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해두자.

from 책에 대해 2001/08/14 14:46
나는 고등학교 때 책을 가장 많이 읽었다.
그 책들 가운데, 몇 권은 내가 갖고 있지만, 대부분은 어딘가 다른 곳에 있다.
대학을 들어간 뒤로는, 일정한 거처 없이 지내는 일이 많아서, 이리저리 옮겨다니다 보면,
아끼는 책이었는데도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곤 했다.
때때로 그 책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찌릿찌릿하다.
다시 읽고 싶은 마음에 너무 괴로울 때도 있다.
책이 절판되어서, 더 이상 출판되고 있지 않은 경우라던가,
출판이 되고 있어도, 왠지 미심쩍은 출판사에서 나오고 있을 경우에는
다시 사서 볼 수도 없으니, 더더욱 괴롭다.

어쨌든, 그런 와중에, 늘 생각나는 책들이 몇 권 있다.
무언가 잊을 수 없는 것을 가진 책들.
고등학교 이후에, 다시 보지 못했지만, 꼭 다시 보려고 마음먹고 있는 책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글 쓰기에 진지한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꼭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책들이다.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 [살로메] - 진정한 유미주의란 무엇인가를 느끼게 해 준 놀라운 작품이었다. 살로메가 이오카난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부분에서, 나는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짧은 희곡이어서, 수 백 번도 더 반복해서 읽었고, 문장으로는 기억할 수 없지만, 완성된 연극처럼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다. 거대한 흑진주나, 다이아몬드처럼, 그 자체로 완결된, 나무나 꽃과 같은 자연물들처럼, 다른 그 무엇을 상상해 볼 수 없는, 그런 작품이다.
오스카 와일드의 작품 가운데, [살로메]와 [장미와 나이팅게일]이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

알랭 로브그리예의 소설, [질투] - 이 책은 어린 나에게, 꽤나 충격이었다. 새로운 글 쓰기 방식이라는 것이 이런 식으로 존재하는 것이구나...하고 생각했던 것 같다. 세밀한 묘사를 통해 화자의 심리가 나에게 전이되는 것을 느끼면서, '질투'라는 감정을 처음 느껴보기도 했다. 두 손가락 사이의 10cm 거리에 대해서, 혹은, 내 삶의 어떤 상황에 대해서 로브그리예 식으로 바라보는 버릇을 갖게 되기도 하였다. 상황을 마치, 사진을 찍어놓은 것처럼, 머리 속에서 멈추어 둔 채로 관찰하여 그 안에 든 미묘한 분위기를 읽어보려고 하는 것이다.

프랑소와즈 사강의 단편들 - 사실, 내가 무엇을 읽었었는지, 제목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고, 내용도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녀의 글을 읽으면서, 이것이야말로 교과서이다...하고 생각했었던 기억이 난다. 아아~ 갑자기,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부각되면서, 너무나 다시 읽고 싶어진다. 하지만, 손바닥만한 세로쓰기 방식의 누런 책이 아닌, 깨끗하게 제본되어 큰 글씨로 쓰여진 사강의 책이란, 매력이 반감, 반감 되어버리는 것이다.

에밀 아자르 [자기 앞의 생] - 성장 소설은, 성장기에 읽어야 가장 맛이 난다. [호밀밭의 파수꾼] 같은 책은, 그래서, 요새 다시 읽어보면 예전 같은 저릿함을 느낄 수가 없다. 나만 그런가? 어쨌든, [자기 앞의 생]은 성장 소설이 아니다. [살로메]와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는 다른 글이라고 생각한다. 그 주제라는 것이, 흔하디 흔한 사랑과 죽음인데, 아름답게 사랑하고 아름답게 죽는 것에 대해 거리낌 없이 써나간 이런 책들을 읽으면서, 나는 내 삶을 지켜나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문예 출판사에서 다시 장정하여 출판하고 있던데, 나는 내가 가진 2500원짜리 책이 더 맘에 들어.

비평을 하려고 했던 것은 절대 아니고, 나는 소설의 비평을 절대로 읽지 않는 만큼, 쓰는 것도 정말 싫어한다. 그저, 기억해두고 싶었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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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8/14 14:46 2001/08/14 14: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