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토의 상상, 개토가 쓴 글, 그리고 찍은 그림들.'에 해당되는 글 263건

  1. 극복 사진 (4) 2007/10/19
  2. 상갈동 (3) 2007/10/08
  3. 핑퐁 (3) 2007/10/07
  4. 악마가 담긴 사진 (7) 2007/10/06
  5. '구텐베르크-은하계'의 끝에서 (5) 2007/09/23
  6. Big Bang & Prime number 2007/09/22
  7. 한 밤 중에 개에게 일어난 의문의 사건은 2007/09/22
  8. 눈먼자들의 도시는 (6) 2007/09/22
  9. 티코와 케플러 (5) 2007/08/31
  10. summer (6) 2007/08/31

극복 사진

from 사진 2007/10/19 00:47

 

 

사진으로 찍으니까 무섭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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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19 00:47 2007/10/19 00:47

상갈동

from 사진을 배우다 2007/10/08 2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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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08 22:02 2007/10/08 22:02

핑퐁

from 책에 대해 2007/10/07 18:57

NeoPool님의 [BombBombBomb] 에 관련된 글.

 

말이 나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바람의 노래를 들으면서 이나중탁구부를 읽다보면

세계를 언인스톨해버리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시가테라도, 두더지도 읽다보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핑퐁은 미노루 후류야님의 아류였다.

존 메이슨처럼.

 

하지만, 역시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가 떠올랐다.

레이먼드 카버도. 

 

우리는 같은 시대를 살고 있구나......

정말로 같은 시대를 살고 있구나.

 

아류라는 건 멋지구나.

 

평론가가 아닌, 작가의 짧은 말이 있는 것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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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07 18:57 2007/10/07 18:57

 

구덩이에 악마의 얼굴이 2/3쯤 보인다. 구덩이 둘레엔 그의 발자국들도 찍혀있어.

그런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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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06 14:03 2007/10/06 14:03

1. 커뮤니케이션?

 

다른 모든 동물들처럼 인간은 자신이 취합한 정보들에 대해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 위험한 것과 위험하지 않은 것, 편안한 것과 편안하지 않은 것 등으로

의미를 부여한다.

우연에 의해(여기까지 인간은 세계에 대해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의존적이었다),

인간이 눈을 중심으로 진화하게 되어, 직립하게 되고,

손이라는 복잡한 도구를 갖게 되면서,

인간은, 단순히 정보(특히 이미지)들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에서 벗어나게 된다.

정보(이미지)를 조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달리는 얼룩말은 사자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다.

그러나,

달리는 얼룩말에 '돌을 던지면' 돌은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서 얼룩말을 죽인다.

 

하나의 공동체 안에서는 비슷한 경험들을 공유하게 된다.

누군가 얼룩말에 돌을 던져서 얼룩말을 잡으면,

그걸 '보고 있던' 다른 개체들도 그 정보를 입수하여 각자의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개체가 정보를 뇌에서 구성하는 방식은 개체의 경험이나 뇌의 물리적 형식에 따라 달라진다.

 

누구도 돌을 던져보지 않은 다른 공동체의 구성원이 그 공동체 안으로 들어왔을 경우,

전체 구성원이 사냥을 나갔을 때, 그는 다른 구성원들이 서로 주고 받는 몸짓과 눈짓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커뮤니케이션이란 공통의 경험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불가능한 것이 된다.

 

지각이란,

초원위에서, 바람과 풀들과 나무들과 얼룩말들 가운데, 특별히 약한 얼룩말을 '골라내어', '주목하는' 일이며

커뮤니케이션이란,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끄덕하고, 시선을 돌맹이로 움직이는 정보(이미지) 등을

'지각하는 것'이다.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끄덕하고, 시선을 돌맹이로 움직이는 것은 일종의 코드이다.

 

그 코드는 우리의 환상과는 달리, 전혀 객관적이거나 논리적이지 않다.

경험적일 뿐이다.

 

돌맹이를 던져보지 않은 이에게 그 코드는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커뮤니케이션이란

민주적이고 쌍방향적인 소통과 대화가 될 수 없다.

 

커뮤니케이션을 위해서

돌맹이를 던져본 부족은

돌맹이를 던져보지 않는 자가 돌맹이를 던지는 이미지(정보)에 자주 노출되도록 강제하는 수밖에 없다.

 

 

2. 고립된 단자들

 

[구텐베르크-은하계의 끝에서]에서 볼츠는

라이프니츠가 완전히 닫힌 체계인 '고립된 단자'들 사이에

신에 대한 근본적인 의존성이라는 미디어를 통해 서로 커뮤니케이션할 수 있다고 했다

라고 말한다.

 

신을 '세계'로 대치하면, 내게는 좀 더 그럴 듯하게 느껴진다.

 

고립된 개체들은 세계에 대한 근본적인 의존성이라는 미디어를 통해 서로 커뮤니케이션 한다.

먹고 자고 싸는 일들을 지속적으로 하기 위해서 세계란 필연적인 조건이고

그 조건들의 동일함, 조건에 대한 의존성의 동일함이 커뮤니케이션을 낳는다.

 

그런데 인간은 눈과 뇌와 손을 갖게 됨으로써

세계에 대해 의존적이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제 조건은 동일하지 않게 되었다.

 

세계는 인간에 대해 의존적이다.

 

세계에 대한 근본적인 의존성이라는 미디어를 통해서가 아니라 

개체와 개체가 직접적으로 커뮤니케이션한다는 환상은

세계에 대해 의존적이지 않은 자기자신을 상정함으로써만 가능하게 된다.

 

고립된 인간의 근본을 알 수 없는 외로움은, 그곳에서부터 나오게 되는 걸까?

 

 

3. 이미지

 

돌맹이를 손으로 들어올려 던지기까지

인간의 뇌가 어떤 경험을 겪었는지는 그저 분분한 추측이 될 뿐이다.

어찌되었건 인간은 돌맹이를 들어올려 던졌다.

 

정보(이미지)를 가공하여 다른 정보(이미지)로.

 

[눈먼자들의 도시]에서 극명하게 드러난 것처럼, 인간은 이미지없이는 인간이 아니다.

 

태초에 이미지가 있었다.

 

4. 미디어

 

이미지는 미디어이다.

 

5. 돈은 이미지이고 미디어이다.

 

그보다 강력한 이미지와 미디어.

 

6. 문자

 

내가 겪은 것을 타인에게 겪게 하는 것.

이것이 커뮤니케이션의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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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23 16:27 2007/09/23 16:27

Big Bang & Prime number

from 책에 대해 2007/09/22 23:52

And when the universe has finished expoding, all the stars will slow down, like a ball that has been thrown into the air, and they will come to a halt and they will all begin to fall toward the center of the universe again. And then there will be nothing to stop us from seeing all the stars in the world because they will all be moving toward us, gradually faster and faster, and we will know that the world is going to end soon because when we look up into the sky at night there will be no darkness, just the blazing light of billions and billions of stars, all falling.

 

I think prime numbers are like life. They are very logical but you could never work out the rules, even if you spent all your life thinking about th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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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22 23:52 2007/09/22 23:52

굉장히 개인적인.

 

 

아무도 없는 곳에 혼자 있고 싶어지는 책이었습니다.

 

어떤, 분위기에 대해서 생각했었는데, 너무 피곤해서 기억이 나지 않네요.

 

한 밤 중에 개토에게 일어난 의문의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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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22 23:14 2007/09/22 23:14

책 날개에는, 이 책의 작가가

마르케스, 보르헤스와 함께 20세기 세계문학의 거장으로 꼽힌다고 적혀있었습니다.

 

마르케스와 보르헤스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들에 포함되기 때문에,

저는 조금 기대를 했었어요.

결론은, 이 책만으로는 마르케스나 보르헤스의 책들만큼 재밌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흠잡을 데 없는 완성작이라는 느낌은 들었습니다.

 

그리고, 최근에 관심이 있는, '이미지'라는 주제에 대해 좀 더 생각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이미지가 없이는, 인간이라는 존재, 문명, 문화도 없다는 거죠.

인간의 진화는 어쩌면 눈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과학적 근거를 찾아보고 생각한 것은 아닙니다만

(누군가 이미 그런 학설을 내놓았고, 어쩌면 이미 정설에 가까운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시각정보의 방대함때문에 뇌가 발달하고, 시각정보를 좀 더 확보하기 위해 직립보행을 하게 되고,

덕분에 손이라는 엄청나게 복잡한 도구를 갖게 된 것이 아닐까 하고.

 

이미지 자체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지만,

인간은 이미지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저것은 위험', '저것은 먹을 것', '저것은 생식', '저것은 안락함'

 

뭐 그런 저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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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22 23:10 2007/09/22 23:10

티코와 케플러

from 책에 대해 2007/08/31 14:06

글씨가 쓰여져 있는 거라면 거의 무조건적으로, 반사적으로 읽기는 하지만,

역시, 작품에 대한 해설이나, 작가에 대한 설명글같은 건 재미가 없다.

소설이건, 이론서이건, 시이건,

뒤에 붙은 작품해설은 읽지 않는 것이 작품을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해서,

대부분 읽지 않는다.

 

평론같은 건 대체 왜 쓰는 것일까 하는 생각도 하고

평전같은 것도 사실 잘 이해가 안된달까.

체 게바라 평전은 세계 최악의 글들 중에 꼽힐만 했다.

 

하지만, 세상에는 그런 것에 흥미를 가진 사람들이 꽤 많아서

개토는 '티코와 케플러'라는 책을 읽고 있다.

평전이라기 보다는 꽤나 자세한 티코와 케플러 생애연구서랄까.

평전보다는 연구서가 낫다.

 

개토는 '티코 브라헤'라는 이름이 마음에 들고 '티코스노바'라는 말이 주문같아서 좋다.

 

학자들은 한스가 면접 때문에 그곳을 방문했는지 아니면 티코의 아내로 20년간 살아온 누이를 찾아온 것인지 그 이유를 연구하고 있다.

p 65

 

티코브라헤는 덴마크의 굉장한 상류귀족이었는데, 아내는 귀족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녀가 농민의 딸이었는가, 성직자의 딸이었는가라는 부분이 아마도 아직까지 확실하지 않은 모양인데, 책에서는 그녀가 티코와 수준이 맞으려면 최소한 성직자의 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주장하면서, '한스'라는 사람이 그 증거가 될 작은 열쇠를 갖고 있다는 투로 위 문장을 적고 있다.

학자들이, 그 이유를 연구하고 있다니.

대체 그걸 알아서 어따 쓴단 말인가?

그래도 그런 태도가 어딘가 모르게 재미있다. 

전세계 인구의 0.1 %정도나 될까 한 사람들이  한스가 누나를 찾아간게 틀림없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어디선가 자료를 조사하다가는, 갑자기 진실을 발견하게 되는 거다.

 

사소한 사실들이 모여 역사를 만들어간다는 입장에서 보면 작은 조각도 모아서 빈틈없이 채우고자 하는 학자들도 있는 법이지. 진지하게 생각해보면, 어떤 이론, 어떤 글, 어떤 그림이 사회적 인가를 받고 통용된다는 것이 저자의 환경조건에 좌지우지 되는 경우가 많으니. 아내가 농민의 딸인지 교양있는 성직자의 딸인지도 중요한 문제였을 거다.

 

100페이지정도 읽었는데, 재미있었던 부분.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별의 시차(stellar parallax) 이동을 관찰할 수 없다는 말은 지구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마찬가지로 마차 안에서 숲을 바라볼 때 나무가 이동하지 않는다면 마차가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의미였다. 별의 시차 이동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설명해주는 또 하나의 예가 있다. 모든 고대인들은 별의 시차 이동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모스(Samos)의 아리스타르쿠스(Aristarchus)는 코페르니쿠스보다 1700년 앞서 별들이 무한대나 거의 무한대에 가까울 정도의 먼 거리에 있다고 가정하며 태양 중심의 우주사상을 처음으로 제안했다. 그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숲을 마차를 타고 관찰한다면 실제 나무 기둥들의 상호이동이 있더라도 식별할 수 없다고 말했다.

p91

 

번역이 상당히 껄끄러워서 괴롭긴하지만, 가끔은 맛없는 것도 먹어보는 거다.

부드럽게 머릿속으로 재해석하는 것도 나름 재미있다.

 

잠시, 소설책으로 머리를 좀 식힌 다음에 다시 읽어야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7/08/31 14:06 2007/08/31 14:06

summer

from 그림 2007/08/31 03:22

가을이 되었다.

 

 

몰스킨에 연필, 오일파스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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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31 03:22 2007/08/31 0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