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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 연속기고] 통합진보당 사태의 정치적 의미

 

http://www.redian.org/archive/8451
“누가 되어도 진보정치 혁신 어렵다” (레디앙, 김민하 진보신당 기획국장 / 2012년 7월 12일, 11:26 AM)
[연속기고①] 통합진보당 사태 보는 진보신당 당원 시각
진보신당에게는 통합진보당의 미래를 염려하고 도래할 파국으로부터 제대로 된 교훈을 찾아 새로운 진보정치를 만들어 나가야 할 사명이 있다. 통합진보당의 운명은 곧 진보정치의 이정표를 바꾸는 것이 되는데, 이것에 한데 묶여 함께 역사의 저 편으로 사라져갈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지금 필요한 것은 정치적 유불리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진보정치의 미래를 전망하며, 새로운 진보정치를 위해 지금 여기에서 무엇을 어떻게 뜯어 고쳐야 할지를 고민하는 것이다.
첫 번째는 소위 혁신파가 내세우는 혁신의 방향이 진보의 혁신과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국민정당, 포괄정당을 가장 잘 할 수 있는 정치세력은 민주통합당이다. 통합진보당의 혁신파가 내세우는 진보정치의 혁신이라는 것은 이것과 거의 동일한 전술을 구사하면서 자신들이 민주통합당보다 이것을 더 잘할 수 있다고 외치는 것과 비슷하다. 지금 당장은 민주통합당과 비슷하니까 국민들이 일시적으로 지지를 표명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결정적인 국면에서 국민들은 진보정치를 선택하기 보다는 민주통합당을 그냥 선택할 것이다.
혁신파가 승리하더라도 이것이 진보정치의 혁신으로 이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보는 두 번째 이유는 결국 이것이 민주통합당과의 선거연합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리라는 것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진보적 색채의 정부가 들어섰음에도 이 정부가 대중의 욕망을 충분히 채워주지 못할 경우 대중들은 다른 대안을 찾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진보정치로부터 새로운 대안을 발견하지 못할 경우 오히려 대중의 사랑을 받게 되는 것은 극우정치이다. 
2012년에 등장할 민주정부가 실패하고 나면 대중들은 필연적으로 다른 대안을 찾게 될 것이다. 이때 진보정치가 대안을 제출할 수 있을 정도의 선명성을 확보하고 있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과연 2012년의 민주정부 구성에 참여하고 나서도 통합진보당이 대중들에게 ‘우리는 진보정당이므로 민주정부와는 다르다’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아닐 것이다. ‘진보적 정권교체’와 함께 흥한 진보정치는 민주정부의 쇠락과 함께 멸망할 것이다.
지금 해야 할 것은 여의도 정치에서의 영향력을 키우고 현실에 부합하는 정책의 코디네이팅을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명확한 깃발을 드는 것이다. 민주정부와 그 친구들의 좌측에도 여전히 유의미한 정도의 진보정치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통합진보당의 혁신파는 이것을 사실상 거부한다.
이제 우리가 던져야 할 물음은 ‘민주정부와 통합진보당의 좌측에 새로운 진보정치가 필요하다면 그것은 어떤 형태가 되어야 하는가?’, ‘통합진보당 사태로부터 새로운 진보정치가 얻어야 할 교훈은 어떤 것이 있는가?’와 같은 것들이다. 
 
http://www.redian.org/archive/8785
‘진성당원제’와 진보정당, 그 복합성 (레디앙, 한윤형 '미디어스' 기자. 미디어비평가 / 2012년 7월 16일, 12:16 PM)
[연속기고②] 목적 아닌 수단이되, 회피할 수 없는 수단
민주노동당엔 각 정파끼리의 갈등을 중재할 수 있는 기제가 필요했고, 또한 매번 그 중재의 결론이 다르게 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필요했다. 그리고 당원들의 투표에 의해 권력이 창출된다는 원칙은 그 필요에 부응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최장집과 그를 따르는 이들이 ‘정당 내 민주주의’의 강조가 적절치 못하다고 비판하고 카리스마적 정치인을 희구해도 한국의 진보정당은 진성당원제를 포기할 수 없게 되었다. 요약하자면 진성당원제는 당연히 진보정당 운동의 목표가 아닌 수단에 불과하지만, 한국 사회 실정에서 재정과 조직화의 문제에 있어 ‘회피할 수 없는 수단’이 되어 버린 것이다.
3연합과 참여계, 그리고 통합연대(진보신당 탈당파)는 과거 민주노동당의 정파연합보다도 훨씬 이질적이며 이들 역시 갈등을 중재할 수 있는 어떤 심급을 필요로 한다. 진성당원제에 대한 일정한 후퇴를 함의한다고도 볼 수 있는 혁신안에 대한 평가도 여기에서 가능할 수 있다.
‘과반 투표 과반 찬성’ 규정을 없앤 것은 경쟁을 줄이기 위한 조치라고 생각된다. 진보세력은 그간 여러 사회운동 단체에서 과반 투표를 위해 미투표자를 독려하다 보니 조직투표와 대리투표가 일어나는 상황을 겪었고, 통합진보당의 선거 문화 역시 이 토대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경쟁은 완화될 수 있는 걸까. ‘비례대표에 대한 100% 전략 공천’이란 개선책은 결국 하나의 선거를 생략하는 대신 당권선거에 걸린 ‘지분’의 크기를 키우는 것이다.
민주노동당과 통합진보당의 역사에서 평당원들이 본인에게 주어진 권리들을 주체적으로 사용하지 못하고 정파의 선택에 포섭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통합진보당 ‘새로나기’ 특위의 쇄신안은 결과적으로 볼 때 그 ‘포섭’을 방해한 것이 아니라 어차피 포섭될 이들의 선택권을 제약하자는 쪽이었다고 볼 수 있다.
즉 통합진보당의 쇄신안은 진성당원제를 결정적으로 후퇴시켜서 문제인 게 아니라, 진성당원제를 결정적으로 후퇴시킬 수는 없는 상황에서 (차라리 그게 가능했다면 장단점을 따져볼 만한 일이었으리라) 진성당원제의 가능성마저 잘라버리는 근시안적인 대책이 나온 상황에 해당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사실 그 ‘조직’이란 것의 실체는 투표에 대한 정보 및 관심을 위임하는 일종의 느슨한 사적 네트워크다. 자주파가 평등파에 대해 지속적으로 우위를 점해왔던 조직화의 실체도 ‘구국의 강철대오’의 조직이 아니라 이러한 네트워크에서의 우위였다.
그리고 이는 한국 사회 시민들의 삶의 형식과 정서에 밀착한 것이었다. ‘인간적이고 술 잘 사주는 어떤 선배’에 의해 운동으로 이끌린 그들은 선거 때마다 누구를 찍어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도 들었고 지침이 없을 경우 스스로 전화를 걸어 “누구를 찍어야 해요?”라고 물어보기도 했다.
통합진보당에게 다른 상황은, 이 당에 있어 2012년은 당의 명운이 결정적으로 달려 있는 중요한 해라는 것이다. 이런 중요한 상황에서 기존 당원이나 새로 들어가는 당원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 할 수 있는 모든 일은 사실상 이번 선거에서 끝났다는 것이 통합진보당원의 처지에 대한 객관적인 설명이다. 따라서 정치에 관심있는 시민에게 ‘통합진보당 입당’이 현명한 선택지가 아닌 것은 당권선거 이전 뿐만이 아니라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더 난감한 것은 여기서 통합진보당이 잘 하기만을 바라야 하는 진보신당원의 사정이다. 만약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이 함께 정권교체에 성공한다면, 이후에 통합진보당 외부의 진보세력 분파에게도 역할이 주어질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정권교체에 실패한다면, 아마도 통합진보당은 민주통합당에 각을 세우면서 영향력을 유지하려 할 것이고 외부 분파의 설 자리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한다고 해서 사태의 향방이 바뀔 수는 없다는 것이 또한 객관적인 현실이다. 통합진보당은 진성당원제를 수용한 민주노동당 창당 이후 12년 진보정당의 역사에서 돋보이게, 진보정당 운동을 지지하는 모든 이들을 논평가로 후퇴(?)시켜버렸다. 
 
http://www.redian.org/archive/8952
진보좌파의 ‘재벌개혁론’은 어디? (레디앙, 박권일 계간 R 편집위원?<소수의견><88만원 세대> 저자 / 2012년 7월 18일, 2:36 PM)
[연속기고③] 좌파의 안목을 가진 경제개혁 담론 부재
장하준‧정승일‧이종태 등과 김상조‧이병천‧유종일‧정태인 등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벌어진 논쟁을 주주자본주의 논쟁이니 신자유주의 논쟁이니 재벌개혁 논쟁이라는 말로 부르는 경우는 있어도 재벌해체 논쟁이라 부르는 경우는 없다.
대타협론자 대 재벌개혁론자의 논쟁은 사실 재벌개혁 문제만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전반적인 한국경제의 성격을 규정하는 논쟁이었고, 훨씬 많은 사람들이 이런저런 논리를 가지고 논쟁에 참여해왔다.
10년간 재벌타협론과 재벌개혁론이 논쟁해왔고, 10년 전에 비하면 양자의 입장은 눈에 띠게 좁혀졌다. 아니, 애초부터 차이는 그리 크지 않았다고도 볼 수 있다. 양자 모두 자신이 ‘진짜 진보’라는 양, 상대를 “좌파 신자유주의자”로 규정하거나 ‘박정희주의자’라는 식으로 몰아갔지만 본질적인 공통점이 있다. 바로 성장전략을 중심으로 국민경제를 사고한다는 점이다. 흔히, 주주자본주의의 원칙이 1원 1표(또는 1주 1표)라면, 이해당사자 자본주의의 원칙은 1인 1표라고 말한다.
장하준 모델에서 핵심은 국가가 산업정책을 기획하고 은행을 통해 재벌을 통제하고 감시하는 것이다. 관료의 ‘창조적’ 역할은 틈만 나면 강조되지만 노동자의 역량은 그렇게 평가되지 않는다.
노동자의 민주적 참여가 배제된 재벌개혁은 그것이 아무리 ‘민족경제’니 ‘경제민주화’라는 이름을 달고 있더라도 좌파의 ‘재벌개혁론’이라 말하기 어려운 게 아닐까. 이를테면 과거 민주노동당 경제민주화운동본부 시절 송태경이 정교화시킨 노동자기업소유 및 우리사주 전략과 현실적용 사례들, 그리고 철학자 김상봉이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에서 갈파한 노동자 경영참여의 철학 말이다.
그것은 한 마디로 ‘생산/경영에서의 노동자 중심성’이다. 물론 노동자 경영참가나 기업소유가 여전히 여러 가지 이론적‧실천적 난맥을 갖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이 좌파의 결론이 될 순 없더라도 좌파적 재벌개혁론의 ‘출발점’으로 삼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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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진보당 사태와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새로운 모색 (레디앙, 이현대 사회진보연대 운영위원 / 2012년 7월 20일, 10:09 AM)
[연속기고④] 민주노조운동 혁신·재건 전략 필수적
통합진보당의 출범, 총선에서의 야권연대 실패와 새누리당의 승리, 총선 이후 불거진 통합진보당 부정선거, 이후 당권파와 비당권파 간의 폭력을 수반한 첨예한 갈등은 두 개의 커다란 효과를 낳았다. 하나는 이명박 정권과 조중동 등 지배세력으로 하여금 대대적인 이념, 색깔공세를 야기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노동자 민중운동 세력에게 통합진보당을 대체하는 새로운 진보정당 혹은 새로운 노동자정치세력화운동의 절박함을 제기했다는 점이다.
구 당권파는 신 당권파가 통진당을 민주당화시킨다고 비판하지만, 구 당권파와 신당권파 모두 민주통합당과의 선거연합을 통해 정권을 교체한다는 전략을 공유하고 있다. 하지만 말이 좋아 선거연합이지 온 국민의 지탄거리로 전락한 통진당은 자신의 정치적 생존을 위해 민통당과의 선거연합에 목을 맬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혁신이라는 미명으로 탈운동화, 자유주의화의 경향을 강화시킬 가능성이 높다.
이미 민주노동당 활동과정에서 드러났던 여러 가지 문제점을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않고, 뚜렷한 대안이 없다는 현실론으로 그들을 지지, 묵인해온 것이 현재의 통진당 사태를 불러왔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상반기부터 진행된 ‘3자 통합당 반대 선언운동본부’ 활동과정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당 건설에 대한 선언운동본부 내부에 이견이 부각되면서, 민주노총의 총파업과 전국·지역 투쟁전선 구축을 위한 공동활동, 민주노총 혁신을 위한 논의는 거의 진행되지 못했다. 각 정파의 주요 관심사가 모두 당 건설에 쏠려 있다는 반증이다. 
당 건설 논의가 중심이 되면서 구체적인 현장, 지역의 공동실천 논의는 상대화되고 있다. 현장 활동가들의 논의가 당 건설을 중심으로 진행될 경우 당의 성격과 노선, 건설경로 등에 대한 이견으로 민주노총 혁신을 위한 공동 논의와 실천조차 불가능해질 가능성이 높다. 더욱이 현재와 같이 지역, 현장의 운동역량이 취약한 조건에서 노동자정당 건설을 중심으로 역량을 배치할 경우, 민주노조운동을 혁신·재건하기 위한 역량은 그 만큼 취약해 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노동자정당 건설 추진 세력들이 현재의 지역과 현장의 주체적 역량을 고려하지 않고 당 건설로 역량을 집중할 경우 민주노조 운동의 활동력을 더욱 축소시키는 의도치 않은 결과를 낳을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그 동안 노동자 정치세력화 운동의 실패는 한편으로는 진보정당의 대리정치, 의회와 선거 중심의 활동에 원인이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민주노총이 민주노조답게 조합원을 정치적 주체로 세우기 위한 현장 활동(학습과 투쟁, 정치적 실천)을 소홀히 하고, 노조를 진보정당운동의 동원부대로 전락시킨 것에 더 큰 문제점이 있다.
민주노총이 투쟁력과 사회적 영향력을 굳건히 하지 않을 때, 진보정당은 노조운동으로부터 거리두기를 하고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기 위한 당의 우경적 노선전환과 원내 정당화 경향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대중운동의 취약한 토대를 강화시키는 계획 없이 ‘집권’을 위해 노조의 인적, 물적 자원을 동원하는 데 매몰되는 노동자 정치세력화가 아니라, 노조의 민주성·연대성·투쟁성을 바탕으로 계급적 단결과 투쟁력, 사회적 영향력을 확대하는 노동자 정치세력화가 필요하다.
재벌(자본)-보수정당·자유주의정당-관료집단-검찰·경찰 등 억압적 국가장치-보수언론 등 이데올로기장치의 강고한 동맹을 깨뜨리고 사회적 관계를 변혁하기 위해서 사회적 세력과 힘을 형성하지 않는다면, 선거를 통한 집권은 가능할 수도 있지만 사회구조의 변혁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역사적 교훈이다.
노동자 정치세력화운동은 노동자계급이 이념적, 조직적으로 보수주의 혹은 자유주의 정치세력과는 분별 정립하여 정치적, 사회적으로 투쟁력과 영향력 있는 세력으로 성장하기 위한 운동 전략을 말한다. 그 동안 추진되어온 노동자 정치세력화가 정치적으로 파산한 상황에서 이제 ‘노동자 정치세력화 운동’이라는 개념의 본래의 의미를 되살려야 한다. ‘계급적 단결을 통해 노동해방, 평등사회 건설을 지향하는 노동조합운동’과 ‘변혁적인 노동자정당’, ‘민중연대 투쟁전선’을 포함하는 운동 전략으로 재구성되어야 한다.
그 동안 노동자 정치세력화운동의 실패의 교훈을 곱씹으며 새로운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위한 입체적인 운동전략을 세워야 할 때이다.
첫째, 모두가 주지하다시피 신자유주의 노동유연화 공세와 타임오프, 복수노조 악법을 앞세운 노조탄압 속에서 민주노조운동은 어려움을 겪고 있고, 통진당 사태로 인해 진보정당운동 또한 심각한 위기 상황에 처해 있다.
자칫 새로운 노동자정당/진보정당 건설의 전망도 확보하지 못하고, 민주노조운동 또한 혁신의 계기를 확보하지 못하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지 않도록 상호 입장 차이를 인정하면서 상생하기 위한 협력과 연대가 절실한 시점이다. 현재 각 정치세력 독자적으로 운동의 전망을 개척하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인 만큼 협력과 경쟁의 지점을 명확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금속을 중심으로 산별과 지역의 활동가들이 결집하고 있는 변혁정치모임이 현재적 수준에서 한계가 많지만, 활동가들의 지역별 공동논의와 공동실천의 틀로 발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당 건설 논의 과정이 민주노조의 혁신과 강화를 위한 자기 활동을 방기하는 과정이 되지 않도록 당의 성격, 정강정책, 건설경로 등을 중심으로 각 조직의 입장을 논쟁하는 방식 보다는 노조운동에서 노동자 정치세력화운동, 정당운동의 의미를 재정립하고, 지역과 현장에서의 민주노조운동의 혁신방안과 지역/현장에서의 공동투쟁과 정치활동을 어떻게 진행할 것인가라는 구체적인 쟁점을 중심으로 실천적으로 구성되어야 할 것이다.
변혁적인 노동자정당, 사회운동적인 노동자정당은 노선의 선명함과 주체들의 의지만으로 가능하지 않다. 민주노조 운동, 대중운동의 역량과 투쟁력이 취약한 조건에서 조급하게 노동자정당을 추진한다면 정당으로서의 사회적 영향력이 거의 없거나, 통진당처럼 자유주의화/우경화의 길로 빠져들 가능성이 크다.
둘째, 지난 노동자 정치세력화운동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현 시기 노동자정당/진보정당의 위상과 역할을 분명히 해야 한다.
의회진출만을 지상의 가치로 삼는 선거주의-의회주의 정당이 아니라 민주노조운동-사회운동의 활성화, 이를 토대로 한 민중연대 투쟁전선의 강화를 자신의 분명한 목표로 하는 사회운동정당이라는 방향성을 확고히 해야 한다. 또한 현재와 같은 취약한 운동조건에서 인적, 물적 자원을 당으로 집중시키겠다는 사고방식을 전환해야 한다.
민주노조운동을 중심으로 한 대중운동과 신자유주의에 맞서 대안적 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민주적, 계급적 사회운동의 역량과의 협력과 연대를 통해 당의 전략과 노선, 활동가 양성프로그램을 수립해야 한다.
당 정책단위의 아이디어성 정책이 아니라 민주노조운동을 중심으로 한 대중운동과 민중연대 투쟁전선의 요구를 바탕으로 당의 정강 정책을 수립해야 하며, 공동논의와 공동투쟁을 통해 대중운동의 요구와 당의 노선을 통일시켜 나가야 한다.
지역 당 조직의 경우 지역의 노조와 사회운동을 혁신·재건시키기 위한 연대와 협력의 센터로서 자기역할을 분명히 해야 한다. 지역운동을 강화하기 위한 기본 역량을 갖추지도 못한 채 선거구별 선거대응 조직으로 전락하고 있는 당의 지역조직을 혁신하고 지원하기 위한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정부/지자체로부터의 자주적이고, 신자유주의적 공세에 저항하는 지역운동을 형성하기 위한 지역 당 조직과 건강한 사회운동, 노조의 연대와 협력이 어느 때보다도 절실한 시기이다.
셋째, 노동현장의 조직화와 관련하여 당으로의 자원 동원(당원 가입을 통한 재정확보, 당직/공직 선거에서의 표 동원)에만 관심을 갖는 기존의 관성을 전면적으로 혁신해야 한다.
장시간 고강도 노동에 시달리는 노동현장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여전히 투표권조차 행사하지 못하고 있는 중소영세 비정규사업장 노동자들의 무권리 상태를 개선하지 않고 현장 노동자들이 지역의 정치활동의 주체로 나서는 것은 쉽지 않다. 무권리의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운동의 주체로 세우기 위해 노조운동과 어떻게 연대하고 협력할 것인지 공동의 전략마련이 필요하다.
그 나마 조직된 노동자 당원들의 경우 선거 때 당의 선거운동원으로 동원하는 것을 넘어서 현장에서의 정치활동을 어떻게 펼쳐야 하는지, 민주노조운동의 혁신과 강화를 위해 어떤 활동을 펼쳐야 하는지 당의 입장과 계획이 있어야 한다.
재벌문제와 관련해서도 탈삼성과 같은 모호한 아이디어성 기획이 아니라 민주노조운동의 조직 확대와 주체적 역량 강화, 재벌에 대한 사회적 통제를 위한 제도적 요구가 함께 결합될 수 있도록 노조운동과의 공동전략수립이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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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와 정치 사이 – ‘패권주의’ 문제 (레디앙, 최태섭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공동저자 / 2012년 7월 24일, 12:24 PM)
[연속기고⑤] 사람의 고통과 상식에서 출발하는 진짜 헤게모니를 찾아야
우리가 목격한 패권주의적 행태의 요란함 뒤에는 방향과 목적의 상실이라는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그리고 이 문제는 패권주의에 동조하지 않는 이들에게도 그다지 가벼운 문제가 아니다.
구 당권파는 자신의 이념이나 비전을 드러내지 않고 계속해서 자유주의적인 사상의 자유나, 검찰의 탄압 같은 것 뒤에 숨었다. ‘대체 왜 저 북한이 내 북한이다 말을 못해!’라고 묻고 싶을 정도로 그들은 계속해서 숨을 곳만을 찾아다녔다. 이들은 기껏해야 북한의 3대 세습, 인권탄압, 미사일발사 같은 사안들에 대해 과감하게 입장을 표명하지 않는 것으로 자신들의 입장을 드러냈을 뿐이다.
이런 북한의 부재는 오늘날 북한이 남한사회에서 갖는 위상의 급격한 변화 때문일 것이다. 냉전구도를 체화한 채로 이루어졌던 건국과, 한국전쟁, 이어진 남북간의 진영대결에서 북한은 그야말로 주적이자, 실제의 위협이고, 유혹이었다.
무엇보다도 북한은 꽤 오랜 시간동안 남한보다 더 나은 경제적 여건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남한의 경제가 급성장함과 동시에 남북간의 격차는 점점 더 벌어졌고, 오늘날 우리들의 시대에서 북한이 갖는 위치는 놀랍게도 “찢어지게 가난한 나라”로 탈바꿈했다. 그 결과 남한의 대중은 북한과의 통일에 들어갈 통일비용을 걱정하고, 남북관계가 국내 경제에 미칠 여파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남한정부의 색깔몰이에 시큰둥해하는 합리적 인간이 되었다. 즉 단순히 정쟁의 도구로 전락하거나, 먹고살기 바빠 기각되면서 북한의 존재는 남한사회에서 점점 흐려졌다.
분단문제는 전혀 새로운 조건과 사람들 속에서 급격한 위상변화를 겪었다. 그러나 정작 그것의 담지자를 자처했던 이들은 그 변화에 대해 사유하고 성찰하기보다는 그것을 일종의 신화로 만드는 길을 택했다. 그 이후의 행보는 세속화된 종교들의 논리와 매우 흡사하게 돌아갔다. 문제의 근본과 대면하는 것을 피하며 그것을 절대화 할 때, 현실에서 그것의 공백을 메우며 작동했던 것은 힘과 조직의 논리였다.
이들은 자신의 정당성을 스스로 찾아내고 만들어 내기보다는 신화로부터, 그리고 무엇보다도 “적”들로부터 찾았다. 이 불안정한 존재방식을 보충하는 것은 논리나 설득이 아니라 ‘힘’이었다. 힘의 이러한 사용방식은 이들이 끝없는 권력의지를 갖게 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얻어진 힘은 점차 정당성과 동의어가 되었다. 이 순환 속에서 조직은 괴물이 되어갔다.
이 역사적 희생자들은 자신의 위치를 돌아보기를 그만두었고, 이들은 고약한 농담 같은 역사적 뒤틀림을 고스란히 체현하며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가 되어갔다.
중요한 것은 이 방향의 상실이 단지 이들에게만 한정된 조건은 아니라는 점일 것이다. 아쉽게도 과거의 영광이 앞으로의 갈 길을 제시해주지는 못한다. 
뒤이은 통진당 사태가 보여준 것들을 여기에 더하면 이념, 조직, 정치세력화를 포함하여 민주화로부터 비롯된 진보의 흐름이 모두 종말을 고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NLPDR도, 끈끈한 조직력도, 야권통합도 이 사태를 구원하지 못하며, 민주화원로들과 진보진영 역시 마찬가지다.
앞으로 한국사회에서 민주화가 소환된다면 그것은 민주화 자체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현존하는 세력에 대한 안티테제로서만 가능할 것이다. 민주화는 이미 그 자체의 길을 계속 이어갈 동력을 상실했고, 정당성이나 도덕성을 손쉽게 보장받을 수 없게 되었다.
물론 이것은 한국이 다시 독재정권이 지배하는 나라가 될 것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민주화는 수구적 우파만 ‘당한 것’이 아니라, 민주 진보에도 동시에 주어진 동일한 환경이다.
자본주의 질서가 조금도 변하지 않고 오히려 이 민주 진보에 의해 신자유주의가 추동된 덕에 우파진영의 페널티는 상당부분 사라졌다. 한미FTA, 미국산쇠고기수입, 강정해군기지 등등의 문제에서 각을 세울 수 없었던 것은 그것이 이미 이전 정부부터 추진되었던 것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지금 우리에게 정치가 가능하다면 그것은 손에 쥐고 있는 한줌거리도 안 되는 것들을 지키겠다는 부질없는 움직임에서는 나타날 수 없다. 또 핵심의 부재를 우회하려는 얄팍한 술수들 속에도 정치는 없다. 진정성이라는 이름으로 흔히 불리고 있는 태도 속에도 정치는 없다. 정확한 방법은 나도 모르겠으나, 시작 지점만은 확실하다. 사람들의 고통과 상식에서 출발하되, 거기에 영합하거나 부화뇌동하지 않으면서 그것을 넘어갈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것이 진짜 헤게모니에 이르는 길이다.

 

http://www.redian.org/archive/8451
“누가 되어도 진보정치 혁신 어렵다” (레디앙, 김민하 진보신당 기획국장 / 2012년 7월 12일, 11:26 AM)
[연속기고①] 통합진보당 사태 보는 진보신당 당원 시각
진보신당에게는 통합진보당의 미래를 염려하고 도래할 파국으로부터 제대로 된 교훈을 찾아 새로운 진보정치를 만들어 나가야 할 사명이 있다. 통합진보당의 운명은 곧 진보정치의 이정표를 바꾸는 것이 되는데, 이것에 한데 묶여 함께 역사의 저 편으로 사라져갈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지금 필요한 것은 정치적 유불리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진보정치의 미래를 전망하며, 새로운 진보정치를 위해 지금 여기에서 무엇을 어떻게 뜯어 고쳐야 할지를 고민하는 것이다.
첫 번째는 소위 혁신파가 내세우는 혁신의 방향이 진보의 혁신과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국민정당, 포괄정당을 가장 잘 할 수 있는 정치세력은 민주통합당이다. 통합진보당의 혁신파가 내세우는 진보정치의 혁신이라는 것은 이것과 거의 동일한 전술을 구사하면서 자신들이 민주통합당보다 이것을 더 잘할 수 있다고 외치는 것과 비슷하다. 지금 당장은 민주통합당과 비슷하니까 국민들이 일시적으로 지지를 표명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결정적인 국면에서 국민들은 진보정치를 선택하기 보다는 민주통합당을 그냥 선택할 것이다.
혁신파가 승리하더라도 이것이 진보정치의 혁신으로 이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보는 두 번째 이유는 결국 이것이 민주통합당과의 선거연합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리라는 것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진보적 색채의 정부가 들어섰음에도 이 정부가 대중의 욕망을 충분히 채워주지 못할 경우 대중들은 다른 대안을 찾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진보정치로부터 새로운 대안을 발견하지 못할 경우 오히려 대중의 사랑을 받게 되는 것은 극우정치이다. 
2012년에 등장할 민주정부가 실패하고 나면 대중들은 필연적으로 다른 대안을 찾게 될 것이다. 이때 진보정치가 대안을 제출할 수 있을 정도의 선명성을 확보하고 있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과연 2012년의 민주정부 구성에 참여하고 나서도 통합진보당이 대중들에게 ‘우리는 진보정당이므로 민주정부와는 다르다’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아닐 것이다. ‘진보적 정권교체’와 함께 흥한 진보정치는 민주정부의 쇠락과 함께 멸망할 것이다.
지금 해야 할 것은 여의도 정치에서의 영향력을 키우고 현실에 부합하는 정책의 코디네이팅을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명확한 깃발을 드는 것이다. 민주정부와 그 친구들의 좌측에도 여전히 유의미한 정도의 진보정치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통합진보당의 혁신파는 이것을 사실상 거부한다.
이제 우리가 던져야 할 물음은 ‘민주정부와 통합진보당의 좌측에 새로운 진보정치가 필요하다면 그것은 어떤 형태가 되어야 하는가?’, ‘통합진보당 사태로부터 새로운 진보정치가 얻어야 할 교훈은 어떤 것이 있는가?’와 같은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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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성당원제’와 진보정당, 그 복합성 (레디앙, 한윤형 '미디어스' 기자. 미디어비평가 / 2012년 7월 16일, 12:16 PM)
[연속기고②] 목적 아닌 수단이되, 회피할 수 없는 수단
민주노동당엔 각 정파끼리의 갈등을 중재할 수 있는 기제가 필요했고, 또한 매번 그 중재의 결론이 다르게 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필요했다. 그리고 당원들의 투표에 의해 권력이 창출된다는 원칙은 그 필요에 부응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최장집과 그를 따르는 이들이 ‘정당 내 민주주의’의 강조가 적절치 못하다고 비판하고 카리스마적 정치인을 희구해도 한국의 진보정당은 진성당원제를 포기할 수 없게 되었다. 요약하자면 진성당원제는 당연히 진보정당 운동의 목표가 아닌 수단에 불과하지만, 한국 사회 실정에서 재정과 조직화의 문제에 있어 ‘회피할 수 없는 수단’이 되어 버린 것이다.
3연합과 참여계, 그리고 통합연대(진보신당 탈당파)는 과거 민주노동당의 정파연합보다도 훨씬 이질적이며 이들 역시 갈등을 중재할 수 있는 어떤 심급을 필요로 한다. 진성당원제에 대한 일정한 후퇴를 함의한다고도 볼 수 있는 혁신안에 대한 평가도 여기에서 가능할 수 있다.
‘과반 투표 과반 찬성’ 규정을 없앤 것은 경쟁을 줄이기 위한 조치라고 생각된다. 진보세력은 그간 여러 사회운동 단체에서 과반 투표를 위해 미투표자를 독려하다 보니 조직투표와 대리투표가 일어나는 상황을 겪었고, 통합진보당의 선거 문화 역시 이 토대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경쟁은 완화될 수 있는 걸까. ‘비례대표에 대한 100% 전략 공천’이란 개선책은 결국 하나의 선거를 생략하는 대신 당권선거에 걸린 ‘지분’의 크기를 키우는 것이다.
민주노동당과 통합진보당의 역사에서 평당원들이 본인에게 주어진 권리들을 주체적으로 사용하지 못하고 정파의 선택에 포섭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통합진보당 ‘새로나기’ 특위의 쇄신안은 결과적으로 볼 때 그 ‘포섭’을 방해한 것이 아니라 어차피 포섭될 이들의 선택권을 제약하자는 쪽이었다고 볼 수 있다.
즉 통합진보당의 쇄신안은 진성당원제를 결정적으로 후퇴시켜서 문제인 게 아니라, 진성당원제를 결정적으로 후퇴시킬 수는 없는 상황에서 (차라리 그게 가능했다면 장단점을 따져볼 만한 일이었으리라) 진성당원제의 가능성마저 잘라버리는 근시안적인 대책이 나온 상황에 해당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사실 그 ‘조직’이란 것의 실체는 투표에 대한 정보 및 관심을 위임하는 일종의 느슨한 사적 네트워크다. 자주파가 평등파에 대해 지속적으로 우위를 점해왔던 조직화의 실체도 ‘구국의 강철대오’의 조직이 아니라 이러한 네트워크에서의 우위였다.
그리고 이는 한국 사회 시민들의 삶의 형식과 정서에 밀착한 것이었다. ‘인간적이고 술 잘 사주는 어떤 선배’에 의해 운동으로 이끌린 그들은 선거 때마다 누구를 찍어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도 들었고 지침이 없을 경우 스스로 전화를 걸어 “누구를 찍어야 해요?”라고 물어보기도 했다.
통합진보당에게 다른 상황은, 이 당에 있어 2012년은 당의 명운이 결정적으로 달려 있는 중요한 해라는 것이다. 이런 중요한 상황에서 기존 당원이나 새로 들어가는 당원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 할 수 있는 모든 일은 사실상 이번 선거에서 끝났다는 것이 통합진보당원의 처지에 대한 객관적인 설명이다. 따라서 정치에 관심있는 시민에게 ‘통합진보당 입당’이 현명한 선택지가 아닌 것은 당권선거 이전 뿐만이 아니라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더 난감한 것은 여기서 통합진보당이 잘 하기만을 바라야 하는 진보신당원의 사정이다. 만약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이 함께 정권교체에 성공한다면, 이후에 통합진보당 외부의 진보세력 분파에게도 역할이 주어질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정권교체에 실패한다면, 아마도 통합진보당은 민주통합당에 각을 세우면서 영향력을 유지하려 할 것이고 외부 분파의 설 자리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한다고 해서 사태의 향방이 바뀔 수는 없다는 것이 또한 객관적인 현실이다. 통합진보당은 진성당원제를 수용한 민주노동당 창당 이후 12년 진보정당의 역사에서 돋보이게, 진보정당 운동을 지지하는 모든 이들을 논평가로 후퇴(?)시켜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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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좌파의 ‘재벌개혁론’은 어디? (레디앙, 박권일 계간 R 편집위원?<소수의견><88만원 세대> 저자 / 2012년 7월 18일, 2:36 PM)
[연속기고③] 좌파의 안목을 가진 경제개혁 담론 부재
장하준‧정승일‧이종태 등과 김상조‧이병천‧유종일‧정태인 등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벌어진 논쟁을 주주자본주의 논쟁이니 신자유주의 논쟁이니 재벌개혁 논쟁이라는 말로 부르는 경우는 있어도 재벌해체 논쟁이라 부르는 경우는 없다.
대타협론자 대 재벌개혁론자의 논쟁은 사실 재벌개혁 문제만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전반적인 한국경제의 성격을 규정하는 논쟁이었고, 훨씬 많은 사람들이 이런저런 논리를 가지고 논쟁에 참여해왔다.
10년간 재벌타협론과 재벌개혁론이 논쟁해왔고, 10년 전에 비하면 양자의 입장은 눈에 띠게 좁혀졌다. 아니, 애초부터 차이는 그리 크지 않았다고도 볼 수 있다. 양자 모두 자신이 ‘진짜 진보’라는 양, 상대를 “좌파 신자유주의자”로 규정하거나 ‘박정희주의자’라는 식으로 몰아갔지만 본질적인 공통점이 있다. 바로 성장전략을 중심으로 국민경제를 사고한다는 점이다. 흔히, 주주자본주의의 원칙이 1원 1표(또는 1주 1표)라면, 이해당사자 자본주의의 원칙은 1인 1표라고 말한다.
장하준 모델에서 핵심은 국가가 산업정책을 기획하고 은행을 통해 재벌을 통제하고 감시하는 것이다. 관료의 ‘창조적’ 역할은 틈만 나면 강조되지만 노동자의 역량은 그렇게 평가되지 않는다.
노동자의 민주적 참여가 배제된 재벌개혁은 그것이 아무리 ‘민족경제’니 ‘경제민주화’라는 이름을 달고 있더라도 좌파의 ‘재벌개혁론’이라 말하기 어려운 게 아닐까. 이를테면 과거 민주노동당 경제민주화운동본부 시절 송태경이 정교화시킨 노동자기업소유 및 우리사주 전략과 현실적용 사례들, 그리고 철학자 김상봉이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에서 갈파한 노동자 경영참여의 철학 말이다.
그것은 한 마디로 ‘생산/경영에서의 노동자 중심성’이다. 물론 노동자 경영참가나 기업소유가 여전히 여러 가지 이론적‧실천적 난맥을 갖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이 좌파의 결론이 될 순 없더라도 좌파적 재벌개혁론의 ‘출발점’으로 삼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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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진보당 사태와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새로운 모색 (레디앙, 이현대 사회진보연대 운영위원 / 2012년 7월 20일, 10:09 AM)
[연속기고④] 민주노조운동 혁신·재건 전략 필수적
통합진보당의 출범, 총선에서의 야권연대 실패와 새누리당의 승리, 총선 이후 불거진 통합진보당 부정선거, 이후 당권파와 비당권파 간의 폭력을 수반한 첨예한 갈등은 두 개의 커다란 효과를 낳았다. 하나는 이명박 정권과 조중동 등 지배세력으로 하여금 대대적인 이념, 색깔공세를 야기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노동자 민중운동 세력에게 통합진보당을 대체하는 새로운 진보정당 혹은 새로운 노동자정치세력화운동의 절박함을 제기했다는 점이다.
구 당권파는 신 당권파가 통진당을 민주당화시킨다고 비판하지만, 구 당권파와 신당권파 모두 민주통합당과의 선거연합을 통해 정권을 교체한다는 전략을 공유하고 있다. 하지만 말이 좋아 선거연합이지 온 국민의 지탄거리로 전락한 통진당은 자신의 정치적 생존을 위해 민통당과의 선거연합에 목을 맬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혁신이라는 미명으로 탈운동화, 자유주의화의 경향을 강화시킬 가능성이 높다.
이미 민주노동당 활동과정에서 드러났던 여러 가지 문제점을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않고, 뚜렷한 대안이 없다는 현실론으로 그들을 지지, 묵인해온 것이 현재의 통진당 사태를 불러왔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상반기부터 진행된 ‘3자 통합당 반대 선언운동본부’ 활동과정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당 건설에 대한 선언운동본부 내부에 이견이 부각되면서, 민주노총의 총파업과 전국·지역 투쟁전선 구축을 위한 공동활동, 민주노총 혁신을 위한 논의는 거의 진행되지 못했다. 각 정파의 주요 관심사가 모두 당 건설에 쏠려 있다는 반증이다. 
당 건설 논의가 중심이 되면서 구체적인 현장, 지역의 공동실천 논의는 상대화되고 있다. 현장 활동가들의 논의가 당 건설을 중심으로 진행될 경우 당의 성격과 노선, 건설경로 등에 대한 이견으로 민주노총 혁신을 위한 공동 논의와 실천조차 불가능해질 가능성이 높다. 더욱이 현재와 같이 지역, 현장의 운동역량이 취약한 조건에서 노동자정당 건설을 중심으로 역량을 배치할 경우, 민주노조운동을 혁신·재건하기 위한 역량은 그 만큼 취약해 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노동자정당 건설 추진 세력들이 현재의 지역과 현장의 주체적 역량을 고려하지 않고 당 건설로 역량을 집중할 경우 민주노조 운동의 활동력을 더욱 축소시키는 의도치 않은 결과를 낳을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그 동안 노동자 정치세력화 운동의 실패는 한편으로는 진보정당의 대리정치, 의회와 선거 중심의 활동에 원인이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민주노총이 민주노조답게 조합원을 정치적 주체로 세우기 위한 현장 활동(학습과 투쟁, 정치적 실천)을 소홀히 하고, 노조를 진보정당운동의 동원부대로 전락시킨 것에 더 큰 문제점이 있다.
민주노총이 투쟁력과 사회적 영향력을 굳건히 하지 않을 때, 진보정당은 노조운동으로부터 거리두기를 하고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기 위한 당의 우경적 노선전환과 원내 정당화 경향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대중운동의 취약한 토대를 강화시키는 계획 없이 ‘집권’을 위해 노조의 인적, 물적 자원을 동원하는 데 매몰되는 노동자 정치세력화가 아니라, 노조의 민주성·연대성·투쟁성을 바탕으로 계급적 단결과 투쟁력, 사회적 영향력을 확대하는 노동자 정치세력화가 필요하다.
재벌(자본)-보수정당·자유주의정당-관료집단-검찰·경찰 등 억압적 국가장치-보수언론 등 이데올로기장치의 강고한 동맹을 깨뜨리고 사회적 관계를 변혁하기 위해서 사회적 세력과 힘을 형성하지 않는다면, 선거를 통한 집권은 가능할 수도 있지만 사회구조의 변혁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역사적 교훈이다.
노동자 정치세력화운동은 노동자계급이 이념적, 조직적으로 보수주의 혹은 자유주의 정치세력과는 분별 정립하여 정치적, 사회적으로 투쟁력과 영향력 있는 세력으로 성장하기 위한 운동 전략을 말한다. 그 동안 추진되어온 노동자 정치세력화가 정치적으로 파산한 상황에서 이제 ‘노동자 정치세력화 운동’이라는 개념의 본래의 의미를 되살려야 한다. ‘계급적 단결을 통해 노동해방, 평등사회 건설을 지향하는 노동조합운동’과 ‘변혁적인 노동자정당’, ‘민중연대 투쟁전선’을 포함하는 운동 전략으로 재구성되어야 한다.
그 동안 노동자 정치세력화운동의 실패의 교훈을 곱씹으며 새로운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위한 입체적인 운동전략을 세워야 할 때이다.
첫째, 모두가 주지하다시피 신자유주의 노동유연화 공세와 타임오프, 복수노조 악법을 앞세운 노조탄압 속에서 민주노조운동은 어려움을 겪고 있고, 통진당 사태로 인해 진보정당운동 또한 심각한 위기 상황에 처해 있다.
자칫 새로운 노동자정당/진보정당 건설의 전망도 확보하지 못하고, 민주노조운동 또한 혁신의 계기를 확보하지 못하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지 않도록 상호 입장 차이를 인정하면서 상생하기 위한 협력과 연대가 절실한 시점이다. 현재 각 정치세력 독자적으로 운동의 전망을 개척하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인 만큼 협력과 경쟁의 지점을 명확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금속을 중심으로 산별과 지역의 활동가들이 결집하고 있는 변혁정치모임이 현재적 수준에서 한계가 많지만, 활동가들의 지역별 공동논의와 공동실천의 틀로 발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당 건설 논의 과정이 민주노조의 혁신과 강화를 위한 자기 활동을 방기하는 과정이 되지 않도록 당의 성격, 정강정책, 건설경로 등을 중심으로 각 조직의 입장을 논쟁하는 방식 보다는 노조운동에서 노동자 정치세력화운동, 정당운동의 의미를 재정립하고, 지역과 현장에서의 민주노조운동의 혁신방안과 지역/현장에서의 공동투쟁과 정치활동을 어떻게 진행할 것인가라는 구체적인 쟁점을 중심으로 실천적으로 구성되어야 할 것이다.
변혁적인 노동자정당, 사회운동적인 노동자정당은 노선의 선명함과 주체들의 의지만으로 가능하지 않다. 민주노조 운동, 대중운동의 역량과 투쟁력이 취약한 조건에서 조급하게 노동자정당을 추진한다면 정당으로서의 사회적 영향력이 거의 없거나, 통진당처럼 자유주의화/우경화의 길로 빠져들 가능성이 크다.
둘째, 지난 노동자 정치세력화운동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현 시기 노동자정당/진보정당의 위상과 역할을 분명히 해야 한다.
의회진출만을 지상의 가치로 삼는 선거주의-의회주의 정당이 아니라 민주노조운동-사회운동의 활성화, 이를 토대로 한 민중연대 투쟁전선의 강화를 자신의 분명한 목표로 하는 사회운동정당이라는 방향성을 확고히 해야 한다. 또한 현재와 같은 취약한 운동조건에서 인적, 물적 자원을 당으로 집중시키겠다는 사고방식을 전환해야 한다.
민주노조운동을 중심으로 한 대중운동과 신자유주의에 맞서 대안적 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민주적, 계급적 사회운동의 역량과의 협력과 연대를 통해 당의 전략과 노선, 활동가 양성프로그램을 수립해야 한다.
당 정책단위의 아이디어성 정책이 아니라 민주노조운동을 중심으로 한 대중운동과 민중연대 투쟁전선의 요구를 바탕으로 당의 정강 정책을 수립해야 하며, 공동논의와 공동투쟁을 통해 대중운동의 요구와 당의 노선을 통일시켜 나가야 한다.
지역 당 조직의 경우 지역의 노조와 사회운동을 혁신·재건시키기 위한 연대와 협력의 센터로서 자기역할을 분명히 해야 한다. 지역운동을 강화하기 위한 기본 역량을 갖추지도 못한 채 선거구별 선거대응 조직으로 전락하고 있는 당의 지역조직을 혁신하고 지원하기 위한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정부/지자체로부터의 자주적이고, 신자유주의적 공세에 저항하는 지역운동을 형성하기 위한 지역 당 조직과 건강한 사회운동, 노조의 연대와 협력이 어느 때보다도 절실한 시기이다.
셋째, 노동현장의 조직화와 관련하여 당으로의 자원 동원(당원 가입을 통한 재정확보, 당직/공직 선거에서의 표 동원)에만 관심을 갖는 기존의 관성을 전면적으로 혁신해야 한다.
장시간 고강도 노동에 시달리는 노동현장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여전히 투표권조차 행사하지 못하고 있는 중소영세 비정규사업장 노동자들의 무권리 상태를 개선하지 않고 현장 노동자들이 지역의 정치활동의 주체로 나서는 것은 쉽지 않다. 무권리의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운동의 주체로 세우기 위해 노조운동과 어떻게 연대하고 협력할 것인지 공동의 전략마련이 필요하다.
그 나마 조직된 노동자 당원들의 경우 선거 때 당의 선거운동원으로 동원하는 것을 넘어서 현장에서의 정치활동을 어떻게 펼쳐야 하는지, 민주노조운동의 혁신과 강화를 위해 어떤 활동을 펼쳐야 하는지 당의 입장과 계획이 있어야 한다.
재벌문제와 관련해서도 탈삼성과 같은 모호한 아이디어성 기획이 아니라 민주노조운동의 조직 확대와 주체적 역량 강화, 재벌에 대한 사회적 통제를 위한 제도적 요구가 함께 결합될 수 있도록 노조운동과의 공동전략수립이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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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와 정치 사이 – ‘패권주의’ 문제 (레디앙, 최태섭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공동저자 / 2012년 7월 24일, 12:24 PM)
[연속기고⑤] 사람의 고통과 상식에서 출발하는 진짜 헤게모니를 찾아야
우리가 목격한 패권주의적 행태의 요란함 뒤에는 방향과 목적의 상실이라는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그리고 이 문제는 패권주의에 동조하지 않는 이들에게도 그다지 가벼운 문제가 아니다.
구 당권파는 자신의 이념이나 비전을 드러내지 않고 계속해서 자유주의적인 사상의 자유나, 검찰의 탄압 같은 것 뒤에 숨었다. ‘대체 왜 저 북한이 내 북한이다 말을 못해!’라고 묻고 싶을 정도로 그들은 계속해서 숨을 곳만을 찾아다녔다. 이들은 기껏해야 북한의 3대 세습, 인권탄압, 미사일발사 같은 사안들에 대해 과감하게 입장을 표명하지 않는 것으로 자신들의 입장을 드러냈을 뿐이다.
이런 북한의 부재는 오늘날 북한이 남한사회에서 갖는 위상의 급격한 변화 때문일 것이다. 냉전구도를 체화한 채로 이루어졌던 건국과, 한국전쟁, 이어진 남북간의 진영대결에서 북한은 그야말로 주적이자, 실제의 위협이고, 유혹이었다.
무엇보다도 북한은 꽤 오랜 시간동안 남한보다 더 나은 경제적 여건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남한의 경제가 급성장함과 동시에 남북간의 격차는 점점 더 벌어졌고, 오늘날 우리들의 시대에서 북한이 갖는 위치는 놀랍게도 “찢어지게 가난한 나라”로 탈바꿈했다. 그 결과 남한의 대중은 북한과의 통일에 들어갈 통일비용을 걱정하고, 남북관계가 국내 경제에 미칠 여파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남한정부의 색깔몰이에 시큰둥해하는 합리적 인간이 되었다. 즉 단순히 정쟁의 도구로 전락하거나, 먹고살기 바빠 기각되면서 북한의 존재는 남한사회에서 점점 흐려졌다.
분단문제는 전혀 새로운 조건과 사람들 속에서 급격한 위상변화를 겪었다. 그러나 정작 그것의 담지자를 자처했던 이들은 그 변화에 대해 사유하고 성찰하기보다는 그것을 일종의 신화로 만드는 길을 택했다. 그 이후의 행보는 세속화된 종교들의 논리와 매우 흡사하게 돌아갔다. 문제의 근본과 대면하는 것을 피하며 그것을 절대화 할 때, 현실에서 그것의 공백을 메우며 작동했던 것은 힘과 조직의 논리였다.
이들은 자신의 정당성을 스스로 찾아내고 만들어 내기보다는 신화로부터, 그리고 무엇보다도 “적”들로부터 찾았다. 이 불안정한 존재방식을 보충하는 것은 논리나 설득이 아니라 ‘힘’이었다. 힘의 이러한 사용방식은 이들이 끝없는 권력의지를 갖게 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얻어진 힘은 점차 정당성과 동의어가 되었다. 이 순환 속에서 조직은 괴물이 되어갔다.
이 역사적 희생자들은 자신의 위치를 돌아보기를 그만두었고, 이들은 고약한 농담 같은 역사적 뒤틀림을 고스란히 체현하며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가 되어갔다.
중요한 것은 이 방향의 상실이 단지 이들에게만 한정된 조건은 아니라는 점일 것이다. 아쉽게도 과거의 영광이 앞으로의 갈 길을 제시해주지는 못한다. 
뒤이은 통진당 사태가 보여준 것들을 여기에 더하면 이념, 조직, 정치세력화를 포함하여 민주화로부터 비롯된 진보의 흐름이 모두 종말을 고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NLPDR도, 끈끈한 조직력도, 야권통합도 이 사태를 구원하지 못하며, 민주화원로들과 진보진영 역시 마찬가지다.
앞으로 한국사회에서 민주화가 소환된다면 그것은 민주화 자체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현존하는 세력에 대한 안티테제로서만 가능할 것이다. 민주화는 이미 그 자체의 길을 계속 이어갈 동력을 상실했고, 정당성이나 도덕성을 손쉽게 보장받을 수 없게 되었다.
물론 이것은 한국이 다시 독재정권이 지배하는 나라가 될 것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민주화는 수구적 우파만 ‘당한 것’이 아니라, 민주 진보에도 동시에 주어진 동일한 환경이다.
자본주의 질서가 조금도 변하지 않고 오히려 이 민주 진보에 의해 신자유주의가 추동된 덕에 우파진영의 페널티는 상당부분 사라졌다. 한미FTA, 미국산쇠고기수입, 강정해군기지 등등의 문제에서 각을 세울 수 없었던 것은 그것이 이미 이전 정부부터 추진되었던 것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지금 우리에게 정치가 가능하다면 그것은 손에 쥐고 있는 한줌거리도 안 되는 것들을 지키겠다는 부질없는 움직임에서는 나타날 수 없다. 또 핵심의 부재를 우회하려는 얄팍한 술수들 속에도 정치는 없다. 진정성이라는 이름으로 흔히 불리고 있는 태도 속에도 정치는 없다. 정확한 방법은 나도 모르겠으나, 시작 지점만은 확실하다. 사람들의 고통과 상식에서 출발하되, 거기에 영합하거나 부화뇌동하지 않으면서 그것을 넘어갈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것이 진짜 헤게모니에 이르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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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위한 진보정당인가? (레디앙, 이택광 경희대 영문학과 교수 / 2012년 7월 27일, 11:31 AM)
[연속기고⑥]좌파성, 자본주의에 대한 태도로 드러나야
19대 총선의 의미를 되새기자면, 그동안 미약하나마 명맥을 유지해왔던 진보의 이념이 부르주아 정치 무대에서 일방적으로 퇴장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민주당의 왼쪽을 담당하는 역할로 자신을 한정함으로써 통합진보당은 ‘원내진출’을 다시 이루어낼 수가 있었다.
진보신당과 녹색당이 후보를 내고 선거에 참여했지만, 그 지지율은 한 자리 수 밑이었다. 이런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이제 최소한 부르주아의 이해관계를 조절하는 대의민주주의 제도에서 진보의 이념은 더 이상 고려의 대상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이런 조건에서 과연 진보정당은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 것인가? 녹색당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대체로 통합진보당과 진보신당의 관계에 대해 많은 이들은 현실주의와 급진주의의 대립으로 치부하면서 전자에 힘을 실어주는 것 같은 태도를 취해왔다.
그러나 통합진보당과 진보신당의 문제는 급진주의를 버리고 현실주의로 간다면 진보도 대중의 선택을 받을 수 있다는 식으로 단순하게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부르주아 정당제도가 더 이상 인민의 요구를 적절하게 재현해주지 못하는 위기의 국면이 도래했다는 사실에서 원인을 찾는 것이 타당하다. 지난 10여 년간 본격화하기 시작한 한국 자본주의의 문제가 이 위기를 추동하고 있다는 근본적인 진실에 주목해야한다.
‘시민’을 어떤 특정 장소에 거주할 수 있는 권리의 존재로 규정했을 때, 한국 사회가 변화해온 방향은 이런 ‘시민’의 소멸, 다시 말해서 시민사회의 붕괴를 부추겨왔다고 할 수 있다. 한국 자본주의가 급속하게 ‘흐르는 속성’을 띠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흐르는 자본주의’는 쉽게 말해서 주거권과 노동권 같은 기본적인 권리가 의문에 부쳐지는 체제라고 할 수 있다.
사회적인 위계의 상층에 속하지 않는 한, 삶의 안정을 확보하기 어려운 것이 바로 ‘흐르는 자본주의’의 특성이다. 높아진 비정규직 비율과 실업률 증가가 이런 특성을 증명하는 것이다. 또한 이렇게 유동적인 삶이 대세로 굳어짐으로 인해서 정당정치 자체가 위기에 빠진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택배 기사나 시급 아르바이트생이 투표를 위해 자신의 노동시간을 벗어난다는 것은 엄청난 결단 없이 불가능한 일이다.
부동산과 주식시장의 활황에 근거해서 만들어진 중산층을 주요 지지기반으로 설정했던 한국의 정당정치가 경제구조의 변화에 따른 삶의 형식이 전환되면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태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이 지금 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는 원인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부동층의 증가는 예상 득표율을 미궁에 빠트린다는 문제를 넘어서서 정당정치를 이념보다도 대중추수주의에 의존하게 만들어, 정당의 존립 근거 자체를 무너뜨린다.
진보정당이 한국의 정치풍경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는 것은 이런 현실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좋은 시절 한 번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겉늙어버린 느낌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이다.
한때 도시 중간계급을 중심으로 지지기반을 넓혀갔던 진보의 이념도 그 중간계급의 붕괴에 따라서 점점 옛말이 되어온 셈이다. 중간계급은 자신의 몰락을 저지하기 위해 복지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했고, 진보정당도 유럽식 사회민주주의를 정치적 대의로 내걸고 이에 호응하는 형국이었다.
그러나 진보정당 못지않게 위기에 빠진 보수정당이 복지문제를 주요 의제로 삼기 시작하자 상황은 이상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진보정당 입장에서야 보수정당이 자신들의 정책을 빼앗아간 것처럼 보이겠지만, 보수정당의 입장에서 본다면, 부르주아 정치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궁여지책이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진보정당만 위기인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 정당들도 위기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안철수 현상은 바로 이 사실을 증명한다. 안철수 현상은 국회를 정치인의 이익집단으로 간주하고 대통령을 ‘국민의 대표’로 생각하는 한국 특유의 대의민주주의 제도 때문에 빚어진 것이기도 하다. 대통령 직선제가 민주화의 상징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그러나 안철수 현상은 한국 정당정치 구조의 한계에서 발생한 것이지만, 동시에 부르주아 정치에 대한 실망감을 받아서 표출된 것이기도 하다. 이 둘이 복합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 안철수 현상의 특징이다. 전자가 단기적이고 실천적인 문제라고 한다면, 후자는 장기적이고 이념적인 문제이다.
정당정치 구조의 문제라면 안철수로서 일정하게 해결할 수 있겠지만, 부르주아 정치의 문제라고 한다면 안철수는 적절한 대안일 수가 없다. 지금 상황은 두 문제가 하나로 겹쳐져서 마치 전자를 해결하면 후자가 자연스럽게 해소될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런 까닭에 부르주아 정당정치에 대한 실망감이 안철수라는 ‘특출한 개인’으로 수렴되는 것은 양가적인 측면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안철수 또는 중간계급의 지지를 이어 받은 어떤 정치인이 정치개혁에 성공해 전자의 문제를 일정하게 해결해주고 자유주의 가치를 삶의 형식으로 보편화시킬 수 있다면, 진보정당은 본격적으로 후자의 문제를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단계론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되풀이해서 지적하자면, 안철수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는 정당정치의 위기 내에 진보정당이 담당해야하는 일정한 의제들이 숨어 있다는 의미이다. 이 의제들을 발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진보정당운동이다. 따라서 안철수 현상과 진보정당은 서로 무관한 문제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19대 총선에서 진보정당이 지지를 받지 못했던 사실에서 이 문제를 고찰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진보정당이 보수정당과 동일하게 중간계급의 의제를 놓고 경쟁하는 것은 불리할 수밖에 없다. 진보정당만의 의제를 만들어야할 필요성이 제기되는 것이다. 그 의제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자본주의 극복이라는 보편성이라고 본다. 여기에서 보편성이라는 것은 한국 사회 내에서 합의되는 보편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대중의 생활에 뿌리박을 수 있는 이념의 보편성이다. 이것을 통해 진보는 국제주의를 체현할 수 있다. 서구에서 유행하는 이념을 수입해서 보편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경험을 보편적인 것으로 만드는 운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유럽의 좌파들이 자신의 처지를 혁파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한국의 좌파들도 자신의 처지를 개선하기 위해 활동하는 것이다. 한국의 좌파들에게 중요한 것은 따라서 한국의 현실이다. 이 현실에서 진보정당운동을 재정립하는 것이 이를테면 지금 한국의 좌파들에게 주어진 과제라고 하겠다. 한국의 좌파들이 세계체제 전체의 변혁을 책임질 수는 없다. 한국의 NL이나 아랍근본주의자들이라면 모를까, 이 세상 어떤 정치세력도 감히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정당이 재현의 장치라고 한다면, 향후 진보정당은 어떤 정치를 재현할 것인지 고민해야할 것이다. 보수정당과 동일한 방식으로 진보의 가치를 알려낼 수 있다는 생각은 그렇게 큰 설득력을 갖기 어렵게 되었다. 가장 구체적으로 삶의 형식에 파고드는 ‘하방’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 ‘하방’을 총화하고 종합할 수 있는 장소로서 진보정당이 기능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한국의 자본주의가 전환기에 들어서고 있는 이 시점에서 진보의 가치는 더욱 중요한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 진보정당의 위기가 좌파의 종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까닭이다.
문제는 새로운 진보정당운동에 대한 패러다임이다. 자본주의의 모순이 집결하는 지점들을 비추는 ‘거울’로서 진보정당이 몫을 다해야하는 것이다. 새로운 진보정당의 정당성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겠다. 좌파성의 강화라는 것은 오직 급진주의로 정당을 포장하라는 뜻이 아니다. 자본주의에 대한 분명한 태도를 취하라는 것이다.
자본주의를 고쳐서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민주당이나 통합진보당과 다른 근본적인 태도를 취하기 어렵다. 훌륭한 정책을 내놓으면 대중이 선택해줄 것이라는 ‘문화진화주의’에 매몰된다면 진보정당의 미래는 없을지도 모른다. 지배 이데올로기가 강요하는 ‘정상성’의 범주에 근거해서 본다면, 진보정당이 보수정당보다 훌륭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에 진보정당이 필요한 것인지, 그 이념의 입장을 명확하게 해야 한다.http://www.redian.org/archive/9673
무엇을 위한 진보정당인가? (레디앙, 이택광 경희대 영문학과 교수 / 2012년 7월 27일, 11:31 AM)
[연속기고⑥]좌파성, 자본주의에 대한 태도로 드러나야
19대 총선의 의미를 되새기자면, 그동안 미약하나마 명맥을 유지해왔던 진보의 이념이 부르주아 정치 무대에서 일방적으로 퇴장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민주당의 왼쪽을 담당하는 역할로 자신을 한정함으로써 통합진보당은 ‘원내진출’을 다시 이루어낼 수가 있었다.
진보신당과 녹색당이 후보를 내고 선거에 참여했지만, 그 지지율은 한 자리 수 밑이었다. 이런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이제 최소한 부르주아의 이해관계를 조절하는 대의민주주의 제도에서 진보의 이념은 더 이상 고려의 대상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이런 조건에서 과연 진보정당은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 것인가? 녹색당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대체로 통합진보당과 진보신당의 관계에 대해 많은 이들은 현실주의와 급진주의의 대립으로 치부하면서 전자에 힘을 실어주는 것 같은 태도를 취해왔다.
그러나 통합진보당과 진보신당의 문제는 급진주의를 버리고 현실주의로 간다면 진보도 대중의 선택을 받을 수 있다는 식으로 단순하게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부르주아 정당제도가 더 이상 인민의 요구를 적절하게 재현해주지 못하는 위기의 국면이 도래했다는 사실에서 원인을 찾는 것이 타당하다. 지난 10여 년간 본격화하기 시작한 한국 자본주의의 문제가 이 위기를 추동하고 있다는 근본적인 진실에 주목해야한다.
‘시민’을 어떤 특정 장소에 거주할 수 있는 권리의 존재로 규정했을 때, 한국 사회가 변화해온 방향은 이런 ‘시민’의 소멸, 다시 말해서 시민사회의 붕괴를 부추겨왔다고 할 수 있다. 한국 자본주의가 급속하게 ‘흐르는 속성’을 띠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흐르는 자본주의’는 쉽게 말해서 주거권과 노동권 같은 기본적인 권리가 의문에 부쳐지는 체제라고 할 수 있다.
사회적인 위계의 상층에 속하지 않는 한, 삶의 안정을 확보하기 어려운 것이 바로 ‘흐르는 자본주의’의 특성이다. 높아진 비정규직 비율과 실업률 증가가 이런 특성을 증명하는 것이다. 또한 이렇게 유동적인 삶이 대세로 굳어짐으로 인해서 정당정치 자체가 위기에 빠진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택배 기사나 시급 아르바이트생이 투표를 위해 자신의 노동시간을 벗어난다는 것은 엄청난 결단 없이 불가능한 일이다.
부동산과 주식시장의 활황에 근거해서 만들어진 중산층을 주요 지지기반으로 설정했던 한국의 정당정치가 경제구조의 변화에 따른 삶의 형식이 전환되면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태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이 지금 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는 원인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부동층의 증가는 예상 득표율을 미궁에 빠트린다는 문제를 넘어서서 정당정치를 이념보다도 대중추수주의에 의존하게 만들어, 정당의 존립 근거 자체를 무너뜨린다.
진보정당이 한국의 정치풍경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는 것은 이런 현실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좋은 시절 한 번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겉늙어버린 느낌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이다.
한때 도시 중간계급을 중심으로 지지기반을 넓혀갔던 진보의 이념도 그 중간계급의 붕괴에 따라서 점점 옛말이 되어온 셈이다. 중간계급은 자신의 몰락을 저지하기 위해 복지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했고, 진보정당도 유럽식 사회민주주의를 정치적 대의로 내걸고 이에 호응하는 형국이었다.
그러나 진보정당 못지않게 위기에 빠진 보수정당이 복지문제를 주요 의제로 삼기 시작하자 상황은 이상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진보정당 입장에서야 보수정당이 자신들의 정책을 빼앗아간 것처럼 보이겠지만, 보수정당의 입장에서 본다면, 부르주아 정치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궁여지책이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진보정당만 위기인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 정당들도 위기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안철수 현상은 바로 이 사실을 증명한다. 안철수 현상은 국회를 정치인의 이익집단으로 간주하고 대통령을 ‘국민의 대표’로 생각하는 한국 특유의 대의민주주의 제도 때문에 빚어진 것이기도 하다. 대통령 직선제가 민주화의 상징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그러나 안철수 현상은 한국 정당정치 구조의 한계에서 발생한 것이지만, 동시에 부르주아 정치에 대한 실망감을 받아서 표출된 것이기도 하다. 이 둘이 복합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 안철수 현상의 특징이다. 전자가 단기적이고 실천적인 문제라고 한다면, 후자는 장기적이고 이념적인 문제이다.
정당정치 구조의 문제라면 안철수로서 일정하게 해결할 수 있겠지만, 부르주아 정치의 문제라고 한다면 안철수는 적절한 대안일 수가 없다. 지금 상황은 두 문제가 하나로 겹쳐져서 마치 전자를 해결하면 후자가 자연스럽게 해소될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런 까닭에 부르주아 정당정치에 대한 실망감이 안철수라는 ‘특출한 개인’으로 수렴되는 것은 양가적인 측면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안철수 또는 중간계급의 지지를 이어 받은 어떤 정치인이 정치개혁에 성공해 전자의 문제를 일정하게 해결해주고 자유주의 가치를 삶의 형식으로 보편화시킬 수 있다면, 진보정당은 본격적으로 후자의 문제를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단계론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되풀이해서 지적하자면, 안철수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는 정당정치의 위기 내에 진보정당이 담당해야하는 일정한 의제들이 숨어 있다는 의미이다. 이 의제들을 발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진보정당운동이다. 따라서 안철수 현상과 진보정당은 서로 무관한 문제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19대 총선에서 진보정당이 지지를 받지 못했던 사실에서 이 문제를 고찰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진보정당이 보수정당과 동일하게 중간계급의 의제를 놓고 경쟁하는 것은 불리할 수밖에 없다. 진보정당만의 의제를 만들어야할 필요성이 제기되는 것이다. 그 의제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자본주의 극복이라는 보편성이라고 본다. 여기에서 보편성이라는 것은 한국 사회 내에서 합의되는 보편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대중의 생활에 뿌리박을 수 있는 이념의 보편성이다. 이것을 통해 진보는 국제주의를 체현할 수 있다. 서구에서 유행하는 이념을 수입해서 보편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경험을 보편적인 것으로 만드는 운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유럽의 좌파들이 자신의 처지를 혁파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한국의 좌파들도 자신의 처지를 개선하기 위해 활동하는 것이다. 한국의 좌파들에게 중요한 것은 따라서 한국의 현실이다. 이 현실에서 진보정당운동을 재정립하는 것이 이를테면 지금 한국의 좌파들에게 주어진 과제라고 하겠다. 한국의 좌파들이 세계체제 전체의 변혁을 책임질 수는 없다. 한국의 NL이나 아랍근본주의자들이라면 모를까, 이 세상 어떤 정치세력도 감히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정당이 재현의 장치라고 한다면, 향후 진보정당은 어떤 정치를 재현할 것인지 고민해야할 것이다. 보수정당과 동일한 방식으로 진보의 가치를 알려낼 수 있다는 생각은 그렇게 큰 설득력을 갖기 어렵게 되었다. 가장 구체적으로 삶의 형식에 파고드는 ‘하방’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 ‘하방’을 총화하고 종합할 수 있는 장소로서 진보정당이 기능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한국의 자본주의가 전환기에 들어서고 있는 이 시점에서 진보의 가치는 더욱 중요한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 진보정당의 위기가 좌파의 종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까닭이다.
문제는 새로운 진보정당운동에 대한 패러다임이다. 자본주의의 모순이 집결하는 지점들을 비추는 ‘거울’로서 진보정당이 몫을 다해야하는 것이다. 새로운 진보정당의 정당성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겠다. 좌파성의 강화라는 것은 오직 급진주의로 정당을 포장하라는 뜻이 아니다. 자본주의에 대한 분명한 태도를 취하라는 것이다.
자본주의를 고쳐서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민주당이나 통합진보당과 다른 근본적인 태도를 취하기 어렵다. 훌륭한 정책을 내놓으면 대중이 선택해줄 것이라는 ‘문화진화주의’에 매몰된다면 진보정당의 미래는 없을지도 모른다. 지배 이데올로기가 강요하는 ‘정상성’의 범주에 근거해서 본다면, 진보정당이 보수정당보다 훌륭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에 진보정당이 필요한 것인지, 그 이념의 입장을 명확하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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