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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칼산의 추억... (6) 2007/01/19
  2. 지리산 일출... (2) 2007/01/19
  3. 3대... (10) 2007/01/19
  4. 내부고발의 여파... (4) 2007/01/18
  5. 뚝방의 추억... (5) 2007/01/18
  6. 지리산 거림골, 세석산장 (5) 2007/01/15
  7. 부모님께... (13) 2007/01/10
  8. 양경규 (12) 2007/01/09
  9. 어머니 칠순, 금혼식 (6) 2007/01/08
  10. 첫날 다시 북한산... (6) 2007/01/05

칼산의 추억...

from 단순한 삶!!! 2007/01/19 15:54

행인님의 [뚝방의 추억(2)] 에 관련된 글.

뚝방의 추억을 그냥 쓰기에는 뚝방에 살지 않아서 그렇고,

칼산의 추억이 어울릴라나..ㅎㅎ

행인이 물 얘기를 썼으니 산오리도 물 생각이나 해 볼까나.

 

처음 서울에 왔을때는 문래동 고모 집에 얹혀 살았는데, 그 집들은 일제시대때 지은

집들이 행과 열을 맞춰서 같은 모양으로 지어진 것이었다.

그긴 당연히 수도도 있었고...



시골에서 식구들이 올라 오고 칼산 아래 집으로 이사를 했는데,

그당시 기역자로 된  '부로꾸'(블록인 모양인데, 일본애들이 이렇게 불러서 그랬나?) 집이었다.

대지25평에 건평 12평인데, 그당시 70만원을 주고 샀다고 했다.

 

쇠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왼쪽에 화장실이 있었는데 부로꾸로 담을  쌓고  지붕은 스레트로 덮었다. 처음 갔을때는 집에 물이 없었다. 그래서 한참 아랫동네에 물을 길러 다녔다. 물론 물 길러 가는 것은 버글버글한 애들의 몫이었고, 한바께쓰 물떠서 오면 절반은 흘리고 떠 왔다. 동네에 수도는 물론 없었으니까 길건너 아랫쫏에 물 길러 가는 곳은 펌프였다.

 

얼마간 물을 길어다 먹었는지 모르겠는데, 그게 엄청 불편했으니까 아버지가 집 안에 펌프를 박기 위해 지하수 구멍을 뚫기로 했다. 먼저 화장실 앞 쪽에 물길이 지나간다고 해서 그길 뚫었는데, 조금만 내려가니까 바위가 버티고 있어서 포기 했다.(그당시에도 기계로 드릴을 걸어서 뚫었는데, 바위는 뚫지 못했는지 금새 포기했다. 요즘 같으면 지하 암반수를 먹을수도 있었을 건데..ㅎ)

다시 작은 방 앞쪽에다 뚫었는데, 그기도 바위가 부닥쳐서 실패.... 마지막으로는 아예 담 바깥의 길에 구멍을 뚤었는데, 여기서 물이 나온 거다.

 

그리고는 파이프를 박고 펌프를 연결했는데, 파이프가 직선으로 바로 내려간 것이 아니라 담밖으로 꺽어졌다가 땅아래로 내려갔으니, 물이 제대로 올라올 리가 없다. 물은 많이 있다는데, 쉽게 눌러서 퍽퍽 올라오지 않고, 아주 힘들게 조금씩 올라왔다. 그래도 그게 어디랴, 시골에서 우물물 두레박으로 퍼 먹다가, 바께쓰로 물 길러 다니다가 담장 안에 펌프가 있는데... 엄청 좋았지..

 

중학생이 되었고, 학교 갔다 오면 양말이고, 옷가지고 손빨래로 잘도 빨아서 입었다. 물론 엄마가 그 많은 애새끼들거 다 빨아주지 못하니까 자기 것은 자기가 빨았다. 겨울이라고 예외가 없었다. 한놈은 펌프질하고, 한놈은 비누칠해서 빨래 문지르고...

 

추운 겨울은 좀 문제였다. 펌프에 남아 있는 물이 얼어버리는 것이다. 그럼  또 연탄불에 물 끓여서 한참을 부어 넣고, 이렇게도 시루고, 저렇게도 시루어야 겨우 얼음이 녹아서 물이 올라오곤 했다. 그러다 고무 패킹이 얼어서 찢어지거나 하면 또 며칠간은 옆집으로 물 길러 다니고...

 

늦은 봄부터 늦은 가을까지는 그 펌프 옆에서 목욕을 해야 했다. 한여름에 식구들만 있으면 팬티만 입고 그냥 씻어 대면 그만이었고, 여자들은 밤 늦게 식구들을 모두 방으로 몰아 넣고, 방문 닫으라 하고서는 씼었다.  그 더운데 방문 닫고 여자들 목욕할때까지 기다려야 했는데, 기다리는게 어려운게 아니라 가끔 놀다가 밖에서 여자들이 목욕한다는 걸 잊고서는 화장실이라도 가려고 문을 벌컥 열고 나서다가는 '빌어묵을 소상'이란 어머니의 욕설을 두어마디 들어야 했다.

 

그건 괜찮은 편이었는데, 문제는 밤 늦게 들어오는 식구가 있는 날이었다. 늦게 들어오려니 하고, 더워서 견디다 못해 목욕을 하고 있는데, 대문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것이다. 바로 대문안이 펌프가 있는 야외 목욕탕이니 어쩌겠어... 목욕 끝날때까지 밖에서 기다리라고 하는 수밖에..

 

이쯤되면 펌프 주변을 막대기를 하나 세우든지 해서 천막천이라도 둘러서 샤워라도 하게끔 만들 생각을 못했던 것일까 싶다. 그런데, 그 집 뜯어낼 때까지 그러고 살았던거 같으니까 끝까지 만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마도 천막 쪼가리조차 구하기 어려웠기에 그랬거나, 너무 좁아서 그기까지 울타리를 만들고 싶지 않아서 였던게 아닐까 싶다.

 

담에 목욕 이야기나 써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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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19 15:54 2007/01/19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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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일출...

from 단순한 삶!!! 2007/01/19 11:48

산오리님의 [지리산 거림골, 세석산장] 에 관련된 글.

 

 

제석봉에서 일출을 보았는데,

사람들은 지리산 일출을 보려면 3대에 걸쳐 덕을 쌓아야 한다는데,

산오리는 겨울에 산에 갈때면 대부분 일출을 보았던 거 같다.

한 30대는 덕을 쌓은 것일까?ㅎㅎ



 

첫번째 사진은 전날 하늘이 너무 파래서 찍었는데, 그 느낌이 안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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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19 11:48 2007/01/19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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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

from 단순한 삶!!! 2007/01/19 11:28

지리산 갔다 부닥쳐서 움직이지 않던 카메라 돈 들여 고쳤다.

이래 저래 찍은 사진이 있는데...



 

1. 동명이가 흥사단을 따라 걷기캠프로 제주도에 가서 집으로 보낸 엽서다.

   집 주소만 있지, 애비, 에미 이름도 없다.

 

   - 이건 뭣때메 보낸거냐?

  = 그냥, 엽서 쓰라 하니까 쓴거지..

   - 네 목표냐? 아니면 부모에게 이렇게 하겠다는 거냐?

  = 그냥 쓰라니까 쓴거라니까...ㅎㅎ

  - 근데, 이 작은 글씨는 뭐냐?

  = 대학생 형이 쓴거야..

  - 이참에 아빠랑 같이 금연하면 어떠냐?

  = 싫어. 고 3  되면 생각해 볼게...

 

 

 

2. 아내가 마지막으로 뜨게질 해서 만든 동명이방 커텐이다.

   동희가 중학교 다닐때 학원갔다가 밤 12시, 1시에 들어오고, 남편은 대전가고 없고,

   그래서 애 기다리면서 온 방의 커텐을 다 뜨게질로 떴다.

   그런 고행을 왜 하냐고, 잠이나 자라고 해도 시작한건 끝을 봤다.

   이사 오고 나서 동명이 방에만 이 커텐이 없었는데, 이번에 다 떠서 걸었다.

   이 커텐 뜨는걸 보고서는 아내가 지독한 독종이란걸 알았다.

   그래도 훌륭한 아내다....

 

 

 

3. 부모님의 칠순 이벤트로 하니문 사진을 찍었다.

   스튜디오에 가서 찍었는데, 칠순잔치하는 날에는 이런 종류의 사진을 서너장 크게 뽑아서

   액자로 만들어서 식장에 가져다 주었다. 보는 사람들마다 좋아하더구먼...

   스튜디오에 처음 갔던날 산오리 사진기에 몇장을 찍었던 거다.

   이게 맘에 안든다고 다시 가서 엄마 머리모양만 바꿔서 다시 찍었다는 것인데,

   산오리는 두번째는 안갔다.

   잔치가 끝나고 무사하게 잘 치렀는가 했는데, 아버지는  또 엉뚱한(?) 꼬투리를 잡아서

   자식들을 닥달하기 시작했고, 그 댓가는 가장 부모님께 잘 하고, 또 잘하려 하는 누나가

   다 뒤집어 썼다. 만만하니까 그럴수 있다지만, 내 부모라도 이런거 정말 싫다.

   젊고 멋있고, 밖에 나서면 누구나 '호인'임을 인정하는 아버지지만,

   자식들에게는 불편하고, 대책없는 아버지다. 그래도 부모라는게 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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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19 11:28 2007/01/19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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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인가 지지난해인가? 하튼 때를 기억하는건 영 빵점인데,

우리 회사의 비정규직 여직원이 재고용이 안되자,

여러가지 회사의 비리(?)를 어느 시민단체에 고발했고,

그래서 밑빠진 독상이라는 상을 받았다고 언론에서 보도한적이 있다.



어쨌든 그 고발 내용중에 허위출장이라는게 있었다.

시내출장이나 국내출장을 올려서 출장비는 받았는데,

출장을 가지 않았거나, 아니면 날자를 줄여 일찍 돌아 온다거나,

출장인원으로 잡아 놓은 인원보다 적게 간다거나... 뭐 이런 것들이다.

 

그렇게 해서 출장비를 좀 남기면 그걸로 갑에 대한 접대비로 쓴다든지,

부서 회식비로 쓴다든지 했다는 것이 주요 내용일듯하다.

 

그래서 이 사건이 시민단체에서 청렴위로, 그리고 감사원이나 검찰까지 번진듯하다.

회사 내부에서도 분위기 뒤숭숭하고,

다른 연구기관에서도 그 여파로 허위출장 있는지 점검해 보라는 지시가 있다는 소리도 들린다.

 

어쨌거나,

산오리한테도 '출장 소명'을 하라는 건이 하나 왔는데,

1년반쯤 전에 저 멀리 나주까지 출장을 갔다 온 건이다.

출근해서 출장결재 올리고 팀원과 같이 10시 29분에 연구원을 나서서

저녁 17시 48분에 연구원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근데, 이게 왜 출장소명을 하라는 것인지 알수가 없다.

계획보다 적게 간 것도 아니고, 출장인원을 줄인것도 아니고, 또 가지 않았던 것도 아니고...

그래서 가만 생각해 보니,, 아마도 나주까지 갔다 왔는데,

그 짧은 시간안에 가능한 것이었느냐? 뭐 이런 의구심 때문에 소명하라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 일산에서 10시반에 출발해서 7시간 20분만에 나주를 갔다 올수 있느냐는 그런???

 

그럴 거라 생각하고 소명은 했다.

일산에서 승용차로 공항으로 가고, 공항에서비행기 타고 목로로 갔고,

목포에서 택시타고 나주로 갔다. 그리고 업무협의를 두어시간 하고

다시 타고 갔던 택시를 불러서 목포공항으로, 그리고 김포공항에서

주차장에 맡겼던 승용차 불러서 타고 되돌아 왔다.

오가는 비행기를 몇시에 탔는지는 기억이 안나지만,

충분히 가능한 스케줄이었고, 그렇게 했다. 근데 그게 소명해야할 내용이라니...

그래서 마지막에는 개인차량 이용과 공항주차비, 목포-나주간 택시이용으로

출장비는 부족했다고 썼다.

(출장계획에는 그런거 없다, 일산-김포도 버스요금, 목포-나주도 버스요금만 올릴수 있고,

그나마 항공료는 그대로 계상했다. 택시비나 주차비는 식비나 일비로 때웠지만, 혼자 가서는

완전부족이고, 둘이 갔으니까 그나마 조금 부족하거나 똔똔 정도로 때울수 있다.)

 

이런 거 소명하라는 건 그럴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허위 출장의 결정적인 근거와 증빙이 되었던 것은 회사의 출입카드 시스템이다.

회사는 도난방지를 위해 출입카드시스템을 도입했는데,

오히려 직원들이 엉뚱한 피해를 입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허위로 출장을 올리고, 그 출장비를 다른데다 쓴 인간들은 처벌도 받고,

고쳐져야 할 일이지만, 출장 갔다가 조금이라도 빨리 돌아와서 밀린 일처리하고

야근까지 했던 친구들은 출장안가고 일찍 돌아왔다는 의심을 받게 되었다.

도둑을 잡는 것이 아니라, 식구를 잡고 있는 꼴이 된것이다.

그래서 노동조합에서 출입기록은 노동조합의 합의가 있어야 유출을 할수 있도록 되어 있는데,

노동조합은 합의해 줄수 없다고 했는데, 회사는 일방적으로 자료를 내줬다.

그런데, 이걸 노동조합도 마구잡이로 반대할수 없었던게,

허위출장이란게 있으니 도덕적이지 않은 것을 감싼다는 비난을 받을수도 있었으니까..

 

이 건과 관련해서 또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했다.

며칠동안은 계약서류철 200여개를 일일이 뒤져서 숫자를 찾아내는 짓거리도 했다.

서류먼지가 책상과 바지를 한참이나 더럽히고, 목이 매캐해 지고,

그 숫자들을 엑셀 파일에 쳐 넣느라고 화면과 서류철만 뒤지고 보고 했더니,

눈이 더 어질어질할 노릇이다.

어딘가 한곳에 문제가 생기면, 줄줄이 관련 없는 사람들도 함께 갖가지 시달림을 당해야 한다.

그러니까 첨에는 내부고발자를 좋게 얘기하던 친구들도,

이제는 '그친구가 오히려 문제'라는 쪽으로 바뀌고 있다.

 

에구....

그러게 첨부터 문제가 불거질때 잘잘못을 좀 잘 가려서

불만을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줄 것이지,

일 다 터지고 벌어지고 나서 후회하면 무슨 소용이 있으랴....

 

근데, 이 일은 언제쯤 끝날라나...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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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18 17:17 2007/01/18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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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방의 추억...

from 단순한 삶!!! 2007/01/18 16:31

행인님의 [뚝방의 추억] 에 관련된 글.

행인님이 안양천 뚝방에서 살았다고 하니까, 산오리도 그 동네서 오래 살았으니,

추억이 많다...

 

산오리네 집은 행인이 살던 뚝방은 아니었고, 칼산이다.

71년도 여름에 서울로 왔는데, 아버지가 영등포국민학교에 넣어줬다.

칼산에서 문래동의 영등포 국민학교까지 3형제가 걸어서 등하교를 했는데,

지금 걸어가라 해도 한시간은 더 걸릴 거리였다.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학교 가는데 한시간 반씩 걸어가고, 다시 집에 오는데 한시간 반 걷고...

아마도 산오리가 조금 잘 걷는다면 이때 단련한 것이 아닐라나 모르겠네..

 

 




논둑길을 지나서(이당시 논둑길이 지금 목동아파트 14단지 부근이다)

안양천 뚝방을 올라가서 뚝위로 한참을 걸어가서

행인네 집 근처의 안양천 아래에 구름다리가 하나 있었다.

안양천 물이야 장마철 빼고 나면 항상 어른들이라면 걸어서도 건널 정도의

깊이와 폭이었으니 20~30미터쯤 되는 다리였던 거 같다.

양쪽에 쇠줄을 걸고, 그 아래에는 빈 드럼통을 몇게 받쳐 놓고,

다리바닥은 나무 판자를 어설프게 올려 놓은 모양새다.

그러니 건너 갈때 다리 위에서 출렁거리며 장난치고 놀기 좋은 다리였다.

 

그 다리는 물론 정부에서 만들어준 다리는 아니었나 보다.

다리 입구에 조그만 움막(요즘 이동식  화장실 만한)을 지어 놓고,

다리 주인인 듯한 아저씨가 돈을 받고 있었다.

한번 건너는데 5원이었던가?...

(그다음해 중학생이 되었을때 시내버스 교통비가 10원인가 15원이었으니까 결코 싼편은 아니었다.)

아마 한달치로 끊으면 몇십원 됐던거 같은데, 얼마였는지 기억이 없다.

이 다리는 안양천 뚝방에 살던 많은 사람들이 문래동이나 도림동의 공장으로 넘어가는

가장 효과적인 길이었기에 아침 출근시간이면 사람들이 꽤 많았다.

 

여름 방학때나 방학이 끝나고 학교로 가다 보면,

어라, 다리가 없어졌다. 큰 비 와서 다리를 쓸고 내려가 버린거다.

그러면 또 그 다리 다시 만들어질때까지 오목교까지 걸어내려 가거나,

고척동까지 걸어서 버스를 타고 가기도....

 

겨울방학 시작할때 쯤이나 2월 봄방학 전에는

군데군데 조금씩 물이 고인 곳이 있었는데,

얼음 아래 붕어들이 놀고 있었다는....

그때까지는 안양천이 그나마 물고기 정도는 살정도는 되었었나 보다.

산오리는 안양천에서 목욕해 보지는 않았는데, 그 전 몇해까지는 안양천에서 여름에

수영을 하고 놀고 했다는 얘기를 듣기도 했다.

 

그 긴 안양천 뚝방을 따라서 서너줄의 판자집들이 끝도 없이 이어져 있었는데,

칼산에 올라가서 보면 그건 예술이었다.

서울 중심가에서 쫓아내니까 쫓겨 와서 집단적인 주거지가 형성되었거나

시골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이 변두리로 모여들어 만들어진 주거지였을텐데,

그래도 줄을 맞춰서 지었으니까 위에서 보면 멋있어 보였다.

학교 갔다 오다가 심심하면 뚝방위를 걷는것이 아니라,

뚝방 아래의 동네 좁은길을 걸어서 왔다.

문앞에 내놓은 연탄재를 차기도 하고,  동네 개 똥구멍을 차기도 하고...

그 동네 지나다니면서 행인의 기억속에 남아 있는 화장실도 가끔은 애용하고...

 

74년인지 75년인지 정확한 년도는 기억이 안난다.

엄청 큰 물난리가 났는데, 안양천이 넘칠 지경에 이르렀고, 지금 목동아파트가 들어선

논바닥은 완전히 잠겨서 커다란 바다가 되었다.

안양천 뚝방으로 물구경을 갔는데, 뚝방아래 사람들이 온통 가재도구를 꺼내들고선

뚝 위로 피난을 올라 오고 있었다.

뚝방아래 집들 가운데 낮은 쪽의 집들은 절반이 물에 잠겼다.

그 동네에 살던 우리 친척 한사람이 애를 낳았는데, 물이 집에 잠겼으니

갖난애기를 싸들고 우리 집으로 피난을 왔다.

뭔지 모르고 물구경에다, 집에는 손님들이 왔으니 그저 좋아 했었다는...

당시에 물이 안양천을 넘기 일보 직전까지 갔는데,

소문에 의하면, 문래동 쪽의 뚝에 대포를 설치했다는 거였다.

문래동쪽으로 둑이 터지면 공장들의 피해가 막심할테니까

아예 목동과 신정동 쪽의 뚝을 터뜨리기 위한 것이었다는데,

직접 보지 못했기에 사실인지 소문인지는 모르겟다.

물 내리고 다시 안양천 건너 문래동으로 갔더니, 그동네도 어른 가슴만큼은 물이 잠겼는데,

당시에 수세식 변소 없었으니까 온통 똥물로 물이 잠겼던 선을 선명하게 그려 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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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18 16:31 2007/01/18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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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심한 스머프...님의 [지리산에 다녀와서..] 에 관련된 글.

 

역사와 산을 따라 나선지 오래다.

지난해 애 학원을 핑계거리로 거의 가지 않았기때문이다.

가지 않다 보니까, 은근히 무박산행이 무서워지기도 한다.

잠자는 시간을 그 좁은 버스의자에 앉아서 몸을 비틀며 잠을 청하는게 싫어서인데,

그렇게 보니까 아예 1박을 잡아서 이틀동안 움직이는건 여유로와서 좋았다.
이틀동안 지겹도록 본것은 하얀 눈길, 새파란 하늘, 그리고 쏟아지는 별, 그리고 떠오르는 해,

그 붉은 바다....

아침에 사무실에 출근하자 마자 눈이 어른거리고, 침침하고, 눈꺼풀은 떨리고, 하늘은 침침하고,

형광등 불빛에 눈을 껌벅이면서 적응하자니, 꽤 답답했다.



거림골로 올라간 적은 없었던 초행길이지 싶다.

김재영처럼 지리산을 57번째 가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이름있는 계곡은 대충 다녀본 듯한데,..

 

1. 세석산장은 너무 호화찬란(?)한 산장이었다.

    지나치기만 했지, 산장에서 잠자본 적은 없었는데, 그날 사람들이 별로 없어서

    산장에서 자야하는 칼잠을 자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다음에 지리산을 오더라도 장터목을 굳이 가지 않고, 세석에서 잠자면 편하고 좋겠다.

    넓고 편하다고 해서, 그리 편하게 깊게 잠들었던건 아니었던거 같다.

    몸을 뒤척일때마다 불편해서 깼는데, 그리고는 또 잠들고, 코를 골아서 옆사람에게

     방해를 주고....

    어쨌든 세석은 너무 좋은 산장이다. 산에서 그렇게 좋은, 편한 곳에서 자는건 좀 미안하다.

     별도 많고, 먹을 것도 잘 먹고, 잠까지 오래도록 잤으니 그이상 뭐가 더 필요하랴..

    술 따로 안가져 가는 바람에 조장한테 '기본이 안되었다'는 소리를 여러번 들었는데,

    무겁더라도 담부터는 소주 한병은 챙겨가자..

 

2. 아침에 우리 조는 가장 먼저 출발했는데, 전날 엄청 먹고서도 아침에 또 배가 고파서

   누룽지 끓인걸 먹고 걷기 시작했다. 근데, 처음 30분 정도는 오르막 길이고, 조장이

   빠르게 빼서 그렇기도 하지만, 가슴이 답답하고 넘 힘들었다.

   약간의 준비운동이나 여유도 없이 출발해서 그렇다고는 하지만, 갑자기 가슴이 막혀 못가는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는....

 

3. 장터목을 지날때부터 동쪽하늘이 붉게 물들었는데, 이게 언제쯤 해가 떠오르려나 몰라서

   좀 기다렸다가 보고 갈까 하면서 계속 올랐다. 제석봉에 올랐을때 해가 떠올랐고,

   그 추운데 카메라를 꺼내서 사진을 찍고, 이리저리 뛰다가 넘어지기도 했다.

   그바람에 카메라를 바위에 약간 부닥쳤는데, 그다음부터는 작동중지....

   밧데리가 없어서이거나 , 추워서 그런가 보다 했는데, 아래에 내려와서도 여전히 중지.

    오늘 에이에스센터에 맡겼다.....ㅠㅠ

 

4. 올라가면서도, 그 추위속에서 산등성이를 걸으면서도, 참 행복하다는 생각을 여러번 했다.

   언제부터 무릎이 아프다고 오래 걷는 것은 가지도 못했고, 이러다가 산에 가는 건 포기해야

   하는거 아닌가고 생각한 적도 있었는데, 이제 그럭저럭 잘 걸어가고 있다는게, 신기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약간 무게가 더 나가더라도 큰 배낭을 지고 갈수도 있겠다는 자만심까지..

   이렇게 또 무리 하다가 완전히 무릎이 고장나는거 아닌지 모르겠네..

 

5. 로타리 산장에서 아침겸 점심을 먹으면서, 물을 뜨러 법계사에 들어갔는데, 물 뜨고,

  내려오면서 절을 들른 김에 열심히 합장을 해서 부처님께 기도했다.

  재수의 길로 들어설지도 모를 동희가 맘 편하게 지냈으면 좋겠다는 기도와, 산에 가기전에

  일출을 보면서 기도해 달라고 부탁한 한 공주가 커플생활(?)을 할수 있게해 달라고 빌었다.

  일출을 보면서  빌지 않았기 때문에 그 기도가 효험이 있을런지는 모르겠지만 올해는 짝들을

  찾아서 즐겁게 살아가시길...

 

6. 아침 겸 점심 먹으면서 박인해에게 한 농담은 그에게 마음에 남았나 보다. 올라오는 버스

   안에서 '산오리 아저씨의 말처럼 비와 강동원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는걸 보면....

   박인해가 한 말은 다 공감이 가고 반성해야 할 것들이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어린이나

   중고등학생을 만나면 더 할 말이 없어지고 마는 듯하다.

   그나마 몇번 보아왔기에 아는 척하거나, 친한 척하는 것들이 그들에게는 오히려 부담으로

   또는 '어른들은 항상 그모양'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기때문이다.

   어릴적에 어른들이 반말하거나, 똑같은 질문을 던지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느껴 왔을 테지만,

   나이 먹어가고, 어른이 되면서 다시 어른들이 하던 것들을 반복하는 것에 대해 반성할 일이다.

 

7. 2월엔 태백산을 간다는데, 무박이란다.

   가고 싶다는, 가야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버스안에서 불편함으로 시달릴걸 생각하니 아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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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15 18:25 2007/01/15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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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께...

from 나홀로 가족 2007/01/10 18:14

벌써 1학년의 모든 행사가 끝이나고 몇일만 학교에 더나오면 어느덧 방학이네요...

중간고사때는 학교시험 포기한다고 하고 제과제빵필기를 따겠다고 하다가 결국

제과제빵도 못따고 시험도 반꼴등을 했습니다. 그때는 정말 내가 왜 이럴까..

생각을 하고 다음에는 학교시험이라도 잘 봐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독서실도 다니고 나름 공부 열심히 하였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하다 보니 제과제빵 필기시험도 붙고 많이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평균점수도 조금 올라간 것 같습니다.

중학생때와는 달라서 한달정도 한꺼번에 공부하려니 꽤나 벅찼던것 같습니다.

다음시험  때는 지금보다 더욱 수직상승한 성적표를 부모님품에 안겨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 안좋은 머리에다가 들어가지도 않는 것들 꾹꾹 쳐넣느라고 힘들었지만

다음에는 더욱더 열심히 공부할 것입니다.

2학년때는 잘 지켜봐주세요!!

사랑해요  ☞☜  ^ ^

 

동명이가...

 

성적표와 함께온 동명이 편지다...

 

'이 안좋은 머리'를 만든 아빠로서 심히 괴롭고 미안한 마음을 주체할수 없구나...

되는 데로 적당히 공부하려무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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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10 18:14 2007/01/10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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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경규

from 단순한 삶!!! 2007/01/09 14:19

양경규 위원장이 민주노총 위원장에 출마했다.

언젠가는 한번쯤 민주노총 위원장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왔었는데,

이번 출마가 이른건지 늦은 건지는 모르겠다.

민주노총이고 당이고, 중앙이 거의 개판 수준인거 같아서,

그런 판에 누가 하든 별로 달라지지 않을 거란 생각도 들어서

된다 하더라도 한편으로는 찜찜하지 않을까 싶다.

 



철도웨딩홀을 가득 메우고도 넘칠 사람들이 왔고,

분위기는 좋았다.

 

가기 싫었는데, 일산으로 근무지를 옮겨온 친구가 퇴근길에 같이 가자고

해서 갔더니, 가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끝나고 나오는데 얘기했듯이 '경로잔치 하냐?'는 말처럼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에 노동조합을 만들고, 같이 활동했던

전문노련 시절의 동지들이 많이 참석했기에,

얼굴도 보고, 반가웠다. 

그래도 17~8년을 넘기면서 함께 활동했던 친구들이

아직도 노동조합에 관심을 갖고,

또 이런 곳에 나와서 양경규에게 박수를 보낼수 있다는건

좋은 일이 아닐까.

 

식이 시작되고, 중간에 박준이 나와서 민주노총가를 불렀는데,

산오리는 그 가사를 거의 다 까먹었다.

뒷부분 소리 높이는 곳만 좀 생각났다.

민주노총 조합원인데, 이모양이라니.......

 

참석한 친구들 가운데 산오리가 알고 있는 친구들은

한 4분의 1쯤 될라나..

모르는 새얼굴들이 많다는 건 활력이 있어서 좋은 일..

허나 경로 잔치에 온 산오리 같은 친구들은

민주노총 대의원도 아닐테니까 별 영양가는 없는 듯하고,

다만 선거경비로 약간씩 추렴할 정도가 아닐까..

 

민주노총 선거공보를 들여다 보니까,

90년 초반 전문노련 시절에 함께 했던 친구들도

이래저래 정파로 갈려져 있었다.

산오리가 가장 좋아하는 허영구는 감옥에 갇혀 있는데,

부위원장으로 출마했다.

그가 추구하는 게 '무정파'라서  더욱 좋다.

김예준은 기호 3번의 선대본부장으로 이름이 올라와 있고,

김태일은 지난번 선거에서 사무총장으로 당선되기도 했으니

기호 2번의 핵심인물임에는 틀림이 없다.

정파로 갈라져서 서로 경쟁하는 거야 나쁠 거 없지만,

요즘 민주노총이고, 당이고 모조리 정파로 사람을 갈라 버리니까

예전 함께 했던 동지들도 서로 못본척하는 사이로 바뀌어 버린 듯하다.

 

전진 만들때 산오리한테도 가입하라 했지만,

이상하게 가입하고픈 마음이 들지 않았다.

전진에 있는 친구들은 산오리와 가까운 친구들도 많고,

그들이 표방하는 것들도 마음에 들기도 하지만,

이것도 어쩌면 그들과 친하게 지내왔기 때문에

그렇게 수용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은 전진이고 뭐고 간에 어떤 단체에 가입하고 싶지 않은 것은

무슨 회의다, 무슨 수련회다, 뭐해라, 뭐해라 하는게 싫어서 였을 것이다.

어디나 사람이 모자르니, 한두번 얘기해서 움직이는 사람들은

계속 그렇게 움직여지기를 강요(?)받게 되고, 또 당사자도 그렇게 하는 것이

단체의 소속원으로서 기본을 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

 

요즘 들어 드는 생각은,

전진이고, 노힘이고, 다함께고, 전국회의고 간에 어디든 다 가입하는 것은 어떨까하는

생각도 든다... 예수님도 믿고, 하나님도 믿고, 부처님도 믿고, 천주님도 믿고, 마호멧도 믿고

그래서 어느 신이라도 어여삐 봐줘서 천당이라도 갈 행운이라도 얻게 될지 모른다고 생각

하는 것처럼,  이단체 저단체들이 다들 표방하는 것들이야 얼마나 좋은 생각들인가 말이다.

부질없는 넋두리겠지..ㅎㅎ 

 

어쨌거나,

양경규는 산오리를 볼때마다 연맹에 나와서 일좀 해달라고 했는데,

산오리는 그즈음에 그랬다.

"양위원장이 민주노총 위원장 되면 도와 드리죠."

그 당시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내뱉은 말이지만,

그 친구들은 당연히 산오리 얼굴 볼때마다 잊지 않고 상기 시켜 왔다.

 

물론 지금 양경규가 민주노총 위원장이 된다 하더라도

민주노총에 들어가서 일하고 싶은 마음은 털끝만큼도 없다.

설사 산오리가 일하고 싶다 하더라도,

이제 별로 쓸모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같이 일하자고 하지도 않겠지만,...

그보다도 그게 하고 싶은 일이라 하더라도

이제는 밤늦게 까지 회의하고, 전국을 여기저기 돌아 다니고,

차거운 아스팔트 바닥에 주저앉아서 소리지르며 팔뚝을 흔드는,

그런 것들이 벅차게 느껴지고, 도저히 할 자신이 생기기 않는다.

 

어쨌거나,

출마한 양경규가 이번선거에서 이겨서

민주노총 위원장에 당선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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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09 14:19 2007/01/09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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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전에 결혼 한 거는 맞는 거 같은데,

결혼식 날자도 정확하게 모르신다. 두분다...

신행 가고 오는 어느날을 헷갈리는지

아니면 세월이 지나다 보니, 결혼날자라는게 무슨 의미가 없어서인지도 모르지만,

아마도 후자가 더 크겠지.

 

어쨌거나 지난 토욜(6일)저녁에

어머니 칠순 잔치를 치렀다.

 



그때도 안하신다, 못하신다 하다가도 막상 하고 나니까

그저 좋아 하셨던 기억이 있기에 이번에는

어머니 칠순에다 금혼식까지 겹쳐서 잔치를 해야겠다고 추진했다.

 

장소에, 사진에, 이런거 저런거 챙기기 싫어서

아예 무슨 상조회사라는데 계약을 했다.

부모님 웨딩 사진 찍어준다 해서

모시고 가서는 사진을 찍었는데,

그게 맘에 안든다고 다시 가서 찍었다.

두번째 가신다고 할때는 난 모르겠다고 안갔더니,

막내 동생이 함께 갔다 왔단다.

사진을 액자로 크게 만들어 가져 왔는데,

그사진이나, 새로 찍은 사진이나...그게 그거인듯.

(어쨌든 그당시의 결혼 사진도 한장 없다..사진이라고 찍지도 않았겠지)

 

아버지와는 칠순잔치를  하겠다, 안하겠다로 실갱이를 좀 벌였고,

"저도 낼모레면 나이 50이니까 그냥 제가 하는대로 좀 따라오시죠!"

하고 아버지한테 대들었더니 그담에는 부모님으로부터는 말이 없어졌다.

막상 청첩장 만들어 드렸더니,

올친구들 아무도 없다고 하셨다가는 다 연락해 가지고,

예약한 자리보다 50석이나 자리가 많았는데도

막상 자리가 모자랐다는...

 

문제는 형제들간에 있었다.

형제들이라기보다는 며느리들의 불만이 나오고,

며느리들끼리도 의견이 안맞아 말다툼도 하고....

 

물론 원인제공은 큰아들인 내가 했지만,

그래도 일을 시작할때 이런저런걸 계약해서 하려고 하고,

그걸 추석 때 만나서 얘기는 했고, 

또 지난 12월 초에 시골에 묘사지내러 갈때

청첩장 나눠주면서 이렇게저렇게 할 거라고 설명을 했다.

그런데, 이 동생들이 자기 아내들한테 제대로 설명을 안해줬다.

대충 이렇게 칠순잔치 한다더라... 정도로.

 

그러다 보니, 불만이 일을 추진한 장남 한테로 몰렸고,

왜 그런 행사를 하려면 전체가 다 모여서 결정을 하지 않고,

장남 맘대로 진행했느냐는 거였다.

(이 형제들이 회비를 거둬서  모아둔 돈이 조금 있었고,

 행사비를 이 돈으로 쓰기로 했기 때문이다.)

부모님의 직접 자식들은

'그정도는 일추진하는 사람이 알아서 하면 편하고 좋은거 아니냐?'였고,

한다리 건넌 자식들은

'전체가 회의를 해서 결정해야지 일방적으로 추진하는게 어딧냐?'였다.

 

한다리 건넌 사위들은 '별의견 없음....' 이런정도..

 

그나마 장남의 아내라고, 남편을 위해서인지, 큰며느리라고 그런지 모르지만,

아내가 대충 지지해 줬고, 그래서 행사는 무사히 마쳤다.

행사 끝나고, 장남이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고,

일요일날 모여서 향후 계획이라도 얘기하자고

밥이라도 살테니 모이라고 했더니,

아들 한명과 며느리 셋은 불참.

모인 사람들만 대충 결정하고 마쳤다.

불평 있는 사람들이 빠지면, 회의는 언제나 일사천리??

 

하튼, 칠순 잔치에는 부모님 친구들과 친척들이 많이 왔는데,

잘 모르는 사람들은

'부모가 자식들보다 훨씬 인물이 낫다'는 중평이었고,

더구나

아내가 아는 사람들에게 산오리를 남편이라고 소개했더니,

'할아버지랑 사냐?'고 되물었다는....

 

아버지, 어머니! 저는 왜 이렇게 만드셨어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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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08 18:37 2007/01/08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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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은 해마다 정발산에 올라 해맞이 하는 사람들에게

커피를 끓여 주는게 당 행사였는데,

올해에는 이틀동안 집안에 손님 치레 하느라 피곤한데다

아침일찍 동명이가 제주도에 무슨 걷기 행사에 참가한다고해서

공항에 애를 실어다 주느라고 해맞이 행사에 못갔다.

 

공항에 가는 도중에 전화가 왔다.

해맞이 행사한 사람들 모여 떡국 먹고 있으니까 오라고...

(아침 일찍 집에서 떡국도 먹었는데..)

공항갔다 와서 가서는 술한잔 하고는 이런저런 야그를 풀고 있었는데,

'서른즈음에'선배에게 전화를 했고,

이 선배가 산에 가려고 집을 나서다가 잠시 들리겠다고 왔다.

 

그리고는 다시 술 한잔씩 마시고서는

가던길이니까 북한산에나 가잔다.

 

 



손빨래 해야 한다고, 그래서 못가겠다고 '당당하게' 얘기했다.

(그놈의 세탁기는 연휴시작하면서 고장났고, 빨래는 넘치는데 못한다고 해서

  그전날 두차례의 손빨래를 하기도 했는데, 마지막 남은 걸 밤 늦게 아내가 하겠다고 하길래

  내일 노니까 그건 내가 하겠다고 해서 남겨 두었는데...)

 

그 빨래야 나중에 갔다 와서 하면 된다고 꼬득이고,

무조건 같이 가야 한다고 윽박지르는 통에 그러자고 하고

집에 가서 배낭 챙겨서 나왔다.

 

지난 연말에 같이 가자 약속했다 못간 청년과 준혁 아빠, 서른즈음에 그리고 산오리.

산성 매표소에서 돈을 받지 않으니까 웬지 불안한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는데,

입장료 안내고 들어가니까 기분은 좋더라.

 

아침에 해맞이 하러 갔던 등산객들은 다 내려왔을 테지만,

첫날이라 북한산에 사람들은 엄청 붐볐다.

그래도 대부분 내려오는 사람들이고, 올라가는 사람들은 별로 없어서

부닥칠 정도는 아니었고...

 

대남문으로 향해서 가다가

마지막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올라가서 능선에 올랐고,

대동문 쪽으로 가는데, 성곽 아래는 눈이 얼어서 엄청 미끄러웠다.

적당한 장소에서 점심과 술을 먹고 마시고,

하산하기 시작했고,

조금 내려오니까 인적이 완전히 끊어졌고,

그 틈에 풍욕을 한판 하고,

(이 멤버들 풍욕 엄청 좋아한다...)

내려오니까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화정에서 사우나 까지 하고 왔더니,

아내는 '빨래 끝나고 나니 들어오네' 한다.

미안한 마음에 내 옷 몇개를 손으로 빨았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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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05 14:07 2007/01/05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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