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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7/08/27
    진부한 것이 진부해지지 않는 순간(1)
    무나
  2. 2007/08/25
    물가만 올리는 웰빙 식품들(2)
    무나
  3. 2007/08/24
    위화의 소설 "형제'를 보며(1)
    무나
  4. 2007/08/21
    드라마 중독(2)
    무나
  5. 2007/08/18
    온라인 커뮤니티
    무나
  6. 2007/08/06
    휴가, 살살페스티벌(3)
    무나
  7. 2007/08/02
    그게 사과할 일인가(1)
    무나
  8. 2007/08/01
    뭐 그리 호들갑인가 싶지만(5)
    무나

진부한 것이 진부해지지 않는 순간

  • 등록일
    2007/08/27 10:08
  • 수정일
    2007/08/27 10:08

화려한 휴가를 봤다.

진부한 접근법

영웅 만들기

낭만적 과거화

혁명적 페티쉬

체게바라 열풍과도 비슷한

엄청난 관객 점유율

소비되는 광주항쟁

제일 진부한건,

명예로워야 할 군인 운운하며

시민군의 선봉에 선 퇴역 장교

 

 

하지만 한편,

어렸을적 쉬쉬하며 광주얘기를 하던 친구들을 떠올리며,

탱크가 사람들을 깔아뭉겠다는 말이 거짓이라고 믿으며,

그의 입에서 나온 "폭도"라는 말을 떠올리며,

월남전을 떠올리며,

몇 명의 적을 죽였느니, 몇 명의 부하를 구했느니 하는 말을 떠올리며,

그 옛날 사진들을 떠올리며,

주민들이 코코넛을 그에게 대접하는 사진을 떠올리며,

그저 그뒤로  맑은 이국의 풍경을 떠올리며,

이데올로기적 떼에 곱게 물든 천진한 내 어린 나날들을 떠올리며,

그가 일하던 군부대 개울을 따라 놀던 때를 떠올리며

함께 도라지 캐러갔던 당번 군인아저씨를 떠올리며,

가끔 매케한 연기를 옷에 품고 들어온 오빠를 떠올리며,

오빠를 기다리며 밤을 지새던 엄마를 떠올리며,

민간인 통제 구역의 그 투명한 동해바닷가를 떠올리며

그 해변으로 새까맣게 몰려오던 멸치떼를 떠올리며

 

사랑하면서도 용서할 수 없는

역사의 잔인함.

그 진부한 퇴역장교가 진부해지지 않는 순간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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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가만 올리는 웰빙 식품들

  • 등록일
    2007/08/25 13:38
  • 수정일
    2007/08/25 13:38

어제 저녁 출근을 하며 갑자기 메밀국수가 먹고 싶어 집근처 마트에 들렸다.

대충 메밀국수와 가시오부시라는 거 하나랑 무우를 바구니에 넣어 계산대에 갔다.

근데 가격이 모두 합쳐 7000원이 넘는 거다. 헉,

얼떨결에 사들고 나오는데 영 찝찝한 것이 메밀국수 한끼를 그것도 집에서 만들어 먹는데

7000원이라는 게 너무 말이 안 된다.

한 100미터 정도를 갔을때 다시 획 돌아와서

얼떨결에 구겨서 슈퍼앞 휴지통에 버린 영수증을 찾아들고

다시 들어가서 반품을 했다.

 

풀무원에서 나온 메밀국수 한 팩이 3500원정도

풀무원에서 나온 가시오부시 소스가 약 2000원

정말 풀무원 얘네들 해도 너무 해먹는다...

메밀도 중국산이면서, 뭐시기 웰빙이라고,

더 큰 문제는 이 마트에서는 다른 저렴한 메밀국수는 팔지 않는다는 거다.

요즘 느끼는 건데,

시장물가가 올라도 너무 올랐다.

한끼를 해먹는 것보다 김밥천국 같은데 가서 사먹는 게 더 싸게 먹히니...

물가만 올리는 웰빙 식품들을 절대 사지 말아야지.

 

결국엔 집에서 라면 끓여먹었다.

라면 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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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의 소설 "형제'를 보며

  • 등록일
    2007/08/24 10:09
  • 수정일
    2007/08/24 10:09

위화의 소설 '형제'

1권 재미있어 이틀만에 독파

2권 진부해짐

3권 여성 성기에 대한 마초적 페티쉬의 만개...

 

1권만 보길 권함

시간 있는 사람은 2권 보고,

3권은 보지 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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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중독

  • 등록일
    2007/08/21 21:00
  • 수정일
    2007/08/21 21:00

요가를 열심히 해서 그런지 요즘 내 신체 상태는 적어도 중상급이다.

근데 문제는 의욕이다.

한 3년 전까지만 해도 몸은 아파도 '매닉'이란 별명을 스스로 붙일만큼

의욕이 차고 넘쳤다.

무슨 일을 해도 의미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가령 오락하기, 친구랑 수다떨기, 드라마 보기 등은 쓸데없는 일로 생각됬다.

그 시간에 책 읽기, 공부하기, 일하기 등 의미가 있거나,

미래에 가치가 있거나, 돈이 되거나 하는 일에 몰입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요즘에는 그냥 늘어진다.

머릿  속에는 이걸해야지, 저걸해야지 하면서도 실행률 바닥이다.

특히 주말에는 널부러져 자거나 재방송 드라마를 보기 일쑤다.

솔직히 드라마가 이렇게 재밌는 줄은 몰랐다.

작년에는 회사를 놀면서 역대 유명했던 드라마들을 거의 죄다 다운로드해서 봤다.

순위를 뽑아볼라치면,

 

1위 발리에서 생긴일

2위 다모

3위 미안하다 사랑한다

정도, 그 외에도 몇편 더 있지만 생각이 안 난다.

 

이런 저런 드라마 얘길 회사 동료들이나 친구들에게 하면, 언제적 드라마를 들춰쌌느냐고 놀리지만,

나에게 드라마란 "앗 이런 신세계가!" 하고 감탄을 연발할만 한, 연애보다 재밌는 새로운 발견이다.

그래서 작년 회사를 쉬면서, 피자매 일 열심히 하고, 회사 다니면서 못했던 활동들을 해보자고 한 결심이

드라마 보기에 홀딱 빠지는 바람에 무너져버렸다고 하면 조금 과장이지만,

어쩄든 드라마가 나의 무기력에 일정정도 영향을 미쳤다고 아니할 수 없다.

가만 보기만해도 재밌는데 뭣때문에 고생을 하며 쏴돌아다니느냔 말이다.

가히 드라마 중독의 징후다.

이래저래 대안없이 다니던 회사를 다시 다니면서

드라마 중독에서 조금은 헤어났지만,

하루 7-8편 최대 기록을 갱신하며 새벽까지 드라마를 보던 그때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내가 프리즌 브레이커니 하는 외화시리즈를 시작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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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커뮤니티

  • 등록일
    2007/08/18 14:14
  • 수정일
    2007/08/18 14:14

서울리데리티 친구들에게 모임을 성격을 좀 바꿔보자고 했다.

번역 프로젝트 팀 보다는 언어교환을 기반으로 한 커뮤니티&네트워크 성격의 모임으로 가자고.

그렇게 되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온라인 소통 공간이다.

진보넷 블로그야 말로 현재로선 가장 이상적인 공간인 것 같다.

될 수 있으면 외국에서 온 친구들도 진보 블로그를 쓰도록 권장하고 싶다.

하지만 문제는 언어.

영어판 인터페이스만 되어 있어도 좀 권해보겠는데,

예전에 G8반대행동할때 서울리데리티 블로그를 만들고 친구들더러 사용하라고 해보니

로그인부터 글쓰기까지, 뭔지 몰르니까 나한테 전화를 한다.

물론 christian같은 이는 아주 훌륭하게 진보넷 블로그를 사용하고 있지만.

대부분 당장 불편하니 조금 해봤다가 마는 식.

요즘 온라인 커뮤니티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있다...

어찌 해야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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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 살살페스티벌

  • 등록일
    2007/08/06 09:38
  • 수정일
    2007/08/06 09:38

살살페스티벌에 다녀오며

퍼뜩 또는 곰곰히 생각하게 된 것 몇 가지.

 

* 몰입하지 않으면 그 어떤 것도 재미가 없다.

나는 '살페'와 '새만금 방조제 반대'에 몰입하지 못하고, '휴가', 임금노동으로부터의 '쉼'에 몰입했다.

물론 폭우를 피해 활력소에서 진행되었던 살페는 정말 재밌었다!

 

* 두려움이 영혼을 잠식한다.

해창 갯벌에서 번개가 내 머리 꼭대기에 칠 거란 두려움에 벌벌 떨었다.

그 시각 보라돌은 텐트 안에서 쿨쿨 잤다고 한다. 그런 왕배짱이 정말 부럽다.

 

* 역할에 대한 고민

어떤 일이나 자발적으로 좋아서 하는 일은 아니다.

나는 일에 선을 긋는 것을 꽤나 잘하고, 같이 일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분명하게 내 의사를

보여주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지만, 이번 살페에서는 그러면서도 미안했다.

왤까... 난 스스로 무엇을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걸까.

살페 다음날 아침 일찍 빗속을 택시를 타고 부안으로 향하면서, 마음이 적지않게 불편하다.

도움만 받고 돕지 못한 것이 불편한 걸까. 그래서 쓸데 없는 변명만 늘어놓게 되는 걸까.

내가 남을 돕는 일도 있고 남이 나를 돕는 일도 있는거다.

둘 다 언제나 사심없이 기쁘게 할 수 있기를...희망사항

 

숙식에 대해 이것저것 돌봐주고,

번개와 불편한 잠자리에서 구해준 도영에게 마음으로 부터 뜨겁게 고맙다...

그가 만들기로 한 웹포스터를 내가 대신 만들 때, 약간은 "대책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했던

오해를 정정한다.

 

이런 재미있는 페스티벌을 준비한 다른 모든 친구들에게 감사...

폭우와 뇌우도 페스티벌을 망치지 못했다.

그 노고에 감동 또 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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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사과할 일인가

  • 등록일
    2007/08/02 10:23
  • 수정일
    2007/08/02 10:23
거한님의 [짧게] 에 관련된 글.

저도 거한님의 생각에 어느정도 동의는 하지만, "넌 관념부터가 마초적이다"라고 환원하기 보다,

정치적으로 페미니스트가 되려는 남자의 가능성과 한계, 발화의 방법 등을 더불어 생각하고 싶어요.

페미니스트이려면 '여성'에 대해 어떻게 말해야 하며, 그것이 얼마만큼 가능하며

그게 얼마나 효과적이고, 자신을 어느 위치에 설정해야 할지... 등등

글쓰기와 전략의 문제를 '성희롱'으로 비화되는 것, 

돕의 사과문도 참 섯부르다는 생각이 드네요.

논쟁하고 토론하면 될 것을 경직되고 사과하고,

그래서 사태가 개인적 마초성으로 비화되는 것 같아서 안타까워요.

게다가 그저 개인 블로그에 개인적인 생각을 쓴 것일뿐.
케샨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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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리 호들갑인가 싶지만

  • 등록일
    2007/08/01 19:55
  • 수정일
    2007/08/01 19:55

돕헤드님의 [민중은 여성이다] 에 관련된 글.

 

돕의 연작에 대해 뭐 그리 호들갑인가 싶지만,

그의 글에 대한 나의 생각은 다음과 같다. 

 

전유와 전복을 시도할 때에는 여러가지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다고 본다. 때론 전유와 전복은 유쾌하다. 특히 억압된 자가 억압한자가 만든 가치와 기호를 전유해서 유희할 때는 더욱. 하지만 그 와중에 전유하고 전복하려는 대상의 다양성과 그들이 위치해 있는 미세한 맥락, 변화, 역동성은 사라지고 만다. 따라서 정치화되며 화석화되고, 과장되어 일반화되기도한다. 돕이 클리토리스에 빗댄 여성은 그런 맥락속에서 정치적으로 "신비화"되어 있다고 본다. (에드워드 사이드에 따르면 서양이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이데올로기적 재현체계를 만들어내고 신비화했듯, 그리고 대항세력이 오리엔탈리즘을 다시 신비화하는 것을 경계했듯.) 돕의 글에 나타나는 화자는 클리토리스의 쾌감이라는 생물학적 여성들의 경험적 사실을 자기 것으로 전유하려는 어떤 생물학적인 남자이다.

그것이 그의 말대로 자신의 남성성에 대한 반성에서 기인되었다고 하자. 하지만 그는 자신의 남성성을 전복하고 해체시키는 방법으로 “여성”이 되려고 한다. 그리고 마치 여성이 된 듯, 그는 여성의 “클리토리스”를 가져다 쓴다. 여기에 함정. 그의 “여성”이란 “내가 지향하는 새로운 주체성”, “ 내가 만들고 싶은 나 자신의 모습” 이라는 말에서 암시되듯, 그 속에서 현실의 여성은 사라진다. 여기서 “현실의 여성”이라 함은 생물학적으로 결정되었든, 사회적으로 구성되었든, 구성되면서 변해가든, 이 현실을 살아내야 하는 무수히 많고 다양한 실체적 존재. 이들이 클리토리스에서 느끼는 것은 그 수만큼 다양할 것이고, 클리토리스를 미워하거나 예뻐하는 방법도 무수하게 존재할 터. 또 클리토리스에 대한 감정도 매우 복잡할 것.

다양성으로의 열림으로 향해가야 할 전유와 전복의 방식이 현실의 여성을 내쫓고 안에서 문을 닫는다. 여성의 신비화로 인한 소외는 계속된다. 그가 생물학적 남자라는 사실은 확실히 이러한 혐의를 가중시키기는 하나, 결정적이지는 않다. 만약 어떤 생물학적 여성이 칼럼에 여성에게 강요되는 질 삽입 오르가즘을 비판하고 클리토리스 자극을 통한 쾌감을 자기 경험에 비춰 옹호하는 글을 썼다고 하자. 물론 그 여자의 글쓰기 방식에 따라 읽히는 방식도 달라지겠지만, 클리토리스 쾌감을 느끼지 않는 여성들은 소외되고 있는 자신들을 발견할 것이다. (모든 글에는 분명 소외가 존재한다. 소외 없는 글은 없지 않을까!)

그 여성 글쓴이가 오히려 친구들이나 주변 지인들과 수다를 떨 때에 무의식적으로 “글은 그렇게 썼지만 삽입 섹스를 할 때의 오르가즘도 정말 좋아”라고 말을 한다면, 나는 오히려 그 여자를 더 잘 이해하게 될 것이고 의사소통이 된다고 느낄 것 같다. 그 여성은 이데올로기적 규정이든, 전복적 의도이든, 자기의 외부 또는 내부에서 자기를 규정하려는 것에서 자꾸 미끄러지는 현실적인 존재로서 여자로 느껴질 테니까. 그러한 여유, 삶 속에서 자기를 규정하지 않는 풀어헤침, 전복한 것을 또 뒤집어보기, 반성한 것을 반성하기, 의식한 것을 의식하기, 자신의 모순을 바라보기가 가능할 것 같기 때문이다. (정치적 글은 이렇지 못하고, 문학적 글은 이게 가능하다. 그래서 문학이 좋다!)

헤드윅이 성기를 절제하면서까지 여성의 몸이 되기를 갈망한 것은, 그의 섹슈얼리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현실적 섹슈얼리티에 충실한 현실적 인물로 보인다. 영화가 갖는 정치성은 재현된 사회와 그를 둘러싼 맥락이 그의 존재의 전복성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글쓴이 돕헤드는 자신에게 스스로에게 없는 쾌감의 이름을 붙이려한다. 그래서 결과는, 물신적이며 정치적이고,  돕에겐 미안하지만  상투적이 되어 버렸다. 누군가 돕의 글에 여성을 전유하려는 남성의 시선을 발견하고 불편한 소외감을 느꼈다면, 그건 그 글의 상투성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그의 후속 글은, 여성을 자신이 바라는 민중상을 구축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기 충분하기 때문.

물론 여기서 정치적인 것을 비판할 생각은 없다. 누구나 다 정치성을 가지고 있으니까. 문제는 그 방법이다. 자신의 지금의 남성을 해체하려 한다면, 여성까지 해체해야 한다. (어떤 이는 섹슈얼리티까지 해체해야한다고 할 거다. 그러면 얘기가 넘 복잡해지고...)  그 둘은 서로를 구성하는 과정에 있지 않은가. 마친가지로 여성성을 이용해 민중성을 그리려면 자기가 빗대려는 여성성이 무엇인지 부단히 스스로 물어보고 점검해야 하지 않은가. "삶은 여자다"라고 선언한 니체가 왜 개마초인지..., 역대의 훌륭하다던 남성 철학자, 사상가, 운동가들이 무수히 여자를 삶아먹은 그 역사를 생각하면 돕의 글에 대한 반응이 충분히 이해가 가지 않을까. 돕의 의도가 진정 그렇지 않았을지언정, 사회와 역사적 맥락에서 그나 나나 자유롭지 않으니...

 


개인적으로 돕 개인을 비판할 생각은 추어도 없다.

그가 솔직하든, 덜하든, 잘 드러내든, 숨기든, 의사 소통이 되든, 안 되든, 어쨌든 그는 그다. 보여지는 그이고, 그를 잘 못보는 사람은 잘 안 보이는 그이고, 더 잘 보는 사람은 더 잘 보이는 그일 뿐이다.

문제는 진정성이 아닌 방법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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