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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 인류 최초의 핵 홀로코스트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7/07/25 12:15
  • 수정일
    2017/07/25 12:15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전쟁국가 미국] '히로시마'를 둘러싼 기억투쟁 (1)
2017.07.25 08:31:21
 

 

 

 

미국의 역사학자 마틴 셔윈은 2차 대전의 가장 중요한 결과로 "인류의 생존이 더 이상 당연한 것이 아니게 됐다"는 점을 꼽았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탄이 인류 절멸의 위험성을 품고 있다는 뜻이다.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물리학자 I. I. 라비는 셔윈의 지적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히로시마 이후) 갑자기 내일이 심판의 날이 됐다. 이후 언제나 내일은 인류 최후의 심판의 날이었다" 

전면 핵전쟁이 벌어진다면 인류 전체가 몰살될 수 있다는 것, 바로 내일이 그날이 될 수 있다는 경고였다. 이들뿐만이 아니다. 미국 역사학자 존 다우어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대한 원폭 공격을 '핵에 의한 집단 학살(nuclear genocide)'이라고 규정했다. 또 다른 역사학자 리차드 미니어는 히로시마를 나치의 유태인 학살에 버금가는 전쟁범죄, 즉 핵 홀로코스트(atomic holocaust)라고 말했다.  

또한 브루스 커밍스는 히로시마를 '정당한 전쟁의 부당한 마무리'라고 지적하면서 이로부터 절멸주의(exterminism)가 시작됐다고 말한다. 승리를 위해 군인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으며 도시와 국가, 그리고 세계까지도 파괴하는 것, 즉 핵무기에 의한 전면적 파멸의 가능성이 열렸다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전쟁의 목적은 무력의 사용을 통해 상대방을 자신의 의지에 굴복시키는 것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핵전쟁은 부도덕하다. 아니, 도덕 이전에 허망하다. 적과 우리 모두 파멸되기 때문이다.  

학자들만의 의견인 것도 아니다. 도쿄 전범 재판(1946~1948년)에 참여했던 인도인 판사 라다비노드 팔은 소수 의견을 통해 미국의 원폭 공격은 "(태평양전쟁에서 일어난 사건 중) 나치 지도자들이 저지른 만행에 가장 근접한 유일한 사례"라고 지적했다. 

일본 공습을 지휘했던 미군 지휘관들도 자신들의 행위가 전쟁 범죄에 해당된다는 점을 인정했다. 도쿄 대공습을 비롯해 일본 64개 도시에 대한 무차별 공습을 지휘했던 커티스 르메이 장군은 자신의 부하였던 로버트 맥나마라(1961~1967년 국방장관 역임)에게 "만일 미국이 전쟁에서 진다면 미군 지휘부 전원이 전범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헨리 스팀슨 전쟁부 장관은 트루먼 대통령에게 "미국이 잔학행위 면에서 히틀러를 능가한다는 얘기를 듣고 싶지는 않다"고 말했다. 

오바마는 왜 '히로시마 원폭'을 사과하지 않았을까 

이상과 같은 학자들의 지적과 경고, 전쟁 당사자들의 자기 고백은 대부분의 미국인이나 한국인들에게 매우 낯설게 느껴질 것이다. 트루먼 등 2차 대전 당시 미국 지도자들의 공식 발언과 너무도 상반되기 때문이다.  

트루먼 등은 일본군의 극단적 저항에 직면해 미군 병사들과 일본 국민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 원자탄 사용이 불가피했다고 주장해 왔다. 트루먼은 원자탄 사용으로 미군 병사 50~100만 명의 목숨을 구했다고 주장했다.  

대다수 미국인들의 히로시마 인식은 바로 이러한 정치지도자들의 주장을 거의 그대로 받아들인 결과다. 히로시마 원폭 공격은 정당한 전쟁을 조속히 끝내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는 것이다.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투쟁으로 독일 나치즘과 일본 군국주의를 물리치고 세계의 평화와 자유를 회복했다고 믿고 있다. 나아가 도덕적 우월성을 자부한다. 세계를 이끌 자격과 의무와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2차 대전은 '좋은 전쟁'을 넘어 '역사상 최고의 전쟁'이었다. 이런 미국인들에게 히로시마가 집단학살이자 핵 홀로코스트라고 한다면 커다란 도덕적 오점이자 모욕일 수밖에 없다.  

한국인들의 경우 교과서 등을 통해 두 방의 원자탄으로 일본이 패망하고 나라의 독립을 되찾았다고 배워왔다. 원자탄이 해방의 은인인 셈이다. 또한 대다수 월남민들은 6.25전쟁 당시 북한에 대해 원폭을 사용하지 못했던 것을, 그리하여 미국 주도의 한반도 통일이 이루어지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조선인 4만 명이 사망했다는 사실이 제대로 인식되지 못했고, 원폭 공격이 과연 도덕적으로 정당한가에 대한 문제의식도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히로시마의 진실'은 무엇인가? 핵 홀로코스트였는가, 아니면 조기 종전을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는가? 민간인에 대한 원폭 공격은 도덕적으로 정당화 될 수 있는가, 없는가?

이 문제는 핵무기의 운명과 인류의 미래에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만일 대다수 미국인이 히로시마가 핵 홀로코스트였고, 민간인에 대한 원폭 공격은 도덕적으로 정당화 될 수 없다고 믿는다면 핵무기는 미국의 전쟁 도구로서, 나아가 대외정책의 수단으로서 설 자리를 잃게 되기 때문이다.  
 

▲ 히로시마 평화 기념관. 미국이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했을 때 유일하게 남겨진 건물이다. ⓒ위키피디아


불행하게도 지난 70여 년간 대다수 미국인들은 히로시마가 조기 종전을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으며, 앞으로도 미국을 보호하기 위해 핵무기가 필요하다는 정책당국자들의 주장을 맹신해 왔다. 미국 핵이 존속돼 온 이유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지난 1980년대 미국과 소련은 유럽에 경쟁적으로 중거리 핵미사일을 배치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등 서유럽 시민들은 수년간 2차 대전 후 최대의 반핵 시위를 벌였다. 자신들은 미소 간 핵 대결의 인질도, 희생자도 될 수 없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었다. 이들의 반핵 시위는 1987년 미소 간 중거리미사일폐기조약(INF)으로 귀결됐다.  

특정한 종류의 핵무기가 완전 폐기된 것은 이것이 유일하다. INF가 성사된 데는 1985년 권좌에 오른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역할도 컸지만 그 원동력은 바로 서유럽 시민들의 반핵 시위였다. 그만큼 국민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그렇다면 히로시마는 군사적으로 필요하고 도덕적으로 정당한 조치였는가? 지난 70여 년간 미국 핵의 역사는 히로시마에 대한 기억 투쟁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한쪽에는 히로시마는 불가피한 조치였으며 핵무기는 정당한 군사무기라고 주장하는 정치‧군사 지도자와 일단의 지식인들이 있다.  

다른 한 쪽에는 히로시마는 군사적으로 불필요한 조치였고 도덕적으로 정당화 될 수 없으며, 핵무기는 군사무기로 사용돼서는 안 될 '절대악'이라고 주장하는 양심적 지식인과 평화운동가, 비판적 시민 등이 있다. 지금까지는 전자가 다수 의견이다. 핵 위협이 계속되는 이유다.

하지만 미국 학계에서는 대중들의 인식과는 다른 결론이 이미 나와 있다. 히로시마는 군사적으로 불가피한 선택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새뮤얼 워커라는 역사학자는 "미국은 수십만 미군 병사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원폭을 투하한 것이 아니다"라고 지적한다. 나아가 "원폭 공격이 없었어도 전쟁은 비교적 이른 시일에 끝났을 것이며, 일본 본토 상륙은 필요 없었다는 것이 학자들의 일치된 견해"라고 말한다. 

1945년 11월로 예정됐던 규슈 상륙, 46년 3월의 혼슈 상륙 작전에서 예상되는 미군 희생자는 2만 5000~4만 1000명, 아무리 많이 잡아야 5만 명 이하였다는 것이다. 반면 트루먼과 스팀슨 등은 일본 상륙작전으로 미군 병사 50~100만 명의 희생이 예상됐다고 주장했다. 엄청나게 과장된 수치다.  

워커는 미 정부 기관인 핵통제위원회(NRC)의 공식 역사가로, 온건 성향의 제도권 학자다. 제도권 학자인 그가 이런 정도의 발언을 했다는 것은 '히로시마는 군사적으로 불필요한 조치'였다는 것이 미국 역사학계의 일치된 견해임을 말해준다.  

2차 대전 종전 이후 20여 년간 미국에서는 트루먼 등 정부 당국자의 발언이 곧 히로시마의 진실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1965년 가 알페로비츠가 <핵 외교(Atomic Diplomacy)>란 책에서 '원폭 투하의 주요 이유는 군사적이 아니라 정치적'이었으며 '소련에 겁을 주어 전후 상황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는 것'이 주요 이유였다고 주장하면서 이러한 신화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후 1970년대 후반부터 2차 대전 당시의 비밀문서들이 비밀 해제되면서 정부 당국자의 주장은 허구임이 드러났다.  

1975년 마틴 셔윈은 저서 <파괴된 세계(A World Destroyed)>에서 트루먼이 히로시마에 핵 공격을 가한 것은 당시 상황에 비추어 '이해할 만한' 처사이긴 하지만, '피할 수 없는 선택'은 아니었으며 분명 핵 공격을 '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히로시마 원폭이야말로 2차 대전이 남긴 최악의 유산이라고 말한다. 미소 간 극단적 핵 군비경쟁이 벌어지면서(한때 핵탄두가 7만 개 가까이 이르렀다) 민생에 쓰여야 할 수 조 달러 이상의 소중한 자원이 낭비됐고, 인류는 절멸의 위기에 처하게 됐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1945년 여름, (전쟁을 끝내기 위해 미국이 직면한) 선택은 재래식 군사력에 의한 상륙작전이냐 핵전쟁이냐가 아니었다. 다양한 형태의 외교냐 아니면 전쟁(의 지속)이냐였다. 트루먼의 선택은 이해할 만하지만 불가피한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 피할 수도 있었다"

즉 트루먼 등은 당시 미국의 선택지가 상륙작전 아니면 원폭 투하밖에 없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외교적 방식에 의한 전쟁 종결이라는 다른 대안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셔윈은 세 가지를 꼽는다. 첫째 항복 조건의 변경(천황제 유지 인정), 둘째 소련군의 참전, 셋째 기존 해상 봉쇄와 공습의 지속 등이 그것이다.  

첫째 대안이 가장 가능성이 높았다. 일본은 1945년 6월부터 최대한 유리한 조건의 항복을 추구하고 있었으며 천황제 유지만 보장된다면 항복할 심산이었다. 미국 고위층은 암호 해독을 통해 이러한 일본의 내부 사정을 알고 있었다. 실제로 스팀슨 등 일부 참모들은 천황제 유지를 건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트루먼으로서는 1943년 루스벨트가 선언한 '무조건 항복'을 거스르기가 어려웠다. 자칫 국내정치적 역풍을 맞을 수 있기 때문이다. 트루먼은 원폭으로 무조건 항복을 관철시켰으나 종전 후 천황제는 유지시켰다. 무조건 항복이란 명분을 지키기 위해 수십만 무고한 민간인들이 희생된 셈이다. 

둘째 대안은 미국 지도자들이 원치 않는 것이었다. 미국은 동아시아에 소련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독점적 지배권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셋째 대안은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이유로 채택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원폭을 사용하지 않고도 전쟁을 비교적 이른 시기에 끝낼 수 있는 대안이 존재했었다는 점이다. 

셔윈은 히로시마 이후 수 십 년에 걸친 역사학자들의 연구 끝에 '히로시마의 진실'이 거의 밝혀졌으나 이러한 역사 연구의 결과들이 미국의 일반 대중들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면서 이는 미국에서 역사가의 역사 해석이 정치적 통제하에 있음을 의미한다고 개탄했다. 나아가 역사가는 진실을 밝혀냈으나 그 진실이 일반에 널리 퍼지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야말로 '히로시마가 남긴 가장 사악한 유산'이라고 말한다. 

그가 이렇게 개탄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1995년 스미소니언 항공우주박물관이 추진했던 원폭 50주년 기념전시회가 정치적 압력에 의해 사실상 무산된 사건이 그것이다. 스미소니언 측은 원폭 50주년을 맞아 대규모 전시회를 기획했다. 히로시마에 원폭을 투하한 폭격기 에놀라 게이를 복원해 전시하는 한편 피폭자들의 참혹한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며 원폭 투하에 이르는 의사 결정의 전 과정을 가감 없이 보여주자는 것이었다. 셔윈은 이 전시회의 역사 자문위원이었다.  

그러나 이 전시회는 기획 단계부터 정부와 의회 및 재향 군인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혀 1995년 1월 사실상 무산됐다. 참전 군인들은 이 전시회가 일본 편향적이며 자신들을 모욕하는 것이라고 반발했다(원폭 투하가 정당한 것이었다면, 모욕으로 받아들일 이유가 있었을까?). 언론들은 반미적이라고 규탄했고 상원과 하원은 이 전시회가 미국의 이미지에 먹칠을 하는 것이며 비애국적이라는 이유로 규탄 결의안을 채택하기까지 했다. 

미국 사회 전체가 찬반으로 갈려 격렬한 논란을 벌였다. 결국 1월 30일 스미소니언 측은 전시회를 사실상 철회했다. 전시장에는 에놀라 게이의 동체와 명패, 원폭 투하 당시 승무원들의 회고담 녹음 테이프만을 전시했을 뿐이다. 

이에 대해 셔윈은 "1995년에도 핵의 역사는 정치의 인질로 잡혀 있다"고 개탄했다. 나아가 2차 대전을 '우리 최고의 시간'으로, 스스로의 도덕적 우위를 굳게 믿고 있는 미국인으로서는 이러한 자기 이미지(self-image)에 어긋나는 역사적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2차 대전에 대한 미국인의 집단적 기억은 '역사상 최고의 전쟁'이라는 것이다. 유럽에서는 잔인하고 위험한 파시즘을 제거했고 아시아에서는 사악한 전쟁 기계를 파괴했다. 그리하여 세계의 평화와 자유, 질서를 회복했다.  

또한 승전 후에는 관대함을 베풀었다. 이전의 적들을 먹여 살리고 경제를 재건시켰으며 민주주의를 가르쳤다. 미국인에게 2차 대전은 단순히 좋은 전쟁이 아니라 완벽한 전쟁의 모델이다. 정당한 전쟁이고 올바른 전쟁이며 인류를 위한 전쟁이었다.

그런데 이처럼 좋은 전쟁의 끝이 군사적으로 불필요한 핵 공격에 의한 수십만 민간인의 학살이라니, 이러한 역사적 해석을 미국인은 정치적‧문화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미국의 지도자나 국민 대다수가 히로시마의 진실과 정직하게 대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소련과의 냉전은 이러한 진실 회피를 부추겼다. 냉전 기간 내내 미국은 소련에 대한 도덕적 우위를 강조해 왔다. 또한 소련의 막강한 지상군을 막기 위해서는 핵 억제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해 왔다. 만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가 군사적으로 불필요하고 도덕적으로 정당화 될 수 없는 공격이었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소련과의 대결에 필수적인 도덕적 정당성과 군사적 무기를 잃게 되는 셈이다.  

따라서 미국 지도층으로서는 히로시마 핵 공격이 유일한 선택지, 정당한 조치였다고 고집할 수밖에 없다. 다른 대안이 있었다고 인정하는 순간 미국 대외정책의 도덕성 및 정당성이 상실되기 때문이다.  

역대 미국 대통령 중 원폭 사용의 부도덕성을 인정한 경우는 아직 없다. 지난해 버락 오바마 당시 대통령이 미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히로시마 피폭 장소를 방문했으나 원폭 공격에 대해 사과, 또는 유감 표명은 하지 않았다.  
 

▲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가운데)이 지난 2016년 5월 27일(현지 시각) 일본의 2차대전 피폭지인 히로시마를 방문, 히로시마평화기념공원에서 헌화하고 있다. ⓒAP=연합뉴스


그는 취임 직후인 2009년 4월 프라하 연설에서 '핵 없는 세계'를 주창하면서 다음과 같은 인상적인 발언을 한 바 있다.  

"어떤 사람들은 핵무기의 확산은 막을 수도 통제할 수도 없다고 주장합니다. 더 많은 국가와 더 많은 민족들이 궁극의 파괴 무기를 갖게 되는 세상에서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겁니다. 이러한 숙명론은 인류의 치명적 적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핵무기의 확산이 불가피하다고 믿는다면, 이는 바로 핵무기의 사용도 불가피하다는 점을 인정하는 셈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그도 2016년 히로시마에서는 원폭 투하에 대해 어떠한 사과도 유감 표명도 하지 않았다. 트루먼이 '원자탄으로 50만 미군 병사의 목숨을 구했다'고 강변하거나 오바마가 히로시마를 방문하고도 핵 공격에 대해 사과하지 않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미국에게 핵무기는 '사용할 수 있는 무기'로 남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 70여 년 핵의 역사는 히로시마를 둘러싼 기억 투쟁의 역사였다. 핵의 역사는 또한 자기기만, 정보 통제(은폐와 왜곡), 여론 조작의 역사이기도 했다. 핵을 쓰려 하는 세력은 핵무기가 초래한 참상과 핵무기의 진실을 한사코 은폐, 왜곡하려 한다. 반면 원폭 피해자를 비롯한 대다수 양심세력은 핵의 참상을 알리고 그 진실을 밝히려 한다. 원폭 피해자가 그러하듯이 핵이 초래한 참상과 진실을 안다면 결코 핵무기를 용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inkyu@pressian.com다른 글 보기
▶ 필자 소개
서울대학교를 나와 경향신문에서 워싱턴 특파원, 국제부 차장을 지내다 2001년 프레시안을 창간했다. 편집국장을 거쳐 2003년부터 대표이사로 재직했고, 2013년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면서 이사장을 맡았다. 남북관계 및 국제정세에 대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연재를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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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력공학자 “한국 원자력 학계, 동문으로 엮인 패밀리”

 

[인터뷰] 417명 교수성명 반대한 박종운 동국대 에너지원자력공학과 교수 “이전 정권에서 사회이슈 침묵, 현 정부는 공격”

조현호 기자 chh@mediatoday.co.kr  2017년 07월 25일 화요일
 

지난 5일 원자력 공학과 교수 및 이공대 교수 417명이 문재인 정부 탈핵‧탈원전 정책을 반대하는 성명을 냈을 때 끝까지 동참하지 않은 원자력 공학 관련 교수가 이들의 주장을 정면 비판했다.

현직 원자력공학과 교수 가운데 탈원전 반대 주장을 편 교수들과 정반대의 목소리를 낸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이 학자는 박근혜 정부가 고리1호기에 대해 2015년 6월 2차 수명연장을 하지 않은 채 영구중지 결정을 했을 때 이들 학자들과 한수원 노조 등이 침묵한 점을 지적했다. 당시에는 침묵했다가 새 정부의 신고리 5‧6호기 중단 공론화 논의조차 반대하고 들고 일어선 것은 학자로서 명분과 일관성이 없는 집단행동이라고 비판했다.  

이밖에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원인은 쓰나미였으며 동일본 대지진은 원전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고, 우리 원전의 격납건물 두께가 두꺼워 안전하다는 원자력공학자들과 조선일보의 주장에 대해서도 이 학자는 반박했다. 그는 “후쿠시마 원전사고의 원인은 복합적”이라며 “스리마일, 체르노빌 원전사고는 인재와 설계 결함 사고였다”고 지적했다. 격납건물 두께와 관련해서도 “관통하는 수십여개의 배관 중 하나만 손상돼도 원자로 냉각에 큰 지장을 초래할 수 있다”며 “또한 원자로 바깥의 건물에 있는 기반시설(비상냉각탱크)은 외기에 노출돼 있고, 두께도 매우 얇다”고 반박했다.

미디어오늘은 새 정부의 탈핵‧탈원전 정책에 반대하는 두차례 성명을 낸 원자력 관련 학과 등 이공대 교수 417명의 명단에 이름을 넣지 않은 박종운 동국대 에너지원자력공학부 교수를 지난 21일, 24일 국제전화로 인터뷰했다. 현재 박 교수는 프랑스 학회에 출장중이다. 

박 교수는 “원자력 관련 교수들의 지난달 1차 반대 성명 때와 이번 2차 (7월5일) 반대 성명 때 모두 나는 서명하지 않았다”며 “원전이 아닌 다른 많은 사회적 이슈들에는 한 번도 의견을 낸 적도 없는 교수들이 자신 이익과 관련된 분야에 극렬하게 반대하는 것은 동의할 수 없어서 안했다”고  두차례 탈원전 반대 성명에 동참하지 않은 이유를 설명했다. 

특히 박 교수는 “(지난 정부에서) 고리 1호기를 영구정지시켰을 때 원자력 계에서 성명을 낼 이유가 될 수도 있었는데 안했다”며 집단행동의 논리적 일관성이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지난달 19일 영구정지된 고리1호기를 폐쇄하기로 결정한 것은 박근혜 정부였다. 박근혜 정부는 지난 2015년 6월12일 에너지위원회를 열어 경제성‧수용성‧해체산업 육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한국수력원자력에 영구정지를 권고했다. 한수원도 당시 이사회에서 2차 수명연장을 신청하지 않기로 의결했다.

 

 

▲ 박종운 동국대 에너지원자력공학부 교수. 사진=본인제공
▲ 박종운 동국대 에너지원자력공학부 교수. 사진=본인제공
 

이를 두고 박종운 교수는 “러시아는 체르노빌 원전폭발 후인 1989년 크림반도에 원전을 짓고 있다가 활성단층이 발견되자 짓던 원전을 중단시켰다”며 “그곳은 사람이 거의 안 사는 지역인데도 그렇게 결정했는데, 우리는 활성단층이 확실시 되는 지역이 경주와 양산에서 발견되고 있는데 어떻게 10개나 몰아짓는다는 것이냐. 그 주변에 400만 명이 살고 있다”고 우려했다.  

신고리 5, 6호기 반대를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도 박 교수는 “지금까지 정부가 원전 반대의견에 대해서는 사회적 합의 한 번도 안하고 묵살하다가 새 정부에서 정책을 바꾸겠다는 것에는 합의하자고 요구하는 것은 논리에 안맞다”며 “그런 논리대로라면 고리 1호기의 경우 10년 더 수명연장을 더 할 수도 있었는데, 접겠다고 결정했을 때 한수원과 노조, 원자력계 교수들은 왜 가만히 있었는가. 당시에도 전기판매금’ 수 조원이 손실된다, 불법이다라는 말조차도 못하다 왜 지금 이러느냐”고 반문했다. 스위스의 경우 원전 지을 때부터 수명연장 여부까지 모두 다 국민투표 했다. 탈원전만 투표한 것 아니라고도 박 교수는 전했다. 

 

박 교수는 원자력 공학자들의 성명 내용에 대해서도 “탈원전 반대성명의 논리에 ‘제왕적 조치, 전문가 배제’ 등 현 정부를 공격하는 내용이 많이 들어 있었다”며 “원자력 전문가만 전문가인가”라고 지적했다. 그는 성명의 내용이 ‘원전의 안전성 등이 과장된 면이 있다면 수정하고, 앞으로 에너지 전환에 원전이 기여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고, 인력들이 불안해하니 이에 고려해달라’고 건의하는 정도이기를 원했으나 투쟁적이고 전투적으로 써왔다며 “단체행동을 이렇게 하면 안된다”고 주장했다.

박 교수는 또한 “원자력 학계 교수들의 의견이 이렇게 같을 수가 있느냐”며 의문을 제기했다. 그 이유는 동문으로 엮여있기 때문이라는 것. 그는 “동문으로 엮여있다. 서울대, 한양대, 경희대 출신이 선배와 후배 제자로 묶여있다. (마피아를 넘어) 한가족, 즉 패밀리”라며 “원자력의 필요성에 대한 정보가 시민단체나 국민들에 전달되지 못하는 것은 이들에게 친화력 없기 때문이다. 그동안 자기들끼리만 해왔다”고 비판했다.

박 교수는 이들의 성명이 학계와 정부-원자력업계의 이해관계에 의한 것도 주된 이유일 것이라는 의심이 들어 동참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는 “(한수원의 대형 용역비) 지원을 받아온 점이나,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원전하자’고 한 것 아니냐는 편향성에 대한 의심이 있을 수 있다”며 “반발하는 논리도 타당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이와 함께 박 교수는 국내 원전이 지진에도 끄덕없고, 항공기가 부딪혀도 견뎌낸다는 원자력공학자와 조선일보 주장에 대해서도 과학적 반박을 폈다.

 

▲ 지난달 12일 부산 기장군 장안읍 해안에 있는 고리1호기(왼쪽 돔-19일 영구중지). 오른쪽 돔은 고리2호기. 사진=연합뉴스
▲ 지난달 12일 부산 기장군 장안읍 해안에 있는 고리1호기(왼쪽 돔-19일 영구중지). 오른쪽 돔은 고리2호기. 사진=연합뉴스
 

특히 조선일보는 지난 13일자 3면 머리기사 ‘原電공포 몰고온 ‘판도라’… 억지설정 장면 한국原電선 가능성 ‘0’’에서 영화 ‘판도라’에 나오는 내용을 물고 늘어졌다. 조선일보는 후쿠시마 원전이 지진이 아닌 쓰나미 때문에 발생했고, 지금까지 지진으로 원전사고가 난 적이 없다는 황일순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의 주장을 실었다. 조선일보는 “당시 9.0 규모의 지진도 발생했지만 지진 자체는 원전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것”이라고도 주장했다.

 

정말 후쿠시마 원전 사고와 9.0의 동일본대지진은 무관한 것인가, 지진으로부터 한국의 원전은 안전한가. 이런 주장은 타당한가. 후쿠시마 원전은 복합적으로 발생했다고 봐야지 지진은 전혀 무관한 것처럼 호도해서는 안된다는 지적이다. 박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후쿠시마 사고는 (해저에) 지진이 났기 때문에 쓰나미가 발생했다. 1차 원인은 지진이다. 주변이 어떻게 됐는가를 봐야 한다. 지진규모 9.0의 동일본대지진으로 원전주변이 초토화됐다. 송전탑이 붕괴되고, 도로가 무너졌다. 원전에 대한 지원 시설이 접근할 수 없는 상태가 됐다. 지진 후 파괴된 송전시설이 전기공급을 불가능하게 했다. 외부의 전원을 못쓰니 냉각시켜야 하는데 이를 돌릴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래서 원전 내부의 비상디젤발전기를 가동해야 하는데, 곧바로 이어진 쓰나미에 의해 물에 잠겨서 외부 전원도 내부 전원도 공급을 못했다. 따라서 원자로를 식혀줄 냉각수 공급을 못하는 심각한 상황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원전의 파괴 여부가 문제가 아니라 주변의 악조건과 설계결함의 복합적인 것이다.”  

박 교수는 “후쿠시마 이전에도 체르노빌, 스리마일 사고, 윈드스케일 원자로 용융사고 등 6건 정도의 원전사고가 있었다”며 “이들도 설계 결함이나 운전원의 실수, 정비 불량, 매뉴얼 숙지불량, 전원상실에 의한 사고이며, 후쿠시마도 단지 지진이냐 쓰나미냐에 원인을 갖다 붙이는 것은 초점을 잃어버리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런 상태에서 쓰나미 높이만큼 방벽을 높였으니 안심하라는 것은 땜질에 불과하다고 박 교수는 반박했다. 

더구나 후쿠시마 원전사고 원인이 지진과 전혀 무관하다고 결론 내리기도 어렵다는 지적이다. 박 교수는 “지진 발생 이후 후쿠시마 원전사고 관련 어느 부분에 손상이 났는지는 정확한 정보가 안나온다”며 “일본 원자력계도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는 “어딘가 얇은 배관이나 주변의 배관, 냉각수 출입 배관 등 여러 배관이 많이 있는데, 어디에 손상을 입었는지 전혀 나오는 정보가 없다”면서 “다만 전원상실과 냉각실패로 이어지는 과정이 가장 큰 요인”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발생한 경주대지진 이후 국내 활성단층 존재 여부와 원전과의 관련성에 대해 박 교수는 가능성이 낮다고 하기 보다는 원인을 없애거나 최소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 교수는 “원자력 공학이나 기계공학을 하는 교수들은 지진 전문성이 없고, 나 역시 지진 전문가는 아니다”라면서도 “과거 활성단층은 아킬레스건인데도 그동안 원전 건설과 관련해 ‘활성단층에 가깝다’는 연구결과를 인용하지 않아왔다”고 지적했다. 그는 “4~5년 전만 해도 (지진과 관련해) 원전에 대해 말하는 것이 거의 묻혔다. 언론도 책임이 있다”며 “과거시절 산업통상자원부 입장이라는 것은 원전을 아파트 짓듯이 생각했다. 그러니 울진과 고리 지역에 원전을 10개씩이나 과밀하게 지은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활성단층의 문제가 불거졌는데도 그런 의심이 되는 지역에 원전을 몰아짓는 것 자체가 문제라는 것이다. 박 교수는 “가능성이 충분히 있고, 규모에 대해 명확히 확증할 수 없을 때엔 활성단층 가능성이 낮다고 하기 보다는 원인을 없애야 한다”며 “그런데 정부는 한 지역에다 몰아짓고, 주민들 역시 돈 받으면 찬성, 없으면 반대하는 상황이 이어지니 원전부지 결정에 갈등이 생겨왔다”고 말했다.

그는 “활성단층의 증거가 나오면 이를 받아들이고 여기의 원전은 최소화해야 한다”며 “연구결과도 다양하게 나올 수 있다. 신고리 5, 6호기는 건설 허가 자체를 막았어야 했다. 못했으니 그것을 문재인 정부에서 대신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 지난 5일 주한규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 등 이공대 교수 417명이 문재인정부의 탈원전, 탈핵정책을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사진=연합뉴스
▲ 지난 5일 주한규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 등 이공대 교수 417명이 문재인정부의 탈원전, 탈핵정책을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사진=연합뉴스
 

일본 원전과 달리 우리 원전의 격납건물의 두께가 1.2m의 철근콘크리트 외벽 포함 5중 방호벽 체계라 안전하다는 원자력 공학자와 조선일보 보도에 대해 박 교수는 “본질은 놓치는 주장”이라며 “두께가 얼마냐, 지진 규모가 얼마냐만 따지는데, 원자로가 들어있는 건물(격납건물) 바깥의 많은 기반시설에 손상을 입는 경우를 생각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예를 들어 항공기가 사용후핵연료가 저장된 건물과 충돌하면 연료에 화재가 발생한다. 원자로를 보조하는 시설이 잘못돼서 망가지면 후쿠시마처럼 발전할 수 있다. 어디에나 아킬레스건이 있다. 비상냉각탱크는 원자로 바깥에 있다. 항공기가 비상 냉각수 탱크를 부수면 냉각수가 사라진다. 원전사고가 시작되는 것이다. 격납건물을 통과하는 배관이 수십여개 되는데 하나라도 손상을 입히면 큰 사고가 난다. 아무리 매뉴얼을 잘 만들어도 이를 벗어나는 상황이 벌어지면 매뉴얼 대로 해도 안된다. 후쿠시마가 마지막이 될 수 있겠느냐. 확률적으로도 50년동안 6회차례나 발생했다.”

전력수급 정책에 대해서도 원자력 공학자들이나 한수원이 나서서 할 말은 아니라는 지적이다. 전문성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 박종운 교수는 “모든 전력수급계획은 국가가 수립하는데 원자력계가 왜 난리를 피우는지 의문”이라며 “원자력 학계와 한수원은 전기료 인상이나 블랙아웃을 말할 전문성이 없다. 오히려 (이 문제에는) 가만히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기료 인상에 대해 박 교수는 “(나 역시 전문성이 없지만) 상식적으로 볼 때 2030년까지 원전 10%가 줄어들고 재생에너지 20%가 늘어나고, 석탄을 우선 가스로 바꾼다고 하면 이는 세계적 추세에 가까우므로 무리가 아니다”라며 “신재생 에너지 비율이 1년에 1.5%씩 늘어나고, 이 에너지가 아무리 비싸도 2020년이면 그나마 인상폭이 꺾일 것으로 본다. 그런데 이를 과장해서 오를 것이라고 몰아가고 있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원전이 값싼 에너지라는 주장에 대해서도 박 교수는 원전에너지의 비용이 대단히 저평가돼 있다고 지적했다. 원자력발전소를 폐로할 때의 비용, 사용후 핵연료(고준위 폐기물) 처리 비용, 방사능폐기물 처리 비용 등을 감안할 때 결코 싼 에너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박 교수는 “우선, 폐로 비용의 경우 해외사례만 보면 조 단위”라며 “우리는 고리 1호기가 5000억 원 수준이라고 했다가 지금 나오는 얘기는 8000억 원이라는 것이다. 믿을 수가 없다. 최근 독일 북동부 작은 원전을 폐로하는데 3조원이 들어간다고 한다”고 설명했다. 또한 사용후 핵연료 처리 문제의 경우 박 교수는 “사용후 핵연료를 (원전 내의) 물(저장수조) 속에 넣어뒀다가 다 차면 공기중에 저장하고, 추후 나중에 영구처분장을 설치한다는데, 이 비용이야말로 상상할 수조차 없다”며 “결국 이 돈은 누가 내느냐. 다 우리가 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다른 원자력 학자와 달리 이 같은 주장을 펴는 것이 정부나 원자력업계로부터 용역과제 선정에서 배제돼 있는 이유탓은 아니냐는 질의에 대해 박종운 교수는 그렇지 않다고 답변했다.  

박 교수는 “제가 한수원으로부터 용역지원을 받지 않았지만 미래창조과학부에서 (선정하는) 정부 과제를 해왔고, 원자력안전위원회 과제도 받아왔다”며 “한수원에서 안 받은 것은 큰 의미는 없다. 연구과제가 없어서 이랬다(이들을 비판했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강조했다. 박 교수는 “오히려 연구과제 받으면서도 당당히 원전 정책과 위험도에 대해 솔직하게 지적한 것”이라고 말했다.  

박 교수가 이 같은 원전의 문제점에 대한 시각을 갖게 된 이유는 다른 교수와 달리 한수원에 근무했던 현장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한국전력부터 한국수력원자력까지 13년 동안을 근무한 적이 있기 때문에 현장에 대해 잘 안다”며 “원전 내의 실물들도 녹슨 것, 고장난 것, 특히 안전 기준에 미달했던 것들을 실제 많이 봐 왔다. 그래서 다른 교수들과 생각하는 게 다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6년전 사고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후쿠시마(福島) 제1원전의 원자로 건물 외부 모습. 지난 2월27일 촬영. 원자로 건물 외부는 사고 당시처럼 벽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 있고 지붕 쪽에서는 수소 폭발로 무너져 내린 지붕이 자갈 더미가 돼 남아 있다. 사진=연합뉴스
▲ 6년전 사고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후쿠시마(福島) 제1원전의 원자로 건물 외부 모습. 지난 2월27일 촬영. 원자로 건물 외부는 사고 당시처럼 벽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 있고 지붕 쪽에서는 수소 폭발로 무너져 내린 지붕이 자갈 더미가 돼 남아 있다.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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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CIA요원 죽기 직전, 9.11은 자작극이라고 고백

미 CIA요원 죽기 직전, 9.11은 자작극이라고 고백
 
 
 
이창기 기자 
기사입력: 2017/07/25 [09:21]  최종편집: ⓒ 자주시보
 
 

 

▲ 2017년 7월 13일 유어뉴스와이어의 CIA요원 하워드 씨의 9.11테러가 자작극이라는 고백 보도, http://yournewswire.com/cia-911-wtc7/     © 자주시보

 

16일 모 인터넷게시판에 미주동포 이인숙 논평가가 13일자 유어뉴스와이어(Your News Wire)의 CIA요원의 죽기 전 고백 보도를 소개하였다.(http://yournewswire.com/cia-911-wtc7/)

 

이인숙 논평가가 번역한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다.

 

36년간 미국CIA에서 일해왔던 하워드 씨-Mr. Howard(79살)가 죽음을 몇 주일 앞두고 9.11에 있었던 건물 중 #7을 상관의 명령을 받고 자신이 직접 철거폭발을 했노라고 고백했다.

이 건물이 무너지는 데 겨우 30초 걸렸다. 그 건물이 무너질 때 사람도 다치지 않고 그들의 계획이 잘 성사되어 하워드와 그 동료들은 위스키를 마시고 담배를 피며 축하파티까지 했다. 

 

특히 이 건물은 World Trade Center#1, #2가 무너진 7시간 후에 무너졌는데 그시간은5:20pm이었다. 그런데 BBC 방송은 이 빌딩이 무너지기 20분 전에 방송하였다. BBC가 무너질 것을 미리 알고 방송했다는 것이다. 

 

하워드는 당시 그의 동료들과 의문을 가진 사람들이 진실을 알려고 할까 두려워하기 시작했는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주류언론은 그 의혹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에 대해 거들도 보지도 않았다고 회고했다.

 

그는 80층의 건물까지도 폭발할 수 있는 엔지니어 전문가인데 그는, 그 당시 애국자라면 더 좋은 것을 위해 정보부나 백악관에 질문하지 않고 거짓말을 서슴없이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니 뭔가 잘못 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며 이런 엄청난 흑막을 공개하였다고 한다.

 

끝으로 하워드는 누가 이 엄청난 범죄를 저질렀는지에 대해 말했는데 “전 세계에서 오직 하나있는 조직이다, 알카이에다는 절대 아니다” 라고 고백했다.-“There is only one organization that spans the entire world, and let me tell you now, it isn’t and it never was al-Qaeda.” 

 

 

 

9.11테러가 자자극이었다는 주장은 사건 당시부터 프랑스 기자 등에 의해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왔다. 펜타곤에 뚫린 구멍이 항공기 형태의 구멍이 아니라 크루즈미사일 형태였으며 항공기 잔해는 발견된 것이 없다는 등 수도 없는 명백한 증거들이 나왔지만 미국과 세계의 주류 언론들은 이런 주장들을 근거 없는 음모설이라고 뭉개버리고 알카에다의 테러로 몰아갔다. 이는 이후 미국에 애국법이 만들어지고 아프간전쟁, 유고전쟁, 이라크전쟁 등이 줄줄이 벌어지는 핵심 명분이 되었다. 

 

9.11 테러는 2001년에 일어났다. 소련의 해체로 상대를 잃어버린 미국의 군산복합체 자본가들은 새로운 적을 만들어야 무기를 소모하고 돈을 벌 수 있었다. 미국의 관변학자들은 이데올로기의 충돌에서 ‘문명의 충돌’로 전환될 것이라는 요설들을 이미 몇 해 전부터 펴왔었다. 그리고 9.11이 터지고 미국은 신형 순항미사일 등을 선보이며 컴퓨터게임과 같은 전쟁을 중동과 유럽 곳곳에서 일으키기 시작했던 것이다. 당시 부시 정부는 중동을 정리하고 나면 북한도 무력으로 제압하려고 했었다. 부시는 그 명분이 바로 ‘악의 축’이라고 밝혔다. 그렇게 해서 소련과의 양극체제에서 미국 중심의 일극패권체제를 완성하려고 했던 것이다.

 

미국의 세계 일극패권을 위해 이라크, 유고, 아프간 등에서는 수백만명의 무고한 주민들이 희생되었으며 지금도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집을 잃고 참혹한 고통을 당하고 있다. 그 여파는 지금까지도 이어져 리비아, 시리아, 예멘 등에서는 지금도 전쟁의 포성이 계속 울려나오고 있다. 

 

어떻게 세계 지배를 위해, 무기를 팔아먹기 위해 이렇게 많은 인류를 죽일 수 있는가. 그것도 수천명의 자국민을 자작극 테러로 학살하여 만든 명분으로...

 

그이 미국이 북에게 핵만 포기하면 잘 살게 해주겠다고 하는데 북이 과연 미국의 말을 믿을 수 있겠는가. 

한국 정부와 언론들도 오로지 미국의 주장을 앵무새처럼 받아 외우며 북이 핵포기만 하면 번영을 누리게 해주겠다고 말하고 있다. 

 

미국인 인질을 구하기 위해 북을 직접 방문했던 제임스 클래퍼 전 미국정보국장은 ‘북은 미국이 완전한 안전담보를 해주지 않는 한 절대로 핵무장력 강화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며 핵동결도 주한미군철수, 평화협정체결과 같은 선물을 주지 않으면 응하지 않을 것이라고 진단하  싫지만 북의 핵무력 강화를 여기서 막기 위해서는 그런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다는 의견을 지난해 말부터 지속적으로 펴오고 있다. 

 

이는 미국의 패권붕괴를 의미한다. 그간 미국이 별별 조작을 다 해가며 구축한 일극패권이 북과의 대결전의 패배로 일거에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도 쉽게 클래퍼의 주장대로 행동할 수 없는 것이며 북미 사이에 첨예한 대결전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는 것이다.

 

북미대결전은 두 나라의 운명만이 아닌 세계의 운명이 걸린 대결전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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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리의 끝판왕, 죽은 자도 살려냈던 조선시대 ‘아전’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7/07/25 10:49
  • 수정일
    2017/07/25 10:49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더 강력해진 박원순표 공직쇄신안, 부정부패 뿌리 뽑을 수 있을까?’
 
임병도 | 2017-07-25 09:38:03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조선 왕조 500년 역사 중 청백리는 단 218명에 불과할 정도로 조선시대는 부정부패가 심했다.

 

‘청백리’는 조선시대 청렴하고 강직한 신하를 뜻합니다. 의정부 및 사헌부, 사간원 등의 추천을 받아 임금의 결재를 받아 내리는 칭호입니다. 청백리는 후손들에게 벼슬을 할 수 있는 특전을 줄 만큼 명예롭고 존경을 받았습니다.

대한민국에서도 공무원에게 주는 상의 이름을 ‘청백리상’이라고 할 정도로 그 의미를 계속 이어오고 있습니다.

조선 왕조 500년 동안 청백리로 인정받은 사람은 단 218명에 불과했습니다.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조정에 청백리의 자손을 등용하라는 명은 있으나, 오직 뇌물을 쓰는 자들이 벼슬을 하고 청백리 자손들은 모두 초야에서 굶주려 죽고 만다’고 말했습니다.

도대체 왜 조선시대에는 청백리가 그토록 적었고, 뇌물과 비리를 저지른 자들이 많았을까요?


‘월급을 받지 않았던 조선시대 공무원’

조선시대 중앙과 지방의 관청에서 행정 실무를 담당하던 하급관리를 ‘아전’이라고 합니다. 지금의 공무원과 비슷하다고 보면 됩니다. (엄밀히 따지면 정식 공무원보다는 대를 이어 지방 행정 실무를 담당하는 명예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중앙관청에서 일하는 이들을 가리켜 ‘경아전’, 지방관아는 ‘외아전’이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세금 징수나 지방의 잡무, 수령의 둔전을 관리하는 업무 등을 맡았습니다.

 

▲ 황구첨정, 백골징포 등의 폐단이 조선 시대에 만연했다. 조선시대 임금들은 군포나 공납의 폐단을 없애려고 했지만, 비리는 끊이지 않았다. ⓒ오늘의조선왕조실록 유튜브 화면 캡처

 

조선시대 지방행정이 부정부패로 얼룩진 이유 중의 하나가 아전입니다. 왜냐하면, 아전에게는 월급이 지급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경아전’은 원래 녹봉이 지급됐지만, 나라에서 지급하지 않거나 생활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낮았습니다. 지방 아전은 아예 월급 자체가 없었고, 오히려 관아에서 쓰는 비용 등을 자신의 돈으로 채워야 할 때가 잦았습니다. 고정적인 급여가 없다 보니, 아전들은 갖가지 방법으로 부정부패와 비리를 통해 모자란 급여를 대신했습니다.

아전의 비리가 제일 심한 것이 ‘세금 착복’이었습니다. 조선시대 세금은 ‘군포’와 ‘공납’이 대표적입니다.

군대에 가야 하는 장정이 농사 등의 생계를 위해 일 년에 베 2필을 내면 ‘군역’을 면제해주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전들은 성인이 되지 않은 어린이에게 군역을 물리는 ‘황구첨정’,이미 죽은 사람을 산 사람으로 둔갑해 군포를 물리는 ‘백골징포’, 군역을 피해 도망간 사람의 군포를 이웃이나 친척과 이웃에게 물리는 ‘족징’과 ‘인징’을 통해 세금을 착복했습니다.

공납은 원래 세금을 지방 특산물로 내는 제도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수확한 농산물이나 특산물 대신에 방납업자의 물건을 구입해 내도록 했습니다. 당연히 아전들은 상인과 짜고 시가보다 수십 배 비싼 물건을 사도록 했습니다. 당연히 아전은 상인으로부터 뒷돈을 받아 챙겼습니다.

조선시대 세금을 거둬들이는 행정 실무를 맡은 아전들이 비리를 저지르고 각종 세금을 착복하면서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졌고, 조정의 재정은 약해졌습니다.


‘양반까지 무시했던 아전의 권력’

 

▲조선시대 고을 관아의 모습. 수령과 아전이 서 있고 백성이 앉아 있다 ⓒ구글이미지

 

근래 아전의 풍속이 나날이 변하여 하찮은 아전이 길에서 만나도 절을 하지 않으려 한다. 아전의 아들, 손자로서 아전의 역을 맡지 않은 자가 고을 안의 양반을 대할 때 맞먹듯이 너나하며 자(字)를 부른다. (정약용, 목민심서)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보면 아전이 얼마나 위세가 높았는지, 중인 계급임에도 양반에게 인사조차 하지 않았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아전이 이토록 권력을 누릴 수 있었던 배경에는 지역 사정과 실무에 밝아 수령조차 함부로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수령이 아전을 무시하면 태업이나 파업 등으로 수령을 골탕 먹이는 일도 허다했습니다.

지방 관아로 내려오는 수령은 지방 사정을 잘 몰라 아전에게 실무를 맡겼습니다. 아전들은 수령에게 뇌물을 바치고 뒤로 더 많은 세금을 빼돌려 자신들의 곳간을 채우기도 했습니다. 어차피 수령은 임기를 떠나면 그만이니, 백성들은 직접 세금을 징수하는 아전을 더 무서워했습니다.

요새도 공무원 사회에서 선출직 시장이나 도지사는 선거 때면 사라져도, 공무원은 평생 그 자리에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담당 공무원의 입김에 따라 인허가 업무가 지연되느냐 마느냐를 놓고 본다면, 시민 입장에서는 시장보다는 오히려 말단 공무원이 더 껄끄럽습니다.


‘더 강력해진 박원순표 공직쇄신안, 부정부패 뿌리 뽑을 수 있을까?’

 

▲서울시가 발표한 서울시 공무원 부정비리 차단 종합대책 ⓒ라이브서울 화면 캡처

 

지난 7월 19일 서울시는 ‘부정비리 차단 6대 종합대책’을 발표했습니다. 동일 인‧허가 업무 5년 이상 담당 공무원의 전보 의무화로 부정부패를 사전 차단하는 등의 공직쇄신안을 담고 있습니다.

박원순 시장이 공무원의 부정부패를 차단하겠다고 나선 이유가 있습니다. ‘박원순법’을 시행하고 있음에도 최근에 버스업체의 노선 신설 조정과 증차 등과 관련해 서울시 도시교통본부 전‧현직 공무원이 비리를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박원순법 (서울시 공무원 행동강령): 서울시 공무원이 직무와 관계없이 단 돈 천 원만 받아도 중징계, 한 번만 걸려도 ‘원 스트라이크 아웃된다. 고위공직자와 가족 보유 재산이 직무와 관련이 있는지도 심사받는다.

과거보다 현저히 줄었지만, ‘김영란법’보다 더 강하다는 ‘박원순법’이 있음에도 서울시 공무원들의 비리는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관련 업무를 맡았던 퇴직공무원이 현직 공무원에게 뇌물과 압력 등을 통해 비리를 저지르는 사례도 발생했습니다.

서울시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현직 공무원이 퇴직 공무원과 골프, 사행성 오락, 여행, 행사 등의 사적 접촉을 제한하고, 만약 만났다면 서면보고를 의무화하는 내용으로 ‘박원순법’을 개정하기로 했습니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공무원의 부정부패를 근절하려고 노력해도 한계가 있습니다. 마치 조선시대 아전처럼 실무에 밝은 공무원들을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공무원들이 비리를 저지르지 못하도록 이중,삼중의 감사 시스템을 구성하는 일입니다.

다행히 서울시는 이번에 안전, 토목, 소방, 수도 등 기술 감사 분야 전문가 21명으로 구성된 ‘시민감사자문단’과 시민들의 제보와 제안을 받을 수 있는 ‘시민 감사요청란’을 홈페이지에 개설할 계획을 수립했습니다.

지금은 조선시대 아전처럼 비리를 저지르는 공무원이 별로 없습니다. 오히려 퇴근하라고 해도 퇴근하지 못하고 밤늦게까지 일하는 공무원도 많습니다.

문제는 소수의 비리 공무원 때문에 대다수 공무원이 더 힘들어졌다는 점입니다. 그런 면을 놓고 본다면 비리 공무원은 더 철저하게 처벌하고, 열심히 일하는 공무원에게는 진급 등의 혜택을 줘야 합니다.

조선시대에는 아전들의 횡포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는 방안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다양한 방식으로 시민들이 부정부패를 발견하면 신고할 수가 있습니다.

개인적인 불법 민원이나 단순 불평불만이 아니라 서울시민 모두를 위한 정의로운 감시 활동에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합니다. 서울시도 이번 기회를 통해 법과 시스템을 한층 강화해 부정부패를 원천 차단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3&table=impeter&uid=1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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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38선 분단, 피할 수는 없었을까

 

[한국전쟁, 그 지울 수 없는 이미지 복원 ⑬] 한반도의 허리가 잘려나간 원인

17.07.25 07:36l최종 업데이트 17.07.25 09:52l

 

 

 소련의 스탈린(가운데) 수상이 군함을 순시하고 있다.
▲  소련의 스탈린(가운데) 수상이 군함을 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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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원인

한국전쟁은 자유-공산 양측에 150만여 명 전사자와 360만여 명 부상자를 낳았다. 그리고 1000만 명 이상의 이산가족이 생겨났다. 이 문명 세상에 이산가족들은 아직도 자유롭게 혈육을 만나지 못하는, 비인륜적 삶을 이어가고 있다. 3년 1개월 2일 17시간 동안 계속된 한국전쟁은 아마도 세계 전사(戰史)에서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운, '더티(Dirty)한' 동족상잔의 잔혹한 전쟁으로 기록될 것이다. 

우리 속담에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고 했다. 500여만 명의 사상자를 낸 한국전쟁에 어찌 그 원인(原因)이 없겠는가. 그래서 이번 회에서는 그 원인(遠因)을, 다음 회에서는 근인(近因)을 살펴보고자 한다. 
 

 1945. 9. 2. 일본 도쿄만. 미 미조리 호 함상에서 맥아더 원수가 일본의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  1945. 9. 2. 일본 도쿄만. 미 미조리 호 함상에서 맥아더 원수가 일본의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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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남북 길이는 약 1000km요, 동서 너비는 약 300km요, 면적은 약 22만 ㎢다. 그 모양은 마치 쇠불알 같기도, 고구마 같기도 하다. 지구의를 보면, 한반도는 동북아시아 대륙에서 바다 쪽으로 좁다랗게 돌출한 지형으로 대륙과 해양을 이어주는 교두보 역할을 하고 있다. 

곧 한반도는 대륙과 해양을 잇는 위치에서 서로 간 문물을 이어주는 거점이었다. 이러한 지형적 특성 때문에 예로부터 대륙의 세력이 남하하는 통로로, 해양세력이 북상하는 길목이 됐다. 한반도 백성들은 자신들의 의사와는 관계 없이 크고 작은 전쟁을 겪어야 했다.
 

  1945. 9. 9. 서울. 미군들이 중앙청 앞 시가지를 행진하자 연도의 시민들이 환호하고 있다.
▲  1945. 9. 9. 서울. 미군들이 중앙청 앞 시가지를 행진하자 연도의 시민들이 환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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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해양 잇는 교두보, 한반도 

 

13세기인 1274년 몽고, 곧 원(元)나라는 고려를 그들의 말발굽 아래 무릎 꿇린 다음, 제1차 일본 원정에 이어 1281년 제2차 일본 원정에 나섰다. 당시 고려는 원의 일본 원정으로 본의 아니게 전쟁에 휩싸여 막대한 물적·인적 피해를 입었다. 

그로부터 두 세기 후인 1592년, 일본은 조선에 명(明)나라를 정벌하러 가고자 길을 열어달라고 주문했다. 하지만 당시 조선과 명은 형제지국 이상으로 섬기는 관계로, 외교 관계상 이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더욱이 조선은 일본군이 한반도를 '게다짝'(나막신을 낮잡아 부르는 말)으로 짓밟고 지나가는 것을 묵과할 수 없기에 단호히 거절했다. 그러자 일본이 이를 트집 잡아 조선을 침략했다. 바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었다.

그 이후에도 일본은 대륙 진출의 발판으로 삼고자 조선 침략을 호시탐탐 노렸다. 그런 가운데 일본은 1853년 개항 후 서양 문물을 재빨리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이뤘다. 그러자 지난날 자신들에게 문물을 전수해준 이웃 조선을 가장 먼저 강탈하고자 덤벼들었다. 그러기 위해 일본은 1894년 조선 침략에 앞서 청일전쟁을 일으켜 승리했다. 이에 러시아가 간섭하고 나서자 다시 러일전쟁(1904)을 일으켜 승리를 거뒀다. 두 전쟁이 끝난 이후 그들은 한반도를 꿀꺽 삼켜버렸다. 

일본은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다시 중국 동북지방을 강점해 만주국을 세운 뒤 점차 중국대륙마저 야금야금 잠식해 갔다. 이에 미국·영국 등이 중국을 도우며 견제하자 일본은 1941년 12월에 이들 두 나라와도 선전포고해 마침내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그 무렵 유럽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 중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은 1939년부터 독일과 이탈리아, 일본을 주축으로 하는 진영과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등을 중심으로 하는 연합국 진영의 대립 구도를 낳았다. 1945년 2월에는 미국, 영국, 소련 등 연합국이 승리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1945. 9. 9. 조선총독부 제1회의실에서 열린 일본항복 조인식에 앉아있는 미군대표들.
▲  1945. 9. 9. 조선총독부 제1회의실에서 열린 일본항복 조인식에 앉아있는 미군대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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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 9. 9. 아베 조선총독(가운데)이 조선총독부 제1회의실에서 열린 일본항복 조인식에서 미 진주군 앞에서 항복 선언하고 있다.
▲  1945. 9. 9. 아베 조선총독(가운데)이 조선총독부 제1회의실에서 열린 일본항복 조인식에서 미 진주군 앞에서 항복 선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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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타 회담

그때 연합국의 지도자인 미국의 루스벨트, 영국의 처칠, 소련의 스탈린, 세 거두는 크림반도 얄타에서 독일의 최종 패배와 그 점령지를 논의하기 위한 회담을 개최했다. 그때 일본의 최후 항전에 고전하고 있던 미국의 루스벨트는 소련의 스탈린에게 독일 항복 후 '2~3개월 이내'에 대일전에 참전해달라고 간곡히 요청했다. 이에 스탈린이 호응하자 연합국은 그 대가로 소련에 1904년 러일전쟁에서 잃은 영토를 반환하고, 또 외몽골의 독립을 인정한다는 등의 협정을 맺었다. 

이에 소련은 그 협정에 따라 약속대로 1945년 8월 9일에 대일 선전포고와 함께 태평양전쟁에 참전하게 됐다. 이로써 소련은 1945년 8월 12일 조선의 북부 해안에 상륙하게 됐다. 소련이 태평양전쟁에 참전한 지 닷새 만에 일본은 항복했다.

소련은 그 대가로 미국으로부터 한반도 북위 38도선 이북을 할양하겠다는 제의를 받았다. 1945년 8월 14일 밤, 소련은 미국으로부터 느닷없이 한반도 38도선 분할 제의 전문을 받은 것. 소련의 스탈린은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전대미문의 원자탄 위력에 놀란 나머지 이 제안을 앞뒤 생각 없이 덥석 받아들이는 실수(?)를 저질렀다고 한다. 

당시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 가운데 인적·물적 희생이 가장 컸던 나라로, 그 보상에 대한 가장 큰 지분을 가진 나라였다. 그런 소련은 한반도 전체가 아닌, 38도선 이북만을 분할받은 지 한참 지난 뒤에야 자신들의 보상이 매우 적었음을 깨닫고 절치부심했다. 

더욱이 한반도는 러시아가 이전부터 무척 탐냈던 부동항(不凍港)이 즐비한, 그들로서는 몽매에도 그리던 축복의 땅이 아닌가. 그래서 지난날 자신들보다 덩치가 한참 작은 일본과 한판 벌이다가 패배해 망신당하고, 일본의 조선 병탄을 멀뚱히 구경만 했다. 그들에게는 뼈아픈 전력이었다. 

그래서 스탈린은 이런 날을 대비해 자신들이 보호하고 있던 극동군 88여단 소속 항일연군 출신의 젊은 김일성 대위를 북한 지도자로 전면에 내세웠다. 그리하여 언젠가 때가 되면 한반도 전체를 그들의 판도에 넣을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북위 38도선
▲  북위 38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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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장의 선, 북위 38도

역사에서 가정은 쓸데없는 공론이다. 만약 미국이 원자탄을 1개월 전 먼저 일본 열도에 떨어트려 일본의 패망이 한 달 앞서 발생했다면, 그때 소련은 대일전 참전 이전이기 때문에 미국은 한반도 38선 이북을 소련에 양보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와 반대로 소련이 대일전에 참전해 한반도를 통째로 점령한 한두 달 뒤에 일본이 패망했다면, 한반도는 그대로 소련의 몫이 됐을 것이다. 

이로 미뤄볼 때 1945년 8월 15일, 그 시점에서 한반도의 38선 분단은 피할 수 없었던, 국제 강대국간의 땅따먹기 거래로 볼 수 있을 것이다. 38선 분단은 당시 나약했던 우리 한민족으로서는 피할 수 없었던, 치욕스러운 결정으로 두고두고 단장의 선이 됐다. 

그날 이후 현재까지도 그 분단은 겨레의 큰 아픔으로 지속되고 있다. 다음 회에서는 그 분단으로 촉발된 한국전쟁 발발 직접적 원인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 이 기사에 실린 사진들은 필자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및 맥아더기념관에서 직접 검색하여 수집한 것으로 스캔한 원본대로 게재합니다.) 
 

 1945. 9. 9. 조선총독부 제1회의실에서 열린 일본항복 조인식을 미군 측 카메라맨들이 
촬영하고 있다.
▲  1945. 9. 9. 조선총독부 제1회의실에서 열린 일본항복 조인식을 미군 측 카메라맨들이 촬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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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 9. 9. 조선총독부 제1회의실에서 열린 일본항복 조인식을 일본 측 카메라맨이 역사적 장면을 촬영하고 있다.
▲  1945. 9. 9. 조선총독부 제1회의실에서 열린 일본항복 조인식을 일본 측 카메라맨이 역사적 장면을 촬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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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 9. 9. 서울. 서울역 광장에 입성한 미군이 장갑차 위에서 환영 인파에 답례로 손을 흔들고 있다.
▲  1945. 9. 9. 서울. 서울역 광장에 입성한 미군이 장갑차 위에서 환영 인파에 답례로 손을 흔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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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 9. 9. 서울. 서울에 들어온 미군이 일본군 담뱃불을 빌려 불을 붙이고 있다.
▲  1945. 9. 9. 서울. 서울에 들어온 미군이 일본군 담뱃불을 빌려 불을 붙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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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 9. 16. 한 미군이 “한국인은 미군을 환영한다”는 게시판을 바라보고 있다.
▲  1945. 9. 16. 한 미군이 “한국인은 미군을 환영한다”는 게시판을 바라보고 있다.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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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 9. 28. 인천. 30년 전, 미국인 기술자의 손으로 건설한 인천항 도크에 미군 군함이 들어오고 있다.
▲  1945. 9. 28. 인천. 30년 전, 미국인 기술자의 손으로 건설한 인천항 도크에 미군 군함이 들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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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 9. 인천. 연합군 환영아치 앞에서 미 해군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1945. 9. 인천. 연합군 환영아치 앞에서 미 해군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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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 10. 28. 서울. 서울에 진주한 미군들이 시장에서 물물교환을 하고 있다.
▲  1945. 10. 28. 서울. 서울에 진주한 미군들이 시장에서 물물교환을 하고 있다.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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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기사] 미국의 오판, 북한군 탱크에 '날개'를 달다

[리워드 안내]

<오마이뉴스> '좋은 기사 원고료'로 후원해주신 모든 분들께는 '한국전쟁 사진 2매'를 메일로 랜덤 전송합니다. 그 견본 이미지는 아래와 같습니다. 또 후원자 분들을 위해 기자의 저서 <카사, 그리고 나> <백범 김구 암살자와 추적자> <약속> <항일유적답사기>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장면>을 준비했습니다. 

종로에서 진행될 '박도 기자와의 차 한잔' 초대권과 강원도 횡성군에서 열릴 '작가와의 대화' 초대장도 리워드로 마련했습니다. 

<오마이뉴스> '좋은 기사 원고료'로 후원해주신 독자분들께서는 기자에게 쪽지로 성함과 우편물을 받을 주소, 이메일 주소를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리워드 발송 기준은 스토리펀딩 기준과 동일함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1950.10.31. 원산. 헐벗고 굶주렸지만 웃음은 떠나지 않는 아이들.
▲  1950.10.31. 원산. 헐벗고 굶주렸지만 웃음은 떠나지 않는 아이들.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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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9. 한 지아비가 시각장애인 아내를 지게에 진 채 피란길을 떠나고 있다.
▲  1950.9. 한 지아비가 시각장애인 아내를 지게에 진 채 피란길을 떠나고 있다.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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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10. 서울 은평. 한 소녀가 동생을 돌보며 불타버린 야외교실에서 수업을 받고 있다.
▲  1950.10. 서울 은평. 한 소녀가 동생을 돌보며 불타버린 야외교실에서 수업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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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3.2.19. 전란 중이지만 설빔을 차려 입은 천진난만한 소녀들이 민속놀이의 하나인 널뛰기를 하고 있다.
▲  1953.2.19. 전란 중이지만 설빔을 차려 입은 천진난만한 소녀들이 민속놀이의 하나인 널뛰기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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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10. 옹진전투에서 한쪽 다리를 잃은 한 국군 특무상사가 목발을 짚은 채 침통한 표정으로 철조망 앞에 서 있다.
▲  1950.10. 옹진전투에서 한쪽 다리를 잃은 한 국군 특무상사가 목발을 짚은 채 침통한 표정으로 철조망 앞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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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자의 저서. 왼쪽부터 <카사, 그리고 나> <백범 김구 암살자와 추적자> <약속> <항일유적답사기>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장면>
▲  기자의 저서. 왼쪽부터 <카사, 그리고 나> <백범 김구 암살자와 추적자> <약속> <항일유적답사기>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장면>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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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14형 출현 이후 돌출된 몇 가지 위험요인들

[개벽예감258] 화성-14형 출현 이후 돌출된 몇 가지 위험요인들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기사입력: 2017/07/24 [11:30]  최종편집: ⓒ 자주시보
 
 

 

[차례]

1. 불상용적이며 비타협적인 제2차 핵대결
2. 조선의 핵무력 완성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3. 의문을 불러일으키는 백악관의 행동
4. 조선이 미국에 보내려는 두 번째 ‘선물보따리’

 

 

1. 불상용적이며 비타협적인 제2차 핵대결

 

조미핵대결에서 이기기 위해 조선이 만든 강력한 핵타격수단들 가운데 하나가 화성-14형 대륙간탄도미사일이다. 조선은 2017년 7월 4일 화성-14형 시험발사를 성공시킴으로써 조미핵대결을 조선의 승리와 미국의 패배로 종식시킬 최종단계로 끌어갔다.

 

그런데 주목되는 것은, 화성-14형의 출현으로 조성된 새로운 국면이 양면적이라는 점이다. 양면적이라는 말은, 조선이 화성-14형 시험발사로 조미핵대결을 승리로 이끌 국면을 열어놓은 측면이 있는가 하면, 그 반대쪽에서는 미국이 조선의 핵타격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 압박강도를 더욱 끌어올리는 측면이 있다는 뜻이다. 전자가 외교담판으로 나아가는 순리적 요인이라면, 후자는 무력충돌을 불러오는 위험한 요인이다. 나는 이전에 <자주시보>에 발표한 여러 글들에서 긍정적 측면을 논하였는데, 이 글에서는 부정적 측면을 논하려고 한다.

 

국제정치관점에서 바라보면, 조미핵대결을 발생시킨 요인들 가운데 하나는 사회주의 대 제국주의의 적대관계다. 조선은 제국주의국가와 공존할 수 없고, 미국도 역시 사회주의국가와 공존할 수 없다. 따라서 조미핵대결이 끝난 뒤에도 사회주의조선과 아메리카제국의 평화적 공존은 불가능하다. 물론 조미핵대결이 끝나면, 조미관계의 적대성이 일정한 수준으로 완화되겠지만, 적대관계가 완전히 소멸되는 것은 아니다.

 

쌍방 사이에 그런 적대관계가 존재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조미핵대결은 운명적이다. 피할 수도 없고, 비길 수도 없고, 중지할 수도 없으므로, 끝까지 싸워 반드시 어느 한 쪽이 이기고, 다른 한 쪽이 질 수밖에 없는 불상용적이며 비타협적인 대결이라는 점에서 운명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진 1>

 

▲ <사진 1> 위의 사진들은 2017년 7월 9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참석한 가운데 평양에서 성대히 진행된 대륙간탄도로케트시험발사성공 기념 음악무용종합공연 중에 무대 뒤에 설치된 대형 배경화면에 나타난 영상들이다. 위쪽 사진은 구름이 약간 덮힌 하늘 아래에 보이는 미국 본토를 촬영한 위성사진이고, 아래쪽 사진은 미국 본토가 핵타격을 받고 핵화염 속에 완전히 소멸되는 장면이다.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처럼, 이 두 가지 연속되는 장면들이 공식적인 자리에서 방영된 것은 조선이 화성-14형으로 미국을 멸망시킬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그런 점에서, 조미핵대결은 운명적인 대결이다. 피할 수도 없고, 비길 수도 없으고, 중지할 수도 없으므로, 끝까지 싸워 반드시 어느 한 쪽이 이기고, 다른 한 쪽이 질 수밖에 없는 불상용적이며 비타협적인 대결이다. 위의 영상들은 조미핵대결을 벌이는 조선의 적대감과 결전의지를 형상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조미핵대결을 발생시킨 사회주의 대 제국주의의 적대관계를 역사적 경험에 투영하면, 1962년 10월 16일부터 28일까지 지속되었던 쿠바미사일위기가 부각된다. 그것은 사회주의진영과 제국주의진영이 첨예하게 대립하였던 냉전시대에 사회주의소련과 아메리카제국이 맞붙은 핵대결이었다.

 

쿠바미사일위기를 일으킨 도발자는 미국이었다. 1962년 3월 미국은 100발이 넘는 주피터(Jupiter) 중거리탄도미사일들을 터키와 이탈리아의 미국군기지들에 전진배치하였다. 메가톤급 열핵탄두를 장착하고 2,400km를 날아가는 주피터 중거리탄도미사일을 터키와 이탈리아에서 쏘면 모스크바를 날려버릴 수 있었다. 모스크바가 미국의 핵타격사정권 안에 놓인 것이다.  

 

미국의 핵무력이 소련을 그처럼 직접적으로 위협하게 된 사태의 배경에는 핵무력의 불균형이 자리잡고 있었다. 1962년 당시 소련은 사거리가 10,000km 이상 되는 대륙간탄도미사일을 아직 갖지 못했으나, 미국은 1959년 10월 31일 사거리가 14,000km인 애틀러스(Atlas)  대륙간탄도미사일을 실전배치하였다. 사거리가 10,000km인 RT-2 대륙간탄도미사일이 소련에 처음 실전배치된 때는 1968년 12월이다. 

 

대륙간탄도미사일 개발에서 미국보다 10년이나 뒤졌을 뿐 아니라, 자기 수도권이 미국의 핵타격사정권 안에 놓이게 되자, 소련은 화급히 비상대책을 세워야 하였다. 그래서 소련은 1962년 8월에 R-12 중거리탄도미사일 6발과 R-14 중거리탄도미사일 3발을 쿠바에 전진배치하려고 미사일기지건설을 서둘렀다. 사거리가 2,000km인 R-12 중거리탄도미사일과 사거리가 4,500km인 R-14 중거리탄도미사일에는 각각 메가톤급 열핵탄두를 한 발씩 장착할 수 있었으므로, 워싱턴이 소련의 핵타격사정권 안에 놓이게 될 판이었고, 그로써 소련은 미국의 핵위협을 상쇄할 핵억제력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쿠바에서 진행되던 소련의 미사일기지건설공사가 미국의 U-2 고고도정찰기에게 노출되자 미소관계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었다. 존 케네디(John F. Kennedy) 당시 미국 대통령은 긴급히 국가안보회의 집행위원회를 소집했는데, 거기서 아래와 같은 다섯 가지 선택방안들이 검토되었다.

 

(1) 미국에 대한 소련의 미사일위협은 새로운 위험이 아니므로 대응하지 않는다.
(2) 소련을 최대로 압박하여 쿠바에 배치한 미사일을 철수하게 만든다.
(3) 쿠바 해상을 봉쇄한다.
(4) 소련이 쿠바에 건설하는 미사일기지들을 공중폭격으로 파괴한다.
(5) 쿠바와 비밀접촉을 하여 소련과 갈라서라는 최후통첩을 보내고, 이를 거부하면 무력침공으로 쿠바정권을 뒤집어엎고 쿠바를 점령한다.

 

위에 열거한 다섯 가지 선택방안들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조미핵대결을 종식시키기 위해 검토하였다는 선택방안들과 일치한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검토한 전략적 인내, 최대 압박, 해상봉쇄, 선제타격, 무력침공, 정권교체 등은 이미 55년 전에 나왔던 선택방안들이다.

 

그런데 당시 미국군 합동참모본부와 중앙정보국은 무력침공으로 쿠바를 점령하는 선택방안을 지지하였다. 그들이 그렇게 행동한 까닭은 당시 혁명정부가 수립된 지 불과 2년밖에 되지 않았던 쿠바의 군사력을 아주 얕보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당시 쿠바혁명군(FAR)에게는 미국의 무력침공을 막아낼 방어수단이 없었다. 또한 소련에서 쿠바까지 거리가 너무 멀어서, 소련군이 쿠바에 도착하기 전에 미국군이 쿠바를 점령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국이 무력침공으로 쿠바를 점령하는 경우, 소련은 그에 대한 보복으로 베를린을 침공하여 점령할 수 있다는 우려가 미국의 발목을 잡아당겼다. 동유럽전선에 강력한 지상군을 배치해둔 소련은 당시 동독 영토 안에 고립된 섬처럼 갇혀 있던 베를린을 손쉽게 점령할 수 있었다. 만일 미국이 쿠바를 점령하면, 소련은 베를린을 점령하게 될 것인데, 그렇게 되면 핵전쟁을 동반하는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게 될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혀 고심을 거듭하던 케네디는 결국 소련과 타협하는 길을 택했다.

 

이런 사정을 살펴보면, 당시 미국이 쿠바를 침공하려는 의사와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핵전쟁을 동반하는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까봐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쿠바를 감히 침공하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소련이 지상군과 전략로케트군을 독일에 가까운 서부전선으로 증파하여 베를린을 점령할 것처럼 강하게 압박하였더라면, 미국은 겁을 먹고 쿠바 해상을 봉쇄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겁쟁이 니키타 후르쇼브(Nikita S. Khrushchev)에게서 그런 담대한 공세전략을 기대할 수 없었고, 더욱이 제국주의와 타협한 변절자로 전락하였다는 비난을 받게 된 그에게는 최후결전도 불사하려는 공격정신이 전혀 없었다. 결국 소련이 미국의 협박에 겁을 먹고 뒤로 물러서는 바람에 미소핵대결은 12일 만에 끝났다. 사회주의 대 제국주의의 제1차 핵대결에서 사회주의소련이 치욕스런 판정패를 당한 것이다.

 

55년 전에 벌어졌던 사회주의 대 제국주의의 제1차 핵대결은 그처럼 사회주의소련의 판정패로 끝났지만, 오늘 벌어지고 있는 사회주의 대 제국주의의 제2차 핵대결은 반대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사회주의조선은 사회주의진영이 사라지는 바람에 전 세계가 아메리카제국의 일극지배체제로 끌려간 최악의 역경 속에서도 물러서거나 주저앉지 않았을 뿐 아니라, 단독으로 아메리카제국에 맞서 1993년부터 24년 동안 비타협적인 핵대결을 계속해왔다. <사진 2>

 

▲ <사진 2> 이 사진은 2017년 7월 4일 오전 화성-14형을 실은 8축16륜 발사대차가 미사일조립시설을 출발하여 발사지점으로 이동하는 장면이다. 발사대차 맨 뒤쪽에 있는, 차탄분리식 발사에 사용되는 발사판이 매우 크고 육중해 보인다. 조선은 사회주의진영이 사라지는 바람에 전 세계가 아메리카제국의 일극지배체제로 끌려간 최악의 역경 속에서도 물러서거나 주저앉지 않았을 뿐 아니라, 단독으로 아메리카제국에 맞서 1993년부터 24년 동안 비타협적인 핵대결을 계속해왔다. 화성-14형 시험발사성공은 조미핵대결에서 조선의 승리를 예고하는 결정적인 전환계기로 되었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소련은 미국과 핵대결을 벌인 지 불과 12일 만에 판정패를 당했으나, 조선은 장장 24년 동안 미국과 치열한 핵대결을 벌이며 최후결전을 준비하였다. 미국과 끝까지 싸우지 못하고 12일 만에 서둘러 타협해버린 소련은 쿠바에 배치하려던 핵타격수단들을 철수하는 것으로 핵대결을 끝냈지만, 미국과 끝장을 볼 때까지 싸우려는 조선은 화성-14형을 시험발사하여 워싱턴을 핵타격사정권 안으로 끌어들였다.

 

55년 전 제1차 핵대결에서 미국은 소련의 핵타격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 쿠바 해상을 봉쇄함으로써 압박강도를 최고로 끌어올렸는데, 오늘도 그들은 조선의 핵타격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 조선에 대한 압박강도를 최고로 끌어올리고 있다. 그런 움직임이 여기저기서 감지되는데, 몇 가지 사례들을 열거할 수 있다.

 

2017년 6월 29일 미국 재무부는 조선이 핵무기 및 미사일프로그램을 포기할 때까지 최대 압력을 가하고 있다고 하면서, 조선과 거래하는 중국 단둥은행, 다롄국제해운, 중국 기업인 2명을 제재하였다. <아사히신붕> 2017년 7월 21일 보도에 따르면, 미국은 조선과 거래하는 중국 기업들 및 개인들에 대한 독자제재범위를 더 확대하는 방침을 지난 7월 19일 워싱턴에서 진행된 미국-중국 포괄적 경제대화 중에 중국측에 통보했다고 한다. 이런 독자제재는 유엔안보리에서 대조선제재결의안을 채택하는 것이 중국과 러시아의 반대로 힘들게 되자, 독자제재로 방향을 바꾸면서 대조선경제제재를 중국에까지 확장하여 조선에 대한 압박강도를 최고로 끌어올리려는 것이다.

 

2017년 7월 21일 렉스 틸러슨(Rex W. Tillerson) 미국 국무장관은 미국인의 조선방문을 전면 금지하는 행정명령서를 결재하였는데, 그 행정명령은 오는 8월 말부터 발효될 것이다. 미국 행정부가 미국인의 방문을 전면 금지한 나라는 전 세계에서 조선밖에 없다. 그들이 이런 강경조치를 발동한 것은 조선에 대한 압박강도를 최고로 끌어올리려고 하는 것이다.

 

조선에 대한 압박강도를 최고로 끌어올리면, 그에 맞서 싸우는 조선은 조국통일대전으로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조미핵대결이 전쟁으로 폭발할 위험은 임계점에 접근하고 있다.  

 


2. 조선의 핵무력 완성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한반도 정치상황에서 조미핵대결을 발생시킨 요인들을 살펴보면, 한국지배체제를 유지하려는 미국과 그에 맞서 미국의 ‘남조선 강점’을 끝장내려는 조선 사이에 조성된 적대관계가 드러나 보인다. 한국이 ‘북한’을 자기 영토의 절반이라고 인정하는 것처럼, 조선도 ‘남조선’을 자기 영토의 절반라고 인정하는데, 그런 시각에서 바라보면, 미국군이 장기주둔하면서 자기 영토 절반을 점령한 것으로 보일 것이다. 따라서 조선이 격렬히 비난하는 ‘미제의 남조선 강점’은 자기 영토의 절반을 아메리카제국에게 빼앗기고, 자기 주권을 심하게 침해당하는 사태로 조선에게 인식되는 것이다. 어느 나라나 영토와 주권에 관한 문제는 타협하지 않는 법인데, 그런 점에서 조선도 결코 예외로 될 수 없다.

 

그러므로 더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이, 조선의 어법으로는 ‘미제의 남조선강점’이고, 나의 어법으로는 미국의 한국지배체제인 한미동맹을 강제로 해체하는 것이 조선이 추구하는 최대, 최상의 국가목표인 것이다. 그 국가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조선은 희생과 위험을 무릅쓰고 핵무력을 건설해왔다. 화성-14형 시험발사성공으로 핵무력을 완성한 목적이 거기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데, 조선이 말하는 핵무력 완성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된다.

 

첫째, 조선이 말하는 핵무력 완성이란 미국 본토 전역을 타격할 수 있는 핵공격력을 갖춘 것이다.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처럼, 화성-14형 시험발사가 성공한 것은 미국 본토 전역을 타격할 수 있는 강력한 핵공격력을 갖추었음을 입증한 것이다.

 

둘째, 조선이 말하는 핵무력 완성이란 핵공격을 받고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핵방호력을 갖춘 것이다. 6.25전쟁을 끝내지 못한 위태로운 정전상태에서 ‘세계 최강’이라는 미국과 맞서 핵대결을 벌이는 조선에게 핵방호체계는 나라의 생사존망에 직결되는 문제다.  
이미 언론보도를 통해 널리 알려진 것처럼, 조선 각지에는 오랜 기간에 걸쳐 막대한 자금과 노력을 들여 건설해놓은 깊고, 넓고, 큰 지하방호시설들이 있다. 지하방호시설들을 전국적으로 건설하였을 뿐 아니라, 조선인민군은 더 말할 것도 없고, 각계각층 인민들도 핵방호훈련을 전국적 범위에서 정기적으로 진행하며 숙달해왔다. 그리하여 조선은 핵공격을 받고서도 살아남을 고도의 핵방호력을 가진, 전 세계에서 유일한 나라로 될 수 있었다. <사진 3>

 

▲ <사진 3> 이 사진은 2017년 7월 9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참석한 가운데 평양에서 성대히 진행된 대륙간탄도로케트시험발사성공 기념 음악무용종합공연 중에서 무대 뒤 대형 배경화면에 펼쳐진 영상들 가운데 하나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지하미사일기지 차폐문 앞에 세워놓은 6축12륜 발사대차 곁에서 야전지휘관들과 담화하는 장면이다. 이 발사대차에는 화성-10 중거리탄도미사일이 은폐포에 덮혀 실려있다. 지하미사일기지를 동굴식으로 건설하였고, 입구가 잘 은폐되어 있어서, 적국의 공중정찰에 노출되지 않는다. 조선은 규모와 양식과 사용목적이 다른 각종 핵방호시설들을 전국 도처에 수없이 건설해놓았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핵공격력과 핵방호력을 겸비함으로써 핵무력을 완성한 조선에게는 미국의 한국지배체제를 강제로 해체하는 일, 조선의 어법을 빌리면, ‘미제의 남조선강점’을 강제로 해체하는 일만 남았는데, 그것이 조선에서 말하는 조국통일대전이다. 그러므로 조선이 핵무력을 완성한 것은 ‘미제의 남조선강점’을 해체하는 조국통일대전이 임박하였음을 의미한다.

 

물론 조선은 핵무력을 보유하기 이전에도 조국통일대전을 준비하였지만, 핵무력을 갖지 못한 상태에서 조국통일대전을 벌이면 미국의 핵공격을 받을 위험이 있었다. 하지만 화성-14형이 출현한 이후 조선이 미국의 핵공격을 받을 위험은 사라졌다. 왜냐하면, 미국이 조선에게 핵공격을 감행하는 경우 조선은 미국 본토를 핵공격으로 파괴할 핵억제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제는 누구도 조선을 건드릴 수 없게 되었으며, 누구도 조선의 조국통일대전을 막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바뀌었는데도, 미국은 핵타격수단을 동원하는 대조선전쟁연습을 멈추지 않고 있다. 지난 3월과 4월 두 달 동안 ‘키리졸브-독수리’ 전쟁연습을 진행하면서 조선을 극도로 자극한 미국은 오는 8월 하순에 ‘을지프리덤가디언’ 전쟁연습을 진행하면서 조선을 더욱 자극할 것으로 보인다.

 

2017년 7월 22일 조섭 던포드(Joseph F. Dunford) 미국군 합참의장은 국가안보부문 관리들과 전문가들이 참석한 가운데 콜로라도주 애스펜(Aspen)에서 진행된 토론회에서 “북조선의 핵능력에 대응하여 군사적 선택방안을 가지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아니다. 내가 상상할 수 없는 일은 (조선이) 핵무기를 콜로라도 덴버에 떨어뜨리는 능력을 허용하는 것이다. 그것이 내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내 임무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만드는 군사적 선택방안들을 개발하는 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발언은 조선의 미국 본토 핵타격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 새로운 군사전략을 개발하겠다는 뜻이며, 핵무력을 강화하여 조선의 핵무력에 맞서는 핵대결을 계속하겠다는 의사표명으로 해석된다.

 

던포드 합참의장의 그 발언은 조미핵대결이 더욱 격화되면서 정세가 험악해질 것임을 예고한 것인데, 정세가 그처럼 험악해지면 폭발임계점에 도달한 조선은 조국통일대전으로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3. 의문을 불러일으키는 백악관의 행동

 

55년 전 쿠바미사일위기에서 경험한 것처럼, 국가지도자의 전략적 판단이 핵대결의 승패를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인이다. 그렇다면 오늘 조선과 핵대결을 벌이는 도널드 트럼프(Donald J. Trump) 미국 대통령은 전략적 판단을 제대로 하고 있을까?

 

<워싱턴포스트> 2017년 7월 20일 보도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이후 여섯 달 동안 거짓말 또는 허튼 소리를 무려 836차례나 늘어놓았다고 한다. 이것은 거짓말 또는 허튼 소리를 매일 4.6차례씩 끊임없이 쏟아낸 것이다. 원래 워싱턴의 정객들은 ‘거짓말선수권대회’에서 상위권에 들어갈 사람들이지만, 자신의 말이 거짓말로 드러나 망신을 당하는 경우 거짓말을 자제하는데, 유독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말이 거짓말로 드러나 망신을 당해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거짓말을 쏟아내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그런 이상행동은 그가 측근들의 도움이 없이는 전략적 판단을 내릴 수 없는 정신상태에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2017년 7월 5일 미국 언론보도에 따르면, 조선이 화성-14형을 시험발사한 7월 4일 오전(미국 동부시간) 트럼프 대통령은 긴급보고를 받고서도 골프장으로 떠났다고 한다. 화성-14형 시험발사에 관한 긴급보고를 받은 고위관리들은 화급히 백악관에 모여들어 장시간 대책회의를 네 차례나 연속 진행하고 있었는데, 대통령은 버지니아주에 있는 골프장에 나가 골프채를 휘두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 날만 그런 게 아니었다. 미국 텔레비전방송 <NBC> 2017년 7월 4일 보도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월 20일 취임한 뒤 164일 동안 무려 35일을 골프장에서 보냈다고 한다. 누구나 직감할 수 있는 것처럼, 골프에 미쳐 허송세월하는 거짓말쟁이 대통령이 조미핵대결에 대처하는 전략적 판단을 제대로 할 리 만무하다. <사진 4>

 

▲ <사진 4> 이 사진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비를 맞으며 골프를 치고 있는 장면이다. 그는 골프에 미친 사람이다. 지난 1월 20일 취임한 뒤 164일 동안 무려 35일을 골프장에서 보냈다. 조선이 화성-14형을 시험발사하였던 7월 4일에도 그는 골프장에 나타났다. 화성-14형 시험발사에 관한 긴급보고를 받은 고위관리들은 화급히 백악관에 모여들어 장시간 대책회의를 네 차례나 진행하고 있었는데, 대통령은 버지니아 골프장에서 골프채를 휘두르고 있었다. 골프에 미쳐 허송세월하는 거짓말쟁이 대통령이 조미핵대결에 대처하는 전략적 판단을 제대로 할 리 만무하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그런데 미국에게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으나, 2017년 6월 25일 미국 텔레비전방송 <MSNBC> 단독대담에 출연한 마이크 팜페오(Mike R. Pompeo) 중앙정보국장의 말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의 머릿속은 조선의 ‘핵문제’로 가득 차 있으며, 미국의 국가안보위험이 그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기 때문에 자기를 하루도 빠짐없이 백악관으로 불러 조선의 동향에 관해 묻고, 미국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묻는다고 한다. 이것은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 중앙정보국의 대조선정보판단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다른 한편, 트럼프 대통령은 자기 맏사위인 재럿 쿠쉬너(Jared C. Kushner) 백악관 선임고문의 조언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정책결정을 내리고 있다. 예를 들면, 트럼프 대통령은 쿠쉬너 선임고문의 조언과 막후협상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을 자신의 사저로 초청한 정상회담을 성사시켰고, 쿠쉬너 선임고문에게 특명을 주고 이라크에 파견하여 중동정책을 결정하게 하였고, 쿠쉬너 선임고문에게 특명을 주어 미국과 러시아의 비밀연락통로를 개설하려고 시도하였던 것이다. 

 

<워싱턴포스트> 2017년 5월 26일 보도에 따르면, 2016년 12월 초 쿠쉬너 선임고문은 뉴욕 맨해튼에 있는 트럼프 대통령의 사저 ‘트럼프 타워’에서 쎄르게이 키슬략(Sergey Kislyak) 워싱턴 주재 러시아 대사와 만났을 때, 러시아 대사관 또는 러시아 영사관의 통신체계를 이용하여 백악관과 크레믈린을 직접 연결하는 비밀연락통로를 개설하자고 제안하였는데, 그 제안을 받은 키슬략 대사는 깜짝 놀랐다고 한다. ‘도청의 본산’으로 악명 높은 미국 국가안보국(NSA)이 워싱턴 주재 러시아 대사관과 크레믈린 사이의 통신을 도청하는 바람에 그 제안은 실행되지 못하였지만, 백악관과 크레믈린 사이에 비밀연락통로를 개설하자는 제안은 트럼프 대통령이 쿠쉬너 선임고문에게 국가안보부문에서 가장 민감한 비밀외교임무까지 맡겼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사진 5>

 

▲ <사진 5> 재럿 쿠쉬너는 트럼프 대통령의 맏사위이며, 백악관 선임고문이다. 그는 정통파 유대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런 쿠쉬너 선임고문의 조언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정책결정을 내리고 있다. 그는 대통령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는 막후실권자다. 그래서 미국 언론매체는 그를 '만사장관'이라고 불렀다. 트럼프 행정부의 국정운영 전반을 총괄하는 장관 중의 장관이라는 뜻이다. 만일 트럼프 대통령이 조선과의 협상을 시작한다면, 쿠쉬너 선임고문을 그 협상에 파견할 것으로 예견된다. 쿠쉬너 선임고문은 조선에 대해, 조미핵대결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을까? 막후실권자인 그는 언제나 막 뒤에서 조용히 움직이므로, 그의 견해가 언론에 드러나는 경우는 없다. 하지만 화성-14형이 출현한 이후 백악관이 펼치는 대조선행동은 쿠쉬너 선임고문이 정세를 오판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그처럼 트럼프 대통령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는 쿠쉬너 선임고문은 대통령을 움직이는 막후실권자다. 그래서 미국 텔레비전방송 <CNN>은 2017년 4월 3일 보도기사에서 쿠쉬너 선임고문을 ‘만사장관(Secretary of Everything)’이라고 불렀다. 이 이상한 별칭은 트럼프 행정부의 국정운영 전반을 총괄하는 장관 중의 장관이라는 뜻이다. 미국의 언론매체 <인포워즈(INFOWARS)> 2017년 4월 13일 보도에 따르면, 트럼프 행정부의 국정운영을 사실상 좌우하는 쿠쉬너 선임고문의 “독판치기(one-man show)”를 바라보는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관리들, 국방부 관리들, 국무부 관리들은 불만과 좌절감을 느낀다고 한다.

 

위에 서술한 몇 가지 사실을 보면,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중앙정보국의 대조선정보판단과 쿠쉬너 선임고문의 조언에 의존하여 조미핵대결에 대처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중앙정보국의 대조선정보판단이나 쿠쉬너 선임고문의 조언이 정확한가 하는 것이다. 비밀활동을 벌이는 미국 중앙정보국의 대조선정보판단이 얼마나 정확한지 알 수 있는 길은 없으며, 쿠쉬너 선임고문도 자기 견해를 언론에 공개하지 않는 터라, 그의 생각과 행동이 외부에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화성-14형이 출현한 이후 백악관의 대조선행동은 그들이 정세를 오판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백악관이 압박강도를 최고로 끌어올려 조선을 압박하면 조선이 굴복할지도 모른다는 정세오판에 빠지는 것은 대파국을 자초하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자멸요인으로 될 것이다.

 


4. 조선이 미국에 보내려는 두 번째 ‘선물보따리’

 

조선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2017년 7월 4일 화성-14형 시험발사를 현지지도하던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오늘 우리의 전략적 선택을 눈여겨보았을 미국놈들이 매우 불쾌해 하였을 것이라고, <독립절>에 우리에게서 받은 <선물보따리>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아할 것 같은데 앞으로 심심치 않게 크고 작은 <선물보따리>들을 자주 보내주자고 호탕하게 웃으시며 말씀하시였다”고 한다. 미국에 크고 작은 선물보따리들을 자주 보낸다는 말은, 각종 핵타격수단들을 동원하는 전략적 핵압박공세를 연발적으로 펼쳐간다는 뜻으로 해석되는데, 조선의 대륙간탄도미사일, 중거리탄도미사일,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이 그런 핵타격수단들이다.

 

대조선군사정보를 다루는 미국 정부 관리 두 사람이 전해준 말을 인용한 <CNN> 2017년 7월 19일 보도기사는 조선이 그 3종의 핵타격수단 가운데 어느 한 가지를 앞으로 2주 안에 시험발사할 준비에 착수하였다는 사실을 전해주었다. 그 보도에 따르면, 최근 미국 정찰위성들은 조선의 미사일발사통제시설들 또는 미사일부품들이 제대로 작동하는지를 시험하는 것을 보여주는 “위성배치레이더방출(satellite-based radar emissions)”을 탐지하였다고 한다. 위성배치레이더방출이라는 말은 인공위성에 장착된 레이더가 지상으로 전파를 발신한다는 뜻인데, 놀랍게도, 이 짤막한 보도문장은 위성배치레이더, 미사일발사통제소, 미사일을 서로 연결하는 최첨단 미사일체계가 조선에 존재한다는 정보를 전해주었다.

 

지금까지 우리는 러시아의 위성항법체계인 ‘글로나쓰(GLONASS)’를 사용하는 일반적인 위성항법장치가 조선의 미사일들에 장착되어 있는 줄 알았는데, 그런 게 아니다. 위의 보도기사를 고찰하면, 조선의 미사일발사통제소는 광명성-3호와 광명성-4호에 각각 장착된 레이더들이 발신하는 전파를 수신하여 비행 중인 미사일을 향해 발신하고, 미사일은 그 전파를 수신하여 자기의 비행방향을 수시로 보정하는 위성항법체계가 작동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위성항법체계는 조선의 대륙간탄도미사일, 중거리탄도미사일,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에 장착된 위성항법장치와 연계된 것인데, 그런 위성항법장치를 장착한 조선의 탄도미사일들이 정밀타격능력을 가진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는 2017년 7월 17일 <자주시보>에 실린 ‘화성-14형은 “세계가 알지 못하고, 흉내 낼 수도 없는 새로운 전략무기인가?”’라는 글에서 화성-14형이 초토화타격능력과 초정밀타격능력을 완전무결하게 겸비한 스크램젯추진 대륙간탄도미사일이라는 사실을 논하였는데, 이번에 미국 언론보도가 그 사실을 뒷받침해줄 증거를 준 것이다. <사진 6>

 

▲ <사진 3> 이 사진은 2017년 7월 9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참석한 가운데 평양에서 성대히 진행된 대륙간탄도로케트시험발사성공 기념 음악무용종합공연 중에서 무대 뒤 대형 배경화면에 펼쳐진 영상들 가운데 하나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지하미사일기지 차폐문 앞에 세워놓은 6축12륜 발사대차 곁에서 야전지휘관들과 담화하는 장면이다. 이 발사대차에는 화성-10 중거리탄도미사일이 은폐포에 덮혀 실려있다. 지하미사일기지를 동굴식으로 건설하였고, 입구가 잘 은폐되어 있어서, 적국의 공중정찰에 노출되지 않는다. 조선은 규모와 양식과 사용목적이 다른 각종 핵방호시설들을 전국 도처에 수없이<사진 6> 위쪽 사진은 평양에 있는 3대혁명전시관에 전시된, 지구궤도를 따라 선회하는 광명성-4호 모형의 우주비행장면이고, 아래쪽 사진은 거기에 전시된 광명성-4호 모형의 일부를 촬영한 것이다. 광명성-4호는 지구관측위성이라고 하지만, 다목적위성이라는 사실이 이번에 미국 언론보도를 통해 밝혀졌다. 조선의 미사일발사통제소는 광명성-3호와 광명성-4호에 각각 장착된 레이더들이 발신하는 전파를 수신하여 비행 중인 미사일을 향해 발신하고, 미사일은 그 전파를 수신하여 자기의 비행방향을 수시로 보정하는 위성항법체계가 작동되고 있는 것이다. 이 위성항법체계는 조선의 대륙간탄도미사일, 중거리탄도미사일,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에 장착된 위성항법장치와 연계되는 것이다. 그런 위성항법장치를 장착한 조선의 탄도미사일들이 정밀타격능력을 가진 것은 당연한 이치다. 건설해놓았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그런데 주목되는 것은, 조선이 최근 그런 자기의 위성항법체계를 시험하였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조선이 대륙간탄도미사일, 중거리탄도미사일,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 가운데 어느 한 가지를 쏘아올리는 시험발사가 임박하였음을 말해준다. 

 

<CNN> 보도는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다. 그 보도에 따르면, 미국 정찰위성들은 조선이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의 “중요한 부분(critical component)”을 시험하는 정황과 조선의 잠수함 한 척이 동해에서 “평소와 다른 배치활동(unusual deployment activity)”을 전개하는 정황을 각각 순차적으로 탐지하였다는 것이다.

 

첫째, 그 보도에 따르면, 조선은 함경남도 신포조선소에서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의 중요한 부분을 시험했다고 한다. 2017년 7월 20일 <38 노스(North)>에 실린, 상업위성사진을 분석한 기사에 따르면, 신포조선소의 지상사출시험장에서는 2016년 8월 이후 아무런 움직임도 나타나지 않았으므로,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의 중요한 부분을 시험했다는 말은 지상사출시험을 하였다는 뜻이 아니다. 그렇다면,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의 중요한 부분을 시험했다는 말은 위에서 언급한 위성항법장치를 시험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둘째, 그 보도기사에 따르면, 조선은 신포조선소에서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의 중요한 부분을 시험한 날로부터 며칠 뒤에 로미오급 잠수함 한 척을 동해안에서 약 100km 떨어진 공해로 출동시켰는데, 그 잠수함은 그 해역에서 이틀 동안 머물며 활동하였다는 것이다. 미국 정부 당국자의 말을 인용한 <아사히신붕> 2017년 7월 23일 보도에 따르면, 그 잠수함은 약 1주일 동안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고 하였으니, 그 잠수함의 활동이 앞으로 더 계속될 수도 있다. <사진 7>

 

▲ <사진 7> 조선의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 북극성-1 동체표면을 촬영한 사진을 확대하면, 멀리서는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특이한 표면처리공법이 시야에 들어온다. 알루미늄 동체표면에 가는 실을 매우 촘촘하게 감아놓은 모양인데, 이것을 섬유강화성형(FRP)라고 하고, 그런 성형공법을 섬유실감기공법(FWM)이라 한다. 미사일동체표면을 섬유강화성형공법으로 처리하는 까닭은, 그렇게 하면 표면강도가 높아지기 때문이다. 조선이 거기에 사용하는 섬유실이 어떤 소재인지는 알 수 없지만, 모든 기술을 다 적용하여 탄도미사일을 튼튼하고 우수하게 만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최근 미국과 일본에서 나온 언론보도들에 따르면, 조선은 동해에서 북극성-1 시험발사를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미국 언론매체는 조선이 앞으로 2주 안에 북극성-1을 시험발사할 것으로 예견하였다. 이번에는 어떤 '묘기'를 보일지 기대된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그 보도에 따르면, 평소에 조선의 잠수함들은 해안에서 가까운 연안수역에 머물며 활동하였는데, 이번에는 이례적으로 약 100km 떨어진 공해로 나가 활동하였으므로, “평소와 다른 배치활동”이라고 지적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다. 미국 정찰위성은 조선의 잠수함들이 수심 깊은 바다 속으로 내려가 잠항하기 때문에 평소에 어느 해역으로, 몇 척이 출동하는지 탐지하지 못하고, 해수면 위로 떠올라 항해하는 경우에만 탐지할 수 있다. 조선의 잠수함이 잠항하지 않고 1주일 동안이나 해수면 위로 떠올라 활동하는 것은 매우 특별한 경우다.

 

신포조선소에서 위성항법체계를 시험한 뒤에, 공해로 출동한 로미오급 잠수함이 1주일 동안 해수면에서 활동하였다고 하니, 북극성-1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의 초정밀타격능력을 판정하는 시험발사를 준비하는 수중작업을 하였던 것일까? <CNN> 보도기사만 읽어봐서는 구체적인 정황을 알 수 없지만, 조선이 앞으로 2주 안에 북극성-1의 초정밀타격능력을 판정하는 시험발사를 진행할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2017년 7월 22일 중국 홍콩의 언론매체가 보도한 바에 따르면, 존 리처드슨(John M. Richardson) 미국 해군 참모총장은 지난 7월 20일 선진룽(沈金龍) 중국 해군 사령원과 영상통화를 하면서 조선이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 시험발사를 진행하는 경우 그에 관한 정보를 보내달라고 요청하였다고 한다. 중국이 받아주지도 않을 요청을 보낸 것을 보면, 조선의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 시험발사를 예견하는 미국이 얼마나 다급한 처지에 빠졌는지 알 수 있다.
  
조선에 대한 압박강도를 최대로 끌어올리며 정세를 악화시키는 백악관의 무분별한 행동에 격분한 조선은 전략적 핵압박공세를 연발적으로 단행하면서 백악관을 더 심각한 공포에 몰아넣을 것으로 예견된다. 조미핵대결이 최종단계로 들어선 오늘의 유동적인 정세는 위험계선으로 다가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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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력마피아, 침소봉대로 '밥그릇 지키기' 하나?

 
[기고]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은 매우 더디다
 
 
 
 
 
 
 
 
 
 
 
 
 
 
 
 
 
 
 
 
 
 
 
 
 
 
 
 
 
 
 
 
 
 
 
 
 
 
 
 
 
 
 
 
 
2017.07.24 09:23:47
 
 
 
후보 시절 40년 후 원전 제로 국가로의 탈원전 로드맵을 마련하겠다고 주장했던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21일 <한겨레>에 의하면, "현재 건설 중인 것만으로 원전은 2079년까지 가동된다. 앞으로 60여년 서서히 줄여나가는 것을 감당하지 못한다면 말이 안 된다"고 했다. 
 
이는 2019년 2월 가동 예정으로 현재 건설 중인 신한울 2호기의 수명이 60년임을 고려한 것일 텐데,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로드맵이 국내 원전의 현실 상황을 반영할 것임을 나타낸다.
 
5월 10일 문재인 정부 출범이래, 국내 원자력계는 관련 교수들이 중심이 되어 6월 2일과 7월 5일 두 차례에 걸쳐 정부의 탈원전 정책에 대해 비판하는 대국민 성명서를 발표했다. 일부 보수 언론 및 경제지 그리고 일부 야당 등도 이들에 편승하여 정부의 탈원전 정책을 거세게 비난해오고 있다.  
 
<조선일보>에 의하면, 전국원자력대학생연합이 지난 20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정부의 탈원전 정책을 비판하면서 반대 운동을 선언했다. 이들은 마치 당장이라도 원전이 멈추고, 원자력산업이 끝날 것 같은 자세로 원자력 사수를 위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실상은 어떤가? 
 
지난 19일 국정기획자문위원회가 발표한 '문재인 정부 국정운영 5개년 계획'은 탈원전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탈원전 로드맵 수립) 원전 신규 건설계획(추가 6기) 백지화, 노후 원전 수명 연장 금지 등 단계적 원전 감축계획을 전력수급 기본계획 등에 반영" 
 
현재 건설 중인 신고리 4호기, 신한울 1, 2호기가 예정대로 2017년, 2018년, 2019년 각각 준공되고, 신고리 5, 6호기는 미정 상태에서 그 이후 후속호기는 도입되지 않는다고 가정하여 본인이 추정한 국내 원자력발전의 전망은 표 1 및 그림 1과 같다. 
 
표 1 및 그림 1에서 1 GWe(1GWe=100만kWe, 예를 들어 신고리 1,2호기는 전기출력 100만kW급이다.) 전기출력의 경수로의 수명은 40년, 1.4 GWe 전기출력의 APR 1400 경수로의 수명은 60년, 월성 1호기 수명은 40년, 나머지 월성 2-4호기 수명은 30년을 가정하였다. 
 
표 1. 국내 원자력발전 전망 추정 (단위: GWe) 
 
그림 1. 국내 원자력발전 전망 추정 
 
 
신고리 5,6호기를 취소하더라도 현재 건설중인 원전으로 국내 원자력발전 규모는 증가하여 2019년에 26.7GWe에 이르며 2022년부터 감소한다. 신고리 5,6호기를 건설하게 되면 국내 원자력발전 규모는 더 증가하여 2022년에 28.9 GWe에 이르며 그 이후 감소한다. 그림 1에서 볼 수 있듯이, 국내 원자력발전은 앞으로도 수십 년간 어느 정도 비중 있는 발전원으로 남아 있을 예정이다.  
 
결론적으로 문 정부의 탈원전 정책은 원전 운영을 2080년경까지 지속시키는 더디고 더딘 정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당장이라도 원자력산업이 끝날 것처럼 침소봉대하며 정부의 탈원전 정책을 비난하는 국내 원자력계의 현 작태는 자기의 큰 밥그릇 지키기 싸움과 무엇이 다른가. 
 
재미 핵물리학자인 강정민 박사는 전세계 240만 명이 회원으로 있는 비영리 환경단체 연합인 NRDC(Natural Resources Defense Council, 천연자원방어위원회) 선임연구위원입니다. 
기사를 끝까지 읽으셨다면…

인터넷 뉴스를 소비하는 많은 이용자들 상당수가 뉴스를 생산한 매체 브랜드를 인지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온라인 뉴스 유통 방식의 탓도 있겠지만, 대동소이한 뉴스를 남발하는 매체도 책임이 있을 것입니다. 
관점이 있는 뉴스 프레시안은 독립·대안언론의 저널리즘을 추구합니다. 이러한 저널리즘에 부합하는 기사에 한해 제안 드립니다. 이 기사에 자발적 구독료를 내주신다면, 프레시안의 언론 노동자, 콘텐츠에 기여하는 각계 전문가의 노고에 정당한 보상이 돌아갈 수 있도록 쓰겠습니다. 프레시안이 한국 사회에 필요한 언론이라고 생각하신다면,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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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부동산 불패의 서막 '말죽거리 신화'

[강남공화국의 민낯4] 영동개발과 말죽거리 신화로 살펴본 땅값 상승의 사례들

17.07.24 07:24 | 글:전상봉쪽지보내기|편집:김준수쪽지보내기

▲ 창의문(자하문) 근처에 세워진 최규식 총경 동상. 1968년 1월 21일 밤 10시께, 당시 종로경찰서장 최규식은 남파된 북한의 124부대원들을 제지하던 중 순직했다. ⓒ 전상봉

1968년 1월 16일 밤 10시 북한의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 124부대원 31명이 황해북도 연산군 제6기지를 출발했다. 청와대 습격을 명령받은 이들이 휴전선을 넘은 시간은 1월 18일 자정 무렵이었다. 얼어붙은 임진강을 포복으로 건넌 이들은 경기도 파주군 법원리에서 미타산-앵무봉-노고산-진관사로 이어지는 능선을 타고 1월 20일 서울 잠입에 성공했다.

북한산 비봉과 승가사를 지나 이들 게릴라부대가 자하문검문소에 도착한 시간은 1월 21일 밤 10시께. 검문하는 경찰에게 CIC 방첩대라고 둘러대고 자하문고개를 넘어선 이들을 가로막은 사람은 종로경찰서장 최규식이었다. 예기치 않은 상황에 직면하자 이들은 수류탄을 던지고 기관단총을 난사했다. 때마침 그곳을 지나던 시내버스에도 수류탄을 던져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군경합동수색진에 의해 1월 31일 사태가 종료되기까지 남파된 124부대원들 중 28명이 사살되었고 2명은 도주했으며 1명(김신조)은 생포되었다. 북한의 도발로 우리가 입은 인명 피해는 사망 32명(군 장병 25명, 민간인 7명), 부상 52명이었다.

1.21사태의 여파는 컸다. 육군3사관학교와 특수부대인 684부대가 창설되었고, 유격훈련이 도입되는 한편 군복무기간이 육군과 해병은 30개월에서 36개월로, 공군과 해군은 36개월에서 39개월로 늘어났다. 향토예비군과 전투경찰순경(전경)이 창설되었고, 고등학생과 대학생은 교련 수업을 받아야 했다. 그해 5월에는 간첩 식별을 용이하게 한다는 이유로 주민등록법이 개정되어 18세 이상의 국민들에게 12자리 번호가 새겨진 주민등록증이 발급되었다(현재와 같이 13자리의 번호가 발급된 것은 1975년 7월 주민등록법이 개정되면서다).

북악스카이웨이가 건설된 것도 이때였다. 청와대 방어를 목적으로 건설된 북악스카이웨이는 서울 종로구 부암동 창의문에서 미아리고개를 지나 성북구 종암동에 이르는 7.1km의 2차선 도로로 1968년 9월 28일 완공되었다. 북악스카이웨이가 완공되고 달포가 지난 10월 30일에는 울진삼척무장공비사건이 발생하여 남북 간의 긴장은 최고조에 달했다.

서울요새화계획은 이런 시대 상황을 배경으로 발표되었다. 서울시장 김현옥은 1969년 1월 19일 남산을 요새화하고, 강북에 집중된 인구를 분산하기 위해 강남 개발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는 서울요새화계획을 발표하였다. 이 계획에 따라 서울 남산에는 전시에 30만~40만 명이 대피할 수 있는 남산 1,2호 터널이 건설되었다.

영동지구 개발계획

남북이 대치하는 가운데 서울의 인구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해방 당시 90만 명 정도였던 서울의 인구는 1950년 169만 명, 1959년 200만 명을 돌파한데 이어 1960년에는 244만 명, 1965년에는 347만 명이 되었고, 1.21사태가 발생한 1968년에는 433만 명을 헤아렸다.

폭발적인 인구 증가는 강남개발의 또 다른 요인이었다. 영동지구 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시행된 강남개발은 경부고속도로 건설과 함께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1968년 시행된 영동토지구획정리사업(영동1지구)은 경부고속도로 부지를 무상으로 확보하는데 목적이 있었고, 1971년 시행된 영동 2지구 사업은 강북에 밀집된 인구 분산에 초점이 맞춰졌다.
 
▲ 1968년 시행된 영동토지구획정리사업(영동1지구)은 경부고속도로 부지를 무상으로 확보하는데 목적이 있었고, 1971년 시행된 영동 2지구 사업은 강북에 밀집된 인구 분산에 초점이 맞춰졌다. ⓒ 김정은

영동지구 개발의 전체적인 윤곽은 1970년 11월 5일 서울시장 양택식이 남서울개발계획안을 발표하면서 드러났다. 특별기자회견을 통해 발표된 남서울개발계획은 인구 60만 명이 거주하는 신시가지를 영동지구에 건설한다는 내용이었다.

① 과밀화되고 있는 구시가지의 인구를 강남으로 분산하고, 서울의 균형발전을 추진한다.
② 남서울의 영동1지구와 2지구를 합한 837만 평의 지역에 1972년까지 167억 원을 투입, 60만 명이 거주할 신시가지를 조성한다.
③ 효과적인 인구 유치를 위해 제1단계로 삼성동 5만 평 부지에 상공부와 한국전력 등 12개 국영기업이 입주할 2만8천 평 규모의 종합청사를 신축한다. 
④ 영동지구 개발을 촉진하기 위해 다른 정부기관 및 사회단체를 적극 유치하며, 상공부와 산하기관 공무원이 거주할 수 있는 주택용지 30만 평과 별도의 3만 평의 부지에 총무처가 주관하는 공무원 타운을 조성한다.
⑤ 영동지구 면적의 72%에 해당하는 600만 평에 상하수도의 완비와 도로 포장, 전신 전화 가스 공동구 설비, 구릉지대에 자연풍경을 살린 공원녹지 조성하고 학교와 시장, 위락시설의 유치로 현대적인 신시가지를 조성한다. - 손정목, <서울도시계획 이야기3>, 126쪽 요약

영동지구의 전체적인 골격은 격자형 도로망을 구축하면서 짜여졌다. 도로율이 24.6%에 이르는 영동지구는 동쪽의 영동대로와 서쪽의 강남대로를 경계로 몇 개의 슈퍼블록으로 구획되었다. 영동대로(50~70m)와 언주로(40m), 강남대로(50m)는 남북을 잇는 간선도로였고, 도산대로(50m), 테헤란로(50m), 사평로(40m)는 동서를 잇는 간선도로였다. 당시 을지로의 폭이 20m임을 감안하면 너비 40~70m의 광로로 설계된 간선도로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경부고속도로가 완공된 이듬해인 1971년 서울시는 영등포구 신동출장소 관할인 반포동과 잠원동 일대의 1백만 평을 개발하기 위해 영동종합개발계획을 수립했다. 재정이 부족했던 서울시는 1971년 4월 24일 거점개발 방식으로 논현동 22번지 소재 7194평의 부지에 12개동의 공무원아파트 건설 공사를 시작했다. 12평형과 15평형으로 지어진 360세대의 공무원아파트는 착공 8개월만인 1971년 12월 28일 완공되었다.

해가 바뀐 1972년 5월 서울시는 영동지구에 단독주택을 건설하겠다고 발표했다. 단독주택은 땅값이 저렴하고, 공사하기 용이한 지역에 건설되었다. 이 계획에 따라 1972년 10개단지 753호와 1973년 4개 단지 181호의 시영주택이 건설되어 분양되었다.

영동지구에 지어진 아파트단지와 단독주택은 파격적인 조건으로 분양되었다. 공무원아파트의 경우 무상 지원과 융자를 끼면 72만 원이면 입주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이었다. 그런데 교통, 수도, 교육 등 생활 기반 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이 때문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얼마 지나지 않아 아파트를 팔고 강북으로 되돌아갔다.

서울시는 강남으로 주거 이전을 촉진하기 위해 1972년 4월 '도시개발촉진에 따른 서울특별시세의 과세면제에 관한 특별조례'를 제정했다. 특별조례의 제정으로 주택공사 등 공공기관이 영동지구에 지은 건물에 대해서는 취득세가 면제되었다. 그해 12월에는 특정지구개발촉진에 관한 임시조치법이 제정되어 영동지구에 대한 추가적인 세제 혜택이 더해졌다. 또한 서울시는 거점 개발 단지를 중심으로 시내버스 노선을 배치하여 주거 여건을 개선하였다. 이런 가운데 점차 민간주택이 지어지면서 시가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청와대와 서울시의 '부동산 투기'

제3한강교와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투기 바람을 일으켰다. 부동산 투기는 영동지구 개발 방식과 무관치 않았다. 정부는 경부고속도로 부지를 무상으로 확보하기 위해 토지구획정리사업을 시행했다. 구획정리사업을 통해 정부는 체비지(替費地)를 확보했고 이중 도로, 공원, 학교 등의 공공용지를 제외한 나머지는 매각하여 개발 비용으로 사용하였다. 이런 사정 때문에 영동지구 사업을 주관한 서울시나 체비지를 내놓은 토지 소유자들 모두 땅값이 오르기를 바랐다.

"예컨대 내가 강남에 땅이 1000평 있을 때 내 땅 500평을 도로용지로 내놓는다면 재산의 50%가 감소한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도로가 난 뒤 땅값이 두 배 뛰었다면 땅값을 기준으로 볼 때 절반을 내놓고도 나는 손해 본 것이 없게 된다. 만약 땅값이 열 배 올랐다면 나는 땅 절반을 내놓고도 큰 이익 보게 된다. 정부나 시가 도로를 내는 데 내가 내놓은 땅 500평을 다 사용하지 않고 250평만 사용했다면 나머지 250평이 체비지인데, 개발 사업의 시행자는 이 체비지를 팔아 개발 비용을 충당한다. 강남 개발의 다른 이름인 '영동 구획정리 사업'은 체비지 매각대금을 재원으로 하는 특별회계로 추진된 사업이었다." - 한홍구, <유신 - 오직 한사람을 위한 시대>, 317쪽

재원이 부족한 상태에서 이 같은 구획정리사업은 불가피한 선택일 수 있다. 그런데 체비지를 수용하는 비율인 감보율이 매우 높은 영동지구에서 투기에 대한 대비책이 없었다는 것은 심각한 후과를 초래했다. 더구나 청와대와 서울시가 개입하여 조직적인 투기를 일삼은 것은 도시개발을 왜곡시키고, 사람들에게 부동산 투기를 부추기는 아주 나쁜 선동이었다.

청와대와 서울시의 조직적인 투기는 1971년 4월 대선과 5월 총선에 필요한 정치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1970년 1월 서울시장 김현옥은 서울시 도시계획과장 윤진우를 대동하고 헬기로 영동지구를 순찰하면서 투기하기 좋은 땅을 물색했다. 당시 윤진우가 투기 유망지역으로 지목한 곳은 강남구 삼성동 일대였다.
 
▲ 1970년대 초 서울시 도시계획과장 윤진우는 강남구 삼성동에 위치한 조계종 소유의 봉은사 주변의 땅 10만평을 5억3천만원에 사들였다. 이때의 부지 매입으로 주변의 땅값이 들썩였다. 이때 매입한 부지에는 한국전력, 무역센터(COEX) 등의 건물이 들어섰다. 2014년 한전 본사 부지가 매각되자 조계종 소속의 일부 승려들이 서울시청 앞에서 한전부지 환수를 요구하면서 농성을 벌였다. 2016년 7월 촬영. ⓒ 전상봉

윤진우는 청와대 경호실장 박종규가 제공한 12억8천만 원의 자금으로 1970년 2월부터 8월까지 24만8368평의 땅을 사들였다. 이렇게 사들인 땅은 해가 바뀐 1971년 1월에서 5월까지 일부(6만5천 평)만을 남기고 되팔아 18억 원의 시세 차익을 남겼다.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의 저자 손정목은 당시 18억 원은 1997년을 기준으로 5천억이 넘는 거금이라고 추산한 바 있다.

이즈음 상공부 장관 이낙선도 서울시장 김현옥에게 상공부와 상공부 산하 기관이 입주할 종합청사 건립 부지를 매입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번에도 윤진우가 나서서 강남구 삼성동에 위치한 조계종 소유의 봉은사 주변(삼성동 159, 167, 308번지)의 땅 10만 평을 5억3천만 원에 사들였다. 이때의 부지 매입으로 주변의 땅값이 들썩였다. 정부 부처는 서울시 밖으로 이전해야 한다는 방침에 따라 상공부는 경기도 과천 정부청사로 입주하였고, 상공부 청사 터로 매입한 강남구 삼성동 부지에는 한국전력, 무역센터(COEX) 등의 건물이 들어섰다.

강남 개발에는 청와대와 서울시의 투기 말고도 정부 부처 장관이 정치자금을 상납 받고 민간기업에 개발을 허가해 주는 비리도 있었다. 1971년 잠실지구 매립사업의 경우 경제기획원 부총리 김학렬이 정치자금을 받고 공유지 매립공사를 서울시가 아닌 민간 건설사에 허가하여 투기를 부추기는 데 일조했다.

말죽거리 신화, 대한민국의 일그러진 민낯
 
▲ 서울 지하철 3호선 양재역 부근에 위치한 말죽거리(馬粥巨里)는 한양에서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로 오가는 길목이었다. 지금도 양재역 주변은 경부고속도로가 지나고 강남대로와 남부순환로가 교차하는 교통요지다. ⓒ 전상봉

"1624년 인조 임금님은 이괄의 난을 피하여 남쪽으로 내려갔다. 지금의 양재역까지 황급히 내려온 터라 배고픔과 갈증이 매우 심했다. 마침 이곳에 있던 김씨 등 유생 6~7명이 황급히 죽을 쑤어 바치자 임금님이 말위에서 그 죽을 마시고 다시 피난길을 떠났다. '임금이 말 위에서 죽을 마셨다'는 뜻에서 '말죽거리'라고 되었다 한다. 또 다른 이야기로 역마에 말죽을 먹이던 곳이었으므로 이곳을 말죽거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서울 강남구 도곡동에 위치한 언주초등학교 정문 들머리에 새겨진 말죽거리(馬粥巨里)의 유래다. 말죽거리는 서울 지하철 3호선 양재역 부근으로 한양에서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로 오가는 길목이었다. 지금도 양재역 주변은 경부고속도로가 지나고 강남대로와 남부순환로가 교차하는 교통요지다.

제3한강교와 경부고속도로가 건설되자 말죽거리 일대의 땅값이 뛰기 시작했다. 그 무렵 '말죽거리에 가서 땅을 사면 떼돈을 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일었다. 말죽거리에 투기 바람이 불기 시작하자 강북에 사는 복부인들은 새벽밥을 먹고, 버스 종점인 동작동 국립묘지 앞에서 말죽거리까지 걸어 다니며 투기 대열에 합류했다.

말죽거리의 땅값은 1966년 초 평당 200~400원 선이었으나 1968년 말에 이르면 4천 원에서 6천 원으로 뛰어올랐다. 땅값이 뛰자 정부는 부동산투기억제에 관한 특별조치세법(법률 제1972호)을 제정하였다. 정부의 부동산투기억제정책 덕분에 투기붐은 잠시 진정되는 듯 했다. 그러나 1970년이 되자 땅값이 다시 요동쳤다. 말죽거리에 불어 닥친 투기붐은 윤진우가 청와대 비자금으로 사들인 땅을 처분하고 난 1971년 하반기가 돼서야 잦아들었다.
 
▲ 양재역 4번출구 인근에 세워진 말죽거리 표석. 2000년대 초 강남구와 서초구는 말죽거리의 역사와 위치를 선점하기 위해 다툼을 벌이기도 하였다. ⓒ 전상봉

투기 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영동지구의 땅값은 큰 폭으로 상승했다. 1963년 땅값 지수를 100으로 했을 때 1970년 현재 강남구 학동은 2000, 압구정동은 2500, 신사동 5000이었다. 7년 동안 학동은 20배, 압구정동은 25배, 신사동은 50배의 땅값이 오른 것이다. 같은 기간 중구 신당동이 10배, 용산구 후암동이 7.5배 오른 것에 비해 엄청난 상승이었다.

1968년에서 1970년 사이에 벌어진 '말죽거리 신화'는 '강남 부동산 불패'의 서막이었다. 이때를 시작으로 1970년대 베트남 전쟁과 중동발 건설 특수에 따른 달러 유입으로 강남의 땅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사회적으로는 한국경제의 고도성장과 함께 투자 여력이 있는 부동산 중산층이라는 새로운 계급을 형성했고, 이들은 개발 독재를 지지하는 세력으로 뿌리를 내렸다.

뿐만 아니라 말죽거리 신화는 마약처럼 대중들의 의식을 마비시켰다. 부동산 투기는 불로소득과 일확천금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된다는 비뚤어진 사회 풍조를 조장했다. 그런 의미에서 말죽거리 신화는 천민자본주의가 뿌리내리기 시작할 무렵 대한민국의 일그러진 민낯이었다.

덧붙이는 글 | 전상봉 시민기자는 서울시민연대 대표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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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가 ‘초대기업·초고소득자 증세’ 정책 꺼낸 이유

 

“일단 조세정의 실현” 증세 공론화에 박차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20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국가재정전략회의에 앞서 이낙연 국무총리, 김동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대표 등 참석자들과 함께 차를 마시며 환담을 나누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20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국가재정전략회의에 앞서 이낙연 국무총리, 김동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대표 등 참석자들과 함께 차를 마시며 환담을 나누고 있다.ⓒ제공 : 뉴시스

문재인 정부가 상위 1%도 채 안 되는 초대기업과 초고소득자에 대한 '증세' 카드를 꺼내든 이유는 '조세정의부터 실현하자'는 데 목적이 있다. 그간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부자감세 정책 등으로 왜곡된 세제를 정상화해 조세의 소득재분배 기능을 강화하겠다는 구상이다.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는 조세저항을 줄이고, 안정적인 국정운영을 위한 보편적인 증세를 시도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 증세 불가피론 대두

국정기획자문위원회가 발표한대로 문재인 정부가 임기 5년간 100대 국정과제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무려 178조원이 필요한데, 이를 위해서는 증세가 불가피하다는 게 중론이다.

그러나 증세 카드를 무턱대고 꺼내 들다가는 만만치 않은 '조세저항'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우려가 정치권 내에 팽배하다. 과거 박정희 대통령 집권 말기에 도입한 부가가치세(VAT)는 당시 정치상황과 맞물리면서 조세저항에 직면했고, 노무현 대통령 때에도 종합부동산세 도입으로 조세조항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증세 없는 복지' 정책 기조를 임기 내내 유지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이에 문재인 정부는 일단 초대기업과 초고소득자에 한정해 증세를 해내겠다는 방침이다. 본격적인 조세개혁의 칼을 빼 들기에 앞서 조세정의를 우선 실현하겠다는 차원으로 풀이된다.

증세 논의에 불을 당긴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대표는 21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이것은 증세가 아니라, 조세정의 실현하는 정상화"라고 주장했다.

문재인 대통령도 "증세를 하더라도, 대상은 초고소득층과 초대기업에 한정될 것"이라며 "일반 중산층과 서민들, 중소기업들에게는 증세가 전혀 없다. 이는 5년 내내 계속될 기조"라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윤영찬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은 "조세의 수직적 형평성 제고라는 기본 원칙은 임기 내내 유지될 것"이라고 부연했다.

이러한 기조는 국정기획자문위가 100대 국정과제를 발표하기에 앞서 제시한 '새 정부의 조세개혁 방향'과 다르지 않다. 국정기획위는 "조세개혁을 위해 대기업과 대주주, 고소득자, 자산소득자에 대한 과세는 강화하는 한편, 자영업자와 소상공인 등 중산·서민층에 대한 세제지원은 지속적으로 확대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는 '재정의 건정성은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 상위권인 반면, 지난 10년간 소득양극화가 심화되면서 조세·재정 정책의 소득재분배 개선 효과는 최하위권에 속한다'는 지적에 따른 조치이다. OECD는 지난 3월 구조개혁평가보고서를 통해 하위 20%인 1분위의 가처분소득 비중이 회원국 평균을 밑돈다고 지적하면서 노동시장의 이중구조, 조세·사회이전시스템의 약한 재분배 효과 등을 원인으로 지적했다.

이에 따라 정부·여당은 현재 초대기업에 3%, 초고소득자에 2%씩 세 부담을 늘이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추미애 대표는 지난 20일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소득 2천억원 초과 대기업에 대한 과표를 신설해 법인세율을 현행 22%에서 25%로 적용 ▲5억원 초과 고소득자의 소득세율을 현행 40%에서 42%로 확대할 것을 제안했다.

23일 민주당에 따르면 현재 과세 대상으로 논의되고 있는 과세표준 2천억 원 이상 초대기업은 116개사로, 전체 신고대상 기업의 0.019% 수준이다. 또 과세표준 5억원 이상인 초고소득자는 4만 명으로 전체 국민의 0.08%에 불과하다. 이들에 대한 과세를 통해 연간 3조8천억원 이상의 세수 증대효과가 나타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조세정의 실현" 증세 공론화에 박차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5년 동안 필요한 178조원을 조달하는 데 턱 없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잇따른다. 정부는 세수확충(77.6조원), 초과세수 증대(60.5조원), 비과세 정비 등(17.1조원), 세외수입 확대(5조원), 지출구조조정(60.2조원) 등을 통해 재원을 조달하겠다는 계획이지만, 안정적이지 못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결국 보편적인 증세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문재인 정부가 '조세정의 실현'을 목적으로 내세운 이번 방침이 결국은 본격적인 증세 논의를 위한 포석이 아니냐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부자감세 등 불공평한 조세정책을 바로 잡는 것으로 조세정의가 실현된다면 반대로 조세저항은 보통 낮아지기 때문이다. 조세정의를 확립하는 과정에서 증세에 대한 국민적인 공감대를 높인다면, 이후 보편적 증세에도 탄력을 받을 수 있다.

문 대통령도 증세의 필요성을 부인하지 않았다. 문 대통령은 지난 대선 당시 고소득자·고액상속·고액증여자들에 대한 과세 강화, 자본소득 과세강화, 법인세 실효세율 인상, 법인세 명목세율 인상 등 단계적인 증세 방향을 제시한 바 있다.

최근 여론조사를 보면 문재인 정부의 조세정의 실현 방향에 대한 국민들의 반응은 일단 긍정적이라고 볼 수 있다. 자신들의 증세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반응이 다수이지만, 부자증세에 대해서는 찬성하는 경향이다.

지난 5월 23일 국회의장실이 한국갤럽에 의뢰한 설문조사(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 ±3.1%p) 결과에 따르면, 새 정부의 공약 실천을 위한 증세에 대해 찬성은 45.2%, 반대는 51.3%로 반대 의견이 다소 우세했다. 반면 새 정부 공약 실천을 위한 고소득자 소득세 인상과 대기업 법인세 인상에 대해서는 각각 85.5%, 82.3%가 압도적으로 찬성했다.

국회의장실은 "국민 상당수는 부자증세를 통해 재원 마련과 소득재분배 개선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을 것을 기대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에 따라 문재인 정부가 이번에 초대기업과 초고소득자에 한정해 증세 정책을 밀어붙인다면 일단 여론은 호의적일 것으로 여권은 기대하고 있다. 게다가 정권 초기 국정운영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높은 만큼, 증세 공론화 작업에 상대적으로 부담이 적을 수 있다.

당·정·청이 한 목소리를 낸 것도 이러한 배경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가 직접 먼저 나서 '증세' 카드를 꺼내기보다는 여당 대표와 정부가 먼저 증세 논의에 불을 붙이면서 청와대도 자연스럽게 따라가는 모양새다.

윤영찬 국민소통수석은 "2019년 이후 새 정부의 조세·재정 개혁의 구체적인 내용과 로드맵은 기획재정부 주관 하에 구성될 '조세·재정개혁 특별위원회'에서 논의해 대통령과 국회에 보고할 것"이라고 밝혔다.

24일 오전 국회에서는 민주당 우원식 원내대표, 김동연 경제부총리 등이 참석한 가운데 '새 정부 경제정책방향'을 주제로 한 당정협의가 열린다. 이 자리에서 증세에 대한 논의가 이뤄질 것으로 예상된다. 또 문 대통령은 오는 27~28일 일자리 창출 및 상생 협력을 주제로 기업인과의 대화를 갖는데, 이 자리에서 증세와 관련된 설명과 설득이 이뤄질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정부·여당이 증세 방침을 못 박으면서 향후 정치권에서 증세 논쟁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내각 인사와 추가경정예산, 정부조직 개편이라는 산을 넘은 문재인 정부가 다음으로 넘어야 할 산이라고 볼 수 있다.

자유한국당은 문재인 정부의 이번 '부자증세' 방침에 반대하고 있다. 자유한국당 강효상 대변인은 21일 논평을 통해 "이번 대기업 및 부자증세가 한국 경제를 견인해 온 우량 대기업과 고소득층에 대한 문재인 정부의 적대감의 발로가 아니기를 바란다"며 "무리하고 졸속인 문재인 정부 대선 공약의 부담을 대기업과 고소득층에게만 전가시킨다면 후안무치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국민의당은 증세를 위해선 일단 국민의 동의가 우선이라는 입장이다. 국민의당 손금주 수석대변인은 22일 논평에서 "증세없는 공약이행은 당연히 허구일 수밖에 없다"면서도 "증세를 위해서는 국민적 공감대와 동의가 우선돼야 한다. 증세야말로 공론화위원회의 구성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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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정사상 최초, 추경안 표결 사기 친 ‘자유한국당’

무조건 민주당이 잘못했다는 언론의 이상한 논리
 
임병도 | 2017-07-24 09:17:33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국회에서 통과된 추경안 표결 현황 ⓒ국회의안정보시스템

 

문재인 정부의 첫 추가경정예산안(추경)이 22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습니다. 추경안이 국회에 제출된 지 무려 45일 만입니다.

22일 오전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를 통과한 추경안은 의원 179명이 본회의에 참석해, ‘찬성 140표, 반대 31표, 기권 8표’를 얻어 통과됐습니다.

추경안이 통과됐지만, 그 여파는 주말 내내 이어졌습니다. 추경안 표결을 앞둔 22일 오전 국회 본회의장에 남아 있던 국회의원이 146명에 불과해, 한때 의결 정족수를 채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재적의원 과반 출석에 (299명 중 150명 이상), 출석 의원 과반 찬성)

의결정족수를 채우지 못하자 표결은 2시간 30분 동안 지연됐고, 결국 11시 54분에야 국회를 통과했습니다.


‘무조건 민주당이 잘못했다는 언론의 이상한 논리’

 

▲민주당 일부 의원의 표결 불참을 비판하는 조선일보 기사 ⓒ조선일보 PDF 캡처

 

추경안 표결에서 의결정족수가 부족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언론은 참석하지 않은 민주당 의원 26명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정작 ‘제 식구’ 26명은 추경표결 빠져… 與 “망신이다” (조선일보)
야당에 표 달라던 여당, 추경 표결 때 26명 해외·지방 갔다 (중앙일보)
친문 핵심 등 26명 표결 불참… 말발 안 먹히는 與지도부 (동아일보)
[사설]120명 중 26명 추경 표결 불참… 민주, 여당 자격 있나 (동아일보)

추경안 표결에 불참한 의원을 보면 민주당 26명, 자유한국당 76명, 국민의당 10명, 바른정당 7명이었습니다. 압도적으로 자유한국당이 많지만, 모든 비난은 민주당을 향하고 있습니다.

표결에 불참한 의원을 퍼센트로 계산해보면, 민주당 21%, 자유한국당 71%, 국민의당 10%, 바른정당 35%입니다. 자유한국당이 제일 높습니다.

민주당이 여당이고, 추경안을 통과시키려는 입장임을 감안한다면 21% 불참률은 높습니다. 그래서 비판을 받아도 마땅합니다. 그러나 비판의 강도가 자유한국당과 비교하면 거의 1:9 수준으로 모든 비난이 몰려있습니다.

특정 정파나 시민도 아닌, 언론이 무조건 민주당이 잘못했다는 이상한 잣대로 추경안 표결을 보도하는 태도는 도가 지나쳐도 너무 지나쳐 보입니다.


‘표결 합의해 놓고 집단 퇴장한 자유한국당’

 

▲ 민주당 추미애 대표와 이재정 의원은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추경안 표결 직전 퇴장했다’라는 글을 트위터에 올렸다. ⓒ트위터 캡처

 

추경안 표결 정족수가 부족했던 이유를 보면 민주당 의원의 불참도 있지만, 표결 직전 퇴장한 자유한국당에 놀아난(?) 민주당의 안일한 자세도 한몫했습니다.

우원식 원내대표는 “제1야당이 국회의장의 중재를 받아들여 본회의 참여 의사를 밝힌 상황이라 정족수 문제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라고 밝혔습니다.

원래 자유한국당은 ’24일 월요일 본회의’를 주장했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22일 새벽으로 바꿨고, 또다시 오전에 통과시키겠다고 합의했습니다. 본회의를 계속 연기한 자유한국당은 반대 토론만 진행하고 표결 직전에 퇴장해버렸습니다.

자유한국당 정우택 원내대표는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우원식 민주당 원내대표와는 ‘22일 오전 9시 30분 본회의 개의’라는 의사일정에만 합의했을 뿐 표결까지 한다고 약속한 적이 없다”고 밝혔습니다.

자유한국당을 무조건 믿은 민주당도 문제이지만, 정치적 꼼수를 부린 자유한국당의 태도 또한 비판받을 일이었습니다.


‘의결정족수를 위해 대리 참석까지 했던 자유한국당(한나라당)’

 

2008년 한나라당 홍준표 대표가 국회 본회의장에서 추경안 통과 등을 놓고 논의하는 모습 ⓒ오마이뉴스

 

2008년 9월 11일 여당이었던 한나라당은 민주당의 반대에도 추가경정예산안을 통과시키려고 국회 본회의장에서 정족수가 채워지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추경안은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한나라당이 추경안을 예결특위에서 통과시키면서 국회법을 위반했던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관련기사:한나라당, 추경안 ‘졸속처리’ 끝내 무산)

추경안은 본회의에 앞서 예결특위 전체 의원 50명 중 최소한 26명이 돼야 의결 정족수를 채워 통과시킬 수 있습니다. 당시 한나라당 소속 의원 29명 중 7명이 불참해 의결정족수 1명이 부족했습니다.

한나라당은 의원 1명의 상임위를 바꿔(사·보임) 겨우 정족수를 채워 통과시켰습니다. 그러나 예결특위 가결 처리 뒤에야 사·보임 처리가 이뤄졌기 때문에 추경안 통과 자체가 무효가 됐습니다.

추경안이 통과되지 못하자, 한나라당은 다시 예결위 전체회의를 소집하려고 했지만, 위원장이 이미 산회를 선포했기 때문에 국회법 (같은 날에는 회의를 재소집할 수 없음)에 따라 무산됐습니다.

정세균 국회의장은 “우리 국회는 너무 부끄러운 모습을 국민들께 보여드렸습니다. 여도 야도 저는 패자라고 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맞는 말 같지만, 동의하기는 어렵습니다.

정치인 모두가 잘못했다는 말은 ‘정치인 모두를 믿지 못한다.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정치 혐오를 불러일으킵니다. 교통사고에도 과실을 정확히 따지듯, 누가 얼마나 잘못했는지 확실히 따져 볼 필요가 있습니다.

민주당 의원들의 불참을 무조건 옹호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왜 불참할 수밖에 없는지 과정 또한 인지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상황을 제대로 살펴보고 난 이후에 비판하는 것과 무조건 비난하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개인이 민주당 불참 의원을 비판하는 것은 자유로운 의견이자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언론이 세세한 과정은 숨긴 채 특정 정당의 논리를 무조건 대변하는 듯한 보도는, 항상 경계해야 할 권력밀착형 보도라고 봐야 합니다.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3&table=impeter&uid=1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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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구선수→노동운동→3선’ 김영주 의원, 노동부장관 내정

 

김영주 고용노동부장관 내정자

김영주 고용노동부장관 내정자

 

문재인 대통령은 23일 고용노동부 장관에 더불어민주당 3선 김영주 의원(62)을 내정했다.

청와대 박수현 대변인은 이날 브리핑에서 “김 내정자는 노동 문제와 노동 정책에 대한 이해도가 높고, 폭넓은 친화력을 바탕으로 이해관계 조정 능력이 탁월하며 검증된 정무 역량으로 우리 사회가 당면한 각종 현안을 해결할 수 있는 적임자”라고 밝혔다. 이어 “노·사·민·정 대타협을 통해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하고, 노동시간과 비정규직 축소 등 노동 현안 과제를 차질 없이 추진해 나갈 적임자”라고 했다. 

김 내정자는 서울 무학여중 2학년 당시 농구를 시작해 1973년 실업 명문 서울신탁은행(서울은행)에 입단했다. 하지만 체력적 한계로 3년 만에 은퇴하고 은행원으로 변신한 뒤 서울신탁은행 노조 간부를 거쳐 한국노총 금융노조 여성 첫 상임 부위원장을 지냈다.

1999년 김대중 전 대통령 발탁으로 새천년민주당 노동특위 부위원장을 맡아 정계에 진출했다. 17대 총선에서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했고, 통합민주당 당시엔 초선으로 사무총장까지 맡았다. 18대 낙선 후 19∼20대 총선 서울 영등포갑에서 당선돼 3선 고지에 올랐다.


김 내정자는 입장문에서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에서 노동부 장관이라는 중책에 내정돼 매우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며 “노동부는 ‘일자리 대통령’을 천명한 문재인 대통령이 국민께 약속한 ‘나라다운 나라’를 만드는 핵심 부처”라고 말했다. 이어 “특히 경제적 불평등으로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노동부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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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07231030001&code=910203#csidx7a0d017b386209e8ded1dfb7be37fd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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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심단결을 더욱 강화해가는 김정은식 소통정치

일심단결을 더욱 강화해가는 김정은식 소통정치
 
 
 
이창기 기자 
기사입력: 2017/07/23 [11:05]  최종편집: ⓒ 자주시보
 
 
▲ 2017년 3월 18일 신형 로켓엔진연소 시험에 성공하자 개발자를 엎어주며 기뻐하는 김정은 국무위원장   북 주민들과 격이 없이 이렇게 소통하는 모습을 통해 북의 지도자와 주민들의 일심단결은 한 층 더 강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자주시보
▲ 2017년 7월 22일 노동신문에서 보도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북 주민들에게 보낸 감사 관련 보도     © 자주시보


최근 북의 보도를 보면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세포지구축산기지 건설장이나 여명거리건설장 등에 성의껏 마련한 지원물자를 전달하는 등의 모범을 보인 북 주민들에게 직접 감사를 보냈다는 소식자 자주 나온다. 

 

인터넷에 소개된 22일 북의 중앙텔레비젼보도와 노동신문에서도 평양 만수대언덕의 김일성, 김정일 동상과 혁명열사릉 등 혁명사적을 가꾸고 보존하는데 헌신적인 노력을 해온 주민들에 대한 감사를 보냈다는 기사를 전했다.

 

이를 테면 이런 식이다. 

 

"날이 갈수록 더더욱 강렬해지는 절세위인들에 대한 끝없는 그리움을 안고 평양기초식품공장 로동자 김은화는 오랜 기간 만수대혁명사적관리사업에 적극 헌신하고 있다. 

...

백두산천출위인들을 영원토록 높이 받들어 갈 마음안고 메아리음향사 기술봉사원 김광일은 대성산혁명렬사릉에 높이 모신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동지의 동상을 더 정중하게 모시는데 필요한 설비들과 물자들을 지원하였다....."

 

이렇듯 내용을 보면 노력영웅상 등 이전의 훈장과는 비교할 수 없이 작은 소행들이다. 이런 소소한 소행마저 나라의 최고 지도자인 김정은 위원장이 알아주고 감사를 표한다면 북 주민들과 지도자의 일심단결은 전과 비교할 수 없이 강해질 수 있을 것이다.

 

북에서는 김정일 정권 시절에도 "장군님이 알아주는 전사가 되자'는 운동을 편 바 있다. 자신들의 소행이 작은 단위의 신문에만 소개되도 큰 경사로 여기고 여기저기서 축하를 받는다는 사실을 북의 영화 한 대목을 통해 알 수 있었는데 이렇게 권위있는 노동신문이나 중앙방송 보도를 통해 최고지도자가 감사를 표했다는 내용과 함께 주민들의 이름이 보도된다면 그 격정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특히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온갖 대내외적인 국사로 바쁜 시간을 보내면서 이렇게 북 주민들의 소소한 소행마저 다 알아주고 감사를 표시한다는 측면에서 북 주민들은 더욱 뜨거운 격정에 휩싸일 것으로 판단된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북 주민들과의 소통정치 의지가 매우 높은 것 같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3.18혁명이라 자칭한 북의 신형고출력로켓엔진 시험에 성공했을 때는 개발자을 업어주기까지 했다. 젊은 지도자이기에 가능한 소통방식일 것이다.

 

이런 김정은식의 소통정치가 북 주민들에게 통한다면 미국과 그 연합세력들의 북에 대한 체제붕괴 시도가 더더욱 어려워질 전망이다. 

2016년에도 미국의 가혹한 경제제재가 가해졌지만 경제성장율이 거의 4% 가까이 나왔다며 최근 한국은행에서도 의외의 결과라고 평했다. 이런 소통정치가 그런 발전의 동력이 된 것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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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와 최순실이 설계한 그 어떤 프레임도 먹히지 않았다

 

[프레임전쟁] ⑮ 2016년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언론과 시민이 만들어낸 명예혁명

정철운 기자 pierce@mediatoday.co.kr  2017년 07월 22일 토요일

“법무부 호송차에서 내린 박 전 대통령은 여성 교도관의 부축을 받아 걸어가는 동안 발을 절뚝이는 모습을 보였다. … 재판부가 ‘몸 상태가 괜찮냐’고 묻자, 박 전 대통령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7월14일자 뉴시스) 

7월14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2부 심리로 열린 자신과 최순실의 특정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뇌물) 혐의 36차 공판. 18대 대통령이었던 박근혜의 오늘은 초라했다. 박근혜는 무너졌다. 1년 전, 아무도 이런 오늘을 상상할 수 없었다.

2017년 현직 대통령을 탄핵시킨 한국사회 명예혁명은 1987년 민주화 이후에도 지속됐던, 박근혜와 이재용으로 상징되던 권위주의정권과 재벌, 그 구체제에 대한 심판이었다. 박근혜와 함께 수구 보수 세력도 함께 무너졌다. 검찰과 언론을 손에 쥐고 있던 살아있는 권력 박근혜는 어떻게 무너진 걸까. 집권초기부터 불통과 소송으로 언론을 상대했던 박근혜는 결국 조선일보마저 ‘부패기득권세력’으로 명명하며 스스로 고립을 자초했다.  

“박근혜와 사사로운 관계로 형성된 비선이 청와대를 수시로 드나들며 국정을 농단했다”는 영화 같은 프레임은 너무나 강력했다. 이 프레임은 TV조선이 시작하고 한겨레가 숨을 불어넣고 JTBC가 완성했다. 박근혜와 최순실은 눈앞에 보이던 정해진 최후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지만 이 프레임을 부술 수도, 덮을 수도 없었다.

 

▲ 7월17일 재판에 출석하는 전직 대통령 박근혜. ⓒ연합뉴스
▲ 7월17일 재판에 출석하는 전직 대통령 박근혜. ⓒ연합뉴스
 
이 사건이 국정농단 프레임으로 확산될 수 있었던 상징적 사건을 꼽으라 한다면 2016년 10월7일을 꼽고 싶다. ‘#그런데최순실은?’ 해시태그 운동이 시작된 날이다. 이날 김형민 SBS CNBC PD는 “정부여당의 모든 관심은 최순실 가리기가 아닐까”라며 해시태그운동을 제안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든 포스팅에 ‘#그런데최순실은?’ 해시태그를 달았다. 이는 국정농단의 실체를 드러내겠다는 주술과도 같았다. 기자들은 이 주문에 응답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박근혜와 함께 심판 당할 운명이었다.

 

 

‘국정농단 프레임’ 덮고 싶었던 박근혜
이정현 단식→김제동→송민순 회고록→개헌 

 

 

국정농단 프레임의 시작은 한겨레였다. 한겨레는 9월20일 1면 톱기사 ‘대기업돈 288억 걷은 K스포츠재단, 이사장은 최순실 단골 마사지 센터장’에서 민간인 최순실을 공공재단 설립과 운영의 숨은 실세로 지목했다.  

박근혜는 언론에 등장한 최순실을 덮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KBS는 북핵 도발가능성 기사를 연일 주요하게 배치했다. 새누리당 이정현 대표는 단식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오직 최순실 보도만 안 나가면 그만이었다. 이정현 대표가 단식을 벌이는 사이 전경련은 미르·K스포츠재단을 해체하고 관련 자료를 파쇄 했다. 당시 국감 국면에서 새누리당은 전방위적으로 최순실과 연결될 수 있는 모든 국감 증인 채택을 거부했다. 최경희 이대 총장까지 증인에 세울 수 없었다.  

10월10일, 서울중앙지법에서 백남기 농민 부검영장을 발부했다. 공권력에 의한 외인사였던 백씨의 사망진단서엔 ‘병사’라고 적혀있었다. 언론은 백남기 사인을 둘러싼 논란으로 시끄러워졌다. 비슷한 시기 김제동씨가 뜻밖의 논란으로 떠올랐다. 새누리당 의원이 국방위 국정감사에서 김 씨 출석을 요구하는 촌극이 벌어졌다. “군 장성 아내를 아주머니라 불렀다가 영창에 갔다”는 발언이 군의 신뢰를 실추시켰다는 것. 종편은 시간 날 때마다 김제동 영창 논란을 띄웠다.  

10월4일부터 10일까지 7일간 미르·K스포츠재단의혹을 쟁점으로 다룬 보도는 35건. 이중 JTBC보도가 25건이었다. 다른 방송사는 사실상 입을 닫고 있었다. 모든 게 순조로워 보였다. 2014년 ‘정윤회 문건 파동’처럼 덮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정부여당은 “최순실이 누군데 왜 그리 목을 매느냐”(김도읍 새누리당 원내수석부대표)며 오히려 기자들에게 따져 묻기도 했다.  

그러나 안이한 인식이었다. 당장 조선일보가 청와대와 날을 세웠다. 조선일보는 “최순실 단골 마사지센터 운영자가 K스포츠재단 이사장이 됐고 재단 사무실과 마사지센터, 최씨 집, 박근혜 대통령 사저는 다 한곳에 모여 있다”며 정부여당이 관련 증인채택을 막는 것을 두고 “국민 무시”라고 비판했다. 조선일보로선 이미 프레임을 돌릴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10월15일, 정부여당은 그 흔한 종북 프레임을 꺼냈다.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의 책 ‘빙하는 움직인다’에서 2007년 유엔 북한인권 결의안 표결 때 정부가 기권 결정 전 북한 의견을 물었고, 이 때 문재인 대통령이 관여했다는 내용이 회고록에 등장했다. 친박 서청원 새누리당 의원은 “북한 종속 국가도 아닌데 북한에 알아봐서 결정하자? 국기를 흔들 문제”라며 날을 세웠다. ‘문재인 종북’ 프레임이었다. 새누리당은 “내통”이라는 극단적 표현까지 쓰며 여론몰이에 나섰다.  

방송은 이 논란에 집중했다. MBC는 2012년 NLL대화록 파문을 언급하며 야당의 안보관은 틀렸다는 새누리당 논리를 적극 선전했다. KBS도 다르지 않았다. TV조선은 문재인 때리기에 집중했다. 이 프레임은 사실 한겨레-조선일보-중앙일보-경향신문-동아일보가 최순실을 매개로 느슨히 걸려있던 ‘논조의 연대’란 고리를 잘라내기 위함이기도 했다. 그러나 통하지 않았다. 당시 동아일보는 “미르·K스포츠재단 의혹으로 수세에 몰린 여권이 국면 전환 카드라도 잡은 듯 문 전 대표와 민주당을 몰아붙이고 있는데 박수 치는 국민이 얼마나 될까”라고 쏘아붙였다.  

사태는 걷잡을 수 없었다. 이대 학사비리의 경우가 그랬다. 김순덕 동아일보 논설실장은 10월17일자 칼럼에서 “130년 전통의 사학이 5년 임기 대통령 측근, 심지어 공식 직함도 없는 학부모에게 휘둘려 학칙까지 바꾼 것보다 비선 실세의 위력을 확인할 수 있는 길은 없다”고 지적했다. 이대 영문과 출신인 김 실장의 이 칼럼은 큰 화제를 모았다.  

 

▲ 2016년 10월25일 박근혜 대통령의 개헌 발언을 다루고 있는 KBS 보도화면.
▲ 2016년 10월25일 박근혜 대통령의 개헌 발언을 다루고 있는 KBS 보도화면.
 
그리고 운명의 10월24일. 박근혜는 국회 예산안 시정연설에서 “저는 오늘부터 개헌을 주장하는 국민과 국회 요구를 국정 과제로 받아들이고 개헌을 위한 실무적인 준비를 해나가겠다”고 말했다. 최순실 국정농단 프레임을 덮기 위해 개헌 프레임을 들고 온 것이었다. 이는 좋은 판단이었다. 이날 KBS 메인뉴스는 1~7번째 꼭지에, MBC 메인뉴스는 1~8번째 꼭지에 개헌 관련 리포트를 배치했다. 주요 일간지도 1면부터 주요 면을 개헌에 할애했다. 모두가 개헌 블랙홀로 빨려들어가는 듯했다.

 

이날 밤, JTBC ‘뉴스룸’의 특종이 등장한다. 손석희 앵커가 말했다. “JTBC 취재팀은 최순실씨의 컴퓨터 파일을 입수해 분석했습니다. 최씨가 대통령 연설문을 받아봤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최 씨가 연설문 44개를 파일 형태로 받은 시점은 모두 대통령이 연설을 하기 이전이었습니다.” 영화보다 영화 같았던 ‘아젠다 키핑’의 한 장면이었다. 이 보도로 JTBC는 ‘최순실 국정농단’이란 프레임을 개헌 프레임으로부터 지켜냈다. 

 

정부-여당-극우단체의 ‘손석희 죽이기’ 
집회→형사고발→인신공격→농성→가짜뉴스

 

 

JTBC는 민간인 최순실이 드레스덴 선언을 비롯한 각종 대통령 연설문을 미리 전달받았으며, 최씨의 지시에 따라 연설문이 고쳐졌다고 단독 보도했다. 그러자 TV조선은 마치 JTBC보도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10월25일 민간인 최순실이 강남 모처에서 대통령 박근혜의 옷을 ‘손수’ 고르는 영상을 단독 보도했다. 그리고 25일 오전 한겨레는 이성한 전 미르재단 사무총장과의 충격적 인터뷰를 내보냈다. “최순실이 거의 매일 청와대로부터 30cm 두께의 대통령 보고 자료를 건네받아 검토했다.” 10월26일, 여야가 최순실 국정농단 특검에 합의하며 박근혜는 무너졌다.

하지만 박근혜와 최순실은 순순히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10월26일 이후 100일 동안 국가(청와대와 국정원)-자본(전경련과 대기업)-극우집단(극우시민단체와 새누리당)은 조직적으로 JTBC 흔들기에 집중했다. 집회→형사고발→인신공격→농성으로 이어진 일련의 흐름은 비판언론을 탄압하는 박근혜의 마지막 악수(惡手)였다. 이는 메시지를 공격할 수 없을 경우 메신저를 공격하는, 고전적인 수법이기도 했다.

 

▲ 손석희 JTBC보도담당 사장. ⓒJTBC
▲ 손석희 JTBC보도담당 사장. ⓒJTBC
 
‘친박 돌격대’ 김진태 새누리당 의원은 10월 27일 국회 법사위에서 “최순실 태블릿PC는 다른 사람 것”이라고 주장했다. 국정농단의 핵심을 부정하는 프레임이었다. 이 프레임은 훗날 최순실의 ‘작품’으로 밝혀진다. 최순실은 같은 날 K스포츠재단 부장이었던 노승일과 통화에서 “걔네들(JTBC)이 이게 완전 조작품이고 얘네들이 이거를 저기 훔쳐가지고 이렇게 했다는 것을 몰아야 되고…”라며 사건 은폐 지시를 내렸다.

 

최순실이 만든 프레임은 새누리당 의원을 통해 언론에 전파되며, 어버이연합·박사모·엄마부대 등 박근혜 지지단체에 ‘임무’를 부여했다. 이들 친박·극우성향 단체는 당장 10월 31일부터 11월 9일까지 상암동 JTBC 사옥 앞에 집회를 신고하고 태블릿PC 보도가 조작됐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11월4일, 검찰이 태블릿PC가 최 씨의 것이라고 파악했다는 보도가 나왔지만 소용 없었다.  

이들 단체는 JTBC를 자극하기 위해 손석희 JTBC보도담당 사장과 JTBC 기자가 죄수복을 입은 합성이미지를 제작해 유포하는가 하면, JTBC 기자가 ‘올해의 여기자상’을 수상한 프레스센터 행사장까지 쫓아가 압력을 행사했다. 11월10일에는 어버이연합 등이 JTBC의 태블릿PC 입수 경위를 수사해달라며 손석희 사장을 서울중앙지검에 형사고발했다. 12월9일 국회 탄핵소추안이 가결되자 친박·극우성향 단체는 “JTBC 태블릿PC 조작이 없었다면 탄핵은 불가능했다”는 프레임을 들고 나왔고 새누리당은 당내 태블릿PC진상규명위원회를 꾸린다고 호들갑을 떨며 동조했다.

2017년 1월10일 박사모·엄마부대·자유총연맹·어버이연합 등 친박·극우성향 단체들은 ‘태블릿PC조작 진상규명위원회’라는 결사체를 만들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그해 1월17일부터 방송통신심의위가 위치한 방송회관 1층 로비를 점거하고 JTBC 심의제재를 주장하며 농성을 시작했다. ‘JTBC 태블릿PC 조작’프레임을 매게로 한 가짜뉴스는 ‘여당과 시민단체의 의혹 제기’로 그럴듯하게 포장돼 일부 극우성향 인터넷매체와 MBC 같은 소수 주류매체의 호응 속에 확대 재생산됐다. 태블릿PC조작 진상규명위는 “제대로 취재하는 곳은 MBC밖에 없다”고 밝히기도 했다.  

물론 최순실의 태블릿PC는 시빗거리가 될 수 없었다. 검찰은 JTBC가 제출한 태블릿PC의 인터넷망을 추적해 태블릿PC 이동경로와 최 씨의 동선이 겹친다는 사실을 밝혀내며 태블릿PC가 최순실의 것이라고 결론 냈다. 무엇보다 태블릿PC에 대한 증거능력 의혹 제기가 무의미해질 정도로 국정농단 증거는 차고 넘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각종 음모론과 조작설들은 전염병처럼 번졌다. 헌법재판소 결정을 지연시키고 어떻게든 현 국면을 반전시키고 싶은 의도의 결과물이었다.  

이 무렵 변희재는 “손석희·홍정도를 국가내란죄로 고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순실 측 변호인단은 변희재를 ‘태블릿PC 전문가’로 재판에 증인 신청하면서 변희재는 JTBC 공격의 중심인물이 됐다. TV조선 등 종합편성채널에서도 섭외할 의향이 없는 변희재를 박근혜·최순실이 ‘키맨’으로 선택했다는 사실은 그만큼 그들이 벼랑 끝에 몰려 있다는 반증이었다. 2017년 2월12일 변희재 등 200여 명은 평창동 손석희 집 앞에 몰려가 기자회견을 열고 “손석희를 죽이러 왔다”는 등의 막말을 쏟아냈다.

국정농단 세력 최후의 프레임 
“이번 사태는 조선일보를 비롯한 전 언론사의 보복” 

 

“지금은 자유주의와 공산주의의 전쟁입니다. 광화문 촛불의 목표는 박근혜 대통령 탄핵이 아닙니다. 국가전복입니다!”  

서울 시청 앞 광장 태극기집회에서 등장한 구호의 공통점은 언론에 대한 불신이었다. 최순실-박근혜 국정농단 국면에서 조중동을 포함한 대다수 보수언론이 박근혜 대통령을 비판하자 친박·극우세력의 ‘설계자’들은 대응논리가 필요했다. 이들은 언론을 사태의 원인으로 규정했다. 대통령 박근혜가 단독인터뷰 대상으로 제도언론이 아닌 ‘정규재TV’를 선택한 것도 이러한 대응논리에 힘을 실어줬다. 

 

▲ 탄핵반대를 요구하던 서울역 보수단체 집회모습. ⓒ연합뉴스
▲ 탄핵반대를 요구하던 서울역 보수단체 집회모습. ⓒ연합뉴스
 
‘월간조선’ 편집장 출신으로 태극기집회에 적극 참여한 조갑제씨는 박근혜 탄핵국면을 아예 “언론의 난”으로 규정했다. 이는 친박·극우세력에서 이번 사태의 시작점을 2016년 10월 24일자 JTBC 태블릿PC 보도로 규정짓는 것과 맥락이 맞닿아 있었다. 조갑제씨는 “조선일보를 비롯한 전 언론사에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보복적 차원의 반감이 팽배했다”며 최근 태극기집회 규모의 증가는 “언론의 선동적 보도에 의한 분노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탄핵국면을 국가전복사태로 규정하며 박정희세대에게 ‘총력전’을 요구했다.

 

조갑제씨는 “박근혜 대통령의 약점은 최순실이라는 비선과의 부적절한 관계였는데 언론보도만큼 심각한 사안이 아니며 탄핵 사안도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이 같은 인식은 태극기집회에 참여하는 대중의 인식과 유사했다. 태극기집회 참여자들은 현장에서 ‘언론개혁’을 주장했다. 이노근 전 새누리당 의원은 JTBC 등 언론사들을 가리켜 “쓰레기 언론을 소각로로 보내자”고 주장했다. 

김세은 강원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이 같은 ‘언론조작·왜곡보도’ 프레임이 친박·극우세력의 중심 이데올로기가 된 것을 가리켜 “한국 언론은 긴 불신의 역사를 갖고 있다. 이 때문에 허위·왜곡보도의 주체로 언론을 설정했을 때 사람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대변하고 지지층을 끌어모을 수 있는 문화적 상징으로 태극기를 선택했다. 태극기집회의 관념은 ‘조작·왜곡보도→탄핵→좌파의 국가전복→대한민국 위기’로 이어지는, 확장성을 잃어버린 낡은 구호의 반복이자 구체제의 집단 기억이 쏟아내는 ‘최후의 발악’을 의미했다.

가짜뉴스는 태극기의 세를 늘려나가는 일종의 바람잡이 역할을 했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이 2017년 3월 내놓은 ‘가짜뉴스 인식’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50대의 경우 카카오톡을 통해 가짜뉴스를 접한 비율이 45.6%로 나타났다. 태극기집회 참가자들의 페이스북 뉴스피드를 분석한 중앙일보-구글 뉴스랩 팀에 따르면 이들의 타임라인에선 ‘손석희 거짓말’, ‘변희재의 의혹 제기’, ‘태극기집회 수백만 명 참가’와 같은 뉴스들이 빈번하게 등장했다. 3월10일, 박근혜가 파면됐을 때 그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던 태극기 집회 참가자들은 눈물을 흘리며 나라가 망했다고 절규했다.

시간은 흘러 4월 21일 방송학회 정기학술대회. 키노트 스피치 연사로 참여한 손석희 사장은 국정농단 국면을 이렇게 회상했다. “광장의 프레임은 ‘이게 나라냐’였다. 국가에 대한 실망이었다. 이것이 헌법 수호로 넘어갔다. 동시에 ‘세월호 7시간’ 프레임이 강력하게 등장했다. 이것은 이번 사건의 주체가 되는 집단들을 연결시켰다. 블랙리스트 역시 헌법의 문제였다. 중요도에 비해 대중적 인식은 ‘그게 뭐 이번 정부만 그랬을까’ 같은 게 있었지만 우리는 이 사안을 중시했다.” 

그는 국정농단 국면에서 등장했던 ‘태블릿PC조작설’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국정농단 사건에서 음모에 의한 정권전복 사건으로 프레임을 바꾸는 방법이 태블릿PC 조작이었다. 집중적 공격을 받았다. 내가 시내에 많이 다녔다. 포승줄에 묶인 모습으로.(웃음) 연구해볼만 한 사건이다. 한참을 참다 법적 대응을 했지만, 결론이 나는 것은 먼 훗날의 이야기다. 일일이 대응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조작프레임은) 굉장한 집요한 노력과 인프라 제공이 있었다. 저널리즘 자체가 중대한 이슈에서 많은 타격을 받을 수 있다는 걸 배웠다.” 

박근혜가 무너진 자리에 들어선 새 정부는 ‘적폐 청산’을 주요 아젠다로 들고 나왔다. 겨울 내내 광장을 비췄던 촛불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던 아젠다였다. 세상은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정의로운 언론과 시민이 만들어낸 명예혁명은 현실 속 끝없는 프레임 전쟁 속에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프레임 전쟁’ 연재를 마칩니다. 

참고문헌  

<박근혜 무너지다>, 정철운, 메디치 
<손석희 저널리즘>, 정철운, 메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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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속 난폭자 물장군, 개구리 송사리에 수컷까지 포식

 
이강운 2017. 07. 23
조회수 145 추천수 0
 
알 지키는 헌신적 수컷, 먹이 부족하면 암컷에 몸 내주기도
습지 감소와 먹이 농약 오염, 가로등에 로드 킬로 멸종위기
 
4령.jpg» 어린 물장군이 자기 몸집보다 큰 버들치를 잡아먹고 있다.
 
강이 바닥을 드러내고 땅이 팍팍한 끝 모를 가뭄으로 아주 오랫동안 비를 기다렸는데, 그 끝에 장마가 왔다. 비만 내리면 장마라도 좋다했는데, 장대비가 몇 날 며칠을 쏟아 부어 큰물이 나가면서 수련원 둑이 터지고 제방이 무너졌다. 지진이 난 것처럼 땅이 갈라져 있지만 아직 수습을 못하고 있다. 날이 가물어도, 비가 많이 내려도 걱정이니 산속 생활이 만만치 않다.  
 
14.jpg» 수해로 무너진 수련원 둑을 고치고 있다.
 
장마가 오락가락하고 햇살이 뜨겁다. 가뭄에 굴하지 않고 잘 버텨온 식물들이 뜨거운 햇살과 많은 물을 받아 산을 검푸른 숲으로 덮었다. 오늘은 해가 지구에 거의 수직으로 서 있어 가장 더운 대서(大暑). 고온과 다습에 끈적끈적해 가만히 앉아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고 뜨거운 열기가 밤까지 이어지고 있다. 원시적 생명력인 해와 물로 한창 열매를 맺는 여름, 그 한 가운데에 있다. 
 
맑은 분홍색 비단실을 부챗살 모양으로 펼쳐 놓은 화려한 모습과 은은하고 달콤한 과일 향이 나는 자귀나무 꽃이 폭죽처럼 터질 때쯤 장마가 온다. 올해로 연구소 만든 지 21년이 되었지만 자귀나무 꽃필 때 장마가 오지 않은 적은 작년밖에 없다. 자귀나무와 장마의 동시적 발생을 알고는 있지만 어떻게 그렇게 잘 맞아 떨어지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그래서 늘 물에 푹 젖어 싱싱한 자귀나무 꽃을 온전하게 보지 못한다. 
 
8.jpg» 누에나방 애벌레의 방적돌기 전자현미경 사진.
 
자귀나무를 영어로 ‘비단 나무’(Silk tree)라 하는데 이는 비단실 모양의 꽃을 보고 이르는 것이고, 진짜 값비싼 비단을 만드는 놈은 방적돌기에서 뽑아낸 실로 고치를 만드는 말 그대로 ‘비단 벌레’인 누에나방이다. 누에나방의 변태 과정에서 번데기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고치를 물에 풀어 이렇게 우아한 직물을 만들어 낸 곤충 산업이 이미 3000년 전부터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한낱 벌레에서 그렇게 아름답고 귀한 비단이 나올 줄은 서양에서는 꿈에도 생각 못했을 것이다. 누에나방에서 비단을 만드는 원리를 모르던 서기 200년경 유럽에서는 꽃에서 비단을 만들어 낸다고 믿었는데 아마도 그 꽃이 비단실 모양의 자귀나무 꽃이 아니었나 싶다. 
 
 
 
이맘때면 붉은 꽃 4인방인 자귀나무, 노루오줌, 부처꽃, 꼬리조팝나무가 한창이다. 모두 붉은색으로 숲 속을 아름답게 수놓으며 많은 곤충을 유인한다. 4꽃 4색. 맛과 향이 달라 찾아오는 곤충 종도 다르다. 자귀나무 꽃에는 늘 제비나비 종류의 큰 나비와 꼬리박각시 종류가 자리를 차지하고 부처꽃엔 흰나비와 호박벌이 큰 손님이고, 꼬리조팝나무에는 온 몸을 파묻고 열심히 꿀을 먹는 꽃무지 무리와 붉은산꽃하늘소의 짝짓기가 한창이다. 노루오줌은 기다란 꽃대에 조그마한 꽃벼룩과 점날개잎벌레들이 조화를 이룬다. 붉은 꽃 4인방이 무리지어 무지갯빛 화려한 색으로 피어있는 연구소 연못 주변은 온갖 곤충이 늘 꼬이는 그야말로 곤충들에겐 천상의 낙원이다. 
 
5-1.jpg» 꼬리조팝나무 꽃에서 짝짓기 중인 붉은산꽃하늘소.
 
6.jpg» 꼬리조팝나무 꽃에서 짝짓기 중인 호랑꽃무지.
 
7.jpg» 노루오줌 꽃을 먹고 있는 점날개잎벌레와 꽃벼룩.
 
아름다운 꽃에, 빛나는 곤충에, 여름 더위를 막아주는 넉넉한 꽃그늘이 있는 자연을 가까이 하는 것만으로도 내 자신이 온전해진다는 느낌을 받는다. 참 황홀하다. 
 
1.jpg» 물장군 어른벌레의 당당한 모습.
 
노린재목에 속하는 물장군(학명 Lethocerus deyrollei (Vuillefroy))은 탄탄한 근육의 굵직한 앞다리 갈고리로 먹이를 꽉 움켜잡고 뾰족한 주둥이를 꽂아 사냥한 체액을 빨아먹는다. 세 시간 이상 남김없이 빨아먹고 나면 나중엔 커다란 개구리나 버들치 같은 먹이도 너덜너덜 빈 껍질만 남는다. 크기뿐만 아니라 위엄과 무시무시한 용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 ‘물장군’이라는 이름이 제격이다.
 
2.jpg» 물장군의 동종포식.
 
물속의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잡아먹는 왕성한 식욕에 알에서 부화하여 어른이 될 때까지 대략 8그램짜리 물고기 52마리를 먹는 대식가인데다 ‘동종포식同種捕食’이라는 잔인함까지 있다. 동종포식이란 말 그대로 같은 종을 잡아먹는 것인데, 사마귀 암컷은 짝짓기 도중 부족한 에너지를 보충하고 짝짓기에 집중하도록 수컷 사마귀를 잡아먹는다. 끔찍해 보이지만 수컷도 기꺼이 동의한 확실한 번식 전략이다. 이에 비해 물장군 암컷은 먹이가 부족한 상황이 닥치면 배고픔 때문에 속도가 빠른 물고기보다는 단지 사냥하기 수월하다는 이유로 수컷을 잡아먹는다. 그저 물속의 망나니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10.jpg» 짝짓기 뒤 산란하는 물장군 암컷.
 
무시무시한 난폭자에다 크고 위험한 곤충이지만 부성애는 정말 특이하고 감동적이다. 가장 강력한 포식자이지만 알이 다른 생물의 먹이가 될까 두려워 물위의 수초나 나무에 알을 낳는다. 물 바깥이라 늘 건조할 수밖에 없어 물을 보충하면서 발육을 돕는 포란은 당연하다, 알을 지키는 내내 신경을 곤두세워, 먹는 것도 잊은 채 움직일 생각도 하지 않아 그 상태로 굳은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꼼짝하지 않는다. 수컷의 헌신적 노력 없이 무사히 부화하기란 불가능하다. 암컷에게 먹이로 몸을 내주기도 하고 몸 바쳐 새끼 키우는 물장군 수컷은 가장 안쓰러운 곤충이다.  
 
11.jpg» 암컷이 낳은 알에 규칙적으로 수분을 공급하며 극진하게 돌보는 수컷.
 
극진한 수컷의 돌봄으로 알에서 무사히 깨어난 지 65일 만인 엊그제 다섯 번의 탈피를 거친 새끼 물장군은 마침내 우람하고 건장한 어른 물장군으로 변신했다. 올해는 가뭄이 심해 동네 웅덩이와 연구소 연못에 낳아놓은 개구리 알이 부화하기 전 다 말라 버려 2㎝ 미만의 작은 물고기를 사서 먹이는 바람에 경제적인 부담이 더 컸다. 자연의 도움 없이 인위적 노력만으로는 쉽게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물장군은 평생 물속에서 사는 수서곤충으로 논에서 쉽게 볼 수 있었던 친근한 곤충이었다. 예전의 논은 언제나 물이 차 있었다. 그러나 보를 만들면서 모를 심는 봄이면 물을 채우고 벼 베기를 할 즈음이면 물을 빼버리는, 물이 들락날락하는 논은 불안정 서식처가 되었다. 게다가 논에 농약을 뿌리기 시작하면서 농약에 오염된 물고기를 많이 먹는 물장군은 먹이에 있던 모든 농약을 몸에 축적(생물 농축)하게 되어 물에서 사는 생물 중 가장 먼저 멸종의 길로 들어서게 됐다. 또 불을 보면 이끌리는 야행성 곤충인데다 몸에 비해 날개는 작은 편이라 불빛보고 쫓아갔다가 도중에 도로에 떨어져 로드 킬을 많이 당한다. 시골 구석구석 가로등 설치 안 된 곳이 없으므로 이제 편하게 살 곳이 전혀 없어진 셈이다. 
 
가장 자연스럽고 넓은 자연 서식지인 논이 봄부터 가을까지만 물에 잠겨있어 습지로서 기능을 다 하지 못하고, 먹이는 부족하고 오염된 탓에 물장군은 멸종위기 곤충으로 지정되어 인공 사육, 증식시키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해졌다. 
 
3.jpg» 물고기를 공동 사냥하는 물장군 새끼들.
 
짝짓기 후 산란을 마치면 동종포식을 막기 위해 우선 암컷을 분리하고 수컷이 편안하게 알을 돌볼 수 있도록 환경 조성을 해 주어야 한다. 알에서 막 깨어난 1령 애벌레와 1번 탈피한 2령 애벌레들은 작고 연약하지만 식욕은 왕성하다. 자기보다 몸집이 큰 먹이를 잡아먹는 것은 아주 어려운 도전이라 때때로 협력하여 공동 사냥을 하기도 한다. 1, 2령 애벌레는 작은 송사리나 올챙이를 먹어야 하니 부화하기 전 수 천 마리의 올챙이를 따로 준비해야 한다. 아직 사냥 능력이 부족한 물장군 새끼에게는 먹이를 잡아 입에 대 주기도 하고 애벌레들이 먹고 난 사체는 최대한 빨리 치우고 배설물을 깨끗이 닦아줄 뿐만 아니라 수조에 깔아 놓은 모래도 수시로 갈아 물이 썩지 않도록 한다. 커갈수록 먹이양이 점점 많아져 3령 이후에는 크기에 맞는 붕어부터 큰 미꾸라지, 개구리까지 제 때에 충분히 공급해야 한다. 어른이 되기 직전인 4령부터는 힘을 확신한 듯 꼭 먹지 않더라도 눈앞을 지나가는 물체만 있으면 공격하는 난폭함 때문에 방 한 칸에 한 마리씩 공간을 나눈다. 
 
 
 
먹이를 충분히 주고 힘껏 몸을 움직여 열심히 키워도 애벌레가 어른까지 크는 확률은 겨우 30% 내외. 겨울을 나면서 또 30% 죽고. 고생에 비해 생존율은 낮다. 멸종 위험이 있는 귀하디귀한 물장군을 보전한다 하지만 올챙이부터 물고기까지 다른 생명을 먹이로 제공하는 일이 늘 꺼림칙하다. 생물다양성의 씨앗을 확보하는 마음으로 키우지만 때때로 물장군 사냥 장면을 보는 아이들이 물고기가 불쌍하다고 할 때마다 내 마음도 아프다. 그나마 최근 들어 실험을 통해 국내 생태계에 치명적 해를 끼치는 침입 외래종인 황소개구리 올챙이와 불루길 밀도를 조절해주는 중요한 역할을 확인하여 다행이다. 
 
요즘 연구소의 거의 모든 일손은 물장군 사육이다. 실험 방식이나 기자재는 첨단화됐지만 사육 시스템은 앞으로도 전혀 바뀔 게 없고 오직 노동력으로만 가능하다. 새벽부터 밤까지 또 다시 도시에서와 같은 바쁜 일상이 되어 버렸다. 자연이 좋아 선택한 시골의 여유로움은 뒤로 한 채 멸종위기종을 사육하느라 우리가 멸종될 처지다. 
 
9.jpg» 물장군의 포란 부화율을 발표하는 포스터.
 
지난 5월부터 지리산 국립공원의 아고산 주요 수종인 구상나무와 분비나무 고사 원인을 곤충을 중심으로 조사하고 있다. 조사 중 만난 많은 사람들이 걱정을 하고 있다. 지리산 댐을 다시 들고 나와 이 아름다운 지리산을 수장시키려 하고 있다고. 
 
가리왕산 숲을 벗겨 스키장을 만들고 4대강을 막아 시퍼렇게 멍들게 한 것도 모자라 설악산을 넘보고 국립공원 제 1호인 지리산을 들쑤셔 불길한 불씨를 만들겠다고? 이만큼 아름다운 자연을 어디서 볼 수 있다고 자연에 갑질을 하나! 법대로 원칙대로만 해서 낙동강을 깨끗이 하면 한 번에 해결될 일을. 
 
녹색과 생명 앞에 놓인 장애물은 케이블카와 4대강에 부채가 있는 환경부가 치워야 한다. 
 
글·사진 이강운/ 홀로세생태보존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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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운 홀로세생태보존연구소 소장
한국서식지외보전기관협회 회장. 국립안동대학교 식물의학과 겸임교수. 저서로는 <한국의 나방 애벌레 도감(Caterpillars of Moths in Korea)>(2015.11 환경부 국립생물자원관), <캐터필러>(2016.11 도서출판 홀로세)가 있다.
이메일 : holoce@hecri.re.kr      
블로그 : http://m.blog.naver.com/holoce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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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 시작한 지 10년, 귓전 때리는 군함 뱃고동 소리

 

[2017 제주생명평화대행진 ⑥] 강정에서 보내는 노신부의 편지

17.07.22 19:56l최종 업데이트 17.07.22 19:56l

 

제주해군기지 반대 싸움이 시작된 지 올해로 꼭 10년이 되었습니다. 평화로운 마을 공동체는 파괴되었고 아름다운 연산호도, 구럼비 바위도 사라졌습니다. 작년에 완공된 해군기지에는 미국 군함들이 수시로 드나듭니다. 강정 뿐만이 아닙니다. 제주 전역이 난개발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강정을 파괴한 것도 모자라 주민 동의 없는 제2공항이 성산에 지어지려 합니다. 제주 전역을 행진하며 제주의 평화를 기원하는 제주생명평화대행진(7/31~8/5)을 앞두고 제주의 평화를 지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연속 게재합니다. - 기자 말

☞이전기사 : 제주 바다 망가뜨리더니, 오름 싹둑 잘라 제2공항까지?

 인간띠잇기가 진행되면 문정현신부는 춤추는 사람들 근처에 서서 진행하는 차량에게 메세지를 보여주고 있다
▲  인간띠잇기가 진행되면 문정현신부는 춤추는 사람들 근처에 서서 진행하는 차량에게 메세지를 보여주고 있다
ⓒ 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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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 벌써 7번째 여름을 보내고 있습니다. 섬의 여름은 습도와 함께 오더군요. 태평양에서부터 불어오는 후텁지근한 바람은 두터운 해무가 되어 강정마을에 덮쳐 옵니다. 처음 강정에 와 여름을 보낸 곳은 구럼비 바위였습니다. 작렬하는 햇살에 바위는 맨발로 서 있을 수 없을 정도로 뜨거웠고, 소금기를 머금은 바닷바람에 땀이 줄줄 흐르던 그 여름을 저는 6년이 지난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병을 낫게 해주고 아이를 갖게 한다는 할망물에서 물을 길어 먹으며, 버틸 수 없이 더울 때에는 용천수에 몸을 맡겼습니다. 구럼비 곳곳에서 솟아오르던 용천수는 바로 먹어도 될 정도로 깨끗했고, 잠깐만 들어가 있어도 뼛속까지 차가웠습니다. 이 물이 없었다면 그 여름을 어떻게 보낼 수 있었을까 싶습니다.

 

저는 구럼비에서 해가 지고 뜨는 모습을 바라볼 때에 제가 믿는 하느님이 이곳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있는 그대로 더 이상 보태거나 뺄 것도 없이 평화롭고 따뜻했던 구럼비와 중덕바다는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2011년 9월 2일 구럼비로 향하던 모든 곳에 팬스가 쳐지고 더 이상 갈 수 없게 되었을 때, 깊은 절망에 매일 미사 때마다 '구럼비야 사랑해'를 힘차게 불렀고 그 외침은 오늘도 계속 되고 있습니다. 

애타는 마음과는 다르게 2012년 3월 7일 구럼비 발파가 시작된 이래 해마다 마을의 모습은 급격히 달라졌고 마을의 해안선은 해군기지에게 점령당했습니다. 2016년 2월 26일 준공식을 앞두고 우리를 가로막던 팬스가 하나둘 철거되기 시작했습니다. 구럼비로 향하던 작은 길, 곳곳에 있던 하우스와 밭들, 그리운 구럼비 바위는 꿈처럼 사라졌고 그 위에 불의와 폭력의 해군기지가 불을 번쩍이며 완공 되었습니다. 마을사람들은 물론 이곳에 이주해 온 지킴이들은 깊은 절망 속에 그 기지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군사주의에 맞서 평화운동을 시작합니다
 

 6월 20일 미군함 입항에 반대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6월 20일 미군함 입항에 반대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엄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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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정투쟁10년을 알리는 인증샷캠페인을 시작하며 마을에 살고 있는 지킴이들과 해군기지 정문앞에서
▲  강정투쟁10년을 알리는 인증샷캠페인을 시작하며 마을에 살고 있는 지킴이들과 해군기지 정문앞에서
ⓒ 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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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기지에서 트는 군가 소리가 마을에 들려오고 시시때때로 울어대는 군함의 뱃고동 소리는 온 마을을 때립니다. 한국 군함만이 아닙니다. 미국에서도 캐나다에서도 강정 해군기지에 와 군사작전을 논의합니다. 미군을 중심으로 해 외국군함이 강정해군기지에 기항하며 군사작전을 펼치는 행위는 자연스럽게 중국을 자극합니다. 사드배치로 인해 한국과 중국의 군사적 대립과 긴장이 높아진 것처럼, 이곳에서의 미군주도의 외국군 훈련이 정례화 되고 빈번해 질수록 군사적 대립과 긴장은 더욱 높아질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제주에 공군기지를 만들려는 시도도 계속되어 현재 연구용역예산까지 책정된 상태라고 합니다. 지난 10년의 투쟁과정에서 한 목소리로 우려했던 것이 사실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우려가 현실이 되고 있는 이 상황에서 저는 더욱 이곳을 지켜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군사기지, 군사주의에 맞선 평화운동을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요즘같이 더운 날이면 숨이 턱턱 막히지만 매일 강정의 평화를 노래합니다. 고맙게도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지나가다 들리기도 하고, 일부러 시간을 내서 오기도 합니다. 그동안 못 와봐서 미안하다고 합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힘에 부쳐 주저앉고 싶지만 아직까지 강정을 기억하고 함께 하는 분들의 힘으로 하루하루 버텨나갈 수 있습니다. 

이 뜨거운 여름, 올해에도 어김없이 평화대행진이 열린다고 합니다. 첫해에는 저도 걸으며 함께 했는데, 이제는 걷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쉬는 장소에 맞춰 가 사람들과 악수하고 격려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하지만 강정에, 제주에 오는 마음이 고마워서 저도 힘을 내 함께 하려고 합니다.

올해부터는 특별히 강정과 더불어 제주의 군사화문제를 알리고 연대를 호소하기 위해 '제주평화대행진'으로 진행한다고 합니다. 비록 강정에 해군기지가 지어졌지만 더 이상의 군사화를 막고자함입니다. 또, 제주 해군기지가 전 세계의 외국군이 기항하며 동북아의 군사적 긴장감을 높이는 일에 저항하고자 함입니다. 내 몸이 허락하는 한 현장을 지키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기에 여기서 여러분을 기다리겠습니다. 이곳에 와 불의의 현장을 함께 목격하고 평화를 배워 나갑시다.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실을 위해서 정의를 위해서 끝까지 함께 해 나갑시다. 
 

 2011년부터 시작된 매일미사, 지금도 여전히 오전 11시면 평화를 위한 미사를 진행한다.
▲  2011년부터 시작된 매일미사, 지금도 여전히 오전 11시면 평화를 위한 미사를 진행한다.
ⓒ 에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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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제주의 소리'에도 공동게재 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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