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토의 상상, 개토가 쓴 글, 그리고 찍은 그림들.'에 해당되는 글 262건

  1. 더워서 (2) 2008/07/14
  2. 은하철도의 밤 2008/07/12
  3. 존레논대화성인 2008/07/10
  4. 2008/07/07 2008/07/07
  5. 트리거 2008/07/03
  6. 2007/11/29 2007/11/29
  7. funtional 2007/11/23
  8. 머리카락이 우수수 2007/11/01
  9. 2007/10/24 (6) 2007/10/24
  10. 포스터 (4) 2007/10/22

더워서

from 그림 2008/07/14 2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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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14 21:47 2008/07/14 21:47

은하철도의 밤

from 책에 대해 2008/07/12 02:25

책이 집에 없다.

 

어딘가에 있겠지만, 보고 싶을 때 보지 못하는 것은 싫다.

 

게다가 품절이다.

 

품절만 안되면, 선물한 셈칠텐데.

 

특별히 좋아하는 책은, 결국 여러번 사다가 품절인 사태를 만나게 된다.

 

미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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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12 02:25 2008/07/12 02:25

존레논대화성인

from 책에 대해 2008/07/10 01:03

또 몇권의 책을 샀고, 이번 선택은 상당히 만족스럽다.

 

존레논대화성인은, 저자가 독자에게 부분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역시 비평가따위는 속을 파서 볏집따위로 채우는 편이 낫겠다 생각했다.

 

깜짝 놀라기도 했다.

 

 

 

그냥 적어놓기만 해도 바보같은 생각인데.

 

그러고들 사는 거지.

 

 

나 부탁이 있어.

 

더이상 이곳에 오지마.

 

니가 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구역질이 나.

 

지워버린 덧글도 봤어.

 

오.지.마.

내 근처에 다가오지 마.

 

존중했던 만큼 경멸해.

 

내 이름을 생각하지도, 내 몸에 대해 생각하지도 마.

기분이 아.주. 나쁘거든.

 

농담이 아니야. 너를 자극하기 위한 것도 아니야.

다시는, 나를 기웃거리지 마.

 

내 이야기에 너를 섞고 싶지 않아.

 

그럼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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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10 01:03 2008/07/10 01:03

2008/07/07

from 2008/07/07 14:52

[먹고 싶은 게 없어.]

소녀는 생각했다.

 

급식실에서는 물을 뿌려둔 시멘트 바닥 위로

 

고무장갑을 끼고 흰 가운에 흰 작업모를 걸친 사람들이

노란 고무장화를 신고 분주하게 돌아다닌다.

 

제법 반짝거리는 커다란 조리기구들.

 

색이 바랜 노란 행주.

 

정액같은 색깔의 뿌연 도마 위에서 묽게 붉은 고기핏물을 흡수한다.

도마 위에는 행주가 지나간 자리가 선명하다.

 

250ml 우유에서는 비린내가 난다.

갈치에서는 시체냄새가 난다.

쌀알은 느끼해. 침에 섞이면 들척지근한 맛이 난다.

김치는, 정.말. 끔찍하다. 지저분한 냄새가 난다.

모든 것들이 으깨져서 창백한 배추의 시체를 덮고 있는 몰골이 가관이다.

무 국의 무는 물컹물컹하다. 피곤에 쪄든 채로 안간힘을 쓰는 게 짜증난다.

 

소고기. 국 안에 든 소고기는 쫄아들 대로 쫄아든 상태다.

내 장딴지를 네모나게 잘라서 무가 든 국물에 넣고 30분쯤 삶으면 이런 모양이 나오려나.

 

종아리를 내려다 본다.

둥글고 매끈하게 생긴 저 다리도, 잘 끊어 잘라서 삶아놓으면 이렇게 잘게 찢기 쉬운 모양이 될거다.

칙칙한 갈색으로 변한 자신의 살덩이.

 

시체들을 먹고 자라는 거니까. 어차피.

 

어떤 시체들을 먹고 자라는 건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자라고 싶지 않다.

 

물.

 

물은 종교적이다.

더러운 것들을 다 씻기고 어루만져주고 투명하게 된다.

몸 안에 들어가서도 그럴까?

종교적인 것은 가식적이다.

투명해 보이지만 그안에 뭐가 들었는지는 하느님만 알 일이다.

 

[먹고 싶은 게 없어.]

 

급식판을 내려다 본다.

 

역겨운 것은 아니다.

 

원래 그렇다는 걸 인정하고 나면 역겨울 것은 없다.

하지만,

식욕은 당기지 않는다.

 

식판에 담긴 걸 그대로 퇴식구에 갖다 놓으면 학주한테 걸려서 된통 혼난다.

 

식판을 들고 교실을 나서자 시끄럽게 떠들어대면서 침과 음식물을 튀겨대던 아이들이

일순 조용해진다.

 

그리고 곧 똑같은 데시벨로 웅성거림이 시작된다.

 

식판을 들고 교문을 나선다.

 

거리는 조용하다.

바로 옆 건물에서 수천명의 여자아이들이 제각기 입을 오물거리고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쓰레기통 옆에 식판을 내려놓으려고 할 때,

 

두 사람이 소녀에게 말을 건넨다.

 

"이봐 학생!"

"저기..."

 

한 사람은 수위아저씨다. 당연히 해야할 일을 하고 있다.

 

다른 한 사람은?

 

식판을 향해 손을 내밀고 있다.

 

수위아저씨가 가까이 온다.

 

식판을 향해 내민 손이 움찔한다.

 

"이 학생, 이거 무슨 짓이야! 에비! 쉿쉿, 저리 가!"

 

 

식판을 도로 들고 들어왔다.

처리가 곤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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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07 14:52 2008/07/07 14:52

트리거

from 2008/07/03 18:37

날 김을 입안에 부석부석 소리를 내면서 집어넣고 씹어먹으면서,

 

트리거에 대해 생각한다.

 

트리거를 한국말로 뭐라고 하더라?

방아쇠.

방아쇠라니, 너무 귀엽지 않은가?

 

트리거쪽이 훨씬 트리거답다.

트리거 트리거 트리거 트리거 트리거 트리거 트리거 트리거

트리 쪽을 빠르게 발음하고 거어 한다.

 

날 김으로 배를 채울 수 있을까?

채울 수 있다면 그러고 싶은데.

 

내 머리속에도 몇 개인가 트리거가 있는데,

그걸 자극하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문을 열어야 하고,

보이지 않는 문은, 인간의 힘으로 해독불가능하다고 알려진 암호가 있어야만 열 수 있는 자물쇠로 잠겨있다.

 

보이지 않는 문을 찾아, 인간의 힘으로 해독불가능하다고 알려진 암호를 입력하고 트리거를 당기다.

 

천재적인 해커들이 있다.

 

생각보다는 드물지 않게 있다.

 

내 인생에 한 명쯤.

 

그가 암호를 알게된 것은 천재들이 다 그렇듯,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것이다.

 

밤낮으로 책상밑에서 새우잠을 자면서 피자나 식은 통닭, 조미 김 등으로 배를 채우고,

머릿속은 나로 가득 채우고

갖은 부호들과 비논리적 혹은 논리적 체계들을 읽어내기를 몇 년 정도 하다보면,

그렇게 된다.

 

라는 것은 나의 상상이고,

 

막상 그는 와인과 잘 차려진 밥상 등으로 머리를 채우면서,

뱃 속은 나로 가득 채우고

온갖 부호들과 비논리적 혹은  논리적 체계들을 만들어내기를 몇 년 정도 하다가

그렇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트리거.

 

트리거를 당겨주었으면 해.

 

남의 트리거나 당기는 건 열정과 힘이 넘치는 젊은 시절에나 가능한 일이다.

 

그는 떠났다.

 

어처구니 없게도, 그는 보안요원이 되었다.

철이 든 것이다.

 

자본주의에 건배.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

쇼스타코비치에 건배.

 

보안요원은 암호가 해킹되지 않도록 교묘하고 복잡한 시스템을 만들어 주고 돈을 받는다.

 

그래서,

 

나는 더이상 해킹당하지 않는다.

 

는 것은 거짓말이다. 왜냐하면 그는 나를 위해서 일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쨌든 나는 더이상 해킹당하지 않게 된지 셀 수 없는 해를 지났다.

 

쇼스타코비치를 들었다.

쇼스타코비치는 살아있지 않기 때문에 들어올릴 수 없다.

살아있다고 해도 내 팔로 그를 들어올리는 것은 무리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쇼스타코비치'라고 말한 것을 들었을까?

그랬을 지도 모른다.

분명, 나는 쇼스타코비치를 알고 있으니, 누군가 말한 것을 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어디선가 읽기만 했던 건지도 모른다.

 

쇼스타코비치를 들었다.

듣고 또 들었다.

혹시, 트리거를 당겨주지 않을까 해서.

 

show star co bitch

 

끈적끈적하고 진하고 역한 무언가를 뒤집어 쓰고

구석에 쳐박히면

아무것도 먹지않고 삶과 잠의 중간영역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면

보이지 않는 문 너머로 트리거가 보인다.

 

트리거는 작지만,

당기면 굉장한 폭발이 일어나곤 했다.

 

한동안 아무것도 들을 수 없게 될 만큼 귓청을 울리는 폭발음,

코를 찌르는 화약 냄새와

무엇보다, 몸 전체를 퉁겨내는 둔중한 충격이 오래도록 가시지 않게 된다.

입안은 쓰고 머릿속엔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것처럼 눈앞이 새하얗다.

 

나는 머릿속에 트리거가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았었다.

 

역시 트리거가 있다는 걸 아는 편이 마음이 놓인다.

 

암호는 더러운 것들과 관련이 있다.

 

상쾌한 공기나 부드러운 바람, 푸른 하늘이라던가 파릇파릇한 새싹, 말랑말랑한 아기 같은 걸

짓밟고 뭉개고 오물로 채워진 늪에 담궈 질식시키고 싶다.

 

무딘 칼로 짓이기며 갈라내서 그 안의 액체를 몸에 바르고

썩을 때까지 누워있고 싶다.

 

건배.

 

맥주나 마셔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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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03 18:37 2008/07/03 18:37

2007/11/29

from 사진을 배우다 2007/11/29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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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29 21:40 2007/11/29 21:40

funtional

from 책에 대해 2007/11/23 16:38

narrator라는 단어는 말하는 목소리(a voice speaking)를 암시하고, 말하는 목소리(a speaking voice)는 존재의 감각(인식 / sense)을 암시한다. 그라마톨로지의 출현을 선포한, 데리다는, 말하기를 글쓰기로부터 분리시키는 차이(gap)에 주목했다 : narrator를 '말하는 자'로부터 '쓰는 자'로 변형시키는 그러한 변화, 혹은 좀 더 정확하게는, 어떤 inscription point(시점)를 향하는 것의 부재. 정보과학(Informatics)은 이러한 변형을 좀 더 확장시킨다. 글쓰기가 이진수에 의해 서명된 명멸하는 기표들에 자리를 양보하게(yield to) 되면서, narrator는 쓰는 자(scribe)가 아니라, 적절한 코드들에 접근하기 위한 권한을 부여받은 사이보그가 된다.

narrator의 기능이 어떻게 변화되는가를 보려면, Mark Leyner의 [내 사촌, 나의 위장병 전문의]에 나오는 이야기들 중 하나인 "나는 지독하게 뜨겁고 조밀한(dense) 하얀 점이었다. (I was an Infinitely Hot and Dense White Dot)" 중에서 유혹 장면을 살펴보자. "Sinutab에 의해 high되고(약을 먹고 열에 들떠있고), 등방적으로 운전하고 있어서 어떤 목적지로도 균등하게 갈 수 있는 narrotor는, 자신을 궁상맞은 작은 싸구려 술집(dive)에서 발견한다.

 

모르겠다... 그러나 거기에 그녀가 있다. 나는 그녀가 사람인지 제 5세대 여성형(gynemorphic)의 안드로이드인지 모르며, 그에 대해 신경쓰지 않는다. 나는 내 술, 메틸 이소시아네이트 온 더 락,을 홀짝거리면서,  짝짓기(mating) 페로몬 앰플을 하나 깨어 열어서 바 전체에 그것이 퍼지도록 했다. 메틸 이소시아네이트는 인도의 보팔에서 누출되었을 때 2000명 이상의 사람들을 죽인 물질이다. 그러나 웨이트트레이닝과 에어로빅 연습, 저지방 섬유질 식이요법 덕분에, (the scuff는) 내게는 전혀 효과를 미치지 못한다. 그녀는 충분히 확실하게 어슬렁거리고, 내 옆의 의자에 자리를 잡는다. .. 내 입술은 이제 그녀의 입술로부터 1옹스트롬 단위만큼 떨어져 있다. .... 나는 그녀에게 키스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녀는 그녀의 머리를 돌려버린다. ... 나는 당신에게 키스할 수 없어. 우리는 단일접합체적(monozygotic) 복제인간들이야 - 우리는 우리의 유전 물질을 100% 공유하고 있어. 내 머리가 어지러워진다.  너는 아름다운 하루야, 나는 외친다. 너의 숨결은 갈릴리의 바다를 건너 빠 드 부레를 추는 유칼립투스의 제피로스(서풍)야. 고마워. 그녀가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내 집으로 돌아가 사랑을 나눌 수 없다. 단일접합체의 근친상간은 연장자들(elders)에 의해 금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이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다고 말한다면? ... 만약 내가 작은 샷건을 가지고 있어서 살아있는 유기체의 세포들안에 유전 입자들을 쏘아 넣는다면, 그들의 유전자 회로들을 변형시켜 단일집합체적 복제인간이 더 이상 단일접합체적 복제인간이 아니게 한다면, 그러면 그녀는 근친상간의 타부를 위반하지 않고 근육맨과 사랑을 나눌 수 있게 된다. 나는, 셔츠를 열어 젖히고, 검은 청바지의 허리 밴드안에 끼어있는 기구를 드러내면서, 말한다. 어떻게 그걸 가졌지. 그녀는 그 두껍게 섬유조직으로 강화된 플라스틱 몸통과 탄창위에 엠보스된 Uzi-Biotech 로고를  흘낏거리면서 숨이 막힌다. 탄창에는 젤라틴화 된 유전자재조합 DNA가 두 통 끼워져 있다. 크리스마스를 위해 샀어. .... 네 염색체를 뒤섞기 전에 하고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니? 겨냥하면서, 나는 말한다. 응, 있어. 그녀가 말한다. 네가 먼저 해.

 

구절들에서 재치있는 부분들 대부분은, 일반 상식(folk wisdom)과,  높은 수준의 어법과 아이디어들로 이루어져 그것들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유혹의 클리셰의 병치에서 비롯된다. narrator는 자연에 누출되었을 때 수천을 죽인 화학물질을 홀짝거린다. 그러나 그는 위험에 면역되어 있다. 저지방 식이요법을 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narrator는 여성/안드로이드에게 키스하기 위해 가까이 몸을 기댄다. 그러나 그는 수소 원자의 직경보다 더 작은 거리인, 1 옹스트롬의 거리에서조차 접촉하지 못한다. 등장인물들은 그들을 일란성 쌍생아로 만든, 그러나 그들이 서로 다른 성을 갖는 것을 막지는 못한, 같은 단일접합체로부터 복제인간이 되어, 근친상간의 타부에 의해 금지되었기 때문에 사랑을 나누지 못한다. 그들은 부족의 연장자들에 의해 강요된 혈족관계의 규칙에 의해 지배되지만, 혈통의 진화론적인 형식에 끼어들고 분열시키는 유전학적 기술에는 접근할 수 있다. 그들은 그들의 문제가 그들의 염색체를 뒤섞어놓을 Uzi-Biotech 무기에 의해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narrator는 결국, 그들의 정체성이 손상되지 않고 살아남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는 것 같다.

다섯 페이지가 채 안 되는 단편이라는 한도 내에서 조차, 이 만남은 그것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사건에 앞서거나 따라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narrative는 가장 빈약하고 임의적인 맥락에 의해 연결된, 장면에서 장면으로 도약한다. 모순들은 narrative를 조립과 분해의 pattern(반복?/견본들)을 통해 만들어진 문자그대로의 안드로이드의 한 종류로 만든다. 이 텍스트 안에 자연적인 몸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이 텍스트를 향한 자연스러운 몸은 없다. 제목이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정체성은 타이포그래피와 융합하고(I was a ,,,,dot)  더 나아가 중력붕괴 컴퓨터 시뮬레이션과 같은 그러한 신기술 재구성(high tech reconstruction)과 융합된다(I was an infinately hot and dense white dot"). 기표들은, 명멸하는 기의의 훝어지는 물결 안에서 터져나갈 준비가 된 상태로, 신성의 중요한 시점에 접근하는, 폭발성 물질 내에 있는 별들의 몸처럼 붕괴한다.

행위를 친숙하게 하는 문화적 코드들과 전통적 기대들을 혼란시키는 신조어적 접목들(neologistic splices) 사이의 그러한 폭발성 긴장들은, narrative를 구성하는 것 이상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것들은, 또한 그럴듯한 심리학이 부여된 말하는 목소리로써 보다, 주관성의 새로운 종류 쪽으로 push하는, 갈라진 틈들과 혼란의 연속으로써 narrator를 구성한다. 이러한 주관성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 저 편의 어떤 수신자를 향하는 스토리텔러로부터 전문가로 이어지는 호를 그리는 궤도를 상상해보자. / 발터 벤야민이, 작품의 리듬에 그의 단어들을 짜맞추는 전통적인 스토리텔러를 재현할 때(evoke) 생각했던, 가치와 존재를 공유하는 공동체는 부족의 연장자들과 노래들에 대한 노래(Song of Songs)를 넌지시 빗대어 어렴풋이 반영하고 있다. 거기에 덧붙여 료타르는 포스트 모던의 조건에서, 이야기를 할 권한이, ‘물리적으로 흩어지고, 전자적으로 엮인 전문화된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자격을 부여하는, 적절한 자격증을 가지는 것’에 의해 주어지는, 전문화에 대해 쓰고 있다. 궤도의 이러한 상태는 다양한 방법으로 의미될 수 있다. narrator는, 물리적 위치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거나 이야기의 제작과 관련되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내면서, “등방적으로” 운전하고 있다. 그의 권한은, 공동체 안에서의 물리적 참여에 의해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Uzi-Biotech 남근 은 물론이고, 페로몬, 메틸 이소시아네이트, 젤라틴화된 유전자 재조합 DNA 를 포함하는 수준 높은 언어구사능력의 소유에 의한 것이다. 이러한 권한은 또한, 그것이 만들어짐과 동시에 추방된다. 왜냐하면 모순(부조화)들이, narrative와 narrator가 이야기 내에서, 결코 일어나지 않을, 하이 테크, 정체성 변환 오르가즘 폭발에 의해 의미지워진, 가까스로 생각해낼만한 형태로 변이하려고 하면서, 극단적으로 불안정하다는 것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 형태란 무엇인가? 그 물리적 발현은 다양하다. 그러나 복잡한 코드를 조작하기위한 가능성은 일정 불변의 것이다. 구절들의 언어를 통해 이미 일어난 희미한 변형들은 주관성 내에 있다. 이 주관성은 정확한 코드들을 소유하는 것에서 그의 권한을 이끌어 낸다. 셀 수 없는 시나리오들이, 누군가가 컴퓨터를 속여, 그가 컴퓨터가 구성된 권한으로 인식하는 코드를 가졌거나 우연히 발견했기 때문에, “권한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하는, 대중적인 문학과 문화 속에서 존재한다. 흔히 이러한 시나리오는 그 사람이, 정보적 시스템안에서 인식되지 않고 움직이게 허락하는 위조 정체성을 가지면서, 변화하지 않고 존재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이 narrative들을 읽는 다른 방법이 있다. 권한부여 코드들을 통해 정체성을 구성하는 것은, 정확히 존재하는, 그가 그 코드들을 알기 때문에 인식되는, 다른 종류의 주관성 내에서 그것들을 사용하는 사람을 변화시킨다. 표면적 기만은 보다 깊은 진실에 의해 받쳐지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두드리는 코드들이 된다. narrator는, 비록 이러한 기능들이 narrative 안에서 시대착오적인 암시와 왜곡된 연관성으로 남아있지만, 스토리텔러나 전문적 권위자가 아니다. 오히려 narrator는 키보드를 두드리는 사람이고, 해커이고, 코드를 조작하는 사람이다. 텍스트가 디지털라이즈된 그 존재 안에서 어떤 상태에 있다고 가정하면, 문자그대로 그(he/it?)는 이러한 코드들이다.
코드의 조작자로서의 narrator의 구성(construction)은 명백히 독자의 구성을 위한 중요한 함의를 갖는다. 독자는 같은 형식으로, 듣는 자에서 읽는 자로, 해독자(decoder)로 움직이는  층층의 고고학을 통해 구성된다. 코드는 본질적으로 즉시 광섬유로 보내지기 때문에, 더 이상 의미를 고정하고 해석을 안내하는 것을 돕는, 공유되는 안정된 문맥은 없다. 읽기(reading)처럼, decoding은 원천 텍스트(source text)로부터 공간적, 시간적으로 임의적으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fixed-type print와는 현저히 다르게, decoding은 원본 텍스트(original text)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함축한다. - 초판, 공정한 복사, 자필 원고(holographic)는 없다. 명멸하는 기표가 있을 뿐이다. 명멸하는 기표들의 일시적인 패턴들은, G.W.S. Trow가 ‘맥락(context-문맥?) 아닌 것에 대한 맥락’이라고 표현한, 모든 맥락이, 모든 텍스트처럼, 전자적으로 매개된 구조들이라는 의심을 재현하고 구체화하고 있다.>> decoder를 시스템에 묶어 두는 것은 하나의 해석의 일치의 안정성이나, 모든 책수집가들이 알고 있는 물리적으로 책을 갖는 것의 강한 기쁨이 아니다. 오히려 사이보그로서, 자신의 신체적 특징들이, ‘몸의 내부 체제(in-format)인 DNA로부터 컴퓨터의 첫 번째 언어인 이진 코드까지 많은 층위를 통해 확장되는 기의의 사슬들 안에서 또 다른 명멸하는 기표, 살로 된 정보라는 것’에 대한 인식을 구조(construction)하는 것이다. 
‘functionality'는 가상 현실 기술자들이, 컴퓨터-인간 인터페이스에서 활발한 커뮤니케이션 형식들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하는 새로운 용어이다. 예를 들어, 만약 유저가 정보 장갑을 끼고 있다면, 손의 움직임은 하나의 functionality를 구성한다. 만약 컴퓨터가 음성-활성화된 명령에 대답할 수 있다면, 음성은 또 다른 functionality가 된다. 만약 컴퓨터가 몸의 위치를 감지할 수 있다면, 공간상의 위치는 또 다른 functionality이다. functionality들은 양 방향으로 작용한다. : 다시 말해, functionality들은 컴퓨터의 능력을 묘사함과 동시에 유저의 감각-운동(sensory-moto?) 기구가 어떻게 컴퓨터의 반응들에 적응하도록 훈련되는가를 보여준다. VR 시뮬레이션과 함께 하면서, 유저는 그의 손을, 컴퓨터가 수용할 수 있는 일정한 형식의 몸짓으로 움직이는 것을 배우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유저의 뇌에 있는 신경 조직(구성?) 내에서 변화가 발생한다. 그리고 그러한 변화들 중 어떤 것들은 오래 지속될 수 있다. 컴퓨터는, 인간이 컴퓨터를 만든 것처럼, 인간을 주조한다.
narrative의 functionality가 변화할 때, 새로운 형식의 독자가 텍스트에 의해 생산된다. 독자들은 다른 functionality들을 통해 읽도록 훈련되기 때문에, 명멸하는 기의의 효과들은 파문처럼 퍼져나간다. 다른 functionality들은 컴퓨터가 발명되기 이전에 쓰여진 텍스트를 포함하는, 모든 텍스트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게다가 narrative functionality들의 변화는, 특정 장르의 구조적인, 주제에 관한 특성보다 더 깊은 곳까지 미친다. 내러티브를 생산하기 위해 활성화된 양식 자체를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바로 이  수준에서, information narrative와 다른 종류의 현대 소설들 사이의 미묘한 연결(접속? connection)이 발생하기 시작한다. 
정보 기술을 포함하는 맥락 속에서, S/Z에서 롤랑 바르트는 훌륭하게 ‘다양한 코드들의 생산으로써의 텍스트를 읽음’의 가능성을 증명하고 있다. >> information narrative들은 그러한 가능성을 필연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다. : information narrative가, 코드들이나 정보기술들과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은, 문자 그대로의 수준에서조차 종종 이해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명멸하는 기의(signification)는, 코드들의 생산적인 힘을 텍스트 너머, 의미화의 과정들을 포함하는 데까지 확장한다. 의미화의 과정은, 인터페이스들이 인간을 통합 회로의 그물망에 빠뜨리게 할 뿐만 아니라, 기술들이 텍스트를 생산하게 한다. 기술, 텍스트, 인간을 연결하는 회로가 확장되고 강해질수록, 양적 증가가 질적 변형으로 변화되는 지점이 가까워진다.
만약 패턴/랜덤니스(무작위)의 변증법이 존재(현존)/부재의 자리에 대신 들어서고 있다는 나의 평가가 맞는다면, 그 함의(암시)는 내러티브를 넘어 많은 문화적 활동의 장 안으로 확장될 수 있다. 내 시각으로는, 현재 문화적 상황에서 이러한 함의(암시)들의 가장 심각한 점 가운데 하나는 물질성과 구체화(embodiment)에 대한 조직적인systematic) 평가절하이다. 나는 이러한 추세가 아이러닉하다고 생각한다. 물질적 조건들과 구체화된 경험들 안에서의 변화들은, 정확하게 매일의 경험들 내에서 그 깊은 뿌리들에 변화를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에세이에서 나는 그 변화를 분석하고 문학에 있어서의 그 함의를 이해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변화가 구체화의 경험을 변화시키는 맥락 안에서 이해되어져야만 함을 제안하는 것에 대해서도 고려했다. 한 편으로, 만약 구체화(embodiment)가 정보과학(informatics)이 정신에 뿐만 아니라 몸에도 흔적을 남긴다는 것을 함의한다면, 다른 한편, 그것은 또한 비물질화를 향한 압력에 저항하는 물질성의 축적으로써 기능한다.
내가 여기에 적은 거의 내용 대부분에 내재하는 것은, 현존과 패턴이 상반되는 관계 내에 서로 맞은편에 존재한다는 가정이다. 한 가지가 더 많은 중요성이 부여될수록, 다른 쪽은 덜 주지되고 가치매겨 진다. 누군가 패턴과 현존이 상호적으로 강화하고 보완할 가능성을 즐길 때, 완전하게 다른 읽기(readings)들이 나타나게 된다. 폴 비릴리오는 정보 기술이 지속적으로 발전해야하는가에 대해 누구도 물을 수 없다고 말했다. 시장의 힘은 이미 작동하고 있고, 사실상(내가 그 단어를 사용할 수 있다면) 구체화된 virtuality들로써 우리를 구성하는 환경들 안에서, 우리가 살고 일하고, 놀게 될 것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나는 이러한 발전에 건설적으로 개입하는 우리의 가장 나은 희망은, 현존과 패턴을 상반되기보다 상호보완적으로 볼 가능성을 여는, 해석의 spin을 두는 것이라고 믿는다. 정보는 인간성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세계 속의 물질적 실체로써 만들어 내는 구체화(embodiment)로부터 떨어져서는 존재할 수 없다. : 그리고 구체화(embodiment)는 언제나 예를 들어 설명되고, 지엽적이고, 구체적이다. 구체화(embodiment)는 파괴될 수는 있지만, 복제될 수는 없다. 일단 그것을 구성하는 특정한 형태가 사라지고 나면, 어떤 양의 조작된 정보도 그것을 되돌릴 수 없다. 이러한 관찰은 개인의 삶-형태에 대해 진실인 것처럼, 행성에 대해서도 진실이다. 우리가 사이버스페이스가 새로운 식민지의 가능성이 되었다는 새로운 전망들을 탐험하는 것을 서두를 때, 결코 대체될 수 없는 물질세계의 부서지기 쉬움에 대해서도 기억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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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23 16:38 2007/11/23 16:38

머리카락이 우수수

from 그림 2007/11/01 01:07

훗, 우수수 우수수~

 

그래도 괜찮아.

 

 이젠 다 상관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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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01 01:07 2007/11/01 01:07

2007/10/24

from 그림 2007/10/24 18:43

 

스케치북에 오일파스텔, 연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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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24 18:43 2007/10/24 18:43

포스터

from 그림 2007/10/22 20:54

 

 

 

내 마음엔 들었는데, 사람들이 안좋아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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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22 20:54 2007/10/22 20: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