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늦가을 정보통신활동가 기술세미나 이후, 이쪽 네트워크에 대한 고민은 살짝 내려놓고 지냈다. 몇달 지내면서 내 주변을 좀 정리하려 했는데 역시 뭔가 정리하고 딴 거 하고 이렇게는 안 살아와서 모르겠다. 세미나 후 뭔가 막 어떤 흐름이 생겨 활발해지길 바랬지만 금방 그렇게 안되서 조바심이 난 나머지 투정조의 메일을 보내 놓고 스스로 움츠려든 것도 약간 있었다.
정권의 미디어 장악 시도가 점점 심해지면서, 활동의 입지가 좁아진 활동 단위들이 인터넷에 관심을 더 보이고 있다. 인터넷도 표현의 자유가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는 건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많은 가능성이 있는 탓일게다. 앞으로 어떻게 족쇄가 채워지더라도, 가장 저렴하게 활용할 수 있는 수단이란 측면에서 인터넷은 계속 이 가난한 활동가/단위들에게 관심을 받을 것이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올 초 들어 특히나 주변을 다니면서 인터넷을 활용하는 것에 대한 고민을 듣는다. 구체적이고, 진전된 차원의 고민은 아니고 대개 막연한 문제 의식 수준이긴 하지만, 어쨌든 이런 이야기가 주변에서 많이 들리는 건 나로선 기꺼운 일이다. 더불어 가끔 "정보통신활동가모임"의 존재를 염두에 두고 뭔가 생각하는 경우도 접하면 더 그렇다. 물론 그런 모임의 실체가 있다고 말하긴 아직 무리가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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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작년부터 그러긴 했다. 대안/국민 포탈, NGO/사회운동 포탈 등의 독립적인 공간을 만들려는 움직임이 간간히 들리긴 했지만 그 이후 뭔가 딱히 추진되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뭔가 해보고 싶다는 사람, 하면 좋겠다 하는 사람들의 바램은 어느 정도 형성이 됐는데, 거기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한, 그리고 더 지속되기 위한 에너지를 부어 넣기 위한 시스템은 만들지 못하는 것 같다.
한국에서는 여전히 사회운동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정보통신기술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거나 MB처럼 "다른 부문 일자리 줄이는" 필요악 정도로 인식하는 것 같고, 자유 소프트웨어 개발자나 커뮤니티등은 자본의 시스템 안에서 여전히 창의성, "기술결정"적인 사회 발전의 환상, 자기 발전과 만족의 수준의 고민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은 것 같다. 커뮤니티 사이트나 개별 개발자들과 만날때 종종 발견되는 고민의 급진성에 비해, 현실의 구체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참여는 상대적으로 부족하거나, 너무 "간접적이다."
정보통신활동가 네트워크를 제안하게 된 배경은, 이런 양쪽의 중간 입장에서 서로를 매개할 수 있는 어떤 실체를 만들고 싶다는 바램에서 시작한다. 구름과 같이 경계는 불분명해도 분명 존재하는 실체, 흩어지고 변화하며 때론 사라지더라도 언제든 계기가 있을때 응집해 활동할 수 있는 네트워크. 작년에는 우선 여러 사회단체에 소속되어 고립된채 활동하고 있는 기술활동가들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기술적 문제 등 당면한 과제를 함께 해결하는 시도를 한 해였다. 그 흐름을 계속 이어나가기 위해 정보통신기술 세미나를 열기도 했지만 역시 작년은 너무 터프한 한 해라, 안 그래도 빡세게 구르고 있는 단체 내 정보통신활동가들이 뭔가 널널하고 대담하게 자유로운 실험을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던 듯싶다. 기술 세미나 이후에는 이전처럼 메일링리스트를 활용해 조금씩 정보를 주고 받는 것과 SF영화에 관심 있는 사람들끼리 가끔 모여 영화를 보는 정도로 겨울을 넘겼다.
이제 봄이 되니, 뭔가 "네트워크"도 다시금 기지개를 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제 어느 정도 생각을 정리해서 뭔가 구체적 "협력"꺼리들을 찾아내고, 모여서 결국 뭘 할 건가 하는 얘기도 던질때가 됐다. 기술 세미나는 물론 계속 하겠지만, 기술만이 아닌 "정보통신"에 대한 철학적인 얘기, 단체의 틀을 넘는 독자적인 어떤 활동꺼리들도 본격적으로 꺼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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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메일링리스트에 있는 한 사람을 만나게 됐다. 불쑥 연락이 와서 뭔가 물어보고 싶은데 만날 수 있냐고 해서, 상황을 보니 나보단 그가 더 바쁠 것 같아서 내가 그리 간다고 했다. 그는 예전에 어느 지역에서 노인 대상 컴퓨터 교육을 계기로 알게 됐는데, 낮에는 육체 노동을 하고 저녁에는 이런 저런 곳에서 정보통신기술과 운동을 접목시키기 위한 활동들을 해온 듯 했다. 이번에 만난건 그 때 이후 처음인데 다시 봤을때 흠칫했다. 흰머리가 그때도 있었는지 모르지만 못 본 사이에 엄청나게 늘었더라.
그는 지금 사회운동 관련된 사이트와 정보들이 좀 더 검색엔진에 잘 노출될 수 있게끔 하는데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고, "검색엔진 최적화"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을 공부해서 이곳 저곳을 다니며 설득하고, 적용시키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난 처음에 그 "구체적인 방안"을 내게 물어보려 한 줄 알았는데 사실 그건 내가 오히려 배워야 할 정도였고, 다른 것에 대한 질문을 조금 받았는데 내가 대답할 것이 사실 그리 많지 않았다. 평소에 미처 생각 못하고 있거나 오랫동안 고민을 놓아 버렸던 것들이기도 했다.
난 그가 해온 활동이 참 의미가 있을 뿐 아니라, 그 과정이 쉽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에 살짝 감탄했다. 사람들에게 설명하고, 이해시키고, 중요성을 강조하고, 그래서 관심을 갖게 하고, 더 나가 실제로 바로 어떤 변화를 가져오게끔 하는 일은 굉장히 피곤한 일이 아닌가. 뭐든지 그럴진대 열에 일고 여덟은 얘기만 나오면 손사래를 치는게 일쑤인 정보통신관련 내용이라면 더 그랬을 것이다. 어쨌든 그가 해주는 얘기를 들으며 사실 내가 원하는, 어떤 "모임"의 활동이 그런 것일 거라는 생각을 다시금 떠올렸다.
각 단체 안에서 그런 고민을 환기하는 역할도 중요하고 쉽지 않지만, 대부분 사람이 부족하고 이슈는 늘어만 가는 단체들의 현실에서 모든 단체 내부에 그런 고민을 하는 사람이 있을리 없다. 특히 영세하고 불안정한 단체일 수록 더더욱 그런 문제는 방치, 보류되기 마련이다. 바로 그런 것때문에라도 꼭 정보통신기술만이 아니라 뭐든지 어떤 단체나 그룹, 정파의 벽을 넘는 공동의 활동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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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길어지니 일단 끊으면,
어쨌든 올 봄, 이르면 3월 중하순 정도에 활동가 워크샵을 한번 열어 활동에 대한 얘기를 본격적으로 하면 좋겠다. 생각을 더 정리하면서 제안을 해야지.
하다 못해 서로가 이미 알고 있는 작은 것만이라도 수시로 만나 공유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