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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5 - 따오청에서 캉딩 - 길위에서 길을

045 - 따오청(稻城) - 길위에서 길을

 

오후 늦게 따오청에 도착하였다.  2007년 10월 30일

우선 내일 출발하는 버스표부터 예매하였다.

 

나는 캉딩까지(124위안), 중국인 친구는 신따오치아오(新道橋)까지,

데이비드는 쫑티엔까지 각자 갈길이 달랐다.

출발은 아침 6시란다.

 

첫날 따오청에 도착해서 먹었던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우리 운전사 아저씨 단골집인가 보다.

 

운전사 아저씨는 귀여운 딸을 저녁식사에 데리고 왔다.

중국요리라는게 1인분이라는 개념이 없기에 한사람 추가된다고 나쁠 것 없다.

 

귀여운 아이는 가끔 외식도 할 겸 다른 곳에서 온 여행자(때론 외국인까지)와

만날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될테이니 말이다.

아버지가 아버지 노릇을 톡톡히 하였다.

 

  

 

따오청 시내 분위기

 

 

 

 

선전용 구호가 어김없이 따오청 시내에도 내걸려 있었다.

 

배도 부른 우리는 이구동성으로 온천에 가자고 했다.

운전수 양반 싫지 않은 눈치다. 이번에도 역시 부인을 대동한다.

원님덕에 나팔분다고 부인에게도 점수 딸 기회인 것이다.

 

 

배도 부르고 오랜만에 뜨거운 물에 몸도 담그고, 비눗물로 제대로 씻고 옷도 갈아입고

다시 태어난 기분이다.

 

다른 친구들이 나오는 동안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욕탕 청소하는 티벳여인이 훌쩍 거린다.

감기에 걸렸다고 한다. 보니 맨발에 슬리퍼만 신고 있었다.

매번 한사람 사용하고 나면 청소를 해야하기 때문에 어쩔수 없었다.

약은 먹었지만 잘 낫질 않는다고 한다. 안타깝다.

 

 

숙소에 돌아오니 마당에 야생여우가 있었다. 헐,,,어디서 잡아온걸까?

 

우리는 그도안 경비를 정산하고 수유차도 마시며, 과일도 먹으며 앞으로 서로 갈길에 대해

이야기 했다.

 

우리보다 하루먼저 떠난 중국여인이 메모를 남겨두었다. 데이비드에게 그녀가 묵는 숙소의

주소를 가르쳐주고 그녀에게 전화해주었다. 낼 오후에 데이비드가 찾아갈거라고,,,,

우리가 걱정되었다고 한다.

 

 

인상적인 야크머리 장식

 

 

 

 

 

숙소 안의 주방겸 응접실 모습

 

다음날 우린 5시에 일어나 준비하고 터미널로 갔다.

이른 아침이지만 운전수 아저씨 터미널까지 데려다 주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작별을 고하고 각자의 버스에 탔다.

중국인 친구와는 신도교까지 함께 갔다.

 

 

신도교의 마을 풍경

 

 

 

 

 

늦은 점심을 먹기위해 정차한 소형버스

 

버스는 대형버스와 소형 버스 이렇게 두대가 함께 출발 하였다.

나는 대형버스에 탔다. 내 생각엔 소형보다는 대형이 좀 편한 것 같다.

그래도 좌석이 좀 넓어 덜 불편했다.

 

 

호기심 많은 꼬마..모자에는 텔레토비가,,,,,

 

신도교를 지나자 날씨가 심상치 않았다.

높고 푸른 하늘은 간데 없고 눈이라도 내릴듯 잔뜩 찌쁘려 있었다.

 

드디어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몇개의 고개를 넘다보니 눈이 쌓이면 길이 막히는게 다반사일 것 같았다.

 

고개를 내려가는데 이백여대는 됨직한 군용화물트럭이 오고 있었다.

트럭마다 앞면에 프랭카드를 달았는데 시짱(西藏)을 지원한다는 걸 보니

티벳으로 향하는 군수품인 것 같았다.

 

지금 돌이켜 보니 그 물건들이 티벳인들은 억압하는데 사용된다니

마음이 아프다.

 

오후 5시 30분 캉딩에 도착했다.

우선 터미널 근처(1일 30위안)에 숙소잡고 왕빠(피시방)에 가서 멜 확인 하고

저녁은 볶음밥에다 칭차이 해서 10위안에 먹었다.

 

비가 내렸다. 근 한달만에 보는 비다.

캉딩은 이미 반은 한족의 도시 분위기였다.

 

그날밤 10시쯤 천둥번개가 치더니 정전이었다. 방마다 난리였다.

10여분간 지속되다가 다행이 전기가 들어왔다.

 

 

 캉딩 숙소 창문을 통해 본 부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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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4 - 야딩(15 - 꽁링쓰) - 길위에서 길을

044 - 야딩(15 - 꽁링스 貢岺寺) - 길위에서 길을

 

샹그릴라 향에 이르기 전에 검문소가 있었다.

이제는 머리를 숙일 필요가 없었다. 야딩 입장권을 보여주자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만약 야딩 입장권이 없었다면 아마도 입장권(150위안)에 준하는 벌금을 물었을 것이다.

아마 그 벌금도 흥정이 가능 할지도 모르겠다.

 

 

샹그릴라 표지판 - 한글이 선명하다.

 

샹그릴라는 윈난의 쫑티엔이 있고 따오청의 옛 르와춘(日瓦村)이 이제는

샹그릴라향으로 바뀌었다.  명칭가지고 윈난과 사천 당국간에 논란도 있었다 한다.

 

하지만 어디 샹그릴라가 한 두구데 일까? 전혀 없을 수도 있구,

 

중국 여행을 하면서 유명하다는 관광지에는 많은 곳에 한국어 안내표지가 있다.

어지간히도 한국인이 많이 왔다보다 하는 생각이 든다.

실제 일본어나 한국어는 두 나라밖에 사용안하는데도 두 나라의 관광객이

외국인 관광객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서양의 대부분 나라는 영어를 사용 할 줄 아니,,,,

 

르와춘의 마을 풍경 - 어딘가 좀 어수선 하다.

 

 

 

 

르와춘은 여기저기서 공사가 한창이었다. 그것도 대규모로,

기사 왈  선전인지 상해인지(지금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의 사장 세명이 합작으로

대규모 호텔을 짓는다고 한다.

 

아마도 야딩도 곧 쓰촨의 주자거우(구채구)처럼 국민관광단지가 되려나 보다.

제발 개발하는 것도 좋은데

1. 자연경관을 해치지 말 것

2. 지역 주민의 삶에 보탬이 될 것

3. 지역 문화가 지켤 질 것

그래도 덜 훼손되기 전에 다녀온 여행자의 바램이다.

 

20여분을 달려 꽁링쓰가 있는 마을에 도착했다.

운전기사는 이 곳이 자기 고향이란다.  현재 어머니가 살고 있다고 한다.

집에도 들릴겸 이전부터 약간문제가 있어보이는 차도 손볼겸 들렸다 가잔다.

불감청 고소원이다.

 

각자 산책하는 기분으로 마을 주변을 돌아보며 꽁링스에 갔다.

 

 

꽁링쓰는 황교사찰(게룩파)로 1170년에 지어졌다.

입구에 입장권 파는 곳이 있지만 먼지만 가득 쌓인지 오래였다.

 

 

 

 

절안은 한산 했다.

 

난 밖으로 나와 절 주위를 한바퀴 돌았다. 으례 라마불교사원에는 코라를 돌 수 있겠끔 길이 있다.

그런데 데이비드와 중국인 친구는 그냥 돌아갔나보다.

 

 

절 뒤편에 있는 백탑과 마니석 무더기

 

젊은이 한무리가 놀고 있었다.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로 갈것인지 뭐하며 노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노는 것은 분명했다. 자기들끼리 웃고 떠든다.

 

 

멀리 오래된 나무다리와 몇채의 집이 보였는데 그 규모가 비교적 크고 정갈했다.

 

 

강가에는 야크떼가 강을 건너려 하고 있었다.

 

 

리더로 보이는 야크 한마리가 강을 건너고 그것을 다른 야크들이 지켜보고 있다. 

무리를 이끄는 리더는 스스로 길을 개척해야만 한다.

 

 

세월에 무너진 담장이 손보지 않고 방치되있기도 했다.

 

 

당나귀인지 말인지 모르겠다.

 

마치 모델처럼 포즈를 취한다.

코라를 돌던 한 티벳 청년이 사진을 보자고 한다.

사진을 보더니 멋있다고 한다. 말이,,ㅎㅎㅎ

 

코라를 다 돌았을 무렵 전화가 왔다.

이제 떠난다고 한다.

 

가다가 한 사람을 태웠다.

오랜 노동으로 지친 농부였다. 야크를 키운다고 한다.

 

한참을 달려 자기집에 다 왔다고 내린다.

이곳은 6월이 되면 두견화(진달래꽃)가 장관이란다. 그때 꼭 와보란다.

기회가 되면 다시 오겠다고 했지만 그런 기회가 다시 올지는 모르겠다.

 

우리도 용변을 보기 위해 내렸다.

농부가 도착한지를 알았는지 저 멀리 집에서 가족들이 반기러 나왔다.

 

어릴쩍 할아버지는 5일장이 설때마다 장에 가시곤 했다.

꼭 물건을 사고자 함이 아니라 정해진 일과 비슷한 거였다.

그 때마다 술이 거나해서 돌아오시곤 했다.

때론 저녁이 되어도 돌아오시지 않으면 몇군데 길을 나누어서

아버지와 고모들이 마중을 나가곤 하였다.

 

주전부리 할 꺼리가 많지 않았던 시절,

나는 할아버지가 다른 건 몰라도 반드시 사가지고 오던 밥풀과자를 기다리다 잠들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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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3 - 야딩(14-야딩춘) - 길위에서 길을

043 - 야딩(14-야딩춘) - 길위에서 길을

점심때가 다되어서야 기사는 왔다.

민박집 주인장과 가족들에게 안녕을 고하고 우선 야딩춘으로 갔다.

야딩춘(亞丁村 아정촌)에는 차량 두어대만 있을뿐 한산하고 조용했다.

 

음료수와 과자 좀 사고 야딩춘을 출발했다.

다들 아침(죽)을 든든히 먹어서인지 점심생각이 별로 없다고 한다.

 

한가한 야딩춘의 모습

 

 

 

 

 

 

 

 

 

 

야딩춘의 거주 가구는 몇이고 인구는 얼마고 그런게 기록되어있다.

하지만 오래되어서인지 불명확했다.

 

 

야딩춘에서 바라본 하납다길 신산

내 똑딱이를 있는 힘껏 땡겨 보았다.

 

야딩춘에서는 하납다길 신산과 선내일 신산이 함께 보인다.

 

 

 

야딩춘은 사랑하는 사람과 오래동안 머물고 싶은 그런 곳 중의 하나이다.

 

고개위에 이르자 야딩춘이 한눈에 들어왔다.

야딩을 소개하는 많은 곳에서 본 장면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다른 모습의 야딩춘 아름답다는 말 이외가 필요 없다.

 

 

 

 

 

 

고개에 오르자 아래로는 아름다운 야딩춘이

멀리로는 선내일 신산과 하납다길 신산이 동시에 보인다.

 

야딩이야 말로 많은 댓가를 지불하고도 와볼만한 곳 중의 하나임이 분명하다.

 

 

 

 

선내일 신산

 

 

차는 산길을 굽이 굽이 돌아 나가고 있었다.

야딩에 올때는 캄캄한 새벽이어서 잘 못 보았는데,

아름다움에 비례하여  길 참 험했다.

 

 

황토빛이 아름다운 마을 모습 

 

 

야딩이여 안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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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 - 야딩(13-농농바) - 길위에서 길을

042 - 야딩(13-농농바) - 길위에서 길을

 

이른 아침부터 시끄럽다.

가축들이 아침을 먹는다.

 

 

 

먹이를 찾고 있는 돼지

 

우선은 따오청으로 돌아 갈 차량을 구하는 것이 급선무다.

주인집 아들 친구가 찾아왔지만 가격이 적절하지 않은지 협상이 잘 안된다.

우리측 협상은 아마추어 사진 작가인 중국인 친구가 맡았다.

 

이 친구는 결혼사진을 찍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있다. 하지만 직업보다는 여행하며 사진찍는 것을

더 좋아한단다. 9살 딸이 있다는데 이번 여행은 미인과 중국최고로 아름다운

향촌고진(鄕村古鎭 : 옛 시골마을) 중의 하나인 단빠를 거쳐 티벳불교 교육기관이 있는 서다(色達)까지

갈 예정이란다.

 

야딩 매표소 입구까지 가서 차량을 수배해보았지만 없기는 매 한가지다.

그래서 결국 우리가 첫날 이용한 따오청 숙소의 기사를 불렀다.

어짜피 다시 오는 것이기 때문에 400위안에 합의했다.

 

맨처음 왕복으로 1000위안(5명)에 계약했었는데 별도의 추가비용이 발생했다.

2007년 여름에 야딩을 방문했던 한국분(현재 난징에서 일하고 있음)에게서

1200위안에 차량을 빌렸다고 했고 청뚜에서 만난 분한테는 1주후인 11월초에는

경쟁을 붙여 750위안(이때부터는 정말 비수기)에도 왔다고 한다.

 

따오청에서 야딩까지 오는데 세시간 정도 걸리기 때문에 우리는 휴식을 취했다.

아침은 민박집 주인식구들과 함께 죽과 짠바(청보리 가루)를 먹었다.

이건 돈을 안받겠단다. 물론 수유차도,,,,

 

 

주인집 가족들

 

할머니와 아들 내외 그리고 손자내외, 그리고 증손자와 증손녀 이렇게 대가족이었다.

가운데가 가장인 아들, 그리고 그 옆이 그의 아들, 할머니가 업고 있는 아이는 증손녀로

머리를 짧게 하였지만 여자아이다.

 

아들과 할머니는 숙소 옆에 있는 작은집에서 기거한다.

 

 

주인집 가장이 기거 하는 집

 

 

집안에 있는 난로 겸 주방

 

 

작은 안마당에서 우린 해바라기도 하며 차를 기다렸다.

 

 

향을 피우는 곳인지 정확히는 모르겠다.

 

 

숙소 지붕에는 청보리를 건조시키고 있었다.

 

 

창틀에는 뿌리를 내린 들풀과 마니석이 있었다.

 

 

작은 채소밭도 있었다.

가축의 침입을 막기 위해 천막으로 둘러쳐져 있었다. 

 

 

사나움을 자랑하는 티벳의 개

 

할머니가 어린 증손녀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아이는 증조할머니 곁을 떠나려 하질 않는다.

 

어릴적 나도 농사일에 바쁜 어머니 대신 팔할을 할머니가 업어 키우셨다 한다.

 

 

따오청 삼신산(三神山)에 경배를 드리는 할머니.

 

매일 자주 절을 올린다고 한다.

 

 

농농바 민박집에서 바라본 선나이르 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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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 - 야딩(12-선내일 신산)- 길위에서 길을

041 - 야딩(12-선내일 신산)- 길위에서 길을

선내일 신산(仙乃日 神山 선나이르 신산)이 관세음 보살의 현신인 것은

그 모양새에 있어서 연화(蓮花, 연꽃) 의 좌대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 짐작된다.

 

 

선내일 신산 - 그 모양이 연곷 좌대(부처님의 좌대는 연꽃)

 

 

장엄한 기운의 선내일 신산 ---  그 앞에 작은 검은새(아마도 까마귀)

  

 

나뭇가지 끝에 정좌한 검은새

 

하루 일과를 마치고 거처로 돌아가기전 저녁 예불을 드리는 듯 하다,

검은 것은 더 검게, 흰것은 더욱 희게,,,,,이게 흑백이 만날때 더욱 도드라져 보엿다.

 

이미 땅거미가 내려 앉을 분위기이다.

마지막이 항상 힘들지만 많이 걸어 피곤하기도 하고, 배도 고프고,

입구를 앞둔 충고쓰 이후는 무건운 발걸음을 옮겨야만 했다.

 

중국인 친구는 낙융목장부터 입구까지 말을 타는데 150위안(元)을 지급했다.

좀 비싸다는 느낌이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을씨년스럽기까지 한 하산길 마지막 구간

 

 

멀어져 가는 하납다길 신산

 

입구(매표소)에 도착하자 표를 사란다.

허걱 입장할때 표두 안팔구서(입장시간이 오전 7시, 넘 이르다) 나갈때 표를 사란다.

 

야딩이 공식적으로 출입금지되었지만 표는 판단다.

그리고 대부분 여행자가 아침 일찍 출입하는 것을 알기때문에 저녁 늦게는 업무시간이 지났지만

표 팔기 위해 지켜서 있다. 그런데 학생표는 없단다.

 

현재(2007년 10월 29일)는 공식적으로 출입이 허가가 되지 않아  학생표는 없다.

이후 공식 개장되면 학생표도 만들거라 한다.

 

표는 150위안(元)이다.

 

입구에서 혹 따오청 갈 수 있는 차량을 찾아보았지만 이미 저녁이 다되어서 실패했다 .

그럼 하루 더 묵어야지...숙소를 구하려 하는데 입구에서 만난 노인이 자신의 집으로 가잔다.

거리도 입구에서 야딩촌보다 더 가깝단다. 

 

지칠대로 지친 우리는 그 노인을 따라 나섰다.

 

 

 농농바 언덕위에 자리잡은 민박집  

 

숙박비는 1인당 하루 20위안(元)이었다.

비교적 최근(2007년 8월)에 내부를 새로 개조해서 집은 깨끗했다.

늘어나는 야딩 여행객을 상대로 숙박업을 하기 위해 무리해서 큰 돈들여 수리했는데

예상치 않게 야딩 출입이 금지되어 그동안 별 재미를 못보았단다.

 

그래서 혹시나 해서 오후에 야딩 출입구에 나가서 손님을 찾았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를 만나기도 했지만 대부분 숙소가 정해져 있는 여행객이

많아서 쉽지는 않다고 한다.

 

화려하게 장식된 응접실

 

 

 

 

 

 

 

 

 

 

응접실에 불을 피우고, 우선 수유차로 허기와 피로를 달랬다.

그리고 저녁을 주문했다.

중국인 친구가 부엌에 가서 재료를 보고 음식을 만들어 달라고 했지만

별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거의 이틀만에 밥을 보니 시장이 반찬이라고 먹을 만했다.

저녁밥값은 30위안. (세명이니 1인당 10위안)

 

 

만 이틀만에 먹어보는 밥다운 밥,

우리셋은 거지꼴한 이몽룡이 월매한테 얻은 밥먹듯 '밥아 너본지 오래구나' 하면서

게걸스럽게 해치웠다.

 

 

적어도 20여명은 잘만한 방에서 3명이 한자리씩 차지하고 퍼졌다.

물론 비단 금침을 뒤집어 쓰고,,,,,

그런데 새벽녁 서선생(쥐)이 새벽강연을 하는지 요란을 떨었다.

 

그렇게 농농바에서의 하룻밤이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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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 - 야딩(11) - 길위에서 길을

040 - 야딩(11) - 길위에서 길을

 

낙융목장을 지나서도 여전히 전화는 불통이다.

이런땐 낙천주의가 좋다. 잘 되겠지...

 

 

 

한참을 걷던 데이비드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띄우며 잠시만 기달려 달란다.

그러더니 숲으로 걸어 들어갔다.

 

 

숲으로 들어간지 한참을 지나서야 득의(得意)한 표정으로 나온다.

편안해졌나보다.

 

예전에 윈난에서 만난 중국인 한테 들은 이야기다.

 

신장위그르자치구를 여행하던 중 용변이 급해서 화장실을 찾았으나

눈에 띄지 않았다 한다.

 

지나가던 사람한테 물어보니 자기를 따라 오란다. 그런데 돈을 받는단다.

1위안이란다. (중국에서 대부분의 화장실이 유료다)

먼저 돈을 달란다. 그래서 주었다고 한다.

 

한참을 걸어 웬 허허벌판에서 그 사람 말

"여기가 내땅이니 맘대로 하라, 상관 없다 - 저쓰 워더 띠, 수이비엔"

허걱,,,일행중 여자도 있어 화장실을 찾은 건데...

 

여자도 뭐가 문제냐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들은 후 화장실을 찾으면 우리는 항상 "수이비엔(편한대로,,,)" 그랬다.

 

 

고사목도 있었다.

 

 

 

 

 

 

벌써 그림자가 늘어지기 시작했다.

 

 

구름과 양메이용 신산

 

하납다길 신산의 여러 모습

 

 

 

 

 

 

 

 

충고쓰에 도착해서야 중국인 친구가 말을 타고 왔다.

그런데 마부의 입언저리에서 피가 난다.

고약한 말을 잡기 위해 뛰다가 뒷발질에 다쳤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별 일 없다고 한다.

 

참 낙천적이다.

성질머리 고약한 나 같으면 '말'을 그냥 두지 않았을 텐데....

 

 

충고쓰엔 결국 가보지 못했다.

 

어제 우리와 함께 왔던 두 사람은 기다리다가 이미 따오청으로 떠났다고 한다.

기사는 오늘 다시 오기는 어렵다고 한다.

 

입구나 야딩촌에 가서 차량을 구해야 할 상황이었다.

 

 

선내일 신산이 조금씩 전면을 드러낸다.

 

 

 

 

선내일 신산

 

 

 

바위에 새겨진 티벳어,,,뜻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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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 - 야딩(10) - 길위에서 길을

039 - 야딩(10) - 길위에서 길을

 

<요즘 2mb 땜시 미친소 먹기도 전에 미쳐버리겠다.

아무래도 끌어 내려야 겠다> 

 

 

우유해로 돌아왔지만 어쩐일인지 한사람도 볼 수 없었다.

이제 야딩도 비수기에 들었나 보다.(2007년 10월 29일)

 

걷기에 고통스러워 하는 중국인 친구는 낙담을 하였다.

낙융목장까지 내려가봐야 말을 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시 돌아와 본 우유해,

 

우리 셋을 제외한 단 한사람도 없었다.

 

 

작은 구름들이 신성함을 더했다.  선내일 신산

 

 

 

양메이용 신산 정상도 구름에 휘돌고 있었다.

 

 

 

한참 후 구름이 걷친 모습

 

 

 

 

우유해로 내려 가다 만난 돌무더기

 

 

하납다길 신산도 구름이 넘나들고 있었다.

 

 

이제는 내려가는 길.

 

늦 가을의 단풍이 무척 고왔다.

한국의 단풍과는 다른 맛이다.

 

 

 

산행을 해본 사람들은 알지만 오를때보다 내려 갈 때 무릅이 더 아프다.

산행 속도가 무척 떨어진 중국인 친구는 잠깐씩 쉬면서 먼저 출발해 내려갔다.

 

나와 데이비드는 먼저 내려 갈수도, 그렇다고 너무 천천히 걷는 것은 더욱 어렵고

그래서 한참을 노닥거리다가 중국인 친구가 한참 멀어지면 그때서야 길을 나섰다.

 

 

흐르는 물에 땀도 닦고, 빈 물통에 물도 채우고,

물은 찼다.

 

 

드디어 낙융목장에 되돌아왔다.

다행히 마부와 말이 있었다. 그런데.....

 

 

잔꾀가 많은 말이 오늘은 휴일임을 고집했다.

마부가 고삐를 쥐려 가면 저만치 달려가서 멈추어 풀을 뜯곤 했다.

 

처음엔 저 말 귀엽네 했더니, 그게 장난이 아니다. 급기야 마부 숨을 헐덕이며

달려갔지만 비웃기라도 하듯 말은 낙융목장을 제집 안마당 삼아 뛰어 다녔다.

 

30분을 씨름해도 도대체 주인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말 잡다가 날새게 생겼다. 저 말 오늘 저녁 국물도 없겠다.

 

마냥 기다릴수 없어 나와 데이비드는 먼저 출발 했다.

 

 

낙융목장 한 가운데 놓여 있는 나무다리.

 

 

물은 맑고 투명했다.

 

 

낙융목장 한가운데에서 본 하납다길 신산

 

 

인적없는 낙융목장에 룽다가 펄럭이고 있었다.

 

 

 

우리는 길을 마다하고 낙융목장 한가운데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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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8 - 야딩(9) - 길위에서 길을

038 - 야딩(9) - 길위에서 길을

 

"여행하는 사람들은 깊이 생각하고, 집에 머무는 사람들은 업신여김을 받을 뿐이다"

(아랍 속담)

 

좋은 말이다.

 

하지만 가끔 여행하는 사람은 노숙도 해야 하고 추위와 배고픔에 떨기도 해야 한다.

 

 

하룻밤을 보내 돌집

춥지 않은 한 여름밤이었다면 모닥불 피고 별을 세며 보내는 하룻밤은 낭만적이었을지 몰라도

그날밤은 너무 추웠다. 나무도 별로 없고 연기가 빠져 나가지 않아 괴로웠다.

 

교대로 둘은 불을 지키고(나무도 계속 모으며) 한 사람은 잠시 눈을 붙이며 밤을 보냈다.

하지만 잠이 제대로 들리 없었다.

한참을 잤나 깨보니 데이비드는 없고 중국인 친구만 불을 지키고 있었다.

나무구하러 간 데이비드가 한참이 지나도 오지 않아 밖으로 찾아 나섰다.

 

밤은 짙은 안개와 어둠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돌집 주변엔 방목한 야크들의 방울 소리와 거친 숨소리만이 들렸다.

 

소리쳐 불렀지만 대답이 없다.

전등을 비추어 위치를 알렸다.

 

'밤길을 가는 맹인이 등불을 밝혀 드는 것은 자신이 보기위함이 아니라

마주오는 상대방이 자기를 보고 비켜 가기 위함이다"

 

한참후에 데이비드가 웃으며 나타났다. 물론 두손 가득히 나무를 들고,,

길을 잃었단다. 한참을 헤메다 내 소리를 듣고 불빛을 보고 찾아 왔단다.

다행이다.  

  

그렇게 하루밤이 갔다.

 

 

저 멀리 여명이 밝아 온다.

 

데이비드는 코피를 흘렸다. 두통이 있단다. 고산증세다. 다만 심하지 않아 다행이다.

중국인은 무릅이 더 심하게 아파서 걱정이다.

 

남아있는 과자로 약간 요기를 한다음 상의를 했다.

어떻게 할 것인가....

 

데이비드와 나는 아마도 마니고개가 얼마남지 않았으니 찾아보자고 하였지만

중국인 친구는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래서 어제 왔던 길을 되돌아 가기로 했다.

그리고 우유해에서 말과 마부가 있으면 구해서 중국인 친구를 태워 가기로 했다.

더 이상의 모험은 어렵다. 아쉽지만 친구를 버리고 갈수 없지 않나...

 

한국에 돌아와서 보니 아마도 마니고개 앞에서 길을 잃었던 것 같다.

대부분 우유해를 보고 돌아가는 마당에 그나마 야딩이 출입이 금지된 이후로

야딩 내선 트레킹 하는 사람이 더욱 적어 길의 흔적이 사라졌던 모양이다.

한 30분 정도만 더 갔다면 길을 찾았을 것 같다.

 

어제 왔던 길을 되돌아가면서 보니 어제 보았던 풍광이 아니다.

전혀 새로운 길 같다.  태양의 방향과 시선의 변화에 따라 풍광이 다르게 보이는 것 같았다.

돌이켜 생각하면 되돌아오는 길도 나쁘지 않았다.

 

이미 길을 아니 걱정 할 것도 없고 조절도 가능하고,,,천천히 풍광을 감상하며 갈 수 있었다.

데이비드와 나는 중국인 친구의 짐을 반으로 나누어 져 어제보다는 무거운 발걸음이었지만

중국인 친구가 그나마 자력으로 천천히 걸을 수 있다는 것에 안도해야 했다.

 

데이비드는 코피를 흘린 후 담배도 사양했다. 이제부터 금연 하겠단다.

혼자서 산상의 흡연을 즐겼다.

그날 저녁 야딩촌의 숙소에서 배낭을 정리하다보니

이틀간 피워댄 담배꽁초가 배낭 주머니에 한가득이었다. 참 많이도 피웠다.

 

낙융목장 이후로 내 전화기와 중국인 친구 전화기 모두 불통이었다.

우리를 기다리는 일행에게 안부를 전하지 못해 걱정할 것을 생각하니 맘이 급했다.

하지만 걸음마저 단축할수는 없는 노릇이다.

 

 

서리가 하얗게 내렸다.

 

 

 

구름이 몰려왔다. 하지만 태양이 떠오르자 어제와 같은 맑은 하늘을 우리에게 선사했다.

 

 

이른 아침의 설산은 느낌이 다르다.

 

 

저 너머에 태양이 떠오르나 보다.

 

 

어제 지나왔던 오색해(? 정확하지는 않음)에 두마리의 새가 아침부터 희롱하고 있었다.

 

 

좀 땡겨 보니...

 

 

설산이 비추어 있었다.

 

 

 

 

두마리 새는 어느새 날아갔나 보다.

 

 

머리위로 태양이 오르자 밤새 떨어던 몸과 대지를 녹인다.

 

 

양메용 신산,,,,밤새 안녕,,,,

 

하납다길 신산도,,,,안녕,,,

 

 

그렇게 다시 우유해로 되돌아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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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7 - 야딩(8) - 길위에서 길을

037 - 야딩(8) - 길위에서 길을 

 

우유해를 뒤로 하고 넘는 첫번째 고개는 힘들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적당히 가파랐다.

만약 더 높았으면 죽겠다는 말이 나왔겠지만,,

적당한 힘듬(고통)은 아드레날린이 분비되기 직전의 느낌,

지치지도 않으면서 온몸을 충분히 움직인 정도의 기분 좋음을 느낄 수 있엇다.

 

 

구름도 힘겹게 넘는 곳이라서,,,

 

고개위에 오르니 탁트인 전망은 환상적이었으나 바람이 문제였다.

만약 한겨울이었다면 눈보라가 굉장했을 듯 싶다.

 

 

우유해에서 고개를 오르 던 중간에 본 양메용 신산

 

 

고개의 4분의 3정도의 지점에서 본 양메이용 신산

 

 

고개를 완전히 넘어서 본 양메이용 신산

 

 

우유해에서 고개로 오르고 있는 중인 동행자,,,여기서부터 힘들어 했다.

 

이미 우유해는 시야에서 사라지고(바로 고개 아래에 있지만) 회색의 돌산만이 보였다.

 

 

고개를 넘자 앞 방향으로 보이는 산, 만년 설산은 아닌듯 싶고 최근에 눈이 왔나 보다.

 

고개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왼쪽은 외선 라운드 트레킹 코스라고 들었다.

그냥 '미친척하고 루구호까지 가봐' 했지만 그건 너무 무모한 짓,,,

 

 

 

고개에서 바라본 선내일 신산(맞나?  맞는 것 같다.)

 

 

고개 정상,,,이제부터는 내리막길,,,

 

 

내리막길 오른편에 아마도 여름(우기,,)에는 작은 호수가 있었던듯 물마른 흔적이 있다.

 

 

가는 방향의 왼편 모습

 

 

아래에 호수가 있었다.

오색해인지 불확실하다.

물빛은 오색은 아닌 것 같고 삼색이나 사색은 되는 것 같다.

지도에는 길의 왼편에 있다고 했는데 오른쪽에 있고 이때 부터 약간 불안했다.

 

지도가 잘못된거야,,,아니면 길을 잘못든거야....

주위에는 우리 셋 외에는 아무도 없어 물어볼수도 없었고, 이정표 하나 없었다.

 

뭐 어찌 되겠지,,,직진 !!!!!!!!

 

 

오른편에는 수만년 돌들이 얼고 녹기를 반복해 부서져 쌓인 모습이 보인다.

 

 

그래도 길은 있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앞서 지나갔기에....

 

 

온 길을 뒤돌아 보니 양메이용 신산이 이젠  거의 모습을 감추엇다.

 

 

 

멀리 카스 협곡이 보인다.(카스 협곡 가는 길인가,,,맞나?)

 

 

 

 

두번째 고개가 나올때가 되었는데 불안해 하며 점 점 쉬는 횟수가 많아졌다.

중국인 친구의 속도가 많이 떨어졌다. 불편한가 보다.

 

 

길은 끊어질 듯 하면서도 이어졌다.

 

 

 

 

산 허리를 따라 가는 약간의 오르막 내리막이 반복되는 비교적 편안한 길이 었다.

 

아마도 여름철 약초를 캐거나 방목을 할때 묵는 돌로 만든 집을 보았다.

 

 

그런데 아무리 가도 마니고개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미 주위는 저녁 그림자가 길어지기 시작했고, 한시간 후 쯤에는 완전히 어두어질 것 같았다.

마니고개를 넘어서 충고사까지가 2-3시간 걸린다고 보았는데,,,

 

결정을 해야 했다. 이미 중국인 친구는 무릅을 상했는지 절룩거리고 있었다.

나와 데이비디는 별 문제 없는데 이 친구를 데리고 야간 산행은 무리인 것 같았다.

 

우리도 길을 확실히 아는 것도 아니고,,,

 

우선 머물만한 곳을 찾았다.

다행히 근처에 목부들이 머물던 돌집이 있었다.

 

한사람은 잠자리를 정리하고 둘은 나무를 구했다. 어둡기 전에 되도록 많이 모아야 했다.

그러나 산중의 밤은 쉽게 빨리 찾아왔다.

 

그렇게 밤이 다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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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6 - 야딩(7- 우유해)- 길위에서 길을

036 - 야딩(7-우유해) - 길위에서 길을

 

우유해에 도착하여 간단한 점심을 먹었다.

점심으로는 과자, 초콜릿, 그리고 캔으로 된 죽(쌀, 보리, 팥, 당콩 등으로 된 달착지근 해서

자주 애용하는 것)을 먹었다.

그리고 선전에서 온 여행객이 준 바나나와 사과를 디저트로 먹었다.

 

우리도 그렇지만 중국인들은 여행하면서 먹는 것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고

많이도 먹는다. 그리고 잘 나누어 주기도 한다.

난 주로 베품을 받는 쪽이지만,,기쁘게 먹어주는 것도 미덕이라 생각한다.

 

 

  우유해에서 보니 하납다길 신산이 더 잘보인다. 왼쪽이 하납다길 신산.

 

 

 

우유해에서 넘치는 물은 왼쪽으로 흘러 낙융목장으로 내려 간다.

 

 

 

먼저 도착한 여행객들이 점심을 먹고 있었다. 금강산도 식후경,,,,,

 

 

 

물 빛이 어쩜,,,,

 

 

 

 

 

 

 

 

 

 

 

 

전경을 보기 위해서는 좀 올라가야 했다. 우유해가 예상보다 컷다.

 

 

 

우유해서 바라본 선내일 신산의 뒷(? 앞뒤란게 있을까마는,,,)모습

 

 

양메용 신산, 저 만년설이 녹아서 우유해가 만들어졌을 것이다.

 

 

다들 우유해까지 와서 되돌아가는데 우리 3명만 앞으로 나아갔다.

 

우유해가 등 뒤로 멀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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