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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늑대비님의 [자본주의 발생과 노동자계급의 기원] 에 관련된 글.
세계노동운동사 | 정치적 자립을 향한 노동자들의 투쟁 | |||||||||||||
김금수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이사장) | ||||||||||||||
1830년 프랑스 7월혁명은 정권을 교체한 노동자계급 투쟁의 첫 번째 사건이었어요. 그러나 노동자들은 정치적 사회적으로 얻은 게 없습니다. 투쟁의 결실을 전유한 것은 부르주아 엘리트였어요. 이를 통해 노동자들은 부르주아지의 계급적 이기심을 확인하게 되었고, 부르주아지에 대한 불신을 갖게 됩니다..... | ||||||||||||||
"정치적 성숙은, 노동운동이 자기 이익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사회 제도를 변혁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인식함으로써 비로소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노동자 대중의 다수가 근본적 개혁이 바로 자신들의 직접적 이익이라는 점을 현실 속에서 깨닫지 않으면, 노동운동은 본래 의미의 정치적 운동으로 발전할 수 없는 것이다(A. 스터름탈, 1983: 57)." 1. 영국의 차티즘 운동 차티즘 운동(Chartism)은 1838년 5월에 공포된 인민헌장(the People's Charter)의 실현을 목표로 이십 년 가까이 전개된 노동자계급의 광범한 대중적·독립적·조직적인 운동입니다. 인민헌장이 내세운 여섯 개의 요구 사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 성인 남자의 보통 선거권, ② 비밀 투표, ③ 평등한 선거구, ④ 매년 선거(의원 임기 1년), ⑤ 후보자에 대한 재산 제한 철폐, ⑥ 의원에 대한 세비 지급 등이 그것이죠.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반란이자, 국제 노동운동의 빛나는 서막이라 표현되는 차티즘 운동의 배경과 동인을 살펴봅시다. 앞에서 본바와 같이, 영국은 18세기 말부터 산업 혁명이 진행되어 세계 최초의 공장 프롤레타리아가 발생했고, 1830년대에는 기계가 대규모로 도입됨으로써 공장 노동자들이 대량으로 형성되었습니다. 이러한 자본주의 진전과 더불어 자본가들은 자본 축적과 부의 집중을 이룰 수 있었지만, 노동자들은 실업과 저임금, 그리고 무권리 상태에서 격심한 고통을 겪어야만 했죠. 정치적으로도 노동자들은 기본적인 자유와 권리를 확보하지 못했어요. 1832년에 부르주아들을 중심으로 한 중산계급의 투쟁으로 선거법이 개정되는데, 이에 따라 부르주아들은 정치 권력을 장악하게 되고, 토지 귀족층을 압도하는 세력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당시 영국 인구 1천6백만 명 가운데 유권자는 16만여 명에 불과했어요. 전국노동조합대연합 1832년 정치개혁에서 노동자들의 선거권은 보장되지 않았습니다.
1832년 이후 노동조합 운동은 활기를 띠었고, 노동자는 부르주아에게 압력을 행사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1834년에는 전국노동조합대연합(the Grand National Consolidated Trades Union)이 결성되었는데, 이 조직은 건설노동자, 방적공, 도공(陶工), 재봉사, 모직공, 농업노동자의 큰 노조들을 포괄했다. 로버트 오웬이 이 조직의 결성을 주도했으며, 기본 이념은 "노동조합이 사회의 지배권을 장악하고 나아가 산업을 운영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대연합은 분산성을 띤 직인조합(craft union)과 달리 전국 단위의 중앙집권적인 계급 조직이었습니다. 대연합은 1834년 조합원 50만 여명을 확보했고, 파업을 조직했으며, 오웬의 '교환시장' 사상을 실현함과 동시에 노동조합을 생산자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려 했죠. 그러나 대연합은 지도부의 분열과 지배 세력의 공격, 파업 준비 부족으로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개혁 법안에 대한 환멸, 새 구빈법에 대한 분노, 노동조합 사업 부진에 대한 좌절, 오웬의 계획 실현 실패 때문에 노동자들은 더한층 절박하게 정치 투쟁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됩니다. 국가 권력에 다가가야 자신들의 곤경을 덜 수 있다는 확신이 커진 것이죠. 그리고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이해 관계는 적대적이며, 노동자의 정치적 권리는 자주적인 행동을 통해서 얻을 수 있음을 인식하게 됩니다. 런던노동자협회 이런 시대 상황에서, 차티즘 운동은 1836년 6월 런던노동자협회(the London Working Men's Association)의 창설로 본격 시작됩니다. 런던노동자협회는 인민헌장을 작성하여 노동자 운동에 '차티즘'이라는 명칭을 주었고, 초기 운동을 주도하면서 차티즘 운동의 산파 역할을 수행합니다. 런던노동자협회를 보면 이전의 급진주의 단체와 구분되는 특징이 발견됩니다. 협회가 노동자 출신만을 회원으로 인정한 점이 대표적입니다. 런던노동자협회는 노동자 자신의 힘과 자각, 그리고 독자 활동을 촉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소부르주아적 민주파나 급진적 부르주아와 협조했습니다. 말하자면, 런던노동자협회는 노동자의 독자 활동을 강조했음에도 중산계급의 협조를 소망했고, 또 그들과 맺는 제휴의 가치를 인정했던 것이죠. 런던노동자협회가 1836년 10월18일 채택한 결의안이 이런 사실을 뒷받침합니다. "지금과 같은 갈등상태에서는 이해 관계가 우리와 적대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평등한 권리 및 법률과 정의를 열렬히 주장하는 자비심 있고 열성적인 친우들에게, 의회가 모든 사람의 이해관계를 대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우리의 요구에 함께 할 것을 호소한다", "그런 결함이 모두 해롭고 분파적인 경쟁심을 망각으로 사라지게 하고, 이 나라의 모든 자원을 전국민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데 사용하도록 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런 기본 방침에 따라 런던노동자협회는 1834년 해체했다가 1837년 다시 발족한 급진 부르주아 연합 '버밍엄 정치동맹'(the Birmingham Political union)과 연대하여 활동합니다. 1838년 5월 런던노동자연합 지도자들은 인민헌장을 공식화하는 한편, 버밍엄 정치동맹이 '국민청원'을 발표하자 노동자들은 한 손엔 인민헌장을, 다른 손엔 국민청원을 들고 의회 개혁 운동을 활기차게 벌입니다. 런던노동자협회와 버밍엄 정치동맹은 전국 각지에 사람들을 파견하여 노동자 조직 작업에 힘을 쏟았습니다. 여러 지역에서 노동자 집회가 열리고, 이들 집회에서 노동자들은 인민헌장을 채택하고, 청원에 서명함으로써 명실공히 차티즘 운동이 전개된 것입니다. 1839년 행해진 제1차 청원은 128만 명의 서명을 받았는데, 이 서명은 214개 도시에서 열린 5백 회가 넘는 집회에서 모아진 것이었어요. 가짜 서명과 선거권 요구에서 제외된 여성들의 서명을 고려한다 해도, 그것은 실제 유권자 보다 훨씬 많은 수의 국민을 대표하는 것이었어요. 청원은 다음 내용으로 시작됩니다. 영국은 풍요한 토지와 온화한 기후와 풍부한 자원을 가진 나라다. 그러나 국가의 번영을 약속하는 모든 이런 요소들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자신은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억압당하고 있다. 우리는 그처럼 고통스럽고 오래 계속되는 참상의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신중히 고찰해 왔다. 결국 지배자들의 우매함이 신의 섭리를 무용지물로 만든 것이다. 이 나라의 모든 에너지가 이기적이고 무지한 자들의 권력을 쌓는 데 소비되었고, 그 자원은 그들의 힘을 강화하는 데 낭비되었다. 소수의 이익을 위해 소수가 지배하고 있다. 다수의 이익이 무시되고, 무지막지하게 짓밟히고 있다.1837년∼1838년에 걸쳐 노동자들은 런던민주주의협회와 대(大)북부동맹 등의 정치조직을 설립하고, 소부르주아 민주파가 제시한 헌장의 슬로건을 채택합니다. 당시의 차티즘 운동은 영국과 스코틀랜드 공장 지대의 산업노동자들, 웨일즈의 광부들, 런던의 저임금 노동자들, 수공업 부문 직인이 운동에 참가함으로써 활기를 띠게 되죠. 차티즘의 절정, 전국헌장협회 1839년 2월 런던에서 차티스트 전국회의가 열렸지만, 모인 대표들은 부르주아 급진파를 비롯해 다양한 노선을 주장하는 여러 분파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명확한 투쟁 방침을 설정하기 어려웠습니다.
1839년 7월 하원은 청원서 심의를 거부하였고, 총파업을 비롯한 최후 조치를 시행하려던 전국회의의 노력은 실패로 끝납니다. 1840년 7월 노동자계급 최초의 대중적 정치조직인 전국헌장협회(the National Charter Association)가 설립되고, 1842년 제2차 국민청원이 시작되면서 차티즘 운동은 절정기를 맞게 됩니다. 1842년 경제 불황에 따라 노동자들의 생활은 한층 더 곤궁 속으로 빠져들었고, '저주받은 공장제'에 대한, 그리고 억압과 잔인함에 바탕을 둔 사회 제도에 대한 노동자들의 대중 투쟁이 고양됩니다. 제2차 국민청원은 다음 내용으로 시작되죠. 정부는 모든 국민의 자유를 보호하고 행복을 증진하기 위해 생겼으며, 모든 국민에게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나 현재의 하원은 국민이 선출하지 않았고 무책임한 행동만을 일삼으며, 다수의 비참함과 불만과 호소를 무시한 채 소수의 이익만을 추구하고 있다. 하원은 국민이 표현하는 희망에 반대되는 법률을 제정하고 비합리적인 수단으로 그들에게 복종할 것을 강요한다. 그리하여 한편에는 참을 수 없는 독재정치를, 다른 한편에는 점점 몰락해 가는 노예를 만들어내고 있다. 소규모의 직업인과 노동자계급을 전적으로 몰락시키면서 토지와 자본의 이익을 옹호한다. 부정과 부패와 협박과 사기가 모든 선거에서 난무하여 … 세금은 현재 참기에는 너무 과하다. 부와 사치가 지배자들 사이에 만연하는 반면, 피지배자들은 빈곤과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다. … 모든 이런 악폐는 계급 입법으로부터 발생한다. 그러나 하원은 이를 철폐하기는커녕, 오히려 늘리려 항상 노력하고 있다.한편, 중산계급 자유무역 주창자들은 1815년에 제정된 곡물법이 지주층의 특권을 유지하게 만드는 커다란 악폐라고 주장하면서, 이를 폐기하기 위해 1839년 반곡물법연맹(Anti Corn-Law League)을 창설했습니다. 자유무역에 호의적인 대부분의 부르주아들이 인민헌장에 정식화된 요구들을 지지했고요. 자유무역주의자들이 의도한 것은 곡물법 반대 투쟁에서 노동자들의 강력한 지지를 얻어 그것을 폐지하고, 그 뒤에는 어제까지의 동맹자인 노동자들을 배반하여 보통선거권 요구를 방기하는 것이었죠. 그러나 차티스트들은 자유무역주의 부르주아와의 동맹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유무역주의자들과 공동으로 추진하는 곡물법 반대 투쟁이 실제로는 차티즘 운동을 자본가의 이익에 종속시킬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곡물법이 폐기되어 곡가가 떨어지면, 자본가들은 이에 따라 임금을 내리게 될 것이어서 노동자들은 곡물법의 폐기로부터 얻을 게 아무 것도 없다는 해석에 근거한 것이었죠. 이처럼 계급적 자립을 추구한 차티즘 운동은 전국헌장협회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노동자 대중은 역사상 처음으로 그들의 공통적인 계급 이익에 정치적 형식을 부여했고, 노동자 당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자립적 정치조직으로 결합하여 행동했습니다. 차티즘 운동의 영향력 증대는 3,317,752명이 서명한 제2차 국민청원에 대한 대중적 지지를 통해 반영되었습니다. 제2차 국민청원서 제출을 위해 5월 2일 하원으로 행진한 사람의 수를 『타임즈』는 5만 명이라고 밝혔으나, 차티스트 신문인 『노던 스타』(Northern Star)는 이보다 열 배는 더 될 것으로 추정했죠. 이 무렵 노조운동 안에서 차티즘의 영향력이 커짐에 따라 수많은 노조들이 전국헌장협회에 참가하게 됩니다. 1842년 8월 총파업 차티즘 운동의 정점을 이룬 것은 아무래도 1842년 8월 총파업이라 할 수 있어요. 8월8일 며칠 전에 일어났던 애쉬톤 하이드 스탤리브리지 지구(랭카셔) 파업이 확대되기 시작했고, 8월10일 맨체스터에서 일어난 파업은 총파업의 성격을 띠었습니다. 8월16일까지 파업은 랭카셔, 체셔, 웨스트 요커셔 일부로 크게 번집니다. 노동자들과 정규군 부대의 지원을 받은 경찰부대 사이에 충돌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유혈 사태가 빚어지기도 합니다. 영국 산업의 심장부를 형성하는 넓은 지역이 사실상 내전 상태에 들어간 것이죠. 파업이 내건 슬로건은 '인민헌장과 공정한 임금'이었어요.
이런 사태 진전에도 불구하고, 파업 지도부는 노동자들에게 운동을 '법과 질서' 테두리 안에 한정시킬 것을 호소하면서 실제로 파업을 이끌 어떤 지도 방침도 내놓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사실상 파업을 끝내는 데 동의합니다. 이 무렵 부르주아 시의회는 정규군의 지원을 받아 중심 산업들에서 일어난 파업을 억누릅니다. 8월 20일 이후 파업은 몇몇 지역에서 고립되어 남았을 뿐입니다. 지배계급은 파업 참가자들을 엄격히 처벌했습니다. 노동자 수천 명이 투옥되거나 식민지로 추방되었고, 많은 지도적 차티스트들은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어요. 차티즘 운동의 쇠퇴 1842년 패배는 차티즘 운동의 쇠퇴를 가져옵니다. 이는 차티즘 운동 지도자들이 1842년에 야기된 혁명적 긴장을 이용할 능력이 없었고, 차티즘의 이데올로기와 전술 사이에 심각한 내적 모순이 존재했으며(즉, 차티스트들의 계급적 자립 지향과 초계급적 환상 사이의 모순, 투쟁의 혁명적 성격과 '법 일반'에 대한 신뢰 사이의 모순), 1843년∼1845년 사이에 걸친 상공업 붐이 노동자들의 상태를 얼마간 개선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됩니다. 차티즘 운동의 마지막 정치 투쟁은 1848년에 일어납니다. 1847년 영국이 심각한 경제 불황에 빠져든 가운데 1848년 2월 프랑스에서 시작된 유럽의 혁명적 정세에 고무되어 대중운동이 고양됩니다. 전국 곳곳에서 대규모 집회가 열렸고, 1848년 4월 570만 명의 서명을 받은 청원서가 의회에 제출되었어요(당시의 영국 인구수는 1,900만 가량이었죠). 정부는 25만 명에 이르는 군대와 경찰을 동원하여 집회와 시위 등을 막으며, 다수의 지도자를 체포하여 장기간 투옥합니다. 그 뒤 차티즘 운동은 두 서너 해 동안 계속되기는 했으나, 그 위력과 영향력이 회복되지 못한 채 약화됩니다. 차티즘 운동은 1847년 6월 제정된 10시간 노동법, 공장법, 탄광법 등 사회입법을 노동자들에게 성과로 가져다 주었습니다. 차티즘 운동은 패배로 끝났습니다. 에릭 홉스봄은 『혁명의 시대』(1999, 한길사)에서 차티즘 운동의 실패 원인으로 지도층의 무능력, 지방 및 부문간의 차이와 의견대립, 그리고 거대한 청원운동 이외에 통일된 전국적 행동을 취할 줄 몰랐던 무능력을 꼽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뒤로 전개된 국제노동운동 역사에서 독특한 하나의 서막 구실을 합니다. 노동자 운동이 부르주아지에 대한 종속에서 정치적 자립으로, 경제 투쟁과 계급 평화에 바탕을 둔 사회개혁 계획에서 정치적·사회적 혁명으로, 분산적 행동과 분립적 조직에서 전국적 규모의 강대한 운동과 통일된 조직으로 전진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차티즘 운동은 노동자 투쟁에서 대규모의 통일성을 이룩함으로써 노동운동 역사에서 새로운 국면을 보여주었고, 그것은 영국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의 발현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2. 프랑스 노동자들의 봉기 1830년 프랑스에서 일어난 '7월 혁명'은 유럽 정치 지형에 큰 충격을 던졌을 뿐만 아니라 노동운동 역사에서 중요한 이정표가 됩니다. 이 혁명에서 파리 노동자들은 가장 전투적이고 무서운 세력으로 등장했어요. 부르봉 왕조 권력을 무너뜨린 '영광의 3일'을 쟁취한 것은 노동자들이 힘차게 개입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정권을 교체한 노동자계급 투쟁의 첫 번째 사건이었어요. 그러나 노동자들은 정치적 사회적으로 얻은 게 없습니다. 투쟁의 결실을 전유한 것은 부르주아 엘리트였어요. 이를 통해 노동자들은 부르주아지의 계급적 이기심을 확인하게 되었고, 부르주아지에 대한 불신을 갖게 됩니다. 리용 봉기 7월 혁명이 일어난 다음 해인 1831년 11월, 프랑스에서 둘째로 큰 도시 리용에서 노동자 봉기가 일어납니다. 리용 봉기는 매뉴팩처 방식에 기반한 특유한 산업조직 체계에서 발생했죠. 당시의 생산 방식은 자본가적 매점 상인이 견직 원사를 구입하여 직조공(織造工)을 고용한 소규모 작업장 소유주에게 이를 제공해 제품을 주문하는 방식이었어요. 작업장 소유주와 그 가족들은 노동자와 함께 일하는 것이 보통이고, 이들 소경영주와 노동자들은 합세하여 매점상인에 대항하기도 했어요. 여기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노동·생활조건은 열악했습니다. 리용의 견직산업은 1826년 이후 수출 부진으로 심각한 위기에 빠져들었고, 노동자들의 상태는 더욱 곤궁해졌습니다. 게다가 '7월 왕정'이 새로운 재정법을 만들었는데, 이는 빈곤층의 부담을 한층 더 키웠습니다. 더욱이 매점상인들은 실업을 악용하여 구매단가를 낮추었고, 그 결과 임금은 낮아졌어요. 이런 상황에서 상인들이 시 당국의 임금인상 종용을 거부하자, 노동자들의 분노가 폭발합니다. 11월20일 노동자들이 끄롸 루스(Croix-Rousse) 교외 광장에 모여듭니다. 그들은 일을 멈추고 다음날 자신들의 요구를 공동으로 시 당국에 제출하기 위해 시내로 들어갈 것을 결정합니다. 시 당국은 이를 저지하기로 방침을 정하고, 부르주아로 구성된 국민방위군이 끄롸 루스에서 리용으로 통하는 도로 다섯 개를 모두 점거하여 노동자들을 막았어요. 11월21일 이른 아침, 역사상 처음으로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에 무력 충돌이 일어납니다. 직조공들이 방위군을 밀치자 방위군은 군중을 향해 발포했고, 노동자들은 돌과 몽둥이로 맞서면서 리용 시내로 돌입하여 건물 몇 개를 점거하고 바리케이드를 설치합니다. 파리에서 바리케이드 봉기의 역사는 적어도 1588년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1830년 7월 파리 혁명에서는 바리케이드를 민중 반란의 상징으로 삼았죠. 그 사이 정규군 대대가 끄롸 루스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전투는 밤늦게까지 계속됩니다. 무기상점과 무기고를 탈취한 노동자들은 재빨리 무장했고, 다음날 아침 다시 전투가 시작되었죠. 노동자들은 "일하면서 살 것인가, 아니면 싸우다 죽을 것인가"라는 슬로건이 적힌 검은 깃발을 내걸었습니다. 11월22일 리용에서 벌어진 전투는 전날에 비해 한층 더 격렬했어요. 끄롸 루스와 리용 지구의 노동자들을 도우러 여러 지역 노동자들이 몰려옵니다. 격렬한 전투가 하루 종일 계속되었고, 노동자들은 시 중심부로 들어가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였죠. 11월23일 군사령부는 리용에서 군대를 철수하기로 결정하고, 시는 노동자들의 손에 들어옵니다. 3일 동안의 리용 전투에서 발생한 사상자는 엄청났어요.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1천여 명이 죽거나 다쳤으며 당국의 보고로는 약 3만여 명이 봉기에 참가했습니다. 군대가 퇴각한 뒤 노동자들은 어떤 형태의 자치정부도 세우지 않았으며, 다만 시의 법과 질서를 유지하는 조처를 취했습니다. 그들은 '봉기 본부'는 설치했으나, 시장이나 행정장관을 체포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들이 수도 파리와 연락하는 것까지 허용했어요. 노동자들의 이런 행동양식은 대체로 봉기에 참여했던 소규모 작업장 소유주들의 타협적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었어요. 11월24일자로 리용 검사장이 법무부장관 앞으로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보냅니다. "주민들의 행동은 여러 가지 대조적인 면들을 보이고 있다. 그들은 굶주리고 있지만 약탈하지 않는다. 폭동을 일으켰지만 승리를 남용하지 않고 있다. 그들은 정권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 정권의 깃발을 끌어내리지는 않고 있다. … 인격과 재산은 존중되고 있다." 11월28일 리용에서 퇴각했던 군대는 증원부대 2만 명과 합세하여 다시 시내로 들어왔고, 시 당국은 노동자들에게 무기를 놓으라고 명령했어요. 노동자들은 어쩔 수 없이 그들에게 굴복했습니다. 12월1일 군대는 시 변두리를 점령했고, 12월3일에는 정규군 4개 연대가 시내로 진입했어요. 정부는 사건 재발을 두려워한 나머지 대량 유혈보복 조처를 취하지는 않았으나, 노동자 수천 명이 시에서 추방당합니다. 견직공들이 선두에 선 리용 봉기는 이렇게 끝납니다. 리용 봉기는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노동과 생활을 전적으로 지배하는 부르주아 소유 체제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음을, 그리고 노동자들이 자본가계급을 포함하여 자신들 위에 군림하는 전체 사회의 위계로부터 독립해서 행동할 수 있음을 표출한 것이었어요. 두 번째 리용 봉기 리용 노동자들의 다음 봉기가 발발한 것은 1834년 4월9일입니다.
정부군은 포격을 개시했고 격렬한 전투가 며칠 계속되다가 4월15일 노동자 봉기는 진압되었는데, 정부가 마지막에 동원한 병력은 정규군 3만 명이 넘었어요. 리용 봉기가 계속되는 동안, 생 떼띠엔느(Saint Etienne), 그레노블(Grenoble) 등 다른 도시와 군구들에서도 노동자들이 전투에 참가했어요. 4월13일과 14일에는 파리에서도 봉기가 일어났고, 4월13일 파리는 마치 전쟁 진지처럼 보였고, 4만 명의 장교와 병사가 전투태세를 취했어요. 이틀 동안의 바리케이드전이 일부 지역에서 벌어졌으나, 4월14일 아침나절 봉기자들은 포위를 당했고, 군대는 바리케이드 방어자들을 표적 거리 안에서 발포합니다. 그리고 장교와 사병들은 봉기자들을 숨겨주었다고 의심되는 주민들을 총검과 소총으로 잔인하게 살해합니다. 리용 노동자들의 두 번에 걸친 봉기는 지배세력에 대항하는 노동자계급의 자립적인 투쟁이었으며, 넓은 의미에서 정치적·계급적 성격을 띤 것으로서 세계노동운동사에서도 획기적 중요성을 갖는 사건이라 볼 수 있습니다. 3. 독일 노동자들의 투쟁 독일에서 전개된 자본주의 생산양식은 영국이나 프랑스보다 늦은 1820년대에 들어 본격 발전합니다. 1820년부터 1840년까지에 걸쳐 산업생산은 75%가량 증대했고요. 섬유산업이 급속히 발달하고 석탄생산이 증대되었으며, 철도망이 괄목할 만큼 신장되었을 뿐만 아니라, 인구도 1816년에서 1845년 사이에 2480만 명에서 3440만 명으로 증가합니다. 그러나 독일은 여전히 반봉건적인 농업국가로서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에 비해서는 낙후되어 있었어요. 독일에서 급속한 산업화가 진행됨에 따라 계급 정세에도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 정치적으로는 무력한 편이었지만, 경제적으로는 점점 강력한 힘을 장악했던 부르주아지가 형성되었고, 노동자계급도 성장했어요. 노동자계급의 핵심 부분인 산업노동자층도 증대합니다. 1832년 약 32만5천 명이 공업과 광업에 종사했는데, 1848년에는 그 수가 약 70만 명으로 불어나죠. 당시 독일 노동자들의 노동·생활조건은 매우 열악했어요. 노동자들은 하루 12시간에서 16시간 정도 노동을 했지만, 임금은 기아 수준이었고 형편없는 빈민가에서 생활했으며, 사회보장과 선거권마저 보장받지 못했어요.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 사이에 공공연한 형태의 계급 충돌이 일어납니다. 당시 독일의 정치 지형은 복잡했습니다. 독일은 하나의 통일 국가가 아니라 38개의 봉건제후국으로 나뉘어 서로에 대해 경제적·정치적 장벽을 구축하고 있었어요. 또한 봉건적 지주의 통치 아래에서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는 영주국들도 많았고요. 이런 상황은 시장 확대를 바라는 부르주아들에게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죠. 그래서 독일 부르주아지는 프랑스 부르주아지를 본받아 봉건적 통제와 장해를 철폐하려 했어요. 그러나 부르주아지는 성장하고 있던 노동자계급에 두려움을 느껴 혁명적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고 결국에는 프로이센 토지 소유계급인 융커와 비굴한 타협을 합니다. 이 타협으로 융커는 정치적 지배권을 계속 유지했고, 독일의 통일은 실현되지 못하죠. 그러나 자본주의적 경제발전의 길은 진척됩니다. 이 투쟁에서 노동자들은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며, 그 성과의 하나로 독일에서 노동운동과 정치운동이 대두합니다. 의인동맹 독일 수공업자와 소(小)부르주아 지식인 출신의 정치적 망명자들이 1832년 파리에서 민주주의적 강령을 내건 최초의 정치조직 '독일 인민연맹'을 결성합니다. 이 연맹은 독일의 영주국가들에 흩어져 있던 지지 그룹이나 개인들과 비합법적인 결합을 가졌고, "성실한 사람이면 누구나 자신의 노동으로 빵을 얻지 않고는 먹지 못하리라"를 신조로 내걸었죠. 프랑스의 루이 필립 왕정이 1834년 4월 결사금지법을 공포함에 따라 해체된 연맹의 구성원들은 비합법적인 '법익박탈자 동맹'(Outlaws' league)을 결성합니다.
1836년∼1837년 '가장 급진적이고 프롤레타리아적인 사람들'이 법익박탈자 동맹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새로운 조직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의인동맹'(Bund der Gerechten, the League of the Just)입니다. 의인동맹 결성 직후 이 동맹의 정치적 핵심은 스위스에서 온 수공업자들로 보충되었는데 그들은 스위스에서 급진적 민주주의 조직 '청년 독일'(1834년∼1836년)의 노동자 그룹을 형성하고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수공업자는 소부르주아가 아니라, 상인으로부터 재료를 제공받아 제품을 생산하여 납품하고 그 대가를 받는 사람들로서 신분상 직인과 크게 다르지 않았어요. 이 조직이 내세운 주요 목표는 통일된 독일 민주공화국 수립입니다. '청년 독일'의 급진파들은 독일 수공업자 그룹과 결합되어 있었고, 그에 따라 이 조직은 정치세력으로 바뀝니다. 스위스의 현(縣) 당국이 독일 연방의 압력을 받아 '청년 독일'의 열성 활동가들을 추방하자, '청년 독일'은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되고, 정치적으로 활동적인 수공업자 그룹은 파리로 가게 되었고 그들 가운데 일부가 의인동맹에 참가합니다. 그리하여 주로 직인 중심의 계급의식을 지닌 노동자들이 조직의 안정적 핵심을 이루게 되죠. 1839년 5월 무렵에는 프랑스 정부의 탄압이 강화되면서 의인동맹의 구성원 일부가 파리를 떠나 런던으로 갑니다. 그들은 런던에서 의인동맹 본부와 '노동자교육협회'(the Workers' Education Association)를 조직했어요. 런던 본부는 파리와 스위스의 지부들뿐만 아니라 독일 지역 내 국가들에 있는 수공업자 비밀조직과도 연결을 맺고 있었습니다. 의인동맹의 활동은 주로 이론적·선전적 성격을 띠고 있었고, 조직 안으로는 이념의 혼란상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의인동맹 결성 초기에는 프랑스의 공상적 공산주의자인 E. 까베와 재산공유제 주창자이면서 통일 민주독일을 지향하는 결연한 투사인 K. 샤프의 주장이 큰 영향력을 발휘했어요. 1830년대 말부터 1840년대 초에는 빌헬름 바이틀링의 사상 체계가 의인동맹 안에서 우세를 보입니다. 그러나 바이틀링은 노동자계급을 사회 변혁의 담당자로 보지 않았으며, 일반적인 피압박 계급과 구별하지 않았어요. 그는 사회 발전의 합법칙성을 설명하지 않았으며, 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과 노동자계급의 동맹을 반대했죠. 또 그는 노동자계급이 정치투쟁에 참가하는 것을 승인하지 않았고 정당 건설에 대해서도 반대합니다. 이런 바이틀링의 체계에서 종교적·감상적 구상들이 현저하게 드러나면서 1840년대 중반 들어 바이틀링의 사상이 쇠퇴합니다. 그 뒤를 이어 의인동맹 회원들 상당부분이 '진정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습니다. '진정 사회주의'는 노동자가 추진하는 자립 투쟁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고, 자본주의를 비판하면서도 '보편적 사랑'의 설교와 불공정에 대한 폭로 등 도덕적 수단으로 자본주의 발전을 저지할 수 있다고 주장했죠. 그리하여 '진정 사회주의'는 감상적 원망과 민족주의적 지향, 그리고 사이비 혁명의 언설로 가득 차 있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1845년 칼 맑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영국 여행을 하게 되고, 이 때 이들은 의인동맹 런던본부 지도부와 만나 유물론적 세계관의 기본 명제에 관해 토론합니다. 그 뒤로 맑스주의가 의인동맹의 이념체계 수립에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슐레지엔 반란 1844년 독일에서 최초의 노동자 대중 행동인 슐레지엔 직조공들의 반란이 일어납니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들의 분노를 촉발시킨 사건이 발생합니다. 슐레지엔 상인들 가운데서도 쯔반지거를 비롯한 '탐욕과 나쁜 성향'을 지닌 몇몇 악덕 기업주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임금을 내리고 벌금을 부과하는 한편, 노동자들에게 난폭하게 굴었죠. 1844년 5월 들어 페테르스발다우 지역에서 심한 동요가 일어났으며, 슐레지엔 직조공의 '라 마르세이에즈'가 된 '피의 학살'(the Bloody Massacre)이란 노래가 점점 더 자주 들리게 됩니다. 6월3일 쯔반지거 집 근처에서 그 노래를 부르던 한 직조공이 하인들에게 두들겨 맞고 현지 경찰에 체포당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다음날 노동자들 한 대열이 쯔반지거의 공장으로 몰려가 서류를 불태우고, 집에 들어가 물건들을 부수었죠. 그 다음날인 6월5일에는 다른 '악덕' 기업주들의 사업체로 몰려갑니다. 이런 사태에 놀란 기업주들은 노동자들에게 돈과 식량을 나누어주었고, 이날 낮에 군대가 페텔스발다우에 도착합니다. 그 사이에 노동자들은 대열을 지어 근처에 있는 랑겐빌라우로 행진했고, 기업주들은 돈으로 노동자들을 달래려 했으며, 마을 목사는 노동자들에게 설교를 하면서 이들의 분노를 누그러뜨리려 했어요. 그러나 노동자들은 기업주의 수하들을 밀쳐내고 목사들을 개천에 빠뜨렸으며, 악덕 기업주의 공장 건물과 집을 마구 부수었어요. 군대가 도착하자, 노동자와 군대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그 충돌에서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행합니다. 이런 상태에서 군대는 퇴각하죠. 6월5일 밤부터 며칠에 걸쳐 군대가 반란이 일어난 지역으로 다시 투입되었어요. 정부당국은 압도적인 우세를 확보한 다음 대량 검거에 들어갔고, 이런 상황에서 6월9일 들어 직조공들은 직장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슐레지엔 노동자들의 반란은 독일의 다른 지역과 오스트리아 노동자들의 투쟁을 촉발한 직접적인 동인이 되었습니다. 슐레지엔 반란은 많은 역사가들이 말하는 '기아 폭동'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억압자에 대한 저항이었을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억압과 착취 체제에 대한 반란이었죠. 그런 점에서 슐레지엔 반란은 영국에서 일어난 차티즘 운동이나 프랑스 리용 노동자의 봉기 등과 같은 반열에 든다고 볼 수 있어요. (다음호에 계속) * 더 읽을 책 박지향, 「초기 차티즘 운동과 계급의식」, 이민호·김인중·박지향·안병준·정현백·유경준, 『노동계급의 형성』, 1989, 느티나무. 노명식, 『프랑스 혁명에서 빠리 꼬뮨까지』,1991, 까치. 박남일, 『반역의 역사 상』, 1994, 계백. A. 스터름탈, 『유럽 노동운동의 비극』, 1983, 풀빛. W. Z. 포스트, 『세계노동운동사Ⅰ』, 1986, 백산서당. D.H. 코울, 『영국노동운동사 상』(김철수·김천우 역), 1980, 광민사. H. 바른케, 『독일노동조합운동소사』(국민문고편집위원회 역), 1970, 日本 大月書店. 헬가 그레빙, 『독일노동운동사』(박경서 역), 1985, 한벗. 에릭 홉스봄, 『자본의 시대』(정도영 역), 1998, 한길사. 에릭 홉스봄, 『혁명의 시대』(정도영·차명수 역), 1999, 한길사. 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소, 『칼 마르크스 전기 1권』(김라합 역), 1987, 소나무. 칼 맑스, 「1848년에서 1850년까지의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2』, 2001, 박종철출판사. 프리드리히 엥겔스, 「독일에서의 혁명과 반혁명」,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2』, 박종철출판사. The USSR Academy of Sciences, The Institute of The Internationnal Working-Class Movement, 1976, The International Working-Class Movement-Ploblems of History and Theory-Progress Publishers Moscow. USSR Academy of Sciences, 1976, volume 1: 312). 출처: 노동사회 2002년 1월호, 통권 61호 |
주제가있는책 (80년대풍향계 ) | |
지난 80년대는 각종 문예계간지와 무크지의 시대였습니다. 선명한 깃발 펄럭이며, 시대의 아픔을 과감하게 담아왔던 이 지면들은 여러 가지의 사정으로 일찌감치 깃발을 내리기도 했으며, 일부는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오면서 우리 문학과 사상의 지평을 넓히고 풍요롭게 하고 있습니다. 이 시기에 어떠한 책들이 창간되었는지를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시대적 고민을 조금이나마 엿보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현재까지 확보된 자료들이 빈약하여 80년대와 90년대 초반까지 창간되었던 창간호의 일부만을 소개합니다. 앞으로 더 많은 자료가 준비되는 대로 보완해가도록 하겠습니다. 도움을 주실 분은 언제라도 책이있는 글터 서점으로 연락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녹두꽃 1 (녹두)글쓴이:녹두 1988.09
역사비평 제1집 (형성사)글쓴이:역사문제연구소 1987.09
사상문예운동 (풀빛)글쓴이:풀빛 1989.08
애국의 길 1 (녹두)글쓴이:녹두 1989.04
우리사상 1991 (새벽별)글쓴이:새벽별 1991.03
실천문학 1985년 봄 (실천문학사)글쓴이:실천문학사 1985.04
생활과 문학 (노동자문학학교)글쓴이:노동자문학학교 1988.12
문학과사회 1988년 봄 (문학과지성사)글쓴이:문학과지성사 1988.02
노둣돌 1992 가을 (두리미디어)글쓴이:두리 1992.08
문학동네 (문학동네)글쓴이:문학동네 1994.11
작가세계 1989년 여름 (세계사)글쓴이:세계사 1989.06
노동해방문학 창간호 (1989년 4월) (노동문학사)글쓴이:편집부 1989.03
현대시세계 1 (창간호/1988 겨울) (청하)글쓴이:편집부 1988.12
*출처: 책이 있는 글터서점, [주제가 있는 책]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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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통일전선과 80년대 후반기 민족문학의 대오/백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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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현실과 역사인식/서중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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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세계정세와 남한 혁명운동 승리의 전망/김승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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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민중 그리고 문학/백낙청/김지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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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사회』를 창간하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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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열렸다/창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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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사 계간 『문학동네』를 창간하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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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사/새날의 진정한 주인인 노동형제들에게...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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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호를 내면서...14 |
울산건설플랜트, 하이닉스매그나칩 문제해결 | |||
민주노총, 지역별 파업 및 전국노동자대회 개최 | |||
13일 기자회견…금속연맹도 6월14-17일 1만 확대간부 파업 | |||
울산건설플랜트노조, 금속노조 하이닉스매그나칩지회 투쟁이 경찰과의 물리적 충돌 등 격화되고 있는 가운데, 민주노총이 이들 사업장 문제 해결을 요구하며 27일 전국노동자대회, 6월20일 충북지역본부 총파업 등 투쟁 계획을 밝혔다. 민주노총은 이날 기자회견을 열어 울산플랜트와 하이닉스매그나칩의 구속조합원 석방, 수배해제, 정부가 직접 SK와 하이닉스-매그나칩 원청회사들이 직접 교섭에 나서도록 할 것을 촉구했다. <사진>
민주노총은 이를 위해 울산건설플랜트노조가 투쟁 중인 울산에서 17일 영남권 노동자 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며, 23일부터 24일까지는 울산본부에서 총파업 찬반투표를 벌일 것이라고 밝혔다. 또 27일에는 역시 울산에서 전국노동자대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금속노조 하이닉스매그나칩지회가 투쟁중인 충북지역본부에서도 다음달 20일 총파업을 벌일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민주노총은 “6월 하순 각 연맹의 임단투와 더불어 차별철폐 총력투쟁기간을 설정, 총파업을 포함한 강력한 총력투쟁을 전개할 것”이라고 밝혔다. 기자회견에 참석한 전재환 금속산업연맹 위원장도 6월14일부터 17일까지 나흘간 1만여명 규모의 확대간부가 비정규직 문제해결을 요구하며 상경투쟁을 벌일 것이라고 밝혔다. 금속연맹 확대간부 투쟁은 비정규 투쟁이 한창인 울산, 청주로 장소가 바뀔 가능성도 있다. 금속연맹은 또 6월22일부터 총파업 찬반투표를 벌일 예정이다. 민주노총은 “조속한 시일내에 다시 노사정대표자회의를 속개해 비정규법제도를 마무리해야 한다”면서도 “사업장에서 칼자루를 쥐고 있는 사용자들의 의식과 노무관행이 바뀌지 않는 상태에서 법만 만들어지면 사문화된 종이쪼가리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민주노총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현대차 채용비리 연루자 처벌 등 현대차노조 전현직 간부들의 비리에 대한 공식입장을 처음 밝혔다. 민주노총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현대차비리 등에 대해 모든 조사를 신속히 진행해 뇌물로 노조간부를 매수한 자와 매수당한 자를 같이 엄벌에 처하라”고 주장했다. 신승철 민주노총 부위원장은 “기아차비리에 이은 현대차 채용비리는 대단히 안타까운 일”이라며 “민주노총은 이에 적극적인 해결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 |||
김학태 기자 tae@labortoday.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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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운동자료관에서 |
글쓴이의 사상과 감정을 보다 효과적으로 나타내기 위한 표현의 기교, 크게 보아 세 가지로 구분된다.
비유법 : 표현하려는 대상을 그와 비슷한 사물과 비겨서 표현
강조법 : 문장에 힘을 주어 강조함으로써 짙은 인상을 주는 방법
변화법 : 단조로움과 지루함을 피하려고 변화를 적적히 주는 방법
1. 비유법 (比喩法): ① 비유란 말하고자 하는 사물이나 의미를 다른 사물에 빗대어서 표현하는 방법이다. ② 비유에는 표현하고자 하는 것(원관념)과 비유하는 사물(보조 관념)의 상관 관계가 성립된다. 즉 원관념과 보조 관념 사이에 유추가 이루어질 수 있는 유사성이 있어야 한다. ③ 대개의 경우 비유는 표현의 구체성, 직접성, 선명성을 높이는 수단이 되며, 일상어에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시에서 특히 많이 쓰인다.
비유의 효과
사물을 통하여 시인의 정서를 형상화하고, 대상의 새로운 모습이나 의미의 발견을 유도하며, 추상적 의미를 구체화하거나 가시화함으로써 의미와 정서를 확대하고, 작품 안의 내용과 형식을 긴밀히 연결시켜 작품 전체의 유기성을 강화한다.
원관념과 보조 관념
원관념 : 원래 표현하고자 하는 사물이나 관념
보조관념 : 빗대어진 사물이나 관념.
비유는 서로 다른 사물에서 유사성과 차이성을 발견하는 데서 출발하고, 이질적인 두 사물이 원관념과 보조 관념으로 결합함.
유사성의 원리 : 비유는 이질적인 원관념과 보조 관념 사이의 유사성을 바탕으로 성립된다.
예)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원관념은 꽃이고, 보조 관념은 누님으로 유사성은 원숙미]
차이성의 원리 : 비유는 유사성을 바탕으로 형성되지만 직접 관련이 없는 대상의 결합인 경우가 많으므로 표면적으로는 차이성이 나타난다. 이런 차이성이 클수록 시적 긴장감이 생기고, 표현의 참신성을 획득할 수 있다.
예) 겨울 나무와
바람
머리채 긴 바람들은 투명한 빨래처럼
진종일 가지 끝에 걸려 [원관념은 바람이고, 보조 관념은 '머리채, 투명한 빨래'로 비가시적인 바람을 가시적인 '머리채', '빨래'에 비유함으로써 참신성을 획득하고 있다. - 김남조 '설일'에서 ]
비유의 유형
추상적인 것을 구체적인 것에 비유 : 일반적으로 비유는 추상적인 관념을 구체화하는 경우가 많음
★ 내 마음은 한 폭의 기(김남조, '정념의 기') [추상적인 '마음'을 구체적인 '기'에 비유함]
구체적인 것을 추상적인 것에 비유 :
★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윤동주, '별 헤는 밤')[구체적인 '풀'을 추상적인 '자랑'에 비유함]
★ 내 마음은 어둠이노라(추상적인 것을 추상적인 것으로 비유)
★ 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구체적인 것을 구체적인 것에 비유)
원관념이 드러난 경우
★ 그칠 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한용운, '님의 침묵')
원관념이 드러나지 않은 경우 : 다른 시어들과의 전후 관계(문맥)에 따라 그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 어느 먼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에 소리없이 흩날리뇨(김광균의 '설야'에서)[원관념인 '눈'이 드러나지 않음, '흩날리뇨'란 표현에서 원관념이 '눈'임을 알 수 있음]
원관념과 보조 관념 사이의 유사성이 직접 드러난 경우
★ 나의 마음은 고요한 물결(김광섭, '마음'에서)['나의 마음'과 '물결' 사이에 '고요하다'는 유사성이 직접 드러남]
원관념과 보조 관념 사이의 유사성이 직접 드러나지 않음
★ 내 마음은 호수여(김동명, '내 마음은')[공통성이나 유사성이 직접 드러나지 않았다. 이런 경우 '유추'의 방법으로 유사성을 추리하여 시적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직유법, 은유법, 의인법, 활유법, 의성법, 의태법, 풍유법, 대유법, 중의법, 상징법, 우화법
(1) 직유법(直喩法) : 원관념을 보조관념에 직접적으로 연결시킨 수사법. 이를 명유(明喩)라고 하는데 '마치', '흡사', '∼같이', '∼처럼', '∼양,' '∼듯' 등의 연결어 사용.
★ 확 트인 벌판에 곡선의 부드러움으로 버섯구름처럼 두둥실 떠오르고 있는 미륵산이 앞에 보인다.
★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박목월 '나그네'에서>
★ 꽃의 둘레에는 밀물처럼 밀려오는 언어가 불꽃처럼 타다가 꺼져도···. <문덕수의 '꽃과 언어'에서>
★ 한밤에 불꺼진 재와 같이 나의 정열이 두 눈을 감고 조용할 때···.<양주동의 '조선의 맥박'에서>
★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이효석 '메밀꽃 필 무렵'에서>
(2) 은유법(隱喩法) : 원관념과 보조관념을 직접적으로 연결시키지 않고 간접적으로 연결시키는 방법으로 암유(暗喩)라고도 한다. "A like B"의 형태가 직유라면 "A is B"의 형태가 은유이다.
★ 수필은 청자 연적이다. 수필은 난이요, 학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
★ 소낙비를 그리는 너는 정열의 여인 <김동명 '파초'에서>
★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유치환 '깃발'에서>
★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저어 오오. <김동명 '내마음'에서>
★ 마음은 한 폭의 기
★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 그칠 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 구름은 보랏빛 색지 위에 마구 칠한 한 다발 장미(김광균 '데생')
사은유(死隱喩) : 언중(言衆)들에 의하여 이해가 될 만큼 일상화되어 버린 은유
★ 언제 이 밤이 가고 새벽이 오려나('밤'은 '암담한 상황', '새벽'은 '희망의 상황'으로 통용됨)
(3) 의인법(擬人法) : 사람이 아닌 무생물이나 동식물에 인격적 요소를 부여하여 사람의 의지, 감정, 생각 등을 지니도록 하는 방법이다. 이는 대상을 인격화하여 존엄성 있게 나타내는 데에 의의가 있다. 의인법을 활유법에 포함시키기도 하며, 추상적인 대상을 인격적으로 나타내기도 한다. '역사의 눈', '문화의 꽃' 등과 같다. 이러한 표현은 고대 소설에서도 볼 수 있는데, 작품 전체가 의인화된 소설을 '의인체 소설'이라고 한다. 고대 소설의 '장끼전', '섬동지전', '별주부전', '서동지전'과 춘원(春園)의 '파리' 등이 이에 해당된다
★ 샘물이 혼자서 웃으며 간다. 험한 산길 꽃 사이로.
★ 바다여/ 날이면 날마다 속삭이는 /너의 수다스런 이야기에 지쳐/ 해안선의 바위는/베에 토벤처럼 귀가 멀었다. <신석정 '바다에게 주는 시'에서>
★ 전나무, 잣나무들만이 대장부의 기세로 활개를 쭉쭉 뻗고···<정비석 '산정무한'에서>
의인법을 활유법에 포함시키기도 하며, '역사의 눈', '문화의 꽃' 등에서처럼 추상적인 대상을 인격적으로 나타내기도 한다.
의인법(personification) - 활유
사물이나 사람이 아닌 생물에서 사람과 같은 성질을 부여해서 표현하는 비유로서, 활유라고도 부른다. 예로부터 많이 쓰던 이 수사법은 메타포(metaphor)의 한 변형이라고도 볼 수 있다. 즉, '성난 파도', '시냇물이 소근댄다', '구름이 달린다'등 자연물을 인간화해서 그 성질과 동작을 표현하는 이러한 의인법은 얼마든지 우리 주변에서 씌어지고 있다.
우리의 조선소설 중에는 '장끼전', '별주부전', '서동지전'과 같이 전체가 의인법으로 되어진 작품들이 있다.
(4) 활유법(活喩法) : 무생물에다 생물적 특성을 부여하여 살아있는 생물처럼 나타내는 방법이다. 단순히 생물적 특성을 부여하면 활유이고 인격적 속성을 부여하면 의인법이다.
★ 안개가 날개를 치면서 산 정산으로 기어오르고 있었다.
★ 청산이 깃을 친다.
★ 대지가 꿈틀거리는 봄이 소리도 없이 다가오면···
★ 어둠은 새를 낳고, 돌을 낳고, 꽃을 낳는다(생명의 모태로서의 '어둠'의 긍정적 이미지를 활유법으로 표현하고 있다.)
(5) 의성법(擬聲法) : 어떤 대상이나 사물의 소리를 흉내 내어 나타내는 방법으로서 '사성법' 또는 '성유법'이라고도 한다. 이는 청각적 이미지를 살리는 방법이다.
★ 실개천은 돌돌돌 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었다.
★ 이 골 물이 주룩주룩 저 골 물이 콸콸 열에 열 골 물이 한데 합수하여 천방저 지방저 소크라지고 펑퍼져 넌출지고 방울져 저 건너 병풍석으로 으르렁 콸콸 흐르는 물결이 은옥(銀玉)같이 흩어지니 <'유산가'에서>
★ 소상강 기러기는 가노라 하직하고, 조팝에 피죽새 울고, 함박꽃에 뒤웅벌이요, 방울새 떨렁, 물레새 찌꺽, 접동새 접동, 뻐꾹새 뻐꾹, 가마귀 꼴깍, 비둘기 꾹꾹 슬피우니, 근들 아니 경일쏘냐. <'토끼 화상'에서>
(6) 의태법(擬態法) : 어떤 대상을 실감나게 표현하기 위하여 사물의 형태나 동작을 시늉하여 나타내는 기교로써 '시자법'이라고도 한다. 이는 시각적인 효과를 위한 방법이다.
★ 마당 한가운데에 모닥불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 해는 오르네 /둥실둥실 둥실둥실 /어어 내 절믄 가슴에도 붉은 해 떠오르네. /둥실둥실 둥실둥실 <김해강 '출범의 노래'에서>
★ 훤하게 터진 눈 아래 어여쁜 파란 산들이 띠엄띠엄 둘레둘레 머리를 조아리고, 그 사이 사이로 흰 물줄기가 굽이굽이 골안개에 싸이었는데, 하늘끝 한 자락이 꿈결 같은 푸른 빛을 드러낸 어름이 동해라 한다. 오늘같이 흐리지 않는 날이면, 동해의 푸른 물결이 공중에 달린 듯이 떠보이고 그 위를 지나가는 큰 돛 작은 돛까지 나비의 날개처럼 곰실곰실 움직인다 한다. 더구나 이 모든 것을 배경으로 아침 햇발이 둥실둥실 동해를 떠나오는 광경은 정말 선경 중에도 선경이라 하나, 화식(火食)하는 나 같은 속인에겐 그런 선연(仙緣)이 있을 턱이 없다. <현진건 '불국사'에서>
(7) 풍유법(諷喩法) :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을 직접적으로 나타내지 않고 그 내용을 다른 이야기나 속담, 격언, 문장으로써 간접적으로 나타내는 방법이다. 나타내려는 내용을 속에 숨기고 그것을 뒤에서 암시하는 방법으로써, 이를 '우의법(寓意法)' 또는 '우유법(寓喩法)'이라고 한다. 풍유로 표현하기 위하여 도입된 비유는 문장전체에 사용되기 때문에 그 본뜻은 추측할 수밖에 없다.
★ 핑계 없는 무덤 없다.
★ ㉠ 남의 잔치에 배 놓아라 감 놓아라.
★ ㉡ 빈 수레가 더 요란하다.
㉠ 은 쓸데없이 남의 일에 간섭한다는 뜻을,
㉡은 지식이 없고 교양이 부족한 사람이 더 아는 체 한다는 뜻을 간접적으로 나타낸 말이 다. 때로는 작품 전체가 풍유로 나타나기도 한다.
★
간밤의 부던 바람에 눈서리 치단말가.
낙락 장송이 다 기우러 가노매라.
하믈며 못다 핀 곳이야 닐러 므슴하리오. <유응부>
★ 야, 이눔아,
뿌리가 없으믄 썩는 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알아들지 못하는 소리를 혼자 중얼거린다는 속담을 통해, 뿌리(근원)없는 삶을 비판하고 있다.] 허지두 말어.(김진경, '뿌리가 없으믄 썩는 겨')
(8) 대유법(代喩法) : 직접 그 사물의 명칭을 쓰지 않고 그 일부로써 혹은 그 사물의 특징으로써 전체를 나타내는 방법으로써 이에는 '제유법'과 '환유법'이 있다. 제유법은 같은 종류의 사물 중에서 어느 한 부분으로써 전체를 알 수 있게 표현하는 방법이고, 환유법은 표현하고자 하는 사물의 특징으로써 전체를 나타내는 수사법이다.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들은 국토)
☆ 금수강산 - 우리 나라
★ 사람은 빵만으로 살 수 없다. (빵 - 음식, 먹거리)
★ 우리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빈 주먹으로 어느 도시에 정착하여 살게 되었습니다.( 빈주먹 - 가난)
★ 은 '들'은 국토의 일부분으로서 조국을 상징하였으므로 제유법이고 ☆은 금수강산이라는 특징으로 우리 나라를 상징하였으므로 환유법이다.
★ 펜은 칼보다 강하다(펜 - 문학의 힘, 칼 - 무력) - 제유법
★ 금테가 짚신을 깔본다(금테 - 신사, 짚신 - 시골뜨기) - 환유법
(9) 중의법(重義法) : 하나의 말을 가지고 두 가지 이상의 의미를 나타내는 방법이다. 두 가지 의미란 단어가 지니고 있는 파생적인 의미나 유사성이 아니라 전혀 다른 개념과 뜻을 재치 있게 함께 지니고 있는 것을 말한다.
★
수양산 바라보며 이제를 한하노라.
주려 죽을진들 채미도 하난 것가.
비록애 푸새엣것인들 긔 뉘 따해 났다니. <성삼문>
⇒ '수양산'은 중국의 '수양산'과 조선 시대 '수양 대군'을 뜻하고, '채미'와 '푸새엣 것'은 ' 고사리'와 '수양대군의 녹'을 뜻한다.
★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하면 다시 오기 어려우니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황진이>
⇒ 벽계수는 자연인 '푸른 시냇물'과 '왕족 벽계수를' , '명월'은 자연인 '밝은 달'과 '기생 황진이'를 의미한다.
★ 깊은 가슴 안에 밧줄[관을 아래로 내리는 데 쓰는 줄, 끊을 수 없는 혈육에의 인연과 정의 줄]로 달아 내리듯
주여,
용납하소서.
머리맡에 성경을 얹어주고
나는 옷자락에 흙을 받아
좌르르 하직[작별을 고했다. 흙을 아래로 떨어뜨렸다라는 말로 동생을 잃은 무너질 듯한 슬픔을 의성어로 나타내어 감정을 절제하고 슬픔을 객관화하고 있다.]했다.(박목월, '하관')
(10) 상징법(象徵法) : 원관념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 암시에만 그치고 보조관념만이 글에 나타난다. 이는 은유법과 비슷하지만 원관념이 직접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르다. 그러나 원관념을 짐작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은유법이다.
★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너머서 어둠을 살라 먹고, 산 너 머서···<박두진의 '해'에서> 이 시에서 '해', '어둠' 등은 상징법이다.
상징의 종류
① 관습적 상징(고정적 사회적 제도적 상징) : 일정한 세월을 두고 사회적 관습에 의해 공인되고 널리 보편화된 상징
예) 십자가 → 기독교, 비둘기 → 평화
② 개인적 상징(창조적 문화적 상징) : 관습적 상징을 시인의 독창적 의미로 변용시켜 문화적 효과를 얻는 상징
예) 윤동주의『십자가』에서 십자가의 의미→윤동주 자신의 희생 정신을 나타냄.
③ 자연적 상징 : 자연물이 인간에게 주는 보편적 의미의 상징
예) 해 → 희망, 밤 → 절망
④ 우의적 상징 : 풍자적 우희적 통로로 상징하는 것
예) 빼앗긴 들 → 일제 치하의 조국
⑤ 기호적 상징 : 약속에 의해 정해진 것
예) 숫자, 문자, 부호, 신호
⑥ 원형적 상징 : 시대와 공간에 관계없이 신화 이후에 문화에 빈번하게 되풀이 되어 나타나는 상징 예) 날개에서의 『방』→ 단군 신화에 나오는 '동굴'의 원형 상징.
상징과 은유 : 은유는 두 대상간의 유사성을 통한 유추적 결합을 추구하는 데 반하여 상징은 상관성이 먼 상징어를 연결함으로써 의미가 확대, 심화되는 언어 사용의 방법이다.
(11)우화법(寓話法)
원관념은 나타나지 않고, 보조 관념만으로써 뜻을 암시한다는 점에서는 풍유법과 같다. 그러나 풍유법은 반드시 동물이나 식물이나 식물이 등장하지 않고 사람이 주인공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우화법은 비인격적인 것이 모두 인격화되어 나타난다. 동물이나 식물의 속성과 풍습으로써 인간의 속성과 풍습을 암시하는 방법 등이다. 이솝 우화가 그 대표적인 것이다.
2. 강조법(强調法) : 문장에 힘을 주어 강조함으로써 짙은 인상을 주는 방법.
과장법, 반복법, 열거법, 점층법, 점강법, 비교법, 대조법, 억양법, 예증법, 미화법, 연쇄법, 영탄법, 현재법
(1) 과장법(誇張法) : 사물의 수량, 상태, 성질 또는 글의 내용을 실제보다 더 늘이거나 줄여서 표현하는 방법이다. "눈이 빠지도록 기다렸다." 등의 표현이 과장에 해당하는데, 때로는 "눈물의 홍수"에서처럼 은유와 함께 나타내는데 효과적이다. 과장법은 시적 감정의 진실성을 나타내는 데 효과적이다. 실제보다 더 크고 강하게 나타내는 것을 '향대 과장(向大誇張)'이라고 하고, 더 작고 약하게 나타내는 것을 '향소 과장(向小誇張)'이라고 한다.
★ 그가 북을 치자, 북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 쥐꼬리만한 월급 봉투 - 향소과장
★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 향대과장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에서>
(2) 반복법(反復法) : 같거나 비슷한 단어나 구절, 문장을 반복시켜서 뜻을 강조하는 방법이다. 이는 문장의 율조로써 흥을 돋구어 강조할 때에 사용되는 기교이다.
★ 고요하다는 고요한 것을 모두 모아서 그 중 고요한 것만 골라 가진 것이 어린이의 자는 얼굴이다.
★ 꽃이 피네 /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 잔디 잔디 금잔디, 심심산천에 금잔디
★ 고향으로 돌아가자, 나의 고향으로 돌아가자.
★ 꿰매어도 꿰매어도 밤은 안 깊어.
★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고운 얼굴 해야 솟아라.
(3) 열거법(列擧法) : 서로 비슷하거나 같은 계열의 구절이나 그 내용을 늘어놓음으로써 서술하는 내용을 강조하려는 수사법이다. 부분적으로는 각각 다른 자격과 표현가치를 가진 어휘로써 전체 내용을 강조하는 수사법이다. 대체로는 셋 이상을 늘어놓아야 열거법으로 본다. 같은 어구가 놓인 것은 열거법이 아니라 반복법이다.
★ 우리 국토는 그대로 우리의 역사이며, 철학이며, 시이며, 정신입니다.
★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의 어 머니.... 어머니, 벌써 아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잼','라이나 마리아 릴케'의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윤동주의 '별 헤는 밤'에서>
★ 난이와 나는/ 산에서 바다를 바라다 보는 것이 좋았다./ 밤나무/ 소나무/ 참나무/ 느티나무(신석정, '작은 짐승'에서)
(4) 점층법(漸層法) : 어떠한 글이 포함하고 있는 내용의 비중이나 정도를 한 단계씩 높여서 뜻을 점점 강하게, 높게, 깊게 층을 이루어 독자의 감정을 자연스럽게 절정으로 이끌어 올리는 표현방법이다. 이 방법은 독자를 설득시켜 감동시키는데 효과적이다.
★ 잠을 자야 꿈을 꾸고, 꿈을 꿔야 님을 보지.
★ 유교의 목적은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에 있다.
★ 신록은 먼저 나의 눈을 씻고, 나의 가슴을 씻고, 다음에 나의 마음의 모든 구석구석을 하나하나 씻어 낸다.
★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도 먼저 일어난다.(김수영, '풀'에서)
(5) 점강법(漸降法) : 점층법과는 반대로 한 구절 한 구절의 내용이 작아지고 좁아지고 약해져서 고조된 감정으로부터 점점 가라앉게 하는 표현방법이다.
★ 천하를 다스리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나라를 다스리고 그 나라를 다스리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집을 가지런히 하여야 한다.
★ 명예를 잃는 것은 모두를 잃는 것이요.
용기를 잃는 것은 많은 것을 잃은 것이요.
돈을 잃는 것은 아무것도 안 잃은 것이다.
점층이나 점강법은 자연히 열거법을 쓰게 되는 경우가 많다. 점층이나 점강을 아울러 점층법이라고 하기도 한다.
(6) 비교법(比較法) : 성질이 비슷한 두 가지의 사물이나 내용을 서로 비교하여 그 차이로써 어느 한 쪽을 강조하는 방법이다.
★ 너의 넋은 수녀보다도 아름답구나.
★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변영로의 '논개'에서>
★ 봄날 뻐꾹새 노래가 이 목소리마냥 가슴 죄게 했을까?
직유와 비교의 차이
비교법과 직유법을 혼동하는 경우가 있다. 직유법이 'A like B'의 형태라는 생각에서 '∼같이', '∼처럼' 등의 연결어만 있으면 직유로 생각하기 쉬운데, 예외의 경우가 있다.
㉠ 영희는순희처럼 예쁘다.
ⓐ ⓑ
㉡ 영희는꽃처럼 예쁘다.
ⓐ ⓑ
㉡은 ⓐ를 ⓑ에 비유하였기 때문에 직유법이 성립된다. 그러나,㉠은 ⓐ를 ⓑ에 비유한 것이 아니고 서로 대등한 자격으로서의 비교이다. 비유는 ㉡의 ⓐ와 ⓑ의 관계처럼 전혀 다른 사물끼리 공통적 속성을 연결시켜 나타내는 방법이다.
(7) 대조법(對照法) :
서로 반대되는 내용을 맞세워 강조하거나 선명한 인상을 주려는 방법이다. 장단(長短), 강약(强弱), 광협(廣狹) 등으로써 대조되는 내용의 단어나 구절을 대립시켜서 표현하는 방법이다. 대조되는 내용의 단어나 구절을 대립시켜서 표현하는 방법이다. 의미, 단어, 색상, 감각의 대조 등이 있다.
① 단어의 대조 :
★ 지식을 전하는 책은 지식이 발달함에 따라서 잊혀지지만, 진실한 사상과 보편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문학은 그 생명이 영구하다.
★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② 의미의 대조
★ 우리들의 반짝이는 미소(微笑)로도 이 커다란 세계를 넉넉히 떠받쳐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믿게 해 주십시오 [미소(인간성)와 이 커다란 세계(현대의 문명 사회)의 대조]- 정한모 '가을에' -
★ 산천은 의구(依舊)하되 인걸은 간데 없다.(세상사의 무상함과 불변의 자연과의 대조).
★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야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참어 떨치고 갔습니다.푸른 산빛(님이 있는 존재의 상황)과 단풍 나무 숲(님이 없는 무의 상황)의 대조
★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
③ 색상의 대조
★ 강물이 푸르니 새 더욱 희오(푸른색과 흰색의 대조).
★ 푸른 버들에 노랑 꾀꼬리가 운다(푸른색과 노란색의 대조).
④ 감각의 대조
★들을 제난 우레러니 보니난 눈이로다 (청각과 시각의 대조).
(8) 억양법(抑揚法) : 칭찬하기 위하여 먼저 내려깎는다든지, 내려깎기 위하여 먼저 칭찬한다든지 하는 표현방법.
★ 얼굴은 곱지만, 속이 얕다.
★ 사람은 착하지만 변변치 못해.
★ 세상은 차다지만 나는 찬 줄을 모른다.
★ 한국의 주지시는 반낭만주의적 처지에서 '방법의 지각'을 가지려했다는 것은 시사상(詩史上)의 획기적인 일이다. 그러나 방법의 기초가 되는 인생관과 세계관에 대한 인식이 없었다.
(9) 예증법(例證法) : 말하고자 하는 바로 그러한 사물 중의 몇 가지를 예로 드는 수법이다.
★ 예컨데 투구(投球)는 결석병과 신장에 좋고, 사격은 폐와 가슴에 좋으며, 가벼운 보행은 위에 좋고, 승마는 머리에 좋은 것 등과 같은 것이다.
★ 배 사과 감 등은 한국에서 많이 나는 과일이다.
(10) 미화법(美化法) : 상대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으려고 대상이나 내용을 의식적으로 미화시켜서 나타내는 방법이다. 현대 문학에서는 이러한 미화법이 미화로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의식화 작업 과정을 거쳐서 예술적 가치를 나타내고 있다.
★ 집 없는 천사(천사 - 거지)
★ 양상군자(梁上君子→도둑)
★ 십 년을 경영하여 초려 한 간 지어내니
반 간은 청풍이요, 반 간은 명월이라.
강산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 두고 보리라. <송순>
(11) 연쇄법(連鎖法) : 앞 구절의 말을 다시 다음 구절에 연결시켜 연쇄적으로 이어가는 방법이다. 강조를 위한 반복법과 다른 점은, 가락을 통해 글에 변화를 줌으로써 흥미를 일으키게 하는 데 있다.
★ 맛있는 바나나, 바나나는 길어, 길으면 기차, 기차는 빨라.
★ 흰눈은 내려, 내려서 쌓여, 내 슬픔 그 위에 고이 서리다.
★ 여기에 큰 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그 나무를 톱으로 자르면 단면이 생기고, 그 단면에는 연륜이 나타난다. 이 연륜을 보면 나무의 자란 햇수와 그 나무의 길이까지도········. <최인욱의 '단편 소설의 특질'에서>
(12) 영탄법(詠嘆法) : 감탄사나 감탄형 어미 등을 써서 슬픔, 기쁨, 감동 등 벅찬 감정을 강조하여 표현하는 수법이다.
★ 옥에도 티가 있다는데, 가을 하늘에는 얼 하나가 없구나!
★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 어머나, 저렇게 많아! 참 기막히게 아름답구나!
★ 옳거니! 새벽까지 시린 귀뚜라미 울음 소리 / 들으며 여물었나니(열매 익어가는 과정을 통해 화자는 자연의 섭리와 그 위대함을 깨닫는다. 이때의 '기쁨'과 '놀라움'을 영탄법으로 나타낸 것이다)
(13) 현재법(現在法) : 과거에 있었던 일이나 미래에 있을 수 있는 일을 과거나 미래 시제를 사용하지 않고 현재 시제를 사용하여 표현하는 기교이다. 미래의 사실을 현재화시킬 때에는 미래 지향적인 느낌을 주며, 과거의 사실을 현재화시킬 때에는 생동감을 느끼게 한다.
★ 영겁의 명상에 잠긴 석가여래를 둘러선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이때마다 뻐꾹새가 운다. <김원룡의 '한국의 미'에서>
★ 궂은 비 개고 날이 아주 맑아 아침의 금빛이 솔밭에 차다. <이광수의 '산중 일기'에서>
3. 변화법(變化法) : 단조로움과 지루함을 피하려고 변화를 적절히 주는 방법.
도치법, 대구법, 설의법, 인용법, 반어법, 역설법, 생략법, 문답법, 명령법, 경구법, 돈호법.
(1) 도치법(倒置法) : 문장상의 순서를 바꾸어서 내용을 강조하는 기교로서 '환서법'이라고도 한다. 문장의 순서는 〔주어 + 목적어(보어) + 서술어〕의 형식으로 나타나는 데, 이 순서가 바뀐 형태가 도치법이다. "단발머리를 나풀거리며 소녀가 막 달린다."에서 주어는 '소녀가'로서 '단발머리를' 앞에 와야 할 말인데 뒤에 왔다.
★ 아! 누구인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영탄법,은유법) [비애와 탄식의 감정을 효과적으로 드러냄]- 유치환 '깃발'-
★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반어법)
★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역설법)
★ 이제 우리들은 부르노니 새벽을, 이제 우리들은 외치노니 우리를, 이제 우리들은 비노 니 이 밤을 분쇄할 벽력을.
★ 정말 아름다웠다. 눈앞에 펼쳐진 우리 강산이.
(2) 대구법(對句法) : 비슷한 가락을 병립시켜 대립의 흥미를 일으키는 기교이다. 이는 단순한 자수의 대립만이 아니라, 앞뒤의 내용이 비슷한 성격으로 나타나야 한다. 고대 가사나 한시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대우법'이라고도 한다.
★ 범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 이성은 투명하되 얼음과 같으며, 지혜는 날카로우나 갑 속에 든 칼이다.(은유법, 직유법, 억양법)
★ 瓜田에 不納履하고 李下에 不整冠이라.
★ 말도 없는 밤의 설움/ 소리 없는 봄의 가슴/ 꽃은 떨어진다/님은 탄식한다/ - 김억'봄은 간다' -
(3) 설의법(設疑法) : 처음에는 일반적인 서술문으로 표현해 나가다가 결론이나 단정 부분에서 의문형식으로써 강조하는 방법이다. 반어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좀 더 효과적으로 상대방을 설득시키려는 표현형식이다. 내용상으로는 의문이 아니며, 정말로 몰라서 의문을 나타내는 것은 설의법이 아니다.
★ 이 푸르고 아름다운 한국의 가을 하늘을 그 누가 잊을 수 있겠는가?
★ 한치의 국토라도 빼앗길 수 있는가?
★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 의문문의 형식만 빌려 독자에게 '생명의 기척이 없었다'는 결론을 내리게 함]
★ 님 향한 일편 단심이야 가실 줄이 이시랴?
★ 추운 겨울에 이렇게 따뜻하고 포근한 장관을 볼 때, 어찌 들어가 쉬고 싶은 생각이 없을 것인가? <박대인(Edward W.POITRAS)의 '온돌'에서>
★ 애고,이게 웬말인가, 서방님이 오시다니? 몽중에 보던 임을 생시에 보단 말가? <'춘향전'에서>
★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가난할지라도 사랑은 안다. - 신경림 '가난한 사랑 노래' )
(4) 인용법(引用法) : 자기의 이론을 증명하거나 주장을 강조하기 위하여 속담이나 격언, 다른 사람의 말을 인용하여 논지의 타당성을 뒷받침하는 기교이다.
★ '비 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고 하잖아. 용기를 잃지 말고 열심히 해 봐.
★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이다."라고 한 파스칼의 말은 인간 사유(人間思惟)의 본원성을 보인 말이다.
★ 옛날부터 "시는 자연의 모방"이라 일컬어 왔고 또 "연극은 인생을 거울에 비추어 보이는 일"이라고 말해 왔다.
★ 공자는 "나도 말이 없고자 한다(余歌無言)."라고 하였다. 대자연은 그대로 말없는 스승인 것이다.
(5) 반어법(反語法) : 겉으로 표현할 내용과 속에 숨어 있는 내용을 서로 반대로 나타내어 독자에게 관심을 갖게 하는 기교이다. 겉으로는 칭찬하는 척하지만 사실은 꾸짖고, 겉으로는 꾸짖는 척하지만 사실은 칭찬하는 방법으로 '아이러니(Irony)'라고도 한다.
★ 얘가 얼마나 공부를 잘 하는데요? 얘 뒤에 두 명이나 더 있어요.
★ 아휴~~~ 이 얄미운 내 새끼
★ '자네'라고? 말씀 좀 낮추시지.
★ 규칙도 모르는 사람이 심판을 하였으니 시합이 오죽이나 공정했겠소.
★ 밑수로 벼락 부자가 된 위대한 교육자에게 자녀를 맡기면 훌륭한 인물이 될 것이다. (자녀를 버린다.)
★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마음 속으로는 슬프지만 그 슬픔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겠다'는 말로 '애이불비'의 자세가 나타나 있다. 이는 너무나 슬퍼 울고 싶은 화자의 심리를 반대로 나타냄으로써 의미를 강화한 것이다. 또한 도치법도 사용되었다.)
★ 말없이 함박눈도 잘도 내리느니. - 국권을 상실한 조국에서의 삶이 힘겨워서, 눈 내리는 겨울에 북극으로 이주하는 우리 민족의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 이 때 '흰 눈'은 축복의 눈이 아닌 앞날의 혹독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잘도 내리느니'는 화자의 내면과는 상반된 표현인 것이다. - (김동환, '눈이 내리느니')
다른 설명 ( 반어 - 겉으로 나타난 말과 실질적인 의미 사이에 상반(相反) 관계가 있는 말을 뜻한다. 기교로서는 어떤 말의 뜻과 반대되는 뜻으로 문장의 의미를 강하게 전달하는 것을 이른다.)
(6) 역설법(逆說法 : Paradox, 모순형용) : 표면적으로는 이치에 맞지 않는 듯하나, 실은 그 속에 절실한 뜻이 담기도록 하는 수사법.
★ 아아, 님은 갔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 하였습니다.(한용운의 '님의 침묵')
★ 찬란한 슬픔의 봄을
★ 차가울사록 사모치는 정화(情火)
★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임에 대한 절대적인 사랑을 역설적으로 표현]
★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 용서한다는 것은 최대의 악덕이다.
★ 우리들의 사랑을 위하여서는/ 이별이, 이별이 있어야 하네.(서정주 '견우의 노래'에서 긴 이별의 과정을 통해서 그들의 사랑이 성숙될 수 있다는 역설적 표현)
★ 외로운 눈부심
★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다른 설명 :
역설-겉으로 보기에는 분명히 모순되고 부조리하지만, 표면적 진술을 떠나 자세히 생각해 보면 근거가 확실하든지, 깊은 진실을 담고 있는 표현을 뜻한다. 표면적 역설은 보통 서로 반대 개념을 가진, 또는 적어도 한 문맥 안에서 같이 사용될 수 없는 말들을 결합시키는 '모순 어법'을 통해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유치환의 '깃발'에서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이 이에 해당한다. 반면에 내면적 역설은 표현에 담긴 내용 자체가 논리적으로 설명하기가 불가능한 경우를 말한다. 특히, 종교적 진술 가운데 만유의 본질이나 우주의 섭리에 관하여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내용들이 담겨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것들이 시의 문맥에 수용될 때, 내면적 역설로 설명될 수 있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 에서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가 이에 해당한다. 즉, 이 경우는 불교의 윤회 사상을 바탕으로 한 일종의 종교적 역설로서 존재의 의미에 관한 초월적인 진리를 담고 있는 표현이기 때문에 내면적 역설이 성립된 것이다.
(7) 생략법(省略法) : 글의 간결성, 압축성, 긴밀성을 위하여 어구를 생략함으로서 여운을 남기는 기교, 생략된 부분은 독자의 판단이나 추측에 맡긴다.
★ 봉네의 눈동자 속에 푸른 하늘이 부풀어 오른다 하는 순간, 따르르 눈물이 뺨으로 굴렀다. "학이………" 봉네는 가만히 고개를 떨어뜨렸다.
★ 캄캄하던 눈앞이 차차 밝아지며 거물거물 움직이는 것이 보이고, 귀가 뚫리며 요란한 음향이 전신을 쓸어 없앨 듯이 우렁차게 들렸다. 우뢰 소리가···· 바다 소리가···· 바퀴 소리가……… <이효석의 '돈'에서>
★ (그들이) 도랑 있는 곳까지 와 보니, 엄청나게 물이 불어 있었다.(도랑물은) 빛마저 제법 붉은 흙탕물이었다. <황순원의 '소나기'에서>
(8) 문답법(問答法) : 글 속의 어느 일분의 문장을 문답형식을 빌려서 전개시켜 나가는 방법. 그러나 단순한 대화를 문답법이라고 하지 않는다. 알고 있는 사실이라도 그것을 변화 있게 강조하기 위하여 자문자답형식으로써 표현하는 방법이다.
★ 아희야, 무릉이 어디오, 나는 여기인가 하노라.
★ 그렇다면 그 둘의 관계는 무엇일까? 그것은 병립의 관계이다.
★ 연즉(然則), 차(此) 제국주의(帝國主義)에 저항(抵抗)하는 방법(方法)은 하(何)인가? 왈(曰) 민족주의(民族主義)를 분휘(奮揮)함이 시(是)이니라.
★ 저 궁예가 미륵불의 현신이라고 자칭하였음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미래불인 미륵을 숭상함은, 현세적, 실제적인 것을 단순하게 그것만으로써 생각하려는 사상적 태도는 아니었던 것이 분명하다. <박종홍의 '한국의 사상'에서>
(9) 명령법(命令法) : 평범한 서술로 해도 된 것을 더욱 뜻을 강조하기 위하여 변화를 주기 위하여 독자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방법.
★ 빨리 책을 읽도록 하십시오.
★ 보게나, 저 외로운 하일랜드 아가씨를.
★ 보라 : 문어체(文語體), 보아라 : 구어체(口語體)
(10) 경구법(警句法) : 격언이나 속담에서처럼 엉뚱하거나 재치 있거나 익살스러운 기발한 표현 속에 진리를 내포시킴으로써, 교훈적 효과를 내는 변화법.
★ 시간은 금이다.
★ 웅변은 은이고 침묵은 금이다.
★ 유비면 무환이다.
(11) 돈호법(頓呼法) : 어떤 사물을 의인화시키거나 대상의 이름을 불러서 주의를 환기시키는 방법이다. 편지글에서 이름을 부르거나, 연설문에서 '여러분!'하고 부르는 것도 이에 해당된다.
★ 친애하는 학생 여러분!
★ 동포 여러분! 나 김구의 소원은 이것 하나밖에는 없다.
★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너머 산 너머서 어둠을 살라 먹고, 산 너머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 먹고, 이글이글 애띤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박두진의 '해'에서>
★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이육사 '청포도'에서 -
송건호
길가에서 택시 운전수들이 다투고 있다. 차가 서로 스쳐 차체가 우그러졌는데 누구에게 잘못이 있느냐로 시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 말이 서로 일리가 있는 것 같아 어느 쪽 말이 옳은지 분간하기 어렵다. 우리들이 일상 생활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는 조그만 광경이다.
신문에는 거의 날마다 몇 건의 교통사고가 보도되고 우리들은 아무런 의심 없이 그 기사 내용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으나 지금 예에서 본 바와 같이 하찮아 보이는 교통사고 보도에서조차 엄격히 따질 때 진실 보도가 어렵다는 것을 발견한다.
무엇이 진실이냐는 참으로 어려운 문제이다. 단순한 교통 사고조차 진실 보도가 이처럼 어렵다면 진실 보도가 무엇보다도 필요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큰 사건이나 큰 문제일수록 진실 보도가 더욱 어렵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사람들은 아무런 의심 없이, 또 신문 기자 자신들조차 진실 보도를 자명한 것처럼 생각하고 또 말하고 있으나 문제를 좀더 파고들어 가 생각해 보면 생각할수록 독자들에게 진실 보도를 하기가 극히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진실을 파악하는 방법
'진실' 이란 어느 사건 또는 어느 문제에 대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한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란 무엇인가. 어떤 사실을 막론하고 존재하는 모든 사실을 그 존재가 다원적이다. 꼭 진실을 막론하고 존재하는 모든 사실은 그 존재가 다원적이다. 꼭 진실을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일수록 그 존재는 더욱 복잡하게 얽혀 있어 한 면만 보고서는 그 사실의 진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위에서 인용한 교통 사고의 경우도 시비하는 두 운전사의 말을 이쪽 저쪽 다 듣지 않고서는 공정하고 옳은 판단을 할 수 없다. 따라서 언론에 있어 '진실'이란, 첫째 사물을 부분만 보지 말고 전체를 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뜻한다. '진실'이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따라서 신문이 사건이나 문제를 전체적으로 또는 그 전모를 밝히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자기들에게 유리한 부분만을 확대시켜 과장 선전하기도 하고 불리한 면은 이를 은폐하여 알리지 않거나 보도되는 것을 저지하려고 한다. 이와 같이 부정확한 보도는 우선 일방적이며 편파적인 보도임을 말한다.
논평에서도 진실한 논평을 하려면 이런저런 측면을 다 같이 검토하고 거기에서 공정한 판단과 결론을 내려야 한다. 공정한 논평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점은 사고의 자유로운 활동이다. 자기에게 불리하다고 해서 '문제를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못 쓴다'거나 또는 '이 문제는 이런 방향, 이런 각도로만 생각해야 하며 그 밖의 각도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면 이것이 곧 진실과 반대되는 曲筆 論評임은 말할 것도 없다.
곡필을 하기 위해서는 따라서 사고를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곡필은 어느 선 이상은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데 그 특징이 있다. 자유롭게 다각도의 사고를 하면 진실이 밝혀지기 때문이다.
둘째, 언론에 있어 '진실한 보도와 논평'을 하기 위해서는 사물을 역사적으로 관찰할 줄 아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어떠한 사물을 옳게 보도하거나 논평할 수 있으려면 그 사물의 의미 또는 가치를 올바르게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 사물의 가치는 역할의 발전에 따라 달라진다. 오늘 가치를 인정받았던 것도 내일에는 부정되고 오늘 부정된 가치라도 내일에는 평가를 받는다. 안목이 있는 사람이란 발전하는 새로운 가치의 입장에서 사물을 볼 줄 아는 사람을 말한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 치고 누가 발전하는 입장의 가치를 거부하겠느냐고 말할 사람이 있겠지만 사회적 가치란 사회적 가치란 사회적 이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자기의 이해 관계에 따라 사물을 보는 입장이 서로 달라진다. 어떤 사람에게는 긍정적 가치도 어떤 사람에게는 부정적 가치가 된다. 이것은 이해 관계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자기의 입장, 자기의 이해 관계의 입장에 서서 사물을 보기 때문에 같은 사물 , 같은 문제인데도 보는 관점이 서로 달라 견해차가 생긴다. 따라서 사물을 볼 때에는 소수의 이익이 아니라 다수의 이익 퇴보의 가치가 아니라 발전하는 가치의 입장에 서서 판단하고 평가해야 한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셋째, 사물을 볼 때에는 어느 면이 더 중요하고 어느 면이 더 중요하고 어느 면이 덜 중요하다는 점을 똑똑히 식별할 줄 알아야 한다. 사실은 그 존재가 다원적이라고 했다 교통 사고가 발생했을 때 가장 중요한 점은 사고의 원인이 무엇인가이다. 버스가 전복했는데 차체가 어느 만큼 파손됐느냐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사건이 발생했을 때 가장 중요한 면이 그 사건의 근거가 되고 그렇지 않은 면이 그 사건의 조건이 된다. 따라서 사물을 옳게 이해하려면 그 사물의 어느 측면이 근거가 되고 또 조건이 된다. 따라서 사물을 옳게 이해하려면 그 사물의 어느 측면이 근거가 되고 또 조건이 되는가를 예리하게 식별할 줄 알아야 한다. 근거와 조건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한 문제 또는 사건의 이해가 크게 달라지고 이미지가 전혀 달라진다. 보도 기사에는 '리드'라는 것이 있다. 그 보도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리드'로 하여 기사를 작성한다. 그런데 기사의 어느 부분을 리드로 잡느냐에 따라 기사가 독자에 미치는 영향이 크게 달라진다. 사물의 어느 면이 중요한 가는 관심도에 따라 다르며 관심도는 이해 관계에 따라 달라진다. 특히 외신을 다루어 보면 같은 사건인데도 입장에 따라, 즉 기자의 국적에 따라 리드가 제각기 달라 사건을 보는 눈에 묘한 차이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월남의 최후를 보도하는 각국의 신문을 보면 이것을 절실히 느낄 수 있다. 반공 진영의 나라라도 역점을 두는 측면이 나라에 따라 다르다.
가장 주관적인 보도가 진실 보도이다.
사실을 가장 정확하게 보도하려면 기사를 객관적으로 써야 한다는 말이 있다. 있는 그대로를 조금도 주관을 섞지 않고 기사를 써야만 정확한 보도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객관적'이라는 표현은 좀 주의해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 하면, 가장 정확하고 올바를 보도일수록 객관적이기보다 오히려 훌륭한 의미에서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사태를 정 가장 정확하게 알리는 보도일수록 주관적이 되어야 한다는 이론은 얼핏 납득하기 어려운 말 같기도 하다. 그러나 구체적 예를 들면서 설명해 보면 조금도 모순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을 것이다.
윤봉길 의사가 1931년 중국 상하이에서 일제 시라까와 대장 등을 폭사시킨 테러 사건을 예로 들어 보자. 만약 정확한 보도라는 것이 주관을 전혀 개입시키지 않은 거울같이 보이는 그대로를 보도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윤 의사는 일본군의 엄숙한 대식전을 피바다로 물들인 엄청난 살인적 '테러리스트'라고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신문은 마땅히 윤 의사를 규탄하는 보도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보도가 사건을 정확히 알리는 보도가 될 수 없다는 것은 긴 설명이 필요없다. 윤 의사의 장거는 우선 역사적으로 이해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로 삼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식민지 제도라는 것이 인류 역사상 배격, 규탄되어야 할 역사적 遺制라는 판단이 앞서야 하고 이러한 역사적 가치 판단뿐 아니라 윤 의사의 장거 당시 국내의 삼천만 동포가 일제의 착취와 탄압 아래 얼마나 신음하고 있었느냐를 윤 의사의 '테러' 행위와 관련시켜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사건을 전체적 역사적 근거와 조건을 식별하는 입장에서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판단 위에 서야만 이 사건의 핵심이 어디에 있는가를 비로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윤 의사의 테러 행위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건이 위와 같이 수많은 다른 사실들과 횡적 종적(역사적)으로 얽혀 있다는 점을 우선 알지 않으면 안 된다. 한 사건을 정확히 보도하는데 만약 이와 같이 풍부한 학문적 지식이 필요하다면 이것은 높은 차원에서 주관적 보도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정확한 보도 활동에는 고도의 사회 과학적 소양, 이 밖에 문학적 철학적 소양까지도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미국이 낳은 세계적 대기자 올솝 형제가 '훌륭하고 정확한 보도는 본래 가장 주관적인 것'이라고 한 것도 이러한 점을 지적해 말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윤 의사의 '테러' 행위라는 좀 극단적 예를 든 것이 적절치 못하다고 할는지 모르나 가장 정확한 보도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사실일수록 진실을 전달하려면 오히려 고도의 주관적 보도를 동해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이해 관계가 진실을 좌우한다
신문이 진실 보도를 해야 한다는 것은 새삼스러운 설명이 필요없는 당연한 이야기다.
그러나 사람들은 진실 보도를 하고 안하고의 문제가 전적으로 보도 활동에 종사하는 기자들의 양심 문제라고 보는 경향이 있다. 기자가 정의감에 불타 있으면 진실 보도를 하고 안하고는 보도 활동에 종사하는 기자들의 양심 문제라고 보는 경향이 있다. 기자가 정의감에 불타 있으면 진실보도에 과감하고 그렇지 않으면 곡필을 휘두른다는 것이다. 또는 좀 좋게 말해서 취재 기술의 미숙에서 진실 보도를 못한다는 견해가 있다. 어느 편이나 다 같이 진실 보도를 하고 안하고는 보도 활동에 종사하는 기자 쪽에 책임이 있다고 보고 있는 점에서는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이것이 지극히 피상적 견해임을 면치 못한다.
물론 진실 보도를 하고 안하고의 책임이 기자 쪽에 있다는 말 자체에 잘못이 있다고 것은 아니다. 다만 진실 보도가 안 되는 이유를 전적으로 기자들의 윤리 문제로 해소시켜 버리는 것은 신문 제작의 현실을 모르는 불충분한 견해라는 것이다 정확한 보도를 하기 위해서는 문제를 부분적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봐야 하고 역사적으로 새로운 가치의 편에서 봐야 하며 무엇이 근거이며 무엇이 조건인가를 명확히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이러한 준칙을 강조하는 까닭은, 문제를 전체가 아닌 부분만 보고 새로운 것 대신 낡은 역사적 가치의 측면에서 보고, 근거를 조건을 근거로, 즉 중요한 점과 그렇지 않은 점을 뒤바꾸어 보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대학의 신문 방송학과에서 배우는 것처럼, 기사 작성의 기술이 미숙하기 때문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특정 문제를 보도하는 데 어떻게 보도하느냐에 따라 이해 관계가 크게 좌우되기 때문이다.
'진실 보도다 아니다'라고 할 때 그것이 A를 B라고 보도하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 아님을 말할 것도 없다. 현대 신문이 이렇게 졸렬한 거짓말 보도를 하는 예는 지극히 드물다. 사실에 입각해 보도하면서도 어느 특정 면을 특히 확대시킨다든지, 발전적이 아니고 낡고 소수를 위한 전시대적 가치의 편에서 보도한다든지, 중요한 점이 아닌 면을 중요한 것처럼 확대시킨다는지 하는 것은 모두 무엇인가 이해 관계가 깊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즉, 세상에서 중요한 문제로 보고 또 정확한 보도가 필요하다고 기대되는 보도일수록 진실을 보도하지 못하도록 필사적인 압력을 가하려는 외부세력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나쁜 것을 나쁘다고, 시정할 것을 시정해야 한다고 보도하고 논평하는 것이 진실한 언론임을 의미한다면 진실한 언론은 부조리를 개혁하려는 다분히 현실 부정적, 현실 지양적 언론이 될 수밖에 없다. 이와 반대로 만약 곡필이 부조리한 현실을 추종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표면상 온건하고 긍정적이며 따라서 건설적으로까지 보이는 것은 '진실의 언론'이라기보다 '곡필의 언론'이며, 그것은 더욱 그럴싸하게 보이기 마련이다.
진실 보도를 하려는 언론은 항상 현실 비판적이며 때로 현실 부정의 모습을 취하기 때문에 진실의 언론일수로 '파괴적 언론'으로 당시의 권력에 의해 탄압받기 일쑤이다. 그러므로 진실 보도는 일반적으로 수난의 길의 걷기 마련이다. 권력에 저항하여 진실을 위해 살기는 어렵다. 양심적이고자 하는 신문 또는 언론인이 때론 형극의 길과 고독의 길을 걸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송건호/서울대 법대 졸업, 주요 일간 신문에서 논설 위원과 편집 국장을 지냈다. 한때 언론 민주화 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현재 (한겨레 신문)대표 이사 . 발행인 겸 편집인이다. 저서로는 (분단과 민족), (한나라 한겨레를 향하여) 등이 있다
에드먼드 윌슨
19 세기의 두 괴짜
샤를르 푸리에 (Charles Fourier)와 로버트 오웬 (Robvert Owen)은 19 세기 전반의 독특한 특성을 대표한다는 점에서 거의 유사한 생애를 살아갔던, 서로 매우 닮은 인물들이다. 푸리에는 브장송의 포목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행상인으로 세상을 떠돌아 다녔고, 오웬은 웨일즈의 말 안장을 만드는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 포목점 점원으로 일했다. 두 사람 다 당대의 자유주의 정치에 실망하였으며, 당대의 인습적인 문화를 외면하였다. 푸리에는 '과학의 세기인 지난 23 세기 동안' 인류를 '피로 뒤범벅되게' 이끌어 온 유럽 철학의 전통을 끊임없이 비난하였다. 그리고 '거의 반무식쟁이이자 상점 점원'인 샤를르 푸리에 자신을 인류에게 신의 뜻을 설명하는 사람으로 선택한 것은 신이라고 말했다. 자신이 직업적 철학가들을 불신하고 '정치 및 도덕에 관한 모든 서적'을 논박하는 것은 신의 뜻이라고 그는 믿었다. 푸리에의 말에 따르자면 천 여 년 동안의 정치인의 잘못은 오직 종교와 행정상의 폐단만을 다루어 왔다는 점에 있었다. "신의 율법은 우선 근본적인 기능인 산업에 관한 법률로 제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여러 정부가 이 일에 착수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며, 더구나 그들은 '자유 경쟁이라는 미명 아래 산업상의 분열과 상업적 사기'를 조장하는 그릇된 방향을 취했다는 것이다. 한편, 로버트 오웬은 『정치적 정의에 관한 연구』(1793)의 저자인 윌리엄 고드윈 (William Godwin)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그러나 그는 이 책이나 이 비슷한 다른 어떤 책에 대해서도 언급했던 적이 없었고, 통계 이외의 다른 책을 읽는 모습이 눈에 뜨인 적도 없었다. 정치 조직을 통해 일해 보겠다는 시도는 실패하였으며 단기간이었을 뿐이다.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는 곤경으로부터 사회를 구제할 다소 합리적인 '그 무엇'을 급진당, 휘그당, 토리당 혹은 어떤 특수 종교 종파에게서 기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로버트 오웬의 초상화를 보면 그는 고집스럽고 자주적인 영국인다운 코와, 뺨 둘레까지 뻗어나올 듯한 움푹 들어간 순진스런 타원형의 두 눈과, 달걀 모양의 갸름한 얼굴을 지닌 사색에 잠긴 유순한 큰 산토끼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그리고 치켜올려 감고 있는 흰 목도리 위의 푸리에와 얼굴은 비록 굳게 다문 입과 날카로운 콧날과 다소 양미간이 넓지만 또렷하고 자애스런 두 눈이 강인한 옛 프랑스인의 합리주의적 위엄을 갖추고 있기는 하나, 어딘지 모르게 오웬과 비슷한 기이한 순진성을 풍기고 있다.
오웬과 푸리에는 모두 완전히 세속을 벗어난 솔직 담백한 사람으로 지칠 줄 모르는 끈기를 지니고 있었다. 양자 모두 심원한 인도주의적 연민과 체계적 정확성에 대한 열정을 독특한 방식으로 결합시켰다. 이 둘은 서구 사회를 가속도로 지배해 가는 상공업제도의 가정 추악한 면을 직접 체험하였다. 푸리에는 국민 의회의 혁명군이 리용을 포위 공격했을 때 자신의 가산을 모두 잃어버리고 가까스로 단두대를 면했다. 또 직물 공업의 성장으로 인해 리용 주민의 생활이 극도로 악화되는 것을 보았다. 한번은 그의 고용주가 기근이 한창일 때 쌀 매점에 성공하여, 가격을 유지할 목적으로 일부러 쌀을 썩게 만든 뒤 마르세이유항 앞바다에 내다버리는 것을 보기도 하였다. 푸리에는 잔혹한 것을 극도로 혐오했고 동정심이 유별나게 강했기 때문에 학창 시절에는 힘이 약한 동무들을 두둔하다 두들겨 맞기 일쑤였다. 예순 살 때는 직접 만나본 적도 없고 다만 주인 마나님이 몹시 학대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뿐인 어떤 불쌍한 하녀를 위해 무엇인가 도와줄 작정으로 비를 맞아 가며 몇 시간 동안 헤매고 다닐 정도였다. 인간생활을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려는 이와 같은 억제할 수 없는 강인한 충동은 그에게 낙관적인 확신을 불어넣었으며, 그를 거의 미친 짓이나 다름없는 보상받지 못하는 일들로 몰고 갔다. 이상스럽게 고독한 생활을 해나가며 푸리에는 자신의 이상적인 공동체 사회를 구성할 다양한 집단들의 상호 관계를 구상하고, 그들이 거주할 건물들의 정확한 비율까지 계산해 내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우주의 수명이 정확히 8만 년이라는 것을 계산해 내었다. 그의 계산에 따르자면 그 기간 동안 모든 영혼은 분명히 인간이 살고 있다고 그가 간주한 다른 혹성들과 지구 사이를 810번 여행하며, 정확히 1,626번까지의 생애를 경험한다는 것이었다.
푸리에와 마찬가지로 로버트 오웬도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매우 민감하였다. 그는 일생 동안 어린 시절 그가 다녔던 무용학교에서 어린 소녀들이 자기 짝을 구하지 못해 실망하였던 광경을 가슴 아픈 기억으로 떠올리곤 했다. 그는 열 살 되던 해에 집을 뛰쳐나와 단시일 내에 출세하여, 20세에는 벌써 5명의 직공을 거느린 면직 공장의 총 책임자가 되었다. 새로운 면방직 기계를 초창기부터 이용했던 오웬은 이윽고 '생명 없는 기계에 대한 끔찍스런 정성과 살아 있는 기계에 대한 혹사와 천대'라는 엄청난 모순에 깊은 충격을 받게 되었다. "미대륙의 노예제도는 현재도,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사악하고 어리석은 제도일 터이지만, 이 자제할 줄 모르는 시대에 영국의 공장에서 일하는 백인 노예들은 후일 내가 서인도 제도 및 미국에서 보게 된 가정에서 일하는 흑인 노예들보다 훨씬 비참한 생활을 하였다. 그들은 18세기 말의 영국 농촌의 소작인과 하인은 말할 것도 없고 영국의 본토의 가내 공장에서 학대받던 소년들과 노동자들보다 여러 면에서, 특히 보건て식품て의복 면에서 훨씬 좋은 대우를 받고 있음을"그는 알게 되었다. 그러나 고통받던 사람들은 노동자만이 아니었다. 그들의 고용주 자신도 타락하게 되었던 것이다. 오웬은 말한다. "나는 싸게 사서 비싸게 파는 데에만 능숙해진 동료들이 정말 싫어졌다. 이 직업은 우리 본성의 가장 아름답고 훌륭한 면들을 타락시키고 때로는 완전히 파괴해 버린다. 온갖 다양한 무역업, 제조업, 상업을 두루 겪어 온 나의 오랜 인생 경험으로부터 나는 이러한 철저히 이기적인 제도 아래에서는 어떠한 훌륭한 품성도 나타낼 수 없음을 깊이 확신한다. 진실, 정직, 미덕은 현재도 그렇고 과거에도 줄곧 그래 왔던 것처럼 미래에도 오직 명목에 그칠 것이다. 이 제도 아래에서는 진정한 문명이 있을 수 없다. 왜냐 하면, 이것은 사람들 간에 대립적인 이해 관계를 만들어 냄으로써 모든 사람이 서로 적대하도록, 심지어 서로 파멸시키도록 제도적으로 훈련시키기 때문이다. 이 제도는 세상사를 처리해 가는 방식으로서는 저열, 비속, 열등, 무지한 것이다. 인격을 배양하고 부를 창조하는 방식으로서 좀더 나은 방식이 이를 대처하지 않는 한, 항구적이고 전면적이며 실질적인 진보는 이룩될 수 없다."
푸리에는 프랑스 대혁명의 철학을 거부했다고 믿었고, 오웬은 관찰만으로 자신의 결론에 도달했다고 주장했지만, 양자 모두 자신들 주장의 토대를 루소의 사상에 두고 있었다. 인류는 천성적으로 선량하며 인류를 사악하게 만들어 온 것은 제도일 뿐이라는 루소의 사상은 당대를 완전히 휩쓸었던 사상이었으므로, 책에서 읽지 않더라도 누구나 물들어 있을 지경이었다. 푸리에는 주장하기를 마치 도구 상자에서 물건을 꺼내 보듯이 인간의 천성을 꺼내 보면, 신이 다양한 목적에 쓰라고 인간에게 주신 몇 가지 인간적 '열정'―본능과 기호―이 있다는 것이다. 이 '열정'들은 모두 필요한 것들인데, 근대 사회에서 문제는 이들 '열정'이 잘못 사용되고 있다는 점에 있을 뿐이요, 적절한 열정이 적절한 방향으로 사용되기만 한다면 '조화'가 세상을 지배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로버트 오웬이 전 생애를 통하여 역설한 원리가 있었다. 즉 자기 스스로는 전혀 통제하지 못하는 교육과 어린 시절의 감화가 인간의 됨됨이를 형성하는 것인 바, 인격이 형성되는 시기에 나쁜 일 대신에 옳은 일만 가르쳐 줄 수 있다면 인간은 (그의 표현을 빌자면) '수학적 정확성'을 띠고 누구나 행복하고 선량해질 수 있다는 원리이다.
절대 평등의 이상 사회
개인의 이해가 전체의 이해와 상충되지 않음을 실례로써 입증하기 위해, 푸리에와 오웬은 모두 대사회 내부에 제한된 규모의 몇몇 자족적 사회를 결성해 볼 것을 주창했다.
푸리에가 요구한 공동체는 개인 자본에 의존하며 완전한 평등을 지향하지는 않는다. 보통 선거제가 실시되며, 부자와 빈자의 자제가 동일한 교육을 받는다. 그리고 푸리에는 소득 격차가 너무 현격한 사람들을 동일한 공동체 내에 두지 않는 것이 좋다고 했다. 그렇지만 소득 격차와 더불어 종래와는 다른 성격의 것이긴 하나 계급 제도가 존재하긴 한다. 이 계급 제도에서는 자본가가 맨 위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먼저 공동체 성원의 최저 생활을 보장해 줄 몫을 공제한 뒤)배당제로 소득을 분배한다. 단지 4/12만을 자본량에 따라 분배하며, 5/12는 노동량에 따라 나머지 3/12은 발휘한 기량에 따라 분배한다. 하기 싫은 노동은 편한 노동보다 높은 대우를 받고, 필수 노동은 단순 유용 노동보다 높은 대우를 받으며, 유용 노동은 사치품 생산 노동보다 높은 대우를 받는다.
푸리에에게서 문제의 초점은 인간의 노동에 대한 관계를 모든 '열정'이 유익한 목적에 이용될 수 있는 방식으로 조직화한다는 간단한 것이었다. 누구에게나 하고 싶어하는 몇 가지 일은 있으니, 모든 일이 행해지지 않을 이유가 없다. 모든 인간적인 충동에는 유용한 용도가 있으니 모든 충동을 만족시키지 못할 이유가 없다. 따라서 누구나 자기 일에 매력을 느끼게 될 수 있는 것이다. 한 가지 일만 지속적으로 함으로써 권태나 피곤을 느낄 필요는 전혀 없다. 누구나 제 나름의 취미와 다양한 감정을 갖고 있을 것이지만, 각자는 다양한 일에 종사함으로써 이들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다. 산업상의 능률은 다양한 집단 간의 경쟁에 의해 촉진된다. 푸리에는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하면서도 생산량을 증가시키는 조직을 구상해 내었다. 그의 골치를 썩혔던 두 가지 문제―아이들이 흙장난을 좋아한다는 문제와 공동체 의 쓰레기를 처리하는 문제―는 서로가 서로의 해결책이 되었다. 즉 쓰레기를 아이들이 치우게 한다는 것이다.
로버트 오웬이 구상한 공동체는 이와 반대로 절대적 평등을 실현하려는 것이었다. 이 공동체의 유일한 계급 제도는 연령에 따른 것이었으며, 장년층이 통치 평의회를 구성한다. 어린이들은 세 살이 되면 부모 곁을 떠나 전문 교육자와 보모 밑에서 양육되고, 교환 수단의 단위는 한 시간의 몫의 노동으로 한다.
푸리에는 자기 계획의 자기 재정을 담당하고 싶은 부자와 기꺼이 상의하기 위해 매일 정오 자기 집에서 기다리겠다고 공고했다. 그러나 그는 10년 동안 매일 그 시각 그 장소에서 기다렸지만, 한 사람의 후원자도 나타난 적이 없었다. 그는 여전히 확고한 신념을 지니긴 했지만 매우 실망한 채로 1837년에 세상을 떠났다.
반면 오웬은 자신의 이상적인 공동체를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다. 오웬은 한때 자기에게 도움을 기대한 푸리에가 자기에게서 제한된 집단으로 공산주의를 실천하려는 사상을 배웠다고 주장했다. 어쨌든 여기서 중심 인물―그리고 그 당시 가장 특출한 인물―은 역시 오웬이다.
꿈을 현실로 바꾼 뉴 라나아크
로버트 오웬의 실제 행적은 오늘날에는 그 당시 소설의 주인공인 칼렙 윌리암스나 프랑켄슈타인만큼이나 기괴하다. 푸리에와 똑같이 사욕을 떠난 사회적 이상주의자인 그의 생애는 헨리 포드의 생애를 연상시킨다. 오웬은 스코틀랜드의 뉴 라나아크에서 최초의 면직 공장을 인수하였을 때, 그 공장 직공들은 더럽고 주정뱅이인 전혀 신뢰할 수 없는 남녀들과―그 당시 어쨌든 공장에서 일한다는 것은 자존심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했다―고아원에서 실어온 5~10세의 어린이들이었다. 이런 형편없는 인간들을 바탕으로, 또 게다가 모두 스코틀랜드인인데 자기만이 웨일즈인이라는 특히 불리한 조건을 지닌 채, 오웬은 25년 이내에 높은 생활 수준과 상당 수준의 교육을 갖춘 공동체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리고 오웬 자신은 그 공동체 사람들에게 숭배를 받았다. 오웬은 공동체 성원들에게 다른 어떤 경쟁 상대보다 높은 임금을 주고 짧은 시간 일하게 했으며, 그들과 함께 불황을 이겨냈다. 그는 자기의 동업자들에게 지불할 배당금을 일정액으로 제한하고 나머지는 모두 공동체의 개량 사업에 돌렸다. 오웬은 사회전체가 이런 식으로 운영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전세계를 향하여 호소했다. 모든 어린이들을 유년기에 부모로부터 인수하여 처벌하거나 학대하지 않고 내가 우리 노동자들의 어린이들 교육하는 방식처럼 교육시키기만 한다면 새로운 인류가 탄생하지 않겠는가?
오웬은 인적 자원을 어디서 찾아야 하는지, 혹은 그 인적 자원을 다듬기에 적합한 조건이 갖추어진 곳이 어디인지를 우선적으로 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인간이란 전반적으로 불완전한 존재이므로 어디에서 시작할 것인지와 누구에게 그 시작을 맡길 것인지가 가장 중요한 문제라는 점을 그는 깨닫지 못했다. 그는 가장 가망성 없는 인간들을 상대로 뉴 라나아크에서 스스로 시작했다. 그리고 그 자신은 매우 고상한 인격을 지닌 예외적인 인물이며, 뉴 라나아크를 이상적인 공동체로 만든 것은 질이 나쁜 부모들에게서 태어난 어린이들의 천성적인 선량함이 아니라 바로 그 자신이라는 점을 결코 깨닫지 못했다. 그는 뉴 라나아크가 자기 자신이 건설했으며, 자기가 관리하고 운용해야만 하는 기계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즉 로버트 오웬은 자신의 공장에서 자애롭고 전능한 신의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권고만으로는 직공들을 근면하고 정직하게 만들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자, 그들을 점검하고 억제하는 방법을 고안해 냈다. 그는 일터에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 머리너머로 작은 사각 나무 패찰을 걸어 놓았다. 이 나무 패찰의 네 변에 각각 다른 색깔을 칠해 놓았는데 각 색깔은 각각 다른 품행 등급을 나타내었다. 이리하여 그는 어느 날이건 공장을 둘러볼 때면 십장이 돌려 놓은 패찰의 색깔을 보고 그 직공이 전날 어떻게 행동했는가를 알 수 있었다. '품행 극히 나쁨'이나 '품행 좋지 않음'을 나타내는 색깔의 표찰과 마주칠 때마다 그는 지나가면서 태만한 근로자를 물끄러미 응시할 뿐이었다. 이 제도 아래에서 그는 색깔이 점차로 검은색에서 파란색으로, 파란색에서 노란색으로, 마침내는 흰색으로 변해가는 것을 보고 만족스러워했다. 매일의 등급을 일지에 기록하게 하여, 그가 없었던 동안에 노동자들이 어떻게 처신했는가를 돌아온 뒤 자신이 항상 알 수 있게 했다. 그리고 그는 도둑을 추적하여 찾아내는 전혀 실수 없는 방법을 고안해 내기도 했다. 그러나 이 도덕적인 세계를 창출해 낸 것이 바로 자신이라는 점을 결코 깨닫지 못했던 오웬은 자기가 거느린 교사들이 다른 곳에 가서는 뉴 라나아크 같은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것에, 그리고 그의 공동체를 다른 사람이 관리하도록 맡겨 두자 번영하지 못하는 것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후일 오웬과 함께 협동 조합 운동을 벌인 차티스트운동의 한 지도자인 윌리엄 로베트는 오웬이 본래 독재적인 성격이어서 여하한 민주주의적 기반 위에서도 함께 일하기는 거의 불가능한 인물이라고 평했다.).
그러나 그의 동업자들이 자신의 방법에 반기를 들 기세가 뚜렷해져서 그가 항상 새로운 동업자를 찾으러 다니지 않을 수 없게 되고, 또 새로운 동업자를 발견한다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진다는 사실을 깨달아 감에 따라, 그는 점차적으로 자본가들이란 탐욕스럽고 무지한 족속들이라는 사실을 직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가 의회를 통해 로비 공작을 벌여 온(영국에서는 최초로 제출된) 연소자 노동 금지 법안이 면방업자들의 맹렬한 반대를 받았을 뿐 아니라, 그가 신뢰해 온 피일과 같은 정치가들에 의해 그 법안 내용의 핵심 조항을 삭제당해 버리자 그의 신념은 한층 더 흔들렸다. 오웬은 기대를 걸고 런던의 경제학자들을 찾아가 보았지만, 그들이 실제 경험은 조금도 없는 사람들로서, 오웬의 말에 따르자면, 단지 공장주들의 추악한 행위를 합리화할 체계를 만드는데 골몰하고 있음을 발견하고서 깜짝 놀랐을 뿐이었다. 나폴레옹 전쟁에 뒤따른 절망적인 경제 사정의 타개책을 논의하기 위한 회의가 캔터베리 대주교를 의장으로 하여 저명한 경제학자, 박애주의자, 정치가, 실업가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려, 그도 초대를 받고 참석했다. 그런데 그 회의에서 그는 당시의 실업 사태의 원인이 제대 군인과 군수 산업의 급격한 붕괴에 있음을 이해하고 있는 참석자가 변변히 교육도 받지 못한 자기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기계로 인해 수백만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어버렸다고 설명하자 모든 참석자들이 놀랄 정도였다. 젊은 시절 그는 면직 공장의 관리자 노릇을 한 적이 있었는데, 매우 가까이 살고 있던 공장주는 단 한 번밖에 공장을 방문한 일이 없었으며, 그 방문조차도 외국 손님에게 공장을 구경시키기 위한 것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오웬은 이 모든 경험에도 불구하고 올바른 결론을 끌어내지 못하였다. 이제 그는 사람들에게 진실을 이해시키자면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걸리게 되리라는 것을 염려하게 되었을 뿐이었다.
가혹한 현실
그런데 그럴 즈음에 그들⇬수상, 대주교, 왕 들―이 그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하류 계급의 불온한 정세에 대해 심각하게 우려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하류 계급을 행복한 상태로 유지시켜 주는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오웬은 여전히 그들의 공평 무사함을 신뢰하고 있었다. 엄중한 책임을 떠맡고 있는 그들 같은 사람들이 인류의 전반적인 향상 이외의 다른 어떤 것을 바라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때, 그의 생각을 완전히 뒤집어 엎어버린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그는 1817년 엑스라 샤펠에서 개최된 열강 회의에 참석하여 그 회의의 간사장인 한 노련한 외교관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이 저명 인사에게 눈부시게 발전한 과학 덕택으로―만일 인류가 서로 협력하는 것이 인류 자신의 최고의 이익을 실현하는 길이라는 것을 깨닫게만 된다면―이제 소수 특권 계급만이 아닌 전체 인류가 훌륭한 교육을 받고, 훌륭한 음식을 먹으며, 훌륭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여태까지 다종 다양한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해 왔었다. 그러나 간사장의 대답을 듣고서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노련한 외교관은 맞는 말이라고 대답한 뒤, 그들―그 자신이 대표하고 있는 유럽의 지배 세력―은 그것을 다 알고 있으며, 그들이 바라지 않는 것이 바로 그것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만일 일반 대중이 잘 살게 되고 자립적이 된다면,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지배 계급이 그들을 지배할 수 있겠는가? "간사장의 이러한 고백을 듣고 난 뒤, 나는 회의에 대한 흥미를 거의 잃어버렸다. 장기간에 걸친 험난한 과제가 내게 주어져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과제는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서로 다툰다는 것이 양자 모두의 진정한 이해와 참된 행복에 정면으로 반하고 있음을 양자에게 깨우쳐 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쳐부수어야 할 편견이 모든 나라 모든 계급에 뿌리 깊이 박혀 있음을 감지했다. 이 편견을 뿌리 뽑자면 무한한 인내와 끈기 이외에도 뱀의 지혜와 비둘기의 순진함과 사자의 용맹함이 요구됨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굳은 결의로 시작한 일이니 만큼 단호하게 목표를 향하여 곧장 전진해 나가야 함을 절감했다."
그러나 권력자들은 이미 오웬을 파괴적인 이상주의적 세력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그는 공개 연단에서 진리의 주요한 적은 종교라고 단언하였으며, 종교만이 아니라 재산제도와 가족 제도까지 공격했다(이리하여 그는 푸리에보다 훨씬 앞으로 나아갔다. 푸리에는 이 세 가지를 수정한 채로 유지하는 공동체를 계획했었다.). 이제 교회가 그에게 적대감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그의 친구들은 그와 어울리기를 꺼려하게 되었다.
그는 유럽은 병들었으므로 새로운 사회를 창건하려면 신선한 땅을 찾아야만 한다고 단안을 내렸다.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독일계 라파이트 교파로부터 인디애나주 뉴우 하모니의 3만 에이커의 땅을 인수했다. 오웬은 1826년 7월 4일에 인류의 3대 억압자인 '사유 재산て불합리한 종교て결혼'으로부터 벗어나자는 <정신 독립 선언>을 선포하고, '근면하고 선량한 사람은 국적을 불문하고' 그의 공동체에 참가하기를 권유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유럽에 돌아왔다가 다시 떠났다. 그러나 미국인은 영국인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었다. 그리고 뉴 하모니에서 그들은 더욱 형편없었다. 서부인들은 뉴 라나아크의 스코틀랜드 프롤레타리아처럼 온순하지가 않았다. 또 제한 없이 누구나 받아들였기 때문에 각종 부랑자와 악당이 들끓었다. 오웬은 테일러라는 파렴치한 인물과 동업을 하게 되었는데, 미국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에는 그와 손을 끊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테일러는 자기도 그 땅 위에 공동체를 하나 세울 생각이라고 하면서 오웬에게 손을 끊는 대가로 한 구역의 땅을 요구했다. 거래가 이루어지기 전날 밤 테일러가 많은 양의 농기구와 가축을 몰래 자기쪽 땅으로 날라 갔기 때문에 그 다음날 거래가 이루어졌을 때에는 그것들이 모두 그의 소유가 되었다. 그 후 테일러는 자기 땅에 위스키 제조소를 만들어 오웬의 금주 설교를 조롱했고, 제혁 공장을 세워 오웬의 제혁 공장과 경쟁했다. 뉴 하모니는 3년도 버텨 내지 못했다. 오웬은 마침내 재산을 여럿으로 갈라 팔아 버렸다.
그는 그 뒤에도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같은 일을 벌여 많은 돈을 이러한 공동체에 날려 버렸다. 그는 돈에 대한 감각이 거의 없었던 듯하다. 뉴 라나아크 시절의 초창기에는 면직업의 경기가 좋았었고 그가 자신의 최초의 공동체만을 소유하고서 스스로 감독할 수 있었으므로, 돈 관계에서의 약점이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유지해 나갈 방도에 대한 아무런 생각 없이 설비와 공장을 사서 다른 사람에게 맡겨버림으로써 많은 돈을 날려 버리곤 했다.
외로운 죽음
그는 마침내 완전히 빈털터리가 되어 자식들의 부양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더이상 부유한 공장주도 아니요, 또한 지배 계급의 호의마저도 잃어버린 그는 이제 완전히 새로운 일을 하기 시작했다. 1932년의 개정 선거법은 오직 중산 계층에게만 지지를 얻었고 노동자 계급에게는 환멸과 반항심만을 남겨 놓았을 뿐이었다. 마찬가지로 환멸을 느낀 오웬은 노동자계급에 가담했다. 그는 뉴 라나아크마저 포기해 버렸으며 이제는 고용주 신분도 아니었다. 그리하여 이제 오웬식 협동 조합 운동과 전국 대통합 노동 조합에 관계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치적 방법을 사용하는 것을 너무도 못 견뎌한 까닭에, 즉 많은 경험을 했음에도 여전히 자기 제도의 확신성과 필연성을 너무도 확신한 까닭에, 그는 노동자 계급의 장기간에 걸친 고통스런 투쟁에서는 거의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조직한 후 1년도 채 못되어 노동 조합 운동은 와해되어 버렸다. 오웬은 차티스트 운동과 곡물법 폐지 운동에는 관심이나 공감을 거의 표명하지 않았다. 그는 아직도 일거에 대뜸 평등을 확립하는 것이 훨씬 쉬운 길이라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그리고 인류가 아직도 너무나 몽매하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저승에 간 사람들의 힘에 의지하려 하였다. 만년에 이르러 그는 자기가 알고 있던 모든 고결한 인물들―생시에 그의 주장을 공감을 갖고 경청하였으며 그의 이상을 정말로 공유하고 있었다고 느껴졌던 사람들로서 이제는 죽어 그의 곁을 떠나간 모든 사람들―즉 셸리, 토마스 제퍼슨, 채닝, 켄트 대공(이 대공이 그에게서 돈을 빌어 쓴 뒤 갚지 않았다는 사실도 잊어버리고)등이 자기와 여러 가지 약속을 맺고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또 자기와 의논하고 자기의 기운을 북돋아 주기 위해 저승에서 돌아오고 있는 중이라고 믿게 되었다.
그에게 죽은 사람들이 필요하게 되었던 것은 여러 해 전에 그의 머리에 떠올랐으나 지금 세상에서는 아직 확실한 근거를 잡지 못한 몇 가지 생각―"지금의 무지몽매한 인류로서는 좀처럼 알아차릴 수 없을 매우 중대한 어떤 변화가 명백히 진행 중"이라는 생각, "쌓이고 또 쌓이는 엄청난 부 속에서 모든 사람이 빈곤에 허덕이거나 아니면 남의 빈곤 때문에 절박한 위험에 처해 있다는 점으로 볼 때, 상호 간의 적대적인 이해 관계에 기초한 제도가 인류를 위해 다행스럽게도 이제 오류와 모순의 극한점에 도달하였다."는 생각, 곧 '단결의 원칙'이 '분열의 원칙'을 대체하게 된다는 생각, 또한 그때가 되면 모든 사람이 "개인의 행복은 공동체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행위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확인해 보려고 했기 때문이다.
큰 돈을 모았다가 깡그리 날려 버린 로버트 오웬은 1858년 웨일즈의 조그마한 마을―그는 이곳에서 태어나 열 살에 사회로 진출하여 꿈같은 출세를 거듭하고, 마침내 면방업계의 개척자가 되었다―로 돌아가 아버지의 말 안장 가게 옆집에서 숨을 거두었다.
에드먼드 윌슨/미국의 뉴저지주 출생으로 프린스턴 대학을 졸업하고, 1차 대전 이후 신문 기자 등으로 활약했다. 후에 비평에 눈을 돌려 20세기 비평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주요 저서로는 『To the Finland station』, 『Axel's Castle』등이 있다.
쇼우의 페이비어니즘과 사회개혁관 연구
서 윤 교
Ⅰ
버나드 쇼우(Bernard Shaw)는 19세기 후반 이후 기존의 극과 유사한 사실적인 소재를 다루면서도 그것들을 정치, 사회, 철학의 여러 문제들과 연관시키면서 사회라는 역사적이고 구조적인 체제 내에서 공존하는 인간의 삶과 현실을 다양하고 심도 있게 묘사하여 독창적인 사실주의 극을 확립시켰다. 아울러 그의 극은 사회비판의 주제를 냉소적 어조로 드러낸 사회문제극으로서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는 예술가란 현실의 모사 외에 어떤 비젼을 제시해야 하며 그러한 비젼을 통해 왜곡된 현실을 바로잡고 이상세계의 가능성을 추구해야 한다는 관점을 지녔던 것이다. 그는 빅토리아조 시기의 사회경제적 모순으로 인한 정신적 혼란 속에서 사회개선의 필요성과 페이비어니즘(Fabianism)을 선전하였다.
1880년대 후반에 명료한 특질을 지니게 된 페이비어니즘이란 어휘와 관념은 혁명에 대립되는 점진적 변화, 격변에 대립되는 점진주의, 합헌적이고 의회적 수단을 통한 사회주의의 달성(현존 정치정당과 지방정부에로의 침투를 통해) 그리고 진보적이고 사회개선적 세력과의 협력(순수한 관념적 입장에 대립되는 실용적 사회주의), 마르크스(Marx)의 프로레타리아니즘에 대립돼는 중산층의 지성주의(지적 존중)를 의미하게 된 것이다. 아울러 사회학의 역사적 기반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페이비언협회의 실행위원으로 쇼우와 같이 활동했던 시드니 웹(Sydney Webb)은 사회적 유기체설(Social organism)의 개념의 후기다윈주의(Post-Darwinism)를 주장하고 있다. 그는 사회주의자의 목표로서의 정적인 유토피아의 개념을 거부하며, “사회적 진화는 모든 생명체의 진화에 대한 현재의 경로로 간주할 수 있고, 전략, 과정, 혹은 목적 -사회정의와 개선된 세계 등 -을 위한 수단으로서 진화는 혁명을 대체한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과정이 목적 그 자체가 된 것같이 보인다”1)라고 언급하고 있다. 생명과 제도라는 근본적 모순은 비실제성이라는 한계로 인해 혼란과 억압을 가져왔고 아울러 생명과 제도가 수평적 상호관계를 유지하지 못하고 위계질서의 구조 속에 폐쇄되어 온 것도 역사발전의 장애로 간주되었다. 모순에 대한 균형감각과 진보에의 의지는 현실과 초현실에 대한 인식에 공히 적용되어 그의 독특한 전략을 만들어내었다. 상황개선과 생명의 진화발전은 동시에 추진되어야 할 과업이므로 침투와 점진주의는 그의 사상과 문학활동에 기본 강령을 제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으며 이 침투와 점진주의가 페이비어니즘의 주요한 핵심사상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쇼우의 저서인 ꡔ페이비언논집ꡕ, ꡔ페이비언논집 1908판 서문ꡕ, ꡔ페이비언논집 1931판 서문ꡕ 등을 중심으로 그의 페이비어니즘 사상을 그리고 아울러 그의 일부 극작품을 통해 페이비어니즘과 사회의 점진적 개혁 사상, 마르크스(Marx)주의비판 등이 어떻게 드러나는지 검토할 것이다.
Ⅱ
쇼우의 페어비어니즘, 사회개혁사상과 이러한 사상이 잘 나타나있는 극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가 살던 시대환경을 살펴보고, 그 가운데 페이비언 협회에 대해서 살펴보아야 한다. 영국의 산업혁명은 자본주의와 결탁하여 여러 가지 사회적인 병폐를 가져왔으며 ,그에 따른 고도 성장은 사회적 부조리의 만연이라는 부정적 결과를 낳았다. 그가 활동한 19세기 말은 기존의 절대적 세계관과 사상체계가 심각하게 도전을 받은 사상적 전환기였다. 마르크스의 사회주의이론이 기존의 경제사상 및 체계에 커다란 변화를 주었고,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의 ꡔ종의 기원ꡕ(Origin of Species)(1859)은 서구 문명의 정신적 지주인 기독교 사상에 충격을 주었으며, 이러한 가운데 영국 사회가 경제적으로 중산계층과 노동자들의 자유에 대한 요구가 높아져 노동자의 시위가 일어나고 경제공항의 조짐이 감도는 등 사회는 일대 변혁을 겪는 시기였다. 1870년 말 미국, 독일 등의 후진 자본주의 국가의 약진에 따라 영국은 불경기를 겪었다. 불황과 더불어 노동조건의 악화와 실업자의 증가로 노동자운동이 빈번했고, 챠티스트운동의 종식이래 사회주의 운동이 1880년대에 급격히 부활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가운데 쇼우는 예리한 통찰력으로 당시 영국 사회가 지니고 있던 갖가지 모순점들을 너무나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고 따라서 그의 능동적이고 낙관적인 사고 방식이 사회 개혁 쪽으로 기울게 된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1882년 미국의 사회주의자인 헨리 조지(Henry George)의 연설을 듣고 감화를 받아 사회주의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그의 저서ꡔ진보와 빈곤ꡕ(Progress and Poverty)과 마르크스(Marx)의 ꡔ자본론ꡕ(Das Kapital)을 읽은 후에는 일생의 중대한 전환점을 맞이하였다. 그는 여기서 현실을 지배하는 자본주의가 낭비적이고 어리석음을 인식하였고 사회주의(Socialism)가 오히려 도덕적이며 지성적이라는 것을 자각하였다. 그러나 그는 곧 마르크스의 사상 중 계급투쟁이라든가 노동가치설 또는 혁명에 의존하는 사회개혁의 방법이 비실제적임을 발견하고 곧 마르크스의 사상을 거부했다. 그리하여 계급투쟁과 노동자의 혁명없이 점진적인 의식의 개혁을 통해 사회주의가 도래해야 한다는 페이비어니즘을 택하게 되었고, 당시 종교와 과학의 갈등, 사회경제적 모순으로 인한 정신적 혼란과 난민의식이 팽배했던 19세기 후반 영국적 상황에서 1884년에는 페이비언 협회(Fabian Society)에 가입하여 8여년을 사회개선의 필요성과 페이비어니즘을 선전하는 데 주력했다. 이 때의 사회활동이 많은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어 그는 작가인 동시에 사회사상가로 인식된 것 같으며, 그의 극이 사회주의 사상의 선전 도구라거나 그의 시대의 사회주의사상과 관련된 여러 사상을 수합한 절충주의자라고 간주되었던 것 같다.
페이비언 협회는 마르크스주의에 반대하는 의회주의적, 점진주의적 경향의 영국적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영국의 지식인 단체였다. 사회주의 단체 중에도 미국의 철학자인 토마스 데비드슨(Thomas Davidson)의 영향을 받아 소수의 젊은 지식층을 중심으로 최고의 도덕적 가능성이 실천될 수 있는 사회실현을 추진하는 새생활동우회(Following of the New Life)가 조직되었고, 이 단체는 모든 개혁의 기본을 개인의 도덕적 개혁에 두려는 개인주의적 도덕주의자들의 모임이였다. 이 단체가 1880년 1월 4일 새로이 사회문제연구를 위한 단체를 창립하니 이것이 페이비언 협회의 시초가 되었다. 이 페이비언 협회를 설립한 사람들은 작가, 교수, 성직자, 관리 등 다양하게 구성된 지식층의 젊은이였다. 이 페이비언 협회에서 쇼우는 리더로서 활약하게 된다. 페이비언 협회의 활동은 다방면으로 확대되었고, 노동조합, 중산계층, 자유당, 보수당 등에 크게 영향을 미쳤고, 특히 후일 자유당이 1901년에 실시한 양로연금제도 제안하였고, 영국사회보장제도의 기초를 만들었다.
페이비언 협회는 1884년 5월 쇼우와 시드니 웹이 참여함으로써 활발해졌다. 페이비언 협회는 회원의 유입으로 조직화를 시도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조사, 연구를 통한 주장을 사회개혁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전파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협회에서 쇼우는 선전자역할을 맡았고, 실행위원회의 위원으로 선출되어 ꡔ페이비언 에세이ꡕ(Fabian Essays)를 웹 등의 실행위원회의 위원 등과 같이 저술하였다. 한편 연구 결과를 팜플렛 「페이비언 트랙트」(Fabian Tract)와 월간지 「페이비언 뉴스」(Fabian News)에 싣고, 강연과 집회를 통해서 그의 사상을 사회에 알렸다. 이 「페이비언 뉴스」는 모임에서 읽혀진 논문들을 요약하고, 서적에 대한 비평을 활자화하고, 선전에 유용한 사실들을 간행하고, 페이비언에 의해 이루어진 강연일지를 제공하는 등 페이비언 협회의 근황과 활동에 대한 정보제공을 목적으로 하였다. 페이비언 협회는 회원들에게 지식과 정보를 제공하고 협회의 목표인 사회제도의 재건설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를 위해 일련의 소책자를 발간하였다. 페이비언 소책자 중 1884년 발간된 이후 페이비언 협회의 전략에 합치하는 것, 혹은 페이비언 협회의 전략을 확립한 것으로 평가되는 것은 제5호 「사회주의자를 위한 사실」(Facts for Socialists)이 최초이다. 쇼우와 시드니 웹은 1887년 말 제 7호 「진정한 급진주의 정강」(The True Radical Program)에서 자유당의 선거정강에 대하여 비난하고, 성인참정권, 선거비용에 대한 지불, 불로소득세, 철도의 국유화, 1일 8시간 노동 등을 요구하였다. 1889년의 「런던사람들에 대한 사실」은 대도시 런던에 대한 통계적인 사실들을 열거하고, 사회주의적인 원칙 위에서의 개혁을 제안하고 있다.1) 이 책자는 지방자치 사회주의에 대한 근원이 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으며, 제 14호 「신개혁법」과 제 17호인 「구빈법개혁」은 구빈법에 관한 다양한 계획과 개혁안을 엿 볼 수 있다. 마르크스 역사이론의 페이비언에 대한 영향은 ꡔ영국의 사회민주주의에로의 발전 과정ꡕ(English Progress towards Social Democracy) 이라는 소책자 제 15호에 나타나 있다. 이것은 「공산당 선언」에서 역사에 관해 언급한 부분과 매우 유사하다. 역사과정을 제시하고 있는 그 내용은 잉여생산을 위한 투쟁을 강조하고 있으며, 그 해결책은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진전과 집합주의적 소유권으로의 점진적인 변화를 통해, 생산 수단에 대한 개인 지배를 없애버리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2) 페이비언 소책자를 검토해 보면 관념적인 문제를 취급하거나 추상적인 이론문제에 대해 논의하고 있는 것은 몇 개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난다. 거의 모든 책자는 정리된 자료에 의해 분석을 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페이비언의 다른 저작에도 공통적이다. 쇼우와 웹의 ꡔ페이비언 논집ꡕ에서의 이러한 경험주의적 요소는 페이비언주의의 저변에 깔려 이 사상의 방법론적 토대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회주의 이론 전개에 앞서 먼저 정확한 사실에 대한 파악을 중시하고 있다는 것은 실증주의 사상으로부터의 영향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페이비언 뉴스」는 후일 독립적이고 독립된 회사로 경영되지만, 1913년 5월 이것은 노동당의 기관지가 아니라 페이비언주의의 잡지였고, 어떤 정당의 편견도 지적하지 않았다. 새 잡지에 쇼우는 정기적인 기고자로 활동하게 된다.
Ⅲ
1889년에 쇼우 등에 의해 만들어진 ꡔ페이비언 논집ꡕ에 표현된 페이비언 사상의 주요한 특성을 살펴 보면 첫째로 단일지도자를 따르지 않고 여러 사람들의 생각 중에서 그들 자신의 노선에 적합한 것을 발전시키는 절충주의라는 것과 둘째는, 쇼를 비롯한 페이비언들이 지난 1세기동안 유럽사회를 사회주의로 향하게 하는 주요한 흐름이 경제적인 영향력과 함께 민주주의라고 믿었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은 페이비언의 세 번째 특성인 점진주의를 낳았다. 맥브라이어(A. M. McBriar)는 페이비언들이 점진주의를 선택한 이유를 다음의 두 가지를 들고 있다. 하나는 새로운 민주주의에 대한 기대, 다른 하나는 사회주의의 도덕적 배경이 전체 사회의 구성원을 설득시키기에 충분하다고 하는 기대를 들고 있는데, 중요한 것은 영국의 경험주의적 전통으로 여겨진다. 페이비언들은 자본주의사회에 있어서도 계약의 자유와 사유재산제도를 그 근간으로 하는 순수한 방임주의는 이미 존재하지 않고, 자본주의는 점차 집합주의의 방향으로 변화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는데, 그래서 쇼우는 자연과 역사에 대한 진화론인 해석을 수용하여 영국에서 사회주의로의 변화는 필연적으로 민주적, 점진적, 합헌적, 평화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쇼우는 민주주의가 사회주의의 정치적인 대행자이며, 국가의 중앙집권적 기구는 결국에 가서는 민주적인 힘에 의하여 장악된다는 것이다.
쇼우를 비롯한 페이비언들은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으로서 사회주의적 정책의 실현과, 정치적 방법에 의한 사회주의의 목표달성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헨리 조지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 볼 수 있다. ꡔ페이비언 논집ꡕ에서 쇼우는 모든 경제분석론이 토지경작에서 시작한다고 규정하면서, 사회주의의 시작에 대해 “인간은 자연이 준 이 임의적인 산물들이 그들에 대한 집단적 추구 속에서 각자에 의한 노동에 따라 그들에게 정당하게 배분하는 권력과 성의를 가지고 있는 어떤 기관에 의해서 가로채질 수 있다는 소망에 상당히 도달하게 되었고, 그 소망이 사회주의이다”3) 라고 언급하고 있다. 동일한 노력과 시간을 투여했을 때도 자연이 주는 보답은 균일하지 않다는 것이다. 한 지역내의 불균등한 생산물을 통괄하여 주민들의 노력에 비례, 배분하는 선의의 강력한 대리기구에 대한 소망이 쇼우의 사회주의의 시발점이라고 볼 수 있지만. 그러나 현실에서 불균등한 생산물 가격에 해당되는 돈은 지대란 명목으로 지주에게 돌아갔다. 인구증가, 기술진보, 산업화에 따른 지가상승으로 지대수입이 증대되자 활성화된 생산력의 과실 또한 지주계급에게 흡수되는 것처럼 보였다. 쇼우는 지대에서 자본주의의 특징적 독소를 발견했을 것이다. 따라서 노동자들이 창출한 가치가 유한계층에 의해 잠식되는 불합리를 인식하게 된 것이다. 헨리 조지의 토지단일세로는 부족하다고 판단한 쇼우는 토지공개념을 포함한 사회주의 이외에는 대안이 없다고 결론짓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Ⅳ
쇼우가 제시한 페이비어니즘의 실천전략은 자본주의 속에 침투하여 자유주의자와 제휴하고 의회에 진출하여 점진적으로 자신의 견해가 확산되도록 노력하고 기다린 후, 시기가 도래하면 변혁을 시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쇼우는 인간개조에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고 보고 있는데, 그것은 인간이 전통적 생활방식과 사고방식에 젖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생활양식과 개선된 세계를 창조 운영할 주체로서의 초인상정은 생명력의 진보의지와 연결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쇼우는 기존 종교의 인위적 체계를 공격하고 자신 나름의 종교를 구축한다. 완전한 신 대신 불완전한 초인의 탄생을 통하여 자신의 완성을 원하는 식이 되는 것이다. 그는 인간들이 문명 속에서 인위적 삶을 영위하고 생명력으로부터 이탈되어 있고, 개인적 이익에만 혈안이 되어 생명을 소모하고 있다고 보고 있는데, 쇼우는 독자와 관객으로 하여금 스스로를 자각하고 생명원과의 교류를 회복하는데 목표를 두고 있으며, 작품활동도 인간과 생명력 사이에 창조적인 교류를 차단시키는 모든 제도와 의식의 틀을 파괴하고자 하는 것이다. 점진적 개혁의 현실적 가능성에 주목한 페이비언들은 의회로 진출하여 자유주의자들 속으로 침투하는 전략을 수립했다. 특히 쇼우는 온건한 정신이 광기보다 덜 자극적이고 침투와 점진은 페이비언 정책의 시발이지 목표가 아니란 인식을 하고 있다. 페이비언들은 상대가 있음을 인정하고, 소기의 목적을 최대한 달성하기 위해 사용할 현실적 방법을 모색했다는 점에서 지적 집단이라는 평가를 받을 만하다. 그들의 의회 진출 시도는 그들이 의회주의 신봉자여서 보다는 그 외의 다른 개혁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며 비폭력의 선택도 폭력이 당시 상황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폭력의 사용은 진보세력의 소멸로 인도한다는 역사적 교훈 등을 프랑스혁명 등을 통해서 알고 있었다. 쇼우는 그의 저서 ꡔ페이비언논집 1908년판 서문ꡕ(Preface to the 1908 Reprint)에서 “페이비언들은 유산자들이 학살을 주저않는다는 것과 성공할 수 없는 혁명가는 중상, 위증과 무자비한 법적, 군사적 대량 학살을 기대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4) 라고 쓰고 있다. 이렇게 페이비언들은 폭력이나 소수 혁명가에 의한 체제의 전복이 아니라 대다수의 국민들에게 페이비어니즘의 정당성을 입증하고 국민이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게끔 하였다. 여기에서 페이비언들의 계몽적, 교육적 성격이 뚜렷이 나타난다. 페이비언들에게 있어서 교육의 중요성은 곧 국민적 자질을 질적으로 높이려는 시도였다고 할 수 있다. 쇼우는 인간에게 아무리 원초적인 생명력이 넘친다 할 지라도 페이비언주의자가 될 만큼 지적이지 못하거나 정치적으로 교육을 받지 못한다면 그에게 미래가 없다고 말한 것은 페이비언주의 하에서의 인간의 지식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 페이비언들에게 있어서 특히 쇼우에게 있어서 사회개혁을 하기 위해서는 국민 전반에 걸쳐 페이비언사상이 보급되고 전파되어 국민이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어야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페이비언사상을 국민들에게 보급시키고 확산시키는 일이야말로 그들의 임무였던 것이다. 쇼우는 페이비언의 본질적인 성격은 타협정신이라고 하고 있다. 타협이란, 한 사람의 신념이 다른 사람의 신념을 누르는, 그래서 결과적으로 패자와 승자가 생기고 강제에 의해서 한쪽이 굴욕적인 감정을 가질 수 밖에 없는 그런 것이 아니다. 타협은 곧 설득이며 토론이다. 이러한 타협과 토론의 강조가 그로 하여금 토론극을 도입하게끔 하게 하는 것이며 ꡔ인간과 초인ꡕ과 같은 극을 통하여 등장인물인 앤과 테너, 램즈던의 심각한 사상적인 충돌을 유도하는 데서부터 출발하여 토론을 통해 모든 인물간의 갈등이 표출되고 긴장감이 더해 가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토론 방식은 결국 인류와 사회의 발전을 위해 자신이 주장하는 바를 담은 교훈적인 내용을 독자나 관객이 수용하도록 하는 한 과정이다. 여기서 쇼우가 강조하는 교육과 계몽을 살펴보면 첫째로 상식을 강조하는데 있다. 페이비언들에 있어서 사회주의는 연약함과 무지함으로부터 그들 자신의 앞길을 바라보고 선택할 수 있는 계몽의 길로 끊임없이 전진하는 한 단계에 불과하며, 따라서 사회주의의 기본적인 덕은 상식이외의 덕이 아니었던 것이다. 둘째로 사실과 지식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을 조하였다. 페이비언들은 사실이 중요하며 궁극적으로 사실의 영향이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하고 행동하고 결정시킨다는 것을 확신했다. 페이비언들은 정확성 부족은 단지 진보를 연기시킬 뿐만 아니라 더 큰 해를 가져다 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의심할 여지없는 사실과 확실한 권위있는 진술의 꾸준한 투하에 의해서만이 현금 자본주의의 부도덕성, 잔인함, 비효율성이 모든 편견 안에서 축출되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쇼우는 ꡔ홀아비의 집ꡕ(Widower's houses)에서 자본주의의 낭만적 이상에 빠진 대중이 사회적 현실을 인식하고, 사회주의로 가치관을 전도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이 작품의 의미는 주인공인 사르토리우스(Sartorius)가 빈민 착취의 도덕성을 합리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비합리적인 관습과 현실과 유리된 이상적인 가치관을 부정하고자하는 사회의 개혁에 있다. 쇼우는 낭만적인 이상주의나 관습적 도덕률에서 벗어나 계층 간의 문제를 단절된 것으로 파악하기보다는 사회구조와 그 체계를 수용하는 사회주의적인 의식의 개혁을 강조한다. 쇼우가 이 극에서 전하려는 궁극적인 메시지는 자본주의가 존재하는 한 아무도 자본주의의 부패로부터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신념이 필요하다는 것이 전하고자 하는 쇼우의 메시지라는 지적처럼, 이 극에서도 부패한 자본주의를 몰아내서 모든 경제적인 부패상을 제거하는 체제, 즉 페이비언체제로 들어가도록 도와야 한다는 것이 쇼우의 의도이다. 그러나 쇼우는 이 작품에 나타난 사회주의적 개념이 비평가들에게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고 주장하며 자신이 지니고 있는 사회주의에 대한 개념을 밝힌다.
사회주의를, 마치 빅터 위고(Victor Hugo)의 레미제라블 ꡔLes Miserablesꡕ에서 절정화되어있지만 고통과 부정의에 대한 가난한 자의 항의와 함께 동정의 정신으로 받아드리려는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단계의 사회주의는 슬럼의 공포를 단지 슬럼의 주인에 입장에서 잔혹한 개인적 비행의 결과로 간주하는 나의 작품에 주인공들의 후회에 잘 나타나있다.5)
쇼우가 추구하는 페이비언주의는 빈민의 비참함과 부자의 횡포를 역설하며 자본주의의 구조적인 모순의 주체인 중산층을 그 대상으로 중산층의 변화를 촉구하는 부르주아적 사회주의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페이비언주의와 마르크스주의(Marxism)를 살펴보면 페이비언주의와 마르크스주의는 평등, 자유, 그리고 우애라는 근본적인 사회주의 가치를 수용한다는 점에선 유사하지만, 보다 구체적인 문제에 관한 입장에서는 그 차이점이 현저하게 드러난다는 점이다. 첫째, 마르크스주의는 이론에 강하고 특정한 제안에 약한 반면, 페이비언주의는 이론에는 약하지만 처방에는 강하다. 둘째,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사회를 집합주의적으로 재구성하는 정치기구를 만들기 위해서, 기존의 국가를 부인하며 계급투쟁을 강조하고 혁명을 시도하는 반면에, 페이비언들은 사회주의 실현을 위해서 국가가 사회개혁사상을 수용해야 하며, 보통선거 기반의 민주정치에서 국가가 언제나 다수파에 의하여 지배되어야 하며, 의회민주적인 수단을 통한 사회주의의 진화를 확신했다는 점이다. 이는 페이비언들의 점진주의의 불가피성에 대한 신념에서 나온 것이다. 셋째, 페이비언들은 복지국가가 시장요소의 자유로운 활동을 수정하는 사회정책을 사용하여 시장경제와 공존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에 반하여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본주의가 완전히 붕괴되기를 원했다. 넷째, 페이비언들은 복지국가를 지향하는데 있어서 마르크스주의자들보다 더 열정적이고, 복지국가를 상당한 성취로 간주하였다. 일부는 복지국가 자체를 목적으로 보았고, 일부는 사회주의를 향한 단계라고 보았다. 반면에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복지국가가 노동계급에게 어느 정도 혜택을 주기는 했지만, 오히려 그 주요 수혜자들은 자본가계급이라고 주장했다. 노만 존슨(Norman Johnson)은 복지 국가가 자본축척을 지지하고 자본주의체제를 정당화했다고 설명하고 있다.6) 1896년 쇼우는 사회주의자들이 자유주의적 환상을 견지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마르크스주의뿐만 아니라, 페이비어니즘 이외의 사회주의론을 프롤레타리아 자유주의의 지적 위장형태라고 규정한 바 있다. 그가 지적한 두 개의 환상은 혁명의 날을 황금시대의 시작이라고 보는 종교적 환상과 마르크스주의자적 계급 전쟁 드라마이다. 쇼우는 사회주의의 진정한 발전을 위해서는 자만과 타협에 대한 부단한 저항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쇼우의 자기반항은 변증법적 진화를 위한 행위이지 자기 진영내의 경쟁자를 증오하여 적과 제휴하는 급진주의자의 저급한 전략에서 나온 결과는 아니다. 그의 사회주의 허상에 대한 비판은 좌파들이 주장하는 역사적 필연성과 가상된 대중의 정치적 우월성에 대한 반발이라 볼 수 있다. 구체적 사실에 대한 쇼우의 판단은 물론 오류의 가능성은 내포하고 있으나 세계에 대한 총체적 분석은 상당한 설득력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쇼우는 자본주의에서 노동자와 자본가의 대립이 아니라 노동자와 유한자의 공존이란 모순을 발견하고 그 해결방법으로 구성원 전체가 노동하는 사회구조에로의 전환을 제안했던 것이다. 그의 작품 ꡔ페이비언논집 1931년 재판 서문ꡕ(Preface to the 1931 Reprint) 에서 “분배란 단지 물질적 생산물의 분배뿐 만 아니라, 일과 여가의 분배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7)라는 내용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제안은 그의 경제학뿐만 아니라 사상의 근간으로 도덕적으로 발전하는 사회에 대한 비젼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쇼우는 엥겔스(Engels)가 쓴 「사회주의, 이상국가 및 과학」(Socialism, Utopian and Scientific)에 대해 그의 저서 ꡔ버나드 쇼우의 서평ꡕ(Bernard Shaw's Book Review)에서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칼 마르크스와 프레데릭 엥겔스, 1848의 공산당선언의 공동저자로 사회 민주주의자들을 위한 고전적인 모델이지만 사실상 말하자면 학문적인 의미를 제외하고는 거의 실효성은 없다. 아울러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둘 다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들이며, 경제학자들의 군주와 같은 존재로써 마르크스는 그 자신과 엥겔스에 의해서 날조된 극적으로 허구적인 것이다.8)
결국 쇼우는 마르크스와 엥겔스 사상에 대한 철학적 취약성이 이러한 퇴화된 가치이론을 아이러니컬하게 만든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쇼우는 비록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이상주의적 관점에서 헤겔(Hegel)을 올바로 정립시키기 위해 시도하였지만 그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이컨(Bacon)이나 록크(Locke)의 형이상학에 반대되는 헤겔의 변증법의 옹호자가 되었고 일면 마르크스가 헤겔의 변증법을 정확히 이해할 수 없어서 가치이론이 실패가 되었다는 주장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쇼우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억눌린 노동자들의 혁명에 의한 개혁은 실현 불가능한 방법이라고 믿게 되었고, 중산층 계급의 양심의 혁명을 통해 유토피아를 건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중산층이 즐길 수 있는 극무대를 통해 사회주의를 설교함으로써 자연스러운 효과를 거둘 수있다고 믿었다. 인간의 양심에 호소하는 데 적극적으로 반응을 보일 수 있는 것은 노동자가 아니라 중산계층이라고 생각하여 그들이 이기심을 극복하고 인생의 목적을 전체 지역사회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데 두어줄 것을 호소한 것 같다. 쇼우가 이렇게 하게 된 것은 쇼우를 비롯한 페이비언들의 출신이 대부분 중류계층이고 여러 직업의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의 대부분이 중산계층 사상가이며 어느 누구도 하류계급으로부터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의 작품 ꡔ홀아비의 집ꡕ에서 주인공 트렌취(Trench)는 현실의 사회조직을 직시하지 못하는 중산층 이상주의자이지만 나중에 인간의 정의와 도덕 등의 가치관에 극심한 혼란을 느끼고 마침내 환상에서 벗어나 리얼리스트로 변모하게 되는데, 이와 같이 트렌취와 같은 중산층 계급의 도덕적 이상인 환상을 타파하는 곳에 쇼우의 문학의 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쇼우가 견지한 사회주의의 가장 중심이 되는 주장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보다도 더욱 열정적으로 부와 힘의 분배가 동등하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회주의자들의 동등한 분배계획에 대한 긍정적 이유. 나는 그것이 나의 선호하는 계획이기 때문에 특별히 관심이 있다. 내가 수입의 불평등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 이상으로 수입의 평등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을 검토하도록 도와주고 있을 때, 당신은 내가 공평히 행위하는 것을 신중하게 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9)
그의 작품 ꡔ바바라 소령ꡕ에서 등장인물인 언더샤프트(Undershaft)는 무기 제조 공장을 경영하는 백만 장자로 자본주의의 대표적 인물이다. 그의 종교는 전통적인 기독교에 구속받거나 얽매이는 것이 아니고, 돈과 화약에 의존한다. 이에 반해 그의 딸 바바라(Barbara)는 구세군의 소령으로 전통적으로 제도화된 기독교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언더샤프트의 부에 대한 신앙은 물질주의의 상징으로 육의 세계를 나타낸다. 반면 바바라의 구세군 구호소에서의 봉사는 알프레드 터코(Alfred Turco)가 언급하듯이 정신의 세계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바바라와 언더샤프트 사이의 대조가 더욱 명확히 그려진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대포 사이의 차이와 같다. 따라서 가장 가능한 용어로는 지혜와 권력사이의 갈등을 양극화했다.10)
언더샤프트는 돈에 그 첫째 가치를 부여하고, 또 돈을 가장 귀중한 것으로 여긴다. 가난하지만 정직하다는 등의 가난을 합리화하는 그의 말은 모두 거짓인 것이다.
가난한 자에게 가난이 축복인 양 내버려두고, 비겁한 자에게 겸손을 가르침으로 비겁한 자가 그의 비겁을 신조처럼 지키게 하라. (85)
여기서 극의 주요 주제인 돈과 도덕성, 즉 현실과 이상은 상호 연결되고, 상호 영향을 미치고 결국 융합한다. 언더샤프트의 공장으로 대표되는 힘의 중심을 향한 커진스(Cusins)와 바바라의 결합은 돈과 도덕의 결합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른 면에서 무력하지만 지적인 인물인 커진스에게 언더샤프트는 힘을 제공하여, 사상을 행동으로 바꿀 기회를 제공한다. 악을 제어하는 힘이 없이는 선을 위한 힘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커진스는 언더샤프트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는 평민에게 효과적인 무기를 제공하여 그들로 하여금 지식층들에게 대항할 수 있게 하고, 사회의 구조를 개선할 수 있도록 무기공장을 훌륭하게 운영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는 그가 지식층들이 보편 선을 위해 그 재능을 발휘하도록 할 만한 강한 힘을 일반인에게 주려고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것은 커진스가 언더샤프트의 사회적 진보를 기초로 하여 지혜와 힘, 지성과 실용성을 화합하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쇼우가 주장한 사회주의 이상은 동시대의 사회주의와는 달리 자본주의를 이상적으로 개선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상세계의 지향점을 동등한 수입을 바탕으로 한 공동의 복지에 둠으로써 특히 공동체(community)속의 삶을 중요하게 여겼고 이기적으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을 악덕으로 간주하였다. 아울러 쇼우는 결코 물질적인 것이 인생의 행복을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고자 하였다. 그리고 가난을 미덕으로 여기는 태도를 타파하려고 하고 동시에 부가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믿는 사회 하류계층의 환상도 깨려고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쇼우의 사회주의적 사상을 우리는 물질적인 측면보다는 정신적인 측면에서 받아들이는 것이 타당하다. 요컨대 사회가 전반적으로 상향 발전되고 사회가 개혁되기 전에는 아무도 지신을 개혁할 수 없다는 쇼우의 인식 속에는 깊은 인도주의가 바탕을 이루고 있으며 이러한 이유로 앞에서도 페이비어니즘이라고 하는 것이 일면 마르크스의 프로레타리아니즘에 대립한 중산층의 도덕주의, 지성주의(지적 존중)이라고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Ⅴ
쇼우의 이중성은 지금까지의 내용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 당시의 급진적인 사고들을 흡수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구시대의 특징인 점진주의와 낙관주의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는 데 있다. 사회 변화와 개혁과 관련해 쇼우가 중요시한 것은 체제나 사회 구조의 변화가 아니라, 사회 구성원의 정신적 도덕적 의식 구조의 변모였다. 쇼우는 페이비어니즘의 평등 이념에 입각해 자본주의의 불평등을 공격하지만. 실제로 사회주의의 기능은 자유주의가 현실적 존재로 존재하도록 허용하는 것이어서, 자유주의자들은 쇼우의 사회주의가 자유의 방향으로 향하지 않을 것이라 지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자유의 영역확대라는 것은 경제의 빠른 사회화에 비하면 더딜 수밖에 없을 것이며, 진정 자유와 민주주의는 전 인구가 책임을 분담할 때만이 작용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쇼우는 책임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인간은 자신의 생이 사회에 대한 유용성과 연관되어 있음을 각자가 인식하고 깨달을 때 비로소 도덕적 책임을 통감하게 된다는 것이다. 요컨대, 우리는 쇼우가 외계에 대한 통제에 인간 자신에 대한 통제도 포함시켜 자신과 상황에 대한 책임을 질 것을 주장하고 있지만 이러한 책임을 지고 실천할 수 있는 적합한 사회제도로 페이비어니즘을 주장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아울러 쇼우는 자본주의 운동법칙이나 역사적 필연성 등의 결정론적 입장에 대해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충돌했다. 그는 노사간의 이해 상충이 무산자들을 자발적으로 권력 투쟁에 임하게 할 것이라는 견해나, 역사법칙, 필연성, 불가피성 등의 개념과 용어에 반대했다. 아울러 무노동자가 노동자 위에 군림하는 사회제도는 타파되어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했으나, 그는 빈자의 순수성과 부자의 단점을 도식적으로 신봉하지 않았으며, 사회내의 어떤 한 집단에 대한 신념을 갖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쇼우는 교육과 제도개혁을 통해 무산계층을 소멸시키고 그들을 신사계층으로 재창조함으로써 사회가 전반적으로 상향 발전되어 가기를 원했다. 마르크스는 역사 발전의 동인을 물질적, 경제적 여건을 위한 급진적 계급투쟁으로 보았지만, 쇼우는 무엇보다도 평등주의에 기초를 둔 점진적인 사회 개혁을 주장했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는 역사에 대한 정치적 해석을 제외시키고 단지 경제적으로만 해석함으로써, 사회주의 그 자체만을 강조하여 민주주의를 이념적으로 크게 중요시하지 않았으며 그러므로 마르크스 사회주의이론은 공산주의의 길을 걷게 된 반면, 페이비어니즘에서 나타나는 사회주의는 영국적 전통 하에서의 정치적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발전 민주주의를 밑거름으로 한 정치토양에서 싹을 틔웠던 것이다. 요컨대 페이비언의 중추적 역할을 하며, 연극이라는 매체를 통해 사회 개혁을 유도한 쇼우의 기여는 문학적 측면 뿐 만 아니라 정치, 사회적으로 매우 크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서경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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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A Study of B. Shaw's Fabianism and His Thought
of Social Reform
Suh, Yun-kyo
In the late 19th century when spiritual confusion through social and economical contradiction and conflict between religion and science, and sufferers consciousness surged in the Britain, Bernard Shaw joined the Fabian Society and over eight years exerted himself for the propaganda of the Fabianism and the need of social improvement. Bernard Shaw was one of the leaders as a member of the execution committee in the Fabian Society. In taking active part in the Fabian Society, Shaw wrote Fabian Essays with Sydney Webb. Here Shaw expressed his Fabianism well and published Fabian Tract and the monthly Fabian News, too.
Fabianism was formulated from the ethical attitudes obtained from the inversion of capitalistic logic and optional addition of economical knowledge from Marx, Ricardo, and Adam Smith as well as the influence upon J.S. Mill and Robert Owen. Shaw was greatly influenced by Henry George in the realization of socialistic policy as the criticism of the capitalism and object achievement of socialism.
In the Fabian Essays in 1889 Shaw's wish was the formation of beneficial agency organization which synthesized ill-balanced produce in a region and distribute it as residents' effort, and he found that the land rent was the capitalistic toxin of the capitalism. Shaw tried gradual reformation through the permeation into liberalists. Those days he pointed out socialists' illusion boldly. He recognized that success or failure of a nation's organization depends on how people operate it and found the realistic method of mass production of gentlemen class. But Shaw recognized that human remodeling needs a considerable time because men are accustomed to the traditional method of life and thinking. The presentation of Shaw's superman as the subject who can create and manage a new way of life and improved world may be connected with the progress will of Shaw's Life Force. He pointed out that the socialism as well as Marxism except Fabianism is the intellectual disguise of proletariat liberalism, criticizing that socialists have a point of view of liberalistic illusion. The illusion he pointed out is a religious one that the revolutionary day would be the beginning of golden age and the Marxist drama of class struggle.
Shaw insisted that the institution of human society must satisfy requirements of flexibility to keep face with the ascending movement of life and suggested that Fabianism would overcome defect of the capitalism and remove the socialistic illusion. It is reasonable that Shaw's socialistic thought is spiritual rather than material. Shaw's recognition that no one can reform himself before the society would develop upwards and reform itself is humanistic and for this reason, as I pointed out previously, Fabianism means moralism and intellectualism of the middle class against Marx's proletarianism. So we can judge that Shaw's Fabianism is conspicuously moral and intellectual.
주제어: 페이비어니즘, 사회개혁, 마르크스주의비판
이름 : 서 윤 교
소속 : 서경대학교
주소 : (집) 서울시 서초구 잠원동 한신 Apt. 213-501
Tel : 직장: 02-940-7207 휴대전화: 018-220-1878
E-mail: suhy@unitel.co.kr
원고접수일: 2002년 3월 31일 게재판정일: 2002년 5월 17일
사회주의 社會主義 socialism
자본주의의 시장원리를 반대하고 생산수단을 공유화함으로써 사회주의 내지 공산주의 사회의 건설을 목적으로 하는 학설 및 정치운동.
개요
영국의 사회주의자 앤서니 크로스런드가 사회주의는 "사회주의자가 사회기구 속에서 구현하려고 하는 일련의 가치 또는 열망"이라고 말했듯이 사회주의의 뜻은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한마디로 정의 내리기는 어렵다. 근대 사회주의 이념의 싹은 플라톤의 〈국가 Republic〉,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 Utopia〉와 18세기 계몽주의시대의 풍부한 유토피아 문학으로 거슬러올라갈 수 있지만, 실제로 근대 사회주의는 산업혁명이 야기한 사회·경제 관계와 전통적인 질서의 붕괴에 반대했던 다양한 작가들의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들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야기한 부정·불평등·피해 및 자유방임적 시장경제 체제에 대해 비판의 화살을 쏘았다. 당시의 탐욕스런 개인주의를 비판하고 그들은 형제적 결속감으로 결합된 새로운 생산자들의 공동체를 꿈꾸었다. 그들은 미래에는 대중이 자본가로부터 생산수단과 정부를 빼앗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19~20세기에 사회주의자로 자칭했던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같은 생각을 공통으로 가지고 있었지만 사회주의의 특정한 이념에 대해서는 서로 의견을 달리했다. 생산수단의 완전한 국유화만이 그들의 목표를 달성시켜 줄 것이라고 주장한 사회주의자도 있고, 주요 산업의 선택적 국유화와 상속권자의 사유재산권 통제를 제안한 사회주의자도 있다. 또 다른 사회주의자들은 강력한 중앙집권국가의 지배와 계획경제를 주장한 반면 그밖의 사회주의자는 사회주의적 입안자가 시장경제를 주도하는 '시장 사회주의'를 주장하기도 했다.
사회주의자들이 제시한 좋은 사회로 나아가는 최선의 방법 역시 다양하다. 몇몇 사회주의자는 정부의 지도를 요구하지만 다른 사회주의자는 공공기관, 준(準)공공 위탁기관, 지방자치기관, 생산자의 자치공동체 등의 정책결정기구를 통해 가능한 한 분산·분권화를 주장한다. 노동자의 지배를 주장하는 사회주의자가 있는가 하면 정부의 계획기구에 의존하는 사회주의자도 있다. 국가수입이 보다 평등하게 분배되어야 한다는 점에서는 모든 사회주의자가 공통되지만 수입의 절대적 평등을 바라는 사회주의자도 있고 직업에 따른 차등지불을 통해 모든 사람에게 적절한 수입을 보장하는 것에만 목표를 두는 사회주의자도 있다.
"각자가 자신의 필요에 따라"는 사회주의자들이 자주 부르짖는 구호이다. 그러나 많은 사회주의자는 각자가 사회에 대한 공헌도에 따라 자신의 몫을 받는 것이 사실상의 사회유지라고 보며, 사회는 먼저 모든 시민에게 최소한의 의·식·주를 보장해야 하고 그들을 교육·건강·교통·오락 등의 기본 서비스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회주의자는 또 모든 시민의 정치적 권리와 신분차이를 평등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은 신분의 차이를 완전히 없애야 하는지, 사회주의 사회에서 정책결정의 불평등이 유지되도록 내버려둘 것인지에 대해서는 서로 이견을 가지고 있다. 사회주의라는 말이 사용되고 악용된 사례는 무수히 많다. 일찍이 1845년에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독일인들이 사용하는 사회주의라는 말이 "모호하고 막연하며 정의할 수 없는 용어"라고 토로했다.
엥겔스 시대 이래 사회주의는 이 용어를 사용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누구나 가져다 쓸 수 있는 재산과 같은 것이었다. 심지어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독일 내의 어떠한 단체도 불법화했던 1870년대 후반 독일의 총리 비스마르크조차도 몇 년 뒤에 "국가는 우리의 제국(帝國)을 위해 사회주의를 도입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파시스트와 전체주의적 독재자 등 현대의 궤변적 보수주의자들도 종종 자신들이 사회주의 건설에 종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마니아의 세계]헌책방 순례
책더미에서
월척을 낚는 묘미
나는 헌책 수집광을 낚시꾼에 비유한다. 강이나 호수나 바닷가의 낚시꾼이 아니라 아스팔트 위의 낚시꾼이다. 낚시꾼의 재미와 마찬가지로 아스팔트 낚시꾼에게도 같은 묘미가 있다. 가끔은 ‘월척’의 희열을 맛보기도 한다.
남재희 호남대 객원교수·전 노동부 장관
내가 평생 극성스럽게 모은 책이 어느새 8만 권이 넘어버렸다. 포켓 북이나 잡지들도 한 권으로 쳐서 말이다. 90평이 약간 넘는 집이 온통 책으로 그득하다. 20년 전 그 반에 반도 못 미치는 양일 때 이사를 하려고 밖에 쌓아놓으니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 집 헌책 장사 하다가 망한 모양이군” 하더란다.
얼마 전 시인 고은 씨와 우연히 만나 이야기하던 끝에 책이 화제가 되었다. 미국의 하버드대학에 머물렀던 그는 “케임브리지의 뒷길을 가다 보면 집 앞에 책을 수북이 쌓아놓고 마음대로 가져가라는 데도 있더군. 비 오는 날이면 비닐로 잘 가려놓기도 하고…”라며 그곳 소식을 전했다. 대학 인구가 압도적으로 많은 케임브리지이니 노년이 된 교수가 많아 그럴 법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은 대부분 아파트에 산다. 아파트에 살면서 책을 모은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오히려 갖고 있던 책도 가끔 정리하여 폐기 처분하는 게 사람들의 소일거리가 아닐까 싶다. 그런 책들이 헌책방에 쏟아져 나온다.
그리고 책종이는 산성화 방지처리가 안 되어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어서 오래 되면 변색하거나 부식되는 문제도 있다. 그래서 마이크로 필름에 담아놓기도 하는데, 오래 전에 미국 잡지에서 도서관 책을 마이크로 필름에 담고 책 자체는 폐기하느냐의 여부를 놓고 논쟁하는 글을 읽은 기억이 난다.
서울서 가장 큰 홍대 앞 온고당
나 이가 들면서 고민이 되었다. 비교적 큰 단독주택에 살지만 언제고 아파트로 이사는 하여야 하겠는데 그 많은 책을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이다. 그 생각만 하면 답답하여 두통이 올 지경이었다. 젊었을 때는 누가 물어보면 사설(私設) 도서관을 차리거나, 네 딸들 집에 골고루 나누어 주거나, 어디에 기증하면 될 것이 아니냐고 했다. 그러나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우선 사설 도서관을 차리기에는 내게 그만한 돈이 없고, 딸들은 아파트 살림이나 외국 살림에 책이라면 손을 내젓고, 그렇다고 기증할 곳도 마땅치 않았다.
책을 모으는 데 열을 내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 때부터다. 그러니 50년이 넘었다. 그 덕분에 서울 장안의 헌책방 주인들 사이에선 책 수집광으로 이름이 난 지 꽤 오래 되었다. 그래서 어렴풋하게나마 그룹이 형성된 그 방면의 사람들한테 가끔 인사를 받기도 한다.
나는 책 이야기를 할 때는 고본(古本)과 헌책을 꼭 구분하여 말한다. 비슷한 말이지만 고본이라 할 때는 오래 되고 희귀한 책이라는 뜻이 담겨 있고, 헌책은 영어로 말하면 유즈드 북(used book), 즉 누군가의 손을 한 번 거친 책들이다. 그래서 고본점이라 해도 될 것을 나는 꼭 헌책방이라고 고집한다.
현재 서울에서 가장 큰 헌책방은 홍익대학교 앞에 있는 ‘온고당’이다. 새로 지은 빌딩을 임대해 1층은 국내서적, 지하층은 외국서적 위주로 파는데 꽤 넓고 책의 유통도 빠른 편이어서 자주 가볼 만하다. 국내서적은 주인이 오토바이를 타고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아파트 같은 곳에서 사온다. 지하의 외국서적은 약간 값이 높은 것으로 나까마(중간상인을 일본말로 그렇게 부르는데 지금도 우리 사회에서 널리 통용되므로 편의상 이 말을 쓴다)들이 가져온다. 온고당이 제일 큰 책방이다 보니 나까마의 활동이 집중되어 좋은 책이 많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또 미술대학이 유명한 홍익대 근처이고 하여 미대생들이 미술책이나 디자인책을 찾느라고 쑤석대기도 한다.
청계천 복개도로변에 있는 평화시장에도 헌책방이 많이 몰려 있다. 그 가운데서 외국서적만 고집하는 곳이 이름 그대로 ‘외국서적’이다. 내가 다니기 시작한 것만도 30년이 되었으니까 역사가 꽤 길다. 헌책방 집결지의 유일한 외국서적 전문점이어서 전에는 좋은 책이 많이 들어왔다. 비교적 학술서적이 많았는데 외국으로 이민 간 사람들 집이나 교수들의 유족으로부터 나왔으리라고 짐작했다. 요즘은 한산해졌다. 규모가 작은 책방이어서 나까마들이 찾지 않아서인 것 같다.
서울 이태원에 영어로 ‘포린 북’라고 쓴 외국서적 전문 책방이 있다. 미군기지가 있고 외국 관광객이 즐겨 찾는 이태원시장이 있어 그런대로 활발하다. 서울에 사는 외국인들, 특히 중년부인들은 포켓 북을 갖고 와 자주 바꿔가기도 한다. 트레이드(trade)라는 것이다. 그러나 미군이 감축되고 난 후, 특히 징병제가 아니고 지원제가 되고 난 후로는 양이나 질에서 많이 떨어졌다. 예전에 징병제일 때는 대학재학생들이 군대에 와서 수준 높은 잡지들도 제법 흘러나왔는데 요즘은 찾기가 힘들다. 더 뉴 리퍼블릭(The New Republic), 디 애틀랜틱(The Atlantic), 더 네이션(The Nation), 더 포린 어페어스(The Foreign Affairs)등 좋은 잡지를 싼값에 많이도 샀다.
연신내에는 ‘문화당’이라는 좋은 헌책방이 있다. 주인 말이 문경의 친구 여럿이 서울에 와서 모두 헌책방을 하게 되었는데 책방 이름은 똑같이 문화당으로 하기로 약속했다나…. 그래서 장승백이나 구로 쪽에 있는 다른 문화당을 일부러 찾아가 보기도 했다. 연신내와 같이 도심에서 떨어진 곳에 좋은 헌책방이 있느냐고 의아해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내 짐작으로는 그 주변의 갈현동 등에 지식인이 많이 살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1980년대 초 망원동에 홍수가 들었을 때 물이 살짝 스민 책들이 책방에 더미로 나왔고 그 수준이 꽤 높았다. 망원동에도 지식인들이 많이 살 것이라고 짐작했다.
시청 앞 지하도에도 알찬 헌책방이 하나 있다. 거의 모두 영서(英書)이며 일서(日書)도 얼마간 있다. 이곳이 번창까지는 못 가도 그럭저럭 장사가 되는 것은 근처에 호텔이 많아서 그럴 것이라고 짐작한다.
헌책방 순례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공씨책방’과 ‘동아서점’
헌책방 이야기를 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공씨책방’과 ‘동아서점’이다. 공씨책방은 새문안교회 건너편에 있을 때 전성기를 누렸다. 서울에서 가장 크다고들 했다. 1층은 작았지만 지하층은 매우 넓었는데, 주인 공씨는 개미굴이라며 거기에 한번 발을 들여놓으면 재미있어 벗어나기 어렵다고 익살을 떨었다.
주인 공진석씨는 고졸 학력인데 월간 ‘신동아’의 논픽션 공모에 헌책방 이야기로 당선되어 그때 받은 상장을 상점에 자랑스럽게 걸어놓기도 했다. 또 ‘책사랑’이라는 얇은 개인 잡지도 열 번쯤 발행했는데 나도 거기에 수필 하나를 기고하기도 했다. 그는 헌책에 재미를 붙여 열성적으로 헌책을 찾아 서울 장안을 헤집고 다녔다. 헌책 이야기를 할 때는 늘 의욕이 넘쳤으며, ‘서울에서 가장 큰 헌책방’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 공씨는 어느 날, 나이는 30대 중반쯤이었을까, 여느 때처럼 헌책을 사갖고 오다 버스 안에서 혈압 때문에 숨을 거두었다. 대단히 애석했다. 그의 부인과 여동생은 지금도 신촌에서 작은 헌책방을 하고 있는데 그분들이 고인을 추모하는 뜻으로 ‘책사랑’ 마지막호를 발행했을 때 나도 정성들여 회고담을 써서 기고했다.
동아서점은 동아일보사 건너편의 지금은 없어진 중부소방서 쪽에 있을 때 활발했다. 주인 강씨는 처음에는 무척 고생을 했단다. 원래 명동 쪽에서 헌책 노점을 하다가 발전하여 번듯한 책방을 차리게 된 것인데 새문안교회 건너편으로 이사하여 영업을 하다가는 출판업에 뛰어들어 좋은 영서를 냈다. 지금도 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사라지는 헌책방들
헌책방은 대체로 사양길이다. 통계를 잡아가며 연구는 안 해보았지만 대충 이런 판단이 든다.
첫째, 시대적 추세가 점차 활자매체에서 시청각매체로 옮겨가면서 헌책방을 찾는 사람들이 줄어들었다. 더구나 근래 인터넷 열풍이 불면서 더 심해진 것 같다. 온고당 지하층 책임자는 몇 년째 활자 중심의 책을 찾는 사람은 급감하고, 사진이나 그림 중심의 책을 찾는 사람들이 현저히 늘어나고 있다고 했다. 나도 그런 느낌이다. 우선 나부터도 좋은 사진이 많이 든 책을 선호하게 되었다.
둘째, 아파트가 주된 주거공간이 되면서 사람들은 책을 간수하기 어렵게 되어 버렸다. 아파트에서 책은 천덕꾸러기 신세다. 또 복사술이 발달하여 사람들은 꼭 필요한 부분만 복사하여 보기도 한다.
셋째, 건물 임대료가 다락같이 올라 헌책 장사로는 임대료를 감당하기 어렵고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 그런 탓인지 헌책방이 사라진 자리에는 호프집이나 밥집이 들어서는 경우를 자주 보았다.
영국에서는 런던에서 조금 떨어진 한적한 시골에 헌책방이 모여들기 시작하여 지금은 관광명소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신문이나 텔레비전에서 보았다. 우리나라도 그렇게 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다가도 정보화 혁명시대에 그런 아이디어는 시대착오가 될 것이라 체념하게 된다.
넷째, 주한미군의 감축과 징병제의 폐지로 미국 책의 유통량이 줄어들었다는 것은 이미 말한 대로다.
용산 삼각지 골목 안에 내가 알기로도 30년이 넘은 양서 헌책방이 있었다. 좋은 책이 많이 나왔는데 5~6년 전쯤부터 시들해지더니, 나로서는 겨우 ‘포린 어페어스’를 살 정도의 효용밖에 없는 집이 되어버렸다. 그 오래 된 집이 작년에 불고기집으로 전업했다. 시대의 변화를 극명하게 말해준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 집주인은 자녀교육에는 성공하여 그래도 위안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과천 헌책방 이야기는 전에 ‘신동아’에 수필로 쓴 적이 있다. 관청들이 모여 있는 과천의 한 빌딩 2층에 넓은 헌책방이 있어 가끔 갔는데 그 집의 중년 여주인은 “헌책방은 헌책을 버리지 않고 모아 학생들에게 제공한다는 취지에서 사회 봉사를 하는 것이고, 그에 수반되는 집세 같은 적자는 아래층에서 경영하는 전통찻집의 수입으로 메운다”고 했다.
몇 년 후 찾아가보니 건너편 빌딩 안 슈퍼마켓 구석으로 옮겨져 있었다. 그 집 역시 집세를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얼마 전에 한양대 이영희 명예교수의 칠순 출판기념회에서 그 여주인을 만났다. 그이 역시 지식여성임에 틀림없다.
‘오거서(五車書)’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전철 홍대역에서 가까운 곳에 ‘오거서’라는 좋은 이름의 책방이 있었다. 옛날에 다섯 대의 수레에 실을 정도의 책이라 하면 엄청나게 많은 분량의 책이어서 오거서(五車書)라는 말이 생겨났다.
그 오거서 책방 주인도 수준이 있는 점잖은 지식인이다. 헌책에 약간의 골동품도 갖추고 하여 책방을 유지해 왔으나 역시 임대료 때문에 이리저리 옮기곤 하다가 지금은 극동방송 부근의 큰길가로 옮겼다. 가끔 들러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우리나라 서적에 대해 넓게 알고 있으며, 사회문제에 대한 식견도 뚜렷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좁은 책방에 앉아 있기에는 아까운 인물이다. 더구나 지금은 헌책방 쇠퇴기가 아닌가.
지방여행을 갈 때는 일부러 시간을 내어 헌책방에 들러본다. 부산의 대청동 미국문화원 주변은 피난 시절 헌책을 사러 다니던 곳이어서 늘 반갑다. 지금은 그곳엔 책방이 없고 대신동 쪽으로 조금 가다 보면 책방들이 몰려 있다. 거기에 가면 기념으로 여하튼 책 몇 권을 사든다. 대구에서도 헌책방을 찾았다. 그러다 모르던 교수들과 초면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헌책방을 찾는 동류의식이 발동하는 것이다. 광주에서도 헌책방 안내를 받아 가보았다가 역시 방문 기념으로 굳이 몇 권을 샀다.
외국도시에 가서도 며칠 머물게 되면 꼭 헌책방을 찾아간다.
일본 도쿄의 ‘간다(神田)’는 너무 유명한 곳이다. 한국의 헌책방에 비교하면 책의 수집이나 그 배열이 몇 급 위 수준이다. 가보면 이것이 전통 있는 헌책방이구나 싶다. 한국의 헌책방처럼 임대료에 치여 이리저리 이사 다니지 않고 부럽게도 몇십 년씩 한자리를 붙박이로 지키고 있는 것이다.
처음 간다에 들렀을 때 가와이(河合榮次郞) 교수의 ‘자유주의의 옹호’ 초판본을 사들고 감격한 기억이 생생하다. 일제 파시즘에 감연히 맞선 가와이 교수가 아니던가. 종이는 재생지로 형편없었지만 매우 소중하게 여겨졌다.
파리에 가서는 유명한 센 강변의 헌책방 노점을 가보았다. 노틀담사원 근처에 노점 서너 개가 있는데 규모는 작지만 문화도시의 풍경에 귀중한 보탬이 되어 보였다. 노점이기 때문인지 헌책인데도 포켓 북조차 투명비닐로 포장하여 먼지가 들어가지 않게 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미국 하버드대 케임브리지 이야기는 고은 시인 말을 인용했지만 30여 년 전 내가 유학 갔을 때는 하버드 쿱(공제조합이란 뜻) 책방 구석에 헌책 코너가 있어 싸게 살 수 있었다. 또 가끔 책을 ‘세일’하는 곳도 있어 지난 시절의 좋은 책을 헐값에 구입할 수도 있었다.
헌책방에서 낚는 ‘월척’의 희열
내가 사는 책은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있다. 과학책도 좋은 이론서는 모은다. 인문 쪽에 비중을 두는데 문학서부터 철학·종교까지 광범위하다. 그리고 특히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영국의 페이비어니즘 관계 책은 기를 쓰고 모은다. 시드니 웹 부처, G.D.H 콜, 해럴드 라스키 등등의 책은 물론 관련 연구서까지 말이다.
요즘은 관심의 초점이 달라졌다. 이제는 나이 탓에 세계 여러 나라를 여행하는 데는 한계를 느낀다. 그래서 사진으로나마 세계일주를 하려는 것이다. 세계 여러 나라와 도시들의 사진첩, 박물관·미술관 사진첩 등 되도록 컬러이고 영문으로 된 것을 모아 즐겨 뒤적거린다.
그러다 보니 리투아니아, 룩셈부르크의 사진첩, 블라디보스토크 사진첩, 상해혁명운동사 사진첩 등 재미있는 것도 구했다. 특히 러시아혁명의 시작부터 소련 붕괴까지를 담은 사진첩은 비장하다. 20세기 역사를 손으로 거머쥔 듯 느끼게 하는 좋은, 비극적 사진들이다.
나는 헌책 수집광을 낚시꾼에 비유한다. 강이나 호수나 바닷가의 낚시꾼이 아니라 아스팔트 위의 낚시꾼이다. 낚시꾼의 재미와 마찬가지로 아스팔트 위의 낚시꾼에게도 같은 묘미가 있다. 가끔은 ‘월척’을 낚는 희열을 맛보기도 한다.
영어사전으로는 옥스퍼드 영어사전이 유명하다. 거기에는 20여 권으로 된 ‘Oxford English Dictionary’와 그것을 줄여 2권으로 된 ‘Shorter Oxford English Dictionary’가 있고, 마지막으로 우리가 흔히 콘사이스라고 부르는 ‘Concise English Dictionary’가 있다. ‘OED’를 처음 발견하고 용기를 내어 샀을 때의 그 희열감이란…. 나중에 영어를 전문으로 하여야 할 분에게 기증했다. 그리고 훨씬 더 뒤에 OED 20여 권을 2권으로 압축한 사전을 싼값에 사고는 기뻐했다. 2권으로 압축했기 때문에 확대경이 첨부되어 있어 그것으로 확대해 보아야만 잘 보였다.
그 밖에도 월척이 많지만, 로댕의 에로틱 데생집도 희귀본이 아닌가 한다. 앞으로 훌륭한 조각가에게 주기 위해 지금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
하나만 더 이야기하면, 내 월척 중에 소중한 것은 영문으로 된 중국 건축 사진첩이다. 나는 서양 숭배자다. 건축에 있어서는 특히 그렇다. 그리스의 아크로폴리스나 로마의 콜로세움, 파리의 베르사유 궁전 등 서양 건축물을 볼 때마다 항상 압도되어 왔고 거기서 동양의 열등감을 느껴왔다. 그러다가 중국 건축 사진첩을 보고는 생각이 달라졌다. 대리석이 없어서 그렇지 중국의 건축은 서양의 그것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예를 들어, 널리 알려진 건축물이지만 베이징의 천단(天壇)이 그랬다.
모으는 재미 못지 않은 주는 재미
나는 멍청하다. 50년 동안 희귀본인 고본에 관심을 가졌더라면 지금 엄청난 희귀본 소장가가 되었을 것이다. 내 지인 가운데 그런 사람이 있다. 그는 국내책 중에도 특히 잡지와 시집의 초판본만 모은다. 그리고 외국책으로는 이집트에 관한 것과 에로티시즘의 수작을 수집한다. 쉽게 말하여 환가(換價)성이 있는 책들이다.
한번은 어느 마음씨 좋은 책방 주인이 내가 희귀본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자 최남선의 ‘백팔번뇌’ 시집을 굳이 사두라고 했다. 장정·서문·발문에 노수현·이광수 등 우리나라 명사가 대거 동원된 책이어서 가치가 있단다. 희귀본으로서의 고본이라고 산 것은 그것 정도다.
책은 모으는 재미도 있지만 주는 재미도 그에 못지않다.
앞서 말한 바 있는 망원동에 물이 들었을 때 하베이의 혈액순환에 관한 고전의 한정 복사본을 샀다. 그래서 의학을 하는 권이혁 박사(전 서울대총장)에게 선물로 주었다. 연필로 ‘몇 권 가운데 몇 권째’라고 표시가 되어 있는 한정판으로 그리 흔치 않은 책이라 한다. 나중에 권박사에게 식사대접을 정중하게 받았다.
한번은 한 교수가 마야나 잉카문명에 큰 관심을 표명하는 것을 듣고는 ‘멕시코’라는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옥타비오 파스가 서문을 쓴 결정판이라 할 책을 선물했다. 또 한 교수는 생활에 도움이 되는 수필을 집필하는 데 골몰하고 있어 ‘영혼을 위한 수우프’라는 영문판 책을 선물했더니 크게 도움이 되었다고 고마워 했다.
한 친구는 신학 전공이 아닌데도 성경 공부에 열중하기에 성경에 나오는 일상의 모든 것에 대한 전집(예를 들어 여성·의식 등등)을 읽어 보라고 주었다.
후배 관리들과 술을 마시게 되었을 때는 라켈 카슨의 ‘침묵의 봄’을 한 권씩 선물하며 환경에 관한 명저라고 꼭 읽어보라고 권했다. 내가 아끼는 신문사 후배와 만나서는 헨리 키신저의 영문 회고록을 선물하며 공부하라고 했다. 어렵지만 꼭 읽어 안목을 넓히라는 것이다.
신문사 편집국장으로 있을 때는 기자들에게 책을 많이 선물했다. 공부하는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아마도 후배들에게 몇백 권을 주었을 것이다. 노동부에 있을 때도 출입기자들에게 영문 원서를 몇 권씩 주었다. 다른 것을 주는 것보다 내 마음도 편하고 흐뭇했다. 정치를 하면서도 당직자들이나 유권자들에게 책 선물을 많이 했다. 손쉬운 문학전집이나 역사물을 위주로 선물했다. 유권자나 당직자들의 교양을 높이기 위해서였다. 회식만 하는 것보다는 내 마음도 훨씬 편했다.
요즘 대학에 강의를 나가면서는 ‘한 학생에게 한 권의 책’을 목표로 책을 선물한다. 공부 잘하는 학생들에게는 ‘전쟁과 평화’ ‘레미제라블’ ‘스카레트’ ‘장미의 이름’ 등 영문 포켓 북을 주로 주는데 대부분의 학생이 “영문 아니에요. 읽기 힘들어요” 한다. 그러면 “요즘 같은 세계화 시대에 자네들 영어를 잘해야 하네”하고 읽기를 강권한다.
그러면서 내가 고등학교 시절, 대학 초년에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조셉 콘래드의 ‘암흑의 심장’, 토머스 울프의 ‘시간과 강’ 등을 영문으로 읽은 경험, 그래서 공부나 인간적 성장에 큰 도움이 된 이야기를 들려준다.
나는 왜 헌책을 그리도 많이 모았을까?
헌책을 거의 광적으로 수집한 나의 50년을 가끔은 미련했다고 후회한다. 이제 그 많은 책이 때로는 거추장스럽다. 특히 이사할 때를 생각하면 아찔해지기까지 한다.
나는 왜 헌책을 그렇게도 많이 모았을까? 심리학적인 분석대상이다. 어렸을 때 무엇인가 부족함을 느꼈고 그래서 그 결핍감을 메우려는 탐욕이 생겨난 것만 같다. 모든 것에 만족하며 자랐으면 그런 탐욕은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부모님은 다른 것은 몰라도 내가 책을 사는 데에는 몹시 관대했다. 그래서 책을 산다면 두말하지 않고 돈을 주셨기 때문에 책 모으기가 가능했을 것이다.
가끔 친구들이 무슨 책을 그리 많이 사느냐고 핀잔을 줄 때도 있다. 그러면 나는 익살을 섞어 이렇게 반문한다. 어느 재벌은 자동차 수집광이지 않느냐, 또 어느 재력가는 여자 수집광(?)이지 않느냐, 거기에 비하면 책 수집은 돈이 덜 드는 것이다. 또 수석을 모으는 취미, 난초를 모으는 취미, 우표를 모으는 취미보다 더 생산적이다, 그렇게 답변하곤 했다.
헌책을 사면 우선 앞뒷면에 있는 추천문을 읽는다. 그리고 목차를 천천히 살피고 서문을 읽는다. 가끔은 결론 부분까지 가는데 그런 ‘대접’을 받는 책은 드물다. 끝까지 독파하는 책은 훨씬 더 드물지만. 그래서 나는 책을 수집하는 것이지 읽는 것은 아니라고 꼭 힘주어 해명한다.
어쨌든 책수집 취미 덕분에 나는 책 세계의 짜임새를 대충 짐작하게 되었다. 도서관의 사서들이 아마 그럴 것이다. 그래서 어떤 테마가 나오면 대개 어떻게 전개될 것이라고 윤곽을 잡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우선 잡지 편집에 도움이 되었다. 옛날에 ‘서울평론’이라고 하는 주간지를 2년간 편집했는데 그때 비교적 호평을 받았다. 지금도 가끔 ‘서울평론’이 좋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요즘 계간 ‘다리’의 편집을 책임지고 있는데 평가는 엇갈리고 있지만 내 나름대로 헌책 수집으로 얻은 안목이 크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다만 나이를 먹어가니까 감각 면에서 시대변화에 뒤떨어진 것은 아닌가 하는 공포에 가까운 두려움은 있지만 말이다.
나의 헌책방 순례는 치유될 수 없는 병
요즘은 인터넷 시대다. 나는 ‘컴맹’일 뿐만 아니라 인터넷도 외면하고 있다. 스스로 인터넷 시대의 석기시대인을 자처한다. 하기는 나는 항상 유행에 몇 발짝씩 뒤늦게 살아왔다. 대학 시절 사르트르가 휩쓸 때도 그러려니 하다가 10년, 20년 후에 관심을 갖고 좀 읽어보았다. 마셜 맥루한이 여기저기 오르내릴 때도 마찬가지였다. 하기는 마르크시즘에 대해서도 그랬다. 젊은 시절 한참 마르크스가 운위될 때도 기본적인 것 몇 가지 읽었을 뿐이다. 그리고 소련과 동구권이 몰락하고 마르크시즘이 아주 한물 가다시피한 요즈음 가끔 기본적인 이론서를 끄집어내 음미하는 것이다. 아마 인터넷도 유행이 휩쓴 후 멍청하니 따라가려 할지 모르겠다. 나이 든 사람의 완고함이라 할까. 하기는 인터넷 운운하는 것도 속도의 문제, 공간의 문제이지 인간의 근본적인 생각의 문제는 여전히 자신에게 맡겨진, 자신과의 씨름이 아니겠는가.
요즘도 계속 헌책방 순례하느라 용돈의 대부분은 거기에 지출되지만 나는 골프를 안 치니까 그 비용으로 충당한 셈으로 친다. 치유될 수 없는 병이다. 그동안 모은 책들은 대충 정리를 마쳤는데, 다시 사모으니 집안식구들의 눈치가 보일 뿐만 아니라 개과천선(改過遷善) 없이 또다시 골칫덩이를 키워가고 있는 것이 내가 생각해도 이상하다. 미련함은 죽기 전에는 못 고치는 것인가.
역시 시대의 변화를 말하는 듯 요즘은 중국의 사진집이 많이 눈에 띈다. 나는 오늘도 온고당에 가서, 이미 갖고 있는 것이지만 중국의 자금성·만리장성·이화원 등의 사진집을 살 계획이다. 동네 후배들에게 주면 얼마나 좋아할 것인가.
내게 서울에 사는 재미를 묻는다면 그 첫째가 헌책방 순례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 재미 때문에 도저히 시골 생활은 못 할 것 같다. 그리고 그 두 번째가 친구들과 어울리는 허름한 대폿집이라 해둘까.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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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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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읽었습니다. 제가 운영하는 '궁평리 책마을'로 퍼가도 될까요? 그리고 어디에 실렸던 글인지도 궁금합니다.^^감사합니다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