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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5/09/20
    안본다고 없어지나(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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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5/09/05
    정신없던 일주일(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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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05/08/24
    진보블로그 다시그리기 10문 8~9답(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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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5/08/17
    영화 봤다네 (덩야버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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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05/08/08
    자전거가 돌아왔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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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05/07/12
    나에겐 쌍둥이 형이 있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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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05/06/23
    요사이 이것 저것(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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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05/06/15
    미루고 미루고 또 미루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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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05/05/30
    내가 불멸의 이순신을 안보는 이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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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5/05/16
    아!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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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본다고 없어지나

뻐꾸기님의 특정한 글은 아니고 [공장의사 일기] 에 관련된 글.

 

다른 다큐를 보면서 그런 적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칠레 전투'를 보면서는 정말 그런 생각이 많이 들었다.  "이젠 힘든 것 그만 좀 봤으면 좋겠다."  

칠레 전투가 워낙 속상한 내용을 담고 있어서 그랬을 수도 있고, 내가 그 즈음 힘들어서 그랬을 수도 있을 게다.  

 

화학공학을 전공했고 (그렇다고 화학이나 화공에 대해 물어보지 마시라. 쥐뿔도 모른다.) 화공과 출신 상당수가 그렇듯 공장에 들어갔다. 내가 있던 부서는 우리 회사 제품을 쓰고 있는 다른 공장에 갈 일이 무척 많았다. 포항제철이나 삼미특수강, 현대 자동차 등 작업조건이 상대적으로 양호한 곳도 있었지만 절반 정도는 정말 열악한 환경의 작업장들이었다. 난 아직도 어쩌다 쇳가루 냄새를 맡으면 그 때 생각이 난다.  어설프게나마 '노동자성'을 갖고 있던 나에게 그건 결코 마음이 편하지 않았던 경험이었다.

 

나 자신이 물론 노동자였고, 운동권은 아니었지만 뒤늦게 맑스에 반한 나에게 '노동자'란 말은 최소한 그 당시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단어였다. 보는 월간지도 '말'에서 '길'로 바뀌었다. "너 같은 녀석은 직장생활 6개월 이상 못할거야"라는 친구들 말과는 달리 2년반을 다녔다. 직장생활 자체는 별로 힘든 것이 없었는데 각 공장을 돌아다니는 것이 내 마음을 편하게 하지는 않았다. (회사를 그만둔 이유와는 상관없다. 흔히들 하는 고민 "이렇게 평생?" 뭐 그런 거였다.)


관리직인 내가 우리공장의 생산직 사원들과 관계를 맺어나가는 것도 무척 힘들었고, 다른 공장의 노동자들과 대면하는 것은 더 복잡했다. 다른 공장의 관리직도 상대하고 생산직도 상대하는데 우리 회사의 이익과 상대편 공장 노동자의 이익이 (또는 상대공장 관리직과 생산직의 이익이) 서로 꼭 부합하는 관계가 아닌지라 정체성의 문제를 고민해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
물론 제일 괴로운 건 이것저것 떠나서 "어떻게 이런 데서 일을 하냐?"라고 느껴질 때다. 환기시설이 엉망인 곳에서 그 많은 분진을 잘난 3M 마스크 하나로 막아내고(나도 써봐서 알지만 분진을 막아주기엔 형편없다. 다만 없는 것보다 나을 뿐이지) 소음은 또 얼마나 심한데...  환풍기 두어개만 틀어놓고 도장을 하는 곳은 페인트 냄새에 취한다. 휘발성 용제 때문에 아마도 애들이 본드 흡입할 때의 효과 비슷한 게 생기지 않을까 싶다.

 

 

뻐꾸기님의 공장의사일기를 보다 보면 그 때 생각이 날 때가 있다. 그 때 생각이 안나더라도 그냥 내용 자체가 힘든 경우도 많다. 아는 사람의 얼굴이 떠오를 때도 있고 말이다.  그러다 문득 든 생각

 

=> "힘든 것 이젠 그만 좀 봤으면 좋겠다."

  => "어, 이 생각 언젠가도 했던 것 같은데"

    => "그래, 칠레 전투!"

 

그러던 즈음 신문에서 9월 11일이 칠레의 아옌데 정부가 미국이 사주한 쿠데타에 의해 무너진 날이라는 칼럼을 봤다. 칠레전투가 바로 그 내용이다. 1부 마지막에 쿠데타 군이 카메라를 향해 총을 겨눈다. 그리고 카메라가 바닥으로 고꾸라진다. 카메라맨이 총에 맞고 죽은 것이다. (미국의 사악함은 정말 종류도 다양하고 끝도 없다.)

 

그래도 내가 공장에 다니던 시절은 87년 노동자 대투쟁의 여파로 그 이전에 비해서나 현재에 비해서 꽤 나은 편이었다. 일단 해고의 불안에 떠는 일이 별로 없었고, 비정규직 문제도 없었다.(있기야 했겠지) 고생한만큼은 아니지만 임금도 그리 형편없지는 않았다.  물론 그 때도 대기업 하청 노동자의 처우는 상대적으로 열악했고, 12시간 맞교대로 일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저러고 어떻게 사나"하고 안스러워 하기도 했다. 십수년이 지난 지금 더 나아지기는커녕 비정규직의 삶은 끝없이 추락하고 있고, 전선이 확실했던 그 당시에 비해 이젠 피아의 식별 문제도 그리 단순하지가 않다. <밥.꽃.양>을 보며 울화가 치밀어 오를 때만 해도, 그게 극히 일부노조만의 극히 예외적인 상황에서 발생한 것이라고 억지로 믿어보려 했는데...

 

하여튼 2005년, 내 상황도 우울하고, 대한민국도 우울하고, 참 엿같다.

칠레전투 이후로도 속상한 다큐를 계속 보듯, 공장의사 일기도 계속 보게 되겠지. 가끔은 꿍얼거리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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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없던 일주일

EBS 다큐 녹화하기

일주일 동안 하루에 10여편을 상영했는데 내가 본 것은 한두편 정도씩이다. 비디오나 DVD는 가게에 손님이 오거나 다른 일이 있어도 정지시켰다가 다시 보면 되지만 TV는 그게 안되니 짜증난다. 아침 6시부터 새벽 1,2시까지 하는 걸 다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래서 녹화를 했다. 중간중간 사정이 생겨 다 녹화하진 못했지만 그래도 70% 정도는 한 것 같다. 불행히도 우리집은 교육방송이 잘 안나온다. 화질만 좋았다면 나름대로 훌륭한 자료수집이었는데 아쉽다. 시간맞춰 테이프 갈아끼우고, 예약녹화하고, 다음날 녹화계획 짜고... 나름대로 꽤 손이 많이 갔다. 공테이프 값만 거의 10만원은 든 것 같다. 이제 찬찬히 봐야지. 뿌듯.

 

아버지 가정간호

아버지께서 예상보다 갑작스레 안좋아지셔서 아무것도 못드시는 상황이 벌어졌다. 담당의사를 만나기로 한 날은 일주일이나 남았는데 말이다. 일단 병원을 찾아갔다. 전화예약은 무조건 이틀후에나 되지만 직접찾아가면 오래 기다리더라도 그날 만날 수가 있다. 그런데 담당의가 휴가를 갔단다. 에구구.  같은 과의 다른 의사분과 다음날로 예약을 해놓고 다음 날 또 서울에 갔다. 강남성모병원은 서울지역만 가정간호가 되기 때문에 소견서를 가지고 수원 빈센트 병원으로.  나처럼 찾아오는 경우가 흔치 않아서 안내하는 사람들도 우왕좌왕. 어찌어찌 의사를 만나고 어찌어찌해서 수녀님(가정간호사)을 모시고 집까지 왔다. 코줄과 소변줄을 끼면서 아버지 표정을 살폈다. 이젠 말도 못하실 정도로 상태가 안좋아진 아버지가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까?

 

식사를 못하시게 될 것은 이미 예정된 일이었기에 그 전부터도 생각은 해놓고 있었다. 문제는 어머니가 코줄 끼는 것을 반대하는 거였다. "사람이 못먹으면 가는 거지, 그렇게까지 해서 뭐하냐. 그렇다고 사는 것도 아니고."  형은 "그래도 껴야지 어떻해"라고 했고, 난 사실 어떻게 하는 게 나은지 알지 못했다. 뇌출혈 같은 거라 몸만 불편할 뿐 생명과 상관이 없는 것이라면 고민도 안할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어차피 나을 수 없는 병이고 점점 끝이 다가오고 있다. 코를 통해서 음식물과 약을 주입하면 생명이 조금은 더 연장되겠지만 그렇다고 병이 낫는 것도 아니고, 아직 의식은 멀쩡한 편인 아버지가 당신의 몸이 하나씩 망가져가는 걸 스스로 지켜봐야 하는 것이 더 끔찍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당장 아버지가 입도 못벌리는 상황이 되자 어머니도 겁이 나셨나보다. "코줄이라도 껴야하나 어떡하냐?"

 

음식을 먹을 수 없다는 것은 약도 먹을 수 없는 걸 의미한다.  그렇게 되자 정말 하루이틀 사이에 급격하게 악화됐다. 혈압, 맥박, 체온등을 재고 나신 수녀님께서 "지금 상태라면 당장 오늘밤이라도 안좋은 일이 생길 수 있으니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갰네요."

 

음식과 약이 들어가자 아버지는 조금씩 좋아지셨고, 이틀이 지나자 급기야 당신 손으로 콧줄을 빼셨다. 주무시다가 무심결에 갑갑해서 뺀건지 일부러 뺀건지는 잘 모르겠다. 어차피 물어봐도 대답은 안하신다. 하여튼 또 한고비를 넘겼다. 이젠 아주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입으로 음식을 드신다. 한동안 또 이렇게 가겠지.

 

 

욕창

침대에서 꼼짝 못하게 된지 딱 10개월이 지났고 , 결국 아버지에게도 욕창이 찾아왔다. 욕창이 생기니까 정말 할 일이 많아졌고, 소독할 때마다 보는 것도 괴롭다.

욕창 자체만 생각하면 2시간마다 자세를 바꾸고, 가급적이면 똑바로 누워있지 않는 게 좋다. TV보는 게 대단한 일도 아니지만 아버지가 하루종일 하는 건 그것밖에 없는데 욕창때문에 옆으로 뉘여드리면 그나마 TV도 못보고 멀뚱멀뚱 계시거나 주무시는 것밖엔 할 게 없다. 어차피 욕창보다는 아버지 머리속의 암세포가 더 빨리 퍼질텐데 욕창치료만을 위해서 아버지를 계속 옆으로만 누워계시도록 하는 게 잘하는 건지...

 

 

용산

그 와중에도 조카녀석 컴터를 사러 용산에 다녀왔다. 다큐 녹화는 누나에게 맡기고.

용산에서 볼 일 보는 동안 아는 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늘 저녁에 술 한잔 할 수 있어요? 사는 게 왜 이렇게 힘들죠?"

왠만하면 같이 한잔 하며 넉두리라도 들어주련만 상황이 전혀 왠만하지가 않은 관계로 다음에 보자고 했다.

 

 

스티브 지소와의 해저생활

뻐꾸기님의 이벤트에 당첨되어 받은 DVD (나중에 자세히 자랑해야쥐)  다큐 녹화시켜놓고 이 영화부터 봤다. 지난 한주동안 평택에 오실 일이 있다고 했지만 내 상황이 상황인지라 만나보는 걸 포기하고 DVD 선택.

 

 

아~ 피곤하다. 내일은 또 병원 가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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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블로그 다시그리기 10문 8~9답

 

<진보블로그 다시 그리기 10문 10답>

 

1. 블로그를 언제부터 알고 사용하게 되셨어요?

'블로그가 뜬다'라는 기사를 본 게 작년초였던 것 같고요, 제가 사용하기 시작한 건 작년 9월. 제가 사용하던 한미르메일이 파란에 통합되면서 블로그를 제공한다고 하길래 한 번 해봤죠.

 

2. 그런데 왜 하필 진보블로그를 ^^ ?

한마디로 말하면 "끼리끼리 놀아보려고"  제 블로그 첫글에 썼듯 내자신이 그닥(Daybreak한테 배운 말^^) 진보스럽다고 생각하진 않는데, 그래도 여기가 말도 좀 통하고 관심사가 비슷한 이들도 있고  해서요.(근데 내 관심사가 뭐지?)   원래부터 알고 지내던 알엠의 블로그에 가끔 가봤는데 노는 물이 파란블로그보다 훨 좋은 것 같아서 이사왔지요.

 

3. 블로깅을 계속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인가요?

뉴톤의 제1법칙? - 관성의 법칙 (쉬운 거 어렵게 말하는 사람들 흉내내봤는데 썰렁하다.)

'가장 큰 이유'를 물었으니 꼭 한가지만 얘기해야 하는 건가여? 사람들을 직접 만날 형편이 안되는 저로서는 훌륭한 놀이터이자 소통의 장입니다. 넋두리 공간도 되고, 배움의 장이기도 하고.

 

4. 진보블로그를 사용하면서 가장 마음에 드는 점은 무엇인가요?
 일단 사람들이 마음에 들고요(역시 사람이 재산이죠. 쪽수 말고)  

제가 원래 '대충 살자 주의'인데 가끔은 너무 나태해질 때도 있거든요. 그럴 때 자극제가 되기도 하죠. (너무 자극하면 '나몰라라'함)

글 쓸 때 블로그홈에 등록하지 않을 수 있는 기능도 맘에 듭니다.(파란에는 이게 없는데, 혼자 볼 글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불특정 다수가 보라고 올리는 글도 아닐 때 무조건 블로그 홈에 등록되서 안좋았거든요.)

모르는 거 있을 때 진보네가서 도움받는 것도 훌륭한 기능이죠. 파란에도 도움을 받는 곳이 있긴 하지만 그곳은 일방적인 것이거든요. '블로그팊'이나 'FAQ'같은 것이 있지만 어디까지나 일방적으로 알려주기만 할 뿐 소통을 할 수는 없거든요. 뭘 물어보려면 메일을 다시 따로 써야 되고 말이죠. 진보네에서는 설명 중 이해가 안가는 게 있으면 덧글로 또 물어 볼 수가 있잖아요. 파란은 기계와 상대하는 느낌.

무엇보다 진보네 뽀글뽀글 머리가 가장 마음에 듭니다. ㅎㅎ

 

5. 진보블로그 메인 페이지에서 보강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기능이 있나요? 있다면 무엇인가요? 혹은 재미있는 아이디어가 있다면?? 

이런 건 저한테 기대하지 말아주세요. Pleeeease!

 

6. 진보블로그를 사용하면서 가장 짜증나는 점은 무엇인가요? 

짜증까지는 아니고요... 진보넷에 들어올 때는 주로 불여우를 사용하는데(특히 RSS가 편해서) 글쓰기 할 때 IE에서와는 달리 편집기 같은 게 안뜨네요. IE에서는 글꼴이나 색깔등을 바꿀 수가 있잖아요? 근데 불여우에서는 그 화면 자체가 안뜨더군요. 게다가 쓴 글을 불여우에서 '수정'하고나면 줄바꿈으로  문단과 문단 사이를 띄어 놓았던 것들이 다 사라지고 다닥다닥 붙은 모양으로 바뀝니다. 그래서 읽기만 할 때는 불여우로 들어오고, 글 쓸 일이 있을 때는 IE를 씁니다.

 

7. 진보블로그 외에도 다른 블로그에 많이 가시나요? 주로 어떤 블로그를 많이 찾게 되나요?

거의 안가요.


8. 새로운 블로그, 마음에 맞는 블로그를 만나게 되는 계기나 방법이 있나요?

다른 분들하고 비슷할텐데요, 블로그 홈에 올라온 글을 따라 갈 때도 있고, 아는이의 블로그에 달린 댓글이나 트랙백을 따라가는 경우, 제 글에 남겨진 댓글을 따라가는 경우 정도인 것 같아요. 새로난 블로그는 몇 번 눌러봤는데 대개는 '글 올린 것이 없는' 경우가 많아서 요즘은 거의 안눌러 봅니다.

 

9. 하루에 블로깅(쓰기 읽기 모두)에 쓰는 시간은 얼마나되고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블로그가 있다면 어떤 방법으로 방문하나요? 

블로깅 시간은 그때 그때 다른데요, 보통은 하루 20분~40분쯤. 거의 매일 들어오기는 합니다. 어떨 때는 두어시간 할 때도 있고요.

다른 블로그 방문방법은, 로그인 한 경우에는 주로 즐겨찾기를 이용하고요, 안한 경우에는 RSS리더기 Sage를 이용합니다.



10. 진보블로그는 블로거들의 자율적인 참여를 통한 실험적인 운영을 해보고자 합니다.
그런이유로 초기에 블로그 홈에 추출되는 "자가증식 블로그진"을 블로거들의 참여를 통해서 구성해 보려고 했는데 ....중략.... 자세한 내용을 보시고 더 나은 방식이나 추가할 다른의견이 있으시면 말씀해주세요.
- 그냥 추천버틍을 누르는 것이 아니라 각 포스트에 점수를 나누어주는 방식.
- 예를 들어 블로거당 각각 10점이 충전되면 그것을 마음에 드는 포스트에 적당하게 배분
.............

.............

- 점수를 점수라 부르지 않고 뭔가 다른 말로
- 탑에 오르지 못했지만 점수를 일정정도 얻은 글들을 모아서 볼수 있어야 한다?
(이방식을 채택하고 있는 외국 사이트 슬래쉬닷/ 1-5등급으로 글을 나누어 5등급외의 글도 볼수 있다)

이렇게 많은 것을 내놓고나서  "더 나은 방식이나 추가할 다른의견이 있으시면 말씀해" 달라니 저를 대체 뭘로 보시고...엄써요^^

 


11. 이 질문에 대답할 블로거를 5명 지목한다면? 질문에 대한 답은 이 포스트로 트랙백 보내주세요.

제가 아는 분들은 이미 다른 분들에 의해서 다 지목 됐걸랑요. 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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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봤다네 (덩야버전?)

지난 일요일 영화 보러 서울에 갔다.

웰컴투 동막골?, 친절한 금자씨?

그런 영화들을 영화관에서 보는 것은 아버지가 저 상태로 계시는 한 포기한 지 오래다.

어차피 아쉬운데로 나중에 DVD로 볼 수 있을테고 말이다.(금자씨는 아쉬울 것도 없지만)

 

알엠이 준비한 <장애코드로 문화읽기 8월 정기 상영회>에 다녀왔다.

쉽게 접할 수 없는 영화 보는 것이 주목적이었고, 그 김에 알엠도 오랜만에 볼 수 있고 말이다. 그런데 의외로 참 많은 사람을 만났다.

 

미디어액트로 가는 길에 10년 전 다니던 회사의 입사동기를 만났다. 애가 셋이나 되더군.(용감하다)

 

상영장소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서는 영화배우를 만났다. 핑크팰리스에도 나오고, 대륙횡단에도 나온. (이 분도 영화를 보러 왔다. 같이 술자리까지 갔건만 이름을 모른다. )

 

낯이 많이 익었다 싶었는데 알엠이 장차현실씨라고 알려줬다.

그 옆에는 딸 은혜양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은혜양도 영화배우군! 이번에 <다섯 개의 시선> 중 한 편에 주인공이란다.

 

사람 이름 외우는 데는 저주받은 것 아닌가 싶을 정도로 젬병인 나는 '서동일 감독'이라는 말을 듣고도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이름인데" 정도만 생각하며 누군지 물어 보지도 않았다.

그 분이 가고 나서 알엠이 다시 말해줘 알았다. "그래, 핑크팰리스의 감독 서동일!"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서동일씨와 장차현실씨가 부부가 되었다는 것이다!!! 오~호!

 

알엠이 만든 다큐 속의 주인공 허중씨와 경수씨도 왔다.

 

전동 휠체어를 탄 여자분도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인데 '버스를 타자'나 '핑크 팰리스'에서 봤나? 아님 사진집 '더이상 죽을 수 없다'에서 본 얼굴인가? 이도 저도 아니고 그냥 나의 착각? 그럴지도 모르지.

 

그리고 덩야를 오프에서 처음으로 만났다.

 

처음 가 본 모임에 이렇게 아는 사람이 많다니 하하^^  날 아는 사람은 알엠과 덩야밖에 없지만 말이다.



영화 얘기는 여기보다는 공동체 게시판에 가서 해야 할 것 같은데 이 참에 가입을?

고민 좀 해보고.

 

아주 간략히 말하자면 영화들은 다 재미 있었다.

독특한 형식 때문에 '어느 네 팔 소녀의 아주 사소한 이야기'를 제일 재미있게 봤고,

스토리가 가장 재미있었던 것은 '알 수 없는'이었다.

생각을 많게 만든 것은 '아빠'(이 영화를 보면서 엉뚱하게도 잠시 박근혜가 생각났다. 왜 그런지는 나중에)

'가는 길에'는 어릴 적에 봤던 만화 독고탁의 한 장면을 떠오르게 했고,

'기적'은 좀 그랬다.

'산책'에선 엄마의 연기 때문에 전혀 웃긴 내용이 아님에도 미소가 지어졌고,

'물결이 일다'는  가장 현실적인 내용이라 가장 갑갑하고, 가장 안타깝고, 그럼에도...

(이렇게 한 영화를 한 줄로 설명해 버리니 정말 거시기 하군.)

 

어쨌든, 누가 골라 준 영화를 보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다.

영화 하나 하나마다 할 얘기가 많아서 오히려 엄두가 안난다.

하여튼 알엠에게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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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가 돌아왔다.

돌아온 아버지 자전거

 

아버지가 병이 난 후 타지 못했으니까 벌써 1년 이상 타지 않은 짐자전거가 있었다.

34년동안 하루도 닫지 않은 가게처럼 자전거도 늘 그 모습이었다.

자전거는 여러차레 바뀌었지만 아버지는 늘 같은 모양의 자전거를 구입했기에 내겐 한 자전거처럼 느껴진다.

 

그 자전거를 탈 일이 없어졌지만 없애지는 않았다.

아버지가 다시 나아서 타겠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 말을 하실 때 이미 아버지에겐 희망이 남아있지 않았던 때였다.

 

문닫을 때 예전에는 가게 안으로 들여놨지만 더이상 들여놓지 않게 된지도 꽤 된다.

그런 짐자전거를 가져갈 일도 없거니와, 없어져도 상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1년 가까이 지났는데 며칠 전 그 자전거가 없어졌다. 

요 몇주 사이에 아버지는 급격히 않좋아 졌고, 그걸 마치 확인이라도 하는 양

더 이상 쓸모없는 자전거가 사라졌다. 

기분이 참 그렇더라

 

그런데 오늘 전화가 왔다.

우곡상회 자전거가 자기네 가게 앞에 그저께부터 서있다고 말이다.

아버지는 자전거에 가게 이름을 써놓았는데 우리집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다.

워낙 작은 동네이고, 워낙 오랬동안 있었던 가게이기는 하지만...

 

조금 전 끌고 왔다.

 

 

 

나와 인연을 맺었던 녀석들

 

어쩌다 예전에 스쳐 지나간 녀석들 사진을 정리할 일이 있었다.

그동안 나와 인연을 맺은 녀석들 사진을 한 장으로 만들어 봤다.

 

 




이 사진들을 정리하면서 우울해졌다.

대부분 해피엔딩이지만

(새 가족을 만난 다음에 어케 됐는지는 모른다. 그냥 좋게 생각하고 마는 거지) 

두 녀석 때문에 우울해 졌다.

한 놈은 위 사진에 있고, 한 녀석은 사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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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겐 쌍둥이 형이 있다.

일란성이고 어렸을 때는 꽤 많이 닮았었기에

흔히들 쌍둥이하면 떠오를만한 일들을 많이 겪었고

다 커서도 쌍둥이하면 대개 나올 법한 질문들을 듣곤했다.

"쌍둥이는 정말 텔레파시가 통하나?"라는 질문이 가장 황당하지만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다.

 

나는 잔병치레 같은 것을 거의 안하고 자랐는데

쌍둥이형은 달랐다.

1년내내 감기를 달고 살기도 했고,

한 쪽 귀는 난청이었고,

알레르기가 아주 심하기도 했다.

 

새끼를 여럿낳는 동물들이 있다.

그 중 첫번째 나온 녀석을 문열이('이문열'과는 상관 없고 '문을 열고 나온 녀석'이란 뜻)라고 한다.

대부분 가장 허약하다고 한다.

나오자마자 죽기도 하고.  

 

사람에게도 이게 성립하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어쨌든 어렸을 때 난

똑같이 나오고도 병을 달고 살았던 형을 보며(형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안스럽기도 했고, 내가 그러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했다.

 

차츰 자라면서 잔병치레는 없어졌는데 알레르기는 계속 심한 상태였다.

그러다 대학에 가면서 거짓말 같이 감쪽같이 없어졌고

우린 농담처럼 "술을 하도 많이 먹어서 체질이 변했다"라고 말했다.

 

둘다 술을 무지하게 좋아했지만 같이 술마신 적은 단 한번도 없다.

몇년 전 형이 술을 끊었으니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형과 나는 그렇게 가깝고도 먼 사이다.

분명 친밀함을 느끼면서도 서로 터놓고 무슨 얘기를 한 적은 없다.

반대로 얘기하면 터놓고 얘기한 적은 없지만 우린 친밀하다.

나이 먹으면서 서로의 인생관이 너무 달라져 서로 할 얘기가 점점 없어지고는 있지만...

 



두 번 쓰러져 119에 의해 실려갔고, CT촬영을 했다.

 

뇌혈관 내부가 파열되서 언제 터질지 모른다고 했다.

터지면 사망할 것이란다.

 

그래서 오늘 수술을 받았다.

수술은 '정교한' 수술이긴 하지만 '규모는 작은' 수술이었다.

다리에 있는 정맥을 통해서 뇌혈관에 관을 삽입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어찌하는지 그림이 잘 안그려진다.

 

수술은 잘됐는데 진짜 문제는 그게 아니다.

뇌혈관 때문에 찍은 뇌사진에서 뇌하수체 쪽에 종양이 발견됐다.

 

병원에선 급한 뇌혈관부터 먼저 해결하고 나중에 처리하자고 해서

아직까지는 자세한 얘기를 못들었다.

 

지난 주 이 얘기를 듣고 작년 아버지 때의 악몽이 떠올랐다.

- 뇌가 좀 부어있다.

- 단순한 염증일 수도 있고 종양일 수도 있다.

- 종양이 의심되는데 양성인지 악성인지는 알 수 없다.

 

그래, 그렇게 그렇게 진행되어 갔다.

희망적으로 생각하다가 하나씩 하나씩 무너져 가고.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뇌하수체 종양은 대부분 양성이라고 한다.

그러니 죽을 일은 없겠지.

근데 안죽기만 한다고 괜찮은 건 아니잖아.

남자는 자각증상이 거의 없다고 한다.

종양 크기는 5mm 정도로 아주대에서는 제법 큰편에 속한다고 하는데

아버지 때문에 오늘 성모병원에 가서 물어보니 그정도면 별로 큰 것은 아니라고.

 

작은 경우는 약으로 해결하고

조금 크면 코속을 째고 들어가 수술하고

더 크면 이마를 절개해서 수술한다고 한다.

 

아주대에서는 코를 통해서 하기에는 좀 크다고 했다는데

아버지 뇌수술 받을 때의 과정을 생각하면 상상하기도 싫다.

 

아버지도 뇌종양으로 지금 1년 넘게 침대를 못벗어나고 있는데 형까지...

게다가 뇌종양 중 뇌하수체 종양은 유전이 원인이라는데

형과 나는 유전적으로 완벽하게 똑같은데

내 머리속에서도 지금 자라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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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이 이것 저것

나비는 아직도 아프다

 

다음까페 냥이네에서 추천을 받은 병원을 찾아 평택에 있는 동물병원에 갔다.

관절이 잘못된 것 같다고 한다.

엑스레이에 나타날 정도는 아닌 것 같으니 너무 걱정은 말라고 한다.

아픈 곳을 자꾸 만지고, 엑스레이 찍느라고 제압을 하다가 여섯군데나 물렸다.

예전에 콩콩, 꼬맹한테도 물려봤지만 이번엔 곪고 부어오르기까지 해서 나도 병원에 갔다.

 

이틀 후 전혀 나아지는 기색이 없어서 다시 데려가서 일단 영양제 주사를 놓아줬다. 식탐이 워낙 심한 우리 나비가 거의 일주일간 별로 먹은 것이 없어 걱정이 됐기 때문이다.

더위를 먹은 것일 수도 있다고 한다.

작년 여름엔 아무 일 없이 지나갔는데.

3일치 약을 다 먹이고도 차도가 없으면 아무래도 피검사를 해보자고 해야겠다.

나를 보면 안스럽게 울어대는데 해줄 것이 없으니 답답하다.

 

 

전철에서 한바탕?

 

지난 일요일 용산에 갔다가 전철을 타고 오는 길이었다.

금정쯤 지났을까? 저쪽이 시끄럽다.

나이도 왠만큼 드신 분이 부인인듯한 아주머니에게 큰소리로 욕을 하고 있었다.

아이를 데리고 있던 아주머니들이 애들을 데리고 이쪽으로 자리를 옮긴다.

그냥 좀 하다 끝났으면 좋으련만 그칠줄을 모른다.

 

잠시 고민모드

가서 얘기를 할까?

술도 한 잔 한 것 같은데 내가 말한다고 들을까?

그렇다고 그냥 두면 마냥 저럴 것 같은 기세이니

내가 가서 긁어부스럼을 만든다고 해도 더 나빠질 것도 없을 것 같고.

그래 가보자

 

최대한 공손하게

"어르신, 아이들도 많고 그러니 목소리 좀 낮추시고 욕도 삼가해주셨으면 하는데요."

늘 그런 건 아니지만 운이 좋으면 이것으로 끝나는 경우도 가끔 있었다.

불행히도 이번엔 운이 좋지 못했지만.

 

60대 초반쯤 되어보이는 그 어르신의 레파토리를 대충 옮겨본다. 물론 같은 얘기를 최소한 서너번 이상을 반복하셨다.(누구나 쉽게 예상할만한 대사들?)

- 젊은 것이 건방지게

- 집에 가면 너만한 아들이 있다

- 넌 애비도 없냐?

- 내가 너한테 욕했냐? 젊은 놈이 오지랍도 넓게 왜 남의 일에 상관이냐?

- 내가 공수부대 출신이다.

- 나도 프라이드가 있는 사람이다.

- 우리 아들이 법대 나왔다.

- 내가 소시적 같았으면...

 

너무 막무가내로 나오니까 건너편에 계시던 나이드신 아저씨께서

"젊은 사람 말 그른 것 하나도 없네"라며 거드셨더니 더더욱 큰 소리로 떠들기 시작했다.

공수부대 출신임을 수없이 강조하자 이 아저씨도 화가나서

"야, 너 내려"라고 하셨지만 자칭 공수부대 어르신은 내리지 않았다.

내가 보기엔 둘다 내릴 생각이 없다.

공수부대 출신이란 이 어르신의 필살기는 겸손하게도

"너 임마, 조인트 한대 맞아볼래?" 정도다.

화가 나 달려들듯 하다가도 내가 붙잡으면 못이기는척 다시 자리에 앉는다.

내가 별로 세게 붙잡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나이밖에 내세울 게 없고, 입만 팔팔하게 살아있는 불쌍한 노인네.

 

대거리 하는데는 소질이 없지만 깐죽거리면서 상대방 열받게 하는데는 일가견이 있는데 그러지 않았다. 다른 승객들에게 너무 민폐가 될테니까.

게다가 난 싸가지가 꽤 있는 편이다.

 

물론 '넌 애비도 없냐?"고 하기에

"있습니다. 근데 저희 아버지는 전철에서 욕같은 거 안하시거든요."

"젊은 놈이 오지랍도 넓다"는 말에

"제가 좀 넓기는 하죠"라고 하기는 했지만

대체로 그냥 혼자 떠들게 내버려 뒀다.

 

재미있는 것은 계속 열받아 떠들면서도 차츰 욕이 줄어들어 나중에는 계속 뭐라고는 하면서도 내게 욕을 하지는 않았다.

 

"나도 프라이드가 있는 사람이다"라는 말을 수차례 반복했는데 이래줄 것 그랬다.

"전 카렌스가 있는데요."

 

 

황당한 DVD

 

이번에 용산에 가서 불법 두장, 정품 두장을 샀다.

에단호크가 나오는 '어썰트13'을 샀는데 정말 황당하다.

어떤 통로를 통해서 아직 개봉도 하지 않은 영화들이 나오는지는 나도 모른다.

아마 외국에서 긴급 입수해서 나름대로 자막작업을 했나본데, 번역이 가희 압권이다.

번역이 좀 잘못된 정도가 아니다.

처음엔 눈치를 못챘는데 조금씩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신경을 써서 들어봤더니, 세상에나 세상에나

아예 소설을 썼다.

Holiday(우리발음으로 할러데이)를 할로윈데이라고 번역한 것은 애교스럽게 봐줄 수도 있다. 그러나...

나중에 시간나면 이 황당하고 재미있는 경험을 정리해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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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루고 미루고 또 미루고

간장오타맨님께 트랙백 보내겠다고 한 지가 한달이 넘은 것 같은데 난 아직 시작도 못하고 있다. 오산 수청동 철거와 관련하여 전철연을 비판한 한겨레21 기사에 관한 글이었는데, 내가 오타맨님의 의견과 같았다면 이렇게 미루고 있을리도 없고, 애초부터 트랙백 보낼 일도 없었겠지. 내가 미루고 미루는 동안 그 때 죽은 철거반원이 화염병 때문에 죽은 게 아니라는 사실도 밝혀졌고, 경찰이 철거민을 향하여 골프연습을 했다는 사실도 밝혀졌고, 무엇보다도 경찰이 투입되어 단 몇분만에 진압되고 모두 끌려가는 것으로 끝이 나버렸다. (이 일 자체가 끝난 것은 아니겠지만) 철거민이 던진 화염병 때문에 죽은 게 아니라는 것이 밝혀진지도 꽤 됐는데 SBS에서는 경찰이 진압하는 사건을 보도하면서 기자의 마지막 멘트가 이거였다. "이 곳은 철거민이 던진 화염병에 의해 철거반원이 숨지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한 곳입니다." 난 한겨레 신문을 보고 '부검결과 폐에서 그을음이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화염병에 의해 사망한 것은 아니다'라는 걸 알았는데 SBS기자는 대체 뭐하는 새끼인가? 자신이 보도하는 사건에관해 이런 중요한 사실조차 모르고 보도했다면 그런 무식하고 무책임한 놈은 기자 자격이 없다. 아님, 부검결과를 알고도 이렇게 보도했다면 명백하게 '사기'친 것이다. 이 뉴스를 본 수많은 시청자들은 아직도 '철거민이 사람죽였다'고 알고 있을 것 아닌가. 어쨌든 사건이 이렇게 돌아가다보니 점점 전철연에 관한 글쓰기가 조심스러워진다. 물론 나의 기본적인 시각은 변하지 않았기에 정리해서 쓰면 되긴 하는데, 정리하는데 너무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기도 하고, 오산에서 직접 철거민들과 연대하여 투쟁하고 있는 오타맨님이 이런 비극적 결말로 인하여 슬픔과 분노에 차 있을텐데 내가 이 상황에서 '전철연에 비판적인' 글을 쓴다는 것이 예의에 어긋나는 것 같아서 말이다. 이래저래 또 미루고 미룰 것 같다. 에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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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불멸의 이순신을 안보는 이유

첫째 이게 가장 크고 결정적인 이유인데 'TV 자체를 원래 잘 안본다.' 둘째 별로 합당한 이유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남들이 공감해주길 기대하지도 않는데 '이순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이순신에게는 아무 잘못 없다. 내가 이순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단 하나! '박정희가 이순신을 무지무지 좋아했기 때문이다.' 내가 너무나 혐오하는 인물이 너무나 사랑한 인물. 별로 이성적인 감정은 아니지만 그러려니하고 이해해 주시라. 셋째 아버지 때문에 조금씩 할 수 없이 본 적이 있는데 '도무지 마음이 편하지가 않다.' 특히 일본함대가 우세를 보이는 듯하다가 이순신의 지략으로 순식간에 전세가 역전되는 순간 말이다. 일본군 장군이야 배우들이지만 일반 병사는 대부분 엑스트라들이 맡는다. 그들의 연기는 사실 어설프다. 게다가 나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감정이입 같은 게 거의 없는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엑스트라들이 그 상황에서 어설프게 당황하는 모습을 보는 건 만으로도 마음이 편하지가 않다. 풍신수길은 침략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이며 그 밑의 장수들이야 사실 자발적 동조자들이기에 패배를 하건 죽건 불쌍할 것이 없지만 그 밑의 쫄따구 들이야 사실 무슨 큰 죄가 있겠는가. 먹고 살려고 군인이 됐거나 징병되었겠지. 전세가 역전되고 조선 수군의 기세가 등등해지면서 일본 수군들이 당황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내 떼거지로 죽어나가기 시작한다. 나에겐 이 장면이 통쾌하긴 커녕 너무 가슴아프다. 넷째 '난 군인을 좋아하지 않는다' 반전 평화주의자가 전쟁영웅을 좋아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가 않지? 물론 내가 반전평화주의자씩이나 되는 것도 아니고 이순신을 전쟁영웅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리 적절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이순신은 쳐들어온 적을 막은 것 뿐이니까. 반전평화주의라고 해서 "누가 쳐들어 오든 그냥 평화롭게 당하라"라는 것은 아니잖아? 그런데 한 번 생각해 보자. 이순신은 무슨 의병대장이 아니라 원래 부터 군인이었다. 만일 그 당시 조선이 잘나가서 다른 나라로 영토확장을 꾀했다면 이순신이 "저는 침략전쟁에 동참할 수 없습니다"라며 퇴역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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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조선일보

꼰대처럼 보일 것 같아서 아무말 안하려다가...

 

* 알엠님의 [시스템과는 싸우고] 에 관련된 글.



조선일보와 왜 상대를 하지 말아야하는지, 조선일보를 '이용한다'라는 것이 얼마나 얼토당토 않은 생각인지에 대한 이유를 수십 페이지에 걸쳐 떠들 수 있지만 그건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꼰대의 모습이 될 것 같고, 그냥 김규항의 옛날 글을 인용합니다. (나에게 '꼰대'는 꼭 부정적인 뜻은 아니지만^^)

 

나는 그 신문의 소품 노릇을 마다하지 않는 지식인들이, 오늘날 근대성을 가진 나라라면 지식인이 극우 신문에 기고하는 일만으로도 사회적 스캔들이 된다는 상식쯤은 갖길 바란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그 신문이 극우신문이라는 의견이 아직은 충분한 사회적 합의에 이르지 못한 현실을 인정한다. 게다가 그 신문에 출연하는 이들 가운데는 머지 않아 나의 미더운 벗이 될 사람이 여럿이다. 나는 그들의 이름을 파시스트의 부역자라 게시하기보다는 지루함을 무릅쓰는 논쟁이나 토론을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믿는다. 김규항의 <그 신문에 침을 뱉어라>

 

 

이글이 쓰여진 게 99년이다. 그즈음엔 주위사람들에게 '조선일보 보지 말라'고 말하면 아주 이상한 놈 취급을 받았다. (진보적이라는 사람들조차 조선일보의 문제에 대해서는 무지했거나 무관심했다) 특히 최장집 사건이 있기 전엔 더 그랬고 말이다. 윗글과 달리 이젠 "그 신문이 극우신문이라는 의견"이 상당수 사람들에게 상식으로 자리잡았는데도 조선일보는 역시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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