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 삽입 이미지‘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 처음이 중요하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결국 아무리 먼 길도 한 걸음을 내딛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이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장 지오느가 쓴 <나무를 심은 사람>에 등장하는 엘제아르 부피에처럼 도토리나무를, 자작나무를, 떡갈나무를 심고 가꾸는 일은 환경위기를 넘어서기 위한 아주 소중한 실천이 될 수 있겠습니다. 뭐, 나무가 잡아두는 이산화탄소야 나무가 살아있을 때나 유효한 것이니 별 소용이 없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나무를 심는 행위가 단순히 숲을 가꾸고 만드는 것만이 아니라. 사라지고 파괴된 공동체를 복원시키는 일이라면. 지배와 착취라는 인관-자연 관계를 새롭게 바꾸는 일이라면 말입니다. 한 무더기 도토리에서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정성껏 골라 땅에 쇠막대기로 구멍을 파고, 심고, 덮는 일을 지금 당장 시작해야 한다는 얘깁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하지만 <환경과 경제의 작은 역사>라는 책을 쓴 존 벨라미 포스터가 도토리를 심는 있는 부피에를 본다면 무슨 얘기를 할까요. 사적이윤 추구와 맞물려 있는 경제체제를 재조직화하지 않는다면. 나무를 심고 가꾸는 일이 됐던, 하이브리드 자동차나 절전형광등과 같은 에너지 절감 기술이 됐던. 자연과 인간 사이에 결코 평화를 보장해주지 않는다며, 아마도 따끔한 충고를 할 겁니다. 지속가능하고 생태적인 경제를 가능케 하기 위해선 사회적 토대로서 생산을 사회화해야 한다는 말이겠지요.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고르디우스 매듭’을 말끔히 잘라냄으로써 문제를 풀었다는 알렉산더 이야기도 되새겨볼만 합니다. 더구나 환경위기가 언급된 지도 벌써 반세기가 넘었고, 태평양 섬나라들이 국민들을 이주시킬 곳을 찾고 있는데도 마땅한 대책들이 나오지 않는 상황인 걸 보면 말입니다.
 
All or Noting. 어떤 문제가 됐건 그 해결책을 찾는 데 있어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전부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일 겁니다. 근본적인 문제 해결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제쳐놓는다면 결국 현실에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 셈이니까요. 물론 찾아낸 해결책이 미봉책으로 그칠 뿐만 아니라 문제 해결을 더욱 꼬이게 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 되레 문제가 드러나지 않게 가리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환경 위기만 놓고 보자면 말입니다. ‘천 리길도 한 걸음부터’ 뗀 사람도 찾기 힘들뿐더러, ‘고르디우스 매듭’ 앞에서 여전히 머리만 굴리고 사람들만 있는 것 같으니 말입니다. 머뭇거리고 주저하는 사이, 인간으로 인해 시작된 재앙이 결국 파국으로 끝나게 되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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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20 14:23 2012/06/20 14:23
22조원입니다. 2천억도 아니고 2조원도 아닌, 22조원이란 말입니다. 무상급식에 화들짝 놀라 보육비 지원하겠다고선 이제와 돈 없다며, 포퓰리즘이니 뭐니 난리들 대지만. ‘아프니까 청춘이다’는 젊은 사람들 홀려 호탕하게 반값등록금을 얘기했다 이제와 배 째라며, 복지병이니 뭐니 생떼 쓰는 사람 취급도 하지만. 가만 생각해보십시오. 나지도 않는 홍수 예방 한답시고 퍼 부운 돈. 가뭄으로 타 들어가는 땅이 어딘지도 모르고 쏟아 부운 돈. 그 돈 22조원이면 뭔들 못하겠습니까. 그런데도 또 염치없고 뻔뻔스럽게도 死대강 사업을 예찬하고 나선 장로님. 어찌해서 그렇게도 자기 주장만 하는 건지요. 대체 보는 눈이 없는 것도 아닐 터이고, 들리는 귀가 없는 것도 아닐 터인데 말입니다. 제발이지 말입니다. 지도 펴놓고 말이지요. 그동안 홍수피해가 났던 곳이 어디였는지. 작년 비 피해로 재난지역으로까지 내몰린 곳들은 어딘지. 또 올 들어 가뭄으로 한 해 농사를 망친 농부들이 어디에 사는지 알아보시기 바랍니다. 제발 땅 투기 하는 데만 골몰하지 마시란 말입니다.
 
발막하다: 염치없고 뻔뻔스럽다. 자기 주장만 하며 건방지다.
 
여기저기서 가뭄 피해 얘깁니다. '10년 만의 가뭄'이니, '34년 만에 최악'이니란 말들까지 나오는 걸 보니. 이거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닌 것 같긴 한데 말입니다. 바짝 타들어가는 논바닥을 보면서도 “여름철마다 반복돼온 고질적인 비 피해가 거의 사라졌다”는 말을 하는 2MB을 보고 있자니. 이런 상황마저 치적 쌓기에 이용하려고 애쓰는. 무슨 얘기만 했다하면 자화자찬으로 시작해서 끝내려는. 대체 이처럼 발막하기 그지없는 사람이 또 어디에 있을까 싶습니다. 벼는 익으면 고개를 숙입니다. 사람은 나이를 먹어감에 자신을 낮춰야 하지요. 그것이 자연의 섭리요 사람이 삶을 살아가는 자세입니다. 하기야, 낮은 곳으로 흘러야 할 강물을 보로 막아 세우는 일을 하는 사람이니. 어찌 자연의 섭리를 알겠으리요. 입만 열면 자기 자랑에 열을 올리는 사람이니. 어찌 또 삶을 살아가는 자세를 알겠습니까. 그저 너무 많은 걸 기대하지 말아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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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14 14:00 2012/06/14 14:00

사용자 삽입 이미지과학이 인간 문명을 이끌고 진보라고 하는 업적을 쌓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설사 과학 연구를 직업으로 삼는 사람이 아닐지라도 말이지요. 하지만 일상생활 속에서 과학이 차지하는 위치는 얼마나 될까요? 또 과학에 접근하는 것이 미술관에 가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일까요? 과학을 이해할 수 없는 불가사의로 간주하거나 단지 수동적이고 동기화가 미약하며 ‘우발적으로’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과학에 대해 잘 알고 있고 호기심을 느끼는 사람들(『과학과 대중이 만날 때.....』, p. 239)까지 이런 물음에는 선뜻 답하기가 쉽지만은 않습니다.

 
더구나 최근 급속한 발전을 하고 있는 생명공학 기술과 IT기술의 급격한 발달에 대한 반응은 이해와 수용보다는 거부감과 불편함이 앞서는 상황입니다. 또 과학자 집단 혹은 정부가 이야기 하는 과학적 조언과 견해에는 신뢰보다는 의구심, 불신이 강하지요. 예컨대 우리 사회만 해도 광우병과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를 명쾌하기 설명하지 못하는 것, 조작과 은폐로 의혹을 자초한 천안함 침몰 사건,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를 반면교사로 삼기는커녕 안전사고에 대한 축소, 은폐기도 등등으로 과학은 그 신뢰가 땅으로 떨어졌지요.
 
물론 일이 이렇게 된 데에는 과학자 집단 스스로가 자초한 면이 큽니다. 먼저 번 서평에서도 잠깐 얘기했지만, 의도했건 그렇지 않았던 간에. 과학자, 과학자 집단은 그들의 과학실, 컴퓨터와 현미경 속으로 빠져듦으로써 대중의 과학 이해라는 문제에 대해 소홀했던 것이지요. 게다가 자신들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와 소통수단을 통해 견고하고 높은 성을 쌓는데 열중했던 겁니다. 결국 과학은 인류를 보다 나은 미래로 이끌었음에도 불구하고 스포츠라 불리는 것에 참여-직접 운동장에서 공을 차거나 배트를 휘두르는 사람들에서부터 소파에 누워 프리미어리그 경기를 관람하는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그 방법은 매우 다양하지요-하는 사람들 숫자보다도 못한 관심을 받게 된 겁니다.
 
물론 상황이 이렇다고 해서 이제까지 취해왔던 접근 방식, 즉 ‘과학 대중화science popularization’라는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질 않습니다. 대중은 잠자는 숲속의 미녀와 같아 멋진 왕자님이 키스만 해주면 깨어날 수 있다는 것이 이 해결방식의 핵심인데요. 무지몽매한 대중에게 과학 지식을 전파해야한다는 생각은 전형적인 계몽적 관점으로 대중은 수동적으로 과학 지식을 수용할 뿐인 존재이며 대중의 역할은 철저히 배제되기 마련(같은 책 옮긴이의 말, pp.268-269)이므로 그다지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이에 새롭게 등장한 관점이 바로 ‘대중의 과학 이해Public Understanding of Science’입니다. 이 방법은 과학의 사회적 구성론이라고도 하는데요. 불균질한(heterogenous) 대중, 암묵지, 민간지 더 나아가 무지까지 확장된 과학 지식, 불명료하고(inarticulate) 암묵적인 이해의 형태라는 세 측면을 대중이 처한 상황과 대중의 능동성을 토대로 새롭게 구성하는 것입니다. 즉 대중들이 과학을 이해하는 과정이 단순한 지식의 수용이 아니라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능동적으로 과학 지식을 재구성하는 역동적인 과정으로 보은 것이지요(같은 책 옮긴이의 말, pp269-270).
 
우리와 마찬가지로 BSE와 인간 광우병 문제로 곤욕을 치렀던 영국이 2000년에 발간한 상원 특별보고서에 따르면 “현대 사회의 민주적 시민권이 과학적 개념과 주장들을 올바로 이해하고, 비판하고, 사용할 수 있는 시민권들의 능력에 크게 좌우되며 … 이러한 신뢰는 과학자 공동체 자체에도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같은책 옮긴이의 말, pp.272-273).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광우병, 천안함, 핵발전소, 4대강 사업, 선관위 디도스 공격 등등. 2mb 정부와 기능적 지식인 아니 기능적 과학자들이 만들어낸 추문들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과 반(反)대응은 우리 사회의 시민권 확장을 둘러싼 싸움이라고도 할 수 있겠는데요. 독선과 아집, 거짓과 은폐로 점철된 2mb 정부로 인해 불러 일으켜진 이 투쟁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 것인지, 어떤 결과로 귀결될 것인지는 제처 놓더라도. ‘대중의 과학 이해’라는 측면에서는 큰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만한 아이러니가 또 어디 있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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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06 13:46 2012/06/06 13: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