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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S 벗어나기?(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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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05/02/01
    사진집 두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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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5/01/28
    바람피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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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S 벗어나기?

* FLOSS님의 [doc hwp 진보 문서양식?] 에 관련됐다기 보다는 감사의 말을 전하는 글이다.



 

컴터를 바꾸면서 윈98에서 XP로 바꾸게 됐는데 좀 더 편리해진만큼 마이크로 소프트에 더 종속되는 것 같아 찜찜했다.

갖고 있던 MS 오피스 CD가 안되서 깔지 못하고 있었는데 마침 floss님이 오픈 오피스를 소개한 글을 보게 됐다. (오픈오피스(OpenOffice.org)

 

MS오피스를 구했지만 깔지 않았다.

내가 자주 이용하는 것은 엑셀인데 오픈오피스에서 엑셀파일을 읽을 수 있을뿐만 아니라 내게 필요한 기능을 거의 다 지원하기 때문에 이참에 아예 이 것만 쓰기로 했다.

레니님의 글에 동의하기 힘든 부분도 있지만 ‘자유 소프트웨어의 사용자층이 아직까지는 파워유저들’이란 말엔 공감이 간다.

난 컴맹 수준은 아니지만 이런 새로운 것을 써보려면 굉장히 부담스러워 엄두도 못냈다.

 

엑셀 대용으로 오픈오피스를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조금씩 다른 것들도 바꿔보고 있다.

워드프로세서는 원래도 별로 쓰지않는데 그나마 아래아한글로 쓰던 일기도 오픈오피스로 바꿨다.

나모웹에디터는 워낙 오랫동안 써서 그런지 오픈오피스로 바꾸니까 많이 버벅거린다.

그래도 계속 해봐야지.

음악들을 때 그냥 MS 윈도우미디어 플레이어를 쓰고 있었는데 프리웨어인 곰오디오로 바꿨다.

불여우도 쓰기 시작했는데 거의 하루종일 연결되어 있는 ‘렛츠뮤직’에서 문제가 있다.

Explorer만 생각하고 만들어서 그러겠지.

게시판에 ‘불여우에서도 문제가 없게 해달라’고 글은 남겼는데 신경도 안쓰겠지?

전자결재할 일이 있는 곳에서도 아직은 Explorer를 쓰고 있다.



이제야 MS의 손아귀에서 약간이나마 벗어나고 있는 느낌인데

가장 큰 건인 OS를 바꾸는 건 아직 꿈도 못꾸겠다.

‘리눅스’는 아직도 나에게 다른 별나라 얘기처럼 멀기만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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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장만

두어달의 고민끝에 노트북을 샀다.

시간적 여유가 없어 인터넷과 워드, 엑셀 정도만을 쓸 때는 업그레이드할 필요성을 별로 못느꼈는데 약간의 여유가 생기면서 이것 저것 조금씩 하다보니 컴터가 너무 버벅거렸다. (셀 500 이 어련했겠나)

 

데스크탑을 살지 노트북을 살지 고민하는데 한 달 이상 걸린 것 같다. 물론 새로 사야하는지 자체에 대한 고민도 있었고.

 

노트북이 예전처럼 비쌌다면(여전히 고가지만) 아무 고민 안했을 것이다. 그런데 삼보에서 값을 파격적으로 내렸다. 전에는 중고조차도 그럭저럭 쓸만한 걸 사려면 100만원은 줘야 했는데 이젠 새것을 그 가격에 살 수 있게 됐다. 성능도 제법 괜찮고 말이다. 용산에 있는 아는이의 말에 따르면 삼보가 부도 위기에 몰리면서 현금을 돌리려고 거의 원가 이하로 팔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꼭 노트북이어야 했나?

 

좁은 가게, 음악들을 때의 소음 등 몇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노트북의 가장 큰(거의 절대적인) 장점은 들고 다닐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집밖에 들고 나갈 일이 없다. 그럼 노트북을 살 이유가 없는 것이 맞다.

 

놀러갈 때 생각해서 예전에 노트북을 사고 싶은 때가 있었다. 여행하면서의 느낌을 그때 그때 글로 남길 수도 있고, 디카의 메모리를 하나 더 사는 방법도 있지만 노트북을 장만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디카로 찍은 것을 즉석에서 CD로 구워줄 수도 있고 말이다.

 

아무데도 갈 수 없는 당장의 현실을 생각하면 같은 돈으로 빵빵한 데스크탑을 사던가, 같은 성능의 데스크탑을 몇십만원 저렴한 가격으로 살 수 있었다.

 

그런데 새 컴터를 사면 최소한 3년은 사용하고 보통 5년까지는 버틴다. 가장 최고사양이 필요한 이들은 그래픽을 다루거나 최신 3D 게임을 즐기는 경우인데 난 둘 다 상관 없기 때문에 5년 정도는 쓸 것 같다.

 

나는 마냥 아무데도 갈 수 없을까? 아마도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어디에 갈 수 있으려면 아버지께서 병이 낫거나, 정반대로 돌아가셔야 가능해진다. 아버지 병이 나을 가능성은 점점 희박해지고 있다.

그러다보니 아무리 가보고 싶은 곳이 있다하더라도 "아버지 돌아가시면 꼭 한 번 가봐야지"라고 생각한다는 게 너무 거시기 하지 않은가? 그래서 어디 가보고 싶다는 생각 자체를 안하려고 노력한다. 

 

...

이번 노트북을 살 때 그리 기분 좋지만은 않았다. (다른 문제도 있었는데, 그 얘기는 관두는 게 나을 것 같다. 조만간 정리해볼 것도 같기도 하고)

 

그래도 정신없던 가게방이 약간은 정리되었고, 노트북인 것과는 상관없지만 컴터가 빨라져서 느므 흐뭇하다. LCD라 눈도 덜피곤하고 말이다. 기왕 비싼 장난감 샀으니 좋게 좋게 생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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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둘셋

장면 1

네 아버지 처음 입원했을 때는 가슴이 두근두근 거려서  어찌할지 모르겠더니 이젠 그렇지는 않다.


- 계속 그 때 같으면 어디 사람 살겠어요?


그건 그래

 

 

고민 2

아버지 원하는 데로 해드리는 것이 어머니를 점점 힘들게 만드는 것이라면? 어머니도 70대 중반에 여기저기 아픈 노인네인데.

 

 

알 수 없어 3
어머니 편하시라고 하는 건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사실은 자식 마음 편하자고 하는 것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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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길 옆 공부방

한겨레 신문에 '인천 만석동 기찻길옆 작은학교’라는 기사를 보면서 서경화 감독이 만든

'기차길옆 공부방'이란 다큐를 오랜만에 떠올렸다.

그 당시 푸른영상 게시판에 올렸던 글인데 오랜만에 읽어보니 참 마음에 안든다.

그래도 일단 올려본다.

내 스스로 가난에 대한 고민을 진지하게 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라며.

 



기차길옆 공부방

 

 일단 재미있게 봤다. 아이들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될 것이라는 나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지만 그래서 더 재미있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아이들이 중심이

되면 TV에서 맨날 보는 최루성 휴먼 다큐멘타리 한 편이 추가되는 것으로 끝났을

것 같다.

 

 인권영화제에서 어떤 분이 말한 "가난이라는 것을 너무 낭만적인 시각에서

그렸다."라는 지적은 매우 적절하다고 본다. 그 분 의견에 동의하느냐 마느냐를

떠나 꼭 한 번 거론되어야 할 문제라고 본다. (물론 그 분이 철거민들을 거론한

것은 한마디로 말도 안되는 비교였다. 그렇게 치자면 지금 이 순간에도

전세계에서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은데 최소한 굶어'죽을' 걱정까지는

안하는 철거민들 얘기를 다루는 것도 배부른 소리가 되지 않는가?)

 

 

자발적 가난이라는 것.

 

 거의 일년이 다되가는 것 같다. 전에 경화씨와 술먹으며 이야기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난 거기서 같이 살아가기로 작정한 분들이 궁극적으로는 원래

가난한 사람들과 절대 같아질 수 없다고 말했고, 경화씨는 동의하지 않았다. 내

생각엔 변함이 없다.  그분들의 가난은 '자발적' 가난이다. '가난하다'는 현재의

결과가 동일하다고 해서 결코 그들이 같아질 수는 없다. 이런다면 말이 된다.

'처음엔 자발적으로 가난해졌는데 이젠 그 가난이 지겨워  벗어나고자

발버둥치는데 잘 안된다.' 아니면 '원래 가난했던 분들이 이젠 가난의 미덕을

발견하고 평생 그렇게 가난하지만 아름답게 살겠다고 작정한다'면 그제서야

비로소 같아지는 것이라고 본다. 극히 부분적으로는 이루어졌는지 모르지만

아직은 '차이점'이 더 많을 것 같다. 오히려 이 차이점을 인정해야 올바른 관계가

정립될 것이다. 영화속의 이모, 삼촌들은 이 점을 확실히 파악하고, 생각이

정립되어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오히려 경화씨가 뭘 잘못이해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내가 경화씨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건가?

 

 자 이제 자발적 가난이라는 것에 대해 말해보자. 미리 겁먹고 말하는 것이지만

'지가 그렇게 못사니까 괜히 열심히 사는 사람들에게 시비를 건다'라고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니 그런 말 들어도 상관은 없다. 그래도 할 말은 해야

하니까.

 우선 만석동에 자발적으로 들어가신 분들에 대한 존경을 표시하고 싶다. 참으로

의미있게 사신다고 본다. 하지만 그 분들도 '자 이제 우리 모두 가난하게

살아야만 합니다'라고 주장할 것 같지는 않다. 즉 '자발적 가난'이란 의미있는

삶의 모델 중의 한가지인 것은 사실이지만 지고지선의 유일한 가치이며 모두들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실제로 가능하지도 않다. 4천만이 모두

가난해지려고 노력하는 세상? 그런 세상을 꿈꾸지는 않으리라 본다. 그렇다면

문제가 한 가지 생긴다. 그 분들의 자식들에게 가난이란 어떤 의미가 되는

것인가?

 말지 이번 호에 김동원 감독의 기사를 보면 '가난하게 산다는 것은 그 자식들도

가난하게 살게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라는 말이 나온다.(내 기억력이 정확하지는

않다.) 그리고 자발적 가난에 대한 얘기도 나온다. 김동원 감독도 자발적 가난을

선택했다고 볼 수 있다.(물론 난 김동원 감독을 가난하다고 보지는 않는다.

물질적으로는 가진 것이 많지 않지만 다른 것들을 많이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발적 가난을 택한 부모를 둔 자식들은 그 덕분에 '선택'이고 뭐고 할

것도 없이 '타고난 가난'을 짊어지고 살아야 한다. 시비를 걸자는 것이 아니고 이

문제에 대해서 말 좀 해보자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훌륭한 부모 밑에서 자라다

보면 부모님을 이해할 확률도 높을 것이다. 하지만 이해를 못한다면? 이해는

하는데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길 원한다면? 이 땅에서 살면서 가난하다는 것은

삶에 있어서 선택의 폭을 상당히 좁게 만든다. 자식들에게 '정직하게 살아라'

같은 것은 강요해도 되겠지만 '가난하게 살아라'하고 강요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

아이들이 친구들에게 이러지는 않을까? '우리집은 원래 가난하진 않았어. 훌륭하신

우리 부모님이 자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려고 이렇게 하신거야.' 라고.

자식이 우리집은 왜 이렇게 못사냐고 칭얼대면 비슷한 말을 해주게 되지는

않을까? 그렣게 되면 자식대에까지도 원래 가난했던 분들과 같아지는 것은

실현되지 않는 것이다.

 

 

 

작품에 대한 별로 중요하지 않은 몇가지 것들

 

 경화씨의 평소 끼(?)로 봤을 때 나래이션을 아주 잘 할 법도 한데 솔직히 좀

어색했다. (물론 성우를 쓰는 것보다는 좋았을 것이라 본다.) 이런 면에서

경화씨보다 별로 나을 것 같지 않은 서명진씨의 경우엔 '봉천동 사람들'에서 그리

어색하지 않았다.  나래이션의 '시점' 차이가 아닐까?  명진씨는 회상하는 식으로

현재에서 과거를 돌아보는 것이었기에 정리하듯 자연스러웠다. 그런데 경화씨의

경우는 (아마도 만석동에서 생활하면서 그때 그때 적어두었던 것을 활용한 것이

아닌가 싶은데) 계속 현재 시점으로 지금 겪고 있는 것처럼 하려니 어느 정도의

연기력이 필요한데 다소 역부족이었을 것 같다. 그렇다고 아주 이상하다는 말은

절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시라. 조금, 아주 조금 아쉽다는 말이다.

 

 마지막 정리할 때 앞으로의 희망에 대해 한 명씩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의

형식인가 보다. 'Women Outside'에서 그런 식으로 마무리하는 것을 보고 아주

깔끔하고 인상적이다라는 생각을 했는데 그 이후로 그렇게 끝나는 것을 몇 개

봤지만 그렇게 매끄러워 보이지 않았다. 그럼 기차길옆 공부방은? 글쎄다. 별

무리는 없었다고 보는데 뭔가 아쉽다. 하긴 이건 다큐도 뭔가 극적이고 폼나게

해서 사람들을 좀 움직이길 바라는 나의 (어쩌면 잘못된) 취향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딴 소리

 

 위에 쓴 글은 작품평이라고 할 것도 없고, 그냥 뭔가 생각나는 데로라도

말해주는 것이 경화씨에게 도움이 될까해서 쓴 것이다. 앞으로 이런 글을 다시

쓰게될 것 같지는 않다. 새로운 작품이 나왔다는 것은 나에게 회원기간이

만료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1년치 회비를 낼까 말까를 고민하고 있었는데,

전혀 고민할 필요가 없게됐다. 보증을 서준 것이 문제가 되서 일년동안 매달

41만원씩 갚게됐다. 꿔준 돈 천만원을 못받게 된 것은 그나마 여유돈을 빌려준

것이라 속이 좀 쓰리지만 마음을 비우면 되는데, 이번 문제는 당장 내 주머니에서

돈이 나가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전혀 상황이 다르다. 내 한 달 수입은 육칠십만원

정도다. 이 돈으로 정혜 공부도 하고 몇 푼 안되지만 처가집에 다달이 용돈도

보내드리며 잘 먹고 잘 살았는데(이게 다 탁월한 나의 살림솜씨 아니겠는가!),

이젠 거의 답이 안나오는 상황이 됐다. 그래도 난 처분할 재산이 있으니

절망적이지 않다. 정혜는 나에게 '어떻게 그렇게 쉽게 쉽게 생각하느냐?'라고

하지만 어렵게 생각한다고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닌데 뭘 힘들게 어렵게

생각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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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이 되살려야 하는 것

예전엔 말지 기사를 하나도 안빼고 다 읽기도 했는데 요즘은 반의 반도 못읽는 것 같다. 인터넷에서는 괜찮은 글도 많긴 하지만 일단 너무 많아 괜찮은 글을 '찾아내는 것'도 큰 일거리다. 이미 검증된 잡지를 보는 것, 그게 바로 내가 아직도 말지를 사서 읽는 이유다. 특히 나는 데스크 칼럼을 좋아하는데 이전 편집장이던 김성환보다는 못한 것 같지만 이종태 편집장의 이번달 데스크 칼럼은 읽어볼만 하다. 진보넷에서는 이 글에 동의하지 않는 분들도 많을 것 같기는 하다. 내 블로그에 오는 이가 별로 없기 때문에 무슨 논쟁거리가 되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노동운동이 되살려야 하는 것

 

 "저 공장도 토지도 건물도 문화도 무기도 우리의 것이다!"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까지 나왔던 월간 <노동해방문학>의 뒷표지에 새겨져 있었던 문구이다. 물론 여기서 '우리'는 노동자 계급을 의미한다. 이 잡지는 '노동해방'(사회주의)이란 '노예의 언어'를 사용하긴 했으되 "노동운동의 목표를 사회주의 혁명"으로 뚜렷이 못 박는 선명성을 과시하면서 엄청난 주목을 받은 바 있다.


 그랬다. '80년대' 대다수 노동운동가들의 꿈은 사회주의였다. 20세기 초 러시아 지식인들이 공동체 건설을 위해 농촌으로 들어갔다면, '80년대' 남한에서는 스스로를 사회주의자로 규정한 운동가들이 공장으로 들어가 "변혁의 주체"인 노동자들을 만났다.


 그들에게 사회주의 혁명으로 가는 길은 레닌 등이 교시한 대로 너무나 선명했다. 임금인상 등 노동자들의 처우개선을 위한 "경제투쟁"은 필수적인 것이었지만 거기서 멈춰서는 안 되었다. 노동자들은 이 경제투쟁을 통해 계급의식을 획득하고 궁극적으로는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정치투쟁을 전개해야 한다고 운동가들은 생각했다. "파업(경제투쟁)은 혁명(정치투쟁)의 학교"인 것이다.


 그래서 노동운동은 '80년대' 내내 임금인상 등 처우개선을 위해 헌신적으로 싸웠다. 그 경제투쟁은 단지(!) 해당기업 노동자들의 임금인상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노동자가 주인 되는 참세상'을 앞당기기 위한 '예비적 투쟁'으로 설정되었다. 그래서 투쟁의 성과가 설사 해당기업 노동자만의 처우개선에 그친다고 해도 그것은 '전체 노동자를 위한 싸움'이라는 '윤리적 확신'으로 이어졌다. 이런 자부심 덕분에 당시의 노동운동은 '자본의 앞잡이'들이 식칼로 옆구리를 찌르고, 감옥에 가두고, 때로 조직 내부에 프락치를 투입해도 굴복하지 않았다. 그리고 윤리적 확신과 자부심이 강한 만큼 투쟁은 치열했다.


 이렇게 '80년대'는 해방 이후 줄곧 수세였던 남한의 노동운동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연대가 되었다. 이 시기 노동운동이 거둔 성과는 놀라울 정도이다. 노동운동의 치열성은 당시 3저호황과 맞물리면서 1987년을 전후한 3년여 동안 전체 노동자계급의 실질임금을 100% 정도 올려 놓았다.


 아이러니한 것은 사회주의자들이 이끈 '80년대'의 노동운동이 오히려 한국 자본주의를 더욱 튼실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1980년대 중후반 한국 경제를 주도한 것은 자동차, 아파트 등 내구소비재 산업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기업들이 쏟아내는 고가의 내구재 상품들이 팔릴 수 있었던 것은 노동자계급의 실질임금이 급속히 상승했기 때문이었다. 한국경제의 생산능력 확대와 임금상승이 맞물려 경제 전체적으로는 선순환을 이루었던 셈이었다. 심지어 1980년대 말 한국 경제의 위기를 극복한 원동력은 내수의 급증이었다는 주장이 나올 정도이다.


 그러나 이런 '공로'와 별도로 남한 노동운동은 임금인상 이후 사회주의쪽으로는 한치도 나가지 못했다. '사회주의 혁명 노선'을 계속 유지해야 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단지 사회주의의 합리적 핵심인 '공공성과 사회적 연대'의 문제의식만큼은 놓쳐서는 안되었다는 이야기다.


 1980년대 이후 남한 노동운동이 잃은 것은 사회주의적 문제의식이었고, 간직한 것은 레닌주의적 노동운동의 과격성이었다. 이는 자기 기업 내부에서는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 '윤리적 확신'에 근거한 '치열한 계급투쟁'을 벌이지만 기업 밖으로는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대기업 정규직 노조가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무심하다는 비난은 이제 모함으로만 들리지 않는다. 최근 세상을 시끄럽게 했던 기아노조의 채용비리나 민노총 대의원대회 폭력사태 등은 이런 관행의 연장선상에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신자유주의 개혁이 급속히 진행되고 있는 2005년의 대한민국에서, 밑천이라곤 몸뚱이 하나밖에 없는 노동자들은 모두 잠재적 피해자의 입장일 수밖에 없다. 오늘의 정규직은 내일의 비정규직이다. 그리고 유럽복지국가들의 사례에서 보듯이 지금 뿔뿔이 분열된 남한 노동자들이 우선 '계급'으로 단결할 때 국가-자본과의 사회적 협약과 국민경제의 발전도 가능하다. 이를 위해서는 비교적 여유 있는 노동자들이 상대적으로 불리한 처지에 놓인 노동자들에게 먼저 연대의 손을 내밀어야 할 것이다. 노동자 계급은 여전히 진보운동의 주요 세력이다.

 

<말> 3월호 '데스크 칼럼' 이종태 편집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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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주나 한 잔 마시고

역사적인 날?

 

아버지는 농사밖에 모르고 사시다가

딸 셋 이후로 나온 쌍동이 아들 녀석들 때문에  장사를 시작했다.

빈농의 자식으로 태어난 아버지가

농사지어서는 자식 교육을 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구멍가게를 35년동안 하루도 닫지 않앗다.

심지어 자식들 결혼식 날조차도 몇시간만 잠깐 닫고 다시 열었다.

매일 밤 12시 30분까지,  35년을.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된지 한 참이 지났지만

아버지는 당신이 만들어 놓은 원칙을 바꾸지 않았다. 

그 때문에 어머니는 맞춰사느라 계속 힘이 드셨고 말이다.

 

아버지는 침대를 벗어날 수 없는 상태가 몇달 째 지속되고 있고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아버지를 위해서 가게를 계속 열었지만

나나 어머니나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그런데 습관이란 정말 무서운 것이지.

일흔 넷이나 먹은 우리 어머니는 아버지보고

'뭐할라고 그렇게 고생하며 살았느냐'고 하시면서도

막상 가게문을 닫을 엄두를 못낸다.

 

어머니가 못하면 나라도 해야지.

스스로 가게를 볼 수 없게된 아버지는

차마 가게문을 계속 열라는 말은 못하고

하고 싶은 데로 하라 했다.

 

내일 35년만에 우곡상회가 처음으로 쉰다.

간병하는 사람이 편해야 환자에게도 좋다는 말을

계속 되뇌이면서도 자꾸 헛헛한 마음이 들고,

나는 몇 달만에 소주를 먹고 있다.

 

 

pan이 아니었으면

 

그냥 맥주나 한 잔 하고 잠들지 않았을까? 

가게에서 파는 고추참치와 번데기 통조림을 따서

소주를 한 잔 하고 있다.

알탕이 어쩌니 곱창이 어쩌니 해쌌는 바람에... ^^

어머니에게 내일 깨우지 말라고 했다.

원래도 깨우지는 않지만 말이다.

 

 

한대수

렛츠뮤직에 한달 3천원 내고 음악을 듣고 있다.

저작권 협상이 안되서 들을 수 없는 음악들도 많다.

한대수의 이전 앨범은 살 수가 없어서 그냥

렛츠에서 듣고 있다.

내가 듣고 싶은 노래들은 유료 mp3f로도 구할 수가 없다.

한대수!

이 자를 어찌할꼬?

 

 

다음주쯤엔?

 

주말에 서울을 올라갈 수도 있을 것 같다.

너무 늦은 시간이겠지만 한두명쯤은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이젠 상황이 바뀌어서 아무도 안나오려나?

그래, 혼자 한잔하고 일찍 자고

다음날 조조영화나 보고 내려와야지.

그때 그사람들을 보고잡다.

정말, 오로지 백윤식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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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 약값

아버지는 뇌종양으로 수술을 했지만 수술했을 때 떼어낸 조직에서는 암세포가 발견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양성종양이라고 안심했었다. 회복될 일만 남은 것 같던 아버지는 다시 악화되고 방사선치료까지 받았지만 악화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 방사선이 효과가 없는 걸로 봐서 악성종양, 즉 '암'인 것이 거의 확실한데 그래서 항암제를 드시고 계시는데 문제는 조직검사에서 암세포가 안나왔기 때문에 공식적으로는 '암판정'을 못받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의료보험 적용이 안된다. 의료보험 재정의 낭비를 막기위해서 만든 규정이겠지만 참 웃기는 일이지. 그렇다면 형식상의 논리로는 암이 아닌데 의사가 항암제를 처방한 게 되는 거다. 한달에 5일간만 복용을 하는데 의료보험이 적용되면 40만원 우린 안되기 때문에 200만원을 내고 먹는다. 오늘 이달치 약값 207만원을 지불하고 약을 받아오며 "돈 없으면 진짜 죽어야 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지리도 가난했던 아버지는 평생을 정말 악착같이 일했기에 돈없어서 죽을 일은 없지만 정말 억척스럽게 일했는데도 돈을 모으기는 커녕 근근히 생존이나 유지하는 사람들을 알고 있다. 미국과 함께 신자유주의의 첨병인 영국이 무상의료를 하고 있는데 작은 병에만 보험이 적용되는 우리 의료보험. 보험이란 말을 쓰지 말던가. 누구는 영국이 무상인 대신 수술 한 번 받으려면 보통 6개월은 기다려야 한다고 폄하하기도 한다. 영국이 우리의 이상형이라는 말도 아니지만 돈이 없으면 6개월은 커녕 6년을 기다려도 수술 받을 수 없는 이들이 많다는 것을 모르는 건지, 상관이 없다는 건지, 그냥 생각이 짧은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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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집 두권

최근 사진관련 책 두권을 샀다.

하나는 김영갑의 <그 섬에 내가 있었네>

 

33K, 56K 전화 모뎀을 이용하던 인터넷 원시시대 시절이었다.

인터넷보다도 PC통신이 더 많이 이용되던,

사진 한 장 보려면 클릭하고 잠시 딴 짓하다가 와야하던 그 때.

사진에 관심은 있었지만 아는 것은 별로 없었는데

풍경사진은 찍는 것도 재미없고 보는 것도 재미 없었다.

앤젤 아담스 같은 대가의 작품은 좀 남다르긴 하지만

대부분의 풍경사진은 풍경 자체가 아름다운 것이지

사진 자체가 감흥을 불러일으키진 못했다.

멋진 풍경이긴 하지만 너무 도식적인 사진들이 많았다.

그러다 인터넷상에서 우연히 '두모악'이란 싸이트에서

김영갑의 제주도 풍경사진을 봤는데 

감탄사가 나왔다.

 


 

사진은 오마이에서 퍼왔다. 출처를 밝히든 안밝히든 불법이지만 어쨌든 밝히는 것이 나의 예의다.

오마이 기사 보려면

 

그 후 그에 대한 이런 저런 소식들을 접하게 되면서

참 특이한 사람이란 생각을 했다.

그러다 몇 년 후 한겨레신문에서 그의 기사를 보게 되었는데

루게릭이란 병에 걸려 몸이 마비되고 있다는 거였다.

내가 보기에 이 사람은 사진에 미친 것 같은데

더 이상 사진을 못찍게 됐으니 얼마나 괴로웠을까?

그러다 또 잊고 살았는데 이번에 오마이기사를 보고 한 권 샀다.

워낙 특이하게 살아왔기에 그의 살아온 얘기는 무척 흥미롭다.

 

반면 두 번째 책 <종이 거울 속의 슬픈 얼굴>은 좀 실망스러웠다.

최민식의 사진이야 그전부터 많이 본 편이라

이번엔 그의 생각을 좀 엿볼 요량으로 그의 글이 들어있는 책을 산 것인데

글은 좀(많이) '아니올시다'이다.

사진도 그가 직접 고른 것인데, 사실 난쏘공의 작가 조세희가 골라서

엮은 최민식사진집(열화당 사진문고)의 사진들이 난 더 좋다.

책꽃이에서 그 사진집을 다시 꺼내 넘겨 보다가 이 사진에서

멈추고 말았다.

 




1972 부산 자갈치 시장

이 사진은 최민식 공식 홈피에서 퍼왔다.

 

아마도 무슨 단속반에게 끌려가는 것 같은데

이 아주머니의 표정이 정말이지...

남자에게 낚아채인 어깨춤 하며, 손에는 무엇을 들고 있는 것인지,

펄럭이는 전대 앞치마에, 자갈치 시장답게 장화신은 모습까지

가슴이 먹먹해지고 너무 속상해서 콧날이 시큰거렸다.

처음보는 사진도 아닌데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이사진 앞에 여러 가지 사진들을 보면서 감정이 올라가다가

이 사진에서 결정적으로 한 방 먹은 것 같다.

그리고 이 사진의 내용이 30여년전의 지나간 어려웠던 추억속의 얘기가 아니라

아직도 현재진행형인 얘기를 담고 있어서 그런 건 아니었을까?

내가 나이들어서 그런 것도 있을게고.

 

이 사진에는 끌고가는 남자의 얼굴이 거의 안보이지만

사진집에는 어두우나마 볼 수 있는데 그 표정이 참 '그렇다'

뭐라고 표현해야 할 지 모르겠다. 정말이지 참 그렇다.

 

지난달 말지에서 '평생 빈곤에 시달리는 '엄마 노동자'들'이란 기사를

보면서도 그랬다.

나를 울컥하게 만든 것은 비정규직 엄마노동자들의 고생하는 얘기가 아니었다.

비정규직 노동자 집회에 나간 이 아주머니들이 투쟁가가 나오자

박자에 맞춰 '팔뚝질'을 한게 아니라 '박수'를 쳤다는 대목이었다.

그래, 이들이 평생 팔뚝질 할 일이 뭐가 있었겠는가?

어려운 살림이지만 큰 욕심 안내고 허리띠 졸라매고 열심히 살면

그럭저럭 크게 남부럽지 않았던 이들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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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피는 사람들

  서울에 살 때는 관악산 아래였고 유선도 달지 않아서 TV가 거의 안나왔다. 굳이 볼 생각도 없었고, 그렇게 몇 년을 살았다.

 

 

현장고발 치터스 (원제: Cheaters)


cheat는 '속이다'란 뜻이다. 우리가 컨닝이라고 하는 것은 콩글리쉬이고 영어로는 cheating이라고 한다. cheat는 '바람을 피우다'라는 뜻도 갖고 있으니 치터스라는 프로그램을 우리말로 굳이 하자면 '바람피는 사람들' 정도가 될 것이다. 아버지 때문에 송탄에 내려와 살면서 케이블 Q채널에서 이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다.
 

바람 피는 것을 몰래카메라로 담아서 배우자에게 보여주고, 배우자와 함께 현장을 덮친다. 한바탕 소동이 일어나고... 나를 포함한 많은 시청자들이 이 훔쳐보기의 진수?를 만끽한다.

전혀 모르는 사람과 바람피는 경우도 있지만 배우자가 자신의 친구와 바람을 피는 경우도 있고, 사돈쪽이긴 하지만 친척과 바람을 피기도 한다. 베이비씨터와 눈이 맞기도 한다. 열 번 정도 보고 나니 그게 그건 것 같기도 하고 요즘은 다시 예전처럼 TV 자체를 거의 보지 않는데 어쨌든 이 프로를 보면서 상당히 재미있었던 것들 몇 가지.



모자이크 처리를 관전하는 즐거움

법적인 문제가 생길 수 있어 이 프로에는 모자이크 처리가 가끔 나온다. 즉 본인 얼굴이 TV에 나오길 원치 않는 경우 모자이크 처리를 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원하지 않을 것 같은 상황인데 모자이크 없이 나오는 경우가 꽤 많다는 거다. 당연히 모든 촬영이 끝나고 나서 본인의 허락 여부를 묻는 것일텐데, 온갖 쌩쑈를 하고, 온갖 쪽팔리는 일을 다 저지르는(당하기도 하고) 장면이 모자이크 없이 나온다. 즉 본인이 동의했다는 말이다. 어떤 이는 아예 인터뷰도 따로 한다. 점잖게 말하는데 그 내용은 대략 이렇다. "TV에서 이런 놈을 봤으면 나도 욕했겠지만 어쨌든 내가 당하고 보니 아주 엿같고, 나를 이렇게 만든 마누라도 엿같고, 이런 짓거리 하는 당신들(프로그램 만드는 사람)도 엿같다." 뭐 이런 거였다. (fuck을 편의상 엿같다고 내 맘대로 했다. 물론 이 단어는 TV에 나오지 않는다. 입부분만 모자이크하고 소리도 안나오지만 쉽게 알 수 있다.)

 


들켰을 때의 변명 혹은 반응
열 번 정도 본 걸로 통계를 내기는 우습지만, 어쨌든 바람피는 현장을 덮쳐서 들통났을 때의 가장 흔한 반응이 뭘까? '미안하다'일까? (그럼 재미 없잖아?)


그런 경우가 없지는 않지만(딱 한 번) 제일 많았던 것은 "바람폈다고 이런 식으로 날 망신시켜?" 물론 그걸 트집으로 화만 내고 바람 핀 것에 대해서는 사과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에 못지 않게 흔한 반응이 "네가 이렇게 날 의심하고 뒷조사나 하니까 내가 바람을 피우지" 이거다. 이치에 전혀 맞지 않지만 정말 이런 경우가 많았다.  바람핀 상대와 떠나버리기도 하고, 떠나 보내기도 하고, 바람핀 상대가 떠나버리기도 하고.
재미있었던 경우는 남자가 새로운 여자에게 이혼한 상태라며 거짓말을 하고 바람을 폈다. 즉 두 여자를 모두 속인 것이다. 그래서 두 여자끼리 동병상련으로 우호적이 됐다.

 

 

가족을 지키려는 강박관념과 진행자의 코메디
이 프로를 만드는 사람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안겠지만 내가 보기엔 이건 완전히 코미디 프로다. 여기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이 진지할 수밖에 없는데 그걸 엮어나가는 진행자가 정말 너무 심각하고 진지해서 미치겠다. 자신들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려다 보니, 자기들이 무슨 정의와 가정을 지켜주는 수호천사처럼 말하는데 진짜 못 봐줄 지경이다. 특히 현장을 덮쳤을 때,  당황해서 카메라를 피해 도망가려고 하면 이 프로를 만드는 입장에서는 그림이 좀 덜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계속 쫒아가며 바람 핀 사람을 꾸짖는 장면은 아주 민망하다. 진행자 왈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를 두고 이런 짓을 하다니 부끄럽지 않습니까?" (화가 난 상대방에게 칼에 찔린 경우도 있다.)

 

그 진행자가 속으로 "먹고 살려고 나도 별 짓 다하고 있네"라고 생각할까? 아무리 봐도 그럴 것 같지는 않다. 자기 딴에는 부정한 배우자들을 심판하고, 시청자들에게는 가족의 소중함을 일깨워줌으로써 가족의 해체를 막는 숭고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바람피는 것을 옹호하려는 게 아니다. 가족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말도 아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헐리우드 영화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가족주의 강박관념'에 대해서다. 누군가 스필버그 영화에 대해서 "다양한 주제를 다루는 것 같지만 알고 보면 몽땅 다 가족의 소중함을 주장하는 뻔한 영화들"이라고 혹평을 한 적이 있다. 그 말에 선뜻 공감을 하긴 쉽지 않지만 헐리우드 영화들이 가족에 대해 집착(애착이 아니라)하는 것은 사실이다. 좀 더 확장시켜 가족과 국가를 연결시키기도 한다.

 

동성애자 의뢰인
굳이 이렇게 끄적일 생각을 한 이유는 이것 때문이었다. 치터스를 만드는 과정은 일단 자기 배우자가 바람피는 것 같으니 조사를 해달라고 시청자가 요청하면서 시작된다. 이렇게 의뢰하는 사람들의 심정이 이해가 가기도 하고 안가기도 하는데 어쨌든 가장 인상적인 의뢰인은 동성애자 여성이었다. 이미 '남자'와 결혼했을 때 낳은 딸도 있고 직업은 교사다. 우리나라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우리네 수준에서 생각해 보자면 의뢰해서 TV에 얼굴이 나오면 학교에서도 그 교사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고 그러면 학생들의 반응은 어떨 것이며 학부모들은 가만히 있을까? 딸은 자기 엄마가 레즈비언이란 것을 알고 있었을까?


미국은 정말 악마 같기도 한 나라이지만 어떤 면은 우리보다 훨 나은 것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  의뢰인이 극히 예외적인 경우였을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바람핀 애인뿐만 아니라 바람핀 상대도 모자이크 처리 없이 나왔기 때문이다. 동성애자라는 것이 알려져 사회에서 매장당하는 분위기라면 그 세 명이 모두 모자이크 없이 나올 수 있을까?


"Out At Work"라는 미국 다큐를 보면 분명 미국에서도 동성애자에 대한 차별이 심각하긴 하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동성애자들이 가혹한 취급을 받는 것에 비한다면 미국은 거의 천국처럼 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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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행유예 2주

아버지와 병원에 다녀왔다.

 

방사선 치료가 끝났는데도 상태가 안좋아져서 원래 한두달 정도 있다가 찍을 예정이었던 MRI를 오늘 찍을 수도 있다고 했다. 스테로이드 때문에 반짝효과를 봐서 좋아졌을 가능성이 높기는 하지만, 어쨌든 호전은 되었으니 2주정도 더 지켜보기로 했다.

의사나 나나 모두 악성 뇌종양일거라고 예상은 하지만 아직 결정적으로 뭐가 나온 것은 아니기에 마음의 준비를 2주간은 미룰 수 있게 되었다.

이러기를 벌써 몇 번째인가?

뇌종양인 것을 안 다음부터 양성이니 악성이니 의사들도 의견이 많았고, 뇌수술 후 별거 아니라는 말에 기적이 일어났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이제 회복하는 일만 남은 줄 알았는데... 다시 악화되서 뇌사진을 또 찍고, 그 새 또 자라난 걸 봐서는 악성같다고 하고... 아버지는 병원을 못믿겠다고 하고... 그러다 별 수 없이 방사선치료를 시작하고... 점점 좋아지는 것을 보니 방사선치료가 효과있는 걸로 믿기도 했다가... 다시 안좋아져서 거의 다 줄였던 약을 왕창 늘리고...

어쨌든 조직검사에서 악성판정이 난 적이 없고, 아직은 뇌사진을 찍지 않았으니 말그대로 '아직'은 악성이란 판정이 난 것은 아니다.

인간은 어차피 죽는다. 하지만 사형수가 자신의 사형집행일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이 아무 차이가 없을까?

 


 

아래글은 아버지가 아주대 병원에 입원했을 때 병원에서 써놓은 글이다.

나중에 상황이 바뀌었다고 내 스스로가 딴소리 할까봐 적어놓은 것이다.



당사자 되기

 

아버지는 뇌종양으로 수술을 하기로 했다.
아주대 병원에서의 치료 방법중에는 수술이 없었다.
너무 위험한 부위라고 극히 일부 조직만 떼어내서 암덩어리인지 단순한 양성혹인지 알아보고 방사선 치료하자는 거다. 그런데 조직을 떼어내기 위해서도 마취를 하고 바늘로 두개골을 뚫고 세포를 떼어내는 것이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반신불수가 된다고 한다.

어차피 위험한 것이라면 그나마 완치의 가능성이 있는 수술을 선택하기로 했다.
지금은 잘된다는 생각만 하고 있지만 몹시 불안한 것도 사실이다.
별의별 생각이 다들고 말이다.

광기형을 통해서 영동세브란스 병원의 실력 있는 권위자에게 수술을 받기로 했다. 수술할 환자들이 워낙 많이 밀려있는데, 아는 사람의 부탁이니 그 스케줄 사이에 아버지를 끼워넣어 주기로 했다. 한국사회의 커다란 병폐중의 하나인 '연줄'을 우리도 동원한 것이다. 연줄 없는 사람들이 그만큼 뒤로 밀려나겠지. 원칙적으로 해서는 안되는 일이다. 하지만 난 그럴 수 있나? 아니, 못한다. 이 죄를 앞으로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지만 거부할 수는 없다.

병원에서 파업을 하고 있다. 모든 일정이 늦어지고 있다.
아직은 식사가 제대로 안나오고 하루 세끼 똑같은 도시락이 나오는 정도의 불편이지만 장기화되면 뭐가 어떻게 돌아갈지 알 수 없어 무지 불안하다.
주5일제를 요구하고, 비정규직 철폐를 요구하는 그들의 주장을 100% 지지한다. 하지만 당장 피해를 입게될 내가 어디까지 이성적일 수 있을까? 벌써부터 TV에서는 평소의 60%밖에는 수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우리 아버지의 수술도 그만큼 늦어지겠지.
노사간에 타결이 안되면 난 물론 사측을 더 원망하겠지만 같은 노동자로서 그들을 계속 지지할 수 있을까?
당사자가 된다는 것은 정말 괴로운 일이다.

 

천지인-열사가 전사에게전(연주곡)

2004. 1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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