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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복원을 위해 남과 북이 해야 할 일은?

<칼럼> 곽태환 전 통일연구원 원장
곽태환  |  thkwak38@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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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7.01  12:0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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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태환 (전 통일연구원 원장/경남대 초빙석좌교수)
 

북한이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무자비하게 일방적으로 6월 16일 폭파하였다. 이런 행동의 정치적 함의는 남북 간 평화공존시대에서 벗어나 새로운 남북 간 적대적 대결 시대로 나가겠다는 의도를 행동으로 보여준 것이다. 감정은 국무위원장은 친여동생인 김여정 제1부부장의 입을 통해 한미 양 정부에게 강한 불만과 심리적 좌절감을 표출한 것이다. 

김정은 위원장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한국과 미국이 한반도 문제 해결을 위해 “새로운 셈법”을 가져오라는 것이다. 그때까지 문재인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과는 더 이상 대화할 생각을 접고 핵전쟁 억제력을 강화하겠다고 공식 발표하면서 새로운 한반도 위기를 조성한 것이다. 

김정은 위원장의 대남 군사행동 계획 보류 결정의 정치적 함의

조선인민군 총참모부가 6월 17일 대변인을 통해 검토하고 있다고 밝힌 4대 대남 군사행동 계획을 발표했다. (1)금강산관광지구와 개성공업지구에 방어임무를 수행하는 연대급 부대들과 화력구분대 배치, (2)남북군사합의에 따라 비무장지대에서 철수했던 민경초소(GP) 재배치, (3)서남해상전선을 비롯한 전 전선의 포병부대 전투 직일근무 증강 및 전반적 전선에서 전선경계근무 급수를 1호 전투근무체계로 격상, 접경지역 부근 정상적인 각종 군사훈련 재개, (4)전 전선에서 대남삐라 살포에 유리한 지역을 개방하여 삐라 살포에 필요한 군사적 보장 등이다. 

그러나 김정은 위원장의 주재 하에 6월 23일 당 중앙군사위원회 제7기 제5차 화상 예비회의에서 당 중앙군사위원회는 조성된 최근 정세를 평가하고 대남 군사행동계획들을 보류 결정하였다고 북한 선전매체가 6월 24일 보도했다. 

이 글에서는 김 위원장의 이런 현명한 보류 결정의 동기를 검토해 보고, 그의 보류 결정이 향후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복원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믿는다.

김 위원장의 “보류” 결정의 정치적 함의를 분석해 보고자 한다. 첫째, 김정은 위원장은 4.27 남북정상 공동선언과 9.19 남북 군사합의를 준수하겠다는 의지가 담긴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본 칼럼을 쓰는 현재까지 북한 매체는 대남비방을 중단하고 있다. 당 중앙군사위원회 예비회의에서 “보류”한 의도는 향후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과 트럼프 미 행정부의 대북정책 향방을 봐가면서 4대 대남 군사행동계획을 최종결정하겠다는 것으로 보인다.

둘째, 김 위원장은 탈북민 단체의 대북전단 살포로 인한 그의 분노와 한미 양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한 좌절감을 표출하였고, 그의 여동생 김여정 제1부부장의 입을 통해 어느 정도 분노를 해소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북한경제의 악화로 북한인민들의 불만 해소와 내부결속을 성공적으로 관리했다고 판단한 것으로 추정한다. 따라서 새로운 한반도 위기 상황을 전쟁분위기로 몰고 가지 않겠다는 판단을 한 것 같다. 더욱이 한반도에서 전쟁분위기가 조성되면 중국으로부터 인도주의적 쌀 지원도 어렵게 될 것이고 북한경제가 더욱더 악화되어 결국 북한체제의 불안정을 가져 올 것이라고 계산한 것으로 보인다.

셋째, 새로운 한반도 위기 상황을 전쟁분위기로 몰아가는 것은 국익에 도움이 안 될 것이며 북미/남북협상을 선점해서 협상해 보려는 의도가 숨어 있는 것 같다. 트럼프 대통령은 북미관계 개선이 재선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되면 언제든지 현 그의 대북정책을 전환할 수 있다는 입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제3차 북미정상회담을 기대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그러므로 김정은 위원장은 트럼프의 우호적인 시그널을 기대하면서 대화분위기 조성을 위해 불필요한 위기를 야기하는 군사적 도발을 자제한 것으로 보인다. 

만약 대남 군사행동계획이 실행된다면 국지적 무력충돌로 인해 전면전으로 확산될 개연성이 높다. 따라서 한반도에서 어느 누구도 원하지 않는 핵전쟁으로 확대된다면 한민족의 공멸로 끝날 것인데 이런 전쟁은 김정은 위원장도 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우선 현 시점에서 남과 북이 대화를 할 수 있도록 분위기 조성이 필요하다. 남북은 상호 적대적 감정을 유발할 수 있는 언동을 즉각 중단하여야 한다. 이런 분위기에서 대화를 이룰 수 없으며 적대적 관계로 치닫게 된다. 그러므로 남과 북이 현명하게 대처하기 위한 노력과 모든 적대적 언동을 자제하기 바란다. 

본 칼럼에서는 새로운 한반도 위기를 기회로 삼아 꽉 막힌 남북관계의 출구전략 모색을 위해 남과 북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필자의 구상을 제언하고자 한다.

문재인 정부가 현시점에서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첫째, 지난 20년 간 남북정상이 합의(6.15, 10.4, 4.27, 9.19)한 4대 합의를 성실히 준수하고 실천, 이행해야 한다. 한국정부가 방치한 4대 합의에 대해 국회가 빠른 시일 내에 비준을 해야 할 것이다. 국회비준은 남북 간 합의를 성실히 준수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김정은 위원장은 국회비준을 주의 깊게 지켜볼 것이다.

둘째, 문재인 대통령은 초당적으로 국민적 합의를 도출하는 노력을 경주할 것으로 기대한다. 문 대통령은 21대 국회가 여당이 다수당인 점을 최대한 이용해야 한다. 먼저 국민적 합의를 도출하기 위해 자신감을 갖고 야당의 지도자들과 소통을 통해 그들의 협조를 얻도록 노력하길 바란다. 현 한반도 위기의 출구전략으로 문 정부는 새로운 대북정책의 청사진을 만들어 초당적 협조로 국민적 합의를 도출하기 위해 국회에서 국정연설을 통해 건설적이고 실천의지를 담은 창의적인 대북정책 제안을 기대한다.

셋째, 탈북민 단체인 자유북한운동연합의 5월 31일 대북전단 살포가 기폭제로 되고, 여기에 김정은 위원장의 불만, 좌절감, 그리고 피포위 강박증(siege mentality)이 가세함으로써, 현 한반도 위기 상황이 조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탈북민 단체의 활동이 실질적으로 다수 국민의 안전한 삶, 번영과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장애물로 작용하기 때문에 소수의 ‘표현의 자유’는 민주주의의 다수결 원칙에 따라 국가의 핵심 이익을 수호하고 신장하기 위해 정부가 강력한 규제조치를 단행해야 한다. 향후 대북전단 살포는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복원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정부는 대북전단 살포 금지법을 조속히 제정해야 할 것이다.  

넷째, 한반도에서 전쟁은 한민족의 공멸이기 때문에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될 것이다. 남북 간 조그마한 무력 충돌이 국지전으로 확대될 수 있고 국지전은 한반도에서 핵전쟁으로 확산될 위험이 있다. 그러므로 한반도에서는 어떤 형태든지 무력사용을 남과 북이 자제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문 정부는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복원을 위해 남북 간 “대화와 소통”을 위해 창의적인 조치를 하기 바란다. 

다섯째, 트럼프 행정부의 현 대북정책은 ‘한반도 비핵-평화체제 구축’을 지연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미국이 새로운 대북정책으로 전환하도록 문재인 정부는 미국을 적극적으로 설득해야 한다. 필자는 향후 북미관계 개선이 트럼프 대통령의 재선에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문 대통령은 대북/대미 “적극적인 교량역할”을 하길 바란다. 따라서 제3차 북미정상회담 개최를 위해 “교량역할”이 바람직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북미정상회담에서 논의할 어젠다는 무엇으로 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필자의 제안은 하노이 제2차 북미정상회담에서 원래 공동발표하기로 한 북미실무회담에서 합의한 북미정상 공동합의문에 서명하고 발표하도록 문 대통령이 교량역할을 하여 북미 양 정상을 설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구체적인 새로운 실행로드맵 제안에 대해 아래 글 참조.  “제2차 북미정상회담의 핵심 쟁점과 정책대안 모색” 통일뉴스(2019.2.22.)]

공고한 한미동맹에도 불구하고 상이한 국가이익으로 인해 한미 간 한반도 문제 해법이 다르다. 그러므로 문 정부는 원칙을 지키면서 지속적으로 미국의 현 대북정책을 수정하도록 설득해야 할 것이다. 현실적으로 국제정치적 시각에서 한반도 문제는 ‘우리 민족끼리’ 해결될 수 없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운명이다. 그러므로 한반도 문제 해결을 위해 한반도 주변국인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4강의 국제협력이 필요하다. 

북한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첫째, 북한 스스로 변할 수 있도록 국제환경 조성이 필요하다. 그래서 북한 스스로 변화 없이는 김정은 위원장이 원하는 선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으로 발전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김정은 위원장은 식량지원을 포함한 남한의 인도적 지원 제안에 긍정적으로 수용하길 바란다. 그러므로 현시점에서 북한은 대남 적대적 언동을 즉각 자제하고 중단하길 바란다. 

그리고 문재인 대통령이 6.15 남북공동선언 20주년 영상 축사(6.15)에서 남과 북은 "소통과 협력”으로 함께 한반도 문제를 풀어 가자고 제안하였고, 북한을 향해 "반목과 오해가 평화와 공존을 위한 노력을 가로막아서는 안 된다"며 "대화의 창을 닫지 말 것을 요청한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무엇보다 중요한 건 남북의 신뢰"라며 "끊임없는 대화로 신뢰를 키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진실성 있는 그의 제안은 대단히 건설적이고 합리적인 제안임에도 불구하고 김여정 제1 부부장이 문재인 대통령을 막말로 맹비난을 서슴지 않았다. 이런 북한지도부의 대응은 남북 간 적대감정을 야기할 뿐 남북관계 개선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대한민국 대통령의 존엄을 해치는 북한지도부의 언동은 자제하길 재촉구한다.

둘째, 현재 북한은 대남/대미 대화를 접고 제2의 ‘고난의 행군’으로 나아갈 ‘자력갱생’의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북한지도부는 남북 간 적대적 대결이 장기적으로 국가 이익이 아님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남북 간 적대적 대결이 지속된다면 궁극적으로 한반도에서 어느 누구도 원하지 않는 핵전쟁으로 확대되면 한민족의 공멸로 끝날 것인데 이런 전쟁은 김정은 위원장이 과연 원할까? 원하지 않다면 북한은 조속히 남북 간 적대적 대결에서 벗어나 평화공존정책으로 복원해야 할 것이다. 김정은 위원장은 소탐대실 하지 말고 문재인 대통령의 대북제안을 수용하고 “소통과 대화”를 통해 평화적인 해법을 모색하길 바란다. 김정은 위원장이 ‘의지’만 있다면 새로운 한반도 위기의 출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셋째, 북한지도부가 북한에는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인한 피해자가 한명도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세계 보건 전문가들은 북한에도 코로나19 예방과 방역을 위해 인도주의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북한지도부는 북한인민들의 귀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 코로나19 방역을 위해 인도주의적 국제지원을 쾌히 받아드릴 것을 촉구한다. 특히 이미 트럼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의 인도주의적 지원 제안을 수용할 것을 촉구한다. 김정은 위원장의 통 큰 결단이 북한체제의 생존과 연계되어 있기 때문에 새 한반도 위기의 출구전략의 첫 단계로 북한이 인도주의적 지원을 수용하길 바란다.

마지막으로 현재 한반도 문제 해결을 위한 기본원칙으로 남북이 ‘역지사지’ 정신으로 상대방을 현실적으로 평가하길 바란다. 그러면 소탐대실하는 우를 범하지 않을 것이다.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복원을 위해 상호양보와 타협 의지가 기본원칙임은 재론할 필요가 없다. 

지금의 한반도 위기를 극복하고 출구를 마련하기 위해 현 시점에서 문재인 정부가 해야 할 일은 적극적인 “교량역할”이다. 미국과 유엔의 대북제재 면제인 인도적 대북 지원사업을 국제사회와 함께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것이다. 먼저 코로나19와 관련하여 의료기구, 의료용품 등 인도주의적 대북지원을 국제 적십자사를 통해 선제적 지원을 시도하는 것이다. 앞에서 이미 지적한 데로 북한이 인도주의적 대북 지원사업에 적극적으로 호응하길 바란다. 이것을 계기로 남북 간 “새로운 신뢰”가 구축될 것이며 이를 기반으로 하여 다른 인도적 지원 사업을 확대해 나 갈수 있을 것이다. 향후 한반도 평화프로세스가 하루 빨리 복원되길 기원한다. 

 

곽태환 박사 (미 이스턴 켄터키 대 명예교수/전 통일 연구원 원장)  

   
 
한국외국어대 학사, 미국 Clark 대학원 석사, 미국 Claremont 대학원대학교 국제관계학 박사. 전 미국 Eastern Kentucky 대학교 국제정치학 교수; 전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소장/교수; 전 통일연구원 원장. 현재 미국 이스턴켄터키대 명예교수, 경남대 초빙 석좌교수, 한반도미래 전략 연구원 이사장, 한반도중립화통일협의회 이사장, 통일전략연구협의회(LA) 회장, 미주 민주참여포럼(KAPAC)상임고문 등, 경남대 명예정치학 박사 수여(2019),글로벌평화재단이 수여하는 혁신학술연구분야 평화상 수상(2012). 32권의 저서, 공저 및 편저; 칼럼, 시론, 학술논문 등 300편 이상 출판; 주요저서: 『한반도평화,비핵화 그리고 통일: 어떻게 이룰것인가?』 (통일뉴스, 2019), 『국제정치 속의 한반도: 평화와 통일구상』 공저: 『한반도 평화체제 의 모색』 등; 영문책 Editor/Co-editor: One Korea: Visions of Korean Unification (Routledge, 2017); North Korea and Security Cooperation in Northeast Asia (Ashgate, 2014); Peace-Regime Building on the Korean Peninsula and Northeast Asian Security Cooperation (Ashgate, 2010) 등. Email: thkwak38@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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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네타냐후 동맹, 중동의 지옥문 여나

[김재명의 '월드 포커스'] 세계적 비판 속 서안지구 합병 밀어붙이기

불법 점령지를 이스라엘 영토로

 

이스라엘의 서안지구 점령은 국제법상 불법이다. 1967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이스라엘이 점령지에서 철수해야 한다고 요구했으나(안보리 결의안 242), 이스라엘은 이를 거부하고 군사통치를 펼치며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면서 미국의 일방적 친이스라엘 지원에 기대어 서안지구의 30%쯤 되는 넓은 지역을 이스라엘 영토에 합병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서안지구 정착촌엔 45만 명 가량의 유대인 정착민들이 살고 있다(동예루살렘 일대에 불법적으로 건설된 이른바 뉴타운에 살면서 서예루살렘 쪽으로 날마다 출퇴근하는 유대인 20만을 합치면 65만 명). 서안지구 요르단 강변 서쪽에 자리 잡은 유대인 정착촌은 모두 132개에 이른다.

 

유대인 정착민들은 요르단 강의 물줄기를 독점하고 농장을 경영하면서 부를 일궈왔다. 현지 취재 때 가보니, 주변 팔레스타인 원주민들의 농작물이 말라비틀어질 때도 정착촌의 스프링클러는 빙빙 잘 돌아갔다.

 

유대인 정착촌은 (지금은 실종된 것이나 다름없는) 중동평화의 '암초'라 일컬어졌다. 정착촌이 불법이기에 철수해야 한다는 국제사회의 비난을 정착민들은 못 들은척이었고, 걸핏하면 주변 팔레스타인 원주민들과 부딪쳐 왔다. 합병안이 통과된다면? 유대인 정착민들은 만세를 부를 것이고, 그 일대의 팔레스타인 원주민들은 다시금 피눈물을 흘릴 것이다.0

 

이스라엘이 점령지를 불법 병합하려는 움직임은 전에도 있었다. 이스라엘은 1980년 동예루살렘을, 1981년에는 시리아 골란고원을 자국 영토에 병합한다고 선언했다. 동서로 나뉜 예루살렘은 국제사회로부터 어느 누구의 영토가 아닌 국제사회의 공유지 성격을 지녔다. 골란고원은 1967년 전쟁에서 시리아로부터 빼앗은 전략요충지다. 이스라엘의 그런 일방적 합병 선언은 국제사회로부터 인정은커녕 거센 비난을 불렀다. 그런데 이젠 한술 더 떠 서안지구의 약 30%쯤 되는 지역을 이스라엘 영토에 합치겠다고 나서는 상황이다.

 

▲ 서안지구에 세워지는 대규모 유대인 정착촌. 중동평화를 깨뜨리는 암초로 국제사회로부터 비판을 받아왔지만 이스라엘과 미국의 태도는 완강하다. Ⓒ김재명

네타냐후-간츠의 야합 산물

 

지난 5월 강경우파인 베냐민 네타냐후(리쿠드 당)와 중도파인 베니 간츠(청백당)의 야합으로 연립내각이 출범한 뒤로 서안지구 합병안은 줄곧 국제사회의 관심을 끌어온 주제다. 지난해부터 올해 초까지 이례적으로 3차례에 걸쳐 치러졌던 이스라엘 총선 과정에서 네타냐후는 강경우파 유권자들의 표를 얻어낼 요량으로 "요르단강 서안의 정착촌들과 전략적 요충지 요르단계곡에 이스라엘 주권을 적용하겠다"고 말해왔다.

 

문제는 네타냐후의 연립내각에서 국방장관을 맡은 간츠의 변절이다. 총선 때 네타냐후가 서안지구 정착촌 합병 얘길 꺼낼 때마다 간츠는 이를 비판하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태도가 바뀐 모습이다. 간츠는 중도파로서 국내문제에선 유연한 입장이지만, 이스라엘 안보 문제에 관한 한 네타냐후와 큰 차별성이 없음이 이번에 확실히 드러난 셈이다. 네타냐후와 간츠는 서안지구 합병 법안을 7월 1일이라도 표결에 넘겨 통과시킬 수 있도록 합의안을 다듬어왔다.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 "국제법 위반이다"

 

수순은 이렇다. 서안지구 합병안을 통과시키되 초기 단계의 실행은 정착촌에 한정한다는 것이다. 국제시회의 비판을 누그러뜨리고 현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반발을 의식해서다. 단계적인 합병을 꾀하려는 모습이다. 중동사태 악화를 은근히 걱정하는 미국쪽의 주문이기도 하다.

 

네타냐후의 서안지구 정착촌 합병 계획은 그동안 국제사회의 거센 반발을 불렀다. 팔레스타인자치정부(PA)와 강경파인 하마스(Hamas)는 물론이고, 유럽연합(EU)과 아랍권 국제기구 아랍연맹(AL)은 "이스라엘이 국제법을 어겨선 안 된다"고 한결같이 비판하고 나섰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도 "(전쟁으로 점령한 땅에 세운) 이스라엘 정착촌을 합법화하는 것은 국제법 위반"이라고 여러 차례 강조해왔다. 여기서 말하는 '국제법'의 출발은 1967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이스라엘은 점령지에서 철수해야 한다"고 요구한 안보리 결의안 242이다.

 

"트럼프는 베스트 프렌드야!"

 

그럼에도 네타냐후가 서안지구 합병을 밀어붙이는 것은 트럼프라는 뒷심에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네타냐후는 기회 있을 때마다 워싱턴으로 날아가 트럼프를 만나곤 했다. 백악관 기자회견 자리에서 네타냐후는 옆에 선 트럼프를 이렇게 칭찬했다. "You have been the greatest friend that Israel has ever had in the White House." 굳이 그 뜻을 옮기자면, 트럼프가 역대 미 대통령 가운데 이스라엘에게 가장 믿을만한 지원군이라는 얘기다. 그럴 만도 하다.

 

트럼프가 미 대통령에 오른 뒤 보여 온 파격적이다 못해 노골적인 친이스라엘 일방주의 정책들의 리스트는 길다. △2017년 10월 서안지구 헤브론 유적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는 과정에서 유네스코(UNESCO)가 이스라엘보다 팔레스타인 편을 든다고 탈퇴 선언했고(실제 탈퇴는 2019년 1월 1일) △국제사회의 세찬 비판을 무시하면서 미 대사관을 텔아비브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겼고(201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이 1967년 전쟁 이래로 지금껏 점령중인 골란고원(국제법상 시리아 영토)에 대한 이스라엘의 주권을 인정한다는 내용의 포고문에 서명했다(2019년 3월 25일).

 

트럼프의 황당한 '중동평화 구상안'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눈에 트럼프가 악마로 비쳐진 또 다른 사례는 유대인 정착촌과 관련한 일방적인 친이스라엘 태도이다. 미 대통령 전임자인 버락 오바마처럼 유대인 정착촌 확장을 막아서기는커녕, 오히려 네타냐후의 강공책에 박수를 쳐주었다. 국제사회의 눈치를 보던 유대인 정착민들은 얼마나 트럼프가 고마울까.

 

2020년 1월에 트럼프가 내놓은 이른바 '중동평화 구상안'도 문제다. 서안지구의 30%에 이르는 땅을 이스라엘 영토로 할당하는 황당한 내용을 담았다. 너무 터무니가 없어서 중동평화를 간절히 바라는 많은 이들의 말문을 잃게 만들 정도였다. 결과적으로 네타냐후의 서안지구 합병안은 트럼프의 그것과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 지난 1월 28일(현지 시각) 백악관에서 도널드 트럼프(왼쪽) 미국 대통령과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중동 평화 구상을 발표했다. ⓒ로이터=연합뉴스

이는 결국 오는 11월 미 대선을 앞둔 트럼프 자신을 위한 정책이기도 하다. 2016년 미 대선에서 미국 유대인 유권자들은 29%만이 트럼프 후보에게 표를 던졌다(민주당 클린턴 힐러리 후보의 득표율은 71%). 70 중반 나이에 대통령 재선을 꿈꾸는 트럼프에게는 보수적인 미 기독교 조직들과 더불어, 미-이스라엘 공공위원회(AIPAC)를 비롯해 이스라엘의 이익을 대변하는 미국 유대인 압력단체들이 중요한 정치 자산으로 꼽힌다.

 

트럼프의 친이스라엘 일방정책, 그리고 트럼프의 뒷심을 믿고 밀어붙이는 네타냐후의 강공 책으로 말미암아 안 그래도 휘발성 높은 중동 상황이 악화되고 있다. 트럼프-네타냐후 동맹은 중동분쟁을 걱정하는 국제사회의 목소리엔 귀를 막는 모습이다.

 

다시 중동에 피바람 부는가

 

해마다 봄이 오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유혈사태가 터지곤 했다. 하지만 올해는 코로나 사태로 말미암아 상대적으로 조용했다. 서안지구 합병 문제로 다시금 중동에 피바람이 불 조짐이 보인다. 코로나 걱정으로 대규모 집회를 삼가오던 팔레스타인 저항세력들도 "더 이상 참기 어렵다"고 행동에 나설 것이다. 이스라엘이 서안지구를 합병하겠다고 나서는 것을 더 이상 바라만 보기는 어렵다고 여기기 마련이다.

 

이스라엘 매체인 <예루살렘포스트>는 6월 말 현재 이스라엘의 서안지구 합병안이 아직은 최종안이 확정되질 않았고, 따라서 7월 첫째 주에 크네셋(이스라엘 의회)에 합병안이 표결에 붙이진 않을 것으로 내다봤다. 분명한 사실은 네타냐후가 루비콘 강을 건넌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한국과 이스라엘의 시간대는 6시간 차이로 한국이 빠르다. 7월 초 어느날 저녁을 먹는 한국 시민들은 서안지구 정착촌이 이스라엘 영토에 공식 합병됐다는 우울한 뉴스를 듣게 될 것이다.



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0063017235848996 프레시안(http://www.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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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다리는 만들 때부터 '끊길' 것을 압니다

[세상을 잇는 다리]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순응하는 섶다리 20.07.01 08:42l최종 업데이트 20.07.01 08:42l이영천(shrenrhw)

다리는 누군가 자신의 등을 밟고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존재다. 또한 모든 것을 이어주는 존재다. ‘이음과 매개, 변화와 극복’은 자기희생 없인 절대 이뤄질 수 없다.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옛 다리부터, 최신 초 장대교량까지 발달되어 온 순서로 다룰 예정이다. 이를 통해 공학기술은 물론 인문적 인식 폭을 넓히는데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기자말]

물은 이중성을 띠고 있다. 평온할 때는 무척 이롭지만, 화가 나면 모든 것을 쓸어가 버린다. 풍경도 바꿔버리고, 집이며 짐승이며 사람 목숨까지도 앗아가 버린다. 이런 물을 잘 이용하는 지혜가 곧 문명의 발달과정이었다.

물은 모든 생물이 삶을 영위하는 데 있어 필수조건이다. 사람도 오래 전부터 물 근처에 모여 살았다. 가장 기본적인 생명을 보전하려는 욕구였다. 농업혁명 이후 정착생활을 하면서부터, 교역에 물을 이용하기 시작한다. 우마차와 물을 이용한 뗏목이 주요 운송수단이었다.

그러다 차츰 조선술이 발달하면서 배를 이용하기 시작한다. 물이 많아 수심이 깊은 곳은 배를 이용한 운송이 최적이다. 나루터를 중심으로 장시(場市)가 형성되었다. 이런 장시의 배후에 하나 둘 집단적인 마을들이 생겨나면서, 도시가 번성하였다. 세계 어디를 가든, 강과 바다를 끼지 않은 도시는 매우 드물다. 이렇듯 물은 인간문명의 원천이다.

물이 부족하고 수심이 얕은 곳에선 배를 이용할 수가 없다. 따라서 도시 형성은 물론, 물류 흐름도 매우 제한적이다. 사람 왕래가 뜸한 한적한 곳으로, 주로 임시시설들이 들어선다. 그런 곳에서 발달한 것이 임시의 다리, 즉 가교(假橋)이다.

가교 형태로 우리나라에서 특이하게 발달된 것이, 바로 '섶다리'다. 우리 조상들도 물을 가까이 했다. 물은 필연적으로 이수(利水)와 치수(治水)의 대상이다. 조상들은 치수 방법으로 수십 미터가 넘는 강과 하천을 안전하게 건널 방안에 고심했다. 그 일환으로 손쉽고 값싸며 자연친화적인 섶다리를 고안해 낸 것이다.

섶다리는 수심이 얕고, 주변에서 쉽게 나무를 구할 수 있는 곳에 만들어진다. 생활편의시설(Facility)로써 원시적인 형태를 띤 섶다리는, 자연에 순응하는 친환경 다리이다. 보통 갈수기인 10월에서 12월 사이에 만든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울력을 벌인다. 공역으로 마을 공동체의 재확인이며, 마을 축제가 벌어지기도 한다.

다리가 놓여 서로 왕래해야 하는 두 마을 공동의 행사였다. 이렇게 만들어진 다리는 보통 초여름 장마철이나 초가을 홍수기에, 급류에 유실되곤 했다. 다리가 유실되어 사라졌다고 하나, 모든 것이 다시 자연의 품으로 되돌아간 것일 뿐이다. 순전히 나무와 흙으로 만들어진 다리이기 때문이다. 섶다리는 이렇듯 모든 생명이 태어나고 명멸하는 모습을 닮아 있다.

섶다리 놓는 과정
 
선창이 만들어진 모습 판운리에 섶다리를 놓기 전에, 강 양안에 선창 놓기를 완료한 모습
▲ 선창이 만들어진 모습 판운리에 섶다리를 놓기 전에, 강 양안에 선창 놓기를 완료한 모습
ⓒ 김원식_주천 강 문화센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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섶다리 놓기는 비교적 단순하다. 먼저 '선창 놓기'라 부르는 토목공사가 필요하다. 강이나 하천 양쪽 끝, 다리가 걸치는 부분에 흙과 자갈, 모래 등을 쌓는다. 그 끝에 '교대(橋臺 : 다리의 양쪽 끝에서 제방, 석축, 흙 등과 만나는 부분에 설치하여 다리를 걸게 만든 시설)' 역할을 하는 넓고 무거운 돌을 놓는다. 그 자중(自重)으로 선창 끝단의 지반을 안정화 시킨다. 또한, 흙 쌓기가 되어 있는 몸통 부위 토압(土壓)을 지지해, 선창 전체를 안정화 시킨다.
 
Y형 교각과 멍에목을 다듬는 모습 섶다리의 교각 역할을 하는 Y형 나무와 상판목 지지대 역할을 하는 멍에목을 다듬는 모습
▲ Y형 교각과 멍에목을 다듬는 모습 섶다리의 교각 역할을 하는 Y형 나무와 상판목 지지대 역할을 하는 멍에목을 다듬는 모습
ⓒ 김원식_주천 강 문화센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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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 산에 올라가 Y자 모양의 나뭇가지를 자른다. 단단한 재질에 물에 강한, 수령이 오래된 나뭇가지를 사용한다. 보통 참나무나 물푸레나무를 많이 사용한다. 이 나무들이 '교각(橋脚 : 다리를 받치는 기둥으로 교량의 다리)' 역할을 한다. 교각 목은 어지간한 하중에도 끄떡없이 버틸 수 있어야 한다.

높이 2.0∼2.5m, 두께는 20∼30cm 나무가 적당하다. Y자 모양의 나무 끝을 네모나게 깎아 다듬는다. 다듬은 나무들을 보(椺) 역할을 하는 '멍에목(옛 교량에서 개개 교각을 결구하는 보 역할을 함. 그 위에 귀틀목(석)이나 상판을 직접 얹을 수 있게 만든 부재)'에 네모난 홈을 파 끼워 맞춘다.
 
완성된 교각들 Y형 교각목을 멍에목에 끼워 완성한 모습
▲ 완성된 교각들 Y형 교각목을 멍에목에 끼워 완성한 모습
ⓒ 김원식_주천 강 문화센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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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에목은 Y자형 나무보다는 더 두꺼워야 한다. 보통 육질이 단단한 소나무가 제격이다. 멍에목과 Y자형 나무가 결구된 홈 간극에 '쐐기(물건의 틈에 박아서 사개가 물러나지 못하게 하거나 물건들의 사이를 벌리는 데 쓰는 물건)'를 박아 단단히 고정시킨다.

멍에목의 길이는 1.5∼2m가 보통이다. 멍에목을 길게 하여, 다리 중간에 대피 공간을 만들기도 한다. 멍에목의 길이가 다리 폭을 결정한다. 이런 작업들이 끝나면 비로소 교각이 완성된다. 그 다음 '경간(徑間 : 다리, 건물, 전주 따위의 기둥과 기둥, 교각과 교각 사이. 또는 그 사이의 거리)'을 결정한다. 경간이 결정되면 하천 너비를 경간 값으로 나누어, 교각 개수를 산정한다. 섶다리 경간은 보통 3∼4m 간격이 일반적이다.
 
교각을 경간에 따라 강바닥에 배치하는 모습 완성된 교각들을 미리 정해 둔 경간에 따라 강바닥에 세워 배치하는 모습
▲ 교각을 경간에 따라 강바닥에 배치하는 모습 완성된 교각들을 미리 정해 둔 경간에 따라 강바닥에 세워 배치하는 모습
ⓒ 김원식_주천 강 문화센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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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성된 교각을 경간에 맞춰 하천 바닥에 박아 세운다. 교각을 세울 때 하부지반을 안정화 시키는 힘든 기초 작업은 따로 하지는 않는다. 섶다리는 자중으로 버틸 수 있는, 하나로 잘 짜인 구조물이기 때문이다.
 
상판목 걸기 교각을 세우고, 그 위에 사람이 지나다닐 상판목을 걸어 묶어 주는 모습
▲ 상판목 걸기 교각을 세우고, 그 위에 사람이 지나다닐 상판목을 걸어 묶어 주는 모습
ⓒ 김원식_주천 강 문화센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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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워진 교각 위에 '상판(上板 : 교량의 윗부분을 이르는 말로, 사람이나 차들이 직접 지나다닐 수 있도록 만든 곳)' 역할을 하는 길이 5∼6m의 곧은 나무들을 가로로 길게 걸어, 질긴 칡덩굴 등으로 단단히 묶어준다. 틈을 촘촘히 하여 나무들이 묶이면, 세로 방향으로 교각 넓이의 짧은 나무들을 엇갈려 묶는다.
섶다리 놓기 작업 모습 상판목 걸기와 섶 얹어 묶기, 흙 다져쌓기가 동시에 이뤄지는 모습
▲ 섶다리 놓기 작업 모습 상판목 걸기와 섶 얹어 묶기, 흙 다져쌓기가 동시에 이뤄지는 모습
ⓒ 김원식_주천 강 문화센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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섶을 엮는 모습 상판목을 촘촘이 걸어 묶고, 그 위에 섶을 두텁게 엮어 묶는 모습
▲ 섶을 엮는 모습 상판목을 촘촘이 걸어 묶고, 그 위에 섶을 두텁게 엮어 묶는 모습
ⓒ 김원식_주천 강 문화센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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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위에 섶(솔가지나 잣나무가지)을 촘촘히 엮는다. 섶은 어느 정도 두께가 되도록 쌓아서 엮어야 하며, 상층부 가장자리는 가급적 하늘을 향해 세워주어야 한다. 그래야 다리가 완성되었을 때, 다리 위를 걷는 사람에게 심리적인 안정감을 주게 된다. 섶이 다 엮이면, 그 위에 흙을 쌓고, 단단히 밟아주면 비로소 섶다리가 완성된다. 섶 위에 단단히 쌓인 흙의 무게로 안정화된 자중을 확보하는 것이다.

모두의 인간성을 유지시키는 배려의 공간

섶다리는 우마차를 위한 다리가 아니다. 가벼운 행장(行裝)으로 길을 나서는 나그네나, 가까운 들녘으로 일 나가는 농사꾼을 위한 다리다. 빈 지게면 충분하다. 맨몸으로 걷는 것도 좋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같이 걸어도 위안이 되어 준다. 새소리 바람소리가 우선인 산골 강촌에서, 섶다리 하나면 모든 것이 위안이고 충족이다.

자연이 가슴으로 들어온다. 욕심 부릴 까닭도, 남의 것을 탐해 빼앗을 필요도 없다. 섶다리를 건너는 넉넉하고 가벼운 마음이면 모든 산천이 품안에 안겨온다. 하늘과 바람과 별들이 안겨오는, 풍성하고 넉넉한 무위자연이다.
 
판운리_섶다리_겨울풍경 평창강에 있는 판운리 섶다리의 평화로운 겨울풍경
▲ 판운리_섶다리_겨울풍경 평창강에 있는 판운리 섶다리의 평화로운 겨울풍경
ⓒ 김원식_주천 강 문화센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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섶다리는 풍경과도 썩 잘 어울린다. 인공이 가미되지 않은 자연 일부를, 강 위에 옮겨놓은 까닭이다. 구절양장 굽어 흐르는 강에서, 사방이 높은 산으로 막힌 마을에선 이 섶다리가 세상과 통하는 유일한 통로이다.

이곳을 통해서 세상으로 나가고, 세상의 잡다한 것들이 들어온다. 물과 바람과 산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순박한 사람들이 해원(解冤)하는 통로이다. 그들이 명(命)을 다해 자연으로 돌아가듯, 섶다리도 명을 다하면 자연의 일부로 돌아간다.

다리라는 임무를 마치고, 자연의 어느 한 구석으로 물러나 있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이런 측면에서 섶다리는, 탄생하는 순간부터 어쩌면 끊김과 헤어짐을 예비하는 다리라는 생각이 든다. 섶다리가 번뇌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떠안아 '윤회(輪廻)의 강'으로 떠나보내는 것은 아닐까? 강촌 사람들은 섶다리를 닮아갔고, 자연을 닮아간다. 그 다리 위에서 삶의 고뇌와 깊은 외로움을 위안 받았을 것이다.

섶다리는 질서와 안녕, 모두의 인간성을 유지시키는 배려의 공간이기도 하다. 양끝에서 서로 길이 엇갈릴 것 같으면, 누구라도 서로에게 먼저 건널 것을 권한다. 나이 드신 분이 반드시 우선이다. 무거운 짐을 이고 진 짐꾼이면 모두 양보하고, 병자나 임산부, 약자가 우선이다.

여럿이 같이 건널 때는, 가장 많은 책임과 부담을 진 자가 앞장을 선다. 특히 눈이라도 내려 다리 위가 미끄러워지면, 이런 원칙은 더욱 빛을 낸다. 섶다리는 이처럼 공동체가 유지되는 질서 속에서, 서로를 배려하며 살아가는 지혜를 담고 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람으로 받아들이는 포용과 관용의 다리이다. 이음을 바탕에 둔 모두의 다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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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출규제 후 한-일 ‘격랑의 터널’ 1년…출구가 안 보인다

등록 :2020-07-01 04:59수정 :2020-07-01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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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7월 수출규제 뒤 갈등 증폭
WTO 분쟁해결 절차까지도 방해
강제동원 판결 타협안 도출 난항

양국 갈등 해법 도출 찾기 어려운
‘구조적 갈등’으로 이미 변화 조짐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 재뿌릴라”
대일관계 방치 위험 지적 이어져
문재인 대통령(왼쪽)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
문재인 대통령(왼쪽)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

지난 29일(현지시각) 세계무역기구(WTO) 분쟁해결기구(DSB)는 일본이 지난해 7월 취한 수출규제 조처에 대해 분쟁해결절차를 재개하기 위한 첫 회의를 열었다. 한국의 재개 요청에 따라 열린 이 회의는 피소국 일본이 1심 재판부에 해당하는 패널 설치를 완강히 거부해 결론을 내지 못한 채 산회했다. 회원국 만장일치 동의가 이뤄지지 않는 한 패널 설치를 막을 수 없는데도 절차 진행을 방해하기 위해 일단 ‘몽니’를 부린 것이다. 그 밖에 한·일은 세계유산 ‘군함도’(하시마) 전시물의 ‘역사 왜곡’ 논란 등 여러 민감한 현안에서 다시 날 선 공방을 벌이고 있다. 지난 3월 초 코로나19 사태가 심각해지며 잠시 이어졌던 휴전을 끝내고 다시 전방위적 백병전에 나서는 모양새다.

 

일본이 한국의 반도체 생산에 꼭 필요한 불화수소 등에 대한 수출규제 조처를 내놓으며, 한-일 관계를 격랑 속으로 몰아넣은 지 1일로 꼭 1년이 된다. 시간이 지났지만 양국 관계는 여전히 ‘사상 최악’의 긴 터널 속에 머물러 있다. 이 조처를 일본의 ‘경제침략’이라 받아들인 한국에선 전국민적인 불매운동이 벌어졌고, 정부는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종료를 결정하며 전선이 ‘경제’에서 ‘안보’까지 확대됐다. 이후 협정 연장을 선택한 한국의 후퇴로 파국을 피했지만, 관계 개선의 실마리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전문가들은 최악의 지경에 이른 한-일 관계를 다시 정상 궤도에 올려놓기 위해선 이 모든 갈등의 ‘원인’인 한국 대법원의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판결’에 대해 원만한 ‘타협안’을 도출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하지만 서로가 상대에게 결정적 양보를 요구하며, “이대로 가다간 공멸”이라는 위협만 거듭하고 있어 타결 전망은 매우 어두운 상태다.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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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협상이 교착상태에 있음을 극적으로 보여준 사건이 올해 초 양국 정상 간 공방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1월14일 열린 신년 기자회견에서 한·일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모아”가자며 대화를 통한 해결 의지를 강조했다. 이에 대해 아베 신조 총리는 엿새 뒤 “국가와 국가 사이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극히 냉담한 반응을 내놨다. 한-일 청구권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됐음을 선언한 1965년 청구권협정을 지키라는 얘기였다. 양기호 성공회대 교수는 “한국 정부가 지난해 6월 첫 제안 이후 여러 강화된 제안을 내놨다. 그러나 일본이 완강히 거부하는 상황이라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청와대도 ‘원고들에게 지급되는 금원은 피고 기업들에서 나와야 한다’는 최소 기준만을 세워 두고 유연한 자세로 외교 협의를 진행하고 있지만, 일본의 강경한 태도가 바뀌지 않아 당혹해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오쿠조노 히데키 시즈오카현립대 교수는 “일본은 현대 일-한 관계의 기초가 되어 있는 ‘65년 체제’를 지켜야 한다고 절실하게 생각한다. 일본 기업의 자산을 현금화한 돈이 원고들에게 넘어가는 순간 청구권협정은 완전히 무시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대법 판결’의 틀 안에서 해법을 도출하려는 한국과 ‘65년 체제’를 사수하려는 일본 사이에 타협점을 찾기 힘든 처절한 대립이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정부는 일본과의 두번째 충돌을 원치 않지만, 피할 수도 없다는 입장이다. 정부·여당은 올 하반기 원고들이 현금화에 나설 경우 일본이 내놓을 수 있는 추가 보복조처의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한 대비책 마련에 나서고 있다. 문 대통령은 29일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1년 전 기습적인 일본의 조치에 흔들리지 않고 정면돌파하며 전화위복의 계기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아소 다로 일본 부총리는 지난해 3월 일본이 취할 수 있는 조처로 “관세, 송금 정지, 비자 발급 정지” 등을 언급한 바 있다.

한-일 대립은 ‘역사 갈등’에서 신냉전이 시작된 동아시아의 미래상에 대한 양국의 화해하기 힘든 입장차를 반영하는 ‘구조적·사활적 갈등’으로 이행하고 있다. 일본은 정부가 2018년 이후 민족의 명운을 걸고 추진한 남북관계 개선과 북-미 핵협상의 결정적인 고비마다 훼방꾼 구실을 해왔고, 최근엔 한국의 ‘대북·대중관’을 문제 삼으며 ‘확대된 G7’에 한국을 참가시킨다는 미국의 안에 반대까지 했다. 대법 판결을 둘러싼 지난 2년의 갈등은 한때 같은 방향인 줄 알았던 한·일의 ‘전략적 이해’가 사실은 크게 달랐다는 점을 깨닫는 시간이기도 했다. 아베 정권에서 두 차례 방위상을 지냈던 오노데라 이쓰노리는 한국과의 관계 개선에 애쓰기보다 “정중히 무시하자”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과의 관계를 방치하는 것은 극히 위험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일본이 한-미 동맹보다 상위에 있는 미-일 동맹의 힘을 업고 한국이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시행하는 데 번번이 재를 뿌릴 수 있기 때문이다. 조진구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정부가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와 관련해 단 한번도 일본과 제대로 협의한 적이 없다고 본다. 어려운 시간일수록 지도자의 지혜와 결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길윤형 김소연 기자 charisma@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politics/diplomacy/951694.html?_fr=mt1#csidx1fb22082ca96c36826896290a97da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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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핵전쟁 부추기는 동아일보가 민족지?

김용택 | 2020-07-01 09:53:59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재래식 무기 탑재 B-1B로 때리고 핵무장 가능 B-52로 초토화, 3∼6시간 내 끝낸다”

6월 30일 자 동아일보 메인 톱기사 제목이다. 제대로 된 언론이라면 이런 반민족적이고 반언론적인 기사를 쓸 수 있는가? 전쟁을 게임 정도로 보는 것도 그렇지만 한반도에 핵무기로 폭격을 하면 북한만 초토화되는가? 북한도 핵보유국인데 미국이 핵무기를 쏠 동안 가만히 앉아서 초토화되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1. 본보는 민족의 표현기관으로 자임함 / 2. 본보는 민주주의를 지지함 / 3. 본보는 문화주의를 제창함… 동아일보의 사시(社是)다. 서울신문과 조선일보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1920년 4월 1일 창간된 신문이다. 국내외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중요한 현안에 대해 사회 공기(公器)로서 국민을 교육하며 여론을 자극하고 양식(良識)의 눈을 일깨우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는 신문이다. ‘민족의 표현기관? 민주주의 지향? 문화주의? 30일 자 기사 하나만 봐도 동아일보는 그런 가치를 지향 하는가?

민주주의니 민족과 동아일보는 거리가 멀다. B-52로 핵공격헤 한반도를 초토화시킨다는 기사를 마치 남의 나라 얘기하듯이 갈겨붙이는 게 민족지요, 민주주의를 지향한다고? 사람들은 조중동을 일컬어 ‘기레기’라고한다. 기레기란 ‘기자’와 ‘쓰레기’의 합성어로 대한민국에서 허위 사실과 과장된 부풀린 기사로 저널리즘의 수준을 현저하게 떨어뜨리고 기자로서의 전문성이 상당히 떨어지는 사람과 그 사회적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일제강점기 말에 조선일보와 함께 친일반민족행위를 일삼은 바 있는 동아일보의 사주가 ‘건국의 공로자’ 훈장을 받았다가 문재인정부 국무회의에서 사주 김성수가 1962년에 받은 건국공로훈장 복장(현재 대통령장)을 취소하기로 의결했다.

<분단의 씨앗, 동아일보 오보사건>

동아일보가 민족과 거리가 먼 상징적인 사건은 이른바 ‘동아일보 오보사건’이다.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독립주장’(“外相會議에 論議된 朝鮮獨立問題 蘇聯은 信託統治主張 蘇聯의 口實은 三八線 分割占領 米國은 卽時 獨立主張”)… 1945년 12월 27일 자 동아일보 1면 기사제목이 그것이다. 동아일보는 “미국은 우리의 독립을 위해 애쓰는데, 소련은 우리를 다시 식민지로 만들려고 한다”는 인식을 갖도록 신탁통치 반대 운동을 맹렬하게 전개했던 신문이다. 만약 동아일보가 사실보도를 했다는 우리역사는 분단도 동족간 상잔도 없이 통일 조국이 되어 있지 않았겠는가? ‘동아일보 오보사건’은 언론사뿐만 아니라 민족의 비극을 불러온 분단의 씨앗이다 이런 신문이 민족지니 민족운운하는 것은 또 한번 민족에 대한 배신행위에 다름 아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일제강점기에는 친일신문이었고, 해방 후에는 남북분단을 이용해 사회적 갈등, 대립, 대결과 분열을 부추긴 반통일 신문이었으며 박정희, 전두환 군부독재정권에 부역한 반민주 신문이었다. 그리고 재벌들 편에서 노동자를 착취하고 민중들을 탄압하는데 앞장선 수구 적폐언론일 뿐이다.” 2020년 3월 5일,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소속 전국공무원노조가 낸 “반통일 분단 고착, 독재정권 비호, 재벌 편향, 영리병원지지, 보건의료노동자의 이름으로 조선일보⦁동아일보의 청산을 선언한다”는 선언문 중 일부다. 오늘날 학교가 무너지는데 일조해 사교육 천지를 만드는데 앞장서고 정의당이 낸 차별금지법을 동성애법이라고 반대하는 신문이 동아일보다. 헌법에 보장된 평등권을 부정하면서 민주주의 어쩌고 하는 외피를 뒤집어 쓴 신문이 동아일보가 아닌가?

전두환대통령 취임 민주·복지·정의... 4천만의 염원 / 전두환대통령의 어록 / 정의사회 이룩하며 복지국가건설하자 / 대폭·거국...행정쇄신기대 / 흥겨운 가락 속 축복의 박수, 내외 귀빈 1500 여명 접견 / 구시대 과오청산, 평화적 정권교체… 뉴스타파가 보도한 1980년 동아일보 기사 제목이다. 뉴스타파는 조동(朝東) 100년 ‘전두환 찬양과 유착으로 고속 성장’이라는 기사에서 “광주시민, ‘폭도’·‘극렬분자’로 표현…계엄군 ‘자제’, ‘노고’ 칭찬…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조선과 동아일보는 광주 시민들을 폭도와 극렬분자, 난동자, 불순분자로 매도했다”는 조동의 부끄러운 민 낯을 폭로했다.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광주 시민들을 ‘폭도와 극렬분자, 난동자, 불순분자로 매도’한 신문이 조선과 동아일보다. 매년 새해 첫날 1면에는 전두환 사진이 등장하고 ‘인간 전두환’, ‘새 시대가 바라는 새 지도자상’이라고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일왕과 박정희, 전두환을 찬양한 신문>

1938년 새해 첫날 동아일보는 1면 머리에 ‘천황’ 부처의 사진을 대문짝만 하게 싣고 ‘천황’이 대원수로서 장병들 걱정 때문에 무더위를 피하는 일조차 삼가고 언제나 군복을 입고 지낸다는 자못 ‘감격적’인 기사를 쓴 신문이 민족지 운운할 수 있는가? 1939. 4. 29. 사설에는 “금일은 천장의 가절이다. 천황 폐하께옵서 38회의 어탄신일을 맞이하옵시는 날이니 … 황공하옵께도 군ㆍ정의 어친재(御親裁)에 신금(宸襟:임금의 마음)을 번거롭게 하옵시고 전선의 장병의 노고를 휼(恤)하옵시는 성은에 공구감읍...어쩌구 하는 신문. 해방 후 유신정권에는 유신을 찬양하고 광주시민을 학살한 살인자를 구국의 영웅이라고 보도한 신문이 민족지 운운하고 민주주의를 말할 자격이 있는가? 하다 못해 이제는 분단을 고착화하고 동족의 반쪽 북한에 B-52로 3∼6시간 내 초토화시키기를 바라는 신문이 언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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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워킹그룹, 해체할 수 없다면

[황재옥의 '한반도 톡'] 남북관계 발목잡을 수 없도록 '대수술' 해야

잠시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나니 '폭파' 라는 과격함 뒤에 가려진 북한의 간절함이 보였다. 김정은, 김여정 남매가 역할을 분담하고, '친절히' 사전 예고까지 해 가면서 극적인 폭파 장면을 연출했지만, 그건 우리 쪽에 보내는 간절한 SOS였다.

 

지난 16일 국제신용평가사 '피치솔루션스'는 북한의 올해 경제성장률을 -6%로 전망했다, -6.5%을 기록한 1997년 고난의 행군 시기 이후 가장 낮은 수치다. 김정은은 8일 노동당 정치국회의에서 '평양시민의 생활보장'을 언급했다. '보류' 결정 이후 대남 비난기사가 사라진 노동신문 지면은 평양시민의 생활 고충을 헤아리는 기사들로 채워졌다. 제재 장기화와 코로나19로 인한 경제적 타격이 핵심계층이 모여 사는 평양까지 확대된 것 같다.


 

대북 제재에 코로나까지 덮친 상황에서 돌파구를 찾지 못하던 북한이 그 분풀이를 '한반도 중재자' 역할을 하는 문재인 대통령, 비핵화와 남북협력을 논의하는 한미 워킹그룹으로 돌렸다. 이번 북한의 '악담'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빠져 있었다.


 

북한은 문재인 정부의 미온적인 태도와 대미굴종적인 자세 때문에 남북협력이 속도를 내지 못한다고 비난했다. 마침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회고록 <그 일이 일어난 방> 덕분에 우리가 북한에 구차한 설명을 할 필요는 없게 됐다. 회고록에 따르면, 북미회담이 실패로 끝나기를 바라는 이들의 훼방을 무릅쓰고 한반도 평화와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한 문재인 대통령의 일화도 담겨있기 때문이다.


 

노력을 안 한 것이 아니었다. '비핵화 전에 대북제재 완화는 없다'는 미국과 비핵화 및 제재 완화의 접점을 찾기가 쉽지 않았을 뿐이다. 북한도 우리의 노력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와 함께 이번 일은 한미워킹그룹이 남북관계 개선,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해 얼마나 효율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성찰의 계기가 되었다.


 

한미 워킹그룹의 탄생 배경은 이렇다. 2018년 9.19 평양선언과 군사분야합의서가 나온 후, 10월 10일 남북의 유화모드에 화들짝 놀란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은 강경화 외교부 장관에게 불편한 심기를 전했다. 이후 28일 스티븐 비건 당시 미 대북정책 특별대표가 임종석 청와대 비서실장을 만나 한미 워킹그룹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고, 11월 20일 미국은 일방적으로 한미 워킹그룹의 출범을 발표했다.


 

한미 워킹그룹이 남북관계 개선의 족쇄가 된 근본 원인은, 미국 앞에만 서면 자꾸 작아지는 우리나라 외교관들의 대미관, 대미자세 때문이 아닌가 싶다. 한미 워킹그룹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해체론까지 나오는 상황이 되니 외교부는 한미 워킹그룹의 순기능을 강조하고 나서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결과로 봤을 때 똑 떨어지는 순기능이 과연 있었나 싶다.


 

시간이 갈수록 한미 워킹그룹은 대북 제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제재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 개성공단 기업인들의 자산 점검 차원의 방북도 불허했고, 운반용 트럭이 제재 대상이라면서 독감약인 타미플루의 대북 지원도 금지했다.

 

그동안 득보다 실이 많았고, 순기능보다 남북관계 개선에 역기능이 많았다면 이런 협의체는 적어도 우리에겐 없느니만 못하다. 미국은 갑이고 우리는 을일 수밖에 없다는 민족패배주의를 걷어내지 않으면 수석대표를 장관급으로 격상시키고 운영방식을 비공개에서 공개로 바꾼다 할지라도 한미 워킹그룹을 통한 남북관계 개선 발목 잡기는 피할 길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반대로 워킹그룹을 당장 해체할 수 없다면, 그리고 해체시 한미관계를 걱정한다면, 해체에 준하는 대수술을 해야 한다. 적어도 남북관계가 의제일 때는 통일부 차관이나 차관급 공무원이 수석대표가 되도록 운영하고, 안보문제는 국방부 차관이나 차관급 수석대표가 참여하는 것이다. 남북관계 당사자인 우리 정부 실무자가 분야별로 적극적으로 나서 미국을 설득하는 것이다. 우리의 국익에 입각해서 우리 정부의 입장과 정책에 협조하도록 미국을 설득할 수 있는 운영방식이라면 해체 아닌 대수술을 통해 자율성과 전문성을 키울 수 있을 것이다.


 

폼페이오 장관은 2인용 자전거론으로 한미 워킹그룹의 순기능을 설명했다. 2인용 자전거는 앞자리에 앉아 핸들을 잡고 있는 사람 마음대로 가는 것이지 뒷자리에 앉아 열심히 페달을 밟는 사람은 자기가 가고자 하는 곳으로 갈 수 없다. '2인용 자전거론'은 틀렸다.



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0063010055319982 프레시안(http://www.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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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통이 가져온 통합당의 ‘오판’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열 차례나 요청했지만 거부, 누구 책임? 도대체 누가 결정권자일까?
 
임병도 | 2020-06-30 08:44:36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6월 29일 통합당이 불참한 가운데 국회 본회의에서 정보위를 제외한 상임위원장 선출이 완료됐습니다.

정보위는 국회법상 국회의장이 각 교섭단체 대표로부터 소속 의원 중에서 후보를 추천받아 국회부의장 및 각 교섭단체 대표가 협의해 선임할 수 있습니다.

지난 15일 법제사법·기획재정·외교통일·국방·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보건복지위원장 등 6개 상임위원장이 민주당 의원으로 선출됐고, 어제 국회운영위원장을 포함해 예결위원장까지 11개이니 총 17개 상임위원장을 민주당이 차지했습니다.

기자 주: 16개 상임위와 1개 상설특별위원회(예결위)

민주당이 정보위를 제외한 모든 상임위원장으로 선출되자 일부 언론은 ‘독식’, ‘불통’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이 말은 민주당이 아니라 통합당이 들어야 합니다.

열 차례나 요청했지만 거부, 누구 책임?

 

 

박병석 의장은 상임위원장 표결이 끝난 뒤 모두 발언에서 자신이 정상적으로 원 구성을 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상세히 밝혔습니다.

이번 21대 국회의 경우 지난 6월 8일까지 각 교섭단체 대표의원이 위원 선임을 요청하고, 국회는 상임위원장을 선출해야 했으나 한 달이 지나 오늘에야 선출하게 됐습니다. 이에 의장은 위원 선임을 요청하지 않은 교섭단체에 대해 지난 6월 11일, 15일, 26일 그리고 오늘까지 모두 다섯 차례에 걸쳐 서면으로 위원 선임을 요청하거나 교섭단체에서 조사한 소속의원의 상임위 수요 조사 결과를 제출해줄 것을 공문으로 요청했습니다. 교섭단체 대표의원과의 회동 과정에서도 구두로 열 차례 이상 요구하며 국회법을 지키도록 최선의 노력을 해왔습니다.

박병석 의장은 본회의를 다섯 차례나 연기하면서 끈질기게 협상을 통해 원 구성을 하려고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박 의장은 민주당 지지자들로부터 엄청난 욕을 먹기도 했습니다.

박 의장이 열 차례나 넘게 통합당에게 국회법을 지키면서 원 구성을 하자고 했지만, 통합당은 거부했습니다. 사실 이 정도면 의장 입장에서는 할 만큼 했다고 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국정 농단 사태 국정감사와 같은 나라를 뒤흔들 사안도 아니고 법사위를 누가 맡느냐 정도로는 마냥 기다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상임위를 민주당이 모두 차지했으니 무조건 민주당이 나쁘다가 아니라, 그토록 협상을 위해 노력했는데도 불구하고 거부한 통합당에 더 책임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도대체 누가 결정권자일까?

 

 

어제 본회의가 열리기 전 민주당 의원총회에서 김태년 원내대표는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제 늦게까지 회동 협상이 이어졌다. 그동안 한 5차례를 본회의를 연기하면서 어떻게든 합의에 이르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어제 일요일이었는데 꽤 장시간 협상을 했고, 어제 언론을 통해 보셨겠지만 상당한 진전이 이뤄졌다. 사실상 원내대표 간에는 합의에 이르렀다. 합의에 이르기 위해서 우리도 상당 부분 마음 아프지만 양보했던 내용이 있지 않았겠나. 어제 합의문까지 작성하려고 했는데, 미래통합당의 원내지도부가 오늘 오전까지 합의문 작성을 미뤄달라고 요청을 해서 오전에 기다렸지만 결국은 최종적으로 거부 의사를 전해 왔다. 어떤 의사결정 구조로 결정했는지 모르겠지만 매우 아쉽고 유감스러운 일이다. 이로써 합의에 의한 미래통합당과의 협상은 완전히 결렬된 거다. 말씀드렸지만 정말로 최선을 다했다. 상임위도 우리가 법사위를 가져오기 때문에 협상을 끝내기 위해서 한꺼번에 양보를 했었고, 또 기다리고 참고 기다리고 하면서 상당한 시간 보내왔는데 끝내 거부한 게 너무 아쉽고 안타깝다.

김태년 원내대표는 사실상 원내대표는 합의에 이르렀지만 어떤 의사결정 구조로 결정했는지 모르지만 무산됐다고 설명했습니다. 이해찬 대표도 “저쪽은 창구가 일원화가 안 된 것 같다. 그래서 협상자와 최종적으로 판단하는 사람이 견해가 달라서 이런 상황에 이르렀다”고 말했습니다.

결국, 통합당은 협상하는 사람 따로 이를 결정하는 결정권자가 따로 있었다는 말입니다. 협상자는 당연히 주호영 원내대표였고, 결정권자는 누구였을까요? 현재로서는 김종인 비대위원장의 개입설이 가장 유력합니다.

누가 됐든 통합당에 결정권자가 있었기에 주호영 원내대표와의 협상은 의미가 없었고, 오롯이 시간만 잡아먹었다고 봐야 합니다.

통합당의 오판, 민주당이 실패해도 통합당이 이기는 것은 아니다

▲29일 오후 주호영 원내대표와 통합당 국회의원들이 국회 로텐더홀 계단에서 국회의장의 강제 상임위 위원 배정과 상임위원장 일방 선출에 항의 하는 규탄 성명을 발표하고 있는 모습

정보위를 제외한 상임위 구성이 이루어진 본회의가 끝난 뒤 통합당은 국회 본청 계단에서 규탄 성명을 하고, 소속 의원 103명 전원이 국회사무처 의사과에 사임계를 제출했습니다. 의사일정을 보이콧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여준 셈입니다. 하지만, 통합당의 이런 모습은 ‘쇼’로 끝날 듯합니다.

어제 본회의가 끝난 뒤 17개 상임위 대부분은 저녁 늦게까지 회의를 하면서 추경안 예산안 심사를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문제 될 것은 없었습니다. 이미 법사위나 국방위 등 기존에 열렸던 상임위도 성원이 성립돼 회의에는 전혀 지장이 없습니다.

통합당은 ’17개 상임위 다 가져가고 잘못되면 모두 민주당 탓이다’라는 전략을 진행 중입니다. 하지만 이런다고 민주당이 패배하고 통합당이 승리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법사위를 주고 알자배기 상임위를 가져온 다음 ‘정의연’이나 ‘인국공’ 처럼 민주당이 곤욕을 치르고 있는 사안을 물고 늘어지는 편이 훨씬 유리했습니다.

통합당은 이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습니다. 그저 로텐더홀에서 농성을 하거나 의사일정 보이콧뿐인데 국민들은 그리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원래 국회는 매번 싸우는 곳이니 그러려니 합니다. 상임위에 들어가 큰소리를 내고 싶은데 뻘쭘합니다. 국정조사로 꼬투리를 잡고 싶어도 추경안이 통과되면 민주당에 내밀 카드도 없습니다.

이래저래 통합당은 출구가 없어 보입니다. 이 모든 것은 통합당의 ‘오판’이 가져온 결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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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반지 갖춘 슈퍼 여당, 골룸이냐 프로도냐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20/06/30 11:08
  • 수정일
    2020/06/30 11:08
  • 글쓴이
    이필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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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取중眞담] 상임위원장직 독식 민주당, '일당독재' 비판 피하려면

20.06.30 07:36l최종 업데이트 20.06.30 07:36l

 
[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롭게 쓰는 코너입니다.[편집자말]
개회 선언한 박병석 국회의장 박병석 국회의장이 29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제21대 국회 원구성을 마무리하기 위한 본회의 개회를 선언하며 의사봉을 두드리고 있다.
▲ 개회 선언한 박병석 국회의장 박병석 국회의장이 29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제21대 국회 원구성을 마무리하기 위한 본회의 개회를 선언하며 의사봉을 두드리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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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대 국회는 한국 정치사에 '다수당의 상임위 독식'이라는 전환점부터 기록하게 됐다. 상임위 활동부터 본회의 법안 통과까지, 이제 다수당이자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책임이다.

국회는 29일 10개 상임위원회와 예산결산특별위원회의 위원장을 모두 민주당 의원으로 선출했다. 지난 15일 법제사법위원회를 포함한 6개 상임위 위원장에 이어, 정보위를 제외한 16개 상임위와 예산결산특별위원회의 위원장을 원내 다수당이 모두 차지하게 된 것이다.

의석 비율에 따라 각 원내 교섭단체가 상임위원장직을 나눠 갖는 관례는 1988년 13대 국회 이후 정착됐다. 민주화 요구가 높은 상황에서 도입된 것이어서, 민주당의 이번 상임위 독식은 마치 그 이전 군사독재 때처럼 국회를 되돌리려는 게 아니냐는 인상을 준다. 법사위가 없으면 어떤 상임위도 맡을 수 없다는 미래통합당은 이런 점에 기반해 '민주당의 일당독재'라는 논리를 편다.

하지만 여야가 상임위를 나눠 갖던 때에도 국회는 '민주주의의 전당'과는 거리가 멀었다. 각 상임위에서 여야 합의로 통과시킨 법안을 '돌려세우는' 권능을 가진 법사위에서 일어난 일들이 대표적인 예다. 17대 국회 한나라당 법사위원들은 법사위 회의장에서 숙식하며 아예 회의를 못 열게 하는 일이 잦았다. 민주당이 소수 야당이 된 18대 국회에선 국회의장의 '미디어법' 직권상정에 항의해 민주당 소속 법사위원장이 다른 상임위가 보낸 모든 법안의 처리를 멈춰 세운 바 있다.

'국회 선진화법'으로 국회법이 개정된 이후 회의실이나 위원장석 점거는 없어졌지만 법사위의 권능은 여전했다. 20대 국회의 여상규 법사위원장(당시 자유한국당 소속)은 피해자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를 위한 특별법 개정안'을 멈춰 세웠다. 상임위를 통과했어도 한국당이 반대하는 법안은 다시 상임위로 돌려보내거나 법사위에서 다시 여야가 합의해 처리하겠다고 해, 마치 양원제의 상원의장 같은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법사위에 체계·자구심사권이 있어 가능한 월권행위였다.

다른 상임위라고 해서 민주적이라는 평가를 받지는 못한다. 몇 개의 상임위원장 자리가 '알짜'라는 평가를 받으며 여야 거래의 대상이 되곤 한다는 점은, 해당 상임위의 활동이 합리적인 토론보다는 상임위원장의 의중에 크게 좌우된다는 반증이다.

'전환의 강' 건너려면, 민주적 상임위 운영 예시를 보여줘야 
 
본회의 참석한 김태년 더불어민주당 김태년 원내대표가 29일 오후 제21대 국회 원구성 마무리를 위해 개의된 국회 본회의에 참석해 생각에 잠겨 있다.
▲ 본회의 참석한 김태년 더불어민주당 김태년 원내대표가 29일 오후 제21대 국회 원구성 마무리를 위해 개의된 국회 본회의에 참석해 생각에 잠겨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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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에서 민주당은 17개 위원장 자리를 모두 차지하게 됐다. 176석 민주당은 모든 상임위에서 과반을 넘는데 여기에 모든 위원장 자리까지, 소설 <반지의 제왕> 속 절대반지를 손에 넣은 것과 다름없다.

김태년 민주당 원내대표는 29일 본회의 직전 의원총회에서 "과거에 익숙했던 방식에서 탈피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는 데에는 진통이 불가피하다"라며 "전환의 강을 건너야 한다"고 말했다. 완전히 달라진 국회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누누이 강조해 온 '일하는 국회'를 향해 전환의 강을 건너려면, 먼저 상임위부터 일하는 곳이 돼야 한다. 상임위에서부터 합리적인 토론과 민주적인 의사진행이 이뤄져야 한다. 보이콧을 선언한 통합당은 한동안 들어오지 않겠지만, 다른 야당이나 무소속 의원들과 합리적인 토론을 벌이는 민주적인 운영으로 '일하는 국회란 이렇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누가 다수당이 돼도 '일하는 국회'가 계속 유지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자면, 탐욕을 일으키는 사우론의 눈을 피해 절대반지를 파괴해야 한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슈퍼 여당의 유혹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이다. 절대반지에 집착하며 스스로를 파괴하는 골룸의 길이 아닌, 절대반지를 용암에 던져버리는 프로도의 길을 가야 한다.

절대반지를 파괴하고 진정한 민주주의를 구현하는 국회를 만드는 일. 그 첫걸음은 법제사법위원회가 체계·자구심사권으로 월권행위를 할 수 있는 제도부터 뜯어고치는 것이다.
 
 미래통합당 주호영 원내대표를 비롯한 의원들이 29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의원총회를 마친 뒤 더불어민주당의 21대 국회 전반기 단독 원구성 강행 처리에 대해 "오늘 의회독재가 비로서 시작된 참으로 슬픈 날이다”며 “민주당의 총선 승리로 인한 희희낙락과 일방독주를 국민의 힘으로 막아달라”고 호소했다.
▲  미래통합당 주호영 원내대표를 비롯한 의원들이 29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의원총회를 마친 뒤 더불어민주당의 21대 국회 전반기 단독 원구성 강행 처리에 대해 "오늘 의회독재가 비로서 시작된 참으로 슬픈 날이다”며 “민주당의 총선 승리로 인한 희희낙락과 일방독주를 국민의 힘으로 막아달라”고 호소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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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전쟁과 미국, 그리고 국보법 – 1

<연재> 고승우의 ‘국가보안법 연구’ (16)
고승우  |  konews8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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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6.29  10: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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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승우 / 언론사회학 박사

 

16. 한반도 전쟁과 미국, 그리고 국보법 – 1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최근 출간한 회고록 '그 일이 일어난 방'에서 따르면, 미국은 북한에 대해  '선제적 공격(a preemptive strike)' 전략을 수립해 항상 그 집행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볼턴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2017년 자신에게 북한과 미국간의 전쟁 발발 가능성에 대해 물었을 때 ‘50 대 50 확률’이라고 말했고 북한에 대한 '선제적 공격'의 장점을 역설했다고 밝혔다.

볼턴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북한의 핵시설과 탄도미사일 프로그램을 겨냥한 '선제적 공격'을 왜 해야 하며, 공격이 어떻게 이뤄지는지에 대해 트럼프 대통령에게 설명했다. 또 서울을 위협하고 있는 비무장지대(DMZ)북쪽의 북한 포대들을 겨냥해 미국이 엄청난 규모의 재래식 폭탄을 어떻게 사용해 공격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볼턴은 이런 방식으로 사상자를 극적으로 줄일 수있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볼턴은 미국이 왜 북한에 대해 양자택일 문제로 접근해야 하는지, 즉 북한 핵무기를 그대로 두는 것과 군사력을 사용해 북한을 공격하는 것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트럼프에게 말해주고 또 다른 대안은 한국 주도의 남북통일 또는 북한의 정권 교체인데 중국의 협력이 요구된다고 설명했다는 것이다<뉴시스 2020년 6월18일>. 

볼턴의 회고록을 둘러싼 진위 논란이 심해 더 검토해야 하겠지만 한국에 대한 부분을 보면 그 냥 지나치기 어렵다. 그 내용이 대단히 심각하다. 한국의 국격을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북한에 대해 '선제적 공격' 전략을 세워놓고 언제든 맘만 먹으면 북한을 공격할 태세인데 이 경우 한국 정부의 동의를 사전에 구해야 한다는  필요성 등을 볼턴은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미국이 북한을 공격할 경우 남북간 전쟁이 불가피하고 그에 따른 인명과 재산 피해가 천문학적인 것인데도 주권국인 한국은 볼턴의 회고록에서 그 존재가 없는 것처럼 비춰진다. 미국의 북한 선제적 공격에 한국은 전혀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는 것으로 추정을 행간에서 읽게 된다. 

더욱 기이한 것은 국내외에서 볼턴 회고록에 대한 논란이 분분하지만 한국 정부가 미국에 대해 ‘북한에 대한 선제적 공격을 하려면 먼저 한국의 동의를 받아야 하는 것 아니냐? 왜 너희 맘대로 전쟁을 한반도에서 일으키려 하느냐?’라고 항의하거나 문제를 제기했다는 이야기는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한국 언론도 마찬가지다. 전쟁이 일어나면 언론사도 피해를 피해가기 어려운데 남의 나라 이야기인 듯 한가하거나 아예 침묵한다. 이번만이 아니다. 수년전부터 미국은 북한에 대해 선제적 공격 전략을 수립해 놓고 한국군과 합동군사훈련도 여러 차례 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한국 정부의 그런 태도에 대해 국내 언론, 학계, 시민사회 등이 극히 일부분을 제외하고 문제를 제기한 적도 없는 듯하다. 6.25 한국전쟁보가 더 심한 참화가 일어날 가능성에 대해 입을 다무는 것이 일상이 된 것은 역시 국가보안법과 이 법이 보호하는 한미동맹 때문이다. 

한반도에서 미국이 선제적 공격을 하겠다는 전략을 세워놓았다는 것은 사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최근의 사례만을 살피면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그랬고 트럼프 대통령이 한반도 전면전쟁을 검토했다는 것이 북 비핵화 추진 노력이 한참 진행 중이던 2018년 9월 공개되었다. 워터게이트를 취재한 것으로 알려진 미국의 언론인 밥 우드워드가 출간한 자신의 신간 '공포: 백악관 안의 트럼프'에서 오바마 정부가 북핵의 위협을 없애기 위해 대북 선제공격을 검토했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북미 간 긴장이 고조됐던 2017년 임기 초반 대북 선제공격 방안 마련을 주문했다고 주장했다<MBC 2018년 9월 11일>.

우드워드는 이 책에서 오바마 대통령이 2016년 9월 9일, 북한의 5차 핵실험 이후 백악관에서북한의 미사일을 저지할 수 있는 극비작전, '특별 접근 프로그램'을 승인했고 국방부는 지상군을 투입해 북한 핵 프로그램을 완전히 파괴하는 방안을 제시했으며 김정은 국방위원장을 공습해 북한 지도자를 교체하는 '맨체인지' 작전도 계획했다고 주장했다. 

존브레넌 당시 CIA 국장이 이끈 이 '공격적 논쟁'에 따라 실제 미 공군은 2017년 10월 북한과 유사한 지형인 미주리주 오자크에서 정교한 모의 연습도 실시했는데 이런 계획들은 북한의 반격을 촉발할 가능성 등으로 백지화되거나 보류됐다고 우드워드는 밝혔다. 또 우드워드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 한 달 뒤 던퍼드 합참의장에게 북한에 대한 선제 군사공격에 대한 플랜을 요청했다고 주장했다. 

한편 미국 상원은 2017년 11월 의회의 사전 승인 없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북한을 먼저 공격하는 걸 막기 위한 법안을 일주일 새 3건이나 무더기로 발의했었다<자유아시아방송 2017년 11월 1일>. 이는 미국 대통령에게 한반도에서 미국의 선제공격 권한이 있으며 그 가능성이 얼마나 높은 것인지를 드러내는 증거의 하나로 충격을 준다. 

미 행정부의 독자적인 대북 선제공격을 차단하기 위한 이 세 개 법안은 공통적으로 의회의 사전 승인 없는 대북 선제공격이 헌법 위배라고 지적했다. 이어 북한의 위협이 임박한 경우, 북한의 기습공격 격퇴 등 제한적인 경우를 제외하곤 대통령이 대북 군사공격에 앞서 의회의 승인을 받도록 했다. 미 의회는 이를 강제하기 위해 의회의 고유 권한인 예산 배정권을 활용해 대북 군사공격에 필요한 관련 예산의 집행 금지를 못 박았다. 

미 의회의 이 법안 제출에서 미 대통령이 대북 선제공격을 할 수 있는 상황이 드러났다. 미 의회의 이런 입법 시도에도 불구하고 과거 통킹만 사태, 이라크 침공 등과 같은 미국 대통령의 선제공격 사례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미 의회가 대통령의 선제공격을 저지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법률적으로 미 대통령과 의회가 전쟁 수행권을 반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위협 임박’과 같은 애매한 표현 때문에 미 대통령의 선제공격에 대한 재량권을 의회가 저지하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미국의 선제공격 가능성이 있을 경우 주요한 징후 몇 가지가 나타나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것은 한국 내 미국 민간인 10만 여 명을 대피시키거나 핵잠수함, 이지스 구축함이 동해나 서해에 대거 출몰할 때, 항공모함 세척 이상이 한반도에 집결할 때, 미국 함선 수백 척이 한반도 근해에 포진하고 육상 병력 수십 만 명이 남한에 주둔하는 것 등으로 알려져 있다<워싱턴 데일리 2018년 3월 1일>. 또한 전쟁 수행을 위한 탄약 등의 전쟁 물자를 대거 한반도에 반입하는 것도 포함된다. 선제공격 준비는 미국인 대피에 최소 수 주가 걸리는 등 최소 1-3개 월 정도 소요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의 선제공격은 사전 준비 없이 취해지는 법은 없으며 선제공격은 전면 전쟁 발생을 의미하기 때문에 최후의 승리를 위해 막대한 군비를 사전에 비축해야 한다. 만약 한국이 미국에 대해 북한 선제공격을 위해 군사력을 한국에 들여오는 것을 반대한다면 미국의 선제공격은 불가능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은 미국과의 군사관계가 준 식민지 상태라 할 만큼 자주권이 축소된 미국의 요구를 거부할 수가 없는 불행한 처지이고 이 때문에 남북 간에 평화를 위한 정상간 합의가 아무리 많이 나와도 휴지조각으로 전락한다는 평가를 피하기 어려운 것이다. 현재와 같은 한미동맹이 지속되는 한 남북간 평화교류와 평화통일은 미국의 허락 없이는 불가능한 상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북은 2018년 9월 평양에서 열린 3차 남북 정상회담 계기로 발표된 9·19 군사합의에 따라 2018년 11월 1일 0시 부로 지상, 해상, 공중에서 상대방에 대한 일체의 적대행위를 전면 중지함으로써 남북 간 군사적 긴장을 완화하고 신뢰 구축을 촉진하며 실질적인 전쟁 위험을 제거하는 중요한 전기를 마련한 바 있다. 특히 남북 간 수차례 교전이 발생했던 서해 완충구역에서 양측이 함포, 해안포의 포구, 포신의 덮개를 설치하고 포문을 폐쇄하는 조치를 취함으로써 우발적 충돌 가능성을 현저히 낮추기로 했다(연합뉴스TV 2018년 11월 1일). 그러나 최근 한반도에서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자 미국의 최첨단 정찰기 등 군용기가 수시로 한반도 상공에 출격한 바 있어 남북간 군사적 긴장 완화조치는 미국에 의해 언제든 백지화될 수 밖에 없는 형편이다. 한반도에서 전쟁 가능성을 없애기 위해서는 한미군사동맹의 정상화 작업 등이 취해져야 하는 것이다. 

미국에 심각하게 기울어진 한미군사동맹의 핵심적 근거인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르면 한국은 군사적으로 미국과 동등한 주권국가가 아니다. 미국은 슈퍼 갑이고 한국은 반대는커녕 이견 제시조차 거의 불가능한 을에 불과하다. 심각한 군사적 종속관계다. 미국의 북한에 대한 선제적 공격이 가능한 것이나 지구촌이 주시하는 미국의 미사일방어체계인 사드 배치가 추진된 근거는 한미상호방위조약 4조다. 이 조항에 따라 미국은 한반도 방위에 필요할 경우 자국 무기나 병력을 마음대로 배치할 권리를 보장받고 있다. 

군사적으로 수십 년 묵은 대미 종속은 1953년 10월 체결된 이 조약의 4조에 따른 것이다. 한미상호방위조약 제 4 조는 “상호적 합의에 의하여 미국의 육군해군과 공군을 대한민국의 영토내와 그 부근에 배치하는 권리를 대한민국은 이를 허여하고 미합중국은 이를 수락한다(영문 The Republic of Korea grants, and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accepts, the right to dispose United States land, air and sea forces in and about the territory of the Republic of Korea as determined by mutual agreement.)”로 되어 있다.

제 4조의 영문 표기를 보면 그 실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미군의 한반도 방위에 필요한 군사력을 한국에 배치하는 것을 미국의 권리(right)로 규정하면서 미국은 이 권리를 수용(accept)하고 한국은 수락(grant)하도록 되어 있다. accept와 grant 단어는 대가없이 받거나 주는 것을 나타낸다. 이 외교적 단어에 의해 한국의 군사주권에 대해 미국이 사전에 협의하나거나 동의를 구하는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이다.

이 4조의 한국어 표기를 보면 맨 앞에 ‘상호적 합의에 의하여’라고 되어 있어 한미 두 나라가 상호 대등한 입장에서 협의하는 것으로 비춰진다. 그러나 ‘상호적 합의에 의하여’는 이 4조의 이행을 규정한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을 가리킨다. SOFA 공식 명칭은 '대한민국과 아메리카합중국 간의 상호방위조약 제4조에 의한 시설과 구역 및 대한민국 내에서의 미합중국 군대의 지위에 관한 협정 및 동 부속문서‘라고 부르기도 한다.

SOFA나 방위비분담특별협정(SMA)도 한미상호방위조약 4 조에서 파생된 하위법체계로, 미국의 우월한 지위를 철저하게 보장받아 주한미군에 대한 시설, 구역, 경비를 한국이 부담하게 만들고 있다. 방위비분담협정은 SOFA 5조(주한미군에 대한 시설과 구역은 한국이 제공하고 주둔 경비는 미국이 부담하는 내용)의 적용과 관련한 예외적 특별 조치를 담았다. SOFA가 주한미군의 주둔 경비를 미국이 부담하게 만들어졌는데도 SOFA 5조의 예외적 협정을 별도로 만든 것이다. 

한미 상호방위조약 4조가 미국에 크게 기울어진 운동장이듯 이 4조에서 파생된 지위협정, 방위비분담협정도 마찬가지다. 군사동맹에서 미국이 갑이고 한국이 을인 구조가 이 부분에서 고착화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에 전시작전통제권을 미군 사령관이 행사하게 되면서 미국이 한국의 군사주권을 상당 부분 대행하는 구조가 정착되었다.

SOFA는 주한미군의 권리에서 파생된 협정이라서 미군이 시설과 구역 이용 시 발생하는 환경 오염문제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고 있다. 이에 따라 한국 정부는 ‘주한미군지위협정(SOFA)시행에 관한 민사특별법'(주한미군민사법)을 만들어 시행하면서 주한미군 구성원 등이 한국 정부 외의 제3자에게 손해를 입힌 경우 '국가배상법'에 따라 손해를 배상하고 있다. 서울시는 용산 미군기지 주변 지하수 정화에 들인 서울시 예산이 매년 5억 원 규모에 달하자 미군이 아닌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고 승소했다<파이낸셜뉴스 2018년 6월 13일>. 한국 정부가 주한미군의 환경훼손에 대한 복구비용을 물어주고 있는 것은 주한미군이 ’권리‘를 행사하다가 환경훼손이 발생한 것이라서 미국식 상식으로 볼 때 복구비용을 부담할 법적 근거가 없는 것이다. 이와 관련 시민단체는 SOFA 개정을 요구하고 있으나 한미상호방위조약 4조가 건재 하는 한 그 개정이 법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즉 SOFA 개정이 아닌 한미상호방위조약 개폐를 주장해야 하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북미정상회담 후 한미군사훈련중단과 주한미군 철수 가능성을 언급하자 미국의 기득권 세력은 일제히 한목소리로 북한에 퍼주기를 한 것이라고 트럼프를 공격했다. 그러나 부동산 재벌 출신 트럼프 대통령이 북미정상회담을 통해 ‘국가대 국가의 평등한 협상’의 룰을 익힌 것으로 보이는데 비해 미국의 기득권 세력은 미 제국주의적 침략성과 난폭성을 여전히 미국의 특권으로 여기는 태도를 드러내고 있다. 미 기득권 세력은 주한미군 철수 가능성에 대해 “절대 안 된다.”는 소리를 합창하고 있는데 이는 주한미군의 특권을 절대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깡패적 논리에 다름 아니다. 

미국은 북미정상회담 등을 통해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 시에도 주한미군은 적용되지 않는다는 전제를 유포시켰고 한국 정부도 이에 동조하고 있다.  주한미군은 유엔사(유엔군사령부)와 한미연합사(한미연합사령부)로 나뉘는데, 유엔사는 1950년 북한에 대항해 창설된 부대이고 유엔사가 맡고 있는 업무가 바로 정전협정 관련이다. 평화협정이 체결되면 이 유엔사가 없어지게 되지만 한미연합사는 그렇지 않다. 한미연합사는 1953년 정전협정 이후 체결된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라 78년에 설치된 부대다. 이는 정전협정이 평화협정으로 전환될 것에 대한 미국의 대비책이라는 성격으로 읽힌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있는 한 한미연합사는 계속 주둔하는 것이다. 전시작전통제권도 바로 이 한미연합사가 가지고 있다. 평화협정과 한미연합사 즉 주한미군 철수는 별개인 것이다<CBS노컷뉴스 4월 8일>. 

미국은 전시작전통제권을 한국군이 가져갈 경우 유엔사를 통해 남북교류에 개입하거나 대북선제공격 등의 전략 유지를 도모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흔히 한반도에 평화협정이 맺어지면 그것이 평화를 정착시키는 거보인 것처럼 인식하지만 미국은 평화협정이후에 가능할 남북의 평화통일 추진 과정에도 개입한다는 논리를 세워놓은 것이다. 미국이 지난 수년간 유엔사를 보강하는 조치와 함께 남북교류협력에도 제동을 거는 등 실력행사를 하고 있는데 이는 미국이 유엔사를 미국의 이익을 챙기려는 도 다른 장치로 삼으려 한다는 것으로 경계해야 한다. 

유엔사는 북한에 대한 공격권 또는 북한 지역 영토 관할권을 주장하는 등 미래에 미국의 이익을 대행할 장치를 만들어 가고 있다. 유엔사가 이런 해괴한 일을 하는 것도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주한미군사령관은 필요에 따라 유엔사 사령관 모자를 쓰고 한반도에서 점령군 행세를 할 준비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미국이 국가간 조약 협정 등에 대해 대단히 집요한 모습을 보이는데 예를 들면 카스라 테프트 밀약과 같은 경우다. 미국은 일본과 맺은 이 밀약에 따라 간도에서의 독립군 활동에 대해 일본 편을 들고 3.1독립만세운동에 대해서도 철저히 외면했다. 이어 2차 대전 종전이후 독도의 영유권을 일본이 주장할 근거를 마련해 주었다. 미국이 각종 조약, 협정 등을 그물망처럼 만들어 놓고 남한에서 특권을 유지하려 획책하지만 그에 대한 문제제기가 정계, 학계, 시민사회, 언론 등에서 미흡한 것은 그 핵심적 이유가 결국은 국보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국보법은 불합리한 한미군사관계를 온존시키고 궁극적으로 미국의 이익에 봉사하는 희대의 악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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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국격을 떨어뜨리는 국가보안법

백남주 객원기자 | 기사입력 2020/06/29 [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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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평화통일민주화를 가로막으며 권련유지 수단으로 사용되어온 국가보안법은 그 존재자체가 한국의 국제적 위상을 추락시키는 원인이 되고 있다.

 

ILO핵심협약 비준마저 가로막는 국가보안법

 

문재인 대통령은 6월 23일 20대 국회에서 처리하지 못한 ILO(국제노동기구핵심협약 비준을 위한 3(노조법교원노조법공무원노조법)에 대해 노동기본권을 보장하는 법으로 자체적으로도 반드시 필요한 입법일 뿐만 아니라 ILO 핵심 협약 비준을 위해서도 필요한 입법이라며 핵심협약 비준 재추진 의사를 밝혔다.

 

 

한국은 1991년 ILO에 가입했지만 노동권에 관한 8개 핵심협약 중 절반만 비준한 상태다한국이 비준하지 않은 것은 결사의 자유 보장(87·98)과 강제노동 금지(29·105등 4가지다핵심협약 비준은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었다.

 

ILO 핵심협약 비준은 그 나라의 노동권이 얼마나 보호되고 있는지그 사회의 노동에 대한 인식이 어떤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척도라 할 수 있다. ILO를 비롯해 국제사회는 한국정부에게 ILO 핵심협약 비준을 요구해 왔다.

 

국제사회와 노동계 등의 요구 속에서 정부는 4개 ILO(국제노동기구핵심협약 가운데 3개 협약(결사의 자유에 관한 87호와 98강제노동 금지에 관한 29)에 대해 비준을 추진하며 법과 제도를 정비해 왔다.

 

그런데 나머지 1강제노동에 대한 105호 협약은 왜 비준을 추진하지 않는 것일까?

 

1957년 제정된 105호 협약은 기성 정치·사회·경제 체제에 사상적으로 반대하는 견해를 가진 사람을 처벌할 목적으로 하는 정치적 강압이나 교육의 수단”, “노동 규율의 수단”, “파업 참가에 대한 처벌수단” 등으로 사용되는 노동을 강제노동으로 규정하고 있다.

 

즉 정치범에 대한 억압이나노동 규율 및 파업에 대한 제재수단으로 강제노동을 시키는 것을 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정부는 105호 협약 비준을 제외하고 있는 이유에 대해 우리나라 형벌체계분단국가 상황 등을 고려할 때 추가적인 검토가 필요하다고 판단해 제외했다고 밝히고 있다.

 

105호 협약이 국가보안법 등과 상충되는 면이 있기 때문이다국가보안법이 규정하는 찬양·고무·선동·동조한 행위에 대한 처벌은 ILO 핵심협약에 위배되는 행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한국사회의 노동권을 보장하는데 있어서도 국가보안법은 걸림돌이 되고 있고이는 국제사회가 한국이 반노동적이라는 인식을 가지게 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국가보안법 개정·폐지에 대한 국제사회의 요구

 

그동안 국가보안법의 부당성은 국제사회에서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다.

 

유엔 인권이사회는 1992년 7한국의 인권상황을 검토한 후 국가보안법의 점진적 폐지를 권고했고, 1995년 유엔인군위원회의 표현의 자유 특별보고관도 국가보안법이 국제인권법을 위반하고 있다며 국가보안법 폐지를 요구했다.

 

1998년 유엔인권이사회는 대법원에서 유죄판결이 확정된 두 건의 국가보안법 사건(박태훈 사건김근태 사건)에 대해 표현의 자유가 침해되었다는 이유로 시민·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을 위반했다고 결론내리기도 했다.

 

유엔 인권이사회는 1999년 11월 국가보안법의 단계적 폐지와 제7(찬양·고무등)의 시급한 개정을 재차 요구했다.

 

또한 2004년 3월 유엔 인권이사회는 미술가 신학철의 작품인 모내기 그림에 대해국가보안법을 적용한 한국 법원의 유죄판결은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 19조 표현의 자유를 침해했다며 한국정부가 신 씨에 대한 구제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2008년에는 유엔 인권이사회의 미국 대표가 국가보안법 남용을 피하기 위한 개정을 권고하기도 했고, 2011년 6월 프랭크 라 뤼 유엔 의사 및 표현의 자유에 관한 특별보고관은 국가보안법 제7(찬양.고무죄)가 인권과 의사 표현의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한다며 한국 정부에 폐지를 요구했다.

 

2015년 10월에는 유엔 자유권위원회에서 국가보안법 제7조 찬양 고무죄 조항에 근거한 기소가 계속되고 있음에 우려를 표하며 이 조항의 폐지를 권고했다.

 

유엔 관련 기구뿐만 아니라 1999년 2월 국제사면위원회(국제엠네스티)가 국가보안법 폐지나 개정을 한국의 최우선 과제로 요구하는 등 국제적인 시민사회단체들은 국가보안법의 반인권성반민주성을 끊임없이 지적해 오고 있다.

 

2012년 프랑스 신문 <르 몽드>가 한국의 우파 정부가 군사독재 정권이 이용해왔던 국가보안법을 좌파에 대해 압력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삼고 있다고 보도하는 등 국제사회의 언론들도 한국의 국가보안법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들을 내어 왔다.

 

이렇듯 국가보안법은 한국사회의 반인권성을 국제사회에 드러내는 치부와도 같다.

 

현재 국민들은 K방역 K팝 등 한국의 국격이 높아지고 있는 것에 대해 기뻐하며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국가보안법 폐지는 한국사회의 민주주의 발전을 국제사회에 알리는 신호탄이 될 것이다.

 

 

*헌법위에 군림하는 국가보안법 http://www.jajusibo.com/51271

*남북공동선언과 전면 배치되는 국가보안법 http://www.jajusibo.com/51297

역사 왜곡시키는 국가보안법 http://www.jajusibo.com/5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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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 자본주의'가 밀고 들어온다

[서리풀 논평] "정부 관심은 'K-방역' 성과가 사라질까 그 한 가지뿐"

'재외국민'이라면 한국의 의료법이 적용되는 대상이 아닌데 무엇을 '허용'한다는 뜻인지? 게다가 임시허가라니, 왜 이렇게 황당한 정책을 내놓는지 모르겠다. 법률적으로 재외국민은 외국인과 같고, 재외국민 진료란 외국 사람이 한국에 와서 성형수술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다. 허가고 뭐고 병원이 그냥 해온 것인데, 일부러 판을 키울 기세다.


 

논리도 품위도 없는 이런 정책을 무슨 위원회를 열고 심의하고, 그걸 허용했다고 보도자료를 내는 것은 그 정책이 (역설적으로) '국내용'이기 때문이리라. 해당 부처의 실적 때문이든 앞으로 '큰일'을 도모하려는 것이든, 초점은 재외국민이 아니라 국내에 있다는 것. 정책이라기보다 이 또한 정치다.


 

우리는 두 가지 목적이 다 있다고 해석한다. '윗선'(또는 대중)에 우리 부처가 뭐라도 열심히 한다고 알리는 목적, 그리고 비슷한 이해관계를 가진 당사자를 격려(?)하는 차원. 후자도 꽤 중요한 목적이지 않을까 짐작한다. 이번에는 해당하지 않지만, 국내 환자에 대한 비대면(원격) 진료를 금지하는 것은 '형평'의 원칙에 어긋난다고 주장할 사람들에게 전하는 메시지?


 

원격의료와 의료수출 등 의료산업 '진흥'은 산업통상자원부를 비롯한 경제 부처의 숙원 사업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무슨 명확한 산업과 경제 논리는 들어본 적 없지만, 그건 거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 거의 20년 동안 모든 기회를 활용해 노력했으니, 서비스 산업 육성, 의료관광, 영리병원, 경제특구, 원격의료, 규제혁신, 제4차 산업혁명 등 참으로 다양하다.

 

이번에는 원격의료. 코로나19 유행에서 잠시 허용했던 비대면 진료를 이번 기회에 '주류화'하려고 하더니, 논리에서 밀린다고 생각했는지 뜬금없이 재외국민을 들고나왔다. 의료 산업화를 밀어붙일 기회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예정을 바꿔 귀국하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고 취약한 방역 체계 때문에 재외국민이 불안해한다는 언론 기사가 넘쳐났다. 열심히 홍보한 'K-방역'이면 뭔가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지 않은가?


 

원리는 익숙하다. 코로나 대응을 핑계 삼아(여당의 해당 위원회 이름에는 '국난극복'이라는 표현이 들어있다) 모든 시도가 '기-승-전-코로나'이다. 따로 무슨 설명이나 논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분위기에 편승해 숙원 과제를 밀어붙이려는 선정적 정책에 정치다. 전형적인 '재난 자본주의'. 

한경연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생산 차질을 겪는 사업장에서 파업이 발생해 장기화되면 기업의 생존 자체가 위협받을 수 있다며 대체근로 허용을 주장했다. 또 코로나19와 같은 국가적 감염병이 발생한 경우 특정 업무에 한해 특별 연장근로를 자동으로 허용해서 추가 근무가 불가피한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관련 기사 : <연합뉴스> 6월 25일 자 '한경연, 대체근로 허용·화학물질 등록기준 완화 등 입법제안')

재난 자본주의는 경제뿐 아니라 정치적 영역이기도 하다는 것을 잊지 말자. '정치경제'라는 개념이 이 이상 잘 어울릴 수 없다. 다음은 코로나를 동원한 노골적이고 뻔뻔한 정치경제. 

검찰의 먼지털이식 수사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등의 위기상황을 겪고 있는 삼성을 옥죄었다. 특히 삼성은 지난 2016년 국정농단 의혹을 기점으로 햇수로 5년째 수사와 재판을 받으며 극도의 피로감을 호소하고 있다.(☞ 관련 기사 : <서울경제> 6월 27일 자 '이재용 '뉴삼성' 힘 받았지만…검찰, 끝내 무리수 던질까')

 
"코로나19에 따른 경제위기로 인해 기업은 외환위기나 금융위기 때보다 훨씬 더 심각한 최악의 경영 환경에 내몰려 있다...ILO 핵심협약 비준을 명분으로 기업이 가장 민감하고 곤혹스럽게 느끼고 있고, 노사 관계를 더욱 어렵게 만들 수 있는 내용의 노조법 개정을 정부가 추진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관련 기사 : <중앙일보> 6월 23일 자 '정부 '해고자도 노조 가입' 재추진…"기업 떠나라는 얘기냐"') 

사정이 이런데도 저절로 '뉴노멀'이 온다고? 턱도 없다. 코로나19라는 재난 상황을 활용해 '올드 노멀'로, 아니 올드 노멀보다 더한 뉴노멀을 의도하는 힘이 압도적으로 강하다. 또 그게 그렇게 노멀이 되면 코로나는 그야말로 이중의 재난이다. 
 
재난 자본주의는 이러한데, 막상 코로나 대책 그 본질과 핵심은 점점 더 개인에 의존하는 모양새다. 개인화와 개별화, 그리고 윤리화와 규범화. 점점 더 위험하다는 '경고'만 무성하고 대책이란 각 개인이 잘하라는 요구뿐이다. 준수, 주의, 자제, 협조 등 벌써 몇 달째 이번 주말이 고비이고 분수령이라며 시민의식과 윤리를 요구하는 것인가.

 

이미 모두 알고 있는바, 개인 차원의 예방 수칙과 사회적 거리 두기는 분명 의미가 있지만 그 한계도 분명하다. 자영업, 기업, 민간 조직에 요구한다 해도 마찬가지다. 개인과 조직은 사회에 긴밀하게 결합해 있고 그 틀에 구속되어 있다. 최선을 다해도 구조가 허용하는 한계를 뛰어넘기 어렵다.


 

구조를 돌파하려면 새로운 조건과 환경을 갖추어야 한다. 이를테면 상병 수당이나 임금 보전 없이 노동으로부터 거리 두기는 불가능하다. 국가와 정부는 이런 조건을 바꾸기 위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대로는 대규모 유행이 있을지도 모른다면서, 설마 운에 맡기는 것은 아닐 텐데, 각 개인이 각자도생으로 한계를 뛰어넘자고 요구하는 꼴이다.

 

의료 준비는 더 답답하다. 지금껏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명확한 데도 질병관리청 한 가지로 모든 일을 다 했다는 분위기다. 단기 대책도 장기 계획도 아무 논의가 없고 정부 안에서는 말을 꺼내는 사람도 없다. 'K-방역'의 성과(?)가 사라질까 그 한 가지 관심뿐인 듯하다.


 

당장 상황은 대책이나 계획이란 말조차 한가하게 들릴 만큼 급하고 아슬아슬하다. 무슨 성과를 내세우기 바쁜 사람들은 수도권의 의료가 겨우 견디는 현실을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확진자가 더 늘고 중환자가 넘칠 때 어떤 비상 대책이 있는가? 바로 작동할 임시 체계는 있는가? 

"현재 빈 병실이 없다고 보는 것이 맞다. 이미 일반 중환자들도 갈 곳이 없는 상황에서 코로나19 환자로 인해 병상을 비울 수 있는 여력이 없다"며 "코로나19 환자를 받으려면 기존 인력에 2~3배를 투입해야 하고 기존 일반 환자용 병상을 줄일 수밖에 없는데 병원 입장에서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해있다"고 전했다.(관련 기사 : <메디게이트> 6월 27일 자 '"방역당국 중환자 입원 가능 117병상 발표부터 오류…가용 병상 없다"')

낙관할 상황이 아니다. 일이 있을 때 '참여'나 '협력'이라는 이름으로 또다시 국가와 공공의 책임을 나누자고 할 것인가? 이 재난이야말로 공공의 역할과 책임을 가장 명확하게 드러내는 중이 아닌가, '코로나 자본주의' 대신 '코로나 공공보건'부터 챙겨야 한다. 
 
 

ⓒ시민건강연구소


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0062910405748477 프레시안(http://www.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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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를 신뢰할 수 있어야 건강한 사회

[창간20주년 특별기획] 미디어를 신뢰할 수 있어야 건강한 사회

릴레이 기고 ‘코로나 너머’ ㉝

김서중 민주언론시민연합 상임공동대표·성공회대 교수
발행 2020-06-28 16:06:51
수정 2020-06-28 16:0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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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2000년 5월 15일 첫걸음을 뗀 민중의소리가 창간 20주년을 맞았습니다. 독자와 후원인들의 성원과 격려로 민중의소리는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민주주의를 확장하며 자주평화의 기운을 북돋우기 위한 진보언론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창간 20주년 특별기획으로 각계 원로, 전문가, 신진 인사들이 코로나19 이후의 세계와 한국사회를 조망하는 릴레이 기고를 연재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코비드19 재난 사태로 한국 사회는 매우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 한국은 K 방역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잘 대처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고 질병관리본부와 정은경 본부장을 칭찬하는 소리가 드높다. 그 점에 동의하지만 코비드19 상황을 극복하는데 불편함을 참으며 수칙을 지키려 노력한 시민의 공을 간과할 수 없다. 시민들이 재난의 어려움을 인식하고 극복에 힘을 모을 수 있는 것은 정확한 정보의 덕이다. 역으로 한 교회가 코비드19에 좋다는 잘못된 정보에 따라 신도의 손과 입에 소금물을 뿌려 지역 감염의 계기가 된 사건도 있지 않은가. 이 지점에서 우리는 언론의 문제를 생각해볼 수 있다.

지난 3월 경기도 성남 ‘은혜의 강’ 교회에서 코로나 바이러스를 소독한다는 이유로 소금물을 담은 분무기를 신도들의 입에 대고 일일이 뿌리는 모습이 CC(폐쇄회로)TV 영상으로 확인됐다.
지난 3월 경기도 성남 ‘은혜의 강’ 교회에서 코로나 바이러스를 소독한다는 이유로 소금물을 담은 분무기를 신도들의 입에 대고 일일이 뿌리는 모습이 CC(폐쇄회로)TV 영상으로 확인됐다.ⓒ경기도

언론의 재난 보도는 매우 중요하다. 한 조사에 따르면 코비드19 관련하여 시민들은 공공성이 강한 미디어를 더 접촉했다고 한다. 사실 이 현상은 코비드와 관련된 한정된 현상일 수도 있다. 지금 미디어 소비는 전통적인 미디어로부터 새로운 플랫폼으로 전환하고 있다. 신문과 지상파는 위기 상태다. 상대적으로 유료방송 사정이 낫다고 하지만 SNS, 유튜브, 넷플릭스 등이 산업을 재편하는 중이다. 그런데 재난과 관련한 정보는 전통적인 미디어를 통해서 얻었다는 것이다. 정확하지 않은 정보로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경각심이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다른 삶은 중요하지 않은가? 사실 우리들의 모든 판단은 정확한 정보에 의지해야 마땅하다. 우리는 민주주의 주권자의 판단이 정확하지 않았을 때 발생할 사회적 재앙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이미 경험했다. 새로운 소통 미디어들의 유용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현재 시점에서 새로운 플랫폼들이 전통적 매체에 기대했던 정확하고 심층적인 정보를 제공한다고 볼 수 없다. 일부 콘텐츠 생산자들이 오히려 새로운 플랫폼을 가짜뉴스의 온상으로 만들고 확증편향을 강화시킨다는 세간의 비판은 설득력이 있다. 기존 미디어의 공공성을 강화하고, 새로운 미디어들에서 공공성을 어떻게 구축할 지는 우리 사회 전체가 함께 고민해야 할 개혁 과제다.

지난 1월 29일 오후 충남 아산 경찰인재개발원 정문 앞에서 아산 주민들이 경찰인재개발원에 우한 교민 격리 수용 반대하는 현수막을 붙여놓고 있다. 당시 언론의 자극적 보도가 주민들의 불안을 자극했다는 지적이 많았다.
지난 1월 29일 오후 충남 아산 경찰인재개발원 정문 앞에서 아산 주민들이 경찰인재개발원에 우한 교민 격리 수용 반대하는 현수막을 붙여놓고 있다. 당시 언론의 자극적 보도가 주민들의 불안을 자극했다는 지적이 많았다.ⓒ뉴스1

재난 상황에 시민들은
공공성 강한 언론을 더 많이 찾았다
그러나 미디어의 공공성 강화, 상황이 좋아 보이지 않아
규제 완화가 공공성 약화를 부를 수 있음을 인식해야


하지만 지금 우리 상황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다. 기존 언론과 관련한 정책은 사실 공백 상태다. 좋게 이해하면 언론 정책은 매우 예민한 사항이라서 자칫 벌집을 건드릴 수 있다는 조심스러움이 작용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사이에 미디어의 공공 영역은 약화 일로다. 반면 비언론 영역은 사업자들의 강한 압박을 받아 상업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정책이 진행 중이다. 지난 6월 22일 정부는 방송통신위원회,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문화체육관광부, 기획재정부, 공정거래위원회, 금융위원회, 고용노동부 등 정부부처 합동 ‘디지털 미디어 생태계 발전방안’을 수립했다고 밝혔다. 차별 받는 미디어 노동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긍정적인 신호도 있지만 공개한 정책의 대부분은 산업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것이다. 미디어시장 최소규제 원칙을 천명하고 유료방송 가입자 점유율 규제 폐지, OTT 시장 활성화, 지역방송 상호 겸영 규제 완화, SO·위성·IPTV의 이용요금 승인제→신고제 전환 등 규제 완화 정책을 밝혔다. 여기에 공공적 미디어 사업자와 콘텐츠를 강화하겠다는 내용은 거의 없다. 종합적 미디어 체계를 고민하지 않고 산업의 요구를 고려한 파편적 대응을 한 결과이다.

김서중 민주언론시민연합 상임공동대표·성공회대 교수
김서중 민주언론시민연합 상임공동대표·성공회대 교수ⓒ민중의소리

작년부터 언론운동·시민사회단체들은 미디어개혁시민네트워크를 결성하고, 공공적 가치를 중심으로 미디어 과제들을 종합적으로 고민하고 대안을 마련할 사회적 논의 기구를 결성할 것을 주장해왔다. 미디어 정책을 사업자 관점에서만 접근하지 말고 시민의 커뮤니케이션 권리 강화 차원에서 접근하여 미디어의 공공성을 강화하는 종합적 대책을 수립해야한다는 주장이다. 시민사회를 비롯한 모든 미디어 관련 이해 당사자들이 모여, 사업자의 이해관계보다는 건강한 사회를 구성할 신뢰할 수 있는 유용한 미디어 체계를 구축할 방법을 논의하자는 것이다. 단발적 정책만을 반복하여 미디어 정책 전반을 누더기로 만드는 우를 피하자는 것이다. 공공 영역과 산업 영역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상호작용적이다. 산업진흥을 내세워 필요한 규제를 완화하는 것은 곧 공공성의 약화를 야기할 수 있음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창간20주년 특별기획] 릴레이 기고 ‘코로나 너머’ 모아보기

김서중 민주언론시민연합 상임공동대표·성공회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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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을 수 없는 개전전황보고

[개벽예감 401] 믿을 수 없는 개전전황보고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 기사입력 2020/06/2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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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1. 군사정보를 독점통제한 미국군사고문단

2. 믿을 수 없는 개전전황보고

3. 원동군사령부 군사정보단의 정보보고서

4. 북진공격으로 일어난 국지적 내전

5. ‘서울해방작전’과 3일 간의 평온

6. 대남군사행동계획은 확대회의에서 비준된다

 

 

1. 군사정보를 독점통제한 미국군사고문단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있지 않지만, 2020년 7월 1일은 미국군사고문단이 창설된 때로부터 71주년이 되는 날이다. 미국 육군성은 주한미국군철수를 완료한 이튿날인 1949년 7월 1일 약 500명으로 이루어진 군사고문단을 서울에 설치했다. 군사고문단의 정식명칭은 ‘대한민국 주재 미국군사고문단(United States Military Advisory Group to the Republic of Korea)'이다. 이 글에서는 미국군사고문단이라는 약칭을 쓴다.   

 

미국군사고문단이 한국군을 어떻게 지휘통제하였는가 하는 문제는 한국군의 경험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이를테면, 1950년 당시 개성지구에 주둔한 한국군 제1보병사단은 미국군 제1군단에 배속되었다. 당시 제1보병사단만 미국군 밑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한국군 전체가 미국군 밑에 들어갔다. 당시 한국군에는 합동참모본부가 없었기 때문에 미국군 밑에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한국군 합동참모본부는 1990년 10월 1일에 창설되었다. 그러므로 1948년에 창군된 이래 1980년까지 42년 동안 한국군은 주한미국군사령관의 직접적인 지휘통제를 받아온 것이다. 1990년 10월 1일 한국군 합동참모본부가 창설되었지만, 지금도 한국군 작전통제권은 여전히 주한미국군사령관이 장악, 행사한다. 

 

1950년 6월 당시 미국군 제1군단장 프랭크 밀번(육군 소장)은 자기 군단에 배속된 한국군 제1보병사단을 공식적으로 지휘통제하고 있었지만, 그 사단을 현지에서 사실상 지휘통제한 지휘관은 미국 육군 중령 로이드 로크웰이었다. 1950년 당시 한국군 제1보병사단 사단장이었던 백선엽이 2010년에 남긴 회고록을 보면, 로크웰은 수석고문이라는 군직을 가지고 한국군 제1보병사단을 사실상 지휘통제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미국군사고문단은 수석고문 밑에 작전고문, 정보고문, 통신고문, 군수고문, 군단연락장교, 공지(空地)연락장교, 연대고문 등 10명을 두고 한국군을 지휘통제했다. 

 

그런데 충격적인 것은, 어깨에 별을 단 한국군 사단장들이 미국군 중령의 지휘통제를 받는 치욕을 당연한 일로 여기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존엄과 자존심마저 내던지고 미국군에게 매달린 것이야말로 한국군이 겪은 불행과 비극이었다. 

 

70년 전에만 그런 게 아니었다. 미국군사고문단이 창설된 때로부터 오늘까지 71년 동안 한국군 작전통제권은 변함없이 주한미국군사령관의 손아귀에 있다. 몇 해 전부터 미국이 한국군 작전통제권을 돌려주겠다고 하는데도, 한국군은 아직 돌려받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느니 또는 ‘철통같은 혈맹’은 영원하다느니 뭐니 하면서 미국군의 작전통제를 계속 받으려고 한다. 미국의 발밑에서, 미국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사는 한, 이 땅에서는 진정한 민주주의도 실현될 수 없고, 조국통일도 실현될 수 없다.  

 

돌이켜보면, 미국군사고문단은 1949년 7월 1일부터 군사정보를 독점통제했다. 당시 한국군 전투부대에 파견된 미국군사고문단 정보고문이 수집한 군사정보는 수석고문을 통해 미국군사고문단 본부에 직보되었다. 이런 사정은 미국군사고문단이 6.25전쟁과 관련된 모든 군사정보를 독점통제하였음을 말해준다. 

 

1950년 6월 25일 오전 4시 조선인민군이 38도선 전역에서 한국군에게 총공격을 개시했다는 개전전황보고는 미국군사고문단이 작성한 것이다. 미국군사고문단은 당일 오전 4시 조선인민군이 38도선 전역에서 한국군에게 총공격을 개시했다는 짤막한 전황보고를 당시 주한미국대사 존 무초에게 통보했다. 무초는 자기가 받은 전황보고를 워싱턴으로 급히 타전했다. 미국군사고문단이 작성한, 6.25전쟁 개전전황보고는 사람들이 전혀 의심하지 않는, 아니 의심해서는 안 되는 역사적 사실로 굳어졌다. 

 

그러나 사람들이 역사적 사실로 믿고 있는 6.25전쟁 개전전황보고는 객관적으로 입증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미국군사고문단은 1950년 6월 25일 오전 8시까지만 해도 그날 새벽에 38도선 어느 지역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선인민군이 1950년 6월 25일 오전 4시에 38도선 전역에서 한국군에게 총공격을 개시했다는 역사기록은 미국군사고문단이 적당히 가공처리한 개전전황보고가 역사적 사실로 굳어진 것이다. 

 

미국과 남측의 정치권과 학계, 언론계 등에서 활동하는 우익학자들과 우익선동가들은 미국군사고문단이 가공처리한 개전전황보고에 의거하여 6.25전쟁 개전상황을 왜곡했다. 6.25전쟁 70주년을 맞이한 오늘 그 전쟁의 개전상황을 새로운 시각에서 재검토하려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사진 1>

  

▲ <사진 1> 6.25전쟁이 계속되고 있었던 1950년 7월 미국군사고문단은 조선인민군의공격에 밀려 서울에서 대구로 후퇴했다. 위의 사진은 당시 대구로 피난한 미국군사고문단의 임사청사를 정문쪽에서 촬영한 것이다. 올해 2020년 7월 1일은 미국군사고문단이 창설된 때로부터 71주년이 되는 날이다. 1950년 6월 25일 오전 4시 조선인민군이 38도선 전역에서 한국군에게 총공격을 개시했다는 개전전황보고는 미국군사고문단이 작성한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역사적 사실로 믿고 있는 6.25전쟁 개전전황보고는 객관적으로 입증된 것이 아니다.  

 

2. 믿을 수 없는 개전전황보고

 

1950년 6월 25일에 펼쳐진 급박한 상황으로 돌아가 보자. 백선엽의 회고록에 따르면, 1950년 6월 25일 당시 서울 신당동 자택에 있었던 그는 38도선 무력충돌이 일어났다고 알려주는 전화를 당일 오전 7시경에 받았다고 한다. 누가 백선엽에게 그런 중대한 정보를 알려주었는가 하는 문제는 6.25전쟁 개전상황을 파악하는 데서 결정적으로 중요한데, 백선엽은 누가 자기에게 그런 정보를 전해주었는지 밝히지 않았다. 

 

백선엽은 1950년 6월 25일 이른 아침 자신이 겪었던 다음과 같은 경험담을 회고록에 서술했다. 신원이 알려지지 않은 사람으로부터 다급한 전화를 받은 백선엽이 서울 용산에 있는 한국군 육군본부에 가려고 자기 집을 나선 시각은 오전 7시 10분경이었다. 백선엽이 육군본부 청사 2층에 있는 육군참모총장실로 올라갔더니 육군참모총장 채병덕과 장교 7~8명이 방안에서 “서성대고 있었다.” 회의를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방안에서 서성대고 있었다는 것은, 당시 한국군 지휘부가 38도선 무력충돌상황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모든 군사정보를 미국군사고문단이 독점통제하고 있었으므로, 한국군 지휘부는 미국군사고문단으로부터 군사정보를 제공받기 전에는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까막눈 신세였다.  

 

전선으로 급히 돌아가라는 채병덕의 호통을 듣고 밖으로 나온 백선엽은 한국군 제1보병사단 수석고문 로이드 로크웰부터 찾았다. 왜냐하면 백선엽은 사단장이라는 군직만 가지고 있었고, 사단을 지휘통제하는 진짜 지휘관은 로크웰이었기 때문이다. 

 

일요일이었던 1950년 6월 25일 이른 아침, 로크웰은 한국군 육군본부 인근에 있는 미국군사고문단 사택에서 아직 잠을 자고 있었다. 백선엽이 로크웰의 집으로 달려가 문을 두드렸더니, 잠에서 깨어난 부스스한 얼굴로 문을 열어준 그는 “전쟁이 터졌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백선엽과 로크웰이 군용차를 타고 서울 서대문구 수색에 있는 한국군 제1보병사단 사령부에 도착한 시각은 오전 9시경이었다. 

 

위와 같은 정황을 보면, 1950년 6월 25일 오전 9시까지 미국군사고문단은 군사고문들에게 개전상황에 관한 정보를 알려주지 못하고 있었고, 개전상황에 대처할 긴급명령도 내리지 못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로크웰은 한국군 제1보병사단 수석고문으로서 개성-문산-파주-고양-서울로 이어지는 제1축선에서 전략임무를 수행하는 한국군 제1보병사단을 지휘통제하였는데, 그처럼 중요한 군직에 있는 그가 당일 오전 9시까지 개전상황을 몰랐으므로, 미국군사고문단도 개전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미국군사고문단은 한국군 사단, 여단, 연대마다 군사고문을 10명씩 파견하여 한국군을 지휘통제했는데, 백선엽의 회고록에 따르면, 당시 개성지구에 주둔한 한국군 제1보병사단 제12연대의 작전고문은 미국 육군 대위 조섭 대리고였다. 서울 서대문구 수색을 떠난 백선엽과 로크웰이 경기도 파주군 파주국민학교에 있는 한국군 제1보병사단 전방지휘소에 도착한 때는 1950년 6월 25일 오전 10시경이었다. 백선엽은 회고록에서 자신과 로크웰이 오전 9시경에 수색에 있는 한국군 제1보병사단 사령부에 도착했고, 오전 9시 30분경 파주에 있는 한국군 제1보병사단 정부지휘소에 도착했다고 썼지만, 오전 9시경 수색에 있는 사단 사령부에 도착하여 잠시 머문 뒤에 그곳을 출발하여 오전 9시 30경에 파주에 있는 사단 전방지휘부에 도착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였다. 백선엽과 로크웰은 오전 10시가 거의 다 되어서야 파주에 있는 사단 전방지휘부에 도착한 것으로 보인다.  

 

백선엽과 로크웰은 개성쪽에서 포성이 들리고 검은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광경을 바라보면서 한국군 제1보병사단 다른 지휘관들과 함께 임진강 철교 남단까지 나가보았다. 그런데 바로 그때 한국군 제1보병사단 제12연대 작전고문 조섭 대리고가 신발조차 신지 못한 맨발로 자기 군용차를 몰고 “뭔가 겁에 잔뜩 질린 표정”으로 허겁지겁 패주해왔다. 황망히 패주하다가 임진강 철교 남단에서 뜻밖에 로크웰 일행과 마주친 대리고는 “숨이 넘어갈 듯 말을 제대로 잇지도 못”하면서 “큰일났다. 적들이 이미 기차로 개성역에 도착했다”고 말했다. 

 

포성이 차츰 가깝게 들려오는 긴박한 상황에서 백선엽과 로크웰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엉거주춤하고 있었는데, 바로 그때 미국군사고문단 최고지휘관 월리엄 로벗츠(육군 준장)의 첫 명령이 작전현장에 하달되었다. 백선엽의 회고록에 따르면, 윌리엄 로벗츠는 최전방 한국군 전투부대들에 파견된 미국군사고문들에게 “모두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철수명령을 받은 로크웰은 백선엽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서울로 발길을 돌렸는데, 자기들을 버리고 떠나는 로크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억장이 무너진 백선엽은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위에 서술한 정황을 보면, 미국군사고문단은 1950년 6월 25일 개전상황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1950년 6월 25일 오전 4시 조선인민군이 38도선 전역에서 한국군에게 총공격을 개시했다는 미국군사고문단의 전황보고는 전혀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조선인민군이 공격을 개시했다는 공격주체에 관한 보고도 믿을 수 없고, 오전 4시에 공격이 개시되었다는 공격시각에 관한 보고도 믿을 수 없으며, 38도선 전역에서 총공격이 개시되었다는 공격범위에 관한 보고도 믿을 수 없다. <사진 2>

  

▲ <사진 2> 이 사진은 2020년 6월 16일 북이 개성공업지구에 있는 남북공동련락사무소를 폭파한 장면이다. 파주쪽에서 바라본 사진에는 검은 폭파연기가 하늘로 솟구치는장면이 담겼다. 북이 남북공동련락사무소를 폭파한 것은 문재인 정부가 대북적대정책을 변함없이 고수하는 것으로 하여 평화통일의 가능성이 사라졌음을 말해주는 엄청난사건이었다. 70년 전에도 개성지구 38도선에서 남북의 무력충돌이 벌어졌는데, 70년이 지난 오늘도 개성지구 군사분계선에서 무력충돌위험이 고조되었다. 세월이 흐르고세대가 바뀌었어도 분단체제의 본질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조국통일이 실현될 때까지 분단체제의 본질은 바뀌지 않을 것이며, 평화는 실현되지 않을 것이다. 분단국가의 평화는 오직 통일국가건설에 의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 조국통일은 매우 시급하고,절대적인 민족사적 과업이다.  

 

3. 원동군사령부 군사정보단의 정보보고서

 

1950년 6월 25일 개전상황을 좀 더 정확하게 서술한 전황보고는 그로부터 2년이 지나서야 나왔다. 미국 원동군사령부 군사정보단이 1952년 7월에 작성한 정보보고서는 조선인민군 포병부대가 38도선 남쪽으로 포사격을 개시한 시각이 1950년 6월 25일 오전 4시 40분이었고, 그로부터 약 20분 동안 포사격이 계속되다가 오전 5시경부터 조선인민군 보병부대가 38도선을 넘어 한국군을 공격했다고 기록했다. 

 

그런데 미국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역사자료를 조사한 한국군사연구소 소속 연구원은 미국 원동군사령부 군사정보단이 1952년 7월에 작성한 정보보고서에서 6.25전쟁 개전상황에 관한 다음과 같은 새로운 사실들을 더 알아냈다.

 

1) 오전 6시경 서울의 미국군사고문단은 일본 도꾜의 원동군사령부에게 무선통신을 통해 38도선 전황을 처음 보고했다. (당시 미국군사고문단은 38도선 전투현장에서 올라오는 보고를 통해 전황을 확인하지 못했기 때문에, 첫 전황보고는 38도선 개전상황에 관한 정확한 보고가 아니었고, 38도선에서 무력충돌이 일어났다는 정도의 간략한 보고였다.)

 

2) 오전 7시경 미국군사고문단 참모회의가 소집되었다. 참모회의에서는 1950년 6월 25일 새벽 조선인민군이 “대규모 수색정찰”을 하던 중 한국군과 무력충돌을 벌인 것으로 판단했다. (조선인민군이 대규모 수색정찰을 하던 중에 우발적인 무력충돌이 일어났다는 미국군사고문단의 최초 판단은 그로부터 약 3시간 뒤에 조선인민군이 38도선 전역에서 총공격을 개시했다는 전황보고로 둔갑했다.)

 

3) 오전 9시경 미국군사고문단은 황해남도 옹진지구에 주둔한 한국군 제17독립보병연대로부터 옹진이 조선인민군에게 점령당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옹진이 함락되었다는 보고를 받은 미국군사고문단 최고지휘관 월리엄 로벗츠는 최전방 한국군 전투부대들에 파견된 군사고문들의 신변위험을 직감하고, 그들에게 전원 철수하라는 긴급명령을 내렸다. 위에 서술한 것처럼, 로크웰도 로벗츠의 철수명령을 받았는데, 그 때는 오전 10시가 지난 시각이었다.) 

 

4) 오전 10시경 미국군사고문단은 서울에 주재하는 당시 주한미국대사 존 무쵸에게 38도선 전황을 통보했다. 

 

미국군사고문단으로부터 38도선 전황을 통보받은 무쵸는 미국 육군성에 긴급히 전문을 보냈는데, 그 전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있었다. “(전략) 오전 4시경 옹진에서 북조선군의 포사격으로 행동이 개시되었다. 오전 6시경 북조선 보병부대가 옹진지구, 개성지구, 춘천지구에서 38도선을 넘어오기 시작했고, 동해안 강릉 남쪽에서 (조선인민군의) 해안상륙이 있었다는 보고도 있다. (중략) 공격의 성격과 방식을 보면, 전면적인 공격으로 보인다.”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미국군사고문단은 당일 오전 7시경 조선인민군이 대규모 수색정찰을 하던 중에 우발적인 무력충돌이 일어났다고 판단했는데, 그로부터 약 3시간 뒤에 그들은 조선인민군이 전면공격으로 보이는 공격을 개시했다는 전혀 다른 전황보고를 무초에게 통보한 것이다. 

 

무쵸의 전문에서 주목되는 것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38도선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인 무력충돌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옹진지구에서 시작된 무력충돌이 시차를 두고 개성지구와 춘천지구로 차츰 확대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6.25전쟁 개전상황을 파악하려면, 당일 새벽 옹진지구에서 무력충돌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런데 미국군사고문단은 당일 새벽 옹진지구에서 무력충돌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알 수 없었다. 왜냐하면 옹진지구에 주둔한 한국군 제17독립보병여단 미국군사고문들은 1950년 6월 25일 당시 옹진에서 멀리 떨어진 서울에 있었기 때문이다. 백선엽이 회고록에 서술한 것처럼, 한국군 제1보병사단 수석고문 로크웰도 1950년 6월 25일 당시 개성에서 멀리 떨어진 서울에 있었다. 

 

미국군사고문들은 왜 서로 약속이나 한 것처럼 6월 25일 아침 서울에 모여 있었을까? 한국군 최전방부대들에 배치된 미국군사고문들은 주말마다 최전방을 떠나 서울에 가서 휴일을 즐겼다. 토요일이었던 1950년 6월 24일 밤 서울에서는 한국군 장교구락부 개설을 축하하는 연회가 열렸는데, 미국군사고문들은 그 연회에서 술과 춤을 마음껏 즐기다가 곯아떨어진 상태에서 6월 25일 새벽을 맞았던 것이다. 그래서 미국의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는 1997년 미국 뉴욕에서 출판된 자신의 책 ‘코리아의 양지바른 곳(Korea's Place in the Sun)’에서 개전당일 38도선 최전방에 미국군사고문이 없었다고 서술했다. 

 

하지만 예외가 있었다. 개성지구에 주둔한 한국군 제1보병사단 제12연대에 작전고문 조섭 대리고가 1950년 6월 25일 최전방에 남아있었다. 그가 왜 서울에 가지 주말을 즐기지 않고, 개성에 남아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개전당일 최전방에 남아있었던 유일한 미국군사고문이었다. 그렇지만 개전당일 개성에 있었던 대리고는 옹진에서 무력충돌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사진 3> 

 

▲ <사진 3> 이 사진은 1945년 8월 15일 태평양전쟁에서 승리하여 일본을 점령한 미국이도꾜에 설치한 원동군사령부 청사를 촬영한 사진이다. 워싱턴에 있는 미국 육군성은도꾜에 있는 원동군사령부를 통해 서울에 있는 미국군사고문단에게 작전명령을 하달했다. 당시 미국군사고문단 최고지휘관은 육군 준장 윌리엄 로벗츠였다. 미국군사고문단은 모든 군사정보를 독점통제하면서 한국군 전체를 지휘통제했다. 그러나 정작1950년 6월 25일 미국군사고문단 소속 군사고문들은 38도선 최전방에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개전전황을 제때에 파악하지 못하고 허둥댔으며, 나중에 작성한 개전전황보고도 제멋대로 가공처리했다.  

 

 

4. 북진공격으로 일어난 국지적 내전

 

그러면 1950년 6월 25일 새벽 옹진지구 무력충돌은 어떻게 일어났을까? 이 중요한 물음에 대한 해답은 브루스 커밍스의 책 ‘코리아의 양지바른 곳’과 최태환의 책 ‘젊은 혁명가의 초상’에서 찾아볼 수 있다. 1950년 6월 25일 개전당일 최태환은 조선인민군 제6보병사단 제13연대 정치보위부 책임장교로 개성전투에 참가했는데, 그는 자기의 전쟁경험을 1989년 서울에서 출판된 책 ‘젊은 혁명가의 초상’에 남겼다. 

 

1) 1950년 6월 23일 밤 한국군 제17독립보병연대의 은파산 공격

 

ㄱ. 최태환의 회고담에 따르면, “숨막히는 긴장감이 계속되는 가운데 (조선인민군) 15연대가 주둔하는 옹진반도로부터 백인엽이 이끄는 국방군 17연대 맹호부대 병력이 은파산을 폭격(포격을 폭격으로 오기했음-옮긴이)하기 시작했으며, 곡사포와 박격포가 동원된 소규모의 전투가 벌어졌다는 속보가 날아왔다.” 최태환은 은파산 전황속보를 1950년 6월 24일에 수신한 것으로 기억했다.   

ㄴ. 평양라디오방송의 6월 26일 전황보도를 인용한 커밍스의 서술에 따르면, 1950년 6월 23일 오후 10시 옹진에 주둔하는 한국군 제17독립보병연대가 곡사포와 박격포로 옹진지구 은파산에 있는 조선인민군 진지를 공격했고, 전투는 6월 24일 오전 4시까지 계속되었다. 

 

2) 1950년 6월 25일 새벽 한국군 제17독립보병연대의 두락산 공격

ㄱ. 평양라디오방송의 6월 26일 전황보도를 인용한 커밍스의 서술에 따르면, 6월 25일 오전 2시 또는 3시경 한국군 제17독립보병연대 맹호부대가 옹진지구 두락산에 있는 조선인민군 진지를 공격했다. 

ㄴ. 최태환의 회고담에 따르면, 한국군 제17독립보병연대가 은파산을 공격했다는 전황속보가 있었고, “이어서 옹진반도의 두락산이 공격당하고 있다는 정보로 이어졌다”고 한다. (그는 은파산 전황속보를 수신한 시각과 두락산 전황속보를 수신한 시각을 명확히 구분하지 않고, “이어서”라는 말로 뭉뚱그려놓았는데, 한국군 제17독립보병연대의 은파산 공격과 두락산 공격은 약 20시간의 시차를 두고 일어났다.)

 

3) 1950년 6월 25일 오후 한국군 제17독립보병연대의 해주 점령

ㄱ. 평양라디오방송의 6월 26일 전황보도를 인용한 커밍스의 서술에 따르면, 6월 25일 오후 2시 30분 한국군 제17독립보병연대는 38도선을 넘어 수동으로 진격했다. (한국군 제17독립보병연대 맹호부대가 38도선을 넘어 수동으로 북진하여 해주를 점령했으나, 평양라디오방송은 해주가 점령당했다는 사실을 보도하지 않았다.) 

ㄴ. 커밍스의 서술에 따르면, 1950년 6월 26일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뉴욕헤럴드트리뷴>은 한국군 2개 대대가 6월 25일 38도선 이북에 있는 해주를 점령했다고 각각 보도했다. 

ㄷ. 커밍스의 서술에 따르면, 주일영국대사관 소속 무관이 1950년 6월 27일 본국에 보낸 전문은 한국군 대대가 6월 25일 38도선 이북에 있는 해주를 점령했다는 사실을 기록했다. (6.25전쟁이 일어나기 전, ‘실지회복’이라는 전략목표를 내건 이승만 친미파쇼정권과 한국군 지휘부는 “아침은 해주에서,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겠다”는 북진공격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그러므로 한국군 제17독립보병연대가 6월 25일 38도선을 넘어가 해주를 점령한 것은 우발적인 군사행동이 아니라 작전계획에 의거한 북진공격이었다.)

 

2020년 6월 22일 <자주시보>에 실린 나의 글 ‘군사상황은 매우 엄중하다’에서 서술한 것처럼, 은파산, 두락산, 국사봉, 해주를 포괄하는 옹진지구는 1949년 4월 29일부터 11월 15일까지 38도선 무력충돌이 치렬하게 벌어진 격전지였다. 당시 한국군 육군본부는 38도선 무력충돌이 언제나 조선인민군의 공격으로 일어난 것처럼 발표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브루스 커밍스의 분석에 따르면, 조선인민군의 공격으로 일어난 무력충돌보다 한국군의 공격으로 일어난 무력충돌이 더 많았다. 

 

옹진지구에서 한국군이 북진공격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옹진지구에 주둔한 한국군 제17독립보병연대가 육군본부 직할부대로서 무장력이 강했기 때문이다. 로씨야 군사역사학자들인 볼꼬브스끼와 뻬뜨로바가 공동으로 집필하여 2000년 쌍끄뜨 뻬쩨르부르그에서 발표한 논문 ‘조선에서의 전쟁에 대한 쏘비엣 관점(Soviet View of the War in Korea)'에 따르면, 1950년 6월 25일 당시 옹진지구에 주둔한 한국군 제17독립보병연대는 병력과 화력에서 그 지구에 주둔한 조선인민군 보병대대보다 더 강했다. 옹진지구에 주둔한 쌍방의 무장력을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한국군

조선인민군

 

대대

 

4개 대대

1개 대대

 

 

전차와 자행포

 

 

없음

5

 

 

견인포와 박격포

 

 

57

27

 

    

위의 비교표가 말해주는 것처럼, 당시 한국군 제17독립보병연대는 비록 전차와 자행포를 갖지는 못했지만, 다른 무장력은 압도적으로 강했다. 당시 조선인민군 전투부대는 소련에서 생산된 T-34 중형 전차와 76mm 포를 탑재한 SU-76 자행포를 운용하였는데, 옹진지구에는 5대만 배치되었다.  

 

한국군 제17독립연대는 1950년 6월 23일 오후 10시 은파산에 있는 조선인민군 진지에 포사격을 개시했고, 6월 25일 오전 2시 또는 3시경에는 두락산에 있는 조선인민군 진지에 포사격을 개시했고, 38도선을 넘어 수동으로 진격하여 해주를 점령했다. 그들의 옹진지구 북진공격은 1950년 6월 25일 전쟁을 일으킨 결정적인 요인이다.

 

그러면 옹진지구 북진공격은 어떻게 국지전으로 확대되었을까? 한국군의 공격을 받은 조선인민군은 옹진지구에서 반격전을 벌인 것은 물론, 개성지구에서도 전투에 돌입했다. 개성 북쪽에 주둔한 조선인민군 제6사단 제13연대와 제15연대는 개성 남쪽에 주둔한 한국군 제1보병사단 제12연대를 향해 포사격을 개시했다. 브루스 커밍스가 자신의 책 ‘코리아의 양지바른 곳’에 서술한 바에 따르면, 한국군 제1보병여단 제12연대 작전고문 조섭 대리고가 포성에 놀라 잠이 깬 시각은 6월 25일 오전 5시 30분경이었고, 조선인민군 제6사단 제13연대와 제15연대가 개성을 점령한 시각은 오전 9시 30분경이었다. 개성전투는 약 4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약 4시간 만에 한국군 방어선이 무너지고 조선인민군 보병부대가 개성 시내로 진격해오자, 대리고는 너무 급해서 신발도 신지 못한 채 자기 군용차를 몰고 개성 남쪽에 있는 한국군 제1보병사단 제12연대 본부로 피신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군 제17독립보병연대가 옹진지구에서 38도선을 넘어 해주를 점령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같은 날 조선인민군 제6사단 제13연대와 제15연대는 개성지구에서 38도선을 넘어 개성을 점령했다. 옹진지구에서 벌어진 소규모 무력충돌은 그렇게 동쪽으로 옮아가면서 전쟁으로 확대된 것이다. 

 

주목되는 것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옹진지구에서 시작되어 개성지구와 춘천지구로 확대된 38도선 무력충돌이 국지전이었다는 사실이다. 1950년 6월 25일 국지전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자료를 제시한 사람은 미국 육군 군사연구소 실장이었던 로이 애플먼이다. 그는 1961년 미국 워싱턴에서 발행된 책 ‘남으로 낙동강, 북으로 압록강(South to the Nakdong, North to the Yalu)’에서 1950년 6월 25일 38도선 무력충돌에 투입된 조선인민군 병력이 38,000명이었다는 사실을 밝혔다. 당시 38도선에 배치된 한국군 병력은 약 50,000명이었는데, 조선인민군은 6월 25일에 38,000명밖에 동원하지 않았으므로, 전면전이 아니라 국지전이었다. 또한 당시 조선인민군 육군 병력은 175,000명이었는데, 그 중에서 6월 25일에 38,000명밖에 동원하지 않았으므로, 전면전이 아니라 국지전이었다. 또한 당시 조선인민군은 지상공격기 일류신-10 93대를 실전배치했는데, 6월 25일에 지상공격기가 단 한 대도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으므로, 전면전이 아니라 국지전이었다. 일류신-10은 23mm 기관포 2문이 장착되었고, 무유도 로켓탄 4발과 100kg짜리 폭탄 4발을 탑재하고, 시속 310km의 속도로 날아가는 지상공격기인데, T-34 전차보다 훨씬 더 강한 공격력을 가졌다. 

 

위에 열거한 사실들을 보면, 조선인민군은 1950년 6월 25일에 전면전계획에 따라 개전한 것이 아니라, 옹진지구 무력충돌이 확대된 것에 따라 국지전을 개시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사진 4>

 

▲ <사진 4> 1950년 7월 초 인천 방어전에 참가한 한국군 전투원들을 촬영한 사진이다.카빈총을 들고 달려가는 전투원들 옆에 한자로 쓴 치과의원 간판이 보인다. 6.25전쟁은 황해남도 옹진지구에서 6월 23일 밤부터 6월 25일 새벽까지 계속된 한국군 제17독립보병연대의 북진공격이 해주점령으로 이어지면서 38도선 다른 지역들에서 조선인민군의 반격전을 촉발시켰고, 그렇게 되어 격화된 국지적 내전으로 시작되었다. 6월25일 한국군 제17독립보병연대가 해주를 점령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조선인민군 제6사단 제13연대와 제15연대는 개성을 점령했다. 옹진지구에서 벌어진 소규모 무력충돌은 그렇게 동쪽으로 옮아가면서 국지적 내전으로 확대되었다.  

 

 

5. ‘서울해방작전’과 3일 간의 평온

 

1950년 6월 25일 새벽 옹진지구에서 한국군의 북진공격으로 일어난 소규모 무력충돌이 다른 지역으로 확대되면서 일어난 국지전에 참가한 조선인민군 전투부대들은 작전계획에 따라 한국군 방어선을 돌파하고 서울을 향해 진격했다. 당시 조선인민군의 작전계획은 38도선 이남 전역을 점령하는 것이 아니라 서울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6.25전쟁은 국지전으로 일어난 것이었다.  

 

북의 공식용어를 빌리면, 1950년 6월 25일에 일어난 국지전은 ‘서울해방작전’이다. 만일 1950년 6월 25일에 일어난 전쟁이 서울을 ‘해방’하는 국지전이 아니라 38도선 이남 전역을 ‘해방’하는 전면전이었다면, 북에서는 그 전쟁을 ‘남조선해방작전’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1948년 9월 8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제1기 제1차 회의에서 채택된 헌법 제103조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부는 서울시”라고 명기되었다. 북이 자기의 수도를 서울에서 평양으로 변경한 날은 1972년 12월 27일이다. 그날 최고인민회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도를 서울에서 평양으로 변경한 사회주의헌법을 채택했다. 그러므로 북의 시각에서 보면, 1950년 6월 25일 당시 자기의 수도인 서울이 반란세력에게 점령되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반란세력이 점령한 수도를 탈환하는 ‘서울해방작전’은 북에게 더 이상 뒤로 미룰 수 없는 중대과업이었다. 이런 맥락을 이해하면, 1950년 6월 25일에 일어난 국지전은, 북의 표현을 빌리면, “이승만 괴뢰도당이 점령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도 서울을 해방하는” 제한적 해방전쟁이었음을 알 수 있다. 

 

1950년 6월 25일 개성전투에 참가한 조선인민군 제6보병사단 제13연대 지휘관들 중에는 정치보위부 책임장교였던 최태환도 있었다. 그는 자신의 책 ‘젊은 혁명가의 초상’에서 6월 25일을 전후하여 자신이 겪었던 경험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1950년 6월 23일 조선인민군 제6보병사단 소속 대대장급 이상 군관들은 송악산 골짜기에 임시로 만든 천막회의장에 모였다. 그 회의에서 최태환은 당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원이었던 김두봉의 연설을 들었다. 김두봉은 연설에서 북조선 최고인민회의 상임간부회가 남조선 당국에 평화통일을 여러 차례 제안했건만, 번번이 거부당했다는 사실을 밝히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략) 이제는 더 이상 앉아서 기다릴 수 없습니다. 우리 동포를 해방시켜야 합니다. 이제 부득이 해방전쟁을 개시하게 되는데, 일주일 동안만 서울을 해방시킬 것입니다. 서울은 남조선의 심장입니다. 그러므로 심장을 장악하게 되면 전체를 장악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후략)”  

 

위와 같은 사정을 파악하면, 한국군은 ‘서울해방작전’을 준비한 조선인민군을 옹진지구에서 먼저 공격하는 바람에 ‘서울해방작전’이 시작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최태환의 회고담에 따르면, 1950년 6월 25일 개성전투에 참가한 조선인민군 제6사단 지휘관들은 서울 이남 지역이 표시되지 않고, 경기도 평택까지만 표시된 5만 분의 1 축적의 군사지도를 가지고 전투를 했다고 한다. 또한 당시 조선인민군 제6사단 사단장이었던 방호산은 조선인민군이 서울로 진격하는 도중 한국군과 맞닥뜨리면 교전은 하되 결전은 피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38도선 이남 전역을 ‘해방’하는 전면전이 아니라 서울을 ‘해방’하는 국지전이었기에 그처럼 특이한 명령을 내린 것이다. 최태환의 회고담에 따르면, 조선인민군 제6사단은 개성을 ‘해방’하고 곧바로 서울로 진격하는 도중에 붙잡은 한국군 포로들에게 ‘서울해방작전’의 정치군사적 의의를 해설하고 즉각 풀어주었는데, 석방된 포로들 가운데 몇 사람은 즉석에서 조선인민군 전투대오에 합류했다고 한다. 

 

파죽지세로 서울을 향해 진격하던 조선인민군 전투부대들은 1950년 6월 27일 오후 5시경 서울 북쪽 경기도 고양군 미아리(현재 서울 성북구 미아동) 인근까지 진출했고, 한국군은 미아리고개에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하고 서울방어전에 돌입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미아리 인근까지 진출한 조선인민군 전투부대들이 더 이상 진격을 하지 않았다. <로동신문> 2016년 6월 28일 보도기사에 따르면, 조선인민군 전투부대들이 1950년 6월 27일 밤에 서울 시내로 진격하지 않은 까닭은, 서울시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서울에 있는 문화유적들을 손상시키지 않기 위해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가 6월 25일 오전 5시에 공격을 하되 포사격은 하지 말고 ‘서울해방전투’를 개시하라는 작전명령이 하달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되어 조선인민군 전투부대들은 6월 28일 오전 ‘서울해방작전’을 완료했다. <사진 5> 

 

▲ <사진 5> 이 사진은 1950년 6월 28일 '서울해방작전'에서 승리한 조선인민군 전투부대들이 서울 시내로 진입하던 때, 조선인민군 제105땅크려단 소속 T-34 전차가 서울시내를 지나는 장면이다. 많은 청년학생들이 땅크를 따라 걸어가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날 오전 5시 '서울해방작전'에 돌입한 조선인민군 전투부대들은 한국군이 구축한 미아리방어선을 돌파하고 서울을 '해방'했다. 조선인민군 제107련대 제1대대장 김영 소좌가 중앙청 꼭대기에 공화국기를 게양했다. 류경수 려단장이 지휘한 조선인민군 제105땅크려단은 1950년 7월 오산전투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맞붙은 미국군을 격파하고, '대전해방전투'를 승리적으로 결속했다. 제105땅크려단은 1950년 7월 27일근위서울제105땅크사단으로 승격되었고, 2001년 5월 23일 사단명칭을 근위서울류경수제105땅크사단으로 바꿨다. 정전 이후 긴 세월이 흘렀건만, 북에서는 6.25전쟁 시기땅크전 지휘관으로 활약한 류경수 려단장의 전공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류경수 려단장은 조선인민혁명군 지휘관으로 항일전쟁에 참가한 항일혁명투사였다.  

 

1950년 6월 28일 오전 서울을 점령한 조선인민군은 공격을 중지했다. ‘서울해방작전’이 완료되었으므로, 공격을 중지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최태환은 자기 회고록에 이렇게 썼다. “그때부터 우리들은 별다른 교전이 없는 가운데 대기상태로 돌입했다. 대기상태란 김포전투가 사실상 끝난 6월 30일에서 7월 2일까지 주둔지에서 중앙의 명령을 기다리며 휴식, 정비, 정찰을 하는 것이었다. 당시 주둔지는 현재 새마을본부 자리 근방(서울 종로구 삼청동-옮긴이)이었다.” 

 

‘서울해방작전’이 완료되자 되찾은 서울의 평온은 너무 짧았다. 1950년 6월 29일 미국 합동참모본부는 원동군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에게 해군력과 공군력을 동원하여 조선인민군을 공격하라는 작전명령을 하달했다. 작전명령을 받은 주일미공군기지의 B-29 폭격기들은 6월 29일 오후부터 한반도 상공으로 건너와 조선인민군 주둔지를 폭격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한반도 공습은 코리언들끼리 싸운 국지전에 외국군대가 불법적으로 개입하여 전쟁의 성격을 내전에서 국제전으로 바꿔놓은 중대사건이었다. 

 

오늘의 군사분계선과 마찬가지로, 당시 38도선도 두 개의 나라를 갈라놓은 국경선이 아니라 하나의 나라 안에 그어진 군사경계선이었으므로, 미국의 무력개입이 시작되기 전 6.25전쟁 초기의 국지적 내전에는 침략이나 침공이라는 개념이 사용될 수 없으며, 남침이니 북침이니 하는 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미국과 남측의 우익학자들과 우익선동가들은 “북의 남침으로 6.25전쟁이 일어났다”는 궤변을 70년 동안 붙들고 있다.   

 

북의 시각에서 보면, 전혀 다른 상황이 펼쳐진다. 전혀 다른 상황은, 미국이 조선인민군에 대한 공습을 시작하자, 1950년 7월 1일부터 국지적 내전에 불법개입한 ‘미제침략군’을 상대로 조선인민군이 반침략전쟁에 나섰다는 것이다. 최태환의 회고록에 따르면, 1950년 6월 28일 국지적 내전에서 승리하고 종로구 삼청동에 주둔한, 자신이 배속된 조선인민군 제6사단 보병부대에게 한강 남쪽에 있는 영등포와 인천을 ‘해방’하는 전투를 재개하라는 새로운 작전명령이 하달된 때는 7월 3일 새벽이었다. 

 

 

6. 대남군사행동계획은 확대회의에서 비준된다

 

1950년 6월 25일 조선인민군이 ‘서울해방작전’을 개시했던 때로부터 70년 세월이 흘렀다. 세월은 그렇게 멀리 흘러갔건만, 한국군과 조선인민군은 군사분계선에서 여전히 대치하고 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옹진지구에서 한국군의 북진공격으로 일어난 소규모 무력충돌이 조선인민군의 ‘서울해방작전’으로 확전된 국지적 내전은 70년 간극을 뛰어넘어 오늘 군사분계선 무력충돌위험으로 또 다시 고조시켰다.    

 

6.25전쟁 70주년을 이틀 앞둔 2020년 6월 23일 평양에서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제7기 제5차 회의 예비회의가 진행되었다.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 김정은 위원장의 사회로 진행된 화상회의다. 군사분계선에서 무력충돌위험이 고조된 시점에 진행된 회의인 것으로 하여 세계의 이목이 평양에 집중되었다. 조선의 언론매체들이 예비회의에 관해 보도한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1)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제7기 제5차 회의 예비회의가 진행되었으므로, 앞으로 머지않아 제7기 제5차 확대회의가 진행될 것이다. 제7기 제4차 확대회의는 2020년 5월 23일에 진행되었었다. 과거기록을 보면, 당중앙군사위원회 확대회의는 2013년에 한 차례, 2014년에 한 차례, 2015년에 두 차례, 2018년에 한 차례, 2019년에 두 차례 진행되었다. 당중앙군사위원회 확대회의가 두 차례씩 진행된 2015년과 2019년은 군사분계선 무력충돌위험이 고조된 시기였다. <사진 6>

 

▲ <사진 6>이 사진은 2020년 5월 23일 김정은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장이 당중앙군사위원회 제7기 제4차 확대회의를 지도하는 장면이다. 과거사례를 보면, 군사분계선 무력충돌위험이 고조되었던 2015년과 2019년에 당중앙군사위원회 확대회의가 각각 두 차례씩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올해 2020년에도 당중앙군사위원회 확대회의가 두 차례 진행될 것이 확실하다. 이런 상황은 군사분계선 무력충돌위험이 또 다시 고조되었음을 말해준다. 머지않아 당중앙군사위원회 제7기 제5차 확대회의가 열리면, 조선인민군 총참모부가 제출한 대남군사행동계획이 비준될 것으로 예견된다.  

 

2) 조선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이번 예비회의에는 “당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 리병철 동지와 당중앙군사위원회 일부 위원들이 참가하였다”고 한다. 당중앙군사위원회 위원 13명 중에서 일부 위원들만 예비회의에 참석한 것이다. 이런 정황은 이번 예비회의가 중대안건을 의결하는 회의가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그런 까닭에 예비회의에서는 앞으로 진행될 확대회의에 상정할 “주요군사정책토의안들을 심의하였고”, 본회의에 제출할 보고서들와 결정서들, 그리고 “나라의 전쟁억제력을 더욱 강화하기 위한 국가적 대책들을 반영한 여러 문건들을 연구하였다.” 

 

3) 예비회의에서는 “조성된 최근 정세를 평가하고 조선인민군 총참모부가 제기한 “대남군사행동계획들을 보류하였다.” 

 

머지않아 당중앙군사위원회 확대회의가 소집되면, 당중앙군사위원회 위원들 이외에 중요한 직무를 수행하는 당과 국가의 고위간부들도 참석할 것이다. 하지만 이번 예비회의에는 당중앙군사위원회 일부 위원들만 참석했으므로, 상정된 안건들과 제출된 보고서들 및 결정서들을 비준하지 않고, 심의하거나 검토하거나 보류했다. 조선인민군 총참모부가 제출한 대남군사행동계획을 이번 예비회의에서 심의만 하고 비준하지 않은 까닭은, 머지않아 소집될 당중앙군사위원회 확대회의에서 비준해야 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처럼, 조선인민군 총참모부가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에 제출한 대남군사행동계획은 매우 중대한 사안이므로 예비회의가 아니라 확대회의에서 비준되어야 마땅하다. 대남군사행동계획에 대한 비준이 이번 예비회의에서 보류된 까닭이 거기에 있다. 

 

사정이 그런데도, 뭐가 뭔지 모르는 사람들은 대남군사행동계획을 실행할 준비가 아직 되지 않았기 때문에 대남군사행동계획 비준을 보류했을 것이라느니, 또는 김여정 당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은 대남군사행동계획을 추진했으나 김정은 당중앙위원회 위원장이 그 계획 비준을 보류한 것은 양면전술이라느니, 또는 대남군사행동계획 비준을 보류한 것은 문재인 정부에게 대화요청신호를 보낸 것이라느니, 또는 대남군사행동계획을 비준할 경우 미국이 무력으로 위협할 것을 우려해서 보류했을 것이라느니 하는 말이 되지 않는 억측과 궤변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그런 가지각색 억측과 궤변을 뒤엎고, 당중앙군사위원회 제7기 제5차 확대회의가 머지않아 소집되면 조선인민군 총참모부의 대남군사행동계획은 비준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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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70주년, 사건과 지역의 '기록' (2)

<특집>통일뉴스 창간 20주년 사진전 (2)한국전쟁 70주년
통일뉴스  |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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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6.28  20:5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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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뉴스>에서는 창간 20주년 맞아 (1)‘6.15공동선언 20주년’, (2)‘한국전쟁 70주년’ 사진전을 준비했습니다. 2000년 6.15공동선언과 함께 출발한 <통일뉴스>는 지난 20년간 단독 방북취재를 비롯해 남북 민간공동행사를 독보적으로 취재해왔습니다.

이번  (2)‘한국전쟁 70주년’ 사진전에는 통일뉴스가 입수한 다수 희귀 사진을 선보입니다.

이 사진들은 1950.6.25.-1953.7.27. 기간 한반도 전역을 대상으로 북측에서 촬영한 것입니다. ①지역과 사건이 담긴 '기록', ②전시 일상과 생활상을 담은 '생활', ③전장의 다양한 모습을 인민군 시점에서 살펴 본 '전쟁'으로 나누어  전시될 것입니다. / 편집자주

 

<기록>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38도선을 넘은 '인민군'은 사흘만인 6월 28일 새벽 서울을 점령했으나 바로 한강을 넘지 않고 7월 3일까지 서울에 머물렀다.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유엔군이 서울을 향해 진격하자 북한은 민족보위상인 최용건을 서울 방위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완강히 저항하였으나 9월 28일 서울을 빼앗겼다.

그해 12월 4일 평양을 점령한 국군이 철수하고 이틀 후 인민군과 중국인민해방군이 평양을 재점령하였으며, 장진호 전투에서 빠져 나온 미국 해병사단이 흥남철수를 하면서 1951년 1월 4일 서울은 다시 인민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공방은 이어졌다.

북한은 점령지역에서 토지개혁을 단행하고 인민위원회를 결성하는 등 일련의 개혁조치를 추진했으나 일진일퇴의 불안한 전황은 일상의 평화를 속절없이 무너뜨렸다. 

전선의 고착속에 1951년 7월부터 시작된 휴전회담은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일성,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 유엔군 총사령관 미국 육군대장 마크 웨인 클라크가 서명한 '정전협정'이 체결됨으로써 막을 내렸으나 정전협정은 70여년 분단을 확인하는 상징으로 지금까지 남아있다.

 

   
▲ 서울 중앙청. [통일뉴스 자료사진]

 

   
▲ 소년근위대원들의 맹세문. 1950. [통일뉴스 자료사진]

 

   
▲ 전선을 시찰하는 김책 인민군 전선사령부 사령관. 1950.7. [통일뉴스 자료사진]

 

   
▲ 8.15 5주년기념대회 알림 구호가 걸린 서울시내 남대문 앞. 1950.8. [통일뉴스 자료사진]

 

   
▲ 서울시인민위원회를 찾아오는 서울시민들. 1950.6. [통일뉴스 자료사진]

 

   
▲ 조선민주여성동맹 서울시 성북구 미아리분회 창립모임. 1950. [통일뉴스 자료사진]

 

   
▲ 파괴된 서울역 광장을 복구하는 서울시민들. 1950.6. [통일뉴스 자료사진]

 

   
▲ 토지개혁사업 현장. 1950.8.21. [통일뉴스 자료사진]

 

   
▲ 노동법령을 지지하는 전라북도 군산시 경성고무공장 경축대회. 1950.6 [통일뉴스 자료사진]

 

   
▲ 황해도 옹진군 온천리 민주선전실. 1950.6. [통일뉴스 자료사진]

 

   
▲ 토지개혁과 인민위원회 선거 실시를 경축하는 군중대회. 1950.6. [통일뉴스 자료사진]

 

   
▲ 노동법령을 지지하는 경축대회. 1950.6. [통일뉴스 자료사진]

 

   
▲ 남한 토지개혁법령을 환영하는 경축대회. 1950.8.21. [통일뉴스 자료사진]

 

   
▲ 사업을 시작한 춘천금융조합. 1950.8. [통일뉴스 자료사진]

 

   
▲ 조선호텔. 1950.6. [통일뉴스 자료사진]

 

   
▲ 서울 북창동 인민위원회 시가행진. 1950.6.28. [통일뉴스 자료사진]

 

   
▲ 인민위원회 선거를 위한 대표자회의. 1950.7.5. [통일뉴스 자료사진]

 

   
▲ 제2전선사령부가 자리잡고 있던 지휘처. 1950.10.6. [통일뉴스 자료사진]

 

   
▲ 춘천시 민청 춘천위원회 청사. 1950.8. [통일뉴스 자료사진]

 

   
▲ 평양시. 1950.12. [통일뉴스 자료사진]

 

   
▲ 인민군 군무자회의. 1951.9.16. [통일뉴스 자료사진]

 

   
▲ 서북리 농민궐기대회. 1951.10. [통일뉴스 자료사진]

 

   
▲ 1952년도 연간 사업총화를 위한 42호공장 종업원대회. 1952.12. [통일뉴스 자료사진]

 

   
▲ 제4차세계청년학생축전을 위한 연대 민청열성자회의. 1953.6.6. [통일뉴스 자료사진]

 

   
▲ 서울시가행진. 1950.6.28. [통일뉴스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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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금지법 만들면 차별 없는 세상이 될까?

  • 분류
    아하~
  • 등록일
    2020/06/29 10:14
  • 수정일
    2020/06/29 10:14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김용택 | 2020-06-29 08:43:13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멀쩡한 법을 두고 또 법을 만드는 것은 낭비다. 학생인권조례가 그렇고 차별금지법이 그렇다. 민주주의란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자유롭고 평등한 인격과 스스로의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는 학설에 근거를 두고 출발했다. 우리헌법이 추구하는 ‘인간의 존엄성’, ‘자유’, ‘평등’도 이러한 이념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런데 진보교육감이 당선되면서 시·도 교육청에서는 학생들의 인권을 보장하겠다며 인권조례를 만들고 있다. 또 진보정당에서도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며 차별금지법을 만들고 있다. 헌법도 지키지 않으면서 법이나 조례를 만들면 학생들의 인권을 존중받고 차별 없는 세상이 될까?

학생들이 인권을 존중받지 못하는 이유는 교육실패와 무관하지 않다. 일류대학이 교육목표가 되어 교육보다 일류대학 진학이 목표가 되어 성적지상주의로 내몰고 있는 것은 반교육이요, 인권 침해다. 학생들이 학교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공부를 할 수 있다면 왜 탈학교 학생들, 학교폭력과 같은 현상이 나타나겠는가? 개성을 무시하고 국영수로 사람가치를 서열매기는 것은 차별이 아닌가? 우리헌법 제11조 ①항은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차별금지법을 만들지 말자는 얘기가 아니다. 이런 헌법을 두고 차별금지법을 만들면 차별 없는 세상이 될까?

차별금지법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노무현정부 때인 2007년 12월 12일 제17대 국회에서 처음 발의했으나 임기만료로 심의조차 못하고 자동폐기됐다. 2011년 12월 2일에 민주노동당 권영길 의원 등 10명은 《차별금지법안》을 발의하여 같은 달 5일에 소관위인 법제사법위원회 회부와 관련위인 국회운영위원회 및 환경노동위원회 회부를 거쳤으나 2012년 5월 29일 제18대 국회의 임기만료로 마찬가지로 폐기 처분됐다. 그 후 2012년에는 통합진보당 김재연 의원 등 10명은 《차별금지법안》을 발의했으나 지난 제19대 국회에서도 임기 만료로 폐기되었다. 촛불정부조차 외면하고 있는 차별금지법. 2007년 법무부에 의해 발의된 후 14년째 ‘입법 시도’ 중인 차별금지법이 21대 국회에서 정의당의 장혜영의원이 중심이 되어 국가인권위원회까지 나서고 있다.

<차이와 차별을 구별 못하는 세상>

1700만 주권자가 만든 대한민국은 차별공화국이다. 헌법 11조는 분명히 ‘모든 국민’이 ‘법앞에 평등’하고,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 그리고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차별받지 않는다고 했지만, 헌법 외에 차별 받지 않는 곳이 어디 있는가? 학교는 학생들이 공부를 못한다는 이유로, 노동자들은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직장에서는 지위가 낮다는 이유로, 군대에서는 졸병이라는 이유로, 여성은 못생겼다는 이유로, 노약자들은 가난하다는 이유로, 어린이들은 힘이 없다는 이유로… 차별받는 나라가 대한민국이 아닌가? 대한민국에서 특권층, 기득권층,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 외에 차별받지 않고 사는 사람이 누군가?

대한민국은 법 따로 현실 따로다. 무전유지 무전유죄의 황제노역이 그렇다.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같은 일을 하면서도 임금을 차별받는 것은 차별이 아닌가? 직장에서 상사들의 갑질이 일상화된 사회, 오죽했으면 어린 초등학생들의 입에서 ‘빌거지’(빌라에 사는 거지), ‘휴거지’(휴먼시아 거지), ‘엘사’(한국토지주택공사(LH)에 사는 사람)… 라는 말로 가난한 친구들을 왕따시키겠는가? 아빠 월급에 따라 ‘이백충’, ‘삼백충’, ‘사백충’ 이라며 소외시킬까? 한 달에 200명, 연간 산재사망으로 죽어가는 노동자 2400명을 두고 차별금지법을 만들면 비정규직 노동자가 사람대접 받을까? 김용균법이 만들어졌는데 왜 노동자들의 처우는 달라지는 게 없을까?

헌법 제10조는 “모든 국민이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행복추구권이 있다”고 했는데, “국가는 이를 보장할 의무가 있다”고 했는데, 하루 평균 36명, 40분마다 1명이 자살하는 자살공화국은 무엇 때문인가? 궁여지책 법이라도 만들어 한계상황에 몰린 국민들에게 위로라도 될 것이라고 한다면 이해가 된다. 그런데 학생인권조례를 만들지도 못하는 시·도는 그렇다 치고 경기도는 학생인권조례를 만든 지 10년이 지났다. 그런데 학교인권조례가 시행되고 있는 경기도에는 학생들의 인권이 존중받고 하고 싶은 공부를 하고 있는가? 공부를 못한다고 차별받지 않는가? 비정규직의 차별을 외면하면서 차별금지법을 만든다는 것은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꼴이다. 원인을 덮어두고 현상만 고치겠다는 것은 ‘아랫돌 빼 윗돌 괴기다’.

 
본글주소: http://www.poweroftruth.net/m/mainView.php?kcat=2030&table=yt_kim&uid=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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