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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와 공부

요즘  주변에 '공부'를 하기 위해 그만 두는 기자들이 많다.

 

사실 기자질을 하다보면 공부에 대한 욕구를 강하게 느낀다. 지식사회의 제일 밑바닥에 위치하고 있는 '언론인'으로 공부에 대한 욕구를 느끼지 않는다면 게으른 기자일 게다.

 

인터넷의 발달 등으로 누구나 쉽게 정보를 접할 수 있게 되면서 남들이 모르는 정보를 전달하기만 하는 언론의 단순 기능의 비중이 줄어들고 있다. 또 과거처럼 맞서 싸워야할 절대 권력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기록하는 자, 기자 정체성에 대한 많은 의문과 회의가 드는 시절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공부하다(정확히 얘기하자면 학위 따다가) 때려치우고 기자질을 하는 나로서는

다시 학위 과정에 복귀한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건 그렇다치고...

 

젊은 기자들이여, 그것도 월급 조금 받고 일하는 마이너매체 기자들이여,

 

당신들은 왜 기자질을 하고 있는가?  

 

나는 왜 기자질을 하고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선 처음 기자질을 시작하던 때를 회고해볼 필요가 있었다.

 

실업과 반실업을 전전하던 그때 솔직히 '생존'도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다.

 

뭔가 내가 장기적으로 벌어먹고 살 수 있는 기반으로 기자질을 택한 게

어쩌면 제일 컸을 것이다.

(그나마 내가 좀 소질이 있고, 나를 받아주는 일 중에서 말이다.)

 

그렇게 초보 기자일 때 만난 이들이 주인집 할아버지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것으로 의심되는 6세 여아와 그의 어머니였다.

애석하게도 그 어머니의 직업은 점쟁이였다.

 

내세울 것 없는 직업과 남편 없이 아이를 혼자 키운다는 사실은

그녀의 주장("딸이 집 주인으로부터 수차례 성폭행을 당했다")을

믿기 어려운 진술로 만들었다.

 

돈과 이웃으로부터 신망이 있는 가해자인 집주인은

"돈 때문에 딸 팔아 먹으려 한다"고 주장했고,

경찰도 부족한 물증과 엇갈리는 진술로 인해 가해자의 주장에 동조하는 듯 했다. 

 

우선 피해 아동의 어머니를 만났다.

그 어머니에 대한 인상은 솔직히 좋지 않았다.

숨기는 것도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해 아동을 처음 봤을 때

그 아이는 분명 성폭력 후유증인 '외상 후 증후군' 증상을 보였다.  

 

따라서 두 사람과 경찰을 인터뷰하고 기사를 작성했으나

데스크로부터 퇴짜를 맞았다.

 

가해자도 만나 보라는 것이었다.

 

가해자를 만나고

경찰을 재차 만나고

점점 그 아동과 어머니에게 불리한 얘기들을 듣게 되면서

난 솔직히 그 어머니를 붙잡고

"도대체 진실이 뭐냐"고 묻고 싶은 충동에 휩싸이기도 했다.

차마 그러지 못했다.

 

재판이 진행 중인 사건인데다

피해 아동과 어머니에게 불리한 증거로 할 수 있는 부분도 있어

"성폭력 피해 아동의 치료 등 사회적 보호가 절실하다"는 야마로 기사를 썼다.

취재하면서 아동성폭력은 저소득층 아동에게 집중된 '계층 문제'라는 걸 뼈져리게 느꼈다.

방치되다보니 성폭력을 당하게 되고

성폭력 이후 또다시 방치되는 악순환이 되풀이 되고 있었다.

 

그로부터 2년 후 결국 법원에서 가해자의 성폭력 혐의가 인정됐고 그제서야 아이의 어머니는 '누명'을 벗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나는 내가 월급 조금 받고 많이 일하면서

좌파적 정체성을 스스로에게 강요하는 상황을 왕왕 접하는 

마이너 매체 기자라는 사실이 뿌듯했다.

 

(진보적) '기자'와 '학자'가 결국엔 하나의 길을 가야할 운명이라고 믿고

학자가 될만한 지적 능력을 못 갖췄다는 한계를 인정하면서

또 한편으론 좀더 사람들의 삶을 직접 대면할 수 있다는 흥미진진함 때문에

난 햇수로 6년째 기자질을 하고 있다.   

 

좋은 기자의 자세는 아래와 같아야 한다고...늘 스스로에게 다짐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유혹에 약한지라 ㅡ..ㅡ;;;;)

 

"작가라면 늘 아픈 눈을 뜬 채로 있어야 한다. 날마다 창문 유리에 얼굴을 바짝 대고 있어야 하고, 날마다 추악한 모습의 목격자가 되어야 한다. "- 아룬다티 로이

 

"어줍잖은 말이지만 지식인이란 '내가 지향하는 바'와 '실제의 나' 사이에 숙명적인 거리를 갖고 사는 '삶의 코미디언'이다. 지식인이 가질 수 있는 최선의 삶이란 그 숙명적인 거리를 어떻게든 줄이려 발악하는 것일 뿐. 그러나 나는 그런 삶을 선택했고 그런 삶의 발악이 더러는 (거의 가능하지 않지만) 세상에 진짜 유익을 주는 일도 있다는 희망을 품은 채, 내 삶을 전진한다." - 김규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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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

벌써 오래 전의 일이다.

 

그리고 까맣게 잊었다.

 

오늘 우연히 컴퓨터에 저장된 이메일을 들춰보다

 

몇해 전 가을...누군가를 위로하려고 썼던 메일을 발견했다.

 

당시 이 메일을 받았던

짝사랑으로 가슴앓이하던 P씨는

다른 사람을 만나 사랑에 빠져

내년쯤 결혼할 예정이라고 한다.

 

정말 시간이 '약'이다.

 

얼마전 우연히 그가 사랑에 빠졌다는
얘길 전해듣고

정말 이젠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가슴 한켠이 묵직하게 아려오더군요.



그 감정의 실체가
나로선 도달할 수 없는 곳에 가 닿은
누군가에 대한 질투인지
끝까지 뒤돌아봐주지 않은 그에 대한 원망인지
그토록 얄팍한, 하잘 것 없는 감정에 집착한
스스로에 대한 회한인지
알 길은 없었습니다.

다만 내가 알게된 것은

언제 또 이놈이 내 가슴 한켠에 숨어 있다
불쑥불쑥 고개를 내밀지 모르겠지만

더이상 나를 지배하지 하도록
내버려둬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맘속에서 떠도는
그의 유령을 붙잡아
관 속에 고이 안치해
영원히, 영원히 묻고자 합니다.

내 맘속에 작은 그의 무덤을 만들고자 합니다.

부디 그가 편안히, 편안히 안식할 수 있길
바랍니다.

그리고 언젠간 나와 편히 화해할 수 있기를...

 

P씨도 이젠 떠나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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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 흘러 당신들에게도 평화가..."

슬픔은 흘러야 한다. 한 사람의 가슴에 있는 슬픔이 흐르지 않고 고이면 그 슬픔은 한 사람을 파괴한다. 미군에 의해 남편과 세 명의 아들을 한꺼번에 잃은 한 이라크 여인처럼.
  
슬픔은 흘러야 한다. 한 사람의 가슴을 잠식한 슬픔이 다른 사람의 가슴으로 스며들지 않을 때 인간은 타인을 죽일 만큼 잔인해질 수 있다. 그래서 슬픔은 강물을 이뤄, 바다가 되어 흐르고, 또 흘러야 한다.
  
 "웃지 않는 아이들, 전쟁의 어떤 모습보다 슬프고 무서워"
  
지난 2004년 3월부터 106일 동안 이라크 바그다드에 머물렀던 윤정은씨가 자신이 경험한 전쟁에 대한 기록을 묶어 <슬픔은 흘러야 한다>(즐거운 상상)를 냈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이 책은 그가 본 전쟁 속 이라크 사람들의 일상에 대한 기록이다.
    
 


이라크에서도 먹고 입고 자고 살아 남아야 하는 고단한 일상, 서로가 무언가를 진심으로 이해했을 때 따뜻한 정서를 함께 느끼는 것은 똑같았다.
  
그러나 그 곳은 폭탄 소리에 잠에서 깨고, 세계에서 석유가 2번째로 많이 묻혀 있다지만 시도 때도 없이 전기가 끊긴다. 길에서 담배와 물을 팔던 소년이 어느날 갑자기 폭탄을 맞아 갈갈이 찢기고, 가족과 친구를 잃은 10대 소년이 무자헤딘이 되겠다며 총을 들고 집을 나가고, 어린 아이들조차 웃지 않는다. 그는 "웃지 않는 아이들을 보는 것은 전쟁의 어떤 모습보다 슬프고 무서운 장면"이라고 회고했다.
  
"아이들의 눈을 볼 때가 가장 슬프다. 전쟁을 목격하고 사막을 넘어 죽음을 본 그 영혼이 입었을 상처를 생각하면 너무도 슬프다. 하지만 아이들의 눈은 너무나 맑아 그 아이러니한 풍경에 가끔 넋을 잃는다."
  
 "전쟁이 비참한 건 사람이 죽어서만이 아니다"
  
이라크에서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지난 14일 하루 동안에만 이라크 곳곳에서 10여 건의 크고 작은 테러가 발생해 180여 명이 숨지고, 570여 명이 다쳤다. 미군과 이라크군의 수니파 저항세력 토벌 작전에 대한 보복 차원에서 이뤄진 이날 테러를 외신들은 본격적인 내전의 시작이라고 분석했다. 사람들 마음에 쌓인 분노와 원한의 응어리가 다 풀어지기 전까지 이라크에서 전쟁은 끝난 게 아니다.
  
 "전쟁이 비참한 것은 사람이 죽어서만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와 신뢰가 무너져 내리고, 살아 남기 위해 타인을 죽이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게 여겨지는 절망적인 사회가 되기 때문에 무서운 것이다. 오염된 물과 공기, 민가와 공공건물의 파괴, 약탈, 여성들에 대한 납치사건과 아이들의 유괴, 앞날을 기약할 수 없는 실업난, 의약품과 식량의 부족, 수도와 전기 통신시설의 파괴, 먹고 살기 힘들어지면서 사람들은 서로를 불신하고, 속이고, 팔아 넘겼다. (…) 사람들의 마음과 인간관계, 사회 전반에 생긴 이 상처가 아물기 위해서 앞으로 어떤 치유의 과정을 거쳐야 할지 아무도 알 수 없다."
  
 

 50여 년전 3년간의 전쟁 이후 분단 국가로 긴 휴전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한국도 여전히 전쟁의 생채기로 신음하고 있지 않은가.
  

 "전쟁의 기록은 타인의 고통을 어떻게 보는가에 관한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방인'일 수밖에 없었던 윤정은 씨에게 106일간의 이라크 체류 경험은 '타인의 고통을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라는 화두를 던졌다.
  
"전쟁은 사람들이 죽기 때문에 비극적이다. 그러나 더 비극적인 것은 그 죽음에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사람의 생명은 숫자가 아닌데, 언론은 전쟁 속 죽음과 관련해 숫자만 보도한다. 모두가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그들 인생의 역사와 이야기들이 있다. 사람들이 생명을 잃는 전쟁에서 이기고 지는 것이 있을까. 사람들이 죽는 전쟁에서 승패라는 것은 없다. 전쟁을 게임으로만 보는 사람들과 전쟁에서 이익을 챙기거나 잃는 권력자들이 승패를 논할 뿐이다."
  
그는 "전쟁의 기록은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이며, 타인의 고통을 어떻게 보는가에 관한 것"임을 깨달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기록자는 힘과 폭력에 저항하며, 자본과 권력의 문제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투쟁하고 기록해야 한다. 전쟁은 타인의 죽음과 피해와 이후 세대를 거치면서 계속될 고통에 대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고통과 죽음을 힘과 돈에 의해 왜곡하거나 수단화해서는 안 된다"고 그는 기존의 전쟁에 대한 언론 보도를 비판했다.
  
 
그의 가슴 속에 스며든 전쟁 속 이라크 사람들의 고통과 슬픔이 그의 그림과 글을 통해 내 가슴에 흘러들었다.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의 것을 지속적으로 뺏기 위해 전쟁까지도 불사하는 이 전지구화된 경제구조를 지탱하고, 그래서 또 세계 어느 곳에서 전쟁을 일으킬 수 있도록 하는 게 우리의 무관심일 수 있다고 윤정은씨는 지적했다. 그의 책이 발원지가 돼 슬픔이 강물이 되기를 바란다.
  
살람 알레이쿰!(평화가 당신에게!) 

 

덧붙이는 말 : 이 책의 필자 윤정은은 내 친구다. 내게 이 책인 더 소중한 이유는 그가 이라크에 머무르는 106일동안 난 한국에서 함께 가슴 졸였기 때문이다. 멀리서 어렴풋이나마 전해듣는 전쟁 소식도 그토록 가슴 아픈데 그 땅에서 직접 전쟁을 경험하는 이들의 고통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윤정은의 지적처럼 "그저 그들의 고통의 가장자리에 공손하게 가만히 서 있는 일"이 우리가 해야할 최선일 것이다. 

 

윤정은이란 친구가 있어 내 삶이 조금이나마 겸손해질 수 있을 것 같아, 난 참 복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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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ot;사람이 나빠서지 터가 나빠서가 아니다&quot;

권세가 중하면 지키기 어렵고

지위가 높으면 세도는 다하기 마련이니

교만한 자리에 오름은 가득 찼다는 뜻이요

나이가 많음은 목숨이 끝나간다는 것.

권세와 지위, 녹봉과 권위, 이 넷은 도둑과 같아

밤낮으로 서로 공격해온다.

설사 좋은 집에 산다고 해도

누가 자신의 몸을 보전할 수 있겠는가.

작은 일을 가지고 큰 도리를 밝히나니

집의 이야기를 빌어 나라의 일을 깨우칠 수 있도다.

주나라와 진나라는 효관과 함곡관을 터로 삼고

그 터는 같았으나

주나라는 팔백 년 간 흥하고

진나라는 이궁만 바라보고 죽었노라.

집이나 국가에 대해서 말하노니

사람이 나빠서지 터가 나빠서가 아니로다.

 

--- 백거이 '흉가' 중에서.

(출처 : <비파행> (오세주 옮김, 다산초당)

 

백거이는 두보, 이백, 한유와 더불어 '이두한백'이라 불리며 한시 최고 전성기를 이끌었던 시인이다.

 

리얼리스트이자, 저항시인이었고, 참여시인이었으며, 민중시인인 백거이는 그러나 한국 독자들에겐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백거이는 시를 다 지은 뒤 이웃 노파에게 들려주어 그가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은 고쳐 쓸 정도로 철저히 쉬운 용어로 시를 지었다고 한다. 때문에 이백, 두보, 한유의 시에 대한 주석서가 수백권에 이르지만 백거이의 시에 대한 주석서가 한권도 없다. 

 

당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을 소재로한 <장한가>는 '낙양의 종이값을 올렸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민중들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마오쩌둥, 장쩌민도 120행이나 되는 이 시를 애송했다고 한다.

 

한시(아니 한자 ㅡ..ㅡ) 자체가 낯설어 그 맛을 제대로 즐길 순 없었지만

번역된 것만으로도 백거이 시의 '저항정신'과 '민중성'을 엿볼 수 있었다.

 

신기한 것은 그의 권력에 대한 충언이

1200년이나 지난 지금도 일정 부분 유효하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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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작가' 공선옥

 

공선옥은 잔인한 작가다. 독자의 기대 따윈 염두에 두지 않는다. 아니, 여지없이 부순다. 어쩌면 공선옥은 나 같은 독자에게 스스로가 자식을 미국에 조기유학 보내놓고 “대 아랍전 이후 중미전쟁에 전부 용병이 될 남반부 아이들”을 걱정하는 지식인 ‘정’과 같은 존재는 아닌지 질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 얄팍한 기대는 내 무관심에 면죄부를 주지 위한 것임을 공선옥은 은근슬쩍 눈 감아 주고 않은 게다. 그보다 가난한 ‘유랑작가’인 그는 그럴 수 없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게다.    


공선옥의 잔인함, 아니 가난한 이들의 삶의 비극은 일찍이 부모를 잃고 함께 살던 할머니마저 위암으로 숨져 오갈데 없는 산골 소녀 영주의 이야기를 담은 <남쪽 바다, 푸른 바다>에서 가장 아프게 드러난다. 열한 살 난 영주는 어렵사리 연홍도에 사는 고모를 찾게 됐다. 그래서 다리가 불편한 장애인이지만 야무진 고모 김귀옥과 남편 김 선장, 이들 부부의 딸 주희와 함께 행복하게 살게 되는 듯 했다. 



  “일이 그렇게 되어 부렀습니다요 이. 김 선장이 말입니다. 전 해상에 태풍 루사 경계경보가 내린 밤에 말입니다, 도선 운항 시간이 끝난 밤 열두시, 신양서 데리러 오라는 연홍도 주민의 전화를 받고 연홍도에서 신양으로 건너오다가 말입니다.....”

“사곱니까?”

“배가 뒤집혀부렀습니다.”

순간적으로 몸이 굳어온다.

“가족들은요?”

“암만 기달려도 연홍도 아이들이 안 보이지요 이 얼마 전에 섬을 떠났습니다. 어디로 간지는 모르고요 이, 그 자모님이 장애인인데, 거그다가 조카까지 책임을 져 놓아가지고....”

 


영주는 섬에 없다. 남쪽 바다 푸른 나라에 영주는 없다. 아침 햇살 속에서 꼭 다시 오라고 소리치던 아이들의 함성도 없다. 그렇다면 영주는 어디로 갔는가. 김귀옥은 두 아이를 데리고 어디로 갔는가. 그때야, 영주가 소리치던 것이 생각났다.

 

“아저씨, 나는 남쪽 바다 푸른 나라에서 행복하게 잘살 거래요.”

 


그렇다면 영주는 제 고모를 따라 그 나라, 그 푸른 나라로 갔는가. 돌아서는데 문득, 바다가 검다.

 

또 공선옥은 에둘러 표현하는데 서툴다. 이미 ‘가난’은 직접 표현하지 않으면 이해하기 힘들만큼 많은 독자들에게 타자화된 경험이라서 그럴지도 모른다. 아니, 은유적으로 표현할 만한 여유가 그에겐 없을지 모른다. 생존의 문제이지 않은가.

 

아버지는 술을 너무 많이 마셔요. 그래서 간이 탈나버린 거예요. 어머니요? 아버지 땜에 농약 마셔버렸어요. 제초제요. 아버지와 어머니는 희망이 없었던 거예요. 삶에 대한 희망이요. 저요? 안 죽으려면 서울로 가야죠. 아저씨, 그거 알아요? 여긴요. 죽음의 땅이에요. 왜냐면, 나라에서 돌봐주지 않잖아요. 킬링필드라고 아시죠. 바로 그거라구요. 죽지 못해 사니까 죽은 거나 마찬가지잖아요. 여긴 맨날 그런 사람들만 산다구요.

 


가난은 사람을 황폐하게 만들기도 하고 난폭하게 만들기도 하고 무기력하게 만들기도 했다. 가난은 다양한 형태로 사람들의 삶을 무너뜨렸다. 가난한 사람들이 그들의 가정을 지켜낼 수 있는 마지막 무기는 사랑 뿐이었다. 그 사랑이 경수 부부에게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이냐. 부자들의 사랑보다 가난한 사람들의 사랑이 한에게는 그래서 더 눈물나는 사랑이다. 돈도 받쳐주지 못하는 것을 사랑이 받쳐주지 않는가. 가난한 사랑이.

 


돈 때문이든, 외로움 때문이든, 사람들이 함께 산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돈이 없어서, 사람들은 외롭다. 돈 있는데도 외로워하는 사람들을 인숙은 아직 이해하지 못한다.

 


“수몰이 되면서 여기 살았던 사람들의 삶도 수장이 되는 거라구.”

물부족 사태라거나, 댐건설의 필요 불필요를 따지기에 앞서, 김은 건설과 개발의 미명하에 파괴되어가는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 얘기했다. 생태계 파괴에 대한 걱정에 앞서 거기 오래 살았던 사람들의 삶과 도대체 돈으로 맞바꿀 수 없는 정신에 대해서. 그러나 돈 앞에서, 발전이라는 이름 앞에서 그런 정신, 삶을 에워싸고 있던 오래된 정신 같은 것은 그저 허섭스레기에 불과한 것인지도 몰랐다.

 

그래서 공선옥은 "가난은 죄가 아니지만 가난한 사람은 죄인처럼 살아간다. 가난한 사람에게는 생활의 안전은 물론이거니와 인격도 인권도 보장되지 않는 게 현실이지 않냐"며 안타까움을 표한다. 가난한  '유랑 작가' 공선옥의 존재는 그래서 더 소중하다. 가난이란 죄가 더 커져갈 수록....하지만 그는 그런 상황을 결코 원치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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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

다음주 월요일부터 휴가다.

 

불행히도 올해는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못했다.

 

좀 막막하기도 한데...

 

일단 푸욱...쉬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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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

7월 들어 글을 하나도 올려놓지 못 했다.

 

지난 한달 참 많은 변화가 있었다.

 

편집국장이 바뀌고

 

노조도 생겼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끼리 때로는 다투고 다시 화해하고

 

그렇게 한달이 지나가고 있었다.

.

.

.

 

근데 문득 주민등록상 생일인 오늘 여러 통의 축하 메일과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OO님의 서른 X 번째 생일을 축하드립니다."

 

시간이 참 빠르구나...

 

내 나이에 아직 익숙치도 않는데

 

벌써 7월이 훌쩍 지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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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친절 재단

"이상주의자는 내가 아니라 감옥제도를 옹호하거나 감옥을 더 짓고 처벌을 더 강화하자고 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부정적 이상주의자'인 것은 현실에서 끊임없이 그릇된 것으로 드러나는 징벌에 대한 이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상은 한 마디로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우리를 해치는 사람을 해치는 일은 해침의 악순환을 영속화할 뿐이다."



이 말은 '인간친절재단'의 보 로조프가 한 말이다.

 

개인적으로 '인간친절재단'과 보 로조프란 인물에 대해 더 알고 싶었지만 자료를 찾기가 영 쉽지가 않다. 

 

내가 이 문구를 접하게 된 것은 <지구를 입양하다-세상을 바꾸는 대안 아이디어>라는 책에서다. 좀 다르게 살고 싶다는 아주 작은 욕망이라고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꼭 한번 읽어보라고 추천하고 싶다.

 

재미있는 아이디어들이 많다. '지역화폐' 등 이미 한국에서 현실화된 아이디어들도 있고 1977년 10월27일에 건국한 자유독립공화국 프레스토니아 같은 진짜 못말리는 사람들의 얘기도 있다.

 

프레스토니아 공화국을 비롯해 몇 가지 눈에 띠는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 자유독립공화국 프레스토니아 :

 

1977년 런던 W11 노팅데일 프레스톤가 주민들이 큰 공장으로 가는 길을 낸다며 이사하라는 강제 이주 위협을 받고 주민 투표를 통해 만든 인구 1백20명인 공화국. 이들은 문장紋章까지 갖춘 가입신청서를 유엔에 보내면서 평화유지군이 필요할지도 모른다고 경고했다고 한다. 국민 중 원하는 사람은 장관이 됐으며 수상은 없었다. 교육부 장관은 두살배기 프란시스코 보기나-브램리였고, 외무부 장관은 난쟁이 배우인 데이비드 래포트-브램리였다. 문장에 새겨진 이 나라 모토는 '노스 수무스 우나 파밀리아'(우리는 한가족)이었고, 모두가 브램리라는 성을 같이 쓰기로 했다. (만일 런던의회가 이들을 쫓아내기로 결정한다면 1백20명을 한 가족으로 묶어 새집으로 옮겨야만 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다.)

 

프레스토니아는 국제우편연합에 가입신청을 했으며, 자체 우표를 발행하기도 했다. 많은 관광객들이 프레스토니아를 찾아 20여분 동안 동네를 돌아본 뒤 여권에 프레스토니아 도장을 찍은 다음 다소 실망한 표정으로 떠나곤 했다고 한다.

 

1998년에는 마을 정원에 있는 천막에서 스물한번째 독립기념일을 축하하는 성대한 파티가 열렸다고 한다.

 

 

- 판사가 피해자에게 강도의 집에서 물건을 가져가도록 허락하다 :

 

1990년 시애틀의 조 브라운 판사의 판결. 그는 몇몇 강도범에게 이전 피해자들을 위해 자기 집을 개방하라고 명령했다. 피해자가 대리인과 함께 가서 자기들이 잃어버린 물건의 가치에 해당하며, 판사가 정한 선까지라면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가져갈 수 있겠했다. "범인은 집에 돌아가서 자기 물건이 제대로 있을지를 걱정하는 선량한 시민들의 마음을 알게 될 것"이라는 게 이같은 판결을 내린 이유.

 

- 골프차(골프카트)만을 도심지 허가차량으로 :

 

일반 승용차는 도심에서 금지한다. 골프차는 전기로 가기 때문에 매연이 없다. 최대 시속이 20마일이라서 도심에서 쓰기에는 충분하다. 목적지까지 더 빨리 가고 싶은 사람은 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골프차는 아주 작기 때문에 주차도 별 문제가 없다.  

 

- 임신 및 출산 도중에 노래 부르기 ;

(<폭력없는 출산>의 저자 프레데릭 르보이어의 주장)

 

산모는 배를 이용해 깊이 천천히 숨을 쉰다. 숨을 내 쉴 때 노래를 부르면서 힘을 주어 자궁을 수축시킨다. 르보이어는 산모가 노래를 불러줄 경우 자궁속 아기가 출산 과정에서 덜 움직이며 편안해 한다고 주장한다.

 

- 추억상자 만들기 : 기념품으로 작은 개인 박물관 만들기.

 

- 맹인에 대해 가르치기 위해 음식점 불을 다 꺼버리다 :

 

취리히의 '블린데쿠(눈먼 소)' 음식점. 이 음식점은 맹인 종업원들이 서빙을 하는 곳이다. 손님들은 가방과 외투는 라커에 두고, 핸드폰과 야광시계도 따로 보관해야 하며, 자리로 가기 위해 웨이터나 웨이트리스의 어깨에 손을 얹고 가야 한다. 식당 내부는 아무것도 볼 수 없을 정도로 캄캄하다.  이 음식점은 유명한 블라인드 데이트의 장소가 됐다고 한다. 커플들은 당장 눈에 띄는 시각적인 부분에 마음을 빼앗기를 일 없이 둘이 얼마나 잘 지낼 수 있을지를 가늠할 수 있는 곳이라고. 때문에 여기서 식사를 하려면 4개월 정도 기다려야 한다고.

 

왠지 딴 나라 사람들만의 얘기 같다고 느끼시는 분은 한국일보 서화숙 대기자가 쓴 <행복한 실천>이란 책을 읽기를 권한다. 우리 사회에서 대안운동을 실천하며 사는 사람들의 행복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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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과 골프'의 역사

골프는 참 여러모로 신기한 운동이다.  

 

틈만 나면 으르렁 대던 여야 의원들도

골프장에서 만나면 '허허실실'해 대는 걸보면

골프장 공기는 여는 곳과는 다른것 같다. 

 

또 골프장 벽엔 맥주병으로 맞추는 다트판이 걸려 있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어쩌다 한번 하면 무조건 욕 먹는 것 알면서도

'레임덕'이라는 소리에 토다는 사람들이 별로 없는 현 시국에도

구력도 5년 밖에 안 됐다는 노무현 대통령 꾸준히 치는 걸 보면

 

분명 골프장엔 뭔가가 있나 보다.



지난 18일 노 대통령이 윤광웅 국방장관 등 군 수뇌부와 골프를 쳐 또다시 논란이 되고 있다. 이해찬 총리의 '노 대통령 허리 이상설'이 나온 직후인 지난달 29일 이 총리, 김원기 국회의장, 최종영 대법원장 등 3부요인과 라운딩한지 3주만이다. 

 

우리 국민 정서상, 더군다나 '서민 대통령'을 자처해온 노 대통령에게 골프가 여론상 악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다는 건 처음부터 예견된 일이다.

 

하지만 노 대통령은 틈틈이 '골프 정치'를 해왔다. 아마 상류층의 문화 이미 그러니 그럴 수 밖에 없는 측면도 있겠으나, '최고 권력자'라는 그의 위치를 고려할 때 이런 변명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평범한 국민들은 '대통령이 골프를 무쟈게 좋아하는구만'에 넘어서 국민 여론에 반하는 대통령의 '골프 정치'에 분노를 느낀다.이제는 냉소를 보낼만 하다. "대통령님 나이스샷"~~

 

노 대통령이 취임 후 골프회동을 언론에 공개했던 건 지난 2003년 5월4일이 아니었나 싶다.  노 대통령 내외는 이날 서울 노원구 공릉동의 태릉 컨트리 클럽(18홀)에서 오전 5시30분부터 5시간 동안 골프를 쳤다. 당시 청와대 유인태 정무수석, 이해성 홍보수석, 반기문 외교보좌관, 김희상 국방보좌관, 김진표 경제부총리, 김화중 복지장관 등 12명이 동행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 보좌진들만 치려다가 골프를 치지 않는 문희상 비서실장, 문재인 민정수석 등이 빠지자 팀 구성이 안돼  김 부총리와 김 장관을 포함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노 대통령은 이날 처음으로 버디를 잡았다고 한다.


이날 골프회동에 대해 청와대 측은 "그동안 '돈있는 사람들은 골프도 치고 하면서 소비를 해야 경기가 살아난다'는 주변의 지적에 따라 대통령이 골프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주문을 받아왔다"며 소비 진작 차원에서 계획된 일이라고 밝혔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골프를 2000년에 배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스승은 먼저 골프를 배운 권양숙 여사. 1988년에 국회의원 배지를 처음 달았던 것을 생각해보면(물론 그가 13대 국회의원 이후 15대때 보궐선거로 당시 당선됐다가 이후 계속 선거에 떨어지는 등 줄곧 야인 생활을 해오기 했지만) 그의 골프 경력은 비교적 짧은 편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권 여사의 골프 실력은 상당한 수준으로 알려졌다. 

 

'여자 캐디' 원조 만든 박정희 전 대통령

 

우리나라 대통령이 골프를 치기 시작한 역사는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전 대통령 때로 올라간다. 이 전 대통령은 정부 수립 1주년 기념일인 1949년 8월15일, 주한 외교관들과 군 고위층 등 인사들이 참석한 자리에서 미군 장성들이 골프를 즐길 공간이 없어 일본 오끼나와로 간다는 얘기를 듣고 골프 코스 건립을 지시해 국내 골프장의 효시라 할 수 있는 군자리 골프장을 만들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역시 골프를 아주 즐겼다고 한다. 특히 골프장에서 올라가면 딱 한 번만 퍼팅을 하고 끝냈는데, 고개를 숙이고  홀에 공을 넣으려고 하는게 국가원수로서 품위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당시에는 대부분 남자들이 캐디를 했으나, 67년부터 군 골프장인 태릉CC에 처음으로 여자 캐디가 등장했다. 특히 박 전 대통령이 방문하면 가장 예쁜 캐디를 뽑아 내보냈다는 후문이다. 

 

'대통령 골프' 신조어 만든 전두환 전 대통령

 

전두환 전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 중 골프를 가장 좋아한 대통령으로 평가받는다. 전 전 대통령은 그의 성격에 걸맞게 앞뒤 홀을 하나씩 비우게 한 뒤 라운드를 해 '대통령 골프'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고 한다.  법정에선 전 재산이 29만원 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그는 지금도 골프를 즐긴다고 한다.  

 

반면 노태우 전대통령은 골프를 상당히 즐겼으나 주변의 시선을 의식해 조용히 골프를 친 편이라고 한다. 특히 청남대 골프장에 가면 아침부터 해가 질 때까지 애용했다고 한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3당 합당'을 골프를 통해 얻어냈으나 집권 후에는 공직자 골프 금지령을 내렸다.  재임 기간 중 골프를 안치겠다고 선언했고 청와대 경내에 설치된 골프연습장까지 철거시켰다. 

 

한편 김대중 전대통령은 다리가 불편해 골프를 치지 않았다.

 

(네이버 카페 '골프 이야기'에 게재된 글을 참조했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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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의 '목적'

연애의 목적은 '연애' 그 자체다.

 

연애가 아닌 다른 것을 목적으로 할때 그 연애는 굴절을 경험하게 된다.

 

상대방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를 탐하며

 

그렇게 한 마리 동물로 본능에 충실할 수 있는 순간,

 

그 매 순간 순간 원초적 긴장감의 아찔함을 즐기는 것.

 

그것이야말로 연애의 진정한 목적이다.



그러나 '진공' 상태에서 살아갈 수 없듯이

 

진공 상태의 연애,

 

연애의 목적에만 오롯이 충실한 연애는 현실에선 어렵다.

 

뼈 속 깊숙이 박힌 연애의 각본은 우리의 동물적 감각을 무디게 하며

 

더 나아가 상상력을 제한한다.

 

연애를 넘어서 다른 단계로 가고자 하는 욕망,

 

더 튼튼한 관계의 끈을 마련하고자하는 욕망은 연애의 목적을 교란시킨다.

 

또 자본주의적 이성애 제도에 의해

 

남성과 여성이라는 서로 다른 종으로 훈육된 이들은

 

필경 다른 각본에 기반해 서로 다른 결말을 꿈꾸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래서 연애를 동시적 욕망과 합의에 기반해 다른 차원의 관계로 변경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같은 이유로 연애는 자주 불행이란 감정의 씨앗이 된다.

 

아무 걱정없이, 아무 거리낌없이, 아무 기약없이 서로를 탐하는

 

연애를...

 

할 수 있을까?

 

지금 내가?

 

여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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