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엿새째, 광주.

  • 등록일
    2007/01/27 23:50
  • 수정일
    2007/01/27 23:50
찜질방에서 잤던 날 중 가장 잘 잤다.
수면실 시설도 매우 좋았고,
무엇보다 군산 찜질방의 경험을 살려 휴대용 귀마개를 미리 준비한 것이 압권이었다.
앞으로도 찜질방에선 얇은 상의 한 벌과 귀마개 정도면 매우 편안히 잘 잘 수 있을 것 같다.

오늘은 광주를 돌아보고, 부지런히 강진까지 가야 한다.
그동안은 하루에 6~70km 정도 탔지만 광주시내에서 망월동까지 갔다가 강진으로 가려면 사실상 거리는 100km가 넘는다.
시간이 부족하면 밤에도 잔차질을 해야 하는 거리다.

밤에 잔차질 하는 것은 여러모로 좋지 않아서 최대한 피하려고 했는데...
화요일에 전남 남해안 지방에 비가 온다고 한다.
비가 오는 것은 더 최악이다.

월요일에 땅끝에 닿기 위해 강진까지는 간다고 결심하게 된 것이다.
광주에서는 518관련지를 많이 돌아보고 싶었는데...
전남대와 망월동만 돌아보기로 결정했다.


전남대


뭐. 별 느낌 없었다.
정문은 그 때의 정문이 아니라 새로 지어진 정문이라고 하니.
'용지'라고 불리는 연못이 크고 좋아 보이더란 생각 밖에는...
학생회관에 한 번 가봤으면 좋겠다 싶긴 했는데 시간도 많지 않고 해서 금방 나왔다.


연못에서 노니는 오리들.
나 너네 좋아하는거 알잖아~


망월동



광주시내에서는 대따 멀다. 가는데 한 10km. 40분 넘게 걸렸다.
게다가 길도 안 좋고 차들도 많고 해서 좀 위험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쨌든 도착.

남들은 학교 다닐 때 가보곤 하더라만 나는 어쩐지 한 번도 와 보질 못했다.












거대한 국립묘지가 서 있었다.
이 묘지가 완공되면서, 어찌 보면 박제화되고 있는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잠깐 했다.
묘비 사이를 돌면서 여성들의 이름을 찾아 비문을 읽어 보았다.
그리고 윤상원 열사의 비석 앞에선 좀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대학 1학년때,
월간 노동해방문학에 실려 있던 윤상원 평전.
지금은 변절한 시인 박노해가 쓴 그 글을 읽고 나는 전율했다.
그 글을 읽은 후 나에게 518은 더이상 광주 민주화 운동이 아니라 광주노동자계급의 무장봉기였다.

그 후로 임철우의 장편소설 '봄날', 최윤의 '저기 소리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 '깃발' 등의 소설책을 쥐곤 했다. 어제 본 '오래된 정원'을 보면 518이 사람들을 싸우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데 20여 년이 지났지만 나에게도 그러했다...

국립묘지를 돌아보고 사진전을 보면 수없이 봐 온 사진들을 감상했다.
여전히 가시지 않는 분노. 한편으로는 허탈함.
문득 다음에 연재되던 강풀의 만화 '그 후 20년'은 어떻게 끝났는지 모르겠다.
볼 만 했는데..

구묘역으로 갔다.
안 갔으면 큰 일 날 뻔 했다.
열사들이 쉬고 있는 곳.
이용석 열사의 묘소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용석 열사가 분신하던 그 장소에 나도 있었지.

집회가 끝나고 행진을 시작할 때쯤 뒷쪽에서 연기가 나길래 여느때처럼 유인물, 쓰레기 등을 모아 불을 피우나 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사람이었다.
그 때 전신이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느낌으로 물들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근로복지공단 진입을 위한 몸싸움라인에서 마주쳤던 1001들의 야수같은 폭력도.

그 날 집회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모여서 비정규직 노동자의 주최로 열린 첫 전국집회였다.
원래는 상징적인 몸싸움 정도를 계획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날 모두는 그냥 그렇게 시늉만 하고 갈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 날은 그랬다.


구묘역에는 광주, 전남 지역이 고향인 열사들이 묻혀 있는 것 같았다.
87년 6월 항쟁의 상징인 이한열 열사도 있었고,
많은 학생 열사, 노동 열사들이 있었다.

한 학생 열사의 사연이 가슴에 남았다.
집회에 참가하기 위해 기차를 타고 가다 검문을 피하려 달리는 기차에서 뛰어내리다가 목숨을 잃은 한 학생.
너무나 어처구니 없어 보이는 죽음일 지 모르겠지만...

구묘역을 돌고 나니 다른 묘역들도 한 번씩 가 봐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박일수 열사 장례식 때 가 보았던 양산 솥발산과 마석 모란공원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남도 땅을 달리며

부지런히 광주 시내를 벗어나 나주를 지나 영암으로 향했다.
먼 거리. 만만치는 않았다.
중간 중간 쉬기도 하면서.



영암읍을 얼마 남기지 않은 고갯길에서 뜻하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





저수지가 내려다 보이는 곳에 왠 6.25 희생자 위령탑?


비문을 읽어보니 내용이 영 심상치 않다.
영암군 금정면 연보리.
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지가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돌아와서 찾아보니 맞다.

전남 영암 보련학살
지역
전라남도, 영암군
1949년 결성된 '국민보도연맹(國民輔導聯盟)'의 취지는 과거 좌익 경력을 가진 사람이나 그 가족을 '도와서 올바른 데로 인도한다(輔導 또는 補導)' 였다. 하지만 당시 이승만 정권을 반대한 이들을 모두 보도연맹원으로 가입시켰고 또 지역에서는 할당된 수를 다 채우지 못하자 사상과 무관한 주민들을 대거 보도연맹원으로 가입시키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마자 예비검속되어 학살되었으며 전국적으로 약 30만 명이 이렇게 학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보도연맹원과 함께 좌익 경력자 및 좌익 가족에 대한 예비검속으로 이들 또한 보도연맹원과 함께 모두 학살되었다. 예비검속 및 보도연맹원에 대한 학살은 이후 물고 물리는 보복학살의 시작이었다.

1950년 7월 13일(음력 5월 30일) 영암군 금정 덤재에서 경찰이 200-250명의 보도연맹원을 학살하였다. 전쟁이 발발하고 예비검속이 된 보도연맹원들이 며치 구금된 사이 경찰은 이들을 살리고 싶으면 돈을 가져오라 하여 갔더니 이미 보도연맹원들은 사라진 후였다. 당시 유족들은 학살지를 찾아 시신을 확인하였는데 한 구덩이에 5-6명씩 묻혀있었고 이런 구덩이가 40-50개 정도 되었다고 한다.

또 1950년 10월 17일(음력 9월 7일) 영암군 구림에서 경찰이 80여 명을, 1950년 12월 18일(음력 11월 10일) 영암군 연보리 차네골에서 군인이 161명을, 1951년 1월 2일 (음력 1950년 11월 25일) 영암군 구림에서 경찰이 12명을 빨치산 소탕과정에서 학살한 사건이 있다. 이 외에도 영암군 풀씨재 고개, 금정 남송리 등지에서도 학살이 있었다는 제보가 끊이지 않고 있다.
(자료 : http://www.genocide.or.kr/  )

그 외에도 찾아 보니 이런 자료가 있다.
http://www.dailian.co.kr/area/news/n_list.html?page=2&t_name=gj_news&sel=&search=&kind=mno&keys=3277&idx=&id=9807&room=&area=&sno=&sdate=

http://blog.naver.com/uuuau?Redirect=Log&logNo=40010166441
20세기 전반 동성마을 영보의 정치사회적 동향

특히 위 글을 읽어 보니
내가 넘어온 고개는 바로, 월출산을 배경으로 한 빨치산들의 활동 무대였던 것이다.

고갯마루를 넘으면 나오는 영보리라는 마을은,
좌익 인사들을 많이 배출한 곳으로 한때 '영암의 모스크바'로 불리기도 했단다.


고갯마루를 앞두고.











고갯마루에 서니 월출산과 탁 트인 남도 땅이 한 눈에 들어온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마주친 역사의 현장이었다.
예전에 사두고 읽지 않은 채 꽂아 둔 이태의 '남부군'이나 다시 봐야겠다.


한밤중에 강진으로

영암읍에 도착하니 이미 어두워졌다.
영암읍은 마치 죽어있는 도시처럼 조용하고 사람도 거의 없어 보이고..
문 연 식당도 별로 없어 보이고(내가 못 찾은 거겠지만)
겨우 고깃집 하나를 찾아서 들어가 밥을 안 먹고 고기나 한 번 시켜 먹어 보았다.
2인분은 시켰는데 혼자인지라 왠지 박대하는 분위기라 좀...;

술은 못 먹고 사이다로...

밥을 먹고는 캄캄한 밤길 30km를 달려가기로 결심했다. 중간에 터널도 하나 지나야 하고.
그리고 강진으로 가는 길.

처음 출발할 때는 바로 머리 위해 오리온 자리가 떠 있었다.
"오리온, 날 지켜줘~"

가끔씩 차들은 쌩쌩 지나갔지만
왠지 오싹한 느낌.
귀신 나오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도 들고.

시가지가 아닌 곳은 정말 '캄캄'하다.
자전거로 긴 오르막을 오르는데 힘든 건 둘째치고,
 캄캄한데 멈춰 서 있는게 더 무서워서 열심히 페달을 밟았다.

결국 터널 하나를 지나고 부지런히 간 끝에 한 시간 반만에 강진읍 도착.
저 멀리 시가지 불빛들이 보이는데 어찌나 반갑던지~


터널 속의 환한 불빛 바로 옆에서 나는 잠시 쉴 수 있었다.
빛이 있고 없고에 따라 인간은 강해지기도 약해지기도 하는 것인지.


강진 진입.
이렇게 20인치 바퀴로 100km를 끊었다.
26인치 바퀴로 다닐 땐 100km 아무 것도 아니었던 것 같은데 ㅠ.ㅠ

찜질방은 없고,
여인숙은 못 찾고,
온돌 있는 모텔방을 찾아서 옷도 말리고, 씻기도 하고..
아무래도 너무 무리했나 보다. 오른쪽 허벅지가 찌릿찌릿 했으니.
자다가 다리에 쥐 나지 않을까 싶어서 문득 겁이 났다.
에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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