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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프랭크의 <실패한 우파가 어떻게 승자가 되었나> 서평

 

http://www.pressian.com/books/article.asp?article_num=50130314175228
'보수의 벽' 못 넘는 대한민국? 미국 꼴을 봐라! (프레시안, 허석재 고려대학교 정치학 박사 수료, 2013-03-15 오후 6:27:41)
[프레시안 books] <실패한 우파가 어떻게 승자가 되었나>
미국 정치에 관한 많은 글을 읽어봤지만, 이 책만큼 세세한 미국 정치판의 사정을 알려주는 경우는 드물었다. 일독을 권하는 데 주저함이 없는 이유이다. 책의 주제는 번역본 제목에 잘 나타난다. <실패한 우파가 어떻게 승자가 되었나>(토마스 프랭크 지음, 함규진·임도영 옮김, 갈라파고스 펴냄).
2008년에 공화당 정부는 대공황 이후 최대 경제 위기를 불러왔고, 민주당에 정권을 내주었다. 그럼에도 2년 만에 중간 선거에서 대승을 거두며 의회 다수파로 부활했다. 왜 그랬을까? 저자의 대답은 한마디로, 공화당과 우파 세력이 너무도 유능했고, 민주당은 너무도 무능했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정확히 석 달 전 받아본 선거 결과로 '멘붕'에 빠졌던 이들에게는 구미가 당기는 이야기임에 틀림없으리라.
프랭크가 그리는 미국 우파는 뻔뻔하고 교활하며 억지로 가득하다. 정치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는 점에서는 유능하다고도 할 수 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는 부시 정부의 맹목적 탈규제 조치와 월가의 탐욕이 결합돼 일어난 일이다. 말하자면 고삐 풀린 시장이 만들어낸 결과다. 하지만 티파티 운동을 필두로 한 우파들은 이 원인에 대해 '진정한 시장주의가 자리 잡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선동했다.
이들의 선동은 이런 식이다 : 워싱턴(정부)이 개입해서 시장 질서를 망치는 바람에 미국의 자유가 위협받고 있다. 그게 부시든 오바마든 마찬가지다. 새로 들어선 오바마 정부가 파산자에 대해 제공하는 구제 금융은 (부시 정부가 시작한 프로그램이긴 하지만) 자유의지에 따라 돈을 빌린 사람에게 책임을 면제해주는 조치에 불과하다. 즉, 미국의 자유를 침해하려는 시도이다. 이런 오바마는 '사회주의자'이며, 나치즘이 "(국가) 사회주의"였으므로, 파시스트이기도 하다. 워싱턴의 민주당은 은행들에게 말도 안 되는 대출을 종용한 앞잡이이면서, 동시에 은행에 박해를 가하려는 도적이나 매한가지이다.
이런 주장들의 배경에는 월가와 거대 자본이 결탁돼 있다. 저자는 억지로 가득한 이런 주장들이 버젓이, 그것도 온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광경을 예리하게 포착하고 있다. 우파들이 어떤 논리적 배경에서 이런 주장을 펼치고 있는지 꼼꼼히 추적한다. 전국의 티파티 집회 현장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참가자들의 발언 내용과 심리 상태를 생생히 보여준다.
2008년 금융 위기와 오바마 정부의 등장은 민주당에게 다시없는 기회였다. 1930년대 루스벨트가 했듯이 고용 보험 확대, 대규모 공공 투자, 파산자 보호 강화, 친 노동 정책 등 일련의 개혁프로그램이 줄줄이 쏟아져야 할 판이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뉴딜 연합이 이후 미국 정치에서 30여 년간 헤게모니를 장악했다. 하지만 오바마는 탈규제를 주도한 옛 관료들을 끌어들이고 의료 보험을 개혁한다며 관련 업계를 끌어들여 시쳇말로 '누더기'법을 만들어 놓았다. 이러는 사이에 우파가 거짓 선동으로 부활할 기회를 활짝 열어준 것이다. 이 대목에서는 2004년 탄핵 정국에서 과반을 얻은 열린우리당 정부가 갈팡질팡하는 모습이 오버랩된다.
사실 중간 선거에서 집권당이 패배하는 것은 미국 정치의 공식이다. 1860년 이후 치러진 35번 중간 선거 중 32번을 집권당이 패배했으니 법칙이라 부를 만하다. 3번의 예외 중 한 번이 1934년 루스벨트가 뉴딜연합을 구축하던 때다. 저자 프랭크는 2008년이 대공황에 버금가는 위기였으면 오바마 민주당도 그만한 실적을 냈어야 한다고 믿는 것 같다. 하지만 웬 걸. 민주당은 이기지 못했을 뿐 아니라 공화당에 (하원) 63석이나 넘겨주고 말았다. 이 규모는 1948년 이후 최대이며, 중간 선거의 평균 의석 이동의 3.5배에 달한다. 기록적인 패배이다.
프랭크의 해설을 따라가면 이러한 사태는 우파의 교묘하고 영리한 술책과 민주당의 무능이 결합된 결과이다. 프랭크가 "포퓰리즘"이라 지칭하는 진보 노선의 입장에서 볼 때, 공화당과 우파는 도저히 용납되지 않고, 오바마와 민주당에게는 분통이 터질 법하다. 하지만, 좀 더 냉정하게 바라보면, 인과관계는 반대일 가능성이 높다. 즉, 우파의 그와 같은 선동 덕분에 공화당의 승리가 가능했던 것이 아니라, 공화당과 보수주의가 그만큼 미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억지스러운 선동이 허용되고 먹힐 수도 있었던 것이다.
2008년 오바마의 승리는 부시 정부가 역사상 최악이라고 하는 실적을 내고도 겨우 이룬 결과였다. 이라크 전쟁과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지루한 교착, 허리케인 카트리나에 대한 늑장 대처, 아브라모프 로비 스캔들, 치솟는 유가 등 일일이 열거하기 힘든 실정이 거듭됐지만 공화당 맥케인 후보는 오바마와 비슷한 지지세를 유지했다. 부시 정부 막판까지도 미국 국민 중 보수가 진보에 비해 10퍼센트 이상 높게 나타났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터진 뒤에야 미국 국민의 인내심에 바닥이 났고, 오바마의 승기가 굳어졌다. 오바마의 승리는 부시 행정부에 대한 심판의 성격이 짙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2010년 선거 결과를 원상복구(restoration)로 이해하는 전문가가 다수이다. 공화당이 새로 얻은 의석의 대부분은 2008년 맥케인과 2004년 부시가 승리한 주에서 나왔다. (이런 지역의 민주당 의원들 다수는 오바마 개혁에 협조하지 않았다.) 이를 제외한 추가 의석은 10석 남짓이다. 이를 설명하는 데에는 좀체 나아지지 않는 경제 사정, 실효성 없는 구제 금융, 의료보험 법안을 둘러싼 지루한 공방 등 민주당의 실책이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수많은 국민을 길바닥에 나앉게 만들고도 오바마 정부에 사사건건 발목을 잡을 수 있는 공화당의 굳건한 기반도 엄연히 존재한다. 우리 사정에 비춰보면 천막 당사나 석고대죄 같은 이벤트조차도 미국 공화당에게는 필요 없어 보인다. 오바마의 유화적인 태도도 개인적인 스타일보다는 권력 기반의 취약성에서 비롯한 바 클 것이다.
프랭크가 보여주는 미국 정치판의 "생얼"은 한마디로 추악하다. 그런 수작에 쉽사리 넘어가서 공화당에 승리를 안겨주는 대중은 가련할 지경이다. 맹목적 탈규제로 그만한 고통을 겪고도 티파티 운동이 규제 철폐를 내세우며 주도하는 정국을 보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프랭크의 책을 읽고 한국 정치를 돌아보면 적잖은 위안이 생긴다. 우리는 미국만한 위기를 겪지도 않았는데 보수 후보조차 경제 민주화와 복지를 하겠다고 불러대고서야 가까스로 집권에 성공했으니 말이다. 보수 헤게모니의 높은 벽을 가리키며 절망을 운운하는 게 객쩍어 진다. 미국에서는 프랭크의 이야기가 끝나는 바로 그 시점에 월가 점령(Occupy Wall Street)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됐고, 민주당의 오바마도 재선에 성공했다. 한국 정치는 어떤 길을 가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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