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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깊이

누군가를 마음 깊이 안아본 적이 많았던가?

하루에도 몇 번씩 안아달아 팔을 흔드는 아기를 안아주는 경험을

1년 넘게 하면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이렇게 오랫동안 안겨있을 기간은

어쩜 짧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든다...

 

안아달라고 무턱대고 요구하다가

사람들의 반응을 살피며, 몸으로 만나기를 꺼려하게 되기까지...

 

나에게 안겨

요염한 표정으로 엄마를 쳐다보는 아기를 보면

그리고 그런 안김에 자신을 내맡기는 아기를 보면

 

문득 안기고, 안는 것에

이유를 찾고, 이내 포기하고, 언어로 대신 표현하려는 나 자신의

지금 모습에 아픔이 밀려오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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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지 못하는 자의 괴로움

아기를 보면(이제 돐이 조금 지난)

말하지 못하는 자의 괴로움이 느껴진다.

 

자신의 욕구를 남을 통해서 이뤄야하고(대.소변, 밥먹기, 목욕하기, 심지어 잠자리에 드는 것조차)

자기가 싫은 것을 몸을 통해서(요새는 거부의 표시를 뒤로 움직이는 방식을 통해서 한다.)

울음을 통해서 밖에 표현할 수 없는대서 오는 괴로움, 답답함, 짜증...

 

아파도 어디가 아프다고 이야기할 수 없고...

그래서 상대방(엄마, 아빠, 등등)은 더더욱 답답하고

답답해서 화가 나고 짜증나고....

 

악순환의 고리를 풀 방법은

어른들이 언어 외의 다른 공감방법을 더 배워야 하는 걸까?

어린 시절의 그 때를, 그 소통방식을 잊어서 그런걸까?

 

<오늘도 이 생각 저생각에 머리가 아픈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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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머니와의 미묘한 며칠간

여성운동하면서 고민되는 지점 중 하나가 바로 가족들과의 관계.

사실 운동한답시고 본격적으로 나섰던 대학시절 이후 부모님을 비롯한

소위 가족, 친척들과는 일정부분 담을 쌓다시피 살아온 나다.

그런 나였기에 결혼도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고, 홀로 사는 게 상책이라 믿었는데...

인생은 자기가 바라는대로 흘러가지는 않는 법.

결국 결혼과 출산이라는 대다수 사람들이 일상이라 믿으며 사는 방식으로 살고 있는 나.

그러면서도 반성폭력운동과 여성억압적 성문화에 반대하는 운동을 놓지 않는 나.

그 안에서 갈팡질팡

 



 괴로운 나... ^^;;;;

 

이번 시어머니의 서울상경은 이렇게 모호하게 살고 있는 나의 삶에

미묘한 긴장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험험...

아기에게 엄마의 품이 최고라는 생각을 가지신 어머니.

그리고 그렇게 평생을 살아오신 어머니를 존중하면서도

은근 슬쩍 그런 삶을 강요당한단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난 아기에게 아침마다 밥을 먹일 수도 없고(어머니는 아침마다 밥과 국을 떠먹이신다 ㅜㅜ)

저녁에 일하고 들어오면 열심히 놀아줄 수도 없고(어머니는 간식을 챙기고 아기곁을 떠나지 않으신다)

아기 목욕시키면서 빨래를 동시에 하고 있으며(어머니는 아기가 그 사이 감기들까 걱정하신다)

애가 울고 짜증내면 같이 화내고 소리친다(언제나 밝은 표정으로 아기를 안고 달래시는 어머니 ㅠㅠ)

 

괄호 안의 행동들, 사실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런데 그 행동들을 보면서 지치는 나는 무엇인가?

시어머니는 결코 나에게 직접적으로 그런 행동을 너도 하라고 강요하지 않으신다.

그런데 나는 왜 자꾸 위축되고, 괴로울까?

 

운동에도 올인하지 못하고, 육아에도 정성쏟지 못하는 내 상황...

음음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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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누구인가? 여성비하 일삼는 그대!

소위 여성의 성적 부위나 여성과 남성간의 섹스를 상징하는 욕들을 사용하여

상대의 글에 리플을 달거나, 온라인 게임이나 채팅 상에서 대화하는 사람들.

나는 솔직히 그들이 누구인지 궁금하다.

 

그들의 일상, 그들의 욕망, 그들의 꿈, 그들의 인생관, 그들이 만나는 여성들, 그들의 가족...

뭐 별다른 사람들이 아니라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은 바도 있지만,

도대체 특정 성을 그렇게 비하하고, 폭력적인 그들은 뭔가 한 군데 빠져나가거나

이상한 사람일 것 같은 맘을 버리기 힘들다.

  

여하튼 어디서 사는 누구길래 그렇게 몰상식한 건지.... 쯧쯧

당신의 인생이 불쌍하오~~~

 

 

자신이 실제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빌미로

상대에게 수치심을 일으키는, 그것도 주로 자신의 대상이 여성이다 싶으면 잘 걸렸다 싶게

바로 여성을 비하하는 발언을 서슴치 않는 그들!!

당신들이 사용하는 일상적인 여성비하 욕설들이

바로 당신의 교양없음과 여성에 대한 인지수준이 밑바닥임을 드러내는 것인지

그토록 모르는가?

아니 이런.... 설마 지저분한 욕망을 가진 건가, 당신은?

누군가에게 그 짧은 몇 마디가 불쾌함을 넘어 치욕감을 느낄 수도 있다는 것을

설마 당신은 일부러 즐기고 있는건가? 정말 상종하고 싶지 않은 인간인건가?

 

그러나, 당신!!

누구에게도 상대를 불쾌하게 할 권리, 피해를 입힐 권리는 없다.

심판의 날이 멀지 않았다.

 

그리고 당신!!

이 세상 수많은 선한 네티즌들이 당신을 지켜보고 있는 걸 아직 모르고 있겠지?

 

언제가 키보드를 만지작거리는 당신의 손이

수많은 이가 그 손을 무섭게 노려보고 있다는 공포 속에서 덜덜 떨릴 날이 오리라. 

 

여성비하를 일삼는 그대! 

부디 몸 조심하시고, 자신을 위해서라도 자중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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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액션데이(빈곤)

http://vimeo.com/1529825(블로그액션데이 홍보 동영상입니당~~)

 

오늘은 빈곤을 주제로 블로거들이 한 목소리로 외치는 날이라네요^^

 

빈곤, 인간 삶에서 가장 생존과 연결된 주제가 아닌가 싶어요.

 

저 또한 여성운동단체에서 일하면서 계급과 빈곤 문제에 계속적인 관심을 갖고 있어요.

 

생존을 불가능하게 하는 빈곤은 추방하면서

 

지구 속에 살아가는 모든 생물, 무생물들과 상생할 수 있는 전략의 고민..

 

저도 계속 고민하면서 전략도 짜보고, 실제 현장에서 실천하는 활동가가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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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헤르의 여인, 지나

 

탕헤르의 여인, 지나       타하르 벤 젤룬

 

 

 


 

* 할아버지의 죽음과 동시에 태어난 딸(축하받지 못한 존재)

* 간질 --- 삶의 이면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을 구경할 수 있는 작은 문의 열쇠

* 지나 --- 자신의 운명에 대한(악을 조절할 수 있는 자) 받아들임. 그것을 자유로 활용. 성에 대한 선택, 주도권

* 화자 여러 명 구도 --- 다만느, 자밀라, 살림, 아비드, 지나,,,

* 이야기는 살아있다. 움직인다. 변형된다. 여성들의 통쾌하면서도 몽환적인 복수이야기

   “ 지나는 우리 안에 있는 존재이다.”

* 아비드의 말 --- 남자들이 비겁하기 때문에 여자들이 잔인한거야.

* 역자 후기 --- 지나는 곧 남성의 성적 노리개로 전락해 신음하는 모로코 여성의 표상이자, 우리 안에 존재하는 암울한 강간범, 다섯 남자를 파멸시키고 과거의 치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고 몸부림치는 이야기 속의 다섯 여자, 복수의 화신이기도 하다.

  

* 147p. 여성의 자기 방어와 한판 싸움 --- “누군가 거짓말을 하고 나를 짓밟으려하면 짐승처럼, 내 고향 산 속에 사는 동물처럼 덤비며 행패를 부리지.”

       : 지나는 파멸로의 열망을 갖고 있는(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사람을 골라 그 사람이 현실의 안정을 버리고, 권력을 버리고 파멸해버리도록 안내하는 자이다. 여성에 대한 존중, 세상에 대한 사랑, 타인에 대한 사랑이 없는 이에게 갈 길이란 파멸비슷한 류일 뿐이다. 그녀가 내뱉는 독설스런 말들을 들으면 마음 속이 시원해진다. 어리석은 남자들이 품고 있는 허위와 허무한 감상주의를 마구 짓밟아준다. 그리고 질 줄 모르는 반격! 삶은 원래 투쟁의 공간아닌가? 남성들이 여성을 지키고 행복하게 해준다는 망상에서 깨어난 멋진 소녀가 바로 지나다.

그녀의 이야기 속에 또다른 내가 보인다.


* 아쉬운 것은 주인공들이 다 미모의 여자라는 것, 섹스어필하여 남성을 파멸로 일으키는 존재라는 것. 여성의 다양한 모습들, 성격들을 더 드러내고 거기에서의 저항과 공격을 표현하면 좋았을 듯 하다.


* 요새 난 한겨레문화센터 강좌 ‘치유글쓰기’를 수강하고 있다. 오늘은 소설가 하성란과 자신의 문학작품과 글쓰기 치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녀는 자신이 여성으로 순응하며 살아온 시간을 과감히 버린 지난 4년 동안 많은 것을 깨닫고 자신만의 삶을 살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동안 얻은 통찰과 새로운 상상력으로 고전‘ 주홍글씨’를 현대판 아마존여성들의 삶으로 신나게 글을 써볼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우리 사회 속의 여성들의 도전과 새로운 여성을 만들어가는 작업을 하고 있는 여성작가들의 행보가 계속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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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식이 나에게 보내는 사인

난 인간의 삶 속에 거대한 크기를 차지하고 있는 무의식에 대해서 깊이 고민해본 적이 없다. 물론 그렇게 쉽게 자신의 무의식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자연스레 의식의 세계에서만 산다고 생각할지도...

하지만 내가 모르는 나의 세계, 세상이 있다는 믿음은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특히 나는 꿈을 자주 꾸는 편인데, 꿈 속의 세계가 도저히 납득이 안갈 때가 많다. 꿈 속에서 나는 보이지 않는 실체이기도 하고, 현실의 세계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 중에 어렸을 때부터 반복되는 꿈의 패턴이 있는데, 오늘은 그 이야기를 꺼내야겠다.

쫓기거나 죽을 위험에 처해지는 꿈.

일주일 전에도 반복되는 유형의 꿈을 꾸었고, 생생히 기억이 난다.


하늘하고 맞닿아 있는  높은 곳에 내가 있다. 나는 성폭력관련(내가 일하는 곳과 연관된 자료였던 것 같다.) 자료, 기사를 받아서 줄사다리를 향해 걸어가고 있다. 그리고 줄을 타고 내려간다. 중간에 홍진경을 만난다.

요새 어떻게 지내냐는 이야기를 늘어놓다가 홍진경이 나를 피하면서 먼저 가겠다고 한다. 나는 이상하게 느껴지나 알았다고 하면서 아래로 내려간다. 그러다가 갑자기 아까 받았던 자료가 내 손에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아, 놓고 왔구나.’ 다시 올라간다. 그런데 올라가려는데 갑자기 힘이 빠지고, 줄사다리의 맨 꼭대기 줄 몇 개가 끊어져버려 한꺼번에 올라가기 매우 힘든 상태가 된다. 이제 나는 다리에 힘이 빠져 거의 줄에 매달려있다.

그냥 내려갈 수도 있다. 그러면 힘이 덜 들 것 같다. 하지만, 나에겐 그 자료는 꼭 찾아야 하는 자료다. 그래서 다시 한번 다리를 높이 들어올려 그 곳에 가려하지만, 줄만 흔들거린다. 바로 아래는 낭떠러지다. 한 번의 실수로도 나는 죽는다는 느낌이 더 땀을 흘리게 한다. 하지만 내려갈 수는 없다. 다시 힘을 회복하고, 올라가야만 할 것 같다. 하지만 이대로 줄을 놓아버릴 것만 같다.


 

    

  




 

그렇게 삶이냐, 죽음이냐를 왔다갔다 하다 잠에서 깨었다. 그날 난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에 기쁘고, 내가 찾아야 할 자료는 없었음을 깨닫고 안도를 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나는 이런 꿈을 어릴 때부터 자주 꾸었다. 뭔가 해낼 수 없을 듯한, 죽음으로서만이 가능한 일을 맡게 된다. 예를 들어 홍수 앞에서 그 물을 헤쳐나가는 꿈이라던가, 거대한 파도로 집과 건물이 무너지는 데 나만 꼭대기 층에 있어서 겨우 살아있는 상황, 그런데 계속 아슬아슬하게 파도가 친다. 아주 어렸을 때는 누군가 나를 자꾸만 쫓아와서 도망치면서 그 사람한테 붙잡히기 전에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은 꿈이 많았다.


그래,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음. 사실 꿈속엔 통증은 없다. 다만 숨이 턱턱 막힐 뿐이다. 계속 되는 긴장감과의 싸움. 그리고 꿈에서 깨면 안도의 한숨을 쉰다.


이건 나에게 무엇을 알려주는 사인일까? 어릴 때(고등학교 때까지) 꾸었던 것처럼 무언가 대상에게 쫓겨다니지는 않는다. 그런데 자연현상(파도, 홍수, 공중에서 끊어질듯 한 사다리 등등)과 마주쳐 그에 필사적으로 살아보려는 내 욕망이 더 강해졌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말하는 걸까? 아무런 이유 없이 아무런 감상도 없이 그저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릴 것 같은 공포? 그럴지도 모른다.

현실에서 난 항상 계획하고, 예상하고 사는 사람이니까. 예외나 갑작스런 전개를 의식적으로 경계하고, 만반의 태세를 갖추는 그런 사람이다. 그래야 불안하지 않다. 대학 4학년 때 에니어그램을 한 적이 있는데 5유형이었다. 그리고 최근에 다시 했을 때도 5유형이 강하게 나왔다. 5유형은 관찰자형, 나서기보다는 주변 상황을 판단하고 섣불리 행동하지 않으며, 감성보다는 사고가 발달한 유형이란다. 내가 인식하고 있는 나는 그런 이미지에 걸맞는 사람이다.

하지만 꿈은 나에게 넌지시 이야기하고 싶은 걸까? 아무리 준비하고, 계획해도 사람의 삶이란 건 그 계획대로만 이루어지지는 않는다고. 오히려 뜻하지 않는 곳에 복병이 숨어 있고, 우연하게 일이 만들어지기도 한다는 걸. 또 죽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는 척하며 잘 살아가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넌 죽음에 대해 그렇게도 공포스러워한다는 걸.

근데 그걸 알아서 나에게 무슨 변화가 온다는 걸까? 음... 혹시 죽음에 대해, 죽음의 공포를 진정으로 만나라는 걸까? 지금까지의 나는 회피, 무시해왔기 때문에 그 공포를 이겨낼 수 없다는 걸까? 아니, 이겨낸다, 아니다의 의미가 아닌 공포를 공포 그대로 느끼고 받아들이라는 의미인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삶에 대해 그 그림자(죽음)또한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거만하게 내 의식의 흐름만을 쫓지 말라는 메시지인 듯...

내가 밝은 곳만을 향해 가는 듯 보이는 그런 위선을 벗어던지라는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워낙 빛과 어둠은 한 몸인 것을~~ 뭔가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죽음을 통해서 이뤄질 수도 있다는 의미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난 꿈 속에서 죽음의 그늘 가까이는 가보지만, 죽지는 않았다. 겨우 겨우 숨을 헐떡이며 살아남는 것. 어쩌면 그만큼 나는 죽음을 피하고 싶고, 살고 싶나보다. 하지만, 현실 속에 있는 것이 아닌, 다른 뭔가를 이뤄내기 위해서는 그것이 비현실적이고, 터무니없는 것으로 보일지라도 선택하라고 무의식이 말해주는 것 같다.

가끔 꿈을 꾸고 나서 그런 생각을 한다. 내가 정말 꿈에서 죽음을 선택했다면, 위로 오르려다가 공중에서 떨어져 죽었다면 어땠을까? 그래, 어쩌면 내가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다양하고, 신나고 혹은 음울한 세상이 펼쳐질지도 몰라. 죽음이 끝, 마지막이 아닐 수도 있다. 바로 미지의 탐험인 것이다.

최근에 영화 ‘판의 미로’를 보았는데, 주인공이 죽음으로서 판타지의 세계로 들어간다. 죽음은 혹은 현실적이지 않음은 또 다른 길을 위한 열쇠인지도 모르겠다. 나의 의식세계가 그걸 계속 막으려고 하겠지만, 조금씩 조금씩 의식이 아닌 내 몸이 가는대로 내 욕구가 가는대로 나를 맡겨보는 시간을 늘이고 싶다. 어쩌면 내 무의식은 현실의 나와 함께 그 여행을 기꺼이 하고 싶어 계속 나에게 꿈으로 나타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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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의 미로-용기/ 인내/ 희생/

 

끔찍하리만치 현실적인 우리들의 이야기.

전쟁 속에서 인간이 찾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

영화는 세상의 악 속에서도 용기. 인내. 희생.

(그리고 사랑, 모험정신, 정의 등등등)을 잃지 않는다면,

세상은 살아볼만한 것이라고 그리고 있다.

 

특히 난 전쟁 중에 스페인독재 정권에 대한 반란을 꿈꾸며, 

적의 가장 가까이에서 유모 비슷한 역할을 하며,

바란군을 돕는 메르세데스(마리벨 베르두)의 기지와 힘이 가장 강렬하게 다가왔다.

그녀의 힘을 몰라보는 남성들, 무시하는 군인들 속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자신이 위험에 처해질 각오를 하고 묵묵히 거사(?)를 수행하는 그녀의 힘은

누구보다 위대하다.

다만, 영화 끝에 독립군이 이기는 것으로 나오는데

그 이후 메르세데스가

반란군 애인의 한켠에 남아있는 역할로 위치지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많은 사람들이 잔인하다, 환타지가 아니라 라고 말하지만,

난 지독히 현실적이었다고 느꼈다.

전쟁 속에서는 누구도 행복하지 않다. 그야말로 최악의 삶을 산다.

그 처참함 속에서 나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전쟁 속에서 거센 고문과 압력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지를 지켜내는 사람들의

위대함은 뭐라 말할 수 없이 나를 겸허하게 한다.

지난 역사 속에 가혹한 삶과 위선 속에서도 희망의 불을 끄지 않는 그녀(그)가 있었다.

우리네 삶은 그녀들에게 빚지고 있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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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사회 성폭력, 아니 여성을 이야기하다

어제 있었던 '운동사회내 성폭력, 다시 묻다'토론회에 다녀오겠다는 인사 후

다녀오고나서 오히려 더 복잡해져서 왔기때문에 후기를 안올릴려고 했다.

근데, 은근히 후기를 기다리는 한 분이 있어 왠지 써야겠다는 마음을 다잡았다. ㅋㅋ

역시 관심있는 주제라는 생각~~ 근데 왜 이렇게 어려운지??

 

우선 토론회는 늦은 5시반부터 시작해서 8시까지 이어졌다.

사실 발제와 토론자가 총 8명이었다는 사실을 보면 알겠지만,

전체 토론은 20여분가량? 그것도 단 3명에게만 기회가 주어졌다.

어떤 토론회에 가도 참 아쉬운 것은

전체 토론시간이 중요하다고 하면서도

결과적으로는 발제, 토론이 늦게 끝나

나중엔 그냥 형식적으로 두 세 질문 받고 그에 대해 짧게 답하는 형식이 된다는 거였다.

무엇보다 우리 사회는 토론 문화에 익숙치 않은 것 같다.

토론회 끝나고 나서 몇몇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눴는데,

토론회 형식을 바꾸지 않는 한 발전적인 논의는 나올 수 없다는 결론을 짓게 됐다.

공개적으로 열려진 토론회 후에 질문나온 부분, 발제. 토론자가 던진 이슈에 대해

더 심도깊은 웤샵형태(둥그렇게 앉아 관련 주제에 고민하는 누구든 자신의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자리)를 기획하여 이슈를 생산하고 대안을 마련하는 자리가 필요할 것 같다.

 

우선, 토론회 진행순서를 보자면

1. 평화- 인권운동, 성폭력 문제에서 얼마나 자유로웠나?

  발제: 윤정은(여성주의저널 '일다' 기자, 평화운동가)

  토론: 최정민(평화인권연대 활동가)

          권김현영(언니네네트워크 운영위원)

2. 성폭력에 대한 운동사회 문제점과 해결과제

  발제: 오매(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

  토론: 지은(경계를 넘어 활동가)

3. 성폭력 사건 대책활동 과정과 평가

  발제: 보경(운동사회내성폭력근절을위한 활동가모임)

  토론: 염창근(운동사회내성폭력근절을 위한 활동가모임)     



이번 토론회에서는 주로 평화-인권운동영역에서 성폭력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초점이 맞추어져서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운동사회내의 성폭력 자체를 문제제기하면서 대안을 모색한 부분도 있었지만(권김현영, 오매, 지은) 주된 이야기는 최근 평화운동권 안에 일어난 성폭력사건과 연관지어 이뤄졌다.

(전체 발제 내용과 토론내용을 다 다루기에는 내용이 많아 관련자료가 필요한 사람은

한국성폭력상담소나 운동사회내성폭력근절을위한활동가모임에 자료를 요청하면 좋겠다.)

 

윤정은은

평화인권운동안에서 과연 일상의 평화, 비폭력은 이뤄져왔는지 반문하면서

평화운동은 여성들의 인권을 비롯하여 보다 사회, 경제적으로 취약한 계층들의 권리에 대해 얼마나 인권감수성을 갖고 있는지 스스로 묻고, 답해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최정민은

지난 2000년 운동사회성폭력뿌리뽑기 100인위원회 활동속에서 소위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남성들에 의해 100인위와 피해자가 순결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소녀부대로 매도되는 상황 경험. 현재도 달라진 바는 없음. 성찰권력(운동사회 남성들이 여성억압에 대해 성찰했다고 하며서 새롭게 권력을 획득하는 과정, 그리고 그 권력을 남용)에 대해 돌아볼 필요를 언급했다. 

 

권김현영은

운동사회 안에서 폭력, 비폭력에 대한 개념 정의를 새롭게 해야 하며, 그 안에서 성폭력의 문제도 풀어 나갈 수 있음을 시사했다. 또한 성폭력으로 규정할 수 없지만, 운동사회 안의 연애(사적으로 친밀한 관계)가 어떻게 공적인 의사 결정과 행동들에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오매는

최근에 많이 알려진 두 사건(평화운동 건,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건)에 대한 여론 분석을 통해 운동사회 속에서 피해자. 여성, 문제제기자인 개인의 목소리가 얼마나 과소평가되어 왔는지 성찰이 필요하고, 성폭력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자, 피해자의 발의를 통한 운동사회내의 토론이 활성화되어야 함을 지적했다.

 

지은은

운동사회 전반의 성폭력에 대한 무지와 남성활동가들의 오만을 지적하면서 성폭력에 대한 인식을 위한 교육, 성교육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보경은

평화운동사회 내 성폭력사건 대책활동에 대한 과정과 평가를 하면서, 당시 사건을 지원하면서 겪은 어려움과 이에 대한 보완방안등(반성폭력네트워크, 사건지원경험 전수,실명공개) 을 이야기했다.  거기에 보태 성폭력이라 단언할 수 없으나 '연애'를 이용한 성적착취에 대해서도 문제제기할 수 있는 틀을 마련해야 한다고 하였다.

 

염창근은

남성중심 운동사회안에서 여성과의 관계와 연애는 성폭력의 연장선상에 있을 수 있음을 말했다. 운동사회에서 많은 남성활동가들은 활동의 중요지점을 차지하면서 인맥을 통한 권력을 만들어 간다면서 '평화운동'이 되기 위해서는 남성운동가들이 '남성되기(남성역할)'를 포기하는 실천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또한 가해자의 실명공개는 꼭 필요하다고 하면서 이것자체가 폭력이라는 반론이 있을 수 있지만, 운동가가 갖는 사회적 공익과 영향을 고려할 때 실명공개는 유효하다는 입장을 보였다.

 

 

휴!~ 글을 정리하는데도 시간이 꽤 걸리는데, 이 사람들이 다 자기 이야기를 10분, 5분내에 발표해야 했으니 상황이 어떠했으리라 짐작이 되리라.

 

이런 상황이었기에 많은 이야기들은 나왔지만 정리되지 못하고, 대안을 모색하고 논의를 모아내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성폭력에 대한 개념정의부터 다시 해야되는 것 아니냐, 운동사회라고 지칭되는 것이 불편하다, 폭력에 대해 폭력으로 대처하는 것이 아닌 다른 방식이 필요한 것 아닌가 등등의 다양한 질문이 나왔다.

 

나도 한 가지 질문을 던졌는데,

기본적으로 윤정은이 언급한

평화를 비롯한 운동은 과정이고, 현재진행형이라는 부분에 동의하면서

성폭력논의에 있어서도 어떤 정해진 절차와 가해자 처벌이 중요한 것이기보다는

운동사회내에서 성폭력에 대한 이야기가 일상적으로 이뤄져야 하고

느리더라도 공동체의 문제로 성폭력을 바라보고 다같이 해결하고자하는 토론과정이

중요함을 말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몇몇 발제자, 특히 염창근이 언급한 실명공개는 필수적이라는 등의

논의 과정보다 해결방식을 먼저 만들어 놓는 방식은

성폭력 해결에 있어 토론되지 못하게 하고, 

성폭력과 관련한 다양한 논의들을 묻히게 만들 수 있음에 대한 우려를 표했다.

 

이에 대해 염창근과 윤정은은

운동사회활동가가 가지고 있는 영향력을 고려했을 때, 사안에 따라 논의는 필요하겠지만

실명공개는 하나의 절차로 받아들여야 함을 말했다.

 

제한된 시간 속에서 내 질문의 의도를 잘 전달하지 못해서 그런지

발제자들은 내 의도를 잘 파악하지 못한 것 같았다.

나중에 뒤풀이에서 염창근과 대화를 하면서

그도 논의과정이 중요하고 토론문화가 중요하다는 부분에 동의하면서

토론에서는 일부러 강하게 표현했다고 설명했다.

 

여러 상황을 보건데, 논의가 소통되지 못한 점, 이후 대안을 위한 논의에 대한 상이 보이지 않는 점 등 아쉬운 점이 많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운동사회내의 남성성, 남성활동가가 가진 권력을

거기서 발생하는 여성에 대한 폭력(성폭력, 여성차별 등등)을

운동사회내 공동체 구성원들 각자가  일상적으로 성찰하지 않는 한 

비폭력을 지향하든, 인권을 지향하든, 그 운동사회는 이미 자체적으로

그 지향성을 잃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기에 성폭력을 무슨 특수한 사건, 특수한 사람들의 일로 볼 것이 아니라

바로 운동사회가 놓치지 말아야 할 가장 주요한 이슈로 보아야 한다.

 

폭력반대, 성폭력반대, 여성이슈에 민감하기.

이는 일상적으로 논의되어야 하고, 내부. 외부에서 대안이 모색되어야 한다.

 

그런 차원에서 단체안에서 구성원이면 누구나 참여하도록

여성소설읽기 모임, 여성관련 스터디를 정기적으로 꾸리는 방식도 생각해볼 수 있겠다.

 

휴~~ 대충 이정도로 마치고 다음에 다시 이야기하자.

내 생각도 정리하기 힘들다 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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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5시, 운동사회성폭력토론회

 오늘 서울여성플라자에서 한국성폭력상담소 등에서 기획한

'운동사회성폭력토론회'가 열린다.

 

'운동사회내의 성폭력', 그리고 일상 속의 여성활동가의 차별

 운동사회내에서 어떤 공동의 노력을 해야 하는지 모색해보는 장이라 하여

 나도 참여하려고 한다.

 

 대안사회를 향한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자기 주변을 그리고 스스로를 항상 돌아보면서

 자신의 무지와 아집을 깨뜨려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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