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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진보민중진영은 무엇을 할 것인가?


4.27시대연구원 ‘새해 정세전망과 진보민중진영 운동방향’ 정치포럼

2019년 진보민중진영은 무엇을 할 것인가?

4.27시대연구원이 지난 9일 ‘2019년 정세전망과 진보민중진영 운동방향’이란 주제로 연 정치포럼의 주된 관심사다. 해서 노동, 농민, 진보정당과 연대단체 관계자들이 소속 단체의 한해 주요 구상과 사업계획을 공유하면서 해답을 모색했다. 이날 포럼 발표내용은 발제자들의 개인 의견임을 밝혀둔다. 차례는 발표순이다.

■ 노동 = 윤택근 민주노총 부위원장은 민주노총의 2019년 사업계획에 관한 현장토론안을 요약 소개했다. 민주노총은 올 한해 ▲200만 조직화와 노동기본권 전면 확대 투쟁 ▲재벌체제 전면개혁 및 업종·산업·정부정책 대전환 투쟁 ▲노동소득·사회공공성·사회안전망 확대 투쟁 ▲한반도 평화·자주통일과 민주주의를 선도하는 투쟁을 활동의 중심 기조로 설정했다고 한다.

이를 통해 ▲‘200만 조합원’ 시대를 열고 노조 결성 등 노동기본권을 신장하고 ▲재벌체제를 전면 개혁하고 한국사회 대개혁을 일궈할 토대를 구축하며 ▲노동·민중·진보·시민단체 전반의 연대를 선도하며 ▲격동하는 한반도 정세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겠다는 구상인 셈이다.

특히 민주노총은 올해 재벌개혁과 연대운동 강화, 자주통일과 민주주의 선도 등 사회대개혁 투쟁에 힘을 더 쏟을 계획이란다. 재벌개혁의 경우 각종 특혜와 사내유보금, 원하청 등 핵심 이슈들을 (가)<전국 ‘을’들의 연대>를 결성해 여성, 중소상인, 시민사회단체들과 함께 여론화하고 법제도 개혁으로 이끌겠단 포부다. 또 민중공동행동에 인적, 물적 지원을 늘리고 지역 체계 구축해 노·농·빈 기층단체들이 중심이 된 진보민중진영의 연대활동을 강화해 정세에 조응하는 자주통일, 민주주의 투쟁을 이끌겠단 계획이다. 해서 올해 으뜸구호도 ‘사업장 담장을 넘어 한국사회 대개혁으로!’로 잡았다는 것. 11~12월엔 세상을 바꾸는 사회적 총파업(각계층 참가하는 범국민적 투쟁)을 결행하겠다는 포부다. 이를 통해 노동·민중·진보·시민운동이 포괄되는 2020총선 공동대응 체계 구축으로 이어간다는 복안이다.

윤 부위원장은 “지난해 민주노총 활동을 평가하면서 연대운동의 경우 과거와 비슷했다는 지적이 많았다”면서 “더는 여러 단체 가운데 하나 정도의 수준으로 연대운동에 참가해선 안 된다고 본다. 민중공동행동을 주도하고 투쟁을 이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 농민 = 김기형 전국농민회총연맹 사무총장은 올해 농민투쟁의 주요 의제로 ▲남북농업농민교류 및 자주통일 투쟁 ▲직불금 개혁투쟁 ▲농지개혁투쟁 ▲농민수당 쟁취투쟁 ▲농산물값 보장투쟁 ▲스마트 팜 밸리 저지투쟁, 이렇게 6개를 제시했다.

남북농업농민교류 및 자주통일 투쟁은 농업문제 해결의 돌파구를 통일농업에서 찾겠다는 구상이다. 공동식량계획 등 농민교류를 통해 구체적인 통일농업 담론을 형성하고자 한단다.

직불금 개혁투쟁은 농산물 제값 보장을 주축으로 진행하고자 한다. 농가소득의 핵심이 농업소득이고, 이를 보장하려면 농산물 가치가 제대로 반영된 가격정책이 필수다. 그래야 농민들의 자존감을 살릴 수 있다. 농산물값 보장투쟁과 직결돼 있음이다. 핵심은 (가)‘농민중심 직불제 개혁위원회’ 구성이다.

농지개혁투쟁은 농업문제 근본 해결의 출발점이다. 농지는 농업의 전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실은 전체농지의 50% 이상이 부재지주 소유이며 농민의 55%가 소작농이다. 농지 공개념 도입과 경자유전의 원칙 아래 농지개혁이 이뤄져야 한다.

농민수당 쟁취투쟁은 농업·농촌의 공익적 가치에 대한 보상과 마을공동체 복원, 농민중심의 농업정책 전환을 위해 추진된다. 광역과 시군 단위 표준 조례안을 만들어 제정 서명운동을 벌여나갈 계획이란다.

전농이 이전 정권 때부터 주장해온 바를 지속하는 건 문재인 정부 들어서도 변한 게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김 총장은 “지난해 집권 2년차 문재인 정부의 농정은 이명박근혜 정권의 농정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면서 “대통령은 농업에 무관심했으며 농림장관이 5개월 이상 공석인 상황을 방관했다”고 비판했다. 농민들의 기대를 저버렸단 얘기다.

■ 진보정당 = 정태흥 민중정책연구원 원장은 민중당의 올해 사업계획을 설명했다. 민중당이 올 한해 동안은 내년 총선에서 승리할 태세를 갖추는데 힘을 집중한다는 구상이다. 민중당이 말하는 내년 총선 승리란 당 소속 의원의 재선을 포함한 지역구 당선자 배출과 정당명부 100만표 이상 득표를 통한 비례후보 당선이다.

이를 위해 우선 오는 4월3일 치르는 창원성산 보궐선거에 출마한 손석형 후보의 당선을 위해 당력을 집중하겠다고 한다.

또한 1000명의 당 간부(분회장) 육성과 10만 당원·100만 지지자 조직사업을 벌여나갈 계획이란다. 특히 분회장들은 당의 지역과 계급계층 조직에서 직접정치를 구현할 담당자들인 만큼 대중정치사업과 조직사업 능력이 필수적이다. 이를 위해 중앙당 차원에서 간부교육사업을 강화하고 조직강화특별위원회를 둬 모범사례를 발굴 전파하고 분회를 확대 강화하겠단 거다. 광역 및 지역위 차원에선 분회장학교와 분회장모임을 진행한다.

연대운동 분야에선 민중공동행동과 6.15남측위원회를 함께 강화하겠다는 계획이다. 현재 사안별 공동투쟁체인 민중공동행동의 경우 민주노총, 전농 등 대중조직이 직접 책임지는 구조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 전체 민중을 단결시킬 정치적 구호를 제시하고 투쟁해야 한다고 본다. 6.15남측위는 외연을 확대하고 대중적 통일운동을 활성화하는데 힘을 보태겠다는 거다.

이는 급변하는 한반도 정세에 조응하기 위한 자주평화통일 사업 영역에도 포함돼 있다. 민중당은 조선사회민주당과와 정당교류를 본격화하고 ▲판문점선언 반대세력 규탄 ▲한미예속관계 청산 ▲대북제재 해제촉구 ▲국가보안법 폐지 등 분단적폐청산운동도 강조하고 있다.

정태흥 원장은 대중투쟁 계획과 관련해 “올해 민중당의 중심적인 대중투쟁 과제는 이상규 상임대표가 신년 메시지에서 발표한 분단적폐 청산과 재벌적폐 청산투쟁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 한반도 정세 = 이정훈 4.27시대연구원 부원장은 2019년 한반도 정세 전망을 중심으로 발제했다. 이 부원장은 올해도 국가핵무력을 완성한 북한(조선)이 주도하는 북미관계 변화가 한반도 정세변화에서 결정적 역할을 한다고 봤다. 문제는 미국이 6.12싱가포르 공동성명을 얼마나 성실히 이행하느냐 여부다. 관건은 역시 대북 제재문제. 

김정은 북한(조선) 국무위원장이 신년사에서 ‘새로운 길’을 경고했지만 말 그대로 부득불한 마지막 선택이라고 봐야 한다고 했다. 북의 정책추진 의지는 트럼프 정부 1기(2020년) 안에 북미관계의 결정적 고리를 해결하려는 거 같다고 관측했다. 올해 안에 평화협상을 시작해 늦어도 내년까진 완료하려 한다는 것. 그래서 올해엔 평화협정과 한반도 비핵화, 북미 관계개선을 위한 협상이 시작되리라 내다봤다.

남북관계는 북미관계 추이와 연동해 ‘대통로’에 진입하리라 예상했다. 개성공단과 금강산관광 재개가 시금석이다. 또 남북 당국은 물론 민간도 함께하는 통일방안, 통일기구 구성 논의가 활성화되리라 전망했다.

그런데 이런 북미·남북 관계 전망과 별개로 문재인 정부의 국내 사회개혁 실종사태는 더 심화될 거라고 했다. 내년 총선 승리를 위해 진보를 배제한 인기영합식 정책 행보를 지속하는 한편 경제정책은 사실상 ‘친재벌’ 회기 수순을 밟을 거라고 봤다.

그래서 문재인 정부에 실망해 이탈하는 민주개혁 지향 대중을 2020년 총선에서 진보세력이 어떻게 흡수하느냐가 중요 과제라고 지적했다. 진보정당이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면 수구세력이 반사이득을 볼 수 있다고 우려하기도 했다.

이 부원장은 “올해는 ‘5대 적폐’(사법, 분단, 노동, 정치, 재벌) 청산투쟁의 최선두에 서서 국민들에게 진정성을 보이고 ‘일점돌파’ 대안투쟁정당으로 각인돼야 2020년 총선에 대응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 통일운동 = 올해도 남북관계에서 상당한 진척이 예상되는 만큼 관심을 모은 통일운동의 진로와 관련해 최은아 한국진보연대 자주통일위원장은 크게 4가지 과제를 제시했다.

먼저 남북 공동선언들의 이행을 위한 거족적인 대중운동을 건설하는 것이다. 6.15공동선언부터 4.27판문점선언과 9월 평양공동선언에 이르기까지 모든 합의사항을 온전히 이행한다는 기조 아래 통일운동진영이 국민들의 관심을 모아낼 사업을 벌여나가야 한다는 얘기다. 4.27선언 1주년에 즈음한 범시민한마당 또는 범국민대행진 등이 예시됐다.

이어 남북관계 발전을 가로막는 분단적폐와 제도적 장벽을 철폐하는 문제다. 당면해선 대북 제재를 완화, 해제하기 위한 실천행동이 필요하고 장기적으로는 국가보안법 폐지, 주한미군 문제 등에 대해서도 대응할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 시민사회와 종교계 등이 함께할 수 있는 실천방안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다음은 통일방안 논의 활성화다. 통일방안 논의에 국민들이 직접 참여할 방안은 무엇인지, 사회적 논의틀을 적극 모색해야 한다는 거다.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등과도 함께 공론화할 계기를 마련해야 한다고 봤다.

끝으로 통일운동 역량을 강화하는 문제이다. 남북관계 발전과 통일운동 활성화 추세에 맞게 6.15민족공동위원회가 전민족적 통일운동연대기구의 면모를 갖출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중간층을 포함해 많은 계급계층을 거기에 망라해야 한다는 거다. 이를 위해 진보진영은 지역과 부문을 함께 육성하고 전국적 체계를 통해 역량을 쌓는 게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최 위원장은 “문재인 정부가 남북관계와 북미관계에서 여전히 미국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긍정적인 환경을 만들려는 노력이 미흡하다”면서 통일운동진영의 적극적인 역할이 필요함을 강조했다.

발제를 마치곤 주로 질의응답이 진행됐다. 민주노총의 재벌체제 개혁투쟁과 총파업 투쟁의 실효성 문제, 민중당과 민주노총의 민중공동행동 강화 방안, 국가보안법 폐지투쟁 계획, 적폐청산을 위한 대중투쟁 조직방안 등이 주된 관심사였다.

김동원 기자  ikaros070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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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한당은 왜 양아치 집단 노릇을 계속할까?

  •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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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2019/01/17 10:38
  • 수정일
    2019/01/17 10:38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자한당은 왜 양아치 집단 노릇을 계속할까?
 
 
 
김용택 | 2019-01-17 09:47:09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자유한국당이 극우성향의 인사인 권태오 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사무처장, 이동욱 전 <월간조선> 기자, 차기환 변호사를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 위원으로 추천해 논란이 일고 있다. 그것도 추천을 받은 지 4개월 만이다. 5·18 민주화운동 관련단체들은 보수·극우 성향 군인·변호사·언론인 출신인 이러한 인사를 진상조사위원으로 추천한 것을 두고 “진상규명을 방해할 인물들”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우리의 소원이 통일이라면서 통일을 못하는 이유는 통일이 되면 불이익을 당할 사람이 통일의 주도권을 잡고 있기 때문이다. 자유한국당이 “진상규명을 방해할 인물들”을 진상규명조사위원으로 추천한 이유는 자유한국당이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가해자요, 광주시민을 학살한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자백한 것’이나 다름없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 추천뿐만 아니다. 식민지 잔재청산을 앞장서 반대하고 것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식민지잔재를 청산하면 스스로 친일세력임이 만천하에 드러나기 때문이다.

4․19혁명으로 쫓겨난 이승만을 국부로 만들고 싶은 이유도 1948년 정부수립일을 건국절로 바꾸려는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5․16 쿠데타를 쿠데타가 아니라 혁명으로 부르고 싶은 이유도 10월 유신을 한국적 민주주의라고 강변하고 싶은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대한민국을 자유민주주의라고 부르고 싶어 하는 이유는 그들이 이승만의 자유당을 계승한 후예임을 증명하고 싶은 것이다. 박정희의 민주공화당, 전두환의 민주정의당을 계승한 정당이 한나라당이요, 새누리당, 자유한국당이니 피를 어떻게 속일 것인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원칙의 헌법 가치에 기반하여 대한민국의 지속적인 발전과 평화통일을 지향함으로써… 국가안보, 자유와 책임, 공동체 정신, 국민통합, 미래세대를 위한 책임 등 신(新)보수의 가치와… 새로운 가치를 국민과 공유하고 확산시켜 나가며, 능력과 도덕성 및 애국심을 갖춘 인재들과 함께 이를 실천하여 국민의 신뢰를 얻는 중산층과 서민을 위한 정당이 된다.>

1. 헌법가치와 법치주의 존중, 2. 국가안보와 국민안전 우선, 3. 자유와 책임의 조화, 4. 공동체 정신과 국민통합 지향, 5. 긍정의 역사관과 국가 자긍심 고취, 6. 지속가능성 중시, 7. 열린 자세로 변화·혁신 추구.

자유한국당의 강령이다. 자유한국당이 헌법을 존중해? 그렇다면 왜 헌법전문에 명시한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와 4·19민주이념을 계승을 부정하고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절로 이승만을 국보로 모시겠다는 것인가? 헌법 제1조에 명시한 ‘민주공화국’도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인정 하지 않고 ①, ②항을 무시하고 있는가? 민주주의니 민주공화국의 뜻을 제대로 안다면 국민주권이나 주권자들의 복지향상을 위해 30년이나 지난 늙은 헌법을 개정 하는데 앞장서야 하지 않는가? 왜 헌법 개정은 반대 하는가?

“정당”이란 <국민의 이익을 위하여 책임있는 정치적 주장이나 정책을 추진하고 공직선거의 후보자를 추천 또는 지지함으로써 국민의 정치적 의사형성에 참여함을 목적>으로 한 조직(정당법 제 2조)이다. 정당이 <정당의 민주적인 조직과 활동을 보장함으로써 민주정치의 건전한 발전에 기여>함이 목적이지만 자유한국당은 국민의 이익을 위해 활동하고 있는가? 아니면 자당의 이익, 재벌의 이익, 범법자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는가? 헌법따로, 강령 따로… 그래서 지지율이 떨어지면 땅바닥에 엎드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바꾸겠다’고 큰절 한 번 하면 정당으로서 역할을 다 하는가?

자유한국당은 왜 그렇게 자주 이름을 바꿀까? 미국의 민주당은 1820년대 이름이 그대로요, 공화당은 1850년대 지은 이름이 지금도 그대로다. 사람의 얼굴은 그 사람의 인품이다. 이름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우리나라 정당 특히 지유한국당은 왜 그렇게 이름을 자주 바꾸는가? 자유당→ 민주공화당→민주정의당→ 신민주공화당→민주자유당→신한국당→자유민주연합→ 한나라당→새누리당→자유한국당… 자신이 부끄러우면 이렇게 이름을 바꾸고 유권자들에게 큰절하면서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바꾸겠다고 해놓고 무엇을 바꾸었는가?

박근혜와 함께 국정농단을 저질러 사법부로부터 받은 형량을 모두 합하면 얼마나 될까? 용케도 실정법의 처벌 대상에서 빠지긴 했지만, 징역 32년, 벌금 180억 원, 추징금 33억 원을 받은 박근혜의 형량은 집권당으로서 그들이 무관한가? 이승만과 박정희는 역사의 심판을 받았지만, 뒤를 이은 전두환 노태우는 사형과 무기징역을 받은 죄인이다. 그들이 만든 이명박대통령은 4대강 사기극과 BBK 주가조작 방산비리 등 파렴치범으로 유치장에 있지 않은가? 자유한국당은 그들이 저지른 범죄와 무관한가? 대의민주제의 근간을 흔들고, 정부의 평화적 통일 노력을 방해하는 무리들은 정당이 아니다. 그들에게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다면 지금이라도 해체의 수순을 밟는 게 도리가 아닐까?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30&table=yt_kim&uid=8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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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 지어 미세먼지 막겠다?’ 자유한국당의 황당 주장

탈원전은 이제 첫 발 뗐는데…“탈원전 정책이 미세먼지 주범”이라는 나경원

남소연 기자 nsy@vop.co.kr
발행 2019-01-16 18:55:03
수정 2019-01-16 18:5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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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자유한국당 원내대책위-안전안심365특별위원회 연석회의에서 나경원 원내대표와 참석자들이 마스크를 쓰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15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자유한국당 원내대책위-안전안심365특별위원회 연석회의에서 나경원 원내대표와 참석자들이 마스크를 쓰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뉴시스
 

미세먼지가 기승을 부린 15일 자유한국당이 난데없이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을 소환했다. 탈원전 정책으로 원자력 발전소 대신 화력 발전소 비중이 증가해 미세먼지가 더욱 심해졌다는 것이다. 자유한국당은 이번 기회에 탈원전 정책을 폐기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는 이날 국회에서 열린 '원내대책위-안전안심 365특별위회의'에서 "탈원전 정책이 미세먼지의 주범 중 하나"라며 "노후화된 화력 발전소는 미세먼지의 주범이라고 하는데 지금 화력발전소를 7기나 새로 짓고 있다. 결국 화력 발전소의 비중이 증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같은 날 회의에 참석한 김승희 의원도 "침묵의 살인자, 최악의 미세먼지로 국민들은 때아닌 정부의 외출자제 안내를 받고 감옥 생활을 하고 있다"며 "(문재인 정부는) 미세먼지 발생 최대 주원인인 석탄발전소는 조기폐쇄하지 않고, 엉뚱하게 원자력 발전소를 폐쇄하겠다고 밝혔다"고 트집을 잡았다. 

한 시간도 채 안 되는 이날 회의에서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미세먼지'라는 단어를 언급한 횟수는 총 61번. 미세먼지 대란을 빌미로 정부의 탈원전 정책을 폐기하라고 그야말로 '총공세'를 퍼붓는 셈이다.  

이 기세를 몰아 자유한국당은 16일 탈원전 정책을 국민투표에 부쳐야 한다는 주장까지 펼쳤다.

나 원내대표는 이날 예종광 칭화대 교수 초청 조찬 간담회에서 "탈원전 정책을 국민 투표 과정을 거쳐 유지할지 폐지할지 국민 의사를 물어야 한다. 자유한국당은 앞으로 국민투표 성사를 위한 행동지침을 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양수 원내대변인 명의로 낸 논평에서는 정부의 탈원전 정책을 '몽니 수준'이라고 깎아 내리며 "청와대와 정부가 탈원전 몽니를 끝내 꺾지 않는다면 국민의 의사를 물어볼 수밖에 없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탈원전 정책이 미세먼지 주범? 
자유한국당의 주장 사실일까
 

미세먼지가 매우 나쁨으로 나와 수도권을 포함한 전국 곳곳에 미세먼지 비상저감조치가 시행된 지난 14일 오전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마스크를 쓴 시민들이 발길을 재촉하고 있다.
미세먼지가 매우 나쁨으로 나와 수도권을 포함한 전국 곳곳에 미세먼지 비상저감조치가 시행된 지난 14일 오전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마스크를 쓴 시민들이 발길을 재촉하고 있다.ⓒ김철수 기자

정말 자유한국당의 주장대로 정부의 탈원전 정책으로 인해 미세먼지가 심해진 걸까. 반대로, 탈원전 정책을 폐기하면 미세먼지가 사라지기라도 하는 걸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

일단 정부의 정책은 원전을 없애고 그 자리에 석탄화력발전소를 채우겠다는 게 아니다. 원전과 석탄화력발전소를 모두 점차 줄여나가고 신재생 에너지를 늘리는 게 목표다.

더욱이 정부의 탈원전 정책은 수십 년간 단계적으로 시행되는 정책으로 이제 막 첫 발을 뗀 셈이다. 아직 제대로 시행도 안 된 정책이 미세먼지 증감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얘기다.

실제로 문재인 정부는 탈원전 정책의 일환으로 노후화된 월성 1호기를 폐쇄하고 신고리 5·6호기의 공사를 중단하겠다고 공약했지만, 공론화위원회의 건설 재개 권고에 따라 신고리 5·6호기 건설을 재개한 바 있다. 

현 정부에서만 하더라도 4기의 원전이 새로 가동되고, 원전의 수와 발전용량이 더 늘어나게 된다. 문재인 대통령 역시 "실제로 원전 수가 줄어드는 것은 다음 정부부터"라고 밝힌 바 있다. 이 때문에 자유한국당의 공세와 달리 오히려 정부는 탈원전 정책에 소극적인 것이 아니냐는 비판을 받아왔다. 

이헌석 에너지정의행동 대표도 16일 민중의소리와의 통화에서 "(자유한국당의 주장처럼) 석탄발전(비중)이 늘어났느냐? 늘어나지가 않았다"라며 "그리고 문재인 정부 임기 동안 핵발전소 숫자가 현격하게 줄었느냐? 그런 것도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이 대표는 "그런 면에서 자유한국당 주장들은 근거 없는 이야기"라며 "미세먼지 때문에 전 국민이 고통받고 있는 상황인데, 이런 상황에 편승해서 문제를 침소봉대한 전형적인 예"라고 비판했다.

자유한국당의 '기승전-탈원전 반대'에 
민주당 "국민들 고통받고 있는데 정치공세하나"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가 지난해 국회 도서관 대강당에서 열린 ‘탈원전 반대 및 신한울 3, 4호기 건설재개 범국민 서명운동본부 발대식’에 참석해 탈원전 반대 손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자료사진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가 지난해 국회 도서관 대강당에서 열린 ‘탈원전 반대 및 신한울 3, 4호기 건설재개 범국민 서명운동본부 발대식’에 참석해 탈원전 반대 손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자료사진ⓒ정의철 기자

당장 여당에서도 자유한국당을 향해 "허황된 거짓 주장"이라고 반박했다.

민주당 홍영표 원내대표는 같은 날 국회에서 열린 확대간부회의에서 "원전 비중 감축은 앞으로 70년간 단계적으로 시행될 정책이다. 당장 2024년까지 5기의 원전이 추가로 건설된다"고 말했다. 원전이 당장 줄어든 게 아닌 만큼 탈원전 정책으로 미세먼지가 악화됐다는 자유한국당의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는 것이다.  

박광온 최고위원 역시 "우리나라 석탄발전 비중과 석탄발전으로 인해 생긴 미세먼지가 줄어들고 있는 추세라는 것은 통계를 통해서 나타나고 있다"며 "원전 축소로 석탄 화력발전을 더 돌렸다는 주장 자체도 실상과는 거리가 먼 거짓 주장"이라고 꼬집었다. 

박 최고위원은 "국민이 미세먼지로 고통을 받고 있을 때 자유한국당은 이를 정치공세로 쓰면서 즐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 국민들이 생각하지는 않는지 생각해보기를 권한다"고 충고했다.

한편, 자유한국당의 '탈원전 정책 시비'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자유한국당은 기록적인 폭염을 기록한 지난해 여름에도 전력 수급 불안을 우려하며 모든 책임을 탈원전 정책 탓으로 돌렸다. 불과 두 달 전에도 대만에서 모든 원전을 가동 중단하는 법안이 국민투표로 폐지된 것을 빌미로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에 대한 비난을 쏟아내기도 했다.

이와 관련, 이헌석 대표는 "자유한국당을 두고 '기승전-탈원전 반대'라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며 "시시때때로 사실과 다른 주장으로 탈원전 정책을 반대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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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림청, ‘숲속의 한반도 만들기’ 나선다

홍석현, “산림협력 대북제재 포괄적으로 풀어야”
조정훈 기자  |  whoony@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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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1.16  19:2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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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림청이 남북 산림협력을 통한 ‘숲속의 한반도 만들기’에 나선다. 북녘 황폐산림 복구, 양묘장 현대화, 임농복합경영, 산림재해 공동대응, 원시림 등 자연생태계 공동보호, 한반도 핵심 생태축 복원이 골자이다. 16일 오후 서울 웨스틴 조선호텔에서 열린 ‘국민과 함께하는 숲속의 한반도 만들기’ 심포지엄에서 참석자들이 나무를 심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산림청이 남북 산림협력을 통한 ‘숲속의 한반도 만들기’에 나선다. 북녘 황폐산림 복구, 양묘장 현대화, 임농복합경영, 산림재해 공동대응, 원시림 등 자연생태계 공동보호, 한반도 핵심 생태축 복원이 골자이다.

산림청은 16일 오후 서울 중구 소공로 웨스틴 조선호텔에서 ‘국민과 함께하는 숲속의 한반도 만들기’ 심포지엄을 열었다.

이날 심포지엄에서 박종호 산림청 차장은 △남북 공동 시범사업을 통한 신뢰기반 구축, △호혜적인 협력, △지속가능한 성과창출 등을 원칙으로 한 ‘숲속의 한반도 만들기’ 안을 제시했다.

먼저, 박종호 처장은 북측의 황폐산림 복구를 위해 평양, 개성, 고성을 삼각축으로 한 경제림, 유실수림, 연료림 등 다양한 유형의 산림복구를 추진할 것을 제안했다. 북한 산림면적 889만ha 중 284만ha, 약 32%가 황폐해진 상황인데, 이는 식량과 연료난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때문이라는 배경에서다.

양묘장 현대화는 노후양묘장을 온실 중심의 시설 양묘장으로 개선하는 사업을 추진하되, 북한이 자력으로 복구하는 역량을 향상시키겠다는 것.

지난해 11월 방남한 북측 송명철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부실장은 “물고기보다 낚시도구와 배를 지원해 달라. 양묘장을 많이 만들었으면 한다”고 발언한 취지에 맞게 한다는 구상이다.

임농복합경영은 평양-개성-황해도-평안북도를 축으로 인구 밀집과 산림 훼손이 심한 서해지역을 우선 대상으로 하며, 밤나무와 밭벼, 낙엽송과 옥수수, 단나무와 고구마 등으로 구분지어 임농복합경영단지를 조성한다는 계획이다.

이는 북한의 임농복합경영 실행계획(15-24)과 연계한다는 것. 북한은 농지로 개간된 산지 30만ha에 임농복합경영을 도입해, 곡물 소비량 10% 이상, 농촌 연료 수요 30%를 충당한다는 구상이다.

박 처장은 남북 접경지역인 비무장지대(DMZ)를 중심으로 산림재해에 공동대응하며, 북한 백두산, 개마고원과 오가산, 낭림산, 관모봉, 경성 등 자연보호구 4곳을 대상으로 생육환경 공동개선, 산림유전자원 데이터베이스 구축 등을 통해 자연생태계 공동보호에도 나설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강원도 세포군 마루금 훼손지를 대상으로 △백두대간 자원실태 공동조사, △대면적 단절구간 우선복원, △세계복합유산 등재 공동추진 등 한반도 핵심 생태축 복원에 나설 계획이다.

국민 참여를 위해 오는 3~4월 중 판문점선언 1주년을 맞아 남북 주민이 함께 소나무, 잣나무, 유실수를 심는 ‘남북공동 평화의 나무심기’ 행사도 추진하기로 했다.

이날 심포지엄에서 문국현 남북산림협력자문위원회 위원장은 ‘한반도 숲 재단’ 창설을 제안했다. △한반도 생태계 보전, △남북 간 신뢰.평화.경제협력 선도, △파리기후협약 기반 탄소 배출권 창출 등의 목표로, 올해 내 설립을 제시했다.

김평환 한국자유총연맹 사무총장은 지난해 12월 ‘한반도 숲 가꾸기’ 중앙추진단을 꾸렸다면서, △1인 1그루 후원 캠페인, △북한 내 단독 양묘장 조선 등으로 정부의 ‘숲속의 한반도 만들기’ 사업에 동참할 뜻을 밝혔다.

정부의 사업에 대해, 김필주 평양과학기술대학 농업생명과학대학 학장은 “(북한) 지도부는 과학적 측면의 발전을 요구하고 있다”며 “양묘장 시설, 종자지원 요청은 종자생산과 양묘장 운영에 도움이 될 것이며, 명확한 경영계획이 수반된 구역 설정은 장기적으로 필수적”이라고 조언했다.

그리고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평화와 남북한의 통일, 평화 공존을 희망하는 국제사회의 염원 속에서 이제는 이념 또는 실용적 지속가능성이냐에 대한 사고 및 접근 방식을 바꿔야 한다”며 △자연보전, △종자개선, △기후 관련 유전자 식별 및 보호, △새로운 식량 자원 발굴 등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모델을 개발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 이낙연 국무총리는 개회사에서 북측을 향해 아시아산림협력기구 동참과 2021년 제15차 세계산림총회 참가를 제안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이날 심포지엄에서는 각계의 남북 산림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발언이 이어졌다.

이낙연 국무총리는 개회사에서 “남북 산림협력은 남북 모두에게, 그것도 지금을 넘어 후대에게 도움을 줄 것이다. 북한으로서는 홍수와 가뭄의 피해를 줄이고 식량 생산을 늘릴 수 있다. 임농복합 사업으로 산림자원과 식량을 더 얻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북측을 향해 아시아산림협력기구 동참과 2021년 제15차 세계산림총회 참가를 제안했다.

고건 아시아녹화기구 운영위원장은 축사를 통해, 임농복합조림, 양묘장 현대화, 연료대책 등을 강조하며, “북한은 UN기후변화당사국 총회에서 산림복원 10년 계획으로 63억 그루의 나무를 심겠다는 계획을 발표하고 기후변화대응국가사업으로 UN에 등록한 바 있다”며 “한반도 녹화사업은 UN기후변화대응사업을 남과 북이 공동으로 추진한다는 깊은 뜻이 담겨 있다”고 말했다.

홍석현 한반도평화만들기 이사장은 기조연설에서 “남북 산림협력은 서로를 겨누었던 무기를 내려놓고 화해 협력으로 가는 지름길”이라며 “남북한 산림협력사업은 한반도의 평화구축을 지향하는 큰 틀에서 호혜적 교류협력사업으로 추진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대표적인 평화 프로젝트인 산림협력에 대해서는 대북제재가 포괄적으로 풀렸으면 좋겠다”며 “제재가 풀려서 사업이 본격화되면 북한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외교안보적 변수와 무관하게 굴러가는 이 사업은 남북관계를 결정적으로 개선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심포지엄에는 김재현 산림청장, 김황식 호암재단 이사장, 원행 조계종 총무원장, 김덕룡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 등 5백여 명이 참석했으며, 강영식 겨레의 숲 운영위원장, 박은식 아시아산림협력기구 사무차장, 박영자 통일연구원 북한연구실장 등이 토론자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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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지난해보다 더 큰 정세격변 일어난다

[신년대담] 올해는 지난해보다 더 큰 정세격변 일어난다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기사입력: 2019/01/16 [15:59]  최종편집: ⓒ 자주시보
 
 
▲ 유태영 박사와 시사 대담을 나누는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노길남 기자

 

[편집자 주] 본지에서는 2019년 새로운 전환을 예고하는 시점에서 독자 여러분들이 한반도 정세와 국제 정세에서 도움을 주고자 한호석 통일연학구소장이 재일동포 통일학자인 강민화 박사와 진행한 신년대담과 관련한 글을 싣고자 합니다. 강민화 박사는 총련계 동포이며 일본에서 오랫동안 통일운동과 통일학 연구에 힘써온 분입니다. 

 

다음은 신년대담 전문입니다.

 


 

신년대담 - 올해는 지난해보다 더 큰 정세격변 일어난다 

 

이 기록은 2019년 새해를 맞아 재일동포 통일학자인 강민화 박사와 재미동포 통일학자인 한호석 박사가 전자우편을 통해 주고 받은 대담록이다.  

 

♦ [강민화] ― 새해를 축하합니다. 지난해 연말부터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2019년 신년사가 큰 관심사가 되어왔습니다. 그런데 몇몇 사람들은 올해 신년사에서 ‘비핵화’ 문제 등에 관한 입장표시가 있겠는가, 혹은 지난해 신년사에서 평창 올림픽 참가를 표명한 것과 같은 놀라운 내용이 있겠는가 하는데 주로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올해 신년사의 기본사상에 대해서 “…자력갱생을 번영의 보검으로 틀어쥐고 사회주의건설의 전 전선에서 혁명적 양양을 일으켜 나가야 한다는 것”(로동신문 2019년 1월 3일)이라고 강조했습니다. 한호석 박사님께서는 얼마 전 <자주시보>에 실린 연재 글에서 올해 신년사를 이해하려면 상당한 수준의 통찰력이 요구된다고 하셨는데, 우선 신년사에 대한 소감부터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한호석] - 다른 나라 국가수반들은 새해를 맞아 의례적으로 신년기자회견을 진행하거나 연두교서를 발표하지만,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신년사는 새해를 맞아 의례적으로 발표하는 문서가 아닙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8천만 민족을 자주적 발전으로 이끌어가는 전략로선과 정책구상을 신년사를 통해 발표합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자주적 발전에 관한 전략로선과 정책구상을 신년사에 담는 것은 물론이고, 8천만 우리 민족 전체의 자주적 발전에 관한 전략로선과 정책구상도 신년사에 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신년사가 가닿는 범위는 북측 동포들에게만 한정되지 않고, 남측 동포들과 해외동포들을 포함하는 8천만 민족 전체로 확대되는 것입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발표한 신년사의 서술방식은 해마다 그러하지만, 올해도 전반부와 후반부로 구성되는 서술방식을 택하였습니다. 전반부 서술내용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자주적 발전에 관한 것이고, 후반부 서술내용은 8천만 민족 전체의 자주적 발전에 관한 것입니다. 이런 사정을 살펴보면, 민족주체적 관점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신년사를 이해해야 한다는 점이 자명해집니다.  

 

무릇 사람의 인식활동은 관점에 의해 좌우됩니다. 사람이 바라보는 현실은 안구의 망막에 비치는 광학영상이 아니라 그가 지닌 관점에 비치는 인식내용입니다. 그런고로 민족주체적 관점을 갖지 못하면,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신년사를 읽어도 깊은 뜻을 알지 못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민족주체적 관점이라는 것은 가장 크고, 가장 공고하며, 가장 유구한 사회적 집단인 민족을 사회역사를 변화, 발전시키는 주체로 인식하고, 사고와 행동을 민족의 공동이익실현에 일치시킨다는 뜻입니다. 

 

자기 민족을 중시하고 자기 민족을 열렬히 사랑하는 태도, 그리고 민족사와 민족어와 민족문화, 민족적 긍지와 민족적 열망과 민족의 공동이익을 소중히 여기는 태도는 바로 그런 민족주체적 관점이 확립될 때 자연히 따라나서게 됩니다. 

 

민족관을 갖지 못한 사람들은 민족이라는 말을 들으면 조건반사적으로 근대민족국가의 형성이념이었던 민족주의를 머릿속에 떠올리는 그릇된 습관에 젖어 있습니다. 하지만 민족은 민족주의자들이 고안해낸 개념이 아닙니다. 근대민족국가가 출현하기 훨씬 전부터, 민족주의자들이 민족이라는 말을 만들어내기 훨씬 전부터, 민족은 존재하였습니다. 근대민족국가가 출현하기 이전부터 수 천 년 동안 발전의 길을 걸어온 우리 민족은 스스로를 겨레라고 불렀습니다. 겨레라는 순우리말은 민족주주의자들이 만들어낸 말이 아니라, 예로부터 민족이 스스로를 지칭하는 자기 이름입니다. 

 

민족은 일정한 강역에서 생성, 융합되었고, 유구한 역사 속에서 장성, 발전되어온 가장 공고한 사회적 집단입니다. 사회역사발전단계에 이르러 민족이 자기를 보전하고 자주적으로 발전하기 위해 세운 것이 국가입니다. 그러므로 단일민족이 한 국가 안에서 함께 살며 자주적으로 발전하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그런데 너무도 억울하고 분통이 터지는 일은 8천만 단일민족이 미국의 민족분렬정책에 의해 강제로 분렬되었고, 우리 민족의 생활터전인 삼천리강토가 미국의 한반도분할점령에 의해 강제로 분단된 것입니다. 일정한 강역에서 생성, 융합되었고, 반만년 유구한 역사 속에서 장성, 발전되어온 가장 공고한 사회적 집단이 20세기 중반에 이르러 미국의 폭압과 만행에 의해 분렬되고 말았으니, 이것이야말로 도저히 참고 견딜 수 없는 민족적 재앙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분렬재앙에 빠진 민족의 운명을 구원하고, 삼천리강토를 옥죄는 분단의 고통과 불행을 민족의 힘으로 극복하려는 민족주체적 관점을 확립할 때,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전략로선과 정책구상이 서술된 신년사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2019년 신년사에 명시된 것처럼, 자력갱생의 기치를 들고 사회주의건설에서 혁명적 앙양을 일으켜 경제강국을 건설하려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전략로선과 정책구상을 민족주체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북측 동포들만이 아니라 8천만 민족이 부강하고 통일된 나라에서 행복하게 살려는 전략로선과 정책구상인 것입니다.     

 

♦ [강민화] - 요즈음 조선이 자력갱생과 경제발전을 중시하는 것은 박사님의 <자주시보> 연재 글에서 언급된 것처럼 경제건설과 핵무력건설의 병진로선의 승리를 선포하고 경제발전에 국력을 총집중할 데 대한 전략을 제시한 지난해의 당중앙위원회 제7기 제3차 전원회의의 결정과 관련되어 있겠지요. 사실 조선에서는 제국주의연합세력의 제재소동 속에서도 려명거리를 건설하는 등 놀라운 발전저력을 과시했습니다. 그렇지만 조선이 자력갱생으로 나간다고 해도 제재완화, 더 나아가서는 제재가 해제되지 않으면 경제발전에 한계가 있다거나 심지어 경제발전 자체를 의문시하는 말들이 들려오는 것을 보면, 앞으로도 미국은 조선에게 이러저러한 방해와 압력을 지속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래서 나는 조선에서 말하는 자력갱생, 특히 지금 강조되는 자력갱생은 그것이 고립, 질식, 압살을 강요하는 제재책동에 맞서 벌어지는 자주권 수호를 위한 투쟁이라는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박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한호석] - 아시다시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자력갱생을 전략로선으로 강조한 것은 이번 신년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 아닙니다. 조선의 자력갱생로선은 조선이 건국되기 이전부터 오랜 역사와 전통 속에서 형성되고 관철되어온 전략로선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조선이 자력갱생로선을 관철해온 역사를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김일성 주석은 대일항쟁기에 악랄한 일제식민통치에서 조선민족을 구원하기 위한 항일무장투쟁을 조직, 지도하면서 자력갱생과 간고분투를 전략로선으로 제시하였습니다. 그 시기의 자력갱생은 왜적들이 끊임없는 덤벼드는 ‘토벌작전’과 ‘검거선풍’ 속에서 조선인민혁명군과 조국광복회가 생명선으로 틀어쥐고 간고분투하였던 전략로선이었습니다. 또한 항일무장투쟁시기의 자력갱생로선은 자칫 굶어죽거나 얼어죽을 수 있는 엄혹한 자연환경 속에서 조선인민혁명군과 조국광복회가 생명선으로 틀어쥐고 간고분투하였던 전략로선이었습니다.  

 

또한 자력갱생은 1945년 8.15해방 이후 민주개혁의 기치 아래 이룩한 모든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발전이 6.25전쟁 3년 동안 미국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잿더미만 남았던 전후복구시기에 조선이 생명선으로 틀어쥐고 피땀을 흘리며 관철하였던 전략로선이었습니다.

 

자력갱생은 부강조국건설의 기치 아래 고속성장을 이룩하였던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30년 동안 조선의 경이적인 경제발전을 이끌었던 전략로선이었습니다.  

 

자력갱생은 전후복구시기보다 더 혹독하였던 1990년대 ‘고난의 행군시기’와 ‘사회주의강행군시기’에 조선이 자기의 국가적 존엄과 자주적 지위를 피눈물로 지켜낸 전략로선이었습니다. 

 

자력갱생은 사회주의국가들이 이른바 ‘사상해방’과 ‘시장개방’의 탁류 속에 자기의 사회주의 깃발을 내던지고 제국주의의 회유에 넘어가는 세기적 혼란이 일어났던 1990년대와 2000년대 20년 동안 조선이 자기의 혁명사상과 혁명원칙을 지켜낸 전략로선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2010년대에 이르러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과학기술발전과 결합된 자력갱생을 새로운 전략로선으로 제시하고, 이를 구현하고 있습니다. 김정은시대의 자력갱생로선은 21세기 지식경제시대에 자주적 발전을 추진하는 전략로선입니다. 그것은 과학기술발전과 결합되고, 과학기술교육으로 발전전망을 열어놓는 전략로선입니다. 김정은시대의 자력갱생로선은 과학기술중시정책, 인재중시정책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조선은 자력갱생을 더욱 고도화하면서 과학기술강국, 인재강국, 경제강국을 향하여 자력자강의 길을 개척해가고 있습니다.    

 

미국을 우두머리로 하는 제국주의연합세력이 사상 최악의 대조선제재소동을 일으켜 정세를 어지럽혔습니다만, 조선에게 있어서 경제제재는 경제문제라기보다는 정치문제입니다. 그래서 조선에서는 경제제재라는 말보다 제재소동이라는 말을 더 많이 씁니다. 

 

이미 1930년대부터 근 90년 동안 자력갱생로선을 관철해오면서 사회주의자립경제체제를 수립하였고, 자급자족능력을 점차적으로 고도화하여 그 경제체제를 공고하게 발전시켜온 조선에게는 그 무슨 경제제재라는 게 별로 통하지 않습니다. 국가경제에서 차지하는 무역의존도를 높이고, 서방선진국들의 자본과 기술을 무턱대고 도입하여 국가경제를 대외적으로 개방해놓은 나라들에서는 미국의 경제제재가 효력을 발생할 수 있지만, 무역의존도가 매우 낮고, 서방선진국들의 자본과 기술을 무조건 받아들이지 않은 조선에게는 미국이 아무리 경제제재를 계속해도 효력을 볼 수 없습니다. 

 

만일 조선이 자력갱생로선을 포기하고 ‘사상해방’과 ‘대외개방’의 길을 택하였더라면, 중국처럼 쉽게, 그리고 고속으로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조선은 허리띠를 졸라매고 죽을 끓여 먹을지언정 어렵고 힘든 자력갱생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자력갱생을 택한 조선의 경제발전속도는 대외개방을 택한 중국의 경제발전속도에 비해 좀 더디기는 하지만, 조선은 자력으로 번영하는 사회주의자립경제를 계속 안정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고, 어떤 폭풍에도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경제체제를 세울 수 있었습니다.   

 

물론 자급자족능력이 고도화된 조선에서 대외무역과 외자유치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조선의 대외무역과 외자유치는 중국식 대외개방을 위한 선행조치가 아니라 조선식 자력갱생을 위한 보완조치에 불과합니다.    

 

조선의 대외무역규모가 국가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적습니다. 이를테면, 한국의 2017년 대외무역총액은 1조520억달러나 되는데, 조선의 2016년 대외무역총액은 55억달러밖에 되지 않습니다. 자급자족능력이 없는 한국경제는 대외무역에 전적으로 의존하기 때문에 세계시장이 불안정해지면 공포와 불안에 떨어야 하지만, 자급자족능력이 고도화된 조선은 대외무역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에 세계시장이 무너지건 말건 상관없이 자기의 경제발전을 안정적으로 추진할 수 있습니다.  

 

또한 조선은 외자유치를 요구하는 5개 경제특구와 22개 경제개발구를 지정해놓았습니다. 경제특구는 지역특성에 따라 개성공업지구, 원산-금강산국제관광지대, 황금평-위화도경제지대, 신의주국제경제지대, 라선경제무역지대로 지정되었으며, 경제개발구는 지역특성에 따라 공업개발구, 농업개발구, 관광개발구, 수출가공구, 첨단기술개발구로 지정되었습니다. 이러한 경제특구와 경제개발구에는 외국자본이 유치됩니다. 그런데 외자유치라고는 하지만, 규모가 작을 뿐 아니라, 조선의 경제특구와 경제개발구에 들어간 외국자본이 지배력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각종 규제를 그쯘히 마련해놓았기 때문에 조선에서 외래자본의 이윤침탈은 원천적으로 봉쇄됩니다. 

 

1990년대 ‘고난의 행군시기’와 ‘사회주의강행군시기’에 조선에서 미국의 경제제재가 효력을 발생할 수 있었지만,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오늘 조선이 원료와 자재, 부품과 설비, 기술과 자본을 자급자족하는 능력이 최고조에 이른 김정은 시대에는 유엔안보리보다 100배 더 강력한 제재권능을 가진 국제기구를 동원한다고 해도 어찌 그런 낡은 제재소동이 조선에게 통하겠습니까? 

 

자급자족능력이 고도화된 조선에게 미국의 경제제재가 통하지 않는데도, 조선은 미국에게 제2차 조미정상회담을 개최하는 선결조건으로 제재완화를 요구했습니다. 왜 그러했을까요? 그 까닭은, 미국이 얼마나 성의 있는 태도로 협상에 임하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요인이 제재완화이기 때문입니다. 2018년 12월 20일 <조선중앙통신>에 실린 ‘낡은 길에서 장벽에 부딪치기보다 새 길을 찾는 것이 나을 것이다’라는 제목의 논평을 읽어보면, 그런 사정을 알 수 있습니다. 논평에서는 “우리는 제재 따위가 무섭거나 아파서가 아니라 그것이 조선반도 비핵화를 위한 미국의 진정성을 판별하는 시금석으로 되기 때문에 문제시하는 것”이라고 명백하게 지적한 바 있습니다.  

 

그런고로 트럼프 행정부는 그 무슨 경제제재를 최고로 강화하여 조선의 경제발전을 가로막으며 압박해보겠다는 어리석고 헛된 생각을 하루빨리 버리고, 대조선제재를 대폭 완화하여 한반도 비핵화를 실현하기 위한 진정성을 보여야 합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2019년 신년사에서 “미국이 세계 앞에서 한 자기의 약속을 지키지 않고 우리 인민의 인내심을 오판하면서 일방적으로 그 무엇을 강요하려들고 의연히 공화국에 대한 제재와 압박에로 나간다면 우리로서도 어쩔 수 없이 부득불 나라의 자주권과 국가의 최고 리익을 수호하고 조선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이룩하기 위한 새로운 길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게 될 수도 있습니다”라고 경고하였습니다. 요즈음 트럼프 대통령이 제2차 조미정상회담을 이른 시일 안에 개최하려고 분주히 움직이는 것을 보면, 그가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경고를 알아들은 것 같습니다.  

 

 [강민화] - 2019년 신년사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지난해에 민족분렬사상 일찍이 있어본 적이 없는 극적인 변화가 일어났다고 하면서, 남북관계가 완전히 새로운 단계에 들어섰다고 평가했습니다. 그런데 “북남관계는 조미관계의 부속물로 될 수 없다”는 제목의 1월 3일부 〈로동신문〉 논평은 미국의 방해와 남측 당국의 대미추종을 염두에 두고 “따져놓고 보면 형식은 있는데 내용은 없고 소리는 요란한데 실천은 없다는 격으로 거의 답보와 침체상태에 놓인 것이 바로 북남관계”라고 비판했습니다. 4.27판문점선언과 9월평양공동선언, 남북군사분야합의서를 이행하는 문제를 어떻게 보십니까?

 

[한호석] - 아시다시피, 2018년은 남북관계에서 놀라운 변화와 발전이 이룩된 역사적인 전환기였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 남북정상회담이 세 차례나 진행되었고, 그 회담들에서 판문점선언, 평양공동선언, 남북군사분야합의서가 각각 채택, 발표되었습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2019년 신년사에서 2018년에 성취된 북남관계개선에 대해 말하면서 “이것은 북남관계가 완전히 새로운 단계에 들어섰다는 것을 뚜렷이 보여주었습니다”라고 지적하였고, 판문점선언, 평양공동선언, 남북군사분야합의서가 “북남 사이에 무력에 의한 동족상쟁을 종식시킬 것을 확약한 사실상의 불가침선언으로서 참으로 중대한 의의를 가집니다”라고 높이 평가하면서 그에 대하여 “나는 대단히 만족하게 생각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력사적인 북남선언들을 철저히 리행하여 조선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의 전성기를 열어나가자!”라는 구호를 8천만 민족에게 제시하였습니다. 여기서 두 가지 문제를 거론할 수 있습니다.

 

첫째,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판문점선언, 평양공동선언, 남북군사분야합의서를 “사실상의 불가침선언”으로 인정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지난해에 남과 북이 불가침선언을 하였으므로, 올해에는 조선과 미국이 평화협정을 체결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2019년 신년사에 명시된 것처럼, 조선과 미국이 주도하고, 한국과 중국이 참가하는 4자회담을 개최하여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교체하려는 것, 바로 이것이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평화방략입니다.

 

둘째, 위에 인용된 구호에서 주목되는 것은 “조선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의 전성기”라는 말입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조선반도의 평화, 번영, 통일을 실현하자고 8천만 민족에게 호소하였지만, 문재인 대통령은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에 대해서만 말할 뿐, 한반도의 통일에 대해서는 전혀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근본적인 차이입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도 한반도의 통일을 위한 것이며, 더욱이 한반도가 통일되지 않으면 진정한 평화와 번영은 실현될 수 없습니다. 8천만 민족이 추구하고 열망하는 모든 가치, 모든 희망, 모든 미래는 오직 조국통일을 위한 것으로 되어야 합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조국통일은 위대한 자주통일강국을 건설하는 국가건설대업이므로, 모든 것을 그 대업에 복종시켜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난날 일제강점기에 우리 민족이 추구했던 모든 가치, 모든 희망, 모든 미래가 오직 자주독립국가건설에 복종되어야 했던 것처럼, 오늘 분단시대에 우리 민족이 추구하는 모든 가치, 모든 희망, 모든 미래는 오직 자주통일강국건설에 복종되어야 마땅합니다. 지난날 일제강점기에 항일선렬들이 자주독립국가건설을 위해 청춘도 목숨도 다 바치며 끝까지 싸웠던 것처럼, 오늘 분단시대에 통일운동가들은 자주통일강국건설을 위해 청춘도 목숨도 다 바치며 끝까지 싸워야 합니다. 

 

그런데 문재인 대통령은 통일이라는 말 자체를 꺼내지 않습니다. 문재인 대통령만 그런 게 아니라, 이전에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도 평화와 번영은 말하면서도 통일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8천만 민족이 열망하는 민족사의 최대위업에 대해 침묵하는 것은 실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문재인 대통령은 왜 통일이라는 말을 회피하는 걸까요? 그 까닭은 한반도에 건설될 자주통일국가 안에는 주한미국군도 없을 것이고, 따라서 한미동맹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한미국군 철수와 한미동맹 철폐는 자주통일강국건설을 실현하기 위한 선결조건으로 됩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한반도가 통일된 이후에도 주한미국군이 남아있을 것이고 따라서 한미동맹도 존치될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만, 그것은 해가 서쪽에서 뜰 것이라는 허무맹랑한 주장과 다를 바 없습니다. 주한미국군이 남아있고, 한미동맹이 존치되는 한, 한반도의 통일은 고사하고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도 실현될 수 없습니다. 

 

위와 같은 사정을 살펴보면, 2018년에 이룩된 남북관계개선의 놀라운 성과들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2019년 신년사에서 지적한 것처럼 “우리 민족끼리 서로 마음과 힘을 합쳐나간다면 조선반도를 가장 평화롭고 길이 번영하는 민족의 참다운 보금자리로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을 온 겨레에게 안겨”준 “첫걸음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2018년 남북관계개선은 첫걸음을 뗀 것입니다. 허나 아주 중대하고, 커다란 첫걸음이었습니다. 우리 민족이 자주통일강국을 세계가 보란 듯이 건설하는 날까지 얼마나 먼 길을 걸어가며 숱한 난관과 도전을 뚫고 나가야 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첫걸음이 중요합니다. 첫걸음을 잘 떼야, 그 뒤에 내딛는 걸음걸음이 역사의 새 길을 열어놓을 수 있습니다. 2018년 4월 27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통일이라는 말을 회피하는 문재인 대통령의 손을 잡고 판문점에 그어진 분단선을 넘어 자주통일강국건설을 향해 전진하는 첫걸음을 떼었습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2019년 신년사에서 제시한 구호가 말해주는 것처럼, 올해에는 우리 민족이 “조선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의 전성기를 열어나가는” 더 큰 걸음을 내딛게 될 것입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2019년 신년사에서 “우리는 미증유의 사변들로 훌륭히 장식한 지난해의 귀중한 성과들에 토대하여 새해 2019년에 북남관계발전과 평화번영,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에서 더 큰 전진을 이룩하여야 합니다”고 언명하였습니다.   

 

 [강민화] - 2019년 신년사에서는 전민족적 합의에 기초한 평화적인 통일방안을 모색할 데 대하여 언급되었습니다. 이는 현재의 남북관계발전을 통일로 이어갈 것을 바라는 온 겨레의 지향과 열망을 정책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9월평양공동선언의 합의에 따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019년 신년사에서 통일방안문제가 언급된 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한호석] -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2019년 신년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북과 남은 통일에 대한 온 민족의 관심과 열망이 전례 없이 높아지고 있는 오늘의 좋은 분위기를 놓치지 말고 전민족적 합의에 기초한 평화적인 통일방안을 적극 모색해야 하며 그 실현을 위해 진지한 노력을 기울여나가야 할 것입니다.”

 

지난 35년 동안 미력이나마 조국통일운동과 통일학연구에 힘써온 나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2019년 신년사에 서술된 위의 문장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왜냐하면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통일방략이 위의 문장에 응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전민족적 합의에 의한 평화적인 통일방안을 적극 모색”한다는 말은 평화통일방안에 대한 전민족적인 합의를 이루어낸다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아시다시피, 조국통일은 민족주체역량으로 실현해야 하는 대업이므로, 통일방안도 전민족적인 합의에 의해 채택되어야 마땅합니다. 

 

그렇다면 전민족적 합의는 어떻게 이루어낼 수 있겠습니까? 내 생각에는, 남측 통일부와 북측 조국평화통일위원회의 공동주최로 남, 북, 해외의 각당각파, 각계각층 대표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평화통일방안을 모색하고 확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전민족적인 정치회합이 개최되어야 합니다.  

 

미국의 악랄한 민족분렬정책과 한반도분할점령에 의해 민족분렬과 국토분단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었던 1948년 4월 19일 평양에 있는 모란봉극장에서 진행되었던 역사적인 남북연석회의 이후 70 년이 지난 2019년에 우리 민족끼리 마주앉아 평화통일방안을 모색하고 확정하는 전민족적인 정치회합을 다시 개최한다면, 자주통일국가건설의 역사적 위업을 실현하는 지름길이 활짝 열리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평화통일방안을 모색하고 확정하는 전민족적인 정치회합이 개최되려면, 그보다 먼저 올해 상반기에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서울방문으로 개최될 남북정상회담에서 평화통일방안에 대한 기본합의가 나와야 할 것입니다. 전민족적 정치회합은 남북정상회담의 기본합의에 의거하여 개최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 [강민화] - 지난해 9월에 남과 북의 정상들은 민족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 나가는 민족자주의 원칙을 재확인하였습니다. 또한 위에서 언급한 북측의 1월 3일 논평은 우리 민족이 이 눈치, 저 눈치를 다 보며 주춤거리고 뒤돌아볼 때가 아니라 더욱 과감히 남북관계발전을 위해 가속으로 달려야 하며, 우리가 손잡고 달려 나갈 때 조미관계도 따라오게 되어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런데 남측이 미국의 눈치를 보는 바람에 지난해에 있었던 남북철도연결 착공식이 ‘착공 없는 착공식’으로 되어버렸던 것처럼, 미국의 방해와 간섭, 그리고 미국의 대조선제재가 남북합의이행을 가로막고 있는 것도 엄연한 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현실을 어떻게 보십니까?

 

[한호석] - 합의를 내왔어도, 합의당사자가 그것을 이행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2018년에 남북정상회담들에서 합의, 발표된 판문점선언, 평양공동선언, 남북군사분야합의서를 이행하느냐 이행하지 못하느냐 하는 중대한 문제가 제기되었습니다. 이것은 남북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중대한 첫걸음을 내딛느냐 내딛지 못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지난해를 돌이켜보면, 남과 북이 판문점선언, 평양공동선언, 남북군사분야합의서를 이행하면서 남북관계를 개선하는 중대한 첫걸음을 조국통일운동사 위에 아로새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첫걸음은 얼마 가지 못하고 걸림돌에 가로막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남북관계개선의 첫걸음을 가로막은 걸림돌은 무엇입니까? 문재인 대통령이 남북관계를 개선하려면 반드시 트럼프 대통령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대미예속성이 걸림돌입니다. 사람들은 문재인 대통령이 한국의 최고권력자라고 알고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남북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트럼프 대통령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처지에 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2018년 10월 10일 백악관 취재진 앞에서 “그들은 우리의 승인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두 차례나 반복해서 강조했던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개성공업지구를 다시 가동하려고 해도, 금강산관광을 다시 시작하려고 해도, 남북교통망을 연결하려고 해도 트럼프 대통령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겁니다. 트럼프 대통령의 승인은 백악관 각료들이 받는 줄 알았는데, 청와대에 있는 문재인 대통령도 그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났습니다.  

 

필리핀 대통령이나 파키스탄 대통령이나 뛰르끼예(터키) 대통령은 미국 대통령의 승인을 받지 않고 국정운영을 할 수 있지만, 전 세계 국가수반들 가운데 오직 한국 대통령만 미국 대통령의 승인을 받아야 국정운영을 할 수 있으니, 민족적 자존심이 상하는 치욕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치욕적인 현실을 살펴보면, 한국 대통령이 미국 대통령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대미예속성을 청산하지 않는 한, 판문점선언, 평양공동선언, 남북군사분야합의서를 충실히 이행하지 못하게 된다는 사실이 자명해집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의 승인을 받지 않고, 자기의 독자적인 결심에 따라 자주적으로 남북관계개선을 추진할 수 있는 방도는 굴욕적인 한미동맹을 폐기하는 것입니다. 한미동맹을 폐기하는 것은 미국과 단교하는 것이 아니라, 한미관계를 미국-필리핀관계, 미국-파키스탄관계, 미국-뛰르끼예관계처럼 정상화하는 것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남북관계를 정상화하기 전에, 한미관계부터 정상화해야 합니다.   

  

♦ [강민화] - 2019년 신년사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트럼프 대통령과 다시 만날 용의를 표명하였고, 트럼프 대통령도 그렇게 되기를 고대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6.12조미정상회담 이후 미국은 조미합의를 ‘북조선의 비핵화’에 관한 합의로 왜곡하였고, 무모하게도 조선에게 허세를 부리는 바람에, 조미관계가 그 이상 진전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2019년 신년사에서 미국이 세계 앞에 한 자기 약속을 지키지 않고 조선에 대한 제재와 압박에로 나간다면 부득불 새로운 길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게 될 수도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조미관계의 발전전망을 어떻게 보십니까? 

 

[한호석] - 언제나 그러하지만, 올해 조미관계의 발전전망도 낙관적으로 봅니다. 25년간 벌어진 조미핵대결에서 조선이 승리하였고, 미국이 패배하였으므로, 조미관계의 앞길을 낙관적으로 전망하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이 중요한 문제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겠습니다. 

 

아시다시피, 미국은 2018년에 조미협상이 시작되었을 무렵, 조선의 핵무기를 미국 본토로 반출하여 해체해야 한다는 이른바 ‘핵반출론’을 잠꼬대처럼 중얼거리다가, 조선으로부터 배척을 받고 움찔하더니 결국 ‘핵반출론’을 철회하였습니다. 조선의 판정승입니다. 

 

또한 미국은 2018년에 조미협상이 진행되는 도중에 조선이 미국에게 핵신고서를 제출해야 한다는 이른바 ‘핵신고론’을 잠꼬대처럼 중얼거리다가, 조선으로부터 배척을 받고 움찔하더니 더 이상 ‘핵신고’라는 말을 꺼내지 못했습니다. 조선의 판정승입니다.

 

미국은 그 무슨 ‘미중공조’로 조미협상에서 조선을 고립시키고 우위를 차지할 것처럼 이른바 ‘미중공조론’을 잠꼬대처럼 중얼거리다가,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중국방문과 조중정상회담을 보고 움찔하더니 더 이상 ‘미중공조’라는 말을 꺼내지 못하였습니다. 조선의 판정승입니다. 

 

미국은 조선이 협상재개 선결조건으로 제기한 제재완화요구에 응할 수 없다느니 뭐니 하면서 이른바 ‘제재완화불가론’을 잠꼬대처럼 중얼거리다가, 조선으로부터 배척을 받고 움찔하더니 조선의 눈치를 보면서 최근에 제재조치를 완화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조선의 판정승입니다. 

 

위에 열거한 네 가지 사실들은 조선이 ‘핵반출론’, ‘핵신고론’, ‘미중공조론’, ‘제재완화불가론’ 같은 미국의 헛소리들을 하나씩 배척하면서, 지난해 조미협상에서 4 대 0으로 압도적인 판정승을 거두었음을 말해줍니다. 원래 조미핵대결에서 완패하는 바람에 협상력을 거의 가질 수 없었던 미국은 조미협상 1회전에서 조선의 강한 협상력에 밀려 고전을 거듭하다가 결국 4 대 0으로 판정패하고 말았다는 것, 바로 이것이 2018년도 조미협상 1회전을 바라보는 관전평입니다. 그러므로 독자들은 미국이 조선에게 그 무슨 ‘최대 압박’을 가하면서 조미협상을 주도하고 있는 것처럼 허위사실을 늘어놓는 가짜보도에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2018년 조미협상 1회전에서 4 대 0이라는 압도적인 판정승을 거둔 조선은 그 기세를 몰아 올해에 진행될 조미협상 2회전에서도 압도적인 판정승을 거둘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2019년 1월 1일 신년사에서 조선의 핵동결완료를 전격 선언한 것은 올해 조미협상 2회전에서 미국을 지난해보다 더 강력한 힘으로 몰아붙이며 협상방향을 평화협정 체결과 조미관계 개선으로 끌어가게 될 것임을 예고한 것입니다. 

 

2019년 2월에 성사될 제2차 조미정상회담은 8천만 민족과 전 세계로부터 비상한 관심과 큰 기대를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제2차 조미정상회담이 열리면,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조선의 핵동결완료라는 초강력한 압박수단을 꺼내들고 트럼프 대통령을 몰아붙여 평화협정 체결과 대조선제재완화에 관한 합의를 이끌어내면서 극적인 판정승을 거둘 것으로 예견됩니다. 그렇게 예견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습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2019년 1월 1일 신년사에서 “나는 미국과의 관계에서도 올해 북남관계가 대전환을 맞은 것처럼 쌍방의 노력에 의하여 앞으로 좋은 결과가 꼭 만들어질 것이라고 믿고 싶습니다”라고 언명하였고, 그로부터 며칠 뒤 “새해 첫 정치일정”으로 중국 베이징을 방문하였습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새해 첫 정치일정으로 중국방문을 택한 것은 올해 조미협상 2회전에서 반드시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려는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2019년 1월 8일 오후 5시 중국 베이징에 있는 인민대회당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만나 조중정상회담을 진행하였습니다. 조선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1월 8일 조중정상회담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시진핑 주석은 “조선반도정세관리와 비핵화협상과정을 공동으로 연구조종해나가는 문제와 관련하여 심도 있고 솔직한 의사소통을 진행”하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시진핑 주석이 조선반도 정세를 공동으로 관리하고, 조미협상을 공동으로 연구, 조종해나가기로 합의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조미협상을 공동으로 연구, 조종해나가기로 합의하였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올해 조선과 중국이 공동으로 노력하여 조선과 미국이 주도하고, 한국과 중국이 참가하는 4자회담을 개최하여 평화협정을 체결할 데 대한 의견일치를 보았다는 뜻입니다. 그런 뜻을 이해하면,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중국을 방문하기 직전에 발표한 2019년 신년사에서 “꼭 만들어질 것으로 믿는 좋은 결과”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제2차 조미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을 상대로 협상하여 꼭 이루어내려는 “좋은 결과”는 명백하게도 4자회담 개최와 평화협정 체결입니다. 

 

2018년 조미협상 1회전에서 미국을 4 대 0으로 제압하고 연승무패행진을 계속해온 조선은 올해 조미협상 2회전에서 8천만 민족의 숙원이며, 전 세계 인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평화협정체결문제를 해결하는 대승을 거둘 것으로 예견됩니다.  

 

♦ [강민화] - 제재문제로 되돌아갑니다만, 조선에 대한 일본의 독자제재 때문에 재일동포들이 계속 피해를 입고 있습니다. 경악스럽게는 지난해 조국에 수학여행을 갔다가 일본에 돌아온 어린 학생들이 평양에서 사온 기념품을 공항에서 몰수당하는 황당한 사건까지 일어났습니다.  일본은 지난해 남북정상회담과 조미정상회담이 연속적으로 진행되는 엄청난 정세변화에 대처하지 못하고 독자제재와 일본인 납치문제에 매달리다가 결국 외톨이신세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조일관계의 앞날을 어떻게 전망하십니까?  

 

[한호석] - 2018년 6월 12일 싱가폴공화국에서 역사적인 조미정상회담이 성사되었을 때, 일본 총리 아베 신조는 불안과 스트레스를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싱가폴 조미정상회담이 끝나는 즉시 조일정상회담을 개최하려고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조일관계는 그의 생각대로 바뀌는 것은 전혀 아니었습니다. 

 

미국 일간지 <워싱턴포스트> 2018년 8월 28일 보도에 따르면, 조선과 일본은 조미정상회담이 끝난 직후인 2018년 7월에 윁남(베트남)에서 비밀회담을 진행하였다고 합니다. 그 비밀회담에는 김성혜 조선로동당 통일전선부 통일전선책략실장과 기따무라 시게루 일본 내각정보관이 각각 양측을 대표하여 참석하였습니다. 기따무라 시게루는 아베 총리의 최측근입니다. 그런데 그 비밀회담은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했습니다. 

 

<교도통신> 2018년 10월 19일 보도에 따르면, 김성혜 통일전선책략실장과 기따무라 시게루 내각정보관은 2018년 10월 6일에서 8일까지 몽골 울란바따르(울란바토르)에서 제2차 비밀회담을 진행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했습니다. 위의 보도에 따르면, 울란바따르 조일회담에서는 조일정상회담을 개최하는 문제가 논의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이 끝났으니, 조선이 정상회담을 개최하자는 일본의 요구를 받아주지 않았던 것이 분명합니다. 조선은 왜 정상회담을 개최하자는 일본의 요구를 거부하였을까요? 조일관계에서 계산해야 할 것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2019년 1월 10일 영국을 방문한 아베 총리는 영일정상회담을 마친 직후 기자회견에서 다음에는 자기가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만나야 한다고 말했지만, 조일정상회담이 성사되려면, 일본은 계산을 바로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일본은 조일관계에서 이미 해결된 일본인 납치문제를 물고 늘어질 것이 아니라,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지난날 일제가 식민통치시기에 저지른 모든 죄악을 조선에게 공식 사죄하고 사죄에 따른 배상을 해야 하고, 재일조선인들을 억누르는 악랄한 민족차별정책을 전면 철폐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조미협상과 조일협상을 비교해봅시다. 조선은 미국이 6.25전쟁 중에 조선에게 저지른 전쟁범죄를 사죄하라고 트럼프 행정부에게 요구하지 않으며, 전쟁범죄사죄에 따른 배상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조선이 그렇게 하는 까닭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일본은 미국에 의해 전범국으로 낙인이 찍혔지만, 미국은 전쟁범죄를 저질렀으면서도 미국을 감히 전범국으로 규정하려는 나라가 없으므로 전범국으로 되지 않았습니다. 국제사회가 전범국으로 규정하지 않은 미국에게 조선이 단독적으로 전쟁범죄를 묻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둘째, 조선은 미국이 주한미국군을 철수하고 한미동맹을 폐기하면, 그것으로 미국의 사죄와 배상을 받는 것으로 여길 것입니다. 주한미국군 철수와 한미동맹 폐기는 자주통일강국건설로 이어질 것인데, 만일 조선이 미국의 사죄와 배상을 받기 위해 미국과 밀고 당기는 협상을 벌인다면, 사죄와 배상을 받기는커녕 주한미국군을 철수하고 한미동맹을 폐기하는 좋은 기회마저 놓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 조선은 미국의 사죄와 배상을 받는 문제를 제기하지 않은 채, 주한미국군을 철수하고 한미동맹을 폐기하는 시급하고 중대한 현안에 집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조선은 일본에게는 전혀 다른 태도를 취합니다. 조선은 일본이 일제식민통치시기에 저지른 엄청난 죄악을 공식 사죄하고, 그에 따른 배상을 해야 한다고 요구합니다. 

 

아시다시피, 2018년 10월 30일 한국 대법원은 일제강점기에 일제에게 강제로 동원되어 고통과 불행을 겪은 징용피해자들에게 징용에 책임이 있는 일본 기업이 한 사람 당 1억원씩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무려 13년 8개월 동안이나 질질 끌었던 징용배상문제가 마침내 법적으로 해결된 것입니다. 

 

2018년 12월 31일 한국의 강제징용피해자들은 일제강점기에 조선인을 강제로 징용하였던 일본 기업의 한국 내 자산을 강제로 압류하기 위한 법적 절차에 들어갔고, 2019년 1월 8일에는 대구지방법원 포항지원이 그들의 압류신청을 받아주었습니다. 이런 움직임은 징용에 책임이 있는 일본 기업이 손해배상을 하지 않고 버티기 때문에 그 기업의 자산압류를 강제로 집행하려는 것입니다.  

 

이러한 움직임은 일제강점기에 이른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당한 피해를 해결해주겠다면서 박근혜 정부가 대일굴욕외교로 조작해놓았던 이른바 ‘화해치유재단’이라는 것을 해산하는 결정을 문재인 정부가 2018년 11월 21일에 내린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최근 문재인 정부가 일제의 조선인 징용범죄에 대한 배상문제와 일제의 조선인 성노예범죄에 대한 배상문제를 해결하려고 힘쓰는 것은, 식민지피해배상문제를 해결할 조일협상을 앞두고 있는 조선에게 매우 유리한 국면을 열어놓은 것입니다. 남과 북은 일본을 상대로 하는 민족공조를 상호교감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민족공조로 식민지피해배상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힘쓰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상황이 자기들에게 매우 불리하게 돌아가자, 일본은 2018년 12월 20일 한국 해군 군함이 동해에서 일본해상자위대 소속 대잠초계기를 향해 사격통제레이더를 조준했다느니 뭐니 떠들어대면서 무모한 시비질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크게 오판하였습니다. 그런 유치한 시비질 따위로는 일본에게 매우 불리하게 돌아가는 상황을 결코 반전시킬 수 없으며, 되레 한국의 반일감정만 자극할 뿐입니다.  

 

이제 일본은 사죄와 배상을 회피해보려는 잔꾀에 더 이상 매달리지 말고, 우리 민족에게 저지른 범죄에 대해 사죄하고 배상하여야 하며, 재일조선인에 대한 민족차별정책을 전면 폐기해야 합니다. 이것만이 올해 일어날 엄청난 정세격변 속에서 일본이 낙오자로 영원히 굴러 떨어지지 않을 유일한 길입니다. 

 

♦ [강민화] - 장시간 대담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호석] - 우리 모두 희망과 신심을 갖고 평화와 통일을 실현하기 위해, 일본의 사죄와 배상을 받아내기 위해, 재일조선인에 대한 민족차별정책을 철폐시키기 위해 힘차게 싸워나갑시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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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날 위 영국…브렉시트안 부결 이어 정부 해산위기

칼날 위 영국…브렉시트안 부결 이어 정부 해산위기

등록 :2019-01-16 10:27수정 :2019-01-16 11:48

 

 

메이 협상안, 역대 최대 230표차 부결
코빈 노동당 대표, 정부불신임안 제출
3월29일 ‘노딜’ 브렉시트 가능성 커져
영국 의회에서 15일 유럽연합 탈퇴 승인투표가 진행되는 가운데 브렉시트에 반대하는 시민이 ‘(유럽연합에서) 떠나는 것은 곧 떠나는 것’이라는 글귀가 쓰인 피켓을 들고 시위를 하고 있다. 런던/ 신화 연합뉴스
영국 의회에서 15일 유럽연합 탈퇴 승인투표가 진행되는 가운데 브렉시트에 반대하는 시민이 ‘(유럽연합에서) 떠나는 것은 곧 떠나는 것’이라는 글귀가 쓰인 피켓을 들고 시위를 하고 있다. 런던/ 신화 연합뉴스
영국이 칼날 위에 서게 됐다. 영국 의회가 테리사 메이 총리가 주도한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브렉시트) 협상안을 사상 최대의 표차로 부결시켰다. 야당에서는 즉각 정부 불신임을 제출해, 정국의 파국조차 예상된다.

 

최대 표차 부결

 

영국 의회는 15일 메이 총리가 제출한 브렉시트 협상안을 230표차로 부결시켰다. 이는 영국 의회에서 95년만에 최대 표차의 현직 정부 패배이다. 이날 의회에서는 432명의 의원이 반대했고, 찬성은 202명에 불과했다.

 

이로써, 영국은 오는 3월29일로 기한이 만료되는 유럽연합 탈퇴에서, 유럽연합과의 아무런 새로운 관계 설정도 없이 내몰리게 될 우려가 커졌다.

 

일단 메이 정부는 의회의 앞선 의결에 따라, 3일 시한 내로 유럽연합과 다시 협상해 새로운 협상안을 제출해야 한다. 하지만, 메이 정부가 이 시한 내로 의회를 만족시킬 새로운 협상안을 마련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번 브렉시트 협상안에서 최대 쟁점은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 사이의 국경 개방을 보장하는 ‘백스톱’ 조항이었다. 영국이 오는 3월29일 유럽연합을 탈퇴한 뒤 21개월 동안의 과도기를 갖는 동안 유럽연합과 새로운 무역협정을 도출하지 못하더라도, 북아일랜드 국경 개방은 계속 유지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브렉시트 찬성론자 등은 영국의 주권과 통합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격렬히 반발했다.

 

이날 부결 사태는 브렉시트 강경론자뿐만 아니라 새로운 국민투표 실시를 주장하거나 더욱 온건한 브렉시트를 주장하는 쪽 모두가 가세하면서 벌어졌다. 메이 총리 정부의 집권 여당인 보수당에서도 118명이 반대에 가세했다.

 

15일 영국 하원에서 실시된 브렉시트 승인투표가 부결된 직후 테리사 메이 총리가 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런던/AFP 연합뉴스
15일 영국 하원에서 실시된 브렉시트 승인투표가 부결된 직후 테리사 메이 총리가 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런던/AFP 연합뉴스
메이 총리 정부 운명 불투명

 

메이 총리 정부의 운명도 바람 앞의 촛불이 됐다.

 

정부의 중대한 동의안이 이런 표차로 부결되면, 통상 총리가 이끄는 정부는 해산하는 것이 관례이다. 하지만, 메이 총리는 이날 부결 직후 성명에서 “하원은 말했고, 정부는 경청할 것이다”고 말해, 물러나지 않을 것을 분명히 했다.

 

제레미 코빈 노동당 대표는 정부 불신임안을 제출해, 16일 오후 7시에 표결에 들어간다. 불신임되면 총선이 실시된다.

 

불신임안을 일단 17일 오후 7시에 동의안 상정 투표를 거친 뒤 14일 내로 불신임 본안 투표가 이뤄져야 한다. 만약 이 시한 내로 현 정부나 다른 대안 정부가 신임을 얻지 못하면, 총선이 실시된다.

 

여당인 보수당은 현시점에서 총선에 치르면 노동당으로 정권이 넘어갈 우려가 있어, 일단 메이 총리를 지지할 것으로 보인다. 브렉시트를 주도하는 강경파인 보수당 의원 보리스 존슨 전 외무장관은 총리가 “브뤼셀로 돌아가 북아일랜드 백스톱이 없는 더 좋은 협상안을 협상할 막대한 사명을 받았다”며 정부 불신임안 투표에서 메이 총리를 지지할 것이라고 밝혔다.

 

보수당 정권 구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 북아일랜드의 신교도 정당인 북아일랜드연합당의 대표 아리엔느 포스터도 자신의 당은 메이 총리를 지지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메이 총리는 자신이 주도한 브렉시트 협상안이 사상 최대의 표차로 부결된 것을 감안하면, 그 운명을 장담하지 못하게 됐다. 보수당 내에서 브렉시트에 반대하는 의원들이 메이 총리 불신임을 통해 제2의 국민투표를 밀어붙일 가능성도 있다.

 

유럽연합, ‘영국이 원하는게 무엇이냐?’

 

유럽연합은 당혹과 우려에 빠졌다.

 

장-클로드 융커 유럽연합 집행위원장은 협상안이 부결돼서 무질서한 브렉시트의 위험성이 커졌다고 우려했다. 그는 협상안은 “질서있는 철수를 보장하는 유일한 방안이었다”며 자신과 도날드 투스트 유럽연합 이사회 상임의장은 영국 의원들을 달래기 위해 이번주 내로 추가적인 명확성을 가진 의지를 보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나는 영국이 가능한 빨리 그 의도를 명확히 해줄 것을 촉구한다, 시간이 거의 다됐다”고 말해, 영국이 원하는 것을 정확히 밝히라고 압박했다.

 

투스크 의장도 트위터에서 “유일한 긍정적 해결책이 무엇인지를 말한 용기를 최종적으로 말할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 영국이 해결책도 없이 무리한 요구를 한다고 시사했다.

 

브렉시트 협상안은 당초 지난해 12월에 의회에서 의결될 예정이었으나, 메이 총리가 부결을 우려해 이날로 늦췄다. 그동안 메이 총리와 유럽연합은 쟁점 사안인 백스톱을 완화하는 대안을 마련했다. 유럽연합 쪽은 백스톱은 적용된다고 해도 “가능한 단기간”으로 일시적일 것이라고 보장을 했었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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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europe/878575.html?_fr=mt1#csidxcf7b5a1701ddce48176a3292c51033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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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 ‘어뢰’에 대하여

천안함 어뢰가 거짓인 10가지 이유
  • 신상철 전 천안함 민군합동조사단 조사위원
  • 승인 2019.01.16 10:16
  • 댓글 0

국방부는 스스로 천안함에 폭발의 흔적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최종조사결과 보고서에 기록해놓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버블제트 어뢰’에 의한 ‘비접촉폭발’이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이 논리적 모순은 역설적으로 ‘어뢰’가 등장하지 않으면 해결될 수 없는 상황임을 말해주는 증거인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짚어보자면, 2010년 4월 15일 오후 1시 14분경 함미가 수면위로 올라오고 바지선 거치대에 탑재되면서 처음으로 선저하부의 모습을 세상에 처음 드러내었습니다. 하지만 거치대 10개가 무너지면서 다시 함미는 크레인에 매달려 있어야 했습니다.

그것을 잠깐 지켜보던 美대표단장 토마스에클스는 독도함으로 가서 본국에 이메일을 보냅니다. 선저하부 1∼3m 지점에서 비접촉폭발! 토마스에클스가 함미의 선저하부를 본 후 독도함으로 가 이메일을 보낼 때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20여분 밖에 소요되지 않았습니다.

다음 날인 4/16 함미는 백령도를 출발해 평택2함대를 향해 바지선에 실려 항해를 시작했으며 그 시각 국방부는 대국민 중간발표를 통해 ‘천안함 사고의 원인이 버블제트 어뢰에 의한 비접촉폭발’이라고 발표합니다.

 

[브레이크뉴스=문흥수 기자] < 부분발췌 >

현재 군 당국은 천안함 침몰원인에 대해 어뢰 등 외부 충격에 무게를 두고 있다. 또한 군은 폭뢰보다는 어뢰에 좀더 가능성을 두고 있으며 어뢰 종류로는 함체에 명중시키는 직격 어뢰 보다는 선체 하부에서 폭발시켜 강한 충격파와 고압 가스거품으로 배에 강한 충격을 주는 버블제트 어뢰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 출처 : http://www.breaknews.com/129702 )

국방부의 ‘버블제트 어뢰 가능성’ 발표는 바로 전 날인 4월 15일 함미가 최초 수면위로 모습을 드러낸 직후 본국에 ‘비접촉폭발(Explosive not contact)’로 이메일 보고한 美 잠수함 전문가 토마스에클스의 보고내용과 완벽하게 일치합니다.

그리고 국방부는 곧 바로 저인망 쌍끌이 어선들을 동원하여 그물코 간격을 좁힌 어망으로 해저를 훑으며 천안함을 반파시킨 어뢰찾기에 돌입합니다.

이 상황이 얼마나 모순인가 하면, 국방부가 판단하기에 ‘선체에는 폭발의 흔적과 증거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판단되는 순간 당연히 검토대상이 되어야 할 1 순위는 가장 흔한 선박사고이며 실제 선박운항사고의 80% 이상 차지하는 ‘충돌’과 ‘좌초’를 생각했어야 함에도 충돌과 좌초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반토막 난 선체의 절반 함수는 아직 물 속에 있고, 함미만 이제 겨우 처음 물 밖으로 나와 크레인에 매달려있는 모습을 본 국방관계자들이 한 눈에 ‘음, 폭발의 흔적이 전혀 없군! 그러면 비접촉폭발이군! 이제 어뢰를 찾아야겠군!’결론내리고 곧장 쌍끌이 어선을 투입하는 과정이 얼마나 유치하고 비약적이며 작위적인지 말 하는 것조차 부끄러운 일입니다.

‘버블제트 어뢰 비접촉폭발’이 언급된 날로부터 정확하게 한 달이 지난 2010년 5월 15일, 드디어 ‘어뢰’가 떡 하니 대평호 갑판 위에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국방부가 공개한 ‘어뢰’등장 영상의 첫 장면부터 석연치 않은 모습들이 잡힙니다.

송구한 말씀입니다만, 저는 이 영상과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속에서 울화가 치밀고 머리에는 열이 납니다. 국방부는 왜 이렇게 속들여다 보이는 거짓을 연출했던 것일까요?

위 영상은 ‘어뢰수거 장면’이라며 국방부가 공개한 영상입니다. 영상 촬영을 시작하며 2G 핸드폰으로 날짜와 시간을 확인시켜 주면서도 정작 어뢰가 그물에 걸려 올라오는 장면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미 갑판 양쪽 구석엔 ‘어뢰 모터(A)’와 ‘추진체 프로펠러(B)’가 올려져 있으며 둘 다 수십m 주황색 나일론 끈에 묶여져 있고, 그물은 소위 온갖 잡동사니의 천국이라는 서해바다 뻘밭에서 끌어올린 것이 맞나 싶을 정도로 깨끗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는 왜 국방부가 이렇게 곧 드러날 유치한 '쇼(show)'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영상을 찍으려면 바다에서 건져올리는 것을 찍든지, 모터와 추진체에 묶여져 있는 주황색 나일론 끈은 또 무엇인지, 심지어 스테인레스 클립밴드와 철사줄까지.. 낯 뜨거운 황당함의 연속이었습니다.

쌍끌이 두 척을 투입하여 해역을 샅샅이 훑었으나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던 대평 11호는 2010년 5월 15일 아침, 평소와는 다르게 해군 장성과 조사요원들이 대거 탑승한 날, 바다로 나가자마자 첫 항해에 어뢰 모터와 추진체를 한꺼번에 그물로 수거하는 쾌거를 이룹니다.

당시 이명박은 이 상황에 대한 보고를 받고 ‘천운(天運)’이라며 좋아했다는 보도가 나왔습니다. 46명이 사망한 사고에 ‘천운’이라니요..

갑판 위에 올려진 모터와 추진체는 그것이 해저에 가라앉아 있었다는 사실을 망각한 듯, 뻘은 물론 모래 알갱이 하나 묻어있지 않은 깨끗한 상태로 갑판 위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하늘이 내린 ‘천운의 어뢰’는 그렇게 우리 곁으로 다가왔습니다.

지금부터 국방부의 야심작 - ‘1번을 쓴 어뢰’가 왜 거짓인지.. 그 이유를 10가지로 압축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1. 백색물질의 분포

어뢰에 백색물질이 분포되어 있는데 특정한 곳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백색물질이 집중적으로 붙어있는 곳 하부 금속들이 모두 알루미늄 재질이라면? 백색물질과 하부금속과의 상관관계를 과학적으로 분석을 해야하는 것이 상식적이며 합리적인 접근일 것입니다.

그러나 국방부는 전혀 그렇게 하지 않았고 일방적 주장만 합니다. 백색물질에 대한 국방부의 주장은 어뢰 폭발 때 발생하는 고열(3000℃)로 인해 폭약 속 혼재된 알루미늄 성분이 산화하면서 백색 알루미늄산화물이 생성되었고 그 백색가루가 어뢰추진체에 날아와서 달라 붙었다고 주장합니다.

만약 백색물질이 날아와서 달라붙은 것이라면 백색물질은 무작위(random)하게 아무곳에나 부착되어야 국방부 주장의 논리에 맞는 것입니다. 그러나 특정부위, 그것도 알루미늄금속 상부에만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면 그것은 확률적으로도 존재할 수 없는 허구의 주장인 것입니다.

저는 이 문제에 대해 합조단 민간단장을 맡았던 윤덕용 전 카이스트 총장이 1심 증인으로 법정에 나왔을 때 질문하였습니다. “어떻게 백색물질이 무작위로 붙지 않고 특정금속 위에만 붙을 수 있느냐”며 질문을 하자 윤 총장은 “그렇게 붙는 무언가가 있겠지요.”라며 얼버무렸습니다.

어뢰 추진체 후미 끝단을 살펴보면 구석구석 백색물질이 발견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모두 알루미늄 재질 금속에만 있고, 알루미늄 성분이 아닌 곳(스테인레스, 황동, 철)에는 백색물질이 전혀 없거나 있다하더라도 주변의 백색가루 일부가 떨어져나와 묻어 있는 정도에 불과합니다.

2010년 통합진보당의 이정희 전 대표(당시 의원)는 어뢰추진체에서 백색가루 일부를 긁어낸 시료를 국방부로부터 건네받아 캐나다 매니토바 대학의 양판석 박사, 미국 버지니아대 이승헌 박사께 보내어 성분분석을 의뢰하였는데 그 결과 국방부의 주장(알루미늄 산화물)과는 달리 ‘알루미늄 수산화물’이라는 사실이 확인되었습니다.

이에 대한 논란이 일자 KBS 추적60분 팀은 국내 400명의 과학자에게 이메일을 보내 이 문제를 누구에게 의뢰하면 가장 권위있는 결론을 얻을 수 있는지 조사한 결과 ‘안동대 정기영 박사’추천이 압도적이라 정기영 박사께 동일한 시료를 보내어 분석한 결과 ‘알루미늄황산염수산화물’로 결론남으로써 국방부의 주장은 과학적 근거가 없음으로 판명난 바 있습니다.

안동대 정기영 박사의 분석결과는 ‘수산화물’입니다. 국방부의 주장인 ‘산화물’과의 차이는 성분분석 결과 시료속에 ‘수(水)’- 물(H2O)성분의 존재유무의 차이이며, 3천도 고열의 존재여부와 직결되는 것입니다.

국방부의 주장대로 폭발원점에 3천도의 고열이 존재했다면 고압으로 형성된 버블 내 바닷물은 모두 증발하고 고열의 가스만 존재하므로 그 상황에서 발생한 산화물(백색가루)에는 물(H2O)성분이 존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미국 과학자분들과 안동대 정기영 박사의 분석결과 물(H2O)성분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확인됨으로써 결론적으로 <물(H2O)성분의 존재>는 <물을 증발시킬만한 고열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국방부의 주장은 ‘거짓’이라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안동대 정기영 박사는 “입자가 와서 달라붙은 것이 아니라 자라난 조직”이라고 말합니다. ‘자라난’ 물질은 하부 금속으로부터 산화되어 생성된 물질 즉, ‘알루미늄 녹’을 의미하는 것으로 저는 판단합니다.

1심 법정에 증인으로 출석한 정기영 박사는 “만약 백색물질의 최초 채취과정부터 관여를 했더라면 오리지네이션(Origination, 발생기원)까지 알 수 있었을 것”이라는 증언을 한 바 있으며 국방연구소 이근득 박사의 “알루미늄 황산염 수산화물이라고 하는 것은 저희가 예측했던 것 중의 하나”라는 말은 “폭발이 없었다”는 고백과 다르지 않습니다.

2. 페인트 아래 백색물질
국방부 말대로 백색물질이 날아와 붙었다면, 어뢰의 검정색 페인트 위에 존재해야 합니다. 그러나 검정색 페인트 하부에 백색물질이 있고, 또한 백색물질이 넓게 퍼져 있는 곳엔 아예 검은색 페인트 자체가 없습니다. 검정색 페인트를 살짝 들춰보면 그 밑에 백색물질이 가득한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 검정색 페인트를 살짝 들어보면 그 밑에 하얀 물질이 가득하다.[사진 : 블로그 '가을밤']

저는 지난 9월13일 평택2함대 어뢰검증에서 이 부분에 대한 검증 및 확인을 희망하였습니다만, 국방부에서 어뢰를 두꺼운 하얀 비닐로 포장해 놓고 유리케이스 안에 넣어 밀폐시킨 탓에 검은색 페인트를 칼로 긁어보거나 들추어보는 검증을 하지 못했던 것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위 그림 좌하단의 그래픽과 같이 외부에서 와서 부착(흡착)되었다면 금속에 발려진 페인트 위에 백색물질이 존재해야 합니다. 그러나 내부금속으로부터 발생된 백색가루가 존재하는 곳에는 검은 페인트가 존재하지 않거나 검은 페인트 하부에 백색물질 형태로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기에 저는 이 물질을 ‘알루미늄 부식물(녹)’이라 규정하는 것입니다.

3. 네티즌, “우리집 보트가 ‘1번 어뢰’ 맞았냐?”
어느 한 네티즌이 자신의 보트 프로펠러 사진을 찍어 아고라에 올렸습니다. 그러면서 “우리집 보트가 ‘1번 어뢰’ 맞았냐?”고 반문했습니다. 네티즌의 사진을 보면 천안함 ‘1번 어뢰’ 백색물질과 똑같습니다.

▲ 다음 아고라 네티즌이 찍어 사이트에 올린 보트 프로펠러(오른쪽), 천안함 '1번 어뢰' 프로펠러(좌측 아래), 해수에서 부식된 프로펠러(좌측 상단)

바로 이것입니다. 알루미늄황화수산화물이며, 알루미늄 부식물(녹)입니다. 우리가 흔히 해안 인접 도로를 운전하다가 발견하게 되는 ‘중고 보트 판매점’뒷 뜰에 진열된 소형 보트들 알루미늄 재질의 프로펠러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백색물질 - 알루미늄수산화물(녹) 바로 그것입니다.

4. 어뢰의 부식상태
어뢰 모터와 추진체 모두 세밀히 살펴보면 아무리 좋게 보아준다해도 최소한 몇 년은 어디선가 썩다가 나온 고철덩어리입니다. 아래 사진은 ‘1번 어뢰’ 모터에서 시편을 잘라 낸 부위의 사진입니다. 매우 깊숙한 곳으로부터 상당 기간 부식이 진행되어 왔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 어뢰 모터 부식 상태 [사진 : 블로그 '가을밤']

어뢰가 존재했다면 처음부터 녹슨 어뢰를 쏘진 않았을 테고, 겨우 50일간 바닷속에 있었을 뿐인데 이렇게 구석구석 썩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모터 코일은 구리 재질인데 녹청이 잔뜩 끼였고 꽁꽁 감아둔 코일 사이사이가 녹슨게 보이고 있습니다. 2010년 6월 방한하여 독자적으로 조사를 실시하였던 러시아조사단은 조사결과 “1번 어뢰의 부식상태로 볼 때 천안함과 관련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덧붙여 녹슨 어뢰 곳곳에 보이는 볼트와 너트, 그것이 저렇게 풀려있는 메카니즘에 대해 국방부는 과연 합리적인 설명을 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폭발이 너트를 돌려서 풀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5. 녹 위에 쓰여진 ‘1번’

▲ 어뢰에 매직으로 쓴 ‘1번’은 녹 위에 쓰여졌다. [사진 : 블로그 '가을밤']

6.2 지방선거를 두 달여 앞두고 하늘이 내린 어뢰에 당시 (한나라당을 상징하는) ‘푸른색 1번’이 적혀있었다고 하여 정치적인 해석의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습니다만, 그와 상관없이 어뢰에 매직으로 쓴 ‘1번’은 분명 녹 위에 쓰여진 것으로 보입니다. 사진을 확대하면 매직글씨가 녹 위를 지나가고 있는 것이 확인됩니다. 만약 신품일 때부터 1번이 쓰여있었다면 녹이 매직을 뚫고 올라와야 합니다. 더구나 1번이 쓰여지기 전에 표면을 세척제(WD-40)등으로 깨끗이 닦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닦은 곳과 구석에 닦지 않은 곳의 잔유 녹물 흔적이 확연하게 구분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1번 역시 녹 난 부분을 피해서 쓴 것으로 보입니다.

6. ‘1번’ 매직 테스트 흔적

황당하게 느껴질 수 있는 매우 특이한 행태 하나가 드러났습니다. 어뢰 반대쪽 면 구석에 ‘매직을 사전 테스트’한 흔적이 발견된 것입니다.

▲ 매직으로 콕콕 찍어보고 몇 군데 테스트한 자국을 찾았다. [사진 : 블로그 '가을밤']

상황을 유추해보건데, ‘1번을 쓰라는 명령을 받은 당사자’는 무척 긴장했던 것 같습니다. 중고 어뢰를 아무데서나 뚝딱 만들어 올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만약 상부에서 만족할만한 ‘1번’이 안쓰여지면 어쩌나 심리적인 부담이 컸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매직잉크가 제대로 나오는지, 어뢰 표면에 쓰면 어떻게 변하는지 몹시 궁금했던 것 같습니다. 다양한 형태의 테스트 흔적이 고스란이 남았을 뿐만아니라 반듯한 표면에 썼을 때, 흠이 패인 곳에 썼을 때 어떻게 다른지 테스트도 해보고, 물이 묻으면 어떻게 되는지 매직을 쓰자마자 테스트도 해 보았습니다. 실전에서 실수하지 않고 잘 쓰기 위한 각고의 노력을 하였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7. 해양생물체 - 참가리비

어뢰 추진체 후부 구멍 속에서 참가리비가 발견되었습니다. 어뢰 추진체 뒷부분 동그란 구멍 안에 참가리비가 있고, 그 위에 백색물질이 붙어 있습니다. 이것이 논리적으로 설명 되려면, 어뢰 폭발과 동시에 하얀 가루가 생성되는 0.00몇 초 사이에 참가리비가 헤엄쳐 구멍 속으로 재빨리 들어가 있다가 날아오는 백색물질을 뒤집어 써야만 논리적으로 성립됩니다.

그리고 “참가리비는 동해안(알래스카, 홋가이도, 하와이 등)과 같은 맑은 물에서만 살기 때문에 이것이 탁한 서해바다에 빠진 어뢰 속에 있다는 것이 말이 안된다”는 참가리비 양식전문가의 지적도 있었습니다.

▲ 어뢰 추진체 뒷부분 동그란 구멍 안에 가리비가 있다. [사진 : 블로그 '가을밤']

이처럼 참가리비 의혹이 제기되자 국방부 수사관을 전쟁기념관으로 급히 보내 유리상자 안에 비치돼 있던 어뢰에서 가리비를 후벼파 없애버렸고, 그 시간 국방부 조사본부에서는 어디서 구했는지 2.5×2.5cm 가리비 껍데기를 만들어 그것이 서해안에도 자라는 ‘비단가리비’라고 언론에 발표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사이즈’에 대한 논란에 휩싸입니다. 조개가 나온 어뢰 추진체 뒤 구멍 크기는 지름이 불과 1.8~2cm 밖에 되지 않는데 어떻게 2.5×2.5cm 조개껍데기가 들어가 앉아있을 수 있느냐는 문제제기였습니다.

웃지못할 이 해프닝을 분석한 결과, 국방부에서 구멍을 착각한 것으로 판단되었습니다. 어뢰 뒤쪽 뿐만아니라 앞쪽에도 마치 구멍인 것처럼 보이는 움푹 패인 곳이 4개가 있는데 그곳 지름은 대략 5cm정도 됩니다. 그렇다 보니 5cm 구멍의 절반으로 잡아 2.5×2.5cm크기의 조개를 만들어서 그것이 구멍 속 조개껍데기라며 언론에 공개하는 황당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결국 참가리비가 발견된 구멍의 지름이 불과 1.8~2cm 밖에 되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오고 그것이 사실임이 확인되자 국방부는 무려 열흘동안 침묵으로 일관하였으며 급기야 1번 어뢰를 통째로 국방부조사본부 지하 창고로 이동시키고 전쟁기념관 현장에는 어뢰 유사모조품으로 대체해 버렸습니다.

2010년 11월 KBS <추적60분>팀이 ‘의혹의 천안함'편에 참가리비 부분도 포함시켜 방영을 준비하자 ‘참가리비’부분을 삭제하지 않으면 방영을 못하도록 KBS측을 압박하여 결국 그 부분은 삭제한 후 방송이 되었습니다.

8. 또 다른 해양생물체(붉은멍게 . 거머리형체) & 해양식물체(면사체)
참가리비에 이어 이번에는 또 다른 해양생물체들에 더해 급기야 해양식물체까지 등장합니다. 우선 ‘붉은 멍게 유생’부터 보시겠습니다.

▲ ‘1번 어뢰’ 프로펠러에서 동해안에만 자라는 붉은멍게 유생이 발견됐다. [사진:가을밤]

‘1번 어뢰’ 프로펠러에서 동해안에만 자라는 붉은멍게 유생이 발견되었습니다. 프로펠러 블레이드 날 모서리에 빨간 점들이 콕콕콕 찍혀있는데, 네티즌들이 정밀 마이크로 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분석한 결과 촉수가 있는 해양생물체 - ‘붉은멍게 유생’(학명 : Red Sea Squirt)이었습니다.

국방부는 붉은 멍게 유생을 모두 없애버린 후, “수거해 DNA 분석을 하였으나 생명체가 아니었다”고 발표한 후 침묵으로 일관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뢰에서 발견된 또 다른 해양생물체는 ‘거머리 형태의 해양생물체’입니다. 이것은 마치 ‘납자루’ 혹은 ‘거머리’와 유사한 형체를 갖고 있으며 이 해양생물체가 발견된 곳은 ‘어뢰 모터’의 곳곳에서 발견되었습니다. 현재는 정밀 마이크로 사진기로 촬영한 영상에만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해양생물체 뿐만아니라 해양식물체(우측, 면사체)도 발견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촉수가 달린 해양생물체와 섬유질의 해양식물체는 어뢰폭발과 3천도 고열과 화염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강력한 증거인 것입니다.

9. 어뢰 샤프트를 감고 있는 ‘철사뭉치’의 정체
지난 여름 (2018. 7. 19) 항소심 공판에서 국방부에서 재판부에 제출한 ‘1번 어뢰’의 최근 모습이 담긴 CD가 공개된 바 있습니다.

당시 9월 13일로 예정된 재판부, 검찰, 변호인단과 함께 평택2함대에서 천안함 선체와 ‘1번 어뢰’에 대한 실물 검증이 계획되어 있어 사전에 ‘1번 어뢰’의 현재 상태가 어떠한지 ‘사진’이라도 제출할 것을 변호인단이 국방부에 요청한 결과로 제출받았던 CD였습니다.

그런데 수십 장의 영상 가운데 특이한 사진 한 장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평택2함대의 합조단 요원이 ‘1번 어뢰’ 샤프트에 칭칭 감겨있던 철사줄을 펜치로 끊는 장면이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대평 11호 갑판 구석에 놓여져 있던 어뢰 모터와 추진체에서 웬 ‘철사뭉치’와 ‘클립밴드’가 나왔는지에 대한 논란과 공방은 작년 2017년 5월 18일 항소심 제5차 공판에서 이미 뜨거운 쟁점으로 다루어진 바 있습니다만, 어떤 논란이었는지 요약하여 말씀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1번 어뢰 추진체’를 덮어 놓은 그물을 젖히자 해저 뻘 속에 50일간 처박혀 있었던 것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깔끔한 상태의 어뢰 추진체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계측요원이 줄자를 들고 어뢰추진체의 치수를 재기 시작합니다.

계측요원 2명이 줄자로 어뢰추진체를 측정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어뢰추진체 샤프트에 웬 ‘철사뭉치’가 칭칭감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이 ‘철사뭉치’가 도대체 어떻게 ‘1번 어뢰’ 샤프트에 칭칭 감겨져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것이 그냥 걸쳐진 정도였다면 해저에서 끌어올리다 보니 해저에 있던 철사뭉치가 걸려 올라왔다는 핑계라도 댈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넓디넓은 서해바다에 부식되지 않을 만큼 최근에 버려진 철사뭉치가 어뢰에 걸려 올라올 확률은 또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런데 단순히 ‘걸쳐진’ 상태가 아니라 ‘추진체 샤프트에 칭칭 감긴’철사뭉치였던 것입니다. 이것을 합조단이 어떻게 처리했는지 보여주는 사진이 금년(2018) 항소심 7월 19일 공판에서 공개된 바 있습니다. 합조단이 평택에 도착한 어뢰샤프트에 감긴 저 철사뭉치를 ‘펜치로 절단’하는 장면의 사진이 CD에 담겨 제출되었던 것입니다.

그 철사뭉치가 대평11호 갑판위에서 제거되지 않고 평택2함대에 까지 가서야 펜치로 절단해야만 했다는 것은 대평11호 갑판에서는 제거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는 뜻이고, 2함대에서 펜치를 사용해 철사뭉치를 끊어냈다는 것은 간단하게 손으로 제거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과연 북한이 쏜 최신 버블제트 어뢰가 천안함 하부에서 폭발하였고, 해저에 50일 동안 있다가 막 건져낸 어뢰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요?

이렇듯 황당한 ‘철사뭉치’의 존재를 통해 제가 유추할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시나리오입니다.

- 천안함 비접촉폭발용 어뢰를 등장시키기로 결심하신 분.

- 국방부 창고에 썩은 고물어뢰 하나가 있다고 보고한 분.

- 그 어뢰를 즉시 백령도 현장으로 갖다주라고 지시한 분.

- 철사 등과 얽혀져있는 어뢰를 포장해 백령도로 보낸 분.

- 백령도에 도착한 어뢰를 대평11호 갑판위로 이송한 분.

- 주황색 나일론 끈에 묶어 바닷속으로 담궜다가 꺼낸 분.

- 갑판위에 올려놓고 치수측정을 하는 척 모션을 취한 분

- 11호에서 평택2함대 합조단으로 어뢰를 이송한 분.

 

이 과정에 참여했던 모든 당사자들이 자신에게 부여된 임무에만 충실하느라 정작 샤프트에 감겨있던 철사뭉치의 존재 이유를 몰랐고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어뢰추진체가 얼마나 극비사항인지는 모두가 알고 있었던 터라 조심스러웠던 반면, 철사뭉치를 제거하라는 명령은 없었으니 제거하지 않은 채 계속 이동했을 개연성이 충분하다 할 것입니다.

이 어뢰추진체를 받아 든 평택2함대 합조단 요원들의 업무수행 과정도 황당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샤프트에 철사뭉치가 칭칭 감겨왔으니 이게 무슨 의미인지 논의를 하였을 것이고 그것을 제거하기로 결정하였으나 손으로 제거하기가 힘들자 펜치로 끊어내면서 그것도 <수행한 과업>이라고 사진을 찍어 남겨놓았지 않았을까 추정합니다.

그러던 차 지난 9월 13일 어뢰검증을 앞두고 <어뢰의 현재 상태를 사진으로 보내달라>는 변호인단의 요구에 부응키 위해 국방부가 보낸 사진들 속에 펜치로 철사끊는 장면이 포함되어 왔던 것입니다. 이렇듯, 거짓은 거짓을 낳고, 여기저기 증거와 흔적들을 남겨놓고 있으니 <모든 범죄는 반드시 흔적을 남긴다>는 법의학자 마르케 베네케의 명언을 절절히 실감하게 됩니다.

10. 샤프트에 감겨있었던 ‘클립밴드’의 정체
이번에는 ‘스테인레스 클립밴드’입니다. 클립밴드(Clip Band)는 설비관련 일을 하시는 분들에게는 매우 흔하고 친숙한 부품입니다.

무언가 묶거나 결속할 때 플라스틱보다 더 강력하고 오랜기간 결속해야 할 경우 사용하는 밴드로 나사식 타이트(Tight)가 붙어 있어서 강력한 결속이 가능한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일반 가정에서는 주로 도시가스와 가스렌지 를 이어주는 호스를 결속하는 부분에 많이 사용됩니다.

이 재질은 ‘스테인레스(stainless)’라 부식에 강한 것이 특징이지만, 엄밀히 말해 스테인레스 재질도 수분에 오래 노출되면 어느 정도 녹이 발생합니다. 부식에 강한 스테인레스 레벨에도 등급이 있어서 ‘SUS304’, ‘SUS316’과 같이 등급을 매겨 부식에 강한 정도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이 클립밴드가 왜? ‘1번 어뢰’에 철사뭉치와 함께 걸쳐져 있었던 것일까요? 어뢰 샤프트에 선명하게 나타나 있는 클립밴드 결속 흔적은 클립밴드가 샤프트에 상당기간 결속되어 있었던 것을 분명하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우측사진 붉은 원) 이것은 무거운 추진체를 이동하기 위한 목적으로 오랫동안 걸어 두었을 것으로 저는 추정하고 있습니다.

계측요원들이 펜치는 안가져갔는지 현장에서 철사뭉치는 제거하지 못했지만, 드라이버는 가져갔던 듯합니다. 클립밴드는 현장에서 나사를 풀어 바닥에 덩그러니 놓여져 있습니다.

결언(結言)
우리 국방부는 이제 진실을 말해야 합니다. 어뢰 구멍 속에서 발견된 ‘참가리비’, 어뢰 날개 끝에서 발견된 무수히 많은 ‘붉은 멍게 유생’, 모터 곳곳에서 발견된 ‘거머리형 해양생물체’그리고 백색물질 곳곳에 박혀 있는 해양식물체 등...

그것도 모자라 ‘철사뭉치’와 ‘클립밴드’까지 등장하며 ‘1번 어뢰’의 불편했던 과거와 이력을 스스로 말해주고 있으니 국방부, 그리고 이 황당한 조작과 왜곡에 적극 가담한 사람들의 양심적 고백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영원히 진실을 땅 속에 묻어 둘 수 있을 것이라 믿었던 그들의 환상과 기대가 깨지는 날이 바로 ‘진실이 승리하는 날’이 될 것입니다.

끝으로, 대평 11호 갑판 위의 ‘모터’와 ‘어뢰추진체’에 묶여 있는 십 수 미터 길이의 주홍색 나일론 줄의 용도를 분석하는 것으로 글을 맺고자 합니다.

어렵게 준비한 모터와 어뢰추진체를 서해 바다에 던져 넣으면, 심청이 빠졌다는 바로 그 인당수 뻘 속으로 처박혀 쌍끌이 그물로 건져올리지 못하게 될 것이 우려되므로 아예 긴 주홍색 나일론 줄에 묶어 놓아 만약에 대비하는 그들의 ‘어설픈 꼼꼼함’이 한심해 보입니다.

정작 어뢰모터와 추진체를 건져올리는 순간의 장면이 없었던 이유 또한 그러한 사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지난 10월 초, <좌초에 대하여>를 시작으로 <프로펠러 손상> - <충돌> - <잠수함> - <폭발> - <비접촉폭발> - <어뢰>에 이르기까지 천안함 침몰사고에 대하여 제가 판단하고 분석한 내용을 성실히 그리고 열심히 작성하여 말씀드렸습니다.

긴 글 보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신상철 전 천안함 민군합동조사단 조사위원  minplusnews@gmail.com

icon관련기사icon천안함에 폭발이 없다고 주장하는 10가지 이유icon폭발의 흔적이 없기 때문에 ‘비접촉 폭발’이라는 국방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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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보다 더 잘한 시진핑의 군 리더십

[윤석준 차밀] 트럼프 보다 더 잘한 시진핑의 군 리더십
 
시징핑은 트럼프를 이길 수 없다?
 
윤석준  | 등록:2019-01-15 17:33:38 | 최종:2019-01-15 17:39:09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2018년 한해 동안 세계 2대 군사강대국 미국과 중국 대통령과 주석(主席)의 군 통수권자 리더십에 대한 평가가 극한 대비로 나타났으며, 놀라옵게도 전문가들은 군 리더십 발휘에 있어 트럼프 대통령 보다 시진핑 주석에게 더 후한(?) 점수를 주고 있다. 여기에서 후한 점수는 정치적 이념을 구현하기 위한 합법적 폭력수단인 군사력을 운용함에 있어 군통수권자로서의 사상과 덕목 등의 리더십(leadership)에 대한 평가이다.

특히 지난 12월 28일 자 『뉴욕타임스(NYT)』지는 미 공화당에게 “더 이상 트럼프 대통령에게 미국의 국정을 맡길 수 없다”면서, “지난 12월 20일의 제임스 매티스 국방장관 사임을 들어, 트럼프 대통령의 군에 대한 리더십 발휘에 더 큰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여 트럼프 해임(fire) 조치를 제안하였다. 이는 지난 11월 19일 자 『뉴욕타임지』가 트럼프 대통령의 미군에 대한 리더십 문제를 제기한 이후 가장 강력하게 비판한 논조(論調)였다.

반면, 지난 8월 24일자 『사우스 차이나 모닝 포스트(South China Morning Post)』지는 시진핑 주석의 8월에 실시된 중국군 장성 진급 및 보직 사례를 들어 시 주석의 군통수권 행사가 과거와 같은 정치적 성향이 아닌, 미래전을 준비하고 싸워서 이길 수 있는 군대로 개편하기 위한 리더십으로 발휘되고 있다면서 매우 긍정적 평가를 내렸다. 또한 지난 12월 16일자 『China Daily』는 “미국 등 서방 주요 국가들이 중국의 군사력 운용에 대해 편견(偏見)을 갖고 있다”면서 “중국의 군사력 사용은 미국이 보이는 유일한 압박과 강제적 수단이 아닌, 항상 외교적 협상 이후 마지막 수단으로 간주되며, 이마저 일대일로에 의한 운명공동체를 지향하는 수준과 범위 내에서 적용될 것이다”고 보도하였다.

사실 미국이 세계 구도와 질서 개편에 있어 개입을 주저하여 고립을 지향함으로써 초래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평화와 번영을 견지하는 국제기구 지원, 보편적 자유와 평등을 지향하는 민주주의 확산과 시장경제를 중심으로 한 글로벌 시대를 주도하는 미국의 이념과 중국 중심의 중화주의, 인민 민주주의 독재와 기획경제에 의한 공산체제를 강요하는 중국 이념을 책임지는 양국 지도자들 간 리더십 비교가 있을 수 없으며, 특히 군사력 운용 개념이 전혀 다른 양국 지도자의 군통수권자 리더십을 비교하는 것은 더 더욱 있을 수 없다.

하지만 2018년 한 해 동안 우리는 세계 구도와 질서 개편을 주도하는 미국 트럼프 대통령과 후발주자인 중국 시진핑 주석 간 군통수권 리더십 발휘에 있어서는 극한 차이를 나타내는 것을 경험하였으며, 현재는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실망과 시진핑 주석에 대한 기대가 함께 교차하고 있다.

이는 현 국제구도를 주도하는 미국 트럼프 대통령과 이러한 트럼프 대통령을 견제하기 위해 임기 없는 주석직을 보장받은 중국 시진핑 주석 간 군통수권자로서의 사상과 덕목에 있어 다음과 같이 너무 크고 차이가 있는 대조를 보였기 때문이었다.
 
첫째, 역사적 인식이다.

우선 트럼프 대통령은 군통수권자이자 대통령으로서 세계 구도와 질서 개편을 주도해야 할 미국의 역사적 인식을 저버렸다. 예를 들면 미국의 역사적이며 인종적 동맹인 나토(NATO) 회원국에 대해 국방비를 올리지 않으면, 미국이 NATO에서 탈퇴할 것을 선언한 사례였다.

ⓒ 셔터스톡

트럼프 대통령은 나토가 2020년까지 GDP의 2% 수준으로 국방비를 올리겠다고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나토를 믿지 못하겠다면서 ‘욱박지르고’ 있었다. 이러한 트럼프 대통령의 나토에 대한 편견은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결정을 번복할 가능성을 제한시키는 역효과로 나타났다. 한마디로 “미국 마저 불신하는 유럽연합에 영국이 다시 들어가 무슨 이득이 있겠느냐”는 영국인들의 반문이 팽배한 현상으로 귀결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과거 역사적으로 미국의 충실한 동맹으로 행동하여 나토의 비난받던 영국마저 미국을 불신하고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증명하는 것이었다.

반면, 시진핑 주석은 중국의 군사굴기(軍事崛起)에 위협을 느끼는 주변 약소국에 대해 실크로드(Silk Road) 개념에 의한 역사적 연계성과 일대일로(一帶一路)의 지리적 선의(善意)를 제시하여, 이들 국가의 중국 위협론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키면서 중국의 이익을 자연스럽게 적용시키고 있다. 더욱이 일대일로의 지향점을 “운명공동체”로 제시하여, 2017년 1월 20일 취임 다음날 바로 TPP 탈퇴를 선언한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에 위협을 느낀 아세안(ASEAN)에게 위안을 주었다. 현재 아세안 학자와 전문가들은 미국과 중국의 약소국을 대하는 태도가 과거와 다르게 되바뀌었다고 하소연하고 있다. 한마디로 트럼프 대통령과 시 주석 간 군통수권자로서의 주변국과 동맹국을 보는 역사적 접근과 인식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중국 인민해방군 해군의 제2호 항모의 시험 항해장면. ⓒ인민망

둘째, 자질(資質)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주요 미 국방이슈와 안보정책에 대한 방향과 지향점을 10대 소년과 같이 트위트(Tweet)을 이용해 공개함으로써 미 국방정책과 군사전략의 위상을 저하시켰으며, 모든 국방정책과 군사작전을 일관성 없는 “사례(case)” 위주로 다루었다. 이는 그동안 정치가 아닌, 냉혹한 비즈니스에 익숙한 트럼프 대통령의 군통수권자로서의 자질이 의문시되는 우려가 현실로 나타난 것이었다. 더욱이 그동안 트럼프 대통령의 자질론을 보호해 주었던 “워싱턴 어른그룹(Adult in the Room)”이었던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수석보좌관 H. R. 맥마스터스 육군중장과 백악관 비서실장 존 켈리 전(前) 해병대 대장의 퇴장에 이어 마지막으로 제임스 매티스 전(前) 국방장관이 지난 12월 20일에 사임하여 트럼프 대통령의 군통수권자로서의 자질에 대한 우려를 증폭시켰다.

반면, 시진핑 주석은 당중앙군사위원회(CMC)에서의 과거 경험을 토대로 군을 잘 이해하는 측근을 활용하여 부패한 군부내 파벌을 반부패운동으로 쇄신하고, 당군사위원회 조직을 군부 파벌이 아닌 시진핑 자신의 군통수권위로 강화하며 군정과 군령을 모두 장악하는 리더십을 발휘하였으며, 이를 통해 “중국군에 대한 문민통제 원칙”을 공고화시켰다. 과거와 달리 당중앙군사위원회 내 민간인은 시진핑 주석이 유일하나, 시 주석은 군복 차림으로 당중앙군사위원회 연합작전지휘소를 방문하고, 단독으로 군사열병식을 사열하는 등의 군 장악 능력을 보이며 문민통제 원칙을 시현하고 있다. 이에 전문가들은 선거에서 갑자기 군통수권자로 임명된 트럼프와 젊어서부터 당중앙군사위원회에서 근무하면서 군의 문제를 잘 이해한 시진핑 주석과는 군통수권자로서의 자질부터가 달랐다고 지적한다. 민주적 선거에 의해 군통수권자를 ‘선발’하는 미국과 당 원로의 ‘지명’에 의해 정치 지도자 수업 과정을 거쳐 군통수권자가 되는 중국 간에는 근본적 차이가 있으나, 실제 트럼프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 간 군통수권자로서의 자질에서는 너무 많은 차이를 보였다.

ⓒ 셔터스톡

셋째, 군사력 운용에 대한 시각이다.

대표적 사례가 지난해 5월부터 증폭된 멕시코 캐러밴 난민 행렬의 목적이 멕시코 난민 신청이 아닌, 미국으로의 난민 신청으로 나타나자, 트럼프 대통령이 이를 미국에 대한 위협으로 정의하면서 육군 5,000명을 멕시코 국경지대에 배치한 사례였다. 이는 당시 러시아와 중국 그리고 북한으로부터의 핵탄도 미사일 위협에 대응하여 미 본토 방어 임무에 집중하던 북부사령부가 갑자기 비무장 난민행렬에 대응해야 하는 임무를 부여받은 상황으로 전환된 것이었다. 이에 당황한 제임스 매티스 전(前) 국방장관이 현지 부대를 방문하여 임무 수행에 의아해 하는 장병들을 설득해야 했다. 당시 트럼프 대통령의 결정은 중간선거를 염두에 둔 정치 쇼였으며, 전문가들은 이를 대통령이 미군을 국내 정치에 활용하지 않는 묵시적 전통을 무시한 처사로 평가한다. 심지어 트럼프 대통령은 워싱턴 시내에서의 군사 퍼레이드 실시와 전략군 임무를 수행하는 미 공군에서 분류하여 제6군 우주군(Space Force)을 창설하라는 지시를 국방부에 일방적으로 시달하였다.

반면, 시진핑 주석은 1989년 뎬안먼(天安門) 사건과 티벳과 신장자치구 반정부 시위 진압 등 중국인민해방군이 중국 인민의 반정부 시위 진압에 동원된 중국군의 불명예를 씻기 위해 집중하였다. 이를 위해 부패한 소수 군부 지도부에 의해 행사되던 군령을 장악하여 중국군 운용에 대한 과거 오해를 불식시키고자 노력하였다. 특히 무장경찰(PAP)에 이어 중국 해양경찰(CCG)을 당중앙군사위원회에 배속시켜 중국군의 국내 정치 개입 가능성을 낮추고, 남중국해에서의 주변국 및 미국과의 군사적 충돌 가능성을 제한시켰다. 총 12차례에 걸친 미 해군의 남중국해 항행의 자유작전(FONOP)과 영국, 프랑스, 호주와 일본 등의 FONOP 실시에 대해 중국해군과 해경이 비교적 유연한 대응을 보인 사례도 이러한 맥락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일본 해상자위대이 FONO에 대해서도 감정이 아닌, 유연한 태도를 보여 당시 군사전문가들을 놀라게 하였다.

ⓒ 셔터스톡

넷째, 의사결정 성향이다.

우선 트럼프 대통령은 미군 운용을 독단적으로 결정하였으나, 시진핑 주석은 비교적 신중한 결정과정을 거치는 성숙된 태도를 보였다. 지난 12월 20일 시리아 미군의 일방적 철수는 트럼프 대통령의 개인적 결정이었으며, 언론 보도에 의하면 심지어 미 합참의장 조지프 던포드 해병대 대장과도 협의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놀라옵게도 시리아 쿠르드민주군(SDF)은 지난 십년 간 미국의 이슬람국가 테러 위협을 지원한 역할을 무시하고 시리아 정부군의 화학무기 등 대량살상무기 위협에 직면한 쿠르드민주군을 불과 2,000 여명에 이르는 시리아 미군 철수를 결정한 것은 국방비 절약와 작전효율성이었다. 더욱이 트럼프 대통령은 정책결정 과정에 참가해야 할 각료와 실무진들을 배제하거나, 고립시켜 혼선을 유발하고 주무 장관과 갈등을 불려 일으켰다. 이는 전 세계 미국의 동맹국과 파트너십 국가들이 향후 미군의 세계 경찰군 역할 수행에 의구심을 보내며, 누구와 협의해야 하는지를 모르는 주된 이유가 되고 있다.

반면, 시 주석은 자신이 주임을 맡은 『국방개혁영도소조(원명: 中國國防軍事改革領導小組)』 정책적 과정을 통해 2016년 11월 26일에 『국방개혁 의견(이후 국방개혁)(원명: 關于國防和軍隊改革深化的意見)』을 추진하여 무리없이 중국군을 한 단계 끌어 올렸으며, 2017년에는 2049년까지 세계 일류 군대를 만들겠다는 비전을 제시하였다. 세계 어느 주요 국가도 2050년대까지 국방비전을 제시하는 국가는 없다,

현재 시진핑 주석은 어느 누구도 못한 중국군의 기본 골격을 바꾸고 전면적 체형을 변화시키며, 그동안의 내부지향적 중국군을 외부지향적으로 변형시키고 있다. 예를 들면 과거 주둔군 성향의 군구(軍區)체계를 세계 경찰군 역할을 담당할 기동군 위주의 전구(戰區)사령부 체계로 재편하고 집단군을 재배치한 것이며, 이는 중국 역사에 있어 어느 누구도 못한 군통수권자의 리더십 발휘였으며 이는 모두 제도적 정책결정 과정을 거쳤다. 군내 반발이라고 해야 일부 퇴역 군인들의 전역후 복지에 대한 시위 수준이었으며, 시 주석은 이들에 대한 배려로 무마시키고 있다. 현재 중국 내 공항에 예비역 군인 전용 창구가 설치되었으며, 객석 배정 특혜가 부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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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동맹(alliance)에 대한 인식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국제현안 해결을 거의 모두 군사적 문제로 보아 해외 미군의 역할을 세계 경찰군으로서의 선의적 기여 보다 미 국방비 증가의 주요 원인으로 평가해 동맹국으로부터 신뢰를 잃은 반면, 시진핑 주석은 주변국과 관련국과의 역사적 연계성을 강조한 일대일로와 같은 비전을 제시하면서 중국의 군사굴기를 우려하는 주변국들에 대해 경제적 상호이익을 위한 군사협력을 강조하여 차츰 성과를 보고 있다.

즉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쌓아온 동맹과 파트너십 관계를 미국 우선주의 원칙을 고집하여 점차 무너뜨리고 있다면, 시진핑 주석은 이를 기회로 삼아 일대일로와 실크로드 개념을 중심으로 향후 2049년에 나타날 중국군의 위협론을 불식시키면서 트럼프 대통령이 만들어 놓은 틈새를 벌리며, 동남아시아, 서남아시아, 아프리카, 중앙아시아. 동유럽에 이어 중남미 국가에까지 이르고 있다.

이는 지난 12월 20일자 『뉴욕타임스(NYT)』지는 멕시코에서 미국으로 향하는 캐러밴 난민 문제를 트럼프 대통령이 멕시코에 떠넘기는 식의 태도를 취하자, 지난 12월 2일에 취임한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 대통령이 ‘China 카드’로 해석되는 『중남미판 마샬 계획』을 발표한 사례에서 식별되었다. 이는 지난 11월 중순 G20 회의차 브라질을 방문한 시진핑 주석이 페루와 파나마를 방문해 일대일로 사업을 제안한 효과로서 트럼프 대통령이 각론(各論)에 있어서는 강(强)하나, 포괄적 세계전략에 있어서는 중국 시진핑 주석에 밀리고 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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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트럼프 대통령은 2018년 한해 동안 미국 우선주의를 구현하기 위해 동맹국과 파트너십 국가들을 불편한 상황에 이르게 하고 있다. 이는 트럼프 대통령이 주한미군의 주둔에 편의를 보아준 동맹국 한국 정부의 기여를 단순히 방위비 분담금 수준으로만 보아 2019년부터 시행할 한국의 방위비 분담금을 기존의 2배로 요구하면서, 지속적으로 주한미군 철수론을 제기해 결국 해(年)을 넘긴 한미 방위비부담금 협상에서 찾을 수 있다. 문재인 정부 들어 전시작전통제권 전환과 남북군사합의서 체결로 한미연합방위체제가 흔들리는 상황 하에 이제는 주한미군 역할론에 대한 의구심마저 드는 상황이 된 것이다. 하지만 북한의 핵과 재래식 위협은 전혀 변화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동맹국 간 갈등이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면 지난 12월 20일 북한 조난어선에 대한 인도주의적 수색 및 구조(SAR) 작전 과정에 일본 해상자위대 P-1 초계기가 개입하여 추적레이더 작동을 두고 적아를 가리는 상황이 나타난 것이다.

반면, 시진핑 주석은 그동안 인공섬 조성에 대한 미국과 지역내 주요 국가의 반발과 중국의 남중국 무력화를 염두에 둔 미 해군의 FONOP 실시 등의 불리한 국면을 남중국해에서의 중국-아세안 간 행동규칙(COC) 프레임워크 합의, 중국-아세안 해상 연합훈련 실시, 중국-필리핀 간 남중국해 공동개발 합의서 추진 그리고 말레이시아 신임 내각의 중국-말레이시아 일대일로 사업 취소 및 재조정 선언에 대한 매우 유연한 대응 등으로 비교적 안정화시키고 있다.

공식적으로 동맹관계를 지향하지 않는 중국은 전략적 파트너십 관계 개념을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 우선주의 지향에 따라 미국과 불편한 관계에 있는 국가들에게 적용하여 동맹에 가까운 군사적 관계로 지향하고 있으며, 이는 일부 국가들의 중국산 장비와 무기 구매 결정에서 식별되고 있다. 예를 들면 미얀마, 필리핀, 파키스탄,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남수단, 베네주엘라, 그리고 일부 동유럽 국가들이다.

전문가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세계 최강 군사력인 미군을 토이솔져(Tory Soldier)로 만들고 전 세계 국가로부터 존경을 받던 매티스 전(前) 국방장관을 사임시키는가 하면, 2019년 1월 1일부로 친(親)트럼프 성향인 보잉사 영업업무 출신 패트릭 새나한 부장관을 국방장관 대행으로 임명하는 좌충우돌의 행각을 보였다면서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반면 시 주석은 거대하나, 비전문성을 갖고 있었던 중국군을 홍군(紅군)에서 전사(戰士)로 만드는 성공적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다면 후한 평가를 한다. 특히 취임 이후 해외 파병부대를 한번도 방문하지 않던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12월 20일 제임스 매티스 국방장관 사임 이후 전격적으로 이라크 파병 미군부대를 방문한 것은 극히 국내 정치적 함의를 나타난 사례라며 트럼프 대통령이 미군을 또 다시 토이솔져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라고 비난하고 있다.

중국 시 주석이 제시한 중국꿈과 강군꿈을 위한 중국군 국방개혁과 영도 지도이념은 분명히 위협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 주석의 위협에 대응할 미국 군통수권자 트럼프 대통령이 미군을 미국 우선주의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는 실수를 연발하여 미 국내만이 아닌, 동맹국과 파트너십 국가들에게 불안감을 더해 주는 이상한 구도가 되었다. 오히려 중국의 군사굴기에 대해 미국과의 안보동맹과 경제적 파트너십으로 대응하려던 국가들이 그동안의 중국 군사굴기에 대한 우려를 뒤로 하고 일대일로와 실크로드와 같은 역사적 연계성을 들어 중국에게 선의(善意)를 베풀어 줄 것으로 요청하는 형국이 되고 있다.

이래저래 트럼프 대통령이 시 주석 보다 군통수권자 리더십 발휘에 있어서 한참 한수 밑이라는 생각이 자꾸 드는 이유가 큰 착각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어 걱정이다. 더욱이 트럼프 대통령 임기가 아직도 2년이나 남았으며, 이는 계속 시 주석에게 군통수권 리더십을 발휘하는 전략적 호기(好機)로 작용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더욱 심난하다.

윤석준 한국군사문제연구원 객원연구위원
차이나랩

윤석준은 
한국군사문제연구원 객원연구위원이자, 예비역 해군대령이다. 2011년 12월31일 제대 이전까지 수상함 전투장교로 30년 이상 한국해군에 복무했으며, 252 편대장, 해본 정책분석과장, 원산함장, 해군본부 정책처장, 해본 교리발전처장 및 해군대학 해양전략연구부장 등을 역임했다.

 
본글주소: http://www.poweroftruth.net/news/mainView.php?uid=4711&table=byple_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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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 속의 신영복

[노회찬 OOO를 만나다] '미완의 기록'으로 본 노회찬과 신영복 (2)

 

 

노회찬은 항상 '영감'을 주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세상을 등졌지만, 세상은 그에게 빚을 졌다고 생각합니다. <프레시안>은 노회찬재단과 함께 '노회찬 OOO를 만나다' 연재를 시작합니다. 노회찬재단과 <프레시안>은 정치가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길 바란다는 점에서, 같은 생각을 품고 있다고 봅니다. 노회찬이 만난 사람, 노회찬의 생각, 노회찬의 꿈에 대한 이야기를 노회찬재단과 함께 연재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바로보기 : 노회찬, '마음의 스승' 신영복을 만나다 (1))

 

노회찬 <난중일기> 속의 신영복, 그리고 글 선물 

노회찬의 <난중일기>는 17대 총선 기간 중 2004년 1월 5일부터 3월 31일까지 기록한 일기다. 노회찬은 많은 사람들을 가슴 졸이게 하며 총선 다음 날인 4월 16일 새벽 2시 30분경 299명 가운데 꼴찌로 당선이 확정된다. 17대 국회의원이 된 뒤 노회찬의 2004년 9월과 10월 <난중일기>에는 피치 못할 사정으로 신영복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을 갖지 못한 데 대한 글이 두 편 있다. 정말로 많이 아쉬웠나 보다. 찐한 아쉬움이 글에 묻어난다. 

2004년 9월 12일(일) 종일 비 내리다  
아침부터 마음이 허전하다. 
토요일의 여러 일정만 아니었으면 지금쯤 강원도 인제 미산리에 있었을 것이란 생각 때문이다.  
어제 밤은 그곳에서 신영복 선생님이 교장으로 있는 <더불어 숲> 학교에서 오랜만에 신 선생님이 직접 강의하는 시간이었다.  
신 선생님의 말과 글에서 깨우침을 얻지 않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잠시 만나 얘기를 나눈 경우에도 여지없이 그러했다.  
존경하는 사람이 있느냐는 물음에 망설이지 않고 대답할 사람이 있다는 것은 분명 행복이다. 
작년 가을 <더불어 숲>에서 신 선생님의 강의가 있을 때도 수강신청을 하고 회비를 송금했다.  
그러나 바로 그 날 이라크 파병발표가 있었고 청와대 앞에서 항의 기자회견이 잡혔다. 
이근성 선배에게 미안하게 됐다고 연락을 하자 이 선배는 다음 강의라도 오라고 했는데 어느덧 1년이 지났다.  

2004년 10월 2일 (토) 맑음 한파주의보  
19시 30분부터 시작되는 <외침 아시아2004 록 콘서트>에 끝내 가지 못했다. 
아시아지역 시민활동가 교육훈련비용 마련을 위한 음악회이다. 
신영복, 김동춘, 한홍구, 김창남 교수 등이 윤도현, 강산에, 김C 등 가수와 함께 록을 부르는 기괴한 장면을 목격하지 못한 것은 오로지 국감 탓이다. 

2005년 2월 21일 오전 노회찬 의원실 관계자가 국회 기자회견장에 들러 '신세대 맞춤형 의정보고서'라고 할 수 있는 'CD' 형태의 영상 다큐멘터리 의정보고서를 기자들에게 돌린다. 이 의정보고서는 신영복이 노회찬에게 보내준 "꽃이되어바람이되어”라는 타이틀로 제작됐다. 의정보고서는 △2004국정감사, 피감기관 의정활동 평가 1위 △굴욕적 용산미군기지 협상 문제제기 △국가보안법 폐지 △민생 인권을 위한 입법활동 △당과 함께 대중과 함께 등 5부로 구성돼 있으며 35분 분량의 동영상이다.  

2009년 9월 6일 노회찬(진보신당 대표)은 이 글씨를 액자에 담아 '전국언론노동조합 언론악법 원천무효 시민바자회' 경매물품으로 내놓는다. 노회찬은 경매 시작 전 발언에서 우리 집에서 가장 비싼 물건을 가져오려 하였으나 아내에 반대에 부딪쳐 두 번째로 비싼 물건을 가져 왔다고 하며 제일 비싼 것은 바로 저라고 하여 바자회를 찾은 시민들에게 웃음까지 선물한다. 이어 노회찬은 이 물품이 희망가 이상으로 팔리게 되면 을지면옥의 냉면과 빈대떡을 대접하겠노라고 약속을 하기도 하였다. (※ 참고로,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노회찬은 평양냉면 광이다. 수도권의 소문난 평양냉면집은 거의 다 가봤을 정도이고, 평양을 방문했을 때는 옥류관 냉면이 너무 맛있어 여섯 그릇 먹고 특별방문록에 서명했다는 일화도 남겼다.) 
 

바자회를 성공적으로 마친 최상재(전국언론노조 위원장)는 이렇게 인사한다. "여러분의 관심과 참여 속에 정말 많은 분들이 오셔서 언론자유를 다시 생각하고 지금 기울어져가는 민주주의를 염려하는 마음을 나누었습니다. 정말 모두가 주인이었고 모두가 참여자였습니다. 그리고 결국 이 바자회를 통해 6천만원이 넘는 소중한 기금이 마련됐습니다. 이 기금은 언론악법 원천무효와 언론자유 수호를 위해 소중하게 사용될 것입니다."

 

 

 

 

신영복은 신세진 사람에게 선물하라며 노회찬에게 글을 많이 써 주었다. 받은 글들 중에 노회찬의 기억에 강하게 남아 있는 것은 17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할 당시인 2005년 2월 15일 책과 함께 건네준 '함께맞는비'다. 신영복의 서화 에세이 <처음처럼>에 수록된 것으로, 서화집에는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입니다"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노회찬은 "국회의원으로 갖고 있는 많은 우산 중 하나를 씌워주는 데서 끝나지 말고 동고동락하는 자세로 현장에서 같이 비를 맞으며 아픔을 느낄 수 있는 의원이 되라는 가르침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신영복의 '함께맞는비'는 노회찬이 일하는 공간에서 늘 그와 함께 한다.
 

 

▲ 왼쪽부터 17대 의원회관, 딴지일보 김어준 총수와의 인터뷰 (2007.4.20.), 19대 노회찬 국회의원 지역사무실(노원구 상계동) 개소식 (2012.8.21.)

 

 

2006년 2월 14일 한 아이가 태어난다. 이름은 박지인(朴芝人). 오랫동안 노회찬과 같이 활동해 오면서 법률자문 역할을 묵묵히 해온 박갑주-김수정 변호사 부부의 아이로, 노회찬이 이름을 지었다. "섬진강 가로질러 송화강 너머까지 산과 들에 절로 나서 홀로자라는 들풀 지초(芝草)처럼 자유로이 살거라 / 초여름밤 어둠속에서 조용히 흰꽃 피우는 야생화 지초(芝草)처럼 한줄기 세상의 빛이 되거라"는 뜻을 담았다고 한다(김수정, 「[왜냐면]끝나지 않은 노회찬의 꿈」, 한겨레, 2018.12.6.). 2007년 노회찬은 아이의 돌 기념으로 부탁한, 이 세상에 딱 하나밖에 없는 <芝蘭之香>에 마음을 담아 아이에게 선물한다. 

 

 

 

 

정년퇴임 '고별 수업'과 석과불식(碩果不食): "절망이 곧 희망의 기회"


2006년 6월 8일. 65세 정년을 맞아 퇴임을 앞둔 신영복의 마지막 강의가 성공회대에서 있었다. 1989년 3월 성공회대에서 첫 강의를 시작하며 장기수에서 대학교수로서의 새 삶을 시작한 신영복은 이 자리를 끝으로 17년간의 교수생활을 마감한다. (정년퇴임 이후 2015년까지 신영복은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석좌교수를 지냈다.)  


"따뜻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라"고 운을 뗀 이날 강의의 주제는 <주역>의 64괘 가운데 박괘(剝卦)에 나오는 '석과불식(碩果不食)-씨과실은 먹히지 않는다'였다. '박(剝)'은 '떨어지다(落)' '다하다(盡)' '소멸하다(消)'라는 뜻으로, 박괘는 가장 어려운 상황을 나타낸다. 신영복은 "사회변화가 쉽지는 않다고 본다"고 하면서도, 그러나 '절망이 곧 희망의 기회'로 '길을 잃었을 때는 근본으로 돌아가라'고 한국 사회를 진단한다. 그리곤 그는 이렇게 묻는다. "사람은 일생동안 참 멀리도 여행들을 떠나는데, 가장 먼 여행은 어디인가?" 그의 강의가 끝나자, 큰 박수 물결이 이어졌다. 강단에서의 마지막 인사를 하는 그의 눈은 붉게 상기됐고 이슬이 맺혔다.  


노회찬은 신영복의 정년퇴임과 새로운 출발을 지켜보기 위해 고별강연에 참석한다. "신 교수님처럼 겉과 속, 말과 행동, 이론과 사상이 일치하는 '지행합일'을 실천하는 사람을 보지 못해 평소 스승으로 모시고 있다"며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읽은 뒤 깊은 감명을 받았고, 92년 직접 신 교수님을 찾아간 것을 계기로 인연을 맺고 있다"며 참석 이유를 밝힌다.

 

2006년 8월 25일 신영복 교수 정년퇴임식이 '여럿이 함께'라는 이름의 콘서트와 토크쇼로 진행되었다. 정년퇴임을 기념하는 문집 <신영복 함께 읽기>(돌베개, 2006.8.)도 이에 맞춰 출간된다. <신영복 함께 읽기>는 '신출귀모'(신영복 선생님의 출판을 귀하게 생각하는 모임)가 기획하고 60여명의 '여럿이 함께'가 만든 신영복의 학문읽기(1부)와 추억담(2부)을 모은 책이다.  


"신영복 선생을 거울로 삼고 닮아가려는 사람들이 만든 문집"에 노회찬은 <함께 걷는 서오릉 길>이라는 글을 싣는다. 서오릉은 1966년 어느 봄날 스물여섯 살의 청년 신영복이 오른 소풍길이고, 여기서 그는 우연히 여섯 소년을 만난다. 이때의 순수하고도 소박했던 만남과 우정을 다룬 것이 <청구회추억>이며 노회찬은 이 책을 통해 사람을 만나는 법, 사람을 대하는 법을 배웠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는 이렇게 맺는다. "신영복 선생과 함께 걷는다는 것, 같은 방향을 바라본다는 것, 같은 곳을 디디고 서 있다는 것, 이 모든 것이 다 축복이고 기쁨이다." 

 

 

▲ 정년퇴임식에서 신영복, 노회찬.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외에 가장 좋아하는 책이자, '신영복 문학의 백미'로 노회찬은 <청구회추억>을 꼽는다. 2008년 8월 28일 <노회찬의 난중일기>는 '청구회 추억'에 얽힌 개인적 추억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8월 28일 (금) 맑음  
<청구회 추억>은 이른바 <신영복 문학>의 백미이다. (…) <청구회 추억>은 사형선고를 받은 신영복 선생이 1969년 남한산성 육군교도소에서 유품을 미리 정리하듯 남긴 글이다. <청구회>란 1966년 서오릉 소풍길에서 우연히 만난 여섯 명의 꼬마들과 인연을 맺으며 만든 모임 이름이며 이들과의 2년에 걸친 만남의 기록이 <청구회 추억>이다. 
1992년 출소 이후 진보정당건설운동에 매진하던 시절 나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감옥으로부터의 사색>과 함께 늘 <청구회 추억>을 권하곤 했다. 활동가라면 특히 조직사업을 하는 활동가라면 마땅히 읽어보아야 할 책이라고 강변했던 기억이 난다. 그땐 1991년 월간중앙에 게재된 글의 복사본밖에 없어 마치 유인물 건네듯 이 복사본을 손에 쥐어 주곤 했다. 구미의 조근래 동지는 이 복사본 <청구회 추억>을 읽고 신영복 선생을 주례로 모시고 싶다고 해서 신 선생을 모시고 구미까지 내려간 일도 있었다. 얼마 후 조근래 동지는 <청구회 추억>을 수첩만한 크기로 만든 책자를 나에게 보내오기도 했다. (…) <청구회 추억>은 이렇게 돌려가며 읽혀졌다. 그 후 <엽서>가 발간되면서 육군교도소 똥종이에 쓰여진 육필원고가 영인본으로 실리고, 부록처럼 다른 책에 함께 실리기도 했었다. 그래도 이 글이 단행본으로 출간되어 더 많이 읽혔으면 하는 바람을 식힐 순 없었다.  
27일 선재아트센터에서 <청구회 추억> 출간을 기념하는 북콘서트가 열렸다. 강당은 만원이고 통로와 계단까지 선남선녀로 가득 찼다. (…) <청구회 추억> 출간 기념회이기도 하지만 마침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20주년이 되는 시점이고 돌이켜보면 20년을 옥중에서 보낸 신영복선생의 <바깥세상 체험 20년>도 되는 터이라 신 선생의 인사말은 그에 걸맞는 '작은 강연'이 되었다. (…) 이 날도 신 선생은 세상에서 가장 긴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까지 가는 길이라 했다. 가슴에서 발(실천을 뜻한다)까지 가는 여행은 더 힘들다는 말도 덧붙이셨다. 
우리는 어디까지 와 있나? 머리에서 출발하여 귀, 눈, 혹은 입까지 와서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닌가? 수십년 운동을 하면서 칼날같이 날카롭게 맞선 상대가 아니라 함께 하는 동지들로부터 더 큰 상처를 받은 사람들을 많이 보아왔다. 스스로 올바르다는 생각에 빠져 쉽게 상처를 안겨주고, 또 상처를 받았다는 생각에서 그에 못지않은 상처를 주는데 주저함이 없다. 자신이 안긴 상처는 기억하지 못하고 자신이 입은 상처만 바라보니 남는 것은 '상처 입은 피해자'들뿐이다.  
이날 강연 중에서 신 선생은 독서란 3독이라 말하셨다. 텍스트(책의 내용)를 읽고 책쓴이를 읽고 동시에 자신을 읽는다고 해서 3독이라는 것이다. 마침 선선한 밤공기가 책읽기에 적절하다. <청구회 추억>이 우리들의 현재가 되길 바라며 3독을 권한다. 

<노회찬마들연구소> 명사초청특강: "성찰과 모색" 
 

2008년 18대 총선에서 석패한 노회찬은 11월 28일 지역 정당활동의 모범을 만들기 위해 노원구 상계동에 <노회찬마들연구소>를 설립, 창립기념식을 치렀다. 축하와 격려의 의미로 신영복은 '노회찬마들연구소' 제호를 글로 써서 선물한다. 2009년 1월 7일 신영복은 노회찬이 이사장으로 있는 <노회찬마들연구소> 명사초청특강에서 "성찰과 모색"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한다. 연구소의 '명사초청특강'은 2008년 9월 7일부터 2012년 9월 26일까지 4년 동안 총 41회를 진행하면서 '지역명품특강'으로 장안의 화제를 몰고오기도 했다. 

 

 

 

 

강연장인 노원역 인근 서울북부고용지원센터는 발 디딜 틈도 없이 500여 청중들이 빽빽이 메웠다. 여러 울림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지만 그 가운데서 '물'에 대한 신영복의 이야기를 옮겨본다.  
"인간의 관계성을 가장 나타내는 것이 물입니다. 우리가 희망을 만들기 위해서는 물로서 배워야 합니다. 물은 항상 낮은 곳으로 흐르지요. 다투지 않습니다. 바위를 만나면 돌아가고 절벽을 만나면 뛰어내리고 큰 웅덩이를 만나면 건너뛰지 않고 차곡차곡 쌓여서 넘칩니다. 이러한 물의 자기 변화를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매우 중요하게 배울 점이 또 있습니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른다는 점입니다. 바로 하방연대(下方連帶), 낮은 곳과의 연대입니다." 

 

 

▲ 500여명이 참석한 이날 강연회에는 몰려든 인파로 앉을 자리가 부족해 강연중인 연단 위에 몰려 앉는 청중들도 눈에 띄었다. (사진=노회찬마들연구소)

 

 

신영복이 노촌(老村) 이구영(李九榮) 선생으로부터 배우고 깨달은 것처럼, 노회찬의 삶에 신영복은 큰 영향을 준다. <강의-나의 동양고전 독법>에서 신영복은 이렇게 말한다. "이 글을 쓰면서 그동안 노촌 선생님을 자주 찾아뵙지 못하였음을 뉘우치게 된다. 그러나 조금도 적조한 느낌을 갖지 않고 있다. 문득 문득 선생님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주 찾아뵐 수는 없었지만 신영복에 대한 노회찬의 생각도 아마 비슷했으리라고 본다. 노회찬의 글이나 말을 보면 신영복의 향기가 스며있다. '6411번 버스'와 '투명인간' 이야기로 잘 알려진 <노회찬 진보정의당 공동대표 수락연설문>(2012년 10월 21일)은 이렇게 적고 있다. 
"강물은 아래로 흘러 갈수록 그 폭이 넓어진다고 합니다. 우리의 대중정당은 달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갈 때 실현될 것입니다." 

인민노련 사건으로 체포된 지 23년이 되는 날인 2012년 12월 24일 노회찬은 '노회찬의 여의도 이야기'에 신영복의 말을 인용해 <밤이 깊으면 별은 더욱 빛납니다> 제목으로 이런 글을 올린다.  
"밤이 깊으면 별은 더욱 빛난다(야심성유휘 夜深星逾輝)는 말을 기억합니다. 지금 이 어둠 속에서 오직 한 가지 더욱 빛나는 것은 바로 우리의 약속뿐입니다. 두 달 전, 지난 10월 21일 창당대회에서 <대중적인 제대로 된 진보정당으로 거듭나겠다>고 한 대국민 약속입니다.…밤이 깊으면 별은 더욱 빛난다는 말은 단지 밤하늘의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어두운 밤길을 걸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합니다. 가장 어두울 때 험하고 먼 길을 함께 걷고자 입당을 결심하신 모든 신입당원들께 뜨거운 환영의 인사를 전합니다." 

2013년 7월 21일 진보정의당 대표 자리를 물러나는 노회찬의 <퇴임사>는 이렇게 마무리 짓는다.  
"그동안 여러모로 부족한 저를 믿고 여기까지 함께 온 분들께 감사와 격려의 인사를 드립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길을 걸을 때 가장 소중한 사람은 함께 손을 잡고 그 길을 걷는 길동무들이라 합니다. 당원동지 여러분 사랑합니다." 

<담론-신영복의 마지막 강의>와 '노유진의 정치카페 테라스'


2015년 5월 21일 진보정의당 이정미가 진행하는 '노유진의 정치카페 테라스'라는 팟캐스트에 노회찬은 신영복과 함께 그의 인생과 새 책 <담론-신영복의 마지막 강의>(돌베개, 2015)에 대해 2시간여에 걸쳐 잔잔한 이야기를 나눈다. "노 의원의 부탁이 아니었으면 안 나왔을 텐데...나왔다." 사실 신영복이 나오기 쉽지 않은 자리였다. 신영복은 암 투병 중이었는데 몸이 좀 회복되기도 했고 또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귀중한 시간을 낸 것이었다. 

1부에서는 노회찬과 신영복의 만남과 인연, '마지막 강의'의 의미와 건강상태, 소주 '처음처럼'의 탄생, '텍스트-저자-독자'와 '머리-가슴-발'의 '서3독'(書三讀), '저자의 죽음과 독자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끊임없는 탈주(脫走)로서의 독서, 청구회 추억과 모순의 결집체로서의 감옥생활, 경직된 인식틀로서의 문사철(文史哲)과 시서화악(詩書畵樂)의 중요성, 청년시절의 꿈과 이상 및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의 소중함 등 신영복의 삶 전반에 대한 일화를 들을 수 있다.
2부는 <담론>에 담은 신영복의 생각을 들려준다. 변방의 창조성과 역동성, '나무와 물'의 철학과 철학적 상상력, 감옥생활 20년의 교훈이자 고별수업 주제였던 석과불식(碩果不食)의 '엽락(葉落)-체로(體露)-분본(糞本)', <담론> 읽기의 의미 등에 대해 소중한 시간을 갖는다. 
마무리 발언에서 노회찬은 휴머니즘과 변혁의 결합, 세상에 맞춰나가기보다는 세상을 바꿔나가는 삶으로 <담론>을 읽어낸다. 정태춘의 '떠나가는 배'가 흐르며 2시간여에 걸친 이야기는 끝나며 신영복과 노회찬 두 사람은 자리를 떠난다. 다음 링크를 열면 이날 나눈 이야기를 생생한 육성으로 들을 수 있다.  
(http://www.shinyoungbok.pe.kr/video/307531

(http://www.shinyoungbok.pe.kr/video/307542) 

"내가 (교도소에서) 자살하지 않은 이유는 '햇볕' 때문이었다. 길어야 2시간밖에 못 쬐는 신문지 크기만 한 햇볕을 무릎 위에 받고 있을 때의 따스함은 살아 있음의 어떤 절정이었다. 겨울 독방의 햇볕은 자살하지 않고 살아가는 이유였고 생명 그 자체였다." 이전엔 무심코 지나쳤던, 그러다가 얼마 전 책장을 다시 넘겼을 때 내 눈에 담긴 <담론>의 글귀다. 

 

 

▲ 왼쪽부터 노회찬 신영복 이정미

 

 

이후 두 사람의 만남은 2016년 1월 7일 노회찬의 병문안이 마지막이었고, 8일 후인 1월 15일 떠남과 헤어짐의 시간을 맞게 된다.  

2016년 1월 18일 영결식 이후 그리움의 시간들 
 

신영복이 세상을 떠난 뒤 3달이 채 안 된 2016년 4월 3일 일요일, 고향땅 밀양 선산에서 고인의 수목장이 조촐하게 진행된다. 좋아하는 진달래꽃도 묘목으로 표지석 주변에 빼곡하게 심어두었다고 한다. 

 

 

▲ 출처: 사단법인 더불어숲

 

 

2017년, 구로구는 1주기를 맞아 신영복의 정신을 기리고, 주민들에게 사색의 공간을 제공하기 위해 그의 대표적 저서인 <더불어 숲>에서 착안한 '더불어 숲길'을 조성했다. '더불어 숲길'은 그가 재직했던 성공회대 뒷산인 항동 산 23-1번지 일대에 길이 480m, 폭 2m로 조성된 산책로다. 생전에 직접 쓴 서화작품 31점이 안내판 형식으로 설치되어 있고 항동 철도길과 수목원, 구로 올레길 3코스와도 연결되어 있다. 한번쯤은 걸어봄직하다. 

 

 

 

 

 

신영복은 떠났지만, 이후에도 계속 노회찬은 트위터나 페이스북 등을 통해 그의 발자취를 알려주며 그리움을 대신한다. (※ 그러던 중에 맞이한 2016년 4월 13일 20대 총선, 창원 성산에 출마한 노회찬은 3선 국회의원이 된다.)  

2016년 12월 25일 트위터 
신영복 선생님 덕분에 아내와 결혼한 얘기 등 얽힌 사연들을 풀었습니다. [다음스토리펀딩] 노회찬의 프로포즈, 그리고 신영복 선생님 https://storyfunding.daum.net/episode/16659 여러분의 공감과 투자를 기다립니다! 

2017년 1월 3일 트위터 
신영복 선생 1주기 추모공연 [만남] 예매중입니다. YB, 김제동, 두번째달, 김형석, 더숲트리오, 문소리, 고민정 출연. 1월 19일(목요일) 블루스퀘어. 
http://mticket.interpark.com/Goods/GoodsInfo/info?GoodsCode=16015996&app_tapbar_state=fix … 

2017년 1월 4일 트위터 
신영복선생 1주기를 맞이하여 두 권의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미발표 유고집 <냇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와 대담집 <손잡고더불어>. 신영복 선생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신년벽두에 읽기 적합한 내용입니다. 감히 일독을 권합니다. 

2017년 1월 17일 <[신영복 1주기 추모기획: 만남] 신영복의 글을 만나다 국회의원 노회찬>(https://youtu.be/_UK-uYrscb8)을 통해 노회찬은 신영복이 '정치'에 대해 말한 글을 읽는다. 5월 15일 스승의 날에는 유고집인 <냇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와 <손잡고 더불어: 신영복과의 대화>에 카네이션 꽃을 올린다.  

수신제가치국(修身齊家治國)의 궁극적 목표가 평화로운 세상(平天下)을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평화(平和)란 글자 그대로 화(和)를 고르게(平) 하는 것이다. 화(和)의 의미가 쌀을 먹는 우리의 삶 그 자체라면 정치는 우리의 삶이 억압당하지 않고 차별받지 않도록 하는 일이다. 정치가 평화의 실현이라는 의미를 다시 생각하는 까닭은 오늘의 정치적 현실이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 
우리가 짐지고 있는 고통이 무겁고 질긴 것이 사실이지만 바로 그 엄청난 무게 때문에 머지않아 '평화와 소통과 변화'라는 새로운 정치 전형(典型)의 창조로 꽃필 수 있기를 바란다. (…) 정치란 무엇인가. 평화와 소통과 변화의 길이다.  

 

 

 

 

2017년 5월 15일 트위터 
오늘은 스승의 날. 초등학교 5학년 때 담임이셨던 신덕만 선생님을 비롯해 여러 스승님께 인사 올렸습니다. 영원한 스승 고 신영복 선생님께도 신간에 카네이션 꽃을 바쳤습니다. 이 땅의 모든 선생님들께 인사드립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1년의 시간이 흐른 2018년 1월 10일 신영복 선생 2주기 전시회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30주년'이 서울 종로구 인사동 동산방화랑에서 열린다. 1월 20일까지 신영복 선생의 옥중 작품 17점을 포함한 서화, 옥중 엽서 원본 등을 전시했다. 노회찬은 이 자리에 참석해 고인을 추억하는 시간을 함께 나눈다. 

 

 

 

 

 

▲ 인사말 하는 노회찬(정의당 원내대표) (출처: 사단법인 더불어숲)

 

 

나흘 뒤인 1월 14일 오후 2시 서울 구로구 성공회대학교 성미가엘 성당. 노회찬은 신영복이 세상을 떠난 지 2년째 되는 날을 기리는 추모식 자리에 함께 했다. 성공회대 교수밴드 <더숲트리오>(김진업, 김창남, 박경태)는 "다음 추모식에선 밝은 분위기 속에서 선생님을 기억하고, 그리워하면 좋겠다"며, 신 교수가 감옥에서부터 부르곤 했던 '시냇물'을 시민들과 함께 합창하며 추모식을 마쳤다.  

2018년 7월 23일 노회찬, 먼 길을 떠나다 

 

2018년 7월 18일 여야 원내대표단의 일원으로 미국으로 출국하기 직전 노회찬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신영복으로부터 받아 소장하고 있던 글 6점을 표구사에 맡긴다. 7월 22일 오후에 귀국한 노회찬은 그 다음날인 7월 23일 아침 홀연히 먼 길을 떠난다.

 

3년 전인 2016년 1월 18일 고 신영복 선생 영결식, 노회찬은 이렇게 쓰고 있다. "오늘 선생님은 떠나시지만 내일부터 선생님을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노회찬이 신영복을 그리워하며 다시 만날 것을 믿은 것처럼, 노회찬의 오랜 길동무들도 노회찬을 다시 만날 것을 믿고 있다. 
노회찬의 생환(生還)과 새로운 만남의 첫 걸음으로 오는 1월 24일(목) 저녁 <평등하고 공정한 나라 노회찬재단> 창립 기념행사가 열린다. "함께가면 길이된다"는 신영복의 말처럼 이제 노회찬재단은 '아름다운 동행' 속에서 "노회찬, 함께 꾸는 꿈"을 이루기 위해 '먼 길을 함께' 떠나고자 한다. 

나는 다시 꿈을 꾼다. 대학서열과 학력차별이 없고 누구나 원하는 만큼 교육받을 수 있는 나라…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차별 받지 않는 나라…무엇보다 모든 국민이 악기 하나쯤은 연주할 수 있는 나라. 토마스 모어는 고작 하루 노동시간을 여섯 시간으로 줄여놓고 그 섬을 존재하지 않는 섬, 유토피아라 불렀지만 나는 그보다 더 거창한 꿈을 꾸지만 단지 꿈이라 여기지 않고 있다.…진보정당의 꿈을 놓지 못하는 것은 현실가능성이 크기 때문도 아니고, 그 꿈이 너무 아름다워 포기하기가 어렵기 때문도 아니다. 그 꿈 이외에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그 꿈이 실현되지 않고서는 정치가 사람의 희망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노회찬 외, <진보의 재탄생-노회찬과의 대화>, 꾸리에, 2010). 

군사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절박한 시점에서 쓰인, 그리고 노회찬이 신영복 문학의 백미라고 꼽았던 <청구회추억>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언젠가 먼 훗날 나는 서오릉으로 봄철의 외로운 산책을 하고 싶다. 맑은 진달래 한 송이 가슴에 붙이고 천천히 걸어갔다가 천천히 걸어오고 싶다." "Some day in the future, I want to take a lonely walk to Seo-O-Reung. With a bright azalea on my plastron, I want to go slowly on foot to Seo-O-Reung and slowly walk back." 

'영원한 자유인'으로 '더불어 숲'의 세상을 꿈꾼 두 사람이 진달래 피는 올 봄철에 서오릉에서 만나 함께 천천히 산책하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으면 참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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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국방백서』, “북한군은 우리의 적” 삭제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9/01/16 12:01
  • 수정일
    2019/01/16 12:01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구조적 군비통제’ 제반조치 준비할 것”
조정훈 기자  |  whoony@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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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1.15  15:5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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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처음 발간된 『2018국방백서』에 “북한군은 우리의 적” 표현이 삭제됐다. 남북 간 군사분야 합의서 이행 상황을 토대로 운용적 군비통제를 넘어 구조적 군비통제를 위한 제반조치를 준비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국방부는 15일 “국방정책을 홍보하여 국민의 알 권리를 보장하고 군사적 투명성을 제고하기 위해 『2018국방백서』를 발간하였다”며 “현 정부에서 처음 발간되는 국방백서로 2년간의 국방정책 성과와 향후 국방정책 방향을 제시하였다”고 밝혔다.

이번 국방백서의 특징은 북한에 대한 주적 개념을 삭제한 것. 북한에 대한 ‘주적’표현은 2004년 이후 삭제된 뒤, 2006년 ‘현존하는 북한의 군사적 위협’, 2008년 ‘직접적이고 심각한 위협’으로 표기됐으나 2010년부터 ‘적’ 표현이 부활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북한에 대한 ‘적’ 표현이 사라졌다. 대신, “우리 군은 대한민국의 주권, 국토, 국민, 재산을 위협하고 침해하는 세력을 우리의 적으로 간주한다”고 포괄적으로 기술했다. 

국방부는 “북한 위협뿐만 아니라 점증하고 있는 잠재적 위협과 초국가적‧비군사적 위협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기술했다”고 설명했다.

   
▲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처음 발간된 『2018국방백서』에 “북한군의 우리의 적” 내용이 삭제됐다. 위는 『2018국방백서』, 아래는 『2016국방백서』. [캡처-2018국방백서]

『2018국방백서』는 “남과 북은 군사적 대치와 화해.협력의 관계를 반복해왔으나, 2018년 세 차례의 남북 정상회담과 최초의 북미 정상회담이 성사되면서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와 평화정착을 위한 새로운 안보환경을 조성하였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북한의 대량살상무기는 한반도 평화와 안정에 대한 위협”이라며 “우리 군은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와 항구적 평화정착 노력을 군사적으로 뒷받침하고 모든 상황에 철저히 대비해 나갈 것”이라고 국방목표를 제시했다.

『2018국방백서』는 군사전략 부분에서도 “북한의 다양한 도발과 초국가적.비군사적 위협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도록 방위역랑을 확충한다”는 『2016국방백서』보다 진전된 내용으로 채워졌다.

“북핵 문제 해결과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정착 여건을 조성하기 위해 남북 간 군사적 긴장완화와 신뢰구축 조치를 추진하”고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 진전에 따라 실질적인 군비통제 방안을 모색할 것”이라는 국방비전에 맞춰, “북한 위협에 대해서는 위협 감소를 통해 전쟁 가능성을 감소시키고 장기적으로 평화체제를 구축할 수 있는 군비통제 전략을 수립하여 시행한다”고 명시한 것.

『2018국방백서』, “‘구조적 군비통제’ 제반조치 준비”

국방부가 『2018국방백서』에서 이같이 대북관을 바꾼 배경은 지난해 9월 체결된 ‘군사분야 합의서’가 충실히 이행되고 있다고 평가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2018국방백서』는 ‘7장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의 군사적 보장’이라는 내용을 따로 두고, “국방부는 군사분야 합의사항을 차질없이 이행해 나가는 가운데, 남북 간 군사적 긴장완화 및 신뢰구축을 견인해 나감으로써 한반도 평화와 번영을 위한 정부의 대북정책을 군사적으로 뒷받침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한반도 종전선언 등을 통해 상호 적대관계를 종식하고 한반도에 항구적 평화를 정착시켜 나가려는 정부의 노력을 군사적으로 뒷받침할 것”이며 “한반도 비핵화 및 평화체제 진전과 연계하여 군사적으로도 본격적인 신뢰구축과 함께 군비통제를 추진해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군비통제 추진과 관련,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과정에 맞추어 남북 간에 실질적인 군사적 신뢰구축에 따라 단계적으로 군축문제를 협의할 예정”이라며 “남북 간 군사적 신뢰구축 조치의 이행 정도를 고려해 ‘운용적 군비통제’와 ‘구조적 군비통제’를 위한 제반조치를 준비해 나갈 것”이라고 명시했다.

‘군사분야 합의서’에 따라 지난해 남북 간 운용적 군비통제가 진행됐다면, 올해에는 남북 군사공동위원회를 구성.운영하면서 군사력의 규모, 편성 등 군사력을 구성하는 실질적인 요소인 병력과 무기체계를 구조적인 차원에서 감축하는 ‘구조적 군비통제’로 나아가겠다는 구상이다.

『2018국방백서』에서 ‘북한 주적’ 삭제 배경 중 하나는 “(북한이) 2018년 들어 한반도 비핵화 목표를 표방하면서 남북 및 대외관계 개선 등을 통해 평화적 이미지를 부각하며 국제사회에서의 위상 정립에 주력하고 있다”는 평가도 한몫한 것으로 보인다.

백서는 “북한은 당국 및 민간차원의 대남접촉을 지속하는 한편, 합의된 사항들에 대해서 충실히 이행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남북관계 개선과 군사적 긴장상태를 완화하기 위한 일련의 조치들에 호응하고 있”어, “앞으로도 경제활로 마련에 유리한 외부적 환경 조성을 위해 큰 틀에서 남북 간 협력 및 교류 기조를 유지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내다봤다.

이는 백서가 밝힌 북한의 대남 침투.국지도발 일지에서도 확인됐다. 백서에 따르면, 2010~2015년 251건의 도발 사례가 있었지만, 2017년 5건, 2018년 0건으로 크게 줄어들었다. 2017년의 경우, 1월 북한 상선 동해 북방한계선(NLL) 침범, 6월 탈북 가장 침투 간첩 검거, 11월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북한군 귀순 시 총격 등이었다.

   
▲ [캡처-2018국방백서]

“북한군 병력수 128만여 명..핵 능력은 여전히 미흡”

『2018국방백서』는 북한군 병력수는 128만여 명으로 추산했다. 이는 2016년 발표와 같은 수치이다. 

북한의 군사지휘기구도 새롭게 수정됐다. 총정치국 산하였던 보위국은 최고사령관의 지도를 받는 조직으로 분류됐으며, 평양을 방어하는 고사포군단이 새로 편성됐다.  

이번 백서는 북한 전략군에 대한 분석을 상세하게 수록했다. 백서는 “북한은 전략로케트사령부를 전략군으로 확대 개편하여 별도의 군종사령부로 운용하고 있으며, 사령부 예하에 9개 미사일 여단을 편성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그리고 2017년 대륙간탄도미사일 등의 시험발사를 추가해, “탄두의 대기권 재진입기술 확보 여부를 검증할 수 있는 실거리 사격은 실시하지 않아, 이에 대한 추가적인 확인이 필요하다”고 명시했다.

   
▲ 북한의 군사지휘기구도. [캡처-2018국방백서]

북한 핵 능력에 대해서는 “북한의 핵기술 수준은 실전에 운용하기에는 미흡하였으나 최소한의 핵폭발장치를 제조하고 폭발시킬 수 있는 단계에 도달한 것”으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핵무기의 위력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실전에 사용하기에는 여전히 기술 수준이 미흡하다”고 평가했다.

방사포에 대해서는 “최근 개발이 완료되어 일부 배치된 300mm 방사포는 중부권 지역까지 공격이 가능하고, 122mm와 200mm 견인방사포를 추가 생산해 전방과 해안 지역에 집중 배치하고 최근에는 사거리 연장탄 및 정밀유도탄 등의 다양한 특수탄을 개발하여 운용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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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이후, 이례적 속도로 ‘노동조합 가입’이 늘고 있는 이유

“변화된 정세, 높아진 권리의식, 노조 조직화 노력 맞물려”

이승훈 기자 lsh@vop.co.kr
발행 2019-01-14 19:23:30
수정 2019-01-14 19:4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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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2월 고용노동부가 밝힌 '상급단체별 조합원 수 추이'
2018년 12월 고용노동부가 밝힌 '상급단체별 조합원 수 추이'ⓒ고용노동부
 

2017년 대규모 촛불 시위 이후 노동조합 가입, 노조 신규 결성이 대폭 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이하, 민주노총)의 조합원 수가 2017년에 이어 2018년에는 더욱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10일 민주노총 미조직전략조직실에 따르면, 2018년 11월 기준 전체 조합원 수가 95만 명에 다다른 것으로 집계됐다.

관련해 백선영 민주노총 미조직전략조직부장은 “2017년 말 민주노총 집행부 선거에서 파악된 조합원 수가 80만이었고, 지금은 또 10~15만 정도가 더 늘어 90만을 넘어선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며 “1년 사이에 10만이 늘어난 것은 상당히 이례적”이라고 밝혔다. 

이는 고용노동부가 분석한 통계자료에서도 확인된다. 2018년 12월21일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2017년 말 노동조합 조직현황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전체 노동조합 조합원 수는 208만8천명으로 전년도(196만6천명)에 비해 12만1천명(6.2%)이 증가했다. 

노동부가 작성한 최근 5년 간 상급단체별 조합원수 증감 그래프를 통해, 양대노총의 조합원 수가 2016~2017년 이후 빠르게 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특히 2016년에서 2017년으로 넘어가는 시기 민주노총(64만→71만)의 상승곡선은 한국노총(84만→87만)보다 더 가파르다. 그런데 이 통계엔 당시 ‘법외 노조’였던 민주노총 가맹조직 전국공무원노동조합(공무원노조 집계, 14만)과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집계, 5만)의 조합원 수가 반영되어 있지 않다. 이를 고려하면 양대노총이 엇비슷하거나 민주노총이 한국노총을 앞질렀다는 분석도 나온다. 

그동안 전교조와 함께 ‘법외 노조’였던 공무원노조는 2018년 3월에서야 ‘법내 노조’로 진입했다. 전교조는 여전히 해고교사 조합원 불인정 문제 등으로, 박근혜 정권 때 ‘법외 노조’ 통보를 받은 뒤 노조지위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2018년 11월21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민주노총의 ‘적폐청산-노조할 권리-사회대개혁 민주노총 총파업대회’에서 참가자들이 노조할 권리를 촉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2018년 11월21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민주노총의 ‘적폐청산-노조할 권리-사회대개혁 민주노총 총파업대회’에서 참가자들이 노조할 권리를 촉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정의철 기자

2년 사이 조합원 3만 명 늘어난 공공운수노조 
“1만여 명 증가” 중소공장 조직화 결실맺은 금속노조
 

구체적인 수치까지 정확하게 집계가 끝나지 않은 상황이지만, 2017년 이후 민주노총 가맹조직 중 가장 빠른 속도로 조합원 수가 늘어난 조직은 공공운수노조다. 관계자들에 따르면, 그동안 공공운수노조는 민주노총 가맹조직 중 두번째로 큰 규모였다. 그런데 최근 가장 큰 규모였던 금속노조를 앞질렀다. 

민주노총 홈페이지에 공개된 조직현황만 보더라도, 2017년 1월 기준 공공운수노조 조합원 수는 17만 명이다. 민주노총 관계자들은 “2018년을 넘기며 공공운수노조가 20만 명을 넘어섰다”고 설명했다. 불과 2년 사이에 조합원이 3만 명 가량 증가한 것이다. 

민주노총 관계자는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문제와 맞물리면서 노조 조직화가 활발하게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하자마자 인천공항을 찾아가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화’ 공약을 밝히고, 이와 함께 현장에서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운동’이 활발히 진행되면서 나타난 결과라는 것이다. 

공공운수노조에 추월당했지만, 금속노조 조합원 수의 증가폭도 만만치 않다. 2017년 1월 기준 17만3천여 명이었던 조합원이, 올해 들어 18만 명을 상회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무노조 사업장으로 악명 높았던 일부 대기업에서 ‘무노조 경영전략’이 깨지고, 그간 금속노조가 조직화에 힘을 쏟아온 중소단위 사업장 노동자들이 노조에 대거 가입하면서 결실을 맺고 있다.

삼성전자서비스는 지난해 검찰조사에서 삼성의 노조파괴 공작이 드러나자 “노조활동을 보장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는 삼성그룹 계열사가 노조를 인정한 첫 사례다. 게다가 삼성전자서비스가 “협력사 직원들을 직접 채용하겠다”고 밝히면서,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 조합원 수가 크게 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무노조 경영의 대명사였던 포스코에서도 노조가 생기면서 수천 명 단위의 조합원 가입이 이루어졌다. 다만, 포스코에선 노조간부 해고와 부당노동행위 고소 등 여전히 노사갈등이 지속되고 있는 상황이다. 

현대모비스 공장을 비롯한 1차 하청에 속하는 자동차부품공장에서도 신생노조가 생겨나고, 조합원 수가 크게 늘고 있다. 그동안 노조가 생긴다고 하면 폐업을 해버리거나 노조탄압을 일삼아도 별다른 제지를 받지 않았던 사측이 촛불 이후 조심스러워지면서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다. 금속노조 관계자는 “중간단위 미조직 제조업 영역에서 조직률을 높이기 위해 4~5년간 꾸준히 역량을 집중시켜 왔다”며 “그 성과가 조금씩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전국공무원노동조합 조합원들이 2018년 11월9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희망을 현실로 공무원119 연가투쟁’ 결의대회에서 해직공무원 원직복직과 노동3권 보장 등을 촉구하며 피켓을 들고 있다.
전국공무원노동조합 조합원들이 2018년 11월9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희망을 현실로 공무원119 연가투쟁’ 결의대회에서 해직공무원 원직복직과 노동3권 보장 등을 촉구하며 피켓을 들고 있다.ⓒ김슬찬 기자

요양서비스·마트·가전통신서비스·택배·대리운전 조합원 증가 
‘법내 노조’ 진입 공무원노조, 조합원들 복귀 중 
건설노조, 청년·여성 노동자들 가입 늘어
 

민주노총 가맹조직인 서비스연맹과 공무원노조, 건설노조, 보건의료노조 등에서도 촛불 이후 조합원이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 

먼저 ‘7만 서비스연맹’은 2018년을 지나며 조합원이 1만 명 이상 늘어 ‘8만 서비스연맹’이 됐다. 서비스연맹 관계자는 “2016년 말에 요양서비스 영역에서 노조가 생기고, 2017년 말~2018년 사이에 조합원수가 크게 늘었다. 또 마트, 가전통신서비스, 택배, 대리운전 영역에서 조합원 수가 크게 늘었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저희가 집중적으로 조직화사업을 펼쳤던 요양서비스 등 5개 영역 외에도 다양한 영역에서 신규노조가 생겨나고 있다”며 “2017년에 비해 2018년에만 2배에 가까운 신규노조가 만들어졌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3월 노조설립증이 교부되면서 ‘법내 노조’가 된 공무원노조도 10개월 사이에 조합원 수가 3천 명 가량 증가했다. 상급단체에 가입돼 있지 않았던 도·시·군 단위 개별 노조들이 공무원노조를 상급단체로 정하고 있는 것이다. 

공무원노조 관계자는 “적으면 백 명 단위에서 많으면 천 명 단위의 노조가입이 이루어진 측면이 있고, ‘법내 노조’ 진입 이후 어렵게 운영되고 있던 지부가 다시 살아나고 있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다만, 공무원노조 관계자는 “새롭게 노조가입이 이루어진다고 보기 보단, 복원과정을 밟고 있다고 보는 게 맞다”고 지적했다.  

민주노총 가맹조직 건설산업연맹 산하의 건설노조도 2016년에서 2018년 사이에 조합원이 1만 명 가량 늘었다. 건설노조 관계자는 “토목건축에 속하는 형틀목수, 타설, 철근 등 분야에서 많이 늘었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특히 청년 조합원이 유의미하게 증가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20~30대 여성·청년 노동자들이 건설노조에서 절대적인 숫자로 늘어난 것은 아니지만, 의미 있는 상승세를 보였다”며 “2017년에 비교해 2018년에 3배가량(약 100명→300명) 늘었다”고 강조했다. 이어 “전체 숫자로 보면 적은 수지만, 증가폭에 있어서는 저희에게 의미 있는 숫자”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지난 5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24살 청년 비정규직 고 김용균 3차 범국민 추모제에서 한 참가자가 피켓과 촛불을 들고 있다.
지난 5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24살 청년 비정규직 고 김용균 3차 범국민 추모제에서 한 참가자가 피켓과 촛불을 들고 있다.ⓒ김슬찬 기자

왜 노동자들은 노조에 가입하고 있을까?  

노조 가입이 크게 늘고 있는 현상에 대해, 각 노동조합 간부들은 비슷한 분석을 내놨다.

장석원 금속노조 기획부장은 “촛불 이후, 미조직 노동자들이 자기 권리를 찾고자 하는 의식이 커졌기 때문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최근 산업현장에서 민주노총으로 걸려오는 상담전화의 상당수가 미조직노동자들이 자기 권리를 찾기 위한 내용인 것으로 전해졌다. 

백선영 민주노총 미조직전략조직부장은 “상담전화를 받아보면, 참고 당해왔던 문제들을 이젠 더 이상 참지 않겠다는 사례가 많다. 개별근로관계든, 집단근로관계든 불만들을 집단적으로 모아내면서 노조 조직화의 열망으로 연결되고 있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촛불 이후 노동자들의 향상된 권리의식도 있지만, 현 정부의 노동정책이 한 몫 하고 있다는 평가도 있다. 민주노총 중앙조직 관계자는 “문재인 정부가 부당노동행위에 대해선 엄벌 하겠다는 태도를 보인 점도 영향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건설노조 관계자 또한 “노조 가입이 느는데 대해 문재인 정부의 노동정책과 관련이 있는지 내부적으로 정식 분석해 본 것은 아니지만, 흥미롭게 보고 있는 지점”이라며 “일단 긍정적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얘기가 많다”고 전했다. 이어 “이명박 정부부터 탄압을 많이 받았고, 전 정부의 정책기조에 따라 어려운 시기가 있었던 반면, 문재인 정부 들어서니 일단 그런 부분은 없어 그런 것 같다”고 말했다. 

민주노총 중앙 관계자와 각 산별노조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그동안 노조가 역량을 집중해온 사업이 변화된 정세와 정부 정책 기조 등과 맞물려 ‘조합원 증가’란 성과로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공무원노조와 택배노조의 ‘법내 노조’ 진입, 삼성전자서비스의 사내하청노동자 직접고용 계획 발표, 중앙교섭을 통해 전국 형틀목수 일당 기준치 마련 등이 이같은 대표적인 사례다.

백 미조직전략조직부장은 “촛불 이후의 정치사회적 변화에 제일 크게 영향을 받았다고 본다. (개별적으로는) 사업장에서의 ‘갑질’ 등이 부각되면서 노조의 필요성을 체감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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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군사화', 그리고 파워엘리트의 탄생

[전쟁국가 미국·2강-②] 군산복합체와 안보 관료의 등장
2019.01.15 00:40:08
 

 

 

 

2차 대전은 미국 사회가 전면적으로 군사화되는 첫 번째 계기였다. 이 전쟁을 거치면서 군부가 대외 정책의 실세가 됐고, 대기업은 연방정부를 주요 고객으로 하는 군수산업이라는 새롭고 거대한 수요처를 확보했다. 군산복합체의 등장이다. 

또한 뉴욕에 근거를 둔 국제금융가와 대기업 국제변호사들이 연방정부의 안보 관료로 대거 발탁돼 미국의 대외정책을 전담한다. 이들 군부와 대기업, 안보 관료의 3자 연합은 이후 군사 개입에 의한 세계 경영을 추진한다. 파워엘리트의 탄생이다.

2차 대전을 통해 연방정부가 비대해지면서 전쟁을 결정하는 권한이 사실상 의회에서 행정부로 넘어갔다. 예컨대 반전 정서가 최고조에 달했던 1930년대 후반 미 의회에서는 미국의 해외 참전을 위해서는 반드시 국민투표를 거쳐야 한다는 조항을 헌법에 추가하자는 움직임이 있었다. 민주당 루이스 러들로 하원의원이 발의한 이 결의안, 즉 '러들로 결의안'은 1938년 1월 의회 표결에서 근소한 차이로 부결됐는데, 이를 위해 루스벨트 대통령은 자신의 모든 정치력을 동원해야 했다.  

그러나 10년도 채 지나지 않아 그리스 내전 개입을 천명한 트루먼 독트린이나 한국전쟁 개입은 의회의 승인은커녕 상의조차 없이 결정됐다. 2차 대전을 거치면서 전쟁에 대한 미국인의 생각이 근본적으로 바뀐 것이다. 

2차 대전의 경험은 미국이 세계를 경영하는 지침 역할을 했다. 그 요체는 군사주의였다. 강력한 군사력이 국내 번영과 세계 패권을 유지해준다는 믿음이었다. 이른바 안보국가(National Security State)가 그것이다. 

2차 대전 후 미국의 안보 관료들은 스탈린을 히틀러와 같은 자리에 놓으면서 '뮌헨의 교훈'을 끊임없이 상기시켰다. 영국의 체임벌린 총리가 히틀러에 양보한 뮌헨의 유화정책이 2차 대전을 불러왔다면서 결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다.

이제 전쟁, 또는 전쟁의 준비는 필요한 것을 넘어 바람직한 것이 됐다. 그리고 정부의 최대 임무는 전쟁에 대비하는 것이 됐다. 파시즘과 맞서 싸운 어제의 동지 소련이 이제는 불구대천의 숙적이 됐다. 아니, 돼야 했다. 그들에게 소련과는 대화도 공존도 있을 수 없었다. 오직 군사적 대결만이 있을 뿐이었다. 

미국의 군사주의는 2차 대전 직후 약 18개월 간 급속한 동원 해제로 일시적으로 퇴조하는 듯했으나 1947년 3월 트루먼 독트린의 발표로 재시동을 걸었으며 1950년 6월 한국전쟁의 발발과 함께 전면적 재무장이 단행되면서 미국 사회의 기본 구조로 확고하게 자리 잡는다.

연방정부의 팽창 : 안보국가(National Security State)의 탄생

2차 대전은 미국의 연방정부를 급속하게 팽창시켰다. 그중에서도 안보 부문의 팽창이 두드러졌다. 전쟁이 일어나던 1939년 미 연방정부의 공무원은 80만 명이었고 이중 안보 관련은 10%였다. 전쟁 직후 공무원의 전체 규모는 400만으로 늘어났고 이중 75%가 안보 관련이었다. 전체 관료 숫자는 5배로, 안보 관련 공무원은 8만에서 300만으로 37배 이상 늘어난 것이다.  

1939년에서 1945년 사이 연방정부의 세입 규모는 8.8배 증가했다. 그 돈은 누가 냈을까? 국민들이 냈다. 1차 대전 때 미국은 채권(Liberty Bond) 발행으로 전쟁 자금을 댔다. 반면 2차 대전은 국민 세금(소득세)으로 충당했다.  

1919년에서 1939년까지 미국에서 소득세를 내는 가구는 전체의 1.5~2.5%에 불과했다. 그러나 1943년이 되면 거의 모든 가구가 소득세를 낸다. 1945년에는 개인 소득세 세입이 기업 법인세 세입을 초과하면서 사상 최초로 소득세가 연방정부의 최고 세입항목이 된다. 이후 20년간 민간 소득의 8~9%가 소득세로 징수됐고, GNP의 10~11%가 국방비로 쓰인다.

이처럼 국민의 혈세로 모아진 전쟁 자금은 군수물자 생산을 위해 수 십 개 거대 기업의 호주머니 속에 들어간다. '이익은 사유화, 위험은 사회화'라는 전쟁과 금융의 공통점이 입증되는 대목이다.  
 

▲ 박인규 프레시안 편집인 ⓒ프레시안(최형락)

 
1930년대 중반 미 육군의 병력 규모는 약 14만 명이었고 1934년 국방예산은 2억 4300만 달러였다. 당시 미군이 보유한 무기는 반자동 소총 80정과 대부분 1903년에 만들어진 스프링필드 소총이 전부였다. 군에 대한 지원이 얼마나 미미했던지 1935년 당시 육군 참모총장이었던 맥아더 장군은 "가능하다면" 30일 치 탄약을 비축하는 게 목표라고 말할 정도였다. 1940년에도 미군이 보유한 중화기는 탱크 80대, 폭격기 49대가 고작이었다.

미국의 국방예산은 2차 대전이 발발한 1939년 30억 달러에서 참전 직후인 1942년 200억 달러, 그리고 1945년에는 450억 달러로 급속하게 늘어난다. 불과 6년 만에 15배나 증가한 것이다.  

전쟁 기간 병력 규모는 최대 1600만 명에 달했다. 전쟁 기간 미국은 탱크와 자주포 8만 8000대, 대포 25만 7000대, 기관총 200만 정, 폭격기 9만 7000대, 전투기 9만 9000대, 그리고 22척의 항공모함과 400척의 구축함 및 순양함을 생산했다. 그리고 원자폭탄까지. 그야말로 천문학적으로 군비가 증강된 것이다. 

미국 경제사학자 리차드 드 보프에 따르면 2차 대전 당시 미국의 군사 관련 지출은 1939년 90억 달러에서 1945년 2000억 달러로 늘어났다. GNP 대비 군사 지출 비중은 1939년 1.5%에서 1945년 40%로 급증했다. 이에 따라 전쟁 5년간(미국은 1940년부터 전쟁경제체제로 전환했다) 미국의 연간 GNP는 무려 2배로 증가했다(6870억 달러).

로버트 힉스라는 학자는 미국의 2차 대전 전쟁비용을 8400억 달러로 추산한다(1940년 기준 : 인플레 감안 2012년 가격 13.59조 달러). 그에 따르면 1944년 미국의 군사지출은 GDP의 36%, 연방정부 예산의 86%에 달했다. (Depression, War, Cold War(2006), p.80~81, 로버트 힉스) 

역사상 최대 규모의 전쟁 수행을 위해서는 불가피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은 유럽과 아시아의 2개 전장에서 전쟁을 수행한 유일한 나라였다. 그러나 평상시 국방비의 수십 배에 달하는 거액의 전쟁 자금, 자그마치 1600만 명의 인력이 5년 가까이 전쟁에 동원됐다면 그 사회의 성격에 중대한 변화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즉 자원 배분의 우선순위가 그 사회의 성격을 결정한다. 

게다가 관료제의 속성상 한 번 생겨난 조직과 기구는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 관료제도 일종의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어떤 식으로든 스스로의 생존을 모색한다. 2차 대전을 통해 팽창한 연방정부와 군부의 규모, 역할을 축소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안보 국가, 전쟁 국가로의 변화는 2차 대전과 함께 시작됐다. 

군부의 부상 

2차 대전 동안 미 군부는 단지 전투만 수행한 것이 아니었다. 미국의 국가안보전략을 세우고 집행하는 가장 효율적인 정부기구였다. 즉 미국의 대외 정책은 군부가 주도했다. 국무부의 역할은 극히 미미했다. 2차 대전 때까지 미국의 외교관은 상류 계층, 또는 부호들이 맡았다. 이들의 역할은 주로 미국 기업의 해외 진출이나 영사 업무에 한정됐다. 인원도 그리 많지 않았다.  

특히 정치 업무를 담당하는 외교관은 극히 적었다. 1944년 현재 국무부 총인원은 5,906명, 이중 정치 담당은 336명에 불과했다. 6%가 채 안 된다. 게다가 젊은 외교관 상당수는 군 장교로 징집됐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국무부에 별 기대를 걸지 않았다. 전쟁 수행과 관련된 계획과 집행을 군 합동참모본부에 의존했다. 그는 당시 국무장관인 코델 헐과 거의 대화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학교 동창인 섬너 웰스 차관을 통해 국무부와 소통했다. 1943년 열린 주요 국제 회담인 카사블랑카(1월), 카이로(11월), 테헤란(11월) 회담에 헐 국무장관은 참가하지 않았다. 대신 합동참모본부가 참가했다. 국무부의 위상을 잘 말해주는 대목이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미국이 참전하게 되면서 루스벨트는 처칠과 회동했고 그 직후 합동참모본부를 창설했다. 당초 목적은 영국 참모본부의 상대 역할을 맡는 한편 육군과 해군 간 불필요한 경쟁을 막기 위해서였다(당시 공군은 별도 병과가 아니라 육군과 해군에 소속돼 있었다). 또한 해군의 윌리엄 리 제독을 군과 대통령 사이의 연락책으로 임명해 백악관에 상주시켰다.  

군은 대통령에 직접 보고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고, 군부 지도자들은 다른 어떤 민간 관리보다도 훨씬 자주 대통령과 만날 수 있었다. 특히 육군 참모총장이었던 조지 마셜 장군을 매우 높게 평가했던 루스벨트는 "귀관이 외국에 나가 있을 때면 밤에 잠을 잘 수가 없구려"라고 할 정도였다. 군부에 크게 의존했던 루스벨트가 합참의 건의를 거부한 것은 2~3차례에 불과했다고 한다.  

군부는 대외관계에 대한 모든 정보와 사고방식의 개념적 틀을 제공했다. 기업계를 대표하는 외교협회(CFR)가 1940년 시작된 '전쟁과 평화 연구'를 통해 전쟁 목표의 큰 원칙을 제시했다면, 1941년 12월 이후 군부는 실제 전쟁 수행을 통해 미국 안보전략의 입안과 집행을 담당한 셈이다.  

전쟁을 통해 미 군부는 주변적 기구에서 사회 전체의 자원을 통제하는 위치에 올랐을 뿐만 아니라 군부의 역할을 새롭게 정의했다. 정치와 군사의 장벽이 무너졌으며 전략을 개발하고 집행하는 과정에서 군부는 정치에 깊숙하게 개입했다. 군역사가 월터 밀리스는 이렇게 말한다. 

"국무부는 너무도 철저하게 소외된 반면, 군부는 너무도 확고하게 중심적 위치를 차지했다. (대외 전략과 관련해) 미국의 역사적 경험에서 참고할 만한 사례가 거의 없었으므로 전쟁에 관한, 그리고 국가정책에서 군사력의 역할에 관한 미 군부의 교조와 신념은 매우 중요하게 됐다" 

중대한 정치적 의미를 갖는 전쟁의 주요한 결정들은 대통령과 합참, 그리고 루스벨트의 최측근 해리 홉킨스에 의해 내려졌다. 외교 회의를 준비하고 동맹국과의 협상을 담당한 것은 합참이었다. 유럽과 아시아에서는 각각 아이젠하워와 맥아더가 최고 권력을 행사했다. 합참은 "(미국과 해외, 정부와 군 간의) 모든 통신을 장악함으로써 다른 어떤 민간기구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모든 상황을 미리 알고 사전에 대비할 수 있었다"

아직 스탈린그라드가 독일군에 포위되어 있을 때(1942년 말~43년 초), 미 군부는 벌써 전쟁이 끝난 후 소련의 군사 위협에 대비한 군비 강화를 준비하고 있었다. 전쟁이 끝나자 육군은 450만 병력, 해군은 60만 병력에 371척 주요 전함과 5000척의 보조 군함, 공군은 별도 병종으로의 독립과 70개 전투 그룹과 40만 병력을 요구했다. 미국 내 어떤 세력보다도 먼저 냉전을 예견했다고 할 수 있다. 

전쟁 기간 쌓은 경험과 위상으로 말미암아 많은 군부 지도자들이 주요 외교 보직을 차지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마셜이다. 그는 1946년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중국 국공내전 협상의 중재역을 맡은 데 이어 국무장관(1947~49년), 국방장관을(1950~51년) 역임했다. 

맥아더는 무려 7년간 일본을 지배했고, 미국 대외 전략의 핵심인 독일 정책을 담당한 것도 힐드링, 바이로드 등 군 출신이었다. 중앙정보국(CIA)도 창립 초기에는 호이트 반덴버그, 로스코 힐렌코터, 월터 베델 스미스 등 장군들이 국장을 도맡았다.

군산복합체 

2차 대전은 미국 경제에도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군수산업이라는 새로운 산업 분야를 창출해낸 것이다. 이전까지 미국에는 군사 무기만을 생산하는 군수산업이란 게 없었다. 그러나 2차 대전을 거치면서 군수산업은 미국 경제에서 가장 중요한 산업 분야가 됐다.

전쟁 이전 군과 기업의 관계는 물과 기름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이후 군과 기업은 확고한 공생 관계를 맺는다. 군산복합체의 탄생이다. 

2차 대전 이전 미국의 기업가들은 군인을 시대에 뒤떨어진 야만적 직업이라고 생각했다. 앤드류 카네기나 헨리 포드 같은 미국 재계의 거목들은 상업적 평화주의자였다. 교역 확대가 인류 구원의 첩경이며 언젠가 세계가 하나의 거대한 단일 시장이 될 것으로 확신했다. 산업 발전과 군사주의는 양립할 수 없었다. 그들에게 군사주의는 순전한 낭비일 뿐이었다.

반면 군인들은 기업가를 이윤만 밝히는 유한계급이라고 경멸했다. 공공의 이익에 대한 봉사는 외면한다고 비판했다. 1906년 윌리엄 카터 장군은 "애국과 이윤은 전혀 별개"라고 지적했다. 

미국은 1941년 3월 무기대여법(Lend-Lease) 제정을 통해 영국, 소련 등 연합국 측에 무기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1940년부터 군수물자 생산을 서둘렀다. 미국의 재무장은 헨리 왈라스, 해리 홉킨스 등 뉴딜주의자 주도에 의한 것이었다. 

당초 기업계는 군수물자 생산에 소극적이었다. 과잉 설비 투자를 우려했기 때문이다. 전쟁 수행을 위해 생산 설비를 확대했다가 자칫 유휴시설로 전락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당시 루스벨트가 매년 비행기 5만 대 생산 계획을 제시하자 군과 기업계 모두 경악했다고 한다. 전쟁의 규모가 그 정도로 커질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기업계는 1차 대전 때처럼 연방정부 소유의 병기창에서 정부 주도로 군수물자를 생산하는 것을 선호했다. 과잉 설비에 따른 위험 부담을 지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제네럴 모터스(GM)는 1차 대전 때 생산설비를 전혀 확대하지 않았다. 자동차 생산은 이전처럼 유지하면서 군수물자 생산은 3500만 달러에 그쳤다. 2차 대전 때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진다. 자그마치 120억 달러 상당의 군수물자를 생산한 것이다(340배 이상). 특히 GM은 1942년 2월부터 1945년 9월까지는 단 한 대의 상용차도 생산하지 않았다. 그 대신 377가지의 신형 군수물자를 생산했다. 

정부가 아낌없이 연구개발비를 제공하고 생산설비를 지어주며 생산된 제품에 두둑한 이윤까지 보장하는데 군수물자 생산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기업계로서는 그야말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만난 셈이다. 이제 '애국과 이윤'은 하나가 됐다.

게다가 전쟁을 거치면서 핵무기, 레이더 등 전혀 새로운 군수물자가 속속 개발됐다. 이제 미국 기업계는 연방정부라는 새로운 고객이, 확실하게 이윤을 보장하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상품을 주문하는 전혀 새로운 성장 산업을 만나게 된 것이다. 

전통적으로 정부 개입을 그토록 증오했던 미국 기업은 2차 대전 동안 정부 주도의 군수산업에 대해서는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기업의 자유를 외치며 정부 간섭을 그토록 싫어했던 미국의 기업이 거대한 정부 보조금으로 회생한 것이다. 전쟁 5년간 미국의 연간 GNP는 무려 2배로 증가했다(6870억 달러). 

정부 지원은 특히 대기업에 집중됐다. 연구개발의 40%가 상위 10대 기업에 몰렸다. 연방정부는 전쟁 기간 중 수백 개 군수공장 건설을 지원했으며 전후 헐값에 민간 불하했다. 260억 달러 중 170억 달러가 정부 지출이었다. 예컨대 유에스 철강은 2억 달러에 건설된 제네바 철강을 4750만 달러에 불하받았다. 정부 자금으로 개발된 특허권도 민간기업에 불하됐다. 감사 결과 7개 중 1개는 거의 공짜로 불하된 것으로 드러났다.

1차 대전 때까지 군수물자 계약은 경쟁 입찰이었다. 그러나 2차 대전 때는 74%가 수의 계약으로 바뀐다. 전시 중 경제 운용에 관한 권한이 대기업에 넘어갔기 때문이다. 참전 직후인 1942년 1월 루스벨트는 전시생산위원회(War Production Board)를 창설하고 이 기구에 군수물자 생산 계약에 관한 전권을 위임했다. 위원회 임원은 거의 모두 대기업 간부 출신이었다.
 

▲ 1942년 4월 14일 워싱턴 D.C의 해밀턴 호텔에서 전시생산위원회 회의가 열렸다. ⓒPicryl


이외에도 루스벨트는 자신의 행정명령으로 만든 각종 전시 연방 기구에 자그마치 1만 명의 기업 경영진들을 포진시켰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전쟁을 수행하려면 기업이 돈을 벌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는 스팀슨의 조언을 충실히 이행한 것이다. 

군수물자 생산 계약의 최우선 기준은 얼마나 빨리 납품할 수 있는가와 연구개발 능력이었다. 당연히 대기업에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1941년의 경우 군사비 지출의 4분의 3이 상위 56개 기업에 몰렸다. 그중 3분의 1은 6개 기업(베들레헴철강, 제네럴 모터스, 듀퐁 등)이 차지했다. 끼리끼리 해먹은 것이다. '기업사회주의'라는 비판이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전시생산위원회의 위원이기도 했던 제네럴 일렉트릭(GE)의 찰스 윌슨 회장은 "중소기업이 탱크나 비행기 같은 복잡한 무기를 만들어낼 수 없다"면서 "국방 프로그램은 대기업이 할 일"이라고 강변했다.  

군수물자 생산은 그야말로 노다지였다. 제조원가에 일정 비율의 이윤(9~10%)을 보장해주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예상보다 제작 원가가 적게 들어도 당초 책정된 대금은 모두 지급됐다. 비용이 더 들면 초과분을 보전해줬다. 

전쟁 후 군수산업 실태를 조사한 상원 국방프로그램특별조사위원회의 해리 트루먼 위원장은 "산타클로스가 크리스마스 선물 나눠주듯 생산 계약을 분배했다 (중략) 이전 같으면 기업 스스로 위험 부담을 지고 1년을 꼬박 일해야 벌 돈의 3~4배를, 정부 보증하에 3개월이면 벌 수 있었다"고 비판했다. 

전쟁 특수가 어찌나 달콤했던지 군과 기업이 영구적 협력관계를 맺자는 제안까지 나왔다. 1944년 GE 회장 찰스 윌슨은 '육군군수산업협회' 연설을 통해 앞으로도 장래의 전쟁 동원에 대비해 '영구 전쟁 경제(permanent war economy)'를 구축하자고 제안했다. 군수물자 생산 기업의 임원 중 한 명을 예비역 대령으로 임명해 국방부와의 연락 역할을 맡기자면서 "최종적으로 군과 기업 사이에는 항구적인 협력 프로그램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앞으로의 국가 정책은 미래의 전쟁에 대비한 산업 역량과 연구개발 능력 확보가 돼야 한다는 것이 자연스럽고도 논리적인 결론이다. 이에 못 미치는 어떤 정책도 위험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향후 산업계가 똘똘 뭉쳐 "정치적 마녀사냥"을 예방해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죽음의 상인'이란 오명을 또다시 뒤집어쓸 수 있다"고 경고했다. 1930년대의 전철을 밟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2차 대전의 경험은 1930년대 대공황 기간 동안 땅에 떨어진 대기업의 대중적 이미지를 회복하게 해주었다. 대기업은 민주주의의 병기고가 됨으로써 이윤과 함께 애국적 봉사를 할 수 있다는 것을 과시했다. GM이 히틀러를 무찌를 탱크를 생산해내면서 'GM에 좋은 것은 미국에 좋다'는 사실을 이제 부정할 수 없게 됐다 

군의 과제가 변화하면서 기업과 군의 화해도 가속화됐다. 기술과 정치 문제에 대한 군의 개입이 확대되면서(정부 예산의 대부분을 국방 예산이 차지하고, 국방 예산의 지출로 공장, 병원, 주택, 교통 등 민간 경제에 중대한 영향을 미침) 군인의 영웅적 윤리와 기업가의 자본주의적 이윤 추구 간의 경계도 희미해져 갔다.  

미국의 비판적 지식인 리차드 바넷은 저서 <전쟁의 뿌리>를 통해 "2차 대전의 경험은 미국 기업으로 하여금 군부를 이윤이 생기는 동맹세력으로, 미국적 생활방식의 영구적이고 합법적인 세력으로 인정하도록 만들었다"고 지적한다. 

또한 사회학자 C. 라이트 밀스는 "미국에서 민간 기업의 발전은 공공 자금에 의해 뒷받침돼온 것이 사실"이지만 특히 "전쟁은 이들 민간 기업이 부와 권력을 축적하는 데 많은 기회를 제공해 왔다"고 말한다. 특히 2차 대전은 "미국의 생산 수단에 대한 핵심적 통제권(Commanding Height)을 민간 기업에 넘겨주었다"는 점에서 "이전의 전쟁들이 가져다준 혜택을 그야말로 보잘것없게 만들었다"고 지적한다.  

미국 민간 기업의 발전이 시장에서의 자유경쟁의 결과라는 신화를 정면 부정한 것이다. 나아가 실상은 공공의 지원에 의해, 특히 전쟁 이윤이 기업의 폭발적 성장을 가져왔고 그중에서도 2차 대전에 의한 혜택은 이전 전쟁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 즉 생산 수단에 대한 핵심적 통제권을 가져올 정도로 막대했다는 점을 말한 것이다. 

건국 이래 미국에는 상비군이 없었다. 직업 군대가 시민의 자유를 억압할 것이란 우려 때문이었다. 상비군이 없으니 당연히 민간 군수산업이란 것도 없었다. 그러나 2차 대전을 거치면서 미국은 군사경제가 경제의 근간이 될 정도가 됐다. 미국이란 나라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변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안보 관료, 금융가와 국제변호사의 독무대  

나치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할 즈음인 1940년 6월 19일, 루스벨트는 공화당 출신의 월가 변호사이자 동부 주류세력(Eastern Establishment)의 원조 헨리 스팀슨(1867~1950년)을 전쟁부 장관(국방부의 전신)에 임명한다. 예일대와 하버드 로스쿨을 졸업한 스팀슨은 이미 스페인전쟁 당시 전쟁부 장관(1899~1904년)을 비롯해 필리핀 총독(1927~29년), 국무부 장관(1929~1933년)을 역임한 정치거물이었다. 정계를 떠난 뒤에는 뉴욕의 금융기관과 대기업의 자문변호사로 일했다.  

루스벨트가 공화당 출신의, 그것도 73세의 노정객을 국방 책임자로 발탁한 이유는 스팀슨이 말한 대로 자본주의 국가가 전쟁을 치르기 위해서는 대기업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스팀슨은 2차 대전이 끝날 때까지 전쟁부 장관으로 일했다. 

전쟁부 장관이 된 스팀슨은 자신과 같은 주류세력의 인물들을 끌어들였다. 존 매클로이와 로버트 로벳이 바로 그들이다. 스팀슨은 1940년 9월 매클로이를 비서실장으로, 12월에는 로벳을 공군 관련 특별보좌관으로 임명했다.  
 

▲ 헨리 스팀슨 전 전쟁부 장관 ⓒ헨리 스팀슨 센터

 
매클로이는 1941년 4월부터 차관보로서 전쟁물자 조달, 연합국에 대한 전쟁물자 조달(렌드리스), 징병, 정보 관련 일을 했다. 또한 전쟁 이후 2대 세계은행 총재, 점령 당시 독일 고등판무관을 역임했다. '의장(Mr. Chairman)'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그는 동부 주류세력의 대부 역할을 했다.  

로벳은 1941년 4월부터 차관보로서 전략 폭격 등 미국의 공군력 향상에 크게 기여했다. 또한 종전 직후 전쟁부가 출범시킨 로벳위원회를 맡아 CIA 창설을 주도했다. 그는 1947년부터 1953년까지 국무 차관, 국방 차관, 국방 장관을 차례로 역임했다. 1960년 대통령에 당선된 케네디가 내각 구성을 처음 상의했던 인물이 바로 로벳이다. 

케네디는 당초 로벳에게 국방 장관을 맡기려 했으나 로벳은 건강 문제를 이유로 고사했다. 대신 국방 장관에 로버트 맥나마라, 국무 딘 러스크, 재무 더글라스 딜론을 천거했고 케네디는 이 제안을 모두 받아들였다.  

한편 제임스 포레스탈은 1940년 8월 해군부 차관을 시작으로 1944년 5월 해군부 장관, 그리고 1947년 9월에는 전쟁부와 해군부를 통합해 출범한 국방부의 초대 장관이 된다. 그는 1940년 해군부 장관에 임명된 프랭크 녹스에 의해 차관에 발탁됐다. 녹스는 1936년 대선에서 공화당 부통령 후보로 루스벨트와 대적했던 인물이다.

그리고 1941년 국무부 차관보를 시작으로 국무부 장관까지 역임하면서 전후 미 대외정책의 골격을 짠 민주당 소속의 딘 애치슨이 있다. 스팀슨, 매클로이, 로벳, 포레스탈 등 공화당 출신과 애치슨 등은 전후 미국에서 냉전 시대의 현인들(Wise Men)으로 불린다. 이들이 주도한 대외 전략이 전후 미국의 번영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동부 뉴욕에 근거를 둔 금융가, 기업가 또는 대기업을 위한 국제변호사라는 점이다. 아이젠하워 행정부에서 각각 국무장관과 CIA 국장을 역임한 존 포스터 덜레스와 알렌 덜레스 형제도 같은 범주에 속한다. 미국 대외정책의 핵심 요직을 맡은 이들은 미국 경제의 해외 진출을 염원하는 동부의 대자본, 대기업의 이익을 대변했다. '미국 대기업에 좋은 것이 미국에 좋은 것이며, 미국에 좋은 것이 세계에 좋은 것'이라는 게 이들의 신념이었다. 

20세기 초에서 1920년대까지 스메들리 버틀러 장군이 미국 대기업의 이익을 위해 중남미 국가들에 대한 군사 개입을 했다면, 이들 냉전 시대의 현인들은 1945년 이후 미국 대기업의 세계 정복을 위한 대외 군사 개입의 길을 연 셈이다. 

리차드 바넷은 "1940년 이후 이들 국가 안보 관료들은 미국의 국익을 새로 정의했다"면서 루스벨트의 스팀슨 등용은 미 대외정책의 중대한 전환점이었다고 지적한다. 

파워엘리트 

"2차 대전 이후 전쟁과 안보, 월가에 대한 구제금융이나 금리와 같은 진짜 중요한 결정은 누가 내리는가? 의회도 국민도 아니다. 군부와 대기업, 안보 관료들로 구성된 파워엘리트들이 내린다." 

미국 사회학자 C. 라이트 밀스는 1956년 발간한 저서 <파워 엘리트>(The Power Elite)에서 이렇게 단언한다. 2차 대전을 거치면서 미국 경제는 "민간 기업 경제인 동시에 영구 전쟁 경제"가 됐으며 이 체제 하에서는 대기업 최고경영진, 군부 지도자, 그리고 행정부 안보 관료가 결정권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들이 파워엘리트다. 

밀스에 따르면 선거를 통해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사회정책이나 조세, 그리고 국방비 이외 나머지 예산에 관한 배분 등 중간 수준의 정책들밖에 없다. 국가 안보, 그리고 금리와 같은 진짜 중요한 결정은 의회 정치에 바깥에 있으며 파워엘리트 내부의 권력투쟁에 의해 결정된다. 

미국 국민들이 정치라고 생각하는 것은 의회에서 직업 정치인들이 중간 수준 정책을 놓고 벌이는 다툼일 뿐, 국가 안보와 같은 진짜 중요한 정책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의회 정치, 중간 수준의 밑에 있는 '일반 대중'들은 그저 TV에서 보여주는 정치 쇼를 보면서 그것이 정치의 전부라고 착각하고 있다.  

밀스에 따르면 건국 이후 남북전쟁 때까지 미국의 경제는 소규모 농장과 공장을 소유한 개인사업자들에 의해 지배돼 왔다. 그러나 2차 대전 이후 미국 경제는 "행정적, 정치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된 2,3백 개 대기업에 의해 지배되고 있으며 이들이 중요한 경제적 결정의 열쇠를 쥐고 있다."  

특히 중요한 것은 "한때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이라는) 불신 때문에 최소 규모로 유지돼 왔던 군부가 이제는 정부 내에서 가장 크고 가장 돈이 많이 드는 부서가 됐다"는 점이다. 

군부 지도자와 대기업 경영진, 그리고 안보 관료들은 이른바 '회전문 인사'를 통해 서로의 영역을 넘나들면서 '그들만의 리그'를 형성한다. 즉 파워엘리트는 독점적, 배타적으로 미국의 대외, 안보, 군사 정책을 결정한다. 

특히 2차 대전 이전 미국인들은 자신의 역사를 "평화가 지속되는 가운데 간혹 전쟁이 끼어드는 것"으로 인식했다. 그러나 2차 대전 이후 "미국 엘리트들은, 상호 공포의 균형에 의해 유지되는 불편하고도 변덕스러운 휴지기라는 것 외에, 평화의 진정한 이미지를 가질 수 없게 됐다. 그들이 오직 유일하게, 그리고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평화'의 계획은 완전 장전된 피스톨뿐이다. 한마디로 전쟁, 또는 최고 경계 태세의 전쟁 준비만이 미국의 정상적이고 어쩌면 영구적 상태가 됐다." 

2차 대전은 기업 엘리트와 군부의 결탁을 가져왔다. 1961년 퇴임하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처음으로 명명한 '군산복합체'를 만들어낸 것은 2차 대전이었다. 대기업과 군부가 결탁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군부가 기업의 생산 계획을 모르면 전쟁 계획의 완벽함을 확신할 수 없고, 기업 경영진이 전쟁 계획을 모르면 생산 계획을 세울 수 없기 때문"이다. 

동시에 미국이 세계의 일에 개입을 하면 할수록 행정부의 권한은 커져갔고, 한때 의회에서 이뤄졌던 많은 결정들이 행정부로 이관됐다. 행정부의 권한이 비대해진 변곡점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행정부 때였다.  

전쟁이 끝난다면 

하지만 전쟁이 끝난다면, 군수물자 주문이 끊어지고 수백만 참전 군인들이 고향으로 돌아온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일감은 떨어지고 실업자도 수백만으로 늘어날 것 아닌가.

전쟁 역사가 가브리엘 콜코는 이미 1942년부터 전후 불경기에 대한 경고가 쏟아져 나왔다고 말한다.  

"1942년부터 경제 기획가들 사이에서는 전후 실업 사태에 대한 우려가 나왔고, 공식·비공식 기구들은 전후 국제 교역 부족, 원자재 부족, 투자 기회 부족에 대한 비관적 전망들을 나이아가라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당시 젊은 경제학자였던 폴 새뮤얼슨은 전쟁이 끝난 후 "정부 지출의 감축으로 500만 미국인이 일자리를 잃거나 노동시간의 상당한 감축을 감수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비관적 예측을 내놓았다.  

또한 딘 애치슨 국무부 차관은 1944년 11월 의회 청문회에서 전후 미국이 "해외 시장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완전고용과 번영을 달성하지 못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3편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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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하나뿐인 달력 "고국이 우릴 잊지 않고 있어..."

사할린 한인동포를 위한 달력, 1월 말 올해도 배달 갑니다

19.01.15 08:06l최종 업데이트 19.01.15 08:07l

 

사할린 한인들  지구촌동포연대가 제작해 선물한 '세상에 하나뿐인 달력'을 들고 포즈를 취한 사할린한인
▲ 사할린 한인들  지구촌동포연대가 제작해 선물한 "세상에 하나뿐인 달력"을 들고 포즈를 취한 사할린한인
ⓒ 변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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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어김없이 달력 한 부가 배달됐다. 연말연시, 참 흔한 게 달력인데, 이 달력은 일반 달력과 다른다.

'1월이 1일부터 8일까지 다 빨간색이네?'
'한 주가 월요일부터 시작되네?' 
'이게 어느 나라 글자지?' 
'설 명절인데 검정색이네?' 

의문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가만히 보니 음력 날짜도 있고, 한글로 한국 국경일과 절기, 명절 등도 표기돼 있다. 또 한국의 절기나 국경일에 대한 러시아어 설명도 있다. 가령, 소한은 'слабые морозы', 추석은 'Чусок, день благодарения', 이런 식이다. 도대체 이 달력의 정체는 무엇일까.

잊지 않고 찾아와줘서 고마워
   

2019년도 '세상에 하나 뿐인 달력'  사할린 동포들을 위해 제작되는 음력 달력. 구정을 전후해 사할린 한인들에게 전달된다.
▲ 2019년도 "세상에 하나 뿐인 달력"  사할린 동포들을 위해 제작되는 음력 달력. 구정을 전후해 사할린 한인들에게 전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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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달력의 이름은 '세상에 하나뿐인 달력'이다. 러시아 달력을 기본으로 해서 음력일과 절기와 국경일 등을 한글로 표기한 달력인데, '지구촌 동포연대'(아래 킨)라는 시민단체가 사할린 거주 한인들을 위해 2013년부터 만들기 시작했다. 제작된 달력은 사할린 한인들에게 전달된다.  

 

"사할린에 갔을 때 나이드신 동포들은 음력으로 일상생활을 챙기더라고요. 사할린 한인들은 대부분 일제강점기부터 이주해 1938년 이후 강제동원 당한 후 남게 된 분들인데, 1~2세분들은 가족의 생일이나 제사 등을 음력 날짜로 세고 계시더라고요. 근데 사할린에는 음력 달력이 귀한 거예요. 그래서 '세상에 하나뿐인 달력'을 만들기 시작했죠."

달력 제작 배경에 대한 킨의 최상구 사무국장의 설명이다.

"달력을 만들고 전달하는 일이 별거 아닌 것 같아도 간단하지 않아요. 무엇보다도 예산을 확보하는 일이 제일 큰일이죠. 포털 사이트 '다음'의 '같이가치'를 통해 제작비를 모금하지만, 목표액을 달성한 건 딱 한 번뿐이었어요."

해마다 모금액이 줄어들다 보니 점점 제작 부수도 적어지고, 내년에도 달력을 만들 수 있을지 걱정이란다.

달력에 들어가는 사진이나 그림은 작가들의 재능기부로 조달한다. 2018년 달력에는 생명과 삶을 주제로 작업을 하는 민중예술가 이철수 판화가의 작품이 사용됐다.

완성된 달력 500여 부는 화물편으로 미리 사할린으로 보내지고, 일부는 구정 즈음에 '킨 방문단'이 직접 들고 가서 사할린 한인들을 일일히 찾아다니며 전달한다. 

사할린의 한인동포들은 누구인가
 
사할린 코르사코프항    강제동원된 한인들이 처음 도착한 코르사코프항 전경
▲ 사할린 코르사코프항  강제동원된 한인들이 처음 도착한 코르사코프항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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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외동포재단에 따르면 2019년 현재 세계 170여 개국에 대한민국 인구 10%를 상회하는 740만 명가량의 한인들이 살고 있다.

이들 중 사할린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처지는 남다르다. 사할린 한인의 대부분은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후반 이후에 강제동원된 사람들과 그 후세들인데, 일제의 패망 이후에도 일본과 소련 및 남북한의 복잡한 셈법과 무관심으로 귀환하지 못하고 사할린에 남게 됐다. 더욱이 사회주의 체제하의 소련과는 수교는커녕 민간차원의 교류조차도 허용되지 않아 고국에 있는 부모자식의 생사도 모른 채 70년 통한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패한 러시아가 북위 50도 이남을 일본에게 넘김으로써 북사할린은 소련이, 남사할린은 일본이 통치하게 된다. 그러다 1945년 일제의 패망으로 남사할린은 다시 러시아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된다. 그러다 보니 남사할린으로 강제동원된 한인들은 이리 떠밀리고 저리 떠밀리는 신세로 전락하게 됐다.

1930년대에 사할린섬에는 1700여 명의 한인들이 살았는데 자발적으로 이주한 북쪽 지역 출신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1937년 스탈린 정권의 소수민족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북사할린에 거주하던 한인들 대부분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한다(극동지역 전체에서는 약 17만 명의 한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했다).
  
사할린 한인 방문단    매년 겨울 '하나뿐인 달력을 전달하기 사할린을 방문한 킨방문단 일행
▲ 사할린 한인 방문단  매년 겨울 "하나뿐인 달력을 전달하기 사할린을 방문한 킨방문단 일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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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일본령인 남사할린 지역의 한인들은 일제강점기에 자발적 혹은 강제적으로 사할린으로 이주한 사람들로 경상도와 전라도 출신들이 많았다. 이들 중에는 '높은 임금'을 주는 '좋은 일자리'를 구해준다는 브로커들에게 속아서 온 경우도 적지 않았다.

1930년대 말 석유·가스·석탄 등 자원개발을 위해 사할린섬에 진출한 일본 기업들과 정부는 부족한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조선인들의 사할린 이주를 부추겼는데, 한국인 브로커들이 앞장서서 조선인들을 모집하고 사할린으로 이주시켰다. 

사할린 이주는 초기에는 민간 주도의 모집 형태가 주를 이루다가 1930년대 말이 되면 모집을 빙자한 강제동원으로 바뀌게 된다. 특히 1938년 '국가총동원령'으로 모든 물적·인적 자원을 자의적으로 동원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일제는 1939년 7월 '조선노무자 모집요강'을 통해 1942년 2월까지는 '모집'으로, 그 이후에는 '관의 알선'으로 강제동원을 실시했다. 1944년 9월부터는 아예 '징용령'을 시행했다.
  
사할린 한인 묘역      킨 방문단이 무연고 사할린 한인들이 잠들어 있는 묘역을 방문하고 있다.
▲ 사할린 한인 묘역   킨 방문단이 무연고 사할린 한인들이 잠들어 있는 묘역을 방문하고 있다.
ⓒ 변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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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 모집요강에 속거나 강제징용된 한인들은 기차나 트럭으로 부산항까지 실려가 일본의 시모노세키항행 배에 태워졌다. 그곳에서 다시 사할린 최남단 코르사코프항으로 실려가 사할린 각지로 보내졌다. 

강제징용된 한인들은 대부분 10대 후반에서 20, 30대 장성한 남성들로 주로 탄광이나 도로 및 항만건설, 목재사업장 등에서 강제노동을 해야 했다.

당시 사할린에는 미쓰이, 미쓰비시, 오지제지 등 일본 전범기업들이 다수 진출해 있었는데, 이들 기업이 운영하는 탄광의 수가 50여 개가 넘었고, 일본 최대 제지회사인 오지제지가 남사할린에서 운영하는 제지공장도 9개나 됐다.

1945년 일제의 패망소식을 들은 한인들은 이제 '집'에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어 코르사코프항으로 몰려들었지만 귀국선에 오를 수가 없었다.
 
망향의 언덕 사할린 코르사코프항
▲ 망향의 언덕 사할린 코르사코프항
ⓒ 변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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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2월 체결된 '소련지역에서의 철수에 대한 미·소 협정'에 따라 사할린 거주 일본인 29만2600명이 일본으로 돌아갔지만, '포츠담선언'에서 조선인은 일본인의 범주에서 제외됐기 때문이다.

당시 귀환하지 못한 한인의 수는 4만3000여 명에 달한다. 1956년 10월 9일 '소·일 공동선언'에 의해 일본인 아내와 조선인 남편 및 그 자식 200~300명만이 사할린에서 귀환했을 뿐이다.

일제에 의해 고통받던 사할린 한인들은 이번에는 소련사회의 차별과 억압 속에서 힘든 세월을 보내야 했다. 이들 가운데에는 귀환만을 손꼽으며 '무국적자'로 살다 죽거나, 통일이 되면 귀환할 수 있다는 희망으로 북으로 넘어간 사람들도 다수였다고 한다. 

다행히 1990년대 시작된 '영주귀국사업'으로 사할린 한인 1세들이 뒤늦게나마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저런 이유로 한인 1세 550여 명은 아직도 사할린에 남아 있다.   

그들에게는 그냥 달력이 아니다
 
'세상에 하나 뿐인 달력'을 받아든 한인들      그들에게는 달력은 '고국이 자신들을 잊지 않고 있다는 징표'와 같은 것이다.
▲ "세상에 하나 뿐인 달력"을 받아든 한인들   그들에게는 달력은 "고국이 자신들을 잊지 않고 있다는 징표"와 같은 것이다.
ⓒ 변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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킨 일행을 맞이하는 한인들의 얼굴에는 반가움이 가득하다. 그분들에게는 달력도 달력이지만 '고국에서 사람이 온 것'이 더 반갑고 고맙다고 한다. "우리를 잊지 않고 먼 곳까지 찾아와 줘서 고맙다"라면서 눈물을 글썽이는 분들도 있다.

한인들이 차려 내오시는 밥상에는 어김없이 김치가 있다. 고명을 얹은 잔치국수와 잡채도 모두 한국식이다. 어렸을 때 부모님이 해 주신 한국음식을 먹으면서 자랐고, 또 먹어본 대로 만들기도 하고, 배우기도 했다고 한다. 한국사람이 한국음식 먹는 게 당연한 거 아니냐고들 하신다. 

역사 시간에도 가르쳐 주지 않았던 '사할린 한인들의 이야기', 발음도 잘 안 되는 먼 타국땅에서 만나는 주름진 얼굴들 앞에서 죄스러움과 부채의식이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작별을 고하고 돌아서는 발길은 언제나 무겁다. 
 
사할린 겨울 자작나무 숲    사할린의 겨울은 혹독하다. 영하 30도를 밑도는 날이 허다하고 눈은 기본이다.
▲ 사할린 겨울 자작나무 숲  사할린의 겨울은 혹독하다. 영하 30도를 밑도는 날이 허다하고 눈은 기본이다.
ⓒ 변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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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의 겨울은 몹시 춥다. 영하 30도를 밑도는 날도 허다하다. 바다까지도 꽁꽁 얼어붙는다. 산처럼 쌓인 눈과 눈보라는 기본이다. 사할린 한인회가 제공한 낡은 일본제 봉고차를 타고 짧게는 서너 시간, 길게는 예닐곱 시간을 달려 한인들을 찾아가는 길은 고단하다. 

여행의 낭만, 설레임 같은 것은 애시당초 없다. 그래도 해마다 찾아가는 이유는 '우리를 잊지 않았다'며 반기는 한인들이 있기 때문이다. 

올해도 킨은 어김없이 1월 말에 '2019년도 세상에 하나뿐인 달력'을 들고 사할린에 계시는 한인들을 방문할 계획이다.  

* 지구촌 동포연대 홈페이지 바로가기 : http://www.kin.or.kr
  
사할린의 겨울    한인들을 찾아가는 킨 방문단 일행.
▲ 사할린의 겨울  한인들을 찾아가는 킨 방문단 일행.
ⓒ 변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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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신년사에 제시된 두 가지 방략

[개벽예감 330] 2019년 신년사에 제시된 두 가지 방략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기사입력: 2019/01/14 [09:30]  최종편집: ⓒ 자주시보
 
 

<차례>

1. 2019년 신년사에 제시된 두 가지 방략

2. 전민족적인 정치회합 개최하여 민족의 운명 바꾼다

3. 민족통일기구 수립으로 실현될 낮은 단계의 연방제

4. 모든 준비는 2016년에 이미 끝났다 

 

 

1. 2019년 신년사에 제시된 두 가지 방략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2019년 신년사에는 평화통일문제와 관련된 특별한 내용이 서술되었다. 해마다 1월 1일에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발표하는 신년사에는 통일국가건설위업에 관한 내용이 반드시 들어가는데, 올해 신년사에는 통일운동가들과 통일학자들의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특별한 내용이 들어있다. 그 특별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북과 남은 통일에 대한 온 민족의 관심과 열망이 전례 없이 높아지고 있는 오늘의 좋은 분위기를 놓치지 말고 전민족적 합의에 기초한 평화적인 통일방안을 적극 모색해야 하며 그 실현을 위해 진지한 노력을 기울여나가야 할 것입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전민족적 합의에 기초한 평화적인 통일방안을 적극 모색해야 하며 그 실현을 위해 진지한 노력을 기울여나가야 할 것”이라고 언명한 것은, 평화통일방안을 전민족적으로 합의하는 매우 중대한 과업을 거론한 것이다. 평화통일방안을 전민족적으로 합의하는 것, 바로 이것이 2019년 신년사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제시한 통일방략이다. <사진 1>

 

▲ <사진 1> 이 사진은 2019년 1월 1일 조선에서 방영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신년사 방송화면에 나온 조선로동당 본부 청사의 야경사진이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이 본부 청사에서 2019년 신년사를 발표하였다. 2019년 신년사에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통일방략과 평화방략이 서술되었다. 통일방략은 전민족적 합의에 기초한 평화적인 통일방안을 적극 모색해야 하며 그 실현을 위해 진지한 노력을 기울여나가야 할 것이라고 서술되었고, 평화방략은 정전협정 당사자들과의 긴밀한 연계 밑에 조선반도의 현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기 위한 다자협상도 적극 추진하여 항구적인 평화보장토대를 실질적으로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서술되었다. 2019년 2월에 열릴 제2차 조미정상회담에서 평화협정체결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예견되고, 그 이후에 열릴 남북정상회담에서 평화통일방안에 관한 기본합의가 나올 것으로 예견된다. 이것은 평화와 통일의 새 시대가 개막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런 감격의 시대에 살고 있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평화통일방안을 전민족적으로 합의하려면, 두 가지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2019년 상반기에 개최될 남북정상회담에서 평화통일방안에 관한 기본합의를 이끌어내야 하고, 그 기본합의를 가지고 전민족적인 정치회합을 개최하여 평화통일방안을 확정하여야 하는 것이다. 예견하건대, 남북정상회담에서 평화통일방안에 관한 기본합의가 나온 뒤에 전민족적인 정치회합이 개최되어 그것을 확정하게 되면, 8천만 민족이 그토록 열망하는 통일국가건설의 결정적인 국면이 열리게 될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올해 상반기에 열릴 남북정상회담에서 과연 평화통일방안에 관한 기본합의가 나올 수 있을까? 이런 의문이 생기는 까닭은, 문재인 대통령이 통일이라는 말 자체를 회피하고 있고, 올해 신년기자회견에서도 통일문제에 대해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통일의지는 갖지 않았더라도, 신년기자회견에서는 겨레의 최고염원인 통일문제에 대해 슬쩍 한 마디 언급할 수도 있었는데, 그런 의례적인 발언조차 회피하였으니 너무 옹졸해 보인다. 문재인 대통령의 태도가 그러할진대, 남북정상회담에서 어떻게 평화통일방안에 관한 기본합의가 나올 수 있을까? 조국통일문제를 회피하는 문재인 대통령의 옹졸한 태도 때문에 의문이 생길 수 있지만,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눈여겨보면 그런 의문은 사라진다. 

 

(1) 2019년 상반기에 열리게 될 남북정상회담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서울방문으로 성사되는 매우 특별한 남북정상회담으로 될 것인데, 주목되는 것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역사적인 서울방문이 성사되기 전에 먼저 선결되어야 할 조건이 있다는 점이다. 첨예한 적대관계를 완화하는 것이 선결조건이다. 첨예한 적대관계가 유지되는 가운데,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군사분계선 대치지역을 통과하여 서울을 방문할 수는 없는 일이다. 신변안전이 보장되지 않아 두렵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첨예한 적대관계를 그대로 두고 군사분계선 대치지역을 통과하여 서울을 방문하는 것은, 평화를 실현하려는 의지와 어긋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역사적인 서울방문이 성사되면 첨예한 적대관계가 완화될 것으로 생각하지만, 서울방문으로 남북 사이에 조성된 적대관계는 완화될 수 있지만, 조선과 미국 사이에 조성된 적대관계는 전혀 완화되지 않을 것이다. 한반도에 조성된 적대관계 중에서 남북 사이에 조성된 적대관계보다 조선과 미국 사이에 조성된 적대관계가 더 결정적인 요인이다.    

 

그래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올해 열리게 될 남북정상회담 이전에 조미적대관계를 완화하는 중대한 선행조치를 단행하려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제2차 조미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을 설득, 견인하여 평화협정체결문제를 합의하는 것이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평화협정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서울방문을 위해 체결되는 것이 아니라, 평화와 철군과 통일로 이어지는 민족사적 대전환을 이루어내기 위해 체결되는 것이다.  

 

2019년 신년사에는 통일방략과 함께 평화방략도 담겼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2019년 신년사에서 “정전협정 당사자들과의 긴밀한 련계 밑에 조선반도의 현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기 위한 다자협상도 적극 추진하여 항구적인 평화보장토대를 실질적으로 마련해야 합니다”라고 언명함으로써 자신의 평화방략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누구나 예견할 수 있는 것처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평화방략은 남, 북, 미, 중 4자회담을 개최하고, 그 회담에서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것이다. <사진 2>

 

▲ <사진 2> 이 사진은 2019년 1월 8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리설주 여사와 함께 중국 베이징에 있는 인민대회당을 방문하여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펑리위안 여사와 상봉하고 촬영한 기념사진이다. 그날 인민대회당에서 진행된 조중정상회담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시진핑 국가주석은 "조선반도 정세관리와 비핵화협상과정을 공동으로 연구조종해나가는 문제와 관련하여 심도 있고 솔직한 의사소통을 진행"하였다. 이것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평화협정을 체결하기 위한 중국측의 측면지원을 이끌어냈다는 뜻이다. 2019년 2월 중에 제2차 조미정상회담이 열리면,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트럼프 대통령을 강력하게 설득, 견인하여 평화협정체결을 합의할 것으로 예견된다. 이처럼 제2차 조미정상회담에서 평화협정체결문제가 합의되면, 그 합의에 따라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교체하기 위한 남, 북, 미, 중 4자회담이 판문점에서 열리는 가운데 8천만 민족의 평화실현의지는 최절정에 이를 것이다. 바로 그런 평화분위기 속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적대관계가 완화되어 평화지대로 전변되기 시작한 판문점을 통과하여 서울을 방문할 것으로 예견된다. 우리는 이런 감격의 시대에 살고 있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앞으로 열릴 제2차 조미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을 설득, 견인하여 평화협정체결문제를 합의하려면, 트럼프 대통령을 압박하는 강력한 측면지원이 필요하다. 그래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새해 첫 정치일정으로 중국을 방문하여 2019년 1월 8일 베이징에서 시진핑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하면서 중국측의 강력한 측면지원을 이끌어냈던 것이다. 조선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2019년 1월 8일 조중정상회담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시진핑 주석은 “조선반도정세관리와 비핵화협상과정을 공동으로 연구조종해나가는 문제와 관련하여 심도 있고 솔직한 의사소통을 진행”하였다고 한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시진핑 국가주석의 정상회담 발언 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조선측이 (미국에게) 주장하는 원칙적인 문제들은 응당한 요구이며 조선측의 합리적인 관심사항이 마땅히 해결되여야 한다는데 대하여 전적으로 동감하며 유관측들이 이에 대해 중시하고 타당하게 문제를 처리하는 것이 올바른 선택이라고 하면서 중국측은 지난날과 마찬가지로 앞으로도 조선동지의 믿음직한 후방이며 견결한 동지, 벗으로서 쌍방의 근본리익을 수호하고 조선반도의 정세안정을 위해 적극적이며 건설적인 역할을 발휘해나갈 것이라고 말하였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이처럼 1월 8일 조중정상회담에서 평화협정을 체결하기 위한 중국측의 강력한 측면지원을 이끌어냈으므로, 제2차 조미정상회담이 열리면, 트럼프 대통령을 설득, 견인하여 평화협정체결문제를 합의할 것으로 예견된다. 제2차 조미정상회담에서 평화협정체결문제가 합의되면, 그 합의에 따라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교체하기 위한 남, 북, 미, 중 4자회담이 판문점에서 열리고, 8천만 민족의 평화실현의지는 최절정에 이를 것이다. 바로 그런 고조된 평화분위기 속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적대관계가 완화되어 평화지대로 전변되기 시작한 판문점을 통과하여 서울을 방문할 것으로 예견된다.  

 

북측의 최고영도자로서는 사상 처음으로 서울을 방문하게 되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민족의 평화실현의지가 최절정에 이른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말고, 8천만 민족에게 평화통일방안을 최상, 최대의 선물로 안겨주자고 문재인 대통령에게 제의하고, 그를 강력하게 설득, 견인할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에게는 그런 제의를 거부할 명분도 없고, 그런 제의를 거부해서 얻을 이익도 없다. 평화통일을 갈망하는 민족의 현실을 생각한다면, 그런 제의를 거부해서도 안 된다.

 

돌이켜보면,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문재인 대통령은 2018년 4월 27일에 발표된 판문점선언과 2018년 9월 19일에 발표된 평양공동선언에서 민족자주의 원칙을 거듭 확인하면서, 평화와 공동번영을 위해 남북관계를 발전시켜나가는 과업들을 합의한 바 있다. 그러므로 2019년에 남북정상회담이 열리면, 지난해에 합의한 내용들을 또 다시 중복적으로 합의할 필요는 없다. 평양공동선언에 명시된 것처럼, “현재의 남북관계발전을 통일로 이어갈 것을 바라는 온 겨레의 지향과 염원을 정책적으로 실현하기 위하여” 새로운 내용을 합의해야 하는데, 그 새로운 내용이 바로 평화통일방안인 것이다.  

 

(2) 올해 안에 평화통일방안을 합의하려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강렬한 의지는 2019년 신년사에 다음과 같이 서술되었다.  

 

“북과 남, 해외의 온 겨레는 용기백배하여 북남선언들을 관철하기 위한 거족적 진군을 더욱 가속화함으로써 올해를 북남관계발전과 조국통일위업수행에서 또 하나의 획기적인 전환을 가져오는 력사적인 해로 빛내여야 합니다.”

 

위에 인용된 문장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올해를 북남관계발전과 조국통일위업수행에서 또 하나의 획기적인 전환을 가져오는 력사적인 해로 빛내여야” 한다고 언명한 것은, 올해 안에 평화통일방안을 전민족적으로 합의함으로써 통일국가건설운동에 획기적인 전환을 일으키려는 강렬한 통일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2019년 상반기에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서울을 방문하여 문재인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진행하게 되면, 그런 강렬한 통일의지를 가지고 문재인 대통령을 설득, 견인하여 평화통일방안에 관한 기본합의를 이끌어낼 것으로 예견된다.

 

 

2. 전민족적인 정치회합 개최하여 민족의 운명 바꾼다

 

평화통일방안을 전민족적으로 합의하려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통일방략은 서울방문과 남북정상회담에서 멈추지 않는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2019년 신년사에서 “전민족적 합의에 기초한 평화적인 통일방안을 적극 모색해야 하며 그 실현을 위해 진지한 노력을 기울여나가야 할 것”이라고 언명하였을 때, 전민족적인 합의라는 말은 평화통일방안을 합의하기 위한 전민족적인 정치회합을 예고한 말이다. 

 

평화통일방안을 합의할 전민족적인 정치회합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남과 북의 정부당국은 물론이고 평화통일을 염원하는 남, 북, 해외의 각당각파, 각계각층 대표들이 광범위하게 참가하는 정치회합으로 될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예상하면, 남측 통일부와 북측 조국평화통일위원회가 공동주최하고, 남과 북의 정당 대표들, 남, 북, 해외의 각계각층 대표들과 개별인사들이 참가하는 것이다. 

 

70년이 흘렀다. 전쟁화염 속에 흘린 민족의 피눈물은 얼마나 많았으며, 대결의 소용돌이 속에서 겪은 고통과 불행은 또 얼마나 뼈아픈 것이었는가! 하지만 전쟁화염도, 대결의 소용돌이도 막지 못했다. 그 누구도 감히 우리 민족의 가슴에 불타는 통일염원을 막지 못했다. 바로 그런 뜨거운 통일염원을 실현하는 것이 전민족적인 정치회합이다. 지나온 70년을 돌이켜보면, 그 누구도 감히 통일국가건설운동을 가로막지 못했다. 수많은 유명무명의 통일운동가들이 통일국가건설위업에 한생을 바쳤고, 목숨까지 아낌없이 바쳤다. 바로 그런 숭고한 역사를 계승하는 것이 전민족적인 정치회합이다! 

 

70년이 넘도록 분단의 불행과 고통 속에서 피눈물을 흘리면서도 통일염원으로 가슴 태워온 우리 민족이 다시 자리를 차고 모두 일어나 자주통일강국을 향해 나아가는 민족운명의 전환은 전민족적 정치회합이 성대히 개최되어 평화통일방안을 합의하고 자주통일강국건설을 준비해나가는 것, 오직 그 길밖에 없다. 바로 그런 민족의 활로를 열어놓기 위해 평화통일방안을 합의하려는 것이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통일방략이다. <사진 3> 

 

▲ <사진 3> 미국의 한반도분할점령과 민족분렬정책으로 국토분단과 민족분렬의 검은 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던 1948년 4월 하순, 남과 북의 각당각파, 각계각층 대표자들은 사경에 처한 민족의 운명을 구원하고 자주통일정부를 수립하려는 불타는 일념을 안고 평양으로 모여들었다. 1948년 4월 19일부터 30일까지 평양에서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와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지도자협의회'가 진행된 것이다. 위의 사진은 1948년 4월 22일 김일성 주석과 김구 선생이 연석회의 회의장으로 걸어가는 장면이다. 1948년 4월 남과 북의 각당각파, 각계각층 대표자들이 평양에 모여 민족분렬을 배격하고 자주통일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역사적인 회합을 진행하였던 때로부터 70년이 지난 2019년 1월 1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신년사에서 평화통일방안을 전민족적으로 합의하기 위한 통일방략을 제시하였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위와 같은 정세발전을 거론할 때면, 통일국가건설운동이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의 한반도분할점령과 민족분렬정책으로 국토분단과 민족분렬의 검은 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던 1948년 4월, 남과 북의 각당각파, 각계각층 대표들은 사경에 처한 민족의 운명을 구원하고 자주통일정부를 수립하려는 불타는 일념을 안고 평양으로 모여들었다. 1948년 4월 19일부터 30일까지 평양에서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대표자련석회의’와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지도자협의회’가 진행된 것이다. 단독정부수립책동을 저지하고 자주통일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전민족적인 정치회합이 개최된 것이다. 당시 서울에서 발간되던 <자유신문> 1948년 3월 30일부에 실린 ‘남북분렬 3년의 암운을 헤칠 서광’이라는 사설은 성사를 앞두고 있었던 전민족적 정치회합이 가지는 거대한 의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격정적인 필치로 서술한 바 있다. 

 

“이 회합은 조선민족이 요구하는 유일한 활로이며 따라서 이를 희망하는 열의가 남조선 방방곡곡에 충만되고 있다. 이 구국운동이야말로 5천년 역사를 가진 문화민족으로서의 자긍자지를 표현한 것이요, 모든 사대주의와 타력의존주의를 박차고 힘있게 진군하려는 민족의 거보로서 세계의 아무도 정당한 민족의 요구와 지향을 막지 못할 것이며 국내의 누구도 이 충만된 의욕과 의지를 방해하지 못할 것이다.” 

 

평양에서 전민족적인 정치회합이 진행되었던 때로부터 40년이 지난 1989년 1월 1일 김일성 주석은 신년사에서 평화통일방안을 논의하기 위한 남북정치협상을 제의하였다. 김일성 주석은 1989년 신년사에서 “가까운 시일 안에 평양에서 북과 남의 각당각파, 각계각층 인사들을 대표할 수 있는 지도급 인사들로 북남정치협상회의를 가질 것을 정중히 제의”하면서, “남조선 민주정의당, 평화민주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의 총재들과 김수환 추기경, 문익환 목사, 백기완 선생을 평양에 초청”하였고, 남북정치협상회의가 가지는 의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명하였다. <사진 4> 

 

▲ <사진 4> 김일성 주석은 1989년 1월 1일 신년사에서 평화통일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남북정치협상회의를 남측에 제의하였다. 그 제의를 적극적으로 수락한 문익환 목사는 1989년 3월 25일 평양을 방문하였다. 위의 사진은 김일성 주석과 문익환 목사가 환하게 웃으며 다정히 손을 잡고 걸어가는 모습이다. 미국과 반통일세력이 강요한 민족분렬을 넘어서 우리 민족끼리 화해하고 단합해야 한다는 심오한 뜻을 말해주는 영상이다. 1989년 4월 2일 평양에서 문익환 목사와 허담 당중앙위원회 비서의 공동명의로 발표된 공동성명은 연방제통일방안을 민족공동의 통일방안으로 인정하였다. 그때로부터 30년이 지난 2019년 1월 1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신년사에서 평화통일방안을 전민족적으로 합의하기 위한 통일방략을 제시하였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역사적인 서울방문으로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고, 평화통일방안을 합의하기 위한 전민족적인 정치회합을 개최하는 것이 통일방략을 실현하는 올해의 정치일정이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북남지도급인사들의 정치협상회의는 현 조건에서 가장 쉽게 민족의 의사를 모을 수 있는 민족적 대화의 마당이며 통일방도에 대한 민족적 합의를 이룩할 수 있는 합리적 방도입니다. 이 정치협상회의의 테두리 안에서 북과 남의 지도급 인사들은 다무적인 회담뿐 아니라 쌍무적인 대화도 나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남조선의 지도급인사들이 건설적인 통일방안을 가지고 평양을 방문한다면 그들을 환영할 것이며, 그들이 내놓은 어떠한 제안에 대해서 허심탄회하게 회의할 것입니다.” 

 

김일성 주석이 1989년 신년사에서 남북정치협상회의를 제의한 때로부터 한 달이 지난 1989년 2월 4일 문익환 목사와 백기완 선생은 서울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김일성 주석이 제의한 남북정치협상회의를 공식적으로 수락하고 그 회의가 성사되도록 노력할 것을 공표”하였다. 하지만 내외반통일세력의 저지에 가로막혀 그들의 방북은 성사되지 못했고, 문익환 목사는 1989년 3월 25일 평양을 방문하여 김일성 주석과 평화통일방안을 협의하였다. 그 협의에 의해 나온 것이 1989년 4월 2일 평양에서 문익환 목사와 허담 당중앙위원회 비서의 공동명의로 발표된 공동성명이다. 공동성명은 “누가 누구를 먹거나 누가 누구에게 먹히지 않고 일방이 타방을 압도하거나 타방에게 압도당하지 않는 공존의 원칙에서 연방제 방식으로 통일하는 것이 우리 민족이 선택해야 할 필연적이고 합리적인 통일방도가 되며 그 구체적인 실현방도로서는 한꺼번에 할 수도 있고 점차적으로 할 수도 있다”고 명시함으로써 연방제통일방안을 민족공동의 통일방안으로 인정하였다. 

 

그런데 그때로부터 30년이 지난 2019년 1월 1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신년사에서 평화통일방안을 전민족적으로 합의하기 위한 통일방략을 제시하였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제2차 조미정상회담에서 평화협정체결문제를 해결하고, 역사적인 서울방문으로 남북정상회담을 서울에서 진행하고, 평화통일방안을 합의하기 위한 전민족적인 정치회합을 개최하는 것이 통일방략과 평화방략을 실현하는 올해의 정치일정이다. 

 

 

3. 민족통일기구 수립으로 실현될 낮은 단계의 연방제 

 

남북정상회담에서 평화통일방안에 관한 의제가 분단역사상 처음으로 논의된 때는 지금으로부터 19년 전인 2000년 6월 15일이다. 그날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김대중 대통령의 평양방문으로 성사된 남북정상회담에서 민족공동의 평화통일방안을 합의하려고 하였다. 남북정상회담 기록에 따르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김대중 대통령에게 연방제통일방안에 대해 오랜 시간에 걸쳐 상세히 설명하면서 연방제통일방안을 민족공동의 통일방안으로 합의하자고 제의하였다고 한다. 김대중 대통령은 야당지도자 시절에 3단계 통일방안을 주장하면서 마지막 단계에서 ‘공화국연방’이 출현할 것이라고 언급한 적이 있었고, 1989년 4월 2일에 문익환-허담 공동성명에서 연방제통일방안이 민족공동의 통일방안으로 인정되었으므로, 연방제통일방안에 관한 합의가 이루어질 생각되었지만, 김대중 대통령은 이런저런 구실과 핑계를 대면서 그 제의를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렇게 되어, 6.15공동선언 제2항에는 평화통일방안에 관한 기본합의만 들어갔다. 그 조항은 다음과 같다.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나가기로 하였다.” <사진 5>

 

▲ <사진 5> 이 사진은 2000년 6월 15일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김대중 대통령이 역사적인 6.15공동성명에 서명하고 환하게 웃으며 맞잡은 손을 치켜든 장면이다. 미국과 반통일세력이 강요한 민족분렬을 넘어서 우리 민족끼리 화해하고 단합해야 한다는 심오한 뜻을 말해주는 영상이다. 6.15공동선언에는 평화통일방안에 관한 기본합의가 명시되었다. 그것은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의 공통성을 서로 인정하는 기본합의다. 2019년 1월 1일 신년사에서 평화통일방안을 전민족적으로 합의하는 통일방략을 제시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19년 전 남북정상회담에서 채택된 평화통일방안에 관한 기본합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을 민족공동의 통일방안으로 합의하려는 것으로 생각된다. 남측의 연합제안은 남북으로 갈라져 살 수 없는 단일민족을 두 나라로 갈라놓고 평화적으로 공존한다는 평화공존방안이므로, 평화통일방안으로 될 수 없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위의 인용문을 읽어보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김대중 대통령이 평화통일방안을 합의하지 못했고, 그 대신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의 공통성을 서로 인정하는 기본합의에만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사정을 살펴보면,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남북정상회담에서 합의하려는 평화통일방안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의 공통성을 인정하였던 19년 전의 기본합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을 평화통일방안으로 합의하려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게 판단하는 논거는 다음과 같다.

 

6.15공동선언에 나오는 남측의 연합제안은 통일국가를 건설하는 평화통일방안이라고 볼 수 없다. 연합제안은 김대중 대통령이 야당지도자 시절에 주장한 ‘공화국연합제’를 뜻하는 것인데, ‘공화국연합’은 남과 북이 서로를 주권국가로 상호인정하고, 두 국가가 영국과 캐나다처럼 국가연합(union of states)을 실현하여 평화적으로 공존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8천만 민족이 염원하는 조국통일은 통일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지, 단일민족을 남북으로 갈라놓은 두 국가를 연합시키는 것이 결코 아니다. 우리 민족은 수 천 년 동안 단일민족으로 완전히 융합되어 살아왔기 때문에 그 어떤 경우에도 남북으로 갈려져 살 수 없다. 이런 사정을 살펴보면, 통일국가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단일민족의 존재방식이 평화통일방안을 논의하는 출발점이며, 평화통일방안을 확정하는 종착점으로 되어야 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 어떤 경우에도 남북으로 갈라져 살 수 없는 단일민족을 두 나라로 갈라놓고 평화적으로 공존하겠다는 것은 ‘평화공존’이라는 미명 아래 분단체제를 합법화하는 반민족적 범죄다. 8천만 민족이 염원하는 평화의 참된 의미는 단일민족을 두 나라로 갈라놓고 평화적으로 공존하는 것이 아니라, 통일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교체하는 것이다. 

 

한반도에서 두 나라의 평화공존을 말하는 것은 ‘평화적인 분단’을 장기화하여 북측을 그 무슨 ‘점진적인 개혁개방’으로 유인해보려는 흡수통합망상의 변종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국가연합-평화공존론의 정체를 간파하지 못한 사람들은 단일민족을 두 나라로 갈라놓고 평화적으로 공존하는 것은 쉽고, 단일민족이 통일국가를 건설하는 것은 힘들다는 착각 속에 빠져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우리 민족이 선택해야 할 평화통일방안은 연방제통일방안밖에 없다는 사실이 자명해진다. 그런 까닭에 2016년 6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정당, 단체 련석회의는 “온 겨레가 힘을 합쳐 분렬의 장벽을 허물고 조국통일의 대통로를 열어나가자 - 전체 조선민족에게 보내는 호소문”에서 연방제통일방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명하였다.

 

“북남수뇌분들이 민족 앞에 확약하고 온 겨레의 지지와 찬동을 받고 있는 련방제는 가장 합리적이고 공명정대하며 유일무이한 우리 민족의 통일방식이다. 이것을 부정하면 북과 남은 어차피 총부리를 맞대고 싸울 수밖에 없다. 8천만 겨레가 꿈에도 소원하던 통일이 전쟁의 방법으로 이루어져서는 절대로 안 되며 그 누구도 이를 바라지 않는다. 서로 다른 사상과 제도를 가진 북과 남의 련방제통일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다 해도 우리 민족이 기어이 이 길을 가야 할 근본리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중략) 우리는 통일강국건설에서 그 누구를 본받을 것도 없고 다른 나라의 것을 그대로 따라할 필요도 없다. 우리의 구체적 실정에 맞고 우리의 땅에 어울리는 련방제방식으로 우리가 소원하는 통일의 집, 우리 식의 통일강국을 세상이 보란 듯이 일떠세우자!”

 

그렇다면 6.15공동선언에 나오는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에 대한 안경호 당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의 설명이 남측 일간지 <한겨레> 2001년 6월 17일부 대담기사에 실렸다. 대담기사에서는 다음과 같은 질문과 답변이 이어졌다.

 

질문 - ‘민족통일기구’란 구체적으로 뭔가?

답변 - 민족통일기구는 국가기구다. 남쪽의 연합제와 북쪽 연방제의 공통점에 바탕을 두고 진행해나가는 것이다. 이 기초에는 1국가, 1민족, 2제도, 2정부에 기초를 둔 연합-연방제가 있다. 이런 근본기초에 대한 합의는 역사적 의미가 있다. 쌍방이 통일방안에 대해 합의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민족통일기구는 대외적으로 하나의 국가로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다.

질문 - 남북의 현 정부는 해소돼야 하는가?

답변 - 그렇지 않다. 두 정부의 정치, 군사, 외교권 등 현존하는 기능과 권한은 유지된다.

질문 - 민족통일기구는 어떻게 구성돼야 된다고 생각하나?

답변 - 국회와 행정기구 구성은 (남북) 쌍방이 우리 실정에 맞게 창발적으로 연구해야 한다.    

 

위에 인용된 대담내용을 읽어보면, 낮은 단계의 연방제에서 출현하게 될 민족통일기구는 한시적인 남북정치협상기구 같은 것이 아니라, 남과 북의 두 정부가 행사하는 정치권, 군사권, 외교권을 민족의 공동이익에 맞게 조절하는 중앙정부이며, 국회와 행정부를 가진 명실상부한 통일정부이며, 대외적으로 통일국가를 대표하는 연방정부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연방제통일방안에 대해 연구해온 통일학자들은 통일정부가 낮은 단계의 연방제에서 높은 단계의 연방제로 ‘진화’하게 된다는 것을 누구나 쉽게 예견할 수 있다. 이를테면, 낮은 단계의 연방제에서 출현하는 통일정부는 남과 북의 지역정부들이 수행하는 기능과 권한을 민족의 공동이익에 맞게 조절하는 임무를 점차적으로 강화하게 될 것이다. 그런 조절임무가 오랜 기간에 걸쳐 강화, 발전되면서 연방정부가 남과 북의 지역정부들에게서 군사권과 외교권을 각각 이양 받게 될 때, 그때 비로소 높은 단계의 연방제가 실현되는 것이다. <사진 6> 

 

▲ <사진 6> 위쪽 사진은 2007년 10월 4일 평양에서 진행된 남북정상회담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노무현 대통령이 10.4선언에 서명하고 맞잡은 손을 치켜든 장면이다. 아래쪽 사진은 평양에서 남북정상회담을 진행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문재인 대통령이 2018년 9월 20일 백두산 정상 장군봉에서 리설주 녀사와 김정숙 녀사와 함께 천지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으면서 맞잡은 손을 치켜든 장면이다. 미국과 반통일세력이 강요한 민족분렬을 넘어서 우리 민족끼리 화해하고 단합해야 한다는 심오한 뜻을 말해주는 영상들이다. 수 천 년 동안 한 강토에서, 한 핏줄을 이어오며, 단일민족의 빛나는 역사와 문화를 창조해온 우리 겨레는 그 어떤 경우에도 남북으로 갈라져 살 수 없으며, 반드시 자주통일국가 안에서 함께 살아야 한다. 통일문제는 민족문제이며, 조국통일은 민족분렬을 극복하고 자주통일강국을 건설하는 민족 자신의 역사적 위업이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통일국가건설운동은 통일정부를 수립하는 것으로 완결될 것이다. 통일정부가 남과 북의 지역정부들로부터 군사권과 외교권을 아직 이양 받지 못하더라도, 통일정부가 수립되어 낮은 단계의 연방제가 실현되면, 통일국가건설운동은 그것으로 완결되고 조국통일은 완전히 실현되는 것이다. 낮은 단계의 연방제가 높은 단계의 연방제로 발전하는 것은 통일국가를 건설하는 운동이 아니라, 통일국가 안에서 국가주권과 사회통합을 공고화하는 운동이다.   

 

주목되는 것은, 통일정부수립과 주한미국군주둔이 절대로 양립할 수 없다는 점이다. 자주적 통일정부가 행정권을 행사하는 삼천리강토에 어떻게 외국군대가 한 명이라도 남아있을 수 있겠는가! 통일정부가 수립되기 전에 평화협정부터 먼저 체결되고, 그 협정에 따라 주한미국군이 완전히 철수되어야 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평화협정이 체결되고, 그 협정에 따라 주한미국군이 완전히 철수하면, 한반도 평화체제 위에 통일정부가 수립될 것이고, 반만년 민족사에서 가장 부강하고 문명한 자주통일강국이 8천만 민족에게 행복한 삶의 터전으로 될 것이다.    

 

 

4. 모든 준비는 2016년에 이미 끝났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자신의 통일방략을 2019년 신년사에서 처음 제시한 것이 아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2016년 5월 6일 평양에서 진행된 조선로동당 제7차 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사업총화보고를 하면서 “북과 남은 여러 분야에서 각이한 급의 대화와 협상을 적극 발전시켜 서로의 오해와 불신을 해소하고 조국통일과 민족공동의 번영을 위한 출로를 함께 열어나가야 합니다”라고 언명하여 자신의 통일방략을 제시한 바 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통일방략에 따라 북측은 그 방략을 실현하기 위한 준비를 조선로동당 제7차 대회 직후에 이미 끝냈고, 그것을 실행할 유리한 조건을 만들기 위해 지난 3년 동안 부단히 노력해왔다. 

 

2016년이라고 하면, 박근혜 정부가 남북관계를 완전히 파탄시켰던 암흑기였으나, 북측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통일방략에 따라 전민족적인 정치회합을 개최하자는 공식 제안을 남측에게 보냈다. 2016년 6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정당, 단체 련석회의는 “온 겨레가 힘을 합쳐 분렬의 장벽을 허물고 조국통일의 대통로를 열어나가자 - 전체 조선민족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발표하였는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있다.

 

“우리는 온 겨레의 뜻과 힘을 합쳐 현 난국을 타개하고 북남관계와 조국통일위업수행에서 획기적 전환을 일으켜 나가려는 절절한 념원으로부터 조국해방 일흔한돐을 맞으며 전민족적인 통일대회합을 개최할 것을 제안한다. 여기에는 북과 남의 당국, 정당, 단체 대표들과 명망있는 인사들을 비롯하여 진정으로 조선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바라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참가할 수 있을 것이다. 회합에서는 민족의 총의를 모아 최악의 상태에 있는 조선반도의 현 정세를 완화하고 북남관계를 새 출발시키며 나라의 통일문제를 해결해나갈 수 있는 출로를 허심탄회하게 론의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애국애족적이며 건설적인 이 제의에 해내외 각계층이 적극 호응할 것을 기대하면서 그를 위한 준비사업에 착수할 것이다.” 

 

당시 북측은 호소문만 발표한 것이 아니라, 전민족적 정치회합 제의를 실현하기 위한 조직준비사업에 즉시 착수하였다. 2016년 6월 27일 북측은 “남조선과 해외의 당국, 정당, 단체 및 개별인사들에게 보내는 공개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제의하였다.

 

“우리는 조국해방 일흔한돐이 되는 올해 8.15를 전후하여 북과 남의 당국과 해내외 정당, 단체대표들, 각계인사들이 참가하는 민족적 대회합을 평양이나 개성에서 개최하되 회의명칭은 조선반도의 평화와 자주통일을 위한 북, 남, 해외 제정당, 단체, 개별인사들의 련석회의로 하자는 것입니다. 만약 남측에서 련석회의와 관련하여 시기나 장소, 참가대상과 토의안건 등 관심하는 문제들에 대한 건설적 의견을 내놓는다면 그것도 허심하게 검토하고 받아들일 충분한 용의가 있습니다. 당면하여 련석회의 개최를 실질적으로 추진할 준비위원회를 각 지역별로 내오고 그에 기초하여 전민족공동준비위원회를 결성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보면서 남측과 해외에서 그 실천에 속히 착수하기를 희망하며 7월 중에는 합의되는 장소에서 북과 남, 해외대표들을 망라한 전민족공동준비위원회 결성과 관련한 실무접촉을 가질 것을 제의합니다.”

 

그로부터 이틀이 지난 2016년 6월 2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는 “온 민족의 통일념원과 지향을 반영하여 조선로동당 제7차 대회에서 제시한 주체적인 조국통일로선과 방침을 철저히 관철하며 민족의 자주적 운명과 통일번영의 휘황한 미래를 열러나가기 위한 성스러운 투쟁을 강력하게 조직전개해나가기 위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국평화통일위원회를 내오기로 결정하였다. 그로써 조국평화통일위원회는 국가기구로 승격되었다. <사진 7>

 

▲ <사진 7> 이 사진은 노무현 정부 시기인 2005년 8월 15일 서울에 있는 장충체육관에서 남, 북, 해외의 각당각파, 각계각층 대표자들이 참가한 가운데 개최된 '자주평화통일을 위한 8.15민족대회'를 진행하는 장면이다. 우리 민족끼리 단결하여 미국의 지배와 간섭을 배격하고 민족분렬을 극복하여 자주통일강국을 건설하기 위한 투쟁과 노력은 지난 70년 동안 끊임없이 지속되어왔다. 남, 북, 해외의 각당각파, 각계각층 대표자들이 평화통일방안을 합의하기 위해 모이는 전민족적 정치회합은 위의 사진에 나온 남, 북, 해외의 각당각파, 각계각층 대표자들이 참가한 민족대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민족사적 의의를 지닌다. 북측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통일방략과 평화방략을 실현할 모든 준비를 이미 2016년에 끝내고, 지난 3년 동안 유리한 조건들을 하나씩 만들어왔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2019년 1월 1일부터 통일방략과 평화방략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한반도 정세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통일방략과 평화방략에 따라 전변되기 시작하였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그것만이 아니었다. 2016년 7월 9일 북측은 남측과 해외측에게 “조선반도의 평화와 자주통일을 위한 북, 남, 해외 제정당, 단체, 개별인사들의 련석회의”를 공식 제안하면서, 연석회의 북측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다고 밝혔다. 연석회의 북측준비위원회는 위원장 1명, 각 부문을 대표하는 부위원장 14명, 각계층을 대표하는 위원 50여 명으로 구성되었는데, 연석회의 북측준비위원회 위원장은 김영철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이다. 김영철 부위원장이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보좌하여 남북정상회담에 계속 배석하는 것은, 북측에서 전민족련석회의를 개최하는 준비와 전민족공동준비위원회를 결성하는 모든 준비가 끝났음을 말해준다.  

 

2018년 1월 24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정당, 단체 련합회의가 또 다시 ‘해내외의 전체 조선민족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발표하였다. 호소문에서는 “전민족적인 통일대회합 실현을 위한 투쟁을 계속 줄기차게 벌려 민족대단결의 새로운 리정표를 세우고 전민족적 통일운동의 일대 전성기를 펼쳐나가자!”고 하였다. 

 

2019년 1월 1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신년사에서 “우리는 미증유의 사변들로 훌륭히 장식된 지난해의 귀중한 성과들에 토대하여 새해 2019년에 북남관계발전과 평화번영,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에서 더 큰 전진을 이룩하여야 합니다”라고 하면서, “온 민족이 <력사적인 북남선언들을 철저히 리행하여 조선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의 전성기를 열어나가자!>, 이 구호를 높이 들고나가야 합니다”라고 언명하였다. 

 

북측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통일방략과 평화방략을 실현할 모든 준비를 이미 2016년에 끝내고, 지난 3년 동안 유리한 조건들을 하나씩 만들어왔으며,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올해 1월 1일부터 통일방략과 평화방략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한반도 정세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통일방략과 평화방략에 따라 전변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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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경의 ‘세계 지성과의 대화’ - 장하준 교수

[세계 지성과의 대화 ③]장하준 교수-Q. 문 대통령 만난다면 해주고 싶은 조언은 “자린고비 경제 그만…복지재정 확 늘려라”

안희경 | 재미 저널리스트


입력 : 2019.01.14 06:00:03 수정 : 2019.01.14 10:09:19

 


‘국가비상사태’라고 발언한 건, 지금 조치 안 하면 ‘큰일’ 경고

[세계 지성과의 대화 ③]장하준 교수-Q. 문 대통령 만난다면 해주고 싶은 조언은 “자린고비 경제 그만…복지재정 확 늘려라”

어느 한 나라가 독자적으로 옴짝거리기 힘든 세계화된 경제질서다. 그로 인해 팽배해지는 불안을 다수의 경제학자는 자본주의의 위기라고 진단한다.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사진)에게 대담을 요청했다. 미처 응답을 받기 전, 장 교수는 한국 언론의 특파원들과 인터뷰를 하게 됐고, 기사화된 그의 ‘국가비상사태’ 발언은 논란을 부르기도 했다.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 속 한국 경제를 진단하려던 애초의 계획을 한국 자본주의의 위기를 파고드는 방향으로 조정했다. 대담은 지난 4일 장 교수의 케임브리지대 연구실에서 진행됐다. 

안희경(이하 안) = 국가비상사태라고 말했는데, 긴급 재난상태인가요.

장하준(이하 장) = 재앙이 닥쳤다는 의미보다 지금 조치를 하지 않으면 큰일이 닥칠 수 있다는 의미의 비상사태죠. 언론은 무엇이든 물을 수 있고, 편집권도 갖고 있다고는 생각해요. 다만 야당이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읽어내고, 여당에서도 자세히 읽어보면 의미를 알 텐데도 곡해하는 점이 좀 서글펐어요. (비상사태 얘기는) 일부에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이상 성장하는데 걱정할 일이냐고 하지만 OECD에서 한국은 중하위권밖에 안되거든요. 36개 국가 중 1인당 소득 기준으로 23등입니다. 

안 = 그래도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10위권이잖아요. 

장 = 경제 수준을 이야기하려면 1인당 소득을 봐야죠. 덴마크의 1인당 소득은 우리의 2배지만 인구가 500만명이기에 경제 규모는 5분의 1밖에 안됩니다. 성장률을 언급할 때는 인구증가율을 고려해야죠. 2010년 이후 독일은 총성장률로만 보면 연평균 1.8%, 우리는 3%이니까 우리가 잘하는 것 같지만 1인당 소득성장률로 하면, 우리는 인구증가율 0.5%로 2.5%, 독일은 인구증가율 마이너스 0.2%이기 때문에 2%입니다. 2%와 2.5%는 큰 차이가 아니지만, 성장만이 우리의 목표는 아니잖아요. 더 큰 문제는 지금 우리 상황이 얼마나 안 좋은가를 얘기하는 사회적인 지표입니다. 단적으로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예요. 1995년까지만 해도 자살률이 OECD 평균 이하였는데 지금은 평균의 3배죠. 출산율은 세계 최저이고요. 

안 = 사회적인 지표가 나빠진 이유가 경제 때문인가요. 

장 = 그럼요. 복지가 안돼 있어 그렇습니다. 옛날엔 경제성장 속도가 빨라 일자리도 많이 생기고, 봉제공장이 문 닫으면 전자공장 가서 일하는데 4~5주 재교육받으면 됐어요. 지금은 필요한 기술이 고급화돼 철강·조선업에서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들이 반도체 같은 곳으로 옮기고 싶어도 금방 갈 수 없습니다. 실업이 점점 더 무서워지고, 제대로 된 직장에서 밀려나면 갈 데가 없기 때문에 치킨집을 하는 거죠. 이 모두를 전체적인 패키지로 봐야 합니다. 

안 = 그래서 국가비상사태라고까지 진단한 건가요. 

장 = 비상사태라는 발언을 하게 된 것은 최근 중국이 무섭게 추격해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도체 빼고는 다 중국이 잠식하잖아요. 반도체도 중국이 국책산업으로 밀고 있어서 시간문제예요. 인공지능, 나노기술에선 우리보다 훨씬 앞서 있고, 전체적인 경제 수준보다 첨단기술이 발달해 있죠. 우리는 답보상태이기에 지금 틀을 완전히 다시 짜지 않으면 5년, 10년 후에는 정말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어느 한 정부가, 한두 가지 잘못해서 이 상황을 맞은 게 아닙니다. 우리 경제가 신자유주의적으로 구조화돼서 그래요. 그 때문에 투자도 떨어지고, 고용도 불안해지고, 국민들에게 앞날이 없는 나라가 된 지 벌써 20년입니다. 이를 보살피지 않고 또 5년이 흐르면 돌아올 수 없는 길에 들어갑니다.

■ 투자·고용·복지 새 틀 짜지 않으면…5년 뒤 한국, 돌이킬 수 없는 길 갈 것

세계적 경제학자인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는 “경제의 목표는 다 같이 행복하게 잘 살자는 것으로, 이제 한국도 ‘좋은 사회란 무엇인가’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인가’를 모두 모여 고민할 때”라며 “‘자린고비 경제학’을 넘어 복지제도 확대로 사회안전망을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황채영 사진작가

세계적 경제학자인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는 “경제의 목표는 다 같이 행복하게 잘 살자는 것으로, 이제 한국도 ‘좋은 사회란 무엇인가’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인가’를 모두 모여 고민할 때”라며 “‘자린고비 경제학’을 넘어 복지제도 확대로 사회안전망을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황채영 사진작가 

 

안 = 그 본격적인 시작이 자유무역협정(FTA)인가요, 아니면 그 전인가요.

장 = 1980년대 말부터 한국 엘리트들 가운데 미국 모델을 바라는 사람들이 많이 나왔어요. 기획원 관료들이 ‘경제계획을 없애야 한다’는 얘기를 해요. 자기 부처의 의무가 경제계획인데 경제계획은 나쁘다는 거죠. 거기에 문민정부가 들어서니 기업들이 적극적으로 신자유주의체제를 추진합니다. OECD도 가입하고, 기획원도 폐기하고, 경제5개년계획도 없애고, 산업정책 거의 폐기하고. 그런데 묘하게도 소위 운동권 출신들이 동조했어요. ‘산업정책은 군부독재가 하던 파쇼정책’이라는 식으로. OECD 가입 조건 중 하나로 자본시장을 상당히 개방하고, 해고를 쉽게 하는 의제도 들여왔어요. 그때 특히 전경련(전국경제인연합회)에서 주주자본주의 논리를 들여와 정부가 기업을 간섭하면 안된다는 주장을 했죠. 그 과정에서 외환위기가 터집니다. <국가부도의 날>이라는 영화에서 재경부 차관으로 나오는 사람을 통해 잘 그렸던데, ‘해고도 쉽게 하고, 구조조정도 쉽게 하는 시장주의를 퍼뜨려야 하는데 노동계, 시민단체에서 반대해 못하고 있다. 지금이 기회다’라는 거죠. 뒷얘기지만 국제통화기금(IMF)이 깜짝 놀랐답니다, 저항할 줄 알았는데…. 

안 = 투항을 한 거죠. 

장 = 예. 신자유주의체제가 외환위기 이후 확립되면서 그 이후 정부들이 그 질서로 간 거예요. 물론 차이는 있지만,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완전히 극단적으로 나갔고, 노무현 정부는 FTA 하고 동북아 금융허브를 한다면서 김대중 정부보다 더 우파적으로 나갔습니다. 그래도 이 두 정부는 빌 클린턴이나 영국의 토니 블레어, 나중에 버락 오바마가 말한 제3의 길하고 비슷한 걸 합니다. 즉 경제를 시장에 맡기는 게 좋은데, 그러면 희생자들이 나오니까 그들을 도와줘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골수 신자유주의는 ‘희생자 봐줄 필요 없다, 그들이 못나서 그렇다’ 하는 거고. 규제를 완화하고 경제를 대자본에 맡겨놓는 것은 똑같습니다. 

안 = 그로 인해 지금 미국, 영국, 프랑스 등에서 나타나는 현상이 정치적 반동이잖아요. 보수든 리버럴이든 똑같은 엘리트들이라고 거부하고, 미국은 극우보수에 표를 주고, 프랑스는 무산자의 저항으로 노란 조끼 입고 나서고요. 

혁신 10개 도전한다면 
한두개만 크게 맞으면 돼
실패할 위험 있는 것 해야 
진정한 혁신 가능해져

 

지금 문재인 정부에서 
확실한 좌파정책 안 하면
‘반엘리트 반동’ 나타날 것
 

장 = 세계적인 추세죠. 한국은 특수성이 있어 아직 그렇게는 안 갔지만 20년 동안 신자유주의가 왔다 갔다 하면서 그쪽으로 밀려가고 있어요. 결국 반엘리트, 반동이 나옵니다. 문재인 정부에서 확실한 좌파정책을 하지 않으면요. 

안 = FTA를 하면 국가는 축소되잖아요. 지금 다시 FTA를 잘하겠다 하고 응원받고, 예전 FTA에 반대하던 사람들도 FTA가 없어지면 어떡하나 걱정합니다. 

장 = 신자유주의는 굉장히 반민주적인 체제예요. FTA나 투자협정을 맺어서 각국 정부가 하는 일을 국제조약으로 제약하고, 중앙은행이 됐건 규제기구가 됐건 많은 기관을 정치적으로 독립시키려고 해요. 우리는 옛날에 독재권력이 너무 개입했으니까 결정기관의 정치적 독립이란 말이 좋게 들리지만, 사실은 민주주의를 무력화시키겠다는 겁니다. 물론 자유무역이 수준이 비슷한 나라 사이에선 서로 좋은 경우가 있지만, 수준이 다른 나라 사이에서는 선진국이 이익이죠. 후진국은 새 산업을 개발할 수가 없어서요. 노무현 정권 때 미국과 FTA 한다고 했을 때, 저는 ‘우리가 지금 미국 수준이 되는 나라냐, 그렇게 생각 안 한다’면서 반대했죠. 

안 = 어떤 정부든지 기업의 이윤 앞에 무력해지네요. 

장 = 호주는 미국하고 FTA 할 때 그 조항을 빼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투자자-국가 분쟁해결제도(ISDS)는 고사하고 관세만으로도 불리합니다. 선진국들은 평균 공산물 관세가 3%이고 한국은 7~8%예요. 우리는 많이 내주고 그쪽한테는 조금 받는 거죠. FTA 없을 때도 수출 잘했어요.

안 = 그럼 지금 FTA 폐기 쪽으로 나가야 한다는 건가요. 

장 = 저는 그 방향이 맞다고 생각은 하죠. 하지만 특히 미국하고는 국방이 얽혀있으니 이제 와서 안 하겠다는 건 어렵죠. 그러면 하지 않아야 할 족쇄를 스스로 채워놨으니까 다음 단계에서는 뭘 하면 좀 낫겠냐 그런 생각을 해야 합니다. 

안 = 당장 뭘 해야 되죠. 

장 = 같이 앉아 모색해야죠. 다시 산업정책을 정립하는 게 중요합니다. 미국은 자유방임주의, 개인의 기업가 정신으로 성공했다고 알려졌지만, 현재 미국이 앞선 분야 대부분은 1950년대부터 정부가 국방연구·보건연구 명목으로 돈을 쏟아부은 곳입니다. 컴퓨터, 인터넷, GPS, 터치스크린 다 미 국무부에서 개발했고, 반도체는 미 해군에서 개발했어요. 아이폰 기술의 99%가 국방연구에서 나온 겁니다. 그 기초기술을 기업이 가져다 발전시킨 거죠. 미 정부의 엄청난 개입이 없었으면 실리콘밸리도 생길 수 없었죠. 미국 제약산업도 연구자금의 30%가 정부에서 나옵니다.

안 = 무슨 명분인 거죠. 

장 = 보건연구죠. 미 전역에 있는 국립보건원에서 세금으로 연구하면 제약회사들이 그냥 가져다 상용화시켜요. 미국 정부처럼 기초연구에 투자하고 마음껏 쓰도록 간접적으로 보조하는 방식이 있고, 독일 같은 경우도 있습니다. 중앙정부의 산업정책은 많지 않지만, 지방정부들이 우리의 산업은행 같은 금융기관을 갖고 있어요. 지방정부하고 지역은행, 지역대학, 그리고 프라운호퍼라고 반관반민 단체인데 연구기관으로 정부에서 기본적 돈은 주고 나머지는 기업 연구용역 해주며 운영하도록 하는 기관들 몇 십개가 있습니다. 

안 = 한국 정부도 R&D(연구·개발) 지원해 주잖아요. 다만 지원대상이 분산돼 있고, 한 해 평가를 해 다음 지원 여부를 결정하니 혁신보다는 안정적인 방향이지만….

장 = 혁신과정을 잘못 이해하는 겁니다. 혁신은 사기업이 하든, 과학자나 정부가 하든, 열 개 해서 한두 개 크게 맞으면 돼요. 정말 실패할 위험이 있는 것을 해야 진정한 혁신이 나오지, 안전한 것만 하면 그게 무슨 혁신입니까. 

안 = 그럼 예산을 편파적으로 쓴다는 비판도 나오고, 과용한다는 지적도 있으니 골고루 주는 거죠.

장 = 개념을 바꿔야죠. 컴퓨터도 유명한 얘기가 있잖아요. 1958년인가 토머스 왓슨 주니어 IBM 대표가 국회 청문회에서 앞으로 예상되는 컴퓨터 시장의 크기가 5대라고 했어요. 그때는 컴퓨터를 살 수 있는 곳이 미 육군, 해군, 공군, 국무부 이런 데밖에 없기 때문에 그냥 소련과 체제 경쟁에서 군사적 우위를 점유하기 위해서 했던 거죠. 나중에 그 기술이 세상을 바꿨지만, 그때 이윤만 생각했으면 문 닫았어야 할 산업이었죠. 

사회안전망이 있어야 
과감하게 직업도 바꿔보지
그러니 공무원만 되려고 해 
핀란드·스웨덴 같은 곳은
구조조정에도 저항 별로 없어
 

안 = 결국 철학이네요. 가치를 어디다 두느냐. 수익을 높일 산업을 키울 것이냐 아니면 공공성을 불러올 것이냐. 

장 = 경제는 수단이지 목표가 아니라고 생각하니까요. 

안 = 목표는 뭔데요. 

장 = 목표는 다 같이 행복하게 잘사는 거죠. 자살 덜 하고, 서로 반목하지 않고, 직장 안정되고, 복지제도도 잘돼 있어 잘리면 어쩌나 걱정 안 해도 되는…, 그런 의미에서 경제는 수단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그 수단으로 쓰는 경제조차도 여러 목표를 갖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사모펀드 하는 일이 뭡니까? 회사 사서 이윤 확 올린 다음 파는 거죠. (한국의) 제일은행이 좋은 예이죠. 뉴브리지캐피털이 사서 지점들 닫고, 사람들 자르고, 일 많이 시켜 이윤 왕창 올리고. 그 과정에서 직원들은 뼈 빠지게 고생하고. 그렇게 해서 이윤을 많이 냈기에 스탠다드차타드은행한테 되판 겁니다. 그런 식으로 이윤 내는 경제도 있고, 독일같이 10년, 20년을 보고 이윤을 내는 경제도 있죠. 한때 독일에는 기업이 같은 지역에서 7년인가 10년 이상 사업하면서 종업원을 안 자르면 상속세 면제해주는 법도 있었어요. 그렇게 기업이 지역사회에 초석이 되고 그 사회와 얽혀 같이 살게 하는 것을 목표로 삼기도 합니다. 

안 = 답은 우리 테두리 안에 있는 사람들의 삶을 봐야 하지 않을까요.

장 = 옛날엔 밥 먹고 사는 게 중요하니까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성장을 더 하자’라고 생각했죠. 정당화할 수는 없지만, 이해할 수는 있죠. 지금은 그런 단계가 아닙니다. 국민소득 3만달러 나라에서 ‘좋은 사회를 만드는 게 뭔가’를 생각해 봐야죠. FTA 많이 했다고 FTA 강국이다, 성장률 조금 높다고 우리나라가 잘한다, 이러면 주객이 전도된 사고입니다. 과연 우리가 ‘어떤 사회를 만들어야 하느냐’에 대해 제대로 얘기해본 적이 있는지 묻고 싶어요. 

안 = 그 점에서도 논의되는 문제가 불평등인데요. 저는 최저임금제도를 사회안전망으로 봤습니다. 대학교육을 받은 중년들은 사실 주변에 최저임금 받는 사람들이 없어요. 그런데 그들이 발언권을 갖고 최저임금에 왈가왈부했습니다. 정작 노동하는 당사자는 목소리를 갖지 못하고요.

장 = 그렇죠. 저는 최저임금제에 찬성하는데요. 우리나라에서 최저임금제가 문제가 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자영업자 비율이 엄청 높다는 겁니다. 

안 = 그래도 좀 줄어서 25%죠. 

장 = 미국 이런 데는 6%밖에 안됩니다. 자본가가 될 수 없는 사람들이 사회안전망이 없기 때문에 치킨집 사장이 된 거란 말입니다. 자본가가 될 수 없는 사람들을 자본가로 만들어놓고 너희도 자본가와 똑같이 행동하라니까 불만이 나오죠. 또 한 시간에 1000원 2000원 더 받는 게 중요한 사람들은 목소리가 없고요. 위쪽에 있는 사람들은 1000원, 2000원 더 받으려고 뭘 그러냐 그러든지 치킨집 사장이 1000원 더 줘야지 합니다. 그런데 1000원을 더 주면 사업이 위험할 수도 있거든요. 목소리가 있는 사람들이 그 현실과 괴리돼 있기에 잘 보지를 못하는 거죠. 노동권, 최저임금제, 그다음에 복지제도 이런 것들이 사회안전망입니다. 1950~1960년대 스웨덴 사민당 구호 중 하나가 영어로 ‘Secure people dare(안전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대담할 수 있다)’였어요. 뭔가 안전망이 있어야 과감하게 새로운 선택도 하고, 직업도 바꿔보는데 우리나라엔 지금 그게 없어요. 다들 공무원 되려고 하는 게 뭐예요, 안전 찾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진짜 안전망을 만들어줘야죠. 핀란드, 스웨덴 같은 데는 실업급여가 최종 월급의 60~70%입니다. 2년 동안 받을 수 있고, 재교육해주고 직업 알선하고, 우리나라 입시 코디 붙듯이 해준다고요. 그러니 이들은 구조조정이나 기술혁신에 저항이 별로 없어요. 미국 같은 데는 90%가 노조 가입이 안돼 있으니까. 

안 = 우리도 노조 가입률 10%잖아요. 

장 = 우리랑 미국이랑 OECD에서 최저죠. 그렇지만 두 나라 다 조직된 10%는 직장을 잃으면 세상이 끝나니, 목숨을 걸고 싸우죠. 

삼성 이건희 회장 사망하면 
상속세 내고 지분율 낮아져
만약 투기세력에 넘어가면 
국민들이 10년·20년 고생

안 = 대기업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경제 현실인데요. 이전 인터뷰에서 ‘삼성 이건희 회장이 사망하면 큰일 난다’고 한 말이 강도가 셌어요. 대기업 지배구도가 이끄는 산업 내 불평등 문제가 당장 이변이 일어나면 위기로 갈 수 있다는 뜻으로 저는 이해하긴 했습니다. 그럼에도 해석의 여지가 너무 넓어요. 

장 = 이건희 회장이 사망하면 상속세를 내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지분율이 떨어지면 그룹구조가 와해될 수 있어요. 그냥 자본시장에 맡겨놓으면 뉴브리지가 제일은행 해먹은 식으로 날아갈 확률이 높다는 거죠. 그렇게 되면 국민 경제에 안 좋겠다는 생각에, 주주자본주의 1주 1표 논리를 따르지 않고 문제를 해결하자고 차등의결권제를 내놓으며 예를 든 거죠. 너무 답답하니까 차라리 국유화를 해라, 우리 국민들의 피땀을 왜 남 주냐 하는 거죠, ‘외국 투기자본에 넘겨주느니 삼성특별법이라도 만들어 아예 다른 방식으로 관리하자’고 한 거죠. 이씨 집안, 정씨 집안을 봐주자는 얘기가 아닌데 양쪽에서 곡해합니다. 친재벌론자들은 사유재산을 침해하려고 하니 불순분자라 하고, 재벌개혁론자들은 주주자본주의 논리에 어긋나니 친재벌론자라고 하고. 소액주주운동이 미국 같은 데서는 펀드매니저들이 하는 운동인데, 한국에서는 사회운동으로 승화시켜 중요한 일을 했죠. 그런데 이 방식이 성공하다 보니 재벌을 개혁하는 유일한 논리처럼 됐습니다. 저는 그게 아니라는 거죠. 스웨덴 제일의 재벌인 발렌베리 집안이 통제권을 갖는 기업의 시가총액이 스웨덴 전체 상장기업 시가총액의 반입니다. 한 나라 기업의 반을 한 가문이 가진 거예요. 차등의결권 때문에 가능하죠. 미국도 구글, 페이스북 이런 데서 차등의결권을 쓰거든요. 저커버그가 가진 주식은 28%이지만 차등의결권이 있어 의결권을 기준으로 하면 50% 이상을 그가 통제합니다. 많은 나라에서 씁니다. 다시 스웨덴으로 돌아가서, 한 가문이 6대째 주요 기업의 절반을 통제하는데 그 면에서 보면 그렇게 불공평한 사회가 어딨어요. 그러나 스웨덴은 노동권을 강화하고 복지국가를 이뤄 세계에서 제일 평등한 나라 중 하나를 만들었습니다. 삼성, 현대 그 기업들이 투기자본에 넘어가면 국민들이 10년, 20년 고생합니다.

■ 경제 정책의 목표는 ‘다 같이 행복’…어떤 사회를 만들 것인지 이야기할 때

경제학자 장하준 교수(왼쪽)가 재미 저널리스트 안희경씨와 영국 케임브리지대 연구실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장 교수는 “한국은 다시 산업정책을 정립하고 적극적인 재정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밝혔다.  황채영 사진작가

경제학자 장하준 교수(왼쪽)가 재미 저널리스트 안희경씨와 영국 케임브리지대 연구실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장 교수는 “한국은 다시 산업정책을 정립하고 적극적인 재정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밝혔다. 황채영 사진작가

안 =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대기업 중심 경제는 여러 면에서 불평등 문제의 핵심이 되고 있습니다. 어떤 대안을 갖고 있는지요. 

장 = ‘재벌 때문에 불평등이 나온다’, 그건 문제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 상위 1%는 상대적으로 다른 나라들보다 잘살지 않는데 상위 10%는 잘사는 편이죠. 문제는 상위 10%지, 상위 1%가 아니거든요. 중소기업이 착취당한다고 하지만 그 중소기업주들은 노동자 착취 안 하나요? 재벌이 권력을 남용하기 때문에 당연히 규제해야 하는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겁니다. 기본적으로 누진세로 많이 걷어 복지제도를 확대해 소득재분배를 확실히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소득재분배를 하기 전 불평등도가 프랑스, 독일, 스웨덴 이런 나라도 미국과 비슷해요. 자기가 번 돈 세금 내고 정부 복지수당 받기 전 소득만 갖고 계산하면요.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 세금 내고 복지 지급하기 전, 불평등도로 보면 제일 평등한 나라예요. 그런데 복지는 OECD에서 멕시코 다음으로 꼴찌잖아요. 복지 지출도 재분배 성향이 높지 않아서, 재분배를 하고 나면 평등도가 OECD 평균 이하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규제를 통해 불평등을 낮춘 거예요. 

안 = 어떤 규제를 말하나요. 

장 = 소농보호, 골목상권보호, 중소기업 고유업종, 그게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굉장한 영향이 있습니다. 그런 보호가 있어서 시장소득만 보면 다른 나라에 비해 훨씬 평등합니다. 복지는 OECD 평균 지출이 국내총생산(GDP) 대비 21%인데 한국은 10% 좀 넘어요. 하다 못해 신자유주의 모범생이라는 칠레보다도 작습니다. 미국이 복지 안 한다고 하지만 미국의 복지 지출이 GDP 대비 19%, 20% 돼요. 유럽은 대부분 28%, 29%이고. 불평등 문제를 획기적으로 바꾸려면 복지를 확대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FTA 하고, 재벌들이 계속 성장하려면 규제 풀라고 하면서 점점 무너지고 있죠. 골목상권까지 무너지면 걷잡을 수 없어요. 

복지 없애고 기본소득만 준다? 
나는 100% 반대입니다
복지는 민영화하면 비용 올라가 
대규모 구매 때 값이 싸지는 것
누진세 걷어 ‘소득 재분배’해야
 

안 = 지난 호에서 카를로타 페레스 선생은 기본소득(UBI)을 제안했습니다.

장 = 기본소득은 잘 봐야 하는데, 옛날에 하이에크, 프리드먼 같은 사람들이 다 지지했거든요. 그 사람들의 주장이 뭐냐면, 딱 기본소득만 주고 복지는 다 없앤다는 겁니다. 실리콘밸리에 기본소득 지지하는 기업가들이 있는데 그들 중 많은 수가 그 영향을 받았죠. 복지를 없애는 대신에 기본소득 주자는 안에 저는 100% 반대입니다. 지금 복지가 잘된 선진국들은 사실상 기본소득이 있는 겁니다. 기본적인 생활이 보장되잖아요. 다만 아동수당, 실업수당, 주택 보조 등 다 조건에 묶여 있으니까 일부 좌파에서 ‘그런 거 복잡하고, 경제구조도 바뀌어 파악하기 힘드니 일괄적으로 현금화해서 주자’는 거죠(안희경의 ‘세계 지성과의 대화’ 2-카를로타 페레스 참조). 저는 그건 좀 아닌 것 같아요. 우파식으로 세금은 국가가 강탈해가는 걸로 생각해서는 안되지만, 세금으로 공동 자금을 만들었으면 어떻게 쓰면 좋은지 얘기할 권리는 있다고 봅니다. 특히 교육, 보건 분야는 복지제도를 민영화하면 비용이 올라갑니다. 복지는 공동구매거든요. 국민 의료보험을 하면 의료비가 싸지는 이유가 의료보험을 대규모로 구매해서예요. 저는 기본소득을 줘서 사람들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부분을 늘려주자 정도까진 찬성인데, 그 과정에서 기존의 사회복지를 어떻게 바꿀 거냐 하는 점은 조심해야 한다고 봅니다. ‘아동수당 올려줄 테니 알아서 탁아시설 찾아라’ 이러는데, 탁아시설이 영리단체면 거기다 돈 주는 거죠. 공급은 늘어날지 모르지만 질은 보장이 안되고요. 

안 = 지금 그렇게 돼 있죠. 그렇지만 시장은 활성화돼 경제가 돌아간다는 주장을 합니다.

장 = 그런 거 가지고 경제가 잘 돌아갈 것 같으면 뭐 벌써 잘 돌아갔겠죠.

안 = 만약 이번 일요일에 문재인 대통령과 청와대 뒷산을 오른다, 그러면 어떤 조언을 하고 싶으세요. 

장 = 지금 우리나라가 OECD 중에서 재정이 제일 탄탄한 나라 중 하나예요. 매년 재정흑자에다 GDP 대비 국채비율이 낮기로 스위스, 덴마크, 스웨덴 등 5개 선진국 다음이 우리입니다. 오죽하면 OECD, 그 보수적인 데서도 한국한테 재정정책 더 적극적으로 쓰고 적자도 좀 더 내도 된다 권고할까요. 그런데 안 해요! 제가 ‘자린고비 경제학’이라 부릅니다. 무조건 안 쓰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 거죠. 특히 교육·연구개발에 공공투자를 하면 나중에 더 큰돈이 돼 돌아와요. 대통령께 부탁드리고 싶은 건 담론 구조 자체를 바꿔주시라는 거예요. ‘우리나라같이 매년 재정흑자만 내는 나라 없다. 지금 복지가 필요하다. 복지 2배로 늘려도 미국 정도다. 유럽 수준 되려면 3배 이상 늘려야 된다.’ 기존 개념을 완전히 바꿔서 새로운 지평을 여셔야죠. 

안 = 페레스 선생과 인터뷰할 때, 한국은 노인 기초연금수당이 얼마냐고 묻기에 30만원이라 답했는데, “그 돈으로 살 수 있느냐”고 되물어 화제를 돌렸습니다. 

OECD 복지 평균지출 21% 
한국은 10% 좀 넘는 수준
노인연금 30만원, 창피한 얘기
 

장 = 창피한 얘기죠. 1970~1980년대 사고에서 못 벗어난 거고. 우파에서는 마치 복지가 없는 돈을 쓰는 것처럼 얘기하는데, 그냥 오른쪽 주머닛돈을 왼쪽으로 옮겨 쓰자는 거예요. 어차피 다들 써야 할 돈, 모아서 체계적으로 쓰자는 겁니다. 좌파도 무상복지라고 하는데 왜 무상입니까? 가난한 사람도 다 세금 냅니다. 부가가치세 내잖아요. 그걸 무상이라고 하니까, 우파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공짜만 바란다’고 비난할 빌미를 주죠. 다 같이 사고를 열어젖혀야 하는데, 한국뿐 아니라 어느 나라나 진영 논리가 강하기 때문에, 그게 참 비극인데…. 그래도 지금 문 대통령 아니면 누가 그걸 바꾸겠어요. 

세수 호황이다. 초과세수가 26조원이 될 거라고 전망한다. 그 돈이면 일자리 21만개 더 만들 수 있었다는 지적도 나온다. 긴축을 비판하는 프레임조차 ‘일자리 만들기’라는 것이 안타깝다. ‘허리띠 졸라매기’를 더는 할 수 없는 이들의 고통은 여전히 뒷전이다. ‘자린고비 정책’이라는 장하준 교수의 일침이 귀에 쟁쟁거린다. 

■ 장하준 교수는…경제분야 세계적 명성, 대중에게 쉽게 풀어내
 
장하준(55)은 영국 케임브리지대 경제학과 교수다. 2003년 뮈르달상, 2005년 경제학의 지평을 넓힌 경제학자에게 주는 레온티예프상을 수상하면서 세계적 경제학자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대한민국 대통령자문정책기획위원(2005년)을 지냈고, 2014년 영국의 정치평론지 프로스펙트(Prospect) 선정 ‘올해의 사상가 50인’에 오르기도 했다. 지난해 11월 영국 국립경제사회연구소(NIESR) 이사로 선임돼 5년 임기를 맡았으며, 2019년부터 3년간 유엔 경제사회이사회 개발정책위원으로 임명됐다. 주요 저서로는 <사다리 걷어차기> <개혁의 덫> <쾌도난마 한국 경제>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나쁜 사마리아인들>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 <국가의 역할> 등이 있다.
 
대중을 위해 경제학을 쉽게 설명하고자 노력해온 장하준은 인터뷰 말미에 모두 함께 경제를 공부하자고 제안했다. 돈으로 가치를 셈하는 사회이기에 사회를 민주적으로 운영하고 개인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서는 경제를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 안희경은 
 
[세계 지성과의 대화 ③]장하준 교수-Q. 문 대통령 만난다면 해주고 싶은 조언은 “자린고비 경제 그만…복지재정 확 늘려라”
 
재미 저널리스트다. 2002년 미국으로 이주, 서구의 문명사적 성찰과 대안 모색 등을 소개하는 글을 쓰고 있다. 세계적 마음 전문가들의 인터뷰집 <사피엔스의 마음>, 레베카 솔닛 등 세계 여성 지성들과의 대화를 엮은 <어크로스 페미니즘>, 재러드 다이아몬드 등 세계 지성 11명과의 대담집 <문명 그 길을 묻다>, 놈 촘스키 등 세계 석학 7인과의 대담집 <하나의 생각이 세상을 바꾼다>, 윌리엄 켄트리지 등을 인터뷰한 <여기, 아티스트가 있다> 등의 저서와 다수의 번역서를 펴냈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901140600035&code=100100#csidx2adbdb5cd60ffbf96e5d527b24623a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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