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영 통일부장관은 4일 오전 판문점견학지원센터 개소식에 참석해 북측에 연락채널 복원을 비롯한 세가지 작은 걸음을 내딛자는 제안을 했다. [사진공동취재단]
이인영 통일부장관은 4일 오전 판문점견학지원센터 개소식에 참석해 '세가지 작은 걸음'을 내딛자고 북측에 제안했다.
취임 100일을 맞기도 한 이날 이 장관은 △남북연락사무소를 비롯한 연락채널의 복원 △판문점 내 남북 자유왕래 △판문점을 통한 이산가족 상봉 등을 '얼어붙은 남북관계의 물꼬가 트이는 평화를 위한 세가지 작은 걸음'으로 제시했다.
먼저, 남측 '자유의 집'과 북측 '판문각' 사이의 통신 복구와 남북공동연락사무소의 복원 및 재가동을 바란다고 하면서 "상시 소통채널을 마련하는 것은 남북관계 복원의 기본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또 지난 2018년 문재인대통령이 경계를 넘었고 9.19 군사합의를 통해서는 자유왕래에 합의한 바 있는 만큼 "판문점 공간 안에서라도 경계를 넘어,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방안을 함께 찾아나가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어 이산가족의 절실함을 생각해 "판문점에서 소규모 상봉이라도 재개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코로나 상황으로 인해 당장 어렵다면, 화상상봉과 서신 교환 등 언택트 방식으로라도 추진"하자고 제안했다.
이 장관은 이날부터 1년여만에 판문점견학이 재개되고 이를 위해 절차적 문제를 대폭 개선해 '판문점견학지원센터'를 개소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남북합의의 정신이 깃든 판문점은 지금 이 순간도 우리에게 '작은 평화'의 시작이자 '큰 평화'를 열망하는 희망의 근거가 되고 있다"고 언급했다.
"무엇보다, 판문점은 9.19 군사합의가 지켜지고 있는 합의이행의 현장"이라고 강조하면서 "앞으로 우리 국민들의 평화의 발걸음이 쌓이고 쌓이면, 평화에 대한 열망과 의지도 판문점을 넘어 북측까지 전해질 것"이라고 기대감을 표시했다.
이날 기념식에 앞서 기자들을 만난 이 장관은 미국 대선이 한반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어떤 경우이든 미국 대선 결과가 새로운 정세의 시작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그런 측면들을 주목하면서 예의주시하고 있다. 다만 정부로서는 어떤 상황이 되든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착실하게 진척시켜나갈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남북관계에 대해서는 "(10월 10일 당창건행사, 11월 3일 미국 대통령선거, 내년 1월 초 제8차 당대회 등 큰 정치일정속에서)북측이 아직까지는 상황을 격화시키거나 파국으로 가는 것보다는 좀 개선하는 쪽으로 가능성들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뭐 완연하게 남북관계 개선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 건 아니고 그래서 그 두 가지 측면들을 다 보면서 최선을 다해서 남북관계를 개선하고 평화의 흐름으로 만들어내기 그런 노력들을 하고 있다"고 조심스러운 입장을 밝혔다.
판문점견학지원센터 개소식이 열린 이날 13개월만에 판문점 시범견학이 재개되었으며, 6일부터 본격화될 예정이다. [사진공동취재단]
이날 개소식에는 송영길 국회 외교통일위원장, 김영호 외통위 민주당 간사, 윤후덕·박정 국회의원, 이재강 경기도 평화부지사, 도성훈 인천광역시 교육감, 장휘국 광조광역시 교육감, 최종환 파주시장, 패트릭 고샤 중립국감독위원회 스위스대표를 비롯한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한편, 이날부터 재개되는 판문점 견학은 남북 협의에 따른 것은 아니며, 지난해 아프리카돼지열병 확산 과정에서 먼저 문을 닫았던 우리 정부가 방역상황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한 결과이다. 북측은 올해 1월 코로나19 확산과정에 판문점 견학을 중단했다.
바이든, 박빙 경합주에서 간발의 차이로 승기 잡아... 당선자 확정 지연에 미국 사회 불안감 고조
김원식 전문기자
발행 2020-11-05 08:39:48
수정 2020-11-05 08:39:48
이 기사는 26번 공유됐습니다
미국 대선 민주당 후보인 바이든 전 부통령과 공화당 후보인 트럼프 대통령ⓒ뉴시스
미국 대선 개표가 대선일 이틀째인 4일(현지 시간) 밤 현재 피를 말리는 초접전 속에 조 바이든 민주당 대선후보가 역전하고 있다. 하지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박빙의 승부 차이를 보인 지역의 재검표와 개표 중단 등을 요구하며 법적 소송전에 돌입했다.
개표 초기 예상외로 트럼프 대통령이 앞서가던 일부 경합주에서 다시 조 바이든 민주당 대선후보가 역전하거나 바짝 추격했다. 따라서 우편투표 등 사전투표의 개표가 지연되면 법적 소송 등 큰 혼란을 불러올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승패의 핵심이 되는 북부 3개 경합주인 위스콘신, 미시간, 펜실베이니아 등 이른바 ‘러스트벨트’ 지역의 싸움이 치열했다. 이들 3개 주는 개표 초반 트럼프 대통령이 앞서갔지만, 위스콘신과 미시간은 현재 바이든 후보가 역전한 상황이다.
뉴욕타임스(NYT) 집계에 따르면, 위스콘신은 현재 98% 개표에 바이든 후보가 49.4% 득표율로 트럼프 대통령(48.8%)을 불과 0.6%포인트 앞서고 있다. 트럼프 대선 캠프는 박빙의 표차를 보이자 재검표를 요청했다고 밝혔다.
미시간도 97% 개표에 바이든 후보가 49.8% 득표율로 트럼프 대통령(48.6%)을 1.29%포인트 차이로 역전했다. 개표 후반에 바이든 후보에게 유리한 우편투표 등 사전투표가 개표되면서 CNN방송 등 일부 매체는 바이든의 승리를 확정했다.
최대 승부처로 꼽히는 펜실베이니아는 85% 개표 기준으로 트럼프 대통령이 51.8% 득표율로 46.9%의 바이든 후보를 4.9%포인트 앞서고 있다. 한때 트럼프 대통령이 두 자리 숫자까지 앞서갔지만, 간격이 좁혀지는 상황이다.
이 밖에도 노스캐롤라이나, 조지아, 애리조나, 네바다 등 아직 승패의 최종 확정이 이뤄지지 않은 나머지 경합 지역에서도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개표 양상이 펼쳐지고 있다.
현재 바이든 후보는 네바다(86% 개표 기준 0.6%포인트)와 애리조나(86% 개표 기준 3.4%포인트)에서 앞서고 있고, 트럼프 대통령은 노스캐롤라이나(95% 개표기준 1.4%포인트)와 조지아(94% 개표 기준 1.2%포인트)에서 리드하는 상황이다.
NYT에 따르면 바이든 후보는 현재 선거인단을 253명, 트럼프 대통령은 214명을 확보한 상태다. 하지만 AP통신과 폭스뉴스 등은 애리조나(11명)에서 바이든 승리를 확정했다. 따라서 현재 우위를 보이는 네바다(6명)만 승리한다면 270명의 선거인단을 확보해 당선을 확정할 수 있다고 일부 언론들은 전했다.
트럼프, “매우 이상하다” 불복 예고 vs. 바이든, “모든 투표 집계돼야” 반격
270명은 선거인단(538명) 과반이자 대통령 당선을 확정하는 ‘매직 넘버’다. 하지만 현재 이들 경합 지역의 개표 작업이 여전히 진행 중이고 초접전이 계속되고 있어 어느 쪽도 당선 확정을 섣불리 선언할 수 없는 상황이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 측이 재검표 요구와 함께 사전투표 개표 중단 등을 요구하는 소송에 돌입함에 따라 상당 기간 당선자를 확정하지 못하는 상태가 지속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이 경우 연방대법원의 최종 판결까지는 한 달 이상이 걸릴 전망이다.
바이든 후보는 이날 연설을 통해 “당선에 필요한 270명의 선거인단에 도달하기에 충분한 주들에서 우리가 승리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면서 “진행 중인 개표가 끝나면 승리할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 그는 트럼프 대통령을 겨냥해 “모든 투표는 반드시 집계돼야 한다”며 “우리 국민은 침묵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트위터를 통해 “어젯밤 나는 대부분 민주당이 운영하거나 지배한 많은 핵심 주에서 확고한 우위를 보이고 있었다”면서 “그 이후 놀랄 만한 투표용지 더미가 개표되면서 이 우위는 하나하나씩 마법처럼 사라지기 시작했다. 매우 이상하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여론조사 전문가들은 그것은 역사적으로 완전하게 잘못된 것이라고 본다”면서 “어떻게 우편투표 더미가 개표될 때마다 득표율에서 그렇게 압도적이고 파괴력을 가질 수 있느냐”며 강한 불만과 의구심을 표시했다. 또 이어진 트윗에서 ”내가 대승한 펜실베이니아, 조지아, 노스캐롤라이나, 미시간 등에 소송을 제기했다”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이 소송을 예고한 상태라 바이든 후보가 간발의 차이로 승리하더라도 이에 승복할 공산은 거의 없다고 선거분석가들은 전망했다. 따라서 미 대선 당선자 확정이 지연됨에 따라 미국 사회가 다시 불안에 휩싸일 수 있다고 미 언론들은 전했다.
“안 되는 거 아는데 정말 한번만…”
“다른 병원도 다 안 받는다 할 것”
집단휴진 탓 “당직의 없어 어렵다”
지역 대학병원 등 14곳 모두 거절
3시간여 만에 겨우 옮겼지만 결국…
의료진 부재, 진료거부 해당 안돼
중증 응급환자들 최우선 수용할
‘500병상 이상’ 공공병원 확충 시급
전국 대형병원에서 수련 받는 전공의들은 지난 8월21일부터 약 20일간 집단휴진을 벌였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지난 8월26일 밤 11시23분. 부산에 사는 47살 ㄱ씨가 약물을 마셔 위독하다는 신고가 119에 접수됐다. 음주운전이 적발돼 경찰과 임의동행하던 중 ‘잠시 볼일이 있다’며 집에 들른 ㄱ씨는 덜컥 살충제를 마시고 말았다. 경찰이 ㄱ씨를 가까운 종합병원에 데려갔지만 ‘약물중독은 더 큰 병원에 가야 한다’는 설명을 듣고 119에 신고한 것이었다. 이때부터 ㄱ씨를 구급차에 실은 119구급대원과 소방청의 절박한 ‘병원 찾기’가 시작됐다. 의식을 잃어가는 환자를 지켜보며, 심폐소생술을 하며, 앰부백(수동식 인공호흡기 마스크)을 짜며, 부산·경남 지역 대학병원 6곳을 포함해 의료기관 14곳의 문을 두드렸지만 소용없었다. 당시는 정부의 의대 정원 확대에 반대하는 전공의 집단휴진이 6일째 계속되던 때다. 결국 ㄱ씨는 이튿날 새벽 2시19분 울산대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당일 오후 5시47분 중환자실에서 숨을 거뒀다.
3일 <한겨레>는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정춘숙 의원(더불어민주당)을 통해 입수한 소방청과 부산시, 경기도, 국민건강보험공단 등의 자료를 바탕으로 긴박했던 그날 밤의 상황을 재구성했다.
북부소방서 감염전담구급대가 부산 ○○병원 앞에 도착한 시각은 밤 11시33분. 이 병원은 혈액 투석 등이 필요한 약물중독을 치료하기엔 규모가 작은 곳이었다. 이에 구급대원들은 부산 구급상황관리센터와 함께 지역 대형병원들에 전화를 돌렸다. 그러나 돌아온 답은 “‘에프유’가 아니면 받을 수 없다”거나 “당직 의사가 1명뿐이라 어렵다”는 것이었다. 에프유(F/U)란 재진 외래환자를 뜻한다. 전공의들의 집단휴진으로, 전국의 대형병원들은 수술 일정을 조정하거나 신규 환자를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버티던 때다.
밤 11시50분. “다 안 된다고 한다”는 구급대원의 절망 섞인 목소리에 119상황센터는 “어떤 이유로 다들 안 된다고 하는 겁니까?”라고 되물었다. “○○대 병원은 파업 중이죠?”(구급대원) “다 파업이죠. 지금 전화를 안 받아서….”(119상황센터)
이튿날 0시25분. 환자는 의식이 ‘세미코마’(반혼수) 상태로 빠지고, 맥박과 호흡이 흐려졌다. 심폐소생술이 가능한 특별구급대가 추가로 출동했다. 대원들은 심정지를 일으킨 환자에게 심폐소생술을 하며 “선생님, 진짜 안 되는 거 아는데, 정말 한번만요”(119상황센터)라며 애원하기 시작했다. 한 대학병원은 “(환자를) 권역응급센터로 밀고 들어가는 게 낫다. 이렇게 전화해봤자 다른 병원들도 다 안 받는다고 할 것 같다”며 거절하기도 했다. 응급의료법에 따라 보건복지부 장관이 지정해 중증 응급환자를 받도록 한 권역응급의료센터 병원으로 가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부산 지역의 응급의료센터인 동아대병원도 ㄱ씨를 받아주진 않았다. 부산시가 8월28일 작성한 ‘업무보고’ 문서를 보면, 당시 동아대병원 응급실엔 전문의 2명만이 일하고 있었다. 부산시는 “파업으로 인력 부족 상태였고, 중환자 병상도 없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진료 거부를 한 것은 아니라 법 위반은 아니다”라고 판단했다.
0시38분. 구급대원들의 노력으로 ㄱ씨는 호흡과 맥박을 회복했다. 여전히 받겠다는 병원은 없었다. 소방청 중앙구급상황관리센터까지 나서 수소문한 끝에 새벽 1시께 울산대병원이 수용 가능 의사를 밝혔다. 새벽 2시19분. ㄱ씨가 울산대병원에 도착한 뒤에야 긴박했던 통화는 종료됐다. 신고 접수 3시간여 만이었다.
<8월26∼27일 부산 약물중독 환자 ㄱ씨 이송 지연 사건 재구성>
자료: 정춘숙 더불어민주당 의원, 소방청 ‘119 신고 녹취록’ 일부
―8월26일 밤 11시33분119 구급대원 도착, 상황센터와 함께 병원 수소문 시작.
―밤 11시50분
구급대원 : 다 안 된다고 하면 우리는 어디로 가야합니까?119상황센터 :
어떻게 다 안 된다고 하세요?
○○○(부산 지역 대학병원)는 뭐라고 하시던가요?구급대원
: 신규환자 안 받는다고 입원도 안 된다고.
―밤 11시59분
119상황센터 : 선생님, 안녕하세요.
119상황센터이구요. 약물중독 환자 문의 좀 드릴려구요.
○○○병원(부산 지역 대학병원) : 우리가 볼 상황이 안 됩니다. 봐드리고 싶어도…. 우리도 당직이 한명씩 돌아가는데. 봐드리고 싶어도 볼 수가 없어요.
―8월27일 새벽 0시29분
구급대원 : 환자 상태가 안 좋아지는데요. 아까는 말이라도 했는데 지금은 ‘세미코마'(반혼수)인데….
정춘숙 의원은 4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당시 상황의 배경에 집단휴진 사태가 있었다며, 복지부에 철저한 진상 조사와 재발 방지 대책 마련을 요구할 계획이다. 그는 “환자를 외면한 14곳 가운데 6개 병원은 8월에도 국민건강보험공단에 약물중독 치료 급여 청구를 한 사실이 있다. 집단휴진 사태 직전까지도 약물중독 치료가 가능했던 것”이라고 지적했다.
코로나19 장기화 국면인 만큼, 중증 응급환자를 안정적으로 치료할 수 있는 공공병원 확충이 시급하다는 목소리도 뒤따른다. 김대희 가톨릭대 인천성모병원 교수(응급의학과)는 “코로나19로 인해 일반 종합병원 응급실이 발열·호흡기 증상이 있는 환자를 가려 받는 경향이 생기면서, 일부 대학병원 응급실로 환자 쏠림 현상이 심화됐다”며 “119 이송 환자를 최우선적으로 수용하는 병원이 있어야 한다. 중증 응급환자를 치료할 500병상 이상 공공병원을 확충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한편 보건의료단체연합, 참여연대 등 173개 시민사회단체는 3일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내년도 예산안에 공공병원 신·증축 예산은 0원”이라고 지적하며 공공의료 예산을 확대 편성하라고 요구했다.
3일 오전 서울 종로구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공공의료 강화를 위한 노동시민단체 활동가들이 ‘공공병원 설립 예산 확충 등 공공의료 강화를 위한 전국공동행동 삐뽀삐뽀 공공의료119 선포 기자회견’을 열어 정부·여당에 공공의료 확충 예산 편성을 촉구하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우선, 민주당의 입장에서는 ▶‘명분 없는’ 보궐선거가 ‘명분 있는’ 보궐선거가 될 수 있다. ▶‘전투’뿐만 아니라, ‘전쟁’에서도 이길 수 있는 방책이다.
다음으로, 진보진영의 입장에서는 ▶운동이 ‘가능한 것’만 채택한다면 그것이 어찌 운동이겠는가? 불가능해 보이는 것도 가능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운동이다. ▶통일전선적 관점에서 민주당은 견인(혹은, 비판)의 대상이다. 옳게 쓰여지는 전략이다.
두 집단의 이해관계가 정확히 그렇게 일치한다.
해서 이 글은 ‘외면할 수 없는’ 민주당의 현실과 ‘경직된’ 운동의 상상력 경계를 허물어, 우리 정치가 한 단계 성숙할 수 있는 가능성이 최대한 끌어올려지는데 그 목적이 있다.
▲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2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 : 뉴시스]
시작은 이렇다.
더불어민주당은 10월 31일부터 11월 1일까지 전 당원투표를 실시했다. 내년(2021)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 공천 여부를 결정할 당헌 개정 전당원 투표였다.
결과는 ‘사실상’ 유효투표율 미달이라는 효력여부논쟁은 발생할 수 있겠지만, 상관없이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 후보자를 낼 것으로 보인다.
몇 가지 측면에서는 매우 안타깝다.
첫째는, 지도부의 비겁한 결정이 대한민국 정치를 희화화했다.
누가 뭐래도 이번 투표는 지도부 자신들이 져야 할 정치적 책임을 당원들에 전가한 것이다. 비겁한 정치적 행위이다.
둘째는, 이번 이 결정-민주당의 당원투표 실시결정이 대한민국 정당사에서 참으로 부끄럽고 민망한 정치행위로 기록된다는 사실이다.
정당에 있어 당헌은 그 당에 있어 헌법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도 이 헌법적 규율조항을 자당의 현실적 목적 땜에 내팽개쳐 졌다. 누가 보더라도 정당하지 못하다.
셋째는, 이번 민주당의 이 결정과 향후 결과가 제아무리 좋은 명분과 정치로 치장을 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겠다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당장의 정치적 이득 땜에, 그 욕망과 탐욕을 위해 국민들과 한 약속, 믿음과 신뢰를 헌신짝 대하듯 버렸으니, 민주당은 그 어떤 정치적 보상과 이득을 받더라도 자신들의 그 정치적 행위를 만회하기란 매우 어려워 보인다.
그런데도 민주당은 왜 이런 결정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다른 데 있지 않다.
그들의 2년 뒤 목표, 대선에서 다시 정권재창출을 하기 위해서는 이 방법만이 최선일 것이라는 판단 때문일 것이다.
과연 그런가?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린 그 의미를 정확히 캐치해 내고, 민주당을 통일전선적 운동관점에서 민주당을 어떻게 견인할지와, 민주당이 그 결정을 할 수 있도록 강제해내어야 한다.
통일전선운동 관점에서는 민주당을 대하는 진보진영의 시각과 관점은 일관돼있다. 진보진영의 최종 목표가 자주적 민주정부수립을 통한 통일정부 구성에 있다 했을 때 그 긴 여정에서 민주당은 ‘때론 비판, 때론 견인’하면서 가야 할 연대·연합의 대상이다.
이를 위한 ■ 첫째 인식은, 민주당의 이번 결정에 대한 비판적 접근이 필요하다.
당헌은 그 당의 헌법과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정치적 불이익과 불편이 있더라도 이는 감내해내어야만 하는 그 당의 몫이다.
즉, 명분적으로는 후보를 내야 할 이유가 발생하지 않고, 현실적으로는 이번 결정이 ‘전투’에서는 승리할지는 모르겠으나, ‘전쟁’에서는 지는 결정이다.
그런데도 집권여당이 자신들의 정치적 책임문제를 보궐선거에서 후보를 냄으로써 지겠다는 것은 정치적 궤변에 다름아니다. 정치적 책임이 그렇게 성립하지 않는데도 말이다.
그러니 민주당의 이번 결정을 이해할 수는 있겠으나, 결정으로서의 정당성은 수용할 수 없다.
그러면 물어지는 것이 있다. 정치란 무엇인가?
본령적으로 보자면 정치는 국가를 이루는 구성원들에게 행복을 안겨다 주는 주권적 행위이다. 그리고 그 행복은 물질적 부보다 정치도덕적 행복이 더 중함을 알 수 있다.
당 창건 75돌에 행사에서 북은 이걸 명확히 증명해냈다.
아시다시피 제3차 고난의 행군 시기라 명명해도 하등 이상할 것 없는 북의 올해 한해였다. 혹독한 자연재해, 코로나-19발생으로 인한 ‘사실상’의 국경폐쇄, 3차례의 남북정상회담과 2차례의 북미정상회담을 통해 제재국면 해소가 기대되었으나 이것마저도 무위로 돌아간 북, 고충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함에도 북은 그들 자신들의 가장 큰 명절인 당 창건 기념일에서 온 인류가 국가란? 정치란? 지도자란? 무엇이며 어떠해야 되는지를 아주 '감동적인' 방식으로 보여줬다.
‘아무것도 제대로 해내지 못한(그만큼 많은 것을 해냈다는 역설적인 의미표현)’ 한해였지만, 지도자는 인민이 고마워서 울었고, 인민은 그런 당과 국가지도자가 고마워 울고, 그렇게 하나가 된 모습이었다.
어떤 단어로도, 백만 단어로도 설명해 낼 수 없는 감동 자체가 정치였다.
굳이 설명해야 한다면 ‘서로 믿고, 존중하는 것’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북은 정치를 그렇게 보여줬다. 믿음과 신뢰.
아니더라도 민주당은 이번 보궐선거에서 후보를 내지 말아야 한다. 명분도 없다. 설령 (후보를 내어야 할)수백만 가지가 있더라도 단 한 가지, ‘신뢰’의 문제에 금이 간다면, 수백만 가지의 근거를 포기할 수 있는 그런 정당이 되게 하는 것, 그것이 진정으로 집권여당 민주당이 해냈어야 정치적 책무였다. 책임지는 자세였다.
정당에 대한 신뢰가 무너져 내리면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다는 자세, 외에는 그 어떤 정치적 레토릭을 구사하든, 예하면 ‘이번 보궐선거에서 도덕적 후보를 내 책임을 달게 받겠다’는 둥 그런 것은 다 말장난이고, 정치적 욕심과 야망이 불러낸 참화이다, 그걸 인정하는 용기였다.
정말 ‘정치적 책임을 달게 받을’ 생각이 있었다면, 그딴 말장난보다 당헌대로 후보를 내지 않으면 된다.
못하면서, 정치적 책임 운운하는 것은 '거짓'이다.
정치적 용기도 없고, 정치(政治)가 정치(正治)되지 않는다.
북과 남의 정치는 그렇게 다르다. 북은 이번 75돌 행사를 통해 정치가 ‘믿음의 정치’, ‘사랑의 정치’여야 됨을 보여줬고, 민주당은 이번 결정을 통해 당장의 ‘작은’ 승리에 눈멀어 '이익의 정치', '정파의 정치'만 보여줬다.
배워야 한다. 체제와 이념이 다르다 하여 못 배울 이유가 전혀 없다.
그렇다면 무엇을 배워야만 한단 말인가?
다름 아니다. 백번 양보해 민주당이 왜 당원투표를 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이번 보궐선거에서 왜 후보를 내어야만 지가 수백 가지의 정치적 이유가 있다손 치더라도, 그 수백 가지의 이유가 단 한 가지를 넘어설 수 없다면 그 ‘없음’의 가치를 사수해내어야 했던 것이다.
<국민과의 약속, 믿음과 신뢰>를 넘어서지 않았어야 했다. 하지만, 민주당은 그걸 해내지 못하였다.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2년 뒤 있을 대선에 승리하기 위해 과반에 육박하는 투표권이 있는 이번 보궐선거를 포기할 수 없었음이다.
조직도 점검해 봐야 하고, 부산은 모르겠으나 서울은 이길 가능성이 높으니(이 말뜻은 부산만 보궐선거하게 되었으면 아마도 포기했을 수도 있었다는 의미도 내포한다. 민주당의 사고는 이렇게 1차원적이다. 너무나도 뻔히 보인다.) 이를 포기할 수 없어 전 당원투표를 통해 그 욕심을 부릴 수밖에 없었다.
뿐만 아니다. 모르긴 몰라도 일부 당원들의 욕망과 탐욕도 한몫 했으리라. 많은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들이 한 자리씩 꿰찰 수 있어 자당 내 실업률(?)도 낮아지는 이득 말이다.
등등 수백 가지의 이해관계와 요구가 그렇게 빼곡히 가득 차고도 넘친다.
현실적인 탐욕과 욕망이 그들 스스로가 만든 당헌을 그렇게 내팽겨치게 만들고, '잘못' 계산된 이해관계는 아무렇지 않게 부활했다.
■ 둘째 인식은, 이제 그들은-민주당은 어떻게 해서 그 잘못된 결정과 질서를 바로 잡을 것인가? 하는 그런 문제와 맞닿는다.
분명 어렵겠지만, 정치의 본령을 제대로 보여줘야 한다.
당헌대로 후보를 안 내는 것이 제일 좋았겠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 되었다.
그래서 되돌릴 수 없다면 지금부터는 코페르니쿠스적인 대전환과 정말 큰 정치적 발상이 필요하다.
▶명분을 지키면서도 소탐대실하지 않는 지혜
▶전투에 이기면서도 전략에 실패하지 않는 지혜
다른데 있지 않다. ‘반적폐세력연합후보’의 관점에서 접근해 이에 동의하는 모든 정치세력과 시민사회세력을 연대·연합시켜 내는 것, 자신들이 갖고 있었던 그 ‘얄팍한’ 기득권을 내려놓고 시민사회세력과 연대·연합해 내는 것, 그렇게 전략적 지혜는 발휘되어져야 한다.
우선적으로는, 범시민후보가 만들어질 수 있는 통 큰 결단. 다른말로는 대의명분적으로는 범시민후보이나, ‘사실상은’ 자당후보가 되게 하는 그런 결단. 그걸 결정할 수 있는 민주당이어야 한다.
한 가지 더, 그것만-후보연합만이 아닌, 반적폐세력연합후보의 ‘공동자치정부’까지 구성해 내는 용기가 필요하다.
늦었지만, 또한 100%의 정답은 아닐 수 있겠지만, 정치적 책임을 지려면 그렇게 져야 하는 것이다.
민주당에게 그런 상상력을 기대해본다.
■ 셋째 인식은, 만약 민주당이 위 ‘첫째 인식은’과 ‘둘째 인식은’으로 견인되고 강제되지 않았을 때 진보진영은 반드시 독자후보를 내야 한다.
근거는 이렇다.
하나, 민주당 후보를 반적폐세력연합후보로 둔갑시키는 것은 통일전선운동론적 관점에서 옳지 않다.
둘, 지금의 민주당은 집권여당이다. 정치적 의미로는 국정책임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고, 못한 만큼 무조건 ‘묻지마식’ 연대연합전술은 옳지 않다.
셋, 확보된 선거공간에서 진보진영도 독자후보를 내어야만 광폭적인 대중투쟁을 가져갈 수 있고, 다양한 선전·선동을 구사될 수 있어 과학적 운동방법론이 견지된다. 더해서 이후 정치적 독자세력화의 토대까지 구축할 수 있다.
그 ‘옳은’ 전략을 절대 놓쳐서는 안 된다.
김광수 약력
저서로는 『수령국가』(2015)외에도 『사상강국: 북한의 선군사상』(2012), 『세습은 없다: 주체의 후계자론과의 대화』(2008)가 있다.
강의경력으로는 인제대 통일학부 겸임교수와 부산가톨릭대 교양학부 외래교수를 역임했다. 그리고 현재는 부경대 기초교양교육원 외래교수로 출강한다.
주요활동으로는 전 한총련(2기) 정책위원장/전 부산연합 정책국장/전 부산시민연대 운영위원장/전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사무처장·상임이사/전 민주공원 관장/전 하얄리아부대 되찾기 범시민운동본부 공동운영위원장/전 해외동포 민족문화·교육네트워크 운영위원/전 부산겨레하나 운영위원/전 6.15부산본부 정책위원장·공동집행위원장·공동대표/전 국가인권위원회 ‘북한인권포럼’위원/현 대한불교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 부산지역본부 운영위원(재가)/현 사)청춘멘토 자문위원/6.15부산본부 자문위원/전 통일부 통일교육위원 / 평화통일센터 하나 이사장/(사)한반도 평화와 번영을 위한 협력 자문위원 외 다수가 있다.
군사정권 시절에는 누구든 간첩이 될 수 있었다. 특히 제주에는 공권력의 고문과 폭력에 간첩으로 조작된 사람들이 많다. 제주에 사는 조작간첩 피해자의 피해 사실과 그들의 삶과 기억을 기록해 현대사의 비극에 직면하고 이를 통해 파괴된 공동체와 인권의 회복을 돕고자 한다. [편집자말]
강희철씨와 이장형씨의 소식을 듣고 재심을 결심한 강광보씨는 본격적으로 재심을 준비했다. 그의 재심 준비는 피해자를 찾아내는 것부터 시작됐다.
강광보씨는 제주의 조작간첩 피해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찾아내어 만나고, 설득했다. 몇 년간 제주 지역을 돌아다니며 간첩으로 조작된 사람들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함께 진실을 찾자고 설득했다. 그가 그렇게 찾아낸 피해자들과 내가 처음 만난 것은 제주시 일도이동에 위치한 오래된 다방, 양지다방이었다.
강광보씨가 어렵게 피해자들을 설득해 그 자리에 나오기는 했지만 이들은 의심 가득한 눈빛을 숨기지 않았다. 마주 앉아 있는 내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무엇을 도와줄 수 있는지,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나 역시 어떤 어려움을 해결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의 만남이라 긴장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앞으로 이야기하겠지만 그들의 의심은 수사 과정과 법정에서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겪은 불신 때문이다.
누구라도 그렇겠지만 처음 보는 사람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는 것은 쉽지 않다. 특히나 간첩이라는 특별한 경력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는 더욱더 그러할 것이다. 낯선 이에게 선뜻 자신이 간첩으로 조작된 억울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할 때, 몇 명이나 그 이야기에 공감해 줄 수 있을까? 이미 주변의 따가운 시선을 오래전부터 여러 번 경험했던 이들로서는 자신의 억울함을 꺼낸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강희철, 강광보라는 같은 피해를 경험한 사람이 보증을 했기에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었다.
나 역시 이들을 육지에서 조작된 간첩과 같은 피해자로 생각하고 만났다. 제주 피해자들이 육지 피해자들과 달리 4.3, 밀항, 조총련과 같은 제주의 특수한 사정 속에서 생겨났다는 사실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이날 이후 제주 피해자들을 만나는 과정에서 오래전부터 육지 권력자들의 권력 유지를 위해 수많은 제주인들이 고통당해야만 했던 역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날 모인 조작간첩 피해자들은 모두 4명, 이들의 징역형을 합하면 모두 30년쯤 되었다. 이들은 곤을, 화북, 삼양 등 가까운 마을 사람들로 모두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보통 조작간첩 피해자들과의 첫 만남에서는 서로 인사를 주고 받고 '나는 이러이러한 일로 억울한 사람이다' 정도만을 듣는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시간도 없을뿐더러 자세한 이야기를 듣는다 해도 그 자리에서 당장 무엇인가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이날 첫 만남에서는 마음을 다해 진실규명을 함께 하겠다고 다짐하고, 국가기록원이나 검찰로부터 수사 기록과 재판 기록을 신청해 받는 방법을 공유했다. 그 후에 어떤 점이 억울한지, 재심이 가능한지 확인하고 증거나 증인을 찾아보자는 이야기를 나눴다. 그때 모인 분 중 한 분이던 김평강씨가 조심스럽게 말을 열었다.
막상 재심을 하려면 육지나 일본 같은 곳에 사는 증인이나 증거를 찾아 여기저기 다녀야 할 텐데 나이 든 자신들이 그런 일을 하기는 무리라는 것이다. 특히 김평강씨의 경우 불법체류로 일본에서 추방된 상태라 10년간 일본 재입국이 금지되어 있는 상태였다. 김평강씨 사건이 대부분 일본의 교포들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증인이나 증거를 찾으러 가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결국 증인과 증거를 찾는 일을 자신이 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재심 재판을 하려면 재판 비용이 들어갈 텐데 변변한 돈벌이가 없는 자신들은 그러한 능력이 되지 않으니 어떻게 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당시 모인 김평강, 허간회는 70대 후반으로 직장이 없었고, 강광보는 70대 초반으로 버스 회사 주차장 야간경비를 하고 있었는데 그마저도 자신의 생계를 겨우 유지하는 정도였다. 그러니 적게는 수백만 원에 이르는 보통의 재판 비용을 생각하면 재심을 한다는 것은 매우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나는 그런 것들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국가폭력피해자들의 억울함을 밝히기 위해 단체를 만든 것이고, 억울한 피해자의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은 단체의 힘으로 하겠으니 염려 마시라 말씀드렸다. 한편으로 재판의 경우 억울한 점이 확인되면, 그래서 재심을 해야겠다고 판단되면, 일단 무료 변론해줄 변호사를 찾아보겠으니 그 점도 염려마시라 전했다.
그제야 마음이 놓이는지 표정이 밝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나에게 마지막으로 하나 더 물었다. 자신들 사건을 맡았다가 힘들어서 중간에 포기해도 원망하지 않을테니 부담 갖지 말라는 것이었다.
대신 이렇게 말씀드렸다.
"제 손을 먼저 놓지만 않으시면, 제가 먼저 선생님 손을 놓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렇게 조작 간첩에 대한 진실규명이 시작되었다.
덧붙이는 글 | 필자는 2004년 12월 국정원 진실위원회에서 조사관으로 근무하기 시작했고 2006년 4월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으로 위원회를 옮겨 2010년 12월까지 과거사 조사를 계속했다. 진실화해위원회가 해체된 뒤에도 국가폭력 피해자들의 피해를 밝혀내는 일을 꾸준히 해왔고 지금은 국가폭력 피해자 지원단체인 '지금 여기에'에서 일하며 국가권력으로부터 부당하게 인권 침해를 당한 피해자들의 진실을 규명하고 이들의 사법적 회복을 돕고 있다.
미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선거가 될 것이라는 이번 대선이 22개월의 긴 레이스를 마감했다. 4년 전 미국우선주의를 표방하며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는 트럼프 대통령의 구호는 미국이 글로벌 리더를 자임하면서 정작 자신의 이익을 챙기지 못하는 데 화가 난 미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냉전 종식 이후 무분별한 세계 분쟁 개입과 천문학적인 재정 적자, 미국 내 실업률 증가와 일자리 감소, 불법 이민자 문제, 대중국 무역적자 증가 등이 미국의 고질적인 문제로 자리잡았다.
지난 4년간 트럼프 정부는 대선 공약들을 실행에 옮겼다. 세계 경찰 역할을 사임했고, 국제기구와 국제공조를 불신했으며 금전적 손익에 따라 동맹 관계를 평가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미국의 글로벌 리더로서의 입지가 위태롭게 됐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셰일 산업 활성화와 화석 에너지 수출 장려, 미국 기업에 대한 세금 감면과 미국 기업의 리쇼어링 촉진, 국내 일자리와 신규 세수 창출의 경제적 선순환 고리를 만들면서 최저 실업률과 경제 성장률 상승을 이끌었다.
코로나 팬데믹 이전까지 트럼프 대통령의 재선은 굳건해 보였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트럼프 대통령의 코로나 팬데믹 대응 실패와 국내 경기침체, 대통령의 코로나 확진, 인종차별 항의 시위까지 겹치면서 미 대선은 혼전을 거듭했다. 선거가 끝난 지금 누가 차기 대통령 당선자가 될 것인지에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이번 대선은 미중패권경쟁과 코로나 팬데믹으로 전 세계가 혼란스러운 가운데 치러지며 대선 결과에 따라 자유주의 국제질서 재편의 방향이 결정된다는 데 중요한 의미가 있다. 두 후보가 동일하게 대중강경책을 주장하고 있지만, 세부적인 접근법은 상이할 것으로 예상된다.
두 후보는 한반도 정책에 있어 북핵문제 접근법, 한미 방위비 분담금 협상과 주한미군 주둔에 대한 견해가 대립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이번 미국 대선 결과는 미국·중국과 협력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한반도 비핵화를 추진해야 하는 한국의 대외전략과 북핵 문제와 연동되는 한반도 정세 변화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 1일(현지 시각) 조 바이든 미국 민주당 대통령 선거 후보가 이번 대선 최대 격전지 중 한 곳인 펜실베이니아주의 필라델피아에서 유세를 벌이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바이든 후보가 당선되면 미국은 대외적으로 대중국 압박 전략과 선택적 개입주의를 견지하면서 글로벌 리더로서의 입지를 다시 확립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군사력과 외교력을 중국의 부상을 저지하는 데 투입하고 동맹국과의 관계를 강화하여 비용과 책임을 나누면서 국제규범과 다자협력을 통한 중국 압박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 인도· 태평양지역의 중요도는 변함이 없지만, 세부적인 전략은 변경될 가능성이 크며, 쿼드(QUAD)나 쿼드 플러스(QUAD+)의 개념이 사라질 수 있다.
대내적으로는 바이든 후보의 공약인 '더 나은 재건(Build Back Better)'을 위해 증세와 재정 정책 확대가 경제 정책의 주요 기조가 될 것이다. 그는 미국 경제 재건을 위해 정부 예산 7000억 달러(약 840조 원) 투입, 일자리 500만 개 창출, 최저 시급 15달러로 인상, 오바마 케어 계승 등을 약속했다.
바이든 행정부가 출범하면 지난 4년간 트럼프 행정부의 국내외 정책들을 검토하고 수정하는데 많은 시간이 소요될 것이고, 미국 내 경제적 혼란을 수습하는 데 총력을 기울일 것이다. 따라서 한국은 한반도 비핵화 이슈가 미국의 외교정책에 후순위로 밀리지 않도록 빠른 대처를 해야 한다.
자유민주주의 가치 수호와 한미동맹 강화 기조를 유지하는 바이든 정부에 한반도 비핵화는 아시아 전체의 평화와 번영뿐만 아니라 미국의 지정학적, 지경학적 이익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음을 지속적으로 설득하면서 북미 비핵화 협상을 이어나가는 것이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에서 미국의 영향력 확대에 중요한 부분임을 강조해야 한다.
바이든 정부는 북한의 핵감축을 전제로 한 미북 정상회담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으며, 트럼프 정부에 비해 체계적인 비핵화 과정을 추진할 가능성이 높다. 바이든 후보는 미 의회 상원 외교위원회 활동을 30년 이상했으며, 상원 외교위원장 자격으로 김대중 대통령을 접견했고, 부통령 자격으로 박근혜, 이명박 전 대통령을 접견하는 등 한국 정치, 한미동맹과 북핵 문제에 대한 이해가 높은 편이다.
외교에 능통한 바이든 후보가 중국 견제 수단으로 북한을 미국 편으로 끌어당기기 위한 체계적인 노력을 할 가능성이 있다. 한미동맹을 강화하면서 대북정책 추진 시 한국과의 협의를 중시할 것으로 예측되는 것도 좋은 신호다.
그러나 바이든 행정부가 북미협상에서 상향식(Bottom-up)방식을 선호하며, 전문가 의견 수렴과 원칙에 입각한 외교적 관여를 통한 비핵화를 추구함으로써 대북전략팀 구성과 대북정책 마련, 북한 비핵화에 대한 가시적인 성과가 도출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보인다.
또 한 가지 예상되는 난제는 미국 대통령과 세 차례 만나 빅딜을 논의했던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새로운 행정부의 새로운 대북전략팀과의 실무협상에 다시 응할지 미지수다. 미국의 대북전략 기조나 태도에 따라 2017년 말과 같은 북한의 전략적 도발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나쁜 시나리오가 재연될 경우 어렵게 이루어낸 4.27 판문점 선언, 9.19 군사합의 등이 무효화되고 한반도에 군사적 긴장이 고조될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한국은 바이든 정부의 대북정책 추진을 예의주시하면서 한반도 비핵화와 남북경제협력을 위한 동력을 유지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북미 비핵화 협상이 재개되도록 노력함과 동시에 유엔 대북제재에 대한 적극적인 해석과 예외 사항 발굴, 남북 철도 연결이 실현될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올해로 끝난 북한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목표 달성에 실패했고, 2021년 1월 북한은 새로운 경제 계획을 공표할 것이다. 북한의 비핵화 선언의 가치를 상기시켜 미국을 설득하고 북한의 새로운 경제개발 계획의 시작과 더불어 남북한이 협력할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또한, 한국은 한미동맹 강화를 통해 안보를 확고히 하고, 한국의 자주성을 확립하는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 동시에 한국은 신북방·신남방으로 외교적, 경제적 외연을 확장하는 대외정책을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이는 대중국 경제의존도를 줄이고 중국이 한국에 경제적으로 보복할 수 있는 여지를 줄임으로써 한국의 경제적, 외교적 자주성 확립으로 이어지는 주요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바이든 후보가 방위비 분담금을 대폭 증액은 동맹국을 갈취한 행위라고 트럼프 대통령을 비난하고 "동맹 강화하며 한국과 함께 설 것", "북한 비핵화와 한반도 통일을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밝힌 것은 상당히 고무적이다. 대북정책에 있어 한미 간 긴밀한 소통, 방위비 분담금의 합리적인 협상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다.
반면, 비용을 중시하는 트럼프 행정부와 달리, 가치와 동맹을 중시하는 바이든 행정부는 한국에 반중연대 동참을 행동으로 보이라고 압박할 여지가 높다. 바이든 후보가 10월 29일 <연합뉴스>에 보낸 기고문 "더 나은 미래를 위한 희망(Hope for Better Future)"에서 '한미동맹 강화'를 약속하고 "같이 갑시다"라고 한국에 믿음을 준 것에 대해 비판적 해석이 필요하다.
한미동맹 강화는 남북관계, 미북 비핵화 협상, 미중 사이에 놓인 한국의 곤란한 입장에 긍정적으로 작용하지 않을 수 있다. 북한의 한미동맹 비난, 상향식 또는 다자협력으로 진행될 더딘 비핵화 과정, 동맹국으로서의 충성도를 시험하는 미중 양자택일 강요 상황이 한국의 외교적 입지를 더욱 좁힐 수 있음을 염두에 두고 대미·대북전략을 구상해야 한다.
새로운 바이든 행정부의 출범은 한반도 정세에 큰 도전이 될 것이지만 트럼프 행정부 2기의 한미동맹, 남북한 관계, 북한 비핵화와 북미 관계도 순조롭게 예측할 수 없는 많은 변수가 있다.
트럼프 대통령 재선 시 기존의 미국 우선주의와 신고립주의를 고수할 것으로 예상된다. 대중국 전략도 인도·태평양 전략, 5G 클린 패스(5G Clean Path), 경제번영네트워크(EPN) 등을 지속적으로 추진하면서 중국을 압박할 것이다. 위에 언급한 전략은 동맹국들의 참여가 필수적이므로 동맹국에 대한 동참 압박도 거세질 전망이다.
다만 트럼프 행정부 2기는 1기 행정부가 진행한 미국 우선주의에 따라 파생된 미국에 대한 불신을 희석하고 동맹국과 파트너 국가들을 어떻게 포용할 것인가라는 숙제도 함께 안고 있다.
▲ 1일(현지 시각)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플로리다 오파로카 공항에서 유세를 벌이고 있다. ⓒAP=연합뉴스
트럼프 행정부는 중국과 기술, 무역, 군사, 이념 등 모든 분야에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으며, 코로나 팬데믹에 대한 중국 책임론, 홍콩 보안법 강행, 화웨이 제재 강화 등으로 미중 갈등이 더욱 고조되고 있다. 미국과 중국은 공격적 현실주의 이론가 존 미어샤이머(John J. Mearsheimer)가 예견한대로 남중국해, 동중국해, 대만해협 등에서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한국은 한반도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가 동아시아 전체의 평화와 연결되어 있으며 중국과 미국의 이익에도 부합함을 설득하면서 어떠한 경우에도 미·중 대리전 양상이 한반도에서 전개되지 않도록 대비해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은 하향식(Top-down) 방식의 협상을 선호하며, 트럼프 대통령은 정상 간 친분을 바탕으로 북한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재선 시 김정은 위원장과 만날 의사가 있음을 표명했다. 북한도 트럼프 행정부 2기와 지속적인 관계 유지를 희망하고 있으므로 조기에 북미대화를 재개함으로써 북한의 존재를 과시하기 위한 전략적 도발 상황을 방지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기존에 진행되어왔던 6자 회담의 진행과정과 결과를 반추해보면 상향식(Bottom-up) 방식과 다자협력을 통해 북한의 비핵화를 진전시키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하향식(Top-down) 방식이 북핵 문제를 풀 수 있는 지름길이 될 수 있고, 재선에 대한 부담을 털어버린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과 정상회담에서 빅딜을 이뤄낼 가능성이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성향을 고려할 때 중국의 부상을 확실히 저지한 대통령, 북한 땅을 처음 밟은 미국 대통령으로서 한반도 비핵화를 위해 공헌한 대통령이 되기 위해 북한의 비핵화를 추진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도 코로나 팬데믹과 경제 재건에 집중할 것이므로 해결이 쉽지 않은 북한 문제가 후순위로 밀려나거나 중요도가 떨어질 수도 있다. 그간 트럼프 행정부의 북미 정상회담 후속 조치를 고려할 때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의 비핵화를 위한 단계적인 계획이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 이것이 일각에서 '트럼프 행정부는 인내와 끈기가 필요한 한반도 비핵화 과정을 체계적으로 추진할 계획과 의지가 없다, 혹은 적합하지 않다'는 비판을 제기하는 이유다.
또한, 미국과 북한 모두 하노이 노딜에 대한 부담을 가지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 2기는 구체적인 실무협상을 통한 북한의 확실한 선(先) 핵폐기 계획이 도출되기 전까지 정상회담을 유보할 가능성이 있으며, 북한 입장에서도 북미대화의 판을 깨지 않고 트럼프 대통령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지만 하노이 노딜로 인한 부담이 3차 북미 정상회담의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다.
한미동맹의 가치를 폄훼하는 트럼프 정부의 기조로 볼 때 주한미군 방위비 협상이 난항을 겪을 가능성이 크며 주한미군 축소도 다시 거론될 여지가 있다. 미중패권경쟁에서도 미국이 중국을 더욱 거세게 몰아붙일 것으로 예상하며 인도·태평양 전략, 5G 클린 패스 (5G Clean Path), 경제번영네트워크(EPN)에 한국 정부의 동참을 노골적으로 요구하며 한국이 미국의 동맹임을 분명히 하라는 압박을 가할 가능성이 높다.
한국은 미국과 중국 중 어느 한 편을 맹목적으로 추종하지 않고, 사안별 대응 방안을 마련하고 국익 우선, 미·중과 우호 관계 유지 입장을 견지해야 한다. 중국은 중국을 비난하는 국가에 전랑외교(戰狼外交)로 대응하면서 상대국에 거침없는 경제보복을 가하고 있다. 한국은 주한 미군의 사드 배치와 그에 따른 중국의 경제보복에서 경험한 바와 같이 미국이 한국의 입장을 두둔해주지 않는다.
호주는 인도·태평양 전략 전략의 쿼드 가담, 홍콩보안법 강행 반대, 코로나 팬데믹 책임론 거론으로 중국으로부터 대규모 경제보복을 당하고 있지만, 미국이 이에 함께 대응하지 않는다. 이는 거대한 풍랑에 맞서 배가 난파될 위험을 감수할 것인가, 지혜롭게 풍랑을 피하며 배를 지켜 목적지에 도달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한국이 직면한 상황은 그 어느 때보다도 혼란스럽다. 코로나 팬데믹, 국내 경제 악화, 세계 무역 환경 변화, 미중패권경쟁 심화와 미·중의 압박, 동아시아의 군사적 긴장 고조, 답보상태인 북한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등 모든 변수를 고려하여 결정을 내릴 수 없을 만큼 복잡하다.
이럴 때일수록 한국은 최우선으로 지켜야 하는 가치와 기준을 더욱 확고히 해야 한다. 한반도 평화 수호와 비핵화 추진, 신북방·신남방으로의 경제적, 외교적 외연 확장, 한미동맹 강화, 남북관계 개선과 경제협력 등을 기준으로 한국의 자주성 회복과 자강의 기회를 찾아 나가야 한다. 한반도 신경제지도의 실현을 위해 DMZ 평화지대 조성과 개성공단 재개를 실현하여 불가역적인 평화를 이루도록 노력해야 한다.
국제질서 재편의 키를 쥐고 있는 강대국 미국의 대선은 전 세계 초미의 관심사이다. 향후 4년간 미국의 대외정책에 따라 각국이 직면할 국제정치 상황이 뒤바뀌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후보의 대한반도 정책을 비교해보면 한국에 유리한 점과 불리한 점을 모두 포함하고 있으며 어느 후보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한국에 더 확실히 유리하다고 단언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현 상황을 긴 시간적 프레임과 넓은 공간적 프레임에서 파악할 필요가 있으며, "미중 패권 경쟁과 북한의 비핵화"를 장기적인 안목으로 대응해야 한다. 한국이 당면한 사안을 면밀히 검토하고 유연한 대응을 취할 수 있도록 대비하면서 미국 차기 행정부의 대한반도 전략의 장점을 살리고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 정착을 위해 끊임없이 기회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한국전쟁 70년 기억 사진전-RESTRICTED 허락되지 않은 기억’이 옛 남영동 대공분실에 들어선 민주인권기념관 4층과 5층 전시실에 10월 29일부터 11월 22일까지 열리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옛 남영동 대공분실에 들어선 민주인권기념관 4층에 마련된 ‘한국전쟁 70년 기억 사진전-RESTRICTED 허락되지 않은 기억’ 전시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한국전쟁 발발 70년을 맞아 특별한 기억 사진전이 열리고 있다.
옛 남영동 대공분실에 들어선 민주인권기념관 4층과 5층 전시실에 ‘한국전쟁 70년 기억 사진전-RESTRICTED 허락되지 않은 기억’이 진행중에 있다. 사진전 ‘RESTRICTED 허락되지 않은 기억’은 피란, 폭격, 학살이라는 주제를 통해 전쟁 지도부가 허락하지 않았던 전쟁의 모습에 집중하고 있다.
열린군대를위한시민연대 신재욱 상임활동가가 4층 전시실에서 전시 해설을 하고 있다. 전시 해설은 평일 오전 11시와 오후 3시, 주말에는 오전 11시와 2시에 진행된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한국전쟁 70년 기억 사진전-RESTRICTED 허락되지 않은 기억’ 4층 전시실의 모습.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4층 전시실은 크게 3개의 섹션으로 나뉘어 있다. 첫 번째는 ‘어떤 피란의 여정’이란 제목으로 살기 위해 떠난 사람들에게 국가가 ‘자유 피란민’이라 불렀던 이들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 “그들이 만난 ‘자유’의 모습은 과연 어땠을까?”를 물음 속에 길 위에서 만난 것은 생존과 자유가 보장되지 않은 또 다른 전쟁의 현장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또한 어떤 피란의 종착지는 죽음이었다며 피란과 죽음 사이의 모호한 경계를 사진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두 번째 섹션은 ‘폭격’의 민낯을 고발하고 있다. ‘폭격, 마을과 사람을 겨누다’는 제목으로, 폭격으로 인한 민간인들의 죽음은 ‘부수적 피해’가 아닌 ‘학살’임을 들어낸다. 전후방 가리지 않고 한반도 곳곳에 떨어진 폭격지도를 통해 왜 폭격이 ‘학살’이 되는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세 번째 섹션은 ‘국민이 되지 못한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민간인 학살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다. 특히 전시가 주목한 민간인 학살은 대전지역에서 발생했던 두 개의 학살이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6월 말부터 7월 중순까지 대전에서는 군인과 경찰들이 형무소 재소자와 보도연맹원 등을 ‘산내 골령골’로 끌고 가 대규모 학살을 자행했다. 대전을 점령했던 인민군들은 퇴각을 하면서 대전형무소와 그 인근에서 보복학살을 하기도 했다.
5층 전시실은 대공분실 조사실로 사용되었던 방 중 10개를 ‘어떤 무덤’, ‘남겨진 사람들’, ‘부역자’, ‘위안부’, ‘어떤 폭격’, ‘고지전’, ‘노무자’, ‘반란자’, ‘불러보는 이름’ 등의 제목으로 전시실로 만들어 ‘전쟁을 통하는 10개의 방’을 만들었다.
이중 ‘어떤 무덤’은 유해발굴과 관련된 진시를 담고 있고, ‘불러보는 이름’에는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에 담긴 2만명 가까운 희생자 명단을 지역별, 시간별로 나눠 정리해 출력해 벽면에 붙였다. ‘불러보는 이름’ 방에는 희생자들의 이름을 부르며 녹음해보는 특별한 전시실이다.
‘한국전쟁 70년 기억 사진전-RESTRICTED 허락되지 않은 기억’의 5층 전시실은 대공분실 조사실로 사용되었던 방 중 10개를 ‘어떤 무덤’, ‘남겨진 사람들’, ‘부역자’, ‘위안부’, ‘어떤 폭격’, ‘고지전’, ‘노무자’, ‘반란자’, ‘불러보는 이름’ 등의 제목으로 전시실로 만들어 ‘전쟁을 통하는 10개의 방’을 만들었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5층의 13번 조사실은 ‘어떤 무덤’이란 제목의 전시실이 되었다. 전시실 ‘어떤 무덤’은 유해발굴과 관련된 진시를 담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5층의 2번 조사실에 마련된 ‘불러보는 이름’ 전시실에는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에 담긴 2만명 가까운 희생자 명단을 지역별, 시간별로 나눠 정리해 출력해 벽면에 붙여져 있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전시를 기획한 열린군대를위한시민연대 박석진 상임활동가는 “전쟁을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지는 어떤 평화를 만들어 낼 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며, “국가의 공식 전쟁 기억이 구현된 용산 전쟁기념관에는 군인, 영웅, 승리, 군인 중심의 기억이 주를 이루고 있지만, 이번 전시는 전쟁 피해자의 관점에서 준비했다”고 말했다.
전시는 11월 22일까지 진행되고, 월요일은 휴관이다. 관람 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 30분까지이고, 전시 해설은 평일 오전 11시와 오후 3시, 주말에는 오전 11시와 오후 2시에 진행된다. 관람료는 무료이다.
이번 전시는 (사)제주4·3범국민위원회, 4.9통일평화재단, 민족문제연구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전국역사교사모임, 평화통일교육문화센터 등이 공동으로 주최했고, 열린군대를위한시민연대가 주관했다. 강성현(성공회대학교), 고진아(전국역사교사모임), 김득중(국사편찬위원회), 김민환(한신대학교), 박찬희(박찬희박물관연구소), 이임하(성공회대학교), 전갑생(성공회대학교) 등이 자문위원으로 참여했다.
검찰은 수사의 밀행성을 중시한다. 한 검사는 “우리 DNA에는 비공개 신념이 박혀 있다”고 말했다. 검찰은 밀행성의 원칙을 일반 행정 업무까지 확대 적용하는 경우가 많다. 윤석열 검찰총장은 최근 대검찰청 국정감사에서 업무 성과라며 “30여개 비공개 내규를 공개 전환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대검과 법무부를 합친 검찰 관련 조직 전체의 비공개 내규는 총 66개(대검 48개, 법무부 18개)에 달한다. 안보를 담당하는 국방부(62개)보다 많다.
예규와 훈령을 통칭하는 내규는 국가기관의 비밀주의를 잘 보여준다. 국가기관에는 비밀이 있을 수 있다. 국가정보원은 누설될 경우 안보에 해를 끼칠 우려가 있는 정보를 기밀로 취급한다. 수사기관과 법원은 범죄 예방, 공소 제기·유지, 형 집행 등 직무수행을 곤란하게 하는 사안이나 형사 피고인의 공정한 재판 받을 권리가 침해될 만한 정보를 비공개한다. 그 외 모든 사안은 공공기관의 정보공개에 관한 법률에 따라 “적극적 공개”가 원칙이다. 국민의 알권리, 국정에 대한 국민 참여, 국정운영의 투명성을 위해서다.
검찰은 비공개 방식도 철저하다. 어떤 내규들을 비공개로 하는지 목록도 공개하지 않는다. 비공개 사유는 물론 존재 자체도 외부에서 검증할 수가 없다. 그간 검찰은 수사 밀행성과 로비 방지라는 명목으로 내규를 비공개했다. 그러나 2기 법무·검찰개혁위원회는 최근 “자의적 기준에 따른 비공개”라며 “다른 국가기관에 의한 견제마저 받지 않는다면 내부 규정을 통한 자의적 검찰권 행사를 방지할 수 있는 제도적 수단을 찾기 어렵다”고 했다.
경향신문은 법률 자문과 검토를 거쳐 검찰 비공개 예규 4개의 전문을 공개하기로 했다. ‘사건배당지침’(대검 예규 제848호), ‘인권수사자문관 운영에 관한 지침’(대검 예규 제960호), ‘검찰 의사결정 과정에서의 지휘·지시 내용 기록에 관한 지침’(대검 예규 제977호), ‘검사 평가자료 수집·관리에 관한 지침’(대검 예규 제990호)이다. 사건배당지침은 전관예우의 원인으로 꼽혀 수년째 문제가 지적됐지만 배당 방식은 바뀌지 않았다. 법조계에서는 활발한 개혁 논의를 위해 해당 지침이 공개되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자체 개혁안으로 내놓았던 인권수사자문관 지침과 의사결정 기록에 관한 지침은 개혁안을 적극적으로 운영하는 데 필요한 점 등 보완할 부분에 대한 외부 판단을 받기 위해 공개를 결정했다.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 청사 뒤로 2일 오후 어둠이 깔리고 있다. 윤석열 검찰총장은 최근 대검찰청 국정감사에서 30여개의 비공개 내규를 공개로 전환한 것을 업무 성과로 꼽았다. 하지만 여전히 검찰 조직 전체의 비공개 내규가 66개에 달해 비밀주의가 강하다는 지적을 받는다. 이준헌 기자
‘윗선 입맛대로’ 길 터놓은 사건배당지침
‘인권수사자문관’ 검증 길 없는 검찰개혁안
감춘 채로 두고 싶은 그들만의 예규
대검 비공개 주요 예규의 문제점
사건배당지침 - “만병의 근원 전관예우, 배당에서 시작한다”
인권수사자문관 운영에 관한 지침 - “수사 결론의 정당성을 주기 위해 만든 면죄부 장치 될 소지”
검찰 의사결정 과정에서의 지휘·지시 내용 등 기록에 관한 지침 - “정말 실행되는지 밖에서도 알 수 있어야”
대검찰청은 지난달 7일 비공개 내규 29개를 일괄 공개로 전환했지만 여전히 ‘비공개가 너무 많다’는 지적이 나왔다. 아직 비공개로 남아 있는 대검 내규는 모두 48개인데, 이 중에는 1순위 개혁 대상으로 꼽힌 ‘사건배당지침’ 예규가 있다. 검찰이 스스로 만든 개혁안도 다수 비공개된 상태다. 검찰 수사의 오류를 스스로 점검하기 위해 만든 ‘인권수사자문관 운영에 관한 지침’ 예규와 검사동일체 문화를 깨기 위해 만든 ‘검찰 의사결정 과정에서의 지휘·지시 내용 기록에 관한 지침’ 예규 등이다.
우리끼리만 알자…전관 ‘인센티브’ 된 예규
사건 배당, 법령에 구체적 기준 없고
검찰청의 장에 무제한 재배당 권한
개혁위 “기준위 설치” 권고 이행 안 돼
사건배당지침은 검찰의 사건 배당 기준 및 절차를 정한 내규다. 지난해 10월 경향신문은 사건배당지침 내용을 보도하면서 각 검찰청의 장에게 지나친 배당 재량권을 부여한 일부 조항의 문제점을 전했다(2019년 10월24일자 4면). 그 무렵 2기 법무·검찰개혁위원회도 불투명한 사건 배당 방식을 해결하는 ‘사건 배당 기준위원회’ 설치를 권고했다. 그 뒤로 1년이 지났다. 사건배당지침은 2016년 마지막 개정된 이후 지금까지 바뀌지 않았다. 개혁위 권고도 이행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의 사건 배당은 법령에 구체적 기준이 없고 오직 대검 예규에 따라 운영된다. 그 내용이 비공개라 자의적 사건 배당이 있는지에 대해 외부 감시가 불가능하다. 권영빈 변호사는 “오랜 문제로 지적됐는데 개선의 여지가 없다면 지침을 공개해 외부에서 봐야 한다”고 말했다. 대검은 사건배당지침이 비공개된 이유를 묻는 질문에 “공개될 경우 업무 수행에 지장이 초래될 우려가 있다”고 답했다.
법조계에서는 검찰의 상명하복 문화와 전관예우 등 다양한 문제가 현 사건 배당 방식에서 비롯됐다고 본다. 실제 배당지침에도 검찰청의 장에게 자의적인 배당을 보장하는 내용이 다수 담겼다.
4조 ‘배당의 기본원리와 배당 준비’는 각 검찰청의 장들이 사건 배당을 할 때 준수해야 할 4개의 추상적 기준을 나열했다.
이에 따르면 검찰청의 장은 사건을 배당할 때 수사 검사의 전담·전문성, 수사지휘 관할 지역의 지휘·관련성, 검사별 사건 부담 균형을 맞추는 합리·형평성, 시기별 각 검사의 부담량과 능력을 고려하는 시의·상당성을 고려해야 한다. 이러한 기준과 별개로 5조는 검찰청의 장이 모든 유형의 사건을 자신이 원하는 특정 검사에게 직접 배당할 수 있는 권한을 보장하고 있다. 검찰청의 장이 직접 배당할 수 있는 사건의 종류를 나열하면서 맨 마지막에 ‘그 밖에 검찰청의 장 등이 직접 검사에게 배당할 필요가 있는 사건’을 포함하는 식이다.
검찰청의 장은 사실상 무제한의 사건 재배당 권한을 갖고 있다. 8조에는 ‘검찰청의 장은 직접 배당한 사건에 대해 재배당이 필요한 경우 재배당한다’고 적혀 있다. 재배당은 사건 처리를 놓고 주임검사와 지휘부 간 의견이 다를 때 윗선의 입맛대로 사건의 결론을 이끌 수 있는 도구로 악용될 수 있다. 중간간부급 A검사는 “위에서 원하는 대로 사건을 처리하지 않고 시간을 끌었더니 다른 검사에게 사건이 재배당된 경험을 겪었다”며 “이런 일은 검찰에서 비일비재하다”고 말했다. 검찰청의 장은 배당 기준도 새롭게 만들 수 있다. 9조는 “검찰청의 장은 청별 사정을 고려해 필요한 경우 지침 본질에 반하지 아니하는 범위 내에서 사건 배당 기준 및 절차, 배당 현황의 보고 등에 관한 자체 기준을 마련하여 시행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이 지침은 마지막으로 개정된 2016년 7월1일 기준으로 매 3년이 되는 시점마다 타당성을 검토하도록 되어 있지만 내규는 3년 전과 비교해 개선되지 않았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은 지난달 26일 법무부 국정감사에서 ‘임의로 사건 배당이 가능해 전관예우가 우려된다’는 송기헌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지적에 “(배당 방식은) 전관 특혜의 하나의 원인”이라며 “특혜를 폐지하기 위해 검찰청법과 직무 이전·승계 권한과의 조화를 찾고 있는 중”이라고 답했다.
지난달 7일 대검이 공개로 전환한 ‘합리적 의사결정을 위한 협의체 등 운영에 관한 지침’도 비공개 과정에서 전관 변호사에게 특혜로 작용했다. 이 지침은 수사팀과 지휘부가 사건 처리를 놓고 의견이 갈릴 때 검찰 내·외부의 형사법 전문가들로 구성된 전문수사자문단을 소집해 사건 심의를 맡긴다는 내용이다. 지난 6월 ‘검·언 유착’ 의혹을 받은 채널A 이동재 전 기자 측이 자문단 소집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대검에 제출하고 윤석열 검찰총장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화제가 됐다. 일반 변호인들은 자문단의 존재 자체를 몰랐고 규정상 사건 당사자는 자문단 소집 권한이 없었음에도 진정이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당시 이 전 기자 측 변호인은 부장검사 출신 변호사가 맡았다. 유승익 신경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결과적으로 사건 당사자가 자문단을 소집할 수 있던 것으로 드러났다”며 “이 절차는 피의자 방어권과 관련이 있었음에도 검사 출신만 알고 활용했다”고 말했다. 양홍석 변호사는 “일반인은 모르고 검사 출신은 모두 안다면 전관 인센티브가 아니고 무엇인가”라고 말했다.
개혁안 만들어놓고 비공개, 이행 ‘검증 불가’
검 내부서도 ‘인권수사자문관’ 두고
“특수부 결론 정당성 위한 면죄부”
‘지휘 내용 기록’ 지침도 활용 의문
검찰은 검찰개혁안으로 만든 내규도 비공개했다. 2017년과 2018년 각각 도입한 ‘검찰 의사결정 과정에서의 지휘·지시 내용 등 기록에 관한 지침’과 ‘인권수사자문관 운영에 관한 지침’이 대표적이다. 인권수사자문관은 검찰 내에서 ‘악마의 변호인’ 역할을 맡는 대검 소속 검사들이다. 수사팀의 확증편향, 수사 과정상 미처 발견하지 못한 오류 등을 내부에서 검토해 걸러내고 기소에 신중을 기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명칭에 ‘인권’이 들어가긴 하지만 수사 과정의 인권 침해 행위를 감독하는 각 검찰청 소속 인권감독관과는 역할이 다르다.
‘인권수사자문관 운영에 관한 지침’에 따르면 전국의 모든 특별수사부(현 대검 반부패부 산하) 수사 사건은 원칙적으로 인권수사자문관의 자문을 받아야 한다. 이 지침의 5조와 7조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지방검찰청의 특수부 사건은 신병 및 기소 여부에 대해 인권수사자문관의 자문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형사부·공안부 사건도 “특별수사에 준하는 객관적 자문이 필요한 사건”은 인권수사자문관 자문 대상이 될 수 있고 특수부 사건과 관련된 진정, 탄원 사건도 자문 대상이 될 수 있다(6조). 이를 감안하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구속영장 청구, 독직폭행 혐의로 기소된 정진웅 차장검사 등 다양한 사건이 인권수사자문관의 자문을 받았어야 한다.
인권수사자문관들이 모든 반부패부 사건에 대해 적극적으로 자문 활동을 했는지는 미지수다. 인권수사자문관은 도입 후 1년7개월여 동안 30여개 사건을 심리한 것으로만 알려졌다. 법무부는 지난 8월 대검 인권부를 대검 차장 산하 인권정책관 체제로 개편하면서 “인권수사자문관이 실효성 있게 운영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인권수사자문관 운영에 관한 지침’ 5조 5항은 ‘대검 반부패부가 자문이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하여 검찰총장 승인을 받은 경우에는 인권수사자문관의 자문을 거치지 아니한다’며 예외 조건을 폭넓게 인정하고 있다. 지침에 규정된 인권수사자문관의 사건 검토 방식에 실효성이 있는지도 의문이다. 8조는 ‘자문관은 검토 과정에서 사건 담당 검사, 수사관, 사건 관계인, 변호인과 접촉해선 안 된다’고 규정한다. 수사기록만 보고 검증한다는 것인데 인권수사자문관의 모델인 일본 총괄심사관이 수사 검사와 적극적인 토론을 통해 의견을 도출하는 것과 차이가 크다. 검찰 내에서도 인권수사자문관은 특수부 결론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만든 면죄부 장치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강신업 변호사는 “상세 지침을 봐야 검찰이 만든 자체 개혁안에 과연 개혁적 요소가 있는지, 실제로 제대로 운영되는지를 외부에서 확인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대검 관계자는 “수사 점검 과정의 설계 내용 등이 공개되면 수사 공정성을 해칠 수 있다”며 “개혁을 위해 도입했지만 자랑 삼아 공개할 만한 내용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검찰 의사결정 과정에서의 지휘·지시 내용 기록에 관한 지침’도 문무일 검찰총장 당시 내부 의사결정 과정의 투명성을 높이고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하기 위해 도입됐다. 검사동일체 문화를 깨기 위한 개혁안으로 만들어졌지만 제대로 활용되는지 밖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중간간부급 B검사는 “초반에는 팀 밖에서 의사 기록을 볼 것을 우려해 기록에 소극적이다 최근 나아지는 추세”라고 말했다. 이 지침에 따르면 기록 대상은 ‘상급자와 주임검사 혹은 각 검찰청과 대검 간의 이견이 발생할 때’이다. 상급자가 상신된 결재를 반려하거나, 상급자 또는 대검이 구체적 지휘·지시를 해서 결재 절차 외 의사결정이 이뤄지는 경우가 기록 대상이다.
검사 평가는 어떤 기준으로?…“인사와 별개”
총장에 보고되는 개별 검사 평가 자료
법무부 요청 땐 전달할 수 있지만
그 예규도 비공개라 ‘묻지마 인사’가능
비공개 대검 예규 ‘검사평가자료 수집 관리 등에 관한 지침’은 검찰총장에게 보고되는 개별 검사에 대한 평가 자료에 무엇이 포함되는지를 담고 있다. 2조에 따르면 각 부서의 각종 포상, 격려 내역, 분야별 우수업무 사례, 미담·선행 사례, 감찰 조사 및 징계처분 결과, 감찰 세평, 사건평정, 사무감사 결과 및 각급 청의 장이 제시하는 의견 등 일체 자료가 검사 평가자료에 해당한다. 대검 기획조정부장은 이러한 자료를 종합해 정리한 내용을 매 분기 1회 또는 필요한 경우에 수시로 검찰총장에게 보고할 수 있다. 법무부 요청에 따라 이 자료를 법무부에 전달할 수도 있다. 법무부 예규인 ‘검사 석순 기준’도 비공개라 구체적으로 검사 순위를 어떻게 매기는지는 외부에서 확인할 수 없다. 그간 객관적 평가 자료와 별개로 검찰 인사가 이뤄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후배 검사를 성추행하고 인사 불이익을 준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가 대법원에서 무죄를 받은 안태근 전 법무부 검찰국장의 공판에서는 음주운전, 변호사 소개 등으로 징계 감찰을 받은 검사들이 희망지로 인사 배치되는 사례가 제시됐다. 복무평정 순위가 좋아도 희망지 반영이 되지 않는 사례도 있었다.
며칠 뒤면 세계 최강대국 미국의 새 대통령이 결정된다. 미국 대통령이 바뀌거나 재선에 성공하면, 우리나라 외교부가 가장 먼저 공을 들이는 게 한-미 정상회담이다. 미국의 새 대통령과 대북 정책을 비롯한 현안에서 입장을 조율하는 건 한-미 관계에 중요할 뿐 아니라 국내 정치적으로도 의미가 크다. 특히 미국 대통령이 바뀌면 정상회담을 서둘러야 할 필요성은 훨씬 커진다. 첫번째 정상회담, 이 회담이 한-미 관계와 대북정책, 국내 정치 흐름을 완전히 뒤바꾼 사례는 적지 않다. 미국 대통령과 한국의 인연, 미국 대통령이 한국에 끼친 영향을 한겨레 아카이브에서 돌아봤다. /해설 박찬수케네디 앞에서 긴장했던 박정희 죽기 전 카터 만났을 때도 곤혹 박근혜도 오바마 앞에선 마이크만…
부시는 김대중에게 화를 냈다 노무현은 부시와 만나 직설적 논쟁 거의 자리 박차고 나올 분위기
첫손에 꼽을 수 있는 한-미 정상회담은 2001년 3월7일(현지시각) 워싱턴 백악관에서 열렸던 김대중 대통령과 조지 부시 대통령의 정상회담이다. 이 회담을 계기로 북핵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던 천재일우의 기회는 날아가고 결국 북한은 몇년 뒤 핵실험 강행으로 나아가게 된다. 아쉽기 짝이 없는 장면이다.
빌 클린턴 행정부 시절 관계 정상화 직전까지 갔던 북-미 관계는 조지 부시 행정부의 등장으로 완전히 뒤집어졌다. 2001년 3월7일(현지시각) 워싱턴에서 열린 김대중 대통령과 조지 부시 대통령의 정상회담은 그 분기점이었다. 이때만 해도 두 사람은 웃었지만, 정상회담 뒤 김대중 대통령 표정은 굳어져버렸다. 청와대 사진기자단이 찍었다.
사상 초유의 플로리다 재검표로 얼룩진 2000년 11월7일의 미국 대선. 이 선거에서 앨 고어 민주당 후보가 당선됐더라면 빌 클린턴 당시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하면서 북-미 관계 정상화는 급진전을 이뤘을 것이다. 연방대법원이 조지 부시 공화당 후보의 승리를 선언한 뒤에도 클린턴은 평양을 방문하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나 부시 당선자 진영이 반대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어떻게든 북-미 대화의 기류를 이어가려 했다. 2001년 2월 조지 부시 대통령이 취임하자마자 한-미 정상회담을 추진했고, 그렇게 급하게 이뤄진 게 3월7일의 워싱턴 회담이었다.미국 정치권과 언론은 김대중 대통령을 ‘아시아의 만델라’로 대했다. 1980년대 초반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신군부가 김대중에게 사형을 선고했을 때, 그를 감형하는 조건으로 전두환의 워싱턴 방문을 받아들인 게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었다.
1981년 2월3일 취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한국의 전두환 대통령을 워싱턴으로 초청했다. 유혈 쿠데타 주역의 워싱턴행에 반대가 많았지만, 전두환은 사형 선고를 받은 김대중 총재를 감형하는 조건으로 백악관 방문 티켓을 따냈다. 당시 공보처 제공 사진으로 추정된다
전두환 방미 열흘 전인 1981년 1월22일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대사가 알렉산더 헤이그 국무장관에게 보낸 2급 비밀 전문엔 “전두환 대통령은 상당 부분 이번 방문이 김대중 사건에 대한 자신의 결정(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 때문에 가능했다는 점을 알게 될 것”이라고 적었다. 그런 민주주의 정치인이 한국 대통령이 돼서 노벨평화상까지 받았으니, 김 대통령을 대하는 워싱턴의 분위기는 호의적이었다.그러나 텍사스 주지사 출신의 조지 부시는 ‘카우보이’였다. 김 대통령 방미에 앞서 <뉴욕 타임스>가 김대중 인터뷰를 싣고 ‘햇볕정책’을 소개하자, 조지 부시의 백악관은 몹시 못마땅해했다. 부시의 카우보이 기질은 정상회담장에서 그대로 표출됐다. 당시 정상회담 상황을 잘 아는 전직 고위 관리는 이렇게 말했다.“회담을 시작하자마자 부시는 ‘(양쪽이 조율한) 공동선언문은 그대로 언론에 발표하고 우리는 좀 더 솔직하게 얘기를 하자’고 말했다. 직설적인 그의 말에 우리 대표단은 얼어붙었다. 회담 도중 김 대통령 발언이 좀 길어지면 부시는 가차 없이 통역을 끊고 들어와 자기 말을 했다. 급한 성격을 그대로 보여주는 이례적인 행동이었다. 부시의 성격은 오찬을 겸한 확대정상회담에서도 나타났다.
2001년 3월7일(현지시각) 백악관에서 열린 김대중 대통령과 조지 부시 대통령의 오찬을 겸한 확대정상회의는 분위기가 싸늘했다. 서빙하는 직원이 수프 국물을 부시 대통령 바지에 약간 떨어뜨리자 부시는 큰소리로 화를 내며 불평을 했다. 진천규 기자가 찍었다.
서빙하던 직원이 부시 그릇에 수프를 퍼주다가 실수로 국물을 약간 양복에 흘렸다. 그러자 부시가 큰소리로 직원을 나무라면서 손수건에 물을 적셔 양복을 닦았다. 그 뒤에도 여러 번 자기 양복이 더러워졌다고 불평하며 투덜댔다. 정상회담에선 참 보기 힘든 장면이었다. 좋게 보면 솔직하고, 나쁘게 보면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도 김 대통령은 노련했다. 얼굴은 흙빛이 됐지만 한번도 부시를 맞받아치지 않고 꾹 참았다. 그렇게 참았기에 2002년 2월 부시 방한 때 김 대통령과 함께 도라산역을 방문해서 한국이 원하는 말(‘북한과 대화할 준비가 되어 있다’)을 해줬다고 본다.”이 점에선 문재인 대통령도 김 대통령과 비슷한 점이 있다. 거칠고 무례하기로 따지면 부시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은 게 도널드 트럼프 현 대통령이다. 정상회담이나 정상 통화에서 트럼프는 자기가 원하는 경제적 이익을 얻기 위해선 외교적 예의를 벗어던지고 상대국 정상을 강하게 몰아붙인다. 문 대통령에게도 예외는 아니다. 특히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인상 요구가 대표적이었다고 한다. 정상 통화에선 구체적인 액수까지 거론하진 않는 게 외교 관례인데, 트럼프는 ‘얼마를 올려 달라’는 식으로 마치 장사꾼 흥정하듯 했다고 한다. 트럼프와의 통화가 끝난 뒤 문 대통령은 참모들에게 ‘정상 간에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는가’라는 취지로 불만을 토로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트럼프 면전에선 꾹 참고 맞대응을 하지 않았다. 특히 대북 문제에서 트럼프의 적극적인 태도를 이끌어내기 위해서 몹시 애를 썼다. 트럼프도 문 대통령의 제안에 호의적 반응을 보였지만, 회담에 배석한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이나 존 볼턴 국가안보보좌관 등이 트럼프의 이런 즉흥적 행동에 제동을 걸곤 했다고 한다.
2018년 9월24일(현지시각) 미국 뉴욕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개정안에 서명한 뒤 펜을 문재인 대통령에게 선물하고 있다. 무역협정이나 방위비 분담금 등 현안에서 트럼프는 오로지 경제적 실리만 챙기려는 모습을 보였다. 김정효 기자가 찍었다.
2019년 6월30일 오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판문점 군사분계선 북쪽 지역에서 인사한 뒤 남쪽으로 같이 걸어 내려오고 있다. 북한과 미국 정상이 분단의 상징인 판문점에서 만난 건 의미가 크다. 그러나 이런 역사적인 만남에도 불구하고 북-미 관계와 북핵 문제 해결은 답보 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다. 청와대 사진기자단이 찍었다.
트럼프와 문재인 대통령은 전화 통화도 많이 했다. 정상 통화를 하기 전, 청와대 국가안보실에선 거의 대화록 수준의 수십쪽짜리 상세한 참고자료를 대통령에게 올린다. 하지만 문 대통령은 트럼프에게 무슨 말을 건넬지 직접 A4 용지에 따로 적어서 정서적으로 접근하려 애썼다. 2019년 2월 하노이 2차 북-미 정상회담의 실패로 북핵 문제는 다시 수렁에 빠졌지만, 2018년 6월 싱가포르 1차 북-미 정상회담을 성사시킨 건 이런 방식으로 문 대통령이 트럼프의 마음을 산 측면이 컸다. 싱가포르 1차 정상회담을 끝내고 본국 귀환을 위해 에어포스원에 오르자마자 트럼프는 문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마치 만점을 받은 아이처럼 회담 성과를 자랑했고, 문 대통령은 “세계 평화의 큰 토대를 놓았다”고 극찬했다. 북핵 문제를 다루는 두 대통령의 스타일을 잘 보여주는 광경이었다.1961년 11월 군사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워싱턴을 방문해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을 만나는 사진은 유명하다. 다리를 꼬고 비스듬히 의자에 기댄 케네디와 선글라스를 쓴 무표정의 박정희 의장 모습은 대조적이다. 쿠데타를 일으킨 제3세계 군 장교가 백악관에서 미국 대통령을 만난다니 얼마나 긴장했을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1979년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하기 몇달 전, 지미 카터 대통령이 서울을 방문했을 때도 박 대통령은 몹시 긴장했다. 주한미군 철수와 한국 정부의 야당·재야인사 탄압을 놓고 한-미 간에 긴장이 높을 때였다. 정상회담에서 박 대통령은 주한미군 철수 계획을 철회해달라고 강하게 요구했고, 카터는 “내 개인적인 바람은 당신이 긴급조치 9호를 철회하고 재소자(양심수)를 가능한 한 많이 석방하는 것”이라고 직설적으로 비판했다.(2018년 한미클럽이 공개한 미 국무부 비밀해제 문서)
박근혜 대통령과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2015년 10월18일(한국시각) 워싱턴 백악관 오벌오피스에서 오찬 회담을 마치고 기자회견장인 이스트룸으로 향하고 있다. 2014년 공동 기자회견에서 답변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박 대통령은 이날 회견에서도 중국 전승절 참석에 대한 미국의 우려를 묻는 질문에 엉뚱한 답변을 내놓았다. 청와대에서 제공한 사진이다.
아버지의 이런 모습을 봤기 때문일까. 박근혜 대통령은 2014년 4월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의 청와대 공동기자회견에서 유난히 긴장해서 실수를 많이 했다. 오바마가 답변을 하라고 눈길을 주는데도 박 대통령은 마이크만 만지작거리면서 제대로 말을 하질 못했다. 오바마가 “불쌍한 대통령이 질문이 뭔지 기억하지 못하나 보네요”라는 조크를 던질 정도였는데, 이 부분은 백악관 영상에선 묵음으로 처리됐다.미국 대통령은 한-미 관계와 대북 정책에만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게 아니다. 나비의 날갯짓처럼 물결을 일으켜 국내 정치·사회적으로도 커다란 흔적을 남긴다. 2008년 4월 취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명박 대통령의 캠프데이비드 방문이 대표적이다. 이 대통령이 워싱턴을 방문하는 동안 한-미 쇠고기 협상이 전격 타결된 게 ‘광우병 파동’을 불러일으키며 대규모 촛불시위를 불러온 것이다.이 대통령의 미국 방문은 조지 부시 행정부의 환대 속에 이뤄졌다. 정상회담은 백악관이 아니라 미국 대통령 별장인 메릴랜드 캠프데이비드에서 열렸다. 한국 대통령으론 첫 캠프데이비드 방문이었다. 부시 대통령은 가장 친한 외국 정상을 개인 별장인 텍사스 크로퍼드 목장으로 초대했다. 영국 토니 블레어 총리나 중국 장쩌민 주석, 일본의 고이즈미 총리가 크로퍼드 초청을 받았다.
2008년 4월18일 방미한 이명박 대통령이 메릴랜드주 캠프데이비드에서 부시 대통령을 옆자리에 태우고 골프 카트를 운전하고 있다. 이 대통령은 한국 대통령으론 처음으로 미국 대통령 별장인 캠프데이비드에서 숙박했다. 그러나 그 대가는 컸다. 방미 직후부터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에 반대하는 촛불시위가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김종수 기자가 찍었다.
그러나 2003년 이라크에 병력을 파병한 한국의 노무현 대통령은 크로퍼드로 초대하질 않았다. 부시와 노무현, 두 대통령이 정상회담에서 수차례 설전을 벌인 게 영향을 끼쳤다. 전직 외교부 고위 관계자의 얘기. “대개 정상회담은 의전적이고 외교적인 성격이 강하다. 양쪽 모두 윈윈하는 모양새를 좋아한다. 노무현 대통령은 달랐다. 정상회담에서 현안을 담판 지으려 했다. 처음엔 주변에서 말려서 의전에 따라 했는데, ‘이러니 너무 답답하다. 솔직하게 토론했으면 좋겠다’고 말하더라. 2005년 11월 경주에서 열린 조지 부시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은 그런 논쟁의 장이었다. 부시와 노 대통령은 대북 금융제재 등을 놓고 직설적인 말들을 주고받았다. 거의 자리를 박차고 나올 듯한 분위기였다. 이듬해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열린 정상회담도 분위기는 비슷했다.”
2005년 11월17일 경북 경주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은 공동기자회견 모습과는 달리 두 대통령이 격한 논쟁을 벌인 회담이었다. 알렉산더 버시바우 주한 미국대사는 나중에 언론 인터뷰에서 경주 회담을 “두 정상은 자기 생각을 고집했다”며 ‘최악’이라고 평했다. 청와대 사진기자단이 찍었다.
2019년 5월23일 오후 봉하마을에서 열린 노무현 전 대통령 10주기 추도식에 참석한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이 노 전 대통령의 손녀 서은양과 팔짱을 끼고 이동하고 있다. 정상회담 때는 두 사람이 격하게 다툰 적도 있는데, 추도식에 참석한 걸 보면 부시의 인간적 면모를 느낄 수 있다. 공동사진취재단이 찍었다.
2008년 4월18일 오후 6시(한국시각), 이명박 대통령이 캠프데이비드에 도착하기 11시간 전에 한-미 간에 쇠고기 수입 재개 협상이 타결됐다. 한국이 ‘30개월 이상 쇠고기 수입금지’ 방침을 철회하고 미국산 쇠고기를 다시 수입한다는 내용이다. 정부는 쇠고기 협상과 대통령 방미는 관련이 없다고 말했지만, 나중에 공개된 미 국무부 문서엔 한국 정부가 이명박 대통령 방미 전에 쇠고기 수입 문제를 풀겠다는 뜻을 미국에 전달한 것으로 적혀 있다.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미 국무부 외교전문을 보면, 인수위 시절인 2008년 1월17일 최시중·현인택 두 측근 인사가 알렉산더 버시바우 주한 미국대사와 만나 이 대통령 방미를 논의했다. 현인택씨가 “4월이 적기이며 캠프데이비드를 방문할 수 있다면 이상적”이라고 제안했고 버시바우 대사는 “한국이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재개한 이후 4월에 방미한다면 더 좋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이에 현씨는 “이 대통령 방문에 앞서 한국 시장이 개방될 것”이라고 말했다.
2008년 8월5일 대학생들이 서울 청계광장에서 부시와 이명박 가면을 쓰고 미국산 쇠고기 재협상을 요구하고 있다. 이종근 기자가 찍었다.
정부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 발표로 전국에선 대규모 촛불시위가 벌어졌고, 임기 초반의 대통령 지지율은 한자릿수까지 떨어졌다. 이명박 대통령이 직접 대국민 사과를 하고 쇠고기 재협상에 들어가겠다고 밝혔다. 미국 대통령 별장인 캠프데이비드에서 하룻밤 묵은 값으로는 너무 커다란 정치적 대가를 치른 셈이었다.1966년 10월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의 서울 방문은 또 다른 측면에서 한국 사회의 중요한 변화와 연결되어 있다. 존슨 방한은 박정희 대통령이 베트남에 전투병력을 파병(1965년 10월)한 데 대한 답례 성격이 짙었다. 한국은 존슨의 7개국 순방 중 마지막 방문국이었다. 전세계적으로 베트남전 반대시위가 불이 붙던 때였다. 존슨은 순방국들에서 시민들의 큰 환영을 받지 못했다. 뉴질랜드에선 의사당 앞에서 반전 시위대와 마주치기도 했다. 한국은 달랐다. 김포공항에서 서울시청까지 카퍼레이드를 했는데, 180만명(언론 보도)의 시민들이 연도에 쏟아져나와 열렬히 존슨을 환영했다. 당시 서울 인구가 370만명이었으니 이 숫자는 다소 과장됐고 또 대다수는 동원 군중이었지만, 어쨌든 베트남전에 짓눌려 있던 존슨 대통령은 기뻐했을 것이다.
1966년 박정희 대통령과 린든 존슨 대통령 카퍼레이드 사진이다. 당시 공보처가 생산한 사진을 국가기록원에서 찾았다.
그런데 존슨의 카퍼레이드 도중 소공동 지역의 너저분한 중국인촌과 남산 기슭 판잣집이 텔레비전으로 방영되면서 나라 안팎의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박 대통령은 도시 미관을 위해 용산역 등 철도 부근 판잣집부터 철거하라고 지시했다. 무허가 건물 철거와 대대적인 도시계획의 출발이었다. 도심 철거민들은 경기도 광주의 허허벌판 대단지(지금의 성남)로 강제 이주해야 했다.(<경기동부>, 임미리, 2014) 서울 도심 재개발이 꼭 존슨 대통령의 방한 때문에 이뤄진 것은 아니지만, 1971년 한국 사회운동에 한 획을 그은 광주대단지 사건은 그렇게 미국 대통령과 실낱같은 연결점을 지니고 있다.한국과 미국 대통령의 만남이 꼭 껄끄러운 건 아니다. 재미있는 장면도 적지 않다. 1993년 7월 빌 클린턴이 방한했을 때는 김영삼 대통령과 청와대 녹지원에서 조깅을 같이 했다. 매일 아침 달리기를 했던 김 대통령이 클린턴 쪽에 먼저 제안을 했고 클린턴도 흔쾌히 수락해서 이뤄진 행사였다. 행사 이름은 ‘민주주의를 위한 조깅’(Jogging for Democracy)이라 붙였다. 300m 우레탄 트랙을 10바퀴 뛰었는데, 나이가 많은 김 대통령은 클린턴에게 지지 않으려 처음부터 속도를 올렸다. 클린턴은 여유 있게 맞춰주었지만, 미국 쪽 통역은 따라가질 못해 중간에 통역을 포기하고 트랙 밖으로 나와버렸다. 클린턴은 조깅을 마친 뒤 김 대통령에게 “나이도 많으신데 젊은 사람처럼 잘 뛰신다”고 덕담을 건넸다. 흡족한 김 대통령은 그날 저녁 만찬에서도 조깅을 화제에 올렸다. 힐러리 클린턴에게 “딱딱한 시멘트에서 뛰면 무릎이 상하니 우레탄을 깔아야 한다”고 조언했고, 힐러리는 백악관에 돌아가서 조깅 트랙에 우레탄을 깔았다.
1993년 7월10일 아침, 빌 클린턴 대통령은 청와대 녹지원에서 김영삼 대통령과 조깅을 함께 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조깅 전에 참모들에게 “내가 지지 않을 끼다”라며 특유의 승부욕을 불태웠다. 김 대통령은 처음부터 조깅 속도를 높였는데 클린턴이 잘 맞춰주었다고 한다. 청와대 사진기자단이 찍었다.
11월3일(현지시각) 미국의 새 대통령이 뽑히면 한-미 정상회담이 언제 열릴지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를 것이다. 역대 정상회담을 보면, 빨리 여는 것보다 치밀하게 회담을 준비하는 게 더 중요하다. 이번 정상회담은 동북아 정세와 한국 사회에 어떤 파장을 던질까. 20년 전과 달리, 한반도에 따뜻한 바람을 몰고 오는 회담이 되었으면 한다.
▶ 제21화 해설자는 박찬수 <한겨레> 선임논설위원입니다. 박찬수 논설위원은 <한겨레> 워싱턴 특파원과 정치부장, 편집국장, 논설실장을 지냈습니다. 청와대와 백악관의 작동방식을 비교한 <청와대 vs 백악관>, 민족해방(NL) 사조의 흐름을 다룬 <엔엘(NL)현대사>를 썼습니다. 요즘 오피니언면에 격주로 ‘진보를 찾아서’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팩트스토리는 전문직·실화 소재 웹소설·웹툰 및 르포 논픽션 기획사입니다. 저널리즘 바깥으로 확장하는 실화를 추구합니다.<한겨레>가 지령 1만호를 맞아 ‘시간의 극장-한겨레 아카이브 프로젝트’를 선보입니다. 33년 기사와 사진 아카이브를 활용하여, 중요 사건과 인물을 현대사 콘텐츠로 재탄생시키는 작업입니다. 해당 주제를 잘 아는 해설자가 ‘시의성 있는 과거’와 관련한 한겨레 사진과 기사를 선정하고 독자에게 해설합니다. 한번도 소개된 적 없는 비컷(B-cut)사진 필름도 발굴하여 공개합니다. 르포, 전문직 소재 웹소설 기획사 팩트스토리가 기획하고 한겨레와 공동으로 제작합니다. 주간 연재.
10월 30일, 우리나라 대법원이 일제 강제동원의 불법성을 명확히 하고 일본 기업은 피해자들에게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린 지 2년이 지났다.
일본은 그동안 판결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며 일본까지 찾아간 피해자를 문전박대하고 국제법까지 위반하며 서류송달을 거부하는 등 배상절차를 지연시켜왔다. 2018년 10월 30일로부터 2년이나 지났지만, 아직까지도 피해자들은 제대로 된 배상을 받지 못하고 있다.
피해자들이 법적으로 대응 해당 일본기업의 자산을 압류하고 강제매각을 추진하자, 일본 정부는 “한국이 해결책을 마련하라”고 판결을 뒤엎을 것을 요구하며 “한중일 정상회담에 참석하지 않겠다”는 등 한국 정부를 협박하고 있다.
그동안 피해자 및 대리인, 시민들은 연대하며 일본에 꾸준히 사죄배상을 요구해왔다. 특히 이번 10월 30일, 판결 2년을 맞아 서울 곳곳에서는 다양한 행동들이 진행되었다.
시민 1,063명, ‘우리가 기억한다’ 인증샷 광고 게재
‘강제동원 문제해결과 대일과거청산을 위한 공동행동(이하 ’강제동원 공동행동‘)’은 10월 15일부터 30일까지 시민 인증샷 캠페인을 벌였다. 시민 1,063명의 인증샷과 후원으로 신문광고가 게재되었다.
▲10월30일 한겨레신문에 실린 시민들의 인증샷 광고. [사진-통일뉴스 정은주 통신원]
판결 2년을 맞는 10월 30일 당일에는 피해자단체와 시민사회단체들이 모여 일본대사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피해자 유족인 이희자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대표는 “일본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잘못된 역사는 묻힐 수 없다”고 강조하며 “이렇게 많은 시민들이 함께 해주어서 힘이 난다"고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10월30일 일본대사관 앞에서 피해자와 시민들이 기자회견을 진행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정은주 통신원]
피해자들과 함께 사죄배상 꼭 받아내겠다는 청년들
청년, 대학생들도 판결 2년을 맞아 피해자단체와 함께 항의행동을 기획하고 진행했다. 매주 목요일 청년들을 중심으로 일본대사관 앞에서 진행되는 항의행동인 ‘서울겨레하나 목요행동’은 10월 29일 판결 2년을 맞아 피해자 유족과 함께 했다.
▲10월29일 판결2년 ‘서울겨레하나 목요행동’에 많은 사람들이 참가했다. [사진-통일뉴스 정은주 통신원]
이날 87차 행동의 사회자를 맡은 전지예 청년은 “피해자분들의 투쟁 덕분에 우리가 지금 더 당당하게 목소리 낼 수 있는 것”이라고 전하며 “이 판결을 받기 위해 강제동원 피해자와 그 가족들이 얼마나 오랜 세월 고통 속에 사셨을지 생각하면 일본에 대한 분노가 올라온다”고 목요행동을 진행한 소감을 밝혔다.
▲‘서울겨레하나 목요행동’ 중 한 청년이 일본 스가 총리의 입에 X자 스티커를 붙이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정은주 통신원]
대학생들, 시민들에게 강제동원 문제 알려
30~31일 용산역 강제징용 노동자상 옆에서는 대학생이 지나가는 시민들에게 일제 강제동원 역사를 알리고 일본의 역사왜곡을 규탄하는 활동이 진행되었다.
활동에 참가한 이수민 대학생은 “활동을 준비하며 가슴 아픈 역사를 자세히 알게 되었고, 여러 사람에게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을 더욱 느꼈다”고 전했다.
▲대학생들이 용산 강제징용 노동자상 앞에서 시민들에게 강제동원 문제를 알리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정은주 통신원]
특히 31일에는 피해자들의 증언을 직접 낭독하고 ‘우리가 증인이다’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퍼포먼스를 통해 강제동원 피해자와 함께 계속 활동해나갈 것임을 보여주었다.
▲대학생들이 용산역 계단에서 ‘우리가 증인이다. 역사왜곡 멈춰라’ 피켓을 들고 퍼포먼스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정은주 통신원]
일본이 사죄할 때까지 시민들의 행동은 이어질 것
판결 2년이 지났지만, 많은 시민들이 강제동원 피해자들과 연대하며 일본에 사죄배상을 요구하고 있다.
청년들의 ‘서울겨레하나 목요행동’은 매주 목요일마다 일본대사관 앞에서 진행된다. 강제동원 공동행동은 시민 인증샷 캠페인을 신문 광고에 이어 연말 지하철 광고로도 추진할 계획이며, 국제캠페인으로 확대해 계속 진행할 예정이다.
시민들의 항의행동은 계속 될 뿐 아니라 일본이 판결을 거부하면 할수록 더욱 거세질 것이다.
청년이 있었다. 그는 어른과 아이의 경계, 생존과 꿈의 경계에 섰다. 같은 경계선을 무난히 혹은 우여곡절을 거쳐 넘은, 같은 시대에 던져진 다른 많은 이들과 달리 그는 경계선을 넘지 못했다. 세계의 폭력에 의해서든, 피하고 싶었지만 피하지 못한 불운에 의해서든 그의 죽음은 역사의 기록이자 시대의 고발이다.
해방을 앞두고 이역에서 숨을 거둔 윤동주부터 2020년의 어느 청년에 이르기까지, 지속가능바람 저널리스트들은 청죽통한사(청년의 죽음으로 통찰하는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한국 현대사의 분수령이 된 청년의 죽음을 취재했다. 청년의 시각에서 새롭게 작성한 '청년의 죽음'은, 그 죽음의 애도이자 더 나은 세상의 모색이다. [기자말]
그날 서울 평화시장이 자리한 수표교 인근엔 노동자 500여 명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고 곳곳에 경찰관들이 배치돼 긴장이 감돌았다. 이미 소문이 널리 퍼져 있었다. 평화시장 의류공장의 사업주들은 "깡패 같은 놈들이 주동이 되어 나쁜 짓을 하니 점심시간에 나가지 말라"고 노동자의 바깥출입을 막았다. 평화시장 건물마다 경비원들이 출입구를 봉쇄했다. 사람은 막았지만 말은 막지 못했다.
오후 1시 20분에 일군의 사람들이 플래카드를 펼쳐들고 그곳 광장으로 향했다. 하지만 곧바로 경찰이 막아서는 바람에 플래카드는 망가져 버렸고, 전에 그랬듯 이번에도 시위가 무위로 돌아갈 듯하였다. 시위대가 주춤하는 사이로 한 청년이 근로기준법 책자를 가슴에 품고 나타났다. 준비한 일을 결행하며 그는 외쳤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외침은 곧 불꽃이 되었다. 휘발유를 뒤집어쓴 그의 몸이 근로기준법과 함께 화염에 휩싸였다. 불길 속에서 또 다른 외침이 타올랐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전신을 휘감은 불길이 3분가량 몸을 태웠고, 22년 짧은 생애를 평화시장에 남긴 채 쓰러진 그는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유언은 한국 노동운동의 착화제가 되었다. 50년 전에 청계천에서 분신한 그는 전태일이다.
평화시장
태일은 1948년 9월 28일 대구에서 태어났다. 매우 가난했다. 소년 시절 가난을 견디지 못해 가출을 반복했다. 구걸, 삼발이 장사, 신문팔이 등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닥치는 대로 했다. 제 몸 건사하기도 힘든 세상, 동생을 배곯게 하지 않으려고 보호시설에 버려야 했다. 그렇게 엄혹한 시간을 보내며 그는 어떤 질문을 품었다. 자신을 억압하는 부유한 자들의 세상, 강자가 지배하는 질서, 가난한 자를 가난으로 밀어내는 그것은 대체 무엇인가? 태일은 그 세상을 '부한 환경'이라 부르기로 했다.
1964년 봄. 16세 태일은 평화시장 의류공장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당시 평화시장 의류공장의 체계는 말단부터 시다, 미싱 보조, 미싱사, 재단 보조, 재단사, 공장주로 올라가는 피라미드 형태를 취했다. 태일은 시다에서 시작해 미싱 보조를 거쳐 1966년에는 미싱사가 되었다.
처음 시다 일을 할 때 하루 14시간을 근무하고 일당으로 50원을 받았다. 당시 차 한 잔 값을 일당으로 받았으니 터무니없는 저임금이었다. 너무 어린 나이에 세상의 험한 꼴 쓴맛을 다 본 태일은 그나마 안정된 직장이라는 생각에 그래도 신이 났다고 한다. 그러나 '안정'에 안도한 것도 잠깐, 평화시장의 열악한 노동환경이 눈에 들어왔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마음은 무거워졌다.
박정희의 근대화와 경제발전은 농촌과 노동자의 수탈을 특징으로 한다. 농촌 소외라는 정책 방향에 따라 도농 간 격차가 확대되어 대대적인 이농이 이어졌다. 이촌향도한 많은 인구는 공장의 노동자가 되거나 노동자가 되기 위한 산업예비군이 되어 도시의 외곽 슬럼 등지에 집단거주했다.
박정희 정권은 수출 주도 경제 노선을 택했다. 미국의 원조나 외국의 차관에 기대 기술 수준은 낮고 노동이 많이 투여되는 경공업 제품을 만들어 수출했다. 기술경쟁력이 없으므로 유일한 경쟁력은 가격경쟁력이었다.
한국 정부는 정부 차원에서 수출목표를 정하고 수출보국(輸出報國)이란 명목으로 기업체를 다그치는 한편 금융과 세제 혜택을 사실상 무제한으로 제공했다. 한국의 유일한 수출경쟁력인 상품의 가격우위를 유지하기 위해 정부는 기업의 노동자 수탈과 탄압을 때로 방관하고 때로 협력했다. 때로는 공권력을 동원해 해결사 역할을 맡았다.
이러한 수탈구조가 안정적으로 작동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로는, 이농현상으로 인한 노동의 만성적 공급 과잉과 남북 분단이란 특수상황에 기인한 한국 노동운동의 침체가 거론된다. 생계비에 못 미치는 저임금이라 하여도 일할 사람이 줄을 섰기에 자본가는 노동자에게 큰소리를 칠 수 있었다.
또 노동운동에 빨갱이 낙인을 찍은 반공이데올로기가 워낙 강력하게 힘을 발휘하였기에 노동자는 불이익을 당하고도 자본가에 맞서 단합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무력한 개인으로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다 일제에서 물려받은 권위주의 통치시스템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비대해진 국가의 폭력역량은 노동운동의 씨를 말려 버렸다.
태일이 일하던 50년 전 평화시장은 이러한 시대 상황이 압축된 노동 현장이었다. 작업량이 비교적 많은 가을부터 봄까지 근무시간은 하루 평균 14~15시간이었다. 아침 8시에 출근하여 내내 일한 뒤 낮 1시 점심시간이 되어서야 잠시 점심을 먹었다. 식사가 끝나면 즉시 업무에 복귀하여 밤 10시에서 11시에 퇴근했다. 중간에 화장실을 가기도 쉽지 않은 노동환경이었다.
일거리가 많은 시기엔 잠 안 오는 약을 먹거나 주사를 맞아가며 사흘 연속 야간작업을 하기도 했다. 평화시장이나 구로공단엔 잠 안 오는 약인 '타이밍'을 비타민처럼 수북이 쌓아놓고 먹게 했다고 전한다. 명목상의 휴일이 있긴 했지만 잘 지켜지지 않았다.
작업장의 밀집도가 심각했다. 고용주들은 작업장 공간을 최대로 활용하고자 '다락방'을 고안했다. 각종 작업 설비, 비품 등이 가득한 이 다락의 위아래 층에서, 평당 약 4명의 노동자가 근무했다. 기지개 한 번 제대로 펼 수 없는 비좁은 환경이었다.
당연히 위생 상태가 나빴다. 원단의 약품 냄새와 옷감에서 나오는 먼지가 노동자 건강을 위협했음에도 작업장에는 환기장치가 없었다. 외부로 향하는 창문은 없거나, 있다 해도 여닫을 수 없는 구조였기에 통풍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1만 명 이상을 수용하는 대형건물도 사정이 같았다. 창문 수가 적은 탓에 환기가 잘 안 된 것은 물론 실내 공간이 어두웠다. 노동자들은 바로 눈앞에 전등을 둔 채 작업했다. 장시간 직접 조명에 노출되어 많은 노동자가 눈병을 앓았다. 화장실은 남녀 공용으로 그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근로기준법 발견과 바보회 창설
나는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감정에는 약한 편입니다. 조금만 불쌍한 사람을 보아도 마음이 언짢아 그날 기분은 우울한 편입니다. 내 자신이 너무 그러한 환경들을 속속들이 알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br />- 전태일 일기 중에서
태일은 억압받는 노동자들에게 특히 마음을 썼다. 자신과 그들 모두 '부한 환경'이 밀어낸 자들이었다는 동질감. 태일은 업주와 재단사의 유착관계로 여공 대부분이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음을 파악하고는 "어서 빨리 재단사가 되어서 공임 타협을 할 때에는 약한 직공들 편에 서서 정당한 타협을 하리라고 결심"한다. 임금이 줄어드는 것을 감수하고 곧바로 한미사 재단 보조로 취업하여 1967년 1월엔 원하던 재단사가 된다.
하지만 재단사가 되었다고 하여도 노동자의 편에 서는 일이 쉽지 않았다. 재단사가 다른 노동자에 비해 높은 직위라 하더라도 결국 고용주 밑에서 일하는 처지이기에 고용주의 횡포를 막는 데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미싱사가 일하던 도중 각혈을 했다. 폐병 3기였다. 그 미싱사는 그대로 일자리를 잃고 말았다. 산재라는 개념이 없던 때여서 보상을 받을 수 없었다.
태일은 이 일로 큰 충격을 받고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에 뛰어들기로 작정하였다. 과거 대구에서 노동운동에 참여한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며 마침내 '근로기준법'의 존재를 알게 된다.
이렇게 좋은 법을 두고 여태껏 기계 취급을 받고 업주들에게 부당한 학대를 받으면서 바보처럼 찍소리 한번 못하고 살아왔다니. 태일은 노동자가 단결하여 고용주에게 근로기준법 준수를 요구한다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 믿고 재단사 노동운동 모임인 '바보회'를 결성했다.
바보회는 평화시장 노동자를 대상으로 노동실태 조사 설문지를 돌렸다. 고용주들에게 들켜 설문지는 대부분 빼앗기거나 찢기고 말았다. 태일은 그나마 거둬들인 설문지를 가지고 근로감독관실로 향했다. 하지만 근로감독관은 태일이 전한 참혹한 노동 현실에 조금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태일은 이번엔 노동청을 찾아갔다. 하지만 노동청 역시 무늬뿐인 실태조사를 한 번 나왔을 뿐 별다른 대책을 내놓지 않았다.
이 사건 이후 태일은 평화시장 어느 공장에서도 일할 수 없게 되었다. 바보회 회원들 역시 해고될 위험에 직면하자 노동운동에 참여하기를 꺼렸다. 바보회는 이후 사실상 해체된다. 평화시장에서 일자리를 잃은 태일은 공사판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다가 떠난 지 1년 후 평화시장에 돌아올 수 있었다. 바보회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고 뜻 맞는 동지들과 '투쟁' 목적의 재단사 모임인 '삼동회'를 만들었다.
삼동회는 바보회에서 시행착오를 겪은 노동실태 설문조사를 성공적으로 재실시하는 한편 노동자들의 서명을 받아 노동청에 근로환경 개선 진정서를 제출했다. 이 진정서를 여러 신문사에 보내 1970년 10월 경향신문에서 <골방서 하루 16시간 노동. 근로조건 영점 … 평화시장 피복공장 소녀 등 만여 명 혹사>라는 기사가 실렸다. 평화시장 노동자의 열악한 노동환경이 주목받자 고용주와 근로감독관은 태일을 회유했고 일주일 내로 문제를 해결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노동청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태일은 더 적극적인 투쟁방식으로 의사표시를 하기로 한다. 진정을 통한 권리획득 방식에서 벗어나서 데모하고 투쟁해야만 성과를 얻을 수 있다는 자각에 이른 것이다.
하지만 적극적 투쟁이 쉬울 리가 없었다. 10월 20일 노동청 앞 시위, 24일 국민은행 앞 시위가 모두 무산되었다. 노동 당국의 압박과 회유도 계속되었다. 이제 태일은 그들이 맞서 싸우는 대상이 고용주뿐 아니라, 노동자를 억압하는 악과 긴밀히 유착한 경찰, 노동 당국, '부한 세상'으로부터 가난한 자들을 밀어내는 권력이라는 사실을 깨우친다. 그리고 당시에 그 거악에 맞설 마땅한 방법이 없었던 것 또한 태일은 잘 알았다.
평생을 건 긴 투쟁의 길을 시작하거나, 다른 많은 이의 투쟁의 길을 밝힐 빛이 되거나, 두 가지 선택을 두고 22살의 아름다운 청년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번민을 밤을 지새웠다.
죽음들
태일이 분신하기 7년 전 베트남 사이공에선 역사를 뒤흔든 다른 분신 사건이 있었다. 당시 외세와 결탁한 남베트남 응오딘지엠 정권은 지주들을 권력 기반으로 하였으며 식민지배의 유산으로 이들은 가톨릭을 믿었다. 가톨릭을 비호한 응오딘지엠 정권은 특정 종교를 비호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거의 전 국민이 믿는 종교인 불교를 탄압하였다.
남베트남 정부의 불교 탄압정책에 항의하여 1963년 6월 11일 사이공의 캄보디아 대사관 앞에서 베트남의 존경받는 승려인 틱꽝득(釋廣德)이 소신공양한다. 이날의 소신공양 광경은 각국에 보도되었는데, 화염 속에서도 표정의 일그러짐이나 고통의 신음 없이 정좌 자세로 조용히 죽음에 이른 고승의 모습은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다. 틱꽝득의 소신공양이 이후 베트남 역사의 방향을 바꿨다는 것이 일반적 평가다.
1970년 11월에 분신한 태일은 기독교인으로 틱꽝득과 종교가 달랐지만, 태일의 분신에도 소신공양이란 의의를 부여해야 한다고 믿는다. 태일과 틱꽝득은 역사를 바꿨다. 물론 아직 태일이 꿈꾼 세상은 오지 않았다.
▲ 24일 오전 서울 종로구 평화시장 부근 전태일다리에서 전태일 열사 50주기를 맞아 일터와 생활 현장에서 전태일 정신을 계승하는 작은 실천을 하자는 취지의 "내가 전태일!" 전태일 정신 계승 1실천 운동 제안 기자회견이 아름다운청년 전태일50주기 범국민행사위원회 주최로 열렸다. 2020.6.24
당장 2018년 12월 충남 태안화력발전소에선 협력업체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이 운송설비 점검 도중 사고로 숨지는 등 노동 현장의 비극은 다양한 형태로 바뀌며 계속되고 있다. 그럼에도 마지막에 "배가 고프다"는 말을 남기고 영면한 태일이 남긴 정신은 한국 노동운동의 영원한 자양이 돼 노동운동의 침로가 되고 있다. 시대에 자신을 소신공양한 20대 초반의 젊디젊은 청년 태일의 일기장에서는 다음과 같은 글이 발견된다. 분신 직전에 남긴 별도 유서가 있지만, 일기의 이 내용은 미리 쓴 유서처럼 느껴진다.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br />지금 이 시각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br />(...)<br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br />(...)<br />내 마음의 결단을 내린 이날, 무고한 생명체들이 시들고 있는 이때에 한 방울의 이슬이 되기 위하여 발버둥 치오니 하나님,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주시옵소서.
이건희 삼성회장이 2020년 10월 25일 향년 78세로 별세했다. 한국 자본가를 대표하는 이 회장이 노동운동을 상징하는 전태일 열사의 50주기를 앞두고 숨진 풍경이 공교롭다. 애도와 추모가 교차하는 가운데 전해진 택배노동자의 잇단 과로사는 두 죽음 중에서 2020년의 죽음보다는 50년 전의 죽음에 더 유념해야 할 절박감을 느끼게 한다.
그가 떠나고 50년이 지나는 사이에 많은 것이 바뀌었다. 자본은 노동자를 강압적으로 착취하는 대신 자발적인 순응을 끌어내는 방식으로 고도화하였으며 아날로그 통제가 디지털 통제로 바뀌면서 통제가 더 교묘하고 강력해졌다. 반면 드러나는 통제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노동의 외주화와 유연화에 이어 긱 이코노미(비정규 프리랜서 근로 형태가 확산되는 경제 현상), 플랫폼 노동 등 다양한 노동 형태가 등장하여 노동계급 내의 분화와 균열이 확대되고 있다. 반세기 전과 마찬가지로 노동현장은 긍휼과 자비를 절실하게 요구한다. 그것이 분신일 이유는 없지만, 우리에겐 더 많은 전태일 정신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그의 50주기에 더 큰 부끄러움을 느끼게 만든다.
글
- 김유라: 가톨릭대학교 국제학부 (졸업 예정). 침대에 누워있기를 즐기지만 열심히 살고도 싶다.
- 안치용: 청년협동조합지속가능바람 이사장. 사회책임과 지속가능성 의제화와 영화·문학·신학이 관심사다. 바람저널리스트들과 청죽통한사를 함께 진행한다.
덧붙이는 글 | 참고문헌
1. 민종덕, 『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평전』, 돌베개, (2016.09.13.)
2. 민종덕, 「잃어버린 진실 : 1977년 9월 9일 청계피복노조 결사투쟁 사건」, 『기억과 전망』 7, 2004.
3. 윤정원, 「대한방직 대구공장 노동쟁의(1955-1960)」, 국내석사학위논문 경북대학교 대학원, 2008.
4. 이원보, 『한국노동운동사 100년의 기록』, 한국노동사회연구소, (2005)
5. 임송자, 「전태일 분신과 1970년대 노동 · 학생운동」, 『한국민족운동사연구』 65,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10.
6. 장미현. 「1950년대 후반 대구 대한방직 노동쟁의와 전국노동조합협의회」, 국내석사학위논문 연세대학교 대학원, 2007.
7. 조영래, 『전태일평전』, 전태일재단, (2009.04.15.)
8. 한철희, 『청계, 내 청춘』, 돌베개, (2007.11.06.)
9. Tsatsralt, Altanbagana, 「박정희 정권과 농민의 연계성: 1970년대 새마을운동을 중심으로」, 국내석사학위논문 성균관대학교 일반대학원, 2011.
2차 대전 이후 국제사회는 냉전 시대, 팍스아메리카나 시대를 거쳐 자주화 시대로 이행하고 있다.
1) 냉전의 시작과 해체
2차대전 직후 제국주의 진영은 미국을 중심으로 단결하여 냉전을 시작했다.
자본주의, 제국주의 모순의 산물인 세계대공황은 제국주의 전쟁으로 폭발해 혁명의 시대를 열었다. 사회주의가 진영으로 발전하고, 식민지민족해방운동이 더욱 강화되어 비동맹운동으로 이어짐으로써 제국주의의 위기는 전반적으로 심화되었다. 이에 미제국주의와 그 연합세력은 내적으로는 국가독점자본주의에 기초한 수정자본주의를 채택하고, 외적으로는 그리스 내전과 한국전쟁을 시발점으로 대사회주의 냉전체제를 구축했다.
▲ 미 항공모함 칼빈슨호 [사진 : 뉴시스]
냉전을 시작으로 미국은 패권적 국가독점자본주의 즉, 군산복합체에 기반한 군사적 케인즈주의 국가로 전환했다. 미국은 냉전을 확대하며 한편으로는 유럽과 일본을 종속적 동맹체계로 편입시키고, 다른 한편으로 한국 등 제3세계를 신식민지로 재구성하여 민족해방혁명에 대한 압살정책을 강화했다.
그러나 미제국주의는 코리아전쟁에서 내리막길로 접어들기 시작하여 베트남전쟁패배를 거치며 심각한 위기에 빠져들었다. 늘어나는 재정적자와 유로달러의 유동성 과잉으로 닉슨은 금태환 정지를 선언하고 페트로달러에 기반한 불태환 달러기축시대와 금융축적 시대를 열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전후체제의 근본위기로 이어졌다. 금태환 정지로 달러가치의 하락은 유가하락으로 이어져 산유국들의 반발을 초래했고 오일쇼크로 이어졌다. 유효수요창출을 통한 전후 자본주의 황금기는 과잉생산기에 접어든 시점에서 유가상승과 결합하며 심각한 스태그플레이션에 빠지고 말았다.
다른 한편 상호확증파괴에 기초한 공포의 균형위에서 유지된 냉전의 평화 시기 소련동구사회주의에서 수정주의가 자라났다.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한 미 제국은 데탕트를 추진함과 동시에 중소분쟁을 이용하여 중국과 손잡고 대소고립전략을 선택했다. 데탕트 시기 더욱더 수정주의로 변질된 소련동구사회주의는 제국주의가 신자유주의로 이동하며 스타워즈전략 등 신냉전 공세를 강화하자 이를 이겨내지 못하고 스스로 몰락, 붕괴하고 말았다. 냉전은 이렇게 해체되었다.
소련동구사회주의 몰락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다.
첫째로 생산력중심주의에 빠져 사회주의민중을 사상적으로 준비시키지 못했다. 특히 소련공산당 지도부가 사회주의 원칙을 버리고 수정주의로 변질되어 전체 인민이 사상적으로 와해되었다.
둘째로 당을 혁명적으로 강화하지 못하여 관료주의가 스며들었으며, 군대를 장악하지 못함으로서 사회주의 사수의 최후의 보루가 무너졌다.
셋째로 사회주의건설에서 주체성과 민족성을 고수하지 못했다. 때문에 소련이 망하니 동구사회주의 진영 전체가 망하는 길로 들어섰다.
넷째로 유가상승과 하락, 과학기술발전문제에 대하여 능동적으로 대응하지 못하였다. 고유가 시대의 관성과 저유가 시대의 위기를 극복하는 사회주의경제시스템을 구축하지 못하고 좀비화되었으며, 과학기술혁명에 기초한 사회주의 경제발전건설 전략을 바로 세우지 못했다.
다섯째로 아프카니스탄 전쟁과 체르노빌 사고로 국력이 소모되고 사회주의 영상이 결정적으로 약화되었다.
사회주의 몰락으로 인한 냉전의 해체는 사회주의운동선상에서는 새로운 시대를 의미했다.
첫째는 선군시대로 전환되었다. 사회주의국가와 반제자주국가는 반제군사전선을 핵심으로 죽느냐 사느냐하는 절체절명의 대결선상에 서게 되었고, 혁명군대가 혁명의 주력군으로 등장하였다.
둘째는 국제사회와 인류의 중심 지향와 요구가 사회주의인가, 자본주의인가라는 제도 선택문제가 아니라 매개 나라와 민족의 자주적 번영과 발전의 문제로 전환되었다.
신자유주의는 위기에 빠진 전후 국가독점자본주의의 자유주의로 등장했다. 신자유주의는 시장만능주의를 주창했으나 철저하게 국가개입에 의해 국가의 힘에 의해 보장되는 자유주의였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군,산,금,정(군수, 산업, 금융, 정보) 대독점체의 성장과 융합, 무한경쟁과 결합되어 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다국적 기업의 생산의 국제화가 촉진되고, 금태환 정지, 투자은행 허용 이후 금융자본의 무제한적 확대와 함께 정보통신혁명 등 과학기술혁명에 기초하여 전개되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현대제국주의 내부의 불균등발전의 산물로서 제조업경쟁력을 상실한 미제국의 경제패권과 경쟁력회복을 위한 미국화 전략으로 강행되었다.
미 제국주의는 제국주의 본국에서 국관영부문의 초과이윤 확보를 위한 민영화에 돌입하고, 신식민지를 상대로 개혁개방을 강제하는 무한착취체제를 도입함과 동시에 자원약탈과 달러패권유지를 위한 침략전쟁을 병행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9.11테러 이후 반테러전에 돌입하며 정점에 달하였다. 미 제국은 북, 이란, 쿠바 등 반제자주국가를 악의 축으로 설정하고, 아프카니스탄, 이라크전을 도발하였으나 아직도 여기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색깔혁명으로 이어졌다. 리비아가 무너졌고, 우크라이나와 시리아가 내전에 휩싸였다.
이렇게 25년간을 풍미한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전쟁의 세계화, 공황의 세계화, 예속의 세계화, 빈곤의 세계화, 재난의 세계화’를 가져왔으며, 2008년 금융공황 이후 파국을 맞게 되고, 코로나 19위기로 결정적 붕괴의 길을 걷고 있다.
▲ 사진 : 뉴시스
신자유주의 세계화 시대, 일시적 팍스아메리카나 시대는 내부로부터 붕괴의 요인들이 성장했다. 미국 일극 패권을 지탱해왔던 핵독점과 달러패권이 서서히 붕괴되고 있다. 러시아와 중국은 미사일경쟁에서 미국을 추월하기 시작했고, 북은 전략국가로 등장했으며, 이란은 본격적 핵무장의 길로 들어섰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시대 글로벌 불균형체제를 기반으로 오히려 중국이 급성장했고, 금융공황 이후 세계는 장기침체에 빠져들었다. 낡은 체제는 무너지고 있으나 새것이 완전하게 대체하지 못하여 다극화로 가는 긴 대결과 갈등의 이행기, 격변기로 접어들고 있다.
그 와중에 발생한 코로나19 위기는 미국 일극패권,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모순을 더욱 극명하게 표출하며 국제사회를 자주화 길로 더욱 다그치고 있다. 바야흐로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유지하려는 세력과 자주화의 길로 진전하려는 세력 간의 치열한 대결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 정부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남북관계, 북미관계, 북핵문제를 정말 자신의 정책 기조에 맞게 풀려는 의지가 있는지, 없는지 정말 확인이 안 된다.
처음 한두 번은 그러려니 했다. 준비가 안 되었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 참고 또 참으며 인내했다. 하지만, 쌓이는 반복은 이미 임계점을 넘어서게 했고, 이후부터는 실수가 아닌 의도이거나, 본심으로 되었다.
평화를 얘기하면서도 절대 통일을 얘기하지 않은 것이라든지, 남북 간 합의문을 내왔으면서도 이 핑계 저 핑계만 댄다든지, 한반도 문제와 남북관계 문제를 제대로 파악해내지 못한 것이라든지, “어려운 시절에도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며 끝끝내 스스로 일어서고자 하는 불굴의 용기를 보았습니다.(문 대통령 평양 능라도 5.1경기장 연설문)”를 얘기하면서도 ‘가난한 북’으로 매도하는 것이라든지, 등등 일일이 열거하기도 벅차다.
▲ 서욱 국방부 장관과 마크 에스퍼 미 국방장관이 지난 10월 14일(현지시간) 미 국방부에서 열린 제52차 한미안보협의회(SCM)에 참석해 국민 의례를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그렇게 뒤죽박죽이던 이 정부의 대북인식, 남북관계, 비핵화 문제에 대해 최근 돌이킬 수 없는 큰 시그널이 하나 발생했다.
제52차 한·미 안보협의회의에서 양국 국방장관은 남·북·미 3국의 정상 간 합의를 종잇장으로 만들고. 또 문 대통령의 종전선언 재추진을 무색케 했으며, 나아가 이 정부의 정책기조인 한반도 평화와 번영 프로세스를 완전 소각했다.
서욱 장관은 제52차 한-미 안보협의회의 공동성명에서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강조, 필자)와 탄도미사일 프로그램 폐기(강조, 필자)를 위해 미국과 긴밀히 협력하겠다”고 공약해 남·북 및 북·미 정상회담에서 합의된 대원칙기조를 완전 뒤집어 버렸다.
설명하면 이렇다.
남·북·미 3국 간 정상이 합의한 대원칙은 1990년대부터 논의돼왔던 ‘북핵 비핵화’프레임을 ‘한반도 비핵화’프레임으로 대전환 시켜낸 것이었다.
4.27판문점 공동선언문 제3조 4항은 다음과 같다. “④ 남과 북은 완전한 비핵화를 통해 핵 없는 한반도를 실현한다는 공동의 목표를 확인하였다.”“
북미싱가포르 정상회담 합의문 제 3항은 다음과 같다. “3. 2018년 4월 27일 ‘판문점 선언’을 재확인하고 북한은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위해 노력할 것을 약속한다.”
어마어마한 의제 대전환이었고, 그래서 기간 남북미 대결사가 남북미 평화사로 전환할 수 있는 토대가 만들어진 것인데, 그것을 다시 원점으로 되돌려 버린 것이다. 20년 전 프레임 ‘북한 비핵화’로 되돌이표 한 것이다.
더해서 이제까지 남·북·미 3국 정상 간에 단 한 번도 합의된 바 없는 ‘미사일 프로그램 폐기’까지 제52차 한·미 안보협의회에서 다뤄냄으로써 자신의 이 발언-북한의 완전한 비핵화가 외교적 레토릭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북한 비핵화’를 목표로 하는 정치적 인식임을 뒷받침해냈다.
하여 북에 대한 미국의 핵 위협 강화를 용인하고, 북이 (핵)무기를 사용하기 이전이라 하더라도 북을 타격할 수도 있는 군사력을 구비하겠다는 정책이 고스란히 그 양국합의에 드러났다.
즉, 북은 이 합의에 따라 핵무기를 폐기해야 하지만, 한·미 군사 당국은 핵무기를 포함한 군사적 압박을 계속하겠다는 일방주의(군사대결주의)가 채택되어 졌고, 이것이 문 대통령의 종전선언 추진과 어떻게 공존할 수 있으며, 9월 평양공동선언 부속합의서인 <9·19 남북 군사분야 합의서>가 실현되어질 수 없음을 만천하에 고한 것이다.
<9·19 남북 군사분야 합의서> 1항과 5항의 합의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남과 북은 지상과 해상, 공중을 비롯한 모든 공간에서 군사적 긴장과 충돌의 근원으로 되는 상대방에 대한 일체의 적대행위를 전면 중지하기로 하였다.”, “5. 남과 북은 상호 군사적 신뢰구축을 위한 다양한 조치들을 강구해 나가기로 하였다.”
9.19 군사분야 합의서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던가? 남과 북 ‘일체의 적대적인 행위 전면 중지’와 ‘신뢰구축을 위한 다양한 조치’가 이뤄줘야 하는데, 서욱 장관의 발언은 계속 북을 군사적으로 압박하는 것으로 되어져야 하기 때문에 북은 당연히 반발하게 되어 있다. 우리 정부 스스로 약속위반을 먼저 했다는 멍에와 낙인도 두고두고 씻을 수 없는 과오이다.
곤궁한 처지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당연히 문책해야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정책기조에 대한 신뢰성을 회복해야 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현재까지 이 부분에 대한 대통령의 입장표명이나, 청와대의 입장은 나오지 않는다. 도대체 뭐란 말인가?
부서의 장이 대통령의 국정철학과 이 정부의 정책기조에 정면 반기를 드는데, 그것도 세 정상 간 합의정신을 완전히 뒤집어버려 상황에 따라서는 한반도의 안정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군사적 긴장을 불러올 수도 있는 그런 엄청난 발언을 했는데도 아무런 조치가 없다? 이해가 갈 수 없다.
마침, 모 신문에 실린 다음과 같은 기사제목이 생각났다. “文, 한번도 경험한 적 없는 '無 레임덕' 대통령 될까”(<쿠키뉴스>, 2020.10.30.)
청와대와 대통령은 여기에 만족하고 있을까? 그렇다면 그것이야말로 큰일이다.
대통령의 국정철학과 이 정부의 정책기조인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정책이 기저에서부터 뿌리채 흔들리고 무너져 내리고 있는데도, 그런데도 장관 하나 경질하지 못하고 5년 뒤를 생각한다? 참으로 ‘웃고프고’ 무책임한 기대이다.
해서 누가뭐래도 당장 이 불미스러운 사달(‘일어난 사건이나 사고’를 일컫는 옛말, 事端)을 해소해내어야만 한다.
어떻게 권력내부 레임덕 하나 못 해결하면서 앞으로 남은 민심과 관련된 레임덕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단 말인가? 성립할 수 없다.
그렇게 성립할 수 없다면, 과거의 초심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내가 왜 대통령이 되려 했는지’를 반드시 기억해내어야 한다.
거기에 대통령 되시기 전 <문재인의 운명>이라는 책에서 ‘운명’까지 거론했던 자신의 철학과 정책 기조가 보일 것이다.
민주당만을 위한 정파적 이해관계, 좁은 인재풀(중종은 당시 사림을 대표하며 가장 급진적인 이념을 가졌던 조광조 같은 인물도 중용했다.)에서 좀 과감히 벗어나 좀 더 광폭적으로 인재를 수용해야 한다.
그래서 자신의 손발이 돼줘야 할 인물 하나 못 찾아 바로 코밑에서 보란 듯이 반기를 들이대는 그런 반북 대결주의자가 발탁되는 이 사달이 멈춰져야 한다.
'정책-인물' 부조화 문제를 그렇게 풀어 5년 뒤를 생각해내어야 한다.
않으면, 역사는, 민심은 “뭐하러 대통령 됐습니까?” 반드시 그렇게 물을 수밖에 없다.
김광수 약력
저서로는 『수령국가』(2015)외에도 『사상강국: 북한의 선군사상』(2012), 『세습은 없다: 주체의 후계자론과의 대화』(2008)가 있다.
강의경력으로는 인제대 통일학부 겸임교수와 부산가톨릭대 교양학부 외래교수를 역임했다. 그리고 현재는 부경대 기초교양교육원 외래교수로 출강한다.
주요활동으로는 전 한총련(2기) 정책위원장/전 부산연합 정책국장/전 부산시민연대 운영위원장/전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사무처장·상임이사/전 민주공원 관장/전 하얄리아부대 되찾기 범시민운동본부 공동운영위원장/전 해외동포 민족문화·교육네트워크 운영위원/전 부산겨레하나 운영위원/전 6.15부산본부 정책위원장·공동집행위원장·공동대표/전 국가인권위원회 ‘북한인권포럼’위원/현 대한불교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 부산지역본부 운영위원(재가)/현 사)청춘멘토 자문위원/6.15부산본부 자문위원/전 통일부 통일교육위원 / 평화통일센터 하나 이사장/(사)한반도 평화와 번영을 위한 협력 자문위원 외 다수가 있다.
10월 29일, 대법원이 이명박 전 대통령을 상대로 '다스는 당신 것이며, 당신은 대통령이 된 뒤에 기업인 뇌물과 국정원 특수활동비를 수수하는 등의 범법을 저질렀다'고 선고했다(관련 기사: 대법원, MB 징역 17년 확정... 횡령과 뇌물수수 등 인정돼).
사기업 직원과 마찬가지로 공직자도 '남의 일'을 해주고 봉급을 받는 샐러리맨이다. 국회의원도 그렇고 서울시장도 그렇고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민주국가의 공직자는 국민의 일을 해주고 봉급을 받는다. 나랏일을 '내 일처럼' 생각하고 열심히 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나랏일이 '내 일'은 아니다. 공직자는 나랏일을 하고 봉급을 받는 샐러리맨이다.
고용주들은 맡은 바 직무를 '내 일처럼' 생각하지 않는 직원(A)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회사 일을 '내 일처럼' 생각하는 직원(B)을 좋아한다. 하지만 고용주들이 A보다 더 경계할 수도 있는 유형이 있다. 회사 일을 '내 일처럼'이 아니라 진짜 '내 일'로 생각하는 직원(C)이다.C 유형은 횡령이나 배임죄를 저지를 수도 있고, 회사를 자기 뜻대로 끌고 가려 할 수도 있고, 그게 여의치 않으면 불만을 품을 수도 있다. 그래서 고용주 입장에서는 C보다 A가 차라리 나을 수도 있다.
옛날 왕들도 그랬다. 고려 공민왕이 신돈을 전격 기용해 국정을 맡겼다가 갑자기 죽인 것과, 조선 중종이 조광조를 전폭적으로 밀어주다가 갑자기 죽인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신돈과 조광조가 B 단계를 지나 C에 접어들었다고 판단되자 고용주들은 위험성을 느끼고 칼을 뽑아들었다.
남들은 모르고 본인만 알던 '샐러리맨 신화'
2007년 대통령선거 당시 유권자 상당수는 회사원 출신인 이명박 후보에게 기대를 걸었다. '저런 사람이라면' 하는 느낌이 상당수 유권자를 지배했다. 대중이 그런 기대를 하도록 만들었다는 점에서 그는 샐러리맨 신화의 주인공이 될 만했다.
그런데 대중이 아는 '이명박 샐러리맨 신화'와 이명박만 아는 '이명박 샐러리맨 신화'는 같은 게 아닐 수도 있었다. 대중은 겉으로 드러난 이명박의 인생 궤적이 그의 커다란 성취로 이어진 면에 주목했지만, 이명박이 생각하는 자신의 성공 비결은 겉으로 드러난 부분에 있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명박이 '대한민국 고용사장'일 때 저지른 범죄에 대한 이번 대법원 판결은 평생을 샐러리맨으로 살아온 이명박의 인생철학에 중대 결함이 있음을 암시한다.
굴욕적인 한일협정이 체결된 1965년에 24세 청년 이명박은 현대건설에 입사했다. 7월 1일 처음 출근한 그는 12월에 태국 빠따니-나라티왓 고속도로 건설 현장사무소에 파견됐다.
태국 현장에서 그는 노동자로 위장 취업한 한국인 폭력배들이 폭동을 일으켰을 때 회사 금고를 꼭 끌어안은 채로 구타를 견뎠다. 2015년 발행된 회고록 <대통령의 시간>에서 그는 "경찰과 함께 들어온 직원들이 금고를 껴안고 쓰러져 있는 나를 발견했다"고 한 뒤 "이 일은 현대건설에 내 이름을 인식시키는 계기가 됐다"고 평가했다.
"지금도 가끔 '그때 왜 그랬을까?'하고 자문한다"면서 그는 "그것은 아마도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기질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한 뒤 "혹독한 가난 속에서도 항상 꼿꼿하셨던 어머니"라고 회고했다.
이 책에서 그는 자신의 정직성을 강조했다. 정주영 사장이 입사 2년도 안 된 자기를 현장 책임자로 임명한 것과 관련해 "무엇보다도 나의 정직함을 높이 산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며 "정직은 내 삶의 큰 자산이었다"고 평가했다. 이런 말에 따르면, 정직성이 이명박 샐러리맨 신화의 주요 동력 중 하나가 된다.
그런데 겉으로 드러난 모습이 현대그룹 샐러리맨 이명박의 전부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느낌이 들게 하는 진술이 있다. 이명박과 함께 일했을 뿐 아니라 이명박이 가까이 한 에리카 김의 남동생인 김경준이 BBK 소송과 관련해 2007년 9월 6일 LA 카운티 법원에 제출한 서류에 그런 내용이 담겨 있었다. 안치용 전 YTN 기자의 <시크릿 오브 코리아>는 이 서류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김경준은 이 서류에서 MB가 1960년대 박정희 대통령의 총애를 받던 현대건설에 입사해 최고경영자가 된 뒤 자신의 직위를 이용해 현대의 자산을 그의 형과 처남 명의로 빼돌렸다고 주장했다. 현대자동차가 자체적으로 차량 시트를 생산할 수 있었음에도 MB가 현대의 기술을 빼돌려 회사를 세웠고, 현대건설에 지시해 차량시트 생산공장인 다스를 짓도록 했다는 것이다. 또 현대자동차에 영향력을 행사해 이 회사로부터 차량시트를 구매하는 계약을 맺도록 지시했다고 설명했다.
대법원 판결로 확정됐듯이 다스는 이명박의 것이다. 이명박이 현대그룹에 재직할 때 세워진 다스가 이명박의 재산 증식에 기여했다는 진술은 "정직은 내 삶의 큰 자산이었다"는 그의 자평을 음미해보도록 만든다. 대중이 아는 '이명박 샐러리맨 신화'와 이명박만 아는 '이명박 샐러리맨 신화'가 과연 같을까?
위 책은 "김경준은 해당 서류 2페이지에서 MB가 사기·뇌물·돈세탁·착취 등을 통해 6억 달러의 재산을 불법적으로 모았고 그의 재산은 형제와 처남 그리고 여러 법인들을 통해 은닉되었다고 밝혔다"고 말한다.
주진우 <시사인> 기자가 쓴 <주진우의 이명박 추격기>에 "내가 이명박의 재산이 30조 정도 될 거라고 말했더니, 이명박의 한 친척은 '지금까지 말한 사람 중에 가장 근사치를 말한 것 같다'라고 했다"고 한 뒤 "이명박 형제의 한 수행비서는 '다스의 재산 가치가 10조가 훨씬 넘으니 (이명박 재산은) 상당히 큰 액수일 것이다'라고 말했다"는 대목이 있다.
김경준이 말한 6억 달러는 현재 기준으로 약 6800억 원이다. '30조에 가깝다', '다스가 10조 원짜리이니 이명박 재산은 상당할 것이다'라는 진술에 비해서는 금액이 적지만, 6억 달러도 상당한 거액이다. 30조이든 10조이든 6억 달러든, 재벌이 아니고는 쉽게 소유할 수 없는 금액이다. 아무리 연봉이 많다 해도 샐러리맨이 모을 수 있는 돈은 분명 아니다.
1992년에 51세 된 이명박이 정주영의 통일국민당에 가지 않고 노태우·김영삼의 민주자유당에 들어가 전국구(비례대표) 국회의원이 된 것도 그의 비밀 재산과 무관치 않다는 증언이 있었다. 이명박의 국회의원 시절 비서관이었던 김유찬 SIBC 대표는 2018년 4월 13일자 <세계일보> 인터뷰 기사 "김유찬, '이명박 차명재산 지키기 위해 30년 은인 정주영 배신'"에서 정주영 가문의 정아무개 박사에게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이렇게 증언했다.
"정 박사에 따르면, 1992년 초 이미 이 전 대통령의 가·차명 재산의 상당부분을 파악하고 있던 당시 노태우 정권이 정 회장의 (국민당) 황색 돌풍을 잠재우기 위해 '다른 사람 명의로 돼 있는 차명재산을 뺏기고 감옥 갈래, 아니면 우리에게 협조하고 전국구 국회의원 감투 받을래'라고 이 전 대통령을 압박했고, 이 전 대통령은 이에 후자를 선택했다."
기왕에 정치 입문을 결심했다면 통일국민당에 들어가야 했지만, 정주영의 수족을 끊으려는 민자당 정권의 압력에 굴해 정주영과 결별하게 됐다는 것이다. 정권이 상당부분을 파악하며 협박·회유를 할 만큼 은닉 재산이 일정 규모에 달해 있었기에 이런 일이 벌어졌으리라고 판단할 수 있다. 현대그룹 고용사장인 그가 기업 오너를 성심으로 대했다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고용주를 대하는 태도는 '대한민국 고용사장'일 때도 잘 드러났다. 29일 대법원은 그에게 징역 17년, 벌금 130억, 추징금 57억8천여만 원을 선고하면서, 그가 대통령이 된 뒤 삼성그룹을 포함한 기업들로부터 뇌물을 수수하는 등의 범죄를 저질렀다고 인정했다.
대법원 선고로 확정된 2심 판결 당시의 서울고등법원 재판부는 "이 전 대통령은 국가원수이자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으로서 본인은 뇌물을 받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뇌물을 받은 공무원을 감시·감독하도록 법령을 정비하고 집행해 국가기관이 부패하는 것을 막아야 할 의무가 있었음에도 이 같은 의무를 저버리고 사인·공무원·기업체로부터 뇌물을 받아 부정한 처사를 했다"고 선고했다.
나랏일을 '내 일'로 생각한 결과
▲ 재수감 앞둔 이명박 전 대통령 자택 분위기 이명박 전 대통령이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 등 혐의로 상고심에서 징역 17년이 확정된 가운데 29일 오전 서울 강남구 논현동 자택 앞에 한 시민이 이 전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를 요구하고 있다.
이명박은 대통령직을 국민과 나라를 위해 수행하지 않고 개인적 치부의 수단으로 악용했다. 나랏일을 '내 일처럼' 하지 않고 '내 일'로 생각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4대강 사업으로 혈세 22조원을 낭비한 것도 나라 돈을 '내 돈처럼' 귀중히 여기지 않고 '내 돈'으로 생각해 함부로 다룬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대한민국 정부의 수석 샐러리맨인 대통령이 된 뒤 그는 공직을 이용해 비자금을 축적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행태가 그의 곳간을 늘려주었으니, 세상은 모르고 이명박만 아는 '이명박 샐러리맨 신화'는 현대그룹 퇴사로 끝나지 않고 청와대에 들어간 2008년 2월 25일 이후로도 계속됐다고 볼 수 있다.
서울시장 시절인 2006년에 이명박은 자서전 <신화는 없다> 개정판의 서문에서 "거듭 말하거니와 신화는 없다"며 "다만 꿈과 용기를 가지고 바른 길로 나아가는 젊은이들의 성실한 노력이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신화는 없고 성실한 노력이 있을 뿐이라고 했지만, 세상이 모르는 '이명박 샐러리맨 신화'는 그 후로도 계속 이어졌다. 이번 대법원 판결로 그런 면모가 한층 더 명백해졌다고 말할 수 있다.
29일 이명박은 대법원 선고 뒤 "법치가 무너졌다. 나라의 미래가 걱정된다"며 "진실은 반드시 밝혀질 것"이라는 입장문을 발표했다. 하지만 이명박의 실체는 이번 판결로 어느 정도 밝혀졌다고 볼 수 있다.
2003년 ‘검사와의 대화’로 본격화
노 대통령-평검사 초유의 공개토론
2005·2011년엔 수사권 조정 ‘검란’
2012년 중수부 폐지 두고 “총장 퇴진”
‘추-윤 갈등’ 반응 않던 검사들 왜
추 장관 인사·지휘권 불만 속에
비판 검사 ‘개혁 대상’ 몰자 동참
‘평검사 회의’ 대신 댓글 릴레이
한겨레 자료 사진추미애 법무부 장관을 향해 검사들이 내부 통신망에 댓글 달기 형태로 집단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른바 ‘검란’으로 불렸던 검사들의 집단행동은, 검찰개혁 과정에서 검찰의 기득권이 축소되는 것에 대한 불만이 표출된 모양새였다. 하지만 이번엔 법무부 장관이 자신을 비판한 평검사를 개혁 대상으로 몰아붙인 것이 검찰개혁에 대한 이견을 용납하지 않는 모습으로 비쳐 검사들의 반발이 잇따른다는 점에서 과거와 차이가 있다.
■ ‘검사와의 대화’부터 시작된 집단행동
2003년 ‘검사와의 대화’는 검사들의 집단반발이 처음으로 공식화한 사건이었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김각영 검찰총장보다 사법시험 11년 후배인 강금실 법무부 장관을 임명하며 “지금의 검찰 수뇌부를 신뢰할 수 없다”며 인적청산을 공언했다. 검사들은 “검찰의 조직 문화를 존중해달라”며 반발했고 10명의 ‘평검사 대표’가 그해 3월9일 노무현 대통령과 공개토론을 하는 초유의 상황이 연출됐다. 결과는 검사들의 부정적 이미지만 증폭됐다. 무례하고 억지 주장을 되풀이한다는 뜻으로 ‘검사스럽다’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다.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검사와의 대화’를 계기로 상설화한 ‘평검사 회의’는 2005년과 2011년 검경수사권 조정 과정에서 소집되며 검찰의 수사권 축소에 반발했다. 2012년 11월에는 한상대 검찰총장이 뇌물 수사를 받던 부장검사에게 언론 대응 방법을 조언했다는 이유로 최재경 대검 중앙수사부장에 대한 공개감찰을 지시하면서 검사들이 한 총장 퇴진을 요구하고 나섰다. 검사 뇌물 사건과 최태원 에스케이 회장 봐주기 구형 지시로 궁지에 몰린 한 총장이 위기를 타개하려고 중수부 폐지 문제로 자신과 갈등을 겪은 최 중수부장을 무리하게 감찰하자 검사들의 누적된 불만이 폭발한 것이었다.
■ “당신의 의견에 반대하지만, 말할 자유를…”
검사 집단반발의 상징이자 구심이었던 ‘평검사 회의’는 이제 검찰 내부게시판의 댓글 릴레이로 대체된 것으로 보인다. 검사들은 한자리에 모여 회의를 하고 성명서를 발표하는 방식이 “괜히 집단행동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검찰 간부)에 자제하는 분위기다. 특히 이번 반발은 과거와 양상이 다르다. 올해 1월부터 시작된 추미애 장관의 윤석열 총장 측근 좌천 인사와 수사지휘권 발동을 통한 윤 총장 견제, 내년 1월부터 시행하기로 확정된 검경수사권 조정에도 검사들은 반응하지 않았다. △추 장관의 인사권 행사가 ‘윤석열 사단’ 독식을 정상화한 측면이 있고 △윤 총장이 검·언 유착 의혹 수사지휘 과정에서 한동훈 검사장을 위해 무리수를 두면서 ‘일선 검사들이 장관-총장 갈등 상황에서 한쪽을 지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게 검찰 내부의 여론이었다.
그러나 추 장관이 검찰 내부게시판에서 자신을 비판한 검사를 에스엔에스에서 ‘공개 저격’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추 장관과 다른 생각을 드러내면 언제든지 ‘개혁 대상’으로 몰릴 수 있다는 우려가 그간의 ‘추-윤 갈등’에서 응축됐던 불만과 맞물려 폭발한 것이다. 검사들의 반발 댓글 중 “검찰개혁에 반대하지 않는다”거나 “나는 당신의 의견에 반대합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그 의견 때문에 박해를 받는다면 나는 당신의 말할 자유를 위해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라는 인용이 내부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다. 한 검찰 고위간부는 “장관과 총장이 대립할 때도 매일 사건 처리에 허덕이던 형사부 검사들은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장관이 자신을 비판한 검사 개인에게 대응하는 방식을 보면서 이제는 본인들도 저렇게 탄압받을 수 있다, 남의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게 된 것”이라고 짚었다.
최근 댓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