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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곰탱이

교육 문제에 관하여...쫑알쫑알...

요즘 선거로 대(?)한민국이 난리부르스가 아니다.

천안함 침몰이 북한의 소행이라는 둥 하면서 북풍으로 선거라는 배를 당선의 항구로 향하게

하려는 '당나라 당'의 '사대강 삽질'의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다.

거기에 야권을 비롯한 진보 일부 세력들이 여전히 '비판적 지지'와 '현실성'이라는 망령을 등에 업고

'반엠비연합전선'을 구축하고 있는 모양이다.

결국 될 놈을 밀어주자라는 비판적 지지와 현실성의 망령은 우리의 의식을 갉아먹고서

비판적 지지와 현실성 빼 놓고는 아무 생각 없는 '좀비'를 만드려고 하고 있다.

국민을 좀비로 만드려고 한다는 점에서 엠비나 반엠비나 '초록은 동색'이다.

 

뭐, 나란 인간은 90년 초반부터 투표 행위에 일체 참여를 하지 않았다.

권리를 행사하지 않는다는 둥, 사표를 만든다는 둥 하면서 힐난의 목소리를 듣기도 했지만

별로 개의치 않았다.

마음에 들지 않아 살 물건이 없으면 사지 않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맘에 들지 않아 투표를 하지 않았다. 

누구 좋으라고 투표하냐!!! 

그런데도 투표하라고 강요(?)한다면 그건 파쇼의 논리일 뿐이다! 

 

그래서 이번 선거도 시큰둥이다... 

한명숙을 찍던, 오세훈을 찍던, 노회찬을 찍던 찍는 사람 마음 아니겠나... 

근데 이번에도 난 찍을 사람 없어 안 찍을란다. 

 

교육감 선거도 있는 모양이다만...  

 

어쨌거나 저쨌거나... 

 

교육과 관련해서 쫑알쫑알대기로 했으니 쫑알대보기로 하겠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교육과 관련한 커다란 두 개의 문제는

사교육비의 엄청난 증가(이것은 공교육의 위기로 일컬어지곤 한다)와

이에 맞선 공교육의 강화이라고 본다.

이 두 문제는 다음과 같은 위치를 점한다.

 

사교육비의 엄청난 증가의 반대는 공교육의 강화이다. 

그런데 정말 이 둘은 동시에 양립할 수 없는 모순적인 것인가?

그런데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내가 보기에는 이 둘은 딜레마를 구성하는 쌍생아일 뿐이다.

어느 한 쪽을 택해도 교육문제는 점점 더 심화된다는 것이다.

즉 적대적인 무한 경쟁 이데올로기에 저당 잡힌 세대들을 계속해서 길러낸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비판적 지지와 현실성이라는 망령이 판을 치게 만드는 것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먼저 공교육과 관련해서 이야기해 보자.

공교육의 대표적인 기관은 일선 학교이다.

그러므로 공교육을 강화한다는 것은 학교 교육을 강화한다는 것으로 풀이될 수 있다.

그럼 어떻게 학교 교육을 강화할 수 있는가?

그것은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를 시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방향으로 공부를 열심히 시킨다는 것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대학입시와 관련하여 공부를 열심히 시키겠다는 것이다.

이는 곧 대학입시라는 무한 적대적인 경쟁에서 살아 남아 대학에 입학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학입시는 어떻게 치루어지는가?

대학입시는 곧 적대 경쟁에 기반하고 있는데,

이 경재에서 살아 남는 자와 도태되는 자를 가르는 기준은

양적인 기준이 되는데, 왜냐하면 자본주의 사회 시스템 자체가 양적인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단시간 내에 많은 상품을 생산하여 최대 이익을 뽑아 내야 살아 남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양적인 시스템은 누가 더 많이 짧은 시간 내에 단편적 지식을 기억하고 있으며,

그 기억을 빠른 시간 안에 떠올릴 수 있는가이다.

이는 텔레비전의 퀴즈프로그램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학교 선생님들은 주어진 시간 내에 많은 단편적 지식들을 학생들 머리 속에 꾸겨 넣어야 하고, 

그 꾸겨 넣은 기억들을 단시간내에 떠올릴 수 있는 기술을 가르쳐야 한다. 

그러니 학교 선생님들은 이것 외에 다른 것을 신경 쓸 수도 업고 신경 써서도 안 된다는 논리가 도출된다. 

학교 선생님들은 이런 일 외에 노조 활동 등의 여타 정치적 활동 등을 해서는 안 되며,

수업 시간에 쓸데없이 이념 교육이니, 통일 교육이니 시가 어떻고 문학이 어떻고 예술이 어떻고 하는, 

대학입시와 하등 관계가 없는 교육을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전교조 선생님들의 명단을 공개하고, 징계를 하고, 퇴출시키겠다는 협박을 하며, 

심지어는 무슨 연구기관에서 전교조 선생님이 많은 학교에서 대학입시 모의고사 성적이 낮게 

나온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고 뉴스를 통해 공공연하게 이야기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그럼 아이들은 어떤가? 

아이들 역시도 이런 시스템의 피해자일 수밖에 없다. 

공정택이 초등학교 때부터 일제고사를 실시한다는 것도 공교육의 강화 차원에서 나온 이야기이다. 

공교육을 강화시키기 위해서 일제고사를 보게 되면 아이들은 또 시험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시험을 잘 봐야 하고, 시험을 잘 보기 위해서는 즉 무한한 적대적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사교육의 대표적인 장소인 학원에서 11시 12시가 다되도록 파김치가 된다. 

학교에 학원에 아이들은 시들어간다. 

재작년에 여고생 3학년들이 잠 좀 자자고 촛불을 들고 나온 것을 기억할 것이다. 

 

이렇게 공교육을 강화시키게 되면 정말 우리 아이들이 대학에 잘 들어가게 될까?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공교육의 강화는 결국 사교육을 강화시키는 것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무한 적대적 시스템인 대학입시에서 살아 남으려면, 

남보다 더 효율적으로 더 많이 단편적 지식을 꾸겨 넣어야 한다. 

아무리 학교에서 빡세게 한들 어차피 정해진 경쟁 내에서는 누가 잠을 더 안 자고, 

누가 더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으며, 누가 더 돈을 많이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서 

더 많은 단편적 지식을 꾸겨 넣을 수 있다. 

그러니까 공교육을 강화시키면 시킬수록 공교육은 황폐되며, 

사교육은 더욱 더 기승을 부릴 수밖에 없는 시스템이 바로 자본주의 교육 시스템이며, 

현재 우리의 교육 시스템이다. 

 

제도권 교육, 아니 자본 계급의 교육 시스템에서 두 개의 축인 공교육과 사교육은 

상호 대립적이지만 상호 보완적이면서 통일적인 것이다. 

어느 것을 선택하더라도 답은 없다!!! 

이것이 우리가 지금 당면한 딜레마 상황인 것이다. 

오죽 했으면 진보넷 블로거 중 한 명께서 자식 교육을 포기하겠다고 하셨겠는가!!! 

 

우리의 대안을 공교육으로 잡는다면, 

우리는 무한 적대 경쟁이라는 자본의 이데올로기를 수용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우리의 무능력에 다름 아니다. 

진보 운동의 위기가 왜 생겨나겠는가? 

유치원부터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 졸업할 때까지 학교 교육에서 

무한 적대적 경쟁 속에서 살아 남는 법만 배운 젊은이들이, 

그리고 돈 버는 외의 활동을 다 쓸데없는 활동이라는 생각을 생활 속에서 체득한 

젊은이들이 어떻게 살지는 뻔할 뻔자이다. 

남에게 피해 주지 않고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이데올로기... 

이것이 슬프지만 오늘날 대다수의 젊은이들이 당연하게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이데올로기이다. 

딱 생존에 위협을 받는다고 느낄 때만 움직이며, 그 위협이 잠시 사그라든다고 생각하든가 

그런 움직임이 생존에 더 위협을 준다고 느끼면 얄짤없이 스톱 앤 고우 백이다! 

 

그러면 교육에 있어서 우리의 대안은 무엇이겠는가? 

이 대한민국 땅에서 사교육을 더 많이 해야 한다고 떠벌리고 다니는 사람은 없다.

저 꼴통 보수인 당나라 당도 공교육 강화를 외치고 있다.

공교육은 진보의 대안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공교육은 자본의 측면에서 볼 때의 공교육이기기 때문이다.

 

대안은 공교육이 아니라 노동자 계급 교육인데, 이는 곧 여성, 장애인, 소수자 인권 등의 소수자 교육이다.

우리는 이러한 교육을 대안으로 제시해야 하며 현실화시킬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제 공교육, 사교육이라는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야 한다.

아마도 이러한 계급 교육, 소수자 교육을 사교육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자본의 생산을 위한 영역에서의 사교육과는 질적으로 구별되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런 고민 없이 사교육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이런 계급 교육을 위한 준비를 하고 그러한 교육을 시행하지 않으면,

우리 진보의 미래는 없다고 봐야 한다.

 

이러한 계급 교육, 소수자 교육은 현재 수준에서는 제도권에서는 실시될 수도 없고,

실시되어서도 안 된다. 

이러한 교육은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가야 하는 교육,

대다수의 민중들에게 현실적인 대안 교육이어야 한다.

이러한 교육의 요체는 자기 비판(이것을 북한 식의 자아비판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또한 고 김수환 추기경이 말한 '내탓이오'와도 동일시해선 안 된다.

이 자기 비판은 과학과 이데올로기를 질적으로 구별시켜 주는 계기이다.

그리고 이러한 점에서만 엥겔스의 과학적 사회주의는 의미를 가진다)과

이 비판을 바탕으로 하는 '산파술'로서의 상호토론이어야 한다.

이것은 맑스가 [포이에르바하 테제] 3에서 <교육은 그 환경 뿐만 아니라 교육자 그 자신도 변화시켜야 한다>고 말한 것과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교육은 어릴 때부터 자신의 삶 속에서 체화되어 있어야 한다. 

이것은 지금의 학교에서처럼 교과서를 가지고서 주입식으로 이루어질 수 없고,

오로지 일상의 삶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나 이 일상의 삶은 자본주의 하에서의 무한 적대적인 경쟁 시스템이라는 일상의 삶이 아니라,

우리가 앞으로 만들어 가야 할 <코뮌>에서의 일상적인 삶이다.

우리는 우리의 아이들이 숨쉬며 맘껏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그들 스스로가 만들어 가고 발전시켜 갈 수 있는 코뮌의 물적 토대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동시에 이런 물적 토대를 구축하는 속에서 우리 자신 역시도 코뮌을 형성해 나갈 수 있다.

이 코뮌 속에서 우리 아이들은 <각기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체>인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 물적 토대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곧 계급투쟁이며, 소수자 투쟁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물적 토대를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가? 

이러한 물적 토대를 마련할 수 있는 현실적인 출발점은 노동자 계급의 임,단투 투쟁이라고 생각한다. 

임금 투쟁, 단체협상 투쟁을 단순히 경제투쟁, 개량적 투쟁의 시각으로만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이러한 투쟁을 코뮌이라는 진지를 만들어 갈 수 있는 투쟁의 서막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현재 이러한 투쟁이 개량적 투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은 

개별 노동자의 임금 인상이라는 측면에서만 고찰되고 실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고립적이고 개별화된 임금 노동자의 임금 보전과 인상이라는 측면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노동자의 기본 소득 보장에 대한 논의는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고 본다.)

 

이러한 투쟁은 개별 노동자의 임금 인상 수준에서 논의되고 실행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 계급 전체와 민중 전체를 위한 수준에서 논의되고 실행되어야 한다.

이러한 투쟁 속에서 자본에게 착취 당했던 부분을 되찾아 개별적인 노동자들에게 분배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 계급, 민중 전체의 기본적인 삶을 보장하기 위한 기본적인 코뮌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 사용해야 한다.

우리의 아이들이, 그리고 우리 자신들이 아무런 걱정 없이 기본적으로 자연 친화적이며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예를 들어

먼저 자연 친화적인 우리 농산물의 공급은 농민회와 연대하면 된다. 

농민회와 민주노총 사이의 직거래를 하면 된다. 

필요한 만큼 주문을 받아서 농민회는 필요한 만큼 농사를 지면 된다. 

여력이 된다면 농민회 차원에서 주말 농장 같은 것을 만들어서 

아이들이 직접 흙을 만지고 농사를 짓는 수업을 하도록 하면 좋을 것이다. 

이러한 재원은 물론 민주노총 차원에서, 아니면 지역 노총 차원에서 

대자본 임단투 투쟁을 통해 마련하는 방식을 취해야 한다. 

 

아이들을 자본의 교육 영역(제도권 교육)으로 완전히 넘겨서 방치하지 않기 위해서는, 

아이들이 방과 후에 자신들이 스스로 공부하고 놀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이러한 공간은 다양하게 쓰일 수 있다. 

이러한 공간을 일단 지역 차원에서 하나씩 마련하면 좋을 것이다. 

마련하는 방식은 임단투 투쟁을 통해서 얻은 재원을 가지고,

노동 계급 스스로가 짓거나 임대하면 된다.

이 재원이 어떻게 쓰이는지와 관련하여 자본의 간섭을 단협을 통해 완전히 배제해 버린다.

마련된 건물에 아이들의 공부방, 문화시설, 식당, 놀이방, 토론회 장소, 휴식 공간 등을 마련한다.

아이들은 이 공간 속에서 자신들의 코뮌을 형성하면서 자신의 문제에 대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모든 지원책을 요구하고 스스로 집행해 나가는 학습을 한다.

물론 이러한 학습은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 아이들은 스스로 자신의 삶을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계속 제도권 교육을 받을 것인가,

아니면 제도권 교육 대신 스스로의 교육을 통해 자신의 삶을 꾸려 갈 것인가의 선택을 할 수 있다.

그러한 선택을 통해서 부수적으로 군 입대를 하지 않을 수 있고,

이는 곧 전쟁 반대의 행동으로 나타날 수 있다.

의무 교육인 중학교만 마치면,

내가 알기로는 군대에 가지 않고, 공익 요원과 같은 사회봉사 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데,

그 봉사활동 기관은 곧 자신이 학습했던 코뮌의 공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건물 확보가 당장 모든 지역에서 이루어질 수는 없을 것이다.

그 경우에 과도기적으로 대학을 거점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대학의 학생운동의 방향은 새로운 인간의 생산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운동은 합법적으로 봉사 동아리의 형태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며,

이러한 봉사 동아리의 형태는 학생 대중들과의 연계성을 높일 수 있을 것이다.

대학 내에서 방과 후에 아이들이 같이 먹고 같이 놀며 같이 공부하면서

또한 자신들의 코뮌을 형성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부수적으로 파업 파괴에 아이들이 이용되지 않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이러한 새로운 인간의 생산은 기존의 노동운동에 새로운 자극제가 될 것이며,

노동운동의 새로운 변태(허물 벗음), 새로운 변혁의 기폭제가 될 것이다.

이렇게 될 때 노동자들은 자기 가족들 때문에, 아이들 때문에

자신과 자신의 동료들, 자신의 조직을 버릴 수 없게 될 것이다.

아이들이 그러한 부모를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을 것이며,

아이들은 그러한 부모를 격려, 비판하면서 함께 싸우는 동지로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새로운 교육, 비제도권 교육으로서의 계급 교육은 공동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한 교육 속에서 노동자들은 새로운 자신의 정체성,

다시 말하자면 <계급>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나갈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 아이들은 자본과의 한판 싸움을 위해서, 즉 단순히 먹고살기 위한 생존을 위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위한 투쟁의 수단으로서 의식적으로 <임금 노동자>가 되거나,

아니면 우리의 코뮌을 새롭게 발전시킬 수 있는 <노동자>로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이렇게 아이들이 자신들의 삶을 그들 스스로의 관계, 즉 코뮌 속에서 풀어나가게 되면,

우리는 자본의 이데올로기의 하나인 가족 이데올로기에 매몰될 필요도 없거니와,

우리 아이들에게 온통 신경이 팔려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지 못하는 억압적 삶을

살 필요가 없게 된다.

이 속에서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가족 내에서의 위계적 관계가 아니라,

코뮌-코뮌 구성원으로서의 동등하고 민주적인 관계가 될 것이다.

그리하여 정말로 각자가 자유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될 것이며,

이렇게 자유로운 개인들이 서로 연대하는 공산주의 삶이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각기 자유로운 개인들이 연대하는 사회>인 공산주의 사회의 실현이라는

우리의 꿈은 이루어질 수 있다.

어떻게?

우리의 환경을 변화시킴으로써!!

 

일단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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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5월 3일..

오늘 위 내시경 검사한 결과를 보기 위해 국립의료원으로 갔다.

결과는 위염이 있고, 식도염이 있다는 것이다.

식도염 때문에 기침이 계속 될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식도염은 위산 과다로 인해 위산이 거꾸로 역류해서 생긴 염증이란다.

식도염이 생기면 목이 간질간질하면서 기침이 나온단다.

그래서 위산을 억제하는 약과 식도염을 직접 치료하는 약을 처방받아 왔다.

 

처방의약품의명칭 1회투약량 1일투여횟수 총투약일수 용법
넥시움정40mg(아스트라제네카) 자기 전에 드세요 1Tab 1 28 1일1회자기전에 1씩 복용하세요
무코스타정 100MG(한국오츠카) 1Tab 3 28 1일3회 매 식후 30분에 1씩 복용하세요

 

위내시경 검사를 통해서는 식도 정맥류 등의 정맥류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의사는 간경화라고 확신할 수도 없지만,  아니라고 확신할 수도 없단다.

그래서 간 조직검사를 해 봐야 확실하게 알 수 있다면서

간 조직검사 받아 보기를 권유했다.

그런데 이 검사는 의료보험이 되지 않는데다가,

병원에 3일 정도 입원해서 검사를 받아야 한단다.

검사를 받아야 할지 어쩔지...

하여간 좀 고민해 볼 일이다.

 

지난 주 수요일에 처방 받았던 흉부내과에서 조제해 준 약은 별로 차도가 없었다.

특히 <코푸시럽>이라는 물약은 속을 미식거리게 하였다.

그리고 그 약을 먹고, 아니면 위 내시경 검사를 받고 난 이후로

가끔씩 토할 거 같은 느낌을 받았다(요건 잊어버리고 의사에게 물어보지 못했다!).

그리고 머리도 지끈거리면서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어제(5월2일, 일요일)저녁부터는 물약을 먹지 않았다.

오늘부터는 식도염 약만 먹기로 한다.

흉부내과에서 처방한 약은 먹지 않기로 한다.

 

오늘 오후에 이비인후과 진료 예약한 것을 5월 12일 오전11시로 미루었다.

기침을 일단 가라앉히고 나서 다시 알레르기 비염을 치료하는 것이 나을 듯싶어서다.

빨리 기침이 가라앉았으면 좋겠다.

빨랑 다시 운동 시작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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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4월 29일..

오늘 오전 10시에 국립의료원에서 위내시경 검사를 받았다.

단순히 위내시경 검사만 하는 줄 알았더니,

위에 염증이 좀 있다면서 조직 검사를 하겠다고 위 조직을 한 서너군데 때 갔다.

작년 11월 말에 위에 경미한 염증이 있다고 했는데,

그것이 아물지 않고 여전히 있었는가부다.

결과는 5월 3일(월)9시 40분에 가서 확인한다.

 

내시경 검사가 힘드는 것인 줄 잘 몰랐는데,

좀 많이 피곤하고 몸이 좀 처진다.

집에 가서 쉴까 생각 중이다.

여전히 속이 싸하면서 기계가 훑고 지나간 느낌이 아직도 상당히 남아 있다.

오늘은 자극적인 음식을 먹지 말고 부드러운 죽 같은 음식을 먹으라고 했는데,

점심 때 튀김 같은 것이 반찬으로 나왔길래 좀 먹었더니,

속이 더 싸한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자판기 커피(프림 섞임)도 한잔 마셨다.

이따 집에 가서 누룽지를 끓여 먹어야겠다.

 

내시경 검사 하고 나서 목이 예전처럼 따갑고 아프다.

그리고 기침이 좀 더 심해졌다.

오후 2시 50분쯤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어제 타온 약을 먹었는데

좀 나아지긴 했는데, 여전히 목은 따갑다.

 

기침이 언제 나으려는지...

왜 목의 염증이 가라앉지 않고 기침이 계속 나는지 그 원인을 알 수 없어 답답하다.

 

내일은 좀 나아지려나...

내일 <야자>(야간자율학습) 있는데 좀 무리가 갈 텐데 걱정이다.

물론 거의 술은 먹지 못하겠지만...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왔는지...

 

하여간 힘을 좀더 내 보아야 할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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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4월 28일...

<종합병원>이라는 새로운 가지를 만든 이유는 요즘 몸 상태가 거의 종합병원 수준으로 보여서

내 몸을 항상 체크하려는 것이다.

 

올해 들어서 몸에 문제가 발생했다.

 

건강보험 공단의 건강 검진을 통해 간 표면이 거칠다는 소견을 듣고,

국립의료원에 가서 간기능검사를 했는데 간 수치는 모두 정상으로 나왔다.

그러다가 3월 말에 간 초음파 검사를 하니까 만성 간염 또는 간경변증이 의심된다는 진단이 나왔다.

간경변증이면 합병증으로 <식도정맥류>라는 것이 나타나는데,

이를 위해서는 위 내시경 검사를 해야 하는데, 바로 내일 한다.

예전(아마도 2003년도이지 싶다)에 위 내시경 검사를 통해

식도에 뭔가 조그만하게 볼록 튀어 나온 것이 있었는데,

아마도 그게 식도정맥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내가 잠정적으로 내린 결론은 아마도 간경변증이지 싶다.

이 간경변증은 알코올에 의한 것일 수도 있지만,

나 같은 경우에는 비형 간염 보균자라서 정상으로 되돌아오기 힘들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내일 위내시경 검사를 하고 5월 3일 그 결과를 보러 간다.

의사가 그러는데 약을 먹을 필요는 없단다.

최대한 간에 부담을 주지 않아야 한다고 한다.

간에 좋다는 약이나 한약은 절대 먹어서는 안 된단다.

인터넷으로 뒤져보니 고단백질을 많이 섭취하는 것이 좋다고 나와 있었다.

이것이 정말 좋은지는 5월 3일 의사에게 물어볼 것이다.

 

다른 한편 한 2년 전부터 알레르기 비염이 있어서 꾸준히 약을 먹고 있다가,

올 3월 중순께부터 목이 칼칼하면서도 간질간질했다.

그러다가 인후염이라서 국립의료원의 처방을 받고 한 일주일 먹는데,

그때서부터 목이 점점 더 간질간질하면서 기침이 좀 심하게 나왔다.

그러다가 일주일 다시 약을 바꿔 처방하여 먹었는데도 기침이 가라앉지 않았다.

오늘까찌 3주째 다시 처방을 바꿔서 약을 먹었는데,

크게 기침하는 것은 가라앉았는데,

소소하게 잔기침이 가끔씩 자주 나타난다.

목이 간질거리거나 칼칼한 것은 없어졌다.

그런데 가슴 위쪽이 숨이 좀 차는 것처럼 느껴지면서 잔기침이 나타나고 있다.

오늘 국립의료원 이비인후과(알레르기 비염을 치료하던 곳이다)에 갔는데, 

담당 의사께서 결핵이 의심된다면서 흉부내과에 가보라고 하셨다. 

이따 2시 45분까지 흉부 내과에 가야 한다. 

이미 오전에 가슴 사진은 찍어놨다. 

그런데 결핵은 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결핵이 재발된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있다. 

(1990년에 결핵 3기를 앓았다가 10개월간 약을 먹고 치유되었다.)

지난 11월 말에 가슴 사진에는 아무런 증상도 없었는데,

이렇게 또 결핵이 나타날 수 있을까...

다른 한편으로는 아마도 대체로 기관지염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따 가보면 알게 되겠지...

 

정말 종합병원이다.

결핵 약을 또 먹게 된다면

간에 많은 부담을 주게 되어 간 손상이 있게 되고,

이것은 곧 면역력 약화로 나타나게 될 것이고,

이 면역력 약화는 여러 다른 합병증을 불러일으키게 될 것이다.

이것은 최악의 시나리오이지만,

이 시나리오가 현실이 되지 말라는 법도 없으니까...

그렇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일단 오늘은 여기서 끝낸다...

 ==================================

병원에 갔다 왔는데, 결핵은 아니고 정상이란다.

바튼기침이 계속 나는 것은 상기도(목) 부분이 안 좋아서 그러는데,

알레르기 비염과 상관관계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일주일 치 약을 타왔다.

일단 하나를 먹었다.

좀 지나봐야 알겠지만,

가슴이 좀 답답하던 증상은 약간 나아진 듯한 느낌이다.

저녁 먹고 약을 하나 더 먹어보면 확실히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 약 처방전 (2010년 4월 28일, 흉부내과)

처방의약품 1회투여량 1일투여횟수 총투약일수 용법  
코프렐정20MG(한국화이자) 1TAB 3 7 1일3회 매 식후 30분에 1씩 복용하세요  
마로나제정(삼진제약) 1TAB 3 7 1일3회 매 식후 30분에 1씩 복용하세요  
코푸시럽에스1ML(유한양행)(비급여) 15ML 3 7 1일3회 매 식후 30분에 15씩 복용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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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 교수 문제에 대하여...

# 비정규직 교수에 대한 문제 #

 

1. 대학 시간 강사 제도 발생과 재생산의 구조적 원인

<2007년 8월 23일 국회 정책 토론회 자료집에서 발췌>

 

 

“대한민국 건국 초에 대학강사와 교수는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1949년의「교육법」제73조에 교원은 ‘학생을 직접 지도․교육하는 자’였고, 제75조에 대학 교원으로 총․학장, 교수, 부교수, 강사, 조교를 둔다’고 되어 있어 강사는 교원이자 교육공무원에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통성 없이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정권이 비판적 지식인의 언로를 통제할 수 있는 ‘절대반지’를 손에 쥐자 대학강사의 지위는 급락하였다.

1962년, 박정희 정권은 「국․공립대학및전문대학강사료지급규정」을 만들어 그 제3조2항에서 ‘시간강사료는 시간강의를 담당한 자에게 실지로 강의한 시간 수에 의하여 지급한다’는 시간당 강의료 지급 근거를 설치하였다. 1963년에는 「교육공무원법」제27조를 손질하여 교육공무원에 드는 강사의 범위는 예전대로 두었지만 총․학장이 임면하는 강사를 전임강사로 국한시켰다. 10월 유신이 단행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72년 12월 16일에는 「교육공무원법」의 교육공무원 정의에 전임강사란 단서를 달아버렸다. 마침내 1977년 12월 31일, 「교육법」 제75조에서 ‘교원에 포함되었던 강사를 전임강사로 바꾸어 버려 강사들의 교원지위를 박탈’하였다(홍영경, 2003). 지식인을 통제하려는 최고 권력자의 야욕이 오늘날의 시간강사 문제를 야기시킨 것이다. 1980년대에 집권했던 전두환․노태우 군부 정권은 국민들의 불만을 다른 데로 돌리고자 대학과 대학생의 수를 대폭 늘렸다. 이 과정에서 전임교원을 별로 충원하지 않아도 대학을 운영할 수 있게 해 주어 오늘날 부실 대학의 초석을 확고히 다져 주었다.” <2007년 8월 23일 국회 정책 토론회 자료집에서 발췌>

문민 정부와 국민의 정부 기간 동안 대학 교육 개혁이 화두로 제기되며 무수한 개혁 정책들이 시행되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아무 것도 없었다. 새로 들어온 참여 정부 또한 또 다른 대학 교육 개혁을 시행할 것이다. 그러나 겉모양만 바꾸면서 기존의 방식 그대로 시행되거나 근본적인 사항을 고치지 않은 채, 대학 개혁 정책이 시행될 때 그것은 또 다른 교육 ‘개악’이 될 것이다. 다른 어떤 것보다 대학 부문에서는 대학 강사 및 비정규 교수들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된 교육 개혁은 고사하고, 대학 교육의 정상화도 가능하지 않다.

오늘날 대학 강사 및 비정규직 교수에 대한 문제는 크게 몇 가지 문제로 이야기될 수 있다. 먼저, 대학 강사와 비정규직 교수들이 대학 강의의 절반 이상을 담당한 지가 오래되었지만, 강의 여건이 거의 전혀 개선되지 않고 있다.

 

<연도별 4년제 대학 비전임교원 의존률>

구 분

전임교원

비전임교원(C)

비전임교원의존률

(C/B+C)

정원(A)

현원(B)

전체

국․공립

사립

전체

국․공립

사립

전체

국․공립

사립

전체

국․공립

사립

2006

66,178

13,884

52,334

51,696

13,361

38,335

71,238

14,951

56,287

57.95

52.81

59.49

2003

57,491

13,009

44,482

45,106

11,899

33,207

65,236

13,203

52,033

59.12

52.60

61.04

2000

51,478

11,933

39,545

41,788

11,334

30,454

52,763

11,709

41,054

55.80

50.81

57.41

※ 비전임교원은 시간강사, 겸임교수, 명예교수 수의 합임.

자료> 교육인적자원부, <2006년 고등교육기관 교육통계조사 결과> 보도자료, 26쪽의 표를 재구성함.

<2007년 8월 23일 국회 정책 토론회 자료집에서 발췌>

 

두 번째가 비정규직 교수의 임금이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유지하기도 힘들만큼 열악하다는 것이다. 비정규직 교수의 한 달 임금은 평균 80만원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규직 교수와 비교해 볼 때 상당한 정도의 차이가 나는 수준이다.

사실상, 정규직 교수와 강사와 비정규직 교수는 동일 자격과 동일 노동이지만, 사회적으로 정규직과 비정규직 교수 사이의 차이는 극심한 차이가 있다. 예를 들면, 정규직 교수(전임 교수)는 금융 기관의 신용도는 A등급이며, 온갖 사회 보장이 되어 있고, 안정적인 연구와 교육이 가능하다. 그러나 강사 및 비정규직 교수(비전임 교수)는 금융기관의 신용은 無이며, 온갖 사회 보장으로부터 배제되어 있으며(기본적인 4대 보험만이라도 적용해 달라는 것이 비정규직 교수들의 바람이다), 안정적인 연구와 교육이 거의 불가능한 수준에 있다. 이러한 상항에서 대부분의 비정규직 교수들이 전임 교수를 지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에 무리를 해서라도 교수가 되고자 하고, 채용 비리가 없어지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런 비리와 같은 부당함이 당연시되는 대학을 졸업한 사람이 사회에 나가서도 사회의 부당함과 불평등을 당연시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학문의 전당인 대학이 정의가 숨쉬는 곳이 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대학 강사 및 비정규직 교수들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세 번째는 비정규직 교수의 신분이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즉 대부분의 비정규직 교수는 ‘교원 노동자로서의 법적 신분’이 보장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고등교육법 시행령> 제 7조에 따르면 시간 강사를 단지 “교육 과정의 운영상 필요한 자”로서 일용 잡급직의 한 형태로 분류하고 있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4대 사회 보장 보험 적용 기준에서도 빠져 있다.

헌법에서 교원들의 지위에 대해 법률로 정하도록 한 것은 교원들의 신분이 안정되어야 보다 좋은 교육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학 강의의 절반 이상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러한 지위를 전혀 부여하지 않는 것은 대학 교육을 방기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대학 강사 및 비정규직 대학 교수들에게 ‘교원 근로자로서의 법적 지위’를 하루 빨리 부여해야 한다.

네 번째는 이러한 것들로부터 발생하는 문제이다. 즉 학생들의 학습권이 엄청나게 침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대학 교육의 절반 이상(평균치:53% 정도)을 담당하고 있는 비정규직 교수들이 자신의 생존 문제에 얽매이게 될 때, 학생들에게 거의 신경을 쓰지 못하게 됨으로써 학생들의 의문을 제때 풀어주지 못하여, 학생들의 학습 의욕을 상당히 떨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비정규직 교수들은 대학 교육의 한 주체이면서도 능동적으로 대학 교육에 참여하지 못하고 강의만 할 뿐, 교육 과정을 설계하고 입안하는 일로부터 완전히 배제되어 있으며, 학생 지도와 상담을 사실상 할 필요가 없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대학 교육을 담당하는 한 사람으로서 상당히 가슴 아픈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다섯 번째는 신분상의 불안정과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연구와 교육에 집중하는 것을 힘들게 하고, 그리하여 보다 나은 교육을 불가능하게 함으로써 전반적으로 대학 교육의 질을 저하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곧 어처구니없게도 이 사회의 모토라고 할 수 있는 ‘경쟁력 강화’에 위배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이것은 교육 개방이 이루어지면 불을 보듯 뻔한 일이 될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뜻 있는 비정규직 교수들은 ‘한국비정규직교수 노동조합’을 만들어 힘을 모으고 있다. 한국비정규직대학교수노동조합(이하 비정규직교수노조)은 1인 시위 및 집회, 교수7개 단체와 연대투쟁, 국회 토론회 참가, 국가인권위원회에 제소, 언론매체와 인터뷰, 기고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7만 대학강사들이 대학교육의 절반 이상을 맡아 실질적으로 교원의 역할을 하고 있음에도 이를 인정받지 못한 채 온갖 부당한 차별대우를 받고 있는 실태를 적극적으로 알려 나갔다. 이와 함께 강사의 법적 교원 지위 부여 및 강사의 처우개선 대책을 해당 정부부처에 끈질기게 요구함으로써 40년 이상 방치된 대학강사의 문제를 그들이 이제는 더 이상 방관하거나 서로 책임을 전가할 수 없도록 여론을 조성하였다.

먼저 강사 문제의 1차적인 해결은 강사들의 역할과 능력에 걸맞게 법으로 교원근로자임을 보장받는 것이다. 이러한 법적인 보장을 통해서 다음과 같이 강사를 비롯한 비정규직 교수의 문제점을 해결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비전임교원 제도 문제의 해결 수준>

<2007년 8월 23일 국회 정책 토론회 자료집에서 발췌>

 

 

다른 한편 학생들의 수업권 강화에 힘을 쓰는 것이다. 왜냐하면 학생들의 수업권 강화는 강사들과 비정규직 교수들의 노동 조건 개선, 생존과 유기적이고도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예를 들자면, 100명이 넘는 대형 강의실에서의 강의는 거의 일방적인 강의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설사 토론식 수업이 이루어져도, 그 수업에 참여하는 인원은 소수의 학생들뿐이기 때문에, 나머지 학생들은 단순히 구경꾼으로만 전락하게 될 수밖에 없다. 수업은 모든 학생들이 주체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수업 인원 수가 줄어들어야 한다. 그래야만 학생들이 수업에 주체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기며, 다른 사람들과의 의사소통을 통해서 민주주의를 수업 시간에 능동적으로 체험하고 학습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대학이 민주 시민을 양성해 낸다는 것, 그리고 이를 통해서 비판적인 안목을 가지게 되어 진리를 탐구할 수 있는 학문 분위기를 형성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대학 본연의 모습을 가질 수 있는 밑거름이 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다른 한편으로, 학생들이 스스로 학습할 수 있게끔 하여, 학생들의 개성 있고 개성 있는 문화를 만들어 갈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 또한 교육자들의 임무이자 권리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지금처럼 각 수강 과목이 어떤 관련성도 없이 개별화되어 있는 것을 각 수강 과목이 보다 유기적인 연관성을 가지게끔 각 수강 과목들의 교류화(inter-discipline)를 꾀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되었을 때 학생들은 보다 폭넓은 안목을 가지게 되고, 그리하여 보다 많은 논의와 연대의 틀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과정이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대학교의 모든 공간이나 시설들은 학생들의 자치적인 학술 활동에 맞춰지게 될 것이며, 존재하는 모든 곳에서 사람을 만나려고 하며 그 속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며 만들어가려고 노력한다. 가령 예를 들자면, 그들은 그들의 삶을 풍부하게 할 수 있는 학습의 목록을 만들고, 서로 의견을 교환한 후에 적정한 학습 커리큘럼을 짠다. 그리고 그 커리큘럼에 따라 서로가 서로에게 교육한다. 그리고 그 커리큘럼의 내용을 풍부하고 새롭게 만들어 나갈 것이다.

이들은 일정 기간 학습하고 교육한 성과물을 다른 사람에게 발표하고, 다른 사람들의 비판에 귀를 기울인다. 그런 비판은 곧 자기 자신들의 삶에 소금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의 삶의 시야를 넓혀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삶의 경이로움을 배운다.

그들의 학습, 교육의 장은 하나의 과나 단대를 넘어서서 대학 전체 차원으로 넓혀 간다. 그래서 그들은 일 주일 정도 학술 포럼 축제를 벌인다. 그 기간 동안 대부분의 사람들은 학교에서 먹고, 자고, 논쟁하고 토론하며 그들의 삶을 즐긴다. 매년마다 학술 포럼의 주제를 정해 모든 학회나 소모임, 동아리들은 그 주제에 맞게 학습하고 교육하여 학술 포럼 축제 때 자신들의 역량을 내보이게 된다. 그리하여 학술 포럼 축제의 실질적인 주체가 된다. 그리하여 연대의 아름다움을 맛보게 될 것이며, 스스로 자기 삶의 주체임을 자랑스러워 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 학술 포럼 축제를 전국적인 차원으로, 그리고 세계적인 차원으로 승화시켜 나가려고 노력할 것이다. 이것이 진정 인간을 위한, 인간에 의한 세계화일 것이다.

이러한 방향으로 비정규직의 권익 옹호와 대학 교육의 민주화, 학문의 발전에 기여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역사는 ‘인간으로서의 권리가 누군가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쟁취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잘 보여 주고 있다.

우리의 권리를 스스로 쟁취하기 위한 어렵고 힘든 길을 가는 비정규직 교수들에게 정규직 교수님들의 따뜻한 격려와 연대의 지지를 간곡하게 바란다. 비정규직 교수들은 대체로 정규직 교수님들의 후학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학생 여러분들의 따뜻한 격려와 힘찬 연대의 지지를 너무나도 간절히 바란다. 학생 여러분들은 대학 교육의 다른 한 주체이자, 앞으로 노동자가 될 소중한 동지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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냥이를 드디어 살짝 스킨쉽하다^^...

오늘 학교 오는 길에 냥이가 출입문에 쪼그려 앉아 있더라...

지난 주에 냥이가 보이지 않길래,

혹시 병이 난 것은 아닐까, 아님 다른 데로 입양되어 간 것일까 하는 생각을 했더랬다.

올초까지만 하더라도 두 마리였는데,

그 이후에 한 마리는 보이지 않더라...

그리고 한 마리만 남아 있었는데,

그 한 마리마저 지난 주엔 아예 보이지 않았더랬다.

 

오늘 출입문 앞에 앉아 있는 모습이 하도 외롭고 처량해 보이더라...

꼭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앉아 있었다.

아마도 다른 한 마리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일지도...

녀석에게 손을 내밀어 인사했더니,

힘 없는 목소리로 야옹 하고 인사를 했다.

야옹 하고 소리를 내어 인사한 건 또 처음이었다.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서,

출입문을 살짝 열고서 냥이의 머리를 두어 차례 쓰다듬고 돌아섰다.

냥이가 밖으로 나오려는 기척을 보여서 얼른 살짝, 냥이가 다치지 않도록 문을 닫았다.

 

어릴 때 냥이를 키울 때처럼 밥 먹거나 잠 자러 올 때 말고는 자유롭게 나다닐 수 있게끔

냥이를 키울 수 있는 처지가 못 돼서 냥이를 입양하지 못한다.

병원 안에 내내 갇혀 있는 냥이가 안됐다는 생각이 들기도...

물론 병원에서 냥이를 보호하고 있는 것이겠지만...

멍이와 냥이들이 자유롭게 인간과 같이 살아갈 수 있는 날이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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냥이가 날 보고 드디어 인사를 하다^^...

**

집에서 학교 가는 길에 동물 병원이 3개가 있는데, 그 중 한 곳에 늘 냥이 2녀석과 멍이 1녀석이 있다.

이 세 녀석을 학교 가는 길에 본 지가 벌써 1년도 더 되었다.

처음엔 멍이 녀석이 가끔 인사를 하더만,

냥이 녀석 둘이 인사를 안 하고 속칭 쌩까니까 덩달아 쌩까기 시작했다.

하여간 냥이 이 두 녀셕 햇볕 따땃이 내리는 창가에 둘이 앉아 햇볕을 쪼이며 조는 것이 일상다반사다.

지나갈 때마다  두 녀석에게 눈길을 주고 인사를 해 보지만,

이 두 녀석은 영 본체만체다. 

처음엔 아예 본체만체하더만, 

내가 계속 아는 체를 하니까, 

아예 아주 귀찮다는 듯이 고개를 돌려 버리더라... 

 

[쟨 왜 맨날 여기 지나다니면서 아는 체를 하는지 몰라...]

[그러게 말이야, 그냥 지 갈 길 가면 되지, 왜 자꾸 귀찮게 하는지...

아마도 우리를 스토커하는 거 같애...]

[얼짱, 몸짱 비스므리해도 눈길 한번 주겠구만, 영 볼품도 없는 것이... 으이구...!!]

뭐 이렇게 즈이들끼리 궁시렁대는 듯한 표정을 짓는데...

이런 거시기한...!! 

 

그러던 녀석들 중 언젠간 한 녀석이 안 보이더라.

그리고 한 녀석만 보이던데...

어제 그 녀석이 꼬리 바짝 치켜들고 냐옹 하면서 현관 앞에 서 있는 내쪽으로 오는 게 아닌가! 

어멋! 

아니 이것이 오늘 뭘 잘못, 아니 엄청 잘 먹었나... 

나에게 아는 체 하면서 반갑게 인사를 하다니... 

병원 현관문을 열고 꼭 안아주고 싶더만... 

그랬다간 냥이 훔쳐가는 사람으로 오해받을까 싶어 그러지는 못했고... 

하여간 어제 학교 올 때 기분이 째지더라^^ 

ㅋㅋㅋ... 

근데 멍이 녀석은 왜 덩달아 나한테 아는 체를 안했을까... 

그런 의문과 함께 좀 괘씸한 생각이 들더라^^... 

 

오늘은 1교시부터 수업이 있는 관계로 냥이와 멍이 녀석을 못봤다. 

내일 다시 환하게 웃으면서 인사하는 녀석들을 보면 너무 기쁠 것 같다^^... 

그러면 병원으로 살짝 들어가서 병원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서 

그 녀석들을 한번씩 꼭 안아주어야지^^.... 

 

** 

이렇게 기분은 만점이었는데... 

지난 주부터 몸 상태가 술 엄청 먹고 난 다음날 상태 또는 물먹은 송덩이마냥 

축축 처지고, 눈알이 튀어나올라 하고, 정신이 멍하면서 엄청 피곤함을 느끼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울 애들이 쌤 얼굴이 거무튀튀해요 라고 하던데...

하여간 얼굴 피부가 술 엄청 먹고 난 다음날 열라 열꽃 피는 상태로 꺼끌꺼끌하다...

그래서 왜 그런지 곰곰이 따져 보니까...

아마도 오버트레이닝의 결과가 아닌 듯싶다.

몸이 올라온다고 몸 상태 안 좋아지기 한 2주간 계속 무리를 했더니만

그런 것 같다. 

어제 운동을 쉬고 있다. 

그랬더니 오늘 몸이 약간 좋아진 듯한데... 

그래도 여전히 몸 상태가 별로이다... 

오늘도 운동을 쉬려한다... 

그러고 나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다음 주 한 주는 한 30분 정도만, 

몸에 긴장감이 돌 정도만 운동하려 한다.

 

하여간 담주부터 다시 몸이 제 상태를 빨리 찾아 주면 좋겠다...

싸구려 영양제라도 하나 먹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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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성의 에어컨 광고...

이 광고만 보면 자꾸 욕이 스멀스멀 목구멍으로 올라온다.

에어컨이 인간에게 이쁨을 받자고 자기 스펙(?)을 늘려간다는 광고 내용이다. 

 

돈성이 하는 광고는 아주 이데올로기적이고 교묘하다. 

저 광고를 노동자와 자본가에 대입시키면 아주 통탄할 현실이 된다. 

자본가가 나(노동자)를 겨울에 보자기로 뒤집어 씌우는 걸 보고,

다시 말해서 경기가 안 좋아져서 나(노동자)를 비정규직으로 돌려세우거나 

구조조정하는 걸 보고, 

나(노동자)는 주인(자본가)이 나(노동자)를 싫어하는 줄만 알았는데,

나의 발전을 위해서 내가 더 많은 스펙을 갖추라는 주인의 큰 사랑의 마음을 알았다.

그래서 나(노동자)는 주인의 사랑에 보답하고자 더 많은 스펙(모양이 이뻐지거나 난방을 겸용하는 기능)을

쌓고자 한다.

 

주인이 원한다면 더 많은 경쟁을 하고 더 많은 스펙을 쌓고자 하는 에어컨...

어쩌면 이것이 우리 노동자의 현실의 모습이거나 예비 노동자인 대학 4학년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참으로 슬퍼진다.

 

돈성은 이 광고를 통해 에어컨 네가(노동자가) 주인의 뜻을 잘 알아들어야 한다는...

그래서 주인의 뜻이 아닌 노동조합 설립 말고,

주인이 시키는대로 주인이 뜻하시는대로 아무 군소리 없이 따라야 한다는...

 

돈성이 우리 노동자를 무시하고 조롱하는 것만 같은 이 광고...

정말 거시기하기 짝이 없다...

 

돈성이 공유화되는 그날은 꼭 오리라 믿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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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만 철학하는 뎌러운 세상의 철학도의 철학 취향은..ㅋㅋ..

풀소리님의 [나의 철학 취향은] 에 관련된 글.

 

 

- 철학자만 철학하는 더러운 세상을 만드는 데 일조하는 사람의 성향은 어떤 것인지 보았더니...

ㅋㅋ...

재미 있다^^...

 

 

** 동양 철학의 성향 **

 

 



 

무위의 실천가
| 실천, 해탈, 공空, 무위
'무위'한다고 하여, '실천'과 등지라는 법은 없다. '무위' 자체가 실천이기도 하니 말이다. 이 타입의 사람들을 '무위의 실천가'라고 부를 수 있겠다. 세상을 관통하는 일관된 법칙은 없다. 세계는 변화무쌍, '변화' 자체가 천하의 도道이다. 그런 변화의 격랑을 마음대로 넘나들면서도 휩쓸리지 않는 지고한 자유인은 바로 이 타입의 사람들을 이르는 말이다. 모든 존재를 향해 자신을 개방하라! 세계 만물, 각각에 우주가 들어있나니! 이 타입의 동양사상가는? = 싯다르타, 장자, 원효, 장재
『철학 vs 철학』에서는?
  2장 자아는 어떻게 구성되는가? 아지타와 싯다르타
  4장 도란 미리 존재하는 것인가? 노자와 장자
15장 깨달은 자가 바라보는 세계는 어떤 모습인가? 원효와 의상
18장 세계를 지배하는 원리는 무엇인가? 장재와 주희
싯타르타
고타마 싯다르타는 모두가 알다시피 불교의 창시자인 붓다, 즉 석가모니이다. 그를 철학자로 볼 수 있을까? 사상사의 맥락에서는 충분히 그렇게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는 '실천가'였던가? 역시 그렇게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불교 교리의 핵심은 무엇보다도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싯다르타가 불교의 법을 설했던 이유도 중생들이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길 바랐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실천'에 관한 사상이 겨냥하는 것은 사실 모두 이것에서 비롯된다. 이 부류의 철학자들 중에서도 싯다르타만큼 이 분야에 있어 탁월한 결과를 만들어낸 사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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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장자와 관련된 일화는 너무나 많다. 『장자』 자체가 이야기들의 묶음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장자와 관련된 이야기들을 알고 싶다면 장자를 직접 읽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그렇지만, 워낙 알쏭달쏭한 말들이 많아서 그 속에 담긴 결을 이해하려면 좋은 해설서도 한 권쯤 필요할 것이다. 장자의 정확한 생몰연대는 미상이다. 흔히 그의 사상을 '도피적'인 것으로 알고 있거나, '신선놀음'쯤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은 데, 이것은 그에 대한 철저한 오해에 기인하는 것이다. 중국의 대동란기였던 춘추전국시대에 등장한 무수한 이론들처럼 그 역시 실천적인 이유에서 그의 사상을 전개시켰다. 부, 명예, 권력 등 단일한 척도에 의해 좋은 것으로 취급되는 것들에 대한 적극적인 반대, 그것을 통해 무위의 삶, 자유롭게 벗어나고 재구성되는 삶을 말한 그의 철학은 삶의 적극적인 방식을 말한 것이지, 삶으로 부터의 도피를 말한 것이 아니었다. 싯다르타와 더불어 이 계열의 철학자들의 대표격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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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
이렇게 이름 난 사람이, 신라왕실과도 일정한 관계가 있었던 사람이 '무위의 실천가'일 수 있을까? 그렇다고 생각한다. 어디까지나 사상사적인 맥락에 봤을 때 그의 사상은 충분히 그럴만 한다. 원효가 종국적으로 추구했던 것은 깊은 사유, 폭넓은 지식이 아니었다. 그는 '생각과 논의조차 필요없을 정도의 실천'을 추구했던 사람이다. 그 유명한 해골물 이야기는 직관적으로 알고, 생각하기 전에 그것을 실천하고야 하는 그의 사상과 성격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늘 민중들과 함께 춤추고, 희노애락을 나눴던 그의 면모를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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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
장재는 주희보다 약간 앞선 연대의 사람으로, 송나라 시대에 성립된 신유학에 결정적인 기초를 제공한 사람이다. 그는 유학자로서, 향후 유학이 어떻게 전개되어야 할지를 명확하게 주지하고 있었다. 당나라 시대를 거치면서 강력한 세력을 확장해온 불교와 민간에 널리 전파되어 있는 도가 사상을 넘어서지 않고서는 유학에 미래가 없다고 본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그러한 자신의 생각에 오래전부터 중국에 전해진 전통적인 자연관, 즉 기의 흐름을 통해 세계의 유, 무가 나뉜다고 보는 견해를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시대를 통찰하는 지혜와 정확한 판단력, 더불어 전통과 현대를 결합하는 상상력까지 ‘지성인’이 갖춰야 할 모든 덕목을 갖췄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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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양 철학의 성향 **

 



 

감성적인 문필가 타입
| 센스, 감성, 열정
동물적 감각+논리적 이성까지 겸비한 당신은 욕심쟁이, 후후훗! 감각과 동시에 ‘쓰임’까지 고려하는 섬세함을 가진 당신. 동물적 감각을 중시하지만, 이 감각은 명확한 데이터를 토대로 나오는 것이다. 좋아하지만,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센스쟁이 타입에 속하는 철학자들은 동물적 감각과 함께 빛나는 통찰력까지 가지고 있으니 어디 가서 미움 사기 십상인 타입+_+? 현대의 직업군에서 꼽자면 ‘디자이너’ 혹은 ‘설계자’에 가까운 이 부류의 철학자는? = 흄, 들뢰즈, 마르크스, 아감벤
『철학 vs 철학』에서는?
  8장 어느 경우에 인간은 윤리적일 수 있는가? 흄과 칸트
15장 역사를 움직이는 힘은 무엇인가? 헤겔과 맑스
26장 들리는 것과 보이는 것 중 어느 것이 중요할까? 데리다와 들뢰즈
28장 정치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슈미트와 아감벤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자. 동시에 유명한 회의주의자. 여기까지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의외로 흄이 애덤 스미스의 절친이었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또 한 가지, 그가 '회의주의자'가 된 이유는 '시니컬'하거나 '허무주의자'였기 때문이 아니다. 어쩌면 그는 단순히 광대하게 펼쳐진 우주 앞에서 지적 겸손함을 보일 줄 아는 사람일 뿐이었을 수도 있다. 그가 살던 당대에는 초월적인 신 없이 평화와 행복을 상상하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지만, 그는 아주 유쾌하고 평온한 상태에서 친구들과 농담 따먹기를 하다가 죽어 갔다고 전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명성'에 꽤나 집착하는 태도를 보인 적도 있었는데, 결국엔 '이교도'라거나, '무신론자', '회의주의자'(이건 사실 꽤 모욕적인 표현이다)라는 악명을 얻었다. 하지만 후대에 칸트에 의해 정직한 사유가로 재평가되고, 들뢰즈에 의해 감각의 위대함을 보여 준 철학자로 높이 평가받았으니, 니체 말대로 "어떤 사람들은 죽은 후에야 다시 태어난다"라는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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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
20세기에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 사상가를 딱 한 사람만 꼽으라고 한다면, 거의 99%는 이 사람을 꼽을 듯. 적을 구워 먹어 버릴 것 같은 열정으로 글을 써 댔던 이 사람은 '천재'였다.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정말 놀랄 만큼 면밀한 분석을 수행했으면서도 문학적인 감수성은 단 한번도 포기하지 않는다. 맑스의 책들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지 않았을까 싶다. 꼼꼼하고 정밀한 분석은 단순히 똑똑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을 테지만, 그걸 가지고 심장을 쿵쾅거리게 하는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인류 역사 전체를 살펴도 손에 꼽을 정도다.
하지만 맑스의 일상은 가끔 '혼돈 그 자체'였다고 한다. 가장 수입이 적을 때조차 당대의 중산층에 상응하는 정도였는데, 지출의 무능력과 사치로 인해 먼저 죽은 딸의 관조차 장만할 수 없었다고 한다. 생활에서도 유능한 '천재'란 정말 없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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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
"그는 너무나 굳센 나머지 실망이나 분노 같은 부정적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이 허무주의적인 세기말에도 그는 긍정적이었다. 질병과 죽음에도 역시. 왜 나는 과거에 그에 대해서 떠벌렸던가? 그는 웃었다. 그는 웃고 있다. 그는 여기 있다. 슬퍼하는 건 너야, 멍청아. 그가 말한다." (들뢰즈의 죽음 이후 『르몽드』에 실린 리오타르의 추도문)
들뢰즈에 대해 그 자신의 발언을 제외하고, 이렇게나 그와 그의 사유를 잘 표현한 말이 있었던가? 긍정적 삶의 대가였던 들뢰즈는 그 어떤 '부정적인 것의 긍정성'도 용납하지 않았다. 부정적인 것은 그냥 부정적인 것일뿐 그로부터 긍정적인 무언가가 나온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래서 그는 우리가 좋아하는 '반성'을 엄청나게 경멸한다. 반성은 우리를 위축시킬 뿐이다!
들뢰즈는 '글쓰기' 그 자체에 관해서도 아주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보통의 철학자들과는 다른 형식의 글쓰기 실험을 했는데, 그래서인지 그의 책은 '이해'할 수 없다. 신기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낄 수'는 있다는 것이다! 깊은 밤 고원 위에서 별 밭을 우러르는 신비한 체험을 하고 싶을 때 그의 저서 중 아무 곳이나 펴 놓고 읽어 보길 바란다. 말들의 미로 속에서 오바이트하거나, 오만가지로 펼쳐지는 생각의 잔치를 볼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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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감벤
'벌거벗은 사람들', 오직 생명 그 자체만 남은 사람들. 고대 그리스 철학의 개념들을 현대사회를 철학적으로 독해하는 데 활용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똑똑한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것은 하나의 사태를 다른 것들과 연결하는 통합적인 상상력이 필요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태생의 이 철학자는 그렇게 역사 속에 묻혀 있던 '호모 사케르'를 현대로 소환함으로써, 현재의 '호모 사케르'를 드러낸다.
방랑하는 사람들, 자격 없고 소속 없는 사람들을 통해 자유와 대안까지 그려 볼 수 있을까? 더 자세한 내용은 『철학vs철학』이나, 아감벤의 다른 저서를 보시길! 어쨌든 우리 삶에서 '정치'를 사고할 때 주목해야 할 철학자임에는 틀림없다는 사실!
[관련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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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2월5일..

1.

개점 휴업한 지, 즉 포스팅한 지 거의 두 달이 다 되어가는데... 

그래도 이 보잘 것 없는 블로그를 꾸준히 찾아주시는 분들께 

먼저 너무 고맙다는 말쌈을 먼저 올립니다... 

어제가 입춘이었는데, 

여길 찾아주신 모든 분들 大吉하시라!!! 

 

1. 

어제가 입춘이었다는데... 

이건 봄이 살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인데... 

못내 겨울 가는 것이 아쉽기만 하다... 

겨울철엔 사람도 길거리에 많이 안 다녀서 

다른 계절보다는 좀 한산해서 좋았는데, 

봄이 오면 또 길거리에 사람들이 바글바글하겠구나 생각하니

갑자기 답답해진다는 느낌이... 

얼마 전 여행한 곳엔 사람도 별로 없고 한산해서 너무 좋았는데 

그곳이 자꾸 생각난다^^. 

사람들은 봄을 기다리는데,

봄이 새로운 희망을 준다고들 생각하는데,

난 봄이 그닥 반갑지만 않다.

아니, 봄 자체라기보다는 서울에서의 봄이 반갑지 않은 것이다.

서울이 조금씩 낯설어지는 걸 보니 늙는가부다.

또 이렇게 생각하니 참 거시기하고^^...

어쩌랴 먹는 나이 인정해야지^^...

 

1. 

살살 배가 고픈데, 

또 식당 내려가서 밥을 먹어야 하는가부다. 

근데 식당 내려가기 구찮다... 

날이 요렇게 좋은데, 

지난 주 놀러가서 먹고 마시고 하던 것이 자꾸 그립고나^^... 

또 언제 놀러갈꼬...^^

프랑스 사람들은 1년 일하고 돈 모아서 한 달간 뽀지게 놀러간다는데, 

나두 돈 좀 아껴 모아서 또 뽀지게 놀러가야겠다!!!^^ 

또 놀러갈 그 날을 아기다리고기다리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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