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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한 교사의 이야기 :"선생님, 제발 저를 사랑하지 말아 주세요"

강을 건너는 너를 위해 작은 징검다리가 되었으면 몸이 아프거나 남학생에게는 없는 일을 치르느라 허리가 반쯤 접혀져서 교무실을 찾아오는 아이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런 경우는 꾀병인지 아닌지 옥석을 가려서 조치를 해주면 되지만, 문제는 이런 아이들입니다. "선생님, 저 조퇴 좀 시켜 주세요." "왜 어디가 아파?" "솔직히 말해요?" "당연하지. 그럼 거짓말하려고 했어?" "그냥 학교에 있기 싫어요." 이런 경우는 일단 심호흡부터 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고, 버럭 화부터 내버리면 다음부터는 담임에게 솔직한 속내를 털어놓지도 않을 뿐더러, 그동안 잘 다져놓은 아이들과의 인간관계가 깨질 염려도 있습니다. "왜 무슨 일이 있었어?" "아니요." "아닌데 왜?" "그냥 학교에 있기 싫어요." "왜 싫은데?" "그냥요. "


여기까지는 탐색전입니다. 별로 뜻 없는 말을 던지긴 했지만 그 사이 아이의 표정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한 가지 꼭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조퇴를 청하러 온 아이와 대화를 나누는 것도 엄연한 교육행위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을 귀찮아하거나 짜증을 내버리면 그만큼 아이에게 다가갈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잃게 되지요. "선생님, 오늘 딱 하루만 조퇴시켜 주세요." "그럼 내일부터 잘 하겠다?" "예. 정말 잘 할 수 있어요." (고개를 가로 젓는다) "(간절한 어조로) 선생님, 정말 약속할게요." "좋아. 대신 5교시까지는 버텨봐." 일 단 조퇴를 해준다고 허락을 한 셈이니 지금 당장 해달라고 막무가내로 나오기는 어렵습니다. 결국은 5교시까지 버티는 쪽으로 마음을 돌리기 마련이지요. 이런 경우, 대개는 5교시까지 참았던 것이 억울해서라도 계속 학교에 눌러 있든지, 친구들과 깔깔대며 다니다가 조퇴를 허락받으러 간 사실조차 잊어버리기도 합니다. 말도 안 되는(교사가 봤을 때) 이유로 조퇴를 청하러 온 아이들을 야단을 치거나 일방적으로 설득하여 돌려보내지 않고 이런 조건을 내거는 것은 어떤 경우라도 대화의 창을 열어놓기 위해서입니다. 대 화를 통해 아이들의 생각을 키워줄 수 있기에 학교에서 일어나는 일상적인 일들을 대화의 기회로 삼으려는 것이지요. 아이 들과 대화를 하다보면 깜짝 놀랄 만큼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거나, 아예 생각 같은 것을 안 하고 사는 듯한 아이들도 적지 않습니 다. 하지만 알고 보면 아이들도 자기 나름대로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얼마 전에 조퇴를 청하러 왔다가 뜻을 이루 지 못하고 돌아간 한 아이와 나눈 대화입니다. "선생님 근데요,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어요." "뭔데?" "제가 조퇴를 해달라고 하면 그냥 해주면 되잖아요."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러니까요, 조퇴해주고 출석부에 조퇴했다고 표시를 하고, 무단 결과를 하면 무단 결과했다고 하면 되잖아요." "조퇴나 결과에 대한 책임을 네가 지는데 왜 못하게 하느냐 이 거냐?" "제 말이 바로 그 말이라니까요." 아 이의 표정을 보니 조퇴를 하고 싶어서 안달하던 조금 전의 모습이 아닙니다. 눈에 호기심이 잔뜩 묻어 있는 것이 정말 궁금해서 물어 보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가만 생각해보니 그 아이의 말이 전혀 엉뚱하거나 틀린 말도 아닙니다. 이제 곧 발을 들이게 될 대학 은 그런 일종의 자율규칙이 적용되는 곳이기도 하니까요. "그래, 너다운 말이다. 사실은 나도 그러고 싶어. 모든 행동을 자신이 책임지게 하는 거지." "맞아요. 제 인생 제가 책임지겠다는데 왜 못하게 하느냔 말예요." "그런데 말이야. 너 학교에 있기 싫을 때마다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나갈 수가 있다면 한 달이면 몇 번이나 밖에 나가려고 할까? 열 번, 아니 스무 번, 아마 거의 매일일지도 모르지?" "솔직히 그럴 것 같아요." " 그럼 공부는 끝난 거네. 그리고 말이야. 만약 선생님 허락도 없이 학교를 나가버렸다고 해봐. 그런데도 다음 날 선생님이 널 보고 아무 말도 않는 거야. 그러면 좀 이상하지 않겠니? 너한테 관심이 없는 담임이 아니라면 말이야. 어때?" "그래요. 이상할 것 같아요." "바로 그 거야. 너 무슨 잘못을 저지르거나 하면 네 이웃집 아줌마가 너에게 화내던? 아니잖아. 네 엄마가 화를 내시는 거지. 왜 그런다고 생각해?" "절 사랑하시니까요." "그래. 나도 널 사랑해. 그래서 네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둘 순 없는 거야. 널 사랑하니까." "그럼, 선생님 제발 저를 사랑하지 말아 주세요." "뭐? 너 정말이지?" "대신, 저 조퇴해달라고 할 때만요." "이런 똥강아지!" '똥강아지'라는 말을 문자 그대로 풀면 곤란합니다. 물론 아이들은 그것이 제가 사용하는 최대의 애칭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문제가 없지만 말입니다. 저는 그날 대화를 이렇게 마무리했습니다. " 오늘 네가 했던 말 선생님은 좋게 생각했어. 그만큼 네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겠다는 말이니까. 어쩌면 넌 대학생 수준의 사고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지. 하지만 조금은 일러. 그래서 위험하기도 하고. 그것은 누구보다도 네 자신이 더 잘 알 거야. 이제 아무 생 각 말고 중간고사 준비나 해. 학생이 공부에 관심을 잃게 되면 불행할 수밖에 없는 거야. 밖에서 아무리 재미있는 일이 있어도 하루 7시간은 학교에 있어야 하잖아." 그 말을 듣는 아이의 표정은 진지함 반, 설득을 당해서 다시는 조퇴를 할 수 없게 된 절망감(?) 반이었습니다. 문득 그런 반반씩 섞인 미완성 상태가 아이들의 참 모습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아 이들에게 완전한 자유를 줄 수는 없지만 대화의 창마저 닫아버린다면 얼마나 답답해할까 하는 생각도 해보면서 말입니다. 생 일을 맞은 아이들에게 전해주는 축하시도 하나의 대화인 셈입니다. 지난 금요일에 생일을 맞이한 수미도 2학년으로 진급하면서 친한 친 구와 반이 갈리자 잠깐 학교생활에 취미를 잃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출석을 부를 때마다 예쁜 웃음을 방긋 지어줄 만큼 밝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말입니다. 수미에게 준 생일시입니다. 작은 징검다리가 되었으면 지금은 새벽 4시,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너에게 편지가 왔을까 궁금했는데 '사랑하는 선생님께…'라는 반가운 글씨가 눈을 즐겁게 하는구나. 대학에도 가고 싶고, 취업도 하고 싶고 돈도 디따 많이 벌고 싶고 미용도 배우고 싶고, 춤도 배우고 싶고 그러나 아직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고… 이것이 우리 수미의 현주소구나. 그런데 넌 알고 있을까? 대학에 가든, 돈을 디따 많이 벌든 무엇이든 한 순간에 이룰 수는 없다는 거 무엇이든 아픔과 고통이 뒤따른다는 거 그것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는 거 수미야, 너의 열일곱과 열여덟의 사이가 깊고 푸른 강 하나를 건너듯 그렇게 큰 걸음이었으면 좋겠다. 강을 건너와서는 후회 없이 살아온 지난 시간들을 너의 그 환한 미소로 예쁘게 환송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 그때 나는 네가 발 딛고 건너는 작은 징검다리였으면 좋겠다. 2005년 4월 29일 사랑하는 수미의 생일을 축하하며, 담임선생님이 ⓒ 2005 OhmyNews 안 준철 기자는 전남 순천 효산고등학교 교사이자 시인이다.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 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등을 상재. 또 국민일보 가족연재소 설 '사을이네 집' 연재한 뒤 단행본 '아들과 함께 인생을' 펴냈다. <오마이뉴스>에 썼던 글을 모아 <그 후 아 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우리교육)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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