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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발점으로 다가서는 군사정세

[개벽예감 419] 폭발점으로 다가서는 군사정세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 기사입력 2020/11/16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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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1. 중국인민해방군은 대만군을 몇 시간 안에 궤멸시킨다

2. 제4차 대만해협위기는 일어나지 않는다

3. 조선인민군과 한미연합군의 싸움, 중국인민해방군과 미일동맹군의 싸움 

4. 동북아시아 군사정세는 폭발점으로 다가서고 있다

 

 

1. 중국인민해방군은 대만군을 몇 시간 안에 궤멸시킨다

 

2020년 11월 4일 대만 언론매체들의 보도에 따르면, 황수광(黃曙光) 참모총장과 쉬옌푸(徐衍璞) 부참모장을 비롯한 대만군 수뇌부가 차이잉원(蔡英文) 대만 총통의 명령에 따라 타이베이(臺北) 북쪽 다즈(大直)에 있는 헝산(衡山)전쟁지휘소에 들어갔다고 한다.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처럼, 중국의 대만통일전쟁을 심각하게 우려한 대만군 수뇌부가 전쟁지휘소에 들어가 대만군에게 경계태세를 명령한 것이다. 전쟁이 임박했을 때, 군수뇌부는 전쟁지휘소에 들어간다. 

 

대만군 수뇌부는 2020년 9월 19일에도 헝산전쟁지휘소에 들어가 대만군에게 경계태세를 명령했었다. 2020년 9월 18일 중국인민해방군 전략폭격기와 전투기 18대가 대만해협 중간선을 넘어가 대만 해안에서 불과 68km밖에 떨어지지 않은 상공까지 바짝 접근했고, 이튿날에도 폭격기와 전투기 19대가 대만해협 중간선을 넘어가 또 다시 대만 해안 상공에 바짝 접근했으므로, 대만군 수뇌부는 즉시 헝산전쟁지휘소로 직행하여 대만군에게 경계태세를 명령했던 것이다. 당시 이런 위기상황이 조성된 원인은 2020년 9월 17일 키드 크락(Keith Krach) 미국 국무부 차관이 이끄는 국무부 대표단이 대만을 방문하여 중국을 극도로 자극한 데 있었다.  

 

그런데 2020년 11월 4일에는 중국인민해방군 전자전기 1대가 대만 서남부 방공식별구역에 들어갔을 뿐이고 전략폭격기와 전투기를 동원한 대만근접비행은 없었는데도 대만군 수뇌부는 헝산전쟁지휘소에 들어가 대만군에게 경계태세를 명령했다. 이런 급박한 움직임은 대만군 수뇌부가 중국인민해방군의 대만근접비행보다 더 심각한 군사적 위험을 직감하고 전쟁지휘소에 들어가 대만군에게 경계태세를 명령하였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대만군이 직감한 심각한 군사적 위험은 무엇인가? 나는 2020년 11월 9일 <자주시보>에 실린 ‘공동전선에서 포성이 울릴 때’라는 제목의 글에서 중국공산당 창건 100주년이 되는 2021년 7월 23일을 앞두고 중국이 대만통일전쟁을 수행할 다섯 가지 주객관적 조건이 성숙되었다는 사실을 자세히 설명한 바 있다. 그 조건들을 여기에 다시 열거한다. 

 

- 중국은 대만통일전쟁준비를 완료했다.

- 대만의 국가분렬세력은 분리독립책동에 광분하면서 중국을 극도로 자극하고 있다.

- 미국은 대만문제에 노골적으로 개입하면서 중국 내정에 간섭하고 있다.

- 보건재앙과 정치혼란에 빠진 미국의 전쟁능력이 약화되었다.

- 중국의 대만통일전쟁에 유리한 군사정세가 한반도에 조성되었다.

 

중국 <신화퉁신(新華通信)> 2020년 11월 14일 보도에 따르면,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2020년 11월 13일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가 제출한 ‘중국인민해방군 연합작전강요’라는 제목의 군사전략문서를 비준했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연합작전이라는 말은 육군, 해군, 공군, 전략로켓군의 연합작전을 뜻하므로, 지금 중국인민해방군은 전면전을 준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중국 언론매체 <환추시바오(環球時報)> 2016년 12월 7일 사설에 따르면, “인민해방군은 몇 시간 안에 대만군을 궤멸시키고 대만섬을 점령할 능력이 있다. 대만을 도우려는 미국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전투는 끝날 것”이라고 한다. <사진 1> 

 

▲ <사진 1>위의 사진은 대만 북쪽 다즈에 있는 헝산전쟁지휘소 정문을 촬영한 것이다. 헝산전쟁지휘소는 대만군 전쟁지휘소다. 이 전쟁지휘소는 당연히 지하에 건설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사진에 나타난 지휘소 정문은 어느 중소기업사업장 정문처럼 허술하기 짝이 없다. 저런 분위기 속에서 전쟁지휘를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2020년 11월 4일 대만군 수뇌부는 헝산전쟁지휘소에 들어가 대만군에게경계태세를 명령했다. 전쟁이 임박했을 때, 군수뇌부는 전쟁지휘소에 들어간다.  

 

매우 다급해진 대만군은 전시동원체제를 마련했다. 2020년 10월 22일 옌더파(嚴德發) 대만 국방부장은 입법원 외교국방위원회에서 “차이잉원 총통이 동원령을 내리면, 45만명 병력이 대만방어작전에 나설 것”이라고 하면서, 전시에 정규군 18만5,000명과 예비군 26만명이 동원될 것이라고 밝혔다. 2020년 10월 27일 대만 언론매체들의 보도에 따르면, 대만군은 중국의 대만통일전쟁에 대처하기 위한 대규모 전투훈련을 대만 각지에 있는 5개 작전지구에서 일제히 진행했다고 한다. 

 

대만 언론보도에 따르면, 대만 국가안전국 추궈정(邱國正) 국장은 2020년 10월 29일 대만 입법원 외교국방위원회에서 “현 시기 양안(중국과 대만을 뜻함-옮긴이) 사이에서 전면전이 일어날 확률이 평소보다 높다”고 말했다고 한다. 바로 그때 어느 대만 입법위원이 최근 중국 모래채취선들이 대만군이 주둔하는 마쭈렬도(馬祖列島) 인근 해역에 자주 출현하는 것이 무력공격조짐이 아니냐고 추궈정 국장에게 거듭 물었다. 대만군이 요새화한 마쭈렬도는 중국 본토 해안에서 불과 30km밖에 떨어지지 않은 몇 개의 작은 섬으로 이루어졌다. 질문을 받은 추궈정 국장은 직답을 피하면서 “여러 가능성을 두고 분석하고 있다”고 아리송하게 답변했다. 

 

중국인민해방군은 대만해협에 있는, 대만군이 주둔하는 작은 섬들을 공격하는 국지전을 차츰 전면전으로 확대하는 방식으로 대만통일전쟁을 수행하는 게 아니라, 대만해협에서 우발적인 무력충돌이 일어나는 즉시 전면전에 돌입하는 방식으로 대만통일전쟁을 수행할 것으로 예견된다. 그러므로 무력공격조짐은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인 2010년 11월 23일 조선인민군 방사포부대가 연평도를 포격했다. 그런데 당일 오후 6시 30분(서울시간으로 오후 7시 30분) 당시 대만 총통 마잉주(馬英九)는 총통부 청사에서 비상국가안전회의를 긴급히 소집했고, 대만군 수뇌부는 헝산전쟁지휘소에 들어가 대만군에게 경계태세를 취하도록 명령했다. 연평도 포격전은 오후 3시 41분에 끝났고, 한국 외교안보장관회의는 오후 4시 35분에 시작되었는데, 대만 비상국가안전회의는 오후 7시 30분에 시작되었고, 대만군 수뇌부는 전쟁지휘소에서 대만군에게 경계태세를 명령했던 것이다. 포격전은 대만에서 약 1,000km 떨어진 연평도에서 벌어졌으나, 대만군이 즉시 경계태세를 취한 것은 한반도 군사정세와 대만해협 군사정세가 얼마나 밀접히 결부되었는지를 보여준다.    

 

 

2. 제4차 대만해협위기는 일어나지 않는다   

 

“전진, 전진, 태양을 따라 나가자

최후 승리를 위해, 전국 해방을 위해“

 

이것은 중국인민해방군가의 맨 마지막 소절이다. 여기서 말하는 “최후 승리”와 “전국 해방”은 대만통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중국 전국을 해방한다는 뜻이다. 이런 사실만 봐도, 대만통일전쟁이 중국의 국가운명을 좌우하는 핵심문제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대만통일전쟁은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직후부터 중국의 국가운명을 좌우하는 핵심문제로 되었다. 

 

1949년 12월 7일 중국 본토에서 벌어진 내전에서 참패한 장졔스(蔣介石)의 국민당군은 130만 명에 이르는 지지자들과 함께 대만으로 달아났다. 1950년 5월 1일 중국인민해방군은 중국 최남단에 있는, 중국에서 두 번째로 큰 하이난섬(海南島)을 점령했고, 그때부터 대만을 점령하기 위한 마지막 전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중국이 대만을 통일하면 25년 동안 지속된 내전이 종식될 수 있었다. 중국인민해방군 정예부대들은 대만 해안으로부터 약 150km 떨어진 푸젠성(福建省)으로 집결하여 대만통일전쟁을 준비했다. 중국은 대만통일과 내전종식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바로 그런 시기에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났다. 6.25전쟁이 일어난 때로부터 이틀이 지난 1950년 6월 27일 당시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Harry S. Truman)은 “대만해협의 중립화는 미국의 최고 이익”이라고 하면서 중국인민해방군의 대만상륙을 저지하기 위해 미국 해군 제7함대를 대만해협에 급파하여 해상을 봉쇄했다. 미국의 대만해협봉쇄는 유엔헌장과 국제법을 위반한 불법행위였지만, 1949년 4월 23일에 창설된 중국인민해방군 해군은 무장력이 너무 약했기 때문에 미국 해군 제7함대에 맞설 수 없었다. 미국은 6.25전쟁이 거의 끝나가던 1953년 2월 2일에 가서야 대만해협봉쇄를 해제했는데, 6.25전쟁이 일어나는 바람에 중국은 대만통일전쟁의 결정적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판문점에서 정전협정이 체결되어 전쟁의 포성이 멎었던 1953년 7월 27일 이후 중국은 대만통일전쟁을 위한 군사행동을 재개했다. 제1차 대만해협위기가 발생한 것이다. 푸젠성에 집결한 중국인민해방군 포병부대들은 1954년 8월 11일부터 9월 3일까지 푸젠성에서 3~4km 떨어진, 대만군이 주둔하는 진먼댜오(金門島)와 마쭈렬도에 집중포격을 퍼부었고, 11월에는 다첸제도(大陳諸島)에 집중포격을 퍼부었다. 푸젠성과 저장성(浙江省) 인근에 있는 여러 섬들에서 중국인민해방군과 대만군이 치렬한 공방전을 벌어는 가운데, 중국인민해방군은 1955년 1월 18일 다첸제도에서 13km 떨어진 이장샨댜오(一江山島)에 상륙하여 그 섬을 점령했다. 대만통일전쟁의 결정적인 시기가 다가왔다. 

 

그러나 미국은 중국의 대만통일을 가로막으려고 광분했다. 1955년 1월 29일 미국 연방상원과 연방하원은 ‘대만결의안’을 의결했다. 그 결의안에서 미국 연방의회는 중국의 대만통일전쟁에 무력개입을 하는 전쟁권한을 미국 대통령에게 주었다. 주목되는 것은, 미국 대통령의 전쟁권한에 중국 본토에 핵공격을 가하는 권한이 들어있었다는 사실이다. 1955년 3월 당시 미국 국무장관 존 포스터 덜레스(John Foster Dulles)는 미국이 중국 본토에 대한 핵공격을 신중히 고려하고 있다느니 뭐니 하면서 핵공갈을 늘어놓았고, 당시 미국 해군 참모총장 로벗 카니(Robert B. Carney)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중국의 군사력을 파괴하는 전쟁계획을 검토하고 있다느니 뭐니 하면서 노골적으로 위협했다. 중국 본토에 대한 미국의 핵공격을 반대한다는 당시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Winston L. S. Churchill)의 발언이 언론에 보도되었을 때, 중국은 미국의 핵공갈이 공갈로 끝나지 않을 수 있을지 모른다고 우려했다. 미국은 중국이 6.25전쟁에 참전하였을 때 중국 본토에 대한 핵공격기회를 노리고 있었으므로, 중국인민해방군이 대만해방전쟁에 돌입하는 경우 중국 본토가 미국의 핵공격위험에 무방비로 노출될 수 있다는 심각한 우려가 중국의 발목을 잡았다. 그렇게 되어 중국인민해방군 포병부대들은 1955년 5월 1일 대만군이 점거하고 있는 대만해협의 작은 섬들에 대한 집중포격을 중지했다. 

 

포격은 중지했지만, 대만통일을 집요하게 가로막는 미국의 핵위협을 물리치고 기어이 대만통일을 실현하려는 중국의 결심은 더욱 굳어졌다. 중국이 미국의 핵위협을 물리치는 길은 핵무장밖에 없었다. 그래서 1955년 7월 4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은 중국의 핵무기개발사업을 지휘할 정책담당자 3인을 지명했다. 

 

그로부터 3년 뒤 제2차 대만해협위기가 발생했다. 1958년 8월 23일 오후 6시 중국인민해방군 포병부대들은 대만해협 진먼댜오와 마쭈렬도에 포탄 50,000발을 퍼붓는 집중포격을 가했다. 이튿날 밤 중국인민해방군 상륙부대는 대만해협의 작은 섬 둥딩댜오(東碇島)에 상륙하기 위한 전투에 돌입했다. 화들짝 놀란 미국은 제7함대를 대만해협에 급파했고, 최신형 전투기들을 대만 공군기지들에 배치했으며, 미국 본토에 있는 반항공미사일부대 1개 대대를 대만에 배치했고, 203mm 곡사포와 155mm 곡사포를 대만군 포병부대에 제공했다. 

 

제2차 대만해협위기 중에 중국인민해방군은 집중포격에서 멈추지 않고 공습작전을 전개했다. 1958년 9월 22일 중국 본토에서 이륙한 중국인민해방군 J-5 전투기 100대가 하늘을 새까맣게 뒤덮으며 대만 공습에 나섰다. 그에 맞서 대만군도 전투기 32대를 긴급히 출격시켰다. 대만해협 상공에서 조우안 쌍방 전투기들은 치렬한 공중전에 돌입했다. 100 대 32의 공중전이 벌어졌으므로, 중국인민해방군 전투기 조종사들이 이길 것으로 누구나 예상했다. 그런데 전혀 뜻밖의 사태가 벌어졌다.

 

대만군 전투기들은 비밀병기를 사용하여 중국인민해방군 전투기들을 한 대씩 격추하기 시작했다. 그 비밀병기가 바로 미국이 대만에 긴급히 보내준 AIM-9 공대공미사일이다. 공대공미사일이라는 개념 자체를 알지 못했던 중국인민해방군 전투기 조종사들은 어이없게도 20여 기를 격추당하고 퇴각했다. 그로써 미국이야말로 대만통일전쟁을 가로막은 주적이라는 사실이 또 다시 입증되었다.  

 

1995년 7월 21일 제3차 대만해협위기가 발생했다. 대만독립을 획책하는 리덩후이(李登輝)가 대만총통에 당선되어 국가분렬책동을 극단적으로 밀고 나갔기 때문에 중국은 군사행동을 단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95년 7월 21일부터 1996년 3월 23일까지 8개월 동안 지속된 제3차 대만해협위기 중에 중국인민해방군은 대만해협을 향해 탄도미사일을 발사하는 위협사격을 여러 차례 진행했고, 푸젠성에 전투부대들을 집결시켜 대만상륙전을 연습했다. 화들짝 놀란 미국은 항모전투단 2개를 대만 인근 해역으로 급파했고, 100,000t급 핵추진항공모함과 40,000t급 강습상륙함을 비좁은 대만해협 안으로 들이밀면서 중국인민해방군의 대만상륙을 서둘러 차단했다. 

 

그러나 미국군에게 겁을 먹고 물러설 중국인민해방군이 아니었다. 중국인민해방군은 8,400t급 미사일구축함과 3,000t급 잠수함들을 출동시켰다. 그 구축함에는 항공모함을 공격할 반함선미사일을 탑재되었고, 그 잠수함들에는 항공모함을 공격할 중어뢰가 탑재되었다. 또한 중국인민해방군은 최신형 전투기 수호이-30을 100대나 출격시켰다. 대만통일전쟁이 눈앞에 다가왔다. 전쟁공포에 빠진 많은 대만주민들이 미국과 캐나다로 도피했다. 중국인민해방군 미사일부대들이 탄도미사일을 집중발사하여 대만군 방공망을 파괴하면, 중국인민해방군 상륙부대들이 대만해협을 건널 수 있었다. 

 

그렇지만 중국은 제3차 대만해협위기 속에서도 대만통일전쟁에 돌입하지 못했다. 무슨 사연이 있었던 것일까? 그로부터 17년이 지난 2013년 1월 1일 중국 언론매체 <환구망> 보도기사에서 그 사연이 밝혀졌다. 보도에 따르면, 1996년 제3차 대만해협위기에 불법적으로 개입한 미국은 중국인민해방군 미사일부대들이 사용하는 위성위치확인체계신호(GPS signal)를 조작하는 전자전을 은밀히 벌여 중국인민해방군 미사일부대들이 발사한 탄도미사일이 비행 중에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가도록 교란했다고 한다. 그렇게 되어 중국인민해방군 미사일부대들이 대만 인근 해상으로 발사한 탄도미사일 3발 가운데 2발이 목표수역에서 벗어났다. 1996년 당시 중국은 전자교란전에 대처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미국이 전자전으로 탄도미사일의 비행을 교란하면, 중국으로서는 속수무책이었다. 1996년에 일어난 제3차 대만해협위기 속에서 중국이 대만통일전쟁에 돌입하지 못하고 발길을 돌려야 했던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사진 2> 

 

▲ <사진 2> 이 사진은 2020년 1월 19일 중국 웨이보에 유출된 중국인민해방군 전쟁지휘소 내부를 촬영한 사진이다. 사진을 보면, 대만섬 남쪽에 상륙하는 작전지휘소라는 지휘소명칭이 보이고, 대만섬 남쪽에 상륙하는 작전경로도라는 제목의 대형지도가 벽에 걸려있다. 상륙지대를 보여주는 커다란 모형판이 실내 중앙에 놓여 있다. 이런 정황을 살펴보면, 사진 속의 전쟁지휘소는 대만 남부해안에 상륙하는 작전임무를 맡은 중국인민해방군 해군 륙전대의 전쟁지휘소인 것으로 보인다. 대만섬 서부해안은 높은 산들이 가로막고 있어서 상륙하기에 불리하다. 그래서 중국인민해방군은 남부해안과 북부해안에 상륙하는 작전계획을 세워놓은 것으로 생각된다.  

 

제3차 대만해협위기가 발생했던 때로부터 어언 25년 세월이 흘렀다. 그 긴 세월 동안 중국은 미국의 무력개입을 차단하고 대만통일전쟁을 수행할 강한 힘을 키워왔다. 이를테면, 중국인민해방군 미사일부대들은 대만의 전략거점들을 조준한 미사일 2,500발을 집중배치했다. 그리고 대만해방전쟁에서 중심역할을 수행할 중국인민해방군 해군은 자기의 무장력을 대폭 강화했다. 그 사정은 다음과 같다.

 

항공모함 2척 

핵추진잠수함 12척을 포함함 잠수함 79척

구축함 50척

호위함 49척

경비함 71척

미사일정 109척

구잠함 94척

경비정 17척

소해정 36척

강습상륙함 2척

상륙수송함 8척

상륙함 32척

상륙정 33척

 

대만해방전쟁에서 중심역할을 수행할 중국인민해방군 공군도 해군에 뒤질세라 자기의 무장력을 대폭 강화했다. 그 사정은 다음과 같다.

 

전투기 1,200대

공격기 150대

폭격기 153대

정찰기 139대

수송기 445대

훈련기 1,618대

헬기 1,157대

 

그것만이 아니었다. 중국인민해방군은 대만통일전쟁에 개입한 미국군을 격퇴할 강한 무장력도 갖췄다. 만일 상황을 오판한 미국이 중국의 대만통일전쟁을 저지하기 위해 중국 본토를 공격하면, 중국은 사거리가 4,000km에 이르는 정밀타격탄도미사일 둥펑-26을 발사하여 괌과 오끼나와에 설치된 미국의 군사전략거점들을 외과수술식으로 제거할 수 있다. 만일 상황을 오판한 미국이 중국의 대만통일전쟁을 저지하기 위해 항모전투단을 대만 인근 해역으로 출동시키는 경우, 중국은 사거리가 1,500km에 이르는 반함선탄도미사일 둥펑-21D를 발사하여 미국 항모전투단을 격침할 수 있다.  

 

지금 중국은 중국공산당 창건 100주년을 앞두고 있다. 중국은 중국공산당 창건 100주년이 되는 2021년 7월 23일 이전에 오끼나와 ⟶ 대만 ⟶ 필리핀 ⟶ 보르네오를 연결하는 제1도련선(島連線) 밖으로 미국의 영향력을 밀어내려는 평정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제1도련선 평정에서 핵심문제는 대만통일이다. 중국이 대만통일을 실현하면 일본 오끼나와는 중국의 포위망 안에 들어가게 된다.

 

또한 중국은 제1도련선 평정계획을 실행한 이후 중화인민공화국 창건 100주년이 되는 2049년 10월 1일 이전에 일본 오가사와라제도 ⟶ 괌 ⟶ 싸이판 ⟶ 파푸아뉴기니를 연결하는 제2도련선 밖으로 미국의 영향력을 몰아내려는 제2차 평정계획을 추진할 것이다. 제2도련선 평정에서 핵심문제는 괌에 배치된 미국의 군사력을 무력화하는 것이다. 

 

 

3. 조선인민군과 한미연합군의 싸움, 중국인민해방군과 미일동맹군의 싸움 

 

중국이 대만통일전쟁에서 가장 우려하는 것은 한미연합군과 미일동맹군이 서해와 동중국해에서 중국인민해방군의 측면을 공격하는 것이다. 한미연합군과 미일동맹군이 중국인민해방군의 측면을 공격하면, 중국이 대만통일전쟁에서 승리하더라도 혹심한 피해를 입고 승리할 것이다. 중국은 어떻게 하면 혹심한 피해를 입지 않고 압도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을지를 고심했다. 

 

중국의 고심은 중국이 대만통일전쟁에 돌입했을 때 과연 한미연합군과 미일동맹군이 자동적으로 무력개입을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결부된 것이다. 우선 한미연합군의 무력개입문제부터 살펴보자. 1953년 10월 1일 워싱턴에서 체결된 한미상호방위조약이 한미연합군의 무력개입문제를 결정하는 근거로 된다. 그 조약의 제2조는 다음과 같다. 

 

“당사국은 어느 일국의 정치적 독립 또는 안전이 외부로부터의 무력공격에 의하여 위협을 받고 있다고 어느 당사국이든지 인정할 때에는 언제든지 당사국은 서로 협의한다. 당사국은 단독적으로나 공동으로나 자조와 상호원조에 의하여 무력공격을 방지하기 위한 적절한 수단을 지속하고 강화시킬 것이며, 본 조약을 실현하고 그 목적으로 추진할 적절한 조치를 협의와 합의 하에 취할 것이다.”

 

위에 인용한 한미상호방위조약 제2조에 나오는 “외부로부터의 무력공격”은 중국이 대만을 공격한다는 뜻이 아니라, 북이 남을 공격한다는 뜻이므로, 이 조항은 중국의 대만통일전쟁과 무관하다. 한미상호방위조약 제3조는 다음과 같다.

 

“각 당사국은 타 당사국의 행정지배 하에 있는 영토와 각 당사국이 타 당사국의 행정지배 아래로 합의적으로 들어갔다고 인정하는 금후의 영토에 있어서 타 당사국에 대한 태평양지역에 있어서의 무력공격을 자국의 평화와 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라고 인정하고 공동의 위험에 대처하기 위하여 각자 헌법상의 수속에 따라 행동할 것을 선언한다.”  

 

위의 인용문은 암시적인 표현이 들어있는 데다, 매끄럽게 번역하지 못한 문장이어서 뜻을 이해하기 힘들다. 위의 인용문을 직설적인 용어로, 알기 쉽게 다시 풀어쓰면 다음과 같은 뜻이 드러난다. 

 

“중국이 한국의 행정지배 아래에 있는 영토(군사분계선 이남지역)에 무력공격을 하는 경우, 그리고 중국이 앞으로 한국이 흡수통일하여 행정적으로 지배하게 될 영토(군사분계선 이북지역)에 무력공격을 하는 경우, 미국과 한국은 공동의 위험에 대처하기 위해 각자 자국의 헌법절차에 따라 행동할 것을 선언한다.“ 

 

위의 해석문에서 드러난 것처럼, 한미상호방위조약 제3조는 6.25전쟁에 참전하여 한국을 공격했던 중국이 한국을 또 다시 공격하는 상황을 가정하고 있다. 또한 한미상호방위조약 제3조에 따르면, 중국이 한국을 공격하는 경우에도 미국이 자동적으로 무력개입을 하는 게 아니라 미국의 헌법절차에 따라 행동하게 되는 것이다. 헌법절차에 따라 행동한다는 말은 미국 연방의회에서 무력개입문제를 의결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위에 인용한 한미상호방위조약 제3조는 남측이 북측을 흡수통일하는 경우 중국이 한국을 공격하는 상황을 가정한 조항이지, 중국이 대만을 공격하는 상황을 가정한 조항은 아니다. 따라서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중국의 대만통일전쟁과 무관하다. <사진 3> 

 

▲ <사진 3> 1961년 7월 11일 중국 베이징에서 김일성 주석과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는 '조중우호협조 및 호상원조에 관한 조약'을 체결했다. 위의 사진은 김일성 주석과 저우언라이 총리가 조약문에 서명하고 악수를 나누는 장면이다. 그 조약 제2조에 따르면, 중국이 대만통일전쟁에 돌입하면, 조선은 "모든 힘을 다하여, 지체 없이" 중국을 지원해야 한다. 전쟁상황에서 조선이 모든 힘을 다하여, 지체 없이 중국을 지원한다는 말은 중국의 대만통일전쟁이 일어날 때 조선도 지체 없이 조국통일대전에 돌입한다는 뜻이다.  

 

중국의 대만통일전쟁과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것은 조선과 중국이 체결한 조약이다. 1961년 7월 11일 중국 베이징에서 김일성 주석과 저우언라이(周恩來) 중국 총리는 ‘조중우호협조 및 호상원조에 관한 조약’을 체결했는데, 그 조약 제2조는 다음과 같다.

 

“체약 쌍방은 체약 쌍방 중 어느 일방에 대한 어떠한 국가로부터의 침략이라도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모든 조치를 공동으로 취할 의무를 지닌다. 체약 일방이 어떠한 한 개의 국가 또는 몇 개 국가들의 련합으로부터 무력침공을 당함으로써 전쟁상태에 처하게 되는 경우에 체약 상대방은 모든 힘을 다하여 지체 없이 군사적 및 기타 원조를 제공한다.”

 

위의 인용문이 말해주는 것처럼, 중국이 대만통일전쟁에 돌입하면 조선은 ‘조중우호협조 및 호상원조에 관한 조약’에 따라 “모든 힘을 다하여, 지체 없이” 중국을 지원해야 한다. 전쟁상황에서 조선이 모든 힘을 다하여, 지체 없이 중국을 지원한다는 말은 중국의 대만통일전쟁이 일어날 때 조선도 지체 없이 조국통일대전에 돌입한다는 뜻이다. 조선의 조국통일대전은 한미연합군이 중국의 대만통일전쟁에 개입할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할 아니라, 중국의 대만통일전쟁에 개입하는 미일동맹군의 전투력을 분산시킴으로써 중국에게 결정적으로 유리한 상황을 조성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미일동맹군이 중국의 대만통일전쟁에 개입하는 문제인데, 미일안전보장조약이 그 문제를 어떻게 규정했는지를 살펴보자. 1960년 1월 19일 워싱턴에서 체결된 미일안전보장조약 제5조는 다음과 같다. 

 

“각 당사국은 일본의 행정권 아래에 있는 영토에서 벌어지는 각 당사국에 (대한) 무력공격이 평화와 안전을 위태롭게 한다고 인식하면, 각자 헌법조항 및 절차에 따라 공동의 위험에 대처하는 행동을 할 것임을 선언한다.”

 

위의 조항에 따르면, 미일동맹군은 일본 영토에 대한 제3국의 무력공격에 공동으로 대처하는 것이지, 중국의 대만통일전쟁에 공동으로 대처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중국이 대만통일전쟁에 돌입하는 경우 일본은 그 전쟁에 무력개입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중국은 대만을 귀속하고 나서, 일본이 불법적으로 지배하는, 대만과 오끼나와 사이에 있는 무인도인 댜오위다오(釣魚島, 일본은 센가꾸렬도라고 부름)도 귀속할 것이고, 그에 따라 오끼나와는 중국의 포위망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더욱이 미일동맹군은 중국인민해방군을 상대하는 전쟁연습을 줄곧 해왔기 때문에 일본자위대가 중국의 대만통일전쟁에 개입하는 데서 작전적 어려움이 없다. 

 

예컨대, 2020년 10월 26일부터 11월 5일까지 주일미국군 9,000명과 일본자위대 37,000명이 참가한 합동전쟁연습 ‘킨 쏘드(Keen Sword)’가 일본 전역에서 진행되었다. 일본방위성이 펴낸 ‘방위백서’ 2019년판에 따르면, 일본자위대와 주일미국군은 1년 동안 10종 이상의 합동전쟁연습을 38회나 실시했으며, 총연습기간은 406일에 이른다고 한다. 또한 일본은 2016년 3월부터 미국의 중국공격에 동참하는 무력행사를 합법화한 ‘안전보장관련법’을 만들어놓고 미일동맹군의 대중전쟁연습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일본육상자위대 막료장(육군참모총장) 출신 이와따 기요후미(岩田淸文)는 2017년 9월 15일 워싱턴에서 진행된 토론회에서 미국이 중국과 무력충돌을 하는 경우 미국군은 제2도련선으로 일시 후퇴하고, 일본자위대가 제1도련선에서 중국인민해방군과 싸우는 작전방안이 검토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일본 <요미우리신붕> 2020년 10월 30일 보도에 따르면, 일본방위성은 14만명을 동원한 대규모 대중전쟁연습을 2021년에 실시하는 문제를 검토하는 중이라고 한다. 이처럼 일본자위대는 미국의 힘을 믿고 만용을 부리며 중국인민해방군과 붙어보려는 것이다.  

 

 

4. 동북아시아 군사정세는 폭발점으로 다가서고 있다

 

중국이 대만통일전쟁에 돌입했을 때, 조선이 지체 없이 조국통일대전에 돌입하면, 전시에 한미연합군을 무조건 지원해야 하는 미일동맹군은 중국의 대만통일전쟁과 조선의 조국통일대전에 동시에 대처해야 한다. 하지만 미일동맹군은 그 두 전쟁에 동시에 대처할 전투력을 갖지 못했다. 미국은 중국의 대만통일전쟁에 무력개입을 할 것인지 아니면 조선의 조국통일대전에 무력개입을 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미국은 대만을 포기할 것인지 아니면 한국을 포기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   

 

조선인민군과 중국인민해방군이 각각 준비한 군사력과 전쟁준비태세를 보면, 미국은 조선의 조국통일대전에 무력개입을 해도 패할 수밖에 없고, 중국의 대만통일전쟁에 무력개입을 해도 패할 수밖에 없다. 미국에게는 패전 가능성만 남아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국은 수수방관하지 않고, 전략적 선택을 할 것이 분명하다. 미국의 전략적 선택은 다음과 같은 손익계산에 따라 이루어질 것으로 보인다.

 

중국이 대만통일전쟁에서 승리하면, 미국은 대만을 잃어버릴 뿐 아니라, 미일동맹의 전략거점인 오끼나와가 중국의 포위망에 들어가게 될 것이고, 미국의 서태평양 전략거점인 괌마저 전략적 가치를 잃게 될 것이다. 다른 한편, 조선이 조국통일대전에서 승리하면, 미국은 한국을 잃어버릴 뿐 아니라, 미일동맹의 전략거점인 일본 사세보가 불안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미국은 괌과 오끼나와를 종전대로 유지할 수 있다. 이러한 손익계산을 따져보면, 미국은 조선의 조국통일대전에 무력개입하는 것을 포기하고, 중국의 대만통일전쟁에 무력개입할 때 손실을 줄일 수 있다는 사실이 자명해진다. 그러므로 중국인민해방군은 대만통일전쟁에서 대만군을 제압하는 한편, 대만군보다 훨씬 더 강한 미일동맹군과 싸우게 될 것이다. <사진 4>

 

▲ <사진 4> 2020년 11월 초 조선인민군 총참모부는 큰물피해복구에 동원된 군부대들에게 피해복구지역 살림집건설을 완료하지 못했더라도 11월 25일까지 무조건원대복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이것은 2020년 12월 1일부터 2021년 3월20일까지 진행될 연례적인 군사훈련에 참가하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 이번 군사훈련은 중국의 대만통일전쟁 가능성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진 엄중한 시기에 진행될것이므로, 조선인민군은 가장 강도 높은 실전연습을 벌일 것이며, 그에 따라 한미연합군 수뇌부는 극도로 긴장할 것이다.  

 

조선의 언론보도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처럼, 최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공개활동을 중지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2020년 10월 21일 중국인민지원군 조선전선참전 70주년을 맞아 평안남도 회창군에 있는 중국인민지원군렬사릉원을 방문한 이후 오늘까지 26일째 공개활동을 하지 않고 있다. 또한 올해에 들어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회의와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 회의가 거의 매달 진행되었는데, 2020년 10월 5일 이후 회의는 열리지 않고 있다. 

 

미국의 반사회주의선전매체 <자유아시아방송> 2020년 11월 10일 보도에 따르면, 조선인민군 총참모부는 2020년 11월 초 큰물피해복구에 동원된 군부대들에게 피해복구지역 살림집건설을 완료하지 못했더라도 11월 25일까지 무조건 원대복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이런 원대복귀명령은 2020년 12월 1일부터 시작되는 연례적 군사훈련에 참가하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 조선인민군은 2020년 12월 1일부터 2021년 3월 20일까지 연례적 군사훈련을 진행할 것인데, 예년 경험을 보면, 정치사상학습 ⟶ 부대별 실전연습 ⟶ 신년사 학습 ⟶ 쌍방실동연습 및 협동작전연습 ⟶ 작전지휘훈련 ⟶ 판정과 총화 순으로 진행될 것으로 예견된다. 이번 군사훈련은 중국의 대만통일전쟁 가능성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진 엄중한 시기에 진행될 것이므로, 조선인민군은 가장 강도 높은 실전연습을 벌일 것이며, 그에 따라 한미연합군 수뇌부는 극도로 긴장할 것이다. 

 

미국에서는 인구이동이 가장 많은 2020년 11월 26일 추수감사절 휴가가 끝나면, 그러지 않아도 급격히 확산되고 있는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이 폭발하여 최악의 보건재앙에 빠질 것이고, 대선결과와 정권이양문제를 놓고 양보 없는 싸움을 벌이는 트럼프파와 바이든파의 대결이 격화되어 최악의 정치혼란에 빠질 것이다. 미국이 그런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을 때, 동북아시아 군사정세는 조선의 조국통일대전과 중국의 대만통일전쟁이 동시에 일어날 거대한 폭발점으로 다가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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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징집 희생자 연세대생 정성희, 38년만의 초혼안장식

  •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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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2020/11/16 09:14
  • 수정일
    2020/11/16 09:14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잔혹한 세월..."야만적 인권유린에 철퇴 가해야 진정한 민주사회"

  • 기자명 이성우 
  •  
  •  입력 2020.11.15 15:23
  •  
  •  수정 2020.11.16 07:25
  •  
  •  댓글 0
 

1981년 연세대학교 영·독·불 계열로 입학한  만 19살의 신입생 정성희는 그해 11월 25일 학내에서 벌어진 격렬한 시위 가담자로 서대문경찰서에 연행되어 그날 곧바로 군대로 끌려갔다. 

그렇게 강제징집당한 정성희는 이듬해인 1982년 7월 23일 초소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갓 스무살을 넘긴 그의 죽음은 '의문사'라는 이름으로,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숨겨졌다. 그의 주검은 가족들도 모르게 군 당국이 화장하여 납골조차 못한 채 어딘지 모를 곳에 뿌려졌다. 잔혹한 세월이었다.

지난 14일 고인이 활동했던 흥사단아카데미를 중심으로 연세대민주동문회 선후배들이 경기도 이천 민주화운동기념공원에서 초혼안장식을 거행했다.

정성희는 스무살 청년으로 유명을 달리한 지 38년만에 제대로 된 안식의 터에서 영면할 수 있게 되었다. 

그와 함께 흥사단아카데미에서 활동했던 친구이자 지금까지 그를 잊지않고 이날 초혼안장식을 준비한 이성우씨의 간략한 기록과 단상을 게재한다. 연세대 민주동문회 밴드에 게재된 글과 사진을 동의하에 싣는다. [편집자]

전두환 정권이 자행한 강제징집, 녹화선도사업의 첫 희생자였던 고 정성희의 초혼안장식이 14일 경기도 이천 민주화운동기념공원에서 열렸다. 
전두환 정권이 자행한 강제징집, 녹화선도사업의 첫 희생자였던 고 정성희의 초혼안장식이 14일 경기도 이천 민주화운동기념공원에서 열렸다. 

11월 14일(토). 강제징집, 녹화 선도사업의 첫 희생자였던 故 정성희의 초혼안장식이 이천에 있는 민주화운동기념공원 열사묘역에서 열렸다. 

예상보다 많은 인파가 몰린 초혼 안장식은 민중의례와 고인의 약력소개, 추도사와 조가 합창, 헌화, 취토 등 순서로 약 1시간 정도 진행되었다. 

재학중 동아리에서 정성희를 직접 지도했던 선배 이재영(경영79)이 사회를 맡아 진행하고 안장예배는 김성복(연대 신학77, 부천 샘터교회)목사가 집례했다.

먼저 흥사단아카데미 동료들이 준비한 약력보고와 추모시 낭송, 추모사, 연세 강녹진(강제징집 녹화선도공작 진실규명 추진위원회)에서 준비한 추모사, 연세 어울림합창단에서 준비한 추모곡(부치지 못한 편지, 그날이 오면) 공연 등이 이어졌다.

이어 취토와 헌화를 시작으로  참여 단체 소개와 인사, 그리고 유족을 대표해 정성희 아버님의 인사 말씀으로 이날 초혼안장식은 끝났다.

추모식은 엄숙하고 경건한 분위기로 이어졌으나 어릴 적 성희를 직접 업어서 키운 적이 있다는 고모는 끝내 오열을 토하기도 했다.

38년만에 안식의 터를 찾은 정성희를 위한 추모가 이어졌다.
38년만에 안식의 터를 찾은 정성희를 위한 추모가 이어졌다.

초혼안장식이란 혼을 불러서 안장한다는 뜻으로 유해가 없을 경우에 진행되는데, 정성희의 유해는 군 당국의 강압에 의해 화장된 후 화장터 인근에 뿌려졌기 때문에 초혼안장식으로 치러질 수 밖에 없었다.

1982년 정성희가 군에서 '의문사'했으니 38년이나 되는 긴 세월이 흘렀다. 이후 민주주의의 역사는 부침을 거듭했고 2000년에 와서야 '의문사'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었다.

2002년 9월 16일 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정성희의 죽음에 대해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공권력의 위법한 행사로 인한 사망으로 인정된다"고 결정하였다. 

이에 화답하여 연세대학교는 2003년 2월 고인에게 명예졸업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반면 군 당국은 아무 것도 인정하지 않은 채 시간만 보내다가 2018년 7월 13일 국방부 중앙전공사상심사위원회를 통해 정성희의 죽음이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강제징집되어 철책(DMZ)근무 중 보안부대의 불법적인 조사와 감시, 진술강요 등의 위법한 공권력의 행사로 사망한"것이라고 인정하였다. 

이어 2019년 12월 16일 국가보훈처는 고인을 "의무복무자로서 가혹행위 등이 원인이 되어 사망한 것으로 판단하여 국가보훈대상자 재해사망군경(순직2형 2-2-1)으로 인정"하였다.

이제 고인의 명예는 사회적 인식에 있어서나 법적 지위에 있어서나 어느 정도 회복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아직도 남은 문제는 있다. 

정성희를 담당한 당시 보안사나 그 구성원은 '보안부대의 불법적인 조사와 감시, 진술강요 등의 위법한 공권력의 행사'를 직접 한 당사자들인데, 정작 이들은 관련 자료를 제대로 내놓은 것도 없고 전부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이는 당시 광범위하게 벌어진 강제징집, 녹화선도공작 피해자들의 명예회복과도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내세웠지만 뒤에선 가장 비열하고도 야만적인 인권탄압을 벌였던 자들에게 철퇴를 가할 수 있는 사회가, 그리고 그 피해자와 희생자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보상해줄 수 있는 사회야말로 진정 성숙한 민주사회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이날 초혼안장식에는 고인의 유가족, 동료, 사회단체 인사 등이 참석했다.
이날 초혼안장식에는 고인의 유가족, 동료, 사회단체 인사 등이 참석했다.

막바지 단풍구경 인파로 고속도로가 아침부터 혼잡했던 관계로 예정시간보다 20가량 늦게 시작된 이날 안장식에는 끝날 무렵까지도 문상객의 행렬이 이어졌다. 

유가족, 동료, 사회단체 인사 등 80명 정도가 참여했고 추모의 현수막, 조화와 다과, 음료 등을 여러 개인과 단체에서 협찬해 주었다.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리고 고인의 안식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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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당한 차별=불법” 2687일만의 재발의…여당 눈치보기에 표류

등록 :2020-11-16 04:59수정 :2020-11-16 07:33

 

입법의시간 ③차별금지법

정의당 장혜영 의원 등 6월 발의
법사위에 정의당 없어 논의 공전

민주당 이상민 의원도 평등법 준비
“오해 커 사회적 공론화에 중점”

기독교계 우려와 달리 ‘강한 규제’ 없어
형사 처벌은 1개 조항뿐
소수자에 제도적 버팀목 의미

2687일.

 

 2013년 2월 차별금지법이 처음 발의된 뒤 장혜영 정의당 의원이 지난 6월29일 이 법을 재발의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19대 국회 때 최원식 당시 민주통합당 의원 등 12명이 발의한 차별금지법은 우여곡절 끝에 2개월 뒤 발의가 철회됐다. 지난 6월 장혜영 의원 등 정의당 의원 6명, 더불어민주당 의원 2명, 열린민주당과 기본소득당 의원이 1명씩 참여해 법안을 발의한 뒤 국가인권위원회가 6월30일 서울 중구 인권교육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국회에 평등법(평등 및 차별금지에 관한 법률) 제정을 권고했다. 2006년 노무현 정부 당시 인권위가 국무총리에게 차별금지법 입법을 권고한 지 14년 만이다.

장 의원 등의 법안 재발의로 막혔던 차별금지법 제정의 물꼬는 트였지만, 5개월이 된 지금 국회 상황은 낙관적이지 않다. 장혜영 의원은 <한겨레>와 만나 “차별금지법이 상정된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정의당 의원이 없어 상임위 논의를 주도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며 답답해했다. 장 의원은 “이제 차별금지법은 정책이 아닌 정치로 다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정부·여당을 향해 지속적으로 질문을 던지면서 이 법안이 필요한 이유를 쟁점화해나갈 생각이다”라고 말했다. 가만히 앉아서 민주당 의원들의 참여가 늘기를 기다리지만은 않겠다는 뜻이다.민주당에서도 차별금지법 제정 움직임이 없는 것은 아니다. 5선 중진인 이상민 의원이 인권위가 입법 권고한 평등법을 바탕으로 법안 발의를 준비 중이다. 현재 30명가량의 의원이 발의에 뜻을 함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지난 10월 국정감사가 시작되기 전 모임을 열어 평등법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다고 한다. 국감이 끝난 뒤인 지난 5일에는 일부 의원과 기독교계·시민단체 관계자들이 간담회를 했다. 이상민 의원은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과거 발의를 하고 유야무야됐던 사례가 많기 때문에, 발의보다 사회적 공론화에 중점을 두고 입법을 추진할 계획”이라며 “법에 대한 오해가 커서 여러가지 사실과 다른 주장들이 나오는데, 공감대를 넓히기 위해 법 제정에 반대하는 그룹과도 토론을 이어나가겠다”고 말했다. 이 의원은 “부당한 차별을 금지해야 한다는 뜻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없다. 평등법을 둘러싼 과도한 오해가 사라진다면 충분히 입법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차별금지법은 노무현 정부 때인 2007년 정부 발의 뒤 모두 일곱차례 발의됐다. 정부가 발의한 1건과 진보정당이 발의한 3건은 국회에 계류돼 있다가 임기만료로 폐기됐다. 민주당의 전신인 민주통합당은 2013년 두차례에 걸쳐 발의했다가 모두 철회했다. 대형 교회가 중심이 된 조직적 압박이 이어지자, ‘표’에 민감한 지역구 의원들이 하나둘씩 빠져나가면서 입법이 무산된 것이다.
성소수자 차별 반대 무지개행동 활동가들이 지난 7월30일 오전 국회 앞 기자회견에서 다양성을 상징하는 무지개 우산을 펼쳐 보이며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성소수자 차별 반대 무지개행동 활동가들이 지난 7월30일 오전 국회 앞 기자회견에서 다양성을 상징하는 무지개 우산을 펼쳐 보이며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기독교계 등 법안 반대 그룹이 우려하는 것과 달리, 차별금지법에는 강한 규제 내용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차별금지법과 평등법에는 형사 처벌 조항이 하나밖에 없다. 사용자·임용권자 등이 피해자에게 해고·전보·징계·퇴학 등 불이익 조처를 취할 경우, 형사 처벌을 할 수 있다는 조항이다. 차별금지법은 이 경우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만원 이하의 벌금, 평등법은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오히려 제재 수준이 높지 않아 실효성이 없다는 지적까지 나올 정도다.차별금지법 제정이 절실한 이유를 홍성수 숙명여대 법학과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차별금지법은 천지개벽을 가져올 법이 아니다. 효과가 있다면, 부당한 차별이 불법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하는 것이다. 이는 차별을 줄이는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하고 학교나 군대 등에서 관련 정책을 세우도록 하는 근거가 될 수 있다.” 차별금지법이 있다면 올해 초 한 트랜스젠더 학생이 숙명여대에 합격했다가 입학을 포기한 경우나, 변희수 하사가 성전환 수술을 이유로 강제로 전역 조처된 사건과 같은 일이 발생할 때, 이들을 차별하는 것은 불법이라는 사회적 분위기를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홍 교수는 “차별금지법의 제재 강도가 크지 않다고 그 의미가 작은 것은 결코 아니다. 소수자들에게 제도적, 사회적 지지는 일상을 버텨나갈 수 있는 커다란 버팀목이 된다”고 덧붙였다.
 
정환봉 이지혜 기자 bonge@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politics/assembly/970060.html?_fr=mt1#csidxe27e9ea3e818c0ca5e35d26fd8328c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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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의 숙원 ‘국가보안법 폐지’, 촛불정부서 이뤄질까

총선 이후 거대 여당 탄생...16년 만에 다시 불붙은 국가보안법 폐지 논의

최지현 기자 cjh@vop.co.kr
발행 2020-11-15 16:52:57
수정 2020-11-15 19:5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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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ㅣ해방 직후 탄생한 국가보안법은 우리 사회의 해묵은 적폐다.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면서 국제사회에서도 국가보안법, 그중에서도 특히 7조를 폐지할 것을 촉구해왔다. 최근 국회의 과반 의석을 확보한 여당에서 국가보안법 7조 폐지 법안이 발의되고 시민사회도 이에 동력이 되고 있다. 인권존중과 나라다운 나라 건설을 표방한 문재인 정부가 이 숙원을 풀 수 있을지 짚어본다.

① 문재인 대통령의 숙원 ‘국가보안법 폐지’, 촛불정부서 이뤄질까

참여정부에서 민정수석을 지냈던 문재인 대통령에게 숙원이 있다면 그 하나는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설치일 것이고 또 하나는 국가보안법 폐지일 것이다. 문 대통령은 2012년 대선을 앞두고 낸 저서 ‘문재인의 운명’에서 이렇게 말했다. “(참여정부 당시) 민정수석 두 번 하면서 끝내 못한 일, 그래서 아쉬움으로 남는 게 몇 가지 있다. 공수처 설치 불발과 국가보안법을 폐지하지 못한 일도 그렇다.”

특히 문 대통령은 공수처보다 국가보안법이 “더 뼈아팠던 것”이라고 회고하면서 국가보안법을 폐지하지 못한 데 대한 아쉬움을 크게 드러냈다. 문 대통령이 이루고자 했던 공수처 설치는 이제 임박했다. ‘적폐청산’을 앞세워 탄생한 문재인 정부에게 남은 것은 국가보안법 폐지다.

2017년 3월 서울 종로구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촛불집회에서 참가자들이 촛불을 들고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을 촉구하고 있는 모습. 자료사진.
2017년 3월 서울 종로구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촛불집회에서 참가자들이 촛불을 들고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을 촉구하고 있는 모습. 자료사진.ⓒ제공 : 뉴시스

태어날 때부터 문제였던 국가보안법
문 대통령도 과거 “폐지해야 한다” 촉구

국가보안법은 오래 전부터 악법으로 꼽혔다. 국가보안법 제1조 제1항은 “이 법은 국가의 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반국가활동을 규제함으로써 국가의 안전과 국민의 생존 및 자유를 확보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정하고 있다. 국가보안법은 과연 ‘국가의 안전과 국민의 생존 및 자유를 확보’하기 위해 만들어진 법일까, 그리고 실제 그러한 역할을 하고 있을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아니오’가 될 수밖에 없는 게 지금 현실이다.

국가보안법은 해방 직후인 1948년 제헌의회에서 제정됐다. 실질적인 목적은 ‘좌익세력과 단체 척결’이었다. 이에 제헌의회에서 48명의 국회의원들이 폐지 동의안을 내는 등 강한 반발이 나왔다. 정치적으로 악용될 가능성이 크고 사상을 처벌한다는 것은 정당하지 못한다는 등의 이유에서였다. 국가보안법이 일제 강점기 때 독립운동 탄압에 악용된 ‘치안유지법’을 그대로 옮겨왔다는 점에서도 이 법이 악용될 소지는 충분했다. 오히려 국가보안법은 일제의 잔재로 청산해야 할 대상으로 꼽혔다.

이처럼 반발이 거세지자 제헌의회는 ‘비상시기의 임시조치법’이라는 이유를 들면서 국가보안법을 졸속으로 강행 처리했다. 훗날 형법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한시적으로 있을 법이지 영구 존속이 되는 법은 아니라며 성난 민심을 달랬던 것이다.

하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1953년 대한민국 최초의 형법 제정에 참여했던 초대 대법원장 김병로는 형법 개정 이후 국회에 나와 “국가보안법 주요 내용 대부분이 새 형법에 담겼으므로 국가보안법은 폐지해도 된다”고 권고했지만, “법 체계보다는 국민정신을 고려하여 존치시키자”는 일부 의원의 의견에 따라 국가보안법은 형법 제정 이후에도 유지됐다.

그렇게 72년이 지난 지금까지 국가보안법은 존속하고 있다. 군사독재 정권하에 개정되면서 오히려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일상적으로 더 억압하게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권은 국가보안법으로 정치적 반대자를 탄압했고, 국민들은 스스로 표현을 검열했다. 남과 북의 정상이 손을 맞잡는 오늘날에도 북한을 긍정적으로 표현했다는 이유로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고발되는가 하면, 대통령이 ‘북한의 비핵화 의지가 확고하다’는 등의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고발되고 있다.

이렇다 보니 국내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에서도 국가보안법 폐지를 거듭 요구할 정도다. 문 대통령도 2012년 대선을 앞두고 한 ‘통일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국가보안법은 폐지돼야 한다”며 “국가보안법은 인간 사상에 대한 검열, 행위 형법이 아닌 심정 형법의 문제, 모호한 범죄구성 요건, 형사절차상 피의자의 권리 제한, 사회 전체의 공안적 분위기 조성 등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문재인 대통령과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사진. 자료사진.
문재인 대통령과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사진. 자료사진.ⓒ양지웅 기자

참여정부 시절 국가보안법 개폐 논의 활발했지만
이견 좁히지 못하고 결국 무산

사실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려는 시도는 꾸준히 이어졌다. 2004년 당시 참여정부가 정부 차원에서는 처음으로 국가보안법 폐지를 추진했다. 그해 9월 노무현 대통령은 MBC ‘시사매거진 2580’에 출연해 “국가보안법이라는 낡은 칼을 칼집에 넣어 박물관으로 보내야 한다”며 의지를 드러냈고, 정부는 국가보안법 개폐 추진을 발표했다. 이는 국가인권위원회가 1년여간의 검토 끝에 국가보안법 폐지를 권고한 데 따른 것이기도 했다.

그해 4월 총선을 통해 구성된 17대 국회에서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과반 의석을 차지하면서 국가보안법 폐지 추진 동력도 얻은 상태였다. 당시 열린우리당 최용규 의원이 대표발의한 국가보안법 폐지 법안엔 150명이 서명했고, 민주노동당 노회찬 의원이 대표발의한 국가보안법 폐지 법안에도 10명이 서명하는 등 국가보안법 폐지에 국회 과반의 공감대가 형성돼 있었다.

뿐만 아니라 남북정상회담 이후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면서 보수정당인 한나라당도 국가보안법 폐지에 공감을 표하고 7조 개정안 등 다수의 개정안을 내기도 했다. 열린우리당 원내수석부대표를 지내며 당시 국가보안법 폐지를 이끌던 이종걸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대표상임의장은 최근 토론회에서 “그때 상대당(한나라당)의 남경필 원내수석대표가 ‘국가보안법 이름만 남겨 놓으면 1조부터 다 삭제하더라도 받아들이겠다’고 한 적도 있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이렇게 국회에서는 국가보안법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는 듯했다. 특히 국가보안법 7조(반국가단체 고무·찬양죄)의 개정 또는 폐지에 대해서는 여야와 보수진보를 불문하고 의원 대부분이 동의한 셈이었다. 참고로 국가보안법 7조는 우리가 가입돼있는 국제기구인 유엔(UN)도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과도하게 침해하는 측면이 있다며 1992년부터 2015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폐지를 권고했던 대표적인 독소조항으로 꼽힌다. 국가보안법이 적용된 사건의 대부분이 7조와 관련된 것이다.

하지만 순풍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당시 한나라당을 새롭게 이끌게 된 박근혜 대표가 국가보안법 폐지는 물론이고 개정에도 난색을 보이면서다. 보수진영이 상대진영을 공격할 때 유용한 ‘칼’이었던 국가보안법을 그대로 두고 싶었던 것이다.

이에 열린우리당이 주도하던 국가보안법 폐지는 한나라당의 극심한 반발에 부닥쳤고, 그러는 사이 각론을 두고 민주진보진영의 입장도 내부에서 엇갈리면서 실질적인 진척을 보이지 못했다. 결국 국가보안법에 손도 대지 못한 채 또 16년의 시간을 흘려보내야만 했다. 그사이 보수정권이 들어서면서 국가보안법에 의한 피해가 다시 속출했다.

2017년 대선 당시 더불어민주당 문재인(왼쪽부터), 자유한국당 홍준표, 바른정당 유승민, 정의당 심상정, 국민의당 안철수 대선후보가 서울 상암동 MBC 스튜디오에서 선거관리위원회 주최로 열린 마지막 TV토론 전 손을 잡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모습. 자료사진.
2017년 대선 당시 더불어민주당 문재인(왼쪽부터), 자유한국당 홍준표, 바른정당 유승민, 정의당 심상정, 국민의당 안철수 대선후보가 서울 상암동 MBC 스튜디오에서 선거관리위원회 주최로 열린 마지막 TV토론 전 손을 잡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모습. 자료사진.ⓒ국회사진취재단

안타까움과 자성의 목소리 낸 문 대통령
“국가보안법 7조부터 폐지해야”

이에 대해 문 대통령은 저서 ‘문재인의 운명’에서 “국보법 폐지를 위해 노력하지 않은 건 결코 아니다. 우리로선 굉장히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대통령까지도 직접 나서서 모든 노력을 다했다. 여당은 대통령의 국보법 폐지 발언 직후에야 부랴부랴 구체적인 작업에 나섰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문 대통령은 “이후 과정은 실망스럽기 짝이 없다”고 혹평했다. 문 대통령은 “대안을 내놓겠다고 했으나 결론은커녕 보안법 태스크포스를 해산했다. 내부 문건 유출이나 일부 소속 의원의 ‘언론플레이’를 핑계로 내세웠지만 실은 당내 이견조정에 실패했다”며 “당시 여당은 과반수 가까운 의석을 가지고도 당내 충분한 논의와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했다. 야당과의 협상도 부족했다. 국민들에게 제대로 호소하지 못해 여론으로 압도하지도 못했다”고 지적했다.

문 대통령은 “그분들을 탓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 점에 대해선 우리 모두의 반성이 있어야 한다”며 “우리 역량의 부족을 그대로 보여준 일”이라고 자성했다. 이어 “나도 김대중 정부 때 국보법을 폐지하지 않는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그런 비판이 그야말로 무색해졌다”며 “국보법 폐지를 못한 것이 그 시기에 진보, 개혁 진영의 전체적인 역량 부족을 보여주는 상징처럼 여겨진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성찰을 바탕으로 문 대통령은 2017년 대선을 앞두고 국가보안법 7조부터 폐지하자는 입장을 내놨다. 참여정부 당시 ‘국가보안법 전면 폐지’라는 입장에선 한발 물러선 것이었다.

문 대통령은 2017년 대선후보 TV토론에서 ‘국가보안법을 폐지할 것이냐’는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의 질문에 “예, 찬양·고무(7조) 그런 조항들은 개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그는 “정치는 타협이 가능한 안에서 해야 한다”며 “그때(참여정부) 여야 간 (국가보안법 7조 폐지) 의견이 모였는데, 그때 못 했던 것이 굉장히 아쉽다”고 털어놨다.

문 대통령은 ‘국가보안법 전면 폐지’에 대해선 “반대한 적 없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다만 “(전면 폐지는) 주장할 시기가 있는 것”이라며 “지금 남북관계가 엄중하니 여야 의견이 모일 범위에서 국가보안법을 개정하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일단 국가보안법 7조부터 폐지하는 것이 현실적이라는 얘기다.

21대 국회 본회의 자료사진
21대 국회 본회의 자료사진ⓒ정의철 기자

총선 이후 거대 여당 탄생
16년 만에 다시 불붙은 국가보안법 폐지 논의
시민사회도 ‘7조부터 폐지’ 대중운동 시작

그동안 시민사회에서는 국가보안법을 폐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꾸준히 이어져왔다. 하지만 정치권의 호응은 없었다. ‘촛불정부’로 일컬어지는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국가보안법을 없애자는 얘기를 하는 순간 보수진영으로부터 ‘빨갱이’라는 딱지가 붙게 되는 것도 부담으로 작용했다.

그러다가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올해 4월 총선에서 과반을 훌쩍 넘는 압도적인 의석을 차지하게 되면서 국가보안법 개폐 논의에 다시 불이 붙고 있다. 2004년 참여정부 당시 열린우리당이 과반 의석을 차지했을 때보다 개혁 추진의 동력이 더 커지면서다.

민주당 이규민 의원은 지난 10월 국가보안법 7조를 폐지하는 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이어 11월에는 민주당 홍익표 의원 등의 주최로 국가보안법 7조를 폐지해야 한다는 내용의 토론회가 국회에서 열렸다. 국회에서 국가보안법 관련 법안이 발의되고 논의가 본격화된 것은 참여정부 이후 16년 만에 처음이었다.

시민사회에서도 국가보안법 7조부터 우선 폐지하자는 방향으로 목소리가 모아지고 있다. 올해 5월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참교육을 위한 전국학부모회, 평등교육실현을 위한 전국학부모회 등 다양한 분야의 24개 단체가 모여 ‘국가보안법 7조부터 폐지운동 시민연대’를 발족했다. 6.15공동선언실천남측위원회도 시민연대의 활동을 후원하고 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은 이규민 의원이 대표발의한 국가보안법 개정안에 대해 “뒤늦은 감이 있지만 남북대결 시대를 청산하는 첫 단추”라며 환영한다는 공식 입장을 밝혔다.

이제 국가보안법을 개정하거나 폐지하는 문제는 정부와 여당의 결단에 향방이 달려 있다.

국가보안법 7조부터 폐지운동 시민연대의 박미자 운영위원장(전교조 참교육연수원장)은 민중의소리와의 통화에서 “(문재인 정부는) 촛불혁명으로 뽑아준 민주정부이다. 또 문 대통령은 민주시민교육을 해야 한다고 여러 번 얘기했고 교육부는 시민교육과를 신설했다”며 “그런데도 국가보안법을 이렇게 두고 있는 건 전혀 민주적이지 않다”고 지적했다.

그는 국가보안법으로 인해 교육 현장에서 겪는 어려움을 토로했다. 그는 “다름에 대해 이해하려면 우선 뭔가 다른지 알아야 하고 이를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 그걸 모르면 혐오 문화가 만들어지지 않나”라며 “이건 기본교육인데 국가보안법은 배제와 혐오를 가르친다. 북한에 대해 무엇을 알고자 하거나 사실을 말하더라도 국가보안법 7조에 걸린다. 이건 21세기 교육과 맞지 않다”고 꼬집었다.

그는 “사실 총선 이전에는 상대가 있기 때문에 촛불혁명 직후였더라도 국가보안법을 개정하는 것이 어려울 수 있겠다고 이해했다. 하지만 4.15 총선 이후 180석을 가까이 얻고도 이 문제를 그대로 두고 간다는 건 어떤 명분으로도 용납할 수 없다”며 “우리 아이들의 발목을 잡는, 시대에 뒤떨어진 국가보안법을 폐지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면서 “7조부터 시작해서 끝까지 갈 것”이라며 “국가보안법 전면 폐지로 당연히 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민주당 홍익표 의원도 토론회에서 “국민의 의식과 시대가 변했다. 북한을 다룬 드라마를 보고 평양냉면과 대동강 맥주를 마신다고 국가안보 의식이 흐려진다는 생각은 평화를 바라고 민주주의를 이룩해 온 우리 국민들을 무시하는 어리석은 잣대”라며 “이제 과거의 낡은 사고와 이념에서 벗어나 공존과 평화의 시대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국가보안법의 전면 개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그 첫 단계로 7조부터 폐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국가보안법의) 전면적인 폐지와 개정이 이뤄질 때까지 (시민사회와) 함께 하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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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전 낙태로 끝없는 고통, 무엇을 위한 단죄일까”

등록 :2020-11-15 09:25수정 :2020-11-15 09:32 

[토요판] 뉴스분석 왜
낙태죄 개정안 입법예고 그 후

지난달 나온 정부안 논란 더 키워
임신 15~24주 사유제한·숙려제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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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수 제한 없애자는 방향 모두 일치
“재생산권·건강권 담아라” 요구도
‘160만의 선언: 낙태죄 폐지 전국 대학생 공동행동’ 회원들이 지난 7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역에서 ‘낙태죄 마침표’ 집회를 열어 정부의 “주수 제한 입법예고안의 완전 철회와 낙태죄의 완전 폐지”를 촉구하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160만의 선언: 낙태죄 폐지 전국 대학생 공동행동’ 회원들이 지난 7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역에서 ‘낙태죄 마침표’ 집회를 열어 정부의 “주수 제한 입법예고안의 완전 철회와 낙태죄의 완전 폐지”를 촉구하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 한달 하고도 보름이 남았다. 지난해 4월 헌법재판소는 인공 임신중절을 처벌하는 형법 제269조 1항과 제270조 1항을 헌법불합치로 결정하면서, 오는 12월31일까지 새 법을 입법하라고 주문했다. 하지만 두달을 채 남기지 않고 지난달 7일 입법예고한 정부의 개정안은 임신 주수와 사유에 따라 임신중지를 여전히 범죄로 규정했다. 정부의 개정안을 비판하는 현장 목소리를 들어봤다.“저는 이제 막 60대에 들어선 오랜 천주교 신자입니다. 성당에서 오랜 기간 봉사자로 일하면서 낙태를 경험한 수많은 50대에서 70대 여성을 만나왔습니다. (임신중지를)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 있었음에도, 길게는 50년 전 경험으로 끊임없이 고해성사를 하는 고통받는 여성들을 보며 이런 단죄가 무엇을 위한 것인가, 그리고 이 단죄는 왜 여성들만을 향한 것인가 깊이 고민하게 되었습니다.”(크리스티나)

 

“국가는 시대에 따라 언제나 다른 출산율 조절 정책을 써왔습니다. 출산율을 높이기 위해 애쓰고 있는 국가는 불과 30~40년 전만 해도 한명만 낳으라고 권고하다 못해 낙태버스마저 운영했습니다. 여성의 몸이 국가에 의해 멋대로 조정될 수 있는 물체입니까. 필요에 따라 낙태를 권장하고, 그렇지 않으면 반대하게요. 적어도 사회안전망과 지원정책, 아이 아버지에게도 같은 짐을 지게 하는 법률이 생기지 않는 한 낙태죄는 여성차별적일 수밖에 없고, 그렇기 때문에 저는 낙태죄 폐지를 찬성합니다.”(안젤라)
 
지난달 14일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열린 ‘낙태죄 전면 폐지를 촉구하는 천주교 신자 기자회견’에서 낭독된 의견들이다. 2주간 1015명의 천주교와 개신교 신자들이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모낙폐)에 지지 서명과 의견을 보내왔고, 이들의 목소리를 6명의 대독자가 읽었다.지난해 4월 사법부가 형법 27장 ‘낙태의 죄’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했을 때, 시민사회는 66년 전 만들어진 ‘낙태죄’가 드디어 폐지된다며 뜨겁게 환영했다. 하지만 1년7개월이 지난 지금 오히려 논란만 더욱 커지고 있다. 정부가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대한 후속 조처로 지난달 7일 형법·모자보건법 개정안을 입법 예고했는데, 낙태를 죄로 규정한 조항을 남겨둔 채 ‘허용 조항’을 마련하는 수준에 그쳤기 때문이다. 정부의 안은 임신한 여성의 의사만으로 임신중지가 가능한 기간을 임신 14주까지로 제한했고, 임신 15~24주엔 사회경제적 사유가 있을 때 상담 절차를 거쳐 가능하도록 정했다. 하지만 여성단체 등 시민사회는 “명확하지 않은 임신 주수와 사유에 따라 예외만 허용한 뒤 여전히 임신중지를 형법으로 범죄화하고 있다”며 거세게 비판하고 있다. “임신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침해해 헌법에 합치되지 아니한다”는 헌법재판소의 판단보다 후퇴한 개정안이라는 평가를 받는다.시민사회가 오랜 기간 염원한 임신중지 비범죄화, ‘낙태죄’ 폐지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을까. 오는 16일 정부의 입법예고 기간은 끝난다. 헌법재판소가 새 입법을 요구한 올해 12월31일까지는 불과 한달 반밖에 남지 않았다.
지난 7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역 앞에서 열린 ‘낙태죄 마침표’ 집회에서 ‘160만의 선언 낙태죄폐지전국대학생공동행동’ 회원들이 정부의 “주수 제한 입법예고안의 완전 철회와 낙태죄의 완전 폐지”를 촉구하는 행위극을 펼치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지난 7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역 앞에서 열린 ‘낙태죄 마침표’ 집회에서 ‘160만의 선언 낙태죄폐지전국대학생공동행동’ 회원들이 정부의 “주수 제한 입법예고안의 완전 철회와 낙태죄의 완전 폐지”를 촉구하는 행위극을 펼치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비범죄화 기대했는데…정부안에 반발
지난 7일, 서울 영등포역 5번 출구 앞. ‘법무부’와 ‘보건복지부’ 이름표를 찬 3명의 대학생이 “여성계 반발 완화하라”라고 쓰인 팻말을 들자, 옆에 있던 스피커에선 “왈왈왈” 개 짖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전국 20곳의 대학생 여성주의 동아리가 모인 ‘낙태죄 마침표 집회’의 행위극이었다. 위험한 낙태를 뜻하는 철사 옷걸이를 몸에 두른 곰인형 수십개엔 낙태죄 폐지를 지지하는 시민들의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160만의 선언: 낙태죄 폐지 전국 대학생 공동행동’이 꾸린 이 집회에서 20대 여성들은 “낙태죄 개정 말고 완전히 폐지하라”고 외쳤다. 160만은 한국 여성 20~24살 인구수다.지난해 헌법불합치 결정으로 임신중지 완전 비범죄화를 기대했던 시민들은 크게 반발하고 있다. 10만명 이상의 국민 동의를 받아 지난 3일 국회에 제출된 ‘낙태죄 전면 폐지와 여성의 재생산권 보장에 관한 청원’이 곧 국회 심의를 받을 예정이다. 이 청원은 △‘낙태죄’ 전면 폐지 △‘낙태’ 아닌 ‘임신중단’ 또는 ‘임신중지’로 용어 교체 △임신중지 유도약의 빠른 도입 등이 담겼다.정부안이 미흡한 수준으로 입법예고되자, 그 대안으로 3명의 국회의원이 3가지 개정안을 발의한 상태다. 권인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달 12일 발의한 형법과 모자보건법 개정안은 임신 주수와 사유에 관계없이 임신부의 의사로 임신중지를 할 수 있는 낙태죄 완전 폐지의 내용을 담았다. 애초 낙태가 허용되는 임신 주수를 정부 법안 14주보다 늘리는 24주안을 발의한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주수 제한을 없애는 방향으로 법안을 수정 중이다. 지난 5일 정의당 당론으로 나온 이은주 의원의 법안은 형법과 모자보건법뿐만 아니라 근로기준법까지 개정하는 내용이 담겼다. 3가지 안 모두 임신 주수에 따른 제한을 없애는 방향이다.“그렇게 쉬지는 못했어요. 제가 계속 일을 하고 있는 상황이라서. … 그때 초기라서 알릴 상황도 아니었고. … 만약에 그것 때문에 쉬려면 회사에다 정확하게 이야기를 해야 되잖아요. 그게 쉽지 않아서 그냥 연가를 조금 사용을 했고 그렇게 푹 쉬지는 못했어요.”(ㄱ씨, 36살 기혼)지난해 2월 발표된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인공임신중절 실태조사’에 사례자로 참여한 한 여성의 이야기다. 15~44살 여성 1만명이 참여한 온라인 조사에서 임신중지 이후 ‘적절한 휴식을 취했다’는 응답자는 전체의 47.7%로 절반에 못 미쳤다. ‘적절한 휴식을 취하지 못했다’는 44.8%, ‘전혀 휴식을 취하지 못했다’는 답은 7.5%였다. 보고서는 “임신중지를 경험한 여성들의 상당수가 충분한 휴식을 취하지 못한 것이 사례자들 사이에 동일하게 언급되고 있다. 주변에 임신중지 사실을 알리고 쉴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160만의 선언 낙태죄폐지전국대학생공동행동’ 회원들이 지난 7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역에서 연 ‘낙태죄 마침표’ 집회에 코로나로 참석하지 못한 시민들이 보낸 인형들이 놓여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160만의 선언 낙태죄폐지전국대학생공동행동’ 회원들이 지난 7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역에서 연 ‘낙태죄 마침표’ 집회에 코로나로 참석하지 못한 시민들이 보낸 인형들이 놓여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재생산권’ ‘건강권’까지 담아야 하는 이유
현행 근로기준법 74조 ‘임산부의 보호’ 조항에는 “사용자는 임신 중인 여성이 유산 또는 사산한 경우 그 근로자가 청구하면 유산·사산 휴가를 주어야 한다”고 돼 있지만 “다만, 인공 임신중절 수술에 따른 유산의 경우는 그러하지 아니하다”는 예외를 명시하고 있다. 지난 5일 나온 이은주 정의당 의원의 안은 형법과 모자보건법에서 낙태죄를 삭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임신중절 수술의 경우 유산 휴가를 갈 수 없도록 한 근로기준법까지 고쳤다. 또한 ‘모자보건법’의 법명을 ‘임신·출산 등과 양육에 관한 권리보장 및 지원법’으로 바꿨다. ‘건전한 자녀의 출산과 양육을 도모’한다는 이 법의 목적 규정도 “모든 사람이 인간의 존엄을 바탕으로 임신·출산·양육 전 과정에서 권리를 보장받는다”는 내용으로 바꿨다.지금 여성계는 ‘낙태죄’ 폐지는 물론 ‘재생산권’과 ‘건강권’을 법에 담아야 할 때라고 말한다. 재생산권이란 여성 자신이 임신·출산·임신중지 등 재생산 여부를 주체적으로 결정하고 통제할 권리를 말한다. 낳을 권리와 낳지 않을 권리, 키울 권리를 모두 옹호하고 누구나 이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법과 제도가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낙폐는 10일 논평을 내어 “이은주 의원안은 (낙태죄) 처벌 금지를 넘어 (임신·출산·양육의) 권리 보장을 명확히 제시한 개정안”이라며 “국회는 처벌이 아닌 권리 보장에 방향을 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의료·보건 시민사회에서는 ‘낙태죄’ 찬반에 대한 단순 논쟁을 넘어서자고 강조한다. 자신이 원하는 시기에 임신과 출산을 경험하고 의료서비스를 제약이나 차별 없이 이용할 수 있는 국가적 환경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김새롬 시민건강연구소 젠더와건강연구센터장은 “임신중지에 대한 보장을 비롯해 재생산 권리 보장 수준은 한 사회에서 여성의 자유권과 사회권, 특히 건강권 수준을 나타내는 대리지표”라고 말했다.김미향 기자 aroma@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women/969953.html?_fr=mt1#csidxa85c35f5826d9fba6a0bca0624817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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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총장, 이제 결단을 내릴 때가 됐다

[하성태의 인사이드아웃] 윤석열 신드롬과 검찰 정치 20.11.14 20:44l최종 업데이트 20.11.14 20:44l하성태(woodyh)

측근들과 재회한 윤석열 총장  8개월 만에 전국 검찰청 순회 간담회를 재개한 윤석열 검찰총장(가운데)이 10월 29일 오후 대전 지역 검사들과의 간담회를 위해 대전지방검찰청에 도착해 강남일 대전고검장(왼쪽), 이두봉 대전지검장과 인사를 나눈 뒤 건물로 향하고 있다
▲ 측근들과 재회한 윤석열 총장  8개월 만에 전국 검찰청 순회 간담회를 재개한 윤석열 검찰총장(가운데)이 10월 29일 오후 대전 지역 검사들과의 간담회를 위해 대전지방검찰청에 도착해 강남일 대전고검장(왼쪽), 이두봉 대전지검장과 인사를 나눈 뒤 건물로 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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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천하'였다. '윤석열 대망론'을 부추기던 언론들이 '충청 대망론'까지 쏘아 올리며 호들갑을 떨었던 이른바 '윤석열 신드롬' 말이다.

11일 한길리서치 대선주자 지지율 조사(쿠키뉴스 의뢰)가 발단이었다. 윤 총장이 지지율 24.7%로 1위에 올랐다. 1, 2위를 다투던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22.2%)와 이재명 경기도지사(18.4%)를 최초로 꺾었다. 윤 총장은 물론 '야권 후보'로 분류됐다. (7~9일 전국 거주 18세 이상 남녀 1022명을 대상으로 구조화된 설문지를 이용한 조사방식으로 진행, 응답률 3.8%, 표본오차 95% 신뢰수준에 ±3.1%p)

그러자, 국민의힘이 즉각 반응했다. 김종인 비대위원장은 "윤 총장이 지금 지지도가 높다고 해서 야당 정치인이라고 볼 수는 없는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주호영 원내대표는 "추미애 장관이 (정치 안 하겠다는) 윤 총장을 자꾸 정치로 밀어 넣고 있다"고 탓했다. 

 

애초 "옷 벗고 정치권에 들어와 싸워라"(김종민 의원)라는 여당의 분위기와 달리 보수야당은 한 마디로 '갈팡질팡'이었다. 검찰개혁 국면에서 적극적으로 '윤석열 옹호'에 나섰던 국민의힘은 복잡한 셈법을 굴리는 중이다. 반면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는 자신이 구상 중인 "혁신 플랫폼을 같이 하자"며 적극적인 구애에 나섰다.

헌데, 단 이틀 만에 반전이 일어났다. 13일 한국갤럽(11%)과 CBS와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 공동 조사(11.1%)에서 윤석열 총장은 3위를 기록했다. '2강 1중'을 형성하던 기존 조사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반토막', '널뛰기', '추락'이란 제목의 언론보도가 잇따르며 한길리서치 조사의 신뢰성에 의문이 제기됐다.

(한국갤럽 조사 : 10일부터 12일까지 전국 18세 이상 1001명 대상, 95% 신뢰수준에 표본오차 ±3.1%포인트. KSOI 조사 : 10~11일 1009명 대상, 95% 신뢰수준에서 표본오차 3.1%p 응답률 12.7%. 보다 자세한 사항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누리집을 확인하면 된다.)

여론조사 1위의 함정

여론조사 전문가들은 유‧무선 전화 비율 등 조사 방법의 차이를 지적했다. 한국갤럽의 경우 이전과 같이 조사자가 직접 대선주자를 고르는 방식이었다. 이와 비교해 야권 주자 중 국민의힘 소속 정치인을 뺀 여야 6자 후보 구도였던 한길리서치 조사가 윤 총장에 대한 중도보수층의 쏠림 현상을 이끌었다는 분석이 주를 이뤘다. 한길리서치 측은 14일 '쿠키뉴스'를 통해 "선거는 구도가 반영된다. 6자 구도 지지율을 보기 위한 것"이었다며 신뢰성 의혹을 반박했다.

사실 윤 총장의 1위 여부보다 흥미로운 것은 다른 지표다. 안철수, 홍준표 등 보수야권 주자 지지율은 윤 총장을 제외하곤 미미한 수치였고, 이를 합산해도 범여권 주자를 위협할 수준이 되지 못했다. 

단 이틀 만에 반전을 끌어낸 '윤석열 신드롬'의 실체가 과장됐고, 기존 '2강 1중' 구도를 확인한 것 외에는 큰 의미가 없을 수 있다는 얘기다. '윤석열 신드롬'을 통해 기존 구도를 흔들려는 누군가의 '일장춘몽'이 반영된 것 아니냐는 의문이 나온 것도 그래서다.

윤 총장은 자신이 대선주자 여론조사에 처음 포함됐던 올 초만 해도, 대검찰청을 통해 "이름을 빼 달라"는 의사를 표시했다. 이후 대검이 그런 요청을 했다는 언론보도는 지난 8월이 마지막이었다. 12일 MBC도 "검찰과 여론조사기관에 다 확인해 봤는데, 지난 8월 이후 (윤 총장으로부터) 이름을 빼달라는 요청은 더 이상 없었다"고 보도했다.

그 사이 윤 총장의 행보는 그야말로 전대미문이라 할 만했다. 지난달 22일 국정감사 당시 "퇴임 후 사회와 국민께 봉사할 것"이라던 발언은 정치입문 가능성을 생각하게 할 만한 발언이었다. 이후 윤 총장은 느긋하게 전국을 돌며 일선 검사와의 대화 일정을 이어가는 중이다. 정치인으로, 대선주자로 호명되는 여론조사와 언론보도를 즐기는 듯 보일 지경이다. 이게 과연, 윤 총장에게 약일까, 독일까.
 
 윤석열 검찰총장이 9일 오후 진천 법무연수원에서 신임 차장검사를 대상으로 강연을 하기 위해 연수원 내에서 이동하고 있다. 오른쪽 두 번째부터 배성범 법무연수원장, 윤 총장, 이문한 법무연수원 기획부장 직무대리. 2020.11.9
▲  윤석열 검찰총장이 9일 오후 진천 법무연수원에서 신임 차장검사를 대상으로 강연을 하기 위해 연수원 내에서 이동하고 있다. 오른쪽 두 번째부터 배성범 법무연수원장, 윤 총장, 이문한 법무연수원 기획부장 직무대리. 202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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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신드롬과 검찰정치

정주영, 박찬종, 이인제, 고건, 안철수, 반기문...

'윤석열 신드롬' 직후, 줄줄이 소환된 '올드보이'들의 면면이다. 일부 언론이 '윤석열 신드롬' 을 거론하자, 과거 대선에서 '신드롬'의 주인공이었거나 여론조사 상 돌풍을 일으켰던 인물들이 소환되며 윤 총장과 비교되기 시작했다.
 
"'제3후보 잔혹사'라고 불릴 만큼 제3의 인물이 끝까지 완주하는 경우도 거의 없었고, 그나마도 특정 정당에서 강하게 영입 했을 경우에나 대세론이 이어졌는데, 이번에는 서로 자기 당 인물이 아니라고 하는 상황이라 앞선 경우들과는 좀 다른 양상입니다." (12일 MBC <뉴스데스크> '정치적 참견 시점')<br /><br />"여론조사기관은 객관성과 전문성을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언론이 중요합니다. 언론은 여론조사 결과가 나오면 반드시 엄격하게 검증한 다음에 보도를 해야 합니다. 그것이 두 기관의 책임입니다." (13일 YTN <뉴스가 있는 저녁> '변상욱의 앵커 리포트')

이중 정주영, 고건, 안철수, 반기문의 예를 든 MBC는 '대선 포기'란 결과를 강조하기도 했다. 변상욱 앵커는 "여론조사라는 게 자칫 이렇게 여론을 엉뚱하게 전하기도 한다"고 꼬집었다. 일부 여론을 호도하려는 조사 자체도 문제지만, 이를 제대로 검증하는 언론 보도가 더 중요하고 그 차이를 가려내야 한다는 고언이었다.

'제3후보 잔혹사'의 경우처럼, 대선정국에서 새 인물을 띄우는 언론의 속성은 새로울 것이 없다. 다만 실제 여론과의 차이는 결국 마지막 레이스까지 가 봐야 확인된다. 그 과정에서 종종 여론조사와 언론보도를 이용하려는 세력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윤 총장의 경우도 다르지 않아 보인다.

여론조사의 경우, 윤 총장 본인이 강하게 거부하면 그만이다. '윤석열 신드롬'의 정체가 신빙성이 있든 없든, 윤 총장 본인이 선을 그으면 될 일이다. 더 심각한 것은 언론의 보도 행태다. 

현직 검찰총장의 장모가 검찰 소환조사를 받는 것도, 아내의 회사가 검찰의 압수수색과 수사 대상에 오르내리는 것도 사상 초유다. 이 자체만으로 '조국 일가족처럼 수사하라'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지난해 '표창장 위조' 기소만으로 조 전 장관의 도덕성 운운하며 사퇴를 요구했던 보수야당을 향해 '기준이 왜 이렇게 다른가'란 비판도 나온다.

그럼에도, 윤 총장은 굳건하다. 이 역시 우호적인 언론 덕택이다. 현직 검찰총장의 일가족이 수사를 받아도, '공직자의 정치적 중립'에 심각하게 위배되는 발언을 일삼아도, 그 직후 '대선행보'라 비판받는 '검사와의 대화'를 이어가고 일선 검사들이 소란을 피워도 요지부동이요, 이를 그저 '강 건너 불구경'식으로 중계할 뿐이다.  

진영논리는 둘째 치더라도, '윤석열 검찰'의 '살아있는 권력 감시'란 주장에 매몰된 언론도 부지기수다. MB가 대법원 확정 판결을 받고 재수감돼도, 김학의 전 차관이 실형을 받아도 사과 한 마디 없는 '정치검찰'을 비판하지 않는 것 자체가 '검찰정치'를 부추기는 형국이라 할 수 있다.

급기야, 한 일간지는 "윤 총장의 검찰관에는 시대착오적인 부분이 있다"면서도 "우직하고 안쓰러운. 모두 여의도 정가에서 탐낼 법한 정치적 자산"이라 치켜세웠다. 10일자 <국민일보>의 <사나이 윤석열의 매력>이란 칼럼을 보자.  
 
"개인적으로 윤 총장의 '싸나이 리더십'을 지지하지는 않지만 정치인 윤석열의 등판 여부는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다. 선거는 공동체의 결핍을 채우는 과정이고, 대통령이 전인격으로 표상하는 덕목은 그 시대가 요구하는 리더십의 요체 같은 거다. 사나이 윤석열의 매력은 지금 우리 사회가 찾아 헤매는 자질인 걸까. 간만에 대선이 기다려진다."

윤 총장을 "(영화) <베테랑> 속 열혈형사"처럼 "예스러운 남자의 매력이 넘친다"며 "'사나이'보다는 '싸나이'가 어울리는, 소신과 의리의 화신"이라 묘사한 이 칼럼이야말로 일부 언론이 부추기는 '윤석열 신드롬'의 요체라 할 수 있다.

안쓰럽게도 지극히 선거공학적인 발상이요, 일부 언론의 '조삼모사'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시각일 뿐이다. 불과 1년 전, 어느 보수언론이 취임 전 윤 총장을 '조폭'에 비유한 사실도 있지 않나(2019년 7월, <동아일보> '김순덕 칼럼' <조직을 사랑한 윤석열, 조폭과 뭐가 다른가>). 1년 동안 달라진 건 '사나이 윤석열'의 정치행보 뿐이다.
 
 12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검 앞에서 윤석열 검찰총장 가족 의혹 관련 수사를 촉구하는 내용의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2020.11.12
▲  12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검 앞에서 윤석열 검찰총장 가족 의혹 관련 수사를 촉구하는 내용의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2020.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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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검찰은 '정치'는 물론 '정책'에도 개입하고 있다. 조직 수장에 대한 비판 및 MB 부실 수사, 김학의 부실 수사, 라임·옵티머스 부실 수사 등에 대한 비판이 계속 일어나자, 바로 반격한 것이다.<br /><br />내년 재보궐선거 전까지 실무담당 공무원부터 시작하여 궁극에는 장관까지 관련자를 계속 소환하고 조사내용을 언론에 흘린 후 기소할 것으로 예상한다. 이 과정에서 문서 폐기 등 몇몇 공무원의 잘못이 드러나겠지만, 궁극적으로는 수사를 통해 탈원전정책에 타격을 주겠다는 의도가 분명하다." (8일 조국 전 법무부장관 페이스북 글 중에서)

이렇게, '윤석열 신드롬'을 부추기는 언론들이 먼저 할 일은 윤 총장의 '월성 1호기' 수사가 왜 문제인지, 그 숨은 의도가 무엇인지 국민들이 알기 쉽게 '따박따박' 분석하는 것 아니었을까.(이에 대해선 김성환 민주당 의원이 윤 총장에게 보낸 '공개서한'(윤석열 총장이 월성1호기 수사 멈춰야 하는 이유 http://omn.kr/1qhia)에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돼 있다)

윤석열 총장은 검찰 구성원들 전체를 정치의 영역으로 끌고 들어갈 생각이 아니라면, 결단을 내릴 때다. 
태그:#윤석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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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MZ 일원을 생명에 이롭고 평화에 도움이 되는 곳으로"

[추가] 강원도 인제군, '금강-설악 DMZ평화생명지대' 본격 추진

  • 기자명 인제=이승현 기자 
  •  
  •  입력 2020.11.15 01:02
  •  
  •  수정 2020.11.15 09:49
  •  
  •  댓글 1
 
금강-성ㄹ악 DMZ 평화생명지대' 사업이 본격 추진된다. 사진은 지난 10일 인제군 서화면 한국DMZ평화생명동산에서 진행된 기획위원 위촉식.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금강-설악 DMZ 평화생명지대' 사업이 본격 추진된다. 사진은 지난 10일 인제군 서화면 한국DMZ평화생명동산에서 진행된 기획위원 위촉식.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금강에서 설악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이 비무장지대(DMZ)와 만나는 강원도 인제군 서화리 DMZ 일원(DMZ, 민북지역, 접경지역). 

20여년 전 북측 금강군 일부를 포함한 이 지역을 '생명에 이롭고 평화에 도움이 되는 곳으로 만들자'고 뜻을 세운 한 평화운동가의 구상이 '금강-설악 DMZ 평화생명지대'사업으로 본격 추진된다.

강원도 인제군(군수 최상기)과 (사)한국DMZ평화생명동산(이사장 정성헌)은 지난 10일 인제군 서화면 한국DMZ평화생명동산 교육마을에서 '금강-설악 DMZ 평화생명지대' 기획위원 위촉식을 갖고 사업 협의와 현지 답사 등을 진행했다.

'금강-설악 DMZ 평화생명지대'는 전체 약 1억 1,208평(3만7,363헥타르) 규모의 DMZ 일원의 대상 지역을 민통선 이북지역(민북지역, 민간인통제선과 남방한계선 사이의 지역)인 '핵심지역'과 주민들이 거주하는 서화 1, 2리 중심의 '배후지역', 그리고 DMZ와 북측을 포함하는 '미래지역'으로 나누어 각각 △생태환경의 보전과 복원 △생명·평화 경제로 산업구조 대전환 △남북협력사업 등에 역점을 두어 진행하는 장기 프로젝트.

당장 구체적으로 실행에 돌입할 활동은 '인제 서화 DMZ 평화생명 특구'사업이다.

DMZ평화생명동산 부이사장인 정범진 특구 기획단장은 최소 특구 조성에만 10년 이상이 걸릴 것으로 예상한다며, 올 연말까지 내년도 사업계획을 작성하고 관련 법 제정 및 개정, 관련 부처 협의와 간담회 등 절차를 거쳐 내년 8월까지는 기본계획을 완료하겠다고 밝혔다.

전체적으로는 남쪽에서 먼저 추진할 수 있는 핵심지역과 배후지역의 사업을 진행하고, 미래지역에 대해서는 상황과 조건이 성숙할 때 북측과 협의하여 진행한다는 계획이다.

 

이에 따르면, 먼저 '핵심지역'인 가전리·심적리·대곡리 등 민북지역 약 3,874만평은 전체를 '음양사상오행수목원'의 관점에서 생태환경을 보전하고 복원하는 것을 중심으로 한다. 

△금강산과 연계한 유네스코 생물권 보전지역벨트 조성 △가전리 습지 보호와 람사르 등재 △지뢰생태공원 △군부대 이전지 활용 평화교육기관 유치 △금강·설악 국제평화생태관광 방문자 센터 조성 등이 제시되어있다.

또 현재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는 서화 1·2리 마을 2,018만평을 '배후지역'으로 정하고 전체 산업구조를 생명·평화산업으로 전환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유기순환농업과 재생에너지 중심의 완전자급 △바이오 및 생물자원산업·연구소 유치 △적정기술연구소 및 교육기관 운영 등을 통해 접경지역 주민들의 낮은 소득과 불평등 문제도 해소한다는 구상이다.

과거 인제군 서화면에 있었으나 전쟁 후 북측 금강군으로 편입된 서희리(西希里)와 이포리(伊布里), 장승리(長承里) 등 DMZ를 포함한 북측 지역 5,415만평의 '배후지역'에 대해서는 남북관계 상황을 보아가며 북측과 협의할 계획이다. 

△핵심지역과 배후지역의 사업경험 공유와 협업 △유기농전환 △산림협력 및 임농복합경영, 생태마을 △금강·설악 자유생태관광 모색 △서화면 가전리와 금강군 금강산 연결하는 총연장 35km의 생태친화적 금강·설악 평화도로 추진 등을 구상하고 있다.

 정성헌 이사장은 '생명의 열쇠로 평화의 문을 연다. 그렇게 연 평화의 들판에 통일의 집을 천천히 짓는다'는 생각이 DMZ평화생명지대를 실현하는 길이 될만하다고 소개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정성헌 이사장은 '생명의 열쇠로 평화의 문을 연다. 그렇게 연 평화의 들판에 통일의 집을 천천히 짓는다'는 생각이 DMZ평화생명지대를 실현하는 길이 될만하다고 소개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정성헌 이사장은 이날 "본론은 금강-설악 DMZ 평화 생명 지구에 관한 이야기이고, 구체적으로는 인제 서화지구 평화생명특구에 관한 이야기"라며, '금강-설악 DMZ 평화생명지대' 구상에 얽힌 사연과 과정을 소개했다.

그에 따르면, 1998년 서화면민들의 숙원사업이 민북지역인 가전리 일대에서 농사를 짓고 싶어하는 것이라는 인제 군수의 이야기를 듣고 그 지역을 살펴보다 '생명에 이롭고 평화에 도움이 되는 곳으로 쓰자. 우리 민족뿐만 아니라 인류에 도움이 되는 곳으로 쓰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미치게 됐'던 것이 발단이 됐다. 

그러고 보면 일은 이미 22년전에 시작되었던 것이다.

남북관계로 새천년 밀레니엄을 열려는 열망이 강했던 김대중 대통령쪽에서도 관심과 협조를 아끼지 않았으나 그렇게 일이 빨리 진행되지는 않아서 한국DMZ평화생명동산 교육마을도 2006년에야 착공했다.

그때 계획으로 교육마을은 서하리에 하고, 가전리쪽은 생태계가 잘 보전되어 있으니까 사람들이 드나들되 상주는 하지 않는 생태공원으로 잘 보전·복원하고 연구하는 기능만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다음에 북쪽에도 이야기를 해서 내금강-DMZ 일원에 이와 같은 것을 만들어서 그걸 함께 연구하자는 구상을 했다.

(사)남북강원도협력협회 이사장 자격으로 2000년대 초 이같은 제안을 북측에 했고, 기억하기에 그쪽의 반응도 나쁘지 않았다. 

당시 유엔개발계획(UNDP)에서 이 계획에 관심을 갖고 여섯번이나 찾아왔을 정도로 적극적이었는데, 주 사업지가 평양으로 옮겨가면서 자연히 멀어지게 된 일도 있다. 진행이 되긴 했지만 실질적인 진척은 좀처럼 없었다.

정 이사장은 "당위성만 가지고 하면 벌써 됐어야 할 일인데, 20여년 가까이 진행했지만 이 정도밖에 못왔다. 그동안 우리들의 노력이 미흡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게 쉬운 문제만은 아니다"라고 하면서 "이걸 집중적으로 물고 늘어져서 성심성의껏 해야 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북측과는 적당한 시점에 이야기 하되 (남쪽과)동시에 하려고 하면 어느 천년에 될지 모르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 여기서 먼저 하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다시, 왜 이 일을 꼭 해야 하는가?

정 이사장은 "우리에게 평화는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해보자"고 말했다. 

지금까지 남북의 평화를 언급하는 순간 핵무기, 탄도미사일 등 정치·군사적 문제로 직결되어 실효성없는 이야기로 끝나버리게 되었다고 하면서 "남북의 평화를 제대로 매개하고 뿌리내리도록 하기 위해서는 생명의 열쇠로 이 문을 열어야 한다. 생명의 질서를 가지고 평화이야기를 해야 진짜배기 이야기가 된다"고 강조했다.

이어 "생명의 열쇠로 평화의 문을 열려고 해야지 급하다고해서 남북평화 문제를 중심으로 하다보면 또 헛짚는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처음부터 구호가 있었다며 소개한 것이 '생명의 열쇠로 평화의 문을 연다. 그렇게 연 평화의 들판에 통일의 집을 천천히 짓는다'는 것.

그래서 인제 서화지구 평화생명특구의 핵심 열쇠말은 생명이다. 

대암산과 향로봉 일대는 남북의 식물이 만나는 우리나라 식물 생태계의 보고인데, 이 일대를 특구로 잘 만들어 결정적으로 기후위기에 적응하는 한반도 생명의 질서를 구체적으로 만들어 가면서 그 힘으로 다시 온대림과 아한대림이 만나는 압록강 옆 북의 오가산특구와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정 이사장은 여길 먼저 만들어야 오가산특구와 만날 근거도 생기는 것이고 그렇게 되어야 남과 북이 함께 한반도의 모든 식물자원에 관한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된다고 역설했다.

또 하나, 결국 사람이 바뀌어야 평화생명지구도 가능한 것이라고 하면서 이 지역뿐만 아니라 강화도에서 고성까지 접경지역 전체를 생명산업과 평화산업으로 대전환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선시대 생활목기의 중심지였고 현재 임업측정량으로 전국 1위인 이 지역에서 독일산 소나무로 만든 아이들의 장난감을 대체하는 사업, 접경지역 전체를 7개년 계획으로 유기농업으로 전환하는 사업, 대규모 장비와 자본에 의존하지 않고 세계 각지의 평화운동가들이 10달러씩 들고와 정성껏 흙을 털어내는 지뢰제거작업 등 할 일은 무궁무진하다.

이런 여러 가지 일을 하기 위해 평화생명지대의 면적도 1억 2천만평 가깝게 잡았다고 설명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초심을 유지하면서 머리를 맞대고 노력하면 '생명에 이롭고 평화에 도움이 되는 세계적인 성지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2018년 9.19남북군사합의로 철거된 12사단 감시초소의 철근, 철조망, 외벽 등 원본기록물을 이용해 2020년 6월 한국DMZ평화생명동산 내에 세운 평화 상징물 '어머니의 땅'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2018년 9.19남북군사합의로 철거된 12사단 감시초소의 철근, 철조망, 외벽 등 원본기록물을 이용해 2020년 6월 한국DMZ평화생명동산 내에 세운 평화 상징물 '어머니의 땅'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산정에서 본 금강-설악 DMZ 평화생명지대]

맨 왼쪽 무산에서 가운데 국사봉, 비로봉, 장군봉이 보이고(위쪽 사진), 금강산 비로봉과 내금강 외금강 산줄기가 좀 더 가까이 보인다.(아래사진) [사진제공-한국DMG평화생명동산]  
맨 왼쪽 무산에서 가운데 국사봉, 비로봉, 장군봉이 보이고(위쪽 사진), 금강산 비로봉과 내금강 외금강 산줄기가 좀 더 가까이 보인다.(아래사진) [사진제공-한국DMG평화생명동산]  

아직 열린 적 없는 인제 DMZ 평화의 길 구간 중 대곡리 초소가 포함된 1052고지에서 '금강-설악 DMZ 평화생명지대'의 북측 지역을 내려다 볼 수 있다.  

1052고지는 백두대간의 주 능선으로 남측 최북단 지점이며 남북으로 설악산-향로봉-금강산을 연결하는 상징적 장소이다.

북쪽으로는 삼치령(三峙嶺)-무산-국사봉-호룡봉-백마봉-차일봉-금강산 비로봉으로 약 50km, 남쪽으로는 향로봉(香爐峰)-칠정봉-진부령-마산-신선봉-상봉-황철봉-소청봉-중청봉-대청봉까지 약 45km가 이어진다.

1052고지 정상에서는 동쪽으로 향로봉에서 고성산, 서쪽으로는 대암산-도솔산-가칠봉-매봉-구례산-화천령, 남쪽으로는 산머리곡산-매봉산-안산(한계산), 북쪽으로는 남강(南江)-해금강 삼일포까지 남과 북을 잇는 백두대간 봉우리들이 하나로 연결된 모습을 볼 수 있다. 

구름 한점없는 청명한 가을 하늘아래 백두대간은 의연한 산하의 모습으로 있다.

흐릿하긴 하지만 이곳은 남쪽에서 금강산 비로봉과 내금강, 그리고 외금강 산줄기까지 가장 가까이 볼 수 있는 지역이다.

매봉에서 무산까지. 아래로 장승리와 이포리의 위치가 육안으로 확인된다. [사진제공-한국DMZ평화생명동산]
매봉에서 무산까지. 아래로 장승리와 이포리의 위치가 육안으로 확인된다. [사진제공-한국DMZ평화생명동산]

남과 북을 잇는 백두대간 뿐만 아니라 1052고지에서는 한국전쟁 이후 북쪽 지역으로 포함되어 지금은 금강군으로 이름을 바꾼 된 원래 인제군의 3개리인 서희리,  장승리, 이포리 위치가 육안으로 확인된다. 

서쪽으로 가칠봉-매봉-구례산 지역이 서희리이며, 무산 서쪽과 회전령 인근은 이포리, 무산 동쪽과 삼재령, 36통문 인근까지가 장승리이다. 미수복 3개 지역의 면적은 약 15만 6,600km2이다.

전쟁 발발 3년전 서화리에서 태어난 김종율 선생은 "원래 서화면에 8개 법정 리가 있었는데, 현재는 4개리만 있다. 가전리는 민간인이 허가를 받아 출입할 수 있고, 을지전망대에서 바라 볼 수 있는 바로 앞산 지역이 서희리, 그 옆이 장승리, 장승리 뒤쪽이 이포리이다. 이포리는 북측 금강군에 속하고 장승리와 서희리는 남과 북에 걸쳐 있다"고 지형을 설명했다.

전쟁 전 북측 지역의 면 소재지로 번창했던 서화리에 대한 추억이 있는 김 선생은 "마을 가운데 중학교도 있던 당봉(堂峰)에서 아침 일찍 출발해 당일 오후 늦게 구룡폭포로 유람을 다녀 온 부모님의 사진도 갖고 있다"며 임북천을 따라 내금강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 서화리에서 시작된다고 알려주었다.

이헌수 남북강원도협력협회 이사장은 "이곳에서 구룡폭포까지 거리가 40~50km 정도 되니까 부지런히 걸어서 6~10시간 걸렸을 것이고 오후 늦은 시간이면 도착했을 수 있겠다"며 "흔적은 많이 없어졌지만 이곳이 양구 31번 국도보다 금강산으로 가는 가까운 길"이라고 부연했다.

DMZ 평화의 길 구간 중 인제 구간은 견학을 시작도 해 보지 못한 상태에서 아프리카돼지열병(ASF)과 코로나19로 인해 지난 6월 예정된 재개 일정도 무산되었고 여전히 방문이 불투명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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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학살’, 20대 여성들은 왜 점점 더 많이 목숨을 끊나

등록 :2020-11-13 17:37수정 :2020-11-13 2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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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여성 자살률, 일본 전후세대와 유사한 패턴
젊은 여성 고용위기 침묵이 ‘조용한 학살’ 불러
“여성을 노동시장 참여자로 만들어야 감소 도움”
 ‘조용한 학살이 다시 시작됐다’ 영상 갈무리" alt="젠더 미디어 <슬랩> ‘조용한 학살이 다시 시작됐다’ 영상 갈무리" style="border: 0px; margin: 0px; padding: 0px; width: 643px;"></슬랩>
젠더 미디어 <슬랩> ‘조용한 학살이 다시 시작됐다’ 영상 갈무리
스스로 목숨을 끊는 20대 여성들이 유례없이 늘고 있다.지난해 20대 여성의 자살률은 전년 대비 25.5% 늘었고, 올 1∼8월 자살을 시도하는 20대 여성은 전체 자살시도자의 32.1%로 전 세대 통틀어 가장 많았다. 여전히 전체 자살률을 놓고 보면 남성 자살률이 여성보다 2∼3배가량 높지만, 20대 여성 자살률의 증가 폭은 다른 세대와 성별을 훨씬 상회한다.젠더 미디어 <슬랩>이 12일 공개한 “‘조용한 학살’이 다시 시작됐다”는 왜 ‘90년대생 여성’들이 목숨을 끊고 있는지 묻고, 우리 사회가 ‘조용한 학살’에 대답해야 하는 이유를 보여준다.
슬랩 유튜브 바로가기 https://bit.ly/3pq8Jg0<슬랩> 인터뷰에 응한 장숙랑 중앙대학교 교수(간호대학)는 2019년 발표한 자신의 연구결과(청년 여성의 자살문제)를 바탕으로 20대 여성 자살률 증가 패턴이 2차 세계대전을 겪었던 일본 전후세대(1902∼1920년생)와 유사한 양상을 띠고 있다고 말한다.“제국주의 때 전쟁에 참전했던 세대들, 패망한 국가를 견뎌야 했던 청년들, 그 청년들이 계속해서 우울증에 시달렸고 (생애 내내) 높은 자살사망률을 보였어요. 그걸 우리는 코호트 효과(특정한 행동양식을 공유하는 인구집단)라고 불러요.”장 교수는 덧붙인다. “우리나라에도 그런 코호트 효과가 똑같이 있나 봤는데 20, 30대 청년이었습니다.”장 교수는 특히 1996년생 여성 자살률이 1956년생 여성에 비해 7배 높아졌다는 점에 주목했다.“90년대생 중에서도 90년대 후반생으로 갈수록 더 자살사망률이 높아졌는데, 80년대생의 엄마 세대인 1950년대생과 비교했을 때 80년대생이 거의 다섯배 정도, 90년대생은 거의 7배 정도의 차이가 났어요. 결과적으로 엄마들보다 딸들이 20대에 자살을 선택할 그런 삶의 조건이라는 것이 5배 증가했다는 거잖아요.”일본 전후 세대가 전쟁을 겪으면서나 느낄 법한 상처가 오늘날 한국 젊은 청년들, 특히 20대 여성들의 삶을 옥죄고 있다는 뜻이다.
1951년생의 자살률과 각 년도 출생자의 자살률 비교. 장숙랑 중앙대 교수 제공
1951년생의 자살률과 각 년도 출생자의 자살률 비교. 장숙랑 중앙대 교수 제공
임윤옥 한국여성노동자회 자문위원은 20대 여성 자살률 급등 원인을 이렇게 분석한다.“우리 사회에서 핵심 인력은 남성 노동자가 하고 여성은 보조 인력으로 필요할 때 일하고 불필요하면 언제든지 빼도 되는 잉여인력처럼 활용됐던 거잖아요. 그러니까 여성들이 주로 서비스 업종에 있게 되고 코로나19 상황에서는 서비스 업종이 가장 큰 타격을 받으니까 20대 여성도 가장 큰 타격을 받는 거죠.”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분석한 9월 여성 고용 동향 자료에 따르면, 여성실업률은 3.4%로 전년 같은 달보다 0.6% 늘었고, 그중 20대 여성의 실업률은 7.6%로 가장 높았다.임 자문위원은 노동시장에서 취약한 지위에 있는 젊은 여성들의 실업에 대한 우리 사회의 침묵이 ‘조용한 학살’을 부른다고 말한다.“3월달에만 20대 여성 12만명이 일자리를 잃었어요. 압도적으로. 그런데 조용하더라구요. 이렇게 ‘조용한 학살’이 다시 또 반복되는 (것인데) 우리 사회가 위기에 대응하는 방식이 저는 굉장히 가부장적인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어요.”정혜주 고려대 보건정책관리학부 교수는 여성이 노동시장에서 ‘동등한 구성원’으로서 인정받는지 여부가 자살률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분석한다.“(여성의) 대학진학률이 남성보다 8%가 더 높은 상황이잖아요. 이 부분이 노동시장에서의 지위를 포함한 사회적인 지위로 이전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한국의 여성은 딱 그 위치에 있거든요.”정 교수는 유럽의 사례를 든다. “결국 (유럽에서) 청년 자살에 제일 영향을 크게 미치는 인자는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율이에요. 여성이 ‘가정 내 여성’으로 고려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동등한 구성원으로서 고려되고, 같이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 힘을 모으는 ‘노동시장의 참여자’로 만들어지는 것이 유럽을 포함한 우리나라의 남녀 자살률 감소에 도움이 됩니다.”
 ‘조용한 학살이 다시 시작됐다’ 영상 갈무리" alt="젠더 미디어 <슬랩> ‘조용한 학살이 다시 시작됐다’ 영상 갈무리" style="border: 0px; margin: 0px; padding: 0px; width: 643px;"></슬랩>
젠더 미디어 <슬랩> ‘조용한 학살이 다시 시작됐다’ 영상 갈무리
정 교수는 ‘가족 정책에 대한 지원이 많을수록 젊은 여성의 자살률이 증가하는 경향이 있다’는 유럽의 연구결과도 제시한다.“이게 되게 놀라운데 아동수당 이런 거 다 포함돼서 가족이 잘 유지돼서 발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정책들인데, 이게 사실 가족을 형성할 생각이 없거나 형성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거죠.”’가족 중심’으로 설계된 정책적 지원들이 노동시장에서 독립된 개인으로서 살고자 하는 젊은 여성들에게 가닿지 않고, 이런 여성들을 지원책에서 배제시켜 오히려 자살률을 높이는 결과를 낳게 된다는 것이다.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지난달 31일 펴낸 ‘청년세대 생애전망에서의 남녀차이, 저출산의 근본원인’도 비슷한 견해를 제시한다.“청년들은 더이상 결혼제도가 전 생애 생존의 바탕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청년여성들은 전 생애에 걸쳐 노동중심적 생애를 유지하는 것을 절박하게 선택하고 있다.”결혼과 출산을 전제로 한 지원 정책은 자신의 직업과 커리어를 중심으로 삶을 설계하는 ‘개인’인 청년 여성들과는 괴리될 수 밖에 없다는 분석이다.<슬랩>의 유튜브 영상에는 ‘공감하고 마음이 아프다’는 취지의 댓글이 200여개 달렸다.“90년대생으로서 내 또래들이 같은 괴로움을 느끼고 있다는 게 너무 마음이 아프다.”“일자리도 일자리지만, 가부장제 사회에서 어릴 때부터 겪은 여성혐오적 문화와 차별이 하나둘 쌓이면서 무기력을 학습하고 컸는데 노동시장에 크게 좌절해 자살로 이어지는 것 같다.”“동년배들이 죽고 싶지 않은 세상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바라지만 않고 개인이 할 수 있는 선에서 노력하겠습니다. 이 영상을 본 여러분도 그래 주셨으면 좋겠습니다.”임재우 기자 abbado@hani.co.kr※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으로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한 경우 자살예방 핫라인 ☎️1577-0199, 희망의 전화 ☎️129, 생명의 전화 ☎️1588-9191, 청소년 전화 ☎️1388 등에 전화하면 24시간 전문가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969898.html?_fr=mt2#csidx85c09fe2f02bf38858cbf727be4e4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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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덜대던 아이들이 변했다 "쌤, 저도 운동장에서 잘래요"

[필름사진 여행기] 운동장 야영, 8박9일 백패킹 노작기행의 시작

20.11.13 19:33l최종 업데이트 20.11.13 19:33l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기사의 사진은 필름을 이용하여 촬영하고 직접 스캔하였으며 사이즈 조정 등 기본적인 보정만 했음을 밝힙니다. 괄호 안에 간단한 기종과 필름 종류를 기재하였습니다.[기자말]
나는 대안학교 교사이다. 학교의 유형을 정확히 말하자면 '공립 대안교육 특성화 고등학교'이다. 우리나라에서 5개만 존재하는 공립 대안 고등학교이자, 일반계 학교에서 계열을 변경한 케이스로는 유일하다.

많은 대안학교가 그렇듯 해외 이동학습이 계획되어 있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교육법과 교육지침을 따라야 하는 공립학교의 특성으로 인해 일정을 길게 할 수 없다는 것. 이동하는 시간을 빼면 6박 7일 정도의 시간을 해외에서 보내고 그동안 학생들은 문화교류 및 봉사활동 등을 할 예정이었다.

본교로 부임하기 1달 전 코로나19가 터졌다. 하필이면 해외이동학습을 추진해야 할 2학년 부장을 맡게 되었다. 4월 중순까지 고민과 토론을 거듭하다가 국내 기행으로 방향을 돌렸다. 이마저도 11월에 시행이 가능할지 불투명한 상태로 말이다. 

이 시기에 학교가 얼마나 혼란스러웠는지는 이 지면에 다 표현 못한다. 학생들이 없는 상태에서 모든 결정을 해야 했고 지침이 하루가 멀다 하고 바뀌곤 했다. 평소 필름카메라와 야영장비를 들고 오지로 여행을 다녔던 경험들을 총동원하여, 학생 체험활동으로는 전무후무한 계획을 홀로 짜기 시작했다.
 
전체 이동경로 (캡처)완주에서 전세버스로 일단 이동을 한 후 현지에서 이동하는 방법 및 경로를 표시한 그림
▲ 전체 이동경로 (캡처)완주에서 전세버스로 일단 이동을 한 후 현지에서 이동하는 방법 및 경로를 표시한 그림
ⓒ 안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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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제는 '생활 속 거리두기 수준의 상황에서 해당 지역에 신규 확진자가 없을 때'였다.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모든 계획을 짰다. 백패킹 배낭 45개와 텐트 16개를 포함하여 2천만 원어치 야영장비를 구입했다. 총액으로만 보면 대단한 가격이지만 45명이 백패킹을 시행할 장비로서는 매우 저렴한 수준이다. 소위 가성비가 좋은 물건들을 선택하고 본사와 직접 연락해서 에누리를 하고 계약을 맺었다.


최초로 계획을 발표했을 때 교사와 학생의 반응이 극명하게 나뉘었다. 교사들은 참으로 교육적인 계획이라며 만장일치로 찬성했고, 학생들은 해외로 나가지 못하는 것에 대해 볼멘 소리를 해댔다. 4차례가 넘는 설명회를 통해 아이들을 설득했고 2학기에는 실제 연습을 위해 운동장 야영을 시작했다. 반전은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야영은 훌륭한 노작교육 컨텐츠였다

실제로 타프를 치는 과정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교실에서 그토록 설명하고 영상으로 보여주었건만 팩을 박지도 않고 지주폴부터 올려놓고, "쌤, 이거 어떻게 해야해요?"라는 아우성이 빗발쳤다. 스토퍼 사용법부터 팩 박는 각도, 타프 치는 순서를 다시 차근차근 일러주고 모둠을 돌아가며 직접 가르쳐주었다. 어느 때보다도 아이들의 눈이 반짝거렸다.
 
처음 타프를 진 날 (SW612/Portra800) 어떤 모둠은 타프 하나를 치는 데에 1시간 가까이 걸렸다.
▲ 처음 타프를 진 날 (SW612/Portra800) 어떤 모둠은 타프 하나를 치는 데에 1시간 가까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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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날의 미션 중 하나 '컵라면 먹기' (핸드폰)4시간 안에 타프, 텐트를 친 후 컵라면을 먹고 정리까지 하는 것이 첫 번째 실습의 미션이었다.
▲ 첫 날의 미션 중 하나 "컵라면 먹기" (핸드폰)4시간 안에 타프, 텐트를 친 후 컵라면을 먹고 정리까지 하는 것이 첫 번째 실습의 미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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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6명 정도의 아이들이 기숙사 말고 운동장에서 잠을 자도 되냐고 물어왔다. 코로나19로 인해 주중 외박은 병결이나 인정결석에 준하는 사유 말고는 불가능하지만 운동장은 학교 내이기 때문에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기숙사 부장과 관리자 선생님들과의 상의 끝에 내가 곁에서 함께 자는 조건으로 운동장 취침이 허가되었다. 새벽 3시쯤 학생들의 상태를 살필 겸 잠시 나와 본 하늘은 매우 환상적이었다.
  
텐트와 학교와 오리온자리 (핸드폰)삼각대가 없어서 조명 스탠드에 세워놓고 16초 동안 노출했다.
▲ 텐트와 학교와 오리온자리 (핸드폰)삼각대가 없어서 조명 스탠드에 세워놓고 16초 동안 노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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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회차에는 타프와 텐트를 비롯해 모든 장비를 세팅하고 캠핑요리경연대회를 열었다. 화기와 조리도구를 사용할 때 충분한 연습이 있어야 안전하기 때문에 기획한 행사였다. 점심시간 전 1시간을 이용하여 모둠별로 마트로 걸어나가 장을 보았고 오후 시간에는 계획한 레시피에 따라 요리를 했다.

작은 코펠세트와 버너 하나, 4명이 쓰기에는 턱없이 작은 백패킹용 테이블이 전부이다보니 상당히 불편하게 식재료를 다듬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러한 제약 때문에 더욱 집중하고 몰입할 수밖에 없었다. 두 시간이 훌쩍 지나갈 만큼 아이들은 버너와 코펠에 온 감각이 집중되어 있었다.
 
요리 중 (67ii/Portra160)하트 모양으로 플레이팅을 할 볶음밥을 만들기 위해 즉석밥을 덥히고 있는 학생들
▲ 요리 중 (67ii/Portra160)하트 모양으로 플레이팅을 할 볶음밥을 만들기 위해 즉석밥을 덥히고 있는 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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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 좀 봐주세요 (67ii/Portra160)조리를 마치고 담당 선생님께 간보기를 부탁하는 모습
▲ 간 좀 봐주세요 (67ii/Portra160)조리를 마치고 담당 선생님께 간보기를 부탁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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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재미있었던 것은 백패킹 국내 기행을 끝까지 못마땅해했던 몇몇 학생들이 보여준 모습이었다. 막상 야영이 시작되니 어떤 학생들보다도 집중해서 주어진 과정들을 해내기 시작했다. 어찌나 열심히 하던지 얄미워 보일 정도였다고나 할까.

'운동장에서 대화하자!' 프로젝트

우리학교는 1달에 한 번 '달매듭'이라는 시간을 가진다. 모든 학생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일과 시간 및 기숙사 생활에 대한 반성과 토의를 하는 것이다. 많은 선생님들도 함께 자리하여 학생들의 인지, 사회적 활동을 돕는다. 

그런데 코로나19 때문에 학년 간의 교류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실내에서 50인 이상 집회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올해의 신입생들은 상대적으로 선배들과 잘 섞이지 못했다. 이미 2, 3학년들은 사이가 돈독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2학년들이 처음 타프와 텐트를 치던 날, 1학년과 3학년들이 부러운 눈빛으로 하루 종일 운동장을 기웃거리는 것을 목격했다. 어떤 생각이 번뜩이며 뇌리를 스쳤다.

'그래! 운동장에서 대화하면 되겠다.'

곧바로 교무실 컴퓨터에 앉아 2주 뒤의 행사를 기획하여 문서로 만들기 시작했다. 2학년이 야영 장비를 설치하고 요리경연대회를 하는 그 날부터 시작하여 전교생의 운동장 야영 및 실외 달매듭을 계획했다. 첫 날은 가장 서먹한 1학년과 2학년이 함께 만나는 날이 되었다.
 
운동장 야영 배치도 (캡처) 첫 날 주간과 야간의 운동장 야영 배치도
▲ 운동장 야영 배치도 (캡처) 첫 날 주간과 야간의 운동장 야영 배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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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장의 저녁노을 (67ii/Ektar100)이 날의 화합을 예견이라도 하는 듯 황홀했던 석양
▲ 운동장의 저녁노을 (67ii/Ektar100)이 날의 화합을 예견이라도 하는 듯 황홀했던 석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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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행사를 기획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운영위원장이자 학부모인 한 분은 집에서 LPG 가스통과 큰 솥을 가지고 오셨다. 시장을 돌며 어묵과 야채를 사서 50인분 어묵탕을 뚝딱 끓여내셨다. 목공 선생님은 폐 목재를 제공하여 캠프파이어를 할 수 있도록 해주었고 어떤 선생님은 아이들을 지킬 겸 차박을 자청하기도 했다.

기숙사부장이 임원진 학생들과 함께 모둠을 짰고 아이들은 작은 의자에 앉아 간식을 먹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떤 모둠은 웃음이 넘쳤고 어떤 모둠은 침묵이 흐르기도 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다들 비슷한 수준으로 평준화 되었다.
 
대화 후 영화 감상 시간 (67ii/Portra160)대화 후에는 추운 날씨 속 '오들오들 영화감상' 시간이 펼쳐졌다. 30초의 노출 시간 동안 움직이지 말 것을 요청하였으나 얼추 성공한 학생은 둘 정도. 당연히 마스크는 사진 찍을 때만 잠시 내린 것.
▲ 대화 후 영화 감상 시간 (67ii/Portra160)대화 후에는 추운 날씨 속 "오들오들 영화감상" 시간이 펼쳐졌다. 30초의 노출 시간 동안 움직이지 말 것을 요청하였으나 얼추 성공한 학생은 둘 정도. 당연히 마스크는 사진 찍을 때만 잠시 내린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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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트 취침은 선택사항이었다. 아침 온도가 5~6도 정도로 예보되어서 상당히 쌀쌀한 상황이 예상되었기 때문에 미리 겨울옷을 준비할 것을 일러놓은 상태였다. 애초 텐트 취침을 선택한 학생은 15명 정도였는데 밤이 깊어 갈수록 아이들이 하나 둘씩 내 앞으로 찾아와서 이렇게 말했다.

"쌤. 저도 운동장에서 잘래요."

담임교사, 기숙사부장, 사감교사에게 차례로 통지를 하고 추운 곳에서 자는 요령에 대해 설명했다. 행사 동안 이틀 밤을 합하여 5시간 밖에 자지 못했다. 새벽까지 노닥거리는 아이들을 지켜보느라 잠을 청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대화의 장을 열어주었다는 뿌듯함 덕에 피곤하지 않았다. 

이 기사를 작성하는 지금은 통합기행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난 뒤인데, 이때의 운동장 야영 경험이 매우 큰 도움이 되었다. 이날 추운 곳에서 자본 덕에 아이들은 교사의 설명대로 한겨울 옷을 배낭에 넣어서 왔고, 단 한 명도 감기에 걸리지 않았으며, 요리를 미리 해 본 덕에 일사불란하고 안전하게 움직였고, 매번 시간과 안전 지침을 잘 지켜주었다.

10월 29일부터 11월 6일까지 8박9일의 백패킹 노작기행에서 담아온 10롤의 필름을 계속해서 스캔하고 있다. 사진작업을 마치는 대로 계속해서 후속기사를 작성할 예정이다. 미리 결과를 말하자면, 한창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는 18세의 아이들이 4일 연속으로 텐트에서 잠을 청하고 마지막 날은 영하 5도의 새벽을 견디면서도 하루 하루를 행복해 했다는 것이다. 예고편 사진 한 장으로 기사를 마친다.
 
배낭을 메고 (645N/Ektar100)통합기행 5일차 아침, 이틀 밤을 묵었던 곳을 떠나는 모습
▲ 배낭을 메고 (645N/Ektar100)통합기행 5일차 아침, 이틀 밤을 묵었던 곳을 떠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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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노동자 교류 넘어 대미 자주권 회복 모색하겠다"

민주노총 위원장 후보 합동토론회로 미리 본 평화통일 사업 방향

  • 기자명 이승현 기자 
  •  
  •  입력 2020.11.13 22:25
  •  
  •  수정 2020.11.13 22:27
  •  
  •  댓글 0
 
직선 3기 지도부 선출을 위한 2020 동시선거 일정을 진행하고 있는 민주노총은 13일 위원장 후보 4명이 참가한 가운데 언론 초청 합동토론회를 개최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직선 3기 지도부 선출을 위한 2020 동시선거 일정을 진행하고 있는 민주노총은 13일 위원장 후보 4명이 참가한 가운데 언론 초청 합동토론회를 개최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직선 3기 지도부 선출을 위한 2020 동시선거 일정을 진행하고 있는 민주노총은 13일 오후 서울 중구 프란치스코 회관에서 위원장 후보 4명이 참가한 가운데 언론 초청 합동 토론회를 개최했다.

김상구 후보(기호 1번), 이영주 후보(기호 2번), 양경수 후보(기호 3번), 이호동 후보(기호 4번)는 이날 각 진영의 핵심 공약을 밝히고 언론사 공통질의에 대한 답변과 후보간 상호토론을 벌여 그간 코로나19 영향으로 원활하지 못했던 지역 합동유세의 부족한 점을 보완했다.

이날 토론회는 민주노총 중앙선관위 유튜브를 통해 중계되었다.

김상구 후보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김상구 후보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금속노조 위원장 출신의 김상구 후보는 핵심공약으로 조합원 중심의 대중운동을 강조하면서 공세적인 사회적 교섭을 추진하고 국민이 지지하는 파업, 반드시 승리하는 파업을 만들겠다고 밝혔다.

한상균 위원장과 함께 직선 1기 사무총장을 지낸 이영주 후보는 "2017년에서 멈춘 민주노총의 역사를 변화시키겠다"고 하면서 "세상을 바꾸는 민주노총.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한국사회를 재편하는 3년의 로드맵을 제시한다"고 말했다.

기아자동차 화성 사내하청 분회장을 지낸 양경수 후보는 최초이자 마지막인 비정규직 출신 위원장이 되겠다며 "내년 1월부터 준비해 11월 총파업투쟁을 실질적으로 조직하겠다"고 기염을 토했다.

공공운수노조와 발전노조의 지도위원을 맡고 있는 이호동 후보는 '조합원의 민주노총. 당당한 민주노총. 실력있는 민주노총. 자랑스런 민주노총'을 캐치프레이즈로 소개했다.
 
민주노총이 강령에 담고 있는 '민족의 자주성과 건강한 민족문화 확립, 분단된 조국의 평화적 통일 실현'을 위한 사업 방향과 계획에 대한 질문에는 남북노동자의 자주적 교류에 그치지 않고 미국의 개입과 지배로 부터 벗어나는 투쟁방안을 적극 모색하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김상구 후보는 "그동안 남북통일사업은 통일위원회 등 일부의 활동에 불과했다"며 "(앞으로)대중적이고 일상적인 자주통일운동이 진행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산별 단위 교류도 확대하고 상징성이 큰 남북 평화철도 잇기 사업에 조합원이 참여할 수 있는 대중사업으로 확대하도록 하겠다고 했다. 또 "한반도 전쟁종식 뿐만 아니라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는 일, 그리고 2018년에 합의한 남북노동자 합의정신에 입각하여 남북노동자간의 자주적 교류를 확대하겠다"고 말했다. 

이영주 후보 [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이영주 후보 [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이영주 후보는 "민주노총이 지금까지 평화통일사업에서 남북교류를 중심으로 진행했다면, 미국의 패권주의가 문제가 되는 지금 우리의 투쟁도 단순한 남북교류의 선을 넘어서 한반도, 동북아의 민중과 연대하고 미 제국주의와 투쟁할 수 있는 그런 투쟁방안들을 배치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양경수 후보는 "민주노총의 통일사업은 그동안 시기적(8.15) 사업에 머물거나 통일위원회만의 사업으로 머물렀던 아쉬움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노총은 통일운동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노력해왔다"고 평가했다. 

이어 "당장 올해 예산 문제만 보더라도 국방예산을 대폭 늘리고 미국의 방위비분담금을 대폭 인상하라는 요구속에서 복지예산이나 노동자들에 대한 예산은 당연히 삭감될 수 밖에 없다"고 하면서 "따라서 민주노총은 자주교류사업도 물론 중요하고 유의미하지만 그것을 넘어서 이제 미국의 지배와 개입으로부터 벗어나는 투쟁을 전 조직적으로 해나갈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이호동 후보는 "당선되면 정말 잘해보고 싶은 사업이 노동자 통일사업"이라며, "8.15를 중심으로 한 시기적 사업, 통일위원회로 제한된 사업은 반드시 극복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간의 여러가지 한계에 대해서는 조직적으로 토론하고 제대로 결의를 모아보겠다며, "통일사업이 좀 더 확대될 수 있도록 의지를 가진 집행, 실천을 해 보겠다"고 덧붙였다.

100만 조합원으로 제1노총의 지위를 갖게 된 민주노총이 모든 노동자의 민주노총을 내세우며 전략조직화 방안으로 강조하고 있는 5인미만 사업장 노동자의 조직화 방안에 대해서는 네 후보가 구체적인 접근 방법에서 차별화를 시도하기도 했다. 

김상구 후보는 "민주노총의 전략사업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어려운 과제이기도 하다"고 하면서 "5인미만 사업장 노동자의 대부분이 사장과 직접 대면하면서 일하기 때문에 기업별, 직종별로 조직하기가 어려운 만큼 지역본부에서 인큐베이팅하고 산별노조에서도 함께 도와야 한다"고 방안을 제시했다. 

이영주 후보는 "지금까지 민주노총은 산별체계로 조합원을 가입받았지만 이제부터 산별이 자신의 영역과 부문을 조직화하기 시작하면 지역에서는 중소·영세·비정규직·5인미만 사업장의 노동자들을 직가입으로 받을 수 있는 체제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또 "5인미만 사업장 노동자는 전체 노동자의 4분의 1이 넘지만 조직률은 0.1%에 그치고 있는데, 바로 이들과 손 잡고 우리 조직의 조합원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바로 민주노총을 혁신하고 나아가 한국사회에서 민주노총이 모든 노동자의 대표성을 획득해 나가는 소중한 길이기도 하다"고 강조했다.
 

양경수 후보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양경수 후보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양경수 후보는 "자유롭게 해고할 수 있고 야간수당, 잔업수당, 특근수당, 아무 것도 주지 않아도 상관없는 무법지대인 5인미만 사업장의 실태를 폭로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며, "택배노동자들의 과로사 문제가 여론화되니까 최근 일주일에 한 두곳씩 지회가 만들어지고 있다. 5인미만 사업장 노동자들의 조직사업도 이렇게 해 나가야 한다"고 밝혔다.
 
이호동 후보는 "열악한 노동조건에 있는 5인미만의 사업장의 노동자들의 실태에 대한 정확한 분석과 조건, 정서에 맞는 접근이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차기 대선에서 민주노총이 취해야 할 후보전술, 지지후보 결정시 조합원 총투표 등에 대한 의견을 묻는 질문도 있었다.

김상구 후보는 주변화되고 있는 진보정치의 미래를 위해, 또 1백만 민주노총 조합원들의 힘을 모으기 위해 진보정치의 단일화 논의와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며 이를 위한 대중운동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영주 후보는 "지금 조합원들에게 가장 큰 호응을 받는 것이 바로 '대선투쟁 노동자·민중 단일후보'라는 구호"라고 하면서 "우리의 사회대개혁 요구안에 동의하는 모든 세력과 함께 우리의 후보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양경수 후보는 "대선에서 단일후보를 선출해 대응하자는 입장에 원칙적으로 동의한다. 꼭 성사되길 바란다"고 하면서 "다만 이 과정이 민주노총의 조직적 단결을 해치는 것이어서는 안되며, 당면한 민주노총의 투쟁을 발목잡는 것이라면 시도하지 말아야 한다"고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이호동 후보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이호동 후보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이호동 후보는 "지역유세 과정에서 민주노총의 정치방침은 토론을 통해 결정하겠다고 선언했으나 섣부른 후보전술 논의로 인해 정치방침 자체를 결정하지 못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고 지적했다.

한편, 민주노총은 오는 27일 자정까지를 선거운동 기간으로 정하고 11월 28일 오전 7시~12월 4일 오후 6시까지 일주일간 투표를 거쳐 당선자 공고를 낼 예정이다. 

연장투표와 일부 재투표·결선투표 등 사유가 발생하는 경우에는 12월 4일~6일 별도로 공고하게 된다.

이번 민주노총 직선은 자체 규약 44조에 따라 3인 1조 동반출마(러닝메이트)하는 민주노총 위원장과 수석부위원장·사무총장, 그리고 산하조직인 16개 지역본부 본부장 및 수석부본부장·사무처장을 동시에 선출하도록 되어 있으며, 임기는 2021년 1월 1일부터 2023년 12월 31일까지이다.

 

[2020 민주노총 위원장·수석부위원장·사무총장 후보]

[기호 1번] 김상구 위원장 후보(기아자동차지부 화성지회 엔진1부, 전 금속노조 위원장), 박민숙 수석부위원장 후보(대전성모병원 해고자, 현 보건의료노조 부위원장), 황병래 사무총장 후보(국민건강보험노동조합, 공공운수노조 국민건강보험노동조합 위원장)

구호 : 선을 넘자-과감한 변화! 사회적 교섭! 이기는 투쟁!

주요공약
-조합원과 함께 과감한 변화 주도(멈춰있는 산별운동, 사회대개혁, 정치세력화, 통일운동 조합원 중심 전면 재정비)
-공세적인 사회적 교섭 추진(교섭전략위원회 구성, 실력있는 사회적 교섭 등)
-100만 조합원이 참여하는 실질적인 공동투쟁 조직(모든 노동자의 민주노총, 200만 민주노총 시대 준비)

 

[기호 2번] 이영주 위원장 후보(전교조 서울지부 수석부지부장, 민주노총 직선1기 사무총장), 박상욱 수석부위원장 후보(기아자동차지부 광주지회 대의원, 금속노조 대의원), 이태의 사무총장 후보(학교비정규직 노동자, 공공부문 공동파업위원회 집행위원)

구호 : 민주노총을 다시 자랑스럽게

주요공약
-2021년 세상을 바꾸는 총파업·민중총궐기
-작은 사업장과 청년·학생도 쉬운 가입 '방방곡곡 민주노총'
-노동자·민중 단일후보로 돌파하는 2020년 대선

 

[기호 3번] 양경수 위원장 후보(전 금속노조 기아자동차 화성 사내하청 분회장, 현 민주노총 경기지역 본부장), 윤택근 수석부위원장 후보(전 부산지하철노조 위원장, 전 민주노총 부위원장), 전종덕 사무총장 후보(전 강진의료원 지부장, 현 보건의료노조 광주전남지역 본부장)

구호 : 백만의 힘 거침없다. 민주노총

주요공약
-첫 정기대대 100만 총파업 결의(전태일 3법 쟁취 총파업 2021년 11월 3일로 확정)
-당선 즉시 위원장이 책임(택배·요양·돌봄·배달·콜센터·보육 등 통큰 코로나 투쟁)
-거침없이 새시대로(국가고용책임제·전국민고용보험제로 노동중심 세상 건설)
-동네마다 민주노총(전국의 모든 시군구에 민주노총 협의회 건설)
-학교부터 민주노총(특성화 고등학생 현장실습부터 조직사업 집중)
-내손안에 민주노총(민주노총 방송국 설립 백만조합원과 소통)

 

[기호 4번] 이호동 위원장 후보(발전노조 초대위원장, 현 공공운수노조·발전노조 지도위원), 변외성 수석부위원장 후보(전 전해투 집행위원장, 현 건설산업연맹 건설노조 대의원), 봉혜영 사무총장 후보(사회보장정보원 분회장, 민주노총 부위원장·여성위원장)

구호 : 새로운 시작, 할 수 있다! 민주노총

주요공약
-조합원의 민주노총(임원, 대의원 전면 직선제 도입 및 소환권 강화 등)
-당당한 민주노총(수석부위원장 직할 상설투쟁체 설치 등)
-실력있는 민주노총(정책연구원 대규모 확대 개편 등)
-자랑스런 민주노총(200만 민주노총위원회 설치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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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새로운 평화'...용기, 그리고 신뢰가 열쇠"

민화협·한국노총 토론회, 핵심은 내년 3월 한미훈련 중단

  • 기자명 이승현 기자 
  •  
  •  입력 2020.11.13 09:06
  •  
  •  댓글 0
 
민화협과 한국노총이 12일 '출구없는 남북관계 대안을 모색하다' 주제의 토론회를 개최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민화협과 한국노총이 12일 '출구없는 남북관계 대안을 모색하다' 주제의 토론회를 개최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우여곡절 끝에 미국 대선은 조 바이든을 승자로 선택한 가운데 끝나고 바야흐로 한반도평화프로세스의 전망을 어떻게 구체화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구체화되고 있다.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 대표상임의장 이종걸)와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 위원장 김동명) 그리고 개성공업지구지원재단(이사장 김진향),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송영길 위원장을 비롯한 김영주·윤건영·김홍걸 국회의원 및 전 한국노총 위원장 출신인 김주영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이 두루 나서 주최한 토론회가 12일 오후 서울 여의도 한국노총 대회의실에서 개최되었다.

'출구없는 남북관계, 대안을 모색하다'라는 주제에 걸맞게 남북관계 경색원인을 따져보고 대안을 찾으려는 이날 토론은 긴장감 넘치게 진행됐다.

김진향 개성공업지구지원재단 이사장은 '남북관계 교착의 원인과 해법 : 평화의 위기를 기회로!'라는 주제의 발표를 통해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것은 미국이 아니라 남과 북 우리가 하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김 이사장은 먼저, 2년전 2018년 4.27 판문점선언에서 '8천만 겨레와 전 세계에 한반도 평화 시대의 개막을 엄숙히 천명'했지만 하나도 된 것은 없지 않느냐는 통절한 반성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또 역사의 분수령이 된 싱가포르 북미 정상합의를 통해 미국은 북의 안전을 보장하고 북은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약속했지만 그 후 한치도 진전이 없었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해 9.19 평양공동선언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에게 북미협상을 위한 담대한 양보를 요청하고 그 성과를 바탕으로 9.25 한미정상회담을 진행했으나 한미워킹그룹에 묶여 2019년 하노이 북미정상회담까지 5개월을 지체하고 이후 '비핵화 및 제재 프레임과 한미관계 중심의 대북 정책'으로 회귀하는 참혹한 시간을 겪었다고 진단했다.

그동안 평화협상 외에는 하지 않겠다는 북측의 입장이 굳어졌고 새 정부가 들어서는 미국으로서도 현재의 교착국면 유지가 최선일 수 있는 상황이 벌어졌기 때문에 결국 우리 정부의 발빠른 행보만이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교착을 풀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이라는 것이 김 이사장의 주장이다.

우리 정부의 결단이 필요한 핵심적인 내용으로는 '비핵화 진전없이 남북관계는 한 발짝도 못나간다'는 비핵화 프레임의 오류와 한계를 넘어서 '비핵화는 평화를 위한 수단이며 평화를 위한 남북협렵을 동시에 추진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평화프레임으로 전환할 것을 촉구했다.

또 정부의 역할을 핵문제 중재자가 아닌 평화문제의 당사자로, 능동적 주체로 인식하고 한미공조와 대북제재의 틀에서 벗어나 민족공조와 화해의 자세로 정책기조를 바꿀 것을 주문했다.

김동엽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현 남북관계의 특징과 대안 : 외교·통일정책의 균형 실패 및 개선과제'를 주제로 한 발표에서 "남북관계 발전과 대북제재 사이의 모순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현실적 제약을 탓하기 전에 용기와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 교수에 따르면, 2018년 4.27판문점선언과 9월 평양선언으로 자리잡은 현재 남북관계의 가장 큰 특징은 '평화'라는 것. 남북은 2000년 6.15선언을 통해 분단과 반목, 갈등을 벗어나겠다는 합의에 도달했으나 '돈으로 평화를 사려고 했던 경제적 접근'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2018년은 말 그대로 '평화, 새로운 시작'이었다. 남북관계에서 특별한 '평화'를 위해 군사적 신뢰구축이라는 제도적 장치를 세웠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9.19군사분야합의서의 명칭이 '역사적인 판문점선언 이행을 위한 군사분야 합의서'라고 되어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렇게 갈구했지만 한쪽은 평화를 향한 용기를 잃었고 다른 한쪽은 상대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 것이 현재 위기의 핵심이다.

따라서 지금 남북관계의 출구는 제대로 된 평화를 설계하는 것이며, 무너진 신뢰와 사라진 용기를 회복하는 것이 먼저라는 것이 김 교수의 진단이다.

그래서 주문하는 바, 군사적 접근에 기초한 상호주의를 탈피해 일방적으로 조정하고 선제적으로 양보하는 탈상호주의를 취하라는 것이다.

이와 함께 지원 프레임을 협력개념으로 변화하는 탈수혜주의, 북맹탈출과 가짜뉴스를 극복하는 탈혐오주의, 조급함을 탈피하고 정책의 연속성을 고민하는 탈성과주의를 바탕으로 평화를 협의하여 원하는 평화를 얻는다는 입장을 견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왼쪽부터 김진향 개성공업지구지원재단 이사장, 김동엽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 소장,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 원희복 전 경향신문 부국장.

토론자로 나선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 소장은 내년 초 미국의 새 정부가 들어서고 북에서는 제8차 당대회가 열리는 한편 하반기 대선정국을 향해 집중하게 될 우리의 상황을 보면, 페리 프로세스로 시작해서 클린턴 전 대통령의 평양방문 직전까지 갔던 1999년의 데자뷔에 가깝다고 평가했다.

바이든 진영에 합류한 한반도 전문가들의 성향까지 감안하면 아주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포괄적 합의와 단계적 이행이 필요하다'는 공감이 있을 것이라고 짚었다.

이어 중유제공을 대가로 핵무기 파기를 바꾸기로 한 2005년 9.19합의를 언급하면서 "새롭지는 않지만 이 해법을 바탕으로 북핵고도화, 정상합의 등 그동안 변화를 반영해서 새로운 이행방안을 만드는 것이 지금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고, 이걸 가지고 북미가 협의하는 프로세스를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유엔총회 연설을 통해 종전선언을 제안했을 때 이미 이 프로세스는 시작된 것이라고도 했다.

다만, 북측은 핵시설을 폭파하고 실험을 중지한 반대급부로 미국이 종전선언을 해야 한다는 입장인 반면, 미국은 종전선언이 비핵화의 사전조치이므로 그밖에 전략무기의 일부감측 등 추가적 조치를 해야 한다는 입장차이가 있기 때문에 '포괄적 합의와 단계적 이행'을 위해 종전선언을 어디에 위치시킬지에 대한 합의가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또 여기서 우리 정부가 중재자, 촉진자로서 해야 할 역할이 있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정 소장은 이어 "미국측 인사들이 북의 선비핵화와 핵 해체를 비롯해 비핵화 프로세스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방안을 갖고 있지만 이를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와 어떻게 연계하여 이끌어 갈 것인지에 대해서는 고민이 부족하다"고 지적하고는 "결국 우리의 역할이다. 내년 3월 한미합동군사연븟을 축소하거나 중단하는 문제가 문재인 정부로서는 큰 실험대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2009년 오바마 행정부가 '전략적 인내' 정책을 표방한 원인이 되기도 했지만 북이 미사일을 발사한 배경에는 한미합동군사연습이 있었다는 것이다.

특히 최근 정면돌파전을 앞세워 경제건설에 집중하는 북한의 사정을 감안하면 내년 3월 한미합동군사연습의 축소, 중단을 계기로 1999년의 이행방안이 미국과 중국사이에도 협의될 수 있는 중요한 기회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는 "종전선언은 했는데 주한미군과 유엔사는 그대로 있고 한미연합군사훈련은 계속된다면, 이런 종전선언은 비핵화를 압박하는 정치적 선언일 뿐 법적으로는 정전상태의 지속이라고 할 수 있다"며, "내년 한미연합군사훈련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하는 것이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의미있는 실천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많은 전문가들이 바이든 집권 후 7개월 이상의 공백을 예상하지만 전임 오바마 행정부의 경우 1월 20일 취임한 뒤 한달내에 한반도 정책을 발표한 바 있으며, 당시 북한은 한미군사훈련 중단으로 미국의 진정성을 확인하겠다고 했으나 결국 강행된 군사훈련이 북의 미사일 발사와 미국의 전략적인내로 귀결되었다는 점을 거듭 지적했다.

또 '비핵화' 프레임을 벗어나자는 의견도 있지만 이에 대해 남·북·미 사이의 합의된 정의도 없는 상태에서 더 이상 우회하거나 미룰 것이 아니라 우리식 비핵화 해법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바이든도 언급한 바 있는 '비핵무기지대(비핵지대)'를 한반도 비핵화의 목표와 정의로 삼자고 제안했다.

한반도 비핵지대는 "남북이 비핵화를 확고히 이행하고, 핵보유국들은 남북에 핵무기 사용 및 사용위협을 가하지 않고 핵무기 및 그 투발수단을 배치하지 않는 다는 것을 구속력을 갖춘 형태로 보장하는 것"이며, "남북한이 '비핵지대 내' 당사자들로 조약을 체결하고, 미국, 중국, 러시아 등 5대 공식 핵보유국이자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들이 '비핵지대 외' 당사자들로 이 조약의 의정서에 가입함으로써 참여하는 구도"라고 설명했다.

원희복 전 경향신문 부국장은 '출구없는 남북관계'의 원인으로 반통일언론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국가보안법의 폐지 또는 대폭 개정 등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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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빠처럼 살고 싶지 않아요”…가슴이 무너져내렸다

한국지엠 비정규직 해고자, 그 후](상)“나는 아빠처럼 살고 싶지 않아요”…가슴이 무너져내렸다

특별취재팀 = 송윤경·이효상·정대연·윤기은 기자 kyung@kyunghyang.com

입력 : 2020.11.13 06:00 수정 : 2020.11.13 08:39

 

주 6일·12시간·최저임금 노동···절망할 틈도 없다 

지난해 12월 한국지엠 창원공장은 비정규직 585명을 대량 해고했다. 조용히 사라져야 했던 이들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사진은 한 비정규직 해고자가 마지막으로 공장에서 일하던 날의 기록을 담은 일기를 보는 모습이다. 이 해고자가 '신입'이었던 대우차 시절엔 정규직·비정규직 개념이 없었다. 세월이 흘러 공장 내 '계급'이 있다는 것, 자신은 비정규직 계급이라는 걸 알게 됐다. 한국지엠 직원이 많은 동네의 아이들은 조금만 커도 서로의 아빠가 '직영'(정규직)인지 아닌지를 알아냈다. 하청업체 소속 비정규직은 임금이 '직영'(정규직) 절반이니 사는 모습이나 씀씀이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한때 중학교 갓 들어간 아들이 어린 마음에 '아버지처럼 살고 싶지 않다'고 했을 때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 자신의 잘못도 아닌데 그저 "부끄러웠다"고 했다. 그는 지난해 12월 사측의 비정규직 대량 해고 때 공장을 나와 일자리를 찾고 있었다. | 특별취재팀

지난해 12월 한국지엠 창원공장은 비정규직 585명을 대량 해고했다. 조용히 사라져야 했던 이들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사진은 한 비정규직 해고자가 마지막으로 공장에서 일하던 날의 기록을 담은 일기를 보는 모습이다. 이 해고자가 '신입'이었던 대우차 시절엔 정규직·비정규직 개념이 없었다. 세월이 흘러 공장 내 '계급'이 있다는 것, 자신은 비정규직 계급이라는 걸 알게 됐다. 한국지엠 직원이 많은 동네의 아이들은 조금만 커도 서로의 아빠가 '직영'(정규직)인지 아닌지를 알아냈다. 하청업체 소속 비정규직은 임금이 '직영'(정규직) 절반이니 사는 모습이나 씀씀이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한때 중학교 갓 들어간 아들이 어린 마음에 '아버지처럼 살고 싶지 않다'고 했을 때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 자신의 잘못도 아닌데 그저 "부끄러웠다"고 했다. 그는 지난해 12월 사측의 비정규직 대량 해고 때 공장을 나와 일자리를 찾고 있었다. | 특별취재팀

 

대다수 근로기준법 사각지대인
중소·영세 공장으로 ‘재취업’
쉬고 싶어도 연차는 꿈도 못 꿔
배달·택배 노동자 환경도 열악
 

김현우씨(36·가명)는 올여름부터 음식배달 기사로 일하고 있다. 한 달 전 배달할 떡볶이를 받기 위해 분식점에 들어갔을 때였다. “아빠다!” 아내와 음식을 먹던 여섯 살배기 딸이 소리쳤다. 가족과 마주칠 거라고 생각지 못했다. 당황스러웠다. 과속방지턱을 지나다 초밥이 한쪽으로 쏠려 6만5000원을 물어준 날에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이럴 때면 자신도 모르게 과거를 불러냈다. 8년간 힘든 일을 마다않고 일했는데 왜 쫓겨났을까.

김씨는 지난해 12월31일 해고된 585명의 한국지엠 창원공장 비정규직 중 한 명이다. 사용자가 노동자를 대량 해고하려면 ‘경영상 이유에 의한 해고’ 요건을 충족해야 한다. 하지만 사내하청 업체 소속 비정규직은 원청(한국지엠)이 업체들과 계약을 끊으면 쉽게 해고할 수 있다. 2018년 1월에도 이 공장은 비정규직 64명을 이런 식으로 내보냈다.

한국 사회에서 비정규직 대량 해고는 대단한 뉴스가 아니다. 이들이 어떤 일자리로 이동하는지 역시 특별한 분석 대상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전태일이 산화한 지 50년이 되는 2020년, 경향신문은 한국지엠 창원공장에서 대량 해고된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을 추적했다. 대기업·대공장 정규직의 가장자리에 가까스로 매달려 있다가 한 번 더 주변부로 밀려난 이들의 이야기엔 갈수록 심각해지는 일자리 양극화 등의 노동 현실이 담겨 있다.

취재진은 지난 6주간 한국지엠 창원공장에서 해고된 비정규직 649명 가운데 138명을 온라인 설문조사 했다. 그중 32명은 인터뷰를 했다. 설문응답자 가운데 한 번이라도 재취업을 한 사람은 85명이었다. 재취업 경험자 62%는 중소·영세 공장에서 일했거나 일하고 있었다. 32%는 음식배달·택배·화물운송을 경험했다. 나머지는 주로 건설현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한국지엠 시절보다 월수입은 50만~100만원(29%) 혹은 100만원 이상(23%) 줄었고 하루 노동시간은 2~3시간(39%), 3시간 이상(25%) 늘었다. 응답자 절반은 “연차 개념이 없는 곳에서 일한다”고 답했다.

인터뷰 결과 해고자들이 재취업한 영세·중소 공장은 근로기준법을 비롯한 노동관계법이 통하지 않는 곳이 태반이었다. 평일 평균 10~12시간 일하면서 최저임금 수준을 받았다. 주로 토요일까지 강제로 일했고 더러는 일요일까지 나와 청소라도 해야 했다. 음식배달·화물·택배노동자가 된 이들은 아예 근로기준법 밖으로 밀려났다. 이들의 신분은 근로기준법이 보호대상으로 삼는 ‘노동자’가 아니라 ‘개인사업자’다. 오토바이나 1t 트럭을 구입하고 일터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고의 책임을 떠안는다.

한국지엠 시절에 대한 해고자들의 감정은 양가적이었다. 한편으로는 그립다고 했다. 정규직과 한 공간에서 일했기 때문에 노동시간, 유급휴가 면에서 법의 보호를 받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분노가 치민다고 했다. 정규직과 같은 일을 했지만 하청업체 소속이란 이유로 정규직 임금의 50~60%를 받았다. IMF 외환위기 이후 급격히 늘어난 이런 고용방식은 불법(파견법 위반)이다. 법원은 일관되게 사내하청 비정규직들을 정규직으로 고용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리고 있다.

한국산업은행으로부터 8100억원을 지원받은 한국지엠은 곧 창원공장에 신차종을 배정하기로 했다. 공장의 일감은 늘어날 것이다. 그러나 정규직 노조는 ‘동료 비정규직’의 해고에 눈을 감았다. 2018년 비정규직 64명 해고 직전엔 정규직 노조가 사측과 합의하기까지 했다.

중소공장에서 하루 12시간씩 일하는 한 해고자는 휴식시간에 앉아있을 곳이 없어 땅바닥에서 쉰다. 그는 깍두기, 고추가 반찬의 전부인 식판을 보고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한다. “이런 게 노예노동 아닐까.” 50년 전 전태일은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며 산화했다. 한국지엠 창원공장 비정규직 해고 노동자들은 묻는다. 한국 사회는 과연 노동자의 존엄성을 존중하고 있는가.

그래픽 | 성덕환·김덕기 기자

그래픽 | 성덕환·김덕기 기자

그래픽 | 성덕환·김덕기 기자

그래픽 | 성덕환·김덕기 기자

한국지엠 창원공장은 2018년~2019년 649명의 비정규직을 대량 해고했다. 5년~15년간(설문응답자 80%의 근속기간) 자동차를 만들던 비정규직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해고 후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어떤 일터로 이동했을까. 해고자 28인의 이야기를 신문 지면 그래픽에 축약해 담았다(위 이미지들을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아래는 위 이미지들 속 텍스트다. ‘①현재 하는 일’ ‘②노동시간, 수입’ ‘③과거와 현재 생활’ 등의 항목을 가지고 각 해고자의 상황을 정리했다.
 

■최우현(38·가명) 

① 현재 하는 일 : 물류 운송

② 노동시간·수입 : 주 6일 새벽 1시부터 아침 8시까지 노동. 월 수입 180만원

③ 23세에 한국지엠에 들어와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 왔다. 그는 사소한 사건으로 자신의 ‘신분’을 알게 됐다. “사람들이 일할 때 이어폰으로 노래 듣는 걸 봤다. 저도 그래도 되는 줄 알았다. 근데 정규직이 와서 너는 들으면 안 된다고…. 그때 제가 비정규직인 걸 처음 알았다. 임금 차이가 크다는 것도.” 한국지엠에서 해고된 뒤 들어간 공장은 화학약품 때문에 견딜 수가 없었다. 지금은 유통기업 하청업체로부터 물량을 받아 편의점에 배송하고 있다. 심야 노동을 하고 있는 그는 낮에 푹 잠들지 못한다.

■유근상(50대 후반·가명) 

① 나이가 많아 일자리 못 구함

③ 1995년 대우에 입사할 때는 정규직·비정규직 구분이 없었다. 차별도 억울한데 해고까지 당하니 앞이 캄캄했다. 5년 전 아들이 “아빠처럼 비정규직으로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해 충격을 받았다. 해고 뒤 아내가 공장에서 하루 12시간씩 일하고 있다.
 

■정상민(39) 

① 택배기사

② 주 6일 아침 7시부터 저녁 9~10시까지 노동

③ 2018년 해고 이후 택배노동자가 됐다. 운전, 고객 응대, 배송, 장시간의 막노동에 몸도, 마음도 지쳐 있다. 1년간 가족들도 말을 못 걸었다. “한국지엠도 참 불합리했는데 여기는 모든 책임을 노동자가 지는 노예계약이다.” 계약 만료 형태로 해고 위기에 놓인 동료를 도우려다 노조를 만들었다. 지난달에는 같은 대리점에서 일하는 택배노동자 한 명이 저소득과 회사의 갑질에 지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일어났다. 올해 물량 급증으로 바쁜 와중에도 그와 동료들은 고인 죽음의 책임을 회사에 묻고 있다.

■차진우(39·가명) 

① 자동차 부품업체 생산직

② 주 6~7일 주·야간 교대근무, 야간 때는 오후 7시30분 출근해 다음날 오전 8시 퇴근

③ 올 초 해고 이후 한국지엠 비정규직 동료들과 복직투쟁을 벌였다. 코로나19로 학교 개학이 연기되면서 아이들을 농성장에 데리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 “비참하고, 미안했다.” 이후 공장 생산직 일을 알아봤다. 먼저 다닌 직장은 3명이서 할 일을 2명에게 시켰다. 담배 피울 짬도 안 나 그만뒀다. 현재 직장은 12월까지만 일할 수 있다. 구내식당 아침 메뉴는 깍두기, 고추, 멀건 국이 전부다. “1970~1980년대가 생각난다”고 했다.

■김석표(40·가명) 

① 사업을 하는 친척을 돕고 있음

③ 2018년 해고 뒤 대출 받아 호떡 푸드트럭를 시작했다. 트럭 옆에 돗자리 깔고, 일하면서 아이를 봤다. 개인 사정으로 장사를 접은 후 공장에서 최저임금을 받았는데 생활이 힘들었다. 친척이 6개월간 월급 줄 테니 심부름을 해달라고 했다. 이후로는 어떻게 될지 그 자신도 모른다. 대출 빚을 못 갚아 아내는 곧 신용불량자가 될 것 같다.

■김규태(46·가명) 

① 육아 전담하며 구직 중

③ 남편이 해고되자 아내는 대기업 하청업체에 생애 첫 취업을 했다. 해고 후 빚은 2500만원이 늘었고, 집은 전세에서 더 좁아진 월세로 바뀌었다. 한국지엠에서 같이 일하던 비정규직 ‘동생’이 정규직이 몰던 차량에 치였지만 3일 만에 다시 출근해야 했던 게 16년 한국지엠 생활 중 가장 기억에 남는다.

■조호규(38·가명) 

① 담배 필터 제조

② 주 5일 10시간30분씩 노동. 2주씩 주야간 교대근무. 160도의 열 기계 앞에서 작업하다 팔에 화상 입음.

③ 두 자녀를 부양하는 그는 해고 후 3000만원을 대출했고, 차 한 대를 처분했다. 부모님과 처가댁에 매월 10~20만원씩 드리던 용돈도 5만원으로 줄였다. 어느 날 은행에서 전화가 왔다. “자녀분 적금통장 해약하시는 게 맞나요?” 아내가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아이의 적금통장을 몰래 깬 것이었다. 한국지엠 마지막 퇴근길에 조씨는 동료와 이런 말을 하며 공장을 나왔다. “우린 뭐였지? 나사 한 조각이었나?” 그는 해고 후 두어달 쉬는 동안 밖에 나갈 일을 최소한으로 만들었다. 아내는 최씨에게 “기운 차리라”며 응원했지만 그는 해고 후 “안쪽으로 침전하는 느낌”이었다고 털어놓았다.

■김진기(42·가명) 

① 전기 배선 설치

② 주 5일 하루 8시간씩 노동. 월 수입 300만원. 전선 설치 중 전기가 몸에 오르거나 전선이 터지는 경우 있음.

③ 김씨는 매년 12월 31일마다 아내와 가족 계획을 세운다. 김씨의 아내는 계획을 짤 때마다 “한국GM을 그만 두고 형 회사로 가라”고 얘기했다. 하지만 그는 선뜻 한국GM을 나올 수 없었다. ‘언젠가 정규직이 될 수 있겠지’라는 보상심리에 11년 동안 한국GM 창원공장으로 출근했다. 해고가 되고 나서야 형 회사로 들어갔다. 김씨의 아내는 6년 전 유방암 판정을 받은 데에 이어 올해 혈액암 판정도 받았다. 김씨는 아내를 요양병원에, 초등학생 아들을 장모님께 맡겨야 했다. 해고 후 생활비를 아끼기 위해 초등학생 아들이 다니던 학원 몇 곳을 끊었지만 김씨의 마이너스통장은 늘어나고 있다.
 

■한지석(44·가명) 

① 건설현장 일용직

② 일당 12만원. 코로나19 이후 공치는 날이 많음

■한석희(45·가명) 

① 아파트 관리

② 5일에 한 번 24시간 노동. 월 수입 230만원

③ 해고 뒤 정규직으로 재취업한 드문 사례다. 그러나 입주민 민원이 들어오면 바로 잘리는 신세다.

지난해 12월 한국지엠 창원공장은 비정규직 585명을 대량 해고했다. 해고자들이 10~20년간 일했던 창원공장을 그만두면서 라커룸에서 가지고 나온 것은 몇 가지가 안된다. 한 해고자는 한국지엠 정규직들의 동계 점퍼를 얻어 왔다. 하청 노동자의 점퍼보다 질이 좋고 따뜻하다. 그는 “직영(정규직)과  비정규직은 작업복의 재질이 다르다”고 했다. 사진은 해고자들이 취재진에게 보여준 자신의 작업복이다. | 특별취재팀

지난해 12월 한국지엠 창원공장은 비정규직 585명을 대량 해고했다. 해고자들이 10~20년간 일했던 창원공장을 그만두면서 라커룸에서 가지고 나온 것은 몇 가지가 안된다. 한 해고자는 한국지엠 정규직들의 동계 점퍼를 얻어 왔다. 하청 노동자의 점퍼보다 질이 좋고 따뜻하다. 그는 “직영(정규직)과 비정규직은 작업복의 재질이 다르다”고 했다. 사진은 해고자들이 취재진에게 보여준 자신의 작업복이다. | 특별취재팀

■김수현(50·가명) 

① 대리기사, 택배기사, 건설현장 일용직

② 일감이 생길 때마다 일함

③ 대학생 아들 둘을 두고 있다. 자녀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1000만원짜리 적금을 깼다. 생활비가 부족해 아내 명의로 마이너스 통장을 만들었다.

■설복현(50·가명) 

① 전자제품 입·출하 보조

② 주 6일 12시간씩 노동. 최저시급

③ 2018년 먼저 해고된 65명 중 1명이다. 해고 후 여러 공장을 전전했다. 한 공장에선 파이프 절삭유를 다뤘다. “기름이 독해서” 고무장갑은 늘 하루만에 “열십자로” 찢어졌고,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듯한 피로감에 시달렸다. 한국지엠에서 그는 자동차 미션 만큼은 ‘빠삭’ 했다. 50대인 지금, 과거 쌓은 기술 대신 힘을 쓰는 상·하차 업무를 한다. 코로나19 때문인지 지금의 일터에 젊은이들이 상당히 들어왔다. 관리자들 눈빛이 달라졌다. 또 밀려날까봐 걱정스럽다. 부모님과 처제가 아파 빚이 늘고 있다.

■석동훈(49·가명) 

① 택배기사

② 주 80시간 노동. 월 수입 300만원

③ 2018년 해고 뒤 택배 노동 한 달 만에 몸무게가 20㎏ 줄었다. 배송 중 교통사고를 당했지만 2주 만에 운전대를 다시 잡았다.

■김희관(53·가명) 

① 자동차 부품업체 생산 계약직

② 주 6일 중 평일 11시간, 토요일 8시간 노동. 월 수입 260만원

③ 해고 후 한 없이 작은 사람이 된 느낌이다. 인간관계를 스스로 단절하고 은둔 생활을 하고 있다.

■서동규(39·가명) 

① 화물 운송, 연삭기 공장 야간 파트타임(투잡)

② 평일 14~15시간씩, 토요일 12시간 노동. 월 수입 250만~300만원

③ 문씨는 여유가 없다며 여러번 인터뷰를 사양했다. 그와의 대화는 한밤중에 이뤄졌다. 1t 탑차로 화물운송을 하는 그는 아침 7시30분부터 12시간 일한 다음, 저녁 8시부터 밤 11시까지 중소공장에서 파트타임 노동을 한다. 하루라도 쉬려면 자신의 대타를 직접 구하거나 25만원을 물류회사에 지급해야 한다. 힘들어도 견뎌야 한다. 아픈 아이의 치료에 목돈이 드는데 해고 뒤 빚이 5000만원 늘었다. 한국지엠 시절 가족 캠핑을 간 적이 몇번 있다. 그후 두 아이는 캠핑가자고 노래를 부른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꼭 한번 더 캠핑을 가보고 싶다.

■김현우(36·가명) 

① 음식배달

② 주 6일 12~14시간씩 노동

③ 도급들(간접고용 비정규직)이 날아간다’는 소문이 지난해 초부터 들리기 시작했다. 나오기 전에 2000만원 마이너스 통장을 만들었다. 해고 20일 후 아내가 둘째를 출산하고 위장 수술을 받았다. 생활비를 최대한 줄였는데도 마이너스 통장이 바닥났다. 아픈 아내가 걱정할까봐 말은 하지 못했다. 연말에 대출 만기 연장이 될지가 가장 걱정이다. 그는 “내년부터가 진짜 위기일 것 같다”고 했다.

■정우철(46·가명) 

① 퀵서비스, 자동차 부품업체 생산 계약직

② 주 6~7일 12~13시간씩 노동. 최저임금

③ 아내가 코로나19로 어린이집 교사 구직에 어려움을 겪다가 7월에야 재취업할 수 있었다. 자녀 셋을 키우느라 월 300만원은 필요하다. 해고 후 빚이 5000만원 이상으로 불어났다.

■이종현(39·가명) 

① 카드 배송

② 카드 한 장 배달할 때마다 900원을 받는다. 하루에 많아야 40장을 돌린다.

■신호상(29) 

① 에어컨 실외기 생산직

② 하루 12시간 노동. 최저임금

③ 신씨는 ‘내 집 마련’의 꿈을 안고 20대 초반부터 한국 GM에서 7년을 일해오며 돈을 모았다. 해고 후 작은 회사와 큰 회사 20여곳에 이력서를 넣었지만 신씨에게 ‘안정적인 직장’을 제공해주는 곳은 없었다. 코로나19가 불어닥쳐 일자리도 줄어들었고, 그가 면접보러 간 직장의 처우는 몹시 안 좋았다. 그는 “어딜 가나 정규직은 안 뽑는다. 안정적인 삶을 살고 싶다”고 말했다.
 

■김수한(41·가명) 

① 직업훈련학교 수강 후 구직 중

③ 한국지엠에서 쫓겨난 뒤 ‘자격증’에 매달렸다. 같은 일을 15년 넘게 했지만 해고돼 보니 “내가 했던 일은 누가 와도 금세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기술직이니까 함부로 해고할 수 없는” 전기기능사를 땄다. 한 단계 높은 전기기사도 공부 중이나 퇴직금이 바닥나 마냥 취업을 미룰 수 없다.

■신우근(39·가명) 

① 당구장 아르바이트

② 하루 5시간 노동. 최저임금

③ 일자리를 못 구해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해고 뒤 결혼식을 미뤘다. 친한 한국지엠 정규직들은 최근 “인연 되면 다시 만나자”며 계모임을 깨버렸다. 짜증과 화가 많아졌다. 1년 새 성격이 바뀐 것 같다.

■정태우(42·가명) 

① 버스 운전

② 주 5~6일 하루 평균 8시간씩 근무. 매주 주·야간 교대. 월 수입 230만원

③ 한국지엠 다닐 때 생각없이 따놓은 대형면허로 버스 기사 일자리를 어렵게 구했다. 코로나19로 승객이 뚝 끊기면서 월급이 140만원까지 줄었다. 아내와 번갈아가며 지인의 호프집에서 야간 아르바이트까지 했지만 손님이 없어 지난여름 일이 끊겼다.

■조연재(39) 

① 자동차 부품업체 생산직

② 주 6일 하루 12시간씩 주·야간 교대근무

③ 2018년 한국지엠에서 해고되고 또 사내하청 노동자가 됐다. 밥도 보호장구도 안 주고, 법도 안 지키는 회사를 관두고 새 일자리를 구했지만 또다시 사내하청이었다. 아내 역시 하루 12시간씩 일하고 있다.

■하세호(47·가명) 

① 물류 운송

② 주 6일 근무

③ 해고 후 1000만원의 부채가 생겼다.

■신승연(41·가명) 

① 일자리를 구하지 못함

③ 정규직으로 복직하겠다는 마음으로 입었던 한국지엠 작업복을 집 장롱에 모셔뒀다. 비정규직 노조를 만들자 평소 내 이름을 부르던 정규직이 ‘형’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고호진(41·가명) 

① 자동차 부품업체 생산직

② 하루 12시간씩 노동. 최저임금

③ 한국지엠에선 로봇으로 들 것을 지금 공장에선 사람이 든다. 그래도 여름에 에어컨이 나온다. 땀으로 뒤범벅이 되는데 선풍기만 트는 공장도 많다. 코로나19로 일을 몇 달 쉬었다. 회사가 아예 망할까봐 불안하다.

■태종현(55·가명) 

① 자동차 부품업체 생산 계약직

② 주 6일 중 평일 11시간, 토요일 8시간 노동. 월 수입 263만원

③ 지금 일하는 공장엔 노동조합에 가입하면 해고된다는 조건이 있다고 들었다. 휴식시간엔 의자도 없어 자판기 앞 땅바닥에 앉아 쉰다. 치매에 얼린 어머니와 관절이 성치 않은 누나와 함게 살고 있다. 어머니는 한밤중에 밖에 자주 나가신다. 한번은 사라진 어머니를 찾아 헤매다가 파출소에서 어머니를 찾았다. 그는 “정상적인 걸 안 하면 보살피는 게 다 힘들다”고 말했다. 누님은 관절염 치료비를 한푼이라도 더 벌어보고자 아픈 다리를 이끌고 쓰레기를 치우는 일을 6개월 동안 했다. 태씨는 30여년 전 감속기 설계를 하며 대기업 다니는 친구들 부럽지 않은 월급을 받았다. 개인 작업실도 있었고 업무 도중 짬이 나면 직장 동료들과 작업실에서 커피를 마셨다. 새로운 도전을 하고자 생활용품점을 열었지만 IMF로 인해 폐업했다. 그뒤 한국GM에 입사했다. 그는 같은 근무 시간이어도 감속기 설계를 하던 당시 시간과 비정규직으로 공장에서 일하는 시간은 “질적으로 다르다”고 말했다.

■오중선(38·가명) 

① 자동차 부품업체 생산직

② 평일 12시간, 토요일 8시간 노동

③ 현재 일하는 공장에선 연차휴가를 쓰는 사람을 한 번도 못 봤다. 코로나19로 이전 공장에서 일감이 없어 주 4일만 일하다 지금 일터로 옮겼다. 해고 전 받아놓은 대출을 아픈 부모님을 위해 쓰고 있다.

■해고노동자 649명 중 끝내 만나지 못한 510명…“휴일에도 근무” “새벽 2시에 끝나” 고단한 생업의 굴레

2018년 이후 한국지엠 창원공장에서 해고당한 비정규직 노동자는 649명에 이른다. 경향신문 취재팀은 지난 6주간 다양한 경로로 모든 해고자들과 접촉을 시도했다. 심층면접과 설문조사에 총 138명이 응했다.

취재팀이 만나지 못한 510여명 가운데 일부는 경향신문과 직간접적으로 연락이 닿았지만 “주 7일 근무한다” “일이 새벽 2시에 끝난다” 등 생계를 이유로 취재를 거절했다. 해고 과정에서 겪은 맘고생으로 직장 동료들과의 관계를 단절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 복직을 위해 회사와 소송 중이어서 언론 접촉이 곤란하다는 해고자도 있었다.

이들이 어떻게 지내는지는 심층면접에 응한 노동자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들을 수 있었다. 마땅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실업 상태인 사람도 많았지만 상당수는 영세 제조업 공장에서 최저시급을 받으며 일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택배 일이나 건설현장에서 날품팔이식 노동을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해고자 A씨는 “작은 회사의 하청업체 소속으로 일하는 옛 동료는 아침 7시에 출근해 사실상 강제로 이뤄지는 잔업 3시간까지 마치면 집에 밤 10시에 도착한다. 철야근무까지 한다”며 “맞벌이하는 부인과 아이 셋 육아 문제로 많이 힘들다고 하소연하더라”고 말했다. B씨는 “공사판에서 일하는 동료들은 지엠에 다니던 시절이 나았다고 말한다”며 “거의 대부분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전했다.

기계에 손가락이 절단되거나 근골격계 질환을 겪는 등 산업재해를 당한 사례도 있었다. 보험료가 1년에 400만~500만원에 이르는 운송용 오토바이 보험을 들지 않고 일하다가 사고를 내고 어려움을 겪는 경우도 있었다. 해고는 경제적 어려움뿐 아니라 노동자들에게 깊은 심리적 상처를 남겼다. 해고자 C씨는 “서로 바빠서 연락을 못하기도 하지만 좋은 일이 있으면 연락해서 술도 먹고 할 건데 만나면 우울한 얘기만 하니까 서로 안 만나려고 한다”고 말했다. 해고 후 이혼을 한 사람도 있고, 주변인과 연락을 끊고 시골 고향으로 간 경우도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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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11130600055&code=940702#csidx5599ef21eb6ba3ba87de3a10aedabb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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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빠처럼 살고 싶지 않아요”…가슴이 무너져내렸다

한국지엠 비정규직 해고자, 그 후](상)“나는 아빠처럼 살고 싶지 않아요”…가슴이 무너져내렸다

특별취재팀 = 송윤경·이효상·정대연·윤기은 기자 kyung@kyunghyang.com

입력 : 2020.11.13 06:00 수정 : 2020.11.13 08:39

 

주 6일·12시간·최저임금 노동···절망할 틈도 없다 

지난해 12월 한국지엠 창원공장은 비정규직 585명을 대량 해고했다. 조용히 사라져야 했던 이들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사진은 한 비정규직 해고자가 마지막으로 공장에서 일하던 날의 기록을 담은 일기를 보는 모습이다. 이 해고자가 '신입'이었던 대우차 시절엔 정규직·비정규직 개념이 없었다. 세월이 흘러 공장 내 '계급'이 있다는 것, 자신은 비정규직 계급이라는 걸 알게 됐다. 한국지엠 직원이 많은 동네의 아이들은 조금만 커도 서로의 아빠가 '직영'(정규직)인지 아닌지를 알아냈다. 하청업체 소속 비정규직은 임금이 '직영'(정규직) 절반이니 사는 모습이나 씀씀이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한때 중학교 갓 들어간 아들이 어린 마음에 '아버지처럼 살고 싶지 않다'고 했을 때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 자신의 잘못도 아닌데 그저 "부끄러웠다"고 했다. 그는 지난해 12월 사측의 비정규직 대량 해고 때 공장을 나와 일자리를 찾고 있었다. | 특별취재팀

지난해 12월 한국지엠 창원공장은 비정규직 585명을 대량 해고했다. 조용히 사라져야 했던 이들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사진은 한 비정규직 해고자가 마지막으로 공장에서 일하던 날의 기록을 담은 일기를 보는 모습이다. 이 해고자가 '신입'이었던 대우차 시절엔 정규직·비정규직 개념이 없었다. 세월이 흘러 공장 내 '계급'이 있다는 것, 자신은 비정규직 계급이라는 걸 알게 됐다. 한국지엠 직원이 많은 동네의 아이들은 조금만 커도 서로의 아빠가 '직영'(정규직)인지 아닌지를 알아냈다. 하청업체 소속 비정규직은 임금이 '직영'(정규직) 절반이니 사는 모습이나 씀씀이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한때 중학교 갓 들어간 아들이 어린 마음에 '아버지처럼 살고 싶지 않다'고 했을 때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 자신의 잘못도 아닌데 그저 "부끄러웠다"고 했다. 그는 지난해 12월 사측의 비정규직 대량 해고 때 공장을 나와 일자리를 찾고 있었다. | 특별취재팀

 

대다수 근로기준법 사각지대인
중소·영세 공장으로 ‘재취업’
쉬고 싶어도 연차는 꿈도 못 꿔
배달·택배 노동자 환경도 열악
 

김현우씨(36·가명)는 올여름부터 음식배달 기사로 일하고 있다. 한 달 전 배달할 떡볶이를 받기 위해 분식점에 들어갔을 때였다. “아빠다!” 아내와 음식을 먹던 여섯 살배기 딸이 소리쳤다. 가족과 마주칠 거라고 생각지 못했다. 당황스러웠다. 과속방지턱을 지나다 초밥이 한쪽으로 쏠려 6만5000원을 물어준 날에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이럴 때면 자신도 모르게 과거를 불러냈다. 8년간 힘든 일을 마다않고 일했는데 왜 쫓겨났을까.

김씨는 지난해 12월31일 해고된 585명의 한국지엠 창원공장 비정규직 중 한 명이다. 사용자가 노동자를 대량 해고하려면 ‘경영상 이유에 의한 해고’ 요건을 충족해야 한다. 하지만 사내하청 업체 소속 비정규직은 원청(한국지엠)이 업체들과 계약을 끊으면 쉽게 해고할 수 있다. 2018년 1월에도 이 공장은 비정규직 64명을 이런 식으로 내보냈다.

한국 사회에서 비정규직 대량 해고는 대단한 뉴스가 아니다. 이들이 어떤 일자리로 이동하는지 역시 특별한 분석 대상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전태일이 산화한 지 50년이 되는 2020년, 경향신문은 한국지엠 창원공장에서 대량 해고된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을 추적했다. 대기업·대공장 정규직의 가장자리에 가까스로 매달려 있다가 한 번 더 주변부로 밀려난 이들의 이야기엔 갈수록 심각해지는 일자리 양극화 등의 노동 현실이 담겨 있다.

취재진은 지난 6주간 한국지엠 창원공장에서 해고된 비정규직 649명 가운데 138명을 온라인 설문조사 했다. 그중 32명은 인터뷰를 했다. 설문응답자 가운데 한 번이라도 재취업을 한 사람은 85명이었다. 재취업 경험자 62%는 중소·영세 공장에서 일했거나 일하고 있었다. 32%는 음식배달·택배·화물운송을 경험했다. 나머지는 주로 건설현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한국지엠 시절보다 월수입은 50만~100만원(29%) 혹은 100만원 이상(23%) 줄었고 하루 노동시간은 2~3시간(39%), 3시간 이상(25%) 늘었다. 응답자 절반은 “연차 개념이 없는 곳에서 일한다”고 답했다.

인터뷰 결과 해고자들이 재취업한 영세·중소 공장은 근로기준법을 비롯한 노동관계법이 통하지 않는 곳이 태반이었다. 평일 평균 10~12시간 일하면서 최저임금 수준을 받았다. 주로 토요일까지 강제로 일했고 더러는 일요일까지 나와 청소라도 해야 했다. 음식배달·화물·택배노동자가 된 이들은 아예 근로기준법 밖으로 밀려났다. 이들의 신분은 근로기준법이 보호대상으로 삼는 ‘노동자’가 아니라 ‘개인사업자’다. 오토바이나 1t 트럭을 구입하고 일터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고의 책임을 떠안는다.

한국지엠 시절에 대한 해고자들의 감정은 양가적이었다. 한편으로는 그립다고 했다. 정규직과 한 공간에서 일했기 때문에 노동시간, 유급휴가 면에서 법의 보호를 받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분노가 치민다고 했다. 정규직과 같은 일을 했지만 하청업체 소속이란 이유로 정규직 임금의 50~60%를 받았다. IMF 외환위기 이후 급격히 늘어난 이런 고용방식은 불법(파견법 위반)이다. 법원은 일관되게 사내하청 비정규직들을 정규직으로 고용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리고 있다.

한국산업은행으로부터 8100억원을 지원받은 한국지엠은 곧 창원공장에 신차종을 배정하기로 했다. 공장의 일감은 늘어날 것이다. 그러나 정규직 노조는 ‘동료 비정규직’의 해고에 눈을 감았다. 2018년 비정규직 64명 해고 직전엔 정규직 노조가 사측과 합의하기까지 했다.

중소공장에서 하루 12시간씩 일하는 한 해고자는 휴식시간에 앉아있을 곳이 없어 땅바닥에서 쉰다. 그는 깍두기, 고추가 반찬의 전부인 식판을 보고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한다. “이런 게 노예노동 아닐까.” 50년 전 전태일은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며 산화했다. 한국지엠 창원공장 비정규직 해고 노동자들은 묻는다. 한국 사회는 과연 노동자의 존엄성을 존중하고 있는가.

그래픽 | 성덕환·김덕기 기자

그래픽 | 성덕환·김덕기 기자

그래픽 | 성덕환·김덕기 기자

그래픽 | 성덕환·김덕기 기자

한국지엠 창원공장은 2018년~2019년 649명의 비정규직을 대량 해고했다. 5년~15년간(설문응답자 80%의 근속기간) 자동차를 만들던 비정규직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해고 후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어떤 일터로 이동했을까. 해고자 28인의 이야기를 신문 지면 그래픽에 축약해 담았다(위 이미지들을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아래는 위 이미지들 속 텍스트다. ‘①현재 하는 일’ ‘②노동시간, 수입’ ‘③과거와 현재 생활’ 등의 항목을 가지고 각 해고자의 상황을 정리했다.
 

■최우현(38·가명) 

① 현재 하는 일 : 물류 운송

② 노동시간·수입 : 주 6일 새벽 1시부터 아침 8시까지 노동. 월 수입 180만원

③ 23세에 한국지엠에 들어와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 왔다. 그는 사소한 사건으로 자신의 ‘신분’을 알게 됐다. “사람들이 일할 때 이어폰으로 노래 듣는 걸 봤다. 저도 그래도 되는 줄 알았다. 근데 정규직이 와서 너는 들으면 안 된다고…. 그때 제가 비정규직인 걸 처음 알았다. 임금 차이가 크다는 것도.” 한국지엠에서 해고된 뒤 들어간 공장은 화학약품 때문에 견딜 수가 없었다. 지금은 유통기업 하청업체로부터 물량을 받아 편의점에 배송하고 있다. 심야 노동을 하고 있는 그는 낮에 푹 잠들지 못한다.

■유근상(50대 후반·가명) 

① 나이가 많아 일자리 못 구함

③ 1995년 대우에 입사할 때는 정규직·비정규직 구분이 없었다. 차별도 억울한데 해고까지 당하니 앞이 캄캄했다. 5년 전 아들이 “아빠처럼 비정규직으로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해 충격을 받았다. 해고 뒤 아내가 공장에서 하루 12시간씩 일하고 있다.
 

■정상민(39) 

① 택배기사

② 주 6일 아침 7시부터 저녁 9~10시까지 노동

③ 2018년 해고 이후 택배노동자가 됐다. 운전, 고객 응대, 배송, 장시간의 막노동에 몸도, 마음도 지쳐 있다. 1년간 가족들도 말을 못 걸었다. “한국지엠도 참 불합리했는데 여기는 모든 책임을 노동자가 지는 노예계약이다.” 계약 만료 형태로 해고 위기에 놓인 동료를 도우려다 노조를 만들었다. 지난달에는 같은 대리점에서 일하는 택배노동자 한 명이 저소득과 회사의 갑질에 지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일어났다. 올해 물량 급증으로 바쁜 와중에도 그와 동료들은 고인 죽음의 책임을 회사에 묻고 있다.

■차진우(39·가명) 

① 자동차 부품업체 생산직

② 주 6~7일 주·야간 교대근무, 야간 때는 오후 7시30분 출근해 다음날 오전 8시 퇴근

③ 올 초 해고 이후 한국지엠 비정규직 동료들과 복직투쟁을 벌였다. 코로나19로 학교 개학이 연기되면서 아이들을 농성장에 데리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 “비참하고, 미안했다.” 이후 공장 생산직 일을 알아봤다. 먼저 다닌 직장은 3명이서 할 일을 2명에게 시켰다. 담배 피울 짬도 안 나 그만뒀다. 현재 직장은 12월까지만 일할 수 있다. 구내식당 아침 메뉴는 깍두기, 고추, 멀건 국이 전부다. “1970~1980년대가 생각난다”고 했다.

■김석표(40·가명) 

① 사업을 하는 친척을 돕고 있음

③ 2018년 해고 뒤 대출 받아 호떡 푸드트럭를 시작했다. 트럭 옆에 돗자리 깔고, 일하면서 아이를 봤다. 개인 사정으로 장사를 접은 후 공장에서 최저임금을 받았는데 생활이 힘들었다. 친척이 6개월간 월급 줄 테니 심부름을 해달라고 했다. 이후로는 어떻게 될지 그 자신도 모른다. 대출 빚을 못 갚아 아내는 곧 신용불량자가 될 것 같다.

■김규태(46·가명) 

① 육아 전담하며 구직 중

③ 남편이 해고되자 아내는 대기업 하청업체에 생애 첫 취업을 했다. 해고 후 빚은 2500만원이 늘었고, 집은 전세에서 더 좁아진 월세로 바뀌었다. 한국지엠에서 같이 일하던 비정규직 ‘동생’이 정규직이 몰던 차량에 치였지만 3일 만에 다시 출근해야 했던 게 16년 한국지엠 생활 중 가장 기억에 남는다.

■조호규(38·가명) 

① 담배 필터 제조

② 주 5일 10시간30분씩 노동. 2주씩 주야간 교대근무. 160도의 열 기계 앞에서 작업하다 팔에 화상 입음.

③ 두 자녀를 부양하는 그는 해고 후 3000만원을 대출했고, 차 한 대를 처분했다. 부모님과 처가댁에 매월 10~20만원씩 드리던 용돈도 5만원으로 줄였다. 어느 날 은행에서 전화가 왔다. “자녀분 적금통장 해약하시는 게 맞나요?” 아내가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아이의 적금통장을 몰래 깬 것이었다. 한국지엠 마지막 퇴근길에 조씨는 동료와 이런 말을 하며 공장을 나왔다. “우린 뭐였지? 나사 한 조각이었나?” 그는 해고 후 두어달 쉬는 동안 밖에 나갈 일을 최소한으로 만들었다. 아내는 최씨에게 “기운 차리라”며 응원했지만 그는 해고 후 “안쪽으로 침전하는 느낌”이었다고 털어놓았다.

■김진기(42·가명) 

① 전기 배선 설치

② 주 5일 하루 8시간씩 노동. 월 수입 300만원. 전선 설치 중 전기가 몸에 오르거나 전선이 터지는 경우 있음.

③ 김씨는 매년 12월 31일마다 아내와 가족 계획을 세운다. 김씨의 아내는 계획을 짤 때마다 “한국GM을 그만 두고 형 회사로 가라”고 얘기했다. 하지만 그는 선뜻 한국GM을 나올 수 없었다. ‘언젠가 정규직이 될 수 있겠지’라는 보상심리에 11년 동안 한국GM 창원공장으로 출근했다. 해고가 되고 나서야 형 회사로 들어갔다. 김씨의 아내는 6년 전 유방암 판정을 받은 데에 이어 올해 혈액암 판정도 받았다. 김씨는 아내를 요양병원에, 초등학생 아들을 장모님께 맡겨야 했다. 해고 후 생활비를 아끼기 위해 초등학생 아들이 다니던 학원 몇 곳을 끊었지만 김씨의 마이너스통장은 늘어나고 있다.
 

■한지석(44·가명) 

① 건설현장 일용직

② 일당 12만원. 코로나19 이후 공치는 날이 많음

■한석희(45·가명) 

① 아파트 관리

② 5일에 한 번 24시간 노동. 월 수입 230만원

③ 해고 뒤 정규직으로 재취업한 드문 사례다. 그러나 입주민 민원이 들어오면 바로 잘리는 신세다.

지난해 12월 한국지엠 창원공장은 비정규직 585명을 대량 해고했다. 해고자들이 10~20년간 일했던 창원공장을 그만두면서 라커룸에서 가지고 나온 것은 몇 가지가 안된다. 한 해고자는 한국지엠 정규직들의 동계 점퍼를 얻어 왔다. 하청 노동자의 점퍼보다 질이 좋고 따뜻하다. 그는 “직영(정규직)과  비정규직은 작업복의 재질이 다르다”고 했다. 사진은 해고자들이 취재진에게 보여준 자신의 작업복이다. | 특별취재팀

지난해 12월 한국지엠 창원공장은 비정규직 585명을 대량 해고했다. 해고자들이 10~20년간 일했던 창원공장을 그만두면서 라커룸에서 가지고 나온 것은 몇 가지가 안된다. 한 해고자는 한국지엠 정규직들의 동계 점퍼를 얻어 왔다. 하청 노동자의 점퍼보다 질이 좋고 따뜻하다. 그는 “직영(정규직)과 비정규직은 작업복의 재질이 다르다”고 했다. 사진은 해고자들이 취재진에게 보여준 자신의 작업복이다. | 특별취재팀

■김수현(50·가명) 

① 대리기사, 택배기사, 건설현장 일용직

② 일감이 생길 때마다 일함

③ 대학생 아들 둘을 두고 있다. 자녀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1000만원짜리 적금을 깼다. 생활비가 부족해 아내 명의로 마이너스 통장을 만들었다.

■설복현(50·가명) 

① 전자제품 입·출하 보조

② 주 6일 12시간씩 노동. 최저시급

③ 2018년 먼저 해고된 65명 중 1명이다. 해고 후 여러 공장을 전전했다. 한 공장에선 파이프 절삭유를 다뤘다. “기름이 독해서” 고무장갑은 늘 하루만에 “열십자로” 찢어졌고,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듯한 피로감에 시달렸다. 한국지엠에서 그는 자동차 미션 만큼은 ‘빠삭’ 했다. 50대인 지금, 과거 쌓은 기술 대신 힘을 쓰는 상·하차 업무를 한다. 코로나19 때문인지 지금의 일터에 젊은이들이 상당히 들어왔다. 관리자들 눈빛이 달라졌다. 또 밀려날까봐 걱정스럽다. 부모님과 처제가 아파 빚이 늘고 있다.

■석동훈(49·가명) 

① 택배기사

② 주 80시간 노동. 월 수입 300만원

③ 2018년 해고 뒤 택배 노동 한 달 만에 몸무게가 20㎏ 줄었다. 배송 중 교통사고를 당했지만 2주 만에 운전대를 다시 잡았다.

■김희관(53·가명) 

① 자동차 부품업체 생산 계약직

② 주 6일 중 평일 11시간, 토요일 8시간 노동. 월 수입 260만원

③ 해고 후 한 없이 작은 사람이 된 느낌이다. 인간관계를 스스로 단절하고 은둔 생활을 하고 있다.

■서동규(39·가명) 

① 화물 운송, 연삭기 공장 야간 파트타임(투잡)

② 평일 14~15시간씩, 토요일 12시간 노동. 월 수입 250만~300만원

③ 문씨는 여유가 없다며 여러번 인터뷰를 사양했다. 그와의 대화는 한밤중에 이뤄졌다. 1t 탑차로 화물운송을 하는 그는 아침 7시30분부터 12시간 일한 다음, 저녁 8시부터 밤 11시까지 중소공장에서 파트타임 노동을 한다. 하루라도 쉬려면 자신의 대타를 직접 구하거나 25만원을 물류회사에 지급해야 한다. 힘들어도 견뎌야 한다. 아픈 아이의 치료에 목돈이 드는데 해고 뒤 빚이 5000만원 늘었다. 한국지엠 시절 가족 캠핑을 간 적이 몇번 있다. 그후 두 아이는 캠핑가자고 노래를 부른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꼭 한번 더 캠핑을 가보고 싶다.

■김현우(36·가명) 

① 음식배달

② 주 6일 12~14시간씩 노동

③ 도급들(간접고용 비정규직)이 날아간다’는 소문이 지난해 초부터 들리기 시작했다. 나오기 전에 2000만원 마이너스 통장을 만들었다. 해고 20일 후 아내가 둘째를 출산하고 위장 수술을 받았다. 생활비를 최대한 줄였는데도 마이너스 통장이 바닥났다. 아픈 아내가 걱정할까봐 말은 하지 못했다. 연말에 대출 만기 연장이 될지가 가장 걱정이다. 그는 “내년부터가 진짜 위기일 것 같다”고 했다.

■정우철(46·가명) 

① 퀵서비스, 자동차 부품업체 생산 계약직

② 주 6~7일 12~13시간씩 노동. 최저임금

③ 아내가 코로나19로 어린이집 교사 구직에 어려움을 겪다가 7월에야 재취업할 수 있었다. 자녀 셋을 키우느라 월 300만원은 필요하다. 해고 후 빚이 5000만원 이상으로 불어났다.

■이종현(39·가명) 

① 카드 배송

② 카드 한 장 배달할 때마다 900원을 받는다. 하루에 많아야 40장을 돌린다.

■신호상(29) 

① 에어컨 실외기 생산직

② 하루 12시간 노동. 최저임금

③ 신씨는 ‘내 집 마련’의 꿈을 안고 20대 초반부터 한국 GM에서 7년을 일해오며 돈을 모았다. 해고 후 작은 회사와 큰 회사 20여곳에 이력서를 넣었지만 신씨에게 ‘안정적인 직장’을 제공해주는 곳은 없었다. 코로나19가 불어닥쳐 일자리도 줄어들었고, 그가 면접보러 간 직장의 처우는 몹시 안 좋았다. 그는 “어딜 가나 정규직은 안 뽑는다. 안정적인 삶을 살고 싶다”고 말했다.
 

■김수한(41·가명) 

① 직업훈련학교 수강 후 구직 중

③ 한국지엠에서 쫓겨난 뒤 ‘자격증’에 매달렸다. 같은 일을 15년 넘게 했지만 해고돼 보니 “내가 했던 일은 누가 와도 금세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기술직이니까 함부로 해고할 수 없는” 전기기능사를 땄다. 한 단계 높은 전기기사도 공부 중이나 퇴직금이 바닥나 마냥 취업을 미룰 수 없다.

■신우근(39·가명) 

① 당구장 아르바이트

② 하루 5시간 노동. 최저임금

③ 일자리를 못 구해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해고 뒤 결혼식을 미뤘다. 친한 한국지엠 정규직들은 최근 “인연 되면 다시 만나자”며 계모임을 깨버렸다. 짜증과 화가 많아졌다. 1년 새 성격이 바뀐 것 같다.

■정태우(42·가명) 

① 버스 운전

② 주 5~6일 하루 평균 8시간씩 근무. 매주 주·야간 교대. 월 수입 230만원

③ 한국지엠 다닐 때 생각없이 따놓은 대형면허로 버스 기사 일자리를 어렵게 구했다. 코로나19로 승객이 뚝 끊기면서 월급이 140만원까지 줄었다. 아내와 번갈아가며 지인의 호프집에서 야간 아르바이트까지 했지만 손님이 없어 지난여름 일이 끊겼다.

■조연재(39) 

① 자동차 부품업체 생산직

② 주 6일 하루 12시간씩 주·야간 교대근무

③ 2018년 한국지엠에서 해고되고 또 사내하청 노동자가 됐다. 밥도 보호장구도 안 주고, 법도 안 지키는 회사를 관두고 새 일자리를 구했지만 또다시 사내하청이었다. 아내 역시 하루 12시간씩 일하고 있다.

■하세호(47·가명) 

① 물류 운송

② 주 6일 근무

③ 해고 후 1000만원의 부채가 생겼다.

■신승연(41·가명) 

① 일자리를 구하지 못함

③ 정규직으로 복직하겠다는 마음으로 입었던 한국지엠 작업복을 집 장롱에 모셔뒀다. 비정규직 노조를 만들자 평소 내 이름을 부르던 정규직이 ‘형’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고호진(41·가명) 

① 자동차 부품업체 생산직

② 하루 12시간씩 노동. 최저임금

③ 한국지엠에선 로봇으로 들 것을 지금 공장에선 사람이 든다. 그래도 여름에 에어컨이 나온다. 땀으로 뒤범벅이 되는데 선풍기만 트는 공장도 많다. 코로나19로 일을 몇 달 쉬었다. 회사가 아예 망할까봐 불안하다.

■태종현(55·가명) 

① 자동차 부품업체 생산 계약직

② 주 6일 중 평일 11시간, 토요일 8시간 노동. 월 수입 263만원

③ 지금 일하는 공장엔 노동조합에 가입하면 해고된다는 조건이 있다고 들었다. 휴식시간엔 의자도 없어 자판기 앞 땅바닥에 앉아 쉰다. 치매에 얼린 어머니와 관절이 성치 않은 누나와 함게 살고 있다. 어머니는 한밤중에 밖에 자주 나가신다. 한번은 사라진 어머니를 찾아 헤매다가 파출소에서 어머니를 찾았다. 그는 “정상적인 걸 안 하면 보살피는 게 다 힘들다”고 말했다. 누님은 관절염 치료비를 한푼이라도 더 벌어보고자 아픈 다리를 이끌고 쓰레기를 치우는 일을 6개월 동안 했다. 태씨는 30여년 전 감속기 설계를 하며 대기업 다니는 친구들 부럽지 않은 월급을 받았다. 개인 작업실도 있었고 업무 도중 짬이 나면 직장 동료들과 작업실에서 커피를 마셨다. 새로운 도전을 하고자 생활용품점을 열었지만 IMF로 인해 폐업했다. 그뒤 한국GM에 입사했다. 그는 같은 근무 시간이어도 감속기 설계를 하던 당시 시간과 비정규직으로 공장에서 일하는 시간은 “질적으로 다르다”고 말했다.

■오중선(38·가명) 

① 자동차 부품업체 생산직

② 평일 12시간, 토요일 8시간 노동

③ 현재 일하는 공장에선 연차휴가를 쓰는 사람을 한 번도 못 봤다. 코로나19로 이전 공장에서 일감이 없어 주 4일만 일하다 지금 일터로 옮겼다. 해고 전 받아놓은 대출을 아픈 부모님을 위해 쓰고 있다.

■해고노동자 649명 중 끝내 만나지 못한 510명…“휴일에도 근무” “새벽 2시에 끝나” 고단한 생업의 굴레

2018년 이후 한국지엠 창원공장에서 해고당한 비정규직 노동자는 649명에 이른다. 경향신문 취재팀은 지난 6주간 다양한 경로로 모든 해고자들과 접촉을 시도했다. 심층면접과 설문조사에 총 138명이 응했다.

취재팀이 만나지 못한 510여명 가운데 일부는 경향신문과 직간접적으로 연락이 닿았지만 “주 7일 근무한다” “일이 새벽 2시에 끝난다” 등 생계를 이유로 취재를 거절했다. 해고 과정에서 겪은 맘고생으로 직장 동료들과의 관계를 단절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 복직을 위해 회사와 소송 중이어서 언론 접촉이 곤란하다는 해고자도 있었다.

이들이 어떻게 지내는지는 심층면접에 응한 노동자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들을 수 있었다. 마땅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실업 상태인 사람도 많았지만 상당수는 영세 제조업 공장에서 최저시급을 받으며 일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택배 일이나 건설현장에서 날품팔이식 노동을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해고자 A씨는 “작은 회사의 하청업체 소속으로 일하는 옛 동료는 아침 7시에 출근해 사실상 강제로 이뤄지는 잔업 3시간까지 마치면 집에 밤 10시에 도착한다. 철야근무까지 한다”며 “맞벌이하는 부인과 아이 셋 육아 문제로 많이 힘들다고 하소연하더라”고 말했다. B씨는 “공사판에서 일하는 동료들은 지엠에 다니던 시절이 나았다고 말한다”며 “거의 대부분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전했다.

기계에 손가락이 절단되거나 근골격계 질환을 겪는 등 산업재해를 당한 사례도 있었다. 보험료가 1년에 400만~500만원에 이르는 운송용 오토바이 보험을 들지 않고 일하다가 사고를 내고 어려움을 겪는 경우도 있었다. 해고는 경제적 어려움뿐 아니라 노동자들에게 깊은 심리적 상처를 남겼다. 해고자 C씨는 “서로 바빠서 연락을 못하기도 하지만 좋은 일이 있으면 연락해서 술도 먹고 할 건데 만나면 우울한 얘기만 하니까 서로 안 만나려고 한다”고 말했다. 해고 후 이혼을 한 사람도 있고, 주변인과 연락을 끊고 시골 고향으로 간 경우도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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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11130600055&code=940702#csidx5599ef21eb6ba3ba87de3a10aedabb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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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이 노동개악을 반대하는 이유

민주노총이 노동개악을 반대하는 이유

  • 기자명 선현희 기자
  •  
  •  승인 2020.11.12 14:14
  •  
  •  댓글 0
 
 

김재하 민주노총 비대위원장 인터뷰

 

11월 14일 노동자대회를 앞두고 김재하 민주노총 비대위원장 인터뷰를 진행했다.
민주노총이 정부의 노동법에 대해 '노동 개악'이라고 칭할 수밖에 없는 이유와 전태일 3법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사진출처 : 노동과세계,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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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이 묻는다 "왜 아직도 일하다 죽는 게 당연하죠?"

'전태일50' 박래군 인권재단사람 소장 특별기고문

20.11.13 07:33l최종 업데이트 20.11.13 07:33l

 

박래군 인권재단사람 소장이 전태일 열사 산화 50년 뒤인 2020년, 모자가 서로 만나 어떤 대화를 나눌지를 상상해서 글을 썼다. '전태일50' 신문에 실린 전태일과 이소선이 나누는 '가상대화'를 오마이뉴스에도 싣는다. [편집자말]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 전태일의 무덤 뒤에 위치한 이소선의 무덤.
▲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 전태일의 무덤 뒤에 위치한 이소선의 무덤.
ⓒ 전태일기념사업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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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이면 제일 먼저 일어나 "태일이 엄마"를 찾던 이웃 종철이 아버지가 조용하다. 아직 동도 트지 않은 새벽, 평소보다 일찍 잠에서 깬 이소선은 조용히 전태일을 불렀다.

"어머니, 부르셨어요?"
"그래. 너도 잠을 제대로 못 잤구나."
"그렇죠. 벌써 50년, 이곳에서 저는 기다렸어요. 언젠가 내가 굴리다 다 못 굴린 그 덩이를 다 굴렸다는 소식을 듣기를 말이죠. 노동자들이 일어나 승리했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저는 너무 기뻤어요. 매년 내 무덤 앞에 와서 환한 얼굴로 저에게 고맙다고 인사하던 노동자들이 기억나요. 그런데 요즘은 사람들이 기운이 없어 보여요. 다들 힘들다고 해요."


한동안 서로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전태일이 먼저 입을 뗐다.

 

"어머니, 제가 세상을 뜬 뒤에 어머니가 저와의 약속을 지키려 무던히 애쓰는 모습을 봤어요. 그래서 어머니에게 너무 큰 짐을 지워서 미안했어요. 장남으로 어려운 살림 꾸려가는 어머니를 돕지도 못하면서 어머니에게 몹쓸 짓을 하고 떠나면서도 제가 못다 한 일을 꼭 이뤄달라고 했는데... 어머니를 믿었어요."

"태일아, 네가 피를 토하면서도 약속하라고 했던 그 모습을 어떻게 잊냐, 그러면 사람이 아니지. 그 약속을 지키는 것, 그것만이 내가 살아야 할 이유였어. 그러다가 세상을 봤고, 큰 공부를 했지. 너를 여기 묻고 집에 가서 며칠 있는데 함석헌 선생님이 찾아오셨어. 그분이 내 손을 잡고는 전태일은 예수처럼 자신의 모든 걸 버리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죽은 거다. 그러니까 전태일이 수많은 전태일로 부활할 거라고 했어."

"누가 그러더라고요.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제 곁에 누웠을 때 마흔한 살에 태일이를 잃고 꼭 41년을 더 사시다 가셨다고, 그 41년 동안 250번을 잡혀 갔다고. 어머니가 당한 고초, 너무 힘들었을 텐데. 어머니를 꼭 안아주고 싶었어요. 그런데 이제 살도 오래전에 다 녹아버리고, 몸이 없으니 어머니를 안아주지 못했어요. 그게 슬펐어요."

"경찰들에게 둘러싸이고, 중앙정보부에도 끌려가고, 빨갱이라고 불라고 매질을 할 때도 나는 이를 악물었어. 나는 태일이 엄마다. 목숨까지 버린 자식 앞에서 비겁하면 안 되잖아."


침묵이 흘렀다. 어색한 분위기를 바꾸려고 태일이 밝은 소리로 말을 이었다.

"태삼이가 어머니 비석 만드는 날 그랬지요. 검은 바탕 비석에 어머니가 마이크 잡은 사진을 새겨 넣은 걸 보고는 어머니가 여기 모란공원 사람들하고 매일 밤 집회할 거다고 말이죠. 참, 어머니는 사람들 웃기고, 울리고, 너무 말씀을 재밌게 하세요. 그러니까 매일 어머니한테 사람들이 와서 얘기해 달라고 하잖아요. 나는 그런 어머니가 너무 부러워요."

"태일아, 내가 뭔 말을 잘하냐. 배운 것도 없고, 무식쟁이 할머니인데, 내가 싸우면서 겪은 일들을 있는 그대로 말하면 사람들이 박수를 치고 좋아하더라. 그런데 사람들이 박수를 치려면 제대로 치든가 해야지 박수도 치다 말아. 그래서 박수를 제대로 한번 쳐봐라, 그러면 사람들이 신나게 박수를 쳐. 그럴 때 꼭 한 마디 부탁했어. 노동자가 단결하면 두려울 게 없다, 절대 갈라지지 말고 하나가 돼서 싸워야 노동자가 인간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 태일이 바라던 세상이 온다고 말이지. 난 어려운 말 몰라. 그냥 내가 겪은 대로 말한 거지. 온몸이 아프다가도 사람들이 많이 모인 걸 보면 없던 기운도 나서 나도 신이 나는 거야."

"맞아요. 모여야 힘이 나죠. 저는 그게 사랑인 거 같아요. 우리가 사는 이유가 그런 건데… 어, 저분, 이 아침에 벌써 오시네."


이제 동녘이 희붐하게 밝아오고, 어둠이 뒤로 물러나기 시작하는 때였다. 김미숙씨가 박래전을 지나서 성유보를 지나서 노란 자전거 탄 김용균 앞에서 멈춘다.

"에고, 날이 밝기도 전에 용균이 엄마가 왔네. 저 엄마가 밤에 잠도 못 잘 거야. 저 엄마를 보면 내 생각이 나. 두 동강이 난 아들을 봤잖아. 얼마나 끔찍했을까. 저 엄마도 나처럼 평생을 용균이를 가슴에 안고 살아갈 거야.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고 하는데 묻기는 왜 묻어, 같이 사는 거지. '태일이었으면 이럴 때 어떻게 할까?', '태일아, 엄마가 잘하는 거 맞냐?' 하고 말이야. 나처럼 용균이 엄마도 그러겠지."

"어머니가 평화시장 노동자들 국수 끓여 먹이면서 노조 만들고, 노동자들 투쟁하는 곳마다 응원해주고, 나중에는 학생들 투쟁하는 데나 재야인사들 투쟁하는 데도 같이 합류해서 싸웠잖아요. 그러다가 의문사한 엄마들 아버지들하고 의문사 진상규명하라고 싸우고. 참 우리 엄마 대단하다 생각했어요."

"그게 다 똑같아. 저 사람도 자식을 잃었고, 가족을 잃었고, 동료를 잃었잖아. 그 사람들이 불러서 간 게 아냐. 나는 너하고 같이 간 거야. 얼마나 많은 사람 눈을 감겨 줬냐. 그때마다 너무 가슴이 아팠어. 목매 죽고, 분신해서 죽고, 병들어 죽고, 사고당해 죽고... 죽음의 행렬이었어. 저걸 멈춰야 하는데, 제발 죽을 힘이 있으면 그 힘으로 싸우자고 눈물로 호소하고 다녔어."

"그러니까요. 왜 아직도 노동자가 일하다 죽는 게 당연하죠? 우리나라가 경제대국이고 국민소득도 높다는데 왜 아직도 장시간 노동에다가 저임금으로 사람들의 고혈을 쥐어짜는 거죠? 제가 만들고 싶었던 '태일피복' 3000만 원이 없어서 포기한 그런 업체가 왜 안 되는 거죠? 근로기준법 지키고, 노동조합 활동도 보장해주면서도 이윤을 올리는 그런 기업이 왜 안 되는 거죠?"

"가진 사람들이 너무 탐욕스러워. 정치인들도 탐욕을 부리는 이들과 한패야. 그러니까 안 되지. 노동자 알기를 노예나 머슴 부리듯 한다니까. 나와 같은 사람이다, 이런 생각이 없이 마른 수건 쥐어짜기만 하다가 버려 버리잖아. 그러니 자꾸 죽지. 말로만 사랑 타령이거든."


"그래서 마음이 너무 아파요. 그때 내 모든 것을 던져서 먹구름 뒤덮인 하늘에 작은 구멍 하나 낸 거거든요. 그 구멍으로 사람들이 파란 하늘이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어요. 그 구멍을 여러 사람이 넓히고 넓혀서 세상 사람들 모두가 같이 살 수 있는 세상이 되는 것 같았어요. 그런데 그 구멍이 다시 좁아지고 있어요. 먹구름 덮인 하늘을 이고 땅에서 서로 싸우면서 살 것 같아서 걱정돼요. 노동은 상품이 아니라고 왜 한목소리로 외치지 못하나요. 답답해요."

그때다. 사람들이 서리 맞은 풀을 밟고 오는 발소리가 어지럽게 들렸다. 어느새 동쪽 산 위로 해가 많이 올라 있었다. 발소리들은 전태일 앞에 멈추고 깃발을 세운다.

"안 되겠다. 오늘은 긴 하루가 될 거야. 사람들이 뭔 얘기하나 잘 들어보자."
"그래요. 밤에 얘기해요."


어느새 새들이 날아서 주위에 내려앉는다. 김미숙씨도 와서 노동자들과 인사를 나눈다. 전태일과 이소선은 종일 사람들의 얘기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그들 앞에서 사람들은 오늘 무슨 생각을 하고 돌아갈까, 그게 궁금해진다. 오늘(13일)은 50년 전 그날이다.

※ 이 기고는 전태일 열사 50주기를 앞두고 제작된 <전태일50> 신문에 게재된 내용입니다. <전태일50> 신문 제작에는 전태일 열사의 정신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오늘의 전태일' 이야기를 신문으로 만들겠다는 현직 언론사 기자, 사진가, 활동가들이 참여했습니다. ☞ 구독신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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