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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개벽예감 454]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 기사입력 2021/07/26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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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1. 젤로나야 로샤에서 진행된 비밀회담

2. 아직 끝나지 않은 중국의 인민전쟁

3. 중국공산당 정치국의 조선출병결정

4. 제1기병사단 궤멸시킨 제39군

5. “전쟁으로 전쟁을 끝내야 한다.”

 

 

1. 젤로나야 로샤에서 진행된 비밀회담

 

흑해 연안의 이름난 휴양지 소치(Sochi)에 맛체스타(Matsesta)온천이 있다. 그 온천 인근에 푸른 숲이라는 뜻을 가진 젤료나야 로샤(Zelyonaya Rosha) 다차(dacha)가 있다. 로씨야에서는 별장을 다차라고 부른다. 1950년 10월 10일 젤료나야 로샤에서 두 사람이 마주앉았다. 조셉 스딸린(Joseph V. Stalin) 소련공산당 서기장과 저우언라이(周恩來) 중국 총리의 비밀회담이었다. 당시 모스크바에서 요양하고 있었던 중국인민해방군 고위지휘관 린뱌오(林彪)가 저우언라이 총리의 요청으로 회담에 동석했다. 

 

2000년 9월 인민해방군출판사가 펴낸, ‘북위 38도선-펑더화이와 조선전쟁(北緯三八度線-彭德懷與朝鮮戰爭)’이라는 제목의 책에 젤료나야 로샤 비밀회담의 대화내용이 들어있다. 이 책은 1950년 10월 중국인민지원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6.25전쟁에 참전했던 중국인민지원군 펑더화이(彭德懷) 사령관의 군사비서 겸 중국인민지원군 사령부 판공실 부주임이었던 양펑안(楊鳳安)과 왕티엔청(王天成)이 함께 집필한 것이다. 그 책에는 1950년 10월 10일 젤료나야 로샤 비밀회담의 대화내용 가운데 일부가 다음과 같이 수록되었다. 

 

스딸린 - “미국군이 38도선을 넘어 조선 북부로 진격하고 있다. 조선이 지원을 받지 못하면, 1주일 정도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조선의 정세가 엄중한데, 중국이 조선을 지원하기 위해 파병을 결정했다니 잘된 일이다. 하지만 다른 문제도 고려해야 마땅하다. 오늘 미국은 세계적인 군사강국이다. 미국은 강한 해군과 공군을 보유했고, 군사기술과 군사장비가 우세하다.”

 

 저우언라이 - “우리는 조선과 미국의 전쟁, 중국에 대한 미국의 전쟁선포와 중국에 대한 미국의 공중폭격 등에 대처하는 문제를 고려해야 한다.”

 

스딸린 - “중국 동지들이 고려하는 문제는 심중한 문제다. 현재만이 아니라 예측하기 어려운 미래의 문제까지 당연히 고려해야 한다. 앞으로 전개될 상황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를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저우언라이 - “이번에 마오쩌둥(毛澤東) 주석이 나를 여기에 보낸 목적은 앞으로 전개될 상황에 대처할 수 있도록 준비하려는 데 있다. 소련 정부가 군사원조와 공군파병으로 도와주기 바란다.”

 

스딸린 - “우리는 그 문제를 검토했다. 우리도 조선 동지들을 어떻게 도울 것인지 생각했다. 그런데 우리 정부가 일찍이 성명을 발표한 것처럼, 우리 군대는 조선에서 이미 철수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조선에 다시 파병하기는 곤란하다. 그것은 미국과 교전하자는 것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중국이 조선에 파병하면, 우리는 무기와 장비를 공급하겠다. 그리고 공군 전투기들이 엄호할 수 있도록 출동시키겠다. 당신들이 요청한 무장장비를 개선하는 문제에 대해 말하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우리에게 무기가 많이 남았기 때문에, 우리 군부와 중국 동지들이 협의하여 해결하기 바란다. (중략) 당신들이 조선에 파병할 때, 전투의 첫 번째 관건은 버티는 것이다. 만일 당신들의 전투부대가 미국군의 진공을 감당하지 못하면 소련이 파병해 지원하겠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미국군과 직접 대결하게 되는 것인데, 그렇게 되면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인류는 또 다시 재난을 당할 것이다.”

 

저우언라이 - “우리는 스딸린 동지가 말한 그런 상황이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본다. 전쟁승패의 결정적 요인은 민심의 향배에 달려있다. 5억 중국 인민과 전 세계 인민들은 미제국주의 침략에 반대하는 우리를 지지할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승리한다. 미제침략자들이 조선에 쳐들어갔으나, 우리는 침략자들을 물리치고 능히 평화를 지킬 수 있다.”

 

스딸린 - “전쟁과 평화의 문제는 매우 복잡하다. 당신이 말하는 방식대로 꼭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저우언라이 - “이치가 그렇다는 말이다. 제2차 세계대전 초기에 히틀러가 많은 약소국가들을 먹어치우는 것을 좌시하는 바람에 히틀러의 야욕이 더욱 커져 세계대전을 피할 수 없었다.”

 

스딸린 - “중국의 10개 사단을 무장시킬 무기를 제공하겠다. 그리고 중국 연해 대도시들을 방어하는 공군도 파병하겠다.” 

 

▲ 이 사진은 1950년 2월 14일 조셉 스딸린 소련공산당 서기장과 마오쩌둥중국공산당 총서기가 지켜보는 가운데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 겸 외무상이 중소우호동맹호상지원조약에 서명하는 장면이다. 조인식은 모스크바에서 진행되었다.그로부터 약 8개월 후, 저우언라이 총리는 스딸린 서기장과 만난 비밀회담에서 중국의 조선출병문제를 협의했다. 핵제국의 위세 앞에서 두려움을 느낀 스딸린은 중국의 조선출병문제에 대해 매우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저우언라이는 소련의군사지원을 받지 않더라도 조선에 출병하겠다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의결정을 스딸린에게 전달했다.  

 

소련의 군사지원을 약속받은 저우언라이 총리는 소치에서 모스크바로 돌아와 마오쩌둥 주석에게 회담결과를 즉시 보고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몇 시간 뒤, 당시 소련각료회의 제1부의장 비야체슬라브 몰로또브(Vyacheslave M. Molotov)가 저우언리아 총리의 숙소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통화에서 몰로또브는 소련이 공군을 파병할 준비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군력을 지원할 수 없다고 하면서, 스탈린 서기장이 중국의 조선출병에 대한 검토를 아직 끝내지 않았으므로 중국의 즉시출병을 반대한다고 말했다. 

 

위의 인용문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1950년 10월 당시 스딸린 서기장은 중국이 미국과의 전쟁에서 이길 수 없을 것이고, 중국이 패하면 소련이 참전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소련과 미국의 전면전이 일어날 것으로 우려했다. 스딸린 서기장이 대미전쟁을 우려한 까닭은 소련이 미국의 무차별적인 핵폭격을 받을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다. 그는 소련의 대도시들과 주요산업지대가 불과 5년 전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끼가 당했던 것과 같은 핵참화를 입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꼈다.    

 

소련은 1949년 8월 25일 미국의 뒤를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핵시험에 성공했지만, 1950년 10월 당시 소련은 미국의 핵폭격을 억제할 핵보복능력을 아직 갖지 못했다. 사실 미국의 핵폭격에 대한 스딸린의 우려는 기우가 아니었다. 2017년 5월 30일 미국 군사전문매체 <내셔널 인터레스트(National Interest)>에 실린 분석기사에 따르면, 1950년대 미국 전략공군사령부가 작성한 800쪽에 이르는 기밀문서에는 B-52 장거리전략폭격기와 B-47 장거리전략폭격기, 그들을 엄호하는 F-101 전투기와 RB-47 정찰기 등 총 2,130대에 이르는 작전기를 총동원하여 소련, 중국, 동유럽 사회주의나라들에 있는 1,200개 이상의 대도시들과 소련의 공군기지 1,100개소를 무차별적인 핵폭격으로 초토화하는 대공습계획이 들어있었다고 한다. 이를테면, 모스크바에서 179개소, 레닌그라드에서 145개소, 동베를린에서 91개소 등이 미국의 핵폭격대상으로 지정되었던 것이다. 당시 미국이 보유했던 핵폭탄의 총폭발위력은 약 20,000메가톤에 이르렀는데, 20,000메가톤의 핵폭발력을 환산하면 상용폭약 200억톤에 해당하는 엄청난 폭발력이다. 

 

그처럼 가공할 핵무력을 보유한 핵제국의 위세 앞에서 두려움을 느낀 스딸린 서기장은 저우언라이 총리에게 조선에 출병하려는 중국에 군사장비를 제공하고, 공군을 파병하겠다고 약속해놓고서도, 회담을 마치고 헤어진 뒤에 고심과 우려를 거듭하다가 결국 자기 약속을 스스로 취소했던 것이다. 

그러나 저우언라이 총리는 전혀 다른 관점과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저우언라이의 전쟁관은 인민 중심의 전쟁관이었고, 스딸린의 전쟁관은 무기 중심의 전쟁관이었다. 스딸린은 핵제국의 엄청난 핵무력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고 조선출병을 기피했지만, 저우언라이는 전체 인민이 단결하면 핵제국을 제압할 수 있으며, 침략자를 반대하여 싸우는 정의의 전쟁은 반드시 승리한다고 생각했다.  

 

 

2. 아직 끝나지 않은 중국의 인민전쟁

 

6.25전쟁은 저우언라이의 전쟁관이 옳았음을 현실로 입증했다. 1950년 10월 중국공산당은 미국에 맞서 조선을 돕고, 가정을 보호하고 나라를 지킨다(抗美援朝保家衛國)는 기치를 들고 5억 중국 인민을 항미원조전쟁에 불러일으켰다. 당시 마오쩌둥 주석은 “미국이 대만을 점령하고, 조선을 침략하고, 중국 동북변경까지 쳐들어왔기 때문에 중국은 항미원조보가위국의 기치를 들었다”고 역설했다. 

 

6.25전쟁이 일어난 직후, 중국 인민들은 항미원조총회를 결성했다. 항미원조총회 회장은 중국의 혁명문학을 대표하는 대문호 궈모뤄(郭沫若)였다. 항미원조총회는 항미원조의연금 모금운동을 전개했고, ‘스톡홀름 평화호소(Stockholm Appeal)’를 지지하는 전국적 서명운동을 전개하여 일주일 만에 2억2,353만명의 서명을 받았다. 

 

‘스톡홀름 평화호소’는 프랑스의 저명한 물리학자이며 노벨화학상 수상자이며 프랑스공산당원인 프레데릭 졸이오 큐리(Frédéric Joliot-Curie)의 제안으로 1950년 3월 15일 세계평화협의회(World Peace Council)에서 채택되었다. 6.25전쟁이 일어난지 2주 만에 전 세계 평화애호인민 150만 명이 ‘스톡홀름 평화호소’에 서명했는데, 세계적인 미술가들인 빠블로 삐카소(Pablo Picasso), 마르크 샤갈(Marc Chagall), 앙리 마띠스(Henri Matisse), 세계적인 음악가들인 러너드 번스타인(Leonard Bernstein), 드미트리 쇼스타코위치(Dmitri Shostakovich), 찰리 파커(Chalie Parker), 세계적인 문학가들은 빠블로 네루다(Pablo Neruda), 토마스 만(Thomas Mann), 조오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 루이 아하공(Louis Aragon), 세계적인 영화배우들인 이브 몽땅(Yves Mountand), 씨몬 씨뇨레(Simone Signoret)를 비롯한 세계 각국의 학계 저명인사들, 문화예술계 저명인사들, 영향력 있는 정치인들이 동참했다. 핵제국만 그 서명운동을 반대했다.  

 

중국공산당이 항미원조의 기치를 들자, 중국 각지에서 수많은 중국 청년들이 인민지원군에 탄원했다. 그 중에서도 결혼을 서약하면서 인민지원군에 탄원한 청년들이 40,000여 명이나 되었다. 마오쩌둥 주석의 아들 마오안잉(毛岸英)도 결혼한 지 4일 만에 항미원조전쟁에 참전했고, 그로부터 한 달 뒤 평안북도 동창군 대유동에 있는 중국인민지원군 사령부에서 미국군의 폭격으로 전사했다. 그의 나이 28살이었다. 

 

이처럼 중국 인민의 엄청난 힘이 항미원조운동으로 분출하여 항미원조전쟁을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중국의 전당, 전군, 전민의 조직적 단결은 핵제국의 핵폭탄과 항공모함과 전략폭격기보다 더 큰 힘을 발휘했다. 핵제국은 6.25전쟁 중에 핵폭격을 감행하지 못했다. 윌리엄 딘(William F. Dean) 제24보병사단 사단장이 포로로 생포되고, 월튼 워커(Walton H. Walker) 미8군사령관이 전사하면서 패색이 짙어진 핵제국은 서둘러 정전을 요청했다. 

 

조선측 자료에 따르면, 1950년 12월 13일 전곡리전투에 참가한 조선인민군 공병매복조원들이 지뢰매설과 매복기습으로 워커를 포함한 미국군 장병 80여 명을 살상하고 전차 1대와 작전차량 8대를 파괴했다고 한다. 그 전투를 승리로 이끈 지휘관은 약관 20살의 최종운 공병소대장인데, 그는 공화국영웅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미국 육군 공식문서에 워커의 사망과 관련한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미8군사령관이 매복기습에 걸려 전사한 것은 미국군의 위신과 사기를 땅에 떨어드리는 치욕사건이므로, 그가 전사한 상황에 관해 기록을 남기지 않은 것이다. 미국의 공식기록이 없기 때문에, 한국측 자료들에는 사망날짜도 사망경위도 사망장소도 모두 불명확하고, 앞뒤가 맞지 않는 교통사고 사망설만 무성하다. 이를테면, 그가 보좌관과 함께 작전차량(jeep)을 타고 가다가 한국군 차량을 뒤쪽에서 추돌하여 현장에서 즉사했다는 설, 그가 작전차량을 직접 운전하다가 한국군 무기수송차량과 정면충돌하여 중상을 입고 야전병원에서 과다출혈로 사망했다는 설, 그가 탄 작전차량이 한국군 무기수송차와 충돌을 피하려다가 전주를 들이받고 세 차례 굴러 전복하는 바람에 사망했다는 설 등이다.   

 

어쨌든 미8군사령관의 전사로 충격을 받은 백악관은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서둘러 정전을 요청했다. 1951년 7월 1일 <민주신보> 보도에 따르면,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Harry S. Truman)은 1951년 6월 29일 전사한 워커의 후임으로 임명된 매튜 릿지웨이(Matthew B. Ridgway) 미8군사령관에게 “정전교섭을 시작하라고 지령하였다”고 한다.   

 

그로부터 70여 년이 지난 오늘도 중국공산당은 인민 중심의 전쟁관을 여전히 견지하고 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중국의 대만해방전쟁을 앞당기는 사상정신적 요인이다. 미국은 무기 중심의 전쟁관밖에 모르기 때문에, 중국이 대만해방전쟁을 언제, 어떻게 시작할지 예상하지 못한다. 미국은 중국과의 전면전을 가상한 컴퓨터모의전쟁연습(wargame)을 수없이 거듭해도, 인민 중심의 전쟁관에 기초한 중국의 대미군사전략을 이해하지 못한다. 

 

▲ 이 사진은 2021년 3월 27일 남중국해 난사군도의 어느 암초 인근에 집결한 중국해상민병대 소속 선박들의 대기장면이다. 중국해상민병대는 평시에 어업에 종사하다가 전시에 경무장을 하고 중국인민해방군 해군의 작전을 측면에서 지원하는 민간군사조직이다. 중국해상민병대에 소속된 선박은 700,000척에 이른다.대만해방전쟁이 일어나면, 중국해상민병대는 상상을 초월한 '벌떼전술'로 미국 해군 항모타격단과 상륙타격단을 포위할 것이며, 중국인민해방군의 대만상륙작전을지원할 것이다.  


그런 전쟁관에 기초하여 미래상황을 예상해보자. 만일 중국이 대만해방전쟁을 개시하면, 중국공산당은 인민 중심의 전쟁관에 의거하여 전당, 전군, 전민을 대만해방전쟁에로 불러일으킬 것이다. 2021년 6월 현재 중국공산당 당원은 9,515만8,000명이고, 각계각층에 침투한 당세포조직은 486만4,000개에 이른다. 이처럼 엄청난 조직력을 중심으로 결집한 중국 인민 14억1,000만명은 중국공산당의 지시에 따라 중국인민해방군의 대만해방전쟁을 적극 지원할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중국의 대만해방전쟁은 군민융합전략에 의거한 인민전쟁(people's war)으로 전개될 것이다. 중국공산당이 말하는 군민융합전략은 무엇인가? 중국은 평시에 각 산업부문에서 생산로동을 하다가, 전쟁이 일어나면 즉각 민간군사조직으로 개편되는 민병제를 운영하고 있다. 2020년 11월 16일 <조선일보> 보도에 따르면, 18~35세 연령층 어민들이 의무적으로 가입한 해상민병대는 평시에 어업에 종사하다가 전시에 경무장을 하고 해상정찰감시, 해상전시물자수송, 해상수색 및 구조 등으로 중국인민해방군 해군의 작전을 측면에서 지원하게 된다고 한다. 윁남의 정치분석가 응우웬 칵 지앙(Nguyen Khac Giang)이 2018년 8월 4일 동아시아연단(East Asia Forum)에서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중국해상민병대에 소속된 선박은 무려 700,000척에 이른다고 한다. 

 

2015년 10월 27일 미국 해군 미사일구축함 라쎈함(USS Lassen)이 남중국해 난사군도에 있는 중국의 군사기지화된 인공섬 영해를 침범했을 때, 중국 해상민병대 소속 선박 수 백 척이 벌떼처럼 라센함에 덤벼들며 위협했다. 2021년 3월 21일 필리핀 언론보도에 따르면, 중국 해상민병대 소속 선박 220여 척이 남중국해 어느 암초 부근에 집결, 정박한 것을 필리핀 해상경비대가 관측했다고 한다. 

 

대만해방전쟁이 일어나면, 중국은 해상민병대 소속 선박 400,000척이 발해, 황해, 동중국해, 대만해협, 남중국해를 뒤덮을 것이며, 상상을 초월한 ‘벌떼전술(swarming tactics)’로 미국 해군 항모타격단과 상륙타격단을 포위할 것이다. 또한 해상민병대 소속 선박 가운데 선체가 해안상륙에 적합하게 개조된 선박 수 천 척과 민간수송기, 민간헬기, 민간무인항공기 수 천 대가 중국인민해방군의 대만상륙작전을 지원할 것이다. 

 

오늘 중국공산당이 중국의 숙적인 미국과 결전을 벌이기 위해 인민해방군을 현대적인 무기로 무장시켰다는 사실도 주목해야 하지만, 그보다 더 주목해야 하는 것은 중국의 전당, 전군, 전민이 일치단결하는 인민전쟁준비를 완료하였다는 사실이다.

   

 

3. 중국공산당 정치국의 조선출병결정

 

역사의 시계바늘을 다시 1950년 10월로 돌려보자. 스딸린 소련공산당 서기장과의 회담을 위해 모스크바에 잠시 머물고 있었던 저우언라이 총리는 1950년 10월 13일 오후 스딸린의 집무실을 방문했다. 저우언라이는 그날 오전 중국 베이징에서 진행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긴급회의 결정사항을 스딸린에게 통보하려고 그를 다시 만난 것이다. 

 

그날 오전 마오쩌둥 주석은 주더(朱德), 류사오치(劉少奇), 덩샤오핑(鄧小平), 펑더화이(彭德懷), 가오강(高崗)이 참석한 정치국 회의를 소집하여 소련이 공군을 파병하지 않아도 조선에 출병하기로 결정했다. 저우언라이는 마오쩌둥의 지시에 따라 그 회의의 결정사항을 스딸린에게 전했다. 통보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중국공산당 정치국 동지들과 협의한 결과 우리 군대가 조선에 출병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데 견해의 일치를 보았다. 제1시기에는 전적으로 남조선위군(南朝鮮僞軍)을 공격한다. 우리 군대는 남조선위군을 대응하는 데서 우세하다. 원산과 평양 이북의 산악지대에 근거지를 만들어 조선 인민을 떨쳐일으킨다. 제1시기에 남조선위군 몇 개 사단만 전멸시키면 조선의 정세는 우리들에게 유리하게 전변될 수 있다.” 

 

해설 - 위의 인용문에 나오는 남조선위군(南朝鮮僞軍)이라는 용어에서 위군(僞軍)은 작전지휘권이 없는 가짜군대를 뜻한다. 우리식으로 번역하면, 위군은 상부의 지령에 따라 움직이는 꼭두각시라는 뜻을 지닌 괴뢰군(puppet army)으로 번역된다. 6.25전쟁에 참전한 중국인민지원군은 한국군을 남조선위군이라고 깔보면서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2) “우리가 이처럼 적극적인 정책을 채택한 것은 중국, 조선, 동방, 세계에 매우 유리한 것이다. 우리가 출병하지 않으면, 적들이 압록강변을 압박해 국내외적으로 반동의 위세가 더욱 높아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각 방면에서 불리하게 된다. 먼저 동북지방이 매우 불리해진다. 모든 동북변방군이 대응해야 하고 남만주 전력을 통제당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마땅히 참전해야 하고, 반드시 참전해야 한다고 여긴다. 참전은 이익을 극대화하고, 불참전은 손해를 극대화한다.“

 

그날 저우언라이 총리는 스딸린 서기장에게 위와 같은 내용을 통보하고 짤막한 대화를 나누었다. 

 

저우언라이 - “중국공산당과 중국정부는 소련 공군의 출동여부와 관계없이 출병해 조선을 지원하는 정책을 채택했다.”

 

스딸린 - “중국 동지들이 그렇게 결심했다니 얼마나 큰 불행을 맞을지 모르겠다. 참으로 큰 희생을 치러야 하는데...”

 

저우언라이 - “마오쩌둥 동지와 정치국 동지들이 이 문제를 진지하게 연구하고, 신중하게 결정했다.”

 

스딸린 - (감동한 표정을 지으면서) “중국 동지들이 위대하다.”

 

저우언라이가 스딸린에게 중국공산당 정치국의 조선출병결정을 통보하기 열흘 전인 1950년 10월 3일 헨드릭 분(Hendrik N. Boon) 네덜란드 외무장관은 자신이 파악한 중국의 의사를 미국에 전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이 사진은 1950년대 중국공산당 지도부를 촬영한 기념사진이다. 1950년 10월 12일 미국 중앙정보국은 중국이 6.25전쟁에 참전할 가능성이 없다는 내용의 정보보고서를 작성하여 백악관에 제출했지만,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은 조선의 공식적인 파병요청에 따라 조선에 지원군을 파병하기로 결정했다. 그결정에 따라 중국은 260,000명의 병력으로 중국인민지원군을 편성하고, 제1차 조선출병준비를 마쳤다.  


1) “저우언라이는 39도선이 붕괴되면 중국이 참전할 것이라고 내게 사석에서 말했다.” 

 

2) “쉬상첸(徐向前) 중국인민해방군 참모총장은 미국군이 38도선을 돌파하면 중국은 참전하는 것 이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으며, 미국과의 전쟁으로 중국의 발전이 50년 이상 후퇴하더라도 미국의 침공을 지금 저지하지 않으면 중국은 영원히 미국의 통제 아래 놓이게 될 것이라고 내게 사석에서 말했다.” 

 

1950년 10월 10일 중국 외교부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미국의 조선반도 침략전쟁은 초기부터 중국의 안보에 심각한 위협으로 되었다. (중략) 중국 인민은 미국과 추종국들이 저지르는 조선반도 침략전쟁을 묵과할 수 없으며, 이는 또 다른 전쟁으로 비화될 위험이 있다. (중략) 중국 인민은 조선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강력히 주장하는 바이며, 미국과 추종국들의 전쟁확대를 결연히 반대한다. 그리고 전쟁확대의 모든 책임은 침략자들에게 있음을 분명히 한다.”

 

위의 성명은 중국이 6.25전쟁에 참전할 것임을 예고한 것인데도, 미국은 상황을 오판하고 있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중국이 6.25전쟁에 참전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판단했다. 1950년 10월 12일 그들이 작성한 정보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서술되었다.

 

“현재 중국의 지상군은 공군 및 해군 지원이 부족한 상태이기 때문에 코리아전쟁에 개입할 수는 있으나 결정적이지는 못할 것이다. (중략) 저우언라이가 성명을 발표한 것, 군대를 만주에로 이동시키는 것, 그리고 잔혹행위 및 국경침범에 관한 선전전을 벌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이 코리아전쟁에 전면적으로 개입할 의사가 확고하다는 증거는 없다. (중략) 중국이 전면적으로 전쟁에 개입할 가능성은 계속 염두에 두어야 하지만, 세계대전을 피하려는 소련의 결정을 생각하면 1950년에 그런 일(중국의 전쟁개입을 뜻함-옮긴이)이 일어날 가능성은 없다. 당분간 중국의 개입은 북조선에 은밀히 지원하는 형태로만 이루어지는 제한적인 개입으로 될 것이다.”

  

 

4. 제1기병사단 궤멸시킨 제39군

 

1950년 10월 8일부터 19일까지 11일 동안, 중국은 동북병방군 제13병단을 주축으로 조선에 출병할 지원군을 편성했다. 제1차로 조선에 출병할 전투병력 260,000명은 12개 보병사단과 3개 포병사단으로 편성되었고, 펑더화이가 인민지원군 사령원으로 임명되었다. 

 

중국이 260,000명의 병력을 지원군으로 편성하고 있었던 1950년 10월 17일 국제련합군 총사령관의 모자를 쓴 미국 원동군총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는 130,000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북진공격을 계속하도록 명령했다. 

 

1950년 10월 19일 펑더화이 사령원이 지휘하는 중국인민지원군은 두 방면에서 압록강을 건너 조선땅을 밟았다. 제39군과 제40군은 랴오닝성 단둥(丹東)과 창디옌(長甸)에서, 제38군과 제42군은 지린성 퉁화(通和)시 지안(輯安)에서 각각 압록강을 건넜다. 펑더화이 사령원은 중국인민지원군 전투부대들에 무전기 사용을 통제하고, 조선인민군 복장으로 위장하고, 큰 길을 피하여 밤에만 행군하고 새벽에 취침하며, 대외선전을 금하고, 출병비밀을 철저히 지킬 것을 명령했다. 

 

1950년 10월 21일 밤, 펑더화이 사령원은 중국인민지원군을 이끌고 어둠이 깔린 압록강 철교를 건너 신의주에 도착했다. 당시 평안북도 동창군 대유동에 있는 최고사령부에서 전쟁을 지휘하고 있었던 김일성 최고사령관은 그날 밤늦게 자신을 찾아온 펑더화이 사령원을 만났다. 

 

1950년 10월 27일 미국 중앙정보국 정보보고서에 따르면, 미국군이 평안북도 운산지역에서 조선인민군 복장으로 위장한 중국인민지원군 병사 한 명을 포로로 붙잡았는데, 그는 심문 중에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고 한다. 

 

“나는 중국 국민당군과 공산군(인민해방군을 뜻함-옮긴이)에서 복무했다. 우리 부대는 미국군 무기와 일본군 무기로 무장했는데, 탄약은 충분한데 식량이 부족하다. 다른 부대들도 우리 부대와 마찬가지로 압록강 남쪽 방어진지에 투입되었다.”

 

위의 인용문을 읽어보면, 중국인민지원군 포로는 자신이 제2차 국공내전시기에 국민당군과 인민해방군에서 각각 복무하였다고 진술하였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의 국공내전은 인민해방군과 국민당군이 싸운 전쟁인데, 양쪽에 모두 복무했다는 그의 진술은 무슨 뜻인가? 중국인민지원군 전투원들이 미국군 무기와 일본군 무기로 무장하였다는 그의 진술은 또 무슨 뜻인가?

 

2020년 10월 16일 서울에서 진행된 국제학술회의에 참석한 중국 중산대학 첸줘(陳卓) 박사의 발표문에서 그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그의 발표문에 따르면, 국공내전 당시 국민당군 소속이었다가 인민해방군에 포로로 붙잡힌 장병들, 그리고 국민당군에서 싸우다가 투항한 후 재교육을 받고 인민해방군에 입대한 장병들을 중국에서 ‘해방전사’라고 불렀는데, 중국공산당은 국공내전 이후 ‘해방전사’ 전원을 인민해방군에 편입시켰다고 한다. 또한 국민당군 군단장이 인민해방군에 투항하는 바람에 국민당군 군단 전체가 인민해방군 군단으로 편입된 사례도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되어 조선에 출병한 중국인민지원군의 약 50%가 ‘해방전사’들로 채워졌다는 것이다. 국공내전시기에 국민당군은 미국에서 지원받은 미국산 무기를 보유했으므로, ‘해방전사’ 출신 인민지원군에는 미국산 무기로 무장하고 조선에 출병한 장병들이 많았다. 일본군 패잔병들이 버리고 간 일본산 무기도 많았으므로, ‘해방전사’들 가운데는 일본산 무기로 무장하고 조선에 출병한 장병들도 많았다. 그런 까닭에 위의 인용문에서 중국인민지원군 포로는 자기 부대가 미국산 무기와 일본산 무기로 무장했다고 진술한 것이다.   

 

그러면 조선에 출병한 중국인민지원군은 미국군과 한국군을 상대로 어떻게 싸웠는지 살펴보자. 

 

▲ 이 사진은 항미원조전쟁에 참가한 중국인민지원군 전투원들이 상감령의어느 고지에서 승리의 환호성을 터쳐올리는 장면이다. 사진에 '상감령영웅진지'라고 한자로 쓴 패말이 보인다. 중국인민지원군은 삼각고지와 저격릉선을 합해 상감령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상감령에서 1952년 10월 14일부터 무려 43일 동안 혈전을 벌였다. 상감령전투는 중국인민지원군이 항미원조전쟁 중에 싸운 8대 혈전 중에서 가장 큰 승리를 거둔 전투다. 미국군과 한국군이 상감령에 쏟아부은 포탄 190만발과 폭탄 5,000발의 맹폭으로 산봉우리 표고가 2m나 낮아졌고, 중국인민지원군 11,529명, 미국군과 한국군 25,498명이 전사했다. 중국인민지원군 병사 황지광은 상감령 579.9고지에서 장렬하게 최후를 마치고 중국의 전쟁영웅으로 되었다.중국에서는 조국과 인민을 위해 불요불굴의 의지와 일치단결의 힘으로 난관을 극복하고 승리하는 상감령정신이 군대와 인민들 속에 널리 퍼졌다. 1956년에 나온영화 '상감령'의 마지막 장면에 울려나온 노래 '나의 조국'은 상감령정신을 음악적으로 형상한 명곡이며, 오늘도 중국 인민들이 즐겨 부르는 애창곡이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개막식에서 '나의 조국'이 연주되었다.  

 

1950년 11월 당시 서울에 주재하던 미국 <합동통신(UP)> 특파원의 보도기사를 인용한 <경향신문> 1950년 11월 6일 보도에 따르면, 미8군사령부 대변인은 11월 4일 오후 10시에 발표한 성명에서 적어도 2개 사단 이상의 중국인민지원군이 조선의 서북전선에서 미국군과 교전 중이라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확인하였다고 한다. 그로부터 닷새 전인 1950년 11월 1일 오전 9시 펑더화이 사령원은 중국인민지원군에 첫 작전명령을 하달했다. 그 작전명령에 따라 중국과 미국은 조선에서 사상 처음 격전을 벌였다. 첫 격전은 평안북도 운산지구에서 벌어졌다. 당시 운산지구에는 미국 육군 제1기병사단과 한국군 제1사단이 주둔했는데, 작전 당일에는 한국군 제1사단이 임무를 교대하기 위해 후방으로 빠졌고, 미국 육군 제1기병사단이 전방을 지키고 있었다. 

 

1950년 11월 1일 오후 5시, 중국인민지원군 제39군은 운산지구에서 미국 육군 제1기병사단을 포위하고 기습공격을 퍼부었다. 운산전투는 11월 3일까지 치렬하게 계속되었다. 포위당한 미국 육군 제1기병사단은 전투기의 공습지원과 전차부대의 지원을 받으며 포위망을 뚫고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을 쳤지만 탈출에 실패했다. 중국인민지원군 제39군은 운산전투에서 미국군 제1기병사단을 궤멸시키고, 포로 2,000여 명을 사로잡았으며, 항공기 3대를 격추했고, 항공기 4대를 노획했으며, 전차 28대, 각종 전투차량 170여 대, 각종 화포 119문을 파괴하거나 노획했다. 중국과 미국이 사상 처음으로 맞붙은 전투에서 중국은 미국의 기를 꺾었다. 운산전투가 중국인민지원군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난 직후, 펑더화이 사령원은 사기가 충천한 휘하 장교들이 참석한 총결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우리 지원군이 조선에 들어와 제1차 전투에서 승리했다. 이번 전투에서 15,800여 명의 적을 전멸시켰다. 마오 주석이 대단히 기뻐했다. 제공권이 없는 조건에서 미국군과 싸우는 전투가 우리에게 불리할 것으로 처음에 우려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보면 그런 곤란은 극복할 수 있다. 우리에게는 비행기가 없고, 대포와 전차가 부족하지만, 근접전과 야간전으로 싸우면 얼마든지 승리할 수 있다. 미국군은 대단한 군대가 아니다. 우리는 남조선위군만이 아니라, 미국에서 제일가는 군대, 조지 워싱턴이 건국 당시 창설했던 제1기병사단도 이겼다. 이 군대는 미국에서 유명하다. 이제까지 그들은 전투에서 져본 일이 없는데, 이번에 패했다. 우리 39군에 패했다.”

 

 

5. “전쟁으로 전쟁을 끝내야 한다.”

 

“폭약배낭을 등에 메고 나팔을 불며 기관단총을 쏘아대는 중국군이 밀려들었다. 그들은 우리 참호로 몸을 날려 들어와 자기의 몸과 우리 참호를 산산조각으로 폭파했다.” 

 

이 인용문은 6.25전쟁에 참전한 영국군 참전로병 케네스 켈드(Kenneth Keld)가 1953년 4월 28일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에서 벌어진 중국인민지원군과의 격전에서 겪은 체험을 서술한 것이다. 그의 체험담에서 중국인민지원군의 전투모습을 엿볼 수 있다. 그들은 폭약배낭을 등에 메고 적군의 참호로 돌진하는 자폭공격으로 싸웠다. 당시 세계 최강의 군대라던 미국군을 상대로 자폭혈전을 벌인 것이다. 

 

중국인민지원군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밤안개처럼 소리 없이 스며들어 계곡에 매복하였다가 어둠 속에서 피리를 불었다. 그들은 중국의 전통악기인 샤오(簫, 피리의 일종)나 디즈(笛子, 피리의 일종)를 사용했다. 멀리 어둠 속에서 들리는 피리소리는 적군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고도의 심리전이었다. 심리전에 걸려든 적군이 공포를 느끼고 있을 때, 중국인민지원군은 사방에서 나팔을 불고 북과 꽹과리를 치면서 매복전, 기습전, 포위전, 유인전, 우회전 같은 다양한 전술로 공격했다. 인해전술(人海戰術)은 중국인민지원군이 어둠 속에서 끊임없이 밀려드는 파상공격 앞에서 공포에 질린 한국군과 미국군이 만들어낸 말이다. 

 

한국 국방부가 1987년에 펴낸 전사자료에 따르면, 한국군은 중국인민지원군의 공격을 받으면 “밥을 먹다가도 숟가락까지 팽개치고 달아났다”고 한다. 미국 육군전사에는 “한국군은 중국의 피리소리 또는 중국인에 대해 본능적인 공포심을 갖고 있는지 모른다”고 서술되었다. 

 

중국인민지원군은 1950년 11월 24일 청천강 작전지구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한국군 제2군단을 궤멸시켰다. 한국군 연대장 3명이 생포되었고, 연대장 1명은 전사했으며, 전사자, 실종자, 포로를 합한 인명손실은 전체 병력의 60%에 이르렀다. 

 

1951년 5월 16일 강원도 인제군에서 벌어진 현리전투에서 중국인민지원군 전투원 100여 명은 한국군이 방어하던 오미재를 점령했다. 곧이어 조선인민군 제5군단, 중국인민지원군 제12군단과 제27군단은 한국군 제3군단 25,000명을 포위했다. 기겁한 한국군 제3군단 군단장은 부군단장에게 지휘권을 넘기고, 혼자 연락기를 타고 후방으로 도주했다. 한국군 제9사단 사단장도 휘하장병들을 포위망 속에 버리고 도주했다.

 

한국군 군단이 거듭하여 궤멸되는 참상을 보고 경악한 당시 미8군사령관 제임스 밴플리트(James A. Van Fleet)는 자기 상관 맥아더에게 오합지졸군대의 작전지휘권을 빼앗아야 한다고 건의했다. 그 건의를 받아들인 맥아더는 이승만에게 연락하여 한국군이 궤멸당하는 것을 더 이상 볼 수 없으므로 작전지휘권을 자기에게 넘기라고 강박했고, 이승만은 “장군이 요구하신대로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쓴 치욕의 이양각서를 맥아더에게 보냈다. 그렇게 넘어간 한국군 작전지휘권은 그로부터 70여 년이 지난 오늘도 여전히 주한미국군사령관이 틀어쥐고 있다. 

 

▲ 위의 사진은 2020년 9월 조선이 중국인민지원군 조선전선참전 60돐에즈음하여 발행한 기념우표다. 1950년 10월 조선출병을 결정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이 전당, 전군, 전민에게 제시한 '항미원조보가위국'이라고 한자로 쓴전투적 구호가 조선우표에 선명히 새겨졌다. 조선과 중국은 그 전쟁에서 함께 피를 흘리며 핵제국의 침공에 맞서 싸웠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어전쟁의 포성은 멎었지만,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로부터 70여 년이 지난 오늘 조선과 중국은 끝나지 않은 전쟁을 끝내려고 한다. 동아시아정세는 매우 긴장되었다.  

 

한국군 육군본부가 2009년에 발간한 전사자료에 따르면, 6.25전쟁 중에 한국군 2개 군단이 궤멸되었다고 하는데, 궤멸된 2개 군단은 위에 서술한 제2군단과 제3군단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궤멸된 제2군단 군단장도 유재흥이고, 궤멸된 제3군단 군단장도 유재흥이라는 사실이다. 2개 군단을 궤멸시키고, 자기 혼자 연락기를 타고 도주한 패장 유재흥은 군사재판에 회부되기는커녕, 육군참모차장, 군단장, 참모총장 직무대리로 계속 승진했다. 

 

1921년 일본 나고야(名古屋)에서 태어난 유재흥은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 대좌로 복무한 친일파다. 1914년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 대좌로 복무한 친일파 유승렬이 그의 아버지다. 유승렬은 자기 아들 유재흥을 일본인으로 키우는 동안 우리말을 전혀 쓰지 못하게 금하고, 일본말만 쓰게 했기 때문에 유재흥은 우리말을 전혀 하지 못했다. 그래서 6.25전쟁 중에 유재흥은 일본어 통역관을 데리고 다니며 한국군을 지휘했다. 

 

일본육군사관학교 제57기 졸업생 박정희는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찬탈하고 나서, 일본육군사관학교 제55기 졸업생 유재흥을 국방장관에 임명했다. 유승렬, 유재흥, 박정희만이 아니라 수많은 일본군 출신들과 일제의 만주괴뢰군 출신들이 미군정의 비호와 지시 아래 한국군 고위지휘관으로 임관되어 6.25전쟁에 참전했다. 6.25전쟁 당시 한국군은 친일파 소굴이었다. 

 

육해공군총사령관 (일본군 출신 채병덕)

제1보병사단 사단장 (만주괴뢰군 출신 백선엽)

제2보병사단 사단장 (일본군 출신 이형근)

제3보병사단 사단장 (일본군 출신 유승렬)

제5보병사단 사단장 (일본군 출신 이응준)

제6보병사단 사단장 (일본군 출신 김종오)

제7보병사단 사단장 (일본군 출신 유재흥)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 (일본군 출신 이종찬)

 

이런 역사적 사실을 생각하면, 6.25전쟁의 내전적 측면은 조선인민혁명군 출신 항일세력과 일본군 출신 친일세력의 싸움이었고, 6.25전쟁의 국제전적 측면은 중국과 미국의 싸움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2년 9개월 동안 한반도에서 제1차 대미항전을 벌인 중국은 그로부터 70여 년이 지난 오늘 대만해협과 동중국해에서 제2차 대미항전을 예상하고 있다. 중국의 항미원조전쟁도 정전상태로 남아있고, 중국의 대만해방전쟁도 정전상태로 남아있다. 2020년 10월 23일 ‘중국인민지원군 항미원조 출국작전 70주년 기념대회’가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진행되었다. 중국 전역에 생중계된 대회에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연설하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 “전쟁으로 전쟁을 끝내야 한다(以戰止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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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기억공간’ 철거 예고일, 서울시 “오늘 철거 계획 변한 것 없어”

광화문으로 몰려든 ‘보수 유튜버’들, “용역 깡패 동원해라” 막말

광화문 광장 재구조화 공사를 위해 '세월호 기억공간' 철거를 앞둔 26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 광장 세월호 기억공간 앞에서 서울시 김혁(오른쪽) 총무과장이 4.16연대 김선우 사무처장에게 자진 철거를 요구하고 있다. 2021.07.26.ⓒ뉴시스

 서울시가 광화문광장 안 세월호 기억공간 철거를 예고한 26일 서울시 공무원이 협조를 요청하는 내용의 공문을 전달하려 왔지만, 유가족의 거부로 그냥 돌아갔다. 서울시는 이날 세월호 기억공간을 철거한다는 계획에는 변함이 없다는 입장이다.

김혁 서울시 총무과장은 이날 오전 7시반경 서울 광화문광장 세월호 기억공간을 혼자 찾아 유가족 측에 철거 협조 공문을 전달하려 했다.

김 총무과장은 기자들에게 "새벽같이 철거할 계획은 없다"면서 "지금은 일단 서로 몸싸움 같은 걸 하지 않고 자진 철거해 주십사 설득하기 위해 저 혼자 온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유가족 측의 거부로 김 총무과장은 공문을 전하지 못하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4.16연대 김선우 사무처장은 김 총무과장에게 "(유가족들이) 안 만나겠다고 한다. 가족협의회와 4.16연대는 기존 입장에서 변화가 없다"고 말했다.

앞서 유가족 측은 지난 23일 기자회견을 통해 세월호 기억공간을 공사의 영향을 받지 않는 곳에 이전할 것과 새로운 광화문광장에 기억공간을 어떻게 반영해 운영할지를 협의할 것을 서울시에 요구했다.

 

김 총무과장은 "(공문을) 안 받겠다고 하시니 강권할 수 없지만, 오늘이 예고한 철거 마지막 날"이라며 "저희로서는 가족들의 마음은 공감하기 때문에 불상사 없이 전시물 이동과 철거가 되길 바라고 협조해달라고 전달해 달라"고 말했다.

이에 김 사무처장은 "가족협의회와 4.16연대는 이전부터 말해 온대로 광화문공사를 막자는 게 아니라 공사가 원활하게 할 수 있게 충분히 이전할 수 있고, 이후 운영과 관련해 협의하자는 입장을 다시 한번 전달 드린다"고 답했다.

발길을 돌린 김 총무과장은 기자들에게 "저희들 기본 방향은 오늘 중으로 철거한다는 것"이라며 "다만 최대한 몸싸움이라든지 불상사 없이 최대한 설득하는 과정을 통해 철거한다는 게 기본 방침"이라고 말했다.

유가족 측의 협의 요구를 수용할 가능성에 대해선 "(서로) 입장차는 있겠지만 서울시는 기억공간이 만들어질 때부터 한시적으로 운영한다고 계획했던 것이고 그것이 연장돼서 이 시점까지 온 것"이라며 "예정된 행정이 처리되는 것에 대해서 지금 시점에서 재논의나 TF(태스크포스) 구성 등은 기본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선을 그었다.

이어 "행정이 그렇게 진행되면 다른 행정에 대해서도 서울시가 아무 일도 할 수 없기 때문에 일단 당초 정해진 방침 따라 진행되는 행정 처리 절차는 예정대로 진행돼야 한다"면서 "이전이나 재설치 전제한 협상은 있을 수 없다는 서울시의 일관된 방침"이라고 재차 확인했다.

김 총무과장은 이날 철거계획에 대해선 "오늘은 철거하기로 한 날이기 때문에 철거해야 하겠지만 가급적 설득한다는 게 기본 방침이기 때문에 다시 방문할지는 상황을 보고 결정해야겠다. 지금은 일정을 확정적으로 말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날 오전 세월호 기억공간 앞에는 전날 밤부터 찾아온 보수 유튜버 등이 '세월호 철거하라'고 고함을 치고 있어 소란스러운 상황이다.

이들은 확성기 등을 이용해 유가족과 시민단체 활동가들을 향해 "자식들 데리고 나와", "용역깡패 동원해서 철거하라" 등 막말을 외치기도 했다.

유가족과 시민단체 활동가들은 지난 23일부터 서울시의 철거 작업을 막기 위해 기억공간 앞에서 농성을 진행 중이다.

광화문 광장 재구조화 공사를 위해 '세월호 기억공간' 철거를 앞둔 26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 광장 세월호 기억공간 앞에서 보수단체 한 회원이 펜스 가까이 다가가 규탄발언을 하자 경찰이 제지하고 있다. 2021.07.26.ⓒ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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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광주·대구·부산·제주 “한미연합군사훈련 중단하라”

편집국 | 기사입력 2021/07/25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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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한미연합군사훈련 중단, 송정 군공항 폐쇄”

 

▲ 송정 군공항에서 송정역까지 행진하는 참가자들.   © 나규복 통신원

 

© 나규복 통신원

 

▲ 한반도 전쟁을 멈추자!  © 나규복 통신원

 

© 나규복 통신원

 

광주전남진보연대는 24일 오후 4시 송정리 군 공항 정문 앞에서 ‘한미연합군사훈련 중단’을 요구하는 집회를 열었다. 

 

집회에서는 코로나19 확산하려는 주한미군을 규탄하고, 송정의 군공항을 폐쇄하라는 요구가 나왔다. 

 

또한 주한미군 철수와 한미연합군사훈련 중단을 촉구했다. 

 

집회 후에는 참가자들이 송정역까지 행진했다. (나규복 통신원)

 

대구 “한미연합군사훈련 중단, 불법 사드 철거”

 

▲ 24일 오후 3시 대구 동성로 한일극장 앞에서 열린 ‘정전협정 68년, 전쟁을 끝내자! 한미연합군사훈련 중단! 불법사드 철거! 미군기지 환경오염 문제 해결! 대구경북행동’  © 조석원 통신원

 

▲ 22일부터 24일까지 활동한 대구경북통일선봉대 모습.  © 조석원 통신원

 

▲ 대경대진연 회원들의 율동.  © 조석원 통신원

 

▲ 미군기지 환경오염 문제 선전물을 배포하는 대구경북통일선봉대.  © 조석원 통신원

 

8.15대구경북추진위는 24일 오후 3시 대구 동성로 한일극장 앞에서는 ‘정전협정 68년, 전쟁을 끝내자! 한미연합군사훈련 중단! 불법사드 철거! 미군기지 환경오염 문제 해결! 대구경북행동(이하 대구경북행동)’을 개최했다.

 

대구경북행동에서는 ‘한미연합군사훈련 중단과 남북합의 이행’, ‘불법사드 철거’, ‘미군기지 환경오염 문제 해결’ 등의 요구가 나왔다.

 

특히 ‘한미연합전쟁연습 중단! 불법사드 철거! 캠프워커를 온전히 시민의 품으로! 2021 대구지역통일선봉대’는 대구 캠프워커 미군기지 반환부지 환경오염을 알리기 위해 캠프워커 주변 주민과 상가를 대상으로 환경오염 실태 홍보물을 배포하는 활동을 했다. 대구지역 통일선봉대는 22일부터 이날(24일)까지 활동을 했다. (조석원 통신원)

 

부산 “한미연합군사훈련 영구 중단하라”

 

▲ 성조기를 찢는 참가자들.  © 이선자 통신원

 

▲ 코로나 주한미군과 연합훈련은 재앙!  © 이선자 통신원

 

▲ 총 든 자유여신상.  © 이선자 통신원

 

▲ 맥아더 포고령을 든 자유여신상.  © 이선자 통신원

 

©이선자 통신원

 

부산경남주권연대는 24일 오후 5시 부산 미 영사관 앞에서 ‘한미연한군사훈련 영구 중단을 촉구하는 항의행동(이하 항의행동)’을 진행했다. 

 

항의행동 참가자들은 총을 든 ‘자유의 여신상’, 맥아더의 포고령을 들고 있는 ‘자유의 여신상’, 우산으로 ‘전쟁훈련반대’ 등 다양한 상징물로 한미연합군사훈련 중단을 요구했다. 

 

항의행동 참가자들은 대형성조기를 찢는 상징의식을 진행했다. (이선자 통신원)

 

제주 “한미연합군사훈련 반대, 평화협정 체결”

 

▲ 제주시청 앞에서 진행된 선전전.  © 고경하 통신원

 

© 고경하 통신원

 

©고경하 통신원

 

6.15 제주본부는 24일 오후 6시 제주시청 앞에서 ‘한미연합훈련 반대! 평화협정 체결 촉구! 제주 집중선전전’을 벌였다. 

 

제주지역 단체 회원들은 구호가 적힌 선전물과 현수막을 들고 선전전을 진행했다. (고경하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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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문 ‘문자폭탄’에 한겨레·경향 “옳지 않아” “안타까워”

[아침신문 솎아보기]
조선일보 또 노동계 비판 기사 ‘정정보도’... 언론인 금품수수 조사 또 침묵한 조선·중앙

한겨레·경향 법사위 양보 ‘긍정 평가’, 문자폭탄에 ‘우려’

여야가 지난 23일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직을 21대 후반기 국회가 시작하는 내년 6월부터 국민의힘이 맡는 것으로 합의했다. 현재 더불어민주당이 독식하고 있는 18개 상임위원장직도 여야가 의석수에 비례해 11 대 7로 조정하기로 했다. 

또한 여야는 법사위가 법안 내용 자체를 바꾸는 ‘상왕’ 역할을 하지 않도록 심사 기능을 제한하기로 합의하기도 했다. 법사위는 다른 상임위에서 올라온 법안의 법적 적절성을 심사하는 기능을 갖고 있는데, 이를 벗어나 법안의 내용까지 건드리면서 ‘상임위 위의 상임위’ 역할을 해왔다. 법사위 기능 조정은  여당이 ‘일하는 국회법’으로 추진해온 방안과 일맥상통한다. 

▲ 26일 세계일보 기사
▲ 26일 세계일보 기사

이번 결정에 진보성향 신문인 한겨레와 경향신문이 나란히 사설을 싣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한겨레는 사설을 통해 “1년2개월 동안 이어진 여당의 상임위원장 독식 구도를 해소하고, 협력과 상생 정치의 밑돌을 놓았다는 점에서 환영한다”며 “대화와 타협이란 의회 정치의 본령에 부합할 뿐 아니라, 코로나 재난 장기화라는 국가 위기 상황에서 국회가 민생 입법이란 제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고 평가했다.

경향신문 역시 “21대 국회가 개원한 지 14개월 만에야 상임위원장 배분이 마무리되고, 협치의 발판이 만들어졌다”며 “코로나19 4차 대유행이 길어지는 국가적 위기 속에서 여야가 따로 있을 수 없다. 상임위원장 배분과 2차 추경에 합의한 협치도 더욱 속도가 붙고 폭이 넓어지길 기대한다”고 했다.

▲ 26일 한겨레 사설
▲ 26일 한겨레 사설

두 신문은 공통적으로 ‘문자 폭탄’을 경계하는 입장을 내기도 했다. 여당 일부 지지자들이 법사위원장을 넘긴 여당 지도부와 찬성 의견을 낸 의원들에게 ‘문자 폭탄’을 보냈다. 

경향신문은 “여당의 강성 당원들이 법사위원장을 넘긴 여당 지도부와 의원총회에서 찬성한 의원들에게 문자폭탄을 퍼붓고 있다”며 “자유로운 의사 표출은 당원의 권리이지만, 협치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지적했다. 한겨레 역시 “안타까운 일”이라며 “‘개혁 완수’를 바라는 열정의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정당 중심의 민주정치가 원활히 작동하려면 지도부의 리더십과 의원 다수의 판단 또한 존중돼야 한다”고 했다.

조선일보 또 노동계 비판 기사 ‘정정보도’

조선일보가 노동계를 비판한 “12년째 증차 불허, 레미콘 기사에 휘둘리는 건설업계”(5월10일) 기사를 ‘정정보도’했다. 언론중재위 조정 결과에 따른 것인데, 조선일보의 노동계 기사 정정보도가 반복되고 있다.

앞서 조선일보는 정년 폐지, 경조금 등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석천레미콘 공장이 3개월 째 가동되지 않고 있고, 파업으로 인해 폐업에 처했다고 보도했다. 조선일보는 “공장 입구 약 20m 길 양쪽에는 민노총 건설노조가 붙여 놓은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며 민주노총을 비판적으로 언급하기도 했다.

▲ 26일 조선일보의 정정보도문
▲ 26일 조선일보의 정정보도문

조선일보는 정정보도문을 통해 “석천레미콘 공장이 3개월째 멈춰 서 있다고 보도했으나, 확인 결과 이 공장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며 3개월간 레미콘 운행을 전면 중단한 적은 없기에 바로잡는다”고 밝혔다. 또한 조선일보는 “지입차주 5명이 원직 복직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인 것이고, 노조 측은 경조비·휴가비 지급과 정년 폐지 등을 요구하지 않았다”는 노조 입장을 전했다.

조선일보의 ‘노동계 비판 기사’ 정정보도는 반복되고 있다. 지난해 7월 조선일보는 인천공항 카트노동자들이 “명분 없이 파업을 선언”한 뒤 열흘 째 “무늬만 파업” 중이고, 사측을 상대로 금품을 요구했다고 보도했으나  론중재위원회 조정 끝에 자사 보도를 대거 바로잡았다.

조선일보는 지난해 3월9일 “민주노총 산하인 서울대병원 노조가 우한 코로나 사태 와중에 노조 교육이라며 단체 휴가를 내고 딸기 따기 체험을 가 논란”이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노조는 코로나19 확산에 따라 딸기밭 체험을 취소한 것으로 드러나 조선일보는 이 보도를 정정했다.

언론인 금품수수 조사 또 침묵한 조선·중앙

자사 언론인이 연루된 언론인 금품수수 로비 의혹에 대해 조선일보와 중앙일보의 소극적 보도가 반복되고 있다. 

서울경찰청 강력범죄수사대는 25일 오전 10시경부터 오후 8시40분까지 TV조선 정아무개 기자가 김모씨로부터 학비 일부를 대납 받은 경위 등을 조사했다. 또한 경찰은 24일에는 이가영 전 중앙일보 논설위원을 조사해 김씨로부터 BMW와 국산 차량 등 고가의 렌터카를 제공 받은 혐의에 대해 조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 26일 동아일보 기사 갈무리
▲ 26일 동아일보 기사 갈무리

이날 동아일보(“가짜수산업자 금품 의혹 언론인 2명 조사”), 세계일보(“가짜 수산업자 금품수수 의혹 기자 소환”), 한겨레(“경찰, 가짜 수산업자 금품 수수 혐의 종편 기자 소환조사”), 한국일보(“가짜 수산업자 금품수수 6명 조사 경찰, 박영수 전 특검도 조만간 소환) 등이 관련 보도를 했다. 자사 언론인이 연루된 조선일보와 중앙일보는 관련 보도를 하지 않았다. 

MBC 개회식 중계 논란에 “제 정신인가” 비판까지

MBC가 도쿄 올림픽 개회식 선수단 입장을 중계하면서 우크라이나를 소개하며 체르노빌 핵발전소 사고 현장 화면을 쓰는 등 부적절한 자료화면을 내보내 비판을 받았다. MBC는 사과문을 내고 ‘조사’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 26일 중앙일보 기사 갈무리
▲ 26일 중앙일보 기사 갈무리
▲ 26일 MBC 비판 사설 제목들
▲ 26일 MBC 비판 사설 제목

이날 아침신문들은 높은 강도로 MBC를 비판했고, 3개 신문사가 MBC를 비판하는 ‘사설’을 냈다.

국민일보는 “MBC 올림픽 중계 국제적 망신...책임자 문책해야” 사설을 내고 “국제적 망신”이라며 “방송사 차원을 넘어 대한민국 전체에 대한 조롱을 불러일으켰다”고 비판했다. 국민일보는 “MBC는 사안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일련의 과정을 철저히 조사해 관련자를 문책해야 할 것”이라고 요구했다. 동아일보 역시 “국제적인 망신” “다른 나라에 대한 결례이자 나라 망신”이라고 비판했다. 동아일보는 MBC에 제대로 된 자체 조사 뿐 아니라 방송통신위원회,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차원의 대응을 촉구했다.

서울신문은 “MBC의 몰상식한 올림픽 중계, 제정신인가”사설을 통해 부적절한 자료화면 사용 뿐 아니라 “MBC는 자막으로 각국의 백신 접종률도 제시했는데, 백신 편중 현상이 심해 저소득국이 크게 고통받는 상황에서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이해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 26일 1면 모음
▲ 26일 1면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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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ECD 1위 한국에서 굽어보다...'한강 다리에 간다'는 말

포토스케치] OECD 평균의 2배... 자살률 또 1위

 

19일 보건복지부는 'OECD 보건통계(Health Statistics) 2021'을 인용해 한국의 자살사망률이 OECD 국가 중 가장 높다고 발표했다. 10만 명당 24.7명으로 OECD 평균인 11명의 두 배 이상이다. 유엔의 비OECD 국가의 자살률 추정치를 봐도 한국보다 높은 나라는 없다. 통계청의 자료를 덧붙이자면, 2019년 자살사망자 수는 13,799명으로 하루 평균 37.8명이었다. 38분마다 한 명이 자살하는 셈이다. 남자의 자살률은 여자보다 2.4배 높았고, 20대 여성의 자살률은 2018년 대비 25% 증가했다.

 

자살에 대해 말하기는 쉽지 않다. 누군가의 절망과 고통을 쉽게 비난할 수도, 그 선택을 존중한다고 말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긍정도 무조건적인 비난도 하기 어렵다. 그 원인을 따지는 것도 쉽지 않다. 흔히 말하는 우울과 신변 비관은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다. 그 배경에 무엇이 있는지 알기 어렵다. 역사부터 사회적 풍토까지 전부 들추어 연구한다 해도 결론을 내기는 쉽지 않다. 다만 분명한 것은 자살률이 유난히 높은 사회는 덜 건강한 사회일 수 있다는 점이다.

 

'한강 다리에 가다'는 이제 관용어가 됐다. 흔한 말 속 그 한강 다리에 가봤다. 무더위와 코로나가 정점을 찍던 22일, 누군가에게는 벼랑 끝이었을 다리 위 풍경을 사진에 담았다.


 

▲ 19일 보건복지부는 경제협력기구가 발간한 'OECD 보건통계(Health Statistics) 2021'를 인용해 한국의 자살률이 OECD 국가 중 1위라고 발표했다. OECD 평균인 11명의 2배를 넘는다. 한국의 자살률은 2009년 10만 명당 33.8명에서 2017년 23명까지 지속적으로 감소하다 2018년 소폭 상승했다. ⓒ프레시안(최형락)
 
▲ 10대, 20대, 30대의 사망 원인 1위, 40대, 50대의 사망원인 2위(1위 암)가 자살이다. ⓒ프레시안(최형락)

 
▲ 한강대교는 현재 안전 난간 공사가 진행 중이다. 오른쪽이 새 난간으로 높이가 높아지고 윗부분이 회전해 올라가기 어렵게 만들어졌다. ⓒ프레시안(최형락)
 
▲ 한강대교는 마포대교와 함께 자살사고가 많이 발생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프레시안(최형락)
 
▲ 한강대교에서 내려다 본 풍경. 멀리 한강철교가 보인다. ⓒ프레시안(최형락)
 
▲ 사람들이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이유를 저마다 생각해 보려는 마음 말고 다른 답이 있을까? ⓒ프레시안(최형락)

 
▲ "당신의 영화, 이제 시작입니다"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최형락)
 



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1072301094008345#0DKU 프레시안(http://www.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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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시위와 대북전단 금지법의 상호관계

  • 기자명 한국진보연대 자주통일위원회
  •  
  •  승인 2021.07.24 09:29
  •  
  •  댓글 1
 
 
 
 

자주의길(5) 쿠바 시위의 본질과 미국의 개입

쿠바에서 시위가 일어나자 미국이 축배를 들고 있다. 미국은 22일 쿠바 국방장관과 시위를 진압한 특수부대를 제재 명단에 올렸다고 밝혔다. 바이든 대통령은 성명을 내고 “쿠바 시민들을 억압하는 책임자들을 계속 제재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쿠바는 미국 마이애미에서 불과 200여 km 떨어져 있다. 쿠바는 미국이 호시탐탐 노리던 곳이다. 특히 미국의 건국 원로 토마스 제퍼슨은 쿠바를 합병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합병이 순탄치 않음에도 경제를 잠식하며 ‘자연스러운 합병’을 추진했다. 미국의 자본이 쿠바의 경제 전반을 장악하고 독립 후 들어선 마차도, 바티스타 정권의 폭정이 이어진 쿠바는 차베스와 카스트로의 혁명이 성공하면서 사회주의 국가가 되었다.

쿠바 혁명이 성공한 이후 미국은 쿠바와 국교를 단절하고 수많은 제재를 가했다. 케네디 대통령 때 미국계 쿠바인 1500명을 침투시켜 카스트로 정권을 전복하는 ‘피그스만 침공’을 감행하기도 했다. 이후 모든 경제교류와 외교 관계가 중단되고 여행금지 등의 제재가 내려져 미국인들에게 쿠바는 갈 수 없는 곳이 되었다. 1992년에는 쿠바 투자 봉쇄 조치와 쿠바 출신 미국인들의 송금 차단 조치가 내려졌다.

미국은 자신들을 반대하는 국가를 베트남,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처럼 전쟁을 통해 굴복시키려고 한다. 칠레의 아옌데 정부에 대해서는 경제적 협력거부와 파업, 태업, 물가인상 조장으로 타격을 주고 쿠데타를 지원했다. 또한 CIA 등을 통해 주요 인물 포섭, 여론 조작 등으로 다른 나라의 정부를 쥐락펴락 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이번 쿠바 시위에 미국이 개입한 것이라는 의혹이 타당한 이유이다.

오늘날 미국은 각국의 시민단체를 지원하는 방식으로 과거 CIA가 했던 일을 대신하고 있다. 미 국무부 예산안 중에 ‘경제적 지원 기금’과 ‘민주주의 기금’은 다른 국가들을 입맛에 맞게 요리하기 위한 기초예산이다.

미국은 2022년 회계연도 예산안을 확정하면서 ‘북 주민들의 인권 증진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또한 국제방송운용 조항에 따른 예산으로 대북 방송 시간을 전 회계연도 수준 이상으로 유지하는 데 사용하도록 했다.

이후 미국 국영방송인 미국의소리(VOA)는 또 다시 대북전단 금지법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7월 14일 이른바 전문가라는 몇몇의 주장을 인용해 “한국 정부 유엔과 공방까지 벌여 실망”이라는 기사를 냈다. 22일에는 한국 정부의 대북 인권 정책이 “국제 역사 교훈과 역행”한다고 주장했다.

미 국무부는 2016년부터 2019년까지 4년동안 탈북단체들에 127억 6000만원을 지원했다. 또한 지성호가 대표로 있던 탈북 단체인 ‘나우’가 국무부가 설립한 ‘민주주의를 위한 국가기금(NED)’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은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대북전단 살포도 미국으로부터 재정지원을 받은 정황이 있다.

쿠바 시위에 대한 환호와 대북전단 금지법에 대한 비판은 자신을 반대하는 정권을 무너뜨리려는 미국의 수작이라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강압적인 행동을 하든 신사적인 가면을 쓰든 미국이 제국이라는 것은 변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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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국무부 “한국에서 CEO 감옥 갈 수도”... 대기업 입장 두둔한 보고서 논란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21/07/25 11:25
  • 수정일
    2021/07/25 11:25
  • 글쓴이
    이필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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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법이 오히려 강력, ‘이중잣대’로 서술... 김영배 의원, “질 좋은 환경 추구하는 것이 글로벌 추세”

미국 워싱턴의 미 국무부 건물. (자료 사진)ⓒ미 국무부 공개 사진

 미국 국무부가 우리나라에 대한 투자 환경 보고서를 발표하면서, 일방적으로 대기업 측 입장만 두둔한 내용으로 기술해 논란이 예상된다.

미 국무부는 21일(현지 시간) 한국을 포함해 전 세계 170개국을 대상으로 ‘2021 투자 환경 보고서’를 발표했다. 하지만 한국에 관해서는 불투명한 규제의 문제점 등을 지적하면서 대기업 측 입장에만 치우친 서술로 일관했다.

미 국무부는 우선 “한국 국회의 중소기업 환경 보호와 증진에 관한 입법이 외국 기업에 불리함을 안겨주는 새로운 무역 장벽을 창출했다”고 규정했다. 우리나라의 중소기업 보호와 육성에 관한 법률 등이 외국 기업의 투자 환경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이미 1953년부터 ‘중소기업법’을 제정해 강력하게 중소기업을 보호하고 있는 나라는 미국이다. 미국 중소기업청(SBA)은 미국 연방의 핵심 기구이다. 미국은 코로나19 사태가 확산하자 ‘중소기업을 위한 급여보호프로그램(PPP)’ 등을 통해 천문학적인 자금을 중소기업에 지원하기도 했다.

미 국무부는 또 “(한국) 행정부가 불법적으로 규제 시행에 관한 지침을 공표하거나, 규제 당국이 구두나 내부 지침으로 법적 강제력을 부과해 외국 회사에 부담으로 작용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결과적으로, 한국 국회에서 모든 새로운 법안의 80%가 엄격한 영향평가나 공청회 없이 통과된다”고 막무가내식으로 적었다. 하지만 미 국무부는 이에 관해서도 해당 보고서에서 어떠한 근거도 내놓지 않았다.

미 국무부는 “한국 정부가 법을 위반할 경우 벌금이나 형사 기소를 통해 규제를 강화하고 있다”면서 “(외국 기업의) 한국 지사장들은 회사의 모든 행위에 법적 책임을 지고 체포되거나 기소될 수 있다”고 언급했다.

그러면서 “외국의 CEO들은 한국에서 그들이 사업을 진행하는 데 이러한 점이 중대한 부담으로 작용한다고 언급한다”고 덧붙였다. 이어 최근 한국에서 제정된 중대재해처벌법(SAPA) 등을 기술했다.

지난 2001년 당시 미국 7대 기업이었던 엘론에서 분식회계 및 부정 혐의로 기소된 제프리 스킬링 CEO가 지난 2006년 4월 법정에 출두하고 있다. 그는 24년 4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자료 사진)ⓒ뉴시스, AP통신

이는 마치 유독 한국에서만 기업 CEO가 형사 처벌을 받을 위험성이 높다는 것을 강조한 일방적인 주장이다. 미국도 연방법인 ‘산업안전보건법’이 존재하고 노동부 산하에 직업안전위생관리국(OSHA)이 막강한 권한으로 불시에 점검해 엄청난 벌금을 부과한다.

또 각 주별로도 산업안전과 관련한 각각의 관련 법을 제정해 처벌 규정을 강화하고 있다. 캘리포니아주의 경우는 노동자 사망하는 기업주는 최대 3년의 징역형에 처하거나 25만 달러(약 2억9천만 원)의 벌금에 처할 수 있다.

미국 기업주는 산업재해만이 아니라, 결산보고서 하나도 감옥에 가겠다는 각오로 서명해야 한다. 실제로 2001년 미국 7대 기업이었던 엔론을 분식회계 처리한 제프리 스킬링 CEO는 징역 24년 4개월을 선고받기도 했다. 한국이 오히려 기업 CEO가 면죄부를 받기 좋은 나라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이다.

미 국무부는 이번 보고서에서 근로기준법이나, 소비자보호법, 공정거래법, 비정규직법, 중대재해처벌법 등이 마치 외국계 기업을 겨냥한 것처럼 노동시장 경직성을 초래해 투자 환경에 막대한 장애가 된다는 뉘앙스로 기술했다. 하지만 해당 법률은 오히려 미국이 더 강력하다는 점에서 이중잣대인 셈이다.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인 김영배 의원. 2021.06.14ⓒ정의철 기자/공동취재사진

이에 관해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인 김영배 의원은 23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규제가 없는 나라는 없고 미국도 규제가 있기 때문에 시장 경제가 발전한 나라”라면서 “세계는 기후 위기 등 글로벌 기준에서도 사람의 생명, 노동 현장의 안전 등을 다수의 이해 관계자들이 함께 노력해서 질 좋은 환경을 추구하는 추세”라고 말했다.

김 의원은 그러면서 “중대재해처벌법만 하더라도 처벌만 주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노사협의체 등 민간과 기업이 함께 해결할 수 있는 시스템을 도입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라면서 “오히려 우리나라는 산업화 과정에서 도입이 늦은 점이 있는데, 미 국무부 보고서는 우리나라의 상황을 전혀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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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전쟁훈련 완전 중단, 평화수호대회’ 온라인으로 열려

평화수호농성단 | 기사입력 2021/07/25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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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 대사관을 배경으로 한 평화수호농성단의 율동 공연 모습.  © 평화수호농성단

 

▲ 온라인으로 열린 평화수호대회  © 평화수호농성단


한미전쟁훈련 완전중단을 촉구하는 온라인 집회가 열렸다.

 

‘한미전쟁훈련 반대, 대북적대정책 철회를 위한 평화수호 국민농성단(이하 평화수호농성단)’은 24일 평화수호대회를 온라인으로 진행했다.

 

평화수호대회는 줌(Zoom)과 유튜브, 페이스북 라이브를 통해 생중계됐다.

 

평화수호대회에서는 곳곳에서 한미전쟁훈련 중단을 위해 활동하는 사람들이 출연했다. 

 

부산에서 참가한 공은희 부경주권연대 운영위원장은 “훈련중단을 촉구하기 위해 회원들과 미 영사관 앞에 나왔다”라며 “세균실험에 이어 또다시 우리 국민의 목숨을 위협하며 전쟁훈련을 하려는 미국을 규탄한다”라고 말했다.

 

▲ 부산 미 영상관 앞에서 우산으로 '전쟁훈련 반대' 선전물을 만든 부산 참가자들.   © 평화수호농성단

 

남영아 평화수호농성단 단장은 “미 대사관 앞에 스피커와 TV를 설치해 우리의 주장을 전달하고 있다”라며 “농성단은 매일 (미 대사관 앞)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응원과 참여를 바란다”라고 호소했다. 

 

그리고 미군기지의 온전한 반환을 위한 목소리도 나왔다. 

 

의정부 미군기지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며 참가한 김준성 씨는 “245만 평이나 되는 의정부 기지 부지를 미군은 돌려주지 않겠다고 한다”라며 미군을 규탄했다. 

 

용산에 거주하는 최명희 씨는 영상을 통해 “미국은 미 대사관을 용산기지로 이전하려 한다”라면서 “2만 평이 넘는 부지를 미 대사관에 제공한다는 사실은 용납할 수 없다”라고 주장했다.

 

또한 대회에는 다양한 공연도 준비됐다.

 

평화수호농성단은 미 대사관을 배경으로 촬영한 ‘투쟁은 멈추지 않으리’ 율동 영상을 선보였으며 권말선 시인은 ‘전쟁은 가라!’를 낭송했다. 노래악단 ‘씽’에서는 노래 ‘두르려’와 ‘청춘을 다 바쳐’를 불러 참가자들의 흥을 돋웠다.

 

▲ 평화수호대회 참가자들.  © 평화수호농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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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나면 다 죽는다 양키군대도 우리군도 위험하다

전쟁나면 다 죽는다 양키군대도 우리군도 위험하다

 

                                                                                           언론지키기천주교모임 이풀잎

 

위기의 8월이 다가오고 있다엄청난 불장난 같은 위태로운 [한미연합 군사훈련]이 오는 8월 10일부터 진행될 것으로 알려졌다주권방송은 박한식 조지아대 명예교수의 대담 방송에서 한미연합 군사훈련의 위험성을 짚었다.

 

남북·북미관계가 교착된 상황에서 한미 양국이 북한을 대상으로 하는 군사훈련을 강행한다면한반도 정세는 걷잡을 수 없는 형국에 빠질 것이라는 우려가 있다그래서 국내외 단체들은 한미 양국에 한미연합 군사훈련 중단을 요구하고 있다.‘

 

 ’박 교수는 “8월에 한미연합 군사훈련을 하게 되면 북쪽에서 가만있을 수가 없다라고 주장했다그리고 박 교수는 현재 미국이 경제·정치·여론 면에서 새로운 전쟁을 감당할 능력이 없으며만약 전쟁이 일어난다면 미국은 회복하기 힘든 참화를 겪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또한 박 교수는 남북관계는 이제 많이 틀어져서 다시 복구하기가 좀 어렵다그래서 이것을 복구하는 데는 미국의 아주 적극적인 호응과 협조가 필요하다라고 주장했다.‘

 

이어 박 교수는 통일이 되어야 진정한 평화가 온다고 강조했다. ”

 

박 교수는 통일을 향하지 않으면 진정한 평화가 되지 않는다전쟁 안 하는 것을 평화라고 하면 우리는 70년 동안 전쟁을 안하지 않았는가그런데 이게 평화인가바람직한 상태로 우리가 70년을 살았는가라면서 평화라는 건 서로 다름과 다름이 이해를 하고 선을 넘어서 관계를 정립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 교수는 문재인 대통령이 바이든 대통령에게 나를 죽이고 지나가라고 말할 정도로 강하게 훈련 중단을 요구해야 한다고 짚었다.‘ 

 

마지막으로 박 교수는 지금 전쟁이 일어난다고 그러면 수십만수백만이 죽을 수도 있다세상에그래서 저는 8월이 위기라고 생각 한다라고 말했다.‘

 

박한식님은 재미동포로 깨어있는 학자로서 널리 알려져 있는 교수로서 진보적성향의 지성인입니다앞으로도 민족통일에 도움이 되는 글이나 평화협정에 발전적 제안기사 등은 출처를 밝히면서 인용하는 일도 종종 있겠습니다좋게 받아드리고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위의 글은 자주 시보에 실린 기사를 옮겨 온 것이다박한식 조지아대 명예교수 전쟁훈련 강행하면 8월이 위험하다

김영란 기자 | 기사입력 2021/07/21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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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시대, ‘위로’의 올림픽 개막

 

등록 :2021-07-23 22:21수정 :2021-07-24 02:30

 

2020 도쿄올림픽, 17일 간의 열전 돌입
 
23일 오후 일본 도쿄 신주쿠 국립경기장에서 열린 2020도쿄올림픽 개막식에서 성화 봉송 최종 주자인 오사카 나오미 선수가 성화에 불을 붙이고 있다. 도쿄/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23일 오후 일본 도쿄 신주쿠 국립경기장에서 열린 2020도쿄올림픽 개막식에서 성화 봉송 최종 주자인 오사카 나오미 선수가 성화에 불을 붙이고 있다. 도쿄/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결국 올림픽 성화에 불이 붙었다.사상 초유의 대회다. 지난해 급속도로 확산된 코로나19 영향으로 역사상 처음으로 올림픽 연기가 결정됐다. 그럼에도 기어코 2020 도쿄올림픽은 23일 저녁 일본 도쿄 신주쿠 국립경기장에 마련된 성화대 점화에 성공하며 17일간의 열전을 알렸다.

코로나로 인한 어려움이 큰 만큼 개막식은 인류가 함께 위기를 극복하고 미래로 나아가자는 메시지를 담았다. 도쿄올림픽 조직위원회가 밝힌 개막식 콘셉트는 핵심 ‘전진, 감정에 의한 연결, 더 다양한 미래’다. 한 여성이 국립경기장에서 희망의 씨앗을 느끼는 장면으로 시작된 개막식은, 코로나 위기 속에서도 훈련을 멈추지 않는 선수의 모습을 거쳐, 생명력과 희망을 품고 있는 태양을 상징하는 성화대에 도착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인류가 긴 터널을 지나 태양처럼 밝은 미래로 나아갈 것을 보여준다. 개막식 중간에는 코로나 등으로 죽은 이들을 위한 묵념의 시간을 갖기도 했다.

 

23일 오후 일본 도쿄 신주쿠 국립경기장에서 열린 2020 도쿄올림픽 개막식에서 대한민국 선수단이 입장하고 있다. 도쿄/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23일 오후 일본 도쿄 신주쿠 국립경기장에서 열린 2020 도쿄올림픽 개막식에서 대한민국 선수단이 입장하고 있다. 도쿄/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이날 개막식에는 동일본 대지진 피해 지역의 부흥을 상징하는 장면도 담겼다. 애초 2011년 동일본 대지진으로 휘청거린 일본을 일으키자는 의미의 ‘부흥올림픽’이었던 만큼 빠질 수 없는 주제이기도 했다. 올림픽기가 입장한 뒤 후쿠시마(8명)와 도쿄(12명)의 고등학생이 모여 코러스를 넣고 오케스트라가 올림픽 찬가를 연주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성화가 점화를 향한 마지막 길을 가는 동안, 이를 감쌌던 해바라기는 후쿠시마, 이와테, 미야기 등 대지진 피해 지역의 회복을 의미한다.
 
 
1964 도쿄올림픽과의 연관성도 부각했다. 당시 전세계 선수들이 자신의 나라에서 가져온 씨앗은 일본 전역에서 나무가 되었다. 이날 등장한 나무로 만든 올림픽 상징물 등이 이 나무로 만들어졌다.

일본이 자랑하는 다양한 문화 콘텐츠도 어김없이 등장했다. 2016 리우올림픽 폐막식 때 슈퍼 마리오 등의 캐릭터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던 일본은 이날도 드래곤 퀘스트, 크로노 트리거 등 유명 비디오게임의 음악을 활용했고 다양한 만화 캐릭터를 활용해 개막식을 꾸몄다.

 

한편 대한민국 선수단은 태극기를 든 남녀 공동 기수 황선우(수영)와 김연경(배구)을 앞세우고 모두 30명(선수 24명, 임원 6명)이 103번째로 입장했다. 한국은 이번 대회에서 금메달 7개, 종합 순위 10위를 목표로 하고 있다. 33개 종목에 총 339개의 금메달이 걸려 있는 도쿄올림픽은 8월8일까지 이어진다.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sports/sportstemp/1004907.html?_fr=mt1#csidxde0ce53a4cbe3e080e3b569eacc084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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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광화문 세월호 기억공간 내부물품 수거 시도...유가족과 대치 중

  • 분류
    아하~
  • 등록일
    2021/07/24 08:21
  • 수정일
    2021/07/24 08:21
  • 글쓴이
    이필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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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서울 광화문광장 세월호 참사 기억공간에서 세월호 유가족들과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내부물품을 수거하기 위해 배치된 서울시 공무원들을 막으며 대치하고 있다.ⓒ4.16연대

 서울시가 23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 안 세월호 기억공간 내 물품 수거를 시도했다. 이 소식을 들은 세월호 참사 피해자 유가족과 시민단체가 현장에 나가 시 관계자들과 대치 중이다.

4.16연대에 따르면 서울시 총무과는 이날 오후 3시 30분께 세월호 기억공간 철거 계획을 전달하면서 당장 기억공간 내 사진 등 물품들을 수거하겠다고 통보했다.

광화문광장 현장에는 이날 오후 4시께 물품 수거를 위한 상자와 차량을 몰고온 서울시 총무과 공무원들과 철거 인력이 도착해 물품 수거를 시도하고 있다.

이에 유가족과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즉시 현장으로 이동했으며, 서울시 공무원들의 수거 작업을 막기 위해 대치했다.

유가족들의 반대에 막힌 서울시 공무원들은 오후 5시 30분께 철수했다. 공무원들은 다음날인 24일 다시 수가를 시도할 것이라고 예고한 상태다. 유가족들과 활동가들은 이날부터 농성을 하며 기억공간을 지킬 방침이다.

 

앞서 서울시는 지난 5일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에 세월호 기억공간을 철거하겠다며 오는 25일까지 물품을 정리하라고 통보한 바 있다.

서울시가 계획하고 있는 실제 기억공간의 철거는 26일이지만, 서울시는 철거 작업을 수월하게 하기 위해 이날 물품 정리를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서울시는 수거한 물품을 '서울기록원'에 보관하겠다는 방침이다.

이와 관련, 4.16연대 관계자는 "세월호 기억공간은 생명과 안전의 사회를 향한 시민의 공간이며, 광화문광장은 시민의 피와 땀과 눈물로 지키고 키워온 민주주의 광장"이라며 "세월호 기억공간 철거는 곧 민주주의를 지우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한편 이날 오후 1시 30분께 유가족과 시민단체들은 서울시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기억공간 철거 계획을 철회할 것을 촉구하고, 2,683개 단체 및 개인의 서명이 담긴 성명서를 서울시에 전달했다.

성명서를 전달받은 서울시는 이날 오후 기억공간 철거에 대한 최종입장을 유가족에게 전달하겠다고 답했다. 유가족과 시민단체의 철거 철회 요구에 서울시가 즉시 철거로 답한 셈이다.

유가족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세월호참사 기억공간을 새로운 광화문광장에 어떻게 발영할지 협의하기 위한 협의체 구성과, 공사기간 중 공사구역 바깥으로 기억공간을 이전해 운영할 것을 요구했다.

23일 광화문광장 안 세월호 참사 기억공간의 내무 물품을 수거하기 위해 서울시 공무원들이 광화문에 배치돼 있다.ⓒ4.16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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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곳곳의 반미행동 “한미연합군사훈련 중단하라”

평화수호농성단 | 기사입력 2021/07/24 [0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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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화문에서 한미연합군사훈련 중단을 촉구하며 활동하는 평화수호농성단.  © 평화수호농성단

 

  © 평화수호농성단

 

한미 당국이 8월 한미연합군사훈련을 강행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이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전국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서울·부산·경기·광주·대구에서는 지난 19일부터 ‘한미연합군사훈련 중단’을 주요한 과제로 내세우며 반미행동주간을 선포하며 활동에 들어갔다.

 

먼저 서울은 ‘한미전쟁훈련 반대, 대북적대정책 철회를 위한 평화수호 국민농성단(이하 평화수호농성단)’이 지난 19일 2기 활동을 시작하고 매일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평화수호농성단 뿐만 아니라 많은 시민단체가 한미연합군사훈련의 위험성을 알리며, 미 대사관을 둘러싸고 미국에 군사훈련 중단을 압박하고 있다. 

 

시민단체들은 “한미연합군사훈련 중단이 바로 국민들의 여론”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 '한미연합군사훈련 중단하라' 부산 미 영사관 앞 1인 시위 모습.  © 평화수호농성단

 

부산경남주권연대도 19일부터 미 영사관 앞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또한 부산지역 시민단체로 구성된 ‘미군철수부산공동행동’은 24일 미영사관 포위 작전을 시작으로 매일 점심시간 항의행동을 이어간다.

 

부산에서는 1인 시위, 1인 상징의식, 1인 기자회견 등 다양한 방법으로 미영사관을 압박할 계획이다.

 

경기주권연대도 8월 한미연합군사훈련 중단을 요구하며 수원역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1인 시위는 오는 29일까지 매일 진행한다. 

 

광주전남주권연대는 매주 수요일·토요일 ‘전쟁연습중단! 평화협정체결!’을 내용으로 전남대 후문과 금남로에서 1인 시위를 진행하고 있다.

 

▲ 22일부터 활동에 들어간 '대구경북지역통일선봉대'.  © 평화수호농성단

 

대구경북주권연대는 대구 캠프워커 미군기지에서 1인 시위를 시작했다. 또한 지난 22일 시작한 대구지역통일선봉대에 적극 결합하고 있다. 대구지역통일선봉대는 ‘한미연합전쟁연습중단! 소성리 사드기지 철거! 캠프워커를 온전히 시민 품으로!’ 3대 구호를 들고 활동을 하고 있다.

 

대구경북주권연대는 “통일선봉대 활동은 24일 끝났지만, 활동을 멈추지 않고 1인 시위를 비롯해 다양한 활동으로 한미연합군사훈련 중단의 목소리를 내겠다. 또한 대구의 단체들과 연대를 강화하겠다”라는 의지를 밝혔다.  

 

8월이 다가올수록 ‘한미연합군사훈련 중단’의 요구가 전국 곳곳에서 더욱 높아지고 있다. 

 

▲ 수원역에서 진행하는 1인 시위.  © 평화수호농성단

 

▲ 광주의 1인 시위 모습.   © 평화수호농성단

 

▲ 대구 캠프워커 앞 1인 시위.   © 평화수호농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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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노동자는 뭐든 뚝딱 나오는 도깨비 방망이입니까"

[토론회] 서울대학교 청소노동자 사망사건, 무엇이 문제인가

지하철, 학교 등 청소노동자가 코로나로 겪는 어려움을 조사한 바 있는 김영 부산대 사회학과 교수는 한국사회 청소노동자의 처지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가장 밑바닥 을'로 살아가는 청소노동자의 삶을 나타낸 말이다. 대부분의 청소노동자가 중고령, 저학력, 여성, 간접고용 노동자라는 이유로 일터에서 휴게공간 부재, 성희롱 등 복합적 차별을 겪고 있다는 점도 지적했다.

 

22일 더불어민주당 산재예방TF가 주최한 '서울대학교 청소노동자 사망사건, 무엇인 문제인가' 토론회에 참여한 김영 교수는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화 정책에 따라 서울대 등에서 청소노동자가 직접고용 된 이후에도 청소노동자의 열악한 처우와 이들에 대한 차별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며 "이를 바꾸려면 우선 정기적 조사로 청소노동자가 처한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고 이를 바탕으로 심도있는 제도적 방안을 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날 토론회에서는 고인이 생전에 가입했던 노조 간부, 서울대에 재학 중인 학생 등이 참가해 청소노동자 사망과 이후 서울대의 대응에서 드러난 문제점을 짚기도 했다.


 

▲ 서울대 관악학생생활관에 사망한 청소노동자의 추모공간이 설치돼 있다. ⓒ연합뉴스

저학력, 여성, 고령, 간접고용...청소노동자는 다양한 차별에 노출된다


 

발제를 맡은 김 교수는 "지난달 26일 서울대에서 청소노동자가 과로사 사망의 대표 증상인 급성 심근경색으로 사망했고 과로사로 의심할 수 있는 여러 정황이 나왔다"며 한국사회에서 산재 사망을 막기 위해 '죽지 않고 일할 권리' 캠페인이 일어난 일을 회상했다.


 

김 교수는 "구의역 사건이나 김용균 사건은 기성세대의 정규직 노동자인 제 입장에서는 너무 마음이 아파 울기도 미안한 사건"이었다며 "하지만 한 호흡을 거르고 다시 생각하면 왜 당연한 권리를 두고 캠페인을 벌여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자신의 연구를 바탕으로 고인과 비슷한 처지에서 일하는 한국사회 청소노동자가 대부분 여성, 고령, 저학력, 비정규직이라는 점도 상기시켰다.


 

통계청의 <2020년 하반기 지역별 고용조사>에 따르면, 청소는 매장판매에 이어 여성이 두 번째로 많이 일하는 소분류 직업이다. 청소노동자 중 89%는 50세 이상, 중졸 이하 학력자는 55.8%다. 또한, 2016년 한국노동연구원이 펴낸 <저임금 일자리의 동태적 변화와 정책과제>를 보면, 청소노동자의 72.2%는 파견, 용역업체 등에 소속된 간접고용 노동자다.

 

김 교수는 청소노동자에게 다양한 사회적 약자 정체성에 따른 복합적 차별이 발생한다며 이의 대표적 사례로 휴게공간의 부재, 일이 많아 일찍 출근해야 하는 데서 비롯되는 과중노동과 무급노동 등을 거론했다.

 

성희롱 피해를 호소하는 청소노동자도 많았다. 김 교수가 조사한 청소노동자 중 한 명은 "관리장이 일상적인 성적 요구를 하며 괴롭혔기 때문에, 남편이 죽었다고 하면 더 노골적으로 괴롭힐 것이 걱정돼서 남편의 죽음조차 (회사에) 알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업체 회장의 술 마시고 노래하는 자리에 참석하라는 강요를 거절했다 해고 위협을 당했다는 청소노동자도 있었다.


 

청소노동자들은 자신의 직업에 대해 "짤릴까 봐" 항상 걱정해야 하고, "산재하면 그 자리에서 끝나는" "제일 밑바닥"이라고 표현했다. 한 청소노동자는 "이게 내 짊어진 업"이라는 표현까지 썼다.


 

코로나 이후, 노동강도는 높아지고 방역 조치에서는 차별받고


 

청소노동자의 열악한 처지는 코로나 이후 청소노동자들이 겪는 어려움에 대한 김 교수의 조사에서 더 단적으로 드러난다.


 

우선 인력 충원이 이뤄진다거나 청소노동자들이 이를 요구하기 힘든 상황에서 노동강도가 강화됐다. 조사 대상 청소노동자 84.4%가 코로나 이후 '일이 힘들어졌다'고 답했다. 벨트 소독, 엘리베이터 손잡이 청소 등 업무가 추가됐다는 노동자가 있는가 하면, 하루에 한 번씩 닦던 변기를 네 번씩 닦게 됐다는 노동자도 있었다.


 

방역도 차별적으로 이뤄졌다. 지하철의 경우 정규직 노동자에게는 재택근무, 시차출근제, 식사시간 분산, 동선 분리 등 조치가 취해졌지만 청소노동자의 업무 특성에 맞춘 방역적 변화는 없었다. 한 청소노동자는 지하철공사에 "마스크를 달라"고 요구했다 '직원이 아니라서 못 준다. 용역업체한테 달라고 해라'는 말을 들었다.


 

양적 조사에서도 청소노동자 96.6%가 '내 일은 코로나19 감염으로부터 안전하지 않다'고 답했다.

 

직접고용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은 차별적 대우와 시선


 

직접고용도 청소노동자에 대한 차별을 해소하지는 못했다. 2018 ~ 2019년 국공립대학 및 공립학교 간접고용 노동자가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정책에 따라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됐지만, 임금이나 복지와 관련한 개선은 거의 없었다. 청소노동자를 직접고용하며 노동시간을 깎거나 임금을 깎고 인원을 축소해 외려 노동조건이 나빠진 경우도 있었다.

 

청소노동자를 유령으로 보는 차별적 시선도 사라지지 않았다. 한 청소노동자는 "같은 무기계약직인데 미화원은 차별받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노동자의 고용안정이 없으면 기본적인 권리조차 주장하기 어렵기 때문에 직접고용은 물론 굉장히 중요하다"면서도 "직접고용이 된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청소노동자의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필요한 일과 관련해 김 교수는 "제도도 중요하지만 실행하는 건 사람"이라며 "우선 사람들이 제대로 된 인식을 갖기 위해 현실을 잘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청소노동자에 대한 정기적인 조사로 이들의 목소리를 드러내는 작업을 먼저하고 축적된 자료를 통해 필요한 제도를 심도있게 이야기해야 한다"고 밝혔다.


 

'시험, 복장 갑질'..."칭찬 받은 사람 있으면 모욕과 갑질 구조는 없는 게 되나"
 

 

이날 토론회에 참여한 박문순 전국민주일반노동조합 서울본부 법규정책국장은 청소노동자 사망 사건과 이후 경과를 전한 뒤 사건에 대한 서울대 대응의 문제를 지적했다.


 

박 국장은 지난 13일 발표된 오세정 서울대 총장의 입장문에 사과 표현이 등장하지 않은 데 대해 비판한 뒤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났을 때 어떻게 이를 타산지석으로 삼느냐에 따라 2, 3차 사건을 막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박 국장은 "그런데 학생처장 보직을 맡았던 구광모 교수 등의 발언을 보면, 학교 측은 사망 사건 이후 가해자의 말은 철썩 같이 믿고 있고, 노사공동진상조사단 구성 등 현장 노동자와 노조의 목소리는 들으려 하지 않고 있다"고 질타했다.

 

박 국장은 또 '필기시험 및 점수 공개'와 '회의시간 드레스코드 지정 뒤 감점 발언'이 갑질인가 아닌가를 두고 벌어지는 논란에 대해 "누군가는 시험에 1등을 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옷 칭찬을 받을 수도 있다"며 "칭찬받은 사람이 있으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모욕감은 없는 게 되나. 갑질 구조는 없던 게 되나"라고 물었다.


 

이재현 '서울대 비정규직 만들기 공동행동' 학생대표는 이번 청소노동자 사망 사건 관련해서 서울대 인권센터가 조사를 맡은 것을 반대한다고 밝혔다. 이재현 학생대표는 "서울대 인권센터는 센터에서 주최하는 인권주간에 학생들에게 교수의 학생 대상 권력형 갑질 및 성폭력과 관련한 코너를 운영하지 말라고 해 인권주간 보이콧을 당한 적이 있는 곳"이라며 "학보사 <대학신문> 기자들이 교수의 편집권 침해에 항의해 신문 1면을 백지로 발행하자 인권센터가 학생 기자들이 교수의 인권을 침해했다며 인권교육 이수를 권고한 황당한 일도 있었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인권센터가 교수의 권력형 갑질과 성폭력 사건을 처리할 때 피해자의 절차적 권리를 보장하지 않고 조사에 대한 학생 참여를 지속적으로 거부하고, 솜방망이 처벌 권고만을 내리는 경우도 많았다"며 "학생을 동등한 구성원으로 보지 않았던 인권센터가 노동자에 대해서도 같은 시선을 답습할 가능성이 높다"고 인권센터를 통한 사망 사건 조사를 반대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1072214545719428#0DKU 프레시안(http://www.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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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시는 커피의 기원, 충격적인 탄생 스토리

[커피로 맛보는 역사, 역사로 배우는 커피] 중국차의 영향, 사실일까

21.07.23 07:07l최종 업데이트 21.07.23 07:07l


인류의 역사를 문명 간 충돌로 보는 시각이 적지 않다. 우리가 읽는 많은 세계사와 한국사 책은 대부분 전쟁이나 정치적 격변과 같은 충돌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그러나 역사 발전의 많은 부분은 문명 간 충돌이 아니라 교류와 대화의 산물이었다. 커피의 탄생 역사가 그것을 보여준다.
커피는 서양의 음료, 차는 동양의 음료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지만 두 음료 모두 동양 문화의 산물이다. 차는 중국에서 그리고 커피는 아랍에서 탄생한 후 유럽 세계로 건너가 대중화되었다. 유럽인들이 즐겨 마시는 포도주와 맥주도 아랍 문명의 산물이지만 유럽인의 음료가 되면서 성장하였다.

차·포도주·맥주는 모두 인류가 낳은 대단한 발명들로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커피는 어떤 문명이 탄생시킨 음료일까? 15세기 후반 예멘을 포함한 아랍 전역에 전파된 신비주의적 이슬람 분파인 수피(Sufi) 교도들이 커피를 처음으로 마시기 시작했다는 것은 정설이고 역사적 사실에 가깝다. 커피 분야의 교과서 격인 윌리엄 우커스의 <올 어바웃 커피>(All About Coffee, 1922)나 제임스 호프만의 <더 월드 아틀라스 오브 커피>(The World Atlas of Coffee, 2014) 등도 이런 설을 따르고 있다.


그렇다면 수피교도들은 언제부터 볶은 커피체리와 뜨거운 물을 결합하여 만든 음료를 마시기 시작했을까? 아쉽게도 이에 관해서는 그 어떤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

16세기 말경 예멘의 산악 지역에서 커피나무를 상업적으로 경작하고 있었으니 그에 앞서 커피나무가 아프리카 대륙에서 홍해를 건너 예멘에 전파된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커피를 로스팅하고 뜨거운 물을 이용하여 음료수로 만든 기원에 대해서는 어떤 답도 힌트도 주지 않는다. 그동안 기록의 부재가 많은 주장을 낳았지만 설득력 있는 주장은 없었다. 특정한 나라, 특정한 인물, 혹은 특정한 동물의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전해져 왔지만 설득력 있는 이야기는 없었다.

명나라 환관 쩡허
 
큰사진보기쩡허의 무덤 난징에 있는 쩡허의 무덤이다. 쩡허는 색목인이라고 부르던 우즈베키스탄 출신 부모를 둔 이슬람계 후손이었다.
▲ 쩡허의 무덤 난징에 있는 쩡허의 무덤이다. 쩡허는 색목인이라고 부르던 우즈베키스탄 출신 부모를 둔 이슬람계 후손이었다.
ⓒ 이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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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까지 알려진 이야기와는 달리 역사적 사실에 기초한 새로운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커피가 동아시아 음료 문화인 차와 아랍의 식물인 커피나무가 만남으로써 극적으로 탄생한 음료라는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다. 21세기 들어 세계인의 감성을 자극하고 있는 커피 문화가 특정한 사람, 국가, 혹은 문명의 독자적 발명품이 아니며 문명 간 대화의 산물이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필자는 십여 년 전에 미국의 세계사 교과서 속에 실린 15세기 중국인 해양 탐험가 쩡허(鄭和 1371~1433)의 남아시아와 동북아프리카 여행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몇 해가 지나 커피의 기원과 역사에 관한 글을 하나 둘 읽게 되면서 떠올랐던 질문이 '혹시 쩡허가 아라비아반도를 방문하였을 때 중국차를 선물하며 차 만드는 모습을 아프리카와 아랍 사람들에게 보여 준 것은 아닐까? 이것을 보고 누군가 차를 만들 듯이 커피나무 잎이나 열매를 볶아서 뜨거운 물로 내리는 방식을 시도해 본 것이 커피를 탄생시킨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이런 나의 오래된 상상이 사실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최근이다. 최근에 읽게 된 안토니 와일드(Antony Wild)의 책 <커피: 어 다크 히스토리>(Coffee: A Dark History, 2005)에서 바로 나의 생각과 똑같은 주장을 만나게 된 것이다. 안토니 와일드는 커피의 기원에 관한 답을 찾기 위해서는 차, 차의 발상지인 중국, 그리고 중국과 중동 간 무역의 역사에 주목할 것을 제안하였다. 바로 명나라 초기 환관 쩡허의 북아프리카와 예멘 방문이다.

쩡허는 중국 남부의 윈난성 쿤양에서 마(馬)씨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마산바오(馬 三寶)다. 그의 선조는 부하라(지금의 우즈베키스탄)의 무하마드왕의 후예였다. 즉, 쩡허는 중국 한족이 아니고 페르시아계 이슬람교도의 아들이었다. 열한 살이 되던 1382년 윈난성이 명나라에 의해 점령되었을 때 포로가 되어 명나라로 잡혀 온 후 거세되어 환관이 되었다. 1398년에서 1402년 사이에 있었던 정변에서 큰 공을 세움으로써 새로 등극한 황제 영락제에 의해 환관 중 최고위직인 태감에 올랐고 쩡(鄭)씨 성을 하사받았다.

34세가 되던 1405년 쩡허는 황제의 명을 받아 대규모 선단을 이끌고 해양 탐험에 나서게 된다. 원나라 세력이 비록 명에 밀려 중국 본토는 포기하였지만 서역으로 가는 내륙의 초원 지대를 여전히 지배하고 있었고, 오스만터키의 등장으로 북부의 비단길을 통한 육로 무역의 위험성이 높아진 것이 해상 무역을 시도한 배경이었다. 서양의 대표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이 향신료를 찾아 해양 탐험에 나서게 된 것과 동양 문명을 대표하던 중국이 대규모 해상 무역을 추구한 배경은 동일하였다.

1405년 첫 항해 이후 쩡허는 30년간 총 일곱 차례 대항해를 했다. 한 차례 항해에 보통 2년이 소요되는 긴 항해였다. 동남아시아·인도·아랍 그리고 마지막에는 아프리카 동해안에까지 이르는 대단한 여정이었다. 당시 선단은 50~200여 척 규모로 승선 인원이 2~3만 명에 달했다. 일곱 번에 걸쳐 떠났던 인도양 방면 대항해 중에서 다섯 번째였던 1417년 항해와 마지막 항해였던 1432년 항해에서 예멘 지역을 방문했다.
 
큰사진보기쩡허의 항해지도 쩡허의 남아시아와 북아프리카 대항해 루트. 중국의 차문화와 예멘 지역 커피나무의 만남으로 커피음료를 탄생시킨 문명 간 대화의 흔적이다.
▲ 쩡허의 항해지도 쩡허의 남아시아와 북아프리카 대항해 루트. 중국의 차문화와 예멘 지역 커피나무의 만남으로 커피음료를 탄생시킨 문명 간 대화의 흔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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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와 커피나무의 만남

이슬람교도였던 쩡허의 예멘 지역 방문은 매우 흥미로운 사건이었다. 무역이 목적이었던 쩡허 선단은 많은 중국 물품을 소개했고, 방문지의 신기한 물건들을 중국에 들여왔다. 많은 동물과 식물 그리고 약재 등이 중국에 소개되었는데 그 어느 기록에도 커피 이야기는 없다. 이런 것에서 유추해 보면 쩡허가 북아프리카와 예멘 지역을 방문했을 15세기 초 당시 커피가 예멘 지역은 물론 아프리카 동쪽이나 아라비아반도에 널리 퍼져 있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최근에는 대만의 한화이종(韓懷宗)이 <세계가배학>(世界咖啡學, 2016)에서 쩡허 이야기를 좀더 구체적으로 다루었다. 쩡허는 출항 때마다 벽돌 모양으로 굳힌 차[磚茶]를 가져갔고, 예멘의 통치자들에게 중국식으로 차를 내려 대접하였다. 한화이종에 따르면 예멘 지역에서 출토되는 초기 커피잔이 중국의 찻잔과 모양과 크기가 비슷하였고, 예멘에 이어 커피를 대중화시킨 터키 지역에서도 중국식 찻잔에 커피를 마셨다고 한다.

쩡허의 마지막 항해에는 예멘의 조공 사절단(일종의 볼모)이 동승하여 중국을 방문하였다. 이들은 중국에 머무는 동안 가는 곳마다 차 대접을 받았다. 이들이 귀국한 후 중국에서 배운 차 내리는 문화를 커피 내리는 문화로 전환하여 커피의 대중화를 가져왔을 가능성 또한 적지 않다.

쩡허 방문 당시 이슬람 세계에 소개된 중국의 물품 중에서 가장 신기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차였을 것이다. 쩡허의 방문 이후 차와 비슷한 성분을 지닌 식물의 잎을 말리고, 이것을 뜨거운 물에 넣어 우려내려는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예멘의 수피교도들은 커피나무 원산지인 에티오피아 지역, 특히 커피 산지이며 이슬람 문명권이었던 하라(Harrar) 지역과 활발하게 무역을 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홍해 주변인 에티오피아, 예멘 그리고 일부 아랍 지역에서 커피나무의 잎이나 커피 열매의 껍질 혹은 과육을 이용해 다양한 음식을 만들어 먹는 풍습이 널리 퍼져 있었다.

특히 잠을 잊고 기도에 집중해서 신에게 가까이 가고자 하는 욕망이 누구보다 강했던 수피교도들 중 차를 마시는 중국인을 만났거나, 중국인의 차 마시는 풍습을 전해 들은 사람들이 다양한 식물로 새로운 음료 만드는 시도를 했을 것이고 커피체리는 그중 하나였을 것이다.
 
큰사진보기 커피열매와 커피꽃. 순백의 커피꽃과 선홍빛으로 익은 열매가 어우러져 더욱 아름답다. 봄이 제대로 무르익을 무렵, 볼 수 있는 모습이다.
▲  커피열매와 커피꽃.
ⓒ 임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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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탄생의 역사에 등장하는 실존 인물인 수피교 수도사 샤들리(Shadhili)와 다바니(Dhabhani, 일명 게말딘)가 쩡허를 만났을 가능성도 있다. 쩡허 일행이 아덴항에 도착하였던 1417년에 어린 다바니는 아덴에 있었다. 다바니는 수피교와 과학 분야에서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고, 30대 초반에는 메카로 순례를 떠난다. 당시 메카에는 중국이나 동남아시아에서 온 이슬람 순례자들이 많았다.

1432년 메카 주변 항구인 지다(Jiddah)에 쩡허 선단이 도착했을 때 다바니는 그곳에 머물렀고, 그때도 중국 차 문화를 경험하였을 가능성 또한 높다. 중국 차 문화를 경험한 과학자 다바니 혹은 그와 비슷한 호기심을 가진 누군가 찻잎과 비슷한 성분의 식물을 찾아보았을 것이고, 결국 에티오피아를 왕래하던 무역상들로부터 커피나무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커피나무 잎뿐 아니라 열매에서 더 맛 좋은 음료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커피가 이슬람의 음료로 탄생하고, '아랍의 포도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예멘 지역에서 발굴되는 유물들은 1450년 즈음에는 커피가 이 지역 수피교도들의 종교 행사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15세기 초 이슬람계 중국인 쩡허와 예멘의 수피교도들, 동양과 아랍 문명의 만남 속에서 커피가 자연스럽게 탄생한 것이다.

<역사대논쟁: 서구의 흥기>(Historians Debate: The Rise of the West)의 저자 조나단 데일리(Jonathan Daily)가 주장하듯이 인류 역사에서 모든 문명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성장하였다. 문명 간 갈등이 아니라 협력이 인류 문명의 발전 법칙이라는 사실에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이 커피의 탄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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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밤에 소방서 들어가 ‘말벌방어복’ 숨긴 뒤 다음날 “없어진 것도 몰랐냐”며 감찰

공무원노조 소방본부 “감찰이라 쓰고 도둑질하는 소방청 고발한다”

공무원노조 소방본부 기자회견 포스터ⓒ공무원노조 소방본부 제공

소방청이 일선 소방서의 점검·보안 업무 관리를 위해 과도한 ‘함정감찰’을 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소방청 감찰반원이 어두운 밤에 전북의 한 소방서 차고에 들어가 몰래 말벌보호복(말벌방어복)을 가져간 뒤, 다음날 교대점검 시간에 보호복이 사라진 것도 몰랐냐는 형태의 감찰이 이루어지면서다.

22일 전국공무원노동조합 소방본부(이하, 소방본부) 등에 따르면, 지난 20일 밤 소방청 소속 감찰반원 2명은 전북 덕진소방서 차고에 몰래 들어가 펌프차 안에 적재된 말벌보호복을 가져간 뒤 다음날 오전 감찰을 진행하며 ‘간밤에 보호복이 없어진 것도 몰랐냐’며 분실 책임 등을 물었다고 한다.

이 같은 형태의 믿기 힘든 감찰은 실제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소방청 감사담당관에서 감찰을 담당하는 한 관계자는 이날 기자와의 통화에서 “당시 소방서 보안 점검이 제대로 안 이루어지고 있는 부분이 있어서, 확인 차원에서 소방서 차량이 세워져 있는 차고에 들어갔던 일”이라고 말했다.

일선 소방서는 긴급 출동이 용이해야 하기 때문에, 외부 침입을 고려한 담벼락·검문소 등을 두지 않는다. 이처럼 다른 관공서보다 외부 관계자의 소방서 진입이 덜 까다로운 측면이 있고, 누군가 들어와서 소방물품을 훔치는 일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사전에 보안 문제에 철저히 대비하기 위한 감찰이었다는 게 소방청 감찰반 관계자의 설명이다.

 

하지만 아무리 보안·점검을 강조하기 위한 감찰이었다고 하더라도, 밤에 몰래 물품을 가져간 뒤 다음날 없어진 것도 몰랐냐는 식의 감찰은 과도한 ‘함정감찰’이라는 게 소방본부의 지적이다.

소방본부는 이날 세종시 소방청 앞 ‘야간주거침입절도 소방청 고발 긴급 기자회견’에서 “해당 장비를 숨겨놓으면, 출동 시 장비가 없어 대원이 사고를 당할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해 본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라며 “야간에 2인 이상 현주건조물에 침입하여 공용물을 절취한 것은 감찰이 목적이었다고 해도, 공문에 적시한 감찰내용에 위배될뿐더러 함정감찰이라는 치졸함을 넘어서는 명백한 범죄행위”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공무원노조 소방본부는 22일 세종시 소방청 앞에서 이 같은 기자회견을 열고 과도한 함정감찰을 중단하라고 촉구했다.ⓒ공무원노조 소방본부 제공

이 같은 과도한 감찰은 이번이 처음이 아닌 것으로 전해졌다.

소방본부 관계자는 “소방서 근처에 차량을 세워놓고 몰래 숨어서 일과표대로 하고 있는지 지켜보다가 작은 문제라도 잡히면 들어와서 감찰을 진행하는 식”이라며 “지난 19일에는 전북 남원에서 출근한 직원 중 한 명이 소방서 앞에 주차된 감찰반 의심 차량을 보고 사진을 찍자, 쫓아와서는 핸드폰에서 사진을 지우게 하고 경위서를 작성하게 한 경우도 있다”라고 전했다.

이어 “이걸 지적하지 않으면 이런 식의 감찰을 계속할 게 뻔해서 문제 제기를 안 할 수가 없었다”라고 말했다.

또 “연말·연초 대전소방본부 전·현직 고위 간부 자녀 승진 특혜 등 여러 비리가 언론을 통해 나온 뒤, 소방청에서 조직문화 혁신 TF를 구성한 바 있다”라며 “거기서 나온 대책은 인사 관련 제도를 개선하겠다는 것과 암행적인 표적감찰을 지양하겠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소방청은 이번처럼 최하위 조직을 방문해 탈탈 터는 식의 감찰이 아니라, 상급 부서 고위직에서 이루어지는 관행적인 비리 이런 걸 밝히는 감찰로 개선하겠다는 보고서를 냈음에도 불구하고, 과거 방식을 그대로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소방청 감찰 관계자는 “누군가를 징계하거나 불이익을 주기 위해 억지로 하는 게 아니다. 청사 보안 관리를 위해 CCTV 추가 설치 등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행정이다”라며, 감찰반원의 감찰 행위를 침입 또는 절도 등으로 보는 것은 과도하다고 말했다.

이어 “매일 8시40분에 교대를 하는데, 업무의 시작은 점검이다. 개인 보호 장구가 있는지, 출동차량 및 소방장비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연료는 충전이 돼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라며 “이는 굉장히 중요한 업무지만, 일상적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행여나 소홀히 되는 부분이 없는지 점검이 필요하다. 감찰은 이를 조언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한편, 소방청은 행정안전부의 ‘하계휴가철, 추석명절 공직기강점검 특별감찰’ 지시에 따라 지난 19일부터 전국 소방기관 감찰을 시작했다. 감찰 주요 내용은 방역지침준수여부, 직위남용, 품위훼손, 이해충돌행위, 민원이첩 등인 것으로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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