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글 목록
-
- 예수의 발견
- 목동
- 2009
-
- 두 세계 사이에서
- 목동
- 2009
-
- 가능성의 세계를 넘어 믿음...
- 목동
- 2009
-
- 믿음과 기도에 대한 이해
- 목동
- 2009
-
- 홀로 설수 없는 인생
- 목동
- 2009
뉴스 위크지에 나온 기사를 읽고서.....
(아시안들에 대한 상담에 대해서) 미국에 살고 있는 아시안 이민자들은 자기들의 운둔적인 사고방식으로 인하여 자신의 속 마음에 있는 것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내어 놓고 상담을 받기를 타 민족들보다는 자발적이지 않다. 그리고 이런 태도는 타민족보다도 더 언어습득이나 문화적인 동화작용이 더디며, 더 나아가 미국문화나 환경이 주는 헤택을 덜 받을 경향이 있다. 아시안 이민자들은 나름대로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페쇄적인 문화적인 이해나 태도는 이민자 자신들이 살고 있는 이중문화의 테두리에서, 동양과 서양의 가치관의 차이로 인한 정신적인 스크레스를 많이 받고 살고 있다. 특히 가정새활에서의 동서양의 가치관의 차이로 인한 혼란이나, 혹은 가족간의 갈등에서 오는 문제들로 인하여 겪는 정신적인 문제들은 그대로 상처를 갖고 사는 경우가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보다 더 하다. 남미에서 건너온 이민자들은 자기들끼리 터놓고 자신의 문제를 내어놓고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푸는 경우가 많다. 동양의 유교사상의 영향으로 침묵이나, 운둔적인 태도나, 비자발적인 사고나 행동양식에서 겪는 내면의 일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마음을 열고 상담을 받으려는 경향이 적다. 전쟁을 겪은 캄보디아인이나 베트남인들은 전쟁후유증을 앓으면서 이곳 이민생활에서 오는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그대로 안고 살아간다. 한국인들도 그렇게 살아가기는 마찬가지이다. 한국인들의 가정생활은 문화적인 차이, 가치관의 차이로 인한 부부간의 갈등이 생긴다. 특히 서로 문화가 다른 배우자들사이에는 서로간의 다른 문화적인 갈등과 언어의 소통의 차이로 인한 더 많은 갈등을 안은채 살아오고 있다. 그러기에 이곳에 있는 이민자들에 대한 일정한 상담사역은 많은 필요을 요구하게 한다. 정신적인 상담을 거치지 않고 살다가 육체적인 질환으로 발전되기도 하며, 혹은 혼돈된 인간관계의 모순과 곤란속에서 그저 묵묵히 참아 갈 뿐이다. 그러나 자신의 내면은 더 외롭고, 그리고 삭막하며, 깊은 고뇌와 불안을 안고 살아가게 된다. 고로 아시안들중, 많은 경우에 상담사역이 활발하게 진행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에 믿음을 빼버리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성경을 읽어도 그 말씀이 믿어지지 않는다면 말씀의 유익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성경은 기적으로 이루어 진 책입니다.
즉 이 하나님의 말씀은 믿음이 없이는 깨닫지 못하고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구원을 받지 못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너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로 우리에게 주어지지는 것인데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 봉사를 할 때에도 믿음이 없으면
그 봉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고서 하나님의 일을 해야
그 일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는 믿음의 눈으로 보면, 모든 물질세계가 그의 말씀으로 지어져서,
믿음의 원리가 적요되는 세계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물질세계이며,
모든 물질의 구성이 원자에 의해 이루어져서, 보이는 현상세계를 이루지만,
실상은 나타난 현상의 세계는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에 의해 조정이 됩니다.
보이지 않는 실체가 선과 약의 원인으로 그 실체들에 의해 움직여 집니다.
아무리 악이 횡행하는 때라도 모든 것들이 창조자의 주관 하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믿음으로 바라보는 세계관입니다.
더 나아가 믿는 자가 가야 할 약속의 땅인 천국도 실상은
시편 33:6에 하늘들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다고 고백합니다.
신자가 가야 할 천국이 그분의 말씀으로 지어져서,
그 세계 안에서도 믿음의 원리가 적용되는 세계입니다.
주 예수님께서 천국을 비유하여 언급하실 때에 아브라함의 품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 천국은 아브라함이 가졌던 믿음이 통용하는 세계이며, 하나님을 믿은, 그분의 신뢰를 따른
그리고 하나님을 신뢰한 믿음의 사람들이 가서 영원히 사는 감격이 넘치는 세계입니다.
이 물질세계는 영화 월리(과거 2,30년 전에는
영화 E.T의 외계인이 지구를 찾아오는 것에 반해
청소 로보트 월리는 먼 미지의 미래의 세계에
살고 있는 인간들의 행성으로 찾아가는)에서
말하는 인간이 가서 살았던 미지의 세계가(거기에는 감격도 없고, 흥분도 없는
자동화된 세계에서 비만으로 생명의 활력을 잃은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비쳐지는 세계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세계인 천국은 신앙인들이 보이지 않는 영적인 존재
특히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경험과 이해를 갖고,
영원히 또 다른 흥분과 감격이 주어지는 도전이 있는 생명의 활력의 세계입니다.
고로 천국에 들어갈 자격은 그 믿음을 소유한 자들입니다.
그 믿음은 하나님께로부터 합당한 사람들에게 주어진 그분의 선물입니다.
다만 그분의 선물을 흔쾌히 받아들이는
자원하는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은 해당이 됩니다.
고로 사람들의 믿음으로 또한 선물로 주어진 하나님의 구원을 얻고
그분의 영원한 나라인 영생의 나라에 들어갑니다.
오늘 본문에 언급하는 믿음(faith)이란 말은 보다 큰 의미가 있는
하나님과 연결된 믿음입니다(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할 때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찾아오시는 그분의 속성은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반면,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포괄적인 태도는 믿음으로 가야 합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것은 그들을 믿었던 것인데,
인간은 그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믿음을 배반하였습니다.
고로 인간은 하나님을 향해 나갈 때에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믿은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다 할 뿐 아니라,
자신의 벗으로 여기셨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말할 때에 몇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종교신조에 대한 믿음(belief)이 있습니다.
그 믿음에 의해 종교행위나, 종교의식을 따릅니다.
문자에 매여있는 즉 (사도신경의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고백)에
대한 믿음(belief)입니다.
또 다른 믿음이란 말 중에는 흔히들, 우리의 믿는 바, 확신하는 것
(신념, assurance, conviction),
말씀에 대한 약속들, 그리고 바라는 것들의 확신 등 입니다.
그러나 믿음(faith)은 그것도 포함하는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또 다른 의미로서의 믿음은 의지하는 바나 혹은 신뢰로서의 믿음(trust)이 있습니다.
믿음(faith)의 세계인 하나님의 통치하시는 세계는 그 분과의 관계에서
믿음으로 연결되는 원리가 적용되는 세계입니다.
사람들은 지식의 힘으로도, 종교나 수양의 힘으로도, 권력의 힘으로도,
물질의 힘으로도, 혹은 자력의 힘으로도 들어가지 못하는
오직 하나님과의 연결(믿음)을 통해서만 들어가는 세계입니다.
본문에서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과 우리가 연결된 우리가 가지고 있을 수 있는 접촉 점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갈 때에 내세울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 밖에 없습니다.
나의 여호와여 내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시편기자가 고백한 것처럼 하나님을 바라 볼 때 그분을 신뢰하는 믿음이 있을 때에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이 만남을 이루고 연결이 됩니다.
고로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원리를 따라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 믿음의 원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그분의 창조된 세계인 이곳에서
그 믿음의 원리로서 생명력 있고 활력 있는 삶을 이루고,
특히 모든 일에 하나님을 늘 마음에 간직하고 그분을 생각하며
그 분의 말씀을 마음에 새겨 묵상하여 그 말씀이 주는 축복 안에서
그 분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세상 살아가는 방법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보통, 믿음의 원리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믿음의 정의로 바라는 소망에 대한 기대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을 실현한 것처럼 믿고 살아갑니다.
소망에 관해서, 앞으로 이루어 질것을 소망하는,
그리고 미래와 영생을 약속하신 하나님의 예언과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바라는 믿음대로 이루어 집니다.
마치 주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낫게 하실 때마다
병자들에게 낫고자 하는 믿음을 말씀하시고
네 믿음대로 될찌어다 라고 하셔서 믿음으로 기적을 기대하는 믿는 자가
그 기적을 맛보듯이 믿음으로 역사가 이루어 집니다.
더 나아가 그 믿음의 특성은 바랄 수 없는 것들을 바라는 믿음의 성격이 있습니다.
그런 불가능 한 것들은
자신의 힘으로는 되지 않으나, 하나님의 힘으로는 되는 기적을 이룹니다.
그 기적을 기대하고 바라는 것이 믿음입니다.
떠 하나의 믿음의 성격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지금 우리가 세계는 보이는 물질세계입니다.
나타난 것만 보이고, 보이는 것만을 따르는 세계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보이는 현상세계는
오히려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의 조정을 받습니다고 주장합니다.
그 믿음을 통해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를 깨닫고 직시하는 힘을 얻습니다.
지구상에 있는 현상의 세계는 원래의 세계(영적인 세계: 이상적인 세계)에서 비롯되었다는 플라톤의 이원론서 언급하는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에 의해 움직입니다.
신앙의 선진들은 영적인 세계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그들의 삶을 통해 경험으로,
응답으로, 그분의 임재를 느낌으로서 자신들만의 체득한 간증이 있습니다.
그것들은 자기 확증들이 되어 변할 수 없는 믿음의 진리로
우리들에게 그들의 삶을 통해 증거하고 있습니다.
자기 체험이나 간증을 통해 그들은 몸소 경험한 하나님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적인 세계의 능력을 알고, 그 세계의 의지를 따라 움직이는
믿음의 원리를 이해하고 있습니다.
고로 믿음의 원리는 인생의 삶의 원리 중에 그들이 깨닫고
경험한 가장 큰 축복의 원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의 원죄로 인하여 이 지구의 물질세계는
3가지 방향의 원리에 의해 좌우되는 것 같습니다.
세상을 움직이는 3가지의 원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물질의 힘이면 무엇이든 살수 있다는 유물론적인 세계관입니다.
그 세계관은 보이는 물질을 따라 눈에 보이는 대로 좋은 것을
취하는 모양으로 그래서 보기에 좋은 선악과를 따먹고,
주님께서 그 금단의 열매를 보암직도 하고 탐스러운 욕심이 가는 대로
취하여 먹고는 사람들은 고통스럽게 살다가
결국 흙으로 돌아가는 죄와 죽음의 법 아래로 내몰렸습니다.
두 번째는 인간을 신뢰하여 주신 자유의지를 남용하여,
인간 스스로가 자신에게 하나님 노릇 하려는 절대자의 모습으로 살려는 것,
즉 자기 권력의 힘을 의지하여 자기 마음대로
자신의 인생을 좌우하려는 세계관입니다.
그 세계관은 인간의 교만과 어리석음을 부추켜서,
스스로의 통치로 인한 많은 부작용을 낳으며,
부패한 권력의 힘으로부터 나오는 온갖 삶의 쓰레기
(고통, 좌절, 불안, 걱정, 패배감등)를 거두어 들입니다.
세 번째는 선악을 아는 열매를 따먹은 고로, 인간이성의 힘이 주축이 된
지식의 힘을 의지합니다.
그 지식의 힘 이면 정보의 힘이면 모든 것을 좌우 할 수 있다는
정보화의 시대를 맞이한 요즘은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지식의 힘은 인간에게 더 많은 무지와
인간의 능력의 한계를 알려 줄 뿐입니다. 인간생명의 병들을 치료하지만
또 다른 불치의 병이 생겨나며,
인간의 생명과 건강 세계를 위협하는 조류독감 같은 신종바이러스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지식의 총체인 과학은 인간세계를 편리하게 할 뿐 아니라,
불안하게 하며, 더 많은 민족이나 국가간에 갈등을 유발하며,
전 세계의 안전을 위협하는 폭발력에 두려움을 갖게 합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있는 선악에 대한 지식이 있어도 선을 이룰만한 힘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교회가 믿음의 역사를 이루게 하소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전능하신 힘으로 출애굽을 하고 나서
광야에서 40년을 살면서 믿음으로 사는 법을 배웠습니다.
광야는 신앙인생들의 교회생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광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들어가기 위해 훈련하는 곳입니다.
교회는 천국을 들어가기 위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것을 배우게 합니다.
세상이나 교회나 천국 등 모든 하나님의 창조된
그리고 통치하는 세계는 믿음의 원리가 통용하는 세계입니다.
이스라엘인들은 그들의 식생활의 해결문제를 통해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들은 매일 아침에 들에 나가서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를 먹고
하나님께서 몰아주신 메추라기 고기를 먹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매일 공급하셨습니다.
6일을 들에 나가 만나를 거두어 들였으나 제 칠일 즉 안식일을 위해
6일 쨰 되는 날에 두 배로 거두어 들이게 해
안식일을 준비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만나는 그들에게 하루에 필요한 양식이었습니다.
아침이슬에 내리는 만나는 해가 뜨기 시작하면
그 햇빛에 의해 녹아내려 더 이상 만나가 아닙니다.
고로 그들은 매일 아침에 들녁에 나가 그것을 거두어 들여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인들이 경험하고 맛본 하나님의 은혜나 자비나 그의 사랑은
우리가 늘 먹어야 하는 마치 육신의 양식인 밥을 먹듯
매일 그분이 공급하시는 은총을 내 영혼이 맛을 보고 먹어야
영혼의 생명이 유지하며,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 안에서
영적 생활의 원리인 믿음(하나님과의 관계로서의)을
따라 살아가는 법을 터득합니다.
그리고 그 자유인들은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을 따라 살아야 생존할 수 있습니다.
한번은 이스라엘이 광야의 길을 가다가 마실 물이 없어 불평을 하며 원망을 했습니다.
그때에 불 뱀이 나와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마구 물었습니다.
불 뱀의 독에 의해 죽어가는 이스라엘백성을 향해 하나님께서 모세를 시켜
높은 장대위에 다 놋 뱀을 만들어 놓고 그 뱀을 쳐다보는 자는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에 마귀는 우리를 어떻게 뱀처럼 죽이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장대에 달린 놋뱀처럼 십자가를 바라볼 때에
치유를 받고 고침을 받으며 살아나고 소생하게 됩니다. 매주일 드리는 예배를 통해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 입니다.
말씀에 순종한 예배의 자세를 통해 하나님의 치유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이스라엘의 선민들은 하나님께서 앞서서 인도하시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하나님의 인도를 따르며 사는 법을 배웠습니다.
낮에는 구름기둥이 일어나 이스라엘 백성의 길을 인도했습니다.
구름기둥은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의 상징입니다.
언제나 이스라엘이 행진하는 곳에 하나님께서 함께하십니다.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어두운 밤에도 빛이 되셔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셨습니다.
주의 말씀은 내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오늘날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려면 말씀으로 인도를 받습니다.
교회가 믿음의 역사를 이루는 발자취를 내딛기 위해서 본문에 나타난
믿음의 역사로 살아가는 3사람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번째 사람은 아벨입니다. 최초로 하나님으로부터 의인이라는 증거를 받았습니다.
성경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의롭다고 여기심은 그들의 믿음을 근거로 해서
그들을 옳은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벨은 제사를 온전히 드림으로 하나님께 자신의 믿음을 표현한 사람입니다.
그는 제사를 통해 자신의 정성을 나타냈습니다.
죄 있는 인간이 하나님앞에서 의롭다고 여김을 받는 것은
온전한 예배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는 자기의 소유중에 가장 귀한 양중에 하나를 선택해서,
그 양을 죽여 피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죄를 생각케 하는 제사였습니다.
죄 있는 인간이 하나님께 갈수 있는 방법은
죄를 해결하는 것을 통해서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죄 있는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접촉점입니다.
아벨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예배의 정신으로 하나님을 섬김으로서
그의 제사즉 예배가 하나님께서 열납 하셨습니다
오늘은 아벨즉 의인의 후손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며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아벨의 후손으로 항상 피의 제사를 드립시다.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를 의지하는 제사를
그래서 하나님과의 진정한 만남을 이루며 살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벨은 또한 그의 온전한 예배로 인하여 온전히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불신의 사람들은 가인처럼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있으나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숭배의 죄에 빠져 삽니다.
우상숭배는 인간의 탐심으로부터 나온 타락한 인간이 범하는
하나님께 불경 하는 죄입니다.
그레서 불신사람들은 보이는 우상도 섬기지만
보이지 않는 우상도 섬기는 것을 봅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만 섬기기로 주님만이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는 분,
물질이 우리의 삶의 목표도 아니고 기준도 아니고 추구해야 할 가치가 아니라
우리에게 넉넉한 물질을 주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 드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두 번째로 생각하는 사람은 에녹입니다.
에녹은 당대에 무의미하게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서
사람들은 땅만을 쳐다보며 살고 있었습니다.
여러사람들이 살았으나 그들은 한결같이 족보를 보면 누구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몇 백년을 살다가 시집가고 장가가서 자녀를 살다가
그것으로 자신의 씨만을 퍼뜨리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저 인생을 소비하면서 무의미하게 살았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서 빛나는 의인으로
그의 인생이 참으로 특이하게 평가되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에녹이 늘 하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과 상의하고 늘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았던 에녹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이세상에 놔두고 살기에는 너무나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이기에
그를 죽음을 보지 않고 천국으로 데려가셨습니다.
왜 우리가 이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하여 광야에서 살아가는 목적은 가나안에 정착하기 위해서 입니다.
에녹은 하나님을 모시고 그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으로 살았으므로
그는 살아있는 산사람으로 죽음을 극복하며 천국에 이른 승리하는 신앙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심이 되었던 에녹을 언급할 시에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 에녹은 모든 일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리고 자신의 생활의 모든 곳에서 언제나 하나님을 모시기를 기뻐하며
하나님의 코치를 받으며 그 분이 지시하는 대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살도록 하셨습니다.
말세에 사람이 쾌락을 좋아하고 자기만을 즐기려는 세태가 점점 심해진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좋아하기 보다는 자신의 욕망을 더 추구하는 세태에서
우리자신들이 늘 하나님을 우리의 목적에 두고 살아가는
믿음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은 점점 타락하여 악해져서 하나님께서 심판하지 않으면 안될 상황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세상을 심판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악한 사람들 중에 노아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랐습니다. 그의 말씀에 순종하여
노아는 방주를 예비하는 경외하심으로
사람들의 비방과 조롱을 받으면서도
하나님의 명령대로 120년 동안을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자기가족이 구원받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교회생활을 하는 것은 천국에 우리 집을 마련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교회를 중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갈 때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게 됩니다.
노아는 방주를 지으면서 계속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외쳐 대었습니다.
우리의 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교회로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전도와 선교의 사명을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드릴 때에
천국에 우리의 집을 건설해 가게 됩니다.
예배를 드릴 때나 생활의 현장에서 그리고 교회의 사역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날 수 있도록 믿음의 발걸음을 내딛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수아의 지도아래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을 들어갈 때에
그들이 한걸음씩 전진하듯 그렇게 우리 모두 믿음의 전진을 합시다.
요단강을 내디딜 때에 물이 갈라지고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듯이
앞으로의 우리교회에 하나님의 의 역사가 나타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는 가끔 우리가 어떤 상황에 대해
반응 하는 나자신을 보고도 놀랄 때가 있고
또 되돌아 서서 “내가 왜 그랬을까”하고 마음 끓이며
후회하고 자책할 때도 있는데
그것은 “지금의 나”와 상관없이
나에게 programming되어있는 자아의 시스템 때문이다.
이것은 부모에게서도 오고 세상을 통해
우리에게 각인 되어진 나름대로의 옳고 그름의 시스템이
하나님과 전혀 관계없이 스스로의 정의가 되어
지금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살기를 원하는 나와 상충되기 때문이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옛 자아”라고 하기도 하고
“육신” 이라고 표현 되기도 한다. 이 시스템 중에는 많은 요소들이 있지만
이것은 어릴 때에 받은 영향일수록 더욱 강력 해지는데,
여러 가지 치유방법의 유형이 있지만
그 중의 하나는 “태아의 치유기도”로 많은 부분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를 경험하기도 한다.
성경과 내적 치유(제 3회 영성 수련의 모임)
* 내적 치유가 왜 필요한가?
인간의 마음 은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로 나눈다.
믿음의 반응은 우리의 의식의 이해와 의지의 결단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신앙의 세계는 무의식과 영적인 세계까지 포함한다.
나도 모르는 나의 뜻과 마음
겉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속으로는 내 뜻대로 하는지를 마7: 21
시139: 23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나도 모르는 나의 뜻과 마음이 있어 죄를 범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기에, 이를 발견해 이 세계까지도 복음의 빛과 능력으로 정복하고 하나님 나라로 이루어 갈 필요가 있음
내면의 중시
구약은 외형을 중시 / 신약은 내면을 중시, 주님께서 내적인 차원을 강조 눅
마라에서 엘림으로
출애굽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은 마라(출 15: 23)에서 쓴 물을 경험한다.
출15: 16에 백성들이 원망하니 하나님께서 너희가 앞으로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그 말씀을 잘 지키면 내가 너희들을 치료하리라” 물샘 열 둘과 종려 칠십 주가 있는 엘림에서의 치유 및 안식
원죄로부터 시작된 상한 마음
아담의 원죄/ 마음이 병들다. 죄를 범하면 두렵고 아프며 죄책감과 미움의 상처가 남는다. 그리고 하나님의 버림을 받았다는 의식이 생긴다.
가장 근원적인 상처는 불신이다. 상한 인간의 원 마음의 상태
열등감과 죄의식의 결과인 수치와 가리움 창3:7, 버림받은 마음으로부터 생긴 아픔과 불신, 창3:14-24, 경쟁 사회의 사랑의 굶주림, 가인과 아벨의 예, 한으로 유전되는 분노 창
상한 마음 밭에서 천국이 잘 자라지 못함
마13장 에서 마음 밭의 비유/ 길가밭, 돌짝밭, 가시밭, 옥토밭, 염려, 두려움, 불신,
복음의 내적인 적용 과정이 내적 치유의 할 일이다.
내적인 마음은/ 두 가지 문제가 있다. 1. 의식하거나 느낄 수 없는 영역, 2. 그리고 무의식 세계로 덮어버리는 경향등. 망각, 감추임
상한 마음은 두려움, 굶주림, 불신, 불안등에 노출되어 있다. 치료되어야 한다.
내적 치유가 되어야, 내면의 성장, 성숙도 있고, 외적인 하나님 나라가 건전하게 성장한다.
내면의 치유를 통해 내면의 세계에서 주님을 찬양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하나님의 이름) 송축하라” 시편 103:1
내적 치유를 위한 주님의 진단들
아픈 내면을 드러내시는 예수님의 방법들
1. 예수님은 빛으로 우리를 드러내신다. 예수님은 세상을 비추는 빛이며(요1:9)이며 빛은 어둡고 악한 것을 드러내신다(요3:20) 아무리 거짓으로 우리의 아픈 곳과 죄를 무의식의 어두움 가운데 숨기더라도 빛 되신 예수님께 드러내신다.
2. 예수님은 말씀으로 우리의 깊이 숨어있는 것을 드러내신다. 히
3. 예수님은 십자가의 사건을 통해서 우리의 속에 있는 죄와 상한 것들을 드러내신다. 십자가는 상한 마음을 숨겨준 세상과의 관계를 끊는 것이기에 십자가를 만나면 세상으로 인해 감추어졌던 모든 것이 드러나고 만다.
4. 예수님은 성령으로 오셔서 드러내신다. 요16: 17-18 죄, 의,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책망은 사실이 아닌 것을 무엇을 밝히고 드러낸다.
내적 치유에 대한 기본 지침
1. 내적 치유는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정당한 사역입니다.
2. 우리는 예수님께서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눌린 자에게 자유를 주는” 내적 치유 사역을 하셨다고 믿습니다.(눈
3.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님은 (히13:8) 우리를 억누르는 사단으로부터 자유케 하실뿐더러, 우리의 현재의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과거의 기억 및 그로 인한 상처를 짊어 주시고 고쳐주십니다.
4. 과거의 상처는 감정 및 개성, 사회적인 관계에 여러 가지의 병을 가져다 줍니다.
5. 반면에 과거의 상처에 대한 치유(내적 치유)는 과거의 상처로 인해 파손된 모든 영역의 회복 및 문제를 치유시킵니다.
6. 내적 치유는 다음과 같은 방법을 통해 이루어 집니다(이런 것들은 다는 아니지만 기본적인 것들입니다).
· 하나님과 사람들로부터 용서를 주고 받음/ 이런 용서의 수용 및 인간의 심리적 쇼크에 대한 반작용으로 습관적/관례적 반응을 보이고 행동하려는 관행에서 탈피해야 합니다(골
· 예수님께서 우리 자신의 쓰라린 과거의 경험을 하나님의 말씀과 섭리에 비추어 재해석하고 치유해주시도록 기도로 예수님을 초청하십시오(롬
· 만약 부모 혹은 조상의 죄가 나쁜 영향을 미치면, 가계를 통해 흐르는 사단의 역사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차단하십시오.
· 어떤 부정적인 영향의 원인이 되는 어떤 사람 혹은 물건에 대한 의존 내지 묶임(soul-tie)으로부터 기인한 사단의 공격을 절단하십시오.
· 예배, 기도, 성경 공부, 묵상 훈련들을 통해 정기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새롭게 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자신의 신분을 확인하십시오(자신의 가치성과 삶의 의미)
내적 치유에 대한 이해
· 내적 치유가 과거의 상처의 치유라고 불리우는 이유는?
과거의 상처가 치유되어 과거의 감정의 노예에서 해방될 때 치유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 내적 치유가 속 사람의 치유라는 것은?
인간의 속 사람은 정신(mind), 의지, 마음과 관련된 모든 영역의 치유를 포함하며,
우리의 감정(emotions), 영혼(psyche, soul or spirit)등도 들어간다.
내적 치유는 이런 부분들을 다룬다.
· 내적 치유는 영적인 상태, 감정의 상태, 기억의 장소, 인간의 마음에 대한 사단의 침투나, 혈통이나 가계를 통해 인간의 내부 성향에 들어오는 사단의 공격에 대한 치유를 모두 포함한다. 영의 질병은 우리가 행한 죄(숨은 죄 혹은 깨닫지 못한 경우)로 인해 발생하기도 한다. 감정의 질병은 우리가 당한 것 혹은 우리에게 일어난 사건에 의해 발생한다. 내부 성향의 문제들은 조상의 죄가 현재의 우리에게 좋지 못한 영향을 행함으로 생긴다.
심리적/영적인 관점에서 본 과거의 감정의 상처에 대한 종합적인 이해
내적 치유에는 표면적이고 기본적인 치유와 내면적인 치유가 있다. 표면적인 치유는 육체적인 치유나 자세나 행동의 치유 등이며, 내면적인 치유에는 영적인 치유 즉 관계의 치유가 있다. 그 영적인 치유는 하나님과의 관계 치유와 타인과의 관계 치유가 있다. 감정에 대한 치유는 자신(자아)에 대한 치유와 자아상(self-image: 자기가 이해하고 바라보는 자아상)에 대한 치유가 있다. 자아의 문제보다는 자아상에 대한 문제가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1. 사건 발생에는 가계의 조상들의 사건들, 어릴 때나 과거의 경험이나 사건, 어린 시절에 겪은 경험들이 감정(상처난 상태나 억압된 상태)로 남아있다. 그 상처난 감정들은 우리의 두뇌의 기억 장치에 기억으로 남아있다.
2. 사건 발생에 대한 이해는 사건이 발생하여 그 사건에 대한 반응이 나타난다. 그 반응이 상처로 남아있다. / 과대 반응은 발전하여 태도나 성향으로 형성한다.
(예: 자신과 타인에 대한 상처, 반사회적인 행동, 유년기의 뻔뻔스러움, 통제 불가능, 자신의 감정의 포로, 과격한 행동)
*그 반응들이 낳는 성향들 즉 태도들:
* 자신에 대해 지나친 절제나 통제하는 태도, 자신의 감정의 포로된 상태,
자신을 학대하는 태도, 상처난 반응의 감정들이 더 내면으로 상주하여 만성적인
우울증으로 남음, 대인 공포증, 정신적인 질병(신경성, 불안증), 결벽증, 완벽주의 등이다.
* 그 부정적인 상처난 반응들은 자신에 대한 행동 성향을 낳는다(과격적인 행동, 퇴행성 행동, 비사회적인 행동)
* 그 반응에 대해 내적인 치유를 할 때에, 그 반응에 직면하며, 인정하고, 표현하며
그리고 나서 주님에게 고백하며 잘못된 것은 회개하고, 고치거나 치유할 것은 성령의
역사를 통해 해결 받음
사건 발생에 대한 과거의 상처에 대한 대처
상처를 받는 것보다는 상처에 어떻게 응하는 것인가가 중요하다. 분노 내는 것은 죄가 아니나, 분노를 품고 있는 것은 죄가 될 수 있다(엡
(실제적인 처리 방법)
1. 복수하는 것을 예수님께 맡겨야 한다
2. 마음의 상처를 예수님께서 치유하시도록 내어 드린다.
3. 상처 난 자기의 모습에서 자기 신뢰(자신에게 상처를 준 타인을 용서할 수 있는 자신의 능력을 얻음: 예수님의 신뢰(예수님에게 투사 내지는 그의 공로를 의지하는 믿음)를 얻음으로
4. 예수님을 통한 상처 난 인간관계의 회복(예수님의 십자가는 모든 깨어진 인간관계를 회복하는 근거가 됨)
용서하지 않는 마음에 대해(마태
1. 예수님께서 용서하지 않는 마음(관용의 부족)이 어떻게 개인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가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이 비유를 사용하심
2.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에게 잘못했을 때 (이 비유에서 빚으로 나옴) 우리의 죄의 경중을 떠나 죄에 대한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마태
3. 누군가가 당신에게 상처를 주었을 때, 혹은 (당신 스스로의 실수 때문에)쓰라린 사건을 경험하였을 때, 어떤 잘못이든지 관계없이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자신 안에 있는 부정적인 영향들(질병이나, 잘못된 성향으로 발전 등)과 사단의 공경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습니다.
4. 과거의 상처로 인해 생긴 용서하지 않는 마음은 모든 종류의 고통, 즉 영적, 정신적, 신체적, 사회적인 고통을 초래합니다.(마태
5. 누가 잘못하였던지 관계없이, 어떤 상처가 있으면, 당신의 책임은 항상 먼저 가서 용서를 하거나 받거나 해서 관계를 정상화시키는 것입니다 (마태
6.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듯이 용서해 주고 잊어버려야 합니다.(엡
7.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로서 적극적으로 한 지체로서의 기능을 감당하고 교제에 참여함으로서 영적으로 성장해가면서, 각가지 종류의 내적 치유를 경험하게 됩니다
(엡
용서하지 않는 마음을 치유하는 방법들
1. 용서하지 않는 마음의 죄를 고백하십시오(마태
2.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고 그의 용서를 수용하십시오(요일
3. 우리가 받은 상처를 적절하게 표현(발산)하는 방법을 배우십시오. (상처의 짐을 맡김/ 마태
4. 다른 사람을 의도적으로 용서해 주십시오, 감정에 지배 받기 보다는 성령의 도우심을 통한 의지의 지배를 받으십시오(요한
5. 하나님께 그 사람의 죄의 용서를 빌어, 그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것을 통해 오는 자신에게 향한 복을 받으십시오(욥 42: 10). 욥이 자기 친구들의 잘못된 위로한다는 어리석음을 용서하고 복을 빌어줌
6. 만약 어떤 사람을 진정으로 용서해주었으며, 잘못을 잊고 그 사람을 믿어주고 한 형제로 대해 주십시오(그 사람 스스로가 내가 그 사람을 인해 상처를 받았다는 것을 인식하는 경우에).
상한 마음을 찾으시는 하나님(이상훈저)과 신학교강의노트에서
자기 변화와 전도 (사도행전9: 10-22)
인생에서 충격적인 사건이나 경험에서 사람들은 더 깊고 넓은 변화를 경험 하기도 합니다. 그런 황당한 경험은 마치 자동차를 타고 가다 자동차사고를 만난 것처럼 잘나가는 사울의 인생이 그만 다메섹에서 고장 난 인생의 차로 전락했습니다. 그는 하늘로부터 강한 빛에 쬐어 어둠 속에 있었던 그의 상태는 견딜 수 없었으며, 그러한 어둠의 자식으로는 아무것도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장님신세가 되었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활개하며, 자기 중심적으로 살아온 그의 인생은 남을 괴롭히는 종교인의 최고 절정에서 그만 다메섹에서 인생의 주인이신 주님에게 잡혀 버렸습니다.
바울은 변화되기 전에는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타인을 괴롭히고, 그들을 추격하여 잡아드리는 악역을 하였습니다. 독실한 종교인으로 자신의 확신하는 바가 결국 남을 억압하고 괴롭히는 것이었습니다.
상처를 입은 피해자의 입장에서 아나니아는 사울의 당한 처지를 구해주는 상담자의 역할을 합니다. 타인을 돕는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사울의 관점은 남을 무시하는 경향입니다. 교만한 눈입니다. 악을 향하는 손 입니다. 대제사장의 권위에 위해 그는 사람을 압제하는 역할을 합니다.
무슨 권위에 복종하는가는 우리의 신분이나 역할을 하게 합니다. 여기 한 사람 사울은 대제사장, 당시, 종교의 세력과 이름으로 사람들을 괴롭히는 종교를 대표하는 사람의 권위에 복종하는 처지에 그는 다른 사람들을 핍박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을 살리는 은혜의 주님의 권위와 지시에 순종하는 아나니아는 사울을 돕고, 치료하고, 살려 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무시하는 세상이나 사단의 하수에 따르는 경우는 그것들의 노예가 되어 자신들을 억압하는 일을 합니다. 세상의 소문은 사람들을 오해하게 합니다. 소문은 사람들을 시달리게 합니다. 사실은 사람들을 살립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에 대한 소문을 듣고 만나기를 꺼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으로부터 계시를 통해 사실을 알고 난 후에 사울을 살리는 일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 주변에 있는 사람들 중에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울과 같이 우리가 도와야 할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첫째, 복음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어둠 속에서 살면서도 빛을 모릅니다. 자신이 하는 일들이 옳다고 여기고 있지만 그것이 도리어 자신과 자신의 인생을 얽어 매 버리게 합니다. 더 나아가 주변사람들에게도 상처를 줍니다. 그에게는 좋은 소식이 필요합니다.. 희망의 소식입니다. 자기우월감에 빠져 살지만 남을 억압하고 괴롭히는 사람들입니다. 결코 행복 할 수 없습니다. 둘째는, 치료가 필요한 사람입니다. 마음의 병이 든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상처를 치료하는 방법을 줍니다. 육체의 병은 의사가 치료하지만, 마음의 병이나 영적인 질병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치료합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 중에 치료가 필요한 분들이 있습니다. 또한 그들은 마음의 치료가 필요합니다. 위로가 필요합니다. 격려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우리주변에 셋 번째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인생의 길을 묻는 이들, 인생의 길에서 상처를 받아, 울고 있는 이들, 고난과 역경의 삶의 현장에서 지쳐있는 사람들, 우리 주변에 많이 있습니다.
사울은 주님을 만남을 통해 변화되었습니다.
환자가 의사를 잘 만나야 병을 고치는 것처럼, 환자가 의사를 잘 못나면 병을 더 얻을 수도 있습니다. 돌팔이의사가 최근에 나온 통계에 의하면 의사들이 자신들의 치료에 환자에게 나타난 정보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들의 의술에 치중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좋은 의사를 만나는 일은 환자에게는 더 없이 중요합니다.
스데반의 순교는 사울 에게는 인상 깊은 만남이었습니다. 그는 핍박자로 스데반의 순교현장에서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스데반의 죽음을 당연시했던 사울이었으나, 그 사건은 그에게 적지 않은 의문을 주었을 것입니다. 상당히 충격을 주는 일이었습니다. 어째서 핍박 받고 돌에 맞아 죽어가는 이가 그렇게 천사의 모습으로 최후의 모습을 할 수 있을 까 하는 의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이 받은 다메섹에서의 사명은 크리스천들을 잡아드리는 것이며, 그들을 핍박합니다. 유대종교인들이 크리스천들을 핍박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극적으로 사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주님과의 만남을 경험합니다. 그 만남의 경험은 전혀 차원이 다른 하나님의 계시를 접하였습니다. 그가 체험한 것은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강권적인 은혜였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였습니다. 십자가의 죽으심 후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영광을 얻으신 주 예수님께서 광명의 빛으로 사울에게 임하신 것입니다. 그의 영광의 광채의 빛에 사울은 꼬꾸라져 자기 인생의 큰 전환점을 이룬 일이 되었습니다.
사울의 종교는 가문과 자신이 배운 학문에서 나온 것으로 그는 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전통과 가문에서 얻은 종교입니다. 그의 학문은 가말리엘 문하에서 당대 최고의 학문을 배웠습니다. 그는 유대교에 정통하여 그 문화와 언어와 풍습에 익은 유대교의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율법으로 사는 종교인으로 자기의 의를 내세우는 전형적인 자기 중심의 신앙형태를 가졌습니다. 그런 사울이 하나님의 은혜의 갑작스런 체험으로 자기 중심에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하나님 중심의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그가 잠시 며칠간 눈이 멀었으며, 식음을 전폐하고 내면의 큰 혼돈의 시기를 맞아, 자신의 내면의 소용돌이 치는 중에, 그의 안에 있는 어두운 면들이 드러나고, 자신의 종교가 자신의 내면의 자유보다는 억압으로 내몰았던 상태에서, 그는 어두운 면들을 벗고, 남들을 괴롭히고 상처를 주는 해로운 사람이 자신 속에 있는 깊은 내면의 상처들을 씻어내고, 전혀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종교의 껍질로 자신의 죄성을 눌러버리고, 자신의 의의 옷으로 치장하던 디펜스 메커니즘 즉 자기방어나, 자기 공경의 성향에서 벗어나, 타인에게 진정으로 다가가는 겸허한 성품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울의 변화
사울은 종교인에서 신앙인으로 변화되면서 그는 자기의 종교적인 무거운 짐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율법이 명하는 영적인 짐들을 지며, 자신도 자유롭지 못하고, 억압된 상태에서 타인들을 억압하는 핍박자에게서 이제는 어둠에 억압된 사람들을 살리는 복음의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종교의 형식적인 열심으로 자신을 얽어 맬 뿐 아니라, 그 형식적인 종교적인 잣대로 타인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도구로 활용하여 자신이 배운 학문이나 종교적인 관습에서 벗어났습니다. 사람에서 내용의 사람으로 멋있는 사람이 됩니다. 교만한 사람에서 겸손한 사람으로 성숙해 집니다. 남에게 위협이 되며, 해를 끼치는 사람이 남에게 유익을 주는 사람으로 전환합니다.
바울의 전도
1. 바울의 전도는 자기변화에 대한 고백입니다. 그는 과거에 기독교의 원수요, 크리스천들의 핍박자였으나, 다메섹으로 오는 길에 부활하신 영광의 주님의 빛을 통해 새로 개종하게 되었습니다.
2. 자기변화로 인한 확신하는 바를 전하는 전도사가 되었습니다.
사울의 자기 개종의 결과는 그에게 새로운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의 아는 지식이나, 확신하는 바의 180도 전환하는 인생변화였습니다. 그는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 그의 생각이나, 비전이나, 성품이나 마음까지 그는 송두리째 자신의 변화를 겪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확신한 바를 타인에게 전가하는 증인이었습니다. 자기체험은 자기 증거에 대한 강한 증거입니다. 그리고 전도는 사람들을 옳은 데로 이끄는 것입니다. 전도는 못난 사람을 잘난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진정한 종교는 사람을 살리는 데 있습니다. 신앙은 사람변화에 필요한 진리를 제공합니다. 고로 교회는 사람들을 살리고 변화를 주고, 올바른 길을 제시합니다.
아나니아의 역할
아나니아는 다메섹의 크리스천입니다. 그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비전 중에 주님께서 지시하는 것을 순종하여 크리스천들의 원수인 사울에게 가서 그에게 안수하므로 그의 멀었던 눈을 즉 시력을 회복시키시고, 그에게 성령을 부어주는 매개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아나니아가 환상 중에, 즉 그의 해야 할 일을 주님의 지시를 받아, 그가 하신 말씀대로 순종하였습니다. 아나니아는 다메섹의 크리스천들의 리더였을 것입니다. 그는 사람들의 리더로서 항상 주님에게 열려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기도하는 중이었는지 혹은 잠을 자다가 받았는지 모르나, 그가 주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그 계시는 그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기가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아나니아는 주님의 명령을 받습니다. 그는 직가라는 거리에 있는 유다의 집에 있는 사울에게 가서 그에게 사울의 환상 중에 받은 대로 안수하여 그의 멀었던 눈을 뜨게 하는 일이다. 그러나 이 일은 그리 간단히 해야 할 쉬운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사울은 크리스천들을 핍박하는 적대자요, 소문에 의하면 다메섹에 있는 크리스천들을 잡으려고 왔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다소 사람이라 함은 외국에 살고 있는 유대인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아나니아의 안수로 사울은 성령을 충만함을 입었습니다. 안수를 받음은 개인적인 관계로 그는 아나니아를 통해 형제의 관계로 이해하고 그로부터 받은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아나니아와 같이 우리 주변에는 또한 타인에게 유익을 주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들 자신은 먼저, 남을 도움을 주는 사람입니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소망을 주며, 빛으로 살며, 남을 도울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빛으로 인도하는 사람입니다. 아나니아는 치료자의 입장에서 그는 상처를 입고 누군가의 도움을 기다리는 사울에게 찾아가서 그를 잃어버린 시력을 회복하게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치료하는데 도움을 주는 사람입니다. 본문의 아나니아는 성령에 이끌리는 사람입니다. 성령의 음성에 민감하여 그가 지시하는 것을 따릅니다.그는 또한 주님의 명령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의 지시를 따르면 그를 통해 다른 사람을 살려주고 치료해주고, 남을 돕는 사람으로 역할을 합니다.
사울은 진리를 만난 이후에 변화되었고, 그 이후에 자신과 자신의 삶의 사명을 알게 되었습니다.
첫째, 사울은 주님이 누구신지를 알았습니다. 눈뜬 장님이 된 후에 그는 보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시력을 잃고 나서, 타인의 손에 이끌리면서 그는 자신이 보아왔던 것의 잘못을 알았습니다. 유대교에서 배운 종교습성들은 종교의 탈을 쓴 사람을 억압하는 것들이 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주님을 알게 되어 그가 바로 메시아이심을 그리고 자신의 구주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둘째 사울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았습니다. 주님을 통해 자신의 위치에 대해 알았습니다. 자신이 3일 동안의 혼란 속에서 자신의 인생에서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 소경의 상태에서 진리와 어둠의 차이를 볼 줄 알며, 어둠 속에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영광의 광채의 빛은 어둠에 있는 사울을 일시에 드러나게 하였습니다. 그는 그 빛 앞에 설수 없는 죄인의 모습이며, 원수요 핍박자로 자신의 모습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을 핍박했다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 음성에서 깨닫는 지난 날들의 과오를 생각하며, 그는 깊이 뉘우치며, 회개의 깊은 골을 팠습니다. 그는 회개를 통해 마음의 변화와 성품의 변화와 아울러 인생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셋째, 사울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그는 개종 시에 주님으로부터 자기 사명을 받았습니다.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하는 지를 아는 일은 참으로 좋은 일 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는 자기가 깨달은 것을 나누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신이 만났던 주님을 알려주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두움에서 빛으로 나온 사람이 빛을 전합니다. 새로운 사람이 된 바울은 다른 사람들에게 주님을 소개합니다.
산다는 것은…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생명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 다만 시간의 선상에서 하루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닌가?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 일어나서 새로운 날을 시작한다. 하루가 시작 되었다는 신선한 느낌을 받은 지 잠깐인데, 하루의 길이는 해가 중천에 올라 하루의 일과에 몰입하여 보니, 시간을 타고 밀려가는 바다의 파도처럼 거침없이 하루의 시간의 끝을 알려주는 황혼의 저녁노을에서 빨리 지나가 버린 낮의 일들을 생각하니, 하루의 길이는 너무나 짧다.
그렇지만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살려고 태어나, 꿈을 안고 살다가,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하루의 꿈은 아침에 꾸며 하루를 살아간다. 한 달의 꿈은 매월 첫날을 보내는 중에 설계하며, 하루하루를 그 꿈속에 살아간다. 매년 새해가 될 때마다 우리는 다가오는 새해를 맞이하며 새로운 다짐을 하며, 새날을 맞이한다. 그리고 한 해에 이루어질 꿈을 가득 안고 새로 시작한다. 젊은 날에 품은 꿈들은 나이가 들면서, 현실로 다가오는 세월의 무상함 속에 우리의 품은 꿈들은 기억도 없이 날아간다. 우리는 또 우리는 꿈을 품는다. 그리고 그 꿈속에 산다.
어느 방송의 “젊은 그대”에 나오는 어느 주인공의 말처럼 사람은 자기가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해 도전을 하며 자신의 꿈을 펼치며 살아 가야 할 것을 역설하며 본인도 그렇게 살고 있노라고 남들이 생각할 수 없는 자기만의 꿈을 향하여…,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도전을 준다.
산다는 것은 꿈을 먹고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나는 오늘도 내일을 바라보는 꿈을 먹고 살아간다.
(딤후 2; 1-6) 그리스도인이란? 주님의 사람들입니다.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아가야 할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믿음으로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의 말씀의 제목은 믿음으로 이렇게 살라는 말씀은 성도들에게 날마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믿음이 강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이 믿음이 약해지는 것은 주님을 멀찌기 좇아가는 경우입니다. 만일 성도들이 주일성수를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곳에서 멀어지면 성도들은 약해지며, 세상과 마귀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며, 어둠의 영향력아래에서 자신의 영적인 위치가 위태한 상태가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일꾼들이기 때문에, 그들은 주님의 사람으로서 주님께서 맡겨주신 일들을 믿음으로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고로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의 일꾼이며 동시에 주님의 일꾼입니다. 본론 디모데후서는 사도 바울선생이 제자인 디모데가 영적으로 약해지는 것을 염려하고 쓴 서신입니다. 바울의 두 번째의 감옥시기인데, 그때에는 네로의 본격적인 핍박이 시작되는 무렵으로,주후 64-68년경(첫 번째 투옥시는 63-63경)입니다. 첫 번째는 바울에게는 개인적인 가택엄금으로 자유롭게 바깥세계에 있는 성도들과 왕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의 지하감옥에 갇혀서 순교할 날을 기다리며, 자신의 생애 중에 마지막 시기를 살고 있다는 비장한 각오로 제자인 디모데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능력과 사랑, 건전한 정신으로 무장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에서 주님의 사람답게, 그리고 주님의 일꾼답게 강한 믿음의 생활을 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신앙인들은 어떻게 강해지는 가?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에서 강해져 라는 것입니다. 강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부단히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훈련으로, 혹은 삶의 고난을 극복하면서, 믿음을 키우는 일이 필요합니다. 주님께서 요한복음 16장 3절에서 마지막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고 담대히 외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의 자세에서 그리고 신앙생활에서 강한 자가 세상을 승리할 수 있습니다. 과거 우리나라는 한때 많은 농경지가 하늘에서 비를 얻어야만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천수답이 대부분 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물을 지속적으로 대는 수리 안전 답으로 논을 개조하여, 농사를 잘 지으며, 수확도 풍성히 거두어서 식량을 자급자족하는데 많은 기여를 했습니다.
학생들이나 이민자들이 영어를 잘 하는 힘은 언제나 꾸준히 단어를 암기하여 나타나며, 그 암송한 단어를 정복하는 것만큼 언어적인 소통에 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물질의 세계에도 에너지의 힘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권세에도, 그 통치력아래에 정의로운 지도력이나 통치력에서 나오는 권력의 힘이 있습니다. 가르치고 배우는 지식의 세계에도 지식의 힘이 있습니다. 어느 13세된 프리틴 학생이 세상을 어떻게 좋은 세상이 되게 할까라는 질문에 그녀는 선생님들에게 많은 투자를 하여 학생들에게 잘 가르치도록 하면 보다 살기 좋은 세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교육의 위기는 다음세대들의 배움의 실패로 많은 문제를 야기할 수 있는 위기 중에 위기입니다. 신앙인의 세계에나 교회의 세계에는 신앙의 힘과, 하나님의 은혜의 힘과 그리고 교회의 힘이 있습니다. 그 중에 교회의 힘은 교회의구성원들이 성도님 한 분 한 분이 강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 넘어지지 않고, 뒤로 퇴보하지 않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새 소망 교회가 강하고 능력 있는 교회가 되려면, 교회의 멤버인 성도들 한 분 한 분이 건강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며, 건강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강한 신앙의 소유자가 되는 길이나, 건강한 신앙 생활의 비결은 교회 내에서 실행하는 모든 종류의 신앙의 훈련, 영성 훈련,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일에 열심히 참여해야 합니다. 성도들의 자기 능력 배가는 성도들이 자기 정체 감을 강하게 가질 때에 자신감을 가지며, 자신의 일에 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자기자신의 능력을 키우는 일은 자기 일을 잘하기 위함입니다. 그것은 은혜 안에서 강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그의 부으심의 축복입니다. 그의 선물로 주어진 구원은 그의 은혜의 힘으로 유지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은혜 안에 머물러 있을 때에 성도들이 강해지는 길입니다. 고로 성도들은 주님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포도나무의 가지처럼, 주님에게 붙어있어야, 생명을 유지하고, 성장합니다. 성도들이 지속적으로 그리스도안에 있으므로 그분으로부터 지속적으로 영양을 공급을 받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은혜는 성도들을 먹여주는 양식입니다. 그 은혜는 주님에게 은혜 위에 은혜로다 라는 은혜의주님으로부터 옵니다. 그것은 강한 성도들의 영적 생활에 필요한 양식입니다. 그 주님의 은혜는 말씀을 통해 주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성경말씀을 읽으므로, 들으므로, 공부하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습니다.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고 하셨습니다.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충성된 일꾼들이 또 다른 충성된 사람들을 가르쳐 세우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세우는 데에는 또한 영적인 훈련을 통해 세울수 있습니다. 그 영적인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강한 일꾼들로 만들어 갑니다. 부흥회이든지 성경 사경회를 통해 주님의 일꾼들은 영적인 충전을 받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교회에서 실행하는 영성 수련의 모임은 바로 영적인 충전을 하는 모임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성도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지속적인 훈련을 받아야 강한 성도들이 되어 갑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에서 보여주는 강한 그리스도인들의 삶이란 다음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좋은 군사로서 1. 주님의 일꾼으로 고난을 받을지니, 신앙인으로 겪는 고난은 자신에게 유익을 줍니다. 2.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시게 하는 삶/ 주님의 뜻을 따르는 삶입니다. 3.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는 것/ 우승하는 것/ 운동선수에게는 훈련을 잘하여 자기 관리를 잘하며, 법대로 경기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4. 수고하는 농부가 수확을 기대하며 열심히 합니다. 강한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은 첫째는 군인의 삶입니다. 군인 정신, 그리스도인은 군인의 정신이 필요합니다. 군인은 나라의 부름을 받아, 특별한 사명, 즉 나라를 지키고, 나라를 보호하는 일을 받아 그 일을 해 나가는 사람들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건설을 위해, 모든 그리스도인 군인들의 총 사령관이신 주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군인들은 적을 예상하고 항상 전쟁에 임하는 임전태세가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늘나라에 갈 때까지 크게 세가지 적에 직면하여 살아야 하며, 그 적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그 적들은 사단이며, 하나님을 거부하는 세상시스템이며, 우리들 자신 안에 있는 자기자신입니다. 이러한 전쟁터에 주님께서 우리 한 사람을 부르셔서, 강한 영적인 세계의 군인으로 강한 군인정신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강한 군인정신을 소유하려면 강한 훈련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세상과 마귀와의 실전을 대비하며, 훈련을 하며, 영적으로 경계를 잘하는 사람들입니다. 군인에게는 전투력이나 실전에서 능력은 바로 거듭되는 훈련을 통해서 입니다. 평소의 훈련 시에 땀을 흘린 군인들은 실전에서 아주 전쟁을 잘하는 군인들이 됩니다. 둘째는 운동선수의 삶입니다. 훈련하는 운동선수에게는 승리의 결과가 있습니다. 항상 운동선수에게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타이거 우즈가 많은 상을 받았지만, 그도 여전히 교사를 통해 훈련을 받습니다. 로스엔젤레스에 있을 때에 다저스의 선발투수로 활약을 많이하여 한국의 최초의 빅리거로 명성을 날리다가, 그 후에 몇 년간을 슬럼프에 빠져 힘든 시간들을 보냈으나, 계속 훈련을 거듭한 그리고 운동선수들은 법대로 경기하는 것입니다. 당시의 고대의 운동경기에도, 경기의 룰이 있어서, 바울은 성경 여러 곳에서 운동선수들의 경기하는 면들을 통해 복음의 의미를 알려주고, 신앙인의 삶을 설명했습니다. 올림픽 경기 때마다 약물복용문제가 있어서, 좋은 경기성적을 거둔 선수들이 약물복용 때문에 상이 박탈되기도 합니다. 세 번째는 농부의 사역의 삶입니다. 그 농부의 삶은 목적 있는 삶입니다. 수확이라는 목적을 따라 살아가는 삶입니다. 자신이해야 할 일을 분명히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수고 하는 것을 얻기 위한 노력하는 삶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노력한 것에 대한 것을 누리는 삶입니다. 성도들의 수고는 현세와 내세에 많은 결과들을 보장해줍니다. 현세에서 자신의 삶을 지켜주는 삶의 축복입니다. 성도들이 봉사하다가 주님의 축복을 받습니다. 로스엔젤레스에서 목회할 때에, 4,29폭동이 일어났습니다. 어느 장로님에게 큰 아들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마켙을 열심히 하는 중에도 성가대 봉사를 열심히 하였는데, 폭동 시에 많은 한인 마켙들이 피해를 입었고, 거의 매월 강도살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의 마켙에도 어느 날 강도가 와서는 총을 들이대고, 그는 총을 맞았습니다. 순간 그는 복부아래에 총을 맞아 쓰면 하는 간구가 있었습니다. 만일 그가 복부위에 총을 맞았으면 죽었을 것이나, 다행히 총을 맞고도 그는 살아났습니다. 그후 자신의 봉사하는 믿음에 주님께서 응답하셨다는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주님께서 달란트 비유에서 받은 달란트 대로 열심히 그것을 통해 이익을 남기는 일을 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사역하는 삶은 열심히 일을 하는 사람이 행복한 삶을 만듭니다. 일이 없는 사람은 불행합니다. 그리고 열매가 없고 가치 없는 삶을 삽니다. 신앙인의 삶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어린이 책에, 한 농부가 자신의 과수원에 어느 나무 밑에 보물이 감추어져 잇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농부는 몇 십그루 되는 과수원 나무들을 다 헤치고, 그것을 엎었으나, 보물을 찾지 못했는데, 나중에 그것을 통해 그는 나무들을 잘 돌보게 되어 그 후로부터 그의 과수원에 큰 수확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보물을 찾기 위해 열심히 일한 것이 농사를 잘 짓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결론 강한 성도들은 군인정신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훈련으로 강한 성도들이 됩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법대로 경기하는 운동선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열심히 일을 하는 농부의 자세를 갖고 사는 것입니다. 심은 대로 거두는 원리를 따르는 삶입니다. 이러한 강한 군인, 훌륭한 운동선수, 능력 있는 농부처럼 사는 것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훈련으로 됩니다. |
Romans4:16-25
When God created human beings, He recognized the human beings and put them the responsibility to take care of the created world. Furthermore, He even gave them the will of freedom to choose anything. At first, God built the confident relationship to make with friends. They can even choose God who they must depend on. However, they chose bad decision and did against His commandments. So, the confident relationship was broken.
There needed to restore the relationship between God and human beings. In such perspective, God called Abraham to restore the broken relationship. Abraham might reject His calling. However, he responded to trust God by obeying His calling and the commandments of blessing. Human beings can the way of faith to be recognized as they are right in the sight of God. God led to Abraham to follow the way of faith by depending on the promises of God.
Abraham’s faith was the faith to trust the promises of God.
God gave Abraham the promise of blessing. The blessings were for him to present the land and descendents, the blessing of life, and the eternal blessing companying God. The secular blessings are insecure; the blessing of faith is guaranteed to be certain by the eternal God. The faith pursued to take the thinking and vision of God beyond circumstance and limited human conditions.
The faith of Abraham was not the view of human to unable the impossible things, but to believe the view of God to enable the impossible things. Christians can trust the God who created anything out of nothing. The faith to take the view of God can make fruit of faith against the destiny of death. Abraham’s faith was a kind of enduring perspective to trust the promises of God, not to wave his faith.
The issue to be transferred as the representative is not onl y applied to the original sin, but also the salvation of Jesus to recompose the sins of human. Jesus was chastised in the imposing for our sins; we human beings are released in the punishment of God. Jesus was on the curse of sin and death; we are on the blessing of God. This is the gospel. The story of Abraham in the confident relationship with God was to restore the broken confident relationship between God and human
아브라함의 신앙/ 로마서 4:17-25 |
최근 댓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