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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투쟁』(악셀 호네트)

 

[키워드로 책 읽기]이유 있는 99%의 분노 (경향, 노명우|사회학자, 2011-10-14 19:31:14)
ㆍ월가 시위·김진숙 고공농성 등
ㆍ자기존엄 회복 위한 정당한 행동

갈등은 이상적이진 않지만 현실을 묘사하기에 적합한 단어다. 평화에 관한 이상적인 질문을 현실적인 질문으로 바꾸게 되면, 우리는 인간이 투쟁하는 이유를 묻게 된다. 진정으로 평화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평화가 무엇인지 정의하는 것보다 사람들이 투쟁에 나선 까닭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투쟁하는 대부분의 사람은 싸움을 즐기는 싸움꾼이 아니다. 투쟁하는 사람은 보다 많은 여물을 달라고 요구하는 돼지와 같은 존재도 아니고, 돈을 받고 영혼을 저당잡힌 채 왜 싸워야하는지 이유도 알려하지 않는 ‘용역’도 아니다. 싸움의 유전자를 갖고 태어나지도 않은 정신대 할머니들이, 부당해고 당한 노동자들이, 삶의 터전을 빼앗긴 철거민들이, 폭력과 고문에 항의하는 인권운동가들이, 등록금에 절망한 대학생들이 왜 거리와 크레인 위에서 투쟁하는지 궁금해질 때, 그 의문을 풀 수 있는 책이 바로 악셀 호네트(Axel Honneth)의 <인정투쟁>(문성훈·이현재 옮김/사월의책)이다. 독일에서 1992년 나온 책이다. 1세대인 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와 2세대인 하버마스의 뒤를 잇는 3세대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대표하는 철학자 호네트는 ‘인정’이라는 틀로 인간사의 갈등을 들여다본다.
인정이란 얼마나 통속적인 단어인가. 인정은 학자들만 사용하는 전문 용어가 아니다. 다른 일상어처럼 인정은 식욕이 왕성하다. 철학자는 대식가보다 미식가에 가깝다.
학자가 미식가로서의 전문적 식견을 발휘하며 단어의 정교화에 탐닉할 때, 일상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미식가는 까다로운 취향을 지닌 편식가로만 보일 뿐이다. 하지만 먹성 좋은 사람이 바로 좋은 식욕 때문에 놓치고 있는 영양소를 미식가는 골라낼 수 있다. 호네트는 미식가의 위치에서 인정에 접근한다. 통속적인 인정의 개념으로는, 종업원의 불친절에 화가 난 손님이 매니저를 불러 “손님은 왕”이라고 소리 지르는 ‘리얼 진상’의 풍경, 승진심사를 앞둔 가련한 샐러리맨이 임원에게 호감을 얻기 위해 머리에 넥타이를 두르고 탬버린을 두드리며 “부장님 최고!”를 연발하는 가련한 장면만이 떠오르지만, 미식가의 감정을 거친 인정이라는 개념으로 다시 들여다보는 세상은 다르다.
인간은 배부르면 만족하는 돼지가 아니다. 아무리 위장이 꽉 차 있어도, 자기 존엄이라는 그릇이 비어 있다면 인간은 만족할 수 없다. 타인으로부터 인정을 받으려는 개인의 욕구는 자기의 밥그릇에 보다 많은 음식을 채워 넣고 싶은 물욕으로 환원될 수는 없다. 인정에 대한 절실함은 보다 많은 돈도 넘치는 권력도 아니라, 자기 존엄이라는 스스로 부여한 가치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인정에 대한 요구가 부당하게 무시될 때 사람은 모욕감을 느낀다. 모욕은 자기 존엄을 추구하는 개인에 대한 일종의 관념적 살인이다. 모든 개인은 자신의 신체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다. 고문이나 폭행은 단순한 신체적 학대가 아니라 자기 존엄 추구를 짓밟는 행동이다. 지렁이는 밟혀서 고통이라는 물리적 자극이 느껴질 때, 물리적 자극에만 반응하여 꿈틀댄다. 하지만 인간은 신체적 고통뿐만 아니라 인격에 가해진 무시에도, 그로 인한 정신적 모멸감에도 반응하는 존재다.
인간은 지렁이처럼 하찮은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시민에게 응당 부여돼야 하는 권리에서 배제됐을 때 굴욕을 느낀다.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에 명시돼 있는 시민의 권리가 특정 집단에게 보장되지 않을 때, 자존감은 굴욕으로 변한다. 종교가 다르다고, 인종이 다르다고, 성취하고 싶은 꿈이 다르다고, 성적 정체성이 다르다고, 한 개인의 생활방식과 추구하는 사회적 가치가 무시돼 놀림의 대상이 될 때, 그 개인 혹은 집단의 명예와 품위는 무차별적으로 훼손된다.
투쟁은 모욕당한 사람이 훼손된 자기 존엄을 다시 획득하려고 떠나는 기나긴 여행이다. 그래서 <인정투쟁>의 부제는 너무나도 적절하게 ‘사회적 갈등의 도덕적 형식’이다. 인정투쟁은 무시와 모욕을 통해 존엄이 훼손된 개인 혹은 집단의 명예 회복을 위한 행동이다. 인정투쟁의 원인은 탐욕도 트집도 투정도 아니다. 따라서 존엄을 되찾기 위해 인정투쟁을 벌이는 사람의 목소리를 사회는 경청해야 할 의무를 지닌다. 그래야 사회는 정상적이라는 판정을 받을 수 있다. 자기 존엄의 회복을 위해 인정투쟁을 벌이는 사람들에게 침묵을 강요하지 않는 사회라야 비정상의 딱지를 떼어버릴 수 있다.
아무리 철학자가 통속적인 인정 개념에 담겨 있는 자기 존엄의 추구라는 영양소를 찾아내도, 통속적인 개념을 더욱 타락시키는 악덕 업자가 판을 치면 미식가의 노력은 머쓱해진다. 악덕업자는 통속적 개념을 더욱 통속적으로 만든다. 악덕업자에 의해 미식가 철학자가 도덕적 요소라는 영양소를 발견했던 인정이라는 음식은 다시 정크 푸드로 타락한다.
정크 푸드가 지배하는 곳에서 사람들은 인정이라는 재료 고유의 풍미를 식별할 능력이 없어진다. 인공 조미료를 흠뻑 뒤집어 쓴 정크푸드화된 인정이란 단어는 성공과 단순 등치된다. 정크 푸드의 달콤한 속삼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은 명예와 품위를 훼손당한 사람들이 자기 존엄을 되찾기 위해 시작한 투쟁을 이해할 수 없다. 그들에게 인정이란 사물로부터의 인정에 다름 아니다. 몰고 다니는 자동차의 크기가 자신을 인정해주기를 바라고, 명절날 선물로 들어오는 갈비세트의 무게와 위스키의 연도수로 인정 여부를 확인하는 사람들은 정작 자기 존엄에는 둔감하면서도, 자신을 인정해주는 사물에 둘러싸여 있지 않을 때만 모욕을 느끼는 물신화된 심성을 지니게 된다.
인정의 통속화가 극한까지 진행되면, 인정은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자리를 차지했다는 것과 동의어가 된다. 인정받았음이 타인의 ‘눈에 들었다’와 동일하게 느껴지는 한, 사람은 눈도장을 찍을 수 있는 권력을 지닌 사람과 눈도장을 구걸하는 사람으로 양분되기 마련이다. ‘속류화된 인정’은 사전에 등록돼 있지 않지만, 속류화된 인정투쟁이 판을 치는 조직생활을 한번이라도 경험한 사람이라면 본능적으로 그 뜻을 알 수 있는 ‘짜웅’에 가깝다. 속류화된 인정투쟁이 벌어지는 전쟁터에서는 아부의 능력과 인정 여부가 정확히 일치한다.
사람은 각자 자기 그릇의 크기로 타인을 이해한다. 배부른 돼지의 눈에는 모든 투쟁이 위장을 채워달라고 꿀꿀거리는 소리로만 보인다. 그런 사람들은 한 개인의 권리가 무참히 무시된 소설과 영화 <도가니>의 상황을 보고도 도덕적으로 분노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며, 자기 존엄을 회복하기 위해 싸움을 하는 사람들의 깊은 속내도 알지 못한다. 정신대 할머니들이 물질적 보상만을 받겠다고 아직까지도 매주 수요일 집회를 하고 있겠는가? 자기 존엄을 회복하려는 인정투쟁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결코 개보다 낫다고 할 수 없다. 그들은 인정투쟁을 벌이는 시위대를 보고도 “아니 배부르고 등 따스하면 그만이지 인정이라니 웬 지랄들이래?”라고 막말을 뱉어낼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이 책이 사람 말을 할 줄 아는 개가 아니라 존엄을 추구하는 사람을 위해 쓰여졌다는 점이다. 사람만이 이 책의 핵심적 메시지를 해독해낼 수 있다. 그래서 이 책은 말한다. 자기 존엄을 회복하기 위해 인정을 위한 투쟁을 벌이고 있는 당신은 도덕적이라고. 그래서 당신은 한없이 정당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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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틀린 한국, 무시당한 자들의 분노로 교정한다! (프레시안, 노명우 아주대학교 교수, 2011-09-16 오후 6:41:25)
[왜 '인정 투쟁'인가] 악셀 호네트의 <인정 투쟁>
너무나 분명한, 사람에 관한 두 가지 사실에서 출발하자. 로빈슨 크루소는 예외적 존재이다. 모든 개인은 사회 속에 살 수밖에 없다. 관념 속에서 개인은 단독자일 수 있지만, 현실 속에서 모든 개인은 사회적 존재이다. 두 번째 사실. 인간은 먹고살아야 하지만 물질적 궁핍 해결이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사람은 생존 그 이상을 원한다. 배부른 돼지가 되었을 때 맛보는 동물적 만족감은 오래 지속될 수 없다. 사람은 돼지가 아니라 자기 존엄을 추구하는 존재이다.
사람에 관한 명백한 변할 수 없는 두 가지 사실이 교차하는 지점에 '인정'이란 단어가 있다. 인정이라는 개념을 통해 악셀 호네트는 인간을 규정하는 부정할 수 없는 두 가지 사실이 빚어내는 풍경을 탐색한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타인으로부터 인정을 얻고 그를 통해 자긍심을 획득하지만, 무시에 의해 자긍심이 훼손되었을 때 투쟁하는 끊임없는 인정 투쟁의 과정이다.
인정 투쟁이라는 개념 자체가 독창적이지는 않다. 호네트는 통속적으로 들릴 수도 있는 인정이라는 개념을 예나 시기(1801~1807년) 헤겔로부터 빌려왔다. 하지만 인정 투쟁 개념을 되살리고 발전시키는 호네트의 솜씨는 능숙하며 충분히 독창적이다. 호네트는 헤겔로부터 물려받은 인정 투쟁 모델을 조지 허버트 미드의 사회심리학과 결합시켜 헤겔을 현대화하는데 성공한다.
초기 헤겔의 인정 투쟁 모델이 후기의 노동 모델에 의해 대체되었음을 비판하는 호네트의 모습에서 우리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3세대라는 호네트의 별칭을 떠올리게 된다. 호네트의 스승 하버마스가 마르크스주의 모델을 비판적으로 해석하고 이를 미드를 비롯한 사회학 이론과 결합시킴으로써 의사소통 행위 이론을 발전시켰던 것과 유사한 궤적을 호네트 역시 밟는다. 스승이 걸었던 길을 따라 걸으면서도 자신의 고유한 길을 찾는 호네트는 잊혔던 헤겔의 인정 모델에 주목한다.
<인정 투쟁>(문성훈·이현재 옮김, 사월의책 펴냄)의 1부는 헤겔의 인정 모델을 발굴하는 호네트의 시도가 집약되어 있다. 그래서 1부는 헤겔에 관심이 없거나, 헤겔을 잘 모르고 있는 사람에게는 독해하기에 지루할 수도 있다. 1부의 지루함은 교수 자격 청구 논문으로 쓰인 이 책의 배경과 크게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1부를 넘기고 나면 헤겔의 인정 투쟁 모델이 미드와 결합되어 현대화되는 매우 흥미로운 2부가 펼쳐진다. 개인적으로 <인정 투쟁>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상호주관적 인정의 유형들을 다루는 2부의 5장과 개인의 자기 정체성과 무시를 다루고 있는 6장이다.
인정은 전문적 학술 용어가 아니라 일상에서도 다양한 맥락에서 다채롭게 사용되는 일상 특유의 현장감이 넘치는 단어이다. 일상의 가장 현장감 있는 개념인 인정을 사상사적 맥락과 결합시킴으로써, 인정은 통속적인 뉘앙스를 벗고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투쟁을 설명하는 핵심어로 부상하는 마법을 부린다.
이 마법은 전적으로 이 책 속에서 일상-사상사-현실이 황금의 삼각형 관계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황금의 삼각형 속에서 사상사와 일상이 결합하기에 헤겔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하지만 호네트의 책은 사변적이라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또한 일상적인 용어를 사용하되 일상적 용어가 갖고 있는 통속적 혼돈을 제거하고 그 자리에 학문적 체계성을 부여함으로써 일상의 삶에 대한 성찰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일 수 있다는 장점을 지닌다. 또한 이 모든 관련이 현실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사회적 갈등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로 작용하기에, 아카데미즘의 좁은 한계를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기도 하다.
인간의 행위는 항상 타인을 전제로 한다. 타인을 전제로 하지 않은 행위는 없다. 정도의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타인은 항상 우리의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타자를 보편적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미드는 '일반화된 타자'라는 개념으로 표현했다. 호네트는 미드로부터 '일반화된 타자'의 개념을 빌려오되, 헤겔의 인정 투쟁 모델과 결합시켰다. 철학과 사회학은 이렇게 호네트를 통해 결합했다.
개인이 일반화된 타자와 긍정적인 상호주관적 상호 관계를 맺으면 그게 인정이다. 개인 간의 상호 관계는 그래서 인정의 관계일 수밖에 없다. "사회생활의 재생산은 상호 인정이라는 지상 명령 아래서 수행"(184쪽)된다. 하지만 개인은 항상 타자로부터 긍정적인 상호주관적 관계를 맺지는 못한다. 인정의 대척점에 모욕이나 굴종과 같은 '무시'라는 무시무시한 범주가 도사리고 있다. 인정은 긍정적인 자아 정체성을 형성시키는 힘이지만, 반면 무시는 주체에 엄청난 심리적 훼손을 가한다. 인정은 개인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지만, 무시는 개인을 사회적으로 사망에 이르게 할 수도 있다.
인정의 관계는 사랑과 우정과 같은 원초적인 인정 형식부터 각 주체의 권리를 인정하는 권리 관계 형태의 인정 형식 그리고 가치 공동체를 지향하는 연대 형식의 인정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세 가지 인정 형태를 거치면서 개인의 긍정적 자기 관계의 정도가 단계적으로 높아"(186쪽)지기에, 인정 형태가 고양될수록 인간은 단순한 자기 보호로부터 적극적인 자기 발현으로 고양될 수 있다.
인정 형태의 고양이 일어나지 않을 때 혹은 각각의 인정 형태들이 무시라는 인정에 대한 거부와 만날 때 사회 투쟁은 벌어진다. 무시의 형태는 다양하다. 폭력, 고문, 폭행 등 개인의 신체적 불가침성을 건드리는 무시가 있는가 하면, 굴욕의 경험을 안기며 개인의 자기 존중을 훼손하는 무시도 있고, 특정한 생활 방식을 평가 절하함으로써 사회적 가치를 무시하는 경우도 있다. 모든 형태의 무시, 즉 인정에 대한 부정은 해당 당사자에게 무시나 모욕으로 이해되고, 이는 분노라는 심리적 반작용을 불러일으키고, 분노라는 심리적 반작용은 사회적 투쟁을 추진하는 심리적 동기가 된다.
인정 투쟁 모델은 설명적이다. 인정 투쟁 모델은 정치적 권력 관계나 경제적 이득을 사회 갈등의 원인이라고 간주하는 분과 학문적 설명에서 벗어나서, 현실에서 우리가 접하는 사회적 갈등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많은 투쟁이 먹고살기 위한 투쟁이었지만, 모든 투쟁이 먹고살기만을 위한 투쟁은 아니다. 인정 투쟁 모델은 그 빈틈에서 발생하는 투쟁을 설명할 수 있는 유용한 틀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하지만 단지 설명적이라면 인정 투쟁 모델은 사회 갈등을 설명하는 여러 이론 중의 하나에 불과했을 것이다. 인정 투쟁 모델의 가장 빛나는 부분은 현실에서 일어났던 투쟁을 설명하는 대목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 투쟁해야 하는 이유에 도덕적 근거를 제시한다는 점에 있다. '분노'는 투쟁을 촉발하는 원인이지, 투쟁의 도덕적 기초를 제공해주지는 못한다. 단지 투쟁이 분노의 표출에 불과하다면, 투쟁하는 사람은 투덜이 혹은 싸움꾼의 의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신체적 훼손, 모욕과 무시, 권리 침해에는 반드시 반응해야 한다. 하물며 지렁이도 밟히면 꿈틀댄다고 했다. 하지만 인간은 신체적 위해가 가해졌을 때만 꿈틀대는 지렁이는 아니다. 인간은 꿈틀대는 단순 반작용 그 이상을 위해 투쟁을 한다. 인정 투쟁 이론은 여기서 가장 광채를 발휘한다. 인정 투쟁 모델은 단지 사회적 투쟁의 등장에 대한 설명 틀이 아니라 나아가 도덕적 자기 형성 과정에 대한 해석 틀이다.
인정 투쟁으로 전개되는 사회 투쟁은 단순히 자기의 물질적 이익을 위한 투쟁과는 다르다. 인정 투쟁의 촉발 요인이 자기 존엄에 대한 부정이기에, 인정 투쟁은 제로섬 게임에서의 승리가 아니라 무시를 통해 부정당했던 자기 존중을 되찾는 과정이다. 그렇기에 인정 투쟁은 단순히 심리학적 공격적 행동도, 자신의 밥그릇을 지키기 위한 이기적 행동이 아닌 약화된 자기 존중에 반응하는 일종의 자기 치유적이며 동시에 무시라는 폭력을 휘두르는 사회를 치유하는 도덕적 행동이다. 이 치유의 과정이 인정 투쟁의 도덕적 역할이다.
인정 투쟁은 사회의 성숙도를 측정하는 바로미터와도 같다. 사회에서 벌어지는 인정 투쟁이 폭력, 고문, 폭행 등 개인의 신체적 불가침성에 대한 반작용뿐인지, 아니면 가치를 인정받기 위한 투쟁인지에 따라 그 사회의 성숙도는 가늠될 수 있다. 생존권과 폭력에 대한 거부와 같은 원초적인 인정 투쟁만을 수용하는 사회는 도덕적 고양과는 거리가 멀다. 한국은 무시를 통해 훼손된 자기 존엄을 회복하기 위한 고양된 인정 투쟁을 승인하고 그 투쟁에 참가하고 있는 사람의 목소리를 듣기 위한 귀를 갖고 있는가?
혹 인정 투쟁이라는 개념 자체가 낯설고 과잉이라고 느껴진다면, 그 이유는 전적으로 '지금 여기'의 한국이 부끄러운 성숙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성숙하기에 품위 있는 사회를 향한 사회로 가는 투쟁의 길을 찾으려고 할 때, <인정 투쟁>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최상의 안내서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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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삶]무시와 모욕에 대한 분노가 투쟁을 부른다 (경향, 박영도 | 연세대 국학연구원 사회인문학 연구교수, 2011-08-26 20:47:05)
헤겔 이후 ‘인정(認定)’ 혹은 ‘인정투쟁’이라는 용어가 오늘날처럼 자주 언급되고 중시된 적도 없을 것이다. 그 중심에 하버마스의 창백한 ‘소통’ 범주로부터 투쟁의 피가 도는 ‘인정’ 범주로 이행함으로써 프랑크푸르트학파 제3세대의 출현을 알렸던 악셀 호네트의 <인정투쟁>이 있다.
이 책의 출발점은 간명하면서도 설득력이 있다. 우리의 정체성과 사회적 존재감은 인정관계 속에서 형성되고 변형된다는 것이 그것이다. 타인으로부터 존중받을 때는 긍정적 자아가 형성되고, 반대로 타인으로부터 무시와 모욕을 경험할 때는 부정적 자아상이 형성되고 좌절과 분노가 쌓인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나, 모든 싸움의 출발점엔 모욕과 분노가 있다는 말도 같은 맥락이다. 호네트는 이 일상적 경험과 상식으로부터 도덕적 갈등의 형식인 ‘인정투쟁’이라는 진주를 캐낸다. 크건 작건, 혁명의 도화선이 되건 일시적 분출로 끝나건, 이 인정관계 속에 일상의 도덕적 역동성이 자리잡는다. 이 인정투쟁 개념을 통해 호네트는 계급투쟁의 숨겨진 메커니즘을, 계급투쟁으로 환원될 수 없는 사회갈등을 해명하고자 한다.
호네트에 의하면, 근대에 오면 인정관계와 그 원리는 친밀한 공동체의 배려 원리, 회사 같은 결사체의 업적·성과 원리, 정치공동체에서의 평등한 존중의 원리로 다원화된다. 그런데 시장자유주의에서처럼 이 다원화된 원리들이 결사체의 업적·성과 원리 하나에 의해 식민지화되면, 인정관계의 왜곡과 궁핍화가 발생한다.
이 시각에서 보면, 사회복지체제라는 것도 배려의 원리나 평등한 존중의 원리를 통해 성과·업적 원리를 제어함으로써 시장자유주의의 구조적 폐해를 피하려는 시도이다. 신자유주의란 이 제어의 틀이 사라지고 인정관계의 일면적 왜곡과 궁핍화가 극단화됨을 말한다. 야차 같은 성과 원리가 재촉하는 이 치열한 생존경쟁의 무대에서, 존중의 시간은 짧고 모욕의 시간은 길다. 이 때문에 존중을 늘리고 모욕을 줄이기 위해 경쟁은 물불 가리지 않고 치열해진다. 이 상황에선, 나의 자존감을 존중의 소통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모욕 위에서 세우는 일그러진 인정 메커니즘이 지배할 수밖에 없고 이를 통해 분노가 축적된다.
무상급식 관련 주민투표 해프닝도 그렇다. 보편적 복지의 관점은 수혜자들에게 모욕과 무시의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한 것이다. 50%의 저소득층 아이들에게 선별적으로 무상급식을 하자는 사람들은 이 점을 아예 고려하지 않는다. 그들은 선별적으로 무상급식을 받는 아이들에게 밥은 밥이 아니라 독이 된다는 점을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그들은 그 점을 잘 알기 때문에 그것을 요구하는지도 모른다. 아마 그들은 타인에 대한 모욕 위에서만 자신의 존중을 발견하는 일그러진 인정관계의 철저한 신봉자일지도 모른다.
최근 몇 년 사이에 특히 두드러진 현상이지만, 일그러진 인정관계가 지배하는 곳에선 삶은 무시와 모욕으로 비루해지고, 마음은 좌절과 분노로 가득 차고, 거리는 천함과 뻔뻔함으로 비열해진다. 이 상태를 그대로 둔다면, 뻔뻔함의 거리가 분노의 거리로 바뀌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런던 폭동은 남의 일이 아닌 것이다.
이 책의 장점은 사회갈등을 분석하는 새로운 진보적 범주를 제시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선 인정 범주만큼이나 우리의 일상적 도덕감각과 밀착된 비판적 범주도 드물다. 동아시아 유교권에서 도덕적 경험과 감수성의 기원에는 인정관계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논어>의 첫장을 펼쳐보라. 거기서 공자는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는다면 군자가 아니겠는가!(人不知 而不溫 不亦君子乎)”라고 말한다. 유교적 도덕의 지향점인 군자가 인정관계를 통해 정의되고 있다.
물론 공자는 인정관계의 훼손에서 비롯하는 분노의 개인적 규제에 방점을 찍는다. 오늘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것은 개인에게 너무 큰 윤리적 부담을 준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서 공자의 취지를 살리는 사회윤리적 전망을 생각할 수도 있다. 그것은 인정관계의 훼손을 최소화해 좌절과 분노의 축적이 최소화되게끔 사회구조를 개혁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런 사회를 정의로운 사회라고 부른다.
  
한국의 고질병 ‘사회적 무시’…그 치료법은? (한겨레, 최원형 기자, 20110826 21:09)
호네트 ‘인정투쟁’ 개정증보판
사랑·권리·연대 세가지 축으로
사회적 갈등구조에 해법 제시
“분배제도 등으로 구체화 필요”

〈인정투쟁-사회적 갈등의 도덕적 형식론〉악셀 호네트 지음·문성훈·이현재 옮김/사월의책·2만3000원

인간 사회에서 결코 끊이지 않는 사회적 투쟁들은 과연 궁극적으로 무엇을 위한 것일까? 근대 서구 사회철학은 사회적 삶이 근본적으로 ‘자기보존’을 위한 투쟁관계라고 규정했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규정한 토머스 홉스가 대표적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인간과 사회를 ‘좋은 삶’을 추구하는 정치적 공동체로 파악했으나, 근대 철학은 이를 무너뜨리고 사회를 구성하는 개별적 원자로서 인간의 ‘자기보존을 위한 투쟁’을 중시한 것이다.
사회적 투쟁의 핵심 배경이 ‘자기보존’보다도 ‘인정’이라고 분석한 <인정투쟁>은 이런 기존 관점을 새로운 차원으로 확대시킨 획기적 저작으로 꼽힌다. 지은이 악셀 호네트는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 하버마스에 이어 독일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대표하는 3세대 이론가로,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산실인 독일 사회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는 사회철학자다. 1992년 나온 이 책은 90년대 국내에 번역 소개됐으나 절판됐다가 이번에 2003년 판본을 번역한 개정증보판으로 다시 국내에 소개됐다.
<인정투쟁>의 핵심적인 명제는, “사회적 투쟁은 상호인정이라는 상호주관적 상태를 목표로 한다”는 주장으로 압축된다. 호네트의 인정이론은 예나대학 시절 청년 게오르크 헤겔의 철학적 사유와 사회심리학자 조지 허버트 미드의 경험과학적 분석으로부터 비롯됐다. 청년 헤겔은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이 공동체를 이루기 위한 인간의 사회화 과정 속에서 중요한 조건이 된다고 봤다. 미드는 개인의 정체성이 확립되는 과정에서, 사회적으로 규정된 ‘목적격 나’와 ‘주격 나’ 사이의 마찰에 주목했다.
이들의 철학과 이론을 종합한 호네트는, ‘인정’은 인간이 자신의 삶을 성공적으로 실현시킬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이자 긍정적인 자기의식을 가지게 하는 심리적 조건이라고 봤다. 사회를 구성하는 주체들은 서로의 정체성을 인정받고 인정해주는 것을 지속적으로 요구한다는 것이다. 또 사랑·권리·연대 등 세가지 층위에서 이런 사회적 인정질서를 풀이할 수 있다고 한다.
인정투쟁 이론은 무엇보다도 사회적 투쟁이 주로 물질적 영역에서의 ‘자기보존’을 위한 생존경쟁에서 비롯된다는 기존 관점을 더 넓은 영역으로 확장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정치경제적 이해관계에 집중했던 기존의 사회철학들이 결과적으로 인간의 삶을 단지 생존 유지를 위한 것으로 다루는 데 그쳤다면, 호네트의 인정이론은 ‘행복한 삶, 좋은 삶’을 누리기 위해 자신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사회로부터 인정받으려 투쟁하는 인간의 총체적 모습을 불러낸다.
만약 개인 또는 집단이 자기 정체성을 타자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무시·모욕’을 당할 경우엔 어떨까? 호네트에 따르면, 인정은 인간이 자신의 삶을 성공적으로 실현시킬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이자 각 개인이 자신에 대해 긍정적인 의식을 가지게 하는 심리적 조건이다. 때문에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은 ‘도덕적으로 옳지 못한 것’이 되어 분노를 불러일으킨다. 폭동이나 봉기 등 다양한 방식을 통해 분출되는 사회적 인정투쟁에는 모두 이런 도덕적 분노가 깔려 있다는 것이다. 인정투쟁 이론은 특히 급격히 변화하는 오늘날의 사회 속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갈등을 풀이하고 해결하는 근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2008년 광우병 쇠고기 반대를 계기로 터져나온 촛불집회에는 대의제 민주주의가 정치 엘리트의 권력 장악 수단으로 변질된 데 맞서 ‘주권적 존재’로서 인정받으려는 대중들의 욕구가 있었다. 차별 철폐와 고용 보장을 부르짖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목소리에는 사회적 존재로서 제대로 인정받고자 하는 열망이 들어 있다. 단지 ‘생산과 분배’의 차원으로 접근해서는 결코 풀어낼 수 없는 사회적 갈등들에 대해, 인정투쟁 이론은 좀더 폭넓고 세심한 접근법을 제시해줄 수 있다.
호네트의 제자이자 이 책을 옮긴 문성훈 서울여대 교수는 “특히 한국 사회는 ‘사회적 무시’라는 독특한 갈등 구조를 갖고 있다”며 한국 사회에 인정투쟁 이론이 좀더 폭넓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 사회에는 명문대를 가지 못해서, 장애인이라서, 못생겨서, 여자라서, 외국인 노동자라서, 노동자라서 등등 수없이 많은 이유로 타인을 무시하는 병리적 현상이 있는데, 인정투쟁 이론은 이를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하기에 적합한 틀이라는 것이다.
인정투쟁을 너무 강조하는 것은 정치적 민주화나 경제적 정의 등 구체적인 분배 정의에 대한 요구를 약화시킨다는 반론도 있다. 문 교수는 “인정투쟁 이론이 분배 정의 문제를 부정하거나 뛰어넘는 것은 아니며, 사회적 인정은 권리나 제도, 사회적 연대를 통해 구체화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 문제에 대해 호네트와 낸시 프레이저가 벌인 논쟁을 담은 <분배인가 인정인가?> 등이 ‘악셀 호네트 선집’으로 계속 나올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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