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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교안 자한당 입당, 기독교를 무기로 대선까지 노리나?

도로 친박당? 자한당 내부에서도 비판의 목소리 나와
 
임병도 | 2019-01-14 08:42:38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황교안 전 국무총리가 자유한국당에 입당합니다. 황 전 총리는 11일 김병준 비대위원장과 만난 자리에서 입당 의사를 밝혔고, 15일 오전에 자유한국당 입당식과 기자회견을 열 예정입니다.

황 전 총리는 13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처음 걷게 되는 정치인의 길이다. 개인적으로 걱정도 된다”며 “하지만 나라가 흔들리고 국민이 힘들어하고 계신데, 가장 중요한 것은 황교안 개인이 아니라 대한민국과 우리 국민만을 생각해야 한다고 판단했다”고 입당 이유를 밝혔습니다.

황교안 전 총리의 정치 도전은 이미 지난 대선과 지선에서 후보로 물망에 오르며 거론된 적이 있습니다.

이후 잠잠하던 황 전 총리는 보수 대선 주자 선호도 1위에 올랐고, 페이스북에 문재인 정부를 비판하는 글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황 전 총리가 자한당에 입당한다는 것은 본격적으로 당권에 도전한다는 뜻입니다. 황교안 전 총리의 자유한국당 입당이 주는 의미와 그 여파를 알아보겠습니다.


도로 친박당? 자한당 내부에서도 비판의 목소리 나와

황교안 전 총리의 자한당 입당은 보수 대선 주자 선호도 1위 인물이 함께 하기에 지지율 상승세에 도움이 된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도로 박근혜당’이 될 수도 있다는 우려도 있습니다.

황 전 총리를 중심으로 친박계와 TK(대구·경북), 전통 보수 지지층이 결집할 수 있지만, 친박 내부에서는 마냥 환영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자유한국당 국회의원 선거구 조직위원장 선발 공개 오디션에서 발언하고 있는 김병준 비대위원장 ⓒ자유한국당

당 대표 출마가 유력한 심재철 의원은 입장문을 통해 “박근혜 정부 초대 법무부 장관에 이어 대통령 권한대행을 지내 정권의 시작과 끝을 함께한 황 전 총리가 박 전 대통령이 공격당하고 탄핵소추당할 때 어디서 무엇을 했느냐”라며 황 전 총리를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김병준 비대위원장의 입장도 궁지에 몰렸습니다. 진박 공천에 관여한 사람이나 박근혜 정부 장관 출신 의원들의 불출마 선언까지 받으며 인적쇄신을 꾀했는 데, 박근혜 정권 핵심 인사가 당권을 잡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친박에서 가장 중요하게 꼽히는 박근혜씨의 의중도 반반 정도로 봐야 합니다. 친박이 힘을 얻을 수 있거나 결집하는 계기도 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친박 신당이 아닌 황교안 개인의 정치적 욕망으로 토사구팽 당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황교안 전 총리가 자유한국당에 입당해 어떤 행보를 보이느냐에 따라 친박과 비박, 그리고 보수층의 지지 여부가 확실하게 나올 것입니다.


왜 하필 지금 자한당에 입당할까?

▲CBS 의뢰로 리얼미터가 조사한 차기 대선주자 선호도에서 황교안 전 총리는 보수층과 자유한국당 지지층에서 1위를 차지했다. ⓒMBN 뉴스 화면 캡처

이미 지난 대선에서도 출마가 거론됐던 황 전 총리가 왜 하필 지금 시점에 자유한국당에 입당할까요?

당시에는 “출마를 위해 권한대행의 대행을 만들 수는 없었다”는 말을 할 정도로 여건이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특히 탄핵 정국에서 출마해도 결과가 그리 썩 좋지 않으리라는 예상도 나왔습니다.

지금은 뚜렷한 보수 대선주자가 없는 상황에서 선호도 1위가 지속되니 해볼만 하다고 느꼈을 겁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이유는 지금 자한당에 입당해야만 2020년 총선 공천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으로 해석됩니다.

자유한국당은 2월 27일 전당대회를 엽니다. 이때 선출된 당 대표는 2020년 국회의원 총선 공천권을 쥐게 됩니다.

정당에서 공천권은 결국 권력으로 이어지고, 차기 대선까지도 영향력을 끼칩니다.

자유한국당은 오랜 비대위 체제의 진통 속에서 새로운 도로를 만들었고, 황교안 전 총리는 개통하자마자 무임승차하는 기회를 잡은 셈입니다.


황교안의 무서움, 기독교인이 결집한다

▲국무총리 자리에서 물러난 후 전국을 돌아다니며 간증집회를 하고 있는 황교안 전 총리. 구글에 검색해보니 그동안 다녔던 간증집회 모습을 볼 수 있다.

황교안 전 총리의 자유한국당 입당이 무서운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기독교인이 결집하는 무기를 황 전 총리가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황 전 총리는 자리에서 물러난 후 전국의 교회를 다니면서 간증 집회를 했습니다. 그가 다닌 교회만 해도 수십 곳이 넘습니다.

기독교의 특성상 간증집회를 하면 침석 한 교인 대부분이 그를 지지하는 마음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성경 속 인물에 비유해 ‘요셉 총리’라고 불리는 황 전 총리의 모습은 종교적 믿음이 자연스럽게 정치인의 지지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성경 속 요셉은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해 형제들의 질투로 노예로 팔렸다. 노예로 살면서 능력을 인정받아 높은 자리에 올랐지만 누명을 쓴다. 감옥에 있던 중에 왕의 꿈을 해몽해 결국 이집트의 총리까지 오른다. 자신을 노예로 팔았던 형제들이 먹을 것이 없어 찾아왔지만, 벌을 주는 대신에 용서를 한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로 이주하는 계기가 바로 이 시기이다. 갖은 고난을 겪지만 하나님을 믿어 성공하는 사례를 거론할 때 빠지지 않는 인물이 요셉이다.

▲지난 2018년 12월 9일 춘천에서 열린 황교안 전 총리 간증집회 기념 사진 ⓒ침례신문 화면 캡처

태극기 집회와 보수층을 보면 교회를 다니는 50대 이상이 많습니다. 이들의 입장에서 보면 황교안 전 총리는 아주 매력적인 인물입니다.

우선 법무부 장관에 국무총리 출신이라는 점은 아주 스마트해 보입니다. 여기에 자신이 믿는 종교를 생활에서 그대로 실천하는 본보기가 될 수 있는 인물상으로 비칩니다.

황교안 전 총리는 중도 보수와 기독교를 묶을 수 있는 인물입니다. 실제로 그는 ‘황교안 전도사’라며 기독교 내부에서 강력한 지지를 받기도 합니다. 이는 그가 대선까지 나올 수 있는 바탕이 될 수 있습니다.

▲2004년 이명박 서울시장이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청년·학생 연합기도회’에 참석, ‘서울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봉헌서를 낭독하고 있다. ⓒ 기독교TV(www.cts.tv) 화면 캡처

기독교인이 줄었다고 하지만 개신교 인구만 무려 천만 명에 가깝습니다. 이들이 정치인 한 명을 몰빵 하듯이 지지하면, 대선에서 당선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실제로 과거 ‘이명박 장로’는 선거에서 기독교인의 맹목적인 지지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한국에서 기독교인의 지지는 쉽게 넘길 수 없는 강력한 무기입니다.

황교안 전 총리는 엘리트 관료 출신으로 정당 정치의 경험이 전혀 없습니다. 여기에 스스로 뭔가 정치적인 힘을 발휘하기보다는 권력자를 찾거나 남이 떠받들어 주는 코스만 밟았습니다. 정치적 역량에 대한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황교안 전 총리는 태극기 집회와 보수층의 구성하는 기독교인의 막강한 지지를 받고 있으며, 보수 대선 주자로 한동안은 독보적인 행보를 이어갈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기독교인이라고 깨끗한 정치를 한다는 맹신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미 이명박 전 대통령의 사례에서 보듯이 하나님을 믿어도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도 많습니다.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3&table=impeter&uid=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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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 북미간 ‘ICBM폐기-제재완화 빅딜설’에 움찔하는 미 대북 강경파들

  •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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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2019/01/14 10:03
  • 수정일
    2019/01/14 10:03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한미동맹’ 내세우며 ‘북미합의’ 막는 속내... 참모 조언 거부하는 트럼프에 기대?

김원식 전문기자
발행 2019-01-13 21:54:25
수정 2019-01-13 21:54:25
이 기사는 번 공유됐습니다
 
북한 대륙간탄토미사일(ICBM) 화성-15호 발사 장면.
북한 대륙간탄토미사일(ICBM) 화성-15호 발사 장면.ⓒ뉴시스/로동신문
 
 

“북미 간에 빅딜설이 가시화되자, 이를 방해하려는 미국 내 대북 강경파들의 움직임도 활발해지고 있다.” 최근 2차 북미정상회담 개최에 관한 보도가 잇따르고 있는 가운데, 워싱턴의 한 외교 소식통이 기자에게 귀띔한 말이다.

2차 북미정상회담에서는 무언가 가시적인 성과를 내놓아야 한다는 데는 북미가 이견이 없을 정도다. 미국이 최소 5∼10년이 걸릴 이른바 ‘완전한 (북한)비핵화’ 완료 전에 기존 제재를 계속 강화하겠다는 입장을 풀지 않고는 북한이 협상 테이블에 앉을 일은 만무하다. 

그래서 이미 워싱턴 외교가에서는 이른바 ‘물밑 합의설’이 파다하다. 즉, 미국 국민 위협 해소가 목표인 미국은 본토 공격이 가능한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폐기하는 조건으로 남북관계 개선을 포함한 대북제재 일부를 가시적으로 완화한다는 ‘빅딜설’이다.

이 ‘빅딜설’에 관해 북한이 어느 정도 합의할지는 아직 미지수다. 하지만 항상 ‘행동 대 행동’을 강조해온 북한이 특히, 상당 부분 대북제재가 완화된다면, 2차 북미정상회담에서 합의할 수 있다는 관측이 유력하다.  

이 ‘빅딜설’의 핵심은 이번 2차 정상회담에서 ‘ICBM폐기- 제재완화’에 북미가 합의하고 이후 곧바로 관계개선과 비핵화를 위한 핵사찰·검증을 위해 상호 연락사무소를 평양과 워싱턴에 개설한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종전선언’을 시행하고 ‘평화협정’도 추진한다는 내용이다.

이러한 ‘빅딜설’이 실제로 북미 간에 합의가 되고 추진돼 나갈지는 아직 미지수나 한반도의 평화정착을 위해서는 상당히 바람직한 방향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늘 전문가를 내세우며 ‘북미협상’ 자체를 반대하는 미국 내 대북 강경파들이 이를 가만히 보고 있을 리가 만무하다.

이들 강경파들은 최근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북미협상에 관해 “궁극적인 목표는 ‘미국 국민의 안전’이다”라는 언급에도 화들짝 놀라고 있다. 이들은 폼페이오 장관이 미 본토 타격이 가능한 ICBM 폐기와 대북제재 완화를 맞바꾸겠다는 속내를 드러냈다고 안절부절못한다.

당장 미중앙정보국(CIA) 출신 수미 테리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선임연구원은 최근 토론회에서 폼페이오 장관이 ‘북한 비핵화’란 표현 대신 ‘미국에 대한 위협 제거’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며, 북한 비핵화 목표 대신 ICBM 제거 쪽으로 대북정책을 수정하고 있다는 우려를 드러냈다.

그녀는 “북한은 그들의 목표인 핵보유국 지위를 얻기 위해 절대로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쉽게 말해 북한의 비핵화 약속은 거짓이며, 북한이 ICBM을 폐기하더라도 이를 합의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는 것이다. 

같은 CIA 출신 브루스 클링너 헤리티지재단 선임연구원도 최근 폼페이오 장관의 발언에 관해 미국이 미 본토에 대한 북한의 미사일 위협 문제만 해결되면 합의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일으킨다고 내심 실토했다. 

그는 “(폼페이오 장관 발언처럼) 그렇게 하는 것은 일본과 한국에 대한 미국의 방어협정을 깨뜨릴 수 있다는 우려도 야기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쉽게 말해 겉으로는 미·일·한 안보동맹을 거론하면서, ‘ICBM폐기-제재완화’라는 북미 빅딜은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대북 강경파 중에서도 온화한(?) 로버트 갈루치 전 국무부 북핵 특사는 “북미 협상이 진전을 보려면 양측 모두에서 선제조치를 내놔야 한다”면서 “북한이 먼저 탄도미사일 관련 조치를 취하고, 미국이 반대급부로 일부 제재 완화를 내놓는다면 나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얼핏 보면, 북미 간의 ‘ICBM폐기-제재완화’‘ 빅딜설을 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역시 “미국이 북한과 ICBM을 제거하는 수준에서 북한과 합의를 한다면 국제안보를 무너뜨리고 한·일과의 동맹이 훼손될 것이라는 사실은 미 행정부도 잘 알고 있고 그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속내를 숨기지 않았다. 

‘대화’ 내세우면서도 ‘북한 불신’이 기본인 미국 내 북한 전문가들

좀 더 온화한(?) 게리 세이모어 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대량살상무기 조정관은 이에 관해 “트럼프 행정부의 목표는 완전한 북한의 비핵화지만, 단계적으로만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우선순위를 정해 그 수순을 밟아 나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북한 비핵화는 동결·감축·폐기 단계 등을 거치는데. 미국은 일단 본토에 대한 직접적 위협 제거를 우선순위에 둔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쯤 하면, 아주 합리적인 말로 보인다. 한반도 비핵화 과정에서 거쳐야 할 수순으로 ‘ICBM폐기-제재완화’‘ 빅딜설을 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북한이 정의하는 한반도 비핵화의 핵심은 한미 안보동맹의 종식에 있다”면서 “미국이 한국에 대한 안보공약을 유지하는 한 핵무기 사용이 가능한 만큼, 결국 북한은 비핵화 대가로 한미 안보동맹의 종식을 요구할 것”이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쉽게 말해, 북한과 비핵화 협상을 계속해도 그들(북한)의 궁극적인 목표는 한미동맹의 종식이니, 이것을 잘 알아서 트럼프 행정부가 처신하라는 경고이다. 자칭 강경파가 아니라, 온화한 ‘대북 대화파’임을 내세우는 크리스토퍼 힐 전 미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는 어떨까?

그는 최근 북중정상회담 공동발표문에서 나온 ‘평화와 안정’이라는 표현은 ‘새로운 코드’라고 말했다. 얼핏 보면, 북중정상회담을 환영하는 것 같지만, 그는 “이러한 용어는 곧 주한미군 철수를 의미하는 것”이라며 “이는 중국의 이해와도 맞아떨어지는 것”이라는 속내를 숨기지 않았다.

역사적 첫 북미정상회담이 열린 6월 12일 오전 회담장인 카펠라 호텔에 북한 김정은 위원장과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악수를 나누고 있다. (자료 사진)
역사적 첫 북미정상회담이 열린 6월 12일 오전 회담장인 카펠라 호텔에 북한 김정은 위원장과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악수를 나누고 있다. (자료 사진)ⓒ뉴시스

다소 길게 기자의 눈에 전부 ‘대북 강경파’로 보이는 미국 내 이른바 ‘북한 전문가’들의 최근 북미 빅딜설에 관한 언급을 나열한 이유는 간단하다. 이들은 나름 때로는 ‘한미동맹’을 내세우지만, 한마디로 북한은 믿을 수가 없으니, 어떠한 합의나 협상도 안 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미국의 대북 전문가들은 북한은 정상회담이든 고위급회담이든 완전한 핵폐기를 약속하고 이를 이행해야 하며, 5년이든 10년이 걸리든, 완료되고 난 다음에야 대북제재나 관계 정상화를 고려해 볼 테니 그러한 패전국 자인 문서에 사인하라는 것이다.

다시 지난해 3월 8일, 백악관 대통령 집무실에서 당시 정의용 안보실장을 만났던 트럼프 대통령의 말이 떠오른다. 정 실장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북미정상회담 의사를 밝혔다고 하자, 트럼프 대통령은 “좋다. 4월에라도 당장(right now) 만나자”면서 환영했다.

주변에 있던 백악관 참모들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순간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바로 “거 봐라. (북한과) 대화하는 게 잘하는 것”이라고 한술 더 뜨는 순간에는 주변 참모들은 마치 ‘사고 쳤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말문을 잃었다. 

끝내 참모들이 반응하지 않자 트럼프 대통령은 “전임 대통령들이 당신들 같은 참모들 말만 들어서 (북미관계가) 하나도 개선된 것이 없다”고 큰소리쳤다는 후문이다. 그래서 북미정상회담 발표도 백악관 관료가 아니고, 정 실장이 백악관에서 기자들에게 해야 했다는 전언이다.

“이제 세계경찰은 더는 싫다”면서 시리아 주둔 미군 철수부터 공약을 이행하고 있는 트럼프 대통령의 고집이 한반도 문제에 어떠한 결과로 귀결될지는 아무도 단언할 수 없다. 다만 주변에 대북 강경파로 가득한 참모들 속에서도 홀로 ‘탑다운(Top-Down)’ 방식으로 싸우고 있는 그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이유이다. 

김원식 전문기자

 

국제전문 기자입니다. 외교, 안보, 통일 문제에 관심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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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란히 암선고 받은 부부 "삼성생명이 이럴 줄이야"

[수상한 암보험금 ①] 금감원서 손 들어줬지만 보험금 지급 미루는 보험사

19.01.14 08:22l최종 업데이트 19.01.14 08:22l

 

의사의 권유대로 치료받았을 뿐인데 보험회사는 '암에 대한 직접치료'가 아니라며 암보험금을 제대로 주지 않는다. 금융당국도 환자들의 손을 들어줬지만 보험회사들은 법정에서 다퉈봐야 한다며 버틴다. 급기야 암환자들이 "약관에 적힌 그대로 암보험금을 지급하라"며 거리로 나섰다. 이들의 말을 들어봤다.[편집자말]

 

 유방암 판정을 받고 투병 중인 최재돈 씨가 지난 12일 경기도 성남시 자신의 가게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나 롯데손해보험, 현대해상화재보험, 흥국화재는 암보험금을 지급했지만, 삼성생명만 요양병원에서 치료 받은 돈은 암에 대한 직접치료가 아니다는 이유로 지급을 미루고 있다고 억울함을 토로했다.
▲  유방암 판정을 받고 투병 중인 최재돈씨가 지난해 12월 12일 경기도 성남시 자신의 가게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나 롯데손해보험, 현대해상화재보험, 흥국화재는 암보험금을 지급했지만, 삼성생명만 요양병원에서 치료 받은 돈은 암에 대한 직접치료가 아니다는 이유로 지급을 미루고 있다고 억울함을 토로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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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생명에서 너무 심한 것 같아요. 진짜 삼성에서 이럴 줄 몰랐습니다. 대기업이니까 무슨 일 생겼을 때 (소비자에게) 잘해 줄 거라고 생각하잖아요. 막상 보험금 줄 때 되니 이제 사람 취급을 안 하더라고요."

그의 목소리는 점차 높아졌다. 보험약관을 보여주며 암보험금을 주지 않는 삼성생명의 행태를 조목조목 고발하던 그는 돌연 한숨을 쉬며 "솔직히 너무 힘들다"고 했다. 지난달 12일 경기도 성남시 인근에서 만난 최재돈(54)씨. 그는 2016년 8월 분당서울대병원에서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

최씨는 "서울대병원에서 항암주사를 맞고 집에 있으면서 구토, 빈혈이 시작됐다"며 "화장실을 하루에 30번 가야 했고 밥도 못 먹고 누워만 있었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수술한 뒤에는 도저히 집에 있을 수 없어서 요양병원에 들어가 9개월 동안 치료 받았다"고 덧붙였다.

"다 죽어가는데 손해사정사가 '돈 못 준다'고 해"

 

작년 9월 집으로 돌아온 최씨는 롯데손해보험, 현대해상화재보험, 흥국화재, 삼성생명 등에 진단서, 영수증 등을 보내 암보험금을 청구했다. 삼성생명을 제외한 모든 보험회사에서 보험금이 나왔다. 그는 "요양병원에서 다 죽어가는 상황이었는데 삼성생명 자회사 쪽에서 손해사정사가 나와 '여기(요양병원)에서 치료 받은 돈은 못 주겠다'고 했다"고 말했다. 

"왜 못 주냐고 물어봤더니 요양병원이라서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럼 약관에 요양병원은 안 된다고 적혀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했죠. 그랬더니 암에 대한 직접치료가 아니라서 못 준다고 하더라고요. 도대체 직접치료가 뭔가요? 항암치료, 방사선치료 이런 것만 직접치료라고 말해 줬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전혀 그런 것도 안 해놓고, 딱 암에 걸리니까 자기네(삼성생명)들 편리하게 해석하면서 안 된다고 하는 건 말이 안 되는 거잖아요."

최씨는 스스로 요양병원을 찾은 것도 아니라고 주장했다. 항암치료 부작용으로 빈혈이 심해져 병원에서 쓰러지자 의사가 요양병원에 입원하는 것이 좋겠다는 소견서를 써줬다는 것. 그는 "서울대병원에서 의사 소견서를 받았다"며 "대학병원처럼 큰 병원에서는 암수술 이후 5일 정도만 입원시켜주기 때문에 환자들이 치료 받을 곳이 없어 요양병원에 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대형병원의 경우 6개월 정도 기다려야 수술을 받을 수 있을 만큼 암환자가 많은데, 수술을 많이 하는 것이 병원 입장에서 이익이기 때문에 환자를 빨리 퇴원시킨다는 것이 최씨의 생각이다.

그는 삼성생명에만 3개의 보험상품에 가입한 상태다. 지난 1995년에는 홈닥터보험, 2000년과 2001년에는 여성시대건강보험, 뉴퍼스트클래스종신보험에 각각 가입했다. 그는 "삼성생명에만 온가족 보험료로 100만 원씩 나갔다"며 "옛날부터 갈빗집을 했는데 보험설계사들이 회식을 하고 나면 보험에 들어달라 해서 어쩔 수 없이 들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금감원도 "보험금 지급 책임 있다" 했지만 삼성생명은 "조사 중"
 
 유방암 판정을 받고 투병 중인 최재돈 씨와 보험사에 대응하는 암환우 모임(보암모) 회원들이 지난 18일 서울 여의도 금융감독원 앞에서 열린 집회에 참석해 암보험금 지급을 미루는 보험사를 규탄하며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는 보험사에 종합검사를 실시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  유방암 판정을 받고 투병 중인 최재돈 씨와 보험사에 대응하는 암환우 모임(보암모) 회원들이 서울 여의도 금융감독원 앞에서 열린 집회에 참석해 암보험금 지급을 미루는 보험사를 규탄하며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는 보험사에 종합검사를 실시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2018.12.18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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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생명이 보험금을 주지 않는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한 최씨는 지난해 3월 금융감독원을 찾았다. 8개월이라는 시간이 흐른 지난해 11월에야 금감원 쪽 답변서가 나왔다. '보험사가 암입원과 관련된 보험금을 지급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 금감원의 판단이었다. 하지만 당국은 삼성생명에 보험금 지급을 재검토하라고 권고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이후 회사는 현재까지도 보험금을 주지 않고 있다. 오히려 삼성생명은 자회사 삼성생명서비스손해사정 쪽 직원을 보내 다시 조사를 진행하겠다고 엄포를 놨다.

최씨의 남편 육경일(62)씨는 손해사정사가 부부를 다시 찾아와 보험금을 깎으려 들 것이라며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그는 "금감원에서도 지급해야 한다고 인정했는데, 손해사정사를 또 붙인다는 것은 합의하려는 것 아니겠나"라며 "필요한 서류는 다 냈는데 왜 또 온다는 것인지 황당했다"고 말했다. 보험회사가 소비자에게 보험금을 덜 주기 위해 자회사 쪽 손해사정사를 보내 보험금 삭감에 합의할 것을 요구하는 일이 흔하다고 육씨는 설명했다.

그는 "무조건 합의하려 한다"며 "원래 보험사가 줘야 하는 보험금의 50%, 30%로 깎으려 한다"고 말했다. 아내 최씨는 "요양병원에 있다 보니 보험금이 1000만 원을 넘어가면 보험금의 30%만 주는 경우가 많았다"며 "누구는 주고, 누구는 안 주고 그러면 안 된다"고 강하게 지적했다.

암 아니어서 보험금 못 준다? 의사는 "수술 중 암세포 손상됐을 수도"
 
 방광암 재발을 진단 받은 육경일 씨가 지난 12일 경기도 성남시 자신의 가게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나 ‘상세불명 방광의 악성 신생물’이라는 내용과 암 질병 코드가 적힌 진단서를 보여주며 다른 보험사는 보험금을 지급했는데 삼성생명만 지급을 거절하고 있다고 부당함을 호소했다.
▲  방광암 재발을 진단 받은 육경일(오른쪽)씨가 지난해 12월 12일 경기도 성남시 자신의 가게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나 ‘상세불명 방광의 악성 신생물’이라는 내용과 암 질병 코드가 적힌 진단서를 보여주며 다른 보험사는 보험금을 지급했는데 삼성생명만 지급을 거절하고 있다고 부당함을 호소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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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가 암 진단을 받기 4달 전인 2016년 4월 남편 육씨도 방광암 진단을 받았다. 앞서 육씨는 최씨와 함께 1995년 삼성생명 홈닥터보험에 가입했다. 하지만 회사는 암세포가 겉에만 있는 상피내암은 암이 아니라며 보험금을 주지 않으려 하다 결국 절반 가량만 지급했다. 이후 육씨의 암이 두 차례 재발했고, 이때에는 보험금이 정상적으로 나왔다. 그렇지만 4번째 암이 재발하자 삼성생명은 보험금 지급을 거절했다. 조직검사 결과 암이 아닌 것으로 나왔기 때문이라는 것이 회사 쪽 주장이었다.

육씨는 "서울대병원에서 내시경을 하고 피검사까지 한 다음 암 재발이라는 진단을 받았다"며 "그런데 수술한 부위를 떼서 검사해 보니 암이 아니라 종양이라고 한 것"이라고 말했다. 육씨가 지난해 7월 받은 진단서에는 '상세불명 방광의 악성 신생물'이라는 내용과 함께 암 질병코드가 적혀 있다.

그런데 삼성생명 쪽 손해사정사가 의사를 만난 뒤인 지난해 8월에 나온 진단서에는 애매한 내용들이 추가됐다. '악성세포가 발견되지 않아 병리학적 진단은 양성종양임. 그러나 수술 때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전기 소작에 의해 조직 검체가 열성 손상을 입어 악성 조직이 병리학적 검체에 발견되지 않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음'이라는 문구가 들어간 것. 다시 말해, 의사가 내시경으로 세포를 봤을 때는 암으로 보였는데 조직검사에서 암세포가 나오지 않은 것은 수술 과정에서 암이 사라졌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육씨가 더욱 의문을 품은 부분은 8월에 나온 진단서에도 앞서 나온 진단서와 똑같은 암 질병코드가 적혀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 "암치료를 목적으로 수술한 것이어서 암코드가 나온 것"이라며 "손해사정사가 진단서를 받은 날 같이 진료실에 들어가 의사를 만났는데, 두 사람이 잘 아는 사이 같았다"고 말했다. 이어 육씨는 "다른 보험사에서는 4번째 재발 때에도 보험금이 나왔다"며 "손해사정사가 찾아 오지도 않고, 서류만 주면 보험금이 지급됐다"고 했다.

금융당국 "암세포 안 나와도 수술비 지급해야"... 삼성생명 "육씨와 다른 사례"

앞서 금감원 분쟁조정위원회(아래 분조위)는 암 재발 소견으로 수술을 했으나 조직검사에서 암세포가 나오지 않은 경우에도 보험사가 암보험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린 바 있다. 육씨와 유사한 사례에서 금융당국이 소비자 손을 들어줬던 것. 지난 2015년 11월 분조위는 "암수술비 지급 여부는 약관대로 실제 수술의 시행목적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며 "수술의 시행결과 종양의 유무만으로 결정할 것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보험회사는 이 같은 분조위 사례가 육씨의 경우와 달라 보험금을 지급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삼성생명 관계자는 "내부적으로 과거 분조위와 유사점이 없다고 판단했다"면서 "(이유는)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금감원에 해당 민원이 들어갔고, 당국에서 판단하게 될 것"이라며 "보험금을 지급하라는 권고가 나오게 되면 차후에 (지급 여부를) 검토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또 이 관계자는 "지난 9월 분조위에서 요양병원 입원에 대해서도 암입원비를 지급하라는 결정이 나오면서 금감원이 최씨의 경우도 재검토하라 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내부 절차에 따라 손해사정사를 통해 다시 한번 보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육씨는 "어머니 병간호를 끝낸 뒤 편안한 노후를 보내려던 찰나 암 진단을 받으면서 보험회사의 횡포에 시달리게 됐다"고 분개했다. 
 
"20년 동안 갈빗집 장사하느라 고생했죠. 또 노인네 똥오줌 받아내느라 겁나게 고생하고, 장례 치르고 나니 암에 딱 걸려버린 거예요. 얼마 안 돼 아내도 암 진단 받아 많이 속상했죠. 그랬는데 보험사까지 난리를 치니... 황당했죠. 집도 팔려고 내놨어요. 아내랑 둘이서 편안하게 바닷가로 이사해 사는 게 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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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통일까지 가려면, 문화통합 준비해 나가야”

<신년 인터뷰> 늦봄 방북 30년, 문성근 통일맞이 부이시장
김치관 기자  |  ckkim@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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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1.14  07:2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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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익환 목사 방북 30주년을 맞아 문성근 통일맞이 부이사장과 9일 일산 한 카페에서 신년 인터뷰를 가졌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통일은 됐어!”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평양을 찾아 김일성 주석과 포옹하고 ‘4.2공동성명’을 발표하고 돌아와 수인(囚人)이 된 늦봄 문익환 목사. 아니 시인 문익환. 1989년 벽두에 “서울역이나 부산, 광주역에 가서 평양 가는 기차표를 내놓으라고 주장하는 일”이라는 ‘잠꼬대 아닌 잠꼬대’ 시를 쓰더니, 실제 저지르고 말았다.

“문목(문익환 목사)이 89년에 평양 방문 후에 서울에 오셔서 “통일은 됐어”라고 완료형으로 얘기를 해서 참 많은 사람들이 놀래고 어처구니 없어 했다... 지금 와서 되돌아보면 참 맞는 말이었다.”

늦봄 문익환 목사의 아들 배우 문성근(66)은 문 목사 방북 30주년 소회를 “너무 아쉽다”고 했다. 문 목사가 김일성 주석과 회담하고 허담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위원장과 서명한 ‘4.2공동성명’은 이후 6.15공동선언 등에 고스란히 반영됐다.

실제로 4.2공동성명의 정신대로 남북관계가 흘러왔다면 통일은 이미 된 거나 마찬가지.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너무 아쉽다.” 문성근 통일맞이 부이사장은 9일 <통일뉴스>와의 신년 인터뷰에서 아쉬움부터 토로했다.

“어떻게 보면 89년부터 2010년 그 사이에 우리가 마무리를 했어야 하는데, 마무리를 못하고 미-중 패권경쟁 시대의 틈바구니에 또 끼이는 상태가 됐으니까. 정말 통탄스럽다”는 것.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부터 본의 아니게 ‘시민정치운동’에 ‘공익근무’해온 그는 판문점선언 시대를 맞아 다시 본의 아니게 남북 문화교류의 일선에 서게 됐다. 당장 문 목사 방북 30주년을 기념해 4월 2일 즈음 가극 ‘금강’의 평양 공연 준비에 들어갔다.

“김일성 주석과 문익환 목사의 포옹에 이어 후대들인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문성근 부이사장의 포옹도 가능한 것 아닌가”라는 질문에 “내가 남쪽에서 살아온 삶이 뭔가를 대표할 수준이 못되기 때문에 말씀드리기는 그렇다”면서도 “그 행사 때 김 위원장께서 대표단을 접견해주면 그건 아주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한가닥 기대감을 내비쳤다.

오히려 정치 일선을 떠남으로써 몸에 맞는 옷을 입을 수 있었을까. 올해 8월 첫선을 보이는 평창 남북평화영화제의 조직위원장과 영화진흥위원회 산하 남북영화교류특별위원회 위원장, 6.15남측위원회 문예본부 준비위원장까지 도맡고 있는 실정.

이미 그의 머릿속에는 공동응원가를 만드는 밀린 숙제부터 개성공단이나 비무장지대(DMZ)에 대규모 영화 촬영장을 만드는 일이나 남쪽 감독이 북쪽에 가서 영화를 찍는 일, 평창 남북평화영화제를 원산에서 공동개최하는 일 등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그는 “남북관계가 다시 두 번째 기회를 맞으니까 문화예술계 전반에 계신 분들이 나한테 뭔가 해주기를 기대하는 게 있고, 나는 문목 때부터 문화예술이 동질성 회복에 가장 좋은 접근이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던 터라 그 요구를 외면할 수 없는 거다. 그래서 이 일은 그냥 문목의 유업으로 알고 한다”고 말했다.

나아가 “궁극적으로 민족통일까지 가려면, 문화통합을 준비해 나가야 한다”며 “다른 체제로 70년 넘게 살아와 이질화된 걸 극복하는 데에는 문화예술이 가장 효과적이다. 영화가 대표적이랄 수 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2002년 6월 문 목사의 부인 봄길 박용길 장로와 동생 문동환 선생의 안내로 문 목사가 나고 자란 중국 용정 명동촌을 방문했을 때 벌써 ‘노무현 대통령’을 시대정신으로 설파하던 그는 이제 ‘문화통합’이라는 새로운 기치를 들고 벌써 저만큼 앞선 걸음을 떼고 있다.

3.1운동 100주년이자 문익환 목사 방북 30주년인 기해년 새해를 맞아 9일 오전 10시 경기도 일산의 한 카페에서 문성근 통일맞이 부이사장과 나눈 신년 인터뷰 내용이다.

“민(民)이 움직이는 노력을 해야 한다”

   
▲ 문성근 이사장은 남북 문화교류의 길목을 맡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통일뉴스 : 지난해가 늦본 문익환 목사 탄생 100주년이었고, 올해 문 목사 방북 30주년을 맞았다. 오랜 시간이라면 오랜 시간일 수 있는데, 소회가 있다면? 그때는 좀더 젊은 때였지 않나.

■ 문성근 부이사장 : 89년이니까, 그래도 서른 여섯이었다.

소회라면 너무 아쉽다. 문목이 89년에 평양 방문 후에 서울에 오셔서 “통일은 됐어”라고 완료형으로 얘기를 해서 참 많은 사람들이 놀래고 어처구니 없어 했다. “시적 통찰이다” 이렇게 찬양하는 분들도 간혹 있었지만. 그때는 그 말씀을 이해하는 분들만 하셨던 건데, 지금 와서 되돌아보면 참 맞는 말이었다.

그때 4.2공동성명에 포함된 정치군사회담과 다방면에 걸친 교류.접촉을 병행추진한다는 것, 그리고 고려연방제 전에 연합 단계를 도입할 수 있다는 의미, 올림픽에 단일팀으로 참가하고 단일기에 공동응원가 쓰고, 이런 구체적인 이야기까지 있었다. 그 이후에 보면, 6.15공동선언이 4.2공동성명의 축약이고, 10.4선언은 교류협력.경제협력에 대한 확대 버전이고, 판문점선언도 재확인 겸 발전이지 않나. 그러니까 결국은 근본적으로 그 합의 테두리에서만 움직이게 돼 있는 거다.

그때 89년 4.2공동성명 9항을 보고, 나는 경탄했다. 서명자가 전민련(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고문 문익환과 조평통(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허담이었다. 양자는 이 합의가 향후 있을 당국자 간의 논의에 기초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각각 ‘건의한다’고 돼 있다. 아, 그거 보고 정말 놀랐다. 민간 차원의 합의였고, 당국 간에 이걸 재확인하라, 그리고 가자!

그걸 안 하고 ‘어’ 하는 사이에 30년이 지난 거다. 그런데 그냥 30년만 지났으면, 30년 지나서 다시 복원하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89년은 분단을 강제했던 동서냉전이 붕괴 기미를 보이던 시점이다. 그러니까 냉전이 끝나면 우리는 분단돼 있을 필요가 없으니 어떻게 우리가 가까워질 거냐는 방법론을 토론하러 간 거였다.

그런데 그 좋은 국제정세가 대략 2010년에 끝나지 않나. 미-중 패권경쟁 시대로 들어가면서 동서냉전이 새로운 미-중 열전 시대로 이행된 거다. 어떻게 보면 89년부터 2010년 그 사이에 우리가 마무리를 했어야 하는데, 마무리를 못하고 미-중 패권경쟁 시대의 틈바구니에 또 끼이는 상태가 됐으니까. 정말 통탄스럽다.

이명박근혜 정권은 정말 반민족적인 매국세력이었다. 그런데 이제 지금이라도 해야 되는데 아슬아슬하고 참 그렇다.

□ 본론으로 들어가서, 지난해는 한반도에 특별한 해였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평가하고 올해를 어떻게 전망하나?

■ 북으로서는 ‘어떻게 하면 미국이 협상에 나올 거냐’ 그 방법론을 찾아 몇 십 년을 보냈지 않나. 이제 그 협상장이 만들어진 거다. 북은 북대로 그 협상 조건을 만들기 위해 그동안 힘든 세월을 보내온 거고, 남은 남대로 분단을 정치에 이용하지 않는 사람들이 정권을 운영할 수 있는 시대를 만들기 위해서 오래 노력을 해온 거다. 남북 시민과 인민의 노력으로 분위기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래서 그 노력에 깊은 존경과 지지를 보낸다.

양쪽 정상이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은 미국인데, 쉽지 않을 것이다. 지금 미국은 트럼트 대통령을 제외하면 여야, 월가, 군산복합체 몽땅 다 반대하는 상황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입장이 굉장히 어려울 것이라 생각된다.

우리로서는 남북이 이런 새로운 대화국면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을 해왔듯이, 이것을 이어나가 전 세계 여론에 호소할 수 있는 방안을 찾는 노력을 해야 되지 않을까 싶다. 민과 정부가 같이 가야 되는데 지금은 완전히 정부 주도로 가고 있지 않나. 민들이 정부에만 맡길 것이 아니라 저들은 지금 할만큼 다 했으니까 민이 움직이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논리적인 근거는, 다른 나라들은 국제정세나 각국의 이익에 따라서 남북문제를 보는데 우리에게는 기본인권에 관한 문제이지 않나. 문 대통령 말씀은 “우리는 5천년을 함께 살고 70년을 헤어져 살았다”, 김대중 대통령 말씀은 “ 삼국통일 이후 1300년간 단일통일국가로 죽 유지해왔는데 60여년간 남의 힘에 의해 분단됐다”, 비정상을 정상화해야 한다는 거다. 우리는 같은 민족으로 같이 살아야 한다. 이게 당위이고 기본인권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 지점을 강하게 세계 여론에 강조하고 호소하는 노력들이 필요하지 않나 싶다.

□ 좀더 구체적인 계획이 있나?

■ 종로5가 기독교 쪽에서 4월 27일 판문점선언 1주년 때 휴전선 155마일을 인간띠로 잇자는 걸 제안하겠다고 하더라. 굉장히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최근 인도에서 600만 여성이 나와서 인간띠를 했다고 들었다. 또 발틱 3국이 그걸 한 적이 있다. 89년 발틱 3국을 관통하는 620㎞를 인간사슬로 이어서 소련으로부터 독립을 요구해 성공했다.

세계 여론에 우리가 호소하는 일이 필요하다. 인간띠잇기는 기본인권에 대한 접근이고, 사회과학적 접근도 필요하다. 남북관계가 개선되면 중국의 입지가 강화될 것이라는 것이 미국의 가장 견제 요소일 것이다. 그러나 남북이 교류협력을 시작해서 경제공동체를 이루어 간다면 도리어 중국을 견제하려고 하지 그렇게 미국을 배척하고 중국에 가까워질 리가 없다.

베트남 전쟁 때 미국이 그것을 걱정했고, 그래서 베트남 전쟁 끝났을 때 물론 라오스, 캄보디아가 공산화 됐지만 베트남은 중국과의 오랜 갈등요인이 있던 역사를 갖고 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밀착하지 않지 않나. 우리도 그렇다. 우리 역사에 중국하고 좋은 일이 뭐가 있었나. 그러니까 사회과학적으로도 그렇게 볼 필요가 없지 않느냐. 미국에게 그런 점을 우리가 많이 강조했으면 좋겠다.

또 하나는 문화예술을 하다보니까 우리 한류가 이렇게 폭발할 것이라고는 사실 우리 종사자들도 생각을 못했다. 99년에 ‘스크린쿼터 사수투쟁’ 할 때도 이런 일이 올 거라고 생각 못했다. 그런데 이렇게 되더라. 한국 영화사를 보면 폭발하는 결정적인 전환이 87년 6월항쟁이다. 6월항쟁 이전까지는 정부가 시나리오를 검열했다. 그러다가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면서 한국영화가 발전했고 그러면서 한류가 터지는 거다.

동북아를 기본으로 해서 지금은 한류가 남미, 아프리카까지 가는데 이 힘이 우리도 예상을 못한 거지만 우리에게 이런 힘이 있더라. 거기에는 촛불로 정권을 바꾸는 국민의 힘이 있는 거다. 이해찬 총리 말씀처럼 아시아쪽 정치에서 개혁세력이 살아있는 나라는 우리나라 밖에는 없다는 거다.

그 분은 정치인으로서 분석하는 거고, 저는 문화 쪽으로 보자면, 중국은 공산당 일당지배를 전제로 한 자본주의화를 시도하고 있는 거여서 그 체제를 바꿀 생각이 없다. 그들은 단계적으로 선출해서 올라가서 집단지도체제를 만드는, 자체 내 민주주의가 있다고 주장한다. ‘미국의 대의제도보다 우리 제도가 더 낫다’고 생각한다. 미국이나 유럽이나 일본이나 포퓰리스트가 국가지도자가 되는 일이 비일비재한데 중국은 그렇지 않다는 거다.

인정 여부를 떠나서 본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거고, 공산당이 국가를 만든 거라서 그대로 가는 거다. 그러면 표현의 자유가 보장될 수가 없다. 그러니까 중국은 체제상 안 되고, 일본은 60년대에 이미 사회변혁을 국민이 포기했다. 그래서 이를테면 ‘오타쿠’라고 탐미적인 문화는 있어도 에너지가 넘치는 인류보편적이면서 굉장히 개성이 강한 그런 문화는 없다. 국적을 갖고 있으면서 보편성을 가져야 한류처럼 외국에 퍼져나가는 건데, 그런 면에서 경쟁력은 우리가 압도적이다.

그렇게 보자면, 남북관계가 개선되고 한국이 중요한 기능을 하는 것이 도리어 미국의 입장에서 중국의 변화를 추동하는데 훨씬 효과적일 것이다. 지금 저렇게 무역전쟁을 해서 힘으로 굴복시키려 하는데, 그게 가능하겠나. 그런 면에서 한국의 효용성을 미국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지난번에 문 대통령이 유럽 가셨을 때 반응이 아주 냉담하지 않나. 미국은 대통령이 자꾸 이야기하고 해서 어느 정도 입력이 됐는데, 그냥 닫혀있다. 그리고 너무 먼 나라 이야기니까 자세히 공부도 안했고, 관심도 없다.

“해답은 문화에 있다”

   
▲ 1989년 문익환 목사는 정부의 승인을 받지 않고 방북해 김일성 주석과 만났다. [사진출처 - 통일맞이]

□ 올해 문익환 목사 방북 30주년을 맞이해서 통일맞이나 문화계에서 어떤 구상을 갖고 있나?

■ 먼저, 통일맞이를 이야기하자면, 작년이 문목 탄생 100년이었다. 생신인 6월 1일에 돌아가실 때까지 살았던 수유리집을 사립박물관으로 해서 ‘통일의집’을 개관했다. 그리고 6월 2일 ‘잠꼬대 아닌 잠꼬대’ 시구에서 따서 ‘평양가는 기차표를 다오’ 행사를 서울역에서 가졌다. 노래패 우리나라가 문 목사 헌정공연을 만들어서 몇 군데 순회공연을 했다. 심포지엄도 했다.

북쪽에서 축사를 보내오고 했는데, 작년은 어떻게 보자면 남북관계가 재개되는 첫해였기 때문에 일단 당국자 간의 합의를 처리하는 데도 북쪽이 정신이 없어 민간 차원의 일들이 많이 진척되지 않았다. 이제 정상 간의 합의가 진행되는 부분이 맥락이 잡혔기 때문에 북쪽도 조금 여력이 생기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통일맞이 일도 문화계 전반에 대한 일도 조금더 진전이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

지난 10.4선언 행사 때 (평양에)가서 이해찬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통일맞이 이사장도 겸하고 있기 때문에 김영남 상임위원장을 만났을 때 그런 이야기를 한 거다. “내년이 문목 방북 30년이다. 기념행사도 갖고 가극 금강을 준비하고 있으니까 평양 공연을 하면 어떻겠느냐?” 김영남 상임위원장이 그 자리에서 흔쾌하게 “당연히 그렇게 해야죠” 그렇게 합의를 했다.

실무적으로도 내가 논의를 했다. 그래서 기념행사와 공연을 갖는다. 4월 2일 즈음해서 하기로 합의가 된 거다. 앞으로 실무적인 논의가 더 필요하다.

□ 금강 평양 공연의 취지에 대해 더 설명해달라.

■ 그 공연은 어떻게 보면 통일맞이를 태동시킨 공연이기도 하다. 문목이 89년에 새통체(새로운 통일 운동체) 통일맞이를 제안했지 않나. 늘 강조하셨던 것이 “너무 오랫동안 따로 살았는데 마음을 합쳐 가는데 가장 효과적인 게 문화예술이다” 그렇게 생각하셨다.

그 말은 독일통일 이후에 확인된다. 독일이 느닷없이 통일되는 바람에 동독 주민들이 일종의 2류 국민이 됐고 간극이 해소가 안 된다. 5,6년 지나고 나서 독일 지성계 전체가 “해답은 문화에 있다” 이렇게 컨센서스가 이뤄졌다고 한다.

이를테면 ‘트라기 고’라는 영화가 있었는데 코미디 영화다. 트라기는 독일의 국민차다. 굉장히 사기가 어렵다고 한다. 아무튼 그걸 사가지고 있는 동독사람이 통일된 후에 그 차를 타고 유럽 전역을 여행하는 로드무비다. 그런데 그 영화를 보면서 서독사람들이 동독사람들의 심리와 사고구조와 정서상태 이런 것을 굉장히 이해를 많이 했다는 거다.

통일 이후에 보도된 것들을 보면 동독사람들이 회사에 이력서 내고 인터뷰를 할 때 그렇게 화를 냈다는 거다. “내가 상품이냐. 나를 뭘로 보고 이러냐” 펄펄 뛰었다고 한다. 워낙 기본이 다른 데서 오는 오해나 이런 게 많은 거다. 실제로 문화예술 특히 영화, 드라마가 큰 기여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일단은 그런 것을 문목이 생각하고 만들었고, 그것을 백프로 이해하고 있던 문호근이 ‘그러면 남북관계 개선되고 이럴 때 우리가 공유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어야 되겠다’ 그래서 만든 게 금강이다. 그래서 본인은 못하고 세상을 떠났고, 2004년 참여정부 때 한 번 공연했었다.

이번 공연에서는 ‘군중 씬’(mob scene) 같은 것, 아예 한 부분을 북쪽 공연단체가 맡아서 한다든지 남쪽에서 무대 설계 상세도면을 보내면 그쪽에서 제작을 한다든지 그래서 좀더 공동창작의 느낌을 가질 수 있게 하면 더 근사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 금강 공연을 위해 배우를 모집 중인 것으로 안다. 배우를 뽑아서 공연을 준비하고, 평양에서 공연하고 순회공연하려면 시일도 촉박한 것 같다. 잘 추진되고 있는 건가?

■ 지난해 10월에 합의해서 올해 초에 공연하는 것은 굉장히 촉박한 거다. 특히 우리나라 뮤지컬이 워낙 산업화 돼 있어서 쉽지 않은 일인데, ‘남북교류에 나도 뭔가 하고 싶다’는 의사를 가진 분들이 많아서 연출과 스탭진은 빠른 시일 내에 아주 탄탄하게 잘 구성됐다. 그래서 오디션 공고가 나갔고, 6,7백명이 응모를 했다고 한다. 1월 중순에 오디션을 하고 1월 말부터 연습해서 4.2 즈음에 공연 가는 걸로 예정돼 있다.

그리고 남쪽 순회공연도 여러 도시들에서 관심을 보여서 확정해 가고 있는 단계에 있다. 성남시가 2016년에 금강을 공연했다. 그때는 남북관계가 풀릴 거라는 전망을 못하고 있을 때인데도 준비하는 단계로 성남시가 했다. 그래서 성남시와 서울, 경기도 등은 확정돼 있는 상태고 몇몇 지자체는 협의를 진행 중이다. 아껴써야 되지만 제작비도 공연하는데 지장 없을 수준으로 모였다.

이게 진전이 되면 통일맞이 주최로 북쪽 가극을 초청해서 남쪽 순회공연을 구성을 했으면 좋겠다. 북쪽도 남쪽과의 교류를 위해서 춘향전 같은 걸 만들어둔 게 있다. 문목 입장으로 보면, ‘피바다’나 ‘꽃파는 처녀’를 초청했으면 좋겠다. 그래야 북쪽 인민들이 이런 가극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거다.

□ 통일맞이의 다른 사업 계획이 있다면 소개해달라.

■ 문목이 김일성 주석과 합의한 사항 중에서 단일팀 같은 것은 다 진행되고 있는데, 딱 하나 공동응원가를 아직 못 만들었다. 겨레말큰사전은 2005년인가 참여정부 때 시작됐다. 그런데 공동응원가를 만들자 했는데 참 복잡하다. 작사, 작곡 문제가 있고 정서의 문제가 있고, 굉장히 어려운 문제다. 어쨌거나 방북 30년이니까 올해에는 숙제를 마저 했으면 좋겠다.

사실 남쪽에서는 이미 몇 사람이 만들었다. 그런데 좀더 규모를 키워서 공모도 하고 해서 여러 곡을 만들어 다 들어보고 투표를 받고 몇 개를 고르면 될 거 아니냐. 남쪽은 남쪽대로 북쪽은 북쪽대로 서로 왔다갔다 하면서. 이번 달도 남자 핸드볼 단일팀이 독일에서 경기를 하던데, 또 아예 올림픽도 같이 하자고 하는데, 올해 꼭 좀 성공시켜야 되겠다 다짐을 하고 있다.

그 다음에 4월 2일 즈음에 통일의 집에서 방북 30년 특별전 같은 것을 구상하고 있다. 북쪽에 일단 문목이 다니면서 방명록에 써놓은 글들을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통해서 요청했다. 다큐멘터리나 사진은 많이 나왔기 때문에 방명록 영인본을 만들고 싶다. 북에서 사진을 찍어서 우리한테 주면 우리가 4월 2일 쯤에 개관 파티를 할 예정이다.

□ 문 목사 25주기 기념행사는 확정돼 있나?

■ 올해 25주기 묘소참배는 1월 19일 오전 11시 마석 모란공원에서 진행한다. 하루 전인 18일 오후 6시 30분 서울시청 시민청 바스락홀에서 다큐멘터리 상영회를 한다. 다큐는 95년에 만들어진 거다.

□ 2004년 문 목사님 10주기 때 북에서 대표단이 내려와 서울에서 공동행사를 가졌던 기억이 난다. 올해는 방북 30주년이고 4.2공동성명 기념일 즈음에 금강 공연단과 함께 방북을 추진하고 있는데, 사견이지만 혹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만나게 된다면 굉장히 역사적인 장면이 될 것 같다.

김일성 주석과 문익환 목사의 포옹에 이어 후대들인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문성근 부이사장의 포옹도 가능한 것 아닌가. 대를 이어 통일에 관한 협의를 하면서 파트너인 민화협이나 조평통과 민간교류 합의서 같은 것을 작성한다면 역사적인 새로운 매듭이 지어지는 것 아닌가. 꼭 정치인이나 통일운동가가 아니더라도 오히려 우리 사회에서 부담없이 받아들여질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 좋은 생각인데, 내가 남쪽에서 살아온 삶이 뭔가를 대표할 수준이 못되기 때문에 말씀드리기는 그렇다. 그 행사 때 김 위원장께서 대표단을 접견해주면 그건 아주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주제넘어서 사실 생각을 안 해봤는데, 연구해 보겠다.

지연관현악단 여가수들, “발성이 달라졌다”

   
▲ 늦봄 문익환 목사 10주기를 맞아 북측 대표단이 참석한 가운데 마석 모란공원에서 추모행사가 열렸다. 봄길 박용길 장로와 문성근도 눈에 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 영화계에서도 남북교류와 관련된 직책을 맡은 것으로 아는데, 올해 계획은?

■ 제가 영화진흥위원회 산하에 남북영화교류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았고, 평창 남북평화영화제 조직위원장도 맡게 됐다. 또 최근에 6.15남측위에서 문예본부 활성화 안이 나왔다. 사실 6.15문예본부가 있기는 있었는데 작가회의 쪽만 다녔고 문예본부가 별로 뭘 안했다. 그런데 이번에 심양에서 6.15남측위와 6.15북측위가 회의를 하면서 문예부문의 논의구조를 좀 만들자는 얘기가 나왔다고 한다.

그러면서 영화부분도 좀 참여를 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까지 있었고, 새롭게 꾸리기 시작하는 거다. 나보고 준비위원장을 하라고 해서 일단 주섬주섬 이미 활동하던 데들 다시 모이고, 만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금강산 신년모임을 30,31일 하는데 그때 문예본부도 동참해서 부문별 모임을 갖고 기본적인 논의를 할 참이다. 문예본부 안에 장르별 대표들도 참여할 예정이다.

그동안은 문단 중심으로 남북교류가 이루어졌다. 그런데 김정은 위원장께서 문화예술 전반에 대해서 강하게 변화를 촉구했다고 한다. 실제로 현송월 단장이 이끄는 삼지연관현악단이 와서 많이 달라진 모습으로 충격을 줬다. 그런데 의상이 달라지고, 남쪽 가요를 넣어 선곡이 달라졌다고 주로 이야기하는데, 더 근본적인 변화는 발성이 달라진 거다.

서울공연 때 현송월 단장은 맨 마지막에 나왔고, 현 단장은 과거 발성이다. 그 전에 8명의 여가수가 번갈아 나왔고 곡마다 발성이 조금 다른 게 있지만, 사회주의는 가사 전달에 방점을 찍기 때문에 발성을 입 앞으로 내민다. 그래서 쨍쨍한 소리를 내고 그래야 멀리 전달이 된다. 그런데 그걸 ‘이선희 발성’ 정도로 뒤로 끌고 간 거다. 그러니까 가사 전달이 그 앞보다 훨씬 약화된다. 그런데 듣기가 편해진다. 북이 발성을 바꾼 것은 정말 놀라운, 굉장히 큰 변화다.

이를테면 영화 같은 경우가 당대회에서 “영화가 시대의 변화를 못 따라간다” 질타를 받았다고 한다. 올해 신년사에도 “시대와 현실을 반영하고 대중의 마음을 틀어잡는 영화와 노래를 비롯한 문예작품들을 훌륭히 창작”해야 된다고 했다. 대중의 마음을 잡는다는 게 중요한 이야기다.

전해듣기로는 당의 고위 정책담당자도 “남북합작영화에 관심이 있다. 평양의 세트장을 많이 써줬으면 좋겠다. 평화가 진전돼 안착이 되면 DMZ 안에 평화공원을 만들고 거기에 대규모 촬영장도 만들 수 있지 않겠는가” 이런 정도의 언급까지 했다고 들었다. 그러니까 굉장히 전향적인 거다.

과거 민주정부 10년 때보다 훨씬 더 많이 나가 있어서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생각든다. 그러나 문화예술은 여전히 이데올로기적 접근을 걱정하는 분들이 있기 때문에 맨 먼저는 사람이 덜 만나고 컨텐츠를 교환하는 방법이 있고, 두 번째는 학술교류 같은 게 가능하다. 사람이 덜 만나고 할 수 있는 건 많다. 촬영 장소만 제공하는 것도 가능하고, 최종단계가 남쪽 배우, 북쪽 배우가 같이 하는 거다. 그것까지는 당장은 생각 안한다.

평화체제가 안착이 되면 대규모 촬영장을 만드는 것도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우리는 사극을 하나 찍으려면 부안, 문경, 속초 다 다녀야한다. 아주 힘들어서 죽을 지경이다. 중국 경우에는 당.명,청 궁전을 그대로 200만평, 300만평 세트장을 세운다. 그게 낭비가 아니고 관광지가 돼서 돌아간다.

우리 경우에 워낙 국경이 가까워서 개성이 60킬로다. 서울역에서 인천공항도 60킬로다. 개성공단은 계획된 천만평에서 백만평만 쓴 거다. 거기 산도 있고 강도 있고 좋은데, 거기도 상관 없고, 아예 휴전선과 개성공단 사이에다 대규모 촬영장 겸 관광위락시설 등을 만들어놓아도 좋을 것이다.

북쪽이 관광업에 대한 노하우를 얻는 것도 있고, 우리의 경우는 굉장히 효율적으로 작업할 수 있다. 자동차로 30분이면 간다. 거기 가서 촬영부터 마지막 후반작업까지 다 끝내버린다. 그러면서 서로 기술교류도 하고. 남쪽 경우에는 CG나 이런 것은 할리우드 것 받아서 할 정도로 발전이 돼 있다.

또 하나, 남쪽 영화인데 유실된 필름이 북쪽에 있다. 이게 왜 그러냐면, 우리가 영상자료 보관의 필요성을 잘 인식 안 해서 74년에 영상자료원을 만들었다. 그러니까 50년대, 60년대 필름이 망실된 게 많다. 그런데 그 망실된 작품 중에 상당량이 북쪽 국가영화문헌고에 있는 거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워낙 영화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영상자료를 거기는 처음부터 모았다. 거기에 ‘남조선 영화’ 섹션이 있는 거다.

그 안에 나운규 감독의 ‘아리랑 3’ 필름이 있다는 설이 있고, 이만희 감독의 대표작 ‘만추’는 분명히 있다고 한다. “이건 민족자산이니까 우리 공유 좀 하자”, 북쪽에서 돈 한푼 안 들고 그냥 디지털 복사해서 넘겨주면 우리가 상영회를 한다. 북에서 우리가 퍼받는 게 된다.

김정일 국방위원장 관심사안이기 때문에 민주정부 10년 동안에 우리가 말을 하면 들은 척을 안했다. 이번에는 이야기하니까 듣고 관심있어 했다. 우선 필름을 공유하고 이를테면, 부산영화제와 평양영화제가 자매결연을 맺어서 상호 돕자는 거다. 평창영화제에 북쪽 영화를 출품하고 개막식은 평창에서 하고 폐막식은 금강산에서 한다든지, 원산 갈마지구가 완공되면 평창과 갈마지구에 페리가 뜨면 공동개최를 할 수도 있다.

지금 당장은 베를린 영화제에 ‘원 코리아’ 섹션을 만들자. 베를린 영화제 측도 동의했다. 금년 2월에는 너무 촉박해서, 영화를 출품할 수는 없고 심포지엄은 할 수 있다고 해서 진행하고 있다. 독일은 분단국이었기 때문에 거기 가서 유럽 문화계에 “우리 이야기 좀 하자. 우리는 같은 민족이고 같이 살아야 하는데 너네 너무 째려보지 말고 우리 좀 도와주라” 이런 거를 베를린 영화제에서 하는 거다.

그런 식으로 우선 영화제부터 교류하면 된다. 영화제는 작품만 오가고 한두 사람만 오가면 된다. 심사위원하고 발제자 정도. 북쪽도 부담이 없을 거다. 그게 좀 진행이 되고 나면 평양 세트장 활용과 로케이션 촬영도 가능할 것이다.

내가 개인적으로 강하게 북쪽에 제안하고 싶은 게 뭐냐면, 남쪽의 세계적인 영화감독이 촬영감독하고 녹음감독 딱 두 사람만 데리고 평양에 가서 북쪽 영화사가 만드는 영화에 대본 작성 때부터 같이 참여해서 만드는 것이다. 남쪽 감독이 구성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이데올로기는 전혀 건드리지 않는다. 시나리오 작업부터 작품을 완성할 때까지 남쪽 감독과 같이 해보면 단숨에 세계 영화계의 흐름을 알 수 있다.

그게 불편하면, 남쪽의 세계적인 감독이 자기가 쓴 대본을 가지고 가서 북쪽 배우들하고 북쪽 스탭들하고 작업하는 거다. 물론 촬영과 녹음은 데리고 가야 한다. 촬영과 녹음은 완전히 상황이 너무 다르다. 나머지는 다 북쪽 인력을 가지고 영화를 한번 해보는 거다. 사람이 계속 만나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시간은 걸릴 것 같지만 그런 구상들을 하고 있다.

□ 평창 남북평화영화제는 올해 시작되나? 왜 8월인가?

■ 올해 8월에 제1회 영화제를 하는 거다. 다른 영화제들 일정을 고려하고 계절도 보고 8월로 잡은 거다. 남북이 궁극적으로 같이 가는 영화제는 시도된 적도 없다. 그런데 이번 평창 겨울올림픽을 기점으로 해서 남북관계가 확 급진전된 됐다. 그 감격을 기념하고 유지 발전시키자는 거다.

그 다음에 강원도 입장에서는 강원도는 분구지역이다. 분단에 의해서 쪼개진 도고, 워낙 분단의 피해를 많이 본 지역이어서 도민들이 그 점을 굉장히 절절하게 많이 느끼기 시작한 거다. 금강산 막혀서 피해를 봤고, 평창에 북이 참가함으로 해서 덕을 봤고, 이런 걸 보면서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지 도민들도 잘 알고 계신다. 그래서 도민의 협조가 있을 수밖에 없는 영화제가 된다.

우리 영화 쪽에서는 남북평화를 주제로 한 영화제가 없는데 일종의 교두보가 돼서 북쪽 영화와의 교류협력을 만들어가는 아주 중요한 영화제가 되지 않겠는가. 궁극적으로 원산에 굉장히 큰 일종의 관광해변이 만들어진다. 그렇게 될 때 우리가 영화제를 같이 가지고 가서 거기서 공동으로 하면 그쪽도 그냥 앉아서 홍보가 될 수 있는 측면도 있고 그러니까 장기적으로 좋을 것이다.

“공익근무는 충분히 성공했다”

   
▲ 시민정치운동에 '공익근무'를 마쳤다는 문성근 부이사장은 이미 남북 문화통합의 '공익근무'를 시작하고 있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지난해 개관한 통일의 집은 잘 운영되고 있나?

■ 늘 돈이 문제다. 개보수할 때 많은 분들이 후원을 해주셔서 큰 도움이 됐고, 아무래도 좀 부족하다. 후원회원들 모집도 꾸준히 하고 있고, 가족들이 부담하는 부분도 있다. 한 달에 그래도 천여명 정도씩 온다. 학생들이 공부 차원으로 오기도 하고, 관객들이 있어서 뿌듯하게 생각한다.

□ 수유리 인근에 여운형 선생 묘도 있고 지역을 잘 연결하면 좋을 텐데.

■ 강북구가 그 생각을 한다. 4.19묘역도 있고 그렇기 때문에 ‘민주통일 순례길’을 강북구가 구상하고 있고 서울시도 구상하고 있다. 그래서 조금 지나면 큰 그림이 만들어질 것 같다. 통일맞이가 주도할 수 있는 사업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말씀드리기는 어렵다.

□ 기념사업회 성격의 단체는 일반적으로 단체와 유족이 갈등이 있더라. 통일맞이는 가족과 단체가 일원화 돼 있나?

■ 그거는 좀 미묘한 측면이 있는데, 원래는 문호근이가 열심히 했고 문호근이 가고 제가 관계하게 됐다. 기념사업회와 가족과의 갈등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이를테면 안창호 선생은 흥사단을 만들어 놓고 가셨고, 문목은 통일맞이를 두고 가셨는데, 대중의 뿌리깊은 조직체를 만들어놓고 가신 것은 아니다.

그래서 ‘문익환 목사 기념사업이라는 것은 민주화와 통일운동 했던 사람들의 공동사업이어야 한다. 이건 가족사업일 수 없다’는 생각이 저는 강하다. 통일의 집은 일단 재산이 있기 때문에 사단법인이나 교회나 이런 것은 유한하고 가족은 대대로 무한하기 때문에 그 건물을 가족소유로 두는 게 맞다. 그래서 가족이 깊이 관계되는 통일의집을 만든 건데, 통일맞이의 경우에는 조직체의 존속과 운영은 민주와 통일운동 진영의 일종의 책무다. 민주와 통일운동을 했던 분들이 유지해야 되는 일이다. 저는 그렇게 생각한다.

□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는데, 이후 정치적 행보를 할 계획은 없나?

■ 전혀 없다. 연기가 내 본업이니까. 그동안 일종의 시민정치운동을 하다보니까 본업을 거의 도외시하고 그쪽에 매달리게 된 세월이 한 16년이 됐더라. 2001년부터니까, 공익근무는 이 정도 했으면 할 만큼 한 것 아니냐. 에너지도 떨어질 때 됐고 그러니까 본업에 충실할 생각이다.

그런데 남북관계가 다시 두 번째 기회를 맞으니까 문화예술계 전반에 계신 분들이 나한테 뭔가 해주기를 기대하는 게 있고, 나는 문목 때부터 문화예술이 동질성 회복에 가장 좋은 접근이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던 터라 그 요구를 외면할 수 없는 거다. 그래서 이 일은 그냥 문목의 유업으로 알고 한다.

그런데 사실은 민주정부 10년 때도 나한테 그런 주문을 해서 그런 일들을 그때도 조금 했었는데, 솔직히 북에서 응답이 없어서 아무런 실적을 낸 적이 없다. 이번에는 북쪽이 조금 변화한 모습이 감지돼서 좀 기대를 하는데, 여전히 체면을 구길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한다. 뭔가를 성사시켜 주기를 기대하는 그 크기에 비해서 성사되는 일이나 이런 것들이 충분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그냥 또 망신을 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건 그냥 해야 되는 일이니까 해볼 참인 거다.

□ 민주정부의 재집권을 바랄 텐데, 예전에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에 앞장섰던 것처럼 앞으로 그런 일에 또 나서야 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는 것 아닌가?

■ 굳이 그렇게까지 할 것 같지는 않다. 나는 민주진보진영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3가지 조건을 본다. 첫 번째는 소득주도 성장이 효과를 좀 내야 된다. 두 번째는 남북관계 개선이 남쪽 경제에 긍정적인 효과를 준다는 것을 국민들이 체감해야 된다. 합치면, 경제가 나아져야 하는데 그 최고의 수단은 남북관계 개선이고 그 다음은 소득주도 성장일 것이다.

세 번째는 민주진보진영의 정당들이 시민참여형 정당으로 바뀌어서 지지자와 정당 간의 일체감이 커져야 된다는 거다. 그래야 이 정권이 연장돼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끼는 활동가들이 늘어난다. 그게 내가 이야기했던 ‘시민참여형 네트워크형 정당’이라는 거다. 다른 표현으로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이 결합된 정당이다. 그것을 위해서 2010년부터 국민의명령 운동을 했던 거다.

그 제안이 문재인 대통령의 2012년, 2017년 대선공약이 됐고, 민주당내 전당대회가 열리면 당대표 선출 때마다 후보들이 그 공약을 했다. 지금 이해찬 대표가 박주민 최고위원에게 그걸 맡겨서 해나가고 있다. 내가 주장했던 것들이 정치권의 공식의제로 채택이 됐고 불가역이다.

그런데 지금 ‘연애인 팬덤(fandom)’ 현상이 정치권으로 옮겨오면서 굉장히 복잡한 양태를 보이고 있다. 정치권이 이 사람들의 심리나 행태를 잘 모른다. 연애인 사생팬클럽의 행태가 이해가 안 되는 거다. 그러니까 시민참여의 형태에 부정적인 효과가 두드러지고 있다. 그래서 속도를 늦출 위험성은 있다. 그러나 그 방향으로 가는 것은 대세다. 어떤 의미에서는 내 의제는 다 채택이 됐다.

나는 직업정치인이나 직업행정가가 될 욕망이 아예 없는 사람이어서 언제까지나 발런티어, 시민자원봉사자 행태를 보였다. 물론 출마도 했고 최고위원도 했지만 그것은 운동의 흐름에서 거기까지 가버린 거다. 일단 내 바람이 채택이 된 걸로 내 임무, 공익근무는 충분히 성공했다는 생각이 든다.

□ 문재인 정부도 촛불정신에 비하면 고전하고 있는 것 아닌가?

■ 지금은 경제 불평등 해소, 남북 경제공동체 건설, 그 첫 단계인 거고 통일단계까지는 수십년이 걸릴지 모르는 일이다. 남북 교류협력의 안착과 경제불평등 해소,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문재인 대통령이 그 부분을 집중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그가 하는 부분에 대해서 대중들이 너무 표피적으로 반응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특히나 지금은 정권이 2년차 들어가다 보니까 일종의 피로도가 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우리가 갖는 정치의 수준은 국민의 수준’인 것이지 않나. 우리 국민이 조금 참을성을 갖고 지켜보자. 이게 쉽사리 해결되지 않는다.

한국은 97년 IMF 전후에 완전히 다른 나라가 돼버린 거다. 97년 이후의 대한민국에서 최악의, 신자유주의에 포획된 구조 속에서 어떻게 개선을 해나갈 것이냐. 97년 이전이라면 훨씬 쉬웠을 건데, 훨씬 더 어려워진 환경 속에서 우리가 좀 나아지려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 그걸 느끼고 응원해주는 수밖에 없는 거다.

□ 남북이 경제공동체에 더해 문화공동체, 민족적 정체성을 구축하는데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할 것 같다. 특히 민주진보진영도 민족문제, 민족정체성에 소홀한 편인 것 같다. 개천절 공동행사의 경우 민주진보진영이 관심을 안 갖는 것 같다.

■ 자칫 ‘국뽕’ 같이 느낀다. 극우 같은 느낌이 드니까. 나는 정치운동하면서 제일 많이 느꼈던 게 뭐냐면, 이론은 현실에서 뽑아야 하는데 우리 지식인들은 외국에서 받아온 이론을 여기에 적용을 시키려 한다. 안 맞는 거다. 우리의 역사적인 배경과 국민적 특성이 있는데, 여기 맞춰야 되는데 그걸 못한다.

이를테면 ‘그래스루츠’(Grassroots, 풀뿌리 민중)라고 해서 인터넷과 SNS 이후에 여러 정치형태가 전 세계적으로 바뀌고 있다. 사실은 그걸 그동안 우리가 선도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걸 인식을 안 하고 자꾸 외국은 이렇다는 걸 소개한다. ‘포데모스’(Podemos, 스페인 좌파정당)가 어떻고...

외국에서 공부하고 온 이들이 문제다. 이를테면 국민의명령이 제안했던 제안서의 경우, 서구나 미국에서 변화하고 있는 정책들을 그대로 우리가 미리 얘기를 하고 있는데도 아무도 그렇게 해석해주지 않는다.

어쨌든 일단은 경제통합의 실이익을 국민이 느끼게 해야 한다. 두 개 국가체제를 인정하자는게 아니라, 당장은 관심이 경제에 집중돼있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민족통일까지 가려면, 문화통합을 준비해 나가야 한다. 문목이 통일맞이를 만든 이유가 거기 있을 것이다. 다른 체제로 70년 넘게 살아와 이질화된 걸 극복하는 데에는 문화예술이 가장 효과적이다. 영화가 대표적이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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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왜 공무원 임용 10개월 만에 죽음을 택했을까

등록 :2019-01-13 09:10수정 :2019-01-13 10:43

 

 

[토요판] 김수정의 여성을 위한 변론/ ⑤ 직장 내 성희롱·성차별

공무원 임용 10개월 만에 생 마감
장례 뒤 확인한 친구와 카톡 대화
성희롱·성차별 시달린 사실 보여줘
“이쁜이” “커피 타 와라” “쉬었다 가자”

우울증 발병과 자살로 이어졌지만
공무원공단 공무상 재해 인정 안 해
“직장생활 부적응” “무능력했다” 등
가해자 황당한 진정서 증거로 제출

성차별·성희롱이 근무환경 악화 
여성들 견디기 어렵게 만들어

 

 

일러스트 조재석
일러스트 조재석
지난해 말 나는 국방부에서 주최한 대체복무제 마련을 위한 공청회에 토론자로 참석했다. 토론자 네명 가운데 유일한 여성으로 특히 더 긴장한 채로 토론을 진행했다. 군대도 가지 않는 여성이 군대 문제를 논할 자격이 있느냐는 자극적이고 일차원적인 공격이 언제 어디서 날아들지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다. 두시간여 토론의 말미, 한 참석자가 많이 참았다는 듯 나에게 말했다. “여자는 군대 갔다 오기 전에는 발언을 하지 말라.” 귀를 의심하던 중 옆자리 다른 토론자가 먼저 “차별적인 발언”이라며 항의를 했고, 나도 순간 화를 참지 못하고 “출산을 못하는 남자들은 출산정책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것과 똑같다. 발언하시는 분은 남자인데 출산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느냐”며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생각해보면 여성으로서 나는 늘 긴장된 삶을 살아왔다. 학생일 때도, 어른이 되어 변호사라는 직업을 갖게 된 뒤에도, 언제 어디서 내가 여성이라는 것이 문제가 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성희롱·성폭력에서, ‘여자는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는 지적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여자라는 이유로 나의 능력이 저평가될까 봐 긴장하고 또 긴장하며 살아왔다. 쉰살이 다 된 지금도 나는 여성이라서 군대를 갔다 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발언권을 제지당하는 삶을 여전히 살고 있다. 이렇게 상시적인 긴장 속에서 고단하게 살고 있는 여성이 어디 나뿐인가. 지난해 초 서지현 검사가 검찰 내 성폭력 피해 사실을 폭로한 뒤, 연극계 문화계 등 각계각층에서 이어진 여성들의 성희롱·성폭력 피해 사실 폭로와 이에 연대하는 #미투운동을 보면서 나는 그녀들에 대한 격려의 박수를 치기보다 속으로 눈물을 흘려야 했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여전히 여성의 삶은 고단하다는 사실과 오직 위안이 되는 것은 ‘나도 당했다’고 외치는 슬픈 연대라는 사실 때문에….

 

 

친구 한명에게만 남겼던 ‘비밀’

 

죽은 뒤에 나를 찾아온 그녀는 20대 후반의 갓 결혼한 공무원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나를 찾아온 것은 그녀의 남편이었다. 그녀는 수년간 공무원이 되려 공부한 끝에 4전5기 만에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그런데 어렵게 공부해 공무원이 된 그녀가, 임용된 지 불과 10개월 만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것이다. 대체 그녀는 왜 죽어야 했단 말인가. 그렇게 원했던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고, 그녀를 헌신적으로 뒷바라지한 사랑하는 남편과 행복한 삶만 꿈꾸면 됐는데 말이다.

 

그녀의 장례를 치르고 난 뒤, 그는 그녀의 휴대폰에서 친한 친구와 주고받은 카카오톡 대화 내용을 확인하고서야 그녀가 왜 병이 들었고, 자살에 이르게 되었는지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그녀는 공무원으로 임용된 뒤 성희롱과 성차별에 시달려온 것이다. 그는 그녀의 카톡에서 실명이 확인되는 가해자들의 성희롱 행위에 대해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하였고, 인권위원회는 조사 결과 성희롱 사실을 확인했다. 이 일로 관계기관은 발칵 뒤집어져 성희롱 전수조사를 하고 성차별적 문화 개선, 엄벌 등의 성희롱 예방을 위한 제도 개선책을 마련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녀의 죽음이 공무상 재해가 아니라는 공무원연금공단(이하 공단)의 판단에 있었다. 공단은 그녀의 발병과 그로 인한 자살은 그녀의 기질로 인한 것일 뿐 직장 내 성희롱 등은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았다고 봤다. 그녀가 당한 언어적 성희롱 몇번이 그녀의 우울증을 발병시키거나 악화시키기에는 미흡한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녀는 입사 뒤 6개월간 시보(일종의 수습) 공무원이었다. 6개월간의 근무성적이 좋으면 정식 공무원으로 임용될 수 있었다. 그녀를 성희롱한 사람은 모두 그녀의 근무성적을 평가하는 상급자였다. 정식 임용을 앞둔 그녀는 그들의 부당한 지시나 성희롱에 문제제기하기 어려운 처지였다. 그녀의 근무공간은 매우 좁은 연구실 같은 곳이었는데, 그 좁은 공간에서 성희롱 가해자와 함께 근무해야 했고, 심지어 나중에 그녀가 성희롱 피해 사실을 외부에 알린 뒤에도 4개월 가까이 가해자와 분리되지 못하고 같은 공간에서 근무했다. 게다가 그녀는 가해자들을 포함해 직장 상사들에게 “이쁜이”라 불리며 수시로 커피를 타는 등 업무와 무관한 성차별적인 업무를 수행해야 했다.

 

가해자를 알 수 있었던 여러차례의 성희롱 외에도 “나는 딸을 안을 때 가슴이 닿는 느낌이 좋다”, 회식 뒤 “쉬었다 가자” “둘이 같이 가서 옷을 골라달라” 등 직장 상급자의 농담을 가장한 성희롱 발언이 그녀 또는 다른 여성 동료들에게 일상적으로 행해지고 있었음이 그녀가 남긴 기록에서 확인됐다. 그녀의 여성 상급자도 성희롱을 당하기는 마찬가지였는데 그녀들 또한 시보 공무원에 불과한 그녀와 다를 바 없이 아무런 문제제기도 하지 못했다. 정식 공무원이 되고 승진을 해도 성희롱이나 성차별적인 관행들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지 못하는 여성 상급자들을 보며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여전히 암울할 자신의 미래를 생각했을까.

 

농담 하나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회성 없는 예민한 여자로 찍히지 않기 위한, 상급자에게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한 그녀의 침묵은 그녀를 병들게 하였다. 견디다 못한 그녀는 책임자에게 가해자를 특정하지 않은 채 성희롱을 여러차례 당했으니 성희롱 방지 교육을 실시해달라고 요청했다. 단 자신이 이런 요청을 한 사실은 비밀로 해달라고 했다. 그러나 바로 이튿날 가해자 한명이 찾아와 그녀에게 사과를 했다. 그녀는 사과를 받았다는 기쁨보다 가해자가 즉시 알고 찾아왔다는 사실에 더 큰 두려움을 느꼈고 “이 일은 앞으로 직장생활에서 나에게 두고두고 족쇄가 될 것”이라는 내용의 카톡 메시지를 친구에게 남겼다.

 

소송 중 공단은 일부 성희롱 가해자가 직접 작성한 진정서를 증거로 제출했는데, 나는 그 내용을 보고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원래 직장생활 부적응 성격으로 업무를 정상적으로 수행하지 못할 정도였고 무능력했으며, 심지어는 그녀가 좋아하는 연예인의 열애 기사가 그녀의 죽음에 영향을 주었다는 내용이었다. 기관의 징계까지 받고도 저런 내용의 진정서를 쓴 가해자들의 태도보다도 더 어처구니없었던 것은 그 진정서를 증거랍시고 법정에 제출한 공단의 태도였다. 나는 공단의 태도를 지적하는 것은 물론, 반성은커녕 심각한 명예훼손적 내용의 진정서를 제출한 가해자들의 태도에 비추어볼 때, 그녀가 생전에 가해자들로 인하여 얼마나 고통받았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며 그녀의 자살이 공무상 재해로 인한 것임을 강조했다.

 

우울증으로 인한 그녀의 자살이 성희롱과 무관하다는 공단의 판단에는, 그녀가 우울증 진단과 치료를 위해 찾은 병원에서 한번도 의사에게 이런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도 이유가 됐다. 그녀가 정신과 의사에게 상담을 하면서도 성희롱 피해 사실 등을 이야기하지 않은 것은 그녀의 우울과 관련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녀는 상담 의사에게뿐만 아니라, 입사 동기들과 카톡으로 직장 내 고충에 대해 활발히 대화를 나눌 때에도 성희롱 피해 사실만은 밝히지 못하였고 남편에게조차 피해 사실을 털어놓지 못했다. 오직 친구 한명에게만 피해 사실을 토로했다.

 

이는 성폭력(성희롱도 넓은 의미의 성폭력에 해당한다) 피해자들에게서 많이 발견되는 모습이다. 많은 성폭력 피해자가 피해 원인을 자기 자신(자신의 행실)에게 돌림으로써 죄책감으로 우울감에 빠지거나 자해행위를 하기도 한다. 또한 수치심 때문에 피해 사실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여 넘기려고 하고, 치료를 받으러 가서도 피해를 당한 사실은 말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처럼 피해자들이 피해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주된 이유는 성희롱 피해 사실을 공개하더라도 피해가 회복되기 어렵고, 오히려 2·3차 가해는 당연한 부록이며, 결국에는 피해자 자신이 직장과 공동체에서 손가락질받고 쫓겨날 것을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공단은 그녀의 이런 전형적인 태도를 오히려 그녀의 죽음과 성희롱 피해 사실이 전혀 무관하다는 근거로 사용하고 그녀의 기질만을 문제 삼은 것이다.

 

 

끝까지 노력했지만

 

나는 그녀의 우울증이 원래 그녀의 우울 기질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하려 초·중·고등학교 생활기록부을 뒤지고 대학 친구들까지 찾아 그녀의 과거 생활을 추적했다. 쾌활하고 밝은 그녀였다. 수년의 긴 수험 기간을 견뎌낸 강인한 그녀였다. 그녀가 당한 언어적 성희롱만 떼어놓고 보면 ‘추행이나 강간도 아니고 언어적 성희롱 몇마디 들었다고 자살까지 하나’라고 반문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언어적 성희롱 자체로 인한 고통을 회피하고자 죽음을 택한 것이 아니다. 언어적 성희롱을 비롯한 성차별적 근무환경에 수시로 노출되면서 우울증이 발병했고 급격히 우울증이 악화됐으며, 결국에는 병이 깊어져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녀가 우울증에 걸리지 않았다면 성희롱과 성차별을 견뎌낼 수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참고 인내하면서, 때론 싸우면서 죽을힘을 다해 견뎌나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소송을 하면서 그녀의 죽음의 억울함에 대해 감정적으로 호소하지 않고 과학적으로 규명하려 노력했다. 자살의 원인을 밝혀내는 철저한 심리적 부검(자살자의 가족을 비롯한 지인을 심층적으로 인터뷰하고 고인의 유서나 일기 등 개인적 기록과 병원 진료 기록 등을 분석해 자살의 이유를 과학적으로 규명하는 작업)을 하여, 그녀의 우울증 발병과 악화의 원인이 수시로 발생하는 성차별과 성희롱을 견뎌야 했던 직장 내 환경에 있었다는 것을 밝히고 싶었다.

 

직장 내 성희롱이 경중을 불문하고 심각하게 고려돼야 하는 것은 성차별적 사고에서 비롯된 성희롱이 여성이 일하는 근무환경을 크게 악화시키기 때문이다. 성차별로 인한 근무환경의 악화는 결국 여성을 직장에서 견디기 어렵게 만들고, 여성을 사회에서 격리시키게 된다.

 

소송은 1심 패소, 2·3심 승소로 그녀가 사망한 지 수년이 지나서야 끝이 났다. 판결문을 받아 들고 판결문에 기록된 그녀의 행적을 되새겨보았다. 그녀는 끝까지 살기 위해 노력했다. 병원을 찾아가고 약을 복용하고, 아이를 낳을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도 마지막 순간 삶을 놓을 수밖에 없었던 그녀를 생각하니 눈물이 솟구쳤다.

 

가해자들은 자신들에게 잘못이 있다고 해도 피해자의 죽음과는 상관없는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들의 생각처럼 그녀의 죽음 자체는 이례적인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수많은 여성이 직장 내 성차별과 성희롱, 성폭력으로 때론 죽고 싶을 만큼의 고통을 받고, 실제 죽기도 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서지현 검사의 폭로 이후 많은 여성이 직장 내 성폭력 등 피해 사실 드러내기에 동참했다. 이는 여성들의 사사로운 투정이나 남성에 대한 모함이 아니라 직장과 사회에서 동등한 동료로,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한 자구책이다. 그나마 여성들이 말하고 외치고 드러내는 것은 지금보다 나아질 희망이 있다는 징표이다. 희망이 좌절되는 순간 그녀의 이례적인 죽음은 일상이 되어, 집단으로 절벽을 뛰어내려 자살하는 레밍처럼 모두가 손을 잡고 절벽 아래로 뛰어내릴지도 모른다. 새해 벽두 희망의 좌절보다 희망의 실현을 믿고 싶다. 혐오와 차별의 언어보다 공감의 언어가 훨씬 더 힘이 세다는 것을 믿고 싶다.

 

 

▶ 김수정: 법무법인 지향 변호사. 한국여성의전화연합 전문위원. 이주여성인권센터 법률지원단. 두 딸의 엄마로 주업은 작은 로펌의 생계형 변호사다. 성폭력, 가정폭력, 이주여성 등에 대한 법률 지원을 꾸준히 해왔다. 세상을 바꾸지는 못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들 곁에서 손잡아주는 든든한 지원군이 되고자 했고, 되고 싶다. 그녀들을 위한 변론 경험을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78139.html?_fr=mt1#csidxa7f71017b947a0a84677e2f4be6a30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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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전쟁과 달러기축체제의 위기(4)


- 윤곽을 드러내는 다극화 경제질서(끝)
  • 손정목 4.27시대연구원 국제분과장
  • 승인 2019.01.12 16:47
  • 댓글 0

- 윤곽을 드러내는 다극화 경제질서(끝)
  • 손정목 4.27시대연구원 국제분과장
  • 승인 2019.01.12 16:47
  • 댓글 0

세계경제의 불안정이 더욱 높아지고 있다. 한계에 이른 양적완화, 천문학적 부채위기가 전후 70년간 세계를 지배해온 달러기축체제의 조종(弔鐘)을 울리고 있다. 미국이 최근 강력히 시행하고 있는 ‘대규모 무역전쟁’과 ‘금리인상’, 그리고 ‘경제제재의 남발’은 본질적으로 달러기축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3대 경제전략이다. 당연히 이에 대항하는 주요국들의 움직임도 빨라지고 있다. 달러국채를 팔아치우고, 제재에 저항하면서 달러결제시스템을 우회하는 새로운 국제결제시스템 도입을 준비하고 있다. 세계는 새로운 다극화된 경제질서로의 전환기에 서있다.[필자주]

1. 양적완화가 끝나고 있다

2. 금리인상과 무역전쟁 그리고 경제제재의 향방

3. 중국제조 2025와 미중 무역전쟁의 향방

4. 윤곽을 드러내는 다극화 경제질서

1) 세계질서 전환을 추동하는 ‘3대1’의 전략구도

2018년 세계정세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북한(조선)의 핵무력 완성에 의한 북·중·러 3개 핵보유국간의 전략적 협력관계의 실현이다. 역사상 처음 북·중·러 대 미국이라는 3대1의 핵보유국간 대결구도가 형성된 것이다. 이것은 전후 미국 우위의 핵패권 구도가 완전히 무너지는 역사적 사변이다. 이 전략구도는 강력한 전쟁억지력으로 작동해 시리아전쟁을 필두로 아프가니스탄전쟁, 예멘전쟁, 그리고 65년을 끌어온 한반도전쟁이 완전히 끝나고 있다. 세계 각지의 전쟁이 거의 동시에 끝나고 있는 것이다. 전후 역사에서 미국이 개입한 주요 전쟁이 이처럼 한꺼번에 끝나는 경우는 처음이다.

이와 관련해 또 하나 주목할 사건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은 계속해서 세계의 경찰일 수는 없다”고 선언한 것이다. 지난해 12월 시리아 주둔 미군의 전면철수 명령과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의 부분철수 결정 보도가 나온 직후다. 이에 대해 러시아 관영 스푸트니크뉴스(Sputniknews)는 “(공식적인 그 발언이) 올해(2018년)의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볼 수 있다”는 전문가 발언을 보도하였다. 그 이유는 ‘미국이 더 이상 해외 군사작전에 수백억 달러를 퍼부을 여력이 없음’을 드러낸 것으로, 이는 “미국 패권을 이루는 경제, 제도, 군사적 기초의 붕괴가 이제 가시화”되었다는 것이다. 실제 미 의회조사국도 지난해 11월 ‘러시아나 중국을 상대로 한 전쟁이 벌어진다면 패배할 수도 있다’고 경고하는 의회 보고서를 발표한 바 있다. 이것은 군사력면에서도 미국이 러시아나 중국에 뒤진다는 솔직한 토로다. 이미 수년 전부터 제기되어온 ‘미국의 세기가 끝나고 있다’는 조짐이 이제 가시화 단계에 이른 것이다.

이렇듯 핵보유국간 3대1의 전략구도 형성과 미국의 ‘세계경찰 포기’는 동전의 양면이다. 상당수 국내외 주류언론들은 미국의 세계경찰 포기가 트럼프 대통령의 지나친 미국우선주의의 산물이라거나 동맹국에 방위비를 더 내게 하기 위한 술수라는 등 트럼프 정부 정책위주로 보도하고 있다. 이런 류의 분석은 마치 트럼프 대통령이 마음을 바꾸거나, 대통령을 교체하면 언제든 미국이 세계경찰 지위를 회복할 것이라는 착시를 일으킨다. 그러나 본질은, 이제는 미국이 세계경찰 역할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미국의 일방적 패권주의에 반대하는 핵무력 완성 3국의 전략적 단결과 미국의 군사력, 경제력의 위축으로 미국이 더는 세계경찰 노릇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전환적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고 과거의 향수에 젖어있는 미 군산언복합체를 비롯한 추종, 동맹세력들은 어떡해서든 시리아 철군을 미루고,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유지하면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되돌리려 하고 있다. 올해는 이 전환적 흐름이 확고히 자리 잡는가 아니면 뒤로 더 밀린 것인가를 가르는 결전의 해가 될 것이다. 이에 대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 2일 ‘대만동포에게 고하는 편지’ 발표 40주년 기념연설에서 “현재 세계는 100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대변혁기”라고 규정하고 군에 전쟁 계획을 철저히 수립하라고 지시했다. 중국은 차제에 대만과의 통일까지 내다보고 있다. 러시아 역시 지난해 3월에 이어 12월에도 최첨단 극초음속 전략무기 ‘아방가르드’ 등을 선보이며 평화정착 흐름을 거스르려는 미국을 위축시켰다. 미국은 3대 핵보유국의 전략적 단결에 의한 강력한 전쟁억지력에 의해 더 이상 세계 각지에서 전쟁을 일으키거나 확대하지 못할 것이다.

2) 다극화 세계경제질서의 주체 – 브릭스 플러스(BRICS+)

이러한 지정학적 변화는 미국 주도의 세계경제질서의 근본적 변화과정과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무엇보다 브릭스(BRICS. 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남아공)를 중심으로 한 남남협력의 강화는 달러기축체제를 끝내는 새로운 국제금융질서 수립과정과 맞물려 새로운 다극화 세계경제질서의 핵심 동력이다.

2017년 9월 중국 샤먼에서 열린 9차 브릭스정상회의에서 중국은 ‘브릭스 플러스’(BRICS+)라는 남남협력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였고, 지난해 7월 10차 브릭스정상회의는 요하네스버그선언을 통해 다자주의 세계경제질서의 주체로서 브릭스 플러스를 제창했다. 주지하듯이 남남협력이란 주로 남반구에 몰려있는 개발도상국과 신흥국들간의 무역, 산업기술, 금융 등 전반의 경제협력을 의미한다. 이는 북반구 선진국들의 경제침탈에 대항한 신흥국들의 자주적 경제발전을 위한 협력체계로, 그간 아프리카-남미협력회의(ASA) 등 다양한 시도가 있었지만 미국과 유럽의 방해와 간섭으로 큰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 지난해 7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열린 브릭스 정상회의에 참석한 인도의 모디 총리(왼쪽), 중국의 시진핑 주석, 남아공의 라마포사 대통령,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과 브라질의 미셰우 테메르 당시 대통령.

그러나 이제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인 중국을 중심으로 국제통화기금(IMF)를 대체하는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을 설립하고, 또 세계은행(IBRD)를 대체하는 브릭스 자체의 신개발은행(NDB)이 설립되어 브릭스만 아니라 기타 신흥국 및 개발도상국의 인프라 건설과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자금지원 체계가 마련되었다. 이로써 남남협력은 미국 등 서방의 간섭과 방해를 배제하고 실질적으로 발전해갈 수 있는 금융적 토대를 갖추게 되었다.

이에 기초한 브릭스 플러스는 기존 브릭스 국가들과 여타 신흥국 및 개발도상국들과의 연계를 강화하여 남남협력체제를 완성해 나간다는 브릭스의 전략방향이다. 즉 브릭스 자체를 확대하기보다 브릭스를 축으로 한 남남협력을 확대 강화한다는 것이다. 시진핑 주석은 이를 “보다 밀접한 파트너십 네트워크”로 정의하였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초강대국(미국)에 의한 경제제재나 경제전쟁이 없는 신흥국과 개발도상국이 주연인 “새로운 유형의 국제관계”(a new type of international relations) 건설을 추진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존 미국 중심의 패권적 세계경제질서를 신흥국, 개발도상국 중심의 다극화된 새로운 경제질서로 바꿔나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의 실현을 위해 남남협력을 4차 산업혁명의 중심으로 발전시킨다는 “신산업혁명 브릭스 파트너십”(the BRICS Partnership on New Industrial Revolution)을 제안하였다. 이것은 남남협력을 기존의 신흥국간 호혜적인 무역, 금융, 기술교류 수준이 아니라 향후 세계경제를 주도해 나갈 첨단산업의 중심기지로 바꿔나간다는 전략이다. 자금과 첨단기술의 준비는 새로운 경제질서 구축의 핵심이다. 중국은 자국의 ‘일대일로’와 ‘중국제조2025’ 전략을 5대륙의 남남협력 체계인 브릭스 플러스에 기반한 “신산업혁명 브릭스 파트너십” 전략과 연동시키고 있다.

여기에 더해 브릭스는 기존 지역협력기구의 집합체(the aggregation of regional integration groups)로서 빔스(BEAMS) 건설을 선언하였다. 빔스는 아프리카 연합(AU), 상하이협력기구(SCO), 유라시아경제연합(EAEU) 같은 기존 남남간의 지역협력기구를 더 큰 통합체계로 묶는다는 의미다. 중국 왕이 외교부장은 브릭스 플러스와 빔스를 “세계적 영향력을 가진 남남협력의 가장 확장된 플랫폼”(most extensive platform for South-South cooperation with a global impact)으로 정의하였다. 브릭스는 남남협력체계를 개별 국가와의 네트워크 확대와 지역연합기구의 통합이라는 중층적 구조로 만들어 새로운 세계경제질서의 강력한 중심주체로 세우려는 것이다.

이같은 중층적 남남협력체계가 건설되면 내부거래에 사용되는 통화체제는 당연히 달러가 될 수 없다. 달러기축체제는 붕괴된다. 세계는 다극형에 맞는 통화체계를 갖게 될 것이다. 이를 위해 중‧러를 중심으로 한 여러 신흥국들은 ▲달러를 대체하고 새로운 기축성을 세우기 위한 금 보유 확대와 국가 차원의 암호화폐 준비 ▲국제달러결제시스템 스위프트(SWIFT)를 대체할 새로운 결제시스템을 준비하고 있다.

3) 2024년 달러 사용 폐기 선언과 RCEP

이와 관련해 달러 사용 폐기계획을 선명하게 내세운 국가는 러시아다. 러시아 재무부는 지난 해 10월 2024년까지 달러 의존에서 벗어날 것을 발표하였다. 달러 사용 폐기를 시한을 정해 발표한 경우는 처음이다. 이를 위해 러시아 정부는 무역결제를 달러 대신 루블로 할 것을 기업에 촉구하고, 특히 러시아가 세계적 우위에 있는 석유, 가스, 무기 수출 등은 루블로 거래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실제 터키나 인도는 러시아 최첨단 미사일방어시스템(MD) S-400 구입대금을 루블로 지불하였다. 더불어 러시아는 지난해 보유한 미 국채 84%를 매각하고 그 대금으로 금을 사는 등 2000톤 이상의 금을 확보하여 루블의 신뢰성 제고는 물론 달러기축 폐기를 준비하고 있다.

사실 러시아가 달러 사용을 중단한다는 것은 러시아 일국에만 적용될 사안이 아니다. 러시아 주도의 국제협력체인 유라시아경제연합(EAEU), 독립국가연합(CIS)은 물론 브릭스의 무역거래 역시 달러 사용 폐기를 지향하고 있다. 주지하듯이 러시아는 미국과 자웅을 겨룰 정도의 군사대국이다. 이미 중동의 새판짜기는 러시아를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다. 정치, 군사적 힘의 우위는 경제질서 형성에 직접적 영향을 미친다. 이미 이란, 터키는 무역거래에 달러 사용을 줄이고 자국 화폐나 위안, 루블, 유로 비중을 높이면서 금 보유를 확대하고 있다. 터키는 유럽으로의 관문이고, 이란은 유라시아의 중심이다. 향후 중동은 러시아를 중심으로 이란과 터키가 협력하여 이스라엘, 사우디아라비아를 견인하면서 안정화의 길을 열 것이다. 이 변화 과정에서 중국의 일대일로 전략이 이들 나라와의 협력(남남협력) 아래 확대되면서 중동은 달러를 배제한 다극화 경제질서의 한 축을 담당할 것이다.

또 브릭스의 일원인 인도는 러시아, 이란, 베네수엘라와 루피와 바터제(barter. 물물교환)에 의한 거래, 중국과도 자국 통화 거래를 진행하고 있다. 특히 달러가 부족한 베네수엘라와는 인도 의약품과 석유거래 바터제를 추진하고 있다. 인도가 사실상 돌아서면서 미‧일이 추진하던 중국포위전략인 인도-태평양 전략은 무너졌다(중국의 달러 사용 중단 관련 사항은 이 글 3편 참조 바람).

아시아에서 가장 주목할 다극화 흐름은 중국 주도의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이다. RCEP는 아시아 10개국과 한국, 중국, 일본, 인도, 호주, 뉴질랜드 등 16개국이 참여하여 세계 인구 절반과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최대 규모 경제협정으로 올해 최종 타결될 것으로 보인다. 이 협정이 주목되는 것은 처음으로 미국이 제외되고 중국 주도로 아시아의 통합된 경제블록(질서)이 건설된다는 점이다. 중국은 이 협정을 아시아지역 남남협력 모델로 세우려 하고 있다. 당연히 달러 사용을 당장 중단하지는 못하더라도 줄이게 되고 위안화 사용 비중은 대폭 늘 것이다. 이에 대해 러시아 관영 스푸트니크뉴스는 현 세계경제에 대해 ‘미국의 경제제재 남발과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이탈로 사실상 국제무역기구(WTO)의 규정이 무력화된 상황’이라고 진단하고 “(RCEP는)중국을 비롯한 역내 국가들의 대안적인 국제 및 지역 무역 규정 마련을 위한 시도”라고 평가하였다. RCEP는 다극화 경제질서의 아시아지역의 축이 될 것이다. 지난해 말 발효된 일본, 호주 주도의 11개국 ‘포괄적, 점진적 환태평양경제공동체협정’(CPTPP)은 중국포위 성격을 폐기하고 RCEP와 협력할 수밖에 없다.

70년 이상 세계를 지배해온 달러기축체제가 그 수명을 다하고 있다. 그 기한이 러시아가 계획하는 2024년이 될지, 중국이 전망하는 2025년이 될지 아직은 알 수 없지만 얼마 남지 않은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역사가 증명하듯이 이런 대전환기에는 항시 과거의 향수에 젖은 자들에 의해 긴장과 혼란이 높아지는 법이다. 전쟁이 발발한 경우도 허다하다. 그러나 역사상 처음 출현한 핵보유국간 3대1의 전략구도는 강력한 전쟁억지력으로 작동하여 더 이상 세계대전과 같은 큰 전쟁은 없을 것이다.

한반도 평화체제 실현은 바로 이러한 세계사적 대전환의 일환이다. 불가역적이다. 미국 패권체제 몰락은 그 시작과 함께 만들어진 인위적 분단장벽도 무너지게 할 것이다. 통일한반도의 출현이 가까워지고 있다. 고난의 역사를 이겨낸 통일한반도는 남남협력의 한 축으로 세계적 번영에도 크게 기여할 것이다.(끝)

손정목 4.27시대연구원 국제분과장  webmaster@minplus.or.kr

icon관련기사icon무역전쟁과 달러기축체제의 위기(3)icon무역전쟁과 달러기축체제의 위기(2)icon무역전쟁과 달러기축체제의 위기(1)

 

 

세계경제의 불안정이 더욱 높아지고 있다. 한계에 이른 양적완화, 천문학적 부채위기가 전후 70년간 세계를 지배해온 달러기축체제의 조종(弔鐘)을 울리고 있다. 미국이 최근 강력히 시행하고 있는 ‘대규모 무역전쟁’과 ‘금리인상’, 그리고 ‘경제제재의 남발’은 본질적으로 달러기축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3대 경제전략이다. 당연히 이에 대항하는 주요국들의 움직임도 빨라지고 있다. 달러국채를 팔아치우고, 제재에 저항하면서 달러결제시스템을 우회하는 새로운 국제결제시스템 도입을 준비하고 있다. 세계는 새로운 다극화된 경제질서로의 전환기에 서있다.[필자주]

1. 양적완화가 끝나고 있다

2. 금리인상과 무역전쟁 그리고 경제제재의 향방

3. 중국제조 2025와 미중 무역전쟁의 향방

4. 윤곽을 드러내는 다극화 경제질서

1) 세계질서 전환을 추동하는 ‘3대1’의 전략구도

2018년 세계정세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북한(조선)의 핵무력 완성에 의한 북·중·러 3개 핵보유국간의 전략적 협력관계의 실현이다. 역사상 처음 북·중·러 대 미국이라는 3대1의 핵보유국간 대결구도가 형성된 것이다. 이것은 전후 미국 우위의 핵패권 구도가 완전히 무너지는 역사적 사변이다. 이 전략구도는 강력한 전쟁억지력으로 작동해 시리아전쟁을 필두로 아프가니스탄전쟁, 예멘전쟁, 그리고 65년을 끌어온 한반도전쟁이 완전히 끝나고 있다. 세계 각지의 전쟁이 거의 동시에 끝나고 있는 것이다. 전후 역사에서 미국이 개입한 주요 전쟁이 이처럼 한꺼번에 끝나는 경우는 처음이다.

이와 관련해 또 하나 주목할 사건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은 계속해서 세계의 경찰일 수는 없다”고 선언한 것이다. 지난해 12월 시리아 주둔 미군의 전면철수 명령과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의 부분철수 결정 보도가 나온 직후다. 이에 대해 러시아 관영 스푸트니크뉴스(Sputniknews)는 “(공식적인 그 발언이) 올해(2018년)의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볼 수 있다”는 전문가 발언을 보도하였다. 그 이유는 ‘미국이 더 이상 해외 군사작전에 수백억 달러를 퍼부을 여력이 없음’을 드러낸 것으로, 이는 “미국 패권을 이루는 경제, 제도, 군사적 기초의 붕괴가 이제 가시화”되었다는 것이다. 실제 미 의회조사국도 지난해 11월 ‘러시아나 중국을 상대로 한 전쟁이 벌어진다면 패배할 수도 있다’고 경고하는 의회 보고서를 발표한 바 있다. 이것은 군사력면에서도 미국이 러시아나 중국에 뒤진다는 솔직한 토로다. 이미 수년 전부터 제기되어온 ‘미국의 세기가 끝나고 있다’는 조짐이 이제 가시화 단계에 이른 것이다.

이렇듯 핵보유국간 3대1의 전략구도 형성과 미국의 ‘세계경찰 포기’는 동전의 양면이다. 상당수 국내외 주류언론들은 미국의 세계경찰 포기가 트럼프 대통령의 지나친 미국우선주의의 산물이라거나 동맹국에 방위비를 더 내게 하기 위한 술수라는 등 트럼프 정부 정책위주로 보도하고 있다. 이런 류의 분석은 마치 트럼프 대통령이 마음을 바꾸거나, 대통령을 교체하면 언제든 미국이 세계경찰 지위를 회복할 것이라는 착시를 일으킨다. 그러나 본질은, 이제는 미국이 세계경찰 역할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미국의 일방적 패권주의에 반대하는 핵무력 완성 3국의 전략적 단결과 미국의 군사력, 경제력의 위축으로 미국이 더는 세계경찰 노릇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전환적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고 과거의 향수에 젖어있는 미 군산언복합체를 비롯한 추종, 동맹세력들은 어떡해서든 시리아 철군을 미루고,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유지하면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되돌리려 하고 있다. 올해는 이 전환적 흐름이 확고히 자리 잡는가 아니면 뒤로 더 밀린 것인가를 가르는 결전의 해가 될 것이다. 이에 대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 2일 ‘대만동포에게 고하는 편지’ 발표 40주년 기념연설에서 “현재 세계는 100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대변혁기”라고 규정하고 군에 전쟁 계획을 철저히 수립하라고 지시했다. 중국은 차제에 대만과의 통일까지 내다보고 있다. 러시아 역시 지난해 3월에 이어 12월에도 최첨단 극초음속 전략무기 ‘아방가르드’ 등을 선보이며 평화정착 흐름을 거스르려는 미국을 위축시켰다. 미국은 3대 핵보유국의 전략적 단결에 의한 강력한 전쟁억지력에 의해 더 이상 세계 각지에서 전쟁을 일으키거나 확대하지 못할 것이다.

2) 다극화 세계경제질서의 주체 – 브릭스 플러스(BRICS+)

이러한 지정학적 변화는 미국 주도의 세계경제질서의 근본적 변화과정과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무엇보다 브릭스(BRICS. 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남아공)를 중심으로 한 남남협력의 강화는 달러기축체제를 끝내는 새로운 국제금융질서 수립과정과 맞물려 새로운 다극화 세계경제질서의 핵심 동력이다.

2017년 9월 중국 샤먼에서 열린 9차 브릭스정상회의에서 중국은 ‘브릭스 플러스’(BRICS+)라는 남남협력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였고, 지난해 7월 10차 브릭스정상회의는 요하네스버그선언을 통해 다자주의 세계경제질서의 주체로서 브릭스 플러스를 제창했다. 주지하듯이 남남협력이란 주로 남반구에 몰려있는 개발도상국과 신흥국들간의 무역, 산업기술, 금융 등 전반의 경제협력을 의미한다. 이는 북반구 선진국들의 경제침탈에 대항한 신흥국들의 자주적 경제발전을 위한 협력체계로, 그간 아프리카-남미협력회의(ASA) 등 다양한 시도가 있었지만 미국과 유럽의 방해와 간섭으로 큰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 지난해 7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열린 브릭스 정상회의에 참석한 인도의 모디 총리(왼쪽), 중국의 시진핑 주석, 남아공의 라마포사 대통령,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과 브라질의 미셰우 테메르 당시 대통령.

그러나 이제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인 중국을 중심으로 국제통화기금(IMF)를 대체하는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을 설립하고, 또 세계은행(IBRD)를 대체하는 브릭스 자체의 신개발은행(NDB)이 설립되어 브릭스만 아니라 기타 신흥국 및 개발도상국의 인프라 건설과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자금지원 체계가 마련되었다. 이로써 남남협력은 미국 등 서방의 간섭과 방해를 배제하고 실질적으로 발전해갈 수 있는 금융적 토대를 갖추게 되었다.

이에 기초한 브릭스 플러스는 기존 브릭스 국가들과 여타 신흥국 및 개발도상국들과의 연계를 강화하여 남남협력체제를 완성해 나간다는 브릭스의 전략방향이다. 즉 브릭스 자체를 확대하기보다 브릭스를 축으로 한 남남협력을 확대 강화한다는 것이다. 시진핑 주석은 이를 “보다 밀접한 파트너십 네트워크”로 정의하였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초강대국(미국)에 의한 경제제재나 경제전쟁이 없는 신흥국과 개발도상국이 주연인 “새로운 유형의 국제관계”(a new type of international relations) 건설을 추진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존 미국 중심의 패권적 세계경제질서를 신흥국, 개발도상국 중심의 다극화된 새로운 경제질서로 바꿔나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의 실현을 위해 남남협력을 4차 산업혁명의 중심으로 발전시킨다는 “신산업혁명 브릭스 파트너십”(the BRICS Partnership on New Industrial Revolution)을 제안하였다. 이것은 남남협력을 기존의 신흥국간 호혜적인 무역, 금융, 기술교류 수준이 아니라 향후 세계경제를 주도해 나갈 첨단산업의 중심기지로 바꿔나간다는 전략이다. 자금과 첨단기술의 준비는 새로운 경제질서 구축의 핵심이다. 중국은 자국의 ‘일대일로’와 ‘중국제조2025’ 전략을 5대륙의 남남협력 체계인 브릭스 플러스에 기반한 “신산업혁명 브릭스 파트너십” 전략과 연동시키고 있다.

여기에 더해 브릭스는 기존 지역협력기구의 집합체(the aggregation of regional integration groups)로서 빔스(BEAMS) 건설을 선언하였다. 빔스는 아프리카 연합(AU), 상하이협력기구(SCO), 유라시아경제연합(EAEU) 같은 기존 남남간의 지역협력기구를 더 큰 통합체계로 묶는다는 의미다. 중국 왕이 외교부장은 브릭스 플러스와 빔스를 “세계적 영향력을 가진 남남협력의 가장 확장된 플랫폼”(most extensive platform for South-South cooperation with a global impact)으로 정의하였다. 브릭스는 남남협력체계를 개별 국가와의 네트워크 확대와 지역연합기구의 통합이라는 중층적 구조로 만들어 새로운 세계경제질서의 강력한 중심주체로 세우려는 것이다.

이같은 중층적 남남협력체계가 건설되면 내부거래에 사용되는 통화체제는 당연히 달러가 될 수 없다. 달러기축체제는 붕괴된다. 세계는 다극형에 맞는 통화체계를 갖게 될 것이다. 이를 위해 중‧러를 중심으로 한 여러 신흥국들은 ▲달러를 대체하고 새로운 기축성을 세우기 위한 금 보유 확대와 국가 차원의 암호화폐 준비 ▲국제달러결제시스템 스위프트(SWIFT)를 대체할 새로운 결제시스템을 준비하고 있다.

3) 2024년 달러 사용 폐기 선언과 RCEP

이와 관련해 달러 사용 폐기계획을 선명하게 내세운 국가는 러시아다. 러시아 재무부는 지난 해 10월 2024년까지 달러 의존에서 벗어날 것을 발표하였다. 달러 사용 폐기를 시한을 정해 발표한 경우는 처음이다. 이를 위해 러시아 정부는 무역결제를 달러 대신 루블로 할 것을 기업에 촉구하고, 특히 러시아가 세계적 우위에 있는 석유, 가스, 무기 수출 등은 루블로 거래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실제 터키나 인도는 러시아 최첨단 미사일방어시스템(MD) S-400 구입대금을 루블로 지불하였다. 더불어 러시아는 지난해 보유한 미 국채 84%를 매각하고 그 대금으로 금을 사는 등 2000톤 이상의 금을 확보하여 루블의 신뢰성 제고는 물론 달러기축 폐기를 준비하고 있다.

사실 러시아가 달러 사용을 중단한다는 것은 러시아 일국에만 적용될 사안이 아니다. 러시아 주도의 국제협력체인 유라시아경제연합(EAEU), 독립국가연합(CIS)은 물론 브릭스의 무역거래 역시 달러 사용 폐기를 지향하고 있다. 주지하듯이 러시아는 미국과 자웅을 겨룰 정도의 군사대국이다. 이미 중동의 새판짜기는 러시아를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다. 정치, 군사적 힘의 우위는 경제질서 형성에 직접적 영향을 미친다. 이미 이란, 터키는 무역거래에 달러 사용을 줄이고 자국 화폐나 위안, 루블, 유로 비중을 높이면서 금 보유를 확대하고 있다. 터키는 유럽으로의 관문이고, 이란은 유라시아의 중심이다. 향후 중동은 러시아를 중심으로 이란과 터키가 협력하여 이스라엘, 사우디아라비아를 견인하면서 안정화의 길을 열 것이다. 이 변화 과정에서 중국의 일대일로 전략이 이들 나라와의 협력(남남협력) 아래 확대되면서 중동은 달러를 배제한 다극화 경제질서의 한 축을 담당할 것이다.

또 브릭스의 일원인 인도는 러시아, 이란, 베네수엘라와 루피와 바터제(barter. 물물교환)에 의한 거래, 중국과도 자국 통화 거래를 진행하고 있다. 특히 달러가 부족한 베네수엘라와는 인도 의약품과 석유거래 바터제를 추진하고 있다. 인도가 사실상 돌아서면서 미‧일이 추진하던 중국포위전략인 인도-태평양 전략은 무너졌다(중국의 달러 사용 중단 관련 사항은 이 글 3편 참조 바람).

아시아에서 가장 주목할 다극화 흐름은 중국 주도의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이다. RCEP는 아시아 10개국과 한국, 중국, 일본, 인도, 호주, 뉴질랜드 등 16개국이 참여하여 세계 인구 절반과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최대 규모 경제협정으로 올해 최종 타결될 것으로 보인다. 이 협정이 주목되는 것은 처음으로 미국이 제외되고 중국 주도로 아시아의 통합된 경제블록(질서)이 건설된다는 점이다. 중국은 이 협정을 아시아지역 남남협력 모델로 세우려 하고 있다. 당연히 달러 사용을 당장 중단하지는 못하더라도 줄이게 되고 위안화 사용 비중은 대폭 늘 것이다. 이에 대해 러시아 관영 스푸트니크뉴스는 현 세계경제에 대해 ‘미국의 경제제재 남발과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이탈로 사실상 국제무역기구(WTO)의 규정이 무력화된 상황’이라고 진단하고 “(RCEP는)중국을 비롯한 역내 국가들의 대안적인 국제 및 지역 무역 규정 마련을 위한 시도”라고 평가하였다. RCEP는 다극화 경제질서의 아시아지역의 축이 될 것이다. 지난해 말 발효된 일본, 호주 주도의 11개국 ‘포괄적, 점진적 환태평양경제공동체협정’(CPTPP)은 중국포위 성격을 폐기하고 RCEP와 협력할 수밖에 없다.

70년 이상 세계를 지배해온 달러기축체제가 그 수명을 다하고 있다. 그 기한이 러시아가 계획하는 2024년이 될지, 중국이 전망하는 2025년이 될지 아직은 알 수 없지만 얼마 남지 않은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역사가 증명하듯이 이런 대전환기에는 항시 과거의 향수에 젖은 자들에 의해 긴장과 혼란이 높아지는 법이다. 전쟁이 발발한 경우도 허다하다. 그러나 역사상 처음 출현한 핵보유국간 3대1의 전략구도는 강력한 전쟁억지력으로 작동하여 더 이상 세계대전과 같은 큰 전쟁은 없을 것이다.

한반도 평화체제 실현은 바로 이러한 세계사적 대전환의 일환이다. 불가역적이다. 미국 패권체제 몰락은 그 시작과 함께 만들어진 인위적 분단장벽도 무너지게 할 것이다. 통일한반도의 출현이 가까워지고 있다. 고난의 역사를 이겨낸 통일한반도는 남남협력의 한 축으로 세계적 번영에도 크게 기여할 것이다.(끝)

손정목 4.27시대연구원 국제분과장  webmaster@minplu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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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전쟁 목표는 '세계 경제 정복'

[전쟁국가 미국·2강-①] 2차 대전과 '좋은 전쟁'이라는 신화
2019.01.12 11:52:41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에서 박인규 이사장의 '전쟁국가 미국' 강연을 마련했습니다. 이 강연에서는 세계 2차 대전 이후 미국이 추구해온 군사주의 노선이 현재 세계의 혼란과 부의 양극화, 그리고 민주주의의 후퇴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살펴봅니다. 
 
<프레시안>은 지난해 12월 5일에 시작해 오는 3월 31일까지 격주로 진행되는 강연의 내용을 정리해 독자 여러분들께 전해드릴 예정입니다. 아래는 지난해 12월 19일 진행된 2회 강연을 보강한 내용입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편집자.
 

2차 대전은 미국에게 '좋은 전쟁(Good War)'이었다. 무력으로 세계를 정복하려던 독일 나치즘과 일본 군국주의를 무찌름으로써 인류의 해방자로 떠오른 한편 막대한 전쟁 수요로 대공황을 단숨에 극복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유엔과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IBRD) 등 전후 세계를 이끌어갈 국제 안보 및 경제 기구의 창설을 주도하면서 세계의 패권국가가 된다. 바야흐로 미국의 세기(American Century)가 시작된 것이다. 

게다가 전쟁 말기 절대무기인 원자탄을 독점하면서 세계를 자신의 의지대로 개조할 수 있다는 자신감, 즉 '미국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만능(omnipotence)의 환상을 품게 된다. 정치, 경제, 군사 등 모든 면에서 압도적 우위를 확보한 만큼 그럴 만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자신감, 또는 환상은 4반세기를 넘기지 못한다.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가지고도 베트남전쟁에서 패배했기 때문이다. 

이는 미 군사주의의 실패를 의미한다. 군사력에 의거한 세계 경영이 파탄한 것이다. 미국은 왜 군사주의로 나아갔을까? 그 원인은 2차 대전의 경험에서 찾을 수 있다. 1차 대전보다 10배나 많은 전쟁 특수를 겪으면서 미국 경제가 전쟁 없이는 유지할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2차 대전을 통해 미국 경제는 '영구 전쟁 경제'가 됐고, 이는 다시 미국이라는 나라를 '영구 전쟁 국가'로 만들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2차 대전은 1차 대전의 후속편이다. 1차 대전의 전후 처리 과정에서 2차 대전의 씨앗이 뿌려졌기 때문이다. 즉 독일에 대한 과도한 배상금 요구가 나치의 득세를 가져왔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당시(1919년) 경제학자 케인스가 <평화의 경제적 귀결>(The Economic Consequences of the Peace)이라는 책을 통해 지적한 바 있다. 배상금 규모가 독일의 정상적 경제활동을 통해 감당할 수 없을 정도가 되면 유럽의 지속적 평화는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최근에는 1, 2차 대전을 합해서 30년 전쟁(1914~1945년)이라고 부른다. 영국 패권이 무너진 후 세계 패권을 계승하기 위한 투쟁이 30년간 벌어졌기 때문이다. 당시 새롭게 뜨는 자본주의 국가는 미국과 일본, 독일이었는데 독일은 유럽을, 일본은 중국과 동남아를 독점 지배하려 했던 반면 미국은 세계 전체를 가지려 했다. 이로 인해 독일과 미국, 일본과 미국이 한판 붙은 것이 2차 대전이다. 2차 대전은 자본주의 열강의 패권 전쟁이었다. 

2차 대전의 결과 영국, 프랑스 등 과거 세계를 호령했던 유럽 국가들은 2선으로 물러나고 미국과 소련이 세계의 양대 주도세력으로 떠오른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피식민지 민족들, 16세기 이후 서구의 세계 정복으로 역사의 무대에서 노예로 전락했던 이른바 '제3세계'가 해방됐다는 점이다.  

1945년에서 1960년까지 약 60개의 국가가 해방됐다고 한다. 1945년까지 서구 세력(일본 포함)이 아니면 인간도, 나라도 아니었다. 제국주의 세력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사람 아닌 사람(unpeople)이자 사회 아닌 사회였다. 이들이 2차 대전 후 세계사의 무대에 당당한 주역으로 참가하게 된 것이다. 

전쟁은 인명과 재산만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기존 체제를 포함해 모든 것을 파괴한다. 1차 세계대전은 소련 혁명을 낳았고, 2차 대전은 중국 혁명을 초래했다. 기존 정치 체제가 파괴된 결과다. 나아가 전면적인 식민지 해방이 이루어졌다. 서구의 비서구 지배도 무너진 것이다.

식민지 인민들은 수 백 년 동안을 서구 자본주의에 당해왔다. 따라서 해방된 후 이들은 자본주의보다는 사회주의, 공산주의, 민족주의를 지향했다. 1945년 이후의 세계는 자본주의 세계체제를 복원하려는 미국과, 민족 자결을 통해 스스로의 생존과 자유를 확보하려는 제3세계 '피압박 민중' 간의 대결로 압축해 볼 수 있다.  

미국의 2차 대전 전쟁 비용, 1차 대전의 13배 

미국은 독일 나치즘과 일본 군국주의 등 세계 정복을 꿈꾸는 세력을 물리치는 데 커다란 공헌을 했다. 그리하여 미국인들은 자신들이 세계의 민주주의와 자유를 수호했다고 믿는다. 또한 유엔과 IMF, IBRD 등의 창설을 통해 세계의 평화와 번영을 이루었다고 자부한다. 

1차 대전 이후 2차 대전 발발까지, 즉 위기의 20년(1919~1939년)은 혼란과 불안정, 갈등과 대결의 시대였다. 2차 대전 이후 미국이 패권 국가가 되고 나서 유엔을 통해 집단안보를 완성하고, IMF 등을 통해 자유무역체제를 복원한 후 비로소 세계는 평화와 번영을 누릴 수 있게 됐다. 이후 1970년까지 미국을 위시한 자유진영(서유럽과 일본 등 동아시아)은 자본주의 역사상 최고의 번영을 구가한다('영광의 25년').  

이런 측면에서 미국이 2차 대전을 '좋은 전쟁'으로 인식하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2차 대전을 통해 세계의 해방자로 부각됐고, 세계 패권을 확보했으며, 이후 자본주의 진영의 평화와 번영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한국이 해방될 수 있었던 것도 결국은 2차 대전 덕택이었다는 점에서 우리도 '좋은 전쟁'이라는 인식을 어느 정도 받아들일 수 있겠다. 또한 2차 대전을 일으킨 것은 미국이 아니라 독일과 일본이었다는 점에서 미국이 세계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수호했다는 주장은 일리가 있다. 

그런데 '좋은 전쟁'이란 인식의 보다 본질적인 이유로는 전쟁 특수가 있다. 즉 루스벨트의 뉴딜로도 극복하지 못했던 대공황을 전쟁 특수가 해결한 것이다. 

미국은 1941년 3월부터 1945년 8월까지 501억 달러 상당의 전쟁 물자를 영국, 소련, 프랑스, 중국 등 연합국에 제공했다(무기대여법 : Lend-Lease). 루스벨트 대통령이 말한 '민주주의의 병기고(Arsenal of Democracy)'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1차 대전 당시 JP모건이 연합국에 외상으로 판매한 군수 물자는 약 50억 달러였다. 그 10배의 전쟁 물자를 이번에는 미국 정부가 무상으로 제공했다.  

렌드리스를 포함한 미국의 총 전쟁 비용은 2950억 달러로 1차 대전 때의(220억 달러) 13배가 넘는다. 이를 현재 가치로 따지면 약 3조 9300억 달러, 4조 달러에 가깝다. 참고로 1939년의 미국 국방비는 30억 달러 정도였다. 평시 국방비의 약 100배를 4년 만에 사용한 셈이다. 공황의 원인이 수요 부족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전쟁 특수는 단숨에 대공황을 극복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전쟁 특수는 일종의 극약 처방이다. 지속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군수 물자 생산을 일종의 투자라고 치자. 그 투자는 일자리는 만들어내지만 결국에는 죽음과 파괴만을 초래할 뿐이다. 사회적으로 유용한 재화와 서비스를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사회에 기여하는 생산적 결과를 낳지 못하는 것이다.  

반면 민수용 투자는 일자리 창출과 함께 사회적으로 유용한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한다. 따라서 군수 경제는 비상시에 단기적으로 사용할 수는 있지만 지속적일 수는 없다. 그런데 미국 경제는 2차 대전을 통해 '전쟁 중독'이라는 치명적 질병에 감염됐다. 이후에도 이를 치유하지 못하고 있다.  

나치 격퇴의 수훈갑은 소련 

2차 대전의 실상과 관련해 많은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진실 한 가지가 있다. 미국이 2차 대전 승전의 최대 수훈 국가라는 것이다. 미국은 유럽과 아시아 전장 모두에서 싸운 유일한 국가라는 점에서 일리가 없지는 않다. (영국과 프랑스는 동남아에서 일본에게 일방적으로 밀렸고, 소련은 종전 1주일 전에야 대일전에 참전했다.) 그러나 나치와의 전쟁에서 수훈갑은 단연 소련이었다.  
 

▲ 1945년 5월 베를린에 입성해 깃발을 내건 소련군. 뒤쪽으로 브란덴부르크문이 보인다. ⓒ위키미디어커먼스


2차 대전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미국은 돈으로 때웠고 소련은 몸으로 때웠다고 볼 수 있다. 즉 미국은 주로 전쟁 물자 생산을 통해, 소련은 엄청난 인명의 희생으로 승전에 기여했다. 그 결과는 미국의 경제적 번영, 소련 경제의 초토화였다. 

소련은 군인 사망자 약 1300만 명을 포함해 30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반면 유럽전쟁과 태평양전쟁을 통틀어 미국과 영국의 군인 사망자는 60만 명 정도다. 레닌그라드 전투에서 사망한 소련군 숫자가 60만 명이다. 약 10만 명의 미군이 유럽 전장에서 사망했는데 이는 1945년 4월 말 베를린 공방전에서의 소련군 전사자와 같다. 한 연구에 따르면 미군 전사자 대 소련군 전사자의 비율은 1 대 53이었다. 

2차 대전에서 전사, 부상, 또는 포로로 잡힌 독일군은 1350만 명인데(독일 성인 남성의 46%) 이중 1000만 명이 동부전선, 즉 소련과의 전투에서 발생한 것이다. 소련은 나치 병력의 5분의 4, 적어도 4분의 3을 대적했다. 나치 격퇴의 9할은 소련이 담당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전투의 대부분을 자국 영토에서 치른 소련은 경제적 피해도 막심했다. 1280억 달러 상당의 재산 피해, 당시 소련 GNP의 25년 치에 해당한다. 1945년 GNP는 1941년 대비 20%나 감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이 독일로부터 받아낸 전쟁 배상금은 고작 51억 달러였다.

반면 미국은 자국 영토에서 전쟁을 치르지 않았고 따라서 전쟁 피해를 입지 않았다. 미국 본토에서 전쟁으로 인해 죽은 사람은 단 6명. 당시 공군력에서 뒤졌던 일본은 폭탄을 장착한 기구를 제트기류에 태워 미국으로 보냈다. 산불 등을 유발할 목적이었는데, 이 기구 중 하나가 캘리포니아에서 터지면서 민간인 사망자가 발생한 것이다. 

미국은 연합국의 전쟁 물자 생산을 도맡다시피 하면서 엄청난 전쟁 특수를 누렸다. 대기업이 최대 수혜자였다. 막대한 이윤이 보장되는 정부 발주 전쟁 물자 계약 중 80%가 56개 대기업에 돌아갔다.  

일반 국민도 단맛을 봤다. 1940년 14.6%였던 실업률이 1944년 1.2%로 뚝 떨어졌다. 사실상 완전고용이다. 노동자 평균 임금도 1939년 주당 23달러에서 1945년 44달러로 90% 인상됐다(인플레율 25%). 지긋지긋한 대공황을 벗어난 것이다. 1930년대 맹위를 떨쳤던 반전 여론은 쑥 들어갔다. '총과 버터(Guns and Butter)'를 동시에 가질 수 있다는, 즉 전쟁 경제와 민생 경제의 양립이 가능하다는 환상이 널리 퍼져 갔다.  

2차 대전이 끝난 직후 미국은 전 세계 GNP의 50%를 차지했고 금 보유량은 3분의 2가 될 정도였다. 당시 미국의 인구는 세계의 6%였다. 아시아와 유럽이 전쟁으로 초토화된 반면 미국은 더욱 번영하는 경제대국, 군사강국으로 우뚝 섰다. 같은 승전국이지만 미국은 부강해진 반면 소련은 피폐해졌다. 전쟁이 끝날 당시 미국의 경제 규모는 소련에 3배에 달했다.

'좋은 전쟁'이라는 신화 

미국은 세계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제3세계 민중의 민족 자결을 위해 2차 대전에 참전했다고 대외에 천명하며 스스로도 그렇게 믿고 있다. 즉 2차 대전은 미국에게만이 아니라 세계에도 '좋은 전쟁'이었다는 것이다. 과연 이러한 미국인의 인식은 현실에 부합하는 것일까?  

벨기에계 캐나다 역사가 자크 파월은 저서 <좋은 전쟁이라는 신화>를 통해 이를 정면으로 반박한다. 미국은 연합국뿐만 아니라 나치 독일에도 군수물자를 제공했고, 해방된 국가들의 민족 자결을 억압했다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병기고'라던 미국은 '나치의 병기고'이기도 했다. 전쟁 기간 나치 독일의 상당수 군수물자를 미국 기업이 제공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탈리아, 프랑스, 그리스 등의 반(反)파시스트 세력을 일관되게 정치에서 배제했다.  

그는 "2차 대전은 파시즘과 일본 군국주의에 대한 미국의 성전이 아니라 기업의 이해관계와 돈, 이윤을 놓고 벌인 투쟁"이라고 규정한다. 미국의 전쟁 목표는 민주주의의 회복이 아니라 미국 경제의 해외 팽창이었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미국 정책의 주된 동기는 자유, 정의, 민주주의가 아니라 미국 대기업을 비롯한 정치, 경제, 사회 분야 파워엘리트의 이익이었다.

"미국의 파워엘리트들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미국 자본주의 경제의 발전, 그리고 자신들의 계급적 이익을 추구했다. 민주냐 독재냐, 또는 평화적 수단이냐 군사력이냐는 중요하지 않았고, 미국이 그토록 부르짖었던 민주주의, 자유, 정의 등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파월뿐만이 아니다. 영국 역사가 A.J.P. 테일러는 "영국과 미국 정부는 히틀러가 사라져야 한다는 것 말고는 유럽의 어떤 변화도 원치 않았다"고 지적한다. 정치, 경제, 사회의 어떠한 개혁도 원치 않았다는 얘기다. 

언론인이자 역사학자로 전쟁 중 워싱턴에서 일했던 브루스 캐턴은 사회 개혁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약속하는 듯 보였던 전쟁의 명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부와 권력이 이전과 같은 사람들의 손에 집중되는 현실을 다음과 같이 신랄하게 비판했다.

"우리는 추축국들의 패배에만 전념했을 뿐, 다른 어떤 것도 얻지 못했다. [중략] 전쟁의 성과가 사회 및 경제 개혁을 가져오기 위해, 또는 그런 개혁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쓰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저들이 엄숙하게 내린 결정이었다." 

한때 미 국무부 차관보로 일했던 시인 아치벌드 매클리시는 전후의 세계를 염려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작금의 사태 진행을 보건대 우리가 만들 평화, 우리가 만들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평화는 석유의 평화, 금의 평화, 해운업의 평화, 요컨대 도덕적 목표나 인간적 관심이 결여된 평화가 될 것이다." 

'전쟁의 정당화', 2차 대전이 낳은 최악의 결과 

역사가 하워드 진의 평가는 더욱 매섭다. 그는 2차 대전을 통해 "파시즘 국가는 패배했으나 군사주의, 인종주의, 제국주의, 독재, 극악한 민족주의, 전쟁 등 파시즘의 요소들은 전후 세계에 널리 자리 잡게 됐다"면서 "우리는 파시즘에 맞서 승리를 거뒀지만, 그 결과 남은 것은 세계를 지배하는 두 초강대국이 다른 나라를 장악하기 위해 서로 다투면서 파시스트 강국들이 시도했던 것보다 더 큰 규모로 새로운 세력권을 개척하는 세계였다"고 말한다. 소련은 동유럽에서, 미국은 라틴아메리카와 한국, 그리고 필리핀에서.

그는 특히 "2차 대전이 세계인의 생각에 미친 치명적이고 심대한 장기적 효과"에 대해 주목한다. 그것은 "전쟁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생각을 계속 존속시킨 것"이며 이로 인해 "1차 대전의 무의미한 살육 이후 철저하게 불신됐던 전쟁이 다시 한 번 숭고한 것이 됐다"는 점을 꼽는다. 이것이야말로 2차 대전이 낳은 최악의 결과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미국의 정치 지도자들은 미국 국민을 어떤 비참한 모험으로 이끌고 가건, 또는 다른 사람들(한반도, 베트남, 이라크 등)에게 그리고 미국인 자신에게 어떤 파괴를 가하건, 2차 대전을 (국민의 전쟁 동원을 위한) 하나의 모델로 활용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나치즘 대신에 공산주의가 전쟁의 이유로 확실하게 자리를 차지했으며, 더 이상 공산주의라는 위협을 사용할 수 없을 때면 사담 후세인 같은 손쉬운 적이 히틀러에 비견될 수 있었다. 2차 대전이 절대 선이라는 가정은 전쟁 자체에 정의라는 후광을 만들어 주었으며(한국전쟁에 반대하는 대규모 저항운동이 없었음을 주목하라), 오로지 베트남 같이 극악무도하고 공식적 거짓말에 흠뻑 젖은 모험만이 이런 후광을 헤쳐 없앨 수 있었다"

나아가 그는 미국의 지배 엘리트가 창시한, "미국은 원초적으로 다른 나라 정치인들보다 우월한 도덕성을 갖고 행동한다는 그릇된 주장이 동시대인들의 반향을 얻고 그 이래로 미국 국민들이 받아들이게 된 것"을 문제로 지적하면서 이런 면에서 2차 대전 이후의 전쟁은 "불가피한 것이 아닐뿐더러 날조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2차 대전이 어떠했기에 미국은 전쟁을 정당화 했는가, 그 실상을 들여다본다.  

포드, GM 등 미국 대기업, '나치의 병기고' 

1940년 12월 루스벨트 대통령은 '미국은 민주주의의 병기고'가 될 것이라고 천명했다. 미국이 민주주의를 위한 무기 생산 공장 역할을 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미 육군 조사관 헨리 슈나이더는 보고서를 통해 포드의 독일 자회사 포드 베르케에 대해 '나치의 병기고(Arsenal of Nazism)'라고 지칭했다.  

포드를 비롯한 제네럴 모터스(GM), 스탠다드 오일, IBM, ITT(국제전신전화회사, AT&T의 전신) 등 미국의 20개 주요 대기업은 전쟁 이전은 물론이고 전쟁 기간에도 나치 독일을 위한 군수품 생산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이들 대기업은 미국과 영국, 소련 등 연합국은 물론 교전 국가인 독일에도 군수품을 제공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그들에게 전쟁은 최고의 장사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미국 대기업의 전쟁 장사를 미국 정부조차 막을 수 없었다.  

1940년 6월 26일 뉴욕 월도프 아스토리아호텔에서는 독일 상공인 대표단이 주최하는 나치 승전 축하 연회가 열렸다. GM의 간부인 제임스 무니 등 미국 대기업의 유명 인사가 참석했다. 7월 1일에는 미국 석유기업 텍사코가 뉴욕에서 축하 연회를 벌였다. 제임스 무니, 헨리 포드의 아들 에드셀 포드 등이 참석했다.  

1940년 6월은 독일이 프랑스를 정복한(6월 22일) 직후다. 나치는 1939년 9월 폴란드를 시작으로 1940년 4월 덴마크와 노르웨이, 5월 이후에는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를 차례로 정복했다. 민주주의와 자유를 수호한다는 미국의 한복판에서 미국 대기업 간부들이 참석하는 나치 승전 축하 연회가 열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미국 대기업이 제공한 군수 물자가 나치 승전에 커다란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미국 대기업에게 민주주의와 자유보다는 사업과 이윤이 훨씬 중요했음을 말해준다. 

사실 1차 대전 이후 독일은 미국의 최대 투자 대상 국가였다. 우선 독일은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330억 달러, 독일이 예상했던 액수의 2배) 갚기 위해 미국으로부터 돈을 빌려야 했다. 미국에서 빌린 돈으로 영국과 프랑스 등에 배상금을 갚아나갔다. 

히틀러 이전부터 JP모건과 체이스은행(석유 재벌 록펠러 소유)이 전담하다시피 한 독일에 대한 대출은 1920년대 비틀거리는 독일 경제를 그나마 버틸 수 있게 해주었다. 이들의 대독일 차관 업무를 전담한 것은 존 포스터 덜레스와 알렌 덜레스 형제가 임원으로 있었던 설리번 앤드 크롬웰이라는 법률회사였다. 두 사람은 아이젠하워 정부에서 각각 국무장관과 CIA 국장을 맡는다. 

1933년 이후 독일은 더욱 매력적인 투자처로 떠올랐다. 정권을 잡은 나치가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불법화하고 노동조합을 해산했기 때문이다. 자본가들이 사업하기에 최적의 상태가 된 것이다.  

앞에 말한 포드 베르케의 경우, 1935년에서 1939년 사이 이윤은 20.4배 늘어난 반면 제조원가에서 인건비 비율은 1933년 15%에서 1938년 11%로 대폭 줄었다. 나치 독일에 대한 미국 대기업의 진출이 늘어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한마디로 독일의 경제 회복과 재무장은 미국 금융기관과 대기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1929년 시작된 대공황에도 불구하고 비약적 경제 성장을 이룬 두 나라가 있다. 독일과 소련이다. 독일은 가혹한 노동자 탄압과 대대적 재무장에 의해, 소련은 국가 주도의 경제개발 계획에 의해 비약적 경제 성장에 성공했다. 1930년대 미국의 노동계급과 진보적 지식인들은 소련의 실험에 열광했고, 자본가들은 파시즘에 주목했다. 미국에서 1930년대를 '붉은 30년대(Red Thirties)'라고 부른 이유다. 

독일의 비판철학자 막스 호르크하이머는 "자본주의에 대해 말하려는 자는 파시즘에 대해 침묵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이는 파시즘이야말로 가장 사악한 형태의 자본주의라는 뜻이다. 그러나 미국의 자본가들은 노동자를 탄압함으로써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낸 나치 독일에 커다란 매력을 느꼈다. 

1933년 독일을 방문한 윌리엄 크누센 GM 회장은 "독일 경제는 20세기의 기적"이라고 칭송했다. 1939년 3월 독일을 찾은 알프레드 슬로언 GM 회장은 그 전 해 나치의 체코 수데텐란트 강제 합병을 애써 무시하면서, 독일의 전쟁 행위는 "(우리로서는) 크게 이문이 남는 것"이며 독일의 국내 정치는 "GM 경영진이 관여할 문제가 아니다"라고 선언했다. 

1935년에는 듀퐁 등 대기업의 배후 조종으로 스메들리 버틀러 장군을 국가수반으로 하는 파시즘 정권을 세우자는 쿠데타 음모가 진행되기도 했다. 그 정도로 미국 자본가들은 파시즘에 매료됐다. 

나치의 반유대주의에 영향을 준 것도 미국 기업인이었다. 히틀러는 자동차 재벌 헨리 포드가 1921년에 쓴 <국제 유대인>이란 저서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히틀러는 자신의 집무실에 포드의 초상화를 걸어놓았고, 1938년에는 그에게 독일의 최고 훈장을 수여했다. 

미국 기업인들은 히틀러 정권이 얼마나 끔찍한 정권인지를 알고 난 뒤에도 오랫동안 거래를 계속했다. 나치가 공산주의자, 사회민주주의자, 노동운동가들을 투옥, 살해하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국제결제은행(BIS)은 미국과 독일의 전쟁배상금 문제를 전담하기 만든 은행으로 1930년 스위스 바젤에 설립됐다. 이 은행은 2차 대전이 시작된 뒤에도 나치에 대한 금융서비스를 계속했다. 유럽에서 나치가 약탈한 금의 대부분이 BIS에 예치돼 적성국교역법에 의해 봉쇄됐을 현금을 나치에 조달하는 창구 역할을 했다. 모겐소 미 재무장관은 BIS 임원 14명 중 12명은 "나치이거나 나치의 조종을 받는 자"라고 지적했다.  

한편 록펠러 소유의 체이스은행은 전쟁 기간에도 나치 부역세력인 프랑스 비시정권과 거래를 계속했다. 비시 정권과 나치의 중개자 역할을 하면서 전쟁 중 수신고가 2배로 늘어났다. 

이렇듯 미국 자본가와 나치 독일은 가까웠다. 유럽에서 2차 대전이 발발한 1939년 9월 현재 250개 미국 기업이 독일에 4억 5천만 달러의 자산을 보유하고 있었고, 그중 58.5%는 상위 10개 기업이 점유하고 있었다. 투자액 비율로는 스탠다드 오일이 14%로 1위, 제네럴 모터스(GM) 12%로 2위였다. 1939년 GM, 포드의 독일 자동차 시장 점유율은 70%에 달했다. 이들은 2차 대전 발발 이후에도 전쟁 수행에 필요한 트럭, 탱크, 장갑차, 폭격기 등을 공급했다. 
 

▲ 2차 대전 당시 GM 오펠 공장에서 생산한 트럭. 나치 정부는 GM 오펠 공장에 "모범적인 전쟁 기업"이라는 명예를 부여했다. ⓒwww.opel.com


"GM이 없었다면 나치의 소련 침공은 불가능" 

포드와 GM은 한때 독일군 탱크의 절반 이상을 생산했고, 스탠다드 오일은 독일이 수입한 석유의 90% 이상을 공급했으며, IBM과 ITT 등은 전쟁 수행과 유대인 학살에 필요한 정보통신기술을 제공했다.  

일례로 나치의 소련 침공 직후인 1941년 7월, 독일의 석유 제품 수입 물량 중 미국산 비율은 44%였으나 9월에는 94%로 껑충 뛰어오른다(중립국 스페인을 통해 독일에 수입됐다). 독일 역사가 토비아스 예르작은 스탠다드 오일을 비롯해 미국 기업이 나치에 제공한 석유는 "총통을 위한 연료"라고 평가했다. IBM의 경우, 당시 홀러리스 카드천공기를 만들었는데 그게 열차 운행뿐만 아니라 유대인을 색출하고 재산을 압수하며 처형하는 등에 이용했다. 

히틀러의 전쟁 물자 담당 장관 알베르트 스피어는 "미국 기업이 제공한 합성석유가 없었다면 폴란드 침공을 꿈꾸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미국 역사가 브래드포드 스넬은 "제네럴 모터스가 없었다면 나치의 폴란드 및 소련 침공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포드, GM 등 미국 대기업이 이윤을 위해 나치에 협력했다면 나치 독일은 승리를 위해 미국 대기업과 협력할 수밖에 없었다. 

나치 정부에게 중요했던 것은 전쟁 물자를 생산하는 기업의 국적이 아니었다. 그 기업이 얼마나 많은 전쟁 물자를 생산해 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길어야 2∼3개월이면 끝날 것으로 예상됐던 소련에 대한 전격전이 실패로 돌아가고 전쟁이 길어지면서 더 많은 비행기, 더 많은 탱크, 더 많은 트럭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당시 전쟁 물자를 대량으로 생산해낼 수 있는 능력은 포드 등 미국계 기업들만이 갖고 있었다. 헨리 포드가 창안한 대량 생산 기법, 즉 '포디즘' 때문이었다. 따라서 나치의 최고 전략 기획가인 헤르만 괴링과 전쟁 물자 담당 장관 알베르트 스피어는 포드나 GM 자회사의 경영에 대한 개입을 최대한 자제했다. 그리고 두 회사는 나치 정부의 목표치를 초과하는 대량생산으로 이에 보답했다.  

이에 따라 나치 정부는 GM의 오펠 공장에 "모범적인 전쟁 기업"이라는 명예를 부여했고, 더 많은 '기업가적 자유'를 허용했다. 독일 연구자 아니타 쿠글러는 오펠이 "자신의 모든 생산 및 연구 역량을 나치에 제공함으로써 나치의 장기적 전쟁 수행 역량을 증강하는 데 기여했다"고 결론지었다. 

"미국도 독일도 IBM이 필요했다" 

그렇다면 미국 정부는 왜 이러한 기업들을 저지하거나 처벌하지 못했을까? 현대전은 산업전이다. 대기업의 도움 없이는 전쟁을 수행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진주만 기습으로 미국이 참전한 지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은 1941년 12월 13일, 루스벨트 대통령은 미국 기업의 적성국과의 사업 거래를 허용하는 특별명령을 은밀하게 발표했다. 적성국교역금지법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특별 허가를 받으면 사업 거래를 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미국 역사가 찰스 히감은 루스벨트 정부가 "전쟁 승리를 위해 석유 기업들과 함께할 수밖에 없었다"고 지적한다. 스탠다드 오일의 석유는 히틀러에게 중요한 만큼이나 미국에게도 중요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1942년 미국 정부가 적성국교역금지법에 따라 스탠다드 오일의 대독일 석유 공급을 처벌하려 했으나 극히 가벼운 처벌로 그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스탠다드 오일 측은 "우리가 공급하는 석유가 없다면 미국은 승리할 수 없을 것"이라고 큰소리쳤다고 한다. 결국 스탠다드 오일은 약간의 벌금을 내는 것으로 처벌을 면했고 이후에도 나치와 계속 거래했다.  

IBM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IBM의 정보처리 기술은 미국에게도 절실하게 필요했기 때문에 나치와의 유착을 막을 수 없었다. IBM의 나치 협력을 파헤친 역사가 에드윈 블랙은 이렇게 말한다.  

"어떤 의미에서 IBM은 전쟁보다도 큰 존재였다. IBM의 너무나 중요한 기술 없이는 미국도 독일도 전쟁을 수행할 수 없었다. 히틀러도 IBM이 필요했고 연합국 역시 마찬가지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2차 대전 당시 미국의 전쟁부장관 헨리 스팀슨은 "자본주의 국가에서 전쟁을 하려면 전쟁 수행 과정에서 기업들이 돈을 벌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기업들이 움직이려 하지 않을 것이므로"라고 말했다.  

반면 반전 평화주의자 스메들리 버틀러 장군은 전쟁을 막으려면 기업이 전쟁으로부터 이윤을 얻을 수 없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윤이 남지 않는다면 기업이 전쟁에 뛰어들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두 사람 모두 같은 얘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실제 현실에 이루진 것은 스팀슨의 견해였다.  

미국과 독일의 자본가들은 비록 전쟁 중이라 하더라도 상대방 적대 국가에 있는 자신의 자산이 "안전하게 유지되고, 적절하게 관리되며, 적대 행위가 끝나면 원상 그대로 반환될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미국과 나치 정부는 (전쟁 행위와 무관하게 자본가의 재산은 절대적으로 존중돼야 한다는) 국제 자본주의의 불문율을 준수했던 것이다.

결국 미국은 대외적으로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2차 대전에 참전했다고 했지만 사실은 돈 때문이었다. 또 반파시즘 전쟁이라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반파시즘 세력을 일관되게 억압했다.  

미국은 '민족 자결'을 억압했다 

1941년 8월 루스벨트와 처칠은 대서양헌장을 통해 전쟁이 끝난 후 피압박 민족의 민족 자결을 존중하며, 평화롭고 정의로운 세계 질서를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실상은 이와 달랐다. 미국은 자주적이고 진보적인 반파시스트 세력의 득세를 극도로 경계했다. 전후 미국의 핵심 목표인 세계의 문호 개방에 방해가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943년 1월 미국, 영국, 소련은 카사블랑카 회의를 통해 독일의 항복을 공동으로 받는다는데 합의한다. 전후 처리를 미국, 영국, 소련 합의에 의해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각국은 이때부터 자국의 전쟁 목표를 추구하면서 물밑 경쟁을 벌였다. 경쟁의 목표는 독일 수도 베를린을 먼저 점령하는 것이었다.  

또한 각국이 군사 점령한 국가의 재건을 어떻게 처리하는가도 관심의 초점이었다. 카사블랑카 합의의 정신대로 미국, 영국, 소련 합의로 할 것인지, 아니면 군사 점령한 국가의 마음대로 할 것인지가 문제였다. 나아가 대서양헌장에 명기된 '민족 자결'의 원칙이 지켜질 것인지도 곧 드러날 터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미국, 영국, 소련 합의에 의한 전후 처리는 실현되지 않았다. 미국과 영국은 자기들대로, 소련은 소련대로 자국이 점령한 지역의 전후 처리를 단독으로 결정했다. 또한 이탈리아, 프랑스, 그리스 등 피점령국 국민의 의사는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대서양헌장이 약속한 '민족 자결'은 공수표였다. 그 첫 사례가 이탈리아다.

1943년 여름, 미국과 영국 연합군은 북아프리카에서 시칠리섬을 거쳐 로마에 입성했다.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을 무너뜨리고 이탈리아를 점령한 미국과 영국의 이탈리아 처리는 피점령국 처리의 선례가 될 터였다. 그런데 미국과 영국은 소련의 참여를 배제한 것은 물론 이탈리아 반파시스트 세력을 무장 해제하고 국내 정치 참여를 철저히 막았다.

이탈리아에는 상당한 정도의 반파시스트 레지스탕스 세력이 군사·정치적으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이들의 활동은 외국인 침략자에 대한 항전인 동시에 국내 보수 세력에 맞선 내전이기도 했다. 전통 엘리트, 즉 왕가와 군, 대지주, 은행가, 기업가, 그리고 교황청 등은 1922년 무솔리니의 집권을 도왔고 그로부터 커다란 혜택을 입은 세력들이었다. 레지스탕스는 이들 보수 세력을 권력에서 몰아내려 했다. 레지스탕스의 활동은 대중의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었다. 이들은 전후 이탈리아의 재건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고자 했다.

'무솔리니 없는 파시즘' 

그러나 미국과 영국은 반파시스트 세력과 협력하는 것을 일체 거부했다. 미국과 영국이 보기에 이들의 지향이 너무도 급진적이었기 때문이다. 반파시스트 안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중요한 역할을 맡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이들의 압도적 다수가 왕정 폐지를 비롯해 사회, 정치, 경제 분야의 급진적 개혁을 원했다.  

특히 처칠은 알프스 너머 유럽 대륙에서 급진적 개혁이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했으며 반파시스트 세력을 소련의 볼셰비즘과 동일시했다. 이탈리아 레지스탕스의 요구를 이탈리아의 공산화로 본 것이다.  

결국 이탈리아 레지스탕스는 무장 해제되고 정치적으로 무력해졌다. 이탈리아 국민의 소망과 기대, 반파시스트 세력의 열정과 능력은 전후 이탈리아 복구에 전혀 반영되지 않은 것이다. 그 대신 미국과 영국은 이탈리아 왕가와 군, 대지주, 은행가, 기업가, 교황청 등과 협력했다. 이들은 무솔리니에게 협력한 대가로 커다란 혜택을 입었던 세력으로 대다수 국민들의 미움을 사고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 미국과 영국은 전쟁 이전 이탈리아의 구질서를 복원했다.

미국과 영국의 점령 이후 최초의 이탈리아 지도자는 무솔리니의 부역자였던 바돌리오 원수였다. 이에 대해 이탈리아 국민은 '무솔리니 없는 파시즘'이라고 개탄했다. 무솔리니만 사라졌을 뿐, 과거의 억압적 구질서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편 미국은 시칠리아 등의 마피아를 '반공의 보루'로 칭찬하면서 이들과 결탁했다. 이른바 마피아 작전(Operation Mafia)이 그것이다. 뉴욕의 전설적 갱 럭키 루치아노와 에드거 후버 FBI 국장이 한통속이 돼 미국에 적대적인 정권의 전복 공작 등을 추진했다. 

미국 정보기관과 국제 범죄 조직이 마약 거래를 중심으로 비밀공작을 펼치는 것은 이후 현재까지 미국 대외 정책의 비밀스런 전통이 됐다. 미국은 카스트로 암살 시도, 니카라과 산디니스타 전복 공작 등 의회 승인을 받을 수 없는 CIA의 불법적 반혁명 공작에 필요한 자금을 국제 범죄 조직의 마약 거래 대금으로 충당했다.  

프랑스에서는 어땠는가? 미국과 영국은 1944년 8월 프랑스를 해방시켰다. 이탈리아는 미국과 영국의 교전 상대국이었던 반면 프랑스는 어엿한 연합국의 일원이었다. 런던으로 망명한 드골 장군이 자유 프랑스를 대표하고 있었다. 따라서 프랑스를 이탈리아처럼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다. 한편 프랑스 본국에는 나치에 부역한 페탱 원수의 비시 정권이 레지스탕스들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프랑스 레지스탕스는 1944년 3월 '레지스탕스 헌장'을 발표하면서 전후 프랑스의 급진적 개혁을 꿈꾸고 있었다. 페탱과 드골은 매국노와 애국자라는 차이가 있었지만 둘 다 보수적이었다. 반면 레지스탕스는 급진적이었다. 레지스탕스는 페탱을 경멸했고, 드골은 지나치게 권위주의적이며 보수적이라고 보았다. 레지스탕스 내에서 드골 추종자는 극소수였다. 

전후 프랑스에 대해 미국과 영국은 서로 다른 구상을 갖고 있었다. 2차 대전으로 과거 대영제국의 위상을 잃고 작은 섬나라로 전락한 영국의 처칠은 전후 드골의 프랑스와 함께 미국과 소련에 맞설 수 있는 독자적 유럽 세력의 구축을 구상했다. 반면 루스벨트는 드골이나 레지스탕스보다는 페탱과 협력하는 것을 선호했다. 레지스탕스는 원천적으로 협력이 불가능한 상대였고, 드골은 처칠의 하수인(전후 프랑스가 미국보다는 영국에 기울 것을 우려)으로 보았던 것이다.  

미국은 나치의 프랑스 점령 후(1940년 6월)에도 비시 정권과 외교 관계를 단절하지 않았다. 미국과 비시 정권의 외교 관계가 단절된 것은 1941년 11월 비시 정권에 의해서였다. 미국의 전쟁 목표는 1차 대전으로 산산조각이 난 세계 경제를 다시 한 번 단일한 자본주의 체제로 통합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미국에 고분고분하고 보수적인 인물이 프랑스 지도자로 적격이었다. 페탱을 선호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미국은 드골의 집권을 막기 위해 드골을 마다가스카르 총독에 임명하자고 영국에 제의하기도 했다.

북아프리카 상륙 후 미국은 비시 정부가 임명한 현지 총독 프랑수아 다를랑과 휴전 협정을 체결하려 했다. 드골은 격노했고, 미국 내에서도 나치 부역자와 협정을 체결하는 것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때마침 다를랑이 알지에에서 암살되면서 이 문제는 흐지부지됐다. 드골파의 소행으로 추정된다.  

미국은 결코 드골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그를 지도자로 인정했다. 당시 전쟁부 장관 헨리 스팀슨은 자신의 일기에 드골에 대해 "잘난 체하는 데다 야망만 많은 속 좁은 인물"이라고 썼다.  

그러나 드골은 첫째 다를랑과 같은 비시 정권 부역자가 아니었고, 둘째 레지스탕스 세력처럼 급진적인 사회경제 개혁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즉 애국자인 동시에 보수파라는 점에서 미국이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전자는 프랑스 국민에게, 후자는 미국과 영국에 필요한 것이었다.  

스팀슨은 "드골은 나쁘다. 하지만 그 외의 선택은 더 나쁘다"고 실토했다. 특히 프랑스 공산주의자와 좌파가 소련과 관계 강화 움직임을 보이면서 이를 차단해야만 했다. 드골 외에 다른 대안은 없었다. 미국 역사가 가브리엘 콜코는 "프랑스를 좌파로부터 구해낼 누군가가 필요했다", "미국은 드골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공산주의자를 훨씬 더 싫어했다"고 말한다. 1944년 10월 23일, 미국은 드골을 프랑스 정부의 합법적 지도자로 인정했다.

연합국이 파리를 해방하기 수일 전, 레지스탕스는 자력으로 파리를 탈환하겠다는 목표 아래 무장 봉기했다가 나치 독일에 의해 엄청난 인명 피해를 본다. 며칠만 기다리면 이루어졌을 파리 해방을 위해 레지스탕스가 무모한 봉기를 일으킨 이유는 무엇인가. 

미국과 영국이 보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드골을 지도자로 내세울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자신들의 힘으로 파리를 장악한다면 전후 프랑스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특히 프랑스는 중앙집권적 국가라는 점에서 수도 장악은 정치적 영향력과 직결될 수 있었다. 그러나 레지스탕스의 봉기는 허망한 실패로 끝났다. 

영국 역사가 A. J. P. 테일러는 드골의 집권에 대해 "단 한 번도 전투를 하지 않은 장군, 단 한 번도 선거를 치르지 않은 정치인"인 드골이 전후 프랑스의 권력을 잡았다고 지적했다.

파월은 "드골이 레지스탕스의 정치적 영향력을 일정 부분 인정하고 상당한 정치적 개혁을 했지만, 그가 아닌 급진적 정부가 들어섰다면 레지스탕스 헌장에 제시된 더 급진적 개혁이 현실화됐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어 "이탈리아와 프랑스 해방 후 미국과 영국의 행동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해방자는 해방된 국민들 스스로 민주주의를 회복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한다는 보편적 원칙(대서양헌장의 민족 자결의 원칙)에 어긋나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이탈리아, 프랑스의 피해는 그리스가 당한 것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그리스 레지스탕스는 이탈리아 및 독일 파시스트에 대한 피어린 항쟁의 결과로 전후 집권 가능성이 매우 높았지만, 처칠과 스탈린의 밀약에 의해 처참한 패배를 당했기 때문이다.

1944년 10월 처칠은 모스크바에서 스탈린과 비밀 협상을 벌인다. 1944년 6월 노르망디에 상륙한 미국과 영국 연합군은 그해 9월 라인강 도하를 위한 마켓 가든 작전(Operation Market Garden)에 실패함으로써 베를린 점령을 놓고 소련과 벌이던 경쟁에서 극히 불리한 입장에 처하게 된다. 처칠은 발칸반도를 비롯한 동유럽에서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 몸소 모스크바까지 날아간 것이다.  

이 비밀 협상에서 양측은 헝가리, 루마니아, 폴란드 등은 소련의 세력권(소련이 90퍼센트), 그리스는 영국의 세력권(영국이 90퍼센트)으로 하고, 유고슬라비아에 대해서는 50 대 50으로 동등한 영향력을 행사하기로 합의한다. 

이 비밀 합의에 따라 영국은 전쟁이 끝난 이후 그리스 내전에 개입한다. 그러나 전쟁으로 피폐해진 영국의 경제력과 군사력으로는 더 이상 그리스 우파를 지원할 수 없게 되자, 영국은 미국에 SOS를 쳤다. 이에 따라 미국이 영국을 대신해 그리스 내전에 개입하게 되는데, 이때 바로 냉전의 공식적 기원으로 얘기되는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된다(1947년 3월). 핵심은 국제 공산주의의 음모에 의해 자유를 빼앗기게 된 그리스 국민을 위해 그리스에 경제적, 군사적 지원을 하겠다는 것이다.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스탈린은 처칠과 맺은 밀약을 '충실히' 지켜 그리스 내전에 일체 개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그리스 레지스탕스는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은 우파에게 패배했고 이후 그리스는 군부 독재 등 숱한 고난을 겪게 된다. 결국 그리스는 미국, 영국, 소련 등 강대국 간 흥정의 희생자가 된 것이다. 그리스의 고난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국제 문제에 개입한다는 미국의 주장이 얼마나 위선적인 것인가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2편에서 계속됩니다.)  

 

 

서울대학교를 나와 경향신문에서 워싱턴 특파원, 국제부 차장을 지내다 2001년 프레시안을 창간했다. 편집국장을 거쳐 2003년부터 대표이사로 재직했고, 2013년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면서 이사장을 맡았다. 남북관계 및 국제정세에 대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연재를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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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을 읽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9/01/13 10:11
  • 수정일
    2019/01/13 10:11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헌법을 읽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
 
 
 
김용택 | 2019-01-11 10:34:01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대한민국 헌법 한 번 읽어보셨습니까?”

‘우리헌법읽기국민운동(법)’ 회원이 손바닥 헌법책을 홍보하면서 건네는 말이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든지 간다. 가서 이렇게 홍보하다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이게 우리나라 헌법책입니다. 전문과 본문 130조 부칙 6조를 다 읽는데 1시간도 안 걸입니다.” “한 권에 500원에 보급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주머니를 뒤져 1000원을 내고 한권을 가져 가시거나 5천원 혹은 1만원을 내고 “참 좋은 일 하십니다”하며 인사까지 하고 가는 분들도 있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살다 삶을 마치는 국민이 자신이 한평생 살아 갈 나라의 헌법을 모른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우리나라 이름이 왜 대한민국인지 대한민국의 주인이 누구인지 주인이 어떤 권리를 가지고 있는지… 모르고 산다는 것 비극 중의 비극이다. 구체적인 통계를 내 본 일은 없지만 대한민국 모든 국민이 대한민국 헌법 전문과 본문 그리고 부칙을 다 읽어 본 사람이 몇 %나 될까? 아마 짐작건대 10%도 되지 않을 것 같다. 물론 초․중등 교과서에 헌법이 나오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교과서에 나오는 헌법은 전문(全文)이 아니라 주권자인 국민에게는 ‘평등권, 자유권, 사회권, 청구권, 참정권’과 같은 권리가 있고 ‘교육, 근로, 납세, 국토방위, 재산권 행사의 환경 보전의 의무’가 있다는 것을 배우는 정도다. 이것도 시험에 대비해 암기해 기억하는 관념적인 지식일뿐 권리와 의무는 양면성을 지닌 상대적인 관계로 국가가 이를 이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의무라는 사실을 강조하지 않는다. 마치 평생 노동자로 살아 갈 청소년들에게 노동 3권이나 근로기준법을 가르쳐 주지 않듯이 말이다.

왜 학교는 헌법교육을 제대로 시키지 않을까? 왜 헌법재판소는, 왜 정부는 헌법교육을 제대로 시키지 않을까? 주권자가 주인의식, 민주의식을 가진 똑똑한 국민이 되면…? 군사정권이나 독재 권력은 주권자들에게 헌법을 가르치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더구나 정경유착 정권, 친부자 정부는 내일의 주인공들에게 국정교과서를 통해 유신이나 자본의 논리를 정당화 한다. 독재정부는 주권자인 국민이 역사의식이나 민주의식, 비판의식을 가지면 설 곳이 없어진다. 그래서 가르쳐 주는 것만 배우게 하고 정직, 근면 검소’의 순종이데올로기를 체화시켜 왔다.

국민이 깨어나는 것을 반기지 않은 정부는 철학교육을 통해 판단능력을 길러주거나 헌법을 제대로 가르쳐 주인의식, 민주의식을 심어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의도적으로 외면해 왔다고 해야 옳다. 헌법을 알고 민주의식, 주권의식을 가진 국민들이 사는 나라에 유신헌법을 만들 수 있겠는가? 국정교과서를 만들 수 있겠는가? 헌법을 가르쳐도 단편적으로 관념적으로 또 지식으로서 헌법을 가르치면 국가주의 헌법보다 국민주의 헌법을 만들자고 할 것이고 우리나라 헌법보다 독일헌법이나 남아프리카 공화국 헌법과 같은 헌법을 만들자고 요구하지 않겠는가?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런데 현행 헌법은 학살자 전두환이 유신헌법의 아류인 간선제의 제 5공화국 헌법을 만들어 이를 수호하려다 유월항쟁을 만난다. 위기에 처하자 후계자 노태우가 다급해 만든 게 현행 헌법이다. 유신헌법이나 제 5공헌법에 비해 상당부분 진일보한 것은 사실이지만 30년이 지난 늙은 헌법에 각계각층의 주권자들의 의지가 반영되지 않는 한계를 안고 있다. 특히 현행헌법은 제왕적 대통령이라고 불리는 대통령제의 권한 집중을 비롯해 건강권, 주거권, 노인, 청소년, 장애인의 주체적 지위 보장, 선거연령 하한등 주권보장을 위한 불완전한 직접 민주주의제를 보강해야 한다.

헌법은 국민교육헌장처럼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지고 국가는 나와 모든 나인 우리에게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행복추구권’을 보장해 줄 의무를 함께 지고 태어난 존재라는 것은 보증한 문서다. 그것도 어린이나 노약자 혹은 장애인과 같은 사회적 약자가 제외된 것이 아니라 ‘모든 국민’이 당연히 누릴 권리라는 것을 선언한 헌장이 곧 헌법이다.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하며, 평등하다. 모든 사람은 인종, 피부색, 성, 언어, 종교 등 어떤 이유로도 차별받지 않으며, 이 선언에 나와 있는 모든 권리와 자유를 누릴 자격이 있다.” 이 헌장은 유엔총회가 제정한 세계인권선언이기도 하지만 국가가 국민을 위해 존재한다는 헌법 정신이기도 하다. “모든 사람은 자기 생명을 지킬 권리, 자유를 누릴 권리, 그리고 자신의 안전을 지킬 권리”가 있지만 가난하다는 이유로 못 배우고 못났다는 이유로 차별받고 홀대 받아서는 안된다는 선언이다. 국가는 주권자인 국민들에게 헌법을 알게 하고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요구할 수 있도록 헌법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국민을 우민화시키는 정부는 국가가 해야 할 책무를 이행하지 않는 나쁜 정부다.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30&table=yt_kim&uid=8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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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 300명 이상은 위헌이다? 그 주장이 틀린 이유

[주장] 선거제 개편으로 촉발된 국회의원 증원 논란... 헌법, 의석수 상한선 정한 적 없어

19.01.12 19:44l최종 업데이트 19.01.12 19:44l

 

정치개혁 제1소위 참석한 심상정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 심상정 위원장과 자유한국당 정유섭 간사, 더불어민주당 김종민 간사, 바른미래당 김성식 의원 등이 18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정치개혁특별위원회 정치개혁 제1소위에서 선거제도 관련 주요쟁점을 논의하고 있다.
▲ 정치개혁 제1소위 참석한 심상정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 심상정 위원장과 자유한국당 정유섭 간사, 더불어민주당 김종민 간사, 바른미래당 김성식 의원 등이 지난 2018년 12월 18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정치개혁특별위원회 정치개혁 제1소위에서 선거제도 관련 주요쟁점을 논의하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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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제도 개편이 새해 벽두부터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지난 2018년 12월 15일 여야 5당은 선거제도 개편안을 올해 1월 안에 합의 처리하기로 약속했다. 바른미래당과 민주평화당이 선거제 개편 없이 예산안을 처리할 수 없다면서 장외투쟁을 이어가자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합의 처리를 약속했던 것이다. 그 후 여야가 여러 차례 만나면서 논의를 전개하고 있지만 치열한 수 싸움만 이어갈 뿐 제자리걸음이 계속되고 있다. 선거제 개편에 따라서 각 정당이 이해관계를 달리하기 때문이다.

지난 7일에도 문희상 국회의장 주재로 5당 대표가 만나 선거제 개혁과 관련한 논의를 계속했다. 이 자리에서도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은 구체적 입장을 밝히지 않았지만, 바른미래당과 민주평화당, 정의당 등 야 3당은 선거제 개편을 한 목소리로 촉구하며 민주당과 한국당을 압박하고 나섰다.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는 "연동형 비례대표제 논의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고 있다", "국회의원 세비를 동결하고 특권을 내려놓는 등 대안이 있으니 당 의석수 증원에 집중하지 말고 국회가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정치제도를 바꾸자는 주장"이라고 말했다. 이어 정동영 민주평화당 대표도 "올해는 당리당략을 초월해 선거개혁을 할 수 있는 적기"라며 "의석 정수는 부수적 문제"라고 거들었다.

그러던 중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정개특위) 자문위원회가 지난 9일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하고 국회의원 정수를 360명으로 증원하는 내용을 담은 선거제도 개혁 방안을 제안했다. 정개특위 자문위는 "현행 선거제도의 가장 큰 문제점은 국민의 의사(지지율)와, 선거 결과로 나타나는 의석수의 괴리가 매우 심각하다는 점", "현 제도 특성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 비례성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은 연동형 비례대표제"라고 제안 이유를 밝혔다.

또한 자문위는 "국회 역사를 보더라도 국회의원 1인이 대표하는 인구수는 현 20대 국회가 제일 많다"며 "연동형 비례대표제 채택을 고려할 때 국회의원 수는 360명 규모로 증원하는 것이 적정하다"라고 주장했다.
 

선거제도 개혁 다짐한 손학규-정동영-이정미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와 정동영 민주평화당 대표, 이정미 정의당 대표 등이 2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정론관에서 열린 정치개혁특위 구성 촉구 및 연내 선거제도 개혁 결의 정당-시민사회 공동기자회견에 참석하고 있다.
▲ 선거제도 개혁 다짐한 손학규-정동영-이정미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와 정동영 민주평화당 대표, 이정미 정의당 대표 등이 지난 2018년 10월 2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정론관에서 열린 정치개혁특위 구성 촉구 및 연내 선거제도 개혁 결의 정당-시민사회 공동기자회견에 참석하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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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은 '200인 이상'만 말하고 있을 뿐 

 

소수정당들은 득표율에 따라서 당선자 수를 정하는 방안이 민의(표심)를 제대로 반영하는 것이라며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을 주장한다. 또, 무엇보다 그렇게 해야 자신들이 교섭단체가 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반면 거대정당인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은 교섭단체가 여럿일 경우 자신들의 의회 장악력이 줄어든다는 점을 고려한다.

그런데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은 의원 수를 늘리거나, 아니면 지역구 의원수를 줄이는 방법으로 비례대표 의원수를 늘려야 비로소 가능하다. 급기야 국회의원 정수를 300명 이상으로 늘리는 문제와 관련하여 정개특위 소속 자유한국당 일부 의원들은 위헌 가능성을 언급하며 부정적 입장을 내비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소속 의원들은 위헌성 여부를 공개적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의원수를 늘리는 데 있어서는 자유한국당과 마찬가지로 부정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정개특위 자문위원의 제안처럼 의원수를 360명으로 늘리는 것이 과연 위헌적 요소가 있는지 살펴보자. 먼저 지난 8일 김재원 자유한국당 의원은 "의석수를 늘리는 것은 헌법상 문제가 있다, (위헌성을) 제대로 판단하고 가야 한다"고 말했다.

즉, 헌법상 의원수에 대한 상한선이 적혀 있지 않다고 해서 의석을 마음대로 늘릴 수 있는 건 아니라는 입장이다. "(헌법상 하한선 규정은) 200석이 299석으로 과도하게 해석된다고 하더라도 299석이 한계선이며 300석은 위헌이라는 주장이 있다"는 요지다. 위헌성을 주장하면서도 위헌의 근거는 명확하게 밝히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국회의원 정수에 대한 우리 헌법은 '국회의원의 수는 법률로 정하되, 200인 이상으로 한다'고 규정할 뿐이다(헌법 제41조 제2항). 그리고 공직선거법에서는 국회의 의원정수라는 제목 아래 '국회의 의원정수는 지역구국회의원과 비례대표국회의원을 합하여 300명으로 한다'고 규정한다(제21조 제1항).

결국 우리 헌법이나 공직선거법의 규정은 국회의원 정수의 하한선을 규정하고 있을 뿐 상한선에 대하여는 언급이 전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국회의원 정수를 정하는 것은 200인 미만으로 할 경우에는 헌법개정이 필요하지만 200인 이상의 범위에서 몇 명으로 정할 것이냐의 문제는 입법 정책의 문제로 국회의 재량 사항인 셈이다.
 
 선거
▲  선거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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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만큼 늘리는지'보다, '꼭 늘려야 하는지'가 먼저  

그렇다면 국회의원 정수를 무한정으로 늘리는 것은 어떨까? 아무리 상한선이 없다고 하더라도 지나치게 많은 수의 국회의원을 뽑는 것은 헌법이 추구하는 대의제의 적정성을 침해할 우려가 있다.

우리나라의 국회의 기능이 어떤 것들인지, (인구수를 포함하여) 외국의 국회의원수와 비교했을 때 타당한지의 여부, 국민들이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국회의원수 등을 고려해서 적정한 수에 그쳐야 하는 것이다. 결국 상한선에 대한 규정이 없다고 하더라도 국회의원 정수를 갑자기 2배수, 또는 3배수로 지나치게 늘리는 것은 과잉금지의 원칙에 위반되어 위헌이 될 수도 있다.

정개특위 자문위가 제안한 국회의원 정수 360명은 헌법의 규정에 위반되는 것도 아니며, 과도하게 의원정수를 늘리는 것으로 보기 어렵다. 따라서 위헌성의 요소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 헌법학자들의 기본적인 입장도 200명 이상의 범위 내에서는 국회의원 정수를 늘리더라도 헌법에 위반되지 않는 것으로 해석한다. 사실 헌법 교과서에서 논의조차 되지 않고 있을 만큼 명백한 사항이다.

참고로 2012년 2월 29일 법률 재11374호로 개정된 공직선거법 부칙 제3조가 헌법에 위반되는지의 여부가 헌법소원 심판의 대상이 됐다. 이에 대하여 헌법재판소는 "헌법 제41조 제2항에 의하면 '국회의원의 수는 법률로 정하되, 200인 이상으로 한다'라고 규정하고 있으므로 국회 의원정수의 결정은 헌법개정사항이 아니라 입법사항이라 할 것이다(헌법재판소 2012. 4. 10. 선고 2012헌마194 결정)"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의원정수를 360명 정도로 늘리는 것이 위헌성이 없다고 해서 의원정수를 늘리는 것이 타당하다는 주장은 아니다. 의원수를 정함에 있어서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돼야 한다. 국민의 신뢰를 바탕으로 열심히 일하는 국회, 그래서 의원수가 부족하다는 여론이 형성됐을 때 늘리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지난 2일 KBS가 발표한 여론조사에서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에 대한 의견'을 묻자 응답자의 46.4%(매우 동의, 대체로 동의)가 동의한다고 답했다. 반면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으로 인한 국회의원 의석수 증가에 대한 의견'을 묻는 질문에는 국민의 79%가 반대한다고 답했다(한국리서치 조사, 전국 만 19세 이상 남녀 1000명, 2018년 12월 28일~29일, 유·무선 전화면접, 응답률 : 12.9% 표본오차 : ±3.1%p (95% 신뢰 수준),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고). 국민을 위해 일한다는 신뢰가 아직 부족하다는 이야기다.

사실 국회의원의 수를 늘리면 무엇보다 정당의 힘이 그만큼 커진다. 정당 지도부의 영향력이 증가하게 된다. 우리 정당법에서는 정당의 민주적 운영을 강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정당이 민주적으로 운영되지 않고 있다고 본다.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정당이 특정계파의 사당으로 전락해서 운영된다면 국민의 세금이 투입되어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게 된다. 결국 의원정수를 늘리는 문제는 정당의 민주적 운영이 담보되고, 국회가 국민들의 신뢰를 회복한 다음에 추진해야 할 일이라고 판단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김정범씨는 법무법인 민우 소속 변호사,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겸임교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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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로 사는 이유

공동체로 사는 이유

조현 2019. 0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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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표지-.jpg 몇년 전 브루더호프공동체인 미국 우드크레스트에 딸과 함께 머물며 그들이 ‘공동체로 사는 이유’를 가슴으로 공감했다. 자본주의적 신자유주의와 디지탈 가공 세계의 쓰나미가 세상을 삼키고 있는 와중에서 브루더호프는 노아의 방주처럼 느껴졌다.
 한국에선 신앙은 신앙이고, 삶은 다른 문제일 뿐이라고 여겨 신앙을 그저 삶의 액세서리 정도로 여기는 이들이 적지않다. 자본주의적 신자유주의에 대한 순응, 또 신앙과 삶의 이분화를 당연시하는 풍토가 지배적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우드크레스트에서 지내면서도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삶과 신앙의 일치였다. 에버하르트 아놀드의 손자로 브루더호프의 장로였던 크리스토프 할아버지를 비롯한 형제들과 지내는 동안 공동체라는 것이 어떤 교리나 명제가 아니라 가슴에서부터 나오는 따사로움과 눈빛, 연민, 자애, 하나됨이나 노동과 실천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 느껴졌다. 더욱 인상적인 것은 그들이 쓰나미에서 자신들만이 안전한 방주에 피신했다는데 자족하지 않고, 시리아와 네팔 등 재난으로 가장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형제들을 파견해 그들과 함께 하는 모습이었다. 자신들끼리만의 행복한 공동체에 그치지않고, 지상 공동체를 위해 소명을 다하려는 고군분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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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루더호프 공동체 창시자로 이번에 발간된 <공동체로 사는 이유>(비아토르 펴냄·김순현 옮김)의 저자인 에버하르트 아놀드(1883~1935)의 정신이 살아있는 것이다. <공동체~>는 아놀드가 1925년 <치커리>라는 잡지에 ‘고백’이란 제목으로 발표한 글이다. 책으로 엮기엔 아주 짧은 글인데, 이 글에 대해 가톨릭 트라피스트 수도회 소속 신부이자 20세기 가톨릭의 대표적 영성가의 한명으로 꼽히는 토마스 머튼(1915~1698)이 해설을 썼다. 
 아놀드는 1920년 작가로서 장래가 보장된 직업과 베를린의 중 상류층의 특권을 버리고 가족과 함께 독일 중부 지방의 작은 마을인 자네르츠로 옮겨 산상수훈을 바탕으로 한 공동체를 세워 장애인과 고아 등을 돌봤다. 히틀러의 전쟁과 살육, 폭력에 반대하다 박해를 피해 피신중 부상을 입고 수술을 받다가 사망한다. 그 이후 브루도호프 공동체원들은 영국으로 피신해 영국에 브르더호프를 설립했고, 브루더호프 공동체는 전세계 20여곳의 공동체에서 무소유와 비폭력, 사랑의 삶을 실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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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놀드는 ‘왜 공동생활인가’란 제목의 글에서 “모든 생명은 공동체로 존재하며 공동체를 근거로 삼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공동체로 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밝혔다. 아놀드는 공동체 건설의 핵심을 ‘믿음’으로 보았다. 그가 말하는 믿음이란 맹자의 성선설과도 통한다. 즉 욕망과 감정에 부초처럼 표류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 아니라 진리와 사랑이라는 것이다. 그는 ‘믿음’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믿음은 인간을 사회적 관습이나 결점에 의거하여 평가하지 않고, 배금주의와 비열함과 흉악함으로 얼룩진 인간 사회의 이 모든 가면이 거짓임을 꿰뚫어 본다. 그러나 믿음은 인간 개성의 현저한 사악함과 변덕스러움이 인간 본래의 결정적 속성이라도 되는 듯이 말하는 다른 견해에도 속아 넘어가지 않는다. 인간은 하나님 없이 자신의 현재 본성만으로는 공동체를 이룰 수 없다. 감정의 기복과 동요, 육체적·심리적 만족을 탐욕스레 추구하는 성향, 신경과민과 야망의 심리적 동인, 타인에 대한 영향력 추구, 인간의 모든 특권은 진정한 공동체 건설을 막는 장애물이지만, 인간은 이를 극복할 수 있다. 믿음은 이런 탐욕적 성향과 성격적 결함이라는 사실적 여건이 결정적인 것이라도 된다는 듯이 말하는 허구에 굴하지않는다. 그것들은 하님의 능력과 모든 것을 극복하는 그 분의 사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이 현실보다 강하시다. 공동체를 건설하는 힘인 그분의 영이 모든 것을 이겨 낸다. 여기서 분명해지듯이, 궁극적 능력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진정한 공동체의 형성과 공동생활의 실질적 구축은 배제되고, 아무리 성가셔도 인간 안에 실제로 존재하는 선이나 법의 강제력을 신뢰하려고 하는 인간의 노력은 악의 실재에 부딪혀 좌절할 수 밖에 없다.”
 아놀드는 “선의 궁극적 신비에 대한 믿음, 곧 하나님에 대한 믿음만이 여기서 말하는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우리는 공동체로 살아야 한다”며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공동체 생활의 시도를 통해서만, 거듭나지 못한 인간이 얼마나 무력한 삶을 영위하는지, 어떻게 하나님이 삶에 영향을 미치는 능력, 즉 공동체를 형성하는 능력이되시는지를 분명히 알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공동체야 말로 사회·정치 문제에 대한 해답”이라면서 “자유와 일치, 인류 평화와 사회 정의를 옹호하는 모든 이들과 함께 하지만 무자비한 수단을 동원해 정반대의 집단들에게 상처를 입히려는 투쟁은 함께하지않고, 오직 행동과 말을 일치시키는 단 하나의 무기인 사랑만으로 오늘의 타락한 상황에 맞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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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해설한 영성가 토머스 머튼 신부는 ‘공동체에는 개인의 성취와 친목 그 이상의 것이 있다”고 밝혔다. 토머스 머튼은 한 번도 다툰 적이 없이 사막의 교부 두 사람이 ‘우리도 한 번 다투어 보자’고 ‘다투기 위해서는 소유욕 곧 무언가를 독점해 다른 이가 가지지 못하게 하는데서 비롯되니 주위에 있던 벽돌 두 개를 놓고 다투기로 해보자’고 한 일화를 소개했다. 일화에서 한 교부가 ‘이건 내 벽돌이요’하자 다른 교부는 ‘그래요, 형제님, 그게 형제님 벽돌이면, 형제님이 가지세요’하는 것으로 끝이난다.
 토머스 머튼은 “사람들이 다투는 이유는 그들이 사람보다 재물을 더 좋아하기 때문”이라며 “재물을 초탈한 상태, 곧 청빈이 중요한 이유는 물질의 방해를 받지 않아야 사람을 좋아할 수 있기 때문이고, 이것이야말로 모든 문제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토머스 머튼은 “우리가 사랑하고 헌신해야할 사람이 우리가 함께 사는 사람들만이 아니다”고 한다. 그는 “우리는 곧잘 우리가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들만을 우리의 이웃으로 여기곤 하는데, 이는 사랑해야 할 사람들이 더 있음을 알지 못해서”라며 “우리는 다른 사람들도 사랑해야 하고, 공동체는 우리 자신의 공동체 너머로 확장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또 “공동체의 기초는 민족성도 계급도 아니다”면서 “그리스도께서 이 모든 차별이 만들어낸 적대 행위를 십자가 위에서 온몸으로 무효화하셨기에 우리는 차별하는 사람보다 더 큰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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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에도 브루더호프처럼 고군분투하는 밝은누리공동체와 은혜공동체, 오두막공동체, 민들레공동체, 사랑마을공동체 등 기독교공동체들이 있다. 그러나 한국에선 그런 공동체적 고군분투는커녕 인간 자체를 귀찮아하며 함께 하기를 거부하는 문화가 대세로 빠르게 자리잡고 있다. 가장 효율적으로 계란을 생산하기 위해 A4용지 한장 크기의 케이지에 갇힌 양계용 닭들처럼 우리도 서로에게 철망을 치고 스스로 케이지에 갇혀 스마트폰으로만 소통하는 모습은 ‘나’보다 ‘우리’가 익숙했던 한국사회에서 불과 반세기 전만해도 상상도 할 수 없던 상황이다. 한국은 이제 전세계에서도 디지털 의존도가 가장 높아 어느 곳에서나 스마트폰에만 코를 박고, 가까이에 가족과 동료들이 있어도 하나같이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느라, 인간과 인간의 접촉이 줄어드는 매트릭스 세계로 빠르게 전환되어가고 있다. 전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혼인율과 출산율은 떨어지고, 1인가구 비율은 가장 빨리 상승하며, 초고령화는 가장 빨리 진행되고 있다. 거대자본에 의해 조종되는 매트릭스에 의해 공동체는 뿌리부터 뽑혀나가고 있다.
 그러나 인간과 인간이 멀어질수록, 창조질서가 맘몬의 지배 질서로 바뀔수록 원래의 에덴동산을 회복하려는 갈망도 커지게 마련이다. 더구나 한국 기독교에는 다행히 아직까지는 그런 희망을 모아 현실적 방주들을 수백개, 수천개라도 만들어낼 수 있는 많은 크리스천들과 신앙의 열정이 있다. 한국기독교는 구한말과 일제의 어둠 속에서 한민족 공동체를 위해 인도주의적 봉사와 교육과 시민사회에서 횃불을 들었던 역사가 있다. 그런 초기 기독교인들의 정신을 잃어버리고, 이제 맘몬에 순종하는 기로에 서있지만 말이다. 그 한국 기독교가 이 <공동체로 사는 이유>를 통해 다시 깨어나 위기의 민족공동체를 위해 다시 한번 횃불을 들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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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밝음은 어둠 속에서 나온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 사회가 세계 어느 곳보다 공동체성의 붕괴로 자살율과 존속살해율, 노인 빈곤율이 가장 높을만큼 어둠이 깊기에 역설적으로 공동체운동의 찬란한 횃불이 타오를 수 있는 최적의 여건이기도 하다. 
 인도의 시성 타고르가 <동방의 횃불 코리아>에서 노래했듯, ‘마음에는 두려움 없고, 머리는 높이 쳐들린 곳, 지식은 자유스럽고, 좁다란 담벽으로 세계가 조각 조각 갈라지지 않는 곳’인 그런 코리아는 정부나 거대 자본에 의해 만들어지는게 아니라 씨알들이 만들어낼수 있다는 믿음으로 서로 응원하고 위로하고 의지하고 사랑하고 도우며 우리 함께 ‘공동체로 사는 이유’를 만들어갔으면 한다.

 

*사진들은 부르더호프 공동체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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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시대가 래(來)하도록 우리가 희망을 만들어야 한다"

[새해 인터뷰] 민플러스가 만난 진보(1) 한국진보연대 박석운 상임대표
2019년은 한국사회에서 중요한 분기점이다. 남북-북미관계가 평화번영통일의 길로 확고히 넘어가는 분기점이다. 또한 문재인 정부가 중립화되는 가운데 과거수구세력이 재등장하는가, 미래세력이 올라오는가의 지점이 갈리는 분기점이다. 진보내부에서도 이에 대한 진단과 처방이 조금씩 다를 수 있고 방법론상의 차이도 있을 수 있다. 이에 신년을 맞이하여 주요 진보진영 대표자들의 인터뷰를 싣는다. 인터뷰 내용이 본사의 입장과 똑 같지는 않다. 그러나 진보운동을 진두에서 이끌어 가는 분들의 고민과 구상, 고언을 들어보는 의미있는 공간이 될 것이다. [인터뷰:김장호 편집국장, 정리:선현희 기자 / 편집자 주]

 

▲ 한국진보연대 박석운 상임대표

- 격동의 2018년 무술년이 지나갔습니다. 촛불의 견지에서 2018년을 돌아본다면 어떻습니까?
"2018년은 촛불항쟁 이후 촛불정부의 역주행이 시작되었습니다. 작년 이맘 때, 즉 2018년 초만해도 적폐청산과 사회대개혁에 대해서 우리 민중들의 기대가 있었지요. 그런데 봄과 여름을 지나면서 최저임금 산입범위 개악, 은산분리 확대라든지 이런 개혁 역주행이 느닷없이 그냥 치고 나왔어요. 경제실패의 모든 책임을 최저임금으로 돌리는 핑계잡기가 시작되면서 상당한 수준의 역주행이 시작중입니다. 그나마 '사법농단', '비정규직', ‘위험의 외주화’ 문제 등이 새로운 이슈로 떠오르고 있지만, 속시원하게 해결되는 것은 아니고요.
이렇게 보면 2018년은 국면전환기로 볼 수 있습니다.
촛불항쟁시기에서 또 다른 새로운 시기로 전환이 되고 있는 것인데, 전환기라고 하는 이유는 기존 적폐들이나 기존 시스템은 무너져 가는데 새로운 시대의 시스템은 아직 구축되지 않은 상태라고 할 수 있지요. 구(舊)시대는 거(去)하였으나 신(新)시대는 아직 래(來)하지않고 있는 상황입니다. 2019년은 신시대가 래(來)하도록 우리가 희망을 만들어야 하는 시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 문재인 정부정책에 대한 비판적 평가가 있어야겠군요.
"적폐정산과 사회대개혁의 과제가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문재인 정부와 시민사회, 민중세력들은 이 과제에 대해서 ‘따로 또 함께’ 이렇게 협력해 나가야 할 부분이 있다고 봐요. 아직 악질들이 더 많으니까요. 그런데 여기에 또 다른 새로운 과제가 생긴 겁니다. 이른바 ‘개혁의 역주행 저지’라는 과제가 새로 생긴 거죠. 그래서 개혁역주행 저지는 문재인 정부와 우리가 투쟁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겠죠.
노동민중세력들이 빨리 태세를 갖추고 새로운 희망을 만드는 일에 바로 착수 할 필요가 있는데, 실제로는 지금 굉장히 어지러운 상태인 것 같습니다. 민주노총 같은 경우, 민주노총 내부에 가치관의 혼동들이 있는 것 같고, 국면은 전환되고 있는데, 여전히 구시대적 사고, 구시대적 접근법에서 달라지지 않고 있는 것 같아요."

 

- 노동민중진영이 구시대적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하셨는데,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죠.
"먼저 정세인식이 정확하지 않습니다. 현재 토대는 변화가 없지만 권력관계는 변화된 상황입니다. 그래서 일종의 국면전환기적 정세인식이 필요한 거죠. 국면전환적 인식을 정확히 못하면 양 편향에 빠지게 됩니다. ‘토대는 아무런 변화가 없는 거다’에 집착하면 구시대적인 문법으로 계속 접근하게 됩니다. 반면에 ‘전환기적으로 변하고 있다’에만 집착하면 조급증에 빠지게 됩니다. 제가 ‘국면 전환기’다, ‘토대는 변화가 없지만 국면은 변화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토대가 변하지 않고 여전하다는 인식에 기반을 두면서도 국면이 전환되는 것에 맞게 문법이 달라져야한다’는 것입니다. 투쟁의 문법이나, 사회운동의 문법이 달라져야 합니다. 운동방식이 국면 전환에 맞는 방식으로 진화·발전해가야 하는데 그 점에 있어서 굉장히 미흡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운동의 진화 자체가 지체되고 있다고 봐야 할 상황입니다.

이러다보니 노동자·민중 세력들이 변방으로 밀려나가고 있습니다. 사회변화의 중심부에서 사회변화를 추동해 나가기보다는 계속 밀려가면서 변방세력이 되어가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 원인은 상대방에도 문제가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우리의 태세에 큰 문제가 있습니다. 촛불항쟁으로 세상을 바꾸고 권력을 바꾸었는데, 그 이후는 없는 거에요. 근본적으로는 노동자·민중정치가 부재하기 때문입니다. 응당한 노동자·민중정치가 지체되고 있기 때문에 투쟁의 성과가 유실되고 마는 거죠. 그 거대한 촛불항쟁의 결과가 유실되고 만 거죠. 현재 ‘저들의 배반’을 얘기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우리 노동자·민중세력들의 구조적 문제들에 대해서 깊은 질문이 필요합니다."

 

- 촛불과제를 수행하는 문재인 정부의 역할에 대해 낙관적으로 보십니까? 비관적으로 보십니까?
"기본적으로는 촛불항쟁은 1단계만 성공한 거라고 봅니다. 말하자면 대통령이라는 그 행정부 권력을 바꾼 거죠.
그 이후로 적폐의 온상인 의회권력을 못 바꿨고, 그와 연동돼서 사법적폐청산도 지지부진한 상황입니다. 3권외에도 재벌적폐청산은 제대로 손을 못쓰고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재벌에게 아부하려고 하는 상황입니다. 언론권력문제는 KBS·MBC정상화를 위한 행동을 하면서 그나마 물꼬를 튼 정도지만 아직 멀었고, 공안권력(국정원·검찰·경찰·기무사 등) 같은 경우는 깃발만 요란하게 흔들 뿐 실제로 된 건 별로 없는 상황이죠. 관료권력의 경우, 촛불항쟁으로 바뀐 대통령과 정부가 기존에 있던 관료들에게 포획당하고 있는 상황으로 볼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대통령만 바꿨다’ 이 정도 된 겁니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권력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그나마 진보적’이고 그 외 나머지는 우클릭하는 일만 남은 셈이죠.

왜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가 하면 노동자민중정치세력들이 너무나 변방이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노동자민중정치세력은 국민적 관심대상도 아닌데다가 의미 있는 대안세력이라는 인식이 안되어 있는 것이 제일 큰 문제입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이 현 정치권력적 환경을 최소한 중립적으로 만들어서 활용할 것은 활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현재 기득권 적폐세력들이 모든 권력을 다 가지고 있는데, ‘문재인 정부가 뭔가 해 줄 수 있을 거다’라고 생각하는 건 철부지들의 낭만적 이야기 수준입니다. 이른바 노동자·민중 등 좌파적 세력들이 적극적인 문제제기와 영향력 행사를 해줘야 결과적으로 좌우 균형을 잡고 중립적인 권력의 행사가 가능할 텐데, 그것이 약하니까 지금 촛불항쟁으로 만들어 놓은 성과가 유실되면서 계속 우클릭 당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여기에 문정부는 계속 끌려가고 있는 상황이죠. 좌측으로 진보쪽으로 당길 수 있는 세력이 너무 약합니다. 핵심은 노동자·민중의 정치가 지체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는 거죠."

 

- 문재인 정부의 성공을 위해서도 노동자·민중세력의 투쟁과 비판이 필요하다는 취지인데요.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죠.
"노동자민중세력의 투쟁과 비판은 그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 진행되는 것이고 다만 올바른 투쟁과 비판이 효과적으로 진행된다면, 문재인정부도 결과적으로 성공할 확률이 높아지겠죠. 그런데 문재인 정부는 자유주의 개혁정권입니다. 그나마 촛불항쟁의 열기와 그 흐름 덕분에 재벌권력과 바로 밀착해서 야합하는 양상들이 일정정도 견제되는 수준이라고 봐야죠. 문정부의 핵심들이나 골간이 곧바로 노동자민중들의 삶에 직결된 의미있는 혁신을 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굉장히 낭만적인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진보-보수’라는 용어가 완전히 왜곡되고 있습니다. 자유주의개혁세력을 진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 책임은 노동자민중 세력이 무력해서 생기는 문제입니다. 진짜 진보들은 제대로 힘을 못쓰고 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대중들의 눈에 진보세력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대중들의 눈에 보이는 수준에서는 극우적 세력에 비해 상대적으로 합리적으로 보이는 세력, 즉 자유주의개혁 세력을 진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전체적으로 우리 사회는 오른쪽으로 심하게 쉬프트 되어있는 현실입니다. 권력집단 중에서 그나마 제일 진보적으로 보이는 문재인 대통령 자신은 잘 하고 싶겠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권력현장에서는 따로 노는(다르게 작동하는), 결과적으로 “빠탐풍” 현상이 계속 일어나고 있다고 봐야죠.

문재인 정부의 정책방향의 특징은 모순되는 것들을 얽어놓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재벌들 참가 못하게 하는 은산분리 확대를 추진하는가 하면 영리병원 허가하면서 내국인 진료불허한다는 식입니다. 이런 식으로 반은 묶고 반은 푸는 이중적인 정책을 하고 있습니다. 줄타기를 하는거죠. 여기서 노동자민중들이 자유주의개혁세력과 함께 연대하여 적폐청산 등 특정과제를 풀어갈 수는 있겠지만, 모든 걸 의탁하면 안됩니다. 모든 걸 의탁했다가 안되면 과도한 실망을 하면서 분노를 표출하는 등 양극단을 널뛰기하듯이 할 수 있습니다. 힘을 갖고, 한편으로는 적폐청산과 사회대개혁은 견인하고, 또 한편으로는 개혁역주행은 저지하는 등 견제와 견인을 입체적으로 추진해가야 하는 건데, 모든 것을 의탁해놓고 불평불만만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여기서 노동자민중들은 필연적으로 무력감을 느끼게 되는 거죠."

 

- 문재인 정부 지지자들은 노동자민중진영이 문재인 정부를 도와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어떤 사람들은 노동자민중진영이 촛불정부를 도와주지 않는다고 얘기하는데, 현실은 거꾸로입니다. 노동자민중들이 앞장서서 민중총궐기투쟁을 선도적으로 진행했고, 거기에 일반시민들이 대거 가세를 해서 촛불항쟁을 성공시켰습니다. 그런데 정작 가장 선도적으로 앞장섰던 노동자민중들은 ‘팽’당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도와주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유주의개혁세력들이 우리를 ‘팽’시킨 겁니다. ‘길을 닦아 놓으니 뭐가 먼저 지나간다’는 식이죠.
어떤 의미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싸운다기 보다는 문재인 대통령에게 한편으로는 똑바로 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최근 나타나는 바와 같은 역주행에 대해서는 중단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우리의 역할입니다. 견인과 견제의 변증법적 통합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국면전환시대에 구시대적 문법으로 계속 얘기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저는 양쪽이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이른바 계속 최대강령과 반대만을 외치고 있는 사람들과 촛불정부 시대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대응해야 한다는 사람들 모두 한계에 부딪히고 있습니다."

 

- 다시 노동자민중진영의 극복과제에 대해 보충해서 이야기해 주셔야겠네요. 결국 광장에서 해결할 수밖에 없다는 말씀이신 것 같은데요.
"물론 가두투쟁, 광장에서의 투쟁이 계속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외에 일상적인 정치·정책 활동의 중요성이 강조될 필요가 있습니다. 최근 상황을 보면 그런데 담론투쟁에서 밀리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이 있어요.
최근 담론투쟁에서 밀리고 있는 대표적 사례가 ‘최저임금투쟁’입니다. 적폐세력들이 각종 통계와 사례를 왜곡·조작해 내면서 “최저임금 때문에 경제가 어렵게 되었다”는 식의 역공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노동자민중세력들, 진보세력들이 정확하게 정책적 대응 활동, 즉 담론투쟁을 제대로 못 했습니다. 제가 최근 여러군데서 지적한 바가 있는데요. “기득권층의 역공에 대해 제대로 대응 못 하는 이유가 뭐냐, 돈이 없어서 정책역량을 상근을 못 시키면 관련 전문가들의 정책네트워크를 가동하여 민주노총이 적폐세력들의 역공에 대해서 대응적 담론을 적극적으로 만들어 나갔어야 한다”라고 말했지요. 상대방은 담론투쟁에 대해 길목을 잘 잡고 매우 효과적인 공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저 손을 놓고 바라보고만 있거나 분개만 하고있는 상태가 아닌가 걱정되는 것입니다. 담론투쟁의 중요성에 대해서 굉장히 허술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담론투쟁을 잘 해야 합니다. 담론투쟁이 잘되어야 광장투쟁이 함께 상승이 됩니다. 담론투쟁을 방어적으로 할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데 작년 한 해, 우리는 담론투쟁에 실패했고, 결과를 보니 문재인 정부에 의탁하고, 미흡한 것에 대해서는 원망만 하고 있었습니다. 보다 정확하게 내용을 갖고 담론투쟁 혹은 광장투쟁, 아니면 두 가지를 통합해서 한편으로 견인하고 한편으로 견제해 나가야 했는데, 속은 비어있으면서 의탁형태로 진행되다 보니까 ‘일희일비’(一喜一悲)하게 되는 것이죠. 현재는 ‘비’(悲)에서 ‘분노’로 변화발전해하고 있는 상황이기는 합니다."

 

- 중요한 이야기네요.
"노동자민중진영의 담론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유튜브 개설운영, 고민도 필요합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노동민중진영이 자신의 대오를 제대로 못 만들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다 보니, 사회운동적 측면이나 정치측면에서 전체적으로 점점 변방화되어가고 있어서, 걱정입니다. 그나마 요즘 문재인 정부나 제도권들이 떡수를 두기 시작하니까 노동자민중의 활동공간이 생기고 있지만, 이는 상대방의 실수에 기대는 것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 약간의 성과도 점수로 이어지지는 않고 있어요. 상당히 걱정입니다."

 

- 노동민중진영이 일상정치활동, 담론투쟁을 적극화하려면 어떤 대책이 필요합니까?
"제2의 노동자민중 정치세력화가 필요합니다. 2008년 민주노동당이 분열된 이후 2010~11년 진보정치세력이 통합을 추진했었습니다. 그때 저도 통합운동에 굉장히 공을 들였습니다. 그런데 현재 기존에 있는 진보정치세력들간의 통합은 쉽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대중들 수준에서는 냉소주의, 허무주의, 한편으로는 심적 앙금이 깊게 남아있습니다. 진보정치통합에 대해 “웃기네”, “잘 되겠냐?” “그 쌔끼들!”과 비슷한 심정을 토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통합해봐야 소용없다”거나, “잘 안된다”거나, 또 불신과 앙금이 너무 깊어서 정치세력들간의 통합방식은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생각입니다. 더 큰 문제는 ‘노동자민중정치세력’에 대한 관심도 멀어졌습니다.
다양한 이견들이 많은 상황인데, 노동자민중 투쟁의 성과가 유실되고 있다는 노동자민중정치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지 않고, 돈·표·사람을 갈라쳐서 각개약진으로 껍데기만 모으려 든다면, 제대로 성과를 만들기 어렵습니다. 각개약진하면 힘이 안 됩니다. 대중들은 정치적 허무주의·패배주의·앙금 때문에 결과적으로 자유주의 개혁세력에 줄을 서고, 의탁하는 현실 아닙니까? 노동자민중정치세력이 자신의 기반을 든든히 다지면서 서민(일반시민)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단결과 연대의 확장 태세를 만들어야 하는 겁니다."

 

- 제2정치세력화 방식은 민주노총 안에서 정치적 다원주의가 완강한데다가 이미 그런 시도가 두 차례나 실패한 건데요. 앞으로도 새로운 조건을 만들지 않는 한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
"정치적 다원주의라는 건 말 그 자체로는 그럴싸해 보일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자유주의 개혁세력들에게 줄 서는 것을 용인하자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봅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제각각 판자집 지어가지고 판자집 더 예쁘게 가꾸면서 자족하자“는 수준의 얘깁니다. 정치적 다원주의로 가게 되면 분립되어 있는 각 진보정당에게만 가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자유주의 개혁세력에게도 가게 마련입니다. 현실이 그렇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노동자민중들의 이익이 파편화되면서, 아마도 일본과 미국의 정치판처럼 되어 가는 겁니다. 사실 이미 각각 다른 정당들을 만들어서 운영해 왔고 또 서로간에 노선상 다른 점이나 앙금이 많이 쌓여 있기 때문에 하나로 통합하기는 어렵다고 얘기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저는 노선차이란게 대동소이(大同小異)라고 생각합니다만, 만일 서로 조금씩 다른 점들이 있다면, 이를 포괄할 수 있는 연합정당방식으로 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총선까지 1년3개월밖에 안 남았는데, 이런 과제를 완수하려면 시간이 걸리는 것이라, 걱정입니다. 촛불항쟁의 1차적 성공을 2차 촛불혁명으로 가져가기 위해서는 노동자민중의 정치세력화가 필수적입니다. 그런데 현재 노동자민중정치세력이 변방에 서있으면서 마치 “손따라 두는 바둑” 식으로 제각각 각개약진하니까 더 안되는 거죠.
앞서 말했듯이 정치적 허무주의·패배주의·앙금이 있기 때문에 대중적으로 해소를 하는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합니다. ‘아무리 바빠도 바늘을 허리에 매어서는 바느질이 안 된다’라는 속담이 있잖습니까? 아무리 바빠도 그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합니다. 다만 신속하게 거쳐야 합니다. 민주노총 내부에서 조직적 검토가 되도록 요청하고 더 토론하고 노력해서 기초를 만들어 가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 노동자민중세력의 사회운동방식에는 어떤 변화가 필요하다고 보십니까?
"본래 사회변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투쟁과 교섭’의 변증법적 통합과정을 거치기 마련입니다. 지금은 투쟁과 교섭을 입체적으로 진행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성과가 유실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나마 자유주의 개혁정권시대에는 그런 방법을 진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노동자민중세력은 ‘투쟁’이라고 하면 광장이나 길거리 가두투쟁만 생각합니다. 협소한 시각인 것이죠, 그 뿐 아니라 ‘일상적 정치투쟁’, ‘담론투쟁’도 못지 않게 중요합니다. 강력한 투쟁은 사업장투쟁, 산업별투쟁, 거리투쟁, 정치투쟁 등이 입체적으로 배치될 때 위력을 발휘합니다. 또 한편으로는 강력한 투쟁에 기반하여 유효한 교섭을 추진해야 성과를 쟁취할 수 있는 겁니다. 유효한 교섭은 사업장교섭, 산업별교섭, 사회적 교섭이 중층적으로 입체적으로 배치될 때 의미있는 성과를 거두게 됩니다. 사회적 교섭도 사회적 대화기구를 통한 요구관철과 노동자민중정당을 통한 정치적, 사회적 문제해결 등으로 중층적 접근이 필요합니다. “사회적 교섭”의 틀을 최상층의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노사정대표자회의 등으로만 생각하면 협소한 시각입니다. 요구사항 관철을 위한 사회적 교섭을 만들어가는 핵심경로는 다양한 공간에서 입체적으로 배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경사노위나 노사정대표자회의 등을 통해서는 그 단위에서 할 수 있는 사회적 교섭을 진행하고, 또 정치활동을 통해 해결할 문제는 노동자민중의 정치세력화를 통해 해결해 나가는 등 문제의 성격에 맞는 다양한 경로를 입체적으로 모색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는 참여거부전략의 위험성을 지적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1996년 민주노총 총파업과 노사관계개혁위원회(노개위) 참여와의 관계를 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민주노총이 노개위에 참여해서 적극적인 법제도개선 의견을 내었으나 의견이 관철되지 않자 노개위 회의에 불참을 선언했습니다. 그러자 당시 김영삼 정부가 노동법과 안기부법 개악안을 날치기 처리했고, 이에 민주노총이 총파업 투쟁으로 맞받아칠 수 있었습니다. 당시 민주노총은 노개위에 참가하면서 노개위에서의 논의내용을 매개로 한 전 조합원 교육과 홍보선전 그리고 사전투쟁 조직을 통해 투쟁을 준비해 왔기에, 날치기 통과에 대해 준비된 총파업 투쟁을 전개할 수 있었던 과정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투쟁과 교섭의 변증법적 통합과정을 잘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링에 올라서 한번 싸워 볼 생각도 않고 미리 “링에 오르게 되면 패배할 것”이라고 지레 단정 짓고 링에 오르는 것 자체를 거부한다는 것은, 투쟁과 교섭의 병행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도 올바른 태도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이 경우 그 링이 기울어진 링이냐, 또는 링에서의 룰이 편파적인 거냐 등을 따지고 시정시키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민주노총이 경사노위 참여조건으로 헌법과 국제법상의 노동기본권 보장 등을 선결요건으로 제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적폐토대를 바꾸는데 있어서, 그 토대를 바꿀 수 있는 노동자민중역량이 매우 취약하다는 사실입니다. 내적 준비도 안 되어 있고, 사회적 분위기도 제대로 성숙되어 있지 않습니다. 한 마디로 노동자민중들이 기를 펴고 살 수 있는 방향으로의 사회변화를 희망하는 세력들이 아직 약하다는 거죠. 실사구시하면서 힘을 더 키워야 합니다.
또 하나는 현재와 같은 전환기 국면에서는 사회공공성을 획기적으로 강화하고, 새로운 비전을 만들기 위한 적극적이고 공세적인 사회운동, 노동자민중정치세력화 대책이 나와야 합니다. 이런 것들을 목표로 걸고 거리투쟁이나 정치투쟁을 통해서 이슈화시키고, 정치세력화를 통해서 공세적으로 일반시민(민중)들이 실감나도록 가시화시키면서 또 일반 시민(민중)들과 함께 실천할 수 있는걸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게 잘 안 되니까 대중적 공감을 얻지 못하고 또 유효한 대안세력으로 가시화 되지 않아서 따라서 선택대상이나 고려의 대상도 잘 안 되는 상태라 좀 답답합니다."

 

- 경제상황이 안 좋은데, 여기에 대해서도 한 말씀 해 주시죠.
"문재인정부가 경제문제는 소득주도성장, 혁신성장, 공정경제 이렇게 얘기하잖아요? 그런데 혁신성장도 그렇고, 소득주도성장도 그렇고 다 ‘성장’에 중독되어 있는 겁니다. 그런데 세계경제는 지금 성장이 둔화되고 있잖아요. 소득주도성장이라는 게 최저임금 올린다고 금방 바뀌거나 좋아지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너무 신기루처럼 쫓아다니다가 금방 성과가 안나니까 다시 역주행 하는 것이 큰 문제인거죠.
혁신성장, 4차 산업혁명 어쩌고 하는데 그것도 마찬가지입니다. 4차 산업혁명이라는게 일자리 줄어드는 걸 필연적으로 수반하게 됩니다. 과학·기술적 측면에서 보면, 4차 산업혁명은 피할 수 없는 하나의 추세입니다. 핵심은 그걸 가지고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하는 겁니다. 4차 산업혁명에의 대응방향의 핵심문제는 고용감소가 나타나는 것에 대한 대책, 그리고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해서 생기는 그 이익·이윤은 누구의 것이 되느냐 하는 2가지 문제에 대해서 능동적으로 대응을 하면서 사회적 대응태세를 만들고 해결해나가는 방안을 모색해 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른바 진보적이라는 사람들조차도 4차 산업혁명이 무슨 혁신성장의 동력이 될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 방식의 혁신성장을 거치면 결과적으로는 양극화가 더 심화 될 것이 뻔합니다. 여기에 어떻게 촛불세력이 사회적 통제를 만들 수 있느냐, 이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쉽지는 않을 겁니다.

그리고 부동산, 주택문제도 우리나라 경제의 제일 큰 원죄적 문제입니다. 이런 원죄를 혁파하기 위해서는 이를테면 ‘주택개혁’을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다주택소유자를 통제해야 하고, 현재 주택보유율이 103% 되는데 자가 보유율은 전국적으로는 57%, 서울은 47%쯤 되고 있으니, 이미 주택 숫자는 남아돌고 있는데, 무주택자는 너무 많은 상태인 겁니다. 그런데 주택과 건물이 투기의 대상으로 되니, 경제의 모든 잉여가 비생산적인 부동산으로 박히고 있는 거고, 결과적으로 우리나라 주요 자원들이 생산적인 데로 안가는 겁니다. 투자가 건설로 집중되는 상황입니다. 지금도 이명박-박근혜 시절 최경환 등이 했던 주택투기·부동산투기 조장정책의 후과를 다 해소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노동시장내부의 분단문제가 굉장히 심각합니다. 옛날에는 ‘걱정이다’ 수준이었는데 지금은 ‘혁파를 해야 한다’는 수준까지 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공공부문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정규직화하는 것을 얼치기정규직들이 반대하고 나섭니다. 큰 문제입니다. 광주형일자리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잘못 대응하면 민주노총이 ‘공공의 적’이 되는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위기감이 있습니다. 이미 그런 분위기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심지어 양심적이고 진보적인 전문가들조차도 광주형일자리를 수용해야 한다고 얘기를 하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광주형일자리 문제는 구시대형 자동차산업의 중복 과잉투자를 조장해서 얼마 안있어 또 다른 큰 재앙을 잉태시킬 수 있다는 문제점이 있습니다. 또 자동차산업이 거의 모두 민주노총 사업장이고 민주노총이나 민주노총 산하조직이 노사민정 합의에 참여하지 않았는데도, 노사민정 합의라고 포장해서 선전하면서 마치 민주노총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괜찮은 일자리 창출을 반대해서 광주형일자리가 안되고 있다는 듯이 왜곡선전하고 있는 상황은 매우 심각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미 청년실업 문제가 매우 심각하고 특히 번듯한 일자리가 별로 없는 지역 등에서는 선동력이 매우 크다는 점을 직시해야 합니다."

 

- 노동시장 이중구조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 지 대표님의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노동시장내부의 이중구조, 노동자간 단절과 이중화 문제는 ‘사회연대임금전략’을 전체적으로 공세적으로 치고 나간다라든지, ‘원청-하청 공동교섭’, ‘동일업종 공동교섭’, ‘산별교섭’ 등을 통한 연대임금전략 추진 등 획기적인 구조변화정책, 실업, 미취업, 비정규 ‘노동자계급’에게 감동을 만드는, 그래서 사회전체에 감동을 확산시키는 노동운동의 획기적 정책변화 방안을 제시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공세적으로 ‘원청-하청 공동교섭’을 진행해서 “원청노동자들의 임금인상분을 하청노동자들의 임금인상분으로 돌릴 용의가 있다”는 등의 계급연대임금전략을 해보는 겁니다. 이런 방식으로 계급연대임금전략의 시초를 만들어야 합니다. 궁극적으로는 사회연대임금전략으로 진화해 가야겠죠.
민주노총 노동조합들이 기업단위로 ‘전투적 경제주의’에 집중해왔던 노동운동방식이 이미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그 한계의 반발형태가 광주형일자리로 나타난 거죠. 엄청난 위기입니다. 아마도 젊은 청년노동자, 예비노동자들이나 비정규직노동자들은 광주형일자리를 좋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일자리를 매개로 노동자들을 경쟁시켜서 파멸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경제적으로 놓고 보아도 과잉생산체계를 조장하는 꼴이 되는 거고 또 다른 재앙을 불러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런 설명은 길고 멀고 복잡하고 어렵습니다. 당장 감성적으로 또 실존적으로 광주형일자리가 굉장히 땡기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광주형일자리에 대해서 ‘찬반 구도’로 가면 본전도 못 찾습니다. 오히려 ‘원청-하청 공동교섭’의 틀을 짜고 ‘계급연대임금전략’으로 과감하게 방향 전환해야 합니다. 결국 노동운동의 전략과 가치의 대전환을 이룩하는 문제입니다."

 

▲ 2018년 4월 27일, 남북정상회담 4.27 판문점선언 (사진 : 뉴시스)

- 4.27판문점선언, 9월 평양공동선언 이후 평화번영통일시대라고 하는데 어떻습니까?
"촛불의 가장 확실한 성과이며, 정말 다행스럽습니다. 2018년 엄청난 변화의 촉매제가 촛불항쟁인 것이죠. 북미간 대화는 서로가 필요한 것이기에 아마 몇 가지 장애가 나타나더라도 그 길로 갈 겁니다. 우리가 촛불항쟁으로 인해서 새로운 길을 만들 수 있다는 게 그나마 다행스럽고 보람입니다.
앞으로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북 바로알기’를 하는 겁니다. 북에 대해 친숙하게 만드는 작업들이 가장 기본적인 우리 활동 방향이 되어야 합니다.
군대 갔다 온 사람들 보면 잘못 주입된 게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그나마 다행인 것이 ‘꿈에도 소원은 통일’이라는 것이 살아 있고, ‘강대국 사이에서 남북이 통일돼야 그나마 우리 살길이 열린다’라는 생각이 강하게 사람들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습니다. 이 측면을 다양하고 입체적 방향으로 잘 확장시켜 가는게 중요합니다.
사람들 마음속에는 아직 북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 같은 게 있습니다. 완전히 없애기에는 시간이 걸리겠지만 최대한 효과적으로 녹여가야 합니다. 일반시민들의 감성과 결합해서 친숙하게 만드는 작업이 스며들 듯이 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과제입니다."

 

- 마지막으로 2019년 진보연대사업 구상은 어떻습니까?
"핵심은 민중공동행동을 확대·강화하는 겁니다. 민주노총이 진보연대에 참여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민중공동행동을 강화해야하는 거죠. 그래서 한편으로는 노동자민중의 투쟁을 강화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자민중정치세력화를 추동하는 과제가 남아있습니다.
노동자민중정치세력에 대해서는 여전히 다양한 이견들이 많기때문에 신속하게 소통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노동자민중의 공동투쟁은 좀 더 고도화되어야하고요. 가두투쟁을 포기할 수 없는 거지만 담론투쟁을 더욱 강화해야 되겠죠. 입체적으로 해 보려고 합니다."

선현희 기자  shh412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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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멘전쟁의 지속으로 막대한 이익을 얻고 있는 미국과 이스라엘

예멘전쟁 속에서 미국은 무기판매, 이스라엘 지역패권유지
 
번역, 기사 이용섭 기자 
기사입력: 2019/01/12 [08:44]  최종편집: ⓒ 자주시보
 
 

예멘전쟁의 지속으로 막대한 이익을 얻고 있는 미국과 이스라엘

 

미국과 이스라엘은 예멘전쟁이 계속됨으로서 지속적으로 이익을 얻고 있다고 예멘 최고정치위원회 위원이 비판을 하였다고 이란의 이르나와 파르스통신이 보도하였다.

 

이르나와 파르스통신은 1월 7일 자에서 각각 “관리: 예멘전쟁의 지속으로 이익을 얻고 있는 미국, 이스라엘” “안사룰라: 미국, 이스라엘 예멘전쟁 지속으로부터 이익을 얻는다.”라는 제목으로 관련 사실을 보도하였다.

 

이르나는 1월 7일 자에서 미국과 이스라엘 정권은 예멘침략이 지속됨으로서 국가적인 이익을 얻는다고 예멘 최고정치위원회 위원이 말했다고 전하였다. 예멘 최고정치위원회 위원인 하잠 알-아싸드는 이슬람공화국통신사(IRNA)와의 단독 대담에서 미국은 사우디에 무기와 첨단무기체계를 판매하여 돈을 벌어 이익을 얻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이스라엘인들은 예멘공격에서 침략자(원문-그들)을 지원함으로써 '세기적인 거래'와 관련된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레이트연합(UAE)의 지지를 얻으려고 시도하고 있다면서 예멘전쟁에서의 이스라엘의 역할에 대해 비판을 하였다. 적들은 그들은 자신들이 세워놓은 계획과 목적을 실현하기 위하여 예멘에서 계속된 학살에 의존하였다고 그는 덧붙였다.

 

계속해서 그는 예멘전쟁의 지속은 적들의 식민지(정책)와 권위주의 계획을 실현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지만 그것(예멘전 지속)은 미국과 이스라엘에 복무(원문-봉사)를 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고 말했다.

 

알-아사드는 스톡홀름협약 이행을 위한 최신 조건들과 관련하여 언급하면서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레이트연합이 휴전협정을 난폭하게 위반함으로서 심각한 난관이 조성되어 있다고 하여 지난 해 12월 13일에 유엔의 지원 아래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체결된 예멘전쟁 휴전햅정체결과 그 이후 약 한 달여간에 휴전협정 이행상황에 대해 언급하였다. 아사드의 이러한 발언은 휴전협정이 체결되었지만 사우디가 이끄는 연합군들은 지속적으로 예멘에 대해, 특히 예멘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공격을 감행하면서 휴전협정을 난폭하게 위반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비판을 하였다. 

 

아사드는 그들은 민간인들을 목표로 하고, 군사작전을 수행하며, 알 후데이다흐 동부 및 중심부를 폭격함으로서 스웨덴휴정협정의 이행을 저지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예멘군대와 인민위원회가 취한 조치(알- 후데이다흐 철수)에도 불구하고 알 - 후데이다흐 항의 통제권을 해안경비대에 위임한 사우디 고용병들은 알-후데이다흐의 남부와 동부를 이어주는 길의 통행을 재개하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달리 말해  유엔이 스웨덴협정에 대한 위반행위를 끝내기 위한 그들의 약속을 준수할 수 있도록 리야드와 아부다비에 압력을 가할 것을 예멘 관리는 촉구하였다. 

 

이르나는 “알-아사드는 유엔특사 마틴 그리피스의 예멘 방문은 알-후데이다흐 협정의 이행의 선상에서와 경제상황, 따이즈, 사나아 공항에 관한 협상과 또한 직원들의 급여지급과 관련하여 대단히 중요한 단계라고 되풀이하여 강조하였다. 유엔안전보장이사회는 협정준수에 대한 감시와 이행을 촉진하고 중요한 예멘 항구에서의 휴전확립을 위하여 감시반(팀) 배치에 관한 스톡홀름 협정지지결의안 2451호를 채택하였다.”고 보도하여 예멘전 휴전협정체결과정에서 유엔이 적극적으로 지원을 하였으며, 휴전협정체결이후에도 그 준수여부를 감시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는데 언급을 하였다.

 

마지막으로 이르나는 “이 결의안은 주로 생활필수품들을 예멘 인민들에게 공급하고, 스톡홀름 협정을 지지하며, 유엔사무총장에게 휴전협정을 이행하고 관찰할 수 있는 권한을 위임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제 4차 예멘평화회담은 유엔특사 마틴 그리피스와 정부대표단의 참석 하에 12월 6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사직이 되었으며, 예멘의 알-후데이다흐, 알-싸리쁘 그리고 아인 이싸 항구들에서 휴전에 들어가는데 합의를 하였다.”고 스톡홀름 예멘전 휴전협정논의 과정과 체결, 그리고 휴전협정내용에 대해 다시 한 번 보도를 하였다.

 

한편 파르스통신 역시 미국과 이스라엘이 예멘전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얻고 있다는데 대해 보도를 하였다. 파르스통신은 “안사룰라 저항운동집단의 정치위원회의 한 최고위원은 미국과 이스라엘은 예멘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전쟁 종식을 막으려 시도하고 있다고 말했다.”고 보도하였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예멘전쟁이 지속됨으로서 각각 자신들의 방식대로 이익을 얻고 있다."고 히잠 알-아사드가 월요일에 말했다.

 

계속하여 그는 미국은 무기와 군사 장비들을 사우디 연합침략자들에게 판매를 통하여 예멘전쟁에서 이익을 얻고 있다고 설명하였다. “또한 이스라엘인들은 예멘공격에서 침략자(원문-그들)을 지원함으로써 '세기적인 거래'와 관련된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레이트연합의 지지를 얻으려고 시도하고 있다.”고 아사드는 말했다.

 

하잠 알-아싸드 예멘 최고정치위원회 위원이 말했듯이 현재 예멘전 역시 내란이나 내전이 아니며 특히 사태는 더더욱 아니다. 예멘전에 대해 사태, 내란, 내전 등으로 묘사를 하는 것은 제국주의연합세력들과 그 괴뢰국가들의 침략행위를 감추려는 교활한 선전선동으로서 세계 인민들을 기만하고 우롱하는 것이다.

 

분명하게 말 하건데 예멘전은 서방제국주의연합세력들의 직간접적인 지원과 개입에 의해 그 괴뢰국가인 사우디와 아랍에미레이트연합 그리고 20여 개 동맹국들이 예멘을 침략을 함으로서 벌어진 국제적인 차원에서 벌어지고 있는 국제전이다. 당연히 국제전인 예멘전에서 핵심역할을 하는 것은 미국, 이스라엘, 영국, 프랑스 등 서방제국주의연합세력들이다. 또 그를 통해 자신들의 직접적인 이익을 취하면서 동시에 자신들의 지배주의와 패권주의 더 나아가서 궁극적 목적인 신세계질서(NWO)를 구축하려는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고 있다. 히잠 알-아싸드 예멘최고정치위원회 위원이 지적하는 것도 바로 이 점에 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서방제국주의연합세력들의 교활하고 악랄함에 대해 일분일초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절대 선(善)한 양이 아니며 평화를 사랑하고 세계적 차원에서의 평화와 안정을 절대로 바라지 않는다. 서방제국주의연합세력들은 지구촌 곳곳에서 대 혼란과 전쟁이 끊이지 않고 지속이 되는 속에서 그 피를 먹으며 살아가는 흡혈귀들이다. 우리는 그 점을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그들로부터 우리민족을 지켜낼 수 있는 방안을 찾을 수가 있는 것이다.

 

 

----- 번역문 전문 -----

 

관리: 예멘전쟁의 지속으로 이익을 얻고 있는 미국, 이스라엘

 

테헤란, 1월 7일, 이르나(IRNA) - 미국과 이스라엘 정권은 예멘침략이 지속됨으로서 국가적인 이익을 얻는다고 예멘 최고정치위원회 위원이 말했다.

 

▲ 미국과 이스라엘 정권은 예멘침략이 지속됨으로서 국가적인 이익을 얻는다고 예멘 최고정치위원회 위원이 말했다. 하잠 알-아싸드는 이슬람공화국통신사(IRNA)와의 단독 대담에서 미국은 사우디에 무기와 첨단무기체계를 판매하여 돈을 벌어 이익을 얻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이스라엘인들은 예멘공격에서 침략자(원문-그들)을 지원함으로써 '세기적인 거래'와 관련된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레이트연합의 지지를 얻으려고 시도하고 있다. 적들은 그들의 계획과 목적을 실현하기 위하여 예멘에서 계속된 학살에 의존하였다고 그는 덧붙였다.     ©이용섭 기자

 

하잠 알-아싸드는 이슬람공화국통신사(IRNA)와의 단독 대담에서 미국은 사우디에 무기와 첨단무기체계를 판매하여 돈을 벌어 이익을 얻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이스라엘인들은 예멘공격에서 침략자(원문-그들)을 지원함으로써 '세기적인 거래'와 관련된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레이트연합의 지지를 얻으려고 시도하고 있다.

 

적들은 그들의 계획과 목적을 실현하기 위하여 예멘에서 계속된 학살에 의존하였다고 그는 덧붙였다.

 

계속해서 그는 예멘전쟁의 지속은 적들의 식민지(정책)와 권위주의 계획을 실현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지만 그것(예멘전 지속)은 미국과 이스라엘에 복무(원문-봉사)를 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고 말했다.

 

알-아사드는 스톡홀름협약 이행을 위한 최신 조건들과 관련하여 언급하면서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레이트연합이 휴전협정을 난폭하게 위반함으로서 심각한 난관이 조성되어 있다고 말했다.

 

그들은 민간인들을 목표로 하고, 군사작전을 수행하며, 알 후데이다흐 동부 및 중심부를 폭격함으로서 스웨덴휴정협정의 이행을 저지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예멘군대와 인민위원회가 취한 조치(알- 후데이다흐 철수)에도 불구하고 알 - 후데이다흐 항의 통제권을 해안경비대에 위임한 사우디 고용병들은 알-후데이다흐의 남부와 동부를 이어주는 길의 통행을 재개하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달리 말해  유엔이 스웨덴협정에 대한 위반행위를 끝내기 위한 그들의 약속을 준수할 수 있도록 리야드와 아부다비에 압력을 가할 것을 예멘 관리는 촉구하였다. 

 

알-아사드는 유엔특사 마틴 그리피스의 예멘 방문은 알-후데이다흐 협정의 이행의 선상에서와 경제상황, 따이즈, 사나아 공항에 관한 협상과 또한 직원들의 급여지급과 관련하여 대단히 중요한 단계라고 되풀이하여 강조하였다.

 

유엔안전보장이사회는 협정준수에 대한 감시와 이행을 촉진하고 중요한 예멘 항구에서의 휴전확립을 위하여 감시반(팀) 배치에 관한 스톡홀름 협정지지결의안 2451호를 채택하였다.

 

이 결의안은 주로 생활필수품들을 예멘 인민들에게 공급하고, 스톡홀름 협정을 지지하며, 유엔사무총장에게 휴전협정을 이행하고 관찰할 수 있는 권한을 위임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제 4차 예멘평화회담은 유엔특사 마틴 그리피스와 정부대표단의 참석하에 12월 6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사직이 되었으며, 예멘의 알-후데이다흐, 알-싸리쁘 그리고 아인 이싸 항구들에서 휴전에 들어가는데 합의를 하였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지역의 동맹국들은 망명객인 전 예멘 대통령 아부드 라부부흐 만수르 하디에게 권력을 회복시켜주기 위해 2015년 3월에 예멘을 침략하였다.

 

그 이래로 침략자들은 예멘 민간인들에 대해 끔찍한 전쟁범죄를 저질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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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문 전문 -----

 

2019년 1월 7일, 1시 35분. 월요일

 

안사룰라: 미국, 이스라엘 예멘전쟁 지속으로부터 이익을 얻는다

 

▲ 안사룰라 저항운동집단의 정치위원회의 한 최고위원은 미국과 이스라엘은 예멘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전쟁 종식을 막으려 시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예멘전쟁이 지속됨으로서 각각 자신들의 방식대로 이익을 얻고 있다."고 히잠 알-아사드가 월요일에 말했다. 그는 미국은 무기와 군사 장비들을 사우디 연합침략자들에게 판매를 통하여 예멘전쟁에서 이익을 얻고 있다고 설명하였다. “또한 이스라엘인들은 예멘공격에서 침략자(원문-그들)을 지원함으로써 '세기적인 거래'와 관련된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레이트연합의 지지를 얻으려고 시도하고 있다.”고 아사드는 말했다.     ©이용섭 기자

 

테헤란 (파르스통신)- 안사룰라 저항운동집단의 정치위원회의 한 최고위원은 미국과 이스라엘은 예멘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전쟁 종식을 막으려 시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예멘전쟁이 지속됨으로서 각각 자신들의 방식대로 이익을 얻고 있다."고 히잠 알-아사드가 월요일에 말했다.

 

그는 미국은 무기와 군사 장비들을 사우디 연합침략자들에게 판매를 통하여 예멘전쟁에서 이익을 얻고 있다고 설명하였다.

 

“또한 이스라엘인들은 예멘공격에서 침략자(원문-그들)을 지원함으로써 '세기적인 거래'와 관련된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레이트연합의 지지를 얻으려고 시도하고 있다.”고 아사드는 말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레이트연합(UAE), 모로코 그리고 수단 등이 포함되어 있는 사우디(원문-그들의)의 동맹국들은 전 예멘 대통령 아브드 라부부흐 만수르 하디를 재추대하기 위한 시도로서 2015년 3월 예멘에 대해 끔찍한 전쟁을 감행하였다.

 

침략은 처음에는 공중폭격으로 감행되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해군의 해상봉쇄와 예멘에 지상군을 배치하여 연합작전을 자행하였다. 전쟁이 시작된 이래 20,000명 정도의 인민들이 죽었다고 예멘 보건부가 밝혔다.

 

침략은 처음에는 공중폭격으르 감행되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해군의 해상봉쇄와 예멘에 지상군을 배치하여 연합작전을 자행하였다. 전쟁이 시작된 이래 20,000명 정도의 인민들이 죽었다고 예멘 보건부가 밝혔다.

 

안사룰라 전사들의 주둔지에 대해서만 폭격을 하였다는 리야드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사우디 폭격은 민간인 거주지역들과 시민들의 기간시설들을  초토화 시켰다.

 

여러 보도들에 따르면 사우디아라비아의 끔찍한 폭격은 환자들이 치료를 위해 해외로 나가는 것을 막고,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에 의약품들이 들어오는 것을 봉쇄하게 되는 예멘에 대한 사우디주도의 공중폭격은 가난한 나라를 인도주의적인 대재앙으로 이끌어갔다.

 

 

----- 원문 전문 -----

 

Official: US, Israel benefiting from continuation of Yemeni war

 

Tehran, Jan 7, IRNA – The US and Israeli regime are benefiting from continuing aggressions on Yemen, member of the Supreme Political Council of Yemen said.

 

▲ 미국과 이스라엘 정권은 예멘침략이 지속됨으로서 국가적인 이익을 얻는다고 예멘 최고정치위원회 위원이 말했다. 하잠 알-아싸드는 이슬람공화국통신사(IRNA)와의 단독 대담에서 미국은 사우디에 무기와 첨단무기체계를 판매하여 돈을 벌어 이익을 얻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이스라엘인들은 예멘공격에서 침략자(원문-그들)을 지원함으로써 '세기적인 거래'와 관련된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레이트연합의 지지를 얻으려고 시도하고 있다. 적들은 그들의 계획과 목적을 실현하기 위하여 예멘에서 계속된 학살에 의존하였다고 그는 덧붙였다.     © 이용섭 기자


Speaking in an exclusive interview with the Islamic Republic News Agency (IRNA), Hazam Al-Assad said the US is benefiting from the money which it earns by selling arms and advanced systems to Saudis.

 

Meanwhile, Israelis are trying to have the support of Saudi Arabia and the UAE as regard 'Deal of Century' by supporting them in attacking Yemen. 

 

Enemy has relied on continuation of massacre in Yemen to realize its plans and goals, he added.

 

He went on to say that continuation of war in Yemen will not help realize enemies' colonial and authoritarian plans, but it is just in line with serving US and Israel.

 

Commenting on the latest conditions of implementing Stockholm agreement, Al-Assad said there is severe obstinacy from Saudi Arabia and the UAE for defeating the truce agreement.

 

They are trying to prevent implementation of Sweden agreement by targeting civilians and by conducting military operations and bombarding eastern and central areas of Al- Hudaydah.

 

Despite the measures taken by Yemeni army and the popular committees and ceding the control of Al- Hudaydah port to coastal guard, Saudi mercenaries refuse to reopen southern and eastern ways to Al- Hudaydah. 

 

Elsewhere in his remarks, the Yemeni official urged the UN to pressure Riyadh and Abu Dhabi to comply with their commitments to put an end to violation of this Sweden agreement. 

 

Al-Assad reiterated the fact that the UN special envoy Martin Griffith's trip to Yemen has been a major step in line with implementation of Al- Hudaydah agreement and also on negotiations on economic case, Taiz, Sana'a airport and also paying employees' salary.

 

The United Nations Security Council adopted Resolution 2451 to support the Stockholm Agreement on deployment of a team in order to facilitate monitoring and implementing the Agreement and establishing truce in important Yemeni ports.

 

The resolution mainly focuses on sending essential commodities to the Yemeni people, supporting the Stockholm Agreement, assigning the Secretary-General of the United Nations to implement it and observing the ceasefire.

 

The fourth round of Yemen peace talks kicked off in Stockholm, Sweden on December 6 with the attendance of the UN special envoy Martin Griffith and the government representatives. It agreed to establish truce in Yemeni ports of al-Hudaydah, al-Salif and Ayn Issa.

 

Saudi Arabia and its regional allies attacked Yemen in March 2015 to bring back to power the deposed president of Yemen Abdrabbuh Mansour Hadi.

 

Since then, the invaders have committed horrible war crimes against Yemeni civili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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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문 전문 -----

 

Mon Jan 07, 2019 1:35 

 

Ansarullah: US, Israel Benefiting from Continued War in Yemen

 

▲ 안사룰라 저항운동집단의 정치위원회의 한 최고위원은 미국과 이스라엘은 예멘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전쟁 종식을 막으려 시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예멘전쟁이 지속됨으로서 각각 자신들의 방식대로 이익을 얻고 있다."고 히잠 알-아사드가 월요일에 말했다. 그는 미국은 무기와 군사 장비들을 사우디 연합침략자들에게 판매를 통하여 예멘전쟁에서 이익을 얻고 있다고 설명하였다. “또한 이스라엘인들은 예멘공격에서 침략자(원문-그들)을 지원함으로써 '세기적인 거래'와 관련된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레이트연합의 지지를 얻으려고 시도하고 있다.”고 아사드는 말했다.     © 이용섭 기자

 

TEHRAN (FNA)- A senior member of Ansarullah resistance group's political council said that the US and Israel are attempting to prevent termination of war in Yemen for the sake of their own interests.

 

 

"The US and Israel benefit from continued aggression against Yemen, each of them in their own way," Hizam al-Assad said on Monday.

 

He explained that the US is benefiting from the Yemen war by selling its weapons and military equipment to the aggressive Saudi-led coalition.

 

"Israel is also attempting to rally Saudi Arabia and the UAE's support for the Deal of Century plot by supporting their aggression against Yemen in return," al-Assad said.

 

Saudi Arabia and some of its allies, including the United Arab Emirates, Morocco, and Sudan, launched a brutal war against Yemen in March 2015 in an attempt to reinstall Yemen’s former president Abd Rabbuh Mansur Hadi.

 

The aggression initially consisted of a bombing campaign but was later coupled with a naval blockade and the deployment of ground forces to Yemen. Around 20,000 people have died since the war began, says Yemen’s Health Ministry.

 

The Saudi-led war has also taken a heavy toll on the country’s infrastructure, destroying hospitals, schools, and factories. The United Nations (UN) has said that a record 22.2 million Yemenis are in dire need of food, including 8.4 million threatened by severe hunger.

 

Despite Riyadh's claims that it is bombing the positions of the Ansarullah fighters, Saudi bombers are flattening residential areas and civilian infrastructures.

 

According to several reports, the Saudi-led air campaign against Yemen has driven the impoverished country towards humanitarian disaster, as Saudi Arabia's deadly campaign prevented the patients from travelling abroad for treatment and blocked the entry of medicine into the war-torn cou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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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커진 태극기부대, 민주주의는 안녕한가?

[최창렬 칼럼] 문재인 정부가 집권 3년차 징크스에서 벗어나려면…

 

 

 

김태우 발(發) 민간인 사찰 의혹 파장과 신재민 전 기획재정부 사무관의 폭로를 정치쟁점화 시키려는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의 정략적 의도로 여야의 대치가 가파르게 전개되고 있다. 기해년 정치는 내년 총선과 맞물려 최악의 적대적 정치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다. 한국정치는 무엇이 바뀌었는가. 탕평 인사와 협치에 한계를 보인 집권세력의 책임이 가볍지 않으나 한국당의 수구적 태도에서 여야의 책임을 모두 묻는 양비론은 설 땅을 잃는다. 
 
한국정치의 작동 원리는 바뀌지 않았다. 촛불혁명으로 출범한 정권의 임기 초기는 지나갔으나 전광석화와 같은 개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김영삼 정권 초기의 하나회 척결과 금융실명제 실시는 군부와 기득권이 반발할 틈 없이 이루어졌다. 6공화국은 민주적인 선거에 의한 정권이었으나 노태우는 군부 출신의 대통령이었다. 실제 1979년 12.12 쿠데타에 가담했다. 따라서 문민정부는 정치군인의 제거가 중대한 개혁과제였다. 이는 임기 초 높은 지지율로 가능했다.  
 
민주주의의 핵심 원리는 대표성과 책임성, 참여성이다. 이러한 원리는 사회구성원들의 정치적 수준과 의식에 의해 뒷받침되어야 하지만 이를 가능케 하는 기제는 이들을 담보할 수 있는 제도다. 그래서 제도화 수준은 바로 그 나라 민주주의의 수준이다. 
  
1987년 민주화가 이루어졌으나 이는 민주주의의 최소한이었다. 구체제를 유지했던 기득권 연합이 온존한 채 이루어진 절차적 민주주의는 실질적 민주주의를 담보하지 못했다. 국민들의 민주적 열망으로 쟁취한 선거에 의한 노태우 정부의 출범 이후 국민들은 빠르게 일상으로 복귀했다. 다시 정치는 소수의 전문 정치인들의 몫으로 돌아갔고, 노태우 정권은 대선 공약이었던 중간평가를 생략한 채,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도 연기했다. 결국 민주세력과 권위주의 세력의 부분적 통합이었던 3당 합당은 거대여당에 의한 입법정치의 왜곡을 낳았을 뿐만 아니라, 과거의 군부 세력 등 기득권 세력에게 정치적 입지를 공고화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노무현 정권은 국민의 참여를 강화하고 권력의 분권을 통해 정치개혁의 실험을 시도했으나 관료사회와 권력기관의 냉소적 비협조, 국민들의 지지와 동의를 견인해 내지 못한 한계로 인하여 지지율은 급전직하했다. 역설적이게도 진보정권을 자처한 노무현 정권 때 부동산 가격은 폭등했다. 노 정권의 실패는 관료와 언론, 경제계와 권력기구의 개혁에 대한 저항이 원인이었으나 본질적으로는 국민의 지지와 동의를 얻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통령이 적대세력들의 연대에 의하여 탄핵을 당하는 민주주의의 위기에 직면하기도 했다. 

1987년의 민중항쟁으로 쟁취한 절차적 민주주의는 사회적 불평등의 증가와 기득권 집단의 공고화, 계층 갈등 등으로 실질적 민주주의로의 이행은 지체되고 있다. 정치적 퇴행을 경험하고 있는 현실에서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는 위기에 봉착하고 있다.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는 어느 정부보다도 국민의 지지와 신뢰를 이끌 수 있는 좋은 정치적 환경에서 출발했다. 역대 정권 초기에 비해서도 높은 국정지지도가 이를 말해준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도 집권 3년차의 징크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절차적 민주주의 성취가 민주주의의 공고화로 이어지지 못하고 정치적 퇴행이 반복되는 이유는 관료와 기득권에 포획되어 있는 정치사회적 요인의 환경적 변수와 집권 엘리트들의 기득권화이다. 이는 국민의 불신을 초래하게 되고, 개혁 동력의 후퇴는 도돌이표처럼 반복된다. 지지율 하락의 총체적 원인은 경제악화라는 공식도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 진보정권을 자처했던 노무현 정권 때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고 국민들의 사회적 가치의 전부가 경제에 몰입하게 되는 악순환을 지금 정권도 되풀이한다면 촛불혁명은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만다. 
  
경제에서 가시적 성과를 기대한다지만 구조적 요인이 본질인 경제성과가 가시화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촛불의 초심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수구세력의 반동적 행태는 더욱 강화될 것이다. 이를 입증하듯 태극기 집회의 규모는 날로 커지고, 심판의 대상이었던 정치집단은 제1야당이라는 우산 속에서 개발자본주의 시대의 성장 패러다임의 부활을 노린다. 
   
민주주의의 위기는 불평등과 격차의 일상화에서 온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제도적 디자인은 국민의 광범한 지지와 동의에 입각할 때 동력을 발휘할 수 있다. 기득권 동맹과 반대세력에게 빌미를 주지 않는 정교한 탕평과 소통의 전략이 절실하다. 주권자의 민주역량을 잘 결집해내고, 이를 토대로 정치적 대표성과 참여성, 책임성을 확립해 나갈 때 민주주의가 공고화된다.  민주주의의 위기를 극복할 때 정권도 순항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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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뚝에서 땅으로 귀환 "지지해줘서 감사"

파인텍 박준호, 홍기탁 두 노동자 426일 만에 고공농성 마침표

19.01.11 19:44l최종 업데이트 19.01.11 19:56l
사진·영상: 유성호(hoyah35)

 

'홍기탁-박준호 무사히 내려와라' 파인텍 노사가 고공농성 426일 만에 협상을 타결한 10일 오후 서울 양천구 목동 열병합발전소 굴뚝 위에서 농성을 벌인 금속노조 충남지부파인텍지회 홍기탁 전 지회장과 박준호 사무장이 농성을 풀고 땅에 내려오자, 마중 나온 시민과 노동자들이 무사히 내려오기를 기도하며 이를 지켜보고 있다.
▲ '홍기탁-박준호 무사히 내려와라' 파인텍 노사가 고공농성 426일 만에 협상을 타결한 10일 오후 서울 양천구 목동 열병합발전소 굴뚝 위에서 농성을 벌인 금속노조 충남지부파인텍지회 홍기탁 전 지회장과 박준호 사무장이 농성을 풀고 땅에 내려오자, 마중 나온 시민과 노동자들이 무사히 내려오기를 기도하며 이를 지켜보고 있다. ⓒ 유성호
굴뚝농성 426일 만에 땅 밟는 홍기탁-박준호 파인텍 노사가 고공농성 426일 만에 협상을 타결한 10일 오후 서울 양천구 목동 열병합발전소 굴뚝 위에서 농성을 벌인 금속노조 충남지부파인텍지회 홍기탁 전 지회장(오른쪽)과 박준호 사무장이 농성을 풀고 땅에 내려오고 있다.
▲ 굴뚝농성 426일 만에 땅 밟는 홍기탁-박준호 파인텍 노사가 고공농성 426일 만에 협상을 타결한 10일 오후 서울 양천구 목동 열병합발전소 굴뚝 위에서 농성을 벌인 금속노조 충남지부파인텍지회 홍기탁 전 지회장(오른쪽)과 박준호 사무장이 농성을 풀고 땅에 내려오고 있다. ⓒ 유성호
홍기탁-박준호 반기는 시민들 파인텍 노사가 고공농성 426일 만에 협상을 타결한 10일 오후 서울 양천구 목동 열병합발전소 굴뚝 위에서 농성을 벌인 금속노조 충남지부파인텍지회 홍기탁 전 지회장과 박준호 사무장이 농성을 풀고 땅에 내려오자, 마중 나온 시민과 노동자들이 이들에게 손을 흔들며 반기고 있다.
▲ 홍기탁-박준호 반기는 시민들 파인텍 노사가 고공농성 426일 만에 협상을 타결한 10일 오후 서울 양천구 목동 열병합발전소 굴뚝 위에서 농성을 벌인 금속노조 충남지부파인텍지회 홍기탁 전 지회장과 박준호 사무장이 농성을 풀고 땅에 내려오자, 마중 나온 시민과 노동자들이 이들에게 손을 흔들며 반기고 있다.ⓒ 유성호
 
75m 굴뚝 위에서 검은 형체가 꿈틀거렸다. 누군가 느릿느릿 사다리를 탔다. 때론, 두 다리가 흔들거리기도 했다. 밧줄을 몸에 감은 실루엣이 더디게 움직였고, 긴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마침내 두 사람이 땅바닥에 발을 내디디고 섰다. 세계 최장기 굴뚝농성에 나선 파인텍 박준호, 홍기탁 두 노동자다. 깡마른 몸이 426일간 75m 콘크리트 기둥 꼭대기에서의 생활을 말해줬다.
 
11일 오후 4시경 박준호 금속노조 파인텍 지회 사무장이 마침내 땅을 밟았다. 뒤이어 홍기탁 파인텍 전 지회장도 지상에 도착했다. 서울 양천구 목동에 있는 열병합발전소 굴뚝에 오른 지 1년 2개월 만이다. 두 노동자의 귀환에 이들의 농성을 지지하며, 연대농성에 나섰던 이들은 눈물과 환호성으로 반겼다.
 
앞서 이날 오전 7시 20분께 파인텍 노사는 끝장 교섭에 나서 협상을 타결했다. 주요 합의사항은 스타플렉스 김세권 대표가 자회사 파인텍의 대표를 맡고, 올해 4월 30일에 단체협약을 체결, 7월 1일부터 3년간 고용을 보장한다는 것이다. 스타플렉스가 5명의 노조원을 직접 고용해 달라는 요구 사항은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관련 기사] 75m 고공의 두 남자, 오늘 내려온다
 
홍기탁-박준호 반기는 시민 '무사히 내려와 고마워' 파인텍 노사가 고공농성 426일 만에 협상을 타결한 10일 오후 서울 양천구 목동 열병합발전소 굴뚝 위에서 농성을 벌인 금속노조 충남지부파인텍지회 홍기탁 전 지회장과 박준호 사무장이 농성을 풀고 땅에 내려오자, 한 지지자가 이들의 손을 잡으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 홍기탁-박준호 반기는 시민 '무사히 내려와 고마워' 파인텍 노사가 고공농성 426일 만에 협상을 타결한 10일 오후 서울 양천구 목동 열병합발전소 굴뚝 위에서 농성을 벌인 금속노조 충남지부파인텍지회 홍기탁 전 지회장과 박준호 사무장이 농성을 풀고 땅에 내려오자, 한 지지자가 이들의 손을 잡으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 유성호


오후 4시 10분 두 노동자는 소방관의 부축을 받으며 구급 침대에 올랐다. 열병합발전소 정문에서 이들은 426일에 걸친 고공농성의 마침표를 찍는 소회를 밝혔다.
 
박준호 파인텍 사무장은 "고맙다"라고 했다. 그는 "밑에 있었던 동지들에게 힘이 못 된 것 같아 미안하다"라며 "지금까지 함께해 준 수많은 동지들과 국민들이 있었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나머지 파인텍 동지들에겐 (그동안) 힘이 못 된 거 같아 미안하다"라고 말했다.
 
홍기탁 전 회장은 눈물을 쏟았다. 그는 "고맙다. 부족한 5명인데, 너무 많은 사람들이 함께 버텨줬다"라며 "저 위에서 박준호 동지와 싸우고 다투면서 많은 것을 느꼈다. 노동조합 하나 지키는 게 왜 이리 힘든지 모르겠다"라고 흐느꼈다.
 
쓴소리도 했다. 홍 전 지회장은 "민주노조를 지키는 게 이 사회에서 왜 이리 힘든지 진짜 더러운 세상이다"라며 "배지만 들고 다니는 국회의원, 재벌들의 밑만 닦고 다니는 권력들, 진짜 더럽다. (공장에서)청춘을 다 받쳤는데"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박준호, 홍기탁 두 노동자를 위해 곡기를 끊고 33일간 단식농성에 나섰던 차광호 지회장도 마이크를 잡았다. 차 회장은 "(그동안 농성을 하면서) 참 힘들고 참담했다. 그래도 여기 있는 분들이 있어서 홍기탁, 박준호 두 동지가 땅을 밟을 수 있었다"라며 "(오늘 이후) 노동자가 사회의 주인이고 꿈을 꾸며 사람답게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어 갔으면 한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김옥배, 조정기 두 노동자는 "연대해준 사람들과 관심을 가져준 시민들에게 고맙다"라며 짧게 소회를 밝혔다. 
 
새신발 선물 받는 홍기탁-박준호 파인텍 노사가 고공농성 426일 만에 협상을 타결한 10일 오후 서울 양천구 목동 열병합발전소 굴뚝 위에서 농성을 벌인 금속노조 충남지부파인텍지회 홍기탁 전 지회장과 박준호 사무장이 농성을 풀고 땅에 내려오자, 동조단식을 벌였던 박래군 인권재단사람 소장과 박승렬 목사가 이들에게 준비한 새 신발을 신겨주고 있다.
▲ 새신발 선물 받는 홍기탁-박준호 파인텍 노사가 고공농성 426일 만에 협상을 타결한 10일 오후 서울 양천구 목동 열병합발전소 굴뚝 위에서 농성을 벌인 금속노조 충남지부파인텍지회 홍기탁 전 지회장과 박준호 사무장이 농성을 풀고 땅에 내려오자, 동조단식을 벌였던 박래군 인권재단사람 소장과 박승렬 목사가 이들에게 준비한 새 신발을 신겨주고 있다.ⓒ 유성호
 
굴뚝농성을 지지하며 동조단식을 했던 이들도 두 노동자를 배웅하며 한마디했다.

인권재단 사람 박래군 소장은 "노동자와 시민이 연대해서 작은 산을 넘었다. 헌법에 보장된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 이렇게 많은 사람이 노력했다는 게 서글프기도 하다"라며 "하지만 굴뚝 위에 사람이 살 수 없다는 마음으로 연대하고 단식에 동참했다. 오늘부터는 합의된 사항을 얼마나 이행하는지 관심을 갖고 감시해 다시는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아야 한다"라고 밝혔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센터 소장 박승렬 목사도 "새들도 살지 못하는 그곳에서 426일간 버틴 두 노동자가 땅에 내려오게 됐다. 시민들에게 감사하다"라며 "지금까지 농성, 협상 과정에서 회사측에 (노조측이) 깊은 갈등과 불신, 분노가 있었는데, 오늘부터 이 문제를 바르고 평화롭게 해결해 새로운 세상이 됐으면 한다"라고 전했다.
 
송경동 시인은 "좋은 날이다. 기쁜 날이다. 꿈만 같다. 정의가 승리한 날이다. 우리 사회 인권의 존엄이 바로 세워진 날이다"라며 "이런 소중한 선물을 모두에게 전해준 파인텍 5명의 동지에게 고맙다. (오늘부로) 1%특권를 위한 나라가 아닌 노동자들이 존중받는 나라. 평범한 시민들이 평화롭게 살아가는 나라가 됐으면 한다"라고 말했다.
 
정치권도 마지막 굴뚝농성 현장을 찾았다. 우원식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굴뚝 높이가 까마득한데 저곳에서 두 노동자가 까마득한 고통을 겪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게 국민들의 안전과 생명이다"라며 "이번 약속을 (회사측이) 절대로 깨거나 위배해서는 안된다. (더불어민주당) 을지로위원회도 합의사항이 관철되고 이행되는지 끝까지 감시하겠다"라고 말했다.
 
윤소하 정의당 의원은 자신의 에피소드를 소개하며 입을 뗐다. 윤 의원은 "솔직히 김세권 대표 집까지 밤중에 찾아간 적이 있다. 분노를 억누르고 사람은 살아야 할 게 아니냐. 사장이냐 노동자냐를 떠나서 사람 먼저 살리자고 호소했다"라며 스타플렉스 김세권 대표를 찾아간 일화를 공개했다.
 
이어 윤 의원은 "파인텍 노사가 타결한 협상은 온 국민한테 내놓은 약속이지 회사와 노동자만의 문제가 아니란 걸 분명하게 기억해야 한다"라며 "이 땅의 노동자들이 제대로 발을 내딛고 설 수 있는 나라를 만들어 나가자"라고 했다.
 
이날 공동행동은 '노동자의 귀환, 우리 모두의 시작!'이라고 적힌 펼침막을 들고 두 노동자를 맞았다.
 
공동행동 김소연 대표는 "내용을 보면 너무나 소박한 한 장의 합의서를 위해 두 명의 노동자가 목숨을 걸어야 했다"라며 "하지만 우리는 희망을 만들었고 오늘이 새로운 출발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오늘 역사를 새로 썼다"라고 말했다.
 
박준호, 홍기탁 두 노동자는 녹색병원으로 후송됐다.
 
'노동이 존중 받는 세상을 위해' 파인텍 노사가 고공농성 426일 만에 협상을 타결한 10일 오후 서울 양천구 목동 열병합발전소 앞에서 열린 ‘파인텍 교섭 결과보고 및 굴뚝농성 해단식’에 참석한 시민과 노동자들이 노동의 가치가 존중 받는 세상을 요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 '노동이 존중 받는 세상을 위해' 파인텍 노사가 고공농성 426일 만에 협상을 타결한 10일 오후 서울 양천구 목동 열병합발전소 앞에서 열린 ‘파인텍 교섭 결과보고 및 굴뚝농성 해단식’에 참석한 시민과 노동자들이 노동의 가치가 존중 받는 세상을 요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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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 뒤 성고문까지 저질렀던 일제의 끔찍한 만행

2019년은 3.1 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임병도 | 2019-01-11 09:24:34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2019년은 3.1 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3.1절 100주년을 앞두고 이미 다양한 행사가 준비되고 있습니다. 비폭력을 통해 독립을 외쳤던 모습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두가 자랑스러워하는 역사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3.1 운동을 겪었던 조선인들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고통을 겪었습니다. 당시 일제가 저질렀던 끔찍한 만행 몇 가지를 소개합니다.

▲ 3·1운동 당시 만세시위에 참가한 여학생의 팔을 자르는 등 일제의 잔혹한 탄압 실상을 알려주는 중국 신문 기사의 그림 ⓒ중국신문한국독립운동기사집(Ⅱ)-3·1운동 편

3.1운동에는 많은 여학생들도 참가했습니다. 일본 경찰은 만세시위에 참가한 여학생을 체포한 뒤 강제로 옷을 벗겨 알몸으로 거리에 내세워 능욕했습니다.

일제의 만행은 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어린 여학생이 오른손에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치자, 일본 헌병은 칼로 오른손을 잘랐습니다. 학생이 잘린 오른손 대신에 왼손으로 태극기를 들고 더 큰 소리로 만세를 외치자 헌병은 왼손마저 잘랐습니다.

두 손이 잘려나간 학생이 또다시 독립만세를 외치자 일본 헌병은 칼로 학생의 가슴을 찔렀고, 결국 학생은 고통 속에서 죽어갔습니다.

이 끔찍한 광경을 목격한 서양인이 사진을 찍으려고 했지만, 일본 헌병에게 끌려가기도 했습니다.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제의 만행은 1919년 4월 12일 중국 신문 <국민공보>에 ‘일본인이 부녀를 능욕하는 방법’이라는 제목의 기사로 보도됐던 내용입니다.

▲일제 경찰의 부녀자 성고문 재연 전시물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2015년 미국 뉴욕 맨해튼의 뉴욕한인교회 창고에서 ‘한국의 상황'(The Korean Situation)이라는 제목의 27페이지짜리 문서가 발견됐습니다. 이 문서에는 1919년 3.1 운동 이후에 벌어진 일제의 무자비한 진압 상황이 나와 있었습니다.

문서에는 “일본 경찰이 자행한 고문 및 잔혹 행위에는 젊은 여성과 여학생을 발가벗기고, 심문하고, 고문하고, 학대한 행위들이 포함돼 있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강간에 대한 처벌이 이뤄지지 않는다'(No charge is made of rape under these conditions.)는 대목을 보면 경찰서에서 강간이 이뤄졌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당시 서양 선교사들은 일본에 구체적인 성고문 건수를 요청했지만, 일제는 ‘정확한 통계 자료가 없다’라며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워싱턴 타임스> 1922년 3월 5일 자 4면. 기사를 작성한 미국 사업가 워드씨는 사진 속 남자들이 근거 없는 법률위반으로 사형을 선고 받고 일본군의 발포명령을 기다리고 있다고 보도했다. ⓒ서울시

1922년 3월 5일 <워싱턴포스트>에는 ‘일본이 조선을 총과 대검으로 조선을 노예로 삼고 있을 때 98명의 여성이 대량 학살당했다’는 제목의 연속 기사가 실렸습니다.

이 기사는 미국인 사업가 로버트 엘 워드씨가 일제의 만행을 르포 형식으로 시리즈로 연재한 글입니다.

워드씨는 일본인들이 소녀들을 총검으로 겨누고 강제로 끌고 가는 것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소녀들은 일본인 장교들 앞에서 발가벗도록 강요를 받았는데, 당시 소녀들의 나이는 14세, 15세 혹은 더 어려 보이는 어린아이들이었습니다.

소녀들은 끔찍한 고문을 당했고 군인들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도록 군인들에게 넘겨졌습니다. 수많은 소녀들이 엄지손가락이 묶인 채 강제로 거리를 지나 끔찍한 최후를 맞으러 갔습니다.

워드씨는 조선인 336명이 한꺼번에 즉결 처형됐는데, 이 중에는 남편과 아들들의 행방을 밝혀내지 못한 것 외에는 그 어떤 죄도 없는 86명의 아내들과 12명의 어머니들이 포함됐다고 밝혔습니다.

▲서울시가 2016년 발굴한 위안부 학살 영상(촬영일 1944.9.15) ⓒ서울시

1944년 9월 중국 송산과 등충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에게 ‘옥쇄’ 지시가 내립니다. 옥쇄는 강제적으로 집단 자살을 의미합니다.

당시 조선인 위안부들은 일본의 강제 자결 지시를 거부합니다. 그러자 일제는 조선인 위안부들을 학살합니다. 중국 송산에는 24명, 등충에는 최소 30명 이상의 위안부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강제로 위안부로 끌고 가 패망하자 잔인하게 학살한 일제의 만행을 보면, 문명국가를 자처했던 일본이 가증스럽게만 느껴집니다.

3.1 운동 100주년 기념행사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일제가 저지른 만행을 자세히 기록한 범죄백서를 만들었으면 합니다. 잊어서는 안 될 가슴 아픈 우리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유튜브에서 바로보기: 3.1 운동 뒤 성고문까지 저질렀던 일제의 끔찍한 만행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3&table=impeter&uid=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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