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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3/03
    Ergo , you are a total hypocrite
    외딴방

Ergo , you are a total hypocrite

그러므로 당신은 완전한 위선자이다.

 

나는 위 문장으로부터 시작하고자 한다. 물론 이 말은 내가 한 말이 아니다. 작가주의적이거나 경험의 직접 체험을 중시하는 독자들로부턴 별로 지지받지 못 할 수도 있겠으나 나는 이 말을 인터넷 서핑 중에 어떤 단어의 뜻을 찾아본 사전의  예문에서 가져왔다. 그게 토탈이었는지 이포크리티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예문을 해석한 문장이 당시 무언가에 골몰하고 있었던 나의 심장을 때렸다는 것만이 가슴에 남아있다. 당신들도 동의하듯이 " 꿈을 추진하는 것은 이성이나 논리가 아니라 가슴이다. " 그리하여 나는 이런 이야기를 쓰기에 이른 것이다. 자, 들어보시라.

 

내가 그를 처음 본 것은 다른 사람들을 처음 만났던 것과 같은 때였다. 당연한 얘기지만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그 모든 사람들 중에 유독 그가 눈에 들어온다는 "최초의 설정"으로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작가가 아닌 등장인물의 경우, 그 설정 속에서 천성적인 배우의 기질을 발휘하게 되는데 이는 사실 비난받을 만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액터란 본시 신을 위한 합창 속에서 추임새같은 대사를 넣는 역할에서 비롯되었으며  제정일치시대에 배우의 등장이란 바치는 것으로서의 예술을 관객을 위한 무대로 끌어내리는 전환점이었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신을 위한 선사에서 인간을 통한 유사가 시작된 것이다. 그래서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쓰여진 것으로서의 사랑이다.

 

나는 그를 한번 보고 두번 보고 거듭 보면서 더욱 사랑에 빠져들어갔다. 음, 내가 말하는 것을 들어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말하는 것을 듣고 있으면서 빠져드는 것이니 이건 자기애가 아니라 대상에의 추구가 틀림없다. 왠지 나는 사랑을 감성으로가 아니라 끊임없이 논리와 이성으로 규명하고 싶어지는데 그 이유는 결국 이 글을 다할 때쯤엔 나 자신에게도 설명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아무튼 나는 그를 사랑한다.

나는 오랫동안  그 사실을 부정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이건 자기 위안이야 혹은 대리만족이야, 팬픽을 쓰고 싶은 사춘기소녀의 심정과도 유사하지. 뭐 이렇게도 변명해봤다. 하나 나는 그와 같은 타입을 너무나 좋아하는 기질을 갖고 있기도 하다. 오, 마이 갓. 이런 식으로 고백하다니.  하지만 사실이니 어쩔 수 없다. 그는 내가 사랑한 열 명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결국 내가 그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내 사랑의 콜렉티드인 것이다. 만일 그럴 일은 없겠지만 그가 이 글을 보게 된다면 용서하라,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관상의 그것이지 소통의 양주체가 되고자 함은 아니다. 그렇다고 모욕감을 느낄 것까진 없지 않은가, 어차피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도 않을 터이니 말이다.

 

사실 마지막에 한 말은 진실이 아니다. 그건 단지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 사랑하지 않겠다는 어느 소심한 노처녀의 완강한 부인과도 같다.

 

하지만 누구라도 그렇지 않겠는가? 열 번 쯤 사랑에 실패해 보면 다시는 누구에게도 사랑한다는 말을 내놓기 쉽지 않아지는 법이다. 여기서 쉽지 않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어려움이라는 뜻이다. 나는 이 쉽지 않다는 말을 이런 용법으로 사용하는 사람을 아는 데 바로 내 열 번째의 사랑이었다. 나는 그때 매우 어렵게 사랑을 시작했지만 '열번째'는 그런건 쉽지 않다라고 에둘러 거절했다. 당시 그 말을 듣는 나는 아홉번 쯤 실패한 사랑으로 인해 어쩔수없이 몸에 익힌 요령으로 묵묵히 그리고 담담한 마음을 가장할 수 있었다.  그것도 꽤 오래동안 말이다. 나는 나 자신조차도 속여넘긴 것 같았다. 어느날 문득 그 날 이후로 웃음이 없어진 내 얼굴을 거울 속에서 발견하기 전까진 말이다.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행복의 법칙을 발견했는데도 말이다.

 

기실 나는 그 행복의 법칙을 발견하고서야 사랑을 시작할 수 있었는데 그 법칙은 예를들면 이런 것이다. 나는 인간을 사랑한다. 그도 인간을 사랑한다. 나는 그를 사랑한다. 이런 식으로 삼단논법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은 유치한 수준의 애라도 알 만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몰랐다. 내가 사랑한 아홉명이 다 이와 같았다. 내가 인간을 사랑하는 것처럼 그들도 인간을 사랑한다고 했다. 게중의 한명은 인민이라고까지 발화했다. 내가 어찌 그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그와 손을 잡고 브나로드를 외쳤다. 그가 김기진의 시처럼 카페 의자에 앉아서만 단지 그럴 뿐이라는 걸 비교적 최근에야 명료하게 인식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그동안은 그저 가슴으로만 아파했다는 것이다. 내 사랑은 왜 거절당했지? 왜 나는 사랑받지 못 하지? 뭐 이런 자괴감 속에서 말이다. 이러하니 내가 열번째의 사랑을 시작하기까지 얼마나 어려웠겠는가? 나야말로 궁상의 극을 달리며 불가능한 꿈에 매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열번째'가 어찌 했는줄 아는가? 온 몸과 마음으로 인간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고 있었다. 나는 이때쯤엔 내가 인간을 사랑하는지 인간을 사랑하는 그를 사랑하는지 아니면 그저 사랑을 사랑하는지 분간할 수 없었다. 나는 오랫동안 선교사를 따라다니면서 감염된 시동과도 같았다. 예수의 얼굴을 보면서 그 속에서 사제의 얼굴을 보면서 기독교적 사명감을 느끼는 것과 같았다. 나는 정말로 '열번째'를 사랑했다. 그리고 실연당했다. 내가 인간을 사랑하는 그로부터 사랑받을 수 있었다면 행복했을까? 물론이다. 그건 법칙이니까.

하지만 신포도에 손이 닿지 않았던 여우처럼 나는 행복의 법칙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인간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한다라니? 아니 인민이라 해도 마찬가지야, 그건 사상이고 보편이거나 진리일 순 있어도 사랑은 아니지. 완전히 별개야, 그가 인민을 사랑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단지 나를 사랑하지 않았을 뿐이야. 바보같은 짓이다. 아둔한 놈, 결국 내가 한 열번의 사랑이 모두 사랑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식의 자해에 해를 입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이다. 나는 행복의 법칙을 포기하자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알 수 없는 것을 느낄 수 있을까? 나는 사랑을 느끼지 못 하는 몸이 되었다. 아무에게서도. 어떤 인간에게서도. 인간을 사랑하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제서야 비로소 사랑이 시작될 수 있는 토양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바로 그때 그를 만난 것이다. 그 모든 사람들 중에서 그가 도드라졌다. 나는 즉각적으로 눈치챘다. 이는 내가 사랑한 열 명이 갖고있는 공통점을 사랑하는 것이다. 더구나 그는 내가 오랫동안 깊게 사랑했던 '열번째'와 가장 유사하기까지 했다. 나는 마치 다시한번 무덤으로 걸어들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자기 자신이 이토록 선하게 보이다니, 그건 물론 쓰여진 이야기 속의 등장인물로서의 나이기 때문이긴 하다. 하나 나는 이미 액터로서 활약하고 있다. 나는 사랑한다. 그를 가감없이 있는 그대로. 그가 말하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도, 그가 인민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아가 그가 역사적 개념 따위엔 관심도 없다는 것을 본인의 입으로 들었으면서도 단념하지 못했다. 왜?

나는 왜 사랑하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하며 지난 세월동안 열번의 사랑을 해 왔다. 그런데 지금은 왜 사랑을 그만두지 못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다시 자신을 괴롭히고 있다. 그는 행복의 법칙에 맞는 인간이 아니다. 오, 맙소사. 결국 내가 사랑한 열 명이 갖고 있는 공통점 때문에 나는 그들 모두를 사랑해왔던 것이다. 그 조차도 그 공통점의 소유자라는 이유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이유'라고 지칭하고 싶어진다. 왜냐하면 그를 왜 사랑하는 지를 규명해야 하니까, 이유를 알게되면 그만두기도 쉬워질 것이다. 뭐든 그렇지 않은가? 원인을 파악하면 상황은 통제가능해지는 것이다. 단지 그럴 수 있다는 믿음에 불과할 뿐이지만. 나는 바로 지금 이순간 그걸 깨달았다. 이유를 알았지만 그만 둬지지 않는 것이다. 그런 거구나...사랑이란.

 

그가 노래하기 때문이다. 인간을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고 삶을 노래하기 때문이다. 때로 그는 죽음을 노래하기도 한다. 내가 최초로 사랑한 자는 통기타를 치며 노래하고 있었는데 제법 인민에 대한 사랑을 말로 하면서 분개하기도 했었다. 내가 두번째로 사랑한 자는 숟가락을 두드리며 노래했는데 그는 인민 자체였다. 내가 세번째로 사랑한 자는 병나발을 불면서 노래하는 자와 늘 함께 있었는데 바로 그 때문에 그를 사랑하게 되었었다. 왜냐하면 병나발을 분 자는 이미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예수를 사랑할 수 없으니 사제를 사랑하게 된 시동과도 같은 심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때쯤엔 내가 이미 단지 노래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레 미제라블처럼 비참한 자들을 보면서 들었던 노래를 잊지 못 하는 것과 같다. 이건 감성의 문제인 것이다. 그러니까 이유라고 달리 지칭해 보았던 그의 매력 앞에서 어찌할 수 없게 되고 마는 것이다. 서두에 말했지만 나는 이 감성을 부인하기 위해서 무던히도 노력해왔다. 매일 낮과 밤을 그에 대한 생각과 꿈으로만 겨우 구분지을 수 있을 정도였다. 나중에는 스스로의 신경이 노쇠해져서 마르고 얄프레한 겨울 낙엽처럼 바스라질 것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다가 결국 자신에게 패배를 인정했다. 그냥 인정해. 사랑한다고 생각만 하는 건데 뭐 어때. 말만 안 하면 되지.

 

그리고 다음의 말도 내가 한 말은 아니다, 물론 누구나 알고 있는 말이다.

 

C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것이 실존을 위해서가 아니라 회의하기 위해서 한 말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면서 다음 글을 쓸 예정이다. 그때는 심리묘사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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