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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경제 성격 논쟁 관련 글 - 장하준·정승일·이종태, 정태인·이병천의 비판에 답한다

 

[싱크탱크 광장] “사민당-‘재벌’ 타협? 사실과 다르다” (한겨레, 신정완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2012.06.19 22:10)
“복지국가 북유럽에도 ‘재벌’ 자리잡아”
“1938년의 살트셰바덴 협약은 노사분쟁 해결방식만이 의제…소유보장과 고용증대·조세를 교환한 정치적 타협 아니었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스웨덴 모델’이 자주 언급되고 있다. 스웨덴은 최근 우리 사회에서 주요 정치적 화두로 대두된 ‘보편주의적 복지국가’ 모델의 대표 사례인데다, 1990년대 후반 이후 경제성장률, 인플레이션율, 실업률 등 거의 모든 거시경제지표에서 유럽 최상위권 성적을 거두어왔으며, 최근의 세계경제 위기로부터도 비교적 쉽게 탈출하였다는 점에서 한국 사회가 지향해야 할 모델 케이스로 주목받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스웨덴 모델을 선호하는 논자들의 일부는, 스웨덴의 산업구조가 수출 대기업 중심으로 짜여 있으며, 발렌베리 가문을 대표로 하는 거대 금융가문들이 주요 대기업들에 대해 강력한 소유지배력을 행사해왔다는 데 특히 주목해왔다. 세계 최강의 사민주의 정당과 노동조합이 있는 나라에서 한국의 재벌 체제와 유사한 기업지배구조를 용인해온 것은, 재벌 체제의 장점을 살려 기업들의 국제경쟁력을 높이고 이를 통해 투자와 고용 증대 효과를 보는 한편, 그 성과를 고율 조세를 통해 정부가 흡수함으로써 보편주의적 복지국가 건설을 위한 재원으로 사용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에서도 최근 강하게 대두된 의제인 ‘경제민주화’를 명분으로 재벌 체제를 약화시키거나 해체시키려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재벌 총수의 소유지배권을 보호해주고, 특히 재벌 가문 3세로의 경영권 상속을 지원해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대가로 재벌 기업과 재벌 총수 가문에 더 많은 세금을 부과하고 재벌 그룹 또는 총수의 사회공헌기금 출연을 유도하는 등의 방식으로 복지국가 건설에 필요한 재원을 조달하고, 재벌 기업들이 투자와 고용 증대에 매진함으로써 국민경제 발전에 기여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적 대타협을 통한 복지국가 건설이야말로 ‘경제민주화’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논리는 필자가 보기에 스웨덴 모델의 역사에 대한 부정확한 지식에 기초해 있다. 이러한 논리를 제시하는 논자들은 스웨덴 사민주의 세력, 즉 사민당과 생산직노동조합 중앙조직(LO)이 발렌베리 가문을 대표로 하는 거대 금융가문들과 명시적 타협을 통해, 거대 금융가문들의 소유지배권은 건드리지 않는 대신에, 그 대가로 거대 금융가문들이 고율 조세를 수용하고 투자와 고용 증대에 매진하는 형태로 윈윈 게임을 전개하기로 약속한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예컨대 스웨덴식 협조주의적 노사관계 형성의 출발점으로 많이 거론되는, 1938년의 살트셰바덴 협약은 노사 간 분쟁사항의 해결방식만을 의제로 삼았지, 거대 금융가문의 소유지배권 보장과 투자와 고용 증대 및 고율 조세 부담을 정치적으로 교환한 타협이 아니었다. 그리고 복지국가 건설은 사민주의 세력과 대기업들 간의 타협과 무관하게 1930년대 초부터 사민당 정부가 일관성 있게 추진해온 프로젝트였다. 복지국가 건설의 핵심 원동력은 사민당의 장기 집권이었고, 이를 가능하게 한 핵심 요인은 세계 최고 수준의 조직률을 가진 생산직노동조합 중앙조직과 사민당의 밀접한 협력, 우파 정당들의 고질적 분열, 사민당의 우수한 정책 역량 등이었다. 살트셰바덴 협약 이후 1960년대 말까지 사민주의 세력과 대기업들 간에 협조적 관계가 유지되었던 것은 사실이나, 이것이 거대 금융가문들의 소유지배권 보장을 매개 고리로 하여 달성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한국에서 소유지배권을 특권적으로 보장받는 대가로 재벌 총수 가문이 제공해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투자와 고용 증대? 소유지배권을 보장받기 위해 일시적으로는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소유지배권을 완전히 보장받은 이후에도 이러한 정치적 교환이 계속 유지될 수 있을까? 재벌 총수 가문의 소유지배권을 보장해주는 대가로 투자와 고용 증대, 고율 조세 납부를 받아내자는 것은, 막대한 현찰을 주는 대가로 액수도 얼마 안 되고 현금 회수 여부도 불확실한 어음을 받는 것과 비슷한 일일 것 같다
 
“복지국가 북유럽에도 ‘재벌’ 자리잡아” (김인춘 연세대 동서문제연구원 연구교수)
“스웨덴 사회민주당은 집권후 1938년 협약 통해 노사대타협
대기업의 소유구조 보장…한국도 대기업 구실 필수적“

최근 우리 사회에서 중요한 현안 중 하나가 재벌개혁으로 대표되는 경제민주화 문제이다. 그런데 재벌개혁의 방향으로 주주모델 방식과 이해관계자모델 방식이 진보진영에서 동시에 나오고 있다.
1997~98년 외환위기 이후 재벌개혁의 방안으로 미국식 주주모델 제도가 국내에 도입되어 왔다. 그럼에도 가족경영 등 재벌 체제는 더욱 강고해졌으며, 더 큰 문제는 기형적 주주모델이 초래한 막대한 비용을 국민들이 치르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에게 미국식 모델이 가능하지 않음이 드러났고 더욱 심화된 재벌 체제 상황에서 기존 대주주를 견제하기 위해 또다른 대주주(예를 들어 국민연금 지분)를 만드는 방안까지 검토됐던 것이다. 
이는 한국에서 미국식 외부 분산주주모델보다 지배주주모델이 제도적으로 용이함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장하준 교수의 재벌해체보다 국유화가 낫다는 주장은 현실적으로 지배주주모델의 유용성과 불가피성을 강조한 것으로 이해된다. 평등과 사회적 신뢰를 자랑하는 북유럽 복지국가들에서도 집중화된 대기업 체제가 자리잡고 있다. 꼭 재벌 체제를 해체해야 경제민주화가 되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한국의 재벌형 기업집단은 몇가지 중요한 우위 원천을 갖고 있다고 한다. 가족경영의 문제가 심화되었지만 재벌의 기업소유가 과연 본질적인 문제인가라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한다. 스웨덴의 가족지배주주 체제와 복지국가의 공존 사례를 들면서 재벌 체제를 활용하자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이다.
장하준 교수의 소위 재벌활용론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만 장 교수 또한 현재 한국 재벌의 문제들을 그대로 덮고 가자는 뜻은 아닐 것이다. 현재의 재벌 체제로는 스웨덴 모델처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재벌활용론은 기본적으로 민주적이고 투명한 재벌 체제를 전제하는 것이며 다만 사회적 대타협을 통해 복지국가와 재벌 체제 경영권을 상호 보장하자는 점에서 미국식 주주모델이나 재벌해체를 주장하는 측과 차이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재벌개혁론과 재벌활용론의 이분법은 잘못된 것이다.
스웨덴 사회민주당은 1932년 집권 후 1938년 살트셰바덴 협약을 통해 노사대타협을 이루었다. 자본과 정치세력 간 타협으로 사회민주당은 대기업의 기존 소유 및 경영구조를 보장해주었다. 이 과정에서 차등의결권이 보장되어 적은 지분으로 거대한 기업피라미드를 통제할 수 있게 되었고 교차소유제로 기업지배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당시 스웨덴 사민주의자들은 무엇보다 투자와 고용, 기업성장과 산업 경쟁력이라는 현실적 문제를 우선시했다. 강력한 대주주에 의한 안정된 기업지배구조는 단기적 이익보다 장기적 관점에서 자본집약적 산업과 연구개발에 투자할 수 있다고 보았다.
1950년대 이후 사회민주당의 정책은 대기업의 자본축적과 자본집중을 더욱 강화시켜주었다. 반면 스웨덴 대자본(가)은 투명성, 낮은 부패, 투자와 고용, 노사협력, 세금으로 복지국가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고용을 늘리고 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여 경제성장에 기여한 것이다. 이는 지속가능한 복지국가의 핵심 조건이 된다. 스웨덴의 대기업은 경영권을 보장받지만 가족지배가 아닌 재단을 통해 지주회사를 지배하고 재단은 수익의 대부분을 공익을 위해 사용하고 있다.
한국에서 복지와 증세, 고용확대, 비정규직, 장시간근로 개선 등의 문제에 대기업의 구실은 필수적이며 대기업의 구실을 도외시하고는 선진적 복지국가를 만들기는 어렵다. 장하준 교수의 주장대로 경제민주화의 핵심은 복지국가 건설에 있다. 대기업의 경영권을 보장하면서 더 많은 세금과 책임을 부담하게 하여 재분배 기능을 강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회적 조정과 정치적 합의로 조세, 노동 및 복지정책과 연계한 한국식 빅딜모델을 검토할 수 있을 것이다. 자본에 대한 시장규율의 압력수단만큼 정치사회적 압력수단 또한 기업지배구조를 효과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2012 스톡홀름 포럼’ 스웨덴서 내달2일 개최 (정혁준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 수석연구원)
한겨레사회정책연 1돌 기념
‘스웨덴 복지의…비전’ 주제

‘2012 스톡홀름 포럼’이 7월2일(현지시각) 스웨덴 스톡홀름의 고틀란드 섬에서 열린다. ‘스웨덴 복지의 위기, 기회 그리고 비전’이라는 주제로 진행되는 스톡홀름 포럼은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소장 이창곤)와 스칸디나비아정책연구소(소장 최연혁)가 공동 주최한다. 이번 포럼은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 설립 1돌을 기념하기 위해 마련됐다.
2일 열리는 포럼에 앞서 세실리아 세이데고르드 고틀란드 주지사가 환영사를 하고 김용익 서울대 의대 교수(민주당 의원)가 축사로 화답한다. 잉바르 칼손 전 스웨덴 총리가 ‘스웨덴 복지모델의 본질, 희망과 꿈’이라는 기조연설을 시작으로 그 화려한 서막을 연다.
오전에 열리는 1세션은 ‘북유럽 모델의 지속적 발전을 위한 조건: 현재 위기의 진단과 미래의 해결책은?’이라는 주제로 스웨덴 의회의 바르브로 베스테르홀름 자유당 의원, 앙네타 루트로프 환경당 의원, 윌바 요한손 사민당 의원과 함께 이창곤 소장이 참가해 토론을 벌인다.
오후에 열리는 2세션에선 ‘국민 삶의 질 향상을 위한 지방자치: 문제와 기회의 진단’이라는 주제로 토론회가 펼쳐진다. 한나 베스테렌 고틀란드 부시장과 카롤라 군나르손 스웨덴 지방자치협의회 부의장 등 스웨덴 지방자치단체 관계자와 김성환 노원구청장, 나소열 서천군수, 김윤식 시흥시장 등 우리나라의 지방자치단체장이 참가한다.
마지막 라운드테이블 토론은 ‘복지개혁의 딜레마: 세금, 국민여론, 그리고 경제성장’이라는 주제로 최연혁 쇠데르퇴른대학 교수가 사회를 맡고, 렌나르트 에릭손 스톡홀름대학 교수와 스벤 호르트 쇠데르퇴른대학 교수, 예란 테르보른 케임브리지대 교수, 정혜주 고려대 교수가 토론자로 참가한다.
3일 스톡홀름 포럼 참가자들은 해마다 7월 첫주에 열리는 알메달렌 정치박람회에 참석한다. 알메달렌 정치박람회는 스웨덴 총리를 포함한 정치인들과 700여개의 시민단체와 관련 기관이 참여해 정책토론과 정치를 논하는 대축제다. 스톡홀름 포럼 참가자들은 이날 오전 알메달렌 정치박람회 조직위원회를 방문한 뒤, 오후에는 고틀란드 지역 정당대표들과 ‘스웨덴 모델의 도전과 지역정치: 재원, 서비스 질, 그리고 주민 접근성’을 놓고 대화를 벌인다. 이날 오후 4시부터는 정치박람회 참가자들의 거리 난상토론회가 벌어진다.

 

"왜 이 씨 가문과 타협해야 복지국가 될 수 있나" (프레시안, 김덕련 기자, 2012-06-24 오후 2:29:08)
[인터뷰] 유종일 KDI 교수 "자본 통제, 재벌 개혁…둘 다 하면 된다"
"의미 있는 토론이긴 한데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인지는 의문이다." 최근 <프레시안>에서 진행되고 있는 '한국 경제 성격 논쟁'을 두고 나오는 말 중 하나다. 이런 기대 섞인 우려를 여러 사람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20일 만난 유종일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에게서도 같은 진단을 들었다. "생산적인 논쟁이 돼야 할 텐데 아쉽다." 유 교수는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 정승일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연구위원, 이종태 <시사IN> 기자 쪽으로부터 "좌파 신자유주의자"라는 비판을 받은 경제 민주화론자 중 한 사람이다. 인터뷰는 KDI의 유 교수 연구실에서 이뤄졌다.
유 교수는 "필요한 논쟁이긴 한데 굉장히 감정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 같다"고 우려했다. "이명박 정부가 신자유주의 비슷하게 하고 재벌들이 횡포를 부려 불균형과 부익부빈익빈이 심해졌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시장과 재벌을 규제하고 조정해서 바꿔야겠다'는 것이 한국 사회에 형성된 합의다. 상황이 이러한데, '경제 민주화론자는 신자유주의자'라고 이야기하는 건 경제 민주화를 고민하는 사람들로서는 좀 황당한 일이다."
유 교수는 "장하준 교수에게 묻고 싶은 게 있다"고 했다. "왜 재벌과 타협해 복지국가를 만들자는 건가? 국회에서 법을 만들면 된다. 세금을 걷고 그 세금으로 복지 정책을 실시한다, 이렇게 하면 된다. 왜 (삼성) 이씨 가문과 타협해야 복지국가가 되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재벌과 대타협' 문제와 관련해 유 교수는 "법 위에서 놀고 있는 재벌들이 뭣 때문에 타협하겠나"라고 지적했다. "어느 정도 힘의 균형이 이뤄져야, '타협하지 않으면 나도 손해를 보겠다'는 생각이 들어야 타협하는 것이다. 그 힘을 만들자는 것이 재벌 개혁 운동이다."
유 교수는 "생산적인 논쟁이 돼야 한다"는 말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논쟁을 위한 논쟁"이 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경제에서 잘못된 것이 무엇인지, 그걸 고치기 위해 어떤 것이 필요한지, (개혁을) 하다보면 예기치 않게 생길 수 있는 부작용이 무엇인지, 구더기(부작용) 무서워 장을 안 담그는 게 맞는 건지, 그게 아니라 장을 담그려면 어떤 보완 대책이 필요한 건지, 이런 식으로 가야 생산적인 논쟁이 된다.
(…) 장하준 교수 쪽도 '재벌이 다 잘하고 있다'는 건 아니고 이러저러한 건 바뀌어야 한다고 하는 것 아닌가. (…) 어떻게 재벌을 개혁하고 경제 민주화를 이루고 복지국가를 만들 것인지, 그리고 장 교수가 이야기하는 국제 투기성 금융 자본의 폐해를 어떻게 최소화할 것인지 논의하고 그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 서로 접점을 찾으며, 의견이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더 깊이 들어가야 한다. (그런 방식의) 생산적인 논쟁으로 바뀌었으면 좋겠다."
유 교수는 "자본 통제가 우선이냐, 재벌 개혁이 우선이냐 하는 것은 불필요한 논쟁"이라고 말했다. "둘 다 하면 되는 것이다. 재벌 개혁을 하면 자본 통제를 못한다? 자본 통제를 하면 재벌 개혁을 못한다? 전혀 그런 게 아니다. (…) 자본 자유화에 가장 앞장선 세력이 누군가? 재벌이다. 또한 재벌은 최고의 수혜자다. 재벌들이 금리 싼 자본을 열심히 들여오고 했던 것 아닌가."
유 교수는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며 재벌 개혁과 자본 통제를 대립적인 것으로 봐서는 안 된다는 뜻을 밝혔다. "(1997년) 한국으로 돌아올 때 '(변화한 한국에 대한) 감을 잡을 때까지 몇 년간은 대중적인 글쓰기를 안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걸 딱 2번 어겼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쓴 것 중 하나가 외환 자유화 2단계를 할 때 반대한 것이다. 그밖에도 학술회의, 신문 칼럼 등을 통해 '자본 통제를 해야 한다'고 여러 번 주장했다."
유 교수는 "경제 민주화에 반대하는 힘이 (한국 사회에) 강하게 있다"며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를 사례로 들었다. "우리의 주된 전선은 거기다. (…) 전경련부터 해체해야 한다."
유 교수는 "경제 민주화는 대한민국 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헌법 119조 2항은 국민경제의 균형 발전, 시장 지배력 남용 방지 등을 위해 정부가 규제 및 조정을 할 수 있다는 내용으로, 경제 민주화의 근거 조항으로 여겨진다. 또한 "국민이 경제 민주화를 절절히 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카드 수수료 문제 갖고 음식점 주인들이 쏟아져 나왔다. 청년들은 최저임금이나 아르바이트생 권리 문제 등을 놓고 싸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여기저기서 싸우고 있다. 희망버스도 많은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기업형 슈퍼마켓 때문에 동네 가게 주인들은 다 죽을 맛이다. '우리도 먹고살게 해달라. 왜 대기업만 잘나가냐', 이런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오는 것이다. 이렇게 국민들이 원하니까, 정치권도 표를 얻으려고 '경제 민주화를 하겠다'고 하는 상황이다."
유 교수는 경제 민주화의 핵심 과제로 꼽히는 재벌 개혁과 관련해 "역사적으로 흔치 않은 기회가 왔다"고 진단했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위기 때 재벌이 원흉으로 지목되면서 재벌 개혁이 사회의 중심 과제로 등장했다. 많은 개혁 조치가 이뤄졌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재벌의 힘이) 부활했다. 재벌의 경제력 집중과 폐해가 더 심해졌다. (…) (요즘 재벌 위주 경제의 폐해를) 국민들이 절박하게 느끼고 있다. 재벌 개혁 기회가 다시 찾아온 것이다."
유 교수는 재벌 개혁의 핵심이 "총수 지배 체제를 바꾸고 소유 지배 구조를 개혁하는 것"이라고 제시했다. 유 교수는 이를 위해 순환 출자 금지, 출자총액제한제, 계열 분리 명령제, 노동자 경영 참여 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유 교수는 "경제 민주화는 역사적 과제"라며 "꼭 단기에 승부를 볼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길게 보면 반드시 이뤄질 일이고 이뤄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유 교수에게 물었다. 서민들이 피부로 느낄 수 있을 만큼 '괜찮은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것과 재벌 개혁을 연결시킬 수 있는 정책이 무엇일까. "예를 들면, 법인세 비과세 감면 액수가 굉장히 많다. 그걸 전면적으로 없애고, 딱 하나 세제 혜택을 주자. 좋은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것에 대해 세제 혜택을 주는 것이다. 물론 고용 문제는 한두 가지로 풀릴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상징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진짜 뭐 좀 달라지겠구나', 이런 느낌이 확 올 수 있게 하는 정책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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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금 문제 해결이 급한가 재벌규제가 급한가? (프레시안, 정승일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연구위원 2012-06-12 오후 2:51:08)
[한국 경제 성격 논쟁] 장하성 등 자유주의자들의 비판에 답한다
2년 전 지방선거에서 무상급식 이슈를 계기로 불붙기 시작한 우리나라의 복지국가 담론에 찬물을 끼얹는 주장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그것도 진보적으로 분류되는 인사들로부터이다.
평범한 시민들의 관점에서 볼 때, 예컨대 연 1000만 원에 이르는 과중한 대학생 등록금 문제의 해결이 시급한가, 아니면 출자총액제한과 순환출자를 통한 재벌규제가 더 시급한가? 당연히 등록금 문제 해결이다. 게다가 등록금 문제뿐이랴. 대학생 당 연 1000만 원에 이르는 생계비 문제는 또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런 과제들이야말로 가장 시급한 과제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과제에 진보적인 정당들과 시민단체들이 총력을 기울여도 모자라는 판이다. 청춘 남녀들이 직면한 이런 문제의 해결에 필요한 연 10~20조 원의 신규 복지 예산을 어떻게 조달한 것인지(부자 증세 등을 통해)를 모두 논의하고 고민해도 모자라는 판이다.
게다가 이런 일을 국회의원과 관료들이 알아서 해결해줄 리 만무하다. 그렇다면 청춘 남녀들이 스스로 들고일어나야 한다. 국회와 행정부, 대통령이 이런 일들을 하도록 압박해야 하고, 따라서 대학생과 청춘 남녀들을 이런 등등의 복지국가 이슈를 중심으로 널리 조직하고 교육시켜 나가야 한다. 이와 유사한 대중적 복지국가 운동을 노인복지와 여성복지, 초중고 교육 등의 영역에서도 광범위하게 벌여 나가야 한다.
또한 기존의 대기업 중심, 정규직 중심 노동운동을 어떻게 환골탈태하게 하여 중소기업 노동자와 비정규직들도 함께하는 노동운동으로 만들어낼 것인지,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도 어떻게 하면 기존의 기업별 사내복지 체제를 국가적, 보편적 복지 체제로 바꿀 것인지를 고민하여야 한다. 이 모든 새로운 복지운동, 새로운 노동운동이야말로 진보의 가장 시급한 과제이고, 이것을 하나로 집약하는 것이 바로 복지국가 운동이다.
수백만, 수천만의 평범한 청춘 남녀들과 청소년들, 시민들, 현장 노동자들, 여성들과 노인들이 자신들의 고단한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 삶을 개선하는 데 직접 참여하는 거대한 대중운동, 이것이야말로 한국 진보 운동의 지난 수십 년 역사에서 결정적으로 빠져 있는 '진보 운동의 기본 질서'이다. 따라서 복지국가의 기본 질서를 창출하는 것이야말로 우리나라 진보의 가장 시급한 과제다.
출자총액제한과 집중투표제, 순환출자 금지와 같이, 일반인들은 알아먹기도 힘든 어려운 전문가적 용어로 이야기하는 일부 진보 엘리트들이 주도하면서 수백만, 수천만 명의 평범한 사람들을 진보 운동의 '주체'가 아니라 '구경꾼' 수준으로 전락시키는 것은 전형적인 자유주의 엘리트 방식의 운동이다. 진보적 자유주의 역시 마찬가지이다.
부모의 소득과 계층이 그 자식들의 소득과 계층으로 대물림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도, 패자부활이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도, 가장 시급한 과제는 복지국가를 만드는 것이다. 노동민주화와 보편적 복지가 이루어지는 복지국가야말로 '불공정'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실질적인 해법이다.
정의와 공정·공평의 의미는 자유주의와 공산주의, 사회민주주의 등 각기 다른 정치 경제 사상과 세계관에 따라 달라진다. 그리고 장하성과 김동춘 교수 등이 말하는 것은 자유주의에 입각한 정의론이다.
자유주의자들은, 보수적 자유주의건 진보적 자유주의건 관계없이, 정의와 공정·공평을 '경쟁'의 테두리 안에서 이해한다. 즉 개인들 간, 기업 간, 정당 간의 경쟁(대립)에 있어 그 경쟁이 절차 또는 형식상 공정·공평하게 이루어지면 그것을 '정의롭다'고 말한다. 따라서 자유주의자들은 형식적, 절차적 공정·공평이야말로 정의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공정한 경쟁' 즉 '기회의 평등'(기회의 공정성)이야말로 자유주의가 말하는 핵심적 가치이다.
형식적·절차적 평등을 가장 중시하는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은 당연히 '복지보다 우선적인 것은 공정·공평'이라고 말하며, '복지 국가보다 더 우선적인 것은 특권과 특혜의 철폐'라고 주장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즐겨 말하던 '반칙과 특권이 없는 사회' 역시 일종의 자유주의적 정의론이다. 요즘에는 문재인과 이해찬 등 친노 인사들 역시 이러한 정의관을 자주 표방한다.
그렇지만 나 같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 개인 간, 기업 간 경쟁이 제 아무리 그 형식 및 절차상 공정·공평하게 이루어진다고 해도 빈부격차 심화와 대·중소기업 간 양극화는 막을 수 없다고 본다. 예컨대 아무리 공정한 시장 경쟁 절차가 준수된다고 하더라도 10개의 신생 벤처기업들 중 9개가 파산하고 1개만 생존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리고 그 9개 파산 업체의 창업주와 종업원들이 실직자가 되는 것도 불가피하다. 그런데 만약 획기적인 고용보험, 그리고 그 자식들에 대한 '대학까지 무료 공교육과 학생 생계비 보조 혜택', 그리고 저렴한 주택복지 등의 복지국가 정책이 없다면, 그 가족들마저 모두 인생 파탄의 위험에 직면할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복지국가의 도움 없이 이들을 위한 '패자 부활전'이 가능하다는 것인가?
자유주의자들은 예컨대 열심히 자진해서 공부한 서울대 출신 직장인이 연소득 1억 원을 받는 데 반해 열심히 공부하지 않았던 지방대 출신 직장인이 연소득 3000만 원을 받는 것에 대하여, 그것은 '시장 경제의 기본 질서' 즉 공정경쟁(기회의 평등) 원칙이 준수된 것이므로 '정의롭다'고 말한다. 그에 반해 대기업 생산현장의 고졸 노동자들이 연봉 7000만 원을 받는 데 반해 중소기업의 대졸 사무직들이 연봉 3000만 원을 받는 것은 '공정 경쟁'의 원칙이 심하게 훼손되었다고 본다.
따라서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은 재벌대기업 노동자들의 특권과 특혜의 폐지가, 따라서 이를 위한 민주노총 기업별 노조의 약화·해체가 가장 시급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정태인과 김기원 같은 개혁적 진보 인사들이 민주노총을 '재벌과 야합한 진보의 적'으로 간주하면서 비판하는 이유가 바로 그러한 (진보적) 자유주의의 정의론에 근거하고 있다.
이에 반해 절차적 평등, 기회의 평등보다 실질적 평등(실질적 공정·공평)을 통한 '실질적 사회 정의'의 구현이 훨씬 더 시급하고도 중요하다고 보는 사회민주주의는 복지국가야말로 노동시장의 불공정, 불공평 문제를 해결하는 실질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의 특권과 특혜를 해체하기 위해서는 기업별·특권적 복지를 국가적·보편적 복지로 전환하는 것이 필요하다. 동시에 최저임금의 대폭 상향 조정과 산별노조 및 산별 단체교섭의 법률적 강제, 이를 통해 달성되는 동일 노동, 동일 임금의 국가적 관철이 필요하다. 이것이 노동민주화이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등 모든 기업에 공통적으로 강제되는 산별 단체교섭 및 최저임금의 대폭 상향 규제와 같은 국가개입주의 없이, 어떻게 대기업과 중소기업 전체에 있어, 그리고 정규직 및 비정규직 모두에 있어, '동일 노동, 동일 임금'이라는 공정·공평의 원칙을 구현해낼 수 있다는 것인가?
그런데 이와 같은 보편적·국가적 복지와 산별노조·산별교섭은 모두 장하성과 김동춘, 정태인 등이 중시하는 '시장 경제의 기본 질서'(즉 공정한 시장경쟁과 기회의 평등)과는 무관하다. 오히려 그것은 '복지국가의 기본 질서'라고 말할 수 있다. 어떻게 복지와 복지국가 없이 정의로운 사회, 공정하고 공평한 사회를 만들겠다는 건가?

 


 

이건희와 삼성그룹도 구별 못하나 (프레시안,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정승일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연구위원,이종태 <시사IN > 기자, 2012-05-28 오후 5:55:41)
[한국 경제 성격 논쟁] 정태인·이병천의 비판에 답한다<1>
우리의 새 책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이후 <선택>)는 2005년 발간된 <쾌도난마 한국경제>와 마찬가지로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잘못된 정책 즉 신자유주의적 경제 정책에 대한 비판으로 가득하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정책의 배경에 있는 지식인들과 정치인들 즉 그런 신자유주의적 '시장개혁'을 '경제민주화'로, '진보적 자유주의'로 묘사하며 찬양했던 개혁진보파 인사들 역시 강한 어조로 비판했다.
우리는 두 책에서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진보 정부 또는 좌파 정부라고 생각하는 것은 - 보수 세력과 진보 세력 모두에 만연한 - 거대한 착각이라고 썼다. 그리고 최근 들어 일부 진보 인사들이 과거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추진했던 시장개혁을 2013년 체제 하에서 경제민주화의 이름으로 재추진해야 한다고 하는 것 역시 강하게 비판하였다. 하물며 우리는 <선택>의 맨 앞 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명박 정부는 물론 김대중·노무현 정부도 기본적으로 모두 신자유주의 노선을 추진해 온 게 사실이에요. 시민들이 이런 측면을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못하고 '안티 이명박'이 노무현 시대로 회귀함을 의미한다면 정말 허무한 일 아닐까요? (...) 우파 신자유주의가 마음에 안 든다고 좌파 신자유주의로 가면서 이를 경제 민주화로 포장하는 일은 그만 했으면 좋겠어요. 이젠 정말 불판을 갈아야 합니다".
논쟁에서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 한다. 정태인, 이병천처럼 대한민국을 이끌어가는 지식인들, 그것도 대표적인 진보적 지식인들마저 우리 책에 대해 거의 욕설에 가까운 곡해와 왜곡, 중상비방을 펼치는 것은 정말 당혹스럽다.
정태인과 이병천의 글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점이 있다. 바로 개인(인간)과 제도·정책을 구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먼저 한국은행 독립성 문제에 대한 논란을 보자. 우리는 한국의 진보개혁 세력이 전통적으로 한국은행 독립성을 - 그리고 이를 통한 물가통제에 집중하는 통화정책을 - 옹호하면서 그에 반대해온 기획재정부(또는 재정경제부)를 비판해온 데 대하여 우리의 새 책에서 비판하였다.
그런데 정태인은 공개편지에서 기획재정부 관료들은 대부분 신자유주의에 물들었는데 반하여 한국은행 근무자들은 그렇지 않다고 우리를 반박하였다. 정태인 자신이 노무현 정부 시절에 청와대에 근무하면서 관료들을 경험해보니 그렇더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정태인은 따라서 한국은행 독립성 주장은 반신자유주의 즉 경제민주화에 부합한다고 결론 내린다.
그런데 정태인의 이러한 논법은 개인(인간)과 제도·정책을 구별하여 관찰하지 않는 것이다. 만약 정태인 식의 논법대로라면 신자유주의적인 인간들이 넘쳐나는 기획재정부는 해체 또는 약화시키는 것이 해법의 하나가 될 것이다. 아니면, 비신자유주의자들이 많은 한국은행 또는 (정태인이 말하는 방식의) 재벌규제 실무를 담당하는 공정거래위원회 같은 다른 정부조직의 위상을 획기적으로 강화해서 기획재정부의 위상을 떨어뜨리는 것이 해법이 될 것이다. 실제 정태인이 "100% 그의 의견에 동의한다"고 하는 김상조는 위와 비슷한 방식으로 모피아 권력을 해체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정태인은 신자유주의에 뿌리 깊이 감화된 관료들(개인들)이 유별나게 기획재정부에만 많다고 생각하는가? 그런 관료들은 외교통상부와 지식경제부(한미FTA 추진)에도, 교육과학부(교육 시장화 추진)에도 철철 넘쳐난다. 공정거래위원회(각종 규제완화 추진)와 노동부(노동권 약화 추진), 보건복지부(사회복지 축소 추진)에도 그런 신자유주의적 관료들은 넘쳐난다.
그렇다면 이런 부처들도 해체 내지 약화시켜야 하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이런 논법대로라면, 현재의 국회와 청와대(따라서 우리나라의 모든 국가기관) 역시 신자유주의적인 인물들이 대다수라는 이유로 그 권한과 위상을 해체 또는 약화시켜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렇게 한다면, 원래 의도는 그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작은 정부, 큰 시장'을 주장해온 밀턴 프리드먼과 하이에크 류의 신자유주의와 똑같은 정책 결론이 나오는 것이 아닌가?
인물과 제도를 구별하지 않는 똑같은 문제점은 이병천의 글에서도 발견된다. 이병천은 "한국의 신자유주의는 개발 독재 유산 위에 서 있다"는 글에서, 한국에서 1990년대 초반부터 신자유주의를 추진해온 인물들은 대부분 과거 개발독재 시대에 권력의 정점에 있던 재벌계 인물들과 경제 관료들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그러면서 한국에서 신자유주의는 금융자본과 금융자산가들이 선두에 섰던 서구와는 달리 박정희 체제의 유산인 모피아 관료와 재벌계 인사들이 앞장서서 추진한 '잡종 신자유주의'라고 지적한다.
훌륭하면서도 올바른 지적이다. 그리고 우리는 단 한 번도 이 점을 부인한 적이 없다. 그런데 박정희 체제의 권력자들(모피아와 재벌)이 199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를 추진한 동일한 인물·개인들이라는 이병천식 논법을 따라가자면, 한국에서 신자유주의(즉 시장주의적 제도·정책)와 박정희 체제(즉 반시장주의적 제도·정책) 사이에는 별다른 '질적 차이'가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실제 이병천은 이것을 주장하고 있는 셈인데, 제도·정책의 관점에서 볼 때, 이는 도무지 납득하기 힘든 이야기이다.
이병천은 우리가 <쾌도난마 한국경제>와 <선택>에서 재벌을 신자유주의의 '피해자'인 양 엉터리로 묘사했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우리로서는 어이가 없는 비판인데, 이 역시 이병천이 개인(재벌가족과 그 가신들)과 제도(법인기업으로서의 대기업과 대기업집단)를 구별하지 않기 때문에 생긴 심각한 곡해요 중상비방이다.
이병천은 이건희와 정몽구와 같은 재벌가문(인간·개인)과 그룹 체제(제도·정책)를 구별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는 우리가 재벌그룹(즉 대기업집단 체제)의 유용성과 정당성을 옹호한다는 점을 곡해하여, 마치 우리가 이건희·정몽구 회장과 같은 재벌 가문과 그 가신 그룹의 이해관계와 행위들(각종 불법행위들)까지 옹호하고 있는 양 착각한다.
요컨대, 정태인과 이병천은 박정희식 경제체제(반신자유주의적 제도·정책)와 그에 관련된 인물들(신자유주의적 모피아 경제관료들)을 구별하지 않고 인물의 문제를 제도의 문제로 바꿔버린다. 또한 대기업집단(주주자본주의 원리에 어긋나는)이라는 경제 제도를 재벌 가족들(주주자본주의에 적극 호응하여 사리사욕을 취하는)이라는 인물·개인들로부터 구별하지 않으며, 인물의 문제를 제도의 문제로 바꿔버린다. 그리고 또한 한국은행 독립성 여부에 관한 제도적·정책적 문제 역시 신자유주의적인 개인-인물들이 한국은행에 많으냐, 기획재정부에 많으냐의 문제로 바꿔버린다.
 
"재벌개혁 만능론은 반민주적 행위" (프레시안,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정승일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연구위원,이종태 <시사IN > 기자, 2012-05-30 오후 4:03:13)
[한국 경제 성격 논쟁] 정태인·이병천의 비판에 답한다<2>
정태인·이병천 등을 포함하는 많은 개혁진보 지식인들이 지금 우리나라에서 가장 시급한 과제는 경제민주화이고 그 경제민주화의 핵심은 재벌개혁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시각에 따르면, 재벌개혁의 핵심 과제는 재벌그룹 계열사 간 순환출자와 같은 '왜곡된' 소유지배구조로 인위적으로 묶여 있는 대기업집단(재벌그룹)을 약화·해체시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계열사 간 출자총액의 제한과 계열분리 명령제를 도입해야 하고, 이렇게 하여 왜곡된 소유지배구조가 정상화된다면 비관련 다각화(문어발식 확장)와 계열사 간 상호 지원 같은 '왜곡된' 경영 역시 바로잡힌다고 한다.
그러나 우선 생각해 볼 점은 경제민주화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개혁론자들은 경제민주화와 재벌개혁을 거의 동일시한다. 그렇지만 재벌개혁은 경제민주화를 위해 이루어야 할 여러 과제 중 하나에 불과하다.
노동자 개인의 권익과 노동조합의 권리를 대폭 향상시키고, 또한 (독일의 공동결정제처럼) 종업원 대표자들의 회사 경영 참여를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것도 경제민주화이다. 소비자 협동조합의 설립을 지원하여 소비자 권익을 향상시키는 것, 그리고 소농·소기업들이 자율적으로 결성한 협동조합에 대한 정부의 제도적, 금전적 지원을 통해 그들의 경제적 힘을 향상시키는 것도 경제민주화이다. 전기와 철도·지하철, 버스, 우편, 수도처럼 모든 국민의 일상생활에 중요한 재화와 서비스를 제공하는 공기업이나 혹은 그런 공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민간기업을 강력하게 규제하는 것도 경제민주화이다.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가 산업정책과 복지정책 등을 통하여 ('1원 1표'라는 반민주적인 원리에 기초하게 마련인) '시장'을 규제하여, 기업들이 가능한 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위해, 즉 국민들의 이익에 맞도록 행동하도록 유도하는 것도 경제민주화의 중요한 부분이다. 또한 그 구조와 인맥상, 물가안정과 통화가치 유지 등 금융중심적 시각에서 경제문제를 파악하게 되어 있는 중앙은행(한국은행)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강화해서 중앙은행이 고용이나 성장처럼 일반 국민에게 더 중요한 문제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는 것도 경제민주화이다.
이렇듯 경제민주화를 위해 할 일이 여러 가지로 많은데도 개혁파의 경제민주화론은 이런 여타 요소들은 거의 무시하면서 재벌개혁과 경제민주화를 거의 동의어로 쓸 정도로 재벌개혁(대기업집단의 약화와 해체)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다.
물론 개혁세력이 노동자 권익과 중소기업 역할 강화, 복지확대 등을 거론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재벌개혁이 선행되지 않고서는 이런 다른 정책들이 실현 불가능하다고 본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정태인은 이렇게 말한다.
"시장에서 이런 양극화를 방치한다면 제 아무리 복지에 돈을 쏟아 부어도 1980년대 중반에서 1990년대 중반의 분배 상황으로 돌아가는 것도 언감생심일 겁니다. … 재벌개혁, 경제민주화 없이 복지만 내세워서 우리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이병천 역시 말하기를,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라는 두 가지 시대정신이 새로 정립되는 상황에서 그 기본 관문(즉 일이 시작되는 출발점)은 "재벌개혁과 '삼성 동물원' 상황의 극복"이라고 한다. 즉 경제민주화(재벌개혁)와 복지국가를 각각의 독립된 병렬적 의제로 내세우되, '전자'(재벌개혁)를 '후자'(복지국가)에 앞서 선행하는 단계로 보고 있다. 특히 정태인은 참여연대와 민주노총 등과 함께 공동으로 '재벌개혁 시민연대'를 새로 구축하여 재벌개혁을 올해 대통령 선거의 핵심 의제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과연 먼저 재벌개혁이 제대로 되어야 그 이후 비로소 복지국가가 그 바탕 위에서 제대로 구축될 수 있는가?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먼저 재벌개혁과 복지국가 구축을 분리시켜 보는 데 문제가 많다. 많은 점에서 복지국가의 강화는 그 자체가 재벌개혁이기도 하다. 예컨대 복지국가의 필요조건인 누진 소득세 강화로 가장 큰 타격을 받는 것은 한국에서 가장 부유한 소득 계층인 재벌 가문들과 그 가신들이다. 또한 보편적 의료 복지와 노인 복지 역시 그 자체 강력한 재벌 개혁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제도들은 재벌계 보험회사들이 주도하는 보험업계의 이익을 축소하기 때문이다. 복지국가 운동 속에는 이렇듯 '여러 형태'의 재벌개혁이 이미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는 (공정거래법상) 출자총액제한과 순환출자 금지 같은 '특정 형태'의 재벌개혁(그것도 재벌가족이 아닌 대기업그룹 체제만을 규제·통제하는)만이 올바른 재벌개혁이라고 고집하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우리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에서 "복지국가 따로, 경제민주화 따로 병행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 복지국가를 향한 운동 그 자체가 경제민주화"라고 이야기했던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이다.
도리어 우리는 출자총액제한 강화를 통해 대기업집단을 약화 또는 해체시키게 되면 한국 최대 대기업들에 대한 주주자본주의의 영향력이 증폭되고, 그렇게 되면 친노동, 친중소기업적인 정책과 복지 정책을 발전시키는 것이 어려워진다고 본다.
조금 더 이론적으로 들어가자면, 경제민주화라는 말은 매우 추상적이어서 다양한 논자들에 의해 다양한 프레임으로 이해될 수 있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역시 경제민주화론이다. 왜냐하면 노동계급이 다수인 사회에서 다수자 민주주의를 통해 집권한 인민주권(즉 민주주의)이 중앙집중 계획경제를 실시함으로써 다수자인 노동계급의 이익에 맞게 (즉 민주적으로) 경제를 운영하자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무정부주의자들(아나키스트)의 주장 역시 그들 나름의 경제민주화론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시장 경제와 국가권력을 해체하고 그것을 자율적 (협동조합) 공동체의 연대적 결사체로 대체함으로써 실질적인(즉 경제적인) 인민주권(즉 민주주의)을 실현하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국가조직(특히 그 경제정책 담당조직들)과 대기업들, 즉 '자본주의 경제의 핵심 조직들'을 어떻게 하면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 즉 1원 1표가 아닌 1인 1표의 이상(理想)에 맞게 재편할 수 있는가?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입장이 있을 수 있다. 하나는 정부조직(정부의 경제개입)과 대기업(대기업집단)을 가능하면 작게 만들자는 입장이다. 이렇듯 '완전경쟁 시장(공정시장) 자본주의'를 만들어야만 참된 '1인 1표 민주주의'가 실현될 수 있다고 보는 정치경제 사상을 자유주의적 민주주의(liberal democracy)라고 부른다. 그리고 한국의 개혁파 학자들은 이것을 진보적 자유주의라고 부른다.
그에 반해 우리는 경제적으로 큰 역할을 하는 정부(특히 큰 복지국가)와 대기업(대기업집단)이 경제적 민주주의의 달성을 위해 긴요하다고 생각하며, 그래야만 참된 경제민주화가 달성된다고 본다. 즉 우리 역시 경제적 민주주의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구상하는 경제민주화의 구체적 내용은 (진보적 자유주의의 틀에 머무르는) 우리나라 개혁론자들의 그것과 현격하게 다르다. 우리의 시각은 비자유주의(non-liberal)적 민주주의이며 유럽 사회민주주의에 훨씬 가깝다.
많은 개혁진보 지식인들이 경제민주화를 진보적 자유주의의 관점에서 바라보면서 스웨덴식 복지국가에 '앞서' 자유주의적 경제민주화가 선행해야 한다고 본다. 그런데 이런 사고방식은 한국 진보의 역사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1960-80년대에 그 사상적 기초가 형성된 한국 진보 세력의 정치경제학에는 박정희식 관치경제와 재벌그룹 체제로 상징되는 한국 자본주의는 '비정상적' 자본주의라는 관념이 깊게 뿌리 내리고 있다.
대표적인 명칭은 '천민' 자본주의(김상조)이다. 그리고 '식민지 반(半)' 자본주의(통합진보당 구당권파), 또는 '신식민지 국가독점' 자본주의(과거 이병천이 대표적 논자였다)로 불리기도 했다. 굳이 이런 형용사를 붙이는 이유는 한국 자본주의가 선진국 자본주의에 비해 왜곡되고 부도덕한 방식으로 성장해왔고, 따라서 이런 과거를 청산하지 않으면 한국 자본주의는 '정상적' 자본주의로 성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이 '천민자본주의'라는 시각은 미국과 유럽 선진국들은 '귀족 자본주의'였고 '노블리스 오블리제 자본가들'이었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렇지만 장하준이 <사다리 걷어차기>와 <나쁜 사마리안> 등에서 지적했듯이, 실제 미국과 유럽 자본주의의 역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들 역시 부정부패와 반민주주의, 정부개입이 난무하는 천민적, 비정상적 방식으로 성장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정태인 등이 말하듯이 착한 자본가 단계, 즉 자유주의적 경제민주화(또는 '공정시장', '공정국가')가 제대로 되어야만 그 이후 비로소 그 바탕 위에서 본격적인 북유럽식 복지국가가 가능해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선진국 문턱까지 도달한 한국 경제의 발전 수준과 국민의 시민적 성숙도로 볼 때, 대한민국은 스웨덴식 복지국가로 곧장 나아갈 수 있다. 복지국가 5개년 계획을 세워 지금부터 차근차근 밀고 나간다면, 5-10년 뒤에는 지금의 미국, 그 다음엔 지금의 유럽 중위권 복지국가, 20-30년 뒤엔 지금의 스웨덴 복지국가 수준에 도달할 수 있다.
이렇듯 한국 사회가 지향해야 할 '잠정적 유토피아'(홍기빈 저, <비그포르스 - 복지국가와 잠정적 유토피아>)로 스웨덴식 복지국가를 제시하는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 재벌개혁은 그 자체로서 목적이 될 수 없다. 재벌개혁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더 큰 목적, 즉 복지국가의 구축에 복무하는 수단, 그것도 여러 수단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이런 의미에서, 재벌개혁 운동과 복지국가 운동은 동시에 '병렬적으로' 행해지면서 서로 '보완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재벌개혁 운동은 어디까지나 복지국가 운동이라는 더 큰 프레임 안에서 벌어지는 작은 부분이다. 말하자면, 복지국가 운동이 하나의 전쟁(war)이라면, 재벌개혁은 그 전쟁 속에서 벌어지는 하나의 전투(battle), 물론 중요한 전투이다. 중요한 것은 프레임(frame)이다. 재벌개혁이 복지국가 구축과 따로 떼어져 병렬화될 때, 그 운동은 궁극적인 큰 목적과 방향(즉 프레임)을 상실한 채 주주자본주의의 이해관계에 따라 진행될 것이다.
무릇 모든 개혁은 개선(改善)이 될 수도, 개악(改惡)이 될 수도 있다. 우리 역시 재벌개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현재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재벌개혁은 - 투명성 강화 등 보편타당한 이야기들도 일부 있지만 - 본질적으로 월스트리트와 연계된 주주자본주의를 더욱 강화하는 프레임 속에서 머무르고 있고, 따라서 대부분 국민의 이해관계에서 볼 때는 개선이 아니라 개악이다. '주주자본주의 원리에 따른 재벌개혁'은 수익성 및 주주이익 지상주의와 이에 따른 고용 없는 성장과 비정규직 양산, 인건비와 하청단가의 삭감, 청장년 실업과 빈곤층의 만연 등을 낳는다.
개악이 아닌 개선이 되려면, 재벌개혁을 통해 달성하려는 궁극적 목표가 무엇인지 분명히 해야 한다. 우리는 그것을 스웨덴식 복지국가로 본다. 물론 그런 복지국가에서도 소득재분배(이른바 2차 분배)를 통한 복지(즉 좁은 의미의 복지)는 만능이 아니다. 그곳에서도 왕성한 일자리 창출과 근로소득 창출을 통한 1차 소득분배(즉 원천소득 분배)는 결정적으로 중요하며 그 큰 부분은 대기업의 몫이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복지국가 원리에 따르는 재벌개혁', 즉 진보적 자유주의가 아닌 새로운 프레임의 재벌개혁을 구상한다.

 

박정희 체제=절대악? 어리석은 규정 (프레시안,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정승일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연구위원,이종태 <시사IN> 기자, 2012-06-08 오전 8:15:35)
[한국 경제 성격 논쟁] 정태인·이병천의 비판에 답한다<3>
한국의 개발독재 시기는 대다수 민중에게 참혹한 시대였다. 노동자들은 저임금과 군대식 규율, 경찰폭력과 산업재해의 위험 속에 세계 최장의 괴로운 노동시간을 감내해야 했다. 전태일 열사의 분신으로 상징되듯이 노동자의 개인적 권리와 노동조합은 야만적으로 탄압 당했다.
박정희의 개발독재 시기인 1960-1970년대에 한국뿐 아니라 대다수 개발도상국의 노동자들도 가혹한 노동착취를 당했다. 그에 반해 당시 미국과 유럽 등 서구 선진국의 노동자들은 높은 임금과 역사상 최고조의 복지를 누리고 있었다. 그렇지만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서구 선진국들 역시 1930년대까지만 해도 야만적인 노동탄압과 국가폭력, 사회 상층부의 부정부패가 일상적이었다. 즉 노동착취와 반민주주의, 부정부패는 자본주의 발전기의 보편적 현상이었으며 박정희 체제로 대표되는 한국 자본주의만 특별히 '비정상적'이거나 '왜곡된' 것이 아니었다.
박정희가 아무리 극악한 반(反)노동, 반(反)서민적인 폭압적 독재자였다 할지라도, 그에 못지않게 폭압적이었던 이디 아민(우간다)이나 마르코스(필리핀)과는 뭔가 다른 '경제' 정책을 운용했기 때문에 한국의 경제성장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경제정책상의 그 차이점은 무엇이었을까? 우리가 발견한 결정적 차이는 바로 박정희가 '자본에 대한 국가적 통제'를 매우 강하게 구사하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바로 이 부분이 우리가 '박정희 옹호자'니 '박정희주의자'니 하는 모욕적인 호칭을 감수하면서까지 주목하고 싶은 점이다.
박정희는 마오쩌둥과 달리 외자를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당시 한국과 개발도상국들은 초보적인 수준의 생산설비와 기술도 갖지 못한 나라들이었기에 해외에서 생산재와 기술을 구입하려면 당연히 외화가 필요했다. 박정희는 남미나 아프리카, 필리핀의 독재자들과 달리 외국자본의 무차별적 자유와 권리를 승인하지 않았다. 예컨대 GM이나 IBM, 또는 도요타와 폭스바겐 같은 선진국 다국적 기업이 한국에 조립공장만 세우고 기술이전도 하지 않으면서 오로지 자사의 국제생산 네트워크에 우리 기업들을 종속시키도록 허용하지도 않았다.
박정희 체제는 당시 선진국 수준에서 보면 어린아이에 불과했던 포항제철과 현대자동차, 대우조선, 삼성전자 같은 회사들을 초국적기업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수입을 규제했고, 또한 그 초국적기업들이 한국에 공장을 세울 때에도 여러 가지 방식으로 국가적으로 통제·규제하였다. 당시 한국이 도입한 외자는 대부분 직접투자(기업 설립)나 다수 지분 투자(한국 대기업의 소유권 장악)가 아니라 부채였다. 정부가 외자를 빌린 뒤 당시 국유기업이었던 은행들을 통해 국가경제 발전에 가장 긴요한 전략 부문들에 투자하도록 했다. 만약 당시 외자가 직접투자나 다수 지분 투자로 들어왔다면, 외자가 한국의 경제발전에 유리한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국민경제적 시각에서 통제'하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했을 것이다.
직접투자나 지분투자로 들어온 외국자본은 마음만 먹으면 제멋대로 철수할 수 있다. 그러나 외자가 부채로 들어오는 경우, 더구나 정부가 그 외자 부채를 통제하는 경우, 그 돈(자본)을 국내 산업 발전과 수출 활성화를 위해 활용할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벌어들인 돈으로 그 외자부채를 갚아 나가면 된다.
박정희 체제는 자본에 대한 국가적 통제를 통해 생산적 투자와 기술개발, 양질의 일자리 창출을 가능하게 만드는 시스템이었다. 박정희 체제는 외자와 함께 어렵사리 형성한 국내 자본을 생산적 투자에 몰아넣기 위한 총력전을 벌였다. 그리고 국내 자본이 금융 수익성만 좇아 비생산적 부문이나 해외로 빠져나가는 사태를 막기 위해 금융시장과 외환시장을 체계적으로 억압하고 통제했다. 정부 허가 없이 외화를 유출하면 사형까지 당할 수 있던 시대였다. 그리고 이렇듯 '자본에 대한 국가적 통제'의 덕택에, '박정희 체제'란 명칭으로 포괄되는 30년 동안 한국경제는 세계사적으로 유례없는 속도로 성장했으며 이에 따라 일자리가 계속 늘어나고 실질임금이 꾸준히 상승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박정희 체제는 '반노동-친성장주의' 체제였다. 그런데 1993년 초 출범한 김영삼 정부는 군인출신이 아닌 최초의 문민 대통령 정부답게, '박정희 경제 유산의 해체'를 국정 지표로 제시했다. 그 후 집권한 김대중·노무현 정부 역시 대동소이했다. 그런데 이 '박정희식 경제체제의 해체와 경제민주화'는 '반노동, 친시장'의 경제민주화, 즉 '(신)자유주의적 경제민주화'일 뿐이었다.
먼저 노동 영역에 대해 말하자면, 김영삼 정부와 그에 이은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초지일관 '친시장적' 노동 정책 노선을 고수했다. 즉 이들 세 '민주' 정부는 모두 노동자 개인과 노동조합의 권리를 신장시키는 일에 무관심했으며, 노동시간 단축과 실질임금 증가에도 뚜렷한 업적을 남기지 못했다. 기초생활보장법 같이 (신자유주의의 프레임 안에서도 허용되는) 선별적·잔여적 복지 외에는 별다른 사회복지 구상도 없었다. 오히려 이들 정부는 1990년대 초반까지의 이른바 박정희 체제 하에서는 불법화되어 있던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고용까지 합법화했다. 학자들은 이를 '노동시장 유연화'라고 칭한다. 노동시장 유연화는 마가렛 대처의 영국과 레이건의 미국에서 시작된 이래 한국만이 아니라 세계적인 유행이 되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노동시장 유연화가 마치 '경제민주화'인양 포장되었다.
더구나 김영삼 정부는 자본에 대한 국가적 통제 장치들을 대대적으로 해체하였다. 자본에 대한 국가적 통제·기획의 주무 부서인 '경제기획원'이 1994년 해체된 것은 그 상징적인 사건이다. 이병천 교수가 잘 지적했듯이, 1990년대 초반 이래 한국에서 박정희 체제를 해체하는 데 앞장선 인물(개인)들은 바로 박정희 체제 하에서 권력의 정점에 있던 모피아 관료들과 재벌계 인물들이다. 그런데 그들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이른바 중도우파로 분류되는 '보수적 자유주의' 학자·지식인들, 그리고 중도좌파로 분류되는 '진보적 자유주의' 학자·지식인들 역시 박정희 체제 즉 '자본에 대한 국가적 통제'의 해체에 함께 나섰다. 특히 진보적 자유주의 그룹의 학자·지식인들은 이와 같은 국가적 자본 통제 체제의 해체에 대하여 '경제민주화'라는 멋진 이름까지 지어주었다.
김영삼 정부 하에서 외환·금융시장에 대한 국가통제가 완화·해체되자 한국의 은행과 종금사 등은 마구 외채를 꾸어왔다. 그 결과 터진 것이 1997년 말의 외환금융위기이다. 따라서 외환금융위기는 모피아 세력과 자유주의 개혁파 지식인들이 말하듯이 '박정희식 관치금융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관치금융)을 섣부르게 해체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그런데도 IMF 사태의 한가운데서 집권한 김대중 정부는 박정희식 관치경제·관치금융 때문에, 즉 '자본에 대한 국가적 통제' 때문에 위기가 터졌다는 주류 신고전학파 및 신자유주의자들, 그리고 이른바 진보적 경제민주화론자들의 견해를 그대로 수용했다. 따라서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추진한 (진보적 자유주의에 따른) 경제민주화는 '자본에 대한 국가적 통제'를 더욱 해체하는 수순을 밟았다. 그것이 바로 은행민영화(외환은행의 론스타 매각)와 국영기업 민영화(KT와 포스코의 민영화), 주식시장 완전개방(월스트리트 주식자본의 대거 유입), 주주자본주의의 대폭 허용(적대적 M&A 촉진과 소액주주권 보호), 재벌개혁(출자총액제한 강화), 사모펀드·헤지펀드나 미국식 투자은행(골드만삭스와 같은)의 육성 등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진보적 자유주의 개혁파가 말하는 경제민주화란 자본에 대한 국가적 통제 체제의 해체를 의미한다. 중앙은행(한국은행) 독립성 역시 IMF와 세계은행 등에 포진한 주류 경제학자들과 신자유주의 세력이 강조해온 것인데, 우리나라에서는 개혁·진보 세력이 '관치경제·관치금융 해체'의 일환으로 중앙은행 독립을 강력하게 주장하면서 신자유주의자들과 - 설령 본래의 선의는 아니라 하더라도 – 동일한 보조를 맞추고 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하에서 추진된, 그리고 이명박 정부 역시 그 기조를 지속하고 있는 자본에 대한 국가적 통제의 해체(즉 관치금융 해체)로 인해 우리나라에서 금융위기가 빈발하고 있다. 이미 2003년에 발생한 신용카드사 위기가 하나의 소규모 금융위기였다. 2년 전부터 큰 문제로 되고 있는 저축은행 부도 사태 역시 일종의 소규모 금융위기이다.
그리고 만약 그리스에 이어 스페인과 이탈리아 경제가 파탄에 직면하여 유럽과 세계의 경제위기가 더욱 심화될 경우, 현재 900조원을 넘어 그 부실화 위험이 날로 격심해지고 있는 은행권 가계대출 역시 또 하나의 대규모 금융위기(은행위기)로 나타날 수 있다. 그리고 이 모든 위기의 배경에는 우리나라 금융시장과 기업지배구조를 월스트리트 모델로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해온 '자유주의적 경제민주화론'이 존재한다. 보수적, 진보적 자유주의 모두 그랬다.
우리의 주장은 박정희식 경제 체제에서 부정적 요소들(노동 억압)을 버리되 긍정적인 요소는 살리자는 지극히 상식적인 이야기이다. 한편으로는 노동민주화와 보편적 복지를 핵심으로 하는 복지국가 정책을 펼쳐나가면서,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에 대한 사회적, 민주국가적 통제를 더욱 세련되고 효율적인 방향으로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후자에 관한 한, 박정희 체제의 긍정적 유산인 외환금융 통제와 주주자본주의 통제, 적극적인 산업육성 정책 등은 적극 수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경제민주화를 위해 필수적인 '자본에 대한 국가적 통제'의 핵심적 목표는 자본(금융과 산업·기업)으로 하여금 단기 수익성과 투기적 이익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 생산적 투자와 기술혁신, 양질의 일자리 창출에 적극적으로 나서도록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자본시장(금융시장)과 산업·기업이라는 두 가지 영역에서 동시에 적극적인 국가개입이 필요하다. 또한 복지국가 재정의 확보를 위하여, 자본(금융자산 및 기업)의 소유자들에 대해 그 소유로부터 발생한 소득에 대해 과세하는 것(누진적 소득세의 부과) 역시 '자본에 대한 사회적·민주적 통제'를 위한 매우 중요한 수단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보편적 복지국가를 중심에 놓고 노동자 보호와 협동조합 육성, 금융 규제, 산업 정책 등의 수단을 통해 경제가 다방면에서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경제체제이다. 그리고 우리가 박정희 체제의 긍정적인 요소를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가 추구하는 경제 체제 속에서 금융시장 규제와 산업정책 등이 행하는 중요한 역할들이 있기 때문이다.

 

'사악한' 재벌들의 '잘한 짓', 그 비밀은… (프레시안,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정승일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연구위원,이종태 <시사IN> 기자, 2012-06-21 오후 6:14:16)
[한국 경제 성격 논쟁] 정태인·이병천의 비판에 답한다<4>
미국의 유력지인 <포춘>의 기자인 베타니 맥클린은 2007년 "고가도로 운영권 대여(lease) 등의 부문에서 미국은 이머징 마켓"이라고 썼다('Would you buy a bridge from this man?' <포춘> 2007년 10월 2일). 2000년대 중반 호주의 거대 투자은행인 맥쿼리가 미국 시카고 고가도로와 인디애나 유료도로의 운영권을 각각 18억 달러와 38억 달러로 사들여 운용하던 중에 나온 표현이다.
민간자본이 고속도로나 터널, 교량 등의 운영권을 국가로부터 한시적으로 사들인 다음 이로부터 금융 수익을 올리는 이른바 '인프라 투자'라는 신종 금융사업 부문에서는 심지어 미국마저도 이머징 마켓이었던 것이다. 요즘 시끄러운 우리나라 지하철 9호선의 요금 50% 인상 시도와 수서발 KTX 민영화 논란 등도 이러한 '인프라 민간 투자'와 관련된 사건들이다.
사실 인프라 투자는 글로벌 금융산업에서 후발 주자였던 호주의 거대 투자은행 맥쿼리가 새롭게 열어젖힌 신천지다. 맥쿼리가 이 사업을 호주 내에서 개시한 1990년대 초중반에 대부분의 금융산업 부문들은 미국, 영국의 거대 투자은행에게 이미 점령당한 상태였다. 이 상황에서 맥쿼리가 내놓은 아이디어가 바로 도로와 교량, 항만 같은 인프라 시설을 '금융자산'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예컨대 '인프라 운영 주식회사'를 만든 다음 이 기업의 주식을 발행하여 매각한 돈으로 고속도로 등 인프라의 운영권을 매입하는 방법이다. 더욱이 이런 '인프라 운영 주식회사'를 만든 투자은행(금융투자회사)에는 단지 배당금 이외에도 여러 수익 창출 통로가 있다. 이를테면 그 운영사의 주식 발행을 대행해주면서(주간사 역할) 주간사 수수료를 받을 수 있다. 또한 그 운영사에 돈을 빌려줘서 이자를 얻거나, 자산운용 및 자문 서비스를 제공하고 수수료를 받을 수도 있다.
그런데 여기서 유의할 사실은 이 모든 '금융수익 창출'이 결국 '투자자들 즉 주주들'을 위한 것이라는 점이다. 해외에서 맥쿼리는 자사가 조성한 인프라 운영회사에서 순이익이 창출되지 않는 경우 빚을 내서 주주배당을 하는 파격적인 주주중시 경영으로 찬사와 비난을 함께 받은 적이 있다. 어떻게 보면 맥쿼리는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주주에 대한 신의와 성실'을 다하는 기업이다.
이처럼 금융자본에게 가장 중요한 경영 원칙은 '주주중시'와 주주 이익 극대화다. 그리고 이러한 금융자본의 논리와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공공성의 논리가 정면으로 충돌한 사건이 바로 서울지하철9호선 요금인상 분쟁과 광주순환도로(민자 도로)를 둘러싼 행정 심판 논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는 우리가 지금부터 말하려고 하는 금융자본주의가 비교적 최근에 우리에게 보여주는 모습일 뿐이다.
우리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에서 금융자본주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 바 있다. "장하준 : 흔히 실물경제가 몸통이고 금융은 꼬리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1980년대 이후 최근에 이르기까지 미국에서는 금융이 몸통이 되고 실물경제는 오히려 꼬리로 퇴락하는 이상한 과정이 전개되어 왔어요. 그러니까 금융자본주의란 금융이 몸통이 되어 실물경제라는 꼬리를 흔들어 대는 자본주의라고 할 수 있겠죠."
말하자면 실물경제인 공공인프라가 금융이라는 몸통에 질질 끌려다니는 사태 역시 금융자본주의의 한 사례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공공인프라가 금융자산화된 것은 비교적 최근 현상이다. 오히려 금융자본주의가 가장 먼저 그리고 보편적으로 적용되기 시작한 영역은 기업 M&A 시장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기업이 제공하는 상품(제품과 서비스)이 아니라 '기업 그 자체'가 금융 상품으로 간주되면서 사고 팔리기 시작한 것이 지난 1980년대다.
상식적으로 보면 기업은 고용을 창출하고 더 많은 부를 생산해서 경제발전에 기여하는 사회적 단위다. 그런데 1980년대 중후반 미국에서는 '기업의 개념'이 완전히 바뀌는 사태가 발생한다. 이 흐름을 주도한 마이클 젠센 교수에 따르면, '기업의 주인은 주주'이고 '기업은 주주 이익 극대화를 위해 경영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경영자가 해야 할 일은 고용 창출이나 매출규모 확대, 품질 개선, 장기투자를 통한 미래 성장산업 진출 등이 아니다. 주제넘게 이런 짓을 하다 보면 기업의 비용이 비대해지고 리스크가 커져서 오히려 주가가 떨어져 주식투자자들이 싫어할 수 있다.
차라리 당장 수익이 나지 않는 일부 사업부를 정리하거나 종업원들을 정리해고 하는 방법 등을 통해 비용을 절감하거나 자사주를 매입해서 주가를 띄우는 것이 경영자로서 훨씬 현명한 처신이다. 괜히 주식투자자들의 마음에 안 드는 짓을 하다 주가가 내려가는 경우, 다른 적대적 자본의 인수합병(M&A)이 쉬워지고(인수비용이 줄어드니까), 그 경우 경영자 자리도 유지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금융자본주의 시대 이후 가장 각광받는 고수익 사업 중 하나가 바로 기업을 사고팔면서 높은 금융수익을 창출하는 사모펀드(private equity fund) 사업이다. 주가가 낮게 평가된 기업의 주식을 다수 매입해서 경영권을 획득한 뒤, 정리해고와 당장 돈이 안 되는 사업부의 매각·청산 등 구조조정을 해서 비싸게 되파는 장사다. 말하자면 '기업 그 자체'가 사고 팔리는 상품이 된 것이다. 현재 미국 공화당 대통령 후보가 된 미트 롬니가 바로 이런 사업으로 큰돈을 벌었다. 그리고 이런 시스템에서는 저투자-저성장-고실업이 체질화될 수밖에 없다. 금융자본주의를 가장 먼저 도입한 미국의 글로벌 제조업체들(GM과 GE 등)이 몰락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게다가 기업을 상품화하여 M&A 시장을 활성화하려면 다른 규제와 제도들도 그에 맞추어 '개혁'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기업을 인수한 금융자본 입장에서는 정리해고를 통해 임금 비용을 절감해야 주가(기업가치)를 올릴 수 있다. 그런데 과거 정리해고가 불가능했던 우리나라에서와 같이, 노동자들을 마음대로 해고할 수 없다면 정말 '답답한 일' 아니겠는가. 따라서 금융자본은 각국 정부에 비정규직 허용과 정리해고 허용 등을 가능하게 하는 법을 제정하여 노동시장을 '유연화'할 것을 요구하게 된다.
또 다른 예로, 금융투자자들이 세계 어디서나 자유롭게 금융 수익을 추구하고 그 돈을 본국이나 다른 나라, 조세회피 지역(tax heaven) 등으로 자유롭게 옮기려면 외환시장이 자유화되어야 한다. 따라서 외환시장 자유화에 대한 요구도 자연히 따르게 된다. 미국 월스트리트는 이러한 금융자본주의 시스템을 1990년대 초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전 세계로 수출했다. 월스트리트 금융자본 입장에서 보면 전 세계의 기업을 '금융 장사의 대상'으로 만드는 작업이었다. 월스트리트의 이런 '금융자본주의 혁명 수출'에 한국이 반강제적으로 포섭된 사건이 바로 지난 1997년 IMF 사태이다.
IMF 사태 이전까지 한국에서는 국민경제와 고용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는 대기업을 자유롭게 사고파는 행위(즉 자유로운 M&A)가 거의 불가능했다. 대기업의 주식을 대량 매입하려면 정부로부터 사실상 인허가를 받아야 했다. 대기업 주식 중 25% 이상이 외국인들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법률로 정해져 있기도 했다. 즉 한국의 재벌들은 국내나 해외의 다른 기업에게 경영권을 빼앗길 수 있다는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이런 '경영권 안정'이라는 제도적 기반 덕택에 한국의 그 '사악한' 재벌들이 그나마 '잘한 짓', 즉 모험적인 장기적 대규모 투자(자동차, 반도체 등)에 나설 수 있었다는 것은 국제적으로도 널리 인정받는 바이다.
그런데 한국이 외환위기를 당하자 IMF가 우리 정부에 210억 달러를 빌려주는 대신 공식적으로 요구한 것이 바로 자본시장 자유화 및 개방이다. 한마디로 기업(의 주식)을 사고파는 데 대한 모든 규제를 제거해서(자본시장 자유화) 주식만이 아니라 '기업 그 자체'도 거래할 수 있는 상품으로 전환시키라는 명령이었다. 동시에 주식시장 개방을 통해 이런 거래를 국내에서뿐 아니라 국제적으로, 그리고 적대적 M&A 방식으로도 이루어질 수 있게 했다. 재벌들의 경영권 안정을 보장하던 법적, 제도적 장치들이 해체되었고 (적대적) M&A 시장의 활성화를 목표로 하여 상법과 공정거래법 등이 개정되었다. 이로써 한국 기업은 월스트리트 금융자본주의 질서에 포섭된 것이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정리해고와 비정규직이 대폭 허용되어 노동시장도 '유연화'되었다.
그런데 주주자본주의의 입장에서 볼 때 민간 기업만 거래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섭섭한 일이다. 이왕이면 공기업 역시 주식시장과 M&A 시장에 끌어들이는 것이 수익이 된다. 이에 따라 금융자본은 공기업 민영화와 주식시장 상장을 요구한다. 공기업은 대개 전기와 상하수도, 정책금융 등 수요가 광범위하고 안정적인 기초생활재를 공급하는 거대 기업이다. 이런 공기업을 상장 주식회사로 만들면 그만큼 금융자본이 거래할 수 있는 주식 수가 늘어날 것이다. 또한 의료와 교육 등 사회 서비스 역시 공적 수요가 광범위하고 안정적인데다 무엇보다 지금까지는 금융자본에 크게 노출되지 않은 신대륙이자 블루오션이니, 금융자본이 군침을 흘리는 부문이다. 병원과 교육기관의 영리 주식회사화 역시 금융자본주의의 한 속성으로 볼 수 있다.
이렇듯 경제 전반의 금융자본주의화와 함께 아예 한 나라를 통째로 금융자본이 들어오고 나가기 좋은 지역 즉 금융허브로 만드는 정책이 추진된다.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추진한 금융중심, 금융허브 정책이 그랬다. 그리고 이명박 정부의 강만수 씨가 산업은행 민영화를 통해 세계적 규모의 초대형 토종 메가뱅크를 만들겠다는 것도 금융자본주의화를 향한 정책 패키지의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말한 여러 요소들, 즉 공공인프라 민영화와 자본시장 자유화, 정리해고, 공기업 민영화, 외환시장 자유화, 사회서비스 영리화, 금융허브, 금융기관 합병을 통한 메가뱅크 창출 등을 사람들은 보통 신자유주의라는 느슨한 명칭으로 부른다. 실제 IMF 사태 이후 김대중-노무현-이명박 정부가 추진해온 정책 패키지들이기도 하다. 금융자본주의는 주주(주식투자자)라는 단기 금융수익을 추구하는 집단의 이익을 최우선시 한다는 측면에서 주주자본주의로 불리기도 한다.
우리가 '재벌의 앞잡이'란 욕설까지 들으면서까지 '기업집단'을 중시하는 이유는, 소위 '경제민주화론'에서 주창하는 것처럼 위와 같은 주주자본주의의 논리를 통해 기업집단을 약화시키거나 해체시키는 경우 한국 최대기업들이 오히려 더욱 국내외 주식투자자들의 단기적 금융수익 추구에 종속되어 국민경제의 기반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우리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에서 언급했듯이, 쌍용그룹 해체 이후 쌍용차의 운명이나 KT 민영화가 바로 주주자본주의적 기업재편의 대표적 사례다. 또한 우리는 금융자본주의 원리가 지금보다 더 본격적으로 시행되는 경우, 고용안정이나 복지 달성도 더 힘들어지고, 더구나 복지국가에 필수적인 공기업 및 공공인프라의 해체와 상업화가 진행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일관되게 해온 것은 다름 아니라 위와 같은 신자유주의 현상들의 '핵심'에 금융자본주의의 이해관계가 있으며, 위 현상들은 금융자본주의에서 파생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는 우리에 비해 정태인 소장의 경우 금융자본주의는 신자유주의의 여러 측면 중 한 측면에 불과하며 그 폐해 역시 재벌에 비하면 크지 않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더구나 정태인 소장은 주주자본주의를 규제하는 과제에 대하여 "동아시아 국가들의 공조와 세계적인 금융 규제의 강화의 진행에 맞춰서 주주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시정해 나가야 할 것이다"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러한 국제적 공조가 언제 이루어질지는 기약이 없다. 이렇게 기약 없는 시간표에 따라 시정하면 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는 것은, 결국 정태인 소장에게 있어 금융자본주의와 주주자본주의의 폐해를 교정하는 일은 별로 시급하지 않은 부차적 고려 사안이라고 결론내릴 수밖에 없다. 게다가 그가 옹호하는 다른 재벌규제 방안들 즉 비정규직 노동자의 노동조합 설립과 최저임금 인상, 하청 기업의 집단 교섭권, 공정거래위원회 강화, 소비자 권리 강화 등 역시 주주자본주의에 대한 규제 없이는 달성될 수 없다.
정태인 소장이나 이병천 교수는 자신들이 주장하는 사실상의 주주자본주의적 '재벌개혁'(즉 기업집단 약화)에 우리가 찬동하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를 '재벌 옹호자들'로 규정한다. 그러나 재벌그룹(대기업집단)을 약화시키는 것과 재벌가문을 약화시키는 것은 엄밀하게 구별되어야 한다. 그리고 대기업집단을 약화시키거나 해체하여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 같은 국내 최대기업에 대한 주주자본주의의 영향력을 증폭시키는 경우 친노동-친중소기업-복지 정책들도 오히려 빛을 잃고 실행 불가능하다.
우리는 경제민주화 논의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지식인들과 정치인들로부터 '재벌을 수천 개의 전문기업들로 분리하자'는 식의 주장이 나오는 것을 우려하고 이에 대해 문제제기를 거듭해왔다. 재벌그룹을 해체하여 수천 개의 전문기업을 만드는 것은 경제의 민주화가 아니라 거꾸로 금융자본주의 강화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에서 제기한 문제의식은 이병천 교수가 말하는 것처럼 '주주자본주의냐 재벌이냐'의 양자택일이 아니다. 우리가 만약 양자택일을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주주자본주의냐 재벌이냐'가 아니라 '금융자본주의냐, 복지국가냐'이다. 그리고 우리는 당연히 금융자본주의가 아닌 복지국가의 편에 선다. 그리고 이러한 우리의 목표에는 정태인 소장이나 이병천 교수도 동의하시리라 생각한다.

 


 

이건희와 삼성그룹을 생이별시키지 마라 (프레시안, 이병천 강원대 교수 <시민과 세계> 공동편집인, 2012-06-07 오후 1:10:41)
[한국 경제 성격 논쟁] 장하준·정승일·이종태의 주장에 답한다
나는 장하준 그룹의 글이 그간 우리 사회에서 재벌이 저질러온 부정, 불법, 편법, 비리와 독점 독식, 무책임, 구사대-용역 동원 폭력 등에 대한 비판은 너무 미약하고 과소한 반면에, 재벌의 장점과 기여에 대해서는 너무 과대 포장하여 치켜세운다고 읽었다. 재벌의 장점과 기여라면, 굳이 진보주의자가 지적하지 않더라도, 그간 당사자인 재벌과 산하 기관/연구원(전경련, 한국경제연구원 등), 재벌을 옹호하고 지원사격한 정/관/언/학계가 우리 귀에 못이 박히도록 장황하고 시끄럽게 떠들어 왔던 바이고, 넘치도록 선전 홍보도 해 왔다. 엊그제만 해도 전경련 싱크탱크 한국경제연구원에서 경제민주화를 반대하는 여론몰이를 하면서 헌법 119조 2항을 삭제해야 한다고 위헌적 재벌 만능 주장을 했다. 그런 까닭에 나는 장하준 그룹이 한국의 재벌이 지닌 양면성, 그 두 얼굴에 대해 너무 불균형하고 비대칭적인 시각과 인식을 갖고 있다고 보았다.
장하준은 일본식의 급진적인 재벌해체 대안을 말한 때와 거의 같은 시점에서 일본식 길과는 180도 다른, 스웨덴을 포함한 유럽식 '대타협'안도 제기했다. 그러더니 지금은 어떤가. 지금은 "출자총액제한제나 지주회사 규제강화처럼 엉뚱하게 월스트리트 금융자본을 도와주는 방식"(<선택>, p.257)이라고 말할 정도로 극단적인 주장을 펴고 있다.
장하준은 다른 나라 대기업들의 횡포를 거론하거나 자본주의 기업원리란 원래부터 독재라고 말하면서 한국 재벌총수의 독재를 옹호한다(<선택>, pp. 219-220). 내용적으로 보자면, 장하준 그룹은 재벌과 관련되어 발생한 경제력 집중과 양극화, 빈곤화 등 한국 사회경제의 주요 문제들, 나아가서는 재벌 조직과 큰 관련 없는 문제조차 거의 다 주주자본주의 탓으로, 재벌체제가 약화된 탓으로 돌린다.
위와 같은 견해를 두고 내가 '재벌 옹호'론, 또는 '재벌 프렌들리' 견해라고 지적한 게, "거의 욕설에 가까운 곡해와 왜곡, 중상비방을 펼치는 것"이 되는가. 좀 납득하기 힘들다.
정승일은 대기업 집단 일반과 재벌 체제가 어떤 점에서 다른지에 대해 매우 모호하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뿐만 아니라 정승일, 장하준은 재벌 개혁을 곧 기업 집단의 해체와 동일시하는 경우가 있는데, 과연 그렇게 볼 수 있는지 묻고 싶다. 재벌 개혁론자 중에서 어떤 논자가 기업집단을 해체하자고 말하고 있는가. 나만 해도 재벌 해체를 주장한 적은 없다.
나는 재벌을 네 가지 구성 요소를 가진 대기업 집단으로 보고자 한다. 1) 총수 일가의 소유와 지배 또는 통제, 2) 피라미드형 소유로 연결된 기업 집단, 4) 다각적 사업경영, 3) 독과점적 시장지배와 국민경제 지배, 이상 네 가지다. 이런 정의로 보자면, 재벌은 분명 대기업집단의 일종이긴 하나 매우 특수한 대기업 집단이다. 1)~4)에 걸쳐 재벌의 특징이 해체된다 해도 대기업 집단의 특성은 지속될 수도 있고, 재생될 수도 있다. 이는 전후 일본의 재벌 해체와 그 후 기업집단 형성에서 보는 바와 같다. 일본에서 재벌 해체 후의 기업집단은 느슨하게 수평적 관계로 연결되어 있고 개별기업의 독립성이 강하다. 그 때문에 총수가문이 수직적으로 통제하면서 피라미드형 소유로 연결된 재벌형 기업집단과는 기업조직의 원리가 질적으로 다르다.
그들은 금융자본과 재벌의 이원론/양자택일론을 비판한 나의 지적에 대해, 신자유주의적 '인물'과 신자유주의적 '제도'를 구별하지 않는 이야기라고 하면서 반박을 했다. 그들은 재벌이 신자유주의 동맹의 핵심 세력이라고 썼던 장하준(과 신장섭)의 이전 논지를 강력히 옹호하면서 나의 '잡종 신자유주의'론에 대해서도 훌륭하면서도 올바른 지적이라고, 자신들과 같은 생각이라면서 받아들인다. 자신들의 모순, 또는 자가당착에서 빠져나오는 묘수를 발견한 것 같다. 그 묘수란 다름 아니라, 인물·개인과 제도·정책을 구별하는 것이다. 더 정확하게는 재벌 가문과 그룹체제 또는 대기업 집단을 구별하는 것이다. 이 논리에 따르면, 주주자본주의에 적극 호응하면서 사리사욕을 취하는 재벌총수/가문과 주주자본주의 원리에 어긋나는 대기업 집단은 구별되어야 한다.
그들은 인물/세력과 제도/정책을 구분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 둘은 마땅히 구분되어야 한다. 그러나 인물/세력과 제도, 재벌 총수/가문과 재벌체제는 장하준 그룹의 주장처럼, 그렇게 완전히 따로따로 동떨어져 있는가? 재벌총수/가문은 재벌 체제에서, 그 틀 위에서 독점적 통제권을 행사하는 인물/세력이다. 그리고 재벌체제란 재벌총수/가문들이 독점적 통제권을 행사하는 제도이다. 즉 인물/세력과 제도는 동떨어져 있는 게 아니라 유기적으로 연계되어 있는 복합체라는 것이 나의 재반박이다.
권력이야말로 인물/세력인 동시에 제도화된 구조의 수준을 같이 가지고 있다. 그리고 제도에 내장된 이 권력문제의 존재 때문에 갈등과 그 조절, 타협의 문제가 제기된다. 인물/세력, 제도, 권력 세 수준은 통합되면서 하나의 복합체를 구성한다. 그리고 그 복합체가 바로 재벌체제다.
장하준 등의 주장대로 총수/일가/가신들은 분명히 자신들의 사익을 위해 주주자본주의, 주식펀드와 타협하고 '의기투합'한다 (<선택>, p. 215, 223-224). 그러나 그간의 연구와 실태를 보면, 총수/일가/가신들은 소액주주와 여타 이해당사자, 여타 계열사의 이익을 침해하면서 '총수가치'(조돈문) 경영을 일삼아 온 경우가 허다하다. 특히 삼성의 에버랜드 전환사채 저가배정 사건 등에서 보듯이, 경영권을 승계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각종 불법비리 행위가 대표적인 경우다. 또 경영권 승계를 위해 "물량 몰아주기"로 부당 내부거래를 악용하는 것도 마찬가지인데 그 부담은 소액주주 및 여타 이해당사자에게 전가된다. 총수/일가/가신들이 하는 일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들은 산업지휘관으로서 조직능력(organizational capacity)을 발휘하여 재벌체제의 중장기 성장과 동태적 효율성을 추구한다.  한국 재벌체제의 작동에서 총수가 하는 역할은 주주가치를 금과옥조로 여기는 미국기업의 CEO와는 결코 같지 않다.
주주자본주의와의 타협과 의기투합은 제도로서 재벌 수준과 무관하게, 단지 총수/가문이라는 인물의 수준에서만 일어난다고는 볼 수 없다. 총수/가문이 통제권을 행사하는 재벌제도, 재벌체제 전체가 가동되면서 주주가치와 타협, 공생하는 하나의 축적양식이 작동하고 있다고, 그런 축적양식은 재벌체제 전체를 관통하는 특성이라고 보아야 한다.
주주자본주의와의 타협과 의기투합은 제도로서 재벌 수준과 무관하게, 단지 총수/가문이라는 인물의 수준에서만 일어난다고는 볼 수 없다. 총수/가문이 통제권을 행사하는 재벌제도, 재벌체제 전체가 가동되면서 주주가치와 타협, 공생하는 하나의 축적양식이 작동하고 있다고, 그런 축적양식은 재벌체제 전체를 관통하는 특성이라고 보아야 한다.
또한 독점적 지배력과 승자독식, 경제력 집중 심화를 통해 공정한 경쟁과 공정한, 개방적 협력의 발전을 가로막는 것이다. 재벌체제는 이렇게 세 가지 가치를 추구함을 통해서 사회경제적 양극화 축적체제를, 다시 말해 재벌과 금융자본이 공생하면서 그 지배 동맹의 공생의 힘으로 노동자와 서민, 취약한 중산층을 양극화 함정으로 몰아넣는 '잡종형 신자유주의' 축적체제를 밀고 가는 것이다.
인물과 제도, 신자유주의적 인물과 신자유주의적 제도, 이건희와 삼성그룹을 천리만리로 서로 생이별시켜 놓은 후에 <신자유주의 = 재벌 인물- 재벌제도+ 금융자본>이라는 자못 흥미로운 새 공식을 제시한 장하준 그룹은 자신들이 빠진 덫에서 벗어나기 위해 땀을 좀 흘려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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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체제 논쟁, 문재인 Vs 안철수 대리전? (미디어스, 냥이관리인 / 진보신당 상근자, 2012.05.31  14:28:02)
[냥이 관리인의 글 숲 방랑기]
<프레시안>을 통해서 전개되고 있는 ‘경제민주화론 대 복지국가론'의 대결양상이 좀처럼 접점을 찾지 못하는 듯하다. 당초 정태인 원장의 서평에서 촉발된 논쟁은, 장하준 등의 책에서 호명된 경제민주화론자 혹은 좌파신자유주의자들이 하나 둘씩 반론에 나서면서 진영간의 갈등 양상으로까지 비춰진다.
그간 진행된 논쟁의 글들을 약간의 현기증을 감수하고 죽 읽어보면 몇몇 쟁점이 드러나긴 한다. 즉, 재벌개혁론이 사실상 주주자본주의의 강화나 혹은 글로벌 스탠다드의 종속아니냐는 장하준 등의 주장과 재벌과의 타협을 통한 보편적 복지국가의 달성이라는 것이 허무맹랑하다는 이병천, 정태인의 주장이 그 하나다. 그리고 정태인 원장이 재기한 한국은행의 독립성 문제와 이에 연동되는 금융위원회의 역할 조정도 또 하나의 쟁점이다.
일단 첫 번째 쟁점을 보자. 장하준 등은 과거 참여연대서 주창했던 소액주주운동이나 사외이사제도 등이 사실상 금융세계화를 등에 업은 다국적 자본의 이해관계에 부합되는 것이었고 외면적으로는 경제민주화라고 불리었지만 사실상 전세계적인 신자유주의적 경제구조 재편에 도움을 주는 방향으로 귀결되었다고 비판한다. 다시 말해서, 소액주주운동은 기업의 경영권에 결정적인 제약으로 작용하면서 단기적인 이윤추구에만 집중하도록 하는 ‘주주자본주의'의 논리를 우리나라 기업체계에 이식시키는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즉, 이들이 말한 것처럼 ‘이건희가 싫다고 삼성을 죽이는 방법을 주장하는 것이 적절한가'라는 질문이다.
이에 대해 경제민주화론자 혹은 재벌개혁론자로 지칭된 정태인은 이런 장하준 식의 접근법이 우리 사회가 재벌의 과두체계라는 점을 직시하지 못하는 외부자의 시선에 불과하며 이들이 왜곡해놓은 분배구조를 바꿔놓지 않은 상태에서 보편적인 복지국가를 만든다 해도 정작 서민들에게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 반박한다. 이병천은 ‘주주자본주의냐 재벌이냐'라는 양자 택일 문제로 접근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지적하면서 재벌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면  소위 '박정희' 이후 우리 사회에 ‘뿌리내린 왜곡된 경제구조'를 바꿀 수가 없다고 지적한다.
조금은 생뚱맞지만, 개인적으로 이와 같은 논쟁을 보면서 2차 세계대전 이후 70년대까지 남미 등 제3세계를 풍미했던 종속이론이 떠올랐다. 종속이론이란 제3세계가 발전을 하지 못하는 이유가 내부적인 미성숙 혹은 전근대성 때문이 아니라 그런 상태를 강제하는 세계적인 자본주의 구조에 따른 강제, 그리고 이를 통해서 독점적인 이익을 얻는 국내 자본과 국가, 그리고 국제 자본간의 지배블럭을 통해서 형성된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제3세계가 저발전 상태에 있는 것은 이를 필요로 하는 자본주의 구조 때문이며, 이를 관철시키는 힘은 단순히 외국 자본이 아니라 이를 대리하는 정부관료와 국내 대자본이라는 말이다.
장하준 등은 재벌개혁이라는 것이 결국은 금융세계화와 주주자본주의라는 ‘글로벌 스탠다드'를 국내에 이식시키려는 세계적 차원의 신자유주의적 기획으로 파악한다. 그렇기 때문에 재벌의 경영권을 보호해주는 대신 이들과 보편적 복지국가 건설을 위한 사회적 타협이 가능하다고 제안한다. 다시 말해, 이런 구조에서 재벌개혁을 주장하는 것은 설사 그 선의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구조적으로는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이식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반면, 정태인 등은 국내 재벌이 세계 경제 내에서 공격받는 약자라는 측면보다는 국내 경제를 잠식하는 포식자로 이에 대한 개혁없이는 어떤 경제적 조치도 효과가 없다고 본다. 그러니까 장하준 등이 말하는 소액주주운동 등의 한계를 인정하더라도 국내 재벌의 특수성에 비춰 보면 그것이 긍정적인 측면이 오히려 강조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정태인이 한국은행 독립문제에 대해 장하준이 미국이나 유럽의 상황이라는 렌즈를 무비판적으로 국내 상황에 적용하고 있다고 지적하는 것은 한국적 특수성을 강조하는 태도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다른 시각으로 이 논쟁을 바라 볼 수도 있다. 그러니까 단순히 경제체제에 대한 논쟁이 아니라 대선을 앞둔 정치적 논쟁이라는 틀로 해석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정태인이 언급한 바 대로 장하준 등의 ‘이제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라는 책은 유종일, 김상조 등이 참여한 ‘박정희의 맨얼굴'이라는 책에 대한 비판서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경제민주화론자들은 박정희 체제의 장기지속이라는 관점에서 그것을 개혁해야지만 새로운 경제체제를 만드는 것이 가능한데, 가장 핵심적인 방법이 재벌 개혁을 필두로 하는 경제민주화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반면, 장하준 등은 박정희에 대한 비판만으로는 97년 이후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정확하게 분석할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오히려 세계자본주의의 문제점인 금융세계화와 주주자본주의라는 문제점은 박정희식의 개발독재에 대한 비판으로는 극복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결국, 단순화시키면 김대중-노무현으로 이어지는 민주개혁정부의 재벌개혁론이 사실상 신자유주의 프로그램이었는지 아니면 공고한 개발독재에 의해 좌절된 경제민주화 노력이었는지가 이 논쟁의 정치적 맥락이다. 결국 유력 대선 후보군에서 보자면, 친노를 표방하고 있는 문재인인가 아니면 보수와 진보라는 양자에 걸쳐있는 안철수인가라는 문제가 된다.
물론 과도한 오독일 수 있겠지만, 서로 간에 쟁점이 좁혀지지 않는 것은 각 진영이 서로 정치적인 이해관계 때문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은 자연스럽다. 각자가 내건 경제 개혁 프로그램들의 성패는 실제로 정책으로 시도해볼 때 그 공과가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어찌되었던 장하준 등은 안철수에서 박근혜까지의 스펙트럼을 정치적 자산으로 삼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으며, 정태인, 이상조 등은 문재인에서 김두관까지 가능하겠다. 이상은 왜 양자가 양측의 입장을 종합할 생각이 없을까 라고 고민하다가 떠오른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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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와 삼성 구별 못하나” “수구적 진보”…재벌개혁 논쟁 (한겨레, 류이근 기자, 2012.05.29 19:49)
장하준 ‘좌파 신자유주의’ 비판에 정태인 “재벌 경영권만 보호” 반박
이병천 “재벌 프렌들리” 가세, 장하준쪽 “이건희·삼성 구분못해”
박정희 체제서 양극화 해법까지 한국경제 성격 논쟁으로 번져
재벌활용-재벌개혁 대충돌

진보진영 내부의 재벌개혁 논쟁을 일으킨 실마리는, 대척점에 있는 두 단어를 합성한 이른바 ‘좌파 신자유주의’ 비판서였다. 문제의 책은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와 정승일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정책 및 운영위원, 이종태 <시사IN> 기자가 함께 쓴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이하 선택)이다. 선택은 “경제민주화와 재벌개혁은 낡은 화두다”라고 과감히 주장한다. 그러면서 보편적 복지의 확대를 진짜 경제민주화의 핵심이라고 선언한다.
‘선택’은 경제학의 전통적 주제였던 시장과 국가의 역할에서 국가를 우위에 둔다. 재벌 개혁론자나 시장 개혁론자 등을 포함해 경제민주화를 주장하는 진보적 학자군에 대해선 국가의 개입보다 시장을 우위에 두고 있다고 의심한다. 장하준 교수 등 3인은 “진정한 민주주의는 반드시 통제된 시장을 필요로 한다”며 “좌파 신자유주의는 자유시장의 합리성과 투명성, 효율성에 방점을 찍으면서 국가의 시장 통제와 개입에 반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선택은 특히 진보·개혁 진영의 소액주주운동이 신자유주의적인 주주자본주의의 한계를 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정태인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원장은 선택과 김상조 한성대 교수가 쓴 ‘종횡무진 한국 경제-재벌과 모피아의 함정에서 탈출하라’란 두 책에 대한 서평에서 “허망하게도 ‘선택’은 재벌의 경영권 보호를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라고 썼다. 그는 또 “(재벌 개혁과) 경제 민주화 운동이 뜻을 펴지 못하고 사그라진다면 복지국가 운동도 같이 힘을 잃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병천 강원대 교수가 <프레시안>에 장하준 등 3인의 주장에 답하는 형식의 4차례에 걸친 반박글을 띄웠다. 이 교수는 “(선택은) 주주자본주의냐 재벌이냐를 양자택일하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며 “사실상 재벌 프렌들리(friendly)한 그들(장하준 등 3인)의 복지국가론”을 비판했다.
논쟁의 대척점은 한국 사회의 최대권력의 하나로 떠오른 재벌과 박정희식 개발독재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서 결정적으로 갈린다. 장하준 교수 등은 “경영권은 보장해 줄 테니, 세금을 왕창 내서 복지국가 만드는 걸 도와달라”고 말할 만큼 재벌의 경영권 보장과 복지 재원의 확보가 ‘타협’ 가능하다고 본다. 재벌그룹의 유용성과 정당성을 옹호한 이런 태도가 재벌개혁을 위한 소액주주운동을 펴온 재벌 개혁론자들을 비판하면서 논쟁은 다소 감정적 수준으로까지 치닫고 있다. 김기원 방송통신대 교수는 장하준을 “재벌체제 개혁에 딴죽을 거는 수구적 진보파”라고 비판했다.
한국 경제의 현재적 모순과 박정희식 경제 모델의 상관 관계도 논쟁거리다. 장하준 등은 “이른바 경제민주화론자들은 (<박정희의 맨얼굴>에서)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빈부격차 심화와 양극화라는 심각한 문제의 주원인이 박정희 체제의 유산인 재벌과 관치, 토건주의에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올바른 인식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한국 경제가 처한 문제는 30년 전의 박정희 탓이 아닌 신자유주의에서 비롯됐다는 주장이다. 이에 이정우 경북대 교수는 <한겨레21>에 “시장만능주의의 폐해도 크지만 박정희 체제의 유산이 한국 경제와 사회에 끼친 악영향이 얼마나 큰데, 이에 눈감는 태무심은 정말 놀랍다”고 썼다. 장하준 등은 한국 경제의 현재적 모순의 근원을 신자유주의에 둔 반면에 이정우 교수 등은 박정희식 개발독재의 잔재에 커다란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논쟁이 격화되자 최병천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정책위원이 중재자로 나섰다. 그는 “주주자본주의 타파론자인 장하준 등은 ‘계열사-그룹 체제’의 계승에 강조점을 두고 있고, 반면 재벌개혁론을 강조하는 김상조-이병천 등은 ‘총수 지배 체제’의 극복을 강조하고 있다”며 “양자 모두 복지국가의 확대에 동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복지란 양쪽의 지향점이 같은 만큼 논쟁이 생산적으로 전개될 수 있다는 얘기다.
이런 중에도 논쟁은 쉽사리 접점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격화되고 있다. 장하준 등은 28일 ‘이건희와 삼성그룹도 구별 못하나’란 글에서 “책에서 재벌들이 ‘불법을 저지르는 것 말고는 문제가 없는 것처럼 (우리가) 재벌 합리화론을 펼치고 있다고 비난하는 것은 명백한 왜곡이요 중상 비방”이라며 “인물(재벌가)과 제도(대기업집단)를 구별하지 않고 있다”고 비판자들을 겨냥했다. 아직까지 논쟁은 인터넷과 주간지 등 제한적인 공간에 머물러 있지만, 문제의 책이 경제민주화와 복지, 박정희식 경제 모델의 성과와 한계 등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대선을 앞두고 사회적 논쟁으로 점차 확산될 가능성이 크다. 
 
재벌개혁이냐 재벌활용이냐…진보의 백가쟁명 (한겨레, 곽정수 기자, 2012.05.29 20:31)
장하준 “재벌과 대타협해야”
정태인·이병천 “재벌옹호” 비판
대선앞 경제민주화 논쟁 확산

장 교수 등은 ‘정태인·이병천의 비판에 답한다’라는 부제가 달린 글에서 “우리가 재벌을 신자유주의적 피해자인 양 엉터리로 묘사했다고 비판한 것은 개인(재벌 가족과 가신들)과 제도(대기업과 재벌)를 구별하지 않아 생긴 오해”라며 “재벌의 유용성과 정당성을 옹호한다는 점을 곡해해, 마치 우리가 이건희·정몽구와 같은 재벌 가문과 가신그룹의 이해관계와 불법행위들까지 옹호하는 양 착각했다”고 주장했다. 장 교수 쪽은 재벌기업에 경영권을 보장해주는 대신 세금을 더 내도록 해 그 돈으로 복지를 확충하는 식의 타협을 주장한다.
이병천 교수는 “그동안 양쪽 간에 충분한 토론이 미흡했는데, 제대로 된 소통이 시작되기는 처음”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국제적인 학자로 한국 사회에도 영향력이 있는 장 교수와 제2의 민주화로 불리는 경제민주화와 관련해 논쟁하는 것은 학술적, 사회경제적으로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개혁진보 진영은 그동안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론을 공통 화두로 삼으면서도 재벌개혁의 구체적인 방법론을 둘러싸고는 이견을 보여, 본격적인 토론을 벌인 적이 없었다. 이번 논쟁은 개혁진보 진영 안에서도 재벌 비판을 넘어 한국 사회의 새로운 사회경제 모델과 성장 전략을 제시해야 한다는 요구가 높아지는 상황에서 벌어졌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장하준, 한국재벌 공부가 안돼 있다” “착한 자본주의? 사람들 속이는 것” (한겨레, 김진철 류이근 기자, 2012.05.30 21:30)
[재벌개혁 논쟁] 대표적 재벌개혁론자 김기원 교수 “장하준, 한국재벌 공부가 안돼 있다”
“장하준 교수는 한국 현실, 특히 재벌에 대해 너무나 잘못 알고 있고 공부가 안 돼 있다. 게다가 이념에 사로 잡혀 자료를 자의적으로 해석한다.” 대표적인 재벌개혁론자로 꼽히는 김기원 교수(방송통신대 경제학과)는 30일 전화 인터뷰에서 “장하준 교수 쪽은 재벌개혁에 딴죽을 걸면서 재벌을 활용하자는 얘기를 하고 있다”며 “그의 사회적 재벌활용론 또는 사회적 대타협론은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비판했다.
“재벌의 경영권을 안정시켜주고 세금을 많이 내게 해서 복지국가를 건설하자는 게 그쪽(장하준)의 주장이다. 세금을 많이 내라는 데 대해선 재벌들이 콧방귀도 안 뀌니 불가능하다. 경영권 안정이란 이미 현재 재벌총수들의 경영권은 안정화돼 있으므로 결국 세습을 쉽게 할 수 있게 해주자는 건데, 경영능력을 검증받지 않은 무능력한 재벌 3~4세들이 최고경영자 지위에 올라서 아이엠에프(IMF) 외환위기 때처럼 그룹과 나라경제를 위기에 빠뜨릴 가능성이 크다.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다.”
재벌은 일종의 반체제 사범,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러
-장하준 교수는, 재벌개혁론자들이 재벌의 긍정적 기능까지 부정한다고 비판한다.
“왜곡이다. 과거나 지금이나 긍정적, 부정적 측면이 있다. 과거 재벌은 고도성장의 견인차로서 긍정적 측면이 부정적 측면보다 많았다. 하지만 2~3세로 가면서 재벌총수는 지분이 희석되고 소액주주가 됐다. 그러나 재벌의 힘은 너무나 커졌고,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일종의 반체제 사범이 된 것이다. 이게 재벌체제의 모순이다. 시장의 공정한 경쟁은 필요조건이고 민주주의적 견제와 함께 가야 하는 것이다. 이걸 시장만능주의니 주주자본주의니 하면서 비판하고 있는데 그건 잘못된 것이다.”
김 교수는 “장 교수가 개발시대와 복지시대의 차별성을 명확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고도 했다. “박정희 개발시대와 오늘날 복지시대의 논리가 다르다. 복지를 강화해야 하고 금융 규제를 제대로 해야 한다는 건 나도 인정한다. 다만 복지를 어떻게 하는 게 효과적일 것인가 하는 데 대한 고민이 장 교수에게 없다. 우리 사회에 대한 재벌의 부당한 지배력이 확대되고 사회는 오염되고 있다. 정계·관계·학계·법조계·언론계를 모두 주무르고 있는데, 어떻게 복지 강화를 위한 증세가 이뤄질 수 있겠나. 재벌의 부당한 힘이 약화되도록 재벌개혁을 해서 복지 위한 세금을 충당해야 한다.”
정·관·학·법조·언론계를 모두 재벌이 주무르고 있는데 어떻게 증세가 이뤄질 수 있겠나
-재벌개혁 주장은 곧 재벌을 해체하자는 주장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장 교수 쪽은 있지도 않은 ‘허수아비’를 때리고 있다. 재벌개혁론자들 중 기업집단을 해체시키자는 식의 주장을 펼치는 사람은 사실상 없다. 말도 안되는 얘기다.”
-그럼 기업집단은 어떻게 해야 하나?
“그룹 계열사들 사이에서 일정한 자율성과 협력성, 이 둘 사이에 균형을 이뤄야 한다. 장 교수는 ‘선단경영’의 효과를 과대하게 보고 있다. 쌍용차가 재벌체제에서 빠져나와서 망했다고 얘기하는데, 그렇지 않다. 쌍용그룹 안에 있을 때 이미 쌍용차는 어렵게 됐다. 대우차가 재벌체제 안에 있어서 망한 것도 아니다. 재벌체제가 결정적인 게 아닐 수도 있는데, 이걸 (장 교수는) 한두가지 개념틀로 덮어버린다. 주주자본주의와 시장만능주의는 악이라는 단순논리 때문에, 내가 장 교수를 수구적 진보파라고 하는 것이다.”
김 교수는 본인 역시 ‘재벌활용론’이라면서 “다만, 재벌을 개혁해서 활용하자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재벌개혁론자들은 재벌의 긍정적인 면은 살리되 부정적인 면을 극복하고자 한다. 성장의 주체라는 면은 살리고 재벌총수의 부패나 무능이라는 부분과 재벌이 사회를 오염시켜서 시장의 공정성을 해치는 부분은 바로 잡아야 한다.” 김 교수는 “한국은 주주자본주의가 아니라 총수자본주의”라며 ‘특경가법’(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강화론’을 주장했다.
 
장하준과 공저 출간 정승일 위원 “착한 자본주의? 사람들 속이는 것”
정승일 위원이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이하 ‘선택’)에서 던진 가장 논쟁적인 대목은 ‘재벌의 경영권과 복지의 맞교환’으로 해석되는 이른바 ‘대타협’이다. 정승일 위원은 30일에 이뤄진 전화 인터뷰에서 ‘오해’가 있다고 설명했다.
“우리가 문제를 재벌의 경영권과 복지를 맞바꾸자라는 식으로 단순화해서 보지는 않는다. 우리가 얘기하는 것은 스웨덴식 복지국가를 만들자는 것이다. 대타협이 당장은 불가능하다. 이건희(삼성전자 회장)와 구본무(엘지그룹 회장)가 미쳤냐? 만약 세금을 (소득의) 75% 내라고 하면 받아들이겠냐? 앞으로 5년, 10년은 재벌과 싸울 수밖에 없다. 대타협에 환상을 갖고 있지 않다.”
장하준 교수와 정 위원이 말하는 ‘타협’이란 정확히 말해 “재벌로부터 세금을 더 걷되 가급적 재벌의 소유권은 건드리지 않는 것”이다. ‘재벌 활용론’이란 것도 바로 이 지점을 가리킨다.
정 위원 등은 분명 재벌체제의 효용성을 인정한다. 그는 “쓸데없이 재벌을 깨야 한다는 얘기를 하지 말자”며 “계열사 상호지원은 이건희 회장이 맨 위에 있든 없든 상관없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삼성을 계열 분리시켜 다른 회사나 사모펀드에 넘긴다면, 이게 무슨 진보냐”고 덧붙였다.
이들은 재벌체제를 긍정하는 대신 재벌가에 세금을 더 많이 물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게 재벌개혁의 핵심이라는 입장이다. 정 위원은 “재벌개혁의 핵심은 재벌의 해체가 아니라 일종의 사회 공공의 산물을 독점하는 재벌가의 ‘불로소득’을 어떻게 회수하냐의 문제”라며 “소유를 재편하는 게 아니라 소득을 재편하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보편적 복지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하다. 그는 과거 미국과 스웨덴 등의 사례를 들어 최고 75%의 소득세율을 물리는 방안을 제시했다. 정 위원 등이 재벌개혁론자들을 비판하는 것도 “김상조(한성대 교수)나 정태인(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장)의 재벌개혁은 이건희 회장의 재산을 건드리지 못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스웨덴식 복지국가 만들자는 것
부자들 세금 더 걷되 가급적 소유권은 건드리지 말자

-장하준 교수와 당신을 ‘재벌옹호론자’로 보는 시각이 많다.
“편법 상속과 증여가 밝혀졌을 때 우린 이건희 회장을 감옥으로 보냈어야 한다고 얘기했던 사람들이다. 또 삼성전자엔 반드시 노조를 만들도록 법으로라도 강제해야 한다고 보는 사람이다. (우리도) 재벌개혁을 반대하지 않는다. 찬성한다. 다만 그 방향이 다를 뿐이다. 우리가 옹호하는 것은 대기업 집단이지 재벌 패밀리(가문)가 아니다. 재벌 패밀리 잡겠다고 재벌 해체하려는 것은 빈대 잡으려 초가삼간 다 태우는 것이다.”
-재벌개혁론자들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본인들은 부인하지만 결과적으로 주주자본주의에 봉사하는 재벌개혁이다. 재벌체제를 넘어선 ‘착한 자본주의’를 만들자는 것은 별로 진보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건희 회장 대신 안철수나 스티브 잡스 같은 사람을 쓰자는 식의 ‘착한 자본주의’는 사람들을 잠깐 속이는 것에 불과하다.”
대주주를 소액주주로 바꾼다고 재벌의 문제 해결되지 않아
재벌 경영의 장점은 인정해야

-당신과 장 교수가 박정희 체제의 옹호론자란 비판도 있다.
“듣기 불편하다. 그건 중상비방이다. 박정희는 파시스트다. 파시스트 같은 사람을 존경하는 게 아니라, 다만 은행 국유화와 정책금융 등의 몇 가지 요소를 옹호할 뿐이다.”
그는 ‘선택’ 출간을 계기로 불붙은 논쟁과 관련해서는 “한국의 진보가 어떤 미래비전을 가질 것인지에 대한 이번 논쟁을 4·11 총선 이전에 했어야 한다. 그래야 총선판이 제대로 짜였을 것이다. 대선에서 진다고 해도 이후 진보세력이 희망을 가지려면 대선을 앞두고 조금이라도 정비해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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