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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시대 평가 관련 서적 서평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21011144234
박정희-삼성·현대 동맹, 12월에 깨질까? (프레시안, 정해구 성공회대학교 교수, 2012-10-12 오후 6:50:32)
[프레시안 books] 김윤태의 <한국의 재벌과 발전 국가>
1. 사실 한국의 지배 연합의 활동과 역할은 매우 역동적이었다. 국가와 재벌이 그 중심이 되어 구축된 지배 연합은 경제 발전을 주도했고, 그 결과 짧은 기간 내에 압축적 경제 성장을 이루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짧은 기간 내에 압축적 경제 성장을 이루어낸 한국의 이러한 경험은 자주 발전 국가(developmental state) 이론의 틀로 분석되고 연구되어 왔다. 사회로부터 자율성을 가진 국가가 그 하위 정책의 수행자인 재벌과 연합하여 압축적 경제 성장을 일구어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발전 국가론의 틀로 한국의 지배 연합을 분석한 이러저러한 연구들은 제법 있는 편이다. 그러나 그 기원을 찾아 일제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한편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 형성과 전개 그리고 변화를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분석한 연구는, 특히 국내 연구는 그리 많지 않다. 그런 점에서 김윤태의<한국의 재벌과 발전 국가>(한울 펴냄)는 발전 국가의 틀로 한국의 지배 연합의 형성과 전개 그리고 그 변화 과정을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분석한 흔치 않은 연구 성과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김윤태의 연구가 갖는 특징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발전 국가론의 틀에 의존하면서도 이 연구는 '국가 자율성'이 아니라 '국가 능력'을 통해 발전 국가론을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한국 국가는 강한 국가이기 때문에 성공한 것이 아니라 기업과 협력하는 국가 능력으로 성공했다"는 것이다.
한편, 김윤태의 연구가 갖는 또 다른 특징은 이 연구가 재벌 분석에 상당한 공을 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이 연구는 한국 재벌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서이기도 하다.<한국의 재벌과 발전 국가>라는 이 책의 제목에서 발전 국가의 용어보다 재벌의 용어가 앞에 나온 것은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2. 구체적으로, 김윤태의 연구는 우리에게 어떤 결과를 보여주고 있나? 첫째는 한국 발전 국가의 등장과 역할에 관한 것인데, 그 요점은 다음과 같다. 우선 한국의 발전 국가는 강력한 국가 권력과 코퍼라티즘의 성격을 가진 사회 조직의 결합을 통해 일제 강점기에 처음 출현했으며, 이후 이승만 정권과 박정희 정권을 거치면서 계속 발전해 나갔다.
그러나 한국 발전 국가가 경제 발전의 성과를 보여준 것은 박정희 정권 시기 재벌을 앞세운 국가의 중상주의적 또는 후원자적 산업화 정책의 추진을 통해서였다. 또 그 성과는 박정희 정권의 군사주의적 스타일과 리더십에 힘입은 것이기도 했다. 그 결과 국가와 재벌의 발전 연합은 주요 경제 단체를 포함한 코퍼라티즘적인 사회 조직의 토대 위에서 재조직될 수 있었다.
둘째, 김윤태의 연구는 재벌의 등장과 그 성장 과정을 분석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1950년대 후반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재벌은 이후 1960~70년대 국가 주도의 산업화 과정을 통해 거대한 복합 대기업으로 발전했으며, 1980년대 경제 자유화 조치가 실행되는 동안에도 재벌의 경제력 집중은 더욱 강화되었다. 또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재벌의 소유와 통제 구조도 변화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가족 다수 통제'에서 '가족 또는 친족 소수 통제'로의 변화가 바로 그것이다.
셋째, 한국 경제가 1980년대 이후 중상주의적 체제에서 시장 지향적 체제로 변화해가면서 발전 국가는 약화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것은 구체적으로 신자유주의 경제 관료에 의한 국가 기구 내부의 도전, 민주화로 인한 민중 부문의 아래로부터의 도전 그리고 국가에 대한 재벌의 직접적인 도전에 의해 이루어졌다.
반면 발전 국가의 약화와 더불어 재벌은 경제적 영역에서뿐만 아니라 정치적, 사회 문화의 영역에서 그 영향력을 더욱 강화시켰다. 그 결과 재벌은 지배 연합의 통합적인 구성 요소가 되었으며, 따라서 국가로부터 재벌로의 권력 이동이 이루어졌다.
넷째, 지구화의 진전 속에서 발생한 1997년의 외환 위기의 충격은 한국의 발전 국가를 최종적으로 종식시키고 '시장 지향적 국가'로 변모시켰다. 그리고 이에 따라 발전 국가와 재벌 사이에 오랫동안 형성되었던 위계적, 지배적 관계는 점차 새로운 형태의 공생적, 협조적 관계로 변화되었다.
한편, 외환 위기와 더불어 등장한 김대중 정부와 이를 뒤이은 노무현 정부의 노선은 자유 기업과 복지 제도를 결합시키고자 했던 서구의 제3의 길과 비슷한 점이 없지 않지만, 사회 불평등의 증대를 제대로 막지 못했다는 점에서 시장 친화적 제3의 길과 유사한 것이라 이 연구는 평가하고 있다.
3. 연말에 제18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는 지금 사람들은 과거와는 달리 재벌 개혁을 비롯한 경제 민주화와 복지 증대의 요구를 높이 외치고 있다. 따라서 보수 정당인 새누리당조차 이에 일정 정도 부응하지 않을 수 없는 사태가 되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2012년 올해의 대통령 선거는, 1987년의 6월 항쟁과 대통령 선거가 권위주의 체제의 민주적 이행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듯이, 성장 일변도의 사회에서 분배의 중요성이 더욱 커지는 새로운 사회로 넘어가는 중대한 전환의 계기가 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이와 관련하여 제18대 대선을 앞두고 현재 전개되고 있는 사태는 아마도 그것이 재벌에 대한 국가 우위의 지배 연합이 되었든, 아니면 국가와 재벌의 공생적이고 협조적인 지배 연합이 되었든 간에, 그 동안의 발전주의적 지배 연합의 약화와 해체 또는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대다수 서민들의 삶과 생활의 안전이 충분히 보장될 수 새로운 국가와 사회의 등장을 요구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경제 민주화와 복지 증대의 요구는 바로 그러한 변화에 대한 기대를 반영하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이와 같은 전환이 요구되는 상황에서 김윤태의 연구가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이와 관련하여 김윤태의 연구는 21세기의 새로운 발전 모형으로서 전통적 발전 국가와 신자유주의를 넘어선 '새로운 민주적 발전 국가' 모형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민주적 발전 국가 모형은 더욱 민주적이고, 참여적이고, 생태 지향적인 발전 모형이어야 함을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원론적일뿐, 아직 그 구체적인 모습을 분명하게 드러내주고 있지는 못하다.
어쩌면 그 대안의 모색은 그의 연구를 넘어 현재의 시대를 사는 우리들의 공통적인 과제인지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과거의 지배 연합이 주도했던 발전 모형은 안팎의 변화된 조건 속에서 이제 그 생명을 다해가고 있다는 점이다. 아무튼, 김윤태의 연구는 그 동안 한국의 발전주의적 지배 연합이 어떻게 우리 사회를 이끌어 왔는지, 그리고 그로 인한 문제점들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드러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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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1207/h2012072520593484330.htm
"박정희 독재, 경제개발 위해 불가피" 보수 논리는 비약… '민주적 근대화가 현실서 가능한가' 진보도 더 고민해야 (한국, 장병욱 선임기자 임소형 이윤주기자 한동주 인턴기자(이화여대 국어국문 4), 2012.07.25 20:59:35)
[100℃ 인터뷰] '박정희 연구'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
10년 가까이 박정희 연구
긴급조치 9호 경험한 세대로서 뉴라이트 주장 수용 못해 연구 시작…진보의 박정희 과소평가 보완 필요
한국사회의 두 주체 출현
재벌·대자본 등 기득권 세력과 평등 기대하는 역동적 대중이 대결…두 요구 충족시키는 새 모델 필요
박정희 시대의 공과
당시 육성 대기업이 측근 소유 아닌 점… 기업 성과와 연계한 지원 등 긍정적…인권탄압·도덕적 자기붕괴는 부정적
박근혜의 역사의식
아직도 70년대 인식에 사로잡힌 느낌… 박정희 체제 양면성 못보는 것이 한계…민중의 저항으로 붕괴된 점 직시해야
선거 때마다 박정희 향수
反박정희 세력 실패하는 지점서 부활… 개발주의적 박정희 모델 몰락하자…박근혜, 민생·복지 등으로 상쇄 전략

민주주의를 가로막은 장기 독재자인가, 보릿고개를 없애고 산업화를 이룬 탁월한 리더인가. 아니면 둘 다인가. 박정희 전 대통령을 보는 눈은 사람에 따라, 입장에 따라 극과 극을 달린다. 그 스펙트럼이 넓고 깊은 것은 그가 재임한 기간(18년)도 길지만 그 공과도 그만큼 크고 상반되기 때문이다. 1980년대 중반까지도 무덤에만 있던 박 대통령은 역설적으로 민주화와 함께 부활하기 시작했다. 유신시대 투쟁의 주인공들이 정권을 잡으며 실패와 문제점이 드러날 때마다 그는 탁월한 리더로 재평가됐다.
이제 그의 사후 33년만인 올해, 그의 신화가 다시 한번 선거라는 도마에 올랐다. 그의 DNA를 이어받으며 5년 가까이 대세론을 지키고 있는 장녀 박근혜 새누리당 전 비상대책위원장이 선거의 중심에 있다. 박 위원장은 최근 5ㆍ16 쿠데타를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이며 "여론조사에서 그 발언에 찬성하는 사람이 50%를 넘었다"고 말했다.
국내 대표적인 진보적 사회학자로 10년 가까이 박정희 연구에 천착해온 조희연(56) 성공회대 교수를 만나 박정희에 대한 공과, 부활의 배경과 의미, 전망을 들어보았다. 유신시대 긴급조치에 걸려 1년 옥고를 치르기도 했던 조 교수는 "박정희는 긍정과 부정의 다면적인 얼굴을 지닌 인물"로 규정하고 "그의 부정적 측면을 현대적 의미에서 보완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박정희를 연구하기 시작한 특별한 계기가 있나요.
"저는 긴급조치 9호 세대입니다. 대학에 입학한 1975년은 박정희 체제의 가장 폭압적인 시대였고 민주주의의 암흑기라고 할 수 있죠. 박정희를 과잉정치화, 과잉일반화 하려는 뉴라이트 세력들의 인식을 보면서 도전의식이 생기더군요. 그게 연구의 중요한 동력이 됐죠. 박정희 시대를 진보프레임으로 재해석하는 것이 저의 과제이고 반독재 세대의 과제라고 생각했지요."
조 교수는 1978년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돼 1년을 복역한 후 박 대통령이 서거하던 해인 1979년 8ㆍ15특사로 석방돼 복학했다. 그는 자신이 유신체제의 희생자이기도 했지만 한 사람의 지식인으로서 역사적 평가를 내려야 하는 의무감을 느끼는 듯 했다. 그가 본격적으로 박정희 관련 논문을 낸 것은 2000년대 초반부터이다. 2002년에 낸 저서 <국가폭력과 역사적 희생>은 바로 박정희 시대 폭력을 해부하는 것이었다.
-그동안 학계의 박정희 연구 흐름은 어떻게 진행됐습니까.
"1970년대까지는 박정희를 영웅적 지도자로 묘사하는 관변적 연구만 허용됐습니다. 하지만 정권이 붕괴되면서 반 박정희 연구와 인식이 대중화했지요. 진짜 도전은 1990년대 말~2000년대 친박정희 인식의 재등장입니다. 이론적으로는 크게 두 가지 도전이 있어요. 탈근대적 박정희 시대 연구, 뉴라이트의 박정희 연구입니다. 진보적 지식인 사이에서도 반박정희적 인식 프레임을 확장하여 성찰하려는 경향과 박정희 시대의 폭압성, 착취를 강조하면서 연구를 지속해가려는 경향이죠."
-조 교수의 연구는 어느 방향인가요.
"박정희 시대의 폭력성, 반민중성을 출발점으로 하되 이를 훨씬 더 풍부하게 보자는 거죠. 저는 하나의 박정희가 아니라 다양한 얼굴의 박정희가 있다고 말합니다."
학계에서 박정희 해석이 새삼 논란이 된 것은 2000년대 들어 '뉴라이트'를 표방한 보수학자들이 박정희 재조명에 적극 나서면서부터다. 그를 대한민국 근대화의 기수로 봐야 한다는 주장에 진보 학자들이 반발했다. 그 선두에 조 교수가 있었다. 진보학계 내에서도 논쟁이 일었다. 임지현 한양대 교수와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 사이의 이른바 '대중독재 논쟁'이 대표적이다. 임 교수가 박정희 시대 산업화 과정을 대중의 자발적 동원에 의한 '대중독재 시기'로 정의하자 조 교수는 독재와 반독재의 차별성을 없앤다고 비판했다.
-박정희의 새마을운동은 해외에서 더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박정희 개발모델이 권위주의적 산업화 모델, 성공한 농촌개발 모델로서 내세울 만합니다. 하지만 새마을운동 성과는 복합적으로 봐야 합니다. 그것은 박정희의 리더십으로만 된 건 아니잖아요. 중동 특수와 같은 우연적 요인도 작용했습니다. 외국에서 새마을운동을 벌인다고 꼭 성공하는 게 아니라는 거죠. 현지의 조건, 대중의 자발성 등을 고려해야 하죠."
-진보진영은 박정희시대를 너무 과소평가한다는 인상도 주는데요.
"그런 요소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새마을운동이나 박정희 체제 전체에 대해 관제동원이나 폭력으로만 작동한 체제로 환원해버린 면도 있습니다. 진보도 그걸 더 보완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고, 제가 도전하고 싶은 이유이기도 하고요. 이런 주장을 몇 번 하다보니 박정희 체제를 너무 긍정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도 많이 받았습니다."
-박정희의 독재가 민주주의 발전의 걸림돌이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거 같은데.
"개발독재체제의 경제적 측면과 정치적 측면을 분류해보면 4가지 유형이 가능해요. 경제적으로는 개발 성공모델과 실패모델,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모델과 독재모델입니다. 박정희는 독재이면서 성공한 권위주의적 근대화 모델이죠. 문제는 민주주의적이면서 개발에 성공한 사례가 거의 없다는 겁니다. 하지만 '민주적 근대화 모델은 상상에 불과할 뿐 불가능한 것'이라는 일부 주장에는 논리적 비약이 있어요. 개발을 위해 독재는 불가피하다는 뉴라이트적 인식이 이런 논리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물론 저는 민주적 근대화 모델이 현실에서 어려웠다는 점을 진보가 직시하고 어떻게 설명할 지에 대해서는 고민해야 한다고 봐요."
조 교수는 이 대목에서 학자로서의 객관적, 과학적 시각을 잃지 않으려고 무척 노력했다. 박정희가 이룬 경제적 성과를 평가하면서도 이를 위해서 독재가 불가피 했다는 식의 논리는 비약이라고 단정했다. 특히 1972년 10월유신 같은 억압적 방식을 택하지 않고 얼마든지 다른 경로를 택할 수 있었고, 그렇게 됐다면 좀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표했다.
-박정희의 긍정적인 정책이나 성과 5개를 꼽는다면.
"개발독재 하에서 육성된 대기업이 가족기업, 측근기업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동남아시아에서 대표적인 폐해가 대통령 친인척 기업들을 육성했는데요. 삼성, 현대가 박정희의 친인척이 아니잖아요. 그리고 정부의 전략적 지원과 기업의 성과를 연계시키는 시스템도 평가할만합니다. 매달 한 번씩 수출 독려 회의를 했죠. 그리고 기업의 성장이 사회에 환원됐습니다. 고교 평준화, 그린벨트도 긍정적인 측면이죠."
-반대로 가장 부정적인 정책이나 결과는.
"먼저 인혁당 사건을 들고 싶어요. 박정희 시대의 비인간성, 가혹성을 전 세계에 여실히 드러냈죠. 그리고 긴급조치 9호, 노동 탄압, 대북 적대정책, 부패문제입니다. 박정희 체제는 민중의 저항으로 붕괴했을 뿐만 아니라 '도덕적 자기 붕괴'를 했다고 생각해요. 박정희는 구조적 부패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으며 구조의 정점이었어요. 혹자는 민주화 이후 대통령 측근 비리와 비교하지만 지금은 단임이고 언론의 자유가 있으니까 권력엘리트의 부패가 노출되면서 더 부패한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1990년대에 태어난 지금 20대는 박정희를 어떻게 생각하나요.
"제가 4ㆍ19 혁명을 경험하지 않고 말하는 것과 비슷할 것 같아요. 한데 교과과정상, 현대사 수업을 안 듣고 대학 온 학생들이 많죠. 다만 박정희 시대를 긍정하는 학생은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은데, 그게 한국사회의 정치적 역동성이라고 봐요. 최근 <민주주의 좌파, 철수와 원순을 논하다>란 책을 냈는데, 그 책의 전제는 박정희 시대를 통해 한국사회에 두 주체가 출현했다는 겁니다. 하나는 재벌, 대자본, 대기업으로 상징되는 기득권 세력이고, 다른 하나는 높은 평등주의적 기대를 갖는 역동적인 대중이죠. 두 주체가 화해할 수 없는 방향으로 대결하고 있는 것 같아요. 박정희 시대를 넘어서는 모델을 통해 이 두 대중의 요구를 충족시켜야 해요."
화제를 올해 박근혜 전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의 발언과 대선전망으로 돌려 보았다. 조 교수는 지난 번 대선 때 이명박과 박근혜가 박정희의 두 얼굴이라고 했다. 그 당시에 이명박을 개발주의적 박정희의 현대적 모습, 박근혜를 자연인 박정희의 딸이자 반공주의적 박정희를 표상하는 존재로 표현한 바 있다.
-올해 대선은 박정희 대 반 박정희 구도라고 합니다. 박정희 향수가 선거 때마다 부활하는 현상을 어떻게 보십니까.
"솔직히 반박정희 세력이 실패하는 시점에서 부활하는 것 같아요. 반박정희 세력이 주도하는 것처럼 보이는 시점, 그들의 공신력이 상실되는 지점에서 언제나 박정희는 우리를 다시 찾아오는 것 같아요. 문민정부 말기, 노무현 정부 말기, 다 그렇잖아요. 반박정희 세력이 박정희에 대한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지점에서 반성하고 한계를 봐야 하는데 그렇게 못하는 거죠. 여기서 안철수가 부상하는 겁니다. 안철수는 문국현 계보 속에 있다고 봅니다. 체제 내에서 사회적 책무와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감수성을 갖는 공공적 엘리트에 대한 기대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박근혜 "5ㆍ16은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이라는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경선 후보 두고 논란이 거셉니다.
"그게 보수의 한계 지점인데, 저는 그런 표현을 넘는 박근혜 인식이 필요하다고 봐요. 박정희 체제의 양면성을 못 보는 것이지요. 박정희 체제는 부인할 수 없는 두 가지 팩트가 있어요. 하나는 박정희 시대에 한국의 산업화가 일정한 도약 단계에 진입했다는 것, 다른 하나는 박정희 체제는 누가 뭐래도 민중의 저항으로 붕괴했다는 것. 박근혜는 박정희 정권의 붕괴이유를 자기 해석 프레임 속에 담아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이라는 말은 1960, 70년대 인식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진보 진영에서 정수장학회 문제를 비롯해 과거의 유산을 청산하지 않는 박 후보에 대해 문제제기하고 있습니다.
"박 후보가 과거의 보수적 역사인식이나 태도를 유지하면, 진보 진영에게는 훨씬 더 유리한 구도가 되겠지요.(웃음) 그렇지만 한국의 정치발전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보수가 훨씬 더 선진화해야, 그런 선진화한 보수를 대면하는 진보가 더 역량 있는 진보로 발전하는 것 같아요. 정치발전은 적대적 갈등의 영역을 축소시켜가고, 비적대적 갈등의 영역을 확장시켜 가는 거에요. 그런 점에서 보수가 적극적으로 변하면 좋겠죠. 정수장학회는 전략적으로 행동할 수도 있다고 봐요. 대선 막판에 털고 갈 수도 있지 않을까요."
-선거철 마다 박정희 신화가 되살아 납니다.
"통계를 따져서, 이명박 대통령의 지지도가 추락하면서 박정희 지지도도 추락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박근혜 후보 처지에서도, 이 대통령과 거리두기를 통해 개발주의적 박정희의 몰락에 동반추락하지 않고, 빠르게 개발주의적 박정희의 모습을 상쇄하는 전략으로 민생, 복지 등을 이야기하게 된 거죠. 저는 박근혜에 반대하고 박근혜의 당선을 저지하기 위해 각축하는 진보 진영의 일부로서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공동의장이기도 하지만, 박근혜나 보수 진영 자체가 1960, 70년대의 일정 측면만 부각시켜서 그 자산에 의존하려고 하기보다 박정희 시대의 문제점을 성찰하면서 앞으로 나가기를 바랍니다. 부정적인 측면을 현대적으로 보완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하고 싶어요. 더구나 박근혜 역시 박정희의 향수에 기댄다던가 하는 것은 결코 승리를 위한 담보가 될 수 없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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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pressian.com/books/article.asp?article_num=50111111140954
"대한민국 망친 원흉은 이명박 아닌 박정희!" (프레시안, 안은별 기자, 2011-11-11 오후 6:26:08)
[인터뷰] <박정희의 맨얼굴>(유종일·이정우·박헌주·김상조·박섭·윤진호·조석곤·신동면 지음, 유종일 엮음, 시사인북 펴냄) 펴낸 유종일 KDI 교수
정권 탈취를 노리는 민주당은 '보편적 복지'와 함께, 하나의 카드를 더 꺼내들었다. '경제 민주화'다. 지난 7월 헌법 119조 2항("국가가 경제력 남용 방지와 경제 주체 간 조화를 통한 경제 민주화를 위해 규제·조정을 할 수 있다")에 근거해 재벌 개혁과 양극화 문제 해법 모색에 주안점을 둔 '경제 민주화 특별 위원회'를 만들었다.
그 핵심 설계자는 유종일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다. 라디오 방송 진행자, 칼럼니스트로도 친숙한 유종일 교수는 "경제 민주화야말로 내 입에 밥이 들어오는 문제"라며 민주당의 대국민 메시지 측면에서도 이 어젠다를 앞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야권 통합 역시 경제 민주화로 모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유종일 교수는 최근 이정우 경북대학교 교수, 김상조 한성대학교 교수 등 개혁 성향의 경제학자와 함께 <박정희의 맨얼굴>(시사인북 펴냄)을 펴냈다. 박정희 전 대통령 30주기였던 2009년 10월 26일을 앞두고 함세웅 신부가 이사장으로 있는 '10·26 재평가와 김재규 장군 명예회복추진위원회'에서 박정희 재평가 연구 지원을 선언했고, 이 책은 그 연구 결과 중 하나다.
박정희 경제 성장 신화 그 자체를 따져보는 총론(1장)부터 성장의 그늘이었던 노동·농업·사회 복지 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논의(6~8장)에 이르기까지, 여덟 명의 학자는 충실한 실증 자료를 통해 현재까지 건재한 신화로 덧칠된 박정희의 화장을 지운다. 제목처럼 '맨얼굴'로 만드는 작업이다. 책에는 양극화 문제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김대중·노무현 정부에게 던지는 쓴 소리도 적지 않다.
그런데 왜 지금 경제 민주화이며, 박정희인가? 1997년 외환 위기와 현재 양극화의 원인을 밝히는 데서, 또 앞으로 시장과 관료의 역할 범위를 설정하는 논의에서 의견 대립을 보이고 있는 진보 진영의 학자들도 던지는 물음이다. 지난 9일 서울 동대문구 회기로에 위치한 KDI의 연구실에서 유종일 교수를 만났다.
프레시안 : 함세웅 신부 측으로부터 연구 제안을 받지 않았더라도 박정희를 재평가하려는 계획이 있었을 듯하다. 박정희를 재평가한 이 책을 통해 무엇을 밝히고 싶었나?
유종일 :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박정희의 유산'을 내려 받은 이명박 대통령이 있고, 그 대통령을 강력하게 견제하는 유일한 정치인이 박정희의 딸뿐이라는 현 상황에 대한 우려다.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되고 나서 2008년 새해 첫 신문 칼럼에서 나는 이 대통령이 시장 경제가 아니라 관치 경제를 할 거라고 썼다.
아니나 다를까 지난 4년간 이명박 대통령은 외환 시장에 대한 노골적인 개입은 물론, 'MB 물가 지수'를 만드는 등 정부 압력으로 가격에 영향을 미치려는 발상을 반복적으로 표출하며 박정희 식 관치 경제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금리 정책에 대해서도 한국은행을 압박하면서 한국은행이 독립성을 상실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금융 시장에 대한 개입도 도를 지나쳤다.
이런 이명박 대통령의 관치 경제는 행정력에 의존해 기업을 압박하고 시장을 통제하는 구시대적 방식이다. 역사가 거꾸로 가고 있다. 경제는 더 어렵고 양극화는 더 심해졌는데 "그래도 경제는 박정희가 잘 했지" 이런 평가가 나온다.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 박정희 식 관치 경제를 잇는 이명박도 낳은 것이다.
또 하나는 소위 진보 진영 내부에서도 모든 문제의 원인을 신자유주의에 고정시키는 데 대한 문제의식이다. 박정희 시대 때 안 일어나던 문제가 신자유주의, 시장 독재 때문에 일어난다는 인식이 존재한다. 나도 누구보다 신자유주의를 강력히 비판하는 사람이지만, 우리 사회는 신자유주의로 설명되는 사회가 아니다.
물론 외환 위기를 계기로 국제통화기금(IMF) 관리 체제가 되고 나서 신자유주의적 경제 정책을 강요당해왔고, 그 부작용이 심화되어 온 건 맞다. 그러나 한국 사회의 모든 문제가 신자유주의 때문에 생긴 것처럼 이야기되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 문제의 핵심은 박정희 시대에 잘못 만들어진 구조적 문제들을 제대로 극복하지 못한 데 있다.
프레시안 : 매우 일반적인 평가 중 하나로, 많은 사람들이 "그래도 경제는 박정희가 잘 했지" 하고 말한다. 민주주의는 후퇴시켰을지언정 경제는 발전시켰다는 것이다. 박정희에게 비판적인 사람도 민주주의와 경제 분야를 따로 놓고 얘기하자고 한다. 이렇게 나누어 보는 관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유종일 : 분리해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두 가지다.
하나는 (분리해서 생각했을 때) 어디다 가중치를 둘 것인가 하는 문제다. 나는 희생을 수반하는 경제 성장보단 인권과 자유라는 가치에 더 무게를 둔다. 또 하나는 '박정희가 민주주의를 후퇴시켰을망정 경제 면에선 잘 했다'는 평가 자체에 내포하는 문제인데, 당시 한국이 고도성장을 이루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근거는 있다. 그런데 그 성장이 얼마만큼 박정희의 공이었는가 하는 점이다.
그때는 한국만 고도성장을 한 게 아니고 동아시아 나라들이 전부 고도성장을 이뤘다. 동아시아는 서구 제국주의의 침입이 있기 전 16세기까지만 해도 세계에서 가장 앞선 문명을 발전시켰던 지역이었고, 당시 60년대는 미국의 역할을 포함해 아시아 개발도상국이 경제 발전을 이룰 수 있는 시대적 조건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래서 우리보다 앞서 일본이, 동시대에는 타이완·홍콩·싱가포르 등 아시아 신흥 공업국이, 뒤따라서는 중국이 고도성장을 했다. 뛰어난 리더십이 있어서가 아니라, 환경적·역사적 요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같은 기간 크게 성장한 이 국가에 공통적으로 '토지 문제'가 없었다는 점도 눈여겨봐야 한다.
많은 개발도상국은 소수 엘리트에게 토지와 부(富)가 집중된 것이 발전의 중대 장애물이었다. 한국, 일본, 타이완, 중국, 베트남 등은 이미 토지 개혁이 이뤄진 상태였기에 이 문제가 크지 않았다. 그러니 이걸 어떻게 박정희의 공이라 할 수 있겠는가. 나라마다 토지 개혁의 사정은 달랐지만(특히 일본의 경우), 대중 운동과 농민 운동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들의 공을 더 높이 사야 한다.
프레시안 : 그러나 결과적으로 박정희 시대는 그 전에 비해 많은 사람들이 빈곤에서 해방되고, 나라는 대외 지향적인 발전의 길을 닦은 시기였다. 평가할 부분이 전혀 없는가.
유종일 : 이승만 시대 경제는 '원조 극대화 정책'으로 요약된다. 미국한테 어떻게든 원조를 많이 받아내려 했고, 극단적인 수출입 배제 정책을 폈다. 그 결과 정부 재정이 완전히 미국에 종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원조 과정에서 부정부패도 많이 일어났다. 그런데 박정희 시대에 이 기조가 바뀌었다. 박정희 식 민족주의는 미국의 원조를 탈피하는 것이었다.
미국에서도 한국 정부에 어느 정도 시장 원리에 맞추라는, 일본과 관계를 잘 풀어서 교역을 하라는 압박도 있었다. 그래서 외화를 많이 벌고자 했고, 열심히 수출하고 그만큼 수입도 하면서 좀 더 세계 시장을 향해 적극적인 발전을 한 거다. 이런 선택은 옳았다고 본다. 이승만 정부 당시의 말도 안 되게 폐쇄적인 상태에서 효율성과 역동성을 끌어올려주는 힘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 역시 박정희의 혜안에 의해서가 아니었다. 장면 정부가 만들었던 계획을 이름만 바꾸어 갖다 쓴 것이었다. 또 한편으론 앞서 말한 미국의 압력과 같은, 시대적으로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배경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경제가 나아졌다 하더라도, 그게 박정희의 공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프레시안 : 그동안 강조해 온 '경제 민주화' 얘기를 해보자. 일단 어떤 내용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해 달라. 많은 이들이 경제 민주화가 '좋은 얘기'란 사실엔 공감하면서도 당장 먹고사는 게, 내 목에 밥이 들어오는 게 더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왜 경제 민주화가 가장 시급하고 절실하다는 건가?
유종일 : 경제 민주화가 곧 '먹고살자'는 얘기다. 나라가 부유해졌다고 하는데 그 과실이 소수 1퍼센트에 집중되고 대다수 국민은 제대로 못 산다. 20대가 연애, 결혼, 출산 등 인생의 중요한 것을 포기할 정도로 살기 힘든 게 현실이다. 왜 우리가 돈을 버나. 죽도록 고생하지 않고 여유롭게,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려고 하는 것 아닌가.
뭐가 잘못돼도 크게 잘못됐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 돌아봐야 한다. 성장의 과실이 골고루 나눠지도록, 특히 실제 '삶의 질'이 상승하도록 하기 위해선 지금과 같은 경제 구조론 안 된다. 시스템을 바꾸어야 하는데 그 방법이 바로 경제 민주화다.
프레시안 : 경제 민주화와 관련해서, 박정희를 다시 보는 작업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유종일 : 박정희는 우리에게 '성장 지상주의'라는 강력한 유산을 남겼다. 경제 성장을 위해서는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다는 얘기다. 물론 '밥부터 먹고 봐야지'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자유와 인권을 억압하는 경제 성장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본다. 사람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기 위해 경제 성장이 필요한 건데, 경제 성장을 위해 사람이 죽는다면 주객이 전도된 것 아닌가.
박정희는 이 주객전도의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냈다. 사실 누구나 이 이데올로기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한 유산으로 남은 이유는, 한국 경제의 지배적 존재인 재벌이 언론과 각종 연구소,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통해 '모든 문제가 성장을 해야 해결될 수 있다'는 식의 관점을 강화해 왔기 때문이다. 실질적으로도 관료, 정치권에 영향을 행사하면서 정책도 그쪽으로 몰고 갔다. 박정희의 유산이 이렇게 정신적, 구조적으로 맞물려 있기 때문에 한국이 경제 성장은 하는데 국민은 오히려 더 불행한, 근본적인 모순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프레시안 : 그런데 현재의 가장 절실한 문제, 즉 청년 실업과 비정규직, 극심한 양극화 등은 박정희 식 관치 경제가 아니라 김대중·노무현 정부 당시 펼친 신자유주의 정책에 기인한 바가 더 크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유종일 :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 특히 외환 위기 직후 노동 시장 유연화나 공기업 민영화 등 신자유주의적 정책에 의한 과오를 저지른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전 세계적인 신자유주의적인 흐름과 외환 위기 이후 IMF와 미국의 압력 때문에 이뤄진 부분이 크다.
앞서 말했듯 한국은 신자유주의 시스템이 아니다. 나도 누구보다 강하게 신자유주의를 비판해왔지만, 핵심적인 문제가 거기 없는데 자꾸 그쪽으로 설명하려고 하는 게 문제다.
아직도 정부가 기업들을 불러다 투자니 고용이니 안 하냐고 야단치는데, 4대강 사업 같은 건설 재벌 도와주는 공사를 하는데, 이게 어떻게 신자유주의인가? 한국이 주주 자본주의인가? 재벌이 왕국처럼 지배하는 총수 자본주의다. 한국에선 재벌 독식 구조와 불공정한 시장, 그래서 부가 한쪽으로 집중되는 게 더 큰 문제다.
프레시안 : 하지만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 동안 노무현 대통령의 말대로 "권력은 시장에 넘어갔"고, 그것은 애초에 '시장 개혁'을 강하게 내세운 정책 기조 자체의 문제가 아니었을까?
유종일 : 그들 정부가 하려고 했던 개혁의 기본적인 방향을 신자유주의와 혼동해선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개혁의 큰 그림은 박정희 식의 관치 경제는 안 된다는 문제의식으로부터, 관료들 혹은 배후에 있는 정치권력이 자원 배분에 입김을 불어넣는 시스템에서 '시장 원리'에 의해 자원이 배분되도록 하는 시스템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그동안 자원이 정치 관료들에 의해 자의적으로 배분되던 것이 굉장히 비효율·비민주적이고 정의롭지 못했기 때문에, 그 해결법으로서 시장 원리에 추를 얹는 것은 옳은 방향이다.
하지만 그냥 시장에 맡겨버리자는 게 아니다. 시장 역시 완전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처럼 이미 재벌 구조가 공고하게 형성된 상태에서 당사자들 마음대로 경쟁하라고 하면 당연히 불공정한 경쟁이 일어난다. 거기서 경쟁이 공정하게 이뤄지도록 돕는 여러 규제와 제도가 필요했다. 한편으론 시장에 진입하기 이전에 교육 등 인적 자본 형성 과정에 있어서 최대한 기회가 평등하게 돌아가도록 해주어야 하고, 경쟁 과정에서 낙오된 이들에게 제공하는 안전망도 필요하다.
결국 문제는 시장 자유화 그 자체가 아니라, 공정한 시장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나 시장 실패를 보완하는 정책들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은 것이다. 시장의 자유와 더불어 이러한 제도적 보완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경제 민주화의 요체다. 거기서 강조되는 게 '시장에 대한 민주적 통제'다. 민주적 통제란 국민이 뽑은 대표자들이 만든 합당한 제도와 투명한 절차에 입각해 각각의 시장을 도와주거나 규제하는 것으로, 관치와는 다르다.
프레시안 : 큰 그림은 옳았을지언정, 결국 민주 정부도 양극화 극복에 실패했다.
유종일 : 두 정부가 추진했던 경제 정책 속에는 다양한 요소가 복합적으로 드러난다. 그들이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펼친 것도 물론 잘못이었지만, 그것보다 근본적인 잘못은 재벌 개혁의 실패였다고 본다. 그랬기에 경제 구조의 양극화를 막지 못했다.
김대중 정부의 경우 2000년에 벌써 재벌 개혁은 끝났다고 봐야 한다. 1998년 정부와 재계가 합의한 재벌 개혁 5대 원칙은 재벌들의 다양한 회피 전략에 의해 거의 무력화되었고, 1999년 출자 총액 제한 등 추가 3원칙을 발표했지만 2000년 총선과 남북정상회담 이후엔 재벌 개혁이 후퇴하기 시작했다.
노무현 정부의 경우, 취임 6개월 만인 8·15 경축사에서 국민소득 2만 달러를 국정 목표로 내세웠다. 개혁과 분배를 하라고 뽑아놓았더니 또 '성장'이었던 것이다. 또 뼈아픈 부분이긴 하지만, 재벌 개혁엔 손도 안 댔다고 봐야 한다. 거기엔 정권과 삼성 사이에 나로선 알 수 없는 유착 관계가 큰 영향을 미쳤다.
근본적 문제는 점점 커져 가는데, 부작용에 약을 바르기 위해 사회 복지나 안전망을 조금 넓힌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다. 그래서 정권도 빼앗겼다고 본다.
프레시안 : 이 책은 8명의 논자가 쓴 각기 다른 글로 구성되어 있다. 이번엔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4장, 외환 위기를 다룬 김상조 교수의 글에서는 그 뿌리를 박정희 체제에서 찾는다.
그런데 많은 외국 학자들은 한국 외환 위기의 원인을 재벌이나 관치 금융이 아니라 김영삼 정부가 추진했던 세계화 정책이라고 말한다. 재벌의 지배력이나 관치 금융 문제는 1960년대부터 시작된 건데, 왜 과거에는 안 터졌다가 1990년대에 와서 터졌을까 하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유종일 : 세상일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원인이 있다. 감기를 예로 들어보자. 감기에 걸린 이유를 누군가 묻는다면 기초 체력과 면역력이 떨어졌다고 말할 수도 있고, 사람이 밀집된 곳에 갔다 와서 손을 씻지 않았다거나 하는 부주의한 위생 문제를 들 수도 있다. 또 감기 바이러스가 온갖 곳에 퍼져 있는 환경 탓을 할 수도 있다. 셋 다 맞는 얘기다. 그리고 아무리 감기 바이러스가 돌아다녀도 기초 체력이 튼튼하면 안 걸릴 것이고, 손을 안 씻고 다녀도 감기 바이러스 자체가 없다면 또 괜찮다.
이것을 외환 위기로 생각해 보면, 부주의한 태도 차원에서 잘못한 것이 김영삼 정부가 우리 실력에 맞지 않게 금융 시장을 무리하게 개방한 것이다. 국민소득 1만 달러 달성을 정치적으로 내세웠기 때문에. 환율을 인위적으로 고평가시켰다. 독감이 대유행 중인데 영화관 갔다가 손도 안 씻은 셈이다.
여기서 '독감 대유행'은 뭔가. 전 세계 금융 시스템 자체가 불안정했고, 특히 아시아 금융 시장에 위기가 일어났다는 '환경'의 문제다. 거기에 우리는 '기초 체력'도 나빴다. 당시 상황을 보면, 아시아에서도 모든 나라가 당한 건 아니지 않나. 체력이 좋다면 큰 위기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바로 이 체력에 해당되는 것이 재벌 금융 문제다.
그런 면에서 김영삼 정부의 섣부른 개방 정책을 지적하는 얘기가 틀리진 않았지만, 그것은 행동 차원에서 원인을 찾은 거라고 볼 수 있다. 그 밑에는 체력, 즉 경제의 구조적 문제가 있었고 그게 바로 재벌과 관치 금융이다. 1990년대 전반 한국은 투자율 40퍼센트에 이르는 엄청난 과잉 투자 상태였다. (정부가) 엉터리 금융 시스템에 돈을 쏟았고, 부채 비율이 치솟았던 것이다.
프레시안 : 이번엔 지가(地價)에 대한 의문이다. 이정우 교수는 2장에서 한국의 높은 지가와 물가 수준이 개발 독재 시대가 키운 괴물이라고 지적한다. 그런데 독재 시대에 부동산가가 굉장히 높이 오르긴 했지만, 당시 소득 수준도 그만큼 오르지 않았나 하는 지적이 있다.
박정희 시절엔 고용과 소득이 동시에 올랐기 때문에 지가가 폭등했어도 부동산 보유율도 함께 올랐고, 지금처럼 집 없는 문제 때문에 힘들진 않았다. 오히려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야말로 부동산 버블이 극성을 부리지 않았나. 따라서 지가 앙등의 거의 모든 책임이 박정희에 있다는 이정우 교수의 비판이 과장되었다는 생각은 없나.
유종일 : 박정희 시절 '과속 성장'을 했기 때문에 뒤따르는 문제들도 많았다. 그 중 하나가 높은 인플레이션이었다. 지적한 대로 소득은 올랐지만 물가와 지가 역시 가파르게 올랐다. 물론 그 이후로도 부동산가는 여러 번 뛰었고 소득 대비 지가 상승률은 계산해 보지 않아 모르겠지만, 지금 문제가 되는 엄청난 투기 바람이 이때부터 구조적으로 시작됐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강남에서 한나라당 득표수가 높은 이유가 꼭 부자의 이익을 대변해서만이 아니라 경상도 사람이 많아서라는 얘기도 있다. 1970년대 고급 정보를 한마디라도 얻기에 유리한 위치에 있던 사람 혹은 기업들이 강남땅을 사들일 수 있었단 거다. 대기업들이 여기저기 땅을 사 두고, 겉으론 공장이나 학교를 짓는다면서 실은 그냥 앉아서 지가 상승으로 돈 벌어들이는 행태가 다 이 때 시작됐다.
물론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부동산 버블에 대한 책임이 있는 건 사실이다. 관료들한테 놀아난 부분이 크다. 김대중 정부의 경우, 외환 위기로 망가진 경기를 부양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렸다. 거기서 "일자리 늘리려면 건설 경기 띄우는 게 최곱니다. 그럼 규제를 완화해야 합니다" 하는 목소리가 나온 거다. 그래서 경기는 회복되었지만 정부 말기에 투기 붐이 시작됐다.
그래서 노무현 정부는 부동산 투기 문제에 대해 세게 나왔는데, 또 관료들 가운데 "카드 채 문제 때문에 금융 기관도 어렵고 경기 안 좋은데, 집값 떨어지면 더 큰일난다" 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처음에 시장은 (노 대통령이) 세게 나오니까 눈치를 보고 있었지만, 어영부영하다 보니 어느새 '이 정권도 토건 세력이 잡았다'는 생각이 퍼졌고 그때부터 부동산가가 마음 놓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여기에 '균형 발전'을 내놓았는데 정작 제일 중요한 분권과 재정적 지원은 쏙 빠지고, 혁신 도시니 뭐니 해서 또 다시 부동산 규제를 완화하는 쪽으로 갔다. 여기에도 큰 책임이 있다. 재벌-토건의 연결 고리를 잡아끊어야 했던 건데 오히려 다 살려줘 버린 셈이 됐다.
프레시안 : 조석곤 상지대학교 교수는 7장에서 박정희 시대의 농업에 대해 '압축 성장 속의 압축 쇠퇴'라고 표현했다. 그런데 박정희 시대에 농산물 수입이 거의 금지되다시피 했기 때문에, 차라리 그때가 농산물 개방 압력에 시달리는 지금보다 나았다고 하는 목소리도 있다. 세계무역기구(WTO) 가입과 자유무역협정(FTA)을 통해 농산물 시장이 열렸렸고, 그래서 농민들이 양극화 되었다는 지적이다.
유종일 : 개방이 물론 큰 문제다. 하지만 개방화 압력이 오기 전에 농업 생산 구조가 튼튼하고 우리 농업의 경쟁력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박정희 시절부터 농촌은 굉장히 살기 어렵고 사람들이 다 떠나는 곳이 되어버렸다. 박정희에게 있어 농업은 철저하게 산업화와 고도성장 정책의 종속 변수였다. 대대적으로 산업화를 하려면 그만큼 (대도시에) 값싼 노동력 제공되어야 하는데, 농촌이 그 전초기지 역할을 한 거다. 국가의 모든 투자가 도시에 집중되었고, 사람들은 교육 기회나 일자리를 얻으려 다 농촌을 뒤로 했다.
당시 농촌이 살기 어려워졌다는 증거가 1971년 대통령 선거 결과 아닐까. 당시 박정희는 김대중에게 거의 질 뻔했다. 그전까지 한국 선거의 기본적인 패턴 중 하나가 '여촌야도(與村野都)' 즉 농촌에선 여당이 우세하고 도시에선 야당이 우세한 현상이었는데, 농촌에서 김대중을 찍은 표가 더 많이 나온 거다. '농민의 아들'을 표방하며 집권 초기부터 중농주의적 모습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미 쇠퇴를 경험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석곤 교수가 강조한 건 농업 생산 구조와 농업 경쟁력인데, 박정희는 이런 부분에 있어 새로운 대안을 만드는 걸 포기하고 단순한 가격 조정으로 임기 내 큰 불만 잠재우려 했다. 그래서 농업은 영원히 경쟁력 없는 산업이 되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외국의 개방 압력이 밀려들어오니까 감당할 수 없게 된 것 아닐까.
프레시안 : 책 마지막 장에서는 신동면 경희대학교 교수가 박정희 시대의 사회 복지를 다루었다. 박정희 정권은 사회 복지의 발전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사회 보장 제도의 근간이 되는 생활보호법·산업재해보상보험법·의료보험법·국민복지연금법·사회보장에 관한 법 등 사회 복지 관련 법률을 제정했다. 그가 만든 사회 복지 기틀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는가.
유종일 : 우리는 지금도 경제 수준에 비해서 전 세계적으로 가장 복지 수준이 낮은 나라다. 무조건 성장에 '올인'하고 경제 개발 예산은 엄청나게 편성하면서 복지는 최소화하는 정책 기조가 박정희의 성장 제일주의로부터 나온 거라고 본다. 기본적인 틀을 마련하긴 했지만 워낙 성장이 우선이고 복지는 사치라는 정책 기조가 강했다. 사각지대도 많았고, '용돈 연금'이란 말도 있듯 급여 수준이 굉장히 낮지 않았나. 제대로 된 복지였다고 볼 수 없다.
프레시안 : 복지는 현재 정치권 최대 화두이기도 하다. 민주당 역시 경제 민주화와 함께 '보편적 복지'를 차기 집권 플랜의 열쇳말로 내세웠다.
그런데 지난 7월 나온 이 발표를 놓고, 복지를 강조하는 일각에서는 '보편적 복지가 경제 민주화보다 먼저다' 혹은, '경제 민주화는 보편적 복지 안에 종속된 문제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워낙 복지 문제가 커다란 화두여서인지 경제 민주화가 덜 부각되는 경향도 있는데….
유종일 : 종속된 문제라니, 그건 큰 착각이다. 얼마 전 복지국가소사이어티 후원회에서 연설을 요청받았는데, 아주 간단히 이렇게 말했다.
"나 역시 복지 국가 운동을 하고 있으며, 나만큼 일찍부터 복지를 강조한 경제학자는 별로 없었다. 하지만 복지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지금 월스트리트 시위가 다 어디서 나온 건가. 1대 99의 격차 사회가 눈앞에 있는데, 그걸 복지로 치유하는 방법은 없다. 더 중요한 건 경제 시스템을 공정하게 만드는 거다."
그날 청중들의 반응은 압도적이었다. 나는 경제 민주화와 복지의 관계를 이렇게 본다. 먼저 모든 사람이 '자유'를 '평등'하게 누리도록 만드는 것이 민주주의 이상이다. 그리고 시장 경제란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 경제가 조직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시장에서 가장 중요한 건 자유로운 선택과 실질적 자유의 최대 평등이다.
그러기 위해선 (시장 진입 이전의) 기회와 (경제 활동) 과정, 의사 결정 참여에 있어서 평등해야 하고, 결과적인 분배 역시 지나치게 불평등하면 안 된다. 기회는 잠재력 개발을 위한 교육 등의 평등을 말하고, 과정의 경우는 시장에서 경쟁할 때 규칙의 문제다. 또 기업에서든 정치 기구에서든 의사 결정에 참여할 때도 민주적 절차가 필요하다.
여기서 '결과적인 분배' 얘기를 했는데, 아무리 시장이 공정해도 그것만 갖고도 해결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사람마다 능력과 운이 다른데, 거기서 벌어지는 위험을 최소화시켜주어야 한다. 이 재분배에 있어서 중요한 건 조세 정의의 확립과 보편적 복지다. 이런 구도로 보면, 오히려 보편적 복지가 경제 민주화의 일부분이라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종속 관계로 생각하기보다 일종의 '연결 고리'로 보고 싶다. 경제 민주화라는 관점에서 생애 주기에 따른 지원이나 보편적 사회권 차원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거다.
프레시안 : 오늘(9일) 오전 민주당 경제 민주화 특별위원회에서 10대 핵심 정책을 발표하려고 했는데 발표 일정이 1주 미뤄졌다. 어떤 내용인가.
유종일 : 구체적 내용은 밝힐 수 없지만 지금까지 나눈 얘기들과 같다고 보면 된다. 민주당 내에서도 한미 FTA에 대해서도 드러나듯 다양한 관점과 의견이 있지 않나. 내가 세게 나갈 경우 생길지 모를 저항이랄까 잡음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하루 이틀 여유를 두면 좋겠다고 해서 발표 일정을 미뤘다. 내용은 바뀌지 않는다.
프레시안 : 마지막 질문이다. 과거 박정희·전두환 정부 때 청춘을 보낸 60대 이상 노인들은 대개 빈부를 막론하고 한나라당을 지지한다. 그분들에겐 박정희 시절에 대한 막연한 향수도 크지만, 당시만 해도 소득은 늘었고 노력만 하면 내 집 마련을 할 수 있었다는 분명한 인식도 있는 것 같다. 그분들이 박정희 시절에 대해 '그래도 살기 좋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두 환상에 지나지 않을까?
유종일 : 모든 사람은 자기의 경험 속에서 개념 틀을 만들고 거기에 맞춰 해석하다 보니까, 앞서 말했던 역사적 맥락을 잘 모르는 상태에서 "그래도 그때 보릿고개는 없어졌지"하며 끄덕일 수 있다. 게다가 박정희는 서민적 풍모를 많이 보여준 대통령이기도 하다. 그때만 해도 권력자가 농민들과 함께 바지 걷고 모 심고, 막걸리 마시는 건 대단히 충격적인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상당 부분은 허상이다. 지금 재벌을 중심으로 한 기득권 세력이 자신들의 특권 구조를 온존시키기 위해 재생산해내는 이데올로기의 일부로서의 허상. 하지만 아마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엔 큰 부분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개인에겐 소박한 일일지 모르겠지만 사회적으로는 보이지 않는 힘이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 책이 그 신화를 깨는 데 작게나마 기여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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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5202015575&code=900308
[책과 삶]선명한 진보의 시각 제시 (경향, 김종목 기자, 2011-05-20 20:15:57)
ㆍ잘못된 비판 탓 ‘박정희신화’ 여전
ㆍ정치·경제를 분리하는 ‘틀’이 문제
▲박정희체제, 자유주의적 비판 뛰어넘기…이광일 | 메이데이

박정희 시대의 ‘한강의 기적’으로 상징되는 고도압축성장을 두고 보수 쪽은 ‘독재·권위주의 불가피론’ 같은 소극적·수세적 옹호를 펴다 ‘선진화론’이란 적극적 담론을 들고 나와 ‘박정희제체’를 정당화하고 있다. 진보나 자유주의 세력의 평가는 여럿인데, 민주주의 억압과 인권탄압을 비판하면서도 경제성장과 산업화는 업적으로 인정하는 견해도 한 갈래다.
책은 이 같은 “경제발전의 업적은 인정하나 독재를 했기에 비판받아야 한다”는 진보 일각과 자유주의 세력의 ‘자유주의적 이분법’과 인식틀을 비판하는 데 초점을 둔다. 박정희체제에 대한 자유주의적 비판에 대한 ‘비판’이다. 이분법이 보수담론 못지않게 ‘박정희 신화’를 지속시키는 힘이며, 박정희 비판자들을 ‘또 다른 박정희’로 만드는 ‘덫’이라고 분석한다.
박정희체제의 고도압축성장에 대한 책의 관점은 뚜렷하다. 경제성장과 반인권·억압의 독재는 동전의 양면이 아니다. 저자는 “ ‘한강의 기적’을 가능하게 만든 핵심 동력이었던 노동자들, 이른바 ‘산업역군’으로 칭송되었던 바로 그 노동자들이 ‘국가의 반인권·억압정치의 주요 대상’이었다”고 말한다. 1970년대 평화시장 재단사 전태일의 분신, 동일방직 여성노동자들에 대한 ‘똥물투척사건’, 유신체제 붕괴에 영향을 미친 YH사건에서 볼 수 있듯 경제성장과 민주주의는 분리해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박정희는 유신체제 이후 노동조합법 등을 개정하면서 전경련과 경총이 건의한 사항을 거의 관철시켰고 모든 비판의 목소리를 봉쇄했다.
‘죽은 박정희’는 산 사람들의 삶과 정치에도 영향을 미쳐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 등 자유주의 정치세력의 리더들도 정치와 경제를 분리하는 이분법의 인식틀을 가졌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이분법은) 경제발전의 토대 위에서만 민주주의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지배적 발상의 수용으로 귀결된다”면서 “바로 이것이 ‘산업화세력(수구세력)과 민주화세력(자유주의세력)의 연합’이라는 언술로 포장된 3당합당, DJP연합이 가능할 수 있었던 기저의 논리”라고 진단한다.
저자의 문제의식은 ‘지금-여기’로 확장된다. 세계 10위 안팎의 무역규모이면서 900만명의 비정규직 노동자가 존재하는 현실, 저자는 “900만명의 비정규직 노동자가 존재하기에 세계 10위의 무역규모를 자랑하는 나라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그들(자유주의 세력)은 놓치고 있다”고 말한다.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착취와 수탈, 배제와 억압의 사회관계들, 권력관계들이 끊임없이 재생산된 결과로 보는 것이다.
대중 학술서를 표방한다. 박정희체제가 등장한 5·16쿠데타부터 10·26까지 정치·노동사 분석이 주된 내용이다. “경제성장은 노동자착취의 결과”라는 주제는 새로운 것은 아니다. 저자는 ‘구시대적 운동권 틀’이란 지적에 구애받지 않고, 선명한 진보의 시각을 관철하고 있다. 1만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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