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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에서 첩자, 남에선 간첩으로 불린 사나이

[한국전쟁 70주년 특집 - 월남민] <아버지의 이메일> 홍재희 감독이 말하는 '아버지의 전쟁'

20.06.25 07:14l최종 업데이트 20.06.25 07:14l
1950년 6월 25일. 식민지시대가 끝난 지 5년도 안돼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했다. '한국전쟁' 혹은 '6.25전쟁'은 이후 한국사회의 모든 구조를 주조했다. 그 전쟁이 발발한 지 무려 70년이 흘렀다. <오마이뉴스>는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아 전쟁의 또다른 상흔인 화교부대병 2세와 소년병, 월남민 2세의 목소리를 들어봤다.   [편집자말]
 연출자 월남민 2세 홍재희 감독" class="photo_boder" style="border: 1px solid rgb(153, 153, 153); display: block; text-align: center; max-width: 600px; width: 600px;">
▲  월남한 아버지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아버지의 이메일> 연출자 월남민 2세 홍재희 감독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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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북조선을 떠나고 싶었다'고 했다. 친할아버지가 남쪽에 내려갔다는 이유로 아버지는 차별에 시달렸다. 당시 북한에서는 학교 수업을 마치고 학생들을 모아 자아비판을 시켰다. 친할아버지와 큰아버지가 남한에 있던 아버지는 모든 비판의 대상이었다. 아이들은 아버지를 향해 '남조선의 첩자'라며 손가락질해댔다. 아버지에게 북조선은 희망이 없는 곳이었다.

아버지는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에게 '꼭 데리러 오겠다'라고 약속했다. 지킬 수 없을 약속인지도 모르고 그렇게 말했다. 열네 살의 아버지는 세 번의 시도 끝에 38선을 넘어 남한 땅을 밟았다. 황해도 황주에서 해주, 개성을 거쳐 문산에 도착한 것이다.  

1948년, 드디어 기회의 땅, 희망의 땅, 배움의 땅에 다다른 아버지는 친할아버지가 있는 인천으로 향했다. 섣부른 꿈이었을까? 2년 뒤,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아버지는 "지긋지긋한 인민군을 2년 만에 또 만나게 되니 억장이 무너졌다"라고 했다.

홍재희 감독은 다큐멘터리 <아버지의 이메일>(2014년)을 통해 이러한 아버지의 삶을 담담히 쫓았다. 한때 아버지가 죽기를 바랐던 딸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 전 1년 동안 보낸 43통의 이메일을 하나하나 되새겼다. 1934년 황해도 황주군 출생의 홍성섭. 아버지의 삶에는 한국전쟁과 베트남 파견 노동자, 중동건설 노동자로 지낸 시대가 아프게 새겨져 있었다. 

해외이민을 꿈꾸다
   

 연출자 월남민 2세 홍재희 감독이 보관 중인 아버지의 과거 사진들." class="photo_boder" style="border: 1px solid rgb(153, 153, 153); display: block; text-align: center; max-width: 600px; width: 600px;">
▲  월남한 아버지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아버지의 이메일> 연출자 월남민 2세 홍재희 감독이 보관 중인 아버지의 과거 사진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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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재희 감독 아버지 홍재희 감독 아버지인 홍성섭씨가 베트남에서 일하던 시절. 아버지는 베트남에서 크레인 기술자로 일했다.
▲ 홍재희 감독 아버지 홍재희 감독 아버지인 홍성섭씨가 베트남에서 일하던 시절. 아버지는 베트남에서 크레인 기술자로 일했다.
ⓒ 홍재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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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재희 감독의 아버지 홍성섭씨가 사우디에서 일했던 시절. 홍 감독의 아버지는 중동건설 노동자로 일했다. 아버지는 늘 이민을 꿈꿨지만, 갈 수 없었다.
▲ 홍재희 감독의 아버지 홍성섭씨가 사우디에서 일했던 시절. 홍 감독의 아버지는 중동건설 노동자로 일했다. 아버지는 늘 이민을 꿈꿨지만, 갈 수 없었다.
ⓒ 홍재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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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6.25나 베트남전쟁에 군인으로 참전한 적은 없어요. 하지만 6.25로 황폐화된 땅에서 모든 걸 잃고, 베트남전쟁에서 크레인 기술자로 베트남에 살았죠. 전쟁을 피해갔다고 할 수 없는 삶이죠."  전쟁의 상흔은 참전용사에게만 있는 게 아니다. 아버지가 술을 마시면 홍 감독과 언니·동생을 꿇어 앉히고 바짓가랑이를 올려 상처를 보였다. 아버지는 "총탄을 맞고도 끝끝내 38선을 넘어 내가 여기까지 왔다"라면서 훈장처럼 상처를 내보이며 일장연설을 했다. 홍 감독의 눈에는 38선을 넘으며 꿨던 꿈을 이루지 못한 자의 울부짖음으로 들렸다.


"6.25만 아니었다면, 조금은 달랐을지도 모르죠. 전쟁 이후 모든 삶이 무너졌으니까요. 하루아침에 판잣집에 살게 됐고, 모든 걸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죠. 아버지는 그게 한이 됐을 거예요. 빨갱이를 피해 왔는데, 또 빨갱이를 만났다고 생각하니까 이 나라를 떠나고 싶어 했어요."

실향민이 남한 땅에서 발붙이고 살 방법은 '경찰' '군인'밖에 없어 보였다. 간첩이 아니라는 증거, 인민군을 증오한다는 것을 증명하듯 남한으로 내려온 아버지의 친척들은 모두 경찰이거나 군인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자유로운 사람이고 싶어했다. 한국전쟁을 겪고 베트남전쟁 당시 기술자로 베트남에 살았던 아버지는 이민을 꿈꿨다.

"아버지는 북한과 남한 땅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사람이었죠. 북한에서는 첩자 소리를 들었고, 남한에서는 간첩이라는 수군거림을 들어야 했으니까요. 누구보다 빨갱이에 치를 떨었지만, 빨갱이라는 낙인이 떨어지지 않았던 거죠. 아버지가 자유로울 곳, 손가락질받지 않을 곳은 외국밖에 없다고 생각했겠죠. 아버지는 이민을 꿈꿨어요."

하지만 아버지의 꿈은 다시 '빨갱이'라는 낙인에 무너졌다. 아버지의 비자는 번번이 거절당했다. 베트남에서는 브라질로 이민을 가려고 했지만 안됐다. 미국 이민도 실패했다. 아버지는 마흔셋에 사우디아라비아 건설 현장으로 일하러 갔고, 오스트레일리아 이민을 알아봤지만 이것도 이뤄지지 않았다.

"아버지는 나중에야 그 이유를 알게 됐어요. 처남들이 보도연맹사건에 연루된 '빨갱이'라 여권도, 비자도 나오지 않았던 거죠. 아버지는 이룰 수 없는 꿈에 실망했고 낙담했어요. 그렇게 매일 술을 마셨어요."

신청하지 않은 이산가족찾기
   
 연출자 월남민 2세 홍재희 감독이 아버지의 과거 사진을 들고 있다. " class="photo_boder" style="border: 1px solid rgb(153, 153, 153); display: block; text-align: center; max-width: 600px; width: 600px;">
▲  월남한 아버지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아버지의 이메일> 연출자 월남민 2세 홍재희 감독이 아버지의 과거 사진을 들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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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의 꿈이 무너지자 술과 폭력의 강도는 점점 세졌다. 얼굴에 가지 크기의 멍이 든 어머니를 마주해야 했고, 중학생이 된 남동생은 아버지를 말리며 몸싸움을 하기도 했다. 1990년대에도 2000년대에도 아버지는 1950년대를 살았다. 아버지는 한국전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버지는 전쟁의 2차 피해자였죠.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은 누구든 전쟁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잖아요. 총탄을 마주한 사람은 돌아와서 제대로 살기 힘들어요. 사회 전체가 6.25라는 총탄을 맞았어요. 그런데 그걸 어떻게 잊겠어요. 아버지는 서운하고 억울했을 거에요. 자기가 열심히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시대는 그렇지 않았으니까요. 남북 편을 나누고 어디서 왔는지 사람을 가르고 그렇게 차별했으니까요."

술을 마시며 점점 나락으로 떨어지는 아버지에게서 홍 감독은 전쟁의 상흔을 봤다. 아버지는 왜 술에 의지해야 했을까. 왜 화를 냈을까. 왜 술을 마시지 않을 땐 말이 없을까. 왜 한 줌도 안되는 엄마의 뺨을 때려야 했을까.

하지만 아버지의 분풀이를 온몸으로 겪은 어머니의 원망은 한국전쟁으로 향했다. 어머니는 홍 감독에게 "6.25로 집이 망했고 오빠들이 빨갱이로 몰렸다, 집이 망하지만 않았어도 아버지랑 선보고 결혼할 일 없었다"라고 말했다. 아버지를 만난 걸 한국전쟁 탓으로 돌렸다. 알코올중독인 아버지랑 사는 것도, 가정 폭력에 시달리는 것도, 모두 한국전쟁 때문이었다.
 
홍재희 감독 가족사진 홍재희 감독 가족사진. 아버지의 품에 안겨있는 딸이 홍 감독.
▲ 홍재희 감독 가족사진 홍재희 감독 가족사진. 아버지의 품에 안겨있는 딸이 홍 감독.
ⓒ 홍재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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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말할 필요도 없이 이상한 논리죠. 그런데요, 어머니는 정말 그렇게 믿었어요. 모든 게 전쟁탓이다, 다 6.25 때문이라고요. 한 때는 그런 어머니랑 싸웠죠. 무슨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한다고요. 그런데 지금은 조금 이해해요. 부모님 세대는 자신의 삶과 인생이 역사 때문에 뒤틀린 세대예요."

2008년 아버지가 세상을 뜨고 홍 감독은 꿈속에서 아버지를 만났다. 꿈속에서 아버지는 살아서는 볼 수 없었던 미소를 지어 보였다. 환한 웃음이었다. 홍 감독은 그곳이 북한 땅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드디어 당신의 어머니를 만났구나, 두고 온 동생들을 만나 한풀이를 했구나' 싶었다.

"어렸을 때 KBS에서 이산가족찾기를 했잖아요. 그때 아빠는 종일 그걸 봤어요. 여의도공원을 돌아다니기도 했고요. 하지만 이산가족찾기 신청은 죽어도 하지 않았어요. 다 죽었을 거라고 스스로 체념했죠. 금강산관광 때도 모시고 가려 했는데, 아버지가 싫다고 했어요. 빨갱이가 지배하고 있는 한 그 땅은 밟지 않겠다는 거였어요. 아버지의 머릿속은 여전히 6.25 중이었던 거죠."

지긋지긋한 '빨갱이 프레임' 벗어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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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남한 아버지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아버지의 이메일> 연출자 월남민 2세 홍재희 감독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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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재희 감독은 한국사회 곳곳에 6.25의 흔적이 있다고 본다. 성조기를 들고 광화문을 에워쌌던 어른들도, 북한이라는 말에 거품을 무는 사람들에게도, 한국전쟁의 잔상이 남아 있다고 생각한다.

"아직도 6.25를 겪어내는 게 개인의 잘못일까요. 우리는 한 번도 전쟁을 제대로 직면하고 기억하며 떠나보낸 적이 없어요. 우리 사회가 그럴 시간을 주지 않았어요. 항상 빠르게 성장해야 했고, 누구보다 앞서서 부지런 해야 했으니까요. 200~300년에 걸쳐 전쟁을 돌아보고 반성하고 치유했던 기억이 우리에게는 없어요. 전쟁의 상처에 시달리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에요."

홍 감독은 "더 열심히 더 꾸준히 전쟁을 기억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홍 감독의 가족처럼 한국전쟁으로 인한 상처를 가족이 고스란히 짊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회가 적극적으로 상처를 직면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는 "개인의 이야기를 할 수 없는 사회는 자꾸 병들 수밖에 없어요, 태극기를 들고 보수집회에 참석하는 어르신들의 말을 우리가 제대로 듣기나 하나요?"라고 반문했다. 그리고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지긋지긋한 빨갱이 프레임에서 벗어나려면, 전쟁을 겪은 사람들의 이야기, 상처가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더 열심히 들어야 해요."
 
 연출자 월남민 2세 홍재희 감독이 보관 중인 아버지의 과거 사진들." class="photo_boder" style="border: 1px solid rgb(153, 153, 153); display: block; text-align: center; max-width: 600px; width: 600px;">
▲  월남한 아버지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아버지의 이메일> 연출자 월남민 2세 홍재희 감독이 보관 중인 아버지의 과거 사진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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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라 단체' 박상학, 취재진 폭행하고 벽돌 던져...경찰관엔 가스총 쏴

여성PD 머리채 잡고, 취재진에 벽돌 던져...경찰 수사 착수

SBS에 따르면 SBS <모닝와이드> 팀은 지난 23일 밤 대북 전단 기습 살포 경위와 향후 계획 등을 묻기 위해 자유북한운동연합 박상학 대표 집을 찾아갔다. 당시 박상학 대표는 집 앞에서 취재진을 발견한 후 다짜고짜 취재진을 폭행했다.

 

카메라를 든 취재진에 주먹질을 했다. 주먹을 맞은 한 취재진은 입 밖과 입 속이 찢어지는 부상을 당했다. 또한 욕설을 하면서 여성 PD의 머리채를 잡아 당기기도 했다. 벽돌을 취재진에게 던지는 위험천만한 행동까지 나왔다.

 

SBS는 "폭행당한 취재진은 모두 4명, 한 명은 뇌진탕 증세로 2주 진단을 받았고, 부상이 심한 두 명은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고

박 대표의 적나라한 폭행 장면들은 카메라에 고스란히 찍혔다.

 

심지어 박 대표는 폭행을 말리는 경찰관을 향해 소지하고 있던 가스총을 분사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피해자 조사 이후 박 대표를 상대로 정확한 범행 동기와 경위를 확인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SBS 취재진을 폭행하고 있는 박상학 대표. 박 대표의 끔찍한 폭행 장면은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겼다. ⓒSBS 화면 갈무리

이명선

방송국과 길거리에서 아나운서로 일하다, 지금은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 기자' 명함 들고 다닙니다.

이명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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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0062507292006229 프레시안(http://www.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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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김영철, "북남관계 전망 南 태도와 행동에 달려"

  • 분류
    아하~
  • 등록일
    2020/06/25 09:51
  • 수정일
    2020/06/25 09:51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北 김영철, "북남관계 전망 南 태도와 행동에 달려"(전문)
이승현 기자  |  shlee@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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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6.25  07:3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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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년 2월 평양동계올림픽 폐막식 참석차 방남한 김영철 부위원장. [통일뉴스 자료사진]

"조선반도의 군사적 긴장완화는 일방의 자제와 선의적인 행동의 결과만으로는 실현될 수 없으며 호상(상호)존중과 신뢰에 기초한 쌍방의 노력과 인내에 의해서만 비로소 지켜지고 담보될 수 있을 것이다."

김정은 위원장의 '대남 군사행동계획 보류' 지시 이후 하루 만인 24일 저녁 김영철 조선노동당 부위원장은 담화를 발표해 "남조선 당국의 차후 태도와 행동 여하에 따라 북남관계 전망에 대하여 점쳐볼 수"있다며 이같이 밝혔다.

'남조선군부에 주의를 환기시킨다'는 제목의 이날 담화는 형식적으로는 같은 날 정경두 국방부장관이 국회에 출석해 '대남 군사행동 보류가 아니라 철회되어야 한다'는 발언에 대한 경고를 담고 있지만, 격화일로를 걷던 남북관계를 끝내고 긴장 완화 국면으로 전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김영철 부위원장은 정경두 장관의 국회 발언에 대해 "남조선 당국의 차후 태도와 행동 여하에 따라 북남관계 전망에 대하여 점쳐볼 수 있는 이 시점에서 남조선 '국방부' 장관이 기회를 틈타 체면을 세우는데 급급하며 불필요한 허세성 목소리를 내는 경박하고 우매한 행동을 한데 대하여 대단히 큰 유감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북의 대남 군사행동계획은 '보류'가 아니라 '철회'되어야 한다고 한 정 장관의 언급에 대해서는 '도가 넘는 실언', '매우 경박한 처사'라고 하면서, "위협적으로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북)의 '보류'가 '재고'로 될 때에는 재미없을 것"이라고 비꼬기도 했다.

남조선군부에 주의를 환기시킨다 (전문)
--김영철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담화--
 
 
보도된바와 같이 6월 23일에 소집된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제7기 제5차회의 예비회의에서는 조선인민군 총참모부가 제기한 대남군사행동계획들을 보류하였으며 추진중에 있던 일련의 대남행동들도 중지시키는 조치가 취해졌다.
 
남조선당국의 차후태도와 행동여하에 따라 북남관계전망에 대하여 점쳐볼수 있는 이 시점에서 남조선《국방부》 장관이 기회를 틈타 체면을 세우는데 급급하며 불필요한 허세성목소리를 내는 경박하고 우매한 행동을 한데 대하여 대단히 큰 유감을 표하지 않을수 없다.
 
조선반도의 군사적긴장완화는 일방의 자제와 선의적인 행동의 결과만으로는 실현될수 없으며 호상존중과 신뢰에 기초한 쌍방의 노력과 인내에 의해서만 비로소 지켜지고 담보될수 있을것이다.
 
남조선군부는 이 기회에 저들의 《대비태세》선전에 주력하는 모습을 생심먹고 연출해대면서 《철저한 대북감시유지》와 《대비태세강화》같은 대립적인 군사적성격이 농후한 행동강화립장을 두드러지게 표명하는가 하면 우리의 행동에 대해 무턱대고 《도발》이라는 극히 자극적인 표현들을 람발하고있다.
 
24일 《국회》 본청사에서 열린 그 무슨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라는데서 정경두 《국방부》 장관이 우리의 군사행동계획이 보류가 아닌 완전《철회》로 되여야 한다고 도가 넘는 실언을 한데 대하여 매우 경박한 처사였다는것을 경고하지 않을수 없다.
 
앞으로 저들의 철저한 《위기감시노력》과 《군사적대비태세》가 조선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보장하는데 기여했다고 생색내기를 해볼 심산이였다면 너무도 부실하고 부적절한 시도라고 말해주고싶다.
 
언제인가 우리는 이번과 류사한 남조선《국방부》의 분별없는 언동을 놓고 겁을 먹은 개가 더 요란하게 짖어댄다고 평한적이 있었다.
 
우리가 공식적인 대남립장발표에서 다시 이런 험한 표현들을 쓰지 않도록 하려면 현명하게 사고하고 처신해야 할것이다.
 
위협적으로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우리의 《보류》가 《재고》로 될 때에는 재미없을것이다.
 
남조선《국방부》의 때없는 실언탓에 북남관계에서 더 큰 위기상황이 오지 말아야 한다.
 
자중이 위기극복의 《열쇠》라는것을 알아야 한다.
 
  
 
주체109(2020)년 6월 24일
 
평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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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애국가'로 민족정기 되살리자

[애국가에 무슨 일이 일어났나] 15

 

애국가에 무슨 일이 일어났나? 지금 우리 애국가에는 두 가지 은폐된 진실과 한 가지 전도된 사실이 있다. 은폐된 진실의 하나는 애국가 작곡자 안익태가 심각한 수준의 친일파이자 친나치 부역자로 그러한 사실을 우리 국민들에게 철저히 숨겨왔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애국가 곡조가 불가리아 민요를 표절한 것임에도 끝까지 감춰왔다는 것이다. 한 가지 전도된 사실은 애국가 작사자 문제이다. 세간에는 윤치호 작사설이 우세하지만 임진택 씨는 도산 안창호 선생이 애국가 작사자임을 명백히 증명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 문화운동가이자 창작판소리 명창인 임진택 씨는 "안익태 애국가는 우리 민족의 수치"이지만 안창호 선생의 애국가 노랫말은 우리 민족의 심금을 울린 위대한 가사로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난해부터 안익태 곡조 대신 '아리랑'에 애국가 가사를 얹어 부르는 '아리랑 애국가' 운동을 펼치고 있는 그는 '아리랑 애국가'로 민족 정기를 되찾고 장기적으로는 국민들의 뜻과 지혜를 모아 한국을 진정으로 대표할 수 있는 애국가를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관련 기사 : "친일파 애국가 대신 '아리랑 애국가' 불러야 할 때")

다음은 연재 순서.(편집자)

1. 두 개의 감춰진 진실과 한 개의 뒤집힌 사실

2. 애국가, 언제 어떻게 생겨났나?

3. 안익태의 두 얼굴 - 애국가 작곡 : 친일·친나치 행각

4. 하나씩 벗겨진 안익태의 거짓말

5. 안익태 애국가 곡조의 불가리아 민요 표절설

6. 애국가 작사자 논쟁 – 안창호인가 윤치호인가?

7. '애국가 작사자 조사위원회(1955)' 활동의 전말(顚末)

8. 윤치호 '애국가 작사설' 물적(物的)증거에 대한 검토

9. '안창호 애국가 작사설' 전문증거(傳聞證據)에 대한 검토

10. 애국가의 원형 '무궁화노래'의 진실

11. 도산 안창호의 애국창가운동과 애국가

12. 애국가 노랫말에 담긴 뜻 – 애국가 시상(詩想)

13. 만신창이가 된 우리의 애국가, 이제 어찌할 것인가?

14. 애국가 교체와 국가(國歌) 제정에 관한 백가쟁명(百家爭鳴)

제 14편 글에서 나는 해방 이후 70여 년 동안 정치 성향이 다른 여러 언론과 학자·지식인, 혹은 관제단체에 의해 제기돼온 '애국가 개체(改替)' 또는 '국가(國歌) 제정'에 관한 갖가지 논란의 이면(裏面)에 숨어있는 의도를 추정해 보았다.(☞ 관련 기사 : 애국가 교체와 국가(國歌) 제정에 관한 백가쟁명(百家爭鳴)) 그 결과 애국가 개체(改替) 또는 국가(國歌) 제정 논란은 단순히 문화적·음악적 논쟁이 아니라 거기에는 정치적·이념적 배후(背後)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현행 애국가 가사에 대한 원색적인 불만 또는 무분별한 비판들은 기본적으로는 110년 전 망국(亡國)의 시대 상황과 광복(光復) 후 신국가(新國家) 건설의 시대 상황, 그리고 21세기 현금(現今)의 복잡다기(複雜多岐)한 시대 상황이 같지 않아 제기된 것이지만, 거기에는 적지 않은 '오해'와 '오류'가 개재(介在)해 있음을 발견하였다. 기실(其實) 그 '오해'는 우리 선대(先代)들의 피어린 투쟁의 고뇌와 체험을 깊이 성찰(省察)하지 못한 안이(安易)함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 '오류'는 애국가 작사자를 친일 민족반역자 윤치호로 잘못 알고 있는 데서 생겨난 일종의 분개심(憤慨心) 또는 자괴감(自愧感)의 발로(發露)임을 발견하였다.

나는 우리 <애국가> 노랫말(후렴과 본가사 모두)의 작사자가 도산 안창호 선생임을 밝혀낸 동시에 그 노랫말에 담긴 깊은 뜻과 시상(詩想)에 관해서는 이 연재 제 12편에서 상세히 소개한 바 있다.(☞ 관련 기사 : 애국가 노랫말에 담긴 뜻 – 애국가 시상(詩想)) 이제 그동안의 애국가 개체(改替)를 둘러싼 여러 논란과 비판들을 충분히 참고하면서 향후 새로운 애국가, 바람직한 애국가를 어떻게 만들어나갈 것인지 그 대안을 모색해 보자.

이에 '새로운 애국가! 가사는 살리고 곡조는 바꾸자'고 하는 나의 관점은 초지일관(初志一貫)함을 다시 한번 천명해 둔다.

1. 새 애국가 또는 국가(國歌)의 가사와 곡조에 대한 제언들

그동안 새로운 <애국가>의 노랫말과 곡조의 방향성에 대한 제언들은 끊임없이 백가쟁명(百家爭鳴)식으로 있어 왔다. 이를 요약해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우리의 전통과 긍지, 향기와 정조를 새로운 이념으로 재인식하고 새로운 각도로 재음미하여 국가 민족의 영원한 번영을 축복하는 가사로, 곡조는 실내악과 행진곡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게 하며 특히 씩씩하고도 명랑하고 웅건하고도 경쾌하여 남녀노소 누구나 어디서든지 부를 수 있는 노래 – <동아일보>의 애국가 모집 공고(1945년 12월 15일)

● 애조(哀調)를 피하고, 진취적이고 건설적이며, 민족의 유구성(悠久性)이 있는 웅장한 리듬일 것 – <중앙신문> 애국가 가사 현상모집 공고(1946년 1월 17일)

● 보우(保佑)니 공활(空豁)이니 하는 어려운 가사가 아닌 쉬운 가사 – 아동문학가 윤석중

● 부르면 기뻐지는 희망찬 가사와 곡 – 서양화가 김환기, 소설가 최정희

● 진취적이고 장엄하며 활기에 넘친 가사 – <경향신문> 설문조사에 대한 시민 응답(1964년 2월 11일)

● 헌법 제1장 1조의 '민주공화국', 제2조의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제5조의 '자유 평등 창의'가 가사에 포함되도록 하자 - 음악평론가 박용구

● 백두산의 웅장한 정기를 타고, 삼면 바다의 대양을 내다보고서 멀리 나아가려는 기상과 동방의 새문명의 창조자로서의 이상(理想)을 강조하는 가사 – 한글학자 최현배

● 대중적이면서도 예술적인 국가(國歌) - 동양화가 천경자

● 서양식 찬송가가 아닌 한국적인 곡조... 7·5조를 피하자 - 작곡가 나운영

● 서양적인 작곡이 아닌 우리스러운 리듬 박자, 음계, 화성법에 입각한 우리 분위기가 있는 곡조 – 작곡가 박찬석

● 자유·평화·화합·단결·개국 이념 등을 나타낼 수 있는 새로운 국가(國歌), 겨레의 기백이 담겨 있는 고유의 리듬과 장엄 활기찬 곡조 – 안호상 국가제정추진위원장 명의로 발송한 설문서(1983년 4월)

● 우리의 민족적·역사적 특성을 살려 분단시대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평화적으로 통일을 달성하는 그 환희와 민족적 자부심을 담아야... – 역사학자 강만길(1994년 <역사비평> 여름호 '통일조국의 국가' 설문에 대한 응답)

● 분단억압에 맞선 민중의 의지와 정서가 담겨야... 너도 살고 나도 살고 모두가 다 함께 잘 사는 세상을 어기차게 달구고 을러대는 위대한 비나리 – 통일운동가 백기완(1994년 <역사비평> 여름호 '통일조국의 국가' 설문에 대한 응답)

● 민족 고유의 정서가 담긴 민족음악 어법으로... 모든 국민이 쉽게 부르고, 우리 국민이 더 잘 부를 수 있는 음악어법으로, 그리고 '예술적으로 완성된' 훌륭한 애국가 – 작곡가 이건용(1994년 <역사비평> 설문에 대한 응답)

● 민족의 기개를 담은 우람하고 유장한 노래, 백두산처럼 하늘로 치솟고 한강물처럼 용틀임으로 굽이쳐 흐르는 그런 가락 – 시인 김준태(1994년 <역사비평> 설문에 대한 응답)

● 3.1 독립운동 100주년을 맞는 해, 친일·친나치 경력이 드러난 안익태 씨의 곡조를 계속 부를지 여부를 매듭지어야 한다. 자라나는 우리 미래세대가 친일 반애국자인 안익태의 애국가 곡조를 계속 부를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프다. -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 이부영(2019년 8월 8일 '안익태 곡조 애국가 계속 불러야 하나' 국회 공청회 발제문)

● 현재 애국가는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일깨우는 노래로써 위상을 상실했다. 애국가를 부를 때 께름칙하다면 이미 그 생명력을 상실한 노래다. 우리 민족 공동체의 위상과 명예를 가슴 펴고 세워나갈 수 있는 애국가가 만들어졌으면 한다. - 광복회 회장 김원웅(2019년 8월 8일 국회 공청회 인사말)

이 많은 제언들을 한꺼번에 다 담아내기란 쉽지 않지만, 요약하자면 새로운 애국가는 '민족의 기개와 민중의 의지를 담아 진취적이고 장엄한 노랫말로 짓되, 민족 고유의 정서가 담긴 음악어법으로, 누구나 다 우러나서 함께 부르며 하나가 될 수 있는 노래'로 만들어져야 한다는 쪽으로 방향이 모였다고 본다.

2. '애국가'로서 손색없는 현대의 노래들

그동안 새로운 애국가 또는 국가(國歌)의 제정 방법에 있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모(公募)에 의한 선정(選定) 방식을 선호하여 왔다.

나는 이 부분이 무척 안이한 발상이라고 생각한다. 우선은 공모에 의해 아무리 빼어난 노랫말을 선택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작곡과 결합되어 얼마나 완성된 수준에 다다를 수 있을지 아무도 장담 못 하기 때문이다.

공모에 의한 선정과 의뢰의 방식은 말이 쉽지 그 과정에서 생겨날 갈등과 대립을 조정하는 일부터가 쉽지 않다. 뿐만 아니라 그 결과가 아쉽게도 모든 국민이 받아들일 수준이 되지 못할 때, 돌이킬 방법이 없다.

심사위원회를 구성하여 공모를 통해 애국가 또는 국가를 제정하자는 발상은 사실상 무책임한 발상이다. 심사위원(전형위원)이 누가 될 것인지부터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있고, 무엇보다 국민들의 실질적 검증을 받지 않고 당선된 작품이 과연 진정한 호응을 얻어낼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발언하자면, 막대한 현상금을 걸고 애국가 국민공모를 하게 되면, 응모 규정에 맞춘 상투적인 작품이 도리어 높은 점수를 받을 가능성마저 생겨난다. 어쩌면 '나의 조국' 같은 사이비 작품이 당선하게 될지도 모른다. 단언컨대 막대한 현상금을 목표로 그제야 관심을 갖고 응모하는 작사자나 작곡자의 경우 전문성은 있을지 모르나 그들에게서 나라와 겨레, 애국가를 향한 책임감과 진정성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돌아보면 국민 공모 현상모집 이전에 벌써 애국가로서 손색없는 많은 노래들이 자발적으로 만들어지고 불리어 왔다. 그 노래들 중에는 이미 역사의 구비마다 실질적인 '애국가'로서의 기능을 수행해온 작품들도 적지 않다.

국민 공모를 굳이 한다면 지금 특정인을 선정하여 새 작품을 만들기보다는 이미 자발적으로 애국적 의지에 의해 생산되고 보급된 많은 '애국의 노래' 중에서 국민 참여 과정을 통해 애국가 군(群)을 선정하는 것이 차라리 바람직하다.

그 결과는 안익태 애국가의 독점적 구조를 해체함에 있어 대단히 큰 효과를 가져올 수 있고, 각계각층으로 다양한 애국가의 분포와 활용을 유도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또한 그 결과에 바탕하여 압도적인 호응을 얻은 작품이 공식 <애국가> 또는 정식 국가(國歌)의 자리에 자연스럽게 다가갈 수도 있다.


이에 내가 생각하는 ''애국가'로서 손색 없는 현대의 노래들'을 추천해보면 다음과 같다.

유튜브 등으로 직접 노래를 들어보면서 노랫말을 찬찬히 음미(吟味)해보면 더 좋은 느낌과 판단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1) <아침이슬> – 김민기 작사·작곡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이슬처럼

내 맘에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

아침 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고

한낮에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일지라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 김민기의 '아침이슬'은 70년대 이후 우리 사회 민주화운동의 상징적인 노래이다. 군사독재정권의 억압 속에서 수많은 학생 청년 지식인들이 이 노래를 혼자 또는 여럿이 함께 부르면서 어두운 밤을 이겨냈다. 억눌려 서러운 자신의 시련을 떨쳐내고 떳떳이 나아가고자 하는 자기정화의 조용한 절규(絶叫)로서, 60대 이상 장년(長年)층의 마음속에 깊이 남아있는 노래이다.

독재시대에 정작 공식 <애국가>는 국가주의적 획일주의를 동원하는 수단이었음에 '아침이슬'은 강요된 국가주의에서 벗어나려는 자기갱신의 노래였다. 그러므로 '아침이슬'은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의 공식적·관제적 행사에서 강요된 고유명사로서의 '애국가'와는 달리, 애기애타(愛己愛他)의 결단과 연대가 요구되는 각종 모임과 집회에서 자발적으로 불린 보통명사로서의 '애국가'였다.

2) <내 나라 내 겨레> - 김민기 작사, 송창식 작곡

보라 동해에 떠오르는 태양

누구의 머리 위에 이글거리나

피맺힌 투쟁의 흐름 속에

고귀한 순결함을 얻은 우리 위에

보라 동해에 떠오르는 태양

누구의 앞길에서 훤히 비치나

찬란한 선조의 문화 속에

고요히 기다려온 우리 민족 앞에

숨소리 점점 커져 맥박이 힘차게 뛴다

이 땅에 순결하게 얽힌 겨레여

보라 동해에 떠오르는 태양

우리가 간직함이 옳지 않겠나

독백(읊조림)

나의 조국은 허공에 맴도는 아우성만 가득한 이 척박한 땅,

내 아버지가 태어난 이 곳만은 아니다.

북녘땅 시린 바람에 장승으로 굳어버린 거대한 바위덩어리

내 어머니가 태어난 땅,

나의 조국은 그 곳만도 아니다.

나의 조국은 찢긴 철조망 사이로 스스럼없이 흘러내리는 저 물결,

바로 저기 눈부신 아침 햇살을 받아

김으로 서려 피어오르는 꿈 속 그 곳, 바로 그 곳.

* 이 노래는 김민기가 대학생일 때 대중음악 평론가 이백천 씨와 정홍택 씨 눈에 띄어 대중가수 송창식씨와 합류한 자리에서 하룻밤 만에 만들어낸 불후의 명작이다.

이 노래의 처음 제목은 '동해의 태양'이었다는데, 나는 국가(國歌) 공모(公募)를 따로 할 필요도 없이 '내 나라 내 겨레'야말로 지금 바로 국가(國歌)로 지정되어도 전혀 손색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가사와 곡을 놓고 많은 사람들이 지향했던 '바람직한 애국가'가 이미 나와 있지 않은가?

뿐만 아니라 이 노래에 사무치도록 눈부시게 담겨있는 '통일에의 꿈'은 북녘 사람들이 들어도 거부감이 있을 수 없는 순결과 숭고(崇高)의 경지에 다다라 있다. 통일된 후의 '우리 겨레 애국가'로도 손색이 없는 노래이다.

3) <상록수> - 김민기 작사 · 작곡

저 들에 푸르른 솔잎을 보라

돌보는 사람도 하나 없는데

비바람 맞고 눈보라 쳐도

온누리 끝까지 맘껏 푸르다

서럽고 쓰리던 지난 날들도

다시는 다시는 오지 말라고

땀 흘리리라 깨우치리라

거치른 들판에 솔잎 되리라

우리 가진 것 비록 적어도

손에 손 맞잡고 눈물 흘리니

우리 나갈 길 멀고 험해도

깨치고 나아가 끝내 이기리라

* '상록수'는 김민기가 젊은 시절 서울 변두리에서 야학 활동을 하던 중 가진 것 없는 야학 학생들을 위해 지은 노래였다. 아마도 심훈의 농촌계몽소설 '상록수'에서 영감(靈感)을 얻었을 터. 그런데 그 해, 1978년 12월 전라도 광주에서 들불야학을 만들어 활동하던 전남대 여학생 박기순이 불의의 사고로 그만 저세상으로 가고 말았다. 마침 광주 녹두서점에 들렀던 김민기가 이 소식을 듣고 박기순의 영결식에서 처음 직접 부른 노래가 이 '상록수'였다. 그리고 그 자리를 들불야학의 동지이자 선배인 윤상원(1980년 5월 광주항쟁의 마지막 시민군)이 지켜보고 있었다.

'상록수'는 후에 노무현 대통령이 이 노래를 좋아하고 자주 부름으로써 자연스럽게 '국민노래'가 되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했을 때도 영결식에서 양희은이 이 노래를 불러 님을 보내었다. 심훈의 소설 '상록수'에서 여주인공 채영신의 죽음을 박동혁이 떠나보냈듯, 박기순의 떠남을 윤상원이 지켜보았고, 노무현의 가심을 '상록수'가 배웅하였다.

'상록수'는 국가 경축일보다는 각급 학교의 공동(共同) 교가(校歌)나 소규모 노동자 집단 또는 사회봉사단체 등의 단체가(團體歌)로 매우 적합한 노래이며, 애국적·헌신적 삶을 산 누군가의 죽음을 떠나보내는 시공간에서도 매우 감동을 주는 노래라 할 수 있다.

4) <터> 한돌 작사·작곡

저 산맥은 말도 없이 오천년을 살았네

모진 바람을 다 이기고 이 터를 지켜왔네

저 강물은 말도 없이 오천년을 흘렀네

온갖 슬픔을 다 이기고 이 터를 지켜왔네

설악산을 휘휘 돌아 동해로 접어드니

아름다운 이 강산은 동방의 하얀 나라

동해바다 큰 태양은 우리의 희망이라

이 내 몸이 태어난 나라 온누리에 빛나라

자유와 평화는 우리 모두의 손으로

역사의 숨소리 그 날은 오리라

그 날이 오면은 모두 기뻐하리라

우리의 숨소리로 이 터를 지켜나가자

* 한돌은 대중가요계에서 혼탁(混濁)에 휩쓸리지 않고 순결한 노래들을 지켜온 선량한 작곡가이자 가수이다. 한돌의 대표작으로는 '터' 외에 '홀로아리랑'이 있는데, 두 노래 다 가사가 건강하고 애국적이다.

'터' 노랫말의 핵심개념을 보면 '산맥' '강물' '오천년' '설악산' '동해바다' '강산' '온누리' 등 국토와 역사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자유' '평화' 등 민주적 가치에 대한 희망이 숨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유사한 단어개념들을 동원한 박정희의 '나의 조국'이 관제(官製) 사이비 국가(國歌)라면 한돌의 '터'는 하얀 옷을 입은 백성들의 순수한 나라 사랑 노래이다.

한돌의 경우 곡조에 있어 우리 가락을 밑바탕에 깔고 있다는 점에서 특히 유의할 필요가 있다. '홀로아리랑'의 경우 우리 민요나 판소리의 기본 가락인 중머리장단에 전개되는 느낌이 확연하거니와, '터'의 경우 우리 풍물굿 농악의 삼채가락이 바탕에 깔려있다는 사실이 무척 흥미롭다. 하지만 나는 아직 이 노래를 삼채가락으로 해석하여 연주하거나 부르는 것을 듣지 못했다. 비교해서 설명하자면, 2002년 월드컵 축구대회때 수많은 청년들이 외쳤던 '대~한민국!'이라는 노랫말이 바로 사물놀이 농악에 맞춘 '삼채가락 응원가'였다.

5) <우리의 소원은 통일> - 안석주 작사, 안병원 작곡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이 정성 다 해서 통일, 통일을 이루자

이 나라 살리는 통일, 이 겨레 살리는 통일

통일이여 어서 오라, 통일을 이루자

* 이 노래의 작사자와 작곡자는 부자(父子) 간이다. 1947년에 '우리의 소원'이라는 제목으로 나온 라디오 드라마 주제곡으로, 원래 가사는 '우리의 소원은 독립'이었다고 한다. 해방 후 미·소 점령하에서 독립을 염원하던 노래가, 분단이 고착된 후 통일을 염원하는 노래 가사로 바뀌었다고 한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은 이미 수십 년 동안 '애국가'의 기능을 해왔고 사실상 또 하나의 '애국가'로 존재하고 있다. 더욱이 북녘 사람들도 이 노래에 대해서는 거부감이 덜 한 탓에 남북 문화교류 현장에서 함께 부를 수 있는 대표적인 노래로 자리 잡았고 때로는 남북이 함께 국가(國歌)처럼 사용하기도 했다.

이 노래는 통일될 때까지 유효한 '애국가'이자 남북공동 국가(國歌)이다.

6) <그 날이 오면> 문승현 작사·작곡

한밤의 꿈은 아니리 오랜 고통 다한 후에

내 형제 빛나는 두 눈에 뜨거운 눈물들

한줄기 강물로 흘러 고된 땀방울 함께 흘러

드넓은 평화의 바다에 정의의 물결 넘치는 꿈

그 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내 형제 그리운 얼굴들 그 아픈 추억도

아 짧았던 내 젊음도 헛된 꿈이 아니었으리

그 날이 오면 그 날이 오면

(되풀이) 그 날이 오면 그 날이 오면

내 형제 그리운 얼굴들 그 아픈 추억도

아 피맺힌 그 기다림도 헛된 꿈이 아니었으리

그 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 1980년대는 민중예술운동 진영(陣營) 입장에서 보면 '마당극운동' 그리고 '노래운동'의 시대였다. 수많은 민중가요들이 생겨나 민주화의 파도(波濤)가 되고 민중문화운동의 깃발이 되었다. 젊은 날 우리들의 투쟁과 다짐의 뜨거운 심장이었던 수많은 민중가요들, '타는 목마름으로' '광야에서' '그날이 오면' '이 산하에'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벗이여 해방이 온다' '직녀에게' '임을 위한 행진곡' 등. 이는 1910년 전후 국권강탈에 맞서 싸웠던 이른바 '애국창가운동'의 맥을 잇는, 1980년대 독재폭압의 질곡(桎梏)에 맞서 싸운 처절한 '노래운동'으로서의 '민중가요운동'이었다.

그 중에서도 '그날이 오면'은 서정적이면서도 비장한 노랫말에 음악적으로 절제된 완성도(完成度)로 해서 민중가요를 예술의 반열에 올려놓은 대표적인 곡이라 할 수 있는 바, 영화 '1987'의 마지막 장면을 장식한 엔딩 뮤직(ending music)이 바로 이 노래!

지금 바로 '애국가'로 채택해도 전혀 손색없는 노래이다.

7) <이 산하에> 문승현 작사·작곡

1절 - 기나긴 밤이었거든 압제의 밤이었거든

우금치 마루에 흐르던 소리없는 통곡이어든

불타는 녹두 벌판에 새벽빛이 흔들린다 해도

굽이치는 저 강물 위에 아침 햇살 춤춘다 해도

나는 눈부시지 않아라

2절 - 기나긴 밤이었거든 죽음의 밤이었거든

저 삼월 하늘에 출렁이던 피에 물든 깃발이어든

목 메인 그 함성소리 고요히 어둠 깊이 잠들고

바람 부는 묘지 위에 취한 깃발만 나부껴

나는 노여워 우노라

3절 - 기나긴 밤이었거든 투쟁의 밤이었거든

북만주 벌판에 울리던 거역의 밤이었거든

아아 모진 세월 모진 눈보라가 몰아친다 해도

붉은 이 산하에 이 한 목숨 묻힌다 해도

나는 쓰러지지 않아라

후렴 - 폭정에 폭정에 세월, 참혹한 세월에

살아 이 한몸 썩어져, 이 붉은 산하에

살아 해방에 횃불 아래, 벌거숭이 산하에

* '이 산하에'라는 노래는 1980년대 '노래운동'의 선구자였던 문승현이 뜻 맞는 동료들과 합작하여 만든 '산하 시리즈' 세 편 중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이 노래의 1절은 동학농민혁명의 통곡을, 2절은 3.1만세운동의 함성을, 3절은 무장독립투쟁의 고난을 담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지난 역사 속의 통곡과 함성과 고난이면서 동시에 이 노래를 부르고 있는 1980년대의 압제와 암흑과 폭정의 세월을 헤쳐나가는 불굴의 투지를 담아내고 있다.

이 노래는 1940년대에 광복군 한형석이 지은 독립군가의 전통을 이으면서, 해방 직후 김순남이 지은 일련의 애국가요들의 수준을 넘어서는 우리 시대의 빼어난 '독립군가'요, '민주항쟁가'요, '애국찬가'이다.

'이 산하에' 같은 노래가 1945년~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무렵 진즉에 발표되었다면 당시의 '애국가 현상모집'에 당선작으로서 가능성이 높았으리라 생각된다. 지금에 와서는 이 노래가 3.1절이나 광복절에 국민 제창(齊唱)으로 불리기는 좀 부담스러울 수 있지만, 다만 전문합창단에 의해 역동적 예술가곡으로 불린다면 충분히 '애국의 노래'로서 기능을 할 수 있다고 본다.

8) <임을 위한 행진곡> 백기완 원작시 '묏비나리'

황석영 각색, 김종률 작곡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 1980년 5월의 광주민중항쟁이 무참히 진압된 후, 1982년 초 추위가 가시기 전 망월동 묘지에서 항쟁의 마지막까지 전남도청을 사수하다 산화(散華)한 윤상원과 먼저 세상 떠난 들불야학 박기순의 영혼 결혼식이 열렸다. 그리고 얼마 후 작가 황석영의 집에서 광주항쟁의 문화패 동지들이 몰래 모여 윤상원 박기순 두 사람의 영혼 혼례를 소재로 한 '넋풀이'라는 노래굿을 만들어 카세트테이프에 담았는데, 이 노래굿에 담긴 마지막 노래가 '임을 위한 행진곡'이었다.

'넋풀이 노래굿'의 전체적인 집필은 작가 황석영의 몫이었는데, 그 중 '임을 위한 행진곡'의 노랫말은 백기완 선생의 미발표 장시(長詩) '묏비나리'에서 따 왔고, 작곡은 당시 전남대 학생이던 김종률이 했다. 이 카세트테이프는 그 후 전국으로 은밀히 퍼져나가 수년 후에는 대표적인 운동가요로 자리 잡았고, 민주화 운동권 집회나 시위에서 실질적으로 '애국가'를 대신하는 노래가 되었다.

한때 수구정권 하에서 국가보훈처가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이 노래가 불리는 것을 가로막기도 했으나, 그러한 모멸과 난관을 뚫고 이제 '임을 위한 행진곡'은 우리 시대 민주와 인권을 대변하는 또하나의 애국가로 자리 잡았으며, 나아가 필리핀 홍콩 등 아시아 여러 나라의 민주화 집회에서도 애창되는 국제적인 '평화와 연대의 노래'로 파급되었다.

9) <우리가 원하는 우리나라> 임동창 작사·작곡

1절 - 하늘은 높고 푸르며 땅은 깊고 기름진 나라

하늘 아래 가장 아름다운 나라

2절 - 서로 서로 도우며 평화를 전하는 나라

하늘 아래 가장 자비로운 나라

3절 - 사람을 널리 이롭게 하여 자연사랑 하는 나라

하늘 아래 가장 한가로운 나라

후렴 : 잃었던 우리 기운 우리 기운

되찾아 되찾아 되찾아

우리가 원하는 우리나라 이루세

* '우리가 원하는 우리나라'는 제목에서부터 백범 김구 선생이 남긴 '나의 소원'이라는 육필 수기(肉筆 手記)에 들어있는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를 연상시킨다.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이요, 부강한 나라 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고 새로운 문화의 힘이라....." 백범 선생이 남기신 '문화국가'를 향한 염원이다. 임동창의 노랫말이 백범 김구 선생의 어록(語錄)을 그대로 가져온 것은 아니지만, 그 시상(詩想)은 동일하다.

그런데 당대의 피아니스트 임동창이 직접 가사를 쓰고 곡을 붙인 이 노래가 독특한 점은 그 곡조가 서양의 것이 아닌 우리 가락 우리 선율로 되어있다는 사실이다. 이 노래는 우리 고유의 굿거리장단(중중모리장단)으로 짜여 있으며 성음(聲音)은 판소리 성음을 구사(驅使)하도록 되어있다. 말하자면 그동안 많은 음악전문가들이 바랬던 새로운 애국가의 필요조건, 민족 고유의 정서가 담긴 음악 어법으로 곡을 붙인 최초의 '나라 사랑 노래'가 바로 이 노래이다.

다만 한가지 아쉬운 것은 이 노래는 일반인들이 따라부르기에는 쉽지 않은 고도의 가창력을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예술적으로는 훌륭하나 남녀노소 모든 국민이 함께 제창(齊唱)하기에는 좀 부담된다는 것이 문제로 남는다.

이처럼 당장 <애국가>로서 손색없는 현대의 노래들 아홉 편을 추천해 보았다. 여러분들이 한번 직접 노래를 들어보면서 노랫말을 음미해 보시기 바란다.

이 외에도 지금 당장 손색없는 현대의 애국가로서 빠지지 않는 노래가 '아리랑'이다. 여기서 말하는 '아리랑'은 나운규가 감독 주연한 영화 <아리랑>의 주제곡을 말한다. 실제로 이 '나운규 아리랑'은 해외 동포들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고, 외국인들에게도 많이 알려져 한국을 대표하는 노래로서 벌써부터 '애국가' 기능을 해왔다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올림픽 등 국제 규모 스포츠대회에서 '나운규 아리랑' 곡조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과 함께 또 하나의 남북공동 국가(國歌) 역할을 맡기도 했다.

그럼에도 나는 '나운규 아리랑'을 현대의 손색없는 애국가 아홉 편에 포함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주(主) 본가사인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 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라는 노랫말이 '애국가' 가사로서 대단히 부적합하기 때문이다. 다만 남북 공동행사 같은 데서 가사 없이 연주만 하는 경우에는 얼마든지 남북 공동 국가(國歌)로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각설하고 다시 한번 강조하건대, 노랫말에 있어서나 곡조에 있어서나 앞서 아홉 편의 작품처럼 빼어나고 진정성 있는 작품은 결코 현상금 걸고 공모하는 방식이나 특정인에게 부담 주는(또는 혜택을 주는) 방식으로는 나오기 어렵다.

3. 새로운 애국가를 위한 대안(代案)

나는 이 연재를 통해 '안익태 애국가 곡조는 민족의 수치이지만, 안창호 선생의 애국가 노랫말은 우리 민족의 심금을 울린 위대한 가사로 평가받아야 한다'고 일관되게 역설한 바 있다.

그러한 관점에서 이제 새로운 애국가를 위한 대안을 모색해보자.

1) 애국가에서 반애국자 안익태 곡조는 이제 그만!

① 국가(國家) 공식행사나 지방자치단체 행사 등에서 안익태 곡조의 애국가를 그만 부르도록 해야 한다.

② 미래 세대 어린이와 학생들에게 더 이상 안익태 곡조의 애국가를 가르쳐서는 안 된다.

③ 국제 스포츠대회의 개·폐막식과 시상식에서 안익태의 곡조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국가(國歌)로 울려 퍼져서는 안 된다.

2) 안익태 곡조 애국가의 독점적 관행(慣行) 해체(解體)

① '애국가'는 관행으로 진행되어온 대통령 훈령 사항일 뿐 법률상 국가(國歌)가 아니라는 인식을 국민 모두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② '애국가'는 원래 '애국가류'를 통칭하는 보통명사였다. 오늘날 '애국가'도 '고유명사' 아닌 '보통명사'로 생성되고 보급될 수 있어야 한다.

③ 민간단체나 각급 학교에서부터 안익태 애국가 곡조의 독점적 구조가 해체되고 곡조 변경이 허용되어야 한다.

④ '애국가' 가사에 또 다른 노랫말의 추가와 변경이 허용되어야 한다.

⑤ '애국가' 공모와 추천을 통해 '애국가류'의 범주를 넓혀나가야 한다.

3) 애국가 논란을 규명하고 해결해야 할 국회와 정부의 책임

① 국회와 정부는 안익태의 친일·친나치 반민족행위를 규명할 조사위원회를 즉시 구성하고 실행해야 한다.

② 국회와 정부는 안익태 애국가 곡조의 표절 여부를 판정할 심의위원회를 구성·가동해야 한다.

③ 국회와 정부는 소위 윤치호 붓글씨 가사지의 진위(眞僞) 여부를 비롯하여 1955년 애국가 작사자 조사 결과에 대한 재조사를 실시하고 진실을 규명해야 한다.

나는 새로운 '애국가'를 위한 대안으로 일단 현행 애국가 가사를 그대로 하면서 곡조를 대체하는 방안과, 나아가 곡조를 대체하되 민요처럼 새로운 애국가 가사를 보완하는 방향으로 '아리랑 애국가'를 제안하고자 한다.

'아리랑 애국가'로 우선 민족정기를 되찾고, 향후 국민의 뜻과 지혜를 모아 국민 모두가 동의하고 대한민국을 진정으로 대표할 수 있는 국가(國歌)를 새로 제정하는 그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0062309412798793 프레시안(http://www.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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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대통령 조롱' 다루는 조중동의 자세, 놀라울 따름

[정연주의 한국언론 묵시록 21] 조중동의 쇠락사(3)

등록 2020.06.24 09:01 수정 2020.06.24 09:01
 
수구언론 또는 보수언론이라고 막연하게 칭했던 조선·중앙·동아일보 세 신문을 하나로 묶어서 '조·중·동'이라 쓰기 시작한 건 20년 전인 2000년 10월 25일 한겨레 칼럼을 통해서다. ('정연주 칼럼' '한국신문의 조폭적 행태(2)).

세 신문을 '조중동'이라 묶어서 하나의 신문인 것처럼 표현한 데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세습이라는 족벌체제, 세상을 보는 눈, 주요 기사와 논설의 방향, 민주개혁세력에 대한 적대감, 수구 기득권·강자의 논리, 냉전·대결 이데올로기 추종, 역사의 가해자 편들기, 군사독재 권력에 굴종하고 부역한 역사, 그 과정에서 특혜를 받으며 자본을 축적해 언론시장에서 '대자본'으로 성장, 대자본을 바탕으로 현금 살포, 자전거 경품 등 신문시장에서 보인 약탈적 시장점유 행태 등 여러 면에서 너무나 닮았기 때문이다.

세 신문사가 공동으로 편집회의와 논설회의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표현과 편집, 논리와 방향, 미움과 적개심 노출 등이 흡사하다. 그냥 하나의 '조중동 신문' 같다.

최근 사례로는 평양 옥류관 주방장 얘기가 있다.

* 조선일보 "국수 처먹을 때는 요사 떨더니..." 옥류관 주방장까지 문대통령 조롱
* 중앙일보 "처먹을 땐 요사 떨더니"... 평화 상징 평양 냉면의 '독한 변신'
* 동아일보 "국수 처먹을 땐 요사 떨더니..." 옥류관 주방장까지 대남 비난


옥류관 주방장 말 가운데 가장 자극적인 부분을 따서 따옴표에 담았다. 품격과 절제 없이 쏟아내는 말의 모양새와 수준이 옥류관 주방장이나 조중동이나 그다지 다르지 않다.

 

▲ 6월 15일자 <조선일보> 보도 ⓒ 조선일보

  

▲ 6월 15일자 <동아일보> 보도 ⓒ 동아일보

  

▲ 6월 15일자 <중앙일보> 보도 ⓒ 중앙일보

 
일란성 세 쌍둥이

조중동이 일란성 세 쌍둥이처럼 생각과 표현, 주장과 논리가 같은 모습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2002년 4월 29일자 조중동 사설을 보자. 이날 조중동은 ▲노무현 민주당 대통령 후보 확정 ▲ 국방백서의 북한 주적 폐지 ▲ 전교조의 민주화 인정 등 같은 주제를, 같은 순서, 거의 비슷한 논지로 다뤘다.

<조선일보>  
노무현 후보 '과거' '현재' '미래'
북이 요구하니 '주적' 삭제인가
전교조 '민주화 운동 인정' 뒤에 남는 것

<중앙일보>
노무현 후보가 해야 할 일
주적론, 군사회담에서 풀어야
민주화 운동 평가 성급하다

<동아일보>
노무현 민주당 대선후보
주적론 삭제 신중해야
전교조 민주화 인정 문제 있다


그 날의 여러 사안들 가운데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사설 주제로 고르는 것이니 사안의 경중에 대한 생각이 비슷할 수는 있다. 그러나 제목, 표현, 배치의 순서, 사설의 논리는 신문사의 철학과 생각이 담긴 것이어서 서로 다른 다양한 결과로 나오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초록이 동색

이 날짜 조중동의 사설을 두고, 당시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은 '조중동이 한통속인 이유는?'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다루면서 '초록이 동색'이라고 비판했다.
 
2002년 4월 29일은 '조중동'이란 단어가 고유명사로 국어사전에 오를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 날로 역사에 기록되지 않을까. 29일자 조선 중앙 동아 세 신문은 공교롭게도 각각 노무현 민주당 대통령 후보 확정을 보도한 머릿기사부터 3꼭지로 구성된 사설까지 동일한 주제와 소재를 거의 비슷한 시각으로 다루고 있다. '초록은 동색'이라는 말이 무색할 지경이다.

당시 조중동이 신문시장에서 차지한 독과점의 위치를 생각하면 주요 기사와 사설, 칼럼에서 하나의 신문인 것처럼 비슷한 시각과 논리를 보인다는 것은 수구기득권과 강자의 논리가 압도하는 조중동 이데올로기가 여론시장을 지배한다는 것을 뜻했다. 그 결과는 민주주의의 아름다움이랄 수 있는 다양성은 배제되고 하나의 논리가 압도하는 세상이 되고 만다.

조중동이 하나같은 신문 모습을 보이는 행태는 또 있다. 같은 사안에 대해 시대, 상황, 정권에 따라 정반대의 목소리를 낸다는 것이다. 카멜레온처럼 주장과 논리를 자유자재로 바꾼다.

정권 따라 말 바꾸는 카멜레온
 

▲ 22일 밤 경기 파주에서 탈북단체가 보낸 대북전단 살포용 풍선이 23일 오전 10시께 홍천군 서면 마곡리 인근 야산에서 발견됐다. 발견된 대북전단 살포용 풍선은 2∼3m 크기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일가의 사진이 부착돼 있다. ⓒ 연합뉴스


최근 대북 전단 살포, 국회 개원 협상, 재정 확대 정책 등에 대해 조중동이 같은 사안을 두고 과거 이명박·박근혜 정권 때와는 정반대의 주장과 논리를 펴고 있는데 대해 페이스북 등에서 구체적 사례를 들며 비판의 소리가 이어지고 있다. 조중동이 같은 사안에 대해 이렇게 손바닥 뒤집듯 정반대의 주장을 할 수 있느냐는 조롱과 한탄이 뒤따른다.

박근혜 정권 때, 대북 전단 살포에 대해 이런 기사들이 나갔다.

- 공개적인 대북 풍선 날리기는 부적절 (중앙, 2012.10.24 사설)
- 대북 전단, 보내려면 조용히 보내라 (중앙, 2013.3.27 시론)
- 위험천만한 대북전단 살포, 자제해야 한다 (중앙, 2014.10.27 사설)
- 여야, "대북전단 살포 자제해야 (조선, 2014.10.27)
- 자유북한연합, 대북 전단 살포 강행 "대체 왜 자꾸 이런 일이" (동아, 2014.9.23)


이렇게 대북 전단 살포를 비판하고 자제를 촉구했던 신문들이 지금은 다른 소리를 내고 있다.

- 군 동원해 우리 국민들 대북전단 살포 제압하자는 발상 (조선, 2020.6.9 사설)
- 미 인권단체들 '전단 금지는 재앙' (조선, 2020.6.12)
- 북에 쌀 추진하면서 '페트병 쌀'은 트집 (조선, 2020.6.11)
- 세계 최악 독재자 남매 위해 우리 국민 고발한 정부 (조선, 2020.6.11)
- 삐라 금지는 북 정권 돕고, 외부 정보 유입은 북 주민 돕는다 (중앙, 2020.6.9)
- "대북 전단 금지, 표현의 자유 억압...통제 대상 확대될 수도" (동아, 2020.6.8)
- 무기력과 비위 맞추기로는 북의 '도발본능' 못 막는다 (동아, 2020.6.16 사설)


정권에 따라 말을 바꾸는 조중동의 카멜레온 같은 변신 사례는 한 둘이 아니다.  '경제위기'를 보는 눈도 정권에 따라 정반대다. 인사청문회 때 동원되는 논리도 정권에 따라 춤을 춘다. 국회 개원협상에 대한 주장도 어느 정권 때인가에 따라 정반대의 논리가 동원된다.  KBS 사장에 대한 얘기도 정권에 따라 판이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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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당 중앙군사위 예비회의서 “대남 군사행동계획 보류”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20/06/24 11:34
  • 수정일
    2020/06/24 11:34
  • 글쓴이
    이필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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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 조선중앙통신 보도...최근 정세평가 후 보류, 사유는 공개되지 않아

이소희 기자 lsh04@vop.co.kr
발행 2020-06-24 09:11:04
수정 2020-06-24 09:11:04
이 기사는 번 공유됐습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겸 노동당 중앙군사위원장(자료사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겸 노동당 중앙군사위원장(자료사진)ⓒ뉴시스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23일 조선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당 중앙군사위) 제7기 제5차 회의 예비회의를 주재했으며, 이 자리에서 조선인민군 총참모부가 제출한 대남 군사행동계획을 보류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북 관영매체 조선중앙통신은 24일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제7기 제5차 회의 예비회의가 화상회의로 23일 진행되었다"면서 "당 중앙군사위 위원장이신 김정은 동지께서 회의를 사회했다"고 보도했다.

통신은 이날 예비회의에 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 리병철과 일부 위원들이 참가했다고 밝혔다.

회의 안건은 중앙군사위 제7기 제5차 회의에 상정할 주요 군사정책 토의안 심의, 보고·결정서 등 전쟁억제력을 더욱 강화하기 위한 국가적 대책이 반영된 여러 문건 연구였다고 전했다.

이어 예비회의 주요 내용으로 "당 중앙군사위는 조성된 최근정세를 평가하고, 조선인민군 총참모부가 중앙군사위 제7기 제5차 회의에 제기한 대남 군사행동계획들을 보류했다"고 소개했다.

그러나 조선중앙통신은 조선인민군 총참모부(총참모부)가 제출한 대남군사행동계획이 왜 중앙군사위 예비회의에서 보류됐는지 그 사유에 대해서는 보도하지 않았다.

앞서 지난 16일 조선인민군 총참모부는 대변인 발표를 통해, 탈북민단체들의 대북전단 살포와 이를 제대로 막지 않는 한국 정부에 대한 조치로 △ 금강산관광지구 · 개성공업지구에 부대 배치 △ 비무장지대 초소에 재진출 △ 접경지역 부근서 각종 군사훈련 재개 △ 인민들의 대남삐라(전단) 살포 지원 등 구체적 군사행동계획이 검토되고 있다고 밝혔다. 또 해당 군사행동계획들을 당 중앙군사위원회에서 비준받도록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총참모부 발표 이후, 북측이 금강산과 개성지구에 병력을 배치하고, 비무장지대 내 초소(GP)를 복구하고, 그간 철거했던 대남확성기를 재설치하는 등의 행보를 하는 것이 우리 군에 의해 포착됐다. 노동신문에는 대남전단을 준비하는 모습과 이를 살포하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북한 주민의 모습도 보도됐다. 군사행동계획을 이행하기 위한 준비를 해 온 셈이다.

이날 예비회의에서 군사행동계획이 보류됨에 따라, 당분간 북한군의 조치도 멈출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왜 이같은 결정을 내렸는지에 대해서는, 북측 당국의 추가 발표를 확인해야 정확한 이유를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소희 기자

작고 약하고 힘없는 이들의 목소리를 담은 따뜻한 기사를 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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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남북관계총파탄을 막아야 할 비상시국에 부쳐

  • 기자명 현장언론 민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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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06.24 0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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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남북관계·남북합의가 말 그대로 완전히 파탄날 수도 있는 비상시국이다.
시간은 길어야 한 두달이다. 그만큼 남북정세는 남북관계가 6.15 이전수준으로 완전히 파탄나는 길로 접어드는가? 아니면 남북관계를 복원할 수 있는 최소한의 신뢰를 회복하는가? 하는 급경사의 십자로에 들어섰다. 급경사의 십자로에서는 어디로 뛰어야 안전할지를 순식간에 판단해야 한다. 신중하게 장고할 시간이 없다. 매우 신속하고도 구체적인 조치들이 취해져야 한다.

왜 그런가?
이미 논란이 되고 있는 삐라살포가 행동단계에 들어서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전단살포가 문제된 것은 문재인 정부가 계속 묵인해 온 데 있으며, 파렴치한 범죄자들이 국회까지 입성하여 그 반북행태가 차후 남북관계를 더욱더 파탄시키는 뇌관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보다 결정적인 것은 그 내용이 최고존엄을 건드리는 저열한 것으로 북 인민들의 분격을 자아내는 것이었다는 점에 있다. 

남북관계의 기초이자 출발점은 상호존중과 신뢰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2018년 9월 19일 능라도 경기장에서 10여 만의 평양시민들 앞에서 연설한 내용을 놓고 보아도 그렇고, 당시 평양시민들이 보여준 자기 지도자에 대한 태도를 놓고 보아도 그렇고, 북 인민들의 사상감정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대북전단살포행위를 안보라인과 경찰이 비호하는 것을 묵인방치 두었다는 것은 심각한 신뢰의 손상이며, 북의 입장에서는 배신감이 들게하는 행위이다.
삐라내용에는 노무현 대통령도 조롱대상으로 들어가 있다. 이렇게 놓고 보면 문재인 대통령도 당사자일텐데 북이 보면 얼마나 한심해 보였겠는가.

그런데도 대북전단살포행위는 아직도 근절되지 않고 있다. 박상학 등은 22일 파주에서 대북전단을 날렸다고 발표했지만, 실제로는 강원도 홍천에서 발견되었다. 어쨌든 날리긴 날린 것이다. 통일부, 경기도 등이 법적 처벌, 고발 등을 진행하고 있지만, 탈북단체의 대북전단살포행위가 완전히 종식될 것이라는 확신은 없다. 지금 이 마당에 이자들이 계속 대북전달을 살포하는 행위가 자행되고 있는 상황 자체가 어이가 없다. 

이제 긴박한 남북정세는 전주곡이 끝나고 천둥번개가 몰아치는 본막으로 들어서고 있다.
남북연락선 차단,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 이후, 17일 조선중앙통신은 논평을 통해 “개성공업지구에서 울린 붕괴의 폭음이 북남관계의 총파산을 예고하는 전주곡으로 될 수도 있다”고 경고한 점에서 그렇다. 
같은 날 "우리는 남조선 당국의 태도를 지켜보면서 차후 처신, 처사 여부에 따라 연속적인 대적행동조치들의 강도와 결행시기를 정할 것"이라고 전하고, 구체적 행동내용을 조선인민군 총참모부 대변인 성명을 통해 발표했다. 이에 따라 “금강산관광지구와 개성공단에 연대급부대와 화력구분대 배치”, “철수한 비무장지대 초소 재배치”, “서남해상 전투근무체계로 격상과 군사훈련재개”, “전체 전선에서 대남삐라 살포”를 예고하고 실제로 하나둘씩 착수에 들어갔다.

정세는 엄중하다.
이러한 조치들이 하나둘씩 가시화되게 되면 남북관계와 모든 합의가 총파탄 날 수 있는 비상 상황이다.
현 상황은 갑자기 조성된 것이 아니라, 지난 2년간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의 총파산의 결과이다. 북은 “북남합의보다 《동맹》이 우선이고 《동맹》의 힘이 평화를 가져온다는 맹신이 남조선을 지속적인 굴종과 파렴치한 배신의 길로 이끌었다.”는 것을 겨냥하고 있다. “북남관계가 미국의 롱락물로 전락된것은 전적으로 남조선당국의 집요하고 고질적인 친미사대와 굴종주의가 낳은 비극”이라는 것이다.
최근 발간된 존 볼턴의 회고록은 주관이 반영된 것이긴 하지만 문재인 정부의 ‘남북관계와 북미관계의 선순환, 중재자, 촉진자론’이 결국 ‘미국의 의향에 따라 처신’한 것으로 되고 말았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앞으로 전개될 남북관계의 총파탄은 ‘평화적 분단관리론’의 환상이 철저하게 깨져나가면서 ‘외세추종은 곧 전쟁의 길’이고, ‘민족공조만이 평화의 길’이라는 것을 엄중하게 인식하는 과정으로 될 것이다.

지금 문재인 정부가 갑자기 ‘친미자주’에 입각한 ‘선비핵화 후남북관계론’, ‘한미동맹에 근거한 평화유지관리론’, ‘자주국방 안보론에 입각한 남북관계론’이라는 뿌리깊은 정책기조를 뒤바꿀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것을 바꿀 결단을 내려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퇴임 후 잊혀지는 대통령’으로 살기는 틀렸다. 조국의 하늘에 핵대결의 먹구름이 가득하고 중미전쟁의 신냉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조용한 퇴임을 준비하는 것은 민족과 촛불민중에 대한 배신으로 될 수 밖에 없다. 이것도 ‘운명’이다. 김대중 대통령의 철학과 경륜, 노무현 대통령의 용기와 돌파력을 자신의 것으로 삼고, 꾸준하고 완강한 문재인 대통령의 속심을 재구성하면 못할 것도 없으리라 본다. 게다가 촛불민중이 있지 않나. 

그러나 당장은 남북관계에서 신뢰를 회복하는 초보적인 비상조치부터 시급히 취해야 한다.
지금 때를 놓치면 연평도 포격사건 이후 가장 위험한 남북간 군사대치상황으로 가게될 것이고, 그 이후에는 그 무엇도 할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혹시나 북의 대남공세가 대미공세를 위한 사전정지작업이 아닌가 하는 식으로 안이하게 생각하면 안된다. 그건 그것이고 남북관계는 남북관계라는 것이 북의 입장이다. 오히려 미국에게 미국과 계산은 따로 할 것이니, 함부로 남북문제, 즉 남의 일에 끼어들지 말라고 하고 있지 않은가.

문재인 정부가 취해야할 긴급조치는 명확하다. 첫째로, 대북전단살포행위를 철저히 중단시키고 해당 탈북자들은 엄단하고 탈북단체들을 해산시키는 것이다. 둘째로 남북관계파탄의 원흉 한미워킹그룹을 해체하는 것이다. 셋째로 외교안보라인을 신속히 교체하고 분위기를 쇄신해야 한다. 넷째로 개성공단, 금강산관광, 철도도로연결사업 시행을 즉각 천명해야 한다. 철도도로연결사업은 코로나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면서도 진행할 수 있는 유리한 사업이다. 다섯째로 최근 군사적 갈등양상이 한미연합훈련의 재개로 이어지는 것을 막아야 한다.
이 같은 조치정도를 취하고서 특사를 보내도 보냈어야 했다. 7.4든, 7.27이든 이런 내용이 반영된 대통령 특별선언이 나와야 남북관계의 총파탄을 막을 수 있다.

비상시국에 임하여 국민들도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임진란과 구한말 나라를 구하기 위해 나섰던 의병들처럼, 방방곡곡에서 미국으로부터 독립을 위한 제2의 독립운동, 촛불의병으로 나서자. 7월 4일은 미국의 독립기념일이 아니라 미국으로부터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떨처나서는 제2의 독립운동이 타번지는 날로 만들자. 시국선언, 시국서명, 동네촛불 등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자. 모두다 ‘한미워킹그룹해체’를 외치며 남북관계 총파탄을 막아내고 포스트코로나의 시대를 평화번영통일의 세상으로 이어가자.

출처 : 현장언론 민플러스(http://www.minplus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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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관계 파탄막는 시작점은 '한미워킹그룹' 해체"

민주노총, 한미워킹그룹은 "美내정간섭 기지 '현대판 조선총독부'"
이승현 기자  |  shlee@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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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6.23  17:4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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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노총은 23일 청와대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남북관계 파탄을 막기 위해  '한미워킹그룹 해체와 남북합의 이행'을 촉구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일부 탈북자단체의 대북전단 살포를 계기로 남북관계 위기가 격화되고 있다.

민주노총은 23일 오전 가맹산하 대표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청와대 분수대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민주노총 100만 조합원들은 현재의 정세를 심각하게 여기고 있으며,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정부가 미국의 눈치를 보지 않고 남북합의를 즉각 실천해야 한다"고 밝혔다.

기자회견 참가자들은 기자회견문에서 먼저 역사적인 남북공동선언이 발표된지 2년이 지난 오늘날 남북관계가 파국으로 치닫게 된 까닭은 대북전단 살포 뿐만 아니라 문재인 정부가 남북합의 사항을 거의 이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더 이상의 남북관계 파탄을 막고 남북공동선언을 이행하려면 미국의 내정간섭에 단호하게 'NO'라고 말해야 한다. 그 시작이 한미워킹그룹 해체를 선언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남북관계가 파국으로 치닫자 한·미 당국은 최첨단 정찰기 글로벌호크와 핵공중지휘통제기 'E-4B' 훈련장면을 공개하고 한미합동군사훈련 개시 일정을 조율하는 등 한반도에 전쟁의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다고 우려를 표시했다.

이 절체절명의 위기를 막기 위해서는 한시가 급하다고 하면서 지금 당장 남북공동선언 정신으로 행동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명환 민주노총 위원장은 "역사적인 4.27판문점선언은 대북제재의 틀에 갇혀 단 한걸음도 전진하지 못했다. 대북전단 살포를 계기로 시작된 지금의 남북관계 파탄은 남북간 최소한의 신뢰도 구축되지 못해서 발생한 것"이라며, "지금이라도 이 파국을 막는 길은 판문점선언 등 남북합의를 즉각적으로 이행하고 실천해 당사자로서 책임을 다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4.27판문점선언이후 9.19평양공동선언, 남북군사합의가 발표되자 이에 당황한 미국이 더 이상의 남북관계 진전을 막기 위해 한미워킹그룹을 만들었다"고 하면서 "비일비재한 내정간섭을 자행하고 있는 한미워킹그룹은 즉시 해체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 김명환 민주노총 위원장 등 기자회견 참가자들이 남북합의 이행을 가로막는 한미워킹그룹, 대북전단 등을 '민족자주의 가위'로 잘라내는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권종오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위원장은 "지금까지 여러 남북공동선언이 있었지만 우리 정부가 제대로 이행한 선언이 없었으며, 지난해 아무런 조건도 없이, 대가도 없이 재개하겠다는 북측의 제안에 대해서도 제대로 응답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그 핵심적 이유는 미국의 내정간섭에 있다. 현대판 조선총독부로 불리는 한미워킹그룹을 즉각 해체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조상수 전국철도노조위원장은 "판문점선언에서 남북철도 현대화·연결 사업이 합의되어 북측은 대륙으로 가는 민족 철도에 대한 염원을 갖고 국가기간교통망의 속살을 보여주는 의지를 보였으나, 우리는 초기 공동조사 사업부터 유엔사의 방해가 있었고 조사 이후 국회와 언론 공개과정에서 물의가 있었다"고 언급했다.

간신히 진행된 공동조사 이후에도 남북철도연결·현대화 사업은 한미워킹그룹의 간섭과 방해로 인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 "문재인정부는 동아시아철도공동체를 만들어 이 지역에 번영과 평화를 일구겠다는 거창한 구상을 밝혔지만 실천은 너무 미미했다. 미국의 눈치를 보기에 급급해 담대하거나 자주적이지 못한 태도로 일관해 분노를 금할 수 없다"고 꼬집었다.

조 위원장은 "철도노조는 6.15에서 8.15기간까지 매주 전국 주요역사에서 대북제재 해제와 남북철도연결을 촉구하는 1인 시위를 전개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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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동안 부역자들 씨 말리겠다며 젖먹이까지 끌고 갔다

등록 :2020-06-23 05:00수정 :2020-06-23 0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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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70년] 학살, 잠들지 않는 기억
1951년 ‘아산 부역혐의 학살사건’
일제 폐탄광서 쏟아진 비녀·구슬…
발굴 유해 대다수가 여성·어린이
아산·천안 곳곳에 ‘보복살해’ 흔적
2018년 봄 충청남도 아산 배방읍 설화산 민간인 학살 유해발굴지에서 어린이 장난감으로 보이는 구슬이 발견됐다. 이곳에서는 6·25전쟁 당시 사망한 208명의 여성과 아이 등의 유해가 발굴됐다. 주용성 사진작가 제공
2018년 봄 충청남도 아산 배방읍 설화산 민간인 학살 유해발굴지에서 어린이 장난감으로 보이는 구슬이 발견됐다. 이곳에서는 6·25전쟁 당시 사망한 208명의 여성과 아이 등의 유해가 발굴됐다. 주용성 사진작가 제공
70년 전 한반도는 적의로 가득 찬 생지옥이었다. 적의 가족이기에 또는 적을 이롭게하거나 동조할 수 있다는 우려만으로 학살이 이뤄졌다. 전세가 역전되자 반대편에서 보복에 나섰다. 피해는 남녀노소 구분이 없었고, 친척끼리도 총부리를 겨눴다. 그런 야만의 세월 동안 이뤄진 민간인 학살로 최소 100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념 차이에서 시작한 한국전쟁은 사실 거대한 보복전쟁이었다. 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을 맞아 <한겨레>는 수많은 민간인 학살 가운데 덜 알려진 여성과 아이들이 희생된 사건에 주목했다. 참혹했던 사건과 함께 유해발굴사업 현주소, 2기 진실·화해위원회의 역할과 올바른 과거청산 해법 등을 2회에 걸쳐 싣는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반복된다.
구슬과 비녀.아이들이 죽던 겨울은 많은 눈이 내렸다. 1951년 1월이었다. 동네 친구들과 구슬치기를 하던 아이들이 엄마 손에 이끌려 폐탄광 부지까지 왔다. 겁을 먹은 아이들은 차마 울지 못했다. 온양경찰서 소속 경찰과 치안대의 엠(M)1·카빈이 200여명의 주민들을 향해 불을 뿜을 때, 엄마들이 아이들을 치마폭에 감쌌다. 아이들은 구슬을 손에 꼭 쥔 채 엄마와 함께 죽었다. 아이들은 사회주의가 뭔지 알지 못했다. 엄마와 아이들이 죽은 자리에서 비녀와 구슬이 발굴됐다. 이들은 죽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충남 아산시 배방읍 중3리 마을회관에서 20분 넘게 풀숲을 헤치고 도착한 야산 중턱. ‘부역혐의 사건’이라는 철제 표시판 하나가 이곳이 민간인 학살 현장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른바 아산지역 부역혐의 학살사건이다.‘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조사단’은 2018년 2월 말부터 4월 초까지 이곳에서 한국전쟁 당시 묻힌 것으로 추정되는 유해 208구를 수습했다. 조사 결과 어른 150명의 유해 중 131구(85%)가 여성이었고, 58구가 어린이 유해였다. 부녀자들이 착용한 (은)비녀 89점과 어린이 장난감, 학살에 사용된 M1·카빈총 탄피도 다수 발견됐다.발굴 작업에 참여한 홍수정 4·9통일평화재단 조사실장이 주변을 가리키며 말했다. “일제 때 폐탄광 구덩이에서 수십구의 유골이 뒤엉켜 발견됐고, 예쁜 은비녀와 꽃단추, 아이 신발 등도 함께 나왔어요. 다른 유해발굴 현장에서는 건장한 남성 유골이 대다수인데 이곳에선 여자와 아이들의 유골이 주로 발견돼 현장 관계자들도 많이 놀라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충남 아산 배방읍 설화산 폐탄광터에서 발견된 은비녀들.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 제공
충남 아산 배방읍 설화산 폐탄광터에서 발견된 은비녀들.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 제공
지난 2009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아산지역 부역혐의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실규명 결정을 했다. “1950년 9월 말부터 1951년 1월 초까지 김석남(金石男, 사건번호 다-117) 등 최소 77명 이상이 인민군 점령시기 부역했다는 혐의와 그 가족이라는 이유로 온양경찰서 소속 경찰과 치안대(대한청년단, 청년방위대 및 향토방위대, 태극동맹)에 의해 배방면 남리 배방산(성재산) 방공호, 배방면 수철리(세일) 폐금광, 염치면 대동리(황골) 새지기, 염치면 산양1구(남산말) 방공호, 선장면 군덕리 쇠판이골, 탕정면 용두리1구 뒷산, 그리고 신창면 일대 등에서 집단살해되었다.” 발굴된 유해는 진실화해위의 조사 결과보다 실제 피해가 더 컸다는 사실을 방증한다.아산과 천안 일대의 민간인들이 설화산으로 끌려와 집단학살됐다. 주변 마을과 거리가 떨어져 있어 학살 행위가 잘 드러나지 않고, 폐탄광 부지에 많은 구덩이가 파여 있어 주검을 묻기 쉬운 장소였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홍남화 전 민족문제연구소 아산지회장은 “진짜 부역 활동을 한 남성들은 다 도망간 뒤 남은 부인과 가족들만 억울하게 희생된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학살 현장”이라고 했다.
임현재씨가 설화산 민간인 학살 사건의 피해자 유해가 발굴된 터에서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옥기원 기자
임현재씨가 설화산 민간인 학살 사건의 피해자 유해가 발굴된 터에서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옥기원 기자
이 마을에 평생 살았다는 임현재(84)씨는 “어머니와 살던 예전 집이 폐탄광으로 가는 길목에 있어서 줄줄이 고개를 숙이고 걸어가는 여자와 아이들의 모습을 봤다”며 “한참 뒤 총소리가 빗발쳤고 군인들이 줄줄이 내려오는 소리가 들릴 때 어머니와 나는 겁에 질려 불을 끄고 이불 속에 숨어 있었다”고 말했다. “수년이 지난 뒤 소 먹일 풀을 베러 뒷산에 갔을 때 흙더미에서 쏟아지는 사람 유골을 보고 놀랐던 기억도 있고, 동네 개가 뒷산에서 사람 뼈를 물고 온 경우도 있었다”고 했다.아산지역 부역혐의 학살사건의 시작은 1950년 9월27일이었다. 인민군이 퇴각하자 충남 아산 염치면(현 염치읍)에는 대한청년단, 태극동맹 등 우익단체를 중심으로 마을 치안대가 급조됐다. “부역자들의 씨를 말리겠다”며 동네 주민들을 불러 모은 치안대는 낫과 삽 등을 이용해 부역 혐의자와 가족 등 80여명을 잔인하게 살해했다. 학살은 3일 동안 계속됐다. 시신들은 마을 공동묘지에 묻혔다. ‘새지기 부역혐의자 학살사건’이었다. 군경이 아산 지역에 배치된 시점은 10월1일이었다. 치안 부재의 상황에서 주민들에 의한 사적인 집단살해가 벌어진 것이었다.
6·25전쟁 당시 학살당한 피해자 후손과 이들의 좌익 혐의를 밀고하고 살해하는 데 앞장선 가해자 후손이 집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살고 있다. 전쟁 이전에는 두 집터와 주변 땅 모두가 피해자 가족 소유였지만, 가족이 몰살당한 뒤 대부분의 땅을 가해자 가족이 빼앗았다. 옥기원 기자
6·25전쟁 당시 학살당한 피해자 후손과 이들의 좌익 혐의를 밀고하고 살해하는 데 앞장선 가해자 후손이 집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살고 있다. 전쟁 이전에는 두 집터와 주변 땅 모두가 피해자 가족 소유였지만, 가족이 몰살당한 뒤 대부분의 땅을 가해자 가족이 빼앗았다. 옥기원 기자
당시 사건을 목격한 마을 주민 이아무개씨는 2008년 진실화해위 조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희생자들은 젖먹이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줄 세워져 마을 공동묘지 새지기로 끌려갔다. 죽이려고 가는 사람보다 죽으러 가는 사람들이 더 많았는데도 아무도 반항하지 못했다. 끌려가던 중 젖먹이를 업은 여자아이가 무성했던 콩밭으로 몸을 굴려 숨어 있다가 살아나오기도 했다. 그렇게 끔찍한 상황에서 살려고 하니까 젖먹이조차도 울지 않아 들키지 않고 용케 살았다. 끌려간 사람들은 애고 어른이고 할 것 없이 죽을 만큼 몽둥이에 맞은 다음 구덩이에 던져져 흙으로 덮어졌다. 미처 숨이 끊어지지 않은 사람들은 꿈틀거리며 생매장되었다.” 처형과 상관없는 주민들은 희생 장소로 몰려가 구경했다고 한다.새지기 사건은 부역자 처벌이 표면적 이유였지만, 내막에는 집성촌 내 친척 사이의 구원이 자리하고 있었다. 치안대는 홍사학씨가 부역을 했다는 이유를 들어 3대에 걸친 대가족 14명을 살해했다. 학살 주도자는 홍사학씨와 같은 홍씨 집안의 홍○○ 홍○○ 형제로, 동생은 인민군 점령기에 좌익 쪽에서 활동하다가 9·28 수복 직전 우익으로 전향해 좌익 혐의자를 체포하는 데 앞장섰던 인물이었다. 이들 홍씨 형제는 당시 마을 유지였던 홍사학씨 집안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홍사학과 그의 가족을 집단살해한 홍씨 형제는 홍사학의 남은 집과 땅, 세간살이를 모두 차지했다. 이때 마을의 채씨와 이씨 가족 수십명도 마을 공동묘지에서 몰살당했다.“세상이 언제 또 바뀔지 알고 그런 걸 말해.” 목격자인 이아무개(87) 할아버지는 70년 전 사건에 대해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사소한 감정으로 수십명의 일가족이 죽임을 당했던 그 미친 세월에 대해 말하는 것은 또다른 원한의 씨앗을 키우는 일이기 때문이었다.당시 학살을 자행한 가해자들은 모두 숨졌지만, 가해자 후손과 일부 살아남은 피해자 후손들이 지금도 한마을에서 마주 보고 살고 있다. 홍사학씨와 같은 문중인 홍남화 전 민족문제연구소 아산지회장은 “전쟁이 만든 좌우익의 갈등이 하루아침에 일가족을 몰살하고 친인척을 원수로 만들었다”며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지만 다시는 이런 아픔이 재발하지 않게 진실이 규명되고 기록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지난 10일 홍수정 4·9통일평화재단 조사실장이 한국전쟁 당시 마을 주민 간 학살이 자행된 충남 아산시 염치읍 새지기의 유해 매장지 일대를 설명하고 있다. 옥기원 기자
지난 10일 홍수정 4·9통일평화재단 조사실장이 한국전쟁 당시 마을 주민 간 학살이 자행된 충남 아산시 염치읍 새지기의 유해 매장지 일대를 설명하고 있다. 옥기원 기자
새지기 사건은 홍사학씨 양자 홍민선(74)씨가 2006년 진실화해위에 진상규명을 신청하면서 세상에 드러났다. 지난해 5월엔 유해발굴공동조사단이 발굴 작업도 진행했다. 당시 자원봉사자로 참여한 박꽃님씨는 “마을 주민들 간의 갈등이 남아 있어 주민 중 누구도 유해가 매장된 장소나 당시 상황을 말해주지 않아 발굴팀이 매우 고생했다”며 “유해 발굴 추정지가 마을 공동묘지와 밭으로 사용되면서 유해들이 많이 훼손돼 예상보다 적은 수의 유해가 발견됐다”고 설명했다. 발굴팀은 한달 남짓의 작업 끝에 훼손 상태가 심한 팔, 허벅지뼈 일부를 찾았고 조사 결과 한국전쟁 당시 사망한 7명의 유해인 것으로 판정됐다.아산 지역의 유해 매장지는 8곳으로 추정된다. 이 중 배방읍 설화산과 탕정면 용두1리, 염치읍 새지기 등 3곳만 발굴이 진행됐다. 염치읍 새지기에선 7명의 유해가 발굴됐지만, 탕정면 용두1리에서는 도로 공사 등으로 일대가 훼손돼 유해가 발견되지 않았다.
충남 아산 배방읍 설화산 민간인 학살 유해 발굴지에서 한국전쟁 당시 사망한 수십구의 유해가 발견됐다. 주용성 사진작가 제공
충남 아산 배방읍 설화산 민간인 학살 유해 발굴지에서 한국전쟁 당시 사망한 수십구의 유해가 발견됐다. 주용성 사진작가 제공
하지만 배방읍 성재산같이 유해가 나올 가능성이 있는 현장도 남아 있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김희열(85) 할아버지는 “북한군이 시켜서 (성재산에서) 방공호를 팠고, 국군이 아산을 수복한 뒤 그곳에 많은 사람이 묻혔다. 부역혐의자들이 줄줄이 잡혀가는 모습을 보고 총소리도 들었다”고 증언했다. 행정안전부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 누리집에 게시된 ‘아산 부역혐의 사건’ 보고서에도 “성재산 방공호에서 많은 사람이 죽었고, 이를 목격했다”는 다수의 증언이 담겼다.잔인했던 학살의 흔적은 70년이란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끌려온 사람들이 학살된 공동묘지는 수풀이 무성했고, 부역혐의자들을 파묻었다는 폐탄광 구덩이들은 모두 유실돼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마을 입구 팔각정에서 만난 주민들은 “동네 뒷산에서 많은 사람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항상 마음이 불편했는데, 유해를 발굴하고 위령제를 지내서 이제야 마음의 짐을 조금 덜었다”고 말했다.홍남화 전 지회장은 “당시를 증언할 수 있는 어른들이 몇명 살아 계시지 않아 진실을 규명할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며 “더 늦기 전에 이념 학살의 아픈 역사를 규명하고, 억울하게 죽어간 유해들을 발굴하는 것이 우리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한 토대”라고 강조했다.아산(충남)/옥기원 기자 ok@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area/area_general/950518.html?_fr=mt1#csidx169dfdab51c824eb403ba5a8b6932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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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論] 미래통합당의 국회 보이콧, 국민의 야당 보이콧 부를 것

[時論] 미래통합당의 국회 보이콧, 국민의 야당 보이콧 부를 것
 
 
 
임두만 | 2020-06-22 09:50:59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21대 국회가 개원 되었으나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고 있다. 미래통합당은 국회의장이 일방적으로 배치한 상임위원 백지화를 통한 법사위위원장 선임을 철회하지 않는 한 국회에 들어올 수 없다고 국회를 보이콧 중이다. 반면 더불어민주당은 민의가 ‘일하는 국회’라며 일방국회도 불사하고 있다. 

▲국회의 야경 ©신문고뉴스

이는 국회를 민심이 담긴 민의의 전당이라고 말하면서도 선거에 나타난 민의는 간데 없는 모습이다. 특히 야당은 ‘관행’과 ‘협치’를 앞세워 다수 여당의 국회 통법부 화를 비판한다. 그리고 다수 여당의 통법부 화를 막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야당이 법사위원장을 맡아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하지만, 이는 반대로 뒤집으면 소수 야당이 법사위의 ‘권한’인 법안의 자구와 체계 심사 및 수정을 고리로 정부여당의 국정운영, 나아가 국회운영에 제동을 걸겠다는 생각을 노골적으로 내비친 것이 된다. 이에 이 같은 노골적 의도에 여당은 더더욱 법사위를 내줄 수 없다는 방침을 굳힌 것이다.

그런데 국회 법사위는 야당의 정부여당 견제 기관이 아니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가 국회의원 또는 정부가 제출한 법안에 대해 자구나 체계의 심사 수정을 맡게 된 것은 제헌국회부터다. 당시 국회의원들 중 법조인들이 많지 않고, 또 국회의원 보좌진들도 법조 출신자들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즉 법조인 보좌진도 없는 비 법조인 출신 국횐의원들이 제출한 법안을 법에 정통한 법조인 출신들로 꾸려진 법사위에서 자구나 체계의 심사 수정을 통해 ‘위헌법률’의 본회의 통과를 막자는 의도였다고 본다. 그래서 법사위는 제헌국회부터 사실상 상원 노릇을 해왔다.

따라서 소수 야당으로선 다수 여당 일변도의 ‘하원’운영을 ‘상원 의장’격인 ‘법사위원장’을 맡아 국회의 여당 일방주의를 막아야 한다고 생각할법하다. 그리고 지난 국회들에서 야당이 법사위원장을 맡았던 사례 또한 그 같은 의미가 담긴 것으로 해석, 이를 ‘관행’이라고 대국민 여론전을 벌였다.

하지만 이 같은 야당의 여론전은 여당은 물론 국민들에게도 먹히지 않고 있다. 이는 국회 역사에서 소수 야당=법사위원장이란 ‘관행’이 아니어서 국민들이 야당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지 않기 때문이다.

▲ 13대 국회 이후 법사위원장 분포도

실제 1987년 개헌에 따라 소선거구제로 치러진 1988년 4월 총선으로 구성된 13대 국회 이후 15대 국회까지는 법사위원장은 아주 ‘당연하게’ 다수 여당이었던 민정당 만자당 신한국당 한나라당 차지였다.

이후 16대 국회에서도 김대중 정권 하의 야당인 한나라당은 국회의 다수를 차지했다며 ‘민의’를 주장, 국회의장부터 법사위원장을 모두 갖겠다고 하다 국회의장을 양보하고 법사위원장을 차지했다.

‘소수 야당’이 국회 법사위원장을 맡은 것은 그 이후다. 노무현 정권 당시인 17대 총선은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원내 과반을 차지하며 승리했다. 하지만, 법사위원장은 야당인 한나라당에 내줬다. 전반기 최연희, 후반기 안상수 위원장 등 전후반기 모두였다.

이후 18대 총선은 이명박 집권 후 한나라당이 압승을 거뒀다. 이때 앞서 17대의 전례에 따라 법사위원장은 소수야당인 민주당이 맡았다. 전반기 유선호, 후반기 우윤근 위원장이었다.

이는 19대 총선에서도 이어졌다. 당시 여당인 새누리당이 연승으로 다수당이 되었다. 법사위원장은 소수 야당인 민주당 몫이었다. 전반기 박영선, 후반기 이상민 위원장이었다.

그러나 이는 박근혜 정권이던 20대 국회 전반기에서 깨졌다. 20대 국회에서 당시 여당인 새누리당이 ‘소수’가 되었다. 그런데 법사위원장은 ‘소수 여당’ 새누리당의 권성동 의원이었다.

그런데 2000년 16대에는 반대로 당시 '다수 야당'이던 한나라당이 법사위위원장을 차지했다.

즉 대통령 임기 중에 치러진 총선에서 여당이 소수가 된 적이 2000년 김대중 정권과 2016년 박근혜 정권 2차례인데 법사위원장은 모두 현 통합당 계열 정당이 차지한 것이다.

이로 보면 결국 당시의 정치권 상황 문제이지 권력견제를 위해 야당이 법사위원장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관행’은 아니란 것이 확인된다.

특히 소선거구제로 치러진 13대 국회 이후 지난 32년 동안의 헌정사에서 다수와 소수를 떠나 국회 법사위원장은 현 통합당 계열 정당이 24년을 장악했고, 민주당 계열 정당 소속으로는 단 8년을 맡았다.

따라서 ‘관행’인데 그런 관행을 다수 여당이 존중하지 않은 것은 ‘협치’를 포기한 것이라고 따지는 것은 맞지 않다. 이에 여론 또한 통합당에 유리하지 않게 흐르는 것이다.

그런데 상황이 이러함에도 통합당은 당 내외에서 의윈직 사퇴, 국회 전면 보이콧, 정기국회까지 국회불참 등의 강경론이, 남북관계와 코로나 민생을 고리로 국회 참여라는 온건론을 압도하고 있다.

▲20대 국회 당시 여상규 법사위원장이 모니터를 보고 있다. 법사위 국감현장 중계화면 갈무리 ©임두만

지난 총선 전 황교안 대표 체제의 자유한국당은 강경론 일변도였다. 국회 보이콧은 물론 국회 의사당 내의 농성, 황 대표의 삭발과 의원들의 릴레이 삭발, 청와대 앞 황 대표 단식농성 등 야당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투쟁수단을 동원했다. 국회는 하염없이 공전되었고, 국민들은 국회 무용론으로 비판했다. 그럼에도 통합당은 이 전면투쟁을 총선 정국으로 끌어들여 총선이슈화를 노렸다.

하지만, 이에 대한 국민들의 답은 민주당에 국회의석 3/5이라는 압도적 다수를 몰아준 것이었다. 국회 무용론이 나올 정도의 강경론에 국민들이 통합당 무용론으로 답한 것이다.

통합당은 2022년 대권 탈환을 노리고 있다. 그들은 지금 경제도 외교도 남북관계도 이대로 문재인 정권에게 맡기면 나라가 거덜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대권을 탈환, 거덜나기 전에 나라를 다시 살리겠다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지금의 통합당에 그 같은 역량이 있다고 믿는 국민은 적다.

남북관계가 최악으로 빠진 가장 최근의 여론조사인 6월 3주차 리얼미터 여론조사에서 통합당은  27.5%(0.4%p하락)의 지지율로  41.4%(0.9%p하락)의 지지율인 민주당에 13.9%p차이로 밀리고 있다.(조사패널 1,507명, 표본오차 95% 신뢰수준 ±2.5%p, 자세한 내용 리얼미터 홈페이지(http://www.realmeter.net/category/pdf/) 또는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http://www.nesdc.go.kr)를 참조)

▲자료 및 도표출처 : 리얼미터 홈페이지

이 여론조사 결과에 국민들의 답이 있다.

이 조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국정지지율은 전 주에 비해 무려 4.6%p가 빠진 53.6%로 나타났다. 다분히 북한의 남북연락사무소 폭파 등 남북관계가 최악으로 흐르고 있는 요인 때문이다. 이에 민주당 지지율도 0.9%p하락했다. 어쩌면 당연한 여론의 흐름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통합당의 지지율은 올라야 한다. 그런데 통합당도 0.4%P하락했다. 국민들이 문재인 정권이 나라를 거덜내니까 통합당이 받아서 살려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래서다. 지금이라도 통합당은 국회로 돌아와야 한다. 돌아와서 정책대결로 승부를 겨뤄야 한다. 국회가 민의의 전당이라고 말하려면 현재의 민의에 따르는 것은 국회 정상화다. 명분, 잠시의 ‘쪽팔림’이 부끄러워 계속 강경론으로 간다면 추후 선거에서 통합당은 아주 버림을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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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관계 비상사태, 비상조치가 필요하다

  • 장창준 정치학 박사
  •  
  •  승인 2020.06.22 14:09
  •  
  •  댓글 1
    •  
 
무엇이 문제인가

발단은 삐라였다. 4월부터 5월 말까지 세 차례 ‘대북전단’이라는 명목으로 삐라가 살포되었고, 이것이 북측의 감정을 건드렸다.

지난 5월 31일 《탈북자》라는 것들이 전연일대에 기여 나와 수십만장의 반공화국 삐라를 우리측 지역으로 날려보내는 망나니짓을 벌려놓은 데 대한 보도를 보았다. 문제는 사람값에도 들지 못하는 쓰레기들이 함부로 우리의 최고존엄까지 건드리며 《핵문제》를 걸고 무엄하게 놀아댄 것이다.

<6월 4일 김여정 담화>

그러나 삐라 살포 문제만이었다면 사태가 이만큼 악화되지 않았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듯이 삐라 살포가 한두번 있었던 일인가. 사태가 악화된 데는 6월 4일 김여정 담화에 대한 통일부 브리핑이 결정적이었다.

정부는 전단살포가 접경지역 긴장 조성으로 이어진 사례에 주목해서 여러 차례 전단살포 중단을, 중단에 대한 조치를 취해 왔습니다.

실제로 살포된 전단의 대부분은 국내 지역에서 발견되며 접경지역의 환경오염, 폐기물 수거부담 등 지역주민들의 생활여건을 악화시키고 있으며 남북 방역협력을 비롯하여 접경지역, 접경지역의 국민들의 생명·재산에 위험을 초래하고 하는 행위는 중단되어야 합니다.

정부는 이러한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접경지역에서의 긴장 조성 행위를 근본적으로 해소할 수 있는 실효성 있는 제도개선 방안을 이미 검토하고 있습니다.

이상으로 대북전단 문제에 관한 정부 입장을 말씀드렸습니다.

<6월 4일 통일부 대변인 브리핑>

통일부 대변인의 브리핑을 보면 북측에 대한 고려는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접경지역의 환경오염, 남측의 폐기물 수거부담, 지역주민의 생활여건, 접경지역 주민의 생명·재산의 위험만을 거론했을 뿐이다.

통일부 브리핑을 접한 북측은 6월 5일 통일전선부 대변인 담화를 발표하는데 제목이 “적은 역시 적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였다. 그리고 6월 8일 김여정 제1부부장, 김영철 당 부위원장 등이 참여한 대남사업 부서들의 사업총화회의를 열고 “대남사업을 철저히 대적사업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배신자들과 쓰레기들이 저지른 죗값을 정확히 계산하기 위한 단계별 대적사업 계획들을 심의”했다.

6월 11일 “북남관계는 이미 수습할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장금철 통일전선부장의 담화, 6월 12일 김여정 제1부부장의 담화는 대남 사업을 대적사업으로 전환시킨 후의 대책을 발표하는 성격이었다.

만약 우리 정부가 삐라 살포에 대해 응당한 조치를 취하고 판문점선언 합의 정신에 기초해 이 문제를 북측과 협의하려는 진정한 의사를 피력했다면 사태는 이만큼 악화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6월 17일 김여정 제1부부장 명의의 담화를 다시 한번 정확히 읽어볼 필요가 있다.

쓰레기들이 저지른 반공화국삐라살포행위와 이를 묵인한 남조선당국의 처사는 추상적인 미화분식(美化粉飾 낡은 것, 뒤떨어진 것을 그럴듯하게 꾸며 본질을 가리다.)으로 어물쩍해넘어갈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북남관계의 기초이며 출발점인 상호존중과 신뢰를 남측이 작심하고 건드렸다는데 근본문제가 있다.

‘미화분식’은 좋지 않은 것을 그럴 듯 하게 꾸며 본질을 가린다는 뜻이다. 삐라 살포 문제를 대하는 태도는 남북 상호존중과 신뢰의 문제라는 북측의 시각을 적시한 것이다.

몇몇 남측 공직자들의 잘못된 인식에 대해

통일부, 국정원, 청와대의 잘못된 인식은 이미 많은 비판이 제기되었기에 재론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대북 사업 주무부서의 소극적 태도를 비판해 왔던 몇몇 공직자들의 부적절한 발언은 언급해야 하겠다.

한 인사는 최근 북의 격앙된 자세를 북측이 김여정 제1부부장을 김정은 위원장급으로 그 지위를 격상시키는 과정에서 나온 행동이라고 분석한다. 조선인민군에 지시를 내릴 수 있는 권한은 오직 조선인민군 총사령관인 김정은 위원장밖에 없는데, 최근 김여정 제1부부장이 총참모부에 대남 군사행동에 대한 지시를 내렸다는 것이다. 즉 북이 최근 강경한 자세로 나오는 데는 분명 삐라 살포가 중요한 요소이긴 하지만 김여정 부부장의 지위 급부상이라는 북한 내부의 정치 상황도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남조선당국이 궁금해할 그다음의 우리의 계획에 대해서도 이 기회에 암시한다면 다음번 대적행동의 행사권은 우리 군대 총참모부에 넘겨주려고 한다.

<6월 13일 김여정 담화>

그러나 이같은 분석은 타당하지 않다. 김여정 제1부부장은 대남사업을 총괄한다.(아마도 지난 해 말 전원회의에서 이같은 결정이 내려진게 아닐까 싶다.) 이번에 총참모부에 내린 지시는 대남사업을 총괄하는 당적 위치에서 총참모부에 대남사업에 대한 군사적 대책을 지시한 것이다.

그런데 6월 17일 총참모부 대변인의 발표에 따르면 자신들이 계획하고 있는 ‘대적군사행동’을 김여정 제1부부장이 아닌 “조선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에 비준을 제기하겠다고 했다. 김여정 부부장이 비준하는 것이 아니다. 2017년 김정은 위원장이 조선인민군 전략군사령부에 괌포위사격 검토 지시를 내리고, 김락겸 전략군사령관에게 직접 보고를 받은 것과는 다르다. 따라서 최근 김여정 부부장이 대남사업 전면에 나서고 있고, 총참모부에 대남 군사적 대책을 지시하고 있다는 현상을 갖고 김여정의 지위가 김정은 위원장 급으로 부상하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설령 북측이 김여정 제1부부장을 김정은 위원장급으로 지위를 격상시키는 것이 사실이라고 가정 하더라도 여전히 남는 문제가 있다. 만약 지금과 같은 정반대의 경우 즉 남북 관계가 급속히 개선되는 상황이 발생하는 경우에도 김여정 제1부부장의 지위 격상은 설명력을 제공한다. 즉 “김여정 제1부부장을 김정은 위원장급으로 지위를 격상시키기 위해 북측이 남북 관계 개선에 나서고 있다”는 설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김여정 부부장이 지위 격상은 남북 관계 개선에도, 남북관계 악화에도 설명 변수가 된다. 정반대의 경우 모두에 적용되는 것은 변수가 아니라 상수이다.

또 한 명의 인사는 문재인 정부가 그동안 트럼프 정부에게 북한에 대한 체제보장을 해 줄 것을 여러차례 설득했으나 트럼프 정부가 이를 거부하고 있다면서, “북한은 이같은 남측 당국의 노력과 불가항력적인 측면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즉 문재인 정부가 안하는 것이 아니라 못하고 있는 것인데 북측이 지나치게 남측 당국에 대한 공세 수위를 높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남측이 전단살포를 금지하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지만 북측 당국 역시 남측의 어려운 처지를 이해하고 행동을 자제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같은 인식은 현실의 변화를 반영하지 못하는 구태의연한 것이다. 2017년 이전 즉 북측이 국가핵무력을 보유하기 전까지는 미국이 북의 체제를 보장하는 ‘선의’가 필요했다. 그러나 2017년 11월 화성 15형 발사로 인해 북측은 사정거리 13,000km ICBM 개발에 성공했음을 보여주었다. 북한과 미국 사이에 “공포의 핵균형”이 이뤄진 것이다. 따라서 북측의 ICBM 보유 이후 북에 대한 체제보장은 미국이 ‘선의’를 베풀 영역이 아니다. 북의 국가핵무력이 북의 체제를 보장하는 것이다. 미국에게 대북 체제 보장 하라는 문재인 정부의 대미 외교는 헛다리짚는 것이다.

설령 이같은 상황 변화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위의 시각은 남북관계를 북미관계에 종속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미국 정부의 ‘선의’가 없으면 남북 관계는 발전할 수 없다는 사고이기 때문이다.

최근 북의 격앙된 반응이 북측의 내부 요인이라는 것은 설명 변수가 될 수 없다. 지금의 문제는 삐라 살포 행위와 남측 당국의 무책임한 대처에 100% 원인이 있다.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이 강구되지 않는다면 남북 관계는 악화일로를 걷게 될 것이며 군사적 충돌로까지 비화될 가능성이 높다.

판문점 선언 이후 문재인 정부의 할 일은 ‘대북 체제 보장’이라는 미국의 ‘선의’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었다. 트럼프 정부가 ‘선의’를 베풀지 않고 있다는 사고는 판문점선언을 이행하지 않는 자신의 잘못을 미국 탓으로 돌리려는 무책임한 발상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문재인 정부가 이제라도 할 일은 판문점선언 이행을 통해 허물어진 남북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이 되어야 한다.

북측은 왜 강경하게 나오고 있나: 북의 ‘티포탯’ 전략

남북연락사무소를 폭파시킨 북측의 행동에 대해 많은 이들이 도를 넘은 것으로 이해하고, 분노를 표출하기도 한다. 그같은 분노는 충분히 이해된다. 그러나 좀 더 차분히 전개 과정을 살펴보면 북의 행동은 이미 충분히 예견되었던 것이다. 남측의 반응 여하에 따라 연락사무소 파괴라는 극단적 행동은 막을 수 있었다. 문재인 정부는 삐라 살포에 대한 북측의 반응을 지나치게 안일하게 대했고, 사실상 북측의 감정을 무시하는 것으로 일관했다.

북측의 행동은 티포탯의 전형을 보여준다. 티포탯은 상대방이 약속을 지키면 나도 약속을 지키고, 상대방이 배신하면 나도 배신한다는 것을 뜻하는 게임 이론이다.

북측이 지난해부터 판문점선언 이행에 소극적인 남측의 태도에 대한 불만을 여러차례 피력한 바 있다. 김정은 위원장이 직접 금강산관광 시설의 철거를 지시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다. 남북관계 개선의 여지를 남겨두고 있었다고 봐야할 것이다.

올해 들어와서도 그같은 기조는 유지되었다. 김여정 제1부부장 명의의 첫 담화(1차)가 발표된 것은 3월 3일이다. 바로 전날 북측은 화력타격훈련을 했고, 여기에 대해 청와대는 국가안보실장 주재로 긴급 관계부처장관 회의를 열고 “북한의 행동이 한반도 군사적 긴장 완화 노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유감을 표명하고, 발사 중단을 촉구한 것에 대한 반응이었다.

 

청와대의 저능한 사고방식에 경악을 표한다

김여정 당중앙위원회 제1부부장 담화

 

불에 놀라면 부지깽이만 보아도 놀란다고 하였다. 어제 진행된 인민군전선포병들의 화력전투훈련에 대한 남조선 청와대의 반응이 그렇다. 우리는 그 누구를 위협하고자 훈련을 한것이 아니다. 나라의 방위를 위해 존재하는 군대에 있어서 훈련은 주업이고 자위적행동이다.

그런데 남쪽 청와대에서 《강한 유감》이니,《중단요구》니 하는 소리가 들려온것은 우리로서는 실로 의아하지 않을수 없다.<중략>

 

남의 집에서 훈련을 하든 휴식을 하든 자기들이 무슨 상관이 있다고 할 말 못할 말 가리지 않고 내뱉는가 하는 것이다. 나는 남측도 합동군사연습을 꽤 즐기는편으로 알고있으며 첨단군사장비를 사오는데도 열을 올리는 등 꼴보기 싫은 놀음은 다하고있는것으로 안다.<중략>

 

우리가 남측더러 그렇게도 하고 싶어하는 합동군사연습놀이를 조선반도의 긴장완화노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중단할것을 요구한다면 청와대는 어떻게 대답해나올지 참으로 궁금하다.<중략>

쥐여짜보면 결국 자기들은 군사적으로 준비되여야 하고 우리는 군사훈련을 하지 말라는 소리인데 이런 강도적인 억지주장을 펴는 사람들을 누가 정상상대라고 대해주겠는가.<후략>

그러나 이 때까지만 해도 북측은 불만을 표출하는 정도였다. 또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코로나19와 싸우고 있는 우리 국민에게 위로의 뜻을 전”하고, “남녘 동포들의 소중한 건강이 지켜지길 빌”며 “문재인 대통령을 조용히 응원하겠다”는 내용의 친서를 보냈다. 청와대가 친서 받은 사실을 3월 5일 공개했으나 아마도 3월 3일 김여정 담화 직전이거나 직후에 보낸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 위원장이 직접 나서 남북 관계를 관리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후 삐라 살포가 세 차례 이뤄졌고, 6월 4일 김여정 제1부부장의 두 번째 담화가 나온 후 남북관계 상황은 급속하게 악화되었다. 다시 한번 6월 4일 김여정 담화를 살펴본다.

스스로 화를 청하지 말라

김여정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의 담화

 

<전략>

태묻은 조국을 배반한 들짐승보다 못한 인간추물들이 사람흉내를 내보자고 기껏 해본다는짓이 저런짓이니 구린내나는 입건사를 못하고 짖어대는것들을 두고 똥개라 하지 않을수 없다. 똥개들은 똥개들이고 그것들이 기여다니며 몹쓸짓만 하니 이제는 그 주인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 때이다.

 

가장 부적절한 시기를 골라 가장 비렬한 방식으로 《핵문제》를 걸고들면서 우리에 대한 비방중상을 꺼리낌없이 해댄 똥개,쓰레기들의 짓거리에 대한 뒤감당을 할 준비가 되여있는지 남조선당국자들에게 묻고싶다.<중략>

 

남조선당국은 군사분계선일대에서 삐라살포를 비롯한 모든 적대행위를 금지하기로 한 판문점선언과 군사합의서의 조항을 결코 모른다 할수는 없을 것이다. 북남사이에 적대관계가 아무리 뿌리깊고 동족에 대한 적의가 골수에 차있다고 해도 어느 정도는 분별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중략>

 

얼마 있지 않아 6.15 20돐을 맞게 되는 마당에 우리의 면전에서 꺼리낌없이 자행되는 이런 악의에 찬 행위들이 《개인의 자유》요,《표현의 자유》요 하는 미명하에 방치된다면 남조선당국은 머지않아 최악의 국면까지 내다보아야 할 것이다.<중략>

 

만약 남조선당국이 이번에 자기 동네에서 동족을 향한 악의에 찬 잡음이 나온데 대하여 응분의 조처를 따라세우지 못한다면 그것이 금강산관광페지에 이어 쓸모없이 버림받고있는 개성공업지구의 완전철거가 될지,있어야 시끄럽기밖에 더하지 않은 북남공동련락사무소페쇄가 될지,있으나마나한 북남군사합의파기가 될지 하여튼 단단히 각오는 해두어야 할 것이다.

 

선의와 적의는 융합될수 없으며 화합과 대결은 량립될수 없다. 기대가 절망으로,희망이 물거품으로 바뀌는 세상을 한두번만 보지 않았을터이니 최악의 사태를 마주하고싶지 않다면 제할일을 똑바로 해야 할 것이다.

<6월 4일 김여정 담화>

다소 거칠긴 하지만 남조선 당국이 삐라 살포 문제에 대해 “응분의 조처”를 취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선의와 적의는 융합될 수 없으며, 화합과 대결은 량립될 수 없다”는 대목이다. 삐라 살포를 방치하는 행위는 ‘적의’의 표현이고, ‘대결’로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담화에 대해 통일부는 즉각적인 반응을 내놓았으나 앞서 설명했던 것처럼 북측에 대한 고려는 전혀 없었다. 6월 5일 통일전선부가 나서서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다.

적은 역시 적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통일전선부 대변인담화

 

<전략>

이러한 우리 인민의 격해진 감정을 담아 김여정제1부부장은 지난 4일 담화를 내고 쓰레기들과 이를 방치한 남조선당국이 사태의 엄중성과 파국적후과를 깊이 깨닫고 할바를 제대로 하라는 의미심장한 경종을 울렸다. 그런데 이를 대하는 남쪽동네의 태도가 참으로 기괴하다.<중략>

 

놀라운것은 《통일부》 대변인이 《탈북자》들이 날려보낸 삐라의 대부분이 남측지역에 떨어져서 분계연선 자기측 지역의 생태환경이 오염되고 그곳 주민들의 생명과 생활조건에 악영향을 미치기때문에 삐라살포가 중단되여야 한다고 가을뻐꾸기같은 소리를 내고있는것이다.<중략>

 

그 어디에도 조금이나마 미안한 속내라고는 그림자도 찾아볼수 없고 다시는 긴장만을 격화시키는 쓸모없는짓을 저지르지 않겠다는 의지도 보이지 않는다.<중략>

 

김여정제1부부장은 5일 대남사업부문에서 담화문에 지적한 내용들을 실무적으로 집행하기 위한 검토사업에 착수할데 대한 지시를 내렸다. 남조선에서 공개적으로 반공화국삐라를 날려보낸것이 5월 31일이지만 그전부터 남측의 더러운 오물들이 날아오는것을 계속 수거하며 피로에 시달려오던 우리는 더이상 참을수 없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적은 역시 적이라는 결론을 더욱 확고히 내리였다.<중략>

 

첫 순서로 할 일도 없이 개성공업지구에 틀고앉아있는 북남공동련락사무소부터 결단코 철페할 것이며 련속 이미 시사한 여러가지 조치들도 따라세우자고 한다.<중략>

 

우리도 남측이 몹시 피로해할 일판을 준비하고있으며 인차 시달리게 해주려고 한다.

벌어지고있는 사태를 직시하면서 대결의 악순환속에 갈데까지 가보자는것이 우리의 결심이다. 어차피 날려보낼것,깨버릴것은 빨리 없애버리는것이 나을것이라는것이 우리의 립장이다.

<6월 5일 통전부 대변인 담화>

통전부 대변인 담화가 통일부의 브리핑에 대한 반응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앞서 설명한 것처럼 6월 8일 대남사업 부서들의 사업총화회의를 열고 대적사업으로 전환하는 결정을 내린다. 6월 4일 통일부 대변인의 브리핑이 대적사업으로 전환하는 데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6월 13일 세 번째로 발표된 김여정 제1부부장의 담화는 대남사업을 대적사업으로 전환된 것을 공개한 것이고 이후 행동 계획을 예고한 것이었다.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김여정제1부부장 담화

 

<전략>

배신자들과 쓰레기들이 저지른 죄값을 깨깨 받아내야 한다는 판단과 그에 따라 세운 보복계획들은 대적부문 사업의 일환이 아니라 우리 내부의 국론으로 확고히 굳어졌다. 그것들이 어떤 짓을 했는지,절대로 다쳐서는 안될 무엇을 잘못 다쳐놓았는지를 뼈아프게 알게 만들어야 한다.

<중략>

확실하게 남조선것들과 결별할 때가 된 듯 하다. 우리는 곧 다음단계의 행동을 취할 것이다. 나는 위원장동지와 당과 국가로부터 부여받은 나의 권한을 행사하여 대적사업 련관 부서들에 다음 단계 행동을 결행할 것을 지시하였다.

 

멀지 않아 쓸모없는 북남공동련락사무소가 형체도 없이 무너지는 비참한 광경을 보게 될 것이다.

 

남조선당국이 궁금해할 그다음의 우리의 계획에 대해서도 이 기회에 암시한다면 다음번 대적행동의 행사권은 우리 군대 총참모부에 넘겨주려고 한다.

<후략>

대적 사업 전환 이후 1차 행동으로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를 예고했다. 그리고 이날 바로 폭파 준비 작업에 착수했고, 이같은 사실을 국정원은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6월 15일까지 아무런 대책을 강구하지 않았다. 아마도 정의용 안보실장과 서훈 국정원장을 대북 특사로 파견한다는 결정을 내리고 북에 타진한 것은 6월 15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북측은 이같은 남측의 움직임을 보고 6월 16일 폭파를 단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6월 4일 통일부 브리핑에서 제시된 입장에서 어떤 변화도 없다는 판단을 했던 것이고, 결국 특사가 오더라도 남북관계의 근본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한 이후 6월 17일 김여정 제1부부장의 네 번째 담화가 발표되었다.

철면피한 감언리설을 듣자니 역스럽다

김여정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담화

 

쓰레기들이 저지른 반공화국삐라살포행위와 이를 묵인한 남조선당국의 처사는 추상적인 미화분식으로 어물쩍해 넘어갈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북남관계의 기초이며 출발점인 상호존중과 신뢰를 남측이 작심하고 건드렸다는데 근본문제가 있다.<중략>

 

거듭 부언하건대 우리의 존엄의 대표자이신 위원장동지를 감히 모독한 것은 우리 인민의 정신적 핵을 건드린 것이며 그가 누구이든 이것만은 절대로 추호도 용납할수 없다는 것이 전인민적인 사상감정이고 우리의 국풍이다.<중략>

 

요사스러운 말장난으로 죄악을 가리워 버리고 눈앞에 닥친 위기나 모면하겠다는 것인데 참으로 얄팍하고 어리석은 생각이다. 신뢰가 밑뿌리까지 허물어지고 혐오심은 극도에 달했는데 기름발린 말 몇마디로 북남관계를 반전시킬수 있겠는가.<중략>

 

항상 연단이나 촬영기,마이크앞에만 나서면 마치 어린애같이 천진하고 희망에 부푼 꿈같은 소리만 토사하고 온갖 잘난 척, 정의로운 척, 원칙적인 척하며 평화의 사도처럼 처신머리 역겹게 하고 돌아가니 그 꼴불견 혼자 보기 아까워 우리 인민들에게도 좀 알리자고 내가 오늘 또 말폭탄을 터뜨리게 된 것이다.

 

어쨌든 이제는 남조선당국자들이 우리와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나앉게 되었다.<후략>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북측은 남측의 반응에 따라 대응 수위를 높였다. 만약 6월 4일 통일부가 판문점선언 정신에 기초하고 북측의 사상감정을 고려해서 삐라 문제를 대하는 입장을 발표했다면 대적사업으로의 전환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만약 6월 13일 김여정 부부장의 세 번째 담화에 대해 좀 더 엄중한 상황 인식을 하고 적절한 대처를 했다면 6월 16일 공동연락사무소 폭파는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남측 당국의 처사는 너무나 안일했고 너무나 무책임했다.

아마도 “북한은 폭파하지 못할 것이다”, “말폭탄을 내놓지만 결국 남북 대화의 극적 효과를 높이기 위한 것이다”와 같은 몰정세적인 판단이 작동한 결과였으리라. 최고존엄에 대한 북측의 사상감정과 티포탯 전략을 이해하지 못하면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될 것이다.

문재인 정부, 다음과 같은 비상조치를 취하라

공동연락사무소 폭파 이후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 조선인민군 총참모부 대변인의 발표이다. 6월 17일 발표된 총참모부의 입장은 아래와 같다.

우리 군대는 당과 정부가 취하는 모든 대내외적 조치들을 군사적으로 철저히 담보할 것이다

 

<전략>

1 . 우리 공화국 주권이 행사되는 금강산관광지구와 개성공업지구에 이 지역방어임무를 수행할 련대급부대들과 필요한 화력구분대들을 전개하게 될 것이다.

 

2. 북남군사합의에 따라 비무장지대에서 철수하였던 민경초소(감시초소, GP)들을 다시 진출전개하여 전선경계근무를 철통같이 강화할 것이다.

 

3. 서남해상전선을 비롯한 전 전선에 배치된 포병부대들의 전투직일 근무를 증강하고 전반적전선에서 전선경계근무급수를 1호전투근무체계로 격상시키며 접경지역부근에서 정상적인 각종 군사훈련들을 재개하게 될 것이다.

 

4. 전 전선에서 대남삐라살포에 유리한 지역(구역)들을 개방하고 우리 인민들의 대남삐라살포투쟁을 군사적으로 철저히 보장하며 빈틈없는 안전대책을 세울것이다.<후략>

대남 사업을 총괄하는 김여정 제1부부장은 총참모부에 대남 군사적 권한을 넘겼고, 남북관계 상황은 군사적 문제로 전환되었다. 이제 남북관계 상황은 군사적 충돌로 비화되느냐 여부가 관건적 문제가 되었다.

남측 당국은 북측의 삐라 살포를 판문점선언 위반이라면 ‘가을뻐꾸기’ 같은 소리를 반복하고 있고, 국방부는 “좌고우면 않고 강력대응하겠다”는 입장을 갖고 있다. 상황이 이대로 방치된다면 군사적 충돌은 정해진 수순이다.

아직 해결의 여지는 남아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이 문제에 대해 함구하고 있다. 마지막 여지를 남겨 두고 있다고 봐야 한다. 대남사업을 총괄하는 김여정 제1부부장의 지시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김정은 위원장이다. 총참모부의 대적행동계획을 중단시킬 수 있는 유일한 사람 역시 김정은 위원장이다.

그렇다면 남측 당국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첫째, 상황의 엄중함을 인식해야 한다. 지금은 한반도 평화 시대를 선언한 판문점선언이 좌초될 수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이다. 남북합의의 파산은 곧 긴장격화로 이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 한반도의 상황이다. 문재인 정부가 좌고우면하지 않아야 할 것은 ‘군사적 강력 대응’이 아니라 ‘판문점선언의 전면적 이행’이다.

둘째, 삐라 살포는 그 어떤 경우에도 중단되어야 한다. 삐라가 북측 땅에 떨어지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단 한 장의 삐라라도 살포되느냐 하는 문제가 핵심이다. 삐라 살포가 어떤 이유에서건 단행된다면 남북 관계는 시계제로 상태가 될 것이다.

셋째, 남북관계 개선 의지를 북측에 보여주어야 한다. 공동연락사무소마저 폭파된 상황에서 문재인 정부가 보여주어야 할 남북관계 개선 의지는 ‘판문점선언 이행해야 한다’는 추상적 입장 표명이 아니다. 지난 2018년 9월 평양에서의 정상회담 이후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은 미국의 반대로 인해 단 하나도 집행되지 못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지금까지 문재인 정부는 미국의 반대라는 미명 아래 남북관계와 판문점선언을 사실상 방치했다.

따라서 문재인 정부의 남북관계 개선과 판문점선언 이행의 의지는 한미워킹그룹에서 탈퇴하는 것으로 보여져야 한다. 미국은 자신의 이해관계 상 한미워킹그룹 해체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 경우 유일한 방법은 한미워킹그룹에서 탈퇴하는 것이다. 더 이상 미국을 탓하면서 자신의 책임과 역할을 방치해서는 안된다.

넷째, 미국의 군사적 움직임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 지금도 미국의 군사자산이 한반도로 출격하고 있다. 또한 여름 한미군사연습이 예견되어 있기도 하다. 지금은 한반도 상황을 적극적으로 관리해야 할 때이다. 대한민국은 주권국가이다. 미국의 군사적 움직임을 제어할 수 있는 주권 행사를 포기하면 평화가 파괴된다. 2018년 판문점에서의 정상회담의 성사될 수 있었던 결정적 이유는 문재인 정부가 한미군사연습을 연기시킨 것에 있다. 문재인 정부는 헌법이 부여한 자신의 모든 권한을 활용하여 일체의 미국의 군사적 움직임을 통제해야 한다. 미국이 문재인 정부의 통제를 거부할 수 있다. 그럴 경우 한미군사연습에 불참해야 한다. 문재인 정부를 출범시킨 것은 미국이 아니라 우리 국민이다.

출처 : 현장언론 민플러스(http://www.minplus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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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치자! 미군철수! 내정간섭중단! 평화협정 체결!”

범민련 남측본부, <민족의 자주와 대단결을 위한 3차 조국통일촉진대회> 각계 제안
이기영 통신원  |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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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6.22  15:2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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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자주의 원칙, 우리민족끼리 정신으로 남북 위기국면을 돌파하자!”

   
▲ 19일 범민련 남측본부를 비롯한 제 단체들은 현 남북 위기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보다 적극적이고 전면적인 반미투쟁, 전민족적 공동투쟁을 펼쳐나갈 것을 호소했다. [사진-범민련 남측본부]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남측본부를 비롯하여 통일원로 및 여러 단체 대표자들이 참가한 가운데 19일 오전 서울 중구 명동 향린교회에서 광복 75돌을 맞아 <민족의 자주와 대단결을 위한 3차 조국통일촉진대회> 추진을 위한 제 단체 간담회가 열렸다.

이날 간담회는 최근 정세를 반영하듯 2시간여 동안 시종일관 진지한 분위기 속에서 당면 정세와 남북위기 국면의 근본원인, 실천방향과 과제, 8.15대회 성사를 위한 단결방안 등에 대해 논의했다.

사회를 맡은 노수희 범민련 남측본부 부의장은 “최근 6.15공동선언 자체가 위기에 놓여있다. 공동선언을 철저히 고수·이행해나가겠다는 의지를 다지고 공동선언에서 천명한 민족자주의 원칙, 우리민족끼리 정신으로 현 위기국면을 돌파해 나가자”며 6.15공동선언문 낭독을 제안했다. 참가자 전체가 6.15공동선언 전문을 낭독하는 것으로 본격적인 간담회가 시작됐다.

   
▲ 참가자들은 6.15공동선언 전문을 낭독했다. [사진-범민련 남측본부]

“남북관계가 악화될수록 반미투쟁을 더 적극화해야!”

이규재 범민련 남측본부 의장은 인사말에서 “최근 대북삐라 문제로 촉발된 남북관계 악화나 ‘한미워킹그룹’ 문제, 통일방해 문제, 대북제재 문제, 사드 추가배치, 세균부대 확장, 미군 주둔비 강요 등 따지고 보면 모든 문제의 원인제공은 ‘미국’이다”고 운을 뗐다. 현 남북관계 악화의 원인은 미국의 대북적대정책과 한반도 패권정책에 있음을 분명히 했다.

이어 “정세가 어떻게 변하든 ‘반미’만이 살길이고 ‘반미자주’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 남북관계를 개선하고 통일을 앞당기는 가장 힘있는 방법이고 지름길이다”고 강조하면서 “지금껏 그래왔듯이 ‘반미투쟁’의 결산 없이는 남북관계의 획기적이고 근본적인 전환을 가져올 수 없다. 따라서 평화와 통일을 원하고 남북관계가 개선되기를 바란다면 ‘반미’를 외쳐야 한다”고 말했다.

이 의장은 “문재인 정부에 대한 규탄과 촉구의 목소리를 높이면서도 본질적으로 미군철수, 내정간섭중단, 평화협정 체결의 구호를 들고 싸워야한다”고 강조했다.

   
▲ 이규재 의장은 인사말에서 “정세는 우리 민족이 평화번영과 자주통일의 새 시대로 나아가느냐 2018년 이전으로 돌아가느냐 하는 중대한 갈림길에 놓여있다”면서 “반미투쟁에 적극 나서고 조국통일촉진대회에 힘을 모아줄 것”을 호소했다. [사진-범민련 남측본부]

“미군철수! 내정간섭중단! 평화협정 체결! 구호를 들자!”

참가자들은 ‘비상한 시국에 맞게 실천과 투쟁강화’, ‘미국바로알기 등 반미투쟁 활성화를 위한 대중사업’, ‘노동자통일투쟁을 위한 구호와 내용제시’, ‘통일투쟁의 기세를 높일 수 있는 방안’, ‘진보진영의 단결방안’, ‘촉진대회 각계 참여방안 등 여러 질문과 의견이 쏟아졌다.

원진욱 범민련 남측본부 사무처장은 “현 남북관계는 문재인정부의 실천의지가 상당히 가시화되지 않으면 계속될 것이다. 남북관계 악화가 고조되면 미국은 이끌려 나올 수밖에 없다”면서 “이 과정에서 평화협정 체결과 미군철수를 위한 조미간의 핵담판이 재개될 가능성도 점차 높아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또한 “당면해서 자주통일진영이 미국의 통일방해 내정간섭 중단, 미군철수와 평화협정 체결의 목소리를 높여 남북관계 전진을 위한 자주적 분위기를 고조시켜 나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지금 정세는 개별단체의 선명성보다 반미투쟁을 상설화하고 이를 추진해나갈 실천기구를 만들고, 지속적인 투쟁을 통해 반미전선을 형성해 나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면서 범민련 남측본부가 2018년 이후 8.15에 조국통일촉진대회를 각 계와 공동으로 추진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설명했다.

“보다 적극적이고 전면적인 반미투쟁, 전민족적 공동투쟁 호소!”

   
▲ 참가자들은 “지금 정세에서 노동자 반미투쟁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노동자 농민 빈민을 중심으로 민중공동행동이 적극 나서줄 것“을 호소했다. [사진-범민련 남측본부]

참가자들 토론에서 “새로운 정세에 맞는 투쟁구호, 실천방안, 단결의 방안이 나와야 한다”면서 “지금은 보다 적극적이고 전면적인 반미투쟁, 전민족적 공동투쟁을 펼쳐 나가야 할 때”라는데 뜻을 모았다. 이어 “이를 위해 노동자 통일투쟁, 진보진영을 대표하는 민중공동행동 차원의 반미투쟁 상설화는 향후 정세대응의 기본축이며 진보진영의 정세대응력을 높이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으로 봤다.

특히, “노동자 통일투쟁이 중요한 이유는 첫째, 전체 반미투쟁과 통일운동의 기세를 높이고 둘째, 실천방향을 선도하며 셋째, 진보진영의 단합된 투쟁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라며 “지금 정세에서 노동자 통일투쟁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노동자 농민 빈민을 중심으로 민중공동행동이 적극 나서 줄 것“을 호소했다.

”노동자 통일운동, 민중공동행동 차원의 반미투쟁 상설화가 중요“
 
참가자들은 토론을 마무리하면서 △노농빈을 중심으로 조국통일촉진대회가 성사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민중공동행동 차원에서 공동개최와 조직적 참가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민주노총을 비롯한 주요 대중조직과 민중공동행동에 이를 적극 제안하고 협의해나가기로 하였다.

참가자들은 이번 촉진대회가 ‘반미투쟁 통일운동의 실천방향과 과제를 결의’하고 ‘노동자 민중들과 함께 하는’ 조국통일 축전의 장, 투쟁의 장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기로 하고 각계에 보내는 제안문을 채택하고 간담회를 마무리했다.

한편, 범민련 남측본부는 오는 8월 14일(금) 저녁 8시, 서울에서 <민족의 자주와 대단결을 위한 3차 조국통일촉진대회> 본대회를 15일(토) 낮 12시부터 서울 시내에서 실천투쟁으로 <8.15미군철수대행진>을 기본안으로 조국통일촉진대회 추진계획을 제출하고 각 계에 참여를 제안했다.

"외치자! 반미자주! 모이자! 8월14일! 조국통일촉진대회!"

   
▲ 조국통일촉진대회 성사를 위해 각 계가 적극 호응해 나서줄 것을 호소하며 간담회를 마무리했다. [사진-범민련 남측본부]

[제안문] (전문)

‘반미’해야 독립하고 ‘민족자주’해야 통일된다.

정권이 사대하면 속국노예가 되고 나라가 망한다는 말이 헛말이 아니다.

우려했던 일들이 눈앞에 벌어지고 설마했던 일들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민족대결에 혈안이 되었던 이명박근혜의 10년 시절도 아니고 판문점선언의 당사자인 문재인 대통령의 재임시기에 남북관계가 파국으로 치닫는다는게 과연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역사를 전진시켜 온 것은 오로지 민중의 투쟁이었다.

낮밤을 이어가며 물대포에 쓰러지고 경찰방패에 찍히고 끌려가며 박근혜 자유한국당 정권을 탄핵시킨 촛불항쟁에서 고작 민주당이 한 것은 민중들이 만든 위대한 민주주의의 성찬에 밥숫가락 얹은 것밖에 없다.

민주당이 잘해서 대통령 뽑아 줬다고 생각한다면 이보다 더 위험천만한 망상은 지구상에 없을 것이다.

박근혜를 권좌에서 끌어 내린 민중들이 또다시 자유한국당을 찍어야 했겠는가.

그렇게 문재인 정부는 탄생했지만 국회의석 타령하고 야당협치에 발목잡히고 미국에 명줄이 잡혀 그토록 갈구했던 적폐청산은 어찌 됐는지 눈 부비고 귀를 씻어 봐도 찾을 수가 없다.

남북 정상의 역사적인 판문점선언이 자주와 평화번영을 향한 우리 민족의 유일한 희망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우리민족끼리>의 정신과 원칙을 전 세계에 천명하였기 때문이었다. 

2018년 9월 19일, 15만 평양시민의 뜨거운 환대를 받은 문재인 대통령은 5.1경기장에서 “우리 민족의 운명은 우리 스스로 결정한다는 민족자주의 원칙을 확인했다. 남북관계를 전면적이고 획기적으로 발전시켜 끊어진 민족의 혈맥을 잇고 공동번영과 자주통일의 미래를 앞당기자고 굳게 약속했다.​ 우리 민족은 우수하다. 우리 민족은 강인하다. 우리 민족은 평화를 사랑한다. 그리고 우리 민족은 함께 살아야 한다. 우리는 5,000년을 함께 살고 70년을 헤어져 살았다. 김정은 위원장과 나는 북과 남 8,000만 겨레의 손을 굳게 잡고 새로운 조국을 만들어 나갈 것이다.”라고 했다.

그로부터 정확히 두 달이 지난 11월 20일, 문재인 정부는 끝내 미국의 압력에 굴복하여 ‘한미워킹그룹’에 남북관계의 숨통을 고스란히 제국주의자들의 손아귀에 건네 주고 말았다.

평양시민들이 갖는 민족적 배신감이 어떨지는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해보시라.

남북관계가 험악해지고 험난한 파국으로 들어 서고 있는 원인은 어디있는가!

본질적으로는 남북관계에 대한 총독부인 ‘한미워킹그룹’과 비무장지대 통치권자인 ‘유엔사’, 그리고 트럼프행정부는 사사건건 남북관계 진전에 쇠말뚝을 박고 어깃장을 놓으며 분단동맹 전쟁동맹 한미동맹의 철권을 마음대로 휘둘렀다.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은 누구 하나 예외없이 통일을 반대하며 무기강매에 환장하였으며 자기네들 마음대로 안되면 핵전쟁으로 위협하였다.

우리는 남북관계가 어려울 때마다 대결과 영구분단을 조장하는 외세공조는 파멸이자 전쟁이고 <우리민족끼리>만이 자주통일과 평화번영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라고 수도 없이 주창해 왔다.

남북관계와 북미관계의 선순환이란게 애당초 세상에 없는 억지논리라는건 글을 깨우치지 못한 사람이라도 다 아는 사실이다. 집안에 강도가 들었다면 모든 걸 내주든지 아니면 내쫓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강도랑 한 이불덮고 살면서 가정이 안전하고 행복해지리라 생각하는 멍청이도 있단 말인가.

또한, 남북관계가 이런 지경으로 된데는 문재인 정부의 친미사대굴종과 남북공동선언실천의 의지가 허약하다는데 있다.

국민의 힘으로 출범한 정부가 국민을 믿지 못하고, 민족적 약속은 내팽개치고 미국말만 고분고분 듣는다면 그 누가 쉽게 납득이 가고 그 누가 값싼 동정을 하겠는가.

민족자주! 이 얼마나 가슴뛰게 하는 말인가

민족대단결! 이 얼마나 의미심장한 말인가

반외세 항전에 빛나는 민족의 역사에 선열들의 헌신과 목숨으로 아로새겨 온 진리는 우리 민족이 나아갈 진로와 종착점을 너무도 뚜렷이 밝혀 주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처음부터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핵보유국인 북미간의 대결관계에서 새로운 관계로 나가자면 먼저 일체의 적대관계를 청산하는게 해법이고 출발점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사이에 문재인 정부가 끼어 있다는 것이다. 이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통일문제는 남북이 풀고 핵문제는 북미 사이에 해결할 문제인데 미국의 사주와 압력을 받은 문재인 정부가 대북제재니 남북대화 속도조절이니 하는 궤변으로 미국의 입장을 대변하다 보니 남북관계는 한치도 진전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불신만 쌓이게 된 것이다.

있는 그대로 말하면 문재인 정부는 한반도 운전자론을 들고나와 미국이 원하는 방향으로만 주행했지, 단 한 번도 우리 민족이 원하는 방향으로 가속페달을 밟아 본 적이 없다. 이래서 터진 것이 오늘날의 정세이다. 금강산관광, 개성공단, 5.24조치 뭐 하나 미국의 주문대로 되지 않은 것이 단 하나라도 있으면 말해 보라. 설상가상으로 미국의 사주와 지원으로 움직이는 탈북단체를 상대로 ‘표현의 자유’라는 얼빠진 놀음을 해 왔는데 표현의 자유라는게 정부와 탈북자들간의 암거래 선물인지는 몰라도 통일애국진보진영에서는 들어 본적도 만져 본 적도 없는 것이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올해로 <제3차 조국통일촉진대회> 개최를 위해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다.

‘반미’만이 살길이요 ‘민족자주’만이 살길임을 확인하면서, 노동자 농민 빈민이 중심이 되어 반미투쟁을 상설화하자는 게 취지이며, 이래야 통일의 수레바퀴가 돌아갈 수 있다는 책임을 가지고 조국통일촉진대회를 준비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힘이 모여야 정부도 남북공동선언의 정신과 원칙에 맞게 제 할 일을 하게 된다.

지금은 미군은 철수하고 민족문제 내정간섭을 중단하고 문재인 정부는 남북관계를 책임지라는데 한 목소리를 모아야 한다.

미군 주둔비, 생화학무기부대의 전국화, 사드배치 등 한반도의 평화와 주권을 위협하는 강도행위가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만큼 각계의 투쟁을 조직하면서도 미군철수를 위한 반미전선의 획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다급한 정세에서 ‘새옹지마’라는 속담의 힘을 놓지 않으려 한다.

또한 우리는 150년 넘은 숙적 불구대천 미국에 대한 그 어떤 기대도 그 어떤 주저도 없이 투쟁해 나가면 반드시 승리한다는 판문점시대의 <우리민족끼리> 정신의 힘 또한 변함없이 들고 나가려 한다.

 

평화와 통일을 원한다면 민족자주를 외치자!

진정한 민주주의를 원한다면 자주독립을 위해 투쟁하자!

자주와 통일을 원한다면 힘찬 단결, 통 큰 단결을 반드시 이루자!

 

2020년 6월 19일

민족의 자주와 대단결을 위한 제3차 조국통일촉진대회 추진을 위한 제 단체 간담회

참가자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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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평] 호박에 줄긋는다고 수박되랴? 미래통합당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김영란 기자 | 기사입력 2020/06/22 [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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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영 미래통합당 원내대표는 지난 5.18 민주화운동 40주년 기념식에 참가하고 미래통합당의 막말에 대해 사과를 했다. 그뿐만 아니라 미래통합당 청년위원회도 광주 망월동 묘역을 참배하면서 당내에서 5.18 광주민주항쟁에 대한 인식을 바꾸겠다고 밝혔다.

 

김종인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은 “진보보다 더 진취적인 정당”을 실현하겠다는 포부를 세우며 ‘포용적 경제, 분배, 여성, 청년’ 등의 키워드를 전면에 앞세우며 미래통합당에 혁신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또한 김 비대위원장은 ‘약자와의 동행’이란 슬로건과 기본소득, 전일보육제 등의 경제·복지 정책 등을 내놓고 있다. 

 

지난 4일 심상정 정의당 대표는 김 비대위원장을 만났다. 심 대표는 김 비대위원장 취임 이후 미래통합당에서 기본소득 논의가 벌어지는 데 대해 “대환영”이라며 “통합당이 불평등 해소에 적극적으로 나서면 (정의당의) 좋은 파트너가 될 것"이라는 말까지 했다.

 

미래통합당이 진정으로 변하려고 하는 것일까.  

 

결론적으로 지금 미래통합당이 보이는 모습은 지난 총선에서 패한 뒤 국민의 눈길을 잠시라도 잡기 위한 꼼수에 불과해 보인다.

 

만약 미래통합당이 진정으로 변모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다면 박근혜가 탄핵당했을 당시에 변화하는 모습을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미래통합당은 박근혜 국정농단에 사죄하기는커녕 박근혜 석방을 주장했다. 그 결과 총선에서 국민은 변함없는 적폐 청산의 의지로 미래통합당을 심판했다.  

 

또한 미래통합당이 진정으로 변신할 의사가 있다면 21대 국회 원 구성을 둘러싸고 몽니를 부리지 않았을 것이다. 특히 미래통합당이 법사위원장을 하겠다고 난리를 편 것은 공수처 설치를 방해하고자 하는 의도였다. 공수처가 설치되면 각종 의혹이 제기되는 황교안, 나경원 등 미래통합당 전·현직 의원들이 수사 대상에 오를 수 있다. 미래통합당은 이런 상황 자체를 막기 위해 법사위원장을 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는 국민의 적폐 청산 의지에 정면으로 맞선 것으로 봐야 한다.   

 

미래통합당이 진정으로 변신할 의사가 있다면 5.18 관련해 막말했던 주요 인사들을 당에서 쫓아내는 최소한의 행동이라도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김진태를 비롯한 인사들은 여전히 미래통합당 소속이다.

 

김종인 비대위원장이 말하는 기본소득을 비롯한 여러 가지 정책 제안은 말에 불과할 뿐이다. 국민이 코로나19 여파로 보편적 복지에 관심 높아지자 이에 말만 얹는 것뿐이다.  

 

김종인 위원장이 말하는 기본소득에 대해 전문가들은 ‘알맹이 없이 화두만 던져진 문제의식’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김 비대위원장이 기본 소득과 관련해 “‘재원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 등을 두곤 신중해야 하며 장기적 연구과제”라고 말해 전문가들은 실제로 미래통합당이 기본소득이 국회에서 쟁점화될 때 후퇴하리라고 전망했다.

 

또한 김 비대위원장이 내놓은 정책과 관련해 원희룡, 장제원 등 미래통합당 주요 인사가 ‘반 김종인’ 전선을 펼쳐 당내에서 용두사미 될 확률이 높다. 

 

원희룡 제주지사는 김 비대위원장이 정책 방향에 대해 “진보의 아류가 되어선 영원한 2등이고 영원히 집권할 수 없다”라고 비판하며 “보수의 유전자를 회복하자”라고 말했다. 원희룡 제주지사의 말은 미래통합당의 전신, 자유한국당의 노선을 회복하자는 것이다.

 

호박에 줄긋는다고 수박 되랴는 말이 있다. 이 말은 겉이 변한다고 그 사물의 속성, 본질이 변하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이다.

 

혹여 미래통합당이 겉으로 보이는 모습 몇 개가 변한다 치더라도 미래통합당의 수구, 극우의 본질이 바뀌지 않으면 진정 변하는 것이 아니다. 미래통합당이 수구, 극우의 본질을 버린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미래통합당이 지금까지 수없이 당명을 바꾸고, 비대위를 세웠어도 수구, 극우의 본질을 버리지 못했다. 미래통합당은 결코 변할 수 없는 집단이다. 국민들이 해체해야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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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20주년 특별기획] 코로나 이후,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성 윤리

릴레이 기고 ‘코로나 너머’ ㉛

권김현영 여성주의 연구활동가
발행 2020-06-21 18:01:30
수정 2020-06-21 22:2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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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2000년 5월 15일 첫걸음을 뗀 민중의소리가 창간 20주년을 맞았습니다. 독자와 후원인들의 성원과 격려로 민중의소리는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민주주의를 확장하며 자주평화의 기운을 북돋우기 위한 진보언론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창간 20주년 특별기획으로 각계 원로, 전문가, 신진 인사들이 코로나19 이후의 세계와 한국사회를 조망하는 릴레이 기고를 연재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2020년 상반기 한국 사회를 뒤흔든 두 개의 키워드를 꼽으라면 ‘코로나19’와 ‘텔레그램 n번방’이었다. 이 두 가지는 전혀 관계 없어 보이지만, 우리가 만들어낸 사회 어디가 어떻게 문제인지를 정확하게 드러낸다.

상호 의존의 필요가 높아진 감염병의 시대

이번 코로나의 집단 발생지는 여성전용 근로자임대아파트, 종교집회, 콜센터, 노래방, 택배물류센터, 학교, 병원, 클럽 등이었다. 밀집과 밀폐라는 특성을 가진 이 장소들이 감염병에 취약한 건 당연하다.

이 장소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인류는 그동안 집단 감염병에 매우 취약할 수 밖에 없는 도시집중형 집단거주라는 생활양식을 발전시켜왔다. 백신을 통해 집단 면역을 만들어두는 일은 점점 더 개인의 건강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를 위한 의무가 되었고, 백신을 불신하는 일은 개인의 (불확실한) 신념을 지키겠다고 타인에게 역학적 부담을 가중시키는 악덕의 극치로 취급되었다. 백신이 만들어지지 않은 신종 감염병인 코로나19의 경우에는 무엇이 공동의 이익을 위한 것이고 무엇을 반드시 해야하는지에 대한 규칙이 아직 정리된 바 없어, 사람들은 그때 그때마다 선별적으로 확진자의 행동을 비난하며 이 시기를 지나고 있는 중이다.

불볕더위가 이어지는 가운데 16일 서울 강서구 강서보건소 코로나19 선별진료소에서 방호복을 입은 의료진들이 고등학생 검사를 하고 있다.  2020.06.16
불볕더위가 이어지는 가운데 16일 서울 강서구 강서보건소 코로나19 선별진료소에서 방호복을 입은 의료진들이 고등학생 검사를 하고 있다. 2020.06.16ⓒ김철수 기자

인류는 감염병에 ‘백신’과 ‘집단 면역’이라는 두 가지 방법으로 대응해왔다. 기본적으로는 시간과의 싸움이다. 현재 우리 앞에 놓인 위기는 나의 마스크가 당신을 지키고 당신의 마스크가 나를 지켜주는 일종의 상호부조의 공동체를 통해 그나마 대응이 가능했던 것이다. 하지만 기후변화 같은 변수, 인간 생활방식의 획일화 같은 상황과 맞물리면서 시간은 더 이상 인간의 편이 되지 않을 것 같다.

여기에 한 가지 변수가 더 있다. ‘디지털 기술’ 말이다. 비대면이 현재까지 나온 거의 유일한 효과적인 대응인데, 비대면을 가능하게 해주는 디지털 기술은 인간을 연결해주기는 하지만 이 과정에서 인간성을 변화시킨다. 한나 아렌트는 “기계와 그 과정의 자동적 운동이 세계와 사물을 지배하고 심지어 파괴한다”며, 기술매개사회는 서로에게 상호의존하는 인간의 조건을 변화시키고 그 결과 공공선에 대한 인식이 극도로 약화될 것이라는 우려를 한 바 있다.

17일 오전 서울 종로경찰서에서 텔레그램 '박사방'에서 운영자 조주빈을 도와 대화방 운영·관리에 관여한 공범 '부따' 강훈이 검찰에 송치됐다. 강훈이 차량에 실려 경찰서를 나서자 시민들이 강력처벌을 촉구하며 피켓시위를 하고 있다. 2020.04.17
17일 오전 서울 종로경찰서에서 텔레그램 '박사방'에서 운영자 조주빈을 도와 대화방 운영·관리에 관여한 공범 '부따' 강훈이 검찰에 송치됐다. 강훈이 차량에 실려 경찰서를 나서자 시민들이 강력처벌을 촉구하며 피켓시위를 하고 있다. 2020.04.17ⓒ민중의소리

디지털 시대 인간성 파괴의 징후적 사건, 텔레그램 N번방

디지털 기술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게 된 상황에서 타자를 나와 공존하는 총체적 인격으로 감각하도록 하는 능력을 어떻게 키워낼 것인가. 텔레그램 N번방은 그 능력이 완전히 손상되었음을 알리는 징후적 사건이다.

세계 최대의 아동성착취 사이트 웰컴투비디오와 노예방을 운영하며 21세기형 인신매매를 자행한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의 가해자들은 자신이 저지른 행위의 해악이 정확히 무엇인지 잘 모른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런 식의 죄책감을 가지지 않아도 되도록 ‘설계’했다. 디지털 기술이라는 매개는 이들에게 피해당사자와의 거리두기를 가능하게 했다.

이들은 마치 게임하듯 원격으로 범죄를 모의하고 실행했다. 인터넷의 특성상 한 번 유출 혹은 유포의 피해를 입으면 완전한 삭제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피해자가 입는 피해의 강도는 더욱 격심해졌다. 반면 기술의 힘을 빌어 자신의 신원을 능숙하게 감추었다고 믿는 가해자들은 유포된 사진을 기다리는 관전자들의 ‘요구’에 부응했을 뿐이라며, 그나마의 가해자 의식마저 지운다. 심지어 이들은 가까이에 있는 지인과 친족을 범행 대상으로 고르는데 주저함이 없다.

가해자들이 상대의 인격에 대한 모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몰라서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이 범죄는 현실 세계에서는 문제가 되지만, 디지털 기술이란 매개를 경유하여 만들어 낸 완전히 다른 세계에선 거침없고 영웅적인 행동이 된다. 인간다움을 만드는 선(線)이 완전히 무너진 세계가 병존하고 있는 것이다.

디지털 성폭력의 근본적 해결을 촉구하는 시민들이 모인 ‘n번방에 분노한 사람들’이 20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성인지감수성이 부족한 재판부의 부실 판결을 규탄했다. 2020.04.20
디지털 성폭력의 근본적 해결을 촉구하는 시민들이 모인 ‘n번방에 분노한 사람들’이 20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성인지감수성이 부족한 재판부의 부실 판결을 규탄했다. 2020.04.20ⓒ김철수 기자

“이것이 인간인가” 묻게 되는 이 때,
디지털 시대 새로운 성윤리 고민해야

1994년이었다. 이제 막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을 때였다. 우연히 미국의 대표적 여성단체 전미여성기구(National Organization of Women·NOW)가 몇 년전에 사용했던 슬로건을 듣게 되었다. “페미니즘은 여성도 인간이라는 급진적 믿음입니다” 이 문장은 그때까지 긴가민가하던 마음의 추를 순식간에 옮겨놓았다. 동시대 미국에서도 여성이 인간이라는 게 ‘급진적’ 주장이라는데 망설일 이유가 있나 싶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것은 1986년 전미여성기구의 브루클린 지부 활동가였던 마리 시어(Marie Shear)가 쓴 문장이었다. 당시의 급진적 제2물결 페미니스트들은 [페미니즘 단어사전]을 만들어 상대의 폐부를 찌르는 유머감각을 선보였다. 이 사전 시리즈는 이런 식이다. 남자란? “화장실에서 휴지가 그냥 자라난다고 생각하는 사람”. ‘포켓 엔비’(pocket envy)란 단어의 뜻은 이렇다. “실용적인 옷을 원하는 여성들의 채워지지 않는 갈망” 주머니가 없는 여성복의 불편함을 고발하는 의미와 프로이트(Freud)가 여성들이 남근을 선망(penis envy)한다고 하는 주장을 비꼬는 언어유희였다. 이 단어사전 시리즈에 등장한 페미니즘의 정의가 바로 이 문장이었다.

권김현영 여성주의 연구활동가
권김현영 여성주의 연구활동가ⓒ민중의소리

페미니즘에 대한 숱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유머러스하게 대응한 페미니즘 단어사전 시리즈에서 나온 말이 어째서 몇 년 후 웃음기를 싹 거두고 비장한 슬로건이 된걸까. 여성을 인간이 아니라 남성의 부속물로 취급하는 남성우월주의가 좀처럼 무너지지 않는 현실 앞에, 이 문장은 더 이상 농담이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1990년대까지의 페미니즘이 ‘여성도 (남성과 동등한) 인간’이라고 외쳐왔다면, 지금은 어떨까.

[이것이 인간인가]를 쓴 프리모 레비(Primo Levi) 는 죽음의 수용소에서 겪었던 일들을 복기하며 이것이 인간인지, 인간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도 되었던 것인지를 물었다. 버닝썬 사태와 전 법무부 차관 김학의 사건, 웰컴 투 비디오와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을 연속해서 겪으면서, 나 역시 그런 의문이 들었다. 지금은 여자‘도’ 인간이라고 주장할 때가 아니라, 남자가 인간인지를 물어야 할 때가 아닌가 하고 말이다. 약물 강간을 하고 불법촬영물을 공유하고 노예방을 운영하고 아동성착취물을 제작하도록 시키는 이들에 대한 처벌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우리 사회가 과연 ‘인간다움’을 유지할 수 있을까. 디지털 시대 새로운 성윤리를 정말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때라는 말이다.

 

권김현영 여성주의 연구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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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벽예감 400] 군사상황은 매우 엄중하다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 기사입력 2020/06/22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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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1. ‘대적군사행동계획’ 작성하는 조선인민군 총참모부

2. 소규모 충돌이 확대되어 전쟁이 일어난다

3. 경무장 경찰대를 최전방에 배치한 사연

4. 미점령군이 후방으로 물러난 날 시작된 38도선 무력충돌

5. 최단공격선 차지하기 위한 개성지구전투

6. 전선을 축소하기 위한 옹진지구전투

7. 오늘의 군사상황은 매우 엄중하다

 

 

1. ‘대적군사행동계획’ 작성하는 조선인민군 총참모부

 

2020년 6월 17일 조선인민군 총참모부 대변인이 담화를 발표했다. 조선인민군 총참모부는 담화에서 6월 17일 현재 “구체적인 군사행동계획들이 검토되고 있”는데, “대적군사행동계획들을 보다 세부화하여 빠른 시일 안에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의 비준에 제기하도록 할 것”이라고 하면서, “전 전선에 배치된 포병부대들의 전투직일근무를 증강하고 전반적 전선에서 전선경계근무급수를 1호 전투근무체계로 격상시키며 접경지역 부근에서 정상적인 각종 군사훈련들을 재개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조선인민군 총참모부가 담화에서 언급한 ‘1호 전투근무체계’는 조선인민군 전투부대들이 무기고에서 각종 군사장비와 실탄을 꺼내 중무장하고 전투명령을 대기하는 최고 수위의 전투동원태세를 뜻한다. 조선인민군 총참모부가 담화에서 언급한 ‘대적군사행동계획’은 한국군을 공격하는 작전계획을 뜻한다. 조선인민군 총참모부가 담화에서 언급한 ‘정상적인 각종 군사훈련들’은 한국군을 공격하기 위한 전투행동훈련을 뜻한다. 

 

이 글이 <자주시보>에 발표되는 2020년 6월 22일 현재 조선인민군 총참모부는 조선인민군 전투부대들에게 1호 전투근무체계를 아직 명령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조선인민군 총참모부가 1호 전투근무체계를 명령하기 전에 ‘대적군사행동계획’을 세부적으로 작성한 다음, 김정은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의 검토를 받고, 최종적으로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의 비준을 받기까지 약 2주 정도 걸릴 것이다.  

 

이런 사정을 간파하면, 조선인민군 전투부대들은 2020년 7월 중으로 중무장을 하고, 최고 수위의 전투동원태세를 취할 것이며, ‘대적군사행동계획’에 의거한 실전급 군사훈련을 실시할 것으로 예견된다. 그에 대응하여 한국군도 중무장을 하고, 비상태세에 돌입할 것이며, 대규모 군사훈련을 시작할 것으로 예견된다. 그렇게 되면, 전쟁발발에 아주 근접한 준전시상황이 조성되는 것이다. 

 

준전시상황이 조성되면, 군사분계선에서 우발적인 무력충돌이 일어나는 사태는 불가피해진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된 이후 오늘까지 67년 동안 군사분계선에서 일어난 무력충돌사례는 이 글에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부지기수인데, 이제껏 군사분계선에서 일어난 수많은 무력충돌은 전쟁발발에 근접한 준전시상황이 아닌 평상적인 군사상황에서, 그야말로 우발적으로 일어났기 때문에 군사긴장만 고조시켰을 뿐 국지전으로는 비화되지 않았다. 

 

그러나 문재인 대통령과 그의 참모들을 ‘배신자’로 낙인한 조선인민군이 징벌보복의지를 불태우면서 1호 전투근무체계에 진입한 상황에서는 사정이 전혀 달라질 것이다. 우발적 무력충돌이 아니라 준비된 무력충돌이 일어나게 된다. 만일 군사분계선 일대에서 어느 한 쪽이 불꽃을 한 점이라도 날리는 순간, 불의의 교전이 벌어질 것이고, 그에 따라 쌍방의 화력증원부대들이 일제히 불을 뿜게 될 것이다. 준비된 무력충돌은 국지전으로 비화될 것이며, 국지전이 전면전으로 확전되는 것은 막을 수 없다. 

 

 

2. 소규모 충돌이 확대되어 전쟁이 일어난다

 

돌이켜보면, 70년 전에도 그러했다. 70년 전 북은 남측 정부를 ‘매국도당’을 낙인하면서 ‘국토완정’을 추구했고, 남은 북측 정부를 ‘괴뢰집단’으로 낙인하면서 ‘실지회복’을 추구했다. 당시 북에서는 국토완정이라는 말이 널리 쓰였고, 남에서는 실지회복이라는 말이 널리 쓰였다. 북의 국토완정론과 남의 실지회복론은 38도선 무력충돌을 불러일으켰다.   

 

그처럼 38도선 무력충돌이 격화되고 있었던 1949년 6월 30일 미점령군이 철수했다. <조선중앙일보> 1949년 7월 2일부에는 미국 육군성이 6월 30일에 발표한 철군성명서 전문이 실렸다. 철군성명서는 다음과 같다. “미국 육군성은 유엔 결의에 의거하여 한국으로부터 미주둔군철퇴를 완료하였다. 따라서 동 부대는 하와이 및 미국 본토로 철수하게 될 것이다.” 소련군은 1948년 12월에 이미 철수했고, 미국군은 1949년 6월 30일 잔여병력 8,000명을 철수하는 것으로 철군을 완료했다. 

 

소련군과 미국군이 한반도에서 철수한 것은 그 두 나라가 합의하여 그어놓은 38도선이 존재리유를 상실했음을 의미한다. 38도선이 존재리유를 상실했으므로, 민족주체력량으로 통일국가를 창건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소련과 정면으로 대결하는 냉전의 시각에서 국제정세를 파악하고 있었던 미국의 눈에는 우리 민족의 통일국가건설운동이 아시아대륙으로 남하하는 소련의 팽창주의전략으로 보였다. 당시 미국이 한반도문제와 관련하여 작성한 모든 정책문서들과 정보문서들은 우리 민족의 통일국가건설운동을 소련의 아시아 팽창주의전략으로 오해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소련의 아시아 팽창주의전략를 반대, 배격한 미국은 38도선 이남지역에 친미극우세력을 내세워 우리 민족의 통일국가건설운동을 잔인무도하게 탄압하면서, 친미반공국가를 건설하려고 광분했다.   

 

38도선을 철폐하고 민주주의적 통일공화국을 건설하려는 전민족적 운동이 미국과 친미극우세력의 탄압으로 혹독한 시련을 겪으며 좌절되었을 때, 북은 38도선을 철폐한 국토완정을 필연적으로 선택했다. 그에 대항하여 남측 친미극우세력은 38도선을 철폐한 실지회복을 주장했다. <연합신문> 1949년 6월 16일 보도에 따르면, 당시 육군참모부장 정일권은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했다. “38 이북의 실지회복에 있어서 가상 아닌 적이 엄연히 있다. 우리는 그 적을 압도적으로 단시일 내에 타도함으로써만 생명이나 물질의 막대한 손해를 최소한도로 멈출 수가 있는 것이고, 뜻하는 실지회복의 성스러운 민족과업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중략) 이 실지회복에 국민은 총궐기하여야 할 것을 거듭 강조하는 바이다.”

 

북의 국토완정의지와 남의 실지회복의지는 정면으로 충돌했다. 사실상 준전시상태로 전변된 38도선에서 무력충돌이 격화되었다. <조선일보> 1949년 6월 16일 보도에 따르면, 국방군 제1사단장 김석원은 6월 14일 국방부 출입기자단과 회견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금번 38선 각지에서 발생한 사태를 계기로 작금의 시국은 이미 전시체제를 갖추지 않으면 안 될 시기에 도달하였다. 그 이유로는 공산군이 아직까지 그 병력의 주력을 38선 후방에 두었던 것이 최근에 이르러는 차츰 최전선에 배치하고 있는 점이며 이에 따라 (아)군도 38선 최전선에서 이에 대비상태에 놓이게 된 점이다. 또한 전쟁이라는 것이 어느 때나 소규모의 충돌이 확대되어 가지고 이루어지는 것이니만큼 예정대로 되는 것도 아니므로 어느 때 어느 지점에서 일어날런지 모르는 것이다.” 

 

 

3. 경무장 경찰대를 최전방에 배치한 사연

 

김석원이 우려했던 대로, 38도선에서 일어난 대규모 무력충돌은 국지전으로 비화되었고, 격화된 국지전은 내전으로 확전되었다. 1949년 내내 일어난 38도선 무력충돌은 1950년 6월 25일 마침내 내전으로 폭발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38도선 무력충돌은 6.25전쟁과 떼어놓을 수 없는, 그 전쟁의 일부라고 말할 수 있다. 

 

역사자료를 살펴보면, 38도선에서 무력충돌위험이 조성되기 시작한 때는 1948년 7월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서울에 주재하는 미국 <합동통신(UP)> 특파원 제임스 로우퍼가 전한 1948년 7월 22일 서울발 보도에 따르면, 1948년 7월 20일 미점령군 병사 5명이 38도선 남쪽 약 360m 지점에서 경계근무를 하면서 옥수수밭을 지나가는 순간, 옥수수밭에 매복하고 있던 민간인 복장을 한 저격병들이 갑자기 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지며 기습하는 바람에 미점령군 병사 1명이 현장에서 즉사했고 여러 명이 부상당했다. 이것은 38도선에서 미점령군이 전사한 최초의 사건이었으며, 그로부터 약 2년 뒤인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일어나게 될 것임을 예고한 사건이었다. 

 

1948년 8월 30일 오후 6시경 경기도 개성시 개풍군 여현리 38도선에서 남측 경찰대와 북측 경비대가 약 30분 동안 교전을 벌였다. 쌍방의 피해는 없었다고 했으니, 우발적인 총격전이었던 생각된다. 이것은 남과 북이 38도선에서 교전을 벌인 최초의 무력충돌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북측 경비대는 38도선과 선만(鮮滿)국경을 지키는 경비부대를 뜻한다. 1947년 2월 22일에 창설된 북조선인민위원회(처음에는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라는 명칭을 썼음)는 내무국 산하에 3개 경비부대를 두었는데, 38도선을 경비하는 보안독립려단과 38경비보안대대, 그리고 선만국경을 경비하는 국경경비대대였다. 경무장을 한 38경비보안대대는 소규모 무력충돌에 나섰고, 중무장을 한 보안독립려단은 대규모 무력충돌에 나섰다.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창건되자, 보안독립려단은 조선인민군 보병사단으로 개편되었다. 이 글에서는 보안독립려단, 38경비보안대대, 조선인민군 보병사단을 구분하여 표기하지 않고 편의상 인민군 전투부대로 통칭한다.

 

내무국 산하 보안독립려단의 초대 려단장은 항일전쟁에 조선인민혁명군 지휘관으로 참전한 최현 항일혁명렬사(1907~1982)였다. 그의 선친은 홍범도 항일부대에서 활동한 최화심 항일투사이고, 그의 아들은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최룡해 위원장이다. 그런데 1949년 8월 7일 국방군 육군본부 정훈감실 보도과는 개성지구 전황을 언론매체들에게 전하면서 여단장 최현 소장이 국방군이 발사한 81mm 박격포탄에 맞아 전사했다는 허위사실을 유포했다. 이런 사례가 말해주는 것처럼, 당시 국방군 육군본부가 발표한 전황자료들은 국방군의 전과를 크게 부풀려놓고, 인민군의 인명손실을 터무니없이 과장해놓은 것이므로 신뢰성을 갖지 못한다. 당시 국방군 육군본부는 38도선 전황에 관한 보도를 전면적으로 통제했으므로, 그들이 발표한 것 이외에 실제 전황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여기에 나오는 국방군은 남조선국방경비대의 후신이다. 미점령군은 1946년 1월 15일 남조선국방경비대를 창설했고, 그것을 1946년 3월에 설치한 국내안전부(Department of Internal Security) 산하기구로 만들었다. 1948년 8월 15일 미점령군이 남조선단독정부를 수립할 때, 남조선국방경비대는 육군으로 개편되었다. 당시 언론보도를 보면, 한국군이라는 명칭은 사용되지 않았고, 국방군 또는 국군이라는 명칭이 널리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글에서는 편의상 국방군으로 통칭한다. 

 

1949년 4월 4일 <동아일보>는 국방군 육군참모총장 채병덕이 발표한 담화내용을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38도선을 경비해오던 미점령군 부대들은 1948년 12월 15일 38도선 남쪽 후방지대로 물러났고, 1949년 1월 15일에는 더 남쪽에 있는 후방지대로 물러났는데, 바로 그때부터 국방군과 경찰대가 38도선을 경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자유신문>이 1949년 5월 7일에 보도한 당시 국방장관 신성모의 보고서에 따르면, “38선 부근을 경계하는 데 있어서 미국측과도 의논이 있어서 국방군을 배치하게 되면 충돌할 위험성이 많으므로 최전선에는 경찰대를 배치하고 후선에 국방군을 배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경찰대는 사거리가 짧은 카빈총과 경기관총으로 무장했는데, 국방군은 사거리가 긴 M1총과 중기관총, 81mm 박격포와 105mm 곡사포로 무장했다. 

 

 

4. 미점령군이 후방으로 물러난 날 시작된 38도선 무력충돌

 

위에 인용한 신성모의 보고서를 보면, 당시 미점령군은 38도선 무력충돌이 전면전으로 비화될 것을 우려한 나머지 경무장한 경찰대를 38도선 최전선에 배치했고, 중무장한 국방군은 경찰대 후방에 배치하였음을 알 수 있다. 1949년 5월 21일 국회 제3회 속기록에 따르면, 38도선 전투현장을 방문했던 국회의원 이진수는 국회에서 보고발언을 하는 중에 1949년 5월 4일 개성지구전투에서 국방군 전투부대의 공격에 밀린 인민군 전투부대가 38도선 북쪽으로 퇴각할 때, 국방군 전투부대가 추격전을 벌이려고 하자, 미점령군 군사고문 여러 명이 38도선을 넘어가지 말라고 지시하는 바람에 추격전을 포기하고 후퇴했다고 한다. 이런 사정은 당시 미점령군이 자기들의 작전계획에 따라 자기들이 전쟁을 도발할지언정 자기들 밑에 있는 국방군이 38도선에서 일어난 우발적인 무력충돌을 격화시켜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억제하였음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70년 전의 미점령군이나 오늘의 미점령군이나 똑같다. 지금 주한미국군사령관은 자기들의 작전계획에 따라 자기들이 전쟁을 도발할지언정 자기의 작전통제를 받는 한국군이 군사분계선에서 일어난 우발적인 무력충돌을 격화시켜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억제하고 있다. 그런 까닭에 조선인민군이 보복공격을 해도, 한국군은 제대로 반격하지 못한 채 얻어맞기만 하는 것이다. 

 

1949년 1월 15일 미점령군이 38도선 남쪽 후방지대로 멀리 물러나고, 경무장한 경찰대가 38도선 접경지에 배치되고, 중무장한 국방군이 경찰대 후방에 배치되었을 때, 인민군 전투부대들(보안독립려단과 38경비보안대대)은 38도선을 넘어와 경무장한 경찰대를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1949년 38도선 무력충돌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남측 친미극우세력의 시각에서는 북의 38도선 월선공격이 내란도발로 보였겠지만, 북측의 시각에서 보면 그것은 38도선을 철폐하고 국토완정을 실현하려는 무력투쟁이었다. 38도선 무력충돌은 얼마나 격렬했던가?  

 

1949년 4월 4일 <동아일보>가 보도한 채병덕의 담화에 따르면, 인민군 전투부대들은 1949년 1월 15일부터 2월 15일까지 한 달 동안 38도선을 넘어와 77차례 공격했다고 한다. 이것은 미점령군이 38도선 경비임무를 국방군과 경찰대에 인계하고 후방지대로 물러난 날부터 인민군 전투부대들이 38도선을 넘어오는 무력투쟁을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남측 내무부의 자료를 인용한 <동아일보> 1949년 4월 28일 보도를 보면, 1949년 3월 20일부터 4월 20일까지 한 달 동안 인민군 전투부대들은 경기도 38도선에서 연인원 1,132명이 공격했고, 강원도 38도선에서 연인원 1,410명이 공격했다. 그 기간에 38도선 무력충돌로 남측에 발생한 인명손실과 피해는 다음과 같다.  

 

경찰관 - 전사 1명, 부상 10명, 포로 2명 

국방군 - 전사 5명, 부상 9명, 포로 2명

민간인 - 사망 4명, 부상 7명, 포로 60명

경찰지서 소각 - 1개소

 

남측 공보처 자료를 인용한 <조선일보> 1949년 8월 2일 보도에 따르면, 1948년 12월 12일부터 1949년 6월 25일까지 인민군 전투부대가 38도선을 넘어와 공격한 회수는 212회이며, 공격에 참가한 연인원은 21,056명이라고 한다.

 

위에 서술한 38도선 무력충돌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1949년 남측 언론매체들이 보도한 38도선 무력충돌상황을 보면, 38도선 전역에서 1년이 넘도록 격전이 거의 매일같이 벌어졌음을 알 수 있다. 당시 38도선 전역은 사실상 전시상태였다. 38도선 무력충돌 중에서 가장 큰 규모로 벌어진 전투는 개성지구전투와 옹진지구전투다. 

 

 

5. 최단공격선 차지하기 위한 개성지구전투

 

1949년 당시 개성은 38도선 이남 접경지역에 속했다. 개성 북동쪽는, 해발고가 488m인 송악산이 솟아있다. 지리공간적으로 서울에 가까운 개성과 송악산은 군사전략적 요충지로 되었다. 

 

1949년 5월 4일 오전 4시 30분 인민군 전투원 약 200명이 송악산을 넘어 쑥고개를 거쳐 개성 시내 성균관 부근까지 파죽지세로 진격했다. 경찰대가 교전을 벌였지만, 인민군 전투부대에게 밀렸다. 인민군 전투부대는 개성시 신관리 부산동을 점령했고, 오후 3시경부터 박격포를 쏘면서 신관리 서북쪽에 있는 안화사 방면으로 전선을 확대시켰다. 인민군 전투부대는 오후 4시 30분경 안화사 인근 38도선에서 남쪽으로 300m 지점에 있는 송악산 292고지를 점령한 다음, 개성 북쪽을 향해 박격포와 기관총을 쏘았다. 전투현장에 증파된 국방군 전투부대가 반격전을 벌여 오후 6시경 292고지를 탈환했다. 인민군 전투부대는 오후 7시 30분경 공격을 재개할 기세를 보였다가, 날이 어두워지자 38도선 북쪽으로 퇴각했다. 

5월 5일 오전 11시경 인민군 전투부대는 쑥고개와 운학동에서 38도선을 또다시 넘어와 송악산 292고지와 155고지를 점령했고, 곡사포와 박격포와 기관총을 쏘면서 개성으로 진격하여 성균관 부근에 있는 신관파출소를 점령했다. 오후 2시경부터 개성 시내 조동 일대에서 국방군 전투부대와 인민군 전투부대가 약 500m의 거리를 두고 치렬한 시가전을 벌였다. 시가전은 오후 7시경까지 계속되었다. 

5월 6일 오전 11시 국방군 전투부대는 박격포를 쏘면서 송악산 292고지, 155고지, 107고지를 탈환하기 위해 공격했고, 개성 시내 선죽동과 천동 일대를 점령한 인민군 전투부대를 공격했다. 개성에서 시가전을 벌이던 인민군 전투부대는 오후 6시경 고랑포와 남천 부근의 38도선을 넘어 북쪽으로 퇴각했다.   

6월 13일 개성지구전투가 재개되었다. 당일 오후 8시경 인민군 전투원 약 120명은 송악산 483고지에 구축한 진지에서 국방군 진지를 향해 공격을 개시했다. 국방군 제1사단 제11연대가 출동하여 교전이 벌어졌다. 

6월 14일 오후 1시경 인민군 전투부대는 송악산 473고지에서 진지구축작업을 하고 있던 국방군 전투부대에게 박격포를 사격했다. 국방군 전투부대는 즉각 응사했고, 인민군 전투부대는 38도선을 넘어 북쪽으로 퇴각했다. 

7월 20일 오후 2시 40분 인민군 전투부대는 송악산 292고지에서 국방군 진지를 향해 박격포를 사격하여 사상자가 났다.

7월 22일 오후 4시 30분 국방군 전투부대는 송악산 475고지에서 송악산 최고봉인 488고지에 있는 인민군 진지를 향해 박격포를 사격하여 사상자가 났다.

7월 25일 오전 2시 국방군 전투부대는 488고지의 인민군 진지를 공격하여 점령했다. 당일 오전 11시 인민군 전투부대는 송악산 292고지에서 개성 북쪽을 향해 박격포를 사격했다. 

7월 26일 오전 5시 인민군 전투부대는 송악산 488고지를 탈환하기 위한 전투를 개시했다. 당일 오후 1시 인민군 포병부대는 곡사포와 박격포로 쏘면서 송악산 475고지의 국방군 진지를 공격했다.

7월 31일 인민군 포병부대는 송악한 북사면에 집결하여 개성 북쪽을 향해 곡사포와 박격포를 사격했고, 국방군 포병부대도 곡사포로 응사했다. 

 

위에 서술한 것처럼, 1949년 5월초부터 7월말까지 인민군과 국방군은 개성지구에서 치렬한 공방전을 계속했다. 개성지구전투는 최단거리축선을 차지하기 위한 무력충돌이었다. 북측 시각에서 보면, 개성-문산-파주-고양-서울로 이어지는 제1축선은 서울로 진격하는 최단공격선이고, 남측 시각에서 보면 그 축선은 평양으로 진격하는 최단공격선이다. 제2축선은 동두천-양주-의정부-서울로 이어진다. 

 

개성지구전투가 벌어졌던 때로부터 71년이 지난 지금 서부전선에 주둔하는 조선인민군 2군단 관하 전투부대들이 개성공업지구에 다시 배치된다. 북은 개성공업지구가 개발되기 직전, 그 지역에 주둔하던 조선인민군 2군단 관하 전투부대들을 후방으로 10km 이동하여 재배치했었는데, 이번에 남북공동련락사무소를 폭파하고, 조선인민군 2군단 관하 전투부대들을 개성공업지구에 다시 배치하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조선인민군은 71년 전 무력충돌을 일으켰던, 개성-문산-파주-고양-서울로 이어지는 최단공격선을 복원하는 것이고, 서울 전역은 조선인민군 2군단 포병부대들이 조준한 대구경방사포와 대구경자행포 사정권 안으로 다시 들어가는 것이다. 

 

 

6. 전선을 축소하기 위한 옹진지구전투

 

1949년 당시 황해남도 옹진군, 강령군, 연안군은 38도선 이남에 속했고, 백령도도 38도선 이남에 속했다. 지도를 보면, 백령도 동쪽에 옹진군과 강령군이 있다. 옹진군과 강령군이 옹진반도를 이룬다. 옹진반도와 연안군 사이에 해주만이 있다. 옹진반도는 다른 38도선 이남지역으로부터 섬처럼 고립되었기 때문에 서울이나 개성에서 육로로 왕래하지 못했다. 그래서 국방군은 군사장비와 군수물자를 인천항에서 배에 실어 옹진반도까지 운반해야 했는데, 항로는 12시간이나 걸렸다. 

 

만일 북이 섬처럼 고립된 옹진반도를 점령하면, 38도선의 길이가 약 120km나 줄어든다. 또한 그 지역은 당시 손꼽히는 미곡생산지였다. 그러므로 북측의 시각에서 보면, 국방군과 경찰대가 방어하기 힘든 옹진반도를 점령하여 미곡생산지를 차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까닭에 옹진지구전투는 38도선 무력충돌 중에서 가장 먼저 벌어졌고, 가장 오랜 기간 동안 계속되었다. 

 

1948년 7월 2일 인민군 전투부대는 옹진경찰서를 습격했다. 경찰대와 인민군 전투부대 사이에서 여러 시간 동안 격전이 벌어졌는데, 옹진경찰서 지서주임이 전사했다. 이것이 옹진반도에서 벌어진 첫 무력충돌이었다. 

 

1949년 4월 27일 새벽 인민군 전투부대는 옹진군 38도선을 넘어와 옹진군 교정면 비파리를 점령했다. 

4월 29일 오후 1시 50분 국방군 전투부대는 비파리를 탈환하기 위한 반격전을 개시하여 오후 6시경에 탈환했고, 현지 경찰대에게 치안을 맡겼다. 

5월 4일 인민군 전투원 약 500명은 옹진군 38도선을 넘어와 옹진군 서석면 경찰지서를 공격했다.

5월 13일 오전 5시경 인민군 전투부대는 옹진군 가천면 경찰지서를 공격했고, 5월 17일부터 19일까지 옹진군 교정면 경찰지서와 벽성군 월록면 경찰지서를 연속 공격했으며, 38도선 남북에 걸쳐있는 두락산에 진지를 구축했다.   

5월 17일 인민군 전투원 약 500명은 옹진군 서석면 문정리 38도선을 넘어와 경찰지서를 공격하고 문정리를 점령했다. 

5월 18일 오전 8시, 정오, 오후 3시 인민군 포병부대는 개성을 출발하여 연안군을 지나는 열차를 행해 포사격을 가해 열차운행을 5월 19일 오후 4시까지 중단시켰다. 

5월 19일 오전 6시 인민군 전투원 약 200명은 황해남도 배천군 은천면 량청리와 치악산 방면에서 맹렬한 사격을 가하며 배천읍으로 진격했는데, 오전 11시 50분 개성지구에 주둔하는 국방군과 경찰대가 현지에 증파되어 량청리 방면에서 반격전을 벌였고, 오후 1시 30분경에는 배천읍 방면에서 반격전을 벌였으며, 4시 30분 이후 쌍방은 대치상태에 들어갔다. 당일 새벽 인민군 전투부대는 배천읍 공격에 호응하여 황해남도 연백군 운산면 우포리와 예성강 왼쪽에 있는 오봉산으로 진격하여 오봉산을 점령했다. 인민군 포병부대는 오봉산 103고지, 209고지, 116고지, 103고지에서 예성강 철교를 향해 곡사포와 박격포를 쏘았다. 

5월 20일 오전 11시경 개성지구에 주둔하는 국방군 전투부대가 증파되어 연백군 운산면 우포리를 탈환했고, 오봉산에서는 쌍방이 대치상태에 들어갔다.

5월 21일 새벽 1시경 인민군 전투부대는 38도선을 넘어 옹진군 교정면 경찰지서, 가천면 경찰지서, 서석면 경찰지서, 옹진읍 은동리 경찰지서를 공격했고, 당일 새벽 5시경 인민군 전투원 약 100명은 옹진군 38도선에서 남쪽으로 약 500m 떨어진 국사봉을 점령하고 박격포와 중기관총을 사격했다.  

5월 23일 오후 6시경 옹진군에서 전투를 벌이던 인민군 전투부대는 태탄군 방면에서 증파된 전투부대와 합세했다. 

5월 24일 오전 6시 증강된 인민군 전투부대는 박격포와 중기관총을 쏘며 총공격을 개시하여 옹진군 교정면 경찰지서, 가천면 경찰지서, 벽성군 대차면 경찰지서를 점령했다. 

5월 25일 오전 9시 국방군 전투부대는 증파부대와 합세하여 반격전을 벌인 끝에 옹진군 가천면 경찰지서와 벽성군 대차면 경찰지서를 탈환했다. 

5월 26일 인민군 전투원 약 1,500명은 옹진군 교정면 비파리 38도선을 넘어와 그 일대를 점령했다. 

5월 27일 인민군 전투부대는 38도선을 넘어 황해남도 태탄군, 황해남도 벽성군의 가좌면 취야리와 장곡면 죽천리, 그리고 해주시를 향해 세 방향에서 진격하여 그 일대를 여러 곳 점령하고 진지를 구축했다. 

5월 29일 오전 8시경 인민군 전투원 약 2,000명은 옹진군 우치지서를 습격하고 북면 삼산리 피재고개로 진격했다. 옹진군에 주둔하는 국방군 제1사단 제12연대는 반격전을 벌였다. 

6월 1일 오전 5시 국방군 제1사단 제12연대는 증파된 제13연대와 합세하여 반격전을 계속했다. 인민군 전투부대는 국사봉 246고지에서 포사격을 가해 국방군측에서 사상자가 많이 났다. 

6월 4일 오후 4시경 인민군 항공대 소속 단발비행기 두 대가 38도선에 걸쳐있는 두락산 상공에 나타나 약 30분 동안 정찰비행을 한 뒤 북쪽으로 사라졌다. 

6월 5일 오후 6시 국방군 전투부대는 38도선을 넘어와 옹진군 동북쪽에 있는 소고개(우치)를 점령했다. 

6월 6일 국방군 전투부대는 옹진군 동북쪽에 있는, 해발고가 700m인 까치산에 구축된 인민군 진지를 공격, 탈환했다.

6월 7일 새벽 국방군 전투부대는 반격전을 벌여 황해남도 벽성군 대차면 은동리를 탈환했다. 

6월 12일 밤 국방군 전투부대는 인민군 전투부대가 점령한 국사봉을 빼앗기 위한 제2차 탈환전을 개시했다. 인민군 전투부대는 국방군 전투부대의 공격을 막아내며 국사봉을 지켰다. 

6월 14일 황해남도 벽성군 월록면 장둔리에서 국방군 보도원이 인민군 전투원들에게 확성기방송을 통해 투항을 권고하자 인민군 전투부대는 즉각 공격해왔고 약 2시간 동안 전투가 벌어졌다. 그와 때를 같이 하여 벽성군 대차면 은동리에서도 인민군 전투부대가 국방군 진지를 공격했다.   

6월 19일 오전 5시 50분 국방군은 곡사포를 쏘면서 국사봉 진지를 또 다시 공격했고, 인민군 전투부대는 국사봉 진지에서 박격포와 중기관총으로 응사했다. 

6월 27일 국방군 전투부대는 두락산, 견불산, 은파산, 까치산에 있는 인민군 진지들을 공격했으나, 인민군 전투부대의 반격에 밀려 퇴각했다.   

6월 30일 평양과 해주에서 옹진점령축하인민대회가 동시에 열렸다.

7월 중순부터 인민군 전투부대는 국사봉과 계명산에 집결하여 벽성군 대차면 은동리에 있는 국방군 진지를 점령하기 위해 매일밤 야간습격을 계속했다. 

7월 19일 오전 5시 국방군 전투부대는 국사봉에 있는 인민군 진지들을 공격했다. 

7월 20일 새벽 인민군 전투부대는 국사봉에서 공격을 개시했고, 전투는 7월 22일 오전 8시까지 계속되었다. 

7월 22일 인민군 전투부대는 벽성군 장곡면에 있는 경찰지서와 그 인근에 있는 북산고지를 점령했다.  

8월 4일 오전 5시 인민군 2개 보병련대와 포병부대는 옹진시를 점령하기 위한 공격전을 개시했다. 인민군  포병부대는 120mm 중박격포와 122mm 곡사포를 쏘면서 국방군 방어선을 뚫고 옹진시 외곽까지 진격했다. 이 전투에서 국방군 2개 중대가 궤멸당했다. 

8월 5일 오전 2시 국방군 2개 보병련대와 105mm 곡사포부대는 옹진지구전투에 참가하기 위해 상륙정을 타고 인천항을 출항하여 옹진군 해안에 도착했으나, 조수간만의 차가 너무 심해 상륙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당일 오전 미군사고문단장 윌리엄 로버츠는 국방장관 신성모와 참모총장 채병덕을 불러 긴급작전회의를 진행했다. 이 작전회의에서 신성모는 옹진시가 인민군에게 점령되면, 그에 대한 보복으로 국방군은 38도선에서 북쪽으로 약 30km 떨어진 강원도 철원시를 점령해야 한다고 미군사고문단장에게 건의했다. 그러나 미군사고문단장은 신성모의 건의를 묵살했다. 왜냐하면, 서부전선을 방어하는 국방군 병력을 옹진지구와 철원지구로 분산시키는 경우, 개성-문산-파주-고양-서울로 이어지는 제1축선과 동두천-양주-의정부-서울로 이어지는 제2축선의 방어력이 약화될 것이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인민군은 그 두 축선을 타고 서울로 진격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국방군 전투부대는 인천항을 출항한 증원부대가 옹진반도에 상륙하여 합세한 덕에 인민군 전투부대를 옹진시 외곽에서 가까스로 물리치고 옹진시를 방어할 수 있었다.  

10월 14일 새벽 인민군 전투부대는 황해남도 벽성군 용정리 인근에 있는 은파산을 공격했다. 해발고가 284m인 은파산은 용정리 서남쪽에 있다. 은파산공방전은 11월 15일까지 한 달 동안 계속되었다. 

 

 

7. 오늘의 군사상황은 매우 엄중하다

 

개성지구전투와 옹진지구전투는 1949년 내낸 계속된 38도선 무력충돌 중에서도 전투규모가 가장 컸고, 전투기간도 가장 길었다. 그 이외에도 경기도 장단군, 포천군, 가평군, 그리고 강원도 홍천군, 춘천 북부, 강릉군 등에서 전투가 계속 벌어졌다. 이처럼 38도선 전역에서 1년 이상 격렬히 벌어진 전투에서 국방군은 화력과 병력의 열세로 계속 밀렸다. 그래서 1949년 7월 9일 남측 치안국장은 38도선에서 남쪽으로 20km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통행제한지구로 설정했다. 

 

38도선 무력충돌의 전개양상이 또다시 반복될 리는 없지만, 6.25전쟁 발발 70주년을 맞이한 오늘, 군사분계선에서는 70여 년 전에 일어났던 것과 매우 유사한 무력충돌위험이 조성되고 있다. 71년 전에 그러했던 것처럼, 오늘 조선인민군의 전투력은 한국군보다 압도적으로 우세하다. 이것은 주관적 평가가 아니라 객관적 평가다. 

 

이를테면, 2004년 9월 국회 국방위원회 소속 국회의원 보좌관은 국회 본관에 있는 국방자료열람실에서 2급 군사기밀자료를 열람하고 나서 한국군이 단독으로 조선인민군과 싸우면 보름 만에 한국군이 무너질 것이라고 말했다. 2013년 11월 5일 국회 정보위원회에 출석한 국방정보본부장은 한국군과 조선인민군이 일대일로 싸우면 어느 쪽이 이기느냐는 질문에 한국군이 질 것이라고 답변했다. 

 

조선인민군 전투부대들은 방어훈련이 아니라 공격훈련을 해왔고, 한국군은 공격훈련이 아니라 방어훈련을 해왔기 때문에 조선인민군의 공격력은 한국군의 공격력보다 우세하다. 또한 조선인민군은 사상무장으로 단결되어 있고, 기강도 강하지만, 한국군은 사상무장이라는 말조차 알지 못하고, 기강도 무척 해이해졌다. 더욱이 조선인민군은 독자적인 작전계획과 정찰정보를 가졌기 때문에 임의의 시각에 독자적으로 전쟁을 할 수 있지만, 한국군은 미국군의 작전계획과 정찰정보에 전적으로 의존하기 때문에 독자적으로 전쟁을 하지 못한다. 

 

그런데 그처럼 허약한 한국군에게 보복공격을 가하는 ‘대적군사행동계획’이 지금 조선인민군 총참모부 작전기획실에서 작성되는 중이다. 조선인민군 전투원들이 동해안에서 서해안에 이르는 비무장지대 북측 관할지역에 산재된 민경초소 150개소에 배치되고 있다. 군사상황은 매우 엄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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