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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발견
요일5:20
나의 영성생활은 어릴때부터 얻은 신앙생활에 근간을 두고 있다.
전통적으로 배워온 모태신앙에 의해 습관적으로
혹은 교회생활중심의 영적생활에 치중을 해왔다.
그리고 신학교에서 배운 신학적이며, 관념적인 신앙에 매이게 되었다.
이런 영적 생활의 습관들이 나로 하여금 개인적이고
역동적인 주님과의 관계를 희석시키며, 나의 영성은 점점 무디어져왔다.
그런데 최근에 내가 겪은 육체적인 아픔이나 약함들이 나로 하여금,
다시금 주님께 대한 끊임없는 자신의 한계에서 오는 도움의 간절함과 영혼의 절규는
생생한 주님과의 살아있는 인격적인 교제를 불러 일으킨다.
최근 몇년동안 (2-3년)나의 육체적인 무너짐은 그동안 피상적이었던 신앙생활에
한없이 미끌어져내려가는 세상의 이끌림에 방향을 잃고 살아왔으나,
최근에 육체의 한계를 통해 영혼의 불꽃을 불태우면서 주님에게 다가가는
내면의 소리는 나로 하여금 나의 제한된 신앙생활의 테두리를 벗어나게 하여,
주님을 바라보면서 나의 영혼이 새로 태어나는 거듭남의 경험을 하고 있다.
요즘 나는 왜 내가 다시 예수를 찾아야 하는가? 하는 나의 신앙생활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며, 잃었던 주님과의 생생한 만남의 교제를 불러 일으키고 싶다.
모든 인생의 문제는 종교의 문제로 귀결이 되며,
그 종교는 결국, 인간영혼의 내면의 근본적인 갈급함으로
채워지지 않되는 하나님과의 진정한 만남이다.
그 하나님을 만나는 길은 오직 그분만이 길인것이다.
하나님에게 이르는 길은 예수가 하나님의 해답이다.
창조주께서 오직 한 이름에게만 그에게 이르는 길을 일러주셨다.
그 이름은 예수, 예수는 신이자, 인간의 몸을 입은 분이다. 그분은 하늘에서 오신 분이다.
그분의 출생은 오직 하나님을 통해서 처녀의 몸을 입고 오신 분이다.
사람들은 좀 더 그분을 열심히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분을 통해 인간의 현실에서 하나님의 현실로 다가갈수 있다.
그분안에는 하나님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가 접촉하는 점이 있다.
그분을 통해 인간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며, 인간의 잃었던 위치를 되찾을 수 있다.
왜 내가 그분을 더 열심히 알아야 하는가? 그는 내게 누구이며,
그분은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
그분은 나의 구주이며 나의 삶을 다시 새롭게 하신 생명과 부활의 주이다.
근래에 나의 삶에 나타난 인간의 나약함이나 나의 병약함은 나로 하여금
인간의 근본적인 존재와 생존의 문제에 있어,
나는 한없이 자신의 한계를 경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메디칼 치료는 회복할 길이 없는 병약함에 빠져있다.
암보다 더 치료가 힘든 아밀로이드와 그로 인한 심부전증을 순간 겪으며
그리고 폐에 물이차는 육체의 한계속에서 지탱해야 하는
나의 육체적인 상태는 오직 그분만이 나를 만져주셨고, 나의 심장을 새롭게 하셨다.
그는 나의 메디칼 의료의 결과를 통해 도저히 회복할 수 없는
절망의 결과를 보고를 의사들로부터 받았을 때에
(아밀로이드가 심장에 영향을 주었을 경우에는 수년내에
나의 육체적생명은 생존의 제한을 받는다는 의학적심판을 받았다)
그 다음 날, 그런 나의 절망에도 불구하고 치료를 구하는 나의 기도(밤 12시부터 아침 7시까지
나는 그의 보혈로 그의 덮으심을 구하며, 7시간을 기돠여 그분의 치료를 받기위해 준비하였다.)
에 응답하여
그는 나의 몸을 어루만져, 나의 심장을 새롭게 만들어 주셨다.
그후에 나는 호흡의 힘을 얻고, 모든 치료의 회복의 시작의 사인으로
그분의 만져주심을 통해 소망의 부활을 얻었다.
이제껏 나의 연약한 육체를 안고 나는 순간마다 외쳤다.
주여, 나에게 힘을 주소서,
힘이 없나이다. 인간의 한계를 경험한 나는 그분의 새롭게 하는 부활의 힘이 아니고는
결코 다시 설수 없는 인생이라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지금 무엇을 하시는가? 그분은 나를 붙드시는분이며,
나를 새롭게 나의 허비된 삶을 이끌어 가신다.
나는 그분의 위로부터의 부르심에 앉힌바 삶을 다시 살아간다.
나의 호흡은 오직 그분의 부활의 힘이 지탱하고 있을 뿐이다.
이것이 내가 그분을 부단히 찾지 않을 수없는 이유이다.
왜 그동안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분을 찾지 않았으며, 그분을 알려고 힘쓰지 않았는가?
후회가 막급이지만, 이제는 그분을 알아야 겠다는 영적인 갈급함이 솟구친다.
그분을 알아야, 세상이 열리고, 인생이 열리고.
그분이 오신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그 인생들을 풍요롭게 하는 그분의 손길을 경험한다.
아직도 나는 예수를 잘 모른다. 그분이 나의 구세주이며, 성경에 기록된 메시아이며,
그분은 모든 성도의 구주이며, 교회의 주인이며, 세상의 주인인 것을 알지만,
그분을 실지로 모른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분은 내 장래의 삶에 어떤 분이며, 지금, 다가오는 나의 삶에 무엇을 준비하고 계시는가?
예수는 하나님의 비밀이다는 말은 언제나 그분에게는 신비로운 인간의 돌아가야 고향이다.
예수안에서 참인간을 발견하며, 참 하나님을 만날수 있다. 그분은 모든 창조세계의 근본이며,
그분을 통해 우리가 존재하며 세계는 그분을 위해 존재하여, 그분은 세계존재의 이유와 목적이다.
예수를 알자, 예수를 발견하자. 나의 생애의 사전에 그분이 나에게 무엇을 하셨나?
나는 그분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 를 끊임없이 물어야 하지 않을 까?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요6:1-5
이 기적이야기는 주님의 복음서중에서 부활에 대한 기사가
4복음서에 다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이기적이야기는
주님의 신성과 그분의 창조적인 능력을 나타내는 메시야적인 기사이적의 중요성을 담고 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 어떻게 우리의 일상세계에서 일어나는 현실적인 문제를
믿음의 세계로 발전시켜 주님안에서 문제를 해결해 가는 지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항상 현실적인 문제를 안고 살아가고 있다. 삶을 사는 것은
우리가 문제의 바다로 던져져 그 문제를 헤엄치고 살아남는 문제로
늘 안고 있는 우리만의 고민이자, 삶의 이유이다. 삶이 있는 곳에 문제가 있기 마련이다.
사는 일은 그 문제안에서 우리의 생존의 의미를 찾는 이유이다.
오늘 본문은 메시야 강림시대를 살고 있는 팔레스틴지역에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 주변동네를 나니시는 메시야로 향하는 여러가지 소문과
그분의 하신 일로 인하여 온 동네마다 메시야에 대한 뉴스를 넘쳐나 사람들의 이목을 끌며,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 누구나 주변에 아픈 이가 있는 하면
본인자신이 질병에 노출되어 인간의 절실한 문제로 누구나 거기에 매여 있는데,
메시야가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은 인간이 안고 살아가는 생노병사에 대한 고민을 함께 느끼며
그 문제를 진지하게 풀어주는 일을 하셨다는 것이다. 그분은 사람들의 아픔을 알았으며,
그들의 고통이나 고난을 함께 풀어가는 해결사로 그들의 삶의 주변에 머무셨다.
사람들은 호기심으로 가득찬 모습으로 그분이 행하는 치유의 기적과
기사를 보고 관심을 갖게 되었으나 아직은 그들은
그 분의 주장하는 믿음의 세계로 들어오지 못하고 변두리에서 서성이는
정도의 구경꾼으로 따라 나선 것이다.
많은 이들이 그분에 대한 소문을 듣고, 이제는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하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하여 사람들은 점점 그분의 말씀의 세계에 심취하게 되었다.
그들은 한끼를 걱정하며 살아가는 빈민이나 가난한 이들로, 날마다 끼니 걱정을 하지만,
이제는 그것도 잊고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달콤한 하늘메시지에 심취하여
끼니 걱정을 하지 않으며, 3일을 지내고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진정 그들이 배가 고파하는 현실에 직면하게 되었다.
굶주림의 문제가 그들이 당면한 현실적인 문제였다.
그분을 따라 다닌 사람들은 유대지역에 있는 사람들 남자어른만 5,000명이나 되었은데
실제인구는 부인과 아이들까지 따지면 족히 2만명이 죄는 거대한 집단이었다.
이들을 먹여야 하는 현실적인 문제에 메시아는 직면하셨다.
그분은 우리의 삶의 문제를 어떻게 풀어 가셨나?
제자 한사람에게 질문을 던진다. 한 제자의 대답은 현실적인 눈이 밝은 계산으로
그들을 먹일 돈을 계산해보니 한 노동자가 벌어야 돈이 당시에 1 데나리온인데
그 노동자가 벌어야 할 돈이 200 데나리온을 벌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 품삯은 200일간을 일을 해야 한다. 거의 8개월을 매일 가서 벌어야
벌판에 있는 굶주린 민중들을 먹일수 있다.
메시아는 현실적인 문제에 직면하여, 다시 제자들을 향해 바라보는데,
그중에 한제자가 평소에 메시아가 하신 기적의 세계를 경험하였던 바,
그 제자는 자기 스승을 보면서 그는 주변에서 한 가능성을
보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 군중들 사이에 한 아이가 있는데,
그 어린이 손에 자기 가족들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있었다.
한가족이 먹는 음식,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인데,
그 음식을 바라보는 제자의 눈은 이미 메시아의 가능성의 세계를 바라보면서,
아이를 데리고 주님에게 다가간다.
아이의 손에 있는 그 음식을 보며, 주님은 하늘을 향해 창조주 아버지에게 감사하며,
그 음식을 축복하신다. 그의 축복은 창조주의 능력을 담고 있어서
그 음식은 이제는 창조주의 손에 놓여있는 도구로 그분의 손에서 옮겨져
제자들에게 옮겨지며, 그떡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며,
무에서 유를 만들어 가는 창조의 역사로 주변에 있는 많은 굶주린 사람들에게
풍성한 양식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가족단위로 앉아서 나누어 주는 그 음식을 받아
마음 가득한 하늘의 풍성에 놀라움으로 현실적인 배고픔의 문제를
한 제자의 가능성의 제기로 시작된 메시아의 창조의 믿음의 역사는
그 많은 사람들을 먹이는 거대한 음식으로 그들이 당면한 식량의 문제,
즉 일상에서 일어나는 먹고사는 문제, 우리가 매일 안고
살아가는 삶의 문제를 해결하고 있었다.
오늘 오병이어의 기적은 우리에게 여러가지 도전을 준다.
우리의 현실적인 문제는 언제난 해결되어지는 문제라는 것이며,
그 문제의 중심에는 사람들의 필요가 있고, 그 문제해결의 중심에는
창조주의 믿음의 세계가 있다.
오늘날도 이 지구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의식주문제로 고민하며,
고통하며, 고난을 겪으며 살고 있다. 갖은 사람들은 더 갖으며,
없는 이들은 더 배고파하는 아픈 현실이 우리 주변에 있다.
그러나 한가지 사실은 그러한 인생의 문제는 그 문제를 창조주의 손에 맡기며,
그 그분에게 문제해결을 요청할 시에 그 문제가 해결된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현실의 세계이며, 그 현실세계는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한다.
의식주의 문제, 질병의 문제, 사는 문제, 인간관계의 문제등,
이루 해아릴 수 없는 문제가 쌓여 있다.
그러나 우리의 주변에는 늘 가능성이 있음을 보는 눈이 필요하다.
내안에 있는 그무엇이 없는가? 나의 주변에 일어날 가능성의 세계를 바라보는
긍정의 시각이 필요하다. 우리의 문제는 우리가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달리 보일 수 있으며, 그것을 해결할수 있는 해결의 길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복음이다.
사람에게는 문제를 일으키는 요소가 있다면 창조주에게는
그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나 권세가 있다. 인간은 현실세계에서 문제를 안고 살아가면서,
창조주가 감추어 놓은 가능성의 세계를 바라보는 긍정의 태도로
삶을 살아가는 태도가 필요하며, 그 삶의 세계에서 창조주의 차원으로
옮겨가는 믿음의 세계를 바라 볼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분은 이세상을 그분의 권능으로 그분의 창조의 권세로 있게 하였으며,
오늘도 그분의 보존하는 능력에 의해 거대한 지구가 움직이며,
이 지구상에 사는 수많은 인생들이 살아가고 있다.
오늘 본문의 메시지가 주는 현실의 세계에서 가능성의 세계를 거쳐
어떻게 믿음의 세게로 들어가는 가가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이다.
가능성을 보는 긍정의 시각에서 한 가지 확실히 잡을 수 있는 확신하는 바가 필요하다.
사실 인생은 불확실한 미래를 살고 있는 자신의 미래나 문제를 조금도
스스로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수 없는 한계의 존재이다.
그 한계는 자신의 어리석은 태도나, 제한된 관점으로 답답한 삶을 살지말고,
언제나 무에서 유를 있게하며, 모든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그분의 손길을 의식하며,
그분을 의지하는데에서 그분과의 신뢰하는 관계에서 동역하는 관계로 살아가면
그분안에 있는 플러스 알파의 창조의 무한한 능력이 나의 삶을 붙들어
감히 자신하며 살아가는 인생을 만들어 줄 것이다. 비록 내일의 세계가 보이지 않으며,
나의 기댈만한 모든 것이 무너지는 한이 있더 라도 결코 두려워하지 않으며
자신에게 다가온 현실의 문제를 결연히 맞서,
창조주의 믿음의 세계에서 그분의 믿음으로 사는
엄청난 풍성한 자원의 축복을 맛보며 살수 있기를 바라 마지 않는다.
믿음과 기도에 대한 이해(약5:13-18)
믿음이란 무엇인가? 믿음은 어디서 오는가?
주님에게 나갈때에 무엇이 필요한가?
나의 존재로 부터 나오는 행위의 결과나 혹은 자질의 유뮤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이미 자신은 주님앞에 도달할수 없는 절대적인 차이가 있으며,
그분앞에 자신의 의로움을 내세울 만한 것이 없다.
다만 그분에게 나갈때에 나에게 필요한 것은 그분을 대하는 나의 자세인데,
그 자세는 그분을 믿는 일이다.
믿음은 그분의 신실하심과 그분의 말씀하심에 대한 내용을 신뢰하는 일이다.
천지를 지은 이가 피조물에게 요구하는 것은 창조주에 대한 신뢰심이다.
마치 아버지가 자녀에게 바라는 신뢰심이다.
자녀는 아버지를 신뢰하는 것으로 자녀가 취할수 있는
아버지와의 관계는 그분을 자녀가 갖을수 있는 사랑하는 관계에서 나오는 신뢰심이다.
이 신뢰심위에서 기도자가 그 기도를 들으시는 존재에게 나아가 구할 수 있다.
그분앞에서는 우리의 무엇이나에 대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생각할 때에 큰 것이나 우리가 생각컨대
이룰수 없는 바람이라도 그분앞에서 그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분앞에서는 우리의 신뢰의 문제가 제기된다.
이 신뢰심만 있다면 기도자는 언제든지 무엇이나
그분에게 요구하는 것을 받을 수 잇으리라.
믿고서 기도한 것은 받은 줄로 알라.
주님에게 기도하는 일은 먼저 그분과 그분이 하신 말씀을 믿는 일이다.
믿음이 있고서야 그분앞에 나갈수 있다.
기도하고 구하는 자가 기도를 듣는 존재가 들을지
혹은 거절할지에 대해 분명한 태도를 갖지못하면 기도의 효력은 나타나지 않으리라.
고로 믿음의 기도가 역사하는 힘이 많다는 것은 믿음으로 드리는 기도가 효과적인 응답을 가져오는 것이다.
주님에게는 무엇이나 구하면 무엇이나 하실수 있는 분이다.
그러나 우리는 때로는 우리의 구함에 있어서 그분의 능력을 의심하거나,
감히 그것을 응답하실까 하는 의구심을 갖을 때가 있다.
그러나 그분이 바라보는 우리의 실제적인 문제는 무엇이나의 문제가 아니고,
동기가 바르다면 우리가 그분을 대하는 신뢰심의 문제인 것이다.
믿음은 우리가 그분을 대하는 처음의 문제이자
항상 지속되는 우리의 문제의 핵심이며, 우리의 관점을 늘 돌리게 하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본성의 문제에서 오는 딜레마의 문제이다.
우리는 늘 원죄로 인하여 그분과의 사이가 늘 벌어지기가 쉬우며,
그분과 우리가 사이를 이간하는 악한 존재의 방해거리를 제공하게 되어,
우리에게 늘 그분에 대한 어리석은 생각이나, 태도를 갖게 미혹을 한다.
그분에 대한 왜곡된 시각을 갖게하는 어둠의 세력의 끊임없는 공격을 생각으로 차단하고,
기도로 방어하는 일은 기도자에게 늘 필요하다.
우리가 왜 그분이 하신 기록된 말씀으로(성경) 돌아가
그분이 하신 약속을 되새김질해야 하는 지를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그 말씀으로 우리의 믿음을 갈고 닦아야 (키우며 자라게 하는)한다.
처음에는 공원을 1.5마일 (3-4 킬로미터)되는
거리를 한번에 걷기도 하였는데, 점점 돌기가 힘들었다,
숨이 차는 고로 몸의 상태는 거의 중간 중간 쉬어야 겨우 한바퀴를 돌수 있었으나
나중에는 그정도도 하지 못하여,
그저 가서 시원한 공기만 쉬는 정도의 몸의 상태로 약해져 있었다.
심장근육의 기능의 신축성이 떨어져 심장운동이 약해져 충분히 피를 공급하지 못하여,
그 여파로 폐에 물이 차게 되는 악순환으로 인해 온 몸에 물이 차게 되며, 그로 인해
숨이 차게 되어 10미터를 걷고 나서는 쉬워야 하는 몸상태는
자신의 행동반경을 점점 약화시킨다.
이런 몸의 상태에서 정확한 병의 원인을 모르고 증상
(주로 congestive heart failure: 심부전증)만을 완하시키는 약물로 지탱하기를
2년을 보내었다. 그러나 증상은 여전히 차도가 없고,
이 상태로 자신의 몸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기만 하였다.
최근 11월경에야 주된 병의 원인을 알아냈지만,
(아밀로이드는 희귀성 질병으로 일종의 다양한 혈액암과 같은 것이며,
아직은 완치케 하는 치료법이 없다보니, 연구 개발중이다.
그리고 일반 백인들사이에는 희귀하여, 주로 아시아인이나,
아프리카 미국인들중에서 혹은 외국 유럽의 몇나라에서 환자가 보고가 있음,
내가 가지고 있는 아밀로이드는 primary 성 아밀로이드로,
그 쌓여진 경단백질이 몸 장기 구석에 영향을 주어 그 기능에 이상을 일으킨다.
주로 심장, 신장, 간, 위장, 입, 혀, 손, 발등)
그런데 심장에 영향을 주었을 시는 힘든 치료와 생존율이나 기간이 1년이나 몇년이 되지 않는다.
지난밤에 집에서 도저히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온몸에 물이 차있었다
그동안 잠을 자지 못하고 지낸 날들이 몇날이 되었으나,
여전히 오줌이 나오지 않아, 캐디터(오줌을 호수로 빼는 기구)를 통해 오줌을
빼어야 했다. 처음에 이것을 집어넣는데 피가 나온다.
오줌에서 피가 뭉쳐서 나온다. 통증은 가히 견디지 못할 정도로
수없이 오줌이 나올때마다 통증을 느끼곤 하였다.
처음에 캐티터를 집어넣은 간호원의 시술로 피가 나오기 시작하는데,
거의 일주일 동안을 피가 멈추지 않았다.
밤마다 통증으로 인해 잠을 잘수가 없었다.
나중에는 극도의 심리적인 불안정이 찾아와,
어려운 처지에 낙망이 되었으나,
그때마다 천지를 지으신 하늘 아버지가 계시는 하늘을 향해 바라보면서
수없이 그분으로 부터 위로의 말씀을 들었다.
그 통증을 일주일동안 겪으면서도
주 예수께서 나의 구원을 위해 쏟아놓으신 그분의 십자가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고
연결하지 못하여 혼자서 고통만을 느끼며 아파할 뿐이었다.
나중에야 주님의 고통을 생각하니 잠시 고통이
나의 구원을 위한 주님의 고통의 고마움을 생각나게 한다.
3일동안 몸무게가 50파운트를 빼어,
거의 몸이 야윈 상태로 3주간을 중환자실에서 지내고 있었다.
자신의 몸을 스스로 지탱하지 못하여, 도저히 스스로의 힘으로
2층 아파트를 내려 올수 없었다. 할수 없이
앰브런스를 불러 응급처치하는 대원들에 의해 겨우 차에 몸을 싣고,
병원 응급실로 들어와 그 날밤을 지내며, 점점 자신의 몸은
거대한 용광로에 들어가 다시 태어나는 몸을 만들기 위한
긴 시간의 여로에 들어 가게 되었다.
응급실에서 그날밤에 바로 중환자실로 옮겨가 거기에서
의사와 간호사들은몸에 여러 가지 주사로,
약물로 거의 실신 상태의 몸을 회복케 하는
긴 시간의 치료의 날이 시작이 되어 몇날을 지내는데,
처음에 3일간을 부은 몸안에 있는 물을 뺴내는데, 50 파운드를 빼니
몸은 가냘픈 상태로 변화되었다.
스스로 일어나 앉아 있을 수 도 없는 상태였다.
그 때에 마치 꿈을 꾸듯 이틀 동안을 치료에 맡기며,
꿈을 꾸듯,치료를 받으며, 주님에게 간구를 드리는데,
의술로 시술하는 과정안에 주님께서 오셔서 몸안에 역사하시는 경험한다.
주님, 저를 치료하여 주소서!
삶과 죽움사이에서
삶이란 사는것이다.
살아있다는 것은 감사하다.
생명을 갖고 사는 것은 그 생명을 주신이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게 한다.
삶의 나날은 우리를 즐겁게 하는 형통할때에 인생의 순간들이 주는 기쁨을 맛보며,
그 시간들을 아무런 가치없이 그저 주어진 대로 살게 한다.
그러나 어떤 어려운 일이나 고통스럽게 하는 일을 만나면,
그것으로 인하여 힘들어 하고,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등을 한다.
병이 들었을때에는 그 병이 주는 불폄함과 괴로움에 자신을 맡기며 생존한다.
잠시의고통이나 힘든 상황을 견디지 못하여
스스로 생을 포기하는 마음속의 급한 기분에 좌우되어 바로 어리석은 행동을 저질르기도 한다.
그럴때에는 고마운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마음을 슬프게 한다.
오늘 아침 뉴스에 실직당한 한 미국인 가장이 부인과 10세 미만의 자녀들을 모두 총으로 쏘아 죽이고
본인 자신도 자살하였다. 그 가장은 자신이 실직하여 삶을 살아갈수 없다고 판단하여,
앞으로도 길게살아야 할 어린 아이의 생명에 까지 손을 대어
자신의 좌절과 절망의 희생자로 만들어 버렸다.
하루 아침에 단란한 일가족이 죽음의 희생자들이 되었다.
그에게는 다른이(자녀)들의 살고 죽는 것의 선택이 마치 자기 권한의 소유인양
전능자처럼 남의 생명에 까지 손을 대었다.
가족의 테두리안에 살아가는 인생들 모두를우울하게 하는 불행한 소식이다.
아무리 삶이 고달프고 힘들게 하여도 나에게 주어진 삶자체를 부인하고 싶지 않다.
오히려 그런 어려움이 그런 삶을 살아가는 자신에게 깊은 삶의 가치와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삶의 끝인 죽음을 맞이하는 일은 오직 자신에게 삶을 살게 한 전능자에게 있는 것이다.
생명을 위협하는 병이나 위험이 아니고, 비록 갑작스런 요인들(교통사고나 천재지변등, 순간의 실수나 삶을 위협하는 그 무엇들)이 발생하여도
삶을 끝나게하는 요소가 사람들 자신들에게서가 아니라,
그 삶을 살게하신 그분의 의지나 섭리에 달려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따르는 것이 현명하다.
죽음이란 죽는 것이다.
자시에게 주어진 유일한 생을 포기하는 것으로 의미한다.
삶을 사는 인생들에게 죽음은 넘어야 하는 장벽이며, 삶을 사는 모든 이에게 다가오며,
괴롭게하는 죽음으로 이끌어가는 절망감은 언제나 삶을 고통스러워하는 이에게 냉정하게 다가온다.
그 죽음은 우리의 인생에서 보이지 않는 그것이었다가,
언제가는 자신의 삶에 죽음의 현실로 다가오면 누구나 두려움을 경험한다.
그러나 살고 죽는 문제에 있어서, 인간적인 현실에 있는 상황으로 몰려가기 보다는
살고 죽는 문제에서 초월하여,
자신의 확신하는 그 무엇을 위해, 삶을 살아가게 하는 사명이나
진리가 주는 초월함을 좇아 가야 할 길을 간다면
사나 죽으나의 문제를 벗어날수 있을 것이다.
삶과 죽음의 가치나 의미보다 더한 인생의 참진리를 발견하면,
사는 것이 죽은 것이 문제가 아닐 것이다.
이런 진리를 깨달은 사람들에게는 사는 것이나 죽는 것이 다
그 진리안에 있는 조건에 해당하는 것으로 제한을 받는다.
그러나 살고 주는 일에 대해 해결을 받은 신앙인들에게는
사나 죽으나 나는주님의 것이다라는 분명한 명제를 따라 갖고 있다는
자세나 태도는 살고 죽어야 하는 그런 것에서 자유하게 될 것이다.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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