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 부산지방기상청에 따르면 23일 밤부터 해운대 211㎜를 비롯해 기장 204㎜, 동래 191㎜, 중구 176㎜, 사하 172㎜ 북항 164㎜, 영도 142㎜, 금정구 136㎜ 등 부산 전역에 물 폭탄이 쏟아졌다.사하구의 경우는 시간당 86㎜의 장대비가 단시간에 쏟아졌고, 해운대 84.5㎜, 중구 81.6㎜, 남구 78.5㎜, 북항 69㎜ 등 기록적인 시간당 강우량을 보였다.
기상청 방재기상정보시스템에 따르면 이날 내린 집중호우는 시간당 강수량이 1920년 이래 10번째로 많았다.
폭우에 갑작스럽게 침수된 지하차도에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3명이 안타깝게 숨졌다.
이날 오후 10시 18분께 동구 초량 제1지하차도에서 차량 7대가 불어난 물에 순식간에 잠겼다.
인근 도로 등에서 한꺼번에 쏟아진 물은 진입로 높이가 3.5m인 이 지하차도를 한때 가득 채웠다.
▲ 23일 많은 비가 내린 부산 동구 초량동 부산역 인근 제1지하차도에 출동한 소방대원들이 구조작업을 벌이고 있다. 이곳에 갇혔던 60대가 병원에 이송됐으나 숨졌다.
“국가보안법이라고 하면 남성은 공적인 자리에서 그 피해가 이야기되잖아요. 경력이 되기도 하고, 역사가 되기도 하고. 그런데 여성은 그렇게 이야기되고 있나요?” (국가보안법 피해자)
"국가보안법 철폐 없는 통일논의 기만이다" 피켓을 들고 있는 임수경 면회자들. ‘여성 서사로 본 국가보안법 전시회― 말의 세계에 감금된 것들’가 진행될 옛 남영동 대공분실 건물 외벽에 붙게 될 사진이다.ⓒ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박용수
국가보안법 사건에서 여성은 주변부에 머물러야 했다. 다른 민주화 운동이 그랬듯, 구속과 수배 등 고초를 겪은 남성 서사가 중심이었다. 그러나 여성은 분명히 존재했다. 민주화 운동에 헌신한 여성들만이 아니다. 피해자의 어머니, 아내, 누이, 딸로 호명된 이들은 ‘빨갱이’ 꼬리표가 붙은 삶을 견뎌내며, 당사자들을 대신해 국가보안법 폐지 운동의 중심에 있었다.
고애순, 권명희, 김은혜, 김정숙, 배지윤, 안소희, 양은영, 유가려, 유숙렬, 유해정, 정순녀. 피해 당사자거나 피해자 가족으로 위치한 11명의 여성이 용기를 내어 말하기에 나섰다. 1970년대 대학을 다녔던 70대부터 이제 막 40대에 들어선 여성까지, 짧게는 5년 길게는 30여 년을 국가보안법에 저항하며 일상을 살아낸 다양한 여성들의 이야기다.
이들의 목소리는 ‘여성 서사로 본 국가보안법 전시회― 말의 세계에 감금된 것들’을 통해 전달된다. 구술 기록을 오디오와 텍스트로 전환한 방식이다. 오는 8월 25일부터 9월 26일까지 남영동 대공분실이었던 민주인권기념관에서 진행되는 이 전시회는 ‘국가보안법을 박물관으로’ 전시회 추진위원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공동 주최했다.
지난 23일 민주인권기념관에서 권은비 총괄 감독을 만나 전시회 준비과정을 들었다. 권 감독은 국가보안법 폐지 운동의 역사에서 여성들의 역할이 중요했다고 강조했다.
ⓒ국가보안법을 박물관으로 추진위
권 감독은 독일 베를린 유학 시절 국가보안법의 존재를 체감했다고 했다. “베를린에 북한대사관이 있어서 북한 사람들이 살았어요. 독일 친구가 북한 친구를 소개해준다고 했는데, 제가 순간 망설였어요. 북한 사람을 만나면 잡혀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동백림사건으로 유명한 도시잖아요”
1967년 중앙정보부는 동베를린(한자음 동백림) 유학생과 교민 등 194명이 북한대사관과 평양을 드나들며 간첩 활동을 벌였다고 주장했다. 간첩으로 지목된 작곡가 윤이상 등이 고문을 받거나 한국으로 강제 송환됐다.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2006년 당시 정부가 무리하게 국가보안법을 적용했다고 판단했다.
권 감독은 당시 경험을 바탕으로 단편영화 ‘유령을 기다리며’를 촬영했다. 베를린에서 북한 사람은 ‘유령’ 같았다고 그는 말했다. 실체는 알 수 없고 소문만 무성한, 왠지 모를 무서운 느낌까지. 국가보안법 때문에 북한 사람을 만나고 싶어도 가만히 앉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담겼다. 이 영화는 2018년 제10회 DMZ 국제다큐영화제 한국경쟁 부문에 초청됐다. 권 감독이 전시회 추진위에 합류하게 된 계기기도 하다.
지난 16일 기자회견에서 전시회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있는 권은비 총괄감독. 당시 권 감독은 "국가보안법 피해자를 들여다보는 걸 중심으로 전시회가 기획됐다. 피해자가 많은데 개인의 아픔으로만 정체돼 있다. 국가가 국가보안법이라는 법을 가지고, 사람을 억압했는데, 그 피해는 개개인의 몫이었다.전시에 아티스트를 섭외하기보다는, 당사자들 이야기를 중심으로 구성했다. 민주화운동 안에 여성들 목소리 담는 게 전시회의 과제였다. 감금됐던 사상의 자유, 억압된 것들 안에서 우리는 무엇을 읽을 수 있을 수 있을지 물었다. 국보법 폐지 운동을 주되게 한 이들은 여성이었다. 이들의 목소리를 잘 알릴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라고 발언했다.ⓒ국가보안법을 박물관으로 추진위
“여성들이 국보법 폐지 운동 이끌었다”
국가보안법 전시회에서 여성 서사가 중심이 된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들을 살펴보는데, 1970~90년대 다른 민주화 운동과 달리 국가보안법 폐지 운동 사진 속에 여성들이 자주 등장했어요. 민주화 운동이 남성 중심이었던 탓에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된 사람 대부분은 남성이었죠. 이들이 감옥에 가면 실제 생계를 꾸리고 자녀를 키우며 국가보안법 폐지 운동을 하는 건 여성이었어요”
피해자의 범위를 확장해야 한다고 의견이 모였다. “수배 생활을 하거나 구속돼 고문받은 사람만 피해자인 건 아니에요. 가족들 모두가 피해자였어요. ‘빨갱이 딱지’는 직접 피해자만 아니라 주변인들의 삶까지 파탄 냈어요. 여성들은 남은 가족과 본인의 삶을 일궈가며 국가보안법과도 싸웠죠.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들은 투철한 열사로서 투쟁만 하는 게 아니라 삶 자체를 투쟁으로 만들었어요”
여성 서사의 힘은 국가보안법이 특별한 사람에게만 한정된 문제가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는 점에서 나온다. “구술에 참여한 분들 모두 평범한 여성이었어요. 교사, 작가 등 각자 꿈을 갖고 살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국가보안법의 굴레에 씌어 아픔을 겪게 된 거죠. 국가보안법 문제는 최전선에서 사회운동을 한, 나와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에요. 국가보안법이 폐지되지 않는 이상 모두가 피해자가 될 수 있어요”
ⓒ국가보안법을 박물관으로 전시회 추진위원회·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
ⓒ국가보안법을 박물관으로 전시회 추진위원회·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
ⓒ국가보안법을 박물관으로 전시회 추진위원회·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
국가보안법이 제정된 지 72년이 지난 지금, 관련 사건도 불거지지 않은 상황에서 전시회가 갑작스럽게 느껴질 수 있다. 2년 가까이 전시를 준비한 권 감독은 피해자들의 삶을 마주한 뒤 확신이 들었다고 말했다. “많이 울면서 작업했어요. 지금이라도 이야기해야 해요. 국가보안법이 폐지되지 않는 이상 언제 이야기해도 생뚱맞지 않아요”
짙은 패배감을 지우는 작업도 필요했다. 2004년 당시 노무현 대통령 탄핵 정국에서 열린 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압승을 거두면서 국가보안법 폐지를 4대 입법의 맨 앞에 내걸었다. 당시 300여 명이 단식하는 등 폐지 분위기가 조성됐으나, 결국 여당의 분열과 야당의 반발로 무산됐다. “그때를 경험한 사람들에게 알 수 없는 패배감이 있는 것 같았어요. ‘72년간 싸웠는데 아직도 폐지 안 됐다’라는 식으로요”
“그보단 ‘이렇게 오랫동안 싸우고 있다. 대단하지 않나. 포기하지 말고 계속해야 하는 게 아닌가’라는 메시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특히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어머니들은 1992년부터 양심수 석방과 국가보안법 철폐를 촉구하는 목요집회를 개최하고 계세요. 세상은 관심이 없더라도 끝까지 싸우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이화여자대학교 학생 시위. 전시회 포스터에 사용된 사진 원본이다ⓒ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정태원
여성들은 오랫동안 국가보안법에 맞서 싸웠지만, 스스로 경력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국가보안법 피해자들이 결합한 단체가 없어요. 민가협이나 전국민족민주 유가족협의회(유가협) 등이 전부죠. 이유를 생각해보니, 살기도 쉽지 않은 시간이었고, 개인의 문제로 여긴다는 점도 있었어요. 법을 통한 국가폭력을 개인들이 감당하고 있었던 거죠”
여성들의 말하기는 힘든 과정이었다. “스스로 생각조차 하기 싫은 시간이었을 거에요. 구술 과정에서 이 이야기는 다른 사람에 처음 한다는 분들도 많았어요. 가족한테도 하지 않은 이야기라면서요”
이번 전시회의 제목은 ‘말의 세계의 감금된 것들’이다. 정희진 여성학자가 저서에서 인용한 페미니스트 작가 버지니아 울프의 ‘말의 세계에서 내쫓기는 것도 비참하지만 그것에 감금당하는 건 더욱 비참한 일이다’라는 말에서 출발한 제목이다. 여기서 ‘말’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국가보안법을 상징한다. 넓게는 ‘빨갱이, 간첩’과 같이 프레임에 갇히게 만드는 말들이다. 목표 문구는 ‘나의 말이 세계를 터트릴 것이다’. 이때 ‘말’은 용기 있는 나로부터 출발한 말이다.
“목표 문구를 고심해서 정했어요. 어려운 이야기를 용기 내서 해 준 사람들로 인해 세상은 변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나누고 싶었어요. 여성으로서든, 피해자로서든 본인의 이야기를 힘들지만, 자신의 목소리로 해주는 사람들 덕분에 우리가 조금은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는 게 아닐까요”
화려한 예술 작품 대신 참여자들의 이야기로
전시회는 크게 1부 ‘여성 서사로 본 국가보안법’과 2부 ‘국가보안법 연대기’로 구성됐다. 화려한 예술가의 작품보다 참여자들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공포의 5층 취조실에서 메인 주제인 1부가 시작된다. 국가보안법 사범들이 과거 고문받던 각 방에서 피해자들의 구술 기록을 읽거나 배우 목소리·영화감독 임순례·래퍼 슬릭 등이 기록을 낭독한 음성을 듣는 방식이다.
“전시의 전형적인 방식은 예술가를 섭외해서 그의 작품을 설치하는 거예요. 하지만 이 전시에서 과감하게 다른 방식을 선택했죠. 구술에 참여한 여성들, 국가보안법 사건을 변론한 변호사들, 자신의 사건을 내놓은 당사자들, 폐지 운동을 한 활동가들 등. 현장에서 국가보안법을 경험한 사람들로만 참여자를 구성했어요. 작품을 통해 사회를 바라보기보다 그 사람들의 삶이 어땠는지 직접 들여다보는 전시에요”
옛 남영동 대공분실 5층 취조실ⓒ민중의소리
관객들이 오랫동안 그 공간에 머물 수 있도록 권 감독은 의도했다. “보통 전시장에 가면 작품을 30초는 볼까요? 민주인권기념관이 경찰 인권기념관으로 사용될 때, 사람들은 문밖에서 취조실을 쓱 둘러보고 갔어요. 하지만 관객들이 그곳에 앉아서 10분 20분 피해자들의 삶을 조금이라도 느껴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들의 삶이 어떻게 파괴됐는지, 그런데도 어떻게 싸워가고 있는지 보여주려는 의도에요”
피해자들의 서사를 들으며 취조실에 앉아있는 행위 자체가 하나의 참여형 예술이 될 수 있다. “전시된 것을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전시를 보는 사람들을 관찰자로서 보는 것도 중요해요. 가만히 앉아서 구술을 듣는 다른 관객들을 보며, 좁은 방에서 누군가 오랫동안 괴로운 시간을 보냈음을 연상할 수 있어요. 그 공간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2부는 4층에서 펼쳐진다. 72년 국가보안법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공간이다. 9개 사건을 세세하게 볼 수 있도록 준비된다. “민변에서 기증한 국가보안법 사건 변론 자료를 검토하면서 눈물 없이는 볼 수 없었어요. 그동안 우리는 ‘국가보안법으로 피해를 본 사람이 있다’ 정도로 소비했는데, 사건 하나하나를 들여다보니 슬프고 아팠어요”
공개될 사건 중 하나는 한국대학 총학생회연합(한총련) 사건이다. 한총련은 80년대 학생운동을 주도한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를 계승해 1993년 만들어진 단체로, 대법원에서 국가보안법상 이적 단체로 확정됐다. 한총련에 가입된 전국 대학교 단과대 학생회장은 수배가 떨어져 많은 이들이 구속됐다.
“당시 이틀에 한 번꼴로 20대 파릇파릇한 대학생들이 잡혀갔어요. 수배 대상이 된 학생들은 학교 안에서만 생활해야 했죠. 함께 전시를 준비한 조용신 진보 공동대표는 한총련 대의원으로 활동하다가 수배 대상이 됐는데, 암 선고받은 어머니가 막내아들을 걱정하다 돌아가셨어요. 사건 하나하나 들여다보면 어떤 사건이 더 중요하고 특별할 것 없이 다 마음 아파요”
지난 16일 기자회견 직후 ‘국가보안법을 박물관으로’ 전시회 추진위원들ⓒ국가보안법을 박물관으로 추진위
1층으로 내려오면 ‘검은 방’이 나온다. 국가보안법 조항이 소리로 반복해서 재생된다. 관객들은 이를 들으며 나희덕 시인의 ‘파일명 서정시’를 필사할 수 있다. 이 시는 나 시인이 동독의 방첩기관 슈타지에서 사상검열을 받은 독일 시인의 글을 보고 쓴 시로, ‘자유를 빼앗기지 않겠다’라는 선언적 성격이 있다. 관객들의 쓰기는 일종의 저항 퍼포먼스인 셈이다.
옛 대공분실에 들어섰을 때 가장 먼저 보이는 동그란 정원엔 12개의 문이 세워진다. 5층 취조실의 초록색 철문을 상징하는 이 문들엔 ‘법은 어떻게 정의로울 수 있습니까?’ 등의 질문이 쓰여있다. 피해자들을 감금시켰던 문을 열 수 있는 물음이다. 숫자 12는 시계처럼 반복되는 국가보안법의 역사를 상징한다.
권 감독은 국가보안법의 ‘국’자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이번 전시회를 강력추천한다고 말했다. “전시회 타겟은 2030 세대예요. 전시회는 국가보안법은 무엇이고, 어떤 역사가 있었으며, 피해자들은 이런 삶을 살았다고 설명하고 있어요. 정치적 관심이 없다고 해도 ‘탈조선’처럼 이 땅에 태어난 이상 본인이 거부하고 싶어도 거부할 수 없는 세계가 있잖아요. 이 세계를 감금하는 법이 무엇인지 알고 같이 생각해보는 시간이 됐으면 좋겠어요”
“구술에 참여한 분들을 피해자로만 보고 안타까워하는 시선보다는 연대하고 응원하고 함께 힘내자고 전시를 본 관객들이 생각해줬으면 좋겠어요”
지난 16일 기자회견에서 ‘국가보안법을 박물관으로’ 전시회 추진위원들ⓒ국가보안법을 박물관으로 추진위
전시회는 오는 8월 25일부터 9월 26일까지 남영동 대공분실이었던 민주인권기념관에서 무료로 진행된다. 코로나19로 관객 방문이 어려워지는 경우에도 전시물을 설치하고 온라인 형태로 관람할 수 있도록 기획된다. 대공분실 특성상 장애인의 접근이 불편해 사전에 신청하면 별도의 안내를 받을 수 있다.
전시에 앞서 8월 3일까지텀블벅이 진행 중이다. 펀딩에 참여하면 전시회 후원인으로 전시장 1층 한편에 기재될 예정이며, 11명의 여성 서사가 담긴 책 ‘여성 사사로 본 국가보안법’을 만나볼 수 있다.
대표적인 사회활동가 겸 논객인 김민웅 교수가 22일 사회관계망 글을 통해 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명예를 지키기 위한 연대를 호소했다.
김교수는 이렇다 할 증거하나 없는 의문 투성이의 사건임에도, 고소인의 진술이 그대로 진실이 되고 있다며, 박원순 시장의 평생을 매장시키는 논란의 책임은 제대로 된 답을 하지 않고 있는 변호인쪽에 있다고 주장했다.
설혹 박 시장의 성추행이 확정된다해도 그에 합당한 사회적 질타를 받고 피해자로 입증된 이에 대한 위로와 보상, 적극적 해결책이 모색되면 그뿐, 그것이 죽음의 무게를 넘어설 수는 없는 만큼 박 전 시장의 죽음에 대한 예의는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다.
김교수는 “애도의 시간이 끝나기까지 조금만 더 기다려줄 수 없을까, 라고 간절하게 애원했던 가족들의 청을 일거에 묵살하는 (변호인의) 태도에서 ‘성추행 이상의 폭력’을 목격했다.”고 글을 이었다.
또한 “피해를 주장하는 이와의 연대는 죽음에 대한 애도와 모순되지 않는다”며. 박원순 시장을 잃어버린 이들의 통절함이 피해를 주장하는 이를 모욕하거나 비난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설명했다.
2회의 기자회견으로도 박 전 시장의 성추행을 확신할 수 있는 물증 하나 없다보니 도리어 법정대리인측에 대한 의혹이 늘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변호인은 국민의 알권리를 위한 질문을 2차가해, 피해자에 대한 공격, 법정대리인에 대한 공격이라고 주장하고 있어, 2차가해라는 말이 고소인을 보호하기보다, 진상규명을 가로막는 폭력적 언어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변호인들은 박원순 시장의 성추행 사실여부를 밝히는데는 관심이 없고, 성추행 혐의를 기정사실화하면서 이것이 가능했던 구조적 조건, 즉 방조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1차가해가 확정된 바 없기에 2차가해를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것.
증거가 없다면 당연히 법정대리인에 대한 공세적 질문이 이어질 것이고 법정 대리인은 이 질문에 대해 성실하게 답변해야 의뢰인을 지켜낼 수 있는데도, 김재련 변호사는 피해를 주장하고 있는 고소인조차 의혹의 대상이 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한평생 이 나라의 정의와 미래를 위해 진력을 다해온 한 인간의 삶이 귀하게 여겨진다면 명료한 사실관계에 대한 규명의지와 깊은 성찰의 힘을 가지고 이 길을 함께 가자는 김민웅 교수의 제안에 <프레스아리랑>은 연대를 표명하며 청와대의 국민 청원을 함께 공유한다.
▲ 청문회 나온 이인영 장관 후보자 이인영 통일부 장관 후보자가 23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에 출석, 의원 질의를 듣고 있다. ⓒ 남소연
국회가 33년 전으로 퇴행했다. 정강정책 개정 초안에 "현대사의 민주화 운동 정신을 이어간다"며 1987년의 6.10항쟁까지 명시한 미래통합당이지만, 소속 의원들은 6.10항쟁의 주역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를 '주체사상의 신봉자'로 전제하면서 통일부장관 후보자에게 사상공세를 펼쳤다.
23일 국회에서 열린 이인영 통일부 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미래통합당은 시작부터 색깔론을 들이대며 전향했느냐고 사상공세를 펄쳤다.
▲ 태영호 "전대협 이인영, 주체사상 전향했나" 태영호 미래통합당 의원이 23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에서 열린 이인영 통일부 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이 후보자가 과거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1기 의장을 지낸 경력을 언급하며 '사상 전향' 여부를 질의하고 있다. ⓒ 남소연
북한 외교관 출신인 태영호 의원은 '태영호와 이인영 두 김일성 주체사상 신봉자의 삶의 궤적'이라고 쓰인 패널을 보이며 이 후보자에게 "이 주제에 동의하느냐"고 물었다. 이 후보자는 "지금 바로 동의할 수는 없는 문제"라고 답했다.
그러자 태 의원은 "북한에서 남한에 주체사상 신봉자 대단히 많다(고 교육한다)"면서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이란 조직이 있는데 이 조직 성원들은 매일아침 김일성 초상화 앞에서 남조선을 미제의 식민지로부터 해방하기 위한 충성의 결의를 다진다는데, 그런 일이 있었냐"고 질문했다.
이 후보는 "그런 일 없었다, 전대협 의장인 제가 매일 아침 김일성 사진을 놓고 충성맹세를 하고 주체사상을 신봉했다는 기억이 없다"고 답했다. 이 후보는 33년 전인 1987년 전대협 1기 의장을 맡았다.
태 의원은 공격은 계속 이어졌다. 태 의원은 "이번 청문회 준비를 하면서 후보자 삶의 궤적을 많이 봤는데 사상 전향을 했는지 찾을 수 없었다"면서 "후보자도 언제 어디서 이렇게 '나는 주체사상을 버렸다'고 한 적 있는가"고 추궁했다. 주체사상을 신봉한 적이 없다는 후보자에게 사상전향을 언제 했느냐고 다그친 것이다.
이 후보자는 "전향이라는 것은 태영호 의원처럼 북에서 남으로 온 분에게 해당하는 이야기다, 제가 남에서 북으로 갔거나 그런 사람이 아니지 않은가"라며 "그런 저에게 사상 전향 여부를 묻는 것은 의원님이 저에게 청문위원으로 물어봐도 온당하지 않은 질의라 생각한다"고 답했다.
태 의원이 '아직도 주체사상을 신봉하느냐'는 취지의 질문을 하자 이 후보자는 "그 당시에도 신봉자는 아니었고 지금도 아니다"라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에게 사상 전향을 강요하거나 추궁하는 행위로 오인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태 의원이 재차 '주체사상을 믿느냐고' 묻자 이 후보자는 "사상 전향을 요구하는 건 북한과 남한의 과거 독재정권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박진 "수령-당-대중의 삼위일체에 동의?" - 이인영 "동의 안 해"
▲ '반미정서' 꺼내든 박진 의원 박진 미래통합당 의원이 23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에서 열린 이인영 통일부 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이 후보자가 과거에 가졌던 편향적인 반미정서 문제가 이번 청문회에서 명확히 해소되지 않으면, 앞으로 문재인 정부의 잘못된 대북 유화정책이 더욱 심화됨은 물론 한미동맹에 심각한 균열이 우려된다"고 말하고 있다. ⓒ 남소연
다른 통합당 의원들도 차례로 색깔론 바통을 이어갔다. 박진 의원은 "통일부 장관은 어느 국무위원보다 균형 있는 역사관과 세계관을 가져야 한다"며 "균형 감각이 없으면 외교적으로 고립되거나 국가가 혼란할 수 있어서 오늘 후보자의 역사관과 세계관을 묻는 것"이라고 밝혔다.
박 의원은 이 후보자가 1987년 고려대 총학생회장 시절, 전대협 서대협 의장으로서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동지여 전진! 동지여 투쟁!> 문건을 공개했다. 박 의원은 여기서 "혁명의 주체는 수령-당-대중의 삼위일체된 힘"이라고 쓴 부분을 읽은 뒤 "이런 생각에 동의하냐, 이건 김일성, 조선노동당 등을 지칭하는 것으로 생각된다"고 물었다. 또 "이승만 정권은 괴뢰정권이 아니라 UN이 인정한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권이고, 이승만 대통령은 단순히 이승만 박사가 아니라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건국 대통령"이라며 다시 한번 "동의하냐"고 물었다.
▲ 청문 나선 정진석 "이인영이라는 정치인을 떠올리면..." 정진석 미래통합당 의원이 23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에서 열린 이인영 통일부 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이인영이라는 정치인을 떠올리면 반미 혹은 '우리민족끼리'라는 이미지가 떠오르기 십상이다, 반미 자주화를 신봉한 전대협 리더였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 남소연
정진석 의원 역시 거들었다. 그는 "저희 당 의원이 사상 관련 질의를 하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을 것"이라며 "이인영이라는 정치인을 떠올리면 반미 혹은 '우리민족끼리'라는 이미지가 떠오르기 십상이다, 반미 자주화를 신봉한 전대협 리더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어 "대한민국 국무위원 후보자에겐 이러한 검증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며 "오늘 같은 소명의 기회를 통해서 '나는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를 신봉하고 대한민국의 헌법정신을 무엇보다 존중하는 공직자라는 말을 속 시원하게 국민들에게 해주면 모든 오해가 풀린다는 기대가 있었다"고 말했다.
이인영 후보자는 박진 의원이 공개한 문건을 "제가 작성한 게 아닌 것으로 기억한다, 제가 읽은 내용일 수는 있다"며 "이 생각에 동의한다고 할 수 없고, 수령-당-대중 삼위일체된 체계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또 "(이승만 정권은) 국민이 선출한, 선거로 정부가 세워졌기 때문에 괴뢰정권으로 규정하는 데에 이견을 갖고 있다"면서도 "독재정권 성격을 가진 것에 비판이 많다"고 덧붙였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을) 국부다, 이러는 건 다르게 생각하고 우리 국부는 김구 주석이 되는 게 더 마땅했다고 생각한다"고도 말했다.
이 후보자는 자신의 청문회가 '사상검증'으로 흘러가는 것에도 거듭 유감을 표시했다. 그는 '사상 관련 질문이 듣기 거북하냐'는 정진석 의원에게 "얼마든지 정치적인 노선이나 정책적 입장은 얘기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저에 대해 전향을 요구하는 것은 제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것 아니냐"고 답변했다.
여당 간사인 김영호 더불어민주당 의원 역시 "대한민국 출신 4선 국회의원, 그리고 통일부 장관 후보자에게 어떻게 '주체사상을 포기하라, 전향했느냐' (묻는 것은) 굉장히 국회를 모욕하는 행위"라며 "진정성은 알겠지만 이런 건 좀 신중하게 접근했으면 좋겠다"고 항의했다. 같은 당 윤건영 의원도 "오늘의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이인영 후보자 같은 독재시절 젊은이들의 피와 땀으로 이뤄졌다"라며 "그렇게 함부로 폄하할 대상도, 천박한 사상검증의 대상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김종철 선생은, 김수영 시인의 말을 빌리면 '제 정신을 갖고 산 사람'이었다. 제 정신으로 살기 위해 분투한 사람이었다. 제 정신으로 살기 위해 분투하던 그에게는 근대 산업사회의 앞날이 명확하게 보였다. 2002년에 쓴 '땅의 옹호'라는 글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산업주의 문화는 이러한 겸손의 자세를 조롱하고 비웃으면서 성장해왔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산업인간'은 도덕적, 정신적으로 극히 왜소한 미숙아가 되어버렸다. 산업의 세계에서 만물의 척도는 인간의 한계를 모르는 자기 확대의 욕망이다. 그리하여, 자본과 기술의 힘으로 얼마든지 자연의 제약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교만심이 분별없이 확대되어 왔고, 그 결과로 지금 우리는 스스로의 생존의 발판을 제거하는 데 열중하고 있는, 인류 역사상 가장 난폭하고 어리석은 시대에 살게 된 것이다."
코로나19라는 현재의 전 세계적 위기는 근대 자본주의 문명의 본질에 대한 그의 통찰이 전적으로 옳았음을 웅변한다. 즉 "자본과 기술의 힘으로 얼마든지 자연의 제약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교만심이" "스스로의 생존의 발판을 제거"해 왔음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가 지향했던 것은 공생공락(共生共樂)의 삶이었다.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고, 인간과 인간이 우애롭게 지내며, 각 개인이 내면의 평화를 누리는 그런 삶이었다. 그는 공생공락을 위한 이상적인 사회로 농(農)의 세계와 촌락 자치를 주장했지만 이는 결코 복고 취미가 아니었다. 공생공락을 위한 세계 각지의 여러 움직임들을 끊임없이 탐색하고 연구하면서 이끌어낸 통찰이었다.
신문‧잡지의 칼럼을 모아 2016년 발간한 <발언 1,2>의 머리말에서 그는 "칼럼을 쓰는 동안 매일매일 발간되는 국내외 신문, 뉴스 매체들을 훑어보는 일이 어느덧 내 생활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왜냐하면 '발언'을 위해서는 우선 세상 돌아가는 형편에 주목('경청')하는 게 전제돼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세상사에 대해서 끊임없이 귀를 열어 경청한다는 것은 '발언'이 갖추어야 할 기본적 윤리"이며 "농민, 노동자, 생활인들의 '현장'이 논밭과 공장 혹은 시장인 것처럼, 지식인에게 가장 중요한 '현장'은 뉴스매체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끼니를 거르는 일은 있어도, 신문이나 뉴스매체를 거르고 지나가는 날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보내왔다. 그리하여 일정하게 구독하는 몇몇 국내 신문들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인터넷을 통해서 외국 언론매체들의 주요 기사, 논평들을 읽는 데 골몰하다 보면 오전 몇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가고 만다."
실제로 그는 하루 4시간 이상 인터넷을 들여다보고, 자신이 한국에서 최초 또는 유일한 정기구독자인 외국 간행물이 여럿 된다고 자랑(?) 삼아 얘기한 적이 있는데, 이는 그가 탁월한 생태사상가인 동시에 뛰어난 저널리스트였다는 점을 말해준다. 이처럼 폭넓은 탐색과 치열한 고민 끝에 지역화폐, 기본소득, 시민의회에 이르기까지 에콜로지와 민주주의에 관한 현실적 대안들을 제시했다. 나아가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한국 최초의 녹색당 창립에 참여하는 등 그는 근래 보기 드문 전 방위적 지식인이자 실천적 사상가였다.
사실 김종철 선생이 걸은 길은 외로운 길이었다. 하지만 뜻을 같이하는 벗들이 있었다. 1999년 펴낸 <간디의 물레> 머리말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난 8년간 <녹색평론>을 엮어내는 일은 무엇보다 내게는 개인적인 구원이었다. 아마 그 일을 하지 않았다면 나는 미치거나 깊이 병들었을지 모른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녹색평론>의 편집에 열중하는 과정에서 나와 비슷한 당혹감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이 나라 안팎에 걸쳐 의의로 많다는 사실을 발견하였고, 그러한 사람들과 깊은 유대 또는 우정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러한 유대감이나 우정을 통한 새로운 정치적 공동체의 형성에 새로운 삶의 희망이 달려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또한 2008년 펴낸 <땅의 옹호>에서는 2004년 대학 교수직을 떠난 이후 4년간 계속된 '이반 일리치 읽기모임'을 통해 "대학생활에서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진정한 '우정'의 의미를 음미할 수 있게 되었다"면서 "'우정'이야말로 지금 세계를 황폐화하는 자본과 국가의 논리에 맞설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인지도 모른다"고 토로했다. "아무리 암울한 시대일지라도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데 필수적인 '희망'을 제공하는 원천이 바로 '우정'"이라는 것이다.
코로나19로 자본주의 문명이 막바지에 이른 지금, 그 어느 때보다 김종철의 사상과 통찰이 절실한 이때, 그는 돌연 세상을 떠났다. 이제 살아남은 자의 몫은 그가 말한 우정의 의미를 되새기며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사회, 새로운 삶의 원리는 무엇이며 어떻게 이를 실천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일일 것이다.
김종철 선생의 저서 <간디의 물레-에콜로지와 문화에 관한 에세이> <땅의 옹호-共生共樂의 삶의 위하여> <발언 1,2>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에콜로지와 민주주의에 관한 에세이> 중에서 9편의 글을 추려 소개한다. 편집자
연재 순서
1. '시대를 바꾸고자 한 예언자이자 실천적 사상가, 김종철' (박승옥 글)
2. 왜 녹색평론을 시작하였는가(1995년, <간디의 물레-에콜로지와 문화에 관한 에세이>)
3. 거짓언어와 '성장'논리 속에서-나의 한국 현대사(2012년, <발언 1>)
4. 땅의 옹호(2002년, <땅의 옹호-共生共樂의 삶의 위하여>)
5. 필요한 것은 '진보'가 아니라 開眼이다(2006년, <땅의 옹호>)
6. 지역통화-삶과 공동체를 살리는 기술(1998년, <간디의 물레>)
7.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 책머리에(2019년)
8. 협동적 자치의 공동체를 향하여(2008년,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
9. 촛불시위와 시민권력(2017년,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
10. 태어남과 삶과 죽음의 순환(1998년, <간디의 물레>)
시인 김해자는 근작 시 <여기가 광화문이다>에서 "대통령 하나 갈아치우자고 우리는 여기에 모이지 않았다"고 일갈한다. 이것은 지금 주말마다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나오는 수많은 시민들의 공통적인 심경일 것이다. 우리가 하던 일을 멈추고 "빛이 사방을 덮어 세상 곳곳으로 퍼진다는 광화문"으로 모이는 까닭은 명백하다. 세습권력들과 그들에게 빌붙어 충성해온 직업정치인, 관료, 언론, 각종 전문가들로 구성된 지배체제를 탄핵하기 위해서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연민과 분배와 정의가 얼어붙은 사이/농촌은 해체되고 청년들은 미래를 빼앗기고 노동자들의 삶은 망가져버린" 나라를 다시 일으켜 "만인이 만인에게 적이 되고 분노가 되는 세상이 아니라/만인이 만인에게 친구가 되고 위안이 되는 세상을” 열자고 한목소리로 외치고 있다.
경이롭게도, 토요일의 광화문 풍경은 우리가 평소에 안다고 생각했던 그 한국 사회가 아니다. 거기는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대하고, 배려해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들로 충만한 공간이다. 물론 같은 목적을 갖고 나왔기 때문에 그곳이 환대의 장소가 되는 것은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예를 들어, 엄청난 인파로 발 디딜 틈도 없는 공간 속에서 사람들이 서로의 안전을 배려하여 몹시 조심스럽게 움직이면서 뭐든지 기꺼이 남에게 양보하려는 모습들을 보고 있으면, 여기가 바로 어제까지 모래알처럼 흩어져 각자도생에 열중하던 사람들이 살던 곳이 맞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뿐만 아니다. 시위가 열리는 광장에는 개인 돈을 들여 마련한 촛불이나 핫팩 혹은 김밥을 참가자들에게 열심히 나눠 주는 이들이 있고, 자기 장사는 접고 차와 음식과 떡볶이를 무료로 나눠 주는 소상인들도 등장한다. 그런가 하면 젊은 자원봉사자들은 여기저기서 임시 화장실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려주는 팻말을 들고 추위 속에서 몇 시간이고 서 있거나 대규모 집회와 시위에 필요한 경비 마련을 위해 모금함들을 들고 끊임없이 사람들 사이를 돌고 있다.
놀라운 이야기는 이 밖에도 많다. 시위가 있는 날은, 가령 청와대 근처의 도로는 경찰차들이 철벽처럼 길을 막아 놓고 있는 탓에 차량 통행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그 동네, 특히 세검정 일대의 주민들은 시위에 참가하려면, 그리고 참가한 뒤 귀가하려면, 걸어갈 수밖에 없는데, 문제는 그 중간에 자하문터널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몇몇 인근 주민들이 자신들의 승용차를 가지고 나와서 터널 구간을 무료로 태워주는 일종의 셔틀을 운행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시간과 돈을 아낌없이 내놓고 시위에 참가하고, 참가를 독려하는 이런 시민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우리가 결코 ‘이상한’ 대통령 하나 때문에 광화문에 모이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 참으로 실감 난다. 사람들의 열망은, 말할 것도 없이, 이제는 썩어 문드러진 구체제를 제대로 청산하고 정말로 인간다운 삶이 가능한 세상을 보고 싶다는 것이다.
그 세상은 어렵고 복잡한 말로 묘사할 필요가 없다. 주말의 광장에는 새로운 세상, 새로운 삶에 대한 비전과 지혜가 놀랄 만큼 선명하게, 풍부하게, 강력하게 분출되고 있다. 예를 들어, 무대 위에 오른 어떤 밴드 가수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마을운동이 아니라 옛마을운동"이라고 노래 불렀다. 그 노래의 뜻은 일찍이 박정희 정권이 요란하게 떠들고 유포시킨 '새마을정신'이란 실은 황금 물신주의를 조장하고 (농촌)공동체를 와해시킨 원흉이었다, 따라서 지금은 사람들이 정을 나누며 서로 돕고 살았던 '옛 마을'의 정신을 되살리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노래를 부르는 중간에, 이 나라 정치인들이 "밥값을 못하고" "서비스 정신"이 몹시 부족하다고 신랄하게 꼬집고, "서비스를 제대로 못하는 업체는 갈아치우는 게 당연하다"고 읊조렸다.
주말의 광화문광장에서 듣는 발언은 감동적인 게 한둘이 아니다. 거기에는 어떠한 정치인, 기성 언론, 지식인들의 발언에서도 느낄 수 없는 생생한 힘이 넘쳐난다. 그것은 풀뿌리 삶의 현장에서 우러나오는 진실한 마음과 생각들이 가식 없이 진솔하게 개진되기 때문임은 말할 것도 없다. 자신이 생각하는 좋은 나라를 또박또박 설명하는 어린 학생들, 갑갑해서 강원도 산촌에서 서울로 한달음에 달려왔다는 시골 할머니, 지금 농촌이 어떻게 황폐화되고, 노동자들의 삶이 어떻게 망가지고 있는지를 비통한 어조로 말하는 늙은 농민과 노동자들, 그리고 무엇보다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의 슬픔과 고통에 대해 언급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 등등. 광화문광장에서 지금 표출되고 있는 것은 너무나 수준 높고 품위 있는 언어들이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새삼 느끼는 것은 종래의 정당정치, 대의제 민주주의로써 과연 이러한 민중의 민주적 열망과 지혜를 제대로 담아낼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한 나라의 정치 수준은 그 나라 민중의 지적·정신적 수준을 반영한다고 흔히 말하지만, 그런 기준에서 본다 하더라도 지금 대한민국 정치의 수준은 민중의 수준에도 훨씬 못 미치는 게 아닌가?
주말의 광장에서 울려 나오는 구호 가운데는 쌀값 문제, 노동 탄압, 인권 및 환경 문제 등등 개별적 이슈에 관련된 것들도 있지만, 가장 집중적으로 말해지는 것은 물론 대통령의 퇴진 문제이다. 완전히 무자격자임이 만천하에 드러난 사람이 한순간이라도 더 대통령직에 머무르는 것은 결코 허용할 수 없다, 그러니까 스스로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기다릴 것 없이) 당장 물러나는 게 옳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대통령의 퇴진 문제 이외에 또 하나 강력하게 울리고 있는 구호가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재벌문제를 척결하자는 외침이다. 실제로 이번 탄핵 사태에서도 역시 재벌이 문제였다는 것은 단순히 의혹이 아니라 분명한 사실로 드러나고 있다. 즉, 이번에도 재벌과의 부당한 거래에 국가권력이 남용 내지는 요용되었다는 언론 보도와 검찰의 수사 결과가 나왔고, 그 결과 지금 광장에서 재벌 척결을 외치는 구호가 큰 공감을 얻고 있다. 이런 현상은 이제 재벌 문제야말로 한국의 민주주의를 끊임없이 좌절시키고, 한국 사회가 인간다운 공동체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원흉이라는 인식이 이 사회에서 광범하게 공유되고 있음을 가리키고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오늘의 한국 사회가 ‘헬조선’으로 돼버린 것은 무엇보다 소위 정경유착, 즉 정치가 금권에 의해서 유린·농락돼왔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은 이제는 우리 사회의 상식이 된 느낌이다. 이른바 정계뿐만 아니라, 나라의 근본 중의 근본인 도덕적·윤리적 기초를 수호해야 할 언론도 학계도 사법부도 얼마나 금권에 의해 오염되고 타락 일로를 걸어왔는지는 지금 대다수 시민들이―아이들까지도―뼛속 깊이 알고 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들은 정치권력과 금권의 부정한 결탁에 의해서 우리들의 삶이 끝없이 훼손되고 피폐해지는 상황을 더는 인내할 수 없다는 결의를 다지고 그 의지를 강력하게 표현하기 위해서 겨울 추위를 무릅쓰고 촛불을 들고 전국의 광장과 거리에 모여들고 있는 것이다.
ⓒ프레시안(최형락)
선거민주주의를 넘어서
이 겨울,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것은 1894년 동학농민전쟁 이래 처참한 실패와 좌절을 거듭하면서도 끝끝내 꺾이지 않고 역사의 저류(底流)로 면면히 지속돼온 풀뿌리 저항정신이 다시 전면으로 분출하고 있는 장면임이 분명하다. 이 역사적인 순간을 지금 우리는 심히 긴장된 흥분 속에서 하루하루 보내고 있다. 되돌아보면, 불과 두어 달 사이에 엄청난 일들이 신속히 진행되어왔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되새겨볼 가장 중요한 점이 있다. 즉, 지난 몇 년간 공적으로 선출된 권력이 아니라 국민 대부분이 알지도 듣지도 못한 일개 사인(私人)에 의해서 이 나라 국가 운영이 철저히 농단·유린돼왔다는 황당한 사실이 언론을 통해 폭로된 뒤, 국회에서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이 가결되고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기다리는 단계가 된 지금까지, 이 상황을 실질적으로 지배해온 것은 시민들의 대규모 촛불시위였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정말로 촛불의 위력은 굉장했다. 사태 초기에는 무슨 계산을 하는지 탄핵을 망설이며 우물쭈물하던 국회가 마침내 야당 의원들은 물론이고 여당 의원들의 일부까지 가세하여 탄핵안을 처리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촛불의 힘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하던 검찰이 결국 적극적인 자세로 전환하여 수사에 돌입하게 된 것도 촛불의 거스를 수 없는 명령 때문이었다. 또한, 법원이 전례 없이 청와대 근접 거리에까지 시위대의 행진을 허용하고, 경찰이 습관처럼 취하던 시위대에 대한 강경한 자세를 일찌감치 포기한 것도 다름 아닌 촛불의 위력 때문이었음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이 모든 것은 비록 매우 평화적인 시위라고는 하지만, 촛불을 통해서 발산되고 있는 시민들의 민주적 열망과 요구가 상상 이상으로 뜨겁고 강력한 것을 확인한 지배세력의 입장에서는 이 상황에서 민중의 뜻을 거역한다는 게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알게 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둔감하고 무책임하다 하더라도 이 엄청난 민중의 결집된 힘을 무시하고서는 결코 무사할 수 없다는 것을 늦게나마 그들도 깨달은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상황이 매우 불안한 상황이라는 것을 우리는 직시할 필요가 있다. 아무리 끈질기게 계속한다 하더라도 광장에서의 항거와 싸움은 어차피 영구적 지속이 불가능하다. 우리는 조만간 촛불의 크기는 줄어들고, 마침내 식어버리는 날이 온다는 것을 냉정히 고려해야 한다. 뭔가 이 상황에 '급진적인' 개입이 행해지지 않는다면, 지금과 같이 대규모 촛불시위를 통해 전면으로 부각된 '시민권력'은 조만간 힘을 잃고, 민초들의 목소리는 또다시 억압되고 무시당하는 수모를 겪는 날이 올 것이다.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근대 민주주의의 역사를 돌아보면, 어디에서나 '살아 있는 민주주의의 순간'은 일시적이고 단명한 것이었다. 민중항쟁에 의해 수세에 몰린 지배층은 일시 물러나서 양보를 하지만, 결국은 상황이 역전되고 역사적 반동이 시작되기 일쑤였다. 그렇게 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원래 근대 민주주의라는 게 철두철미 유산자들의, 유산자들에 의한, 유산자들을 위한 정치제도로 출발했고, 그 기본적인 틀이 수 세기 동안 조금도 변경되지 않고 지금까지 계속되어온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하기는 산업시대를 거치면서 무산계층과 여성들에게까지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부여된 것은 사실이다. 그것을 생각하면, 민주주의가 계속 변화·발전해왔다고 보는 견해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예외적인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근대 민주주의는 그 외관상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늘 기득권층의 계속적인 지배를 합법화하고 정당화하는 메커니즘으로 기능해왔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근대 민주주의가 이렇게 된 데에는 무엇보다 선거라는 제도가 큰 작용을 해왔다는 것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선거라는 것은 조금만 깊이 생각해도 알 수 있듯이 본시 그 한계가 명확하다. 즉, 선거판에서는 거의 언제나 명망가나 재산가 혹은 그들의 비호와 지원을 받는 이른바 특권적인 '엘리트'들이 승자가 되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선거란 본질적으로 기득권층이 계속해서 집권하도록 돕는 장치, 다시 말해서 기득권층끼리 돌고 돌면서 권력을 ‘세습’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 매우 편리한 장치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뿐만 아니다. 선거를 통한 정치는 불가피하게 금권에 의해서 오염·타락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는 문제이다. 물론 정치가의 자질에 따라 부패의 정도는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이란 본시 나약한 존재이고 믿을 수 없는 존재이다. 따라서 인간은 누구든지 거의 예외 없이 특정한 상황에 처하면 타락하게 마련이라는 것을 우리는 직시할 필요가 있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인간의 이 본원적인 나약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 토대 위에서 정치가의 개인적 자질에 관계없이 합리적인 정치가 가능한 제도를 만드는 일이다. 이렇게 볼 때, 고대 그리스인들, 공화정 시대의 로마인들, 혹은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자유도시인들은 매우 현명한, 그리고 합리적인 사고의 소유자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이 오랫동안 안정되게 유지했던 민주정이나 공화정 체제는 권력의 세습이나 집중화를 막고, 난폭하고 무책임한 정치가 불가능하도록 미리 구조적으로 설계돼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구조의 핵심적인 기제가 바로 제비뽑기였다.
오늘날 우리는 너나없이 모두 ‘선거 근본주의자’가 되어버린 결과, 선거만이 공정한 정치제도를 보장한다는 근거 없는 미신에 빠져 있다. 하지만 원래 선거는 고대 이래 귀족 혹은 엘리트들이 지배하는 과두정(寡頭政) 체제가 즐겨 채택해온 제도였다(선거를 통해야 엘리트들이 계속 권력을 장악할 수 있기에). 반면에 민주주의 정신이나 공화주의 정신이 살아 있는 곳에서는 한정된 공직자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공직자는 제비뽑기로 뽑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 제비뽑기로 뽑힌 대표자나 공직자들의 임기는 짧았고, 퇴임 이후에는 재임 중의 직무성과에 대하여 매우 엄격한 평가와 감사(監査)가 실시되곤 했다. 가장 철저했던 예가 고대 아테네인데, 거기서는 심지어 실제로 아무런 과오도 저지른 바 없는 사람인데도 잠재적으로 독재자가 될 소질이 있어 보이는 인물은 시민투표를 통해서 10년간 국외로 추방하는 ‘도편추방제’라는 특이한 제도까지 운영하고 있었다. 과연 그렇게까지 해야 했을까라고 오늘날의 우리는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게 했기 때문에 아테네가 200년 동안이나 인류사에서 가장 수준 높은 민주주의를 향유할 수 있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하지만, 아테네인들이 현명했던 것은 ‘권력의 유혹에 저항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믿지 않고, 그 대신 부정·부패를 막는 사전 예방 장치로서 합리적인 제도를 만들어 운영했다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시민권력'의 제도화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엄청난 역사의 분기점에 서 있다. 이 촛불항쟁은 명백히 "대통령 하나 갈아치우기" 위한 것이 아니다.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 지금으로서는 불명료하지만, 어떻든 우리가 이 상황을 통해서 보다 새롭고 좋은 세상으로 가는 길을 열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 길은 보다 밀도 높은 민주주의를 향한 길이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지금 광화문을 비롯해서 전국의 광장과 거리로 나오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힘주어 말하는 게 있다. 즉, 나라의 주권은 '우리'에게 있지, 일시적으로 권력을 위임받은 자들에게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1987년 6월이나 2008년 광우병 파동 때의 시위 상황에 비해서도 한결 더 진전되고 구체화된 민주주의적 요구의 직설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이제 한국인들 대다수는 국가의 중대사를 의논하고 결정할 때 그 의논과 결정의 주체는 직업적 정치인들도, 관료들도, 소위 전문가들도 아니고, 평범한 시민들 자신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훨씬 명확하게 이해하게 된 것이다.
촛불시위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최근 들어 지식인들 사이에서 '시민의회'나 '시민주권회의' 혹은 그 밖의 이름으로 시민들이 주체가 되는 논의 및 결정 기구를 만들자는 제안이 나오는 것도 우연한 현상이 아니다. 예전의 시위 때에는 없었던 이런 제안이 지금 여기저기서 동시적으로 개진되고 있는 것은 지금은 개별적인 사회문제를 하나하나 제기하기 이전에 무엇보다 보다 합리적인 정치가 가능한 틀, 즉 민주주의의 강화가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을 많은 사람들이 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한국의 상황은 세계적으로도 예외적인 선진성을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오늘날 극심한 사회적 격차 속에서 날로 삶이 피폐해지고 있다고 느끼는 미국의 평민들은 도널드 트럼프라는 파쇼적 기질이 농후한 무교양의 부동산 부호를 대통령으로 선출하는 선택을 했다. 물론 여기에는 선거제도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거나 선택의 폭이 극히 협소했다는 이유가 있다. 하지만 미국을 비롯해서 세계 도처에서 사람들이 곤경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극우 파쇼 세력을 지지하는 경향으로 쉽게 기울고 있는 오늘날 세계의 일반적 현실과는 대조적으로 대다수 한국인들은 보다 강화된 민주주의를 지향하고 있다는 것, 이 점은 분명 특기할 만한 일이다.
그런데 지금 시민들 중 상당수는 ‘시민의회’ 혹은 ‘시민주권회의’ 등의 제안에 대해서 ‘뜬금없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이런 개념 자체가 생소하고 이질적인 느낌을 주기 때문일지 모른다. "국회가 있는데 왜 별도의 '의회'가 필요하다는 것인가"라는 질문이 나오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현재의 국회와 정당정치가 민주주의를 제대로 실행할 수 있었다면, 지금과 같은 탄핵정국이 발생했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할 수 없었던 일을 앞으로 국회가 할 수 있을지, 근본적으로 의심할 필요가 있다. 이번의 대규모 촛불시위에서 우리의 정치가들이 배운 바가 있을 것이고, 그래서 환골탈태할지 모른다고, 그런 어리석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말할 필요도 없이, 정치가의 선의를 믿는 것보다 어리석은 일은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즉, 시민들이 상시적으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제도적인 틀을 만들어, 기성의 정치가들이 민중의 의사를 정당하게 대변하는 정치를 하도록 강제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한 새로운 제도로 지금까지 나온 아이디어 중 가장 합리적인 것이 ‘시민의회’(혹은 ‘시민주권회의’)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시민의회는 전국의 평범한 시민들 중 (제비뽑기에 의해) 무작위로 뽑힌 대표자들이 자유로운 토론과 숙의가 가능한 규모의 회의체(mini―publics)를 구성하여, 거기서 전문가들의 조력을 받아서 국가나 지방의 주요 현안을 의논·결정하여 국회와 정부로 하여금 이 결정을 수용하게 만드는 전형적인 ‘숙의민주주의’적 제도이다. 그러니까 개헌이든 선거법 개정이든 필요한 개혁에 대한 입안도, 사심이 개입될 수밖에 없는 기성 정치가들에게 맡겨 놓지 말고, 이 시민의회가 주도적으로 만들면 되는 것이다. 실제로 이 방법은 근년에 아이슬란드와 아일랜드가 개헌을 포함하여 주요 정책을 변경할 때 실행했던 방법이다(2016년 10월, 아일랜드는 낙태 합법화 문제를 비롯하여 몇 가지 현안을 토의하기 위해서 다시 시민의회를 출범시켰다).
시민의회를 잘 활용하면 보다 밀도 높고 건강한 민주주의를 확립하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예를 들어, 연간 1~2회 정도 시민의회를 소집하여 정부와 국회가 해당 기간 동안 행한 일들을 검토, 평가, 감사하고, 만약 오류와 부정이 있다고 판단될 때 정부와 국회에 주권자의 이름으로 시정명령을 내리는 제도도 충분히 구상해볼 수 있다.
우리가 지금 숙고해야 할 것은, 이런 제도를 고안하지 않는다면 오늘의 이 촛불시위에서 발휘된 '시민권력'이 지속적인 생명력을 유지할 수 없다는 점이다. 물론 '시민의회'는 아직 한국 사회에서는 시도해보지 못한 구상이고 가설이다. 하지만 우리가 염원하는 인간다운 세상은 우리들 자신의 용기 있는 상상력과 집단적 지혜로부터만 열린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2016년)
출처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에콜로지와 민주주의에 관한 에세이>, 녹색평론사, 2019년, 324~333쪽
열린민주당 김진애 의원이 21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민중의소리와 인터뷰하고 있다. 2020.07.21ⓒ정의철 기자
'저격수' 혹은 '파이터'. 열린민주당 원내대표인 김진애 의원을 설명하는 데 빠지지 않는 수식어다. 18대 국회에서 2년 반이라는 짧은 의정활동 동안 4대강 사업 문제를 치열하게 파고들었던 김 의원은 21대 국회에서는 시작부터 기획재정부(기재부)를 향한 개혁의 칼을 빼 들었다.
'도시 전문가'인 김 의원은 지난 21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진행된 민중의소리와의 인터뷰에서 국민적 관심이 높은 현안인 부동산 문제를 언급하면서 기재부를 개혁의 대상으로 콕 집었다. 문재인 정부 3년 동안 기재부가 집값 안정을 위해 해야 할 일은 하지 않고 '직무유기'했다는 것이다.
김 의원은 기재부를 겨냥해 "정신 차리게 해야 한다"며 날을 세우기도 했다. 한 시간가량 진행된 인터뷰에서는 기재부에 대한 답답함이 가득 묻어났다.
기재부 직무유기 강하게 질타
"기재부서 할 일 안 하고 내버려 둬"
김 의원은 "부동산 문제의 기저에는 저금리 문제와 유동성이 많다는 데 있는데, 이것을 잡기 위해 기재부에서 해야 하는 일들이 많다. 세금과 관련된 것들은 기재부에서 관장하고 있기 때문"이라며 "그런데 기재부는 자기들이 해야 할 일들을 하나도 해놓지 않고, 보유세(종합부동산세·재산세 등)를 올리는 문제도 하지 않고 내버려 두니까 이렇게 온 국민이 '똘똘한 한 채'를 찾아서 삼만리 하고 있는 게 아니냐"고 지적했다.
김 의원은 "우리나라가 보유세가 낮다는 건 다 알지 않나. 보유세는 시장에 충격이 있기 때문에 국민에게 주의를 주면서 천천히 올려야 한다"라며 "그런데 이런 일들을 하지 않고 (정부 출범 후) 3년 동안 있으면서 국회에 내버려 뒀다. 국회에 내버려 두면 미래통합당이 다 방어해주겠지라며 3년을 보낸 거 아니냐"라고 쏘아붙였다.
김 의원은 기재부가 부동산 대책으로 규제 강화보다는 공급 확대에 무게를 두면서 '그린벨트 해제 검토' 등의 발언으로 정책의 혼선을 부추긴 것도 문제 삼았다. 참고로 문 대통령은 논란 끝에 전날 그린벨트를 해제하지 않고 미래세대를 위해 두기로 결정한 바 있다.
김 의원은 "이제 와서 공급이 부족하다며 그린벨트를 푼다는 것도 왜 기재부가 나서는 것이냐"라며 "그것이야말로 국토교통부가 해야 하는 일이고, 환경부나 여러 지방자치단체가 굉장히 신중하게 결정해야 하는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러면서 "지금 공급 때문에 부동산 문제가 생기는 게 아니라는 것은 너무나 잘 알지 않느냐"라고 덧붙였다.
열린민주당 김진애 의원이 21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민중의소리와 인터뷰하고 있다. 2020.07.21ⓒ정의철 기자
김 의원은 종합부동산세(종부세) 최고세율을 6%로 인상하는 등의 내용이 포함된 정부의 '7.10 대책'에 대해서는 "종부세를 올리는 것까지는 좋은데, 마치 현행 3.2%에서 6% 올린 게 굉장한 것인 양 많이 올렸다고 한다. 이게 전형적인 (기재부의) 플레이"라며 "기재부는 끊임없이 숫자 플레이만 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김 의원이 국세청으로부터 받은 '개인별 종부세 과세표준 규모별 결정 현황'에 따르면 2018년 기준으로 종부세 최고세율 6%를 적용받는 대상은 고작 전체 종부세 납부자 38만여 명 중 20명밖에 되지 않는다. 이는 전체 종부세 납부자의 0.005%에 불과해, 부동산 안정화를 위해서는 종부세 과표 구간을 세분화하는 등의 세밀한 보완책이 필요하다는 게 김 의원의 주장이다.
김 의원은 "지금 과세표준 구간도 3억 이하, 3~6억, 6~12억, 12~50억, 50~94억, 94억 초과 등 6개 구간으로 나뉘어 있다. 그런데 과표구간 12~50억은 시세로 하면 27~90억 정도 된다"며 "이렇게 차이가 많이 나는 것을 왜 한 구간으로 묶느냐"고 지적했다.
김 의원은 이러한 문제 의식을 담아 과세표준 구간을 현행 6개에서 7개로 늘려 12~50억 구간을 12~20억과 20~50억 구간으로 나누는 종부세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내에서도 과표구간을 세분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김두관 의원도 12~50억의 과표구간이 지나치게 넓다고 지적했고, 박주민 의원 역시 입법 과정에서 이러한 주장도 함께 검토해 논의해야 한다고 힘을 보탰다.
김 의원은 "이것처럼 구간을 나누면 더 실효성 있게 세금이 부과된다"며 "제가 (부동산에 대해) 잘 알아서 하는 게 아니다. 제가 종부세 강화 법안을 내기 위해 스터디를 꽤 했는데 불합리한 점들이 보였다. 그런데 기재부에서는 불합리한 게 안 보이는 거다. (원래) 하던 대로 세금을 받으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김 의원은 "기재부도 정신 차려야 한다. 정신 차리게 만들어야 한다"며 "저는 우리 사회가 앞으로 나아가려면 기재부가 혁신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부 부처나 국회조차도 기재부에서 하는 숫자 게임에 놀아날 때가 너무 많다"고 우려했다.
다만 김 의원은 통합당이 제안한 부동산 대책에 대해서는 "대체 누구 편을 들려는 것이냐"라고 일침을 가했다. 통합당은 '세금으로는 부동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기조하에서 재건축·재개발 규제 완화, 그린벨트 해제 등 공급량을 늘리는 데에 중점을 두고 있다.
김 의원은 "저는 솔직히 이해가 안 된다. 통합당처럼 종부세도 완화하고 공급도 다 풀면 언제로 돌아가자는 거냐, 이명박 정부 때로 돌아가자는 거냐"라며 "건설업자 편들려는 것인지, 고소득층을 편들려는 것인지, 아니면 자산가만을 편들려는 것인지, 어떻게 이렇게 정신이 없나"라고 질책했다.
김 의원은 정부의 부동산 대책을 입법으로 실현해내야 하는 민주당을 향해서는 "흔들리지 말고 꿋꿋하게 하라"고 당부했다. 그는 "(법안 논의 과정에서) 통합당이 생떼를 쓰면 '조금만 양보하자, 협치하자' 할 수도 있을 텐데 이런 데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며 "최근 두 달은 민주당이 흔들리지 않고 잘 해왔다. '열린민주당은 3석이지만 우리가 뒤에 있다'고 얘기를 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검찰 개혁, 국회 개혁도 고삐
"7월 임시국회서 정리돼야, 시간 끌면 문제 돼"
열린민주당 김진애 의원이 21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민중의소리와 인터뷰하고 있다. 2020.07.21ⓒ정의철 기자
부동산 문제 외에 '검찰 개혁'과 '국회 개혁'도 김 의원의 관심사다. 김 의원은 두 개혁 과제를 중점적으로 다루는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와 국회 운영위원회 소속인데, 다음 주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될 법안심사 국면을 벼르는 중이다.
특히 김 의원은 검찰 개혁에 대한 강한 의지를 거듭 내비쳤다. 김 의원은 "7월 임시국회에서 정리돼야 한다. 그렇지 않고 자꾸 뒤로 (시간을) 끌면 여러 가지 문제가 된다"며 검찰개혁의 고삐를 바짝 쥐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물론 자신의 전문 분야와는 동떨어진 법사위에 '깜짝 배치'되면서 의아하다는 반응이 나오기도 했다. 이에 김 의원은 "제가 (법사위 첫 회의에서) 비전문가니까 참신할 수도 있고 또는 엉뚱할 수도 있다고 말했는데 (지금은) 두 가지 다 해보려고 노력 중"이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김 의원은 가장 주력해야 할 검찰 개혁 과제로는 고위공직자범죄수처(공수처) 출범을 꼽았다. 그는 "지금 검찰은 마지막 저항을 하는 중인데, 공수처가 있으면 그렇게까지는 못할 것"이라며 "궁극적으로는 검찰에서 수사권을 빼고 기소권만 남겨서 검찰이 정말 전문적인 검찰로 태어나는 것을 하면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국회 국토교통위로 배치된 최강욱 의원과 사보임을 통해 서로 상임위를 맞바꾸는 방안에 대해서는 "때가 되면 할 것"이라며 말을 아꼈다. 다만 김 의원은 "법사위가 열리고 나서 제가 한 발언들이 신선해서 그런지 말뚝 박으라는 소리도 나온다"면서도 "(하지만) 역시 제가 제 분야에 가서 할 수 있는 게 있다"고 아쉬워했다.
김 의원은 '법사위에서 잘해보라'고 응원했던 한 의원과의 대화를 소개하며 "'잠깐만'이라고(잠깐만 잘해보겠다고) 대답했다. 제가 요즘 (기재부·검찰·국회 개혁을 위해) 몸이 세 개가 되어서 너무 힘들다. 빨리 (제가 더 잘) 할 수 있는 데 가서 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앞으로 열린민주당의 역할에 대해서는 "등대, 쇄빙선, 소금, 지렛대의 역할을 하겠다"고 설명했다. 이는 총선 당시 '매운맛 민주당'을 표방하며 민주당보다 더 강한 어조로 개혁을 추진해가는 역할을 하겠다고 약속한 데 대한 연장선으로 보인다.
최근 잇따른 악재로 정부·여당의 지지율이 급격히 떨어지는 데 대해서는 "(정부·여당은) 조금 더 일을 뚫고 나가는 힘, 문제를 뚫고 나가는 힘은 더 적극적이었으면 좋겠다"며 "우리는 다수 정당이나 교섭단체가 아니기 때문에 막 끌고 나가지는 못하지만 이런 (등대, 쇄빙선, 소금, 지렛대의) 역할을 하면 민주당도 우리를 싫어하지는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김광수: 북(북의 사상과 정치) 정치학 박사, <수령국가> 저자, 평화통일센터 하나 이사장
통일부 장관 청문회(7/23)가 불과 하루 남았다. 예측컨대 청문회 결과와 상관없이 대통령은 이인영 내정자를 임명할 것이다. 그러면 늦어도 7월 말, 혹은 8월 초에는 내정자 딱지를 떼고, 정식 장관임기가 시작될 것이다.
이인영 내정자도 그걸 알고 있기에 21일 내정자 신분으로 자신의 입장을 비교적 소상히 밝혔다.
발표를 보면 취임 후 가장 먼저 추진할 일로는 북측과의 대화 복원을 꼽았고, 다음으로 '먹는 것, 아픈 것, 죽기 전에 보고 싶은 것'으로 표현한 인도적 교류·협력 추진 의지를 밝혔다. 그리고는 이런 신뢰에 바탕해서 그동안 있었던 남북 간 합의와 약속을 이행하는 과정이 진행될 것이라고 제시했다.
<대화복원 → 교류협력 → 약속이행>의 순서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해법의 첫 단추를 완전 잘못 꿰고 있다. 정반대여야 한다. <약속이행 → 교류협력 → 대화복원>순으로 말이다.
뭔 말 인고 하면, 이렇다.
첫째, 지금의 남북관계 경색이 대화가 부족해서 일어난 결과가 아니라는 말이다.
둘째, 지금의 남북관계 파탄이 교류협력을 통해 회복될 수 있는 상황은 이미 넘어섰다는 말이다.(임계점을 훨씬 넘어섰다는 말이다.)
그러니 남북관계가 복원되려면 이 내정자가 생각하고 있는 이행순서와는 정반대의, 즉 180° 뒤집어 생각해내어야만 하는 것이다.
정점에 남과 북이 약속했던(그것도 양 정상이 합의한) 합의문 이행 최우선이 있다.
그래야만 북과 대화할 수 있고, 그 바탕위에서 교류협력을 추진해나갈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위 3단계 대북접근 방식은 전임 장관들과 똑같은 공허한 메아리로, 실패한 전철과 하등 다르지 않다. 3번째.
그 전제하에 장관 내정자에게 남은 사실상의 시간, 10여 일 동안 내정자는 무얼 해야 되는지 한번 고찰해보자.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유일한 것은) 지금의 남북관계 파탄이 이제까지 제안된 사업(아이디어)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는데서 부터 출발해야 한다.(이미 제안된 사업만으로도 임기 안에 하기 에는 너무나도 벅차다.)
그래야만 자꾸 엉뚱한 해법도, 번지수가 틀리지도 않게 된다. 나아가 뭔가 쌈빡한 아이디어가 없는지, 그렇게 자꾸만 시간을 허비하지 않게 된다.
어떻게? 다른데 있지 않다.
장관 내정자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뭘 하겠다’이런 쓸데없는(?) 공약 남발보다는, 남북관계가 왜 이 지경까지 되었는지를 곰곰이 되돌아보고, 그 성찰적 토대위에서 뭘 할지를 집중 구상해야 한다.
그러면 제일 먼저 ‘신뢰’의 문제가 보일 것이다. 덩달아 그 신뢰 문제를 푸는 유일한 방법이 이 정부 들어와 남북 간에 이뤄낸 ‘합의문 약속이행’밖에 없음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인식을 그렇게 분명히 해야 한다.
그 다음 약속이행 구현을 위한 필요한 것들, 넘어서야 할 것들, 국민적 동의를 구해야 할 것들, 등등 이런 것들에 대한 액션플랜(action plan)을 구체화해내어야 한다.
순서는 다음과 같다.
첫째, 대북 전단지 살포에 대한 책임 있는 사과와 책임자 처벌, 재발방지를 위한 입법추진이 제일먼저 천명되어져야 한다.(시간표 있게)
둘째, 신뢰회복 그 정점에 ‘합의문 약속이행’ 문제가 있음을 직시하고, 그 합의문 이행을 어떻게 추진해 나갈지가 분명하게 천명되어져야 한다.
▶한미워킹그룹을 넘어설 전략
▶약속이행의 제도적 틀 완성: 국회비준 추진
▶합의문이행을 위한 실행로드맵 제시
셋째, 북에 의해 철거 예정되어있는 금강산 관광시설물, 그리고 2019년 북 신년사에서 ‘조건 없이’재가동되길 희망했던 금강산·개성공단 재가동에 대한 입장을 명확히 정리해내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꼼수와 같은 ‘우회로’로에 집착하지 말고, 정공법에 해당되는 정면돌파의 전략을 수립해야 된다. 즉, ‘개별관광’이니 하는 그런 것들에 집착하지 말고, 그냥 ‘오는 몇 월, 며칠부터 금강산 관광은 전면 허용됩니다. 그에 맞춰 통일부는 북과 모든 협의를 마치고, 필요한 이행절차를 완전 세팅하겠습니다.’ 그러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민족자주와 자결의 원칙합의에 맞는 것이다.
넷째, 그렇게 위 ‘첫째’, ‘둘째’, ‘셋째’와 같이 해놓고, 다음으로는 범정부 차원에서 추진되어야 할 내용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내고, 돌파할 전략을 수립해내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있다.
▶5.24조치
▶한미합동군사훈련(8월 예정)
먼저, 알다시피 5.24조치는 적폐정권에 의해 저질러진 대북적대정책이다. 그러니 이 해법은 조치를 철회하면 된다. 그것이 촛불정부다운 것이고, 지난 10년의 민주정권 적통을 이어받은 문재인 정부가 해야 할 일인 것이다.
통일부가 적극 나서야하는 이유가 그렇게 발생한다.
다음으로, 8월로 예정된 한미합동군사훈련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개진해야 한다.
다 안다. 한미합동군사훈련은 통일부가 독자적으로 결정할 수 없는 사안임을. 그럼에도 이 문제가 통일부장관이 직접 나서서 남북관계 복원의 핵심 사안으로 가져가야 되는 이유는, 그래야만 남북관계가 뚫려 질 수가 있기 때문이다.
해서 비록 독자적으로 결정할 수만은 없겠지만, 입장을 분명히 밝힘으로써 통일부가 적어도 한미합동군사훈련이 왜 문제인지는-실질적 남북관계 회복을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서야할 문제임을 온 국민들에게 알려내고, 북에게는 통일부(장관)의 진정성을 잘 전달할 수 있는 좋은 호재이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장관은 이후 정부안의 야당이 되어 훈련중지를 위해 모든 역량을 총 투입해 정부를 상대하고, 국민들에게는 한미합동군사훈련 중지의 필요성을 설득해나가야만 한다.(이는 그냥 언론플레이 하듯 기자만나 ‘내 개인적 소신은 합동군사훈련 반대하지만, 이건 정부차원에서 결정될 일이라서...’ 그렇게 얼렁뚱땅 넘어가지 말라는 말이다.)
장관의 성패가 그렇게 거기에 있다. 이인영 장관 내정자에게 그런 기대를 해본다.
실패 시 이인영 장관 내정자 역시 길어봐야 1년 내외의 (욕 들어먹고, 역사의 기록에는 아무런 공적도 없는) 월급쟁이 장관직밖에 못할 것이다.
한번쯤은 그렇지 않는 장관을 만나보자.
김광수 약력
저서로는 『수령국가』(2015)외에도 『사상강국: 북한의 선군사상』(2012), 『세습은 없다: 주체의 후계자론과의 대화』(2008)가 있다.
강의경력으로는 인제대 통일학부 겸임교수와 부산가톨릭대 교양학부 외래교수를 역임했다. 그리고 현재는 부경대 기초교양교육원 외래교수로 출강한다.
주요활동으로는 전 한총련(2기) 정책위원장/전 부산연합 정책국장/전 부산시민연대 운영위원장/전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사무처장·상임이사/전 민주공원 관장/전 하얄리아부대 되찾기 범시민운동본부 공동운영위원장/전 해외동포 민족문화·교육네트워크 운영위원/전 부산겨레하나 운영위원/전 6.15부산본부 정책위원장·공동집행위원장·공동대표/전 국가인권위원회 ‘북한인권포럼’위원/현 대한불교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 부산지역본부 운영위원(재가)/현 사)청춘멘토 자문위원/6.15부산본부 자문위원/전 통일부 통일교육위원 / 평화통일센터 하나 이사장/(사)한반도 평화와 번영을 위한 협력 자문위원 외 다수가 있다.
신라 최대의 사찰인 황룡사 터 남쪽 구역에서 광화문 광장에 버금가는 1600년전 신라 광장이 확인됐다. 동궁 및 월지까지 500m(폭 50m)가량 이어진 이 광장의 규모는 2만5000㎡(7600평)에 달한다. |신라문화유산연구원 제공
신라시대 최대의 사찰이던 경주 황룡사터 남쪽에 광화문 광장에 버금가는 대규모 ‘광장’이 존재했다는 조사성과가 정리되어 발표됐다. 이 광장은 담장과 함께 황룡사에서 동궁 및 월지 방향으로 500m 가량 이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 동궁 및 월지(서쪽)와 명활산성(동쪽)까지 동서로 이어지는 도로의 존재도 확인됐다.
2016년부터 황룡사 남쪽 구역(3만1000㎡)을 조사중인 신라문화유산연구원의 이민형 연구원은 24일 경주에서 열리는 ‘황룡사 남쪽 광장 정비를 위한 정비 및 활용’ 학술대회에서 2만5000㎡(7600평·동서 500m×남북 약 50m)에 이르는 광장의 존재를 확인했다는 내용의 논문을 발표한다.
조사구역에서 드러난 신라시대 광장. 높이 60㎝ 정도의 담장과 함께 조성되어 있다. 폭은 50m 가량이다.|신라문화유산연구원 제공
이민형 연구원은 22일 정리된 논문(‘황룡사 남쪽광장과 도시유적 조사성과’)에서 “맨먼저 조성된 광장의 배수로를 채운 유물 중에 ‘의봉 4년명’ 기와 등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의봉’은 당나라 고종(재위 649~683)의 9번째 연호(676~679년)이며, 따라서 ‘의봉4년’은 679년을 가리킨다. 그래서 이 광장의 첫번째 조성시기는 늦어도 통일신라 초기인 7세기초로 추정된다. 광장은 지금도 도로 포장 등에 쓰는 마사토(지름 0.002mm 이하, 점토분이 12.5% 이하인 입자로 된 토양)를 바닥에 깔고 그 위에 주먹 크기의 냇돌을 촘촘히 덮은 구조로 조성했다.
동궁과 월지까지 길게 조성된 동서도로. 후대에 이 도로 위에 광장이 조성됐다. |신라문화연구원 제공
이후 1차 정비된 광장은 처음의 광장 위에 마사토와 사질점토를 덮고 자갈을 전면적으로 깐 모습이었고, 2차 정비된 광장은 20~30㎝의 냇돌을 자갈과 함께 깔아 조성했다. 광장의 동쪽 경계부에서는 길이 30.4m, 너비 280㎝ 정도의 넓은 배수로가 남북방향으로 연결된채 노출됐다. 1차로 조성된 광장으로 유입되는 물의 흐름을 차단하기 위한 시설이다. 이밖에 광장보다 더 남쪽에 조성된 주거단지와의 구분을 위해 설치한 담장도 보였다. 담장은 광장보다 60㎝ 정도 높게 조성됐으며, 확인된 길이만 280m에 달했다. 이민형 연구원은 “너비 1.5m의 담장은 동궁(월지)까지 500m 정도 연결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황룡사에서 월지 및 동궁까지 500m가량 이어진 대규모 광장의 세부구조. 광장은 지금도 도로 포장 등에 쓰는 마사토(지름 0.002mm 이하, 점토분이 12.5% 이하인 입자로 된 토양)를 바닥에 깔고 그 위에 주먹 크기의 냇돌을 촘촘히 덮은 구조로 조성했다. |신라문화유산연구원 제공
조성윤 신라문화유산연구원 조사팀장은 “광장의 규모는 도로를 제외한 광화문 광장(약 600m×60m) 보다는 약간 작지만 1300~1400년 전의 경주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엄청난 규모”라고 설명했다. 물론 신라인들이 이 넓은 광장에서 무엇을 했는 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서라벌에 절들이 별처럼 펼쳐져 있었고 탑들이 기러기처럼 늘어서 있었다(寺寺星張 塔塔雁行)”(<삼국유사>‘원조흥법염초멸신’)는 기록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신라는 삼국 중 가장 늦게(521년) 불교를 수용했다. 그러나 불교는 신라에서 꽃을 피워 신라에서 결실을 맺었다.
광장보다 더 남쪽에 조성된 주거단지와의 구분을 위해 설치한 담장도 보였다. 담장은 광장보다 60㎝ 정도 높게 조성됐으며, 확인된 길이만 280m에 달했다.|신라문화연구원 제공
17만8936호가 살았다는 왕경에 ‘별처럼 기러기처럼’ 늘어서 있던 절과 탑을 상상해보라. 특히 월성 동북쪽에 우뚝 서있는 황룡사 9층 목탑은 서라벌의 랜드마크였을 것이다. 탑 높이가 자그만치 80m나 됐다.
박방룡 신라문화유산연구원장은 “서라벌 백성들이 황룡사 앞에 조성된 광활한 광장에 모여 우뚝 솟은 목탑을 바라보며 나라의 안녕과 개인의 화복을 빌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또 이 광장에서 팔관회와 같은 국가적 행사가 열렸을 가능성이 있다. 팔관회는 가을의 추수를 천신에 감사하기도 하고, 전사한 장병들의 명복을 비는 종교 행사였으며 문화제였다. “572년(진흥왕 33년) 전쟁에서 죽은 병사들을 위해 7일간 팔관연회가 열렸다”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진흥왕조’ 기록이 있다. 898년(효공왕 2년)에도 “팔관회를 시작했다”는 기사(<삼국사기>)가 등장한다. 이민형 연구원은 또한 “발굴지역에서 동서도로와 남북도로 1·2호 등 도로 3곳이 확인됐으며, 시차를 두고 조성된 十자 교차로도 찾아냈다”고 밝혔다.
광장의 담장 남쪽에 조성된 가옥군도 확인됐다. 가옥군은 남북도로와 작은 도로로 4개의 공간으록 구분됐다. 경주 도시계획의 치밀함을 보여준다.|신라문화연구원 제공
동서도로와 1호 남북도로가 교차되는 도로는 시차를 두고 조성된 것으로 파악됐다. 동서도로는 5~6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파악됐다. 7세기초 만든 광장은 이 도로 위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민형 연구원은 “폭 15~19m의 동서도로는 조사구역 전체(동서 316m)로 뻗어있었으며, 서쪽으로는 경주 동궁 및 월지, 동쪽으로는 명활산성까지 이어진다”고 말했다. 도로 양쪽 가장자리는 광장을 조성할 무렵 의도적으로 매립한 흔적이 보이며 그 안에서 통일신라시대 토기와 기와 목제 도장 등의 유물과 복숭아씨, 밤껍질, 가래씨, 잣 등 자연유물이 출토됐다.
조사구역. 광장과 도로, 가옥군까지 경주의 도시계획을 알 수 있는 유구와 유물들이 쏟아졌다. |신라문화유산연구원 제공
이민형 연구원은 “발굴성과 중 하나는 광장 담장 남쪽에 조성된 가옥군(주택단지)의 확인”이라고 밝혔다. 주택단지는 남북도로 2기와 작은 도로(小路) 2기에 의해 4개의 공간으로 구분됐다. 조성윤 팀장은 “신라의 공간은 140~160m 간격의 바둑판 모양처럼 구획되는 것으로 그동안 알려졌지만 이번 조사결과 그 사이 70~80m 간격의 작은 도로로도 나뉜다는 사실도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밖에 황룡사는 연약한 습지 위에 흙을 성토하면서 조성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민형 조사원은 “특히 이 넓은 대지를 일정한 규칙에 따라 크고작은 구획으로 나눠 45도 경사지게 성토한 것으로 드러났다”면서 “원활한 배수를 위해 굵은 돌과 자갈, 그리고 성질이 다른 흙을 번갈아 쌓았다”고 전했다.
황룡사 9층목탑과 금당이 있었던 자리. 13세기 몽골침입 때 소실됐다. 황룡사 9층목탑은 높이만 80m 가량 되었다. 17만5000호가 된 서라벌 주민들에게 신앙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아마도 항룡사 앞에 조성된 광장에서 나라와 개인의 안녕을 빌었을 것이다.|경향신문 자료사진
황룡사는 553년(진흥왕 14년) 건립된 사찰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은 “진흥왕이 처음엔 새로운 궁궐을 짓다가 황룡이 나타나는 바람에 사찰 조영으로 계획을 바꿨으며 17년 만인 569년(진흥왕 30년) 절(황룡사)을 완성했다”고 기록했다. 이 절에는 신라의 세가지 보물(三寶·장육존상, 9층목탑, 천사옥대) 중 두 가지인 장육존상과 황룡사 9층 목탑이 있었지만 13세기 몽골의 침입 때 소실됐다.
박방룡 신라문화유산연구원장은 “광화문 광장에 버금가는 황룡가 광장과 담장, 동궁 및 월지까지 이어진 도로 등을 연결하는 유구를 복원하는 프로그램을 완성하며 대단한 볼거리가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김태년 “국회에 특위 구성 제안”
이낙연·김부겸도 긍정적 의견
당내 보고서 “행정수도법 검토”
여권서도 “집값 불만 회피용 안돼”
주호영 “위헌 문제 풀려야 논의”
세종시 중심부. 세종시
더불어민주당이 연일 국회의사당 세종시 이전 등을 거론하며 ‘행정수도’ 재이슈화에 힘을 싣고 있다. 야당과 합의만 있다면 충분히 현실성이 있다며 내부적으론 ‘실행 전략’도 마련했다. ‘국토균형발전’을 위해선 더이상 미룰 수 없다는 게 여당의 논리지만, 야당 반대가 완강하고 공론화를 위한 정지작업도 없었던 터라 논의가 탄력을 받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다.
김태년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21일 국회에서 열린 원내대책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김태년 원내대표는 21일 국회에서 열린 원내대책회의에서 “행정수도 완성을 위한 사회적 논의를 본격 추진하기 위해 국회에 행정수도 완성 특위를 구성할 것을 정치권과 시민사회에 제안한다”고 말했다. 전날 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 한 ‘청와대·정부·국회 세종시 이전론’의 연장이다. 김 원내대표는 지난 2004년 헌법재판소의 ‘행정수도 이전 위헌’ 결정을 언급하며 “시대 변화에 따라 관습헌법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여야 합의에 의한 국회 결단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당권 주자들도 힘을 보탰다. 이낙연 의원은 “여야가 합의하거나, 헌재에 다시 의견을 묻는 방법이 있을 수 있다”(<문화방송> 라디오)고 했고, 김부겸 전 의원도 “자꾸 수도권으로 몰릴 수밖에 없는 현실을 두고 대책을 세워봐야 한계가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나온 것 같다”(<와이티엔> 라디오)고 거들었다.
이날 <한겨레>가 입수한 민주당 원내지도부 보고서를 보면, 민주당은 기존 행정중심복합도시법을 ‘행정수도법’으로 개정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헌법소원 제기 시, 헌법재판관 다수가 진보 성향이라 기각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하면서도 “안심하기만은 어렵고, 관습헌법 논쟁이 종식되기가 어렵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국민투표로 행정수도 이전을 결정하거나 행정수도에 대한 원포인트 헌법 개정 방안도 거론했다.
그러나 민주당의 이런 구상이 현실화되기까지는 난관이 많다. 우선, 여론의 폭넓은 지지가 확보돼야 한다. 민주당이 꺼내든 행정수도 이슈가 수도권 집값 급등으로 인한 불만을 돌리기 위한 시선 분산용이 아니라 국토균형발전을 위한 진정성 있는 대책이라는 공감대가 마련돼야 한다는 것이다. 정해구 전 대통령 직속 정책위원회 위원장도 여의도 민주당사에서 열린 총선 평가 토론회에서 “단순히 부동산값이 올라서 옮겨야겠다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국토 발전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문제다. 북한까지 포함해서 고려해야 한다”고 사실상 반대의사를 밝혔다.
야당 설득도 관건이다. 청와대와 입법기관을 이전하는 중대한 사안을 놓고 민주당 단독으로 법 개정을 시도하거나 국민투표에 부치는 것은 정치적 부담이 크다. 개헌 역시 재적의원 3분의 2(200석) 이상 찬성을 얻어야 한다. 주호영 원내대표는 국회에서 기자들과 만나 “행정수도는 이미 헌재에서 위헌 결정이 났던 문제다. 위헌성 문제가 해결되고 난 뒤에 논의돼야 한다”고 말했다.
10년 천안함 재판 신상철에 세번째 징역 3년 구형
[항소심 결심] 검찰 “공적 조사 불신 초래, 의혹제기 홍보의장” 변호인 “쌍끌이 어선 50톤짜리 가스터빈 있는 곳 작업 모순”
(미디어오늘 / 조현호 기자 / 2020-07-22)
천안함 항소심 재판이 우여곡절 끝에 10년을 넘긴채 마무리됐다.
검찰은 21일 서울고법 형사5부(재판장 윤강열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신상철 전 민군합동조사위원의 명예훼손 사건 항소심 결심공판에서 피고인에 징역 3년 형을 내려달라고 구형했다. 신상철 전 위원과 변호인들은 무죄를 내려달라고 요구했다. 세번째 검찰의 징역 3년 구형이다. 재판부는 오는 10월6일 오후 2시반에 10년 넘은 이 사건의 선고를 하기로 했다.
검찰측인 소재환 검사는 21일 결심공판에서 신상철 피고인을 두고 “주장이 악의적이고 중요한 부분을 왜곡해 비방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소 검사는 △고의로 실종자 구조 작업을 지연 △군이 사고원인을 은폐조작, 조작 △천안함이 용트림바위의 제3의 선박과 충돌 △좌초후 후진했으며 명백한 해난사고라고 한 신상철 피고인의 주장을 두고 “이 모두는 재판과정에서 허위로 입증됐다”고 했다.
소 검사는 쟁점이 된 ‘고압세척을 통한 선저 스크래치 지운 흔적 유무’ 관련 “합조단 위원들 모두 스크래치 발견되지 않았고, 실제로 2010년 4월30일 이전 고압세척을 한적이 없다”며 “버블흔을 세척으로 사라진 흔적이라 주장하나 세척으로 사라진 바 없다”고 주장했다.
이스라엘 잠수함을 거론한 것을 두고 소 검사는 “이스라엘 잠수함이 출몰했다는 주장 자체가 난센스”라고 했다. 그는 함안정기의 손상을 “압력흔과 버블흔의 증거”라고 주장했다.
소 검사는 “신상철 피고인은 합조단에 있으면서 진실규명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고, 가치가 없는 자료를 근거로 계속 주장을 폈다”며 “악의적 경멸적 표현과 단정적 허위사실을 기재했다”고 했다. 그는 △기소이후에도 허위사실을 적시 △피해자들의 처벌의사 △공적 조사결과에 대한 국민 불신 초래 △희생장병의 명예훼손 △심각한 국론분열을 들었다. 신상철 피고인의 의혹 제기 자체를 문제삼기도 했다. 그는 “항소심에서도 정부 합조단 판단에 대한 의혹제기를 위한 홍보의장으로 만들었다”며 “원심 5년 넘게 법정 안팎에서 의혹제기를 계속했고, 천안함 생존자에게 희생자 CCTV를 보여주며 고통스러운 질문을 한 것을 보면 정상참작의 사유가 모두 틀렸다”고 주장했다.
신상철 피고인측 변호인인 김종귀 변호사는 최후변론에서 천안함 사건을 좌초후 충돌로 보고 있다고 밝히면서 허위라는 검찰주장에 하나하나 이견을 제시했다. 김 변호사는 좌초와 관련 우현 프로펠러의 경우 특이한 손상구조를 보이고 있으며, 합조단이 시뮬레이션했으나 밝혀내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원심판결문에 ‘현대 과학의 한계’라는 표현을 들기도 했다. 김 변호사는 “천안함 우현의 프로펠러가 가변피치프로펠러로, 역회전하지 않고, 같은 방향으로 돌면서 전진과 후진이 다 가능하다”며 “이를 반복하면서 빠져나오는 과정에서 에스자형태의 손상이 나타났다”고 반박했다.
▲경기도 평택 해군 제2함대에 전시된 천안함 함미. 2018년 9월13일 서울고법 형사5부가 현장검증을 하고 있다. 사진=이우림 기자
특히 쌍끌이 어선의 어뢰추진체 인양의 모순성을 지적하기도 했다. 김 변호사는 박정이 합조단장이 증인으로 출석해 ‘격자무늬로 탐색해 폭발원점을 지나는 과정에서 건졌다’고 주장한 점을 들어 “가스터빈이 50톤이 넘는 대형구조물인데, 이 위를 쌍끌이어선이 지나갔다는 것은 그물이 찢어질 수밖에 없다는 의미”라며 “가스터빈실이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자연스럽게 지나가면서 물건을 건져올릴 수 있느냐. 상식에 반한다”고 반박했다.
김 변호사는 “폭침 어뢰가 아니라 다른 곳에서 가져온 어뢰”라며 “이어도호와 장목호가 2010년 4월4일부터 5월8일까지 탐색했지만, 어뢰 추진체보다 더 작은 물건도 식별하는데, 어뢰가 식별되지 않은 이유는 그 시점에는 어뢰추진체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추론했다.
항소심 재판부에 제출된 생존자 진술서 원본을 두고 김 변호사는 “굉장히 핵심 증거”라며 “분석 결과 폭발보다 압도적으로 충돌이라고 진술한 장병이 많았다”고 밝혔다.
피고인인 신상철 전 위원은 “그동안 혹독한 시간을 보냈다”며 진실을 밝혀 남북관계를 미래지향적 관계로 만들고, 북한에 씌운 누명 벗겨주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신 전 위원은 1심 판결에서 유죄로 선고된 ‘고의구조 지연’ 주장을 두고 “함수가 16시간동안 떠내려가는 것을 보고 있었는데도 아무 조치하지 않았다”며 “이게 구조지연한 것 아니냐. 박성균 하사 시신도 여기서 발견했지 않느냐”고 반론했다. 증거인멸 주장 관련 신 전 위원은 “함미 인양 당시 (좌현 선저에 있는) 길이방향 스크래치가 사라졌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번 판결로 한반도 미래가 달려 있다는 점을 고려해 현명한 판단을 부탁한다”고 덧붙였다.
▲천안함 가스터빈 외판의 좌측 부분. 2015년 촬영. 사진=조현호 기자
심재환 변호사는 이번 사건의 역사적, 정치사회적 의미를 들어 무죄를 내려달라고 촉구했다. 심 변호사는 이 사건이 1,2심 포함 10년을 넘긴 점을 들어 “재판부의 부담을 보여준 것”이라며 “국방부와 검찰이 진실의 목소리를 억압해 법정까지 오게 됐다”고 말했다. 심 변호사는 “재판부가 진실에 대한 무거운 부담이 있겠지만 진실앞에 단호한 태도를 바란다”고 요청했다.
심 변호사는 특히 “지금 사법부 불신이 상당한 것은 잘못된 재판을 해왔기 때문”이라며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강기훈유서대필사건 △삼성은 봐주고 뇌물 폭로한 노회찬 유죄판결 사건 △이회창 전 총리가 판사시절 서명한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 사형언도 사건 등을 들었다. 심 변호사는 “신상철 피고인이 이 자리에 있어서는 안된다”며 “정부의 황당한 발표에 의문을 갖는 것이 어떻게 10년이나 재판을 받아야 하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검찰 수사 당시 MB 정권이 “사회질서를 어지럽히고 정부발표를 믿지 못하게 하는 자를 신속히 수사해 엄벌에 처하라고 했다”며 “진실을 밝히고자 용기를 가진 피고인을 법정에 몰아넣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10년이나 진행한 사건, 실무적으로 부담이 있고, 어떤 결론을 낼지 복잡한 생각을 가지리라 본다”면서도 “진실의 편에 서면 된다. 가짜판결의 오명을 쓰지 말아달라”고 했다.
이로써 신 전 위원은 검찰의 3년 구형만 세 번째 받은 피고인이 됐다. 검찰은 1심 재판 때 3년 구형(1심 판결은 징역 8월 집행유예 2년)을, 항소심 재판 중인 지난해 11월21일 신 전 위원에 3년형을 구형했다. 당시 항소심 재판부(김형두 부장판사)는 지난 1월30일 선고공판을 하려 했으나 여러 의문점이 해소되지 않았다며 종결했던 변론을 재개했다. 그 후 정기인사로 재판부가 통째로 바뀌었다. 새로 바뀐 재판부로 구성된 서울고법 형사5부(재판장 윤강열 부장판사)는 지난 4월24일 변론기일에서 한차례 공판을 진행한 뒤 이날 변론을 종결하기로 한 바 있다.
금속노조와 금속노조 경기지부 현대위아비정규직평택지회는 21일 경기도 평택 현대위아 1공장 앞에서 결의대회를 마친 뒤 법원 판결에 따라 정규직으로 전환을 촉구하며 공장 로비 점거 농성에 들어갔다. 2020.07.21ⓒ김철수 기자
자동차 엔진을 생산하는 평택 현대위아 공장에서 일하는 사내하청노동자들이 ‘근로자지위확인소송 철회 등을 대가로 3천만 원을 주겠다’, ‘소송을 취하하지 않으면 울산으로 내려보내겠다’ 등의 회유·압박을 거부하고 “법원 판결에 따라 정규직으로 전환하라”며 21일 공장 점거 농성을 시작했다.
현대위아는 현대기아자동차에 자동차 엔진을 납품하는 현대기아자동차 부품생산 계열사다
금속노조와 금속노조 경기지부 현대위아비정규직평택지회는 이날 경기도 평택 현대위아 1공장 앞에서 정규직 전환 촉구 결의대회를 열었다. 결의대회엔 현대위아비정규직평택지회 조합원들뿐만 금속노조 경기지부 소속 노동자, 금속노조 전국순회투쟁단 관계자 등 700명이 참여해 사내하청비정규직을 법원 판결대로 정규직으로 전환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결의대회가 끝난 뒤, 현대위아비정규직평택지회 조합원들은 공장 안으로 진입해 건물 로비를 점거했다. 이들 조합원은 현대위아 평택공장에서 오랫동안 일해 온 직원임에도 불구하고, 회사는 다른 직원들을 동원해 이들의 공장 진입을 막았다. 하지만 40여 명의 사내하청비정규직들이 로비까지 진입하는 것을 막진 못했다.
금속노조와 금속노조 경기지부 현대위아비정규직평택지회는 21일 경기도 평택 현대위아 1공장 앞에서 결의대회를 마친 뒤 법원 판결에 따라 정규직으로 전환을 촉구하며 공장으로 들어갔다. 2020.07.21ⓒ김철수 기자
금속노조와 금속노조 경기지부 현대위아비정규직평택지회는 21일 경기도 평택 현대위아 1공장 앞에서 결의대회를 마친 뒤 법원 판결에 따라 정규직으로 전환을 촉구하며 공장 로비 점거 농성에 들어갔다. 2020.07.21ⓒ김철수 기자
사내하청노동자들이 이같이 로비 점검 농성을 벌이게 된 이유는 회사가 ‘이들을 직접고용하라’는 취지의 1·2심 법원 판결을 무시하고, 대법원 판결이 나오기 전에 온갖 회유·압박으로 사내하청비정규직들에게 “소송을 포기하고 자회사로 갈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늦어도 올해 안으로 대법원 판결이 나올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직접고용 의무를 회피하기 위해 대법원 판결이 나오기 전에 노동자들을 자회사로 모두 보내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엔 비조합원들 대상으로 소송을 제기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2천만 원을, 금속노조 조합원 대상으론 소송을 취하하는 대가로 3천만 원을 지급하겠다며 회유하고 있다. 또 오랫동안 평택에서 일해 온 이들 노동자에게 소송을 취하하지 않으면 울산 공장으로 내려 보내겠다는 압박도 하고 있다. 그러면서 소송을 취하하고 직고용 정규직 전환을 포기하면 평택 공장에서 계속 일을 할 수 있게 해주겠다는 식으로 회유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노동자들은, ‘소송을 포기하지 않는 노동자들에 대한 울산공장 발령’은 사실상 ‘실업급여조차 받지 못하는 해고’라고 보고 있다. 현대위아비정규직평택지회 관계자는 “구형 봉고차 엔진을 만드는 울산공장에서 필요한 인원은 약 20명 정도다. 40명이 일할 때도 물량이 없어서 주3일 노동을 하던 곳”이라며 “그런데 이곳에 120명가량을 보내겠다는 건 말이 안 된다”라고 지적했다.
금속노조와 금속노조 경기지부 현대위아비정규직평택지회는 21일 경기도 평택 현대위아 1공장 앞에서 자회사 분쇄! 고용보장! 정규직화 쟁취' 현대위아비정규직 평택지회 투쟁승리 금속노조 결의대회를 열고 법원 판결에 따라 정규직으로 전환을 촉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2020.07.21ⓒ김철수 기자
김영일 현대위아비정규직평택지회 지회장은 “일할 때는 최저임금 주면서 부려 먹더니, 불법파견 소송을 취하하지 않는다고 설비도 식당도 없는 텅텅 빈 울산공장으로 부당전보발령 내면서, 월급도 실업급여도 받지 못하게 하는 신종 탄압을 (현대위아) 자행하고 있다”라며 “현대위아가 이처럼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는 이유는 그동안 저질러온 불법파견 범죄를 회피하고, 사내하청비정규직들의 피와 땀을 착취할 수 있는 노동구조를 바꾸고 싶지 않아서인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김 지회장은 “이런 (부당한) 노동구조를 법으로도 바꿀 수 없다면, 노동자들이 단결된 힘밖에 없다”라며 “단결된 힘으로 꼼수 막아내고, 좀 더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끝까지 투쟁해서 승리하자, 비정규직 철폐하고 정규직화 쟁취하자”고 외쳤다.
김영배 금속노조 경기지부 부지부장은 “딸이 6살 때 아무것도 모르면서 재롱잔치에 (노조) 빨간 머리띠를 매고 나갔었다. 그런 딸이 이젠 숙녀가 됐다. 하지만 변한 건 없다. 아직까지 난 노동자이고, 우리 딸 또한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있다”라며 “이런 현실을 더 이상 후대에 물려주지 말아야 한다. 더 이상 비정규직이 있어선 안 된다”라고 말했다.
양경수 민주노총 경기본부 본부장은 “그동안 도급업체 정규직으로, 하청업체 직원으로 포장돼 왔던 비정규직이 자회사 정규직으로 포장을 바꾼다고 해서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라며 “평택 현대위아 비정규직 투쟁은 인간답게 제값 받고 노동자답게 살기 위한 투쟁의 최전선”이라고 강조했다.
이날 금속노조는 규탄 성명을 발표하고 “현대위아는 불법파견에 대해 사죄하고 불법파견을 해결할 종합적인 대책마련을 위한 대화에 나서라”라고 촉구했다. 그러면서 “금속노조는 이미 현대위아 측에 정규직, 비정규직이 함께하는 논의 테이블을 구성해 문제해결에 나서자고 제안한 바 있다”라며 “모든 사회구성원이 지혜를 모아가야 할 시기에 현대위아가 비정규직 노조파괴, 집단해고, 불법파견 무력화를 위한 탄압에 나서고자 한다면 금속노조뿐만 아니라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염원하는 모든 양심세력에 전면전을 선포하겠다는 것과 다름없다”라고 비판했다.
한편, 현대위아비정규직평택지회 조합원들이 농성을 시작한 현대위아 평택 1공장은 현재 신규투자를 받고 설비를 개선하는 공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공장 재개는 올해 9월쯤으로 예상된다.
▲ 이인영 통일부장관 후보자는 21일 오전 남북회담본부 앞에서 기자들과 만나 "통일정책 추진에 있어서 우리 국민이 공감할 수 있고, 미국이 신뢰할 수 있는 변화, 그리고 북한과 대화할 수 있는 변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아주 대담한 변화를 추진하겠다."
23일 인사청문회를 앞두고 있는 이인영 통일부장관 후보자는 21일 오전 인사청문회를 준비하고 있는 서울 종로구 남북회담본부 앞에서 기자들과 만나 교착상태의 남북관계를 진전시키기 위한 통일부의 대담한 변화를 예고했다.
남북관계 발전에 있어서 공식적이고 공개적이며 대중적인 영역에서 통일부가 주무부처라는 확고한 위상과 역할을 정립하겠다는 의지를 강조했다. 그리고 "통일정책 추진에 있어서도 우리 국민이 공감할 수 있고, 미국이 신뢰할 수 있는 변화, 그리고 북한과 대화할 수 있는 변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취임 후 가장 먼저 추진할 일로는 북측과의 대화 복원을 꼽았다. 그리고 '먹는 것, 아픈 것, 죽기 전에 보고싶은 것'으로 표현한 인도적 교류·협력 추진 의지를 밝혔다. 이런 신뢰에 바탕해서 그동안 있었던 남북간 합의와 약속을 이행하는 과정이 진행될 것이라고 제시했다.
당장 남북관계 발전의 저애요인으로 지목된 한미워킹그룹에 대해서는 "한미워킹그룹을 통해서 해법을 찾아나가는 것과 독자적으로 판단해서 해야 할일은 구분해서 해야 한다는 것이 일관된 생각"이라고 말했다.
제재와 관련해서 한미워킹그룹을 통해 통일적이고 효과적으로 해제절차를 밟은 사례도 있기 때문에 여전히 워킹그룹에서 할 수 있는 것은 그대로 하고, 예컨대 '먹는것, 아픈 것, 죽기전에 보고싶은 것' 등 통칭해서 인도적 교류와 관련한 영역에 있어서는 워킹그룹에서 이야기하지 않고 우리 스스로 독자적으로 판단해서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한미연합군사훈련에 대해서는 "통일부 이전에 개인적인 입장으로는 연기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면서도 "(전시작전권 반환 등의 필요에 따른)국방부의 요구와 코로나19 확산상황 등을 모두 감안해서 전략적으로 유연하게 판단했으면 좋겠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이 후보자는 금강산관광을 개별관광 방식으로 풀어보려는 기존 시도는 유의미하다고 평가했고 고령 이산가족의 개별방문과 상호방문은 물론 일상적인 화상상봉, 서신교환 등에 대해서 남북관계 제약을 제거하고 나면 신속하게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남북교역과 관련해서는 "벌크캐시(대량현금) 문제들이 제재와 관련해서 직접적인 제약조건으로 작용했다"고 하면서 "물물교환 방식으로, 새로운 상상력으로 뛰어넘어야 한다"는 방안을 제시했다.
특히 "먹는 것, 아픈것, 보고싶은 것 등 인도적 교류협력 영역에서부터 작은 교역을 추진해 보았으면 좋겠다"며, "금강산과 백두산의 물, 대동강의 술, 그런 것들이 물건 대 물건, 현물 대 현물, 아주 많은 교류가 아니더라도 작은 교류가 시작되어서 상황과 조건이 나아지면 큰 교류로 발전시켰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북측과의 대화 재개에 대해서는 "장관에 취임하게 되면 그 시점에서 보다 본격적으로 북과 대화를 할 수 있고, 북이 대화로 나설 수 있는 그런 입장을 발표하겠다"고 말했다.
청와대와 여당은 문재인 대통령의 국정수행 지지도가 오르내릴 때마다 “숫자 보고 정치하지 않는다” “지지율 등락에 일희일비 않는다”고 했다. 평창 겨울올림픽 개최로 대통령 지지율이 고공행진을 할 때도, ‘조국 사태’로 지지율이 급락했을 때도 그랬다. 하지만 최근 이어진 지지도 추락에는 긴장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집권 4년차, 총선 압승 100일도 되지 않아 나타난 ‘추세적 하락’이란 점에서 자칫 ‘레임덕’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위기감 탓으로 보인다. 여권은 무엇보다 정권의 핵심 지지층인 30대마저 이탈하고 있다는 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민심은 왜 등 돌리나 문 대통령의 국정수행 지지율은 한국갤럽 조사를 기준으로 7주째 하락했다. 7월 3주 지지율은 46%로, 올해 최고점을 찍었던 5월 1주에 견줘 25%포인트 하락했다. 20일 발표된 리얼미터 조사에서는 문 대통령의 직무수행에 대한 부정평가(51.0%)가 긍정평가(44.8%)를 앞질러 ‘데드크로스’ 현상까지 발생했다. 국정 지지율은 ‘조국 사태’가 한창이던 지난해 10월 2주 이후 최저치다. 더불어민주당 지지율도 지난해 10월 이후 가장 낮다.지지율 하락 배경에는 정의기억연대 회계부정 의혹, 인천국제공항공사 정규직 전환 논란 등 지난 4월 총선 뒤 끊이지 않은 여권발 악재가 자리잡고 있다. 특히 최근 급격한 민심 이반은 신뢰를 잃어가는 부동산 정책과 고 박원순 서울시장 성추행 의혹 및 이에 대한 여권의 부적절한 대처 등이 맞물리면서 가속화됐다. 충북 청주시와 서울 반포동에 아파트 2채를 갖고 있던 노영민 청와대 비서실장이 ‘서울 아파트가 아닌 청주 아파트를 처분한다’고 밝힌 것은 최악이었다. 부동산이 삶의 근간이 되는 주거의 문제라는 점 때문에 민심이 더욱 크게 흔들린다는 진단도 나왔다. 안병진 경희대 미래문명원 교수는 “부동산 이슈는 ‘부동산’으로 상징되는 미래의 꿈이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에 여권에 치명적”이라고 말했다.부동산으로 들끓던 민심은 ‘박원순 사태’로 폭발했다. 여권 관계자는 “박 시장이 성추행 의혹을 받아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점 자체도 충격적이지만, 이후 사건을 대하는 여권의 태도가 지지자들마저 등 돌리게 했다”고 말했다. 정치평론가 유창선 박사는 “이해찬 대표의 ‘××자식’ 발언이 상징적인 장면이다. 민심이 어떤 상태인지, 박 시장 성추행 의혹을 바라보는 젊은 세대의 시선이 어떤지에 대해 여권이 감을 잃었다는 것을 드러냈다”고 꼬집었다. 실제 ‘박원순 사태’와 관련해 당의 대응 기조를 정하려 할 때마다 젊은 당직자와 보좌진 그룹과 의원 그룹 간 견해차는 상당했다. 한 의원 보좌관은 “사태 초기부터 아무리 조언을 해도 먹히지 않았다. 의원 대부분이 사태의 심각성을 체감하지 못했던 것”이라고 말했다.전날 최고위원 출마를 선언한 이원욱 의원은 ‘내로남불’식 대처를 지지율 하락의 원인으로 꼽았다. 그는 “인천국제공항공사 사태에 대한 청년층의 분노를 ‘가짜뉴스’ 탓으로 돌리고, 박원순 서울시장의 성추행 의혹 고발사건에 대해 모호한 태도를 보였다. 민주당에 실망한 국민은 공정함을 잃은 것에 실망했고, 내로남불식 태도에 실망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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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권, 돌파구는? 조국·윤미향·박원순 사태를 잇따라 겪은 여권에선 ‘인연과 의리에 이끌리지 말고’ 단호하게 조기 수습에 나서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기류에 힘이 실리고 있다. 박원순 시장의 성추행 의혹과 관련해서도 단호한 입장을 내놓아 민심을 달래고, 개혁 과제 처리에 집중해 지지자들의 마음을 다독여야 한다는 것이다.여권 관계자는 “‘조국 사태’ 때만 해도 ‘검찰개혁’이라는 정책 이슈가 맞물려 있어 버틸 여력이 있었다. 이번 위기는 ‘권력형 성범죄’라는, ‘찬반’으로 나눌 수 없는 이슈에서 비롯된 위기이기 때문에 심각하다. 하루빨리 단호한 대책을 추가로 내놓아야 한다”고 말했다. 당 지도부에 소속된 한 의원도 “당이 발표한 대응책은 은폐 의혹을 받는 서울시에 진상조사를 떠맡기는 모양새다. 더 단호하게 대처해야 국민들의 화가 풀릴 것”이라며 “부동산 문제도 당·정·청 혼선을 하루빨리 정리하고, 개혁 입법을 통해 지지자의 마음을 되돌려야 한다”고 말했다.전문가들은 ‘핵심 지지층’에 의지하고, 그들의 눈치를 살피는 정치 행태를 버려야 한다고 조언했다. 박성민 민컨설팅 대표는 “콘크리트 지지층도 악재가 계속되면 무너진다는 사실을 박근혜 정부가 보여주지 않았느냐”며 “안희정·오거돈·박원순까지 3명의 민주당 소속 자치단체장이 같은 사안으로 물러났는데 정권 차원의 사과가 없다. 이슈를 대하는 태도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유창선 박사는 “여권 내부에 위기경보를 발송하고 민심에 부흥하는 새로운 리더십이 등장해야 한다”며 “부동산은 주무 장관을 교체해서라도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주문했다.김원철 서영지 기자 wonchul@hani.co.kr
김종철 선생은, 김수영 시인의 말을 빌리면 '제 정신을 갖고 산 사람'이었다. 제 정신으로 살기 위해 분투한 사람이었다. 제 정신으로 살기 위해 분투하던 그에게는 근대 산업사회의 앞날이 명확하게 보였다. 2002년에 쓴 '땅의 옹호'라는 글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산업주의 문화는 이러한 겸손의 자세를 조롱하고 비웃으면서 성장해왔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산업인간'은 도덕적, 정신적으로 극히 왜소한 미숙아가 되어버렸다. 산업의 세계에서 만물의 척도는 인간의 한계를 모르는 자기 확대의 욕망이다. 그리하여, 자본과 기술의 힘으로 얼마든지 자연의 제약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교만심이 분별없이 확대되어 왔고, 그 결과로 지금 우리는 스스로의 생존의 발판을 제거하는 데 열중하고 있는, 인류 역사상 가장 난폭하고 어리석은 시대에 살게 된 것이다."
코로나19라는 현재의 전 세계적 위기는 근대 자본주의 문명의 본질에 대한 그의 통찰이 전적으로 옳았음을 웅변한다. 즉 "자본과 기술의 힘으로 얼마든지 자연의 제약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교만심이" "스스로의 생존의 발판을 제거"해 왔음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가 지향했던 것은 공생공락(共生共樂)의 삶이었다.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고, 인간과 인간이 우애롭게 지내며, 각 개인이 내면의 평화를 누리는 그런 삶이었다. 그는 공생공락을 위한 이상적인 사회로 농(農)의 세계와 촌락 자치를 주장했지만 이는 결코 복고 취미가 아니었다. 공생공락을 위한 세계 각지의 여러 움직임들을 끊임없이 탐색하고 연구하면서 이끌어낸 통찰이었다.
신문‧잡지의 칼럼을 모아 2016년 발간한 <발언 1,2>의 머리말에서 그는 "칼럼을 쓰는 동안 매일매일 발간되는 국내외 신문, 뉴스 매체들을 훑어보는 일이 어느덧 내 생활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왜냐하면 '발언'을 위해서는 우선 세상 돌아가는 형편에 주목('경청')하는 게 전제돼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세상사에 대해서 끊임없이 귀를 열어 경청한다는 것은 '발언'이 갖추어야 할 기본적 윤리"이며 "농민, 노동자, 생활인들의 '현장'이 논밭과 공장 혹은 시장인 것처럼, 지식인에게 가장 중요한 '현장'은 뉴스매체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끼니를 거르는 일은 있어도, 신문이나 뉴스매체를 거르고 지나가는 날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보내왔다. 그리하여 일정하게 구독하는 몇몇 국내 신문들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인터넷을 통해서 외국 언론매체들의 주요 기사, 논평들을 읽는 데 골몰하다 보면 오전 몇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가고 만다."
실제로 그는 하루 4시간 이상 인터넷을 들여다보고, 자신이 한국에서 최초 또는 유일한 정기구독자인 외국 간행물이 여럿 된다고 자랑(?) 삼아 얘기한 적이 있는데, 이는 그가 탁월한 생태사상가인 동시에 뛰어난 저널리스트였다는 점을 말해준다. 이처럼 폭넓은 탐색과 치열한 고민 끝에 지역화폐, 기본소득, 시민의회에 이르기까지 에콜로지와 민주주의에 관한 현실적 대안들을 제시했다. 나아가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한국 최초의 녹색당 창립에 참여하는 등 그는 근래 보기 드문 전 방위적 지식인이자 실천적 사상가였다.
사실 김종철 선생이 걸은 길은 외로운 길이었다. 하지만 뜻을 같이하는 벗들이 있었다. 1999년 펴낸 <간디의 물레> 머리말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난 8년간 <녹색평론>을 엮어내는 일은 무엇보다 내게는 개인적인 구원이었다. 아마 그 일을 하지 않았다면 나는 미치거나 깊이 병들었을지 모른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녹색평론>의 편집에 열중하는 과정에서 나와 비슷한 당혹감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이 나라 안팎에 걸쳐 의의로 많다는 사실을 발견하였고, 그러한 사람들과 깊은 유대 또는 우정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러한 유대감이나 우정을 통한 새로운 정치적 공동체의 형성에 새로운 삶의 희망이 달려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또한 2008년 펴낸 <땅의 옹호>에서는 2004년 대학 교수직을 떠난 이후 4년간 계속된 '이반 일리치 읽기모임'을 통해 "대학생활에서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진정한 '우정'의 의미를 음미할 수 있게 되었다"면서 "'우정'이야말로 지금 세계를 황폐화하는 자본과 국가의 논리에 맞설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인지도 모른다"고 토로했다. "아무리 암울한 시대일지라도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데 필수적인 '희망'을 제공하는 원천이 바로 '우정'"이라는 것이다.
코로나19로 자본주의 문명이 막바지에 이른 지금, 그 어느 때보다 김종철의 사상과 통찰이 절실한 이때, 그는 돌연 세상을 떠났다. 이제 살아남은 자의 몫은 그가 말한 우정의 의미를 되새기며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사회, 새로운 삶의 원리는 무엇이며 어떻게 이를 실천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일일 것이다.
김종철 선생의 저서 <간디의 물레-에콜로지와 문화에 관한 에세이> <땅의 옹호-共生共樂의 삶의 위하여> <발언 1,2>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에콜로지와 민주주의에 관한 에세이> 중에서 9편의 글을 추려 소개한다. 편집자
연재 순서
1. '시대를 바꾸고자 한 예언자이자 실천적 사상가, 김종철' (박승옥 글)
2. 왜 녹색평론을 시작하였는가(1995년, <간디의 물레-에콜로지와 문화에 관한 에세이>)
3. 거짓언어와 '성장'논리 속에서-나의 한국 현대사(2012년, <발언 1>)
4. 땅의 옹호(2002년, <땅의 옹호-共生共樂의 삶의 위하여>)
5. 필요한 것은 '진보'가 아니라 開眼이다(2006년, <땅의 옹호>)
6. 지역통화-삶과 공동체를 살리는 기술(1998년, <간디의 물레>)
7.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 책머리에(2019년)
8. 협동적 자치의 공동체를 향하여(2008년,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
9. 촛불시위와 시민권력(2017년,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
10. 태어남과 삶과 죽음의 순환(1998년, <간디의 물레>)
2008년 8월 3일 모스크바 근교에서 90세를 일기로 타계한 작가 솔제니친은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정신의 하나였다. 한때 한국의 독자들 사이에서도 그는 상당한 인기가 있어서 적지 않은 작품이 번역되어 읽혔다. 많은 사람들에게 솔제니친은 전체주의체제하에서 온갖 시련을 겪으면서도 그 체제의 실상을 용기 있게 폭로하고, 꺾이지 않는 인간정신을 증언하기 위해서 비타협적으로 싸운 불굴의 이름으로 기억되어왔다.
그러나 말할 것도 없이, 솔제니친은 단순한 반공 작가가 아니었다. 1974년 <수용소 군도>가 국외에서 발간된 직후, 소련당국에 의해 강제적으로 추방된 뒤 미국에서 20년에 걸친 망명생활을 하는 동안 그가 일관되게 보여준 반서구적(反西歐的) 언동은 물론이고, 실제 작품들을 읽어보면 그 점은 분명하다. 예를 들어, 비교적 초기에 쓴 중편소설 〈마트료나의 집〉이 특히 그렇다.
혁명 후 러시아 오지(奧地) 풀뿌리 농민들의 삶에 관한 이 뛰어나게 감동적인 이야기는 솔제니친이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를 거쳐 전승되어온 러시아의 심오한 정신적·사상적 맥을 정통적으로 계승하고 있는 작가임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스탈린이 강제적으로 추진한 집단농장화로 인해 러시아의 옛 농민공동체가 어떻게 철저히 파괴되었는가를 암시하면서, 농민들이 집단농장의 일개 타율적인 노동자로 전락하는 과정에서 농민으로서의 심리와 정서는 말할 것도 없고 인간성마저 잃어가는 비참한 상황을 묘사한다. 하지만 모두가 모두에 대해서 사나운 늑대가 되어가는 이 상황에서도, 러시아 사회의 오래된 ‘거룩한 바보’의 전통, 즉 자기주장이 아니라 자기희생을 습관적으로 실천하는 철저히 겸허한 정신이 끝끝내 살아 있음을 작가는 발견한다. 솔제니친에 의하면, 아무리 타락한 세상이지만 아직 세상이 완전히 무너지지 않고 있는 것은 자기희생의 습관이 몸에 밴 이러한 '거룩한 바보'의 존재 때문이다. 작가는 작품 속에서 가난하고 외로운 데다가 늙고 병든 이 '바보'에게 ‘마트료나’라는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그녀가 만물을 품 안에 기르는 어머니―대지(大地)를 표상하는 존재임을 암시하고 있다('마트료나'는 '마티'에서 왔고, 러시아어에서 ‘마티’는 어머니라는 뜻이다).
사실, 솔제니친의 저작 속에서 러시아 농민이나 농민공동체에 대한 언급이 그렇게 많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때때로 농민에 관한 일을 묘사하거나 언급할 때 그의 어조는 매우 날카롭고 강렬하다. 예를 들어, <수용소 군도>는 혁명의 과정과 혁명 후 소련에서 일어난 수많은 부조리, 잔혹함, 비극적 사건들을 엄청난 치밀성과 정확성을 가지고 기록한 방대한 기록이다. 그렇게 기록된 사건의 하나로, 1932년 모스크바 근교 집단농장에서 다섯 명의 농민이 스탈린의 명령으로 처형당한 일이 있었다. 그 이유는 기막힌 것이었다. 그날 집단농장에서 다른 농민들과 함께 풀베기 공동작업을 끝낸 뒤에 이들 다섯 명이 농장에 남아서 자기들이 개인적으로 키우는 말에게 먹이려고 따로 풀을 베어서 갖고 간 사실이 발각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솔제니친이 이 사건을 기록하면서 드러내는 극도의 분노이다. "만일 스탈린이 이 다섯 농민 이외에 단 한 사람도 죽이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 사건만으로 그는 극형에 처해졌어야 마땅하다"라고 그는 쓰고 있는 것이다.
스탈린에 의해 저질러진 반인륜적 범죄가 한둘이 아닌데도, 특히 이 농민들의 죽음에 관련해서 솔제니친이 이토록 강경한 태도를 드러낸 것은 어째서인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 빠뜨릴 수 없는 것은 아마도 러시아 옛 농민공동체에 대한 그의 본능적인 애정이었을 것이다. 솔제니친은 특히 혁명 전까지 계속되었던 농촌의 협동적 자치조직, 즉 '젬스트보'에 대해 관심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서구 지식인들이 흔히 들먹이는 솔제니친의 이른바 '슬라브주의'라는 것도 실은 이러한 자치적 협동성의 생활기반 위에서 생을 영위하던 옛 러시아 농민의 세계를 옹호하고, 가능하다면 그것을 부활시키고 싶다는 갈망에 깊이 관계되어 있었던 게 아닐까? 실제로 이와 같은 농민공동체는 따져보면 모든 인간다운 삶의 토대 중의 토대라고 할 수 있다. 개인으로서나 작가로서 솔제니친의 위대성은 그가 평생 유지했던 강인한 정신적 에너지와 무관한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것인데, 그 에너지는 바로 이 농민적 세계에 대한 억누를 수 없는 향수나 갈망에 의해서 끊임없이 재충전되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여기서 집단농장의 풀을 개인적 용도를 위해서 베어 갔다고 해서 사형을 당한 농민들의 이야기에서 좀더 생각해볼 것이 있다. 즉, 그 이야기는 무엇보다 소비에트사회주의체제의 본질을 짐작할 수 있는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해주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는 것이다. 실제로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소비에트체제는 인간사회의 오랜 관습을 지나치게 가볍게 여기고, 심지어 인간성에 반하는 폭력을 무자비하게 휘둘렀던 것이다. 집단농장만 하더라도 그렇다. 기본적으로 집단농장화는 농민의 심리와 정서를 아예 무시하는 폭거였다. 그뿐만 아니라, 생산력이라는 견지에서도 소농 중심 경제가 우월하다는 유력한 학문적 증언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견해를 표명한 당대의 저명한 농업경제학자 알렉산드르 차야노프 등의 지식인은 철저한 탄압을 받았다. 그리하여 1928년에서 1933년까지 강행된 집단농장화의 직접적인 결과는 사회적 갈등과 비극적인 대기근과 그에 따른 엄청난 인명 손상이었고, 그 궁극적인 결과는 소비에트사회주의 자체의 붕괴였다.
물론 소비에트사회주의가 실패한 것은 스탈린의 폭압통치에 전적인 책임이 있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무엇보다 그와 같은 압제체제의 근간에는 사회주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기본적 인식에 있어서의 혼란이 있었던 것이다. 초기 소비에트의 이상이 무엇이었든, 그것은 결국 산업화와 생산력 제고를 위한 효율적인 시스템으로 환원되어버렸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요체가 생산수단의 국유화였다. 그 결과 농촌은 단지 도시와 공장에 식량과 원료를 공급하는 생산기지로 전락하고, 공동체는 파괴되고, 농민들은 자기 땅에서 유리된 채 집단농장의 한갓 노동기계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생산수단을 국유화한다고 해서 생산력 경쟁에서 사회주의가 자본주의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뿐만 아니라, 사회주의가 일차적으로 효과적인 산업화 혹은 경제성장의 도구로 인식되는 순간, 국가가 독점적인 자본가가 되고 인민은 전부 프롤레타리아로 전락하고 마는 기형적인 사회주의체제의 출현은 거의 필연적이라고 할 수 있다.
▲ 김종철 <녹색평론> 편집인 겸 발행인 ⓒ프레시안
근대적 발전사관의 덫
돌이켜보면, 현대 사회주의운동을 사실상 독점적으로 주도해왔던 맑스주의 자체 속에 이미 사회주의의 기형적인 발전을 예고하는 논리가 내포되어 있었다. 우선, 사회주의가 성립하려면 먼저 물질적 생산력을 비약적으로 높여주는 자본주의 문명의 발달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맑스 자신의 논리가 그러했다. 한나 아렌트가 지적한 바 있듯이, 이러한 논리에 이미 혁명이 “자유가 아니라 물질적 풍요함”을 겨냥하는 운동으로 왜소화되는 결정적인 요인이 있었다. 나아가서, 여기에 내포된 역사 발전에 대한 일원론적이며 단계론적인 관점은 결과적으로 서구 제국주의에 의한 비서구 민중공동체에 대한 공격과 침탈을 정당화하는 매우 위험한 논리로 이어지고 만다.
1857년과 58년에 걸쳐 일어났던 인도 민중의 대대적인 봉기에 대해서 영국 식민당국이 무자비한 탄압으로 맞섰을 때, 맑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는 (인도의) 이 목가적인 마을공동체들이 '동양적 전제주의'의 견고한 토대가 되어왔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 문제는 이러한 아시아의 사회 상태에 근원적인 혁명이 일어나지 않고 인류가 그 운명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영국의 죄악이 무엇이건, 영국은 그런 혁명을 위한 역사의 무의식적인 도구였다.
이렇게 '문명화'라는 개념으로 제국주의와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맑스의 논리는 "아시아의 '근대화'를 위한 일이었기 때문에 일본에는 아무런 전쟁책임도, 식민지 지배에 대한 책임도 없다"는 오늘날 일본 보수우파의 논리나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를 미화하는 한국의 뉴라이트 그룹의 논리와 본질적으로 일치한다. 그렇게 해서 비록 한정된 논리에서일지라도 오늘날 한일 우익 논객들이 뜻밖에도 맑스의 충실한 제자가 되어 있는 기이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결국 핵심은 '근대'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점이다. 맑스를 단순히 근대주의자라고 하는 것은 어폐가 있는 얘기가 되겠지만, 비록 잠정적으로나마 맑스에게도 '자본주의 근대'는 역사 발전의 불가결한 단계로서 긍정하고 옹호해야 할 대상이었다. 그 '근대'를 통해서만 사회주의가 성립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근대'를 허용해야 할 잠정적인 기간이 과연 얼마 동안이냐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본주의 근대문명이 과연 어떤 수준까지 발전해야 사회주의혁명이 가능한가 하는 것이다. 이것을 알려줄 객관적인 척도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맑스는 역사법칙에 의해서 언젠가는 사회주의혁명이 일어날 것이라고만 말했다. 이렇게 되면 '과학적 사회주의'가 그토록 강조한 '과학'과는 상관없이, 혁명의 때가 무르익었음을 판단하는 것은 전적으로 주관적인 행위일 수밖에 없게 된다.
이 맥락에서 또 희극적인 일이 발생할 수 있다. 지금 오키나와(沖繩)에서 평화운동에 헌신하고 있는 정치사상가 더글러스 러미스는 어떤 글에서 자신이 아는 일본의 한 젊은 맑스주의 운동가에 관한 일화를 들려주고 있다. 그 젊은이는 일본 자본주의가 혁명이 일어나기에는 아직 미숙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혁명적 수준까지 자본주의가 도달하는 것을 돕기 위해서" 지금까지 하던 운동을 접고, 대기업으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이것은 논리적으로는 흠잡을 데 없는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이런 터무니없는 희극들이 발생하는 것은 서구 자본주의적 산업화와 경제성장에 의해서만 문명생활도 가능하고, 더 높은 단계로의 인간해방이 가능하다고 믿어온 뿌리 깊은 ‘근대적 미신’ 때문이다. 실제로 인간생존의 궁극적 테두리인 우주와 자연은 순환의 법칙에 의해서 돌아갈 뿐인데도, 서구 근대문명은 끊임없이 자기중심적인 욕망을 내세워 직선적인 진보를 끝없이 추구·확대해왔고, 그 과정에서 생태적·사회적·인간적 한계는 계속해서 무시되어왔다. 근대문명이란, 간단히 말해서, 재생 순환적인 태양에너지 체계의 근본적인 제약을 뛰어넘어 장구한 세월 동안 땅속 깊숙이 묻혀 있던 석탄, 석유, 천연가스, 우라늄 및 기타 지하자원을 채굴하여 마구잡이로 사용하자는 지극히 근시안적인 발상에 근거하고 있는 문명이다. 그러니까 이런 종류의 문명이 영속할 수 없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옛날 도쿠가와(德川)막부 말기 개국 초에 일본에 와 있던 영국 공사가 당시 일본의 석탄 생산이 전근대적이어서 일본에 기항하는 영국의 선박에 원활한 연료공급이 되지 않고 있는 것을 답답하게 생각한 나머지 막부의 관리에게 근대적인 석탄 채굴 기술을 제공하겠다고 제의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막부의 담당 관리는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즉, "일본의 석탄은 우리 세대에만 쓰라고 있는 게 아닙니다." 이 말은 전형적인 '비근대인'의 세계관을 명료하게 드러내고 있다.
지금 우리가 직면한 생태적 위기는 단순히 자원과 에너지를 낭비적으로 소비한 결과라고 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세계관의 문제, 세계인식의 문제이다. 무엇이 정말 좋은 삶이고, 인간다운 삶인가, 혹은 어떤 사회가 진실로 선진사회인가 하는 것에 대한 기준이 오로지 서구 근대적 발전사관에 의거해 있을 때, 위기상황을 근본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사실상 없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맑스주의를 포함한 사회주의운동 세력 대부분이 지금까지 파행을 거듭해온 것도 결국 이러한 발전사관의 덫에 걸려온 탓이라고 할 수 있다.
란다우어의 '사회주의'
지금 우리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글로벌 자본주의의 지배에 대한 대안이 없다는 통설에 대부분 굴복한 채 나날을 보내고 있다. ‘대안이 없다’는 구호 밑에 강화되어온 것은 히틀러와 스탈린의 것보다 어쩌면 더 지독한 전체주의체제라고 할 수 있다. 감세, 노동유연화, 규제철폐, 민영화, 자유무역 등등, 그럴싸한 언어유희 밑에서 실제로 발생하는 것은 갈수록 벌어지는 사회적 격차, 부와 권력의 극심한 편중, 토지와 물을 포함한 공공재의 상품화, 국가기구의 사유화, 그리고 걷잡을 수 없이 심화되는 환경파괴이다. 지리학자 데이비드 하비가 "강탈에 의한 자본축적"이라고 부를 만큼 거의 노골적인 형태로 진행되는 이 수탈 구조를 우리는 과연 언제까지 허용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정말 이 시점에 ‘대안’이 없다는 게 진실일까.
그러나, 깊이 생각해볼 때, '대안이 없다'는 논리에 굴복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물질적 풍요와 계속적인 경제성장이 인간다운 삶의 필수적인 전제조건이라는 고식적인 관점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만일 우리가 용기 있게 이 상투적인 관점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사실 '대안'은 얼마든지 있다고 할 수 있다. 인류사회는 장구한 세월 동안 공동체의 호혜적 관계망을 토대로 다양한 상호부조의 경제를 경험해왔고, 그것은 아직도 드러나거나 드러나지 않은 형태로 수많은 사람들의 생존·생활을 떠받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산업화된 세계에서 우리들은 현금이 없으면 죽을 수밖에 없다는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상호부조의 경제가 붕괴된 상황에서 이 두려움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필요한 것은 이 상호부조의 경제를 시급히 복구하려는 노력이지, 상황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온 글로벌 자본주의시스템에 대한 계속적인 굴종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해서는 우리에게 아무런 활로가 열리지 않을 것임은 자명한 일이다.
사람들은 '상호부조의 경제'라는 개념에서 대뜸 '가난'을 연상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상호부조의 경제란 기본적으로 자원과 에너지를 낭비적으로 사용할 것을 강요하는 성장경제시스템의 바깥에 있는 경제이다. 따라서 이른바 생활수준의 저하는 어느 정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하여 '가난'은 회피할 게 아니라, 우리가 적극적으로 껴안아야 할 미덕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아나키스트 철학자 프루동에 의하면, 정상적인 인간생활은 원래 가난한 생활이었다. 중요한 것은 '가난'을 견딜 만하게 하고, 나아가서는 '가난'을 삶의 축복이 되게 하는 사회적 토대, 즉 공생공락의 네트워크를 확보하는 일이다.
구스타브 란다우어는 유태계 독일인으로 20세기 초 혁명과 반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치열한 삶을 살았던 뛰어난 문예비평가, 사상가, 평화운동가였다. 그는 자신이 신봉하는 ‘사회주의’의 이상을 위해서 헌신적인 생애를 살다가 1차 대전 직후 짧은 순간 존립했던 바이에른 소비에트공화국 혁명정부의 문화 담당 각료로 활동하던 중 1919년 49세의 나이로 반동세력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란다우어는 '사회주의'를 자본주의의 모순에 의해 언젠가 필연적으로 도래할 미래로 생각하지도 않았고, '진보'를 믿지도 않았으며, 생산수단의 국유화를 찬성하지도 않았다. 그가 생각한 '사회주의'는 철저히 자발적인 상호부조와 협동적 공동체들의 연합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사회주의의 기초는 생산력의 발전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인간의 사회적 관계였다. 그는 자본주의국가가 혁명에 의해서 전복될 수 있으리라고 믿지 않았고, 새로운 사회공동체가 국가권력의 장악을 통해서 실현될 수 있을 것으로 믿지도 않았다. 그에게 국가는 "하나의 조건, 어떤 종류의 인간관계이자 행동양태"를 의미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과는 "다른 종류의 인간관계를 형성함으로써, 즉 우리가 서로서로에 대하여 종래의 방식과 다르게 행동함으로써" 지금 당장 국가의 지배를 벗어나거나 심지어 국가를 폐기할 수도 있다는 게 그의 신념이었다. 게다가 그는 생애의 후반기로 갈수록 땅과 농촌공동체를 무엇보다 중요시하게 되었다. 그는 토지를 떠난 인민은 자본가에 맞설 수 있는 독립성이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산업노동자들이 도시의 공장으로부터 퇴각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하였다. 그들이 만일 '협동적 사회주의' 사회의 일원이 되고자 한다면 대도시를 떠나 농촌공동체에서 농업과 소규모 공업의 결합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 란다우어의 생각이었다.
구스타브 란다우어의 '사회주의' 사상은 주류 사회주의 사상들에 밀려나 오랫동안 잊혀졌다. 그러나 '사회주의'란 무엇보다 새로운 인간관계를 의미한다는 그의 명료한 메시지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지금 우리들에게 요긴한 지침이 될 수 있다. ‘경제’라는 덫에 걸려 사고력이 정지되어 있는 오늘의 우리들에게 그의 메시지는 강력한 충격이 아닐 수 없다. 란다우어와 함께 우리는 우리 각자가 새로운 인간관계를 통해서, 이웃들과 더불어 자발적인 협동체를 형성함으로써 '지금 여기에서' 당장에 자유인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 필요가 있다.(2008년)
출처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에콜로지와 민주주의에 관한 에세이>, 녹색평론사, 2019년, 74~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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