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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의 부재가 아니고 무뎌져 가는 것이 아닐까

소통의 부재가 아니고 무뎌져 가는 것이 아닐까



술을 사양하지 못 하는 성격이라 이 술자리 저 술자리 가리지 않고 참석하는 편인데요, 보통 술자리가 물이 오르면 저마다 조직 내의 문제를 지적하고 진단을 합니다.  내가 술자리에서 빠짐없이 보는 풍경입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많은 이들이 공통으로 지적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소통의 부재다” 혹은 “소통이 문제다”  그러나 나는 이 진단에 선뜻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소통”이라는 말이 몇 년 새 유행어가 되어 버렸는데 이명박 씨도 그 깨우침을 얻었는지 “소통”하는 것도 경지에 이른 듯싶습니다.  “중도 실용”과 “서민 행보”를 언론을 이용해 적절하게 구사를 하는데 예를 들면 재래시장에 가서 오뎅을 입에 가져가는 장면이 크게 나온 적이 있지요.  그런데 제법 효과가 있습니다.  놀랍습니다.  이명박 씨가 깨달음을 얻은 그 “소통”이란 친절한 언론을 통한 적당한 립 서비스, 이런 정도가 아닐까요.


“소통”이라는 용어는 내가 알기로 애초 이 사회에 넘쳐나는 “단절”을 극복하기 위한 화두로 던져진 것입니다.  부자와 가난한 자의 단절,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단절, 생태·생명과 산업문명과의 단절 그 밖에 우리를 둘러싼 벽을 허물기 위한 진지한 성찰의 과정에서 “소통”을 화두로 던졌습니다.


그런데 몇 년 새 “소통”이라는 말이 유행어가 되더니 우리들 안에서 “소통의 부재”, “소통의 문제”에 책임을 돌리는 경향이 생겼습니다.  이때부터 생기는 부작용이 있습니다.  오히려 진지한(솔직하고 구체적인) 성찰을 가로막는다는 점입니다.  “이 말은 내가 지나쳤다.  너 감정이 많이 상했겠구나” 이렇게 얘기하면 될 일을 “문제의 원인은 소통이야” 이렇게 얘기를 하니 상한 감정이 풀릴 리 없고 그러니 진짜 소통이 안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소통의 가장 빈번하고 일상적인 모습이 바로 의사소통일 것입니다.  의사소통의 유형만 해도 조직 내 개인과 개인, 개인과 집단, 집단과 집단 간의 의사소통이 있고, 조직과 조직 간의 의사소통을 더하면 훨씬 복잡해집니다.  의사소통의 방법만 해도 마주보고 하는 말, 전화로 하는 말, 회의, 공식적인 문서, 비공식적인 글, 몸짓, 표정 그 밖에도 많은 행위 과정이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생기는 감정의 상처, 오해, 생각의 차이, 미움과 분노와 증오, 불신, 무관심, 편애 그 밖에 많은 모양의 갈등과 단절이 있습니다.


이것만 보더라도 우리 내부의 의사소통조차 매우 복잡 미묘한 것이며 여기서 생기는 장애를 치유하는 과정도 적지 않은 공력이 필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다 대고 “소통의 부재”, “소통의 문제” 단 한 마디로 정리해버리므로 그 다음에 할 일이 없어지곤 합니다.  그저 모두가 열심히 노력하자 라고 말할 밖에요.


나는 문제가 있으면 그 원인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아야 한다.  문제가 생기도록 나는 어떤 잘못을 했고, 또 상대방은 어떤 잘못을 했는지, 구조적인 문제는 없는지 솔직하고 구체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소통의 부재”, 이 한 마디로 적당히 버무려서는 안 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의 “무뎌짐”을 경계할 일이라고 봅니다.  내부에서조차 “소통”이라는 용어가 범람하는 걸 보면 혹시 내가 나도 모르게 더 무뎌진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불편하더라도 우리의 심성과 자세는 근본을 향하여 늘 솔직하고 구체적이어야 하는데 이것은 마치 신영복 선생이 말한, 극점을 향해 떨림을 멈추지 않는 나침반의 바늘과 같은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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