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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정당 실패가 안철수 불러들여"(박상훈)

 

"진보정당 실패가 안철수 불러들여" (레디앙, 2011년 10월 31일 (월) 08:42:46 정상근 기자)
박상훈 "안-박 정치 지향에 노동은 없다"…리더들의 침묵 비판
“안철수 현상은 진보정치의 실패가 나은 것이다.”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정치학 박사)는 안철수 돌풍이 진보정당의 역량 부족에 가장 큰 원인이 있다고 분석했다. 박 대표는 지난 27일 문화다양성 포럼, 새언론 포럼, 소비자주권국민캠페인이 공동 주최한 '사랑방 좌담회'에서 이같이 밝히고 “진보정당이 있는 민주주의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진보정당 있는 민주주의는 노동자 정치세력화'라고 설명했다. 그는 하지만 “안철수와 박원순의 정치적 지향에 빠져 있는 것은 노동문제에 대한 인식”이라며 “그럼에도 진보진영이 박원순 후보를 지지할 수밖에 없는 매우 곤혹스러운 상황이 됐다."고 말했다.
그는 이 같은 상황이 나타나는 것에 대해 “우리나라 유권자의 20%가량이 진보정당을 바라고 있음에도 사실상 진보정당의 역할이 부재하고 있다는 것이 결정적인 이유”라고 지적했다.
박 대표는 “안철수 현상은 진보의 정치적 실패, 정치적 위기와 동전의 양면”이라며 “그 전까지만 해도 진보진영 인사들이 토론회에서도 돋보였고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일상에서 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고 말했다. 박 대표는 이어 “진보정당이 지금보다 더 잘 하면 대안으로 부상할 수 있다”며 “유권자 성향은 어느 나라보다 진보적이지만 대안이 나오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안철수 현상의 등장에 대해 “유권자 대다수가 한나라당을 정권교체 하고 싶어하는 욕구가 가장 크다.”며 “그런데 민주당과 개혁세력을 다 합해도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만큼 표가 안 나오기 때문에 적극적 유권자 층에서 스스로 후보를 만들겠다는 정서가 형성되었고 그렇게 출연한 사람이 안철수”라고 설명했다.
박 대표는 이날 좌담에서 “민주화 이후 어떤 민주주의냐가 부상한 상황에서 수많은 통계를 짚어보면 진보정당이 강하거나 노동조합이 강한 국가가 평등지표, 자유지표가 좋은 더 건강하고 평화로운 국가가 되었다”며 “곧 진보정당이 작동하는 민주주의, 노동의 가치와 권리가 큰 나라일수록 살만하고 건강하고 평등하고 자유롭다”고 말해 평소의 지론을 거듭 강조했다.
그는 “87년 민주화 이후 2004년까지는 진보정당이 없는 민주주의 체제였으며, 그 체제 하에서 권력은 민주주의를 회복했으나 노동운동에 대해서는 깊이 고민하지 않았다”며 고 말했다. 그는 민주화 이전까지 의회에서 야당 대표자 연설문에는 “노동자, 농민......”을 호명하는 경우가 많았고, 민주화만 되면 노동법도 개혁하고 분배도 개선하는 등 노력하겠다는 약속도 많이 했으나, 민주화가 되면서 이런 표현과 의제들이 점차 감소한 연구 결과(박찬표, 『한국의 1948년 체제』)를 사례로 인용했다. 이 연구에 따르면 실제로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 들어서 이 같은 경향은 계속되었으며, 급기야 노무현 정부에서 열린우리당, 민주당이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는 '노동'이라는 단어조차 언급되지 않는 일이 나타나기도 했다.
하지만 이 같은 경향은 지난 2004년 진보정당이 원내 진출 이후 크게 바뀐다. 박 대표는 “진보정당이 무상의제를 계속 얘기하면서 국회 내 의제의 우선순위가 바뀌고, 결국은 한나라당이나 조선일보도 양극화를 얘기 하게됐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서울에서 무상급식 투표가 부결되고 보궐선거를 하게 된 것도 작지만 큰 진보정당의 힘이 작용했다.”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그런데 최근 노동의 정치세력화 혹은 진보정당이 있는 민주주의의 길은 멀어져가고 그 자리를 대신 차고 들어온 것은 ‘민주대연합론’”이라며 “지난 10년 민주정부 이후 민주주의의 과제는 진보정당 있는 민주주의에 초점이 있었는데 갑자기 대연합이라는 주장이 등장하고 이것이 진보정당 하는 사람들에게도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박 대표는 “한나라당 정권을 바꾸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민주대연합을 주장하는 진보파가 어떤 미래구상을 갖고 있는지 모르겠다”며 “실용적 논리도 필요하지만 그 미래는 미국식 민주주의로 귀결될 가능성이 커지고, 진보정당 없는 미국의 민주주의, 일본의 민주주의, 이탈리아의 민주주의로 흐를 가능성이 크다”며 결과에 대해 비판적으로 언급했다.
그는 “민주대연합이 아닌 논리 중 진보대연합론과 독자노선이 있는데, 진보대연합은 범진보가 힘을 합쳐 내년 총대선을 잘 대응해가자는 것으로 보이지만 이것이 모호한 측면이 많다”며 “이 같은 주장은 시간이 지나면 민주대연합으로 전환될 가능성이 보이고, 진보연합이 이뤄지더라도 초기에는 집단지도체제를 해야 할텐데 그렇게 되면 전략적 유연성을 갖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독자노선은 성공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단순다수제의 선거제도를 비례성 높게 바꿔야 한다”며 “물론 독자노선에 윤리적 정당성이 있기 때문에 지속될 수 있지만 수동적인 노선을 갖게 된다면 정치적으로 주변화되는 길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박 대표는 이명박 정권 아래 실시된 지방선거와 각급 보궐선거를 통해 민주당의 승리와 진보정당의 존재감 상실을 겪었다며 “민주대연합론은 더 강해져왔고 진보대연합 시도는 실패한 현 상황이 지속된다면 진보대연합은 민주대연합에 대해 정치적 승패 이전에 정신적으로 굴복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지금 상황을 냉정히 볼 때 한국이 진보정당 있는 민주주의로 갈 수 있을지 회의적일 수 밖에 없다”며 “그리고 그 이유는 진보 안에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내부로부터 비관주의와 냉소주의가 지배하고 있으며, 누구도 책임있는 지도부의 역할을 하고 있지 못한 상황에서 어떤 입장이든 실천적인 대안을 제시해주는 것이 중요하다”며 정치 리더들의 책임을 강조하고 동시에 그들의 침묵을 비판했다. 
 
진보 정치의 세 가지 길 사이에서 (레디앙, 2011년 10월 31일 (월) 09:05:46 박상훈 / 도서출판 후마니타스 대표)
1.
민주화는 크게 두 단계로 이루어진다. 첫째는 권위주의로부터 벗어나는 민주화 이행이다. 우리의 경우는 1987년 직선제 개헌이 그 전환점이었다. 둘째는 민주적 공고화라고 부르는 단계이다. 많은 정치학자들은 이 단계를 민주주의가 아닌 방법으로 정치권력을 장악하고자 하는 시도가 사라지는 것, 혹은 대다수 정치세력이 민주주의를 정권 장악의 유일한 게임으로 인정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나아가 헌팅턴이라는 정치학자는 선거에 의해 평화적으로 정권이 두 번 바뀐 것을 민주적 공고화의 지표로 삼을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민주적 공고화 단계에서 더 중요한 문제는 ‘어떤 민주주의’를 갖게 될 것인가가 결정되는 데 있다. 민주주의라고 해서 다 같은 것이 아니다. 미국의 민주주의 다르고 영국의 민주주의 다르며 독일, 일본, 이탈리아, 북유럽의 민주주의 다 다르다. 우리는 어떤 민주주의를 갖게 될 것인가? 이번 서울시장 보궐선거는 이 문제와 관련해 어떤 생각을 갖게 하는가. 오늘 이 자리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함께 대화해보고 싶다.
2.
우선 문제를 이해하는 판단의 기준, 혹은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민주주의의 유형에 대해 먼저 말하고 싶다. 어느 나라나 민주주의라고 할 때, 상당 정도 공유되는 바람직한 가치나 규범을 갖는다. 어느 민주주의 국가든 헌법에는 그런 가치 합의가 적시되어 있고, 대체로 그 내용은 생명, 자유, 평등, 행복 추구로 수렴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좀 더 건강하고 좀 더 평등하고 좀 더 자유롭고 좀 더 평화로운 사회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민주주의 국가 사이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기본 규범 내지 가치라 할 수 있다.
이 문제를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기 위해, 이렇게 질문해 보자. 현재 민주주의 국가로 분류되는 나라는 110개 정도 된다. 이들 가운데 빈곤 인구의 비율이 낮고 계층 간 불평등 정도도 낮으며 비정규직의 규모도 작은 나라는 어디일까? 투표율은 높고 인권 및 자유화 지표도 좋으며 소수자 및 이주민에 대한 권리 부여 정도도 높고 여성 장관 비율이 높은 나라는 어디일까?
기대 수명은 높고, 불법 약물 복용, 10대 임신, 10대 자살, 저체중아 출산율, 정신 질환 발병률, 영양실조, 비만율이 낮은 나라는 어디일까? 후천적으로 계층 상승이 가능한 사회적 유동성이 높은 나라, 즉 기회의 평등이 높은 나라는 어디일까? 강력 범죄율과 재소자 비율이 낮은 안전한 나라는 어디일까? 요컨대 어떤 유형의 민주주의가 되어야 좀 더 자유롭고 평등하고 건강하고 평화로운 사회가 될 수 있을까?
이와 관련해, 국가 간 민주주의의 성취를 통계적으로 조사 연구한 성과들에 따르면, 결론은 다음 두 가지다. 하나는 진보 정당의 경쟁력(집권 기간, 득표 경쟁력 등)이 큰 나라일수록, 다른 하나는 (보통 노조 조직률, 노사 협약 적용률, 노조의 중앙 집중화 정도로 평가하는) 노동조합의 힘이 강할수록 결과가 좋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노동을 배제하는 정도가 덜할수록, 그리고 진보적인 정당들도 상당한 득표를 하고 집권의 전망도 있는 나라들이 좀 더 자유롭고 평등하고 건강하고 평화롭게 살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념적·계층적 대표의 범위가 충분히 넓은 사회일수록 그 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집단들의 관심과 이익이 평등하게 고려될 수 있다. 진보 정당의 경쟁력이 낮아 집권의 가능성이 없는 민주주의를 보수 독점적 정당 체제라 할 수 있는데, 이럴 경우 그 사회의 하층이나 약자 집단의 이해는 대표되기 어렵다.
현대 민주주의는 자본주의라는 경제적 조건 위에서 실천되고 있는데, 이때 그 사회의 민주적 성취는 노동이라고 하는 가장 중요한 생산자 집단의 이익과 열정이 기업 운영과 노사 관계, 나아가 정당 체제의 차원에서 어느 정도 평등한 권리를 향유하느냐에 달려 있게 된다. 노동의 시민권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받아들여지느냐에 따라 그 나라 민주주의의 내용과 질은 크게 달라진다는 것이다.
우리의 경우, 임금 소득에 근거해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은 전체 경제활동인구의 70퍼센트에 이른다. 자영업자가 비정상적으로 많아 이 정도이지, 이른바 서구 선진국의 경우 그 비율은 90퍼센트를 웃돈다. 따라서 노동을 축소해야 할 생산 비용으로 간주하거나, 하나의 독립된 집단으로서 정치 참여의 권리를 갖는 것을 불온시할 때, 그것은 단순히 노동만 배제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사회 다수를 이루는 하층과 약자 집단 전체를 배제하는 것과 같은 부정적 효과를 낳게 된다.
좋은 사회, 좋은 정치란 보수정당만이 아니라 진보 정당도 집권할 수 있는 민주주의, 노동의 시민권이 기업 운영-노사관계-정당 체제의 차원에서 폭넓게 받아들여지는 민주주의에 있다고 말한다고 해서, 그것이 내가 가진 어떤 진보적 이념 때문이라고 오해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좋은 진보 없이 좋은 보수가 가능할까? 어려울 것이다.
사회의 다양한 의견들이 정치적으로 조직되고 경쟁하는 것이 갖는 좋은 효과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현실의 민주주의를 좋게 만들 방법이 없다. 보수와 진보가 좋은 경쟁의 체제를 발전시키는 것이야말로, 민주정치의 발전에 있어 핵심 중의 핵심이라는 것, 그것을 말하고 싶다.
자본주의가 민주주의의 가치나 이상과 공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노동의 시민권이 노동조합과 진보 정당의 형태로 조직되는 것에 있으며, 그럴수록 공동체의 발전에 대한 그들의 기여와 책임성도 커진다. 그런 사회가 더 건강하고 투표율도 높고 평등하고 자유롭다는 것, 이보다 더 확고한 사실은 없다.
박찬표 박사가 쓴『한국의 1948년 체제』라는 책이 있다. 거기에 보면 매우 흥미로운 분석이 있다. 민주화 이후 우리나라 의회에서 노동과 관련한 의제가 어떻게 변화되었나를 분석했다. 민주화 이전까지 의회에서 야당 대표자 연설문에는 “노동자, 농민......”을 호명하는 경우가 많았다. 민주화만 되면 노동법도 개혁하고 분배도 개선하는 등 노력하겠다는 약속도 많이 했다.
그런데 민주화가 되면서 이런 표현과 의제들이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김대중, 노무현정부에 들어서 그 경향은 계속되었다. 급기야 노무현정부에서 열린우리당, 민주당 교섭단체장 연설에서는 노동이라는 단어조차 언급되지 않는 일이 나타나기도 했다.
이런 상황이 달라진 것은 2004년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입에 성공하면서부터였다. 비정규직, 양극화, 무상급식 등 이른바 서민 의제가 제기되기 시작했고 다른 정당들의 의제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언론의 의제 구조도 영향을 받았고 급기야 양극화, 비정규직 의제를 한겨레, 경향도 쓰고 조선일보도 기사화하는 일이 벌어졌다.
복지는 모두의 이슈가 되었고 한때 다소 낯설었던 무상 관련 이슈들은 이후 한국 정치에 깊은 영향을 미쳐서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만들어낸 데까지 이르렀다. 복잡하게 이야기했지만, 말하려는 핵심은 간단하다. 진보정당이 없을 때에는 개혁적인 정부조차 노동 관련 의제에 그리 영향 받지 않았다.
자신들의 집권은 노동과 관계없이 정당하게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면서 노동문제에 대한 책임감을 벗어버렸다. 그런데 비록 작은 정당이지만 진보정당이 원내에 들어간 것이 미친 물리적 효과는 대단했다. 제한적인 경험 사례이지만 우리의 경우에도 진보정당이 있는 민주주의와 그렇지 않는 민주주의가 어떤 차이를 낳았는지 보여주는 매우 좋은 분석이었다고 생각한다.
3.
이상과 같은 이유에서 나는 ‘진보정당 있는 민주주의’를 원한다. 진보정당과 그렇지 않은 정당을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노동 문제에 있다고 본다. 우리 삶을 규정하는 가장 강력한 갈등의 구조가 자본주의라면 노동의 문제를 빼고 진보를 말할 수는 없다고 보고, 그런 노동의 열정과 이익에 기초를 둔 좋은 진보정당이 만들어질 수 있느냐의 문제가 결국 한국 민주주의의 질을 결정한다고 본다. 좀 더 다른 차원에서도 생각해보자.
민주주의를 정의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가운데 하나는 시민 스스로 만든 법과 제도에 시민 스스로 복종하는 체제라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법이나 제도가 만들어진다 해도 시민이 입법자가 아니라면 그 사회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그렇듯이 노동자도 호남도 비정규직도 여성도 농민도 자영업자도, 권력의 향방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집단적 힘을 갖고 있지 못하다면 그들은 시민권이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흑인 대통령의 출현이 뿌리 깊은 인종적 차별을 하루아침에 없앨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대다수 흑인들의 시민적 자존감을 이보다 획기적으로 높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 취임식에 몰려든 흑인 참석자들의 기쁨에 찬 얼굴과, 대표적인 흑인 지도자 제시 잭슨 목사의 얼굴에서 멈추지 않고 흐르던 눈물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도 뿌리 깊은 호남 차별의 구조나 편견을 해결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계기는 호남 출신 대통령의 등장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이 집권해서 더 잘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그래도 그의 당선만으로도 한국 정치에 기여한 바 크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최근 들어 많은 사람들이 선거에서 지역감정의 영향력이 많이 줄었다고들 하는데, 여러 요인이 있었겠지만 김대중, 노무현 두 정부를 만들어 내는 데 있어서 호남 유권자가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비정규직을 포함해 노동문제가 심각하다고들 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런 부당한 현실을 개선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여러 차원의 노력이 모두 소중하겠지만, 노동운동에 기반을 둔 정당 내지 후보가 당선되고, 대통령이 되는 것만큼 사태 개선에 더 좋은 효과를 갖는 것은 없다고 본다. 브라질 커피도 좋아하고 그 열정적인 문화도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만, 브라질에 부러운 것 하나를 더 꼽으라고 한다면 룰라라고 하는 가난한 노동자도 정당을 만들고, 정당의 리더가 되고, 대통령도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런 정당, 대통령이 등장한다고 해서 노동문제가 금방 좋아질 것이라고 말할 만큼 내가 순진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노동운동에 기반을 둔 정당이나 후보가 집권할 수 있는 나라와 그렇지 않은 나라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노동을 대표하는 정당이나 후보가 집권할 수 없다면, 절규에 가까운 문제 제기는 끊이지 않지만 그 해결은 늘 지배적 위치에 있는 세력들의 각성과 온정주의에서 구하게 되는 종속적 심리가 계속해서 만들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지지하는 정당이 집권할 수 있을 때, 사회적 약자 집단도 무시당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온정에 의존하지 않는 주체적 시민 권력을 행사할 수 있으며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도 커진다.
진보도 집권할 수 있는 길, 혹은 권력의 향방에 독자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길을 가길 진심으로 바란다. 진보 그 자체의 이념성도 중요하고 가치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중요한 만큼, 정치의 길을 개척하고 넓히는 것이 병행되지 않으면 안 된다. 진보노선과 정치노선 사이의 일정한 실천적 균형을 만들어가는 노력 속에 진보정치의 미래가 있다는 생각을 했으면 좋겠다. 제발 더 이상은 공허한 논쟁과 헛된 감정싸움으로 스스로를 소진하는 어리석은 결과를 낳지 않았으면 좋겠다.
4.
‘진보정당 있는 민주주의’를 과거 우리는 “노동의 정치세력화” 과제라고 표현했다. 나로서는 그 표현이 매우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점점 그 표현의 가치가 평가 절하되고 있는 느낌이다. 노동문제가 많이 개선되어서? 진보정당이 필요 없을 만큼 정치나 사회가 좋아져서? 오히려 그 반대다. 그런데도 노동의 정치세력화 혹은 진보정당 있는 민주주의의 길은 멀어져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자리를 대신 차고 들어 온 것은 ‘민주대연합론’이다.
한때 ‘민주연합론’의 주장이 영향력을 가졌을 때가 있었다. 그러나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등장과 함께 그 주장은 사라졌다. 나 역시 ‘민주연합론’의 정당성은 두 정부의 집권으로 종식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갑자기 그 주장이 다시 불러들여졌고 거기에 ‘대연합’이라는 더 넓고 강한 주장으로 등장해서는 독자적 진보정당을 추구했던 세력들 사이에서도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민주대연합론은 현 정부의 악정에 대한 반대와 항의의 열정을 담고 있지만, 냉정하게 말해 정치적으로는 민주당이 초점이 되는 논리가 아닐 수 없다. 그것의 정치에너지는 지난 두 정부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재집권 의지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그 주장의 정당성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면, 진보정당 있는 민주주의의 길을 굳이 어렵게 개척할 이유는 크지 않다. 민주당의 범위 안에 있는 후보를 지지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다. 말 많고 탈도 많은 진보정당의 세계 안에서 지지부진한 모습을 보느니 그 길이 반한나라당의 투표효과를 극대화하는 합리적인 선택일 될 수도 있다.
그런데 경제적으로 세계 12~13위를 다투는 나라가 지난 25년간 민주주의가 중단 없이 지속되고 다섯 정권을 경험한 마당에 여전히 민주주의냐 아니냐로 고통받고 있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도 남들 보기에 우습지만, 더 문제는 진보가 실력을 키우는 노력 대신 늘 남 탓하는 것에 편승해 스스로의 기회를 잃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데 있다. 한나라당 정권은 바꿀 수 있다. 하지만 그러면서 진보정당 있는 민주주의의 길을 희생하지는 않아야 할 것이다.
민주대연합을 주장하는 진보파들이 어떤 미래 구상을 갖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들을 수 있는 근거들은 반한나라당 연합전선이 대세라거나 혹은 차기 총선에서 일정한 의석수를 갖기 위해 필요하다는 실용적 논리들이다. 글쎄, 그런 측면이나 필요가 있다고는 보지만, 결국 그 미래는 미국처럼 독자적 진보정당의 실험이 좌절되고 민주당 안에 진보 블록을 형성하는 것으로 전환하면서 노동운동도 민주당을 통해 자신의 이익을 지키고자 하는 것으로 귀결될 가능성도 커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는 사실이지만, 미국의 경우 민주당 선거 자금 가운데 노동조합이 제공하는 비율은 꾸준히 늘어 지금은 50%를 훨씬 상회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진보정당 없는 미국식 민주주의가 세계에서 가장 강한 군사대국, 경제대국을 이루었을지는 모르나, 그것은 세계에서 가장 불평등하고 유색인 등 약자 집단들의 자유권이 가장 취약하고 재소자율과 범죄율이 높으며 투표율은 낮고 10대 임신과 약물 복용 심각한 사회라는 비용을 치르고 얻은 성취이다. 진보정당 없는 민주주의가 가져다 준 나쁜 효과는 일본과 이탈리아 사례가 잘 보여주는 바이기도 하다.
1997년 사회당이 ‘반자민당연합’에 참여함으로써 정권교체를 이룬 일본은 그 덕분에 오랜 자민당 일당우위체제를 종식시킬 수는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사회당은 독자적 역할이 약해지기 시작했고 급기야 정당으로서의 존재도 소멸했다. 그러면서 비정규직은 급격히 늘었고 빈곤 문제가 새로 등장하고 다양한 사회 해체 위기를 경험했다.
이탈리아도 다르지 않다. 이탈리아 역시 전후 기민당 우위체제를 유지해왔지만 냉전 해체와 세계화의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기존 정당체제가 붕괴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진보정당도 분해되었다. 그 결과 등장한 베를루스코니하의 이탈리아 사회는 더 불평등하고 덜 자유롭고 덜 건강하고 덜 평화롭게 되었다. 진보정당의 길이 봉쇄되어 있는 게 아니라면 민주대연합을 위해 그 길을 희생시켜서는 안 된다고 본다.
혹자는 민주대연합 내에서 진보 블록이 결국 주도권을 잡아 진보정당화하는 길을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 문제에 있어서도 나는 부정적인데, (정당론의 패러다임을 만든 지오반니 사르토리가 강조하듯이 ) 지금까지 모든 나라의 정당의 역사에서 외생정당(기존 정당체제 밖으로부터 새로운 유형의 정당이 진입하는 것)으로서의 길이 아닌 방법으로 진보정당이 만들어진 사례는 단 하나도 없다. 외생정당의 충격 없이 기존 정당체제가 달라질 수 있다면 정당체제 이론이 통째로 달라져야 할 것이다. 나는 내가 배운 정당이론을 부정할 만큼 과도한 용기나 상상력을 발휘할 생각이 없다.
아무튼 진보파가 민주대연합의 길을 가겠다면 어떻게 진보정당 있는 민주주의를 개척할 수 있는지 좀 더 이야기되어야 할 것 같다. 민주대연합을 말하는 진보파가 성공할 수 있으려면 이 문제에 대해 설득력 있는 주장이 먼저 있어야 할 것이다. 그것을 기대한다.
5.
물론 진보 안에는 민주대연합이 아닌 주장도 있다. 하나는 ‘진보대연합론’이라고 부를 수 있고 다른 하나는 ‘진보정당 독자노선’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먼저, 전자의 진보대연합론을 보자. 정치적인 측면에서만 본다면, 범 진보가 힘을 합해 향후 중대 선거에 대처해 가야 할 것이다. 진보대연합론은 이 문제를 중시하는 것 같다. 그런데 진보대연합론은 모호한 면이 많다. 내가 보기에 거기에도 상당 정도 민주대연합론의 흐름이 잠복해 있거나 혹은 민주대연합론으로의 전환 가능성도 커 보인다. 모두는 아니지만 상당수는 그런 여지를 갖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정치노선의 유연성 내지 전술적 고려의 여지가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런 고려는 공천 및 선거 과정에서 기존 정당들에 대해 독자적인 연합능력과 협박능력을 더 효과적으로 발휘한다는 목표와 양립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달리 말해 진보정당의 선택 여부에 기존 정당들도 영향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모습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있다.
더 중요한 문제는 진보연합세력이 이루어진다 해도, 불가피하게 집단지도체제로 시작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 경우 지도부의 응집성이 약해 전략적 유연성을 가질 수 없다는 데 있다. 진보연합 안에서 논란과 갈등은 계속될 수밖에 없고 그럼에도 누구도 책임질 수 없는 지도체제를 갖게 되면서, 연합을 유지하는 일 자체에 정치에너지를 소진할 가능성이 높다.
이런 문제 이전에 진보대연합론이 성공하려면 분명히 해둬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분단과 재벌중심사회, 대통령중심제, 강한 국가중심사회, 강한 중앙집권사회 등을 특징으로 하는 우리 사회에서 단순다수제의 강력한 양당제 효과 속에서 진보정당이 계속 존립하려면, 제3당을 목표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 구조나 선거제도가 지속된다면, 선택은 과감하게 제2당을 모색하는 것밖에는 없다.
비견한 예로는 영국 모델을 생각할 수 있다. 즉 자유당을 대체한 노동당 모델이 그것이다. 민주당을 대체할 정도의 정치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현재와 같은 구조 속에서 진보대연합론은 민주대연합론과 진보정당 독자노선 사이에서 자신의 길을 개척하기도 전에 좌절될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진보 안의 연합을 유지하기도 힘든데 그것에 만족해서는 생존도 어렵다는 사실 때문에, 진보대연합의 길은 만만치 않은 실력과 응집력을 필요로 한다. 그것을 위해서는 진보대연합을 하고 나서 빠른 시기 안에 지도체제를 단일화해야 할 것이고, 그것과 함께 내년 대선에서 매우 강력한 후보를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한다.
내년 대선이 열어 줄 정치적 가능성의 공간을 활용해 대중적인 진보정당으로 가는 문턱을 넘지 못하면 현재와 같은 진보대연합론은 성공하기 어렵다고 본다. 그런데 진보대연합을 말하고 있는 사람들이 이런 문제의식이라도 갖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진보대연합의 성공 정치 전략이 무엇인지 윤리적 정당성과 현실을 갖춘 대안 논리가 빨리 나와야 할 것이다. 그것을 기대한다.
다음으로 후자의 진보정당 독자노선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이 노선이 정치적으로 성공하려면 내가 보기에 단 한 가지 방법밖에 없어 보인다. 그것은 현행 단순다수제를 비례성이 높은 제도로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이다. 제 아무리 진보이념을 멋지게 만들고 강령을 잘 만들고 선거 전략을 잘 짜도 (앞서 지적했듯 분단과 재벌중심사회, 대통령중심제, 강한 국가중심사회, 강한 중앙집권사회 등) 양당제의 효과를 강제하는 구조적 조건 및 현행 단순다수제는 제3당의 존립 여부를 어렵다 못해 불가능하게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러나 비례대표제 도입 여부를 결정할 힘은 진보정당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존 정당들이 갖고 있다. 결국 타인의 호의에 의존해야 하는 일이 되고 마는데, 어떤 정치 노선도 수동적인 기대에 의존해서는 잘 되기 어렵다. 어떻게 비례대표제로의 전환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지와 관련해 효과적인 정치 전략이 무엇인지에 대해 무엇보다도 적극적인 대책을 가져야 한다고 본다.
물론 이 노선은 의석에서 큰 성과를 내지 못해도 지속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진보적이라는 기준에서 강한 윤리적 정당성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한국 정치에 영향을 미칠 수는 없다는 점, 정치적으로는 점차 주변화될 수밖에 없다는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따라서 진보노선과 더불어 정치노선의 문제를 어떻게 개척해갈 지 더 깊은 고민이 뒤따랐으면 한다.
6.
어디로 갈 것인가? 혹은 한국정치에서 진보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민주대연합 내 진보블록인가 아니면 비례대표제를 통한 다당제 하에서 제3정당인가, 혹은 진보-보수의 양당제 모델로 가고 있는가?
현재로는 민주대연합이 다수 전략인 것으로 보인다. 이 전략은 정권교체와 당선 가능한 자리라는 확실한 목표도 있다. 그러나 그 대가는 장기적인 차원에서 나타날 텐데, 가장 큰 문제는 진보정당 없는 민주주의, 노동의 정치세력화 없는 미국식 민주주의의 길을 넓힌다는 데 있다.
진보대연합론은 이를 말하는 사람들의 단결된 의지나 열정을 느낄 수 없다는 데 큰 문제가 있다. 막연히 진보가 연합해서 내년 선거구도에 대응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상황 논리만 앞서 보인다. 민주대연합론과의 관계도 모호한데, 앞으로 이 문제는 더 민감해질 것으로 보인다.
진보대연합이 당선을 위해 결국 야권단일후보라는 프레임에 자신들도 참여하게 될 텐데, 그것이 민주대연합과 어떻게 다른지 설명하고 실천할 능력이 있는지 모르겠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 흐름은 진보의 다수가 민주대연합으로 전환하는 심리적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효과만 남기는 것으로 끝날 가능성도 높아 보인다.
독자진보정당론은 진보대연합론이 성과를 내지 못하는 것에 비례해 더 큰 윤리적 영향력을 가질 것으로 보인다. 정치적으로는 성공하기 어렵다 해도 진보파 안에서 정당성은 더 강하게 가질 수도 있다. 이 흐름이 계속해서 건재하게 되는 것이 진보대연합파들의 입장에서는 가장 괴로운 일이 되겠지만, 그러나 냉정하게 말해 문제는 이들 때문이 아니라 본인들의 진보대연합론의 정치노선과 진보노선의 윤리적 정당성이 취약하고 목표나 전략도 분명치 않기 때문이라는 점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지난 2010년 지방선거 이후 한국 정치는 독자적 진보정당 없이도 잘 돌아가는 정치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지방선거에서 승리는 민주당 몫이 되었고 이번 서울 시장 선거에서도 진보정당의 존재감은 느낄 수 없었다. 민주대연합의 주장은 지속적으로 강해져 왔으며, 진보대연합의 시도는 일단 실패했다. 현 상황이 지속된다면 진보대연합파는 민주대연합파에 정치적 승패 이전에 정신적으로 굴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 상황을 냉정하게 말하라면, 한국이 진보정당 있는 민주주의(노동의 정치세력화)로 갈 수 있을까에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이유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진보 안에 있다. 그 내부로부터 비관주의와 냉소주의가 지배하고 있으며, 누구도 책임 있는 지도부의 역할을 하고 있지 못한 상황에서 새로운 진보정치의 에너지가 만들어질 수 있을까?
어떤 입장에 서 있든 이 문제에 답해야 하고 다시금 열정을 갖게 하는 실천적인 대안을 제시해줘야 한다고 본다. 본격적인 논쟁과 진전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러려면 먼저 각 입장은 자신들의 미래 구상을 말해야 할 것이다. 그것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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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고용 해결못하는 정치가 안철수·박원순 현상 낳아” (한겨레, 정리/조계완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20111007 21:48)
정당정치 위기와 진보의 갈길’ 좌담회
공동주최: 한국노동사회연구소·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
김영훈 국민들 변화열망…정치 밖에서 희망찾아
노회찬 한나라 밉고 민주 싫고 진보정당은 못마땅
최장집 안철수 돌풍은 정치적으로 ‘포퓰리즘’ 현상
권영길 패거리 정당정치서 벗어나라는 숙제 던져

최장집 교수 기조발제

‘안철수·박원순 현상’과 진보정당 대통합 논의가 뜨겁다. 나는 가끔 ‘노동 없는 민주주의’라는 표현을 쓴다. ‘노동’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가장 중요한 생산자 집단이다. 사회경제적 시장의 약자인 노동자들은 민주주의 아래에서 정치적으로 조직되고 대표되면서 보호받아야 한다. 그런 역할을 못하고 있는 것이 한국 정치의 가장 대표적인 특징이다. 노동자들이 투표권을 가지고 선거와 정부 정책에 영향을 미치고 자신들의 권익과 지위를 향상시키는 것이 민주주의의 가장 큰 장점이다. 그러나 정당체제 중심의 전체 정치체제에서 한국 노동자들은 단순히 하나의 정치적 행위자로서 나타날 뿐이다. 한나라당도 민주당도 노동자들을 대표하지 않는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으로 대표되는 진보정당 역시 실제로 노동자 권익을 대표하는 데 매우 허약했다.
이처럼 노동자의 정치적 이해가 대표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지금의 ‘안철수·박원순 현상’을 초래했다. 오늘날 젊은이들은 시장과 생산·고용 구조 속에서 구조적 실업자로 전락하고 있고 노동자들도 불안한 노동 속에 고통받고 있다. 런던에서 젊은층을 중심으로 중산층과 실업자들이 폭동을 일으키고, 미국에서도 월스트리트의 금융자본에 항의하는 시위가 격화되고 있다. 전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 금융자본주의가 위기를 맞고 있다. 지금 갈등의 축은 세대가 아니라 기본적으로 노동과 고용의 문제다. 한국의 기존 정당 중에서 이 문제를 다룰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당은 한 곳도 없다. 이에 대한 불만이 정당 바깥에서 시민 또는 시민사회 담론을 통해 폭발적으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 안철수·박원순 현상이다.
■ 안철수·박원순 현상
이원보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이사장(이하 사회)
뵙기 어려운 분들인데 오늘 한자리에 모였다. 지금 기존의 정치질서가 근본적으로 도전받고 있다. 진보세력과 보수세력의 경계를 혼란스럽게 하는 여러 흐름이 제기되고 있다. 이른바 ‘안철수·박원순 현상’은 이런 새로운 흐름들이 정치적으로 분출된 사건으로 볼 수 있다. 어떻게 보는가?
권영길 민주노동당 의원(이하 권) 최장집 교수가 (기조발언에서) 말한 ‘노동 없는 민주주의’ 그리고 ‘노동과 고용의 문제를 끌어안지 못하는 정당의 문제’ 지적에 대해 공감한다. 그러나 노동자의 이해 대변이라는 측면에서 진보정당도 보수정당과 거의 차이가 없다는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다. 안철수·박원순 현상을 기존 정당정치에 대한 불신과 거부라고 흔히 말하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에 과연 정당정치라는 것이 있었던가?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는 지역주의 패거리 정당정치를 청산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안철수·박원순 현상은 긍정적인 요소를 담고 있다. 이 현상은 이명박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절대적인 거부가 배경으로 깔려 있다. 먹고살기 어렵고 현 정권은 교체돼야 한다는 것이 국민의 합의인데, 민주당은 안 되고, 진보정당도 아직 정치력이 미약해 안철수·박원순이라는 쪽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노회찬 전 진보신당 대표(이하 노) 안철수 현상에는 현실에 대한 실망과 미래에 대한 희망이 동시에 섞여 있다. 무엇보다 현실의 정당, 인물, 정치문화 전반에 대한 반대와 불신이 깔려 있다. 오늘의 한국 정치는 하나의 안정적인 패러다임으로 설명하기 매우 어려운 과도기적 상태에 있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다섯번의 대선이 있었다. 6월항쟁에 앞장선 세명이 대통령이 되는 등 6월항쟁의 성과는 어느 정도 계승됐다. 그러나 6월항쟁 직후의 7·8월 노동자 대투쟁은 민주화 과정에서 반영되지 못했다. 노동자 대투쟁을 상징하는 조직과 사람들은 여전히 감옥을 드나들고 있다. ‘노동 있는 민주주의’는 6월항쟁과 7·8월 대투쟁이 다시 제대로 만나는 것으로 집약할 수 있다. 그런데 현재 국민들은 ‘한나라당은 밉고, 민주당은 싫고, 진보정당은 못마땅하다’고 여긴다. 현 정치권 내에서 현상을 타파할 힘있는 흐름이 생겨나지 않으니까, 국민들 스스로 정치권 바깥에서 고인 물에 파문을 일으키는 돌멩이 던지는 선택을 하고 있는 양상이다. 안철수 현상에 착시 내지 허상이 부분적으로 없지 않다. 하지만 안철수 현상을 역사발전과 시대발전을 거스르는 반동적 측면에서 해석하기보다는 이 현상을 통해 진보정치의 과제를 봐야 한다. 제대로 된 진보정당의 부재가 이 현상을 만들어냈다. 안철수 현상은 진보의 길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라는 신호가 아니라 오히려 진보정치에 대한 희망적 관측을 갖게 하는 신호다.
김영훈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위원장(이하 김) 이른바 ‘글로벌 차원의 분노’가 일어나고 있다. 지금 (미국) 월스트리트의 시위자들에게 요구 조건이 뭐냐고 물으면 몇 가지로는 해결될 수 없는 문제라고 대답한다. 안철수·박원순 열광 현상도 월스트리트 점령 시위처럼 미래에 대한 불안과 자기 목소리를 대변해주지 못하는 기존 정당에 대한 부정과 분노가 폭발하면서 나타난 것이다. 여기서 관통하는 건 바로 ‘노동’이다. 아랍 민주화 시위도 먹고살기 힘든 노동의 문제에서 시작되었다. 그런데 지금 안철수에게 열광하고 있듯 2004년 민노당의 역사적인 의회 진출 때도 국민들이 진보정당 사람들에게 열광했다. 그 뒤 ‘노동 없는 진보’가 무너지고, 그 빈자리를 안철수가 채우고 있다. 진보정당과 노동조합운동은 지금의 과도기에 몸을 싣고 혼돈을 하나씩 정리해 가야 한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이하 최) 안철수·박원순 현상은 기존의 보수·진보 구도로 나뉜 정당 갈등 축을 가로지르고 넘어서고 있다. 즉 전체를 아우르면서 대표하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이는 정치학적으로 보면 전형적인 포퓰리즘 현상에 해당한다. 모든 문제를 일거에 해결할 수 있다는 희망과 기대를 불러올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안철수·박원순씨의 경우 정치적으로 검증된 게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폭발적 지지를 받고 있다. 기존의 어느 정당도 대표하지 못했던 모든 문제를 이 사람들이 해결해 줄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깔려 있다. 이 현상은 오래갈 수도 있고 짧게 끝날 수도 있다. 이 현상을 뒷받침하는 담론은 시민 또는 시민사회다. 시민사회는 민주주의와 더불어 정치적으로 중심적인 개념이다. 하지만 시민 또는 시민사회가 중심적인 정치 화두가 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민주주의는 한쪽에서 시민이 한 개인으로서 투표하는 수준이 있고, 다른 한쪽에 사회경제적인 공동의 이익을 위해 결집해 투표하는 수준이 있다. 시민은 분화되지 않은 추상적 개념이다. 실제로 현실의 사회경제적 위치에 들어가면 누구나 은행가·공무원·교사·생산자 집단 등에 속하게 된다. 즉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사람들이 결사의 자유를 통해 표가 결집된 형태로 나타나야 비로소 정치세력화가 되고, 또한 선거를 통해 자신들을 보호하고 대표하는 정책을 부분적으로라도 끌어낼 수 있다. 반면 시민과 시민사회는 포괄적인 개념이고, 누구를 대표하고 무엇을 하자는 것인지 전망하기 매우 어렵다. 다수결 민주주의 선거로 모든 것을 결판낼 수는 없다. 투표를 통해 정부를 구성한 다수파가 모든 이해집단의 부분적인 이익을 골고루 대표할 수는 없다. 노동자들은 매우 중요한 생산자 집단이다. 한국의 기존 정치질서는 이를 반영할 수 있는 적절한 체제를 갖추지 못했다. 앞으로 신자유주의 금융자본이 주도하는 한국의 시장사회 질서에 위기가 닥쳐올 수 있다. 과연 지금의 안철수·박원순 현상이 그 위기에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는 (국민들의) 정치적 대응인가는 의문이다.
■ 진보정당의 좌표
사회
안철수 현상과 희망버스는 기존의 정당정치와 사회운동이 제대로 포괄하지 못해온 새로운 움직임들을 급속히 만들어내고 있다. 이런 상황에 대응하는 진보세력의 좌표 설정은 제대로 되고 있는가?
진보정당 대통합과 관련해 내가 “‘도로 민노당’이 되는 걸 두려워하면 안 된다”고 했다. 다시 통합시절의 민노당으로 돌아가는 걸 두려워하면 ‘노동 없는 진보정치’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2000년 민노당 창당의 주역은 민주노총이다. 즉 노동자가 중심에 선 진보정당이었다. 진보정당은 노동자 문제뿐 아니라 민생정치를 담아내면서 슬로건으로 무상교육·무상의료·부유세를 내걸었다. 물론 민노당이 그 문제를 구체적으로 풀어내지 못하고 중간에서 멈춰버린 점은 성찰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좌표 설정이 애초부터 잘못된 건 결코 아니다. 민노당의 틀을 개혁해야 하는 건 맞다. 하지만 민노당의 구성요소와 정책방향이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라는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다. 진보신당과 분당되지 않았다면 2008년 총선 때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할 수 있는 수준의 당선자를 낼 수 있었을 것이다. 분당을 겪으면서 퇴보하게 된 것이지 민주노총 중심의 길 자체가 잘못된 건 아니다.
지금 와 생각해 보면 11년 전에 민노당을 창당할 때 설정한 좌표는 틀린 게 아니다. 설정된 좌표를 뿌리내리는 과정에서 미숙함과 오판, 시행착오 등이 나타났을 뿐이다. 10년간 진보정치를 실험해서 고작 지지율 5%라면 그 좌표와 노선의 부적합성이 확인된 것이라고 사람들이 종종 말한다. 그래서 진보정당의 길을 바꿔야 한다거나 ‘대중화’라는 이름 아래 진보세력의 외연을 넓혀야 한다며 좌표를 오른쪽으로 조금 더 수정해 난관을 넘어서자고 주장한다. 그러나 한국 정치사에서 제3세력으로 출발해 10년 이상 그나마 세력을 유지하고 뿌리내려온 정당이 있는가? 진보정당이 처음이다. 진보정당을 통해 자신들의 이해를 관철시키려는 잠재적 세력이 우리 사회에 굳건히 존재한다. 다만 이를 현실화하지 못하고 있는 게 진보세력의 현주소다. 좌표를 수정하고 진보의 개념을 수정할 것이 아니라 원래 설정된 좌표, 예컨대 무상의료·교육 등을 선거 때만 얘기하지 말고 제대로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좌표 설정과 관련해 중대한 충돌이 이번 통합 논의에서 나타났다. 이른바 대중적 ‘진보정당’인가, 아니면 진보적 ‘대중정당’인가라는 대립이다. 대중적 진보정당의 길이 애초 민노당 창당의 정신이었다. 안철수 현상을 강조하면서 진보적 대중정당을 주창하면 유럽의 사회민주당이 몰락한 경험을 되풀이할 수 있다. 분단 문제까지 포함해 한국 사회의 중첩된 모순과 갈등을 정치영역에서 조정할 수 있는 통합적 리더십이 가장 중요하다. 브라질의 룰라는 18개 정파를 조정하면서 집권에 성공했다. 진보정당 내에서 목표지향적 정치를 하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진보정치는 하루하루 계단을 만들어가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게 우선이다. 진보정당 내부의 과도한 집권계획이 오히려 진보의 길을 망치고 있다. 프랑스 사회당이 창당 후 집권하는 데 100년 걸렸다. 풀뿌리부터 시작해야 한다. 민노당의 좋은 정책들이 조그만 군에서 읍에서부터 싹을 틔워 전국적으로 퍼지면 집권도 다가온다.
민노당과 진보신당의 통합 좌절과 실패는 현시점에서 진보정치사의 중요한 매듭으로 평가해볼 수 있다. 역사적으로 한국 노동운동은 사회주의 퇴조 속에서 이념적 지표를 갖지 못한 채 20세기 전반기 노동운동의 경험과 이념적 좌표를 따라 움직여왔다. 그 결과 나타난 것이 진보정당의 정치적 현실주의의 결여다. 즉 과도한 이념 중심 접근이다. 무상교육이 노동자들에게 필요하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무상교육이 필요한가, 또 할 수 있는가? 진보정당의 강령과 정책은 현장 노동자들이 필요로 하는 것에 1차적으로 대응하지 못해 왔다. 처음 진출하는 노동자정당이 전체 민족문제까지 대응하기에는 힘겨울 수밖에 없다. 노동현장의 문제에 집중하기에도 힘이 달리는 판이다. 현장을 소홀히한 게 아닌가. 나는 기존의 진보정당 구조와 이념·경향·타성 속에서 이런 문제를 교정하고 극복하면서 현실주의로 전환하는, 그런 새 출발이 과연 가능한지 회의적이다. 만약 노동자들이 요구하는 현실적인 정책 대안을 수립한 뒤 현실적으로 수용 가능한 범위에서 기존 정당과 타협하든가 또는 (이를 통해) 투표에서 표를 결집했다면 노동자 정치조직이 지난 10년간 상당한 힘을 갖는 주요 정당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국민들은 그 어느 때보다 양극화의 심화 속에서 도탄에 빠져 있다. 진보정당이 우리 사회에서 설 수 있는 입지와 조건은 충분히 확보돼 있다. 다만 이를 현실정치 속에서 녹여낼 능력과 포부를 갖고 있느냐가 문제다. 복지는 2차적인 사회 재분배에 대한 것인데 1차 분배, 즉 노동시장에서의 정리해고와 반노동자적 수탈을 바꾸려고 노력하는 정치조직은 진보정당뿐이다. 보수정당은 복지를 말하면서도 노동 1차 분배시장에서 병은 병대로 계속 주면서 약을 충분히 줄 수 있다고 무책임한 약속을 내놓고 있다. 분산된 진보세력의 힘을 하나로 모으는 과정은 진보정치의 진전을 가로막아왔던 내부적 문제의 극복이라는 큰 의미를 지닌다.
■ 진보정당 통합 전망
지금 당면한 진보정당의 현실적 과제는 내년 총선에서의 괄목할 만한 의회 진출이다. 즉 원내교섭단체 구성이다. 현 단계에서 필요한 건 진보정치세력의 대동단결이다. 즉 ‘선 진보통합, 후 야권연대’다. 진보통합의 힘을 기반으로 민주당과 연대하면 내년 총선에서 이길 수 있다.
진보정치에서 민주노총은 하나의 진지다. 이 진지가 붕괴되면 한국 정치에서 양당 구도가 굳건히 확립되고 진보정치는 무너질 것이다. 민주노총이 ‘(민노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 방침’을 내려놓는 순간 민주당의 좌클릭과 맞물려 현장의 대기업·정규직 노동자들은 둑이 무너지듯 급속도로 민주당으로 이탈하게 될 것이다. 진보정당의 힘은 여전히 노동에서 나와야 하고, 결국 민주노총에서 나와야 한다.
중요한 건 노동자들의 표를 어떻게 결집하느냐다. 한국 노동자들은 투표에서 정치적·지역적으로 분산돼 있다. 노동자들의 요구와 이익을 확실히 대변할 수 있는 결집된 표를 가질 수 있다면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지 못하더라도 이 표를 통해 기존 정당과 협상할 수 있다. 즉 타협의 원리에 의해 노동자가 필요로 하는 정책을 상당한 정도로 끌어낼 수 있다. 노동자들을 위해 어떤 정책을 꼭 실현할 것인지 정책대안의 우선순위를 확실히 가진 뒤에 어떤 정당과도 협상할 수 있다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보수적 정당과는 절대로 타협할 수 없다고 미리 못박을 것이 아니다. 현실성 없는 구호를 내걸고 국민들이 지지해주길 바라는 구조에서 탈피해야 한다.
진보신당과 민노당과의 통합이 부결된 이후 진보신당 내 통합파와 다른 여러 진보적 정치조직체가 결집된 ‘통합연대’가 있다. 이 연대조직이 발전하면 이달 중순 이전에 준정당적 조직체로 결성될 수 있다. 이 조직체가 새로운 통합진보정당 건설 추진위원회(새통추)에 합류하면 새통추를 중심으로 민노당과 그 외 다른 진보정치세력들과의 통합진보정당 건설 움직임이 활발하게 일어날 것이다. 그러면 11월 전국노동자대회 이전까지, 비록 완전하지는 않지만 새로운 통합진보정당이 결성될 수 있다고 본다. 이 새로운 통합진보정당의 과제는 민주당과의 야권연대를 통해 내년 총선에서 한나라당과의 일대일 대결구도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진보대통합 논의가 삐걱거리고 있지만 과정의 일부일 뿐 최종적인 상황은 아직 아니다. 결국 통합으로 수렴될 것이다. 흩어져 있는 진보세력을 하나로 모으는 것과 진보정치의 외연을 넓히는 건 차이가 있다. 진보정당의 통합을 먼저 도모하고, 외연을 넓히는 건 단결을 굳건히 하는 속에서 머리를 맞대고 이야기할 수 있다. 조금 더 뒷심을 발휘해야 한다. 단기적 성과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바로 진보정당의 혼이고 정신이다. 물론 이념과 기조를 달리하는 조직과의 적극적 연대나 유연한 정치력도 발휘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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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장집칼럼]‘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감춰진 상처 (경향, 최장집 | 고려대 명예교수, 2011-09-26 21:12:21)
평소 나는 ‘노동 없는 민주주의’를 민주화 이후 한국 정치의 중요 특징으로 생각했다. 민주주의는 정치참여와 결사의 자유에 힘입어 사회 여러 세력과 집단들이 정당의 형태로 조직되고, 이들이 제도화된 정치과정 내에서 갈등을 해결하려 경쟁적으로 노력하는 것을 중심 내용으로 한다. 그래야 사회경제적으로 약한 사회집단으로서 노동자들과 소외세력들이 그들 스스로의 요구와 이익을 정치과정에 투입하고 이를 통해 취약한 삶의 조건을 개선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노동을 대표하는 정당이 존재한다면 그것이 비록 작은 정당이라 해도 전체 정당체제에 미치는 영향은 실로 큰 것이 될 수 있다.
반대로 노동이 민주주의의 정치과정으로 들어와 집단적 주체로서 역할을 못한다면, 정치 전반에 걸쳐 심대하게 부정적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치가 권위주의 시대와 다를 바 없는 구태를 탈각하지 못하고 시민들로부터 냉소와 불만의 대상이 되고 있는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여기서 찾을 수 있다. 며칠 전 신문에서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통합이 좌절되고 노회찬, 심상정씨 등이 탈당한 것을 보면서 노동의 정치세력화를 위해 분투노력했던 한국 민주주의의 한 중요한 실험이 사실상 종결된 것은 아닌가 생각했다. 무엇이 잘못되었나? 진보는 무엇이고, 그들은 왜 실패했나?
며칠 전 나는 일용직 건설 노동자들의 인력시장이 열리는 성남시 수진리 고개 일원과 그 인근을 찾아갔다. 세계화가 노동시장의 양극화를 가져온 사실에 대해서는 누구나 알고 있지만, 비정규직 노동자 가운데서도 가장 열악한 한계 계층의 하나로 자리 잡게 된 이들의 문제에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들이 외국과 국내에서 생존을 위해 사투해온 지난 20여 년 동안, 한국경제는 눈부시게 발전하여 세계의 주요 경제 강국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눈부신 경제성장에 기여한 대표적인 생산자집단이자 30대에서 60대에 이르기까지 넓은 연령층을 가진 일용직 건설노동자들의 생활조건과 삶의 질은 답보상태였거나 더 나빠졌다. 고용기회는 줄었고, 노임은 적어졌고, 주거조건은 나빠졌고, 자식세대의 사회적 상향이동도 열어줄 수 없는 막힌 현실을 대면하게 된 것이다. 지금 그들에게 가장 큰 관심사는, 중국동포들이 중심인 외국인 노동자들의 대거 유입으로 일자리가 줄어드는 문제였다. 자국민의 노동 조건에 대한 고려 없는 정부의 외국인노동자 정책에 대한 그들의 비판은 날카로웠다. 몇 사람은 건설노조가 주관하는 외국인노동자고용정책 반대집회 때문에 수원으로 간다며 먼저 자리를 떴다. 남은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옛날보다 더 살기 어려워졌다고 말한다. 대화 도중 한 사람이 “할 수만 있으면 이민가고 싶어요. 이 나라에서 살기 싫어요”라고 말했을 때, 희망의 상실과 감춰진 분노를 느낄 수 있었다.
이들에게서 민주주의는 무엇이었나? 나는 새벽의 인력시장에서 정치와 정당 일반의 부재는 물론이고, 노동자들을 대표하는 진보정당의 부재 역시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치권과 시민사회 그리고 여러 운동 단체에서 내세웠던 화려하고 추상적인 진보적 구호들과 담론들이 이 현장에서는 아무 흔적도 갖지 못했다. 이들 노동자들의 존재를 의식한 산업-고용정책, 외국인 노동자정책, 주택정책, 교육정책은 없었다. 지난 20년간 무서운 기세로 밀어닥친 세계화의 물결이 아무런 여과 없이 이들의 삶에 커다란 충격을 가하는 동안, 한국 민주주의는 무엇을 했던 것일까?
최근 안철수, 박원순 현상은 정치권에 몰아닥친 가장 극적인 사건이다. 여러 요인이 다 중요하겠지만, 근본적으로는 노동 없는 민주주의 혹은 실재하는 사회경제적 문제들을 다루지 못했던 한국 정당체제의 무기력함이 가져온 결과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의 다른 모습은 바로 여론조사가 지배하는 정치다. 이미 시민, 시민사회라는 포괄적인 말이 정치를 지배하면서 예견된 현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말은 정당정치가 사회적 기초를 갖기 위해 필요한 것, 즉 사회경제적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사회집단의 존재와 그들 간의 갈등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부정하는 추상화된 개념으로 위력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여론조사 결과가 공직 후보 선출을 지배한다면, 정당이란 여론조사 기관 이상 다른 역할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선거관리위원회가 공인된 여론조사 기관을 통해 대표를 선출하고 정부를 구성하면 될 것이다.
나는 한국 민주주의가 이렇게까지 나빠진 중요한 원인의 하나는, 민주화이후 한국 정치와 사회운동이 학생 운동 출신 엘리트들에 의해 지배된 것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 말은 한국 민주화에서 학생운동의 중심적 역할을 부정하려는 데 있지 않다. 그러나 이들이 그 뒤 정치인이 되고 진보 정당을 하고 사회 운동을 주도한 것이 소외된 사회적 약자들에게 어떠한 실체적 혜택을 주었고, 이들을 위한 정치의 세계를 확장하는 데 무엇을 기여했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에 관한 한 내 대답은 부정적이다. 나는 학생운동의 역사적 역할은 이미 오래전에 끝났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실제의 현실 삶과 유리된 조건에서 의식화되면서 갖게 된 과잉 이념화된 사고방식과 도덕적 우월의식은 그것이 지속되는 시간에 비례해 부정적 효과를 더 크게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곳 일용직 인력시장에서 만난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대졸자가 아니다. 더욱이 서울의 좋은 대학 출신, 즉 엘리트집단이 아니다. 이 두 집단을 연결하는 접점은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동정심을 감정이입(empathy)과 공감(sympathy)의 두 종류로 나누었다. 앞의 것은 스스로 경험하지 않았지만 가치와 이념의 도움으로 다른 사람의 사정에 공감을 갖는 것이고, 뒤의 것은 사실의 구체적인 접촉을 통해 다른 사람의 사정에 동정을 느끼는 것을 지칭한다. 여기에서 인간 행위의 급진성을 불러오는 감정 형태는 앞의 것, 즉 감정이입이다. 현실의 삶에 기초하지 않은 학생운동의 전통이 정치행위나 사회운동을 추동하는 힘으로 과도하게 크게 작용할 때, 진보의 행동정향 역시 그런 형태를 띠게 된다.
그러한 정조와 감정은, 베버의 개념을 빌려 말하면, 강한 신념윤리를 격발하고 추동하는 반면 그것이 가져올 결과에 대한 책임윤리의 부재 내지는 약화를 가져온다. 사실 일용직 건설노동자들이 어떠한 정책을 필요로 하는가 하는 문제는 그들이 처한 조건을 직접 대면할 때 상당 정도는 저절로 드러난다. 그렇지 못했다는 것, 그것 말고 한국 진보정당의 몰락 내지 주변화의 원인을 어디서 찾을 수 있겠는가. 공허한 담론과 추상적 이념의 언어가 지배하는 곳에서 민주주의의 실체적 성과는 만들어질 수 없다. 새벽의 인력시장은 그 어떤 거창한 것이 아닌 이 지극히 단순하고 명백한 진실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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