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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안법과 강정구교수 필화사건 심포지엄

해방전쟁. 통일전쟁 그리고 미국은 그 해방전쟁에 있어  방해 세력

그저 지극히 상식적이고 누구나 한번쯤 그렇게 생각해 볼 수 있는 문제를 마치 국가안보를 위협하고 국가정통성을 부인하는걸로 몰아가는게 어째 좀 불편합니다. 언제까지 이런거 가지고 이 난리를 피워야 하는지요? 오늘자 김종우 논설위원의 칼럼 말마따나 열린당이 다수당 시절 국가보안법을 폐지했더라면 이런 문제 가지고 왈가왈부하는일도 없었을텐데 하는 아쉬움만 남는 하루 입니다. 혹자는 국민 여론 들어 폐지를 주저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건 어불성설입니다. 인권은 국민이 원해서 보장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설령 국민이 반대 하더라도 소수자의 인권을 침해하는거라면 당연히 그 소수자의 인권을 침해하는 제도나 법을 바꿀 의무가 있는거죠. 국민. 이기적이죠 자기 혹은 '우리'의 이해관계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아니 자신들과 상관 없는거라면.....쩝 하긴 적자생존의 약육강식 같은 정글사회에서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 보고 뭐라 한다는 자체가 우습죠. 그렇게 살도록 한건 따로 있는데... 또 그런 사람들이 왜 그렇게 사냐고 왜 틀린걸 틀리다고 말하지 않느냐고 따진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럴땐 그저 한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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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중국, 일본 VS 닫힌 사회 한국

프랑스의 철학자 H. 베르그송의 '닫힌 도덕'과 '열린 도덕'이라는 두 가지 상반된 도덕 개념과 관련해, 닫힌 사회(morale fermée)와 열린 사회(morale ouverte)로 구분되는 두 개의 사회 유형이 있다.
  
  이에 대해 백과사전에는 닫힌 사회는 본능에 가까운 습관이나 위압, 제도에서 유래하는 사회적 의무에 따라 안으로는 개인을 구속 ·위압하고, 밖으로는 배타적이며 자위와 공격의 준비를 게을리 하지 않는 폐쇄적 사회를 의미하며, 열린 사회는 적대적 폐쇄성을 초월한 무한의 개방적 사회로서 인류애로 전인류를 포용하려는 사회라고 되어 있다. 이에 비춰볼 때 우리 사회의 열린 사회성과 닫힌 사회성은 과연?
  
  얼마전 한 인터넷 매체의 칼럼을 통해 "6.25는 통일전쟁이자 내전"이라는 주장을 해 논란을 일으키며 경찰조사를 받고 있는 강정구 동국대 교수. 그런데 필자는 그의 주장에 대한 찬반이나 적부 여부를 떠나 그의 주장 자체에 대한 우리사회의 반응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현실과 이상 사이에는 항상 괴리가 존재하는 법. 인류는 이 괴리를 최소화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왔고 그러한 노력의 최선전에 위치한 상아탑은 적지 않은 역할을 수행해 왔다. 즉 학자들은 학문을 통해 다양한 견해를 피력, 문제를 제기하고 이에 대해 다원적 다수가 갑론을박 하며 경쟁하는 가운데 인류는 발전이라는 문명의 수레바퀴를 다듬어 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다원성의 공존을 불허하는 사회주의 체제도 아닌 현행 우리 체제에서, 또 다른 다양함을 제기함으로써 발전의 디딤돌을 제시하고 있는 학자에 대해 21세기를 역행하는 조지 부시류의 멍청한 분류기준을 들이대며 재갈을 물리려 하는 것이 과연 열린 사회를 지향하는 우리의 바람직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까.
  
  유감스럽게도 작금의 상황은 열린 사회는 고사하고 "데모크라시(Demo"=people", Cracy"=rule)", 즉 민중이 다스린다는 민주주의 개념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한 나라를 구성하는 민중이 어디 한두 명이겠으며 그들의 생각 또한 언제나 한 방향으로 일치할 수 있겠는가. 사회주의 국가에서조차 존이구동(存異求同)에 근거해 국가의 외교전략을 수립하고 있거늘, 아직도 의연하기만 한 한국적 매카시즘이여! 이는 전방위적 사회발전을 왜곡하며 편향에 안위하려는 우리 사회 수구세력의 건재를 보여주는 것에 다름 아니며 열린 사회를 지향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깨고 나가야 할 틀이기도 하다.
  
  한편 우리의 닫힌 사회성은 부지불식 간에 우리 사회의 경직성 심화와 더불어 우리를 주변국에 의해 놀림 당하며 이용 당하는 신세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그 단적인 예가 우리 사회의 가히 천편일률적이라 할 수 있는 대일관, 일본 인식이다.
  
  물론 과거사에 대해 아직도 온갖 꼼수로 얄팍한 술수를 부리려 하는 일본 정계 일부의 구악에 대해서는 단호한 비분강개가 당연하며 또 필요한 대응의 하나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일관에 있어서는 대통령부터 국민 개개인에 이르기까지 우리 모두가 항상 동일한 목소리에 일사불란한 행동으로 똘똘 뭉쳐야만 하는가.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한다고 해서 과연 저들이 북한이나 중국에 의해 애를 먹거나 곤혹스러워 할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잦은 비분강개에 대해 버거워 했는가. 오히려 우리를 자극하고 유도함으로써 국내외정치용으로 잘 활용하곤 하지 않았던가.
  
  지난 9월, 우익보수를 주창하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수상이 재집권에 성공했다. 그에 대한 일본 국민들의 지지는 알려진 바와 같이 압도적이었다. 그런데 이와 관련, 한 가지 곰곰 생각해보자. 한국언론에 비쳐지는 고이즈미 수상은 주변국과의 마찰은 아랑곳 않은 채 줄곧 강한 일본을 주창하는 일본의 우익화와 군국주의를 총지휘하는 선봉자가 아닌가. 그러한 그를 지지한다 함은 곧 그의 우익화 사조에 동조하는 것이 되므로 결국 일본국민 대다수도 우익화와 군국주의를 원한다는 식으로 이해되기 십상이다. 그리고 또 실제로 적지 않은 한국의 매스컴이 이와 같은 논조에 의거해 일본을 전하고 있으니 이를 통해 일본을 접하는 우리 국민들의 일본 인식은 과연….
  
  그렇다면 과연 고이즈미를 지지하는 일본인 대다수가 군국주의에 매료된 보수 우익주의자들일까? 과연 고이즈미가 군국주의를 주창하기에 일본국민들이 그를 지지하는 것일까?
  
  일국의 최고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해당국가 사회 전 분야(외교 분야 포함)에 걸친 다양한 공약이 제기되고 유권자들은 이를 토대로 자신들의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하기 마련이다. 한편 국민들의 입장에서 볼 때 이들 공약사항 가운데 가슴에 더욱 가깝게 와닿는 분야는 과연? 당장의 민생문제가 시급한 국민들에게 있어 외교 부문이 과연 득표에 얼마나 유효하게 작용할 수 있을까.
  
  고이즈미 수상은 중의원을 해산한 뒤, 우정사업 민영화를 중심으로 한 일본 국내의 민생 현안에만 초점을 맞추면서 "개혁을 저지 말라!"는 새로운 선거전략을 수립했다. 그는 국민생활과 직결된 민생문제만을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자신에게 "불리하게 작용될 외교문제(일본 노무라총합연구소 마타키 연구원)"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던 것이다.
  
  마타키 연구원의 분석에 의하면 외교 문제는 고이즈미 수상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라고 했는데, 이는 만약 일본의 유권자들이 외교 문제를 주요 이슈로 선거에 참가하게 되었다면 고이즈미는 재집권에 성공하지 못 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를 통해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일본 국민들도 주변국과 좌충우돌 마찰만 빚고 있는 고이즈미 정권의 외교행태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다는 점과 일본인들의"고이즈미 지지 = 일본인들의 우경화, 군국주의 지지"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면 우리의 어긋난 대일 인식은? "때려야 할 일본"이라는 불변의 프리즘을 고수하고 있는 한국언론에 의해 취사선택된 편협한 정보는, 이처럼, 우리 국민의 열린 사회적 대일인식을 저해하며 한국적 매카시즘의 끈을 더한층 옭조이고 있는 것이다.
  
  베르그송에 의하면 닫힌 사회의 결합원리는 정지된 관습이나 위압, 명령 등에 의해 개인을 사회에 복종시키려는 불변의 비인격적인 닫힌 도덕으로 이러한 사회에서는 가족이나 도시, 국가도 타인을 선별, 배척하며 거부와 투쟁을 전개한다. 이에 대해 열린 사회의 결합원리는 자연으로부터 인간을 해방하고 생명의 근원에 감촉되는 환희를 향해 끊임없이 전진·향상하려는 인류애적 도덕, 즉 열린 도덕이다. 따라서 열린 도덕은 가족이나 사회, 국가의 닫힌 도덕을 초월한 사랑으로 맺어진 인류사회에 대응한다….
  
  10여 년 이상을 미국, 일본, 중국을 포함한 다양한 외국에서 생활하는 가운데 필자는 우리 사회의 상대적 닫힘성(사회주의 독재체제인 중국과의 비교는 사실상 무의미하므로 논외로 하고)을 발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시간이 지나면서 밟힐수록 강해지며 푸르러지는 우리의 열린 사회 지향성도 발견,'희망!'을 느끼고 있기도 하다.
  
  그렇다. 우리 사회는, 아직은 닫혀 있지만, 우리 국민은, 이미 활발히 열리기 시작했다. 문제는 온갖 가시덩쿨로 우리를 둘러싼 채 국가와 민족이라는 미명 하에 우리 사회의 열림 지향성을 저지하려는 일부 닫힘성 인자들!.
  
  하지만 필자는 감히 단언할 수 있다. 우리 국민들의 지력과 총력은 필자가 경험한 어느 국가, 어느 국민들보다도 21세기를 리드하기에 손색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우리에게 있어 20세기적 닫힌 사회를 고수하려는 19세기적 독소와 저항은 우리의 열린 사회화를 더욱 촉진하는 촉매제에 다름 아니다. 이렇게 하나의 알을 깨는 고통 속에 놓여 있는 현재의 우리 사회, 머리 숙여 경의를 표할만 하지 않은가.
   
 
  우수근/중국 화동사범대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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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건 비우는 것

삶 1

산다는 일은 음악을 듣는 것과도 같아야 합니다.
작은 생의 아픔속에도 아름다움은 살아 있습니다.
삶이란 그 무언가를 기다림속에서 오는 음악같은 행복
삶의 자세는 실내악을 듣는 관객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삶 2

시간을 낭비하는 삶은 위험한 생존법입니다.
시간속에는 삶의 지혜가 무진장 잠겨있는 것입니다.
성장할 수 있는 삶은 노력함속에 잉태합니다.
삶의 가치는 최선속에 있는 영원한 진리인 것입니다.






삶 3

사람은 강하고 높아질수록 낮음을 배워야 합니다.
강자가 된 사람은 쉽게 자신을 망각하게 됩니다.
강한 사람일수록 적을 많이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강자란 강한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다.






삶 4

사람은 고난이 깊을수록 철학을 깨우칩니다.
시행착오 속에서 더욱 삶의 가치를 깨닫습니다.
이 세상에서 영원한 가치는 없는 것입니다.
고난 깊은 사람은 결코 인생을 헛되게 살지 않습니다.






삶 5

부자와 가난은 한 겹의 차이밖에 없습니다.
가난한 자는 부자를 통하여 의지를 갖습니다.
부자는 가난한 자로 통해 자신을 발견합니다.
부자란 자신을 잘 지킴속에 유지가 되는 것입니다.






삶 6

인생을 살아가는 일은 전쟁입니다.
그러나 삶을 위해 투쟁하는 행복한 싸움입니다.
산다는 것은 의문이오, 답변을 듣는 것.
승자되는 삶이란 그냥 열심히 사는 사람입니다.






삶 7

강자일수록 자신을 돌아볼 줄 알아야 합니다.
강자의 그늘속엔 언제나 약자가 칼을 갑니다.
강자의 정면속에 또 다른 강자가 도전 합니다.
현명한 사람은 강할 수 있는 지혜를 깨닫습니다.






삶 8

고난이 깊은 사람일수록 인생의 참 맛을 압니다.
산다는 것은 비우는 일입니다.
완전한 것은 이 세상에서는 없는 것.
노력함 속에 중요한 삶의 진리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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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의 안위 걱정하는척 하는 국가권력에 대한 2편의 칼럼

믿지말자 권력!! 이젠 권력이 백성을 생각한다는 편견은 버려야 할때... 권력이 하는 일은 언제나 그들의 지배력을 공고히 하고 그것을 강화하려는것뿐....

 

금속활자, 왜 한글은 없나?

 

한글날이 되면 신문과 방송은 늘 그래 왔듯 일제히 한글을 찬양하기 시작한다. 외국인이 거들기도 한다. 외국인(그것도 이른바 선진국 학자들!)까지 한글의 우수성, 과학성을 칭송한다는 말을 들으면 너나 할 것 없이 기분이 갑절이나 좋아지리라. 나 역시 과거에 적잖이 기분이 좋았었다. 나는 이토록 잘난 민족의 일원이구나 하고 말이다. 그런데 요즘 한글날이 되면 이 상식적 기쁨을 배반하는 불경스러운 생각이 솔솔 피어난다.

뭔가 하면 금속활자와 인쇄다. 다 아는 바와 같이 한글은 1443년에 만들어졌다. 이로부터 10년 전인 1434년에 세종은 금속활자인 갑인자를 제작한다. 금속활자야 고려 때 만들어진 것이지만, 널리 쓰이지는 않았다. 금속활자가 본격적으로 책을 찍어낸 것은 조선 건국 이후다. 태종 3년(1403)에 계미자를 만들지만, 성능이 좋지 않아 세종 16년(1434)에 다시 갑인자를 제작한다. 이후 갑인자는 지금 보아도 놀라울 정도의 엄청난 종수(種數)의 책을 쏟아낸다. 이뿐이랴. 갑인자는 조선왕조 500년 동안 많은 활자의 모본(母本) 구실을 했으니, 그 중요성이야 굳이 말할 필요조차 없다.

갑인자는 한자(漢字) 활자다. 그런데 왜 한글 활자는 없는가. 갑인자를 만든 바로 그해 세종은 백성을 교화시키기 위해 '삼강행실도'란 책을 편찬한다. 그리고 10년 뒤 언문 제작에 반대하는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언문으로 '삼강행실도'를 번역해 민간에 반포하면 어리석은 남녀 모두가 쉽게 깨달아 충신.효자.열녀가 쏟아져 나올 것이다." 세종은 한글로 표기된 서적을 백성들에게 보급해야 할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금속활자 갑인자는 다수의 책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렇다면 한글 금속활자를 만들면 될 게 아닌가? 하지만 세종의 머릿속에는 한글과 금속활자를 연결시키는 상상력은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한문서적을 언해(諺解)하면서 극히 소수의 한글 활자를 만들기는 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한문 언해 서적의 부속물일 뿐이었다.

'삼강행실도'가 언문으로 번역된 것은 성종 때였고 그 번역물은 목판본으로 제작되었다. 기묘한 것은 이 목판본 '삼강행실도'가 조선 전기의 백성들에게 직접 읽히기 위한 거의 유일한 책이라는 점이다. 즉 '삼강행실도'를 위시한 극히 소수의 윤리 서적 외에 백성들에게 공급되는 책은 없었던 것이다. 이에 반해 금속활자 갑인자는 양반을 위해 막대한 분량의 한문서적을 쏟아내고 있었다. 세종시대의 금속활자는 오로지 조선시대의 지배층인 양반 사대부의 지식과 교양을 생산하는 도구였던 것이다.

한글 인쇄물이 제법 나오기 시작한 것은 조선 후기에 와서다. 하지만 대부분 목판 인쇄였고 질과 양에서 한문 인쇄본을 따를 수 없었다. 한글 금속활자가 본격적으로 책을 쏟아낸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다. 한글은 금속활자화하여 한글 인쇄물을 쏟아내지 못하고 20세기를 맞았던 것이다.

민중이 문자를 갖는다는 것은, 무지로부터 해방됨을 의미한다. 그 해방은 다름 아닌 인쇄물, 곧 책을 통해 이루어진다. 한데, 조선의 한글은 분명 민중의 문자로 만들어졌으되, 지배층은 민중의 책을 찍는 데 인색했다. 세종의 시대에 금속활자가 개량되어 본격적으로 사용되고 또 그 시기에 한글이 만들어졌지만, 둘은 결합하지 않았다. 금속활자는 모두 한자 활자였으며, 그 소유주는 국가와 양반이었다. 애당초 적극적으로 책을 통해 민중을 무지에서 해방한다는 생각은 왕과 양반들의 머릿속에는 없었던 것이다. 애석하지 않은가.

해마다 한글날이면 한글의 우수성과 세종의 훌륭함을 한목소리로 찬송한다. 찬송가 부르는 것을 누가 탓하랴만, 찬송과 함께 그 이면의 사정도 살펴보아야 하지 않을까.


강명관 부산대 교수.한문학

 

김치 먹어도 되냐고요?

 

1998년 7월 검찰은 W, D, N사 등이 포르말린을 넣은 통조림을 만들어 팔았다고 발표했다. 통조림의 내용물인 번데기.골뱅이가 상하지 않도록 제조사가 포르말린을 넣었다는 내용이었다.

퇴근길 골뱅이나 번데기 안주에 생맥주 한잔으로 더위를 달랬던 사람들은 분노했다. 시체 부패 방지용으로 쓰이는 약품이 들어 있는 안주를 먹었다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러나 재판 과정에서 통조림에서 가장 많이 검출된 포르말린 양이 자연상태의 표고버섯에서 검출되는 양보다도 적은 것으로 드러났다. 검찰의 성급한 발표가 공연히 국민의 불안감만 증폭시킨 것이다. 통조림을 생산하던 업체의 도산도 이어졌다. 일부 피해자는 국가와 언론을 상대로 거액의 소송을 내기도 했다.

벌써 16년 전 일이지만 '라면 공업용 우지(牛脂:쇠기름) 파동'에 대한 기억도 생생하다. 89년 가을 검찰은 '라면을 공업용 우지로 튀긴다'는 내용의 익명 투서를 받고 수사를 시작했다. 팜유를 사용하던 농심을 제외한 거의 모든 라면 제조업체의 간부들이 줄줄이 구속됐다. 100억원대의 라면제품이 수거되고 당시 라면시장 점유율이 60%에 달했던 삼양식품(당시 삼양식품공업)은 3개월간 영업정지 처분을 받았다. 이후 삼양라면의 시장점유율은 10%대로 떨어졌다. 10여 년이 지난 97년 대법원 판결에서 모든 혐의가 무죄로 드러났지만 삼양식품은 파동 이후 아직까지 어려움을 겪고 있다. 97년 외환위기 때 회사가 사라질 위기까지 몰렸다. 삼양식품은 올 3월 말 화의를 마치고 재기를 도모하고 있다.

특정 식품이 건강에 해롭다는 주장이 나오면 그때마다 한 차례씩 홍역을 치른다. 국민은 불안에 떨고, 해당 식품을 생산한 기업이나 팔았던 업소가 문을 닫기도 한다. 명백하게 건강을 해치는 성분이 포함된 식품을 만들고 판매한 기업이나 업소가 망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우리가 너무 조급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중국산 수입 장어의 말라카이트 그린 성분 검출 사건만 해도 그렇다. 외신이 중국산 장어에서 말라카이트 그린 성분이 검출됐다고 보도하자 국내 언론은 일제히 국민 건강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말라카이트 그린은 전문가들조차 "물고기에 대해 독성이 있지만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은 명확하지 않다"고 말하는 성분이다. 식품의약품안전청은 곧바로 수입 장어의 성분을 검사해 결과를 발표했다. 사람들은 '암에 걸린다'며 보양식으로 즐기던 장어를 멀리했다. 그 결과 말라카이트 그린 성분이 검출되지 않은 국내 양만(養鰻) 업계의 매출까지 평상시의 절반 이하로 뚝 떨어진 채 아직도 회복되지 않고 있다.

당시 중국산 장어를 세계에서 가장 많이 수입하는 일본의 대응은 눈여겨볼 만하다. 일본에 사는 교포는 "(일본 국내에서 장어 파동이 났을 때) 일본 언론은 말라카이트 그린 문제를 크게 다루지 않았다"고 말한다. 일본 후생성은 중국산 장어의 성분 검사를 우리보다 20일 늦게 했다. 일본의 차분한 대응이 검역시스템의 한계인지 국익을 생각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혼란을 줄이는 효과는 있었다.

식품의 위해성 여부를 가리는 것은 쉽지 않은 문제다. 암을 유발할 가능성이 있거나 몸에 해로울 수 있는 특정 성분이 '검출됐다'는 것만 가지고 유해성 여부를 판정할 수 없다. 식품의 유해성을 판정하는 기준 중에는 체중이 70㎏인 사람이 70년 동안 계속해 노출(섭취)됐을 경우 100만 명당 1명꼴로 암에 걸릴 수 있는 확률'이라는 조건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위험 물질을 경고할 때는 노출 양과 시간, 위험 등 납득할 만한 분석이 따라야 하는 것이다.

시민단체나 정치권, 사법 당국도 한건주의식 공개는 자제해야 한다. 경각심을 일깨운다는 긍정적인 측면은 있지만 검증되지 않은 사실 공개로 국민이나 관련 기업들은 충격받고 불안해한다.

국민 건강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11일에도 국정감사장에서는 '김치의 안정성' 문제를 둘러싸고 정부와 야당이 치열한 공방을 벌였다. 하지만 정작 국민이 알고 싶은 것은 '김치에 납이 얼마나 들었느냐'가 아니고 '먹어도 되느냐'라는 점을 공방의 당사자는 염두에 둬야 할 것이다.


송상훈 정책사회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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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선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최보은의 인터뷰 무제한/교사 때려치우고 농부의 삶 공영석·서원정씨 부부

민성(10)이는 학교에 가지 않는다. 하루 24시간, 민성이는 자유다. 아빠 공영석(45)씨도, 엄마 서원정(35)씨도 민성이를 붙들고 무엇을 가르치려 들거나, 무엇을 하라고 주문하지 않는다. 부부가 아이를 데리고 같이 하는 것은, 그림 그리기와 기타 치기가 전부다. 부모를 교사 삼아 학교 교과과정을 집에서 그대로 공부하는 이른바 홈스쿨링과는 거리가 먼, 이런 양육방식을 이들은 농담삼아 ‘안 스쿨링’이라고 부른다. 탈학교의 아이 민성이는 경남 산청군 오부읍 산꼭대기, 하늘 아래 첫째 집에서 늘 엄마 아빠, 그리고 이제 6개월된 동생 태현이와 함께 생활한다. 이들 가족은 낮에도 밤에도, 집에서도 밖에서도, 헤어지는 법이 없다.

민성이는 컴퓨터도 텔레비전도 없어서 심심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있으면 보고, 없으면 할 수 없는 거지예”라고 말하는, 아무 것에도 중독되지 않을 자유를 가진 아이다. 민성이의 그림에서는 기교적 훌륭함을 떠나, 우선 생명이 느껴진다. 삶의 맥락을 놓친 도시 아이들이 천편일률적으로 그려내는, 생활과 동떨어진 죽은 그림이 아니라, 자신의 사는 이야기에 상상을 보탠 숨쉬는 그림이다. 엄마가 동생 태현이를 임신해서 출산하는 과정을 동화책으로 만들어보기로 하고, 같이 사진도 찍고 상황도 연출하고 이야기도 만들면서 그린 연작 그림 앞에서 나는 한참을 입 벌리고 서 있었다.(우리 큰딸은 4년 동안 미술학원에 다녔는데도, 지금도 만화 베끼는 수준밖에는 못 그리던데…) 기타는 아빠가 읽어주는 악보를 따라 줄을 튕기며 익혔는데 제법 잘 친다. 민성이 뿐만 아니라 이 집 식구들은 무엇이든 돈을 주고 배우는 대신, 스스로의 머리를 써서 익힌다.

영석씨는 10년 전 산청에 들어와 농부가 되기 이전에는, 중학교 미술교사였다. 10년간 교사생활을 하면서 나름대로 열심히 산다고 살았는데도, 왠지 행복하지 않았다. 한국화를 전공하고 화랑에서 임시로 일하던 원정씨도 같은 생각이었다. 영석씨의 개인전 때 화랑에서 만나 결혼한 두 사람은, 먹고 입고 자고 쉬는, 존재의 모든 것을 돈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살아가는 데 필수적인 모든 것을 남에게 의지해야 하는 도시에서는 결코 근원적으로 행복할 수 없을 거라는데 의견의 일치를 본 뒤, 직장을 그만 두고 퇴직금으로 받은 1천만원으로 농촌에서의 삶을 시작했다.

도시에서 자녀는 ‘돈먹는 호랑이’




지금 살고 있는 집은, 3년 걸려 부부가 직접 지었다. 치장을 위한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는 이 집에서, 민성이를 기르고 둘째 태현이를 낳았다. 아이는 영석씨가 직접 받았다. 건강을 해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살면서 아이가 조금만 아프면 지갑 챙겨 병원으로 약국으로 달려가는 대신, 맑은 공기 속에서 뛰어놀며 인체의 고유한 면역력을 통해 스스로 건강을 지키도록 하는 방식을 택했다. “옛날에는 아이를 싫어했어예. 아이가 내 삶을 망칠 것 같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아예. 그런데 지금은 많이 낳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예.” 모든 교육을 돈으로 전문가를 사서 해결해야 하고, 따라서 아이가 ‘돈 잡아 먹는 호랑이’가 된 세상에서는 웬만해서는 들지 않는 생각일 것이다. 아이 하나 키우는 데 몇억이 든다는 보도는 중단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돈의 잣대로 재량되는 자녀의 양육이라니!

산청에 들어온 뒤, 자신들이 먹을 만큼만 농사를 짓고, 농사지은 만큼만 먹었다. 가난하고 불편하기는 하지만, 그 가난과 불편은 이들에게는 지성을 갈고 닦을 수 있는 ‘뻬빠’쯤으로 작용하는 듯했다. “불편하면 생각을 하게 되잖아예. 자기가 익숙해진 것들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도 되고예.”

농사 짓고 남는 시간에는 같이 그림을 그리고 기타를 쳤다. 하지만 민성이를 학교에 보내지 않기로 한 것은, 돈 문제 때문은 결코 아니었다. 학교에 다니는 것이 아이를 스스로 생각할줄 아는 지성인으로 키우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기 삶의 고유한 맥락과 아무 관계가 없는 사회의 일률적인 가치관을 성찰없이 무조건 받아들여야 하는 곳이 학교다. 또한 학교는, 아이들 개개인의 특성을 존중하지 않는다.

“한반에 50명이 있다고 치면, 그중의 25명 수준을 대상으로 한 수업을 하거든예. 그러면 잘 하거나 못 하는 학생들은 손해보는 거지예.” 하지만 교사 경험을 통해 학교교육에 대해 확실하게 비판적인 철학을 갖고 있었던 영석씨와는 달리, 원정씨는 처음에는 학교에 보낼 생각이었다.

“본인이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어른들 의견으로 안 보내는 것은 안 된다. 일단 경험을 시켜보자”라고 주장했다. 그렇게 해서 초등학교에 입학한 민성이는 딱 열흘만에 학교를 그만 두었다. “학교를 보내자마자,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바로 들더라고예. 제가 어릴 때 다녔던 학교와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이 없는 것 같고. 온 식구가 같이 학교 다니는 시스템이 되어버리면서, 아침 일찍 같이 일어나서 학교 보내고, 돌아올 때까지 마음 졸이고.” 생활의 자유가 없어져 버렸다. 당연히 엄마가 도와주는 것을 전제로 한 숙제는, 원정씨가 보기에 너무도 불필요하고 무의미했다. “어떤 것이 더 잘한 것이라는 기준이 없는데도, 자의적으로 이건 백점, 이건 팔십점하는 식이니까 학교의 가치관에 가족생활을 맞춰야 되더라고예.“

영석씨는 “가족이 분리된다는 느낌”을 받았다. “도시에서는 그런 느낌이 덜 들었을 텐데, 항상 같이 있다가 애가 학교 가니까 같이 있는 시간이 적어지는 것이 바로 느껴지데예.” 사실 학교가 돈 버는 부모들을 위한, 거대한 탁아소인 것은 맞다. 인정하자.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하고,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에 아이들을 맡아줄 학교가 필요한 악순환 때문에, 대부분의 도시 가족들은 내용상 이산가족의 삶을 살고 있지 않은가. 때문에 부모는 자녀양육에 있어서 완전한 비전문가가 되어, 어쩌다 아이와 함께 있는 시간이 되면 어쩔줄을 모르고 좌충우돌하는 것이리라. 방학 때가 되어 아이가 집에 있을라치면 어떻게 그 아이들의 시간을 해결해줄지 몰라서 허둥대다가 비싼 돈 주고 이런 캠프 저런 캠프 등 떠밀어 보내는 부모들이 얼마나 많은가.

영석씨가 보기에, 도시 가족들이 세대간의 소통 단절을 경험하는 것은, 서로 다른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같이 하는 생활이 없으니까 서로 할 말이 없는 거지예. 대화를 억지로 할 수는 없는 것 아니겠어예.” 많은 사람들은 학교를 다녀야 생활에 필요한 사회성을 익히게 된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 사회성이라는 게 뭔지 다시 한번 생각할 필요가 있어예. 집에서 공부하는 아이들 보면, 사람 잘 사귀어예. 학교 다니는 아이들 보면 또래들하고는 잘 어울리는데, 어른들하고는 그렇지 못하거든예. 그런데 민성이는 우리와 늘 함께 다니고, 어른들 있는 자리에도 함께 가서 같이 대화에 참여하니까 어른들하고도 잘 어울려예. 다양한 연령층과의 소통을 경험하는 거지예.”

우린 어떤것도 미리 걱정하지 않아

세상이 무서운 속도로 바뀌는데, 이런 산골에 살면서 뒤처지는 느낌은 받지 않느냐고 물었다. 디지털이다 모바일이다 온갖 기기들이 자고 일어나면 ‘메롱, 나 잡아봐라’ 쉴틈 없이 외쳐대는 세상에서 아이를 그렇게 키워서 어쩔 작정이냐는 걱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나도 걱정 안해예. 우리는 미래를 살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예. 그런 것에서 해방되는 것이 바로 미래라예.” 그들은 어떤 것도 미리 걱정하지 않는다. 아이가 갑자기 큰 병에 걸리면? 다치기라도 하면? 그때 가서 해결한다!

아이가 나중에라도 학교 안 다닌 것을 원망하고 대학 진학을 하고 싶어 한다거나 취직을 원하는데 학력 때문에 못한다거나 하는 경우엔 또 어쩔 작정이냐. 영석씨와 원정씨가 약속이나 한 듯 웃음을 터뜨린다. “우리는 우리 가치관에 대한 확신이 있거든예. 지금 너무 행복하잖아예. 민성이는 매일같이 삶을 최대한 누리고 있는 거라예. 매일 너무 많은 것을 누리고 있기 때문에 여한이 없을 거라예. 그리고 나중에 대학 들어가겠다 하면, 자기 힘으로 하면 되는 거지예.”

그래도 학교 졸업장이 있어야 취직이라도 하고 취직해서 돈 벌어야 시집장가 가서 애도 키울 것 아니냐고 묻는다면? 그런 삶이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이미 알아버린 부부에게는 소용없는 질문이었다. 그들은 민성이가 좋은 회사 취직해서 돈도 잘 벌고 그럴듯한 배우자 만나 남들 보기에 그럴듯한 삶을 살기를 바라지 않았다. 대신 민성이가 늘 오늘 이 순간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고 자신을 책임질 줄 아는, 생각하는 인간이기를 멈추지 않는 삶을 살기를 바라는 것같았다.

영석씨와 원정씨는 민성이가 열아홉살 될 때까지만 같이 살 생각이다. 그 이후에 민성이는 독립해야 한다. 지금은 지금 필요한 사랑과 자유와 행복을 주고, 그가 독립해서 살 때, 돈 대신 두고두고 밑천이 될 ‘생각의 힘’을 길러주는 것이, 지금 이들 부부가 하고 있는 일이다.

아침이면 온 가족이 회사로, 학교로 뿔뿔이 흩어졌다가 오밤중에 지쳐서 한마디도 못할 상태로 모이고, 어쩌다 모여도 그저 텔레비전에 눈을 팔다가 잠이 드는 가족이라면, 민성이네 가족의 사는 법에서 무언가 느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자녀 교육비를 벌기 위해 삶을 포기하다시피 돈벌이에 매달리는 데도, 자녀들이 마음 같이 자라주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부모라면, 자식을 키우는 데 돈보다는 함께 하는 시간이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는 교훈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삶의 근본을 돌아다보는 일은, 어쩌면 미래를 위한 가장 중요한 대비일 수도 있다.

 

권은정의 인터뷰 무제한/청계천 살리시 참여한 황기연 교수

‘수많은 사람들이 런던 브릿지 위를 흘러가네’ T.S. 엘리엇은 <황무지>에서 도시 속의 군중을 이렇게 그려 놓았다. 정말 청계천 다리 위를 사람들이 강물이 되어 흘러가고 있었다. 청계천과 사람들의 얼굴이 수 십 년만의 상봉을 즐기고 있었다. ‘땅 속에 묻혔던 물길이 다시 찾아오니 그 어찌 반갑지 아니하랴’고 공자님도 말씀하셨지만 (아닌가?), 어쨌든 갇혀 있던 게 풀려나는 것을 바라보는 일은 일종의 감동이다. 이번 복원사업에 단단히 한몫을 한 황기연 교수(48. 홍익대 도시공학과)와 약속시간을 정하는 데에는 이명박 시장의 역할이 있었다.

“아, 그 시간은 좀 곤란해요. 세계도시 시장포럼 중인데 제가 시장님 뒤에 배석을 해야 하거든요. 다른 시간으로….” 그리고 좀 일찍 만나자는 연락이 다시 왔다. “시장님이 잠시 자리를 비우셔서 제 시간이 괜찮아요.”

나는 속으로 그가 이 시장을 참 좋아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세계 여러 도시에서 서울을 보러온 시장님들이 나름대로 회의를 하고 있었다. 그 옆 한적한 회의실이 우리의 자리였다. 미국 남가주대학에서 도시 교통을 공부한 황 교수는 92년 8월부터 서울시 산하 정책연구기관인 시정개발연구원에서 연구원으로 일했다. 이번 9월에 대학으로 자리를 옮기기 전 장장 13년간이나. 그러니 뒤에 앉아 있다가 혹 시장님이 숫자에 막히거나 연도를 헷갈릴 경우 귓속말로 전해주는 배석의 임무에 적임자일 듯 했다. 어쨌든 ‘시장님이 돌아오시기 전’에 우리는 이야기를 마쳐야 했다.

그는 청계천 살리기 연구회에서 교통전문가역을 맡았다. 교통전문이라지만 그는 기존의 교통 개념과 좀 다른 차원이다.

“사실 승용차에는 별 관심이 없어요. 대중교통과 보행이 저의 주된 관심입니다. 어떻게 하면 승용차 이용을 줄이고 사람들을 걷게 만들 수 있나 그거죠.”




이번 청계천복원도 결국 사람들을 걷게 만든다고 그는 주장한다.

“시민들이 걷도록 하기 위해서는 도로의 양을 상당히 줄여야합니다. 기존 교통학자들은 도로를 줄이면 교통이 막힌다고 여기지만 오히려 반대지요. 사람들이 차를 덜 타게 되니까요.”

지식인 자발적·희생적 봉사 소중

복원사업 이야기가 처음 나왔을 때 벌써 그는 서울시의 교통문제 해소에 도움이 될 거라고 알아봤다. 고가도로를 걷어내면 심각한 교통체증이 올 거라고? 오히려 반대일 거라고 우겼다.

“공사를 통해 이미 경험했습니다. 도로를 줄이면 오히려 차량소통이 좋아지는 게 바로 교통의 역설입니다. 도로는 차를 흘려보내는 기능과 함께 차를 유인하는 기능을 동시에 갖고 있으니까요.”

청계천 사업에서 얻은 경험은 서울시의 교통정책에 엄청난 힘을 실어주었다. 교통연구부를 맡고 있던 그는 시청앞 광장, 버스 중앙차로제 등을 시리즈로 내놓았다.

“도로의 여건이 달라지면 자동차는 다른 방도를 찾기 마련이지요. 도로의 용량을 줄여서 그 길을 보행로로 확장하는 사업이 점차 정착되고 있는 중입니다. 사실 그동안 많이 내려온 거지요. 위에서 아래로. 입체교차로도 많이 없앴지요. 육교도 없애고 차도를 광장으로 만들고, 도로의 폭을 줄여나가고 있습니다.”

이야기 주제가 청계천이 아니라 오히려 보행자 권리로 옮겨갔다. 평소 대중교통과 보행위주로 이동의 삶을 영위하는 나로서는 할 말이 많았다. 서울시내에서 지하철에서 내려 버스정거장으로 가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아느냐, 툭하면 지하도에다가 또 건널목은 얼마나 인색한지, 오죽하면 광화문 건널목 하나를 텄다고 서울시가 그리 생색을 내는데도 가련한 시민들은 그저 감지덕지한다 등등. 그는 달래듯이 말했다.

“조금씩 바꿔질 거라고 봐요. 너무 빨리 바꾸면 반발이 심하니까요. 특히 자동차 업계에서요. 사실 보행환경을 좋게 하는 것은 대중교통을 성공적으로 개혁하는데 필수적인 여건이지요.”

청계천 주변도 걷기에는 여간 불편하지 않다. 좁은 보행도로와 잦은 신호등, 사람보다 언제나 많은 자동차들. 그는 청계천을 몇 번이나 오락가락 해봤는지?

“아휴, 다 걸어보진 못했지요. 많이 불편해요. 솔직히 아래로 내려가야 걷는 게 가능하지 위에서는 도로를 건너갈 수가 없어요.”

좀 의외다. 적어도 수십 번은 걸어봤다고 대답할줄 알았는데.

“이동의 연속성이 중요하지요. 앞으로 청계천 주변을 걷기 좋게 만드는 것이 주요과제인거죠. 신호를 기다린다고 몇 분씩이나 기다려야한다면 걸을 재미가 안 나죠. 사람들은 자기가 건너기 가장 편한 곳에서 건널 수 있어야 하거든요.”

황 교수는 걸어 다닐 때는 신호위반을 많이 하는 편이라고 털어놓았다. 사실 신호는 자동차를 위해서 있는 것이다, 사람을 피해서 조심해서 달리라고 있는 거다,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게 신호다, 신호만 믿고 달리는 차들은 공공의 적이다…. 황 교수가 이런 ‘과격한’ 주장을 쏟아내는 동안 나는 혹시 운전자가 엿듣지나 않는지 두리번거렸다.

그런데 ‘보행도시’ 서울은 아직 꿈같은 공상이 아닐까? 배낭여행 다녀온 사람들이 외국 유명도시에서야 당연히 그렇다고들 하지만.

“글쎄, 그렇게 말씀들을 하시는데 틀린 말이에요. 사람들이 가면 차는 서야 하거든요. 여태 자동차가 사람을 길들였는데 이제는 사람이 차를 길들여야지요. 자꾸 말을 해야 해요. 우리는 행인들이 너무 순해요. 길들여져 있다고 하는 게 맞는 말일 거예요. 요구하고 부르짖어야 해요. 길의 주인이 누구인지 확실하게 정해줘야 합니다.”

‘우리가 걷지 않는다면 직립으로 서 있을 필요가 없다’고 프랑 미셀은 말한 적이 있다.‘걷기는 삶과 분리될 수 없다, 걷기는 무기력한 관성의 안티테제’라고 주장한 미셀의 말을 떠올리며 나는 황 교수의 얼굴을 다시 한번 뜯어보았다. 혹시 그의 얼굴에도 모든 뚜벅이들이 가지는 ‘위엄과 예민함을 지니고 자유를 배우는 수련의 예비단계’에 든 표정이 보이는지. 그는 완전한 뚜벅이는 아니라고 한다. 연구를 위해 자동차를 타보기도 해야 한다며.

어쨌거나 황 교수는 내가 만난 그 누구보다도 보행에 관한 가장 인본주의적이고 진보적인 사상의 소유자중 한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다음 과업은 ‘신호를 깨는 일’이라고 엄숙히 말했다. 그동안 자동차가 누린 만큼의 혜택을 보행자들도 누릴 때가 되지 않았느냐, 이제 미래세대는 그렇게 가야하지 않겠느냐는 게 그의 주장이다.

문화·역사계쪽 불만은 짧게 외면

그는 자신이 보행만큼이나 사회의식에서도 선진적이라고 약간 목소리 톤을 낮추어 <청계천 살리기연구회>의 의미를 설명한다.

“전 평소 자율적인 연구를 하고 또 그것을 통해 이 사회에 어떻게 기여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지식인들이 늘어나야 한다고 믿어요. 이번에만 해도 노수홍 교수 같은 분의 의식적이고 실천적인 기여가 컸지요. 지식기반 리더들의 자발적이고 희생적인 봉사라고 볼 수 있지요. 우리사회 곳곳에 묻혀 있는 힘을 적절히 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는 주5일제 근무로 늘어난 휴일을 사회변화로 쓸 수 있게 분위기를 잡는 게 역시 중요하다며 자신의 생산적인 휴일을 소개한다.

“돈이나 벌어주고 공부 안한다고 혼이나 내는 게 아버지 역할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을 바꿨지요. 매주 토요일 저녁 아들과 그 친구 애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한주도 안빠지고 합니다. 부모들도 모여 교육도 고민하고요.”

그는 아주 긍정적인 ‘바른 생활주의자’인 듯했다.

긍정일변도인 그에게 청계천 복원에 대한 문화 역사계 쪽의 불만에 관해 물었다. ‘묻혀 있던 것을 드러낸 것만 해도 큰 성과 아니겠느냐’는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그도 다른 사람들처럼 길게 답할 용의가 없어보였다. 대신 이번 사업으로 서울시의 환경이 얼마나 업그레이드 되었는지 증거를 들이댄다.

“세계 언론을 보세요. 우리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개발의 시대를 남들보다 빨리 달려온 게 사실이지만 또 누구보다 그 상처를 빨리 치유하고 있다고 세계는 보고 있습니다.”

다리를 둥둥 걷고 물장구를 치던 아이들, 어… 진짜 물이 흐르네 하며 신기한 표정을 짓던 시민들을 떠올려 보았다. 그들은 과연 앞으로 청계천 덕분에 얼마나 더 행복해질까?

▲ 권은정/전문 인터뷰어
“행복지수를 지불의사력으로 산정해볼 수 있는데요. 세금을 얼마나 낼 용의가 있느냐 물어봤더니 가구마다 1년에 10만4천원 정도 낼 수 있다고 나왔어요. 깨끗한 물, 역사문화 복원, 바람길 등의 항목으로 나눴는데 물에 대한 지불의사가 6만원으로 가장 높게 나왔어요.” 6만원이나! 옛날처럼 천변에 나앉아 빨래를 하는 것도 아닌데, 너무 비싼 거 아니냐며 물어보려는 순간 그의 핸드폰이 울린다.

황 교수가 전화를 받고 일어설 준비를 한다.

“저, 시장님이 오셨답니다. 그만 이만 가봐야….”

회의장으로 들어가는 이 시장의 등이 보였다. 황 교수가 배석을 하기 위해 재빨리 따라 들어갔다. 보행 진보주의자 황 교수의 행보가 나와는 달랐지만 걷기에 관한 한 그와 나는 동지로 여기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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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채호의 반자본주의 혁명론

신채호(申采浩)의 반자본주의 혁명론

                                                                                                 안태정(연구원)


1. 머리말


  단재(丹齋) 신채호는 근대의 대표적인 지식인이었으며 실천가였다. 신채호는 1880년 12월 8일 충청남도 대덕군 산내면 어남리 도림마을에서 농촌 선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서 1936년 2월 21일 여순 감옥에서 사망했다. 신채호는 56년의 생애 동안 변화하는 시대와 사회에 대응하여 남달리 치열하게 살았다. 기존의 연구는 주로 신채호의 역사사상, 민족주의사상, 무정부주의사상 등을 밝히는 데 집중되었다.1) 

  신채호가 살았던 시대의 세계적인 차원에서의 역사현실은 ‘자본주의적 제국주의’2)가 대세였다. 특히 신채호가 태어난 한국은 일본을 비롯한 제국주의의 침략대상이었고 결국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가 되어 자본주의사회로 바뀌어 갔다. 신채호는 이러한 제국주의시대라는 역사현실에 어떻게 대응했는가?

  신채호의 한평생을 사회적인 측면에서 볼 때, 대체로 1880년에서 1897년까지는 양반의 입장, 1898년에서 1910년대까지는 민족부르주아지의 입장, 1919년 하반기에서 1926년 전반기까지는 한국민중의 입장, 1926년 후반기에서 1936년까지는 세계 무산대중의 입장에서 제국주의시대에 대응했다. 다시 말해서 신채호는 1919년 하반기부터 양반과 부르주아지의 입장에서 벗어나서, 한국민중과 세계 무산대중의 입장에서 민중과 무산대중이 자본주의 억압착취 체제로부터 자기해방 하도록 투쟁했다.

  신채호는 반자본주의 혁명운동 과정에서 혁명운동의 범위를 ‘일국적’ 혁명전선에서 ‘국제적’ 혁명전선으로 확장해 갔다. 대체로 1919년 하반기부터 1926년 전반기까지의 신채호의 혁명운동은 일본자본주의를 타도하려는 일국적 혁명인 ‘한국혁명’운동이 중심적이었다. 그러나 무정부주의동방연맹에 참여하는 1926년 후반기부터 신채호는 일본제국주의를 포함한 세계자본주의를 극복하려는 ‘세계혁명’운동을 전개했다.

  이 글은 1919년 하반기부터 시작된 신채호의 반자본주의 혁명투쟁을 뒷받침하는 반자본주의 혁명론을 구체적으로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먼저 신채호의 일국적 반자본주의 ‘한국혁명론’에 대해서는 주로 1923년 1월 「의열단선언」으로 쓴 「조선혁명선언」을3) 분석하여 알아보겠다. 다음에 신채호의 국제적 반자본주의 ‘세계혁명론’에 대해서는 주로 1928년 4월에 쓴 무정부주의자 동방연맹대회의 「선언문」과,4)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간의 계급투쟁을 형상화한 소설 「용과 용의 대격전」을5) 통하여 알아보겠다.  

  이 글이 오늘날의 무산대중이 자기해방 하도록 고무하는 반자본주의 혁명투쟁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역사적 경험으로 읽혀지기를 기대해 본다.



2. 일국적 반자본주의 한국혁명론


1) 반일본자본주의 한국혁명론 제기


  늦어도 1920년대 초반기에 신채호는 한국에 침투한 일본자본주의를 타도하는 한국혁명을 주장했다. 이것은 신채호가 당시 일본자본주의와 한국민중 간에 형성된 적대적 모순관계를 인식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6)

  신채호는 자본주의의 기본 특징 두 가지, 즉 자본의 ‘임금노동 착취’체계와 자본의 ‘경쟁적 축적’체계가 일본자본주의에도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신채호는 일본을 “자국의 무산계급의 혈액까지 착취하는 자본주의”국가로 규정했다. 즉 자본주의의 기본 특징의 하나인 자본의 ‘임금노동 착취’체계를 파악했다. 이것은 자본과 노동 간의 적대적인 계급적 모순관계의 형성과, 이러한 자본․노동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정치적 억압체제로서 자본주의국가가 성립되었음을 인식했다는 것이다.

  또한 신채호는 “상업가들은 일본의 제조품을 한국인에게 매개하는 중간인이 되어 차차 자본 집중의 원칙 하에서 멸망할 뿐이오”라고 하여 자본주의의 기본 특징의 다른 하나인 ‘자본의 경쟁적 축적’체계도 인식했다. 이것은 임금노동 착취의 산물인 이윤의 분배를 둘러싸고 자본 내부에서 자본 분파들 간의 경쟁과, 경쟁 과정에서 형성된 독점자본을 기반으로 하는 제국주의를 대두시켰다. 신채호는 이러한 일본에 대하여 “자본주의 강도국” 또는 “강도적 침략주의의 초패(招牌)인 제국(帝國)”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일본자본주의와 한국민중 간의 적대적인 민족적 모순관계의 형성과, 이러한 일본자본․한국민중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정치적 억압체제로서 식민지 자본주의국가가 성립되었음을 인식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일본자본주의 억압착취 체제가 한국에서 무엇을 했을까? 신채호는 모두 ‘6천 400여’ 개의 글자로 완성한 「조선혁명선언」을 “강도 일본이 우리의 국호를 없이하며, 우리의 정권을 빼앗으며, 우리의 생존의 필요조건을 다 박탈하였다”로 시작했다. 신채호는 한국을 침략한 일본자본주의의 억압과 착취로 인하여 한국민중의 생존의 필요조건, 즉 경제적 생존․정치적 생존․문화적 생존․신체적 생존 등을 박탈당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폭로했다. 말하자면 일본자본주의의 한국 침략에 의하여 한국민중의 생존이 위기에 빠지게 되었고, 따라서 일본자본주의와 한국민중 간의 민족적․계급적 모순관계가 심화되었다는 것이다.

  신채호는 이렇게 한국민중의 생존을 박탈하는 일본자본주의 억압착취 체제에 대하여 어떻게 대응하려고 했는가? 그것은 “우리는 혁명수단으로 우리 생존의 적인 강도 일본을 살벌(殺伐)함이 곧 우리의 정당한 수단임을 선언하노라”라고 하여 일본자본주의를 한국민중의 ‘생존의 적(敵)’으로 규정하고, 한국민중의 생존을 위해서는 한국민중 생존의 적인 ‘자본주의 강도국 일본’을 없애는 반일본자본주의 한국혁명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7)

  이와 같이 신채호가 반일본자본주의 한국혁명을 제기할 수 있었던 사회적 기반은 무엇일까?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1845-1846년에 쓴 ꡔ독일이데올로기ꡕ에서 “특정한 시대에 있어서 혁명적 사상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곧 하나의 혁명적인 계급이 존재하고 있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라고 했다.8) 다시 말해서 신채호가 1920년대부터 반일본자본주의 한국혁명을 제기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이전부터 일본자본주의의 한국 침투에 의하여 한국에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성립되었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혁명적 계급, 즉 민중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무산대중=노동자계급이 일정하게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2) 한국혁명의 주체와 폭력


(1) 민중직접혁명


  신채호가 「조선혁명선언」에서 주장한 한국혁명은 ‘민중직접혁명’이었다. 신채호가 말한 ‘혁명’의 성격과 혁명의 방법으로서 민중의 ‘직접’혁명 그리고 민중관에 대해서 보자.

  신채호는 왜 ‘혁명’을 주장했을까? 그것은 위에서 보았듯이 역사적 경험으로나 자본의 경쟁논리로나 자본주의를 수용하는 개량주의운동인 ‘외교론’과 ‘준비론’ 등으로는 식민지 한국민중의 생존을 박탈하는 일본자본주의 억압착취 체제를 타도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신채호는 “조선민족의 생존을 유지하자면, 강도 일본을 쫓아내어야 할 것이며, 강도 일본을 쫓아내려면 오직 혁명으로써 할뿐이며, 혁명이 아니고는 강도 일본을 쫓아낼 방법이 없는 바이다”라고 하여 ‘혁명’을 강조했다. 신채호는 과거의 혁명은 계급사회 내부에서 소수의 지배계급이 다수의 인민을 지배하는 또 다른 지배계급의 교체에 지나지 않는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구시대의 혁명으로 말하면, 인민은 국가의 노예가 되고 그 위에 인민을 지배하는 상전     곧 특수세력이 있어 그 소위 혁명이란 것은 특수세력의 명칭을 변경함에 불과하였다. 다    시 말하자면 곧 ‘을’의 특수세력으로 ‘갑’의 특수세력을 변경함에 불과하였다. 그러므로    인민은 혁명에 대하여 다만 갑․을 양 세력 곧 신․구 양 상전의 누가 더 어질며, 누가    더 포악하며, 누가 더 선하며, 누가 더 악한가를 보아 그 향배를 정할 뿐이요, 직접의      관계가 없었다. 그리하여 ‘임금의 목을 베어 백성을 위로한다.’가 혁명의 유일한 취지가     되고 ‘한 도시락의 밥과 한 종지의 장으로써 임금의 군대를 맞아들인다’가 혁명사의 유     일한 미담이 되었거니와….


  그러나 신채호가 주장한 ‘혁명’은 과거의 그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신채호의 ‘혁명’은 “돈 없고 군대 없는 민중으로 백만의 군대와 억만의 부력(富力)을 가진 제왕도 타도하며 외국의 도적들도 쫓아내니”라고 하여 다수의 민중이 안팎의 지배자들을 타도하고 구축(驅逐)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혁명은 소수의 지배계급이 다수의 인민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다수가 소수의 지배자들을 없애는 혁명이었다. 즉 신채호가 말한 한국혁명은 ‘민족해방’인 동시에 ‘사회혁명’이었다.9)

  그리고 신채호가 말한 혁명의 방법은, “금일 혁명으로 말하면 민중이 곧 민중 자기를 위하여 하는 혁명인 고로 ‘민중혁명’이라 ‘직접혁명’이라 칭함이며, 민중 직접의 혁명인 고로”라고 한 데서 보듯이 민중이 ‘직접’하는 것이었다.

  어떤 논자는 이러한 민중의 ‘직접’혁명은 공산주의자들=당의 지도나 매개에 의한 것과는 대립적이라고 주장했다. 즉 신채호가 말한 것은 ‘누구의 지도나 매개’ 없이 민중이 ‘직접’하는 혁명이라는 것이었다.10) 그러면 공산주의자들은 누구인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1848년에 쓴 「공산당선언」은 노동자대중 가운데 ‘선진적 부분’이 공산주의자들이라고 했다.11) 로자 룩셈부르크도 1906년에 쓴 ꡔ대중파업론ꡕ에서 공산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트 가운데 가장 잘 계몽되고 계급의식적인 전위이다”라고 했다.12) 뒤에서 다시 보겠지만, 신채호도 민중 가운데 ‘선각한 민중’이 민중 전체를 위하여 ‘혁명적 선구’가 되어야 한다고 해 ‘지도’ 또는 ‘매개’를 전제했다. 그리고 역사 현실적으로는 의열단이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하는 단체였다. 따라서 노동자들 가운데 ‘선진적 부분’인 공산당과, 민중 가운데 ‘선각한 민중’인 의열단이 대립된다고만 할 수 없다.

  역시 어떤 논자는 신채호가 ‘민중직접혁명’에서 말한 ‘민중’은 ‘고도로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사고와 행동을 하는 자주인’이라면서, 공산주의자들의 민중관과는 대립적이라고 주장했다.13) 과연 공산주의자들은 민중을 타율적이고 비주체적으로 보았는가? 마르크스가 1864년에 쓴 「국제노동자협회(제1인터내셔널) 잠정규약」은 “노동자계급의 해방은 노동자계급 자신에 의하여 쟁취되어야 한다”로14) 시작한다. 또한 「공산당선언」은 “프롤레타리아 운동은 압도적 다수의 이익을 위한 압도적 다수의 자주적 운동이다”15)라고 했다. 즉 공산주의자들도 노동자계급을 자율적이고 주체적으로 보았던 것이다. 따라서 어떤 논자가 말한 신채호의 민중관과 마르크스 같은 공산주의자들의 민중(노동자대중)관이 대립된다고만 할 수 없다.


(2) 혁명의 주체와 폭력


① 민중 속의 선각한 민중

  신채호는 「조선혁명선언」에서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大本營)이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한국혁명을 ‘직접’하는 객관적 주체로서 민중은 누구일까? 당시 신채호는 민중이 어떠한 사회적 집단인지 분명하게 밝히지 않았다. 이를테면 계급적 관점에서 민중의 성격을 규정하지 않았다. 민중을 자본주의 생산관계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관련지어 파악하지 않았다.16) 앞서 보았듯이 신채호가 말한 민중은 일본자본주의 억압착취 기구, 이에 타협하고 기생하려는 한국인, 자본주의를 수용하는 개량주의적 한국인 운동가를 제외한 모든 한국인=피지배자를 지칭한다고 보면 크게 잘못이 없다.17)

  그러면 이러한 민중이 어떻게 한국혁명을 ‘직접’ 할 수 있을까? 신채호는 민중의 직접 “혁명의 제일보는 민중각오(民衆覺悟)의 요구니라”라고 했다. 신채호는 민중각오의 방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민중이 어떻게 각오하느뇨. 민중은 신인(神人)이나 성인이나 어떤 영웅호걸이 있어 ‘민     중을 각오’하도록 지도하는데서 각오하는 것도 아니요, “민중아, 각오하자” “민중이여, 각    오 하여라” 그런 열렬한 부르짖음의 소리에서 각오하는 것도 아니다. 오직 민중이 민중    을 위하여 일체 불평․부자연․불합리한 민중 향상의 장애부터 먼저 타파함이 곧 ‘민중    을 각오케’하는 유일한 방법이니, 다시 말하자면 곧 먼저 깨달은 민중이 민중의 전체를    위하여 혁명적 선구가 됨이 민중각오의 첫째 길이다.


  신채호는 ‘민중이 스스로를 위하여 일체 불평․부자연․불합리한 민중향상의 장애부터 먼저 타파함’이 곧 ‘민중을 각오’케 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면서, 이러한 ‘민중각오의 첫째 길’민중 속에서 ‘먼저 깨달은 민중이’ 전체 민중을 위하여 ‘혁명적 선구’가 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를테면 당시의 의열단이 민중 가운데서 ‘선각한 민중’으로서 민중 전체를 위하여 ‘혁명적 선구’의 역할을 하는 단체였다.18) 


② 선각한 민중의 폭력과 민중각오

  다음에 신채호는 민중 속에서 ‘선각한 민중’이 ‘혁명적 선구’가 되어 민중 전체를 위하여 ‘폭력’으로써 일본자본주의 억압착취 기구들을 파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9) 이에 대하여 신채호는 “우리의 민중을 깨우쳐 강도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민족의 신 생명을 개척하자면 양병(養兵) 십만이 폭탄을 한번 던진 것만 못하며 억천장(億千張) 신문 잡지가 한번의 폭동만 못할 지니라”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왜 신채호는 ‘선각한 민중’이 ‘혁명적 선구’가 되어 ‘폭력’을 행사해야 한다고 강조했을까? 신채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반 민중의 배고픔, 추위, 피곤, 고통, 처의 울부짖음, 어린애의 울음, 납세의 독촉, 사     채의 재촉, 행동의 부자유, 모든 압박에 졸리어 살려니 살 수 없고 죽으려 하여도 죽을     바를 모르는 판에, 만일 그 압박의 주요 원인 되는 강도정치의 시설자인 강도들을 때려    누이고, 강도의 일체 시설을 파괴하고, 복음이 사해(四海)에 전하여 뭇 민중이 동정의 눈    물을 뿌리어, 이에 사람마다 그 아사(餓死) 이외에 오히려 혁명이란 한 길이 남아 있       음을 깨달아, 용기 있는 자는 그 의분에 못 이기어, 약한 자는 그 고통에 못 견디어, 모    두 이 길로 모여들어 계속적으로 진행하며 보편적으로 전염하여 온 나라가 일치하는 대    혁명이 되면 간사하고 교활하며 포악한 강도 일본이 필경 쫓겨 나가는 날이리라.


  신채호는 민중이 일본자본주의 억압착취 체제 하에서 부자유와 빈곤 등의 죽음과 같은 고통을 겪고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상태에서 벗어나려면 일본자본주의를 쫓아내는 한국혁명을 전체 민중이 ‘직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민중직접혁명’을 하기 위해서는 ‘민중의 각오’가 필요하고, ‘민중의 각오’를 위해서는 ‘선각한 민중’이 ‘혁명적 선구’가 되어 ‘폭력’을 행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신채호는 이러한 ‘폭력(암살․파괴․폭동 등)’의 목적물을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① 조선총독 및 각 관공리 ② 일본천황 및 각 관공리 ③ 정탐꾼․매국적 ④ 적의 일체     시설물. 이외에 각 지방의 신사나 부호가 비록 현저히 혁명운동을 방해한 죄가 없을지     라도 만일 언어 혹 행동으로 우리의 운동을 지연시키고 중상하는 자는 우리의 폭력으로    써 마주 할지니라. 일본인 이주민은 일본 강도정치의 기계가 되어 조선민족의 생존을 위    협하는 선봉이 되어 있은 즉 또한 우리의 폭력으로 쫓아낼지니라.


  신채호는 민중 속에서 ‘선각한 민중’이 민중 전체를 위하여 ‘혁명적 선구’가 되어 한국민중의 생존을 박탈하는 일본자본주의의 억압적․착취적 국가기구, 즉 한국민중의 생존의 적인 전국에 산재한 개별적 정치적 권력자와 그 집행기구 등, 그리고 착취기구인 개별적 경제적 권력자와 그 집행기구 등을 ‘폭력’으로 파괴한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당시에 의열단은 스스로의 주장대로 실천했다.20) 즉 선각한 민중의 폭력을 통하여 여타의 민중을 각오케 한다는 것이었다.21)


③ 각오한 민중의 폭력과 혁명

  신채호에 의하면 ‘민중직접혁명’은 민중 속에서 ‘선각한 민중’의 ‘폭력’에 의하여 ‘각오한 민중’이 ‘폭력’으로써 일본자본주의를 파괴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신채호는 「조선혁명선언」에서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한 무기이다”라고 말했다. 신채호는 ‘각오한 민중’이 혁명을 이루려면 ‘폭력’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역사적 경험을 교훈으로 삼아서 정당화했다.


  우리의 경험으로 말하면 갑신정변은 특수세력이 특수세력과 싸우던 궁궐 안 한때의 활     극이 될 뿐이며, 경술 전후의 의병들은 충군애국의 대의로 분격하여 일어난 독서계급의    사상이며, 안중근․이재명 등 열사의 폭력적 행동이 열렬하였지만 그 후면에 민중적 역    량의 기초가 없었으며, 3․1 운동의 만세소리에 민중적 일치의 의기가 언뜻 보였지만 또    한 폭력적 중심을 가지지 못하였도다. ‘민중․폭력’ 양자의 그 하나만 빠지면 비록 천지    를 뒤흔드는 소리를 내며 장렬한 거동이라도 또한 번개같이 수그러지는 도다.


  신채호는 한편으로 ‘특수세력’의 ‘갑신정변’, 1910년 전후의 ‘독서계급’의 ‘의병투쟁’, ‘안중근 등의 폭력’은 ‘민중적 역량’과 결합하지 못했기 때문에, 다른 한편으로 ‘민중적 일치’의 3․1 운동은 ‘폭력’과 결합하지 못했기 때문에, 즉 이러한 운동은 ‘각오한 민중’이 ‘폭력’을 사용하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판단했다. 일본자본주의를 없애기 위해서는 ‘선각한 민중’의 ‘폭력’에 의하여 ‘각오한 민중’이 ‘폭력’을 써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신채호는 ‘각오한 민중’과 ‘폭력’이 결합하면, 일본자본주의 “경찰의 칼이나 군대의 총이나 간사하고 교활한 정치가의 수단으로도 막지 못하리라”라고 하여 민중직접혁명인 한국혁명을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3) 이상적 한국 건설


  이상과 같이 신채호는 「조선혁명선언」에서 한국혁명의 길로서 ‘각오한 민중’이 ‘선각한 민중’의 ‘폭력’을 본받아서 ‘직접’ 일본자본주의 억압착취 체제를 타도하고, 그 대신에 ‘이상적 한국’을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파괴하고 건설해야 한다는 것일까? 그리고 파괴하고 건설하는 ‘주체와 행위’의 성격은 무엇일까?


(1) 혁명적 파괴 대상


  신채호는 ‘각오한 민중’이 ‘폭력’으로써 ‘일본자본주의 억압착취 체제’를 타도하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파괴해야 한다고 주장했는가?

  신채호는 첫 번째의 파괴 대상에 대하여, “이민족 통치를 파괴하자 함이다. 왜? ‘조선’이란 그 위에 ‘일본’이란 이민족 그것이 전제(專制)하여 있으니, 이민족 전제의 밑에 있는 조선은 고유의 조선이 아니니, 고유의 조선을 발견하기 위하여 다른 민족통치를 파괴 함이니라”라고 말했다.

  신채호는 두 번째 파괴 대상에 대하여, “특권계급을 파괴하자 함이다. 왜? ‘조선민중’이란 그 위에 총독이니 무엇이니 하는 강도단의 특권계급이 압박하여 있으니, 특권계급의 압박 밑에 있는 조선민중은 자유적 조선민중이 아니니, 자유적 조선민중을 발견하기 위하여 특권계급을 타파 함이니라”라고 말했다.

  신채호는 세 번째 파괴 대상에 대하여, “경제약탈제도를 파괴하자 함이다. 왜? 약탈제도 밑에 있는 경제는 민중 자기가 생활하기 위하여 조직한 경제가 아니요, 곧 민중을 잡아먹으려는 강도의 살을 찌우기 위하여 조직한 경제니, 민중생활을 발전하기 위하여 경제약탈제도를 파괴 함이니라”라고 말했다.

  신채호는 네 번째 파괴 대상에 대하여, “사회적 불평균을 파괴하자 함이다. 왜? 약자 위에 강자가 있고 천한 자위에 귀한 자가 있어 모든 불평등을 가진 사회는 서로 약탈, 서로 박탈, 서로 질투․원수 시하는 사회가 되어, 처음에는 소수의 행복을 위하여 다수의 민중을 해치다가 마지막에는 또 소수끼리 서로 해치어 민중 전체의 행복이 끝내 숫자상의 공이 되고 말뿐이니, 민중 전체의 행복을 증진하기 위하여 사회적 불평등을 파괴 함이니라”라고 말했다.

  신채호는 다섯 번째 파괴 대상에 대하여, “노예적 문화사상을 파괴하자 함이다. 왜? 전통적 문화사상의 종교․윤리․문학․미술․풍속․습관 그 어느 무엇이 강자가 제조하여 강자를 옹호하던 것이 아니더냐? 강자의 오락에 이바지하던 여러 도구가 아니더냐? 일반민중을 노예화하게 했던 마취제가 아니더냐?” “그러므로 민중문화를 제창하기 위하여 노예적 문화사상을 파괴 함이니라”라고 말했다.

  이렇게 신채호는 일본자본주의 억압착취 체제를 타도하기 위해서 ‘각오한 민중’이 ‘폭력’으로써, 정치적 측면에서 ‘일본의 한국통치’라는 자본주의 억압체제의 파괴, 사회적 측면에서 ‘특권계급’과 ‘사회적 불평균’이라는 자본주의 불평등 사회의 철폐, 경제적 측면에서 ‘경제약탈제도’라는 자본주의 착취체제의 파괴, 이데올로기적 측면에서 ‘노예적 문화사상’이라는 자본주의 지배이데올로기를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 혁명적 건설 대상


  신채호는 ‘각오한 민중’이 ‘폭력’으로써 기존의 자본주의 억압착취 체제를 혁명적으로 파괴한 후에 무엇을 새롭게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는가? 신채호는 ‘파괴와 건설은 하나’라면서 “이민족(異民族) 통치의․약탈제도의․사회적 불평등의․노예적 문화사상”을 ‘폭력’으로써 파괴하고, 그 대신에 “고유적 조선의․자유적 조선민중의․민중적 경제의․민중적 사회의․민중적 문화의 조선을 건설”해야 한다고 말했다. 즉 신채호는,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손을 잡고 끊임없는 폭력 - 암살․파괴․폭동으로써,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여,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수탈하지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 지니라”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신채호는 당시에 ‘각오한 민중’이 ‘폭력’으로써 자본주의 억압체제․자본주의 불평등 사회․자본주의 착취체제․자본주의 지배이데올로기를 파괴하고, 그 대신에 새로운 무엇을 건설할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제시하지는 못했다. 다시 말해서 신채호는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수탈하지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하기 위해서 어떠한 ‘생산양식’ 또는 ‘하부구조’와 ‘상부구조’를 수립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다.


(3) 혁명적 파괴․건설의 주체와 행위의 성격


  이미 보았듯이, 신채호는 민중을 한국혁명의 주체로서 강조했다. 그런데 이 민중은, 민중 속에서 ‘선각한 민중’이 민중 전체를 위하여 ‘혁명적 선구’가 되어 ‘폭력’을 사용한 결과 ‘환성(喚醒)한 민중’이었다. 이렇게 ‘각오한 민중’은, ‘선각한 민중’의 ‘폭력’을 본받아서 자본주의 억압착취 체제를 혁명적으로 타도하고, 한국을 혁명적으로 건설하는 주체였다.

  그런데 이러한 혁명적 주체로서 ‘각오한 민중’은 실질적으로 일본자본주의 억압착취 체제를 타도할만한 강력한 ‘폭력’, 즉 일종의 권력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역시 혁명적 건설을 하기 위해서도 그렇게 할만한 강력한 창조적인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렇게 자본주의 체제를 파괴할 만한 ‘폭력’을 가진 ‘각오한 민중’을 우리는 어떠한 성격을 지닌 집단으로 규정해야 할까? 그리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만한 창조력을 가진 ‘각오한 민중’을 우리는 어떠한 성격을 지닌 집단으로 규정해야 할까? 또한 혁명적 파괴와 건설의 과정에서 자본주의의 부활을 안팎에서 시도하는 반혁명적 경향의 세력을 억압하고 혁명을 보위하는 힘을 가진 ‘각오한 민중’을 우리는 어떠한 성격을 지닌 집단으로 규정해야 할까?22)

  한편 ‘각오한 민중’이 ‘폭력’으로써 혁명적 파괴를 하고 창조력으로 혁명적 건설을 하는 ‘행위’를 우리는 어떠한 성격을 지닌 ‘행위’로 규정해야 할까? ‘각오한 민중’이 ‘폭력’으로써 혁명적 파괴를 하는 ‘행위’는 소수에 대한 다수의 지배과정, 즉 자본가계급에 대한 다수 민중의 지배과정 같은 것이 아닐까? ‘각오한 민중’이 창조력으로 혁명적 건설을 하는 ‘행위’는 각오하지 못한 민중을 비롯한 전체 민중의 힘을 새로운 사회 건설에 집중시키는 자기 통제행위로서 계급이 철폐된 사회에서의 동일한 이해관계를 기반으로 하는 연대와 협동․자율과 자치의 과정이라고 해야 되지 않을까?

 

4) 한국사회 내부의 반혁명 세력


  신채호는 「조선혁명선언」에서 한국사회 내부에 존재하는 ‘반혁명’ 세력을 두 가지 로 구분했다. 하나는 일본자본주의 억압착취 체제에 타협하고 기생하려는 세력이었고, 다른 하나는 자본주의를 수용하면서 독립을 하겠다는 개량주의운동 세력이었다.


(1) 일본자본주의에 타협하고 기생하려는 세력


  신채호는 일본자본주의 억압착취 체제에 타협하고 기생하려는 세력으로서 ‘내정독립’을 주장하는 자들, ‘참정권’ 획득을 주장하는 자들, ‘자치’를 주장하는 자들, ‘문화’운동을 주장하는 자들을 지적했다.

  첫째, 신채호는 이른바 ‘내정독립운동’에 대하여, “3․1운동 이후에 강도 일본이 또 우리의 독립운동을 완화시키려고” “매국노를 시키어 이따위 미친 주장”을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신채호는 만약에 “소위 내정독립을 찾고 각종 이권을 찾지 못하면 조선민족은 흔히 보이는 배고픈 귀신이 될 뿐”이라고 말했다.

  둘째, 신채호는 이른바 ‘참정권획득운동’에 대하여, “참정권을 획득한다 하자. 자국의 무산계급의 혈액까지 착취하는 자본주의 강도국의 식민지 인민이 되어 몇몇 노예 대의사(代議士)의 선출로 어찌 굶어 죽는 화를 면하겠느냐”라고 말했다.

  셋째, 신채호는 이른바 ‘자치운동’에 대하여, “자치를 얻는다 하자. 그 어떤 종류의 자치임을 묻지 않고 일본이 그 강도적 침략주의의 간판인 ‘제국’이란 명칭이 존재한 이상에는, 그 지배 하에 있는 조선인민이 어찌 구구한 자치의 헛된 이름으로써 민족적 생존을 유지하겠느냐”라고 말했다.

  넷째, 신채호는 이른바 ‘문화운동’에 대하여, “일본 강도 정치 하에서 문화운동을 부르는 자가 누구이냐? 문화는 산업과 문물의 발달한 총적(總積)을 가리키는 명사니, 경제 약탈의 제도 하에서 생존권이 박탈된 민족은 그 종족의 보전도 의문이거든, 하물며 문화발전의 가능성이 있으랴”라고 말했다.

  신채호는 이러한 일본자본주의 억압착취 체제에 타협하고 기생하려는 ‘내정독립 운동가’․‘참정권운동가’․‘자치운동가’․‘문화운동가’ 등은 일본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식민지 한국민중의 생존의 적이라고 규정했다.


(2) 개량주의운동 세력


  신채호는 ‘외교론자’와 ‘준비론자’ 등을 자본주의를 수용하면서 ‘독립’을 하겠다는 개량주의운동 세력으로 보았다.

  첫째, 신채호는 이른바 ‘외교론자’들에 대하여, “이조 5백년 문약정치(文弱政治)가 외교로써 호국의 좋은 계책을 삼아 더욱 그 말세에 대단히 심하여 갑신 이래 유신당(維新黨)․수구당(守舊黨)의 성쇠가 거의 외국의 도움의 유무에서 판결”되었으며,  “평화회의․국제연맹에 대한 과신의 선전이 도리어 2천만 민중의 용기 있게 힘써 앞으로 나아가는 의기를 없애는 매개가 될 뿐이었도다”라고 말했다.

  둘째, 신채호는 이른바 ‘준비론자’들에 대하여, “강도 일본이 정치․경제 양 방면으로 구박을 주어 경제가 날로 곤란하고 생산기관이 전부 박탈되어 입고 먹을 방책도 단절되는 때에, 무엇으로 어떻게 실업을 발전하며, 교육을 확장하며, 더구나 어디서 얼마나 군인을 양성하며, 양성한들 일본 전투력의 백분의 일의 비교라도 되게 할 수 있느냐? 실로 한바탕의 잠꼬대가 될 뿐이로다”라고 말했다.

  신채호는 이렇게 자본주의를 수용하면서 ‘독립’을 주장하는 ‘외교론’과 ‘준비론’ 등은 ‘자본들 간의 경쟁’ 체계를 통하여 일본자본을 이길 수 있다는 개량주의운동 논리로서 자본주의 억압착취 체제하의 식민지 한국의 상황에서는 실현이 불가능한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3. 국제적 반자본주의 세계혁명론


1) 반세계자본주의 국제혁명론 제기


  신채호는 1926년 후반기 무정부주의동방연맹 참여를 계기로 반자본주의 혁명전선을 ‘일국적’ 혁명에서 ‘세계적’ 혁명으로 확장했다. 신채호는 1928년에 쓴 무정부주의자 동방연맹대회의 「선언문」에서 “자본주의의 강도제국(强盜帝國) 야수군(野獸群)들”의 그동안의 발전상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 야수들이 중세기 이래 자유도시에서 발달하여 오는 과학과 공업적 기계 - 증기기계․    전기기계 등을 빼앗아, 나날이 정치적․경제적․상공업적․군용적 모든 시설을 확대하며    증가하여, 커다란 지구가 우리 무산민중의 두뇌와 육체를 가루가 되도록 갈고 있는 한      개의 맷돌 짝이 되고 말았다.


  신채호는 자본주의의 특징인 임금노동 착취체계와 이를 기반으로 한 경쟁적 자본축적체계에 의하여 자본주의의 정치적․경제적 억압착취 체제가 일국적 자본주의의 수준에서 세계적 또는 지구적 자본주의 수준으로 확대되었다고 보았다. 이러한 상황을 신채호는 “하루아침에 영국․프랑스․일본 등 자본제국 경제적 야수들의 경제적 착취와 정치적 압력이 전속력으로 전진하여 우리 민중을 맷돌의 한 돌림에 다 갈아 죽이려는 판”이라고 말했다.

  다시 말해서 신채호에 의하면 자본주의 억압착취 체제가 국제적으로 확대된 조건에서 일국적인 일본자본주의를 타도한다고 하더라도 세계자본주의가 작동하는 이상 무산대중의 생존은 역시 박탈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신채호는 당시 자본주의의 발전과 무산대중의 상태 그리고 양자의 적대적인 계급적 모순관계를 세계적 차원에서 인식하게 되었다. 이것이 신채호의 혁명운동을 세계적 차원으로 넓혔다.23)     

  신채호는 「선언문」에서 세계자본주의 착취체제가 세계 무산대중, 더욱이 동방의 각 식민지 무산대중의 생존을 빼앗는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우리의 세계 무산대중! 더욱이 우리 동방 각 식민지 무산대중의 피․가죽․뼈․골을 빨     고, 짜고, 씹고, 물고, 깨물어 먹어 온 자본주의 강도제국 짐승 무리는 지금 그 창자가 뚫    어 지려 한다. 배가 터지려 한다. 그래서 저들이 그 최후의 발악으로 우리 무산대중 더욱    동방 각 식민지 민중을 대가리에서 발끝까지 박박 찢으며, 아삭아삭 깨물어, 우리 민중은    죽어 멸망하는 것보다도 더 음울하고 참혹한 생존 아닌 생존을 하고 있다. 아, 세계 무산    민중의 생존! 동방 무산민중의 생존! 소수가 다수에 지는 것이 원칙이라면, 왜 다수의 민    중이 초소수인 야수와 같은 강도들에게 피를 빨리고 고기를 찢기느냐? 왜 우리 민중의 피    와 고기가 아니면 굶어 죽을 강도들을 없애버리지 못하고 도리어 그놈들에게 죽임을 당하    느냐?


  그러면 왜 세계 무산대중이 다수임에도 불구하고 극소수인 세계자본주의의 지배계급에 의하여 생존을 박탈당하고 있을까? 신채호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측면에서 말했다.


  저들은 역사적으로 발달․성장하여 온 수 천년이나 묵은 괴상한 동물이다. 이 괴상한 동    물들이 맨 처음에 교활하게 자유․평등의 사회에서 사는 우리 민중을 속이어 지배자의 지    위를 얻어 가지고, 그 약탈행위를 조직적으로 대낮에 행하려는 소위 정치를 만들며 약탈    한 소득을 분배하려는 곧 ‘사람고기 나누어 간직하는 곳’인 소위 정부를 두며, 그리고       영원 무궁히 그 직위를 누리려 하여, 반항하려는 민중을 억압하는 소위 법률․형벌 등 부    어 터진 조문(條文)을 만들며, 민중을 노예적으로 복종시키려는 소위 명분․윤리 등 문둥    이 같은 도덕들을 조작하였다. 


  신채호는 이러한 세계자본주의의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억압체제가 극소수의 세계자본주의의 지배계급으로 하여금 다수의 세계 무산대중의 생존을 빼앗도록 보장한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세계자본주의의 경제적 착취체제와 이를 보장하는 세계자본주의의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억압체제가 세계 무산대중의 생존을 박탈하고 있었다. 때문에  세계 무산대중의 생존의 적인 세계자본주의의 정치적 억압체제와 경제적 착취체제를 타도하는 세계혁명을 이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신채호는 “저들의 세력은 우리 대다수 민중이 부인하며 파괴하는 날이 곧 저들이 그 존재를 잃는 날이며, 저들이 존재를 잃는 날이 곧 우리 민중이 열망하는 자유․평등의 생존을 얻어 무산계급의 진정한 해방을 이루는 날이다. 곧 개선(凱旋)의 날이니, 우리 민중의 생존할 길이 여기 이 혁명에 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2) 세계혁명의 주체와 폭력


  이곳에서 살펴보아야 할 논점들의 대부분은 앞에서 본 1923년의 「조선혁명선언」의 그것들을 세계적인 범위로 확대하면 되는 것들이다. 예컨대 사회적 성격은 다르지만, ‘한국’혁명의 주체는 ‘한국’민중이었고, ‘세계’혁명의 주체는 ‘세계’ 무산대중이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살펴보지 않은 논점들은 1923년의 그것으로 대신 하겠다.


(1) 세계혁명의 주체


  신채호는 「선언문」에서 세계혁명의 객관적 주체로서 세계 무산대중, 더욱이 동방 각 식민지 무산대중의 역할을 강조했다. 왜 신채호가 세계 무산대중 속에서 동방 각 식민지 무산대중의 역할에 주목했을까?


  우리 무산민중의 최후 승리는 필연적으로 정해진 사실이지만, 다만 동방 각 식민지 반식    민지의 무산민중은 옛부터 석가․공자 등이 제창한 곰팡내 나는 도덕의 독 안에 빠지며,    제왕․추장 등이 건설한 비린내 나는 정치의 그물에 걸리어 수 천 년 헤매다가, 하루아침    에 영국․프랑스․일본 등 자본제국 경제적 야수들의 경제적 착취와 정치적 압력이 전속    력으로 전진하여 우리 민중을 맷돌의 한 돌림에 다 갈아 죽이려는 판인 즉, 우리 동방      민중의 혁명이 만일 급속도로 진행되지 않으면 동방민중은 그 존재를 잃어버릴 것이다.     

  신채호는 동방 각 식민지 무산대중은 ‘영국․프랑스․일본 등’ 세계자본주의의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착취의 ‘주요 대상’으로서 생존을 박탈당하고 있기 때문에 반자본주의 세계혁명의 중심세력이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신채호는 생존을 위해서 동방의 각 식민지 무산대중은 생존의 적인 세계자본주의를 타도하는 세계혁명의 주체로서 앞장설 것을 강조했다.  

  그런데 신채호는 왜 동방 각 식민지 무산대중을 비롯한 세계 무산대중이 반자본주의 세계혁명의 주체가 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는가? 이미 보았듯이 신채호는 “저들의 세력은 우리 대다수 민중이 부인하며 파괴하는 날이 곧 저들이 그 존재를 잃는 날”이라고 주장했다. 즉 신채호는 세계 무산대중이 세계자본주의 억압착취 체제를 ‘부인하고 파괴하면’ 세계자본주의는 그 존재를 상실한다고 말했다.

  그러면 왜 세계 무산대중이 세계자본주의 억압착취 체제를 ‘부인하고 파괴하면’ 자본주의는 멸망할까? 그것은 세계자본주의가 무산대중에 대한 경제적 착취와 정치적 억압에 기반을 두고 있는 ‘세계체제’이기 때문이다. 즉 자본주의는 무산대중의 임금노동을 착취하고 이에 저항하는 무산대중을 억압하지 않으면 작동될 수 없는 ‘사회체제’라는 것이다. 따라서 세계 무산대중이 자본주의 억압착취 체제를 ‘부인하고 파괴하면’ 세계자본주의는 존재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채호의 주장은 반자본주의 세계혁명 주체의 사회적 성격을 계급적 관점에서 파악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혁명의 주체를 무산대중이라고 하여 프롤레타리아=노동자계급으로 규정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사회적 집단을 자본주의 생산관계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따라 성격 규정했다는 것이다. 무산대중=노동자계급이 자본주의를 타도할 수 있는 능력은 그들이 자본주의 생산관계에서 차지하는 위치로부터 생겨난다.24) 이러한 계급적 관점에 입각한 혁명주체에 대한 사회적 성격 파악은 1923년의 「조선혁명선언」에서는 적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당시 신채호는 반일본자본주의 한국혁명의 주체를 ‘무산자’라는 계급적 관점의 용어가 빠진 일국적 존재인 ‘한국민중’으로만 호명했다.25) 

  그러면 신채호는 세계 무산대중이 어떻게 세계자본주의를 ‘부인하고 파괴하는’ 주체가 될 수 있다고 보았는가? 즉 ‘세계 무산대중이 각오’를 어떻게 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하여 신채호는 「용과 용의 대격전」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야소기독의 참사의 하수자들은 민중이지만 그 하수의 수범(首犯)은 드래곤이라 한다. 드     래곤은 아직 출처가 불명한 괴물인데, 수일 전부터 그 지방에 와서 상제를 ‘잡아먹어도 시    원치 못한 악물’이라고 욕설하며, 야소기독을 ‘제 아비보다 더 간흉한 놈’이라고 지적하고,    상제 및 기독의 죄악을 열거한 90조의 격문을 돌리고 그날 마침 기독의 내림(來臨)을 기    회하여 민중의 선봉이 되어 이같이 기독을 참살하는 흉행을 범한 것이다. … 드래곤은 늘    희랍․로마 등지에 체재하여 드디어 서양의 용이 되어 늘 반역자․혁명자들과 교유하여     ‘혁명’ ‘파괴’ 등 악희(惡戱)를 즐기어 종교나 도덕의 굴레를 받지 않는 고로 서양사에서     매양 반당(叛黨)과 난적(亂敵)을 드래곤이라 별명하였다.


  신채호는 ‘반역자․혁명자․반당․난적’ 등 세계 무산대중 가운데서 드래곤으로 상징되는 ‘선각한 무산대중’이 무산대중의 ‘선봉’이 되어 ‘폭력’ 등을 사용하여 ‘세계 무산대중’으로 하여금 ‘각오’케 한다고 했다.26) 이를테면 당시의 무정부주의동방연맹이 세계 무산대중 속에서 ‘선각한 무산대중’으로서 무산대중 전체를 위하여 ‘혁명적 선봉’의 역할을 하는 단체였다.27)  


(2) 세계혁명과 폭력


  이와 같이 ‘선각한 무산대중’의 ‘폭력’에 의해서 ‘각오한 세계 무산대중’은, 또한  ‘폭력’으로써 세계자본주의를 없애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신채호는 「선언문」에서 “저들의 세력은 우리 대다수 민중이 부인하며 파괴하는 날이 곧 저들이  그 존재를 잃는 날”이라고 말했다. 역시 세계 무산대중은 ‘폭력’으로써 세계자본주의의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억압기구와 경제적 착취기구를 부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신채호는 「용과 용의 대격전」에서 “민중들이 야소를 죽인 뒤 미구에 공자․석가․마호메트” 등 “종교 도덕가 등을 때려죽이고, 정치․법률학교․교과서 등 모든 지배자의 권리 옹호한 서적을 불지르고, 교당․정부․관청․공해(公廨)․은행․회사” 등을 파괴한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서 신채호는 세계 무산대중 속에서 ‘선각한 무산대중’이 ‘폭력’으로써 세계의 ‘전체 무산대중을 각오’케 하고, 이 ‘각오한 세계 무산대중’이 ‘선각한 무산대중’의 ‘폭력’을 본받아서 자본주의 억압착취 체제를 타도하는 세계혁명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3) 이상적 지국(地國) 건설


  여기에서 살펴보아야 할 논점들의 대부분도 앞에서 본 1923년의 「조선혁명선언」의 그것들을 세계적인 범위로 확대하면 되는 것들이다. 예컨대 이상적 ‘한국’이 이상적 ‘지국’으로 되었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살펴보지 않은 논점들은 1923년의 그것으로 대신하겠다.

 

  신채호는 「선언문」에서 “저들이 존재를 잃는 날이 곧 우리 민중이 열망하는 자유․평등의 생존을 얻어 무산계급의 진정한 해방을 이루는 날이다”라고 하여 세계자본주의의 지배계급이 없어질 때 세계 무산대중이 평등하고 자유로운 생존이 보장되는 진정한 해방의 지상(地上)사회가 도래할 것이라고 보았다. 또한 신채호는 「용과 용의 대격전」에서도 이상적 지상사회와 관련하여 “과거의 사회제도를 일체 부인하고, 지상의 만물을 만중(萬衆)의 공유(共有)”로 하고, 나아가 “지배계급이 이미 멸망함에, 민중들은 이에 전 지구를 총칭하여 지국(地國)”을 건설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신채호는 이러한 무계급 사회와 ‘지국’을 어떻게 유지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지를 말하지 않았다. 즉 무엇을 어떻게 생산하는지, 생산하기 위해서 노동을 어떻게 배치하는지, 생산물들을 어떻게 분배하고 소비하는지, 그 결과 무계급 사회 내부에 어떠한 조직이 형성되는지, 그러한 사회에 알맞는 ‘지국’의 짜임새와 이데올로기는 무엇인지 등에 대하여 아무 것도 제시하지 않았다.28)

4) 세계자본주의의 반혁명 정책


  신채호는 「선언문」과 1928년에 쓴 소설 「용과 용의 대격전」에서 세계자본주의 지배계급의 반혁명 정책을 두 가지 측면에서 말했다. 신채호는 세계 무산대중의 반자본주의 세계혁명투쟁을 저지하는, 국제자본주의의 폭력적․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의 역할과, 세계 무산대중을 분할하여 지배하는 정책을 들었다.


(1) 폭력적․이데올로기적 지배정책 


  신채호는 「선언문」에서 세계자본주의의 억압착취 체제를 파괴하기 위한 세계 무산대중의 혁명투쟁을 막으려는 지배계급의 폭력적 국가기구와 지배이데올로기의 반혁명적 역할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동서 역사에 전하여 온 제왕․성현이, 강도나 야수를 감싸고 돈 강도․야수의 우두머리     들이다. 민중이 종종 그 약탈에 견딜 수 없어 반항적 혁명을 행한 때도 많았지만, 마침내    몇 명의 교활한 놈에게 속아 다시 그 강도적 지배자의 지위를 허락하여 과거의 폭력적 지    배자 대신에 새로운 폭력적 지배자를 앉히는 현상으로 역사를 되풀이하고 말았다. 이것이    바로 다수의 민중이 소수의 야수들에게 유린당하여 온 원인이다. … 아, 잔학․음침․참     담, 부도덕한 야수적 강도․강도적 야수, 이 야수의 유린 밑에서 고통과 비참을 받아 오는    우리 민중도 참다못하여, 견디다 못하여, 이에 저 야수들을 쫓아내려고 하여 없애 버리려    고 하여 재래의 정치며, 법률이며, 도덕이며, 윤리며 기타 일체 문구를 부인하는 군대며,     경찰이며, 황실이며, 은행이며, 회사며, 기타 모든 세력을 파괴하자는 분노의 절규 ‘혁명’     이라는 소리가 대지 위에 일반 사람의 고막을 울리었다. 이 울림이 강조됨에 따라 저들     야수들의 신경도 비상히 긴장하여 극도의 전투적 눈빛으로 우리 민중의 태도를 자세히 살    펴본다. 그래서 군인의 총과 경찰의 칼로 혁명적 민중을 억누르는 동시에 신문․서점․학    교 등을 세우거나 혹 사들이고 혹 감독하여, 저들의 앞잡이인 기자․학자․문인․교수들    을 시키어 그 야수적 약탈, 강도적 착취를 공인하며, 변호하여, 예찬하여, 민중적 혁명을     소멸하려 한다.


  신채호는 「용과 용의 대격전」에서도 역시 세계자본주의 지배계급의 정치적․이데올로기적인 반혁명 정책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하, 딱한 사람, 우리가 만든 정치 법률이 코뚜레보다 더 잔악하지 안하냐? 윤리도덕이     굴레보다 더 흉참(凶慘)하지 안하냐? 군대의 총과 칼이 채찍보다 몇 만 배나 더 전율한     무기가 아니냐? 그래도 고놈들이 반역을 도모하는구나! 그러면 일등 닥터를 불러 마취      약을 제조하여 고놈들을 영원히 마취시키어 우리에게 잡히어 먹는 줄 모르고 잡히어 먹이    게 합시다. 흥, 그 약도 내가 써보았지. 공자놈을 시키어 명분설(名分說)을 지어 ‘빈자․     천자(賤子)의 천분(天分)을 안수(安受)하여 세력자의 명령을 잘 받아 충신․열사의 명예를    후세에 끼쳐라’고 속이며, 석가놈과 예수놈을 시켜 ‘너희들이 남에게 고통을 받을지라도     이것을 반항 없이 간과하면 죽어서 너희의 영혼이 천국으로, 연화대(蓮花臺)로 가리라’고    속이었다. 이러한 마취약들이 또 어디 있겠느냐? 이천년 동안이나 크게 그 약효를 보았더    니, 지금에는 그 약의 힘도 다하여 그놈들이 점점 자각하여 반역이니 혁명이니 하고 떠드    는구나. 그러면 오늘은 과학․문학 등이 크게 위력을 가지 때니, 많은 과학자․문학자들     을 꾀어다가 부자․귀자(貴者) - 지배계급 - 의 주구를 만들어 학설로서 지배계급의 권리    를 옹호하며, 시와 소설로서 지배계급의 장엄을 구가하면 될까 합니다. 야소기독은 … 일    반 민중에게 사람이 사람 잡는 술법을 가르쳐 주셨으며, 늘 ‘고통자가 복 받는다, 핍박자    가 복 받는다’는 거짓말로 망국민중과 무산민중을 거룩하게 속이사 실제의 적을 잊고 허    망한 천국을 꿈꾸게 하여 모든 강권자와 지배자의 편의를 주셨으니….


  이상과 같이 신채호는 ‘군대․경찰’, ‘정치법률’, ‘윤리도덕’, ‘유교․불교․기독교’ 같은 종교, ‘과학․문학’ 등 자본주의의 폭력적․이데올로기적 지배기구들이 세계 무산대중의 혁명투쟁을 저지하는 반혁명적 역할을 한다고 주장했다. 


(2) 세계 무산대중에 대한 분할지배 정책


  신채호는 소설 「용과 용의 대격전」 중에 “미리님이 안출한 민중진압책”에서 세계의 지배계급이 자본주의 억압착취 체제를 유지하고 무산대중의 혁명투쟁을 저지하려고 세계 무산대중을 분할하여 지배하는 정책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상의 민중을 대개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으니, 일은 강국의 민중이요, 또 일은 식민지    의 민중이올시다. 강국의 민중은 아주 그 타성적인 애국심을 가진 동시에 나라를 지배계    급의 나라로 오인하여 그 애국심이 거짓된 애국심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즉 강국의 민    중에게는 얼마큼 보통선거의 권리 같은 것, 노동임금의 증가 같은 것이나 허락하여 주고,    일면으로 그 거짓된 애국심을 장려하여 약소국의 민중을 정복케 하며, 식민지의 민중을     압박케 하여 지배계급 - 자본주의 - 의 선봉이 되게 하면 그들의 고픈 배가 다시 이 이    익 없는 허영에 불려져 우리가 비록 몇 십 년 동안 그들의 피를 빨아먹어도 아픈지를 모    를 것이요. 식민지의 민중은 그 고통의 정도가 다른 민중보다 만 배나 되지만 매양 그 허    망한 요행심을 가져 굶어죽는 놈이 요행의 포식을 바라며, 얼어 죽는 놈이 요행의 따뜻한    옷을 바라며, 교수대에 목을 디민 놈이 요행의 삶을 바랍니다. 그래서 반항할 경우에도 반    항을 잘 못합니다. 그런즉 식민지의 민중처럼 속이기 쉬운 민중이 없습니다. … 속이기      쉬운 것은 식민지의 민중이니, 상제시여, 마음 놓으십시오. 세계 민중들이 다 자각한다 하    여도 식민지 민중만은 아직 멀었습니다. 우리가 식민지의 민중만 잡아먹더라도 몇 십 년    동안은 아무 걱정 없을 것이올시다.


  신채호는 국제자본주의가 세계 무산대중을 ‘강국의 민중’과 ‘식민지 민중’으로 분할하여 각 민중에 대한 서로 다른 지배정책을 실시한다고 주장했다.29) 그리하여 세계 무산대중끼리 서로 싸우도록 만들어 그들의 계급적 연합을 파괴해서 무산대중의 세계혁명투쟁을 무력화시키고 세계자본주의 억압착취 체제를 유지한다는 것이었다.30)



4. 맺음말


  지금까지 신채호의 반자본주의 혁명운동을 뒷받침하는 반자본주의 혁명론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신채호의 반자본주의 혁명론은 1919년 하반기부터 1926년 전반기까지의 일국적 반자본주의 한국혁명론과, 1926년 후반기 이후의 국제적 반자본주의 세계혁명론으로 구분된다.

  먼저, 신채호의 일국적 반자본주의 한국혁명론을 주로 1923년 1월 「의열단선언」으로 쓴 「조선혁명선언」 등을 통해서 살펴보았다. 신채호는 일본자본주의를 타도하는 한국혁명을 주장했다. 그것은 당시 한국을 침략한 일본자본주의 억압착취 체제가 한국민중의 경제적․정치적․문화적․신체적 생존을 박탈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신채호가 주장한 반일본자본주의 한국혁명은 민중직접혁명이었다. 신채호는 역사적 경험으로나 자본의 경쟁논리로나 자본주의를 수용하는 개량주의적인 외교론과 준비론 등으로는 식민지 한국민중의 생존을 박탈하는 일본자본주의를 타도할 수 없다면서 혁명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과거의 혁명과는 반대로, 신채호가 주장한 혁명은 다수의 민중이 안팎의 소수의 지배자들을 없애는 것으로서, 민족해방인 동시에 사회혁명이었다.

  신채호가 주장한 반일본자본주의 한국혁명의 객관적 주체로서의 민중은 일본자본주의 억압착취 기구, 이에 타협하고 기생하려는 한국인, 자본주의를 수용하는 개량주의적 한국인 운동가를 제외한 모든 한국인=피지배자였다. 신채호에 의하면 혁명의 제일보는 민중 속에서 먼저 깨달은 민중이 전체 민중을 위하여 혁명적 선구가 되어 폭력으로써 일본자본주의 억압착취 기구들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다음에 선각한 민중의 폭력에 의하여 각오한 일반민중도 폭력으로써 이민족 통치․특권계급․경제약탈제도․사회적 불평균․노예적 문화사상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폭력으로 파괴한 것 대신에 고유적 한국의・자유적 한국민중의․민중적 경제의․민중적 사회의․민중적 문화의 이상적 한국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신채호의 일국적 반자본주의 한국혁명론이었다.

  그런데 혁명적 파괴를 하기 위해서는 각오한 민중이 실질적으로 일본자본주의 억압착취 체제를 타도할만한 강력한 폭력, 즉 일종의 권력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역시 혁명적 건설을 하기 위해서도 그렇게 할만한 강력한 창조적인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렇게 기존의 체제를 파괴할 만한 폭력과 이상적 한국을 건설할 만한 창조력을 가진 각오한 민중을 우리는 어떠한 성격을 지닌 집단으로 규정해야 할까.   그리고 각오한 민중이 폭력으로써 혁명적 파괴를 하고 창조력으로써 혁명적 건설을 하는 행위를 우리는 어떠한 성격을 가진 행위로 규정해야 할까.

  신채호는 한국사회 내부에 존재하는 반혁명 세력으로서, 일본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한국민중의 생존의 적인 일본자본주의 억압착취 체제에 타협하고 기생하려는 세력인 내정독립을 주장하는 자․참정권 획득을 주장하는 자․자치를 주장하는 자․문화운동을 주장하는 자와, 자본주의를 수용하면서 독립을 하겠다는 외교론자․준비론자 등의 개량주의운동 세력을 들었다. 

  다음에, 신채호의 국제적 반자본주의 세계혁명론을 주로 1928년 4월에 쓴 무정부주의자 동방연맹대회의 「선언문」과, 계급투쟁을 형상화한 소설 「용과 용의 대격전」을 통해서 살펴보았다. 신채호는 1926년 후반기에 무정부주의동방연맹 참여를 계기로 반자본주의 혁명전선을 일국적 혁명에서 세계적 혁명으로 확장했다. 신채호는 자본주의 억압착취 체제가 세계적으로 확대된 조건에서 세계자본주의를 타도하는 세계혁명을 하지 않고서는 한국 무산대중을 비롯한 세계 무산대중의 생존 박탈을 피할 수가 없다고 보았다.

  신채호는 반일본자본주의 한국혁명론에서와는 달리 반세계자본주의 국제혁명의 객관적 주체로서 세계 무산대중을 내세웠다. 세계자본주의는 국제 무산대중에 대한 경제적 착취와 정치적 억압에 기반을 두고 존립하고 있는 사회체제이다. 따라서 무산대중이 세계자본주의 억압착취 체제를 거부하고 파괴하면 자본주의를 멸망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일국적 한국혁명론에서는 혁명의 사회적 주체를 일국적 단위의 한국민중으로 규정하여 계급적 관점을 적용할 수 없었으나, 세계혁명론에서는 혁명의 사회적 주체를 세계적 단위의 계급적 존재로서 프롤레타리아트=무산대중으로 규정했다. 한편 세계 무산대중 전체와 더불어 특히 동방 각 식민지 무산대중의 세계혁명의 주체로서의 중심적 역할을 강조했다. 그것은 세계자본주의의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착취의 주요대상이 동방의 각 식민지 무산대중이었기 때문이다.

  신채호에 의하면 국제적 반자본주의 세계혁명의 주체와 폭력의 관계는 일국적 반자본주의 한국혁명론의 그것과 같았다. 즉 세계 무산대중 가운데서 선각한 무산대중이 무산대중의 혁명적 선봉이 되어 폭력으로써 세계자본주의 억압착취 기구를 파괴하면, 이것을 본 여타의 세계 무산대중도 각오하여 폭력으로써 세계자본주의 억압착취 체제를 파괴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폭력으로써 파괴한 것 대신에 세계 무산대중은 전 지구에 단 하나인 이상적 지국(地國)을 건설한다고 했다. 그곳에는 생산자원을 지구인(地球人) 모두가 공유하고, 폭력적․이데올로기적 지배기구도 없는 자유스럽고 평등한 무계급 사회였다. 이것이 신채호의 국제적 반자본주의 세계혁명론이었다.

  신채호는 무산대중의 반세계자본주의 국제혁명을 무력화시키고 세계자본주의 억압착취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세계자본주의의 반혁명 정책으로서, 군대․경찰, 정치법률․윤리도덕, 유교․불교․기독교 같은 종교, 과학․문학 등의 자본주의의 폭력적․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들의 역할과 세계 무산대중을 강국의 민중과 식민지 민중으로 분할하여 무산대중의 연합을 파괴하는 분할 지배정책을 들었다.


  신채호가 살았던 1880-1936년의 역사현실은 세계적인 차원에서 볼 때 자본주의적 제국주의시대였다. 신채호는 1919년 하반기부터 1936년까지 한국민중과 세계 무산대중의 입장에서 당시 역사현실의 대세인 일본자본주의를 비롯한 세계자본주의 억압착취 체제로부터 민중과 무산대중이 자기해방 하도록 투쟁했다. 다시 말해서 신채호는 자본의 임금노동 착취체계와 자본의 경쟁적 축적체계가 작동할 수 없는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의 철폐, 즉 생산수단을 사회적으로 공유하는 무계급 사회를 만들기 위하여 반자본주의 혁명투쟁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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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ot;젊은이들에게 '총' 대신 '보습'을 들게 하자&quot;

농민이 되려는 자가 없어야 자본이 먹고 살지

사람 하나하나가 돈인걸 뭐....도시로 내쫓아야 기본적 의식주부터 갖가지 소비생활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황금밭 아닌가? 게다가 그들이 농촌에 짱 박혀 있으면.. 1명이 짱 박혀 거기서 자급자족 생활을 하면 소비자 하나가 줄어들 뿐만아니라 지배계급을 위해 충실히 봉사하는 노예계급 즉 저임금의 3D 허드렛일을 담당할 최하층 빈민 노동자가 부족할테니 착취를 통해 남아 도는 돈으로 그들을 사야만 편해질 뿐만아니라 다른 궁리(어떻게 하면 좀 더 재밌게 스펙타클하게 지배할까? 어떻게 하면이 체제를 끊김없이 확대재생산할 수 있을까 그 궁리?)를 할새없이 사소한 일 까지 일일이 직접 해야 하는 번거로움을 감수해야 하니?? 그러니 지배계급의 이익을 대변해 주는 국가로선 오늘도 자신들에게 궁극적이고  잠재적 적인 농촌 파괴에 열을 올려  소농을 없애 농촌의 도시화를 꿰하려고 하겠지? 그래야 더 많은 개발을 통한 벌이가 가능해지고 백성들을 도시라는 회색지대에서 노예(한시라도 일을 하지 않으면 굶어죽을 수 밖에 없기에)상태로 몰아 넣은채 지배하려 하겠지? 물론 거기서 또 다시 환상과 유혹을 만들어 냄으로서 불필요한 소비욕을 자극, 보다 더 많은 부를 축적할 뿐만아니라 그 욕망을 충족 시키기 위해서라도 딴 생각 못하게 함으로서 현 체제 유지에 기여하도록 하는??? 불순한 음모?? 그 악순환은 끝없이 되풀이 되는것이 아닌가???
그나저나 나도 회색지대의 죽음의 공간에서 벗어나 늘 푸른 생명의 공간인 농촌으로 달려 가고 싶다. 언젠가는 그 꿈을 이룰 수 있지 않을까 그 전엔.....  한푼을 벌더라도 생각하며 쓰고 최대한 남을 돕는데 아낌없이 씀으로서 어느 정도 죄를 씻을려고 노력하는 수 밖에.... 참고로 여기서 아낌 없이 돕는것이란.... 지배계급이 그런 일을 하는것은 체제 모순을 은폐하고 그런 부조리한 사회구조를 영구히 존속시키려는  부당함에서 나오는 불순한 저의이지만 반대로 피지배계급이 그런 일을 하는 것은 오히려 권장할만하다. 도시에서 사는것, 경제활동을 하는 것, 소비활동을 하는 것 자체가 죄를 짓는것이기에....자연과 이웃에게.....

 

 

가능성 '제로'의 '게토'가 된 농촌
  
  태풍 '나비'가 지나간다는 소식에 온 나라가 숨을 죽이던 지난 9월 초순의 어느 날이었다. 아직 중학생 티를 채 벗지 못한 고교 1년생인 우리 반 아이들은 수업을 일찍 끝내고, 야간자율학습도 하지 않는다는 기대감으로 설레고 있었다.
  
  종례시간, 이미 가방을 둘러메고 담임의 "종례 끝" 신호만을 기다리며 엉덩이를 들썩이는 아이들 앞에서 나는 "실은 나도 오늘 아침에는 수업이 일찍 끝나는 것이 기대되기도 했었다, 그런데 막상 태풍이 다가온다고 하니 너네들 부모님 농사가 좀 걱정이 된다"고 운을 뗐다. 아이들은 '좀 길어지겠군'하는 눈치로 슬금슬금 엉덩이를 붙인다. 나는 일년 농사의 수확 직전에서 태풍을 기다리는 농부의 마음 운운하면서 어쭙잖은 훈시를 했다. PC방으로 쪼르르 달려가지 말고 바로 집에 가서 급한 일도 좀 돕고 어쩌고 하면서. 그리고 나는 30명 우리 반 아이들 중에서 부모님이 농사짓는 아이들을 하나씩 호명해 보았다. 그리고 무슨 농사를 하시는지를 물었다. 누구는 "대추", 누구는 "사과"라고 대답했고, 또 누구는 "낙과 때문에 걱정이 많으시다"며 불현듯 침울해하기도 했다.
  
  한 아이의 차례가 되었다. "너네 아버지는 뭐 하시냐?" 내 물음에 아이는 머리를 긁적이며 "잘 모르겠는데요"라고 답했다. 순간, 교실에 한바탕 폭소가 터졌다. "저거 아부지 짓는 농사도 모르네~~" 하면서 금세 얼레리꼴레리하는 분위기가 번졌다. 그 아이는 상기된 채로 약간 더듬으며 말했다. 비닐하우스를 하시는데, 해마다 작목이 바뀌어서 올해는 무얼 심으셨는지 아직 잘 모른다면서 연신 머리를 긁적였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새벽밥 말아 먹고, 봉고차 타고 학교 와서 학교수업, 야간자율학습, 학원까지 마치고 밤 열두시가 넘어서 집에 돌아가는데, 휴일이면 밀린 잠 벌충하고, 컴퓨터 하느라 들판에 나가본 적이 없을 텐데,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 생각했다.
  
  농촌지역 고등학교라서 상당수 아이들이 농사 짓는 부모님을 두고 있지만, 부모님의 가업을 물려받겠다고 생각하는 아이는 거의 없다. <녹색평론>을 비교적 열심히 읽는 편인 내가 수업시간에 가끔 식량자급률 25% 운운하면서 유전자조작 작물(GMO)과 수입산 먹을거리로 위협받는 우리의 식탁 사정을 이야기해도, 재작년 밀양의 어느 면지역에서 출생한 신생아가 3명밖에 없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전하면서 농촌의 죽음이 결국 큰 재앙으로 연결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해도, 아니 좀 더 솔깃하게 앞으로 유기농이 새롭게 각광받는 고소득 직종의 아이템이 될 것이라고 이야기해도 아이들은 덤덤하다.
  
  우리 아이들에게 농업과 농촌은 가능성 제로의 '게토'다. 자신이 나고 자란 땅에 뿌리내리는 삶의 가능성을 무엇보다 그들의 부모가 완전히 차단해놓고 있다. 이 아이들의 부모들은 자기 세대의 퇴장과 함께 우리 농업이 사망에 이를 것임을 이미 알고 있다. 국가권력과 자본의 조직적인 교살 음모 속에서 수십 년간 가위눌린 그들은 자기 아이들을 마치 위험지역에서 대피시키듯 도회적 삶의 어느 한 구석자리에라도 편입시키기 위해 가열찬 교육열을 불사르고 있다. 죽음에 임박한 소나무가 제 몸에 주렁주렁 솔방울을 매어달듯이 그들의 몸부림은 절박하다. 이제 이 아이들도 학교를 졸업하면 막막한 도회에서 이리저리 떠밀리는 '비정규직' 전사로 살아갈 것이다. 탈근대 운운하기 좋아하는 유식한 사람들이 잘 쓰는 말로는 '노마드'(유목민)가 되겠지만.
  
  "우리도 자라면 농부가 되겠지" 읊던 그들은 어디로 떠밀렸나
  
  농업의 죽음, 농촌의 해체, 뿌리 뽑힌 삶, 이런 비감한 느낌이 엄습할 때마다 나는 30여 년전에 "우리도 자라면 농부가 되겠지"라고 읊었던 경북 산골 마을 이오덕 선생님의 아이들을 생각한다. 그때의 다짐처럼 정말로 농부가 되었던 그 시절의 아이들은 지금 우리 농업을 지키는 마지막 세대가 되어 지금도 마을의 '막내'로서 마을회관에 모인 60대, 70대 어르신들의 막걸리 시중을 들고 있다. 수천 년 이래 이 땅에서 이뤄졌던 자연적인 순환의 고리가 이제 막 끊어지려는 즈음이다. 그 시절 아이들의 감각과 정서는 이제 곧 화석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느 작가의 표현처럼 '반복되는 실패'일지라도 '기억을 향한 투쟁'을 수행할 수밖에 없다. "우리도 자라면 농부가 되겠지"라고 읊었던,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기적 같은 그 시절에 대한 기억 말이다.
  
  오줌이 누고 싶어서
  변소에 갔더니
  해바라기가
  내 자지를 볼라고 한다
  나는 안 비에(보여)줬다 (이오덕 지도, 경북 안동 대곡분교 3년 이재흠, 1969년 10월 4일)
  
  청개구리가 나무에 앉아서 운다
  내가 큰 돌로 나무를 때리니
  뒷다리 두 개를 발발 떨었다
  얼마나 아파서 저럴까?
  나는 죄 될까봐 하늘 보고 절을 하였다. (이오덕 지도, 경북 안동 대곡분교 3년 백석현, 1969년 5월 3일)
  
  내 어릴 적 못물골 골짝에 예닐곱 살 먹은 일근이란 아이가 살았는데, 하루는 우리 동네로 놀러나온 거야. 늘 산골에서 혼자 식구들하고만 지내다 보니 심심해서 나왔겠지. 동네 애들하고 비석치기 하다가 싸움이 붙은 거야. 못물골 일근이하고 우리 동네 춘근이하고. 어린아이들 싸우는 것 보면 몸으로 엉겨붙어 싸우기만 하는 건 아니잖아. 입으로는 온갖 욕을 다 하잖아. 그래 춘근이가 먼저 욕을 하기 시작한 거야. "야 이 씨발놈, 개새끼야, 좆만새끼, 호로자석……." 이렇게 춘근이가 한바탕 욕을 끌어붓자, 멍하니 듣고 있던 일근이가 맞서 대거리한다는 것이 이러는 거야. "야이 참나무야, 대나무야, 밤나무야, 옻나무야…" 못물골 일근이는 그때까지 욕을 몰랐던 거지. 늘 보고 듣는 것이라고는 소나무, 대나무, 밤나무, 노루, 산토끼,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 이런 것뿐이었으니까. (구자행 할머니 구술, <삶을 가꾸는 글쓰기>, 2001년 4월호)
  
  오줌을 누려고 바지춤을 끌렀는데 변소 위 해바라기가 제 '꼬추'를 보려는 것 같아 재빨리 해바라기를 등지는 아이, 그 아이는 해바라기를 제 '꼬추'를 보려는 동무쯤으로 여겼나 보다. 무심결에 벌인 장난 때문에 발발 떠는 개구리를 보고 불현듯 두려움을 느껴 하늘에 대고 절을 하는 아이가 있었다. 동무의 쌍욕에 기껏 '야 이 참나무야, 대나무야' 하는 '욕'으로 응대하고 말았다는 산골 아이도 있었다. 우리는 이 세 편의 글을 음미하면서 '동심'이라는 말로는 담을 수 없는 아름다움과 깊은 평화를 느낀다. 이것은 불과 한 세대 전의 아이들이 남긴 기억이다. 그 시절의 아이들에게 해바라기는 제 동무였고, 하늘에 죄의 용서를 비는 본능이 있었고, 나무 이름으로 겨우 욕을 지어내는 어린 짐승같은 천연의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한 세대가 경과하면서 '사람은 밥을 먹고 된장국을 먹고 김치를 먹어야 사는' 것이 아니라 '휴대폰을 먹고 컴퓨터와 자동차를 먹으며 살아야 한다'는 도착된 논리 속에서 우리는 살게 되었다. 그리하여 지금 아이들은 정말로 휴대폰이 되었고, 컴퓨터가 되었고, 자동차가 되었다. 우리 아이들에게 휴대폰과 컴퓨터는 도구가 아니라 제 오관(五官)을 대체하는 신체의 연장이다. 아이들은 제 옆으로 질주하는 자동차는 무심히 비켜가지만, 교실에 날아든 한 마리의 벌을 보고는 기겁한다.
  
  자연으로부터 쫓겨나 '한국의 교육'이라는 집단가학 시스템 속에 유폐된 아이들은 제 자연적 본성을 돈을 주고 구매하는 말초적 즐거움에, 디지털로 분절되는 기계적 단순성에, 남을 밟고 일어서야 한다는 고독하고도 야수적인 경쟁논리에 가탁하면서 서서히 영혼없는 사회의 복제품이 되어간다. 소란스럽고 무례하며 폭력적인 이 모든 것들을 아이들은 온통 뒤집어쓰고 있다.
  
  우리 아이들을 이렇게 키워도 되는 것일까. 만약 이 시대에 조금이라도 반성적인 지성이 있다면 우리는 분명한 합의에 도달해야 한다. 흙에서 땀 흘리며 살아가는 인생을 짓밟고서 구축한 이 경제적인 풍요가 우리 아이들을 키우는 것에 가장 악마적인 조건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하여 아주 상식적인, 그러나 고통스런 대안, 즉 아이들을 다시 자연으로 되돌려 보내는 것 말고는 다른 길이 없음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지금처럼 아이를 키우면 우리는 망한다"
  
  구체적인 몇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우선, 국가 수준의 교육과정을 농(農)적인 요소로 재구성하는 것이다. 이미 근대교육 태동기에 산업사회의 요구에 복무하는 교육의 폐해를 내다보았던 교육사상가들은 '노작교육(勞作敎育)'이라는 이름으로 '농적인 교육'의 가치와 방법론을 정립해놓았다. 우리 교육이념을 주물러 온 엘리트들과 정책입안자들은 노작교육을 지금껏 철저히 무시해 왔지만, 이 일은 이제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가 되었다.
  
  학교의 조그만 귀퉁이라도 좋고, 배후의 농촌에 있는 실습지라도 좋다. 아이들이 호미와 괭이를 들고 땀을 흘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후진 산업사회에서 유기농업의 선진국으로 거듭나고 있는 쿠바처럼 초등ㆍ중등ㆍ고등교육의 모든 과정 속에 농업 관련 이론과 실습을 의무화해야 한다. 구 소련 시절 국가가 개간하여 개인에게 공여한 소규모 개인농장인 러시아 '다차'의 성공적인 사례를 우리 사회에 적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국가 소유의 공유지나 노동력이 노쇠하여 경작이 불가능한 땅을 매입하여 기업이나 주민조직, 학교에 분양함으로써 주5일제의 실시로 늘어난 시간을 흙 속에서 보내도록 하는 것도 한 대안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또 하나, 젊은 남성에게 부과되는 병역의무 수행의 한 영역으로 농촌을 생각해볼 수 있다. 국가의 공유지나 이미 노쇠하여 경작할 수 없는 토지에서 원하는 젊은이들이 일정한 교육을 받게 한 후에 그들에게 직접 그 토지를 경작케 하는 것이다. 이미 조선시대 군역제도 속에도 정군으로 징집되어 떠난 장정의 노동력을 보충역 개념인 '보인'이 벌충해주던 제도가 있었다. 총을 들기를 원치 않는 평화주의자, 땀 흘리며 노동하는 삶을 배우고픈 젊은이들로 하여금 '총' 대신 '보습'을 들게 하는 것은 국가가 개인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교육의 기회가 될 것이다. 농촌에서 일정한 기간 동안 병역의 의무를 수행하면서 땀 흘린 그들은 내면적인 평화주의자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며, 우리 농업의 회생에 한 주체가 되거나 최소한 든든한 지지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문제를 단순히 하고자 한다. 우리 교육의 이 처참한 현실은 그 속에 농(農)적인 가치를 도입하지 않고서는 결코 그 돌파구를 찾을 수 없다. 한 논객이 일갈한 것처럼 "지금처럼 아이들을 키우면 우리는 망한다." 이 절박한 현실 앞에 우리의 '어른들'과 위정자들은 너무나 한가롭다. 정말, 알 수 없는 일이다.

   
 
  이계삼/밀양 밀성고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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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가 건강해지는 10가지 전략

01. 연결시켜 기억하라
정보를 얻고 저장하는 가장 대표적인 방법은 조합이다. 학습능력과 기억력을 좋게 하려면 배우는 것들 사이의 연관성을 만들어주면 된다. 예를 들어 새로운 이름을 외울 때는 이미 잘 알고 있는 사람이나 그 사람을 처음 만난 장소, 그 장소에서 들었던 음악 소리 등과 연결시켜보는 것이다. 새정보와 이미 알고 있던 정보 사이에 연결고리가 생겨 또다른 정보가 생겨나게 된다.

02. 양손을 사용하라
뇌는 서로 비슷하게 생긴 오른쪽 뇌와 왼쪽 뇌로 나눠져 있다. 신체로부터 전달되는 대부분의 정보가 오른쪽과 왼쪽으로 서로 교차돼 전달된다. 왼손이나 왼쪽다리에서 온 정보는 오른쪽 뇌로, 오른쪽 손에서 온 정보는 반대로 가는 식이다. 양손을 사용한다면 뇌를 균형적으로 발달시킬 수 있다. 글씨를 쓸 때 오른손을 사용하더라도 칫솔질은 왼 손으로 하는 거다. 넘쳐나는 정보의 바다속에서 알아야 할 것이 너무 많아 한쪽 뇌만으로는 부족한 것이다.

03. 잠자기 직전에 공부하라
꿈은 아직까지 그 본질이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한 동물 실험은 꿈이 우리가 전에 경험하거나 배운 것이나 남겨 둔 문제들을 다시 기억하는 과정을 반복하도록 만든다. 잠자기 전, 꿈꾸기 전에 외운 것이 더 잘 기억되는 이유다.

04. 외우지 말고 이해하라
인간의 뇌는 시시각각 변화하는 주변환경에 적응해 살아가기 위해 진화해왔다. 주변 환경을 분석하고 이해하면서 작용하도록 돼 있다. 뇌는 그래서 단순히 암기한 것보다는 이해한 것에 대해 특히 잘 기억한다. 뭔가를 배운다면 이것을 왜 배우고 공부해야 하는지 뇌에게 잘 "설명"하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05. 오래 사귈수록 나쁜게 TV다
텔레비전을 오래 시청하면 뇌에 좋지 않다. 텔레비전은 한꺼번에 방대한 양의 정보를 줘 뇌가 그 정보를 스스로 처리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 텔레비전을 오랫동안 보게 되면 뇌가 정보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문제는 이것이 반복되다보면 나중에 뇌가 새로운 정보를 능동적으로 얻고 처리하는데 방해가 되는 것이다. 앞으로 2~3일 동안만이라도 텔레비전을 켜지 말고 생활하보라. 처음에는 견디기 힘들겠지만, 얼마 지나면 전과는 다르게 머리가 맑아진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06. 일상적인 것에 반대하라
우리의 뇌는 변화를 즐긴다. 틀에 박힌 것은 싫어한다. 단조롭고 변화가 없다는 것은 뇌의 욕구를 만족시켜 주지 못한다는 얘기다. 뇌는 일상적이고 변화가 없는 정보는 소음처럼 여기고 기억하지 않는다. 가령 여러 권의 책을동시에 읽는 새로운 시도를 해본다. 첫번째 책을 30분 동안 읽다가 이어서 다른 책으로 넘어간다. 교과서를 읽다가 시집이나 재미있는 잡지를 읽어본다. 이렇게 하면 뇌가 집중력을 잃을 것 같지만 오히려 반대다.

07. 여행하라
여행은 뇌를 재충전하고 깨어있게 하는 좋은 방법이다. 이국적인 곳을 여행할 수록 풍부한 자극을 경험하게 돼 더욱 좋다. 여행은 뇌의 환경이 결정되는 12세 전후가 지나기 전에 할 수록 좋다. 새로운 장소나 다양한 인종, 이국적인 음식들을 접하면 뇌의 활동에 도움이 된다.

08. 새로운 것을 먹어라
늘 먹던 음식보다 한번도 먹지 못했던 음식, 예를 들어 인도나 태국음식 등에 도전해보자.
새로운 음식은 뇌에 새로운 자극을 줘 일상생활에 지쳐 있는 머릿속을 상쾌하게 만들어준다.

09. 도전하고 배워라
뇌는 도전을 즐긴다. 새로운 외국어를 배우거나 글을 써보거나 모형비행기를 조립하는 것 무엇이라도 좋다.

10. 남들따라 하지 말라
뇌는 도전을 좋아하는 동시에 다른 것을 잘 따라한다는 특성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뇌가 배우고 기억하는 능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과 같아지려 하는 뇌의 명령을 거부해야 한다. 앞으로 20~30년 동안 무슨 일을 할 때가 가장 행복할 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그리고 정말로 하고 싶은 그 일을 하라. 즐기면서 하는 일은 보상도 따른다.
출처 : 카이스트 이수영 교수
가만 보니 우리네 삶은 뇌를 죽이는 방식이 아닌가 싶다. 단편적인 학습, 왼손 쓰면(요즘엔 안그러겠지만....^^) 버르장머리 없다고, 버릇 나쁘다고, 머리 나쁘닥고 혼내는 어른, 잠자기 전에 공부 못하게 하는, 아니 그렇게 되는 환경, 암기 위주 수업 방식(특히 사교육 따라하는 공교육에서), 어른들부터 TV와 함께 하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아이도 따라 보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왕따 되는 문화,  일상적인거 반대?? 집중력 없다... 산만하다....하나만 해라...라 하시던 가르침?, 12세?? 그 나이에 여행할 시간이 어딨어?ㅋㅋㅋ, 새로운거 먹기 보다 쎄빠지게 일해 번 돈 공장에서 찍어 나오는거   사느라 다 쳐발라  열심히 먹고 또 아이들에겐 그런것을 부모노릇 잘하는거랍시고??, 도전하고 배울새 있음 복습 예습이나 더 하라고 가르치는 요즘 가정, 학교교육 세태?, 남들 따라하지마라? 그랬다간 튀지마라고 하기 일쑤  오히려 남 따라하면 중간은 간다?,...ㅋㅋㅋㅋ 암튼 어린시절은 반항의 세월 때론 자신만의 방법으로 한번 해보는것도 괜찮을듯 싶다. 이게 그저 어른들 시키는대로, 하라면 하고 하지마라면 안하는 아이, 그른것에 대해 그르다고 말 못하는 아이로 커 온 나의 결론이라고 하면...... 요즘 애들이나 애들을 키우는 부모들은 뭔가 생각하는게 있지 않을까 싶다.  다른거 다 제쳐두고 제일 중요한 교육.. 교육은 꼭 학교에서만 하라는 법 있나요. 위에 목록에 든거 그거만 제대로 하기 위해서라도 학교 보다 사회를 학교 삼아 열심히 치열하게 사는게 훨 나을듯 싶은데 난 왜 그러지 못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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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멍 뚫리는 나라 살림

김준영 ·성균관대 경제학부 교수
입력 : 2005.09.28 18:19 02'


▲ 김준영· 성균관대 경제학과교수
나라 살림살이에 구멍이 뚫리고 있다. 대형 국책사업은 쏟아지고 있는 반면, 경기침체가 장기화되면서 세금이 당초 예상보다 덜 걷히고 있기 때문이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1000억원 이내였던 세수(稅收) 부족 규모가 지난해 4조3000억원, 올해 4조6000억원으로 확대될 전망이다.

문제는 이 같은 세수 부족이 경기침체와 저성장의 늪에서 갈수록 더 심각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정부는 내년도 예산 규모를 금년보다 총지출 대비 6.5%, 일반회계 대비 8.3% 증가한 221조4000억원으로 편성했다. 경제성장률을 5%로 높게 잡은데다 지출 증가가 성장률을 앞지르는 팽창예산이다. 게다가 복지·분배·균형발전의 우산 속에 성장동력의 확충은 가려지고 말았다. 연구개발 예산을 올렸다지만 겨우 9조원 수준에 턱걸이하고 있다. 결국 내년 세수 부족도 7조원을 넘어서면서 참여정부 출범 이후 내년까지 16조원이 넘는 세수 차질이 발생하게 되어 적자재정이 만성화될 조짐이다.

적자재정이 쌓이면서 나라 빚(국가채무) 또한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지난 3년간 경제성장률은 줄곧 목표치에 미달하였을 뿐만 아니라, 잠재성장률에도 미치지 못했다. 정부의 비현실적인 경제전망 아래 지출 규모만 크게 잡았다가 성장률 하락에 따른 세수 부족의 구멍이 고스란히 나라 빚으로 남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도 올해 30%(1인당 국가채무 500만원)를 넘어섰다.

이처럼 국가채무가 급증하고 있는데도 정부와 정치권은 국가균형발전 5개년계획,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 국방개혁, 대북(對北) 전력지원 사업 등 경제규모(GDP)에 육박하는 수준의 정책사업을 동시다발적으로 터뜨려 놓고 있다. 이들 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할 경우 정부재정과 국가채무가 더 악화될 것은 뻔한 일이다.

게다가 정부는 최근 세수 부족을 메우기 위해 극도의 땜질식 처방에 기대고 있다. 소주와 LNG에 대한 세율을 높이려고 시도하는가 하면, 신용카드 소득공제를 축소하고, 수도권 중소기업에 대한 세금감면 혜택을 없애는 것 등이 바로 그것이다. 세수에 난 큰 구멍을 서민과 중소기업들을 대상으로 세금을 짜내서 메우겠다는 것이다.

이 같은 졸속 처방이 나오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 정부의 예산편성과 세수 예측의 전문성이 낮기 때문이다. 최근 예산대비 세수추계 오차가 3%를 넘어서고 있다. 세수에 영향을 미치는 성장률·물가·경기·환율·경제심리지수 등이 반영된, 보다 과학적인 세수추계 모형을 개발해야 한다. 예산편성 역시 정부 부처간 역학관계와 정치적 주고받기식 관행이 근절되지 않고 있다. 보다 정확히 세수를 예측하고 본예산을 알뜰하게 편성·운영한다면 추경예산은 불필요할 것이다. 예산이 오·남용되고 낭비되는 사례도 즐비하다. 대형건설사업, 국방장비 구입, 사회복지, 지방관광벨트사업 등의 운영에서 국민의 세금이 새는 곳은 없는지를 철저히 모니터링해야 한다.

아울러 정부 재정의 기본방향도 새로 짜야 한다. 세수 부족을 세금 짜내기에서 찾지 말고, 경기침체와 저성장의 늪을 탈출하는 데서 해법을 구해야 한다. 대형국책사업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고, 생산성을 높이고 투자를 늘려 성장동력을 높이는데 최우선을 두어야 한다. 예를 들어 무모한 정부지출을 과감히 조정하고 줄이는 대신, 미래 성장동력인 유망기술에 대한 연구개발투자비는 대폭 증액하는 것 등이다. 그래야 일시적으로 적자 재정을 편성하더라도 국민들의 신뢰와 공감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막대한 비용에 대해 단지 국민들은 돈 낼 준비만 하라는 식의 일방통행은 국민적 저항을 불러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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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땐 굴뚝에 연기날까?

부정부패나 비위 사건이 나올때 레퍼토리는 고정되어 있다.

터트리면 당사자 하는 말, "터무니 없다"며 소송 불사하겠다는 비장한 태도...

그러나 얼마 않있어 흐지부지 되고 알고 보니 폭로자와 부패자 서로 야합해

덮어 버린거였다 물론 거기엔 언론 역시 매수된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럼 정보기관의 로또 자금 유입은???

외환위기 핑계로 서민을 위한 특수은행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막강한 시장지배력을 키워온 국민,주택은행(둘은 합병했다)을 국외 자본 흡혈마에게 팔더니급기여 관련 법마저 폐지해 특수은행으로서의 지위도 상실했는데.... 왜 국민 호주머니 터는 로또 사업을 그 은행에 맡겼을까? 그것도 민영방송인 서울방송이 주관 방송사로 선정되어 복권으로선 드물게 (카드복권 조차 생방송인데) 녹화방송하는 이유는????

분명 뭔가 있다.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더 이상 국가정보원의 존재 이유는 없을듯 싶다 이런 정보기관 필요없다 아니 어쩜 국가가 사기친 꼴이니 국가 존재 당위성 마저 위협받을 수도.... 가뜩이나 도박은 금지하면서 국가라는 이름으로 도박을 장려하는 파렴치한 짓에 대해 분노가 극에 다다랐는데....

도박이 불법이면 로또 , 복권도 불법이다. 마약이 불법이면 당연히 그 보다 더 위험한 담배 역시 불법이다 국가는 불법산업을 자행하지마라.. 당신이 조폭마피아인가? 조직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마약, 도박에 손대게? 아니 마피아는 그래도 낫다 그들은 서민 호주머니를 '직접적'으로 털지 않고 은밀하게 수익을 창출해 내니까...............이건  이회창과 한나라당이라는 본래  그런놈이 차떼기한건 이해하나(그러니 싫어하는거잖아?) 놈현이가 재벌 돈 받고 차떼기하는건 용서할 수 없는것과 같은 이치

 

 

"로또 당첨금, '국정원 자금'으로 유입?"

인터넷에 확산되는 '로또 괴담', "50여명 당첨자는 가짜" 폭로글
 
 

추첨전, 은행 전산팀에 국정원 직원 동석

열린우리당 게시판에 지금껏 로또복권 34회차까지의 일등 당첨자 중 50여명이 가짜이며 당첨금액 중 상당수가 국정원으로 흘러들어갔다는 다소 황당한 '로또괴담'이 떠돌고 있어 화제를 모으고 있다.

평범한 40대 주부라고 밝힌 이 게시물의 저자는 얼마전 동창모임에 나가 국민은행 모 지점에 근무하는 친구로부터 들은 얘기라며 '로또조작설'에 얽힌 실제 내막을 공개했다.

그녀가 밝힌 '동창 친구'의 발언에 따르면 "로또복권 34회차까지 일등 당첨자 백여명중 50여명은 실제가 아닌 가까당첨자로 내정됐는데 이들 가짜당첨자는 국민은행 전산팀에 의해 만들어지며 이를 위해 매주 추첨전 국민은행 전산팀에 두 세명의 국정원 직원이 동석, 전산을 함께 조작한다"는 것. 게다가 이 '동창 친구'는 가짜당첨자를 양산하는 이유가 대북 사업의 비밀 자금을 조성키 위한 극비작업이라고 덧붙였다.

그가 밝힌 복권의 조작방법은 의외로 간단했는데, 우선 토요일 오후 8시에 로또 판매가 마감되면 그때부터 카메라 녹화와 동시에 추첨을 시작, 나오는 번호를 일일이 전산 입력한다. 그 다음 리허설 추첨에서 나온 번호들 중 (내정된)일등 당첨자가 1∼2명 정도의 번호를 고르면 전산 조작으로 2∼3명정도의 가짜당첨자를 만든 뒤, 슬립도 조작으로 만들어 그 녹화분을 방송으로 내보낸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 '동창 친구'는 이같은 가짜당첨자의 당첨금은 고스란히 국정원에서 비밀리에 찾아가 현재까지 약 3500억원 정도가 국정원 비밀기관으로 흘러들어 갔다는 다소 구체적인 데이터까지 제시했다.

현재까지 3500억원 국정권이 꿀꺽…   용도는 대북사업?

이어 '동창 친구'는 "김대중 정권 말기에 무리한 대북 사업으로 현대아산이 심각한 자금난에 처하자 국민의 정부는 삼성과 엘지측에 대북사업 참여를 권했으나 경영진과 주주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혀 그 대안으로 내놓은 게 로또복권"이라고 설명하며 "많은 네티즌이나 로또 메니아들이 복권 추첨의 생방송을 원해도 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충분한 조작이 가능토록 하기 위함"이라고 밝혔다.

물론 이같은 '조작설'이 출처와 근거도 불충분할뿐더러 발설된 정확한 경유 또한 찾을 길이 없어 현재로선 문자 그대로 풍문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최근 로또복권 시스템사업자인 코리아로터리서비스(KLS)가 컨설팅업체인 영화회계법인과 짜고 시스템사업자 선정에 관여한 로또복권 사업자 선정 및 운영 과정의 비리 의혹이 사실로 드러남에 따라 이같은 '루머' 역시 단순히 웃고 넘길 만한 가벼운 소재는 아닌 듯 싶다.

현재 감사원은 로또복권 사업자인 코리아로터리서비스(KLS)가 로또복권 당첨 확률을 조작했다는 의혹에 대한 첩보를 입수, 조사에 착수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따라서 조만간 로또와 관련된 이같은 각종 루머가 과연 사실로 드러날지 귀추가 주목된다.

다음은 열린우리당 게시판에 실린  '로또괴담' 전문.

(펌)저는 평범한 40대 주부 입니다...
얼마전 저는 초등학교 동창모임에 나가서 단짝 친구이며 현재 국민은행 모 지점에 근무하는 친구로 부터 들은 로또복권 조작에 관한 충격적인 내용을 듣고 많은 고민 끝에 이글을 올립니다...
로또복권 34회차까지 일등 당첨자 백 여명중에서 절반가까이인 50여명이 가까당첨자라는군요...
이들 가짜당첨자는 국민은행 전산팀에 의해 만들어지며 그들이 만들어지는 이유는 대북 사업의 비밀 자금을[일부는 내년 총선자금] 조성하기 위한 극비작업이라고 했읍니다...
또한 매주 추첨전에 국은 전산팀엔 두 세명의 국정원 직원이 파견나와서 전산을 함께 조작한다고 한다고 하는군요...
조작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는군요...
토요일 오후 8시에 로또 판매가 마감되면 그때부터 리허설 추첨을 방송나가기 직전까지 계속 한다는군요...
물론 전부 카메라로 녹화 되고 있는 상태로 추첨을 한다는군요...
그리고는 추첨해서 나오는 번호를 일일이 전산 입력하면 진짜 일등 당첨자가 몇명인지 바로바로 나온다는군요...
리허설 추첨에서 나온 번호들중 일등 당첨자가 1~2명정도의 번호를 고른답니다 그런다음 전산 조작으로 2~3명정도의 까짜 당첨자를 만든후 슬립도 조작으로 만들고 그 녹화분을 방송으로 내보낸다는군요...
그런후 가짜 당첨자의 당첨금은 국정원에서 비밀리에 찾아간다는군요...
현제까지 약 3500억정도가 국정원 비밀기관으로 흘러 들어 갔다는군요...
모든분들이 알다시피 김대중 정권 말기에 무리한 대북 사업으로 현대아산이 그룹의 존폐마져 흔들릴 정도로 자금난에 처하자 국민의 정부는 또다른 돈줄을 찾기위해 삼성과 엘지에 대북사업 참여를 권하였으나 경영진과 주주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딛혀 뜻을 이루지 못하자 그 대안으로 내놓은게 로또복권이며 치밀한 기획하에 녹화방송을 보내면 충분한 조작이 가능하다는 판단아래 김대중 정부 말기에 로또를 시행하게 됐다는군요...
지금도 로또복권은 조작되고 있으며 많은 네티즌이나 로또 메니아들이 생방송을 원해도 하지 못하는 이유는 생방송으로 투명한 로또가 된다면 바로 일등 당첨자의 비율이 지금까지와는 엄청난 차이를 보일게 뻔하며[ 이월이 많아짐 ] 그동안 조작이었다는게 즉석에서 탄로나기 때문에 어떤식으로든 로또를 현행대로 유지 할수밖에 없단는군요...
만약 로또가 생방송이 된다면 여기저기 많이 뜯어고친 후에나 가능하다는군요...그래야 예전의 일등당첨자 비율과 비교를 못할테니깐요...
친구는 저에게 노태우는 율곡비리,김영삼은 한보비리,김대중은 공적자금 비리,노무현은 단연코 로또비리 라는군요...
그들은 약 5조원을 목표금액으로 정하고 있다는군요...
앞으로도 로또에 관해서 이런 저런 말들이 많을것이지만 충분한 대북 비밀지원 자금이 모이기전까진는 현행대로 로또를 시행할거라는군요...
그런후 적정한 금액을 모은후 로또를 투명하게 만드는날 그들은 국은 전산실에서 과거의 로또에 관한 모든자료를 폐기 또는 압류해서 철저한 비밀에 붙일것같다는군요...
서민을 상대로 등친 이런 비열한짓은 무덤속까지 가져가야 할테니깐요...이 글은 분명 친구한테서 들은 사실이며 저 또한 매주 로또복권을 구입하는 한사람으로서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모든 국민이 참여정부의 이런 엄청난 대 국민 사기극이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기에 조잡하지만 몇자 올렸읍니다...
감사합니다...

 
2005/09/28 [10:43] ⓒ브레이크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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