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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정상회담과 로비스트

로비스트(lobbyist)는 특정 이익단체를 대표해 정책이나 입법에 영향을 줄 목적으로 정책 입안자나 정당, 의원을 상대로 활동하는 사람을 말한다. 이말은 19세기 미국에서 유래된 것인데,  당시 워싱턴 D.C의 윌라드 호텔(Willard Hotel)의 로비(lobby)에 각 이익 집단들의 대표가 그 호텔에 주로 숙박하는 의원들을 만나기 위해 모이곤 했다는데서 비롯됐다. 윌라드 호텔은 미국 백악관과 의회에서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다.

 

미국에서 로비스트는 합법적인 '직업'이다. 당국에 등록을 한 로비스트들은 자신이 누구를 위해 어떤 목적으로 활동하는지 등 활동 내역에 대해 보고할 의무가 있지만 동시에 '청원권의 보장'에 근거해 합법적으로 활동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 로비 활동은 불법이다. YS 정부 때 국방부 통신감청용 정찰기 도입 사업인 백두사업과 관련된 '린다 김 사건'을 통해 로비스트라는 직업이 세간의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명품 옷에 명품 선그라스를 낀 신비에 가득찬 미모의 여성 로비스트 이미지....한때 '린다김 패션'은 한국 강남 중년 여성들을 휘어잡기도 했다.

 


 

(로비스트라는 말이 유래된 윌라드 호텔 복도. 이 긴 복도를 따라 가면 나오는 로비가 바로 그 역사의 현장이란다.)



뜬금없이 웬 로비스트 타령이냐고?

 

지난 주말 '1박3일'이라는 초미니 일정, 그렇지만 "최근 10년간 가장 중요한 회담"이라는 한미정상회담 취재를 위해 워싱턴 D.C를 찾았고, 기자들이 머물렀던 곳이 바로 윌라드 호텔이었다.

 

짐 풀고 기사 쓰고 다시 짐싸서 출발하기 바쁜 일정 속에 로비스트의 어원을 확실히 알게 된 게 개인적으로 거둔 몇 안 되는 성과 중 하나다. ㅡ..ㅡ;;;

 

취재 후기는 기사(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60050610210202&s_menu=정치)로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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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우석과 가스냉장고

지난주부터  환자의 체세포를 복제해 배아줄기세포를 배양하는데 성공, 난치병 치료에 신기원을 기록했다는 황우석 서울대 수의대 교수 얘기로 떠들썩하다.

 

그의 연구가 난자 공여 과정, 연구 과정에서 버려진 난자와 배아 문제 또 세포 복제 기술 자체를 둘러싼 윤리적 논란 등 윤리적 문제가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어느 누구도 그의 연구에 '딴지'를 걸기 힘든 분위기다.

 

유난히 일등과 최초를 좋아하는 우리 사회에서 '세계 최초'라는 타이틀, 그리고 종교적 이유로 줄기세포 연구를 제한하고 있는 미국에서 이른바 '황우석 논쟁'이 일고 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그의 연구를 흠집내려 했다간 당장 '매국노'로 몰릴 판이다.   

 

또 척수손상으로 팔.다리가 마비된 환자(예를 들면 가수 강원래씨) 등 그의 연구가 실용화될 경우 구체적 수혜자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난치병 환자를 위한 것이라는 황 교수의 연구는 칭송받아 마땅한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그의 연구에 대한 절대적 지지는 과학기술이 효용성, 가치에 따라 발전한다는 다소 순진한 믿음에 기반한 게 아닌가 싶다.



어제 술자리에서 황우석 교수와 관련된 얘기를 하다 동료 기자에게 들은 얘기다.

 

그 친구 역시 황 교수 연구를 둘러싼 최근 분위기에 대해 마뜩잖아하는 사람이다.

 

그가 불안해 하는 것은 일반인들에게 다소 막연하고 모호해 보이는 종교적, 철학적 차원의 '윤리' 문제가 아니다. 그는 한번 개발될 경우 그것이 미치는 파급력은 너무나 크지만, 역효과가 발생할지라도 되돌리기 힘든 과학기술의 '불가역성'에 주목하고 있다. 과연 우리가 세포복제 연구에 대해 최소한의 합의라도 가지고 있는가? 과거에 기반한 '종교 윤리'를 대체할 새로운 윤리가 존재하는가? 이 친구의 고민이다.

 

그는 그러면서 효용성이 아닌 자본이 기술 개발을 결정했던 사례로 가스냉장고를 들었다.

 

가스냉장고는 가스의 연소로 냉각장치를 작동시키는 흡수식 냉장고로 1922년 스웨덴의 한 공업학교 학생인 맨타와 플란텐이 발명한 것이다. 가스냉장고의 특징은 소음이 없고, 기계적 마모에 따른 고장이 없다는 것이다.

 

반면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전기냉장고는 냉매를 고온, 고압으로 압축하는 '압축기'를 가동시키면서 '윙윙' 거리는 큰 소음이 나고 전기료도 비싼데다 덩치도 더 컸다.  

 

그러나 이런 장점에도 불구하고 가스냉장고는 사라져버렸다. '자본의 힘' 때문이었다.

 

미국에서 냉장고가 일반 가정에 보급되기 시작한 1920년대 전기냉장고를 생산하는 회사는 제너럴일렉트릭, 제네럴모터스, 웨스팅하우스 등 대기업이었다. 특히 발전소에서부터 전등을 만드는 것까지 전기산업을 주도하고 있던 제너럴일렉트릭 입장에선 냉장고 시장이 사업 확장에 있어 매우 중요했다. 

 

반면 가스냉장고를 제조하던 기업은 중소기업들이었다. 가스냉장고와의 경쟁에서 전기냉장고를 생산하는 대기업들은 우리 흔히 상상할 수 있는 각종 횡포를 저질렀다.


결국 미국 가정의 45%가 전기냉장고를 소유할 정도로 냉장고가 보편화된 1940년대 무렵에 가스냉장고는 사라지게 됐다. (좀더 자세한 얘기를 알고 싶은 분들은 사이언스타임즈(http://www.sciencetimes.co.kr). "냉장고 '윙윙'거리는 소리에 얽힌 비밀- 강양구의 과학기술 뒤집어보기" 롤 보시기를..)

 

최근 만난 강주성 건강세상 네트워크 대표는 "백혈병 치료제인 글리벡이 개발되기 전까지는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백혈병에 걸리면 다 죽었다. 그러나 한병에 3백만원 하는 글리벡이 시판된 후 약을 사먹을 능력이 없는 가난한(?) 백혈병 환자는 치료 방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죽어야 한다"고 말했다.

 

좀더 기술이 발전하면 수혜자가 더 늘어날 것이라고? 과연 이게 기술의 문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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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폭력 '직접 행동'

'비폭력 직접 행동'은 마하트마 간디의 저항 방식에서 구체화됐다.

 

'비폭력 직접 행동'에선 전자인 비폭력적 저항에 방점이 찍힌다고들 흔히 생각하지만 사실 더 중요한 것은 불의에 맞서는 '직접 행동'이다.

 

간디는 "이 땅에서는 직접적인 행동 없이는 그 무엇도 행해지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비폭력을 '소극적 저항'이라고 표현하는 것을 거부한다"고 지적했었다.


(데이빗 핫소오 NP 창설자)



지난 금요일 '비폭력 평화연대'(Nonviolent Peaceforce)의 한국지부 성격을 띠는 '비폭력 평화물결'는 NP 창설자인 데이빗 핫소오(David Hartsough) 초청 강연을 열었다.

 

핫소오는 자신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로 목사였던 자신의 아버지와 열다섯살인 1956년 만난 마틴 루터 킹 목사를 꼽았다.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주도한 인종차별철폐 운동은 '비폭력 직접 행동'의 힘을 보여준 대표적 사례다.

 

이에 영향을 받아 핫소오는 워싱턴에 있는 흑인들의 입학도 허용했던 하워드 대학에 입학했다.

 

대학교 2학년 때 그는 버지니아주 알링톤에서 흑백분리 정책에 '비폭력 직접 행동'으로 맞섰던 경험을 들려줬다. 그를 포함한 12명의 대학생들(백인 1명, 흑인 11명)은 백인들만 출입이 가능했던 식당을 방문해 음식을 주문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들은 식당에서 음식이 나올 때까지 나가지 않겠다고 버티며 하루를 보냈다고 한다. 그리고 이튿날도 똑같은 식당을 찾았고, 또 다음날도, 그렇게 일주일을 똑같은 식당을 방문해 이른바 '점거시위'를 벌였다고 한다. 물론 '점거시위'를 벌이는 동안 유일한 백인 동조자였던 그는 폭력과 협박에 시달려야 했다. 한 백인 남성은 그에게 칼을 들이대며 "2초 안에 사라지라"고 위협했으나 핫소오는 "나는 계속 당신을 사랑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당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해라"고 답했다. 그 남성은 아무 일도 저지르지 못했다고 한다.  이들의 '점거시위'는 버지니아주의 식당에서 흑인들의 출입 규제를 없애는 계기가 됐다.

 

NP는 1978년부터 미국의 지원으로 군부독재정치가 계속돼던 과테말라의 민주화 운동을 지원하는 활동도 했다. 과테말라 정부는 10만 이상의 민간인을 학살했으며, 정권에 반대하는 운동에 가담한 운동가들은 어느날 실종돼 죽임을 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1985년 3월과 4월에도 연달아 반정부 활동가들이 죽었고, 과테말라 활동가들은 국제적 지원을 요청하게 됐다. NP는 당시 핵심적인 활동가였던 여성 두명을 보호하기 위해 NP 활동가들을 콰테말라로 파견했고, 이들 NP 활동가들은 24시간 내내 여성 활동가와 동행하며 이들을 보호했다. 이 두 여성은 결국 죽지 않았고 많은 과테말라인들에게 정권에 대항할 수 있는 용기를 줬다고 핫소오는 회고했다.

 

NP는 스리랑카에 지난 2002년 4월부터 25명의 활동가를 파견해 무력충돌을 막기 위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그는 스리랑카를 비롯한 90여개국에 NP 활동가를 파견할 계획을 가지고 있고 이는 1년에 1백7십만 달러의 비용 밖에 들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는 미군이 2분 동안 쓰는 돈에 불과하다.

 

핫소우가 주장하는 '비폭력 직접행동'이 일촉즉발의 전쟁 위기가 상존하고 있는 한반도에선 이상적이고 유약하고 소극적으로 보일지 모른다. 현실적으로 그럴수도 있다. 하지만 '비폭력 직접행동'의 정신과 원칙은 그 어떤 운동보다 강하며 적극적이다. 

 

"비폭력은 결코 현실에서 악의와 맞서기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한결 능동적인 투쟁 형태이다. 악의를 늘릴 뿐인 폭력적인 반격보다 훨씬 현실적인 투쟁 형태이다."

 

"힘이란 물리적 능력에 달린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불굴의 의지에 토대를 두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임무에 대한 강한 믿음을 가진, 의지 굳건한 소수의 사람들이 역사의 흐름을 바꿀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도 간디의 말을 인용했다. 

 

참고: 스리랑카 

 

싱할라족이 지배하는 스리랑카는 65년부터 타밀족이 분리독립을 추진하면서 충돌이 잇따랐다. 특히 83년 타밀족 본거지 자프나에서 정부군 몇명이 사망하면서 싱할라족이 타밀족 1천여명을 살해했다. 이를 계기로 타밀일람해방호랑이(LTTE)가 결성돼 본격적인 내전이 전개됐다. 80년대 LTTE는 소련의 지원도 받고 조직력과 자금력을 무기로 정부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했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스리랑카는 인도에 지원을 요청 87년 평화유지군 성격의 인도군이 파견된다. 그러나 인도군은 89년까지 2천5백명의 희생자를 낸 채 철수했다.1990-2000년대 들어서도 정부군과 LTTE의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인도와 미국, 스리랑카가 LTTE를 불법단체로 규정했고, 정부와 반군간에 협상도 거의 진행되지 않고 있다. 30여년에 걸친 오랜 내전으로 6만5천여명이 죽고, 1백60여만명의 난민이 발생했으며 라나싱헤 프레마다사 총리 등 정치지도자 10여명이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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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헤미안' 박원순

기자질을 한지 5년 가까이 되다 보니 가끔 내가 과거에 썼던 글조차 기억 못 할 때가 있다.

 

오늘 박원순 변호사의 새 책 <독일사회를 인터뷰하다 : 박원순 변호사의 독일 시민사회 기행>(논형)에 대한 서평 (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60050510163711&s_menu=문화) 을 쓴 뒤 2002년 초 그에 대한 인터뷰 기사를 쓴 것을 발견했다.

 

자신이 '보헤미안'이란 박 변호사의 고백을 그 인터뷰에서 들은 것이었다. 난 박 변호사와의 각별한 인연으로 사석에서 들은 얘기로 기억하고 뿌듯해 했건만...


 

당시 인터뷰 기사 중 일부를 옮겨왔다. 참여정부 출범 이후 국무총리, 교육부총리, 법무부 장관, 공정거래위원장, 인권위원장 등 가장 많이 하마평에 오르내리는 박 변호사의 모습을 비교적 잘 묘사한 글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또 그때 당시 인터뷰 제목은 "삼성도 망할 수 있다"는 도발적인 것으로, 최근 이건희 회장 사태로 다시 한번 '삼성'을 둘러싼 논란이 일기도 했으니까. 

 

난 도대체 노무현 정권에서 박 변호사를 어떻게 감당하려고 계속 '러브콜'을 보내는지 이해할 수 없다.  

 

그는 지독한 '몽상가'다.



다음은 당시 인터뷰 중 일부.

 

도대체 사람이 어쩜 그럴 수 있을까? 돈벌이도 못하고 바쁘긴 엄청 바쁘면서도 입만 열면 '신나고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 참여연대의 박원순 사무처장 말이다. 혹시 거짓말 아닐까?
  
그래서 오늘(1월 3일)의 주제는 시비걸기다.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는, 더 나아가 존경하는 참여연대 박원순 사무처장(47)에게 그가 삼성에, 부패한 정치인에 그랬듯 사정없이 ‘딴지걸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딴지걸기’를 통해 우리는 그의 치명적인 약점들을 찾아냈다.
  
우선 그는 실정법(선거법)까지 어겨가며 낙천ㆍ낙선운동을 벌인 ‘범법자’다(총선연대 상임집행위원장이었던 그는 지난달 26일 항소심에서 벌금 50만원을 선고받았다). 그는 자신의 부지런함으로 아랫사람들을 괴롭게 하는 ‘교묘한 독재자’다. 참여연대가 한번 물면 놓지 않는 ‘불독’으로 악명을 떨치게 된 것도 그의 ‘똥고집’ 때문이다.
  
권력과 명예, 게다가 부까지 보장되는 검사와 변호사 자리도 박차고 나올 만큼 지독한 '몽상가'에다 ‘보헤미안’ 기질까지 농후하다. 다들 보수와 안정을 희구하는 21세기 한국에서 '혁명적 개혁'을 이뤄야 한다며 초조해 하는 '혁명가'이기도 하다.
  
그뿐인가? 국내 제일의 기업인 “삼성이 망할 수 있다”고 말하는 지독한 ‘독설가’다.
  

 '교묘한 독재자' 박원순
  
참여연대 사무실 아래층인 느티나무 카페에 박원순 처장은 약속시간보다 10여분 늦은 10시 40분경에 나타났다. 정관용 에디터는 특유의 사람 좋은 웃음으로 맞이하며 대뜸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지금 내복 입으셨어요?”
 “안 입었어요.”
 “환경단체에서 하는 내복입기운동에 동참 안 하십니까?”
  

박처장은 다소 머쓱해 하며 "원래 잘 안 입어요. 건강하니까 내복 안 입어도 춥지 않아요"라고 대꾸했다.
  
우리는 이어 불룩한 그의 배낭을 물고 늘어지기 시작했다. 양복에 자주색 배낭. 다소 안 어울리는 차림새지만 그는 ‘공식행사가 없으면’ 배낭을 즐겨 맨다. 책도 많이 들어가고 겨울에 양손을 주머니에 넣고 다닐 수도 있기 때문이란다. 가방에 책을 많이 들고 다니는 것이 ‘지나친 욕심 아니냐’, ‘과시용 아니냐’ 등 다소 억지스런 질문에 그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이어 박원순 처장은 자진해서 자신의 ‘초기 치매현상’까지 실토했다.
 

 “인상적으로 본 것은 오래 기억하지만 오늘 내가 누구를 만났더라, 이러면 기억이 안 나거든요. 그래서 연구 끝에 수첩을 활용하고 있습니다.”
  
그처럼 바쁜 사람에게 안성맞춤인 한국 리더십 센터에서 제작한 수첩엔 하루하루 해야 할 일/ 약속/ 실제 한 일, 세 부분으로 나눠져 있다. 몇 장 뒤적여 보니 거의 매일 6,7개의 약속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기자는 학교 다닐 때 외엔 별로 생각해본 일이 없는 ‘새해 소망’도 끼워져 있었다.
  

 새벽 2-3시에 잠자리에 드는 그는 잠이 늘 부족하다. 모자란 잠은 차 속에서, 심지어 회의 시간에 보충한다. 참여연대 사무처장 7년 만에 반쯤 자면서 회의 내용을 듣는 득음(得音)의 경지에 도달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의 부지런함에 대해 “부지런을 떨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몰려 있는 것 같다”며 애써 부정했다.
  
그러나 박 처장은 피곤한 지도자 유형중 하나인 ‘똑똑하고 부지런한’ 사람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 ‘간사급 사무처장’이라고 인정하는 그는 근면과 성실로 매번 간사들의 기를 죽이는 ‘교묘한 독재자’다.
  
불독’ 참여연대에 물린 삼성
  
이 ‘교묘한 독재자’가 이끄는 참여연대의 별명은 ‘불독’이다. 한번 물면 끝장을 볼 때까지 절대로 놓지 않기 때문이다.
  
초일류기업 삼성도 '불독' 참여연대에 물려 곤욕을 치르고 있다. 참여연대는 작년 말 소액주주운동의 일환으로 삼성전자 이건희 회장과 이사들을 상대로 청구한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9백77억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받아냈다. 4년여를 끌어온 싸움의 1라운드 승리는 참여연대에게 돌아갔다. ‘왜 그렇게 삼성을 못 살게 구느냐’는 질문에 박 처장은 삼성에 대한 ‘충정’에 따른 것이라고 말했다. “이대로 가면 삼성도 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우도 망하고 현대도 자동차와 중공업 빼고는 망했습니다. 5년전만 해도 현대가 망하리라고 누가 생각했습니까. 전근대적인 경영형태와 관행들이 자기 살을 갉아먹었기 때문에 망했다고 생각합니다. 삼성자동차의 실패는 삼성도 망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시입니다.” 
  
그는 진심으로 삼성이 ‘세계 일류’다운 모습을 보여주기를 바란다. 마치 참여연대와 ‘오기 싸움하듯’ 자신들의 과오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세계 일류 기업답지 않다는 지적이다.
  
“앞으로도 삼성에 대해서는 소액주주 운동을 계속할 것입니까.”
 “참여연대는 한번 시작하면 끝까지 합니다.”
  
정말 그와 참여연대는 징그러울 정도로 ‘똥고집’이다.
  
'보헤미안+혁명가' 박원순
  
그만큼 그와 참여연대는 닮은꼴이다. 그런데 그가 지난해부터 후임 사무처장을 물색하고 있다. 스스로 “영원한 실무자”라고 말하는 그는 이제 사무처장 자리를 후배에게 물려주고 ‘현업’에 복귀하기를 바란다. 올해 참여연대에 재활용 사업을 하는 대안 사업국이 생겼는데 그 일을 해보고 싶다는 것.

그는 사무처장에서 물러나고 싶은 또 한가지 이유로 자신의 ‘보헤미안’적 기질을 들었다. 그는 결혼생활 이외에는 십여년 넘게 꾸준히 해온 일이 없었다.
  
정선 등기소장 1년, 사법고시 합격 후 검사 생활 1년, 9년 동안 변호사 일을 하면서도 임헌영, 원경선, 이호웅, 김성동씨 등과 함께 역사문제연구소를 만들었다. 1991년부터 2년간 미국 하버드대에서 객원연구원으로 있었다. 그런 그가 7년 동안 참여연대 사무처장을 해왔으니...
  
‘보헤미안’ 박원순 처장이 꾸준히 시민운동을 해올 수 있었던 이유는 내면에 흐르는 ‘혁명가’적 기질 때문인 것 같았다. 그는 "나도 한때는 정치를 생각했었다"는 의외의 말을 던졌다. 지난 85년 전직 국회의원 등 고향선배들이 출마를 권유했던 것. 지역주민들한테 때 되면 편지도 보냈다. 그러다 '젊음의 낭비'라는 생각이 들어 그만뒀다고. 지금은 정치보다는 시민운동에서 자신이 할일이 훨씬 큰 것 같아 앞으로도 꽤 오랫동안 시민운동 언저리를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고 한다.
  
그는 미국과 일본을 돌아보며 “나라는 개판이고 사회는 엉망이지만 할 일도, 바뀔 여지도 많아서 한국에서 시민운동을 하는 것이 행복하다고 느꼈다.” 16대 총선에서 낙선운동이 의외의 성과를 거두면서 ‘가능성’과 ‘희망’을 절감한 그는 “지금은 혁명적 개혁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동시에 그는 자족적인 운동을 넘어서기 위해 어떻게 하면 대중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가를 끊임없이 고민하는 뛰어난 전략가이기도 하다.
  
우리는 한시간 반가량의 시비걸기를 통해 인간 박원순의 몇 가지 약점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 모든 단점들이 지난 7년간 참여연대를 가장 신뢰받는 시민단체로 성장하게 만든 중요한 밑거름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우리의 시비 걸기는 ‘실패’로 끝났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올해 참여연대에서 어떤 사업을 계획하고 있는지 물었다. 그러나 참여연대 1년 사업은 매년 2월말에 있는 총회를 통해 결정된다고 한다. 아직 금년에 있을 지방선거와 대선 전략도 구체화되지 않았다. 확정된 것은 6월 지방선거에 낙선운동은 벌이지 않는다는 사실 뿐.
  
그밖에 금년 1년의 화두랄까 가장 역점을 둘 일이 뭐냐고 물었지만, "우리가 1년 단위로 사는 사람들도 아니고, 정부기관처럼 신년 역점사업 1, 2, 3.. 해 가며 액자에 걸어두는 사람들이 아니쟎아요"라고 되묻는다.
  
박 처장은 인터뷰를 시작한지 한 시간 반이 지나자 시계를 보기 시작했다. “저희 대표님이 오기로 되어 있어서...” 오전 8시부터 약속이 있어 늦었다던 그는 그 날도 예외없이 바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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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꾼 시대의 기자

"과점 언론들 즉 조중동 논조가 왜 그렇게 보수적이냐. 사주들이 정말 친자본적이고 수구적인 사람이라서 그럴까? 난 그렇게 보지 않는다. 1980년대를 거치면서 기자 개개인이 부르주아가 됐다. 그전까지는 기자들 월급이 한국 사회 평균이거나 더 아래였다. 그래서 아래에서 한국 사회를 볼 수 있었다.
  

<조선일보> 등은 월급쟁이가 받는 최고 수준의 월급을 받는다. 이렇게 되면 이미 '결단의 문제'가 아니다. 경제적 상층부에 기자들이 들어간 것이다. 편집권 독립을 얘기하는데, 기자들이 편집장을 뽑는다고 좀 다른 논조를 주장하는 편집장이 뽑힐까? 데스크 눈치 보지 말고 마음대로 기사를 쓰라고 하면 기자들의 논조가 바뀔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기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상층 부르주아에 포섭됐기 때문에 자기가 속한 계급의 이익을 대변할 수밖에 없다."



이 내용은 지난해 고종석 전 한국일보 논설위원을 인터뷰 했을 때 고 위원이 한 말이다.

 

진보언론, 언론개혁을 얘기하는 다른 어떤 말보다 내게 무겁고 아프게 다가왔다.

 

(물론 내 월급은 내 또래의 정규직 대졸 월급쟁이가 받을 수 있는 최저 수준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행여나 기자들이 경제적 상층부에 편입해 필봉이 무뎌질 것으로 우려하는 회사의 혜안에도 불구하고 난 종종 내 월급에 불만이 많다.) 

 

먹물쟁이들이 우대받는 사회, 군인들이 우대받는 사회를 지나 장사꾼이 우대받는 사회에서 '기자'는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가?

 

권력을 감시하고 있다, 사회의 어두운 구석을 비추고 있다 등 기자의 자존심 만으로 버틸만한 기자들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이 장사꾼의 시대에...

 

아니 인문학적 지식이란게 시대에 뒤떨어진 뒷방 늙은이들의 유희거리 정도로 전락한 이 장사꾼의 시대에 양심적 기자라는 존재가 언제까지 효용 가치가 있을까?

 

주변에 알고 지내던 후배 기자의 전직 소식에 "전망 없으니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다른 길 알아보는 게 현명하다"는 선배 기자의 평가가 서글프다. 난데없이 추워진 봄날, 소주 한잔이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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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0 재보선과 조간신문

'6:0'

지난 주말 치러진 4.30 재보선 결과는 여.야 모두에 충격적이었다.

 

'설마' 하던 일이 일어난 것이다. 새삼 정치는 정말 그 향방을 한치도 예측하기 힘든 '생물'이라는 말을 실감한다.

 

이같은 선거 결과는 당연 5월2일 조간신문 1면 톱을 장식했다. 또 각 신문 사설에서도 이번 선거의 의미를 분석했다. 조간신문들은 이번 재보선이 과반 의석을 차지하고도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한 집권 여당에 대한 심판이라는 인식은 공유했지만 선거 결과를 바탕으로 열린우리당이 어떻게 거듭나야 하는가에 대한 '훈수' 내용은 각기 달랐다.

 

경향신문, 한겨레, 서울신문 등은 이번 재선거 결과가 과반의석을 갖고도 제대로된 개혁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한 비판이라고 보았고, 동아일보, 중앙일보, 조선일보, 세계일보, 국민일보 등은 오히려 노무현 정권과 열린우리당의 '개혁노선'에 대한 국민들의 심판이라고 분석했다.



따라서 '개혁 실종'을 선거 참패의 원인으로 분석한 신문들은 열린우리당이 본연의 노선에 충실할 것을 주문했고, 정반대의 분석을 한 신문들은 열린우리당이 실용주의 노선을 충실히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개인적 정치적 견해에 비춰보건데, 이날 사설 중 가장 훌륭한 것은 경향신문이었다.  

 

특히 "선거가 패배자와 승리자에게 각각 다른 의미의 교훈을 주고, 자기 교정의 계기가 된다면 선거는 제기능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선거에서 정치는 작동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정치는 희망이어야 한다"는 마지막 구절은 압권이다.

 

<왜 집권당은 패배했는가>


그제는 열린우리당과 노무현정부에게 슬픈 날이었다. 열린우리당은 국회의원 재선거에서 단 한석도 얻지 못했다. 그들은 집권 이래 나름대로 노력했는데도 알아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답답하고 서운한 감정을 억누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재선거 결과는 과반의석을 갖고도 국정을 안정적으로 운영하지도 못하고, 개혁도 하지 못한 무능한 집권세력에 대한 정당하고도 냉정한 평가이다. 시민들은 열린우리당이 실력 이상으로 많은 의석을 갖고 있다고 믿었던 게 틀림없다. 사실, 열린우리당은 과반의석을 부담스러워한다고 느껴질 정도로 그 힘을 어디에 어떻게 쓸지 어쩔 줄 몰라했고, 우왕좌왕했다. 야당과는 소모적인 싸움을 하며 귀중한 첫 1년을 다 허비했다.


이런 집권당이 계속 의석의 반 이상을 차지한다는 것은 너무나 비현실적이고, 너무나 비정치적이며, 너무나 비상식적인 일이다. 열린우리당이 이번 선거에서 만에 하나 승리를 기대했다면 그것은 욕심이었다고 말해 주고 싶다.


열린우리당이 1년 내내 표 깎아 먹을 일만 하다 재선거가 다급하다고 벌인 행태만 보아도 패배는 너무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새 정치’ ‘다른 정치’를 자신의 존재이유로 자처했던 정당이다. 그런데 가장 낡고 더러운 선거수법을 다 동원했다. 그 정당은 선거승리에 정신을 빼앗겨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몰랐겠지만, 시민들은 다 알고 있었다. 다른 정당 인물을 빼내오는 철새정치, 후보와 당정체성의 불일치, 유권자 매수 시비에서 그 정당은 선두에 있었다. 이런 자기 부정이 없다. 그들이 부풀려 놓은 기대와 실제 행동 사이의 괴리가 시민을 더 큰 절망 속에 빠뜨렸음을 아는지 모르겠다. 열린우리당은 왜 이겨야 하는지, 어떻게 이겨야 하는지 성찰하지 않았다. ‘선거니까 이겨야 한다’고 했다면, 굳이 열린우리당을 선택할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한나라당은 이번 선거를 통해 열린우리당의 대안으로 선택받았는가. 한나라당은 감히 그렇다고 내놓고 말하지는 못한다. 이 선거 결과의 의미를 천하가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이 무슨 비전을 제시해서, 그 무슨 국가개혁 프로그램을 내놓아서 지지를 받은 것은 아니다. 집권당의 잘못으로부터 얻은 반사이익일 뿐이다. 이번 선거가 열린우리당의 실패일지언정 한나라당의 성공은 아니다. “한나라당이 더 빨리 달리라는 국민 여러분의 매서운 채찍”이라는 말이 빈말이 되어서는 안된다. 만일 한나라당이 자만에 빠져 자기개혁에 나태해진다면, 이번 승리는 큰 패배를 향한 음울한 전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은 그렇지 않아도 재·보선이라는 작은 선거에서는 이기고, 대통령 선거라는 큰 선거에서는 연속해서 졌다. 큰 선거는 지역주의, 반사이익, 선거전략만으로는 안된다. 시대 흐름을 읽을 줄 알고 자기의 전망을 제시할 줄 알아야 한다. 이번 승리가 다음 승리의 약이 될지 독이 될지는 한나라당의 선택에 달려 있다.


선거가 패배자와 승리자에게 각각 다른 의미의 교훈을 주고, 자기 교정의 계기가 된다면 선거는 제기능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선거에서 정치는 작동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정치는 희망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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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 해변가의 버려진 공동묘지

하와이 오하우섬의 노스 쇼어(North shore) 부근 해안가에 주인 모를 버려진 묘지들이 있다고 한다.

 

1903년 사탕수수농장 노동자로 와 이 곳에 몸을 뉘게된 재미한인 1세들의 공동묘지는 돌보는 사람 없이 언제 쓸려갈지 모르는 채로 버려져 있다.

 

"작년 처음 이민 와서 결혼도 못하고 죽은 분들의 공동묘지를 치웠습니다. 어림잡아 2백명도 넘는 것 같은데, 해변가에 있다보니 파도에 쓸려내려가기도 하고, 나무 비석을 세워 비석이 썩어 없어진 경우도 있었다. 그 무덤들을 치우면서 우리 선조들이 이 낯선 땅에 와 얼마나 서럽게 살았는지 절실히 느꼈다."(Rex K.C. Kim, 변호사, 재미한인 2세)

 

1903년 1월 13일 101명의 한국인들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할 '계약 노동자'로 하와이의 호놀룰루 항에 도착한 게 공식적인 미국 이민의 시작이다. 그후 1905년까지 7천2백여명의 한국인(남자 6천48명, 여자 6백37명, 아이들 5백41명)이 노동자로 미국에 왔다고 한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하와이 섬.)



당시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주 협회는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지 못하도록 세계 각국에서 노동자를 모집해 농장을 운영했다. '노동자 분리 정책'으로 각국의 여러 민족의 노동자들이 서로 경쟁하도록 해 이들의 노동력을 저임으로 착취했다. 한국에서 노동자들을 모집하게 된 동기도 일본인 노동자들의 파업을 분쇄하기 위한 것이었다. 초기 이주한 한인들은 부산 제물포 항구를 출발해 일본을 거쳐 배로 약 40-70일의 길고도 험한 항해를 거쳐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했다고 한다.

 

물론 하와이에서의 생활은 모집 때의 선전과 달리 중노동과 저임금에 시달리는 고통스런 생활이었다.

 

뙤약볕 아래에서 하루 10시간의 중노동에 하루 품삯은 남자 67센트, 여자와 아동 50센트에 불과했다. 한달 평균 25일 일하고 이들이 손에 쥘 수 있는 돈은 16달러로, 하와이까지 오는 뱃삯 을 갚고, 고향에 조금 송금하고 나면 수중에 남는 돈으로 기본 생활도 불가능할 정도였다고 한다. 또 이들은 마치 죄수처럼 이민국에 등록된 번호로 불렸으며, 부당한 대우를 당해도 반항하면 당장 쫓겨나기 때문에 노예 생활에 가까운 생활을 견뎌야 했다.

 

초기 이민의 대다수가 젋은 남성들이었기 때문에 이들의 신부감으로 젊은 여성들이 '사진 신부'(사진 교환을 통해 결혼이 성사돼 이렇게 불렸다)로 이민을 오게 됐다. 당시에는 동양인과 미국인의 결혼을 금지하는 '금혼법'이 있었기 때문에 현지 여성과의 결혼은 꿈도 꾸기 힘든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같은 '사진 신부'를 맞이할 형편도 안되는 초기 이주 한인들은 낯선 타국 땅에서 거둬주는 사람 없이 쓸쓸히 생의 마지막을 맞았다.

 

그렇게 1백년이 지나 그들의 버려진 무덤이 파도에 쓸려 사라지듯 그들의 고단했던 삶도 제대로 기록되지 않은채 영원히 잊혀지고 있었다.

 

현재 하와이에 거주하는 한인은 공식적으로 3만5천-4만명, 그러나 한국인의 피가 조금이라고 섞인 혼혈은 20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하와이 한인들은 지난 2003년 이민 1백년(centenial)을 맞아 자체 행사를 벌였고, 이 행사 이후 남은 기금으로 코리언 아메리컨 재단(Korean American Foundation)을 만들려고 한다.

 

 


 

(3주간 미국 방문의 마지막 도시였던 하와이에서 우리가 만난 최고위층은 하와이 주대법원장인 Ronald T.Y. Moon이었다. 재미한인 3세인 그는 무척이나 우리를 반갑고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소위 꽤나 성공한 그였지만 그가 전해준 가족사에서 재미한인, 아니 더 나아가 이주자들의 진한 삶의 애환을 느낄 수 있었다. 평양이 고향인 그의 할아버지는 1903년 사탕수수 노동자가 되기 위해 하와이로 건너왔다. 그의 서울 출생인 할머니 역시 '사진 신부'로 이민온 케이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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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들의 '아랫도리 동맹'

지난 한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숨겨진 딸'이 정치권의 가장 큰 이슈 중 하나였다.

 

기자로서 난 개인의 사생활과 관련된 보도에 대해 비교적 보수적 입장이다. 되도록이면 하지 말아야 한다는 쪽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 뿐 아니라 혼외자로 알려진 김모씨(35)의 사생활 침해도 충분히 보도 이전에 고려했어야 한다. 김모씨가 인터뷰에 응해줬다고는 하지만 방송 이후 김모씨, 혹은 주변에 대한 보도가 이어졌고 그는 잠적했다.

 

기자라는 계급장을 떼고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점은 평생 야당 지도자였던 DJ의 혼외자 문제가 다른 정적들에게 전혀 이용되지 않았던 이유였다.

 

SBS 보도에 따르면 "박정희 전 대통령이 김 전 대통령의 사생활 관련 보고에 대해 '야, 남자 아랫도리 부분은 보고하지마'라며 일축했다. 이후 대통령들도 마찬가지였다"는 것이다.  



각종 폭로와 의혹 제기가 난무한, 일종의 '정글'인 한국 정치판에서 DJ가 이 문제로 상처받지 않았다는 점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한국에서 권력을 가진 남성들 중 '여자 문제'에 있어 자유로운 인간이 거의 없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는 부분이다.

 

'프라이버시'라는 개념이 거의 전무한 한국 사회에서 남성들의 '여자 문제'만큼은 철저히 개인적 문제였다. 그리고 서로서로 비밀을 지켜주고 감싸줬다.  '여자 문제'를 거론할 경우 오히려 치졸한 사람으로 치부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아...얼마나 무서운 남성들간의 '아랫도리 동맹' 인가.

 

덧붙이는 글.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것은 SBS가 왜 이 사실을, 이 시점에 보도했냐는 점이었다.

 

대략 세 가지 정도 분석이 나오는데

 

첫째는 '진승현 게이트'를 취재하다가 진승현씨 쪽에서 찔러서 DJ의 혼외자 문제를 알게 됐고 상업방송인 SBS 답게 과감히 '질렀다'. 뭔가 많이 부족한 설명인 듯하다.

 

두번째는 목포시장 선거를 겨냥한 것이라는 분석이다. 이번 4.30 재보선 목포시장 선거에서 민주당이 패배할 경우 사분오열할 가능성이 높고 이때를 노려 열린우리당이 통합을 한다는 시나리오다. 이것도 좀 약하다.

 

세번째는 퇴임후 오히려 업적을 인정받고 있고 정치적 입지를 여전히 확보하고 있는 DJ 자체를 겨냥한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특히 DJ는 올해 회고록을 출간한 계획이었는데, 이것을 앞두고 완전히 재를 뿌린 격이 됐다. DJ 회고록은 역사적 의미 뿐 아니라 정치적 파장 또한 엄청날 것이라고 정치권에서 엄청 긴장하고 있었다.  여권에서 철저히 정략적인 목적에서 배후조정한 것이라는 분석이다. 제일 그럴듯하긴 하다. 

 

근데 왜 숨겨둔 자식들은 왜 다 딸인가?

 

(아들일 경우, 호적에 올리지 않을까 싶다. 왜냐...나중에 그 아들이 자라 자신보다 더 큰 권력을 갖고 복수할 게 두렵지 않을까. 대개 딸들은 그런 권력을 갖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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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페퍼


 

3주간 미국 방문의 가장 큰 수확은 역시 '사람들' 이었다.

 

특히 인상깊은 몇몇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중 한명이 존 페퍼(John Feffer)다.

 

미국친구봉사회(American Freinds Service Communuties) 멤버로 한국에서 3년 정도 살았던 그는 보기 드물게 진보적 시각으로 한반도 문제를 분석하는 젊은 미국 학자다.

 

워싱턴 D.C에 위치한 Institute for Polocy Studies(IPS)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한국말로 더듬더듬 "죄송해요. 제가 한국말 좀 알았는데 많이 잊어먹었어요"라며 " 한국에 머무르면서 참여연대, 여성단체연합, 평화를만드는여성회 등 시민단체들과 같이 일했다"고 밝혔다. 

 

그는 약속했던 시간을 훌쩍 넘겨 2시간 가량 북핵문제, 한미관계, 남북관계 등에 대한 우리 질문에 성실히 답했으며, 자신이 편집한 이란 책을 선물로 주기도 했다.

 

이 책 속표지에 그는 서툰 솜씨로 "평화, 통일, 연대"라고 한글을 써줬다. 



최근 그의 저서 <남한 북한>(정세채 옮김.모색)이 한국어로 번역돼 나왔고, '문화일보'에서도 그의 순발력있고 빼어난 분석력이 돋보이는 칼럼을 읽을 수 있다. 또 그의 홈페이지(www.johnfeffer.com)에서도 그의 글을 찾아볼 수 있다.

 

페퍼와 나눴던 대담 내용을 보고 싶으면 아래 링크를 클릭하면 된다.

(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60050404090259&s_menu=세계)


 

(페퍼도 한국에서 나름 진보적인 인터넷 매체 기자들과의 대담을 즐겼다. 시종일관 그는 진지하고 친절했다. 사진은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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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와 비데

청와대 기자실인 춘추관의 화장실에 지난 13일 비데가 설치됐다.

 

참여정부 들어 지난해 비서동을 신축하면서 비서동에도 설치됐던 비데가 드디어(?) 춘추관에 까지 등장하게 된 것이다.

 

청와대에서 오랫동안 관리직으로 근무해온 A모씨는 이와 관련, "15년 전에는 대통령 화장실에만 비데가 있었는데 세상 참 좋아졌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노태우 전 대통령 시절에는 청와대 중 유일하게 대통령 집무실 내 화장실에만 비데가 설치됐었다고 한다.

 

특히 당시에는 국내에서 비데가 생산되기 전이라 수입 비데가 설치돼, 영어에 익숙하지 않은 관리담당자들이 청소하면서 비데를 오작동시켜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는 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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