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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현정권은 반공정권?

민방위훈련장(?) 아니 교육장에 갔다,
이상한 영상물을 보여주더니 '싸우면 이긴다'라는 멘트로 끝맺었다. 헉...싸움질이나 조장하는 이놈의 '평화번영' 정권 작살내야 한다.

그리고 북핵 보유에 대해 북한이 핵을 보유하면... <통일되면 우리것이라는 '일부 친북주의자'들의 위험한 주장?> 지랄하고 자빠졌다!.... 왜 그런 생각을 하면 친북주의자가 되는건지? 거참 웃기지도 않아... 완전 똥닢신문 같은 우파 애들이 떠드는걸 왜 정부가 이 지랄을혀?

끝으로....예비군 8년받고 나서 민방위 4년받는다고? 하던데.. 진짜? 헉 미쳤다..
내가 만약 그렇다면.....난 이 나라서 안산다.. 가뜩이나 국가안보를 강조해서 내장이 뒤틀리는거 같았는데 도대체 뭘 위해 12년씩이나 희생해야 하나??? 국가안보보다 중요한건 시민안보다. 국가가 시민의 안전을 생각해 주지 않는데 미쳤다고 국가 생각하나? 어차피 국가란거.....지배집단의 도구에 지나지 않잖아? 누구를 위한 안보란 말인가? 그리고 화생방에 대해 강의하면서 '테러분자'와 미국에 적대적인 놈들에 대해 분노에 가까운 감정 표현을 아낌없이 표출하던데 난 솔직히 알 카에다 같은 테러리스트 보다 미국이라는 국제깡패집단, 그들과 협정을 체결해 언제나 상시적으로 결탁하는 한국군 뿐만아니라 더 나아가 내부적으론 이 땅의 지배세력 그들이 백만배 천만배 그 이상 두렵다. 만약 1달러면 좁은공간의 수백명을 살상할 수 있다는 탄저균 1KG을(얼핏 계산해 보니 대략 15만원이면 서울 하나 날려 버릴 수 있더라구? 헉.. 순간 느꼈다. 아...... 9.11 테러를 일으켰다고 미국주요언론과 정부 관계자에 의해 찍혀 버린 테러리스트들이 훈련받은 곳은???? 그렇다. 합법적으로 안보를 위해 하는것이 결국? 테러의 온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 남의 일 같지가 않았다. 가뜩이나 자동차 테러에  숨 막힐 뿐만아니라  생명의 위협 속에 사는 내게......부시식대로라면 내가 당하지 않기 위해 그들에 대항해서 선제공격하여 그들의 씨를 말리는건 선악 이분법 구도하에서 선에 해당하지 않을까?? 막말로 배기독가스나 담배독가스 그게 화학무기 보다 못하다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을까 배기독가스를 집적해 그것을 민들을 상대로 분사한다면 그것은 테러방지법 상의 테러행위에 해당할까? 해당되지 않을까?)  아니 화학, 생물 무기 그 어떤 것이라도  그들의 손에 들어간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아니 어쩌면 이미 그들 손에 쥐어져 있을지도 모른다 예전에 이런 얘기가 있었다. 수돗물에 이상 약물을 투입해서 그 수돗물(하긴 수돗물 뿐이랴.....이미 공장에서 만들어 내는 소위 생수라는거??? 헉..)을 음용하는 주민들의 지능저하 등을 통해 자신들이 원하는 시민 이를테면 자발적으로 순응하는 노예형 인간으로 길 들여 지배, 피지배계급 구도를 공고히 하려는 그들의 저의.... 근데 실제 그런 약물이 있다면서? 헉.. 두번 놀랐다. 또 다시.....

 

암튼 이놈의 세상 참 두렵고 또 두렵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자신들의 이익에 반하는건 절대악으로 간주하여  수단 방법 안가리고 소탕하려고 들지만(그것도 시민들을 수탈한 막대한 자금을 그들 지배계급으로 부터 사들인 무기로서)  이해관계에 얽매여 있는 것에 대해선 철저하게 보호할뿐만아니라 오히려 그런것을 피지배계급 구성원에 적극적으로 권하기 까지....(대표적인게 마약, 대마초와 담배의 관계 아닐까??? 법률상 범죄를 구성하지 않았지만 그럴 개연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불법으로 못을 박아두는 마약, 심지어 유해하지 않고 도리어 약초, 의복 등으로 소중하게 쓰여지는 대마초는 불법? 독극물에다 직접적으로 남에게 피해를 주는 담배는 합법? 그것도 세금 수탈까지?) 그 연장선상에서 이번 테러방지에 관한 민방위교육을 받으며 많은 것을 가져 올 수 있었다. 그래 역시 그들은 한 패거리야 믿을 수 없는 놈들 우린 그들이 말하는것과는 완전 반대로 가면 행복과 꿈의 나라에 도달한다는 사실을....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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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지식인 100명..누가 될까

오늘날 세계를 이끄는 글로벌 지식인은 누구인가. 미국의 국제문제 격월간지 포린폴리시(FP)와 영국의 시사 월간지 프로스펙트는 공동으로 이 같은 물음을 제기한 후 인터넷을 통해 자체 선정 후보 100명을 제시했다. 다음달 10일까지 온라인(prospectmagazine. co.uk/intellectuals) 투표를 거쳐 결과도 공개할 예정이다. 후보 선정 기준에 대해서는 “자기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면서도 다른 분야의 논쟁에도 영향력을 줄 수 있을 정도로 소통능력을 갖춘 생존인물”이라고 밝혔다. 이들이 선정한 후보군은 자신들도 인정하듯 영미권에 치우친 감이 있다. 이들은 ‘누락된 후보’에 대해서는 추천을 요청했다.

 

노엄 촘스키

 

미국의 언어학자, 변형생성문법() 이론의 창시자.
별칭 언어학 혁신의 아버지
국적 미국
활동분야 어학
출생지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
주요저서 《언어 이론의 논리적 구조》(1955) 《통어론적 구조 Syntactic Structures》(1957) 《통어 이론의 제상 Aspects of the Theory of Syntax》(1965)
미국의 언어학자, 변형생성문법() 이론의 창시자.
별칭 언어학 혁신의 아버지
국적 미국
활동분야 어학
출생지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
주요저서 《언어 이론의 논리적 구조》(1955) 《통어론적 구조 Syntactic Structures》(1957) 《통어 이론의 제상 Aspects of the Theory of Syntax》(1965)
본문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 출생이다. 구조언어학을 주류로 하는 미국 언어학계에 새바람을 불어넣은 ‘언어학 혁신의 아버지’라 불린다. 중세언어학 연구가인 아버지 W.촘스키의 아들로, 펜실베이니아대학교에서 구조언어학을 배웠다. 1951년에 학위를 받고 하버드대학교에 초청되어 그 곳에서 독자적인 변형생성이론()을 형성하였다.

1955년부터 매사추세츠공과대학교의 언어학과 교수로 있으며, 《언어 이론의 논리적 구조》(1955) 《통어론적 구조() Syntactic Structures》(1957) 《통어() 이론의 제상() Aspects of the Theory of Syntax》(1965) 《영어의 음성양식 Sound Pattern of English》(1968, Morris Hall과 공저) 등에 의하여 생성문법 이론을 체계적으로 발전시켰다.

언어구조학의 기반이 되어 있는 경험주의를 넘어서 데카르트훔볼트에게서 그 발단을 찾아내려고 한 그 이론의 철학적 배경은 《데카르트파 언어학 Cartesian Linguistics》(1966)에 상세히 논급하고 있다. 주요저서에 《생성문법 이론의 여러 문제 Topics in the Theory of Generative Grammar》(1966) 《언어와 정신 Language and Mind》(1968) 등이 있다.

본문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 출생이다. 구조언어학을 주류로 하는 미국 언어학계에 새바람을 불어넣은 ‘언어학 혁신의 아버지’라 불린다. 중세언어학 연구가인 아버지 W.촘스키의 아들로, 펜실베이니아대학교에서 구조언어학을 배웠다. 1951년에 학위를 받고 하버드대학교에 초청되어 그 곳에서 독자적인 변형생성이론()을 형성하였다.

1955년부터 매사추세츠공과대학교의 언어학과 교수로 있으며, 《언어 이론의 논리적 구조》(1955) 《통어론적 구조() Syntactic Structures》(1957) 《통어() 이론의 제상() Aspects of the Theory of Syntax》(1965) 《영어의 음성양식 Sound Pattern of English》(1968, Morris Hall과 공저) 등에 의하여 생성문법 이론을 체계적으로 발전시켰다.

언어구조학의 기반이 되어 있는 경험주의를 넘어서 데카르트훔볼트에게서 그 발단을 찾아내려고 한 그 이론의 철학적 배경은 《데카르트파 언어학 Cartesian Linguistics》(1966)에 상세히 논급하고 있다. 주요저서에 《생성문법 이론의 여러 문제 Topics in the Theory of Generative Grammar》(1966) 《언어와 정신 Language and Mind》(1968) 등이 있다.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국적 영국
활동분야 역사학
출생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주요저서 《혁명의 시대》(1962), 《자본의 시대》(1975), 《제국의 시대》(1987), 《극단의 시대》(1994)
본문

1917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폴란드 출신의 유대인으로 1870년대에 영국으로 이주했다. 2세 때 오스트리아 빈으로 이주하고, 1931년에는 독일 베를린으로 이주했으나 히틀러(Adolf Hitler)가 집권하자 1933년 다시 런던으로 이주했다. 그 뒤 케임브리지대학교 킹스칼리지에서 역사를 전공하고, 논문〈페이비어니즘과 페이비언들, 1884~1914〉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고등학교 때부터 마르크스주의에 관심을 가져 대학 때 영국공산당에 입당하고 1946년부터 1956년까지 '공산당 역사가들의 모임'에서 활동했으며, 공산주의의 경직성을 비판하고 역사연구에서도 이념을 앞세우지 않은 탓에 뒤에 자유주의자들이 가장 많이 읽는 마르크스주의 저술가가 되었다.

이론과 현실의 통합을 추구하여 1947년부터 노동자와 사회인을 교육하는 런던대학교 버벡칼리지에서 강의하고 1982년에 정년 퇴임했다. 그 사이인 1949~1955년까지 케임브리지대학교 킹스칼리지 특별연구원으로 활동하고, 1984년 이후에는 영국 아카데미와 미국 아카데미 특별회원으로 활동했다. 2001년 현재 런던대학교 버벡칼리지의 명예교수로 강의 및 저술작업을 하고 있다.

특히 연구 대상을 노동자 조직 및 지도자들에게 국한하지 않고 노동계급 전체의 경험을 총체적으로 조망하여 눈길을 끌었으며, 자본주의 형성과정과 그에 따른 인간의 다양한 삶에 근거하여 근대자본주의 사회의 역사를 연구하여 명성을 얻었다.

저서에 《노동의 전환점》(1948) 《원초적 반란자들》(1959), 3부작 《혁명의 시대》(1962)·《자본의 시대》(1975)·《제국의 시대》(1987), 《극단의 시대》(1994) 《1780년 이후의 민족과 민족주의》(1994) 《예술의 힘》(1995) 등이 있다.

 

홉스봄의 생애와 사상 
        

김동택 (정치학 박사)[수유연구실+연구공간넘어 자료실에서]



1. 에릭 홉스봄의 생애

20세기의 위대한 역사가이자 마르크스주의자인 에릭 존 에른스트 홉스봄(Eric John Ernst Hobsbawm)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1917년에 태어났다. 본래 그의 조부는 러시아령 폴란드 출신의 유태인으로서 1870년대에 영국에 이주해왔으며 그의 외가는 오스트리아-형가리 제국의 수도인 비엔나 출신의 중산층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당시 대영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이집트에서 직장을 갖고 있었는데, 졸업 여행차 이집트를 방문했던 홉스봄의 어머니와 결혼하게 되었던 것이다. {제국의 시대} 서설에서 홉스봄 자신이 간략하게 밝히고 있듯이 그의 출생에는 국제적인 이민과 취업, 제국과 식민지, 여성 교육, 그리고 세계 여행과 같은 여러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는 두 살 때 비엔나로 건너갔다가 1931년에는 베를린으로 옮겨 살다가 히틀러가 집권하면서 유럽 대륙에 파시즘과 전쟁의 분위기가 고조되어감에 따라, 1933년 런던으로 옮겨와 거기서 정착하게 되었다. 런던의 성메리르본 고전문법학교에 다닌 그는 케임브리지의 킹스 칼리지에 입학하여 역사를 전공하게 된다.
자신의 경험에 대한 비판적인 의식을 통해 홉스봄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마르크스주의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대학시절에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인 동료학생들과 교류하면서 공산당에 입당하여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역사학자로서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자로서 그의 활동은 1946년부터 56년까지 이루어진 '공산당 역사가들의 모임 (Historian's Group of Communist Party)'에 참여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그 모임에는 모리스 돕, 로드니 힐튼, 크리스토퍼 힐, 에릭 홉스바움, E. P. 톰슨, 빅터 키어넌, 조지 뤼데, A. 머튼, 존 세빌, 도로시 톰슨 등 유명한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들이 참여했다. 이들의 연구는'아래로부터의 위로의 역사'라는 독특한 시각에 입각해 있었으며, 그 결과 민중사, 계급 형성사, 사회사, 전체사 등 여러 분야에 걸처 중요한 연구결과물들이 나타났다.
그러나 '공산당 역사가들의 모임'은 1956년 제 20차 소련 공산당대회에서 시작된 스탈린 격하 운동에 대해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던 영국 공산당의 입장에 반발한 지식인들의 탈당 사태로 흐지 부지되었다. 홉스봄 자신은 당을 떠나기 보다는 공산당 당적을 고수하는 가운데 역사학 연구와 여러 모임을 통해 당의 민주화를 촉구하였다. 그는 다른 지식인들과 달리 '강력하게 조직화된 정당'의 필요성에 대해 분명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 그의 행동과 마찬가지로 그의 저서 곳곳에서는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자본주의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 나타나있다. 그러나 그는 결코 맹목적인 마르크스주의자로 간주될 수 없다. 그는 현존하는 사회주의에 대해 유보없는 비판을 시도했을 뿐만 아니라 역사 연구에 있어서도 이데올로기적인 재단 보다는 객관적 사실에 충실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이론과 현실의 통합을 추구했던 그는 1947년에는 노동자들과 사회인들을 대상으로 교육하는 런던 대학의 버벡 칼리지의 사학과 강사로, 59년에는 전임강사로, 1970년에는 정교수로 재직하다가 1982년에 정년 퇴직하였으며 이후 미국 'New School for Social Research'의 객원 교수로 활발한 강의 활동을 했다. 현재에도 80대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버벡 대학의 특별 교수로 세계 여러 곳을 순회하면서 강의와 저술 활동에 몰두하고 있다.


2. 자본주의와 인간에 대한 탐구

홉스봄의 근본적인 연구의 관심사는 자본주의가 어떻게 오늘날과 같은 세계를 만들어냈으며, 그 속에서 인간들은 어떻게 살아왔는가에 집중되어있다. 이러한 관심사를 축으로 그는 자본주의의 역사적 형성과 발전, 그로 인해 고통받게된 농민과 노동자 계급, 빈민과 의적 그리고 게릴라에 이르는 다양한 인간들, 나아가 자본주의 문화 비평으로서 음악에 이르기까지 매우 광범위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많은 연구자들의 논쟁을 불러일으킨 '17세기 위기론'을 1950년대에 발표한 이래 그는 수많은 연구 업적을 남겨왔다. 그는 '17세기의 위기론'에서 유럽은 17세기에 전반적 위기를 경험하게 되었는데, 그 결과 자본주의 체제로 전환점이 이미 이 시기에 사회경제적으로 준비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그의 견해는 영국의 자본주의적 발전을 세계적 맥락에서 다룬 {산업과 제국}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그의 주저로 알려진 장기 19세기에 관한 3부작 {혁명의 시대}, {자본의 시대}, {제국의 시대}는 1789년 프랑스 혁명으로부터 1914년 1차 세계대전의 발발에 이르는 이른바 장기 19세기를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형성과 발전 그리고 파국으로 각기 구분하여, 그것의 역사적 추이를 검토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작업을 통해 그는 오늘날의 자본주의와는 구별되지만, 그러나 그것의 역사적 뿌리를 이루고 있는, 이른바 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어떠한 방식으로 인간의 삶을 규정해왔고 또 왜곡해왔는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3. 장기 19세기(1789-1914)에 대한 고찰

1)  {혁명의 시대 1789-1848} : 이중혁명과 자본주의 세계의 형성

1962년에 출판된 {혁명의 시대}는 장기 19세기의 첫 번째 국면, 즉 세계 자본주의의 형성을 다루고 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산업 자본주의가 어떻게 승리했으며, 그 결과 세계는 어떻게 변화하였는가를 추적하고 있다. 먼저 홉스봄은 이 시기를 자본주의가 시작된 시기가 아니라 자본주의가 승리한 시기로 규정한다. 그는 이미 존재하고 있었지만 그것의 승리가 여전히 불분명했던 유럽에서 산업 자본주의가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이중혁명, 즉 영국의 산업혁명과 프랑스 대혁명으로 인해서였다고 지적한다.
혁명이 시작되었던 1780년대의 세계는 압도적으로 농촌적이었으며, 정치적으로도 여전히 절대주의가 지배하는 시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보기에 영국의 산업혁명은 자본주의 경제를, 프랑스의 대혁명은 자본주의 정치를 상징하는 통합적인 혁명으로 간주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이중혁명은 공업 일반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공업의 승리를, 자유와 평등 일반이 아니라 부르조아적 자유와 평등의 승리를, 근대 경제들 일반이 아니라 자본주의 중심부의 승리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홉스봄은 이중혁명에 의해 형성된 1848년의 유럽를 균형을 잃은 사회로 규정한다. 그가 보기에 그 시대는 혁명의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봉건적 귀족사회가 지배하고 있었으며, 산업 혁명에도 불구하고 토지 문제는 여전히 핵심적인 문제였으며, 산업상의 호황과 불황이 아니라 농업상의 흉년과 풍년이 사회와 인간들의 운명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확대는 최초로 자유주의적 원리하에 내버려진 대규모의 노동 빈민을 만들어내 정치적 불안정을 가속화시켰던 것이다.

2) {자본의 시대 1848-1875} : 세계 자본주의의 발전

1975년에 출판된 {자본의 시대}는 장기 19세기의 두 번째 국면, 즉 세계 자본주의의 발전을 다루고 있다. 홉스봄은 이 시대에 들어서 공간적으로 자본주의는 지구적 규모에서 진행되엇으며 시간적으로 사회적인 변동 또한 급격하게 빨라졌음을 강조한다. 이 시기에 이르러 최초로 자본이란 이름이 등장했으며, 그것에 대한 가장 강력한 비판자였던 마르크스가 마찬가지로 자본이라는 이름으로 그것을 비판함으로써, 자본은 이 시대의 핵심적인 문제로 등장했다.
자본의 시대는 1848년 혁명의 실패와 경기활황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1848년 혁명의 실패는 두가지 상황을 초래했다. 첫째 유럽에서는 정치 혁명이 후퇴하고 산업혁명이 모든 변화의 동인이 되었다. 둘째, 사회혁명의 두려움으로 인해 자유주의자들을 노동빈민계급으로부터 이탈하여 구체제의 지배계급들과 타협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정치는 전반적으로 보수화되어갔다. 그러나, 비록 사회혁명의 꿈은 사라졌지만, 프롤레타리아는 점차 조직과 이론을 갖추고 정치적 무대에 등장했다.
혁명의 실패와 상대적인 자본주의의 팽창은 불가피하게 그 시대를 부르조아가 승리하는 시대로 만들었다. 그러나 홉스봄은 부르조아의 승리가 결코 부르조아의 정치적 지배를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고 지적한다. 다만 사회의 발전 자체가 불가피하게 자유주의적 발전을 지향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러한 의미에서만 이 시대는 부르조아가 지배하는 시대로 규정될 수 있다고 그는 지적한다.
자본주의의 발전은 유럽 내부에서 빈부의 격차를 점점 심화시켰고 또한 자본주의의 발전 자체가 세계 시장의 착취에 힘입었던 까닭에, 소수의 승리자 즉 중심부 국가들이 다수의 패배자 즉 주변부를 착취하는 현상을 구조화시켰다. 그리하여 홉스봄이 보기에 {자본의 시대}는 사회적, 지리적 양극분해가 심화되었다는 점에서 균형이 파괴된 시대였다.
홉스봄이 보기에 이 모든 상황을 초래한 것은 1850년대의 대호황이었다. 호황은 혁명가들에게 희망을 앗아가 버렸지만, 이후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적 불안정을 초래한 호황과 불황이라는 전형적인 경기순환 현상을 최초로 보여주었다. 1857년의 불황, 1860년대의 호황 그리고 다시 이 책의 마지막 시점인 1875년의 불황으로 이어지는 경기순환은 자본주의의 전형적인 성격으로 자리잡게 된다.
결국 {자본의 시대}에서 홉스봄이 드러내고자 했던 것은 역사적으로 형성된 자본주의의 발전은 "혁명의 시대"에서 내걸었던 자유와 진보의 이념이 점차 퇴색하면서, 자본주의의 폭력성이 전면에 나타나는 현실, 경제적 성장과 더불어 그것이 전 세계적인 규모에서 이루어지는 억압과 인간의 희생과 고통을 기반으로 해서만 가능했던 역설적인 현실이었던 것이다.

3) {제국의 시대 1875 - 1914}; : 파국에 처한 부르조아 세계

1987년에 출판된 {제국의 시대}는 장기 19세기의 최종 국면, 즉 제 1차 대전의 발발과 더불어 야기된 부르조아 사회의 파국을 다루고 있다. 홉스봅이 {제국의 시대}에서 강조하는 것은, 그 시대는 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필연적으로 배태시킬 수밖에 없었던 모순에 지배되었던 시대였다는 점이다. 세계는 호황과 불황이라는 자본주의 특유의 경제주기에 휩쓸리게 되었다. 1873년부터 시작되어 1890년대 중반까지 지속된 격렬한 공황은 농민들로 하여금 곡물 가격의 하락이라는 시장 논리와 자연 재해의 이중적인 재앙에 시달리게 했다. 공황에 대한 농민들의 대응은 대량 이민과 협동이었다. 가격, 이윤 그리고 이윤률의 공황에 대한 정부, 기업들의 대응은 각기 보호관세에 입각한 보호무역주의였으며 기업들의 대응은 경제적 집중과 기업 합리화의 복합으로서 '트러스트'와 '과학적 경영'이었다고 홉스봄은 결론내리고 있다.
하지만 1914년은 부르조아를 위해 그리고 부르조아에 의해 만들어진 세상, 즉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종말을 고한 시점이며 따라서 '장기의 19세기'의 종말을 표상한다. 이 시대의 모순은 스스로를 진보의 담지자로 규정했던 부르조아가 현실적으로는 피착취 계급과 식민지 민중들의 노동에 의존하는 기생적인 계급으로 변모함에 따라 겪게 되는 정체성의 상실로 특징지워진다. 산업자본주의에 의해 창조된 대중적으로 조직된 임금노동계급의 운동이 자본주의의 전복을 요구했으며, 부르조아 자유주의의 정치적 문화적 제도가 노동 대중과 여성들을 포함한 대중들에게 확대됨에 따라 자유 부르조아들은 정치 권력의 주변부로까지 밀려나게 되었다. 게다가 승리하는 부르조아의 이미지는 이자소득과 식민지 민중의 노동력 착취를 근거로 살아가는 기생 계급의 이미지로 바뀌어 버렸다. 그 결과 {제국의 시대}는 부르조아들로 하여금 근본적인 '정체성의 위기'를 경험하게 했던 것이다.
또한 이 시대는 유럽에서는 유래를 찾기 힘든 평화의 시대였지만 바로 그것으로 인해 불가피하게 유래를 찾기 힘든 세계 전쟁을 만들어 낸 시대였으며, 발전된 산업 경제 지역들 내에서는 사회적 안정성이 증대되는 시대였으나 바로 그것으로 인해 불가피하게 식민지 제국의 변방에서는 제국을 삼켜버리게 될 폭동과 혁명이 혼합된 세력이 불가피하게 형성되어간 시대였다. 보호주의의 확장은 식민지 확장을 자연스럽게 추구했으며 이로 인해 제국주의는 주변부로부터 초래될 수 있는 세계혁명적 요소를 내장하게 되었다. 즉 러시아와 중국 혁명 그리고 페르시아와 터키 혁명은 제국의 시대가 만들어낸 결과였다. 제국의 시대는 주변부 혁명으로부터 점차 세계 전쟁과 러시아 혁명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홉스봄이 보기에 이 모든 모순은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발전이 불가피하게 내장한 모순이었으며, 바로 그러한 이유로 이 시대는 부르조아 세계의 파국으로 규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1880년의 세계는 진정한 의미에서 지구적인 세계였을 뿐만 아니라 지리적 분화에 따른 양극화가 다른 어떤 시대보다 커진 때였다. 기술의 발전은 세계를 지구적인 범위에서 하나로 묶이게끔 했지만, 그것은 지구를 발전된 부분들과 지체된 부분들, 지배적인 부분들과 종속된 부분들, 부유한 부분들과 가난한 부분들로 양극화시키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것은 주변부로부터의 혁명을 통해 세계를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홉스봄은 1차 세계대전은 제국주의가 만들어낸 모순의 불가피한 결과였다고 지적한다. 역사상 유래없는 진보와 번영을 주창한 부르조아 자본주의가 역설적으로 역사상 유래없는 전쟁과 야만적인 파시즘을 낳게된 상황이야말로 부르조아 자본주의의 모순 그 자체였던 것이다.

4. 파국과 희망의 갈림길

홉스봄이 보는 부르조아 세계의 파국은 자본주의 역사 자체의 파국을 의미한 것이 아니었다. 1914년 이후 붕괴된 것은 자본주의 자체가 아니라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였다. 19세기의 종결과 더불어 인간 사회는 급속하게 변화했다. 홉스봄이 들고 있는 하나의 사례로, 1914년 이후 '재앙'이란 단어의 의미는 두 차례의 세계 대전, 전쟁의 뒤를 이은 두 차례의 지구적인 혁명, 지구적 탈식민화, 두 차례에 걸친 인종 청소에 의한 대량 학살, 한 차례의 경제적 위기와 같은 것들로서 규모면에서 제국의 시대 이전에는 찾아보기 힘든 것들이었다. 정치적으로 19세기 부르조아의 세계는 '볼셰비즘'의 위협을 받게 되었다. 자본주의는 1914년 이전과는 매우 다른 그 무엇으로 자신을 변형시켜야만 했다. 파시즘이나 사회민주주의의 출현은 바로 그것의 결과였다.
장기 19세기에 관한 연구에서 홉스봄이 독자들에게 말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 그는 현재의 시점에서 볼 때, 부르조아에게 있어서나 프롤레타리아에게 있어서나 과거에 추구되었던 내용의 희망이 결코 부활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가 보기에 자유주의적 자본주의나 사회주의 혁명은 모두 종결된 꿈이며, 현재의 인간들은 다른 방식으로 사회를 희망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물론 19세기 부르조아들이 꿈꾸던 세상과 20세기에 현실적으로 닥친 세상이 아주 다르듯이 현재의 인간들이 꿈꾸는 세상과 미래에 도래하게 될 세상은 아주 다를지도 모른다는 것을 역사가 홉스봄은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홉스봄은 여전히 희망하기와 그것을 위해 살아가기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현재의 희망과 매우 다른 모습으로 미래가 나타날지라도, 현재의 시점에서 인간들이 수행해야할 의무는 결코 회피될 수 없기 때문이다.

19세기, 이른 바 장(長)기 19세기라 일컬어 지는 1800년대, 정확히 말하자면 1789년 프랑스 혁명을 기해 제 1914년 1차 세계대전까지의 시기를 다룬 역사책은 무궁무진하게 많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면 장기 19세기만큼 인류의 역사상 커다란 변화가 없었기 때문이며, 미시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현 문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장기 19세기를 알아야 하기때문이다.

 

3권으로 된 이 시리즈물은 장기 19세기를 부르주아에 의한 혁명과 부르주아의 승리라는 커다란 틀로 서술하고 있다.

 

에릭 홉스봄은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로, 이집트 출생이다. 홉스봄에게 붙은 통상적인 수식어인 '마라크스주의'를 고려해 볼 때, 일련의 저작들이 편협한 서술 관점에서 쓰여졌을 가능성도 무시하지 못하지만, 이 책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그런 의혹은 기우에 지나지 않음을 통감할 것이다.

 

혁명, 자본, 제국이라는 세 가지 단어로 장기 19세기를 설명하려고 하는 홉스봄의 의도는 책의 제목에서 그대로 느껴진다. 이렇게 한 가지 주제로 역사를 서술하게 되면 으례 그렇듯이 데이터의 의도적인 이용과 아전인수식의 해석을 동반할 수도 있지만, 홉스봄의 역사서는 그렇지 않다. 물론 혁명, 자본, 제국이라는 커다란 틀로 장기 19세기를 설명하고 있기는 하지만, 각각의 시대마다 홉스봄은 정치 경제 종교 과학 문화 등 다방면에서 체계적인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우선 혁명의 시대에서 홉스봄은 영국의 산업 혁명과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이중 혁명에 주목하고자 한다. 프랑스 대혁명 여파, 그리고 1848년 전 유럽적인 혁명 -불행히도 실패로 끝났지만- 을 관통해 홉스봄은 이중혁명이 유럽에 미친 여파를 추적한다.

 

그 후 자본의 시대에서는 경제가 정치보다 앞서가기 시작한 시대로 규정하며 자본의 거국적 팽창, 그리고 발흥하는 민족국가, 독일과 미국 등의 신흥 강대국의 출현에 초점을 맞춘다. 이 시기에 비로소 부르주아 계급이 사회의 주도층으로 성장했다는 게 - 물론 전적인 면이 아니라 일부에서- 홉스봄의 요지다.

 

마지막 제국의 시대에서는 부르주아 계급의 위기와 유럽의 여러 민족국가들의 제국화, 노동 계급의 위치 상승 등을 고찰한다.

 

홉스봄의 이런 저작들은 장기 19세기를 거시적인 관점에서 파악하려는 사람에게 더할 나위 없는 역사서이다. 방대한 참고 문헌을 자랑하지만 지나치게 학제적이지 않은 쉬운 문체, 분야별로 정리한 체계적인 접근 등은 홉스봄이 왜 유능한 역사학자인지를 백분 이해하고도 남을 정도다. 그러나 홉스봄의 이런 역사 서술이 지나치게 유럽 중심적 - 그런데 사실, 장기 19세기는 유럽의 역사였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을 듯 하다- 이라는 것, 약간의 마르크스주의의 입장으로 서술되어 있다는 것은 읽는 이에 따라서 거부감을 느낄 소지가 있을 것이다.

 

참고로, 단기 20세기를 다룬 홉스봄의 저작은 '극단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까치에서 출판되었다.

 

 

빈곤퇴치가 테러 막는 길.....제프리 삭스

1941년 8월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과 영국의 처칠 수상은 대서양 헌장(Atlantic Charter)을 발표했다. 2차 대전 이후의 세계평화에 관한 공동선언이었다. ‘전 세계의 경제발전과 사회보장’이 주된 내용이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같은 해 취임 연설에서도 ‘궁핍으로부터의 자유’를 강조하면서 모든 국가들이 국민들에게 ‘건강하고도 평화로운 삶’을 영위케 하기 위해 전 세계적 경제협조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부시 현 대통령도 최근 이와 비슷한 선언을 했다. “전 세계인의 보다 나은 기회와 삶을 약속하는 지속적인 경제 번영이 테러를 막을 수 있다.” 매우 의미있고 긴급한 과제이다. 하지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주요 선진국들, 특히 미국이 크게 변해야 실현가능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최근 세계경제는 모든 이들에게 골고루 번영의 이익을 나눠주지는 않는다. 10억명이 넘는 인구가 단지 그날그날의 연명을 위해 애쓰지만 그나마 쉽지가 않은 상황이다. 지난 2년간 세계보건기구(WHO)의 거시경제보건위원회 의장직을 수행하면서 매년 수백만명이 생존에 가장 기본적인 것도 얻지 못해 죽어가고 있다는 상세한 증거를 목격했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홍역·결핵·말라리아·에이즈(AIDS)와 같은 예방 및 치료가 가능한 병들로 죽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문제는 돈이다. 부국으로서는 많은 액수가 아니겠지만 가난한 나라로서는 벅차다. 실제로 이들 가난한 나라의 연간 1인당 보건비용은 11달러 정도이다. WHO가 생각하는 연간 1인당 최소 보건비용인 33달러에 크게 못미친다. 이 같은 격차를 메우기 위해서는 선진국들이 이들 나라에 1인당 20달러 정도는 보조해야 한다. 하지만 현재 선진국의 보조는 2달러 선에 불과하다. 그러면서도 선진국들은 수백만명의 죽음이 정치적 무관심이 아니라 ‘자연적’ 발생에 의한 것으로 치부하고 있다.

만약 선진국들이 국민소득의 0.1% 또는 소득 10달러당 1센트만 제공한다고 해도 연간 250억달러가 된다. 이 돈이면 에이즈 치료, 아동면역, 말라리아 예방을 위한 모기장 등과 같은 의료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수억명에게 혜택을 줄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선진국들의 기부금은 필요한 액수의 4분의 1에 그치는 60억달러 수준에 불과하다. 이를 250억달러 수준으로 올린다면 한해 800만명의 생명을 구할 것으로 WHO는 보고 있다.

미국은 선진국 중에서도 가장 인색한 나라이다. 외국원조에 쓰이는 비중은 연방예산의 1%에도 못미친다. 그럼에도 미국인들은 최근 여론조사에서, 미국이 가장 인심이 좋은 나라이며 연방예산의 약 20%를 외국원조에 사용한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총생산(GDP)을 기준으로 해도 미국은 유럽국가들의 10분의 1 정도에 불과하다.

부시 대통령은 전 세계인의 번영을 촉구하는 연설에서 ‘무역을 통해 빈곤과 절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국제무역을 포함한 시장원리 또는 시장의 힘만이 빈곤을 해결할 수 있다는 미국인들의 태도를 잘 보여준다. 하지만 이것은 반쪽의 진실이다. 무역이 빈국에 도움이 되려면 빈국이 생산한 제품을 부국이 시장을 개방해 사줘야 한다. 게다가 질병이 기승을 부리는 상황에서는 수출 주도 성장을 달성하기도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아울러 무역정책보다는 의료 서비스를 겨냥한 직접적 금융지원이 더 효과적일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선진국들이, 빈국이 최소한 필요로 하는 수준의 지원은 물론 빈국들이 수출할 수 있도록 시장을 개방해야 할 때다. 이 같은 조건이 충족되지 못하면 한편에선 많은 가난한 나라 사람들이 고통받으며 죽어가고 다른 한편에서는 정치적 불안과 소요는 계속될 것이고 테러도 그치지 않을 것이다.

( 하버드대 경제학과 석좌교수 ) ( 프로젝트 신디케이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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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럽다 한빛고

왜...

내가 다니던 중,고등학교에는 이런 훌륭하신 깨어 있는 선생님들을 만나볼 수 없었을까 그저 한숨밖에 안나온다 이런 기사 볼때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선생님들?? 선생님이 아니라 학원강사였다. 그런 강사를 볼때마다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한숨만 내쉬던...그러면서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던 무기력한 나의 모습이 다시금 떠올라 잃어버린 6년을 어디서 보상받나 싶은 생각뿐이다. 국어 수업??? 우린 어떻게 했냐면....담당이 책 읽어가면서 밑줄 그으라면 긋고 써 넣으라고 하면 써넣는 수 밖에 없었다.(그늘도 밟지마라는 철저하게 국가독점 교육의 수혜자로서 신민으로 길러진...) 그렇게 한권의 책 채우다 보면 참고서 한권 뚝딱 만들어졌지...물론 시험에 나왔던 빈도대로 그냥 밑줄, 형광펜, 빨간색, 별표 등으로 중요도를 표시하니 당장 높은점수는 '받을 수' 있겠지만 그래서??? 그렇게만 하면 새로운건 어떡하는데??? 과거에 출제되었던게 중요하다면 출제 안되었던건??? 말자...이제와서 그런 소릻서 뭐하나...

차라리 퇴학이란걸 했음 얼마나 좋았을까?? 아마 '지금의 나'였더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을텐데? '이딴거 해서 뭐해?'라며 훌훌 털고 나왔을걸??? 그저 조숙하지 못했었던거....지나치게 순진했었던거... 그게 천추의 한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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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학할 땐 절망뿐이었지만 지금은 남들에게 자랑하고 다녀요."(3학년 류정훈군)

"처음엔 심란해 잠도 안 왔는데 학교가 발전하는 걸 보니까 애를 보내길 잘했단 생각이 들죠."(학부모 김효영씨)

교육 여건이 나빠 평준화에서 제외됐던 학교. 재단의 비리로 내분이 끊이지 않았던 학교. 그랬던 대전 한빛고등학교가 과거의 모습에서 벗어나 새롭게 변신 중이다.

8일 오후 9시, 한빛고의 역사교과실에서는 황미경 교사의 국사 수업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수능 선택과목으로 국사를 택한 2, 3학년생 15명을 위해 황 교사가 자발적으로 하는 수업이다. 이 학교에서는 평일 저녁이면 학년별로 한 과목씩 보충수업을 한다. 일종의 '무료 과외수업'으로 지난해부터 교사 20여 명이 무보수로 참여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으로 올 초엔 졸업생 전원이 대학에 합격했다. 김주혁(수학)교사는 "보충수업을 받고 학생들의 점수가 40점에서 50~60점으로 올라가는 걸 보면 뿌듯하다"고 말했다.

한빛고는 과거 '성복고' 시절엔 재단 비리 때문에 매우 불안정한 학교였다. 시설은 열악했고, 교사들은 편이 나뉘어 갈등을 빚었다. 학부모들이 몰려와 항의하는 사태도 있었다. 1991년부터 이 학교에 근무한 송동섭 연구부장은 "교사들이 자기 자신 챙기기에 급급해 학생들에게 신경쓸 수 없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학교가 변신을 시작한 것은 삼성 출신 기업가인 홍사건 이사장이 세운 한빛학원이 학교를 인수한 2000년부터다. 홍 이사장은 우선 교명을 한빛고로 바꾸고 과감한 시설 투자에 나섰다. 학교 건물을 리모델링하고 체육관과 도서관을 신축했다.

교사 연수도 대폭 강화했다. 학기 말엔 전 교사들이 모여 워크숍을 열고 학교 발전 방안에 대해 토론을 벌였다. 우수 교사는 일본 연수를 보내줬고 '상담교사 자격증'을 취득하도록 학비를 대준 교사도 8명이나 된다.

김정현(3학년)양은 "이 학교 안 들어 왔으면 원하는 대학을 바라보지도 못했을 것"이라며 "선생님들의 지도로 자신감을 얻었다"고 말했다. 차재경 (생물)교사는 "다른 학교 교사들이 예전엔 '깡패학교 아니냐'며 걱정했는데 이젠 '도서관도 들어서느냐'며 부러워한다"며 "평준화되면 우리 학교를 1지망으로 쓰는 학생이 많아지도록 더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학교는 현재 인문계나 실업계에 가지 못한 학생들이 입학한다. 하지만 2007년부터는 평준화 고교로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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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이 줄면 씀씀이 역시 줄이는게 일반 시민들의 생활 태도다.

수입, 소득이 줄면 씀씀이, 지출을 줄여 그것에 맞추는게 보편적인 가정의 가계부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유독 그러지 않은 곳이 있다. 깡패, 날강도, 조폭, 한량 등으로 불리는 건전하지 못한 사회암적 존재들.. 그들의 생활에 있어 지출은 늘 정해져 있다. 물론 태반은 주로 조직관리비 명목으로 책정된 인건비와 폼 좀 잡을려고 떡칠하는 품위유지비 정도다. 그런놈들한테 수입이 줄어든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어떻게 해서든 벌충하러 든다. 그럼 어디서 벌충할 수 있나??? 당근 쥐어 짜는 수 밖에 없다. 힘 없고 빽 없는 서민들 상대로.......때론 그들을 보호해준다는 미명하에......

 

그런데 최근 그런 모습을 국가란 조직체에서 자행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도 조금도 거리낌 없이 당연히 할 일을 하는거처럼 고개를 바짝 쳐든채 떳떳하게??  국가....... 경찰과 군대라는 폭력조직과 검찰 등 공무원이라는 이름의 막강한 조직원을 두고서 자신만이 합법적이라며 그 존재에 반기를 드는 세력에 대해선 반란, 불법이라는 단어로 간단하게 제압해 버리는 그....그가 드디어 일을 저질렀다. 쓸데가 많으니 세금 좀 걷겠단다. 그것도 조폭이 유흥가 질서를 보장해주는 대신 자릿세를 받아 챙기듯 술 장삿꾼을 상대로 고율의 세금을 붙이겠단다..허허.... 이놈의 국가..참 기가차다. 가뜩이나 그놈들이 '우리의 미래를 보장'해준답시고 건강보험, 국민연금이라는 이상한 이름의 준조세를 뜯어가더니 뭐라??? 그냥 로또 주택복권 환경복권 또또복권 경마 카지노 같은 도박장 열어놓고 한푼 한푼 털어가시지 이젠 대놓고 미리 떼어 가셔야겠나???  그것도 제품 가격에 육박하는 90%대에????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이놈의 국가라는 합법을 탈을 쓴 조폭, 진짜 징한 놈들이다 징해......

 

그나저나 부당한 착취와 억압이라는 폭력에는 어떻게 맞서야 하나??? 그것도 무시뭇한 공권력-따지고 보면 그것도 우리들을 쥐어 짜서 키워낸 것들이다 그러니 그들에 대해 우리들도 어느 정도 지분권을 주장할 수 있지 않을까??? 조폭수뇌부의 명령만이 우리들의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반기를 드는것도?-의 위협에 맞서려면??? 그냥 찌그러져 죽으라면 죽는 시늉만 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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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보게 된 사회당 강령!!

와...사회당이 이래 좋은 정당이었어? 헉...이노무 자슥들...이리 좋은거 눈치 채지 못하게 하려고 빨갱이라는 올가미를 씌워 놓고 그토록 탄압한거로구나? ㅋㅋㅋ

국가의 존재는 민중을 억압하고 수탈하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으며  그렇게 수탈하고 남몰래 편취한 자원을 자신들의 지배세력을 확장하기 위헤 쓰여질뿐이다. 그렇게 쓰여진 자원?  그렇게 축적한 부와 권력으로 또 다시 민중을 노예로 삼아 착취하는데 여념이 없을 뿐만아니라 간혹 지배질서를 위태롭게 하는 존재에 대해선 국가공권력의 추상같은 단호한 법 집행으로 본보기를 보여주게 된다.

 

암튼 강령 구구절절 옳은 말이다. 불가능하다고? 세상에 불가능한 것은 없다. 아니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특정세력의 불순한 목적(지배적 이익)을 달성하기 위해 불가능하도록 하는것이라고 말해야 더 정확한 것이다.

 

전문 (前文)

자본의 시대를 넘어


자본주의가 인류의 삶을 지배하기 시작한지 수세기가 지나갔다. 자본주의의 찬양자들은 끊임없이 미래에 대한 희망을 말해 왔지만, ‘꿈의 21세기’가 도래한 지금까지 우리가 본 것은 전 세계 노동자 민중들의 피폐한 삶과 대자연의 파괴뿐이다.
생산을 통한 이윤 창출을 소명으로 한 산업 자본주의는 이미 한계를 드러낸 지 오래다. 세계적 과잉 생산과 과잉 설비로 인한 평균 이윤율의 저하는 거대 기업의 초국적 통합화를 통해 생산 자본의 재편을 가속화시켰다. 과잉 생산 속에서 이윤을 확보하지 못한 자본은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대중의 소비 성향을 부추기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윤 확보를 위한 돌파구를 찾아 왔다.
자본은 자신의 위기를 탈출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방책들을 찾고 있다. 산업 자본은 자신의 이윤율 저하를 노동 유연화를 통한 구조 조정으로 만회하려 하고 있고, 금융 자본은 초국적화와 함께 투기 자본화하고 있다. 또한 세계무역기구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첨병이 되고 있다. 더구나 미국은 전쟁 수단까지 동원하여 자국 중심의 세계 질서 확립에 나서고 있다.
그 결과 서방 자본주의 국가들과 제3세계 국가들 간의 소득과 생활수준의 차이는 더욱 벌어지고 있다. 개별 국가들 내에서도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심화되고 있고 최소한의 사회 안전망 조차 해체되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지구의 생태계는 급속히 파괴되고 있으며, 군사적 긴장 또한 심화되고 있다.
자본주의는 인류의 삶과 생태계를 더욱 황폐하게 만들어 왔다는 점에서 결코 인류의 희망이 될 수 없다. 우리는 과감히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새로운 대안 사회를 구성해야 한다. 자본주의는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마지막 종착지가 아니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극복으로부터 출발한다.

자본주의 사회 이전의 단계들에서는 계급 대립이 특정한 법적 관계에 표현될 수 있었고, 따라서 일정한 정도까지 새로운 관계가 등장하는 것은 여전히 과거의 틀 속에서 허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자본주의 계급 지배의 기본 관계들은 부르주아의 법률에 의해 탄생한 것이 아니었다. 자본주의는 그 관계들을 표현하는 법적 형태 역시 갖지 않는다. 자본주의의 계급 지배는 기득권이나 법률적 형식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경제적 관계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부르주아 질서의 토대를 건드리지 않은 채 법적 개혁을 통해 변혁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의회 투쟁으로 대표되는 정치 투쟁과 노동조합 투쟁으로 대표되는 경제 투쟁을 과대평가해서는 안 된다. 법적?제도적 개혁과 경제적 처지의 개선 모두는 자본가적 착취를 일정하게 제한하는 데 유용할 뿐 그 자체로 자본가적 착취를 폐절할 수 있는 수단은 아니기 때문이다. 한편, 우리는 현재적 국면에서 정치 투쟁과 경제 투쟁에 대한 과소평가 또한 경계해야 한다. 이는 부르주아 사회의 정상적인 시기에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투쟁을 외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러한 투쟁들을 우회하면서 새로운 대안 사회로의 이행을 위한 주체와 동력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현실 사회주의와 사회민주주의를 넘어

역사 속에 존재했던 소련을 비롯한 현실 사회주의는 당과 국가의 권력을 민중 스스로의 권력으로 바꿔내지 못했다. 그리고 정치권력의 장악으로 표현되는 정치 혁명은 사회 혁명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현실 사회주의는 국가 권력을 지렛대로 하여 자본주의와 시장을 통제하고자 하는 것 이상이 아니었으며, 생산 수단의 사회화는 실질적인 사회화 과정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형식적 수준에 그쳤다. 실질적 민주주의는 민중이 권력의 주체라는 선언을 넘어서서 그것을 보장하기 위한 사회화 형식에 대한 실험을 요구한다. 그것은 분명히 사회주의를 특정한 국가 형태가 아니라 사회화 형태로 이해할 것을 요구한다.
현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와의 경쟁과 자신의 사회적 토대의 한계 속에서 생산력주의와 산업주의에 굴복하였다. 현실 사회주의의 계획 경제는 실제로 계획다운 계획도 수립하지 못했으며, 그 계획 또한 제대로 작동시킬 수 없었다. 완벽한 계획이란 하나의 꿈에 지나지 않았다. 시장과 계획의 대립은 자본주의와 현실 사회주의의 본질적 차이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것은 곧바로 시장만이 대안이라거나 시장과 계획의 조화가 대안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사회주의는 이러한 시장과 계획의 대립을 넘어선 새로운 패러다임의 창출을 필요로 한다.
결과적으로 현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 사회를 극복한 대안 사회가 아니라, 자본주의 국가와 구별되는 또 다른 국가 형태로 드러났을 뿐이었다. 그리고 현실 사회주의는 소련의 붕괴를 필두로 자본주의 세계 체제 속으로 속속 편입되었다.

서유럽에서 출발한 사회민주주의는 어떠한가. 현실 사회주의가 붕괴한 지금 사회민주주의만이 유일한 대안으로 남아 있는 것인가. 우리는 사회민주주의가 자본주의를 역사의 종착지로 인식하고, 가능한 것은 자본주의의 점진적 개혁일 뿐이라고 사고하는 것을 반대한다.
사회민주주의는 자본주의에서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특수한 계급, 주어진 시대에 각 국의 상황에 따라 특수한 집단으로 존재하는 노동자들의 이익을 옹호하기 위한 운동으로 출발하였다. 그리고 사회민주주의 정당은 국민적으로 분할된 노동자들의 정당이었다. 사회민주주의의 전반적인 기획은 그들의 선조인 라쌀레의 국가주의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했다. 사회민주주의는 이미 존재하는 국가 기구의 인수를 통하여 자본주의를 개혁하고자 했다. 즉, 의회 진출을 통하여 정치권력을 획득하고, 국가 장치를 통하여 시장에 개입하며, 사회 보장에 관한 입법을 추진하고자 했다. 여기서 국민 국가는 시장을 규제하고 소득 재분배 정책을 수행함으로써 자본주의를 개혁할 수 있는 유효 적절한 수단으로 이해되었다. 이러한 국민 국가에 대한 신념은 1차 세계 대전 시기에 사회민주주의를 사회애국주의로 변질시켰던 하나의 원인이다. 이는 또한 2차 세계 대전 이후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국민 정당으로 변신할 수 있는 이념적 기초가 되었다.
전후 부흥기에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유럽 각 국 노동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자신들의 처지를 개선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노선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 노선은 자본주의의 위기로부터 신자유주의 세계 질서가 전면화된 1990년대에 들어와서 총체적인 위기에 직면하였다.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의 일부는 스스로 신자유주의 세계 질서로의 편입을 선언하였으며, 또 다른 일부는 편입을 예비하고 있거나 이를 묵인하고 있다. 사회민주주의의 위기는 공교롭게도 역사적 경쟁자인 현실 사회주의 세계 체제의 몰락과 함께 시작되었다.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과 사회민주주의의 위기 속에서 새로운 사회주의의 기획들은 출현하고 있다.

사회당의 사회주의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피안에 존재하는 도달할 수 없는 유토피아가 아니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 체제 안에 존재하는 반체제적 힘으로 자본주의를 영구히 변혁하고 폐절하기 위한 운동이다.
사회주의의 근본적 실천 형식은 반자본주의이다. 여기서 반자본은 자본 일반에 대한 비판을 말한다. 그리고 자본 일반의 비판은 전 지구적 규모에서의 자본 운동에 대한 보편적 비판을 뜻한다. 이는 전 지구적 자본의 지배에 대항하는 길이 국민 혹은 민족을 경계로 한 국지적 방어 전략에 있다는 민족주의 좌파 진영의 뿌리깊은 전통과의 단절을 요구한다.
자본주의가 이전의 생산 양식보다 더욱 발전한 것이며 그 속에서 새로운 생산 양식의 맹아들이 더욱 발전할 수 있는 것처럼 자본의 전 지구화와 이로 인해 성립되는 새로운 질서는 그 자체로 새로운 대안 사회의 맹아들을 포함하고 있다. 민중의 힘은 이러한 모순을 극복하고 해방으로 나아갈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다. 사회당은 이를 더욱 더 확산하고 촉진시키기 위해 전 세계의 민중과 굳건히 연대할 것이다.
사회당은 이전까지 하나의 도그마로 고정되어 있었던 현실 사회주의와 사회민주주의를 넘어설 것이다. 또한 사회당은 자본주의를 불변의 것으로 인식하고 그 안에서의 개량을 추구하는 모든 운동을 경계할 것이다. 사회당은 초국적 자본과 새로운 세계 질서에 맞선 급진적 반자본주의 투쟁을 통해 자본주의를 극복해 나감으로써 궁극적으로 영토적 차원과 특정한 권력 형태의 차원 모두에서 국가적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사회주의를 구현할 것이다.
사회당의 사회주의는 또한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운 공존을 위해 노력하며, 지역과 국경을 넘어선 평등한 연대를 추구하고, 참여와 자치가 보장되는 실질적인 민주주의를 지향하며, 전쟁과 폭력이 없는 평화를 실현하는 것을 중요한 가치로서 추구한다.

사회주의 대중정당을 향하여

사회당은 현재 미완의 정당이자 열려 있는 정당이다. 사회당 바깥에는 여전히 각각의 지역과 부문과 영역에서 자본주의의 근본적 폐절을 위해 노력하는 사회주의자들이 있다. 우리는 그들과 하나가 되어 명실상부한 사회주의 대중정당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강령 또한 미완의 강령이다. 그들과 하나가 될 때 이 강령은 다시 쓰일 것이다. 새로운 강령은 다양한 역사적 실천과 사상?이론적 성과들이 만나면서 총체적인 사회주의의 기획으로 태어날 것이다. 새로운 강령과 함께 사회주의 대중정당은 가장 단호한 정치 투쟁을 전개하고, 정치 투쟁과 경제 투쟁의 결합을 선도할 실력을 갖출 것이다. 그리고 이를 자본주의 사회 질서의 폐지를 목표로 하는 하나의 계급투쟁 속으로 융합시킬 것이다.


강령

정치/경제/국제/평화/한반도

1. 억압적 국가 기관 혹은 법률의 폐지 또는 전면 개편을 실시한다. 특히, 국가보안법은 즉각 철폐한다.
2. 모든 공직 대표자들을 소환?탄핵할 수 있는 제도를 포함하여 민중의 참여와 통제가 가능한 정치 구조를 마련한다.
3. 국민개방형 정당명부 비례대표제와 완전 선거 공영제 실시, 만18세 이상 선거권 부여 등의 정치 개혁을 이룩한다.
4. 재벌을 해체하고 소유의 사회화/일반화 방안을 마련한다.
5. 국가 기간산업과 삶에 필수적인 재화를 생산하거나 서비스를 제공하는 분야는 국/공유화를 확대하고 사회적 통제 장치를 마련한다.
6. 고액의 상속과 증여를 금지하고, 대규모 자산가에게는 고액의 누진세를 부과하며, 투기 자본과 고리 사채 등에서 발생한 불로 소득은 점차 근절한다.
7. 모든 침략 전쟁과 테러를 반대하고 전 세계의 반전 평화 운동 진영과 긴밀하게 연대한다.
8. 미국과의 불평등한 협정은 모두 폐기하고 주한 미군을 철수시켜 실질적인 자주권을 확보한다.
9. 군비를 대폭 축소하고 징병제를 폐지하며 군사적 목적에 동원된 모든 인적/물적 자원을 평화적인 목적을 위해 사용한다.
10. 남북한간의 적대적 분단 체제를 종식하고 항구적인 평화 체제를 수립한다.


노동/농업/여성

11. 정리해고제, 파견근로제 등 각종 노동 악법들을 폐지한다.

자본이 아니라 사람이 중심이 되는 경제에선 있을 수 없는 법들
보장하는 노동 시간 단축과 완전 고용을 실현한다.

노동시간 단축은 교양 쌓을 권리(교육권)과 민주주의 실현(공직참여)을 위한 필수 불가피한 과제다. 특히 공직은 직업공무원제에 의존하는것만큼 위험한것도 없다. 공직 책임제가 중요하다.
동일임금을 실현한다.
14. 모든 노동자의 노동 기본권을 완전 보장하고 그 권리를 확대한다.
15. 이주 노동자에게 노동 비자를 발급하고 노동 기본권을 전면 보장한다.
16. 무분별한 농산물 수입 개방을 저지하고 식량 주권을 확보한다.

농산물은 지역내에서 생산되고 소비가 이뤄져야 한다 그게 원칙이다.
채를 탕감하고 생태 농업을 육성하며 농민의 생존권을 보장한다.
18. 부재지주의 토지 소유를 제한하고 토지의 경작자 우선 원칙을 적용한다.

농지는 농민에게.... 경작자는 소농 우선 원칙 지켜져야..기업농은 자연을 파괴한다
하여 모든 가부장적 위계질서를 해체한다.
20. 육아 노동과 가사 노동을 사회화하고 무상 보육을 실시한다.
애들을 모아 놓고 보육한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대안을 제시한다. 이웃간에, 대략 네다섯가구가 약속을 하여 서로 돌아가면서 아이를 돌봐주는거다. 물론 '당번' 가구의 집에서!! 그렇게 하면?? 부부 맞벌이라면 부부와 각 가구가 돌아가면서 휴직하는 방법으로 보육을 담당하면 된다 그게 최선이다.



의료는 지식 장삿꾼(의료인)들과 자본(제약)이 결탁하여 지속적으로 민중을 수탈하는 장치

간혹 민중 스스로 병치레를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을 보급하려들면 불법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곧장 수갑 채운채 감옥에 집어 넣게 된다. 그렇게 제약자본에 길들여지는 민중은 영원히 병의 굴레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채 죽음마저 병원에서 맞이하는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교육? 어차피 스스로 터특하는거다. 국가 독점 교육은 지배 이데올로기의 확산 도구에 지나지 않으므로... 여기서 필요로 하는 것은 국가 교육을 통하 진입장벽을 둬선 안된다는거다 이를테면 전문대졸 이상, 4년대졸 이상이라는 자격을 두는거, 의학 같이 의대 입학으로 직업선택의 자유가 주어지고 박탈되는 구조 그런건 있을 수 없다. 누구나 스스로 배웠더라면 기회는 동등하게 보장되어져야 한다.


다.
25. 환경 문제의 직접 규제를 강화하며, 생태 파괴적인 대규모 개발 사업을 중단한다.

생태가 죽으면 사람도 죽는다
에너지 시스템을 재생 에너지 중심으로 전환하며, 우선적으로 핵 발전을 중단한다.

대량살상무기로서의 핵과 평화적 이용의 핵은 동전의 양면이다 언제든 전용이 가능하다. 평화적으로만 이용은 사기다
편적 이익 증진에 이바지하는 과학기술을 발전시킨다.
28. 정보 독점 및 상품화를 반대하고 정보 감시 제도를 폐지한다.
29. 공공 문화 시설을 확충하고 문화적 공공성을 확대한다.
30. 삶의 모든 영역에서 성별, 나이, 학력, 직업, 인종, 국적, 장애, 출신 지역, 성적 취향 등으로 인한 모든 차별을 금지하고 인권을 신장한다.


행동 강령

1. 사회당원은 노동자 민중의 투쟁이 벌어지는 모든 곳에서 헌신적으로 연대하고 모범적으로 투쟁한다.
2. 사회당원은 당의 행사와 의사 결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모든 일에 대해 끝까지 책임을 다한다.
3. 사회당원은 당비를 성실히 납부하고 당이 재정적으로 어려울 때는 이를 함께 극복한다.
4. 사회당원은 당내의 비판과 이견을 항상 열린 마음과 태도로 대하며 서로의 의견을 존중한다.
5. 사회당원은 당 바깥의 진보 운동 진영과 폭넓게 연대하며 항상 겸손한 자세로 이에 임한다.
6. 사회당원은 당의 대중 기반 확대를 위해 노력하며 다양한 대중 조직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7. 사회당원은 당의 방침뿐만 아니라 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 꾸준히 학습하고 토론한다.
8. 사회당원은 다양한 취미나 자질을 적극 계발하고 풍부한 문화적 소양을 갖추기 위해 노력한다.
9. 사회당원은 모든 종류의 성폭력을 방지하기 위해 노력하며 일상생활에 스며있는 가부장적 사고를 척결한다.
10. 사회당원은 동지들에 대해 예우를 갖추며 신의를 지키고 사소한 약속이라도 소홀히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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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의 테러, 비정규직

비정규직 차별 문제 많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보다 크게 볼 순 없을까요?

얼마 안되는 몇푼의 이익에 눈이 멀어 버린다면 그거 얼마나 서글픈 현실입니까??

우리는 지금 정규직 비정규직 가지고 싸울 계제가 아닙니다. 생태 환경이 위협받는 현실에서 연일 기상이변으로 수 많은 사람들의 재산상의 손실을 보고 있을 뿐만아니라 소중한 생명마저 앗아감을 당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몇푼? 그게 그렇게 중요합니까?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 차이 얼마나됩니까? 그만큼 제가 보전해줄까요? 제가받는 조금의 월급으로 그게 가능할지 의심스럽긴 합니다만 어쨋거나 단 한푼을 벌더라도 그것을 소중하게 생각할줄 아는 넓고 깊은 마음을 가졌음 합니다. 우리가 버는 한푼은 우리 기업들이 갈취한  세계 여러 나라의 자연자원을 값싸게 들여오는 대신 삶의 터전이 파괴되어 오갈데 없음은 물론 굶어죽기 까지하는 현지 주민들이 있기에 얻을 수 있는 결코 값싸지 않은 소중한 자원 그 이상의 것이라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세계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우리 이웃과 대자연의 희생을 바탕으로 누리는 현실 세계에서의 만족(더러 불만족스럽더라도)스런 욕구를 충족 시킨다면 일말의 죄의식이나마 가져야하는거 아닌가요 그런걸 가진다면 실천 실천을 해야겠죠 함부로 낭비하지 않겠다거나 조금 있는 것에 만족하며 살겠다 라는??

 


[한겨레] [조계완의 노동 시대] 전체 노동자 임금을 깍아내리고 고용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냉혹한 얼굴
결국에는 자본과 노동의 동거를 깨뜨려 자본주의를 파괴하는 수단이 아닐까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헨리 포드는 1914년 어느 날 포드 공장 노동자의 임금을 두배로 올려줬다.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일급 5달러’였다. 포드는 “내가 고용한 노동자들도 포드차(모델 T)를 구입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포드주의는 대량생산뿐만 아니라 ‘대량소비’에서도 자본 축적의 원천을 발견한 생산 시스템이었다. 포드의 이 새로운 질서에서 “자본과 노동자들은 가난하거나 부유하거나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결합돼 있었다. 포드 공장에서 젊은 견습공으로 일자리를 잡은 노동자라면 거기서 ‘노동의 생애’를 마감하리라는 것을 확신했다”. 쉽게 말해 정규직 평생고용이었다. 비정규 노동의 진실은 ‘반쪽 저임금’ 그러나 이제 고삐 풀린 시장이 자본주의를 질주하면서 자본과 노동의 동거는 무너졌다. 케인스주의적 계급타협도 깨지고, 노동 세계는 이제 자본의 일방적인 지배가 판치고 있다. 한국노동조합의 전투성은 흔히 말하듯 ‘노동운동의 힘 과시’가 전혀 아니다. 사용자의 지배·공세에 맞선 생존을 위한 방어적 투쟁일 뿐이다. 우리 시대 노동의 절반은 비정규직(2004년 전체 임금노동자의 55.9%)인데, 자본의 지배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비정규직 현상’이다.

비정규직 현상 뒤에 숨은 냉혹한 얼굴(자본)은 웃고 있지만, 점차 타락하고 있다. 흡혈귀처럼 살아 있는 노동을 흡수할수록 더 활기를 띠는 게 자본의 혼이다. 어떤 집단적 조직도 없고 오직 개별 노동자로서 시장에서 거대한 자본과 대면해야 하는 비정규직은 최대치까지 착취가 가능하다. 그래서 자본은 “비정규직 확산이 관철되지 않으면 설비투자도 않고 고용도 늘리지 않겠다”며 ‘자본 파업’으로 국가를 위협하고 있다. 어느 기업이 비정규직을 더 많이 사용해 더 싼 가격으로 시장에 상품을 내놓을 경우 경쟁기업은 더 많은 비정규직을 써야 승리할 수 있다. 자본 분파들이 기술은 뒷전이고 오직 ‘인건비 따먹기’로 이윤축적 경쟁에 돌입해 있는 것이다. 20세기 초 테일러는 바닥에서 나사를 집어들어 기계에 끼우는 노동자 동작을 스톱워치로 0.01초 단위까지 세밀하게 분석하고, “네가 저 무거운 철강을 들어올리면 다른 노동자보다 몇푼 더 주겠다”고 꾀어 노동자 체력의 극단까지 알아낸 뒤 이를 모든 노동자들에게 평균 과업으로 부과했다. ‘과학적 관리’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포장된 테일러주의는 노동 착취를 강화한 ‘유혈적’ 테일러리즘이었지만, 오늘날 자본의 비정규 노동 착취에 비하면 차라리 인간적이고 소박했다.

물론 세상은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깊고 풍부하다. 비정규직의 세계도 생각보다 복잡할 수 있다. 그러나 노동 유연화니 21세기 새로운 노동 형태니 하는 여러 진단 그 너머에 있는 비정규 노동의 진실은 ‘반쪽 저임금’이란 사실이다. 특히 자본주의적으로 사용되는 기계가 노동자의 수고를 덜어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노동자 숙련을 파괴해 상품을 값싸게 하고 노동을 축출했는데, 자본주의적으로 사용되는 비정규직은 기계보다 더 훌륭한 ‘자본의 무기’가 되고 있다. 비정규직은 직업을 갖고 있음에도 거대한 ‘고용된 산업예비군’을 형성한다. 비정규직이 ‘일자리를 만드는 훌륭한 기계’ 노릇을 하지만 ‘더 많은 임금’을 찾아 떠도는 수많은 불완전 취업자들일 뿐이고, 이들은 실업인구가 그러듯 노동시장에서 끊임없이 전체 노동자 임금을 끌어내리는 압력으로 작용한다.

건강한 노동조합운동마저 깨뜨려 거대한 비정규직은 존재 그 자체로 집단적 노동의 힘을 약화하고 기존의 건강한 노동조합운동마저 타락시킨다. 무엇보다 비정규직 착취에서 발생한 독점적 지대를 정규직과 자본이 나눠갖고, 이런 노사간 물질적 배분은 노사 담합으로 이어진다. 거대한 규모의 비정규직이 ‘풍부한 노동력 저수지’ 노릇을 하는 한 조직 노동의 공장 노동력 철수(파업)도 무력해지고 만다. 개별 노동자로서는 해고될 경우 실업의 공포도 크지만 ‘비정규직 함정’에 빠져 노동 생애 내내 비정규직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더 큰 공포가 짓누른다. 일본의 자본은 회사가 어려워지면 일단 임원들이 스스로 임금을 삭감하고, 이어 기계를 퇴출시키고 그래도 버틸 수 없으면 최후에 노동자를 해고한다. 1990년대 ‘잃어버린 10년’을 견뎌내고 최근 새롭게 부활하는 일본 경제의 저력은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임금을 두배로 올린 포드의 5달러 임금제는 전후 자본주의 황금 시절의 한 축이었다. 거꾸로 임금을 절반으로 억압하는 비정규 고용은 자본의 이윤 축적에 봉사할지 모르지만, 자본과 조직노동을 타락시키고 수많은 비정규직의 삶을 불안케 해 종국에는 자본주의를 파괴하는 건 아닐까? ⓒ 한겨레(http://www.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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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열심히 하는 대학생이 나라를 일으킨다(?)

 
































초등학교 5학년이 되는 아들놈이 일요일 고려대학교를 갔다왔다. 녀석은 웅장한 건물에 감탄하고, 도서관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대학생에 무척 감동받은 모양이다. 아들의 기행담에 대고 기말고사 기간이니 당연히 놀던 친구들도 요즘은 공부를 하는 척이라도 할 것이고, 웅장한 건물은 사학이 벌려낸 빚잔치에 불과한 것이라고 핀잔을 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아내 눈초리가 무서워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침묵의 방조도 잠시, 어른들 있는 자리에서 끝내 입방정을 떨고 말았다. 대학생들이 공부를 열심히 해서 참 다행이라는 감탄사에 대고 데모안하고 취직에 매달려 도서관에 처박혀 있는 놈들이 뭐가 그리 대단하냐고 면박을 주고는 우리 때는 데모 열심히 하고 덕분에 취직도 잘되었다고 너스레까지 떨었다.

사실 요즘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는 대학생을 보면 우리 때(80년대)와 비교해 참 안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더욱이 고시바람이 대학에 분지 오래인데, 가장 비창조적인 고시공부에 매달리면서 자기 두뇌를 낭비하는 젊은이가 많은 나라는 불행한 나라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사태가 이렇게 된 데에는 다름 아닌, 노동비용을 줄여서 자본의 이익을 극대화하겠다는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의 극심한 횡포가 수년간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이 와중에 대학이 권력과 자본에 대한 저항의 중심에서 대중문화의 소비지로 급변하면서 사회전체적으로 자본우위의 역관계가 지속되었기에 예비노동자인 대학생이 고달파 진 것이다.

80년대말 노학연대라 불렸던 자본에 대항한 저항전선의 확대는 남한 자본주의 발전에 있어서 일련의 사태가 상황을 개선하는 방향으로 전개되는 소위 순순환(順循環)의 형태를 띠게 하였다. 자본은 위축되었고 노동자의 임금인상요구에 양보가 불가피했다. 임금이 오르면서 내수가 확장되고, 기술개발과 마케팅 강화 필요성도 높아지면서 고학력 인력에 대한 수요도 덩달아 높아졌다. 완만한 인플레와 높은 경제성장율이 정치적 억압에도 불구하고, 대학 졸업자들의 자기실현에 긍정적인 환경을 조성했던 것이다. 한 예로 그 유명한 건대사태로 수백명의 대학생이 까막생활을 하면서 정부미를 몇 개월씩 먹었지만 대부분 대기업에 취직될 수 있었다. 그 외에도 일자리는 풍부했다.

지금 대학이 대중문화의 중요한 소비지가 되고 대학이 이른바 한국 IT산업의 리트머스 시장이 된지 오래다. 대학축제 때 대중가수가 공연을 하고, 여성댄스그룹이 공연을 할 때 관객석의 반응은 전방위문공연과 흡사하다. 81년도에 서울대에서 어용 학도호국단(전두환이 학생회를 못 만들게 하려고 만든 단체)이 주최한 쌍쌍파티에 초대받은 당시 최고 인기가수였던 조용필이 발칙한 대학생들의 협박에 오금이 저려 오지 못하고 나중에는 무대를 완전히 박살냈던 폭력적인 일부 대학생들은 강제징집 당했던 이야기는 전설이 되었다. T.V로 생중계되던 고연전 농구경기에서 “광주학살 책임지고 미국놈들 물러가라”는 플랭카드를 펼친 용공학생들과 이를 저지하려는 경찰들이 육박전을 버려, 경기중이던 운동선수들이 졸지에 관객이 되었던 이야기(무엇보다도 싸움구경이 최고인지라!)는 신화 수준이다.

21세기 대학생들은 예비노예로 전락하였다. 대학교라는 공간에서 노예가 해방되기 위해서는 말 그대로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는데, 요즘 대학생은 머리가 텅 비었다. 대학교 앞에 있던 사회과학 서점은 흔적을 찾기 어렵게 되었다. 80년대에 박불똥이라는 민중화가가 그린 네컷짜리 만평에 보면 공부를 조금한 학생은 돈을 전망하고, 조금 더한 학생은 고시합격을, 그리고 그것보다도 조금 더 한 학생은 교수를, 그리고 왕창 공부한 학생은 수갑을 전망하는 장면이 나온다. 자신의 삶을 통해 진실에 접근해 가는 기회가 박탈당한 지식인들이 의존할 것은 오로지 책뿐이다. 그런데 독서량이 적으니 대학생들이 자신들의 문화를 창출할 능력, 자신들의 담론을 만들어낼 능력, 사회적 의제를 제시할 능력을 갔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대중문화와 이것과 결합한 대중소비, 그리고 취업난에 의해 대학에서는 지금 현대판 분서갱유(焚書坑儒)가 일어나고 있다.

지금 대학은 상속재벌과 결탁해 교육재벌로 성장하고 있는 사학에 의해 천문학적인 등록금을 수탈하는 곳,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는 곳, 산업예비군을 양성하는 곳으로 전락했다. 이를 타개하지 않고서는 황폐한 대학이 살아날 방법이 없다. 따라서 지금 대학생들이 고된 취업준비와 경제적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광범위한 대중행동이 객관적으로 요구되고 있다. 무상교육을 요구하고, 자본의 무차별한 노동자계급에 대한 공격을 규탄하며 나아가 우리사회의 운영원리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동력, 아카데미 군단이 되어야 한다.

지금 대한민국 자본주의가 87년 이후 몇 년 동안 보여주었던 선순환의 시기로 돌아갈 가능성이 없다. 자본의 양보를 기대하기 어렵고, 노동자들의 경제투쟁이 이를 조만간 극복할 것이라고 섣부르게 예측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선순환을 일으키는 자본주의에 대한 어설픈 기대보다도 차라리 자본주의를 전복하기 위해 분투하는 것이 더 현실적이다. 대학은 이제 수년간, 저항의 부재로부터 초래된 고통을 극복하고 사회주의를 위한 전초기지, 사회주의자들을 양성하는 정치학교로서 기능해야 한다.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은 대학이 지성에 기초한 새로운 문화가 꿈틀되는 공간으로 만드는 것이다. 역사와 계급, 그리고 인간의 해방을 고민하고 이를 행동으로 옮기는 역사적 공간으로 대학이 바로 서도록 노력해야 한다. 대학생의 멋은 청춘의 빛나는 얼굴을 더욱 아름답게 하는 지성에 있다. 그리고 그 지성이 세상의 칭송을 받는 방법은 행동에 있는 것이다. 공부를 열심히 해 세상을 구하는 일은 대학생들의 책꽂이에서 맑스와 엥겔스, 레닌과 트로츠키 눈빛과 마주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가질 때 가능한 일이 될 것이다.
김광수>

 

동감. 그런데 그게 어디 대학만의 문제일까요 하긴 때가 덜 낀 젊은 대학생들마저? 그런거라면...뭐 그런거라면 고딩에게나 기대 걸어보죠? 요즘 두발자유화 등 의식있는학생들 많던데 하긴 10대들....소비의 주체이긴 하다.. 텅 빈 호구들....쩝...암튼 자본주의 이거 한번은 죽어야할텐데 큰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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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당신은 얼마나 행복하십니까

  "아, 은행가고 싶다."
  
  공공건물이라곤 조그만 우체국 하나밖에 없는 남해안의 한 포구로 여름 휴가를 온 고등학생 녀석이 아침 산책을 다녀와서는 민박집 툇마루에 털썩 주저앉으며 내뱉은 말이다. 나는 웬 뜬금없는 소리인가 하고 어리둥절해 있는데 함께 산책 갔던 주위의 어른들이 빙그레 웃다가는 이내 아이와 함께 방안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닫고는 에어컨을 켠다.
  
  불과 몇 분 사이에 눈앞에서 벌어진 이 광경은 사람들에게 대안적 삶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를 두고 며칠 째 머리를 싸매던 내게 충분한 동기유발의 계기가 됐다. 냉수 한 잔 걸치고 마당의 나무 그늘 아래 10분만 앉아 있으면 될 것을 도시에서 길들여진 그 짜릿한 시원함을 잊지 못해 쇳소리를 내는 억지바람에 몸을 맡긴다. 한참을 쉬고 나서 다시 해안가로 나가려 하기에 식수는 챙겼냐고 물었더니 마을 상점에서 생수를 사기로 했다는 것이다. 땅 속에서 퍼 올린 이 집 물이 파는 생수보다 훨씬 낫다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집 뒤에 있는 파란 플라스틱 탱크에 담겼던 물이라서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질 않았다. 공장에서 만들어진 생수가 그보다 훨씬 많은 탱크와 파이프를 거쳐 나오는 줄도 모르고 단지 식품 인증을 받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현지의 자연산 생수를 거부하는 것이다. 하긴 지리산 산속에 별장을 지어놓고 사는 사람들에게도 공기청정기를 팔아먹는 세상이니….
  
  문명이 지나쳐 사람들을 문맹으로 내몰고 있다. 저마다 어디선가 주워들은 과학적 지식을 들이대며 똑똑한 척하지만 내가 보기엔 석유 문명이 만들어낸 물신(物神)의 주문에 사로잡힌 듯 했다. 에어컨을 켜도 석유요 생수를 사 먹어도 석유다. 집 안은 물론 집 밖으로 한 발자국만 나가도 석유가 없이는 꼼짝달싹 할 수 없는 것이 우리네 삶이다. 석유 문명 시대에 석유를 잘 쓰는 것이 현명한 태도가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미안하게도 지금은 석유 문명이 종말을 고하고 새로운 문명이 싹트는 전환기다. 석유 문명이 종말에 가까워졌다는 것은 석유 자원이 고갈 위기에 빠진 측면도 있지만 그 보다는 석유 문명에 의한 온갖 공해와 자연 파괴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는 상태에까지 이르렀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
  
  지금 우리 사회는 경제가 어려워졌다는 사실을 두고 미덥지 못한 정권을 두들겨 패기에만 바쁘지 그 근저에 석유 문명의 위기가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은 애써 외면하고 있다. 당장에 석유값이 배럴당 100달러만 돼도 주저앉고 마는 경제 구조를 가지고 겨우 몇 년을 맡을 뿐인 정권에 모든 덤터기를 뒤집어씌우는 것은 난센스에 가깝다. 진실로 국가에서부터 개인에 이르기까지 현재의 위기를 넘어 지속 가능하기 위해서는 대안적 삶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점에 와 있다.
  
  왜 지금 여기의 삶에서 벗어나야 하나
     
  
출근하는 시민들로 꽉찬 신도림역. 당신은 얼마나 행복하십니까? ⓒ연합뉴스   
  

  오늘날 선진국이라고 불리는 나라들은 모두 석유 에너지를 효과적으로 사용해 경제부국이 된 경우다. 석유 에너지로 쌓아올린 부(富)는 예외 없이 대량생산, 대량소비, 대량폐기의 패턴을 보이고 있다. 사실 석유 문명만이 이런 패턴을 보이는 게 아니다. 그 옛날 나무와 석탄을 때던 시절에도 한 문명이 몰락의 징조를 보일 때에는 반드시 대량생산-대량소비-대량폐기로 이어지는 거대한 착취구조 속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대의 그것이 특별히 문제가 되는 이유는 착취의 규모와 깊이가 종의 멸절에까지 이를 정도로 악성적이라는 데 있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돈을 많이 벌어 풍요롭고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면 남들이야 어떻게 되건 적어도 우리는 잘 살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인데, 바로 이런 생각이 몰락을 재촉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착취에 기반을 둔 세계화 구조 속에서 어느 한 곳으로 부가 집중되면 될 수록 다른 곳에서는 기아와 질병, 전쟁 등이 만연하게 되어 있다. 때로 강대국들은 부의 집중을 촉진하게 위해 기아와 전쟁을 조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늘 평형을 유지하고자 하는 지구라는 유기체는 이러한 쏠림과 의도적인 파괴행위에 대해 어떤 식으로건 응징을 가한다. 그것은 자연재해나 괴질 또는 사회병리 현상, 테러 등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그리고 대량생산-대량소비-대량폐기 체제는 규모의 방대함에도 불구하고 매우 치밀한 감시와 통제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어디 한 군데라도 잘못되면 바로 대규모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위험하고도 불안정한 체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체제를 유지하려면 어쩔 수 없이 독재와 관료주의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진실로 불행한 것은 일단 이 체제에 발을 들여놓게 되면 개인이건 국가건 파국에 이르지 않는 한 빠져나올 길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개별적으로 빠져나올 수도 있겠지만 체제는 이마저도 용납하지 않는다. 고립 속에서 온갖 협박과 회유에 시달리다가 시나브로 자멸하기 십상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대안적 삶을 바라지만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데에는 대단한 결심과 각오가 필요하다.
  
  대안적 삶은 당연히 석유 문명을 넘어 궁극적으로는 재생가능 에너지에 기반을 둔 새로운 삶의 양식을 만들어내는 전 과정을 말한다. 따라서 우선은 석유 문명에 찌들어 있는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는 일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내가 대량생산(유통) 시스템에 복무하는 노동자(판매원)인지,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그 자리에서 서서히 발을 뺄 것인지, 남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 정신없이 살다보니 나도 모르게 소비하는 기계로 전락한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과연 나의 영혼과 지구촌의 모든 이웃들을 풍요롭게 하는 현명한 소비는 무엇인지, 나는 오로지 나의 편리만을 위해 스스로 치우지도 못하는 쓰레기를 양산하고 있는 건 아닌지, 사회 전체의 쓰레기 양을 줄이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과연 무엇인지 등등….
  
  이렇게 석유 문명에 철저히 포박된 자신의 삶을 근본에서부터 성찰한 다음 그에 대신하는 새로운 생활양식을 실현가능한 것부터 하나하나 실천하는 것이다. 그러나 막상 대안적인 삶의 양식을 실천에 옮기려면 걸리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원래 대량생산-대량소비-대량폐기 시스템이란 것이 대부분의 인구를 도시에 몰아넣고 그 안에서 최대한의 경제적 이득을 뽑아내려고 만들어진 것이므로 도시에 살면서 그 체제를 벗어나는 일이 쉬울 리가 없다.
  
  가령 내 손으로는 아무 것도 내게 필요한 것을 생산할 수 없는 도시인이 슈퍼마켓을 통하지 않고 생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실정이다. 또한 대규모 발전소에서 중앙 집중식으로 공급되는 전력선에 온갖 전기 제품들을 연결해 사용하는 마당에 소규모 대안 에너지 시설을 도입한다는 것도 실현성이 별로 없는 얘기다. 그러므로 대안적 삶을 살기 위해서는 두 가지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는 에너지가 되도록 적게 들도록 생활을 간소화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대안적 삶이 가능한 직업 또는 산업을 선택하는 것이다.
  
  먼저 에너지가 적게 드는 생활을 살펴보자. 편리함을 추구하는 현대 문명의 특징은 되도록 몸의 사용을 최소화함으로써 외부 에너지에 대한 의존도를 크게 만드는 것이다. 자기 몸을 써서 자급자족하게 되면 대량 순환 체제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에너지 소비를 줄이려면 그만큼 몸을 많이 사용해야 한다. 생활에 필요한 물건 하나를 사더라도 에너지가 적게 드는 제품을 선택하고 되도록 몸을 움직여 해결할 수 있는 것은 귀찮더라도 몸으로 대처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많은 가정주부들이 홈쇼핑의 광고에 현혹되어 조금이라도 편리한 가전제품을 구입해 노동력을 절약하려고 드는데, 가사 노동의 어려움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생활양식을 간소화하면 웬만한 일들은 자신의 몸으로 충분히 대처할 수 있다. 격에 맞지 않는 큰 집을 구해 그 안에 온갖 살림살이를 잔뜩 채워놓고는 살림을 유지 관리하느라 또 다시 노동 절약형 가전제품들을 사들이는 소비의 악순환에 빠져서는 대안적 삶을 얘기할 수가 없다. 에너지 문제도 정부가 주도하는 중앙집중식 화석연료 정책에 전적으로 의존하기보다 집안에 설치 가능한 대안 에너지 시설을 적극 도입하는 한편 시민 주도형 대안 에너지 개발에 참여함으로써 에너지의 외부 의존도를 줄이려고 노력해야 한다.
  
  간소한 생활 방식과 소규모 생산양식이 바람직한 또 하나의 이유는 세계의 평화에 결정적으로 기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의 어느 구비에서나 먼저 평화를 유린하는 측은 대규모 생산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었다. 누군가가 큰 무기를 들고 있으면 그에 대응하기 위해 너도 나도 무기 개발에 나서기 때문에 평화는 늘 설 자리가 없었다. 평범한 시민들이 공원에서 칼 든 강도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절대적 다수에 의해 지켜지는 도덕적 우월감 때문이다. 따라서 지구촌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서는 대규모 살상 무기와 생산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 강대국들에 대항해 소규모의 대안적 삶을 추구하는 절대적 다수가 연대하여 저들의 큰 손을 부끄럽게 만들어야 한다.
  
  행복을 위해선 농업만이 대안
  
  이와 같이 지구촌의 평화와 생태계의 안정, 그리고 거기에 깃들어 사는 개인 또는 공동체의 행복을 위해 대안적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것을 가장 잘 구현해낼 수 있는 직업 또는 산업은 무엇일까? 두말 할 것도 없이 농업이다.
  
  예컨대 대규모 선박 건조 회사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경우를 보자. 그가 열심히 일하여 최고 품질의 선박을 만들어내면 그로서는 보람 있는 일을 했노라고 자긍심을 가질 만도 하다. 그는 노동의 대가로 받은 좋은 월급으로 석유 문명의 온갖 편리를 누리며 스스로 행복하다고 느낀다. 그러나 그가 만든 대형 선박은 대량 순환 체제를 유지하는 효율적인 도구로 사용되어 세계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가속화시키고 심지어는 남의 나라를 침략하는 전쟁 도구로 쓰일 수도 있다.
  
  대량 순환 체제에서는 나의 행복이 남의 불행이 되는 경우가 너무도 많은 것이다. 하지만 소규모 산업의 경우에는 그렇게 될 위험성이 아주 낮다. 소규모 산업 가운데서도 지구 생태계 보전과 석유 문명으로 인해 상실된 인간성을 회복하는 데에 농업만한 것은 없다. 무엇보다도 농업은 위에서 언급한 대안적 삶을 실천하는 데 있어 가장 적합한 형태의 직업이다. (여기서 말하는 농업은 석유 에너지에 의존하는 지금의 관행농은 물론 아니다).
  
  먼저 농업을 통해 우리는 생활에 필요한 웬만한 먹을거리와 생필품들을 스스로 조달할 수 있으므로 굳이 대규모 유통시스템에 의존할 필요가 없다. 둘째, 농사일이란 것이 주로 몸을 써서 하는 것이므로 아무래도 외부 에너지에 대한 의존도가 낮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농업이야말로 다른 어떤 산업보다 대안 에너지를 적용하기 쉬운 분야다. 농경지의 지형 조건에 따라 소수력, 풍력, 태양열, 지열과 같은 다양한 대안 에너지원을 확보할 수 있고 농업 부산물을 이용한 바이오 에너지도 얼마든지 얻을 수 있다. 셋째, 몸을 많이 쓰고 계절의 리듬에 맞추어 일하기 때문에 생활이 단순하면서도 변화가 있다. 마지막으로 소규모 제조업이나 상업이 농촌에서도 가능하듯이 도시에서도 텃밭이나 베란다, 지붕, 나대지 등을 이용한 소규모 농업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이다. 만약 도시농업과 주말농장, 계약농업 등을 잘 활용한다면 농업은 현대 산업 구조 속에서 최고의 생산적인 취미활동으로 자리매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석유 문명에 푹 빠져 사는 현대인들이 농촌에 가서도 순간적인 더위를 참아내지 못하고 에어컨을 켜대는 것은 하나의 생물종으로서 자연 생태계에 적응능력을 상실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현대인들이 지구상에 도태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외부로부터 에너지가 공급되어야 하는데 이 에너지마저도 이제 고갈 위기에 처해있다. 지금이야말로 이 위기 상황을 온전히 극복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길이 소박 단순한 대안적 삶과 농업에 있음을 알고 주어진 조건에서나마 하나하나 실천에 옮겨야 할 때다.
  
  필자 소개
  
  황대권 생태공동체운동센터 대표는 지난 1985년 '구미 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3년 동안 옥고를 치른 뒤 1998년 광복절 특사로 석방됐다. 그 뒤 사람과 자연이 함께 더불어 사는 대안 문명을 일구는 데 혼신의 힘을 쏟고 있다.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준 <야생초 편지>(도솔, 2002),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들>(두레, 2003) 등의 저서와 <새벽의 건설자들>(코린 맥러플린 외, 한겨레신문사, 2005) 등의 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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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기 난동자를 살해하는건 정당한 자위권 행사

1000톤짜리의 육중한 몸무게를 자랑하며 숨을 쉴때마다 맹독성 유해가스를 쉼 없이 뿜어대며 달리는 흉기, 자동차

 

그것을 조작하며 거리에서 난동을 부리는 사람들을 볼때마다 한숨만 팍팍 쉬게 되는데 그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짓을 할까요? 아니 문제는 그들이 아무 겁대가리 없이 마구 내지르는데도 누구 하나 막는 사람 없고 도리어 그들이 뭘 하든 그저 피하기에 급급하는 시민들은 뭔가요? 칼 들고 설치는 사람들에 대해 주변 사람들과 국가공권력은 어떻게 하나요?  그들을 피하는 모습이 마치 강도가 무서워서 그들이 시키는대로 순순히 응한채 굴복하는거랑 뭐가 다른가요?

 

이젠 할말을 해야 합니다. 행동으로 보여줘야 합니다. 그 흉기가 우리들의 삶의 터전에서 난동을 부리지 못하도록 우리들이 그 길을 빼앗아야 합니다. 빼앗긴 길에도 봄은 오는법이죠. 언제까지 그들 때문에 얼어붙어 있을 순 없는 노릇이지 않습니까

 

자 실천합시다. 길은 우리들의 것입니다. 법? 그딴거 필요없습니다. 자동차 재벌에게서 뇌물을 받아막고 인체에 유해한 경유차 조차 허용하는 겁을 상실한 놈이 국가권력일진데 그놈들한테 뭘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 다니는 인도는 사람들에게 양보하고 자전거 주행자는 차도를 휘젓고 다녀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주행을 합법적으로 방해합시다. 만약 얼굴 들이밀고 쌍욕을 퍼부으면 어떡하냐고요? 상관없습니다. 본래 폭력 좋아하는 사람은 폭력을 씀으로서 상대를 제압할 수 있을거라는 믿음이 있기에 그러는거죠 만약 절대 굴하지 않고 도리어 맞선다면 그들의 폭력성? 결코 표출할수만은 없습니다.  이런놈은 초장에 본때를 보여줘야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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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지배민, 피지배계급임을 자랑스러워하라

피지배민이 머 어때서? 너는 지금 피지배계급 아니더냐? 아님 날강도 도둑놈인 자본가??나 그 하수인??
피지배민임을 부끄럽게 여기지마라 그것은 타인에 대한 배려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는 하늘이 주신 기회다. 그것은..... 그리고 피지배계급은 자연과 우리의 이웃을 벗삼으나 지배계급은 그것은 착취하고 수탈한다. 피지배계급은 함께살기를 실천하나 지배계급은 홀로살기(끼리끼리)를 실천하며 그들 밖에 있는 남들은 단지 억압의 대상일뿐이다 권력으로서...때론 국가공권력의 힘을 빌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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