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2004/12

8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4/12/28
    2004년 크리스마스
    랄라^^V
  2. 2004/12/22
    2002년] 처음으로 자전거 여행을 갔다(4)
    랄라^^V
  3. 2004/12/22
    집에..(1)
    랄라^^V
  4. 2004/12/18
    휴가준비..
    랄라^^V
  5. 2004/12/14
    사무실 츄리닝 바람(2)
    랄라^^V
  6. 2004/12/06
    딴짓만 한다..
    랄라^^V
  7. 2004/12/06
    책]현대가족이야기 -조주은
    랄라^^V
  8. 2004/12/06
    2001년 싱가폴
    랄라^^V

2004년 크리스마스

를 보냈다. Happy~! Holiday! 다.

작년에는 당진에서 보내고 올해는 북길이네 집에서 보냈다.

깐가의 애절한 요구가 아니였다면 집밖에 한번도 나오지도 않고 자고, 술마시고, TV보고 .. 그렇게 또 연휴를 보냈을 것이다.

 

그래도 간만에 다 만나니 엮시나 재밌다..^^




 

이렇게 저렇게 보낸 크리스 마스 올해 사진이다.

24일 이것 저것 선물들을 사들고 북길이네 집에 모였다.

난 영등포 역에서 마님을 기달리다가 영등포 역앞 사진도 한장 찍고,

우람이는 자기와 같은 토실토실 케익을 만들어 오는 기특한 짓을 했고,

술취한 마님은 모든 남자가 다 자기를 좋아한다는 망언을 했고,

느끼쟁이 안영은 리마리오 흉내를 내 모두에게 수천만 기름을 선물했고..

여전히 귀여운 영보는 신문까지 스크랩해와 홍합탕을 했고...

여수에서 올라온 깐가는 원장이 자기만을 갈군다고 성토를 했고..  

간만에 만난 북길이는 여전했고, 

또한 간만에 만나는 임고 또한 유쾌하고 재밌었다..

안타깝게 싱가폴에 가 있는 오뚱과 큰 모임에만 나오는 브 만이 결석한 상태였지만..

모두가 모여서 술과 잠과 TV와 만담이 어우러진 크리스 마스를 보냈다.

 

간만에 동네 노는 형들이 동네 극장에서 '나비 효과' 영화를 시끄럽게 봤고..

27일 생일을 맞은 깐가의 깜짝 생일 파티도 해줬고..

고음 처리는 안되지만 득음을 위해 열심히 노래하는 베스킨라빈스 루돌프 머리띠도

우리와 함께 했다.

 

뭐.. 그래도 연휴 내내 집에서 술만 마시고 먹기만 했던 작년보다는 좀 발전적이다.

 

대부분 연인들이 보낸다는 날들을 같이 보내는 친구들이고, 왠만하면 주기적으로 만나고, 개별적 보다는 집단적으로 만나는 친구들이다. '올해가 마지막이지 않겠냐' 싶었지만 우리들의 이런 놀이는 수년에 이르고 있다. 이들이 있어 적적하지 않은 연휴, 즐거운 연휴, 유쾌한 연휴가 됐다..다들 올해의 모습 처럼 밝고 명랑하길.. ^^

 

난 이들에게서 '랄라' 라는 이름이 적힌 빤스를 선물 받았다. 요란한 무늬라서 언제 어디에 맞춰 입어야 할지.. --;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2년] 처음으로 자전거 여행을 갔다

컴퓨를 보다보니 2002년 첫 여름 휴가 때 적었던 글이 있었다. 이것 저것 손 볼까 하다가 .. 그냥 올린다.. 언제나 그렇듯 여름 휴가 때가 되면 사람이 문제다. 그리고.. 내가 문제다..

 

참고로 그때 난 자전거를 탄지 일주일도 채 안된 왕 생짜 초보였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혼자가서 음.. 사진도 별로 못찍었다. 그리고 혼자 찍는 사진은 늘 이렇다.. 타이밍도 못맞추거나.. 어설프게 나오거나.. 

어쨋든 내 2002년의 모습과 내 알톤 자전거다.

 

2002년 8월 4일부터 7일까지
아주 짧은 첫 여름 휴가

준비물 : 현금, 썬글라스, 썬블럭, 손수건, 안장수건, 캡모자, 여유분 옷, 우비(나중에 필요가 없음을 알게 되지만 무지 무거운 우비를 준비했었다), 물통, 장갑, 시계, 비상약, 건전지

자전거는 영등포 기차역에서 화물로 강릉역으로 보냈다. 화물로 보내기 전에 자전거에 붙어 있는 조명등 및 기타의 물건들을 떼어내는 것이 좋다. 그렇지 않으면 없어지기 땜시. 당시 15만원에 구입한 앞 뒤 쇼파가 있는 알톤 자전거를 타고 갔는데 여행객들이 나의 자전거와 혼자여행온 여자라는 사실 그리고 내가 준비한 모든 것에  어찌나들 놀라는지..



준비물을 담은 가방과 몸만 기차에 싣고 밤기차를 타고 강릉역으로 감. 가방은 최소한으로 하는 것이 좋다. 사전에 준비한 것은 자전거 여행 까페에 가서 코스 및 일정들을 체크하고, 정말 혼자 무작정 떠난 극기훈련이였다. 7번 국도가 어떤 곳인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덤벼든 여행은 강릉역에서 날 맞은 비에 넘어지면서 시작됐다. 준비는 없다. 그냥 가면 어떻게든 되겠지 그리고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라은영이란 사람에 대한 자괴감에서 오는 절박함이 있었다.

 

8월 4일.
7번 국도를 타고 내려갈 것만 결정했지 어떻게 강릉시내에서 7번국도를 탈것인가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는 상황이다. 비를 맞으며 다시 전국 교통지도를 꺼내고 강릉시내의 조밀도를 보고, 7번국도를 찾는다. 출발은 양호하다. 무거운 우비는 자전거를 타자마자 간이 찜질방으로 변해버렸고, 비는 우비의 틈을 비집고 나를 적시고 있었다. 자전거를 탄지 일주일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출발, 멈춤, 코너 돌기 및 모든 것이 서툴렀다. 특히 무거운 짐은 자전거를 더욱 무겁게 했다.

 수차례의 무단횡단과 신호무시 자동차 경적, 사람들의 손가락을 따라 도착한 7번 국도는 한적한 시골길과 같이 직선 길로 시작됐다. 그리고 처음으로 거꾸로 올라온 하이킹 족을 만났고, 그들의 힘찬 응원이 여행내내 힘이 됐다.

 

강릉역 출발 ☞ 7번 국도 진입. 진입 30분도 채 되지 않아 심각하게 자전거가 빗길에 미끄러진다. 미끄러진 자전거가 도로로 미끄러 지고 자칫 교통사고가 날뻔했다. 덕분에 무거운 우비와 바지가 찢어지는 액땜을 겪었다. ☞ 정동진. 고 3때 수능 끝나고 성적이 나오기 전에 잠시 가출아닌 가출을 했던 적이 있다. 그때 혼자 기차타고 왔던 정동진. 이미 2002년의 정동진은 너무 많이 변해 있었다. 혹여 자전거 도둑맞을까 자전거와 함께 모래 바닷가를 가는 무모한 짓도 한번 하고 편의점에서 물도 사먹었다. 어찌나 사람들도 많고 여름 휴가때면 빠지지 않는 이른시간에 바닷가에서 유흥을 젊은이들의 모습도 보인다 ☞ 헌화로 바다가 내옆에서 계속 파도를 친다. 특히 비가 오는 바닷가가 무척이나 인상적이였다 ☞ 다시 7번 로 돌아와서 동해시를 지나 묵호 ☞ 삼척 ☞ 맹방에서 1박을 한다.
 
사실 맹방에서 일박을 할 계획이 아니였으나 이미 날이 저문 상태에 빗길이고, 자잔거 등도 생각보다 무척 약했다. 특히 가로등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야맹증이 있는 개인적 상황에서는 더욱 나가기가 어려웠다. 맹방으로 넘어가는 고개에서는 언제 호랑이가 나타날지 변태가 나타날지 모른다는 공포속에서 찔끔찔금 한 상황이였기에 맹방에서 1박을 했다. 장소는 맹방 민박. 2만원. 맥주 1캔과 약간의 과자를 사서 맹방 바닷가에서 혼자 한잔하고 나의 기억하나를 바닷가에 묻고 왔다.

 

사전에 알았어야 하지만 개인적으로 7번 국도를 타본적이 없었기 때문에 지형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강원도에는 무척이나 고개가 많다. 맹방에 이르는 곳까지의 해안도로 뿐만 아니라 수많은 고개에서는 자전거를 밀고 올라가야 하는 상황이 많았다. 특히 공사중인 곳도 많고 국도도 역시 자동차 운전자들은 자전거를 배려하지 않기 때문에 확확 밀치고 가는 경우가 많다. 식사는 중간에 보인 휴게소 식당에서 하고, 볼일은 여기 저기 널린 화장실에서 보고, 이곳 저곳에서 물 사먹으며 정말 아픈곳 하나 없이 잘 왔다.

 

 

8월 5일

맹방에서 다시 아침을 맞고, 아침을 먹고 짐을 챙겨 출발한다. 전날 무리하게 달려서 상당히 근육통이 있을 것으로 예상했으나 어찌나 튼튼한 다리는 전혀 이상이 없었다. 미쳐 간과했던 어깨와 종아리 뒷쪽이 완전히 익어버리는 불상사를 제외하고는. 난 정말 건강한 사람임이 입증됐다. 철저히 썬블럭으로 커버하고 썬글라스와 수건을 정비하고 다시 출발한다. ☞계속 7번 국도를 타며 왕 고개들을 넘고 엄청난 활주로를 넘고 고가도로를 타고 ☞ 동해 휴게소 (강원도와 경상도 경계 고개에 있음)에서 잠시 쉼. 고가도로에서 다른 하이킹 여행족과 도보여행자를 만났다. 그들이 내게 다음의 코스가 어려움을 알려줬다. 까짓것 하고 오르는 고개는 정말 오를수도 없고 내려 갈수도 없고 자전거를 뉘여 놓고 쉴수도 없는 울고싶은 고개였다. ☞ 울진 발전소 근처에서 맥주 한캔도 까보고, 부둣가에서 놀고 ☞ 왕 바람 많이 부는 고개를 넘어 평해에 도착. 기냥 평범한 읍내 인데 전날과 같이 어둠의 상황에서 절망하기 보다 해질녁에 그냥 쉬어버린 상황이다. 저녁 먹는 식당에서 고개에서 만난 하이킹족을 다시 만남. 그들은 텐트를 싣고  여행중이기 때문에 강가에서 잔다고. 다음날을 위해 오이를 사서 여관 냉장고에 넣어두고 물도 얼렸다. 어찌나 고급스런 여관을 잡아서 1박을 함. 어찌나 고급스럽던지 다시는 여관에는 가지 말아야 겠다는 생각과 특히 혼자는 가지 않겠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 누군가에 부탁해서 찍었겠지.뒤는 동해바다다..

 

8월 7일

평해를 떠나 포항에 도착하는데 6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경상도 부터는 강원도와 완전 대비되는 완만한 길이 나오는 데 특히 평해 이후로는 정말로 완만한 시골길과 도로길이 번갈아 나온다. 특히 이날 부터는 비가 좀 심하게 내리는 상황이였고 자전거 수리도구를 하나도 챙겨오지 않은 상황에서 자전거 바퀴 바람이 빠지는 상황인지라 더 여행하기가 어려웠다. 일상의 도로에서 덤프 트럭은 주위 대상이다. 지나가면 엄청난 바람과 먼지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특히 비가오는 상황에서의 덤프트럭은 빗물로 물보라을 만들고 엄청난 빗물을 퍼붓고 가기 때문에 중심을 잘못 잡으면 그 바람에 자전거가 넘어지기도 한다. 결국 포항에 사는 후배 녀석의 신세를 지며 여행을 끝내기로 한다. 포항 주유소에서 전날에 만난 하이킹 족을 다시 만나서 쉬면서 옥수수 나눠 포항시내를 헤집어서 후배네 집으로 가며 여행을 마무리한다.

 

후기 ..

그냥 꿈 같다. 지나간 시간들. 혼자 되씹던 말들. 수천번을 되뇌었을 할수 있다는 나의 약속. 한고개 한고개를 넘으며 그리고 내려오며 나는 나를 시험하고 이겨내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남들에게 과시하거나 자랑하기 위해 시작한 홀로여행이 아니다. 역시 너야, 대단해 라는 말들은 흘려라. 남들이 나에게 해주는 말들은 기존의 틀에서 벗어난 나의 결정에 대한 그들의 가치관에서 예의상 나오는 말일뿐이다. 나에게 있어서 하나의 부분이고 현상처럼 해낸 것이고 누구도 할수 있는 일이다.

 

자전거는 맛탱이가 갔다. 그럴만 하지. 그리 무리를 했으니. 이 여행을 통해 혼자 달릴지라도 언제나 나에게 힘이 되는 사람들. 그들에 대한 느낌과 존재감 그리고 그들에 대한 내가 가진 의미를 알수 있었다. 독불장군과 같은 나란 사람은 원채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란 감정자체를 느끼지 않으니... 표현하지도 않는다. 고민스럽게 찡얼거리며 강한척 어느 순간에 약한척. 척척하는 가식적 행위에 대한 불필요함을 느낀다.

난 단지 나 이다. 그냥 그 모습을 있으며 움직이면 되는 것이 세상의 한 부분인 나란 존재이다. 후후 연애나 찐하게 해서 누군가를 죽도록 좋아하면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있지만 난 죽도록 좋아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지금의 내 모습과 별로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너무 뻔하다. 욕심 부리지 말고 조급해 하지 말아야.. 주변에 모든 것에 ..

 버티고개에 자전거를 밀고 올라가던거. 활주로 끝에 나왔던 감동적인 내리막길. 억수같은 빗속에서 만난 하이커들. 모두가 힘을 나눠가는 모습. 모두의 까만 얼굴과 파이팅의 말들. S나 또한 그들에게.. 내 주변인들에게 힘을 주는, 나눠주는, 단 한줌의 정성도 나누는. 외롭고 고독한 사람들이 아닌 삶은, 세상은 그렇게 나눠가면서 살아저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런 사람이 되어야 겠다. 이제 포항을 떠나 다시 성남으로 가야한다. 이제 나의 첫 휴가도 끝났다.

 

나의 그사람에게
분명 왜곡된 거다. 그리고 그 사람도 그것을 알 것이다. 서로간에 사랑이 아니라 익숙함인 것을. 분명한 것은 난 그 사람을 좋아하고 인정하지만 사랑하지는 않는 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내가 잘못한 거다. 처음부터 너무 잘 맞아 떨어진 우연처럼 지금까지 온거다. 나로 인해 그 사람이 더 많은 해를 입었기에 나또한 이렇게 혼자 나를 되돌아 볼 수 밖에 없다, 이제 인생을 나누는 동지가 되었으면 한다. 내가 그 사람에게. 무엇을 하든 서로에게 어떠한 사람이 생기든 간에.

 

여행을 끝내니 ...
손톱에 끼여있는 때. 고개. 햇볕. 소금에 절은 옷. 바다. 트럭이 선사한 빗물 세례. 바람. 다리의 멍. 2번이나 사고를 낼만큼 심하게 넘어진 상황. 내가 목격한 불륜의 현장. 까맣게 탄 팔과 다리. 힘내자. 할수 있다.

그리고 내가 깨우친 내가 가진 삶에 대한 집착. 살기 위해 달릴 수 밖에 없었던 첫날 밤. 오르막길에서 포기하지 않고 끝가지 밀어 부티는 나의 고집. 난 독한 년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집에..

신경질이 욱.욱.욱.욱..

엄마가 계속 찡얼찡얼 찡얼..

내 말투는 툭.툭.툭..

 

아침에 엄마한테 한 막말이 미안해서..

엄마가 그리 졸랐던 이메일과 블로그를 만들어 줬다.

음.. 진보넷에 만들려 하다가 일상사 들통날까봐 다시 네이버로 바꿔서 만들어 줬다..

좋으시단다..찡얼징얼하다가 갑자기 기분이 업되서 점심 준비하신단다..

 

못됐다. 무책임하다. 너는 너만안다. 자식잘못 키웠다. 너는왜 대학을 나왔냐.

나도 공부하고 싶었다. 남들 자식을 자기차끌고 와서 엄마 모시고 다니더만..

마지막 말은 "등록금 대줄것도 아니면서.."로 끝맺는다. 지겹도록 못이 박힌다.. 이게 다 내 죄려니.. 하고 듣고만 있는 것도 정말 기분 드러워서 못들어 먹겠다고 지른 한마디가 내내 걸리네.. 못되먹은거 맞다.. 

 

최근 고3인 울 엄마의 찡얼거림이 본격적인 지원이 시작되면서 더 거세진다. 엄마가 대학에 갈수 있지. 맘에 드는 거 골라봐..내가 아는게 없으니까 너가 도와줘야지. 잘난 둘째 아들한테좀 도와달라고 해. 둘재아들 왈.. 난 지금의 교육제도를 반대하고, 나또한 그 제도의 희생자라 생각한다. 엄마가 하나의 티켓 따듯 자기만족적으로 그런 제도속에 들어가는 게 싫다.. 일장연설을 늘어놓으시고 .. 엄마의 하소연은 나에게 쏟아진다... 

 

엄마가 학교를 다니기 까지 엄마와 이모 그리고 나를 제외한 극비의 007작전이 두어번 있었다. 공부하고 싶어했으니까.. 공부하는 걸 좋아하시는 분이니까.. 평소에 나도 보지 않는 아리랑 TV의 퀴즈 프로그램을 열심히 보며 아는 단어 찾기가 취미이신 분이니.. 말끔히 학교생활 마치고 2005년 2월 16일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는다. 아마 생애 처음으로 받는 졸업장일 것이다..그래서 한편으로 미안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고, 울 엄마의 삶이 서글프기도 하고..

 

불감지수 높아지면서 사람들에게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첫 타자는 가장 가까이에서 늘 즐기게 아침을 챙겨주는 이모와 아침을 못먹고 나가는 나의 상황 때문에 발생하고.. 너 뭐하고 다니냐고 묻는 말에 다시 한번 발생하고.. 지방에서 올라온 후배에게도 한마디 날리고.. 오늘 엄마한테도 날리고.. 망나니다.. 마구 날리고 사니..

 

분명히 후회하는데.. 반성도 하는데.. 나아지는 기미 없이 계속 반복이다.. 반복.반복.. 빨리 다음주가 와서 휴가 모드에 빠져야 할 것 같다.. 지금의 고민은 휴가 후에도 회복되지 않고 계속 욱욱!! 하는 모드면 어쩔까 라는 우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휴가준비..

12월 마지막주 수요일 29일 부터 겨울 휴가에 들어간다.

겨울 휴가일 뿐만 아니라 예년과 다르게 집으로 들어가 차분하게 휴가를 보낸 생각이다.

이것 저것 챙겨 먹고, 이것 저것 못봤던 책도 보고..

 

휴가를 준비한다.. 헌책도 주문해서 집에 쟁여 놓고..

사람들에게 사전 광고도 철저히 한다.. 나 휴가거든요.. 나 그때 휴가가요.. 라고..

전화기는 사무실에 두고 갈 생각이다.. 하하.. .. 이건 오바인가??

 

여의도 공원에 처진 국보법 단식단들의 텐트를 보면서.. 돌아가는 버스가 지나치는 국회앞에 즐비한 플랭카드를 보면서.. 그 반대편에 즐비한 국보법 사수 콘테이너를 보면서 착찹하다.. 한번 기사로 다뤄야 하는데라는 것 이상으로 생각을 못하는 것 같아서.. 참.. 지나칠때마다 무기력해진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사무실 츄리닝 바람

사무실에 아무리 편하게 와도 츄리닝은 입고 오는 경우 드문데..

오늘도 하루 왠 종일 츄리닝 차림이다.

일찍 끝내고 집에 가려 했건만 쉽게 발이 떨어질 만큼 일이 깔끔하게 끝나지 않는다..

 

내장들이 난동을 부려 소화도 잘 되지 않네..

음.. 너무 우유를 많이 먹은 탓인지..

너무 커피를 많이 먹은 탓인지..

죽으로 만들어 버린 인절미를 먹은 탓인지..

잠이 부족한 탓인지..

 

어제는 긴급하게 연락 받은 우리증권 테입을 들고 츄리닝을 입고 다시 사무실로 왔다.

하루 종일 회의를 한 멤버들이 회의스럽게 술잔을 주고 받고 있었고,

적당한 사람들이 옹기종이 있는 곳에서 편집을 시작했다.

파업상황만 아니면 테입 안받았을 텐데.. 주말에 너무 무리한 관계로 넘 피곤한 상황이었던 게다..

 

파업 영상 받고, 이렇게 저렇게 해보고 짜집기 하고 해보다..기어이 새벽에는 눈물이 나더라고.. 사실 동지가 전화했을때 정말 부탁 받기 싫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좀 피해 볼까 하다가 어쩔 수 없이 받은 거였는데..

 

정말 순수하게 동지 관계 쌓아 가는 것도 아니고, 잘만든 것도 아니지만 만들었다고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만들어 준대로 여론적으로 잘 활용하는 것도 아니고. 생색내기 식으로 기능적으로 필요할때 도구처럼 활용하는 그런 내 존재 인것 같아서 카메라를 팔고 영상과 관련한 활동을 접을까 하는 고민이 있었기 때문에..그리고 이제 정말 몸이 축나서 밤세우기도, 내 몸 쪼개가면서 하기가 쉽지 않으니까.. 편집도 마찬가지 였는데..

 

미안한 맘 하나는 꼬깃 꼬깃 신문지에 싸인 테입에 라은영 동지 고맙습니다 라는 글을 보면서.. 파업이 노동자 학교라 하더니, 그리 라부장, 라부장 이렇게 부르던 동지가 나에게 이젠 서스름 없이 동지라 하네..한편에 맘도 뻐근해 지고..뺑이치려 했던 맘도 미안해 졌다.. 서둘러 사무실에 와서 술먹자는 사람들 뿌리치고 편집을 시작하는데..

 

곳곳에서 그들의 웃음이, 투쟁의 구호가, 그리고 아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면서 예날 생각이 많이 났다. 증권노조 역사 관련한 영상을 급하게 만들던 중에 인터뷰를 했던 여성동지가 주말에 삭발을 했다. 삭발이나 단식결의는 늘 사람 맘을 쪼그라 들게 하는데.. 삭발하는 그동지 주말에 돌잔치 끝내고 와서 삭발을 했다. 고졸하고 17년 동안 다닌 회사. 약해지지 말자고, 우리 모두 독해지자고 한 삭발입니다. 오늘 난 눈물 만큼 황영기에게 피눈물 나게 해 줍시다.. 라고 다부지게 말하는 모습에 .. 뺑이치려 했던 내 모습이 비껴 영 눈물이 많이 났다.

 

하루종일 피곤이 가시지 않는다. 그리고 쌓이는 일에 슬슬 신경질이 난다. 부담없게 생각했던 알티비가 날 누르기 시작하고 맛있게 먹으려 했던 인절미가 죽이 되서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샤워를 못하고 아침을 맞아서 찝찝하고, 잠못자서 피곤하고..

 

파업대오가 영상을 보고 싶단다.. 3개 영상으로 나눠 만들었는데, 하나로 만들어 달란다.. "그건 도저히 역부족 입니다"라고 말하고 혹시나 해볼까 해서 컴을 켰는데 컴이 영 말을 듣지 않는다. 안도의 숨을 내쉬며 다행이다.. 어제 아무일 없어서... 숨을 내리고.. 어쨋든 우리증권 동지들이 와서 영상을 받아간다.. 서부역 방향을 찾다가 나보고 길건너 오라 하고, 기다리라 하고 주문이 많다. 다시 짜증이 확 하는데 차가 도착했다..

 

츄리닝 바지에 겨울 단체 복을 입고 차 창문을 내린다.. 정말 착하게 생긴 3사람이 얼굴을 내밀면서 정말 고맙다고 인사한다.. 파업대오 한테 간다고.. 고맙다고 다시 인사한다..

 

다시 미안해 졌다.. 뺑이치고, 신경질 내고, 욱! 욱! 튕기고 그러고 있었는데 참 열심히 사람들한테 참 내가 몹쓸 짓 하는 나쁜 사람이구나 싶었다.. 하루 종일 여러 사람들에게 미안해 지면서 정말 쪼그라 드는 하루로 마감하고 있다..

 

지금도 추가적으로 있을 일정을 기다리며..

 

어제도 그랬다. 미디참에서의 기사와 관련한 공개적 논쟁이 이렇게 까지 붙은 적이 있었을까 싶은, 그렇게 민감하고 중요하다 생각하면 절충해서라도 내야 한다고 주장해야지 왜 원본 수정 불가, 모아니면 도라는 식으로 모두를 심판대에 세우냐 라고 윽박 지르듯 말을 했다. 그래 민감한 주장이고 충분히 이해되는 문제제기면 쉽게 절충하고 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게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모습으로 강단지게 보여줬다. 그래서 섭섭했고, 그래서 답답했다. 과연 그 동지에게 하루종일 제안하고, 함께 논의하고 있는 우리는 뭐였을까. 차라리 정치 토론을 해서 하반기 정세에서의 집중 방점으로 잡고 기획논의로 넘겼어야 하는 건가. 기사는 기자의 자의적 판단이 아니고서는 100% 등록되어야 한다는 원칙으로 밀어 붙여야 하는 건가..

 

내안의 관료주의인가.. 편집장이 마구잡이로 "등록 안됨. 삭제다"라고 주장하지 않고, 함께 논의할 수 있다는 것이 진보넷의 장점이고, 강점이다 라고 얘기한 나도 참 무색해 졌다.

 

결론은 없다. 그냥 그런 상황만이 남았다. 어제 같이 술을 먹지 않아서 내게 결론이 없는건지, 아니면 내안의 관료주의와 그 동지와 다른 정치적 판단에 의해 그런건지 결과를 알수가 없다.

 

만성적 수면 부족.. 찌들어서.. 내몸만 생각하네.. 참..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딴짓만 한다..

집에 와서 기사를 쓰려고 노트북도 쟁여 왔건만 ..

계속 딴짓만 하고 있다. 옛날 생각하며 사진도 정리하고, 정리 못했던 것을 하나 둘 씩 올려 놓고..

이모가 보일러를 켜 놓고 나간 덕분에 집이 찜질방이 되어 있다.

오늘 .. 발딛 기도 힘들 정도로 뜨거운 이 바닥에 나의 허리를 완죤히 지저 버려야 겠다..^^:

 

임용고사 끝난 녀석들을 어제 좀 늦게 만났다.

고시인지 고사인지 다른 학번들은 다들 척척하니 잘도 붙더만 울 동기들은 참 쉽게 풀리지 않는다..

바라보기 안타깝고, 그냥 지나치기에도 참 쉽지 않은 녀석들이다..

 

전교조 가서 꼭 활동하겠다는 포부들을 밝히지만, 난 교사가 가지는 사회적 계층성으로 인한 한계가 있으니 지역활동이나 공장현장에서 부터 같이 시작하자고 말했다. 이제 이 말도 소용 없고 서로의 갈길은 정해져 있다. 그리고 이미 서로의 그런 길을 인정하고 알아서들 간다. 단지 때론 필요할 때 그리고 과거의 정으로 끊어내지 못하기 때문에 모든것을 초월해 그냥 인간적 관계로 유지되어 간다. 이미 교사를 하겠다는 것은 교육 운동을 하겠다는 한 맥이지만, 난 전교조 활동이나 교사 운동을 말하는 내 선배나 동기들이 적당한 자기 밥줄과 사회적으로 안정적으로 자기 지위를 잡고 취미활동같은 운동을 하겠다는 것 이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헌신적으로 전교조를 세워온 사람들을 폄하하는 것도 아니고, 그들의 교육운동을 비하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사범대를 나온 나의 판단이 그렇다는 거다.

 

민주노총 총파업을 보내고, 철도의 밤을 보내고 그리고 널럴한 월요일을 보내면서 이것 저것 생각이 많아진다. 개인적으로는 좋은 경험을 했다. 블로그에 내글 적듯, 꼬마게시판에 주저리 늘어놓듯 기사를 쓰면 안되는 다는 것을 뼈져리게 배웠고, 단어 선택도 신중하게 해야 하고 특히 설렁설렁 넘기는 단점을 넘어 내가 쓴 글에 대해 책임지고 재검토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도 깨달았다. 다소 챙피하고 아프지만 좋은 경험했다고 생각한다.

 

민주노총 투본 회의 참관 투쟁의 경우는 내가 들고 싶은 손을 정확히 들었으나 뒷심 부족으로 마무리가 제대로 되지 못했고 심지어 민주노총의 투본 결과를 담아 후속 정리를 못했다.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였고, 이미 내가 그것을 썻어야 하는데라고 느낀것은 이미 12월이 넘어 서였다.

 

철도 파업에 배치되면서 내가 생각한 것은 '파업 가부와 상관없이 실상황으로 보도 한다. 그리고 반드시 마무리 기사를 쓴다'였다. 변수들이 많이 생겼다. 많은 사람들은 판단들이 난무하고, 여러 평가들이 이어지고, 가진 정보가 틀려 지거나 내가 가진 정보를 확신할 수 조차 없어졌었다. 파업에 대한 시기성은 추운 새벽을 넘겨서 철도청의 최종안을 받으면서 '잠정안 수용'으로 완전히 기울어 졌다. 평가다 성과다 말이 없이 마지막 복귀 지침에 그 흔한 박수 조차 없었다. 현장에 서 있는 나는 확대쟁대위의 투표 결과와 부곡 현장 분위기 속에 갈팡질팡 할 수 밖에 없었다. 무엇인가 무엇이 현장의 판단이고 분위기 여야 하는가에 대해 나는 남겨진 조합 간부들, 그들에 대한 조직적 자신감 없음으로 결정 지었다. 그만큼 준비가 덜되 있기도 했고.

 

마지막 결국 밤을 세고 집에 오는 길에 마무리 정리하고 자야, 사람들이 기사를 보겠구나 싶어 욕심부려 정리한 게 화근이 됐다. 지적도 받았고, 정리도 했다. 그렇지만 그 정리된 상황을 모르고 본 사람들은 과연 어떻게 평가하고 기사를 봤을까에 대한 생각을 하면서 참 많이 아찔해 졌다. 아. 이런 거구나. 미디참이라는 곳이, 인터넷 매체라는 것이 이런 곳이구나를 등골 서늘하게 느낀 순간이었다. 덧글보며 설마했던 문항을 다시 읽은 글에서 황당해 하고, 아무도 지적해 주지 않은 것에 대해 다소간에 원망도 나오면서 어떻게 해야 할까 짱구를 마구 굴리다가 선택을 했다. 고치고, 덧글달아 설명하고, 글을 좀더 수정 보자고. 편집장의 존재가 용욱이 형의, 용구라의 존재가 정말 절실해 지는 순간이었지만 결국 혼자 마무리 지어 버렸다. 그게 제대로 한 것인가에 대한 판단도 내일 회의때 해야 하겠지.

 

과한 욕심은 실수를 부르고, 공간에 대한 책임은 나의 신중함에서 나온다. 덜렁 거리지 않고 꼼꼼하게, 허둥지둥 하지 말고 신중하게 12월의 내 모토는 "차분해 지기"다. 역할 구분상의 실수 이기도 했으나 나의 실수가 컸던 만큼 차분하고 신중하게 판단하고 실천하는 내가 되야 겠다. 2005년도 다가오고 이제 한살 더 먹어서 20대 중반도 훌쩍 넘어 버리게 됐으니 살아온 시간 만큼의 사회적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차근차근.. 신중신중.. 진중진중.. 하게..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책]현대가족이야기 -조주은

신기하다. 이 책의 저자가 미디어 참세상 칼럼니스트인지도 몰랐고, 현대가족이야기의 저자 인줄도 몰랐다. 성공회대학교에서 열변을 통하며 운동권들은 한번씩 읽어보라고 권한 책이 이 책인줄도 몰랐고, 진보넷 와서 성교육 해 주던 동지가 이 책의 저자인줄도 책을 읽고 나서야 알았다. 어처구니 없는 정보력이란.. 각각 또다른 조주은 이라는 여성학자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알고보니 다 한명이였던 거다. 신기하다.


현대가족이야기는 현대자동차에 다니는 아버지, 남편을 둔 가족이야기라는 한 축과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노동자가족이야기 두 가지 축으로 이해를 했다. 가족 중에서도 여성, 어머니를 중심으로 보되 실제적 실태조사와 인터뷰를 중심으로 분석돼있다.

 

한마디로 재밌다. 조주은 동지의 성격 만큼이나 솔직하고 재밌고, 가리는게 없다.  

.

 



여러가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재생산 도구로써의 가족도 보고, 그 가족단위를 중심으로 배치된 여성의 사회적 역할도 분석하고, 체제, 지역사회 내적으로 남성과 여성의 성별 분업의 내적으로 체제화 하고, 학습화 하고, 내면화 시켜 동일성들을 만들어 낸다.

 

가족이란 집의 공간을 그리고 인간들의 관계를 안식처의 기둥으로 만들어 버리는 생산적 시스템이 있다. 읽으면서 느낀 것은 나 역시도 그 시스템의 한 동조자인거 같다는 거다. 지금 단지 내게 내가 주체적으로 꾸릴 가정이 없을 뿐이지, 열심히 재정적 책임을 지고 있는 아버지의 존재와 단 한번의 외박 경험도 없는 가정지킴이 엄마. 기둥같은 두 사람의 시스템을 그대로 악용하며 지금의 내가 기생하는게 아닌가 하는가 해서 왕창 찔렸다. 그리고 지금 얹혀 사는 이모네 집에서도 나 엮시 그런 존재 인거 같다. 가사일에 대한 기초적 분담 조차 나눠 하지 않는 내 모습은 너무나 당연히 미안한 모습이어야 한다.

 

그렇지만 집에 부모님이 없는 집을, 어머니와 아버지가 없는 내가 상상이 안된다. 오빠들이 없는 나도 상상이 안된다. 가정이 가지는 체제 유지적 기능은 알겠는데 그렇다고 해서 대안적 존재는 잘 모르겠다. 가정의 형태던 인간의 공동체적 형태던 체온을 느끼고, 온정을 느낄만한 공간이 있어야 하는거 아닐까. 그런게 없으면 일끝나고 가서 놀곳도, 쉴곳도 정말 적막하고 쓸쓸해서 매일 술을 마시게 될 것 같은데 ^^; 제 5원소에서 브루스 윌리스가 혼자 캡슐같은 집에서 사는 거 정말 불쌍해 보이잖아...  

 

책은 재밌다. 음.. 솔직히 예로 들어진 여성들의 조건이나 상황들을 확장 적용하거나 일반화 하기 어렵지만 공감하기는 쉬웠다. 충분히 그럴수 있지 끄덕여지기도 했는데 그 동네에서 어떻게 견디며 책을 쓰고, 대학원 공부를 했을까 유별난 저자가 정말 독하고 대단해 보였다.

 

"가족을 신성한 사적 공간의 왕좌에서 끌어내려, 인간을 기계의 일부로 합체하게 만드는 자동차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 시스템, 이윤 추구를 위해 기꺼이 '가족'을 이용하는 거대 기업의 경영 정책, 공해와 교육을 키우려고 해던 것도 사실이다. 사고의 위험이 가득한 지역사회, 그리고 노동조합의 협상 전략과 지역 공동체의 평준화 된 삶 옆에 나란히 놓고자 했다. 또한 실제로는 전쟁과 갈등을 내포하고 있으면서도 언제나 '평화'와 친밀함'의 이미지로만 덧칠되어 있는 '가족'에 대해 의문부호를 찍고자 했다. "

 

그냥 내가 적은 책 내용

 

p.41
우리는 자신의 노동자 남편이 건강한 활동가로 성장하게 끔 조금다른 차원의 내조를 하는 것일 뿐이었다. 물론 모임을 통해 나름대로 스스로 여성으로서 독립된 개인으로서 정체성을 키우려고 했던 것도 사실이다. 또한 현대자동차 노동자의 열악한 노동 현실뿐만 아니라, 전체 노동계의 문제에 민감해지고 노동자 남편을 둘러싼 사회 현실에 대해 폭넓게 이해하는 것이 그 모임의 중요한 과제이다.

 

나는 엄마, 아내, 여성으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해 다시 탐수해야 했고, 나와 우리를 그토록 힘들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직시하고 싶었다.

 

p.66
현대자동차의 모델 그들 가정에서 남편과 부인 사이의 철저한 성별분업이 재생산되고,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한 '가정중심성 domesticity'이 가족을 규정하는 힘으로 되고 있는 것이다. 전업주부라는 존재는 그 전제이자 결과이다. 여성이 있을 곳을 가정에만 붙박아 두고 가정을 바깥 세상과 대비시키 신성화하는 가정중심성 이데올로기는 , 남녀간의 평등한 동반자 관계를 방해하고 사회에서 여성차별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된다.

 

p.99
결혼하지 않고 혼자사는 여성들은 흔히 '주인없는 여자' '뭔가 문제가 있는 여자' '일부일처제를 위협하는 위험한 여자'로 받아들여지고, 그에 따라 보이지 않는(혹은 드러나게) 차별을 받기도 한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결혼은 개인의 선택사항이 아니라, 다양한 사회제도와 맞물려 체계화되어 있는 준강제적인 제도라 할 수 있다.

 

p.149
자본의 착취에 대항한 노동운동을 하는 남성들 역시, 여성이 가정에서 만들어가는 스위트홈 이데올로기를 내면화 하여 가정에서 또 다른 권위를 행사하고 있다.

 

p.177
밥은 행복한 가정과 직결되는 의미를 갖는다. 밥을 차려 주는 것은 단순히 내조를 넘어 가족을 구성하는 행위의 의미도 가지고 있다.

 

p. 201
주인공 여성들은 어머니 역할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한 개인으로서의 욕구와 어머니로서의 정체성 사이에 큰 갈등을 겪지 않는다. 이들은 어머니 역할 수행에 따른 육체적, 심리적 피로가 가중되는 초기 양육기를 거치면서 오히려 '어머니' 정체성에서 편안함과 삶의 가치를 느끼게 된다.

 

p. 315
페미니스트들과 일부 학자들은 생계부양자(남성)과 가사전담자(여성)로 구성된 핵가족이 보편적인 가족 형태가 아니라 이데올로기적인 구성물일 뿐이고, 여성들이 가정에서 경험하는 갈등과 긴장을 보이지 않게 하고 낭만화시켜 남녀간의 권력 관계를 은폐한다면 비판해 왔다.

 

제언
노동자가족에서 가족의 가정중심성을 어떻게 약화시키고 가정과 사회 모두에 변화를 가져오게 할 것인가?: 첫째 무엇보다 우선 가부장적 특권을 유지시키는 '장시간 노동' 그리고 그것을 재생산 하는 매커니즘인 교대레 근무가 폐지되어야 한다. /시급제를 없애나가야 한다.

 

p.324
가족 임금 이데올로기를 벗어나서 노동주체를 상정해야만 남성들을 가족을 책임져야 한다는 의무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을 뿐 아니라, 여성들의 사회적 노동이 가시화되는 계기도 만들 수 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1년 싱가폴

5학년이 되던 해 처음으로 비행기를 탔다. 친구 잘둔 덕분에 친구의 친척집에 머물면서 아이들 돌봐주는 조건으로 보름정도 싱가폴에 갈 기회가 생겼다. 그리고 다녀왔다.

 

당시 들인 돈은 우리 나라 돈으로 100만원정도. 내돈 30, 부모님돈 70  

그리 싸게 간것도 비싸게 간것도 아니다.

비행기 왕복이 50만원 좀 넘었던 기억이 나고..



싱가폴은 우리나라 보다 1시간정도 늦고 싱가폴 달러는 우리나라랑 비교하면  SDG 1S$=700원 정도 된다. 동남아시아의 다른 나라에 비하면 물가가 상당하다. 싱가폴이라는 이름의 유례는 예날 싱가폴에서 묘하게 생긴 동물을 발견했는데 그 동물을 사자로 오인해 singa pura(사자의 도시)라고 부르면서 시작됐다고 했다.  

 

1819년 영국 스탬포드 래플스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견제하기 위해 노호르 주의 술탄으로 부터 싱가폴을 사들여 이 곳에 자유무역항을 건설했다. 말레이 반도와 인근 여러 나라를 관할하는 영국의 무역거점으로 성정하게 됐다. 이후 1921년 영국이 군사기지를 건설하고, 군사, 경제적으로 영국의 동아시아 식민지 지배의 핵심이었다. 2차 대전 중에 일본이 싱가폴에 쳐들어와 싱가폴 사람들을 학살하는 대학살극을 벌어서 그런지 상당부분 나쁜 감정들이 있다고 하고 1959년 자치권을 획득했고, 말레이시아로 부터도 완전히 독립한 상황이고. 도시 규모는 서울보다 좀 큰 편인데 경제적 규모나 세계적인 지위를 볼때 비교가 안되는 곳이다.

 

우리나라에 알려 진 것 처럼, 싱가폴에 갈때 껌을 가지고 들어갈 수 없고, 가지고 가다 들키면 벌금을 내야 하고 당연히 압수 당하고. 길거리가 깨끗한거는 이루 말할 수 없고, 안전장치들도 잘 되 있어서 지하철의 스크린 도어나 도로 표지 판등이 상당히 잘되어 있다. 물론 사람들이 질서도 잘 지키고, 버리는 일도 없고, 차들도 모범적이고.. 인공도시 답게 조경도 멋지던데, 친척분의 말로는 간판의 높이과 크기 숫자를 비롯해 건물 높이와 모델등 왼만한 것은 다 국가가 규제하고 있다고 한다. 

 

사실 리콴유나 싱가폴 사회 통제적 분위기와 성형등을 보름 동안 뭐 판단할 것 조차도 없었지만, 경제 성장이라는 발판을 딛고 있는 사회의 역동성(센토사 섬으로 가는 케이블 안에서 본 항구의 번잡한 움직임, 넘치는 관광객, 지하철 등 곳곳에서 드러나는 활기)과 그들이 보이는 자부심 그리고 말레이시아에서 넘어온 사람들과의 경제적 불균형의 아이러니들이 마구 잡이로 섞여 있었다.


 아마 이 사진에서 날 찾기는 쉽지 않았겠지만 센토사 섬에 있는 사자상 근처에서 찍은 거다.

 

2001년 여행에서는 싱가폴과 말레이시아를 갔다. 말레이시아의 여행은 정말 집에 묶이지 않고 자유롭게 돌아다녔고, 특히 영화에도 자주 나오는 콸라룸푸르의 페트로나스 트윈타워(452m)에도 가보고, 절도 다니고, 팬이 도는 싸구려 여관에서도 자보고..

 

2000년과 2001년의 겨울은 참 괴롭고 힘든 시기였다. 나름대로 현장이란 곳에 기웃기웃하다가 생각을 바꾸기도 하고, 학교에서 설 자리가 없다는 것에 대한 처절한 현실도 느꼈고, 정말 오아시스 같은 여행을 친구랑 갔다 왔다. 남은 사진도 몇장 없고, 준비된 동선도 없이 무작정 떠났다가 와서 솔직히 어디어디를 갔다 왔는지 기억도 안나지만 내 도피여행의 시작이고, 첫 외국어를 하는 세상에서 단 둘만이 한국어를 하는 놀라운 현실을 체감한 기회이기도 했다.

 

친구와 나의 영어 실력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경험이 있었는데..

싱가폴에 있는 유명한 도서관에 가려고 왠 사람에게 길을 물어 봤다.

"우리에게 길좀 알려 달라" 그랬더니 그 외국인이 한참을 영어로 설명하고, 그림을 그려 주고 난리가 났다(우리가 만난 싱가폴 사람들은 정말 다 친절했다) 그러더니 맨 끝에 "Are you follow me?" 라고 물었는데 우린 팔로우만 들은거다. "아니 이 사람이 우리한테 어쩔려고 따라오라는 거야. 야 안돼!" 갑자기 땡큐 라고 대답해 버리고 확 돌아서 버렸다. 어찌나 그 외국인이 황당했을까..

 

이런 경험도 있었다. 센토사에 가려면 케이블 타고 가면 케이블 타고 와야 한다. 그사실을 사전에 몰랐던 우리는 매표소에서 갈때는 케이블을 타고 가고 싶고 올때는 배를 타고 오고 싶다는 말을 한참을 하고 있었는데 안내원과 말이 통하지 않았다. 우리는 왕복하지 않겠다는 말로 "go but No Return"이라고 말을 했는데 안내원이 상당히 당황해 하더니, 나중에 우리의 의도를 알아들었는지 한국말로 "왕복해야 해요"라고 대답을 했다. 어찌나 당황스럽던지.. 하하.. 웃으면서 땡큐를 연발했었다.  

 

 같이 여행했던 내 친구가 다시 싱가폴에 간다. 다시 그 친척집에 간다. 아직 국가 공인 선생님이 되지 못한 내 친구는 요번 시험에서 떨어지면 상당기간 싱가폴에 묶여 있게 될 것이라는 겁을 주며 '너네가 그리울 거야'라는 말을 연발한다.

 

오뚱이가면.. 정말 심심할 텐데.. 약방의 감초 같은 오뚱이 가면 우리끼리 모여도 참 서먹서먹 할 텐데.. 오뚱이 아이들 수영장에서 다이빙 한다고 난리 치면서 머리 박는 사고가 없기를, 영어 때문에 압박받지 않기를.. 건강하게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