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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의 대가/조지프 스티글리츠 지음·이순희 옮김/열린책들 펴냄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5312022105&code=900308
[책과 삶]우리가 겪고 있는 불평등은 ‘새로운 현상’이다 (경향, 황경상 기자, 2013-05-31 23:10:44)
▲ 불평등의 대가…조지프 스티글리츠 지음·이순희 옮김 | 열린책들 | 624쪽 | 2만5000원
세상은 본래 불평등하다. 더 열심히 일해서 더 많이 기여한 사람이 더 많이 버는 건 당연하다. 가난은 게으른 네 탓이다.
많은 한국 사람들도 그렇겠지만, 대부분의 미국 사람들도 철석같이 믿었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계속된 경제의 ‘대침체’는 이런 믿음을 흔들어놨다. “규칙을 준수하며, 성실하게 공부하고, 성실하게 일했는데도” 간신히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 생계유지조차 어려운 사람들이 급격하게 늘어난 것이다.
저자는 미국의 현재 상황을 이렇게 요약한다. “부자는 갈수록 부자가 되고, 부자 중에서도 최상층은 더욱 큰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은 갈수록 가난해지고 그 수가 많아지며, 중산층은 공동화되고 있다.” 30여년 전 미국의 상위 1% 소득 계층은 국민 소득의 12%를 차지했다. 2002~2007년에 이르러서는 국민 소득의 65% 이상을 거머쥐게 됐다. 금융위기로 일부 손실을 봤지만 곧 빠른 속도로 회복했다. 2010년 추가 창출된 소득의 93%를 차지한 것이다. 월마트의 후계자 여섯 명이 소유한 재산은 697억달러로, 하위 30% 소득 계층의 전 재산을 모두 합친 것과 맞먹었다. 1에 가까울수록 소득이 불평등하다는 걸 나타내는 지니계수는 0.48로 이란·터키보다도 심각했다.
“미국은 건국 당시부터 자본주의 국가였지만,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불평등은 ‘새로운 현상’이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저자는 시장 만능을 외치는 보수 우파도, 자본주의 자체를 부인하는 급진 좌파도 아니다. 전통적인 주류 경제학 틀 안에서 자본주의의 실상을 추적해 온 정통 경제학자다. 그 또한 “불평등은 불가피하며, 더 노력을 기울인 이들에게 보상을 해줘야 한다”고 말한다. 주류 경제학의 ‘한계 생산성 이론’ 또한 사회에 기여하는 몫이 클수록 높은 소득을 가져간다고 말한다. 그런데 오늘날 ‘노력’은 새로운 부를 창출하기보다 다른 사람들의 부를 빼앗는 데 집중되고 있다. 아무 기여도 없이 많은 몫을 가져간다. 이걸 ‘지대 추구’라고 부른다.
‘지대’란 원래 토지 소유자에게 주어지는 보상을 뜻한다. 일하지 않아도 단지 소유권이 있기 때문에 수익을 얻는다. 이 말은 점점 어떤 권리를 독점적으로 소유함으로써 얻는 이윤이란 뜻으로 확장됐다. 예컨대 풍부한 천연자원을 가지고 있는 나라에서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새로운 부를 창출하기보다 특정 자원에 독점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권리를 얻어내는 편이 훨씬 쉽고 빠르다. 이런 경우는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정부로부터 독점적 권리를 받거나, 독점적 권리를 유지하도록 보장받으면 그만이다. 이라크 전쟁 초기, 당시 딕 체니 부통령이 최고경영자를 맡았던 핼리버턴은 70억달러의 정부 계약을 무입찰로 따냈다. 어수룩한 서민들의 등골을 빼내는 약탈적 대출도 지대 추구의 일부다. 국가자산을 헐값에 인수하거나 독과점을 이뤄 초과 이윤을 뽑아내는 기업들도 마찬가지다. 이들이 경영상의 일대 혁신을 하거나 천재성을 발휘해서 그만큼의 몫을 가져갔다고는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더구나 금융위기 뒤에도 임원들에게 보너스를 지급한 은행들처럼 실적이 형편없는데 높은 보수를 받는 경우도 있다. 이것이야말로 상위 계층들이 이룩한 ‘진짜 혁신’이었다.
월가 점령 시위가 터져나왔을 때 공화당을 포함한 우파들은 “우리는 결과의 평등보다 기회의 평등을 추구한다”고 맞받았다. 미국은 오랫동안 ‘기회의 땅’이라 불렸다. 그런데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순회 강연을 다닌 저자에게 숱한 대학생들은 어려움을 호소했다. “취업할 곳이 없다. 대학원 진학이 최선의 방법이었지만 학자금 대출을 받아서 빚만 늘었다. 개인 파산을 신청해도 학자금 대출은 면제 못 받는다. 부모가 부유해서 무보수 인턴으로 일하며 경력을 쌓는 또래 학생들을 보면 절망감만 늘어간다. 이제 장래성이고 뭐고 임시직 일자리라도 잡아야 할 것 같다.” 미국 명문대 재학생 중 하위 50% 계층 출신은 9% 정도에 불과하다. 상위 25% 계층 출신은 74%에 이른다. 학업 성취도가 높은 빈곤층 자녀들은 상대적으로 낮은 부유층 자녀보다 대학을 졸업할 확률이 훨씬 낮다. 대학을 졸업한다 해도 그들보다 훨씬 가난하게 산다. 하위 20% 계층의 자녀 중에 계층 이동을 할 가능성은 절반 정도에 불과하며 그것도 소폭 이동에 그치고 있다. 반대로 하위 계층으로 떨어지는 건 그보다 훨씬 쉽다. 주택 담보금을 딱 한번 연체했을 뿐인데 집을 빼앗긴다.
우파들은 상위 계층에게 일단 더 많이 몰아주면 구성원 모두가 그 혜택을 볼 것이라는 ‘낙수효과’를 설파한다. 상위 계층이 가져가는 ‘파이’의 크기를 따지지 말고 일단 전체 ‘파이’를 키워야 한다는 말이다. 어쨌든 더 많은 부를 부유층에게 몰아줬고, 파이는 커졌다. 1인당 국내총생산은 1980년부터 30년 동안 75%나 상승했다. 상위 1%의 임금은 150%, 상위 0.1%의 임금은 300% 넘게 인상됐다. 그럼에도 비슷한 기간 하위 90%의 임금은 15% 인상에 그쳤다. 정규직 일자리는 2007~2011년 사이 870만개나 사라졌다. 99주 이상 실업 상태에 놓인 ‘나인티나이너스(99ers)’라는 새로운 집단이 등장했다. 미국은 ‘유연한 노동시장’의 선두주자였지만 경제 실적은 노동자를 강력하게 보호하는 독일·스웨덴에 못 미쳤다.
저자는 이 불평등이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시장의 힘이기도 하지만 그 시장을 만들어낸 정부의 문제다. 금융위기 이전에도 약탈적인 대출관행을 막아야 한다는 여론이 있었지만 연방 정부는 아무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정치는 이미 상위 1%가 점령해 버렸다. 공화당과 민주당을 통틀어 대통령 선거 운동에 투입된 20억달러 넘는 돈이 대부분 상위 1%가 기부한 것이다. 이들 1%는 정치 혐오를 부추기면서 하위 계층들이 아예 투표장에 나오길 꺼리게 만든다. 그러는 사이 레이건 대통령이 포문을 연 지속적인 감세정책에 따라 이제 부자들보다 가난한 사람들의 세율이 더 높아졌다. 2007년 상위 400위 고소득 가구들의 평균 담세율이 16.6%인 데 비해, 일반 납세자들은 20.4%였다.
그러나 이 불평등은 결국 시장 만능을 외치는 이들이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성장’을 저해하며 ‘효율성’을 떨어뜨리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핵심 논지다. 바로 ‘불평등의 대가’다. 감세와 재정적자로 인해 정부의 공공투자가 줄어들다 보니 기간시설, 기초 연구, 교육 같은 공공재 즉 다음 세대의 혁신을 몰고 올 수 있는 ‘우물’은 점점 말라붙게 된다. 빈곤층 자녀들은 잠재력이 있다고 해도 점점 그 발현 기회를 찾지 못한다. ‘지대 추구’가 심해짐에 따라 다른 사람들의 몫을 빼앗는 데만 골몰하게 되니 파이 전체 크기는 줄어든다.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일할 의욕을 상실한다. 사회보장 축소로 삶이 불안정해지면서 하루 종일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들에게 생산성 향상을 기대하긴 어렵다. 일이 잘못되더라도 보호받을 안전망이 있어야 고위험 고수익 활동에 투자할 수 있다. 그렇기에 사회보장이 잘되는 나라들은 미국보다 훨씬 높은 경제성장을 이루고 있다는 설명이다.
그럼에도 미국인들 가운데 지난 10년간 불평등이 심화됐다고 여기는 이들은 42%에 불과했다. 정부가 하는 일은 늘 실패가 과장되고 개인이 지출하는 돈은 설사 도박에 쓰일지라도 합리적이고 효율적으로 사용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규제 완화와 세금 인하만을 지고지선으로 여긴다. 하지만 레이건 이후 계속된 그 정책이 과연 자신들에게 얼마만큼의 혜택을 주었는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은 복잡한 이야기를 이해하려 들기보다 단순하고 왜곡된, 감정에 호소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상위 1%는 이런 인식과 신념을 만들어내기 위한 충분한 자원을 가지고 있다. 조지 오웰의 <1984>에 등장하는 ‘빅 브러더’가 지배하는 사회를 점점 닮아가고 있다.
저자는 ‘지대’에 세금을 물리자고 주장한다. 1%의 부를 빼앗는 것이 아니라 공공재 생산을 위해 당연히 부담해야 돈을 내게 하자는 것이다. 또 투자를 활성화하기 위해 세금을 감면하기보다 실제 투자를 하는 기업에 세금을 깎아주자고 말한다. 그냥 더 많은 돈을 줘 봤자 돈은 더 많은 수익을 좇아 해외로 떠다닌다. 핼리버턴에 지출하는 건 경제 성장과 무관하다. 대신에 장기 실업자들에게 주는 실업보험 혜택을 늘리면 그들은 돈이 들어오는 대로 바로 지출할 것이다. 최상위 계층에 대한 세금을 인상할 경우 이들의 지출 감소분은 많아야 80%에 그치지만, 하위 계층에 대한 세금을 인하하면 이들의 지출 증가분은 100%에 가깝다. 낙수효과는 없지만 ‘분수효과’는 있다는 것이다. 국내총생산이 증가하면 상위 1% 또한 함께 이익을 보게 된다.
우파들은 정부 재정이 적자면 큰일 날 것처럼 얘기하지만 저자는 정부 예산은 한 가정의 예산과는 다르다고 반박한다. 한 가정이 수입을 넘어서는 지출을 하면 파산을 맞을 뿐이지만 정부가 그렇게 하면 거시경제의 변화가 온다. 재정 지출이 늘면 실업자들에게 일자리가 생기고 그들은 세금을 낸다. 재정적자에 시달리는 미국 정부는 불과 10년 전만 해도 국내총생산의 약 2%에 해당하는 큰 폭의 흑자를 내고 있었다. 경기 침체는 무엇보다 수요의 부족에서 온다. 재정적자는 경기침체의 원인이 아니라 그 결과다. 허버트 후버 대통령의 예산 긴축이 1929년의 주식 시장 붕괴를 대공황으로 심화시킨 전력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재정 지출로 이뤄지는 사회보장이 ‘공짜’라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미 그만한 세금을 낸 사람들이 혜택을 받는다. 오히려 저자는 정부의 후한 지원을 받고 있는, ‘지대’로 먹고사는 이들이 정부의 적극적인 지출을 반대한다고 꼬집는다.
불평등을 낳는 근본적 원인은 실업이다. 저자는 중앙은행이 통화정책으로 인플레이션을 낮추려는 정책 또한 부유한 채권 보유자들에게 자산가치가 하락할 것이란 우려를 떨쳐줬을 뿐 정작 실업률 상승을 불러일으켰다고 비판한다. 인플레이션보다는 불평등과 분배, 구체적으로는 실업률을 낮추는 데 초점을 맞춰야 현재 침체기의 문제인 ‘총수요 부족’을 해결할 만한 소비가 늘고 경제가 활성화될 것이란 주장이다. 1830년대 미국을 여행한 프랑스 역사학자 토크빌은 미국 사회의 독특한 특징을 창출한 주요인으로 ‘개인적 이익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꼽았다. 약삭빠른 미국인들은 다른 사람들을 보살피는 행위가 비단 영혼을 살찌우는 데 그치지 않고 사업을 살찌운다는 사실을 이해했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상위 1%가 이것을 깨달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책을 따라가다보면 미국의 상황이란 걸 잠시 잊고 마치 한국의 이야기인 것처럼 빠져들게 된다. 선대인 선대인경제연구소 소장은 “이 책의 지적과 분석이 가장 잘 들어맞는 나라는 미국 다음에 한국일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마지막 장에서 촘촘한 개혁 방안을 제시하는데, 무엇보다 이 정책들이 채택되도록 허용하려면 정치 개혁이 선행돼야 한다고 말한다. 문제는 시장과 경제가 아니라 ‘정치’에 있었다.
 
http://news.heraldcorp.com/view.php?ud=20130531000024&md=20130531075406_AR
<새책> 불평등 해결하면 1%의 부도 늘어난다 (헤럴드경제=이윤미 기자, 2013-05-31 07:54)
‘뭔가 잘못되었다.’‘우리는 99%다.’ 2011년 이집트ㆍ스페인ㆍ튀니지의 시위와 월스트리트 점령 시위는 현 경제ㆍ정치시스템이 공정하지 못하다는 대중 인식의 신호탄이었다. 현재 전 세계의 화두는 공정성이다. 시장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정치시스템은 시장의 실패를 바로잡지 못하며 나아가 현재 경제ㆍ정치시스템은 근본적으로 공정하지 않다는 생각이 확산돼 가고 있다.
2011년 5월 ‘배니티페어’에 미국은 ‘1퍼센트의, 1퍼센트를 위한, 1퍼센트에 의한’나라라고 일갈한 세계적 석학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최근 저서 ‘불평등의 대가’(열린책들)를 통해 뜨거운 이 주제를 대가답게 냉정하고 단호하게 다룬다. 우리 사회가 어째서 이처럼 불평등한 사회, 갈수록 기회가 줄어드는 사회가 되었는지,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어떻게 풀어야 하는가에 대한 석학의 묵직한 답변이 실려 있다.
저자에 따르면 미국은 1930년 대공황 이래 불평등 수준이 최고다. 지난 30년간 하위 90%의 임금은 15% 증가한 반면 상위 1%의 임금은 150% 증가했고, 상위 0.1%는 무려 300% 증가했다. 상위 1%가 국민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율도 12%에서 25%로 늘었다. 월마트 가문의 상속자 6인의 재산이 미국 하위 30%의 재산을 모두 합친 것과 엇비슷하다.
불평등의 대가는 윤리나 정의의 추상적 얘기가 아니라 현실적으로 치명타를 입힌다는 데 심각성이 있다. 스티글리츠는 시장주의자가 금과옥조로 여기는 효율성의 관점에서 이를 비판한다. 즉, 불평등은 시장경제가 본래 가질 수 있는 역동성과 효율성ㆍ생산성을 모두 마비시키고 이것이 다시 효율성과 무관한 분배구조를 고착화함으로써 파멸적인 악순환 고리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경제시스템이 대다수 국민에게 혜택을 베풀지 못하고 정치시스템이 금전적인 이해관계에 얽혀 작동하면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충만하던 자신감이 서서히 무너지고 국가시스템의 근간을 흔들어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불평등이 완화되면 상위 1%에는 해가 될까. 저자의 연구에 따르면 불평등이 완화되면 전체 경제의 성과가 개선될 뿐만 아니라 상위 1%의 부도 늘어난다.
그럼에도 불평등 논의가 시작되면 결국 재분배란 누군가의 호주머니를 털어 다른 사람에게 준다는 식으로 이해되는 게 일반적이다. 저자는 이는 사실과 다르다고 얘기한다. 가령 실업 및 장애보험 같은 사회보호시스템은 마치 소득세를 내지 않는 하위계층을 위해 퍼주는 것처럼 인식되지만 이미 이들 대부분은 그 대가를 직간접적으로 지불했다는 것이다. 이런 사회보호시스템은 그 혜택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점을 차치하더라도 생산성 향상에 기여한다는 게 스티글리츠의 주장이다. 즉, 사람들은 일이 잘못되더라도 자신을 보호해줄 안전망이 있다는 믿음이 있을 때만 고위험 고수익 활동에 도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공공재’는 사회와 경제의 원활한 작동을 보장하는 데 필요한 것인데 상위 계층 가운데 상당수는 공공재의 구축에 대해 부담해야 할 몫을 부담하려 하지 않는다고 질책한다.
스티글리츠는 불평등을 시장의 실패보다 정치시스템의 실패로 본다. 현대사회에서는 정부가 게임의 규칙을 정하기 때문이다. 정부는 무엇이 공정한지, 경쟁을 저해하는지, 불법인지를 정하고 조세제도와 사회복지지출을 통해 소득을 재분배하는 것도 정부 몫이다. 정부가 이런 역할을 어떻게 감당했느냐에 따라 불평등 수준이 달라진다. 문제는 지금까지 상위 1%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해 자신의 관점에 동조하는 사람을 이 기관의 책임자로 앉혀 시장이 1%에 유리한 쪽으로 기울어진 데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대안은 분배자로서 정부의 역할 강화다. 경쟁을 강화하고 착취는 줄이는 방향으로 공정하게, 시장을 시장답게 게임의 규칙을 만드는 것이다. 시장이 대다수 국민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꾸준히 관리하는 역할이다.
미국의 현실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분석한 책이지만 우리의 현실을 들여다보는 듯하다. “기회의 불평등이 존재하는 오늘의 현실은 미래에는 불평등의 수준이 더욱 악화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는 스티글리츠의 말은 불평등 관리가 오늘 왜 중요한지 보여준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590139.html
‘1%를 위한 이데올로기’에 종언을 고하라 (한겨레, 안선희 기자, 2013.06.02 22:03)
스티글리츠 ‘불평등의 대가’
경제민주화가 성장을 방해한다는 주장, 부자증세를 하면 경제활력이 떨어진다는 주장을 어떻게 봐야 할까. 스티글리츠는 “상위 1%가 원치 않는 일을 하면 나머지 99%가 피해를 입게 된다는 건 ‘상위 1%’ 쪽에서 지어낸 거짓말”이라고 일갈한다.
파이가 커져도 99%의 몫은 더 적어지고 있다
불평등이 너무 심해져 성장을 저해하는 지경이다
어떤 정책이 1%의 이익에 부합하는지 99%의 몫을 키우는 것인지 ‘관념전쟁’을 벌여야 한다

조지프 스티글리츠(70)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의 신작 <불평등의 대가>에는 이런 일화가 나온다. 1990년대 클린턴 정부의 경제자문위원회 의장으로 일할 때, 그는 대기업에 대한 과도한 세금 혜택을 줄이려고 시도했다. 그러자 당시 국가경제위원회 위원장이던 로버트 루빈이 “계급 전쟁을 하려는 것이냐”고 강력 반발하고 나섰다.
하지만 스티글리츠는 ‘계급전쟁’을 하자는 사람이 아니다. 시장자본주의를 부인하지 않는 미국의 정통 경제학자 중 한 사람일 뿐이다. 경제에서 정부 역할을 강조하는 ‘뉴케인스주의’ 학파의 일원으로서, 시장을 절대시하는 ‘시카고 학파’에 대립각을 세워오긴 했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주류 경제학의 패러다임 안에서 경제를 바라보고 분석한다. 이는 그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는 물론 비주류 경제학자에게도 절대 주지 않는다는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는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 책에서도 주주의 권리를 중시하고, 불평등을 어느 정도는 용인해야 한다고 말하고, 불평등의 부작용을 경제의 ‘효율성’ 저해로 분석하는 등 그의 ‘주류’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이 책에서 자신이 ‘경제적, 정치적 권력을 가진 상층부를 일컫는 광의의 개념’이라고 정의한 ‘상위 1%’에 대해 적대적으로 보일 만큼 단호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이런 태도는 이 1%가 자신의 조국인 미국을 망치고 있다는 신념 때문으로 보인다. “당신들에게 직장과 번영을 제공하는 대가로 우리가 상여금을 챙길 수 있게 해달라. 당신들 모두에게 한몫씩 나눠주겠다. 물론 우리 몫으로 더 많이 챙길 테니 그건 이해해주기 바란다.” 스티글리츠는 이를 미국 사회의 상위계층과 하위계층 사이에서 오랫동안 유지돼온 합의라고 말한다. 하지만 지금은 전체 파이가 커져도 99%에게 돌아오는 몫은 더 적어지고 있다. 현재 상위 1%에 속하는 가구가 소유한 부는 미국인 표본가구가 소유한 부보다 225배가 많다. 이는 1983년보다 두배나 심해진 것이다. 이 차이가 너무 커진 나머지 전체 파이가 커지는 것(경제성장)을 저해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99%의 소득이 늘지 않으니 총수요가 늘어날 수가 없다. 수요 부족은 투자 위축, 실업, 성장률 저하로 이어진다.
해결책은 간단하다. “미국 인구의 상위 1%가 국민소득의 약 20%를 차지하고 있다. 이 상위 1%가 소득의 약 20%를 저축한다고 할 때 그 소득 가운데 5%포인트를 하위계층이나 중위계층에게로 이동시키면(그래도 그들은 15%를 가져간다) 총수요는 곧바로 1% 가량 상승한다. 이 돈이 유통되면 국민총생산(GDP)은 1.5~2%포인트 가량 올라간다. 그만큼 실업률은 내려간다.”
하지만 1%는 자기 몫을 내놓기는커녕 ‘지대(rent) 추구’에 열중하고 있다. “부자가 되는 비결은 두 가지다. 하나는 부를 창출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부를 빼앗아 가지는 것이다.” 후자가 바로 ‘지대 추구’다. 은행들이 서민들의 정보 부족을 이용해 약탈적 대출로 돈을 뜯어내는 것, 대기업 경영진들이 경기 침체를 빌미삼아 노동자들을 해고하거나 임금을 삭감하고 자신들의 보수는 두둑하게 챙기는 것, 인맥을 활용해 정부 물자 조달사업이나 자원개발권을 유리하게 따내는 것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정치 시스템은 이런 불평등을 완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추기고 있다. “정치는 국가 경제의 파이를 어떻게 배분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싸움이 벌어지는 곳이다. 오늘날 정치라는 싸움에서 승승장구하는 것은 상위 1%다.” 그들은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게임의 규칙’을 정하기 위해 정치권에 막대한 선거자금을 대고, 정치인이나 관료가 공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좋은 자리를 제공해 금전적인 보상을 해준다.
하지만 미국은 민주주의 사회이고, 누구나 한 표를 행사할 수 있다. 99%가 뭉쳐서 이런 상황을 바꾸면 되지 않을까? 이런 사태를 막기 위해 그들은 ‘관념전쟁’, ‘이데올로기 전쟁’을 해왔다. “어떤 정책이 ‘국민 대다수’에게 가장 유익한지를 둘러싸고 관념전쟁이 수행돼왔으며, 이 전쟁에서 상위 1%에게 이로운 것은 만인에게 이로운 것이라는 확신을 만인의 마음에 새기기 위한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스티글리츠 교수는 지적한다. 하지만 “1%의 이익과 99%의 이익은 현저하게 다르다.” 따라서 어떤 정책이 1%의 이익에 부합하고, 어떤 것이 99%의 몫을 키우는 것인지를 명확하게 아는 것이 중요하다.
상위 1%가 퍼뜨리는 ‘신화’들과 이에 대한 스티글리츠 교수의 반박은 다음과 같다.
부자들에 대한 세금을 깎아주면 전체 경제가 좋아질 것이다. 아니다! 레이건 정부 때 소득세 최고세율을 70%에서 28%로 낮춘 뒤부터 불평등만 심화됐다. 현재 35%인 상위계층에 대한 과세율은 70% 정도가 적당하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정부는 시장보다 무능하다. 따라서 작은 정부, 민영화, 정부 서비스의 민간 이관, 규제완화가 바람직하다. 아니다! 성공적인 경제 뒤에는 늘 정부의 결정적인 역할이 있었다. 강한 정부는 부유층으로부터 부의 일부를 빼앗아 공교육 같은 공공투자에 투입해 사회의 불균형을 바로잡을 수 있다.
재정적자가 커지면 경제에 문제를 일으키는 만큼, 복지를 줄여 재정적자를 줄여야 한다. 아니다! 정부가 빚을 내더라도 공공투자를 확대하면 장기적으로 경제에 도움이 된다. 재정적자를 줄이려면 상위계층에 대한 세금을 인상하면 된다.
노동자들의 과도한 고용보장과 임금요구 때문에 노동시장 효율성이 떨어지고 있다. 아니다! 노동시장 유연성이 가장 높은 미국은 강력한 노동자 보호정책을 시행하는 스웨덴, 독일보다 경제성과가 떨어진다.
중앙은행의 독립성은 지켜져야 하고, 물가안정은 경제에 가장 중요하다. 아니다! 중앙은행은 책임성과 대표성을 강화해야 하고, 노동자들에게는 물가보다 일자리와 임금이 더 중요하다.
소득 불평등을 바로잡으려는 시도는 경제를 악화시켜 빈곤층에게까지 고통을 안겨줄 것이다. 아니다! 좀더 평등한 사회를 이룩하면 좀더 역동적인 경제를 이룩할 수 있다.
상위 1%는 “또다른 세계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열심히 99%를 설득하지만, 스티글리츠 교수는 “불평등은 불가피한 것이 아니다”고 강조한다. 일반 대중의 이익을 반영하는 민주주의를 확보하고 지금까지 해온 경제정책을 반대방향으로 바꿔나가면 된다는 것이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590179.html
불평등이 망치는 것들 경제성장·공정성·정의… (한겨레, 안선희 기자, 2013.06.02 21:16)
▶ 불평등의 대가/조지프 스티글리츠 지음·이순희 옮김/열린책들 펴냄
“이들은 더는 빚(학자금 대출)을 내려는 엄두를 내지 못했고, 극심한 절망감과 환멸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부유한 부모의 도움을 받아 무보수 인턴으로 일하면서 경력을 쌓고 있는 또래 학생들을 볼 때면 이들의 절망감은 더욱 깊어졌다. 서민층 자녀들은 무보수 인턴 자리를 유지할 경제력이 없었고, 장래성을 따질 여유도 없이 닥치는 대로 임시직 일자리를 잡아야 했다.”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조지프 스티글리츠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가 신작 <불평등의 대가>에서 묘사한 미국 대학생들의 상황이다. 너무 비슷해 한국이라 착각할 정도다.
스티글리츠 교수는 한때 ‘기회의 땅’으로 여겨졌으나, 이제는 ‘1%의, 1%를 위한, 1%에 의한’ 나라로 전락한 미국의 불평등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불평등은 단지 도덕적으로 나쁜 것이 아니다. 그는 “(불평등으로 인해) 경제 성장이 둔화되고 국내 총생산이 감소하고 있을 뿐 아니라 불안정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고 말한다. 돈이 상위 1%에게만 집중되면서 서민층이 쓸 돈이 줄어들고, 그 결과 소비가 위축되고 있기 때문이다. 스티글리츠 교수는 성장을 막고 있는 것은 분배가 아니라 불평등이라고 말한다. 불평등의 대가는 또 있다. “민주주의의 약화, 공정성과 정의라는 가치의 훼손이 그것이다.”
1%와 99%의 차이가 점점 벌어지는 것은 1%만을 위한 경제정책이 계속되는 탓이다. 정치인들이 그 경제정책을 유지하려면, ‘1%에게 좋은 것이 99%에게도 좋다’는 거짓말을 99%가 믿어줘야 한다. 1%는 이 ‘관념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정치인과 경제학자, 법조인 등에게 아낌없이 투자하고 있다고 그는 지적한다.
미국 사회를 분석했지만 이 책은 이런 질문의 대답도 될 것이다. 왜 한국 경제의 성장률이 계속 낮아지는지, ‘낙수효과’와 ‘증세 반대’를 외치는 이른바 ‘전문가’들이 왜 그렇게 많은지, 왜 최근 최경환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경제를 죽이는 경제 민주화라면 신중해야 한다”는 발언을 하고 나섰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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