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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K. 헌트의 <자본주의에 불만 있는 이들을 위한 경제사 강의> 서평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21026113133
경제학자, '마녀 사냥' 성직자와 다를 게 뭐야? (프레시안, 류동민 충남대학교 교수, 2012-10-26 오후 6:20:46)
[프레시안 books] <자본주의에 불만 있는 이들을 위한 경제사 강의>
"역사를 잊은 자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말이 현대 경제학만큼 어울리는 경우를 찾기는 어려울 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미국에는 이른바 연구 중심 대학의 경제학과가 적게 잡아도 50여 개가 넘지만, 경제학설사에 관한 주제로 박사 학위 논문을 쓸 수 있는 곳은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몇 년 전이던가 주류 경제학자들을 중심으로 경제학설사를 경제학의 분류 체계에서 아예 빼버리려는 시도가 이뤄진 적도 있었다.
미시 경제학을 공부하는 대학원생은 레옹 발라를 읽지 않고 거시 경제학을 공부하는 대학원생은 존 메이너드 케인스를 읽지 않는다. 물론 여기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이를테면 천문학과 학생이 이미 틀린 이론으로 판명된 천동설을 진지하게 공부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고고학적 흥미가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과거의 "틀린" 경제학 이론에 관해 공부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경제학이 "과학"이라는 것, 더구나 과학은 항상 틀린 지식을 기각하고 맞는 지식을 새롭게 추가함으로써 일직선으로 발전한다는 생각에 기초하고 있다. 과학의 반대는 이데올로기이다. 경제학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철저하게 가치중립적인 실증 과학이라는 믿음, 그것이 현대 주류 경제학의 기초에 놓여 있는 셈이다.
최근 번역 출간된 미국의 비주류 경제학자 E. K. 헌트의 <자본주의에 불만 있는 이들을 위한 경제사 강의>(유강은 옮김, 이매진 펴냄)는 이러한 믿음에 정면으로 맞선다. 그에 따르면 경제학은 기본적으로 이데올로기일 수밖에 없다. 헌트에 따르면 "이데올로기란 한 사회의 사회관계와 경제 관계를 도덕적으로 정당화하는 경향을 띠는 신념과 관념을 가리킨다."(18쪽)
그런데 이데올로기는 학자나 정치가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사회 구성원들은 "대개 이런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하며, 결국 다른 사람뿐만 아니라 자신의 기능적 구실도 도덕적으로 옳고 사회가 생산물을 분배하는 방식도 공정하다고 믿게 된다. 이런 공통된 신념이 사회에 응집력과 생명력을 부여한다. 이런 신념이 없을 때에는 혼란과 투쟁이 생겨나고, 견해 차이가 심해지면 결국 혁명이 일어난다."(18쪽)
우리가 객관적 거리를 유지할 수 있는 역사 시대를 살펴보면 이러한 지적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노예제 사회에 살고 있는 노예들은 자신이 노예가 되어 마땅함에 대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나름대로의 이론 체계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수많은 노예들이 노예됨의 부당함을 깨닫는 순간, 노예제 사회에는 균열이 발생하기 시작한다.
사람을 죽고 다치게 만드는 전쟁에 참가하는 (또는 참가할 것으로 상정되는) 군인들에게 총검술 훈련보다 정훈이 더 중요한 것도 그 때문이다. 내가 죽여야 할 자가 나와 똑같이 사랑하는 이를 가진, 살아 숨쉬는 사람임을 깨달아서는 죽일 수 없다. 적은 그저 뿔 달린 도깨비이거나 신의 이름으로 처단되어야 할 괴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믿음이 끊임없이 내면화하여야 하는 것이다.
원래 제목이 <Property and Prophets>이므로 직역하자면 아마 "소유와 선지자들" 정도 될 터인데, 이번에 나온 것은 제7판이고 1972년에 출간된 그 초판은 이미 1979년에 <소유의 역사>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바 있다. 부제인 "경제 제도와 이데올로기의 진화(The Evolution of Economic Institutions and Ideologies)"가 책의 내용을 더 잘 설명해준다. 이데올로기는 단순히 무에서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해당 시대의 경제적 제도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 책은 경제의 역사, 즉 경제사와 경제학의 역사, 경제학사를 연결 지어 설명한다. 물론 여기에서의 경제사란 역사 그 자체라기보다는 '이론적으로 해석된 역사'일 것이다. 예를 들어 기독교의 금욕적 교리가 중세 사회에서 지배 이데올로기로 기능하는 것에 관한 논의는 비교적 잘 알려진 얘기이기는 하지만 매우 차분한 느낌으로 서술된다. 총14강으로 구성된 책에서 마르크스의 경제 사상이 2강을 차지하는 것은 현대 경제학의 커리큘럼에서 보자면 기형적이다. 그렇지만 헌트의 논의는 예상보다 훨씬 균형 있는 관점을 취한다.
나는 대학생이던 1980년대 초중반에 이 책의 존재를 알고는 있었으나 애석하게도 제대로 읽은 기억은 없다. 그 시절 내 주위의 많은 또래들은 폭압적인 군사 정권에 불만을 갖고 있었고 그것에 저항하기 위한 수단이 될 만한 것이라면 닥치는 대로 읽었다. 마르크스에 대한 관심을 채우기 위해서는 불법 복사본을 떠듬거리는 일본어로 읽거나, 심지어는 육군사관학교의 소비에트 철학 비판 교재, 말하자면 반공 교과서를 통해 원래 이론의 그림자를 더듬어야 했다.
역자 후기에 서술된 초판 번역의 사정은 "노예의 언어"로 읽고 말해야 했던 1980년대의 상황을 잘 드러내 준다. 마르크스의 경제 사상을 서술한 6강과 7강은 한 쪽도 안 되는 분량으로 축약돼 5강 말미에 삽입됐고, 제국주의와 혁명적 사회주의를 다룬 11장은 내용이 대폭 축소된 채 제10강과 합해졌다고 한다. 일본을 지칭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입에 담기도 위험한 단어였던 'imperialism'이라는 단어는 '제국주의'가 아니라 '경제적 팽창주의'라고 번역되었다.
어쩌면 내 또래들이 그렇게 '불온한' 책들을 많이 읽었던 것은 마치 식민지 시대 공산주의자들이 공산주의 자체보다는 독립 운동의 이론적 무기로서 공산주의를 읽었던 것과 비슷한 이치일지도 모른다. 군사 정권이 허무하게(?) 무너지고 나서 예를 들어 미국 유학이나 연수 쯤 다녀와서 시장 경제의 찬미자가 되어 물불 가리지 않고 덤비는 이들도 많아졌던 걸 보면, 몰상식한 정권에 대한 불만을 자본주의에 대한 불만으로 착각하는 경우도 많이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1980년대 젊은이들이 가진 '자본주의에 대한 불만'이 군사 정권의 도덕성에 대한 불만과 뒤섞인 것이었다면, 오늘날의 많은 이들은 사회가 생산물을 분배하는 방식이 과연 공정한 것인가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다. 오히려 1980년대에 비해 2012년의 한국 사회는 자본주의에 대해 더욱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오히려 이제야말로 경제학의 역사를 돌이켜보고 그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한 시기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책을 넘기면서 마치 지금의 한국 사회를 설명하는 듯한 생생한 구절 두 개를 뽑아 소개한다.
고전적 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단순하고 대중적으로 변형해서 퍼뜨리는 미국의 유명한 단체에는 미국제조업협회, 경제교육재단, 입헌 정부를 위한 위원회, 미국상공회의소, 미국기업협회 등이 있다. (295쪽)
공간적 배경을 한국으로 바꿀 때 채워 넣을 만한 단체들의 이름은 내 머리 속에서 줄줄이 떠오른다. 한국에서 자유주의라는 말이 어떻게 타락하고 왜곡되었는가를 생각해 보기 위해서는 얼마 전 뜬금없이 중고교 교과서까지 뒤져가며 민주주의를 '자유'민주주의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던 해프닝을 떠올리는 것으로 충분하다.
반공주의는 공포에 사로잡힌 사람은 희생양을 필요로 한다는 잘 알려진 사실에서 힘을 얻는다. 자본주의 역사를 살펴보면, 보수주의자들은 항상 자본주의 비판자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도매금으로 묶는 식으로 싸움을 벌였다. 그러고는 이 집단을 위협적인 악의 세력으로 묘사하는 보수적 선전 공세를 펼쳤다. 이런 전술이 성공을 거두는 정도만큼 두 가지 이점이 드러났다. 보수적 선전 공세는 사람들의 마음을 걸어 잠가서 비판자들의 사상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게 했고, 또한 정부나 우파 자경단이 비판자들을 폭력적으로 억압하는 사태를 대중이 묵인하게 만들었다. (304쪽)
이 단락의 한국 버전을 만들어보는 것도 이 책을 읽는 또 하나의 서글픈 흥밋거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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