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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의 구조> (가라타니 고진 지음, 조영일 옮김) 서평

 

http://joongang.joinsmsn.com/article/aid/2012/12/29/9902642.html
[책과 지식] 소득 재분배만으로 경제민주화 가능할까 (중앙일보, 박유하· 세종대 교수(일문학), 2012.12.29 00:54)
믿기지 않는 일이지만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한국의 지적 공간에선 일본의 ‘지성’ 혹은 ‘사상’ 같은 것은 거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필자가 97년 『일본근대문학의 기원』을 번역하며 ‘일본의 지성’으로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71)을 선택한 것은 그의 글에 ‘타자’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당시의 한국에 ‘타자’가 실종된 ‘우리’만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80년대가 주변의 지적 상황에 눈길을 돌릴 여유가 적었던 탓도 있었지만 냉전종식과 세계화라는 큰 물결이 민족주의에 불을 붙이면서 그런 상황은 꽤 오래 갔던 것 같다.
그런데 ‘세계’라는 타자와 제대로 만나려면, 무엇보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다행히도 가라타니 고진의 내셔널리즘 비판은 긍정적으로 수용됐다. 그리고 15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그는 이제 한국 문학비평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외국비평가로 자리 잡았다.
가라타니는 내셔널리즘과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양심적인 일본’의 지식인으로, 그리고 칸트와 마르크스를 재해석하는 비평가로서 우리 앞에 처음 나타났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칸트나 마르크스에 대해 말하는 기존의 우회적 방식을 버리고 직접 그들과 나란히 앉아 ‘세계’에 관해 사고한다. 그리고 이 세계가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할지를 설득력 있게 들려준다.
그는 미래를 생각하기 위해 기원전 까마득한 시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소크라테스와 공자부터 월러스틴과 네그리까지 동서고금의 사상가들을 총동원해 그들의 사고를 수렴·비판하면서, ‘이 세계의 구조’를 이루는 자본과 국가와 네이션(국민·인민)과 종교의 관계에 관해 고찰한다.
가라타니는 마르크스의 이론을 평가하면서도 그것이 ‘생산양식’(토지·노동 등 생산수단과 이를 소유하는 사회관계)에 근거한 사고였고 ‘국가’의 능동성을 경시한 데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그런 생산양식 대신 ‘교환양식’을 고찰해야 세계시스템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왜 공산주의와 사회주의가 강력한 국가주의적 전제국가로 존재했고, 여전히 존재하는지도 설명한다. 그렇게 이 책은 두 가지 얼굴을 지녔다.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진보사상의 책이자 현실의 공산주의·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결정적 비판서이기도 하다.
그의 대안은 ‘호수’(互酬·서로 주고 받음)의 교환양식이 이루어졌던 고대 씨족사회의 시스템을 회복하는 일이다. ‘국가=자본=네이션’을 지양하는 시스템이다. 그는 구체적 방법으로는 존 롤즈가 『정의론』에서 말한 ‘재분배’를 통한 평등 대신 ‘교환적 정의’의 실현을 제시한다. (376쪽) 진정한 사회주의란 분배적 정의, 즉 재분배에 의해 부의 격차를 줄이는 게 아니라 애당초 부의 격차가 생기지 않는 교환적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다. (331쪽).
가라타니는 이렇게도 말한다. “국가와 국가간에 경제적인 불평등이 있는 한 평화는 존재할 수 없다”고. “칸트의 영원평화는 일국만이 아닌 다수의 나라에서 교환적 정의가 실현됨으로써만 실현된다”고. (335쪽).
그는 이런 평화가 실현된 사회로 ‘세계공화국’ 개념을 든다. 그건 각 국가들이 무기를 가진 채 주장하는 반전(反戰) 상태가 아니다. 국가간의 적대 자체가 사라진 세계다. 그는 이를 위해 모든 국가가 유엔에 군사주권을 증여할 것을 제창한다.
물론 그의 결론에 바로 수긍하는 이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타자를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봐야 한다고 했던 칸트의 모럴을 상기하는 일이 그런 이상의 실현을 가능케 할 것이라는 그의 말은 설득력이 있다. 여기서 중요한 건 경계심의 제거이고, 이익을 포기하는 일일 터.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칸트와 마르크스의 사상을 보완한 가라타니의 자본론이자 국가론이자 정의론이다.
그는 개인과 개인뿐 아니라 국가와 국가간의 정의에 대해서도 설명한다. 제국과 제국주의의 차이는 무엇인지, 자본과 국가와 네이션이 왜 그토록 강하게 결합돼 있는지, 일본은 왜 서양열강에 식민지화되지 않고 제국주의를 행사할 수 있었는지, 또 중국은 그 위기를 어떻게 벗어날 수 있었는지를 그림 그리듯 명료하게 가르쳐준다. 인간을 수단화하는 자본주의자들에게도, 국가에 의한 재분배만이 경제민주화를 이룰 것으로 생각하는 반자본주의자들에게도 이 책이 똑같이 유익해 보이는 이유다. 그가 말한 대로 환경파괴가 인간에 의한 환경착취고, 또 그게 ‘인간이 인간을 착취하는 사회에서 생긴다’(297쪽)는 지적에 공감한다면, 진보든 보수든 함께 국가와 자본의 지양에 나서지 않을 방도는 없다.
이 책은 마이클 샌댈의 『정의란 무엇인가』보다 훨씬 깊고 넓게, 세계의 한가운데에 자신을 놓고 나의 문제를 세계의 문제로 사고하도록 도와준다. 대부분의 세계사 책이 ‘역사=팩트’를 나열하면서 그 팩트를 자신들의 현재에 맞추어 해석하는 것에 비해 이 책은 ‘역사의 역사’를 말하는 일로 역사의 진짜 구조를 보여준다.
이제 우리가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우리는 한때 제국으로 편입됐던 나라였고, 근대국민국가를 형성했던 식민지였고, 자유주의적 독재국가와 그리고 신자유주의의 극단을 거쳐왔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라타니가 비판하는 관료제와 상비군을 유지 중인 나라다.
그런 대한민국을 돌아본다면 경제민주화를 단순한 재분배가 아니라 교환양식의 정의로서 실천하는 가능성이 비로소 보이지 않을까. 페이지마다 담긴 빛나는 예지에는, 그 가능성을 믿게 만드는 힘이 있다. 일본어판을 수정·보완한 한국어판이 현재로서는 정본이라는 역자의 설명, 그리고 가라타니의 간결한 문체를 살리면서 꼼꼼한 주석을 붙인 번역 역시 이 책을 빛내고 있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567456.html
새 사회 만들 결정적 열쇠는 ‘증여’ (한겨레, 최원형 기자, 2012.12.28 20:19)
<세계사의 구조> 가라타니 고진 지음, 조영일 옮김/도서출판 b·2만6000원
교환양식 변천따라 역사 재구성
유통과정에서 자본에 대항하는
협동조합 등 새 교환시스템 주목

일본을 대표하는 사상가이자 비평가인 가라타니 고진(사진·69)이 2010년 펴낸 저작 <세계사의 구조>가 국내 출간됐다. 그의 저작들을 우리말로 옮겨 온 조영일씨는 이 책에 대해 “40년 동안의 저작활동을 집대성하면서도 그 모든 것을 한계까지 밀고 나간, 명실상부한 ‘가라타니의 주저’”라고 말했다. 그동안 가라타니가 비평가로서 기존 텍스트를 뒤집고 교차시키며 새로운 착상들을 도출하는 데 주력했다면, <세계사의 구조>에서는 사상가로서 지적 작업들을 모두 응축해 생각의 체계를 축조해냈다는 평가다.
가라타니는 2001년 <트랜스크리틱>에서 칸트와 마르크스를 교차시켜 읽으며, 근대 사회구성체는 마치 ‘보로메오의 매듭’처럼 ‘자본-네이션(국민)-스테이트(국가)’의 결합장치라고 분석한 바 있다. ‘자본주의 경제’는 경제적 격차와 대립을 일으키는데, 공동성과 평등성을 지향하는 ‘네이션’은 그런 격차나 모순들의 해결을 요구하고, ‘스테이트’는 재분배로 그것을 실행한다. 그러니까 근대의 사회구성체는 이 삼위일체의 회로 속에 갇혀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애초 각 나라에서 일어나는 자본과 국가에 대항하는 움직임들의 연합(‘어소시에이션’)이 이 삼위일체의 회로에서 벗어날 계기를 만들 수 있을 것이란 전망을 제시했으나, 2001년 9·11 이후 심각한 고민에 빠진다. “국가나 네이션이 단순히 ‘상부구조’가 아니라 능동적 주체로서 활동하기 때문에 자본과 국가에 대한 대항운동은 일정 단계를 넘어서면 반드시 분열된다”는 점을 통감한 것이다. 그는 그 뒤 2006년 <세계공화국으로>를 통해 국가 외부에서 국가를 소멸시킬 힘을 고민하고, 그 방향점을 ‘세계공화국’이란 이념으로 제시하게 된다.
<세계사의 구조>에서 가라타니는 이를 밑받침할 이론적 체계의 구축을 시도한다. 주된 대결상대는 자본-네이션-스테이트의 삼위일체성을 파악하고 근대 사회구성체 역사를 체계화한 헤겔이다. 마르크스는 헤겔을 비판했지만, 삼위일체의 회로에 주목하지 못하고 자본주의 경제를 하부구조로, 국민·국가를 상부구조로 간주했다. 이로부터 ‘자본주의가 없어지면 국가도 없어진다’는 순진한 견해나, 반대로 강고한 삼위일체의 현실을 이길 수 없다며 이념 자체를 조소해버리는 태도가 비롯됐다는 것이다.
가라타니는 헤겔이 제시한 삼위일체성을 놓지 않으면서도, 마르크스와 칸트의 지적 자산에 기대어 헤겔의 ‘역사결정론’을 비판해나간다. 사회구성체 역사를 ‘생산양식’ 아닌 ‘교환양식’으로 파악하고, 지배적 교환양식의 변천에 따라 사회구성체와 세계시스템이 달라져온 맥락을 총체적으로 재구성한다. 그는 증여-답례와 같이 호혜적인 ‘교환양식A’와 약탈-재분배에 의거한 ‘교환양식B’, 합의에 의한 상품교환인 ‘교환양식C’, 그리고 교환양식A의 고차원적 회복으로서 자유롭고 상호적인 ‘교환양식D’를 제시한다. 이 가운데 어떤 교환양식이 지배적이냐에 따라 사회구성체와 세계시스템 성격이 좌우된다. 예컨대, 교환양식A는 호혜성 원리에 따라 불평등을 억제한 씨족사회 구성체와 국가 없는 ‘미니세계시스템’을 구축했다. 또 교환양식B는 아시아적·고대적·봉건적 사회구성체와 ‘세계=제국’ 시스템을, 교환양식C는 자본주의적 사회구성체와 ‘세계=경제’라는 시스템을 일으켰다고 한다.
이 책에서 제시하는 오늘날의 과제는 교환양식D를 추구해 새로운 사회구성체와 세계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다. “재분배에 의해 부의 격차를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호혜’라는 교환양식의 고차원적인 회복을 통해 애초 부의 격차가 생기지 않는 교환적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 핵심인 체제다. 곧 ‘증여’가 가진 힘을 되살려, 격차를 낳는 교환시스템 자체를 폐기하는 쪽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가라타니는 이런 맥락에서 소비자-생산자 협동조합, 지역통화·신용 시스템같이 교환양식을 다루는 ‘유통과정’에서 자본에 대항하는 움직임들을 새로운 사회구성체를 만들기 위한 운동으로 주목한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일국뿐 아니라 세계시스템 차원에서도 이뤄져야 한다는 점이다. 칸트의 ‘영구평화’ ‘세계공화국’ 개념에 영향을 받은 가라타니는 국가간 관계에서도 호혜적인 교환양식을 적용한다고 강조한다. 가라타니는 이런 새로운 세계시스템의 출발점을 현재 국가연합기구인 ‘유엔’의 개혁, 곧 유엔으로 하여금 교환양식D를 추구하도록 하는 데서 찾는다. 예컨대 어떤 나라에서 유엔에 군사적 주권을 증여하는 혁명이 일어난다면, 이것이 ‘세계동시혁명’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는 전망이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12282037385&code=900308
[책과 삶]생산양식이 아닌 교환양식을 기치로 마르크스주의서 ‘목숨 건 도약’ (경향, 박수연 | 충남대 교수·문학평론가, 2012-12-28 20:37:38)
▲ 세계사의 구조…가라타니 고진 지음·조영일 옮김 | 도서출판b | 477쪽 | 2만6000원
몇 가지 이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가라타니 고진의 <세계사의 구조>는 세계사적 경제위기가 엄습한 때에 시의 적절한 독서 대상이 될 만하다. 한국사회의 정치적 선택이 납득되지 않는 사람이라면 더 그렇다. 자본주의 사회구성체에 대해 그것의 이후까지를 포함하여 발본적(radical) 논의를 열 수 있도록 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가치의 생산보다 금융자본의 이동에 의해 출렁대는 경제구조가 주목되어야 한다면, 이와 관련하여 생산양식보다 교환양식을 강조하는 그의 입론이 앞장서고, 이 무참한 시대 앞에서 무람하게 역사를 돌아본다면 그의 세계공화국이 언뜻 미래를 열어보여주는 듯도 하다. 경제학자라기보다는 사상가라서, 그의 주장은 미시경제학의 논리적 치밀함보다 굵직한 얼개를 보여주고, 주장하는 내용의 그물을 펼치는 일에 능란하지만, 독자들은 자르고 밀어내며 명쾌하게 논의의 속살을 드러내는 그의 문체에 끌려들어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음을 불현듯 알게 될 것이다.
가라타니 고진을 한국 인문학계에 널리 알려지도록 만든 책은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이다. 근대적 제도와 심성이 어떻게 근대문학을 형성시켰는가를 일본문학으로 입증하면서도 그 일본문학이 한국 근대문학의 기원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언급함으로써 한·일비교문학의 지평을 그 책은 한단계 심화시키기도 했다. 일본의 내부 식민지 홋카이도를 바라보는 시선이 식민지 조선에 대한 시선과 결합되었더라면 포스트 식민주의와는 다른 더 진지한 논의를 가져왔으리라는 아쉬움이 없는 바는 아니지만, 그 책은 한국문학 전공자들에게도 거의 에피고넨의 수준에 이르는 열광을 불러왔던 것이다. 그리고 가라타니는 <트랜스크리틱>이라는 책으로 한번 더 강하게 한국 땅에 상륙했다. 미국에서 2001년에 출판되고, 한국에도 띄엄띄엄 소개되다가 2005년에 번역된 이 책이 부제목으로 달고 있는 것이 ‘칸트와 마르크스 넘어서기’이다. 직역하면 ‘초월론적 비판’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책에서 가라타니는 칸트로 마르크스를 읽고 또 마르크스로 칸트를 읽는 일을 감행한다. 요컨대 관념론의 대가와 유물론의 대부를 결합시키는 일이 가라타니의 과제였던 것이다. 이런 횡단적 독해의 입각점이 또한 주목할 만하다. 그에 의하면 초월론적 태도란 주체의 의식에 선행하는 형식을 드러내기 위해 타자의 시선을 투입하는 행위를 뜻한다.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행한 일이란 다른 경제학자들이 놓치고 있는 경험 형식, 즉 상품경제를 성립시키는 초월론적 형식을 드러내는 것이었고, 그것이란 노동력이 투하된 물적 재화 자체가 아니라 그 물적 재화가 놓인 관계의 장을 주목하는 것이었다는 것이다. 이 관계의 장이 가라타니의 유명한 개념인 ‘목숨을 건 도약’과 연결되는 것은 그러므로 너무도 당연한 것일까. 이 초월론적 태도가 ‘목숨을 건 도약’과도 같이 <세계사의 구조>에서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그 도약이 <근대문학의 종언>이라는 제목으로 이루어져 한국문단을 흔들었던 때도 바로 엊그제이다. 그때는 한국문학이 끝난 듯했더랬는데, 정치적 문학이 근대문학의 본질이라는 의미에서 본다면 지금 한국문학은 가장 근대적인 문학이기도 하다.
<세계사의 구조>는 그의 핵심적 입론인 ‘교환양식론’을 설명하는 서설 부분을 시작으로 해서 씨족사회의 미니 세계시스템, 국가가 탄생한 이후의 고대국가들이 구성하는 세계 제국, 그리고 근대세계시스템과 그 이후의 세계공화국을 논증한다. 독자들이 공들여 읽어 볼 부분은 당연히 서설이다. ‘교환양식’이라는 말에 그의 주장의 핵심이 들어있을뿐더러 그것을 끌어오는 그의 초월론적 태도도 다시 서설의 끝부분에서 주장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강조되는 그의 논점은 ‘생산양식론’을 버리고 ‘교환양식론’으로 나아가자 정도가 될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은 존재들 사이의 관계론이기도 하고, 그래서 자본주의의 기초인 상품들의 관계론이기도 하다. 이 관계론이 이른바 ‘트랜스크리틱’ 기초임을 강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물론 가라타니의 주장에 의해 마르크스주의의 가치론이 모두 붕괴될 수는 없을 것이다. 또 관계론이 가라타니에 의해 처음으로 주장되는 것도 아니다. 언뜻 떠오르는 것만 해도 가치론에는 투하된 노동의 패러다임을 강조하는 것 이외에도 사회관계를 강조한 힐퍼딩이나 룩셈부르크가 있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운 일이지만, 지난 시대에는 문학전공자인 나조차도 소련의 정치경제학 교과서를 읽으며 그들을 비난하곤 했었다. 그런데 하나의 입장이 무릇 고정되어서 강요될 것이 아니라 과연 타자를 받아들여서 그 타자를 내재화함으로써만 진정한 보편적 입장으로 거듭날 수 있는 것이라면, 관계론으로서의 교환양식론은 새삼 진지하게 생각할 부분이 아주 많다.
서평이기 때문에 가라타니의 이론체계에 대해 묻고 싶은 것이 있다. 일제말 천황제하에서 세계사의 논리를 강조하던 근대초극론자들과는 정반대의 편향이 가라타니에게서 보이기도 한다는 점이다. 그의 이론의 출발점은 당연하다는 듯이 서양적인 것이다. 물론 그것을 증명하는 데에는 일본의 증거들이 사용된다. 이것은 일본이 서양화되었다는 뜻일까 아니면 아직 일본의 이론을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뜻일까? 지금 논의의 출발점이 칸트라면 <근대문학의 종언>을 말할 때 논의의 출발점은 A 코제브이다. 칸트는 그의 ‘숭고론’에서 아시아 아프리카인을 아주 무능한 존재로밖에는 인식하지 않았던 인종주의자이지 않았는가? 그런데 왜 여전히 칸트에서 출발해야 할까? 이 의문에 답하는 것은 가라타니가 식민지 홋카이도를 언급하다가 이유 없이 빼버린 사태를 설명하는 일이기도 한데, 이 모든 것을 생각하더라도 <세계사의 구조>는 이 자본주의의 무참함을 넘어서기 위해서라도 신년에 꼭 한번 읽어볼 만한 책이다.
 
http://newsmaker.khan.co.kr/khnm.html?mode=view&code=116&artid=201212311342011&pt=nv
[북리뷰]‘마르크스의 헤겔비판’을 다시 한다 (2013 01/08ㅣ주간경향 1008호, 이현우 <서평가·필명 ‘로쟈’>)
일본의 대표적 비평가 가라타니 고진의 문제작 <세계사의 구조>가 번역돼 나왔다. “교환양식을 통해 사회구성체의 역사를 새롭게 봄으로써 현재의 ‘자본=네이션=국가’를 넘어서는 전망을 열려는 시도”라고 저자는 서문에서 적었다. 그런 시도 자체는 낯설지 않다. 교환양식이란 관점은 전작인 <트랜스크리틱>에서부터 제시한 바 있다. 무엇이 달라졌고, 얼마나 더 전진한 것일까.
궁금증에 답하기라도 하듯 고진은 <트랜스크리틱>과 <세계사의 구조>의 차이부터 설명한다. 애초에 그는 “마르크스를 칸트로부터 읽고, 칸트를 마르크스로부터 읽는” 작업을 ‘트랜스크리틱’이라 명명했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텍스트’로 읽는 독특한 방법을 제시했지만 기본적으로는 문학비평가를 자임했다. 하지만 2001년에 일어난 9·11은 자본과 국가에 대해 더 근본적으로 고찰할 필요성을 제기했다. ‘텍스트 독해’라는 방법론을 넘어서 독자적인 ‘이론적 체계’를 만들도록 부추긴 것이다. 즉 <트랜스크리틱>이 비평가의 저작이라면 <세계사의 구조>는 이론가 혹은 사상가의 작품이다.
고진은 마르크스의 헤겔 비판을 그 연장선상에서 완성하고자 한다. “나의 과제는 어떤 의미에서 마르크스의 헤겔 비판을 다시 하는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헤겔 비판을 반복한다는 것은 동시에 마르크스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기도 하다. 자본과 네이션, 국가를 상호연관적으로 파악한 헤겔을 비판하면서 마르크스는 자본제 경제를 하부구조로, 그리고 네이션이나 국가는 거기에 얹힌 상부구조로 간주했다. 자본주의라는 경제적 하부구조를 철폐하면 국가나 네이션은 자동적으로 소멸된다는 관념은 거기에서 나왔다. 하지만 자본주의를 극복하려는 마르크스주의적 운동은 국가와 네이션을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렇다고 해서 고진은 ‘상부구조의 상대적 자율성’을 끌어오지 않는다. 그의 독창적인 착상은 네이션과 국가가 자본과는 다른 경제적 하부구조에서 기인한다는 점에 있다. 바로 교환양식이다. 마르크스는 생산양식의 관점에서 세계사의 구조를 설명했지만, 이제 고진은 교환양식을 통해 그것을 해명함으로써 마르크스의 설명을 보완하고자 한다. 교환양식을 그는 A(호수), B(약탈과 재분배), C(상품교환), 그리고 D(X), 네 가지로 구분한다. 발생사적으로 보자면 A는 부족사회의 지배적인 교환양식이고, B는 국가사회의 지배적 교환양식이다. 그리고 C는 자본제 사회의 지배적 교환양식이며, 고진이 아직은 X라고 부르는 교환양식 D는 증여와 답례로 이루어진 교환양식 A의 고차원적 회복으로서 앞으로 도래할 세계공화국의 하부구조다.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해명한 것은 주로 교환양식 C의 세계였다. 때문에 다른 교환양식이 형성하는 네이션과 국가에 대해서는 적절하게 해명할 수 없었다. 반면에 고진은 교환양식이란 이론틀을 통해서 사회구성체의 역사적 변천과정을 새롭게 해명한다. 더불어 ‘자본=네이션=국가’를 넘어설 수 있는 전망을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확보한다.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자본=네이션=국가’라는 세계 시스템을 일거에 지양하는 ‘세계 동시혁명’을 통해서 가능하다. 마르크스의 이 신화적 비전은 전 세계적 차원의 폭력적 봉기라는 이미지로 각인돼 지금은 기각됐지만 고진은 그것을 다시금 복원한다. 다만 방법이 다를 뿐이다. 가령 일국에서 군사적 주권을 유엔에 ‘증여’하는 것이 일국혁명이다. 그러한 행위가 많은 국가로 확산된다면 그것이 바로 세계 동시혁명이다. 비현실적이라고? 하지만 우리가 그런 혁명을 지향하는 운동을 전개하지 않으면 남은 가능성은 세계 전쟁이라고 고진은 말한다. 낙담할 필요는 없다. 국제연맹이나 국제연합도 세계대전의 산물이었으니까. 곧 세계공화국의 실현이 쉽지는 않더라도 그 가능성을 제거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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