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야화

from 2006/12/06 20:50

1. 꿈을 먹어치우는 페로시타스

 

영영 깨어나지 못할지도 모르는 잠을 자기에 앞서, 나는 이 글을 쓴다.

 

그 어떤 정의감이나 의무감 혹은 책임감, 확신도 없이 나는 그곳으로 간다.

나는 왜 그곳으로 갈까? 서글프게도, 나는 가야하기 때문이다.

 

삶이란 자신의 의지로 만들어가는 거라고 믿었던 건 언제까지 였을까?

 

[나는 본다. 나는 창조한다. 그리고 나는 자유다. 모든 것이 내 것이다.

쇠사슬까지도 내 것이다. 나는 내 고통의 주인이다.]

 

로망롤랑의 글귀를 노트에 적어 놓고 오랫동안 기억하면서

죽음까지도 내 선택에 의한 것으로 하기 위해 마음속으로 마지막을 그려보곤 하던

나는 어디로 간 것일까?

 

내 고통은 커녕 내 즐거움조차 내 것이 아니다.

 

나는 아무 것도 보지 않는다. 나는 파괴한다. 그리고 나는 모든 것에 구속되어 있다.

아무것도 내것이 아니다. 나는 운명의 지배를 받는다.

 

서글프게도, 정말 서글프게도 나는 그저 가야하기 때문에 그곳으로 간다.

가지 않을 수 있다면 하는 작은 기대조차 내게는 없다.

 

왜 나인가? 라는 질문이 소용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자꾸 묻게 된다.

 

어젯밤의 꿈을 꾸기 전까지, 나는 몇년 동안 꿈을 꾸지 않았다.

꿈을 꿀 시간쯤이면 나는 언제나 회사로 향하는 버스에 있다.

운이 좋아 앉아서 가는 경우에

버스에서 달콤하고 깊고 짧은 토막잠을 잔다.

 

보통은 좁은 바닥에 의지하여 넘어지지 않기 위해 애쓰면서,

다른 사람들과 최소한으로 맞닿기 위해 애쓰면서

음악을 듣는다.

음악을 고르는 게 귀찮아서 MP3 플레이어는 셔플로 해둔다.

 

나는 억울하다는 느낌을 받지만, 인생은 언제나 그랬다.

신체적 결함,10년이상 지속된 부모의 별거나, 말도 안되게 가난한 가정 형편,

정신적 결함이 있는 동생, 내세울 것 없는 외모,

이제는 아주 익숙해져버린 억울함들.

 

회사에서는 당연히 해고 당하게 될 것이다.

다시 취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겠지만,

내가 잠들어 있는 동안 우리 가족들은 가난의 공포와 막막함에 떨어야 한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

그정도쯤, 스스로들 알아서 하면 된다.

내가 꿈을 먹어치우는 페로시타스와 싸우는 동안 그들은 가난을 정면으로 대면하게 된다.

 

어쩌면 별로 대단할 것 없는 괴물일지도 모른다.

하루만에 나는 돌아와서 회사에는 사유서를 내고 일상으로 돌아오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그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

 

그렇다.

나는 어젯밤에 꿈을 꾸었다.

 

거대한 에메랄드 목걸이를 한 페로시타스의 꿈.

 

어둠 속에서 목걸이의 에메랄드 만이 녹색으로 반짝였다.

짐승의 눈처럼, 에메랄드는 두개였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녹색.

어둠보다 더 어두운 그의 윤곽이  나를 덮친다고 생각했을 때

그것이 그의 그림자라는 것을 알았다.

내 몸은 사지가 분리된 듯, 나는 대체 내 팔을 찾을 수가 없어

덮쳐오는 어둠을 망연히 바라보아야만 했다.

그림자는 여러차례 나를 덮쳤다.

내 다리는 아주 먼곳에 버려진 듯 어느 곳으로도 나를 도망치게 해주지 않았다.

눈꺼풀조차 나를 보호해 주지 않았고

귀는 여느때처럼 무방비로 어둠의 적막을 고스란히 전달했다.

냄새.

냄새가 필요했지만, 물 속에서처럼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다.

어둠은 끈적하고 무거웠다.

목소리가 나지 않을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어서 나는 작은 비명조차 낼 생각도 못했다.

 

하지만 그림자는 내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는 내게 다가올 수가 없었던 것이다.

좁은 우리에 갇힌 맹수처럼 내 앞을 좌우로 왔다갔다 하면서

나를 위협할 뿐이었다.

 

두터운 어둠속에서 그의 목소리가 아무런 매개체도 통과하지 않고

내 깊은 심장속에 울렸다.

 

나를 찾아오겠노라고.

하루도 빼놓지 않고 나를 완전히 사라지게 할때까지 찾아오겠노라고.

내가 완전히 사라지게 되면 내 껍데기는 영원히 죽지 못할 거라고.

지금의 현실을 시지프스처럼 반복하게 되겠지만 결코 희망은 없을 거라고.

 

나는 그와 싸우는 수밖에 없다.

160cm도 안되는 작은 키에 좁은 어깨, 장애가 있는 오른 다리를 이끌고

조용히 그와 맞서는 수밖에 없다.

 

여느때와 같은 일상의 피로가 나를 잠들게 한다.

나는 잠이 든다. 눈꺼풀이 천근처럼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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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06 20:50 2006/12/06 20: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