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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급하는 삶

  • 등록일
    2009/03/04 12:55
  • 수정일
    2009/03/04 12:55

전인권의 <남자의 탄생>이란 책이 있다.

남자들은 한 번 볼 만 하다고 권유하길래 빌려서 읽었다.

 

필자의 어린 시절 집 안에서의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경험은 이해는 가도 확 와 닿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자라 온 환경에 조금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라고나 할까.

필자의 어린 시절은 시골 마을의 옛 형식의 가옥이었다. 즉, 농촌의 삶에 가까웠다. (비록 농사를 짓는 집은 아니었어도)

반면 도시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 가족 간의 위계는 필자의 그것보다는 살짝.(물론 아버지와 어머니의 관계 자체는 전근대와 근대를 왔다갔다 하지만) 약했다.

 

무엇보다 오늘날의 남성 가장은 가족을 부양할 만한 경제적 능력이 없으면 가장이 될 수 없는 게 현실이니까... 다만 내가 명절 때 시골 조부모 댁에 내려가고, 아버지 형제가족들 다수가 시골집에 모였을 땐 확실히 전통적인 가족의 모습이 눈에 확 드러났다.

 

내가 더 깊이 공감하면서 읽은 부분은 필자가 국민학교에 입학한 이후의 경험을 적은 것이다.

특히 "한국인의 보편적인 삶의 방식은 선택이 아니라 진급이다"란 언급이 참 적당하다.

김어준도 <건투를 빈다>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자기가 진정 원하는 게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자신이 선택하는 삶을 살지 못하고 계속 '아이'로 남아 있다고 지적하는 데 비슷한 얘기다.

 

태어나서 유치원에(혹은 유사한 유아교육기관) 가고, 그 다음엔 초등학교, 다음엔 당연히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거쳐서, 남자는 군대에 가서 이병에서 일병으로, 상병으로, 병장까지 진급한 다음, 취직하고, 결혼하고, 애 낳고, 애를 똑같은 싸이클로 잘 키운 다음에 애들을 취직, 결혼시키고, 그 애들이 또 손주를 낳으면 그 손주를 봐 주면서 또 똑같은 싸이클로...

 

이게 한국 사회에서 가장 '보편타당한' 라이프 싸이클이고, 여기에서 한 치라도 벗어날라 치면 주변에서 온갖 간섭과 회유와 협박과 걱정이 휘몰아치면서 당사자는 계속 불안과 스트레스에 놓이게 되고 꿋꿋이 자기 선택대로 밀고 나가거나 아니면, 결국 굴복하고 마는 비극이 참 다채널에서 벌어지고 있으니.

 

한편 삶이 곧 진급이란 얘기는, 우리 삶에 '계급'이 실재하고 있단 얘기다. 어느 집단, 모임에서든 신분의 위 아래를 구분하는 게 가장 먼저 이루어지고 그에 따라 권위주의는 곳곳에 살아 넘친다는 얘기. 하물며 서로 '동지'라고 호칭하는 운동가들 사이에서도 학번의 권위와 성별의 권위와 기타 등등은 다 깔려 있다.

다음에 기회 되면 좀더 자세히 얘기하겠지만,

잘 생각해 보면 초중고 학교에서의 경험과, 학생운동에서의 경험과, 군대에서의 경험이 크게 다르지 않다.

 

"권위주의와 커뮤니케이션은 정반대 위치에 있다"는 필자의 말도 그래서 참 와 닿았다. 한 사람이 모든 걸 결정하거나 구성원이 하고 싶은 말 못하고 있는 곳은 권위주의적인 문제가 있다는 지적도 맞는 얘기다. 경험상으로도 충분히.

 

스무 살이 되기 전까지는 나도 그대로 진급하는 삶을 살아왔다. 그 이후엔, 약간의 파열음을 내긴 했지만 그렇다고 거스르며 살아왔냐.. 그것도 아니다. '동굴 속 황제'의 모습은 아직 내 안에 있으니까... 군대에서도 무사히 진급해서 보편 라이프 싸이클에서 군대까지 일단 찍었다. 집에서는 이제 다음 단계로 진급하라고, 취직과 결혼을 종용한다.

 

내 안의 아버지를 죽여 버리고 '어른'이 될 수 있는 길은 무얼까.

자기가 선택하고 책임지는,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는 길.

제자리뛰기는 시작했는데 아직 방향을 못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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