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의 신앙/ 로마서 4:17-25
모든 인간관계는 신뢰의 관계 위에 있습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도 신뢰의 관계입니다. 부모는 자식들에게 애정을 쏟으며, 자식들은 부모님들을 신뢰합니다. 부부관계도 서로를 믿어주는 신뢰의 부부관계일 때에 어떤 어려운 일도 함께 헤쳐갈 수 있습니다.
같은 또래의 친우의 관계도 서로를 믿을 수 있는 관계라야 친한 우정을 나누는 친우관계가 됩니다. 이익의 동기로 모인 직장에서 조차도, 직장상사와 부하의 관계도, 서로 신뢰하는 분위기에서 직장생활이 잘되어갑니다. 사업을 하든지, 장사를 하든지,손님이나 장사를 하는 사람도 서로 신뢰하는 분위기가 조성되면 장사도 잘됩니다. 사람들이 명품을 찾고, 좋은 물건을 찾는 것도 물건의 품질을 믿고 신뢰할 수 있다 이것입니다.
정치지도자와 국민의 관계도 신뢰의 관계에 있습니다. 그러한 신뢰의 관계에서 권력의 힘이 나옵니다. 국민이 정치지도자에게 부여한 정치의 권한도 그 신뢰에 있습니다. 만일 신뢰의 관계가 깨어지면 아무리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리라도 힘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모든 관계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도 신뢰의 관계 위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창조하셨을 때에 그들을 믿고 창조의 세계에 대한 책임을 맡겼으며, 그들에게 하나님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처음에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그와의 신뢰의 관계에 세우셨습니다.
그러나 인류의 시조인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하고, 그의 명령을 어겼습니다. 아담은 말씀을 어겨서 행위로 범죄하여, 하나님과 불신의 관계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신뢰하지 못하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자신의 행위와 공로로 스스로 의로워지려는 율법의 길에서는 자신의 행위로 인하여 범죄한 죄인임을 아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으려는 것은 하나님과 올바른 인간관계에 이르지 못합니다. 고로 사람들은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 일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가 정상적이고, 건강한 관계를 가져옵니다. 하나님을 불신했던 인간들은 범죄하므로 그 신뢰의 관계를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믿고, 그들에게 창조물에 대한 책임 역할과 그리고 자신의 의지로 무엇이나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인간이 절대자로 의존할 수 밖에 없으신 하나님조차도 인간 자신이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자유의지를 가진 사람들은 그 자유의지로 즉 범죄한 그 반항적인 행위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그의 법도를 어겼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간의 시조인 아담의 행동을 보나, 또 혹은 내자신안에 있는 선하지 못한 성품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선택할 수 있는 자유와 권한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고귀한 인간의 권리입니다. 그 자유의지와 선택의 권한을 옳게 사용하므로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잃어버린 관계를 회복하고 하나님 안에 있는 자신의 위치를 되찾습니다. 이러한 자유와 선택의 권한을 사용하여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길이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맺게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길이 인간이 하나님과의 잃어버린 관계를 회복하는 길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은 서로의 신뢰의 관계의 회복이 필요합니다. 그러한 하나님과의 인간의 신뢰의 관계를 회복하는 면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일로 이루어집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 아니오 라고 할 수 도 있습니다. 그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순종하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삶의 길로 나갔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여김을 받는 길은 그분을 믿고 신뢰하는 길이 있습니다. 그가 원하시는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하신 것 즉 그의 선물로 주신 것들을 믿는 것입니다. 그의 선물은 사람들에게 은혜로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아브라함은 그가 받은 축복은 땅과 자손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복의 근원이 되는 복을 받았습니다. 믿음의 복입니다. 하나님의 선택과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믿음을 요구하며, 그분과 그분의 약속하신 말씀들을 믿고 신뢰하는 믿음의 길을 알려주셨습니다. 지금까지 아브라함은 자신 스스로의 의지로 삶을 살았습니다만, 이제는 모든 것에서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약속하신 것을 믿고 그분의 약속하신 것이 이루어지는 시간을 기다리며, 그분이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할 수 있다는 믿고 그분을 알아 가야 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죽음에 대한 문제, 미래에 대한 문제, 인간의 눈에 불가능 한 것을 가능케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땅과 자손의 복과 더불어, 그의 이름에 대한 축복, 삶에 대한 축복 그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과 함께 사는 영생의 복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축복을 다 받아 누리고 살도록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조건은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행위나 전제조건에 따른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선물로 주어지는 즉 은혜로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세상의복은 운명이나, 우연에 근거하지만, 불확실 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믿음의 복은 어떻습니까? 그 축복은 영원하시고 확실하신 하나님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인간의 미래와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절대자이신 하나님의 약속하심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질서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움직이며, 운행하는 만물의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기에 그것은 확실합니다.
신념이 주는 유익은? 신앙과 다릅니다. 신념은 자신을 믿는 것입니다. 자기의 생각이나, 비전을 믿는 것입니다. 자신의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생각이나 비전을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확실하신 분이고, 그분의 확실하게 약속하신 것을 믿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신념으로는 불가능하고, 불확실한 것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보장하십니다. 미래에 대한 약속 즉 인간구원의 생명의 부활과 하나님과 함께 사는 영생입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은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불가능하였지만, 그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하나님의 관점을 믿은 신앙입니다. 인간의 관점에서 불가능한 것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자손을 약속하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나 사라가 그들의 자손을 낳을 수 없는 상태에서 몸이 죽었습니다. 자신들의 생각에는 도저히 일어날수 없는 일 입니다. 기독교의 신앙에는 부활에 대한 믿음입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안 된다 했을 때에 할 수 있다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고로 그의 신앙은 불멸적입니다. 외부적인 조건이나 환경이 그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것을 믿는 신앙을 없앨 수 없습니다.
주변의 환경이나 인간적인 조건이 도저히 자신에게 일어날수 없는 일이기에, 믿음이 약해집니다. 자신이 없습니다. 그의 신앙은 힘을 잃습니다. 그리고 자신만을 바라본다면 실망합니다. 자기 자신이나, 자기가 처해 있는 환경이나 삶의 조건만을 바라보다면 사람들은 절망할 수 있으나, 신앙인들은 환경이나 조건을 넘어서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기독교의 신앙의 특징은 조건이나 환경을 넘어가는 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순교자들을 배출했으며, 자신을 변화시킨 신앙인들의 고백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며, 자신을 변화시킨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한 것입니다.
부활을 믿는 신앙은 죽음을 불사하고 신앙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길입니다. 18절에 Contrary to hope/ 이 말씀은 희망과는 거리가 있다라는 말입니다. 즉 인간의 관점이나 판단으로 볼 때에는 희망적이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면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마치 아브라함과 사라가 나이가 많아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노인이 되었는데, 즉 사라의 몸은 아이를 가질 수 있는 경수가 끊어진 상태입니다. 아브라함이나 사라에게는 자녀를 가질 수 있는 희망이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죽은 자와 같은 이들에게 생명을 주며, 할 수 없는 이들에게 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고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믿음의 복은 부활의 축복입니다.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는 역사는 모든 인류의 원수인 죽음을 이기는 즉 인간의 죽음을 이기는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인간의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셨습니다. 고로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믿음이 불멸적입니다. 죽어도 소멸되지 않습니다.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굴하지 않습니다. 북한이나 모슬렘과 같은 핍박하는 세계에서 순교를 당하는 사람들에게 찾아볼 수 있는 신앙입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상식이 없는 것을 추구하는 비이성적이 아니고, 상식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초이성적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인간의 생각으로 생각할 때에 상식을 벗어난 것이 아니고, 인간의 생각이나 상상을 넘어서는 이성을 벗어나는 비전과 계시의 역사입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은 기나긴 시간 동안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지 않고 기다리는 신앙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들에게 바로 자손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25년을 지나고 나서 그들의 몸이 아이를 낳을 수 없을 때에 이삭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되는 것을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일을 성취하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24절에 기다리는 중에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습니다. 잠언서에 보면 소망이 더디 이루어지면 마음이 상한다고 하였습니다. 즉 실망하거나 절망하여 자포자기합니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은 그 기다림의 시간들을 통과하여 하나님의 약속하신 복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신뢰하는 신앙을 가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그는 믿었습니다. 신앙생활의 초기에 혹은 일이 잘 이루어 지지 않을 때에도, 시간적인 차이나, 혹은 삶의 조건이나 환경에 두지 않고, 그 분께서 하신 말씀을 신뢰하였습니다.
신뢰의 문제는 인간사회의 욕구입니다. 정치가와 국민 사이에 일어난 일입니다. 소고기문제에서 정치가들은 자신을 믿으라고 하지만, 믿을 수 있는 신뢰심을 백성들은 요구합니다. 한국의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대선에서 많은 수의 표를 얻었습니다. 한국민들이 그에게 그의 능력에 신뢰를 보였습니다. 그런데 작금의 쇠고기문제로 인하여 그는 국민들의 신뢰심에 금이 가게 되어 인기를 잃고 어려운 정치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신뢰의 문제는 비단 국가나사회의 문제뿐 아니라, 가정이나 사회 혹은 교회도 사람들 사이에는 서로의 신뢰의 문제가 중요합니다. 목회자는 성도들을 신뢰하고 성도들은 목회자를 신뢰하는 단계에 있으면 그 교회가 아무리 외부적인 조건이 부족에도, 거기에 희망이 있습니다.
이번 민주당대선후보를 선출하는 데는 미국인 민주당 유권자들이 그들의 후보를 선택하였습니다. 능력의 문제를 다루는 것에 있어서, 경험이 많고, 경력이 있는 힐러리 보다는 신선한 변화를 주려는 오바마를 선택하였습니다. 어느 쪽이 더 신뢰가 가는 가하는 것은 능력보다는 시대에 흐름을 반영하는 변화의 욕구에 더 많은 점수를 주어, 그를 신뢰한 것입니다.
23절에 전가하는 문제는 대표성에 대한 것입니다. 옛날 군대에서나 학교 같은 곳에서 연대책임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 잘못 하는데도, 잘못하지 않은 다수인 그 단체에 속한 모두가 같이 체벌을 받습니다. 원죄에 이런 연대책임을 묻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태어나자 마자 원죄의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담의 후손이 우리모두는 그런 일에 불공평하다는 현실을 생각합니다. 억울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전가하는 문제는 원죄에만 적용되지 않습니다. 그 전가하는 문제는 아무 공로나 일도 하지 않았는데 우리들 자신에게 구원을 주시는 예수님에게도 적용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이들은 그의 공로로 인하여, 그의 의로우심으로 인하여, 그가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습니다. 그가 높고, 위대하고 부요 하신 자였으나, 우리 때문에 그가 가난하게 되시고, 천대를 받아,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가 나로 인하여 저주받아 죽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를 믿음으로 내가 저주받은 데서 복을 받았습니다. 그가 낮아짐으로 내가 높아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주님이 나를 위해 이루어 놓으신 것을 믿는 일, 그리고 그것을 누리는 것이 복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잃어버린 신뢰의 관계는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과 아브라함과의 관계에서 다시 회복되었습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약속을 믿고 따르며 신뢰한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믿음의 의인이라는 칭호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에게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신 하나님을 통해 할 수 있다는 낙천적인 믿음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더 나아가 모든 일에 있어서, 때마다 일마다, 늘 하나님과 함께 사는 영생의 복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복을 받은 아브라함은 기나긴 기다림의 시간을 통과하여 독자인 이삭을 갖는 축복을 누렸으며, 그 자손들에게 땅을 물려주었습니다. 그리고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시는 부활의 하나님을 신뢰하여, 그의 불멸의 믿음으로서 하나님의 옳다 함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이런 신앙과의 삶이 바로 기독교인의 신앙과 삶이 따라야 할 모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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