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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과 병장 월급 차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을 거다

[김형남의 갑을,병정] 포퓰리즘 딱지 떼고 제도화 할 때 20.10.29 08:04l최종 업데이트 20.10.29 08:04l김형남(khn8911)

장병 휴가 통제 끝... 76일 만에 정상 시행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통제됐던 장병 휴가가 정상 시행된 8일 오전 강원 춘천시 육군 2군단 사령부 위병소에서 병사들이 휴가를 떠나고 있다. 2020.5.8
▲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통제됐던 장병 휴가가 정상 시행된 8일 오전 강원 춘천시 육군 2군단 사령부 위병소에서 병사들이 휴가를 떠나고 있다. 2020.5.8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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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8월부터 병사에 대한 징계 벌목 중 영창 제도가 폐지되면서 새로 도입된 벌목 중에 '감봉'이 있다. 고작 60만 원 주면서 그것마저 빼앗아 가려고 하는가 하는 의문이 들다가도, 건국으로부터 70년이 지난 이제서야 월급 삭감이 벌칙으로 작용할 수준이 되었다는 사실에 씁쓸함을 느낀다. 그만큼 병사들에게선 빼앗을 게 없었다. 행정상 불이익에 불과한 징계를 받으면서 범죄자처럼 쇠창살에 갇혀 몸으로 때워야 했던 병사들이 자기 월급으로 잘못된 행동에 책임을 지게 되었으니 그야말로 대단한 변화가 아닐 수 없다.

화폐개혁으로 돈의 단위가 '환'에서 '원'으로 바뀐 1962년, 병장의 월급은 2000원이었다. 그로부터 64년이 지난 2020년 기준 병장의 월급은 54만 900원이다. 단순하게 비교하면 270배가 오른 셈이다. 물론 월급 액수를 단순하게 비교한 수치로는 병사의 월급 수준이 얼마나 나아졌는지 정확하게 파악할 수가 없다. 그래서 간부의 최고계급인 4성 장군 대장과 병사의 최고계급인 병장의 월급을 비교해보았다. 군에서 병사의 군 복무에 매기는 가치가 얼마나 되는지 가늠해보기 위해서다.

대장과 병장의 월급 차이

 

이승만 대통령이 '병 진급령'을 개정해 병장 계급이 생긴 것은 1957년, 이때 병장의 월급은 60환이었고 대장의 월급은 900환이었다. 대장이 병장에 비해 15배 많은 월급을 받았던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4.19 혁명 이후 장면 정부가 집권했던 시기까지 똑같이 이어진다.

그러다 5.16 쿠데타가 발발하고 1963년 박정희 정권이 집권하게 된다. 아무래도 군사 정권이 들어섰으니 군인의 처우가 좋아지지 않았을까 하는 추론도 가능하겠으나 현실은 달랐다. 이때 병장의 월급은 2000원, 대장의 월급은 9만 6200원이었다. 차이가 48배로 현격히 벌어진 것이다. 유신이 시작된 1972년에는 격차가 한층 더 크게 벌어진다. 10년 사이 대장의 월급은 15만 2000원으로 오른 반면, 병장의 월급은 1030원으로 오히려 삭감되었다. 이때의 차이는 무려 148배에 달한다. 박정희 정권 마지막 해인 1979년까지 격차는 167배로 늘어난다.

이후로도 김대중 정권이 끝날 때까지 대장과 병장 간 월급 격차는 100배가 넘었다. 전두환 정권 마지막 해인 1988년 기준 대장 월급은 93만 원, 병장 월급은 7500원으로 124배 차이를 보였고, 노태우 정권 마지막 해인 1993년에는 124배, 김영삼 정권 마지막 해인 1998년에는 169배, 김대중 정권 마지막 해인 2003년에는 171배의 차이를 보였다. 이 당시 대장의 월급은 395만 원, 병장의 월급은 2만 3100원이었다.
 
 역대 대장과 병장 월급 차이는 얼마나 될까?
ⓒ 고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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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차는 참여정부가 출범한 뒤로 확연하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참여정부 마지막 해인 2008년 기준 대장의 월급은 594만 6800원, 병장의 월급은 9만 7500원으로 61배의 차이를 보인다. 참여정부 집권 5년간 병사의 월급 인상률은 300%가 넘었다. 그래도 10만 원이 채 되질 못했다.

병사의 월급이 처음으로 10만 원을 넘은 것은 2011년이었다. 이명박 정부는 2008년 출범 이후 2010년까지 병사의 월급을 동결했다가 2011년에서야 인상했다. 이후로 병사 월급은 매년 인상을 거듭해 박근혜 정부 마지막 해에는 21만 6천 원에 이르렀는데 이때 대장과 병사의 월급 격차는 36배까지 줄어들었다.

2017년 대선 당시 문재인 후보는 병사의 월급을 2017년 최저임금의 50%를 목표로 인상하겠다고 공약했다. 문 대통령 취임 이후 이러한 약속은 현실이 되어 가고 있다. 국방부가 발표한 '2021~2025 국방중기계획' 상 2022년 기준 병장 월급은 67만 6000원으로 딱 2017년 최저임금 월 135만 2230원의 절반이다.

2020년 현재 병장과 대장 간 월급 차이는 16배다. 1970년대에는 160배 정도였음을 고려할 때, 두 계급 간 월급 차이로 병사의 군 복무에 군이 어느 정도의 가치를 매겨왔는지 가늠한다면 그 가치는 10배가 오른 셈이다. 월급의 많고 적음이 하는 일의 가치를 오롯이 담아내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돈을 주는 이가 받는 이의 일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보여주는 지표는 될 수 있다. 대한민국이 국방의 의무에 매겨온 가치는 불과 10년 전만 해도 10만 원이 채 되질 않았다. 병사들은 소모품 수준에 불과했던 것이다.

군 복무의 가치

그러나 우리 사회는 아직도 국방의 의무에 매길 가치의 적정선을 찾지 못하고 있다. 병사 월급은 늘 논란의 대상이다. 인상 때마다 '포퓰리즘'으로 국방비에 과도한 부담을 지운다는 비판이 대두된다. 반면 병사 월급이 여전히 턱없이 부족하다는 주장도 많다. 정치권의 주장도 각양각색이다. 점진적으로 인상하자는 주장, 100만 원을 기준점으로 삼자는 주장, 최저임금에 맞추자는 주장, 최저임금의 50%를 목표로 하자는 주장, 하사 임금을 기준으로 그보다 낮게 책정하자는 주장 등 말하는 사람마다 기준이 다 다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병사 월급 인상률은 정권의 의지에 따라 널뛰기를 뛴다. 대통령 임기 중 인상률이 문민정부 17.7%, 국민의정부 73.7%, 참여정부 322.1%, 이명박 정부 32.9%, 박근혜 정부 66.7%, 문재인 정부 150.4%로 천차만별이다. 원래 급여액이 턱없이 적은 탓에 차이의 폭도 컸을 수 있겠으나, 기본적으로 기준선이란 것이 없다. 공무원 봉급 인상률이 정권과 관계없이 일정한 등폭을 유지하고 있음을 고려하면 이는 이상한 일이다.

공무원의 보수는 '공무원보수규정'에 따라 인사혁신처장이 실시하는 보수자료 조사에 근거하여 책정된다. 인사혁신처장은 보수자료 조사 시 민간의 임금 수준, 표준 생계비 및 물가의 변동 등을 근거로 공무원의 보수를 책정한다. 군인 간부의 월급 역시 '군인보수법'에 따라 공무원보수규정에 위임하여 책정된다. 병사의 월급은 '공무원보수규정' 상 '군인의 봉급표' 말미에 쓰여있다.

그렇기에 병사의 월급 역시 공무원의 보수를 책정하듯 관련한 기준을 법령에 마련하고 인상률 역시 해마다 이에 근거하여 정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에 앞서 정부와 정치권이 사회적 토론을 통해 병사 급여의 적정한 기준점을 정하는 과정도 필요하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병사 월급 인상에는 늘 포퓰리즘 딱지가 붙을 수밖에 없다. 병사의 월급은 우리 사회가 국방의 의무에 매기는 가치의 단면이다. 계속 주먹구구식으로 정부 정책에 따라 널뛰기를 하게 둘 수는 없다.

2020년 병사 월급은 2019년에 비해 33.3%가 인상되었다. 병사 월급에 소요되는 예산은 2조 964억으로 2019년 대비 4946억이 늘었다. 간부의 월급에 소요되는 예산은 10조가량으로 2019년 대비 1457억이 늘었다. 2020년 국방비는 2019년 46조 7000원에서 3조 5000억 원(7.4%)이 늘어난 50조 2천억이었다.

지금껏 대한민국이 해마다 증가하는 국방비 중 의무복무 중인 병사 40만 명의 월급 인상을 위해 5000억 원의 예산을 추가로 편성할 여력이 없는 나라는 아니었을 것이다. 곳간이 풍족해져서 월급이 오른 것이 아니고, 우리 사회가 국방의 의무를 대하는 눈높이만큼 월급도 따라 올랐을 뿐이다.

공교롭게도 월급이 많이 오른 10년간 군인의 인권 수준도 눈에 띄게 높아졌다. 이제 병사 월급 인상에서 포퓰리즘 딱지를 떼줄 때가 되었다. 언제까지 국방비를 정할 때 병사들 월급 올리는 일과 무기 구매가 하나의 저울에 달려 비교되어야 하는가. 월급 책정과 인상의 제도화를 고민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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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서 탄소중립 선언한 文대통령...그린피스 "적극 환영한다"

 

선언은 '환영', 구체적 내용은?...그린피스 "탈석탄 2030년 전 마무리 필요"

하지만 구체적 목표치 설정이 부족해 정부 의지는 더 지켜봐야 한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날 문 대통령은 국회에서 "국제 사회와 함께 기후변화에 적극 대응해 2050년 탄소중립을 목표로 나가겠다"고 말했다. 탄소중립이란 배출하는 온실가스량과 제거하는 온실가스량을 동일하게 맞춰 순배출량을 '0'으로 만드는 것이다. 여러 사회단체에서는 이를 '넷제로'로 부르기도 한다.

 

문 대통령은 보다 구체적으로 노후 건축물과 공공임대주택의 친환경 시설 교체, 전기차와 수소차 보급 및 기반 인프라 투자 확대, 지역 재생에너지 사업 지원 확대 등의 방안을 제시했다. 도시 공간·생활 기반시설의 녹색전환에 2조4000억 원, 전기·수소차 보급과 충전 인프라에 4조3000억 원을 투자한다는 게 골자다.


 

이에 따라 한국은 올해 말로 예정된 2030년 국가감축기여(NDC)와 2050년 저탄소발전전략(LEDS)의 유엔(UN) 제출에 탄소중립 목표안을 반영할 것으로 보인다.


 

정부가 지난 7월 그린뉴딜 정책을 발표했으나, 탄소중립 선언은 당시 담기지 않았다. 녹색에너지로 전환한다는 구호와 달리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이는 핵심인 석탄 발전 구조조정안이 담기지 않아 '무늬만 녹색' '이명박 정부의 녹색성장과 다를 바 없는 구호'라는 비판이 크게 일어난 배경이다.


 

한국에 앞서 중국과 일본을 포함한 세계 70여개국이 탄소중립 목표를 선언한 바 있다. 독일을 포함한 유럽 여러나라 등은 탄소중립 목표 실현을 위한 구체적인 감축 계획서까지 유엔에 제출한 상태다. 이를 고려하면 한국의 탄소중립 선언 시기는 매우 늦은 편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 정부의 의지 부족을 우려한 듯, 환경단체뿐만 아니라 그간 국내외에서도 한국 정부의 탄소중립 선언이 시급하다는 요구가 이어진 배경이다.


 

이와 관련해 지난 27일 국회 기후위기그린뉴딜연구회와 더불어민주당 미래전환K뉴딜위원회 그린뉴딜분과는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정부에 탄소중립 선언을 촉구한 바 있다. 앞서 국회는 지난 달 기후위기 비상대응 촉구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들은 "국제에너지기구 분석에 따르면 현재 가장 많이 투자되는 에너지는 전체 에너지 투자의 66%인 재생에너지인 반면, (한국 정부가 여전히 크게 의존하는) 석탄 화력은 12%, 원자력은 8%에 불과하다"며 "녹색산업 경쟁력이 곧 국가경쟁력이 되는 시대"라고 전환 의지를 촉구했다.


 

이어 "일본 정부가 어제(26일) 2050 탄소배출 제로를 선언했고 지난 9월에는 온실가스 배출 세계 1위인 중국도 2060 탄소 중립을 선언했다"며 "한국 정부도 화답할 차례"라고 강조했다.


 

따라서 이번 문 대통령의 국회 연설은 이 같은 요구에 대한 응답으로 해석 가능하다.


 

환경단체들은 문 대통령의 탄소중립 선언 후 일제히 논평을 냈다. 일단 환영의 뜻을 보였으나 더 구체적인 의지를 정부가 정책으로 보여야 한다고 환경단체들은 촉구했다.


 

그린피스는 "문 대통령의 선언을 적극 환영한다"면서도 탄소중립 실현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발표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그린피스는 성명문에서 "현재 정부 계획에 따르면 (2050 탄소중립 선언과 반대로) 석탄발전이 2050년 이후까지 지속되고, 내연기관차 퇴출 시점 논의 역시 부족하다"며 "빠른 시일 내에 2050 탄소중립을 위해 발전부문을 중심으로 한 에너지 전환과 수송, 건물 등 다양한 분야의 로드맵이 설계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2030년 이전에는 탈석탄과 탈내연기관을 완료할 계획이 제시돼야 2050년 탄소중립 달성이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2050년에 한국이 온실가스 넷제로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그 이전에 빠른 속도로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여야 하는데, 이를 위한 구체적인 시간 계획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기후솔루션도 이날 문 대통령의 발표를 일견 환영하면서도 해결해야 할 과제가 산적했다고 강조했다.

 

김주진 기후솔루션 대표는 이번 문 대통령의 선언을 두고 "(이미) 파리협정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달성해야만 하는 목표"였으며 "그간 과학자들과 시민사회가 줄기차게 요구한 것"에 대한 응답으로 해석했다.

 

김 대표는 구체적으로 "현재 매우 느슨하게 설정된 2030년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대폭 강화하는 게 필수"라며 "신규 석탄발전소 건설을 즉시 중단하고, 기존 석탄발전소도 급속히 줄여나가며, 국내외 석탄사업 금융지원도 즉각 중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재 한국 정부가 밝힌 2030년 온실가스 배출량 목표는 5억3600만 톤이다. 기후 분석 전문기관인 클라이밋 애널리틱스(Climate Analytics)는 한국의 목표가 '매우 불충분'한 수준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지난 4일 양이원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정부의 이 같은 감축 목표안을 두고 "그린뉴딜 정책의 진정성이 의심받을 것"이라며 "구체적인 실행계획을 만들어 감축 의지를 국제사회에 약속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28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2050 탄소중립 목표를 선언했다. ⓒ연합뉴스


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0102811535505750#0DKU 프레시안(http://www.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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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총수일가 상속세 마련 위한 ‘배당 잔치’ 벌어질까?

배당 산정에 총수일가 사적 이해관계 개입 시 부작용 우려…산정 근거 투명성 제고 주문도

조한무 기자 chm@vop.co.kr
발행 2020-10-28 18:54:41
수정 2020-10-28 18:5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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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6월 1일 서울 중구 신라호텔에서 열린 호암상 축하 만찬에 홍라희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과 이서현 제일모직 사장과 ,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이재용(왼쪽부터) 삼성전자 부회장이 참석하고 있다.
2015년 6월 1일 서울 중구 신라호텔에서 열린 호암상 축하 만찬에 홍라희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과 이서현 제일모직 사장과 ,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이재용(왼쪽부터) 삼성전자 부회장이 참석하고 있다.ⓒ뉴시스  
 
삼성 총수일가 상속세 마련 방안으로 주요 계열사 배당 확대가 대두된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이 지분을 보유한 계열사 배당을 늘려 상속세에 보탤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경영 차원에서 결정해야 할 배당 산정에 총수일가 개인의 이해관계가 개입하면, 합리적인 판단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경고한다.

28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 등에 따르면,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보유한 주식 평가액은 총 18조2천억원 수준이며 상속세 규모는 10조원 정도로 추산된다. 연부연납제도를 활용하면, 상속세를 신고할 때 6분의 1을 내고 나머지는 5년간 분할 납부할 수 있다. 연간 납부액은 약 1조 8천억원이다.

증권가에서는 총수일가가 지분을 보유한 계열사 배당을 더 늘려 상속세를 충당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향후 배당 확대가 집중될 것으로 전망되는 계열사는 삼성전자와 삼성물산이다. 이 부회장은 삼성물산 지분 17.3%를 보유한 최대주주다. 삼성전자 지분은 0.7%에 불과하지만, 삼성전자 배당이 늘면 이 부회장도 간접적으로 이득을 보게 된다. 삼성물산과 삼성생명이 삼성전자 지분을 추가 매입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삼성물산-삼성생명-삼성전자’로 이어지는 지배력을 강화할 수 있다.

유종우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이 부회장 등 총수일가가) 상속세를 마련할 방법은 보유 지분의 배당금과 개인 파이낸싱일 가능성이 있다”며 “향후 계열사 주주환원 정책 확대로 배당 소득이 더 늘어날 수 있다”고 내다봤다. 김동양 NH투자증권 연구원도 “지배주주 일가가 상속세 납부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삼성전자 배당 정책을 강화하고 삼성물산과 삼성전자에 지분을 집중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배당은 경영 일환…총수일가 사적 이해관계 개입 말아야

총수일가 상속세 마련 방안으로 배당 확대를 활용하는 데 대한 우려도 제기된다. 총수일가의 사적 이해관계가 개입하면, 합리적으로 결정돼야 할 배당 산정이 왜곡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배당은 기업 순이익 가운데 처분되지 않은 부분, 즉 미처분이익잉여금으로 지급한다. 미처분이익잉여금은 투자 재원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배당이 확대되면 상대적으로 재투자 여력이 줄어든다.

배당과 재투자는 기업과 모든 주주의 이익을 극대화한다는 주식회사의 목적에 걸맞은 방향으로 결정돼야 한다. 재벌 기업은 배당을 확대하면서 ‘주주친화정책’이라는 명목을 내세우지만, 배당 만이 능사는 아니다. 주주의 이익 증대는 ‘배당을 통한 이윤 분배’와 ‘사업 성과를 통한 주가 상승’ 두 축으로 이뤄진다.

경영 환경에 따라 사업 확대와 기술 고도화 등에 대한 투자를 통해 경쟁력 강화에 집중해야 할 상황도 있을 수 있다. ‘투자 확대-경쟁력 강화-매출 증대-재투자’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에서 주가가 상승해 주주 이익이 늘어난다. 배당은 상대적으로 단기적인 이익 실현 수단일 뿐, 주주친화 측면에서 항상 투자를 앞선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는 얘기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주주 입장에서는 배당과 주가 상향에 따른 이익의 합이 최대가 되는 방향으로 경영 정책이 집행돼야 한다”며 “배당과 투자에 대한 합리적인 판단이 이뤄져야 기업과 주주의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배당 수준은 경영 차원에서 결정해야 한다”며 “상속세 마련이라는 총수일가 개인의 필요에 따라 배당을 산정하면 기업 경영에 왜곡을 초래할 수 있어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이창민 경제개혁연대 부소장(한양대 교수)은 “배당도 주가 부양 목적을 갖고, 투자를 통한 실적도 배당 확대 여력으로 작용해 배당과 투자는 상호 연결성을 갖는다”며 “배당은 절대다수 주주의 이익에 맞게 결정해야지 총수일가 사익 추구 수단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장 유족들이  28일 오전 서울. 삼성서울병원 암병원 강당에서 열리는 영결식을 마친뒤 나서고 있다.  2020.10.28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장 유족들이 28일 오전 서울. 삼성서울병원 암병원 강당에서 열리는 영결식을 마친뒤 나서고 있다. 2020.10.28ⓒ김철수 기자

삼성 총수일가 연간 배당 이득 7천억원 규모…배당 산정 근거 투명하게 공개해야

삼성 총수일가는 이미 매년 수천억원의 배당을 챙겨왔다. 이 회장, 홍라희 여사, 이 부회장,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이 2014년부터 지난해까지 삼성 내 상장 계열사로부터 받은 배당금은 총 3조원 수준에 달했다. 지난해 배당 소득만 7천억원대에 이르는데, 2014년 2천억원 수준에서 3배 이상 증가했다.

배당 확대는 주로 이 씨 부자 지분이 높은 핵심 계열사 삼성전자와 삼성물산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이 회장의 삼성전자 지분은 4.18%, 이 부회장의 삼성물산 지분은 17.3%다. 삼성전자의 2014년 중간배당과 결산배당은 1주당 각각 500원, 1만9,500원이었는데, 2017년에는 각각 2만1천원으로 크게 뛰었다. 삼성물산 경우 2015년 500원이던 배당금이 2017년 발표한 배당 정책에 따라 3년간 2천원으로 지급됐다.

배당 분석 지표로는 배당성향이 있는데, 순이익에서 배당으로 사용된 총금액의 비율을 이른다. 배당성향이 높으면 벌어들인 순이익 대비 배당 규모가 크다는 의미다. 삼성전자는 2015년 순이익 18조7천억원을 거둬 이 중 배당으로 3조원을 써 배당성향이 16.4%였다. 2019년 배당성향은 44.7%로 급등했다. 순이익은 21조5천억으로 3조원 정도 늘었는데, 배당총액은 9조6천억원으로 6조원 이상 불면서 배당성향이 치솟았다. 같은 기간 삼성물산 배당성향은 3.1%에서 31.4%로 올랐다.

삼성전자의 최근 5년간 배당 규모
삼성전자의 최근 5년간 배당 규모ⓒ삼성전자

삼성전자와 삼성물산 배당성향은 한국 주식 시장에서 높은 편이다. 국회 예산정책처에 따르면, 2008~2018년 한국 상장사 배당성향은 평균 24.8%다. 삼성전자 배당성향은 국내 평균치의 2배에 육박한다. 삼성물산도 평균치를 크게 웃돈다.

그러나 삼성전자와 삼성물산 배당성향을 마냥 높다고 평가하기는 무리가 있다. LG전자의 지난해 배당성향은 434.4%였다. KT는 62.5%를 기록했다. 주요 7개국(G7) 기업 배당성향 평균은 41.9%로 삼성전자와 비슷한 수준이다.

전문가들은 적정 배당 수준에 대한 절대적인 기준은 없다고 설명한다. 가령 애플 배당성향은 20%대인데, 단순히 삼성전자보다 낮다는 이유로 배당 정책이 주주친화적이지 않다고 평가할 수 없다는 얘기다. 반대로 삼성전자가 애플보다 주주친화적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사업 기회와 투자 수요 등을 고려하면 평가가 분분할 수 있다.

배당은 기업의 이윤을 주주에게 분배하는 수단이며, 주주의 정당한 권리이기도 하다. 주주가 기업 순이익이 증가에 따른 배당 확대를 요구하는 것 또한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문제는 배당이 합리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산정됐는지 여부다. 주주가 배당 정책을 보다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도록, 기업이 중장기적인 배당 계획과 근거를 주주에게 제시해 투명하고 합리적으로 배당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는 주문이 나온다. 배당은 이사회가 산정해 주주총회 안건으로 올리면 주주 의결을 거쳐 확정하는데, 대부분의 기업은 이사회가 어떤 근거로 배당을 산정하는지는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있다.

이상훈 참여연대 경제금융센터 실행위원(변호사)은 “그간 대기업 배당이 총수일가 개인의 이해관계로 움직이는 사례가 더러 있었다”며 “기업이 사업 전망과 연계한 중장기적인 배당 계획을 세우고 주주에게 설명하면 배당 산정 타당성과 투명성을 제고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전자는 지난 2019년 3월 20일 서울 서초 사옥에서 정기 주총을 열고 ▲재무제표 승인 ▲이사선임 ▲이사 보수한도 승인 등 안건을 처리했다.
삼성전자는 지난 2019년 3월 20일 서울 서초 사옥에서 정기 주총을 열고 ▲재무제표 승인 ▲이사선임 ▲이사 보수한도 승인 등 안건을 처리했다.ⓒ삼성전자  

조한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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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은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창간 20주년 좌담회] 스무 살 통일뉴스가 20대에 묻다

  • 기자명 이광길 기자 
  •  
  •  입력 2020.10.29 07:53
  •  
  •  수정 2020.10.29 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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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 오후 '스무 살 통일뉴스가 20대에 묻다' 좌담회가 열렸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27일 오후 '스무 살 통일뉴스가 20대에 묻다' 좌담회가 열렸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2000년 6월 평양에서 만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역사적인 ‘6.15공동선언’을 채택했다. 남북관계 해빙 기류를 타고 그해 10월 31일 인터넷신문 [통일뉴스]가 첫발을 떼었다. 민족화해의 소식을 전한지 20년, 스무 살이 된 [통일뉴스]가 20대 청년 4명과 좌담회를 열었다.

화두는 ‘6.15공동선언’에서 가져왔다. 이 선언 1항은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하였다”고 밝혔다. 핵심어인 ‘북한’, ‘통일’, ‘민족’에 대한 20대의 생각을 들어봤다. 

이정도(고려대 대학원 한국사학과 1995년생), 김송현(중앙대 공공인재학부 1999년생), 이진희(서울지역 대학생 겨레하나 1997년생), 구현우(서울지역 대학생 겨레하나 1999년생) 씨가 참석했다.

좌담회는 27일 오후 3시 10분부터 70분간 서울 마포구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 회의실에서 열렸다. 

 

□ 북한 얘기부터 하자. 9월 서해상에서 ‘어업지도원 피살사건’, 10월 ‘노동당 창건 75돌 열병식’도 있었는데 북한 뉴스 접하면 어떤 느낌이 드나? 

1995년생 이정도 씨. [사진-이승현 기자]
1995년생 이정도 씨. [사진-이승현 기자]

이정도 : 저는 남북 분단은 냉전과 관련이 깊다고 생각한다. 소련의 붕괴로 세계는 냉전에서 벗어났지만 한반도에서는 냉전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북한이 존속되면서 탈냉전 시기에 이르러서도 한반도, 동아시아, 전 세계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냉전은 끝났지만 남한과 북한 내부에서 냉전 때와 마찬가지로 정치적 경제적으로 북한에서는 남한이, 남한에서는 북한이 분단체제를 이용해서 자신들의 목소리에 힘을 불어넣는 행태가 유지되고 있다. 북한이라는 존재가 당장 다가갈 수 없고, 남한 내부에서 전문가들이 말하는 것도 각자 다르고 그들이 말하는 논거나 이유도 부정확하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북한이라는 존재에 대한 진실은 잘 알 수 없다. 어업지도원 피살사건이나 열병식도 남한 내에서 각각의 주체들이 그것을 어떻게 이용할지에 따라서 다르게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저는 남한이 이렇다 북한이 이렇다 북한의 의도가 이렇다고 하기보단 남북 간 상호작용에 따라서 다르게 해석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북한 관련 좋은 뉴스도 있고 나쁜 뉴스도 있는데, 특히 젊은 층에서 ‘같은 민족’이라는 개념이 옅어지고 있는 건 확실하다고 생각한다. 젊은 세대들이 전쟁도 냉전도 경험하지 못했고 이산가족 등과 같은 민족의 한에 대해 공감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든 같은 민족이라는 공감이 더 발휘된다면 조금 다르지 않을까. 북한의 도발을 부각시키는 기사가 아무리 많고 아무리 세대가 지나더라도.  


김송현 : 북한하면 양면적 측면이 떠오른다. 부정적 측면이라면, 많은 사람들의 인권을 침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가고 싶은 곳에 갈 수 없게 이동의 자유를 침해한다던가, 10년 넘게 걸리는 군대 생활을 의무적으로 해야 한다던가. 사람이 마땅히 누려야 하는 권리를 누리지 못하게 하는 측면은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반면, 북한의 문화나 생활모습에는 긍정적 측면도 많이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북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탈북민 친구들 많이 만나면서부터다. 제가 겪은 문화들이 진짜 북한의 문화인지 알 수 없지만 간접적으로 탈북민들 통해서 경험한 북한의 문화는 되게 소박하고 친환경적이고 우리가 도시화·자본주의화 되면서 옅어지고 있는 공동체 의식이나 순우리말을 많이 사용한다든가 우리 민족의 고유성을 많이 보존하고 있다는 측면에서는 긍정적으로 봐야 할 점이 많다고 생각한다. 


이진희 : 북한 하면 옛날에는 대학 들어오기 전에는 ‘대화가 통하지 않는 국가’, (말보다) 무력 행동으로 나와서 폭력적이라는 생각이 컸다. 그런데 대학 들어와 대학생겨레하나 동아리 활동하면서 북에 대해 알게 되고, 2018년 판문점선언 때 김정은 국무위원장 발언 보고 북에 대한 이미지가 바뀌었다. 정말 대화 안하려고 한 것은 우리였구나, 북은 오히려 대화를 끊임없이 요구하고 있었구나 생각 들었고. 기존 북의 이미지는 딱딱하고 어렵고 그랬는데 화면에서 봤던 김정은 위원장 이미지는 유머 있고 재밌고 내가 생각했던 그런 이미지가 아니었구나 하고 깬 게 판문점선언이었다.  

2018년 (판문점선언)전까지는 북 문제는 통일 동아리 하는 우리한테나 관심 가는 문제였다고 생각했다. 저희 동아리 회원도 7~8명, 별로 없었다. 판문점선언 직후 제가 ‘대학생 남북교류 준비단’ 일을 했다. 1주일도 안됐는데 대학생 300명이 모였다. 평소에는 그렇게 안모였는데. 대학생들이 아직도 남북 교류, 평화통일에 관심이 많구나 실감했다. 정세가 그래서 별로 표현하지 않았구나 싶었다.   


구현우 : 대학 들어올 때부터 통일문제에 관심 갖고 있어서 작년부터 겨레하나에서 활동하고 있다. 북한은 평화를 위해서는 같이 품어나가야 할 존재이지만, 개인적으로 사회적 이슈 보고 있을 때는 북한은 또한 경계해야 할 대상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어업지도원 피살사건, 열병식도. 북한의 행위들이 한반도 평화에 방해되는 측면이 있다.


□ 여러분들은 민화협이나 겨레하나 활동을 하니 북한에 관심이 많은 편이지만, 주변 또래의 북한 인식은 어떠한가?


구현우 : 제 주변 친구들한테는 안 좋은 인식이 많은 것 같다. 북한 뉴스 접하면, 나오는 반응이 ‘돈도 없으면서 미사일만 쏜다’는 식이다.  

이진희 : 요즘 이런 얘기 꺼내면 논쟁거리가 된다. (의견이) 갈리는 얘기는 잘 안 하는데 하게 되면 안 좋은 얘기 나오더라. 부정적인 생각 가진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북을 너무 모르기도 하고 뉴스나 매체도 너무 자극적으로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것 같고. 

1999년생 김송현 씨. [사진-이승현 기자]
1999년생 김송현 씨. [사진-이승현 기자]

김송현 : 제가 통일에 관심 있는 대학생이라고 말하고 다님에도 불구하고 북한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 게다가 기자들이 쓴 북 관련 기사에 대한 신뢰도도 부족하다. 그래서 제가 내린 결론은 부정적이다 긍정적이다를 떠나서 우린 아예 북에 대해서 잘 모르고 무관심하다는 표현이 가장 적합한 것 같다.  


이정도 : 제 주변에서 북한에 긍정적인 친구들은 북한에 대해서라기보다는 통일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더 많다. 북한(자체)보다는 통일에 관심의 초점이 더  맞춰져 있는 것 같다. 북한에 대한 관심, 통일에 대한 관심은 결이 조금 다른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북한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친구들이 대체적으로 많다. 그 이유는 아까 나왔듯이 북한에 대해서 정확히 알 수 없기 때문이라고 본다. 남북관계가 일관적이지 못하다는 점, 남한의 정권이 바뀜에 따라 북한에 대한 정책이 수정되고. 어떤 때는 정부에서 북한에 대한 긍정적 평가가 나오지만 다른 때는 반대적인 평가가 나오고. 시기에 따라 달라지는 북한에 대한 평가는 국민들이나 특히 북한을 많이 경험하지 못한 젊은 청년들이 북한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요소다.  


□ 언론에서 나오는 북한 뉴스가 팩트라고 믿어지나?


이정도 : 아니다. 사회문화분야 말고 북한 정치.군사 기사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신뢰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북한이 존재하는 이상 남한에서는, 남한이 존재하는 이상 북한에서는 충분히 정치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정권의 입장에 따라서 특히 언론인의 성향에 따라 기사의 방향이 달라질 수 있다고 본다. 요즘은 북한 기사를 보면 기사를 보기 전에 누가 작성했는지 신문사나 기자를 먼저 찾아보고 읽는 편이다. 국민들에게 신뢰를 줄 수 있는 방법이 언론 쪽에서도 쉽지 않은 것 같다. 북한에 직접 가서 취재할 수도 없고 북한에서 나오는 보도를 전적으로 신뢰할 수도 없고. (그렇지만) 언론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정보 전달이다. 북한의 정치.군사 분야 기사를 작성할 때는 사실에 초점을 맞춰서 전달해야 하지 않을까. 판단은 국민에게 돌리고. 북한에서 나오는 목소리를 국민에게 가감 없이 전달하되 언론인이 판단은 유보하고 국민들에게 맡기는 편이 좋지 않을까. 정치.군사 분야 이외에는 민족적 감정이나 공감 능력이 조금 더 발휘될 수 있는 기사 있으면 좋을 것 같다.   


김송현 : 제가 처음에는 이분 정도면 북한 관련해 많은 경력 쌓았으니 믿을 수 있겠다 생각해서 그분 기사에 대해서는 비판 없이 사실로 받아들였는데 그분도 사실과 다른 기사 내는 것 보고 나서는 다른 기사들 통해서 팩트인지 아닌지 찾아보는 습관 생겼다. 다른 경로가 많이 없기 때문에 오보가 날 가능성이 있지만 나중에라도 알았을 때 정정해주면 독자들에게 더 신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정부쪽에 부탁하고 싶은 것인데, 실제 북한에서 나오는 뉴스에 대해서 언론뿐만 아니라 국민들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 갖추었다고 생각한다. 국민들도 (북한 뉴스를 직접) 볼 수 있는 경로가 열렸으면 좋겠다. [주-남측 정부는 조선중앙통신과 노동신문을 비롯한 북한 사이트들을 ‘유해 사이트’로 분류해 차단하고 있다.]

1997년생 이진희 씨. [사진-이승현 기자]
1997년생 이진희 씨. [사진-이승현 기자]

이진희 : 근거 없는 보도 좀 안했으면 좋겠다. 누가 죽었네 누가 총살당했네 (했는데) 다음 공식석상에 나오고. 그렇게 보도하고 나서 기자들이 책임 안지고 그냥 내버려두더라. 그런 근거없는 이야기들, 도움 안 되는 기사 안 썼으면 좋겠다. 북의 소식을 차라리 국민들이 곧바로 접할 수 있는 경로가 확대되면 좋겠다. 

구현우 : 예를 들어 열병식 같은 하나의 사안에 대해 엄청 많은 의견들이 나오더라. 볼 때마다 사실도 너무 다르고 기자들의 주관적 의견이 너무 많이 들어가 있다. 북한 관련 기사를 쓸 때 기자들의 주관이 너무 많이 들어가지 않았으면 하고, 최대한 팩트만 전달했으면 좋겠다. 앞에서 얘기했듯 민간에서도 북한 뉴스나 방송들 바로 볼 수 있게 풀어줬으면 좋겠다. 북한 뉴스도 (팩트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걸 판단할 능력을 국민들이 갖고 있다고 보기 때문에 북한 뉴스나 방송을 (국민들이) 직접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 통일은 필요한가? 필요하다면 그 이유는?


이정도 : 아예 무관심한 편을 제외하면, 통일은 해야 한다고 보는 친구들이 제 주변에는 많다. 통일을 해야 하는 당위성, 이유는 생각들이 나뉜다. 민화협 들어올 때 첫줄에 ‘저는 민족주의자입니다’라고 썼다. 지금은 그 단어가 엄청나게 무서운 것임을 알고 그런 말 함부로 안하지만, 그만큼 민족주의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지금도 같은 민족이기 때문에 통일해야 한다고 생각은 하는데, 제 친구들은 ‘같은 민족이기 때문에 통일해야 한다’는 프레임을 조금씩 벗어나고 있다고 생각된다. 다른 나라들을 보더라도 같은 민족인데도 나라가 다른 경우도 존재하고 굳이 합치지 않아도 평화적으로 잘 살고 있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민족이라는 프레임보다는 경제적 편익, 이익, 교류를 통해서 육로가 뚫리면 얻게 되는 경제적 이익 등으로 통일의 당위성 설명하는 친구들이 더 많은 것 같다. 
 

김송현 : 저도 그렇지만, ‘통일보다는 평화’가 청년세대의 중점적인 키워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남북 주민들이 피해를 보거나 지금보다 삶이 더 나아지지 않는 방식의 통일이라면 저는 반대한다. 평화가 오지 않는 상태에서의 통일에는 저는 반대한다. 통일과 평화가 어떤 식으로 결론이 나고 과정을 어떻게 진행해야 할지는 주변 친구들도 다양한 생각을 하는 것 같다. 그래서 통일해야 된다 안해야 된다고 결론을 지어서 의견을 표현하는 친구들은 별로 없다. (어떤 통일인지, 과정까지 포함해서) 다 고민하는 친구들이 더 많은 것 같다.  


이진희 : 우리가 분단된 것은 우리가 원해서 된 것은 아니다. 외세에 의해서 강제로 분단된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통일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우리 힘으로 자주적으로 통일하는 게 중요하고 우리 민족의 자주성 회복을 위해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1999년생 구현우 씨. [사진-이승현 기자]
1999년생 구현우 씨. [사진-이승현 기자]

구현우 : 우리 때문에 분단된 것은 아니니까 같은 민족으로서 통일하는 것은 맞다고 생각한다. 같은 민족이기 때문에 통일을 추진하는 것은 맞지만 서로 원하지 않는 방식을 통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예멘이라든가 다른 나라들 사례 보면 통일했지만 내전이 난 경우도 많더라. 통일을 했지만 불완전한 통일은 원치 않는다. 앞에서 얘기했듯 남북 간에 평화가 먼저 자리 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평화가 먼저 자리 잡아야 서로 오갈 수 있고 서로 신뢰를 쌓을 수 있지 않나. 그런 과정 속에서 통일도 같이 이뤄질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한다.

□ 통일과 민족, 민족주의는 직결된 문제로 여겨져 왔는데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가?


구현우 : 민족주의에 대해 (깊게) 생각해본 적은 없는데 제 생각에는 위험한 것 같다.  

이진희 : 위험한가요?

김송현 : 모든 게 그렇지만 과한 것은 나쁘지만 어느 정도의 민족주의는 우리 고유의 문화나 가치를 보존할 수 있는 좋은 이념이라고 생각한다. 과도한 것은 나쁘지만 적정한 수준의 민족주의는 우리가 추구하는 통일을 실현하는 좋은 매개체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정도 : 민족주의는 견지는 해야 하지만 조심도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과도한 민족주의는 우리뿐 아니라 주변국가에게도 폐해가 있다. 근본적으로 평화를 해치는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대신, 민족주의 + 평화주의나 공동체주의라든가 결합하면 좋지 않을까. 우리의 생존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공동체의 생존을 같이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 20대에게 정말로 통일은 절박한가?


구현우 : 통일은 필요하다고 생각은 한다. 넓게 봐서는 통일로 이어지는 과정이 결국 동북아시아와 전세계 평화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현재 미국과 중국 보면 신냉전 조짐이 있는데. 또한 분단으로 인해서 저희 삶에 많은 제약이 있는데 통일이 된다면 그런 것들을 벗어나서 러시아 등 대륙으로 진출하고 우리 삶이 많이 달라질 수 있다고 본다.     


이진희 : 분단으로 인해서 받고 있는 제약을 생각하면 꼭 통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재일동포들 만난 적 있다. 저희 동아리에서 시모노세키에 있는 강제동원역사관에 갔는데 그분들은 자기의 뿌리에 대해서 엄청 생각하시더라. 처음 만났는데 ‘조국통일 만세!’ 외치며 오시더라. 엄청 신선한 충격 받았다. 그분들 얘기 들어보니 자기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서, 일본 땅에서 그걸 지키기 위해서 엄청 고민하고 있더라. 그런 분들을 보면서 진짜 평화통일에 대해서 절박하게 생각하고 있더라. (그분들에게는) 삶의 문제이구나. (서울에서는 덜 절박한데) 왜 그럴까요?


구현우 : 솔직히 분단체제에서도 먹고 살아가는 데 큰 문제 없으니까. 현실에 안주하면서 살아가는 편안함에 젖어있을 때가 많다는 생각이 스스로도 든다. 청년들도 그런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경제가 어렵기도 하고. 통일보다는 요즘 청년들은 경제 문제에 관심 많은 것 같다. 


김송현 : 저도 통일이 왜 필요한가 많이 생각해봤다. 분단체제에서도 잘 살아가고 있는데 우리는 왜 통일을 해야 하나 의문점을 많이 해결한 게 북에서 오신 분들 만나면서다. 북한이탈주민들을 제2의 이산가족이라고 생각한다. 1세대 이산가족들과 마찬가지로 북한이탈주민들이 보고 싶을 때 가족들을 못 보는 것에 대해서 감정적으로 많이 공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일은 한 국가로 만들어나가는 것인데 왜 필요한가라고 생각했을 때 영국 브렉시트(Brexit) 많이 떠올랐다. 유럽연합(EU) 형성해서 잘 살았지만 다른 국가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이 체제에서 떠나갈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자유로운 왕래나 한 국가 안에서 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제약이 늘어나게 된다. 한 국가 테두리 안에서 있을 때와 많이 차이가 난다. 그런 점을 재외동포나 탈북민들 이야기 통해서 한 국가의 테두리가 얼마나 중요한지에 공감했다. 그래서 지금은 통일에 대해서 찬성하고 있다.
 

이정도 : 통일 얘기 할 수 있는 분들 많이 만나 얘기하는 편인데 요즘은 통일이 필요할까 하는 의문이 커지고 있다. 이산가족이나 탈북민 보면 통일의 필요성 있어 보이지만, 그러면 통일의 대상이 문제가 된다. 통일을 원하는 세력도 있으나 반대하는 세력도 있다. 남한에서의 통일의 주체는 누구이고 북한에서 통일의 주체는 누구일까. 저는 통일은 해야 한다고 생각은 하는데, 사회 분위기 보면 ‘같은 민족이기 때문에 통일해야 할까’ 하는 질문에 대해서 바로 긍정적으로 대답할 수는 없는 것 같다.   


□ 통일 과정에서 해보고 싶은 일이 있는가?    


이정도 : 저는 진정한 남북 간의 교류협력 시대가 왔을 때 통일시대에 걸맞는 역사학을 하고 싶다. 현재 남북이 가르치는 역사와는 조금 다른 역사가 필요할텐데 나는 어떻게 준비할까 이런 고민하면서 공부하고 있다. 
 

김송현 : 실제 북한 사람 만나는 남북교류가 활성화됐으면 좋겠다. 그 중심에 청년이 있었으면 좋겠다 생각한다. 앞으로 통일 미래를 살아갈 주역은 청년들인데 그 세대들이 계속 무관심하게 통일문제를 대하는 것에 대해서 저는 아쉽게 생각한다. 무관심을 넘어서 긍정이든 부정이든 심도 있게 고민하는 과정이 청년세대에 필요하고 그러려면 실제 북에 대해 아는 게 필요하고 그래서 더 많은 북과의 교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진희 : 저는 미대생이라 미술교류전 하고 싶다. 그리고 제가 통일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현실적인 실천들이라고 생각한다. 통일을 가로막는 미국, 분단에 기생하는 사람들에 맞서 목소리를 내고 싸우는 게 제가 잘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요즘에도 통일운동하는) 대학생들이 있고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구현우 : 저도 민간교류 통해서 북한 사람들 직접 만나고 싶다. 특히 청년들과 만나고 싶다. 이곳에서 활동하고는 있으나 실제로 만나지 못하니 아는 게 별로 없다. 하고 싶은 것은 북한에 대한 오해라든가 객관적인 사실을 정립하고 싶다. 학교에서도 북한, 통일에 대해 배운다. 그런데 학교에서 배우는 북한 얘기와 겨레하나 동아리에서 듣는 얘기랑 너무 다르다. 언론에서도 북한에 대해 너무 안 좋게 얘기하고 오보 내보내는 경우도 엄청 많고. 아직까지도 우리 사회에서는 북한에 대한 오해와 불신들이 너무 많아서 북한에 대해 모르고 있는 것 같다. 그런 것들이 체계적으로 정립되어야만 우리 사회에서 통일과 북한에 대해 편하게 얘기할 수 있는 자리가 많이 만들어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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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세균실험실 폐쇄하라” 온라인 남구주민대회 성황리 열려

  • 기자명 홍기호 현장기자
  •  
  •  승인 2020.10.27 21:20
  •  
  •  댓글 0
 
 

300여명의 남구 주민들 화상으로 만나 주민투표 성사 결심

지난 24일, 부산항 미군 세균실험실 추방을 위한 ‘온라인 남구주민대회’가 8부두 미군세균실험실 앞을 비롯한 50여개의 거점에서 남구주민 30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성황리에 개최됐다.

부산8부두 미군세균전부대 추방 남구대책위(이하 대책위)의 주최로 열린 이번 행사는 코로나 상황을 감안하여 8부두에 중계석을 운영하고 5~6명의 주민들이 각자의 생활거점에서 화상회의 방식으로 참여했다.

여성, 노동자, 자영업자, 종교인 등 남구에 거주하는 각계각층의 분들이 참여했으며 연령 또한 10대 청소년부터 80대 어르신까지 다양했다.

8부두 온라인 중계석을 통해 개회사를 비롯한 각계각층의 주민 참가자 인터뷰, 주민투표 성사를 위한 주민회의, 남구 주민 주권 선언 발표가 순서대로 진행됐다.

동네슈퍼, 중국집, 미용실, 계란가게, 카페, 식당, 도서관, 마을 평상, 공동체센터, 반찬가게 등 마을 공간에서 화상으로 참가한 주민들의 적극적 의견들이 온라인을 통해 모아졌다.

주민투표 성사를 위해 “한사람이 열 명의 주민들의 요구서명을 받자.”, “시장에 오는 단골 손님에게 서명을 받겠다.”, “아파트 현관 입구에 주민투표 홍보물을 붙이겠다.”, “차량에 홍보 스티커를 붙이겠다.”, “세균 실험실 주변 거주자들의 건강 상태 역학 조사를 통해 피해 등을 확인하자”라는 의견 등 꼭 주민투표를 성사시키겠다는 주민들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참가자들은 남구주민 미군 세균무기실험실 폐쇄 남구주민 주권선언을 통해 “부산시 주민투표를 우리가 성사시키자”, “생활과 생업 속에서 주민투표 자원봉사 실천을 이어가자.”, “실험실을 패쇄하고 아이들에게 평화로운 이 땅을 물려주자.”라고 선언했다.

참가자들은 온라인 대회 직후부터 미군 세균실험실 폐쇄 주민투표 요구서명 수임인이 되어 마을 곳곳에서 서명운동을 펼칠 예정이다.

부산항 미군세균실험실 패쇄찬반 주민투표 추진위 관계자는 “남구 대책위 온라인 주민대회를 시작으로 구별 추진위 결성 및 결심 행사가 연이어 이어질 예정이다.”라며 “부산시민의 생명과 안전이 걸린 사안인 만큼 부산시민이면 참여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서명운동이 펼쳐질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 향후 시민사회 및 구별 추진위 결성 및 수임인대회 일정 ]

■10월 27일(화) 부산항 미군 세균실험실 폐쇄 찬반 주민투표 부산진구 추진위원회 결성식(오후 6시, 부산진장애인자립생활센터 교육관

■11월 12일(목) 부산항 8부두 미군 세균실험실 폐쇄 여성 온라인 집회(오후7시 30분, 온라인 대회)

■11월 15일(일) 부산항 미군 세균실험실 폐쇄 대학생 청년 청소년 원탁회의(오후3시, 온라인대회)

■12월 5일(토) 연제구 추진위원회 수임인 대회 (일시장소 미정)
*업데이트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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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에도 쓰레기가 줄었다? 대구 달서구의 '황당한' 기적

[백경록의 지방의회는 지금] 박종길 구의원은 재활용폐기물 수거량·잔재물량을 어떻게 감축했나

20.10.28 08:00l최종 업데이트 20.10.28 08:00l
1991년 지방의회가 부활한 지 곧 30년이 됩니다. 각 시·도·군·구의 주민들을 대표해 지방자치를 실현해가야 할 주체로서 과연 제 역할을 잘하고 있을까요? 백경록 대구의정참여센터 운영위원장과 함께 지방의회의 현재,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짚어봅니다.[편집자말]
우리가 배출한 플라스틱 24일 부산 강서구 부산시자원재활용센터에 각 가정에서 배출된 플라스틱 등 재활용 폐기물 분류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부산에서 배출되는 재활용 폐기물이 모이는 이곳은 코로나19로 배달 음식과 택배가 늘어나면서 지난해보다 20% 이상 처리량이 늘었다.
▲ 우리가 배출한 플라스틱 지난 9월 24일한 자원재활용센터에 각 가정에서 배출된 플라스틱 등 재활용 폐기물 분류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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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의 여파로 재활용쓰레기가 가파르게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환경부에 따르면 올 1~8월 재활용폐기물 발생량은 전년 동기 대비 11.4% 늘었다. 전국 민간 소각시설은 9월 현재 가동률 106%로 허가용량을 초과 운영 중이다.  

비대면 소비 확대로 택배 상자 같은 쓰레기가 늘면서 폐기물 또한 빠르게 증가했다. 이는 통계청 자료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지난 8월 온라인 쇼핑 거래액은 14조 3833억 원으로 전년 대비 3조 1047억 원(27.5%) 증가했다.

그런데, 이 시국에 재활용폐기물 수거량의 수치가 줄어든 지방자치단체가 있다. 바로 대구광역시 달서구다. 인구 57만3천여 명으로, 대구시 안에서 가장 큰 기초지방자치단체이자 평균연령이 가장 젊은 지역중 하나다. 

달서구 월배권의 재활용폐기물 수거량은 1~5월 기준 2019년 6023톤에서 2020년 4839톤으로 1184톤 감소했다. 매달 평균 약 237톤이 줄어든 셈이다. 처리 과정에서 재활용하지 못하고 남은 잔재물도 5개월간 2019년 2949톤에서 1442톤으로 총 1507톤, 매달 평균 약 301톤을 감축한 것으로 확인됐다. 대체 어떻게 이런 기적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대구의정참여센터와 <오마이뉴스>가 공동주최한 2020년 7월 '우리삶을 변화시키는 지방의원과 정책'에서 대상을 받은 박종길 달서구의원(더불어민주당)의 사례를 보면 우리가 놓치는 것들이 보인다.

젊은이 많아서 쓰레기도 많다? 달서구 논리의 허점

지난해 10월 달서구청 용역으로 계명대학교 산학연구소에서 생활폐기물 수집·운반·처리비 원가계산 최종보고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 참석했던 박 의원은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2020년도 재활용폐기물 수집·운반·처리 대행수수료 예산이 2019년도 대비 72% 증액된 것이다. 금액으로 보면 2015년 18억 원이었던 대행수수료 관련 예산이 2020년에는 약 62억 원으로 늘었다. 2015년 대비 무려 250% 수준이다.

자료를 받아봤더니, 원가 산정의 기준이 되는 수거량, 재활용폐기물 선별과정에서 나오는 잔재물량이 지나치게 많이 잡히고 있었다. 특히 잔재물은 소각이나 매립을 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악취나 각종 오염물질이 발생되기 때문에 철저히 선별해 재활용률을 높여야 하지만 그런 노력이 보이지 않았다. 

2019년 말, 박 의원은 달서구청을 상대로 문제제기에 나섰다. 대구시의 다른 구·군은 재활용폐기물이 1인당 30~32kg인데 왜 달서구는 약 44kg냐고 물었다. 달서구 측은 "성서산단과 4개 대학이 있어 젊은 층이 많이 거주한다"며 "타 구보다 유동인구가 많아 인구 1인당 재활용폐기물이 많이 발생해 수거량 또한 많다"고 답했다.

달서구는 재활용폐기물을 성서권역과 월배권역으로 나눠 서로 다른 업체가 처리한다. 계명대학교 등 대학이 밀집한 곳은 성서권이다. 젊은층이 밀집한 지역이 포함돼 있어 구 전체적으로 쓰레기 수거량이 많을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과연 사실일까? '젊은 사람이 많을수록 쓰레기도 많이 나온다'라는 달서구의 논리라면, 성서산단과 4개 대학이 들어선 성서권의 발생량이 그렇지 않은 월배권보다 많아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반대다.

이 내용을 근거로 다시 물었지만, 2020년 2월 12일 이태훈 달서구청장은 "의원님이 자기 선입견으로 자꾸 강요"한다며 박 의원이 잘못 판단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대구 달서구 권역별 재활용가능폐기물 수거량 비교표. 월배권역이 문제가 된 지역이다.
▲  대구 달서구 권역별 재활용가능폐기물 수거량 비교표. 월배권역이 문제가 된 지역이다.
ⓒ 백경록  
 
같은 지역인데 수거량이 왜 이렇게 다를까? 박 의원은 두 권역의 차이를 파고들었다. 알고 보니 성서권은 수거 차량마다 지정된 카드로 자동 계량하고 있는 반면, 월배권은 카드를 이용한 자동계량 시스템이 구축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월배권의 업체가 수거량을 부풀리고 있을 수도 있다는 의심이 드는 지점이었다. 

월배권 수거는 17년 동안이나 동일한 업체가 맡아왔는데, 달서구청은 이 업체의 정확한 수거량을 파악하기 위한 어떠한 행정조치도 하지 않고 있었다. 수거량의 정확성을 담보할 시스템 구축도 부실했고, 심지어 월말에 기초자료가 되는 계근전표마저도 받지 않았다. 업체가 속일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줬다는 게 박 의원의 판단이었다.

이후 박 의원의 문제제기가 나오자 월배권 대행업체는 자동계량화 시스템을 도입하고 계근전표를 제출하기로 했다. 더 이상 예전처럼 숫자를 속일 수 있는 여지가 사라지게 됐다. 그러자 실제 재활용폐기물 발생량은 줄어든 것이 아닌데, 월배권의 수거량과 잔재물량의 수치가 획기적으로 줄어드는 기적과 같은 상황이 일어나고 만 것이다.

배출량이 극적으로 줄어드는 기적은 없었지만

박 의원은 문제 해결을 위해 다른 업체 관리자와 인터뷰하던 중 핵심을 찌르는 말을 들었다. "재활용폐기물 잔재물을 줄이기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사업자의 의지다." 재활용폐기물의 재활용률을 높이고 잔재물량을 감축하려면 업체의 노력 또한 관건이라는 뜻이다. 이 부분은 환경부도 경청해야 될 대목으로 보인다.

박 의원은 달서구의 재활용폐기물 처리 예산을 점검하면서 계약방식에 대한 문제도 제기했다. 현재 달서구는 협상에 의한 방식을 채택하고 있는데, 적격심사를 통한 완전 공개입찰을 도입하면 업체선정 과정의 투명성도 높이고 예산도 절약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동일한 회사와 계약을 반복한 달서구는 낙찰률이 99.9%였고, 적격심사를 통한 완전 공개입찰방식을 선택한 달성군 다사지역은 낙찰률이 87.33%였다. 낙찰률이 낮을수록 비용을 절감한다. 만약 계약방식을 일찍이 바꿨다면 약 7억 원을 아낄 수 있었다고 박 의원은 주장한다.

이밖에도 이태훈 구청장은 2020년 재활용폐기물 수집·운반·처리 대행수수료 예산을 2019년 대비 72% 증액한 또 다른 이유로 인력 증원을 꼽은 바 있다. 수집·운반원이 3.56명, 선별인원이 9.14명 증가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박 의원이 임금대장을 분석해보니 거의 차이가 없었다고 한다. 예산 증액의 허점을 또 한 번 짚어내자, 그제야 구청장은 "세부사항은 제가 아직 미처 파악을 못한 상태"라며 한계를 인정했다. 

안타깝게도 쓰레기 배출량이 극적으로 줄어드는 기적은 없었다. 다만 자동계량화 시스템, 계근전표 제출, 계약방식의 변경 등 기초지자체가 관리·감독만 제대로 한다면, 수거량은 물론 전국에서 한해 폐기물을 처리하는 데 드는 비용 연간 15조 원 중에서 절약해볼 수 있는 요소들이 분명히 생긴다는 점이다.

달서구의회는 문제의 반복을 막기 위해 2020년 8월 대구광역시달서구 폐기물 관리에 관한 조례를 개정하면서 제12조(생활폐기물 수집·운반·처리의 대행 등)에 아래와 같이 2가지 항목을 추가했다.

▲ 임금지급내역, 수거량 집계표 및 계량증명서(계근전표) 등을 포함한 대행업무와 관련된 자료제출 요구에 관한 사항
▲ 대행업체 현장점검에 관한 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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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처럼 일하는 삶, 우린 아직도 ‘전태일’이다

등록 :2020-10-28 04:59수정 :2020-10-28 08:15
 
 
[그 후 50년, 여기 다시 전태일들]
1부. 2020년, 무엇이 달라졌나
①여전한 노동, 고단한 삶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몸 불살랐던 전태일의 외침
하루 16시간 일하다 피를 토하던 여공과
하루 16시간 일하다 쓰러지는 택배 노동자들…
2020년, 우린 얼마나 달라졌을까
서울 청계천에 있는 한 봉제공장의 모습. 화섬식품노조 서울봉제인지회 제공
서울 청계천에 있는 한 봉제공장의 모습. 화섬식품노조 서울봉제인지회 제공
1970년 11월13일, 평화시장 봉제공장 재단사로 일하던 22살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분신했다. 당시 평화시장 노동자들은 “2만여명이 넘는 종업원의 90% 이상이 평균 연령 18세의 여성”이었고, “40%를 차지하는 시다공들은 평균 연령 15세의 어린이들”(전태일이 쓴 탄원서)이었다. 이들은 “하루에 90원 내지 100원의 급료를 받으며 하루 16시간의 작업”을 했다. 전태일은 노동청과 서울시청 근로감독관을 찾아가 이런 부조리를 고발했지만, “한달에 이틀 쉬면서 일주일에 98시간의 고된 작업에 시달리”는 현실은 바뀌지 않았다. 여공들은 “안질과 신경통, 신경성 위장병과 폐결핵”에 시달렸다. 전태일 분신 이후 한국 사회는 조금씩 소외된 노동 현장을 살피고 그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50년, 전태일 외에는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주변부 노동자들의 삶은 달라졌을까. 얼마나 달라졌을까.
 
2007년 7월, 2년 전 국회를 통과한 비정규직 관련 법이 유예 기간을 거쳐 본격 시행됐다. 기간제 노동자 사용 기간을 2년 이내로 규정한 내용이 핵심이었는데, 비정규직의 존재를 법적으로 인정한 셈이 되어 노동계의 큰 반발을 샀다. 그해 44살이었던 김영순(가명)은 한 고등학교에 비정규직 급식 노동자로 취업했다. 아침 7시30분까지 출근해 야간자율학습을 하는 학생들의 저녁밥을 배식하고 설거지까지 끝내면 퇴근 시간은 언제나 밤 10시였다. 2300명의 점심과 저녁 두 끼니씩, 매일 4600인분의 음식을 만들었다. 1년쯤 지나 손목 힘줄에 이상이 생겼다. 병원에 갔더니 두 군데나 염증이 생겼다고 했다. 곧 ‘손목 방아쇠 수지 증후군’ 수술을 받았다. 밥솥을 들고 내리다 그런 게 분명한데, 학교는 산업재해가 아니라고 했다. 근무 기간이 짧다는 이유를 댔다. 수술 뒤 재활은 꿈도 꾸지 못한 상태에서 또 새벽에 출근해 밥을 짓고 배식을 하고 설거지를 했다. 학교 쪽은 안 그러면 “해고할 것”이라고 알려왔다. 1년 단위 계약으로 해마다 재계약을 했기에 학교 쪽의 그런 강짜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김영순만 그런 게 아니었다. 모두 불안정한 신분에 과도한 노동을 하다 보니 약간의 충돌에도 예민해졌고, 고참 언니들의 구박과 서로 간의 헐뜯음이 급식실을 오갔다. 월급은 고작 120만원 정도. 그나마 2012년 생긴 학교 비정규직 노동조합이 꾸준히 싸운 결과, 2017년에 학교 직고용 체제의 무기계약직 신분이 됐다. 불안정한 신분이 조금은 해소됐기 때문일까. 급식실의 구박과 헐뜯음도 현격히 줄었다. 그러니까 그게, 지난 43년 동안 김영순의 신분이 바뀐 유일한 경우다.
1975년 서울 평화시장 봉제공장(왼쪽 사진)과 최근 서울 종로구 창신동 봉제공장(오른쪽 사진)의 모습. 전태일 열사의 분신 이후 50년이 흘렀지만 풍경은 별반 달라지지 않고 노동자들의 주름살만 더 깊어졌다. 봉제공장 노동자들은 여전히 근로계약서조차 쓰지 못한 채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lt;한겨레&gt; 자료사진
1975년 서울 평화시장 봉제공장(왼쪽 사진)과 최근 서울 종로구 창신동 봉제공장(오른쪽 사진)의 모습. 전태일 열사의 분신 이후 50년이 흘렀지만 풍경은 별반 달라지지 않고 노동자들의 주름살만 더 깊어졌다. 봉제공장 노동자들은 여전히 근로계약서조차 쓰지 못한 채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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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살 ‘시다’에서 57살 학교 급식 노동자로
1977년, 14살이던 김영순은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일터에 나갔다. 밥을 굶을 형편까진 아니었는데 “딱히 학교를 더 다니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어머니 친구의 소개로 서울 동부이촌동에 있는 개인 의상실에 취직했다. 김영순이 처음 얻은 직업은 ‘카렌스 의상샵 시다’였다. 부자 동네의 고급스러운 옷집 일은 어렵지 않았다. “선생님이 피팅할 때 핀 잡아주고 심부름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해 겨울, 첫 월급은 3만8천원이었다.의상실에서 모시던 “선생님이 예쁘게 봐주어” 명동에 있는 노라노 의상샵으로 옮겼다. 당대 최고의 의상실이었다. 1명의 선생님 밑에 6명의 ‘시다’가 일하는 구조였는데, 일이 만만치 않았다. 야근이 일쑤였다. 그러던 어느 날 “평화시장에서 일하면 오후 6시에 딱 끝나고 월급도 1만원 더 준다”는 친구의 말에 혹했다. 의상실에서 봉제공장으로 자리를 옮겼고, 그때부터 본격적인 ‘시다’의 삶이 시작됐다.김영순이 평화시장 2층 다락방 봉제공장에 처음 들어선 시기는 전태일이 분신한 지 7년이 지난 뒤였다. 분신 이후 대학생들과 지식인들이 야학을 만들고 공단에 위장 취업해 노동조합을 조직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전태일이 죽음으로 읍소했던 노동 환경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뿌연 먼지로 가득한 공간에 크기를 헤아릴 수 없는 소음이 김영순을 덮쳤다. 다다미 바닥 위 재봉틀은 소란을 멈추지 못했다. ‘이처럼 작은 공간에 이렇게 사람들이 빡빡하게 서서 부딪히지 않고 일할 수도 있구나’라고 떠올렸던 그때 그 생각이 43년이 지난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고 김영순은 말했다. “상처 하나 없는 깨끗한 마네킹에 화려한 옷을 입히던 소녀”는 그렇게 66㎡(20평) 남짓한 공간에 25명이 부대끼며 일하는 봉제공장의 ‘10대 여공’이 됐다.악 소리도 내지 못할 만큼 바빴다. 교복 자율화 바람이 불었고, 사람들은 점차 소비에 눈뜨고 있었다. “팔다리만 제대로 달려 있으면 옷을 집어가던 시절”이었다. 미싱사 ‘오야’ 언니들이 박카스랑 같이 먹으라며 ‘영양제’를 줬다. 몇년이 지나고 나서야 그 영양제가 ‘타이밍’이라고 불리는 각성제라는 걸 알았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던 시절이었지만 현장은 별나라였어요. 근로기준법에 마약류 투입 금지 같은 조항이 있었겠어요? 그땐 다 그렇게 일했죠.” 김영순은 그렇게 몇년 동안 더 ‘타이밍’을 먹고 잠을 뿌리치며 ‘오야’ 언니들이 집어던진 일감을 수습하고, 옷의 라인을 잡고, 재단된 옷을 넘겼다. “참을 만했던 것인지, 참을 수 있었던 것인지, 겨우 참아냈던 것인지…, 이제 기억나지 않아요.”김영순에게도 빛나던 시절의 기억이 있다. “교회에 공부하러 간다”던 친구를 따라 박형규 목사가 있던 제일교회에서 ‘야학’을 했던 때다. 한문과 세계사, 상식을 그때 처음 접했다. ‘시골에서 올라와 자취하던 언니들이 살던 창신동 보문동 방’을 강의실 삼아 노동법 관련 공부를 하면서 “이슬비에 옷 젖는 것처럼” 조금씩 생각도 바뀌었다. 손학규, 송영길, 김문수 같은 이들을 그때 ‘선생님’으로 처음 봤고, 위장 취업한 두살 위 대학생 오빠와 이른바 ‘노학연대’ 커플이 되어 결혼했다. 변두리 노동자들을 ‘학습’시키겠다며 현장에 ‘침투’했던 그때 그 오빠는 이제 사내 등산반 활동을 열심히 하는 “평범한 생활인”이 되어 위장 취업했던 그 회사에서 정년 퇴임을 앞두고 있다.그러나 김영순의 삶에 큰 영향을 준 일들은 노동법을 공부하던 그 시절이나 전태일 분신 이후 50년 동안 일어난 굵직한 노동 관련 사건들이 아니었다. 청계천을 떠나 경력이 단절됐다가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하게 만든 출산이었고, 아이엠에프(IMF) 경제 위기였으며, 43년 사이 폭등한 부동산 가격이었고, 어느덧 훌쩍 자란 아이의 과외비였다. “43년 전에서 지금은 얼마나 멀리 왔을까요? 그때는 공장 위 다락방에서 언니들과 수다를 떠는 게 좋았고, 지금은 그때 어울리던 사람들과 함께 늙어가며 고단함을 견딜 뿐이에요.”
서울 종로구 창신동, 성북구 보문동, 동대문구 신설동 일대에서 일하는 봉제 노동자는 9만여명으로 추정된다. 40~50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시다’로 불리던 이들은 어느덧 ‘사장님’이 됐지만,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해야 겨우 먹고살 수 있고, 노동법 밖에서 보호받지 못하는 현실은 변한 게 없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서울 종로구 창신동, 성북구 보문동, 동대문구 신설동 일대에서 일하는 봉제 노동자는 9만여명으로 추정된다. 40~50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시다’로 불리던 이들은 어느덧 ‘사장님’이 됐지만,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해야 겨우 먹고살 수 있고, 노동법 밖에서 보호받지 못하는 현실은 변한 게 없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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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8시…“아직도 일이 남았다”
61살 이군표(가명)의 삶과 노동도 1970년대나 지금이나 크게 변한 게 없다. 그는 서울 창신동에서 아내와 함께 가내수공업 봉제공장을 운영한다. 지난 13일 만난 이군표는 대뜸 “인터뷰가 오래 걸리느냐”고 물었다. 저녁 8시가 넘은 시간이었지만 아직 일이 남았다고 했다. 17살이던 1976년 신설동의 한 의상실에서 ‘시다’로 일하기 시작해 미싱사를 거쳐 가게와 공장을 겸하는 사장님이 되기까지 꼬박 44년이 걸렸다. 하지만 그는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고 했다. “아, 그나마 일하는 곳에 창문이 생긴 게 달라졌네요.”화섬식품노조 서울봉제인지회는 창신동 일대에만 이군표와 같은 이가 9만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서울 전역에는 30여만명의 봉제 노동자가 있다. 자영업자인지, 노동자인지 경계도 모호하고 구분도 쉽지 않다. 전태일 분신 50년이 지났지만 이런 봉제 노동자들은 여전히 법 주변부 어딘가로 밀려나 있다. 2019년 대구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이 조사한 봉제 노동자 실태를 보면, 봉제 노동자 가운데 근로계약서를 작성해봤다는 이는 14%에 그쳤다. <한겨레>가 1970년대부터 종로와 동대문 일대 봉제공장에서 일을 시작했던 노동자 5명을 만나 물어봤을 때도, 모두 “근로계약서는 단 한번도 작성해보지 못했고 본 적도 없다”고 입을 모았다. 4대 보험이나 근무 시간 준수 같은 건 꿈도 꿀 수 없다. “봉제 노동자는 어떤 노동 이력도 입증할 수 없는 유령 노동자들이에요. 그렇다 보니 코로나 재난 지원금 같은 것도 전 국민한테 준 거 외엔 아무것도 받지 못했죠. 그나마 국민이라는 데 감사해야겠지요.” 서울봉제인지회 회장 이정기의 말이다.고향인 경기도 이천에서 “밭뙈기 하나 없는 집에서 동생만 셋을 둔 장남”으로 태어난 이군표는 초등학교를 겨우 졸업하고 이천 읍내 양복점에서 잡일을 시작했다. 가게에서 먹고 자며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옷감을 나르고 또 날랐다. 몇년이 지나 겨우 재단판 앞에 설 수 있었는데, “단춧구멍만큼 작은 눈을 종일 부릅뜨고 옷감과 사투를 벌였다”며 웃었다. 그렇게 받은 월급 3만5천원이 온 가족 생계비였다.이군표의 바지런함과 솜씨를 눈여겨본 고향 선배의 추천으로 서울 신설동의 한 의상실을 소개받은 게 1976년이었다. ‘오야’ 혹은 ‘선생님’이라고 불리던 미싱사 한명 아래 패턴사, 손바느질하는 사람, 패턴 뜨는 사람, 심부름하는 사람까지 다섯명이 한 조가 되어서 일했다. 눈뜨면 일을 시작했고, 일을 마치면 바로 잠들던 시절을 보냈다. 남은 건 관절염과 위장병이었다.
전태일 열사(뒷줄 가운데)가 서울 평화시장에서 ‘시다’로 갓 취직했을 때 동료들과 함께 찍은 사진. 전태일기념재단 제공
전태일 열사(뒷줄 가운데)가 서울 평화시장에서 ‘시다’로 갓 취직했을 때 동료들과 함께 찍은 사진. 전태일기념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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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 한벌 공임, 32년째 내리막길
청계피복노조가 임금 인상과 노동 3권 보장 등을 요구하며 싸우던 1980년, 21살 이군표는 처음 ‘오야’가 되어 월급 35만원을 받았다. 열심히 하면 “이름 내건 의상실도 열고, 패션업계 사장님”도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전태일 분신 직후 결성된 청계피복노조가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을 거쳐 18년 싸움 끝에 합법성을 쟁취한 1988년, 이군표에게도 전성기가 왔다. 옷 한벌을 만들면 7000~7500원을 받던 시절이라 신나게 일했지만, 모든 것은 1997년 외환위기가 오면서 마른 잎처럼 바스러졌다. 패션 산업은 거대한 구조조정을 거쳤고, 제품을 대량생산하는 공장들은 중국과 동남아시아로 서둘러 떠났다. 패션산업의 주 무대가 명동에서 이대 앞으로, 홍대 앞에서 강남으로 바뀔 때마다 ‘선생님’으로 불리던 봉제 기술자들의 지위는 더 아래로 흘러내렸다. 그 ‘전성기’ 이후 꼬박 30여년이 흘렀지만, 요즘도 아내와 함께 옷을 만들면 한벌당 1만7천원을 받는다. 32년 동안 치솟았던 물가와 비교하면, 숙련공 공임의 가치는 끝없는 내리막길을 걸어온 셈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봉제 일을 하고 산 44년 동안 이군표에게 가장 많은 이익을 안겨준 건 밤샘 노동이 아니라 대출을 끼고 샀다가 최근 수억원이 훌쩍 오른 아현동의 낡은 아파트다. “돈을 벌었으니 좋은 것인지, 그동안의 노동이 허무한 건지 헛갈리네요.”
청계노조 산울림회 회원 박원섭, 신항철이 평화시장 내 공장에서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전태일기념재단 제공
청계노조 산울림회 회원 박원섭, 신항철이 평화시장 내 공장에서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전태일기념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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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주가 됐어요. 종업원은 아내…”
18살 때인 1987년 광주에서 상경해 청계천 주변에서 33년째 미싱을 돌리고 있는 51살 윤복기(가명)도 비슷한 처지다. ‘오야’가 25명, ‘시다’도 25명 있는 청계천의 한 봉제공장에서 일했던 1980년대 중반과 아내와 함께 가내수공업처럼 일하는 지금의 노동이 복사한 듯 그대로라고 했다.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지키라며 분신한 지 17년이 지난 때였지만, 윤복기도 함께 일하던 동료 ‘시다’ 24명도, 심지어 ‘오야’ 25명도 근로기준법을 몰랐다. 지금은 봉제인공제회에도 가입했고 근로기준법도 알지만, 무엇이 달라졌느냐는 질문에 그는 길게 침묵하다 이렇게 말했다. “긴 시간 노동하는 건 하나도 안 바뀌었어요. 청계천 주변에서 일하는 사람들, 그때 일했던 그 사람들이 지금도 똑같이 있어요. 일은 그때보다 더 하는 것 같아요. 바뀐 건, 지하에 있던 공장들이 지상으로 올라가고 좀 밝아지고 환풍기가 생겼지요. 대단한 노동권을 쟁취하기보다 그저 하루 사는 게 고역이 아니길 바랄 뿐입니다.”한때 봉제공장 노동자들이 한국 산업 전체를 맨 앞에서 이끌던 때가 있었다. 전태일은 한국 노동운동의 출발점이고, 청계피복노조는 빛나는 투쟁의 현존하는 역사다. 하지만 노동자들이 감당할 수 없었던 거대한 산업구조 변화의 뒤안길은 쓸쓸하기만 했다. 노동운동의 주류가 여공에서 대공장 남성 노동자로 변해가는 동안 봉제공장 노동자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퀴퀴한 공장에서 옷을 만들거나 눈길 닿지 않는 현장에서 불안정 노동을 하며 산다. 청계피복노조에서 활동하며 40년 동안 미싱 앞을 지켜온 57살 최석호(가명)는 지난 50년을 돌아보는 질문에 피식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노동운동 열심히 했죠. 임금 격차, 시간 격차, 계급 격차 이런 말 많이 하면서 조직화도 해보려고 했어요. 그런데 노동운동이 여기 현실을 잘 몰라요. 영세 사업장 노동자들은 절대 뭉칠 수 없어요. 5명도 안 되는 노동자들이 어떻게 투쟁을 해서 노동 조건을 개선하고 사업주랑 싸울 수 있을까요. 그런데 맨날 투쟁만 하자고 해요. 영세 공장 사업주들도 우리를 등쳐서 더 벌어먹는 게 아니라 생존이 안 되는 우리 같은 사람들이라는 걸 나중에 안 거죠. 그러다 우리도 이젠 다 1~2인 공장 사업주가 됐어요. 종업원이 아내인 공장 말이에요.”
임현재씨, 정인숙씨, 도요한 신부, 이승철씨(왼쪽부터)가 청계피복지부 노조 사무실 현판 옆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전태일기념재단 제공
임현재씨, 정인숙씨, 도요한 신부, 이승철씨(왼쪽부터)가 청계피복지부 노조 사무실 현판 옆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전태일기념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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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와 권리”라는 말의 설렘은 어디로…
윤복기는 전태일 50주기와 노동권 이야기에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20여년 전 육아 이야기를 꺼냈다. 봉제공장 불빛이 꺼질 줄 모르던 그때, 창신동 놀이터(현 다산어린이공원)는 밤늦게까지 일하는 노동자들의 공동 육아장 같았다. “엄마, 아빠가 불 켜진 공장에서 일하는 동안 수십명의 아이들이 창신동 놀이터에서 자기들끼리 어울려 놀았죠. 아직도 놀이터를 지날 때면 그때 생각이 나고, 맘이 흐려집니다. 육아, 이런 개념이 없어 아이들을 그냥 방치했던 거죠. 지금은 그래도 나라에서 (육아를) 책임져주려고 애는 쓰니까 헛산 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요?”김영순은 다른 이유로 1970년대 후반을 아련하게 기억한다. 잠옷 공장의 ‘시다’는 그때쯤 야학에서 “여러분은 존중받아야 하는 사람이고, 무시받으면 안 되는 노동자입니다”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모든 노동자에게는 권리라는 것이 있다. 자기 권리는 스스로 찾아야 한다”는 말도 마음에 박혔다. 전태일이 몸을 불태우며 부르짖던 그 말들이 시발점이 되어 ‘내가 일하는 기계가 아니라 나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있고 존중받아야 한다’는 걸 배우던 그때 그 시절을 떠올리면 김영순은 아직도 맘이 설렌다고 했다. 하지만 청춘의 설렘은 어떻게 흘렀는지도 모를 시간 앞에 차츰 흐려졌다. 청계천 ‘시다’로 청계피복노조에 가입해 싸우던 그 미싱사들은 여전히 기계처럼 일한다. 존중받는 주인이 되지 못했다. 그가 몸을 태운 지 반세기가 지났는데도.김완 김민제 기자 funnybone@hani.co.kr
[화보] 그 후 50년 - 여기 다시 전태일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labor/967499.html?_fr=mt1#csidx431ea7e7700370ba9dffd816cace96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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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단체들 ‘미국은 들어라-아메리카NO 월례 국제평화행동’ 캠페인 시작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20/10/28 09:01
  • 수정일
    2020/10/28 09:01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남영아 통신원 | 기사입력 2020/10/27 [2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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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은 사드와 세균전 부대를 가지고 이 땅을 떠나라!”

“가짜 ‘유엔사’ 해체하라!”

“한미워킹그룹, 동맹대화 철폐하라!”

“대북 제재 해제하고, 평화협정 체결하라!”

 

▲ 27일 오후 7시부터 청계천 광통교 부근에서 80여 명의 시민이 ‘미국은 들어라-아메리카NO 월례 국제평화행동’을 진행했다.  © 남영아 통신원

 

▲ 집회 참가자들의 큰 호응을 끌어낸 중학생의 상모돌리기 공연  © 남영아 통신원

 

27일 오후 7시부터 청계천 광통교 부근에서 80여 명의 시민이 ‘미국은 들어라-아메리카NO 월례 국제평화행동’을 진행했다.

 

김수형 대진연 미군 장갑차 추돌사망사건 진상규명단 총단장은 “5,000명이 넘는 국민이 국민청원에 동참해 주셨다. 미군강점 75년, 미군장갑차 추돌사망사건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분명히 하고 국민의 목숨을 짓밟는 외세의 그림자를 이제는 걷어내야 할 때”라며 오는 31일 미군장갑차 추돌사망사건 국민대회에 연대와 참가를 호소했다.

 

류경완 2021 미국 전쟁범죄 국제 민간법정 조직위원회 집행위원장은 “2021년 9월 8일 뉴욕에서 미국의 전 세계 전쟁 반인륜 범죄를 단죄하는 ‘미국 전쟁범죄 국제 민간법정’을 열기로 하였다”라고 밝혔다.

 

이들은 27일 집회를 시작으로 매월 마지막 화요일 저녁 미 대사관 앞에서 미국의 죄행을 규탄하며 미국이 이 땅에서 물러날 것을 촉구하는 평화행동을 개최할 예정이다.

 

이날 집회에서 동학실천시민행동 풍물패의 공연 중 중학생 단원의 상모돌리기는 참가자들의 뜨거운 호응을 끌어냈다.

 

▲ 미 대사관 앞에서 열린‘미국은 들어라 아메리카NO 월례 국제평화행동 선포 기자회견’, 앞으로 매월 마지막 주 화요일에 미국이 이 땅에서 물러날 것을 촉구하는 평화행동을 개최한다.   © 남영아 통신원

 

참가자들은 집회를 마친 후 미 대사관 앞으로 이동해 ‘미국은 들어라 아메리카NO 월례 국제평화행동 선포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기자회견 참가자들은 기자회견문 낭독 후 성조기를 찢는 상징의식을 했다.

 

아래는 기자회견문 전문이다.

 

-----------------아래------------------------

 

‘미국은 들어라’아메리카NO 월례 국제평화행동 선포 기자회견문

 

미군이 이 땅에 점령군으로 상륙한 지 75년 되는 올해 9월 8일, 우리는 한반도를 포함한 전 세계에서 미국이 저질러온 전쟁·반인륜범죄를 고발하는 ‘국제고발대회’를 개최한 바 있다. 이를 통해 1866년 제너럴셔먼호 침입 이후 두 세기 넘게 우리 민족을 농락해온 미국을 규탄하고, 구체적으로 한국전쟁 시기를 전후하여 자행된 잔혹한 전쟁범죄와 불평등한 ‘한미동맹’ 하에서 벌어지고 있는 내정 간섭, 사드와 세균전부대, 주한미군 주둔비, 미군범죄와 환경오염, 가짜 ‘유엔사’ 문제 등에 대해 상세히 밝히고 미국의 죄상을 고발하였다.

 

아울러 중동과 남미, 아시아, 아프리카 등 세계 각지에서 미국이 일으킨 온갖 전쟁, 쿠데타, 정치개입 등으로 인한 세계 민중의 피해에 대해서도 폭로·고발하였다. 애초에 원주민 학살과 노예노동 위에 세워진 미국은 150여 차례 이상 침략을 벌여온 전쟁국가이며, 2차대전 이후에만도 37개 국가에서 근 2천만 명을 희생시키며 세계를 지배하는 제국으로 군림해왔음을 밝혔다.

 

그러나 이제 세계가 변하고 있다. 달러와 무력에 기초한 제국의 세기가 저물고 미국 일극 패권의 쇠퇴와 다극화 질서로의 전환이 가파르게 진행되고 있다. 세계 반제 진영의 투쟁과 제국 내부 모순이 맞물리면서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소말리아, 심지어 대서양동맹의 중심인 독일에서까지 미국이 후퇴하고 있다. 끝내는 150여 개국에 산재한 900여 미군기지의 감축 및 철군도 불가피하게 될 것이다. 그 길에 강권과 전횡, 침략과 약탈이 아니라, 호혜와 친선에 기반한 새로운 문명의 시대가 열릴 것이다. 

 

우리는 쇠락해가는 미국의 침략주의를 단죄하고 그 종식을 앞당기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내년 9월 미 제국의 심장 뉴욕에서 ‘미국 전쟁범죄 국제민간법정’을 개최하기로 뜻을 모았다. 또한 그 준비 과정에서 전 세계에 걸쳐 ‘국제고발인단’을 조직하고, ‘아메리카NO 국제평화행동(AmericaNO International Peace Action)’을 진행하면서 지구촌 반제·반전 평화운동의 국제 연대를 강화하기로 결의한 바 있다.

 

이에 오늘, 그간 전개해온 ‘미국은 들어라’ 시민행동과 국제평화행동 1인 시위의 성과 위에 ‘미국은 들어라-아메리카NO 월례 국제평화행동’ 캠페인의 시작을 선포한다. 매월 마지막 화요일 저녁 미 대사관 앞에서 미국의 죄행을 규탄하고 미국이 이 땅에 대한 부당한 영향력을 거두고 물러날 것을 촉구하는 평화행동을 개최할 것이다. 전쟁에 반대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국내외 양심과 시민 여러분들의 관심과 성원을 기대한다. 

 

2020년 10월 27일 

 

‘미국은 들어라-아메리카NO 국제평화행동’ 참가자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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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안법 체계’에서는 생소한 일이 벌어진다”

[인터뷰] 권오헌 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

  • 기자명 이계환/이승현 기자 
  •  
  •  입력 2020.10.27 23:32
  •  
  •  수정 2020.10.27 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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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오헌 명예회장은 '새 용어 제조기'답게 이번 인터뷰에서 '국가보안법 체계'라는 새로운 용어를 소개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권오헌 명예회장은 '새 용어 제조기'답게 이번 인터뷰에서 '국가보안법 체계'라는 새로운 용어를 소개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저는 ‘국가보안법 체계’라는 표현을 쓴다. 국가보안법 체계에 있어서는 생소한 일이 벌어진다.”

‘새 용어 제조기’ 권오헌 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은 이같이 ‘국가보안법 체계’라는 새로운 용어를 소개했다. 권 명예회장은 일찍이 운동의 발전에 따라 그에 맞는 새로운 용어와 개념들을 만들어 왔다. ‘비전향장기수’와 ‘2차송환희망자’, ‘송환’ 그리고 ‘양심수’ 등이 그것이다.

이들 개념들은 당시 기독교인권위원회, 불교인권위원회, 천주교인권위원회 등에서 받고, 국제사면위원회에서 따르니까 나중에 유엔인권이사회까지도 인정했다. 정부에서도 일부 인정했다. 특히 양심수 개념이 규정되자 “양심수 석방과 송환까지 큰 힘을 받았다”는 것이다.

권 명예회장은 이번에는 ‘국가보안법 체계’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그 작태들을 열거했다. 박상학 자유북한운동연합대표의 대북전단 살포, 정광훈 목사의 일장기 동원 시위 그리고 이영훈 교수가 쓴 <반일 종족주의> 등. ‘국가보안법 체계’란 한마디로 “반공, 반북만 하면 남쪽사회에서 어떤 일이든 용인된다는 것”이다.

그는 국가보안법 철폐운동만이 아니라 평생을 자주통일, 민주주의, 인권, 양심수 등 한국사회의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 활동해 왔다. 그가 이와 같은 엄청난 일을 하자면 이론과 실천의 겸비는 필수일 터다.

그러나 그는 초등학교 출신자다. 이에 그는 “책도 보고 견문도 넓히려고 했지만 그것이 책에서 얻어지기보다는 어떤 현실조건에 내가 대응하면서 어떻게 뚫고 나가야 하겠다는 일을 하다보니까 그것이 논리가 생기게 된 것 같다”고는 “그런 논리가 형성되면 그 논리의 힘 때문에 추진하는데 힘이 생기는 것 같다”며 실천을 통해 이론이 형성됐음을 내비쳤다.

이들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아스팔트에서 집회도 하고 단식도 하고 투쟁도 하는 힘든 활동 중에도 기억에 남는 감동적인 장면도 있었다. 다름 아닌 2000년 비전향장기수들의 송환과 그해 북한 노동당 창건 55돌 행사시 방북해 고려호텔에서 만난 비전향장기수들. 권 명예회장은 “이렇게 사람이 살면서 이런 경우도 있고 이런 삶은 후회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면서 “감동적이었다”고 표현했다.

거의 모든 사안마다 거침없이 답을 해가던 그도 이재문 선생에 대한 질문에서는 말을 아꼈다. 참고로 권 명예회장은 3년 전인 2017년 6월에 폐암4기 진단을 받았으나, 항암 신약을 복용하자 그게 유전자와 잘 맞는지 다행이라며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몇 번이고 이재문 선생에 대해 묻자 그는 “우리 집에도 몇 달간 있었다”는 정도로 비켜갔다. 남민전 성원으로서 최고지도자에 대한 어떤 ‘배려’(?) 때문일까?

그래서 더욱 필요한 게 자서전이 아닐까 해서 묻자 예전과 달리 이번에는 “소중한 삶이라 자서전 한번 기록하고 싶은 생각은 있다”며 일단의 가능성을 내비쳤다. 그의 삶은 간단히 일별해 봐도 ‘독학, 농촌 사회운동, 정당운동, 남민전, 인권운동, 통일운동 등등’으로 이어진다. 그의 파란장한 삶의 이야기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언제쯤 주어질까?

이번 인터뷰는 ‘통일뉴스 창간 20주년, 비전향장기수 송환 20주년’을 맞아 이뤄졌다. 권 명예회장과의 인터뷰는 10월 20일 통일뉴스 사무실에서 이계환 기자와 이승현 기자가 함께 참석한 가운데 진행됐다. 권 명예회장은 2시간 30분에 걸쳐 모든 사안에 대해 쉼 없이 그리고 거침없이 답하는 노익장을 발휘했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이다.

 

권 명예회장과의 인터뷰는 10월 20일 통일뉴스 사무실에서 2시간 30분에 걸쳐 진행됐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권 명예회장과의 인터뷰는 10월 20일 통일뉴스 사무실에서 2시간 30분에 걸쳐 진행됐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항암 신약이 잘 맞아 다행이다”

□ 먼저, 독자들이 선생님 건강에 대해 궁금하실 것 같다. 2017년 폐암4기 진단을 받으셨죠. 지금 건강이 어떠신가요?

■ 감히 저에 대한 염려를 해주신데 대해서 너무 감사하고 사실 그런 염려들 때문에 생각했던 것 보다는 현재 상태는 잘 버티고 있다고 말씀드리겠다. 정확히 2017년 6월에 판정을 받고 7월경부터 이레사라는 항암 신약을 복용했는데, 그게 제 유전자 검사하고 그 약이 잘 맞았다. 그 약을 투약한 사람 중 저처럼 오래 견딘 사람도 흔치 않았다. 2019년 9월까지 정확하게 2년 3개월을 견뎠다.

그리고 내성이 생겨서 작년 9월경에 그 약을 끊었다. 전적으로 처음부터 저를 담당했던 서울대 김동완 교수가 항암주사를 놓았다. 처음에는 먼저 먹는 약도 그렇지만 주사제도 전신에 피부발진이라든가 위 장애, 식용부진, 변비 등 부작용이 있었는데 그것도 얼마 지나니까 적응이 됐다. 어제(10월 19일)가 주사 맞은 지 1년 되는 날이었다.

어제 병원에 가서 담당의사에게 물어보니까 지금 상태로는 괜찮다고 한다. 그런데 이게 나아지는 건지, 괜찮다는 건지 이런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그런 걸 물어보기도 어렵고... 나쁜 소리를 들을 필요도 없으니까.

어제 처음으로 '암세포가 줄어드는 것이냐'고 물어봤더니 '이 약을 쓰고 나서 (암세포가) 줄어들고 정지상태가 유지된다'는 뜻이라고 한다. 병원에서도 제가 실험대상이라면 성공한 것이라는 거다. 언제 또 내성이 생겨서 다시 또 잘못될지도 모르지만.

그전에도 1년쯤 지나서 척주로 옮겨진 적이 있다. 폐암이 무서운 게 척추로 전이되는 것 하고 뇌로 가는 것인데, 척추로 간 것은 방사선 치료 한 번에 괜찮아진 것이다. 그러니까 거기서 한 것이 나한테는 잘 맞은 것이다. 지금 현재로는 다행히 잘 견디고 있다.

□ 그전에 잘 안 오시다가 엊그제 6.15산악회에도 오셨는데, 그렇게 산에 오시는 것 보니까 건강이 호전되는 것 같다.

■ 다른 것보다는 처음으로 느낀 것이, 올해 1월에 북한산을 올랐는데, 나는 무릎 아픈 것만 걱정했는데 오르다보니까 숨이 차더라. 숨이 차서 도저히 못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무릎이 아프다고 하고는 뒷풀이에 갔었다. 그 다음에 병원에 가서 알아보니까 항암주사 때문에 빈혈증이 생겼는데 적혈구 치수가 보통 성인남자가 13~14라면 저는 8이 나왔다. 이거는 수혈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의 낮은 수치하고 하는데, 제가 그냥 견뎌보겠다고 했다.

단백질 섭취라던가 이런 걸 신경 쓰고 있는데, 지금은 9까지 올라왔다가 어제는 8.5까지 떨어졌더라. 이거는 항암치료 하는 동안은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 병원에서도 조심하고 될 수 있으면 단백질 섭취를 많이 하라고 한다.

지금은 그 일 때문에 산에 못가는 것이고 어제는 제가 제안해서 둘레길을 가겠다고 한 것인데 다 같이 가게 된 것이다.

“난 초등학교 출신자. 현실조건 극복 위해 고민하니 논리가 형성돼”

□ 선생님께서는 오랜 기간 활동해 오셨기 때문에 선생님에 대해 '양심수의 대부', '한국의 호치민', '평생청년', '이론과 실천의 양수겸장' 등 별칭이 많다. 이에 대한 소감은 어떠신가요?

2019년 11월 제25회 불교인권상을 수상한 권오헌 명예회장이 수상소감을 말하고 있다.
2019년 11월 제25회 불교인권상을 수상한 권오헌 명예회장이 수상소감을 말하고 있다.

■ 사실 너무 지나치고 분수에 넘치는 호의라고 생각된다. 사실은 뭐 그런 부분에 대해서 일은 하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가 지닌 감성이랄까, 이런 것과 사회적 여건과의 조건반사적인 만남의 결과라고 보인다. 열심히 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성과는 달라질 수는 있겠지만 저는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면 반드시 해야겠다는 생각은 늘 갖고 있다. 그런 생활을 해 왔을 뿐인데 저한테는 분수에 넘치는 호의라고 생각한다.

□ 외부 사람들이 보기에는 늘 청년처럼 움직이고 외모도 호치민과 같이 안온한 모습이 있으며, 양심수를 위해서 평생 일해 오셨고, 말 그대로 이론과 실천을 두루 아우르는 활동을 해 오신데 대해 좋은 의미에서 이런 종합적인 말씀을 하시는 것 같다.

■ 이론과 실천 이야기가 나왔는데, 제가 초등학교 출신 아닌가. 알면 얼마나 알겠어요. 물론 노력은 많이 했다. 지금은 민간인이 갖고 있는 책도 거의 없을 것으로 알고 있는데, 1946년에 나온 자본론 3권을 제가 갖고 있다.

6학년 담임이었던 정인묵 선생이 '이건 자네가 봐야 할 책이네'라며 건네 주셨다. 그건 보물이었다. 지금도 진품명풍에 나갈 수 있는 책이라고 알고 있다. 당시 노트하면서 봤던 것이 지금도 남아있다. 잉여가치라든가 용어 하나 하나를 외우다시피 했다. 내용을 알기 위해서 노력했다.

알다시피 그걸 다 읽은 사람이 많지 않다. 역사, 경제, 문화 등이 다 있다. 그걸 보면 완벽한 인격도야에 큰 힘이 될 것이다. 그런 것을 비롯해서 책도 보고 견문도 넓히려고 했지만 그것이 책에서 얻어지기보다는 어떤 현실조건에 내가 대응하면서 어떻게 뚫고 나가야 하겠다는 일을 하다보니까 그것이 논리가 생기게 된 것 같다.

그런 논리가 형성되면 그 논리의 힘 때문에 추진하는데 힘이 생기는 것 같다. 가령 양심수나 비전향장기수 규정이라든가 하는 새로운 개념은 그분들 석방하고 송환하는데 아주 결정적인 큰 도움이 됐다. 그전에는 한국의 양심수에 대해서도 폭력을 행사한 사람들이라고 해서 양심수로 인정하지 않았다. 엠네스티에서 만델라도 양심수가 아니라고 했다.

제가 이 논리를 세우고 난 후 처음에는 기독교인권위원회, 불교인권위원회, 천주교인권위원회에서 이걸 다 따랐다. 그리고 국제사면위원회에서 이런 논리를 따르니까 나중에 유엔인권이사회까지도 그렇게 하여서 이 분들을 양심수로 규정하고 석방과 송환까지 큰 힘을 받았다.

그래서 정확한 논리라는 것이 굉장한 힘이 된다. 맹목적으로 사업을 하면 힘이 없다. 반드시 논리가 있어야 한다. 양심수 석방의 당위성, 국가보안법 폐지의 논리라든가. 뭐 다 마찬가지이다. 저는 활동하면서 그냥 목소리 높이는 것보다는 논리성을 찾고 그에 따라서 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그러다 보니까 그런 이야기가 나온 것 같다.

□ 실천으로 옮길 경우 그에 합당한 이론이나 논리가 있어야 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형식에 맞춰 하는 경우가 많다. 선생님은 그걸 스스로 깨우치면서 이론이 올라가고 실천이 쌓여져 가니까 그런 점에서 많은 분들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다.

■ 그동안 제가 써놓았던 원고를 두 번에 걸쳐서 책을 냈지 않았나. 거기에도 이런 이론화 과정이 나온다. 그냥 덮어놓고 이렇게 해야 한다고 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전문 학자들의 논문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일반 시민사회의 성명서 같은 것과는 다르다. 이러이러하기 때문에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논리가 형성되어서 글이 나왔다고 할 수 있다.

□ 선생님께서 6.15산악회에서 산상강연을 하시는데 10~20분 즉흥적으로 하시면서도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는 것을 보면서 평소에 늘 자신에게 질문을 하고 답을 하는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겠느냐는 생각을 했다.

방북한 권 명예회장이 리인모 묘소를 참관했다. [사진제공-권오헌]
방북한 권 명예회장이 리인모 묘소를 참관했다. [사진제공-권오헌]

■ 그것이 생활화되고 하다보니까 그냥 어디 가서 함부로 이야기하긴 어렵다. 그냥 이야기하면 권력자나 시민사회 상대에게 힘을 못 받는다.

비전향장기수 송환하는 과정에서 제가 글을 많이 썼다. 정확하게는 1993년 리인모 선생 송환 때부터 시작해 1995년 함세환, 김인서, 김영태 등 세분 송환 활동(고향이 이북이고 한국전쟁 기간에 체포된 비전향 장기수는 제네바협약에 따른 전쟁포로로 취급하여 송환해야 한다)을 거쳐 1999년부터 본격적으로 글을 쓰게 됐다.

당시 송환운동에 많은 단체들이 같이 했지만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제 논리에 따라 활동했다. 잘 모르면 논리도 세우기가 어렵다. 논리가 별건 아니다. 이런 현상들이 있었는데 이걸 어떻게 해결하고 극복할 것인지 방법을 추구하다보면 논리가 정립되는 것이다. 그게 시대상황마다 다르게 나온다. 통일부가 입장을 밝히는데 따라 반박논리도 나오는 거다. 이렇게 해서 송환운동 과정에서 상호주의론, 자격문제도 나온 것이다.

“비전향장기수 송환, 방북해 다시 만난 비전향장기수들.. 감동적이었다”

□ 선생님께서는 평생을 우리 민족의 자주통일, 나라의 민주주의, 인권, 양심수 등 여러 가지 문제 해결을 위해 활동해 오셨다. 특별히 애착이 있는 분야가 있는가?

■ 아까 말씀드린 대로 저는 주어진 조건에서 처음엔 감성으로 대하다가 이성적 판단으로 상승하게 되었다. 그렇게 이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많은 일들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60~70년대만 하더라도 처음엔 노동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통일사회당에 들어가서 김철 씨 구속되고 옥중 관련된 일을 하게 되다보니까 그쪽으로 쏠리게 되고 양심수후원회 만들어져서 통일운동과 연계되어서 그쪽으로 더 저의 활동영역이 달라지게 됐다. 그렇게 하다보니까 자주통일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와 인권, 국가보안법, 양심수로 다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와 인권이라고 하면 노동문제도 다 포함되지 않나. 결사의 자유라던가 노동3권 등, 또 생존권이라고 하면 노동자·농민·빈민이 다 해당되지 않나. 제 글속에는 그런 것이 다 있게 된 거다. 그래서 어느 부분에 더 관심이나 집착이 있다기보다는 가장 보람 있고 긍지를 가질 수 있는 것을 꼽는다면 이런 것이 있을 수 있다. 그동안 한 번도 이야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1988년 12월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을 비롯해서 시국사범이 전원 석방됐다. 물론 저 사람들이 말하는 공안 쪽은 나오지 못했지만. 남민전이 나왔으니까 제헌의회(CA)라든가, 반제청년동맹 등 반국가단체 관련자들까지 전원 다 나온 것이다. 남민전이 다 끌고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때 '비전향장기수'들도 상당히 많이 나왔다. 전향서를 썼던 분들은 거의 다 나왔다고 볼 수 있다. 김영식, 양원진, 박희성 선생 등 지금 낙성대에 계신 분들이 그때 나온 분들이었다. 그때 저는 남민전 석방운동에 온 정력을 투여했기 때문에 보람을 느꼈다. '아 이런 세상도 있구나' 하고 이루 말할 수 없는 감동이 있었다. 야당이었지만 당시 민주당 인권위원장이 저하고 석방 규모와 내용 등을 상의하고 그랬으니까.

(통혁당 재건위와 남민전 준비위 사건으로 쌍무기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인) 임동규 선생(2020년 9월 21일 별세)의 석방을 위해 광주를 찾아가 봐달라는 요청도 있었다. 그 사람을 나오는 방향에서 '그걸' 해달라는 요청이었는데, '우리 동지한테 뭘 써달라'고는 말 못하지 않나. 박현채와 함께 가기로 했다가 나 혼자 가서는 '당신이 지금까지 해온 대로 하는 것이 원칙이다. 당신 마음대로 하라'고 했는데 결국은 다 나왔다. 그때 감동을 잊을 수 없다.

그 다음으로는 1999년 2월 25일 우용각 선생을 비롯한 17명이 석방되었다. 1999년 손성모, 신광수 등 두 분이 나왔다. 이 분들은 7.4성명 이후 이쪽 공안에 의해서 유인되었다는 혐의가 역력하다. 일본에서 들어왔다가 김포공항에서 다 잡힌 사람들이다. 신광수는 일본인 납치와 연관되었다고 해서 낙성대에 와서 시위가 있었다. 그때 내가 그것도 다 막아냈다. 일본 NHK방송에 다 나가고 했다. 그렇게 해서 비전향장기수가 다 나왔는데 그때 그 감동과 보람은 말도 못했다.

2000년 10월 북한 노동당 창건 55주년 행사 때 방북한 권 명예회장은 고려호텔에서 그해 9월 송환된 비전향장기수 대부분을 만났다. [사진제공-권오헌]
2000년 10월 북한 노동당 창건 55주년 행사 때 방북한 권 명예회장은 고려호텔에서 그해 9월 송환된 비전향장기수 대부분을 만났다. [사진제공-권오헌]

2000년 63명 송환됐을 때의 감동, 그해 조선노동당 창건 55돌 경축 행사에 남측에서 42명이 참관을 하게 됐다. 제가 서둘러서 전국연합에서 참관 결정을 했고 홍근수 목사, 백기완 선생 등이 개별적으로 가기도 했다. 그때는 열병식이나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백전백승 조선노동당'이 문제가 아니라 비전향장기수들을 고려호텔에서 다 만났다는 것. 이게 저한테는 정말 감동적이었다. 이렇게 사람이 살면서 이런 경우도 있고 이런 삶은 후회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 활동하시면서 아스팔트에서 힘들게 집회도 하고 단식도 하고 투쟁도 하면서 너무 힘든 삶이지 않을까 싶었는데, 크게 보면 기억에 남는 감동적인 장면도 있었다.

■ 따지자면 여러 가지 있겠지만 이건 정말 내 일생에 대표적인 감동적인 장면들이었다.

□ 얼마 전 비전향장기수 1차 송환 20주년을 맞았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직후인 9월 2일 63명의 비전향장기수가 북으로 송환됐다. 20년이 지난 소회가 어떠신지요.

■ 20년이 지났지만 어제 일처럼 그때 장면이 떠오른다. 몇 가지로 나눈다면, 첫째 당사자들이 끈질긴 노력이다. 조국통일을 위해 수십 년 감옥을 살면서도 정치적 신념과 양심을 지켜왔다는 것. 이것이 아니었다면 갈 수 없었던 것이다. 비전향장기수들의 불굴의 투지와 신념의 강자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분들이 '인간승리'로 갔다는 생각이다.

비록 외세에 의해서 분단이 되었지만 남북이 합의해서 이런 인도주의 문제를 해결하고 이걸 시초로 해서 당시 6.15공동선언이 말했던 자주원칙, 통일방식, 다방면적인 교류협력 등을 차근차근 엮어져서 이어졌던 것. 비전향장기수 송환은 남북관계를 발전시키고 이어지게 한 계기이면서 우리민족이 세계에 대해서 자주민족으로서의 긍지를 가질 만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 6.15선언 이후 많은 분들이 북측에 갔는데, 선생님은 몇 번이나 가셨나?

■ 평양은 제가 7번인가 8번 갔었다. 공동행사도 있고 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에서 하던 콩우유돕기운동 차원으로 평양에 가서 좋은 이야기들 많이 나누었다.

□ 평양에서 비전향장기수 선생들을 만난 이야기를 해 달라.

■ 평양에 갈 때마다 안 만난 일은 거의 없다. 당창건 55돌에는 병원에 계신 네 분인가 빼고 고려호텔에 다 나오셔서 사진도 같이 찍고 그랬다. 2001년 8.15민족통일대회 때였는데, 아주 뙤약볕이었다. 남측에서 간 분들이 고려호텔에서 아웅다웅 늑장부리는 바람에 비전향장기수들이 3대헌장기념탑 앞에 얼굴이 새까맣게 탈정도로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노인들도 휠체어 타고 기다렸다. 찍히기도 했지만 우린 모두 거기로 가서 선생님들 다 뵀다. 그리고는 선생님들이 제가 묵었던 고려호텔 '초호화실'(침실이 있고 응접실이 따로 있고 화장실이 2개 있고, 회의실도 굉장히 컸는데 혼자 쓰도록 했다)에 찾아 오셨다.

방북해 김선명 선생 등 비전향장기수들을 만났다. [사진제공-권오헌]
방북해 김선명 선생 등 비전향장기수들을 만났다. [사진제공-권오헌]

선생님들이 찾아오셨다고 해서 빨리 내려가서 맞이하려고 했더니 북측 담당자들이 그냥 계시라고 하더라. 그런 의전을 철저히 하더라. 홍경선·황용각 선생이 대표로 오셔서 공식적으로 인사를 하고 같이 내려가서 아홉 분을 만나 다른 회의실로 옮겼다.

그렇게 여러분을 만난 일은 그 뒤로는 없었다. 고려호텔이나 양각도호텔에서 신청을 하면 비공식으로 만나서 선물도 전해드리고 애기한 적은 있다. 사진으로 공개된 것도 몇 번 있다. 2001년까지는 많이 만났고 그 이후에는 그렇게는 못 만났다. 그 뒤로는 적게는 세 분에서 많게는 일곱 분의 대표성 있는 분들을 만났다.

□ 연로하신 선생들이 별세할 때마다 북측 매체에서는 부고를 알렸는데, 2010년 이후부터는 소식이 나오지 않는 것 같다. 지금 몇 분이 계신지는 모르겠지만 많이 돌아가신 것 같다.

■ 2012~2013년쯤에 재미언론 <민족통신>에서 정리한 적이 있다. 노트에 다 정리를 해두었는데 지금 노트를 찾지 못하고 있다. 그때 25명 정도 남아 계셨다. 그리고 2017년 제 출판기념회 때 22명으로 확인했다. 그때 아홉 분이 영상으로 축사를 보내주면서 22명이 남았다고 알려오신 거다. 그 뒤 3년이 지났는데 15명이 남아계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정확치 않고 그 후 더 돌아가셨을 것 같다.

이 자리를 빌어서 공식적으로 인사드리고 싶다. 그때 출판기념회 때 영상메시지를 손수 보내주셨는데 너무 감사드리고 그 뒤 오랜 시간이 걸리는 동안 많은 선생님들이 별세하신 것으로 알고 있다. 돌아가신 분들에 대해 명복을 빌고 살아계신 선생님들은 항상 건강하시면서 평생 염원이셨던 자주통일 세상을 이루면서 그 영광과 축복을 누리셨으면 좋겠다. 공식적으로 전해드리고 싶다.

'비전향장기수'와 '2차송환희망자', ‘송환’ 그리고 ‘양심수’의 개념

□ 지난 10월 10일 기독교회관에서 '비전향장기수 송환 20주년 기념 및 2차 송환 촉구대회'를 하셨다. 이때 ‘비전향장기수’와 ‘송환’의 개념을 말해주셨는데, 다시 한 번 정리해 달라.

■ '비전향장기수'와 '2차송환희망자'는 다르다. 비전향장기수는 "국방경비법, 국가보안법, 반공법 등 반민주악법으로 구속기소 되어 수십 년을 감옥에 갇혀있으면서도 온갖 고문 등 핍박을 이겨내고 조국통일에 대한 정치적 신념과 양심을 지켜낸 불굴의 투사, 신념의 강자들"을 말한다.

1975년 사회안전법이 생겨서 감호처분을 받았던 분들 중 1989년에 사회안전법 폐기로 인해 그해 후반부터 1990년에 전향을 하지 않고 나온 분들이 이에 해당된다. 또 1990년부터 대전 등 전국 교도소에 있던 비전향장기수 중에 노약자·병약자를 비전향으로 내보냈는데, 김석행·이종환·권양섭 선생 등 15명 정도가 비전향장기수에 포함한다.

'비전향장기수 2차송환희망자들'은 명칭 자체가 개인이 아니라 복수이다. 역사적 개념에 속하는 고유명사가 된 것이다.

사회안전법이 폐지(1989년)된 이후 사상전향제도가 폐지(1998년)되고 준법서약제도가 폐기(2003년)된다. 본인 의사에 반해서 강제로 사상을 전향시키는 것은 제도 폐지와 함께 당연히 원인 무효가 된 것이다.

비전향장기수 송환자 중에도 사실 쓰고 간 분이 있다. 청주감호소에서 나오기 전에 썼던 분들이 북으로 간 분들이 있다. 그렇지만 사회안전법이 폐지됐기 때문에 원인무효라고 본 거다. 정부에서 이런 역사인식이 있다면 강제 전향자들에 대해서 원인무효임을 확인하고 보내드려야 한다는 거다.

이런 분들은 개별적으로 '비전향장기수'는 아니지만 '비전향장기수 2차송환희망자'는 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대통령 직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2002년과 2004년에 걸쳐서 강제전향을 위한 공작의 일환으로 강제급식 과정에서 돌아가신 5명에 대해 사상전향제도의 위헌성, 강제전향공작의 위법성을 지적하고 이분들을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사람으로 규정했다. 이렇게 강제전향은 사실상 전향이 아니라고 사실상 인정했다.

이때까지 양심수후원회에서도 송환 대상자와 관련해 '장기구금양심수', '비전향장기수 2차송환희망자' 등을 혼용했는데 2004년 통일부에서 '비전향장기수 2차송환희망자들'로 규정한 뒤로 2006년부터는 '비전향장기수 2차송환희망자들'로 용어를 단일하게 했다.

이 분들을 엄격한 의미에서 '비전향장기수'라고 할 수는 없지만 사실상 강제전향을 원인무효로 해석하는 상황인 만큼 복합적인 명칭에서 '비전향장기수'라는 표현을 이렇게 정리해도 된다. 그리고 인권개념이 그때와 지금은 많이 달라져 있다. 이 분들은 어디까지나 조국통일에 대한 정치적 신념과 양심을 지금까지 지키고 현장에서 뛰는 사람들이다.

2020년 7월 통일부 앞에서 열린 ‘비전향장기수 2차 송환’ 기자회견에 참가한 권 명예회장. [통일뉴스 자료사진]
2020년 7월 통일부 앞에서 열린 ‘비전향장기수 2차 송환’ 기자회견에 참가한 권 명예회장. [통일뉴스 자료사진]

비전향장기수 2차송환희망자들은 처음에 33명이었다가 13명이 추가되어 총 46명이었으며, 이중 33명이 돌아가시고 현재 13명이 남아 있다. 이 분들이 전부 그런 분들이다. 13명 중 박종린 선생이 병원에 계신데 오래 견디지 못하실 것 같다.

'송환'이라는 개념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쓴 것이 정전협정문에서였다. 그 이전에 전쟁포로에 대한 제네바협정에서 전쟁이 끝나면 일정기간을 두었다가 송환해야 한다는 뜻으로 사용됐다. 송환을 뜻하는 리페이트리에이션(repatriation)은 전쟁포로가 본국으로 돌아간다는 뜻이고 '반드시 보내야 한다'는 당위성을 포함하고 있다.

리인모 선생과 2000년 9월 2일 63명 송환 때에는 '북한 방문'을 목적으로 했으나 2005년 정순택 선생의 유해가 육로로 보내질 때에는 '유해송환'이라는 표현을 남북이 합의해서 정확히 썼다. 미묘하지만 용어의 변화가 있다. 남과 북 어느 쪽도 문제 삼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서 송환에 대한 '자격문제'도 짚고 넘어가자. 얼마 전 통일부에서 비전향장기수 2차송환희망자들의 송환을 촉구하는 서한에 대해 과정 전결로 '가야할 분들은 다 보냈다'고 답을 보내온 것은 아주 인권개념이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남북합의 정신에 대한 역사인식이 없는 것이다. 민족과 국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무엇이고 한 번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반드시 따라야 하는 것이다. 너무 무식한 것이다. 송환은 반드시 보내야 한다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정부에서 이미 인정한 만큼 나머지 분들은 모두 보내야 한다는 것이다.

□ 한 가지 더 여쭤보겠다. ‘양심수’ 용어도 처음 쓴 것으로 알려졌는데...

■ 양심수라는 개념은 한마디로 '국가권력과 사회정의실천 사이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사회정의를 위한, 개인이나 소수의 이익이 아니라 다수의 이익, 공동선을 위해서 양심에 따라 행동하다 구속된 사람"이라고 제가 처음 표현했다. 조국통일, 노동3권, 생존권보장, 양심적 병역거부 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겠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확신을 가지고 활동을 했기 때문에 '확신수'라고도 했고 예전에는 ‘정치범’이라고도 했다. 전에는 정치적 사건과 관련해서 구속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는 공안당국에서도 일반 형사피의자와는 다르게 취급했다. 그런 것을 인권감수성이라고 볼 수 있는데, 문재인 정부에서는 양심수에 대한 인권 감수성이 없는 것 같다.

인권변호사라고, 촛불정부라고 자임하면서도 양심수, 국가보안법 철폐문제에 대해 취임 후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다. 말이 안 되는 것이다. 숫자는 줄어들었지만 양심수는 숫자가 많고 적은 문제가 아니라 단 한사람이 갇혀 있더라도 문제가 있다고 봐야 한다.

□ 대표적인 양심수는 누가 있나.

■ 현재 12명이 갇혀있다. 양심수가 제일 많았던 1989년에는 1,700여명이 갇혀 있었다. 그때와 비교하면 천지차이이지만 양심수와 인권에 대한 감수성이 발전했는데도 불구하고 결국 양심수가 갇혀있다는 것이 문제라고 보아야 한다. 또 그 내용이 감옥에 갈 내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갇혀있다는 것도 문제이다.

민가협 목요집회에서 연설을 하고 있는 권 명예회장.  [통일뉴스 자료사진]
민가협 목요집회에서 연설을 하고 있는 권 명예회장.  [통일뉴스 자료사진]

세 가지로 분류하는데 먼저 국가보안법 위반 관련이다. 이석기 전 통합진보당 국회의원과 인터넷 논객인 김경용 씨, 조종원 평화협정운동본부 국보법폐지 특별위원장 등 3명이 있다.

이밖에 금속노조 소속 유성기업 노조원 4명과 제주해군기지내 기습항의시위로 구속된 송강호 박사, 마크 리퍼트 전 주한미대사 피습 사건으로 구속된 김기종 우리마당 대표, 오세훈 낙선운동에 나섰다 구속된 유선민 서울대학생진보연합 운영위원장, 양심에 따른 병역법 위반으로 구속 중인 송상윤 씨 등 12명이다. 예전에 비하면 참 숫자는 작지만, 양심수이기 때문에 갇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 문재인 정부의 인권 감수성에 대해 지적하셨는데...

■ 적폐세력들과 대항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노력을 한다. 또 경제, 코로나19 등 질병관계에 대해서 고민하고 남북문제, 한미관계에 대해서도 고심하는데 민주주의와 정권의 건전성, 인권문제에 대해서는 소홀하다. 이게 도덕적으로 정당성을 갖기 때문에 중요한데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다. 한상균 전 민주노총도 사면 성격으로 한 게 아니지 않나.

사회정의와 기회균등, 공정성 등에 대해서도 말은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하지는 못하고 있다. 예를 들어 부당한 전교조 법외노조는 부처 행정명령으로 한 것이어서 노동부의 철회만 있으면 되는데 그걸 하지 않고 있다. 그런 면에서 무척 아쉽다.

“‘국가보안법 체계’에서는 생소한 일이 벌어진다”,, 박상학, 전광훈, <반일 종족주의> 등

□ 양심수 문제는 국가보안법 폐지 문제와 깊은 상관관계가 있다. 국가보안법은 민주화시대에도 끈질기게 살아남아 있다. 2004년 12월 동토에 삭발도 하고 정치적 이슈도 되어 국회에도 갔지만 결국 국회 상정은 되지 않은 아쉬움이 있었다. 전 국민적인 투쟁으로 흔치 않은 기회였지만 굉장히 중요한 투쟁이었다. 16년이 지난 지금 다시 평가한다면?

■ 참 아쉽다. 그때 그 절호의 찬스를 놓쳤다. 국가보안법 폐지운동이 대중적으로 가장 규모 있게 벌어졌던 때였다. 그전에는 1989년 명동성당에서 국가보안법 폐지운동과 개정운동이 진행되다가 통합하여 1990년 500여 단체가 망라된 국보법폐지 국민행동이 발족하게 됐다.

당시 국보법 폐지가 안 된 것은 한마디로 노무현 정부의 의지 부족이었다. 노무현 정부의 의지가 있었다면 국회의장의 합법적 권한인 경호권을 발동했으면 된다. 그때 폐지했으면 국가 기강, 체면, 국격 모든 면에서 우리나라의 형편이 아주 달라졌을 것이다. 대규모적으로 처절한 투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은 천추의 한이다. 앞으로 그런 기회는 쉽지 않을 것 같다.

‘그해 겨울은 몹시 추웠다.’ 2004년 12월 1만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국회 앞에서 열린 국가보안법 폐지를 요구하는 촛불집회에서 권오헌 명예회장이 농성에 들어갔다. 이후 농성자들은 국가보안법 폐지를 요구하는 집단 삭발과 함께 1천명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통일뉴스 자료사진]
‘그해 겨울은 몹시 추웠다.’ 2004년 12월 1만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국회 앞에서 열린 국가보안법 폐지를 요구하는 촛불집회에서 권오헌 명예회장이 농성에 들어갔다. 이후 농성자들은 국가보안법 폐지를 요구하는 집단 삭발과 함께 1천명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통일뉴스 자료사진]

□ 국보법이 왜 폐지되어야 하는지, 왜 폐지가 어려운지에 대해 말해 달라.

■ 국가보안법이 폐지되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동족인 북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또 인간의 기본권을 침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상 양심의 자유, 집회 결사의 자유, 학문 예술 표현의 자유를 제약하려면 목적이 정당하고 수단이 적합하며 제한의 최소성, 법익의 균형성이 갖추어져야 한다. 지금 코로나 바이러스 방역을 위해 기본권을 제한하고 있는 것은 그만한 사정이 있기 때문이다.

헌법 37조 2항은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의 안전보장, 질서유지, 공공복리를 위해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으며 제한하는 경우에는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국가보안법은 여기에 해당한다.

국보법은 법을 집행하는 사법기관이나 공안당국이 자의적 해석에 따라서 유무죄를 결정하는 애매모호성 때문에 법으로서의 균형을 잃고 있다. 사회가 변하면 법률과 제도도 바뀌어야 하는데, 오늘날 남북관계는 이 법이 있어서는 안 되지 않나.

최근 판문점선언과 9월 평양공동선언도 있지만 특히, 10.4선언에서는 남북관계 발전에 저해되는 법, 제도 폐지를 명시적으로 언급하기도 했다.

현재 국보법 적용을 받고 있는 사람이 많지는 않은데 특성이 있다. 지금 8년째 감옥살이를 하고 있는 이석기 의원의 경우 대법원에서 내란음모, 지하혁명조직 등이 모두 ‘혐의없음’으로 판결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내란 선동으로 급조, 뒤집어 씌워서 국보법 제7조 찬양 고무죄를 엄격하게 적용했다.

보수정부에서도 찬양 고무, 이적표현물 소지 등 국보법 7조 적용해서 구속시킨 사례는 거의 없는데, 무려 8년 징역을 살리고 있다.

또 일심회 사건으로 7년 옥고를 치른 장민호 씨의 경우 간첩죄, 이적단체 구성 등 모두 무죄판결을 받았으나 이적표현물 소지 등 하찮은 죄목을 적용해 만기를 꽉 채우게 하고는 만기출소하는 날 80살 노모의 얼굴 한번 보지 못하게 하고 미국으로 강제출국시켰다. 그것도 모자라 미국에서 5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못하게 하다가 노모가 위급한 병환에 이르자 여러 가지 조건을 붙여 입국제한조치 일부 해제를 하는 엄격한 국보법 적용을 하고 있다.

최근 범민련에 대한 가혹한 탄압의 경우까지 보면 미국을 반대하고 민족자주에 투철한 경우에 대해서는 예외 없이 가혹하게 국가보안법을 적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정부만의 뜻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압력을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저는 '국가보안법 체계'라는 표현을 쓴다. 국가보안법 체계에 있어서는 생소한 일이 벌어진다. 박상학을 비롯한 대북전단 살포 주도자들은 정부와 시민사회에서 막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외국의 반북단체까지 끌고 들어와서 터무니없는 대북모략 내용의 전단 살포를 보장받고 있다. 반공, 반북만 하면 남쪽사회에서 어떤 일이든 용인된다는 것이다.

또 하나, 북에서 잔인한 범죄행위를 저지른 것이 세계 언론에 공개된 자가 남쪽에 와서 국회의원이 되는 이런 사회는 국보법 체계 속에서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정광훈 목사가 대통령 하야를 주장하면서 온갖 얘기를 다하고 태극기부대가 성조기와 이스라엘기, 최근에는 일장기까지 동원하고 있는 이런 현상은 오로지 반공, 반북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 나아가 이영훈 교수가 쓴 <반일 종족주의>까지 국보법체계에서 나오게 되는 것이다.

“남북대화 복원하려면 정상 간 합의문 이행해야”

□ 선생님께서는 정세에도 관심이 많다. 지난 10일 조선노동당 창건 75주년 열병식과 김정은 위원장 연설이 있었다. 광경이 파격적이었고 화제가 많이 됐다. 소감이나 평가를 해주신다면.

■ 이런 표현을 마음대로 할 수 있어야 민주사회인데. 우리 사회가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국가보안법 체계가 있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평자들이 말하는데 공감하는 바 있다. 열병식에서 한 김정은 위원장의 연설을 주의 깊게 들었다.

권 명예회장이 인터뷰 도중 발언의 정확성을 위해 가끔 돋보기로 자료를 살피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권 명예회장이 인터뷰 도중 발언의 정확성을 위해 가끔 돋보기로 자료를 살피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크게 두 가지 아닌가. 이른바 인민을 위한 ‘인민대중제일주의’라는 것이 하나 있고, 허리띠를 졸라매서라도 부당한 외침으로부터 자위적 억제력을 갖추고 만약 침략하면 강력하게 물리치겠다는 것 두 가지이다. 이번 연설에서는 인민대중제일주의와 관련된 내용이 대부분인 것 같다.

"하늘같고 바다같은 우리 인민의 너무도 크나큰 믿음을 받아 안기만 하면서 언제나 제대로 한번 보답이 따르지 못해 정말 면목이 없다. 나는 우리 인민의 하늘같은 믿음을 지키는 길에 설사 온몸이 찢기고 부서진다 해도 그 믿음만은 목숨까지 바쳐서라도 무조건 지킬 것이고 그 믿음에 끝까지 충실할 것을 다시 한 번 이 자리에서 엄숙히 확언한다"고 말했다. 이런 말을 국가지도자가 공개적으로 한다는 것은 어느 자유주의 국가에서도 찾아보기 어렵고, 연출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열병식에서 연설을 통해 '핵억제력'이 아니라 '전쟁억제력'이라고 완곡하게 표현했지만, 새로운 전략무기체계와 개인장비를 선보임으로써 인민들에게는 자주권과 생존권을 위한 군사력 보유 의지를 과시하고 외세에는 경고한 것으로 본다.

□ 여전히 미국과의 관계에서는 장기전으로 보고 정면돌파전으로 가는 흐름이 있을 것 같고, 남측에 대해서는 보건문제 풀리면 손을 잡자는 언급도 있어서 남북관계 복원을 점칠 수 있지 않나 하는 평가들도 있다.

■ 현재까지 미국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이렇다 할 내용을 제시하지 않았다. 하노이 결렬 연장선에서 새로운 셈법을 가져오라는 것 외에는 없다. 기본적인 것은 싱가포르 정상회담은 인정하는 것인데, 거기에서 한반도 비핵화는 북쪽만의 비핵화는 아니지 않나. 일본이나 남쪽의 핵우산까지 포함되는 거다. 더 확대하면 오키나와, 괌까지 포함된다. 이렇게 찬찬히 들여다보면 미국이 함부로 대들 성질의 문제가 아니다.

남북사이의 적대 관계 해소는 원칙적으로 7.4남북공동성명에서부터 시작됐다. 7.4성명과 6.15남북공동선언, 10.4평화번영선언을 비롯해서 문재인 정부가 직접 만나서 합의했던 판문점선언과 9월 평양공동선언을 이행하면 되는 것이다.

민족자주와 민족자결의 원칙, 이걸 가지고 남북 사이에 더 이상 전쟁이 없다는 것을 합의하고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는 위기국면을 조성하지 않기 위해서 한미 연합군사훈련을 하지 않고 첨단무기 도입을 하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 남북 간 대화가 복원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남민전 이재문 선생. 우리 집에도 몇 달간 있었다”

□ 사적인 질문을 좀 드리겠다. 활동하면서 많은 조직사건과 연루되었고 또 많은 운동가들과도 만난 것으로 알고 있다. 특히 남민전 사건으로 옥고도 치렀는데, 40년이 지난 남민전을 한국 운동사에서 평가한다면?

■ 지금까지 웬만한 공안사건은 다 평가되고 대부분 부당한 권력에 의해서 탄압받은 것으로 규정되어서 복권되거나 보상까지 받았다. 지금까지 안 된 사건이 남민전 하고 통혁당 사건이다. 통혁당 사건은 일부가 한국영토 바깥에서도 활동하는 것으로 공식적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남쪽에서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 역시 남쪽에서 활동한 내용이 자주통일과 민주주의 발전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기 금기시될 만한 일도 아니다.

남민전은 전혀 외부와 연계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국회를 해산하고 스스로 국회의원을 임명하는 유신체제의 그 포악성을 더 이상 참을 수 없고, 거기에 더해 2차 인혁당 사건에서 사법살인이 자행된 상황에서 비공개조직으로 활동한 것이 남민전 사건이다.

그때 농촌은 말할 수 없이 피폐했고 저농산물 정책을 토대로 임금을 낮추는 노동착취를 통해 수출지향 정책을 펼쳤다. 거기에 공안탄압, 폭정까지 있었다. 남민전은 대외적으로 민족자주를 주장하고 민주정부를 수립하고 남북 연방연합정부를 수립한다는 강령이 있었는데, 지금 정당이나 사회단체가 하는 것보다 심하지도 않다. 한 사람은 사형집행 당하고 한 사람은 강제로 죽임을 당했다.

2019년 10월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 내 이재문 선생 묘역에서 열린 남민전 열사 첫 합동추모제인 ‘고 이재문, 신향식, 김병권, 박석률 남민전 민족민주통일열사 합동추모제’에서 추도사를 하고 있는 권오헌 명예회장. [통일뉴스 자료사진]
2019년 10월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 내 이재문 선생 묘역에서 열린 남민전 열사 첫 합동추모제인 ‘고 이재문, 신향식, 김병권, 박석률 남민전 민족민주통일열사 합동추모제’에서 추도사를 하고 있는 권오헌 명예회장. [통일뉴스 자료사진]

남민전 사건은 유신폭정에 항거해서 일어났던 반파쇼 민주화운동이었고, 반외세 민족자주운동이었다. 실제 활동한 내용은 반파쇼 민주화운동이었고 그 일환으로 최원석 가에 대한 응징투쟁도 있었다. 남민전은 반드시 재평가되어야 한다. 자주통일운동과도 관계가 있지만 특히 유신철폐 투쟁에 가장 헌신적이고 희생적으로 참여한 단체였다. 어떤 단체도 3년간 성명 하나 내지 못했던 시기에 빈틈없이 투쟁했다. 현재 일부 회원들이 재심 청구해서 재판하고 있다.

□ 만나본 분들 중에서 특별히 영향을 받은 운동가는?

■ 이재문 선생이다. 우리 집에도 몇 달간 있었다. 저는 학교도 안다녔고 학연이 없으니까... 농촌에서 농촌청소년 운동을 하다 군대 갔다 와서 다시 농촌사회 운동하고 그 다음에 64년 한일협정 반대투쟁이 심할 때 처음으로 사회에 나갔다. 현장에 있다가 몰래 서울로 올라왔다. 장준하 선생 사무실이 교보문고 부근에 있었다. 데모대에 섞여서 그곳에서 국회의사당(현재 서울시의회)에 같이 들어갔다가 잡혀서 종로경찰서에 들어가기도 했는데, 여러 사람이 끌려들어갔기 때문에 몰래 빠져나오기도 했다. 그해 시골에서 여름을 지내고 9월에 서울로 왔다. 그때 굉장히 혼란을 겪었다. 농촌에서는 혼신을 다해서 농촌사회운동을 했는데, 서울에서는 다 자기를 위해서 일하고 노동자를 위한 조직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사상계의 오랜 독자로서 종각 옆 한청빌딩에서 장준하 선생, 함석헌 선생을 만났다. 최초로 사회적으로 이름 있는 분들을 만나 의견을 나누기도 했다. 그때는 현장에서 하루 40페이지 글을 읽고 40페이지 글을 쓴다는 생각으로 지냈다. 장준하 선생이 농촌소설을 쓰면서 당시 경복궁에 근무하던 박경수 선생을 소개해주었는데, 그 분이 내 글을 읽고 '위험하다'고 평가하기도 했다.(웃음) 그 글들은 지금도 내가 갖고 있다.

67년께 서울에서 공사장 장비 관리 일을 하다가 충북 제천의 충북시멘트 공장으로 옮겨 근무하던 중 지금은 돌아가신 박금수를 만났다. 박금수는 당시 성신여사대 교수를 지내다가 5.16후 해직되어 인텔리 노동자로 근무하고 있었다.

나를 미스터 권이라고 부르던 박금수 씨는 '미스터 권은 정치 한번 해보지'라고 권하면서 통일사회당 김철 씨를 소개했다. 정식으로 일을 한 것은 1968년이었고 김일성대 교수를 지낸 이동하 교수와 이몽 등과 함께 통일사회당에 들어간 것이 1970년이었던 것 같다.

그때 만난 사람이 김철, 안필수, 양호민 등이고 단둘이 자주 만나 술도 많이 마셨던 천관우(동아일보 주필) 와는 절친하게 지냈다. 더 지나서는 참여문학 동인지인 상황파에서 비문인으로서 구중서, 임헌영, 신상웅 등과 동인 활동을 했으며, 농촌운동을 하던 이우재도 발탁해 글을 쓰게 했다. 두세 살 위인 박현채, 두 살 아래인 임헌영과는 특히 가까웠다. 학연은 없었지만 여러 토론회에 빠짐없이 참여해서 다 기록하고 영어, 일어 공부도 열심히 했다.

□ 아무래도 이재문 선생에 대해서 한 말씀 해 주신다면.

■ 임헌영 추천으로 안재구 선생 주재로 남민전에 가입했다. 이재문 선생은 그 다음에 우리 집에 오게 됐다. 우선 믿을 만하고 지휘부를 보호해야 할 때여서 우리 집에 왔지만, 그때 나는 현장도 다녀야 하고 통일사회당도 끝낸 것이 아니었다. 상황파 등과의 교우관계도 있지 않나. 여러 가지 맺는 관계가 있어서 사실 참 어려웠다. 이재문 선생은 참 좋은 분이었다. 집에 있던 자본론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지금도 내가 그건 가지고 있다. 그때 몇 가지를 신상웅한테 주어서 치워두었었다, 신향식 선생도 돌아가셨지만 참 좋았다. 남민전과 관련해서는 임헌영도 그렇고 다 인간관계로 맺은 분들이다.

독학, 농촌 사회운동, 정당운동, 남민전, 인권운동, 통일운동...
“소중한 삶이라 자서전 한번 기록하고 싶은 생각은 있다”

□ 지금 말씀하신 내용만 해도 상당한 양이 될 텐데... 자서전 권유를 받지 않으시지 않나. 선생님에 대해 ‘한국현대사의 보고’라는 평도 있는데, 자서전을 검토해 보시면 좋겠다.

■ 아까도 말했지만 제가 화려한 자서전이 나오지 못하죠. 학교도 안다녔고 그렇다고 큰 단체를 이끌면서 연대체의 중심에 있었던 것도 아니고 양심수후원회라는 사회단체 중의 일부를 애써 꾸린 것이어서 대단한 자서전이 나올 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온 속속들은 참 소중하다고 본다.

2019년 11월 6.15산악회 산행에서 도봉산에 오른 권오헌 명예회장.. 그는 6.15산악회 회장도 맡고 있다. [통일뉴스 자료사진]
2019년 11월 6.15산악회 산행에서 도봉산에 오른 권오헌 명예회장.. 그는 6.15산악회 회장도 맡고 있다. [통일뉴스 자료사진]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고 일제가 패망한 다음 날 하루아침에 달라진 세상을 겪으면서 느낀 혼란. 학교에 갔더니 신사가 불태워지고 유리창이 깨지고 교장이 발가벗겨서 쫓겨나는 큰 변화. 전쟁이 나자 우리 마을 엄청난 피해를 보았다. 부모님 돌아가시고 나 혼자 공부도 하고 농촌 사회운동도 하고 사회에 나와서 정당운동에 남민전, 인권운동, 통일운동까지 이어지는 역사. 이것도 참 소중한 삶이구나 하는 생각이다. 한번 기록하고 싶은 생각이 있는데, 지금 하고 있는 일도 있어 이 일을 단절하기도 어렵고 그렇다.

또 하나는 나의 건강상태가 2년만 더 살 수만 있다면 달려들고 싶은 생각이 있다. 그런데 장담하지는 않는다. 저만큼 기록을 가진 사람도 없을 것이다. 군대생활 당시 일기도 아직 가지고 있다. 그런데 지금 눈이 나빠서 볼 수도 없다. 아주 유치한 일도 있지만, 4.19당시 기록만 봐도, 그 때 상황을 볼 수 있고 '70년대의 인식'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낼 생각이 있다.

그때 통일사회당 문화국장이었는데 감히 '문학예술인들에게 보내는 글'이란 걸 쓴 적이 있다. 이렇게 보면 지금 봐도 유치하지 않다. 당시 국내외 정세에 대해서도 통일사회당에서 보고를 한 것을 보면 그때 30대 초반이었을 때이니까 비례대표로 국회에 나와도 되지 않았을까?(웃음)

60년대까지는 기록이 상당히 많은데, 73년 이후에는 일체 기록을 하지 않았다. 남민전 들어갔다 나오고 할 때에도 상당 부분 기록이 없다. 엄혹한 시기에는 기록을 하지 않기로 했으니까 일체 기록이 없다. 상상이고 다른 연관된 기록이 있다.

□ 창간 20주년을 맞는 통일뉴스와 통일뉴스 독자들에게 한 말씀 해주시죠.

■ 통일뉴스 하면 2001년 금강산에서 남북해외 대토론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김치관 기자와 송정미 기자가 그때 그렇게 열심히 뛰던 모습이 떠오른다. 통일뉴스가 창간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실제 기자가 와서 그렇게 열심히 하는 것을 보고서는 ‘야 이렇게 헌신적으로 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민족정론지로서 장구한 발전을 해 주었고 변함없이 일관성 있는 큰 역할을 해 주셨다. 정말 축하드리고 여기에는 통일뉴스를 이끄는 대표님을 비롯한 성원들의 헌신이 있었지만 또 많은 독자들과 여러분이 함께 노력한 것이 포함된 것이라고 본다. 이계환 대표께서 지금까지 통일뉴스가 통일을 준비하는 과정이었다면 앞으로 통일을 이룩해내는 시기로 빨리 전환되기를 바란다고 하셨는데 그 시기가 빨리 앞당겨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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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정치를 하다](13)‘성실’로 경제 살렸지만, 독선의 파국도 따라왔다

장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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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거릿 대처 

11년간이나 총리직을 지킨 마거릿 대처의 성실함에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위험한 독선이 영국 사회의 분열로 이어진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11년간이나 총리직을 지킨 마거릿 대처의 성실함에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위험한 독선이 영국 사회의 분열로 이어진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시 암송 경연대회에서 입상
교장은 “너는 참 운이 좋구나”
발끈한 아홉살의 마거릿은
“저는 운이 좋아서가 아니라,
상 받을 만한 자격을 갖췄기에
수상자가 됐습니다”라고 대답
 

“내가 처음으로 가진 직업은 플라스틱을 만드는 공장의 개발과에서 일한 것이다. 소규모 실험 단계를 거쳐 새로운 플라스틱을 만들어낸 다음 어떤 용도로 사용하고 어디에 팔 것인지 생각하는 일이었다. 가끔 노동당 일원인 친구들에게 ‘난 너희보다 공장에서 일한 경험이 더 많아’라고 말하며 장난을 치고는 했다.”

마거릿 대처는 아버지를 존경했다. 구두 제조공 집안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교사가 되고 싶었지만, 가난한 집안 형편으로 13세에 학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악물고 일했다. 잡화상 점원으로 앞만 보며 생활한 소년은 이내 식료품점의 주인이 되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책을 읽었다. 근면한 삶에 보상이 따른다는 종교적 신념도 깊었다. 감리교 교회의 평신도 설교자로 명성이 높았다. 지역에서 자수성가의 대명사로 통했던 앨프레드 로버츠는 중산층에 진입하자, 정치인이 되기로 결심한다. 그랜섬 시의회 의원을 거쳐 1945년에 시장이 된 앨프레드 로버츠의 둘째 딸은 아버지의 연설을 들을 때마다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 같았다.

1925년 영국 중부의 링컨셔 그랜섬에서 태어난 마거릿 대처는 어린 시절부터 승부욕이 강했다. 또래 집단들과 어울려 노는 대신 책을 읽거나 부모님이 운영하는 식료품점에서 일을 했다. 아홉 살 때 시 암송 경연대회에서 입상한 마거릿 대처에게 교장 선생님이 아무렇지도 않게 “너는 참 운이 좋구나”라고 하자, 마거릿 대처는 “운이 좋아서가 아니라, 저는 그 상을 받을 만한 자격을 갖추었기 때문에 수상자가 되었습니다”라고 맞받아쳤다.

마거릿 대처는 어린 시절부터 승부욕이 강했다. 또래 집단들과 어울려 노는 대신 책을 읽거나 일했다. 10대 시절의 마거릿 대처

마거릿 대처는 어린 시절부터 승부욕이 강했다. 또래 집단들과 어울려 노는 대신 책을 읽거나 일했다. 10대 시절의 마거릿 대처

그녀는 옥스퍼드대학교에 진학하고 싶었다. 사립 기숙학교에 갈 형편이 아니었지만, 상황을 탓하는 대신 수업료가 낮으면서도 우수한 학생이 많았던 공립학교 케스티븐 앤 그랜섬 여학교를 선택했다. 옥스퍼드는 입학 자체도 어려웠지만, 등록금도 무척 높았다. 마거릿 대처는 부모님이 옥스퍼드 학비를 지원할 만큼의 경제적 여유가 없다고 판단하고, 장학생 선발 시험에 응시했다. 1943년 10월 마거릿 대처는 옥스퍼드대학교 솜머빌 칼리지에 입학한다.

대학 생활은 쉽지 않았다. 우선, 전공 공부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화학보다는 정치학과 경제학에 관심이 갔다. 게다가 옥스퍼드의 친구들은 대부분 사립 기숙학교 출신이었고, 그들끼리는 대대손손 혈연과 지연으로 서로 얽혀 있는 경우가 많았다. 소외감을 느꼈다. 마거릿은 혼자 산책을 하거나, 교회에 앉아 있는 시간이 많았다. 자신이 진정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었다.

1946년 10월 마거릿은 옥스퍼드대학교 보수협회에 가입했다. 유서 깊은 정치토론 클럽인 옥스퍼드 유니언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당시에는 여성 회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옥스퍼드대학교 보수협회에서 마거릿의 활약은 눈부셨다. 가입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협회장이 된 마거릿은 보수당의 외연을 확장하기 위해서는 노동계급 회원을 확보해야 한다는 내용의 연설로 화제를 모았다.

하지만 옥스퍼드에서 만난 대부분의 친구들은 보수와 진보의 정치 성향을 떠나 마거릿의 뜻 자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이때부터 마거릿은 주류 사회 안에서 평온한 삶을 살며 세련된 교양과 호사 취미를 은근히 자랑하는 친구들과 자신은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인식하게 된다. “마거릿 대처에게는 언제나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들이 연 파티에 참석한 불청객 같은 분위기가 흘렀다.” 그녀는 자신을 하찮은 집안의 출신으로만 보는 동문들의 시선을 느낄 때마다 열등감에 사로잡히면서도, 세상 물정을 모르는 도련님 같은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며 우월감에 도취되기도 했다.

졸업과 동시에 취업을 해야 했다. 1947년 옥스퍼드를 졸업한 마거릿은 안경테와 필름 등을 생산하는 플라스틱 제조 회사에 취직해 1년 반 동안 근무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정치인이 되겠다는 포부를 숨기지 않았다. 기회는 예상보다 빨리 찾아왔다. 1950년 런던 남동부에 위치한 닷퍼드의 보수당 지역구위원장 자리에 옥스퍼드 시절 지인이 마거릿을 추천했다. 그녀는 1950년 총선에 출마한다. 24세의 마거릿은 표를 얻기 위해서라면 어디든 직접 찾아갔다. 우선 유권자들을 만나야 했다. 남성들만 출입 가능한 클럽이 즐비했던 시절, 여성은 종업원 이외에 입장이 되지 않자, 마거릿은 클럽에서 맥주 따르는 일을 하면서 남성 유권자들에게 지지를 호소할 정도로 선거에 최선을 다했다. 결과는 석패였다. 1951년 총선에도 도전했지만, 다시 낙선했다.

두 번의 실패를 겪은 마거릿은 선거운동 기간 중에 만난 데니스 대처와 1951년 12월에 결혼했다. 그는 아내의 능력과 야망을 높이 평가했다. 1953년 8월 쌍둥이를 출산한 마거릿은 선거를 치르면서 계획했던 일을 실천에 옮긴다. 정치인에게 법률 지식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던 마거릿은 세금관계법으로 변호사 시험을 준비해 합격했다.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 그녀는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과정이 곧 정치와 유사하다고 생각했다. 하루빨리 직업 정치인이 되고 싶었다.

[여성, 정치를 하다](13)‘성실’로 경제 살렸지만, 독선의 파국도 따라왔다
보수당 대표 시절인 1975년 미국 백악관에서 제럴드 포드 미국 대통령과 회담하는 모습, 1982년 북아일랜드를 방문한 마거릿 대처 부부 .

보수당 대표 시절인 1975년 미국 백악관에서 제럴드 포드 미국 대통령과 회담하는 모습, 1982년 북아일랜드를 방문한 마거릿 대처 부부 .

세번째 도전 끝에 의원 당선
엘리트 남성의 전유물로 인식
여성 의원 휴게실도 없던 의회
살아남는 방법은 오직 실력뿐
간명하면서 공격적 언어 구사
첫 여성 총리가 된 ‘철의 여인’
 

1959년 총선에서 압승을 거둔 마거릿 대처는 의회에서 법안을 발의할 때마다 주목받았다. 의회에 여성 의원을 위한 휴게실조차 하나 없던 시절이었다. 엘리트 남성들의 전유물로 인식되었던 의회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실력뿐이었다. 그녀는 특히 연설에 공을 들였다. 간명하면서도 공격적인 정치 언어를 구사했다. 한편 지역구 행사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2년 후인 1961년 10월, 마거릿 대처는 연금국민보험부의 정무차관으로 임명된다. 36세의 최연소 차관 마거릿 대처는 보고만 받지 않았다. 복지 제도의 실효성을 다각도로 검토하며 현안을 직접 챙겼다. 대처는 1970년 교육부 장관에 취임하며, 존재감을 드러낸다. “마거릿 대처는 우리 모두의 머리를 합친 것보다 더 좋은 머리를 가졌어.”

하지만 보수당 에드워드 히스 총리의 경제 정책이 영국 국민들의 신뢰를 받지 못하자 1972년 노동당으로 정권이 교체된다. 마거릿 대처는 나라 살림이 국정 운영의 최우선 과제라는 교훈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1974년 보수당의 정책연구센터 부소장으로 취임한 마거릿 대처는 경제 이론들을 다각도로 분석하며 자유주의 시장경제의 근간을 점검한다. 보수당이 영국 사회를 다시 이끌어갈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지만, 뜻밖의 사건이 벌어진다. 1974년 10월 보수당의 차기 대표 후보였던 키스 조지프가 “양육에 문제가 많은 하층 노동계급 미혼모의 출산 비율이 높아지고 있는 현실을 우려한다”고 발언한 것이다. 키스 조지프는 사태를 수습하지 못한 채, 기자들을 피해 다니기에 바빴다. 그가 후보직에서 사퇴하겠다고 밝혔지만, 누구도 쑥대밭이 된 보수당을 책임지려고 하지 않았다. 마거릿 대처는 “내가 출마하겠습니다”라고 나섰다.

1969년 한 기자로부터 총리직을 꿈꾸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나는 총리가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제 모든 것을 헌신해야 하니까요”라고 답했지만, 마거릿 대처는 의회에 입성하면서부터 더 정확하게는 옥스퍼드 시절부터 영국의 지도자가 되고 싶었다. 그녀는 더 이상 자기 자신의 욕망을 감추지 않기로 한다. 겁쟁이처럼 도망치는 남성 정치인들을 보면서 마거릿 대처는 “모든 것을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지인들은 그녀에게 도박에 손을 대지 말라고 충고했다. 보수당 중진 의원들과 언론 매체들은 “모든 여성 정치인은 이류에 불과하다” “마거릿 대처는 여성일 뿐만 아니라 경력도 일천하다”며 그녀를 깔보았다. 재무부, 내무부, 외무부에서 일한 경험이 없는 사람은 당 대표도 총리도 될 수 없다는 논리로 마거릿 대처를 압박하기도 했다. 그녀는 조급해하지 않았다. “마거릿 대처는 아직 권력을 장악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는 겁먹지 않았다.” 1975년 2월4일과 2월11일,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된 보수당 대표 투표의 승자는 마거릿 대처였다.

보수당 대표에 취임하자마자, 마거릿 대처는 조직 쇄신에 착수한다. 집권 정당이 되는 길은 오직 하나, 정책 개발에 있다고 판단했다. 경제 회생을 위한 감세 정책에 주력했다. 1979년 5월, 보수당은 압승했다. “총리직을 원하지 않습니다”라고 발언했던 마거릿 대처는 10년 동안 절차탁마의 시간을 보내고 영국 최초의 여성 총리에 취임한다. 역대 최장 기간인 11년 동안 영국 총리로 재임하며, 마거릿 대처는 자유주의 시장경제를 신봉했다. 어떤 타협도 후퇴도 용납하지 않았다. 그녀의 정책이 성공을 거둘수록 그녀는 대학 시절 가졌던 우월감에 다시 빠져들었다. 보수당 의원과 내각을 수반하는 장관들이 부유한 집안에서 “물러 터지게” 살아와 아무것도 모른다며 그들을 자주 야단쳤다. 본인은 피나는 노력으로 총리가 되었지만, 보수당 의원들과 각료들은 너무 쉽게 권력과 부와 명예를 얻었다고 생각했다. 노동당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노동자 출신인 자신이 노동당의 귀족들보다 노동을 훨씬 잘 안다고 확신했다.

마거릿 대처와 남성 엘리트 정치인들은 혐오와 차별적 언어를 주고받았다. 총리가 물가를 언급하면 실물경제에 정통하다고 평가하는 대신 ‘야채 가게’ 출신은 어쩔 수 없다고 비아냥거렸다. 마거릿 대처의 독선도 나날이 거칠어졌다. 총리가 아니라 여왕처럼 말하고 행동했다. 정치적 여정을 함께해온 최측근들에게조차 모멸적인 언사를 퍼부었다. 1990년 11월, 부총리 제프리 하우는 “더 이상 국민의 이익과 총리에 대한 의리 사이에서 갈등할 수 없다”는 말로 대처를 맹렬하게 공격했다. 결국 제프리 하우의 공개 비판은 3주 후 대처 정부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1990년 11월20일 실시된 투표에서 대처는 뒤늦게나마 세론(世論)을 알게 되었다.

이틀 후인 1990년 11월22일 오전, 마거릿 대처는 사임을 발표하며 보수당의 승리를 기원했다. 자진 사퇴 결정이야말로 마거릿 대처의 정치생명을 연장시켰다. 1997년에는 후배들의 간청으로 보수당 총선을 지원했고,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 총리는 마거릿 대처에게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 정계에 입문한 이후로 하루에 잠을 4시간 이내로만 자면서 정치 현안과 행정 업무를 완벽하게 파악하고자 했던 마거릿 대처의 성실함에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위험한 독선이 영국 사회의 분열로 이어진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영국 최초의 여성 총리 마거릿 대처는 자력갱생의 미덕과 독선의 파국을 함께 선사한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녀를 사랑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장영은
 
[여성, 정치를 하다](13)‘성실’로 경제 살렸지만, 독선의 파국도 따라왔다

성균관대학교에서 <근대 여성 지식인의 자기서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균관대 비교문화연계전공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을 엮고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 <촛불의 눈으로 3·1운동을 보다>를 함께 썼고, <쓰고 싸우고 살아남다>를 썼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이야기하는 여성들에게 관심이 많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분투해온 여성들의 생애를 복원하고, 그들의 말과 글을 차근차근 모아 널리 전하고자 한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10270600025&code=910100#csidx01c94c3e85fbb458b3d12f585d691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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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고 싶으면' 석탄발전에서 탈출하라

[함께 사는 길] "'탈석탄법'을 제정하라"

 

"90년대 이후 지속적으로 증가추세였던 우리나라의 온실가스 배출량이 2018년을 정점으로 2019년부터 감소추세로 돌아섰습니다. 초미세먼지도 줄어서 연평균 농도가 개선되고, 푸른 하늘을 볼 수 있는 날이 늘어났습니다."

 

제1회 '푸른 하늘을 위한 국제 맑은 공기의 날'이었던 9월 7일, 문재인 대통령은 기념사를 통해 정부의 기후변화와 미세먼지 대응 노력을 강조했다. '푸른 하늘을 위한 국제 맑은 공기의 날'은 '대기 환경과 기후 변화에 대한 국민의 이해와 관심을 높이고 대기오염 저감 활동에 대한 범국가적 참여를 유도'한다는 취지로 지정한 날로 지난해 9월 열린 '기후행동 정상 회의'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제안에 따라 유엔이 이를 공식 채택한 뒤 올해 첫 기념일을 맞았다.

 

올해 코로나 감염병 확산으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뿌연 공기가 가시고 푸른 하늘이 열렸다. 하지만 기후위기로 인한 '빨간 지구'는 더욱 심각해졌다. 코로나 감염병이 장기화되는 상황에서도 대기 이산화탄소 농도는 계속 증가하는 추세다. 올해 8월 기준, 지구 평균 이산화탄소 농도는 414ppm(100만분의 1)을 기록했다. 산업화 이전인 1850년에 비해 47% 증가한 수치다. 

석탄발전 퇴출한다면서 수명 30년은 보장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세계 감염병 대유행부터 최장기간 이어진 장마와 태풍까지, 기후위기는 당장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는 비상사태로 치닫고 있다. 한국의 온난화 속도는 세계 평균보다 2배 이상 빨라 폭염 사망을 비롯한 기후 재난 위험이 급상승할 것으로 전망된다. '푸른 하늘의 날' 기념일에 초강력 태풍 '하이선'이 덮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단기적 대기오염 대책에 안주하며 기후위기에 정부가 무대응한다면, 시민 생명과 안전은 더욱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1.5℃ 지구 온난화 방지를 위한 탈탄소 전환에 대한 정부의 정책 의지는 보이지 않는다. 한국의 현행 2030년 온실가스 감축 목표는 1.5℃는커녕 3℃ 이상 온난화로 이어지는 '매우 불충분'한 목표라는 국제사회의 혹평을 받는 처지다.


 

가장 큰 역설은 '푸른 하늘의 날'을 제안한 한국이 대기오염과 기후변화 주범인 석탄발전에 중독된 대표적 국가라는 사실이다. 한국은 현재 석탄발전소 60기가 가동되고 있고 현재 7기가 추가 건설 중이다. 석탄발전은 국가 온실가스 배출량의 약 30%를 배출하는 최대의 배출원이며, 연구에 따르면 석탄발전에서 배출되는 미세먼지로 해마다 1천 명이 조기 사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도 석탄발전의 문제점에 대해 모르지 않는다. 더구나 "깨끗하고 안전한 에너지로의 전환을 가속화하겠다"라고도 말한다. 동일한 기념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정부는 신규 석탄발전소 허가를 전면 금지하였으며, 이미 폐쇄한 노후 석탄발전소 4기를 포함하여 임기 내 10기를 폐쇄하고, 장기적으로 2034년까지 20기를 추가로 폐쇄하겠다"고 말했다. 아울러, 태양광과 풍력 설비는 2025년까지 지난해 대비 세 배 이상으로 확대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럼, 한국은 석탄발전으로부터 제대로 '탈출'하고 있는 것일까.


 

대통령의 연설을 보면, 한국이 석탄발전을 과감히 줄이는 정책을 펴는 것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그건 착시다. 대통령은 석탄발전소를 2034년까지 20기를 추가 폐쇄하겠다고 했지만 석탄발전소의 가동 수명을 30년으로 정하고, 수명이 만료되는 발전기를 순차적으로 폐지하겠다는 방침에 근거한 말이다. 석탄발전소의 폐쇄에 대한 공식적 규칙이 없었던 과거보다는 나은 것일까. 아마 10년 전이었으면, 그렇게 평가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기후위기로 온실가스 배출을 극도로 억제하고 줄여나가야 할 시점인 현재로선 전혀 그렇지 않다.


 

1.5°C 지구 온난화 방지 목표를 달성하려면, 전 세계적으로 2040년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은 늦어도 2030년까지 석탄발전을 완전히 퇴출해야 한다는 게 과학적 명제다. 정부 계획대로 수명을 30년으로 설정해 석탄발전소를 가동하게 한다면, 온실가스 배출량은 1.5°C 목표 대비 3배를 초과할 전망이다. 특히 향후 온실가스 급증의 원인이 될 7기의 건설 중 석탄발전소에 대해서 정부는 수수방관할 뿐이다. 실제 정부 예측을 보더라도, 석탄발전은 15년 이후에도 최대의 발전량 비중을 유지할 전망이다. 기후위기 비상사태를 목도하는 현재, 석탄발전의 '수명 30년 보장'이 아닌 조기 퇴출을 촉진해야 하는 이유다.


 

▲ 환경운동연합은 지난 9월 9일 국회 앞에서 '석탄발전 퇴출법'을 촉구하는 1인 시위를 했다. ⓒ서울환경운동연합

석탄발전 퇴출 위한 탈석탄법 제정해야


 

환경운동연합은 8월 26일 '탈석탄법 제정 캠페인'을 선포하며 "국회는 신규 석탄발전소 건설 금지와 '2030 석탄발전 퇴출 로드맵' 수립을 포괄한 탈석탄법을 제정하라"고 촉구했다. 이날 회원 1233명이 선언자로 참여한 '석탄발전 퇴출을 촉구하는 환경운동연합 1천인 선언'을 발표해 △2030 석탄발전 퇴출 로드맵 수립 △환경 과세 강화 및 환경급전 제도화 △석탄발전 사업에 대한 공적금융 지원의 중단 △건설 중 석탄발전의 중단 및 지원 근거 마련을 요구했다. '탈석탄법'이 담아야 할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자.


 

첫째, 석탄발전 퇴출 로드맵을 마련해야 한다. 올해 말까지 1.5℃ 지구온난화 방지를 위한 '장기 저탄소 발전전략'을 유엔에 제출해야 하는 가운데 전국 모든 광역기초지자체가 기후 비상 선언을 선포했다. 아울러 2050년 온실가스 순배출 제로 목표와 2030년 목표를 강화하자는 국회 '기후위기 비상선언' 결의안이 상임위를 통과하면서 진전된 온실가스 감축 목표 설정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높아졌다. 석탄발전을 운영 중인 유럽 15개국은 기후위기 대응을 위해 석탄발전의 단계적 폐지 방안을 공식화했고 대부분 2030년 이전까지 석탄발전의 퇴출을 완료할 계획이다.

 

한국도 2030년까지 석탄발전을 퇴출하기 위한 로드맵이 마련돼야 한다. 폐쇄되는 석탄발전소의 자리만큼 에너지 효율 개선과 풍력, 태양광 등의 재생에너지 확대에 더욱 박차를 가해야 한다. 석탄발전은 조속히 퇴출하되, 지역 사회와 노동자의 일자리는 보호하고 안정화해야 한다. 석탄발전에 의존하던 지역이 에너지 전환에 기반을 둔 일자리와 경제로 회복될 수 있도록 정부의 지원 대책이 선행돼야 한다.


 

석탄발전의 퇴출을 제도적으로 정한 해외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네덜란드 의회는 2019년 12월 국가 온실가스 감축 목표 달성의 일환으로 석탄발전 금지법(Law on the prohibition of coal in electricity production)을 제정해 2025년부터 석탄을 이용한 발전시설을 전면 금지하는 것을 입법화했다. 핀란드는 2029년 5월 1일 이후로 석탄을 연료로 한 전기 및 열 생산을 전면 금지하는 법을 2019년부터 발효했다. 정책적 의지만 있다면 방안은 만들면 된다.

 

둘째, 석탄발전의 비용에 환경오염을 제대로 부과해야 한다. 이는 온실가스 배출량이 많은 석탄발전이 과도하게 가동되는 '시장 왜곡'을 바로잡고 효과적 감축을 유도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 현행 전력시장은 발전원에 대해 아무런 기후변화 비용이 반영되지 않는 구조다. 그나마 배출권 거래제가 시행 중이지만, 배출권 가격도 급전 순위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상태다. 오로지 연료비만 따지는 '경제급전'만 작동 중이다. 온실가스 배출 비용을 전력시장 급전 순위 결정에 반영하는 '환경급전'을 조속히 시행할 필요가 있다. 배출권 유상할당 비율과 화력발전의 배출원단위 기준도 대폭 강화해야 한다. 아울러 석탄발전이 미세먼지의 다배출 오염원인 만큼, 대기오염 세제도 높여야 한다. 발전용 유연탄에 대한 개별소비세 세율을 대기오염 환경비용에 충분히 반영하도록 2배 수준으로 인상하는 개별소비세법 개정이 요구된다.


 

셋째, 석탄 사업에 대한 공적금융 지원을 중단하고 금지해야 한다. 2015년 노르웨이 연기금은 기후변화 대응 및 윤리적 투자를 위해 석탄 관련 기업에 대한 투자 중단과 철회를 선언했다. 전 세계적인 파슬 프리 캠페인(Fossil Free Campaign)에 1000개 이상의 투자기관이 동참했다. 반면, 한국산업은행 등 공적 금융기관은 최근 10년간 국내외 석탄발전 사업에 총 23조 원 규모의 금융을 제공하며 석탄 사업에 대한 주요한 자금 제공처 역할을 담당했으며, 석탄발전에 대한 금융 지원의 축소와 중단을 선언한 바 없다.


 

산업은행, 수출입은행, 무역보험공사, 국민연금 등 공적금융 기관의 사업 업무에 사회, 환경, 지배구조 등 사회책임을 고려하고 석탄발전 투자를 금지하는 기준을 포함시켜야 한다. 아울러 기후변화 영향이 큰 프로젝트에 대한 금융 지원을 결정하는 경우, 기후변화 비용을 포함한 경제성 평가를 의무화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건설 중인 석탄발전 사업을 중단하고 전환을 지원해야 한다. 현재 강원도 삼척과 강릉, 경남 고성, 그리고 충남 서천 등 지역에 건설 중인 7기의 대규모 석탄발전 사업이 중단 없이 그대로 추진돼 향후 30년 동안 가동된다면 연간 5160만 톤의 온실가스를 배출할 것으로 예측된다. 석탄발전소 건설과 장거리 송전선 입지로 인한 생태계 파괴와 주민 갈등도 더욱 심화되는 상황이다.


 

이대로 추가 석탄발전소를 건설하기보다는 매몰비용에 대한 보전을 통해서라도 중단시키는 방안이 공익적으로 편익이 높다. 방법이 없지 않다. 현행 전기사업법과 전력산업기반기금을 통해 석탄발전소를 포기하는 경우 보상책을 제공할 근거를 마련할 수 있다. 현재 건설이 진행 중인 석탄발전소를 멈춰 세우기 위해서는 강력한 의지를 모아야 한다. 국회는 건설 중 석탄발전 사업의 중단 및 전환을 위한 국회 결의안을 채택하고 지원 대책을 마련하는 데 머리를 맞대야 한다.

 



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0102612122427271#0DKU 프레시안(http://www.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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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여섯, 그는 자신에게 칼을 들이댄 동생의 '책임자'다

  • 분류
    아하~
  • 등록일
    2020/10/27 10:47
  • 수정일
    2020/10/27 10:47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조기현의 영 케어러 ③] 알코올 의존증 동생을 돌보는 청년형수씨의 이야기

20.10.27 07:07l최종 업데이트 20.10.27 07:07l
'가족 돌봄'을 말할 때 떠오르는 얼굴들은 '중장년'입니다. 하지만, 분명 한국 사회에도 아픈 부모나 가족을 돌보며 살아가는 청년들이 있습니다. 영국과 일본 등에서는 이들을 지칭하는 '영 케어러'(Young Carer)라는 개념이 있을 정도지만, 한국에서는 그저 '효녀', '효자'로 불릴 뿐 사회적 주체로 가시화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지난 10여 년간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직접 돌본 조기현 <아빠의 아빠가 됐다> 작가가 자신과 같은 한국의 영 케어러들을 찾아나섭니다. 돌봄이 형벌이 되지 않는 사회를 위해, 더 많은 청년들의 경험담을 기다립니다. 
(제보 - youngcarer90@gmail.com, jeor23@ohmynews.com)[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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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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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데없이 얼굴에 주먹이 날아들어 정신이 아득했다. 김형수(가명)씨가 다시 술을 먹겠다고 방을 나서려는 동생을 몸으로 막아선 직후였다. 방 안에 갇힌 동생은 주먹을 들어 올리며 "친다, 친다" 소리치며 형수씨를 겁줬다. 형수씨의 등 뒤에 서있던 외할머니는 "너한테 술 판 곳 찾아서 경찰에 신고할 거야!"라며 소리쳤다. 그 말이 기폭제가 된 것처럼 주먹이 뻗어 나왔다.

주먹을 날린 후에도 동생은 더 날뛰었다. 형수씨는 아득한 정신을 서둘러 부여잡았다. 그는 항상 정신이 아득해지는 일 앞에서도 제일 먼저 정신을 차려야 하는 '책임자'였다. 동생을 눕혀 온 몸으로 짓눌렀다. 평소에는 자신보다 더 힘이 셌지만, 지금은 만취 상태였다. 그렇게 잠잠해지는 것 같았다.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동생이 벌떡 일어났다. 비틀거리면서 부엌으로 한 발 한 발 다가갔다. 형수씨가 돌아봤을 때 동생의 손에는 끝이 번뜩이는 부엌칼이 쥐어져 있었다. 눈앞에 거슬리는 무엇이든 찌르려는 듯 형수씨를 노려봤다.  

한두 번 겪는 일은 아니었다. 동생은 이미 여러 번 칼을 빼들었다. 하지만 형수씨를 목표물로 여겼던 적은 처음이었다. 동생 19살, 그가 21살이 된 때였다. 그날 동생은 부엌칼로 형제 사이를 갈라놓았다. 그렇게 5년이 흘렀다.

"그때 마음이 아예 떠났어요. 얘랑은 아무 형제 관계도 아니고, 남남이구나 싶었죠."

알코올 의존자의 가족으로 산다는 것

언젠가 텔레비전 방송에 출연해 가족 돌봄의 어려움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나는 프로그램의 진행자에게 아버지를 돌보면서 힘들었던 순간들을 말했다. 가족 돌봄에 들어가는 시간과 비용이 만만치 않아 내가 원하는 삶을 살기에는 벅차다는 게 주된 내용이었다.

대부분 방송에서는 힘든 순간을 하나의 질병으로 환원하기를 원한다. 바로 '치매'다. 국가적 관심사이면서, 실제로 모두가 두려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아버지를 돌본 10년이란 기간의 전반부는 치매가 아니라 알코올 의존으로 고생했다. 알코올 의존으로 인한 아버지의 당뇨, 환각, 신부전 등이 나를 힘들게 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알코올 의존에 대해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순전히 개인의 '의지' 문제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알코올 의존은 마음만 굳건하게 먹으면 해결될 일처럼 느껴진다. 만약 그런 마음조차 없다면 알코올로 인해 몸 안에서 벌어지는 재난은 스스로 감당할 몫이라고 여기게 된다. 

실제로는 스스로 감당하지 않는다. 많은 가족들이 가족 구성원의 알코올 의존 때문에 고생한다. 내가 만나본 아픈 가족을 돌보는 청년들도 대부분 알코올 의존으로 돌봄의 전조를 감지했다. 질병은 이미 예약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가족들은 알코올 의존을 겪는 부모나 형제가 술을 마시지 못하도록 집에 있는 술을 버리거나 외출을 제한하기도 하고, 술을 끊을 수 있는 동기를 만들기 위해 마음의 정성도 쏟아본다. 그럼에도 당사자를 제어하지 못하고, 그가 술을 꾸준히 마시면서 시간이 흐른다. 그러다가 질병이 터져 나오면, 폭풍이 몰아치는 듯한 돌봄을 하게 된다.

지난 10월 15일, 인천 한 카페에서 95년생 김형수씨를 만났다. 형수씨는 알코올 의존이 한 가족에게 어떤 경험을 전해주는지 얘기해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한 청소년 기관을 통해 그를 소개받았다. 그는 주변에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숨기지 않았다.

이전에도 그는 한동안 동생의 알코올 의존을 해결하기 위해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는지 도움을 요청했다. 다만 세상에는 알코올 의존을 적극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창구가 많지 않았다. 알코올 의존은 세상의 관심 밖이었다. 다행히 그의 이야기를 기억하던 사회복지사가 그와 나를 연결해줬다.

동생의 첫 번째 책임자

때때로 새벽이면 동생이 길바닥에 널브러져 있다는 경찰의 연락을 받았다. 한두 번 겪는 일도 아니어서 무시하고 잠들고 싶었지만, 그런 전화를 한 번 받으면 긴 한숨이 나오는 동시에, 졸음이 달아난다. 그럴 때면 형수씨는 풀어진 정신을 주섬주섬 챙기며 경찰이 알려준 위치로 향했다.

어느 날은 집 앞 편의점에서 컵라면과 빨간 소주 4병을 쌓아두고 쓰러져 있는가 하면, 또 어느 날은 대중교통으로 1시간이나 되는 다른 동네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동생은 늘 혼자 술을 마셨다. 술에 취하면 순순히 형의 말을 듣지 않았다. 부축하려는 형수씨의 손은 뿌리치기 일쑤였다.

"그럼 보호자 분 왔으니까 저희는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동생과 실랑이를 벌이면 옆에서 지켜보던 경찰이 늘 하는 말이다. 형수씨도 경찰이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가 동생 곁에 있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일도 별로 없었다. 새벽녘에 해가 뜰 때면 동생에 대한 형수씨의 기대는 저물었고, 좌절감이 밀려왔다. 

그는 언제부터 동생의 삶에 금이 가기 시작했는지, 왜 그에게 의지가 사라졌는지 헤아릴 수 없었다. 어린 시절에 동생은 똑똑했고 체격도 좋았다. 어른들은 형수씨보다 동생을 더 예뻐했다. 그는 내성적이었고 늘 방어적이어서 친구를 사귀기보다 혼자 그림을 그리거나 게임을 했다. 반면 동생은 늘 사교적이어서 친구들이 넘쳐났다. 

그런 동생이 17살쯤부터 술을 먹기 시작했다. 소위 '비행 청소년' 집단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술과 담배는 늘 지니고 다니는 명찰 같은 것이었다. 후배들 돈을 갈취하거나 패싸움을 하는 건 일상이었다. 모두 집 밖에서 벌이는 일들이었다. 경찰서나 학교에서 연락이 오는 날이 아니면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조차 몰랐다. 
 
 그는 언제부터 동생의 삶에 금이 가기 시작했는지, 왜 그에게 의지가 사라졌는지 헤아릴 수 없었다. 다만, 동생은 17살쯤부터 술을 먹기 시작했다. (사진은 기사의 내용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습니다.)
▲  그는 언제부터 동생의 삶에 금이 가기 시작했는지, 왜 그에게 의지가 사라졌는지 헤아릴 수 없었다. 다만, 동생은 17살쯤부터 술을 먹기 시작했다. (사진은 기사의 내용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습니다.)
ⓒ 영화 파수꾼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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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형제는 초등학교 때부터 쭉 외갓집에 살았다. 부모님은 이혼했고, 아버지는 중학교 때 한 번 보고 만난 적이 없다. 결혼 생활의 생활비로 썼던 비용이 고스란히 어머니에게 빚으로 남았다. 이혼하고 지금까지, 어머니는 경기도 등지에 있는 공장을 다니며 기숙사 생활을 한다. 형수씨가 같은 집에 살고 밥을 먹고 생활한 사람은 할머니, 외삼촌 둘, 그리고 동생이었다.

할머니는 동생에게 늘 마음을 썼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술을 마시고 폭력적인 동생을 할머니가 제어할 수는 없었고, 만취해서 여기저기 드러누워 있는 걸 쫓아다닐 수도 없었다. 큰 외삼촌과 막내 외삼촌 모두 40대 중반을 넘겼지만 결혼은 하지 않았다. 큰 외삼촌도 알코올 의존이 심해서 스스로를 챙길 수도 없는 상태였고, 막내 외삼촌이 투잡을 뛰며 집안의 모든 생계와 부양을 담당했다. 외삼촌들은 매번 사고만 치고 다니는 동생을 곱게 보지 않았다. 

형수씨가 동생이 벌인 일들에 첫 번째 책임자가 되는 건 자연스러웠다. 선택하고 자시고 할 게 아니었다. 19살 때부터 밑 빠진 독에 물을 붓 듯이 동생이 벌이는 사고를 수습하러 다녔다. 그러다 그가 혼자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사고가 커지면 가족들에게 그 사항을 보고했다. 그럴 때면 무슨 명절처럼 어머니, 할머니, 외삼촌들, 자신이 한 자리에 모였다.

"안 마셔볼게" 단 한 번의 다짐 

20살이 된 형수씨는 대학에 들어가 학생회 활동에 열중했다. 사회복지 관련 학과였다. 어떤 결과물을 내기 위해서 협업하는 과정이 좋았다. 하지만 저녁 6시가 넘으면 여지없이 전화벨이 울렸다.

"형수야, 미안한데 집에 일찍 들어가서 동생 좀 봐줘."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이었다. 어머니는 자신이 동생을 돌보지 못하니, 형수씨라도 잘 돌봐주기를 바랐다. 반면 형수씨는 동생을 책임지고 싶지 않았다. 학생회 활동에 더 집중하려고 노력하던 때였다.

저녁이 돼서 친구들끼리 술을 마시거나 맛있는 걸 먹으러 갈 때, 그는 어머니 전화를 받고 몸을 일으켜야 했다. 전화기 너머로 어머니의 간절한 마음이 느껴졌고, 자신도 동생의 부모였다면 그랬을 것이라고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가 저녁마다 자리를 뜰 때면 아쉬워하던 친구들도, 어느 순간부터는 그를 으레 '집에 가는 애'라고 여겼다. 그렇게 이 집에 가면 동생이 술 먹으러 나가지 못하게 지키는 게 전부였다. 동생의 마음을 헤아리려고 노력해보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뭐가 그렇게 힘드니? 왜 계속 술을 마시니?"

그런 질문에 동생은 곧바로 입을 닫았다. 너무 많은 게 힘들어서 말을 않는 것인지, 술을 마시지 못하게 하려는 질문이라고 느낀 것인지는 모르겠다. 결국 형수씨는 동생의 마음의 문에 노크하듯이 '술 먹지 말고 좀 더 잘 살아보자'는 잔소리밖에 할 수가 없었다. 삶을 포기한 동생과 동생의 삶을 놓지 못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형수씨는 혼자 조난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안 마셔볼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동생이 그의 잔소리에 응답했다. 시커멓게 빛 하나 없는 망망대해를 떠돌다가 어디 등대라도 발견한 것 같았다. 동생의 의지를 함께 메워줄 사람들을 찾았다. 서둘러 알고 지내던 청소년 기관에 도움을 요청했고, 집 근처에 있는 사회복지관의 청소년 상담사를 소개받았다. 

하지만 동생의 말 한마디에 너무 큰 기대를 걸었던 걸까. 동생은 상담사의 전화에 잠수를 탔고, 다시 만취해서 집에 돌아오길 반복했다. 집에서 만취해 있던 큰 외삼촌과 밖에서 만취해 들어온 동생은 마주치면 크게 싸웠다. 외삼촌은 욕을 하면서 동생을 때렸고, 동생은 부엌에서 칼을 뽑아들며 외삼촌에게 욕을 퍼부었다. 기력도 없는 할머니와 형수씨가 외삼촌과 동생을 뜯어 말렸다. 알코올 의존이라는 구멍이 점점 커져서 집안 전체가 꺼질 판이었다.

기대를 거는 순간 상처를 입는다
 
  동생은 17살쯤부터 술을 먹기 시작했다.
▲  동생에게 기대를 거는 만큼, 더 감당하기 힘든 파국이 뒤따랐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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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이 잘 살 수 있을 거란 기대를 아예 접을 수는 없었다. 그건 애틋한 마음으로 거는 기대가 아니다. 모든 사태가 동생이 의지만 있으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현실 인식에 가까웠다. 기대는 일종의 투자와 비슷하다. 내가 이만큼 기대를 걸면 얼마만큼 보상이 따를 것이라는 마음의 공식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노력하고 계기를 만들어주면 알코올 의존을 겪는 사람이 도의적으로라도 성의를 보일 것'이라고 여기게 된다. 그러나 형수씨의 기대는 번번히 상처로 끝났다. 그는 19살 때부터 8년간 동생의 알코올 의존을 돌보며 온몸으로 이 사실을 깨달았다.

어느날 동생이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했을 때, 차라리 일이라도 하면 정신을 차리겠거니 했다. 하지만 편의점 카운터에 앉아서도 만취해서 정신을 잃었다. 동생이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친구들은 동생이 잠든 사이 물건들을 싹 다 훔쳐갔다.

분노한 점주는 동생과 친구들을 한데 묶어 특수절도죄로 고소했다. 형수씨는 동생이 감옥에 들어가서 정신 차릴 계기를 마련해야 한다고 호소했지만, 어머니는 기어코 동생의 합의금을 마련해줬다. 1000만 원에 가까운 돈이었다.

큰 외삼촌과 갈등이 극에 달하자 동생은 집에 쉽게 들어오지 못했다. 그때 형수씨는 차라리 잘 됐다 싶었다. 어디 고시원 방이라도 얻어 혼자 살아보면서 정신을 차릴 기회였다. 어머니에게 얘기해서 간신히 동생이 살 고시원을 구했다.

거기서 동생이 어떻게 지냈는지는 모른다. 병원 응급실에서 동생이 급성 췌장염으로 입원했다는 얘기를 듣고서야 술만 먹었겠구나 싶었다. 한동안 술을 마시지 않으면 계속 장기가 아프다고 했던 동생의 말도 떠올랐다.  

"의사가 막 다그쳤어요. 췌장염은 가족들이 잘 안 돌봐주면 죽는 거라고. 가족들은 이미 알코올 의존으로 다 지쳐 있는데."

동생에게 기대를 거는 만큼, 동생이 정신 차릴 계기를 마련한 만큼, 더 감당하기 힘든 파국이 뒤따랐다.

술 뒤에 삶과 가족

"좌절감도 있지만, 동생에 대한 분노도 너무 커요. 얘도 못 바꾸고 내 마음도 어떻게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인데, 과연 내가 사회복지 분야의 일을 할 수 있을까? 이런 의문들이 계속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요. 내가 일하다가 동생이랑 비슷한 비행 청소년을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하지?"

그는 지금 대학교 4학년이다. 원래는 사회복지 전공과 청소년 기관 활동 경험을 살려서 청소년 사회복지 쪽으로 걸어갈 예정이었다. 하지만 대학을 다니는 내내 동생을 돌보면서 겪은 경험들이 그의 발목을 낚아챈다.

여전히 동생이란 사람을 감당할 수 없고, 마주하는 것도 힘이 부친다. 또다시 전화벨이 울리며 경찰서나 병원에 가는 악몽이 시작될 것만 같다. 어쩌면 첫 번째 책임자의 임기는 동생이 죽을 때까지일지도 모른다.

동생은 급성 췌장염을 겪은 이후에도 계속 술을 몸속에 들이부었다. 몸은 만성 췌장염과 당뇨로 악화됐고, 지금은 병원에 입원했다. 몸이 악화되는 걸 계기삼아 그동안 미뤄두었던 정신병원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의사는 이미 동생의 뇌가 "술에 절여졌다"고 말했다. 통제력을 아예 잃은 상태라는 것이다. 동생은 올해 초 퇴원을 하려고 했지만, 코로나19가 터져서 아직 퇴원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퇴원하는 날이 다가오는 것 같아서 형수씨는 초초하다.

10대가 알코올 의존을 겪는다는 사실은 많이 이들에게 낯설 수 있다. 실제로 10대의 알코올 의존 비율은 다른 연령층에 비해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2019년 건강보험 심사평가원 '알코올중독 현황' 자료에 따르면, 10대 알코올 의존증 환자는 2014년 1588명에서 2018년 2106명으로 약 33%나 늘었다.
 
 10대 알코올 중독 현황.
▲  10대 알코올 중독 현황.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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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알코올 의존증 환자 증가의 원인으로는 청소년이 겪는 과도한 스트레스, 술에 관대한 음주문화, 술을 산 청소년은 처벌 받지 않고 사업주만 처벌받는 구조 등이 언급된다. 술에 대한 교육, 예방, 처벌 등을 강화돼야 청소년 알코올 의존이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조금은 다른 관점이 필요하다. 술은 여러 가지 표현 중에 하나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알코올 의존이 쉽사리 해결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술을 둘러싼 문화를 점검하는 것과 더불어 술 뒤에 감춰진 삶을 들여다봐야한다. 모든 중독과 의존에는 이유가 있다.

그 이유를 삶의 맥락에서 따라가 보지 않으면 중독과 의존은 술이 아니라 또 다른 것으로 표현될 수도 있다. 술뿐만 아니라 다양한 중독과 의존이 벌이는 사고들을 수습하는 가족이 있다. 형수씨는 말했다.

"병원에 가두는 것 말고 알코올 중독자를 케어할 수 있게 돕는 제도가 구체적으로 없어요."

형수씨와 나는 긴 침묵을 나눴다. '알코올 의존'이라는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술 뒤에 감춘 삶을 되짚어줄 사회가 우리에겐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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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용은 ‘대표이사 회장’이 될 수 있을까?

‘국정농단’ 파기환송심 부담으로 이사직 내려놔…‘사법 리스크’ 여전

조한무 기자 chm@vop.co.kr
발행 2020-10-26 18:59:48
수정 2020-10-27 08:4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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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 5월 6일 오후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서초사옥에서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 불거진 위법 행위에 대한 대국민 사과를 하고 있다. 2020.05.06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 5월 6일 오후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서초사옥에서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 불거진 위법 행위에 대한 대국민 사과를 하고 있다. 2020.05.06ⓒ민중의소리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지난 25일 별세했다. 본격적인 ‘이재용 체제’를 위한 작업이 추진될 전망이다. 그러나 이 부회장이 등기임원 선임에는 나서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의 불법 행위에 대한 재판이 진행 중이고 비판 여론도 높은 상황이다.

26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에 따르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담당업무로 부회장직을 맡고 있지만, 이사회에는 참여하지 않는 미등기임원이다.

(부)회장·(부)사장 등으로 표기되는 담당업무는 법적으로 규정된 직함은 아니다. 담당업무로서의 직함은 이사회 의결을 통해 부여된다.

대표이사를 비롯한 등기임원 선임은 다르다. 주주총회를 열어 일정 비율 이상의 주주 찬성표를 받아야 한다. 즉, 이 부회장이 ‘회장’이 되는 건 큰 무리가 없겠지만, ‘대표이사 회장’이 되는 건 쉽지 않다는 얘기다.

이 부회장은 2016년 책임경영을 내세워 사내이사를 맡았으나, 지난해 10월, 3년간의 임기를 마치고 이사직을 내려놨다. 2019년 10월 이 부회장이 박근혜 전 대통령 등에 뇌물을 준 혐의로 기소된 ‘국정농단’ 사건의 파기환송심이 시작됐다. 위법 행위에 대한 비판과 사법 리스크에 대한 우려, 국민연금과 해외 연기금 등 주주의 반대 가능성 등으로 연임을 시도하지 않았다는 분석이 당시 지배적이었다.

 

이 부회장에 대한 비판 여론은 1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하다. 이 부회장은 ‘국정농단’과 ‘경영권 불법 승계’ 두 건의 재판을 받고 있다. 지난 22일에는 경영권 불법 승계 사건 관련 첫 재판이 열렸다. ‘이재용 체제’는 주식시장과 재계가 걱정하는 ‘사법 리스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국정농단 사건은 파기환송심 재판은 지난 1월 중단됐다가 이날 다시 공판 준비기일이 열렸다.

두 재판 모두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의 이 부회장 불법 행위가 핵심 쟁점이다. 현재 삼성 지배구조는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을 통해 구축됐다. 삼성전자 지분이 적은 이 부회장은 삼성물산이 가진 삼성전자 지분을 확보하기 위해 합병을 추진했다. 합병과 관련해 이 부회장을 비롯한 경영진의 뇌물·횡령·배임 등 불법 의혹이 불거졌다. 검찰은 이 부회장이 최대주주로 있던 제일모직 가치를 높이고 삼성물산 가치를 낮추는 과정에서 불법이 행해졌다고 보고 있다.

이건희 지분 가치 18조원, 상속세 10조원 규모 추산
삼성생명법 통과 시 지배구조 개편 불가피

이 부회장은 재판 진행과는 별개로 지배력 강화 작업을 지속할 것으로 보인다. 일단 이 회장 지분을 상속받기 위한 세금을 마련해야 한다.

이 회장이 보유한 주식 평가액은 사망 직전 영업일인 23일 종가 기준으로 총 18조2천억원 수준이다.

이 회장은 삼성 지배구조 핵심 계열사인 삼성전자·삼성물산·삼성생명 3곳과 삼성SDS 지분을 보유했다.

지분 가치가 가장 큰 건 삼성전자다. 지난 6월 기준 이 회장은 삼성전자 보통주 2억4,927만주(지분율 4.18%)와 우선주 61만9,900주(0.08%)를 보유했다. 지분 가치는 이 회장 사망 직전 영업일인 23일 종가 기준 보통주 15조61억원, 우선주 330억원 수준이다.

삼성생명 지분 가치도 조 단위다. 이 회장이 보유한 삼성생명 주식 4,151만9,180주(20.76%)의 가치는 2조6,199억원 규모다.

삼성물산 지분은 542만5,733주(2.88%)로 가치는 5,643억원으로 추산된다. 삼성SDS 9,701주(0.01%)의 가치는 17억원 정도다.

이 회장 지분 상속에 따른 총 세액은 10조원 규모로 추산된다.

30억원 이상 상속 재산에 대한 세율은 50%다. 회장은 4곳 계열사에서 최대주주 또는 최대주주의 특수관계인으로, 상속세법상 최대주주 할증 대상이다. 과세 대상 지분에 할증률 20%를 적용한다. 여기에 상속인이 세금을 자진 신고하면 세액에서 3%를 공제한다.

다만, 주식 평가액은 사망 전·후 2개월씩 넉 달간의 종가 평균을 기준으로 산출해, 최종 세액은 향후 주가 변동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연부연납제도를 활용하면, 상속세를 신고할 때 6분의 1을 낸 뒤 나머지를 5년간 분할 납부할 수 있다.

삼성 소유지분도
삼성 소유지분도ⓒ공정거래위원회

이 회장 지분에 대한 상속이 삼성 지배구조 개편 과정에서 어떤 변수로 작용할지도 관건이다.

삼성 지배구조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삼성물산-삼성생명-삼성전자’의 출자구조를 주축으로 한다. 이 부회장은 지주사 격인 삼성물산 지분 17.33%를 가진 최대주주다. 삼성물산은 삼성생명과 삼성전자 지분을 각각 19.3%, 4.4% 보유하고, 삼성생명은 삼성전자 지분 8.5%를 가지고 있다. 이 부회장의 삼성전자 지분은 0.7%에 불과하나, 삼성물산을 고리로 지배력을 유지하고 있다.

삼성생명은 출자구조를 이루는 주요 계열사이나, 향후 관련법 개정에 따라 지배력 측면에서의 중요도가 축소될 수 있다. 현재 국회에는 일명 ‘삼성생명법’으로 불리는 보험업법 개정안이 발의돼 있다. 해당 법이 통과하면, 삼성생명은 총자산 3%를 초과하는 삼성전자 지분을 처분해야 한다. ‘금산분리’ 원칙을 바로잡자는 취지다. 이 경우 이 부회장이 삼성생명 지분을 보유하더라도 삼성전자 지배력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된다. 때문에 이 회장의 삼성생명 지분은 상속 과정에서 일부 매각될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삼성생명이 핵심 출자 구조에서 빠지게 되면 삼성물산이 삼성전자에 대한 직접 지분을 확보해야 한다. 이상헌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이날 ‘향후 삼성그룹 지배구조 변화 불가피할 듯’ 보고서에서 “삼성물산이 보유한 삼성바이오로직스 지분을 삼성전자에 매각하고 삼성생명이 보유한 삼성전자 지분을 매입할 수도 있다”며 “삼성물산이 삼성전자 지분을 얼마나 확보하느냐가 지배구조 변화의 핵심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조한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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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통일뉴스 창간 20주년, 해외에서 본 통일뉴스②] 강민화 재일 대동연구소 소장

  • 기자명 도쿄=강민화 
  •  
  •  입력 2020.10.27 00:42
  •  
  •  수정 2020.10.27 07: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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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20년

6.15공동선언이 발표되고 온 겨레가 통일열기로 들끓었던 시기에 세상에 태어난 [통일뉴스]가 창간 20주년을 맞은데 대해서 진심으로 축하한다. 뜻깊은 이날에 즈음해서 글을 쓸만한 남, 북, 해외 인사들도 많겠는데 나에게 ‘해외에서 본 통일뉴스’라는 주제로 글을 써달라니 참으로 영광이다.

그런데 이날을 기념해서 내가 글를 쓴다면 ‘통일뉴스와 더불어 20년’이라는 제목으로 쓰는 것이 더 어울릴 것 같이 느껴진다. 그만큼 나 자신과 통일뉴스와의 관계가 깊다고 자부하기 때문이다.

일본 도쿄 주오(中央)대학에서 열린 ‘10.4선언 발표 1주년 기념토론회’를 진행하고 있는 강민화 당시 평통협 홍보국장. [자료사진 - 통일뉴스]
일본 도쿄 주오(中央)대학에서 열린 ‘10.4선언 발표 1주년 기념토론회’를 진행하고 있는 강민화 당시 평통협 홍보국장. [자료사진 - 통일뉴스]

그 계기는 2003년 7월에 진행된 당시 통일뉴스 상임고문 김남식 선생(고인)의 일본에서의 강연 출연이었다. 강연은 가는 곳마다 호평이었다. 선생은 6.15공동선언의 당위성을 비롯해서 조선(한)반도의 평화와 통일문제에 대해서 소박하고 알기쉽게 말씀하시다가 도중에 개성관광이 화제에 올랐을 때 “나는 황진이를 사모합니다”라고 청중들을 웃기기도 하셨다.

그런데 참으로 아쉽게도 이때 기자가 동행하지 않았다. 그래서 서툴게나마 내가 기사를 쓰고 그것이 통일뉴스에 실리게 되었다. 아마도 재일동포가 남녘의 언론과 이렇게 공동작업을 한 것은 당시로서는 참으로 드문 일이 아니었을까.

이 공동작업을 계기로 훗날에 통일뉴스 기자들과의 만남이 실현되었으며, 그것이 일본 각지에서의 동포들과의 만남과 조선학교에 대한 방문취재, 그리고 내가 속한 조국평화통일협회(평통협=재일조선인평화통일협회라고도 한다)가 주최한 토론회를 비롯한 여러 행사들에 대한 취재 등으로 이어졌다.

물론 그전부터 통일뉴스는 재일동포들 속에서 널리 알려지고 애독되고 있었다. 그러나 동포사회에 대한 취재 범위가 넓어짐에 따라 재일동포 문제를 다루는 기사의 내용도 깊어져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통일뉴스 기자들이 일본에 올 때마다 그들을 안내하고 나름대로 편의를 제공한다고 했지만 마음뿐이지 그들이 불편한 점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통일뉴스가 재일동포 사회에 접근하는데 내가 다소나마 기여할 수 있었다면 참으로 다행스럽다.

키워드는 ‘민족’

이렇게 깊어간 나와 통일뉴스의 관계인데 그 키워드는 바로 ‘민족’이었다.

고 김남식 통일뉴스 상임고문이 6.15 3주년을 맞아 일본 도쿄에서 통일강연회를 가졌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고 김남식 통일뉴스 상임고문이 6.15 3주년을 맞아 일본 도쿄에서 통일강연회를 가졌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2006년 일본 도쿄에서 고 김남식 선생의 유지에 따라 『21세기 우리민족 이야기』의 일본어판이 출간돼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2006년 일본 도쿄에서 고 김남식 선생의 유지에 따라 『21세기 우리민족 이야기』의 일본어판이 출간돼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한 번은 김 선생으로부터 <통일뉴스>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남녘에서 인터넷이 본격적으로 보급되자 인터넷언론을 해보고 싶다고 찾아온 젊은이들에게 선생은 어용언론이 되지 않게 “당당하게 고생하자, 그러되 옳은 일을 하자”고 해서 통일뉴스가 출발을 하게 되었다, 활동방향은 특정한 단체나 이념에 기울어지지 않게 나가자고 했는데 그러자면 민족·민족자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고 말씀하셨다.

선생이 남녘에는 “민족이 밥 먹여 주느냐”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들에게 통일은 결국 민족문제가 아닌가, 통일을 지향하는 데서 단체나 계급의 이익에 집착하는 것은 소탐대실이라고 해왔다고 말씀하신 일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데 나와 통일뉴스 기자들과의 관계 역시 사상과 이념, 거주지역의 차이를 초월해서 조국통일이라는 지향을 공유하면서 동포애적으로 깊어갔었다.

그러한 민족적 연계의 결과물의 하나가 바로 일본에서 출판된 김 선생의 저서 『21세기 우리민족 이야기』의 일본어판이었다. 이 책은 원래 통일뉴스에서 먼저 출판되었다. 그후 선생은 자기 저서를 일본에서 번역출판하기를 희망하셨다. 그런데 그가 2005년 1월에 일본에서 천만뜻밖에 세상을 떠나고 이 말은 결국 유언이 되고 말았다.

책의 일문판은 이 유언에 따리 재일동포 유지들과 남녘의 여러 인사들을 편찬위원으로 해서 저자의 1주기에 출판되었다. 때문에 이 책은 말 그대로 ‘민족적 집체작’인 셈이다.

아낌없이 내놓은 ‘보물’

나와 통일뉴스의 연계를 실물로 보여주는 것은 그것 뿐 만이 아니다.

『인간 문익환』 집필로 인연을 맺은 고 박용길 여사와 2002년 10월 서울에서 만난 필자. [자료사진 - 통일뉴스]
『인간 문익환』 집필로 인연을 맺은 고 박용길 여사와 2002년 10월 서울에서 만난 필자. [자료사진 - 통일뉴스]

나에게는 통일운동을 하는 과정에 마련된 귀중한 ‘보물’이 있다. 그것은 일본에서 출판된 나의 첫 저서 『인간 문익환』(일본어)의 인연으로 서로 알게 된 늦봄 문익환 목사의 부인 박용길 여사(장로)와 내가 주고받은 편지, 그리고 여사가 나에게 보내준 문 목사의 시 ‘잠꼬대 아닌 잠꼬대’의 한 구절을 자필로 옮겨 쓴 액자이다.

나는 이 ‘보물’을 세상에 공개하지도 않고 여러 해 동안 소중히 보관해왔는데 2019년에 그것을 통일뉴스에 아낌없이 제공했다.

나는 저서 『인간 문익환』도 그렇고 자신의 ‘보물’을 세상에 공개할 바에야 문 목사와 박 여사에 대한 인물소개로 그칠 것이 아니라, 김일성 주석,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만남을 비롯해서 두 분이 단행했던 방북에 관한 이야기, 또한 거기에 반영된 북녘동포들의 통일의지, 민족대단결 사상에 대해서 남녘동포들은 물론 한사람이라도 더 많이 알리고 싶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나의 ‘보물’을 통일뉴스에서 널리 소개해준데 대해서 참으로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민족은 사라지지 않는다

나와 통일뉴스의 인연에는 또 하나의 추억이 있다.

고 김남식 선생과의 인연은 통일뉴스 임원들과의 인연으로 이어졌다. 2009년 4월 통일뉴스 이계환 대표(오른쪽)와 ‘북한의 민족 문제 및 민족주의 문제’를 주제로 인터뷰를 하고 있는 모습.  [자료사진 - 통일뉴스]
고 김남식 선생과의 인연은 통일뉴스 임원들과의 인연으로 이어졌다. 2009년 4월 통일뉴스 이계환 대표(오른쪽)와 ‘북한의 민족 문제 및 민족주의 문제’를 주제로 인터뷰를 하고 있는 모습.  [자료사진 - 통일뉴스]

내가 김남식 선생에게 앞으로도 더 많은 동포들을 만나보시고 좋은 강연도 해주셨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렸을 때였다. 선생은 “아니 나 같은 늙은이가 언제까지나 쥐고 앉아있어서는 안 된다, 창발성이 없어진다”고 굳이 사양하시는 것이었다. 그러시고는 내가 상임고문으로 있는 통일뉴스의 임원들이 대학을 나와서 노동운동을 하기도 했던 젊은이들인데 오히려 그들과 많이 만나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해서 서로 알게 된 우리이지만 어느새 20년 세월이 흐르고 나 자신도 이제 칠순을 넘게 되었다. 그리고 나와 공동작업을 하고 취재현장에 함께 가기도 했던 통일뉴스의 기자들도 ‘젊은이’라고 불리울 시기가 지나고 어떤 사람은 환갑을 넘었다. 그런데 민족의 간절한 염원이자 지상의 과제인 조국통일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참으로 안타깝기만 하다.

어렸을 때 부모님으로부터 너희들이 어른이 될 때면 조국통일이 다 이루어져 있을 것이라는 말씀을 들었던 내가 그때 부모님보다 더 나이를 먹게 되고 때로는 ‘내가 통일을 볼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그러나 비록 개개인의 육체에는 한계가 있지만 민족은 결코 사리지지 않는다.

창간 20년을 맞으면서 통일뉴스가 들었던 ‘민족과 함께 한 20년, 통일로 함께 갈 20년’의 슬로건이 그래서 몹시 인상에 남았다.

일본 도쿄에서 재일동포들이 대지진의 아픔을 딛고 “현 시점에서 다시 생각하는 ‘우리 민족끼리’”라는 주제로 2011년 5월 16일 6.15공동선언 발표 11주년을 기념하는 통일토론회를 개최했다. 맨 오른쪽이 필자. [자료사진 - 통일뉴스]
일본 도쿄에서 재일동포들이 대지진의 아픔을 딛고 “현 시점에서 다시 생각하는 ‘우리 민족끼리’”라는 주제로 2011년 5월 16일 6.15공동선언 발표 11주년을 기념하는 통일토론회를 개최했다. 맨 오른쪽이 필자. [자료사진 - 통일뉴스]

지난 20년 동안에 반통일세력에 의해서 한때 6.15시대의 흐름이 막혀버렸지만 그 기본정신인 ‘우리 민족끼리’가 4.27판문점선언을 통해서 우리 민족의 운명은 우리 스스로 결정한다는 민족자주의 원칙으로 계승되어 나왔다. 그러나 통일의 노정은 여전히 간고하고 복잡하다.

민족의 최대 염원이 이루어질 그날까지 통일뉴스가 반드시 창간 시의 초심을 관철할 것과 그 과정에 자기 활동에서 보다 큰 전진이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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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용 시대 본격 개막…지배구조 개편·사법문제 해소 시험대

등록 :2020-10-26 04:59수정 :2020-10-26 07:44

맞물린 상속·지배구조 문제 풀어야
심화된 경제 불확실성 ‘넘어야 할 산’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가운데)과 아들 이지호씨(오른쪽), 딸 이원주양이 25일 오후 서울 강남구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빈소로 이동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가운데)과 아들 이지호씨(오른쪽), 딸 이원주양이 25일 오후 서울 강남구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빈소로 이동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별세로 관심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앞으로 삼성을 어떻게 이끌어갈지에 쏠린다. 이 부회장은 2014년 이 회장이 쓰러진 뒤부터 이미 총수 역할을 맡아온 터라, 급작스러운 변화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상속’과 지배구조 개편 한데 맞물려이 부회장 앞에 놓인 가장 큰 위험 요인은 승계 문제와 관련한 ‘사법 리스크’이다. 현재 이 부회장은 국정농단 뇌물 사건 파기환송심과 삼성물산-제일모직 불법합병·회계부정 사건 등 두개의 재판을 받고 있다. 26일엔 서울고법 형사1부(재판장 정준영)의 국정농단 뇌물사건 파기환송심 재판이 예정돼 있다. 이건희 회장이 보유한 재산의 상속 과정도 변수다. 증권가에서는 이 회장이 가지고 있던 삼성전자 지분 4.18%를 비롯해 삼성생명(20.76%), 삼성물산(2.88%) 등의 상속재산가액이 약 18조원, 이에 해당하는 상속세만 약 10조~11조원에 이를 것으로 본다. 정대로 미래에셋대우 애널리스트는 지난해 11월 낸 보고서에서 “이 회장 보유 상장사 지분에 대한 상속세는 약 11조원 규모”라고 예상하며 “상속 과정에서 삼성전자 보유 지분에 대한 매각이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이 부회장과 특수관계인이 갖고 있는 지분 변동이 이뤄질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이 부회장은 6월 말 현재 그룹 주력 계열사인 삼성전자 지분은 0.7%만 들고 있다. 그의 그룹 지배력은 삼성물산-삼성생명-삼성전자로 이어지는 출자 구조에 기대고 있다. 이 부회장은 삼성물산의 최대주주(17.33%)다. 현재 이건희 회장 등 삼성전자의 대주주 및 특수관계인(계열사 포함)이 가진 지분은 모두 21.36%(우선주 0.25% 포함)이나, 주요 안건에 대한 의결권은 15%까지만 행사할 수 있다. ‘독점 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공정거래법)은 대기업집단 소속 금융·보험회사가 보유하고 있는 국내 계열사 주식의 의결권 행사에 대해 경영권과 관련된 주요 안건을 결의할 때 대주주 및 특수관계인이 가진 주식의 15%까지만 의결권을 적용한다고 돼 있다. 의결권을 온전히 쓸 수 없는 이 회장 보유 삼성전자 지분 일부를 이 부회장이 넘겨받은 뒤 매각해 상속세 비용을 치를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상속 과정에서 지주회사 체제로의 변환 등 현재 삼성에 요구되는 ‘정상적인 지배구조 개편’을 처리할 가능성도 남아 있다. 삼성생명이 보유한 삼성전자의 주식(8.8%)도 삼성이 풀어야 할 숙제다.
■ ‘반도체 비전 2030’ 등 경영능력 시험대 올라코로나19와 미-중 무역갈등, 반도체 산업 지형 변화 등 경제 불확실성도 이 부회장으로선 넘어야 할 또 다른 과제이다.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도 삼성전자의 올해 1~3분기 실적은 굳건했다. 그러나 최근 미국 정부는 화웨이에 이어 중국 반도체 기업 중신궈지(SMIC)에도 수출 규제를 내리면서 불확실성은 더욱 짙어진 상황이다. 최근에는 에스케이(SK)하이닉스가 10조원을 투자해 인텔의 낸드플래시 사업을 인수했고, 지난 9월에는 미국 반도체 기업 엔비디아가 일본 소프트뱅크그룹 자회사인 영국 반도체 개발 기업 에이아르엠(ARM·암홀딩스)을 총 400억달러(약 47조원)에 인수하는 등 세계 반도체 산업의 지각 변동도 진행 중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 부회장은 지난해 4월, 2030년까지 시스템 반도체(파운드리 및 칩설계) 글로벌 1위를 달성하겠다며 내놓은 ‘반도체 비전 2030’을 차질 없이 진행해야 하는 처지다.“저는 제 아이들에게 회사 경영권을 물려주지 않을 생각입니다. … 제 자신이 제대로 된 평가도 받기 전에 제 이후의 제 승계 문제를 언급하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지난 5월6일 삼성 준법감시위원회의 권고로 이뤄진 이 부회장의 사과에서 언론의 주목을 가장 많이 받은 대목이다. 당시 대부분의 언론은 ‘4세 경영권 미승계’에 방점을 뒀지만,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별세 이후 더욱 주목되는 부분은 바로 “제 자신이 제대로 된 평가도 받기 전”이라는 대목이다. 이 부회장은 당시 대국민 사과를 통해 아버지만큼의 경영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스스로 인정한 뒤 ‘앞으로의 자신의 역할’을 강조하며 본격적인 경영 행보에 나설 것을 예고했다.이후 이 부회장은 중국 시안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을 찾은 것을 시작으로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과의 두차례 회동, 네덜란드 반도체 장비 회사 에이에스엠엘(ASML) 방문, 베트남 아르앤디(R&D)센터 공사 현장 방문 등 광폭 행보를 이어오고 있다. 이 회장의 별세로 이 부회장은 이제 본격적인 경영 능력 평가 시험대에 오르게 됐다.송채경화 기자 khsong@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economy/marketing/967189.html?_fr=mt1#csidx85031e88e3977b4a1d38d6fb238eb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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