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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이다.
대학 졸업반때.
친구 오빠의 소개로 만난 누군가와 두 달째 만남을 이어가는 중이었다.
3월도 막바지에 당시 인기있었던 영화 "사랑과 영혼"을 보고 나오는데
(대충 이정도면 어느 정도의 분위기가 흘렀을지 짐작이 될테지만 ^^*)
눈이 펑펑 쏟아지는게 아닌가.
유난히 눈이 잦은 금년에야 3월에 오는 눈이 더이상 신기하기는커녕
자연을 오염시킨 인간의 폭력에 대한 하늘의 징벌일까 걱정스럽지만
그 해 3월의 눈은 신기하고 느닷없이 주어진 선물처럼 들뜬 기분을 만들어주었다.
갑자기 오늘, 대설주의보를 떠드는 뉴스를 보면 그때 생각이 났다.
그때 나는 빈민지역 탁아소에 출근한지 얼마되지 않아
머리속엔 온통 아이들에 대한 생각밖에 없이 생활하던 시기였지만
사람의 감정을 기막히게 잡아내는 헐리우드산 신파영화를 보고 나온데다
하늘에서는 눈이 쏟아지지, 옆에는 남자친구가 있지,
잠시 아이들 생각을 잊을 만도 하지 않는가?
양희은의 노래를 들으며 차에 앉아 눈 오는 서울거리를 천천히 달리면서
잠시 세상과 분리된 듯한 느낌에 '오싹' 했다.
그리고, 그 잠깐의 감상이 지나고 나자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나?
밀려드는 상념을 주체할 수 없어 결국 혼자서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내가 돌보는 아이들,
이천원짜리 운동화를 선물로 받고 1주일동안 가슴에 끌어앉고 잠을 자던 아이들
그 아이들의 삶 속에서
나는 어떤 존재인지? 어떤 존재이고 싶은지?
정답도 없이 계속되던 질문을 던지며
그렇게 스물몇살의 젊음이 지나갔다.
아직도 나는 그 답을 찾기 위해 살고 있는 것 같다.
잠깐의 연애는 가물거리는 기억으로, 추억으로만 남았지만
혼자 집으로 돌아오게 만든 질문들은 여전히 생생하게 내 삶에서 계속 되고 있다.
나이를 더 먹으면 알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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