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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당겨진 3차 남북정상회담…‘북-미 교착’ 돌파구 찾아라

앞당겨진 3차 남북정상회담…‘북-미 교착’ 돌파구 찾아라

등록 :2018-08-13 05:00수정 :2018-08-13 10:10

 

 

북미회담 불씨 살린 2차회담처럼
비핵화 협상 뚜렷한 진전 없자
남북 ‘가을 이전’ 만남 필요성 커져
당국자 “환경을 만들려고 하는 회담”

북 공화국 70돌·유엔총회 개막 등
9∼10월 바쁜 일정 감안 가능성도
남북노동자통일축구대회가 11일 오후 서울 마포구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열려 경기 시작에 앞서 ‘판문점 선언 그리고 다시 만나다’라는 주제로 축하공연이 열리고 있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남북노동자통일축구대회가 11일 오후 서울 마포구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열려 경기 시작에 앞서 ‘판문점 선언 그리고 다시 만나다’라는 주제로 축하공연이 열리고 있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남북 정상이 이르면 이달 말 평양에서 3차 정상회담을 열 것으로 알려지면서, 예상보다 이른 ‘조기 정상회담’ 배경에 관심이 모이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번 3차 정상회담은 5·26 2차 정상회담처럼 ‘정세 돌파’를 위한 회담으로 보고 있다.

 

청와대 사정에 밝은 정부 고위 소식통들은 “남북 사이에 그동안 상당한 물밑 협의를 통해 시기와 장소는 뜻을 모았지만, 의제 등은 충분히 숙성되지 않은 듯하다”고 전했다. 한 정통한 소식통은 “(북-미 관계 진전 등) 환경이 갖춰져 회담을 한다기보다는, 환경을 만들려고 하는 회담으로 보는 게 맞을 듯하다”고 짚었다.

 

6·12 북-미 싱가포르 정상회담 이후 ‘비핵화’와 ‘종전선언’을 두고 교착 상태에 빠진 북-미 관계의 진전을 위해,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애초 합의한 ‘가을’보다 서둘러 만날 필요성이 생겼다는 설명이다. 앞서 김 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북-미 정상회담에서 한반도 비핵화와 적대적 관계 해소에 합의한 바 있으나, 북쪽의 핵·미사실 시설 폐기와 미군 유해 송환, 한-미의 연합 군사훈련 유예 조치 외에는 뚜렷한 진전이 없는 상태다. 미국은 비핵화의 첫 조처로 현재 보유 중인 핵·미사일 시설 목록을 요구하고 있고, 북쪽은 체제안전 조처로 종전선언을 먼저 요구하면서 양쪽이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형국이다.

 

이번 3차 회담은 힘겨루기 중인 북-미 사이를 한국이 오가며 ‘오해’를 해소하려는 노력이 나름 성과를 거둔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북-미가 서로의 요구를 앞세우며 6·12 북-미 정상회담 합의 이행이 난항에 빠진 만큼, 문 대통령이 다시 중재력을 발휘할 시점이라는 얘기다. 현재로선 남북, 북-미 관계를 진전시킬 방안이 뚜렷이 마련된 것은 아니라는 게 소식통들의 전언이지만, 일단 교착 국면인 현 상황을 돌파해야 한다는 데에 남북 정상이 강한 의지를 갖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남북 정상은 지난 5월26일 판문점에서 2차 ‘번개회담’을 통해, 당시 취소될 뻔했던 북-미 정상회담의 불씨를 되살린 바 있다.

 

이와 함께 남북 정상은 9월, 10월에 집중된 국내외의 바쁜 일정을 고려했을 가능성도 있다. 9월9일은 북한이 대대적으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 70돌’로, 북은 이를 기념하는 대규모 행사를 치를 가능성이 있다. 김정은 위원장은 올해 신년사에서 이날을 평창 겨울올림픽과 함께 “민족적 대사”라고 언급한 바 있다. 김 위원장으로선 9·9절을 앞두고 ‘손에 잡히는 성과’가 필요하다.

 

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9월11~13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리는 동방경제포럼에 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을 초청했다. 문 대통령은 애초 불참하는 쪽으로 기울었지만, 김 위원장이 러시아를 방문할 경우엔 사정이 달라진다. 9월18일부터는 미국 뉴욕에서 유엔총회가 개막하는 등 문 대통령의 외교 일정도 빼곡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문 대통령은 실무진에게 ‘가을 평양 방문’이라는 판문점 선언 합의와 관련해 “가을이라는 문구상 표현에 얽매이지 말고 8월말까지로 폭을 넓혀서 검토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김보협 기자, 이제훈 선임기자 bh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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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지지율 하락과 국민연금 논란

시장원리 확대가 아닌 총체적 대안으로 국민 설득해야김민하 / 저술가 | 승인 2018.08.13 09:29
 

지방선거 직후만 해도 ‘1당’의 시대가 오는 분위기였는데 꼭 그런 건 아닌 모양이다. 문재인 대통령 국정지지율 하락세가 뚜렷해지면서 심상찮은 분위기다.

물론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율 하락은 국정 수행의 심각한 문제를 불러올 수준은 아니다. 이전의 70%대 지지율은 지나치게 높은 수준이었다. 이전 정권 파행의 반사이익이 상당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득표율은 40%를 넘는 수준이었다는 걸 돌아보면, 비록 대선에서 적극적으로 지지하지 않았던 계층도 훼손된 국가적 기능의 정상화를 요구하는 기대를 갖고 있다는 점이 수치에 반영되었던 게 아닌가 한다.

문재인 대통령 지지율 하락이 제1야당 지지율 상승으로 이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도 당분간 지켜볼 대목이다. 자유한국당은 파행적 국정운영의 당사자로 ‘집권 자격’의 문제를 의심받고 있다. 2020년을 경유하면서 야권 전반이 이런 저런 정계개편의 과정을 거치게 되겠지만 이런 상태라면 성과를 장담할 수 없다고 봐야 한다.

오히려 진보정당인 정의당으로 일부 지지층이 이동한 측면이 눈에 띈다. 노회찬 의원의 사망 이후에 기존의 진보적 유권자층을 넘어 중도층 일부까지 정의당을 지지하는 흐름이 강화된 것으로도 보인다. 정책과 노선을 둘러싼 본격적 논쟁이 시작되면 조정 국면은 피할 수 없을테지만 향후의 정치 지형이 중도적 정부 여당과 진보적 야당이라는 구도로 재편된다면 한국 정치 전반에는 그 이상 좋을 일이 없을 것이다.

다만 정치 세력 간 지형의 변화가 유권자 층의 변화와 일치하느냐는 두고 볼 문제다. 현대정치에서 반복되는 교훈은 정치 세력 간 관계의 변화를 유권자들의 성향 변화와 혼동할 경우 현실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예측하지 못한 파국을 맞게 될 수 있다는 거다. 지금처럼 보수야당의 범야권과 진보-중도적인 범여권의 대결구도가 붕괴한다고 해서 한국 유권자들의 이념지형이 중도 대 진보로 변화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걸까?

문재인 정권 들어 눈에 띄게 빈번해지는 ‘신호’들은 문제가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암호화폐, 남북단일팀, 입시제도, 난민, 전기요금 누진제 등에 대한 논란이 그렇다. 불만에 찬 대중이 바라는 것은 언뜻 보기에 시장원리의 확대인 것 같다. 앞서의 쟁점에서 두드러진 요구가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는 조건을 보장하고 노력에 따른 보상을 요구하는 것이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런 요구의 이면에는 경쟁에서 탈락한 사람은 보잘 것 없는 보상에 만족해야하고, 그 이상을 바라는 ‘무임승차자’는 응징과 배제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존재한다.

자유한국당의 김병준 비대위원장이 느닷없이 ‘국가주의’ 프레임을 들고 나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문재인 정권의 접근법은 국가가 나서서 격차를 해소하는 인위적인 방식이기 때문에 부작용이 있을 수밖에 없으므로, 자신들은 민간 자율에 맡기는 ‘자율주의’를 내세우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자율주의’는 이탈리아 사람들이 제기한 정치철학과는 관계가 없고, 지금까지 ‘신자유주의’로 불려온 정책 노선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

물론 앞서 말한 것처럼 이런 시도가 당장 어떤 정치적 성과로 이어질 것 같지는 않다. 그런데 적어도 분명한 건 김병준식 접근법이 어쨌든 지금의 정치적 한계 내에서 우파가 취할 수 있는 정공법에 해당할 수는 있다는 거다. 굳이 자유한국당이 내세우고 있어서 반향이 없는 것이지, 메시지 자체는 무시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지 않나 한다.

공적연금강화국민행동 회원들이 7월 10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국민연금 급여인상 사회적 논의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국민연금을 둘러싼 논란에서도 이런 구도는 반복되고 있다. 국민연금 제도발전위원회가 국민연금 보험료율 인상과 가입 연령 상향을 논의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자 반발이 커지는 걸 보면 그렇다. 국민연금 제도발전위의 안은 저출산 고령화로 연기금 고갈 시점이 애초 계산보다 빨라졌다는 평가를 근거로 한 것이다.

저출산 고령화는 우리 사회가 복지제도로 감당해야 할 인구가 늘어나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 꼭 국민연금의 차원이 아니더라도 이 조건은 당분간 변하지 않을 전망이다. 국민연금은 전체 국민을 대상으로 따졌을 때 낸 돈보다 많이 돌려받도록 설계돼있다. 이런 조건을 종합하면 연기금의 고갈은 어느 시점이든 예정돼있을 수밖에 없다. 이 시점을 경과하기 전에 적립식에서 부과식으로의 변경 등이 불가피하다는 게 지금까지 되풀이 되어 온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제도발전위의 안을 놓고 연금을 더 많이 더 오래 내라는 것이냐는 반발이 나오지만, 국민연금의 특성상 개인의 입장에서 볼 때 더 내면 돌려받는 액수가 늘어나는 측면도 있지 않느냐는 반론도 있다. 그 외에 이런 저런 쟁점이 있지만 핵심을 간추리면 더 내고 더 받느냐, 덜 내고 덜 받느냐의 문제로 수렴된다. 만일 국민연금 개혁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면 이 대목에서 이뤄져야 한다. 덜 내고 덜 받는 방식이 선택된다면 이를 보완할만한 다른 복지제도의 강화와 노동조건의 변화도 함께 고려하는 게 올바른 방향이다.

그런데 사람들의 반발은 이런 논의와는 별 관계가 없어 보인다. 크게 나누자면 두 가지다. 하나는 국가가 시키는 대로 연금을 꼬박꼬박 내왔고 노후보장을 기대하고 있는데 연금 지급 연령을 늦추면 상대적으로 손해라는 중장년층의 반발이다. 다른 하나는 연기금 고갈로 국민연금의 혜택을 아예 받을 수 없게 될지도 모르는데 누구를 위해서 연금을 내겠느냐는 상대적으로 젊은층의 반발이다. 이 두 가지 정서가 뒤섞여 ‘국민연금 폐지론’으로 분출되고 있다.

사람들이 바라는대로 국민연금을 없애버리면 가장 이득을 보는 것은 국민연금의 절반을 부담해 온 기업이다. 국민연금의 틀을 벗어나 각자도생하면 살아남는 것은 상대적으로 풍족한 사람들이다. 즉, 국민연금 폐지론은 시장원리 강화 요구라는 맥락으로 봐야 한다. 심지어 자영업자들은 이런 구도 안에서조차 소외된 채로 ‘국민연금 폐지론’에 심정적 동의를 표하는 상황이다.

당장 국민연금 기금운용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는 비판은 있을 수 있지만 수익률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평가할 일이다. 연기금 수익률 제고의 고전적 논리는 좀 더 공격적인 투자에 나서라는거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란 얘긴데, 금융자본 입장에선 좋은 얘기지만 국민이 낸 연금을 투자에 함부로 동원한다는 비판과는 맞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렇게 보도하는 것은 국민연금에 대한 불만을 정파적 방식으로 소화하겠다는 의도일 것이다.


보수언론의 ‘공포마케팅’은 국민연금 폐지론에 불이 붙는 주요 통로 중 하나인데, 요즘에는 한 발 더 나가는 분위기다. 문재인 정권이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 인사를 제대로 하지 못해 수익률이 급격히 떨어졌고 이것이 연기금 고갈을 앞당기고 있다는 것이다. 국민연금공단이 전주로 이전해 인력이 이탈한 게 문제라는 지적도 함께 나온다.

국민연금을 둘러싼 논란은 다수의 국민들이 현실의 불만을 해소할 방법을 시장원리 확대에서 찾고 보수세력이 이를 추동하며 정부 여당의 중도적 부위는 이에 무력한 현실을 보여준다. 이런 상황 속에서 진보적인 정치가 적절한 총체적 대안을 내놓고 호소하지 않으면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무게추가 급격히 쏠릴 수 있다. 일희일비 하거나 조급해하는 게 아니라 흔들림 없는 장기적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

김민하 / 저술가  webmaster@media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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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태평양전쟁, 2018년 태평양지배체제

[개벽예감 310] 1945년 태평양전쟁, 2018년 태평양지배체제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기사입력: 2018/08/13 [09:26]  최종편집: ⓒ 자주시보
 
 

<차례>

1. 태평양전쟁 종전, 태평양지배체제 성립

2. 퀘벡비밀군사회담의 내막

3. 전세를 바꿔놓은 미국군의 악전고투 118일 

4. 미국이 규슈상륙 포기하고 핵폭탄개발에 매달린 사연

5. 소련의 대일전쟁, 조선의 조국해방전투, 미국의 핵폭탄투하

6. 73년 묵은 태평양지배체제가 흔들리고 있다

7. 모든 문제는 종전과 철군으로 귀결된다

 

 

1. 태평양전쟁 종전, 태평양지배체제 성립

 

해마다 8월 15일은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지강점에서 해방된 날이다. 일왕 히로히또(裕仁)는 1945년 8월 15일 정오 <NHK> 라디오방송을 통해 이른바 ‘대동아전쟁종결의 조서(詔書)’라는 문서를 읽어 내려간 녹음방송을 내보냈다. 사람들은 그 녹음방송을 일제의 항복선언이라고 알고 있지만, ‘조서’에서 항복이라는 단어는 찾아볼 수 없다. ‘조서’는 어려운 한자말로 작성되었을 뿐 아니라, 1940년대의 저급한 라디오방송 송출기술 때문에 무슨 소리를 중얼거리는지 청취하기 힘들었고, 그래서 그 방송내용을 정확히 알아들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주목되는 것은, 그 ‘조서’가 대일전쟁에서 승리한 국제연합군에게 보내는 항복선언이 아니라 일본 국민에게 보내는 대국민담화였다는 사실이다. 그러했으니 항복이라는 단어가 ‘조서’에 들어있을 리 없었다. 

 

그렇지만 항복의사를 간접적으로 표시한 것으로 해석될 만한 문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조서’에는 일왕 히로히또가 미국, 소련, 영국, 중국에게 공동선언을 수락한다는 뜻을 통고할 것을 일본제국정부에게 지시하였다고 서술한 문구가 들어있었다. 그가 ‘조서’에서 언급한 공동선언이라는 것은 1945년 7월 26일 미국, 소련, 영국, 중국이 일제에게 항복을 요구하였던 포츠담선언(Potsdam Declaration)을 뜻한다. 하지만 당시 포츠담선언이라는 말을 들어보지 못한 일본 국민들은 일왕 히로히또가 ‘조서’에서 간접적으로 항복의사를 표시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었을 뿐이다. <사진 1> 

 

▲ <사진 1> 이 사진은 1945년 8월 15일 정오 '대동아전쟁종결의 조서'를 읽어내려간 일왕 히로히또의 녹음방송이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오자 일본인들이 머리를 숙인 장면이다. '조서'는 대일전쟁에서 승리한 국제연합군에게 보내는 항복선언이 아니라 일본 국민에게 보내는 대국민담화였다. '조서'에는 1945년 7월 26일 미국, 소련, 영국, 중국이 일제에게 항복을 요구하였던 포츠담선언을 수락한다는 내용이 들어있는데, 그것이 항복의사를 간접적으로 표시한 유일한 대목이었다. 일제가 도꾜만 앞바다에 정박한 미국 해군 미주리함 함상에서 미국에게 무조건 항복한다는 항복문서에 조인한 날은 1945년 9월 2일이었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그로부터 73년이 흘렀다. 일제의 무조건 항복으로 끝난 그 전쟁을 오늘 다시 논하는 까닭은, 우리 민족이 겪는 고통과 불행의 화근인 한반도 분단을 태평양전쟁 종전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73년 전 일제의 무조건 항복으로 종전된 그 전쟁은 어떤 전쟁이었던가? 일제가 대동아전쟁(大東亞戰爭)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하기 시작한 때는 1940년 7월 26일이었다. 그러나 전쟁에서 승리하여 일본을 점령한 미국 점령군사령부는 1945년 12월 15일부터 점령지에서 대동아전쟁이라는 말을 쓰지 못하게 금하면서 그냥 전쟁이라는 말만 쓰도록 조치하였다. 얼마 뒤부터 미국은 그 전쟁을 태평양전쟁(Pacific War)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고, 그 전쟁명칭은 굳어져버렸다. 

 

전쟁명칭에 전쟁목적이 비껴있다. 미국이 그 전쟁에서 노린 목적은 일제를 패망시키고 태평양을 장악하여 그 대양을 자국이 지배하는 ‘미국해(American Sea)’로 만들려는 것이었다. 당시 미국은 태평양과 아시아대륙을 모두 점령할 전쟁능력을 갖지 못했으므로, 미국의 야욕은 태평양을 지배하려는 것이었다. 1897년에 하와이왕국을 병탄한 미국은 당시 서태평양을 지배하던 에스빠냐(스페인이라는 미국식 국호를 쓰지 말고, 그 나라의 정식 국호를 써야 함)를 상대로 1899년부터 1902년까지 전쟁을 벌여 필리핀과 괌(Guam)을 점령하고 태평양지배권을 틀어쥐었다.  

 

그런데 1941년 12월 1일 일왕 히로히또는 전시각료회의에서 전쟁을 태평양으로 확전하기로 결정하였고, 그 결정에 따라 일본군이 1941년 12월 8일 새벽 하와이 진주항(Pearl Harbor라는 지명은 진주만이 아니라 진주항으로 번역해야 함)을 기습공격하여 미국의 태평양지배권에 도전하였다. <요미우리신붕> 2018년 7월 23일 보도에 따르면, 일본군의 진주항 기습공격을 몇 시간 앞둔 1941년 12월 7일 오후 8시 30분경 일본 총리 도조 히데끼(東條英機)는 “(일본은) 이미 이겼다”고 떠들어대며 망상에 빠졌다고 한다. 망상은 치명적인 오판이었다. 그들은 태평양전쟁이 일본의 패망과 미국의 일본점령으로 끝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태평양전쟁에서 미국의 전략목표는 일본을 점령하고 태평양지배체제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이미 필리핀과 괌을 점령하고 서태평양 남부해역을 장악한 미국은 일본점령을 태평양지배체제를 완성하는 마지막 단계라고 생각했다. 미국의 일본점령은 1951년 9월 8일 쌘프랜시스코 강화조약 이후 미국군의 무기한 일본주둔으로 변형되었다. 태평양지배체제는 지난 73년 동안 변함없이 유지되어왔다. 

 

 

2. 퀘벡비밀군사회담의 내막

 

일본의 진주항 기습공격으로 선제타격을 받은 미국은 비밀군사회담에서 일본점령을 태평양전쟁의 전략목표로 확정하였다. 그 비밀군사회담은 1943년 8월 17일부터 24일까지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로저벌트(Franklin D. Roosevelt, 루즈벨트라는 한국식 발음표기는 오류)와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이 캐나다 퀘벡시에서 만난 퀘벡비밀군사회담(Quebec Secret Military Conference)이다. 원래는 이오시프 비싸리오노위쯔 쓰딸린(Иосиф Виссарионович Сталин, 조섭 스탈린이라는 발음표기는 미국식으로 왜곡된 것)도 퀘벡비밀회담에 참석하기로 했으나, 소련군과 독일군이 격렬하게 싸운 쿠르스크전투(Battle of Kursk)가 1943년 7월 5일부터 8월 23일까지 계속되는 바람에 참석하지 못했다. 처칠은 캐나다 총리 맥켄지 킹(Mackenzie King)도 비밀회담에 참석시키려고 하였지만, 로저벌트가 반대하는 바람에 맥켄지 킹은 의전행사에만 얼굴을 내밀었다.  

 

퀘벡비밀군사회담에서 로저벌트와 처칠은 전쟁수행에 필요한 일본의 전략자원(석유, 철강, 식량)을 소모시키기 위한 전쟁전략, 일본렬도상륙을 위한 공격거점을 확보하는 전쟁전략을 검토했다. 미영합동참모본부가 1942년 8월에 공동으로 작성한 ‘일본을 타파하기 위한 평가와 계획(Appreciation and Plan for the Defeat of Japan)’이라는 제목의 전쟁계획서에는 일본렬도에 상륙하는 작전계획이 들어있지 않았는데, 퀘벡비밀군사회담에서 일본렬도에 상륙하여 일본을 점령하는 것이 전쟁목표로 정해졌다. <사진 2>

 

▲ <사진 2> 이 사진은 1943년 8월 17일부터 24일까지 캐나다 퀘벡시에서 진행된 퀘벡비밀군사회담 중에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로저벌트,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 캐나다 총리 맥켄지 킹이 의전용으로 촬영한 사진이다. 원래는 이오시프 비싸리오노위쯔 쓰딸린도 그 회담에 참석하기로 했으나, 유럽전선의 전황이 복잡해서 참석하지 못했다. 맥켄지 킹은 의전행사에만 얼굴을 내밀었고, 회담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그 비밀군사회담에서 로저벌트와 처칠은 일본상륙을 위한 공격거점을 확보하는 전쟁전략을 검토했다. 이것은 미국과 영국이 일본에 상륙하여 일본을 점령하는 것을 전쟁목표료 정하였음을 말해준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당시 미영합동참모본부가 작성한 기밀문서에 따르면, 미국 전쟁부(War Department)에서는 독일이 항복하면 1년 안에 일본의 항복을 받아내야 한다는 것에 대해 의견이 일치하였지만, 미국 해군과 육군 사이에서 대일전쟁전략을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고 한다. 당시 미국군에는 육군과 해군만 있었고, 공군은 없었다. 미국 해군은 일본에 대한 해상봉쇄와 공중폭격을 주장하면서, 중국 샹하이(上海)와 조선에 있는 일본군 항공기지들을 점령하여 일본렬도를 폭격하기 위한 공격거점을 확보하는 전략을 내놓았다. 하지만 미국 육군은 그런 전략은 전쟁의 장기화와 엄청난 인명손실을 불러올 뿐이라고 반대하면서, 대규모 공격력으로 일본렬도를 직접 타격하는 전략을 꺼내놓았는데, 전략논쟁은 결국 육군의 승리로 끝났다.  

 

당시 미국군이 일본렬도에 상륙할 수 있는 지대는 두 군데였다. 하나는 일본렬도 서남부에 있는 규슈(九州)남부 해안지대였고, 다른 하나는 일본렬도 중앙부에 있는, 수도권으로 연결되는 간또(關東)지방 해안지대였다. 그래서 미영합동참모본부는 일본을 두 단계에 걸쳐 점령하는 작전계획을 세웠다. 먼저 규슈를 점령하여 그 지역의 항공기지들을 장악한 다음, 그 항공기지들에서 출격한 폭격기들의 지원을 받는 25개 사단이 도꾜만(東京灣)에 상륙하는 작전계획이었다. 규슈점령작전을 올림픽작전(Operation Olympic)이라고 불렀고, 도꾜만상륙작전을 코로닛작전(Operation Coronet)이라고 불렀다. 규슈를 점령하는 올림픽작전 개시일은 1945년 11월 1일로 예정되었고, 도꾜만에 상륙하는 코로닛작전 개시일은 1946년 3월 1일로 예정되었다. 

 

 

3. 전세를 바꿔놓은 미국군의 악전고투 118일

 

미영합동참모본부가 1945년 11월 1일과 1946년 3월 1일로 예정한 전쟁일정을 대폭 앞당겨야 하는 사정이 생겼으니, 그것이 바로 얄타회담(Yalta Conference)이다. 

1945년 2월 4일부터 11일까지 흑해 북쪽 크림반도의 얄타에서 로저벌트, 쓰딸린, 처칠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된 얄타회담에서 쓰딸린은 독일이 항복하는 경우 2~3개월 뒤에 대일전쟁을 개전하겠노라고 약속하였다. 유럽전선에 배치된 소련군 병력과 전투장비를 대일전쟁을 벌일 원동지역(Far East라는 지명에서 Far는 멀다는 뜻이므로 극동지역이 아니라 원동지역으로 번역해야 함)으로 이동시키려면 2~3개월 걸릴 것으로 예상한 것이었다. 

 

쓰딸린이 대일전쟁 참전을 약속하자 미국은 불안감을 느꼈다. 왜냐하면 미국보다 한 발 앞서 소련이 일본을 점령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일본점령이라는 전쟁목적을 놓고 미국과 소련이 치열한 경쟁을 벌인 태평양전쟁 말기의 상황은 그렇게 조성되었다. <사진 3> 

 

▲ <사진 3> 이 사진은 1945년 4월 1일부터 82일 동안 계속된 오끼나와전투의 한 장면이다. 미국 해병대 전투원들이 지친 모습으로 주저앉아 있다. 미국이 일본을 점령하려면 규슈 남부에 상륙하여, 그곳을 공격거점으로 삼고 일본 혼슈를 폭격해야 하였는데, 그렇게 하려면 오끼나와부터 먼저 점령해야 하였다. 미국군은 오끼나와전투에서 엄청난 인명손실을 입고, 수많은 전투장비를 잃으며 82일 동안 악전고투했다. 미국이 오끼나와전투에서 고전하고 있었던 1945년 5월 8일 나치 독일이 미국과 소련에게 항복하였다. 나치 독일의 항복은 쓰딸린의 얄타회담 약속이행을 추동하는 결정적인 계기로 되었다. 그 약속이행에 따라 소련군은 늦어도 1945년 8월 초순까지는 원동지역에 집결하여 대일전쟁을 개전하게 되어 있었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소련과의 경쟁을 의식한 미국은 규슈점령을 예정일보다 크게 앞당기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전황은 미국의 욕망을 따라주지 않았다. 미국군이 규슈에 상륙하려면 우선 오끼나와(沖繩)를 점령해야 했고, 오끼나와를 점령하려면 이오섬(硫黃島)부터 점령해야 했다. 이오섬은 도꾜에서 남쪽으로 1,050km 떨어진 태평양에 떠 있는, 면적이 21㎢밖에 되지 않는 작은 섬이다. 사정이 급해진 미국군은 얄타회담이 끝난 날로부터 8일이 지난 1945년 2월 19일 이오섬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10일이면 점령할 것으로 예상했던 그 섬에서 미국군은 고전하였다. 미국군이 병력 110,000 명과 각종 전투함선 500여 척을 동원하여 공격한 이오섬전투는 1945년 2월 19일부터 3월 26일까지 무려 36일 동안이나 격렬하게 계속되었다. 그 전투에서 미국군 6,821명이 전사하였고 21,865명이 전상했으며, 일본군 20,129명이 전사하였고, 1,083명이 포로로 붙잡혔다. 

 

조급증에 사로잡힌 미국은 태평양전쟁을 하루빨리 끝내기 위해 일본의 심장부를 공격하였다. 1945년 3월 10일 새벽 미국군 B-29 폭격기 344대가 3시간 동안 도꾜에 소이탄 2,400t을 퍼부었다. 거대한 폭탄화염 속에서 100,000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일제가 징용으로 그 지역 군수공장에 끌어간 조선인 10,000여 명도 미국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희생되었다. 

 

그러나 전쟁은 무차별 폭격으로 끝나지 않았다. 일제는 이른바 ‘국체호지(國體護持, 나라를 보호하고 지킨다는 뜻)’를 부르짖으며 계속 버텼다. 

 

더욱 다급해진 미국은 오끼나와(沖繩)공격을 서둘렀다. 1945년 4월 1일부터 6월 22일까지 82일 동안 계속된 오끼나와전투는 이오섬전투보다 훨씬 더 격렬하였다. 미국은 오끼나와전투에 육군 102,000명, 해병대 88,000명, 해군 18,000명을 동원하였으나 고전을 면치 못했다. 미국군 20,195명이 전사하였고 55,162명이 전상했으며, 일본군 77,166명이 전사하였고 7,000여 명이 포로로 붙잡혔다. 오끼나와전투에서 미국군은 구축함 12척, 상륙함 15척, 전투기 768대, 전차 225대를 잃었다. 

 

 

4. 미국이 규슈상륙 포기하고 핵폭탄개발에 매달린 사연

 

미국이 오끼나와전투에서 고전하고 있었던 1945년 5월 8일 나치 독일이 미국과 소련에게 항복하였다. 나치 독일이 미국과 소련에게 항복하였으므로, 독일은 미국과 소련에 의해 동서로 분할점령되었다. 그와 달리 일본은 미국에게 항복하였으므로, 일본은 미국과 소련에 의해 분할점령되지 않고 미국에게 점령되었다. 일본을 단독으로 점령한 미국은 당시 일본의 식민지영토였던 한반도에 분할점령선으로 그었다. 우리 민족에게 고통과 불행을 강요하는 분단체제는 그렇게 생겨났다.

 

나치 독일의 항복은 쓰딸린의 얄타회담 약속이행을 추동하는 결정적인 계기로 되었는데, 쓰딸린의 약속에 따르면 소련군은 1945년 7월 초순에, 아무리 늦어도 1945년 8월 초순에는 원동지역에 집결하여 대일전쟁을 개전하게 되어 있었다. 

 

미국군은 소련군이 원동지역에 집결하기 전에, 그리고 여름철 일본렬도에 태풍이 불어오기 전에 서둘러 규슈를 점령해야 하였으므로, 1945년 7월 초에 규슈상륙전을 예정하였다. 당시 미국의 전쟁기획자들은 규슈 남부에 있는 35개 해안구역에 상륙하여 규슈 면적의 3분의 1을 점령하는 작전계획을 세워놓았다.  

 

다른 한편, 당시 일본의 전쟁기획자들은 일본군이 결사항전으로 미국군의 규슈상륙을 저지하면 미국은 일본을 패망시키지 못할 것이고, 결국 정전협정을 체결하는 것으로 태평양전쟁이 끝나게 될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그리하여 일본군은 미국군의 규슈상륙을 저지하는 ‘게쯔고작전(決号作戰)’을 준비하였다. 

 

1945년 2월 일본 해군연합함대 참모장 우가끼 마또메(宇垣纏)가 규슈에 주둔하는 제5항공함대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제5항공함대는 오끼나와전투가 벌어졌을 때 전투기에 폭탄을 싣고 적함에 충돌하는 자살공격전술로 미국군 상륙함을 격침시켰었다. 1945년 7월 당시 10,000대 이상의 각종 군용기를 보유한 일본군은 규슈해안에 접근하는 미국군 군함 400척 이상을 자살공격전술로 격침시킬 수 있을 것으로 예견하였다. 그리하여 일본은 1945년 3월부터 규슈의 전투부대를 대폭 증강했는데, 만주, 조선, 북부 혼슈(本州)에 배치된 전투부대들을 규슈로 집결시켜 3개 전차여단을 포함한 14개 사단 900,000명 대병력을 배치해놓고 미국군 상륙에 대비하였다.   

 

일본군이 만주, 조선, 북부 혼슈에 배치된 전투부대들을 규슈로 집결시켰으니, 소련군은 만주와 조선반도를 파죽지세로 공격할 수 있었고, 사할린과 쿠릴렬도를 거쳐 혹까이도(北海道)에 상륙하고 곧바로 북부 혼슈를 점령할 수 있었다. 실제로 소련군은 매우 허술한 방어선밖에 없는 혹까이도를 1945년 8월 말까지 점령하는 작전계획을 세워놓았다. 그 작전계획이 실행되면, 일본이 소련에게 항복하게 될 것이고, 소련군이 일본의 중심부를 점령할 판이었다. 소련군이 일본을 점령하는 것은 미국에게 재앙이 아닐 수 없었다. <사진 4>

 

▲ <사진 4> 이 사진은 1945년 7월 16일 미국의 핵폭탄개발사업에 참가한 기술자들이 뉴멕시코주 사막에서 진행된 핵폭발시험 직후 현장에서 잔해를 살펴보는 장면이다. 태평양전쟁 말기에 일본을 누가 점령하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소련과 경쟁하였던 미국은 원래 규슈에 상륙하여 그곳을 공격거점으로 혼슈를 폭격하고, 도꾜만에 상륙하려고 하였던 작전계획을 포기하고 핵폭탄개발을 황급히 서둘렀다. 그러는 사이에 소련군 전투부대들은 유럽전선에서 원동지역으로 이동, 집결하여 전쟁준비태세를 갖추었다. 원동지역에 집결한 소련군이 혹까이도에 상륙하여 일본을 점령하지나 않을까 하고 조바심하던 미국은 불과 며칠 전에 핵폭발시험을 마쳤으나 실전상황에서 제대로 터질지 알 수 없는 첫 핵폭탄을 사용하기로 결정하였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미국은 일본점령기회를 소련에게 빼앗길까봐 조바심하며 규슈상륙전을 준비하였으나, 일본이 규슈에 매우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하는 것을 알고 규슈상륙을 포기하였다. 그 대신 미국은 핵폭탄개발에 미친 듯이 매달렸다. 1943년 8월 17일부터 24일까지 진행된 퀘벡비밀군사회담에서 로저벌트와 처칠은 미국과 영국이 핵폭탄개발에 상호협력하기로 공약한 퀘벡합의(Quebec Agreement)를 채택하였다. 영국은 캐나다를 끌어들인, ‘튭 얼로이즈(Tube Alloys)’라는 암호명으로 불린 핵폭탄개발사업을 1941년 8월 30일부터 시작했었는데, 그 핵폭탄개발사업은 1942년 8월 13일 미국이 추진하기 시작한, ‘맨해튼 프로젝트(Manhattan Project)’라는 암호명으로 불린 핵폭탄개발사업으로 흡수, 통합되었다. 

 

일제가 규슈에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하는 것을 알게 된 미국은 일제가 항복하지 않고 전쟁을 계속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핵폭탄을 투하하는 계획부터 서둘러 검토하였다. 미국은 일본의 어느 도시에 핵폭탄을 투하할 것인지를 검토하는 표적위원회(Target Committee)를 구성하였다. 표적위원회는 당시 미국이 개발 중이던 핵폭탄이 완성되면, 일본의 주요도시들을 핵폭탄으로 완전히 파괴할 수 있으므로 미국군이 규슈에 상륙할 필요가 없게 되리라고 예상했다. 표적위원회가 정한 핵폭탄투하대상목록에는 도꾜(東京), 요꼬하마(橫浜), 교또(京都), 히로시마(廣島), 고꾸라(小倉), 니이가다(新瀉) 등이 포함되었다.  

 

 

5. 소련의 대일전쟁, 조선의 조국해방전투, 미국의 핵폭탄투하 

 

누가 먼저 일본에 상륙하여 일본을 점령하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소련과 경쟁하던 미국은 핵폭탄개발을 황급히 서두르던 중, 1945년 7월 16일 핵폭발시험에 성공하였다. 미국이 핵폭탄개발을 서두르는 사이에 소련군 전투부대들은 유럽전선에서 원동지역으로 이동, 집결하여 전쟁준비태세를 갖추었다. 

 

소련군이 혹까이도에 상륙하여 일본의 중심부로 남하하지 않을까 하고 조바심하던 미국은 불과 며칠 전에 핵폭발시험을 마쳤으나 실전상황에서 제대로 터질지 아직 알 수 없는 첫 핵폭탄을 실전에 사용하기로 결정하였다. 당시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Harry S. Truman)이 ‘태양의 힘을 끌어들인 무기’라고 불렀던 첫 핵폭탄은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일본 히로시마에 투하되었다. 히로시마에 핵폭탄이 투하되기 6시간 전, 태평양 북서부에 있는, 괌(Guam)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화산섬 15개로 이루어진 마리아나제도(Mariana Islands)의 열세번째 섬 티니안(Tinian)에 건설된 활주로에서 B-29 폭격기 세 대가 이륙하였다. 한 대에는 핵폭탄이 실렸고, 다른 한 대에는 핵폭발측정기구들이 실렸고, 또 다른 한 대에는 관측기재와 사진촬영기가 실렸다. 

 

B-29 폭격기에서 투하된 핵폭탄은 44.4초 동안 낙하하다가 지상으로부터 580m 상공에서 폭발하였다. 원래는 B-29 폭격기 탑승자들이 고공에서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아이오이하시(相生橋)라는 다리를 향해 낙하했어야 하는데, 바람에 밀려간 핵폭탄은 그 다리에서 240m 떨어진 도병원(島病院) 상공에서 낙하하다가 폭발하였다. 

 

히로시마 핵폭탄투하로 민간인 126,000여 명과 일본군 20,000여 명이 몰살당하는 핵참사가 일어났다. 조선인 30,000여 명도 목숨을 잃었는데, 조선인 희생자들 가운데는 의친왕의 아들로 일본으로 끌려가 일본군 중좌가 된 리우(李鍝)도 있었다. 

 

일제는 히로시마가 날아갔는데도 항복하지 않았고, 소련은 1945년 8월 9일 대일전쟁을 개시하였다. 소련이 대일전쟁을 개시한 날, 이미 1930년대부터 만주에서 일제관동군과 싸워온 조선의 항일전쟁은 조국해방전투로 전개되었다. 조선의 역사자료를 보면, 다음과 같은 전황을 알 수 있다.  

 

러시아-중국 국경으로부터 30km 떨어진 하바롭스크 부근에 임시군사기지가 있었다. 김일성 사령관의 지휘를 받으며 만주에서 일제관동군과 격전을 벌이던 조선인민혁명군은 1942년 7월 22일 그 군사기지에서 소련원동군, 동북항일련군 중국인부대와 함께 국제연합군을 결성하였다. 소련원동군은 3국 국제연합군을 독립88여단 또는 8461보병특별여단이라고 불렀다. 조선인으로 편성된 국제연합군 제1지대는 김일성 지대장이 지휘하는 조선인민혁명군이었다. 조선인민혁명군은 30명 정도로 편성된 소부대들을 두만강 국경일대와 함경북도 북부지역에 출동시켜 일본군을 타격하는 습격전, 정찰활동, 지하정치활동을 계속하면서 조국해방전투를 준비해왔다.  

 

조선인민혁명군은 소련군이 대일전쟁을 개시하기 하루 전인 1945년 8월 8일에도 비가 내리는 밤에 두만강을 도하하여 함경북도 웅기군 최북단에 있는 토리에서 조선주둔일본군을 습격하였으며, 중국 훈춘(琿春)현 남별리와 동흥진도 습격하였다. 이튿날 소련이 대일전쟁을 개시한 새벽, 조선인민혁명군은 소련군과 함께 총진격을 개시하였다. 두만강을 도하한 조선인민혁명군은 함경북도 은덕, 새별, 남양, 회령으로 진격하였다. 조선인민혁명군은 1945년 8월 11일 19시 함경북도 웅기만에 상륙하고 서수라항으로 진격하였으며, 이튿날에는 함경북도 라진만에 상륙하였다. <사진 5> 

 

▲ <사진 5> 이 사진은 미국이 히로시마에 첫번째 핵폭탄을 투하한 날로부터 사흘이 지난 1945년 8월 9일 나가사끼에 두번째 핵폭탄을 투하한 직후 폐허로 변한 시가지 모습을 촬영한 것이다. 자료에 따르면, 미국군이 일본에 상륙하는 날까지 적어도 핵폭탄 7발이 준비되고 있었다고 한다. 두 차례 핵폭탄투하로 소련군의 혹까이도상륙을 미연에 중지시킨 미국은 1945년 9월 2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받아내고 일본을 점령하였다. 그로써 미국은 태평양지배체제를 완성하였고, 일본은 미국의 태평양지배체제를 지켜주는 군사거점으로 전략하였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조선인민혁명군이 조국해방전투를 개시한 1945년 8월 9일, 미국은 일본 나가사끼(長崎)에 두 번째 핵폭탄을 투하하였다. 원래 미국은 1945년 8월 11일 기따규슈(北九州) 후꾸오까(福岡)현 고꾸라에 두 번째 핵폭탄을 투하하기로 예정하였는데, 소련군이 만주에서 파죽지세로 남하하는 전황에 놀라 투하날짜를 이틀 앞당겼다. 핵폭탄을 실은 B-29 폭격기가 고꾸라 상공에 도착하였을 때, 지상에서 짙은 연기가 피어올라 투하대상을 식별할 수 없었고, 일본군 전투기들이 접근하였다. 그래서 B-29 폭격기는 나가사끼로 기수를 돌렸다. 오전 11시 1분, B-29 폭격기에서 투하된 핵폭탄은 47초 동안 낙하하다가 원래 정했던 투하대상에서 약 3km 벗어난 정구장 상공에서 폭발하였다. 나가사끼 핵폭탄투하로 약 40,000여 명이 사망하였고, 약 60,000여 명이 부상당했다.  

 

당시 핵폭탄제조기술자로 근무했던 미국 육군 소장 케네스 니콜스(Ken D. Nichols)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미국군의 일본상륙전에 사용하기 위해 핵폭탄 15발을 제조하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미국의 핵폭탄제조사업을 총지휘한 육군 소장 레슬리 그로브스(Leslie R. Groves)의 보좌관이었던 육군 대령 라일 씨먼(Lyle E. Seeman)은 미국군이 일본상륙전을 개시하는 날까지 적어도 핵폭탄 7발이 준비될 것이라고 상부에 보고하였다. 

 

두 차례 핵폭탄투하로 소련군의 혹까이도상륙을 미연에 중지시킨 미국은 1945년 9월 2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받아내고 일본을 점령하였다. 그로써 미국은 태평양지배체제를 완성하였고, 일본은 미국의 태평양지배체제를 지켜주는 군사거점으로 전락하였다. 미국이 태평양사령부를 창설한 때는 1947년 1월 1일이었다. 만일 미국이 핵폭탄을 1945년 8월 말까지 개발하지 못했더라면, 소련군은 혹까이도에 상륙했을 것이며,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를 분할하지 않고 일본을 분할했을 것이다. 그런 사정을 살펴보면, 미국의 태평양지배체제는 처음부터 핵무력으로 건설되었고, 지난 73년 동안 핵무력으로 유지되어왔음을 알 수 있다. 

 

 

6. 73년 묵은 태평양지배체제가 흔들리고 있다 

 

미국의 태평양지배체제를 위태롭게 만드는 거대한 ‘지각변동’이 두 방향에서 거의 동시에 밀려왔다. 조선의 국가핵무력 완성, 그리고 중국의 남중국해지배권 확립이 그것이다. 

 

2017년 11월 29일 조선은 미국 본토 전역에 전략핵공격을 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 화성-15 시험발사에서 성공하였고,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2018년 1월 1일 신년사에서 조선의 국가핵무력이 완성되었음을 선포하였다. 조선이 미국의 방해를 물리치고 국가핵무력을 완성한 사연에 대해서는 내가 2017년과 2018년에 <자주시보>에 발표한 여러 글들에서 계속 논하였으므로, 재론하지 않는다. 

 

미국 텔레비전방송 <CNBC> 2018년 5월 2일 보도에 따르면, 2018년 4월 중국은 남중국해 난사(南沙)군도에 건설한 세 개의 인공섬에 대함순항미사일 잉지(鷹擊)-12B와 지대공미사일 훙치(紅旗)-9B를 각각 실전배치하였다고 한다. 잉지-12B의 사거리는 550km이고, 훙치-9B의 사거리는 230km다. 중국은 그 인공섬들 가운데 메이지자오(美濟礁)에는 군사통신기지와 전자전기지도 건설하였다. 남중국해 시사(西沙)군도에 있는 융싱섬(永興島)에는 중국의 정규 항공편이 개설되었고 거주민과 주둔부대를 위한 해수담수화시설이 건설되었다.  

 

미국은 2017년 한 해 동안 ‘항해의 자유 작전’을 벌이면서 구축함과 정찰기를 남중국해에 계속 들이밀었고, 나중에 사정이 급해지자 B-1B 전략폭격기까지 들이미는 소동을 일으켰으나, 중국의 남중국해군사기지 건설을 가로막을 수 없었다. 

 

2018년 4월 12일 중국은 남중국해에서 항공모함, 이지스구축함, 핵추진잠수함을 비롯한 각종 전함 48척과 조기경보기, 전략폭격기, 전투기, 공중급유기를 비롯한 각종 작전기 76대와 해군병력 10,000여 명이 동원된 중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해상열병식을 진행하였다. 전투복을 입은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해상열병식을 직접 사열하고 훈시하였다. 그것은 중국이 미국의 방해를 물리치고 남중국해지배권을 확립하였음을 내외에 알린 사변이었다. 중국은 1988년 남중국해 난사군도에 군대를 파견한 때로부터 30년 만에 남중국해지배권을 확립한 것이다. <사진 6>    

 

▲ <사진 6> 이 사진은 2018년 4월 12일 전투복을 입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남중국해에서 진행된 중국인민해방군 해상열병식을 사열하고 훈시하는 장면이다. 남중국해 해상열병식은 중국 역사상 최대 규모로 진행되었다. 남중국해 해상열병식은 중국이 미국의 방해를 물리치고 남중국해지배권을 확립하였음을 내외에 알린 커다란 사변이었다. 중국은 1988년 남중국해 난사군도에 군대를 파견한 때로부터 30년 만에 남중국해지배권을 확립하였다. 중국이 남중국해지배권을 확립함으로써 73년 묵은 미국의 태평양지배체제는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만일 미국이 위에 서술한 두 가지 ‘지각변동’을 방치하면, 73년 묵은 태평양지배체제는 심하게 흔들리다가 어느 순간 무너질 판이다. 미국은 흔들리는 태평양지배체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위에 서술한 두 가지 ‘지각변동’에 전력으로 대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미국에게는 국가핵무력을 완성한 조선과 남중국해지배권을 확립한 중국을 상대로 3자동시대결을 벌일 능력이 없다. 조선과 중국 가운데 어느 한 쪽을 택하여 양자대결을 하는 수밖에 없다.  

 

2017년 12월 28일 미국은 백악관이 발표한 ‘아메리카합중국의 국가안보전략’이라는 제목의 문서에서 인도양-태평양전략(Indo-Pacific Strategy)을 천명하였고, 2018년 1월 7일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조미정상회담을 제안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두 가지 조치는 미국이 흔들리는 태평양지배체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중국에게는 대결정책을, 조선에게는 협상정책을 펼치기 시작하였음을 말해주는 사건들이다.  

 

2018년 3월 22일 트럼프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중국의 경제침략을 표적으로 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하면서 중국과 무역전쟁을 시작했는데, 미중무역전쟁의 본질은 흔들리는 태평양지배체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중국을 상대로 벌이는 미국의 패권대결 이외에 다른 게 아니다. 그에 맞서 남중국해지배권을 확립한 중국은 동중국해지배권을 놓고 미국을 상대로 더 심각한 패권대결을 벌이게 될 것이다. 이것은 불가피하다. 그렇게 되면 미국은 일본을 끌어들여 중국과 대결할 것이다. 미일동맹의 강공에 홀로 맞서는 중국은 조선과 손을 잡을 수밖에 없다. 최근 중국의 대조선정책이 급변한 까닭이 거기에 있다. 

 

 

7. 모든 문제는 종전과 철군으로 귀결된다

 

조선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2018년 6월 20일 베이징에서 진행된 조중정상회담에서 “새로운 정세 하에서 두 당, 두 나라 사이의 전략전술적 협동을 더욱 강화해나가기 위한 문제들”을 논의하였다고 하는데, <아사히신붕> 2018년 7월 5일 보도에 따르면,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6.20 조중정상회담에서 정전협정이 평화협정을 교체되면 미국군이 조선반도에 주둔할 필요가 없으므로, 조선반도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미국에게 주한미국군 철수를 촉구하기 위해 조선과 중국이 전략적으로 협력하기로 합의하였다고 한다. <사진 7> 

 

▲ <사진 7> 이 사진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2018년 6월 20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진행된 조중정상회담에서 발언하는 장면이다.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그 회담에서 두 당, 두 나라 사이의 전략전술적 협동을 더욱 강화해나가기 위한 문제들을 논의하였는데, 일본 언론보도에 따르면, 조선과 중국의 전략전술적 협동이란 조선반도에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미국에게 주한미국군 철수를 촉구하기 위해 상호협력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주한미국군은 미국의 태평양지배체제가 흔들리면서 전략적 가치를 잃어버렸다. 미국은 조선의 국가핵무력 완성과 중국의 남중국해지배권 확립으로 심하게 흔들리고 있는 태평양지배체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종전선언 발표에 동참하고, 주한미국군을 철수해야 한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워싱턴포스트> 2018년 6월 7일 보도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주한미국군이 전략적으로 필요하다는 주장에 대해 자신은 동의하지 않는다고 지속적으로 말하고 있으며, 미국군을 한국에 계속 배치해야 하는 이유에 관한 미국군 지휘관들의 설명을 들을 때마다 그들의 설명에 불만을 표시한다는 것이다. 

 

미국 텔레비전방송 <NBC> 2018년 5월 1일 보도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이 주한미국군 전원철수명령을 내리려고 하자, 존 켈리(John F. Kelly) 비서실장이 강하게 만류하였고, 그것으로 하여 트럼프 대통령과 켈리 비서실장 사이에서 열띤 언쟁이 벌어졌다고 한다. 이 보도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주한미국군 전원철수명령을 내리려고 하였던 때가 2018년 2월 9일에 개막된 평창동계올림픽 이전이라고 하였으므로, 트럼프 대통령은 2018년 1월 중에 주한미국군 전원철수명령을 내리려고 하였던 것이 분명하다. 이런 정황은 트럼프 대통령이 2018년 1월 7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조미정상회담을 먼저 제안하기로 결정한 직후 주한미국군 전원철수명령을 내리려고 하였음을 말해준다.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머릿속에서 조미정상회담과 주한미국군 철수는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연관관계에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주한미국군을 철수하려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는 흔들리는 태평양지배체제를 안정화시키기 위해 중국과 대결하려면 조선과의 대결을 멈추고 관계개선을 추진해야 한다는 전략적 인식을 갖고 있으며, 조선과 관계를 개선하려면 종전선언을 발표하고 주한미국군을 철수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주한미국군은 미국의 태평양지배체제가 흔들리면서 전략적 가치를 잃어버렸다. 미국이 태평양지배체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주한미국군을 계속 유지할 것이라는 생각은 조선이 국가핵무력을 완성하고, 중국이 남중국해지배권을 확립하기 이전의 정세를 반영한 고정관념이다. 조선이 국가핵무력을 완성하고, 중국이 남중국해지배권을 확립한 지금, 그런 고정관념은 설 자리를 잃었다. 정세는 정반대로 바뀌었다. 미국은 조선의 국가핵무력 완성과 중국의 남중국해지배권 확립으로 심하게 흔들리는 태평양지배체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종전선언 발표에 동참하고, 주한미국군을 철수해야 하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에게 있어서 조선반도의 비핵화는 언제가도 실현될 수 없는 조선의 국가핵무력 해체라는 뜻이 아니라, 종전선언을 발표하고 주한미국군을 철수하여 미국 본토에 대한 조선의 핵공격위험을 해소하기 위한 명분이다. 지금 그에게는 그 명분을 언제, 어떻게 실행하느냐 하는 문제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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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수돗물 파동, 4대강 비극의 전주곡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8/08/13 10:24
  • 수정일
    2018/08/13 10:24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산 강과 죽은 강⑭] 4대강 독립군 낙동강 탐사 취재를 마치며

 

등록 2018.08.13 07:53수정 2018.08.13 07:53

대구 월성교 아래로 내려가자 숨이 막혔다. 성서공단이 쏟아낸 오폐수의 악취 때문이다. 시궁창 냄새와 화학약품 냄새가 뒤섞여 눈도 시큰했다. 다행히도 오폐수는 낙동강 지천인 대명천으로 곧장 흘러가진 않았다. 이 물은 차집관로에 모여 성서하수종말처리장으로 보내지는데, 1m 높이의 시멘트 차수벽을 세워 대명천의 물과 분리했다.
 

▲ 좌측의 성서산단의 오폐수 차집관로에 오폐수들이 가득 차 있고, 그 너머로 낙동강의 지천인 대명천이 보인다. ⓒ 대구환경운동연합 정수근

 

▲ 차집관로 안의 오폐수는 악취가 진동했다. 이 오폐수는 아래 이동통로를 통해 성서하수종말처리장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다. 그러나 비만 오면 이 오폐수가 차집관로를 넘어 낙동강으로 흘러들어가게 되는 심각한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 대구환경운동연합 정수근


하지만 오폐수는 차수벽 위쪽에서 위태롭게 찰랑거렸다. 이곳이 넘친다면? 성서공단의 오폐수는 하수종말처리장으로 가지 않고 1300만 영남인들의 식수원인 낙동강으로 흘러간다. <오마이뉴스> 4대강 독립군이 지난 6월 25일 찾아간 이곳, 식수원 보호를 위한 최후의 방어선은 너무 허술했다. 

이날 4대강 독립군은 대구 달성군 도동서원 앞의 낙동강에 핀 녹조를 확인한 뒤 화원유원지 부근에서 낙동강과 합류하는 대명천의 월성교로 갔다. 4대강 사업 이후 매년 녹조의 농도가 짙어지는 원인을 살피기 위해서였다. 결론부터 말하면 최근 과불화화합물 유출 사건으로 파문을 일으켰던 대구 수돗물 사태는 비극의 식수 대란의 전주곡일 뿐이다. 

[녹조의 원인] 오폐수를 댐으로 가두다

성서공단오폐수 차집관로의 말단부와 연결된 대명천은 한눈에 봐도 건강한 하천의 모습은 아니었다. 바닥이 새까맣다. 그 위에 탁한 잿빛 강물이 고였다. 장화를 신고 물속을 내딛자 물컹했다. 썩은 펄을 발로 헤집으니 메탄가스를 머금은 물방울이 치솟으면서 악취가 터졌다. 군데군데 붉은 빛을 띤 물속을 들여다보니 이상한 생명체가 바글바글했다. 부영양화의 지표생물인 물벼룩이었다. 

 

▲ 심각히 부영양화된 대명천의 모습. 이 썩은 강물이 낙동강으로 그대로 흘러 들어간다. 잉어 한 마리가 썩은 강에서 위태롭게 움직이고 있다. ⓒ 대구환경운동연합 정수근

 

▲ 심각히 부영양화된 곳에서 출연하는 지표생물체인 물벼룩류의 모습. ⓒ 대구환경운동연합 정수근


이곳에 가 보면 알 수 있다. 굳이 측정기를 들이대지 않아도 사람의 오감으로 충분히 짐작이 가능한 최악의 수질 상태. 그 원인은 우수관로와 오수관로를 따로 분리하지 않은 잘못된 하수관리 시스템 때문이다. 비가 조금이라도 오면 빗물(우수)이 성서공단에서 내뱉는 오폐수와 섞여 1m 시멘트 턱을 흘러넘치게 만들어놓은 것이다.  

지난 6월 대구에 10mm 가량의 비가 내렸을 때에 이곳을 확인했는데 차집관로에서 빗물과 섞인 오수가 흘러넘쳐 대명천으로 그대로 유입되고 있었다. 오폐수는 강을 따라 낙동강으로 흘러갔다. 이 물은 4대강 사업 때 만든 달성보로 갇혀 하원유원지 쪽 낙동강에서 보면 가축 분뇨 같은 검은 이물질이 둥둥 떠다니기도 했다. 이런 오염물질들이 달성보 바닥에 쌓인 시커먼 펄속에서 켜켜이 쌓여서 썩고 있다. 달성보는 중금속 섞인 오폐수의 저장고인 셈이다.

 

▲ 지난 6월 채 10밀리의 비가 오지도 않은 날 차집관로를 넘어 빗물과 뒤섞인 오수가 그대로 대명천으로 흘러 들어오고 있다 ⓒ 대구환경운동연합 정수근

 

▲ 흘러넘친 오수는 대명천을 통해 낙동강으로 그대로 흘러 들어간다. ⓒ 대구환경운동연합 정수근


최근 달성보에서 목격되는 '녹조라떼' 현상은 당연한 것이다. 기온이 조금만 올라가도 녹조가 창궐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그렇다면 이곳만 이럴까? 낙동강 유역의 대도시는 대개 비슷하다. 대구만해도 성서공단, 달성산단 등 5곳의 산단이 있다. 박근혜 정권 때에 달성 국가산단까지 들어섰다. 낙동강을 따라 농공공단도 부지기수이다. 곳곳에 낙동강의 수질을 위협할 지뢰밭이 산재해 있다.    

[취수원 이전] 낙동강을 포기하겠다?

대구는 부산경남 식수원의 상류에 있다. 대구시도 우오수관로의 문제를 알고 있는 것일까? 대구시 물관리과의 한 담당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구시는 낙동강 관리를 위한 특별한 활동은 하고 있지 않다. 대구시가지를 관통해 금호강이 흐르고 있기 때문에 금호강 관리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금호강은 이전보다 획기적으로 수질이 개선됐다. 문제가 된 성서산단의 우오수관로 분리사업은 2030년까지 순차적으로 해나갈 것이다."

그는 "현재 대구시의 우오수관로 분리율은 40%선"이라면서 "우오수관로 분리사업에는 대략 3조 원의 예산이 든다"고 밝혔다.

우오수관을 분리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예산 문제 등으로 급하게 추진하지는 못한다는 뜻이다. 3조 원은 지방자치단체로서는 부담스러운 금액일 수 있다. 하지만 이명박 정권 때에 4대강 사업에 쓴 30조 원의 1/10에 불과하다. 4대강 사업 추진본부는 약 4조 원을 들여 강물 속의 인을 제거하는 총인처리시설을 설치하기도 했다.

 

▲ 차집관로 안의 오폐수와 대명천의 수질이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 대명천이 심각히 부영양화 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 대구환경운동연합 정수근


하지만 정작 오염물질을 사전에 차단할 우오수관 분리 등의 근본적인 문제에는 눈을 감았다. 이명박 정권이 추진한 4대강 사업의 본질은 강 정비가 아니라 한반도대운하 1단계 사업이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30조 원이나 되는 천문학적인 4대강 예산의 일부만이라도 이런 우오수관리분리사업과 같은 근본적이고 시급한 공사에 투입했더라면 낙동강 수질은 그야말로 획기적으로 개선될 수 있었을 터이다. 

그러나 이명박씨는 강의 흐름을 막아 수질을 악화시키는 대규모 댐을 세웠다. 수심을 6m로 파면서 강물을 정화시키는 모래와 자갈을 퍼냈다. 낙동강에 산재한 크고 작은 습지도 밀어버렸다. 결국 오염원을 그대로 둔 채 강물의 자연정화 시스템을 통째로 발라낸 셈이다. 매년 낙동강 녹조의 농도가 짙어지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구시가 내놓은 해법은 취수원 이전이다. 강정고령보 바로 위에 있는 대구의 취수원을 구미산단 위쪽인 해평취수장 쪽으로 옮기겠다는 발상이다. 하지만 부산경남보다는 상대적으로 더 안전한 물을 먹는 대구시가 지금의 낙동강을 포기하고 취수원을 이전하겠다는 것은 이기적 주장으로 비칠 수 있다.

그동안 대구 취수원 이전 불가 주장을 해온 계명대 생명과학부 김해동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성토했다.

"대구시는 부끄러운 짓을 하고 있다. 대구만 깨끗한 물 먹고 부산경남은 똥물 먹으라는 소리와 같다. 대구가 취수원을 상류로 이전하는 순간 낙동강 중류의 수질은 엉망이 된다. 대구시가 책임 있는 행정을 편다면 독일처럼 대구 산단의 하류에 취수원을 둬야 한다."

 

▲ 대구 취수원 이전을 반대하는 현수막들이 구미 시내 곳곳에 걸려 있다. ⓒ 대구환경운동연합 정수근


낙동강네트위크 임희자 공동집행위원장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낙동강이 그나마 지금과 같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취수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낙동강물을 먹지 않으면 영산강 꼴이 난다. 취수장을 주암호로 옮긴 뒤 영산강의 수질은 4-5급수로 전락했다. 농공용수로도 쓸 수 없다. 1300만 영남인의 식수원으로 낙동강을 달리할 식수원이 없는 상황에서 낙동강을 되살려서 영남인 전체가 안전한 수돗물을 얻도록 해야 한다."

[이상한 대구시] 수돗물 대란까지 정치적 이용

대구시는 집요했다. 수돗물 사태도 취수원 이전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려 했다. 4대강 독립군이 낙동강을 탐사보도할 당시 내 전화통은 불이 났다. 대구 수돗물에서 미량 검출된 과불화화합물로 촉발된 대구 수돗물 대란 사태 때문이다. 구미산단에서 과불화화합물 누출 사고가 터지자 대구시민들은 1991년 페놀 사태의 악몽을 떠올렸다.

생수 사재기 현상이 벌어지는 등 대구시민들은 우왕좌왕했다. 권영진 대구시장은 일주일이 지나서야 공식 사과를 했지만, 해법은 10년 전부터 주장했던 취수원 이전이다. 대구시장과 같이 자유한국당 소속인 경북도지사도 가세했다. 정치적으로는 지난 지방선거에서 당선된 민주당 소속의 구미시장을 협공하는 모양새를 취했다.

과연 구미시의 하수관리도 전날 4대강 독립군이 대명천에서 목격했던 대구시의 엉성한 하수처리시스템과 비슷할까? 지난 6월 26일 구미산단에 있는 구미하수종말처리장을 찾아갔다. 당시 과불화화합물로 촉발된 대구 수돗물 파동의 진원지였다. 구미하수처리장의 한 담당자는 구미산단의 오폐수가 모이는 차집관로 앞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 낙동강을 끼고 들어선 구미국가산단의 전경 ⓒ 대구환경운동연합 정수근

 

▲ 구미하수종말처리장의 차집관로는 처리장 안에 있다. 즉 하수들이 빗물과 분리된 관로를 따라 이곳으로 다 모이는 것이다. ⓒ 대구환경운동연합 정수근


"구미산단의 우오수관로 분리율은 99%이다. 빗물이 모이는 우수관로 말단에 완충저류시설까지 있다. 오염물질이 많을 수밖에 없는 5mm까지의 초기 우수는 이곳에서 차집해서 처리한다. 하지만 폐수의 중금속이나 화학물질은 이곳에서 처리할 수 없다. 이곳은 미생물 재제를 이용해서 BOD 등 6개 항목을 관리한다. 하수를 2급수 정도로 처리해서 낙동강으로 내보내고 있다." 

대구시보다는 형편이 나았지만 허점도 있었다. 그는 "산업체에서 폐수를 완벽하게 처리해서 내보내야 한다"면서 "하수종말처리장은 폐수를 처리하지는 못한다"고 말했다. 

폐수 처리는 산업체의 자발성에 의존하고 있기에 관리감독이 중요한 셈이다. 그렇다면 이 시스템은 잘 정비되어 있을까? 구미산단은 폐수를 방출하는 양을 기준을 1~5종 사업장으로 나뉘어 있다. 폐수를 많이 방출하는 규모가 큰 1~2종 공장 73곳은 경상북도가 관리하고, 나머지 3~5종 공장 600여 개는 구미시가 관리한다.

하지만 이 업무를 담당하는 경상북도 환경방재과 공무원은 5명에 불과하다. 1, 2종 업체를 관리하는 경상북도의 한 담당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5명이 돌아가면서 업체를 관리한다. 일 년에 한 번 정도 업체를 방문해서 현황을 점검한다. 수질 감시 항목표가 있는데 이를 중점적으로 체크한다. 가끔은 불시에 현장 점검을 실시한다."

불시에 현장을 덮치고 1년에 한 번 정도의 점검으로 제대로 된 관리를 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낙동강으로 유입되는 폐수 처리를 사실상 전적으로 업체의 자발성에 맡기고 있는 셈이다. 구미시의 산업체 하수 처리 관리감독 시스템은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우오수관조차 분리하지 않고 배출하는 대구시보다는 형편이 훨씬 나았다.   

[달성보 녹조] 치명적인 맹독 함유

4대강 독립군은 지난 6월 26일 구미산단의 하수처리 시설을 살펴보기 전에 낙동강 달성보 위 선착장을 찾았다. 대명천이 낙동강과 합류하는 곳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이다. 본격적인 폭염이 시작되지 않았을 때였다. 간간이 빗방울도 떨어져서 녹조가 창궐할 수 있는 조건도 아니었다. 하지만 낙동강엔 녹조띠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악취도 올라왔다.

 

▲ 달성보 위 낙동강 바닥에서 퍼올린 썩은 펄과 그 안에서 나온 수질 최악의 지표생물인 붉은깔따구의 모습. ⓒ 대구환경운동연합 정수근


가슴까지 오는 장화를 신고 강 속으로 들어갔다. 콘크리트 포장이 끝난 곳에 이르자 갑자기 발이 쑥 들어간다. 펄이었다. 물컹물컹한 펄이 발아래 촉감으로 그대로 전해졌다. 삽으로 펄을 떠서 물가로 나오니 시궁창 냄새가 진동했다. 최악 수질 4급수 지표종인 붉은 깔따구 유충과 실지렁이가 꿈틀거렸다.

환경부는 "4급수의 물은 식수로 사용할 수 없고, 접촉하면 피부병을 일으킬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녹조는 독이다. 대구시의 허술한 오폐수 정화 시스템 등으로 인해 낙동강에 창궐하는 남조류 마이크로시스티스는 마이크로시스틴이라는 맹독성 물질을 품고 있다. 지난 2016년에 방한했던 일본 구마모토보건대 다카하시 토루 교수는 "낙동강의 조류독소는 청산가리 100배 수준의 맹독이고, 물고기 체내와 녹조 물로 농사지은 농작물에도 농축된다"고 말했다. 

일본 신슈대학의 박호동 교수와 함께 조사 분석한 낙동강 도동서원의 녹조 시료에선 무려 456ppb나 되는 조류독소가 검출됐다. 세계보건기구의 마이크로시스틴이라는 조류독소의 먹는 물 음용기준치가 1ppb다. 기준치의 456배나 되는 맹독이 우리가 마시는 낙동강 물 속에 들어 있다. 

기준치에 한참 밑도는 미량의 과불화화합물이 검출된 것에 대해 구미시를 공격한 대구시장과 경북도지사는 대구 취수원에서 독극물에 가까운 맹독성 조류가 대량으로 창궐하는 녹조에 대해서는 입을 닫고 있다. 국제적인 먹는 물 기준으로만 봐도 과불화화합물보다도 더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는 녹조는 애써 외면하고 있다.

게다가 대구시는 우오수관 분리 등 녹조의 원인을 제거하는 것은 뒷전으로 밀어놓고 있다. 과불화화합물 사태에 대해 구미시를 공격했던 대구시는 녹조가 창궐할 때마다 전화를 걸어 대책을 물으면 고장난 레코드판처럼 같은 말만 반복했다.

"조류가 덜한 3-4미터 깊은 곳에서 취수를 하고 고도정수처리를 하고 있으니 괜찮다."

 

▲ 달성보에 핀 짙은 녹조라떼. 조류독소를 포함하고 있는 남조류가 대량으로 증식을 하고 있다. 독조라떼라 불러야 한다. ⓒ 대구환경운동연합 정수근


하지만 과연 그럴까? 아무리 고도정수처리를 해도 100% 완벽한 것은 없다. 독소의 일부를 거르지 못할 가능성은 0%가 아니다. 또 조류의 농도가 높아지면 이를 해결하려고 염소 투입량을 늘린다. 이는 물속의 유기물과 결합해 총트리할로메탄이라는 발암물질을 만든다. 물론 기준치 이내로 관리하고 있지만 조류농도가 높아질수록 발암물질의 양도 증가한다.

결국 낙동강에 설치한 8개의 '4대강 댐'을 그대로 둔다면 악순환의 반복이다. 대안은 영남인들의 식수원인 낙동강을 살리는 방법밖에 없다.

[제언] 낙동강을 살리는 길

3박 4일간의 낙동강 탐사 취재를 마친 뒤의 소감을 요악하면 세가지다. 첫째, 댐의 수문을 모두 열어서 강물이 흐르게 해야 한다. 수문만 연다면 강물은 스스로 물을 정화하는 모래와 자갈을 낙동강에 실어 나를 것이다. 불도저와 포클레인으로 밀어버렸던 습지도 다시 형성될 것이다. 

이번 탐사 취재 때 4대강 독립군이 대명천에서 목격한 대구시의 우오수 처리방식은 사실상 '오폐수 무단 방류 시스템'이다. 식수원인 낙동강에 인접한 산업단지를 철저히 관리하고, 최근 환경부가 도입하려는 폐수 무방류 시스템을 서둘러 도입해야 한다. 폐수를 무한 반복해 재사용하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 낙동강 협곡에 들어선 영풍제련소. 1~3공장이 연속해서 2~3킬로미터에 걸쳐 들어서 있다. 이로 인해 낙동강의 수질이 오염되고, 주변 산지가 산성화되어 식물이 살 수 없는 환경으로 바뀌었다. ⓒ 대구환경운동연합 정수근


마지막으로 낙동강 최상류에 있는 영풍제련소와 같은 기업도 이전을 추진해야 한다. 영풍제련소는 낙동강 상류의 원수를 비소, 카드뮴, 납, 아연 등 각종 중금속으로 오염시키고 있다(관련 기사 : 낙동강 협곡을 감싼 수상한 화학약품 냄새).

4대강 독립군 탐사취재를 마친 뒤 낙동강에서 달성보에서 만난 임희자 낙동강네트워크 공동집행위원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촛불혁명으로 들어선 문재인 정부는 적폐를 청산하고 안전한 대한민국을 만들어줄 것으로 희망했다. 국민의 안전한 물보다 시급한 현안은 없다. 하지만 경상도 단체장과 지역민 일부가 반대한다는 이유로 시급한 과제를 뒤로 미루는 것 같다. 국민의 목숨보다 더 중한 가치는 없다. 문재인 촛불 정부는 일부 반대가 있더라도 시급하고 근본적인 낙동강 수질대책을 내놓아야 한다. 낙동강은 1300만 국민의 목숨줄이다."

111년 만의 폭염이라고 언론이 매일 떠들고 있는 요즘, 나는 거의 매일 낙동강에 나간다. 이명박, 박근혜 정권 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죽은 강'이다. 4대강 사업에 부역했던 자들이 아직도 요직을 꿰차고 있다. 지난 정권 때에 이들은 '국책 사업'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농민과 어민을 4대강에서 쫓아냈던 자들이다. 대구시와 경상북도도 4대강 사업에 적극 찬동했다. 하지만 지금은 농민들을 부추기며 '농업용수 부족' 등을 내세워 간혹 열렸던 수문조차 닫는데 안간힘을 쓰고 있다.

오늘도 나는 낙동강을 걸으며 절망한다. 금강과 영산강은 수문을 열어 살아나고 있지만, 죽은 낙동강을 '산 강'으로 복원하는 길은 아직도 멀다. 녹조 곤죽처럼 질식해가는 낙동강을 보면 아직도 수문을 계속 닫아거는 4대강 부역자들의 손이 그 속에 꽈리를 틀고 있는 것 같아 분노가 치민다.    

 

▲ 대구취수장이 있는 강정고령보 상류의 칠곡보에도 짙은 녹조라떼가 폈다. 칠곡보 위에 구미광역취수장이 있다. 조류독소 문제에 있어서 구미도 절대 자유로울 수 없다. ⓒ 대구환경운동연합 정수근

 

4대강 현장탐사-영화 만들기에 후원을 
정수근 기자를 비롯한 오마이뉴스 4대강 독립군은 지난 6월21일부터 금강과 낙동강을 탐사 취재했습니다. 또 오마이뉴스는 4대강 사업을 소재로 한 최초의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 10만인클럽 회원 가입으로 정수근 기자와 4대강 독립군을 응원해 주십시오. 

 

덧붙이는 글 기자는 대구환경운동연합 활동가입니다. 지난 10년 동안 낙동강을 다니며 4대강사업의 밑낯을 고발해왔습니다. 4대강 재자연화는 필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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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7판문점선언은 반드시 이행된다”

민플러스-조선신보-Web통일평론 공동토론회… 4.27시대 실천방안 모색

현장언론 민플러스와 4.27시대연구원이 일본을 방문해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재일총련) 기관지 조선신보사, 정책월간지 Web통일평론과 함께 지난 9일 도쿄 중앙구민센터((東京都文京区本郷)에서 공동토론회를 열었다.

“4.27판문점선언 시대의 의미와 우리의 역할”을 주제로 연 이번 토론회는 4.27판문점선언 발표 이래 첫 민족언론 교류사업이다. 참가자들은 토론에서 판문점선언이 ‘민족의 화해와 평화번영, 통일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는 데 인식을 같이하고 새 시대의 실천과제를 모색하기 위한 열띤 토론을 벌였다.

▲ 공동토론회엔 재일동포 200여명이 참석해 자리를 꽉 채웠다. [사진 : 김영욱기자]

“민족언론의 연대연합 강화, 판문점선언 이행에 기여하자”

먼저 리정만 조선신보사 사장이 방일 토론회에 참가한 남측 방문단을 환영했다.

리 사장은 대회사에서 “김정은 위원장과 문재인 대통령의 역사적 상봉과 4.27판문점선언의 탄생, 역사상 처음 되는 조미수뇌상봉, 싱가포르 수뇌회담 공동선언 발표 등 우리 민족사 5천년 역사에 일찍이 없었던 융성번영의 새 전기가 펼쳐지는 역사적 단계에 들어서고 있다. 우리는 지금이야 말로 북과 남, 해외 온 겨레가 판문점선언 이행을 위한 거족적 운동에 한사람같이 떨쳐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이번 공동토론회에 대해선 “민족언론이 민족의 운명을 우리 스스로 결정한다는 오직 한마음으로 뜻과 힘을 합쳐 지혜를 모아 평화, 통일, 번영의 판문점선언 시대의 전기를 적극 추동해 나가려는 결의가 깃들어 있는 자리”라고 의미를 부여하곤 “오늘 이 마당이 북과 남, 해외 민족언론의 연대연합을 강화하며 재일동포들은 물론 남녘의 각계각층을 판문점선언 이행에로 힘 있게 불러일으키는데 기여하길 바란다”고 인사했다.

조헌정 언론협동조합 담쟁이 이사장도 “오늘은 해외동포 역사에 길이 기억될만한 특별한 날이다. 남북 두 지도자의 혁명적 결단에 따른 판문점선언 발표에 힘입어 오늘 공동토론회가 열릴 수 있었다”고 말했다.

조 이사장은 또 조선학교를 방문한 소감을 전하며 재일동포들을 응원했다. “어제 방문한 조선학교에서 민족적 자긍심으로 똘똘 뭉쳐있는 동포 3, 4세 학생들을 봤다”면서 “남북은 하루빨리 하나 된 통일국가를 이뤄 조선반도의 평화와 번영을 이어갈 뿐만 아니라 조선학교를 비롯한 총련을 탄압하는 아베와 일본 정부, 미국의 제국적인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아주는 세계평화의 주도국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 축사를 하고 있는 손형근 6.15공동선언실천 일본지역위원회 의장

손형근 6.15공동선언실천 일본지역위원회 의장은 축사를 통해 “판문점선언 이행이 전민족적인 과제가 되는 속에서 시의적절하게 이번 공동토론회가 열리게 됐다”면서 토론회 공동주최자인 조선신보사, 민플러스, Web통일평론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한편 “남북이 합의한 판문점선언을 전력으로 이행해 나가기 위해선 판문점선언에 대한 배경과 총화에 대해서도 잘 공부해야 한다. 토론회에서 판문점선언에 대한 인식을 더 깊게 할 수 있을 것”이라며 참가자들의 열띤 토론을 당부했다.

“4.27판문점선언 시대! 새 시대가 열렸다”

Web통일평론 최석룡 대표의 사회로 본격적인 토론이 시작됐다. 먼저 김지영 조선신보사 편집국장이 “새로운 세계질서와 4.27시대의 개막”이란 주제로 발제했다.

김 편집국장은 4월 남북정상회담을 회상했다. “북남수뇌분들께서 함께 손잡고 분계선을 넘어 북과 남을 자유롭게 오가시었다. 전 세계에 생중계된 그 장면은 력사의 전환이 시작되고 조선반도에 평화와 통일의 새 시대가 도래하였음을 직관적으로, 그리고 감동적으로 보여주었다”고 운을 뗐다. 판문점선언을 두고는 “평화와 통일에 대한 우리 민족의 요구와 지향이 응축되여있을 뿐 아니라 오늘의 변화된 현실, 조선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치구도와 력량관계의 현황과 추세가 반영되어 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북남 수뇌분들은 판문점선언으로 조선반도에서 더 이상 전쟁은 없으며 새로운 평화의 시대가 열렸음을 8천만 겨레와 전세계에 엄숙히 천명했고 외세에 의해 동족상쟁의 비극을 강요당하는 일은 더 이상 없다는 것을 확언하신 것이며, 북과 남의 주도로 조선반도의 평화체제를 구축하고 그 과정에서 유관국들을 끌어들여 지역의 국제질서 재편에서 민족의 리익을 관철시켜 나가는 구도와 흐름이 태동하였다”고 분석했다.

판문점선언이 발표된 배경으론 ‘북의 국가핵무력 완성’과 ‘남녘의 촛불혁명’을 꼽았다. “판문점선언을 통해 내외에 과시된 민족의 지향과 요구는 미국이 70여 년간 조선반도에 적용하여온 개입과 지배, 분단과 대결의 정책과 전면 대치된다”면서 “미국 대통령이 판문점선언의 취지를 긍정한 것은 지난해 조선의 국가핵무력 완성 선포가 조미대결구도를 근본적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이어 미국이 한반도에 적용해온 분단대결정책에서 북에 대한 적대시와 남에 대한 지배와 간섭은 ‘동전의 양면’이라며, 남녘에선 촛불혁명을 통해 “미국의 지배와 간섭의 체계를 밑뿌리채 뒤흔드는 민중의 힘이 증명되었다”고 말하곤 “(판문점에서 분단의 선을 함께 넘은 것은)우연이 아닌 우리 민족사의 필연적 귀결이었다”고 평가했다.

▲ 주제발제를 하고 있는 김지영 조선신보사 편집국장

이어 판문점선언에 이은 6.12조미공동성명 발표는 “새로운 조미관계 수립과 동북아질서의 재편”을 가져왔다고 분석했다. “6.12공동성명에서 조선반도의 항구적이며 공고한 평화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노력을 확약하며 판문점선언으로 표명된 북남의 평화구상에 대한 미국 대통령의 지지와 찬동을 공식화한 것”이라고 했다.

또 미국의 대북 적대정책에 대한 전환의 의미가 담겨 있다고도 설명했다. “1948년 창건이래 공화국을 단 한번도 인정하지 않았던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새로운 조미관계의 수립이 명시된 공동성명에 수표(서명)한 것은 70여 년 동안 면면히 이어져온 대조선 적대시 정책의 포기를 김정은 위원장에게 확약한 것을 의미한다”며 조미 두 정상의 결단이 세계의 정치지도를 바꾸어 놓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러면서 “좋게 발전하던 정세가 과거처럼 경색국면으로 되돌아가는 일은 이제 더는 없을 것”이라며 “우여곡절은 있어도 새로운 조미관계의 수립은 두 정상 사이의 믿음과 신뢰에 기초해 과거에 없었던 새로운 방법으로 단계별로 동시행동의 원칙에 따라 착실히 추진되어 나갈 것”이라고 낙관했다.

4.27시대, 자주통일운동의 과제는?

‘4.27시대, 자주통일운동의 과제’란 주제로 두 번째 발제가 이어졌다. 한충목 4.27시대연구원 원장이 준비한 발제문을 심재환 언론협동조합 담쟁이 이사가 대독했다.

한 원장은 발제문에서 “한국의 촛불항쟁과 조선-미국 역관계의 변화는 우리 겨레에게 전례 없는 기회를 부여하고 있다”면서도 “냉전질서가 저절로 타파되는 것은 아니”라며 자주통일세력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판문점선언에 의해 우리는 4.27시대에 세 가지 과업을 수행해야 한다”며 ▲남북관계의 전면적이고 획기적인 개선과 발전을 이루는 일 ▲한반도에서 첨예한 군사적 긴장상태를 완화하고 전쟁위험을 실질적으로 해소하는 일 ▲한반도의 항구적이면 공고한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일을 강조하곤, 자주통일운동의 여섯 가지 실천과제를 제시했다.

그는 먼저 1) ‘자주통일세력의 주체역량을 강화하고 민족대단합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 민족이 단결해 평화와 번영, 자주통일을 앞당겨야 하며 ‘민족우선’ ‘민족자주’의 정신으로 주체역량을 총결집해야 한다”는 것.

▲ 주제발제를 대복하고 있는 심재환 언론협동조합 담쟁이 이사

다음으로 2) 각계각층이 참가하는 민족공동행사 조직 3) 각계각층이 다방면적인 협력과 교류, 왕래와 접촉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민족공동행사 준비과정에서 6.15, 10.4, 판문점선언에 담긴 정신과 실천방안에 대한 정치선전사업을 조직해야 하며, 민족공동행사에선 연합연방제의 실현, 남북관계 개선에 의한 공동번영과 자주통일의 실현을 지속적으로 제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노동자, 농민, 빈민, 중소상공인, 지식인, 종교인, 예술인 등의 협력과 교류, 왕래와 접촉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4) 분단적폐 청산과 5) 미국의 대북 적대정책 폐기, 종전선언과 평화협정 체결, 조미수교, 주한미군 철수 등에 대한 정치선전사업 및 반전평화운동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남북관계발전법과 남북교류협력법 개선, 그리고 촛불시민들과 함께 국가보안법 폐지 등 강력한 대중투쟁을 전개하는 한편, 국제평화애호세력과 연대해 조미관계 개선과 주한미군 철수를 촉구하는 성명, 선언운동 등을 국제적으로 조직하고, 국제평화세력과 연대행사를 조직해야 한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6) 남과 북, 해외의 자주통일세력의 연구, 언론, 교육활동 연대성 강화를 꼽았다. 한 원장은 “대결의식을 부추기는 냉전교육 개편, 올바른 언론보도를 통한 ‘민족현실 바로알기 운동’ 전개, 4.27시대연구원을 포함한 조선신보, 통일평론, 민플러스를 비롯한 연구와 언론역량 강화 등을 주요 방향에 담아 연구, 언론, 교육활동이 ‘민족적 화해와 평화번영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데 유익하도록 하고, 남북해외 합작운동으로 발전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6.15공동위, 판문점선언을 통일이정표로 들고 갈 것”

2부에선 4.27시대의 실천과제를 제시하는 지정토론이 진행됐다. 첫 번째 토론자로 나선 송세일 6.15일본위 대표위원(한통련 부의장 겸 사무총장)은 먼저 판문점선언에 대해 “과거 두 차례의 남북정상회담 성과를 널리 계승하면서도 시대와 민족의 절박한 요구인 한반도에서의 항구적 평화체제, 남북의 공동번영, 조국의 자주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경로와 방안을 제시한 점에서 지금까지의 최고 수준의 남북합의”라고 평가했다.

그리곤 6.15공동선언실천 민족공동위원회(6.15위원회)의 역할을 4가지로 제시했다. 첫 번째는 6.15를 계승한 판문점선언을 통일운동에 있어서 새로운 이정표로 높이 받들고 이행해 나가는 것이다. 송 위원은 “판문점선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민족자주를 다시 선언한 것”이라며 “우리 민족의 운명을 우리 민족 스스로 결정해야 하며,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더 이상 외세의 간섭을 받을 수 없다는 각오로 판문점선언을 새로운 이정표로 견지하면서 주도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 토론하고 있는 송세일 6.15일본지역위원회 대표위원

두 번째로 ‘판문점선언의 완전한 실천’을 언급했다. 그는 “판문점선언 시대에 따른 전민족적 이행이 필요하다”면서 “합의를 하나하나 성실히, 신속히 실천하도록 촉구하고, 정부 당국에만 맡기는 것이 아닌 8천만 동포, 겨레가 판문점선언 이행운동을 전민족적으로 전개한다는 의지와 각오가 필요하다. 남쪽의 국가보안법과 같은 사회제도나 법률 시정해 나가는 것도 판문점선언 시대의 과업”이라고 말했다.

송 위원은 또 “판문점선언과 북미공동성명에 담은 남북관계와 북미관계를 개선하면서도 한반도에 항구적이고, 연속적인 평화체제를 만들기 위한 평화운동도 동시에 벌여야”하며, “각계각층을 광범하게 망라한 남북해외 통일운동연대조직인 6.15위원회를 판문점선언 시대에 걸맞는 조직으로 확대강화”하는 것을 세 번째, 네 번째 역할로 꼽았다. 그러면서 “6.15위원회가 민족공동행사와 민간차원의 각계각층 만남을 주동적으로 만들어 민족의 화해와 통일의 분위기를 높여나가겠다”고 밝혔다.

‘3대 바로알기 운동’ 그리고 ‘한국진보의 과제’

두 번째 토론자인 김장호 민플러스 편집국장은 “새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운동이 필요하다”면서 ‘3대 바로알기 운동’을 제안했다. ▲북 바로알기 ▲우리민족 바로알기 ▲미국 바로알기가 그것이다.

3대 바로알기 운동을 제안한 이유에 대해 김 편집국장은 “판문점선언을 이행하는데 걸려있는 문제가 바로 미디어”라고 꼽았다. 그는 “미국의 주류언론들이 온갖 가짜뉴스를 퍼트리고 일본의 우익언론들, 그리고 한국의 조중동을 비롯한 수구언론들이 어떻게 해서든 판문점선언의 의미를 깎아 내리고, 6.12조미성명을 폄하하는 최전방 나팔수가 되고 있다”고 비판하곤 “이런 때에 남, 북, 해외 민족언론들이 미디어 전쟁의 최전방에서 펜으로 투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토론하고 있는 김장호 민플러스 편집국장

그는 “남쪽에선 ‘북맹탈출’이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북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인식이 많다”면서 “새로운 조미관계 전환이라는 세계 인류의 염원, 온 겨레의 염원을 북이 어떤 진정성과 자신감을 갖고 실현하려고 하는지 잘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북을 바로 아는데서 중요한 북의 지도자, 조선노동당, 조선인민 등을 바로 알 수 있도록 ‘북 바로알기 사업’을 조선신보와 협력해 추진하려고 한다”고 밝혔다.

김 편집국장은 또 우리민족을 바로 알기 위해 “하나의 민족인 재일동포를 바로 알기 위한 취재진을 구성해 우리동포들의 삶과 투쟁, 재일동포운동을 한국민들에게 알릴 계획”이며 “북 인권문제 제기 등 서방언론들의 가짜뉴스에 대한 대응에도 남, 북, 해외 언론들의 힘을 합쳐 보고자 한다”고 전했다.

이정훈 4,27시대연구원 부원장은 ‘4.27시대 한국진보의 과제’란 제목의 발표에서 문재인 정부의 통일론을 진단하며 한국 진보진영의 과제를 짚었다. 이 부원장은 “남과 북에서 4.27판문점선언을 실현하는 방법에서 약간 차이가 날 수밖에 없는 특수성이 있다”고 운을 뗐다.

그는 “북측은 공화국 정부의 지침에 충실한 것이 가장 빠른 4.27구현의 지름길인 반면, 남녘에선 문재인 정부만 믿고 가면 될 것인가에 대해 의문점을 제기하고 있다”면서 “새로운 시대 평화체제와 자주통일 성취의 기본방도는 통일의 이정표인 4.27판문점선언을 빠르고 과감하게 실현하는 것인데, 문재인 정부는 민족공조를 우선하면서 대북제재를 남측부터 허물어 버리는 과단성을 보여야 하나, 현실에서는 이를 주저하며 끝없이 미국과 수구보수세력의 눈치를 보고 있다”고 평가했다. “미국의 대북제재 유지 장단에 보조를 맞추며 남북정상이 합의한 선언을 사실상 크게 전진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것.

그러면서 “문재인 정부의 통일론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 필요가 있다”면서 “한국의 수구보수정당인 자유한국당의 통일론이 ‘흡수통일’과 ‘전시분단체제 유지론’이라면, 더불어민주당과 문재인 정부의 통일론은 남북교류가 있는 새로운 평화공존형 분단체제 유지에 가까운 측면이 있다”고 진단했다.

▲ 토론하고 있는 4.27시대연구원 이정훈 부원장

이 부원장은 또 “문 정부의 한계를 대중적으로 극복하기 위한 투쟁을 한국 진보진영이 병행해야한다”고 밝히곤, 한국 진보진영에게 ▲국가보안법 철폐 ▲조선(한반도) 비동맹 중립평화지대론 ▲한미동맹 해체 ▲주한미군 철수 ▲남북 제정당사회단체 정치교류 전면화 ▲연방(연합제) 통일국가 건설운동을 대중화할 막중한 과제가 주어져있다고 덧붙였다.

누구보다 판문점선언 환영한 ‘재일동포’

마지막 토론은 강이룩 조선신보사 편집국 부국장이 맡아 판문점선언 시대 재일동포들의 이야기를 전했다.

강 부국장은 “온 동포사회가 판문점선언을 환영하고 경축했다. 재일동포 1세들은 물론 6.15공동선언 발표 때에 태어나지도 않은 학생들은 10년간 북남관계가 좋지 않아 통일에 대한 표상이 없을 것인데도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기도 했다”고 알렸다.

강 부국장은 판문점선언 이후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며 지난 6월28일 북으로 수학여행을 다녀온 조선학교(고베조고) 학생들의 선물을 간사이 공항 세관당국에 압수당한 일을 소개하곤 “이젠 선물 빼앗기는 일이 없어졌다”고 말했다.

남측의 재일동포 지지 투쟁도 큰 힘이 되고 있다고 고마움을 표했다. “7월3일 서울 일본대사관 앞에서 (선물 압수를)규탄하는 기자회견이 진행됐고, 16일엔 남측 43개 시민단체가 일본정부의 조선학교 차별 시정을 요구하는 련대보고서를 유엔인종차별철폐위원회에 제출했다”면서 “과거 청산문제나 재일동포 권리개선 문제에 있어서도 민족이 힘을 합치면 이뤄낼 수 있다. 북남 수뇌회담이 전례없는 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만큼 함께 목소리를 높이면 그 속도는 더 높아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 토론하고 있는 강이룩 조선신보사 편집국 부국장

종합토론에선 판문점선언에 대한 전망을 두고 한목소리로 “우여곡절은 있겠지만 판문점선언은 반드시 이행될 것이며, 역진 불가능하고, 조미관계와 조미공동성명 역시 착실히 전진, 이행될 것”이라고 말했다.

토론회 마지막 순서로 단일기(통일기) 전달식이 진행됐다. “7월4일부터 10월4일까지 남녘땅 전역에서 벌어지는 통일기(단일기) 달기운동에 연대하기 위해 도쿄, 군마, 후쿠오카 지역에서 재일동포들의 연대메시지가 담긴 통일기를 가져왔다”면서 조헌정 이사장(6.15남측위원회 서울본부 상임대표)에게 전달했다. 단일기는 11일 남북노동자통일축구대회장인 서울 상암월드컵경기장에 게시됐다.

▲ 단일기(통일기) 전달식

 

 

 

 

발제문 전체보기1) 새로운 세계질서와 4.27시대의 개막- 김지영 조선신보사 편집국장: https://drive.google.com/file/d/1qf-iX0uNkLvVH1KOplDZr2lE27OEFRpG/view?usp=sharing

발제문 전체보기2) 4.27시대, 자주통일운동의 과제- 한충목 4.27시대연구원 원장 : https://drive.google.com/file/d/1HkswQLllUPXG4ZTG6Dvbr8UWft0YzrNK/view?usp=sharing

조혜정 기자  jhllk2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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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갱이라 욕하던 어르신들이 정의당을 찾고 있다

빨갱이라 욕하던 어르신들이 정의당을 찾고 있다

이하늬 기자 hanee@kyunghyang.com
입력 : 2018.08.12 09:44:01 수정 : 2018.08.12 10:13:28
 
 
7월 26일 연세대 대강당에서 열린 故 노회찬 의원 추도식. / ⓒ김흥구

7월 26일 연세대 대강당에서 열린 故 노회찬 의원 추도식. / ⓒ김흥구

 

“노회찬 원내대표가 돌아가시고 나서 많은 시민들이 당으로 오셨다. 그분들에게 우리 집안 꼴이 어떻게 보일지 걱정되는 게 사실이다. 우리당이 그분들을 다 끌어안을 수 있는 역량이 될까?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을까?” 보좌진 ㄱ씨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당직자 ㄴ씨도 비슷한 고민을 한다. “한국이 월드컵에서 독일을 이겼다고 세계 1등이 되지 않는 것처럼, 우리당 지지율이 자유한국당을 이겼다고 제1야당이라고 하기는 민망하다.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 힘 있는 당이 되려면 다 바꿔 나가야 한다. 근데 우리당에서 그걸 해본 사람이 없다.”
 

정의당사를 찾은 70대 노인 
정의당이 2012년 창당 이후 정당 지지율 최고치를 기록했다. 한국갤럽이 지난달 31일부터 사흘간 전국 성인 1003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 정의당은 15%를 기록해 자유한국당(11%)를 앞섰다. 리얼미터가 CBS 의뢰로 지난달 30일부터 8월 3일까지 2505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에서도 정의당 지지율은 14.3%를 기록했다. 

“대한민국 제1야당을 교체할 수 있도록 정의당을 지지해달라”는 지방선거 당시의 호소가 현실이 된 것이다. 여기에는 고 노회찬 의원에 대한 추모열기가 한몫 했다. 리얼미터 조사에 따르면 7월 3주차 정의당 지지율은 10.4%였다가 7월 4째 주 12.5%로 최고치를 경신했고, 8월 첫째 주 14.3%를 기록해 또 최고치를 경신했다. 

한창민 정의당 부대표는 “지방선거와 노 의원에 대한 추모열기 때문에 조금 두드러지게 올랐다”면서도 “하지만 갑작스러운 것은 아니다. 지난 6년 동안 서서히 지지율이 올랐고 지방선거 이후 10%에 육박했다”고 말했다. 실제 정의당은 2014년 지방선거에서 2.5%, 지난 대선에서는 6.2%, 이번 지방선거에서는 8.9%의 지지를 받았다. 

정당 지지율 상승과 더불어 당원 가입도 늘고 있다. 정의당 관계자들에 따르면 노 의원 사망 이후 정의당에 가입한 당원은 7000명이 넘는다. 기존 당원이 2만5000명임을 감안할 때 3분의 1 규모의 신입당원이 짧은 시간 내에 들어온 것이다. 정의당은 이런 추세라면 1만명도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주목할 점은 60대 이상 연령의 신입당원이 꽤 있다는 점이다. 실제 노 의원 사망 직후 한 70대 노인이 서울 여의도 정의당 당사를 찾았다. 연일 폭염경보가 울리던 때였다. 한 당직자는 “더불어민주당 당사 앞에 문재인 빨갱이라고 욕하는 어르신들은 있어도, 정의당에는 어르신이 찾아오는 일 자체가 드물다. 의아했다”고 말했다. 

이 70대 노인은 “나는 나이도 들었고 그동안 정치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고 운을 뗐다. 이어 “노회찬 같은 정치인이 이렇게 삶을 마감하는 걸 보고 안타깝고 부끄러웠다. 노회찬이 하려고 했던 일에 보탬이 되고 싶다”며 당원 가입원서를 요구했다. 그는 온라인 당원 가입절차를 몰라 직접 당사를 찾았다고 했다. 

실제 리얼미터 조사를 보면 정의당 지지율 상승은 40대와 50대가 주도하고 있었으나 최근에는 30대와 60세 이상에서도 상승폭이 커지고 있다. 30대는 최근 2주 연속 10% 중반대 지지율을 보였으며, 60대는 11.9%를 기록했다. 민주노동당을 비롯한 진보정당은 한 번도 60세 이상에서 10% 이상 지지율을 기록한 적이 없다. 
 

정의당 이정미 대표와 심상정 의원등 당직자들이 7월 30일 오전 국회 정론관에서 고(故) 노회찬 의원 장례를 마무리하고 국민들께 감사인사를 하고 있다./권호욱 선임기자

정의당 이정미 대표와 심상정 의원등 당직자들이 7월 30일 오전 국회 정론관에서 고(故) 노회찬 의원 장례를 마무리하고 국민들께 감사인사를 하고 있다./권호욱 선임기자

정의당 지지율 뜯어보니, 낙관은 이르다 
그럼에도 정의당 내부에서 좋아하는 분위기는 느끼기 어려웠다. 갑작스러운 일들의 연이은 발생에 당혹해하는 분위기에 가까웠다. 보좌진 ㄷ씨는 “노 대표님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서 당 지지율이 오른 것도 몰랐다”고 말문을 연 뒤 “당에서 지지율을 어떻게 관리한다고 하나”라며 오히려 기자에게 물었다. 

당직자 ㄴ씨는 “김종철 실장(노회찬 원내대표 비서실장)이나 노 대표 의원실 사람들은 거의 아무 말도 못한다고 보면 된다. 당에서 트라우마 치료를 할 생각이다”라며 “이정미 대표나 심상정 의원 등 지도부 속도 지금 속이 아닐텐데, 신입당원과 지지율을 관리해야 한다. 멘붕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실무진들이 보이는 우려는 정의당이 해결해야 할 과제가 그만큼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먼저 지지율 분석이다. 정의당은 지난 6년 동안 지지율이 서서히 올랐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지지층을 뜯어보면 낙관적이지만은 않다. 리얼미터와 한국갤럽 자료에 따르면 지난 4월부터 7월까지 정의당의 주동력은 40·50대로 나타났다. 40대는 10% 후반대, 50대는 10% 중반대 지지율을 기록했다. 이를 기반으로 최근 30대와 60대까지 범위가 확장된 것이다.

이에 대해 당직자 ㄴ씨는 “과거 민주노동당 지지층이 다시 복원되고 있다. 진보정당 분열 이후 민주당으로 가거나 무당층으로 갔던 사람들이 정권이 안정화되고 자유한국당이 작아진 걸 보고 다시 돌아온 것이다. 정치지형이 만들어준 지지율이 아닐까”라고 말했다. 한국당의 경쟁상대로 민주당을 지지하던 사람들이 한국당의 지지율이 떨어지자, 이제는 정의당돌아섰다고 보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지지층의 경우, 보수정당의 파이가 커지면 민주당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서복경 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 연구교수는 지방선거 이후 정의정책연구소 주최로 열린 토론회에서 “정의당 지지층이 안정화된 상태가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20대 지지율이 낮다는 점도 난관이다. 7월 한국갤럽 조사에 따르면 60대 이상의 지지율이 20대 지지율보다 높았다. 당직자 ㄴ씨는 “40대 이상은 당위적으로 진보정당을 지지한다. 자신에게 이득이 되지 않더라도 한국 사회에 진보정당이 필요하고 노회찬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지지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ㄴ씨는 “20대는 다르다. 이들은 진보정치의 역사를 모른다. 그래서 당위만으로는 지지하지 않는다”며 “이들에게 지지를 얻으려면 민주당이 아닌 정의당이 필요한 이유를 체감하게 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이정미 대표도 “20대는 당장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세력에 주목한다”고 말했다.
 

“민주당·정의당, 제로섬 게임 아니다” 

민주당과의 차별화도 과제다. 많은 이들이 “민주당과의 차이가 무엇이냐”고 묻는다. 민주노동당이 내세웠던 ‘무상교육 무상의료’ 구호는 상식이 됐고, 문재인 정부 들어서는 민주당을 담당하는 기자가 정의당까지 담당하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두 정당의 색깔이 비슷하다는 의미다.

보좌진 ㄱ씨는 “정의당은 과거부터 하던 걸 계속해 왔다. 움직인 건 민주당이다. 이들은 참여정부 때는 우클릭했다가 보수정부에서는 무상교육을 내세웠다”며 “진보정당이 정책을 선도해 왔지만 돈이 없는데 어떻게 계속 정책을 내나. 정책 허브 역할을 하라는 건데 이제 그러기 싫다”고 말했다.

차별화를 묻는 질문에 정의당 관계자들은 하나같이 ‘문재인 정부의 성공’을 언급했다. 당직자 ㄴ씨는 문재인 대통령과 민주당 지지율 사이의 간극을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최근 문 대통령 지지율은 60% 수준인 반면 민주당 지지율은 40% 수준이다. 

ㄴ씨는 “문 대통령이 공약으로 걸었던 최저임금 1만원, 불공정과 갑질 청산 등의 문제를 지금 민주당이 주도적으로 하고 있나? 복지를 하려면 증세를 해야 하는데 민주당이 증세를 이야기하고 있나?”라며 “정의당이 나서서 문 대통령의 공약을 실현시키겠다고 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의당은 이런 스탠스를 통해 ‘개혁보수 민주당’ ‘여당을 견제하는 진보야당’의 구도를 만들겠다는 포부다. 한창민 부대표는 “정의당과 민주당 지지율은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라며 “현재 한국 정치의 지형을 이용하면 충분히 가능한 구도다”라고 설명했다. 

보수정권에 실망하고 한국당에 실망한 보수 지지층이 민주당으로 이동하는 만큼, 민주당은 이들을 의식할 수밖에 없다. 이는 당의 입장이나 정책으로 나타날텐데, 이 경우 촛불정국에서 민주당을 지지했던 일부는 민주당에 실망할 가능성이 크다. 정의당은 바로 이 지지층을 끌어안겠다는 것이다.
 

빨갱이라 욕하던 어르신들이 정의당을 찾고 있다

누가 노심을 이을 것인가 
이제 남은 문제는 ‘인물’이다. 정의당에 노회찬·심상정 말고 누가 있느냐는 질문은 식상하기까지 하다. 이제는 노회찬이라는 대중정치인도 없다. 새로운 인물을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정의당 의원 5명 중 심 의원을 제외한 4명이 모두 비례대표로 당선됐다. 

보좌진 ㄷ씨는 “선거 때마다 비례에 목숨 거는 측면이 있다. 선거 때가 되면 당을 알리기 위해 동원은 엄청 한다. 비례 몇 명이라도 건지려면 당을 홍보해야 하니까”라며 “선거가 끝나면 소진되는 느낌이 든다.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이 악순환의 굴레를 벗어나려면 두 가지가 필요하다. 돈과 지역기반이다. 돈과 지역기반이 마련돼야 대중정치인으로 성장할 수 있다. 보좌진 ㄱ씨는 “비례 초선으로 들어와서 지역에서 재선, 3선에 도전하면서 정치인이 만들어진다”며 “하지만 우리처럼 작은 정당에서는 이 구조가 작동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ㄱ씨는 이어 “19대 국회에 박원석이나 서기호. 이런 인물들이 있었다. 재선에 도전했지만 당선이 안 됐다. 당이 여력이 있으면 지역에서 역할을 주겠지만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는 개인만 빚쟁이 되는 거다”라며 “이런 구조는 안 보고 정의당이 사람을 안 키웠다고 하는 건 부당하다”면서 답답해했다.

정의당은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중심으로 한 선거제도 개혁을 이야기하고 있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정당 지지율에 따라 의석수를 배분하는 선거제도다. 현재 선거제도는 지역구 의석을 제외한 나머지 의석만 정당 지지율로 배분한다. 15%의 지지율이라면 정의당은 40석 가까운 의석을 확보할 수 있다. 정치 진입장벽이 낮아지는 것은 물론 입법활동도 지금보다 활발하게 할 수 있다. 의석이 많아지면 보좌진 등을 통해 당의 일꾼도 양성하기 쉽다. 

그러나 당직자 ㄴ씨는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된다 해도 인물이 없는데 누구로 의석을 채울 것이며 보좌진을 채울 것이냐”고 비판했다. ㄴ씨는 “당장 이번 지방선거에 나간 청년 후보들만 해도 당에서 제대로 관리하고 있는지 의문이다”고 말했다. 

이런 복합적인 우려에 대해 이정미 대표는 “어려운 길이다. 진보정치는 늘 어려웠다”며 “하지만 언젠가는 가야 할 길이며, 가지 못할 길도 아니다”라는 포부를 보였다. 한창민 부대표도 “실무진들의 이런 우려를 잘 알고 있으며 2020년, 2022년을 대비한 후보군을 양성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의당에 지지를 보내는 이들도 이런 난관을 모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들은 정의당에 당비를 내고 당원으로 가입했다. 최근 정의당에 가입한 30대 직장인 ㄹ씨는 노회찬 의원의 장례식에 다녀온 뒤 당원 가입을 결심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때보다 더 많은 사람이 조문을 했다고 들었다. 그때는 아무나 들여보내지 않았다고 하더라. 노 의원 장례식장에서는 노숙자가 밥을 먹고 임종석 청와대 비서실장이 줄을 서서 기다렸다. 문재인 대통령의 화환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보낸 화환이 나란히 있더라. 정의당이 그런 정당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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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전선언·제재해제!” 함성, 미대사관을 흔들다


‘판문점선언 실천 8.15자주통일대행진’

서울시청에서 광화문 미국대사관까지 진행하는 ‘판문점선언 실천 8‧15자주통일대행진’이 11일 8천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종전선언, 대북제재 해제’의 함성을 울리며 진행되었다.

폭염을 뚫고 전개된 이날 행진은 노동자 통일선봉대와 학생 통일선봉대를 비롯 4.27판문점선언 이행에 뜻을 같이하는 각계 시민사회가 함께했다.

박석운 8·15추진위원회 상임대표는 대회사에서 “한반도 평화와 번영을 약속한 판문점선언 이행의 출발은 종전선언부터다”면서 “오늘의 자주통일대행진은 전쟁국가 미국에 저항하고 민족의 자주권을 쟁취하는 투쟁이다”고 강조했다.

9월 초 평양에서 조선사회민주당과 만날 예정인 김창한 민중당 상임대표는 “여름이 아무리 뜨거워도 오는 가을을 막을 수 없듯 평화와 번영으로 가는 4.27판문점 시계는 한 순간도 멈출 수 없고, 단 1초도 거꾸로 갈 수 없다”며, 판문점선언을 재확인한 북미정상회담을 역행하는 트럼프 행정부 행태를 규탄했다.

이날 대행진에는 재일동포들도 함께했다. 김승민 재일한국청년동맹(한청) 위원장은 “미국이 타국을 위해 스스로 선행을 쌓은 적은 없다. 미 대사관으로 향하는 오늘의 행진이 미국에 공동성명 이행을 강제하는 힘이 된다”며, 판문점선언 이행에 한청이 함께하겠다고 다짐했다. 함께 무대에 오른 니시야마 나오히로 일한평화연대 사무국차장은 “한국의 노동자, 민주적인 사람들의 힘처럼 우리들은 일본에서 아베정권을 무너뜨리고 동아시아의 평화의 길을 여러분과 함께 쌓아나가겠다”며 우리말로 “투쟁”을 외쳤다.

박행덕 전국농민회총연맹 의장, 최진미 전국여성연대 대표, 최영찬 빈민해방실천연대 공동대표가 결의문을 낭독했다. “평화의 대세는 확정적이나 판문점선언, 북미정상선언 이행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서, “민족자주의 기치 아래 민족 구성원 모두가 땀과 노력을 바치자”고 호소했다.

사전 행사를 마치고 미국 대사관까지 행진한 참가자들은 ‘종속적 한미동맹’과 ‘대북제재’가 적힌 현수막을 뛰어넘는 퍼포먼스도 진행했다. 길게 이어진 행렬은 미 대사관까지 닿았다.

8.15자주통일대행진 결의문

자주와 평화의 시대, 예속의 적폐를 청산하자!

한반도에 깊이 뿌리내린 미국의 패권정책은 평화와 자주통일을 향한 우리 민족의 투쟁에 의해 결정적으로 무너지고 있다.

이제 예속과 분단의 낡은 틀을 모두 청산하고, 평화와 통일의 새 시대를 맞이하자.

남과 북, 북과 미국이 새로운 관계를 선언한 조건에 주한미군은 누구를 위해 필요한가.

전쟁의 군대 주한미군을 이대로 두고 평화의 새 시대를 열 수 없다.

70년 낡아빠진 종속적, 반민족적 한미동맹을 이대로 두고서는 주권도 번영도 통일도 이룰 수 없다.

판문점 선언 정신에 따라, 민족자주의 기치에 따라 평화의 새 시대를 우리 힘으로 열어젖히자!

평화협정 체결하라! 주한미군 떠나라! 종속적 한미동맹 폐기하라!

분단 적폐 청산하자!

촛불항쟁, 그리고 판문점선언과 북미정상선언으로 분단적폐 청산의 결정적 기회를 맞이하고 있다.

일시적 우여곡절 속에서도 남북관계는 우리의 상상을 넘어 빛의 속도로 발전할 것이며, 4.27통일시대는 곧 현실이 될 것이다.

남북관계의 전면적 발전과 자주통일이 실현되는 시대에, 민족을 적으로 규정하는 낡은 법과 제도부터 하루빨리 청산해야 한다.

분단에 기생해 민주주의를 억압해 온 국가보안법을 비롯하여, 상호 불신과 대결을 조장하는 낡은 법과 제도를 하루빨리 폐지해야 한다.

또한 분단 적폐세력에 핍박받은 모든 양심수를 즉각 석방해야 한다.

분단적폐 청산하여 4.27통일시대를 활짝 열어나가자.

분단적폐 청산하자! 국가보안법 폐지하라! 양심수를 석방하라!

6.12 북미정상선언 이행 않는 미국을 규탄한다.

4.27 판문점선언 이행 가로막는 미국을 규탄한다.

남북정상은 역사적인 4.27 판문점선언을 통해 ‘전면적인 남북관계 발전’과 ‘종전선언,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노력’을 7천만 겨레 앞에 엄숙히 선언하였다.

북미정상은 6.12북미정상회담을 통해 적대관계를 끝내고 평화와 신뢰의 관계로 전환하기로 전 세계 앞에 약속하였다.

그런데 불과 100일이 지난 지금, 미국은 대북제재 해제, 종전선언 등 합의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있다.

나아가 제재니 압박이니 하면서 남북관계 발전을 위한 판문점 선언 이행까지 난폭하게 가로막고 있다

평화의 대세는 확정적이나 판문점 선언, 북미정상선언 이행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민족자주의 기치아래 민족 구성원 모두가 땀과 노력을 바치자.

판문점 선언을 따라 거족적인 자주통일대행진을 만들어 가자.

판문점선언 이행하자! 대북제재 해제하라! 종전을 선언하라!

 

강호석 기자  sonkang11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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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만 함성 속 열린 남북노동자축구대회, “이것은 단순히 축구가 아니다, 통일이고 평화다”

11일 오후, 판문점선언 이행을 위한 남북노동자통일축구대회 개최

이소희 기자 lsh04@vop.co.kr
발행 2018-08-11 19:48:10
수정 2018-08-11 19:5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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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오후 서울 마포구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남북노동자 통일축구대회에서 한반도 단일기가 경기장 중앙에 게양되고 있다.
11일 오후 서울 마포구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남북노동자 통일축구대회에서 한반도 단일기가 경기장 중앙에 게양되고 있다.ⓒ김슬찬 인턴기자
 
11일 오후, 서울 마포구 상암 월드컵 경기장에서 ‘판문점 선언 이행을 위한 남북노동자 통일 축구대회’가 열렸다. 35도에 달하는 폭염 속에서도 상암월드컵경기장 좌석을 채운 노동자, 시민 3만여명은 남북노동자 축구팀을 응원하며 민족이 평화, 번영의 길로 나아가길 바라는 마음을 한껏 표현했다.

이번 남북노동자통일축구대회는 4.27판문점선언 이후 이루어지는 첫 민간교류이다. 오랜만에 남북 민간이 만나 서로 교류하는 만큼 주최 측이나 참여하는 시민들이나 열기가 더없이 뜨거웠다. 경기장 밖에는 지방에서 올라온 노동자, 시민들의 버스들이 북새통을 이뤘고, 착석한 시민들은 ‘우리는 하나다’가 쓰인 하늘색 응원봉을 흔들며 한시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4시 정각이 되자 남북 주빈단 및 대표단이 좌석에 착석했다. 그라운드엔 민주노총 팀, 조선직업총동맹(이하, 조선직총) 건설노동자축구팀, 조선직총 경공업노동자축구팀, 한국노총 축구팀이 입장해 관객들에게 인사를 했다. 양 측은 악수를 하며 공정한 경기를 다짐했다. 함께 기념사진을 찍는 선수들의 얼굴엔 긴장감보다는 차분함이 감돌았다.

11일 오후 서울 마포구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남북노동자 통일축구대회 개막식에서 한반도 단일기와 선수들이 입장하고 있다.
11일 오후 서울 마포구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남북노동자 통일축구대회 개막식에서 한반도 단일기와 선수들이 입장하고 있다.ⓒ김슬찬 인턴기자

오후 4시 2분이 되자 개막식이 시작했다. 개막식 사회는 최은철 민주노총 서울본부 본부장, 홍광효 조선직총 중앙위원회 통일부위원장, 서종수 한국노총 서울본부 본부장이 맡았다. 세 사람은 번갈아 준비된 멘트를 해 가며 식을 매끄럽게 이어갔다.

4시 5분경, 세 사회자는 “남북노동자들의 의지를 모아, 판문점 선언 이행 북남노동자 통일 축구대회를 시작한다”라고 개막선언을 했다. 이어 한반도기가 상암월드컵경기장에 게양됐다. 경기장 내 모든 이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한반도기가 하늘 높이 오르는 모습을 지켜봤다.

 

이어 민주노총, 조선직총, 한국노총 대표자들이 대회사를 하며 대회 개최의 감격과 특별한 소회를 밝혔다.

11일 오후 서울 마포구 상암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남북노동자통일축구대회에서 남북노동자 3단체 민주노총 김명환 위원장, 조선직업총동맹 중앙위원회 주영길 위원장, 박원순 서울시장, 한국노총 김주영 위원장이 한반도기를 흔들며 입장하고 있다.
11일 오후 서울 마포구 상암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남북노동자통일축구대회에서 남북노동자 3단체 민주노총 김명환 위원장, 조선직업총동맹 중앙위원회 주영길 위원장, 박원순 서울시장, 한국노총 김주영 위원장이 한반도기를 흔들며 입장하고 있다.ⓒ김철수 기자

민주노총 김명환 위원장이 첫 순서로 대회사에 나섰다.

김 위원장은 “일촉측발의 전쟁위기와 대결정세를 걷어 낸 4.27 판문점 선언의 확고한 이행을 위해 노동자들이 먼저 만났다. 4.27판문점선언은 73년 분단체제를 끝나고 조국의 평화와 자주통일 시대를 열기 위한 또 하나의 역사적 이정표다. 민주노총은 분단된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실현한다는 강령에 맞게 판문점 선언 이행을 위해 누구보다 앞장서 실천해나가겠다고 약속한다”라고 말했다.

이어 “승패에 앞서 ‘우리는 하나다’ 함께 응원하고, ‘조국 통일’을 외치며 통일의 열정을 함께 확인하기 위해 이 자리에 왔다”라며, “이번 대회는 어떤 장애와 난관이 있더라도 남과 북이 하나임을 확인하는 대회, 남과 북의 노동자들이 판문점선언 이행을 위한 통일운동에 주도적으로 나서자는 약속과 다짐의 대회”라고 행사의 의의를 밝혔다.

김 위원장은 대회사 말미 “이것은 축구가 아니다, 이것은 통일이다”, “이것은 축구가 아니다, 이것은 평화다”라고 외쳐 관객들의 큰 환호를 받았다.

11일 오후 서울 마포구 상암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남북노동자통일축구대회에서 조선직업총동맹 중앙위원회 주영길 위원장이 축사를 하고 있다.
11일 오후 서울 마포구 상암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남북노동자통일축구대회에서 조선직업총동맹 중앙위원회 주영길 위원장이 축사를 하고 있다.ⓒ김철수 기자

주 위원장은 “8월의 폭염보다 더 뜨겁고 열렬한 환호로 우리를 맞아주고 환영해 준 남녘의 노동자들과 서울시민들, 그리고 여기 모인 각계 인사들에게 북녘 노동계급을 대표하여 동포애적 인사를 보낸다”라며 사의를 표했다.

이어 “북과 남의 노동자들이 펼치게 될 통일 축구는 민족사의 새 시대를 맞이한 크나큰 기쁨과 평화롭고 번영하는 통일조국건설에 한 몸을 기꺼이 내댈 북남노동자들의 억센 기상과 의지를 힘있게 과시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 “우리민족끼리 뜻을 모으고 힘과 지혜를 합쳐 하나 된 위력으로 위대한 역사를 창조해나가자. 바로 그 선두에 민족의 맏아들이며 기둥인 우리 노동자가 설 것이다. 노동자가 있는 그 어디서나 판문점선언 이행운동을 힘 있게 벌려 겨레의 통일대진군을 기운차게 견인하자”라고 참여자들을 격려했다.

마지막으로 대회사에 나선 한국노총 김주영 위원장은 “서울을 찾아주신 조선직총 주영길 위원장과 모든 성원들, 6.15 북측위원회 양철식 부위원장께 뜨거운 감사와 연대의 인사를 전한다. 대회의 성사를 위해 함께 해주신 6.15남측위원회 이창복 상임대표의장님과 모든 성원들께 감사 인사를 드린다. 이 상암구장을 제공해주고 남북노동자통일축구대회를 격려하려 와 주신 박원순 시장님께도 감사하다”라고 고마움을 표했다.

이어 “자주적이고 평화로운 노동자의 삶을 위해, 남북 노동자의 연대와 단합을 더욱 적극화해야 한다. 단결된 힘을 하나로 모아 판문점선언을 이행한다면 비로소 노동자가 존중받는 새로운 통일의 시대가 열릴 것이다. 긴 시간 떨어져 살아왔으나, 노동자는 함께 해왔고 또한 함께 할 것이다”라고 다짐했다.

11일 오후 서울 마포구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남북노동자 통일축구대회 개막식에서 한반도 단일기와 선수들이 입장하고 있다.
11일 오후 서울 마포구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남북노동자 통일축구대회 개막식에서 한반도 단일기와 선수들이 입장하고 있다.ⓒ김슬찬 인턴기자

이어 6.15 남측위원회, 북측위원회 상임대표들의 축사가 있었다.

이창복 6.15남측위원회 상임위원장은 “판문점 선언 이후 처음으로 정부가 아닌 민간이 주최가 되어 규모있는 공동행사가 진행되고 있다”라며, “더 다양한 장소에서 더 다양한 계층이 다양한 주제로 만나서 토론하고 손 맞잡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어 “민주노총, 한국노총 북의 조선직총이 협력하면 우리 시대의 주인공으로 우리 민족의 미래와 희망을 담보해낼수 있다. 우리 겨레가 공존공영하는 통일의 길 전세계에 보여주자. 세계사적 사변이 될 평화와 번영 통일의 새로운 역사를 함께 만들어 가자”고 민간교류협력의 물꼬를 튼 노동자들의 격려했다.

양철식 6.15남측위원회 부위원장은 “역사적 판문점선언 실천 고수 의지가 각자의 좁은 울타리를 젖히고 당파와 소속의 차이를 넘어 통일 애국의 길에서 마음과 뜻을 합쳐가게 한다. 민족 우선, 민족 중시의 입장에서 굳게 단결해야 한다. 계층, 부문 연대와 단합을 시동하고 그것을 민족의 대단합으로 이어 가야 한다”라고 남북이 마음을 모아가는 일의 중요성을 짚었다.

이어 “북남노동자통일 축구대회가 민족의 단합을 힘있게 추동하고, 통일로 가는 민족사의 큰 자욱을 남길 걸로 확신한다. 대회의 성과적 개최를 진심으로 환영한다”고 축하의 뜻을 밝혔다.

11일 오후 서울 마포구 상암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남북노동자통일축구대회에 앞서 박원순 서울시장이 축사를 하고 있다.
11일 오후 서울 마포구 상암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남북노동자통일축구대회에 앞서 박원순 서울시장이 축사를 하고 있다.ⓒ김철수 기자

서울시는 상암월드컵경기장 사용을 허가하고, K Water등을 지원하며 물심양면으로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날 박원순 서울시장은 대표단과 함께 앉아 경기를 관람하며 통일을 바라는 노동자, 시민들과 함께 했다.

축사에 나선 박 시장은 “평화 특별시 서울에서 이런 뜻깊은 행사가 열려 너무 행복하다. 평화의 마음을 가득 담고 분단의 경계를 넘어온 조선직총과 북측대표단께 서울시민을 대표해 뜨거운 환영인사를 건넨다”라고 첫 인사를 했다.

이어 “다양한 분야에서 연대와 협력을 강화해 나가야 한다. 전세계 시민과 소통, 공감해야 분열과 대립으로 얼룩진 분단사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다. 민족의 화합과 통일, 남북공동선언 판문점선언 실천을 위해 부단한 노력과 정성을 다하자. 남북노동자들의 선구적 노력을 기대한다”라고 말했다.

또 “저와 서울시는 어려움 속에서 남북공동선언을 지키고 그 정신을 살리려고 노력해왔다. 앞으로도 서울시민과 함께 평화 공동번영의 새 시대를 열겠다. 남북이 함께 할 일을 협의하고 고민할 것을 찾겠다”라며, “통일에 겨레의 미래가 있다. 저와 서울시도 멈추지 않겠다. 오직 평화를 위해 달리자”라고 연설을 끝맺었다.

11일 오후 서울 마포구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남북노동자 통일축구대회를 찾은 시민들이 축구 경기를 관람하고 있다.
11일 오후 서울 마포구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남북노동자 통일축구대회를 찾은 시민들이 축구 경기를 관람하고 있다.ⓒ김슬찬 인턴기자

개막식 말미에는 축하공연이 이어졌고, 바로 남북 노동자들의 몸풀기가 시작됐다. 경기 시작전부터 “통일조국” “우리는 하나다”를 외치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경기장을 꽉 채웠다.

이날 먼저 한국노총과 조선직총 건설노동자축구팀 경기가 전후반 30분씩 열렸고, 이어 민주노총과 조선직총 경공업노동자축구팀 경기가 이어졌다.

한국노총과 경기하는 건설노동자축구팀(붉은색 유니폼 착용)은 김정현 감독 지도하에 13명의 선수가 뛰었다. 민주노총팀과 경기하는 경공업노동자축구팀(백색 유니폼 착용)도 백명철 감독 지도하에 13명의 선수가 출전했다. 민주노총과 조선직총 경공업팀 경기에서는 북측에서 내려온 장철진 심판이 주심을 봤다. 한국노총과 조선직총팀 경기는 MBC 스포츠 플러스에서 생중계 됐다.

경기 후 대표단과 선수단은 남측 대표단 및 선수단과 함께 워커힐 호텔에서 환송만찬을 하며 서울에서의 마지막 밤을 정리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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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족을 파멸시킨 수사관, 훈장 받고 별 일 없이 산다

[잔인한 훈장 ③] 간첩 조작 사건으로 망가진 서창덕씨 가족의 삶

18.08.12 11:47l최종 업데이트 18.08.12 11:47l

 

큰사진보기 군산 성산공원에 잠들어 있는 고 서창덕 어르신
▲  군산 성산공원에 잠들어 있는 고 서창덕 어르신
ⓒ 정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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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벽 안에 잠들어 있었다. 작은 유리문 너머로 납골함이 보였다. 여기에 무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옆으론 웃고 있는 가족사진이 놓여 있다. 거기엔 아들이 쓴 편지가 있었다.

"아버지 저 잘살게요. 어머니, 엄마, 잘 모실 테니 그곳에서 아프지 마시고 지켜봐 주세요. 아빠! 사랑해요."

지난 1일, 군산에 있는 성산공원을 찾았다. 이른 아침, 납골당은 텅 비어 있었다. 여기에 그가 있었다.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간첩이 됐던 사람이다. 서창덕(71)씨다. 지난 5월 15일, 그는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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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뵐 때마다 고문 수사관을 처벌해야 한다고 했다. 최근엔 고문 수사관의 훈장이 취소되지 않을 거 같다며, 화를 내셨다. 결국 다 못 보고 하늘나라로 가셨다."

함께 납골당을 찾은 변상철 '지금여기에' 사무국장의 말이다.

고 서창덕씨가 말한 '고문 수사관'은 보안사 수사관 A(65)씨다. 지난 1985년, 그는 서씨를 간첩으로 검거한 공으로 '보국훈장광복장'을 받았다. 조작한 간첩 사건으로 훈장을 받은 거다.

머리에 총 겨누며 위협... 끔찍한 기억
 
큰사진보기 오른쪽이 서창덕. 고문후유증으로 병원을 찾는 일은 일상다반사가 되었다.
▲  오른쪽이 서창덕. 고문후유증으로 병원을 찾는 일은 일상다반사가 되었다.
ⓒ 변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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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다. 서씨는 마지막까지 '고문 수사관' A씨의 처벌을 바랐다. 끔찍한 기억이 있어서다. 훈장이 취소되지 않아 화를 냈던 것도 이 때문이다. 그건, 고문과 구타의 기억이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의 조사결과 보고서에 적힌 그의 증언은 이랬다. 발췌한 내용을 그대로 싣는다.

"포승줄로 손을 묶더니 양쪽 기둥에 쇠막대기를 걸고서는 양손을 그곳에 매달아 저의 몸이 그 쇠막대기에 대롱대롱 매달린 꼴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매달아 놓고서는 수사관이 야전침대 각목으로 저를 사정없이 두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약 20여 분간 가슴이고 다리고 마구 구타하여 나중에는 피를 토할 정도였습니다.

수사관이 '이런 새끼는 본을 보여줘야 해'라면서 때렸습니다. 그렇게 맞다가 결국 기절하게 되었습니다. 깨어 나보니 참 창피한 이야기지만 제가 똥을 다 쌌더라고요(이때 진술인은 한참을 울먹이다) 그러더니 보안대 놈들이 군인 팬티를 갖다 주면서 갈아입으라고 하고는 주는데, 똥 씻을 물도 주지 않아서 그냥 팬티에 쓱쓱 닦았습니다."


이게 다가 아니다.

"한번은 제가 허위사실을 인정하지 않자, 저의 머리에 총을 겨누며 '야, 이 새끼야, 너 같은 새끼 하나 죽여도 누가 눈 하나 깜짝할 것 같아? 너 같은 새끼 토막을 내 죽여서 바다에 던져도 뭐라고 할 사람 아무도 없어, 에구, 총알도 아까워서 못 쏘겠다' 하면서 겁을 주는데 정말 저를 죽일 것만 같아 너무 무서워 벌벌 떨기만 하였습니다.

수사관이 구둣발로 사타구니(고환 부위)를 걷어차 너무나 고통스러운 부상을 당하였는데, 이 부상으로 온몸이 오그라들어 한동안 제대로 걷지 못하였으며, 나중에 재판을 할 때에도 교도관이 부축을 하여 재판정을 출정하였고, 몸을 움직이지 못하여 교도소에서 병사에 있었습니다."


지난 2008년, 법원은 서창덕씨에게 무죄를 판결했다. 그가 '고문과 구타로 만들어낸 조작된 간첩'이란 게 밝혀졌다. 국가폭력 피해자는 그렇게 사건이 발생한 지 24년 만에 죄를 벗었다.

남편이 '간첩'이라고 따라다니며 감시... 아들은 삐뚤어졌다
 
큰사진보기 최옥선 씨가 일하는 다방에 '정 형사'는 주기적으로 찾아왔다.
▲  최옥선 씨가 일하는 다방에 '정 형사'는 주기적으로 찾아왔다.
ⓒ 정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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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이 드러났으나 고문 수사관은 처벌받지 않았다. 서창덕씨의 삶만 망가트린 게 아닌데도 그랬다. 아내 최옥선(65)씨도 '간첩 남편'을 둔 죄로 고단한 인생을 살아왔다.

성산공원을 떠나 군산 시내에 있는 다방에서 최씨를 만났다. 그는 돌아오지 않은 남편을 찾아 헤매던 때를 이렇게 기억했다.

"생전 어디 가서 자고 오는 법이 없는 사람이었어요. 세 살배기를 등에 업고 온 동네를 뛰어다녔죠. 그렇게 물어물어 찾아간 게 전주보안대에요. 거기 가서 서창덕씨 혹시 있냐고 물으니 있다고 하데요. 반갑더라고요. 그래서 얼굴 한 번 볼 수 있냐고 하니 안 된데요. '땡깡' 놓다시피 했죠. 그랬더니 '아주머니도 여기서 조사를 받아야 하는데, 아기가 있어 집으로 돌려보낸다'면서 서류를 내밀데요. 무섭더라고요. 쓰라는 대로 다 썼어요.

어느 날, 전주북부경찰서에 갔어요. 부대에서 거기로 가보라고 하데요. 가서 서창덕씨 있냐고 물으니 거기 있던 사람이 그래요. 어쩌다 그렇게 됐냐고. 사람이 아침에 질질 끌려갔다가 저녁이면 피투성이가 돼서 온대요. 그리고 아침에 또 질질 끌려가고. 끝내 얼굴은 못 봤죠. 그러다 부대에 다시 찾아가니 며칠에 군산 법원으로 오래요. 거기서 봤어요. 수인번호 333을 달고 있던 남편을. 10년을 '땅땅땅' 때리데요."

"진석 아빠"는 그 길로 교도소로 갔다. "진석 엄마"는 먹고살기 위해 막노동판에 뛰어들었다고 했다. 철근도 엮으러 다니고, 합판에 박힌 못을 빼는 일도 했단다. 하지만 문제는 겨울이었다. 소일거리도 없었단다. 지인의 소개로 그때부터 다방에서 일하게 됐다고 했다. 이때, 그 사람이 찾아왔단다.

"하루는 다방으로 '정 형사'라는 사람이 찾아왔어요. 남편이 교도소에 가기 전에도 이따금 집에 찾아와 남편의 행방을 묻던 사람이었죠. 가슴이 철렁했어요. 주방에서 일하고 있으면, 잘 보이는데 앉아 한참은 있다가 가요. 그런 게 일주일에 한두 번은 됐죠."

최씨는 다방을 그만뒀다. "정 형사"의 눈을 피해 다른 다방에 취직했단다. 감시가 끝나지 않았다. 며칠 뒤, 정 형사가 다방에 찾아왔다고 했다. 이번에도 주방이 잘 보이는 의자에 앉아 최씨를 지켜봤단다. 주인에게 말을 붙일 때도 시선은 최씨에 고정돼 있었다고 한다. 이번에도 최씨는 견딜 수 없었다. 다시, 다방을 나왔다. 그런 일이 몇 차례 반복됐단다.

마지막으로 정 형사를 본 건, 이혼하고 나서란다. 최씨는 정 형사가 "이혼하면, 안 쫓아다닌다"고 했단다. 그 말대로 했단다. 먹고살려면 일을 해야 했고, "진석이"를 키우려면 돈이 필요했단다.

감시에서 풀려났으나 마음고생은 끝나지 않았단다. 최씨의 말이다.

"셋방살이 할 때에요. 동네에서 무슨 안 좋은 일만 터지면, 사람들이 찾아와요. 우리 애가 '말짓'(해서는 안 되는 나쁜 행동)한 거라고. 다른 집 애가 말짓해도 우리 애만 혼내고 소리 지르고 그랬어요. 아빠가 교도소 간 집 아들내미라고.

'진석이'도 어디서 듣고 왔는지 '아빠가 간첩이냐'고 했다고 막 소리를 질러요. 엄마는 아빠 외국으로 돈 벌러 갔다고 하더니 다 거짓말이었다며. 그러더니 애가 삐뚤어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애들도 선생님도 "간첩 자식"... 아버지가 미웠다
 
큰사진보기 진실화해위원회가 조사한 '납북어부 서창덕 간첩 조작 사건'의 보고서
▲  진실화해위원회가 조사한 '납북어부 서창덕 간첩 조작 사건'의 보고서
ⓒ 정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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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석(37)씨도 말을 쏟아냈다. 군산 시내 커피숍에서 인터뷰하면서 '간첩 자식'으로 살아온 날들을 끄집어냈다. 죄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고 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간첩 새끼'라고 왕따를 심하게 당했어요. 애들한테 엄청 두들겨 맞았죠. 선생님도 저를 많이 때렸어요. '간첩 자식'이라고. 이때는 괄시받고 무시당했던 기억만 있어요.

저한테도 형사가 따라 다녔어요.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일주일에 한두 번은 제 뒤를 쫓아다녔죠. 답답하대요. 학교에 가면 맞고 안 가도 동네 형들이 때리고, 형사들이 따라 다니고. 살 수가 없더라고요. 나쁜 친구들과 어울렸죠. 그 애들은 저를 버리지는 않았거든요. 그러다가 소년원도 가고 교도소도 가고..."


- 아버지와 사이가 어땠나요?
"정이 없었어요. 제가 아버지 때문에 너무 당했거든요. 중학교 때인가? 제가 복싱을 했어요. 어릴 때부터 하도 맞아서 배운 거죠. 그때는 아버지가 감옥에서 나와서 같이 살 때인데, 어느 날 저를 때리더라고요. 쇠파이프로. 손뼈가 다 으스러져 운동을 그만뒀어요. 제가 소년원에 갔을 때도 아버지는 면회 온 적도 거의 없었어요. 아버지가 정말 미웠어요."

- 가장 힘들었던 기억이 있나요?
"한 번은 제가 아버지한테 물었어요. 왜 우리는 짜장면 한그릇도 밖에 나가서 못 먹느냐고. 아버지가 그러데요. 무섭다고. 또 잡아갈까봐 무서워서 밖에 못 나가겠다고. 아버지는 거의 밖에 나가지 않았어요. 항상 아버지 뒤에는 사람이 있으니까. 저는 저대로 힘들었죠. 초등학교 때부터 가출을 반복적으로 했고, 나쁜 길로 빠지게 됐죠."

- 납골당에서 다정하게 찍은 가족사진과 편지를 봤어요
"제가 교도소에 있을 때 아버지가 엄마랑 면회를 왔는데, 처음으로 우시면서 그러더라고요. 사랑한다고. 그때 정말 죽고 싶었어요. 내가 왜 여기에 있나 이런 생각도 들고. 이게 다 내 탓이구나. '나가서 아버지한테 잘해야겠다.'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5년 만에 집에 왔는데, 아버지가 아팠어요. 제가 전주로, 서울로 병원을 모시고 다녔어요. 서울서 병원 생활 할 때는 한 달간 옆에서 병실 생활도 했죠. 그때 아버지랑 밥도 같이 먹고, 이야기도 많이 했어요. 어느 날은 이불 없이 자는 저한테 점퍼를 덮어주는데, 행복하더라고요. 그 뒤로 항암치료를 받으러 여기저기 다니셨는데, 그때마다 모시고 다녔죠. 그러다가 가족사진도 찍게 됐어요. 제 인생에 가장 행복한 날이었죠."

- 아버지의 새로운 모습을 찾은 게 있나요?
"사실 아버지는 저한테 굉장히 폭력적인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아버지를 더 미워했죠. 근데 나이를 먹으면서 알겠더라고요. 그게 다 저를 생각해서 그런 거란 거. 제가 피해를 볼 까봐 그런 거라고요. 그래서 아버지 주위 사람들은 아들이 있는지도 몰랐어요. 제가 '아들'이라고 하면, 다들 놀랐죠. 아버지가 누명을 쓰고 '간첩'이 됐다가 무죄 판결받았으나, 어찌 됐든 '간첩 자식'이란 소리를 들을까 봐 그러셨던 거를 나중에 알았어요."

끝나지 않은 국가폭력

끝으로 서진석씨와 헤어지며 약속한 게 있다. 그가 행정안전부에 가는 날, 함께 가기로 했다. 서창덕씨의 삶을, 최옥선씨의 인생을, 그리고 서진석씨의 미래를 뒤바꿔 놓은 A 때문이다. A의 훈장은 아직 박탈되지 않았다.

지금도 '고문 수사관' A는 보훈 혜택을 누리며, 살고 있다. 국가폭력은 끝나지 않았다.

[관련기사] 간첩 조작해 받은 두 개의 훈장, 취소는 한 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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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공단' 1호 공장, '남북경협 이곳에서 시작될 것'

[포토뉴스] 무더위로 하나된(?) 평양과 서울은 하나
평양=이승현 기자  |  shlee@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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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8.11  19:4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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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유소년축구대회 참가를 위해 도착한 평양의 한 여름은 무더위에서 만큼은 이미 서울과 하나였다.

대회 출전 선수들이 대회장인 김일성경기장에서 연습을 하는 사이 시내 참관에 나선 참가단은 이동중 연신 땀을 닦으며 하루 종일 더위와 사투를 벌였다.

중간 중간 기온을 묻는 참가단에게 안내를 맡은 북측 관계자들은 손전화로 어디론가 전화를 걸어보더니 34도라고 알려준다.

오후 4시가 조금 넘은 시각. 김일성광장으로는 흰색 와이셔츠 차림에 남녀 학생들이 모여들고 큰 공터에서도 부문별로 연습하는 장면이 눈에 띄었다. 

9월 9일 '공화국창건' 70돌을 맞아 예전 '아리랑'을 모체로 새로 창작한 대집단체조 '빛나는 조국'의 막을 올리기 위해 막바지 땀을 흘리고 있다.  

고 김일성 주석의 생가인 '만경대 고향집', '개선문'과 '김일성경기장', '옥류관' 등 그다지 낯설 것도 없는 참관지이지만 10년만에 다시 가본 그곳에는 세월의 변화가 조금씩 비껴 있었다.   

이번에 특별히 참관하게 된 국제유소년축구대회를 공동 주관하는 4.25체육단의 실내 종합체육관과 축구훈련장, 그리고 남북체육교류협회와 함께 최근 가동에 들어간 '4.25체육기자재공장은 남측에는 처음 소개되는 곳이다.

   
▲ 양각도호텔에서 내려다 본 미래과학자거리 뒷편으로 류경호텔이 뾰족히 솟아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미래과학자거리는 지금도 건설중이다. 멀리 평양화력발전 굴뚝에서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개선문 뒷편으로도 고층 아파트가 올라가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고 김일성 주석의 생가인 만경대고향집의 해설강사.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만경대고향집' 가까이 우물에서 물을 떠 먹는 여학생들. '정중성을 보장해야 한다'며 사진 촬영을 금지했지만 학생들을 찍는 건 괜찮다는 눈치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개선문 해설강사는 열띤 해설에 이어 노래솜씨도 뽐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김일성경기장 앞 남녀. 유난히 뜨거운 올 여름 평양 여성들이 들고 다니는 화려한 양산이 눈에 띄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오는 15일 국제유소년축구대회가 열릴 김일성경기장으로 들어가는 길.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김일성경기장 운동장. 보조의자를 깔았을 경우 10만명을 수용할 수 있다고 하며, 관중석은 6만석이다. 트랙이 깔려있는 종합운동장이지만 국제축구연맹(FIFA)로부터 승인을 받은 경기장으로 앞으로는 월드컵 지역예선이 이곳에서 열릴 수 있다고 한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김일성경기장 본부석.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무더운 여름 더 생각나는 시원한 옥류관 냉면.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봉사원들의 날렵하고 익숙한 냉면 봉사 모습.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경기도 연천군 선발팀을 이끌고 대회에 참가한 임재석 연천군의회 의장(오른쪽에서 두번째) 등 임원진들이 '우리는 하나다' 구호로 '통일 연천' 의지를 과시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옥류관 테라스에서 본 대동강 풍경. 주체사상탑.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옥류관 테라스에서 본 대동강 풍경. 왼쪽 아치형 자색 건물은 청년문화회관, 그 옆으로 물결치는 지붕 모양을 한 건물이 류경원이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옥류관 테라스에서 본 능라도 5.1경기장. 15만명 규모로 오는 9월 9일 '공화국창건일' 대집단체조 '빛나는 조국'이 펼쳐질 곳이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4.25체육단이 연습과 경기를 위해 운영하고 있는 실내 종합체육관. 농구, 배구, 핸드볼은 물론 특설무대를 설치해 권투, 레슬링 경기까지 진행할 수 있다고 한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김기혁 4.25체육단 단장.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2011년 5월 4일 현지지도하고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그때부터 2014년 8월 9일까지 5차례에 걸쳐 현지지도한 표식비가 있는 4.25체육단 실내 종합체육관 전경.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4.25체육단에서 쓰고 있는 보조 축구경기장에서 벨라루시 선수들이 한낮 땡볕에 잠깐 집중 연습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4.25체육단 옆의 평양시 사동구역에 소재한 '4.25체육기자재공장'. '국가경제발전 5개년전략목표 수행을 위한 증산돌격운동을 힘있게 벌이자'는 구호가 눈길을 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최문순 강원도지사(왼쪽)와 김경성 남북체육교류협회 이사장이 '4.25체육기자재공장'에서 참가자들에게 공장 설립 취지와 의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이 공장은 사단법인 남북체육교류협회가 북측으로부터 50년간 사용권을 받은 35만 평방미터 규모의 '평양공단'에 처음 지은 1호 공장이다. 북측 4.25체육단과 남북체육교류협회가 만든 경협기업인 (주)남북경협이 합영으로 설립한 이 공장은 2008년 준공해 우여곡절을 겪다가 최근 완공하고 가동에 들어갔다. 당초 모든 체육용품을 생산하기로 했지만 대북제재 등의 이유때문에 지금까지는 스포츠 의류를 주로 생산하고 있다.

김경성 이사장은 앞으로 국제환경이 나아지면 당초 계획했던대로 모든 체육용품을 생산하는 '대동강1호공장'으로 확대시키고 '체육부지'로 받은 애초 토지 성격에 맞게 27홀 규모의 골프장, 스포츠센터 겸 호텔, 축구 전용경기장 건설 등을 계획하고 있다고 밝혔다. 

김 이사장은 "남측 내수 또는 제3국 수출을 전제로 한 개성공단과 달리 평양에서 직접 소비할 수 있는 내수용 스포츠용품을 생산하기 때문에 진정한 남북경협의 완성품이라고 할 수 있다. 아직 국제환경이 미치지 못해서 그렇지만 이곳에서 본격적으로 남북경협이 시작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 과학기술중시 구호 아래 스포츠의류 생산에 여념이 없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공장 외벽에 걸린 '세계와 경쟁하라, 세계에 도전하라, 세계를 앞서 나가라!', '사회주의 경제건설에 총력을 집중하여 우리 혁명의 전진을 더욱 가속하자!'구호.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수정-12일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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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한 나는 아오키, 이복순, 청목항

한·일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한 나는 아오키, 이복순, 청목항

등록 :2018-08-11 09:35수정 :2018-08-11 09:35

 

 

[토요판] 커버스토리/ ‘잊힌 이름’ 재한일본인 처 ① 내 이름은 무엇입니까  

광복 뒤 남편 따라 조선 온 일본인 여성들
한국·일본 양국서 모두 잊힌 그들의 이야기
다시 8·15가 돌아왔다. 73번째 광복절을 맞이해 는 조금 다른 방향에서 그 의미를 새기고자 했다. 광복의 두 주인공은 대개 피해자 조선과 가해자 일본이었다. 제국주의와 식민지배의 역사에서 가해자와 피해자 어디에도 딱 들어맞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재한일본인 처.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조선 남성을 만나 가정을 꾸리고, 1945년 해방 직후 남편을 따라 조선에 온 일본 여성들이다. 한국전쟁과 가난, 가해 국가 출신이란 정체성은 그들의 한국살이를 고단한 시간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들은 한·일 두 나라의 역사에서 모두 잊힌 존재가 됐다. 한국의 피해자 민족주의와 일본의 패배한 제국주의 역사관 모두 그들의 삶을 기억하려 하지 않았다. 주로 남성의 관점에서 조명하고 기록해온 전쟁과 식민지배의 시대를 이들 ‘소수자 여성 집단’은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3차례에 걸쳐 그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카카오스토리펀딩(storyfunding.daum.net) 페이지에서는 총 8화로 구성된 이야기가 8월10일부터 시작됐다. 기획·글 팩트스토리 박상연·박희영·강민혜·서지연, 사진 아오키 츠네·김종욱 제공

 

 

 

 사진은 2000년대 중반에 찍은 70대의 아오키 츠네(오른쪽)와 또 다른 재한일본인 처인 쿠도 치요(1918~2010)의 결혼식 장면. 기획·글 팩트스토리 박상연·박희영·강민혜·서지연, 사진 아오키 츠네·김종욱 제공
사진은 2000년대 중반에 찍은 70대의 아오키 츠네(오른쪽)와 또 다른 재한일본인 처인 쿠도 치요(1918~2010)의 결혼식 장면. 기획·글 팩트스토리 박상연·박희영·강민혜·서지연, 사진 아오키 츠네·김종욱 제공

 

아오키 츠네(90)가 서울역 안내센터 앞 의자에 손깍지를 끼고 앉아 있었다. 수요일 정오가 조금 지난 시간인데도 서울역은 어디론가 떠나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아오키는 가만히 앉아 왼손에 낀 반지 두 개를 만지작거렸다. 그는 가장 좋아하는 빨간색 점퍼를 입고 알록달록한 번짐 무늬가 새겨진 하얀 스카프를 맸다. 5년 동안 보지 못한 친구, 가츠라 시즈에(97)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아오키 오른발 옆 종이가방에는 친구에게 줄 선물이 한가득이었다. 점심 식사도 잊고 오후 1시 경주행 케이티엑스(KTX)를 기다렸다. 지난 4월4일, 일기예보는 전국에 비가 온다고 했지만 서울 하늘은 아직 맑았다.

 

“광복절만 되면 아들이 나 보고 공원도 나가지 말라고 해. 엄마 돌 맞을까봐….”

 

아오키가 별 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그는 전라도와 충청도 사투리를 섞어 말했고, 가끔 경상도 억양으로 발음하는 단어들도 있었다. 일본인으로 태어난 아오키는 전북 진안과 대전에서 30년 가까이 살았다. 부산과 경남 김해에서도 10년 정도 머물렀다. 그는 ‘재한일본인 처’라고 불리며 한국에서 70년 넘게 살았다.

 

 

조선인과 결혼한 일본인 아내

 

 

재한일본인 처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인과 결혼해 살다가 광복 후 남편과 함께 한국에 정착한 일본 여성들이다. 이들은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조국 대신 사랑을 선택했지만 한국에서는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일본에서는 조선인과 결혼했다는 이유로 한일 양국에서 외면 받았다.

 

현재 재한일본인 처의 수는 정확한 기록이 없어 파악이 어렵다. 논문 ‘재한일본인 처의 생활사’(1999년 김응렬)에 따르면 1977년 771명, 1991년 744명이 ‘부용회’(재한일본인 처 모임) 부산·영남지부에 가입해 있었다. 같은 논문에선 부용회 임원의 말을 인용해 전국 회원을 1983년 1500여명, 1996년 1천여명으로 추산했다. 차별을 피하기 위해 출신을 숨겼거나, 부용회에 가입하지 않은 이들도 적지 않았다.

 

아오키는 1928년 1월16일 일본 홋카이도에서 태어났다. 고향 야쿠모는 섬의 잘록한 서남단 지역에 위치했고, 서쪽과 동쪽 모두 바다를 접했다. 그는 고향을 “눈이 많이 오는 곳”으로 기억했다. 자기 어깨 언저리에서 손을 휘휘 저으며, 그만큼 눈이 왔다고 알려줬다.

 

“대나무가 있으면 끄트머리만 조금 나올 정도로 눈이 높이 쌓였어. 그래서 스키 파는 장수가 있었어. 나무로 만든 스키 사서 고거 타고 학교 댕겼잖아. 그 눈이 4월이나 돼야 녹았어. 요즘 눈은 눈도 아니야.”

 

어린 시절 아오키의 주특기는 ‘스키점프’였다.

 

아오키가 고등학생이던 1940년대 초, 탄광과 공장 사이에 있던 그의 집에는 20여명의 조선인 하숙생이 있었다. 그들 대개는 전쟁 중인 일본의 부족한 노동력을 메우러 바다를 건너온 사람들이었다. 아오키의 남편 남점암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조선에서 농부였던 점암은 일본에서 탄광 광부로 일했다.

 

한일 강제병합 이후 많은 조선인이 일본에서 하급 노동자로 전락했다. 1939년 이후에는 강제 징병에 따른 이주도 급격히 증가했다. 1945년 5월 기준으로 일본에 머물렀던 조선인은 210만 명으로 추산된다. 소수 유학생을 제외한 대다수가 가난한 노동자였다. 1945년 3월 일본 탄광 노동자 41만여 명 가운데 조선인 노동자는 30%에 달했다. 지역에 따라서는 조선인 노동자가 더 많은 경우도 있었다. 아오키의 고향 홋카이도가 대표적이었다.

 

점암은 아오키 집에서 가장 오래 하숙한 사람이었다. 3년 정도 함께 생활했다. 가끔 저녁에 시간이 나면 두 사람은 ‘조선말’을 공부했다.

 

“사람이 순진하고 참 좋았어요. 우리집 농사일, 가축 기르는 일도 많이 거들어 줬어.”

 

아오키는 조선 사람이 낯설지 않았다. 둘째 언니도 조선인과 결혼했다. 둘째 형부는 경북 안동에 살던 양반댁 자제였다. 아오키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집에서는 자연스럽게 점암과의 혼인 이야기가 오갔다.

 

일제강점기 일본의 공장과 탄광 지대에서는 조선인들과 일본인들의 결혼이 자연스러웠다. 일본 내무성 기관지 <특고월보>에 실린 집계에 따르면, 1939년 12월 말 일본 전국 47개 지역 중 조선-일본인 부부가 가장 많이 거주하는 곳은 도쿄와 홋카이도였다.

 

아오키의 부모는 혼사를 서둘렀다. 남성 대다수가 전쟁에 징집된 1940년대 일본에서 여성들은 결혼 상대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부모는 점암이 아오키보다 10살 많았지만, 오랫동안 하숙집에 함께 살아 식구 같고 성실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아오키의 아버지는 결혼을 앞두고 점암의 고향 전북 진안에 편지를 보내 그의 호적을 확인하기도 했다. 한국에 본처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였으나 점암은 미혼이었다. 아오키는 1944년 겨울에 점암과 결혼식을 올렸다. 전쟁통이라 혼례는 일본 전통식으로 간단하게 치렀다. 아오키는 기모노를 입고 머리 모양을 내기 위해 가발을 썼다.

 

결혼 뒤 1년도 지나지 않은 1945년 조선은 식민지배에서 놓여났다. 아오키는 첫 아이를 가진 상태에서 조선의 광복 소식을 들었다. 점암은 아오키에게 조선으로 가자고 했다. 점암은 조선에 가도 “목욕탕도 있고 화장실도 있고 다 있다”며 아오키를 설득했다. 아오키가 어머니에게 조선에 가겠다고 하자, 어머니는 반대했다.

 

“혼자 가라고 하고 너는 여기서 살아라. 아이 키우면서 새로 시집가면 된다.”

 

1945년 10월14일 아오키는 아이를 낳았다. 그는 자식 걱정이 앞섰다. 당시 일본인들은 조선인을 낮잡아 ‘한토진(반도인, 半島人)’이라고 불렀다. 자신은 이혼하고 살 수 있어도 아이가 한토진 소리를 들으며 자랄 게 걱정됐다. 아오키는 남편 점암을 따라 아이와 함께 조선으로 가겠다고 결심했다.

 

 

 

일제강점기 조선인 남자와 결혼한
일본인 아내들의 고단한 한국살이
광복 뒤 남편 따라 5천여명 한국행
한국에선 일본인이란 이유로 외면
일본선 한국인과 결혼했다며 외면

 

40년대 홋카이도 고향집 하숙생이던
조선인 광부와 혼인한 아오키 츠네
아이 ‘한토진’ 소리 안 듣게 하려고
한국 생활 시작해 남편 호적 입적
6·25때 핏덩이 막내 잃고 직접 매장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서 조선인 남성과 결혼한 뒤 광복과 함께 남편을 따라 한국 살이를 시작한 아오키 츠네. 2000년대 중반 70대의 그가 태극기를 들고 사진을 찍었다. 아오키 츠네 제공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서 조선인 남성과 결혼한 뒤 광복과 함께 남편을 따라 한국 살이를 시작한 아오키 츠네. 2000년대 중반 70대의 그가 태극기를 들고 사진을 찍었다. 아오키 츠네 제공

 

 

1945년 12월, 눈 내리는 일본 홋카이도 하코다테항에서 출항한 조선행 배가 가다 서기를 반복하며 보름이 걸려 부산항에 도착했다. 갓난아이를 안은 17살의 앳된 아오키와 남편 점암도 그 배에 타고 있었다. 광복 후 남한을 통치한 미군정은 혼란스러운 부산항을 강력히 단속했다. 낯선 조선 땅을 밟은 아오키를 가장 처음 맞은 건 덩치 크고 파란 눈을 가진 미국인이었다.

 

“미국 사람을 그때 처음 봤어. 남편이 옆에 있는데도 나를 번쩍 들어 올려서 빙그르르 도는 거야.”

 

160㎝도 안 되는 작은 체구의 아오키는 낯선 이의 무례한 행동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전쟁통에 남편 폭력 피해 도망

 

 

남편을 따라 하얀 눈을 맞으며 부산에서 전주를 거쳐 전북 진안의 시댁에 이르는 고단한 여정을 아오키는 묵묵히 견뎠다. 흩날리는 눈발을 피해 아기에게 젖을 물리려 잠시 들어간 주막 안에서 처음 만난 할머니 대여섯 명이 신기한 눈으로 기모노 입은 아오키의 손을 잡았다가, 아기 물린 가슴을 찔러보고, 얼굴도 쓰다듬었다.

 

고생 끝에 도착한 곳은 시집이 아닌 남편의 외숙모 집이었다. 점암은 아오키와 갓난아기를 2~3일간 외숙모에게 부탁하고, 자신의 집을 수리하러 다녀왔다. 일본의 아오키 집과 비교하면 한국에 있는 점암의 집은 변소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열악한 곳이었다. 점암은 집 주변 울을 다시 치고, 변소의 나무판자도 새로 깔았다. 남편없이 외숙모 집에 남겨진 아오키는 예상보다 더 열악한 한국 상황, 낯선 음식과 문화 때문에 입국을 후회했다. 점암의 외숙모가 밥상에 올린 검은 밥에선 알 수 없는 냄새가 났다. 팥을 넣어 지은 밥 냄새가 익숙지 않았다. 조선간장은 너무 짰다. 배가 고팠지만, 동치미 국물을 조금 마실 수 있을 뿐이었다. 밤에는 어디선가 기어 나온 빈대가 아오키와 겨우 잠든 아이를 물어뜯으며 괴롭혔다.

 

아오키는 남편 점암의 아내로 혼인신고를 해 남편의 호적에 입적됐다. 광복 전 한일 관계상 ‘동일국가’ 내에서의 결혼이었기 때문에, 아오키의 일본 국적은 유지된 상태였다. 아오키는 결혼 생활 6년 동안 아이 셋을 얻었다. 낯선 땅 조선에서 기댈 사람은 남편 점암 뿐이었다. 시어머니와 큰형님 등 대가족이 한 집에 살았다. 낮에 작은 돌무더기 위에 앉아 아이에게 젖을 물리던 아오키는 이웃들이 흉보는 것도 몰랐다. 아기가 죽으면 작은 돌무더기를 쌓아 무덤을 만든다는 사실을 남편이 알려줬다.

 

1950년 6월25일 한국전쟁 발발 뒤 진안에 북한군이 들어온 것은 7월22일 무렵이었다. 가족들은 피난길에 오르며 뿔뿔이 흩어졌다. 아오키 부부는 어린아이 셋을 데리고 피난길에 나설 수 없어 진안군 주천면 일대를 전전했다.

 

“전쟁 때는 니꺼 내꺼 없잖아. 아무 빈집이나 막 들어가서 살았어. 인민군도 농사짓는 사람 해코지는 안 했어. 먹을 거랑 옷, 이불을 다 빼앗아가서 고생했지만.”

 

피난 생활 중에 아직 핏덩이였던 막내아들을 잃었다.

 

“죽은 막내를 내가 파묻고 왔지. 눈이 많이 오는 날이었는데, 군용 담요에 싸서 그냥….”

 

아오키는 한 손엔 죽은 아이를 안고 다른 한 손에는 괭이를 들고 눈 덮인 산으로 올라갔다.

 

“파고 보니까 조금 깊이가 모지래(얕아). 그래서 다시 꺼내 가지고 더 파서 다시 묻고 그랬어. 가(막내)가 살았으면 지금 예순여덟인가 아홉인가.”

 

엄마 아오키는 아흔이 넘어서도 죽은 막내 나이를 헤아렸다.

 

전쟁 중 장티푸스가 유행했다. 점암이 장티푸스에 걸리자 가족 모두가 병에 옮았다. 점잖고 성실했던 점암이 돌변했던 것도 이때였다. 그는 술독에 빠져 지내며 걸핏하면 아오키에게 손찌검을 했다.

 

“나무 베개 있잖아. 그걸로 그 새끼는 얼굴만 때렸어. 하도 맞아서 코가 없어졌어. 맞아서 피투성이가 됐어.”

 

아오키는 목침으로 얼굴을 맞아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코가 깨졌다. 눈이 퉁퉁 부어 손으로 눈꺼풀을 벌려야 겨우 앞을 볼 수 있었다. 전쟁이 한창이었지만 점암의 폭력을 피해 금산까지 50여㎞를 걸어서 도망쳤다. 도망 길에 어린 아들 둘을 데려갈 순 없었다.

 

재한일본인 처들 대부분은 한국에서 불행한 삶을 살았다. 일본 외무성 관료였던 모리타 요시오의 <전쟁 중 재일조선인의 인구 통계(1968)>를 보면, 1938년부터 1942년까지 일본에서 조선인 남성과 결혼한 일본인 여성은 5242명이다. 그 중에서 5천여명의 여성이 1946년 3월까지 남편을 따라 한국으로 왔다. 이들 중 상당수는 남편으로부터 버림받거나 자식을 빼앗기고 내쫓겼다. 이방인으로서의 삶을 견디지 못해 자살한 사람도 많았다.

 

무작정 도망 나온 아오키는 금산을 거쳐 대전에 닿았다. 당장 배고픔을 해결할 돈이 없었던 아오키는 대전의 한 이발소에서 3년 간 머물며 일을 돕고 잠자리를 해결했다. 이발소 주인 할머니는 조용하고 성실한 아오키에게 바닥 쓸고 닦는 일과 머리 감기는 일을 맡겼다. 하루는 이발소에 평소 왕래가 잦아 안면을 튼 ‘보이’(심부름하는 소년)가 와서 아오키를 찾았다.

 

“누님, 일본 무역회사 사장이 있는데 누님이 가서 말 좀 해주실라요?”

 

아오키는 일본인 무역회사 사장의 통역을 도와주고 일본에 있는 큰언니 아오키 스우에게 보낼 편지를 부탁했다.

 

“남편한테서 도망 나왔다고는 말 못하고, 남편이 죽었다고 했지.”

 

 

다시 아들을 피해 도망

 

 

며칠 뒤 언니한테서 답신이 왔다. 한국 생활을 접고 무역회사 사장을 따라 일본으로 건너오라는 내용이었다. 보름 뒤 한 학생이 아오키를 데리러 왔다. 사장 아들이려니 짐작했다. 이발소 주인 할머니는 “남자들 다 도둑놈이니까 가지 말라”며 아오키를 붙잡았지만, 일본에 돌아가고 싶었던 아오키는 그를 따라나섰다. 사장의 집은 서울 동대문 근방이었다. 그는 며칠 동안 집을 비운 상태였다. 아오키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사장의 집안일을 도우며 하염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한 사흘인가 있으니까 사장 집에 어떤 군인이 찾아왔어. 사장 조카 된다더만. 한밤중에 내방에 들어왔어. 아이고….”

 

아오키는 사장 조카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그때 25살밖에 안 됐으니까…. 무서워서 그날 밤에 도망쳤어. 기차 소리 나는 곳으로 막 뛰었어. 짐칸 있잖아. 거기 탔어.”

 

 

1940년대 일본에서 결혼 전의 아오키 츠네(오른쪽 두번째)와 친구들. 아오키 츠네 제공
1940년대 일본에서 결혼 전의 아오키 츠네(오른쪽 두번째)와 친구들. 아오키 츠네 제공
1945년 10월 부산항을 통해 일본에서 귀국하는 사람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5년 10월 부산항을 통해 일본에서 귀국하는 사람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전염병 앓은 뒤 점잖던 남편 돌변
피난 생활 중 남편 폭력 피해 도망
남편으로부터 버림받고 내쫓기거나
이방인 삶의 고통으로 목숨 끊기도
재한일본인 처들이 견뎌온 시간들

 

이혼 절차 못밟아 귀국 못한 아오키
이번엔 아들 폭력 피해 다시 도망
바느질·청소일 등으로 생계유지하며
일본 귀국 포기하고 살아온 70여년
외로운 시간 견디게 해준 ‘부용회’

 

 

 

아오키는 일본에 가고 싶은 마음이 더 절실해졌다.

 

1951년 일본 귀국을 희망하며 부산항에 모인 일본인 ‘부녀자’는 450여명(그해 1월25일 <동아일보>)이었다. 연합군 총사령부에 일본 입국허가를 받기 위해서는 호적 초본이나 경찰서장의 인증 등 일본인이라는 증거서류가 필요했다. 일본은 1952년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체결을 계기로 조선인 호적에 입적한 일본인 아내들의 일본 호적을 소멸시켰다. 아오키의 일본 호적도 이때 소멸돼 한국 국적만을 보유하게 됐다. 남편 점암의 한국 호적에 올라있는 아오키가 일본 입국 허가를 받기 위해서는 이혼 절차를 밟아야 했다.

 

1960년대 초 한일 수교를 위한 회담이 결렬을 거듭하고 있었다. 아오키는 일본으로 가는 ‘야메배(밀선)’를 구해 타기 위해 부산 부전시장에서 건어물 장사를 하며 뱃삯을 모았다.

 

“배 타기가 쉽지 않았어.”

 

미국 국적의 선박이 아니거나 연합군 총사령부, 또는 일본상선관리국으로부터 운항 허가를 받지 않고 38도선 이남의 조선반도를 오가는 해운은 불법이었다. 많은 일본인과 조선인이 쓰시마 해협과 조선 해협을 건널 때 밀항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운항 요금은 비쌌다. 조선인 한 사람당 75엔에서 150엔을 받았지만, 귀국을 원하는 일본인에겐 한 사람당 150엔에서 200엔(미군정기 자료를 토대로 펴낸 <주한미군사>)을 받았다.

 

1965년 6월22일 한일 정부는 14년 동안 끌어온 국교 정상화 협상을 마무리 짓고, ‘한일 양국의 국교 관계에 관한 조약’을 조인했다.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십수년을 부산에 머무르며 건어물 장사를 하던 아오키는 이 무렵 김해 출신 남자 김태우를 만났다. 그는 불도저 운전사였다.

 

“나보다 3살 아래야. 그 사람은 일본말도 잘하고, 글도 잘 쓰고, 담배나 술도 안 하고. 사람이 괜찮았어.”

 

부인과 사별한 김해 남자는 슬하에 아들과 딸을 두고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아오키는 김해로 내려가 밭일을 도우며 함께 살았다.

 

김해 생활 6년째에 태우가 사우디아라비아로 출장을 갔다. 그 사이 아오키는 장티푸스를 앓았다. 태우의 어머니는 시름시름 누워 있는 아오키가 짐스러웠다.

 

“동네 사람이 그러는데, 누룽지 썩은 걸로 나를 멕이더래. 시어머니 되는 사람이 나 죽었다고 사우디에 편지를 했어.”

 

아오키가 죽었다는 편지를 받고 태우는 급히 집으로 돌아왔다.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남자가 밭일하던 아오키 앞에 섰다.

 

“내가 죽었다는 얘기 듣고 온 거야. 와서 자기 엄마한테 집에서 나가라고 하더라고. 죽지도 않은 사람을 죽은 사람으로 만들었다고.”

 

1970년대 초반 40대에 들어선 아오키는 남편 점암과의 이혼 절차를 밟기 위해 진안으로 갔다. 진안에서 마주한 두 아들은 아오키의 기억 속 4살, 6살이 아니었다. 군대에 다녀온 첫째 아들은 한번에 알아보지도 못했다. 남편 점암은 다른 여자와의 사이에 딸 둘과 아들 하나를 두었다. 새 살림을 차린 점암은 아오키와 이혼하려 했지만 아들이 반대했다. 동네 사람들이 “엄마를 일본으로 보내주면 평생 못 본다”며 겁을 줬다. 아들은 “이혼 도장을 찍어주지 말라”며 아버지를 막아섰다.

 

“어머니는 내가 잘 모실게요.”

 

진안에 묵은 지 보름이 지날 무렵 아오키를 데리러 온 태우 앞에서 아오키의 아들이 엄마를 붙잡았다. 아오키는 김해에 있는 태우의 자식들을 돌보는 것보다 피붙이인 자식들과 사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태우는 사우디에서 번 돈 500만원을 아오키에게 주며 “잘 살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일본으로 돌아가는 뱃삯을 마련하기 위해 부산 부전시장에서 건어물 장사를 할 때(1965년)의 아오키 츠네. 아오키 츠네 제공
일본으로 돌아가는 뱃삯을 마련하기 위해 부산 부전시장에서 건어물 장사를 할 때(1965년)의 아오키 츠네. 아오키 츠네 제공
1974년 당시 “일본인은 승차 거부”라는 문구를 써붙인 전북 군산 지역 택시.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74년 당시 “일본인은 승차 거부”라는 문구를 써붙인 전북 군산 지역 택시.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일본행을 포기하고 한국에서 아들과 살기로 한 아오키는 진안에 작은 막걸리집을 열었다. 진안 사람들은 아오키를 ‘이복순’이라고 불렀지만, 이름만큼 복 많고 순하게 살 순 없었다. 동네 사람들은 농사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아오키의 가게에 들렀다. 술 취한 남자 손님들의 농담과 추행이 잇따랐다. “일본댁 연애 한 번 하자”며 손을 덥석 잡거나 무작정 끌어안았다. 못하던 욕만 늘어갔다.

 

“시불놈들, 미친놈들.”

 

한 동네에서 살림을 따로 살던 남편 점암은 일흔을 갓 넘긴 나이에 죽었다. 아오키를 향해 동네 사람들은 “일본댁 한국 남편 죽었는데 얼마나 우나 보자”며 쑥덕거렸다.

 

 

40년 만에 되찾은 이름 ‘청목항’

 

 

전라북도 진안군 주천면 대불리 12**번지. 고된 장사 생활 15년 만에 쌀 17가마니를 주고 산, 한국 땅에서 아오키가 소유한 첫 번째 집이 됐다. 그 집에서 작은아들이 술만 먹으면 남편 점암처럼 폭력을 행사했다. 가게에서 술 항아리를 깨부수고, 몇 십 통 떼어다 놓은 수박을 집어 던지곤 했다.

 

“술이라면 정말 지긋지긋 해.”

 

한국에 남은 이유였던 아들 때문에 예순을 넘긴 나이에 아오키는 다시 ‘도피생활’을 시작했다. 자식이라 어디 말할 데도 없이 아오키는 홀로 속앓이를 했다. 무작정 서울행 기차를 탔다. 1980년대 서울 변두리엔 판자촌이 즐비했다. 아오키가 가장 먼저 자리 잡은 곳은 미아리 산 중턱의 초가집이었다. 바느질, 인형 만들기, 청소도우미 등 아오키는 생계를 위해 어떠한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외롭고 고단한 삶에 한줄기 위안은 있었다. ‘부용회’. 아오키와 같은 재한일본인 처들의 모임이었다. 아오키가 1960년대 초 부산에 살 때 부용회 부산지부가 수정동에 있었다. 부용회를 찾아간 그가 일본 가는 방법을 물었을 때 “합의 이혼을 해서 호적을 정리해야 일본에 갈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일본행은 무산됐지만 진안에 돌아갔을 때 부용회 전주지부에서 잠시 활동했었다. 아오키가 본격적으로 부용회 활동을 한 건 서울살이 때부터였다. 1970년대 말 그가 처음 서울 부용회에 갔을 때만 해도 50여 명의 회원이 있었다. 부용회는 유일하게 아오키를 반기는 ‘집’이었다.

 

동네 친구로 가족처럼 정을 나누던 가츠라상, 사람 좋기로 소문난 나가시마상, ‘한 성깔’ 하던 마츠모토상, 잘 웃던 고마다상…. 서울 부용회 마지막 회장인 구마다 가츠코는 어려운 살림의 아오키를 챙겼다. 일본대사관은 일본 국적의 재한일본인 처에게 소정의 생활보조금을 지급했으나, 아오키는 한국 국적이라는 이유로 받지 못했다. 구마다는 아오키에게 생활보조금 지원을 해달라고 일본대사관에 요청했다. 아오키가 자원해 매달 부용회 식구들의 식사를 책임지던 수고를 보상하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서울 부용회 건물이 노량진동에서 대방동으로 이동하고 회원들이 하나둘 세상을 달리해 문을 닫기까지 아오키는 개근 회원이었다.

 

정부 차원에서 재한일본인 처 지원책을 강구하기 시작한 건 한일 국교정상화(1965) 이후인 1969년이었다. 한일 정부는 일본인 처들을 일본으로 송환하기 위한 계획에 합의했고, 일본 정부는 ‘재한일본인의 보호대책비’ 명목으로 1억3000만엔(13억원)을 지원했다. 그 과정에서 1960년대 한국에 머물러 있던 일본인 처의 절반 이상이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들이 돌아가길 희망한 가장 큰 이유는 한국인의 반일감정과 궁핍한 생활 때문이었다.

 

1970년대 한국 생활 30여년 만에 처음 일본으로 돌아가 가족들과 만난 40대의 아오키 츠네(윗줄 오른쪽 세번째). 아오키 츠네 제공
1970년대 한국 생활 30여년 만에 처음 일본으로 돌아가 가족들과 만난 40대의 아오키 츠네(윗줄 오른쪽 세번째). 아오키 츠네 제공
2000년대 중반 서울 동작구 대방동에 위치한 부용회 서울지부 앞에서 아오키 츠네(오른쪽 두번째)가 재한일본인 처 친구들과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아오키 츠네 제공
2000년대 중반 서울 동작구 대방동에 위치한 부용회 서울지부 앞에서 아오키 츠네(오른쪽 두번째)가 재한일본인 처 친구들과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아오키 츠네 제공

 

국내 유일의 재한일본인 처 복지시설인 경주 나자레원(원장 송미호)은 일본인 처 147명의 일본 귀국을 도왔다. 나자레원은 한국 국적을 가진 일본인 처들도 돌아가길 희망하면 호적 정리를 통해 귀국 절차를 밟도록 지원했다. 아오키는 그 정보를 접하지 못했다. 40여년 전은 지금처럼 정보가 빠르게 공유되는 시대가 아니었다. 귀국 시도가 번번이 좌절된 아오키는 아들을 피해 서울로 올라온 뒤부터 일본으로 돌아가겠다는 생각을 접었다.

 

“아이고, 그냥, (귀국한다는) 생각도 못했어요.”

 

대신 아오키는 ‘고향 방문’(단기 비자) 목적으로 일본을 꾸준히 찾았다. 아오키가 일본의 가족을 다시 만난 것은 1970년대 들어서였다. <재한일본인처 고향방문 후원> 프로젝트(한국인 단체인 ‘부용회 후원회’ 지원)로 아오키는 한국에 온 지 30여년 만에 일본으로 건너가 가족들을 만날 수 있었다. 첫 방문은 안동으로 시집온 둘째 언니와 함께였다.

 

“버선발로 뛰어오시는 아버지를 보는데, 내가 일본말을 잊은 거야. 부둥켜안고 눈물만 흘렸잖아.”

 

그날은 온 집안이 야단법석이었다. 연신 고개만 끄덕이며 울었다.

 

아오키 츠네의 한국 이름은 ‘청목항’(靑木恒)이었다. 츠네를 한국식으로 표기했다. 1985년 이후에야 아오키는 ‘복순이’ 대신 ‘청목항’을 얻을 수 있었다. 1984년 12월 유엔여성차별철폐협약이 비준되어 이듬해 국내법과 같은 효력을 발휘하게 되면서 호적법이 개정되었다. 이때 한국 국적을 취득한 외국인도 고유의 성과 본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조항이 추가되었다.

 

2000년대 중반 서울 성북구 월곡동에서 친자매처럼 지내던 아오키 츠네(왼쪽)와 가츠라 시즈에. 아오키 츠네 제공
2000년대 중반 서울 성북구 월곡동에서 친자매처럼 지내던 아오키 츠네(왼쪽)와 가츠라 시즈에. 아오키 츠네 제공
지난 4월 경북 경주시 나자레원에서 5년 만에 다시 만난 90살의 아오키 츠네(오른쪽)와 97살의 가츠라 시즈에. 박희영 제공
지난 4월 경북 경주시 나자레원에서 5년 만에 다시 만난 90살의 아오키 츠네(오른쪽)와 97살의 가츠라 시즈에. 박희영 제공

 

5년 만에 만난 두 친구

 

 

서울에서 경주는 고속열차로 2시간15분이 걸렸다. 아오키는 자리에 앉아 선물 꾸러미와 가방을 창 쪽 벽에 가지런히 뒀다. 그는 잠도 청하지 않고 창문 밖 풍경만 바라봤다. 신경주역을 빠져나왔을 때는 흐린 하늘에서 부슬비가 흩날렸다.

 

아오키가 90살이 된 지금 서울 부용회(‘부용회 본부’ 역할을 해온 부산지부도 이름만 유지될 뿐 사실상 활동 중단)는 사라졌다. 2004년까지만 해도 12명에 달했던 회원 대부분이 세상을 떠났다. 남은 이들 중에서도 다리가 불편한 가츠라 시즈에는 5년 전 나자레원에 들어갔다. 가츠라는 나자레원으로 가기 전까지만 해도 아오키의 반려견 ‘삐삐’와 ‘딱지’를 돌봐준 유일한 동네 친구였다. 두 사람은 서울시 월곡동에서 10m를 사이에 두고 살았다.

 

짙은 청색 기와지붕을 얹은 나자레원으로 들어갔을 때 가츠라가 휠체어를 타고 아오키를 맞았다.

 

“얼굴이 왜 이렇게 안 좋아. 그렇게 건강하던 사람이….”

 

만나자마자 얼굴을 부비며 가츠라는 아오키 걱정부터 했다.

 

“난 괜찮아요. 언니는?”

 

“2년만 있으면 100살이야. 나 예쁘지?”

 

5년 만에 만난 두 친구는 서로를 깊이 끌어안았다. 아오키가 차고 있던 하얀 진주 팔찌를 풀어 가츠라 손목에 채웠다. 건물 밖에서 벚꽃이 지고 있었다.

 

 

기획·글 팩트스토리 박상연·박희영·강민혜·서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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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부경기 아니다, 통일경기 시작하자” 손맞잡은 남북 노동자 대표들

판문점선언 이행을 위한 남북노동자단체대표자 공동기자회견

이승훈 기자 lsh@vop.co.kr
발행 2018-08-10 17:15:54
수정 2018-08-10 17: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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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노동자 3단체 한국노총 김주영 위원장·조선직업총동맹 중앙위원회 주영길 위원장,·민주노총 김명환 위원장이 10일 오후 서울 광진구 워커힐호텔에서 판문점선언 이행을 위한 남북노동자단체 대표자 공동기자회견에 앞서 손을 잡고 들어보이고 있다.
남북노동자 3단체 한국노총 김주영 위원장·조선직업총동맹 중앙위원회 주영길 위원장,·민주노총 김명환 위원장이 10일 오후 서울 광진구 워커힐호텔에서 판문점선언 이행을 위한 남북노동자단체 대표자 공동기자회견에 앞서 손을 잡고 들어보이고 있다.ⓒ김철수 기자

 “북과 남의 노동자들이 진행하게 되는 통일축구경기는 결코 누가 이기고 누가 지는가 하는 승부경기가 아닙니다. 마음과 뜻을 합쳐 통일의 대문을 앞장에서 열어나가려는 우리 노동자들의 드높은 통일의지를 과시하는 민족적 단합과 화해를 위한 통일지향경기입니다.” (주영길 조선직업총동맹 중앙위원회 위원장)

10일 남녘의 땅을 밟은 주영길 조선직업총동맹 중앙위원회 위원장과 양대노총 위원장이 환한 미소를 머금고 손을 맞잡은 채 ‘남북노동자통일축구대회’ 행사의 시작을 알렸다.

주영길 위원장과 김주영 한국노총 위원장, 김명환 민주노총 위원장은 이날 서울 광진구 워커힐 호텔 4층 아트홀에서 ‘판문점선언 이행을 위한 남북노동자단체대표자 공동기자회견’을 열고 남북 노동자들의 통일을 향한 의지를 과시했다.

이 자리에서 주영길 위원장은 “내일 여기 서울의 상암경기장에서 온 겨레의 커다란 기대와 관심 속에 북남로동자통일축구대회가 진행되게 된다”며 “역사의 창조자, 시대의 개척자들인 북과 남의 우리 노동계급은 조국통일을 위한 길에서 이루어지고 굳건히 다져진 연대단합의 위력을 남김없이 떨치며 역사의 새 시대를 열어놓은 판문점선언을 고수하고 이행해 나가는데서 선봉적 역할을 다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남북노동자 3단체 한국노총 김주영 위원장·조선직업총동맹 중앙위원회 주영길 위원장,·민주노총 김명환 위원장이 10일 오후 서울 광진구 워커힐호텔에서 판문점선언 이행을 위한 남북노동자단체 대표자 공동기자회견에서 김명환 위원장이 북측 주영길 위원장 마이크를 바로 잡아주고 있다.
남북노동자 3단체 한국노총 김주영 위원장·조선직업총동맹 중앙위원회 주영길 위원장,·민주노총 김명환 위원장이 10일 오후 서울 광진구 워커힐호텔에서 판문점선언 이행을 위한 남북노동자단체 대표자 공동기자회견에서 김명환 위원장이 북측 주영길 위원장 마이크를 바로 잡아주고 있다.ⓒ김철수 기자

“따뜻하게 맞아준 양대노총에 깊은 사의”
“물러서지 않고 통일축구대회 개최에 노력”

 

이날 남북노동자단체 대표자 공동기자회견장에는 수많은 취재진이 몰렸다. 100석 가량 마련된 기자석에는 기자들이 빼곡하게 앉았다. 기자회견 시작 직전에는 스피커 앞에 설치해 놓은 방송사 마이크들이 우르르 떨어져 관계자들이 급하게 수습하는 해프닝이 발생하기도 했다.

오후 3시가 조금 넘자, 주영길 위원장이 앞장서서 기자회견장으로 들어섰다. 그 뒤를 김주영·김명환 양대노총 위원장이 따라 들어왔고, 세 사람은 환하게 웃으며 손을 맞잡아 들어 보였다. 카메라 플래시가 번쩍였다.

간단한 소개를 마치고 곧바로 기자회견이 시작됐다. 주 위원장은 먼저 양대노총 환영단의 환영식에 감사를 표하며 2015년 이후 3년 동안 열리지 못했던 남북노동자통일축구대회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했다.

주 위원장은 “2015년 10월 평양에서 4번째로 개최되는 북남노동자통일축구대회를 성대히 진행한 뒤, 2016년 5·1절을 계기로 서울에서 통일축구대회를 개최하기로 발표했었다”며 “그러나 아쉽게도 서울에서의 통일축구대회는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어 “북남 사이의 왕래와 접촉은 완전히 차단됐으며, 적대와 불신의 골은 나날이 깊어만 갔다. 하지만 우린 결코 포기하거나 물러서지 않았으며, 오히려 통일축구대회를 반드시 개최하기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여 왔다”고 지난 시간을 회고했다. 그러면서 “우리들의 노력은 판문점북남수뇌상봉으로 북남관계가 극적으로 전환되면서 오늘 이렇게 현실로 이뤄지게 됐다”고 강조했다.

또 그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말을 빌려 “북과 남이 자주 오가면 분리선은 낮아지고 아예 없어지게 될 것”이라며, “조선직총 대표단의 이번 길은 북과 남의 각계각층 사이의 접촉의 길을 넓히고 통일의 대로를 더욱 든든히 다지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남북노동자 3단체 한국노총 김주영 위원장·조선직업총동맹 중앙위원회 주영길 위원장,·민주노총 김명환 위원장이 10일 오후 서울 광진구 워커힐호텔에서 판문점선언 이행을 위한 남북노동자단체 대표자 공동기자회견에서 북측 주영길 위원장이 발언을 하고 있다.
남북노동자 3단체 한국노총 김주영 위원장·조선직업총동맹 중앙위원회 주영길 위원장,·민주노총 김명환 위원장이 10일 오후 서울 광진구 워커힐호텔에서 판문점선언 이행을 위한 남북노동자단체 대표자 공동기자회견에서 북측 주영길 위원장이 발언을 하고 있다.ⓒ김철수 기자

“기호지세(騎虎之勢)로 내달릴 출발”

주영길 위원장의 발언 뒤엔 곧바로 김주영 한국노총 위원장과 김명환 민주노총 위원장의 발언이 이어졌다.

김주영 위원장은 “오늘 통일축구대회의 개최는 지난 시기 남북의 노동자가 함께 노력한 결실”이라며 “노동자가 앞장서서 통일시대를 열어내자는 약속을 지키기 위한 실천의 결과물”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이제 우리 남북 노동자 앞에 놓인 과제는 역사적인 판문점선언의 중단 없는 이행일 것”이라며 “판문점선언이 열어놓은 새로운 평화번영의 시대, 자주통일의 새 시대를 실현하는 길에, 어제보다 더욱 힘 있게 나설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명환 위원장은 “이것은 축구가 아닌, 통일”이라고 강조했다.

이같이 정의한 이유에 대해 김 위원장은 “남북의 노동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민족애를 나누는 것이 바로 통일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남북노동자가 함께 뜀박질한 상암 월드컵경기장에 흘릴 땀방울은 조국통일을 앞당기고 키워가는 숭고한 값진 거름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또한 김명환 위원장은 “오늘부터 진행되는 노동자통일축구대회가 역진불가능 한 조국의 평화와 번영, 통일시대를 위해 남북노동자들이 호랑이 등에 함께 올라 기호지세(騎虎之勢)로 내달릴 출발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기자회견은 별다른 질의응답 없이 종료됐다. 남북노동자통일축구대회 조직위원회 관계자는 기자회견 시작에 앞서 “3개 단체 대표 발언 뒤 별도의 질의응답은 갖지 않을 예정”이라며 양해를 부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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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마피아를 위한 ‘소설’이 도를 넘었다

[기자수첩] 英이코노미스트 기사에 등장하는 단 한 줄로 “한전 경쟁력 상실” 창작한 문화일보·한국경제신문

정철운 기자 pierce@mediatoday.co.kr  2018년 08월 11일 토요일
 
한국경제신문은 8월7일자 ‘英이코노미스트 “한전, 脫원전 탓에 경쟁력 잃어가고 있다”’란 제목의 기사에서 “영국 이코노미스트지가 한국의 원자력발전이 국제적인 경쟁력을 잃고 있다고 분석했다. 탈(脫)원전 등 원전에 대한 반발에 직면했다는 이유에서다”라고 보도했다.
▲ 게티이미지
▲ 게티이미지

 

한국경제신문에 따르면 이코노미스트는 “글로벌 원전시장에서 러시아의 경쟁자는 거의 없다”며 “러시아원자력공사가 한국전력 등 원전 기업을 제치고 세계 원전시장의 지배자로 떠올랐다고 분석했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이어 “한전은 한때 아랍에미리트(UAE) 원전 수주 성공 등으로 세계 원전시장의 신흥 강자로 떠올랐지만 탈원전 등으로 경쟁력을 잃었다고 이코노미스트는 지적했다”고 보도했다.  

 

▲ 한국경제신문 8월7일자 기사.
▲ 한국경제신문 8월7일자 기사.
 
그러나 이코노미스트는 그런 지적을 한 적이 없다. 위와 같은 보도내용도 없다. ‘Russia leads the world at nuclear-reactor exports’(러시아가 세계 원전수출을 이끌다)란 제목의 해당 이코노미스트 기사를 보면 한전이 언급되는 부분은 전체 기사에서 단 한 문장 밖에 없다. “KEPCO, South Korea’s energy company, is facing a domestic backlash against nuclear power.” 번역하면 “한국의 에너지 회사인 한전은 원자력 발전에 대한 국내의 반발을 사고 있다”정도다.

 

이코노미스트 기사의 취지는 러시아가 세계 원전 수출의 리더가 됐다는 내용이다. 한국경제신문은 기사에 단 한 줄 언급된 이 문장을 거의 왜곡에 가깝게 본인들 입맛대로 확대해석했다. 원전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있다는 대목을 두고 어떻게 “한국 원전이 경쟁력을 잃었다”로 해석할 수 있을까. 이 정도면 소설이라 봐도 무방하다.

 

 

▲ 문화일보 8월6일자 기사.
▲ 문화일보 8월6일자 기사.
 
한국경제신문은 문화일보 8월6일자 ‘“러, 원전시장 절대강자…한전은 경쟁력 상실”’이란 제목의 기사를 보고 다음날 지면에서 인용 보도했을 가능성이 높다. 문화일보 역시 ‘영국 이코노미스트지 분석’이란 부제를 달고 한전이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탈원전 흐름 속에서 경쟁력을 잃어가고 있는 상태”라고 보도했다. 마치 영국 권위지 해석처럼 보이지만 문화일보의 각주에 불과하다.

 

이코노미스트 기사를 인용하고자 했다면 방점을 잘못 찍었다. 이코노미스트는 “1980년대부터 침체에 빠져 있던 원자력 산업은 2011년 쓰나미가 일본의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를 집어삼켰을 때 엄청난 타격을 입어 결국 붕괴를 초래했다”고 보도하며 “전 세계적으로 원자력 발전으로 발생되는 전기량은 2년 만에 11% 감소했고, 그 이후로는 회복되지 못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이코노미스트는 “이 쇠퇴하는 산업 내에서, 한 국가(러시아)는 현재 원자력 발전소의 설계 및 수출 시장을 지배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우리가 주목할 대목은 바로 이 ‘쇠퇴하는 산업’에 미래가 없다는 사실이다. 러시아와 중국처럼 언론이 원전 공포와 우려를 제대로 보도 못하는 소위 독재국가들만 이 산업에 발을 빼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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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차 금요행동, 아베정권 규탄 1110명 국제선언 발표 (전문)

모리모토 씨 “분노와 부끄러움과 한탄스러움 느낀다”180차 금요행동, 아베정권 규탄 1110명 국제선언 발표 (전문)
김치관 기자  |  ckkim@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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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8.10  17:4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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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학교와 아이들을 지키는 시민모임’은 10일 일본대사관 앞에서 ‘180차 금요행동’을 개최, ‘재일동포와 조선학교를 탄압하는 아베정권 규탄 국제선언’을 발표했다. 시민모임 공동대표 정태효 목사가 여는말을 하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1948년, 일본정부가 재일동포들의 민족교육을 대대적으로 탄압하며 급기야 한 소년을 사망에 이르게 한 ‘한신교육투쟁’이 발생한지 7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일본정부의 재일동포 탄압은 계속되고 있다.”

국내는 물론 해외동포들까지 1차로 1,110명이 서명한 ‘재일동포와 조선학교를 탄압하는 아베정권 규탄 국제선언’이 10일 낮 12시 서울 율곡로 일본대사관 앞에서 ‘우리학교와 아이들을 지키는 시민모임’(시민모임)이 개최한 ‘180차 금요행동’에서 기자회견 형식으로 발표됐다.

참석자들은 정영이 전여농 사무총장이 낭독한 ‘재일동포와 조선학교를 탄압하는 일본정부를 규탄한다’는 제목의 국제선언을 통해 “식민지배에 대한 사죄는커녕 재일동포와 조선학교를 노골적으로 탄압하는 일본정부를 강력히 규탄한다”며 4가지 요구사항을 발표했다.

   
▲ 정영지 전여농 사무총장이 국제선언을 발표하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일본정부는 식민지배 사죄하라! △대북적대정책 및 독자제재 즉각 철회하라! △재일동포에 대한 탄압을 즉각 중단하라! △조선학교에도 고교무상화 제도를 적용하라!

사회를 맡은 조원호 시민모임 기획위원장은 “국제선언에 참여하신 분들은 총 1,110명이다. 여기에 일본, 미국, 독일, 카나다, 호주에 계신 우리 동포들이 많이 마음을 같이 하셨다”고 소개하고 “2차, 3차 계속 이어질 예정”이라고 밝혔다.

시민모임 공동대표 정태효 목사는 여는말을 통해 “브라질 학교까지 지원하는데 우리 조선학교 아이들에게만 고교무상을 허용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아이들에게 정당하게 고교무상화를 적용하라는 이야기다”라며 “일본이 고교무상화 정책을 할 때까지, 그리고 또 일본이 식민정책을 사죄할 때까지. 그리고 더 이상은 헤이트 스피치나 더 이상 많은 일본에 가 있는 사람들이 학대받지 않고 규탄받지 않는 그런 사람다운 세상에 살 수 있을 때까지 우리는 함께 할 것”이라고 말했다.

   
▲ 방한 중인 모리모토 다카코 고교무상화연락회 사무국원이 발언하고 있다. 일한민중연대전국네트워크 가토 마사키 씨가 통역을 맡았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와타나베 켄쥬 일한민중연대네트워크 대표 등이 8.15행사 참가를 위해 방한해 금요행동에 함께 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모리모토 다카코 고교무상화연락회(고교무상화제도에서조선학교배제를반대하는연락회) 사무국원은 “이 자리에 지금 서 있으면서 아주 부끄럽다. 그것은 일본 정부가 지난 식민지시대에 대한 사죄도, 반성은커녕 아직도 재일 코리안 분들에게 차별정책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운을 뗀 뒤 “이미 고교무상화가 8년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외국인 43개 학교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유독 조선학교만 배제가 돼 있다. 저는 정말 이런 배타적이고 반식민적인 이런 행동에 분노와 부끄러움과 한탄스러움을 느낀다”고 심경을 밝혔다.

이날 180차 금요행동에는 8.15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한 일한민중연대네트워크 와타나베 켄쥬 대표 등이 자리를 함께 했고, 일한민중연대전국네트워크 가토 마사키 씨가 통역을 맡았다.

모리모토 사무국원은 “일본의 문부과학성 앞에서도 금요행동이 진행되고 있는데 오후 4시부터 1시간에 걸쳐서 진행된다. 여기에는 조선대학교 학생들, 조선학교 고교생들, 일본인 지원자들이 참여하고 있는데, 무려 300회가 넘었다”고 소개하고 “유엔의 인종차별철폐위원회에서 이미 일본 정부는 차별을 시정하라는 권고를 받은 바 있다”고 지적하고 “차별정책을 진행하는 아베 정권이 북일회담을 한다고 하는데, 그런 회담을 할 자격도 없다. 아베는 당장 퇴진하라”고 외쳤다.

1930년대 증조할아버지 세대가 제주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정착한, 재일동포 량대륭 씨는 “재일교포 3세인데 잘하지는 않지만 이렇게 민족의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고 반문하고 “일본에는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재일교포 학교가 있다. 조선총련 학교가 있다. 저는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다녀서 이 정도 말을 한다”고 밝혔다.

량대륭 씨는 “이제 시대가 많이 변하고 있는데 어떻게 새로운 시대, 새로운 역사 흐름에 맞게 우리 민족의 재산으로서 동북아시아의 새로운 역사에 맞게 조선학교를 봐야 되느냐는 것”이라며 “앞으로 탄압, 차별이 없어지고 더 좋은 세상이 만들어질 때까지 다 같이 힘 합쳐 나가리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 국제선언을 일본대사관에 전달하려다 경찰에 가로막히자 조원호 시민모임 기획위원장이 규탄하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금요일행동 참가자들은 일본대사관측을 규탄하고 다음 번에는 일본대사관측과 사전협의를 거쳐 문건을 전달하기로 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기자회견을 마친 대표들은 국제선언을 일본대사관 측에 전달하려 했지만 경찰들이 막아나서 전달하지 못했고 일본대사관 측은 사전협의가 없었다는 점을 들어 접수를 거부했다. 기자회견 참석자들은 “일본 대사 나와라” 등을 외치다 다음 번에는 사전협의를 거쳐 전달하겠다며 마무리했다.

앞서, 정태효 공동대표는 여는말에서 “우리는 세 차례 일본대사관에 우리의 서명받은 것과 우리가 목적하는 바를 전달했다. 받아주지 않았다. 들어가지 못했다. 그리고 우편으로 하라고 해서 우편으로 했는데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한 번도 답을 듣지 못했다”며 “오늘도 우리는 전달할 거다. 그리고 계속할 거다”라고 말했다.
 

[재일동포와 조선학교 탄압하는 아베정권 규탄 국제선언 (전문)]
재일동포와 조선학교를 탄압하는 일본정부를 규탄한다

1948년, 일본정부가 재일동포들의 민족교육을 대대적으로 탄압하며 급기야 한 소년을 사망에 이르게 한 ‘한신교육투쟁’이 발생한지 7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일본정부의 재일동포 탄압은 계속되고 있다.

일본정부는 자국 내 모든 고등학교에 적용하는 ‘고교무상화’제도에서 유일하게 조선학교만을 배제하며 평등하게 교육받을 권리가 있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차별적 조치를 강행했다. 그에 따라 일부 지자체는 기존에 지급하던 교육보조금마저 중단하며 초급, 중급학교까지 재정적 압박을 가하고 있다.

또한 일본정부가 가하는 대북독자제재로 인해 재일동포들은 북측에 있는 가족,친척들과 제대로 된 왕래, 물자교환마저 차단당하는 피해를 입고있다. 얼마전 북으로 수학여행을 다녀온 조선학교 고급부 아이들의 수학여행 기념품을 일본세관이 모조리 압수한 사태가 발생했다. 금지품목이나 위험품목이 아닌 개인의 물품까지도 몰수해가는 일본정부의 반인권적 행태에 경악을 금할 수 없다.

조선학교는 일본의 식민지배 시절 강제로 일본에 끌려가 정착하게 된 우리 동포들이 “조선인은 조선말을 배워야 한다”는 당연한 이치로 설립한 민족교육기관이며, 재일동포들은 일본정부로부터 보호받을 권리가 있는 일본사회의 구성원이다.

그러나 일본정부가 가하는 노골적인 차별정책은 우익단체들의 헤이트스피치와 재일동포건물에 대한 총기 난사 등의 충격적인 폭력행위로 이어져 재일동포들을 증오범죄의 대상으로 내몰고 있다.

식민지배에 대한 사죄는커녕 재일동포와 조선학교를 노골적으로 탄압하는 일본정부를 강력히 규탄한다. 우리는 동포들의 정당한 권리를 위해 끝까지 연대해 싸워갈 것임을 선언하며 아래와 같이 요구한다.

1. 일본정부는 식민지배 사죄하라!
1. 말로만 북일관계 개선, 북일정상회담 운운말고 대북적대정책 및 독자제재 즉각 철회하라!
1. 재일동포에 대한 탄압을 즉각 중단하라!
1. 조선학교에도 고교무상화 제도를 적용하라!

2018년 8월 10일

* 재일동포와 조선학교를 탄압하는 아베정권 규탄 국제선언 (1차-1110명)

Bowm Kim, Chan Gok Kim(Wisconsin), CHO,Haeng-Lae(JAPAN), Debbie Kim(London UK), Ejay Kim(New Jersey, USA), Esher Yi(NY), Heidi Johnstone(Sydney), Hyun Choi(Ottawa. Canada), Hyun Song(TN, USA), Iksoo Han(NY), Jinju 최(Florida), Kelly Lee(Canada), Keumjoo Armstrong(USA), Kitamura Megumi(Hiroshima Japan), KSY(S. Korea kyungju), Lacey Kim(NY, USA), Lee in sook(LA Torranc), M.S.Lee, Max Kwak(New Zealand), Misuk Nam(CA, USA), Peter Kim(CA, USA), Rippel, Young Sook(Germany), Roy S Kim(Milton, WA), Sam Song(NY, USA), Seo, Eui Ok(Berlin-Germany), SungAe Ha(California), Susan Lee(Sydney, Australia), Susan Lee(Australia), ubong kim(japan tokyo), Yong lee(San diego(CA), Yongsoon Yun(Germany), Young Soon Kim(CA, USA), Young Tai Han(Berlin), Yulgoo Lee(서울), 가은경(밀양), 간은균(화성), 강유사(일본 이바라키현), 姜裕聖(日本), 姜スルギ(東京), 강경란(광명), 강다복(김제), 강동균(서울), 강란솩(고양), 강륭정(日本 兵庫県), 강미현(수원), 강민정(서울), 姜福美(日本), 강사용(당진), 강선래(경주), 강성봉(안산), 강성운(전북), 강성주(제주), 강성준(광주), 강신우(안산), 강영경(경남), 강영숙(제주), 강유선(東京), 강윤식(진주), 강인석(창원), 강인식(공주), 강재형(서울), 강정숙(서울), 강정연(서귀포), 강주수(서울), 강행옥(광주), 강형구(서울), 강호석(울산), 강훈식(전주), 고선미(전주), 고성준(수원), 고은영(서울), 고은하(전주), 고재성(진도), 고정호(화성), 공연배(광주), 곽노진(서울), 곽다원(서울), 곽미예(고양), 곽분이(경기 광주), 구복이(부산), 구용기(광주), 구자숙(김천), 구태희(서울), 국주영은(전주), 권계영(서울), 권낙기(서울), 권말선(용인), 권미강(서울), 권수희(부여), 권영국(경주), 권영제(화성), 권영준(전주), 권오혁(서울), 권용덕(고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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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2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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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2018/08/11 09:51
  • 수정일
    2018/08/11 09:51
  • 글쓴이
    이필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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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라아에서 미, 이스라엘제 무기 대량 발견
 
번역, 기사 이용섭 기자 
기사입력: 2018/08/11 [06:06]  최종편집: ⓒ 자주시보
 
 

탈환된 다라아에서 테러분자들이 남긴 두 개의 무기창고 발견

 

아래 사나통신 보도에 대해서는 분석은 하지 않는다. 해당 기사에 올라온 여러 장의 사진들을 함께 올려준다. 사진은 영문 원본 아래에 올려준다.

 

 

----- 번역문 전문 -----

 

다라아의 테러분자들이 남긴 두 개의 대규모 무기창고 발견

▲ 미국과 이스라엘에서 생산된 엄청난 량의 무기와 탄약이 수요일 다라아 북서부 외곽에 있는 알-하라 도심에 대한 정리 작전을 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수리아 관할관청의 공무원들은 현지인들과 협력하여 정확한 정보를 기초로 수색작전을 벌여 테러분자들이 무기와 탄약을 은신하기 위해 사용을 했던 8~12m에 이르는 지하 동굴 주변지역과 알-하라도심 등 테러조직들이 사용하였던 두 개의 대규모 무기저장고를 발견하였다.     ©이용섭 기자

 

2018년 8월 8일

 

다라아, 사나통신-미국과 이스라엘에서 생산된 엄청난 량의 무기와 탄약이 수요일 다라아 북서부 외곽에 있는 알-하라 도심에 대한 정리 작전을 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한 관리는 관할관청의 공무원들은 현지인들과 협력하여 정확한 정보를 기초로 수색작전을 벌여 테러분자들이 무기와 탄약을 은신하기 위해 사용을 했던 8~12m에 이르는 지하 동굴 주변지역과 알-하라도심 등 테러조직들이 사용하였던 두 개의 무기저장고를 발견하였다고 사나통신에 말하였다.

 

노획된 무기의 종류들(원문-포함한): 자동소총 탄알(원문-탄약), 기관총, 탱크발사용 포탄, 충전기가 장착된 휴대용 대전차 미사일 발사기(Rocket Propelled Grenade launcher-RPG), 수류탄들, 미국과 이스라엘에서 생산된 23mm 대공포 및 반탱크 미사일 들이다.

 

노획된 것 중의 하나는 가스 마스크, 방호복과 현대적인 통신장치를 포함한 소위 말 하는 “하얀 철모(화이트 헬멧)”들이 사용한(원문-위한) 군수품들이 포함되어 있었다.(화학무기는 하얀 철모들이나 테러분자들이 사용을 했다는 간접적인 증거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 원문 전문 -----

 

Two weaponry caches of terrorists’ remnants discovered in Daraa

▲ 미국과 이스라엘에서 생산된 엄청난 량의 무기와 탄약이 수요일 다라아 북서부 외곽에 있는 알-하라 도심에 대한 정리 작전을 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수리아 관할관청의 공무원들은 현지인들과 협력하여 정확한 정보를 기초로 수색작전을 벌여 테러분자들이 무기와 탄약을 은신하기 위해 사용을 했던 8~12m에 이르는 지하 동굴 주변지역과 알-하라도심 등 테러조직들이 사용하였던 두 개의 대규모 무기저장고를 발견하였다.     © 이용섭 기자


8 August، 2018

 

Daraa, SANA-Large amounts of weapons and ammunition, some of which are US and Israeli made, were discovered on Wednesday during the sweeping operations in al-Hara town in Daraa northwestern countryside.

 

An officer told SANA that members of competent authorities, based on accurate intelligence in cooperation with the locals, found two caches for terrorist organizations in al-Hara town and the area surrounding it about 8 to 12 meters under the ground which were used by terrorists to hide weapons and ammunition.

 

The seized weapons included: ammunition for automatic rifles and machine guns, tank shells, RPG launchers with their fillings, grenades, mines, 23mm anti-aircraft machineguns and anti-tank missiles manufactured in US and Israel.

 

One of the caches included munitions for the so called “White Helmets”, including 

gas masks, protective clothes and modern communication devices.

 

다라아의 테러분자들이 남긴 두 개의 대규모 무기창고에서 발견된 무기 사진들

 

사진, 1

▲ 무기 사진, 1     © 이용섭 기자


사진, 2

 

▲ 사진, 2하얀 철모들이 사용했던 무장장비들로 대량으로 발견되었다.     © 이용섭 기자

 

사진, 3

 

▲ 사진, 3하얀 철모들이 사용했던 각종 장비들. 그 중에는 화학무기방지용 마스크도 대량으로 발견되었다.     © 이용섭 기자

 

사진.  4

 

▲ 사진. 4기관총, 대포 등 발견된 무기들이 엄청나다. 한 갓 테러집단들이 사용했던 무장장비라고는 도저히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그 규모가 엄청나다.     © 이용섭 기자

 

사진, 5

 

▲ 사진, 5대포, 포탄알, 통신장비 등 발견된 무기와 무장장비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다양하고 대규모이다.     © 이용섭 기자

 

사진, 6

 

▲ 사진, 6다라아 두 곳의 병기창고(병참)에서만 발견된 무기 및 무장장비가 이 정도이다. 참으로 어마어마한 무기와 무장장비들이다.     © 이용섭 기자

 

사진, 7

 

▲ 사진, 7놀랍다고 밖에 더 이상 할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이다.     © 이용섭 기자

 

사진, 8

 

▲ 사진, 8     © 이용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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