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

잡기장
어릴때 워낙 병약했고, 항상 쪼들리고 그렇게 살아서 그런지
신비한거("현실"이라는 걸 뒤흔드는), 초월적인것(악순환의 고리를 탈출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로) 을 관심을 살짝 가졌더랜다. 보통 이럴때 독한 사람은 지극히 현실적이 되겠지만, 난 "물"과 같은 사람이었다 :)

중앙일보 배달로 시작해서 조선일보 6년, 한국일보 1년 배달을 하며 조선일보와 그 자매지를 통해 쇠뇌가 됐었다. 그러다 대학에 들어가고, 신문배달이 음식배달로 바뀌어 추가적인 쇠뇌는 멈추고, 내 스스로 그런 사상을 강화하며 살게 됐다. 그래도 원체 사랑과 관심을 받는 걸 좋아하는지라(생존을 위한 반사적인 몸부림) 공부를 제치고 일하는 시간 말고는 사람들 따라다니며 밥과 술을 얻어먹었다.

그러다, 특히 내게 밥 잘 사주는 선배 따라다니다가 "빨갱이" "불순분자" 들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며 심한 충격, 그러나 바로 운동에 몸 담기에는 그 충격을 스스로 감내할 만큼 단단하지도 못했고, 몸에 배어 있는 습관(생각과 생활)들이 그걸 계속 거부하게 만들었더랜다.


공부는 싫지 않았지만 성적 따는 요령은 없었고, 꼼꼼하거나 치밀하지도 못했다. 성적이 안나오니 더 하기 싫어졌다. 그렇다고 운동 하는 사람들과 좀 같이 있어 볼라치면 도무지 적응할 수 없는 방식들..(그때는 내가 뼈속 깊이 물든, 이미 그른 놈이라고 생각했다 -_- 지금은 아니지만) 결국 내가 택한 것은 알바 시간 외에는 도서관에 틀어박혀 이책 저책 집히는 대로 읽는것. 알바도 야간에 할 수 있는 걸 했다. 과외는 두번 짤린 후로 더러워서 안하기로 했다. 총체적 요령 부재 - 낙천적 현실부적응자.

그곳에 틀어박힌게 98년. 이때 여기서 내가 리눅스를 알게 되고, 비로소 텅 비어 있던 삶의 "목표" 항목에 다시 "후회할 걱정 없이, 속을 걱정 없이 맘놓고 빠져들어도 될만한" 것을 채워넣은 것도 언젠가 얘기했던 것 같고..

하지만 그때 기술 서적만 본 건 아니고, 철학과 신비주의 서적도 봤는데, 어떤 계획을 갖고 파고 들어 가며 치열히 본 게 아니라 그냥 집히는 대로 보다가 재미없으면 던져버리는 식으로 봤다. 특정한 종류만 판 것도 아니고, 동서양, 고전 근대 현대.. 철학, 그리고 UFO와 "신의 계획" 운운하는 서적들.. (디테일 내용은 기억도 안난다. -_- 그래도 지금의 내 정신 상태가 그때 읽은 것들의 영향이 반영되어 있는 것 같다)

99년이던가 출판사에서 알바를 했는데, 동양철학의 말초적 활용 -_-이라 할 수 있는 "점보는 법", "만세력", "손금보는 법", "명당잡는 법", "관상보는 법"..  뭐 이런 책을 내는 곳이었다. 읽다보니 흥미 있으면서도 워낙 깊이 없이 얄팍한게 싫어 역시 조금 읽고는 던져버리고 쳐다보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뭔가 신비한 거,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것, 보다 깊은, 눈에 보이지 않는, 지금 차원의 인류가 알고 겪고 실현할 수 없는 그런 것들이 있기는 있을 거라는 생각은 갖고 있었다.

신문배달을 할때도 나는 지각생이었는데, 남들이 다 끝내고 돌아오고, 빠트린 곳 다시 넣어주러 가는 후속작업 하는 시간(신문 안 들어왔다고 바로 리포트 해주는 부지런한 할아버지들.. )에야 기어 나와 신문을 돌렸다. 일단 시작하면 빠릿빠릿하게 움직였지만 시작할때까지는 세월아 네월아였는데.. 이거는 잠을 끊고 벌떡 일어나지 못하는 내 성격도 있겠지만, 사실 어두운 새벽 골목 구석구석이 얼마나 무서운지, 익숙했던 것들이 괴물처럼 보이고, 바람에 날리는 작은 것도 귀신이 아닐까 하고 떨게 만드는 두려운 곳이라는 걸 느껴본 사람은 알건데, 그게 너무 싫었다. 그 외에 손에 얼음이 들어 새벽 제일 추운시간을 괴로워했던 것도 있고.

그래서 타로니, 러시아 집시 카드 이런 것도 일단 신기하고, 한번씩은 대개 접해보고는 하는데, 그 결과는 대개 맘에 들지가 않는다. 물론 첨에 들을때는 "맞어, 정말 그래!"하고 감탄하게 되지만, 잠시 있다보면, "그건 이 상황이면 당연한거 아냐 -_-" 하고 깨닫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그제 손금 봐주신분 감사 ^^) "서른쯤(이후)에 직업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는 말. 올해로 지금 몸담은 곳을 접고 계속 운동을 다른데서 할지 아니면 돈을 벌러 가야할지 고민하던 나는 "이야~ 딱 맞어 딱" 해버렸지만, 다음날 자고 일어나니 "아니 서른즈음에 자기 진로 다시 고민 안하는 사람이 있을까? -_-"
물론 그렇게 쉽게 얘기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는건 알고 있지만.

운명이라는게 있을까 없을까. 있다고 하면 그건 어떤 의미일까. 이미 모든게 정해져 있다는 숙명론적인 것일까 아니면 지금 상황과 의지 그리고 여러 요소를 감안한 결과를 경험적으로 통계 내린 과학적 예측인 걸까. 그리고 운명을 점 등을 통해 "미리 안다"는게 어떤 의미일까. 영화에서 보면 보통 운명을 미리 보는 것 자체가 이미 운명에 포함되어 있는, 운명을 보고 그것을 피하려고 바꾸려고 해서 결국 그렇게 되는 이야기가 너무 많지 않은지. (강풀의 "타이밍"도 그런 얘기가 들어있고)

사실... 갑자기 이 얘기를 이렇게 길게 하는 이유는, 내 운명의 상대를 몇년 후에야 만난다는 말 때문.  *-_-* 그렇다면 난 당연히 그걸 가볍게 물리쳐 줄 수 밖에 없다. 운명은 내가 만들어가는 "역사"일 뿐이고, 여러 사람과 환경과의 복잡한 상호작용 속에서 변해가는 것이라는(그리고 세상은 점점 복잡해진다, 그러나 점술류는 여전히 단순하다) 생각을 채택할 수 밖에 없다. 설사 지나보면 "정말 그랬던 것이었구나.."라고 쓸쓸하게 말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지금의 내가 영향받을 생각 따윈 없다. 그때 가서 그렇게 말하지 뭐. 백번 양보해 그게 맞다고 하더라도, 그럼 그때 가서 운명의 사람을 만나도록 하고, 지금은 일단 지금의 감정에 충실하고 싶다. 오히려 맘 편하게, 집착함 없이 임할 수 있겠다는 생각까지 드니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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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난 운동을 시작했고, 설사 운동을 안한다고 해도 지금의 방식이 아닌 새로운 방식을 시도하기 위함일 뿐, 실험일 뿐. 지금의 관점과 이상을 포기할 맘은 없다. 적은 상근비나마 받으면서 작게 나마 나를 위해 돈을 쓸 수 있게 됐고(자전거, 기타..) 이상을 이루기 위해서는 현실 감각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걸 알고 있다. 아직 충분히 체화되진 않았을지라도 무엇이 옳은지는 감을 잡고 배워가는 중이다. 바꿔가는 중이다. 아직 모든 걸 충분히 즐기며, 재밌게 하진 못하는 것 같지만, 적어도 가끔은 기차게 재밌게 살기도 하는 것 같고, 그 주기가 짧아진다는 생각, 그리고 그 파장이 커진다는 생각도 갖고 있다.

아.. 이 말을 왜 꺼냈더라. 그냥.. 최근 들어 내 얘기를 너무 안했다는 생각에. 윽. 난 사람들하고 대화를 더 많이 해야 된다. 빡빡하게 살다 컴퓨터만 붙잡고 살다보니 조곤조곤 얘기하는 게 아직도 익숙치가 않다. 술을 먹었거나 얘기가 한참 진행되고 나야 슬슬 말문이 열리는.. -_- 그래도, 난 전반적으로 계속 좋아지고 있다. 난 점점 더 미치도록 멋있어지고 있다. 내 바램은 내가 완전히 미쳐버리는 것, 꼭지가 완전히 돌아버리는 것. 그래서 이제 오직 하나만 생각하는 사람이 되버리는 것. 아, 역시 글의 처음과 끝이 별 연관이 없는가.. -_- 읽어주셔 감사. 가벼워지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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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0/05 20:27 2006/10/05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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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디 2006/10/05 21:19 URL EDIT REPLY
좋아좋아요! 지각생은 열나 멋져! 짱! 현재에 충실한 인간만이 인생을 살.고.있.는. 거 아니겠삼?
지각생 2006/10/05 23:15 URL EDIT REPLY
감사. *^^* 하지만 부끄럽삼
re 2006/10/06 04:41 URL EDIT REPLY
만나서 조곤조곤 얘기해도 재미날 것 같다는 느낌.
글에서 그런 느낌이 풍겨져 나와요. ㅎㅎ
다 읽고나니 기분 좋아지는 글이에요~~
지각생 2006/10/06 11:06 URL EDIT REPLY
re// 어머 정말요? 느무 고맙삼. 자신이 생기네요 ^^
smilrady 2006/10/06 15:19 URL EDIT REPLY
지각생님은 글을 참 차분하게 잘 쓰시는 것 같아요. 요즘 느끼는 건데,말재 보다 글재가 훨 없는 것 같아서 진보넷에서 어떻게 버텨나가야 할지 모르겠다는...웃는 사진 쵝오에염...^^
지각생 2006/10/06 18:11 URL EDIT REPLY
스밀라디// 칭찬 고마워요 :) 근데 나 사실 글쓸때 좀 격앙되는데.. 정말 "차분"히 보인단 말이죠? ㅋ
ScanPlease 2006/10/07 03:37 URL EDIT REPLY
차분하지는 않지만, 잘 쓰시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어요..ㅋㅋ
지각생 2006/10/07 19:33 URL EDIT REPLY
거듭 감사.. 근데 사실 어리둥절할때가 많삼 :)
아침 2006/10/10 22:05 URL EDIT REPLY
음... 제 손금 믿지 마세요. 저도 안믿어요. ㅋㅋ 아마도 제가 손금볼 때 처음보는거, 이 사람이 자기중심인가 타인중심인가 그런거는 정말로 맞더라구요. 디디님 말처럼요, 제 식으로 표현하자면 지금 여기에 내가 살아있는 걸 느끼는거 그게 내 운명의 주인이 되는 길이랍니다.
지각생 2006/10/14 20:01 URL EDIT REPLY
아침// 지금 이곳 런던 회의중인데, 영어를 못하다 보니 "살아있음을 느낄" 수 없이 그저 가만히 있습니다. -_- ㅋ 밑천 바닥 나지 않게 조금씩 가르쳐 주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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