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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카스 선스타인 『왜 사회에는 이견이 필요한가』『우리는 왜 극단에 끌리는가』

 

"2002 미선·효순은 단순 사고!" 외칠 수 있는가? (프레시안, 김성희 북 칼럼니스트, 2012-06-08 오후 6:44:38)
[김성희의 '뒤적뒤적'] 카스 선스타인의 <왜 사회에는 이견이 필요한가>(카스 선스타인 지음, 송호창·박지우 옮김, 후마니타스 펴냄)
다소 길지만 이 책에 인용된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 일부를 소개한다. "다른 권력의 횡포와 마찬가지로 다수의 횡포도 주로 공권력 행사를 통해 그 해악이 처음 목격되었으며, 지금도 다르지 않다. (…) 사회는 스스로 뜻을 관철할 수도 있고 실제로도 그렇게 한다. (…) 그러므로 정치 권력자들의 횡포를 방지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뿐만 아니라 사회에서 널리 통용되는 의견이나 감정이 부리는 횡포 그리고 사회가 통설과 다른 생각과 습관을 가진 이견 제시자들에게 법률적 제재 이외의 방법으로 윽박지르면서 통설을 행동지침으로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는 경향에 대해서도 대비해야 한다."
맞는 말 아닌가. 예를 들어 10주기를 맞은 '미선·효순 양 사건'과 관련해 "단순 사고사였다. 촛불 집회와 같은 사회적으로 들고 일어설 만한 사안이 아니었다"라고 공공연히 말하려면 때와 장소를 가려야 한다. 그 반대로 "북한인권법은 내정 간섭이자 외교 관례에 어긋난 게 맞다. 실효성도 의심스럽다"고 공언하려면 상당한 역풍을 맞을 각오를 해야만 하는 것이 현실 아닌가.
소수 의견을 용납하지 못하는 사회는 건강하지 못하다. 그러니 사실 책 제목-원제를 그대로 옮겼다-에 대한 답은 자명한 셈이다. 하버드 대학 로스쿨 교수인 이 책의 지은이는 이를 이른바 '대세'와 '통설'에 맞서는 이견은 실수와 불의의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 필요하다고 한다. 그래선지 책은 이견의 필요성을 강조하기보다 사회적 압력을 행사하는 '통념'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분석하는 데 비중을 두었다.
그에 따르면 동조, 사회적 쏠림(social cascade), 집단적 편향성(group polarization) 때문에 이견이 설 자리가 좁아진다. 동조는 다른 사람의 행위나 의견을 따라서 하기다. 사회적 쏠림은 동조가 무리지어 일어나는 것이고, 집단적 편향성은 집단 구성원들이 토론을 거친 후에, 토론 이전보다 더 극단적인 견해를 가지게 되는 현상이다.
지은이는 그 원인으로 몇 가지를 드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정보의 부족 또는 왜곡과 평판의 압력이다. 그는 2001년 수백 명의 미국 법학 대학 교수들이 헌법에 근거해, 테러리스트로 의심받는 사람들을 군사재판에 회부하도록 한 부시 대통령의 결정을 비판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던 예를 든다. 법학 교수라 해서 모두 헌법 전문가는 아니다. 그에 따르면 성명서에 서명한 대부분이 법적 쟁점에 대해 전문 지식을 가지고 있던 것이 아니라 단지 피상적으로 믿을 만하지만 실제로는 별다른 정보가 없는 다른 사람들-동료 교수일 가능성이 크다-의 판단에 따랐던 것이다. 이는 어쨌든 성명서가 보기만큼의 무게를 지니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지은이는 의사들의 처방, 판례 등을 예로 들며 동조와 사회적 쏠림은 장님이 장님을 인도하듯, 앞선 사람들의 결정도 결국 다른 사람들의 결정을 따랐을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좋은 평판을 얻고자 하는 욕망은 집단 편향성의 주요 요인이다. 극단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자신이 옳다는 확신을 강하게 갖는 경우가 많은 반면 확신이 약한 이들은 중도적인 의견을 취하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좋은 게 좋으니까'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까봐' 다수라고 여겨지는 이들의 의견에 동조하게 되어 진보적인 이들이 모이면 더욱 진보적인 의견이, 보수적인 집단에선 더욱 보수적 의견이 득세를 하게 된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지은이는 미국의 정책 결정 과정을 분석한 어빙 야니스가 제시한 집단 사고의 몇 가지 증후를 소개한다. 야니스에 따르면 집단적 자기 합리화를 통해 한 번 내려진 결정을 돌아보게끔 하는 경고 혹은 정보를 무시하는 폐쇄적 사고, 적들이 너무 사악해서 협상이 불가능하다거나, 적들이 너무 약하고 멍청하다는 등의 판에 박힌 생각이 이 같은 집단 사고의 특징이다. 또한 야니스는 집단 결속력이 강한 경우, 집단의 정책 결정에 전문가의 자문이나 외부 평가를 받을 수 없는 경우, 지도자들이 열린 토론과 비판적 평가를 장려하지 않을 경우, 구성원들의 사회적 배경과 정치적 신념이 서로 비슷한 경우 잘못된 결정을 내릴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했다.
이런 경향은 정파를 가리지 않아 '정치적 올바름'이 대세를 이뤘던 1980년대 미국 대학에서 공화당 지지나 동성애자 권익 반대 입장을 취했던 한 학생은 "보수주의자라고 말하는 것은 다양성을 포용하지 않는다고 책망하는 바로 그 사람들의 악의적인 비난의 대상이 되기를 선택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고 기억했다.
지은이는 일반적으로 동조하는 사람들은 집단의 이익을 위해 침묵하는 것이며 이견 제시자는 자신의 생각대로만 행동하는 이기적인 개인으로 해석되지만 실은 그 반대라고 지적한다. 동조자들은 그 자신에게만 이익이 되지만 잘못된 관행이나 집단적 합의의 모순점을 지적하는 이들은 처벌, 따돌림 등 불이익을 무릅쓰고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위하는 것이란 설명이다.
책은 2009년에 번역판이 나왔으니 사실 좀 묵은 것이다. 또 다원적 무지, 자기 검열, 침묵의 비용 등 다양한 개념과 사례를 제시하지만 우리가 아는 것을 학술적으로 설명하는 '정교한 장치'에 불과하다고 볼 수도 있다. 또한 조직이나 국가는 이견을 환영하고 개방성을 응원할 때 가장 번영할 확률이 높다는 당연한 주장 말고는 이견을 허용하고 장려하는 제도에 대한 제안은 뚜렷이 보이지 않는다. 건강한 이견 제시자와 '청개구리'를 구분하는 방법도 명시되지 않은 점도 아쉽다. 하지만 '진영 논리'가 판치는 요즘 우리 사회에서 꼭 들춰볼 만한 책이 아닌가 싶다.

 


 

'김어준빠'와 '강용석빠'의 불편한 공통점은? (프레시안, 김성희 북 칼럼니스트, 2012-02-24 오후 4:59:10)
[김성희의 '뒤적뒤적'] 캐스 선스타인의 <우리는 왜 극단에 끌리는가>
지난해부터 출판계엔 '가까 붐'이 일었다. 음, 이건 어떤 정치적 의도를 담은 비아냥이 아니다. '~가' '~까'로 끝나는 제목이 쏟아지는 현상을 두고 붙여본 이름일 따름이다. 추측컨대 인문서로는 아주 드물게 대박을 친 <정의란 무엇인가>(마이클 샌델 지음, 이창신 옮김, 김영사 펴냄) 탓으로 보이는데 편집자들의 상상력이 아쉬운 대목이긴 하다.
어쨌거나 이런 유의 책은 시류를 좇는 것 같아 일단 낮춰보는 편이 마땅하다고 보지만 그 중엔 꽤 괜찮은 책이 없는 것은 아니다. 캐스 선스타인의 <우리는 왜 극단에 끌리는가>(이정인 옮김, 프리뷰 펴냄)가 바로 그런 경우라 하겠다.
일단 인간 행동 변화의 비밀을 들춰낸 전작 <넛지>(안진환 옮김, 리더스북 펴냄)에서 보여준 통찰력도 그렇고, 하버드 대학 로스쿨 교수란 직위도 믿음을 더한다. (표지에 자랑스레 박은 이유겠다.) 무엇보다 원제에 충실한 제목이 흥미를 돋운다. 바로 오늘 이 땅에 발 디디고 사는 우리들에게 주는 메시지도 유혹적이다.
어제 오늘 일은 아니지만 우리 편, 네 편 아니 '좋은 나라' '나쁜 나라'로 갈려 벌이는 논란을 보면 상식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어 보이기에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그 해법에 목말라서다.
지은이가 초점을 맞춘 것은 집단 극단화(group polarization) 현상이다. 정치, 사회, 문화, 경제 등 온갖 분야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사람은 서로 생각이 같은 집단 속에 들어가면 극단으로 흐를 가능성이 높아지는' 현상을 가리킨다. 사실 이런 현사에 주목한 것은 지은이가 처음은 아니다. 이미 1930년대 미국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이한우 옮김, 문예출판사 펴냄)에서도 비슷한 개념을 논하긴 했다. 이 책은 선악의 잣대를 떠나 극단화를, 철학 대신 사회학 또는 심리학의 관점에서 다뤘다는 점이 니버의 책과 다르다.
책은 집단 극단화의 정체와 그 원인, 그 결과로 어떤 일이 빚어지는지, 어떻게 막아야 하는지를 순서대로 논한 뒤 '착한 극단주의'를 이룰 방안을 설명하고 있다. 로스쿨 교수가 쓴 덕인지 아주 체계적이고 풍부한 사례와 실험 결과 등을 토대로 해서 명쾌하고 알차다.
이 중 가장 관심이 가는 부분은 아무래도 집단 극단화의 원인과 처방이겠다. 제2장 '극단화는 왜 일어나는가'에서 원인을 집중 분석하는데 지은이는 권력의 엄청난 위력과 악의 본질, 집단 사고라는 개념, 그리고 사회적 '폭포 효과'를 꼽았다.
눈길을 끄는 설명은 '평판의 압력'. 집단의 일원이 되면 다른 구성원들에게 자신의 이미지를 호의적으로 보이고 싶어 하며 그 결과 능력이 신뢰도에서 높은 평가를 받기 위해 자신만이 아는 정보나 집단 의사에 반하는 의견을 제시하기를 꺼린다는 설명이다. 이를 위해 건강한 '라이벌들의 팀'을 구성했던 링컨 대통령과 달리 '라이벌이 아닌 사람들의 팀'으로 구성됐던 부시 행정부는 다양한 내부 의견이 통제되는 바람에 이라크 정책 등에서 '일사불란함'을 보여주면서 균형을 잃었다고 평가한다.
또 아주 미미한 수준의 정보를 습득한 다음, 그것으로 자신의 극단주의를 뒷받침하려고 하는 '절름발이 인식'은 극단주의자들의 특징이라고 한다. 박원순 서울시장의 아들 병역을 둘러싼 논쟁에서 강용석 의원을 지지했던 이들이 그런 사례에 속한다면 이명박 정부에 반대하는 이들이 열광하는 <나는 꼼수다> 현상은 '확증 편향'의 사례로 꼽을 수도 있다.
'확증 편향'은 자신의 신념과 일치하는 정보는 받아들이고 신념과 일치하지 않는 정보는 무시하는 경향을 뜻하는 심리학 용어. 이 책에선 '확증의 힘'이라 해서 "사회적 네트워크가 사람들이 원래 갖고 있던 생각을 확인하고, 강화하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에 극단화의 도구로 활용될 수 있다"며 인터넷을 지목한다. 자신의 정치 신념에 맞는 매체만 보거나 온라인 사이트를 방문해 성향이 같은 사람들과 의견을 나누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다양한 생각, 논리적 반론을 접하는 대신 입맛에 맞는 정보만 취한다면 고정관념이 서로, 갈수록 증폭되는 '에코 효과'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런 우려는 온라인 정치 시민운동의 선구자가 쓴 엘리 프레이저의 <생각 조종자들>(이현숙·이정태 옮김, 알키 펴냄)에서도 볼 수 있다. 프레이저는 구글 등 대형 포털들이 검색 필터링을 이용해 개별화된 맞춤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정보 편식'을 불러 반드시 편리하고 바람직한 것은 아니라는 의견을 제시했지만 인터넷의 속성상 '확증 편향'은 피할 수 없는 현상인지도 모른다.
그런 면에서 신문과 잡지, 라디오와 텔레비전 등 올드 미디어도 나름 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한다. 다양한 주제나 주장을 우연히 접하게 만드는 '우연이 만드는 건축물(architecture of serendipity)'을 제공하기 때문이란다. (물론 다양한 견해를 공정하게 소개한다는 전제가 필요하지만 제임스 하킨의 <니치>(고동호 옮김, 더숲 펴냄)에 따르면 다양한 계층을 아우르려는 매체는 갈수록 입지가 좁아진다고 한다.)
그렇다면 자연히 극단주의를 어떻게 막을 것인가로 관심이 쏠리는데 지은이는 제4장에서 세 가지를 가능한 답변으로 제시한다. 전통주의, 결과주의, 견제와 균형이 그것이다. 표현의 자유와 관점의 다양성을 핵심으로 하는 '견제와 균형'은 어쩌면 상식적인 해법이어서 많은 보수주의자들이 지지한다는 '전통주의'가 신선하게 읽힌다.
이는 프랑스 혁명을 비판한 영국 사상가 에드먼드 버크에 기댄 것으로 버크는 '혁신 정신'을 이기심과 편협한 관점의 결과로 보았다. 이에 따라 그는 합리적인 사람들은 어떤 판단을 내릴 때 상당 부분을 전통에 위임한다면서 "우리가 가진 오래된 편견들을 모조리 내다 버리지 말고 상당 부분 소중하게 간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의 견해가 마음에 쏙 드는 건 아니다. 그러나 오늘의 진보나 혁신이 내일의 보수가 되거나 밥그릇 싸움의 또 다른 명분인 경우를 보았고, 또 볼 수도 있다. 그러니 "전통주의는 많은 분야에서 올바르지 않은 운동을 저지하는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는 지은이의 의견에 동조할 수밖에.
1930년대 파시즘에서 21세기 서브프라임 금융 위기까지 다양한 현상을 분석한 지은이는 "집단 극단화는 크게 보면 정보 교환의 산물"이라 결론짓는다. 그런데 요즘은 인터넷을 중심으로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다. 인터넷을 일러 '정보의 바다'라고도 하고 정보의 쓰레기가 넘친다고 하지만 어쨌든 지은이에 따르면 그만큼 집단 극단화 현상이 일어날 가능성은 커진 셈이다. 이를 막기 위해, 적어도 어떤 정보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대한 가이드로 이 책은 주목받을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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