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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작 - 열 아홉의 그녀 7

" 이름. "

그녀는 새로 하이얗게 티셔츠를 갈아입고, 커서 헐렁한 바지를 구겨 입은 채 침대 위에 앉아있었다. 젖은 머리가 수건 위에서 가지런히 놓여진 것이 손가락으로 애써 빗어내린 듯. 빗물에 씻긴 말갛고 하얀 얼굴, 입술 끝이 분홍빛으로 찢겨져 있다.

" 차 마셔. 둥글레차야. "

" 이름, 넌 이 진이고 동생은 윤 이수야? "

" 응, 나만 성 바꾸고 동생은 아직. 할아버지가 싫어하시니까 아마 갠 그대로 갈꺼야. "

언제부터인가 동생도 저도 친구들을 집에 데려오지 않게 되었고, 같은 부모 아래 다른 성을 갖고 있다는 것에 대해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진은 그렇다고 부모의 이혼을 부끄러워하거나 숨기고 싶은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다만 외부인들의 시선이나 동정에 대해 신경쓸 여유가 없었을 뿐이었다. 부쩍 혼자 만의 시간과 생각이 많아지고 있던 진이었기에.

" 흐응. 그렇구나. "

그녀는 이해한다는 듯, 더 묻지 않았다. 엄마의 뜻도, 할아버지의 생각도 알겠다는 듯. 그보다 동생이 자신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느냐면서 제 자신의 문제에 더 주목하고 있었다.

" 우산 빌려주려고 불렀대. 우리집 가는 건 줄 알았었다면서. "

" 으응... "

" 어디 가는 길이었어? "

진은 뜸을 두고 천천히 차를 마시면서 물었다.

" 그냥, 산책. 비가 오길래. 시원할 것 같애서. 걷다 보니 너무 많이 나와서 돌아가려던 참이었는데. "

진은 더 말하지 않았다. 더 캐어서 무엇 하리. 저리 상처받은 얼굴로, 저렇게 울 것같은 눈으로, 입술을 숨기고 싶어 달짝이며 고개를 외로 꼬고 있는 그녀에게.

두어번 접어올린 바짓단 아래로 가로 잘려진 종아리, 티없이 하이얀 피부에 도드라진 복사뼈, 짧은 발등 위로도 붉그레하니 상채기가 있다. 생긴 지 얼마 안되는, 무언가에 주욱 긁힌 듯한 자국. 젠장...이건 뭐 아동학대센터에 신고할 수도 없고, 뭐 이딴 경우가...싶은 진은 커다란 머그컵을 두 손으로 부여쥐고 있는 그녀가 추운 듯, 입술을 꼬옥 붙이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녀는 집에, 그 커다란 상가 건물의 2층 어딘가에 숨어있을 엄마를 생각하고 있는 걸까. 엄마가 끄질려 나와 다시 손찌검을 당하고 있는건 아닌가 걱정스러운 걸까. 내리 뜬 두 눈이 촛점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불안하게. 도망나온 자신의 비겁을 자책하는 듯.

" 추우면 이불 쓰고 좀 누워 있어. 난 피아노 연습할 게 있는데. 낼모레 면접을 봐야 해서. "

" 응. 그래, 너 할 일 해. 난 조금만 있다가 갈께. "

" 아니, 그냥 쉬고 있으라구. 천천히. "

별 말이 없는 그녀를 두고 방을 나왔다. 흐음. 차라리 교실의 제 자리를 지키고 있을 수 있는 수업시간이 더 편안하다던 그녀는 불안한 저희 집의 제 방이던, 남의 집의 남의 방이던 안락하게 한 숨 돌리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허나, 예민하게 곤두서는 신경보다 잠이 부족한 채 함부로 넘어뜨려졌던 그녀의 몸은 쉬고 싶어 어쩌지 못 하겠다는 듯, 이내 침대 속으로 기어들듯 누여졌다. 동그마니 움추린 채, 얇은 눈꺼풀을 내리덮었으나 파르라니 떨고 있는 그녀, 얕은 잠 속에서 허우적대는 듯.

그녀의 누운 침대를 손잡이 돌려 스르륵 문 열어보고 확인하면서 진은 잠시 머뭇거렸다. 한 발을 문지방 위에 걸은 채. 끼익. 하고 문 여는 소리가 뒤에서 나지 않았으면.

휙 돌아본 마루 건너 이수가 서 있었다. 굳었던 이마에 조금씩 인상을 팍 쓰기 시작하면서.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것이 저도 소리를 내지 않으려는 듯.

도로 문 닫고 식탁 앞으로 오니 이수도 마주 걸어와 의자를 내어 앉는다. 누이도 앉으라는 듯.

" 나도 차 좀 줘. "

진은 네가 타 마셔. 라는 말이 머리에는 떠 올랐으나 입은 꾹 다문 채 찻주전자를 가스불에 올렸다. 엄마가 출근하기 시작한 이후, 진이 먹고 있는 상 위에 제 손으로 밥 한 그릇 더 떠 와서 후다닥 먹어치우고는 빈 밥그릇 개수대로 숨기면서 자리를 뜰 지언정 누이에게 식사시중 들어달란 적 없다고 말하던 이수였다. 끓은 물 찻잔에 부어 둥글레 티백 넣어 가져다 줄 때까지 식탁 앞에 자리보전하고 있던 이수는 턱으로 앞자리를 가리킨다.

" 왜? "

" 뭘? "

진은 싱거운 놈. 하는 표정으로 털썩 자리에 앉았다. 제 앞엔 반 남은 물컵 만이 놓여있는데.

" 차 마셔. "

" 됐어. "

" 그럼 냉수라도 마셔. "

" 뭐? "

네가 또 시비를 걸 양이면 상대해 주겠다는 태세로 자세를 고쳐 앉는 진에게 억양의 강세 없이 말한다, 이수는.

" 물도 씹어먹어야 한대. "

싸울 생각 없다는 듯, 긴장 없이 이어말하는 이수.

" 씹어 먹으라구. 서른 번씩. 그게 건강에 좋대. "

진은 댓거리하기 귀찮다는 듯, 가만 있다가 물컵 들어 한 번에 들이켰다. 입 안에 넣고 가만 있으니 조금씩 목구멍을 흘러내려가는 물줄기가 느껴온다.

이수는 그냥 쳐다보며 차를 홀짝 거린다. 뜨거워서라기 보다, 오래 앉아 있겠다는 듯. 피아노 좀 쳐 보지? 하더니 진의 방문을 한번 흘낏 하면서 조용한 걸루다. 하고 뒤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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